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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 논문

역설의 다원적 시각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Pluralistic Visualization of Paradox

국민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회화전공
원 영 태
2018
역설의 다원적 시각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Pluralistic Visualization of Paradox

지도교수 신 장 식

이 논문을 미술학 박사학위 청구논문으로 제출함


2019년 02월

국민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회화전공
원 영 태
2018
원영태의
미술학 박사학위 청구논문을 인준함

2019년 02월

심사위원장 권 기 동 (인)

심사위원 신 장 식 (인)

심사위원 김 태 진 (인)

심사위원 전 인 아 (인)

심사위 원 이 준 형 (인)

국민대학교 일반대학원
국 문 초 록

이 연구는 칸트가 인간의 정신영역을 종교, 과학, 예술의 세 가지로


분리한 이후 나타난 서양의 근대의 역설을 극복하고자, 세 가지 영역이 공
유하는 교집합의 영역과 각각의 자율적인 영역이 공존하는 대안으로서의
연구자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을 첫번째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이 대안을
찾아가는 논리적 과정과 연구자의 자전적 경험이 상호작용을 통해 시각화
된 지난 20여 년에 걸쳐 제작된 일련의 드로잉, 회화, 사진, 렌티큘러 및
설치작품을 분석하여 이에 대한 학술적 의미를 검토하고 이해를 도모해 관
객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함과 아울러 향후 연구자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것을 그 두번째 목적으로 한다.
연구자는 우선 역설의 논리적 구조를 분석하고 사전적 정의를 넘어서
역설이 가지는 두 가지 철학적 함의를 제시했다. 첫째, 역설은 거시적으로
토마스 쿤의 분석대로 기존 패러다임의 붕괴를 촉진 시키며 이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해결책을 촉발시킨다. 과학계에서는 빛의 이중성 역설을 통해
고전역학이 붕괴되고 양자역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었다. 미술에서
는 새로운 시도를 담은 아방가르드 운동이 촉발된다. 둘째, 역설은 미시적
으로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혹은 음과 양의 관계처럼 상호 대립적인 요소
가 쌍을 이루어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기도 한다. 닐스 보어는 이처럼 상호
대립적인 요소 모두를 고려해야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상보
성의 원리라 칭했다.
논리적 모순이 초래한 역설은 기존의 패러다임이 더이상 유지될 수 없
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후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확립을 위한 여러 방안의
모색과 이들 사이의 경쟁이 초래되고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형
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설은 구조적으로 자기지시성
(self-referentiality)이 갖는 논리적 필연의 결과다. 자기지시성이 있으면
논리적으로 주체=객체라는 등식이 성립되므로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즉,
주체 A는 주체가 아닌 객체 B와 같아야만 하기 때문에 역설적일 수밖에 없

- i -
다. 실제로 연구자는 본문에서 이발사의 역설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지시성
은 필연적으로 형식논리의 오류를 가져오며, 양자역학에서는 측정이라는 주
체의 행위 자체가 계(界)에 영향을 미쳐 불확정성의 원리를 가져오는 것을
고찰했다.
미술에서는 기존의 지배적인 양식이 시대정신을 담을 수 없는 모순으
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새로운 시도, 즉 아방가르드
의 등장이 이루어진다. 특히 미국미술에서는 그린버그에 의해 미술을 키치
에서 구해낼 진정한 아방가르드라 여겨졌던 환원 불가능한 매체의 존재론
적 속성을 추구한 엘리트적 형식주의가 3차원의 미니멀 조각 영역에서 역
설에 처하게 된다. 로버트 모리스는 작품 자체 외에 관객의 지각이 중요한
요소로 개입되고, 그 결과로 관객이 작품의 속한 계에 편입 됨으로서 자기
지시성을 가진다는 것을 입증했다. 따라서 미니멀리즘 조각에서는 전시공간
의 조명과 환경, 그리고 시간이라는 작품외적인 환경의 요소가 필연적으로
개입되어 대상 자체의 존재론적 정의(definition)만을 추구한 형식주의 논리
의 역설을 가져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반면에 형식주의와 상보적 관계를
가지고 있던 반-미학의 선구자 뒤샹의 기존의 미학체계와 미술시스템에 의
문을 던진 반-미학적, 반-미술적 제스츄어인 레디메이드가 네오다다와 제
프 쿤스 같은 이들에 의해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하나의 확립된 미적 대상
과 미술어휘로서 미술제도 내에서 활용되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했다. 즉,
뒤샹의 시도는 미술의 경계의 확장을 가져와 레디메이드가 미술이라는 계
(界) 안에 위치하게 됨으로서 미술의 정의가 변화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다.
또한, 수학에서의 괴델의 불완정성정리에서 보여지듯이 따라서 우리가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논리적으로, 수학적, 과학적 모델로 기술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자기지시성을 갖는 질문, 즉 자기 자신이 대상이 되는 “나
는 누구냐? ”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아‘를 질문으로 대상으로 할 때 발생하는 자기지시성이 갖는 역
설은 과학적 접근법과는 다른 접근법을 요구한다.

- ii -
연구자는 아인슈타인이 과학과 상호 영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미래
의 종교로 평가한 불교적 접근법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불
교에서는 근본적 진리를 직관적으로 체득하는 지혜를 특별히 반야(般
若,prajna)라고 하여 이성적 과학적 인식능력이라 할 수 있는 분별지(分別
智,vijnana)와 구분한다. 반면에 불교의 핵심사상인 연기법(緣起法), 공(空),
일심(一心)을 현대물리학을 대표하는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통해 설명함
으로써 과학이 갖는 보편성으로 불교철학의 핵심개념을 설명하려 했다. 물
론, 과학이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은 직관적 수행의 경험으로 체득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종교 고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과 대안을 연구자의 작품으로 구현하려했다. 그리
고 이를 미술작품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는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학파
의 해석처럼 가시세계와 비가시적세계, 혹은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보이는
것’과 ‘궁극적인 것’에 따라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가시세계 혹은 ‘보이는
것’은 사진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사실적 양식을, 비가시적 세계 혹은 ‘궁
극적인 것’을 추구할 때는 추상적 양식으로 작품화했다.
연구자는 아담의 사과/ 뉴튼의 사과라는 연작을 통해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일한 대상이나 진리의 문제도 보는 이의 세계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양가적 문제를 다뤘다. 그리고 종교와 과학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분석하기 위해서 서양의 기독교 교리가 갖는 논리적 모순을 분석했다. 특히
신의 존재증명에 관해서 그간의 논쟁을 살펴보고 각각이 가지고 있는 철학
적 모순점을 고찰했다. 또한, 과학적 세계관이 가치 중립적이다는 편견을
넘어서 인간의 가치와 도덕적 고양에 기여한 바를 마이클 셔머의 주장을
통해 살펴보았다. 즉, 합리적 이성과 과학적 세계관의 보편화로 인간은 종
교의 시대보다 훨씬 더 진보한 형태의 사회를 이루고 있고 이러한 진보는
지속될 것이라는 셔머의 주장에 연구자는 동의한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의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과 상호 교감할 수 있는 불교 철학과 그 사유방식을
통해 과학과 종교가 조화롭게 공존 할 수 있음을 논증했다.

- iii -
현대사회의 대중을 대상으로 한 대중 시리즈는 앞으로도 더 많은 시
도와 발전이 가능한 부분이라 사료된다. 현대와 같은 대중사회에서 최근의
정보 통신기술과 SNS의 발달, 인공지능의 발달과 더불어 새로 논의되는 미
래사회에서 대중은 대중 민주사회의 주체로서의 민의의 발원지이자 동시에
선전 선동의 쉬운 대상이 되기도 하는 양가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살펴
봤다. 대중사회에서도 합리적 이성에 기반한 과학적 세계관은 종교와 마찬
가지로 해묵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부터 대중들에게 해방을 가져올 것으
로 믿는다.
마지막으로 Someting/ Nothing 연작에서는 추상 회화를 통해서 양
자역학의 패러다임과 불교와의 교집합을 미술의 영역에서 표현하고자 했다.
단순히 추상적 원리 뿐만 아니라 이것이 가져오는 종교적 깨달음과의 연관
성도 양자역학과 불교철학과의 비교를 통해 논증했다. 뉴튼의 역학을 포함
한 과학혁명 이후 과학적 세계관과 방법론이 인간사회와 제도에 대한 이해
를 확장시키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듯이 양자역학이 상징하는 과학적 세계
관이 자아의 정체성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며 이를 통해 유일신 인
격신을 믿는 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미래의 종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개념을 양자역학의 주요원리인 불확정성의 원리와
상보성의 원리에 빗대어 설명하고 공(空)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모노크롬
의 형식을 빌어 작업을 전개했다.
연구자가 역설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을 갖는
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연구 작품들은 상호 대립적, 혹은 양가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
는 대상과 한 쌍의 제목을 갖는다. 이는 자연의 대상은 하나의 고정된 개념
만으로는 결코 기술될 수 없으며 반드시 이 개념과 상호 대립적, 혹은 역설
적인 개념과 쌍을 이뤄야만 제대로 기술될 수 있다는 닐스 보어의 상보성
의 원리를 연구자는 따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노장
사상과 불교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작품의 의미에 대
한 보다 적극적인 사고를 요구받는다.

- iv -
둘째, 양식적인 측면에서 연구자는 거시적인 세계를 다루는 사실적 스
타일과 미시적인 세계와 마음의 문제를 다룰 때는 추상의 스타일 두가지를
나누어서 사용한다. 즉 일관된 형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물리학계에서 고전
역학의 세계와 양자역학의 세계를 나누듯, 혹은 불교에서 ‘보이는 것’과 ‘궁
극적인 것’을 나누듯 세계를 두 개의 계로 나누어 상호 대립적인 사실과 추
상의 양식을 각각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역설적이다.
셋째, 연구자는 사진 이미지와 이에 바탕을 둔 회화, 디지털 판화이미
지, 그리고 렌티큘러 활용하며 원본과 시뮬라크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회화를 원본으로 보고 사진과 판화를 복제물이라 칭하는데 연
구자는 무한복제가 가능한 사진을 원본으로 하여 이를 유화로 그리고 이를
디지털 판화와 렌티큘러 작업과 함께 제시해 여러 시뮬라크르를 마치 뫼비
우스의 띠처럼 순환시킨다. 이를 통해 들뢰즈가 말한 ‘차이’를 ‘반복’함으로
써 어떤 것이 실제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모든 것은 고정된 본질, 혹은 실
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공(空)사상과의 연관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들 작품을 제사하는 방식은 다원적이라 할 수 있는데 연구
자가 말하는 다원적 접근법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첫째, 주제적인 측면에서 「역설」이라는 다소 범위가 큰 연구 주제를
그 아래에 몇 개의 구체적이고 서로 다른 소주제를 통해 구현한다. 예를 들
면 종교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차이에 따른 인식의 갭(gap)을 다룬
「아담의 사과/ 뉴튼의 사과 (Adam’s Apple / Newton’s Apple)」 연작,
대중민주주의에 대한 양가적 관점을 다룬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Demagoguery)」,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자역학의 세계와 상
통하는 불교의 절대무(Sunyata). 공(空)의 개념과 자아의 정체성의 문제를
추상회화의 형식을 빌려 다룬 「Something / Nothing」 시리즈의 작업 등
이 그것이다. 즉, 몇 개의 소주제를 통해 이를 포괄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다원적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기존의 회화나 조각, 설치 같은 전통적인 매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회화, 드로잉, 사진, 판화, 렌티큘러, 홀로그램 등의 다 매체를 활용

- v -
한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홀로그램이나 비디오 설치작
업,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활용하는 장치 등도 활용할 계획이었으나,
연구자의 현재 여건상 구현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이는 추후의 연구과
제로 돌리기로 한다. 그리고 향후 연구자의 활동영역은 단순히 앞에서 언급
한 영역 외에 영화, 연기 등으로 확대될 수 있으며, 특히, 한국의 근현대사
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역설의 문제에 대한 집필 및 저술 활
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낡은 이데올로기
대립의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하나의 패러다임을 제
시하는데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연구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종교, 과학, 예술의 조화로운 통섭을 추구
하였으며 이러한 접근법은 비평가 홍가이가 논한 현대사회와 그 문화가 가
지고 있는 분열적, 역설적 속성에 대한 본 연구자의 대안이다.

주요어 : 역설, 양가성,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 코펜하겐해석, 양


자역학, 상보성(complementarity), 연기법(緣起法), 공(空), 아방가르드, 과
학적 세계관, 종교적 세계관, 대중

- vi -
차 례

I. 서론 ······················································································································· 1
1. 연구의 목적 ······································································································ 1
2. 연구의 대상 및 내용 ····················································································· 10
3. 용어의 정의 ···································································································· 13

II. 역설의 의미 ······································································································ 16


1. 서양 학문과 예술의 전통적 총체성 ··························································· 18
2. 고대 그리스 시기의 역설 ············································································· 21
(1) 제논의 역설과 그 의미 ············································································· 22
(2) 역설의 구조 ································································································· 25
3. 빛의 역설적 성질과 양자역학 ····································································· 28
(1) 빛의 이중성 ······························································································· 29
(2) 양자역학의 성립 ······················································································· 32
(3) 코펜하겐 해석 정리 ················································································· 42
(4) 양자역학적 세계와 동양적 세계관 ························································ 44
4. 질 들뢰즈의 역설 ·························································································· 50
(1) 들뢰즈의 의미론 ······················································································· 54
(2) 구조에서 기계로 ······················································································· 56
(3) 기관없는 신체와 주체 ············································································· 58
(4) 양식과 역설 ······························································································· 59

III. 현대미술에서의 역설 ····················································································· 64


1. 뒤샹의 역설 ···································································································· 72
2. 형식주의의 역설 ···························································································· 80

- vii -
IV. 연구자의 작품 분석 ······················································································· 85
1. 칸트의 모델과 연구자의 모델 ····································································· 87
2. 역설의 시각화 ······························································································ 94
(1) M.C.에셔와 르네마그리트 ··································································· 94
(2) 연구자의 접근법 ··················································································· 96
① 역설의 표현 ···················································································· 96
② 다원적 접근법 ················································································ 97
3. 생(生)과 사(死) 그리고 곰팡이 ···································································· 98
(1) 생(生)과 사(死) ······················································································ 98
(2) 곰팡이 ································································································· 100
4. 아담의 사과 / 뉴튼의 사과 ······································································ 105
(1) 기독교와 역설 ························································································· 105
(2) 과학적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 ·························································· 108
(3) 작품 분석 ································································································· 114
5. 민주주의/대중선동 ···················································································· 128
(1) 대중의 역설 ····························································································· 128
(2) 민주주의/대중선동의 시각적 표현 ······················································ 130
6. Something/Nothing-과학과 종교, 그리고 미술 ································· 135
(1) 과학과 불교 ··························································································· 140
(2) 연기법(緣起法)의 과학적 의미 ··························································· 143
(3) 파동함수와 불교 ··················································································· 147
(4) 불확정성의 원리와 상보성 ································································· 148
(5) Something / Nothing의 시각적 표현 ··········································· 150

V. 결 론 ··············································································································· 160
참고문헌 ··············································································································· 164
Abstract ·············································································································· 169

- viii -
참 고 도 판

도판 1. 영(Young)의 이중 슬릿 간섭 모양 30
도판 2. 양자화된 전자의 에너지 방출 및 흡수 모형 33
도판 3. 여러 오비탈의 모양 및 방향 37
도판 4. 슈뢰딩거 고양이의 역설 실험 40
도판 5. 앙리 마티스, 「생의 기쁨」, 1906 69
도판 6.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여인들」, 1907 69
도판 7. 마르셀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1912 70
도판 8. 뒤샹, 「샘」, 1917 74
도판 9. 앤디 워홀, 「브릴로 박스」, 1964 77
도판 10. 제프쿤스, 「강아지」, 2015 79
도판 11. 잭슨 폴록, 「페인팅 no.30」, 1950 79
도판 12. 케네스 놀란드, 「Every Third,」 1964. 81
도판 13. 도날드 저드, 「Haning soft and standing hard」, 2015 83
도판 14. 칸트의 모델 90
도판 15. 연구자의 모델 90
도판 16. M.C. 에셔, 「그림을 그리는 손」 94
도판 17. 르네 마그리트,「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29 95
도판 18. 렌티큘러의 작동원리 120
도판 19. 양안시차와 렌티큘러 121
도판 20. 원뿔 단면 153

- ix -
작 품 도 판

작품 1. 98
「탄생(Birth)」, 104 x 70Cm, UV print on Canvas, 2011

작품 2. 101
「곰팡이(fungi)」, pen on paper, 2004

작품 3. 102
「곰팡이(fungi)」, 71.7 x 91.0 Cm, UV print on canvas, 2004

작품 4. 102
「곰팡이(fungi)」, 71.7 x 91.0 Cm, UV print on canvas, 2004

작품 5. 103
「곰팡이(fungi)」, 71.7 x 91.0 Cm, UV print on canvas, 2004

작품 6. 104
「곰팡이(fungi)」, 71.7 x 91.0 Cm, UV print on canvas, 2004

작품 7. 118
「Adam’s Apple/ Newton’s Apple」,
Oil on Canvas, 116.7x91.0Cm, 2017

작품 8. 119
「Adam’s Apple/ Newton’s Apple」,
UV Print on Canvas, 91.0x71.7Cm, 2017

- x -
작품 9. 123
「Adam’s Apple/ Newton’s Apple」,
Lenticular Acrylic, 91.0x71.7Cm, 2017

작품 10. 124
「Adam’s Apple/ Newton’s Apple」,
Lenticular Acrylic, 80x80Cm, 2017

작품 11. 126
「벤야민의 방」, 설치, 2017

작품 12. 130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 Demagoguery)」,
Lenticular Acrylic, 104x70cm, 2017

작품 13. 131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 Demagoguery)」,
UV print on canvas, 125.3x83.2Cm, 2017
작품 14. 132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 Demagoguery)」,
UV print on canvas, 125.3x83.2Cm, 2017

작품 15. 132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 Demagoguery)」,
UV print on Acrylic Plates, 125.3x83.2Cm, 2017

- xi -
작품 16. 133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 Demagoguery)」,
UV print on Acrylic Plates, 125.3x83.2Cm, 2017

작품 17. 151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1993

작품 18. 151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1993

작품 19. 152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1993

작품 20. 152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1993
작품 21. 152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1993

작품 22. 152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1993

- xii -
작품 23. 154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1993

작품 24. 154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1993

작품 25. 154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1993

작품 26. 154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1993

작품 27. 155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1993

작품 28. 155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1993

작품 29. 156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2017

- xiii -
작품 30. 156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2017

작품 31. 157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2017

작품 32. 157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2017

작품 33. 158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2017

작품 34.. 158
「Something/Nothing」,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88x109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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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 론

1. 연구의 목적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는 인간의 정신영역을 종교, 과학, 예술의 세
가지 영역으로 분리했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와 미셸 푸코는 이를 서구
모더니즘의 시작으로 보았고, 미술의 영역에서 형식주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 역시 모더니즘의 기원을 칸트로 보았다. 이들 세 영역이 각각 독
립적이고 자율적인 논리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이 모더니즘 논리의 핵심이
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법은 인간의 정신이 서로 다른 세 영역의 산술적 총
합과 같다는 명제를 전제로 한다. 그 결과로 본래 상호 분리될 수 없는 총
체로서의 인간의 정신은 비평가 홍가이의 표현대로 온전한 “자존(integrity)
을 유지하기 어려운 파탄”에 처하게 되었다.1) 그리고 그는 이러한 파탄상
태를 모더니즘의 역설로 보았다.
이 연구는 칸트 모델이 가지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세 영
역이 각각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영역과 더불어, 서로 공존하며 통섭하고,
상호 영감을 주는 교집합의 영역이 함께 존재하는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하
는 것을 첫번째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이 대안을 찾아가는 논리적 과정과
연구자의 자전적 경험이 상호작용을 통해 시각화된 지난 20여 년에 걸쳐
‘역설(Paradox)'을 주제로 제작된 일련의 드로잉, 회화, 사진, 렌티큘러 및
설치작품을 분석하여 이에 대한 학술적 의미를 검토해 관객과의 소통을 원
활하게 함과 아울러 향후 연구자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것을 그 두
번째 목적으로 한다.
역설(Paradox)의 사전적 정의는 “상식과 모순되거나 혹은 반대의 의
미를 가지지만 참인 진술”을 말하거나,2) “참인 전제로부터 명백히 합리적
인 추론과정을 거쳤지만 모순되거나 혹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결론
에 도달한 진술”을 의미한다.3)

1) 홍가이, 『현대미술문화비평』, 미진사: 서울, 1987, p 17.


2) Merriam-Webster, Retrieved 8 Nov 2017.
3) Oxford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Retrieved 21 June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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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과 관련되어 최근 자주 언급되는 것이 ’양가성‘이다. 양가성이라
는 용어는 스위스의 심리학자 블로일러 (E. Bleuler)가 「양가성에 대한 강
연 (Vortrag Über Ambivalens)」라는 논문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4)
정신분석적 의미로 동일한 대상, 사람, 상황에 대하여 서로 반대가 되는 감
정과 경향, 태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사랑과 증오, 복종과
반항, 쾌락과 고통, 금기와 욕망 등의 감정 상태가 공존하는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5) 따라서 이 양가적 상황은 모순율, 배중률, 동일률을 기
반으로 하는 서양의 전통적 형식 논리학의 관점에 모순된다. 이처럼 상호
대립 되는 두 인자 사이의 논리적 모순 관계는 따라서 역설적 관계로 치환
될 수 있다. 감정뿐만 아니라 논리에서도 양가성의 경우는 이율배반적인 성
격을 띤다는 측면에서 역설의 한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사회학자 김광기는 이러한 양가적, 혹은 역설적 상황을 현대사회가 가
지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로 보았다.6) 그리고 현대사회가 가지는 불명료
성, 불확실성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특징을 정의하기에
앞서 우선 서양의 현대화 과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평가 홍가이
는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를 인용하며 “중세의 무지와 미신에서
해방된 새롭고 평등한 자유인들의 세상을 세우려는 의지의 역사가 현대화
(modernization)”라고 보았다.7) 이러한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의지한 합리
성의 추구는 그때까지 서구사회의 모든 의식구조를 지배하던 교회와의 힘
겨운 투쟁을 초래했으며 과학기술과 산업기술의 발전은 그간 항상 인간을
위협했던 가난과 결핍으로 인간을 해방시켜 주기도 했다.
베버는 합리성의 개념을 크게 합목적적(Purposive), 정형적(formal),
그리고 논술적(discursive)라는 세 가지로 구분했다.8) 그는 이러한 세 국면
을 ‘합목적적 합리성(Zweckrationaliät, purposive rationality)’으로 통칭

4)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문학비평용어사전』, 서울:국학자료원, 2006.


5) 같은 글.
6) 김광기, 「양가성, 애매모호성, 그리고 근대성 – 알프레드 슈츠의 ‘전형성 개념’의 응용연
구」, 한국사회학 제 37집 6호, pp 1-32, 2003.
7) 홍가이, 『현대미술문화비평』, 미진사: 서울, 1987, p 16.
8)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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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 정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과정에
서 나타나는 논리로서 현대국가의 경제적, 행정적인 운영의 효율성을 증대
시키는 논리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보았다. 합목적적 합리성은 여러 가
지의 복잡한 상황들, 인간의 경험, 행위 믿음, 그리고 지식들에 대한 체계
있고 정리된 질서를 부여하려는 의지를 상징한다.9)
특히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는 과학과 이성의 발달을 통해 인
류는 도덕을 발달시켜왔으며 앞으로도 더 진보하게 될 것으로 예측한다.10)
예를 들면 서구에서 과학적 합리성이 발달 되기 이전의 종교의 시대에 행
해졌던 마녀재판에서는 ‘물에 의한 재판(trial by water)’이 종종 행해졌다.
마녀로 의심되는 여인에 돌에 매달아 물에 빠트려 익사하면 보통 인간이므
로 무죄가 되며, 떠오르면 마녀라 판단되었으므로 화형에 처했다. 마녀재판
에 처해 진 여성은 물에 의한 판결의 결과에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밖
에 없었다. 또한, 종교의 시대에 권장 혹은 옹호되었던 노예제도는 가장 비
인간적인 제도로서 인간이 다른 인간에 행한 최악이 착취였으며 학대였다.
합리적 이성과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마
녀사냥은 중단되었으며, 산업혁명 이후에는 생산 과정에서 증기기관과 같은
내연기관의 발전과 더불어 기계화된 공장 시스템의 도입됨으로써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의존이 줄어들게 되어 결국 노예 해방과 같은 혁신적인 제
도의 개혁을 가져왔다. 이후에도 20세기에는 세탁기와 같은 가전 도구의
발명은 경제학자 장하준의 지적대로 여성 해방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인간의 도덕적 진보와 해방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
은 종교나 거창한 이념보다는 합리적인 이성과 과학기술 발전의 결과였다
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다.
이성과 과학의 발달은 사회 제도의 변화를 촉구하고 인간의 해방을

9) The growth of Zweckrationaliät does not lead to the concrete realization of


universal freedom but to the creation of an ‘iron cage’ of bureaucratic
rationality from which there is no escape.
Max Weber,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trans by Talcott
Parsons , New York, 1958, p 182. 여기서는 홍가이, 같은 책, p 17.
10) 마이클 셔머, 김영주 역, 『도덕의 궤적』, 바다출판사: 서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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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화 한다. 따라서 셔머가 주장하는 과학과 합리적 이성의 발달이 인류의
도덕적 진보에 기여 해왔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예측은 다분히 합리적
이라 할 수 있다.11)
그런데 사회의 합리성이 증대되고 발전하면 할수록 지식 체계나 사회
시스템의 유지, 그 사회의 경제적, 행정적 효율성 유지 자체가 목적이 되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즉 목적과 수단이 역전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
이다. 누구를 위한 지식, 질서, 효율성인가에 대한 회의와 극심한 관료주의
속에 인간이 다시 노예가 되어버리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12) 홍가이는
이를 현대사회의 ‘합리화의 역설(paradox)’이라 칭했다. 게다가 현대의 과
학, 기술, 공업의 발전은 앞에서 언급한 풍요로움과 편리함과 더불어 대기
와 수질, 해양 오염을 통한 환경파괴의 재앙을 야기했다. 생화학무기를 포
함한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의 발전은 인간의 멸종을 초래할 수 있게 되
었다. 또한, 대량 생산되고 대량 소비되는 경제체제는 새로운 시장 논리를
만들어 인간의 취미, 취향에 까지도 영향을 미쳐 본래의 필요나 정신성의
추구와는 관계가 먼 삶의 방식을 현대인들이 강요당하고 있으니 이 또한
현대화의 역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화의 역설은 결국 인간 그리고 대상에 대한 인식의 명료성과 확신
성의 결여를 초래했다. 사회학자 김광기는 이러한 이유로 현대사회의 특징
을 ‘불명료함’과 ‘불투명함’으로 보았고, 따라서 양가성(ambivalence)과 이
에 기인한 애매모호함(ambiguity)을 현대사회를 인식하기 위한 키워드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현대사회의 특징이 사회 구성원인 현대인들에
게 영향을 미쳐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상호 구성원들의 상호작
용, 즉 인간관계를 이해하는데도 애매모호성이 침투해 들어오게 된다고 보
았다.13) 그는 알프레드 슈츠(Alfred Schutz)의 전형성(Typification)이라는
개념을 논의의 준거로 설정한다. 양가성과 애매모호함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11) 셔머는 인간의 도덕성 향상에 기여 하는 과학적 이성과 합리성에 기반을 둔 방법론을
도덕과학이라 칭했다.
12) 홍가이, 같은 책, p 17.
13) 김광기,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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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척점에 있는 어떠한 전형(stereotype)이 있어야 하며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도 기존의 전형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슈츠가 말하는 전형성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토마스 쿤(Thomas
Kuhn)이 제시한 패러다임(paradigm)의 개념과 흡사하다. 기존의 패러다임
은 현존하는 하나의 전형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패러다임은 새로
발견되거나 제시된 현상이나 사태를 설명하는 데 한계를 보일 때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아직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체계로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의 전형성이 도전을 받으며 위기
상황에 봉착하게 되고, 이와 함께 어떠한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애매
모호함과 더불어 양가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결국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체할 만한 어떠한 새로운 시도가 더 설득력을 얻는다
면 이러한 전형의 전환이 마치 혁명처럼 급속히 이루어지는데 쿤은 이를
패러다임 쉬프트라 칭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이 일어나기 전의 기존의 것과 새것이 경쟁
하는 상황인 역설적 상황을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철학자 중 하나인 프
랑스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또한 주목했다. 그에게 있어 역설은 단
순한 논리적 파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인식능력의 일반
적이고 상식적인 사용, 즉 틀에 박힌 정형화된 사용을 벗어나게 함으로써
인간의 능력을 한 단계 도약시키고 그 이상을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
장했다. 즉 역설을 통해 인간은 그가 사로잡혀 있는 고정된 기존의 사고방
식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주체는 고정된 양식(bon sens), 상식 혹
은 공통감각(sens commun)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주체다. 이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수많은 의미의 계열들을 자유로이 떠다니며 형성되는 주체로
그는 이를 노마드적 주체라 칭했다. 이처럼 역설은 대상을 바라보는 틀을
허물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긍정적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는 역설을
통해 사유의 정주(定住)를 피하고 동질적이지 않은 두 항의 만남이 이루어
질 수 있고, 이 만남이 계열화되며 또 다른 계열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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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새로운 만남을 사유하게 됨으로써 기존 관념체계의 전복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논리적 파국상황인 역설, 양가성은 종종 새로
운 돌파구, 혁명을 낳으며 예술에 있어서 아방가르드의 출현을 예고하는 조
건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들뢰즈의 역설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플라톤적 이데아를 전제로
한 동일자의 논리에 기반을 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데아와 현상계로 세계
를 구분하는 서양의 이원론에서는 항상 이데아, 원본은 모범이고 절대선이
고 현상은 그것의 모방이며 열등한 것이었다. 따라서 현상을 모방한 회화와
같은 모든 모방, 재현, 혹은 시뮬라크르는 더더욱 열등한 것이라는 위계질
서가 있었다. 그는 이러한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유용한 틀 중의 하나로 역
설을 보았다.
반면에 서양과 전혀 다른 문화적 패러다임에 속해있는 동아시아의 전
통사상에서는 고정불변하는 이데아를 상정하지 않고 따라서 이데아와 현상
계를 구분하는 이분법을 취하지도 않는다. 또한, 데카르트적 인식 주체와
객체의 분리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동양에서는 인간은 우주, 자연과 구분된
것이 아닌 이들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주의 모든 속성을 가지
고 있는 소우주라고 보고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은 항상 변화한다는
일원론을 기반으로 한다. 구체적으로 노자(老子)는 도덕경의 첫 구절에서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라 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
실을 제외하고 모든 것, 모든 법칙은 변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또한,
초기 불교의 기본 교리인 삼법인(三法印)중 첫 번째인 제행무상(諸行無常)
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14)
근대 서양의 데카르트에 의해 확립된 ‘주체’라는 개념은 인식 주체인
인간과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분리해 보는 관점이지만 동아시아에서 인간은

14) 삼법인의 두 번 째는 모든 것은 서로 원인과 결과로 얽혀져 있어 다른 것과 분리된 고


정불변한 자기 동일성을 갖는 현상이나 사물 그리고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 제법
무아(製法無我)다. 이를 통해 불교에서는 고정 불변한 자기정체성, 즉 아상(我相, Atman)
을 부정하는 무아(無我, Sunyata)의 개념이 있다. 그리고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깨닫고
일체의 탐욕과 노여움 어리석음이 소멸된 평온한 마음의 상태가 삼법인의 세 번째인 열
반적정(涅槃寂靜)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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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한 부분이므로 결코 분리되어 다루어지지 않았다. 20세기 초부터
서양의 탈근대론자들이 주체의 해체에 골몰하였던 문제가 동양 전통사상에
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플라톤의 이원론에 전제
를 두고 있는 들뢰즈의 역설에 관한 논의는 준거의 틀이 전혀 다른 일원론
에 전제를 두고 있는 동아시아의 문화에 기계적, 도식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동양 문화권에 속해있는 한국인 철학자, 예술
가들에게는 서양과는 다른 새로운 준거의 틀이 필요함을 일깨워 준다.
동아시아 문화에서는 항상 변화하는 현상이나 사태가 가지고 있는
양가적, 역설적인 성격을 동시에 제시해 본질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빛이 있으면 항상 어둠이 있고, 음(陰)이 있으면 양(陽)이 있다는
식의 접근법이 그것이다. 영어의 crisis에 해당하는 위기(危機)라는 단어도
상반되는 의미를 가진 위험(danger,危險)과 기회(opportunity,幾會)가 공존
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특정한 사태에 대한 본질적이고 직관적인 의미
를 전달한다. 또한, ‘화가 복이 된다’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사자성어
는 동양적 사고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종종 역설적 표현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반야심
경의 한 구절인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조차도 논리적으로
보면 역설이며 널리 알려진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는 구절 또
한 역설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과 세계를 지배하는 원
리, 진리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면 언어는 기표와 논리를 토대로 이루어진
기호체계에 불과하므로 당연히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동양 사상
에 큰 영향을 준 불교에서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며
이러한 한계를 초월하는 커다란 깨달음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20세기 초 확립된 양자역학은 이러한 동양적 인식방법과 상
통하는 면이 많다. 빛이 입자이며 파동일 수 있다는 역설(파동입자 패러독
스)과 원자 내부 전자(電子)의 위치와 그 움직임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
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뉴튼역학과 맥스웰 전자기학을 기반
으로 한 기존의 고전 물리학계를 뒤흔든 혁명적 사건이었다. 물리학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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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양자역학이 체계를 갖춰가면서 기존의 뉴튼 역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
러다임이 형성되었다. 양자역학을 확립시킨 닐스 보어중심의 코펜하겐 학파
들은 세계를 둘로 나누는 이원적 입장을 견지한다. 가시적인 세계를 지배하
는 뉴튼 역학의 세계와 양자역학이 적용되는 미시적인 양자의 세계를 나눈
것이 그것이다. 우주왕복선이나 탐사 로켓의 궤도, 군사적 목적의 탄도학이
나 다리는 놓거나 고층의 건물을 건설하는 건설현장에서는 여전히 뉴튼역
학이 사용된다.15) 규모가 큰 대상일수록 뉴튼 역학의 정확도는 더 높아진
다. 이렇게 과학계에서는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낡은 패러
다임이라고 해서 무조건 버리지 않으며 주어진 조건하에 정확히 적용되는
물리 이론을 선택적으로 적용한다.
물리학자 막스 보른의 해석에 따르면 양자의 세계에서 전자는 그 존
재가 중첩상태(superposition)라 불리는 상태로 존재하다가 측정 혹은 계측
기구나 다른 빛에 접촉하는 순간 결어긋남(decoherence)현상을 일으키며
하나의 입자가 된다. 따라서 전자라고 정의할 수 있는 입자는 측정하기 전
에는 존재한다고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없다. 단지 파동함수를
통한 수치적 확률로 존재하는 상태일 뿐이다. 그것이 그 전자 자체를 제외
한 우주의 모든 요소, 예를 들면 가이거 계수기와 같은 계측 장비 등과 접
하는 순간 파동의 결이 어긋나는 결어긋남 현상이 발생하면서 입자처럼 행
동한다. 전자라는 것의 정체성은 측정 전에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측정
후에야 명확하게 입자라 할 수 있다. 서양의 전통 논리학의 방식으로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으며 불교에서 말하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행위를 보
인다.
잘 알려진 전자나 소립자의 위치와 운동속도는 동시에 측정할 수 없
다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적성의 원리와 더불어 닐스 보어는 상보성의 원
리(complementarity) 라는 것을 통해 이 현상을 설명한다. 상보성이란 자
연계는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반드시 이와 짝을 이루
는 대립 되는 개념을 사용해야만 대상을 제대로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을 뜻

15) 뒤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가시 세계에서의 뉴튼 역학은 양자역학의 근사치이다.

- 8 -
하는 말이다. 이는 앞서 예로 든 위기(危機)라는 단어처럼 논리적으로 상반
되는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현상의 본질을 보여주는 아시아
의 사고방식과 매우 유사하다.16) 따라서 양자역학적 접근법은 앞에서 예를
든 상호 대립 혹은 역설관계에 있는 쌍을 제시해 대상에 대한 본질 파악을
보다 용이하게 해준다. 특히 닐스 보어나 슈뢰딩거같은 양자역학과 직접 관
련이 있는 과학자들은 동양의 사상 특히 불교철학과 양자역학이 상호 영감
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역설적 상황은 토마스 쿤이 말한 패러다임 전환, 혹은 혁명의 상황을
만들어 내고 때때로 들뢰즈의 분석처럼 사태나 현상에 대해 새롭고 자유로
운 의미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기존의 관행들을 전복할 수 있게 한다. 예술
분야에 발현한 이러한 상황은 아방가르드로서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에서
이러한 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역설은 때때로 앞에서 예를 든 위기
라는 단어처럼 대상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
에 제시하여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려는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방
식은 닐스 보어가 제시한 상보성의 원리와 상응한다. 특히 아인슈타인에 의
해 미래의 종교로 언급되는 불교에서는 모순을 초월하는 본질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역설적 표현이 활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연구자는 20세기 초 새로 성립된 물리학계의 양자역학적 세계관과,
불교를 필두로 한 동양 철학의 교집합에 주목하며 이를 시각예술로 표현하
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서양의 칸트의 모델에 대한 연
구자의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 종교, 과학, 예술의 세 가지 정신영역이 공
유하는 교집합의 영역과 각각의 자율적인 영역이 공존하는 것이 연구자의
모델이다.
그리고 이를 미술에서 구현하는 과정에서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학파의 방법론처럼 연구자는 뉴튼역학이 상징하는 거시적 세계와 양자역학
이 상징하는 미시적 세계로 대상을 나누어 다른 접근법을 취한다. 거시세계
의 현상, 즉 인간과 사회 현상을 다루는 문제는 사실적인 양식을 취한다.

16)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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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사진을 눈에 보이는 세계에 대한 하나의 관찰 및 측정 도구로
사용하여 드로잉과 판화, 회화, 그리고 렌티큘러 작업에 활용한다. 반면에
이러한 미시세계에 작용하는 추상적 원리에 관한 사유나 인간의 정신, 마음
의 문제를 다룰 때는 양자역학에 상응하는 추상적 접근법을 취한다.

2. 연구의 대상, 내용 및 방법
역설이라는 주제는 연구자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얻은 깨달음을
계기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던 것이다.
2장에서는 연구자의 작품에 대한 분석에 앞서 다음과 같은 이론적
고찰 단계를 거친다. 첫째, 우선 역설의 의미와 역사를 살펴본다. 고대 그
리스부터 현대까지 역설의 정의와 개념을 살펴보고 역설이 발생하는 구조
적인 특성을 분석해 본다. 둘째로 물리학에서 빛의 역설적 성격인 입자설과
파동설에 관련한 논쟁, 그리고 양자역학의 등장 과정을 상세히 고찰한다.
특히 물리적 대상을 두 가지로, 즉 거시적 세계와 양자의 세계로 나누는 코
펜하겐 해석은 연구자의 세상을 보는 방식과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양
식, 즉 사실주의적 양식과 추상적 양식을 같이 구사하는 영감의 원천이 된
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토마스 쿤이 지적한 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배적 패러다임이 빛의
이중성이라는 역설의 발견을 통해 위기에 처함과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
한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양자역학의 성립과정을 과학사적 관점에서 고찰해
본다. 20세기 초 과학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은 지식사회 전반에
큰 파급력을 미쳤다. 이는 결국 현대 철학에도 영향을 끼쳐 주체의 해체와
더불어 기존 데카르트식의 근대적 자아에 대한 해체작업이 행해지며 포스
트모던시기를 연다. 이러한 맥락에서 질 들뢰즈의 의미론과 역설의 개념을
공시적인 관점에서 고찰해 보고 현대사회에서 역설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
를 생각해 본다.
3장에서는 현대미술에서의 역설에 대해 고찰해 본다. 기존의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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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기에 처했을 때 등장하는 여러 징후 중의 하나는 이를 부정하며 등장
하는 새로운 시도들이다. 미술에서는 이를 아방가르드라 칭한다. 페터 뷔르
거에 의해 명명 되어진 역사적 앙방가르드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평가되
는 뒤샹을 중심으로 그의 아방가르드가 가진 성격을 살펴본다. 뒤샹의 레디
-메이드와 는 반미학적, 반미술적, 반관습적 예술의 선두에 서서 미술과 연
관된 여러 개념들을 하나씩 거부하거나 혹은 해체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그는 레디메이드 제시 이외에 언어유희, 여성으로의 분장, 패러디, 인
용, 차용등의 작업을 보여 줌으로서 기존 미술의 개념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의 혁신적인 시도는 1950년대 60년대의 네오다다부터
현재의 제프 쿤스등의 작가들에게 오히려 하나의 확립된 자기표현 양식으
로 활용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처음의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미술의 표현 방식 및 어휘를 확장시킨 선구자의 역할을 한 것이다.
20세기 미술에서 또 다른 큰 축을 이루는 존재론적 실재(ontological
reaslity)를 추구한 그린버그식의 형식주의 미술은 추상표현주의, 색면추상,
프랭크 스텔라를 정점으로 미니멀리즘에서 자체 논리의 모순 즉 역설적
상태를 맞게 된다.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는 그의 에세이 ‘조각에
대한 소고(Notes on Sculpture)’에서 미니멀리즘 조각은 주변 환경과 시
간, 그리고 관람자의 지각이라는 작품 외적인 요소의 개입이 필연적일 수밖
에 없음을 증명했다. 따라서 미술 자체의 형식적 완결성을 구현하려 한 그
린버그식의 형식주의도 결국 논리적 파국을 맞게 된다. 서구의 미술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모더니즘의 자율성의 신화를 적극적으로 해체하
며 다원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현대미술이 가진 역설적 상황은 이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신할 만
한 다양한 아방가르드적 시도들을 낳는다. 이들 중 특히 형식주의 모더니즘
과 뒤샹은 닐스 보어의 표현처럼 상보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4장에서는 3장의 성과를 바탕으로 우선, 홍가이가 언급한 현대화의 역
설 중 인간의 총제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인간의 정신을 종교, 과학,
예술이라는 세 가지 영역으로 분리해 분열적으로 만들수 밖에 없었던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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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관점에 대한 연구자의 대안을 제시한다. 칸트 모델을 대체해 인간의 유
기적이며 통합적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연구자의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델에 바탕을 두고 연구자의 작품을 분석한다. 연구자
는 마이클 셔머가 근대화 과정에서 과학이 공헌한 인류의 도덕적 진보에
대한 구체적 예를 근거로 그가 과학적 합리성이 인류의 도덕적 향상 또한
가져온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굳이 서양의 기독교처럼 인격식, 유일신 절대
자를 상정하지 않더라고 인간의 합리적, 과학적 접근법만으로도 도덕적으로
진보할 수 있다는 믿음에 동의하는 것이다. 또한, 물리학계에서는 이미 양
자역학과 불교의 유사성에 주목해 관련 연구가 있었다. 양자역학의 세계와
불교의 연기론(緣起論),공(空), 과 무아(無我)의 개념과의 비교를 통해 양자
역학적 해석을 도덕과 종교의 영역까지 연관시켜 보려한다.17)
이러한 일련의 통합적 시도들은 연구자의 작품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
다. 가시적 세계엔 여전히 뉴튼역학을 적용하고 양자의 세계에는 양자역학
을 적용하는 코펜하겐 학파의 해석에 영감을 받아 연구자는 양식적으로 이
원적 접근법을 취하며 다원적 매체를 선택한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세계,
인간사회의 문제를 다룰 때는 사실주의적 접근법을 취하며 비 가시적 추상
적 개념과 원리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접근할 때는 추상적 접근법을 취한다.
가시적 세계의 관측장비라 할수 있는 사진과 X레이 사진, 렌티큘러, 설치등
이 회화와 드로잉, 판화 작품과 아울러 제시된다.
연구자의 일련의 시도들은 또한 연구자 개인의 구체적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기도 하다. 역설이라는 대주제 아래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소주제
를 갖는다. 첫 번째로 사과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연구자 개인의 일상의 세
세한 사실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동일한 대상인 사과가 바라보는
이의 세계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상황을 제시한다. 이 소주
제를 통해 과학적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의 대립에 대한 철학적 논쟁들을

17) 연구자의 신념체계를 굳이 현재의 종교의 영역과 비교한다면 불교 철학과 가장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학문적 관심과 신념체계에 관한 것에 국한된 것이며 절에가서 불상
에 절하고 복을 비는 일반적인 기복 행위는 배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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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고 이를 시각화한 방법, 매체, 그리고 작품에 대해 기술한다. 둘째,
민주주의/대중선동의 경우는 대중민주주의의가 가지는 위험을 상기시키는
작품들로 대중과 대중사회가 가지고 있는 양가성을 분석한다. 셋째,
Something/Nothing 연작은 물리학의 관점, 즉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불교
를 해석하고 불교가 가진 과학성을 분석한다. 양자역학과 불교와의 비교 분
석을 통해 불교의 연기법, 공, 그리고 무아의 개념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자의 작품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마지막 5장에서 결론을 통해 본 연구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3. 용어의 정의
① 모던(Modern)
백낙청이 지적했듯이 영어의 modern은 시기적으로 볼 때 한국어의 근대
와 현대 모두로 번역되는 난점이 있다.18) 그 어원인 modo(바로 지금) 라는
라틴어가 시사하듯이 지금, 당대의 의미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근대나 현대
나 서양에서는 고대와 구별되는 the Modern Age의 일부이고 다만 좀 더
가까운 시기가 현대라고 일반적으로 해석한다면 무리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또한, modern은 시기적 구분뿐만 아니라 서양 역사가 근대로 이행하는 과
정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문화적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일본의 경우 영어의 modern을 근대(近代)라는 용어로 한정시켜 사용
한다.
그런데 미국 뉴욕의 Museum of Modern Art(줄여서 MoMA) 와 프
랑스의 퐁피투 센터의 Musee d’Art Moderne가 ‘modern art’라는 용어
를 우리말의 현대미술에 상응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현대를 일본어의 근대를 대체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도 무방하리라 본
다.19) 그리고 영어의 ‘컨템포러리(contemporary)에 해당하는 말은 ’당대

18) 백낙청, 「문학와 예술에 있어서 근대성 문제」, 『서울대학교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제 3회 학술토론회 자료』, 서울: 서울대학교, 1993, p 4.
19) 원영태, 「한국현대미술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미술이론전
공 석사논문, 2000, p.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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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代)‘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될 것이다. 본 연구에서 연구자의 논점은 20
세기 초반에 확립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를 일반
적으로 현대 물리학이라 칭하며 미술의 영역에서도 비슷한 시기의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같은 개념도 일반적으로 현대미술이라는 테두리 아래 사용되
므로 modern을 현대로, modernization을 현대화로 사용하기로 한다. 참
고로 서론에서 언급한 미술 비평가 홍가이 또한 그의 원 저서에서 ’모던‘을
’현대‘ 로 번역했음을 밝혀 둔다.
② 코펜하겐 해석
코펜하겐 학파는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그, 막스 보른 등의 과학자들
로 지칭되는데 이들의 대부격인 닐스 보어가 덴마크 사람이고 코펜하겐에
서 거주하기에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양자역학에 대한 이들의
해석을 코펜하겐 해석이라 한다. 김성구에 따르면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20)
첫째, 코펜하겐 해석은 세계를 전자와 같은 소립자, 원자가 속하는 미시세
계와 측정장비가 속하는 거시세계로 구분한다. 거시세계는 고전역학의 법칙
을 따르며 미시세계는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른다.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의
대상을 파동함수로 기술하며 파동함수는 관찰자가 대상에 얻을 수 있는 모
든 정보를 담고 있다.21)
둘째, 미시적인 대상과 거시적인 대상(측정도구)와의 상호작용을 관찰이라
정의한다. 가이거 계수기 같은 측정도구 자체가 훌륭한 관찰자라는 것이 코
펜하겐 해석의 기본입장이다. 그러나 폰 노이만 같은 이는 양자역학의 관찰
자는 반드시 인간과 같은 의식을 지닌 존재이어야 한자도 주장한다. 노이만
의 주장도 코펜하겐 해석 중의 하나이다.
셋째, 관찰이 실행되기 전에는 미시세계에서 존재는 모든 가능한 상태에 ’
동시에’ 존재한다. 이를 중첩상태(superposition)이라 하며 관찰은 파동함
수를 붕괴시켜 관찰자는 위치나 속도중 단 하나의 측정 값을 확인할 수 있

20)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p. 222-224.
21)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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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를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라 한다. 그리고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개별적인 지점에서 개별적 파동함수의 값은 그 지점에서 입자가
발견될 확률을 나타낸다. 그런데 관측이 이루어지면 계를 교란시킬 뿐만 아
니라 관찰 결과를 만들어 낸다.
넷째, 관찰(측정)은 파동함수의 붕괴(collapse of wave function)를 야기
한다. 이를 통해 결어긋남(decoherence)가 일어나며 전자나 소립자는 마치
입자처럼 행동하게 된다.
다섯째, 고전역학은 양자역학의 근사이론에 해당한다. 양자세계에 대한 양
자역학적 기술은 그 물리적 대상의 크기가 거시세계에 가까워짐에 따라 그
에 대한 고전역학적 서술과 가까워진다.

③ 상보성의 원리
닐스 보어에 따르면 미시세계에 속하는 원자나 소립자들은 파동-입자
의 이중성을 보인다. 이중성을 갖는 미시세계의 현상은 반드시 상호 보완적
인 쌍(set)의 물리량으로 기술된다. 서로 상보적인 한 쌍을 이루는 두 개의
물리량은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할 수 없다.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
에서 보이는 현상을 보어의 관점에서 풀이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④)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
데카르트적 인식론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여
기에 대상에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이 있을 경우는 주체=대상 이 성립되
므로 논리적 모순이 일어난다. 본 논문에서 예시된 이발사의 역설, 양자세
계에서의 관찰자의 측정이 미치는 영향, 그리고 미술의 영역에서 로버트 모
리스가 지적한 미니멀리즘에서의 관객이 관람의 주체로 전시공간에 참여하
는 경우 모두가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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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역설(Paradox)의 의미

역설(Paradox)은 그리스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 말로서 ‘반대’의 의미


를 가진 ‘Para’와 ‘의견’을 의미하는 ‘Dox’의 합성어이다. 서론에서 언급했
듯이 일반적으로 상식과 모순되거나 혹은 반대의 의미를 가지지만 참인 진
술을 말한다.22) 그런데 특히 어떤 명제가 그 부정명제와 함께 논리상 동등
하다고 생각되는 논거를 갖고 주장되고 있는 경우를 이율배반(二律背反,
antinomy)이라고 하며 종종 역설과 동의어로 쓰인다. 이러한 일반적인 정
의 외에 이 장에서는 연구자가 가지는 역설의 의미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근거를 밝히기로 한다.
이 논문의 서론에서 본 논문의 목적은 인간의 정신영역을 종교, 과학,
예술의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눈 칸트의 모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라 발혔다. 세 영역으로 분열된 인간의 정신영역이 가지는 역설을 극복하고
세 영역이 공존하면서도 각각의 존립이 가능한 하나의 총제적이고 유기적
인 인간 정신의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형식논리에서
의 역설만이 아닌 서구의 학문, 예술의 전통 전 분야에 걸쳐 역설이 차지하
는 역할과 그 의미를 살펴봐야 하는 난제를 가진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
구하고 여러 제반 분야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역설에 대하여 연구자는 크
게 두 가지 철학적 함의를 부여한다.
첫째, 거시적인 관점에서 역설은 새로운 시도와 해결책을 찾기 위한
하나의 동력을 제공한다. 이러한 관점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과학사의 전개
를 하나의 패러다임의 전개 과정으로 본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의 해석을
제반 학문 및 예술의 역사에 적용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패러다임
이 새로운 상황이나 문제해결에 한계를 보이고 역설에 처할 때 그 패러다
임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이러한 역설을 해결하고 문제를 해결할 새로
운 시도들이 등장하게 되고, 그중 가장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설 혹은 이론체계가 일련의 검증과정을 거쳐 그 유효성이 지속적으로 입

22) Merriam-Webster, Retrieved 8 Nov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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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되면 마치 혁명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된다. 서양의 논리학, 수학
철학, 과학, 예술의 역사 전반에 걸쳐 역설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
에 선행했다.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진행된 양자역학의 형성
과정은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논리학과 물리학의 관점
에서 볼 때, 빛이란 대상이 입자와 파동 두 가지의 성질을 모두 가진다는
것은 고전 물리학 체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역설이었다. 이 입자파동역
설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서 빛과 양자세계에 대한 이론과 이를 검증할
수 있는 실험들이 시도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전물리학의 패러다임
이 급속히 붕괴되고 혁명적인 양자역학적 체계, 즉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
된 것이다. 같은 시기에 미술에서도 기존의 양식(style)이 새로운 시대정신
을 담을 수 없다고 판단될 때 여러 가지 새롭고 혁명적 시도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 시기에 진행된 페터 뷔르거의 용어로 ‘역사적 아방가르드’라 불리
는 일련의 혁신적인 운동이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둘째, 미시적 관점에서 볼 때 역설은 대립 되는 개념이 하나의 쌍으로
서 제시되어 대상이나 현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전통
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음양(陰陽), 위기(危機)라는 단어처럼 두 가지 서로
대립 되는 즉 역설관계가 형성되는 말이 서로 쌍을 이루어 대상의 가지는
본질적 의미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동
양의 노장사상이나 혹은 불교 철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과학에서
는 20세기 양자역학의 확립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코펜하겐 학파의 수
장 닐스 보어가 이러한 대립적 두 요소가 쌍을 이루는 관계를 상보성
(complementarity)의 원리라고 정의하였다.
상보성은 “자연현상은 하나의 고정된 개념만으로 결코 기술할 수 없
고 반드시 이 개념과 짝이 되는 대립 되는 개념을 함께 사용해야만 사물을
제대로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3) 특히 보어는 상보성을 언급하
며 동양의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에서의 인식론을 참고해야 함을 지적했다.24)

23)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 213.
24) Graham Smethan, 박은영 역, 양자역학과 불교, 서울: 홍릉과학출판사, 2012, p.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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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전통적 형식논리에서 벗어난 이러한 접근법은 특히 포스트 모던의
대표적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질 들뢰즈가 주장하는 역설의 개념과도 상
통하는 점을 가진다. 특히 질 들뢰즈의 인식론에서 말하는 역설은 연구자의
관점에서는 미시적인 관점에서 정형화된 사고의 틀을 타파하며 동시에 새
로운 가능성을 열어 거시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기
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장에서는 칸트의 분화주의적 모더니즘이 가져온 인간 정신영역의
분열과 모순을 회복시키기고 그 총체성의 회복을 위한 첫 단계로 다소 피
상적일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고대 그리스로부터 칸트 이
전까지 학문 및 예술이 지녀온 총체성을 우선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특히
수학과 논리는 서양학문 방법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도구로서 이 안에서 발
견되었던 몇몇 중요한 역설을 살펴볼 것이며, 이후 논리학과 물리학 그리고
현대철학의 영역에서 나타난 역설을 검토해 연구자가 이 연구의 목표로 했
던 과학과 종교가 상호 영감을 주고 통섭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만들기
로 한다.

1. 서양 학문과 예술의 전통적 총체성.


고대 그리스에서 논리는 철학의 핵심이었다. 철학은 philosophy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치 및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추구를 의미했다. 칸트에 의해 정의되고 분화된 인간의 정신영역과 마찬가
지로 오늘날의 학문은 현대화 과정을 통해 다수의 분화된 개별과학으로 존
재한다. 반면에 고대 그리스 때부터 철학은 총체적 의미에서의 학문을 의미
했다.
총체적 학문으로서의 철학에서 수학과 논리학은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플라톤의 아카데미 교육에서도 이 둘은 가장 중요한 과목들이었
고, 이 전통은 종교의 시대인 중세의 대학교육에서도 자유칠학과(seven
liberal arts)에도 이 둘은 존속하며 서양 학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통
이 된다. 특히 철학의 한 분야로서 18세기까지 자연철학(nat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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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이라 불리던 자연과학은 논리와 함께 수학을 그 방법론의 핵심
으로 한다. 자연철학은 그 이후 물리, 화학, 생물 등의 개별과학으로 분화
되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수학과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자연에 대
한 경험적 세계를 다루는 과학적 방법론은 이후 인간사회를 연구하는데도
적용되었다. 사회학은 초기에 social physics라고도 불리기도 했는데 이후
연구대상에 따라 사회학, 경제학, 등의 개별과학으로 분화되었다.
플라톤은 고정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진정한 진리의 세계요 실체
(reality)로 보았고 이 세계는 수학적, 기하학적 원리가 지배한다고 믿었다.
실체는 모든 물체의 불변하는 원형, 즉 진정한 형상 혹은 형식(form)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수사학을 통해 언어를 매개로 하여 세계에 대한 실체를
파악함에 있어 엄격한 형식논리를 거쳐 보편타당한 결론을 얻어내려 했다.
이러한 전통 아래에서 자연철학에서는 가변적이고 때때로 변덕스러우며 불
안정한 자연의 현상(phenomenon)에서 고정불변하는 보편타당한 법칙을
수리적 모델로 설명하려 했다. 이러한 수리적 모델은 formula(공식)로 불린
다.
자연철학자 뉴튼은 가시적인 세계에서의 움직임을 위치와 시간과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를 수식으로 표현했다. 가장 유명한 뉴
튼역학 공식 중의 하나인 힘을 가속도와의 질량의 관계로 F= ma 로 표시
했고, 등 가속도 운동에서 거리와 속도, 시간과의 관계를 V=½at²등의 수리
적 모델로 표시하고 전자기파의 운동도 맥스웰이 수학적 방정식으로 설명
한다. 이후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 내부의 전자, 빛의 세계를 다루는 양자
역학에서도 슈뢰딩거는 방정식을 통해 물질파를 수리적 모델로 설명했다.
사회과학에서도 통계를 활용한 양적 접근법(quantitative methodology)이
보편적이고 특히 현대 경제학에서 수리 경제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렇
듯 수학과 논리에 바탕을 둔 방법론은 서양 학문의 가장 큰 특성이다.
제반 학문뿐만 아니라 피타고라스를 위시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름다
움과 예술을 논함에 있어서도 수학적, 기하학적 원리에 맞는 비율
(proportion), 특히 황금비, 그리고 대칭(symmetry) 등을 이상적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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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보편적 기준으로 삼았다. 이러한 요소를 갖춘 것만이 실체(reality)를 담
은 진정한 형상(form)으로 여겼다. 완벽히 좌우 대칭을 이루고 8등신을 이
루는 이상적 여신상과 남신 조각상은 고대 그리스 예술작품을 대표한다. 이
후 르네상스에 완성된 투시원근법에서도 기하학적 원리가 핵심이었다. 근대
에서는 후기인상파 세잔느가 시각적 현상(phenomenon)에 대한 피상적인
인상만을 추구한 인상파에 반대해 모든 사물은 구, 원기둥, 육면체 등의 기
하학적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며 본질적 형태를 추구한 것은 이러
한 고전적 전통에 부합한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 형태 구형을 위한 노력은
이후 입체파를 거치며 20세기의 기하학적 추상으로 전개되며 이후 미니멀
리즘에 까지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실은 수학적, 기하학적 질서와 형
태(form)로 표현되고 이러한 원리가 시각적으로 구현되었을 때 아름다움이
된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부터 수학적 논리적 접근법은 진실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있어 핵심수단이었다.
음악에 있어서도 피타고라스는 그 본질을 수(數)와 비례라고 정의했
고, 하프를 직접 연주하고 소리를 분석해본 결과, 하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조화롭게 나올 때는, 하프 현의 길이나 현에 미치는 힘이 일정한 정
수비례 관계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25) 즉 한 옥타브는 1:2의 비, 5
도음은 2:3 의 비를 이룬다는 것 등인데, 최성우는 고대 그리스의 5도 음률
에 기초한 피타고라스의 음률이 곧 오늘날 우리가 음정이라 부르는 것의
기원이며, 음향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고 본다.26) 또한, 화음과 진동수의
관계를 보면, 이른바 순정음률에서는 으뜸화음인 도, 미, 솔, 버금딸림화음
인 파, 라, 도, 딸림화음인 솔, 시, 레의 진동수 비율이 모두 정확히 4:5:6
의 정수비가 되도록 이루어져 있다.27)
순정음률에서는 모든 음정이 정수비로 되어있는 대신에, 음과 음 사이
의 진동수 간격은 일정하지 않고 약간씩 차이가 있게 된다. 이를 보완하고

25) 최성우, 「한국과학기술 정보원(KISTI)의 과학향기 칼럼」, 2005년 2월 16일,


여기서는 네이버 지식검색 참조. (검색일시: 2018년 10월 10일)
26) 같은 글.
27)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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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프랑스의 메르센과 독일의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등이 평균율을 발전시켜서 이후에는 거의 모든 서양 음악이 이를 따르게
되었다. 평균율에서는 음정과 다음 음정 사이의 비율 간격이 약 1.06으로
모두 일정하고, 현재까지 모든 피아노에 사용되며 일정한 악기로 어떠한 조
로 바꾸어도 균등한 울림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28) 그러나 평균율
음계에서는 진동수 비율이 완전한 정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엄밀한 화음은
약간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29)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이의 전통을 이어받은 서양의 학문과 예술에서
는 이처럼 본래 인간의 정신영역이 모두 수학과 논리학에 기반한 하나의
유기적이며 총체적인 그 무엇으로 파악하는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이츠 (John Keats,1795~1821) 가 지은 시 ‘그
리스 화병에 바치는 송가(Ode on a Grecian Urn)의 다음 구절에는 이러
한 개념이 잘 나타나 있다.

“Beauty is truth, truth beauty,” that is all ye know in earth,


and all ye need to know.
“아름다움은 진실이고, 진실은 곧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그대들이 아는 전부이고 알아야 할 전부이다.

진리와 아름다움을 같은 것이라 하고, 이를 또한 도덕적 선과 연결시켜 삼


위일체를 만든다. 이러한 총체성은 고대 그리스 전통의 가장 큰 특징이다.

2. 고대 그리스 시기의 역설
고대 그리스의 역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제논의 역설이다. 파르
메니데스의 제자로 알려진 제논은 특히 수학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증명방
법인 귀류법을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귀류법은 명제 ‘A가 B이면
C는 D이다.’라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하여 A는 B일 때, ‘C는 D가 아니다.’

28) 최성우, 같은 글.
29)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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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것을 참으로 가정해 이것이 모순임을 입증해 간접적으로 원래의 명제
가 참인 것을 증명하는 간접증명법이다.30)
이 단원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제논의 역설과 그 해법을 통해 역설
이 가지고 있는 역할과 그 의미를 알아보고, 일부 순환 논리가 갖는 역설의
구조와 그것이 가지는 철학적 함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제논의 역설과 그 의미


제논이 제시한 몇 가지 역설은 아리스토 텔레스 등을 통해 전해져 온
것으로 반분의 역설, 아킬레스의 역설, 화살의 역설, 그리고 스타디움의 역
설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역설은 무한의 문제에 대한 수학적 인식이
확립되기 전에 나온 것으로 수학에서 무한의 개념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
① 반분의 역설(2분법)
제논은 움직임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도착점에
도달하려면 중간지점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 중간지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중간지점을 또한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무한 반복하면, 결
코 출발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 역설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점은 크기를 갖는다.’라는 견해
를 포기하고 ‘점은 위치만 있고 면적(크기)이 없다’라고 생각하면 선분 AB
사이에 무한히 많은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A와 B 사이를 운동하는데 무한
한 시간이 소요되지 않게 되어 역설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 역설의 해결을 위해 유클리트 기하학에서 점에 대한 새로운 정의
를 하고 이를 증명이 필요 없는 공리로 삼는 결과를 가져온다.
② 아킬레스의 역설
아킬레스는 가장 빠르게 뛸 수 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도 제논에
따르면 그보다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아킬레스가 거북이

30) 김지예, 「각종 역설의 이해」,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수학전공 석사학위 논문, 2008, 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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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출발점에 도달하였을 때 거북이는 이미 앞으로 나아갔고 또 아킬레스가
그 다음 거북이의 위치에 도달 하였을 경우에도 거북이는 이미 그 지점을
지나쳐 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무한히 반복해 보면 아킬레스는 논리적으로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역설은 19세기에 발견된 무한급수의 간단한 응용으로 해결
할 수 있다. 아킬레스가 100미터를 달리는데 10초가 걸린다고 가정하자.
이때 아킬레스가 100미터를 달려가서 거북이가 있던 지점까지 오는데 10초
가 걸린다고 하자 이사이에 거북이는 10미터 앞으로 나아가 있다. 아킬레
스가 다시 10미터를 따라오는데 1초가 걸린다. 이때 거북이는 1미터를 또
전진해 있다. 아킬레스가 1미터를 따라가서 거북이가 있던 곳에 까지 오는
데 10분의 1초가 소요된다. 이렇게 계속 반복된다고 가정할 때,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격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모두 합하면
10+1+(1/10)+(1/100)+(1/10000)+....
이 급수의 합은 10/1-(1/10) =100/9= 11.111 초 걸리게 된다.31)
그리고 아킬레스가 가야할 거리의 합을 더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그 거리들의 합은 고작 111m 남짓이다. 따라서 아킬레스가 자신의


출발점으로부터 112m만 달려도 거북이를 앞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거북

31) 김지예,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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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불과 12m도 못간 지점이다.32)
직관적으로 아킬레스가 거북을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느끼
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제논은 논리적으로 이 시간을 무한한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역설의 난제를 던진 것이다.
③ 화살의 역설
쏜 화살은 움직이든가 아니면 멈춰있던가 둘 중의 하나다. 만일 화살이
움직인다면 어느 순간의 시작점인 동시에 어느 순간의 끝점의 위치에 놓여
져야 한다. 이것은 순간을 분할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므로 모순이 된다. 따
라서 화살은 정지해 있어야만 한다.
이 화살의 역설은 ‘시간은 크기가 없는 순간의 모임이다’는 가정을
버리고 ‘시간은 연속적으로 흐르는 것이다. 시간은 분할이 가능하다.’고 새
롭게 정의한다면 간단히 모순이 해결된다. 화살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
고 한다면 화살이 움직인 시간과 거리는 비례하게 된다.
다시 말해 t1을 1초라 하면 t2=1/2, t3는 1/4, t4는 1/8, t5=1/16 이다
따라서 이들의 합을 구하면 1+1/2+1/4+1/8+1/16+... = 1 =2
1-(1/2)
실제로 2초 후면 이 화살은 과녁에 도달하게 된다.33) 이러한 제논의 역설
들은 극한이라는 수학적 개념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요구하게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제논의 역설들은 수학 분야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것들


이다. 이들 역설은 수학사에서 볼 때 제논 사후 2000년이 지난 후에 뉴튼
같은 과학자와 수학자들에 의해 무한과 극한(limit)의 개념을 통해 해결되었
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역설은 이렇게 새로운 해결책, 개념을 생성시키
는 일종의 촉매 역할을 한다거나 혹은 ‘점은 위치만 있고 크기가 없고, 선
은 폭이 없고, 면적은 두께가 없다’라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를 낳게 했
다.

32) 김지예, 같은 글.
33)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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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설의 구조
기원전 6세기의 크레타 섬의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다음과 같
은 진술로 순환논법 패러독스를 처음 소개했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은 진술을 유도한다.
①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 인이다.
② 따라서 그는 거짓말쟁이다.
③ 거짓말쟁이가 말한 말은 거짓말이고
④ 따라서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라는 말이 된다.
⑤ 거짓말쟁이가 아닌 그가 한 말은 진실이다.
⑥ 그러므로 모든 크레타인이 거짓말쟁이라는 말은 참이 된다.
이 말은 다시 ①의 진술로 연결되어
① 그는 크레타 인이다.
② 따라서 ‘그는 거짓말쟁이다.’ 로 연결되어 무한 순환되는 논리가 된다.34)
그런데 이 진술이 순환논리가 되는 이유는 에피메니데스 자신이 크레
타인이라는 것, 즉 본인이 말하는 대상에 포함된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말하는 주체, 즉 본인이 스스로 대상 혹은 객체가 되는 계에 속하
게 되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역설이 발생한다.
이와 유사한 이발사의 역설을 살펴보자. 어느 마을에 이발사가 단 한
사람만 있다고 가정하자. 이 이발사는 자기가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사람들
만 면도해 주겠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발사 자신의 면도는 누가
하는가? 만일 그 이발사가 자신이 스스로 면도한다면 자신의 원칙을 따르
지 않는 것이 된다. 또한, 만일 그가 스스로 면도를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
신의 원칙에 따라 면도를 해야 한다. 두 가지 중 어느 경우에도 모순이 된
다.35) 이러한 진술은 이렇게 의미론적으로 역설이 된다.

34) 김지예, 「각종 역설의 이해」,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수학전공 석사학위 논문, 2008, p.
7.
35) 같은 글, p.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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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역설의 원인은 이발사라는 주체와 이발하는 사람들이란 객체가
분리됨 없이 이들 모두를 전체 상황에 포함 시켰을 때 발생한다. 만일 주체
인 이발사가 그를 제외한 사람들을 객체, 즉 대상으로 하여 이들에만 국한
된 규정으로 선언한다면 이러한 논리적 역설은 없었을 것이다. 이 이발사가
만든 규정은 본인 자신을 포함하는 자기지시성, 혹은 자기 언급
(self-reference)를 가지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역설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다.36)
에피메니데스의 경우와 이발사의 역설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주체A
와 객체B는 같지 않다. 즉 A≠B이다. 그런데 A=B이어야만 하는 자기지시
적(self-referential) 상황이 만들어 짐으로써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
러한 상황은 역설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그렇다면 주체와 객체가 완전히 분리된 데카르트식의 근대적 관점에
서는 문제가 될 수 없는 부분이 자기언급(self-referece)을 가질 때 필연적
으로 나타나는 논리의 역설은 자연계에서 무엇과 연관될까?
예를 들어 대중 목욕탕의 물의 온도를 수은 온도계로 측정하면 온도
계 자체의 온도는 충분한 물의 양이 있는 욕조에 큰 영향을 주지 않기에
물의 온도를 측정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만일 측정하고자 하는
온수의 양이 10cc정도에 불과하다면 측정을 위해 차가운 수은 온도계를 담
그면서 온수는 차가운 온도계로 열에너지를 빼앗겨 처음보다 낮은 온도가
될 것이고 측정온도도 실제보다 낮아지게 된다. 즉 측정하는 대상이 충분히
작아지면 수은 온도계로 측정하는 실험자, 즉 주체의 행위 자체가 적은 양
의 온수의 온도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하게 된다.
대상의 크기가 점점 작아져 빛이나 혹은 전자의 세계를 다루는 양자
역학적 체계에 들어가면서 측정이라는 행위가 가지는 문제는 더더욱 두드
러진다. 측정하는 주체의 행위 자체가 계에 영향을 주어 하이젠 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말하는 것처럼 측정의 한계를 보여준다. 즉, 데카르트적
주체와 객체의 분리와는 달리 양자역학적 세계에서는 주체가 객체인 대상

36)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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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상호분리되지 않고 상호연관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바로 이러한 이유
로 미세한 세계 내에는 전통적인 서양의 논리체계와 절대공간, 절대시간을
전제로한 뉴튼역학 체계가 적용되지 않게 된다.
대상의 위치와 속도라는 두 물리량의 파악하고 이를 수학적 모델로
도식화하여 이를 바탕으로 대상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는 고전적인 접근
방법은 빛과 전자 등의 소립자를 다루는 양자의 세계에서 한계를 맞게 된
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을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물리량의 측
정값을 구해야 하지만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측정하려는 기구에서 발사하는
빛이 대상이 되는 전자 등의 소립자에 영향을 주는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
문이다. 즉 측정자로서의 주체와 대상으로서의 객체가 상호 작용하는 상태
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데카르트적 인식론에 대한 근본적인 붕괴로
이끈다.
17세기 르네 데카르트식의 주체, 객체 분리 이후 대상으로서의 객체
는 주체에 의해 분석되고, 따라서 통제될 그 무엇이 되었다. 이러한 근대적
인식론은 특히 물리와 화학 부문에 두드러진 자연과학 혁명으로 이어졌으
며 자연을 통제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인식하게 했다. 이러한 결과는 이후
산업혁명으로 이어졌으나 양자역학의 성립과 더불어 이러한 접근법이 한계
를 맞게 되는 것이다.
크레타인 역설과 이발사의 역설에서 형식논리에서 구조적으로 역설을
만드는 자기지시성을 발견할 수 있다. 자기지시성은 형식논리 뿐만 아니라
실제의 물리적 대상을 다루는 양자역학에도 적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주체와 객체는 상호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계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기본적으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전제하고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로하는 고전역학과 완전히 다른 조건
을 바탕으로 하기에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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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빛의 역설적 성질과 양자역학
자연의 보편타당한 질서와 법칙들을 탐구하는 자연과학의 분야에서 가장
대표적인 역설은 “빛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빛은 파동이면서도 입자
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서양 전통 논리학에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 중의 하나가 배중율이다. B 와 C가 같지 않을 때 A=B 이거나 A=C
일 수 있지만, A=B 이면서 동시에 A=C 가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근대까지 서양의 모든 학문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논리적 원칙위에
이루어진 집적체다. 따라서 논리학의 핵심 원칙 중의 하나인 배중율을 벗어
난 빛의 이중성에 대한 실험적 입증은 20세기 물리학계뿐만 아니라 인류
지성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빛은 입자이며 동시에
파동이고, 물질이며 동시에 에너지라는 역설적 사실이 그것이다. 물리적 실
체인 빛과 전자의 움직임에서 발견된 이러한 이중성은 기존의 고전 물리학
체계를 뒤흔든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19세기까지 가시적 세계의 사물의 움직임은 시간과 위치 혹은 거리의
관계로 표시하는 뉴튼 역학을 사용해 설명했으며 이를 통해 모든 사물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었고 그 사물의 미래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기와 자기적 현상은 맥스웰의 파동 방정식을 이용해 설명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이론체계를 합해 고전 물리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빛
의 성질에 관한 실험을 통해 이러한 고전 물리학 체계로는 일관되게 설명
할 수 없는 빛의 이중성을 발견하게 되고 이러한 역설을 해결하는 과정에
서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게 된다. 이 장에서는 빛의 입
자파동역설에 관련된 여러 실험과 논쟁을 살펴보고, 이 역설을 해결하는 과
정에서 등장하는 양자역학의 패러다임 형성과정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37)

37) 이 장의 내용과 체제는 다음과 같은 저서를 참고했음을 밝혀 둔다.


James T. Cushing, 송진웅역, 『물리학의 역사와 철학』, 서울:북스힐, 2006.
김유신, 『양자역학의 역사와 철학』, 서울:이학사, 2012.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다케우치 가오루, 김재호, 이재호 역, 『양자론』, 서울:전나무숲, 2010.
장상현, 『양자물리학은 신의 주사위 놀음인가』, 서울: 컬쳐룩, 2014.
한스 라이헨바흐, 강형구 역,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 서울:지식을 만드는지식,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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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빛의 이중성
빛에 관한 이론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아랍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이븐 알 하이삼이다. 그는 1021년에 발간된 『광학의 서(Book of Optics)』
라는 저서에서 빛이 가지고 있는 굴절과 반사하는 특징을 설명하며 빛이
입자라고 주장한다. 이후 1625년 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는 파동을 연구했
던 네덜란드의 과학자 스넬이 발견한 스넬의 법칙을 빛에 적용해 설명했다.
그는 매질의 변화에 따른 빛의 굴절 현상을 파동으로서도 설명해 내었고
이를 통해 빛의 파동설이 등장한다.
당시 물리학의 최고의 권위자 아이작 뉴튼(Isaac Newton)은 그의
저서 『광학(Optics)』에서 빛은 연속적인 입자의 흐름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입자설을 지지한다. 그러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티안 호이겐스
(Christiaan Huygens)와 용수철의 탄성을 연구했던 로버트 훅(Robert
Hooke)은 여전히 빛의 파동설을 주장했으나 당대의 대학자 뉴튼의 입자설
에 밀려 빛의 파동설은 소수 의견에 머물렀었다.
그런데 1801년 영국의 물리학자 토마스 영(Thomas Young)은 빛을
이중 슬릿에 통과시켜 파동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간섭무늬를 검출해 뉴튼의
이론을 반박했다.38) 파동은 간섭(interference)과 회절(diffraction)을 보여
주는 특성이 있다. 빛이 이중 슬릿을 통과하면서 두 개로 갈라져 파동이 보
여주는 상호 보강간섭, 상쇄간섭 현상 동반하는 회절 무늬를 보여준다. 이
로써 빛은 파동이라는 설이 유력해지기 시작한다.39)
이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은 그가 만든 방정
식을 풀면 파동은 항상 일정한 수치가 나오게 되는데 이 수치가 당시 피코
와 푸조가 실험적으로 산출한 빛의 속력과 동일 하다는 것을 1865년 「전자
기장의 역학이론」을 통해 입증한다. 이로서 빛의 파동이론이 확립된다.40)

38)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 182.
39) 장상현, 『양자물리학은 신의 주사위 놀음인가』, 서울: 컬쳐룩, 2014, pp. 80-85.
40) James T. Cushing, 송진웅역, 『물리학의 역사와 철학』, 서울:북스힐, 2006. p.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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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 영의 이중슬릿 실험 간섭 모양 (출처:wikepedia.com)

19 세기말에는 산업혁명의 필요와 제국주의 시대에 늘어난 엄청난 군


수용의 철을 생산하기 위해 대규모 제철작업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따라서
제철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대량 생산을 위한 제철기술이 필요하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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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특히, 용광로의 고온을 측정하기 위한 장치를 필요하게 되었다. 과학
자들은 과거 도자기를 구울 때 온도에 따라 물체의 색깔이 변한다는 경험
적 사실에 착안해 고온의 물체는 빛을 방출한다는 사실과 온도에 따라 그
빛의 파장이 다르며 다는 사실을 발견했다.41) 1893년 돌일의 빌헬름 빈
(Wilhelm Wien)은 흑체복사(black body radiation)라 불리는 실험을 통해
물질은 특정한 파장을 최대값으로 한 모든 영역에 걸친 전자기파를 복사한
다는 빈의 변위의 법칙(displacement law)을 발견한다.42)
영국의 물리학자 레일리(Rayleigh)는 맥스웰이 기체분자운동론을 다룰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통계역학을 활용하여 빈의 변위의 법칙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낮은 에너지 단계에서만 설명이 가능하고 에너지가 높은, 즉
파장이 짧은 자외선의 영역에서는 복사 에너지가 무한대로 향하는 자외선
파탄을 경험하게 된다.43)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작은 모닥불이나 난로
불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그 무한대의 엄청난 에너지로 인해 모두 타서 재
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00년 12월 독일의 막스 플랑크는 특정한 상수를
대입해 빈의 변위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설명해 내었다. 그리고 일정한 상수
의 곱으로 나타나는 에너지의 값을 발견하고 전자의 에너지는 아나로그 시
계처럼 연속적인 단계를 걸치는 것이 아니라 계단처럼 불연속적인 양자화
(Quantification)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44)
이러한 플랑크의 양자 가설은 20세기에 아인슈타인을 통해 획기적인
도약을 하게 된다. 헤르츠는 광전효과라는 실험을 통해 특정한 진동수와 에
너지를 넘어서는 주파수를 금속판에 쬐면 그 금속판에서 전자가 튀어나가
는 현상을 발견한다. 빛이 파동이라면 특정한 진동수보다 낮은 주파수의 빛
을 쬐더라도 충분히 오랜 시간을 쬔다면 전자가 튀어나와야 하는데 그런
현상을 일어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프랑크의 양자 가
설을 바탕으로 빛을 입자로 생각한 광양자(photon) 모델을 발표한다.45) 그

41) J.P. 매키보이, 이충호 역, 『양자론』, 서울:감영사, 2001. p. 33.


42) 같은 글.
43) 같은 글, p. 34.
44) 만지트 쿠마르, 이덕환역, 『양자혁명: 양자물리학 100년사』, 서울:까치글방, 2014. p.43.
45) 장상현, 『양자물리학은 신의 주사위 놀음인가』, 서울: 컬쳐룩, 2014, pp. 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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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빛은 한 덩어리 당 E = hf(플랑크상수 곱하기 진동수)만큼의 에너지를
갖는다고 보았고 특정한 에너지 이상을 넘어가면 조금만 빛을 비춰도 전자
가 튀어나가고 특정한 진동수 이하는 아무리 강하게 그리고 오래 빛을 쬐
어도 전자가 튀어 나가지 않는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
다.46) 그러나 이 역시 당시 물리학계에서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의 아서 컴프턴은 엑스선을 금속에 쬐어서도 광전효과가 발생한다
는 것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다. 그 후 엑스선을 전자와 충돌시킨 뒤 그 에너
지를 확인한 결과 에너지가 감소한 것을 발견했다. 에너지의 차이만큼이 전
자를 튕겨내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파동이라면 차이가 없어야
했다. 이를 컴프턴 산란실험이라 하는데 이를 통해 빛의 입자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47)
물리학계에서는 전통적으로 빛의 입자성과 토마스 영의 이중슬릿 실험
을 통해 보여지는 간섭무늬에서 볼수 있는 파동성을 모두 받아들여 빛이갖
는 이중성(duality)을 인정해야만 했고, 하나의 일관된 이론체계안에 이를
통합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48) 고전역학은 붕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2) 양자역학의 성립
빛의 이중성과 양자론의 대두와 더불어 토마스 쿤의 설명대로 기존 고
전 물리학의 패러다임은 위기 단계를 넘어서 빛과 원자 내부의 세계에 대
해 더 이상 설득력을 상실한 파국의 상태에 도달한다. 따라서 20세기 초
과학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빛의 역설적 성질을 일관된 체계하에
설명해야 하는 난제를 깨달았다. 이들은 전자의 움직임 방식을 포함한 여러
원자 모델을 고안해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려 했다.

46) 장상현, 같은 책. 이 업적으로 아인슈타인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47) 김유신, 『양자역학의 역사와 철학』, 서울:이학사, 2012. p. 72.
48) 김유신,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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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2> 양자화된 전자의 에너지 방출 및 흡수 모형
(출처:www.kdsg.hs.kr)
맥스웰에 의해 확립된 이론에 따르면 전자는 움직이기만 해도 전자
기파를 방출하며 에너지를 잃게 된다. 그렇다면 전자는 필연적으로 에너지
를 잃고 핵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어 원자는 붕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닐
스 보어는 전자는 복사에너지를 전혀 방출하지 않고도 여러개의 특별한 궤
도 중 하나에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49) <도판2>에서 보여지듯이 이러한
궤도는 여러 에너지준위(Energy Level)을 가지며 전자는 외부로부터 에너
지를 흡수 혹은 방출 시 이러한 에너지 레벨에 따라 순식간에 점프하거나
내려오는 양자도약(quantum leap)이라는 방식으로 여러 궤도들을 들락 거
린다고 보았다.50) 즉 전자가 정상상태(static state)에서 외부에서 다음 레
벨에 올라갈 만큼의 정확한 에너지를 얻게 되면 점프하여 에너지 준위가
올라가는 (excited state) 상태가 되며 일정량의 에너지를 잃게 되면 다시
아래 레벨로 떨어진다.51) 이는 마치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과 0과 1로 표현
되는 비트(bit)라는 정보 단위처럼 불연속적인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모델
은 기존의 체계와는 달리 수소 스펙트럼 현상에서 특수한 진동수의 빛만을
흡수하는 흡수 스펙트럼과 특정한 진동수의 빛만을 방출하는 선 스펙트럼

49) J.P. 매키보이, 이충호 역, 『양자론』, 서울:감영사, 2001. p. 89.


50) 장상현, 『양자물리학은 신의 주사위 놀음인가』, 서울: 컬쳐룩, 2014, pp. 72-73.
51) J.P. 매키보이, 같은 책. p.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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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었다.
고전 역학에서는 사물의 움직임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확인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이 두 가지
물리량을 통해 과거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고 앞으로의 움직임도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당시까지 집적된 역학이었다. 따라서 원자 내부의 경우
도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데 문제는 전자의 움직임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원자 내부
에서 전자가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전자기파만을 수소 스펙트럼 실험을 거
쳐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하이젠버그는 보어의 전자궤도모형을
포기하고 원리적으로 측정 가능한 원자가 방출 가능한 모든 전자기파의 주
파수와 세기를 수학적 방법으로 정리하여 수학의 행렬(matrix)과 같은 방식
으로 정리했다.52) 전자기파의 진동수를 통해 위치를 유도하고 위치를 통해
운동량을 유도함으로써 고전역학의 필수요소인 위치와 운동량을 행렬로 기
술할 수 있게 된다.53)
하이젠베르그는 그의 행렬(matrix)역학에서 수식으로 이를 유도함에
있어서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위치값을 정밀하게 하려 하면 할수
록 운동량의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이를 일반
용어로 설명하자면 전자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에너지가 높은, 즉 파장이
짧은 빛을 쏘아 그 빛의 반사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게 되는데 아인슈타인
의 광량자 이론에 따르면 빛은 입자성을 띠므로 그 빛에 충돌된 전자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튕겨 나가게 된다. 따라서 입자의 위치는 확인할 수 있지
만 튀어나간 전자의 운동량은 확인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를 방
지하고자 에너지가 낮은 긴 파장의 빛을 쏘인다면 위치를 파악하는데 오차
가 많아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정
할 수 없다. 이를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한다.54) 원자 내부
의 세계에 들어가면 측정하려는 행위 자체가 전자의 움직임을 교란시켜 버

52) 김유신, 『양자역학의 역사와 철학』, 서울:이학사, 2012. pp. 100-113.


53) 같은 글.
54)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p. 206-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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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기 때문에 측정 행위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55)
비슷한 시기에 클린턴 데이비스와 래스틴 거머는 니켈 결정에 수직으
로 입사시킨 광선이 특정한 각도를 기준으로 파동의 성질인 회절을 일으킨
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검증해냈다.56) 이 실험 이후 물리학자들은 전자뿐만
아니라 소립자와 원자들도 입자와 파동성을 모두 띨 수 있다는 것을 확인
했다.57) 이에 자극을 받은 에르빈 슈뢰딩거는 양자현상에 대한 수학적 해
석을 기존의 물리학 체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슈뢰딩거는 그의 방정식을 통해 전자가 파동이라는 간단한 전제하에
보어의 양자 도약뿐만 아니라 하이젠베르그의 행렬역학을 기존의 물리학
체계에서 모두 설명해 냈다.58) 보어를 중심으로 하이젠베르그까지 기본 전

55)
장상현, 『양자물리학은 신의 주사위 놀음인가』, 서울: 컬쳐룩, 2014, pp. 96-104..
56)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p. 184-186.
57)
같은 글, p. 187.
58)1926년 E. 슈뢰딩거가 수소 원자내 전자(電子)의 파동을 기술하기 위해 확립한 방정식
이다.
파동역학에서 계의 운동상태를 나타내는 상태 벡터는 파동함수라는 형태로 표현되는데 슈뢰
딩거 방정식으로 기술된다.
전자의 에너지는 위치좌표 r(x, y, z)와 운동량 p( )를 사용하여 식으로 표시하면 
이 된다.
여기서 m은 전자의 질량, e는 단위전하, r은 양성자와 전자 사이의 거리이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은  를 연산자

로 표기된다.
이 식이 시간에 의존하지 않는 슈뢰딩거 방정식이다.
이 때 전자 파동의 시간변화도 이 H를 써서 i (∂φ/∂t)=Hφ가 되면 시간에 의존하는 슈뢰
딩거 방정식이라고 한다.
즉 파동함수 ¢(ql, …,qf, t)는 계의 자유도를 f라 한다면 일반화 좌표  와 시간 t의
함수이며 f차원 배위공간의 파가 된다.
해밀토니안 H는 고전역학과 대응할 경우 고전 역학의 해밀토니안 H(q, p)이고 운동량  를
-i (∂/∂ )로 치환하여 얻는 연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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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삼은 전자 움직임의 불연속적 속성을 기존의 연속적 속성을 가진 미
분방정식을 활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보어와 하이젠베르그는 전자와 광자 등 원자 내부의 대상에 대해 인
간은 직접 관찰이 불가능하고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전자가 불연속적인 ‘양
자도약’시 방출하는 빛을 스펙트럼 분석한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
다. 따라서 이들은 슈뢰딩거의 방정식은 불연속성을 지닌 대상에 연속성에
전제를 둔 접근법을 취하므로 이미 그릇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비판
했다. 보어가 덴마크 출신인걸 감안 해 이를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한다.59)
특히 막스 보른(Max Born)은 슈뢰딩거 방정식을 확률적으로 해석할 수 있
다는 주장을 하며 전자는 특정한 궤도를 도는 것이 아닌 확률적으로 일정
구역에 구름의 모양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햇다. 이 전자구름은 <도판4> 와
<도판5>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형태를 가지며 이를 오비탈(orbital)이라
칭했다. 즉 양자세계는 확률적으로 나타난다고 본 것이다.60)
물리학계에는 지금까지 지속되는 유명한 회의인 솔베이(Solvay)의
회의가 있다. 제 5회 회의에서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는 보어, 하이젠베르

예를 들면 포텐셜이 V(r)인 역장(力場) 속을 운동하는 질량 m의 입자는 라플라시안 △을 써


서 H=-( /2m)△+V(r)로 기술된다.
이 예와 같이 H가 시간 t를 직접적으로 포함하지 않을 때는 ψ(q, t)= 로 하면 
는 H의 고유값 방정식

를 만족시킨다.
이것이 시간에 의존하지 않는 슈뢰딩거 방정식이다.
φ(q)는 역학계의 성질에 따른 경계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므로 상수 E는 특정한 값  ,  ,
…만이 허용된다.
이를 에너지 고유값이라고 한다.
고유값의 배열을 에너지 벡터, 또는 에너지 준위라고 한다.
고유값은 띄엄띄엄한 경우도 있고 연속적인 경우도 있다.
로 표시되는 상태는 | |2이 시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정상
상태이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23년 L. V. 드브로이가 제창한 물질파 개념을 슈뢰딩거가 기하광학적 유
추를 통해 포텐셜이 있는 경우까지 확장해서 양자상태를 설명한 것이다. W. 하이젠베트크가
확립한 행렬 역학과 형식은 다트나 양자상태를 기술하고 설명한 결과는 같다.
『과학백과사전』,www.scienceall.com/슈뢰딩거파동방정식schrodinger-wave-equation/)
(검색일자: 2018년 10월 23일)
59) 장상현, 『양자물리학은 신의 주사위 놀음인가』, 서울: 컬쳐룩, 2014, pp. 135-139.
60) 같은 글, pp. 10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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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솔베이의 전쟁’이라는 커다란 논쟁을 벌인다.

<도판3> 여러 오비탈의 모양 및 방향 (위에서부터 s, p, d, f 오비탈)


(출처:www.chemistryonline.guru)

보어는 지금까지의 물리학은 측정을 당하는 대상과 측정하는 주체 사


이에 확실한 분리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측정이라는 행위는 기존 대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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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있던 운동상태 및 성질을 재확인한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은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결정론적 상태며 이것을 우리
는 측정이라는 행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원자보다 작은
양자의 세계에서는 측정이라는 행위가 대상을 교란시키기 때문에 측정하려
고 하는 대상과 주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여기에 막스 보른은
한발 더 나아가 측정 대상이 측정 전에 확률적으로 여러 상태로 동시에
존재하는 중첩상태(superaposition state)로 존재하다가 측정이라는 행위가
있음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실제로 존재하게 한다는 파동붕괴(wave
collapse)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61) 따라서 보른은 애당초 전자는 가지고
있는 운동상태는 없다고 보았다.
영의 이중 슬릿 실험을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측정되지 않은
중첩상태인 전자를 이중슬릿에 쏜다면 전자는 슬릿을 통과하면서 파동과
같이 행동하여 이중슬릿 간섭무늬를 만들게 된다. 그런데 이중슬릿에 측정
장치인 가이거 계수기를 부착하고 전자를 쏘면 슬릿을 통과하는 순간 중첩
상태였던 전자는 결어긋남을 일으키며 입자같이 움직이므로 이중슬릿중 하
나의 슬릿 만을 통과하여 간섭무늬를 만들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62)
반면에 아인슈타인은 그가 남긴 유명한 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모든 물리적 현상은 수학적 모델로 확실히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고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상대성이론으로 가장 혁신적인 물리학의 이론체계를 이룩한 그가 이러한
고전적 태도를 취한 것도 역설적이다. 그는 보른의 중첩상태는 물론이고 양
자의 세계가 불연속적인 확률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어
끝까지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만약에 전자가 측정 순간
에 한 점에 모이는 것이 가능하다면 빛보다 빠른 정보 전달이 있어야만 가
능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측정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주 전체에 중첩상
태로 있었던 전자의 정보가 순식간에 한 점으로 모여야 하는데 빛보다 빠

61) 한스 라이헨바흐, 강형구 역,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 서울:지식을 만드는지식, 2014,


p. 57.
62) 장상현, 『양자물리학은 신의 주사위 놀음인가』, 서울: 컬쳐룩, 2014, p.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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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주에서 이런 변화는
존재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물리적 정보가 빛의 속도로 전달되고 이 정보
가 전달된 후 그것에 대한 물리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국소성(locality)이
라고 한다.63) 그리고 한곳에서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을 무시하고 다른 곳에서 즉각적으로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비국소성
(non-locality)라고 하는데 1980년 이후에 확인된 일이지만 아인슈타인의
생각과 달리 미시세계에서는 비 국소적인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다.64)
코펜하게 해석의 지지자들은 전자 자체는 우주 전체에 퍼져있는 것이
아니고, 측정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즉, 특정 기능을 하는 그 무엇을 전자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그것이 입자라는 실체로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솔베이 회의에 참석했던 과학자들은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게 됨으로써
양자역학 해석에 대한 논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달을 예로 들어 “내가 달을 보고 있지 않는 동안
달은 확률적으로 중첩상태로 있다가 내가 하늘을 보는 순간 그 위치에 딱
있는 것인가?”, “내가 하늘을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가? 혹은 내
가 보지 않아도 내 친구가 쳐다보면 그 위치에 존재하게 되는 것인가?”라
는 의문을 제기하며 막스 보른에게 쓴 편지에서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라며 양자역학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성을 지적했다.65) 그
러나 우리는 그가 양자에게 적용되는 물리적 법칙을 우리가 살고있는 가시
적인 세계에 적용한다는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코펜하겐 학파의 거시적 세계와 양자의 세계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는 슈뢰딩거에 의해 도전에 직면한다. <슈뢰딩거의 고양>라
는 가상실험을 통해 그는 양자역학이 가지고 있는 역설을 비판한다.66)

63)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 198.
64) 같은 글.
65) 다케우치 가오루, 김재호, 이재호 역, 『양자론』, 서울:전나무숲, 2010, pp. 49-50.
66) 애덤 하트데이비스, 강영옥 역, 『슈뢰딩거의 고양이』, 서울:시그마북스, 2017, p.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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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4> 슈뢰딩거 고양이의 역설 실험 (출처: 나무위키)

상자에 고양이를 넣고 미시세계에서만 일어나는 방사성 붕괴를 일으


키는 시료를 넣어 둔다. 그리고 이 시료가 한 시간 동안에 50%의 붕괴를
일으킨다고 가정하자. 만약 방사성 붕괴가 일어나면 이를 가이거 계수기가
감지하여 시료 옆에 있는 망치가 작동하게 되며, 그 결과로 시료 옆에 놓아
둔 독극물을 넣은 병을 깨어 고양이가 죽게 되는 장치를 했다고 가정한다.
한 시간 후에 이 고양이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코펜하겐 해석이 맞다
면 방사성 동위원소를 포함한 시료는 관찰하지 않았을 시 붕괴될 확률과
그렇지 않을 확률이 반반인 중첩상태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와 도미노식
으로 연결되어 있는 고양이도 죽어있는 상태와 살아있는 상태가 혼존하는
중첩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역설이 된다.67)
1999년 오스트리아 빈의 안톤 차일링거 교수팀은 슈뢰딩거의 사고실험
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 탄소 60개로 이루어진 축구공
모양의 플러렌(fullerene)구조를 가지고 이중슬릿 실험을 실시해 간섭무늬
를 얻는 성공을 거두었다.68)
그리고 2012년 노벨 물리학자 수상자인 프랑스의 세르주 아로슈
(Serge Haroche)와 미국의 데이비드 와인랜드(Divid Wineland)는 하나의
광자 또는 하나의 원자를 진공상태의 실험장치 안에 두가지 다른 양자 상
태가 공존하는 형태로 가둬 두는 데 성공했다.69) 또 그 상태를 측정해 두

67) 장상현, 『양자물리학은 신의 주사위 놀음인가』, 서울: 컬쳐룩, 2014, pp. 146-149.
68)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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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중 하나가 붕괴되고 하나만 측정되는 현상을 관측했다. 슈뢰딩거가 상
상했던 것을 실헙으로 확인한 것이다.
특히 차일링거가 가시적인 세계에 비하면 미세하지만 전자나 광량자
에 비하면 거대한 이 입자를 가지고 실험에 성공한 것은 주목할 만한 발견
이었다. 이를 통해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특정 조건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것을 결어긋남(decoherence)라고 불린다. 태양광선이나 백
열등에서 나오는 빛은 하나의 광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자 하나하나
가 빛을 내는 수 많은 광원인데 이들은 그 위상 관계가 들쭉날쭉하여 두
파동이 합쳐진다 해도 간섭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이를 ‘결어긋남파동’이
라 부른다. 이 결어긋남 파동을 만났을 때 그 합성파는 간섭무늬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파동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것이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중 슬릿실험에서도 하나의 광원에서 연속적으로 나온 빛들이
서로 결이 맞는다 할지라도 이들이 이중슬릿을 통과한 다음 입자들로 가득
찬 경로를 지나 벽면에서 만나면 간섭무늬를 만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파동
이 다른 입자들이 충돌하면서 그 위상이 조금씩 바뀌면서 연속적으로 벽면
에 이른 두 줄기 빛 사이에 ‘결어긋남’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다른 원자나
소립자도 모두 파동이기 때문에 이들이 많이 모이면 이들 모임에서는 파동
성이 사라진다. 이 해석에 따르면 측정의 주체를 실험자가 아닌 피실험대상
을 제외한 우주 전체로 확대시켰을 때 이러한 역설이 사라진다.70)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에 이 결어긋남이라는 개념을 적용시킨다면 측
정의 주체가 실험자가 아닌 고양이를 제외한 우주 전체라고 할 때 예를 들
면 박스안의 박테리아 한 마리가 그 상황을 인지했다고 할 때 이는 측정이
일어난 것으로 간주하여 고양이는 죽게되며 따라서 패러독스는 해결된다고
본다. 이를 이중 슬릿 실험에 적용해 본다면 전자를 측정하기 위해 가이거
계수기를 슬릿에 장치해 놓으면 이 측정기기 자체가 파동의 특징인 결을
어긋나게 함으로써 간섭현상이 생기지 않게 되는 해석과 마찬가지가 된다.

69) 장상현, 『양자물리학은 신의 주사위 놀음인가』, 서울: 컬쳐룩, 2014, p. 149.


70)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p. 26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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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를 측정한 것은 인간이 아닌 가이거 계수기이며 측정을 당하는 전자를
제외한 전 우주가 측정하는 주체가 된다.
결어긋남(decoherence)이론을 다시 설명한다면 진공상태에서 전자는
아무 방해없이 파동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어떠한 외부의 요인이 개입되면
이 파동의 결을 흩어 놓아 입자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물
질이 갖는 이중성이다.
빛의 이중성이라는 역설은 기존 서양의 논리적 사고 체계로는 받아들
이기 어려운 현상이었기에 물리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솔베이이전쟁이라 불
리는 커다란 논쟁이 있었다.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그 중심의 코펜하겐 학
파가 아인슈타인, 슈뢰딩거의 강력한 반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을 거쳐 빛의 성질에 관한 역설과 가시적 세계와 양자세계를 함께 연
결해 의문을 제기한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이 가지는 역설을 해결하는 과
정을 통해 양자 현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체계인 양
자역학이 성립되었다
토마스 쿤은 이러한 양자역학의 성립과정을 분석해 그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기존 패러다임이 새로 발견된 현상을 설명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위기에 봉착했을 때 새로운 현상을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한 여러 시
도들이 생기기고 이들이 경함해 가장 포괄적이고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
는 체계가 헤게모니를 얻어 마치 혁명과 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
는 과정을 설명했다. 물론 모든 역설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 형성된 패러다임이 성립하는 과정을 보면 반드시 역설이 선
행한다.

(3) 코펜하겐 해석 정리
코펜하겐 학파는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그, 막스 보른 등의 과학자들
로 지칭되는데 이들의 대부격인 닐스 보어가 덴마크 코펜하겐에 거주해서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양자역학에 대한 이들의 해석을 코펜하
겐 해석이라 한다. 김성구는 이러한 해석이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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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했다.71)
첫째, 코펜하겐 해석은 세계를 전자와 같은 소립자, 원자가 속하는 미
시세계와 측정장비가 속하는 거시세계로 구분한다. 거시세계는 고전역학의
법칙을 따르며 미시세계는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른다. 양자역학은 미시세계
의 대상을 파동함수로 기술하며 파동함수는 관찰자가 대상에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
둘째, 미시적인 대상과 측정도구를 포함한 거시적인 대상과의 상호작용
을 관찰이라 정의한다. 가이거 계수기 같은 측정 도구 자체가 훌륭한 관찰
자라는 것이 코펜하겐 해석의 기본입장이다. 그러나 폰 노이만 같은 이는
양자역학의 관찰자는 반드시 인간과 같은 의식을 지닌 존재이어야 한다라
고 주장한다. 노이만의 주장도 코펜하겐 해석 중의 하나이다.
셋째, 관찰이 실행되기 전에 미시세계에서는 존재는 모든 가능한 상태
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를 중첩상태(superposition)이라 한다. 관찰이라는
행위는 파동함수를 붕괴시켜 관찰자는 위치나 속도 중 단 하나의 측정값
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라 한다. 그리
고 시 공간의 각 점에서 파동함수가 갖는 값은 그곳에서 관찰자가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나타낸다. 그런데 관측이 이루어지면 계를 교란시킬 뿐만 아
니라 관찰 결과를 만들어 낸다.
넷째, 관찰(측정)은 파동함수의 붕괴(collapse of wave function)를
초래한다. 이를 통해 결어긋남(decoherence)가 일어나며 전자나 소립자는
마치 입자처럼 행동하게 된다.
다섯째, 고전역학은 양자역학의 근사이론에 해당한다. 양자세계에 대
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그 물리적 대상의 크기가 거시세계에 가까워짐에 따
라 그에 대한 고전역학적 서술과 가까워진다.

(4) 양자역학적 세계와 동양적 세계관


닐스 보어에 따르면 미시세계에 현상은 반드시 상호 보완적인 쌍(set)

71)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p. 22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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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물리량으로 기술된다. 자연현상은 하나의 고정된 개념만으로는 결코 정
확하게 기술할 수 없고 반드시 이 개념과 쌍이되는 대립되는 개념을 함께
사용해야만 사물을 제대로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말이다.72) 보어
의 상보성의 원리에 따르면 우리의 세계는 개념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개념의 세계, 즉 파동성을 가진 세계와 입자의 성질로 설명할 수 있는
두 가지 세계 중 어느 하나의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 세계가 중첩되어 있
다는 것을 뜻한다. 양자세계에 대한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가 정량
적인 설명이라면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는 개념적, 인식론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보다 더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두 가지 대립되는 개념,
즉 역설관계에 있는 음양(陰陽)의 조화에 의해 세계가 움직인다고 보는 것
이 상보성의 개념이다.73)
서론에서 연구자는 위기(危機)라는 단어를 예를 들어 단순한 영어의
crisis의 개념과는 다른 danger를 나타내는 危 와 opportunity를 나타내
는 機를 쌍으로 제시해 어떠한 사태나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동아시아
특유의 사고방식을 언급했다. 애증(愛憎)이라는 감정은 가장 잘 알려진 양
가성을 가진 감정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크기에 사랑받고 싶은 욕구
와 기대가 크고 이를 충족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증오심이 커지는 것이
다. 어떠한 대상을 너무나 증오한다면 분명히 그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못함이 원인이 있는 것으로서 이 또한 분리되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고락(苦樂)의 경우도 고통이 있다면 그것이 없는 상태가 즐거울 수 있다.
고통은 즐거움을 행하지 못함으로 기인한 것이다. 선악(善惡)이라는 개념도
악이 있기 때문에 선함의 의미가 보다 명확해 진다. 이렇게 대립되는, 상호
모순적인 어휘가 하나의 쌍으로 제시되어 특정한 상황에서의 의미를 명확
히 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기존의 물리학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을
필요로 한다. 보어는 양자역학의 이해를 위해 인식론적 전환이 필요함을 주

72) 김성구, 같은 책, p. 213.


73)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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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자역학의 개념적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존재(existence)라는 큰 드라마


에서 관중이자 배우로서의 우리의 위치를 조화시키려고 할 때는, 심리학과
같은 다른 분야의 과학이나 일찍이 부처나 노자가 직면했던 인식론적 문제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74)

이 장의 앞에서 연구자는 이발사의 역설에 대해 설명했다. 한 이발사가 마


을에서 “자신이 스스로 이발하지 않는 사람만 이발을 해준다”는 규칙을 정
했을 경우 자신을 제외한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전혀 문제가 발
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을 그 계에 포함 시킨다면 “본인은 마을의 다른
사람만을 이발해주며 본인 자신이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규칙
에 따라 이발사 본인은 스스로에게 이발을 해줘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즉, 이 이발사가 자신도 이 마을 사람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 진술은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을 가지며, 이 진술은 역설
에 처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이발사가 주체로서 계에 개입을 함으로써
역설관계가 형성됨을 볼수 있다.
양자역학에서도 양자세계에 관찰자 혹은 측정자라는 주체가 개입됨으
로써 여기에는 전자의 파동함수가 붕괴되며 결어긋남이 일어나 전자라는
입자로 관찰되어진다. 전자는 양자세계에서 존재할 확률이 마치 파동처럼
퍼져있는 중첩상태(superposition)로 있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의 실체
로서의 전자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관찰자로 표현되는
측정장치가 개입됨으로써 파동의 성질을 잃는 파동함수 붕괴상태가 일어나

74) or a parallel to the lesson of atomic theory regarding the limited applicability
of such customary idealizations, we must in fact turn to other branches of
science such as psychology, even to that kind of epistemological problems
with wich already Buddah and Lao-tse have been confronted, when trying to
harmonize our position as spectators and actors in the great drama of
existence.
Niels Bohr, Atomic Physics and Human Knowledge, Wiley, New York, 1958, p.
20.
여기서는 김성구, 같은책. p 222.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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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마치 입자인 상태로 관측된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전자라는 실체
는 측정 전, 즉 인식주체의 개입 전에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 무(無)의
상태였다가 측정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면 마치 실제가 있는 입자처럼 행동
하는 것이 관측된다. 관측 후 전자의 상태는 유(有)라고 할 수 있다. 즉 無
가 有가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된 것이다. 이 또한 측정 주체, 인식주체의
개입이 이루어낸 결과인 것이다. 이발사의 역설에서 이발사 자신 즉 주체가
그 계에 포함되는 상황과 마찬가지의 결론이 난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이 일상에 겪는 물리현상과 형식논리로는 접근할
수 없는 상태다. 심지어 상대성이론으로 현대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업적을
남긴 아인슈타인조차도 빛의 이중성과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모든 대상과 물리량은 정확히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고 믿었던 아인슈타인에게 중첩상태라던가 확률밀도함수의 개념은 도
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설명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유로 닐스 보
어는 우리가 미시세계를 기술하는데 적합한 용어와 개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75) 가시적 세계의 물리량이 크기가 현저히 달라진다면
일상 경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물리현상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판명되었
어도 우리는 여전히 가시세계의 언어체계에 의존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
에 아인슈타인에게 조차도 이러한 혼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전자의 실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전자가 처음부터 존재하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중첩상태로 파동함수의 방식으로 존재하다가 관측이
일어나면 결어긋남 과정을 통해 하나의 입자처럼 행동한다. 따라서 전자라
는 실체는 사실은 처음엔 존재하지 않지만,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
하기 위해 만들어 낸 하나의 조작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리 스몰린(Lee
Smolin, 1955~)이라는 물리학자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
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물(things)이 있는 것 같다. 돌맹이나 깡통처럼 그
성질만 나열해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objects)들이 있다. 다른 하나

75) 김성구,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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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과정(process)로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이나 문화 같은 존
재(entities)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전개되는 과정들이다.
세상에는 무엇이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어떤 것
(things)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서서히 변하는 것과 빨리 변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76) 우주가 물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환상은 고전역학
을 구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 현대 물리학의 양대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상대성이론(theory of relativity)과 양자론(quantum theory)은 우주가 과
정의 역사라고 말한다. … 운동과 변화(motion and change)가 주된 것이
다. 근사적이고 임시적인 뜻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사건들의 우주는 관계론적인 우주(relational universe)
다. 모든 성질은 사건들 사이의 관련성을 통해 서술된다. 두 사건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인과관계다.77)

인과관계라는 것은 대상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인과관계를


우주까지 확대해보자. 우주의 나이는 유럽우주국이 2013년 4월 그간 관측
한 결과를 토대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약 138억 년정도라고 한다.78) 관측
가능한 우주의 반경은 빛이 138억년 걸려서 달리는 거리보다 더 크게 된
다. 왜냐하면, 우주는 계속 팽창 중이기 때문이다. 태초의 우주의 위치를 A
지점이라 하면 그 빛이 138억년 동안 지구로 날아오는 동안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으므로 A의 위치는 138억 광년보다 훨씬 크다. 현재 약 470
광 년쯤 된다고 추산 된다.79) 우리 은하계에는 태양 만한 별들이 1000억
개 쯤 들어있고 이런 은하가 1000억 개가 모여서 우주를 이룬다고 한다.
이 우주 속의 별들은 다양한 크기와 질량을 가지며 이들은 여러 가지 형태
로 성장하다가 소멸되는데 어떤 별들은 소멸되기전 강한 빛을 내며 질량의
많은 부분을 우주로 날려 보내고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이 된다.80) 질량의

76) 리 스몰린, 김낙우 역, 『양자중력의 세가지 길』, 서울: 사이언스북스, 2007. pp.
107~121.
77) 리 스몰린, 같은 글.
78) 김성구, 같은 책, p. 147.
79) 같은 책.
80) 별들의 진화에 과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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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부분을 소실하면서 밝게 빛나는 별을 초신성(超新星, supernova)라고
부른다. 물리학자이자 불교철학자이기도 한 김성구는 이 초신성의 존재를
인간의 존재까지 이끌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81)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태양이 방출하는 에너지
를 이용하여 생명활동을 한다. 그리고 생명체가 탄생하고 생명활동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탄소(C), 산소(O), 질소(N) 뿐만아니라 철(Fe)과 같은 여러
가지 물질이 필요하다. 철보다 훨씬 무거운 방사성 동위원소도 지열(地熱)
의 원천으로서 생명체의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다. 생명체의 몸은 모두 탄소
를 중심으로 수소, 질소가 모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중 수소만 태양계내에
있던 것이고 나머지 원소는 태양계 밖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주의 탄생
초기에는 수소(H)와 헬륨(He) 그리고 약간의 리튬(Li)밖에 없었다. 이 셋보
다 무거운 원소는 태양보다 질량이 훨씬 큰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진다.82)
태양은 수소가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면서 보다 질량이 높은 헬륨이라
는 원소를 만들고 그 질량의 차이만큼 E=MC² (M은 질량 C는 빛의 속도)의
핵융합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빛을 발하며 태양은 빛이나
는 것인데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기 위한 전제조건은 10⁻¹³Cm 정도의 거리
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수소 원자는 이렇게 가깝게 접근하기가 불가능하
다. 왜냐하면 + 전하를 가진 양성자(proton)끼리 서로 밀쳐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별의 중력이 훨씬 더 큰 힘으로 잡아당겨 줘야 하기 때문
에 별들의 질량이 크면 클 스록 중력이 더 커진다. 탄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태양의 질량보다 3배, 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10배 정도는 되는 별의 중력
이 작용해야 한다. 그런데 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반응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철로 끝난다. 철이 가장 안정된 원소이기 때문이다. 철보다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초신성의 폭발 같은 사건이 필요하다.
초신성이 폭발할 때 새로운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고 철보다 무거운 원소들

닐 더글라스 타이슨, 도널드 골드스미스 저, 곽영직 역, 『오리진』, 서울: 지호출판사,


2005.
81)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 148.
82)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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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우주 공간으로 날려 보내고 소멸하게 된다.
지구의 나이를 대략 50억 년이고 지구상에 생명체가 나타난 것은 40억
년 전이라 한다면 무거운 별들은 우리의 태양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졌어
야 했을 것이다. 우주 초기에 탄생 된 별들은 태양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무거운 원소를 우주에 뿌려놓고 사라졌다. 우주의 나이가 적어도 100억 년
은 되어야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며 다시 30~40억 년이 지
나야 인간과 같은 고등 생명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지구상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우주가 지금처럼 커야만 했고 초신성이 그 잔해를 우주
에 흩어놓지 않았더라면 지구상의 생명체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식물
이 죽으면 썪어서 비료가 되고 이 비료가 다른 식물의 양분이 되는 것처럼
무거운 별이 생을 마치며 이것의 잔해 위에서 지구상의 생물이 생겨난 것
이다. 즉 초신성은 생명의 토양이 된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지구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가 시간적으로 138억 년이 되어야 하고 공간적으로도 지금처럼 커야만
한 것이었다. 또한, 초신성이 폭발하여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이 되었어야만
했다. ’나’라는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전 우주가 유기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우주는 전체가 단일체라 할 수 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우주에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즉 우주의 무수한 인과관계에 의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우주의 무수한 연기법(緣起法)
에 연관되어 있다.
앞서 닐스 보어가 양자역학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식론적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했고, 특히 노장사상과 불교가 가진 세계에
대한 인식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역설했다. 물리적 대상을 양자의
세계에서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시켜 보면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전제로
한 뉴튼역학은 역시 한계를 맞고 공간과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
의 이론을 통해 우주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혔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장엄한 우주의 질서에 대해 종교적 감성
(religious feeling)을 느낀듯하다. 그는 종교와 과학을 수레의 두 바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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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했다.83) 그는 종교와 과학을 수레의 양 바퀴에 비유했다. 맥스 재머에
따르면 진리를 찾는 것은 이성적 사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종교적 감정이며
인간의 이성은 이렇게 찾은 진리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리
하는 것으로 보았다.84) 아인슈타인은 미래의 종교는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과학자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종교를 우주적 종교(cosmic religion)라고 불렀다. 그리고 불교
가 이러한 요소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85)
빛의 이중성이라든가 코펜하겐 해석을 두고 이견을 보이고 강하게 논
쟁했던 닐스보어와 아인슈타인은 두 사람 모두 불교에 인식론적 종교적 관
심을 보이고 있다.

4. 질 들뢰즈의 역설
20세기 초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서구 지성계에 큰 영향을 미쳤
다. 닐스 보어가 노자나 부처를 언급하며 인식론적 전환을 언급했듯이 20
세기 서양 철학 전반에서는 데카르트식의 주체, 객체 분리를 전제로한 근대
철학의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이를 전복하려는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이 새
로운 패러다음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과정은 고전 물리학의 붕괴와 이어 새
로 성립된 양자역학적 패러다임의 형성과정과 유사하다. 이 장에서는 이러
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성립과정을 질 들뢰즈의 역설의 개념을 중심으로 살
펴보기로 한다.
17세기 데카르트는 그의 저서 『명상(meditation)』에서 생각하는 자
아, 즉 주체의 개념을 제시하고 방법적회의(方法的懷疑)를 통해 모든 지식
과 대상을 회의(懷疑)하고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의 방법적회의는 교회
의 권력과 가르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므로 그는 저서 출간 이후
종교재판을 피해 네덜란드로 도피해야만 했다. 데카르트가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키는 이분법적인 접근법을 확립하면서 서양의 철학은 중세 형이상학

83) Max Jammer, Einstein and Relig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9. p. 32.
84) Max Jammer, 같은 책.
85)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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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근대의 인식론으로 대전환을 이룬다.
데카르트에 의해 확고히 성립된 인식 주체와 대상의 분리는 자연철
학, 즉 자연과학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곧 이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획득함을 의미한다. 특히 물리학에서는 앞서 언급한 뉴튼 역
학의 등장과 함께 과학의 시대를 열었다. 이후 과학 혁명은 산업혁명까지
이어지면서 서구는 전례 없는 급격한 사회의 변화를 겪었다. 근대는 산업화
와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자본주의 체계가 확립되면서 사회적 계층 간의 갈
등이 두드러졌다. 자연을 대상으로 한 산업화와 공업화는 환경문제와 공해
를 야기시켜 오히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단계까지 처해졌다. 다른 문화
와 민족을 대상화한 제국주의는 결국 세계를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만들었
고 이들은 상호 충돌하며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냉전 체제하에서 열강들의 핵무기개발 경쟁은 지구
를 수십 차례 멸망 시킬수 있을 만큼의 위험에 처하게 했다. 근대의 과대하
게 부풀려진, 자신의 주변 대상 모두를 이해하고 통제 할수 있다고 확고히
믿은 주체가 만들어낸 역설인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근대의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라는 개념에 대한 회의는
이러한 사회변화와 함께 수반되었다. 무엇보다도 주체가 그렇게 부르짓던
‘자유의지’의 결과인 소위 상부구조도 마르크스는 물질적, 경제적 토대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종속 변수로 보았다. 프로이드는 그의
정신 분석학을 통해 자유로운 의사를 가진 개인의 행동도 결국 리비도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지적하며 근대의 주체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이후 서양 현대 철학은 근대의 주체 해체에 골몰하게 된다.
20세기에 들어 이러한 경향은 급속화 된다. 소쉬르는 언어의 기표와
기의와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관계라는 것을 밝
혀 이후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해체주의를
이끈 데리다는 플라톤이후 서양에서 전개된 형이상학적 철학이 중심과 주
변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중심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비판했다. 로고스 중심
주의는 대상을 우열의 위계질서로 서열화하여 지배와 종속이라는 인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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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질서로 만드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텍스트의 의미는 고
정될 수 없고 연쇄적인 의미작용 속에서 하나의 해석으로부터 또 다른 해
석으로 끊임없이 연기될 뿐이다. 그는 이처럼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
이 연기되는 의미 작용을 차연(differance)이라 부르고 이것을 서양철학의
형이상학적 분화주의 체제를 해체하는 도구로 삼았다. 노만 브라이슨은 차
연을 불교의 연기법(緣起法)과 비유하기도 했다.
낡은 권력질서를 해체하려는 움직임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에서 급속
히 퍼져나갔다. 리오타르가 제시한 『포스트모던의 조건』은 이성, 진리, 정
의, 해방 등을 내세운 대서사(master narrative)를 불신하는 것이다.86) 지
금까지 거대서사들은 하나의 권력으로서 다양한 목소리를 지닌 소서사를
억압하고 배척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소서사의 대두는 오늘날
페미니즘이나 동성애, 노마디즘, 다문화주의, 우연성, 신체성, 애브젝트 등
의 담론을 유행시켰다.87)
푸코는 인류사를 고고학적으로 탐구하면서 “이성과 광기, 진리와 허위
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온 서양의 지식에 권력이 결탁되어 있음”을 드러
냈다.88) 그는 “지식과 권력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밝혀냄으로써 그동안 절
대적으로 믿고 의지하였던 “지식에 숨겨진 권력의 힘과 이데올로기”를 깨
닫게 했다.89) 그리고 이러한 인간 지식에 대한 총체적 불신은 이성적 주체
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주체의 죽음을 불러왔다.
롤랑 바르트는 그동안 창조적 주체로서 작품에 대한 권의의 원천으로
여겨졌던 저자의 죽음을 선포하고 독자의 해방을 알렸다. 저자로부터 분리
된 작품은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무한한 의미를 산출하게 되고 작품은
작가의 유일하고 독창적인 창조물이 아니라 문화의 수없이 다양한 중심으
로부터 차용한 조직체로서의 ‘텍스트’적인 성격을 갖는 다는 것이다. 이러
한 배경에는 차용과 이종교배, 혼성모방, 절충주의, 퓨전, 하이브리드 등이

86) 장 프랑스와 리오타르 저, 유정완 역, 『포스트 모던 조건』, 서울:민음사, 1992.


87) 최광진, 『한국의 미학』, 서울:미술문화, 2015. p. 183.
88) 같은 글, p. 182.
89)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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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던 작품의 주요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해체의 분위기는 사회학 분야에서도 유사하게 일어났다. 보드리
야르는 현대사회를 생산보다 소비가 중요시되는 소비사회라고 규정하고 소
비사회는 과거처럼 사용가치나 상징가치보다 문화적 기호로서의 가치가 중
요해졌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진짜와 가짜, 가상과 현실, 재현과 실재라는
이분법적 의미체계는 내파(implosion)되어 기호의 체계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로 인해 원본과 재현과의 관계는 무너지고 시뮬라크
르라는 가상의 이미지가 더 진짜처럼 행세하는 하이퍼리얼리티가 포스트모
던사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한다.
특히, 질 들뢰즈는 플라톤의 이데아 중심의 서양 철학의 전통에 도전한
다.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해 현상계와 모든 복제, 모사, 재현에 대해 열등
한 지위를 부여한 동일성 중심의 세계관에 비판하며, 차이에 내재된 가치를
인정하며 이를 생산적인 역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 타자, 신체와 같은 담론을 통해 차이의 존재론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통일되고 이성적인 주체 개념을 거부하고 유목적인 욕망의 우위를
통해 탈영토화와 탈코드화된 감각의 논리를 주장했다.90) 그에게 감각은 신
체의 논리이며 분화되지 않은 유목적인 것이다.91) 그의 유목개념은 리좀처
럼 이분법을 파괴하며 다양한 복수의 관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는
역설이 동일자 중심의 규정된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사유할 수 있
게 만드는 중요한 개념이라 생각했다. 그의 역설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는 그의 의미론의 체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92)

(1) 들뢰즈의 의미론

90) 최광진, 『한국의 미학』, 서울:미술문화, 2015. p. 184.


91) 같은 글.
92) 질 들뢰즈의 의미론에 대한 설명은 그의 저서 『의미의 논리』,『차이와 반복』, 가타리와
공동 저술한 『천 개의 고원』 중 해당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임을 밝혀 둔다.
또한, 국내 연구자의 연구 논문으로는
박동숙의 『김구용의 생성 시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 박사학위논
문,2015)과 윤나리의,『사이버 공간의 패러디 문화와 이용자 인식연구-들뢰즈의 역설의
개념을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1) 등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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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구조주의자의 대표적 철학자 중의 하나가 들뢰즈다. 후기구조주
의는 의미가 생성되는 ‘구조’를 사유했던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진일보하여
기호체제가 주체를 어떻게 재구성하며 새롭게 구성된 주체가 기호체계로부
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의 관점을 가진다.93) 들뢰즈는 표면과 표면
의 만남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건 혹은 표면효과와 이들이 의미를 만들어
가는 방식, 그 계열을 분석하며 의미생성 구조를 파악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 바탕에 흐르는 여러 가능성과 욕망에 주목하며 주체의 힘을 강조하려
했다.
들뢰즈의 의미론의 이해를 위해서는 ‘사건’, ‘표면효과’,그리고 ‘계열
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건과 표면효과는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가지
지 않으나 다른 사건이나 컨텍스트와 만남을 통해 계열화되면서 비로서 의
미화된다.94) 들뢰즈의 의미론은 지속적으로 접속하여 계열화되는 구조들을
탐구하여 어떠한 의미가 생성되며 이것이 어떻게 양식과 역설을 통해 다양
체로 향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갖는다.95)
먼저 사건이라는 것은 원인이 되는 사물들이 상호 충돌하면서 만들어
지는 결과물이다. 예를 들면 공이 어떤 물체와 만났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사건들이 생성된다. 공이 야구 방망이와 충돌하면 야구에서 점수를 얻기 위
한 시발점이 되지만, 공이 길거리로 나와 도로 위를 구르고 있다면 교통사
고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96) 들뢰즈는 물체의 표면과 표면
이 접촉해 발생하는 것을 사건이라 정의하고 이를 다른 말로 표면효과라고
불렀다. 사건은 물체의 가장자리끼리 접촉하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
고, 표면효과는 순간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는 이러한 사건 혹은 표면효과
가 심층에 실재(subsistent)하고 지속(insistent) 하고 있다고 보았다.97) 사

93) 윤나리, 『사이버 공간의 패러디 문화와 이용자 인식연구-들뢰즈의 역설의 개념을 중심
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p 9.
94) 같은 글.
95) 같은 글.
96) 같은 글.
97) 여기에서 서술한 의미구조는 질 들뢰즈의 사유체제와 그 내용을 분석한 그의 저서 『의
미의 논리』의 내용을 요약 서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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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혹은 표면효과는 현실화의 가능성을 지닌 채로 잠재하다가 물체들이 서
로 접점을 가지는 순간 표면으로 올라와서 현실화 된다.
들뢰즈는 존속하고 있는 사건들을 ‘순수사건’으로 부르며 이를 불어나
영어에서 활용되는 부정법(Infinitive)의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98) 동사는
시간 자체가 규정되지 않은 부정법의 형태를 통해 과거 혹은 미래라는 특
정 시점을 동시에 포함할 수 있으며, 이 두 방향으로 문맥에 따라 끊임없이
분화되면서 사건을 언표한다.99) 부정법은 동사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문맥 속에서 상호 연관되는 물리적 사태와 시간적 조건을 형성하며 관계를
맺게 되고 특정한 시간과 문맥을 가지는 형태로 구체화 혹은 현실화된다.
즉 부정법은 사건의 현실화 이전의 ‘순수사건’을 칭하는 말이고, 이것이 현
실화 되었을 때는 현재라는 특정 시점에 귀속되는 형태로 언표된다. 즉 ‘순
수사건’은 부정법의 형태로 잠재하고 있다가 특정 상황에서 표면으로 올라
오며 ‘사건’ 혹은 ‘표면효과로’ 현실화된다.
그러나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 혹은 표면효과는 하나의 사태를 기술하
지만 그 자체의 의미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100) 단일한 사건은 순수 사건
이 표면으로 올라와 현실화된 것인데 그 사건이 특정한 조건 속에서 특정
한 문맥을 형성하거나 혹은 또 다른 사건과 만나면서 비로서 구체적인 의
미가 생성되는 것이다.101) 예를 들면 나폴레옹의 머리와 왕관이 서로 만났
을 때 하나의 사건 혹은 표면효과가 생성된다.102) 여기서 나폴레옹이 어디
서 왕관을 쓰는지가 중요하다. 황제 대관식에서 왕관을 쓰는 것과 혼자 화
장실에서 쓰는 것은 그 의미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하나의 사건은 그 사건 자체가 다른 사건 혹은 맥락과 접하면서 특정한 의
미가 형성됨을 알 수 있다.
들뢰즈는 이를 ‘이중인과’라 칭한다. 한 사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원

98) 질 들뢰즈, 이정우역, 『의미의 논리』 파주: 한길사, 1999, p. 50.


99) 같은 글.
100) 질 들뢰즈, 같은 글.
101) 질 들뢰즈, 같은 글.
102) 윤나리, 『사이버 공간의 패러디 문화와 이용자 인식연구-들뢰즈의 역설의 개념을 중심
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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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결과를 갖는다고 본다. 사건의 원인은 물체가 다른 물체를 만나 조합
되면서 만들어지고 이를 통해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다른 차원에서의 원인
은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한 사건
은 특정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이때 원인이 되는 사건을 ‘준원인’이라고
칭한다. 사건 그 자체는 무의미하다. 들뢰즈에 따르면 한 사건은 무한한 의
미의 가능성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의미가 진정으로 파생되는 장소는 ‘준
원인’들의 체계 속이다. 이러한 ‘이중인과’의 개념은 물체들의 운동으로부터
흘러나온 부산물로서의 사건의 위상을 바꿔놓는다.
이렇게 의미 파생을 위해 ‘이중인과’되는 과정을 ‘계열화’라고 칭한다.
그리고 이 계열에는 동질적인 항으로 구성된 단일한 계열이 존재하고 이
단일한 계열 속에 이질적인 계열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하나의 계
열은 다른 계열과 수렴 혹은 발산하는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계열은 서로 얽혀 하나의 장을 형성한다. ‘사건’ 혹은 ‘표면효과로’
는 어떤 계열 속에 어느 곳에 위치하는지, 또 어떻게 다른 사건과 접속하여
계열화되는지의 여부에 따라 의미가 결정된다.
구조주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를 분석해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일종의 결정론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구조주의적 관점에서는
한 개인이 그 구조적 사유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사유하고 행동하기 어
렵다. 구조주의는 인간을 구조적 인과관계의 틀 속에 규정함으로써 주체의
소멸을 불러왔다. 반면에 들뢰즈는 표면 아래에 흐르는 잠재성과 욕망에 주
목하고 이를 드러냄으로써 욕망-기계로 주체화된 주체들의 다양한 가능성
을 열어놓는다.103)

(2) 구조에서 기계로


들뢰즈의 ‘계열화’와 ‘배치(arrangement)’라는 개념은 서로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이 둘은 두 항이 서로 접속하는 것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103) 윤나리, 『사이버 공간의 패러디 문화와 이용자 인식연구-들뢰즈의 역설의 개념을 중심
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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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하다. 계열화는 두 가지 물체 사이에 발생하는 의미에 관한 것이지만
배치는 다양한 이질적인 항들로 구성되어있으며 차이 나는 것을 가로질러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사물들이 서로 얽히며 관
계가 형성되면서 만들어진 배치물은 다른 배치물 들과 다시 만나면서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들뢰즈는 그의 저서 『의미의 논리』에서 항과 항, 사건과 사건 간의
연결방식을 ‘접속(connexion)’, ‘이접(disjuction)’, ‘통접(conjunction)’ 세
가지로 구별하여 규정한다.104) 그리고 이러한 구별은 가타리와 함께 슨 『안
티 오이디푸스』에서도 반복하여 나타난다.105) 접속은 우리말의 ‘그리고’에
해당하며 A et (and) B로 표현할 수 있다. 이질적인 두 가지가 et(and) 라
는 접속사를 통하여 등위 결합함으로써 제삼의 무엇을 만들어 낸다. 들뢰즈
와 가타리는 ‘그리고’ 라는 접속사는 ‘~이다’ 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 뽑
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고 보았다.106) 접속은 종착점을 가지지 않으며 ‘동일
자의 논리’에 의한 위계질서도 가지지 않는다. 그저 먼저 A 로 향했다가 B
로 향해가는 과정만 존재한다. 때문에, 들뢰즈는 접속을 이접이나 통접보다
더 중시한다.107)
이접은 A soit(or) B 라는 접속사를 가지는 연결로서 둘 중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하는 경우와 상이한 경우를 허용하고 포함하는 경우 (A이
든 B이든 간에)를 말한다. 반면에 통접은 A donc(therefore) B 라는 접속
사로 가지며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유기적 통
접과, 모두가 어떤 하나로 귀결되는 흐름으로서의 통접이 있다.108) 따라서
배타적 이접과 유기적 통접은 접속의 양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로 간다고
볼 수 있다. 배타적 이접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기를 강요하고 유기적 통
접은 정체성을 부여한다.109)

104) 같은 글.
105) 김재인,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 홍성:느티나무책방, 2016, p. 258.
106) 윤나리, 같은 글. p. 14.
107) 김재인, 같은 글.
108) 같은 글.
109) 윤나리, 같은 글. 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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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모든 개별화된 존재를 기계라 불렀고 “어떤 코드에 의해 조
직화되지 않고 부분과 부분이 분절되어있는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정의했
다.110) 배치는 기계가 다른 존재 혹은 기계와 관계를 맺으며 더 높은 차원
의 기계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배치를 반복하면서 기계들은 보
다 상위의 새로운 기계로 재탄생 되며,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다양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 기계들이 서로 접속하는 것이 ‘기계적 배치’
다. 그리고 기계에 성질로서 귀속되는 비 물체적 변형을 표현하는 것이 ‘언
표적 배치’라고 한다. 배치는 이 두 배치의 상호작용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주체로서 욕망하는 기계는 ‘언표적 배치’가 코드로서 지나치게 작용할
때는 언제든지 이를 끊어내고 거부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 그러므로 배치
는 안정적이지 못하고 따라서 틈새가 존재하며, 이 틈을 통해 욕망은 흐른
다. 어디로든 흘러가는 욕망은 또 다른 생성을 기약하게 된다.

(3) 기관 없는 신체와 주체
들뢰즈의 욕망에 대한 관점은 프로이트나 라캉의 그것과 다르다. 정신
분석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욕망은 결핍과 부재로 인한 공허함을 채우려는
것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음으써 충족되길 원하는 것이다.111)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는 욕망은 중단없이 무언가를 실현 혹은 실천하려는 것으
로서 자기증식과 확장을 추구한다.112) 그리고 욕망이 무언가를 실현하려 한
다면 흐르고 있는 욕망을 배치하여 그 흐름을 절단, 채취하여야 한다. 결
국, 욕망이란 생산이자 집합적 배치다. 따라서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을
내재하고 있는 장이며 마치 줄기세포처럼 ‘배치’를 거치며 어떤 기계로든
될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113) 그리고 이는 마치 순수사건처럼 가능성이 무
한히 내재되어 있는 무의미의 상태와도 같다. 들뢰즈는 욕망이 분절화되어
어떠한 형태로 신체화되든 이를 긍정한다. 또한, 욕망은 아무리 절단하고

110) 같은 글.
111) 윤나리, 같은 글. p. 17.
112) 최광진, 『한국의 미학』, 서울:미술문화, 2015. p. 184.
113) 윤나리,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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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는다고 해도 항상 ‘배치’의 틈새를 흘러 다니며 또 다른 ‘배치’가 될 가능
성을 열어 놓는다.
따라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욕망이 있는 한 주체는 언제나 혁명의
가능성을 가진다. 들뢰즈는 개별적 차이를 무시하는 어떠한 전체주의적 움
직임들에 대해도 반대하며, 낡은 개념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주체를 긍정한다.

(4) 양식과 역설
들뢰즈는 서양철학을 오랫동안 지탱해왔던 플라톤의 동일자 논리를
전복하고 그 속에 무시되었던 많은 차이를 사유하고자 했다.114) 플라톤은
이데아에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하면서 현상계의 불완전함을 논한다. 이데아
를 충실하게 닮은 것은 또한 선한 것이다. 반면에 ‘동굴의 비유’ 속에 비쳐
지는 형상들은 모두 거짓이며 판타즈마(phantasma)로 칭한다.115) 그리고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데아에 끊임없이 닮아 가려 노력해야 한다
는 주장을 통해 플라톤은 어떤 도덕적인 질서까지 확립하고자 한다.116) 이
데아를 재현하려는 과정에서 옳고 그름의 이분법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여기서 문제를 발견한다. 우선 이 구조는 중간항이나 매개항
이 결여되어 있다. 동일성의 논리에 치우친 나머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간과하고 있다.117) 그는 판타즈마, 오늘날의 용어로 하자면 시뮬라
크르에 주목한다. 시뮬라크르는 복사물을 다시 복제한 카피로서 이데아로부
터 유사성의 관점에서 볼 때 무한히 멀어져 있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주
장한다. “시뮬라크르는 퇴락한 복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원본과 복사본, 원
형과 재생산을 부정하는 긍정적인 잠재력을 숨기고 있다 (...) 그 어느 것도
원본이 될 수 없으며 그 어느 것도 복사본이 될 수 없다.”118) 그러므로 시

114) 신수진, 「‘차이의 반복과 그 표현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1. pp.
38-41.
115) 질 들뢰즈, 이정우역, 『의미의 논리』, 서울:한길사, 2000. p. 45.
116) 같은 글, p. 405.
117) 윤나리, 『사이버 공간의 패러디 문화와 이용자 인식연구-들뢰즈의 역설의 개념을 중심
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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큘라크르는 ‘차이’가 가진 함의를 끄집어내어 다양체를 사고하려는 들뢰즈
의 방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119)
따라서 시뮬라크르는 모방이 단순히 모방이 아니라 원형이나 특권적
위치라는 생각을 반대하고 전복하는 행위이고, 이데아를 중심으로 한 위계
질서가 성립된 세계에 대항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
가 되는 것이다.120) 시뮬라크르는 동일자로 향하는 특정한 방향에 편중하지
않고 생성하고 변화하며 운동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과정과 변화하
는 순간에 관심을 기울인다.121) 그가 접속(connexion)을 중요시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때문에, 들뢰즈는 ‘양식(bon sens)’과 ‘상식(sens commun)’을 하나
의 하나의 ‘기관(une organe)’으로 본다.

사람들이 ‘공통의’라고 말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기관, 하나의 기능, 하나의


동일화 능력이며, (어떤 형태로든) 주어진 다양성을 동일자(Meme)의 형상에
관련짓기 때문이다.122)

‘양식(bon sens)’이라는 말은 불어를 직역하면 ‘좋은 감각’으로 되어 하나


의 바람직한 방향을 지시할 만한 모범이 될 만한 좋은 의미를 가진다. 이는
플라톤주의의 이데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상식(sens commun)’ 또한
‘공통 감각’으로 번역되며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123)
이는 서론에서 언급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의 개념과 알프레드 슈츠의 전
형(stereotype)이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상식/공통감각’은 모든 개체들이 이러
한 하나의 모범 혹은 동일자에 얼마나 가까운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118)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pp. 417-418.


119) 윤나리. 같은 글.
120) 신수진, 같은 글, p. 41.
121) 김재인,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 홍성:느티나무책방, 2016, p. 258.
122) 질 들뢰즈, 이정우역, 『의미의 논리』, 서울:한길사, 2000. p. 159.
123) 같은 글, p.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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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124) 이 또한 다양성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하는 플라톤주의와 연관
성이 있다. 존재론적인 양식과 인식론적인 상식은 이 세계를 뒤엎고 있는
통념(doxa)이다.125) 이 통념은 한 사회의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사유하게
만들며. 동시에 공통적인 가치체계를 가지게 함으로 지배적인 힘을 가지는
것이다.
들뢰즈는 양식/일방향과 상식/공통감각이라는 두 힘의 ‘상보성’을 분명
히 볼 수 있다고 한다.126) 그가 ‘상보성’을 언급하고 ‘역설’을 분석한 것은
연구자가 보기에는 앞장에서 고찰한 20세기 초 양자역학에서 닐스 보어의
개념에서 온 것으로 보이며, 또한 동아시아의 불교나 음양(陰陽)사상의 영
향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건은 ‘계열화’되면서 하나의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127) ‘배치’ 역시 하나의 기계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사건과 기계는 통념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통
념이란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특정한 방향으
로 계열화하여 공통적이고 통일적인 의미를 가지도록 하려는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건들이 존속하고 있는 장 속에는 이러한 통념을
형성시키는 코드들을 무력화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의미화될 수 있는 잠재
적 가능성이 많은 아직 의미를 가지지 않은 순수한 사건들이 존속하고 있
기 때문이다. 무의미는 아직 어떤 방향으로도 계열화되지 않은 상태라서 어
떠한 방향성을 가지면서 현실화될지는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사건을 사유하고 의미를 논하는 것은 이러한 무의미들이 계열
화될 때 가지게 될 양방향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러한 양방향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한 방향으로만 몰아감으로써 ‘차이’를 없애버리려는 그
어떠한 상황과 시도에 대해서도 그는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보았
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판적 사유의 핵심은 어떠한 사태의 의미를 파악함

124) 윤나리, 같은 글, pp. 24-25.


125) 질 들뢰즈, 이정우역, 『의미의 논리』, 서울:한길사, 2000. p. 158.
126) 같은 글, p. 160.
127) 윤나리,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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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어 정해진 양식의 반대를 선택하는 것 자체가 아니며, 또한 상식(공통
감각)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만이 아니라 언제나 양방향 모두로 나
갈 수 있고 또한 두 개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128) 이러한 방식은 사전적 정의 그대로 “통념에 반하는(para)것이고 역
설(para-doxa)”이 된다.129) 역설은 기호 작용이 서로 다른 유형의 요소들
을 포함하거나 혹은 상식에서 벗어난 의미의 집합들을 가진다. 이를 통해
기존의 고정되고 획일화된 사유방식을 전복한다.130) 따라서 역설이란 동일
자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이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개념이
다. 역설은 개인들의 획일화된 사유방식을 타파함으로써 이들이 가지고 있
었던 인식적 한계에 도달하게 하지만 그럼으로써 능력의 도약과 발전을 이
룰 수 있도록 한다.131)
들뢰즈가 사유하고자 하는 것은 다양한 계열들이 얽힌 장, 시연에 무
의미들로 꽉 들어찬 내재성의 장 즉 다양체이다. 장은 수많은 것들이 접속
하고 분기하는 장이다. 다양체는 마치 리좀과 같아서 어떤 방향으로도 향할
수 있기 때문에 역설이 실현되는 장이다.132) 리좀은 n-1로 표시한다. 왜냐
하면 리좀 속에는 동일자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133) 궁극적인 그리고
다양화로 향하는 길은 서로 다른 두 항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러
한 만남이 계열화됨과 동시에 다른 계열들과 만남이 계속되고, 이어지는 새
로운 만남을 통해서 이러한 다양화는 가능해진다. 이러한 만남 들로 가득
찬 내재성의 장이야 말로 들뢰즈가 사유하고 향하고자 한 지향점이다.134)
질 들뢰즈에 있어 이상적인 주체는 양식과 상식에 붙들려 있지 않은
주체다. 이러한 주체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다양한 계열들을 자유롭게 돌아
다니며 형성되는 주체로서 들뢰즈는 이를 노마드적 주체라고 칭한다.135)

128) 질 들뢰즈, 이정우역, 『의미의 논리』, 서울:한길사, 2000, p. 156.


129) 같은 글, p. 155.
130) 같은 글, p. 160.
131) 윤나리, 『사이버 공간의 패러디 문화와 이용자 인식연구-들뢰즈의 역설의 개념을 중심
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p. 24.
132) 최광진, 『한국의 미학』, 서울:미술문화, 2015. p. 184.
133) 윤나리, 같은글, p. 24.
134) 같은 글,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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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의 역설의 개념은 연구자가 앞에서 제시했던 역설의 두 가지
의미와 상통한다. 기존의 낡은 패러다임을 해체를 촉발시키며, 대상의 본질
을 드러내는 중요한 방식인 역설은 들뢰즈의 표현대로 ‘상식과 양식을 동시
에 전복’시키고 우리 인간을 둘러싸고 있었던 좁고 정형화된 사고의 틀을
깨고 나와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작용을 수행하는
것이다.

135) 최광진,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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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현대미술에서의 역설
앞 장에서 빛의 역설적인 이중성의 발견과 이로 인해 20세기에 탄생
하게 된 양자역학을 통해 과학사에서 기존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역설은 새로운 설명과 시도들을 자극하고 이들 중 가장 설득력이 있고 탁
월한 체계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미술사에서 기존의 미술 양식이 더 이상 새로운 시대정신과 가치를
반영할 수 없을 때 내용과 형식 사이의 모순 관계가 발생하며, 이를 극복하
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촉발시킨다. 이러한 시도들을 연구자는 아방가르드
로 정의한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은 서로 경합하고 영향을 끼치며 가장
설득력이 높은 체계로 진행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기도 한다.
20세기 현대미술에서는 자유로운 개인이 기존의 미술과 그 전통에 반
대하며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를 해온 아방가르드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실
아방가르드는 하나의 사조도, 철학도 아니고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모더니즘
처럼 역사적 시간의 틀을 제공하지도 않는 지적 급진성을 띠는 특별한 문
화적 실천을 대변하는 용어다.136)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하는 획기적 변혁의 과정은 구축
(construction), 탈구축(deconstruction), 재구축(reconstruction)의 과정
으로 설명되거나 혹은 양식적인 측면에서 정형(formation), 탈정형
(deformation), 융합(convergence)의 과정을 거친다고 분석되기도 한
다.137)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 대한 설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방가르드는
페터 뷔르거가 지적했듯이 유기적 예술작품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개념을 대치함으로써 급진적, 혁명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
에서 그 성격에 대한 설명은 일치한다.
군대의 단위 부대에서 본대에 앞서 전방을 탐색하며 본대의 안전을
확보하는 첨병을 avant-garde라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 이 말에는 군대용

136) 진휘연,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서울: 민음사, 2001, p 8.


137) 이광래, 『미술철학사 3』, 파주:미메시스, 2016, p.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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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하는 프랑스의 문화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
만 낭만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프랑스 혁명의 분위기를 담은 말이기
도 하다. 특히 생시몽(Henri de Saint-Simon)은 시민사회의 혁명의 분위
기를 예술의 맥락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
술을 비판하고 현실참여를 독려했다.
미술사학자 조나단 파인버그(Jonathan Fineberg) 현대미술에서의 아
방가르드의 기원을 낭만주의에서 찾았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에서 이상을
찾고 당대 프랑스 아카데미의 미적 규범과 전통의 준수를 강조한 신고전주
의는 이러한 혁명의 분위기를 담을 수 없었고 낭만주의적 격정적 양식이
혁명처럼 미술계에 들어와 기존의 미술에 혁신을 가져왔다고 본 것이다. 산
업혁명후 사회적 격변과 이와 연관된 정치적 격변 속에 아방가르드는 기존
의 미술 양식이 더 이상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을 수 없고 오히려 시대정신
이 기성 가치와 모순, 즉 역설적 관계에 있다고 보기에 낭만주의는 이후 다
른 여러 새로운 시도들이 등장하는 전조가 되었던 것이다.
레나토 포지올리는 그의 저서 『아방가르드 예술론』에서 19세기 이후
의 모든 미술에서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적 요소를 보편적으로 적용한다.
반면에 아방가르드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이론을 저술한 페터 뷔르거는 예
술의 자율성을 극복하고 사회변혁의 이상을 실천하는 20세기 전반기의 다
다, 초현실주의, 미래주의,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모더니즘과 구분해 역사적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를 사용해 설명한다. 그는 미술의 자율성(autonomy)과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은 미술품을 제작, 평가, 유통시키는 총체적
제도로부터 조직되고 운영되는 기만적인 전제를 깨지 못하면 사회와 격리
되며 진정한 의미를 얻을 수 없다고 보았다.138) 그런데 그가 말한 자기지시
성은 앞 장에서 살펴본 이발사의 역설에서 살펴본 바 있는 문제와 그 구조
가 동일하다.
그린버그는 전후 재편된 서구 자본주의의 질서 속에 다시 미술 자체의

138) Peter Burger, “Avant-garde”, Encyclopedia of Aessthetics, ed, by Michael


Kelley(New York: Oxford Unniversity Press, 1998), p.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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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그의 엘리트주의 아
방가르드 개념을 19세기 모더니즘과의 연장 선상에서 분석한다.139) 이를
달리 말하면 그린버그는 평면성이 두드러진 마네의 19세기 모더니즘 부터
그가 옹호했던 미국의 1950년대 60년대 추상에 이르는 단선적이고 진화론
적 변화를 하나의 형식주의적 패러다임으로 파악했다.
그는 매체의 환원 불가능한 속성을 추구해 나가는 일련의 움직임을 저
급한 키치에서 미술을 구원할 수 있는 진정한 아방가르드로 보았다. 형식주
의자들은 이러한 주지적 혹은 이성 중심의 미술 운동은 마네에서 시작해,
세잔느, 피카소, 등을 거쳐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색면추상 그리고 프랭크
스텔라까지 이르는 일련의 움직임까지 연결해 분석했다. 형식주의자가 주목
한 미적 자율성(autonomy)은 매체의 존재론적 특성에 주목한 것이었고 매
체의 비재현적(non-representational), 비대상적(non-objective), 비형상
적(non-figurative) 속성에 주목했다. 회화에서는 평면성이 절대적이었으며
조각에서는 이러한 조건과 더불어 3차원적 속성이 더해져야만 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미니멀리즘 조각은 리터럴(literal)한 속성을 지니는
기하학적 형태들로 귀결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이발사의 역설처
럼 혹은 양자역학에서 관찰자의 개입이 만들어내는 역설처럼 자기지시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3차원형태 그대로는 하나의 대상이지만 이것이 갤러리 공
간에 전시된다면 관객은 작품을 관람하기위해 움직이면서 그 공간에서 필
연적으로 관여하게 되고 이러한 행위의 결과로 작품 외적인 조명, 시간들의
요소들이 개입되어 형식주의가 갖는 미적자율성이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하
게 된다. 이발사가 자신도 마을사람들 중의 하나임을 깨닫는 순간 이발사의
규칙은 역설이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객이 작품이 제시된 공간에 함께 있
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에 작품관람을 위한 관찰자의 움직임에는 시간적
요소가 개입되며 조명이라든가 주변의 환경이 문제가 되면서 환원불가능한
조각 작품의 존재론적 속성을 추구했던 미니멀리즘 조각은 역설이 될 수밖

139) 페터 뷔르거는 이들과 달리 달리 입체파, 미래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으로 이어지


는 구체적 아방가르드 등의 20세기 전반기 미술을 설명하며 역사적 아방가르드라는 용어
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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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뒤에 다룰 로버트 모리스의 미니멀리즘 조
각론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에 이르러 진행되는 형식주의적 관점과 페
터 뷔르거의 역사적 아방가르드 두 가지 지류의 아방가르드들을 닐스 보어
가 말한 상보적 관계로 볼 수 있다. 즉 미술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지류와
이에 대한 강한 반발로 나타나는 삶 자체를 예술로 끌어드리려는 역사적
아방가르드라 칭하는 일련의 미술운동은 마치 음과 양, 혹은 동전의 양면처
럼 상보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순수하지 못하고 잡다한 키치와 뒤섞인 미
술이 있기에 형식주의 엘리트주의자들은 하나의 위기의식을 느끼며 미술을
보다 순수하게 제련해 나갔고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이야말로 타락의 위기
에 빠진 인류의 정신을 구원할 수 있는 진정한 미술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에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삶과 단절된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미술의 공허
함과 무의미를 느끼며 삶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미술에 개입시켰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삶에서 단절된 예술의 생산적 잠재력이 실제 삶을
새롭게 하는데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자동기술을 실행하면서
무의식에 잠재된 어떤 욕망과 감정을 표출하게 되는 데 이를 통해 개인은
숨겨진 자신의 새로운 면을 확인하게 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산업적 재
료를 실험했고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실질적으로 참여했으며 혁명적 주제
를 전달했다. 뷔르거는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새로운 형식창조, 미학적 탐구
등과 별개로 삶과 예술의 분리를 종식 시키는데 앞장섰고, 생산 및 수용으
로부터 소외된 미술을 회복시키려 했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유토피아고 진정한 예술의 패러다임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1950년대부터
북미와 유럽에서 활발하게 다시 사용된 오브제, 레디메이드, 단색화, 격자
를 활용한 미니멀리즘 등의 네오-아방가르드가 아방가르드 본연의 정신은
사라진 채 예술로 편입된 결과를 초래한 의미 없는 행위가 되어버렸다. 이
또한 역설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린버그의 형식주의나 피터뷔르거가 각각 주장하는 아방가르드는
방식에 있어서는 상호 대립적이지만, 즉 닐스 보어의 표현 방식을 빌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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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적인 관계이지만, 모두 미술을 통해 타락한 정신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
운 시대정신에 걸맞는 새로운 미술의 패러다임을 세우기 위한 시도라는 점
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기존의 확립된 낡은 형식이 새
로운 시대의 정신을 담을 수 없는 역설과 이의 극복을 위한 시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미술사가이자 비평가인 레오 스타인 버그가 「현대미술
과 대중의 양상」이라는 글에서 제시한 예는 아방가르드의 성격과 그 역설
적인 운명을 또한 잘 애기해 준다. 스타인 버그에 따르면 모더니즘의 산파
였던 독립전(Salon des Independants)의 부회장이자 당시 쇠라와 더불어
혁신적인 점묘법을 구사한 신인상파의 대부 시냐크는 마티스와 친분이 깊
었는데 마티스의 「생의 기쁨」이라는 작품을 보고 선과 색채, 그리고 내용의
유치함과 천박함에 경멸을 표하면서 우정의 결별을 고한다. 파블로 피카소
는 시냐크와 달리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아비뇽」의 여인들(1907)을 완
성하고 자신의 화실에 마티스를 초대했으나 심하게 각진 나부들의 몸이나
아프리카 마스크에서 따온 사실적이지 않은 기괴한 형상과 제대로 설명되
지 않은 배경을 보고 마티스는 무척이나 불쾌해했다고 한다.140)
마티스는 이후 당시 프랑스의 진보적 미술전의 대명사였던 가을전
(Salon d’Automne)의 심사위원으로서 1908년 브라크가 출품한 입방체가
투성이의 풍경화가 전시에 부적합하다고 탈락시킨다. 141)

마티스처럼 당시 진보적인 예술가들에게도 당시 이해되기 어려웠던


입체파 작가들은 이들이 사회적 지지와 명성을 얻게 되며 같은 전시의 심
사위원이 되었을 때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1912)를 탈락시킨다.142)

140) Leo Steinberg, “Contemporary Art and Plight of its Public”, Other Criteria
(London:Oxford University Press, 1972).
여기서는 진휘연,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서울: 민음사, 2001, pp 8~16.에서 재인용
141) 같은 글.
142)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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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5> 앙리 마티스, 「생의 기쁨」, 1906

<도판6>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여인들」,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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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7> 마르셀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1912
윌리암 루빈(William Rubin)은 형식주의 관점에서 이 작품을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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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이 입체파에서 조형언어를 배웠고 대상의 연속적인 동작처럼 보이는
이어진 형상은 미래파의 영향으로 보았다. 그런데 입체파 심사위원들에게는
인체이 형상이 너무나 기괴하고 파격적이라 입체파와의 연관성이 충분히
설득되지 못했는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티스나 피카소 그리고 뒤샹은 모두 아방가르드의 거장들이며 여기
에 도판으로 제시된 작품들도 서양미술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중요한 작
품들이다. 그러나 이들 아방가르드의 거장들도 익숙지 않은 새로움, 즉 다
른 아방가르드를 접했을 때는 스스로 수구 보수가 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미술사학자 진휘연은 “가장 앞서있는 개념과 이미지에서 다시 탈피하는 것,
보는 것과 그리는 방식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으로 아방가르드의 성격을
정의했으며, 때문에 소수의 엘리트조차도 발표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는 마치 과학사에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을 상정한 뉴튼 역학을
부정하고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일 수 있다는 획기적인 상대성이론을 발표
한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에서는 당시에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
와 막스 보른의 물질파 해석을 중심으로 한 코펜하겐학파의 해석을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모든 대상을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려는 형식을 취했던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속에서 전자의 중첩상태와 전자는 확률로 존재한다는
새로운 발견을 인정할 수 없었던 고전주의자 일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아방가르드는 초기에 등장했을 때의 혁신성과는 별개로 이것이 미술
계에서 널리 이해 되어지고 받아들여지면서 하나의 정립된 표현방식과 어
휘가 됨과 동시에 다른 아방가르드적 시도에 의해 부정되어지는 역설을 맞
는다. 특히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는 기존의 모든 시도들이 양식화되어
상호 절충, 차용, 패러디되는 양상을 보인다. 리오타르가 제시하는 포스트
모던의 조건은 선, 정의, 이성, 진리, 해방 등의 명분을 내세워 구축한 이성
중심, 서양중심의 거대서사를 불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구 남성 중심주의
에 묻혀 있었던 다양한 소서사에 주목한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 페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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즘, 노마디즘, 다문화주의, 우연성, 신체성, 과정성, 애브젝트 등의 담론을
유행시켰다.143) 이러한 흐름은 주제뿐만 아니라 매체에 있어서도 탈 쟝르적
이고 다원적인 접근법을 가져오는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탈중심, 다원주
의도 모더니즘의 역설에 대한 대응과정에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페터 뷔르거에 의해 가장 중요한 아방가르드 작가로 평
가된 뒤샹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역설적 성격과 이의 뒤를 잇는 네오 다다
의 전통, 그리고 현대미술에서 미국적 모더니즘으로 20세기 중반을 풍미했
던 그린버그식의 형식주의와 이를 극단으로 몰고간 미니멀리즘의 성격을
살펴볼 것이며, 마지막으로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 1970년대 한국적 모더니
즘 혹은 단색화의 시발점이 되는 이우환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전위’성과
그 역설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1. 뒤샹과 역설
뒤샹은 그를 상징하는 레디메이드 이전의 회화 분야에서도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에서도 작품의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는 역설적 성격을 보여
줬었다. 즉 누드라는 전통적 소재는 입체파를 연상시키는 대상의 분석적 형
태 그리고 인체처럼 보이지 않고 마치 기계의 일부처럼 보이는, 연속적으로
찍은 사진에서 보이는 형태 같은 미래파적 영향을 연상시키는 형식과 역설
적이다. 로잘린 크라우스 식으로 해석한다면 외형과 내용 간의 불일치, 즉
해석 불가능한 불투명성일 것이다.144)
로잘린 크라우스는 그녀의 저서 『현대조각의 흐름 (Passage to
Modern Sculpture)』에서 현대조각의 ‘불투명성’의 기원을 로댕에서 찾았
다. 조각작품의 형상을 한쪽 측면에서 보아도 보이지 않는 쪽의 구조와 형
태가 명확하게 해석될 때 이를 ‘투명하다(transparent)’라고 본다. 이는 곧
특정한 정지된 시점에서 대상을 보고 전체 구조를 이해할 수 있을 때 쓰는
용어지만 로댕의 경우는 하나의 인물을 구현한 조각작품에 여러 시점에서

143) 최광진, 한국의 미학, 미술문화, 2015, p 182.


144) 진휘연, 같은 책, p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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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대상이 혼재하는 ‘잉태된 시간(time pregnant)’을 담고 있다. 또한, 캐
스팅하는 과정에서 주물의 이는 거품이 함께 나타나는 등 한번에 형상을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보인다. 즉 내용과 형식의 분리되는
역설은 로잘린 클라우스의 설명대로 보는 순간 의미론적 해석이 불가능한
불투명성을 갖는 것을 볼 수있다.
뒤샹의 불투명적, 실험적 도전은 그 후 회화를 넘어서 유명한 「샘」
이라는 작품에서 기성품 즉, 레디메이드(ready-made)를 최초로 사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물론 다다와 마찬가지로 뒤샹의 작업은 홍가이의 지적대
로 그 시작은 현대화의 과정에서 기존의 예술과 문화전통의 패러다임의 붕
괴가 일어나는 심각한 위기(paradigm crisis)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대응
의 방법이었다.145) 처음에 그는 스스로 고백한 대로 변기를 하나의 예술작
품으로 정의하고 전시한 것도 아니었다.
홍가이는 테드 코헨(Ted Cohen)의 분석을 빌려 언어행위이론
(Speech Act Theory)를 통해 예술가의 작품 출품 행위를 설명한다. 예술
A가 X라는 예술작품을 내놓은 행위는 일종의 언어행위와 같다. 즉 X를 예
술 작품으로 제시한다는 행위는 이미 그 사회, 문화권에 무언으로 전제된
조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오브제는 캔버스위에 있다든지 혹은 공장 직
공이 아닌 미술가에 의해 창작된 것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뒤샹
의 경우처럼 이러한 조건이 형성되지 않을 경우는 어떠한가? 홍가이는 코
헨의 언어행위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한 남자가 “I promise to love you
forever.”라는 약속을 한경우를 살펴보자. 약속은 실현 가능성을 전제로 한
다. 그런데 나는 영원히 살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말은 논리적으로 역설이 된다. 그렇다면 남,녀의 연인
사이에 나눈 이런 말은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 전혀 의미가 없는 말일까?
여기서 코헨은 말한 자의 행위 자체가 주의를 끌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 말
은 연극의 제스처 처럼 하나의 극적이 제스처로 이해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러한 행위의 참다운 동기는 바로 왜 그런 행위를 했는가를 생

145) 홍가이, 현대미술,문화비평, 서울:미진사, 1987. p.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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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해 보게 하는데 있는 것으로서 하나의 엉뚱한 행동에 주의를 끌려는 엉
뚱한 제스추어이자 스펙타클이었던 것이다.146)

<도판8> 뒤샹, 「샘」, 1917

홍가이는 이러한 엉뚱한 제스추어를 진정한 아방가르드라고 평가하는


데 회의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아방가르드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
체할만한 관습 및 의미 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다다와 뒤샹등은 이

146)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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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한 체계를 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장에서 살펴본 과학사적 관점에
서 양자역학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슈뢰딩거방정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슈뢰딩거는 전자의 불연속 속성에 주목한 하이젠 베르그의 행렬역학을 배
격하고 전자는 파동이라는 단순한 전제에서 맥스웰의 파동방정식을 활용해
슈뢰딩거 방정식을 유도해 냈다. 이 모델로 양자세계에 대한 수학적 해석을
당시 과학자들에게 익숙한 미적분을 통해 설명해냈다. 그러나 슈뢰딩거 그
자신도 이 방정식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알지는 못했다. 막스
보른은 이를 연구하다 슈뢰딩거 파동의 해의 제곱값을 적분한 값이 모든
구간에서 1, 즉 확률로 환산해서 100%로 규격화 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서 존재하는 확률을 의미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막스보른의 확률 해석
이라 부르며 전자는 보어의 모델처럼 궤도가 아닌, 여러 구간에서 구름처럼
존재할 수 있는 확률로 표시가 가능하게 되고 이를 오비탈(orbital)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양자역학의 예를 들어 하나의 패러다임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홍가이의 말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체계처럼 처음부터
모든 체계를 갖춘 상태로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하나의
개척자에 의해서 던져진 화두를 여러 연구자가 연구하는 집단 지성의 노력
과정을 거쳐 하나의 공고한 패러다임 혹은 학문체계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뒤샹은 그의 레디메이드 작품을 통해 기존의 미술자체
에 질문을 던지고, 표현 방식에 질문을 던지고 미술의 가치에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러한 제스추어는 반미학적, 반미술적, 반관습적 예술의 선두에
서서 미술과 연관된 여러 개념들을 하나씩 거부하거나 혹은 해체하는 결과
를 가지고 온다. 그런데 그의 의도와는 달리 소위 네오다다는 뒤샹의 어휘
와 이디엄을 충분히 활용해 이를 하나의 표현 양식으로 만든다. 이 또한 뒤
샹이 의도치 않았던 역설적인 결과다. 이에 대해 뒤샹 또한 다음과 같이 토
로한다.
이러한 네오다다들, 소위 신사실주의(Nouveau Realisme), 팝 아트, 앗상블
라쥬(assemblage)등은 안이하게 나를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레디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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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를 고안해 만든 것은 미학 또는 탐미주의를 비판,모독하려는 위도에서
였다. 그런데 이들 네오다다는 나의 레디메이드 아이디어를 도용함으로써 구
전통의 탐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 나는 변기나 병꽂이들을 점잖은
예술 애호가들에게 하나의 야유이자 도전으로 던진 것인데, 이 네오다다들은
그러한 오브제들을 미적 감상이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147)

그는 레이메이드 제시 이외에 언어유희, 여성으로의 분장, 패러디, 인


용, 차용 등의 도상파괴적인 행위등을 보여줘 20세기~21세기 미술에 오히
려 새로운 표현양식의 전범 혹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더 나아가 팝아트의 앤디워홀은 뒤샹의 반-예술적 질문을 극한까지
몰고 갔다. 워홀이 그의 작품 <브릴로 박스>를 실물과 같이 만들어 전시장
에 들여왔을 때 아서 단토는 미술의 역사가 종말을 고했다고 주장했다.148)
왜냐하면, 작품과 수퍼마켓에 진열되어있는 상품을 시각적으로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토는 예술작품과 사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지각적인 특
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철학적 사유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149) 그러므로 팝아트를 그린버그식으로 훈련된 눈으로 보는 것은 그
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때문에, 대상의 존재론적 실재를 탐구했던 모더니즘
의 내러티브가 막을 내렸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신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정체가 정신임을 깨달았을 때 역사의 종말이 온다”는 헤겔의 주장에 따라
단토는 예술의 본질이 정신에 있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변증법적 투쟁의
역사가 종말을 고했다고 주장한다.150)

147) Hans Richter, Dada-Art and Anti-Art, London, 1966, p. 207


여기서는 홍가이, 『현대미술문화 비평』, 서울:미진사, 1987, p.31.에서 재인용
148) 최광진, 한국의 미학, 서울:미술문화, 2015, p.153.
149) 같은 글.
150)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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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9> 앤디 워홀, 「브릴로 박스」, 1964

단토는 철학적 사유가 예술의 본질이 되는 탈역사적 예술을 컨템퍼러리


아트(Contemporary Art)라고 명명하고, 그 특징을 다원주의에서 찾았
다.151) 다원주의에서 회화는 더 이상 역사발전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예술
가들은 하나의 장르에 매달리지 않고 그림, 조각, 영화, 사진, 출판, 심지어
는 패션까지 작품으로 삼는다는 것이다.152) 모더니즘이 재현과 모방이라는
내러티브와 결별함으로써 새로운 자유를 얻었듯이 컨템퍼러리 아트는 물질
성의 내러티브를 포기함으로써 보다 폭넓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제프 쿤스의 농구공과 같은 레디메이드를 활용한 「평형(equilibrium)」
작품, 그리고 풍선 장난감을 스테인레스 스틸로 커다랗게 확대한 것 같은
「풍선강아지」 연작들, 그리고 보다 최근의 「Gazing Ball」 연작을 보면 20

151) 최광진, 같은글, p. 154.


152)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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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아방가르드에 의해 시도된 거의 모든 어휘와 표현 방법을 그가 사용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153)
레디메이드는 그가 말했듯이 뒤샹의 영향이다. 그는 풍선강아지 같은
팝적인 소재를 사용하고 거울이나 스테인레스 스틸은 관객의 관여와 해석
으로 작품이 완성되는 방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거울과 같은 표면을 보면서
관객은 자신과 주변 환경의 관계를 상기 받고 자신이 움직임에 따라 조각
작품 자체의 형상이 변함과 아울러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도 변하는 것을
겪는다. 이러한 관객참여 방식은 기존의 작가와 관객과의 관계를 재정립하
며 관객이 단순히 작품해석에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해석의 중심이
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그는 미술사에도 정통해 미술사의 의미있는 작품
들을 현대를 상징하는 뽀빠이나 마이클 잭슨 같은 유명인, 어린이 장난감과
같은 대상들을 이용해 패러디하기도 한다.

20세기의 시작에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한 다양한 미술의 시도인 역사


적 아방가르드는 페터 뷔르거의 지적대로 예술과 삶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중에서 뒤샹은 본인의 주장대로 기존 예술의 개념, 관행
에 야유와 도전으로 레디메이드를 던졌지만 네오다다들에 의해 이러한 오
브제를 하나의 미적 대상으로 전도하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했다. 그의 다양
한 반 미술적, 반미학적 시도들 또한 현재는 제프쿤스같은 현대 미술가들에
게 하나의 정립된 표현방식과 이디엄으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즉, 그가 의문을 제기했던 미술이라는 개념자체
가 레디메이드를 수용하며 확장되면서 그가 제시한 철학적 의문은 하나의
표현 양식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미술은 하나의 고정된 그 무엇이 아닌,
앞 장에서 언급한 물리학자 리 스몰린이 말했듯이 변화하는 그 무엇이고,
그는 이러한 변화 과정에 참여해서 미술의 개념확대에 촉매 역할을 한 것
이다.

153) 그는 2018년 9월 계원예술대에 있었던 강연에서 지금까지의 작품의 개념과 표현 방법


등에 대하여 상세하게 발표한 바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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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0> 제프쿤스, 「강아지」, 2015

<도판11> 잭슨 폴록, 「페인팅 no.3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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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형식주의의 역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1940년에 「아방가르드와 키치」, 「더 새로운 라


오쿤을 향해」를 발표했다. 그는 부르주아의 퇴폐적인 문화나 수준 낮은 키
치를 비판하며 그 대안으로서 비정치적이고 순수미술지향의 엘리트 아방가
르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1965년에 발표된 「모더니스트의 회화」
를 통해 형식주의 그는 매체가 그 자체의 속성 즉 회화에서는 회화가 가지
는 존재론적 실제(ontological reality)인 평면성을 얻기 위한 모든 재현적
구습과 인습을 탈피하는 과정을 모더니즘이라 정의하였다.
그는 헤겔적인 단선적, 진화론적 관점에서 19세기에 중엽의 마네부터
시작되어 세잔느, 피카소, 잭슨 폴록을 거쳐 뉴욕의 프랭크 스텔라에 이어
지는 흐름을 형식주의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를 모더니즘(Modernism)이
라 칭했다. 그는 미술의 최우선 요소를 질(quality)이라 상정하며 미술의 자
율성을 옹호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마이클 프리드는 「세 사람의 미국화가」
라는 글에서 미술사라는 학문이 헤겔의 미술에 대한 개념이 제시된 후에
발전되었다는 견해에 동의했지만 20세기에는 미술이 내적, 외적 조건보다
작가 개인의 양식변화에 기인한다고 보았다.154)
케네스 놀랜드, 쥴즈 올리츠키와 더불어 프랭크 스텔라는 이러한 형
식주의 회화의 정점을 찍는다. 그는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유명한 말로 그 작품의 물리적 자체의 것을
강조하는 미술(literal art)을 제시했다. 화면은 극도로 완전한 평면에 캔버
스의 형태를 본인의 의도대로 (shaped canvas) 만들어 일정한 두께를 가
짐으로서 하나의 사물성(objecthood)을 돋보이게 했다. 스텔라는 형식주의
의 모더니즘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154) 진휘연, 같은 책,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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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2> 케네스 놀란드, 「Every Third,」 1964.

이후 도널드 저드와 더불어 미니멀리즘의 대표 조각가인 로버트 모리


스(Robert Morris)의 미니멀리즘은 형식주의적 논리의 절정이면서 이의 역
설을 담게된다. 그는 2부로 된 에세이 「조각에 대한 소고 (Notes on
Sculpture)」에서 그의 미니멀리즘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논리적으로 제시
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리스는 타틀린과 구성주의자들을 언급하며 형상의 재현, 즉 일루져
니즘을 배격하는데 본질이 있는 현대 미술에서 조각작품이 회화보다 우월
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부조에 대해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지적한
다. 부조는 회화와 표면을 공유하고 또한 조각처럼 중력에 적극적으로 맞서
지도 않는다. 보여지는 면도 제한적이기에 3차원 조각작품에 대해 한계를
갖는다고 보았다. 색은 본래 회화적, 시지각적 요소이기에 물리적으로 만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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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재료의 자질, 즉 조각에만 속하는 속성이 아니기에 그의 조각 작품
에서는 배격한다. 크기는 사람의 몸이 기준이 되어 너무 작으면 이는 공예
의 영역이 되고, 지나치게 크면 모뉴먼트가 되므로 그 중간 정도의 사람크
기의 적절한 사이즈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작품은 작가의 개개성이 드러
나지 않는 객관적인 양식이어야 한다. 조각 작품의 형태는 즉각적으로 작품
전체의 형태와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하기 위해, 즉 보다 나은 게쉬탈트
(Gestalt)를 위해 정다면체등의 기하학적 형태가 되어야 한다. 게쉬탈트는
일반적으로 부분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전체적 구조를 말하는데 모리스
는 관객의 지각에 대한 고려를 염두에 둔 것이다.
사람의 크기 이상의 기하학적 조각작품은 관람자가 즉각적으로 그 구
조를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감상은 관객이 작품 주위를 움직이며 경
험하게 된다. 움직임에는 필수적으로 시간이 매개된다. 이 과정에서 마이클
프리드가 지적한 시간이라는 요소가 관여되는 연극성 (Theatricality)이 두
드러지게 된다. 시간이 관여하는 장르는 음악과 연극 등의 공연예술장르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품자체와 더불어 조명과 같은 전시 조건, 주
위 환경이 중요하게 대두된다.155)
모리스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양축 안에서 관객들의 심리학적
인식, 총체적 형태와 ‘경험’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는 반복
성이나 규칙성을 벗어나 관객의 구체적이고 직접적 경험을 강조했다는 점
에서 의미가 있다. 회화가 2차원적 평면이라는 문제에 천착한 형식주의의
논리로 3차원 조각의 존재론적 실재를 구현할 경우 가져올 수 있는 필연적
인 결과를 로버트 모리스는 이 소논문에서 논증한다.
이 결과로 형식주의 모더니즘이 배제했던 작품 외적인요소, 즉 조명등
의 주변 환경문제와 관객의 지각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그는 형식주의 모
더니즘시대의 장엄한 종말을 알린다. 이는 조각의 영역에서 자기지시성
(self-referentiality)를 고집했을 때 초래할 수 있는 필연적인 결과로 관객

155) Robert Morris, Notes on Sculpture,


Charles Harrison and Paul Wood, Art in Theory 19000-2000, Blackwell, pp.
22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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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지각(Gestalt)이 관여함을 인식한다는 것은 마치 양자세계에서 관찰자의
측정이 이루어 짐으로서 계가 교란되어 그 이전에는 중첩상태로 파동같이
행동하면서 실체로 존재하지 않았던 전자가 입자로 검출되는 것, 즉 無=有
가 되는 역설적 상황이 된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이발사도 본인 역시 그
마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또한 원칙을 지켜야 하는 대상이 됨
으로써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도판13> 도날드 저드, 「Haning soft and standing hard」, 2015

롤랑바르트는 작가가 결코 독자보다 더 의미있는 존재도 아니고 완결


된 작품의 존재성도 부인되며 독자가 작품을 받아들이며 완성한다는 열린
개념을 제시한다고 본다. 모리스도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객의 세 가지 요
소속에 존재하는 예술작품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도출해내며 환원 불가능한
매체의 존재론적 실체 (ontological reality)가 허구요 역설일 수밖에 없음
을 증명해 낸다.
따라서 미니멀리즘에서는 역설적으로 시간과 주변환경 관객의 요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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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는 의미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그린버그식의 형식주의는 막을 내리게된다.
미니멀리즘은 이후 주변환경과 시간의 개입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대지
미술, 프로세스아트와 개념미술을 포함하는 포스트 미니멀리즘으로 이어진
다.
뒤샹의 경우 그가 술회한대로 처음에는 반-예술, 반-미학적 의도로
제시된 그의 작품들은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 미학적 표현방식으로 받아 들
여졌다. 즉 그가 의문을 제시한 미술이라는 개념자체는 고정된 무엇이 아닌
변화하는 것으로서 그의 미술 자체에 대한 도전적 행위들 또한 미술이라는
제도 안에 하나의 표현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는 역설적 결과를 가져온 것
이다.
그리고 그린버그식의 환원불가능한 매체의 존재론적 특성을 추구했던
형식주의는 미니멀리즘에 이르러 관객도 작품의 일부가 되는 자기지시성이
드러나면서 주변 환경의 요소가 개입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마치 뉴튼 역학적 패러다임이 양자역학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것과 마
찬가지의 상황이 된 것이다.
뒤샹의 반예술과 형식주의의 순수미술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상보적인 관계이면서 또한 아방가르드라는 공통점을 가지며 모두 역설에
처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은 고정 불변하는 그 무엇으
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며 주변환경, 삶
과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연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관을 불교
식으로 얘기한다면 연기법(緣起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 닐스 보어가 언급한 道可道非常道를 말한 노자
(老子)와 諸法無我를 말하는 불교철학과 인식적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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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연구자의 작품 분석
역설은 주제로 한 연구자의 작품은 연구자 개인의 경험과 서론에서
언급한 칸트 모델의 대안을 모색하는 이론적 연구과정과 상호 작용하며 만
들어진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연구자의 작품은 이론에 바탕을 두며,
또한 자전적이라 할 수 있다.
연구자는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과학수학고등학교(North Carolina
School of Science and Mathematics)를 벤치마킹해 한국에 최초로 1983
년에 설립된 경기과학고 1기로 입학해 3년간 수학했다. 1학년부터 물리, 화
학, 생물, 지구과학, 네 과목을 미국의 대학 교재 수준의 교과서와 실험서,
그리고 한국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했으며, 네 과목 모두 3년간 각각 23~25
회의 실험을 했고 이에 따른 실험 보고서를 매번 제출해야 했다.156) 실험을
통해 얻은 데이터가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에는 수시로 재실험을 했
으므로 연구자가 경험한 실제 실험 횟수는 3년간 100회를 훨씬 상회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고등학교 2학년 말에 앞 장에서 언급한 빛의 이중성 중
파동성에 관련된 모형실험인 ripple tank 실험과 영(Young)의 이중 슬릿
실험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대입이나 국제과학경시를 위한 별도
의 프로그램 없이 과학고 초기의 이념을 충실히 살리기 위한 실험에 충실
했던 시기였기에 제반 과목들의 실험과정은 매우 알찼다는 평을 받는다.
수학의 경우에도 수준 높은 교육이 이루어져 최상위권의 학생들의 경
우에는 이미 고등학교 2학년에 당시 대학에서 미적분학 교재로 사용중이던
Thomas’ Calculus 라는 책을 보며 공부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아인슈타
인의 상대성이론을 미적분을 사용하며 토론하기도 하였다. 수학과 과학에서
는 이들에 뒤떨어졌지만, 인문학과 예술에 더 많은 적성과 관심이 있었던
연구자는 뒤쳐진 수학 공부보다는 중학교 시절부터 즐겨왔던 그림 그리기
에 더 몰두했다. 오랜 고민 끝에 고등학교 3학년을 마친 12월에 미술대 서
양화과 진학을 위해 학교를 자퇴했다. 학교에서 미술대 진학을 불허했기에

156) 경기과학고등학교의 과학 과목 주교재는 PSCS물리, Chem-study화학, BSCS생물,


ESCP 지구과학 이라는 교재를 사용했으며 각 과목에는 실험서가 별도로 있어 각 과목의
해당 단원에 대한 자세한 실험 과제와 지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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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린 필연적 결론이었다.
그러나 뇌성장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자 자아 형성의 토대가 되는 시
기에 매주 평균 두 번꼴로 3년간 행해진 실험 및 보고서 작성은 일상의 가
장 중요한 부분이었고 그 과정에서 습득한 과학적 방법론과 세계관은 연구
자가 세계를 이해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 당시에 학습했던 양자역학에 관한
논의와 수학적 풀이과정은 이 후 연구자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뿐
만아니라, 당시에 양자역학을 노장사상과 불교 등의 동양사상과 비교 설명
한 게어리 주커브가 쓴 『춤추는 물리』라는 저서는 몇몇 동기들 사이에 유
행이었다. 이러한 환경은 연구자의 자아 형성뿐만 아니라 미술은 전공한 이
후에도 작품제작의 바탕이 되었다.
이때 학습한 양자역학의 주요 개념들은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
리, 닐스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 그리고 이후 관심을 가지게 된 아인슈타인
의 상대성 원리 등을 바탕으로 일련의 드로잉을 제작해 미술대학 졸업미전
에 출품한 것을 계기로 과학과 종교 그리고 예술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자
의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추상적 형식의 Something/
Nothing 시리즈가 시작된다.
이후 대학원 석사과정에서는 미술이론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학부 4학
년 과정중 수학했던 강태희 교수의 현대미술사 강좌를 수학하며 현대미술
에서 차지하는 이론적 배경의 중요성을 절감하였고, 초기 미술평론가로서도
활동했던 이우환 작가의 접근법에서 영향을 받아 졸업미전에 제시했던 개
념들을 보다 체계적인 이론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미술이
론전공을 선택한 것이다.
이 장에서는 우선 현대화의 역설을 초래한 칸트모델에 대한 연구자의
대안을 제시하고 이를 미술의 영역에서 구현하려 한 연구자의 일련의 작품
들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기로 한다. 이를 통해 상보적 관계라 할 수 있는
연구자의 이론과 실천과정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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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칸트 모델과 연구자의 모델.

서론에서 연구자는 서구 문명에 있어서 합리화와 이의 제도화가


가져온 현대화의 역설에 대해 언급했다. 현대화 과정에서 합리적 이성과 과
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무지와 미신, 그리고 물질적 결핍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왔다. 현대 문명은 그것을 특징짓는 도구적 합리성으로 효율적 행정,
경제 시스템 형성, 그리고 이들의 유지를 통해 인간의 삶에 큰 전환을 가져
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질서의 유지를 위한 극심한 관료주의 속에
인간이 오히려 구속되어 목적과 수단이 역전되는 역설적 상황이 초래되었
음을 지적했다.
모더니즘의 정신적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철학자 칸트는 순수 이성비
판, 실천력 비판, 판단력 비판을 저술하며 인간의 정신영역을 종교, 과학,
예술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칸트의 인간 정신영역 삼등분에서
모더니티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157) 미술의 영역에서도 20세기 미국의
클레멘트 그린버그도 칸트를 모더니즘의 시조라고 지칭한다. 이 세 가지 영
역은 상호 독립적이며 각 영역의 자율적인 논리로 발전해 간다는 것이 모
더니즘의 핵심이다. 이러한 개별영역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모더니티에 대한
분화주의적 접근법은 분명 보편적인 견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삶에 대한 총체성이 부정
되면서 단지 분열적 인식만이 가능한 상황을 초래했다. 하나의 총체적인 정
신영역의 자존(integrity)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다.158) 미술비평가 홍가
이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57) Habermas,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 (Frankfurt:Schurkamp,


1985)
Foucalt, “What is Enlightment?,” (Paul Rabinow ed. The Foucalt Render, N.Y.,
Pantheon, 1984, p 50. 여기서는
홍가이, 『현대미술문화비평』, 미진사: 서울, 1987, p 17. 에서 재인용
158) 홍가이,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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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열은 더욱 증가하여, 현대사회는 인간 삶의 공동의 장으로서보
다는, 도덕에서 이탈된 오로지 합법성이라는 개념의 기초 위에서 법률
이라는 것을 합리화 시켜 많은 사람들을 묶어 통치하는 제도적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예술조차 미아가 되어버리고 만
다. 칸트 자신도 말했듯이 예술이란 완전한 공동체를 향한 인간의 추
구 또는 의지의 표현 일진대, 그리고 바로 그런 의지가 인간정신의 기
초일진대, 인간 정신영역의 자존이 박살나버린 상태에서 진정한 의미
의 예술이라는 인간실천은 깊은 상처와 갈등을 안게 되었다는 것이
다.159)

그러나 지성의 가장 큰 파탄은 중세부터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던 종


교와 과학과의 갈등과 분리의 문제다. 구체적 예를 들면 우주와 생명의 기
원, 지구의 나이, 인간의 출현과 같은 문제에 과학과 기독교는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으며 진리라 칭한다. 동일한 질문에 서로 다른 두 답이 가능한
상황은 양가적이고 모순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적 모순은 그렇다면 “과
연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떤 성질을 갖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야기시킨다. 유일신의 존재증명은 세계관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문제이므로 현대 서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정신의 위기상황
과 직결되는 부분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우선 서양의 기독교 교
리가 갖는 철학적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챕터의 1장에서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가 논리적으로 역설을 피하기 어려움을 입증할 것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에서 보여지듯이 기독교는 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본 연구자가 접근하기에 한계가 있다. 실제로 리차드 도킨스
(Richard Dawkins, 1941~)는 E. J 라슨(E.J. Larson) 과 위덤( L.
Witham)의 연구를 인용해 미국 국립과학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될 정도로
최상급의 저명한 미국의 과학자들 중에 기독교의 신과 같은 인격신을 믿는
비율이 약 7 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점을 그의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 지적

159) 홍가이, 같은 책, p.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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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160) 이러한 사실은 전 인구의 90 퍼센트 이상이 초자연적인 인격신
을 믿는 미국 일반 대중의 입장과는 상반된다. 국립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
로 뽑히지 못한 덜 저명한 과학자들은 이 비율이 40 퍼센트 정도로 일반
대중에 비해서 소수지만 더 저명한 과학자들에 비하면 많은 편이다.161) 일
반 대중의 신앙심과 지적 엘리트 그룹의 무신론 비율이 거의 같다는 통계
적 사실은 경쟁 관계에 있는 진화론이 종교와 공존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봐야 할 것이다.162) 연구자의 Adam’s Apple/ Newton’s
Apple 연작은 이러한 문제를 다룬다.
연구자의 경우는 도킨스처럼 강한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기독교를
신앙으로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기독교 신학 체계가 가지는 역설
로부터 자유롭다 할 수 있다. 신앙의 전개 혹은 진화 과정을 대략 도식화
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체계에 따를 때
신앙은 다신교에서 모세가 출애급 후 십계를 받는 순간 여호와 혹은 하나
님 유일신체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신의 수를 n(G)라 할 때
n(G)=∞에서 n(G)=1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n(G)=0 으로 진화
혹은 전개되는 상황이 있지 않을까? 이 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신앙의 영역에서 굳이 기독교와 같은 절대신, 유일신을 상정하지 않고도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고 인간의 도덕 문제와 가치판단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체계가 있지는 않을까?”라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연구자에게 큰 관심으로 다가왔고 이러한 삶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체계를 살펴보던 중 아인슈타인이 미래의 우주적 종교
(cosmic religion)가 될 가능성이 높은 종교로 보았던 불교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불교의 연기론은 과학적 인과관계와 근본적으로 상통

160) 리차드 도킨스, 이한음 역, 『만들어진 신』, 김영사: 서울, 2007, pp 159-160.
161) 같은 책.
162) 혹자는 창조과학을 들어 이를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설명하려 하지만 진지한 과학자들
커뮤니티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절대자 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지 않고 진화론만
으로도 생명의 존재는 충분히 설명된다. 이에 관한 논의는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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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과학의 인과율을 영어로 causality라 하고 불교의 인과관계를 나타내
는 연기론을 Buddhist causality라 하듯이 이 둘은 근본적으로 같은 맥락
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양자역학은 우주적 종교를 통한 과학과 종교의 만남을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한다. 불교에서 ‘보이는 것’ 과 ‘궁극적인 것’으로 실재를 나누는
것은 양자역학에서 가시적 세계 혹은 거시세계를 다루는 ‘고전역학’과 양자
의 세계 혹은 미시세계를 나누는 ‘양자역학’으로 그대로 반영된다.163) 그리
고 이러한 관심은 연구자의 「Something / Nothing」 시리즈로 이어져 다
뤄진다.

<도판14> 칸트의 모델 <도판15> 연구자의 모델

칸트의 모델을 벤다이어그램을 통해 도식화 한 것이 <도판14>다. 연


구자는 이러한 세가지 영역의 분리로부터 발생하는 분열과 역설을 극복하
기 위해 <표15>와 같은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모델에서 종교와 과
학과 예술은 서로 분리되어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영역과 한가운데의 교집
합의 영역이 공존하는 구조를 보인다.
연구자가 지향하는 미술은 각각의 세 영역이 자율적으로 존재하면서

163) Graham Smetham, 박은영 역, 『양자역학과 불교』, 서울: 홍릉과학출판사, 2012,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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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상호 교차하는 교집합의 부분이 공존하는 것에 있다. 즉, 과학과 종교와
미술이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한데 통섭하며 어울리는 것, 이
것이 연구자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미술의 개념이다.164) 이러한 모델은 모든
것을 상호 연관된 유기적 총체로 파악하는 동양의 세계관과 상통하며 본문
의 앞에서 살펴본 고대 그리스인의 정신세계가 가진 총체성과도 연관된다.
서구 물리학계에서는 일찍이 양자역학의 시대를 연 닐스 보어도 노,장
사상을 위시한 동양불교에 대한 인식론적 관심이 표명했었다. 그리고 게러
리 주커브의 『춤추는 물리』나 프란츠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등
과 같은 저서를 통한 양자역학과 불교, 동양사상과의 연관 관계에 대한 심
화 된 연구가 있었다. 이러한 연구에 바탕을 두고 연구자는 종교의 영역에
도 과학적 접근법을 취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불교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아인슈타인의 지적대로 새로운 시대의 우주적 종교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러한 연구 활동을 통해 깨달은 내용을 미술의 영역에서 사진, 드로
잉, 회화, 렌티큘러, 설치 작품 등으로 제작, 제시하는 것이 연구자의 작업
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연구자는 과학과, 종교, 그리고 예술이 한데 어울리
는 종합적인 연구를 진행한다.
앞 II 장에서 연구자는 20세기 물리학계에서의 빛과 전자의 세계 등을
포함한 양자의 세계를 다룬 양자역학의 패러다임이 확립되는 과정을 고찰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양자역학의 패러다임이 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학계에서는 가시적인 세계에서 달탐사 로켓의 궤도를 계산하
거나 포탄의 탄도를 계산하는 데 여전히 뉴튼역학을 사용한다. 하나의 패러
다임이 무너졌다고 해서 과학계에서는 낡은 패러다임에 대한 무조건적인

164) 최광진은 그의 저서 『한국의 미학』에서 이러한 세 부분의 영역을 각각, 진, 선, 미의


영역으로 표시해 이들의 이상적인 관계를 연구자의 다이어그램과 동일한 형태로 제시하
고 있으나 원론적인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구현하는가의 과정
은 제시되지 않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연구자의 모델은 종교, 과학, 예술의 영역으로
표기되며 1993년 학부 졸업미전을 준비하며 구체화 되었고 이후의 작업과정과 학습과정
을 통해 이러한 모델을 구현하려 했고 이러한 과정이 본 논문으로 구제적으로 제시된다
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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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거시적인 세계의, 상대적으로 커다란 물체에서는
뉴튼역학이 여전히 정확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론적으로 뉴튼역학은
양자역학의 근사치이지만 대상이 로켓트 등과 같이 큰 경우에는 그 오차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정도이기에 거시세계에서는 여전히 뉴튼역학을 활용
한다.
연구자는 과학계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자세에
관심을 가진다. 즉, 과학계에서는 거시적 세계와 양자적 세계에서 대상의
서로 다른 조건을 고려해 두 가지 다른 접근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가시세
계와 양자의 세계를 나누는 코펜하겐학파의 해석은 연구자에게 큰 시사점
을 준다. 그리고 이는 불교에서 ‘보이는 것’(고전 물리학) 과 ‘궁극적인 것
(양자역학)’으로 실재를 나누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165)
미술에서도 크게 거시적인 세계, 즉 연구자가 살고 경험하는 자연과
사회에 대한 구체적 접근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세계에
대하여 연구자는 양식적으로 사실적인(realistic) 접근법을 취한다. 연구자는
이 세계를 마치 사회과학자나 자연과학자와 같이 관찰, 기록하며 이를 위한
유용한 도구로 사진을 사용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X 선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 데이터로 활용하여 사실적인 드로잉이나 회화, 사진, 렌티큘러
작업을 진행한다.
반면에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적인 세계, 추상적인 원리나 마
음, 심상의 문제 등에 접근할 때는 양식적으로 추상적 접근방법을 취하기로
한다. 추상은 영어의 abstract라는 말의 의미대로 기존의 구체적 사물에서
무언가를 추출해서 그것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것은
양자역학의 세계가 갖는 추상성과 유사성이 있다. 양자의 세계는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오로지 관측기구를 통해 측정한 데이터를 수학적 모델로 설명한
다. 수(數)와 이들의 관계를 정리한 수학적 모델을 통해 물리현상을 설명한
다는 것 자체가 고도의 추상적 개념활동이다.

165) Graham Smetham, 박은영 역, 『양자역학과 불교』, 서울: 홍릉과학출판사, 2012,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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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사진에 적용해 볼 때 디지털 이미지를 무한히 확대하는 것은
수학의 미분개념에 해당하는데 이를 통해 커다란 단색의 픽셀 하나를 발견
할 수 있다. 즉 실제 대상을 촬영한 이미지에 대한 미분을 반복하면 하나의
추상적인 픽셀이 된다. 이러한 추상적 픽셀이 하나하나 모여 하나의 구체
적, 사실적 형상이 된다. 따라서 추상적 픽셀은 하나의 형상이면서 그 추상
성 때문에 형상이 아니기도 한 것이고 이 또한 이중성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 전자는 관찰되기 전까지 중첩상태(superposition)로 파
동처럼 행동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어휘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가이거 계수기 같은 측정장치가 개입되면서 파동함수는
결어긋남(decoherence)을 일으키며 붕괴해 전자 입자로 검출된다. 즉 전자
라는 존재는 측정과정을 거치며 無에서 有로 전환되는 것이다. 마치 불경의
한 구절처럼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닌 것이
되는 상태가 된다. 즉 양자의 세계에서는 일체의 사물(전자, 빛, 소립자 등
등)은 실체, 정체성이 없는 하나의 허상이다. 이러한 불교의 공(空) 사상에
서 Somehting/Nothing이라는 작품의 제목이 유래된 것이다.
특히 닐스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는 연구자의 이론적 연구와 실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마치 빛과 어두움처럼 혹은 동전의 양면처
럼 서로 대립 되는 한 쌍의 상보적 요소들은 연구자의 작품의 제목에서 드
러난다. 동일한 대상도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으며, 경
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양가적 상황 자체가 진실일 수 있다는 점을 연구자
는 이러한 상보적 한 쌍의 제목을 통해 암시한다. 이러한 상보성의 원리는
Something/Nothing 시리즈 연작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고찰해 볼 것이다.
과학 분야에서 양자역학의 접근법은 종교의 분야에서 불교적 세계관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를 미술의 영역에서 구현하는 것이 앞에서 다이아그
램으로 제시한 연구자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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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설의 시각화
(1) M.C.에셔와 르네 마그리트
미술에서 역설과 관련 있는 대표적인 작품을 예로 들자면 2018년 말
뉴욕 브루클린에서 대규모 전시가 열리며 재조명 받고있는 에셔 (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의 작품을 꼽을 수 있다.

<도판16> 에셔, 「그림을 그리는 손」 (출처:The MC Escher Company)

에셔의 그림은 그림 안에 자기지시적 상황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역설


을 표현했다. 이 그림에서 손이 그리는 그림을 따라가면 그림들 그리는 다
른 손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손은 처음에 그림을 그리는 그 손을 그리고
있으므로 마치 II 장에서 예로 든 에피메니데스의 ‘모든 크레타 인은 거짓
말쟁이이다.’라는 진술처럼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을 가지며 무한
순환되는 구조를 가지는 역설을 보여준다.
반면에 다음에 제시된 초현실주의자 르네 마그리트( Renne Magritte,
1898~1967)의 작품은 서로 다른 상징체계를 동시에 제시해 보는 사람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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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환기 시키는 ‘언어그림’에 속한다.166)

<도판17 >르네 마그리트,「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출처: en.wikipedia.org)
미셸 푸코는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그림’이다.
②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이다.
③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은 ‘파이프’가 아니다.
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⓹ 이 ‘화폭’, 에 써진 ‘문장’, 이 파이프 ‘그림’, 이 모든 것은 파이프가 아
니다.167)
마그리트는 시작도 끝도 없이 하나의 의미에서 다른 의미로 연속된
주행을 통하여 차이화 된 것을 반복으로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시뮬라크르
를 순환시키는 것이다.168)

166) 마그리트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그림속의 그림’, ‘결합그림’ 과 ‘언어그림’이라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이중 제시된 작품은 ‘언어그림’이라는 범주에 속하낟.
Schneede Uwe M, Renne Magritte: Life and Work, (New York, Barron’s, 1982),
p. 47. 여기서는
이소림, 회화 이미지 재현에 관한 역설적 표현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전공 석사논
문, 2008, p. 14.에서 재인용.
167) 미셸 푸코, 김현 역,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서울: 민음사), 1995, p. 48.
168) 이소림,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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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자의 접근법
① 역설의 표현
연구자가 역설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갖는
다.
첫째, 연구작품들은 상호 대립적, 혹은 양가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대상과 한 쌍의 제목을 갖는다. 이는 자연의 대상은 하나의 고정된 개념만
으로는 결코 기술될 수 없으며 반드시 이 개념과 상호 대립적, 혹은 역설적
인 개념과 쌍을 이뤄야만 제대로 기술될 수 있다는 닐스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를 연구자는 따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노장사
상과 불교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작품의 의미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사고를 요구받는다.
둘째, 양식적인 측면에서 연구자는 거시적인 세계를 다루는 사실적 스
타일과 미시적인 세계와 마음의 문제를 다룰 때는 추상의 스타일 두 가지
를 나누어서 사용한다. 즉 일관된 형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물리학계에서
고전역학의 세계와 양자역학의 세계를 나누듯, 혹은 불교에서 ‘보이는 것’
과 ‘궁극적인 것’을 나누듯 세계를 두 개의 계로 나누어 상호 대립적인 사
실과 추상의 양식을 각각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역설적이다.
셋째, 연구자는 사진 이미지와 이에 바탕을 둔 회화, 디지털 판화이미
지, 그리고 렌티큘러 활용하며 원본과 시뮬라크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회화를 원본으로 보고 사진과 판화를 복제물이라 칭하는데 연
구자는 무한복제가 가능한 사진을 원본으로 하여 이를 유화로 그리고 이를
디지털 판화와 렌티큘러 작업과 함께 제시해 여러 시뮬라크르를 마치 뫼비
우스의 띠처럼 순환시킨다. 이는 에피메니데스의 역설과 이발사의 역설과
마찬가지로 무한 순환하는 속성을 갖는다. 이를 통해 들뢰즈가 말한 ‘차이’
를 ‘반복’ 함으로써 어떤 것이 실제이고 시뮬라크르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모든 것은 고정된 본질, 혹은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공(空)사상
과의 연관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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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다원적 접근법
이 연구에서 연구자가 사용하는 실천적 의미에서의 다원적 접근법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첫째, 기존의 회화나 조각, 설치 같은 전통적인 매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회화, 드로잉, 사진, 판화, 렌티큘러, 홀로그램 등의 다 매체를 활용
한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홀로그램이나 비디오 설치작
업,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활용하는 장치 등도 활용할 계획은 있으
나, 연구자의 현재 여건상 구현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이는 추후의 연
구과제로 돌리기로 한다. 그리고 향후 연구자의 활동영역은 단순히 앞에서
언급한 영역 외에 영화, 연기 등으로 확대될 수 있으며 한국의 근현대 역사
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역설의 문제에 대한 집필 및 저술 활
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 주제적인 측면에서 「역설」이라는 다소 범위가 큰 연구 주제를
그 아래에 몇 개의 구체적이고 서로 다른 소주제를 통해 구현한다. 예를 들
면 종교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차이에 따른 인식의 갭(gap)을 다룬
「아담의 사과/ 뉴튼의 사과 (Adam’s Apple / Newton’s Apple)」 연작,
대중민주주의에 대한 양가적 관점을 다룬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Demagoguery)」,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자역학의 세계와 상
통하는 불교의 절대무(Sunyata). 공(空)의 개념과 자아의 정체성의 문제를
추상회화의 형식을 빌려 다룬 「Something / Nothing」 시리즈의 작업 등
이 그것이다. 즉 몇 개의 소 주제를 통해 이를 포괄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소주제에 대한 작품제작은 앞에서 밝혔듯이 종교와 과학,
그리고 예술과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이론적 연구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사과 연작을 통해 연구자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대립과 역
설의 문제를 다루며, 이후 불교와 양자역학의 관계에 천착한
Something/Nothing 시리즈로 귀착이 되면서 앞에서 언급한 칸트의 모델
에 대한 연구자의 대안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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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를 통해 연구자는 몇 가지 소주제를 통해 역설이라는 큰 주제
를 제시하며 이를 구현하는 방식도 다매체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연구자는
이를 다원적으로 정의했다. 다음은 구체적으로 몇 가지 소주제와 이에 대한
이론적 배경, 그리고 이와 연관된 작품에 대해 논의하기로 한다.

3. 생(生) 과 사(死) 그리고 곰팡이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이후의 삶의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
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과 이후의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경험들이었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은 크게 생(生)과사(死)에 관한 작업과 곰
팡이 연작들에 반영된다.169)
(1) 생(生) 과 사(死)
2003년 5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경험했던 복잡한 감정은 양가적이

작품 1. 「탄생(Birth)」, 104 x 70Cm, UV print on Canvas, 2011

169) 추상 연작인 Something/Nothing 시리즈의 연작들을 시작한 대학 4년의 작품들은 계


속 진행중이었고, 이 시리즈는 별도로 동시에 진행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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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고 역설적이었다. 당시 부친을 여읜 슬픔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컸지만,
한편으로는 6개월 내내 겪었던 극심한 병마의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여 오히려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이 기간은 가족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간 엄하게만 느꼈던 아버지의 자애로움과 자식
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느끼게 해준 따뜻한 시간이었다. 그냥 옆에 계셔 주
시기만 해도 좋았던 아버지의 존재감을 처음으로 절실히 느꼈던 시간이기도 했
다. 어떠한 현상과 상황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고정관념과는 달
리 때로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그 상황과 맞지 않는 정반대의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탄생과 죽음과 같은 삶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종종 역
설적, 양가적 감정을 수반한다. 결혼 후 첫 아이를 얻었을 때의 감정 또한
그러했으며 이는 도판에 제시된 「탄생」이라는 작품에 구현되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더할 나위 없는 환희와 감동과 더불어 공존하는 아쉬움과
슬픔의 양가적 감정을 수반했다. 아이가 태어남과 더불어 부친의 부재가 더
더욱 절실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라며 재롱을 부리는 행복한 순간
에도 이러한 아쉬움의 감정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일생동안 행복한 날로 기
념하게 될 아이가 태어난 날 이제 막 삶을 시작한 아이 본인 또한 큰 소리
를 내며 울고 있었다. 이 아이는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인간이라면 누
구나 겪는 희로애락을 겪을 것이고 제 수명을 다하면 결국에는 생을 마칠
것이다. 삶은 곧 죽음의 시작이기도 하다.
생사(生死)는 한자어가 보여주듯이 탄생은 죽음과 나눠질 수 없다. 이
두 글자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닐스 보어의 상보성의 개념을 잘 보여주
고 있다. 부친의 DNA는 연구자를 통해 이 아이에게도 전해지고 집안의 문
화와 관습도 아이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또 자신의 아이를 낳아 내가 그러했듯이 나의 이야기를 그 아이에게 전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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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곰팡이
부친이 돌아가신 그 이듬해 2004년 2월 어느 날 짐을 정리하다가 베
란다 한편에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낡은 박스 안에 있는 썩은 귤을 발견했다.
그 썩은 귤에는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분명 이는 세균, 박테리아의 온상이었을
것이다. 무심코 쓰레기통에 버리려 하다가 햇볕 속에 노출된 귤 위의 파란 곰
팡이가 우연히도 잘 배열된 귤의 오렌지 색깔과 어울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곰팡이는 일반적으로 더러운 것, 상한 것이 연상되고 또한 귤과 같은
유기물에 핀 곰팡이와 박테리아는 부패와 더불어 죽음 등 부정적인 것과 연상
된다. 따라서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시각예술의 영역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았
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한국 전통음식의 중요한 재료인 메주를 띄울 때 곰
팡이의 도움을 받으며 또한 대표적인 항생제인 페니실린은 곰팡이를 활용한 것
이다. 또한, 생태계에서 곰팡이는 살아있는 유기물을 분해하여 생태계의 순환을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분해된 유기물은 식물들의 자양분이 되고 이
들의 생육을 돕는다. 즉, 곰팡이와 박테리아는 한 유기체의 죽음을 다시 다른
생물체의 생육으로 전환시키는 생태계의 인과관계, 불교의 용어로는 연기(緣起)
의 중요한 고리인 것이다.
뿐만아니라, 연구자는 생물학 전공의 지인의 실험실에서 배양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곰팡이를 보면서 현대미술의 추상화를 보는 것 같은 시각적 쾌
감을 경험하기도 했다. 물론 페트리디쉬 안에 염색약품에 담겨져 있는 것이 가
져다주는 시각적 의미는 실제로 발견된 박스속의 귤에 핀 곰팡이와 의미도 목
적도 다르지만, 이것은 분명 죽음이 가지는 양가적 성질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하
다고 할 수 있다.
곰팡이는 한국의 전통적인 초가집 속의 생활에서는 항상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짚에 메주를 메달아 방에 널어놓거나 혹은 뜰에 음식물 쓰레기
를 활용해 두엄자리를 만들어 과수의 거름으로 쓰던 때에는 항상 인간과 함께
공존했다. 물론 모든 곰팡이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은 아니며 때로는 건강에 치
명적인 경우도 적지 않지만, 합리적이고 위생적인 현대의 도시적 생활양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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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일반적으로 곰팡이라는 존재 자체가 건강에 해를 끼치는 백해무익한 존재로
서 말끔히 청소되어야 그 무엇이 되어버렸다.
현대 한국인의 가장 중요한 주거 형태 중의 하나인 아파트 환경에서 발생
하는 곰팡이는 박테리아와 더불어 이러한 양가적 성질을 상실하고 단순히 처리
되어야 할 비위생의 상징으로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위생에 대한 강박관념
은 역설적으로 현대인의 면역력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곰팡이와 박테리아는 역사적으로 한국인의 일상 속에 늘 함께 있었던 것이고,
또한 미학적 대상이 될 수 있다.

작품 2. 「곰팡이(fungi)」, pen on paper,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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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3. 「곰팡이(fungi)」, 71.7 x 91.0 Cm, UV print on canvas, 2004

작품 4. 곰팡이(fungi), 71.7 x 91.0 Cm, UV print on canvas,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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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5. 「곰팡이(fungi)」, 71.7 x 91.0 Cm, lenticular acrylic, 2004 (한 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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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6. 「곰팡이(fungi)」, 71.7 x 91.0 Cm, UV print on canvas, 2004

앞에 실린 도판은 연구자가 제작한 일련의 곰팡이 연작들은 연구자


가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된 역설과 양가성에 대한 관심의 결과물이다.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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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로 연구자의 작품들은 이후에 언급될 세 가지의 소주제를 지닌 일련의
작업들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학부과정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양
자역학과 불교의 상호 연관성에서 영감을 받은 추상 작업들을 크게 역설의
틀에서 해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최근의 추상작업을 이어 가게 되었다.

4. 아담의 사과/ 뉴튼의 사과 (Adam’s Apple/ Newton’s Apple)


(1) 기독교의 역설
사과를 소재로 한 이 연작은 동일한 대상도 세계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일종의 역설인 양가적 상황을 상징한다. 이는 제목이 시사
하듯 종교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대립상황을 다룬 것인데 이를 관객
들에게 제시함으로써 관객들의 사유를 촉구하는 의도를 지녔다. 여기서 종
교적 세계관이란 서양의 유일신, 인격신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함께 서양 문명의 양대 축을 이루는 기독교의
교리에서도 역설은 발견된다. 종교의 시대였던 중세 교부 철학에서 형이상
학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신이 존재한다면
존재는 그 목적을 가질 것이고 인간은 영원한 삶을 갖는다. 만약에 존재하
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영향 없이 삶의 의미와 목
적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특히 기독교에서 유일신이 갖는 속성은 두 가
지다. 첫째, 신은 전지전능하고, 둘째로 신은 선(善)하다. 그런데 악(惡)은
세상에 존재한다. 악의 존재를 볼 때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신
을 생각하면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만약에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그는 일부
러 악을 만들어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고 그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벌주는 것인데 이러한 존재를 선하다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려 하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역설적 결과
를 맞게 된다.
나이젤 워버턴(Nigel Warburton)은 그의 저서『철학의 근본문제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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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가지 성찰 (Philosophy: the Basics)』에서 신의 존재증명과 관련된
논쟁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놨다. 대표적으로 그가 제시한 몇 가지 논쟁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철학적 타당성을 검토해 본다.170)

① 디자인 논증(Design Argument)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는 시계를 살펴볼 때 시계의
제작자가 그 시계를 디자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눈과 같은 자
연물들이 갖는 정교함과 탁월함, 그 효율성을 그것을 디자인 한 신의 존재
의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견해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결과로부터 그 원인을 추론하는 논증으로서 유
비논증(argument from analogy)의 형식을 취한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은 『자연 종교의 대화』와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11
절』에서 이에 대한 강력한 반박을 제시한다.171) 그에 따르면 손목시계와 주
머니 시계는 유사성이 충분하기에 시계 제작자가 디자인했다는 것을 인정
할 수 있지만, 인간의 눈은 시계와는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하므로 이 논증은
범주의 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하고 있으며 그 유사성조차도 애매모
호 하다. 따라서 이 정도의 유비에 기초한 어떠한 결론도 마찬가지로 애매
모호 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설명하고 있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은 가장 널리 수용되고 있는 대안이다. 그는 적자생존의 과정을 통해
동, 식물들이 환경에 적응하고 후세에게 유전자를 전승하는 과정을 신의 개
입 없이 잘 설명해 줌으로써 디자인 논증이 신의 존재에 대한 결정적 입증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설령 디자인 논증을 확신시키는 방
법이 있다 하더라도 신의 유일성, 전지전능함과 선함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즉 세계의 모든 것이 다 신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170) 나이젤 워버턴, 최희봉 역,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10가지 성찰』, 자작나무 서울,
1997.
여기에서 설명한 여러 논증들은 이 저서에서 해당 내용을 요약 발췌한 것임을 밝혀둔다.
171) 같은 책,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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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증명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하나의 신이 디자인했다고 믿어
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또한, 인간의 눈은 근시가 되기 쉬우며 늙어서
는 백내장에 걸리는 등 우주의 많은 것들은 다자인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디자인 논증은 신이 전능 하나는 주장을 입증하기도 어렵다.
② 제 1원인으로서의 신
우주론적 논증 (Cosmological Argument)으로도 불리는 이 논증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단 한가지의 경험적 사실에 기초한다. 모든 것은 그 원
인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이 논쟁은 우주도 원인 없이 존재하지는 않
으므로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최초의 원인을 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논증은 신이 첫 번째 원인이라고 말함으로써 신이라는 존재
자체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그리고 신을 존재하게
하는 그 원인을 또한 있게 하는 원인을 무한히 상정해 볼 수 있는 무한 퇴
행(infinite regression)의 문제를 야기한다.
신을 “원인을 갖지 않은 원인” 이라 부른다면 우주의 생겨남도 원인
을 갖지 않는 원인일 수 있지 않은가? 또한, 논증에 대한 이러한 반론이
극복된다 하더라도 논증의 제 1 원인이 유일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
는 그 신이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입증하지는 못한다. 이 존재는 신의 존재
를 정당화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전지전능하고 선하다는 것을 입증하
지는 못한다. 이들 속성은 어느 것도 제1 원인에게는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
다.
③ 존재론적 논증 (Ontological Argument)
중세 교부철학의 대부 성 안젤무스(St. Anselmus, 1033~1109)는 ‘그
어떤 것도 이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상상가능한 완전한
존재로서 신을 상정한다. 완전성은 존재성을 포함한다. 따라서 신은 그 정
의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완벽한 8등신의 비율과 대칭적 몸매를 가진 남녀와 이들이 거니
는 완벽한 해변을 머릿속에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따르는 완벽한 남,
녀, 섬이 어딘가에 현실로 존재한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따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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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신이 완벽하다는 전제는 증거에 입각한 논증이 아니기에 이 전제를
부정할 경우 이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한 번 더 예를 들어 유니콘의 경우 유니콘이 하나의 뿔과 네 개의 다
리를 가졌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전지전능하고 선하다는 속성을 얘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몇 가지 논쟁들을 반박하는
형태로서 신의 존재는 이성으로 증명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
신앙의 문제라고 주장할 수 있다.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 인간을 보살펴
준다는 안도감이 매력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죽은 뒤의 삶에 대한 신념은
죽음에 대한 공포의 좋은 치료제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원인들이 단지
삶의 불확실성과 바라는 마음(wishful thinking)의 조합일 수 있다.
신은 존재하며 그 속성은 전지전능하고 선하다는 것을 전제로 구성한
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논의 체계는 앞에서 논증했듯이 반드시 논리적 모순
을 초래한다. 하나의 상식으로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를 증명하
는 철학적 과정에서 그들의 믿음과 그 결과가 상충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역설을 피하는 방법은 첫째 나이젤 워버턴이 언급했듯이 보다
느슨한 형태 혹은 완화된 형태로 신의 속성, 즉 전지전능성, 완벽성에 대해
정의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이러한 유일신 종교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독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첫 번째 선택은 이루
어질 수 없다.

(2) 과학적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


앞에서 연구자는 미국의 최상급의 과학자일수록 기독교의 인격신을
믿을 확률이 일반인들의 그것보다 현저히 적다는 통계를 인용했다. 연구자
는 이들처럼 저명한 과학자는 아니지만, 과학적 세계관을 지지하고 과학적
사유를 통해 칸트에 이해 종교, 과학, 예술로 분리되어 정의된 인간의 정신
영역을 통합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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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박이문은 과학적 세계관을 ⓐ인식대상의 설정, ⓑ인식대상의
서술 양식, ⓒ인식적 신념의 근거, ⓓ그 신념에 대한 태도 등의 차원에서
정의가 가능하다고 본다.172)
ⓐ 인식 대상은 직, 간접적으로 지각 가능한 물리적 대상이며, ⓑ서술
양식은 인식대상을 인과관계로 기계론적으로 서술하며, ⓒ이러한 행위에 대
한 인식적 신념의 근거는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주장대로 항상 반증가능성
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 이러한 신념에 대한 태도는 언제나 변경 가능한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
종교적 세계관은 다음과 같은 차이를 가진다는 면에서 과학적 세계관
과 다르다. 첫째, 인식의 대상이 지각의 차원을 넘어선 ‘초월적, 의인적, 영
적’ 혹은 ‘관념적 실체’를 포함한다. 둘째, 종교적 및 철학적 세계관의 근거
는 반증이 불가능한 ‘계시’나 지각과는 독립된 ‘순수한 논리적 사유’에 근거
를 두고 있다. 그리고 셋째로 과학적 세계관이 갖는 개방성과는 달리 폐쇄
적이거나 독단 혹은 독선적이다.
연구자는 비록 서론에서 합리성에 기반한 현대화가 가지고 있는 역설
에 대해 언급했지만, “인류로 하여금 유례없는 경이로운 물질적 부, 기술적
힘, 그리고 지적 빛을 누리게 한 오늘날의 첨단 과학기술문명은 긍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박이문의 견해에 동의하며, “오늘날 이 문명의 바탕에
과학적 세계관이 깔려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또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그의 주장에도 동의한다.
인류는 현대 과학기술문명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면을 누리면서 그 역설
적인 면을 보완하며 해결해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173) 박이문이 지적했
듯이 과학적 방법론으로 유도된 세계에 관한 인식은 그렇지 않은 방법에
의해서 얻어진 세계에 관한 인식보다 더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인정된
다.174) 따라서 과학적 세계관도 과학기술의 성과 못지않게 긍정적으로 평가

172) 박이문, 「과학적 세계관과 전통적 세계관」, 『과학과 기술』, 2008년 10월, pp. 6-7.
과학적 세계관에 관한 내용은 저자의 글을 요약 서술한 것임을 밝혀둔다.
173) 같은 글.
174) 같은 글.

- 109 -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가 지적한 대로 “과학적 세계관, 인식, 진리가 비과학적 세
계관, 인식, 진리와 상충할 때, 우리는 과학적 세계관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을 인정하고 그 열매를 향유하고 더
많은 발전을 위해 전력을 다하면서 과학적 세계관과 인식 그리고, 진리를
거부하면서 그것과 양립할 수 없는 비과학적 체계를 명백한 모순이며 자기
부정의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175)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과학기술문명에 때때로 정서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기존의 종교적 세계관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그 필요성
을 주장한다. 박이문은 이들이 “과학적 세계관의 정서적 삭막함, 이론적 지
적 한계성, 그 내용의 극심한 추상성”이라는 세 가지 사실을 그 근거로 한
다고 본다.176)
첫째, 이들은 “세계의 내재적 의미와 가치가 과학적 세계관에는 부
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과학적 세계관이 보여주는 세계는 차디차고, 삭
막하고, 기계적이며 몰인정하다.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감정을 포함해서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미립자로 분석하
여 물질로 환원되고, 모든 현상은 양적 차원에서 수학적으로 계산되고 예측
할 수 있는 기계적 인과법칙에 의해서 설명된다”.177) 거기에는 아무 ‘의미’
도 없는 가치 중립적 사실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학적 세계관에서 생명,
인간성은 증발되고 ‘영혼의 죽음’만이 남게 된다”라는 것이다.178)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는 이미 아득한 옛날 “만약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잃는다면
그가 세계전체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
가?”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바로 똑같은 이유에서 종교학자 스미스는 과학
적 세계관을 버리고 ‘사람들이 마치 자기 집처럼 영혼의 안식을 느낄 수 있
는 수 있는 전통적, 종교적 세계관’에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전통적 세계

175) 박이문, 같은 글.
176) 같은 글.
177) 같은 글.
178) 같은 글.

- 110 -
관에서는 인간과 그들의 세계는 다 똑같이 영적 감각을 소재로 만들어져
있으므로 인간은 바로 자신의 세계에 속해있다는 것이다.179)
둘째로, 과학이 인간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
적된다. 스미스의 주장을 예로 들자면, “과학이 모든 물리적 현상을 완전히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종교적, 영적 사항에 관한 더 근본
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
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째서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으며, 여기서
존재하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 것이며, 죽은 후에는 무슨 일이 생기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과학은 원천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다.180) 반면에 이들은 종교적 세계관은 답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과학적 세계관과 비교해서 전통적, 종교적 세계관이 상대적
으로 더 포괄적이고 더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근거로 “어떤 인식대상에 대한 과학적 서술의 지나친 추상성, 즉
비구체성, 극도의 환원적 성격, 즉 우리가 감각적으로 관찰하는 것과 전혀
다른 수학적 도식적 성격”이 자주 지적된다.181) 우주의 물리적 현상을 서술
하는 E=MC² 라는 놀랍고도 단순한 언어가 구체적인 물리적 현상을 서술하
는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182)
그러나 박이문은 이러한 세 가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펼
친다. 첫째, 가치관의 부재에 대한 지적은 유물론, 인식, 이론 및 진리 등의
개념들에 관한 잘못된 인식에서 유래한다. 진리는 인식대상으로서의 세계의
일부 혹은 전체로서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 혹은 전체에 대한
사실적 서술이다.183) 어떤 대상에 대한 명제가 참, 즉 진리이면 그 진리는
그 대상의 가치평가와는 전혀 논리적 관계가 없다. 예를 들면 “나의 건강상
태에 대한 ‘암’이라는 진단이 사실, 즉 진리라면, 그 진단은 그것에 대한 나
의 주관적 반응과는 전혀 상관없이 역시 ‘진리’ 즉 ‘참’이라는 데는 변함이

179) 박이문, 같은 글..


180) 같은 글.
181) 같은 글.
182) 같은 글.
183) 박이문, 같은 글.

- 111 -
없다.”184) 진리는 때로는 쓰고 고통스럽다. 진단을 통해서 내가‘암’에 걸렸
다는 객관적 사실 즉 진리를 수용할 때만 비로소 나는 ‘암’을 치료하고 생
존할 확률을 늘릴 수 있다.
둘째, “과학적 세계관이 초월적, 즉 종교적 물음에 원천적으로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폐기되어야 하고, 이러한 물음에 대답을 제공한다
고 자처하는 종교적 세계관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전혀 말
이 되지 않는다.185) 박이문은 이에 대해 “과학적 지식이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믿지만, 설사 과학적 세계관이 참이 아니라고 가정하
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종교적 세계관이 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며 이를 반박한다.186) 그리고 “종교적 주장이 독단적이고 폐쇄적인데 반해
서, 과학적 세계관은 실증적이고 개방적”임을 지적한다. 예수는 “나는 길이
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분석해 보면 사는 것이 중요하
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객관적 사실, 즉 진리를 전제한다는 말이다. 박이
문은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진리는 예수의 선언이 아니라 과학적 사유에
있다.”라는 말로 이에 대한 반박을 마친다.
연구자는 박이문의 위 세 가지 반박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과학에서의 발견과 업적이 인간의 가치와 법체계, 도덕 심지어는 정신세계
에 까지 심오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마치 17, 8세기 과학혁명이
서양사회 전반 시스템에 영향을 준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예를 들면 뉴
튼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확증된 이후 그의 과학적 방법들을 모든 분야에
적용하려는 경주가 일어났다.187)
가령 몽케스키외는 1748년 『법의 정신』이라는 저서에서 잘 작동하는
군주제를 지닌 국가에서 군주를 중심으로 모든 중력(인력)이 작동하는 우주
체계에 비유함으로써 뉴튼을 연상시켰다. 그는 ‘정신’은 사회를 통치하는
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원인들’로 보았다. 그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184) 박이문, 같은 글.
185) 같은 글.
186) 같은 글.
187) 마이클 셔머, 『도덕의 궤적』, 서울:바다출판사, 2018, pp 18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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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법은 대상들의 성질에서 이끌어낸 필연적인 관계”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견지에 보면 모든 존재는 법을 가진다. 신은 신의 법을, 물질세계는
그 세계의 법을, 인간보다 뛰어난 지적 존재들은 그들만의 법을, 짐승은 짐
승의 법을, 인간은 인간의 법을 가진다.”188) 라고 주장했다. 몽테스키외의
자연법 전통을 이은 프랑스 지식인들은 “물리적 세계, 동물사회, 심지어는
모든 생물의 내적 상태까지 지배하는 법칙들은 마치 뉴튼역학의 법칙과 같
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선언했다.
특히 홉스는 자연, 인간, ‘시민정부와 신민의 의무’에 관한 연구에 기
하학 정신과 기계적 인과론의 정신을 의식적으로 적용했다.189) 이를 통해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사회학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볼 수 있을 뿐만 아
니라 현대의 국가 통치개념들도 인간의 사회적 문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에
이성과 과학을 적용하려는 노력을 볼 수 있다. 일례로 천부적 자연권으로
번역되는 natural rights는 보편적 자연법(Universal natural law)에 기반
한 천부적 인권으로서 정의되어진다. 영어의 universal law는 글자 그대로
우주 어디에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뉴튼역학의 법칙처럼 자연에 필연적으
로 주어진 법이라는 뜻이다. 자유, 생명, 그리고 행복추구권과 같은 인간의
권리는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개인의 인종, 성별, 나이, 국적 불문하고 누
구에게나 마치 중력의 법칙처럼 보편적으로 적용되며 어떤 국가도 이를 침
해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치의 근간을 아리스토 텔레스의 도덕 윤리, 칸트의
정언명령, 밀의 공리주의 롤스의 정의론 같은 철학 원리뿐만 아니라 과학에
서도 찾을 수 있다. 과학혁명부터 계몽시대까지 이성과 과학은 미신, 교주
주의, 종교적 권위를 체계적으로 대체했다.190) 누군가를 하등한 종족이라는
이유로 노예로 삼는 대신 인간은 진화학을 통해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지
식을 확장함으로서 모든 사람을 인간이라는 종의 구성원에 포함 시켰고 다
른 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을 가지게 됨으로써 다른

188) 같은 글, p. 182.
189) 같은 글.
190) 같은 글.

- 113 -
문화와 인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특정한 책에서 남성의 권
리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대신, 우리는 도덕
과학을 통해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천부적 자연권
(natural rights)을 발견했다. 서양의 경우 무신론과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더 이상 부도덕한 외부인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으며 동물들을 마음대로 이
용해도 되는 자동인형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과학이 이룬 업적과
과학적 세계관은 실제로 인간의 가치체계와 도덕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연구자는 더 나아가 과학의 발달과 과학적 세계관이 인간의 종교의
영역에 까지 공유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담대한 주장의 근
거는 20 세기초에 형성된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가진 함
의성 때문이라고 본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 Something/ Nothing 시리즈
연작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3) 작품분석
아담의 사과/ 뉴튼의 사과 (Adam’s Apple/ Newton’s Apple)라는
제목을 가진 연구자의 작품은 동일한 대상인 사과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상
징하는 아담의 사과가 될 수도 있고, 동시에 과학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뉴
튼의 사과가 될 수도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제시한다. 이러한 양가적 상
황과 세계관의 차이에 관한 문제를 통해 관객들의 사고를 촉발하기를 원했
다.
사과는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품종으로서 모양과 색깔에 있어 일반적
인 한국 사과와 많이 다르다. 미국은 21세기 현재에 가장 강력한 기독교
근본주의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의 개신교 전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나
라다. 또한, 미국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과학, 기술의 발달에 많은 도
움을 주었으며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체제, 교육, 의료제도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가로서 신생국인 한국이 따라야
할 모델이기도 했다. 기독교의 한국 전래 과정에서 미국의 개신교는 한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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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의료 등으로 시작해 사회 전반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러
한 이유로 연구자는 주한미군 공군기지에 근무하는 지인을 통해 품종이
Red Delicious 인 미국사과를 구해 이를 소재로 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성서에는 선악과( fruit of the knowledge
of the good and evil)라고 명시되어 있을 뿐, 구체적으로 사과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리차드 도킨스는 중동지방의 기후 조건이 사과라는 과일
의 생육조건과 맞지 않으므로 석류가 선악과 일 것이라고 본다. 성서의 경
우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 판본에 대한 취사 선택이 있었으며, 이에 따
른 오류와 서로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고, 타 언어로의 번역과정에서 오역
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가 사과를 선택한 것은 사
람들이 믿는 이러한 신화(myth)가 가지는 오류의 가능성 문제 또한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양한 품종의 한국 사과를 구해 특히 위에서 중심을 본 모습을
찍었다. 한국사과는 사과 자체의 형상이 둥글둥글한 형상을 가진 것이 대부
분이어서 옆모습 촬영시 형태가 비교적 단조롭기 때문에, 차라리 위에서 근
접 촬영한 것이 조형성이 보다 뛰어나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도는 대
상자체에 대한 집중을 통해 단순히 정물화를 그리려는 목적이 아니라 연구
자의 개념에 초점을 맞추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러한 각도는 한운성의
과일 그림 연작과 연관성이 있다. 학부 3학년 때 그의 유화강좌를 수강한
연구자는 그 수업을 통해 대상을 새로운 각도와 시각으로 보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이 후 4학년 과정부터 시작한 추상 작업과 미니멀리즘의 영향이
이러한 평면도와 같은 각도에 영향을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 사과가 서구의 근대화를 의미한다면 한국사과는 한국의 근대화
와 기독교화를 상징한다. 향후 연구자는 여러 나라의 다양한 품종의 사과를
같은 구도로 촬영해 연작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이러한 방식은 서구의
근대화, 현대화의 문제가 각각의 나라와 문화권에서 수용되며 발생하는 현
대화의 역설을 상징하는 것이다.
연구자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작품을 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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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대상에 대한 관찰 및 시각적 데이터를 확보한다. 이 주제를 가
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인 사과를 찾아 가능하면 다양한 종을 관찰하고
이를 통제된 조건에서 디지털 사진으로 기록하여 데이터화 한다.
둘째, 확보된 시각 데이터, 즉 사진 이미지를 분류 재구성한다. 재구
성이라 하면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색과 명암등을 보정하는 작업을 말
한다. 특히, 유화 작업을 위해서는 사진의 초점을 사과의 여러 부분 부분에
맞춰 복수 촬영하여 전체뿐만 아니라 부분 부분의 세부 이미지를 같이 확
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유화작업 뿐만 아니라 디지털 판화작업을 위해 적절한 툴을 사
용한 이미지 프로세싱 절차를 걸쳐 이미지 자체의 표현성과 완성도를 높인
다. 이를 통해 모니터상에서 작품의 완결성을 갖도록 한다. 이러한 작업은
디지털 판화 원판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이후 실제 종이와 캔버스에 프린트
를 해보며 별도의 보정작업을 거친 후 원하는 최적의 상태를 준비한다.
넷째, 보는 시점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보일 수 있는 렌티큘러작업을
위한 사진 이미지를 선별한다. 가능하면 회화작업과 U.V. 프린트 작업에
사용했던 이미지를 다시 사용해 하나의 이미지를 활용해 회화, 디지털판화,
렌티큘러 등의 다수의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동일한 사진 이미지로 회화와 디지털판화 그리고 렌티큘러를 제작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원본과 복제의 구별이 무의미해지는 반복적인 과정을
겪는다. 일반적으로 회화를 원본으로 칭하고 판화를 복제물이라 칭한다. 그
런데 연구자의 회화는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고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사
진을 손으로 복제한 것이 된다. 또한, 이 사진의 이미지를 활용해 판화와
렌티큘러 작업을 진행했으므로 이러한 복제물과 회화의 관계는 전통적인
원본과 복제의 관계라 할 수 없다. 마치 뫼뷔우스의 띠처럼, 혹은 에페메니
데스와 이발사의 역설이 가지는 순환논리처럼 어떤 것이 원본이고 어떤 것
이 복제물(시뮬라크르)인지 경계가 애매모호하게 된다. 원본의 개념조차 모
호하고, 또한 시뮬라크르와 구분이 되지 않은 상황은 마치 고정불변하는 정
체성을 부정하는 불교의 공(空)이라는 개념과 유사하다.

- 116 -
실제로 이러한 과정은 연구자만이 갖는 고유의 접근법은 아니다. 판화
작업과 그 프로세스를 활용하는 여러 미술가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기 때문
이다. 신수진은 들뢰즈의 ‘차이의 반복’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서양의 플
라톤적 전통에 따른 동일자의 논리에 기반한 원본과 복제물의 위계질서에
전복을 꾀하는 방식으로 이를 설명했다.191)
‘역설’을 주제로 한 연구자의 작품들, 또한 들뢰즈의 ‘역설’의 개념을
초기부터 염두에 둔 것으로서, 같은 사진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같은 해석을 할 수 있으나, 연구자는 여기에 불교의 연기론(緣起
論)적 해석을 덧붙일 수 있다고 본다. 사과라는 대상에서 사진이 생기고 사
진이라는 대상이 원인이 되어 판화와 회화, 렌티큘러가 생겨난 것이다. 그
리고 이러한 인과관계는 계속 이어져 마치 불교의 공(空)의 개념과 연결시
킬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은 뒤에 이어질 「Something/Nothing」 시리즈에
서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① 유화 작업.
동일한 사과를 대상으로 한 여러 사진을 레퍼런스로 유화물감을 사용
하여 캔버스 위에 작업한다. 이 과정에서 실제 대상은 참고자료로 활용할
뿐 사진을 주요 자료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포토 리얼리스트와 유사하다. 그
러나 연구자는 정밀한 사진 이미지를 재현하지만, 붓 자국을 남긴다는 점에
서 보다 회화적이다. 사진을 본떠 작업했지만, 회화적 붓 터치와 물감의 재
질감을 남겨 회화임을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191) 신수진, 『차이의 반복과 그 표현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1,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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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7. 「Adam’s Apple/ Newton’s Apple」
Oil on Canvas, 116.7 x 91.0 Cm, 2017

② U.V. 프린트 작업.


디지털 판화의 일종인 이 작업은 전통적인 종이에 인쇄해 프레임하는
방식과 더불어 캔버스 위에 찍어 다른 판화와 회화와 병렬로 전시한다. 특
히 캔버스에 찍은 판화는 유화와 병치시켜 어떤 것이 원본인가라는 물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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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진다. 이 또한 기존의 회화와 복제물에 대한 관계의 역전을 추구한 역설
적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작품 8. 「Adam’s Apple/ Newton’s Apple」, 91.0x71.7Cm, UV print on


Canvas, 2017

- 119 -
③ 렌티큘러 작업.
리차드 도킨스의 저서 『만들어진 신』의 영어 제목은 『The God
Delusion』이다. ‘delusion’은 망상, 오해 정도로 번역되는 단어인데
illusion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에서 연관성이 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illusionism을 도입한 사실적 회화는 신앙이 가지는 환영성을 드러내기 좋
은 전통적 방식이다. 회화와 판화작업 등을 위해 연구자가 대상에 대한 관
찰 및 측정 데이터로 활용하는 것이 사진이다. 특히, 디지털 사진 이미지는
이를 처리(processing)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일루젼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근에는 이미지를 삼차원으로 구현
하는 방식이 홀로그램이나 Virtual Reality를 통해 많이 활성화되었다. 그
러나 현재 연구자의 여건상 이들을 구현하는데는 많은 제약이 있어, 가장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렌티큘러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홀로그램이나
VR을 활용해 사과를 삼차원적 이미지로 재현하는 것은 종교나 혹은 개인의
믿음이 가지고 있는 허구성을 표현하는 것에 적합한 방식인데 이에 대한
활용은 향후 연구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도판18> 렌티큘러의 작동원리 (자료출처: explainthatstuff.com)

보조 안경이나 다른 도구 없이도 삼차원의 환영을 표현할 수 있는 비


교적 간단한 렌티큘러는 반원통형의 수 많은 렌티클이 나열된 판으로 표면
의 볼록한 면이 사람의 시선을 굴절시켜 뒷면의 합성된 이미지를 입체로

- 120 -
인식하도록 한다.192)
렌티큘러가 입체적인 효과를 내는 원리는 인간의 눈이 가진 양안시차
(binocular parallax) 때문이다.193) 인간의 눈은 좌, 우 약 65mm의 간격
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눈에 맺히는 이미지의 차이 때문에 깊이감과
거리감 같은 입체감을 느끼게 된다.194) 이 망막에 맺힌 두 이미지가 뇌에
전달되면 뇌는 이를 서로 융합하여 3차원의 입체감과 실제감을 얻게 된
다.195).

<도판19> 양안시차와 렌티큘러 (자료출처: explainthatstuff.com)

렌티큘러 렌즈의 규격은 1인치 안에 들어가는 렌티큘러 렌즈의 수로 나타


내며 LPI(Line per Inch)로 표시된다. 이 수치는 대략 10~150 정도로 나
뉘어지며 수치가 높을수록 해상도가 크며 입체감도 달라진다.
렌티큘러는 여러장의 사진 이미지를 잘라 순차적으로 배치하기 때문
에 고해상도의 이미지일수록 원하는 효과를 잘 나타낼 수 있다. LPI 수치가

192) 안성준, 「렌티큘러의 표현기법을 활용한 패션일러스트레이션 연구: 옵티컬일루젼을 중


심 으로」 ,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7. p 57.
193) 이승현외 2인, 『3D 영상 콘텐츠 제작 개론』 서울: 인터비전, 2006, p 2.
194) 네이버IT용어사전, 검색일, 2018년 12월 29일.
195) 이승현외 2인, 같은 책, p 2.

- 121 -
낮으면 렌즈의 크기가 커지고 보다 많은 이미지를 넣을 수 있고 따라서 입
체감 표현에 유리하나 근접해 볼수록 이미지 사이의 분리 영역이 보이게
된다.196) 반면에 LPI 수치가 높을수록 적은 양의 이미지가 들어가며 세밀
한 표현이 가능해지며, 따라서 갤러리 공간에서 전시되는 중, 소형의 작품
에 적합하다. 연구자는 중, 소형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렌티큘러로 낼 수 있는 효과로는 일반적으로 2차원적 이미지를 양안
시차를 이용해 3차원 입체로 보이게 하는 입체효과(depth), 여러 이미지를
각각 다른 레이어로 놓아 보이는 방향에 따라 특정한 이미지 만을 보이게
하는 변환효과(flip-flop), 그리고 연속되는 이미지를 합해 마치 영화같은
움직임을 보여주는 모션효과(motion),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자
연스럽게 변환되어 가는 모핑효과(morphing),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을 단
계별로 확대 혹은 축소해서 보여주는 줌 효과(zoom) 등이 알려져 있다.197)
일반적으로 연구자 주변의 렌티큘러를 사용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은 대
개 시각의 차이를 움직임(motion)으로 만들거나 혹은 배준성의 경우처럼
여러 레이어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복잡하고 깊은 시각적 환영(illusion)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198) 연구자는 이러한 여러 효과
중 보는 이의 관점과 세계관에 따라 대상이 다르게 보일 수도 있는 양가성
이라는 개념을 잘 드러내는 적합한 효과로 변환 효과(Flip-flop)를 선택했
다.
연구자는 작품의 개념에 맞게 보이는 각도에 따라 대상이 칼라와 흑
백의 사과 이미지가 교차로 보이게 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관객의 위
치가 변하면서 칼라와 흑백이 점진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했
다. 특히 갤리리의 조명 조건하에서 렌티큘러 렌즈가 마치 스스로 빛을 내
듯 반사하며 이러한 시각적 현상을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흑백 이미지는

196) 권종수, 「테크놀로지 발달로 인한 디지털예술작품의 물리적,심리적 밀도성 변화연구」,


중앙대학교 첨단 영상대학원 예술공학 박사학위 논문, p. 57.
197) 박진영, 「제프쿤스 회화의 캐릭터 복제를 응용한 패션디자인 연구-렌티큘러 적용을 중
심으로」 ,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7, p. 33.
198) 배준성은 연구자와 대학원 석사과정때 실기수업을 같이 들었던 지인으로서 연구자가
그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해 렌티큘러 활용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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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흑백 논리를 상징한 것으로서 관람자의 세계관이 자신만의
도그마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작품 9. 「Adam’s Apple/ Newton’s Apple」


Lenticular Acrylic, 91.0x71.7Cm, 2017

렌티큘러를 활용한 작품은 관객의 시선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는 점에서 일반 회화, 판화 작품과 차이가 있다. 즉 관객이 스스로 작품의
한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며 이는 양자역학에서 관찰자의 개입이 대상에 직
접적으로 작용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낸다.
관객은 실제로 보는 관점에 따라 대상이 달라 보인다는 것을 전시장
에서 확인할 수있다. 이러한 관객의 관점, 시점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가능하다. 첫째로, 시점의 차이는 글자 그대로 사람들의 서로 다른 관
점의 차이 혹은 세계관의 차이로 해석될 수 있다. 둘째, 동일한 인식 주체
인 관객이 작품 앞을 지나가면서 관객은 사과의 이미지가 칼라에서 흑백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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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변해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람할 수 있다. 관객의 움직임과 이미지의
변화가 상호 연결된 것이다. 3 차원 공간에서 움직임과 그가 움직인 거리는
시간을 매개로 일어난다. 따라서 거리는 시간으로 환산할 수 있다.

작품 10. 「Adam’s Apple/ Newton’s Apple」,


Lenticular Acrylic, 80x80Cm, 2017
관객은 작품을 지나가면서,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가 바라보는 대
상이 칼라에서 흑백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관객의 대상을 바
라보는 시각이 시간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그
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거에 자신이 보았던 생생한 색채의 사과가 결국
은 흑백 사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생생한 진리라고
보았던 것이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보면 흑백 이미지가 상징하는 도그마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이 점은 관객이 작품과 분리가 되지 않은 하나의 계(界)에 속하는 것
을 전제한 작품이다. 이를 통해 양자역학에서 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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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속도의 값을 제대로 측정할 수 없고 속도의 값을 제대로 측정하려면
위치를 알 수 없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과학적
세계관을 가지면 가질수록 기독교적 세계관과 멀어지고 종교적 세계관을
가지면 가질수록 과학적 세계관은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또한 보여주고자
했다.

⓸ 설치작업
앞에서 언급한 사과를 소재로 한 사진, 유화, U.V. 프린트, 렌티큘러
작품들은 전시장 안에 별도로 만든 한 방에서 특정하게 배열되어 전체가
하나의 설치 작품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이 조건에서는 유일물인 유화 원본
과 사진을 활용한 복제물이 동시에 배열됨으로써 원본과 복제물의 가치 전
복문제를 한 번 더 상기시킨다.
발터 벤야민은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이라는 글에서 미술의 기능을 크
게 종교적 기능과 전시적 기능 두 가지로 정의했다. 본디 예술작품은 그 기
원에서부터 주술적 기능과 연관이 있다. 후에 이것이 종교적 기능으로 발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199) 또한, 예술작품은 전통적으로 소수계
층의 지위만 누릴 수 있는 것이었고 평범한 사람에게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락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미술품은 숭배적 가치(Kultwert)를
지녔다. 그래서 벤야민은 예술작품이 가진 종교적 기능과 압도적인 권위를
가진 ‘아우라’를 이와 연결 시킨다. 그리고 그는 그 권위의 근거가 작품들
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 속성 즉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에 있다고 보았
다.200) 연구자는 이 세 가지 속성을 마치 기독교에서의 유일신을 연상시키
려는 의도에서 ‘유일성’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등 새로운 매체의 등장을 매우 긍정적인 변화
로 파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예술의 가치와 기능에 변화를 초래했다고 보
기 때문이다. 기계적 복제시대에 ‘예술작품을 향한 일반 사람들의 민주적

199) 심혜련, 20세기의 매체철학, 그린비, p 45.


200) 같은책, p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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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 가능성’이 확대되어 전시적 가치가 부각되며 수용자가 예술작품에 가
지고 있었던 막연한 두려움과 신비감, 즉 아우라적 권위가 상실되었기 때문
이다.

작품 11. 「벤야민의 방」, 설치, 2017

2017년 9월 사이아트 갤러리에 있었던 개인전에서는 전시실을 1실, 2


실로 나누어서 그중 1실을 다양한 매체들을 사용해서 「Adam's Apple/
Newton's Apple」 을 주제로 한 하나의 작품들이 전체로 어울려 하나의 설
치작품 같이 배열했다. 그리고 그 방을 ‘벤야민의 방’으로 명명했다.
정면 벽면에 유화로 그린 ‘유일성’을 지닌 사과작품 한 점을 배치했
다. 이 방의 주인으로서 마치 예수가 그의 사도들을 거느리며 중앙에 자리
하듯이 자리배치를 한 것이다. 그리고 좌,우 벽면에 사진을 활용한 렌티큘
러와 UV 프린트 작품들, 즉 복제물들을 배치했다.
벤야민식으로 해석한다면 중앙의 유화는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을
가진 것으로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연구자는 유화를 사진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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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서, 사진과 같이 보이게 그렸고 또한 사진을 이용한 복제물들을 주변에
놓아 언뜻 유화인지 알아보기 힘들게 했다. 즉 시뮬라크르의 문맥속에 회화
가 놓였고 회화 자체도 사진이라는 복제물을 보고 그려서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제물인지 발견하기 힘들어진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불교식
으로 말한다면 모든 상(想)은 실재가 없는 공(空)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전시회에 온 관객들에게 묻고 확인해보니 언뜻 봐서는 회화가 아닌
사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뿐만아니라, 유화 자체를 거의 사진 같이 보이게 함으로써 연구자가
사진기라는 기계적 장치를 가지고 대상을 관찰하는 자연과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게 했다. 회화라는 매체에 부여한 벤야
민의 아우라의 개념을 비틀어 놓은 것이다. 이를 통해 서양 철학의 전통 속
에 놓인 동일자를 기반으로 한 원본과 복제물의 위계질서의 역전을 꾀했다.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 광고등 당시에 새로 등장한 매체들이 예술작품에
미치는 영향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대중의 소통 가능성의 향상에 주목했
다. 특히 영화에서는 집단적이고 대중적인 지각 방식에 주목하고 대중의 참
여, 즉 ‘예술로 향하는 민주적 통로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
했다. 영화는 대중들에게 필요 이상의 예술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영
화는 아우라의 몰락에서 가장 강력한 주선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201) 이를
통해 영화가 사진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종교적 가치를 해체하고 ‘예술의 자
율성’이라는 가상을 해체 시킴으로써 아우라의 몰락을 완성했다고 본 것이
다.202)
따라서 벤야민은 기계복제시대에 아우라의 몰락과 더불어 발생한 사진,
영화, 광고 등의 대중적 매체의 등장을 ‘민주적 통로로의 확장’으로 보고
다가올 대중사회에서의 예술의 역할과 소통에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
는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 또한 부분적으로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고 있
다.203)

201) James Monaco, Film Verstehen, Hamburg: Rowwohlt, 1996, p 259~260.


여기서는 심례련의 같은책, p 66.
202) 같은책,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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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 Demagoguery : Mass 시리즈)
(1) 대중(Mass)의 역설
낙관적 벤야민과는 달리 그보다 조금 앞선 시대의 철학자 니체
(Fridrich Wilhelm Nietzsche)는 대중예술과 대중에 대한 혐오와 독설로
유명했다. 그는 대중의 도덕관을 ‘이웃사람과 똑 같이 행동하는 것’을 가장 우
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으로 보았고, 사태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사고나 회의(懷
疑) 없이 전원이 눈사태를 피해 동일한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대중사회의
특징으로 판단했다. 니체는 이러한 비주체적인 군중을 조롱하듯 가축의 무리
(Herde)라고 이름 붙였다. 무리 지어 어슬렁거리다가 한 마리의 양이 뛰면
다들 모두 같이 무리를 지어 뛰어가는 양떼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의 대중
에 대한 시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은 니체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독일어의
Herde는 이러한 이유에서 일상적 의미로 사용될 때 우민(愚民)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대중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은 굳이 니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일반화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대중
의 무리는 누군가 특별하거나 탁월한 것을 싫어한다. 이들 무리가 지닌 이상은
모두 ‘동일하게’이며 이것이 이들의 도덕률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 무리가 지향
하는 것은 ‘만인이 평등한 것’이고 모든 특수한 요구, 특권과 우선권에 완강히
저항하며 동등하게 동고동락하고 같은 종교를 믿고, 살고 느끼는 것을 모두 함
께하게 되어 결국은 각각의 개체의 차이를 구별하기 어려운 덩어리(Mass)가 되
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짐승 무리가 집착하는 도덕률은 어떤 행위에 내재하는 그
가치보다는 단순히 그가 속한 집단과 ‘동일한지 아닌지’가 기준이 된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상대방은 무조건 비난하며 자신과 같은 편이라면 무조건적 지
지와 응원을 보낸다. 소위 진영논리가 지배하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203) 사과는 일반 관객에게 있어 매우 대중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실례로 세 차례의 아트페


어 참여경험을 볼 때 연구자의 작품도 일반 대중들의 관객의 긍정적인 관심과 평가가 많
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관객들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렌티큘러 작품에 대한 문
의가 많았던 것을 보면 이러한 복제물과 소재의 친숙성을 활용한 대중성 확보에 어느 정
도 성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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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대중들은 항상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길 원하고 자신들
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민의(民意)’를 강조하며 ‘민주주의’를 강조한다. 민주주의
의가 일반적으로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한다 할 때 이러한 대중의 의사 개진과
참여는 분명 시민사회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때때로 과장되거
나 잘못된 정보에 의해서 쉽게 선동당하고 오도되는 우민(愚民)의 무리가 되기
도 한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현자와 아둔한 사람도 정치적으로는 같은 가치를
지닌 한 표로 치환되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보다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는 대중
들의 의사에 귀 기울이며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들의 요구에 부응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들의 이해관계가 전문가들의 판단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종
종 있다. 바둑의 예를 들면, 아무리 아마추어 백 명이 힘을 합쳐도 프로 9단 한
명을 이길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공공영역에는 무수한 이익집단의 이해
관계 속에서도 이러한 이해관계를 초월해 문제 자체에 고도의 전문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이 있다. 그러나 다수가 이들의 견해를 무시하고 본인들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려 하는 집단의 힘에 의존한다.
한병철은 그의 저서 『투명사회』에서 현대의 이러한 대중적 체제는 때대로
과도한 투명성과 즉각적인 문제해결을 요구함으로써 다소간의 현재의 희생이
있더라도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적인 계획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204) 또
한 이러한 체제하에 대중들은 그들 끼리 무리 지으려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다름과 낯섬을 부정하고, 집단의 응집력을 강화시키려 하는 그들 간의 커뮤니케
이션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이 원하는 민주사회는
결국 역설적으로 전체주의 사회와 같은 성격을 가질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 물질적 기반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고 인터넷, sns등의 정보 통
신의 발달로 일반적인 정보와 지식의 공유가 다른 어느 나라와 비교할 수 없
을 정도로 빠른 ‘투명사회’의 속성을 지니며 니체가 말한 대중의 무리가 지배
하는 사회의 속성을 가진다. 더구나 이들이 스스로를 진보나 보수 두 가지
집단 중 하나로 나뉘어 특정한 방향성을 표명하게 되면 이들은 나와 같은 편

204) 한병철, 『투명사회』, 서울:문학과 지성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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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항상 옳고 다른 입장을 지닌 상대방은 무조건 나쁘고 반대해야 할 대상이
되는 극단적 상황이 초래된다.
대중들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이 일각에서는
대중문화에 대한 폄하라는 지적을 받았던 것이다.

작품 12.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 Demagoguery)」


lenticular acrylic, 104x70cm, 2017

(2)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 Demagoguery)의 시각적 표현


2008년 연구자는 여름 뉴욕을 여행 중에 뉴욕 양키스 구장에서 뉴욕 메
츠와의 야구 경기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미국은 이미 5,60 년대에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기반한 소비사회를 이루었고 서구세계에서 텔레비전 등의 대중 매
체가 가장 일찍 보편화된 대표적인 대중사회다. 더욱이 미국의 시장경제 기반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포함한 사회제도는 한국에서 항상 배워야 할 모범이었다.
야구는 미국과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며 대중사회의 속성을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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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다.

작품 13.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 Demagoguery)」


UV print on canvas, 125.3x83.2Cm, 2017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찍은 1루 측의 관객석과 경기장 일부를 찍은 사진을
데이터로 이용해 사진 및 렌티큘러 아크릴 작품을 제작했다. 보이는 방향에
따라 칼라이던 대중들이 흑백으로 보이기도 한다. 흑백은 이들을 하나의 덩
어리로 묶어 획일적으로 보이게 하며 이들이 흑백논리에 쉬운 타깃이 된다
는 것을 상징한다. 이를 통해 사진과 영화 등 대중매체를 ‘민주주적 통로로
의 확장’으로 본 벤야민의 견해에 반전을 주려고 했다. 즉, 이러한 매체들
은 선전선동의 쉬운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인들의 과도한 노력은 종종 대중영합주의(populism)의 결과를 초
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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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14. 작품 15.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 Demagoguery)」
UV print on canvas, 각각 125.3x83.2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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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16.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 Demagoguery)」
UV print on canvas, 125.3x83.2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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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의, 흑백이며 점선으로 이루어진 야구의 1루와 3루 쪽 관객석 광
경을 나란히 제시한 작품은 대중들이 보여주는 진영논리를 시각화 한 것이
다. 마주 본 야구장의 양쪽 관객석을 통해 연구자는 대중이 가지는 양가적
성질과 진영논리가 지배하는 대중 정치의 위험성을 상기시키고 싶었다. 야
구 경기 중 투수가 타자의 몸을 향해 던진 위협구도 내 편이 하면 다 이유
가 있는 것이며 상대방의 행동엔 가차 없는 야유와 비난이 따른다. 이들은
자신들 편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재단하고 심판한다. 자기편은 항상 옳고 상
대편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연구자는 사실은 1루 측의 사진을 반전시켜
거울 이미지로 3루 쪽 스타디움을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 관객들은 상대방
진영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흑백 이미지를 사용한 이유는 이들이 하나의 덩어리(Mass)로서 각 구
성원들 간의 일체감 및 동일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이들
이 때때로 흑백논리에 물들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는 동일한 이미지를 다양한 툴을 사용해 여러 번
반복해 사용해 메조틴트 판화와 유사한 효과를 낸 후 이를 투명 아크릴 판
에 UV 프린트로 찍었다. 이 위에 두꺼운 투명 아크릴 판을 다시 덧대어 양
아크릴 판에 대중의 이미지가 서로 반사되게 하여 마치 메아리같이 대중의
함성이 울리는 모습을 시각화하기도 했다.
특히 같은 구도의 서로를 마주 보는 관객들의 사진 이미지를 활용해
만든 렌티큘러 작업에서는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칼라에서 흑백으로 이미
지가 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앞서 사과 시리즈의 해석과 마찬가
지로 개인의 관점에 따라 대중들이 흑백 논리로 선동된 상태일 수도 있음
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과, 렌티큘러. 아크릴 판위에 찍은 같은 복제 이미지들은 모두 보
드리야르의 용어로 시뮬라크르라 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가 더 이상 오늘날
에는 실재가 가능하지 않다고 얘기하듯, 연구자는 전 세계 어느 곳에도 존
재한 적이 없는 이상화된 민주주의를 말하며, 본인들만이 절대선이라는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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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에 사로잡힌 일부 대중들의 믿음을 이 시뮬라크르를 통해 표현했다.
또한, 대중 시리즈는 최근 세계에 만연한 정치적 진영변화와 정치적
이슈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시한다. “작금의 현실은 민주주의의
발현인가, 아니면 대중 선동가들의 선동의 결과인가?”

6. Something / Nothing, 과학과 종교, 그리고 미술


과학적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과의 대립을 다룬 사과 시리즈에서 연
구자는 과학적 세계관을 견지하며 합리적 이성과 과학을 진리추구의 방법
론으로 삼는다는 점을 밝혔다. 더 나아가 연구자는 이러한 접근법의 확장을
통해 인류는 인간의 가치문제나 도덕적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마이클
셔머의 ‘도덕과학론’에 동의한다. 셔머는 우리가 살고있는 현대는 과학에
기반한 합리적 사고의 덕으로 과거 종교의 시대나 어느 때 보다 도덕적으
로 진보된 상태라고 보았다. 한발 더 나아가 연구자에게는 현대 과학의 발
전이 단순히 도덕적 향상만을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의 패러다임까지
도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본다.
물리학자이자 불교 철학자이기도 한 김성구는 그의 저서 『아인슈타인
과 우주적 종교』에서 미래의 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종교와 과학을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했다. 그는 진리를 찾는


것은 종교적 감정(religious feeling)이며 인간의 이성은 이렇게 찾은 진리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미래의 종교
는 교리가 과학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하고 과학자와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
넣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조건을 만족할만한 종교를 우주적 종
교(cosmic religion)라 불렀다. 그는 ”우주 종교적 감정(cosmic religious
feeling)이란 인간이 갖는 그릇된 욕망의 허망함을 깨닫고 정신과 물질 양쪽
측면에서 나타나는 질서의 신비와 장엉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 느낌은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205)

205) Max Jammer, Einstein and Religion, Priceton University Press, 1999,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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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는 아인슈타인이 구약시대의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이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특히 불교가 이 요소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고 보았다.206) 종교와 과학이 진리를 찾는데 상호 보완적일 때 그 종교를
가리켜 우주적 종교라 할 수 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등 현대물리학을
공부하다보면 아인슈타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비록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의 영역에서는 빛의 이중성과 코펜하겐
해석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만, 양자역학을 연구했던 많은 과학자
들도 양자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동양사상, 특히 공(空) 과 연기법(緣起法)에
대한 중관학(中觀學)파의 대승불교적 해석에 많은 공감을 표하고 있다. 특
히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관여한 중요한 물리학자 중 한사람인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자 물리학에서의 발견은 전혀 낯선 것도 아니고, 생경한 것도 아니다. 이것


들은 불교와 힌두교의 역사에서 상당한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현대 물리
학에서 발견한 것은 그러한 지혜를 강화하고 고무시키며 개선해 나가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207)

양자역학의 핵심 인물 중의 하나인 하이젠베르그 또한 힌두교 철학의 가치


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타고르와 인도철학에 대해 토론했고 이를 통해 양
자물리학에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얘기했다. 이러한 사상 속에는 당시 물리
학계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양자역학의 쟁점들이 전혀 다른 문맥의 인
도사상에서는 그리 새로운 내용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다.208)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베르나르 데스파냐는 최근 저서인 『물리학과 철학(Physics and
Philosophy)』에서 물리학은 양자적 베일에 싸인 실재의 본질을 영원히 걷
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실재의 본성에 관한 통찰이 엉뚱
하게도 자신이 신비주의라고 불렀던 곳에서 올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206) 김성구, 같은 책, p 74.


207) 그라함 스메단 저, 박은영 역, 『양자역학과 불교』, 서울: 홍릉과학출한사,2012, p.45.
208) 같은 책,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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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특히 불교 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이 신비주의는 물질의 토대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 거절하고 오히려 반대되


는 입장인 ‘토대의 부재’ 혹은 공(空)에 대해 강조하기 조차 한다.209)

이러한 과학자들이 공통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 인식의 틀


로는 양자역학의 새로운 개념들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고, 이에 대한 이
해를 위해서는 당시 물리학계 한편에서 신비주의라고 배척되었던 동양의
사상들, 이중에서 특히 불교에서 영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계에서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물리학자인 페
터 보이트(Peter Woit)는 『춤추는 물리』, 『물리학과 도(道)』같은 책들이 엄
격한 과학전 논쟁과 철학적 엄격성 없이 서점들에 우아하게 진열되어 베스
트셀러가 되는 것을 보고 분개했다.210) 그러나, 양자물리학을 발전시켜온
하이젠베르그나 핵물리학자 오펜하이머, 그리고 베르나르 데스파냐는 학문
적 역량이 모자라서 이러한 관점을 가졌을까? 양자역학의 가장 유명한 방
정식을 만든 슈뢰딩거는 양자역할에서 관찰자의 역할을 언급하면서 “정신
이 물질을 창조했다”라고 말했고 플랑크는 “정신이 모든 물질의 모체”라고
했으며 휠러는 “시공간은 의식으로부터 온다”라는 주장을 했다. 이들 또한
멍청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들 물리학자들은 기존 방법론과 인식의 틀이 갖는 한계를 명확하
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들보다 훨씬 이전 근대철학
의 핵심이었던 칸트도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미 인간의 이성
적 사유(Human understanding)에는 이율배반적인 측면, 즉 역설적 측면
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211) 구체적으로 본 논문의 II장과 III장에서 연구
자는 이미 형식논리, 종교, 과학, 심지어는 미술의 영역에도 역설과 역설적
현상들이 발견됨을 논증했다.

209) 김성구, 같은 책. p.51.


210) 같은 책, p. 45.
211) 같은 책. p.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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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연구자는 자기지시성 (Self-referentiality)이라는 하나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발사의 역설과 양자 역학에서의 하이젠베르그의 정리, 그리고
미술에서의 미적 자율성을 추구한 형식주의가 갖는 역설을 일관된 체계로
설명했다. 특히 미술에서는 형식주의가 3차원의 조각 영역에서 관객이 관찰
자라는 자기지시성을 가질 때 주변 환경과 시간의 문제가 개입되어 형식주
의의 대전제와 모순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형식주의와 상보적, 혹은 동전
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던 반-미학의 선구자 뒤샹의 시도 또한
기존의 미학체계와 미술시스템에 의문을 던진 반-미학적, 반-미술적 제스
츄어가 네오다다와 제프 쿤스같은 이들에 의해 하나의 확립된 미술 어휘로
서 미술제도 내에서 활용되는 역설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살펴보
았다.
뿐만 아니라, 수학 세계에도 수학의 체계 내에 모순이 없음을 증명하
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 또한 본래 의도했던 것과 다른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이를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괴델의 제1불완전성정리: 수학의 공리체계가 온전하다면, 즉 모순이


없다면, 그 체계 안에는 옳고 그름을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한다.

*괴델의 제2 불완전성정리: 수학의 공리체계가 완전하다면, 즉 모순이


없다면 이 공리체계가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이 공리체계만으
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이 공리체계보다 더 큰 공리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212)

불완전성정리는 칸트가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이성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


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김성구는 이를 보다 이해하기 쉽게 다음과 같이

212) 김성구, 같은 책. p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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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한다. 괴델의 제1불완정성 정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적 사유(분
별지)만으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문제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
다. “제 2 불완전성정리는 분별지로 판단한 것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더 큰 지혜가 필요하며 이 큰 지혜가 판단한 것도 더 큰 지혜가 있어야 한
다는 것이다.”213) 불완전성의 원리는 또한 과학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것이 우주와 자아라고 보고 과학적 지식체계
만으로는 필연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고 보았다.
20세기 이후 현재까지 물리학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통하여 물
질과 우주에 대하여 깊은 이해의 틀을 제공했고 인지과학은 마음(또는 정신
현상)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식체계는 특히 “자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른다
면 한계에 도달하게 되는데 김성구는 이를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
의 결과로 보았다.
자기지시성이 있으면 논리적으로 주체=객체라는 등식이 성립되므로 v
필연적으로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즉, 주체 A는 주체가 아닌 객체 B와 같
아야만하기 때문에 역설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연구자는 앞 장에서 자기지
시성은 필연적으로 형식논리의 오류, 양자역학에서의 결어긋남, 그리고 미
술에서의 형식주의의 붕괴를 초래해 역설을 만들낸다는 것을 입증했었다.
따라서 우리가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논리적으로, 수학적 모델로 기
술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자아가 무엇인지 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214)
김성구는 직관적 깨달음을 통해 얻은 불교적 진리를 과학이 무시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물론 그는 불교적 진리가 모두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불교에서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깨달음을 전달하는 방편시설(方便施設)의 하나로 물리학을 활용하
고 있다. 왜냐하면, 21세기의 지배적인 지식은 과학이고 과학적 방법론이나

213) 김성구, 같은 책, p 77.


214)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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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보편타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불교의 핵심개념인 연기법(緣起法)이나, 공(空), 중도(中道), 일
심(一心)의 개념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이 장의 다음의 내용들
은 김성구의 저서 『아인슈타인과 우주적 종교』의 내용을 연구자의 관점에
서 요약 및 발췌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215)

(1) 과학과 불교
김성구는 과학과 불교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 과학은 물질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세상, 즉 현상계를 대상으로한다. 이
를 넘어서는 초월계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불교의 세계관이라 하는 십이
처설(十二處設)에서도 사람이 인식하는 세계만을 대상으로 한다. 불교에서
는 연구대상이 되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말보다는 ‘오온(五蘊)’이라 칭하고
이 세상을 색(色,물질), 수(受,느낌), 상(想, 표상작용) 행(行,의지와 충동) 식
(識,인식작용)의 다섯가지로 구분한다. 특별히 오취온(五取蘊)이라는 용어는
사람을 비롯한 하나의 개별적인 생명체를 기리킬 때 사용한다.216)
‚ 불교와 과학 모두 비판정신과 통일성을 갖는다. 과학은 기존의 지식과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험을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과
정을 거친다. 과학에서 이론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는 칼 포퍼가 말
한 반증가능성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불교에서는 신해행중(信解行證)
을 강조한다. 단순히 믿음으로 끝나지 않고 바른 이해와 깨달음을 바탕으로
가르침을 실천하고 마침내 진리를 증득해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붓다의 정
신을 계승하여 임제종을 세운 당나라의 선승 임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다운 법을 터득하려면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할 것이며, 나한을 만나
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야만 비로서 해탈하여 자유자

215)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216) 『잡아함경』 권3, 「분별경3」 “사문이나 바라문이 다 ‘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 오
취온을 다 ‘나’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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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할 것이다.217)

여기서 죽이라는 말은 강한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일체의 권위에 끌려다니


지 말고 자신의 이해와 수행의 힘을 바탕으로 진리를 깨닫고 절대적 자유
를 누리라는 의미다.
불교에서는 만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이치를 연기(緣起), 공(空)이
라고 부른다. 물리학에서는 다양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자연현상들을 얼마나
통일성 있고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추구했고 특히 물리학자들은
단 하나의 방정식으로 모든 자연현상을 통일성 있게 기술하는 것이다. 따라
서 불교와 과학은 그 영역과 목표, 진리를 찾는 정신, 사물을 보는 태도에
서 일맥상통한다.
ƒ 측정도구와 과학
과학은 오차의 범위를 줄이고 인간의 감각기관을 넘어서는 정밀한 측정을
위해 많은 종류의 측정도구를 개발하고 사용한다. 심지어는 컴퓨터를 활용
하여 인간의 두뇌가 하는 일을 확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들은
장소와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성을 띤다. 따라서 사람들은 과학적 검증을 확
인하고 신뢰한다. 불교에서는 수행방법과 수행의 결과를 체험적으로 검증한
다. 불교적 진리는 주관적 내적 경험을 띠기 때문에 과학에서 쓰는 용어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붓다가 경험한 것을 누구나 체험하고 이
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검증 가능하다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불교에
서는 과학이론의 가설에 해당하는 것이 붓다의 체험과 교설이다. 누구나 바
르고 깊게 수행한다면 이를 이해하고 검증할 수 있다고 본다.
„ 검증과 표현의 문제
과학은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검증한다.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면
모든 것을 주체와 객체로 나눠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서 주체는 객체에 아
무 영향을 주지않고 객체를 논리정연하게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과
마음이 과학과 불교와의 공통점이지만 과학의 연구대상으로는 물질이 적합

217) 김성구, 같은 글, p.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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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과학과는 달리 관찰자가 자신의 마음을 관(觀)하는 것이 불교의 관이
다. 불교의 관은 남의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主)으로 마음(客)
을 관하니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된다. 여기에 불교의
어려움이 생긴다. 즉 앞에서 말한 자기지시성이 생긴 것이다. 이는 훗날 양
자역학을 낳은 막스 플랑크(Max Planck)의 말에도 잘 나와 있다.

과학은 자연의 궁극적 신비를 결코 풀지 못할 것이다. 자연을 연구하다 보면


자연의 일부인 자기 자신을 탐구해야 할 때가 오기 때문이다.218)

주와 객이 하나가 된 상황은 형식논리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불


교에서는 근본적 진리를 직관적으로 체득하는 지혜를 특별히 반야(般
若,prajna)라고 하여 분별지(分別智,vijnana)와 구분한다. 우리가 영어의
religion의 번역어로 쓰고 있는 종교(宗敎)의 ‘종’은 근본적 진리를 뜻한다.
이는 직접 깨달아 체득할 수밖에 없지만 깨달은 자, 즉 붓다가 보통사람들
에게 가르치려면 어떻게든 ‘종(宗)’을 말로 표현하는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교(敎)’로서 불교의 경전이 되는 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과 같은 형식
논리의 관점에서 볼 때 역설인 표현을 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
리를 표현하자니 어쩔 수 없게 그러한 방식을 취한 것이다. 특히 대승불교
에서는 이러한 역설 표현이 많다. 예를 들면 ‘범부 즉 부처’라는 말이 있는
데 이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깨닫고 체험해야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219)
따라서 자기지시성을 원인으로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알기 위한 노력
에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한계를 맞이한다면, 다른 말로 하면 자연과학적 패
러다임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다면, 이는 연구자가 서론에서
토마스 쿤을 언급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마
치 코펜하겐학파가 대상을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로 나누어 다른 접
근법을 취했듯이 연구자는 자아를 대상으로 하는 노력에는 자기지시성이

218)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 94.
219)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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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으로 초래하는 역설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인 불교적 접근방
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다시 정리한다면 거시적 세계와 양자의 세계를
대상으로 할 때는 각각 대상의 특성에 맞는 과학적 접근법을 취하고, 자신
의 마음을 대상으로 할 때는 불교적 접근법을 취한다는 것이다. 물론 앞에
서 언급한 여러 물리학자들이 동의하였듯이 보이지 않는 미시의 양자의 세
계에는 불교의 세계와는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점이 많음을 언급해둔다. 그
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종교와 과학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된다.

(2) 연기법(緣起法)의 과학적 의미


과학과 불교의 검증과 표현 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핵심
개념 중의 하나인 연기법(緣起法)은 과학계와 공유할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
과학계에서도 지지하고 있다.
A가 원인이되어 B가 생겨나고 B가 원인이 되어 C가 발생하고 또 C
가 원인이 되어 D가 일어나는 등 이렇게 모든 것은 무한히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얽혀 있다. 이를 도식화 한다면 A→B→C→D→E로 표현할 수 있
다. 만일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추적해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을 발견
할 수 없다면, 즉 무한소급을 끊어줄 근본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계열은 그것을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궁극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220) 이러한 과정은 마치 뫼뷔우스의 띠처럼 무한히 반복되고 모든
것은 상호 인과관계로 얽혀져 있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가 되는 것이다. 따
라서 모든 개체나 현상은 다른 것과 구분되는 자기 자신만의 고정된 정체
성을 가지지 않으니 이를 무아(無我)라 할 수 있고 따라서 공(空)한 것이다.
이를 초기 불교의 교의 삼법인(三法印)중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한다.
철학자 한자경은 더 나아가 연기(緣起)를 다시 두 가지로 세분한다.
서로 기대어 서 있는 두 볏짚이 서로 상대를 서 있게 한다는 의미 즉, ‘동

220) 제일원인을 설정하고 기독교처럼 절대자인 인격신을 상정해 만물을 설명하는 방식이
갖는 논리적 오류는 앞 Adam’s Apple/ Newton’s Apple 편에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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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同時的)상호의존성’이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이시적
(異時的)으로 일어나는 이시적(異時的)상호의존성이 그것이다.221) 일반적으
로 자연과학의 인과관계와 공유할 수 있는 연기는 이시적 상호의존성이다.
또한, 동시적 상호의존성은 다음과 간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
인의 일반상대성이론 의하면 중력장(gravitational field)에서 일어나는 물
체의 운동은 시공간(space-time)의 기하학적 모양에 의해 결정된다. 구슬
이 평면 위를 구를 때는 직선운동을 하지만 곡면 위를 구를 때에는 곡선운
동을 한다. 마찬가지로 지구나 태양 같은 천체는 물론 빛도 시공간의 모양
에 따라 여러 가지 곡선을 그리며 운동한다. 그런데 시공간의 기하학적 모
양은 물질의 분포에 의해서 결정되고 물질의 분포는 시공간의 기하학적 모
양에 의해 결정되는 상호 의존적 관계에 있다.222) 이를 불교식으로 표현하
면 연기(緣起) 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한자경의 분류에 따르면 동시적연기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 의존성은 생태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생태계의 환경은
먹이사슬을 통해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시간적으로는 진화를 통해 상
호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생명전체와 환경은 시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단순히 생명권을 넘어서 지구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가이아설 (Gia
hypothesis)이 있었는데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들이 하나, 둘 씩 발견됨
에 따라 이 학설을 가이아 이론(Gia theory)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223)
그리고 김성구는 이러한 상호 의존적 관계를 태양계를 넘어 우주까지
확대해 설명한다. 그는 ‘나’라는 존재는 우주까지 연기적으로 얽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유럽우주국(ESA)이 2013년 4월 그간 관측한 결과를 토대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약 138억 년 정도라고 한다.224) 관측 가능한 우주의
반경은 빛이 138억년 걸려서 달리는 거리보다 더 크게 된다. 왜냐하면, 우

221) 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서울:예문서원, 2003, p.47.


222) 김성구, 같은 글, p 9.
상호의존성과 연기에 관한 분석은 대부분 김성구의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
교』, 의 해당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임을 밝혀둔다.
223) 같은 글. p. 146.
224) 같은 글, p.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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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계속 팽창 중이기 때문이다. 태초의 우주의 위치를 A 지점이라 하면
그 빛이 138억년 동안 지구로 날아오는 동안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으므
로 A의 위치는 138억 광년보다 훨씬 크다. 현재 약 470 광년쯤 된다고 추
산된다.225) 우리 은하계에는 태양만한 별들이 1000억 개 쯤 들어있고 이런
은하가 1000억 개가 모여서 우주를 이룬다고 한다. 이 우주속의 별들은 다
양한 크기와 질량을 가지며 이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성장하다가 소멸되는
데 어떤 별들은 소멸되기전 강한 빛을 내며 질량의 많은 부분을 우주로 날
려 보내고 중성자 별이나 블랙홀이 된다. 질량의 많은 부분을 소실하면서
밝게 빛나는 별을 초신성(超新星, supernova)라고 부른다. 물리학자이자
불교철학자이기도 한 김성구는 이 초신성의 존재를 인간의 존재까지 이끌
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226)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태양이 방출하는 에너지
를 이용하여 생명활동을 한다. 그리고 생명체가 탄생하고 생명활동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탄소(C), 산소(O), 질소(N) 뿐만아니라 철(Fe)과 같은 여러
가지 물질이 필요하다. 철보다 훨씬 무거운 방사성 동위원소도 지열(地熱)
의 원천으로서 생명체의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다. 생명체의 몸은 모두 탄소
를 중심으로 수소, 질소가 모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중 수소만 태양계 내
에 있던 것이고 나머지 원소는 태양계 밖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주의 탄
생초기에는 수소(H)와 헬륨(He) 그리고 약간의 리튬(Li)밖에 없었다. 이 셋
보다 무거운 원소는 태양보다 질량이 훨씬 큰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다.227)
태양은 수소가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면서 보다 질량이 높은 헬륨이라
는 원소를 만들고 그 질량의 차이만큼 E=MC² (M은 질량 C는 빛의 속도)의
핵융합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빛을 발하며 태양은 빛이나
는 것인데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기위한 전제조건은 10⁻¹³Cm 정도의 거리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수소 원자는 이렇게 가깝게 접근하기가 불가능하다.

225) 같은 글.
226) 같은 글.
227) 같은 글. p.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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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 전하를 가진 양성자(proton)끼리는 서로 밀쳐내기 때문이다. 그
러기 위해서는 별의 중력이 훨씬 더 큰 힘으로 잡아 당겨줘야 하는데 별들
의 질량이 크면 클수록 중력이 더 커진다. 탄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태양의
질량보다 3배, 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10배 정도는 되는 별의 중력이 작용
해야 한다. 그런데 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반응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철로 끝난다. 철이 가장 안정된 원소이기 때문이다. 철보다 무거운 원
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초신성의 폭발 같은 사건이 필요하다. 초신성이
폭발할 때 새로운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고, 철보다 무거운 원소들을 우주
공간으로 날려 보내고 소멸하게 된다.228)
지구의 나이를 대략 50억 년이고 지구상에 생명체가 나타난 것은 40억
년 전이라 한다면 무거운 별들은 우리의 태양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졌어
야 했을 것이다. 우주 초기에 탄생 된 별들은 태양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무거운 원소를 우주에 뿌려놓고 사라졌다. 우주의 나이가 적어도 100억 년
은 되어야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며 다시 30~40억 년이 지
나야 인간과 같은 고등 생명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지구상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우주가 지금처럼 커야만 했고 초신성이 그 잔해를 우주
에 흩어놓지 않았더라면 지구상의 생명체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식물
이 죽으면 부패해서 비료가 되고 이 비료가 다른 식물의 양분이 되는 것처
럼 무거운 별이 생을 마치며 이것의 잔해 위에서 지구상의 생물이 생겨난
것이다. 즉 초신성은 생명의 토양이 된 것이다.229)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지구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가 시간적으로 138억 년이 되어야 하고 공간적으로도 지금처럼 커야만
한 것이었다. 또한, 초신성이 폭발하여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이 되었어야만
했다. ’나’라는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전 우주가 유기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우주는 전체가 단일체라 할 수 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우주에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즉 우주의 무수한 인과관계에 의해서 내가

228)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229)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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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우주의 무수한 연기법(緣起法)
에 연관되어 있다.230)

(3) 파동함수와 불교
앞 II장에서 빛의 이중성에서부터 양자역학의 주요 개념과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기술했다. 원자보다 작은 미시세계의 입자들은
예외 없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동시에 여러 곳에 중첩상태로
마치 파동처럼 확률로서 존재하고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 반드시 꼭
한곳에 존재한다. 확인 이전의 상태를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전자라는 것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는 중
첩상태에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파동은 이를 전달하는 매질이 진동하는 모습으로 파동의
모양을 측정할 수 있고 직접 관찰할 수있다. 그러나 전자의 확률파는 매질
이 진동하는 것이 아니고 관찰자가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나타내는 추상적
인 존재로서 아무도 확률파를 직접적으로 볼 수 없다. 확률파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복소수(複素數,complex number)로 나타낸다. 복소수는 실수와
허수(虛數, imaginary number)의 합으로 나타낸수로서 실제 물리량을 나
타낼 수 없다. 예를 들면 연구자의 몸무게를 65+20i kg으로 나타낼 수는
없다. 확률파는 실재를 나타낼 수 없는 추상적인 수, 복소수로 표현됨에도
불구하고 확률파를 그림으로 그래프로 그릴 수 있고 간섭무늬를 통해 파동
의 성질을 조사할 수도 있다. 토마스 영의 이중 슬릿실험에서 스크린에 나
타난 간섭무늬 자체는 파동이 아니다. 이중 슬릿 실험에서 스크린에 나타난
간섭무늬를 보고사 빛이나 소립자들이 파동처럼 행동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로 스크린을 때린 것은 입자다. 적은 수의 입자가 도달한 것은 어둡게 되고
많은 수의 입자가 도달한 곳은 밝게 나타난 것이고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
이 간섭무늬다.

230)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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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보른이 슈뢰딩거 방정식을 확률파(確率波, probability wave)로
해석할 것을 제안했고 물리학계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코펜하겐 해석에서
확률파는 ‘관찰자가 입자를 발견할 확률이 공간상에 파동의 형태로 퍼져있
다고 본다. 그리고 측정 전에는 정보(확률)만 있고 측정 후에야 비로서 입
자라는 실체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비판했으나 보어는 “신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
라.”고 응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뉴튼역학의 방정식
과 마찬가지로 결정론을 따른다. 그러나 실험결과는 확률론을 따른다고 해
석함으로써 코펜하겐 해석은 결정론과 확률론의 조화를 통해 세상을 설명
하는 셈이다. 이는 물론 불교식 해석으로 무상(無常) 및 중도(中道)임을 말
하며 코펜하겐 해석은 불교의 철학과 조화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231)
전자는 관찰 혹은 측정 전에는 입자라 할 만한 것이 아니며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소립자들은 측정 과정에서 생겨난 허깨비(ghost)같은 존재
들이라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실체가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라 할 수도 없다. 이들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이라 할
수도 없으니 이를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色卽是空 空卽是色라 할 수 있다.

(4) 불확정성의 원리와 상보성


물리학에서 측정순서를 바꾸면 측정의 결과가 달라지는 물리량들을
비가환(非可煥,non-commutative)물리량이라고 한다. 그 좋은 예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이다. 회전하는 스핀의 량도 한예다. 3차원적 좌표를 설정하
기 위한 축을 각각 x,y,z 축이라고 할 때 z 방향의 성분을 측정하면 물리계
를 교란시켜 x, y 축의 성분의 값이 달라지고 y 축의 성분을 측정하면 x,
z 축의 측정값이 달라진다. 따라서 비가환 물리량 측정시, 그 정밀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그 한계를 정량적으로 표현하여 하나의 원리로 정립
한 것이 불확정성의 원리다.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빛을 발사하면
빛이 전자에 충돌하는 순간 전자는 강하게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튀어나가

231)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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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도나 위치 중 하나의 값만을 정확하게 얻을 수 있다. 이를 하이젠베르
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라 한다. 이를 철학적으로 본다면 관찰자와 관찰대상
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전체의 일부인 상태(undevided wholeness)가 되고
이를 우주까지 확대한다면 앞의 연기법에서 설명했듯이 대승불교에서 우주
와 내가 하나가 되는 한마음(一心)의 상태와 연결시킬 수 있다.232)
또한, 닐스보어는 상보성이라는 ’이중성‘과 유사한 개념을 제시한다.
이중성이 논리적으로 상호 양립할 수 없는 역설적인 성격을 말한다면 상보
성은 자연현상은 하나의 고정된 개념만으로는 절대로 기술할 수 없고 반드
시 이 개념과 짝이 되는 대립되는 개념을 함께 사용해야만 사물을 제대로
기술할 수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233) 예를 들면 우주는 음양의 조화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이 상보성의 개념이다. 보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시세계의 자연현상은 반드시 서로 상보적인 두 조(組, set)의 물리량으
로 기술되며, 서로 짝이 되는 한 쌍의 상보적인 양은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코펜하겐 해석을 이끌어내는데 깊이 관여한 파울리
도 사물의 참모습을 알기위해서는 관찰자를 의미하는 정신과 대상인 물질
이라는 한 쌍을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물리적인 것(phisis)와 정신적인 것(pysche)이 동일한 실체의 상보적인 측면


이라면 가장 만족스러울 것이다.234)

상보적인 물리량 중 어떤 것을 측정할 것인가는 관찰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따라서 물리학에서도 관찰자의 의식이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합의가 있다.
물리학적 관점에서 의식을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일상적으로 의
식이라는 말은 상보적 관계에 있는 무의식적 행동을 떠올리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있다. 무의식적 행동이라는 것은 기계적인 행동에서 나오는 것으

232) 같은 글.
233)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서울: 불광출판사, 2018, p. 213.
234) C.G. Jung, W. pauli, The Interpretation of Nature and Psyche, (phantheon
1955), p.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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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선택의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 선택이라는 것은 자유의지에서 나온 것
이다. 만약에 자유의지를 부정한다면 세계는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으로 움직
인다는 것이다. 이 세계가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면 물리학
과 의식의 만남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성구는 양자역학적 측정에서
의식의 중요성이 밝혀진다면 이는 과학이 유식불교의 관점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것으로 보았다.235)

(5) Something/Nothing 의 시각적 표현


이 Something/Nothing 시리즈의 작품들은 그 제목이 시사하듯이 양
자세계에서의 전자의 정체성의 문제와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 그리고
공(空)사상을 관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 이 연작에서 과학(양자역학)과 종
교(불교)가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서로 영감을 주며 공존하고 이를 미술의
영역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이 시리즈의 작품들은 종교, 과학, 예술이 분리
된 칸트 모델에 대한 연구자의 대안을 실현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 시리즈는 양식적으로 추상적 형식을 취한다. 이는 앞에서 분석한
가시적 세계의 사과를 대상으로 한 일련의 작품들과는 달리 비가시적이고
추상적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대학 4학년 시절부터 대학
원에 걸쳐 이러한 양자역학과 상대성 원리에 바탕을 둔 세계의 이치를 시
각화 하는 것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앞 도판에 제시된 일련의 드로잉 작업
중 일부는 당시 작업들을 2017년과 2018년 개인전을 위해 대폭 수정 보완
하였고 다른 일부는 별도로 추가 제작한 작품들이다.

235) 김성구, 같은 책, 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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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17.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1993
작품 18.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1993

1993년에 제작된 초기의 작품들은 우선, 화면에 기하학적 형태와 바


둑판 모양의 그리드(grid), 수학적 좌표와 그래프 축을 상징하는 선과 숫자,
수식이 두드러진다. 보이지 않지만 단지 수학적 기호와 상징을 통해 개념적
으로만 존재하는 세계,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는 세계를
상징한다. 이를 통해 연구자는 양자역학에서의 중첩상태와 불교의 연기론
(緣起論)과 공(空)이라는 개념을 표현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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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19.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1993
작품 20.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1993
작품 21.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1993~2017
작품 22.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1993~2017

특히 원뿔 모양의 기하학적 형태는 연구자가 과거에 공부했었던 수학


의 원뿔곡선(conic section)에서 나온 것으로 평면으로 원뿔을 잘랐을 때
생기는 곡선의 형상이 무의식중에, 불교의 용어로는 아뢰야식에 저장된 것
이` 떠올라 화면에 그린 것이다. 원뿔을 잘랐을 때 생길 수 있는 타원의 이
심율의 공식 또한 화면에 기록되어 있다. 초기에 이러한 기하학적 형상과
숫자, 기호 등은 이후 작품이 진행되어가면서 점차 사라지면서 단순한 구조
를 가지게 된다.

<도판20> 원뿔 단면(conic section)


(자료출처:mathworld.worldfr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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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23.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1993
작품 24.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1993
작품 25.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1993
작품 26.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1993

작품 27.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1993


작품 28.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1993

이후 최근 연구자는 작품에 기호들이 난무하고 지나치게 설명적인


(descriptive) 것을 피하고 싶어 화면을 보다 간결한 형태로 진행시켜 나가
기로 했다. 기호들이 점차 사라지면서 보다 회화 자체에 집중하게 되면서
색, 선, 형태 등의 조형 요소에 집중하게 된다. 물론 기하학적 형상들도 매
우 단순화되어 정육면체나 입방체 등을 연상시키는 선을 직접 긋기도 하고
캔바스 조각을 실제로 붙여서 선처럼 보이게도 했다. 안료를 직접 사용하여
색깔의 채도를 높였고 안료의 물성을 살리기 위해 알갱이들도 그대로 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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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게 했다. 즉, 기호보다는 회화 자체의 본질적 성격에 집중하게 되었다.
색채는 상보적 관계에 있으면서 음양(陰陽)을 상징하는 울트라마린블
루가 주가되는 파랑색과 카드뮴레드가 주가되는 빨강계열로 나누어 상호
보색 관계를 형성시켰으며 파랑색과 빨강색의 연작들을 동일한 규격으로
제작하여 모듈화 시켰다. 이들 개별 작품들은 마치 원자처럼 전시장에서 그
때의 조건에 따라 임의로 색깔의 조합이 가능하게 된다. 전시장 조건에 따
라 빨강과 파랑 각각의 작품들을 서로 섞이게 하거나 혹은 빨강과 파랑의
일관된 색깔로 나열하는 등 이러한 구성만으로도 마치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게 했다. 이는 자연계에서 동일한 단위인 원자가 임의의 배합을 통해
서로 다른 분자와 화합물이 되듯이 빨강과 파랑의 회화작품들도 전시 조건
에 따라 디스플레이를 다르게 하여 같은 원소도 다른 화합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다른 문맥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했다.

작품 29.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2017


작품 30.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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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작품들은 안료와 물감들의 텍스추어가 두드러져 하나의 물리적
평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다른 굵기와 재료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선
과 형태가 있어 이것들이 positive space 역할을 하면서, 안료 알갱이와
여러 층의 물감으로 쌓아 올려진 다소 두터운 질감을 가지고 있는 파란색
평면은 negative space가 되어 마치 비어있는 허공 같이 보이기도 한다.
물리적으로는 평면이지만 그래서 형식주의의 규범을 충실히 준수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일루져니즘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역설적 공간을 만들어냈
다.

작품 31.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2017


작품 32.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2017

마치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이들 작품의 두드러진 파


란색, 빨간색의 화면을 유기적인 하나의 전체로서 색깔이 갖는 강력한 지각
적 요소 때문에 표면의 미세한 텍스추어의 변화와 안료 알갱이가 만들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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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물질적 요소를 지각하기 어려워 진다. 반면에 이들 표면의 물리적 특질
에 집중하게 된다면 전체를 하나로 지각하기 어려워진다. 지각적 요소인 색
깔과 물리적 요소인 재질감은 마치 전자의 위치와 속도처럼 하나의 대립된
쌍을 이루어 두 가지를 동시에 관찰하거나 감상하기 어려운 관계를 가진다.
이 추상 작품들은 이 시리즈의 작품이 진행될수록 기하학적 형태와
제스츄어가 점점 최소화 되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가장 최근 작품들의 경우
에는 바탕에 몇 가지 색을 칠하고 그 위에 붉은색으로 덮고 난 후, 캔버스
천 조각 등의 물질을 붙인다. 그 위에 흰색, 검정색, 회색 등의 오일 스틱

작품 33.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2017


작품 34. 「Something/Nothing」, 88x109Cm,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안료, 2017

으로 굵기를 달리한 선을 그었고, 붙여져 있던 캔버스 천 일부는 다시 떼었


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선을 그리거나 캔버스 조각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몇 점의 회화를 제작했다. 바탕에 선이나 캔버스를 붙이면 그 선 자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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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itive space가 되고 바탕은 negative space가 된다. 그런데 이 선 위
에 또 다른 선을 그으면, 먼저 그려진 그 선 혹은 붙여진 천은 negative
space로 변하고 새로 그은 선이 positive space가 된다. 즉, 음양의 관계
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때마다 변화할 수 있는 것이
다.
도판 마지막의 모노크롬 추상 작품은 이러한 과정을 겪은 후 다시 그
위에 캔버스 천을 물결(파동) 모양으로 붙인 후 그 위 전체를 붉은색으로
덮어 단색의 추상화가 되었다. 아래에 칠해진 여러 층의 색과 형상들, 그리
고 그 위에 덧붙여진 캔바스 천은 모두 붉은색 레이어로 덮어져 하나의 통
일된 색상 속에 있게 되었다. 붉은 새 레이어 속의 조형요소들은 분명 존재
하나 지금은 보이지 않고 텍스추어로서 흔적만 남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한
다면 이들은 빨간색 물감층에 덮여져 지워진 것으로, 물리적으로는 빨간 물
감층 아래에 존재하나 지각되지 않는다. 형상들은 다 지워진, 비워져있는
상태(空)이지만 이들 조형요소의 집적은 직사각형의 모노크롬적 회화로 존
재한다.
물리적으로는 한 레이어의 물감을 더 칠한 것이지만 이것은 앞서서
그리고 붙이고 했던 작업을 지우는 양가적인 행위다. 이를 통해 이 전의 작
업들은 지워져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이러한 행위는 물질적인 흔적을 남기
며 그림이라는 실체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
는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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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결 론
이 연구를 통해 연구자는 칸트가 인간의 정신영역을 종교, 과학, 예술
의 세 가지로 분리한 서양의 근대의 역설을 극복하고자, 세 가지 영역이 공
동으로 공유하는 교집합의 영역과 각각의 자율적인 영역이 공존하는 대안
으로서의 연구자의 이론적 모델을 제시하고 이에대한 실천의 과정을 분석
했다.
논리적 모순이 초래한 역설은 하나의 패러다임이 더이상 지배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역설은 두 가지 의미 있는 철학적 함의를 가진다.
첫째, 역설은 거시적으로 토마스 쿤의 분석대로 기존 패러다임의 붕괴를 촉
진 시키며 이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해결책을 촉발시킨다. 과학계에서는 빛
의 이중성 역설을 통해 고전역학이 붕괴되고 양자역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 형성되었다. 미술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기존의 양식으로 담을 수
없는, 즉 기존의 패러다임이 더 이상 적용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아방가르드
운동이 촉발된다. 둘째, 역설은 미시적으로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혹은 음
과 양의 관계처럼 상호 대립적인 요소가 쌍을 이루어 대상의 본질을 드러
내기도 한다. 양자역학의 확립에 공헌한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이처럼 상호
대립적인 요소 모두를 고려해야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상보
성의 원리라 칭했다.
구조적으로 역설은 자기지시성을 갖는 논리적 필연의 결과다. 자기지시
성이 있으면 논리적으로 주체=객체라는 등식이 성립되므로 혼란이 일어나
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문에서 밝힌 이발사의 역설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지시성은 필연적으로 형식논리의 오류, 양자역학에서의 결어긋남, 그리
고 미술의 미니멀리즘에서 형식주의의 붕괴를 초래해 역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연구자는 입증했었다. 또한, 수학에서의 괴델의 불완정성정리에서 보
여지듯이 우리가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논리적으로, 수학적, 과학적
모델로 기술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자기 자신이 대상이 되는 “나는 누구냐?
”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연구자는 우선 과학과 종교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한 첫 단계로 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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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독교가 갖는 논리적 모순을 분석했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의 양자역학
과 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불교적 연기법(緣起法)과 공(空)사상을 분석하고
이러한 과정과 대안을 연구자의 작품으로 구현했다. 그리고 이를 미술작품
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는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학파의 해석처럼 가시
세계와 비가시적세계에 따라 방식을 달리해 접근했다.
가시적인 세계, 연구자가 살고 경험하는 사회에 대한 접근법은 마치
사회과학자나 자연과학자와 같이 관찰, 기록하는 유용한 도구로 사진을 사
용한다. 그리고 사진의 사실적인 이미지를 활용하여 회화, 드로잉, 판화를
활용하고 경우에 따라서 렌티큘러등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연구자를 둘러싸
고 있는 사회나 특정 대상에 대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양식으로 접근한
다.,
반면에 자아의 정체성의 문제나 양자역학과 같은 추상적인 물리, 철학
의 원리 등의 문제에 접근할 때는 추상적 접근방법을 취하기로 한다. 사진
의 이미지를 무한히 확대하는 것은 수학의 미분개념에 해당하는데 이를 계
속하면 커다란 픽셀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양자역학의 세계가 갖는 추
상성과 유사성이 있다. 연구자는 이러한 추상적 형식을 통해 분명히 존재하
지만 대부분 비어있고, 관찰되기 전까지 중첩상태(superposition)로 파동처
럼 확률로 존재하는 전자와 마찬가지로 나의 정체성 문제나 혹은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형식으로 추상의 형식을 취하기로 한다.
불교의 핵심사상인 연기법(緣起法), 공(空), 일심(一心)을 현대 물리학
을 대표하는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통해 설명함으로써 과학이 갖는 보
편성으로 불교철학의 핵심개념을 설명하려 했다. 물론, 과학이 접근하기 어
려운 부분은 직관적 수행의 경험으로 체득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종교 고
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역설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을 갖는다
고 할 수 있다.
첫째, 연구 작품들은 상호 대립적, 혹은 양가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
는 대상과 한 쌍의 제목을 갖는다. 이는 자연의 대상은 하나의 고정된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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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으로는 결코 기술될 수 없으며 반드시 이 개념과 상호 대립적, 혹은 역설
적인 개념과 쌍을 이뤄야만 제대로 기술될 수 있다는 닐스 보어의 상보성
의 원리를 연구자는 따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노장
사상과 불교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작품의 의미에 대
한 보다 적극적인 사고를 요구받는다.
둘째, 양식적인 측면에서 연구자는 거시적인 세계를 다루는 사실적 스
타일과 미시적인 세계와 마음의 문제를 다룰 때는 추상의 스타일 두가지를
나누어서 사용한다. 즉 일관된 형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물리학계에서 고전
역학의 세계와 양자역학의 세계를 나누듯, 혹은 불교에서 ‘보이는 것’과 ‘궁
극적인 것’을 나누듯 세계를 두 개의 계로 나누어 상호 대립적인 사실과 추
상의 양식을 각각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역설적이다.
셋째, 연구자는 사진 이미지와 이에 바탕을 둔 회화, 디지털 판화이미
지, 그리고 렌티큘러 활용하며 원본과 시뮬라크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회화를 원본으로 보고 사진과 판화를 복제물이라 칭하는데 연
구자는 무한복제가 가능한 사진을 원본으로 하여 이를 유화로 그리고 이를
디지털 판화와 렌티큘러 작업과 함께 제시해 여러 시뮬라크르를 마치 뫼비
우스의 띠처럼 순환시킨다. 이를 통해 들뢰즈가 말한 차이를 반복함으로 써
어떤 것이 실제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모든 것은 고정된 본질, 혹은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공(空)사상과의 연관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들 작품을 제사하는 방식은 다원적이라 할 수 있는데 연구
자가 말하는 다원적 접근법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첫째, 주제적인 측면에서 「역설」이라는 다소 범위가 큰 연구 주제를
그 아래에 몇 개의 구체적이고 서로 다른 소주제를 통해 구현한다. 예를 들
면 종교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차이에 따른 인식의 갭(gap)을 다룬
「아담의 사과/ 뉴튼의 사과 (Adam’s Apple / Newton’s Apple)」 연작,
대중민주주의에 대한 양가적 관점을 다룬 「민주주의 / 대중선동
(Democracy /Demagoguery)」,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자역학의 세계와 상
통하는 불교의 절대무(Sunyata), 공(空)의 개념과 자아의 정체성의 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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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회화의 형식을 빌려 다룬 「Something / Nothing」 시리즈의 작업 등
이 그것이다. 즉 몇 개의 소 주제를 통해 이를 포괄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다원적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기존의 회화나 조각, 설치 같은 전통적인 매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회화, 드로잉, 사진, 판화, 렌티큘러, 홀로그램 등의 다 매체를 활용
한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홀로그램이나 비디오 설치작
업,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활용하는 작품 등도 계획하고 있으나, 연
구자의 현재 여건상 구현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이는 추후의 연구과제
로 돌리기로 한다.
연구자는 과학적 세계관을 매개로 종교, 과학, 예술의 조화로운 통섭
과 공존을 추구하는 한 방안을 제시하였고 이를 시각예술의 분야에서 실천
하려 했다. 향후 연구자의 활동영역은 앞에서 언급한 영역 외에 영화, 연기
등으로 확대될 수 있으며 특히, 한국의 근현대사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역설의 문제에 대한 집필 및 저술 활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낡은 이데올로기 대립의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하나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는데 기여하기를 희망한
다.

- 1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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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 -
Abstract

A Study on the Pluralistic Visualization of Paradox

Won, Yung Tae


Painting Major
Department of Fine Arts
The Graduate School
Kookmin University

This thesis offers an alternative model of Immanuel Kant’s


that divided the realm of human spirituality into three parts:
religion, science, and art that caused the division of holistic
human spirituality and paradox of modernization of the West. The
model I suggest incorporates an intersection of the three while
maintaining their own distinctive areas to achieve harmony and
consilience of them. Based on my experience and study, my
artwork attempt to realize this idea.
The logical structure of paradox is first analyzed, trying to
get a necessary condition, self-referentiality, which leads to
paradox. In addition, I suggest two philosophical implications that
paradox has in terms of history. Firstly, from a macro
perspective, paradox often leads to the fall of a pre-existing
paradigm, stimulating new trials and thereby helping establish a
new one. In fact, in physics, the arguments on the wave-particle
duality of light led to the fall of classical physics, giving birth to
quantum physics at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Likewise, in
the realm of art, when an established style fails to convey a new
zeitgeist in a new era, avant-garde movements are stimulated.

- 169 -
Secondly, from a micro perspective, paradox itself reveals the true
nature of a given object or a phenomenon, just like yin-and-yang
or the opposite sides of a coin, as a pair of contrasting
properties. This view is closely related to Buddhism and the
traditional view of East Asia. Niels Bohr, the head of the
Copenhagen school in quantum physics, also thought that an
object in nature can be properly described, in a scientific manner,
only with a pair of contrasting properties. This is referred to as
‘complementarity.’
As shown in Epimenides’ and the barber’s paradox,
self-referentiality causes paradox, for subject A must be equal to
object B in a self-referential situation, leading one to logical
confusion. In quantum physics, measurements of a certain system
cannot be made without affecting the system itself, that is, without
changing something in the system. This fact is related to
Heisenberg’s uncertainty principle, which can be interpreted as a
self-referential situation. In addition, as demonstrated in Goedel’s
Incompleteness Theorem in mathematics, the question such as
“Who am I?” can never be answered properly in a logical,
mathematical, and scientific way due to its self-referential nature.
Therefore, one needs to take a different approach to this question
from a mathematical and scientific one.
Just as Albert Einstein once consider Buddhism to be “the
religion of the future”, I choose to take a Buddhist approach to
this question, for it is commensurable with a scientific approach
given that it shares a common principle of causality with a
scientific one, while maintaining its own peculiar realm of religion.
In Buddhism, two ways of mind processing exist : vijnana(般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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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ch corresponds with intuitive wisdom that makes it possible for
one to discern the ultimate truth in a religious way, and vijinana
(分別智) which corresponds with a scientific approach. The idea of
sunyata(空) and Buddhist causality(緣起法) in Buddhism are
described in terms of quantum physics to demonstrate the
universal qualities of Buddhism. I try to put this idea of sunyata
into my art works titled Something/Nothing.
The way I visualize paradox has three characteristics.
Firstly, the title of the works presented consists of two words
that have contrasting or ambivalent meanings as Niels Bohr’s
principle of complementarity or yin-and-yang suggests. It is
intended to provoke thoughts of the viewers on a given subject
and make them a part of the work.
Secondly, in terms of style, two different or contrasting styles
such as realistic and abstract approaches are employed to deal
with the visible world and invisible world. This approach is
inspired by the Copenhagen interpretation of the physical world,
which divides the world into two parts: the macro-world that
governs the visible world and the micro-world that quantum
physics dominates. It is consistent with the Buddhist approach,
which divides ‘the visible’ and ‘the ultimate’. These different styles
are paradoxical but complementary.
Lastly, the use of the same photo images in painting,
printmaking, and lenticular acrylic makes it hard to tell which one
is original and which are simulacra. Like a Moebius strip, those
images are connected to each other through ‘difference’ and
‘repetition’, making the original blend with the simulacra. This
corresponds with the idea of ‘sunyata’ or emptiness in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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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ch refers to the tenet that all things are empty of intrinsic
existence and nature.
In addition, I take pluralistic approaches in presenting my
ideas. My pluralistic approach is defined as follows:
Firstly, the main theme ‘paradox’ is expressed with some
specific subject matters such as ‘Adam’s Apple/ Newton’s apple
that deals with clashing world views and the communication gap
between the scientific and religious worlds,
Democracy/Demagoguery that demonstrates ambivalent views on
masses and democracy, and Something/Nothing that shows the
idea of sunyata or emptiness in Buddhism that corresponds with
quantum mechanics. I employ multiple subject matters in
delivering one theme.
Secondly, this approach involves using multiple forms of
media including drawing, painting, printmaking, lenticular acrylic
and installation. I am also planning to utilize holograms and
virtual reality in the near future to convey the idea of illusion or
delusion to which Richard Dawkins compared religion. This can be
expanded to plays or movies regarding the theme of paradox.
Furthermore, I would like to write papers and books on the
paradoxes in this society, the culture, and the history of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 to contribute to creating a new paradigm
over outmoded ideology struggles.
In this way, I seek harmony and consilience of science,
religion, and art, trying to overcome the schizophrenic and
paradoxical nature of moder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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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s: paradox, ambivalence, self-referentiality, the
Copenhagen interpretation, quantum mechanics, complementarity,
Buddhist causality(緣起法), sunyata(空), avant-garde, m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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