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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2020년 5월호 (Urimunhwa May 2020)
우리문화 2020년 5월호 (Urimunhwa May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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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모육아 慈母育兒
>
신한평申漢枰, 1726~?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 담채, 23.5 × 31.0cm
이 그림을 그린 신한평은 풍속화로 저명한 신윤복의 아버지이다. 신한평은 아들의 명성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은
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다’는 뜻이다. 세 자녀를 둔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품에 안고 젖을 먹이고 있다. 엄
마의 품속에서 아이는 편안히 젖을 먹고 있다. 화면 오른쪽의 큰아들은 방금 잠에서 깨었는지 눈을 비비고 있다. 화
면 왼쪽의 딸은 복주머니를 만지면서 조용히 앉아있다.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이 그림에는 잘 나타나 있다. 시대와 사
회가 변하면서 가족의 형태, 기능, 의미도 크게 바뀌었다. 사랑으로 세 자녀를 돌보는 한없이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
을 그린 <자모육아>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가족은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가정의 달,
5월에 가족의 소중함을 생각해 본다.
U RIM U N HWA
별별마당
월간 우리문화 4 테마기획
vol.283 | 2020 05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_ 한국 예술은 무엇으로 단련 되는가 / 정인서
발행인 김태웅
발행일 2020년 5월 1일
10 이달의 인물
편집고문 권용태 색깔 있는 여자, 천연염색 작가 ‘김외경’ / 이행림
편집주간 한춘섭
편집위원 곽효환, 김 종, 김찬석, 오광수, 16 바다 너머
오양열, 장진성, 지두환 네팔의 부처님 오신 날, 붓다 자얀티를 가다 / 하도겸
편집담당 음소형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20 시와 사진 한 모금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그 도시의 열흘 _ 5·18 40주년을 기리며 / 김 종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홈페이지 www.kccf.or.kr
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등록번호 마포,라00557 문화마당 Cultural Encounters
기획편집번역제작 서울셀렉션 02)734-9567
22 옹기종기 Iconic Items
수수함 속 단단함, ‘목기’ / 안유미
Mokgi, Simple and Solid Woodenware / An Youmee
56 지역 따라 노래 따라
기차 타고 온 노래들 / 손민두
60 오! 세이
눈물 속에 피는 꽃 / 박상우
62 한류포커스
서태지와 아이들부터 방탄소년단까지 / 심영섭
24
우리마당
64 북한사회 문화 읽기 ⑮
태양의 꽃 그리고, 불멸의 꽃 / 오양열
68 있다, 없다?
공중전화기 있다, 없다? / 문진영
30 70 독자 투고
아름답고 매서운 산세로 수도 지켜낸, ‘북한산성’ / 정동일
72 NEWS, 편집후기
도봉문화원 《도봉산》 발간 등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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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9-4236
■ 원고 투고나 《우리문화》에 대한 의견, 구독신청 등은 편집부(eumso@kccf.or.kr)로 보내주세요.
■ 게재된 기사 및 이미지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 책자는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제작합니다.
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한국 예술은
무엇으로
단련 되는가
1980년 5월 18일
올해로 40주년을 맞은 5·18은 한국 현대예술에 힘을 불어넣는 영감
의 원천이다. 그렇지만 ‘광주권’이라고 하는 지역에만 머물러 있음
은 지적되어 마땅하다.
한국 현대사는 5·18을 우회하여 전개될 수 없다. 한국의 민중예술
도 마찬가지다. 민중예술은 5·18을 통해서 그 깊이, 즉 정신을 얻었
다. 하지만 5·18 절대정신의 바탕은 ‘이념을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시선에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지난 40년 동안 한국 현대예
술의 정신은 개인의 행복을 실현하는 여로旅路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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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시는 고유한 서정성을 지닌다. 5·18의 서사, 즉
처연하고 처참한 의분과 저항의 맥락을 어떻게 시적
서정에 담을 것인가. 피 끓는 시인들은 꽃잎처럼 떨
김남주는 연작시 <학살>을 통해 자신이 당한 고문과
감금 경험을 칼날 벼르듯 거친 목소리로 5·18을 고발
하고 증언한다. 또한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부채 의식과 어져 간 목숨을 노래한다. 노래하지 말아라 /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서정적으
진실의 공유 김준태는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로 오지도 않았고 /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
통해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 문 밖에 가 당신을 으로 눕지도 않았다”<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
기다리다가 / 나는 죽었어요… 그들은 / 왜 나의 목숨 아라> 중며 김수영의 시 <풀>의 서정을 아예 민중 사
을 빼앗아갔을까요 /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갔 이로 밀어붙인다.
을까요 / … 아아, 여보! / 그런데 나는 아이를 밴 몸으 문병란은 “그대들의 꽃다운 혼 / 못 다한 사랑 못 다
로 /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 미안해요, 여보”라고 한 꿈을 안고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부
5·18의 참상을 현장감 있게 담아낸다. 특히 ‘우리나라 활의 노래로 / 맑은 사랑의 노래 / 정녕 그대들 다시
의 십자가’를 불러일으킴으로써 5·18의 비극을 분노 돌아오는구나”<부활의 노래> 중로 지금, 여기 ‘현재형’으
와 폭로, 저항을 넘어 종교적 틀에 접목하고 마침내 로 살아있는 희생과 부활을 노래한다.
숭고한 시의 정신으로 나아간다. 이 시는 5·18의 평 김 종은 “사랑하자 사람들이여 광주를 사랑하자 / 눈
화, 분단 극복, 인권, 자유, 정의 등의 이념을 불어넣는 맞추자 사람들이여 광주를 눈맞추자 / 보듬아 안아
대표적인 시다. 올려 광주의 눈썹과 배꼽과 머리와 이마를 넘어서자
/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아 돌아온 / 광주의, 광주의
양어깨를 사랑하자”<광주 가는 길> 중며 무등산 자락에
서 벌어진 5·18의 한과 고통을, 치유의 차원에서 화
해와 부활의 정신으로 보여준다.
이 밖에도 고정희<누가 그날을 모른다 말하리>, <광주의 눈물비>,
황지우<화엄광주>, <묵념, 5분 27초>, <흔적>, 김진경<프라하의
봄>, 임동확<눈밭을 걸어가는 오이디푸스왕>, 문병란<송가>, 박
몽구<십자가의 꿈>, 박주관<비가> 등 많은 시인에 의해
5·18의 이야기가 쓰였다.
5·18의 시 생산은 이승철의 지적대로 “세상을 떠난
이들은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부채 의식과, “1980
년 5월을 어떻게 문학화하고 그 진실을 대중과 공유
할 것인가”박몽구에 대해 ‘운동 차원’의 물음에서 더 나
아가 ‘문학적 완성’을 향한 힘든 걸음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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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5·18과 같은 역사적 대항쟁을 겪은 소설가에게
5·18은 대산맥을 만난 것이나 진배없다. 그러나 재난
에서 살아난 사람이 그렇듯이 소설은 증언, 기록, 폭
최윤의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는 5·18 이후 기억상실증에 빠진 소녀가 5·18의 고통
과 참담함을 겪는 소설이다. 화자가 전해 듣는 이야
넘어야 할 로의 유혹에 붙들린다. 문학은 증언, 재현 이상의 문 기와 회상을 통해서 그려지는데 소설에서 ‘그날’로 표
산맥 학적 형상화를 담보해야 한다. 5·18 관련 소설들은 현되는 ‘광주민주항쟁’에서 겪은 상처를 고통에 대한
대부분 앞서 말한 폭로, 고발, 증언에 쏠려 있다. 홍 기억 혹은 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광주항쟁을
희담의 《깃발》, 송기숙의 《오월의 미소》, 문순태의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인간의 ‘기억 고통’의 망각, 재
《그들의 새벽》이 이런 맥락에 있다. 현을 통해 차원 높은 경지를 펼쳐낸다.
윤정모의 《밤길》은 ‘신부’와 ‘요섭’이라는 학생이 광 정찬의 《광야》, 손홍규의 《테러리스트》 연작, 공선옥
주의 진실을 외부로 알리기 위해 밤길을 떠나는 이 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김경욱의 《야구란 무
야기다. 요섭은 짙은 패배 의식과 열패감에 사로잡혀 엇인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 등의 작품들이 5·18
있고, 신부는 불안감에 빠져 있다. 어떻게 보면 ‘지식 을 현재진행형으로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특히
인의 소시민적 고뇌’최원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뛰어난 서사 작업을 성공시
있지만, 삼엄함을 뚫고 광주항쟁을 외부로 알리기 위 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해 떠나는 모습은 ‘엠마오로 가는 부활한 예수와 제
자’들을 상기하는 대목이다.
임철우의 《봄날》은 전 5권의 대작 소설이
다. 5·18 당시 작가는 도청에 가서 총을 나
누어 받았지만, ‘과연 군인이 광주의 적인
가, 그들을 쏘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다 결
국 총을 놓고 집에 돌아온 것이 부채 의식
으로 남아 이 소설을 쓰게 된 것으로 알려
졌다.
1 윤정모 《밤길》
6
2 홍희담 《깃발》
3 임철우 《봄날》 1
4 최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2
5 한강 《소년이 온다》
6 공선옥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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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5·18 이후 광주는 침묵과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이때 마치 구원의 손길처럼 분연히 나타난 것은 민중
미술 운동이었다. 그 첫 걸음이 광주시민미술학교다.
정치적 소재와 사회현실에 대한 표현은 금기시되었
지만 5·18은 한국미술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도된 걸개그림은 미술패 ‘토말’의 <민중
민중과 소통한 이는 1983년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를 개설해 1992 의 싸움>이다. 이 작품은 동학혁명에서 시작해 5·18
민중미술 년까지 운영된 대중을 상대로 한 미술교육이자 5·18 까지 역사적 맥락에서 접근했다. 한국민중항쟁의 전
현장에서 선전활동을 했던 작가들이 중심이 된 민 체적 맥락에서 5·18을 떠올리게 만든 작품으로 1980
중미술 운동이었다. 강요된 침묵 속에서 그들은 지 년대는 강연균의 <고부가는 길>, 송필용의 <땅의 역
게꾼, 노동자, 농군, 가족, 노인, 행상인 등 일반 시민 사>, 이상호의 <민중항쟁시리즈>, 전정호의 <봉기
을 소재로 많은 판화 작품을 그렸다. 민중이 스스로 가>, 김진수의 <시민군> 등은 동학혁명과 5·18이 겹
5·18의 상처를 치유하는 운동이 된 것이다. 쳐지면서 표현되는 양상을 보였다.
판화는 민중의 목소리를 날 선 칼맛으로 저며낸 불꽃 그런가 하면 1987년 6월 항쟁 이후 5·18을 알리고
처럼 일어나 1980년대 책표지태백산맥, 엽서, 달력, 삽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주장이 작품으로 등장했다. 이
화, 팸플릿, 동인지, 포스터, 목판 등 대유행을 끌어냈 사범의 <아들의 낫을 가는 아버지>와 <공수부대 만
다. 미술은 문학과 달리 지역성을 넘어 한 시대를 풍 행>, 김산하의 <망월동 가는 길>, 김경주의 <대동세
미했다. 문학이 전문가 집단에서 생산된다면 판화는 상>, 박문종의 <두엄자리>, 조각가 나상옥의 <어여
회사원, 학생, 교사, 주부 등이 직접 교육을 받고 창 쁜 나의 젖가슴>, 이기원의 <임산부의 죽음>은 처절
작에 나섰다. 1985년을 전후하여 사회운동이 점차 하게 형상화되었다.
확대되는 가운데 미술계에도 실천성이 강조되었다.
7 홍성담의 <세월오월>은 세월 7 8
호 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연
계하여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
는 내용의 작품이다. 2016년 광
주비엔날레 특별전으로 광주시
립미술관 외벽면에 걸기로 했으
나 당시 정부의 압력으로 걸지
못하게 되면서, 광주시립미술관
현관 계단에 걸개그림을 펴고
난장퍼포먼스를 벌이면서 미술
관 외벽에 걸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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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이달 의 인 물
색
깔
있는
여자
천연염색 작가
김
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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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염색을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서울을 떠나
쪽 염색의 고장 ‘나주’에 둥지를 튼 지 벌써 18년째.
처음부터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공부를 끝내면 다시 서울로 가리라.’
그런데 천연염색의 세계는 끝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색감도, 모양도, 그것이 자아내는 아름다움도 무궁무진한 세계였다.
그 속에서 여전히 끝을 모른 채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가고 있는
김외경 작가를 만났다.
나주 그리고 ‘천연염색’과의 인연
나주시천연염색문화재단에 소속된 작은 공방
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과 더불어 매주 한 번씩 공
예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김외경 작가(48세). 취재
가 있던 날도 그녀는 공방을 찾은 수강생들을 상대
로 천연염색과 바느질 노하우를 전하고 있었다. 그
리고 그러는 사이 그녀의 손끝에서 뚝딱 천연염색
목베개 하나가 완성되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잠이
스르르 올 것 같은 베개의 고운 색감을 보며 어떻 규방공예 수업 중인 김외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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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을 장식하고 있는
천연염색 조각보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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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품의 재료가 되는 니라 서울 인사동 거리에 있는 한 공예품점은 그녀
천연염색 원단
2 꽃을 모티브로 한 의 작품만을 찾는 마니아들을 위해 김외경 작가 전
천연염색 가방 용공간을 두고 있다.
“2005년에 코엑스에서 전시회를 하는데 어떤 분
이 찾아와서 ‘쌈지길에 매장 하나를 오픈할 예정
인데 상품을 한번 만들어 보시겠냐, 상품을 만들면
제가 무조건 사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1
그래서 몇 가지를 만들어서 보여드렸더니 정말로
그걸 다 사 가시는 거예요. 손님들 반응이 좋아서
인지 그 뒤로도 계속해서 제가 만든 것들을 사 가
완성도 있는 ‘무엇’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거니와 소 셨어요. 그러면서 그 매장 고객 중에 제 작품을 기
득을 올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다려 주시고 보러와 주시는 분들이 생겼고, 덕분에
있었어요. 아주아주 예쁜 색이기만 하면 뭐해요. 장 그곳에 제 전용공간도 생겼죠. 지금이 2020년이니
롱에 넣어두는 걸로 끝이죠. 하지만 천연염색을 기 까 벌써 15년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에요.”
반으로 무언가를 만들면 작품이나 제품이 돼서 세
상 빛을 보게 되잖아요. 제가 규방공예를 하게 된
데는 그 이유가 크다고 볼 수 있어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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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염색은 색色을 찾아가는 여정 을 쓸 때는 ‘동백꽃이네’ 하시는 분들이 있고, 다른
공방의 한쪽 벽면을 그녀가 만든 천연염색 가 색을 쓰면 또 다른 꽃을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세
방이 차지하고 있었다. 동백꽃 같기도 하고 무궁화 요. 저는 그렇게 보시는 분들이 꽃에 이름을 주시
같기도 한 꽃장식이 달려있는 가방들이다. 무슨 꽃 는 게 좋아요. 어떨 때는 꽃을 검정색으로 해요. 바
이에요? 라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에서 꽃 이름 탕이 화려한 경우인데, 색감의 조화와 균형을 고려
만 빠져있다. 해서죠. 어떻게 보면 색감이 섬유작품의 첫인상이
“제가 꽃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많이 만들어요. 이 에요. 그만큼 색이 중요하죠.”
건 무슨 꽃이다 규정하지 않고 ‘그냥’ 하죠. 꽃이라 어쩌면 김외경 작가는 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는 게 색깔마다 느낌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붉은색 위해 꽃에 이름을 주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
는 늘 색이 우선이다. 그래서 작품을 만들 때 염색
메리골드 염색천을 들고 있는 김외경 작가 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전시회 때 보면 가장 반응이 좋은 건 큰 조각보예
요. 근데 큰 조각보를 만드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
아요. 만드는 데 몇 달이 걸리기도 하거든요. 조각
보 작업은 이런 원단에 이런 염색을 해서 만들어봐
야겠다고 계획을 세워도 100% 그대로 이루어지진
않아요. 염색을 다 했다가도 여기 빨간색은 좀 더
선명하면 예쁘겠다, 흐리면 예쁘겠다, 이런 것들이
있거든요.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작업을 하기도 하
니까요.”
김외경 작가는 천연염색의 어려움에 대해 계속 말
을 이어나갔다.
“감물 염색을 들일라치면 감이 전라도산이냐 제주
도산이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져요. 한약재로도 염
색을 하는데 그 한약재가 국내산이냐 외국산이냐,
나무라고 치면 1년산이냐 10년산이냐에 따라 또
색이 달라져요. 천연염색은 색이 달라지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기준표나 정확한 통계를 내
기가 어려워요. 화학염색은 이거 몇 그램 저거 몇
그램 해서 몇 분 동안 염색하면 딱 이런 색이 나온
다는 게 있는데 천연염색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반복해서 염색을 하는 거예요. 너무 진하면 물을
빼기도 하고, 다른 색이 나는 염료를 섞어서 다른
색을 내기도 하고… 그렇게 색을 찾아가는 거죠.”
색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녀의 말대로 쉽지 않다.
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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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염색 좋다는 건 다들 알잖아요. 환경을 오염
시키지 않고 주변에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할 수
있고, 또 차분한 컬러감이랄지 특별한 분위기, 다
른 것과 쉽게 조화를 이루는 점 등은 분명 천연염
색만의 장점이죠. 하지만 천연염색을 하고 있는 저
조차도 굳이 천연염색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
을 할 때가 있어요. 천연염색이 낼 수 있는 색감은
화학염색도 다 낼 수 있거든요. 그런데 천연염색은
화학염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정과 수고가
많이 들어가죠. 수고가 많이 들어가면 가격은 올라
갈 수밖에 없고요. 천연염색에 들이는 공을 아시고
인정해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화학염색이건 천
연염색이건 색이 예쁘기만 하면 되지, 하는 분들도
계세요. 그분들 말씀도 틀린 건 아니죠. 저는 개인
적으로 아무리 작품이 훌륭해도 가격이 맞아야 살
수 있는 거니까 마음에 들면 살 수 있을 정도의 가
격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중에 나와 있 꽃을 모티브로 한 꽃발(위)과 아플리케(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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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바다 너머
네 팔 의 부 처 님 오 신 날 ,
붓 다 자 얀 티 를 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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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은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인 불교의 교주이자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불리는 불교의 창
시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탄생한 날이다. 이날은 불교도만이 아닌 세계인의 축제로 거듭난다. 네팔은 싯다
르타가 태어난 룸비니Lumbini가 있는 나라로, 석가탄신일을 ‘붓다 자얀티’ 또는 인도와 같이 ‘붓다 푸니마’라
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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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선 불교도들은 먼저 가까운 곳의 사원곰파을
찾아가 뿌자Puja 즉, 정성껏 준비한 꽃과 초, 과일 그
리고 쌀 등을 비롯한 공양물을 바치며 기도를 시작한
다. 힌두교도 역시 소망의 촛불인 버터 램프에 불을
붙인 디파Dipa를 공양해 올리는 것으로 대법회의 시
작을 알린다.
3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다는 영안 또는 부처
의 눈으로 ‘법안法眼’이다. ‘제3의 눈’이나 ‘지혜의 눈’으
로 불리는 두 개의 눈 아래에 그려진 물음표 모양은
네팔의 숫자 1을 형상화한 것이다.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하나의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1 보드나트 스투파(불탑)
2 불경이 새겨진 마니차를 돌리는 여신도들
3 스와얌부나트 대탑에 디파를 올리는 모습
4 4 스와얌부나트 주변 탑에 공양드리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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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나트 법회에 참석한
승려와 재가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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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시와 사진 한 모 금
그 도시의 열흘
- 5·18 40주년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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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는 꽃들의 방석이었다
벌 · 나비 날개 펼친 눈부신 오월이고
웃음소리 마냥 가득하던 그 날
마당 깊은 무등에 천둥소리 퍼질 때
손과 손 굳게 쥔, 어깨동무로 나섰다
하늘 아래 믿을 것은 오직한 사랑뿐이라고
눕던 풀잎 바람 따라 불사조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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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옹기 종 기
나무 바가지
Woodenware scoop
나무 그릇
Woodenware dish
발우
Buddhist alms bowl
22
Cultural Encounters ㅣ I c onic I tem s
목기는 선사 시대부터 우리 삶에 필수적인 도구로 사용되어 왔 Since the dawn of time, woodenware has been essential
다. 목기가 일찍부터 사용되어 온 이유는 다른 재료에 비해 나무 in our everyday lives. Compared to other materials, wood
의 취득과 가공이 쉬웠기 때문이다. 또 그 재질이 단단하고 옻칠 is easier to find and fashion. Wood is also sturdy and
옻나무에서 나는 진을 바르는 일을 하면 잘 벗겨지지 않는다. 이처럼 나무 good at retaining varnish, making it an ideal material
는 그릇을 만드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였다. for making mokgi, a uniquely Korean tradition of
woodenware.
조선조 500년 목공예 본산지, 남원 Namwon, Joseon Dynasty’s Woodenware Crafts Village
목기는 오리목, 물푸레나무, 박달나무, 은행나무 등을 재료로 The wood that goes into mokgi is taken from various trees, including
하는데 재료에 따라 그 쓰임새가 다르다. 목기의 제작과정은 다 alder, ash, birch, and ginkgo. The crafting process begins by hewing
음과 같다. 원재목을 자른 후 만들고자 하는 형태로 대강의 구조 lumber into the rough shape of the intended vessel (a phase called
만 잡는다. 이것을 ‘초가리’라 한다. 그 후 습도가 높지 않은 그늘 chogari). After leaving the wood in a dry, shady spot for about five
에서 약 5개월간 말려 틈이 나지 않도록 한 뒤 정교하게 다듬고 months, to prevent cracking, the craftsperson moves on to the more
깎아 그릇의 모양을 완성하는 ‘재가리’를 한다. 재가리가 끝나면 detailed carving phase (called jaegari). Finally, the vessel is sanded
사포로 부드럽게 하여 ‘백골’을 만들고 이후 칠을 한다. 화학칠카 down and coated in lacquer. While some vessels are produced with
슈칠을 한 목기도 생산되고는 있지만, 전통적인 목기는 옻칠을 고 a chemical cashew-based varnish, traditional craftspeople insist on
수한다. 티끌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 옻칠은 초벌칠, 재벌칠, 상칠 using otchil, a lacquer from the varnish tree. Vessels that have been
등의 과정을 섬세하게 거쳐 완성된다. 옻칠은 2∼3년이 지나면 prepared with this nontoxic natural varnish actually gain in luster
더욱 색이 살아나고, 방수·살균효과도 크다. 이에 따라 옻칠이 된 after years of use. Otchil also has water-repellent and sterilizing
목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좀이 슬지 않는다. properties: that’s why lacquered vessels aren’t eaten by moths.
목기는 찬합도 있고, 찻잔이나 쟁반, 바리때절에서 쓰는 승려의 공양 그릇 Mokgi can be seen in stackable picnic boxes, trays, and rice
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사 때 사용하는 제기祭器다. 목기를 제기로 bowls at Buddhist temples, but its most common application in
많이 사용한 까닭은 소리가 나지 않고 정결한 느낌을 주기 때문 Korea is in the ancestral rites called jesa. It’s preferred in these
이다. rites because it doesn’t jangle or clank and it looks clean and neat.
예로부터 지금까지 목공예의 본산지로 불리는 곳은 남원이다. 남 Since days of yore, the mokgi employed in the rites was made by
원 뱀사골 목공장은 왕실에서 사용되는 목기를 만들 때 1개월 이 craftspeople at Baemsagol Valley, in Namwon. We’re told that
상 목욕재계하고, 부정한 짓을 하지 않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 the craftspeople there were exceptionally dedicated to their craft,
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performing rites of purification and abstaining from anything
unclean for more than a month while making mokgi for the royal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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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의 서 원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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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Korea’s Seowon
소수서원 전경
A panorama of Sosu Se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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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3년1548 풍기군수로 부임하자 송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백운 and his brother An Bo (1302–1357). After building the academy, Ju
동서원에 조정의 사액賜額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Sebung created a comprehensive set of rules for the management
요청하였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이 지은 서 and operation of the academy called the Samun ibeui. This rule book
원의 이름을 ‘소수’로 정하고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친필 현판 included specifics about how to appoint the seowon director, how
과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 그리고 노비를 내 many pupils could study in the academy, and rules governing the
렸다. holding of sacrificial rites at the institution.
정부에서 사액을 내렸다는 것은, 서원의 중요한 기능인 선현의 Sosu Seowon gained even more prestige under Yi Hwang
봉사奉祀와 교화 사업을 정부가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액 (pen name Toegye, 1501–1570). When Yi Hwang was appointed
된 뒤 입학 정원도 10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났으며, 서원의 원생 county magistrate of Punggi-gun in 1548 (the third year of King
들이 배움에 충실하도록 이황은 학업 규칙을 정해 배움의 장으로 Myeongjong’s reign), he submitted a request, citing Zhu Xi, a scholar
서 서원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데 힘썼다. 개원 이래 1895년까지 of the Song Dynasty, for the academy to become royally chartered.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유생이 무려 4,000명에 달할 정도로 소수 King Myeongjong decided to name the seowon “Sosu,” a title that had
서원은 조선 시대에 확실한 위치를 점했다. been created by Sin Gwanghan (1484–1555), director of the Office
서원 옆에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죽계천이 있고, 그 한편 of Special Counselors. The king further sent a plaque with the name
으로 ‘백운동’이라고 위치를 알리는 글자[이황 글씨]와 선비들이 Sosu Seowon in his own handwriting along with servants and a
심성을 닦을 때의 자세로 쓰는 경敬자가 새겨진 바위[주세붕 글 supply of books, including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and the
씨]가 있으며 ‘경렴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경’자는 선비의 덕목 Seongni daejeon (Collected Works on Human Nature and Principle).
을 나타내는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 The government provided the Sosu Seowon with a royal charter
미다. 경렴정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선 because it recognized the importance of the services for the ancient
비들의 시흥을 엿볼 수 있는 필적들이 목각판에 새겨져 있다. sages the academy conducted along with the institution’s efforts
백운동 글자가 새겨진 죽계천 건너에는 ‘취한대’라 부르는 정자 to educate and transform students through moral example. Sosu
가 있고 정자 오른쪽 숲속에는 돌탑이 있다. 취한대는 자연을 벗 Seowon’s student body rose from 10 to 30 pupils after becoming a
하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이는 옛 시 송취한계松翠 royally chartered institution. Yi Hwang created rules for learning
express the position scholars took when cultivating their minds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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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강학당
Ganghakdang Hall, Sosu Seowon
寒溪에서 따 온 것으로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 is also a pavilion called Gyeongnyeomjeong. At the pavilion, the
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다. academy’s students composed poems and discussed their lea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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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의 강당은 강학당명륜당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문성공묘 connects all buildings located in the academy. Sosu Seowon, however,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서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강당 has no fixed axis, and its lecture hall, building where sacrificial
이다. 4칸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이며 내부 마지막 칸에만 온돌 rites are conducted, and other structures are all located around the
방이 놓였다.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 끝에 온돌방을 놓는 후대의 center of the seowon in no particular order—a design feature aimed
강당 형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at enabling discussions on learning. What’s more, the academy
does not have any structures sitting outside of its environs such as a
1 소수서원 문성공묘 pavilion or a front gate. The entrance to the seowon is not fixed and
Munseonggyongmyo Shrine, Sosu Seowon
2 소수서원에서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있는 광풍정 its other miscellaneous spaces are not clearly delineated. In short,
Gwangpungjeong Pavilion on the way from Sosu Seowon to Sosu Museum
Sosu Seowon boasts unique architectural features that reflect the fact
that it was built during the early days of building such institutions.
An Hyang and Ju Sebung. The building that houses the two portraits
kan facing forward and three kan facing to the side. Three of the four
kan are large halls, and only the kan located in the farthest interior of
buildings on the premises. The wall clearly sets the shrine apart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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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오른쪽), 전사청(왼쪽)과 해시계인 일영대(가운데 아래)
Yeongjeonggak (right), jeonsacheong (left), and the iryeongdae sundial (center)
서원에서 중요시되는 사당은 다른 건물과는 달리 별도의 담장으 gyeonggichega (Gyeonggi-style songs) and valuable historical pieces
로 구획되어 경내의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둘레를 담으로 둘러 of Korean literary history.
쳤다는 것은 아무나 쉽게 범할 수 없는 확실한 위상을 갖고 있음
을 보여준다. 사당에 배향된 안축은 안향의 삼종손三從孫으로 그가 An Hyang: The first figure enshrined in Sosu Seowon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은 이름난 경기체가 An Hyang, who was the first scholar to be enshrined in Sosu Seowon,
景幾體歌이자 국문학사상 귀중한 사료이다. was born in Hongju (now Punggi-eup, Yeongju), Gyeongsangbuk-
do. His family clan was Sunheung, his courtesy name (ja) was
소수서원에 처음 배향된 안향은 누구? Saon, and his pen name was Hoeheon. He was enshrined in Sosu,
소수서원에 처음 배향된 안향은 경북 흥주興州; 영주시 풍기 출신 the first royally chartered seowon, as well as several other seowon,
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최초의 사 including Hapho Seowon, Dodong Seowon, and Imgang Seowon.
액서원을 비롯해 합호서원, 도동서원, 임강서원 등 여러 서원에 His tablets have been enshrined in the daeseongjeon (halls of
배향되었으며, 성균관 문묘를 비롯해 전국 230여 개의 향교 대성 achievement) of around 230 hyanggo throughout Korea, including
전에 위패를 봉안해 매년 춘추로 제향하고 있을 정도로 생전보 the Munmyo Shrine at the Seonggyungwan National Academy,
다 사후에 더욱 그 공이 빛나고 있는 사람이다. 안향에 의해 우리 and he is honored every spring and fall. Indeed, his achievements
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이 소개되었고, 이후 주자학이 크게 일어난 appear more impressive following his death than during his life. An
것을 인정하여 안향을 한국 최초의 주자학자로 평가한다. Hyang introduced Korea to neo-Confucianism, and his contribution
learning.
글 이종학 《유네스코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저자, 前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 Written and photographed by Lee Jonghak, author of Seowon, Korean Neo-
회 위원 Confucian Academies and former committee member of the Committee for
사진 이종학, 공공누리, 영주시 the Restitution of Joseon Wangjo Sill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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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지역 문 화 스 토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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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L oc a l Culture Stories
지역 방어의 최전선,
간비오산 봉수대
“적선 500여 척이 부산·김해·양산·명지도 등지에 정박하고, 제
맘대로 상륙하여 연해변의 각 관포와 병영 및 수영을 거의 다 점
령하였으며, 봉홧불이 끊어졌으니 매우 통분하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 하루하루를 기록한 《난중일기亂中日記》
의 1592년 4월 29일 자 기록에 등장하는 부분이다. 당시 봉수대
는 ‘정보의 최전방’으로 신속하고 긴밀하게 통신체계를 이뤘던
군사시설이었다.
Bongsu: A System of
Cutting-Edge Military
Communication
“Five hundred enemy ships have put in at Busan, Gimhae,
Yangsan, and Myeongjido Island, landing soldiers at will
and capturing nearly all our coastal villages, naval ports,
military headquarters, and naval headquarters. I was
displeased to learn that our beacon stations have been
cut off.” This is an excerpt from the April 29, 1592, entry
in the Nanjung ilgi (War Diary) of Yi Sun-sin, in which
the venerated Korean admiral kept a daily record of the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the late 16th century. The
beacons represented a swift and highly organized system
of military communication, what might be called the
bleeding edge of the information technology of that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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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구 우동에 있는 간비오산 봉수대
Ganbiosan Mountain beacon station
즉 그 자체가 군사 통신시설이자 하나의 작은 군사 요새지의 역 fires, barracks and weapons for the garrison, a storehouse for various
할을 했던 것이다. supplies, and a well for drinking water. In short, the beacon st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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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구 전포동에 있는 황령산 봉수대
Hwangnyeongsan Mountain beacon station, Daeyeon 3-dong, Nam-gu, Busan
지휘와 감독을 하는 오장伍長 2명과 봉군 10명이 배치되어 3명씩 The soldiers of the beacon station garrison on the mountain
5일 근무한 뒤 교대하였다. 봉군은 주로 주변 지형과 지세에 밝고 peaks, called bongsugun, bonjol, or bonggun, had the duty to monitor
유사시 동원될 수 있도록 인근 지역 주민들로 충원되었다. 이들 their surroundings for the enemy and to pass along messages. These
은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 이외에도 군사훈련을 받아 적의 침입에 soldiers, by all accounts, did not have an easy job. The size of each
대비하고 거화의 방호시설을 보수하는 일과 군대에서 사용하는 garrison varied somewhat with the region, but the frontier stations, to
각종 도구와 거화 재료를 확보하는 일 등을 하였다. take one example, were manned by ten soldiers and two officers who
봉수제는 고려 때 성립되어 조선 시대에 확립되었다. 고려 대의 did five-day shifts, with three people assigned at a time. The soldiers
봉수제를 이어받아 조선 태종 대에서 봉수제가 시행되고 있음을 were typically recruited from the local peasantry, people who were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경국대전》 상의 규정으로 확정 well-versed in the lay of the land and who could be drafted in the event
되었는데, 거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해안의 경우 적이 바다에 있 of war. Sending signals wasn’t their only job: they also had to train for a
으면 2거炬, 국경으로 접근하면 3거, 국경을 넘어서면 4거, 육지에 potential invasion, repair the defensive works, and acquire the various
상륙하면 5거를 올린다. 육지의 경우 국경 밖이면 2거, 국경에 이 tools and materials needed at the beacon station.
르면 3거,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접전하면 5거를 올린다. 해안과 The beacon fire system was developed during the Goryeo
육지 모두 평상시 아무 일도 없으면 1거만 올린다. Dynasty (918–1392) and expanded under the Joseon Dynasty. Records
이처럼 이미 조선 전기에 봉수망이 정비되면서 전국적으로 약 of King Taejong’s reign show operation of the system, which had been
700여 개소가 설치·운영되었으며, 2016년 문화재청 조사에 의하 inherited from the earlier dynasty. This was given official formulation
면 이 중 약 400개소의 봉수대 유구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음을 in the Gyeongguk daejeon (National Code), which provided the
알 수 있다. following description of how messages were sent. For coastal bea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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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ions, two fires meant that enemy ships had been spotted at sea;
three, that they were approaching the border; four, that they’d crossed
the border; and five, that they’d put ashore. For inland beacon stations,
two fires meant that enemy troops were near the border; three, that
they’d reached the border; four, that they’d crossed the border; and
five, that battle was engaged. Both on the coast and in the interior, a
single fire was lit in peacetime, to indicate that all was well.
in the dynasty’s early period and five toward its end, with the region’s
통신 초기 막중한 임무 띤 간비오산 봉수대 first line of defense being the station at Ganbiosan Mountain, at the
부산은 멀리 바다로부터 출몰하는 이양선 등의 정보를 탐색 top of Jangsan Mountain, near Haeundae Beach. This beacon station
하고 통보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이 was in close contact with the Left Naval Headquarters, serving as
있던 곳이다. 동래부산에는 조선 초기 7곳, 조선 후기 5곳의 봉수 the first frontier station on the southeast coast. Ganbiosan linked up
대가 있었는데, 그중 해운대 장산 자락 정상에는 지역 방어의 최 with other coastal stations at Namsan Mountain, Imnangpo Port, and
전선 ‘간비오산 봉수대干飛烏山烽燧臺’가 있었다. 간비오산 봉수대는 Aipo Port, converging at Namsan Mountain (also called Bongjisan)
당시 좌수영과 아주 신속하고 긴밀한 통신체계를 이루었는데 특 at Andong, from which messages were passed along to the beacon
히 이 봉수대는 우리나라 동남해안 연변봉수의 출발지로, 간비오 station at Mongmyeonsan Mountain in Seoul. The Ganbiosan station,
산 봉수 ~ 남산 봉수 ~ 임랑포 봉수 ~ 아이포 봉수 등으로 해변을 therefore, represented the first crucial link in communication. While
따라 이어지고 다시 안동 남산봉지산 봉수에서 합해져 서울 목면산 the date of its construction isn’t known for certain, it’s presumed to
봉수로 전달된다. 이처럼 통신 초기의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던 have been built at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and it continued to
간비오산 봉수대는 그 설치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진 않으나 serve as a lookout for enemy ships around Haeundae for about 700
고려 말부터 설치됐던 것으로 추정되며, 갑오개혁1894에 이르기까 years, until the Gabo Reform of 1894. It was the oldest beacon station
지 약 700여 년간 해운대 일대에서 왜적을 감시한 곳이다. 부산에 in Busan, along with the station at Hwangnyeongsan Mountain.
서는 황령산 봉수대와 함께 가장 오래되었다. The Ganbiosan Mountain beacon station is mentioned in Sejong
간비오산 봉수대에 대한 기록은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 1530 sillok jiriji (Geography Section of the Annals of King Sejong) in 1454
년 《동국여지승람》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18세기 제작된 <해 and Dongguk yeoji seungnam (Augmented Survey of the Geography
동지도>, <여지도> 등의 지도에 간비오산 봉수대가 표기되어있 of Korea) in 1530, and the station is also marked on atla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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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서구 암남동 천마산 정상에 있는 석성 봉수대
Stone beacon station on the summit of Cheonmasan Mountain, Amnam-dong, Seo-gu, Busan
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 왜인 구청에 관계되는 prepared in the 18th century, including Haedong jido and Yeojido.
기록들을 연월일 순으로 모아 필사한 책, 《왜인구청등록》에는 간 Furthermore, the names of soldiers at the Ganbiosan garrison and
비오산 봉수대에서 근무한 봉군의 실명 그리고 그들의 활약 등이 their activities appear in Waein gucheong deungnok, a late Joseon
기록되어있다. Dynasty compilation of requests made by Japanese individuals,
특히 《왜인구청등록》 4권에는 “이번 달 초7일 신시申時; 15시~17시즈 arranged in chronological order.
음에 황령산 봉군 이창군과 간비오산 봉군 김득성이 고한 내용 The fourth volume of Waein gucheong deungnok contains the
에, 조선 배인지 왜선인지 분간되지 않은 배 2척이 물마루로 나온 following account: “In the Hour of the Monkey [3–5 p.m.] on the
다고 하였고…”라는 기록이 있다. 해당 글은 1677년의 내용으로, seventh day of this month, two ships were spotted on the crest of the
임진왜란이 끝난 지 79년이 흘러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갈 때 wave, though it was unclear whether they were Korean or foreign.
지만, 최전선에 해당하는 황령산 봉수대와 간비오산 봉수대가 계 This information was reported by Lee Chang-gun, a member of the
속해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책, 같은 해의 6월 19일 자 garrison at Hwangnyeongsan Beacon Station, and Kim Deuk-seong,
에도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사사로이 무역 밀매를 하는 일본인 a member of the garrison at Ganbiosan Beacon Station.” This record
들의 왜선이 들어왔을 때 감시를 잘못하여 배를 놓친 본부의 황 was made in 1677, by which time some degree of stability had been
령산과 간비오산 두 곳의 봉군이 모두 관측을 잘못함을 면치 못 restored, 79 years after the Japanese invasions. Even so, it shows that
하였기에, 잡아 와서 중하게 곤장을 쳤다.” 이는 각 봉수대 봉군 the two beacon stations were still in operation.
의 역할이 얼마나 엄중했는지를 알게 한다. Another interesting account in that volume appears in the entry
for June 19 of the same year: “The garrisons at the beacon stations 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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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하구 다대동 두송산에 있는 응봉 봉수대
Eungbong beacon station on Dusongsan Mountain, Dadae-dong, Saha-gu, Busan
인류 평화를 위한 ‘평화 봉수대’로 observe Japanese ships engaging in illicit trafficking for private gain.
역사 속에 묻혀있던 간비오산 봉수대는 부산 관방유적의 하 Therefore, all the soldiers were brought in and given a severe caning.”
나였지만, 이제는 군사시설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곳에 담긴 당 This section shows how seriously the duties of the beacon station
시 사람들의 삶에 애환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봉군의 지 garrisons were taken.
게에 담긴 봉수대 살림살이에 대한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야 할
때가 되었다. 앞으로 봉수대는 전쟁을 대비한 횃불이 아닌, 인류 A new role for the beacons: A signal of peace for humanity
의 평화를 희망하며 올리는 평화의 횃불, 평화의 봉수대로서 역 Historically speaking, the long-forgotten ruins of Ganbiosan beacon
할 하길 기원해본다. station are part of Busan’s fortifications. But in addition to their
for us to pay heed to the stories of the soldiers who were stationed
there. My hope is that, in the future, the beacon fires will serve not as
Written by Hwang Gu, head of the local history center at the Gijang Cultural
‘지역N문화’ 누리집에서 Center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Photography courtesy of Hwang Gu and the Haeundae Cultural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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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느린 마을 기 행 ①
봄의 서정이 깃든
그 길에 서다
남양주 조안슬로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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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Slow City T ravel
변협·변응성장군묘
송촌2리마을회관
물의 정원
운길산역
봉용골 전망대
마진산성 전망대
다산 생가 여유당
봄날의 다양한 색으로 물든 여유당
Yeoyudang, decked in springtime col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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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In the footsteps of “Dasan” Jeong Yak-yong
2010년 남양주시 조안면은 수도권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 In 2010, Joan-myeon, Namyangju, was designated as a Slow City
되었다.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조안면은 도시인에게 편안한 쉼 through the Italy-based international Cittaslow movement, the first
터로 자리매김했다. 조안면은 북한강의 빼어난 경관은 물론이고 such city in the Seoul Metropolitan Area. In a decade’s time, Joan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학문과 삶을 엿볼 수 있는 다산유적지 등 has become a comforting relaxation space for the urban population.
문화유산까지 품고 있다. 게다가 이맘때 걷기 좋은 길이 여럿 있 Joan is not only surrounded by the superb scenic beauty of the
다. 다산 정약용을 테마로 조성한 다산길 5개 코스와 슬로시티길 Bukhangang River, but it also includes the Dasan Heritage Site,
이 대표적이다. 이들 가운데 슬로시티길은 약 7km 안팎이어서 where the cultural heritage of Jeong Yak-yong (pen name Dasan,
초보자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편안하게 봄날을 만끽하며 길 1762–1836) allows a glimpse into his life and scholarship. Joan-
을 걷노라면 문뜩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새가 편안히 깃든다’ myeon also has a number of paths that are ideal for walking at
라는 조안鳥安의 이름이 허풍이 아니구나. this time of year. The Five Dasan Paths themed around Jeong Yak-
다산은 조안에서 태어나 조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산유적지는 yong, and the Slow City Path are particularly lovely. The Slow City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과 묘역, 다산기념관 등으로 꾸며져 있다. Path is only about seven kilometers, which is not too hard, even
올곧게 뻗은 길을 따라 여러 조형물이 줄지어 있다. 대부분이 다 for beginners. The name “Joan” means “a place where birds dwell
산이 남긴 500여 권의 저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이다. 특히 peacefully.” Walking along the path on a beautiful spring day, I hear
눈에 띄는 것은 거중기다. 1792년 정조의 명을 받아 수원 화성을 the happy birds chirping, and I realize that there could be no better
건설할 때, 다산이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만든 발명품이다. 다산 name for such a place as this.
은 거중기를 이용함으로써 수원 화성 공사 기간을 2년 9개월로 Joan-myeon is the place where “Dasan” Jeong Yak-yong was
단축했다. 경내에 들자 여유당與猶堂이 고즈넉한 운치를 자아낸다. born and ultimately passed away. The Dasan Heritage Site consists
여유당은 다산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살 때 지은 당호다. 여유 of his birthplace, called Yeoyudang, his grave, and Dasan Memorial
당은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 Hall. Along the straight path stand various structures. Most of them
을 두려워하듯이”라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대목을 따온 것 are works inspired by the more than five hundred books Jeong Yak-
Fortress to two years and nine months. Stepping onto the heritage
is the name Jeong gave to his childhood home upon his retreat to his
hometown after resigning from public office. The name comes from
one fears one’s neighbors.” The name embodies Jeong’s will “to behave
The original building is known to have washed away in the great fl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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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운치가 느껴지는 여유당 물의 정원 다리 주변에 꽃잔디가 만개했다.
Yeoyudang, charming in its serenity Moss phlox in full bloom beneath the bridge in the Garden of Water
으로 ‘매사에 살얼음을 건너듯 신중하게 처신하고 경계하며 살겠 around Yeoyudang are now in full bloom, including yellow forsythia,
다’라는 뜻이 담겼다. 당시 건물은 1925년 대홍수 때 떠내려갔다 pure white camellias and bridal wreaths, and plum blossoms.
고 한다. 지금의 여유당은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A spring symphony resounds
그 길에 서면 봄의 교향곡이 울려 퍼진다 The Slow City Path is created around the Eco Experience Villages
슬로시티길은 조안면 진중리, 송춘리 생태체험마을과 수종 in Jinjung-ri and Songchun-ri and the temple grounds of Sujongsa
사 일원에 조성돼 있다. 출발지는 운길산역이다. 길은 시작과 함 Temple. It begins from Ungilsan Station and leads to a rural village,
께 시골 마을로 이어진다. 마을은 봄볕에 잠든 고양이처럼 한가롭 a village relaxed and idle like a cat dozing under the spring sun. On
다. 구불구불 이어진 고샅길에 들꽃이 만개했다. 바쁜 일상이었다 the narrow, winding path, wildflowers are in full bloom. Easy to
면 무심코 지나쳤을 들풀이 아니던가. 허리를 숙여 한참을 구경해 overlook in the hustle and bustle of everyday life, here I can stop and
도 좋다. 이곳은 느리게 사는 게 미덕인 동네, 슬로시티니까. bend down to gaze at them for a long time, because this is a Slow
고샅길을 벗어난 길은 예봉산 기슭으로 가파르게 오른다. 솔숲에 City, where taking your time is a virtue.
화룡점정을 찍듯 연분홍 진달래가 피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진 Veering away from the narrow path, I run into a path climbing
달래꽃이 흐드러진다. 봄이 혼자 오기 머쓱했던지 진달래꽃을 잔 sharply up to the foot of Yebongsan Mountain. Like a finishing
뜩 데리고 온 것이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던 김소월 시인 touch to the pine forest, the first few azalea buds appear in pale
의 진달래꽃은 눈물 대신 환희에 찬 함박웃음으로 맞아준다. 슬 pink. Now, look! The azaleas have blossomed splendidly! Perhaps
로시티길에서는 진달래꽃이 주인공이다. 숲길은 소나무와 진달 the spring was too shy to come alone, so it brought a heap of azaleas
래가 마중을 나왔다가 다시 배웅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는 사이, along with it. The azalea flowers, which, in the poetry of Kim Sowol,
길은 진중2리 생태체험마을을 지난다. 길섶에는 봄나물을 깨는 have portrayed the subdued sorrow that lets not a single tear drop,
일손도 있고, 밭일에 나선 주름진 일손도 있다. 그들 모두 일상을 greet visitors with a bright smile of delight rather than tears. The
보내고 있지만 분주하거나 고단해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조 azaleas are the main attraction of the Slow City Path. On the forest
물주가 정해놓은 시간에 따라 순응하며 여유롭다. 2011년 세계유 path, pine trees and azaleas greet and send off visitors in turn. Here,
기농대회를 기념해 건립한 팔각정에 올라 걸어온 길을 눈으로 되 the path passes through the Eco Experience Village in Jinjung 2-ri.
짚는다. 눈도장을 찍듯 천천히 걸어서일까, 되짚어 보는 길이 눈 People are gathering wild herbs along the grassy roadside, and
에 선하고 밟았던 땅과 흙의 질감이 다시 느껴지는 듯하다. 한껏 farmers with wrinkled faces work in the fields. They are hard at work
여유를 누리고 다시 길을 나선다. 역시 진달래가 방긋 웃는 솔숲 on their everyday tasks, but they do not look agitated or worn out.
으로 길이 이어진다. 먼발치에 북한강이 아늑히 보이는 길을 걷 Everything and everyone follow their own timeline, so life is carefree.
다가 발길이 머문 곳은 대를 이어 무관武官으로서 나라를 지킨 변 At the octagonal pavilion built in celebration of the Organic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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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변응성 장군 부자 묘다. 변응성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왜구와 Congress in 2011, I retrace the path that I have just climbed up.
맞서 내륙의 이순신이라 불릴 정도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아버 Maybe because I walked slowly, as if to carve every scene deep into
지 변협 장군은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해 약탈 my mind, when I retraced the path, it seems as though I could see
과 노략질을 일삼은 을묘왜변명종 10년, 1555 때 왜군을 물리친 바 있 the path unfold just before my eyes and feel the texture of the earth
는 무관이다. that I had just trod. After stopping to rest and relax for as long as I
길은 어느덧 숲길을 벗어난다. 빼곡하게 이어진 비닐하우스가 대 pleased, I set out to walk again. The path leads to another pine forest
신 펼쳐진다. 유기농 쌈채와 딸기 등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다. where I again occasionally encounter the radiant smile of the azaleas.
먹골배 농장도 눈에 띈다. 새하얀 배꽃이 만개해 팝콘이 주렁주 Walking down the path from where I can see the Bukhangang River
렁 매달린 것 같다. 천만 인구가 모여 아옹다옹 살아가는 수도권 at a distance, I arrive at the graves of General Byeon Hyeop and
에서 농촌의 모습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니, 역시 슬로시티다운 General Byeon Eung-seong, who protected the nation generation
면모다. after generation. General Byeon Eung-seong rendered such
1555 (the 10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who fought off the
Before I know it, I have come to the end of the forest path. I see
vegetables, strawberries, and more. I can also see the Meokgol pear
orchard. The pure white pear blossoms in full bloom look as though
popcorn is growing from the trees. Even here in the Seoul Metropolitan
Joan allows people to wholly feel the life of a farming village. I would
to his hometown of Joan after being released from exile. After his
final years. It was around this time that he completed the unfin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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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여유로운 삶이 흐른다 (Realization of the Errors in the Everyday Terminologies). Perhaps
농촌체험마을을 벗어나면 자전거길과 맞닿은 북한강이 모 Jeong was able to savor the latter years of his life to the fullest
습을 드러낸다. 다산 정약용은 57세 되던 해 가을에 유배를 마치 because he had the idly flowing Bukhangang River within easy reach.
고 고향 조안에 돌아왔다. 그는 이후부터 치열한 삶을 정리하며 여 When we are too wrapped up in the hectic routines of our life, we
생을 마무리해 갔다. 미완으로 남았던 《목민심서》를 완성한 것도, tend to overlook and miss out on many things. At times like that,
《흠흠신서》와 《아언각비》를 세상에 내놓은 것도 그 무렵이다. 그 we need to take a step back and look back on things. In that regard,
가 만년의 삶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었던 까닭은 유유히 흐르는 북 living a relaxed life communing with the river must have served as
한강이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일상을 바쁘게 살다 보면 놓 the best medicine and a time for recovery.
치고 흘리는 것이 많다. 그럴수록 한 박자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Stagnant water is bound to rot, but a flowing river does not.
되짚는 습관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강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삶 That is why rivers are called lifelines. Wavelets glisten on the water’s
을 사는 것은 최고의 명약이요, 회복의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리라. surface like jewels, and the cool breeze running across the river
물은 고이면 썩기 마련이지만, 흐르는 강물은 그렇지 않다. 그래 penetrates deep into the lungs. The mind that became agitated
서 강을 생명의 젖줄이라 부르지 않던가. 수면에 크고 작은 물비 amidst the life hard-pressed for time is suddenly refreshed. That’s
늘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수면을 박차고 오른 청량한 바람이 폐 not all. The unhampered view of the natural scenery that was not
부 깊은 곳까지 밀려온다. 시간에 쫓겨 살던 각박한 머리가 정리 visible on the forest path seems to clear the soul. The paths here even
되는 듯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숲길에서 느끼지 못했던 탁 트인 have beautiful names such as the Water Scent Path, Water Mind
풍광에 영혼까지 맑아지는 기분이다. 물향기길, 물마음길, 물빛 Path, and the Water Color Path. Among these beautiful paths, if I
길 등 길 이름마저 예쁘다. 여러 길 가운데 으뜸을 꼽으라면 아치 had to choose one, I would choose the path around the arch-shaped
형 다리 물의 정원 다리 주변이다. 다리 앞에는 커다란 액자 조형 bridge on the Garden of Water. Installed at the end of the bridge is a
물까지 설치해 놓았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순과 봄 내음을 잔 huge frame-shaped structure. The path where the sprouts shoot out
뜩 머금은 꽃들이 봄의 교향곡을 울리는 길, 슬로시티길은 그렇 in green and the flowers filled with the scent of spring play a spring
게 마무리된다. symphony—that is how the Slow City Path comes to an end.
여행 정보 Travel Course
• 걷기 코스 운길산역~마진산성 전망대~봉용골 전망대~생태체험 • Walking Tour Course Ungilsan Station → Majinsan Fortress
마을~유기농대회 팔각정~변협·변응성장군묘~한음이덕형별서터~ Observatory → Bongyonggol Observatory → Eco Experience
Village → Organic World Congress Octagonal Pavilion → Graves of
송촌2리마을회관~물의 정원
General Byeon Hyeop and General Byeon Eung-seong → Site of
• 여행 팁 운길산역 주변에 자전거 대여소가 있으며 운길산역과 물 “Haneum” Yi Deok-yeong’s Farming House → Community Hall of
의 정원에 주차장이 있다. 물의 정원은 운길산역 1번 출구에서 도 Songchon 2-ri Village → Garden of Water
보 10분 거리이다. •Travel Tips There is a bicycle rental shop near Ungilsan Station,
and there are parking lots at Ungilsan Station and the Garden of
• 문의
Water. The Garden of Water is a 10-minute walk from Ungilsan
물의 정원 031-590-2783(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398)
Station, Exit No. 1.
다산유적지 031-590-2837(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
•Contact
Garden of Water 031-590-2783 (Bukhangang-ro 398, Joan-myeon,
Namyangju-si)
Dasan Heritage Site 031-590-2837(Dasan-ro 747 beon-gil 11,
Joan-myeon, Namyangju-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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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팔도 음 식
준치무침
Spicy raw white herring sal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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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Pr ovinc ial Cuis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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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since I’d been told that so many white herring are caught in the
area. But luck is against me: the fish didn’t show up this spring.” In
short, the white herring was a gourmet specialty back in the days of
finest when pine pollen was in the air. Surprisingly, the pollen is no
salt ponds here produce a salt prized for its health benefits during
the 10 days or so when pine pollen is released from the black pines
quoi to pastes fermented with it, as well as dishes seasoned with it.
herring is worth it, even after it goes bad” (roughly equivalent to the
still”). That’s a nod to the fish’s exquisite flavor, of course, but there’s
more to it than that. The white herring is a long, flat fish, riddled
with fine bones that can make it tricky to eat. But those very bones,
it turns out, are what keep the fish in good shape, as it were, looking
치무침 한상
준
Meal featuring spicy raw white herring salad firm even when it’s past its pr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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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각을 깨우는 부드러운 맛과 독특한 질감 heaping plate of this just begs to be washed down with strong drink.
준치 살은 무척 부드럽다. 광어나 숭어 등의 쫄깃함과는 달리 Restaurants that know their way around raw white herring often
살살 녹는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정도다. 부드러운 식감에 아 add apricot vinegar or apple mash to the seasoning. That’s partly for
삭함을 더하고 싶다면 초고추장에 버무린 미나리, 오이, 양파 등 the flavor, but more importantly to counterbalance white herring’s
과 함께 먹으면 된다. 여기에 따끈한 밥 한 그릇을 더해도 좋겠다. distinctively fishy smell.
이름하여 준치회비빔밥! 입맛 깨우는 별미로도, 든든한 한 끼로도 The best way to experience white herring’s natural flavor is to go
이만한 게 없다. for hoe, as Koreans call fish served raw. Unlike the flat hunks most
신안, 목포 등에서는 준치를 주로 회무침으로 먹는다. 바로 회를 hoe is served as, white herring is sliced into long strips, in a manner
친 싱싱한 준치를 새콤달콤한 초고추장, 야채 등과 버무려 접시에 similar to gizzard shad (jeoneo), because of its fine bone structure.
수북이 담아 놓고 술잔을 기울인다. 준치회 좀 한다고 소문난 집 No matter how skillfully the chef dodges bones while filleting,
에서는 양념장에 사과를 갈아 넣거나 매실 식초를 넣는다. 맛도 some are bound to remain lodged in the tender flesh, impacting the
맛이지만 준치 특유의 비린내를 잡기 위해서다. texture. But that’s just part of what makes white herring unique and,
준치 본연의 맛을 즐기고 싶다면 ‘준치회’다. 준치회는 일반 횟감처 indeed, brings diners back for more.
럼 납작하게 포를 뜨지 않고 길게 채를 썬다. 그 모양이 전어회와 When the pine pollen is in the breeze, white herring is just
도 비슷한데, 잔가시 때문이다. 요령껏 가시를 피해 포를 뜬다 해 one of many specialties available to tickle our taste buds on Korea’s
도 워낙 연한 살 속에 가시가 많이 박혀 있어 조금의 질감은 남는 southwestern coast. During spawning season, diverse sea creatures
다. 이 또한 준치회만의 특징으로, 이 맛에 준치를 찾기도 한다. congregate offshore, including flatfish, red snapper (domi), cuttlefish
송홧가루 날리는 무렵의 서남해안 지역에는 굳이 준치가 아니어 (gabojingeo), and clams (bajirak). Blanch a well-fattened cuttlefish
도 우리의 미각을 충족 시켜 줄 별밋거리가 넘쳐난다. 산란철을 맞 to bite into salty yet savory perfection, bursting with the flavor of
아 광어, 도미, 갑오징어, 바지락 등 다양한 어족이 연안으로 몰려 the Yellow Sea. Or try some fresh clam soup (called bajiraktang),
들기 때문이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갑오징어를 데쳐 한입 오물거 the fresh clams simmered al dente in a spicy broth. Another option
리노라면 그 짭조름하면서 고소한 육질에서 서해의 풍미가 한가 is ganjanggejang, or raw crabs fermented in soy sauce until salty and
득 느껴진다. 시원한 국물에 쫄깃한 육질이 압권인 싱싱한 바지락 sweet, a dish best prepared with roe-laden she-crabs. Koreans fondly
탕은 또 어떠한가! 짭짤하고 달곰한 알배기 간장게장은 “공깃밥 refer to this dish as the “rice thief,” since you may well find yourself
추가!”를 부르는 최고의 밥도둑이다. ordering another bowl of rice to go with the flavor-packed crab.
‘코로나19’ 여파로 미각도 멈춘 듯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잘 먹는 While the coronavirus pandemic may seem to have put culinary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사회적 거리두기는 하되 제철 음식은 가까 adventuring on pause, I venture to suggest that eating well has never
이하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주춤했던 우리의 미각과 건강을 깨 been more important. Surely we need the wisdom to maintain social
우기 위해서라도…. distance while keeping seasonal foods close at hand. Not only 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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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을 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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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T hr ough Foreign Eyes
옛날 한국에서는 호랑이를 상징적 존재로 여겼다. 흉포한 산군 Tigers are often thought of as the iconic creature of
山君 호랑이는 제 영역을 침범한 어리석은 자들을 오금 저리게 Korea’s past. They were the ferocious monarchs of the
했다. 그런데 19세기 말 한국을 방문하는 서양인들의 여행기를 wilderness and commanded respect from anyone foolish
잔뜩 메운 짐승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조랑말이다. enough to enter their domain. However, it might surprise
you to know there was another beast—a domesticated
animal—that dominated the travel accounts of
Westerners visiting Korea in the late 19th century. It was
the Korean pony.
and squealing, which lasted till blows and execrations restored some
degree of 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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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1890년대 말의 서울
Seoul in the late 1890s
3 한국인과 조랑말
Korean with a pony
4 조랑말에 편자 신기기
Shoeing a pony
5 한국 양반과 그의 말
A Korean gentleman with his ho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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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고뭉치이긴 해도 조랑말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 loads, and endurance. William H. Jackson, an American who visited
는 걸음걸이와 무거운 짐을 나르는 능력, 강한 인내력 덕에 매우 Korean in the mid-1890s wrote:
소중히 여겨졌다. 1890년대 중반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인 윌리 “My travelling stead was a singular-looking, shaggy little beast,
엄 H. 잭슨은 이렇게 기술했다. “내 여행 조수는 특이하게 생긴 equipped with a very aged saddle, and from his appearance and that
텁수룩한 작은 짐승으로 낡디 낡은 안장을 얹고 있었다. 한국의 of his companion, who was already loaded up with my baggage to a
조랑말에 대해 잘 모른다면, 그의 겉모습이나, 이미 위험할 정도 height that looked dangerous, no one unacquainted with the Korean
로 높이 쌓아 올린 내 짐을 진 그의 동료의 겉모습을 보고, 이 작 pony could have expected to find them fully equal to the task before
은 말들이 맡은 바 임무를 완벽하게 해내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 them.”
으리라.”
Were the ponies as wicked to Koreans?
조랑말은 한국인에게도 천방지축이었다? The ponies were not just cantankerous to Westerners; they were
조랑말이 서양인들에게만 심술궂었던 건 아니다. 한국 사람 equally ill-tempered to their Korean handlers. In the late 1880s, an
들에게도 그만큼 못되게 굴었다. 1880년대 말 어떤 미국 언론인 American journalist described the manner in which Korean ponies
이 한국 조랑말에 편자를 붙이는 장면을 묘사한 적이 있다. 그에 were shod. According to him, they were usually strapped up to poles
따르면, 대장장이가 작업하는 동안엔 조랑말을 기둥에 묶어 두 so that only two of their feet rested on the ground with a band placed
발만 땅에 닿도록 하고 배에는 뱃대끈을 감아서 몸무게를 지탱하 under their belly to help support their weight while the blacksmith
도록 했다. 그래도 성가시게 하는 조랑말은 바닥에 던진 후, 네 다 worked. However, if the pony was especially troublesome, “it was
리를 한꺼번에 묶어서 발길질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first thrown to the ground, and his four legs were tied together so
개일은 한국의 조랑말과 승강이를 벌이고 난 후, 가슴에 쌓이는 that he couldn’t possibly kick.”
“농축되고 지독한 악감정의 양”에 스스로 놀라 이렇게 고백했다. Gale, who was surprised at the “amount of concentrated evil” in
“나는 그 조랑말에 편자를 박는 것을 보고 싶다. 머리, 발, 꼬리까 his heart after dealing with Korean ponies, confessed:
지 하나로 꽁꽁 묶어서 가지를 넓게 뻗은 밤나무 아래에 눕혀 놓 “I love to see the pony shod—see him pinioned tooth and nail,
고 마을의 대장장이가 그 말의 발굽에 편자를 박아서 조랑말의 bound head, feet, and tail in one hard knot, lying on his back under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싶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그 조랑 the spreading chestnut tree, with the village smithy putting tacks into
말이 자신에게 준 무수한 고통과 시련에 합당한 ‘시적 정의’라고 him that brings tears to his eyes.”
주장했다. He claimed it was “poetic justice” for all of the pain and
어쩌면 1891년에 한국을 찾은 영국의 작가이자 화가 아놀드 헨리 tribulations the pony had caused him.
새비지 랜더의 표현이야말로 조랑말에 대한 가장 적합한 정의일 Perhaps it was Arnold Henry Savage Landor, an English writer
지 모른다. 그는 조랑말이야말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들쑤시 and artist who visited Korea in 1891, who summed up the Korean
는 네 발 달린 요물’이라 천명했다. pony the best. They are, he declared, the “equine wickedness in the
글·사진 로버트 네프 칼럼니스트, 왕립아시아학회 극동지부 회원 Written and photographed by Robert Ne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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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조선 人 LO V E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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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 자를 어서 끌어내지 못할까!” 분기탱천한 사또가 호통치자 구실
아치들이 나섰다. 그리고 거지 행색의 선비를 잔칫상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때 촉석루 바깥에 숨어있던 역졸들이 함성을 지르며 쏟아져 들어왔다.
“암행어사 출두요!” 사또와 아전들은 사색이 되어 황급히 누각 아래로 내
려갔다. 거지 선비, 아니 어사가 높은 자리에 앉자 수령들은 사모관대를
갖추고 뵙기를 청했다. 예가 끝난 후, 어사는 문제의 기생을 데려오게 하
고 그 어미도 불러들였다.
《청구야담》 권7 ‘촉석루의 암행어사’
촉석루의 암행어사,
사랑을 심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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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돌아가지 않고 ‘책방 도령’으로 눌러앉았다. 로 마음을 표시하려 했습니다. 누추하지만 저의 집
기생도 장래가 촉망되는 사또의 조카가 싫지 않았 에서 머무십시오. 곧 따뜻한 밥을 차리겠습니다.”
다. 청춘남녀는 사랑에 푹 빠지고 만다. 같은 날 죽 《청구야담》 권7 ‘촉석루의 암행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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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면 그에게 주어진 소임은 ‘별견어사別遣御史’ 덕으로 삼고 ‘백성에게 널리 알려진’ 박문수의 이
였다. 암행어사가 아닌 임금의 특명을 받아 공개적 름으로 설파한다.
으로 파견된 것이다. 나라에 가뭄이 들고 홍수가 수절은 원래 ‘유교 국가’ 조선이 규중 여인들에게
날 때마다 박문수는 재난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요구한 사회 규범이다. 양반가 여자들은 남편이 죽
1727년 영남안집어사, 1731년 호서감진어사, 1741 은 뒤에도 재가再嫁하기 어려웠다. “재가녀 자손은
년 북도진휼사, 1750년 관동영남균세사 등 네 차례 문관과 무관직에 등용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조선
나 별견어사를 맡아 굶어 죽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시하기도 했다. 수절 문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누구보다 뛰어난 수 화는 조선 후기에 이르며 하층민에게까지 확산한
완을 발휘했기에, 영조 임금도 그를 깊이 신뢰했다. 다. 심지어는 기생의 절의까지 거론하는 이율배반
어사로서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밥이었다. 백성에 의 사회였다.
겐 밥이 하늘이다. 백성을 굶기는 탐관오리는 임금 진주 촉석루의 박문수도, 남원 광한루의 춘향이도
에게 처벌을 요청했다. 어사의 소임을 마친 후에도 전하고자 하는 바는 한 가지다. 수절하는 여자들에
현지를 왕래하면서 구휼이 잘 이뤄지는지 꼭 확인 게 복이 있나니, 세상의 찬양을 받을 것이라! 그럼
했다. 그 행적들이 구전으로 전해지며 살이 붙어 조선 남자들은 어째서 수절하지 않았을까? 왜 기
암행어사 설화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래서 어사 생과 여종에게 한눈팔았을까? 대체 뭘 믿고 허구
박문수의 이야기에는 그 시절 민초들의 삶이 오롯 한 날 첩질에 열을 올렸을까? 그것을 ‘풍류風流’라
이 담겨 있다. ‘촉석루의 암행어사’ 또한 당대의 풍 일컫는다. ‘풍류’라고 쓰고 ‘바람’으로 읽으면 된다.
속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일화에서 박문수가 사랑 바람 부는 세월 속에 수절 여인들의 ‘한恨’은 깊어
을 심판한 기준은 절의節義, 곧 절개와 의리다. 절의 갔다.
를 지킨 여종은 상을 받았고, 절의를 저버린 기생
글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은 벌을 받았다. 이른바 수절守節을 모든 여성의 미 그림 신경란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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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지역 따라 노 래 따 라
기차 타고 온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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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린 피난의 경험이 서린 오로지 주소로 배달되는 편지를 통해서만 알 수 있
<이별의 부산정거장> 었다. ‘고향에 가시거든 한두 자 봄소식을 전해 주
해방의 기쁨도 잠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소서’란 가사가 애절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얽혀 남북이 분단되고, 곧이어 동서 냉전의 대리전 남한에서의 이산가족 상봉이 한 TV 프로그램을 통
이라 할 수 있는 한국전쟁을 치렀다. 수많은 사람 해 1983년에야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보
이 목숨을 잃었고, 남은 사람은 생존을 위한 사투 다 한 세대 전 이별의 장면을 담은 이 노랫말이 결
를 벌이며 고난의 피난길에 나섰다. 코 감정의 과잉일 순 없다. 이 노래는 당시 ‘세대경
험’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사의 고난의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결정체라 할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노랫말 속
유리창에 적어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 애달픈 이별이 전쟁에서 비롯되었단 점을 암시하
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 한두 자 면서 떠나가는 기차를 매개로 헤어짐이란 이산의
봄소식을 전해주소서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몸부림치는 몸을 뿌리치며 떠나가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기차에서 숨진 야당 대통령 후보를 추모하며 부른
<비 내리는 호남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사 3절이다. 이 노래는 한
국전쟁 직후 전쟁과 피난의 기억을 담아 박시춘이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작곡한 트로트 곡이다. 휴전 이듬해인 1954년 남 돌아서서 이 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인수가 불러 유명해졌으며,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 사랑이란 이런 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져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부산은, 몇 년 전 개봉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
인 것처럼 수많은 사람이 ‘한 많은 피난살이’를 했 1956년 대통령 선거, 자유당 후보 이승만에게 맞서
던 곳이다.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부산역에서 기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해공 신익희가 유세 도중 호
차를 타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가사의 주제 남선 열차에서 서거했다. 그러자 그를 지지하던 많
는 정든 연인과 이별을 앞둔 경상도 큰애기 사랑의 은 국민이 <비 내리는 호남선>을 부르며 그를 추
순애보다. 고향으로 떠나기 위해 기차에 오른 한 모했다. 나중에 이 노래는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청년이 플랫폼에 서 있는 연인을 향해 간절한 이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는 현직 대통령이던 이
별의 메시지를 김 서린 유리창에 몇 자 적는다. 기 승만과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격돌했다. 당시 이
차가 눈물의 기적을 울리며 떠나고, 이별이 아쉬 승만 정권의 부패에 실망한 국민들은 신익희에게
워 발을 구르며 몸부림치는 경상도 아가씨의 모습 열화 같은 지지를 보냈다.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이 보슬비 내리는 부산역 플랫폼에서 더욱 안타깝 신익희의 유세 때 자그마치 30만 인파가 몰렸다.
다. 발달한 통신수단 덕분에 언제 어디서나 연락 당시 서울 인구가 150만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30만
할 수 있고, 심지어 숨을 곳조차 없는 현대 사회의 인파는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그만큼 정권교
젊은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다. 하지만 그때 체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이 컸다. 하지만 애석하게
는 한 번 헤어지면 좀처럼 다시 만나기 힘든 시대 도 그는 투표 열흘을 앞두고 전라도 유세를 위해
였다. 전화는 물론 자동차도 귀했다. 연인의 안부는 전주로 가던 중 여수행 제33열차 안에서 뇌내출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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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청년들의 말과 행위를 부조리한 정치 권력이 억압
신익희의 죽음은 야당을 비롯해 그를 지지하던 많 하고 감시했다. 길 가던 청년이 장발이란 이유로
은 국민을 슬픔에 빠트렸다. 특히 그가 호남선 열 붙들려 머리카락을 잘리고, 처녀의 치맛자락이 짧
차에서 숨진 것이 정권교체를 바라던 대중의 정서 다며 우악스러운 경찰의 손이 가녀린 여성의 허벅
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이 노래를 애창하게 만들었 지에 눈금자를 들이대던 야만의 시절이었다. 그러
다. 이 때문에 <비 내리는 호남선>은 민주당 당가 므로 청춘들이 즐겨 찾던 경춘선 열차는 그들만의
로도 활용됐다. 또 노랫말을 신익희의 부인이 썼다 해방구였고, 여기서 부르는 노래와 춤은 더 강렬했
는 소문이 돌면서 가수 손인호가 작사·작곡가와 함 다. 이 노래는 젊은 청춘들이 미래의 보석과도 같
께 경찰에 붙잡혀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이 노 은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을 노래한다. 그러나 시
래가 신익희 서거 3개월 전에 작곡했다는 사실이 대의 그늘은 늘 불확실한 미래에 희망을 주지 못했
밝혀지면서 모두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다. 하지만 노래는 1등, 2등보다 3등 인생이 더 많
은 세상에서 보통 사람들과 완행열차를 타고 블루
청춘의 해방구, 경춘선의 정서가 담긴 오션을 찾아 떠나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고래사냥> 40년 전 고래사냥을 부르던 청춘의 가슴은 아직
식지 않았다. 지나간 추억과 낭만은 이제 ‘ITX청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춘’이란 기차 이름으로 남아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해 추억의 손길을 뻗게 만든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기차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는 이 밖에도 수없이 많
모두가 돌아앉았네 다. <대전 부르스>를 비롯해 야구장에 울려 퍼지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 는 <남행열차>, 명절 전후 단골로 등장하는 <고향
기차를 타고 역>, <녹슬은 기찻길> 등 기차를 소재로 한 수많은
노래는 이 땅을 120년 동안이나 내달린 기차를 타
아마 가수 송창식이 1975년에 부른 <고래사냥>을 고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모르는 70·80세대는 없을 것이다. 1970년대엔 통
기타를 들고 MT에 나선 대학생들이 주로 타는 열
차가 경춘선 완행열차였다. 그런데 그 시대는 젊은 글 손민두 한국철도(코레일) KTX 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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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오! 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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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되는 시점에 이르러 있었다. 세상에 봄꽃이 지 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천으로 흐드러진데 그 꽃들을 구경 다니는 상춘객 아니다. 세상만사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니 자작자
의 행렬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봄마다 인산인해를 수 자업자득自作自受 自業自得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루던 올매화마을, 산수유마을, 쌍계사 벚꽃 십리 며칠 전 이학성 시인이 짧은 자작시 한 편을 문자
길, 윤중로 벚꽃길의 공허가 뉴스 화면을 스쳐 갈 메시지로 보내왔다. 코로나19 환란기를 보내며 나
때마다 세상 좋은 시절, 다 끝나버린 듯한 종말적 름 느낀 점이 짙게 밴 시여서 가슴이 선뜩했다. 그
분위기가 언뜻언뜻 스쳐 기분이 이를 데 없이 막막 제목이 <댓글러>였다.
해지곤 했다.
코로나19 환란기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인류 얼치기 기사보다는 댓글에 공감한다. / 세계 곳곳
의 유전자 속에 그와 같은 바이러스 전염병에 대한 의 공장이 멈춰서고 / 도로를 질주하던 자동차 행
충격과 공포가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일 터이다. 발 렬이 줄어드니 / 서울 뉴욕 파리 북경 할 것 없이
생 5년 만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800 대기질이 깨끗해졌단다. / 사회적 거리두기가 당면
만 명의 사망자를 낸 페스트를 비롯하여 5,000만 명 한 진실을 파헤쳤다. / 촌철살인적 탁견으로 정곡
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 3,600만을 사망에 이 을 찌른 / 두고두고 새겨봄 직한 댓글 전문을 여기
르게 한 에이즈 바이러스, 콜레라, 천연두, 매독, 결 옮긴다. / “지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 인간이 흉악
핵, 지카, 에볼라, 신종플루, 사스, 메르스 등등 듣는 한 바이러스, 코로나가 백신이다.” / 충분히 그가 옳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게 만드는 전염병은 인 아서 엄지척, 경의를 띄우나 / 쓸개즙을 사발로 들
류의 역사에 충격과 공포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이킨 듯 입가에 쓴맛이 괸다. / 우린 악랄한 지구의
단기간 기하급수적으로 전파되는 전염병은 인간에 약탈자, / 나 역시도 노략질에 가담한 패거리였다.
게 공포와 충격을 주며 인간 세상을 변하게 한다.
페스트는 급격한 인구 감소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는 결국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시
많은 일자리와 높은 임금을 구가하는 경제적 이득 간이다. 그동안 인류가 너무 무반성적이고 즉흥적
을 얻게 했다. 일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니 자연 인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데 대한 자각과
스럽게 노예제도가 없어지고 식량 부족을 걱정할 반성. 전 세계 3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에 갇혀
필요도 없게 된 것이다. 페스트 이전의 유럽 대부분 그런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면 분명, 세상은
지역이 기근과 빈곤에 시달린 걸 감안하면 놀라운 이전보다 나아지고 깊어지고 또한 넓어질 것이다.
사회적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매독으로 인한 얼마 전 문득 고등학교 시절에 즐겨듣던 쟈니 도렐
사망자가 늘어나면서 문란한 성생활에 경종이 울 리Johnny Dorelli의 <눈물 속에 피는 꽃L’immensità>이라는
리고 금욕적인 삶이 중시되는 풍조가 일어나는가 칸초네가 떠올라 유튜브에서 찾아 들었다. 그 까마
하면, 수인성 질병인 콜레라는 상·하수 시설과 청 득한 옛날 노래를 코로나19 환란이 극에 달한 시기
결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일깨워 주었다. 지금 전 세 에 왜 찾아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우리가 힘들
계적으로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19만 하더라도 국 게 관통하고 있는 이 시기가 ‘눈물 속에서 꽃을 피우
가적 방역 시스템과 검진 시스템, 그리고 확진자 관 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코
리 시스템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일깨우고 있다. 이 로나19가 지나가면 우리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전의 실패 경험을 이후의 상황을 위한 준비와 대처
능력 함양의 계기로 삼은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글 박상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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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한류 포 커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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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모두의 마음속에 ‘글로벌’이라는 자신감을 심어준 일대 방탄의 기획사 ‘빅히트’는 소규모 기획사였다. 이 때문인지 대형 기
전환은 전혀 다른 곳,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2012년 7월, 획사가 팬들과의 소통 대신 신비주의 전략을 택한 반면, 방탄은 SNS
갑자기 유튜브에서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가 소위 ‘떴다’. 외국 란 시대의 산물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팬들과 적극 소통한다. 이것은
인들이 서툰 한국 발음으로 가사를 따라 하고, 오빠를 외치며 말춤 새로운 전략이었고, 전 세계에 아미방탄소년단 팬덤명의 씨앗을 뿌렸다.
을 추고, 강남이 어디인지 알고 싶어서 강남이란 단어를 검색하기 방송보다 공연이고, 리듬보다 화성이었고, 오락보다 메시지였다. 이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강남이라는 지정학적 관련 검색어가 25만 것은 안젤리나 졸리의 아들조차 K–Pop에 매료되어 한국으로 유학
9,534건으로 증가했다. 급기야 꿈이라고 여겼던 빌보드 차트 1위의 오게 만드는 마법적인 힘을 발휘했다. 방탄의 인기곡 <피 땀 눈물>
목전까지 가게 되면서 <강남스타일>은 세계를 한바탕 뒤흔들어 놓 의 노랫말에는 헤르만 헤세의 고전 ‘데미안’이 등장한다. 그들의 노
았다. 이 현상은 매우 특별한 점이 있었다. 싸이는 아이돌이 아니다. 래 중엔 철학적 각성을 의미하는 <에피파니Epiphany>란 곡도 있다.
이웃집 삼촌처럼 생긴 데다, <강남스타일>은 포스트 모던한 짬뽕 즉 이야기가 철저히 서구 친화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너 자신을
장르 그 자체였는데, 게다가 그 전파가 주로 유튜브에서 이루어진 사랑하라는 메시지’도 자기 계발을 사랑하는, 지극히 서구적인 개인
것이다. 이는 K–Pop이 아시아의 국지적인 인기를 등에 업은 마니아 주의적 문화 코드를 강조한다. 방탄은 그래미를 정복했고, 빌보드
음악이라는 세계인의 인식을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하지만 <강남 200에 4번째 1위를 달성했다.
스타일>의 글로벌한 인기가 우발적인 신드롬이나 해프닝이 아닐까 이제는 한국인 없는 K–Pop도 가능하다. 미국인들로만 이뤄진 남성
하는 우려도 존재했다. 4인조 그룹 EXP에디션EXP EDITION이 등장했고, 비非한국인 아시아
인들로 구성된 지보이즈Z-Boys와 지걸즈Z-Girls도 나타났다. 현지인으
방탄소년단의 등장, 그리고 로 구성된 K–Pop 콘텐츠 사업뿐만 아니라, 음원 유통과 도시 브랜딩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앞서 언급한 우려를 무색하게 하 사업에도 진출하고 있다. 이제 K–Pop은 유튜브와 인터넷을 통해 동
는 새로운 신드롬이 나타났다. 바로 소비되는 K–Pop을 감상하는 시성으로 승부하고 있다.
K–Pop으로, 희화화된 코믹한 K–Pop을 메시지와 멜로디가 있는 K–
글 심영섭 심영섭아트테라피 대표, 영화평론가
Pop으로 만든 방탄소년단(이하 ‘방탄’)이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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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북한 사 회 문 화 읽 기 ⑮
태양의 꽃
2
그리고,
불멸의 꽃
김 부자父子를 상징하는 김일성화花와 김정일화는
북한의 대표적인 우상화물 중 하나로, 이에 대한
북한 당국 및 주민들의 관심과 열정은 상상을 초 모든 장르 문학예술 작품의 소재와 주제
월한다. 2월 김정일 생일광명성절과 4월 김일성 생 김일성화는 1965년 초 인도네시아 보고르식
일태양절 행사 기간에 김정일화축전과 김일성화축 물원에서 발견된 난초과 석곡속의 한 품종으로,
전이 진행되는데, 한 외국인의 관람기에 따르면 1965년 4월 김일성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할 당시
북한 주민 중에는 단순히 꽃구경만 하는 것이 아 수카르노 대통령이 ‘김일성화’라고 작명한 후 교배
니라 노래도 부르고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다고 육종하여 1975년 평양에 보냈다. 이후 김일성 65
한다. 회 생일 때인 1977년 4월 주민들에게 처음 공개되
면서 1999년부터 매년 김일성 생일 행사들 중 하
나로 전시회를 진행해 오고 있다. 한편 김정일화는
일본 시즈오카현의 조총련계 원예학자인 가모 모
토테루加茂元照가 20년 동안 연구하여 품종을 개량
했다는 남아메리카 원산, 베고니아의 한 품종이다.
1988년 2월 김정일의 46세 생일에 선물로 받은 후
북한 전 지역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1997년부터 매
년 김정일 생일에 김정일화 전시회를 연다. 열대성
※ 이 글의 인용문은 북한 맞춤법 규정에 따라 표기한 것으
로 우리나라 맞춤법 규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난과에 속하는 김일성화는 북한에서 기르기 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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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운 데 비해, 김정일화는 북한 기후에도 잘 맞고
번식력도 강해 일반 가정에서도 쉽게 기를 수 있다
고 한다. 오늘날 북한에서 김일성화와 김정일화는
모두 ‘불멸의 꽃’이라 불리는데, 구분이 필요할 경
우에는 ‘태양의 꽃’김일성화과 ‘불멸의 꽃’김정일화으로
나누어 부른다.
북한에서 김일성화와 김정일화는 모든 장르 문학
예술 작품의 소재와 주제가 된다. 예를 들면, 김일
3 4 5
성화와 김정일화를 형상화한 소설(《김정일화와
1 김일성화
세계》)과 시(<혁명의 꽃 김일성화>), 조선화, 유
2 김정일화
화, 보석화, 아크릴화, 선전화, 우표, 도자공예품(< 단위와 각 계층 근로자들, 청소년 학생들이 피운 3 3 제19차 김정일화축전 선전화
4 제21차 김일성화축전 선전화
김일성화 김정일화 장식화병>), 수예(<불멸의 꽃 만여 송이가 전시되고, 해외 동포들과 단체들, 주북
5 제23차 김정일화축전 선전화
김일성화 김정일화>), 얼음조각(<불멸의 꽃 김정 외교 단체들과 개별 인사들이 키워낸 ‘뜨거운 지성
일화>), 공연(무용 <온 세상에 만발한 김일성화>, 至誠이 어린 불멸의 꽃들’도 전시된다.
관현악곡 <불멸의 꽃 축전가>), 대중가요(<김정일 폐막식에서는 우수한 평가를 받은 성, 중앙기관, 무
화>, <김일성화의 노래>), 영화(<김정일화>, <태양 력기관 등의 많은 단위 기관과 재배공들, 해설 강
의 꽃 김일성화>) 등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들을 비롯한 모범적인 참가자들에게 김일성화
2018년 12월 29일 자 《노동신문》의 기사‘미술교육과 우 축전상 상장을, 개별참가자들에게는 참가증을 수
리 생활’는 유치원에서 고급중학교까지 미술교육을 여하며 해외동포들과 외국인에게도 상장을 수여한
통해 무엇보다 먼저, 김일성화와 김정일화, 국가 상 다. 또 축전 기간 동안 북한의 각 시·도 등 지방에
징물들을 비롯하여 ‘절세의 위인들을 칭송하고 나 서도 ‘불멸의 꽃’ 전시회와 김일성화김정일화온실
라를 상징하는 대상’들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는 참관사업이 진행된다. 김정일화축전과 김일성화축
능력과 창작의 기초를 다져주어야 한다고 주장하 전은 매년 일정한 주제 하에 개최되는데, 2018년의
고 있다. 경우 ‘위대한 강국으로 영광 떨치는 주체조선에 만
양 축전은 매년 각각 8일간 진행되는데 올해 김정 발한 김정일화’, ‘우리 수령님 그리워 더욱 붉게 피
일화축전은 제24차, 김일성화축전은 제22차 행사 여난피어난 김일성화’였다. 관련 조직으로는 조선김
를 맞이했다. 조선김일성화김정일화위원회가 주 일성화김정일화위원회 외에 그 산하조직으로 각
관하는 이들 축전들은 북한 당국이 매우 중요시하 시·도위원회가 있고, 불멸의꽃보급후원회국제명칭, 김
는 행사로, 여타 생일 행사들과는 별도의 트랙으 일성화김정일화보급후원회라는 단체도 있다.
로 진행되고 있다. 양 축전은 평양 김일성화김정일
화전시관에서 개최되는데, 전시 대상만 바뀔 뿐 진 북한 전역에 김일성화, 김정일화 재배 온실 산재
행 방식과 과정은 같다. 축전 때마다 《노동신문》은 김일성화와 김정일화를 재배하거나 전시하는
축전 개최 예고, 축전 추진 상황, 선전화 출판, 개막 시설 또는 재배와 전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시설
식, 주북 외교 및 국제기구대표들 참관 사실 보도, 은, 규모는 제각각이지만 북한 전역에 산재해 있다.
방문기, 폐막식 기사를 순차적으로 내보낸다. 양 축 북한은 당초 1988년 4월 평양 대성산 조선중앙식
전에는 성省, 중앙기관, 무력기관을 비롯한 80여 개 물원에 김정일화온실을 처음 설치했고, 시·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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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 있는 식물원에도 김정일화온실을 마련했다.
이후 2002년 4월 평양 대동강변에 김일성화김정
일화전시관지하 1층, 지상 2층, 연건평 5,000㎡을 개관했다.
전시관 지하층에는 매년 10만여 그루의 김일성화,
김정일화를 키워낼 수 있는 조직배양실이 있고 1층
과 2층에는 재배실과 전시장이 있는데, 이곳의 온·
습도와 빛 조절 등은 모두 자동화 및 컴퓨터화되어
있다. 2005년에 황해남도 해주시에 황남전시관연건
평 3,750㎡이, 2013년에는 평안남도 평성시에 평남전
6 시관이 건립되었다. 타 시·도 역시 비슷한 규모의
전시 시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모든 시·군·구역뿐만 아니라, 당·정·군 기
관과 근로단체, 기업소와 공장 등에도 김일성화김
정일화온실이 있다. 조선외국문도서출판사가 발
간하는 종합월간지인 《오늘의 조선》2016.2.15.은 지
난 19년간 김정일화축전 참가 단위 수는 1,400여
7 개, 참가 인원은 750여만 명해외동포, 외국인 포함에 달
한다고 보도했고, 《노동신문》 2019년 4월 9일 자
기사‘세계 화초사에 특기할 위인 칭송의 꽃 축전’는 다음과 같
이 선전했다. “년대연대와 세기를 이어오며 20차례
에 걸쳐 열린 김일성화축전에 31만여 상송이의 불
멸의 꽃이 전시되였으며, 참관자수는 630여만 명
에 달하였다… 어버이 수령님의 탄생 100돐돌이 되
는 2012년에 진행된 제14차 김일성화축전에는 2만
7,600여 상의 태양의 꽃이 전시되여 만사람을 경
탄시켰다.”
세계원예박람회에서 수차례 수상
전시회는 김 부자 생일 때만 개최되는 것이 아
니다. 이른바 ‘꺾어지는 해정주년; 5주년 10주년 주기’를 맞
이한 기념일의 경우에도 똑같은 진행 방식과 과정
을 거쳐 치르기도 한다. 2012년 4월 ‘조선인민군창
건 80돌 경축’, 2013년 7월 ‘조국해방전쟁승리정전
6 김일성화를 소재로 한 무용
7 김일성화와 김정일화 자수 협정 60돌 경축’, 2015년 10월 ‘조선로동당 창건 70
8 김일성화무늬 도자화병
돌 경축’ 김일성화김정일화전시회가 그러한 사례
9 제21차 김일성화축전 개막
8 10 제23차 김정일화축전 개막 들이다. 한편 2015년 4월에는 김일성화 명명 50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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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맞이하여 기념우표 2종, 그리고 북한과 인도네
시아 공동우표 1종이 발행되고, 기념보고회가 열렸
다. 또 2018년 2월에는 김정일화 명명 30돌을 맞이
하여 기념우표 1종이 발행되었으며, 조선우표 집중
전시회와 기념보고회가 개최되었다.
김일성화와 김정일화는 세계원예박람회에서 수차
례 수상한 바 있다. 중국에서 개최된 ‘2011 시안세
계원예박람회’2011. 4.에서 국제란꽃 경쟁 최고상인
9
금상김일성화과 전시展示금상김정일화을 받았다. 이어
서 ‘2012 네덜란드 벤로 세계원예박람회’2012. 8.에
서 최고상김정일화, 중국 해남성 ‘제8차 국제란꽃박
람회’2014. 1.에서 특별상김일성화, 그리고 중국 산동
성 ‘2014 청도세계원예박람회’2014. 5-6.에서는 금상
김일성화과 국제분재경쟁 특별전시상김정일화을 받았
다. 또한 2014년 3월 몽골에서 진행된 ‘국제화초전
시회’에서 김정일화가 최고상인 1등상을 수상한 데
10
이어, 다음 해인 2015년 3월에도 같은 전시회에서
김정일화가 또다시 1등상을 수상했다. 2018년 4월
에는 김일성화와 김정일화가 중국 사천성 ‘제15차
중국 두견화전시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올해 달력엔 김일성화, 김정일화 대신 ‘장미’
김일성화김정일화전시회는 북한의 각종 기념일과 《데일리 NK》2020. 1. 8.에 의하면, 북한의 출판
경축일에 해외에서도 활발히 개최되고 있다. 간혹 물수출입사가 2020년 새해를 맞아 출판한 꽃 사진
단독행사로 규모 있게 개최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 달력에서 2월과 4월 의례적으로 담아왔던 김일성
진·도서·우표·미술·수공예품 전시회, 영화감상회 화, 김정일화 대신 장미꽃을 비롯한 다른 꽃 사진
등과 종합행사로 치러지는 경우가 많다. 매년 개도 을 삽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수십 년간 북한
국이나 제3세계에서 무수히 치러지고 있는 이러한 출판사들은 꽃 달력을 제작할 때 김정일, 김일성
소규모 행사들은 현지의 북한 대사관과 주로 제3세 생일에 맞춰 으레 2월에는 김정일화, 4월에는 김
계의 공산주의 계열 단체, 주체사상 연구조직, 북한 일성화 사진을 넣어 왔다. 그러나 2020년 달력은
과 거래하고 있는 민간기업, 친목회, 기타 비정부단 2월 사진으로 사랑을 고백할 때 주는 연분홍 장미
체가 주최한 대내외 선전용, 언론 보도용 행사들이 꽃을 싣고 영어로 ‘Propose프러포즈’라고 써놓고 있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김 부자 생일, 정권공화국과 다고 한다. 이러한 파격은 정상국가 이미지를 구축
당 창건일 등 주요 기념일들은 물론이고, 김정일과 하고 있는 북한이 김씨 일가 우상화에 대한 외부의
김정은을 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한 26돌과 6돌, 곱지 않은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분석
김정일을 당 총비서로 추대한 21돌, 당 중앙위 사업 이다.
을 시작한 지 53돌, 사망 3돌 등에도 이를 기념하여
글 오양열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초빙석좌연구위원
해외에서 김일성화김정일화전시회를 개최한다. 사진 출처 《조선중앙통신》, 《조선의 오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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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있다 , 없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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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이형 전화기는 주로 다방, 약국, 생필품점 등
에 설치되었는데, 그런 이유로 1950년대 내내 다방 자동심장충격기 등 응급 의료장비를 비치하고, 현
은 전화가 없는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 금 입출금기로 변형된 부스를 넣어 운영 중이다.
는 ‘전화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인터넷 이용도 가능한 공중전화기로 재탄생
1982년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일명 하며 멀티부스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하지만 공
D.D.D.Direct Distance Dial가 등장한다. 국내에서 최 중전화기가 그 변화를 더 하지 않더라도 완전히 사
초로 개발된 시내·외 겸용 자동 공중전화기인 라질 일은 없을 거라고 한다.
D.D.D.는 1980년대 말 가수 김혜림이 부른 노래 현재 전국의 공중전화는 KT의 자회사인 KT링커
제목으로도 인기를 끌었지만, 2003년을 기점으로 스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재난 등 특수한 상황에서
모두 철거되는 아쉬움을 겪기도 했다. 당시를 살았 사용될 가능성과 공공재라는 특성상 평생 쓰이지
던 사람들에게 십 원짜리 동전 2개를 들고 길게 늘 않더라도 유지, 보수된다고 한다. 즉, 공중전화는
어선 줄 뒤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했던 공중전 기본적으로 국가가 제공해야 할 보편적 서비스의
화기와의 일상은, 삶 그 자체였으며, 서로의 안부를 일환인 셈이다.
묻고 위로를 전할 수 있게 해 준 값싸고 고마운 기 인간의 필요로 만들어졌으나 사라져가는 것이 비
계 그 이상을 의미했다. 한때는 이렇듯 우리 모두 단 공중전화만은 아닐 것이다. 제 몫의 기능을 다
의 전화기로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공중전 하고 새로운 기술에 밀려 자리를 내놓는 물건들의
화기. 하지만 지금은 쉬이 만날 수 없는 추억의 산 흥망성쇠는 흡사 우리의 인생과도 닮은 것이어서
물이자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를 감당해야 할 형편 아쉬움을 자아낸다.
이 되었다. 전염병으로 접촉을 금지하는 요즘,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하며 함께 힘을 모아 어려운 상황을
쓰이지 않더라도 평생 우리 곁에 극복해나가고자 한다. 오래전 공중전화기 속에서 서
공중전화기가 사라지게 된 이유는 단연 휴대 로에게 전했던 그 따스한 위로와 연대가 지금 여기
전화기의 보급 때문이다. 휴대 전화기 덕분에 우리 의 휴대폰과 인터넷을 통해 재현되길 바란다. 혹여
는 더 이상 공중전화기를 찾아 헤매거나 줄을 설 길거리를 가다 공중전화부스와 마주친다면, 주저 말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 그래서일까? 공중전화기 1 고 들어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에게 전화 한 통 걸
대에서 나오는 매출보다 유지하는 비용이 더 커지 어보는 건 어떨까? 손에 쥔 휴대폰을 두고 이 무슨
고 있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흘러나오고 있으 이상한 짓인가 할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만난 그 공
며,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도 휴대 전화에 밀려 전 중전화기가 어쩌면 당신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만나
국의 공중전화기가 사라져 가는 중이다. 하지만 공 게 될 공중전화기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중전화기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기존의 공
중전화부스를 변형시켜 전기차 충전설비시설이나 글 문진영 스토리너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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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방어 위한 천혜의 조건
수도와 가까우며 험난한 산세의 북한산은 수도
방어를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산성의 역사가 깊다.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처
음 쌓인 것으로 전해지지만 당시엔 토성이었기에 지
금 우리가 보는 성곽 대부분은 조선 숙종 37년1711에
축성된 것이다. 해발 800m 넘는 곳에서 해발 50m
도 되지 않는 곳까지 산 정상과 골짜기, 계곡, 능선,
바위 등에 걸쳐 총 11.85km중성문 성곽 250m 포함의 길
이의 성곽이 남아 있으며, 고양시[약 98%]와 서울시
[2%]에 걸쳐있다.
북한산성과 성곽 안쪽에 대한 문화재의 조사와 발굴
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지표조사, 시굴
조사, 발굴조사로 진행된 북한산성 문화재의 조사 및
정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한양도성~탕춘
대성~북한산성의 연결고리를 찾는 일이 중요한 연구
과제로 부각되었다. 더불어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 그리고 수원화성과 비슷
한 성격이 있어 북한산성 또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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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발행처·문의 도봉문화원
한국문화원연합회
김문경 정책연구소장*전 구리문화원장/靑松 정책연구개발비 기부
한국문화원연합회 부설 정책연구소는 전국 지방문화원의 발전을 위해 문화정책 조사·연구·개발
편집후기
한춘섭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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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
Ssireum
ISSN 1599-4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