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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is Master
Tesis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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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9 6 5 –1 9 9 4 _
1. 2.
37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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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 명시하게 했고, 상업미술이 상업디자인으로, 공업미술이 공업디자인으로 명칭이 바 ‹ 1› / / /
39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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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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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4› 교수로부터 수업을 듣고 권순형 교수의 개인전을 보았던 양승춘 교수는 당시의 경험을
1959 , , , , , , , , ,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62 , , , , , , , , , ,
1963 , , , , , , , , ,
, ,
1964 , , , , , , , ,
“...... 복학을 하고나서 2학년에 올라가니까 전공을 하는데 민철홍 선생님이 실기
수업에 들어오더니 바인더를 딱 펴주는 거야. 설명을 할 테니까 들어봐라 하면서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의 디자인교육이 서구 현대 디자인의 영향을 받게 된 직접 미국에서 유학한 바인더를 펼치는데, 눈이 휘둥그레졌지. 백문이 불여일견이야.
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미국에서 유학한 김정자23, 권순형24, 민철홍25 세 교수에 의 (중략) 민철홍 선생이 시카고 일리노이 공대(IIT)에서 1년 간 배운 바인더를 펼치
해서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58년부터 서울미대에 출강하여 1959년에 전임교수 는데 그 안에 모든 게 다 있어. 그 다음해인가 권순형 선생님이 미국에서 귀국해
가 된 김정자 교수는 부임 초기에 구성 과목을 담당하면서 일본에서 유래한 초기 ‘양식 서 전시를 하는데 (중략) 레코드 자켓, 책표지, 광고 CF 비슷한 거 등등. 그런데
화’ 수업과는 다른 미국식 기초 디자인의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김정자 교수는 나는 유별나게 레코드 자켓에 눈이 탁 꽂혔어. 그게 부활이라는 댄스곡인데 정열
이순석 교수가 생각했던 장식에 한정된 디자인 개념과 달리 “용도의 기능을 기초로 한 적으로 불같이 표현한 게 마음에 와 꽂히더라고. ‘아, 저렇게 감성적으로 표현을
동작적인 것을 디자인”이라 정의했으며 장식에 한정된 디자인의 정의는 명사적인 뜻으 할 수 있구나. 마음속에 있는 어떤 생각을.’ 그때부터 디자인에 대한 눈을 뜨기 시
로서 부분적인 것임에 반해 디자인은 ‘질서’와 ‘계획하다’라는 동사적인 뜻, 즉 활동을 작한 거야.”28
의미하는 전체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김정자 교수에게 있어 디자인이란 “주어진 뚜렷
한 목표를 계획하여 상호관계를 조직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권순형 교수는 1961년 서울미대 응용미술과 부임 후 도자공예 분야에, 민철홍
현대적인 의미의 디자인 개념이었다.26 교수는 1963년 부임 후 공업디자인 분야에 전념을 했기 때문에 응용미술과 내에서 시
한편 권순형 교수가 미국 클리브랜드 대학에서 일 년 간 수학하고 돌아와 1960 각디자인교육을 전담할 교수진이 없었던 상황에서 1965년 김교만 교수와 조영제 교
년 중앙공보실에서 개최했던 개인전은 시각디자인교육의 전환에 또 다른 계기를 마련 수의 부임은 향후 그래픽 디자인 중심의 교육적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를 제공했다.29
했다. 이 전시회를 통해 스크린톤, 칼라톤, 하드보드와 같은 새로운 재료들과 타이포그 196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시각디자인 관련 전공과목 구성의 변화를 살
라피, 신문광고 레이아웃, 레코드커버, 포장 등 그래픽 디자인의 재료와 영역들이 새롭 펴보면 다음과 같다.
게 소개되었기 때문이었다.27 대학 재학시절에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민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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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2
‹ 5› 960 –1 9 9 0 ‹ 6› 1985
1960 1970 1980 1990
I
( ) , ,
1, 2 1 , 2 ,3 ,4 ,5 ,6 1, 2 , 3 , 4 , 5 , 6 .
1, 2 1, 2 II ·
1, 2 1, 2 , 3 , 4 , 5 1, 2 , 3 , 4 , 5 , 6 .
1, 2 1, 2 1, 2 I
1, 2 1, 2 1, 2 .
1 , 2 ,3 1, 2 1, 2 II ·
1, 2 .
1, 2 I
1, 2 , 3 1, 2 .
1, 2 , 3 1, 2
II
1, 2
.
1, 2
I
, , , .
1960년대 초반에 상업미술이라는 과목으로 교육되던 시각디자인이 1960년대 II , , ,
.
중반에 독립된 전공이 되면서 관련 과목의 수가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1970년대 전공
III , .
필수 과목으로는 시각디자인, 광고디자인, 포장디자인이 있었고 이들 수업에서는 포스 IV
.
터, 달력, 기업 아이덴티티 디자인(Corporate Identity Program), 신문광고, 선물용 포
I
장 디자인 등을 가르쳤다.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사진디자인 과목 등은 전공선택 과 .
II
목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각디자인전공 교과과정에서 영상 과목들이 증 .
가하게 되었다. 1981년부터 기존의 사진 1, 2와 사진디자인 1, 2, 3 과목은 영상디자 I
.
인(Photography & Film Design) 1, 2, 3, 4, 5, 6으로 대체되어 운영이 되게 되었고 II
.
1985년에는 영상디자인 6개 과목을 5개로 줄이고 대신 컴퓨터그래픽 2개 과목을 추가
I .
하였다가 1988년에 다시 영상디자인 과목을 6개로 늘렸다. 1980년대 영상디자인 과 II ·
.
목의 수업 목표는 정사진, 멀티비젼과 애니메이션 제작의 기초과정, 영화와 비디오 제
I
작 등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다. 31
1985년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교과목개요와 개 .
II · · ( )
설학년 및 담당 교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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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 ‹ 7› 1985
.
III I
.
I
IV
1 I
, .
I
I
I
. 2
II
II Public
. II
I . 2 II
II II
. II
III color transparency photography III
· · . I
IV animation film design 1 I
. III
V design coordination I
. 3
IV
VI event design visual identity . II
I 2 II
, .
IV
II marketing communication
II
.
V
, , ,
I
. 1
V
,
. 4
I computer VI
program . 2 II
II ·
.
V non–fiction film film
video . 1989년에 산업미술과가 산업디자인과로 학과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이 시기 시
각디자인전공의 교육목표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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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디자인, 컴퓨터그래픽 디자인 등의 분야에서 보다 나은 창조 행위를 추구할 수 한편 1998년에 디자인학부로 산업디자인과와 공예과가 다시 통합되기 전까지
있도록 교육한다.34 도안과, 응용미술과, 산업미술과, 산업디자인과 시기에 출강했던 디자인 관련 주요 강
사진을 부임 시기별로 구분해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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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디자인과 시각디자인전공의 1990년대 초반의 교육과정은 1980년대 후반과 ‹ 9› 1940 –1 9 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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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3.01 /7 5 /7 9 1996.03.01 /7 7 /8 4
1986.03.01 /6 7 /7 1 1996.03.01 /7 9 /9 6
1986.03.01 /(?)/7 0 1996.09.10 /8 9 /9 3
1986.03.01 /6 9 /7 3 1996.09.10 /8 1 /8 5
1 9 8 7. 0 3 . 0 1 /7 6 /8 7 1 9 9 7. 0 3 . 0 1 /(?)/7 7
1988.03.01 /7 5 /7 9 1 9 9 7. 0 3 . 0 1
1988.03.01 /7 7 /8 1 1 9 9 7. 0 3 . 0 1 /7 6 /8 3
1988.03.01 /6 9 /7 6 1 9 9 7. 0 3 . 0 1 /8 3 /8 7
1988.08.01 /5 5 /5 9 (?) 1 9 9 7. 0 3 . 0 6
1989.03.01 /7 5 /7 9 1 9 9 7. 0 9 . 0 9
1989.03.01 /7 8 /8 2 1 9 9 7. 0 9 . 0 9 /8 3 /8 7
1989.03.01 /7 6 /8 0
1989.08.01 1960년대 중반부터 시각디자인과 공업디자인이 전공 분리가 되기는 했지만 기
1990.03.01 /7 8 /8 2 초 과목과 이론 과목은 두 전공 학생들이 함께 수강했고 전공 분리 이후 과정에서도 학
1990.03.01 /7 4 /7 8
1990.03.01 /7 6 /8 0
생들이 개인의 선택에 따라서 전공 외의 과목을 수강하기도 했기 때문에 시각디자인 관
1 9 9 1. 0 8 . 2 1 련 강사 명단만 따로 구성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또한 이 강사 명단은 서울대학교 조
1993.03.01
형연구소에서 파악한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해당 시기에 출강했던 강사를 모두 포함한
1993.03.01 /7 3 /7 7
1993.09.01 /7 6 /8 0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강사들의 출강 기간도 개인에 따라 차이가 많은데 예를 들어 응
1994.03.01 /8 2 /8 6
용미술과 61학번으로 1965년에 대학을 졸업한 정시화 국민대 조형대학 명예교수의 경
1994.03.01 /7 6 /8 0 (?)
1994.03.15 /8 1 /8 5 우 1972년에 첫 출강을 해서 2007년 정년퇴임을 한 후 70세가 되는 2012년까지 40여
1994.09.01 /7 6 /8 0
년간 서울미대에서 디자인이론 관련 강의를 해왔다.
1995.03.01 /8 4 /8 8
1995.03.01
1995.03.01
1990 1995.03.01 /7 9 /8 2
1995.03.01 /7 6 /8 0 3. 3
1995.03.01
1995.03.01 /6 8 /7 5 (?)
1995.03.01 3–1. 김교만39
1995.03.01 1928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나 서울미대 50학번으로 6.25 한국전쟁 기간 중에 대
1995.03.20 /8 0 /8 4
1995.09.01 /8 1 /8 5 학을 다니다 1956년에 졸업한 김교만 교수는 만 37세가 되던 해인 1965년에 서울미
1995.09.01 /6 8 /7 5 (?) 대 응용미술과 교수로 부임하여 1994년에 정년퇴임을 했다. 한 인터뷰에서 김교만 교
1995.09.05 /7 3 /8 5 (?)
1995.09.05 /8 3 /8 7 수는 자신이 응용미술과에 입학하게 된 동기를 고등학교 시절에 동화백화점(현, 신세
1995.09.05 /8 1 /8 5
1996.03.01
1996.03.01 /7 7 /8 2
39 강현주, 「김교만과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 『조형_아카이브』, 제3호, 조형연구소, 2011,
1996.03.01 /7 8 /9 2
101–13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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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화점)에서 개최된 조선산업미술가협회40의 정기회원전을 보고 거기에 출품된 디자 (1986) 등 단행본을 출판했다. 작품 활동 외에 문교부 학술연구 조성비를 지원 받아
인 작품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응용미술과 재학시절부터 국전 공예 서 1968년에 「수출상품의 포장개선」, 1970년에 「수출포장개선과 POP 광고」, 1973년
부에 작품을 출품하고 이순석 교수의 디자인 작업을 도왔던 김교만 교수는 1956년 대 에 「픽토그램을 이용한 교통표식 개선연구」, 1982년에 「디자인교육에 있어 시각전달
학 졸업 후 권순형 교수와 함께 K.K.디자인연구소를 열어 2년 동안 운영했다. 그 후 진 과정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또한 김교만 교수는 서울지하철 심볼마크(1974), 성산
명여고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다가 동일방직의 전신인 동영방직주식회사에서 디자이 대교 아치 디자인(1977), 서울지하철 3, 4호선 토탈 디자인(1978) 등의 작업을 했으
너로 4년간 근무했다. 성심여고와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다시 교사생활을 시작했던 김 며 1980년부터 1984년까지 한일은행, 주택은행, 중소기업은행, 대한투자신탁 등 국내
교만은 1964년부터 서울대학교에 시간강사로 출강을 했고, 그 다음해인 1965년 12월 시중 은행들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개발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국제공
에 전임교수가 되었다. 김교만 교수는 재직 중이던 1978년에 영국의 세인트마틴스 미 항 국제선 제1, 2청사 및 국내선 사인 시스템 및 픽토그램을 제작했고, 1988년에는 한
술대학에 가서 공부하기도 했다. 국공항관리공단, 1989년부터 1990년에는 동남은행 및 제일생명, 1991년부터 1992년
김교만 교수는 1966년 제1회 대한민국 상공미술전람회가 개최될 당시 심사위 에는 서울정도 600주년 기념 한국방문의 해 심볼마크 및 로고타입을 디자인했다. 회갑
원장이었던 이순석 교수를 도와 제1부 상업미술부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고 1990 을 맞았던 1988년에는 일본 도쿄 세이부 백화점에서 열린 ‹Soulof Seoul› 행사의 총괄
년까지 집행위원, 심사위원, 초대작가 등을 역임했다. 활동 초기부터 우표디자인 작업 아트 디렉터를 맡았으며, 1991년부터 1992년에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개최된 엑스
을 꾸준히 해온 그는 1998년 작고하기 전까지 정보통신부의 우표 심의위원으로 활동 포'92 행사에서 대한민국관 설계 및 제작의 총 디렉터로 활동을 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했으며, 통상산업부 산업디자인 심의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72년에 창립된 한국그래 김교만 교수는 서교동 성당 및 서초동 성당, 역삼동 성당 등의 교회 실내 및 성물 디자
픽디자인협회(KSGD)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1980년부터 1998년까지 서울일러스트레 인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1994년 정년퇴임 후에는 컴퓨터 기술을 배워 그래픽 표현에
이터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8년에 서울시 문화상을, 1976년에는 대한민국산업디 있어 변화를 주고자 했으며 그 결과를 1998년 고희 기념전에서 소개하고자 했으나 안
자인전 대회장상인 상공부장관상을 수상했으며 1982년에는 유네스코 주최 노마 국제 타깝게도 전시회를 얼마 앞두고 타계하였다.
전에서 특선을, 1988년에는 88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로 제12회 바르샤바 국제 포스
터 공모전에서 특선을 받는 등 1970, 80년대 동안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한국디자이너로 소개 되었다. 1993년에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하였고,
1996년에는 한국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KIDP)에서 디자인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하여 선정한 ‘한국의 산업디자이너 100인’ 중 70%라는 압도적인 득표 기록으로 1
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김교만 교수는 고희 기념전이자 유작전이 된 1998년 뉴욕 전시회를 포함하여
총 다섯 차례 개인전41을 열었고, 『한국의 가락』(1980)과 『아름다운 한국 ‘86 그래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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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조영제42
조영제 교수는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마치고 1954
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 입학하여 만 30세가 되던 해인 1965년에 서
울미대 응용미술과 교수로 부임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미대 학장을 역임한 후
2000년에 정년퇴임을 하였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동서대학교 디자인전문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1. 2. 1 3.
(1 9 6 8 ) (1 9 7 6 ) (1 9 7 7 ) 대학 졸업 후 조영제 교수는 1959년 3월에 화신산업에 입사하여 1961년에 퇴
사한 후 잠시 을지로 2가에 디자인 사무실을 열어 운영을 하다가 1962년에 다시 조흥
은행 업무추진부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1963년 9월에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에 출강
하기 시작한 조영제 교수는 1964년부터 1965년까지 덕성여자대학 생활미술과의 주
임교수로 근무했다. 1965년 12월 서울미대 응용미술과 전임강사로 부임한 후 그 이듬
해부터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 심의위원과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72
년부터 1975년까지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 2, 3대 회장을 지냈으며 1980년부터
10. ‘9 4 1 1. 12.
(1 9 9 4 ) (1 9 9 8 ) 42 강현주, 『한국 디자인사 수첩–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디자인플럭스, 2010 참조.
55 56
, 1 9 6 5 –1 9 9 4 _
57 58
, 1 9 6 5 –1 9 9 4 _
의(The InternationalSymposium ‘93 on Design of Amenity’›에서 초청 강연을 하고, 인 1965년에는 제1회 전국 쇼윈도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같은 해 제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대학(RISD)에서 초청 강연 및 전시회를 했다. 1994년에는 1회 청소년 선도의 달 포스터에도 당선이 되었다. 1966년에는 동양맥주에 근무하면
스위스 『후스 후 인 그래픽 디자인(Who’s Who in Graphic Design)』에 작품이 수록됐 서 작품을 출품하여 제1회 대한민국상공미전에서 특선을 받았고 이후 매년 출품하여
고, 중국광고협회 주최 베이징 국제광고세미나에서 초청강연을 했다. 1998년에는 홍 1969년 제4회 때는 추천작가가 되었고, 1971년에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
콩디자인협회(HKDA) 주최의 ‘디자인 98’ 국제 심사위원을 맡았다. 2001년부터 2007 에 졸업동기생들과 함께 프리즘이라는 디자인그룹을 만들어 1966년에 제1회 프리즘
년까지 일본 후쿠오카에서 개최되는 아시아디지털아트어워드 국제심사위원을 맡았다. 디자인전을 개최하였고, 이후 1968년에 제2회, 1969년에 제3회, 1971년에 제4회 전
2004년에 한국디자인진흥원 주최 디자인 코리아 베이징 대회와 베이징 복장학원 디자 시회를 가졌다. 이러한 프리즘의 활동은 1972년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 설립
인학원에서 초청 강연을 하고 2004년과 2005년에 베이징 칭화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의 단초가 되었다.
초청 강연을 했다. 1972년 민철홍, 조영제 교수와 함께 본인이 근무하던 동양맥주주식회사의 OB
맥주 BI 개발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동양맥주주식회사의 CI 개발(1974), 진로의 BI
3–3. 양승춘44 개발(1974), (주)제일제당 CI 개발(1975), (주)제일모직 CI 개발(1976), (주)제일합섬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난 양승춘 교수는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미대 응용미술 CI 개발(1976), 신세계백화점 CI 개발(1977) 한국주택공사 CI 개발(1977), (주)동양
과 59학번으로 입학하여 1965년에 졸업한 후 동양맥주주식회사에 입사하여 근무했다. 맥주 마주앙 BI 개발(1977), 한일은행 CI 개발(1980), (주)동방생명 CI 개발(1982), 국
1968년부터 학과 조교로 근무하면서 시간강의를 하다가 만 30세가 되던 1970년에 전 립현대미술관 CI 개발(1984) 등 조영제, 김교만, 민철홍 교수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임교수가 되었다. 디자이너로 참여했다.
2006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양승춘 교수는 학과뿐만이 아니라 미대와 대학 본 1977년 삼성물산 버킹검 BI 개발과 (주)진로 길벗위스키 BI 개발을 시작으로 독
부 차원의 다양한 보직을 했다. 우선 미대와 학과 차원에서의 활동으로는 서울미대 부 자적인 CI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이후 양승춘 교수가 아트디렉터로 진행한 프로젝트
속 실습장(1984–1985), 산업미술과 학과장(1985–1989), 서울미대 교무담당 학장보 는 다음과 같다: 유로패션 CI 개발(1978), 아세아오세아니안산부인과학회 CI 개발
(1990–1992), 산업디자인과 학과장(1993–1994), 디자인학부 학부장(1998–1999), (1980), 카톨릭중앙의료원 CI 개발(1980), 성모병원 CI 개발(1980), 서울장애인종합
서울미대 조형연구소 소장 및 부소장(2000–2005) 등이 있다. 대학 본부 차원에서는 복지관 CI 개발(1982), 한국사회과학도서관 CI 개발(1982), (주)토탈디자인 CI 개발
서울대학교 개교 40주년 기념위원회 위원(1986), 서울대학교 기획위원/소비조합 이 (1984), (주)한샘 CI 개발(1984), 체신부 우정 100주년 VI 개발(1984), (주)동양맥주
사/교육매체제작소 운영위원(1987–1989), 서울대학교 식전개선위원회 위원(1988– 마주앙 BI 개발(1984), (주)금복주 CI 및 BI 개발(1984), (주)동양맥주 CI 개발(1984),
1989), 서울대학교 발전장기계획위원회 위원(1989–1990), 호암교수회관 운영위원 (주)한양투자금융 CI 개발(1987), (주)동양맥주 OB라이트 BI 개발(1987), (주)삼양사
(1991–1993),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1993–1996), 자랑스런 CI 개발(1988), (주)오리엔트시계 CI 개발(1989), (주)선일포도당 CI 개발(1989), (주)
서울대인 선정 운영위원(2001–2004)을 지냈다. 삼양중기 CI 개발(1989), (주)백화 CI 개발(1989), (주)두산곡산 CI 및 두산사료 BI 개
시기별로 양승춘 교수의 주요 작품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미대 응용 발(1990), 종가집 BI 개발(1990), (주)가보식품 BI 개발(1990), 마가레트호텔 CI 개발
미술과 재학시절인 1964년에 제1회 상공인의 날 공모에 당선이 되었다. 졸업하던 해 (1990), (주)서울방송 CI 개발(1991), 대림혼다 CI 개발(1991), 동성아파트 BI 및 색
채계획(1991), 보훈병원 및 한국보훈복지공단 CI 개발(1991), (주)경월주조 설향 BI
개발(1991), 두산건설 사인시스템 VI 개발(1992), 대전 EXPO 포스코 파빌리온 소재
44 양승춘, 『그래픽 디자인 양승춘』, 한국디자인산업연구센터, 2005 참조 및 재인용.
관 VI 개발(1992), (주)두산기계 CI 개발(1992), (주)매일유업 오메가2 분유 BI 개발
59 60
, 1 9 6 5 –1 9 9 4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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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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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의 비중이 커진 것은 양승춘 교수의 노력 때문이었다.51 그는 대학 졸업 후 동양맥주 디자인전공 졸업생들에게 일종의 역할모델로서의 기능을 했다.53 김교만 교수 역시 CI
주식회사에 근무하면서 디자인 작업에 있어서 사진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현장에서 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팀을 구성해서 작업을 해나갔고 작고한 성신여대 김훈 교수의 경
험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디자인교육에 접목시키고자 했다. 1970년대 당시 서울미대에 우처럼 졸업생으로서 그 팀에 참여한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활동이 수업과 직접적으로
사진 수업이 개설되어 있기는 했지만 디자인적인 맥락을 갖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응 연계되지는 않았고 CI 작업 이외의 김교만 교수의 일러스트레이션이나 포스터 작업은
미과의 초기 사진 수업은 양승춘 교수가 했고, 무빙 이미지를 다루는 영상 수업은 정시 스타일이 워낙 뚜렷하고 개인적인 특성이 강해서 교육방법론적인 차원에서 학생들과
화 교수가 담당을 했다.52 이후 사진과 영상 수업이 통합된 형태인 영상디자인 과목이 2 공유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양승춘 교수의 경우에 김교만, 조영제 교수와 다른 점은
학년부터 개설되어 학년이 올라가면서 심화되는 형태로 운영이 되었다. 영상디자인 과 1980년대 말까지 대부분의 외부 프로젝트를 교내 자신의 연구실에서, 비록 소수의 인
목은 세종문화의 윤석태 대표가 출강하여 광고 실무 차원에서 수업을 하는 한편 응미과 원이지만 졸업생이나 대학원생들과 함께 진행을 했다는 점이다. 1990년부터 1997년
68학번인 유영우 국민대 교수와 72학번인 백명진 교수가 1980년대 초반에 유학에서 까지 양승춘 교수도 학교 바깥에 외부 연구실을 두었으나 1997년에 다시 학교로 돌아
돌아와 수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와 정년퇴임 때까지 주로 연구실을 기반으로 작업을 했다.54
디자이너–교수의 작품 활동과 교육 간의 격차는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세 교수 전임교수들의 디자인교육이 실무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동안 서울미대 디자인
의 대외 활동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는 1980년대에 가장 심했다. 조영제 교수의 경우 교육에 있어서 이론 교육을 담당한 것은 시간강사로 출강을 했던 정시화 국민대 교수
1973년에 CDR을 창립하여 2006년까지 고문을 지냈는데 CDR은 처음에는 연구실 형 였다. 1965년 응용미술과를 졸업한 후 교육대학원에 진학하여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태로 출발했지만 전문적인 CI 회사로 빠르게 성장하여 학교 바깥에서 디자인 비즈니스 1968년에 첫 강의를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에서 시작한 그는 1972년 3월부
를 해나갔기 때문에 실제 수업 내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어렵지만, 시각 터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에 출강하여 ‘디자인론’을 강의했다. 정시화 교수는 1975년에
『현대 디자인 연구』라는 제목으로 1968년부터 강의했던 내용을 자비 출판하여 강의 교
재로 활용하다가 1980년에 『현대 디자인 연구: 현대디자인의 이론적 배경』(미진사)이
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했다. 김민수 교수는 정시화 교수가 보여준 개인적인 노력을 높
이 평가하면서 그로 인해 학생들이 현대 디자인의 이론적 배경, 기초 개념 및 접근방법
51 양승춘 교수는 ‹한국 디자인의 새벽› 전시회 준비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응미과 전임교수 부임 후 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질을 획득하는 문제, 토탈 디자인(total design)의 이념, 세계 각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까 고심을 하다가 선배 교수들과 다른 것을 가르치겠다는 목표 하에
국이 취해온 현대 디자인의 배경과 한국의 현대 디자인이 취해야 할 성향, 역할, 전통과
광고에 사진을 접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진을 통한 광고, 사진을 통한
편지, 사진을 통한 포스터를 시도했고 이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디자인교육에 실크스크린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1960년대까지 응용미술과에는 사진 수업이 전공과목으로는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미대에 일반사진 수업을 시간강사인 임흥식 선생이 맡고 있었는데 1970년 양승춘
교수가 부임하던 바로 그해에 임흥식 선생이 서라벌예대에 교수로 가게 되면서 사진 수업을 53 조영제 교수가 아트 디렉터 역할을 했던 CI 프로젝트에는 서울미대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학
응용미술과로 가져와 양승춘 교수가 가르치기 시작했다. 김수정, 『한국 디자인의 새벽– 출신의 여러 디자이너들이 함께 참여를 했다. CDR이 창립되기 이전에는 양승춘 교수가 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아카이브:디자인 구술채록 자료집 | 양승춘』, 조형연구소, 2013, 72–77쪽 진행을 했고, 이후 디자인파크의 김현 대표와 후에 올커뮤니테이션에 함께 참여했던 구동조
참조. 전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조종현 전 더그래픽스 대표, 김민 국민대학교 교수(서울대 응미과
52 정시화 교수는 1973년부터 1974년까지 국비장학생으로 덴마크 그래픽디자인대학에서 80학번), 박진숙 세종대학교 교수(서울대 응미과 73학번), 김성천 현 CDR 대표(서울대 응미과
유학을 하고 돌아와 그 당시 배웠던 내용을 바탕으로 1975년부터 서울미대 응미과 영상디자인 82학번) 등이 디자인팀을 이끌었다.
수업에서 무빙 이미지를 가르쳤다. 그 영향으로 응미과 77학번이던 신경섭 선생이 졸업 후 54 1984년부터 1997년까지 한샘 고문이었던 양승춘 교수는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방배동 한샘
애니메이션 1세대로 활동하게 되었다. 김수정, 『한국 디자인의 새벽–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빌딩에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근처 다른 사무실에서 연구실을 운영하다가 1997년에 IMF
아카이브:디자인 구술채록 자료집 | 양승춘』, 조형연구소, 2013, 72–77쪽 참조. 외환위기가 시작되면서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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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문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55 한편 정시화 교수의 수업에서 학생들 부 등 총 3부로 구성이 되어 있었는데 심사위원단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58
이 현대 디자인의 이념에 대해서는 배웠으나 개별 디자이너들의 구체적인 ‘작업 논리와 ‹ 10› 1 (1 9 6 6 )5 9
67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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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동문 모임이라는 한계를 가질 수 있으니 타 대학 출신의 디자인 전공자들도 함께 할 이 직접 디자인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한편 한글레터링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양
수 있는 디자인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하여 1972년에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가 승춘 교수는 로고타입 및 타입페이스 개발에 비중을 두었다.
창립되게 되었다. 이 단체의 출범을 위해서 김교만, 조영제, 이태영, 양승춘, 정시화, 김 서울미대 응용미술과 출신으로 CI 분야에서 활동을 한 졸업생으로는 1981년에
영기, 권문웅, 안정언 등 서울대 출신 8명과 권명광, 유재우, 홍종일 등 홍익대 출신 3 올커뮤니케이션을 함께 창립한 안정언 숙대 명예교수(60학번)와 현용순 건대 교수(68
명이 모여 발기인 대회 겸 첫 총회를 개최하였고 초대회장으로 김교만 교수를 추대하였 학번)가 있다. 올커뮤니케이션은 1983년에 체신부 CI를 수행함으로써 기업뿐만이 아
다. 김교만 교수에 이어 조영제 교수가 2대와 3대 회장을 하고 4대는 양승춘 교수가, 다 니라 정부기관이 CI를 도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4년에는 93대전엑스포 때 디자
시 6대와 7대 회장을 조영제 교수가 함으로써 1972년 협회 설립부터 1983년까지 김교 인업무를 담당했던 79학번 졸업생인 정석원 대표가 엑스포디자인연구소를 설립, 2007
만, 조영제, 양승춘 교수가 회장으로서 이 협회의 활동을 주도해나갔다. 한국그래픽디 년에 엑스포디자인브랜딩으로 법인전환하여 현재 CI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자인협회(KSGD)는 설립 당시 명칭을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로 변경해 운영하다 있다. 졸업 후 CDR에 근무하다가 복스앤콕스라는 디자인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던 82
가 1992년에 해체가 되었다. 이후 1994년에 조영제 교수를 초대 회장으로 하여 한국 학번 김성천 대표는 1995년에 CDR의 새 대표로 취임하여 현재 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
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가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61 한편,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된 후 서
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조영제 교수가 디자인전문위원장을 맡게 된 것은 1970년대
4–3. 작품활동:기업 아이덴티티 디자인과 88서울올림픽 디자인 초부터 국내 여러 기업의 CI 개발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조영제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교수는 서울미대 재임 기간 중 디자이너로서 활발하게 작품 활 교수는 1982년부터 1988년까지 디자인전문위원장으로서 88서울올림픽의 아이덴티
동을 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포스터는 초창기부터 가장 기본이 된 매체였다. 포스터 작 티 디자인 전반을 총괄하면서 공식 포스터와 스포츠 포스터를 디자인하고 스포츠 픽토
업과 병행하여 김교만 교수는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에 보다 큰 중심을 두었지만, 세 교 그램을 디렉션 했다. 88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를 디자인한 김교만 교수는 한 인터뷰에
수 모두 기업 아이덴티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첫 번째 CI 프로젝트는 양승춘 교수가 서 자신의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이 포스터를 꼽았다.62 양승춘 교수는 88
근무했던 동양맥주주식회사의 OB맥주 BI를 1972년에 민철홍, 조영제, 양승춘 교수가 서울올림픽 공식휘장 공모전에 당선한 후 문화포스터와 입장권도 디자인을 했다. 서울
함께 참여하여 개발한 것이었다. 그 이듬해인 1973년에 동양맥주 본사의 로비 디자인 미대 시각디자인전공에 있어서 1980년대는 가히 올림픽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
을 한 조영제 교수는 1974년에 동양맥주 CI와 제일제당 CI 개발을 진행하였다. 1976 니었다.63
년 3월에 신세계미술관에서 CI를 주제로 한 개인전인 ‹조영제 디자인展: DECOMAS›
를 개최한 조영제 교수는 이후 국내 수많은 기업의 CI를 담당했다. 김교만 교수와 조영
제 교수의 후배이자 제자, 그리고 조교였다가 후에 동료교수가 된 양승춘 교수는 조영
제 교수가 진행하는 CI 개발에 디자이너로 참여하다가 김교만 교수가 CI 개발을 시작
62 1987년 7월에 확정 발표된 문화포스터는 총 12종으로 김교만 교수 외에 양승춘(서울대),
하면서 조영제, 김교만 두 교수의 프로젝트에 모두 참여했다. 국내 기업들의 CI 개발 수
김영기(이대), 안정언(숙대), 나재오(단국대), 유영우(국민대), 오병권(이대), 백금남(성균관대),
요가 양적으로 커지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양승춘 교수 역시 독립적인 프로젝트를 구동조(동덕여대), 김현(디자인파크), 전후연(연아트대표), 조종현(CDR 제작실장) 등 12명의
진행했다. CI 프로젝트 진행에 있어서 조영제 교수가 아트디렉터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디자이너들이 참여했다. 「올림픽 문화포스터 12종 확정, SLOOC」, 『매일경제』, 1987년 7월
16일자. 「88올림픽 문화포스터 12종 확정」, 『경향신문』, 1987년 7월 17일자 참조.
큰 비중을 두었다면 김교만 교수와 양승춘 교수는 아트디렉터이자 디자이너로서 본인
63 1981년에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결정되던 때 김교만 교수는 53세, 조영제 교수
46세, 양승춘 교수 41세였고,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되던 1988년에는 김교만 교수 60세, 조영제
61 강현주, 『한국 디자인사 수첩–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디자인플럭스, 2010, 교수 53세, 양승춘 교수 48세였다.
8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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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춘, 『그래픽 디자인 양승춘』, 한국디자인산업연구센터, 2005.
73 74
도판목록 Abstract
도판 1 김교만 교수의 한일은행 달력디자인(1968) The Graphic Design Education from 1965 to 1994 in the College
도판 2 김교만 교수의 제1회 개인전 도록 표지(1976)
도판 3 김교만 교수의 성산대교 아치 디자인(1977)
of Fine Arts, SeoulNationalUniversity:
도판 4 김교만 교수의 월간디자인 창간 3주년 특집호 표지(1979) Focused on the Design Practice of Three Professors
도판 5 김교만 교수의 한일은행 심볼(1980)
도판 6 김교만 교수의 한국의 풍속 우표 디자인(1984)
Kang, Hyeon–joo
도판 7 『GRAPHIC4:아름다운 한국 ‘86』 단행본 표지(1986)
(Inha University)
도판 8 김교만 교수의 한국관광 포스터, 국제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 출품작(1986)
도판 9 김교만 교수의 88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1987)
도판 10 김교만 교수의 ‘94 한국방문의 해 엠블렘(1994)
도판 11 김교만 교수의 천주교 성물 디자인 The design education of the College of Fine Arts, Seoul National University began
도판 12 김교만 교수의 고희기념 개인전 작품(1998) at the Department of Do–An in 1946 when the university was founded. Since
도판 13 조영제 교수의 대한항공 한국관광 포스터(1974) then, the name has gone through several changes, including the Department
도판 14 조영제 교수의 비제바노 포스터(1972) of Applied Art, the Department of Industrial Art, the Department of Industrial
도판 15 조영제 교수의 코카콜라 포스터(1984) Design, and now design education is mostly taking place at the Faculty of Design.
도판 16 조영제 교수의 제일제당 백설표 심볼(1974) In the beginning, graphic design was taught as a part of commercial art;
도판 17 조영제 교수의 OB맥주 BI(1974) however, it became one of the three majors in Applied Arts in the mid 1960s. In
도판 18 조영제 교수의 신세계백화점 심볼(1975) 1983, the Department of Applied Arts was divided into the Department of Indus-
도판 19 조영제 교수의 외환은행 CI(1979) trial Art and the Department of Craft. In the Department of Industrial Art, the
도판 20 조영제 교수의 기아자동차 CI(1986) name of which changed to the Department of Industrial Design in 1989, there
도판 21 조영제 교수의 88서울올림픽 공식 포스터(1984) were Graphic Design and Industrial Design majors. In 1998, the Department of
도판 22 조영제 교수의 88서울올림픽 스포츠 포스터(1987) Industrial Design and the Department of Craft merged and continued to be united.
도판 23 일본 아이디어 잡지 표지에 소개된 조영제 교수의 88서울올림픽 스포츠 포스터 Three professors in design lead the graphic design education at Seoul National
도판 24 조영제 교수의 디자인을 소개한 일본 포트폴리오 잡지의 표지(1990) University from the mid 1960s to the early 1990s. Kyoman Kim joined the pro-
도판 25 양승춘 교수의 제1회 상공인의 날 포스터 공모전 당선작(1964) gram in December 1965 and retired in 1994. Young–Jae Cho, who joined in the
도판 26 양승춘 교수의 제1회 프리즘디자인전 출품작(1966) same year as Kim, retired in 2000. Seung–Choon Yang retired in 2006. Young–
도판 27 양승춘 교수의 제4회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전 출품작(1975) Jae Cho was a part–time instructor for the Department of Applied Arts before he
도판 28 양승춘 교수의 제13회 상공미전 출품작(1978) joined the faculty as a full–time professor. During this time, he taught Seung –
도판 29 양승춘 교수의 성모병원 타이페이스(1980) Choon Yang, who was admitted to the Department of Applied arts in 1959 and
도판 30 양승춘 교수의 마주앙 패키지(1982) graduated in 1965, for one semester. Seung–Choon Yang served as a Teaching
도판 31 양승춘 교수의 88서울올림픽 공식 휘장 당선작(1987) Assistant from 1968 to 1970, and later worked as a part–time instructor; therefore,
도판 32 양승춘 교수의 88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1987) the three of them served in the College of Art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for
도판 33 양승춘 교수의 청하 패키지(1993) more than three decades.
도판 34 양승춘 교수의 한샘 타이페이스(1996) This research reviews the characteristics and changes of graphic design
도판 35 양승춘 교수의 서울대학교 개교50주년 기념 포스터(1996) education at the College of Art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from the mid 1960s,
도판 36 양승춘 교수의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 CI(2003) when Kyoman Kim and Young–jae Cho joined the faculty as full–time professors,
and Graphic Design was separated from the Department of Applied Arts, to the
early 1990s when Kyoman Kim retired.
Key words: applied art, graphic design, visual communication design, design edu-
cation, College of Fine Arts, Seoul National University, 1965 –1994,
Kyo–man Kim, Young–jae Cho, Seung–choon Yang, Corporate Identity
Program, 88 Seoul Olymp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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