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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시각디자인교육, 1. 머리말


2. 서울미대 시각디자인 교육과정의 변화
1965–1994: 2–1. 전공명칭 변화

디자이너–교수 3인의 활동을 중심으로 2–2. 교육내용 변화


2–3. 교수진 구성
3. 서울미대 시각디자인전공 전임교수 3인의 활동
강현주 3–1. 김교만
3–2. 조영제
3–3. 양승춘
4. 서울미대 시각디자인전공 디자이너–교수 활동의 특징
4–1. 교육활동:디자이너–교수의 실기 중심 교육
4–2. 사회활동:상공미전과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
4–3. 작품활동:기업 아이덴티티 디자인과 88서울올림픽 디자인
5. 맺음말

강현주는 1965년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산업미술과와 스웨덴 콘스트팍스콜란


(Konstfackskolan)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였다. 1996년부터 인하대학교 예술체육
학부 시각정보디자인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디자인사 연구』(조형교
육, 2004)와 『한국디자인사 수첩: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디자인플럭스,
2010)가 있으며, 공저서로 『열두 줄의 20세기 디자인사』(디자인하우스, 2005), 『한국의
디자인: 산업, 문화, 역사』(시지락, 2005), 『한국의 디자인 02: 시각문화의 내밀한 연대
기』(디플, 2008), 『우리를 닮은 디자인』(KDF, 2009), 『생활의 디자인』(현실문화, 2011),
『디자이너 열전』(현실문화, 2011)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김교만과 한국 현대 그
래픽 디자인」(조형_아카이브, 2011년 제3호), 「한홍택 디자인의 특징과 의미:한국 그래
픽 디자인의 전사(前史)」(디자인학연구, 통권 제102호, 201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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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9 6 5 –1 9 9 4 _

1. 2.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교육은 개교 당시 도안과로 출발하여 응용미술과, 산업 2–1. 전공명칭 변화


미술과, 산업디자인과 시기를 거쳐 현재 디자인학부 체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1946년 서울대학교의 디자인교육은 1946년 8월 22일 미군정령 제102호 국립서울대학교 설
서울미대 도안과 개설은 우리나라에서 대학 디자인교육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립에 관한 법령에 의거하여 9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 체제로 서울대학교가 같은 해
서울미대에서 시각디자인은 초창기에는 상업미술이라는 과목으로 교육되다가 1960년 10월에 개교하면서 시작되었다. 개교 당시 예술대학은 미술부와 음악부로 구성되었고
대 중반부터 응용미술과 학생들이 3학년에 진입하면서 선택하는 전공이 되었다. 응용 미술부는 제1회화과, 제2회화과, 조각과, 도안과로 나뉘어 있었다. 도안과는 1950년에
미술과의 전공은 처음에는 상업미술과 공예미술 두 개로 구분이 되다가 이후 공예미술 학과 명칭을 응용미술과로 개칭하였다. 예술대학의 미술학부는 1953년 4월 20일 대통
이 공예미술과 공업미술로 나뉘어 상업미술, 공예미술, 공업미술 세 개가 되었다. 1983 령령 제780호에 의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으로 학제가 개편되어 회화과, 조소과, 응용
년에 응용미술과가 산업미술과와 공예과로 분리되면서 산업미술과(1989년 산업디자 미술과의 3개 학과로 재정비되었다.3 도안과에서 응용미술과로 학과 명칭을 변경하게
인과로 개칭)는 시각디자인과 공업디자인 두 개의 전공으로 나뉘었고, 이 체제는 1998 된 이유에 대하여 1961년부터 1968년까지 미대 학장을 역임했던 박갑성 교수는 “처음
년에 디자인학부가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서 도안과라고 불리던 것이 그 분야가 확대되고 내용이 다양해져 더욱 광범위한 개념을 가
울미대 시각디자인교육은 1965년 12월에 함께 부임한 김교만(1928–1998), 조영제 진 응용미술과라는 이름으로 되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이순석 교수는 응용미술
(1935년생) 교수와 1970년에 부임한 양승춘(1940년생) 교수 이렇게 세 사람의 전임 과의 목적에 대해 “예술적인 의의를 가진 작품제작 과정의 공부인 동시에 일상생활과
교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1 김교만 교수는 1994년에, 조영제 교수는 2000년에, 양 상업, 공업 및 공예에 직접 관계를 가지며 실용적 가치와 창의성에 중점을 두어 이론과
승춘 교수는 2006년에 정년퇴임을 했다. 응용미술과 59학번으로 군대 제대 후 복학하 기술 양면을 연구케 하여 사회와 생활면에서 적응할 디자이너를 양성시키는 데 있다.”
여 1965년에 대학을 졸업한 양승춘 교수는 대학 재학 시절 시간강사로 출강한 조영제 라고 하였다.4 이처럼 당시 응용미술은 상업미술, 공예미술, 공업미술을 모두 포함하면
교수로부터 수업을 받았고2 1968년부터 학과조교로 근무하면서 시간강의도 했기 때문 서 도안의 개념을 확장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에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교수 세 사람은 30여 년간 선배와 후배, 스승과 제자, 그리고 응용미술과 내에서의 세부 전공 분리는 몇 단계를 거치며 진행이 되었는데 1964
동료교수의 관계를 맺으며 서울미대에서 함께 해왔다. 본 연구에서는 시각디자인이 전 년에 처음으로 학생들이 상업미술과 공예미술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학과 차원에서 지
공 차원에서 교육되기 시작한 1960년대 중반부터 산업디자인과와 공예과가 디자인학 도를 하다가 1966년부터 교과목 상으로도 분리가 이루어졌다.5 1968년부터는 전공 이
부로 다시 통합되기 이전 시기인 1990년대 초반까지 서울미대의 시각디자인교육을 김 수 과목이 상업미술, 공예미술, 공업미술 세 개로 확실하게 분화되었다.6 입학 시점에는
교만, 조영제, 양승춘 세 교수의 디자인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전공 구분이 없다가 1976년부터는 입학시험 원서를 제출할 때 본인의 전공을 선택하

1 1965년 김교만, 조영제 두 교수가 부임할 당시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에는 이순석, 김정자,


권순형, 민철홍 이렇게 네 사람의 전임교수가 있었다. 당시는 공예와 디자인이 전공 분리가 되기 3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홈페이지(http://art.snu.ac.kr/history) 대학소개 중 연혁 참조.
전으로 상업미술, 공예미술, 실내장치, 건축미술 등이 과목의 형태로 존재했으며, 전임교수들의 4 동서울대학 산업기술연구소, 「한국 디자인 사료의 DB화에 관한 연구:1880–1980년대를
전공이 아직 뚜렷하게 전문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중심으로」, 산업자원부, 1999, 748쪽 참조.
2 1963년 2학기에 첫 출강을 해서 2학년 상업미술 과목 수업을 했던 조영제 교수는 그 이듬해인 5 실제 교육내용은 세분화 되어 있었지만 교육과정 상으로 1960년대 초까지는 1, 2, 3학년의 실기
1964년에는 2학년 상업미술과 함께 4학년 실내장식 과목을 담당했다. 이때 양승춘 교수와 과목과 4학년의 고등실기 과목에서 실기수업을 했다.
함께 국민대 정시화 교수, 이화여대 배천범 교수, 오리콤 이태영 부사장 등이 실내장식 과목을 6 ‹표 1› 시각디자인 관련 대학/학부/학과/전공 명칭의 변화 참조.
수강했다. 강현주, 『한국 디자인사 수첩–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디자인플럭스,
2010, 3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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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9 6 5 –1 9 9 4 _

10
여 명시하게 했고, 상업미술이 상업디자인으로, 공업미술이 공업디자인으로 명칭이 바 ‹ 1› / / /

뀌었다. 초창기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의 디자인교육은 디자인을 포함하는 상위 개념으


1946 ‒
로서 ‘공예미술’이라고 하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이순석 교수가 갖고 있 1 9 5 1 ‒1 9 6 7 ‒

던 응용미술의 개념적 토대에 의해 유지되어온 것으로 이순석 교수는 1969년 한국디


1 9 6 8 ‒1 9 7 5
자인센터에서 개최한 제1회 디자인세미나에서 응용미술의 개념적 범위를 설명하면서
회화와 조각을 순수미술로 규정하고 이를 제외한 나머지 전 응용영역, 즉 공예미술, 상
1 9 7 6 ‒1 9 8 0
( )
업미술, 건축미술, 무대미술, 복식미술을 응용미술의 범주에 포함시켰다.7

1983년에 응용미술과가 산업미술과와 공예과로 분리되고 1989년에 산업미술과
가 학과 명칭을 산업디자인과로 변경해 1997년까지 미술대학은 동양화과, 서양화과, 1 9 8 1 ‒1 9 8 2
( )

조소과, 산업디자인과, 공예과의 5개 학과 구조를 유지했다. 김민수 교수는 산업미술과


와 공예과의 학과 분리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하였다. 첫째는 이 1 9 8 3 ‒1 9 8 8
( )

순석 교수가 인식했던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공예’의 시대가 지나가고 디자인과 공예가 1 9 8 9 ‒1 9 9 7


( )
각기 전문화된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며, 둘째로는 이러한 방향 선택의 결과로서 디
자인과 공예의 전공 영역은 한편으로 심화되었지만 그 내용의 폭은 상대적으로 축소되 1 9 9 8 ‒2 0 0 4 ‒
( )
었다는 점이다.8 1998년에 산업디자인과와 공예과가 단일학부인 디자인학부로 통합이
되었는데 2005년부터는 디자인학부가 학부 체제는 유지하지만 학생 입학시험 시 디자
2005‒ ‒
인전공과 공예전공을 분리 모집하게 되었다.9 학부제 도입은 디자인과 공예가 교육에 ( )

있어서 다시 통합되어야 하는 내적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중앙정부


차원에서 강력하게 추진되던 교육부 정책을 수용한 결과로 현재의 디자인학부는 명칭 ‹표 1›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서울대학교의 시각디자인교육은 대학 설립 초
은 단일학부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학과제와 마찬가지로 운영되고 있다. 1946년 서울대 기의 예술대학 미술부의 도안과 및 이후 미술대학의 응용미술과, 산업미술과, 산업디자
학교 개교 당시 도안과 신설부터 2013년 현재까지 시각디자인 관련 학부 및 학과, 전공 인과, 디자인학부 시기에 상업미술, 상업디자인, 시각디자인 등으로 전공명칭이 변화되
명칭의 변화를 정리해보면 다음 ‹표 1›과 같다. 는 과정을 통해 발전을 해왔다.

10 김정희, 앞의 글 21쪽 ‹표 1› 학과구조 (『서울대학교 학생모집요강 안내』,


『서울대학교신입학생모집안내』, 『서울대학교현황–입학요강』 참고) 재참조 및 일부 내용 추가.
7 김민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ㆍ공예교육 50년사:1946–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전공과목 중의 하나로 운영이 되던 상업미술이 언제부터 전공 개념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논문집』, 조형연구소, 1996, 49–50쪽 참조.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1965년에 응용미술과를 함께 졸업한 59학번의 양승춘 교수와 61학번의
8 김민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ㆍ공예교육 50년사:1946–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정시화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명예교수는 본인들이 4학년이었던 1964년에 이미 상업미술과
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논문집』, 조형연구소, 1996, 48쪽 참조. 공업미술 전공 분리가 시작되어 양승춘 교수는 상업미술을, 정시화 교수는 공업미술을
9 김정희, 「서론: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혁신을 위한 비판적 돌아보기」, 『조형_아카이브』, 제4호, 선택했다고 개인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이는 김정희 교수가 참조한 서울대학교 자료의
2012년, 19–21쪽 참조. 연도들과 상이한 것으로 1968년 대학 차원의 공식적인 전공 인정 행정 절차 이전에 1964년부터
학과 차원에서는 이미 내용적인 전공 분리가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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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교육내용 변화 년 간 수업을 진행했다.17 이후 1957년에 미국 원조로 설립된 한국공예시범소(Korea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교육의 틀을 마련한 것은 1946년에 초대 도안과 교수로 Handcraft Demonstration Center)18가 대학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면서 당시 재학 중
부임하여 1970년에 응용미술과 교수로 정년퇴임을 한 이순석(1905–1986) 교수였다. 이던 학생들이 미국식 교육을 접할 기회를 잠시 가졌다.19
그는 1931년에 동경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같은 해 6월 동아일보사 강 1950, 60년대 응용미술과의 교육내용을 50학번인 김교만 교수, 54학번인 조영
당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디자인 개인전시회를 개최했다.11 1946년에 41 제 교수, 59학번인 양승춘 교수의 개인 성적표 상에 나타난 과목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
세의 나이로 미군정청 고문관으로 일을 하고 있던 이순석 교수는 당시 문교차관으로부 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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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서울대학교 내에 미술대학을 설치하는 구상에 대한 제의를 받고 교육과정 및 교수 ‹ 2›
1951 , ,
진 구성에 대한 계획을 제출하였다. 동경미술학교와 컬럼비아대학교를 수료한 당시 장 1952 , , , , , , ,
발 서울시 학무과장이 이순석 교수의 추천으로 예술대학의 미술부장이 되었고 이후 미 1953 , , , ( ), , , ,
1954 , , , , ,
술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다.12 이와 함께 이순석 교수 본인도 도안과 교수로 부임했
1955 , ,
다.13 이순석 교수는 서울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전 공예부 신설, 한국공예기술연구 1956 , , , , ,

소 설치, 상공미전 출범 등 정부 차원의 디자인 제도 및 정책 마련에 깊게 관여하여 영 ‹ 3› 21

향력을 크게 발휘했다.14 1954 , , , , , , , , ,


1955 , , , , , , , ,
개교 당시 서울대학교는 제도적으로는 “학술계와 직업계가 하나의 대학교에 공 1956 , , , , , ,
존하는 미국형 종합대학교”15의 모델을 따르고 있었으나 일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 1957 , , , , ,

지 않았다. 특히 디자인교육 커리큘럼은 일본식의 교과과정과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었


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교과과정을 설정하는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이순석 교 17 김민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ㆍ공예교육 50년사:1946–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수 자신의 교육적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16 1950년에 발발한 6.25 한국전쟁으 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논문집』, 조형연구소, 1996, 39쪽 참조.
18 한국공예시범소(Korea Handicraft Demonstration Center, 약칭 KHDC)는 1957년
로 부산 송도에서 전시연합학교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이 시기에 최초의 외국인 강사
미국의 원조로 설립된 디자인진흥기구로 미 국무부 산하의 국제협력처(International
인 존 프랭크(John L. Frank)가 구성 과목을 맡아 1953년 5월부터 1954년 4월까지 일 Cooperation Administration, 약칭 ICA)의 기술원조기금을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미국
대외원조기관(USOM), 주한유엔군사령부, 주한미8군사령부의 협조와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ICA는 산업화가 저조한 세계 여러 후진국에 이와 비슷한 지원을 하고 있었다.
김종균, 『한국디자인사』, 미진사, 2008, 55쪽 참조.
11 첫 개인전에서 이순석은 일본유학 시절 제작한 도자기와 수영복, 넥타이, 스카프 등의 패턴 19 한국공예시범소는 1960년 1월에 폐소되고 그 설비들만 서울미대에 옮겨져 현재의 부속
디자인, 가구 디자인, 포스터, 구성 등 30여 점의 상업미술품, 공예미술품, 실내장식품 등을 실습장이 마련되었다. 이 설비들이 서울미대로 옮겨지게 된 것은 김정자 교수가 당시
선보였다. 미국대사관 문정관 내외와 친분 관계가 있어 대화를 나누던 중에 제안하여 이루어졌다. 김정자
12 장발 학장은 1946년 10월 22일부터 1961년 5월 9일까지 재직했다. 김정희, 「서론:서울대학교 교수가 당시 박갑성 학장에게 이야기를 하고, 이와 관련한 실무적인 작업은 권순형 교수가
미술대학, 혁신을 위한 비판적 돌아보기」, 『조형_아카이브』, 제4호, 2012년, 13쪽 참조. 진행하였다. 박영목, 『한국 디자인의 새벽–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아카이브:디자인 구술채록
13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사:1946–1993』, 1993, 2쪽. 자료집 | 김정자』, 조형연구소, 2013, 41–42쪽 참조.
14 황부용, 「회화적 접근」, 『월간디자인 6월호』, 1986, 참조. 20 1950년에 응용미술과에 입학했던 김교만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6.25전쟁을 겪게 되어
15 김정희, 앞의 글 11쪽에서 재인용. 오욱환, 최정실, 『미군 점령시대의 한국 교육–사실과 해석』, 피난 중 대전에서 전시 연합대학을 다니며 학업을 계속했으나 이수 학점 부족으로 1956년에야
지식산업사, 1993. 졸업을 하게 되었다. 강현주, 「김교만과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 『조형_아카이브』, 제 3호,
16 김민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ㆍ공예교육 50년사:1946–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조형연구소, 2011, 107쪽 재인용.
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논문집』, 조형연구소, 1996, 32–37쪽 참조. 21 김민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 ·공예교육 50년사:1946~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논문집』, 조형연구소, 1996, 4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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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교수로부터 수업을 듣고 권순형 교수의 개인전을 보았던 양승춘 교수는 당시의 경험을
1959 , , , , , , , , ,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62 , , , , , , , , , ,
1963 , , , , , , , , ,
, ,
1964 , , , , , , , ,
“...... 복학을 하고나서 2학년에 올라가니까 전공을 하는데 민철홍 선생님이 실기
수업에 들어오더니 바인더를 딱 펴주는 거야. 설명을 할 테니까 들어봐라 하면서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의 디자인교육이 서구 현대 디자인의 영향을 받게 된 직접 미국에서 유학한 바인더를 펼치는데, 눈이 휘둥그레졌지. 백문이 불여일견이야.
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미국에서 유학한 김정자23, 권순형24, 민철홍25 세 교수에 의 (중략) 민철홍 선생이 시카고 일리노이 공대(IIT)에서 1년 간 배운 바인더를 펼치
해서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58년부터 서울미대에 출강하여 1959년에 전임교수 는데 그 안에 모든 게 다 있어. 그 다음해인가 권순형 선생님이 미국에서 귀국해
가 된 김정자 교수는 부임 초기에 구성 과목을 담당하면서 일본에서 유래한 초기 ‘양식 서 전시를 하는데 (중략) 레코드 자켓, 책표지, 광고 CF 비슷한 거 등등. 그런데
화’ 수업과는 다른 미국식 기초 디자인의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김정자 교수는 나는 유별나게 레코드 자켓에 눈이 탁 꽂혔어. 그게 부활이라는 댄스곡인데 정열
이순석 교수가 생각했던 장식에 한정된 디자인 개념과 달리 “용도의 기능을 기초로 한 적으로 불같이 표현한 게 마음에 와 꽂히더라고. ‘아, 저렇게 감성적으로 표현을
동작적인 것을 디자인”이라 정의했으며 장식에 한정된 디자인의 정의는 명사적인 뜻으 할 수 있구나. 마음속에 있는 어떤 생각을.’ 그때부터 디자인에 대한 눈을 뜨기 시
로서 부분적인 것임에 반해 디자인은 ‘질서’와 ‘계획하다’라는 동사적인 뜻, 즉 활동을 작한 거야.”28
의미하는 전체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김정자 교수에게 있어 디자인이란 “주어진 뚜렷
한 목표를 계획하여 상호관계를 조직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권순형 교수는 1961년 서울미대 응용미술과 부임 후 도자공예 분야에, 민철홍
현대적인 의미의 디자인 개념이었다.26 교수는 1963년 부임 후 공업디자인 분야에 전념을 했기 때문에 응용미술과 내에서 시
한편 권순형 교수가 미국 클리브랜드 대학에서 일 년 간 수학하고 돌아와 1960 각디자인교육을 전담할 교수진이 없었던 상황에서 1965년 김교만 교수와 조영제 교
년 중앙공보실에서 개최했던 개인전은 시각디자인교육의 전환에 또 다른 계기를 마련 수의 부임은 향후 그래픽 디자인 중심의 교육적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를 제공했다.29
했다. 이 전시회를 통해 스크린톤, 칼라톤, 하드보드와 같은 새로운 재료들과 타이포그 196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시각디자인 관련 전공과목 구성의 변화를 살
라피, 신문광고 레이아웃, 레코드커버, 포장 등 그래픽 디자인의 재료와 영역들이 새롭 펴보면 다음과 같다.
게 소개되었기 때문이었다.27 대학 재학시절에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민철홍

22 1959년 응용미술과에 입학한 양승춘은 군 입대로 휴학 후 1962년에 복학하여 1965년에


졸업했다.
23 1929년생인 김정자 교수는 미국 오클라호마대학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28 김수정, 『한국 디자인의 새벽–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아카이브:디자인 구술채록 자료집 | 양승춘』,
1959년에 서울미대 응미과 교수로 부임한 후 1994년에 정년퇴임을 했다.
조형연구소, 2013, 참조.
24 1929년생인 권순형 교수는 미국 클리브랜드 대학에서 1년간 수학하고 1960년에 귀국하여
29 1959년 가을학기에 시간강사로 응용미술과에 첫 출강을 한 민철홍 교수는 초창기에는 상업미술
1961년에 서울미대 응미과 교수로 부임한 후 1994년에 정년퇴임을 했다.
과목도 담당하면서 포스터 제작을 지도하기도 했으나 이후 공업디자인 전공교육에 매진했다.
25 1933년생인 민철홍 교수는 1958년에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IIT)에서 1년간 수학을 한 후
김정자 교수는 응용미술과 초창기부터 이론과 실기의 기초 과목 및 주요 교과목을 담당하고
귀국하여 1963년에 서울미대 응미과 교수로 부임하여 1998년에 정년퇴임을 했다.
전공 분리 이후에도 시각디자인전공의 대학원 논문지도도 담당했으나 정년퇴임 때까지 교육 및
26 김민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ㆍ공예교육 50년사:1946–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연구 활동이 시각디자인뿐만이 아니라 디자인교육 전반을 포괄하고 있었다.
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논문집』, 조형연구소, 1996, 44쪽 참조.
27 김민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 ·공예교육 50년사:1946–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논문집』, 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 1996, 45쪽 참조.

43 44
, 1 9 6 5 –1 9 9 4 _

30 32
‹ 5› 960 –1 9 9 0 ‹ 6› 1985
1960 1970 1980 1990
I
( ) , ,
1, 2 1 , 2 ,3 ,4 ,5 ,6 1, 2 , 3 , 4 , 5 , 6 .
1, 2 1, 2 II ·
1, 2 1, 2 , 3 , 4 , 5 1, 2 , 3 , 4 , 5 , 6 .
1, 2 1, 2 1, 2 I
1, 2 1, 2 1, 2 .
1 , 2 ,3 1, 2 1, 2 II ·
1, 2 .
1, 2 I
1, 2 , 3 1, 2 .
1, 2 , 3 1, 2
II
1, 2
.
1, 2
I
, , , .
1960년대 초반에 상업미술이라는 과목으로 교육되던 시각디자인이 1960년대 II , , ,
.
중반에 독립된 전공이 되면서 관련 과목의 수가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1970년대 전공
III , .
필수 과목으로는 시각디자인, 광고디자인, 포장디자인이 있었고 이들 수업에서는 포스 IV
.
터, 달력, 기업 아이덴티티 디자인(Corporate Identity Program), 신문광고, 선물용 포
I
장 디자인 등을 가르쳤다.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사진디자인 과목 등은 전공선택 과 .
II
목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각디자인전공 교과과정에서 영상 과목들이 증 .
가하게 되었다. 1981년부터 기존의 사진 1, 2와 사진디자인 1, 2, 3 과목은 영상디자 I
.
인(Photography & Film Design) 1, 2, 3, 4, 5, 6으로 대체되어 운영이 되게 되었고 II
.
1985년에는 영상디자인 6개 과목을 5개로 줄이고 대신 컴퓨터그래픽 2개 과목을 추가
I .
하였다가 1988년에 다시 영상디자인 과목을 6개로 늘렸다. 1980년대 영상디자인 과 II ·
.
목의 수업 목표는 정사진, 멀티비젼과 애니메이션 제작의 기초과정, 영화와 비디오 제
I
작 등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다. 31
1985년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교과목개요와 개 .
II · · ( )
설학년 및 담당 교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I .

3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사:1946–1993』, 1993, 참조 후 조정


31 동서울대학 산업기술연구소, 「한국 디자인 사료의 DB화에 관한 연구:1880–1980년대를
중심으로」, 산업자원부, 1999, 750–751쪽 참조.

32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 교과목개요–미술대학:1985 학사과정, 대학원과정』, 1985, 참조.

45 46
, 1 9 6 5 –1 9 9 4 _

33
II · ‹ 7› 1985
.
III I
.
I
IV
1 I
, .
I
I
I
. 2
II
II Public
. II
I . 2 II
II II
. II
III color transparency photography III
· · . I
IV animation film design 1 I
. III
V design coordination I
. 3
IV
VI event design visual identity . II
I 2 II
, .
IV
II marketing communication
II
.
V
, , ,
I
. 1
V
,
. 4

I computer VI
program . 2 II
II ·
.
V non–fiction film film
video . 1989년에 산업미술과가 산업디자인과로 학과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이 시기 시
각디자인전공의 교육목표는 아래와 같다.

매스커뮤니케이션 시대의 다양한 정보를 시각화하여 전달할 수 있는 형식을 광


고, 포장디자인, 여러 매체의 시각이미지 통합 및 기획,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영

33 1985년도의 경우, 교과목 개요와 강의계획서를 비교해보면 『서울대학교 교과목개요–미술대학:


1985 학사과정, 대학원과정』에는 강의계획서에 있는 디자인론 I, 디자인 II 과목에 대한 설명이
없고, 컴퓨터그래픽 I, 컴퓨터그래픽 II가 포함되어 있으나 강의계획서에는 디자인론 I, 디자인
II가 포함되어 있고 컴퓨터그래픽 I, 컴퓨터그래픽 II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차이가 있다.

47 48
, 1 9 6 5 –1 9 9 4 _

상디자인, 컴퓨터그래픽 디자인 등의 분야에서 보다 나은 창조 행위를 추구할 수 한편 1998년에 디자인학부로 산업디자인과와 공예과가 다시 통합되기 전까지
있도록 교육한다.34 도안과, 응용미술과, 산업미술과, 산업디자인과 시기에 출강했던 디자인 관련 주요 강
사진을 부임 시기별로 구분해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3738
산업디자인과 시각디자인전공의 1990년대 초반의 교육과정은 1980년대 후반과 ‹ 9› 1940 –1 9 9 0

큰 차이를 보이지 않다가 1993년에 교과목 재조정이 이루어지면서 ‘문자디자인’이 ‘타이 ( / / )3 8


1948.10.01
포그래피디자인’으로 과목 명칭이 바뀌고, ‘일러스트레이션’ 과목이 개설되었으나 이듬 1940
1949.10.01
해 바로 사라지고 대신 ‘컴퓨터 표현기법’과 ‘시각디자인표현기법’으로 대치가 되었다.35 1952.04.01
1953.04.01
. 1953.05.01
2–3. 교수진 구성 L. 1954.04.01
1950 1956.09.01
서울대학교 개교 당시 도안과를 만들고 응용미술과의 교육체제를 마련했던 이순석 교 1958.04.01
수가 1970년에 정년퇴임을 한 후 같은 해 양승춘 교수가 부임을 하면서 이후 1994 1958.04.01
1959.04.01
년 김교만 교수의 정년퇴임 때까지 시각디자인전공은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세 교수
1959.04.01
에 의한 이른바 트로이카 체제가 약 25년간 지속되었다. 양승춘 교수가 부임하던 해인 1 9 6 1. 0 4 . 0 1 /6 0 /6 5 (?)
1960
1 9 6 7. 0 3 . 0 1 /4 6 /5 1 (?)
1970년 이전의 응용미술과 교수진은 다음 ‹표 8›과 같다.
1972.03.01
36
‹ 8 › 1 9 4 6 –1 9 7 0 1972.03.01 /6 1 /6 5
Nemeli, G. V. 1972.03.01
(1 9 0 5 ~1 9 8 6 ) 1946 1970 1970 1972.10.01 /5 9 /6 5
(1 9 1 2 ~1 9 7 3 ) 1955 1961 1 9 7 7. 0 3 . 0 1
(1 9 2 9 ) 1959 1994 1979.03.01 /6 0 /6 9
(1 9 2 9 ) 1961 1994 1979.08.01 /6 6 /7 0
(1 9 3 3 ) 1963 1998 1980.03.01 /6 1 /6 5
(1 9 2 8 ~1 9 9 8 ) 1965 1994 1982.03.01
(1 9 3 5 ) 1965 2000 1982.03.01
(1 9 3 8 ) 1969 2003 1982.03.01 /5 9 /6 3
(1 9 4 0 ) 1970 2006 1983.03.01 /6 2 /6 6
1980
1983.03.01 /6 8 /7 2
1984.03.01 /6 7 /7 4
1985.03.01 /6 8 /7 5
1985.03.01 /6 8 /7 5
34 동서울대학 산업기술연구소, 「한국 디자인 사료의 DB화에 관한 연구:1880–1980년대를 1986.03.01 /6 9 /7 3
중심으로」, 산업자원부, 1999, 752쪽 참조.
35 김민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ㆍ공예교육 50년사:1946–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논문집』, 조형연구소, 1996, 54쪽 참조.
37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자료 참고.
36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자료 참고. 김민수 교수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38 본교 출신의 학과/입학/졸업 연도는 200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창회가 작성한
디자인ㆍ공예교육 50년사:1946–1996년」에서 1947년부터 출강했던 유영국 교수가 1948년에
『서울대미대인명록』에 실린 졸업생 명단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으로 개별 강사의 이력을
도안과 교수가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조형연구소 자료에는 나와있지 않아 이에 대한 추후
일일이 확인 대조하지는 못했으나 주요 강사진 구성의 특성 파악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확인이 필요하다.
표시하였다.

49 50
, 1 9 6 5 –1 9 9 4 _

1986.03.01 /7 5 /7 9 1996.03.01 /7 7 /8 4
1986.03.01 /6 7 /7 1 1996.03.01 /7 9 /9 6
1986.03.01 /(?)/7 0 1996.09.10 /8 9 /9 3
1986.03.01 /6 9 /7 3 1996.09.10 /8 1 /8 5
1 9 8 7. 0 3 . 0 1 /7 6 /8 7 1 9 9 7. 0 3 . 0 1 /(?)/7 7
1988.03.01 /7 5 /7 9 1 9 9 7. 0 3 . 0 1
1988.03.01 /7 7 /8 1 1 9 9 7. 0 3 . 0 1 /7 6 /8 3
1988.03.01 /6 9 /7 6 1 9 9 7. 0 3 . 0 1 /8 3 /8 7
1988.08.01 /5 5 /5 9 (?) 1 9 9 7. 0 3 . 0 6
1989.03.01 /7 5 /7 9 1 9 9 7. 0 9 . 0 9
1989.03.01 /7 8 /8 2 1 9 9 7. 0 9 . 0 9 /8 3 /8 7
1989.03.01 /7 6 /8 0
1989.08.01 1960년대 중반부터 시각디자인과 공업디자인이 전공 분리가 되기는 했지만 기
1990.03.01 /7 8 /8 2 초 과목과 이론 과목은 두 전공 학생들이 함께 수강했고 전공 분리 이후 과정에서도 학
1990.03.01 /7 4 /7 8
1990.03.01 /7 6 /8 0
생들이 개인의 선택에 따라서 전공 외의 과목을 수강하기도 했기 때문에 시각디자인 관
1 9 9 1. 0 8 . 2 1 련 강사 명단만 따로 구성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또한 이 강사 명단은 서울대학교 조
1993.03.01
형연구소에서 파악한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해당 시기에 출강했던 강사를 모두 포함한
1993.03.01 /7 3 /7 7
1993.09.01 /7 6 /8 0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강사들의 출강 기간도 개인에 따라 차이가 많은데 예를 들어 응
1994.03.01 /8 2 /8 6
용미술과 61학번으로 1965년에 대학을 졸업한 정시화 국민대 조형대학 명예교수의 경
1994.03.01 /7 6 /8 0 (?)
1994.03.15 /8 1 /8 5 우 1972년에 첫 출강을 해서 2007년 정년퇴임을 한 후 70세가 되는 2012년까지 40여
1994.09.01 /7 6 /8 0
년간 서울미대에서 디자인이론 관련 강의를 해왔다.
1995.03.01 /8 4 /8 8
1995.03.01
1995.03.01
1990 1995.03.01 /7 9 /8 2
1995.03.01 /7 6 /8 0 3. 3
1995.03.01
1995.03.01 /6 8 /7 5 (?)
1995.03.01 3–1. 김교만39
1995.03.01 1928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나 서울미대 50학번으로 6.25 한국전쟁 기간 중에 대
1995.03.20 /8 0 /8 4
1995.09.01 /8 1 /8 5 학을 다니다 1956년에 졸업한 김교만 교수는 만 37세가 되던 해인 1965년에 서울미
1995.09.01 /6 8 /7 5 (?) 대 응용미술과 교수로 부임하여 1994년에 정년퇴임을 했다. 한 인터뷰에서 김교만 교
1995.09.05 /7 3 /8 5 (?)
1995.09.05 /8 3 /8 7 수는 자신이 응용미술과에 입학하게 된 동기를 고등학교 시절에 동화백화점(현, 신세
1995.09.05 /8 1 /8 5
1996.03.01
1996.03.01 /7 7 /8 2
39 강현주, 「김교만과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 『조형_아카이브』, 제3호, 조형연구소, 2011,
1996.03.01 /7 8 /9 2
101–134쪽 참조.

51 52
, 1 9 6 5 –1 9 9 4 _

계백화점)에서 개최된 조선산업미술가협회40의 정기회원전을 보고 거기에 출품된 디자 (1986) 등 단행본을 출판했다. 작품 활동 외에 문교부 학술연구 조성비를 지원 받아
인 작품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응용미술과 재학시절부터 국전 공예 서 1968년에 「수출상품의 포장개선」, 1970년에 「수출포장개선과 POP 광고」, 1973년
부에 작품을 출품하고 이순석 교수의 디자인 작업을 도왔던 김교만 교수는 1956년 대 에 「픽토그램을 이용한 교통표식 개선연구」, 1982년에 「디자인교육에 있어 시각전달
학 졸업 후 권순형 교수와 함께 K.K.디자인연구소를 열어 2년 동안 운영했다. 그 후 진 과정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또한 김교만 교수는 서울지하철 심볼마크(1974), 성산
명여고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다가 동일방직의 전신인 동영방직주식회사에서 디자이 대교 아치 디자인(1977), 서울지하철 3, 4호선 토탈 디자인(1978) 등의 작업을 했으
너로 4년간 근무했다. 성심여고와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다시 교사생활을 시작했던 김 며 1980년부터 1984년까지 한일은행, 주택은행, 중소기업은행, 대한투자신탁 등 국내
교만은 1964년부터 서울대학교에 시간강사로 출강을 했고, 그 다음해인 1965년 12월 시중 은행들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개발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국제공
에 전임교수가 되었다. 김교만 교수는 재직 중이던 1978년에 영국의 세인트마틴스 미 항 국제선 제1, 2청사 및 국내선 사인 시스템 및 픽토그램을 제작했고, 1988년에는 한
술대학에 가서 공부하기도 했다. 국공항관리공단, 1989년부터 1990년에는 동남은행 및 제일생명, 1991년부터 1992년
김교만 교수는 1966년 제1회 대한민국 상공미술전람회가 개최될 당시 심사위 에는 서울정도 600주년 기념 한국방문의 해 심볼마크 및 로고타입을 디자인했다. 회갑
원장이었던 이순석 교수를 도와 제1부 상업미술부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고 1990 을 맞았던 1988년에는 일본 도쿄 세이부 백화점에서 열린 ‹Soulof Seoul› 행사의 총괄
년까지 집행위원, 심사위원, 초대작가 등을 역임했다. 활동 초기부터 우표디자인 작업 아트 디렉터를 맡았으며, 1991년부터 1992년에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개최된 엑스
을 꾸준히 해온 그는 1998년 작고하기 전까지 정보통신부의 우표 심의위원으로 활동 포'92 행사에서 대한민국관 설계 및 제작의 총 디렉터로 활동을 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했으며, 통상산업부 산업디자인 심의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72년에 창립된 한국그래 김교만 교수는 서교동 성당 및 서초동 성당, 역삼동 성당 등의 교회 실내 및 성물 디자
픽디자인협회(KSGD)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1980년부터 1998년까지 서울일러스트레 인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1994년 정년퇴임 후에는 컴퓨터 기술을 배워 그래픽 표현에
이터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8년에 서울시 문화상을, 1976년에는 대한민국산업디 있어 변화를 주고자 했으며 그 결과를 1998년 고희 기념전에서 소개하고자 했으나 안
자인전 대회장상인 상공부장관상을 수상했으며 1982년에는 유네스코 주최 노마 국제 타깝게도 전시회를 얼마 앞두고 타계하였다.
전에서 특선을, 1988년에는 88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로 제12회 바르샤바 국제 포스
터 공모전에서 특선을 받는 등 1970, 80년대 동안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한국디자이너로 소개 되었다. 1993년에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하였고,
1996년에는 한국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KIDP)에서 디자인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하여 선정한 ‘한국의 산업디자이너 100인’ 중 70%라는 압도적인 득표 기록으로 1
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김교만 교수는 고희 기념전이자 유작전이 된 1998년 뉴욕 전시회를 포함하여
총 다섯 차례 개인전41을 열었고, 『한국의 가락』(1980)과 『아름다운 한국 ‘86 그래픽 4』

40 조선산업미술가협회는 한홍택, 권영휴, 홍순문, 이완석, 유윤상, 조능식, 엄도만, 조병덕,


최정한, 이봉선, 홍남극 등이 임원으로 참여하여 1945년 12월 27일에 결성한 단체이다. 최열,
『한국현대미술의 역사:한국미술사 사전 1945–1961』, 열화당, 2006, 86쪽 참조.
41 1976년 제1회 개인전, 1978년 제2회 개인전, 1980년 제3회 개인전, 1988년 제4회 개인전,
1998년 제5회 개인전.

53 54
, 1 9 6 5 –1 9 9 4 _

3–2. 조영제42
조영제 교수는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마치고 1954
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 입학하여 만 30세가 되던 해인 1965년에 서
울미대 응용미술과 교수로 부임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미대 학장을 역임한 후
2000년에 정년퇴임을 하였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동서대학교 디자인전문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1. 2. 1 3.
(1 9 6 8 ) (1 9 7 6 ) (1 9 7 7 ) 대학 졸업 후 조영제 교수는 1959년 3월에 화신산업에 입사하여 1961년에 퇴
사한 후 잠시 을지로 2가에 디자인 사무실을 열어 운영을 하다가 1962년에 다시 조흥
은행 업무추진부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1963년 9월에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에 출강
하기 시작한 조영제 교수는 1964년부터 1965년까지 덕성여자대학 생활미술과의 주
임교수로 근무했다. 1965년 12월 서울미대 응용미술과 전임강사로 부임한 후 그 이듬
해부터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 심의위원과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72
년부터 1975년까지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 2, 3대 회장을 지냈으며 1980년부터

4. 5. 6. 1983년까지 다시 6, 7대 회장을 지냈다. 1994년에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


3 (1 9 8 0 ) (1 9 8 4 )
초대 회장, 1997년에 한국디자인법인단체총연합회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시각디자인
(1 9 7 9 )
관련 주요 협회 및 단체의 회장으로서 활약을 했다. 1973년에 조영제 디자인연구소로
출발한 CI 디자인 전문회사인 CDR은 1988년에 법인전환을 했다. 조영제 교수는 기업
자문위원이나 고문으로서의 활동도 활발히 해서 신세계백화점 자문위원(1973–1975),
대우 기조실 고문(1975–1982), 연합통신 자문위원(1981–1992), 제일기획 자문위원
(1981–1992), 대우전자 디자인 고문(1983–1991), 한국토지개발공사 기술자문위원
과 디자인 및 포장 기술육성자문위원(1990) 등을 역임했다. 1982년부터 1988년까지

7.『GRAPHIC4 : 8. 9.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디자인 전문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88서울올림픽 공식포스


‘8 6 』 (1 9 8 6 ) , 88
터와 스포츠포스터를 디자인하고 스포츠 픽토그램 개발 디렉션을 했다. 1990년부터
(1 9 8 6 ) (1 9 8 7 )
1993년까지 대전엑스포 조직위원회 디자인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기업 아이덴티티 디자인 작업을 활발히 해온 조영제 교수
는 제일제당(1974), 동양맥주 (1974), 제일모직(1975), 신세계백화점(1975) 등 자신
이 개발한 초창기 CI 결과물을 모아서 1976년 3월에 신세계미술관에서 ‹조영제 디자

10. ‘9 4 1 1. 12.
(1 9 9 4 ) (1 9 9 8 ) 42 강현주, 『한국 디자인사 수첩–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디자인플럭스, 2010 참조.

55 56
, 1 9 6 5 –1 9 9 4 _

인展:DECOMAS›43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CDR을 중심으로


국내 주요 기업의 CI 및 BI를 상당수 개발하였다. ‹조영제 디자인展:DECOMAS› 이후
진행한 주요 CI 작업은 다음과 같다: 제일합섬 CI 개발(1978), 한국외환은행 CI 개발
(1979), 삼립식품 CI 개발(1980), 국민은행 CI 개발(1981), 대림산업 CI 개발(1981),
대한교육보험 CI 개발(1981), 한국산업은행 CI 개발(1981), 경기은행 CI 개발(1982),
동아제약 CI 개발(1983), 피어리스 CI 개발(1983), 한국투자신탁 CI 개발(1983), 동
13. 14. 15.
(1 9 7 4 ) (1 9 7 2 ) (1 9 8 4 ) 서식품 CI, BI 개발(1985), 럭키 CI 개발(1985), 기아자동차 CI 개발(1986, 1993), 대
우증권 CI 개발(1988), 충북은행 CI 개발(1988), 동남증권 CI 개발(1988), 이건산업
CI 개발(1988), 한국무역협회 CI 개발(1988), 한국장기신용은행 CI 개발(1989), 삼
미그룹 CI 개발(1990), 삼성중공업 CI 개발(1990), 동서식품 BI 개발(1990), 전북은
행 CI 개발(1991), 데이콤 CI 개발(1991), 강원은행 CI 개발(1992), 현대건설 CI 개발
(1993), 아남그룹 CI 개발(1997) 등.
일본 디자인계와의 교류를 중심으로 국제적인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1980년
16. 1 7. OB 18.
(1 9 7 4 ) BI(1 9 7 4 ) (1 9 7 5 )
에 일본디자인학회 1호 해외 회원이 되었고, 1981년에는 한국현대디자인학회 주최로
한 ·일디자인세미나를 준비했다. 1983년에 일본 『코코마스(COCOMAS)』 86호에 국민
은행 CI 사례가 수록되었고, 1984년에는 일본 『그래픽 엘리먼츠 오브 더 월드(Graphic
Elements of the World』 1권에 작품 5점이 수록되었다. 또한 같은 해 일본 모리사와
상(Morisawa Awards International Typeface Competition) 국제심사위원을 지냈다.
1987년에는 『월드 트레이드마크 앤드 로고타이프(World Trademarks & Logotypes)』
제2권에 작품이 수록되었고, JAGDA와 ICOGRADA가 공동주최를 한 ‹도쿄 범태평양
19. 20. 2 1. 디자인대회(Pan–Pacific Design Congress ‘89 Tokyo)›에서 초청 강연을 했다. 1990년
CI(1 9 7 9 ) CI(1 9 8 6 ) 88 (1 9 8 4 )
에는 『인터내셔날 코퍼리트 디자인 시스템(International Corporate Design System)』
에 작품이 수록되었다. 1991년에는 『월드 트레이드마크 앤드 로고타이프』 제3권에 작
품이 수록되었다. 1992년에 일본 큐슈예술공과대학 주최 ‹생활의 디자인› 국제학술회

43 데코마스(DECOMAS)는 ‘Design Coordination as a Management Strategy’의 약자로


우리나라에서는 ‘경영전략으로서의 디자인 통합’이라고 소개되었다. 이 용어는 일본의 CI
전문회사인 파오스(Paos, Progressive Artists Open System) 사의 대표인 나카니시 모토가
기업문화로서의 CI를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1971년에 회사 내에 DECOMAS
위원회를 구성하고 『DECOMAS』 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만든 말로 이 책은 일본뿐만이 아니라
22. 23. 24.
88 한국과 대만 등에도 소개가 되어 관심을 모았다. 나카니시 모토는 1993년에 CI 교과서의 성격을
(1 9 8 7 ) 88 ((1 9 9 0 ) 지닌 『New DECOMAS:CI ·BI를 통한 신경영전략』도 출판하였다.

57 58
, 1 9 6 5 –1 9 9 4 _

의(The InternationalSymposium ‘93 on Design of Amenity’›에서 초청 강연을 하고, 인 1965년에는 제1회 전국 쇼윈도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같은 해 제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대학(RISD)에서 초청 강연 및 전시회를 했다. 1994년에는 1회 청소년 선도의 달 포스터에도 당선이 되었다. 1966년에는 동양맥주에 근무하면
스위스 『후스 후 인 그래픽 디자인(Who’s Who in Graphic Design)』에 작품이 수록됐 서 작품을 출품하여 제1회 대한민국상공미전에서 특선을 받았고 이후 매년 출품하여
고, 중국광고협회 주최 베이징 국제광고세미나에서 초청강연을 했다. 1998년에는 홍 1969년 제4회 때는 추천작가가 되었고, 1971년에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
콩디자인협회(HKDA) 주최의 ‘디자인 98’ 국제 심사위원을 맡았다. 2001년부터 2007 에 졸업동기생들과 함께 프리즘이라는 디자인그룹을 만들어 1966년에 제1회 프리즘
년까지 일본 후쿠오카에서 개최되는 아시아디지털아트어워드 국제심사위원을 맡았다. 디자인전을 개최하였고, 이후 1968년에 제2회, 1969년에 제3회, 1971년에 제4회 전
2004년에 한국디자인진흥원 주최 디자인 코리아 베이징 대회와 베이징 복장학원 디자 시회를 가졌다. 이러한 프리즘의 활동은 1972년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 설립
인학원에서 초청 강연을 하고 2004년과 2005년에 베이징 칭화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의 단초가 되었다.
초청 강연을 했다. 1972년 민철홍, 조영제 교수와 함께 본인이 근무하던 동양맥주주식회사의 OB
맥주 BI 개발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동양맥주주식회사의 CI 개발(1974), 진로의 BI
3–3. 양승춘44 개발(1974), (주)제일제당 CI 개발(1975), (주)제일모직 CI 개발(1976), (주)제일합섬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난 양승춘 교수는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미대 응용미술 CI 개발(1976), 신세계백화점 CI 개발(1977) 한국주택공사 CI 개발(1977), (주)동양
과 59학번으로 입학하여 1965년에 졸업한 후 동양맥주주식회사에 입사하여 근무했다. 맥주 마주앙 BI 개발(1977), 한일은행 CI 개발(1980), (주)동방생명 CI 개발(1982), 국
1968년부터 학과 조교로 근무하면서 시간강의를 하다가 만 30세가 되던 1970년에 전 립현대미술관 CI 개발(1984) 등 조영제, 김교만, 민철홍 교수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임교수가 되었다. 디자이너로 참여했다.
2006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양승춘 교수는 학과뿐만이 아니라 미대와 대학 본 1977년 삼성물산 버킹검 BI 개발과 (주)진로 길벗위스키 BI 개발을 시작으로 독
부 차원의 다양한 보직을 했다. 우선 미대와 학과 차원에서의 활동으로는 서울미대 부 자적인 CI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이후 양승춘 교수가 아트디렉터로 진행한 프로젝트
속 실습장(1984–1985), 산업미술과 학과장(1985–1989), 서울미대 교무담당 학장보 는 다음과 같다: 유로패션 CI 개발(1978), 아세아오세아니안산부인과학회 CI 개발
(1990–1992), 산업디자인과 학과장(1993–1994), 디자인학부 학부장(1998–1999), (1980), 카톨릭중앙의료원 CI 개발(1980), 성모병원 CI 개발(1980), 서울장애인종합
서울미대 조형연구소 소장 및 부소장(2000–2005) 등이 있다. 대학 본부 차원에서는 복지관 CI 개발(1982), 한국사회과학도서관 CI 개발(1982), (주)토탈디자인 CI 개발
서울대학교 개교 40주년 기념위원회 위원(1986), 서울대학교 기획위원/소비조합 이 (1984), (주)한샘 CI 개발(1984), 체신부 우정 100주년 VI 개발(1984), (주)동양맥주
사/교육매체제작소 운영위원(1987–1989), 서울대학교 식전개선위원회 위원(1988– 마주앙 BI 개발(1984), (주)금복주 CI 및 BI 개발(1984), (주)동양맥주 CI 개발(1984),
1989), 서울대학교 발전장기계획위원회 위원(1989–1990), 호암교수회관 운영위원 (주)한양투자금융 CI 개발(1987), (주)동양맥주 OB라이트 BI 개발(1987), (주)삼양사
(1991–1993),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1993–1996), 자랑스런 CI 개발(1988), (주)오리엔트시계 CI 개발(1989), (주)선일포도당 CI 개발(1989), (주)
서울대인 선정 운영위원(2001–2004)을 지냈다. 삼양중기 CI 개발(1989), (주)백화 CI 개발(1989), (주)두산곡산 CI 및 두산사료 BI 개
시기별로 양승춘 교수의 주요 작품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미대 응용 발(1990), 종가집 BI 개발(1990), (주)가보식품 BI 개발(1990), 마가레트호텔 CI 개발
미술과 재학시절인 1964년에 제1회 상공인의 날 공모에 당선이 되었다. 졸업하던 해 (1990), (주)서울방송 CI 개발(1991), 대림혼다 CI 개발(1991), 동성아파트 BI 및 색
채계획(1991), 보훈병원 및 한국보훈복지공단 CI 개발(1991), (주)경월주조 설향 BI
개발(1991), 두산건설 사인시스템 VI 개발(1992), 대전 EXPO 포스코 파빌리온 소재
44 양승춘, 『그래픽 디자인 양승춘』, 한국디자인산업연구센터, 2005 참조 및 재인용.
관 VI 개발(1992), (주)두산기계 CI 개발(1992), (주)매일유업 오메가2 분유 BI 개발

59 60
, 1 9 6 5 –1 9 9 4 _

(1992), 두산아파트 색채계획 및 VI 개발(1992), (주)시그램 이천공장견학관 설계 및


VI 개발(1993), (주)백화 군산공장견학코스 설계 및 VI 개발(1993), (주)동양맥주 마
주앙 메도크와 라인 BI 개발(1993), 종가집 식품류 및 사료류 BI 개발(1993), (주)백화
의 수복/국향/청하/청하화인/설화/백화24 BI 개발(1993), (주)경월 그린소주 BI 개발
(1993), 사단법인 한국문화연구 CI 개발(1993), 관악구청 CI 개발(1994), 동양투자
신탁 CI 개발(1994), 카톨릭대학교 CI 개발(1995),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VI 개발
25. 1 26. 1 2 7. 4
(1995), (주)한샘인테리어 BI 개발(1996), 성모병원 CI 개발(1996), 라자로마을 사제 (1 9 6 6 )
(1 9 6 4 ) (1 9 7 5 )
마을 VI 개발(1996),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CI 개발(1997), (주)유로패션 에베레스트
BI 개발(1997), 한국장애인종합복지관 서울리포츠센터 CI 개발(1997), 한샘인테리어
BI 개발(1997), 대광고등학교 개교 50주년 VI 개발(1999), 한울교회 VI 개발(1999),
서울장애인복지관 CI 개발(1999), 제41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 CI 개발(1999), 과학
기술처 21세기 프로티어연구개발사업 CI 개발(1999), 한국법학교수회 VI 개발(1999),
서울대학교 포스코스포츠센터 CI 및 인테리어 설계 디자인(2001), 서울대학교 리서치
파크 인테리어 디자인 설계(2002), 마가레트호텔 CI 및 인테리어 자문(2002), 한국기 28. 13 29. 30.
업경영사연구원 CI 및 인테리어 디자인(2002),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 CI 개발 및 (1 9 7 8 ) (1 9 8 0 ) (1 9 8 2 )

인테리어 디자인 설계(2003), 한국디자인산업연구센터 CI 개발(2003), 마가레트호텔


CI 개발(2003), 서울대학교 발전기금(연구공원) CI 개발(2003), (주)영림임업 CI 개발
(2004), SK그룹의 Spring 투자금융유한회사 CI 개발(2005), 서울대 생활협동조합의
글로벌하우스 CI 개발(2005).
양승춘 교수는 88서울올림픽대회 공식휘장 공모전에 당선이 되어 엠블렘 기념
우표와 엠블렘 공식 포스터, 문화포스터, 입장권 등을 디자인했다. 한편 1974년에 문교
3 1. 32. 33.
부 지원으로 ‹한글타입페이스 디자인 연구›를 진행했고, 1978년에는 ‹사진예술의 사적 88 88 (1 9 8 7 ) (1 9 9 3 )
(1 9 8 7 )
흐름과 미학적 고찰›을, 1984년에는 ‹기초 디자인 교육에 있어서 조형요소와 그 표현
에 관한 고찰›을 서울미대 『조형』지에 게재하였다. 2000년에는 서울대 연구처 지원으
로 ‹2002년 월드컵 예술포스터 개발›을, 문예진흥원 지원으로 ‹한국전통문화에 기초한
문화상품 개발안› 연구를 진행했다.

34. 35. 36.


(1 9 9 6 ) 50 (1 9 9 6 ) CI(2 0 0 3 )

61 62
, 1 9 6 5 –1 9 9 4 _

4. – 는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이 강했고48 교육보다는 작품 활동 및 사회 활동에 더 큰 의


미를 두고 있었다. 이들의 실무 경험이 전공의 과목 구성이나 강사진 편성에 영향을 미
4–1. 교육활동:디자이너–교수의 실기 중심 교육 치기는 했지만 교육 프로그램의 재구성을 통해 서울미대 시각디자인교육에 제도적으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교수는 모두 학부 졸업 후 사회에 나가 디자이너로 활동을 하다 로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각각 개인의 현장 경험에서 중요하게 생각하
가 전임교수가 되었다. 세 사람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에는 대학 는 점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세 교수의 대외적인 작품 활동에
원 과정이 없었다. 양승춘 교수가 졸업하던 해인 1965년에 대학원 신설 논의가 있어 양 직접 참여했던 소수의 재학생이나 졸업생만이 디자이너–교수로서의 그들의 활동과 경
승춘 교수와 정시화 교수 등 그해 몇몇 졸업동기생들이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으나 신설 험을 가까이에서 배우고 접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다른 매체나 경로들을 통해
이 미루어져 양승춘 교수는 동양맥주주식회사에 취직을 하고 정시화 교수는 교육대학 교수들의 활동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원 미술교육과에 진학을 했다.45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에 석사과정이 개설된 것은 1969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래픽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지녔던 김교만 교수는 수업
년으로46 이때 김교만, 조영제 교수는 이미 전임강사였고, 양승춘 교수는 학과 조교로 의 형식이 자유로웠고 학생들의 개성과 자기표현을 존중했다.49 공예미술이나 응용미
근무하면서 시간강의를 하고 있었다. 대학원 진학을 희망했던 양승춘 교수는 오히려 대 술이 아닌 그래픽 디자인, 나아가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는 시각전달디자인으로의 분
학원생을 지도해야 하는 교육자의 입장이 되었다. 47 시각디자인전공 전임교수 세 사람 야 정체성 확립에 강조점을 두었던 조영제 교수의 경우는 디자인 작업에 있어서 컨셉의
이 모두 대학원 연구과정을 거치지 않고 디자이너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전임교수가 된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디자인교육에 있어서도 아트디렉터로서의 디자이너 상을 구축하
것은 서울미대 시각디자인전공 운영 및 교육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자 했다.50 서울미대 시각디자인교육에 있어서 사진과 영상 등 당시로서는 새로운 매
1990년대 초반까지 서울미대의 시각디자인교육이 실기 중심, 현장 중심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우리나라의 디자인계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 48 서울미대 응용미술과 75학번으로 1980년대 초반에 김교만 교수의 CI 작업에 참여했던 김훈
전 성신여대 교수는 김교만 교수가 교육자로서보다는 디자이너로서의 자부심이 더 컸다고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디자인 수요가 늘어났으나 실무 경험이 풍부한 디 회고했다. 조영제 교수는 2013년 ‹한국 디자인의 새벽› 전시 준비를 위한 구술채록 과정에서
자이너나 디자인 전문회사가 많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대학 교수들은 디자인 전문가 본인은 교육보다는 디자인 실무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양승춘 교수의
경우에도 2006년에 정년퇴임을 하기 전 대학원생이나 졸업생들과의 사석의 대화에서 본인이
로서 국가 정책 및 기업 디자인 활동에 개입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교육적인 열정을 갖고 교육 프로그램을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1990년대 이후라고 종종
서 디자인 전문회사가 많아지고 기업 내 디자이너들도 경험을 쌓게 되면서 대학 교수의 이야기하곤 했다.
사회적 역할도 변화가 되었다. 49 김민수 교수는 김교만 교수의 스타일이 학생들로 하여금 그래픽 디자인을 오로지 자와
콤파스에 의한 ‘도안기법’으로 인식하게 했으며 이러한 기법은 이순석 교수의 교육으로부터
이러한 사회적인 조건 속에서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교수 모두 교육자로서보다
이어져 응미과에서 전통적으로 진행되어온 ‘편화’ 방법에 의한 양식화(stylization) 과정이 더욱
심화된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표면적 이미지에 ‘한국적 주제’를 사용했다는 것만으로
한국적 정체성을 담은 작품을 했다고 볼 수 없다고 보았다. 김민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 ·공예교육 50년사:1946–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45 양승춘 교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하지 않고 권순형 교수 연구실에서
논문집』, 조형연구소, 1996, 46쪽 참조. 김교만 교수의 교육 및 작품 활동에 대한 이러한 평가와
디자인 작업을 도우며 6개월간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으나 신설이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련해서는 추후 분야 내에서 보다 심도 있는 연구와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취업을 했다고 한다.
46 양승춘 교수는 대학원 신설을 1968년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응용미술과 65학번으로 1969년에 50 김민수 교수는 1976년 3월에 신세계미술관에서 개최되었던 ‹조영제 디자인展:DECOMAS›
전시회가 한국 그래픽 디자인에서 디자인 컨설팅이 비즈니스의 차원에서 전개될 수 있게 된
졸업한 이정숙 교수가 대학원에 입학한 것이 첫 해인 점을 볼 때 1969년에 대학원 석사과정이
계기를 마련하였고 조영제 교수가 데코마스 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디자인교육에 적용했다고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박사과정은 김교만, 조영제 두 교수는 정년퇴임을 한 후인 2004년에
평가한 바 있다. 또한 그는 조영제 교수의 그래픽 스타일의 주된 특징은 시각전달의 목적상 채택된
신설이 되었다.
메시지의 성격에 따라 특징적인 요소를 가장 압축된 의미로 과감하게 생략하여 합리적으로
47 대학원이 신설되던 1969년에 김교만 교수는 45세, 조영제 교수는 38세였다.
시각화하는 추상과정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성향은 양승춘 교수에 의해 계승되고 더욱
보강되어졌다고 평가하였다. 김민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 ·공예교육 50년사:1946–
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논문집』, 조형연구소, 1996, 47쪽 참조.

63 64
, 1 9 6 5 –1 9 9 4 _

체의 비중이 커진 것은 양승춘 교수의 노력 때문이었다.51 그는 대학 졸업 후 동양맥주 디자인전공 졸업생들에게 일종의 역할모델로서의 기능을 했다.53 김교만 교수 역시 CI
주식회사에 근무하면서 디자인 작업에 있어서 사진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현장에서 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팀을 구성해서 작업을 해나갔고 작고한 성신여대 김훈 교수의 경
험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디자인교육에 접목시키고자 했다. 1970년대 당시 서울미대에 우처럼 졸업생으로서 그 팀에 참여한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활동이 수업과 직접적으로
사진 수업이 개설되어 있기는 했지만 디자인적인 맥락을 갖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응 연계되지는 않았고 CI 작업 이외의 김교만 교수의 일러스트레이션이나 포스터 작업은
미과의 초기 사진 수업은 양승춘 교수가 했고, 무빙 이미지를 다루는 영상 수업은 정시 스타일이 워낙 뚜렷하고 개인적인 특성이 강해서 교육방법론적인 차원에서 학생들과
화 교수가 담당을 했다.52 이후 사진과 영상 수업이 통합된 형태인 영상디자인 과목이 2 공유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양승춘 교수의 경우에 김교만, 조영제 교수와 다른 점은
학년부터 개설되어 학년이 올라가면서 심화되는 형태로 운영이 되었다. 영상디자인 과 1980년대 말까지 대부분의 외부 프로젝트를 교내 자신의 연구실에서, 비록 소수의 인
목은 세종문화의 윤석태 대표가 출강하여 광고 실무 차원에서 수업을 하는 한편 응미과 원이지만 졸업생이나 대학원생들과 함께 진행을 했다는 점이다. 1990년부터 1997년
68학번인 유영우 국민대 교수와 72학번인 백명진 교수가 1980년대 초반에 유학에서 까지 양승춘 교수도 학교 바깥에 외부 연구실을 두었으나 1997년에 다시 학교로 돌아
돌아와 수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와 정년퇴임 때까지 주로 연구실을 기반으로 작업을 했다.54
디자이너–교수의 작품 활동과 교육 간의 격차는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세 교수 전임교수들의 디자인교육이 실무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동안 서울미대 디자인
의 대외 활동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는 1980년대에 가장 심했다. 조영제 교수의 경우 교육에 있어서 이론 교육을 담당한 것은 시간강사로 출강을 했던 정시화 국민대 교수
1973년에 CDR을 창립하여 2006년까지 고문을 지냈는데 CDR은 처음에는 연구실 형 였다. 1965년 응용미술과를 졸업한 후 교육대학원에 진학하여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태로 출발했지만 전문적인 CI 회사로 빠르게 성장하여 학교 바깥에서 디자인 비즈니스 1968년에 첫 강의를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에서 시작한 그는 1972년 3월부
를 해나갔기 때문에 실제 수업 내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어렵지만, 시각 터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에 출강하여 ‘디자인론’을 강의했다. 정시화 교수는 1975년에
『현대 디자인 연구』라는 제목으로 1968년부터 강의했던 내용을 자비 출판하여 강의 교
재로 활용하다가 1980년에 『현대 디자인 연구: 현대디자인의 이론적 배경』(미진사)이
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했다. 김민수 교수는 정시화 교수가 보여준 개인적인 노력을 높
이 평가하면서 그로 인해 학생들이 현대 디자인의 이론적 배경, 기초 개념 및 접근방법
51 양승춘 교수는 ‹한국 디자인의 새벽› 전시회 준비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응미과 전임교수 부임 후 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질을 획득하는 문제, 토탈 디자인(total design)의 이념, 세계 각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까 고심을 하다가 선배 교수들과 다른 것을 가르치겠다는 목표 하에
국이 취해온 현대 디자인의 배경과 한국의 현대 디자인이 취해야 할 성향, 역할, 전통과
광고에 사진을 접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진을 통한 광고, 사진을 통한
편지, 사진을 통한 포스터를 시도했고 이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디자인교육에 실크스크린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1960년대까지 응용미술과에는 사진 수업이 전공과목으로는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미대에 일반사진 수업을 시간강사인 임흥식 선생이 맡고 있었는데 1970년 양승춘
교수가 부임하던 바로 그해에 임흥식 선생이 서라벌예대에 교수로 가게 되면서 사진 수업을 53 조영제 교수가 아트 디렉터 역할을 했던 CI 프로젝트에는 서울미대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학
응용미술과로 가져와 양승춘 교수가 가르치기 시작했다. 김수정, 『한국 디자인의 새벽– 출신의 여러 디자이너들이 함께 참여를 했다. CDR이 창립되기 이전에는 양승춘 교수가 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아카이브:디자인 구술채록 자료집 | 양승춘』, 조형연구소, 2013, 72–77쪽 진행을 했고, 이후 디자인파크의 김현 대표와 후에 올커뮤니테이션에 함께 참여했던 구동조
참조. 전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조종현 전 더그래픽스 대표, 김민 국민대학교 교수(서울대 응미과
52 정시화 교수는 1973년부터 1974년까지 국비장학생으로 덴마크 그래픽디자인대학에서 80학번), 박진숙 세종대학교 교수(서울대 응미과 73학번), 김성천 현 CDR 대표(서울대 응미과
유학을 하고 돌아와 그 당시 배웠던 내용을 바탕으로 1975년부터 서울미대 응미과 영상디자인 82학번) 등이 디자인팀을 이끌었다.
수업에서 무빙 이미지를 가르쳤다. 그 영향으로 응미과 77학번이던 신경섭 선생이 졸업 후 54 1984년부터 1997년까지 한샘 고문이었던 양승춘 교수는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방배동 한샘
애니메이션 1세대로 활동하게 되었다. 김수정, 『한국 디자인의 새벽–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빌딩에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근처 다른 사무실에서 연구실을 운영하다가 1997년에 IMF
아카이브:디자인 구술채록 자료집 | 양승춘』, 조형연구소, 2013, 72–77쪽 참조. 외환위기가 시작되면서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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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문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55 한편 정시화 교수의 수업에서 학생들 부 등 총 3부로 구성이 되어 있었는데 심사위원단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58
이 현대 디자인의 이념에 대해서는 배웠으나 개별 디자이너들의 구체적인 ‘작업 논리와 ‹ 10› 1 (1 9 6 6 )5 9

사고’나 실제 현대 디자인이 취했던 사물과 이미지의 ‘미학적 맥락과 형식 논리’에 대해


,
서는 배우지 못했다고 그 한계 역시 함께 지적했다. 1 , , , ,
2 , , ,
3 , ,
4–2. 사회활동:상공미전과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
김교만과 조영제 교수가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의 전임교수로 부임을 한 1965년은 청와 상공미전 신설을 주도했던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이전에 국전 공예부를 중심으로
대 수출확대회의에서 한국공예기술연구소56의 설치 결정이 있었던 해이다. 이듬해인 활발히 활동해온 세대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 디자인과 공예가 엄밀하게 구분되어
1966년 7월 26일에 한국공예기술연구소가 서울대학교 부설기관인 한국공예디자인연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서울미대 응용미술과 교수와 학생들은 국전 공예부에 작품
구소로 개칭되어 설립되었고, 같은 해에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약칭, 상공미전)가 을 출품해왔다. 김교만 교수와 조영제 교수 역시 대학 재학시절 국전 공예부에 출품을
신설됨으로써57 기존의 국전의 공예부 중심의 디자인 흐름에 변화가 있게 되었다. 김교 한 경험이 있었다. 김교만 교수는 서울미대 응용미술과 부임 초기에 그래픽 디자인 수
만, 조영제 교수는 제1회 상공미전 개최 당시에 이 전람회의 신설을 주도한 이순석 교 업만이 아니라 금속공예 수업도 담당을 했었고, 시각디자인전공으로 전공이 분리된 후
수를 도와 함께 참여를 했다. 신설 당시 상공미전은 상업미술부, 공예미술부, 공업미술 에도 한동안 국전 공예부에 작품 출품을 계속했다. 반면에 조영제 교수는 대학 재학 중
국전 공예부에 작품을 출품하여 1956년에 입선, 1957년에 특선을 했으나 이후 그래픽
디자인에만 전념하겠다는 생각으로 졸업 후에는 국전 공예부에 출품하지 않고 신설된
55 김민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ㆍ공예교육 50년사:1946–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논문집』, 조형연구소, 1996, 50–51쪽 참조. 상공미전을 중심으로 활동을 했다.
56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는 이순석을 중심으로 한 서울미대 교수들이 주도적으로 정부에 1946년 서울미대 도안과 신설을 주도했던 이순석 교수가 디자인과 공예의 구분
디자인센터의 필요성을 제기하여 설립된 기관이다. 수출 상품의 디자인과 포장디자인을
이 없는 공예미술가 세대를 대표한다면 김교만 교수와 조영제 교수는 디자인과 공예의
종합적으로 연구개발하여 산업발전과 수출 증대라는 국가 정책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66년 7월 26일 독립적인 기구 형태인 사단법인으로 서울대학교 부지 내에 건립되었다. 분리를 주도해나간 과도기의 세대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상공미전 출범을 계기로 보다
설립 초기에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중심으로 인사가 이루어졌으나 이후 상공부에서 전문적인 디자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이들의 노력과 영향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
이 기관이 상공부 장관의 설립 허가를 받은 산하기관이며, 국고보조로 건물 건축과 운영비를
서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본격적인 디자이너 세대가 출현하게 되었다.60 1965년에 대학
충당한다는 이유로 상공부 산하 단체라고 여기고 정관 개정 등을 통해 서울대학교 출신의 학계
인사 비중을 줄여 나가다가 1969년 3월에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를 한국수출디자인센터로 을 졸업한 양승춘 교수가 바로 이러한 변화를 경험한 첫 세대였다. 이 시기에 양승춘 교
개칭하여 수출 상품의 디자인 연구개발사업을 전담케 함으로써 이후 서울대로부터 분리되었다. 수를 비롯하여 정시화, 배천범, 이태영 등 서울미대 응용미술과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
김종균, 『한국디자인사』, 미진사, 2008, 참조.
들은 프리즘이라는 이름의 소그룹 활동을 시작하여 1966년에 상공미전과 별개로 중앙
57 상공미전의 신설 과정에 대해 민철홍 교수는 디자인계에서 젊은이들의 창작 의욕, 연구 의욕을
북돋아주고 장려하기 위해서는 공예에서 국전이 존재하듯이 국가에서 행사를 갖는 것이 공보관에서 제1회 프리즘디자인전을 열었고 이후 1971년 제4회까지 전시회를 개최하
필요하다는 것이 당시 디자인계의 중론이라서 이순석, 권순형, 조영제, 한도룡 교수, 염인택,
였다. 이들의 활동을 지켜보던 조영제 교수는 프리즘의 출발 동기는 좋으나 자칫 서울
한홍택, 박대순 교수 등과 함께 의논을 한 후 상공부 장관을 면담을 해서 개괄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상공부에서 지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것이 완성되면 지금보다
활기찬 제품생산이 나오는데 독자적인 브랜드를 과시할 수 있는 제품으로 탈바꿈하려면 58 상업미술, 공예미술, 공업미술을 구분한 상공미전의 구성은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의 교육에도
디자인이 절대로 필요한 요소라는 것을 정부에서도 인식하시고, 그 토대를 구축하려고 하는 이 영향을 미쳐 1968년부터 3개의 전공이 운영되었다.
행사를 수행해주십시오”라고 요청하였다고 회고했다. 박영목, 『한국 디자인의 새벽–서울대학교 59 「상공미심사위 결정」, 『매일경제』, 1966년 7월 30일자.
미술대학 아카이브:디자인 구술채록 자료집 | 민철홍』, 조형연구소, 2013, 87쪽. 60 정시화, 「한국의 현대디자인」, 열화당,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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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동문 모임이라는 한계를 가질 수 있으니 타 대학 출신의 디자인 전공자들도 함께 할 이 직접 디자인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한편 한글레터링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양
수 있는 디자인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하여 1972년에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가 승춘 교수는 로고타입 및 타입페이스 개발에 비중을 두었다.
창립되게 되었다. 이 단체의 출범을 위해서 김교만, 조영제, 이태영, 양승춘, 정시화, 김 서울미대 응용미술과 출신으로 CI 분야에서 활동을 한 졸업생으로는 1981년에
영기, 권문웅, 안정언 등 서울대 출신 8명과 권명광, 유재우, 홍종일 등 홍익대 출신 3 올커뮤니케이션을 함께 창립한 안정언 숙대 명예교수(60학번)와 현용순 건대 교수(68
명이 모여 발기인 대회 겸 첫 총회를 개최하였고 초대회장으로 김교만 교수를 추대하였 학번)가 있다. 올커뮤니케이션은 1983년에 체신부 CI를 수행함으로써 기업뿐만이 아
다. 김교만 교수에 이어 조영제 교수가 2대와 3대 회장을 하고 4대는 양승춘 교수가, 다 니라 정부기관이 CI를 도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4년에는 93대전엑스포 때 디자
시 6대와 7대 회장을 조영제 교수가 함으로써 1972년 협회 설립부터 1983년까지 김교 인업무를 담당했던 79학번 졸업생인 정석원 대표가 엑스포디자인연구소를 설립, 2007
만, 조영제, 양승춘 교수가 회장으로서 이 협회의 활동을 주도해나갔다. 한국그래픽디 년에 엑스포디자인브랜딩으로 법인전환하여 현재 CI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자인협회(KSGD)는 설립 당시 명칭을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로 변경해 운영하다 있다. 졸업 후 CDR에 근무하다가 복스앤콕스라는 디자인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던 82
가 1992년에 해체가 되었다. 이후 1994년에 조영제 교수를 초대 회장으로 하여 한국 학번 김성천 대표는 1995년에 CDR의 새 대표로 취임하여 현재 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
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가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61 한편,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된 후 서
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조영제 교수가 디자인전문위원장을 맡게 된 것은 1970년대
4–3. 작품활동:기업 아이덴티티 디자인과 88서울올림픽 디자인 초부터 국내 여러 기업의 CI 개발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조영제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교수는 서울미대 재임 기간 중 디자이너로서 활발하게 작품 활 교수는 1982년부터 1988년까지 디자인전문위원장으로서 88서울올림픽의 아이덴티
동을 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포스터는 초창기부터 가장 기본이 된 매체였다. 포스터 작 티 디자인 전반을 총괄하면서 공식 포스터와 스포츠 포스터를 디자인하고 스포츠 픽토
업과 병행하여 김교만 교수는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에 보다 큰 중심을 두었지만, 세 교 그램을 디렉션 했다. 88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를 디자인한 김교만 교수는 한 인터뷰에
수 모두 기업 아이덴티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첫 번째 CI 프로젝트는 양승춘 교수가 서 자신의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이 포스터를 꼽았다.62 양승춘 교수는 88
근무했던 동양맥주주식회사의 OB맥주 BI를 1972년에 민철홍, 조영제, 양승춘 교수가 서울올림픽 공식휘장 공모전에 당선한 후 문화포스터와 입장권도 디자인을 했다. 서울
함께 참여하여 개발한 것이었다. 그 이듬해인 1973년에 동양맥주 본사의 로비 디자인 미대 시각디자인전공에 있어서 1980년대는 가히 올림픽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
을 한 조영제 교수는 1974년에 동양맥주 CI와 제일제당 CI 개발을 진행하였다. 1976 니었다.63
년 3월에 신세계미술관에서 CI를 주제로 한 개인전인 ‹조영제 디자인展: DECOMAS›
를 개최한 조영제 교수는 이후 국내 수많은 기업의 CI를 담당했다. 김교만 교수와 조영
제 교수의 후배이자 제자, 그리고 조교였다가 후에 동료교수가 된 양승춘 교수는 조영
제 교수가 진행하는 CI 개발에 디자이너로 참여하다가 김교만 교수가 CI 개발을 시작
62 1987년 7월에 확정 발표된 문화포스터는 총 12종으로 김교만 교수 외에 양승춘(서울대),
하면서 조영제, 김교만 두 교수의 프로젝트에 모두 참여했다. 국내 기업들의 CI 개발 수
김영기(이대), 안정언(숙대), 나재오(단국대), 유영우(국민대), 오병권(이대), 백금남(성균관대),
요가 양적으로 커지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양승춘 교수 역시 독립적인 프로젝트를 구동조(동덕여대), 김현(디자인파크), 전후연(연아트대표), 조종현(CDR 제작실장) 등 12명의
진행했다. CI 프로젝트 진행에 있어서 조영제 교수가 아트디렉터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디자이너들이 참여했다. 「올림픽 문화포스터 12종 확정, SLOOC」, 『매일경제』, 1987년 7월
16일자. 「88올림픽 문화포스터 12종 확정」, 『경향신문』, 1987년 7월 17일자 참조.
큰 비중을 두었다면 김교만 교수와 양승춘 교수는 아트디렉터이자 디자이너로서 본인
63 1981년에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결정되던 때 김교만 교수는 53세, 조영제 교수
46세, 양승춘 교수 41세였고,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되던 1988년에는 김교만 교수 60세, 조영제
61 강현주, 『한국 디자인사 수첩–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디자인플럭스, 2010, 교수 53세, 양승춘 교수 48세였다.
8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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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며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판단된다.


서울미대의 디자인교육은 공예와 디자인, 그리고 디자인 분야 내에서 시각디
본 연구에서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시각디 자인과 공업디자인, 그리고 이후 공간디자인과 협동과정 및 융합과정 등이 시대 상황
자인교육을 당시 전임교수로 재직했던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교수 세 사람의 활동을 과 사회 환경 변화에 따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교차되며 전개되어 왔기 때문에 향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디자인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인식하기 후 이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다만 이번 연구에서는 이러한 종합적인 논의에 앞서서
보다는 스스로를 디자이너라고 생각하며 교수 생활을 한 디자이너–교수였다. 그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서울미대 디자인교육 중 시각디자인교육, 그
세 사람의 개인적 특성과 관심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우리 사회 리고 학부교육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이 변화해온 과정과 해당 시기에 시각디자인교육
에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나 디자인 전문회사가 많지 않아서 국가 및 기업의 디 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세 교수의 디자인 활동에 한정
자인 작업에 있어 교수들의 사회적인 역할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교만, 조영제, 양 해서 정리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국내 디자인 환경이
승춘 교수 세 사람이 디자인 실무에 매진하면서 학교에서도 아카데믹한 연구 기반의 교 급속히 변화하였는데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세 교수는 디자인 분야에 디지털 기술이
육보다는 현장 중심의 경험을 강조하는 동안 서울미대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강의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의 그래픽 디자인 교육을 담당했던 세대이다. 이 시기는 도안
하며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정시화 국민대 조형대학 명예교수였다. 그는 1970 으로부터 출발했던 디자인이 응용미술, 산업미술 시기를 거쳐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년대 초반부터 약 40여 년간 서울미대에 시간강사로 출강을 하며 학부와 대학원에서 의미의 디자인으로 자리 잡는데 있어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던 때라는 점에서 서울미대
디자인론, 색채학 등을 강의했다. ‹한국 디자인의 새벽› 전시회 준비를 위한 구술채록 의 역사에서뿐만이 아니라 한국디자인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서울미대
과정에서 양승춘 교수는 정시화 교수의 역할과 영향을 언급하면서 교육의 실제 내용 면 의 디자인교육 및 교수들의 활동은 오늘날과 같은 우리나라 대학 디자인교육의 체제와
에서는 그가 서울미대 디자인교육에 있어서 디자인이론 담당 전임교수 역할을 해왔다 교육내용이 마련되는데 있어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한국디
는 점을 강조했다. 자인제도 구축기라 할 수 있는 20세기 중 ·후반기의 국가 디자인 정책 수립 및 산업경제
서울미대 시각디자인교육을 전반적으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김교만, 조영제, 양 적인 차원에서의 디자인 비즈니스 모델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앞으로 서울미대
승춘 교수의 활동 외에도 다른 전임교수들과 정시화 교수를 포함한 각 시기별 주요 강 디자인교육이 한국디자인의 교육 및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보다 심도 있고 다양한
사진의 구성과 그들의 영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 시각의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당 시기 서울미대 시각디자인 교과과정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교육철학과 교육목표
는 무엇이었으며 실제 교육내용은 어떠했는지, 교수들 간의 상호 소통과 역할 분담은 주제어:응용미술, 그래픽 디자인, 시각디자인, 디자인교육, 서울미대, 1965-1994, 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학생들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는지 파악하는 일이다. 이와 관 교만, 조영제, 양승춘, 기업 아이덴티티 프로그램, 88서울올림픽
련한 선행연구로는 1996년에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으로 미술대학 부설 조형
연구소에서 개최한 ‹한국현대미술교육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46–1960› 학술심
포지엄에서 김민수 교수가 발표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 ·공예교육 50년사:
1946–1996년」이 있다. 초창기 상황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
서 김민수 교수는 관련 자료들을 조사하고 원로 교수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서울미대 디
자인 및 공예 교육의 50년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김민수 교수
가 서울미대 디자인교육에 대해 제기한 1990년대 중반의 문제의식은 2013년 현재 시 : 2 0 1 3 .1 2 .5 / : 2 0 1 3 .1 2 .2 0 / : 2 0 1 3 .1 2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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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춘, 『그래픽 디자인 양승춘』, 한국디자인산업연구센터, 2005.

73 74
도판목록 Abstract

도판 1 김교만 교수의 한일은행 달력디자인(1968) The Graphic Design Education from 1965 to 1994 in the College
도판 2 김교만 교수의 제1회 개인전 도록 표지(1976)
도판 3 김교만 교수의 성산대교 아치 디자인(1977)
of Fine Arts, SeoulNationalUniversity:
도판 4 김교만 교수의 월간디자인 창간 3주년 특집호 표지(1979) Focused on the Design Practice of Three Professors
도판 5 김교만 교수의 한일은행 심볼(1980)
도판 6 김교만 교수의 한국의 풍속 우표 디자인(1984)
Kang, Hyeon–joo
도판 7 『GRAPHIC4:아름다운 한국 ‘86』 단행본 표지(1986)
(Inha University)
도판 8 김교만 교수의 한국관광 포스터, 국제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 출품작(1986)
도판 9 김교만 교수의 88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1987)
도판 10 김교만 교수의 ‘94 한국방문의 해 엠블렘(1994)
도판 11 김교만 교수의 천주교 성물 디자인 The design education of the College of Fine Arts, Seoul National University began
도판 12 김교만 교수의 고희기념 개인전 작품(1998) at the Department of Do–An in 1946 when the university was founded. Since
도판 13 조영제 교수의 대한항공 한국관광 포스터(1974) then, the name has gone through several changes, including the Department
도판 14 조영제 교수의 비제바노 포스터(1972) of Applied Art, the Department of Industrial Art, the Department of Industrial
도판 15 조영제 교수의 코카콜라 포스터(1984) Design, and now design education is mostly taking place at the Faculty of Design.
도판 16 조영제 교수의 제일제당 백설표 심볼(1974) In the beginning, graphic design was taught as a part of commercial art;
도판 17 조영제 교수의 OB맥주 BI(1974) however, it became one of the three majors in Applied Arts in the mid 1960s. In
도판 18 조영제 교수의 신세계백화점 심볼(1975) 1983, the Department of Applied Arts was divided into the Department of Indus-
도판 19 조영제 교수의 외환은행 CI(1979) trial Art and the Department of Craft. In the Department of Industrial Art, the
도판 20 조영제 교수의 기아자동차 CI(1986) name of which changed to the Department of Industrial Design in 1989, there
도판 21 조영제 교수의 88서울올림픽 공식 포스터(1984) were Graphic Design and Industrial Design majors. In 1998, the Department of
도판 22 조영제 교수의 88서울올림픽 스포츠 포스터(1987) Industrial Design and the Department of Craft merged and continued to be united.
도판 23 일본 아이디어 잡지 표지에 소개된 조영제 교수의 88서울올림픽 스포츠 포스터 Three professors in design lead the graphic design education at Seoul National
도판 24 조영제 교수의 디자인을 소개한 일본 포트폴리오 잡지의 표지(1990) University from the mid 1960s to the early 1990s. Kyoman Kim joined the pro-
도판 25 양승춘 교수의 제1회 상공인의 날 포스터 공모전 당선작(1964) gram in December 1965 and retired in 1994. Young–Jae Cho, who joined in the
도판 26 양승춘 교수의 제1회 프리즘디자인전 출품작(1966) same year as Kim, retired in 2000. Seung–Choon Yang retired in 2006. Young–
도판 27 양승춘 교수의 제4회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전 출품작(1975) Jae Cho was a part–time instructor for the Department of Applied Arts before he
도판 28 양승춘 교수의 제13회 상공미전 출품작(1978) joined the faculty as a full–time professor. During this time, he taught Seung –
도판 29 양승춘 교수의 성모병원 타이페이스(1980) Choon Yang, who was admitted to the Department of Applied arts in 1959 and
도판 30 양승춘 교수의 마주앙 패키지(1982) graduated in 1965, for one semester. Seung–Choon Yang served as a Teaching
도판 31 양승춘 교수의 88서울올림픽 공식 휘장 당선작(1987) Assistant from 1968 to 1970, and later worked as a part–time instructor; therefore,
도판 32 양승춘 교수의 88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1987) the three of them served in the College of Art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for
도판 33 양승춘 교수의 청하 패키지(1993) more than three decades.
도판 34 양승춘 교수의 한샘 타이페이스(1996) This research reviews the characteristics and changes of graphic design
도판 35 양승춘 교수의 서울대학교 개교50주년 기념 포스터(1996) education at the College of Art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from the mid 1960s,
도판 36 양승춘 교수의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 CI(2003) when Kyoman Kim and Young–jae Cho joined the faculty as full–time professors,
and Graphic Design was separated from the Department of Applied Arts, to the
early 1990s when Kyoman Kim retired.

Key words: applied art, graphic design, visual communication design, design edu-
cation, College of Fine Arts, Seoul National University, 1965 –1994,
Kyo–man Kim, Young–jae Cho, Seung–choon Yang, Corporate Identity
Program, 88 Seoul Olymp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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