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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배 한 척이 있었다. 길고 큰 검은색의 배였다.

나는
유조선일 거라고 생각했다. 배는 파도 위에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수 미터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커다란 파도가 밀려왔다. 모래 위에 있던 사람들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금세 파도에 따라 잡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그리고 전부 물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사람들을 밀치고
대피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엷은 녹색의 물이 건물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물은 사람들을 벽으로 밀어붙였다가 밖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창문의 쇠창살을 붙들고 온 힘을 다해
버텼다. 물이 빠져나가자 사람들이 중국어로 고함을 질러댔다.
그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중국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떻게 왔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게다가 해변에 유조선이 떠있는 것도, 물이
녹색인 것도 이상했다.
"이십삼 번. 이십삼 번 지원자 안 계세요?" 직원이 외쳤다.
"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요즘 자꾸 이상한 꿈을 꾸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김철수씨?" 직원이 나를 쳐다보았다.
"네." 나는 문 앞에 섰다.
"삼십 초만 대기하겠습니다." 직원이 휴대폰을 두드렸다.
맞다. 휴대폰 꺼야지.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껐다.
"준비 되셨어요?" 직원이 물었다.
"네." 내가 대답했다.
"면접 시작하겠습니다. 잘하세요." 직원이 문을 열었다.
"네. 감사합니다." 내가 말했다.
방 가운데 의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면접관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모두 세 명이었다. 나는 의자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어서오세요. 앉으세요." 가운데의 면접관이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철수라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가운데 앉은 사람은 꽤 나이가 들어 보였다. 나머지 두 사람은
젊었다. 삼십 대 후반, 아니면 사십 대 초반인 것 같다.
"밖에 춥죠. 아침 일찍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왼쪽의 면접관이
말했다.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식사는 하셨어요?" 왼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네. 먹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럼 간단하게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왼쪽의 면접관이
말했다.
"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아서 해도 되는데." 왼쪽의 면접관이 웃었다.
"잠깐만요. 그냥 바로 시작하죠. 시간이 없어서." 가운데의
면접관이 말했다.
"아, 네. 철수씨. 미안해요. 자기소개는 생략할게요. 어차피
여기에 다 써주셨으니까요. 이번에 지원자들이 너무 많아서
면접 일정이 조금 빡빡하네요. 이해해주세요." 왼쪽의 면접관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내가 말했다.
"앉으세요." 가운데의 면접관이 말했다.
"네." 나는 의자에 앉았다.
"철수씨. 올해 졸업하셨어요?" 왼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네. 올해 이 월에 졸업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학교를 오래 다니셨네요. 아, 휴학을 하셨구나." 왼쪽의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가 말했다.
"휴학을 이 년 동안이나 하셨네요?" 오른쪽의 면접관이 나를
쳐다보았다.
"네.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이 년 동안 뭐 하셨어요? 여기에는 안 나와 있는데." 오른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내가 웃었다.
"왜 웃어요?" 가운데의 면접관이 웃었다.
"아닙니다. 그. 소설을 썼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소설이요?" 왼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씨 전공이 뭐였죠? 공학 아니었나요?" 오른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네. 공학 맞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근데 소설을 쓰셨다고요?" 오른쪽의 면접관이 웃었다.
"아니, 뭐." 가운데의 면접관이 웃었다. "쓸 수야 있지. 쓸 수는
있는데."
"무슨 소설인데요?" 왼쪽의 면접관이 웃었다.
"그냥. 일반적인 소설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재주가 많으신 분이네." 가운데의 면접관이 말했다.
"원래 그쪽에 관심이 있었나 봐요?" 왼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그쪽이면, 글쓰기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가 물었다.
"네. 문학 쪽으로." 왼쪽의 면접관이 대답했다.
"아. 아니요. 문학 쪽으로는 전혀." 내가 고개를 저었다. "소설도
거의 안 읽습니다. 그냥 쓰는 것만 좋아합니다."
"취미 같은 거예요? 소설 쓰는 게?" 오른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네. 근데 그것도 그때 딱 한 번 했던 거라서요. 그 이후로는 안
했습니다. 그래서 취미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지금은 안 해요?" 오른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네. 지금은 안 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지금은 왜 안 해요?" 왼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이제는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내가 웃었다.
"그럼 아예 전공을 그쪽으로 선택하지 그랬어요. 글 쓰는 걸
좋아했으면." 가운데의 면접관이 말했다.
"고등학교 때는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그때는 수학하고 물리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공대로 진학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가운데의 면접관이 물었다
"대학교 일 학년 때 글쓰기 수업을 들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도대체 어떤 수업이었길래." 왼쪽의 면접관이 웃었다.
"어쨌든 소설을 썼다는 거죠." 가운데의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쓰기 수업이었다. 나는 일어서서 시를 암송했다. 그게
과제였다. 아이들이 손뼉를 쳤다.
"김철수씨." 교수님이 말했다.
"네." 내가 말했다.
"우리가 다 알 만한 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요." 교수님이 말했다.
그래도 나는 그 시가 좋았다.
"그래서 어땠나요?" 교수님이 고개를 숙였다. 다음 차례의
학생을 찾는 것 같았다.
"그냥. 시 같았는데요." 내가 대답했다.
"시 같았어요?" 교수님이 웃었다.
"네." 내가 대답했다.
"시 같았다." 교수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대답입니다."
아마 그때부터가 맞을 거다.
"철수씨?" 가운데의 면접관이 말했다.
"네." 내가 말했다.
"소설만 썼어요? 그거 말고 다른 건 안 했어요?" 가운데의
면접관이 물었다.
"그 사이에 외국에서 연수를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여기
보니까 영어 점수가 상당히 높으시네요." 왼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내가 대답했다.
"근데 굳이 휴학까지 하면서." 오른쪽의 면접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는 방학 때만 잠깐 하려고 했습니다. 아니,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냥. 심심해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는데. 한 줄 두 줄 쓰다 보니까.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방학 동안에 이거 하면서 놀면 되겠다. 그냥 그 정도였습니다.
근데. 거기에 꽤 깊이 빠졌던 것 같습니다. 그걸 꼭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 전에는 다른 걸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해도 집중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한 학기만
휴학하면 끝낼 수 있겠다. 여름방학까지 포함하면 총 육
개월이니까. 육 개월이면 끝낼 수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휴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삼 학년 때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내가 말했다.
"그런데 왜. 이 년씩이나 휴학을 했어요?" 오른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쓰는 게 생각처럼 잘 안 됐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취업 준비는요? 보통 그 시기에는 다들 취업 준비하느라
바쁘잖아요." 오른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네. 하지만 사 학년 때는 수업이 많지 않기 때문에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실제로는 어땠어요? 시간이 충분하던가요? 지금 본인이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오른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 이 년 동안 더 많은 걸 준비할 수도 있었잖아요.
예를 들어, 인턴을 한다든지. 아니면 외국어를 하나 더
배운다든지. 혹시 필요한 자격증이 있다면 그걸 위한 공부를 할
수도 있고요." 오른쪽의 면접관이 말했다.
"네. 그럴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셨죠." 오른쪽의 면접관이 말했다.
"네. 그때는 제가 잘 몰랐습니다. 취업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래도. 하여튼 제가 잘 몰랐습니다. 제가 너무
안이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철수씨. 오해하지 마세요. 철수씨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에요.
저희는 그저 철수씨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려는
것뿐이에요." 오른쪽의 면접관이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오른쪽의 면접관이 말했다.
"아니요."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아닙니다."
"책으로 냈어요? 그, 본인이 쓴 소설 말이에요." 가운데의
면접관이 물었다.
"책으로는 안 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왜요?" 가운데의 면접관이 물었다.
"책으로 낼 정도는 아닙니다." 내가 대답했다.
"철수씨. 그때의 경험을 통해서 본인이 얻은 게 있다면
뭘까요?" 왼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제가 얻은 거." 내가 말했다.
"네. 뭐가 있을까요?" 왼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끈기를 기를 수 있었던 같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리고요?" 왼쪽의 면접관이 물었다.
"그리고. 이제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건 왜죠?" 가운데의 면접관이 물었다.
"소설도 썼으니까?" 왼쪽의 면접관이 웃었다.
"네." 내가 웃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신발이 없어졌다.
나갔네. 아침에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갑자기 약속이 생겼을
수도 있지. 아니면 뭐 사러 잠깐 나갔을 수도 있고. 발뒤꿈치가
따끔거렸다.
"아, 이거." 나는 구두를 벗었다. "계속 아프네."
비싼 건데. 조금 더 참고 신어 보자. 괜찮아지겠지. 나는 구두를
신발장에 넣었다. 그리고 방으로 향했다.
나는 가방을 책장 아래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공기가 차가웠다.
침대부터 정리하자. 나는 이불을 걷어냈다. 그리고 손으로 침대
위를 쓸었다. 아침에 청소를 안 한 거 같은데. 내가 해야 되나.
일단 씻고. 뭐 좀 먹고 나서.
책상 위에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다. 금방 또 이렇게 될 텐데.
나는 과자 봉지를 집어 휴지통에 넣었다. 휴대폰 충전기는
서랍에 넣었다. 빗은 연필통에 꽂았다. 책들은 쌓아서 모서리
쪽으로 밀어냈다. 재킷하고 바지는 옷장으로. 셔츠하고 양말은
빨아야지. 넥타이는 상자에 넣고. 상자 어디 있지?
"어디 갔어, 이거." 나는 방을 둘러 보았다. 선반 위에 상자가
있었다.
어제 저녁이었다.
"김철수."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네." 내가 말했다. 문이 열렸다.
"내일 이거 매고 가." 아버지가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뭔데요?" 나는 상자를 받아 들었다.
"넥타이." 아버지가 대답했다. 나는 상자를 열었다. 넥타이였다.
"어? 넥타이 있는데." 내가 말했다.
"야. 그거는 아빠가 옛날에 매고 다니던 건데. 요즘에 그런 거
매고 다니는 사람 없어. 팔지도 않아." 아버지가 웃었다.
"이거 비싼 거 아니에요?" 내가 물었다.
"내일 그거 매고 가. 알았지? 양복 색깔이랑 잘 맞을 거야."
아버지가 방을 나갔다.
나는 넥타이를 상자에 넣었다. 오늘 괜찮았다. 잘될 거다.
초인종이 울렸다.
"응?" 나는 상자를 선반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현관으로
향했다.
세탁소 아주머니가 내게 옷들을 건넸다. 재킷이랑
셔츠들이었다.
"어머니는 안 계신가 보네?" 세탁소 아주머니가 물었다.
"네." 내가 대답했다.
"어제 바지 하나 맡기셨지? 그건 내일까지 갖다 드릴게요."
세탁소 아주머니가 말했다.
"네. 이건 얼마 드려야 돼요?" 내가 물었다.
"만 팔천 원." 세탁소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돈을 끄집어 냈다. 만 원. 이만 원.
"학교는 졸업했어?" 세탁소 아주머니가 물었다.
"네." 나는 이만 원을 내밀었다.
"그럼 취업하는 거야?" 세탁소 아주머니가 물었다.
"그래야죠." 내가 대답했다.
"제일 힘들 때네." 세탁소 아주머니가 웃었다. 나는 웃었다.
"여기." 세탁소 아주머니가 돈을 내밀었다. 천 원. 두 개. 이천
원이었다.
"바지는 내일 가져다 드릴게요." 세탁소 아주머니가 돌아섰다.
"안녕히 가세요." 나는 현관문을 닫았다. 휴대폰 벨이 울렸다.
전화가 왔다.
"또 누구야." 나는 방으로 뛰었다.
경환이의 전화였다. 지금 회사에 있을 텐데. 아. 오늘
토요일이지. 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내가 말했다.
"여보세요." 경환이의 목소리였다.
"어. 왜." 나는 방을 나왔다. 그리고 거실로 향했다.
"어디야?" 경환이가 물었다.
"집이지. 너는?" 내가 물었다.
"거래처 갔다가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이야." 경환이가
대답했다.
"토요일인데?" 내가 물었다.
"응. 집에서 뭐 하냐?" 경환이가 물었다.
"그냥 있는데." 나는 소파에 앉았다.
"그냥 있다고?" 경환이가 말했다.
"아침에 면접 갔다가. 지금 막 들어왔어." 내가 말했다.
"면접 잘 봤어?" 경환이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기지개를 켰다.
"집에 혼자 있는 거야?" 경환이가 물었다.
"응." 내가 대답했다.
"어머님은?" 경환이가 물었다.
"집에 왔는데 안 계시네. 점심 먹으러 나가셨나 봐." 내가
대답했다.
"그럼 이제 뭐 할 거야?" 경환이가 물었다.
"그냥 집에 있을 건데." 내가 대답했다.
"저녁 때 시간 있어? 석구가 같이 저녁 먹자고 하는데. 어제
너한테 몇 번씩 전화했었는데 계속 안 받았대." 경환이가
말했다.
"석구가? 왜?" 내가 물었다.
"석구 결혼한대." 경환이가 대답했다.
"아, 그래? 정연이랑?" 내가 물었다.
"응. 둘이 벌써 칠 년째다. 대단하지." 경환이가 대답했다.
"그러네." 내가 말했다.
"너도 결혼해야지." 경환이가 말했다.
"그래서 저녁 먹자고?" 내가 물었다.
"응." 경환이가 대답했다.
"그래. 어디서 만나는데?" 내가 물었다.
"어디서 만날까? 신촌은 너무 멀잖아." 경환이가 물었다.
"아니야. 괜찮아. 신촌으로 갈게." 내가 대답했다.
"그럴래?" 경환이가 말했다.
"응. 몇 시까지 가면 되는데?" 내가 물었다.
"일곱 시까지 와. 거기 알지? 저번에 만났던 데. 일단 거기서
만나자." 경환이가 대답했다.
"응. 알았어." 내가 말했다.
"그래. 그럼 저녁 때 보자." 경환이가 말했다.
"응." 내가 말했다. 전화가 끊어졌다.
일곱 시. 여기서 신촌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리니까. 여섯 시에
출발하면 된다. 지금 몇 시야. 두 시 반. 아직 멀었네. 일단 뭐 좀
먹자. 배고프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 앞에 줄을 섰다. 토요일이라서. 나는
계단을 올랐다. 저 위에 출구가 있다.
컴컴하네. 사람 많다. 여기는 여전하구나. 얘는 아직 안 왔나.
나는 휴대폰을 열었다. 일곱 시 지났는데.
"철수 형?" 남자 목소리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재영이었다.
"형 여기서 뭐 하세요?" 재영이가 웃었다.
"어?" 내가 웃었다. "오랜만이네."
"여기 서서 뭐 하세요?" 재영이가 물었다.
"아. 친구 기다려. 집에 가는 거야?" 내가 물었다.
"아니요. 친구들하고 밥 먹으러 가려고요." 재영이가 대답했다.
"아직 졸업 안 했네." 내가 말했다.
"네. 이번에 졸업해요." 재영이가 대답했다.
"졸업연구는? 잘 돼가?" 내가 물었다.
"네. 거의 다 끝났어요." 재영이가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 지금 뭐 하세요? 회사 다니세요?" 재영이가 물었다.
"아니. 아직. 잘 안 되네." 내가 대답했다.
"왜요?" 재영이가 물었다.
"모르겠는데."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 지원하셨는데요?" 재영이가 물었다.
"여기 저기 다 썼는데. 뭐, 되겠지. 너는 졸업하고 뭐 할 거야?"
내가 물었다.
"저 대학원 가려고요." 재영이가 대답했다.
"그래? 대학원 가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도 그냥 대학원으로 오세요." 재영이가 웃었다.
"그럴까?" 내가 웃었다.
"네. 같이 해요." 재영이가 말했다.
"너 어느 연구실로 들어갈 건데?" 내가 물었다.
"이 교수님 연구실이요." 재영이가 대답했다.
"나 거기서 졸업연구 했는데." 내가 말했다.
"아, 형 거기서 졸업연구 하셨어요? 연구실 분위기 어때요? 아."
재영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친구들 기다리는 거 아니야?" 내가 물었다.
"네. 형. 죄송해요. 저 가 볼게요. 다음에 또 봬요." 재영이가
말했다.
"그래. 또 보자." 나는 손을 흔들었다. 재영이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나는 휴대폰을 열었다. 그리고 경환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경환이의 목소리였다.
"어디야." 내가 물었다.
"나 다 왔는데. 너는?" 경환이가 물었다.
"나 여기 횡단보도 앞에." 내가 대답했다.
"잠깐만. 끊지 마. 나 지금 밖으로 나왔거든." 경환이가 말했다.
나는 역 입구를 향해 섰다.
"와. 사람 많다. 횡단보도 앞에 있다고?" 경환이가 물었다.
"응." 내가 대답했다.
"안 보이는데. 손 좀 들어 봐." 경환이가 말했다. 나는 손을
들었다.
"어. 보인다. 거기 있어. 내가 갈게." 경환이가 말했다.
"응." 내가 말했다. 전화가 끊어졌다.
파란 불이 켜졌다. 사람들이 차도로 몰려나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경환이가 걸어왔다.
"야." 경환이가 웃었다.
"어. 왔어?" 내가 말했다.
"건너자." 경환이가 말했다.
"어디 가는데?" 나는 경환이를 따랐다.
가게 안은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웃음소리를 냈다.
점원이 냉장고 앞에 서 있었다.
"저기요!" 내가 외쳤다.
"여기요!" 경환이가 손을 들었다. 점원이 다가왔다.
"세 개 주세요." 경환이가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점원이 펜을 움직였다. 그리고 탁자 위에
계산서를 내려놓았다.
"물 좀 주세요." 내가 말했다. 점원이 걸어갔다.
"저기요!" 경환이가 외쳤다. 점원이 돌아섰다.
"물이요." 경환이가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물 갖다 드릴께요." 점원이 말했다.
"애들 진짜 많다." 경환이가 두 손을 비볐다. 소매에 얼룩이
졌다.
"토요일이잖아. 근데 이거 뭐야? 뭐 묻었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얼룩을 가리켰다.
"아, 이거? 아까 점심 먹다가." 경환이가 손으로 얼룩을
문질렀다.
"요즘도 토요일에 출근하냐?" 내가 물었다.
"응." 경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도 안 준다며." 내가 말했다.
"응. 수당은 안 나오는데. 집에 있어 봐야 할 일도 없잖아. 밥 해
먹는 것도 귀찮고. 아침에 천천히 일어나서. 회사까지
걸어간다. 운동 삼아서. 한 삼십 분 정도 걸리거든. 회사 간 김에
업무 잠깐 보고. 나와서 점심 먹고. 오늘은 문제가 좀 있어서
거래처 갔다가, 거기 직원하고 같이 먹었어. 그리고 다시 회사
들어갔다가. 한 다섯 시쯤 퇴근해. 그리고 집에 가서 티브이
보면서 밥 먹고. 아니면 오늘처럼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시고. 뭐,
그런 거지." 경환이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월요일에 할 게 줄어드니까. 그만큼 편하지." 경환이가
말했다.
"똑똑한데." 내가 말했다.
"너는 그럼, 뭐. 계속 면접 보러 다니는 거야?" 경환이가 물었다.
"응." 나는 컵에 물을 따랐다. "그래서."
"응." 경환이가 말했다.
"결국 둘이 결혼하는 거야?" 나는 경환이 앞에 컵을 내려놓았다.
"아." 경환이가 웃었다. "응. 결혼한대."
"결혼식이 언제인데?" 내가 물었다.
"다음 달." 경환이가 대답했다.
"다음 달? 다음 달 언제?" 내가 물었다.
"그건 모르겠어. 이따가 오면 물어봐." 경환이가 말했다.
"얼마 안 남았네." 내가 말했다.
"아, 그리고. 정연이 임신했대." 경환이가 말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뭐 하는 거야." 경환이가 웃었다.
"그랬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경환이가 말했다.
"그럼 곧 아빠 되겠네." 내가 말했다.
"그렇지." 경환이가 말했다.
"석구가 아빠가 된다." 나는 팔짱을 꼈다.
"너도 빨리 결혼해야지." 경환이가 말했다.
"뭐래." 내가 웃었다. "무슨 결혼이야."
"왜? 너 결혼 안 할 거야?" 경환이가 물었다.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말했다.
"응. 나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경환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모르겠다."
"안 하겠다는 건 아니고. 일단 취직부터 해야지." 내가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석구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석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석구 왔다." 내가 말했다. 경환이가 고개를 돌렸다. 석구가
다가왔다.
"집에서 오는 거야?" 경환이가 물었다.
"조금 늦었지. 아니, 회사에서." 석구가 의자에 앉았다. "철수.
전화했는데 계속 안 받더라."
"미안. 휴대폰 충전하는 걸 자꾸 까먹어서. 결혼한다며?
축하해." 내가 말했다.
"그래. 고마워. 잠깐만." 석구가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청첩장이다.
"청첩장?" 경환이가 물었다.
"응." 경환이가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봉투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무슨 요일이야?" 경환이가 봉투를 열었다.
"토요일. 맞다. 너 주말에도 출근한다고 그랬지. 그날 올 수
있어?" 석구가 물었다.
"응. 괜찮아. 갈 수 있어." 경환이가 대답했다.
"철수 너는?" 석구가 나를 쳐다보았다.
"응."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갈 수 있어."
"요즘 어때? 잘 돼?" 석구가 물었다.
"노력하는 중이야." 내가 대답했다.
"참 이상하다. 나이 때문에 그런가? 그렇게 늦은 건 아닌데.
작년에 나랑 동갑인 사람도 신입으로 들어왔거든." 석구가
말했다.
"나이 때문만은 아니겠지." 내가 말했다.
"근데 너 왜 늦은 거지?" 석구가 물었다.
"그거. 시험." 경환이가 대답했다.
"아, 맞다. 그거 몇 년 했었지?" 석구가 물었다.
"이 년 아니야?" 경환이가 물었다.
"응. 그리고 학교도 일 년 늦게 들어갔으니까." 내가 대답했다.
"아니, 뭐. 늦게 들어간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거 계속 해
보지. 아깝잖아. 이 년이나 했는데." 석구가 말했다.
"너 그때 공부한 거 다 잊어버렸어? 다시 한 번 해 봐. 솔직히
웬만한 샐러리맨보다는 그게 낫잖아." 경환이가 말했다.
"훨씬 낫지." 석구가 말했다.
"이제는 하면 안 될 거 같은데." 내가 웃었다.
"왜?" 경환이가 물었다.
"정연이 임신했다며? 이제 아빠 되겠네." 나는 석구를
쳐다보았다.
"응. 그렇게 됐어." 석구가 말했다.
"요즘에는 뭐. 주위에서 보면 대부분이 그렇더라. 거의 다 그것
때문이야.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경환이가 말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석구가 얼굴을 붉혔다.
"집은 구했어?" 내가 물었다.
"응." 석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이 어디야?" 내가 물었다.
"회사 근처." 석구가 대답했다.
"야. 그 동네 엄청 비싸잖아." 경환이가 말했다.
"집이 작으니까." 석구가 말했다.
"그래도 비쌀 텐데." 경환이가 말했다.
"집에서 도와주셨지." 석구가 말했다.
"잘됐네." 내가 말했다.
"응." 석구가 말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경환이가 물었다.
"하와이." 석구가 대답했다.
"나도 외국 여행 가고 싶다. 딱 한 달만." 경환이가 말했다
"혼자서?" 석구가 물었다.
"너 호주에서 일 년이나 놀다 왔잖아." 내가 말했다.
"너 호주 갔었어? 언제?" 석구가 물었다.
"아니면 딱 일주일만이라도. 에이. 그거는." 경환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응? 언제 갔었는데?" 석구가 물었다.
"얘 호주로 교환학생 갔었잖아." 내가 대답했다.
"그건 여행이 아니지. 공부하러 간 건데." 경환이가 말했다.
"하루 종일 공부만 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리고 너 학기
끝나고 나서도 계속 거기 있었잖아. 휴학하고." 내가 말했다.
"너 휴학했었어?" 석구가 경환이를 쳐다봤다.
"응. 아마 그때 너 군대에 있었을 거야. 너 일 학년 마치고
갔지?" 경환이가 물었다.
"어. 일 학년 마치고." 석구가 대답했다.
"내가 이 학년 때 갔으니까. 근데 이 얘기 너한테 안 했었나?"
경환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 않았어?"
"안 했어." 석구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경환이가 이마를 긁적였다. "원래는 한 학기만
다녀오려고 했었는데. 실은 그것도 은영이가 하도 졸라서
억지로 신청했던 거지. 솔직히 나는 안 될 줄 알았거든? 학점도
그렇게 좋지 않고 면접도 설렁설렁 봤는데. 그 학교에 지원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나? 모르겠어. 운도 참 없지." 경환이가
말했다.
"붙은 다음에 취소하면 교내봉사 사십 시간 해야 돼." 내가
말했다.
"운이 좋은 건가." 경환이가 말했다.
"정말? 사십 시간?" 석구가 물었다.
"응. 나도 그때 처음 알았어." 내가 대답했다.
"그래서 간 거야. 갔는데. 한 달 지나니까 돌아오기 싫더라."
경환이가 말했다.
"야. 거기가 그렇게 좋다며? 누가 그러던데. 천국 같다고.
사람들이 대낮에 그냥, 잔디밭에 누워서 잔다며." 석구가
웃었다.
"잔디밭이 많기는 많아. 그런데 걔들이 꼭 잔디 위에만 눕는 건
아니다. 내가 말했잖아. 그냥 길이야. 근데 거기에 누워있어.
정말로. 계단 내려오다가 어떤 여자애 밟을 뻔한 적도
있었다니까." 경환이가 말했다.
"거기 혼자 있었어? 아니면 은영이랑 둘이서?" 석구가 물었다.
"아니. 은영이는 학기 끝나고 먼저 갔고. 근데 이상하다. 내가
이 얘기를 안 했다고?" 경환이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그동안 거기서 뭐했는데? 그냥 논 거야? 돈은? 집에서
뭐라고 안 했어?" 석구가 물었다.
"영어 공부 한다고 그랬지. 그리고 그렇게 놀지도 못했어. 누가
소개해줘서 한국식당에서 일했는데. 와. 웬만큼 부려먹어야지.
일 끝나면 너무 피곤해가지고." 경환이가 말했다.
"맞아." 내가 웃음소리를 냈다. "너 호주에서 막 돌아왔을 때
엄청 말랐었어."
"그래도 좋았는데. 뭐라고 해야 되지. 그. 동네 분위기라고 해야
되나. 아니면. 사람들? 잠깐만." 경환이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너 핸드폰 뭐 써?" 석구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야." 석구가 웃었다. "아직도 그거야?"
"응." 나는 휴대폰을 열었다.
"줘 봐." 석구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석구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이거 몇 년 된 거야?" 석구가 물었다.
"얼마 안 됐어. 삼 학년 때 샀으니까. 일 년. 이 년, 삼 년. 사 년.
오 년. 오 년 됐네." 내가 대답했다.
"오 년. 근데 진짜 깨끗하게 썼다. 새 거 같은데. 야." 석구가
경환이에게 휴대폰을 보였다. "이거 봐. 철수 핸드폰."
"응. 알아." 경환이가 웃었다.
"안 바꿀 거야?" 석구가 내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나중에."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누구야?"
"아. 회사 사람." 경환이가 대답했다.
"왜?" 석구가 물었다.
"월요일에 뭐 좀 해달라고. 나도 할 거 많은데." 경환이가
대답했다.
"근데 그걸 왜 지금 말해? 월요일에 말해도 되잖아." 석구가
물었다.
"월요일에 출장 간대." 경환이가 대답했다.
"아." 석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월요일이 제일 바쁜데. 일부러 월요일에 가는 거지. 내가 알아.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거야." 경환이가 말했다. 내가 웃었다.
"그렇게 일이 많아?" 석구가 물었다.
"일이 많다기 보다는. 일도 많지. 일도 많은데. 일할 사람이
없는 것도 문제야. 아니, 직원이 그만두면 새로 뽑아야 되잖아.
그런데 뽑지를 않아요. 매번 뽑는다는 말만 하고. 그러니까 또
누가 그만두지. 일이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 되는 걸. 요즘에는
나도 체력이 달린다니까." 경환이가 대답했다.
"운동 할 시간도 없겠네." 내가 말했다.
"없지. 진짜 운동해야 되는데. 야근하면서 자꾸 뭘 먹으니까
살이 너무 많이 쪘어. 한 팔 킬로 늘었나. 이거 봐." 경환이가
배를 두드렸다. 배가 나왔다.
"심하네." 내가 말했다. 석구가 웃었다.
"딱 오 년만 채우고 그만둘 거야." 경환이가 말했다.
"회사 옮기려고?" 석구가 물었다.
"아니. 다른 일 해 보려고." 경환이가 대답했다.
"다른 일 뭐." 내가 물었다.
"음식점." 경환이가 대답했다.
"무슨 음식점?" 내가 물었다.
"한국 식당. 호주에서." 경환이가 웃었다. "사실 이것 저것 생각
해봤는데. 마땅한 게 없더라고. 그러다가 문득 그때 그 가게
생각이 나더라. 아까 말했던 그 한국 식당. 처음에는 서빙만
하다가 나중에는 주방 일도 했거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해
볼만 하겠더라고."
"너 요리 할 줄 알아?" 내가 웃었다.
"그럼. 그리고 배우면 되지." 경환이가 말했다.
"돈은? 맞다. 너 아직 집에서 안 나왔지. 그럼 꽤 모았겠네.
얼마나 모았는데?" 석구가 물었다.
"근데. 돈이 있어도." 내가 말했다.
"응." 경환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거기서 마음대로 장사를 할 수가 있나? 외국인인데?" 내가
물었다.
"안 될 걸." 석구가 말했다.
"아직 자세히 알아보지는 않았는데. 거기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방법이 있겠지." 경환이가 말했다.
"그 사람들은 이민 간 거잖아." 석구가 말했다.
"나도 이민 가지 뭐." 경환이가 말했다.
"이민 가게?" 내가 물었다.
"갈 수도 있지. 같이 갈래?" 경환이가 물었다.
"어딜 같이 가." 내가 웃었다.
"호주. 석구 너도." 경환이가 말했다.
"나도?" 석구가 웃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가게 하나를 내서 셋이서 하는 거야. 예를
들어서 나는 요리, 너는 서빙, 그리고 철수는 뭐할까. 어. 철수는
카운터를 맡는 거야. 야. 웃지 말고. 나 진지해. 잠깐만 들어 봐.
일단 처음에는 그렇게 셋이서 해. 그러다가 필요하면 사람을 더
구해. 그리고 돈을 모아서 가게를 하나씩 늘리는 거야. 세 개가
될 때까지. 그때까지는 돈을 똑같이 나누고." 경환이가 말했다.
"그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 석구가 물었다.
"왜 세 개에서 멈춰. 계속 가지. 그 옆에 뉴질랜드에도 내고,
나중에는 저기 유럽에도 몇 개 내자." 내가 말했다.
"농담 아니라니까." 경환이가 말했다.
"아니, 정말로." 내가 말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십 년이면 충분할 거 같은데. 너무
긴가? 그래 봐야 사십 대 초반이야. 물론 장사가 잘 되면 더
짧아지겠지." 경환이가 대답했다.
"사십 대 초반." 석구가 말했다.
"해 볼래?" 경환이가 물었다
"나는 안 돼. 철수한테 물어 봐." 석구가 대답했다.
"너는 왜 안 돼?" 경환이가 물었다.
"아빠 되잖아." 내가 웃었다.
"애 데리고 가면 되지. 지금 바로 가자는 거 아니야. 한 삼 년
뒤에." 경환이가 말했다.
"애를 데리고 가는 건."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힘들 것
같은데."
"그런가?" 경환이가 웃었다.
"야. 그리고 석구는 여기서도 괜찮아. 굳이 거기까지 안 가도
돼." 내가 말했다.
"그. 이민은 어떻게 가는 거야? 뭐가 필요해?" 석구가 물었다.
"그건 잘 모르겠는데." 경환이가 말했다.
"찾아봐야지." 석구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면 얘는 안 되고. 너는 어때? 같이 갈래?" 경환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뭐, 돈은 반반씩 내는 거야?" 내가 물었다.
"그렇지. 버는 돈도 반으로 나누고. 가게 하나 더 낼 때까지."
경환이가 대답했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봐. 일단 취직부터 하고." 내가 말했다.
"아! 너 혹시 학원에서 애들 가르쳐 볼래? 그래, 네가 있었네."
경환이가 물었다.
"무슨 학원?" 내가 물었다.
"우리 작은 아버지 학원 하시잖아." 경환이가 대답했다.
"나는 모르지." 내가 웃었다.
"하여튼, 작은 아버지가 학원을 하셔. 중학생들 다니는
학원인데. 얼마 전에 선생 한 명이 갑자기 그만뒀나 봐. 그래서
사람을 새로 구하고 있는 중이거든. 나한테 어제 전화를
하셨더라고. 학교 친구들 중에 적당한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해달라고. 왜 네 생각을 못 했지? 너 애들 많이 가르쳐 봤잖아.
한번 해 볼래? 아직 못 구했을 텐데." 경환이가 물었다.
"아니야. 됐어." 내가 대답했다.
"왜?" 경환이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 그러니까. 거기 계속 다니라는 게 아니고. 취직 할
때까지만. 아르바이트 한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작은
아버지께도 그렇게 말씀 드릴게." 경환이가 말했다.
"나 애들하고 어색해서 안 돼." 내가 말했다.
"너 학교 다닐 때 애들 많이 가르쳐 봤잖아." 경환이가 말했다.
"그때는 다 고등학생들이었어." 내가 말했다.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이나." 경환이가 말했다.
"에이. 다르지." 내가 말했다.
"이거 복잡하네. 너 정말 갈 거면 미리미리 준비해야 되겠다."
석구가 말했다.
"줘 봐." 경환이가 석구의 휴대폰을 잡아당겼다. "정말 안 할
거야?"
"시간도 없어. 면접 준비도 해야 되고." 내가 말했다.
"야. 얘 고집 있어." 석구가 말했다.
"그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한번 해 보지. 아깝잖아. 돈 벌 수
있는데." 경환이가 말했다.
"너 대학원 가는 건 생각 안 해봤어?" 석구가 물었다.
"대학원. 생각해 봤지." 내가 대답했다.
"교수님이 대학원 오라고 그랬는데 싫다고 했다며." 경환이가
물었다.
"아, 그랬어? 언제?" 석구가 물었다.
"졸업하기 전에." 내가 대답했다.
"싫다고 그랬어?" 석구가 물었다.
"응. 그때는 그랬는데." 내가 대답했다.
"지금은 아니야? 다시 공부할 생각 있어?" 경환이가 물었다.
"글쎄. 지금 대학원 가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나." 내가 말했다.
마음은 있는 거야?" 경환이가 물었다.
"더 공부해 보고 싶은 건 있는데." 내가 대답했다.
"그렇게 늦지는 않은 것 같은데. 요즘에는 회사 그만두고
대학원 가는 사람들도 많잖아. 나도 여러 명 봤어." 석구가
말했다.
"그래도 나보다 어릴 걸." 내가 웃었다.
"대학원도 나이 제한이 있어?" 석구가 물었다.
"그런 건 없는데." 내가 기지개를 켰다. "모르겠다. 생각 좀 해
보고."
"내 생각에는 역시 시험을 다시 보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
대학원 가서 박사까지 해도 결국은 회사원 되는 거잖아."
석구가 말했다.
"근데 시험을 본다고 다 붙는 게 아니니까." 경환이가 휴대폰을
두드렸다.
"얘는 금방 될 거 같은데." 석구가 말했다.
"나도 볼게. 줘 봐." 내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핸드폰을 바꾸라고." 경환이가 내게 휴대폰을 넘겼다.
"근데 꼭 호주로 가야 돼?" 내가 물었다.
"왜? 너는 어디로 가고 싶은데?" 경환이가 웃었다.
"아니. 음식점을 꼭 외국에서 해야 되냐고." 내가 물었다
"아. 그런 건 아닌데. 꼭 여기서 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경환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여기는 음식점이 너무 많아서." 석구가 말했다.
"맞아." 경환이가 말했다.
그쪽에 가서 준비하는데 적어도 일 년은 걸리겠지. 그러면 일단
취업을 해서 가는 게 낫겠네. 근데 이민 가는 게 복잡하구나.
이렇게 봐서는 잘 모르겠다. 자격증이 도움이 되려나.
"철수." 경환이가 말했다.
"응?" 나는 석구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아까 내가 말한 거 있잖아. 그 학원.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알았지?" 경환이가 말했다.
"응."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생각해 볼 거야?" 석구가 웃었다. 내가 웃었다.
"아, 진짜로. 생각해 보라니까." 경환이가 말했다.
"어. 생각해 볼게." 내가 말했다.
"야, 근데 빨리 생각해야 된다. 내일 저녁까지는 알려 줘야 돼."
경환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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