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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地名表記 字音의 上古音的 特徵*

兪 昌均 ❙

Ⅰ. 머리말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지명이 따라 다닌다. 이것은 지명 그 자체가 삶의 존재


를 확인해 주는 중요한 징표임을 뜻한다. 지명은 사람이 삶으로써 지어지는 것이며,
지명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거나 일찍이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지명이 이토록 사람의 삶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지명은 곧 사
람에 의해 작명되었음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지명을 지은 사람, 또는 그곳에 살
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지명의 지음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하나는 그곳의 지리적 어떤 특성과 결합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
나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속성, 즉 인류학적 민속학적 종교적 특성이나, 그곳에 사
는 사람들과 관련된 전설이나 설화들과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이 후
자의 입장은 그와 반대되는 경향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그 지명을 민간 어원적 재
해석에서 새로운 지명을 만들어낸 현상도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지명의 생성은 매
우 다양한 방법에 바탕을 두고 있거니와 이러한 다양성은 비단 언어학적인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 특성의 규명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학문과 관련성을 가짐을 뜻한
다. 그렇기 때문에 지명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역사학이나 민속학, 또는 신화나 전
설을 연구하는 학자들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명은 그 자체가
언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무엇보다 언어학적 입장에서의 구명이 1차적

* 이 글은 󰡔지명학󰡕 제4집(한국지명학회 2000.12)에 게재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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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중요성을 가진다고 하겠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전래의 전설이나 설화, 또는 역사


학자나 인류학자들의 연구 성과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제
각각으로, 이들 여러 학문간의 횡적인 유대 관계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
다.
지명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의 삶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숨
쉬고 움직임과 같이, 표면적으로는 굳어진 화석처럼 보이지마는 실지로는 살아 움직
이는 생명체와도 같다.
첫째로 지명에도 世代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람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
버지로부터 나와 같은 세대가 이루어져 간다. 지명에도 이와 꼭 같은 현상이 있다. 가
령 ≪三國史記≫ <지리지>에 高昌郡 本古陀耶郡 景德王改名 今安東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곳의 지명이

(A) (B) (C)


古陀耶郡 → 古昌郡 → 安東府
(경덕왕이전) (경덕왕이후) (고려)

와 같은 세대의 교체가 있었음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이들 지명 사이에는 ‘祖→父→


子’와 같은 현상이 있음을 뜻한다. 사람에 있어서는 이것이 血緣的 紐帶關係로 맺어
져 있다. 즉 ‘祖→父→子’ 사이에는 共通되는 유전자에 의해 관계 지워져 있는 것이
다. 앞에 보인 지명의 예도 언어학적으로 음운론적, 형태론적, 의미론적인 관련성을
가지는 것이다. 위의 예에 있어서 (B)는 (A)에서 유도되었고, (C)는 (B)에서 유도되었
다. 그렇기 때문에 지명 연구에 있어서는 (A)→(B)→(C)의 관계에서 (A)의 본질적 특
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A)는 그 지명의 최초의 생성 형태라 하겠다. 이것에 대한 규명에는 그곳
에 살던 사람들의 지리적, 역사적, 민속학적, 원시종교적 제요소들과 결합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제요소들은 그 지명의 어원탐구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지명의 어원이 이러한 제요소들과 결합하고 있다는 것은 역시 사람과의 사이
에 무시할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셋째로, 지명은 사람의 이동과 같이한다는 점에서 생명체적 구실을 한다고 하겠다.
상고시대에는 사람들은 집단으로 이주해 다닌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
본래 살던 곳의 지명을 그대로 지니고 다니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도 지명이 사람들
의 공동체적 운명과 일치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형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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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이 여러 곳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여러 곳에 언어적으로 유사한 지명이


여기 저기 분포하고 있다면 그것은 상고대에 있어서의 민족의 이동과 어떤 관련성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명의 연구는 단순히 언어학
적인 기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과 관계되는 모든 분야에 걸치는 관심
사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지명의 연구는 언어학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위에 말한 여러 분야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지명연구의 중심은 언어학적 기술에 잇는 것이다. 언어학적 기술이란 그 기술이
객관적 합리적 타당성을 가질 때만이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며, 거기에는 추호도 주관
의 개입이 용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날 역사학자들은 상고사 기술에 있어서
부족한 사료의 보충을 위한 지명에 대한 해석이 있었고, 민속학자들은 상고 샤머니즘
형태의 규명에서 종종 어원을 인용하는 일이 있었으나, 이들은 견강부회가 적지 않았
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명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공시적으로는 시대
별 형태에 대한 규명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지명 발
생시의 형태를 규명하는 것이 제1차적인 과제가 된다고 하겠다. 물론 이 경우에 그
下代의 형태와의 어원적 유연성에 통시적인 변화 변천 교체의 현상들에 대한 고려도
아울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고대의 지명이 한자를 이용한 借字
表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1차적으로 이 표기를 통한 해석의 방
법론이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차자표기의 방식은 이미 알려진 대로 한자의 음이나
훈의 재구가 연구의 핵심이 된다고 하겠다. 이 경우에는 그 음이나 훈이 어떤 성격의
것이냐의 인식의 차이에 따라 재구의 형태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
리 나라 지명의 연구에 있어서는 한자의 음이나 훈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부터 갖추어
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의 연구 경향에서 볼 때 이 문제를 너무도 소홀
히 다루는 경향이 적지 않다. 우리는 지명 연구에 있어서 현대의 지명을 대상으로 하
는 경우는 口傳의 음형을 자료로 다룰 수도 있으나, 고대로 소급할수록 기록된 문헌
의 자료를 이용하는 길밖에 없다. 이것이 차자표기라는 점에서 기록에 이용된 표기나
표기자에 대한 세밀한 검토를 선행시킴은 연구에 들어가기 전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향에서 볼 때는 이러한 문제를 너무도 소홀히 다룬 점이 적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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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은 이상과 같은 입장을 고려해서 특히 고대의 지명을 대상으로 표기자음의 성


격을 규명하는데 그것이 어떠한 성격의 것인가를 검토해 보기로 한 것이다.

Ⅱ. 자료의 성격

이 문제는 필자가 저서를 통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한 바 있으나, 고대 지명의


규명에 있어서 그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 번 더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지명의 연구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료로서 쓰일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
의 <지리지>이다. 여기에는 삼국의 구 판도의 영역 안의 지명을 망라했을 뿐만 아니
라 삼국 통일후의 개신지명, 그리고 ≪삼국사기≫가 편찬되던 고려 초의 지명이 병기된
점에서, 이들 지명의 변화의 과정을 소상히 이해할 수 있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매
우 높다고 하겠다. 이의 보조 자료로서는 ≪日本書紀≫의 지명 표기, 그리고 ≪東國輿
地勝覽≫도 소중하게 쓰일 수 있으나, ≪日本書紀≫나 ≪東國輿地勝覽≫과 같은 것은
어형 재구의 방증자료로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료를 취급함에 있어서 우리가 제1차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자료 자체
가 보여주는 시대적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점이다.
먼저 같은 구 판도에 속하는 지명이라도 고구려, 신라, 백제에 있어서의 한자음의
체계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라별 옛 판도의 지명(A) 개신지명(B) 고려 초의 지명(C)


熱兮縣(泥兮) 未詳
신라 日谿縣
仇火縣(高近) 義城府에 合屬
南川縣 黃武縣 利川縣
고구려
今勿奴郡 黑壤郡(黃壤) 鎭川郡
熱也山縣 尼山縣 尼山縣
백제
舌林郡 西林郡 西林郡

여기 제시한 예는 (A)-(B)-(C) 사이에 시대적 차이와 나라별 차이가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즉 (A)는 口傳의 자료이냐 전사되어 내려온 자료이냐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이 경우에 필자는 분명히 전사되어온 자료에 따른 것으로 본다. 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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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A)의 단계에서 각자의 史書를 편찬한 바 있고, 또한 상당히 조직화 된 지방의 행


정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A)에 있어서 신라의 지명은 개
신지명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신라가 가졌던 표기체계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고, 고
구려는 고구려의 표기체계, 백제는 백제의 표기체계가 기준이 되었던 것으로 일응 추
정해 두는 것이 과학적인 태도라 하겠다. 유감스럽게도 이들 삼국의 표기체계와 그
字音이 동일했는지 달랐는지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 삼국이
결과적으로 같았다 하더라도 또한 유사성이 많다 하더라도 초기 단계의 연구에 있어
서는 구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에서 볼 때 그러한 노력
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필자가 지난날 그러한 의도에서 ≪韓國漢字音의
硏究≫Ⅰ․Ⅱ와 ≪三國時代의 漢字音≫을 낸 바 있지마는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B)의 지명은 분명히 신라 경덕왕 때에 사용되던 字音이 기준이 되었음은 말할 필
요도 없다. 이런 점에서 (B)의 字音은 (A)의 字音과는 확연히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이 두 계층간의 자음의 시대적 차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이루
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A)와 (B)는 시대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원적으로는
有緣的인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물론 (B)는 (A)의 어원을 신라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결과이기는 하나, 어떤 것은 고구려 시대의 이표기를 그대로 이용했다고 생각되는 경
우가 없는 바도 아니나, 고구려측 이표기를 수용하면서도 신라어로 재해석한 예도 보
인다. 예컨대 앞의 보기에서 고구려의 今勿奴가 (B)에서 黑壤과 黃壤 둘이 나타난다.
이것은 黑과 黃은 해석상 혼동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료에 따라 黑壤으로 된 곳
도 있고 黃壤으로 된 곳도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필자는 이 둘의 관계는 분명히 구
별되어져 표기되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즉 今勿奴는 고구려측의 입장에서는 黃壤에 해당하나, 신라측의 재해석으로는 黑
壤이 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즉 今勿을 음차로 볼 때 고구려어로는 黃
이 되고 신라어로는 黑이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고대 지명의 연구에 있어서는 표기
에 이러한 시대적 지역적 차이가 있음을 고려하여 그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지명연구에 있어서는 표기에 나타난 字音의 기층음에 대한 충분한 고
려가 되어 있지 않은 결함이 있다.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앞에 보인 예에 있어서
(A)단계의 기층음과 (B)단계의 기층음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들
의 기술이나, 언어학자들의 기술이나, 그들이 이용한 자음이 모두 15세기 이후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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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정착된 자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한 잘못으로 생각된다.


(A)단계의 자음은 우리나라에 수용된 시기가 언제이며, 그 기층음이 어떤 것이었던
가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이용한
용자는 한자이며, 한자는 자형과 어가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언어의 변화에 따라 그
자음도 변화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선행되지 못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언제부터 한자를 수용해서 국어의 표기에 이용했
을까 하는 것과 연결된다. 지금까지 제기된 몇몇 학자들의 견해는 대체로 서기 6세기
경의 唐音이 기준이 된 것으로 추정한 경향이 있으나 이는 언어도단이다. 이것은 우
리의 문자생활이 6세기경에야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인데, 천부당만부당한 이
론이다.
앞의 (A)단계가 보여주는 자음들은 적어도 중국에 있어서의 上古音까지 소급하는
상당한 흔적이 있다. 필자는 인적 물적 교류, 고고학적 유물, 고대의 여러 기록들을
탐색하여 이 땅에 있어서의 한자음의 수용은 적어도 기원전으로 소급하는 것으로 보
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6세기로 추정한 것은 上古音에 대한 인식의 부족과, (A)
단계의 표기와 (B)단계의 표기를 같은 共時的 字音의 體系로 다루고, 그것을 해독함
에 있어서도 15세기 이후의 한글에 의한 표음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
를 초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명의 표기가 한자를 이용한 借字表記라는 점에서 우리는 연구에 앞서 이른바 聲
韻學으로 불리어지는 漢字音韻學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명심
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上古音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으나, 기존의 여러
학자들이 재구해 놓은 한자음을 이용하는데 그치고 있다. 남의 재구음을 이용하는 경
우에도 그러한 재구음이 어떻게 해서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를 충분히 주
지하고 이용해야 한다. 여기에는 단순히 음운의 변천사만이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
라, 聲韻學史, 즉 字音의 硏究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에 대한 기초지식을 가지고
임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보는 바로는 몇몇 분을 제외하고는 이에 대한 충분한 기초
지식을 가진 이가 적은 것 같다.
오늘날 字音에 있어서 上古音에 대한 연구는 칼그렌(karlgren)이래로 상당한 수준
에까지 이르고 있으나, 우리에 있어서는 상고음에 대한 기초지식이 다른 누구보다도
절실함에도, 이에 대한 같은 연구를 하고 있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上古音에 대한 기
초지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聲韻學 전반에 대한 이해, 그 중에도 中古音에
대한 기초지식 위에서 갖추어져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모든 학문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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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너무도 안이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는가 한 번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


각한다.
여기서는 우리의 지명, 그 중에서도 (A)단계의 자음 가운데는 上古音의 경향이 농
후하게 분포하고 있음을 들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구 판도의 지명이나 다른 고
유명사의 표기에서 상고음의 경향이 존재한다면, 거기에 이용된 한자음의 기층음이
중국의 상고음에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여기에는 이미 발표한 저
서에서의 것과 중복되는 것이 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Ⅲ. 고대지명 표기자음의 검토

1. 複聲母의 흔적

오늘날 上古音에서 복성모가 존재했으리라는 가설은 학계의 하나의 상식으로 통한


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는 이도 있으나, 동일한 자
가 두 개의 대립되는 성모를 가졌거나 聲符를 같이 하는 자가 聲母를 달리 하는 경
우, 그것을 합리적으로 성명하기 위해서는 그 初期音이 복성모이었으리라는 가설에
서는 것이 보다 타당성을 가진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일찍이 李鐸이 이와 같은 현
상을 기술하기 위해서 매우 복잡한 음운 규칙을 세우려고 하였으나1), 그 규칙들은 납
득하기 어려운 것이 적지 않았다. 梁柱東의 경우도 互傳이라 해서 음운의 교체를 너
무도 자의적으로 원용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2)
이런 경우에 어떤 것은 음운규칙으로서 성립되는 것도 있으나, 음운규칙으로 설명
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복성모의 존재를 인정하면 간단하게 음운현상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음에 그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1) 臨屯
前漢의 武帝는 元封3년(B.C.108), 衛氏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故地를 중심으로 樂
浪․臨屯․玄菟․眞番의 4郡을 두었는데 이른바 漢4郡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1) 李鐸: 國語學論攷, 正音社, 1958.


2) 梁柱東: 古歌硏究, 一潮閣,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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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郡의 이름이 본래부터 그 지방의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던 것


이냐, 漢이 4군을 설치하면서 새로 지어 붙인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들 4군은 본래
朝鮮의 땅이었음이 분명하고 거기에 살던 사람은 분명히 古朝鮮人이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기에서 위 4군의 이름이 漢人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면 漢語로
봐야할 것이며, 본래부터 그 지방에서 사용되어 온 것이라면 마땅히 古朝鮮語로 봐야
할 것이다. 이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언어학자보다도 역사학자에 의해 여러 방면에
서 考究되어온 바 있다.
眞番과 臨屯에 대해서는 ≪史記≫<朝鮮傳>에 眞番國과 臨屯國이라는 이름이 보
임으로 그 이름에서 유래한 것임이 분명하며, 玄菟와 樂浪에 대해서도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으나, 많은 학자들에 의해 그것이 고조선어로 된 고조선의 지명임이 분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여기에서 주제로 삼은 臨屯이 고조선인에 의한 고조선의
지명임이 분명함을 알 수 있거니와, 그 臨屯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별
로 언급된 것을 보지 못했다.
이들 지명의 표기가 音借에 의한 것이냐 訓借, 또는 音訓借 혼용이냐 하는 것이 문
제가 되는데, 訓借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일단은 音借에 의한 것으로 보고 풀어 보기
로 한다.
音借를 전제로 했을 때 臨이라는 字音이 과연 고조선어의 형태에 합당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臨은 현행 우리의 음으로는 ‘림’이며, 일부 학자들은 上古音을 li̭ǝm(董
同龢)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의 현행음 ‘림’은 이 li̭ǝm과 부합한다. 그러나 이의 聲
符를 기준으로 할 때 臨의 上古音이 과연 li̭ǝm과 같은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說
文≫에 의하면 ‘臨 監也 從臥品聲’이라고 했다. 臨은 監으로 臥와 品의 합성이며 品을
聲符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臨을 ‘림’으로 읽는 사실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
는다. 이것은 臨이 品과 等價音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品은 우리 음으로는 ‘품’
이며, 이의 상고음은 p‘i̭ǝm(董同龢)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3)
≪설문≫은 漢代 許愼이 지은 것으로 적어도 한대에 통용되던 음을 반영한 것으로
봐야 하며, 臨屯이라는 지명이 그 이전의 臨屯國에서 유래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음성
실현은 당시의 음운현상의 반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li̭ǝm/p‘i̭ǝm의 이 괴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칼그렌은 이런 점
을 감안하여 臨을 bli̭ǝm과 같이, 品은 p‘li̭ǝm과 같이 재구했다.4) 이는 臨이 bli̭ǝm과

3) 董同龢: 上古音韻表稿, 中央硏究院 歷史言語硏究所, 1948刊本. (이하 引用音은 같음)


4) B. Karlgren; Compendium of Phonetics in Ancient and Archaic Chinese. The Museum of F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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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복성모라는 것이다. 이 재구음을 기준으로 하면 臨屯의 臨은 ‘브름’과 같은 것으


로 추정된다. 이 bli̭ǝm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필자는 bli̭ǝm은 東夷族의 원시 토템
과 결합한 風․虫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風의 최초의 음형은 *bli̭ǝm이었을
것이며, 虫은 蛇로 ‘뱀’을 뜻한다. ‘뱀’은 중세어로는 ‘얌’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고
대의 ‘’에서 발달한 것으로 본다. ‘’은 모음의 교체에 의해 ‘브름’이 되며 이
는 臨의 bli̭ǝm과 완전히 형태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브름’은 ‘브르’로, 이는 ‘블’
(火)에서 어원하며, 夫餘族의 ‘夫餘’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본다. 夫餘는
종족의 분류에서 볼 때는 北狄에 해당한다. ‘狄’에 ‘火’를 내포한 것도 夫餘族이 ‘블’
과 연관되었음을 뜻한다. 이 문제를 여기서 자세히 거론할 수는 없으나, 臨은 ‘브르’
로 夫餘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5)
屯의 상고음은 d‘wǝ̂n/ti̭wǝn으로 재구되나 보다 이른 시기에는 개모의 -w-가 개재
하지 않았던 것이다. -w-가 개재하게 된 것은 대개 남북조 이후에 속하는 것이다.6)
이것을 *tǝn으로 재구하면 고구려지명에 접미사로 쓰인 呑․旦․頓과 일치하며 珍․
知도 이와 같은 것일 것이다. 우리가 臨屯을 ‘림둔’으로 읽는 것은 중세의 음에 따른
것인데, 이러한 태도로는 고대의 지명해독이 불가능하다. 이것을 ‘림둔’으로 읽었을
때 어두에 ‘ㄹ’의 성모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한4군의 이름
이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고유의 이름을 따른 것이라고 할 때, 과연 어두에 이
러한 ‘ㄹ’음의 개제를 허용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구
3국의 판도내의 지명에서 臨屯을 제외하고 어두에 ‘ㄹ’을 가진 예는 볼 수 없다. 이것
은 어두에 ‘ㄹ’음을 가질 수 없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臨屯의 ‘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 하더라도 臨屯은 ‘브름’으로 부여족의 집
단 이주지였던 것으로 추정하는 바이다.

(2) 樂浪
한4군의 다른 하나인 樂浪도 이와 꼭 같은 입장에서 처리될 수 있다. 칼그렌은 樂

Eastern Antiquities, Stockholm, 1963.


常宗豪․繆錦安, 中國上古音韻表, 據高本漢擬音, 香港中文大學聯合學院, 1971.
(이하 칼그렌의 인용음은 같음)
5) 이에 대한 재구음과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拙著; ≪文字에 숨겨진 民族의 淵源≫, 集文堂, 2000.9
에 세밀하게 기술한 바 있다.
6) Ting Pang-hsin; Chinese Phonology of the WEI-CHIN period; Reconstruction of the Finals
as Reflected in Poetry, TAIPEI, 197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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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nglǒg(肴韻)/glåk(鐸韻)/nglǒk(覺韻)/gliog(宵)과 같이 ng-/gl-을 가진 복성모로 재구


했다. 필자는 여기 肴․覺韻의 ngl-도 보다 이른 시기에는 gl-로 소급하는 것으로 추
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glag/glak로 소급한다면 우리말의 ‘가락’과 어원을 같이
하는 말로 추정하는 것이다. ‘가락’은 현대 ‘노랫가락’과 같이 곡조를 뜻하는 말로 쓰
이나, 본래는 歌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이와 같은 뜻을 가진 말에 呂가 있다. 呂는
陰律로 風流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呂를 칼그렌은 gli̭o로 재구했으나, 魚韻에 속하는
점으로 보아 이른 시기의 음은 gli̭ag이었을 것이다. 이것도 樂의 glag과 음성적으로
유사하다. 이것은 우리의 ‘가락’에 해당하는 말이다. 어쨌든 樂을 galg로 재구했을 때
이의 종족 이름인 伽倻․加羅와 대응한다고 하겠다. 伽倻․加羅는 ‘가라’로 종족의
이름이다. 그러나 漢代에는 이미 이러한 복성모가 단성모화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
로 추정된다. 복성모의 단모음화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gag>giag>iag>jau(요)
glag
lag

g->ng-
gl
l-

이것은 gl-이 g-와 l-의 둘로 분화하게 됨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는 樂의 음이 ‘락․


악․요’의 세 음을 가지는데 이는

gak>giak>ak(악)
glak
lak>lak(락)

와 같은 변화를 겪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lag형은 우리의 현용음에는 남아 있지 않


으나, 이는 어두 ㄹ음의 기피로 말미암아 일찍이 폐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데 樂浪은 여기에 다시 樂을 첨기한 것이다. 浪은 차자표기로는 la에 대용되었다. 이
것은 樂이 복성모 glag에서 ga가 되므로 다시 浪을 첨기하여 gala가 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樂이 ‘악/락’으로 발달한 뒤에는 이것이 종족의 이름 gala/glak을 적는 데는 적
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음에 따라 加羅․加落․伽倻로 바꾸어 적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역사가들이 樂浪族과 伽倻族을 전혀 별개의 종족처럼 부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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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字音의 변화에 따라 字類를 바꾸어 적은데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며 樂浪과 伽倻는


동일 종족의 이표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 買省縣
고구려 지명에 ‘來蘇縣 本高句麗 買省縣 景德王改名 今見州’도 본래 복성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을 시대별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買省縣 → 來蘇郡 → 見州
(A) (B) (C)

買省縣이 ≪삼국사기≫ 권37의 <삼국지명>에서는 一云 馬忽이라 했다. 이는 고


구려 지명에서 買省이 馬忽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B)의 來蘇도 경덕왕 때
개정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도 고구려 시대부터 일부에서 쓰던 이표기를 그대로
채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買는 고구려에서는 水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南川縣 一云
南買는 買가 川과 대응하고 買忽 一云 水城에서는 買가 水와 대응하고 있다. 이는 買
가 川이나 水를 뜻하는 말임이 분명하다. 買가 水와 대응한 예로는 買召忽→彌鄒忽
內乙買→內尒米들이 있다. 買가 水를 뜻하는 말로 쓰였음이 분명한데 중세국어에 따
르면 水의 훈은 ‘믈’이며, 買의 음은 ‘’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水의 고구려어가 ‘’
인 것처럼 생각하나 買의 고구려음은 위의 音 대응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
아니다. 買와 대응한 彌나 米와 같았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彌의 상고음은 mi̭ǎr
(칼그렌), 米의 상고음은 miǝr(칼그렌)이다. 이 형태는 오히려 중세국어의 ‘믈’과 가깝
다고 하겠다.
․ ․
또한 본항에서 예로 든 買→馬의 대응을 馬의 중세국어가 ‘’인 점을 감안하면
彌․米․馬가 ‘믈’을 나타내는 것임이 분명하다.7) 이것을 買의 중세음을 기준으로
‘’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우리는 중세의 한자음으로서 고대의 지명을 해석하
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買省縣이 개신지명에서 來蘇縣으로 되어 買가 來와 교
체한 사실이다. 買를 ‘믈’로 가정했을 때 이 來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來蘇가
고구려 때부터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상고음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서는 買→來의

7) 拙著; ≪韓國古代漢字音硏究≫Ⅰ, 啓明大出版部, 1980.6.


삼국시대의 漢字音, 民音社, 1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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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한국지명연구

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來를 상고음으로 소급시켰을 때 비로소 買와


來의 대응이 가능해진다. 來의 상고음은 lag(칼그렌)인데 이는 본래 麥을 뜻하는 말이
었다. 麥의 상고음은 mwǝk(董同龢)이나 이의 보다 이른 시기의 음은 mlǝg로 소급될
수 있다. mlǝg는 mǝlǝg로 국어의 ‘밀’과 대응한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m-이 비비음
화하여 b-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이는 일본어의 현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m-를 b-와 교체하면 ‘믈’은 ‘블’이 되어 見과 대응하게 된다. 고려초의 見
州는 그러한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상에서 買→來의 대응은 중고음으로 설명될 수 없다. 來의 상고음 mlǝg를 기준
으로 할 때 買와의 대응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2. 복성모에서 분화한 형태

앞의 예는 복성모가 그대로 존속되었다고 가정되는 예이었으나 이 복성모는 다시


분화하여 단성모화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1) 波害乎吏縣(卷35)→波害乎史縣(卷37)
≪삼국사기≫에서 같은 지명이 위와 같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 波害乎吏의 乎는 平
의 오자일 것이다. 그 아래의 平吏-平史에 있어서 吏가 史와 교체한 것이다. 이것도
史가 吏의 오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史→吏의 대응으로 본다면 이는 吏
→史가 등가적임을 뜻한다.
칼그렌은 史는 sli̭ǝg로 吏는 li̭ǝg로 재구했는데, 史를 sli̭ǝg와 같이 복성모로 재구
하면서 吏는 단성모인 li̭ǝg로 재구한 까닭은 이해하기 어려우나 이는 史가

s-
sl-
l-

와 같이 분화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l-로도 쓰였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平吏는


고구려 지명에 관용되던 접미사의 하나로 平唯押 一云 別史波衣에서 볼 수 있는 平唯
→別史가 바로 그것이다.
이 平唯․別史는 平吏․平史와 같은 것인데 이는 ‘벼르․브르’와 같은 것으로 볼
것이다. 이 別史는 平史와 함께 史기 l-로 쓰인 예라 하겠다. 史가 l-에 대용된 점도
상고음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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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文峴縣→斤尸波衣
이 예는 文이 斤尸과 대응한 것이다. 文은 중세어에서는 ‘글’로 나타난다. 斤尸을
중세어의 ‘글’과 대응하는 것으로 본다면 尸는 ‘ㄹ’을 표기한 것으로 밖에 생각할 수
가 없다.
신라의 지명에서도 阿尸兮→阿乙兮, 古尸山→管城 등의 예가 있다. 이것은 모두 l-
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명뿐만 아니라 吏讀나 鄕歌에서 尸는 거의 l-에 대용되었
다. 어째서 尸가 l-에 대용될 수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곳에서 제기한 바 있
기에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을 피한다.8) 尸가 l-에 대용된 것은 sl-가 s-와 l로
분화한 데서 말미암은 것으로 s-에 대용된 예도 있다. 加尸兮→新復縣의 加尸는 復의
훈 ‘가-가시’와 대응한 것으로 볼 때, 이는 중고음을 기층으로 하는 새로운 현상이
라 생각한다.

3. 유성성모의 흔적

상고음에서는 성모에 유성자음의 계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


유성음 계열은 중고음에서는 이미 소멸하고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칼그렌은 유성
자음 g-, d-, b-가 3등의 개모 -i̭-의 앞에서 삭제되거나, j-로 변한 것으로 추정했다.9)
그러나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유성자음 g, d, b dz는 3등의 경우에만 소멸한 것이 아
니다. 이들은 전부 소멸하여, 이 계열은 자음의 체계에서 삭제되고만 것으로 본다. 이
들은 성모에서는 喩․影母에 들어가기도 하고 全濁音에 배속되기도 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고구려 지명에서 이 유성음 계열이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현상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지명에 쓰인 字音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
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1) 國內州→不而→尉那嵒城
≪삼국사기≫ 권37의 鴨綠水以北已降城十一 가운데 들어있는 지명이다. 이 지명의
예는 國→不→尉, 內→而→那와 같은 대응 관계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州․嵒은
이 지명에 붙은 접미사이다. 다만 不而에는 접미사가 붙어 있지 않으나 國內의 이표

8) 拙論; 鄕歌表記用字의 上古性的 側面-特히 ‘尸’의 音價와 그 淵源에 대하여, ≪國語學論攷≫,


啓明大出版部, 1984.12.
9) B. karlgren; 앞의 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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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 그 아래의 접미사는 생략 표기한 것으로 볼 것이다. 위의 예에서 國은 훈차에


속하며 나머지는 모두 음차에 속한다. 國의 훈은 중세어에서는 ‘나라’로 나타나나, 고
대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러하다고는 할 수 없다. 國은 원칙적으로 고조선에 있어서는
眞番國, 臨屯國과 같이 부족국가 시대의 종족집단의 단위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國이 접미사뿐만 아니라 基體部에 쓰인 점에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이
와 같은 것에 國原城→未乙省→託長城이 있다. 이것도 國이 基體部에 쓰인 점에서 國
內城과 같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國의 훈이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는 國이 未나 託과
대응한 것이다.
未의 상고음은 mi̭wǝd로 재구된다.10) 여기에서 운미의 -d는 -r(周法高)로 변한 경향
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는 mi̭wǝr과 같다고 하겠다. 앞에서 m-가 때로는 b-와 교체하
는 현상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m→mƅ→b와 같은 과정을 겪은 것으로 생각되지마는
앞에 예로 든 것 외에도 ‘臂城郡 一云 馬忽’과 같은 예가 있다. 이는 臂→馬의 대응일
것이다. 臂馬는 훈차일 것으로 보는데, 臂의 중세어는 ‘’, 馬의 중세어는 ‘’이다.
이는 ‘’이 ‘’로 실현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未의 音 mi̭wǝr이
bi̭wǝr와 같이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는 託이 문제가 되는데 필
자는 이것이 托의 잘못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托의 중세어는 ‘’이다. 이와 같이 추
정하면 國의 bi̭wǝr은 신라에 있어서 지명의 접미사로 쓰인 伐이나 火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伐의 상고음은 b̒i ̭wǎt로 재구하고 있다. 火의 중세어가 또
한 ‘블’임을 감안할 때 國은 곧 ‘벌․블’과 같은 형태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
이 곧 不․尉와 대응한다고 보는 것이다.
不의 상고음은 pi̭ug로 재구되고 있어서, 현재 우리가 쓰는 ‘불’과는 운미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集韻에는 分物切(物)로 舌內入聲을 가졌으며, 不은 또한 일찍부
터 非, 弗과 통용되어 왔다. 이것은 不이 非(pi̭wǝr)나 弗(pi̭wǝt) 등과 등가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하면 不의 상고음도 pi̭wǝr/pi̭wǝt로 재구될 수 있을 것
이다. 이것은 國을 bi̭wǝr로 추정한 것과 음성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尉의 상고음은 ・i̭wǝd(칼그렌)로 재구하고 있다. 尉는 ․(影母)로 不과는 성모에 차
이를 보이고 있다. 필자는 이 影母의 경우에도 상고음에서는 유성자음이 개재했던 것
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경우에도 성모 b-를 가정하면 尉은 *bi̭wǝd가 된다. 그렇지

10) 이 재구음은 B. karlgren의 앞 책에 따른 것이다. 이하 상고음의 표시에서 특별히 이름을


들지 않은 경우는 모두 이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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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는 尉가 不과 대응한 합리적인 이유를 기술할 수가 없다. 이것은 尉가 본래 b-라


는 유성자음을 가졌던 하나의 예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11)

(2) 阿斯達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李丙燾의 설에 따라 阿斯達의 阿斯를 朝鮮의 朝에 대응시
켜 ‘아’로 읽고, 국어의 ‘아침’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阿斯達의 표
기시기를 근거로 할 때 과연 阿斯의 음이 ‘아’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12)
阿의 상고음은 ㆍ[a](칼그렌)로 재구하여 성모가 ㆍ(影母)로 되어 ‘아’는 ․로 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설문≫에 의하면 ‘阿 大陵曰阿. 從阜可聲’이라 했다. 이것은
阜와 可의 합성으로 可가 聲符가 된다는 뜻이다. 漢代에 이 阿가 성부 可와 다르게
실현되었다면 許愼은 분명히 따로 음가를 제시했을 것이다. 여기 성부로서의 可만 제
시하고 달리 음가를 제시하지 않은 것은 阿가 可와 등가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
제에 있어서 影母는 일반적으로 성문정치음 [ʔ]으로 이해되는데 음절두음에서 이것이
어떻게 변별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문제이다. 필자는 影母로 기술되는 성모는 본래
는 어떤 정지음이나 마찰음에 속하던 것인데 그것이 삭제됨으로써 발달한 것으로 본
다.
즉 본래 있었던 g-, d-, b-, dz-, z-와 같은 자음의 소멸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는 것
이다. 可의 상고음은 k̒â로 재구하고 있으나, 阿는 *gar와 같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
다. 이것은 *gar>ɤa>ㆍa와 같이 발달한 것으로 봐야 하며 許愼이 可聲이라고 한 것
은 바로 이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斯는 si̭ěg(칼그렌)으로 재구하고 있다. 그러나 丁邦新에 의하면 운미의 -g는 이미 前
漢때 -ï와 같이 변화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集韻≫에 의하면 斯는 相支切(支
部)과 같이 실현되는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이의 상고음은 si̭ar로까지 소급시킬 수 있
다. 우리 한자음으로는 中世音은 ‘’, 현용음은 ‘사’로 실현되나 이는 ‘/슬’과 같은
것으로 가장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阿斯는 gasǝr과 같이 재구할 수 있는데 필자는 이것을 濊
의 초기음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濊의 초기음은

11) 拙著: ≪韓國古代漢字音의 硏究≫Ⅰ, 啓明大出版部, 1980.6.


<上古 b-音의 再構> 참조.
12) 拙著: ≪文字에 숨겨진 民族의 淵源≫, 集文堂, 1999.7.
<朝鮮이라는 이름의 뿌리>
이 내용의 구체적인 사실은 이 책을 참고하시기 바람. 여기서는 그 요지만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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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한국지명연구

gasǝr이며 이는

gar(gara의 축약형)
gar
giar>iar>jaj
gasǝr ^ ^

sar ―――― sar(sara의 축약형)

과 같은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13)


阿斯達의 達은 高의 뜻이나, 지명의 접미사로 쓰일 때는 山과 대응한다. 따라서 阿
斯達은 결코 朝鮮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濊山이라는 뜻으로 濊族이 살던 지역에 붙여
진 이름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마는 종족이 이동해서 새로 정착한 지역에는
그 종족의 이름이 지명으로 쓰이게 된다. 이것은 阿斯達에 도읍한 檀君族이 濊族의
일파이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濊의 초기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고지명은 아주 넓은 지역에 퍼져 있다. 다음의 지
명과 고유명사는 모두 이것을 표기한 이표기로 볼 것이다.
≪삼국사기≫<지리지>에 따르면 ‘溟州는 본래 고구려의 河西良으로 何瑟羅로 쓰
기도 한다. ≪買耽古今郡國志≫에 이르기를 지금의 신라 북쪽 경계에 있는 명주는 濊
의 옛 나라이다.’라고 했는데, 溟州는 바로 濊族이 살던 곳이라는 뜻이다. 溟州의 본
래의 이름이 河西良/何瑟羅인 것은 濊族의 옛 이름을 남긴 것이라고 하겠다.

河 g̒â / 何 g̒â
西 si̭ǝr / 瑟 si̭ět
良 li̭ang / 羅 la

河․何는 등가음이므로 초기음은 ga이었을 것이다. 西․瑟은 sǝr/si̭ǝr 이었을 것이


다. -t가 -l에 대용됨은 고구려의 음에서 보편화 된 현상이다. 良․羅는 la 또는 ra를
전사한 것으로 접미사 壤에 대응하는 이형태이다. 良의 li̭ang은 개모의 -i̭-가 발달하기
전의 단계이며 차자표기로는 -ng는 삭제한 형태를 취했다. 여기에서 이것은 ga-sǝr-la
가 되는데 gasǝr은 바로 濊의 초기음과 일치한다. 이곳이 濊의 故土라 한 것은 이것과
부합하는 사실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東夫餘의 수도는 동해의 갓에 있던 迦葉原
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동해의 갓이라 했으니, 앞의 河西良의 이표기가 아닐까 추정

13) 濊의 발달과 그 전개에 대해서는 앞 책의 <濊>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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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昌均 | 古代地名表記 字音의 上古音的 特徵 181

하는 것이다.
迦는 加를 성부로 한다. 加는 ka이나 迦는 ga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葉은 di̭ɐp/
si̭ɐp의 두 음을 취한다. si̭ap를 취하면 迦葉은 gasi̭ap가 되는데, 이는 gasǝ-과 음성적
으로 유사하며, -p는 후속의 原의 bǝr에 의해 삭제되는 同音重出 표기에 따른 것이
다.14) bǝr은 伐과 같은 접미사일 것이다. 이는 東夫餘를 세운 夫餘族이 濊와 동일한
종족이었음을 뜻한다.
≪삼국유사≫<圓光>조에 나오는 ‘嘉瑟岬’은 혹은 加西로도 쓰고 또 嘉栖로도 쓰
는데 모두 방언이다. 岬은 俗에서 古尸이라 한다. ……지금의 雲門寺 동쪽 9천보쯤
되는 곳에 加西縣이 있는데 혹은 嘉瑟峴이라고도 한다고 했는데, 嘉瑟․嘉栖․加西가
모두 gasǝr의 표기로 본다. 이러한 지명은 가장 일찍이 정착한 濊族이 거주한 곳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朱蒙이 烏伊 摩離 陜父 등과 더불어 남쪽
으로 달아날 때 건넌 강이 淹氵虒水인데 일명 盖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압록강의 동
북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淹氵虒水와 盖斯水가 모두 gasǝr의 이표기인 것으로 측
정한다. 이것은 淹-盖 氵虒-斯와 같은 대응을 보인다고 하겠다.
盖는 蓋의 약자로 상고음은 kâd/k̒âb의 약음자이다. 이 경우에는 kâd를 취한다. 漢
代에는 -d>-r에 kar이었던 것으로 측정한다. 周法高는 처음부터 kar로 재구했다. 淹은
․i̭aㅡ로 재구한다. 이것은 介母 -i̭-의 앞에서 유성의 g-가 삭제된 형태를 취하고 있
으나, 보다 이른 시기의 음은 gam이었던 것으로 측정한다. 氵虒의 상고음은 si̭eg로 斯
와 같다. 이것은 淹氵虒수가 곧 蓋斯水임을 뜻하는데 바로 濊의 초기음 gasǝr를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濊의 성모가 ㆍ-가 아니고 g-임은 이것이 곧 상고음의 형태를 간직
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신라지명의 阿尸良國(阿那加倻)→咸安郡(개신지명)→의 예는 阿→咸의 대응이다.
이것은 阿가 ga일 때 가능한 것이다. 阿가 역시 g-를 가졌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gasǝr의 지명은 전국에 널리 퍼져 있다. 여기에 일일이 들 수 없으나, 이는 이 땅에
가장 먼저 건너온 종족이 濊를 gasǝr로 부르던 시기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것에 居西干이 있다. 居西干은 신라 첫째의 왕인 朴赫居世에 붙여진
왕호이다. 이 居西干의 居西도 濊를 뜻하는 지명 阿西良의 이형태로 생각된다. 이것
은 居西干이 곧 濊王이라는 뜻인데, 朴赫居世가 古濊族의 출신임을 뜻한다.
濊는 우리 민족의 연원으로 역사가 매우 길다. 그렇기 때문에 최초의 종족명이

14) 이 同音重出表記에 대해서는 拙著;≪韓國古代漢字音의 硏究≫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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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sǝr로 이는 앞에서 보인 바와 같이 시대에 따라 변화한 여러 형태를 남겨두고 있다.


여기서는 그것을 다 들 수 없으나, 중세음의 ‘예/왜’는 gasǝr에서 분화한 형태의 하
나인 gar에서 g-가 삭제된 형태에서 발달한 것이다.
이상에서 阿斯達에서 阿가 ga임은 상고음의 흔적이다. 또 阿西良, 何瑟羅, 迦葉原,
嘉瑟縣, 嘉西, 淹氵虒水, 蓋斯水, 居西干의 어원이 濊의 초기음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으니, 상고음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3) 熱也山-尼山
백제지명의 熱也山은 개신지명에서는 尼山이 되었다. 이것은 熱也-尼의 대응이다.
熱의 중세음은 (동국정운)으로 尼와의 음의 대응은 성립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상고음으로 소급하면 尼가 곧 熱也의 축약현상임을 알게 된다. 熱의
상고음은 n̒i ̭at로 ‘널’을 가정할 수 있고 尼의 상고음은 n̒i ̭ǝr, 중고음은 ńi이나 이는 상
고음의 형태가 그때까지도 존속하고 있었거나, 尼山이라는 표기가 백제시대의 것을
그대로 취했을 가능성이 있다. 熱이 n-로 나타남은 신라에서도 같다.

熱兮縣(泥兮縣)→日谿縣

이것도 熱이 n-로 실현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熱→泥의 대응은 백제시대


의 표기이며 개신지명의 熱→日은 日이 훈차로 ‘’로 읽을 때 熱이 n-이었음을 뜻한
다고 하겠다.

(4) 大良州郡(大耶州)→江陽郡
이것은 良→耶와 같은 대응을 보이는 것이다. 良이 신라에 있어서는 ‘라’의 전사에
이용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서 耶가 良과 대응한 것은 耶가 역시 ‘라’
이었음을 뜻한다. 耶의 상고음은 źi̭å/dzi̭å/dzi̭o 등으로 재구된다.
그러나 보다 이른 시기에는 dår와 같았을 것이며 이것이 ra로 바뀌었을 것이다. 재구
음은 dår>di̭år>ri̭a와 같은 발달을 겪었을 것이다. 耶가 ‘라’이었음은 신라에서는 하
나의 관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d-의 r-화는 다른 예에서도 볼 수 있다. 古冬攬郡(古陵
縣)은 冬攬→陵의 대응인데 이도 d->r-로 기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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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齊次巴衣→孔巖縣
이 예는 巴衣-巖의 대응이다. 巴衣가 巖임이 분명하다. 巖의 중세어는 ‘바회’이다.
이 예의 孔巖은 ≪용비어천가≫에는 ‘구무바회’로 되어 있다. 이것은 명백히 첫 음절
의 ‘바’와 둘째 음절 사이에 자음 ‘-ㅎ-’이 개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런데 신라시대의 향가 <獻花歌>에는 이것을 ‘岩乎’로 적고 있다. 이 巖은 고구려 지
명에서는 이외에도 鵂鶹城縣-租波衣-鵂巖郡, 三峴縣,-密波兮, 文峴縣-斤尸波衣 등과
같은 예가 있다. 여기에서 衣가 兮와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岩
乎의 乎는 말음절을 첨기한 것으로 상고음은 g̒o로 재구된다. 兮는 ger(周法高)와 같
다. 董同龢는 乎는 ɤag, 兮는 ɤieg로 재구했는데, 이들은 模韻에 속하는 것으로 운미
를 고려해 넣으면 乎는 gag>ɤar>ɤoi와 같은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볼 수 있고 兮는
gieg>ɤieɤ>jej와 같은 발달을 생각할 수 있다. 중세국어의 ‘바회’는 이 중간단계 go
i>ɤieɤ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衣는 ․i̭ǝr(上古)>․jḙi(中古)와 같이 상모가 ㆍ
-(影母)로 되어 있으나 위의 사실을 감안하면 衣의 상고음은 gi̭ǝr로 소급되고, 이는
ɤi̭ǝr>․jaj와 같이 g-의 삭제로 인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 지명의 衣가
g-를 가졌던 상고음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衣가 중
세음에서 ‘의’로 나타나기 때문에 고구려어의 巖은 ‘바의’였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鵠浦縣-古衣浦도 ‘衣’가 상고음 g-를 따른 것임이 분명하다. 鵠의 음은 g̒ôg으로 재
구되고, 중세어는 ‘고해’로 중간에 -ㅎ-을 가진 점이 ‘바회’와 같다. 이것도 ‘衣’가 상
고의 g̒ôg의 단계의 음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4. 운미자음의 흔적

지명은 아니지마는 신라 官17等 가운데 10등의 大奈麻가 혹은 大奈末로도 적는다


했다. 이것은 麻를 末로도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麻의 상고음은 ma, 末의 상
고음은 mwat로 재구되어 있다. 麻는 陰聲系로 운미가 -o인 것처럼 되어 있고 末은 入
聲系로 운미 -t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운미의 -t는 일찍부터 -l화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麻는 Ting Pang-hsin은 mra̭r와 같이 -r의 운미가 있는 것으로 재구
하고 있다.15)
여기에서 운미의 -r이 그대로 존속되고 있음을 뜻하는 바 상고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15) Ting Pang-hsin;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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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한국지명연구

道西縣 - 都盆

이것은 西 - 盆의 대응으로 추정된다. 西는 陰聲系에 속하며 중세음에서는 ‘셔’로


운미에 자음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상고음에서는 siǝr와 같이 -r의 자음을
가지고 있었다. 盆은 훈차로 생각되는데 盆의 중세국어는 ‘소라’로 되어 있어, 西가
운미의 -r가 있음으로써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Ⅳ. 맺음말

앞에서 성모와 운미의 자음에 대해 상고음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약간의 예를 들어 보


았다. 이러한 상고음적 성격은 성모나 운미의 자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운부의 모
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잔존해 있다.
상고음이 중고음과 특히 다른 점은 첫째, 성모에 있어서 복성모와 유성자음의 계열
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복성모는 우리의 중세어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음절
의 두음에 여러 개의 자음을 복합해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는 어원적으로 자음과
자음 사이에 개재하던 자음의 약화 내지 삭제로 인한 것인데, 그러한 현상이 일부 고
대지명에 잔존한다는 사실이다. 유성자음은 중고음에서는 이미 약화되어 j나 w 등으
로 변하거나 소멸하였지마는 고대지명에서는 광범하게 이 현상이 잔존해 있다. 이것
은 고대지명의 초기 표기용자음이 그러한 상고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단계의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둘째로, 운미의 자음도 상고음과 중고음 사이에는 특히 陰聲系 즉, -g, -d, -b, -dz,
-z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고음에서는 이들이 거의 삭제되거나 -j, -w 등으로 변
했지마는 고대지명에서는 부분적으로 일부 상고음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d
는 한대에는 -r화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이 거의 그대로 잔존하고 있다. 중고
음에서는 이 -r은 -j화 한 것이다.
셋째, 운부의 모음에서도 개모의 -w-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w-는 원순음화에
의한 것인데, 이것은 대개 남북조 이후에 일어난 현상으로 보고 있다. 3등의 개모 -i̭-
도 중고음에 비해 1등과의 대립이 분명하지 않다. 이것도 상고음의 잔재로 볼 수 있
다.
이외에도 상고지명의 표기용자음은 중고음이나, 우리의 중세음으로는 설명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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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昌均 | 古代地名表記 字音의 上古音的 特徵 185

없는 요소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우리 한자음의 유입시기와 그 성격을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벌써 오래 전부터 고대 우리 한자의 음에 상고성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주장해 온 바 있거니와 적어도 지명의 연구에 관심이 있는 분은 상고로부터
近古에 이르기까지의 한자음의 추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믿고 있다. 특히 상고음의 기술에 대한 여러 특징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명연구를 한
다는 것은 緣木求魚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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