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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4 주일 설교 준비

온세대 한말씀 프로젝트

마태복음 21 장 1-11 절

본문: 마태복음 21 장 1-11 절


제목: 소동이 일어나다
주제: 예수님이 예루살렘 전체에 소동을 일으키셨다.
이미지: 소동,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 등

1. 본문의 중심 주제 정하기

돌아오는 주일을 흔히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고 부른다. 허나 종려나무에 대한 언급은 오로지


요한복음에만 있다.(요 12:13) 게다가 마태복음의 일정을 계산해보면, 해당 본문은 월요일에 일어난
사건이 된다. 그래서 ‘종려주일’이라는 명칭에 맞추는 것이 꽤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본문은 종려주일에 다룰 충분한 가치가 있다. 종려주일은 보통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다룬다. 그 사건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질문을 설교의 중심에 놓고
본문을 살펴보면 10 절의 말씀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도시 가운데 소동을 일으켰다. 예수님은 소동을 일으키시는 분이다.
여기에 초점을 두고 말씀을 전개하도록 하자. 그러면 대략 아래의 설교 구성이 가능할 것이다.

2. 예루살렘은 소동이 일어나지만 참된 변화를 싫어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내용을 담는다. 예루살렘, 이


도시는 어떤 곳인가? 마태복음 2 장 3 절에 의하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한다. 그들은 왕궁으로 찾아가서 헤롯 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는가 묻는다. 이 일로 인해 헤롯과 온 이스라엘이 함께 소동(tarasso)한다.

그럼에도 마태복음은 예루살렘을 “거룩한 성”(holy city)이라고 부른다.(마 4:5) 광야에서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이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리라고 유혹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여전히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문제도 많고 탈도 많은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신다.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활동을 하시려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위한 입성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참 특이하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마치 전쟁에 나간 장군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것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의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인 개선문을 떠올려보자. 정식 명칭은 “에투알 개선


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건축물은 1806 년 2 월 18 일에 프랑스 군대의 승리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나폴레옹 1 세가 명령하여 건축이 시작되었고 1836 년에 완공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개선문들이
세계 도처에 있는데, 그것은 하나같이 승리를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다.

그래서 누군가가 개선문을 통해 입성한다면, 당연히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강력함을 드러내는 행렬을
자랑하게 된다. 전투용 말과 마차와 멋지게 휘날리는 깃발 그리고 승리의 영광에 취한 병사들의
늠름한 모습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이런 군대의 입성과 비교하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분명 뭔가 이상하다. 전투용 말은 없다.


강력한 마차도 없다. 화려하게 장식된 깃발도 없다. 예수님의 입성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곤 나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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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새끼 뿐이다.

게다가 나귀와 나귀 새끼가 동원되는 방식도 상당히 우스운 면이 있다. 개역개정이나 새번역성경은
예수님의 지시를 받은 두 제자가 마을에 들어가서 나귀와 나귀 새끼 주인에게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내어줄 것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헌데 개역개정 성경 3 절의 각주에 달려 있듯이,
여기에는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즉시 돌려보내리라 하라.”라고도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제자 두 사람이 마을에 들어가서 아주 늠름하게 나귀 주인에게 우리 주님께서 쓰시려고 한다고
말하면 바로 내어줄 것이라는 해석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쓰실 것인데 너무 염려하지 마시라, 우리
주님이 금방 돌려 보내주실 것이다, 이렇게도 번역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지금
나귀를 일시적으로 렌트해서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다. 이게 일반적인 장군들의 입성과
너무 비교가 된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스가랴 9 장 9 절의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해석한다.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무리들은
열광적으로 환영을 한다.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서 길에 편다.
그리고 소리를 높여 외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 절)

여기서 “무리”의 역할도 생각해봐야 한다.


마태복음의 내러티브에서 15 장 39 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신다. 일곱 개의 떡과
생선 두 마리로 4 천 명을 먹이신 사건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무리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다가, 오늘 본문에서 다시 “무리”가 등장한다. 이들은 한 편으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지지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후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대상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역할도 하게 될 것이다.(27:20) 그럼에도 지금 무리들은 “호산나”라고 외친다. 본래 호산나의
의미는 “제가 간구하오니, 저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과연 그들은 호산나의 의미를 담아서
외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감탄사처럼 내뱉는 것일까?

아무튼 그리하여 온 성은 소동(seio)을 하게 된다. 특히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입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예루살렘은 정말로 소동을 하게 되는
것일까? 정말로 변화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일까?

무리들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사실은 변화를 싫어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더욱 바라는 것 같다.

3. 우리도 예루살렘과 별로 다르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정말로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할까? 우리 집에 오신다면, 우리 일터에 오신다면, 우리 일상에 오신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반영할까? 아마 겉으로는 무리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환영하며 나뭇 가지를 흔들고
겉옷을 펴서 호산나 호산나 소리를 높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보면, 할렐루야를 남발하지만, 할렐루야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지 않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런 우리 모습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4.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진짜 소동을 일으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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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자체로 소동이었다. 세상의 왕들에게는 특히 소동이었다. 예루살렘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큰 소동이 일어난다. 입성의 때에 일어난 것은 진짜 소동도
아니다. 더 큰 소동이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고 땅이 진동을 하다.


바위가 터진다. 큰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27:51)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보관하고 있던 무덤의 문이
열리고 주의 천사가 나타났을 때, 무덤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무서워하며 떨게 된다. 죽은 자처럼
자기들 안에 소동이 일어난다.(28:4)

그렇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제 소동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지진을 일으키는 소동이
될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무덤을 지키던 자들의 심장에서 소동이 일어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완전히 달라진다. 전혀 다른 도시가 된다. 예수님이 오셨으니,


그곳에서는 이제 이전과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주중에 강원도 태백을 다녀왔다. 거기서


북한 선교를 위해 세계 도처에서 모인 선교사님들을 만났다. 그들은 한국을 위해서 그리고 북한 땅을
위해서 기도하며 북한에 들어갈 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말을 배우고 북한의 문화를 배우고
어떻게 쓰임을 받을 지 준비하는 중이었다.

방문한 날에 예배를 드렸다. 브라질에서 온 여자 청년이 말씀을 나눴다. 예수님으로 인해 도시가


달라지게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가 비록 북한을 위해서 모였지만, 우리가 잠시 머물고 있는 태백을
위해서 기도하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 도시가 우리들로 인해서 이전과 전혀 다른 그런 도시가
되도록 기도하자고 했다. 그곳의 학교를 위해, 그곳의 병원을 위해, 그곳의 주민들을 위해서
기도하자는 것이었다.

그 마음이 너무 귀했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던가!
우리 도시의 학교와 병원과 기업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이 도시가 우리로 인해서 이전과 같을 수
없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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