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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모육아 慈母育兒
>
신한평申漢枰, 1726~?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 담채, 23.5 × 31.0cm

이 그림을 그린 신한평은 풍속화로 저명한 신윤복의 아버지이다. 신한평은 아들의 명성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다. 그러나 그는 영조·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도화서 화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이 거의 남아 있

지 않아 신한평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자모육아>는 그의 현존작現存作 중 유일한 풍속화로, 그림 제목인 ‘자모육아’

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다’는 뜻이다. 세 자녀를 둔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품에 안고 젖을 먹이고 있다. 엄

마의 품속에서 아이는 편안히 젖을 먹고 있다. 화면 오른쪽의 큰아들은 방금 잠에서 깨었는지 눈을 비비고 있다. 화

면 왼쪽의 딸은 복주머니를 만지면서 조용히 앉아있다.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이 그림에는 잘 나타나 있다. 시대와 사

회가 변하면서 가족의 형태, 기능, 의미도 크게 바뀌었다. 사랑으로 세 자녀를 돌보는 한없이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

을 그린 <자모육아>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가족은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가정의 달,
5월에 가족의 소중함을 생각해 본다.

글 장진성 서울대 고고미술학과 교수


그림(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Contents

U RIM U N HWA

별별마당
월간 우리문화 4 테마기획
vol.283 | 2020 05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_ 한국 예술은 무엇으로 단련 되는가 / 정인서
발행인 김태웅
발행일 2020년 5월 1일
10 이달의 인물
편집고문 권용태 색깔 있는 여자, 천연염색 작가 ‘김외경’ / 이행림
편집주간 한춘섭
편집위원 곽효환, 김 종, 김찬석, 오광수, 16 바다 너머
오양열, 장진성, 지두환 네팔의 부처님 오신 날, 붓다 자얀티를 가다 / 하도겸
편집담당 음소형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20 시와 사진 한 모금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그 도시의 열흘 _ 5·18 40주년을 기리며 / 김 종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홈페이지 www.kccf.or.kr
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등록번호 마포,라00557 문화마당 Cultural Encounters
기획편집번역제작 서울셀렉션 02)734-9567
22 옹기종기 Iconic Items
수수함 속 단단함, ‘목기’ / 안유미
Mokgi, Simple and Solid Woodenware / An Youmee

24 한국의 서원 ② Korea’s Seowon


우리나라 서원의 시작 경북 영주 ‘소수서원’ / 이종학
Korea’s First Seowon: Sosu Seowon in Yongju, Gyeongsangbuk-do / Lee Jonghak

30 지역문화 스토리 Local Culture Stories


지역 방어의 최전선, 간비오산 봉수대 / 황 구
Bongsu: A System of Cutting-Edge Military Communication / Hwang Gu

38 느린 마을 기행 ① Slow City Travel


봄의 서정이 깃든 그 길에 서다 _ 남양주 조안슬로시티 / 임운석
Walking the Paths Filled with Spring Lyricism: Slow City Paths in Joan-myeon, Namyangju /
Lim Unseok

44 팔도음식 Provincial Cuisine


조선 최고의 미식가 허 균도 반한 ‘준치’ / 김형우
우리 놀이문화 _ 씨름 White Herring, Late-Spring Treat: A Favorite of Heo Gyun, the Most Demanding Gourmand
of the Joseon Dynasty / Kim Hyungwoo
표지 이야기
두 사람이 샅바를 잡고 힘과 기술을 겨루는
48 한국을 보다 Through Foreign Eyes
우리 민속놀이이자 운동 경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만난 천방지축, ‘조랑말’ / 로버트 네프
표지 그림 박수영 일러스트레이터 The Korean Pony: Equine Wickedness in the Realm of the Morning Calm / Robert Neff
공감마당
10 52 조선 人 LOVE ⑤
촉석루의 암행어사, 사랑을 심판하다 / 권경률

56 지역 따라 노래 따라
기차 타고 온 노래들 / 손민두

60 오! 세이
눈물 속에 피는 꽃 / 박상우

62 한류포커스
서태지와 아이들부터 방탄소년단까지 / 심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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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64 북한사회 문화 읽기 ⑮
태양의 꽃 그리고, 불멸의 꽃 / 오양열

68 있다, 없다?
공중전화기 있다, 없다? / 문진영

30 70 독자 투고
아름답고 매서운 산세로 수도 지켜낸, ‘북한산성’ / 정동일

72 NEWS, 편집후기
도봉문화원 《도봉산》 발간 등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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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9-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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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자는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제작합니다.
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여울물이 아스라한 낭떠러지를 통과해야 힘을 얻듯, 우리


나라 국민은 ‘2·28민주운동’, ‘4·19혁명’, ‘6·10 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이하 5·18)’과 같은 저항운동을 거치며 민
주주의에 대한 갈증과 열망을 키워갔다. 그리고 예술은 그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정신을 품었다.

한국 예술은

무엇으로
단련 되는가
1980년 5월 18일
올해로 40주년을 맞은 5·18은 한국 현대예술에 힘을 불어넣는 영감
의 원천이다. 그렇지만 ‘광주권’이라고 하는 지역에만 머물러 있음
은 지적되어 마땅하다.
한국 현대사는 5·18을 우회하여 전개될 수 없다. 한국의 민중예술
도 마찬가지다. 민중예술은 5·18을 통해서 그 깊이, 즉 정신을 얻었
다. 하지만 5·18 절대정신의 바탕은 ‘이념을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시선에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지난 40년 동안 한국 현대예
술의 정신은 개인의 행복을 실현하는 여로旅路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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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시는 고유한 서정성을 지닌다. 5·18의 서사, 즉
처연하고 처참한 의분과 저항의 맥락을 어떻게 시적
서정에 담을 것인가. 피 끓는 시인들은 꽃잎처럼 떨
김남주는 연작시 <학살>을 통해 자신이 당한 고문과
감금 경험을 칼날 벼르듯 거친 목소리로 5·18을 고발
하고 증언한다. 또한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부채 의식과 어져 간 목숨을 노래한다. 노래하지 말아라 /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서정적으
진실의 공유 김준태는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로 오지도 않았고 /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
통해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 문 밖에 가 당신을 으로 눕지도 않았다”<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
기다리다가 / 나는 죽었어요… 그들은 / 왜 나의 목숨 아라> 중며 김수영의 시 <풀>의 서정을 아예 민중 사
을 빼앗아갔을까요 /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갔 이로 밀어붙인다.
을까요 / … 아아, 여보! / 그런데 나는 아이를 밴 몸으 문병란은 “그대들의 꽃다운 혼 / 못 다한 사랑 못 다
로 /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 미안해요, 여보”라고 한 꿈을 안고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부
5·18의 참상을 현장감 있게 담아낸다. 특히 ‘우리나라 활의 노래로 / 맑은 사랑의 노래 / 정녕 그대들 다시
의 십자가’를 불러일으킴으로써 5·18의 비극을 분노 돌아오는구나”<부활의 노래> 중로 지금, 여기 ‘현재형’으
와 폭로, 저항을 넘어 종교적 틀에 접목하고 마침내 로 살아있는 희생과 부활을 노래한다.
숭고한 시의 정신으로 나아간다. 이 시는 5·18의 평 김 종은 “사랑하자 사람들이여 광주를 사랑하자 / 눈
화, 분단 극복, 인권, 자유, 정의 등의 이념을 불어넣는 맞추자 사람들이여 광주를 눈맞추자 / 보듬아 안아
대표적인 시다. 올려 광주의 눈썹과 배꼽과 머리와 이마를 넘어서자
/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아 돌아온 / 광주의, 광주의
양어깨를 사랑하자”<광주 가는 길> 중며 무등산 자락에
서 벌어진 5·18의 한과 고통을, 치유의 차원에서 화
해와 부활의 정신으로 보여준다.
이 밖에도 고정희<누가 그날을 모른다 말하리>, <광주의 눈물비>,
황지우<화엄광주>, <묵념, 5분 27초>, <흔적>, 김진경<프라하의
봄>, 임동확<눈밭을 걸어가는 오이디푸스왕>, 문병란<송가>, 박
몽구<십자가의 꿈>, 박주관<비가> 등 많은 시인에 의해
5·18의 이야기가 쓰였다.
5·18의 시 생산은 이승철의 지적대로 “세상을 떠난
이들은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부채 의식과, “1980
년 5월을 어떻게 문학화하고 그 진실을 대중과 공유
할 것인가”박몽구에 대해 ‘운동 차원’의 물음에서 더 나
아가 ‘문학적 완성’을 향한 힘든 걸음이 요구된다.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 1면에 게재된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원본(위).
계엄사의 검열로 원문의 2/3가 삭제되어 <아아, 광주여!>로 게재되었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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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5·18과 같은 역사적 대항쟁을 겪은 소설가에게
5·18은 대산맥을 만난 것이나 진배없다. 그러나 재난
에서 살아난 사람이 그렇듯이 소설은 증언, 기록, 폭
최윤의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는 5·18 이후 기억상실증에 빠진 소녀가 5·18의 고통
과 참담함을 겪는 소설이다. 화자가 전해 듣는 이야
넘어야 할 로의 유혹에 붙들린다. 문학은 증언, 재현 이상의 문 기와 회상을 통해서 그려지는데 소설에서 ‘그날’로 표
산맥 학적 형상화를 담보해야 한다. 5·18 관련 소설들은 현되는 ‘광주민주항쟁’에서 겪은 상처를 고통에 대한
대부분 앞서 말한 폭로, 고발, 증언에 쏠려 있다. 홍 기억 혹은 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광주항쟁을
희담의 《깃발》, 송기숙의 《오월의 미소》, 문순태의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인간의 ‘기억 고통’의 망각, 재
《그들의 새벽》이 이런 맥락에 있다. 현을 통해 차원 높은 경지를 펼쳐낸다.
윤정모의 《밤길》은 ‘신부’와 ‘요섭’이라는 학생이 광 정찬의 《광야》, 손홍규의 《테러리스트》 연작, 공선옥
주의 진실을 외부로 알리기 위해 밤길을 떠나는 이 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김경욱의 《야구란 무
야기다. 요섭은 짙은 패배 의식과 열패감에 사로잡혀 엇인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 등의 작품들이 5·18
있고, 신부는 불안감에 빠져 있다. 어떻게 보면 ‘지식 을 현재진행형으로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특히
인의 소시민적 고뇌’최원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뛰어난 서사 작업을 성공시
있지만, 삼엄함을 뚫고 광주항쟁을 외부로 알리기 위 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해 떠나는 모습은 ‘엠마오로 가는 부활한 예수와 제
자’들을 상기하는 대목이다.
임철우의 《봄날》은 전 5권의 대작 소설이
다. 5·18 당시 작가는 도청에 가서 총을 나
누어 받았지만, ‘과연 군인이 광주의 적인
가, 그들을 쏘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다 결
국 총을 놓고 집에 돌아온 것이 부채 의식
으로 남아 이 소설을 쓰게 된 것으로 알려
졌다.

1 윤정모 《밤길》
6
2 홍희담 《깃발》
3 임철우 《봄날》 1
4 최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2
5 한강 《소년이 온다》
6 공선옥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5

7
미술; 5·18 이후 광주는 침묵과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이때 마치 구원의 손길처럼 분연히 나타난 것은 민중
미술 운동이었다. 그 첫 걸음이 광주시민미술학교다.
정치적 소재와 사회현실에 대한 표현은 금기시되었
지만 5·18은 한국미술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도된 걸개그림은 미술패 ‘토말’의 <민중
민중과 소통한 이는 1983년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를 개설해 1992 의 싸움>이다. 이 작품은 동학혁명에서 시작해 5·18
민중미술 년까지 운영된 대중을 상대로 한 미술교육이자 5·18 까지 역사적 맥락에서 접근했다. 한국민중항쟁의 전
현장에서 선전활동을 했던 작가들이 중심이 된 민 체적 맥락에서 5·18을 떠올리게 만든 작품으로 1980
중미술 운동이었다. 강요된 침묵 속에서 그들은 지 년대는 강연균의 <고부가는 길>, 송필용의 <땅의 역
게꾼, 노동자, 농군, 가족, 노인, 행상인 등 일반 시민 사>, 이상호의 <민중항쟁시리즈>, 전정호의 <봉기
을 소재로 많은 판화 작품을 그렸다. 민중이 스스로 가>, 김진수의 <시민군> 등은 동학혁명과 5·18이 겹
5·18의 상처를 치유하는 운동이 된 것이다. 쳐지면서 표현되는 양상을 보였다.
판화는 민중의 목소리를 날 선 칼맛으로 저며낸 불꽃 그런가 하면 1987년 6월 항쟁 이후 5·18을 알리고
처럼 일어나 1980년대 책표지태백산맥, 엽서, 달력, 삽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주장이 작품으로 등장했다. 이
화, 팸플릿, 동인지, 포스터, 목판 등 대유행을 끌어냈 사범의 <아들의 낫을 가는 아버지>와 <공수부대 만
다. 미술은 문학과 달리 지역성을 넘어 한 시대를 풍 행>, 김산하의 <망월동 가는 길>, 김경주의 <대동세
미했다. 문학이 전문가 집단에서 생산된다면 판화는 상>, 박문종의 <두엄자리>, 조각가 나상옥의 <어여
회사원, 학생, 교사, 주부 등이 직접 교육을 받고 창 쁜 나의 젖가슴>, 이기원의 <임산부의 죽음>은 처절
작에 나섰다. 1985년을 전후하여 사회운동이 점차 하게 형상화되었다.
확대되는 가운데 미술계에도 실천성이 강조되었다.

7 홍성담의 <세월오월>은 세월 7 8
호 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연
계하여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
는 내용의 작품이다. 2016년 광
주비엔날레 특별전으로 광주시
립미술관 외벽면에 걸기로 했으
나 당시 정부의 압력으로 걸지
못하게 되면서, 광주시립미술관
현관 계단에 걸개그림을 펴고
난장퍼포먼스를 벌이면서 미술
관 외벽에 걸 것을 요구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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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


5·18은 현실적인 문제를 예술 세계로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다만, 배종민의 “오월 미술은 끊임
없이 오월 광주를 호령하고 있다”는 지적처럼, 5·18은
13
‘광주’의 울타리에 갇힌 것은 아닌지 자성이 필요하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예술은 어떤 정신의 깊이를 표
현했을까. 결론적으로 “역사란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이라는 헤겔의 말처럼, 5·18이 추상적 이념을
8 이사범 <아들의 낫을 가는 아버지>
대중화하는 성취를 이룬 것은 명백하다.
9 박문종 <두엄자리>
10 미술패 토말 <민중의 싸움>
11 홍성담 <횃불행진>
12 김경주 <대동세상> 글 정인서 문화비평가, 광주서구문화원장
13 홍성담 <대동세상> 연작 중 사진 홍성담, 광주시립미술관

9
별별마당 ㅣ 이달 의 인 물



있는
여자
천연염색 작가



10
천연염색을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서울을 떠나
쪽 염색의 고장 ‘나주’에 둥지를 튼 지 벌써 18년째.
처음부터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공부를 끝내면 다시 서울로 가리라.’
그런데 천연염색의 세계는 끝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색감도, 모양도, 그것이 자아내는 아름다움도 무궁무진한 세계였다.
그 속에서 여전히 끝을 모른 채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가고 있는
김외경 작가를 만났다.

나주 그리고 ‘천연염색’과의 인연
나주시천연염색문화재단에 소속된 작은 공방
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과 더불어 매주 한 번씩 공
예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김외경 작가(48세). 취재
가 있던 날도 그녀는 공방을 찾은 수강생들을 상대
로 천연염색과 바느질 노하우를 전하고 있었다. 그
리고 그러는 사이 그녀의 손끝에서 뚝딱 천연염색
목베개 하나가 완성되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잠이
스르르 올 것 같은 베개의 고운 색감을 보며 어떻 규방공예 수업 중인 김외경 작가

게 천연염색을 하게 되었는지를 묻자 그녀로부터


꽤 긴 답이 돌아온다.
“대학 시절 섬유공예를 전공했어요. 그러면서 화학 물론 그때는 이렇게 오래 있게 될 줄은 몰랐어요.
염색을 하게 됐는데, 그걸 하려면 제가 직접 화학 처음에는 ‘천연염색은 쪽 염색이다’ 생각하고 공부
분말로 염료를 만들어야 했어요. 염료가 있어야 그 를 했는데 웬걸요. 쪽 염색이 다가 아니라 천연염
걸로 염색도 하고 그림도 그릴 수 있으니까요. 그 색의 범위가 정말 넓은 거예요. 또 하면 할수록 무
런데 집에서 염료를 만들 때마다 엄마가 제 건강을 한정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고요.”
걱정하시는 거예요. 그러던 중 나주에 사시는 지인
분이 우연히 저희 집에 놀러 오셨다가 나주에 무형 천연염색에 이어 만난
문화재천연염색장도 있고 하니, 와서 염색을 한번 배 또 하나의 세계 ‘규방공예’
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운을 띄우신 거죠. 공부도 물감 번지듯 천연염색이 그녀 안에 스며들어
좋지만 집이 서울인데 나주는 너무 멀기도 해서 선 자리를 잡을 때쯤, 그녀는 또 하나의 세계에 빠져
뜻 가겠다는 말이 안 나왔어요. 그때는 천연염색에 들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규방공예’였다.
관해 잘 몰랐던 때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먼저 인 “천연염색 배우다가 우연한 기회에 조각보를 보
터넷으로 천연염색이 뭐고, 쪽 염색이 뭔지 공부를 게 됐는데, 정말 예쁜 거예요. 그래서 바느질을 한
하기 시작했죠.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다 보니까 번 배워봐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염색과 바
나주에 가서 제대로 배워보자는 결심이 서더라고요. 느질을 같이 해나갔죠. 사실 천연염색만 가지고는

11
공방을 장식하고 있는
천연염색 조각보와 풍경

12
1 작품의 재료가 되는 니라 서울 인사동 거리에 있는 한 공예품점은 그녀
천연염색 원단
2 꽃을 모티브로 한 의 작품만을 찾는 마니아들을 위해 김외경 작가 전
천연염색 가방 용공간을 두고 있다.
“2005년에 코엑스에서 전시회를 하는데 어떤 분
이 찾아와서 ‘쌈지길에 매장 하나를 오픈할 예정
인데 상품을 한번 만들어 보시겠냐, 상품을 만들면
제가 무조건 사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1
그래서 몇 가지를 만들어서 보여드렸더니 정말로
그걸 다 사 가시는 거예요. 손님들 반응이 좋아서
인지 그 뒤로도 계속해서 제가 만든 것들을 사 가
완성도 있는 ‘무엇’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거니와 소 셨어요. 그러면서 그 매장 고객 중에 제 작품을 기
득을 올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다려 주시고 보러와 주시는 분들이 생겼고, 덕분에
있었어요. 아주아주 예쁜 색이기만 하면 뭐해요. 장 그곳에 제 전용공간도 생겼죠. 지금이 2020년이니
롱에 넣어두는 걸로 끝이죠. 하지만 천연염색을 기 까 벌써 15년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에요.”
반으로 무언가를 만들면 작품이나 제품이 돼서 세
상 빛을 보게 되잖아요. 제가 규방공예를 하게 된
데는 그 이유가 크다고 볼 수 있어요.” 2

김외경 작가는 직접 염색한 천과 규방공예를 배우


면서 익힌 바느질 솜씨로 많은 것을 만들어 나갔
다. 조각보나 발창문이나 대청에 쳐서 햇볕을 가리는 물건을 비
롯해 전통 주머니, 각종 가방류, 지갑, 스카프, 넥타
이, 손수건, 베개보, 테이블 러너 등 그 종류만도 수
십 가지에 달한다.
“처음부터 여러 종류를 만들었던 건 아니고 조각보
위주로 작업을 했어요. 그걸로 개인전도 하고요. 그
전시회를 기점으로 관공서에서 하는 규방공예 수
업을 맡아 수강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또 2005
년도에 천연염색박물관이 생긴 후 그쪽에서 천연
염색을 가르쳤어요. 나주시천연염색문화재단에서
도 수업을 했는데 수업 종료 후에도 계속 배우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지금은 그분들과 동아
리 모임처럼 매주 모여서 오늘처럼 베개를 만들기
도 하고, 또 다른 것들을 만들기도 하고 그래요.”
수업이 있는 날이라 수업이 끝나면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그녀의 바느질은 계속됐다. 그녀의 작품
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

13
천연염색은 색色을 찾아가는 여정 을 쓸 때는 ‘동백꽃이네’ 하시는 분들이 있고, 다른
공방의 한쪽 벽면을 그녀가 만든 천연염색 가 색을 쓰면 또 다른 꽃을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세
방이 차지하고 있었다. 동백꽃 같기도 하고 무궁화 요. 저는 그렇게 보시는 분들이 꽃에 이름을 주시
같기도 한 꽃장식이 달려있는 가방들이다. 무슨 꽃 는 게 좋아요. 어떨 때는 꽃을 검정색으로 해요. 바
이에요? 라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에서 꽃 이름 탕이 화려한 경우인데, 색감의 조화와 균형을 고려
만 빠져있다. 해서죠. 어떻게 보면 색감이 섬유작품의 첫인상이
“제가 꽃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많이 만들어요. 이 에요. 그만큼 색이 중요하죠.”
건 무슨 꽃이다 규정하지 않고 ‘그냥’ 하죠. 꽃이라 어쩌면 김외경 작가는 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는 게 색깔마다 느낌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붉은색 위해 꽃에 이름을 주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
는 늘 색이 우선이다. 그래서 작품을 만들 때 염색
메리골드 염색천을 들고 있는 김외경 작가 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전시회 때 보면 가장 반응이 좋은 건 큰 조각보예
요. 근데 큰 조각보를 만드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
아요. 만드는 데 몇 달이 걸리기도 하거든요. 조각
보 작업은 이런 원단에 이런 염색을 해서 만들어봐
야겠다고 계획을 세워도 100% 그대로 이루어지진
않아요. 염색을 다 했다가도 여기 빨간색은 좀 더
선명하면 예쁘겠다, 흐리면 예쁘겠다, 이런 것들이
있거든요.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작업을 하기도 하
니까요.”
김외경 작가는 천연염색의 어려움에 대해 계속 말
을 이어나갔다.
“감물 염색을 들일라치면 감이 전라도산이냐 제주
도산이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져요. 한약재로도 염
색을 하는데 그 한약재가 국내산이냐 외국산이냐,
나무라고 치면 1년산이냐 10년산이냐에 따라 또
색이 달라져요. 천연염색은 색이 달라지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기준표나 정확한 통계를 내
기가 어려워요. 화학염색은 이거 몇 그램 저거 몇
그램 해서 몇 분 동안 염색하면 딱 이런 색이 나온
다는 게 있는데 천연염색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반복해서 염색을 하는 거예요. 너무 진하면 물을
빼기도 하고, 다른 색이 나는 염료를 섞어서 다른
색을 내기도 하고… 그렇게 색을 찾아가는 거죠.”
색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녀의 말대로 쉽지 않다.
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14
“천연염색 좋다는 건 다들 알잖아요. 환경을 오염
시키지 않고 주변에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할 수
있고, 또 차분한 컬러감이랄지 특별한 분위기, 다
른 것과 쉽게 조화를 이루는 점 등은 분명 천연염
색만의 장점이죠. 하지만 천연염색을 하고 있는 저
조차도 굳이 천연염색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
을 할 때가 있어요. 천연염색이 낼 수 있는 색감은
화학염색도 다 낼 수 있거든요. 그런데 천연염색은
화학염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정과 수고가
많이 들어가죠. 수고가 많이 들어가면 가격은 올라
갈 수밖에 없고요. 천연염색에 들이는 공을 아시고
인정해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화학염색이건 천
연염색이건 색이 예쁘기만 하면 되지, 하는 분들도
계세요. 그분들 말씀도 틀린 건 아니죠. 저는 개인
적으로 아무리 작품이 훌륭해도 가격이 맞아야 살
수 있는 거니까 마음에 들면 살 수 있을 정도의 가
격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중에 나와 있 꽃을 모티브로 한 꽃발(위)과 아플리케(아래)

는 수공예품들이 수공예품이라는 이유로 너무 비


싸게 판매되는 경향도 분명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가격보다는 우리 전통 공예품의 대중화에 우
선순위를 두고 싶어요.”
공功이 크다 하여 가격을 높인다면 우리 전통 공예
품은 소수만을 위한, 또는 전시관에서나 볼 수 있 시회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대만과 일본을 놓고 고
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은 김외경 작 민 중이에요. 대만이나 일본에서도 천연염색을 많
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굳이 이 하는데, 그쪽 분들은 또 제 작품을 어떻게 봐주
천연염색이어야 하는 이유와 그렇다 하더라도 부 실지가 궁금하거든요.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상
담 없이 살 수 있는 가격, 이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한 품보다는 작품 위주로 많이 작업하면서 준비하고
다. 그리고 지금도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있어요. 이번에는 그동안 해왔던 꽃을 모티브로 한
이라고 말한다. 작품에서 탈피해 다른 주제로 디자인 개발을 하는
중이에요.”
앞으로의 계획은 ‘바다 너머 전시회’ 좀 더 특별한 무대를 놓고 좀 더 특별한 작품을 모
코로나19로 인해 계획이란 걸 세우기가 어려 색 중인 김외경 작가. 그녀를 통해 우리나라 천연
운 때이지만 김외경 작가는 아주 특별한 계획을 세 염색 그리고 규방공예의 아름다움이 더 멀고 더 깊
우고 있다. 은 곳까지 뻗어나가길 기대해본다.
“작년에 나주문화예술회관에서 개인전을 했는데
글 이행림 편집팀
반응이 좋았어요. 그래서 올해는 외국에서 한번 전 사진 김정호 사진작가, 김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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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바다 너머

네 팔 의 부 처 님 오 신 날 ,
붓 다 자 얀 티 를 가 다

카트만두 도심에서 찍은 스와얌부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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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은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인 불교의 교주이자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불리는 불교의 창
시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탄생한 날이다. 이날은 불교도만이 아닌 세계인의 축제로 거듭난다. 네팔은 싯다
르타가 태어난 룸비니Lumbini가 있는 나라로, 석가탄신일을 ‘붓다 자얀티’ 또는 인도와 같이 ‘붓다 푸니마’라
고 부른다.

나라마다 다른 ‘부처님 오신 날’ 힌두교인도 함께 즐기는 ‘붓다 자얀티’


완연한 봄이지만 예전의 그 봄 같지 않다. ‘사회 앞서 이야기했듯 네팔은 석가탄신일 Buddha’s
적 거리두기’라는 낯선 말이 가장 뜨거운 주제어가 Birthday을 ‘붓다 자얀티Buddha Jayanti’ 또는 인도와 같이
되어버린 요즘, 이맘때쯤 치러져야 할 행사들이 연기 ‘붓다 푸니마Buddha’s Purnima’라고 부른다. 깨달음을 얻
되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계도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은 석가모니의 탄생을 기리며 하루를 바치는 날이다.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2020년 부처님 부처님이 태어난 네팔이지만 그 종교 분포도를 보면,
오신 날4월 30일 봉축 법요식과 연등회 등을 윤 4월 8 힌두교가 87%, 불교가 8%, 이슬람교가 4%로 불교
일인 5월 30일로 공식 연기했다. 코로나19로 어려움 신자는 10분의 1도 안 된다. 네팔의 국교는 힌두교이
을 겪는 나와 남, 우리 국민 모두를 위한 기도를 시작 고, 히말라야 고산지역에 사는 구릉, 셀파, 타망 등의
으로 국난, 즉 국가적 위기를 극복한 뒤 ‘부처님 오신 소수 민족 카스트만이 대부분 불교를 믿고 있다. 수
날’을 더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도 카트만두에 거주하는 불교 카스트들은 보드나트
우리 선조들은 윤달을 ‘길흉’이 없는 달로 여겨, 윤달 네팔에서 가장 큰 불탑나 스와얌부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원
에 이사하거나 묘를 옮겼다. 불교에서는 전통 불교 근처에 모여 산다. 아마도 싯다르타를 힌두교의 3대
의식인 ‘생전예수재’와 사찰 3곳을 참배하는 ‘삼사순 신 가운데 하나인 비슈누 신의 9대 화신으로 삼은 까
례’를 비롯하여 보시와 수행을 행해왔다. 따라서 부 닭에 적지 않은 불교도들이 힌두교로 흡수된 듯하다.
처님 오신 날, 즉 생일잔치를 좀 미뤄도 문제가 없다 어쨌든 ‘붓다 자얀티’는 힌두교도를 포함하여 95%
는 입장이다. 또 부처님 오신 날이 불교 국가들마다 의 네팔인 모두가 함께 즐기는 축제로, 전국 각지에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서 의식이 치러진다. 네팔인은 물론 전 세계 수많은
세계 불교 국가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사람이 네팔의 룸비니 사원으로 몰려들어 행진하며
5월 스리랑카의 콜롬보에 모여 세계불교도단체World 축제를 즐긴다. 불교도들은 이날 아침에 일찍 일어
Fellowship of Buddhists를 구성했다. 다음 해인 1956년 나 집 주변이나 불단을 청소한다. 이후, 목욕재계하
11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4차 대회에 고 준비해둔 깨끗한 복장을 입고 집을 나선다. 이날
서 양력 5월 15일을 석가탄신일로 결정했다. 하지만 은 전혀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을 하며, 흰 쌀죽 또는
네팔을 비롯해 우리나라와 동남아 국가 등 세계 불교 키르Kheer라고 부르는 쌀로 만든 달콤한 음식 등을 먹
국가들은 이에 따르지 않고, 각 나라의 전통과 역사 는다. 또한, ‘방생’이라 하여 새장에 갇힌 새나 우리에
에 맞춰 우리의 음력 4월 초파일과는 다른 날을 공휴 갇힌 동물 등을 풀어주고, 주변의 가난하거나 배고픈
일로 지정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나누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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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선 불교도들은 먼저 가까운 곳의 사원곰파을
찾아가 뿌자Puja 즉, 정성껏 준비한 꽃과 초, 과일 그
리고 쌀 등을 비롯한 공양물을 바치며 기도를 시작한
다. 힌두교도 역시 소망의 촛불인 버터 램프에 불을
붙인 디파Dipa를 공양해 올리는 것으로 대법회의 시
작을 알린다.

네팔을 대표하는 불교적 성지, ‘스와얌부나트’


티베트 불교의 중심 성지인 보드나트 스투파
1 Bodhnath Stupa와 달리 힌두교도의 성지이기도 한 스와
얌부나트Swayambhunath에서는 찬불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기도와 염송, 삼보일배, 탑돌이 행사가 진행
된다. 세존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 등의 괘불이 걸
리며 탑 주변에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담은 현수막이
걸린다. 오후에는 정부 주요 인사와 불교계 원로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친견하는
봉축 행사가 열리고, 저녁에는 봉축 점등식이 열린다.
카트만두 중심지 서편의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 잡
2
고 있는 스와얌부나트는 1979년 유네스코가 세계복
합유산으로 등록한 카트만두 계곡에 있는 7개의 주
요 문화재 가운데 하나다. 네팔을 찾는 외국 관광객
이 반드시 들리는 네팔의 대표적인 불교 성지로, 이
곳 정상에 오르면 흰 돔 위에 금빛으로 도금한 커다
란 탑과 사원 전체가 카트만두 분지의 아름다운 풍경
과 어우러진 장관을 볼 수 있다. 이 탑에는 카트만두
를 수호하는 듯한 거대한 눈이 그려져 있다. 사물의

3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다는 영안 또는 부처
의 눈으로 ‘법안法眼’이다. ‘제3의 눈’이나 ‘지혜의 눈’으
로 불리는 두 개의 눈 아래에 그려진 물음표 모양은
네팔의 숫자 1을 형상화한 것이다.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하나의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1 보드나트 스투파(불탑)
2 불경이 새겨진 마니차를 돌리는 여신도들
3 스와얌부나트 대탑에 디파를 올리는 모습
4 4 스와얌부나트 주변 탑에 공양드리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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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나트 법회에 참석한
승려와 재가신자들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고 사방으로 일 설법을 들으며 색색의 등불을 밝히고 복을 기원한다.


곱 걸음을 걸으며 사방을 둘러보는 가운데 “하늘 위 어두워진 밤이 되어 디파를 손에 들고 탑돌이를 하는
와 하늘 아래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 삼계가 모두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다.
고통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 봉축 행사의 일환으로 사찰에서 주변 마을로 이어진
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한 모습과도 연관된다. 도로에서는 우리의 연등회와 마찬가지로 불상을 선
붓다가 태어난 룸비니 다음으로 신성시되는 스와얌 두로 한 퍼레이드가 진행된다. 부처님과 불단을 실은
부나트의 스투파를 한 바퀴 돌면 불경을 천 번 읽는 트럭을 따라 가두 행진을 하기도 하는데, 앞에서 스
것만큼의 공덕을 쌓는 일이리라 여겨져 그 일대는 항 님들과 재가자들이 어우러져 악기를 연주하며, 그 뒤
상 참배객들로 북적이는데, 붓다 자얀티 때에는 더 로 일반인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단체 현수막이나 깃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발 등을 들고 행진한다. 몇몇 독실한 신자들은 룸비
몽키 템플Monkey Temple이라 불릴 정도로, 야생 원숭 니까지 순례를 떠나기도 한다.
이의 집단 서식지로 유명한 스와얌부나트도 평소 아 붓다 자얀티의 대표적인 행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침이나 저녁 등 특정 시간에 조금씩 열었던 전각은 아기 부처상을 목욕시키는 관불灌佛 의식이 아닐까
물론 쉽게 볼 수 없었던 불상들마저 모두 개방한다. 싶다. 사원에서는 물을 가득 채운 대야를 꽃으로 장
하지만 대부분의 전각은 불교가 아닌 땅의 여신 ‘바 식하고, 그 안에 아기 부처상을 놓아둔다. 축일을 맞
순다라’, 바람의 신 ‘바유’ 등 힌두교 신을 모신 사원들 아 사원을 찾은 신자들은 대야의 물을 아기 부처상의
이라는 점에서 조금 생소할 수 있다. 머리에 붓는데, 이로써 자신의 업장, 즉 카르마karma
를 정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나를 시작으로
붓다 자얀티의 대표적인 행사 역시 ‘관불’ 한 우리 모두의 마음 정화,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상
신도들은 찾아온 대중에게 음식 공양을 베푸는 징하기도 한다.
한편, 발우를 들고 앉아있는 스님들이나 불전 앞에
글 하도겸 NGO 나마스떼코리아 대표, 시사위크 논설위원
연중 가장 많은 돈을 보시한다. 그리고 큰스님들의 사진 하도겸, flickr(@Šarūnas Burdu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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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시와 사진 한 모 금

그 도시의 열흘
- 5·18 40주년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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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는 꽃들의 방석이었다

바람도 은혜로운 실루엣이었다

벌 · 나비 날개 펼친 눈부신 오월이고

지아비 지어미의 하루하루는 행복했다

웃음소리 마냥 가득하던 그 날

몰아친 천둥번개가 도시를 강타했다

파라다이스는 종잇조각처럼 구겨지고

도시의 허파는 찢어지고 뭉개졌다

자유는 막히고 민주는 질식했다

마당 깊은 무등에 천둥소리 퍼질 때

시민들의 떼창은 하늘을 덮었다

상처와 상처에서 선혈은 흐르고

무릎 꺾인 도시가 쓰러지고 엎어져도

독재를 타고 넘던 그 도시의 열흘은

손과 손 굳게 쥔, 어깨동무로 나섰다

사람들은 주먹밥처럼 뭉치고 뭉쳐졌다

죽음에 불붙이고 해일처럼 달려갔다

새살 차는 그 도시에 민주는 어디쯤일까

나라의 백척간두를 끝까지 지켜가자고

하늘 아래 믿을 것은 오직한 사랑뿐이라고

열차처럼 강물처럼 하루하루를 흘러가던

저 가득한 사람들의 눈부신 부활 위에

함께 나선 그 도시는 오월처럼 젊었다

눕던 풀잎 바람 따라 불사조로 일어섰다

어깨 올린 청춘들의 함성을 따라따라


김 종
보라! 죽어서도 살아서도 그들은 하나였다.
시인,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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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옹기 종 기

나무 바가지
Woodenware scoop

수수함 속 단단함, ‘목기’

나무 그릇
Woodenware dish

Mokgi, Simple and Solid Woodenware

발우
Buddhist alms bo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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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I c onic I tem s

목기는 선사 시대부터 우리 삶에 필수적인 도구로 사용되어 왔 Since the dawn of time, woodenware has been essential
다. 목기가 일찍부터 사용되어 온 이유는 다른 재료에 비해 나무 in our everyday lives. Compared to other materials, wood
의 취득과 가공이 쉬웠기 때문이다. 또 그 재질이 단단하고 옻칠 is easier to find and fashion. Wood is also sturdy and
옻나무에서 나는 진을 바르는 일을 하면 잘 벗겨지지 않는다. 이처럼 나무 good at retaining varnish, making it an ideal material
는 그릇을 만드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였다. for making mokgi, a uniquely Korean tradition of
woodenware.

조선조 500년 목공예 본산지, 남원 Namwon, Joseon Dynasty’s Woodenware Crafts Village
목기는 오리목, 물푸레나무, 박달나무, 은행나무 등을 재료로 The wood that goes into mokgi is taken from various trees, including
하는데 재료에 따라 그 쓰임새가 다르다. 목기의 제작과정은 다 alder, ash, birch, and ginkgo. The crafting process begins by hewing
음과 같다. 원재목을 자른 후 만들고자 하는 형태로 대강의 구조 lumber into the rough shape of the intended vessel (a phase called
만 잡는다. 이것을 ‘초가리’라 한다. 그 후 습도가 높지 않은 그늘 chogari). After leaving the wood in a dry, shady spot for about five
에서 약 5개월간 말려 틈이 나지 않도록 한 뒤 정교하게 다듬고 months, to prevent cracking, the craftsperson moves on to the more
깎아 그릇의 모양을 완성하는 ‘재가리’를 한다. 재가리가 끝나면 detailed carving phase (called jaegari). Finally, the vessel is sanded
사포로 부드럽게 하여 ‘백골’을 만들고 이후 칠을 한다. 화학칠카 down and coated in lacquer. While some vessels are produced with
슈칠을 한 목기도 생산되고는 있지만, 전통적인 목기는 옻칠을 고 a chemical cashew-based varnish, traditional craftspeople insist on
수한다. 티끌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 옻칠은 초벌칠, 재벌칠, 상칠 using otchil, a lacquer from the varnish tree. Vessels that have been
등의 과정을 섬세하게 거쳐 완성된다. 옻칠은 2∼3년이 지나면 prepared with this nontoxic natural varnish actually gain in luster
더욱 색이 살아나고, 방수·살균효과도 크다. 이에 따라 옻칠이 된 after years of use. Otchil also has water-repellent and sterilizing
목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좀이 슬지 않는다. properties: that’s why lacquered vessels aren’t eaten by moths.
목기는 찬합도 있고, 찻잔이나 쟁반, 바리때절에서 쓰는 승려의 공양 그릇 Mokgi can be seen in stackable picnic boxes, trays, and rice
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사 때 사용하는 제기祭器다. 목기를 제기로 bowls at Buddhist temples, but its most common application in
많이 사용한 까닭은 소리가 나지 않고 정결한 느낌을 주기 때문 Korea is in the ancestral rites called jesa. It’s preferred in these
이다. rites because it doesn’t jangle or clank and it looks clean and neat.
예로부터 지금까지 목공예의 본산지로 불리는 곳은 남원이다. 남 Since days of yore, the mokgi employed in the rites was made by
원 뱀사골 목공장은 왕실에서 사용되는 목기를 만들 때 1개월 이 craftspeople at Baemsagol Valley, in Namwon. We’re told that
상 목욕재계하고, 부정한 짓을 하지 않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 the craftspeople there were exceptionally dedicated to their craft,
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performing rites of purification and abstaining from anything

unclean for more than a month while making mokgi for the royal

family.

Written by An Youmee, editing team


글 안유미 편집팀 Photography used under the Korea Open Government License, National Folk
사진 공공누리, 국립민속박물관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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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의 서 원 ②

우리나라 서원의 시작 Korea’s First Seowon:


경북 영주 ‘소수서원’ Sosu Seowon in Yongju,
Gyeongsangbuk-do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소수서원이 자 Sosu Seowon is Korea’s oldest seowon, or private neo-
리한 곳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로, 인삼과 사과, Confucian academy, and is located in Naejuk-ri, Sunheung-
직물의 명산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낙엽송이 울창한 숲을 myeon, Yeongju-si, Gyeongsangbuk-do, which is famous for
이루고 있어 나무의 고장이라고도 불리며, 바람, 돌, 여자가 ginseng, apples, and textiles. The area around the seowon is
많아 내륙의 제주도라고도 한다. surrounded by lush larch tree forests and is referred to as the
“hometown of trees.” There is so much wind and so many
rocks and women in the area that it is commonly compared
with Jeju I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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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Korea’s Seowon

소수서원 전경
A panorama of Sosu Seowon

백운동서원을 시초로 하는 소수서원 Sosu Seowon’s origins: Baegundong Seowon


소수서원이 들어선 곳은 통일신라의 사찰 숙수사宿水寺 옛터 Seosu Seowon was built on the site of the old Suksusa Temple,
로, 성리학자 회헌 안향晦軒 安珦, 1243〜1306이 어린 시절 노닐며 공부 which was where the neo-Confucian scholar An Hyang (pen name
하던 곳이다. 중종 36년1541 안향의 연고지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Hoeheon, 1243–1306) lived and studied during his childhood. Ju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안향을 배향하는 사당을 1543년에 완공 Sebung, who was appointed by King Jungjong in 1541 (36th year of
하였고, 같은 해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했다. King Jungjong’s reign) to be the local magistrate of Punggi, built a
주세붕은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채용해서 유생들에 shrine honoring An Hyang in 1543. The Baegundong Seowon was
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었으며, 한양의 종갓집에서 안향 built the same year on the eastern side of the shrine.
의 영정을 옮겨와 봉안했고, 중종 40년1545에 안축安軸, 1287∼1348과 Ju Sebung adopted the Baengnokdong hakgyu (Rules of the
그의 아우인 안보安輔, 1302∼1357를 배향했다. 주세붕은 서원을 세 White Deer Hollow Academy) created by Zhu Xi to make it easier
운 후 《사문입의斯文入議》를 통해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한 제반 for his students to conduct their readings and discourses on learning.
방책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서원의 원장 임명 문제, 원생의 정원 He brought a portrait of An Hyang from his family’s head house in
수, 제향 절차 등을 상세하게 규정하였다. Hanyang (now Seoul) to the academy, and in 1545 (the 40th year
소수서원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에 의해 성장한다. 퇴계는 of King Jungjong’s reign) added portraits of An Chuk (1287–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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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3년1548 풍기군수로 부임하자 송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백운 and his brother An Bo (1302–1357). After building the academy, Ju
동서원에 조정의 사액賜額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Sebung created a comprehensive set of rules for the management
요청하였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이 지은 서 and operation of the academy called the Samun ibeui. This rule book
원의 이름을 ‘소수’로 정하고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친필 현판 included specifics about how to appoint the seowon director, how
과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 그리고 노비를 내 many pupils could study in the academy, and rules governing the
렸다. holding of sacrificial rites at the institution.
정부에서 사액을 내렸다는 것은, 서원의 중요한 기능인 선현의 Sosu Seowon gained even more prestige under Yi Hwang
봉사奉祀와 교화 사업을 정부가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액 (pen name Toegye, 1501–1570). When Yi Hwang was appointed
된 뒤 입학 정원도 10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났으며, 서원의 원생 county magistrate of Punggi-gun in 1548 (the third year of King
들이 배움에 충실하도록 이황은 학업 규칙을 정해 배움의 장으로 Myeongjong’s reign), he submitted a request, citing Zhu Xi, a scholar
서 서원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데 힘썼다. 개원 이래 1895년까지 of the Song Dynasty, for the academy to become royally chartered.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유생이 무려 4,000명에 달할 정도로 소수 King Myeongjong decided to name the seowon “Sosu,” a title that had
서원은 조선 시대에 확실한 위치를 점했다. been created by Sin Gwanghan (1484–1555), director of the Office
서원 옆에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죽계천이 있고, 그 한편 of Special Counselors. The king further sent a plaque with the name
으로 ‘백운동’이라고 위치를 알리는 글자[이황 글씨]와 선비들이 Sosu Seowon in his own handwriting along with servants and a
심성을 닦을 때의 자세로 쓰는 경敬자가 새겨진 바위[주세붕 글 supply of books, including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and the
씨]가 있으며 ‘경렴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경’자는 선비의 덕목 Seongni daejeon (Collected Works on Human Nature and Principle).
을 나타내는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 The government provided the Sosu Seowon with a royal charter
미다. 경렴정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선 because it recognized the importance of the services for the ancient
비들의 시흥을 엿볼 수 있는 필적들이 목각판에 새겨져 있다. sages the academy conducted along with the institution’s efforts
백운동 글자가 새겨진 죽계천 건너에는 ‘취한대’라 부르는 정자 to educate and transform students through moral example. Sosu
가 있고 정자 오른쪽 숲속에는 돌탑이 있다. 취한대는 자연을 벗 Seowon’s student body rose from 10 to 30 pupils after becoming a
하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이는 옛 시 송취한계松翠 royally chartered institution. Yi Hwang created rules for learning

at the academy that ensured the students would focus on their

studies, among other measures to safeguard the academy as a place

of learning. By 1895, the academy had provided education to around


소수서원 죽계
Sosu Seowon's Jukgyecheon Stream 4,000 students, securing a prominent place among neo-Confucian

academies of the Joseon Dynasty.

Jukgyecheon Stream, which runs down from Sobaeksan

Mountain, flows next to Sosu Seowon. A rock with characters

alerting passersby to the site of Baegundong, written by Yi Hwang,

along with the Chinese character gyeong (敬) in Ju Sebung’s

handwriting is located nearby. The character gyeong was used to

express the position scholars took when cultivating their minds and

hearts. Gyeong was used to remind students of scholarly virtues and

refers to the act of learning with reverence and discipline.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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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강학당
Ganghakdang Hall, Sosu Seowon

寒溪에서 따 온 것으로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 is also a pavilion called Gyeongnyeomjeong. At the pavilion, the
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다. academy’s students composed poems and discussed their learning.

There remain in the pavilion wooden tablets with poetic musings


소수서원을 특징짓는 독특한 건축양식 written by scholars including Yi Hwang.
소수서원은 독특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보통의 서 There is a pavilion called Chwihandae across the Jukgyecheon
원은 중앙에 마당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서원의 주요한 건물들이 Stream where characters representing Baegungdong are carved,
놓인다. 그리고 서원을 관통하는 축선이 있고 전문, 누각, 강당 등 and a stone pagoda to the right of the pavilion located inside the
이 이 축선 상에 놓인다. 즉 축선은 이들 시설 전체를 잇는 길이 nearby forest. Chwihandae Pavilion boasts a sense of harmony with
되기도 한다. 그런데 소수서원은 일정한 축의 설정 없이 강학을 the surrounding natural environment and is where scholars wrote
위주로 강당과 재실 등이 불규칙하게 경내의 중앙에 있으며, 누각 poems and discussed learning. The name Chwihandae was taken
이나 정문 같은 별도의 경계 건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진입 from the old poem “Songchwihangye,” which literally means to “write
과정도 일정하지 않으며 부속 공간의 설정도 애매하다. 이와 같 poems and enjoy the scenery with energy of the green mountains
은 소수서원의 배치는 서원건축의 초창기에 건설된 특수한 건축 and the glittering of the cool water.”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강당강학당이 바로 보이
며 이어서 재실이 강당 후면과 우측에 있고, 좌측 후면으로 사당 Sosu Seowon’s unique architectural features
인 문성공묘, 장서각과 전사청, 그리고 안향과 주세붕의 영정을 Sosu Seowon’s famous architectural features stand in contrast to
모신 영정각이 있다. 영정각은 다른 서원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other Korean seowon. Usually, seowon have a yard at their center,
건물이다. 원래 관학인 성균관, 향교 등에서는 위패를 모시나 서 and this central area is surrounded by the academy’s important
원에서는 영정을 봉안한다. 이것은 서원에서 공부하는 선비나 원 structures. The front gate, pavilions, halls, and lecture hall of
생들이 선현의 모습을 직접 배알케 하여 한층 더 숭배하는 마음 ordinary seowon are built along an “axis” that runs through the
가짐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academy’s premises; this axis essentially becomes a path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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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의 강당은 강학당명륜당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문성공묘 connects all buildings located in the academy. Sosu Seowon, however,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서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강당 has no fixed axis, and its lecture hall, building where sacrificial
이다. 4칸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이며 내부 마지막 칸에만 온돌 rites are conducted, and other structures are all located around the
방이 놓였다.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 끝에 온돌방을 놓는 후대의 center of the seowon in no particular order—a design feature aimed
강당 형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at enabling discussions on learning. What’s more, the academy

does not have any structures sitting outside of its environs such as a
1 소수서원 문성공묘 pavilion or a front gate. The entrance to the seowon is not fixed and
Munseonggyongmyo Shrine, Sosu Seowon
2 소수서원에서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있는 광풍정 its other miscellaneous spaces are not clearly delineated. In short,
Gwangpungjeong Pavilion on the way from Sosu Seowon to Sosu Museum
Sosu Seowon boasts unique architectural features that reflect the fact

that it was built during the early days of building such institutions.

Upon entering Sosu Seowon, the lecture hall

(Myeongnyundang) immediately comes into view. The room for

sacrificial rites is located behind and to the right of the lecture

hall, and the Munseonggyongmyo Shrine is to the left, along with

jangseogak, jeonsacheong, and yeongjeonggak, houses the portraits of

An Hyang and Ju Sebung. The building that houses the two portraits

is a structure unique to Sosu Seowon. State-run schools such as the

1 Seonggyungwan National Academy and hyanggyo possessed tablets,

while seowon enshrined portraits. Doing this was meant to help

scholars and students studying at the seowon to both remember and

increase their respect of the ancient sages.

Sosu Seowon’s lecture hall is called Myeongnyundang,

and it stretches from north to south on the east side of the

Munseonggongmyo Shrine. The lecture hall has four rooms called

kan facing forward and three kan facing to the side. Three of the four

kan are large halls, and only the kan located in the farthest interior of

the Myeongnyundang has a heated floor (ondol). This contrasts with

more contemporary lecture halls, which placed heated rooms on

both sides of large lecture halls.

The shrine, which is an important part of the seowon, is to

the left and surrounded by a separate wall in contrast to other

buildings on the premises. The wall clearly sets the shrine apart from

everything else; it is clearly a space not just anyone can enter. An

Chuk, who is honored in the shrine, is the son of An Hyang’s cousin;

“Gwangdong byeolgok” (Song of Gangwon-do Province) and “Jukgye


2 byeolgok” (Song of the Bamboo Stream) he wrote are both fam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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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오른쪽), 전사청(왼쪽)과 해시계인 일영대(가운데 아래)
Yeongjeonggak (right), jeonsacheong (left), and the iryeongdae sundial (center)

서원에서 중요시되는 사당은 다른 건물과는 달리 별도의 담장으 gyeonggichega (Gyeonggi-style songs) and valuable historical pieces
로 구획되어 경내의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둘레를 담으로 둘러 of Korean literary history.
쳤다는 것은 아무나 쉽게 범할 수 없는 확실한 위상을 갖고 있음
을 보여준다. 사당에 배향된 안축은 안향의 삼종손三從孫으로 그가 An Hyang: The first figure enshrined in Sosu Seowon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은 이름난 경기체가 An Hyang, who was the first scholar to be enshrined in Sosu Seowon,
景幾體歌이자 국문학사상 귀중한 사료이다. was born in Hongju (now Punggi-eup, Yeongju), Gyeongsangbuk-

do. His family clan was Sunheung, his courtesy name (ja) was
소수서원에 처음 배향된 안향은 누구? Saon, and his pen name was Hoeheon. He was enshrined in Sosu,
소수서원에 처음 배향된 안향은 경북 흥주興州; 영주시 풍기 출신 the first royally chartered seowon, as well as several other seowon,
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최초의 사 including Hapho Seowon, Dodong Seowon, and Imgang Seowon.
액서원을 비롯해 합호서원, 도동서원, 임강서원 등 여러 서원에 His tablets have been enshrined in the daeseongjeon (halls of
배향되었으며, 성균관 문묘를 비롯해 전국 230여 개의 향교 대성 achievement) of around 230 hyanggo throughout Korea, including
전에 위패를 봉안해 매년 춘추로 제향하고 있을 정도로 생전보 the Munmyo Shrine at the Seonggyungwan National Academy,
다 사후에 더욱 그 공이 빛나고 있는 사람이다. 안향에 의해 우리 and he is honored every spring and fall. Indeed, his achievements
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이 소개되었고, 이후 주자학이 크게 일어난 appear more impressive following his death than during his life. An
것을 인정하여 안향을 한국 최초의 주자학자로 평가한다. Hyang introduced Korea to neo-Confucianism, and his contribution

to widely disseminating the neo-Confucian learnings of Zhu Xi in

Korea has led him to be considered Korea’s first scholar of Zhu Xi

learning.

글 이종학 《유네스코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저자, 前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 Written and photographed by Lee Jonghak, author of Seowon, Korean Neo-
회 위원 Confucian Academies and former committee member of the Committee for
사진 이종학, 공공누리, 영주시 the Restitution of Joseon Wangjo Sill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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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지역 문 화 스 토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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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L oc a l Culture Stories

[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 ]

지역 방어의 최전선,
간비오산 봉수대
“적선 500여 척이 부산·김해·양산·명지도 등지에 정박하고, 제
맘대로 상륙하여 연해변의 각 관포와 병영 및 수영을 거의 다 점
령하였으며, 봉홧불이 끊어졌으니 매우 통분하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 하루하루를 기록한 《난중일기亂中日記》
의 1592년 4월 29일 자 기록에 등장하는 부분이다. 당시 봉수대
는 ‘정보의 최전방’으로 신속하고 긴밀하게 통신체계를 이뤘던
군사시설이었다.

[ Project supporting the development of original content at cultural


centers in the countryside ]

Bongsu: A System of
Cutting-Edge Military
Communication
“Five hundred enemy ships have put in at Busan, Gimhae,
Yangsan, and Myeongjido Island, landing soldiers at will
and capturing nearly all our coastal villages, naval ports,
military headquarters, and naval headquarters. I was
displeased to learn that our beacon stations have been
cut off.” This is an excerpt from the April 29, 1592, entry
in the Nanjung ilgi (War Diary) of Yi Sun-sin, in which
the venerated Korean admiral kept a daily record of the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the late 16th century. The
beacons represented a swift and highly organized system
of military communication, what might be called the
bleeding edge of the information technology of that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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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간비오산 봉수대 표지석


Ganbiosan Mountain beacon station's stone marker
2 위에서 바라본 간비오산 봉수대
1 Aerial view of Ganbiosan Mountain beacon station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Smoke by day, fire by night


‘봉수’는 높은 산 위에서 밤에는 횃불烽, 낮에는 연기燧로 중 Bongsu, or beacon fires, were a communication network whose
요하고 급한 소식을 중앙으로 알리던 신호 전달 체계이자 통신 nodes were stations on the top of mountains, where smoke was used
제도다. 봉수는 무엇보다 불을 일으키는 ‘거화擧火’ 시설이 아주 during the day and fire at night to send important, urgent news to
중요했기에 기본적으로 하루 한 번 횃불을 올려 신호체계를 점 the central government. Fires were typically lit once a day to verify
검하였다. 날씨가 궂어 횃불이나 연기로 정보를 전달할 수 없 that the critical equipment at these stations, and the system itself,
을 때는 봉수군이 직접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거나 말馬을 이 was functional. When poor weather made it impossible to convey
용했다. 아니면 화포나 나팔로 전달하거나, 깃발을 사용하여 신 information by smoke or fire, soldiers from the garrison would
호를 주고받기도 했다. 경계가 되는 제일선에 설치한 봉수대인 have to deliver the message to the next station directly, either on
‘연변봉수沿邊烽燧’는 하부 기단 위에 연대를 쌓고, 상부에 연소 foot or on horseback. Other methods of exchanging signals were
실이나 연통을 설치하여 연기가 용이하게 배출될 수 있도록 했 firing cannons, blowing horns, or raising flags. During the Joseon
다. 거화의 재료로는 싸리, 솔잎, 말똥, 소똥, 섶나무, 담뱃잎 등 Dynasty (1392–1910), the beacon stations on the frontier (yeonbyeon
을 사용했고,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화철석火鐵石과 같은 부싯돌 bongsu), as the front lines of defense, consisted of a lower platform
을 사용했다. supporting a structure that contained a stove and smokestack to
봉수대에는 거화시설 이외에도 봉수군을 짐승으로부터 보호하 direct the smoke. Fires were started with flint and kindling, such as
고, 산으로 불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호벽과 봉수군 bush clover, pine needles, cow and horse dung, and tobacco leaves.
의 생활을 위한 주거용 건물, 봉수대 무기류, 각종 생활용품 등 In addition to the implements for the beacon fires, these stations
을 보관할 창고, 식수 확보를 위한 우물 등이 함께 갖춰져 있었다. were equipped with walls to protect against wild animals and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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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구 우동에 있는 간비오산 봉수대
Ganbiosan Mountain beacon station

즉 그 자체가 군사 통신시설이자 하나의 작은 군사 요새지의 역 fires, barracks and weapons for the garrison, a storehouse for various
할을 했던 것이다. supplies, and a well for drinking water. In short, the beacon stations

functioned not only as military communication posts but also as


조선 시대 첨단 군사 통신시설 mini strongholds.
봉수는 성격과 기능, 역할, 구조, 형태 등이 매우 다양한데 크
게 경봉수, 연변봉수, 내지봉수, 권설봉수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Joseon Dynasty’s cutting-edge military communication posts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수도 경京’자를 쓰는 경봉수는 말 그대로 While these beacon stations had a great variety of forms and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였던 중앙봉수를 말한다. 앞서 언급한 functions, they generally fell into one of the following categories.
‘연변봉수’는 국경과 해안가 및 도서 등의 지역에 설치되었던 최 There were central stations in the capital (gyeongbongsu), which
전방 봉수를, 내지봉수內地烽燧는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collected messages from beacon stations all over the country;
봉수를 의미한다. 권설봉수權設烽燧는 본읍, 본영, 본진으로만 연락 frontier stations (yeonbyeon bongsu), which, as we’ve already seen,
하도록 운용되었던 봉수다. 봉수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용어가 were set up on the national border, the coasts, and the islands;
생소하고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로써 첨단 interior stations (naejibongsu), which linked the border and central
군사 통신시설이었다고 보면 된다. stations; and regional stations (gwonseolbongsu), which only
봉수군은 봉수대가 있는 산 정상에서 적을 탐색하고 사방을 두 communicated with towns and garrisons nearby. Since the idea of
루 경계하며 감시·전달했던 역할을 했던 이들이다. 이들은 봉졸 communicating by beacon fires may well be unfamiliar to readers
烽卒, 봉군烽軍 등으로 불렸는데 실제로는 힘든 노역이었다고 한다. today, it may be easier just to think them of as the high-tech military
지역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 연변봉수에서는 봉군을 communications posts of their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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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구 전포동에 있는 황령산 봉수대
Hwangnyeongsan Mountain beacon station, Daeyeon 3-dong, Nam-gu, Busan

지휘와 감독을 하는 오장伍長 2명과 봉군 10명이 배치되어 3명씩 The soldiers of the beacon station garrison on the mountain
5일 근무한 뒤 교대하였다. 봉군은 주로 주변 지형과 지세에 밝고 peaks, called bongsugun, bonjol, or bonggun, had the duty to monitor
유사시 동원될 수 있도록 인근 지역 주민들로 충원되었다. 이들 their surroundings for the enemy and to pass along messages. These
은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 이외에도 군사훈련을 받아 적의 침입에 soldiers, by all accounts, did not have an easy job. The size of each
대비하고 거화의 방호시설을 보수하는 일과 군대에서 사용하는 garrison varied somewhat with the region, but the frontier stations, to
각종 도구와 거화 재료를 확보하는 일 등을 하였다. take one example, were manned by ten soldiers and two officers who
봉수제는 고려 때 성립되어 조선 시대에 확립되었다. 고려 대의 did five-day shifts, with three people assigned at a time. The soldiers
봉수제를 이어받아 조선 태종 대에서 봉수제가 시행되고 있음을 were typically recruited from the local peasantry, people who were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경국대전》 상의 규정으로 확정 well-versed in the lay of the land and who could be drafted in the event
되었는데, 거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해안의 경우 적이 바다에 있 of war. Sending signals wasn’t their only job: they also had to train for a
으면 2거炬, 국경으로 접근하면 3거, 국경을 넘어서면 4거, 육지에 potential invasion, repair the defensive works, and acquire the various
상륙하면 5거를 올린다. 육지의 경우 국경 밖이면 2거, 국경에 이 tools and materials needed at the beacon station.
르면 3거,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접전하면 5거를 올린다. 해안과 The beacon fire system was developed during the Goryeo
육지 모두 평상시 아무 일도 없으면 1거만 올린다. Dynasty (918–1392) and expanded under the Joseon Dynasty. Records
이처럼 이미 조선 전기에 봉수망이 정비되면서 전국적으로 약 of King Taejong’s reign show operation of the system, which had been
700여 개소가 설치·운영되었으며, 2016년 문화재청 조사에 의하 inherited from the earlier dynasty. This was given official formulation
면 이 중 약 400개소의 봉수대 유구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음을 in the Gyeongguk daejeon (National Code), which provided the
알 수 있다. following description of how messages were sent. For coastal bea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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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ions, two fires meant that enemy ships had been spotted at sea;

three, that they were approaching the border; four, that they’d crossed

the border; and five, that they’d put ashore. For inland beacon stations,

two fires meant that enemy troops were near the border; three, that

they’d reached the border; four, that they’d crossed the border; and

five, that battle was engaged. Both on the coast and in the interior, a

single fire was lit in peacetime, to indicate that all was well.

As this indicates, the beacon fire network was already in plac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ith about 700 beacon stations in

operation. In a 2016 survey,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found that ruins survive for about 400 of those stations.

Ganbiosan beacon station: The first link in communication


Busan (or Dongnae, as it used to be called) hosted Gyeongsang-

do’s Left Naval Headquarters, which had the grave responsibility

of collecting and communicating information about foreign ships


18세기 <동래부 지도>에 표기된 5곳의 봉수대를 볼 수 있다.
The 18th-century Atlas of the Eastern Country shows five beacon stations in Dongnae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re were seven beacon stations in Busan

in the dynasty’s early period and five toward its end, with the region’s
통신 초기 막중한 임무 띤 간비오산 봉수대 first line of defense being the station at Ganbiosan Mountain, at the
부산은 멀리 바다로부터 출몰하는 이양선 등의 정보를 탐색 top of Jangsan Mountain, near Haeundae Beach. This beacon station
하고 통보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이 was in close contact with the Left Naval Headquarters, serving as
있던 곳이다. 동래부산에는 조선 초기 7곳, 조선 후기 5곳의 봉수 the first frontier station on the southeast coast. Ganbiosan linked up
대가 있었는데, 그중 해운대 장산 자락 정상에는 지역 방어의 최 with other coastal stations at Namsan Mountain, Imnangpo Port, and
전선 ‘간비오산 봉수대干飛烏山烽燧臺’가 있었다. 간비오산 봉수대는 Aipo Port, converging at Namsan Mountain (also called Bongjisan)
당시 좌수영과 아주 신속하고 긴밀한 통신체계를 이루었는데 특 at Andong, from which messages were passed along to the beacon
히 이 봉수대는 우리나라 동남해안 연변봉수의 출발지로, 간비오 station at Mongmyeonsan Mountain in Seoul. The Ganbiosan station,
산 봉수 ~ 남산 봉수 ~ 임랑포 봉수 ~ 아이포 봉수 등으로 해변을 therefore, represented the first crucial link in communication. While
따라 이어지고 다시 안동 남산봉지산 봉수에서 합해져 서울 목면산 the date of its construction isn’t known for certain, it’s presumed to
봉수로 전달된다. 이처럼 통신 초기의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던 have been built at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and it continued to
간비오산 봉수대는 그 설치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진 않으나 serve as a lookout for enemy ships around Haeundae for about 700
고려 말부터 설치됐던 것으로 추정되며, 갑오개혁1894에 이르기까 years, until the Gabo Reform of 1894. It was the oldest beacon station
지 약 700여 년간 해운대 일대에서 왜적을 감시한 곳이다. 부산에 in Busan, along with the station at Hwangnyeongsan Mountain.
서는 황령산 봉수대와 함께 가장 오래되었다. The Ganbiosan Mountain beacon station is mentioned in Sejong
간비오산 봉수대에 대한 기록은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 1530 sillok jiriji (Geography Section of the Annals of King Sejong) in 1454
년 《동국여지승람》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18세기 제작된 <해 and Dongguk yeoji seungnam (Augmented Survey of the Geography
동지도>, <여지도> 등의 지도에 간비오산 봉수대가 표기되어있 of Korea) in 1530, and the station is also marked on atla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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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서구 암남동 천마산 정상에 있는 석성 봉수대
Stone beacon station on the summit of Cheonmasan Mountain, Amnam-dong, Seo-gu, Busan

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 왜인 구청에 관계되는 prepared in the 18th century, including Haedong jido and Yeojido.
기록들을 연월일 순으로 모아 필사한 책, 《왜인구청등록》에는 간 Furthermore, the names of soldiers at the Ganbiosan garrison and
비오산 봉수대에서 근무한 봉군의 실명 그리고 그들의 활약 등이 their activities appear in Waein gucheong deungnok, a late Joseon
기록되어있다. Dynasty compilation of requests made by Japanese individuals,
특히 《왜인구청등록》 4권에는 “이번 달 초7일 신시申時; 15시~17시즈 arranged in chronological order.
음에 황령산 봉군 이창군과 간비오산 봉군 김득성이 고한 내용 The fourth volume of Waein gucheong deungnok contains the
에, 조선 배인지 왜선인지 분간되지 않은 배 2척이 물마루로 나온 following account: “In the Hour of the Monkey [3–5 p.m.] on the
다고 하였고…”라는 기록이 있다. 해당 글은 1677년의 내용으로, seventh day of this month, two ships were spotted on the crest of the
임진왜란이 끝난 지 79년이 흘러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갈 때 wave, though it was unclear whether they were Korean or foreign.
지만, 최전선에 해당하는 황령산 봉수대와 간비오산 봉수대가 계 This information was reported by Lee Chang-gun, a member of the
속해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책, 같은 해의 6월 19일 자 garrison at Hwangnyeongsan Beacon Station, and Kim Deuk-seong,
에도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사사로이 무역 밀매를 하는 일본인 a member of the garrison at Ganbiosan Beacon Station.” This record
들의 왜선이 들어왔을 때 감시를 잘못하여 배를 놓친 본부의 황 was made in 1677, by which time some degree of stability had been
령산과 간비오산 두 곳의 봉군이 모두 관측을 잘못함을 면치 못 restored, 79 years after the Japanese invasions. Even so, it shows that
하였기에, 잡아 와서 중하게 곤장을 쳤다.” 이는 각 봉수대 봉군 the two beacon stations were still in operation.
의 역할이 얼마나 엄중했는지를 알게 한다. Another interesting account in that volume appears in the entry

for June 19 of the same year: “The garrisons at the beacon stations at

Hwangryeongsan and Ganbiosan were held responsible for failing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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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하구 다대동 두송산에 있는 응봉 봉수대
Eungbong beacon station on Dusongsan Mountain, Dadae-dong, Saha-gu, Busan

인류 평화를 위한 ‘평화 봉수대’로 observe Japanese ships engaging in illicit trafficking for private gain.
역사 속에 묻혀있던 간비오산 봉수대는 부산 관방유적의 하 Therefore, all the soldiers were brought in and given a severe caning.”
나였지만, 이제는 군사시설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곳에 담긴 당 This section shows how seriously the duties of the beacon station
시 사람들의 삶에 애환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봉군의 지 garrisons were taken.
게에 담긴 봉수대 살림살이에 대한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야 할
때가 되었다. 앞으로 봉수대는 전쟁을 대비한 횃불이 아닌, 인류 A new role for the beacons: A signal of peace for humanity
의 평화를 희망하며 올리는 평화의 횃불, 평화의 봉수대로서 역 Historically speaking, the long-forgotten ruins of Ganbiosan beacon
할 하길 기원해본다. station are part of Busan’s fortifications. But in addition to their

military function, we should focus on what such beacon stations can


글 황 구 기장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장
사진 황 구, 해운대문화원 tell us about the joys and sorrows of their age. The time has also come

for us to pay heed to the stories of the soldiers who were stationed

there. My hope is that, in the future, the beacon fires will serve not as

a warning to prepare for war, but as a hopeful sign of world peace.

Written by Hwang Gu, head of the local history center at the Gijang Cultural
‘지역N문화’ 누리집에서 Center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Photography courtesy of Hwang Gu and the Haeundae Cultural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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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느린 마을 기 행 ①

봄의 서정이 깃든
그 길에 서다
남양주 조안슬로시티

느리게 걸어야 제격인 곳이 있다. 봄 한가운데 자리한 그곳엔 여


러 길이 뒤섞여 있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산길과 솔향이 그
윽한 솔숲길, 따사로운 햇살에 물비늘이 춤추는 강변길, 그리고
때를 놓칠세라 농사에 한창인 들길과 봄기운이 한껏 깃든 고샅
길이 있다. 수도권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남양주시 조안면
의 슬로우길이다. 볕 좋은 봄날, 그 길을 걸었다.

Walking the Paths Filled with Spring Lyricism:


Slow City Paths in Joan-myeon, Namyangju
There are certain places that just seem to be made for
taking slow strolls. There’s one such place with a network
of walking paths, bursting with the energy of spring. A
mountain path with azalea in full blossom, a pine forest
path fragrant with the scent of pine, a riverside path with
the sunlight glistening on the water, a field path through
the midst of the busy farms, and a narrow countryside
path where one can feel the spring in the air. This is Joan-
myeon, in Namyangju, designated as the first Slow City in
the Seoul metropolitan area. I took a stroll through Joan’s
Slow Paths on a sunny spring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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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Slow City T ravel

한음이덕형별서터 물길을 따라 조성된 다산생태공원


Dasan Eco Park, created along the waterway

변협·변응성장군묘
송촌2리마을회관

물의 정원
운길산역
봉용골 전망대

마진산성 전망대

걷기 여행자는 물론이고 자전거 여행자들에게도 인기만점인 물의 정원 다리


Bridge in the Garden of Water, popular among pedestrians and cyclists alike

다산 생가 여유당
봄날의 다양한 색으로 물든 여유당
Yeoyudang, decked in springtime col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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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In the footsteps of “Dasan” Jeong Yak-yong
2010년 남양주시 조안면은 수도권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 In 2010, Joan-myeon, Namyangju, was designated as a Slow City
되었다.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조안면은 도시인에게 편안한 쉼 through the Italy-based international Cittaslow movement, the first
터로 자리매김했다. 조안면은 북한강의 빼어난 경관은 물론이고 such city in the Seoul Metropolitan Area. In a decade’s time, Joan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학문과 삶을 엿볼 수 있는 다산유적지 등 has become a comforting relaxation space for the urban population.
문화유산까지 품고 있다. 게다가 이맘때 걷기 좋은 길이 여럿 있 Joan is not only surrounded by the superb scenic beauty of the
다. 다산 정약용을 테마로 조성한 다산길 5개 코스와 슬로시티길 Bukhangang River, but it also includes the Dasan Heritage Site,
이 대표적이다. 이들 가운데 슬로시티길은 약 7km 안팎이어서 where the cultural heritage of Jeong Yak-yong (pen name Dasan,
초보자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편안하게 봄날을 만끽하며 길 1762–1836) allows a glimpse into his life and scholarship. Joan-
을 걷노라면 문뜩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새가 편안히 깃든다’ myeon also has a number of paths that are ideal for walking at
라는 조안鳥安의 이름이 허풍이 아니구나. this time of year. The Five Dasan Paths themed around Jeong Yak-
다산은 조안에서 태어나 조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산유적지는 yong, and the Slow City Path are particularly lovely. The Slow City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과 묘역, 다산기념관 등으로 꾸며져 있다. Path is only about seven kilometers, which is not too hard, even
올곧게 뻗은 길을 따라 여러 조형물이 줄지어 있다. 대부분이 다 for beginners. The name “Joan” means “a place where birds dwell
산이 남긴 500여 권의 저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이다. 특히 peacefully.” Walking along the path on a beautiful spring day, I hear
눈에 띄는 것은 거중기다. 1792년 정조의 명을 받아 수원 화성을 the happy birds chirping, and I realize that there could be no better
건설할 때, 다산이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만든 발명품이다. 다산 name for such a place as this.
은 거중기를 이용함으로써 수원 화성 공사 기간을 2년 9개월로 Joan-myeon is the place where “Dasan” Jeong Yak-yong was
단축했다. 경내에 들자 여유당與猶堂이 고즈넉한 운치를 자아낸다. born and ultimately passed away. The Dasan Heritage Site consists
여유당은 다산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살 때 지은 당호다. 여유 of his birthplace, called Yeoyudang, his grave, and Dasan Memorial
당은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 Hall. Along the straight path stand various structures. Most of them
을 두려워하듯이”라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대목을 따온 것 are works inspired by the more than five hundred books Jeong Yak-

yong wrote. The most notable structure is called geojunggi. It is


다산 정약용이 발명한 거중기 a device that Jeong invented using a pulley system, when he was
Geojunggi, a pulley system invented by Jeong Yakyong
commissioned by King Jeongjo to build Hwaseong Fortress in Suwon.

The use of this tool shortened the construction period of Hwaseong

Fortress to two years and nine months. Stepping onto the heritage

site grounds, Yeoyudang evokes a tranquil atmosphere. Yeoyudang

is the name Jeong gave to his childhood home upon his retreat to his

hometown after resigning from public office. The name comes from

the following phrase in Laozi’s Daodejing (Book of the Way) : “To be

careful (yeo) as if one crosses a river in winter; to be cautious (yu) as if

one fears one’s neighbors.” The name embodies Jeong’s will “to behave

carefully and live cautiously in every affair as if stepping on thin ice.”

The original building is known to have washed away in the great flood

in 1925; the current structure was restored in 1975. Spring flo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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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운치가 느껴지는 여유당 물의 정원 다리 주변에 꽃잔디가 만개했다.
Yeoyudang, charming in its serenity Moss phlox in full bloom beneath the bridge in the Garden of Water

으로 ‘매사에 살얼음을 건너듯 신중하게 처신하고 경계하며 살겠 around Yeoyudang are now in full bloom, including yellow forsythia,
다’라는 뜻이 담겼다. 당시 건물은 1925년 대홍수 때 떠내려갔다 pure white camellias and bridal wreaths, and plum blossoms.
고 한다. 지금의 여유당은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A spring symphony resounds
그 길에 서면 봄의 교향곡이 울려 퍼진다 The Slow City Path is created around the Eco Experience Villages
슬로시티길은 조안면 진중리, 송춘리 생태체험마을과 수종 in Jinjung-ri and Songchun-ri and the temple grounds of Sujongsa
사 일원에 조성돼 있다. 출발지는 운길산역이다. 길은 시작과 함 Temple. It begins from Ungilsan Station and leads to a rural village,
께 시골 마을로 이어진다. 마을은 봄볕에 잠든 고양이처럼 한가롭 a village relaxed and idle like a cat dozing under the spring sun. On
다. 구불구불 이어진 고샅길에 들꽃이 만개했다. 바쁜 일상이었다 the narrow, winding path, wildflowers are in full bloom. Easy to
면 무심코 지나쳤을 들풀이 아니던가. 허리를 숙여 한참을 구경해 overlook in the hustle and bustle of everyday life, here I can stop and
도 좋다. 이곳은 느리게 사는 게 미덕인 동네, 슬로시티니까. bend down to gaze at them for a long time, because this is a Slow
고샅길을 벗어난 길은 예봉산 기슭으로 가파르게 오른다. 솔숲에 City, where taking your time is a virtue.
화룡점정을 찍듯 연분홍 진달래가 피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진 Veering away from the narrow path, I run into a path climbing
달래꽃이 흐드러진다. 봄이 혼자 오기 머쓱했던지 진달래꽃을 잔 sharply up to the foot of Yebongsan Mountain. Like a finishing
뜩 데리고 온 것이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던 김소월 시인 touch to the pine forest, the first few azalea buds appear in pale
의 진달래꽃은 눈물 대신 환희에 찬 함박웃음으로 맞아준다. 슬 pink. Now, look! The azaleas have blossomed splendidly! Perhaps
로시티길에서는 진달래꽃이 주인공이다. 숲길은 소나무와 진달 the spring was too shy to come alone, so it brought a heap of azaleas
래가 마중을 나왔다가 다시 배웅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는 사이, along with it. The azalea flowers, which, in the poetry of Kim Sowol,
길은 진중2리 생태체험마을을 지난다. 길섶에는 봄나물을 깨는 have portrayed the subdued sorrow that lets not a single tear drop,
일손도 있고, 밭일에 나선 주름진 일손도 있다. 그들 모두 일상을 greet visitors with a bright smile of delight rather than tears. The
보내고 있지만 분주하거나 고단해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조 azaleas are the main attraction of the Slow City Path. On the forest
물주가 정해놓은 시간에 따라 순응하며 여유롭다. 2011년 세계유 path, pine trees and azaleas greet and send off visitors in turn. Here,
기농대회를 기념해 건립한 팔각정에 올라 걸어온 길을 눈으로 되 the path passes through the Eco Experience Village in Jinjung 2-ri.
짚는다. 눈도장을 찍듯 천천히 걸어서일까, 되짚어 보는 길이 눈 People are gathering wild herbs along the grassy roadside, and
에 선하고 밟았던 땅과 흙의 질감이 다시 느껴지는 듯하다. 한껏 farmers with wrinkled faces work in the fields. They are hard at work
여유를 누리고 다시 길을 나선다. 역시 진달래가 방긋 웃는 솔숲 on their everyday tasks, but they do not look agitated or worn out.
으로 길이 이어진다. 먼발치에 북한강이 아늑히 보이는 길을 걷 Everything and everyone follow their own timeline, so life is carefree.
다가 발길이 머문 곳은 대를 이어 무관武官으로서 나라를 지킨 변 At the octagonal pavilion built in celebration of the Organic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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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변응성 장군 부자 묘다. 변응성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왜구와 Congress in 2011, I retrace the path that I have just climbed up.
맞서 내륙의 이순신이라 불릴 정도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아버 Maybe because I walked slowly, as if to carve every scene deep into
지 변협 장군은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해 약탈 my mind, when I retraced the path, it seems as though I could see
과 노략질을 일삼은 을묘왜변명종 10년, 1555 때 왜군을 물리친 바 있 the path unfold just before my eyes and feel the texture of the earth
는 무관이다. that I had just trod. After stopping to rest and relax for as long as I
길은 어느덧 숲길을 벗어난다. 빼곡하게 이어진 비닐하우스가 대 pleased, I set out to walk again. The path leads to another pine forest
신 펼쳐진다. 유기농 쌈채와 딸기 등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다. where I again occasionally encounter the radiant smile of the azaleas.
먹골배 농장도 눈에 띈다. 새하얀 배꽃이 만개해 팝콘이 주렁주 Walking down the path from where I can see the Bukhangang River
렁 매달린 것 같다. 천만 인구가 모여 아옹다옹 살아가는 수도권 at a distance, I arrive at the graves of General Byeon Hyeop and
에서 농촌의 모습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니, 역시 슬로시티다운 General Byeon Eung-seong, who protected the nation generation
면모다. after generation. General Byeon Eung-seong rendered such

distinguished service against the Japanese invaders during the Imjin

Waera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at he was called Yi


벚꽃이 만개한 강변길을 따라 하이킹을 하고 있다. Sun-sin of the inland. His father Byeon Hyeop was a military officer
Cyclists ride along the riverside under full-blown cherry blossoms
during the Eulmyo Waebyeon, the attack by Japanese marauders in

1555 (the 10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who fought off the

invaders at Gangjin and Jindo Island of Jeollanam-do who had come

to loot and plunder the Korean people.

Before I know it, I have come to the end of the forest path. I see

a dense array of vinyl greenhouses in front of me. They grow organic

vegetables, strawberries, and more. I can also see the Meokgol pear

orchard. The pure white pear blossoms in full bloom look as though

popcorn is growing from the trees. Even here in the Seoul Metropolitan

Area, where a population of 10 million people live crowded together,

Joan allows people to wholly feel the life of a farming village. I would

say this is what makes it worthy of the name Slow City.

Life flows like the idle river


The Bukhangang River, along which the bicycle route runs, shows

itself when one comes out of the Agricultural Experience Village.

In the autumn of the year he turned 57, Jeong Yak-yong returned

to his hometown of Joan after being released from exile. After his

return, he reorganized his intense life to prepare himself for his

final years. It was around this time that he completed the unfinished

Mongmin sismeo (Handbook for Tending the People) and published

Heumheum sinseo (Toward a New Jurisprudence) and Aeon gak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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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여유로운 삶이 흐른다 (Realization of the Errors in the Everyday Terminologies). Perhaps
농촌체험마을을 벗어나면 자전거길과 맞닿은 북한강이 모 Jeong was able to savor the latter years of his life to the fullest
습을 드러낸다. 다산 정약용은 57세 되던 해 가을에 유배를 마치 because he had the idly flowing Bukhangang River within easy reach.
고 고향 조안에 돌아왔다. 그는 이후부터 치열한 삶을 정리하며 여 When we are too wrapped up in the hectic routines of our life, we
생을 마무리해 갔다. 미완으로 남았던 《목민심서》를 완성한 것도, tend to overlook and miss out on many things. At times like that,
《흠흠신서》와 《아언각비》를 세상에 내놓은 것도 그 무렵이다. 그 we need to take a step back and look back on things. In that regard,
가 만년의 삶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었던 까닭은 유유히 흐르는 북 living a relaxed life communing with the river must have served as
한강이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일상을 바쁘게 살다 보면 놓 the best medicine and a time for recovery.
치고 흘리는 것이 많다. 그럴수록 한 박자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Stagnant water is bound to rot, but a flowing river does not.
되짚는 습관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강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삶 That is why rivers are called lifelines. Wavelets glisten on the water’s
을 사는 것은 최고의 명약이요, 회복의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리라. surface like jewels, and the cool breeze running across the river
물은 고이면 썩기 마련이지만, 흐르는 강물은 그렇지 않다. 그래 penetrates deep into the lungs. The mind that became agitated
서 강을 생명의 젖줄이라 부르지 않던가. 수면에 크고 작은 물비 amidst the life hard-pressed for time is suddenly refreshed. That’s
늘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수면을 박차고 오른 청량한 바람이 폐 not all. The unhampered view of the natural scenery that was not
부 깊은 곳까지 밀려온다. 시간에 쫓겨 살던 각박한 머리가 정리 visible on the forest path seems to clear the soul. The paths here even
되는 듯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숲길에서 느끼지 못했던 탁 트인 have beautiful names such as the Water Scent Path, Water Mind
풍광에 영혼까지 맑아지는 기분이다. 물향기길, 물마음길, 물빛 Path, and the Water Color Path. Among these beautiful paths, if I
길 등 길 이름마저 예쁘다. 여러 길 가운데 으뜸을 꼽으라면 아치 had to choose one, I would choose the path around the arch-shaped
형 다리 물의 정원 다리 주변이다. 다리 앞에는 커다란 액자 조형 bridge on the Garden of Water. Installed at the end of the bridge is a
물까지 설치해 놓았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순과 봄 내음을 잔 huge frame-shaped structure. The path where the sprouts shoot out
뜩 머금은 꽃들이 봄의 교향곡을 울리는 길, 슬로시티길은 그렇 in green and the flowers filled with the scent of spring play a spring
게 마무리된다. symphony—that is how the Slow City Path comes to an end.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Written and photographed by Im Unseok, travel writer

여행 정보 Travel Course
• 걷기 코스 운길산역~마진산성 전망대~봉용골 전망대~생태체험 • Walking Tour Course Ungilsan Station → Majinsan Fortress
마을~유기농대회 팔각정~변협·변응성장군묘~한음이덕형별서터~ Observatory → Bongyonggol Observatory → Eco Experience
Village → Organic World Congress Octagonal Pavilion → Graves of
송촌2리마을회관~물의 정원
General Byeon Hyeop and General Byeon Eung-seong → Site of
• 여행 팁 운길산역 주변에 자전거 대여소가 있으며 운길산역과 물 “Haneum” Yi Deok-yeong’s Farming House → Community Hall of
의 정원에 주차장이 있다. 물의 정원은 운길산역 1번 출구에서 도 Songchon 2-ri Village → Garden of Water
보 10분 거리이다. •Travel Tips There is a bicycle rental shop near Ungilsan Station,
and there are parking lots at Ungilsan Station and the Garden of
• 문의
Water. The Garden of Water is a 10-minute walk from Ungilsan
물의 정원 031-590-2783(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398)
Station, Exit No. 1.
다산유적지 031-590-2837(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
•Contact
Garden of Water 031-590-2783 (Bukhangang-ro 398, Joan-myeon,
Namyangju-si)
Dasan Heritage Site 031-590-2837(Dasan-ro 747 beon-gil 11,
Joan-myeon, Namyangju-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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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팔도 음 식

준치무침
Spicy raw white herring sal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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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Pr ovinc ial Cuisine

조선 최고의 미식가 허 균도 반한 ‘준치’


White Herring, Late-Spring Treat:
A Favorite of Heo Gyun, the Most Demanding
Gourmand of the Joseon Dynasty
봄이 무르익어 그 정취가 절정에 이를 즈음, 우리의 미각도 한껏 As the flowers of spring blossom on the bough, our
고조된다. 이때의 별미로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알배기 꽃게, appetites return, raising the question of what the finest
통통한 갑오징어에 솥뚜껑만 한 광어까지 다양한 미식 거리가 delicacy is at this time of year. There are a number of
있지만, 오월에는 뭐니 뭐니 해도 ‘준치’다. 준치는 잔가시 덕분 candidates—blue crabs crammed with roe, fattened
에 신선도를 잃어도 팽팽한 모습을 유지할 수가 있어 ‘썩어도 준 cuttlefish, and flatfish as big as a serving tray—but
치’라는 말이 따른다. 또한 부드럽고 고소한 육질에 계절의 풍미 the finest of all is white herring. The white herring has
까지 담고 있어 이 무렵 최고의 별미로 꼽힌다. an elaborate network of fine bones that maintain its
structure even when its freshness has faded. No wonder
Koreans like to say, “White herring is worth it, even
after it goes bad.” Along with its soft and savory flesh,
this fish has a seasonal charm that makes it my culinary
recommendation for this time of year.

옛날부터 별미로 통했던 ‘준치’ White herring, an age-old delicacy


5월 준치는 예로부터 별미 중의 별미로 꼽혀왔다. 본래 ‘보리 White herring in May has long been regarded as one of the finest of
벨 때가 준치 철’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수온 상승 등으로 그 철이 foods. In fact, it’s in season right now—people once said it was best
약간 앞당겨졌으니 지금이 제철이다. 《난호어목지》1820년경 서유구가 around the barley harvest, but the schedule has been pulled forward
저술한 어류학에 관한 기술서에도 준치를 시어時漁, 한글로는 ‘준치’라 하고 because of rising levels of mercury. In Nanhoeomokji, a circa-1820
있다. 준치의 출몰 시기가 항상 음력 4, 5월로 정해져 있기에 ‘시時’ treatise about ichthyology, Seo Yugu referred to the fish by the
자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Chinese characters “時漁” (pronounced sieo, meaning “time fish”)
이맘때쯤이었을까? 조선 최고의 미식가로 꼽히는 허 균은 전라도 alongside the native Korean word “junchi.” Seo used the character
함열 귀양살이 중에 다음과 같이 준치를 못먹는 아쉬움을 토로했 for “time” because the white herring always appears right on time,
다고 한다. “이 지방에 준치가 많이 난다고들 해서 여기로 유배 오 namely in April and May by the lunar calendar.
기를 바랐는데, 금년 봄에는 나지 않으니 운수가 사납다.” Perhaps that’s why Heo Gyun, the epicure par excellence of the
이처럼 준치는 지금뿐만 아니라 허 균이 살았던 그 옛날부터 별미 Joseon Dynasty, was thinking about white herring while exiled in
로 통했다. Hamyeol, Jeollanam-do, at this time of year. “I’d wanted to be exi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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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since I’d been told that so many white herring are caught in the

area. But luck is against me: the fish didn’t show up this spring.” In

short, the white herring was a gourmet specialty back in the days of

Heo Gyun, just as it is today.

Koreans of bygone days thought that white herring was at its

finest when pine pollen was in the air. Surprisingly, the pollen is no

nuisance in the salt ponds of Sinan, Jeollanam-do. The sun-dried

salt ponds here produce a salt prized for its health benefits during

the 10 days or so when pine pollen is released from the black pines

clustered nearby. This pollen-infused salt is said to add a je ne sais

quoi to pastes fermented with it, as well as dishes seasoned with it.

The white herring appears in the Korean proverb, “White

herring is worth it, even after it goes bad” (roughly equivalent to the

English proverb, “A diamond on a dunghill is a precious diamond

still”). That’s a nod to the fish’s exquisite flavor, of course, but there’s

more to it than that. The white herring is a long, flat fish, riddled

with fine bones that can make it tricky to eat. But those very bones,

it turns out, are what keep the fish in good shape, as it were, looking
 치무침 한상

Meal featuring spicy raw white herring salad firm even when it’s past its prime.

Gentle flavor and unique texture are a gustatory revelation


Compared to the chewy flatfish (gwangeo) and grey mullet (sungeo),
특히 준치는 송홧가루 날리는 때에 맛보는 것을 최고로 쳤다. 해 the flesh of the white herring is very tender—so tender, in fact, that
송이 밀집한 전남 신안 등지의 염전에서는 송홧가루가 또 다른 대 you might say it melts in your mouth. To add a bit of crunch for
접을 받는다. 천일염전에 송홧가루가 날려 와 쌓이는 열흘 남짓 사 some contrast, mix it up with some water parsley, cucumber, and
이, 몸에 좋다는 명품 송화소금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 가지고 onion that have been smeared in red pepper paste and vinegar.
장을 담그고, 간을 맞춘 음식은 그 맛이 더 각별하다는 것이다. Throw in a serving of piping-hot rice, and presto! You’ve got yourself
준치를 두고 하는 “썩어도 준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만큼 a bowl of white herring bibimbap. Whether you’re looking for an
준치의 맛이 일품이라는 뜻도 있지만 다른 뜻도 있다. 납작 길쭉 eye-opening gustatory experience or just a solid meal, you can’t go
한 준치는 잔가시가 많아 맛은 있으나 먹기가 까다로운 생선이다. wrong with this dish.
하지만, 바로 이 잔가시가 몸짱 준치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비결 In the vicinity of Sinan and Mokpo, white herring is typically
이나 다름없다. 먹기는 불편하지만 그 잔가시 덕분에 신선도를 잃 served raw, tossed with various veggies in a sweet and vinegary
어도 팽팽한 모습을 유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red pepper sauce. (This kind of a combo is called hoemuchim.)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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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각을 깨우는 부드러운 맛과 독특한 질감 heaping plate of this just begs to be washed down with strong drink.
준치 살은 무척 부드럽다. 광어나 숭어 등의 쫄깃함과는 달리 Restaurants that know their way around raw white herring often
살살 녹는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정도다. 부드러운 식감에 아 add apricot vinegar or apple mash to the seasoning. That’s partly for
삭함을 더하고 싶다면 초고추장에 버무린 미나리, 오이, 양파 등 the flavor, but more importantly to counterbalance white herring’s
과 함께 먹으면 된다. 여기에 따끈한 밥 한 그릇을 더해도 좋겠다. distinctively fishy smell.
이름하여 준치회비빔밥! 입맛 깨우는 별미로도, 든든한 한 끼로도 The best way to experience white herring’s natural flavor is to go
이만한 게 없다. for hoe, as Koreans call fish served raw. Unlike the flat hunks most
신안, 목포 등에서는 준치를 주로 회무침으로 먹는다. 바로 회를 hoe is served as, white herring is sliced into long strips, in a manner
친 싱싱한 준치를 새콤달콤한 초고추장, 야채 등과 버무려 접시에 similar to gizzard shad (jeoneo), because of its fine bone structure.
수북이 담아 놓고 술잔을 기울인다. 준치회 좀 한다고 소문난 집 No matter how skillfully the chef dodges bones while filleting,
에서는 양념장에 사과를 갈아 넣거나 매실 식초를 넣는다. 맛도 some are bound to remain lodged in the tender flesh, impacting the
맛이지만 준치 특유의 비린내를 잡기 위해서다. texture. But that’s just part of what makes white herring unique and,
준치 본연의 맛을 즐기고 싶다면 ‘준치회’다. 준치회는 일반 횟감처 indeed, brings diners back for more.
럼 납작하게 포를 뜨지 않고 길게 채를 썬다. 그 모양이 전어회와 When the pine pollen is in the breeze, white herring is just
도 비슷한데, 잔가시 때문이다. 요령껏 가시를 피해 포를 뜬다 해 one of many specialties available to tickle our taste buds on Korea’s
도 워낙 연한 살 속에 가시가 많이 박혀 있어 조금의 질감은 남는 southwestern coast. During spawning season, diverse sea creatures
다. 이 또한 준치회만의 특징으로, 이 맛에 준치를 찾기도 한다. congregate offshore, including flatfish, red snapper (domi), cuttlefish
송홧가루 날리는 무렵의 서남해안 지역에는 굳이 준치가 아니어 (gabojingeo), and clams (bajirak). Blanch a well-fattened cuttlefish
도 우리의 미각을 충족 시켜 줄 별밋거리가 넘쳐난다. 산란철을 맞 to bite into salty yet savory perfection, bursting with the flavor of
아 광어, 도미, 갑오징어, 바지락 등 다양한 어족이 연안으로 몰려 the Yellow Sea. Or try some fresh clam soup (called bajiraktang),
들기 때문이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갑오징어를 데쳐 한입 오물거 the fresh clams simmered al dente in a spicy broth. Another option
리노라면 그 짭조름하면서 고소한 육질에서 서해의 풍미가 한가 is ganjanggejang, or raw crabs fermented in soy sauce until salty and
득 느껴진다. 시원한 국물에 쫄깃한 육질이 압권인 싱싱한 바지락 sweet, a dish best prepared with roe-laden she-crabs. Koreans fondly
탕은 또 어떠한가! 짭짤하고 달곰한 알배기 간장게장은 “공깃밥 refer to this dish as the “rice thief,” since you may well find yourself
추가!”를 부르는 최고의 밥도둑이다. ordering another bowl of rice to go with the flavor-packed crab.
‘코로나19’ 여파로 미각도 멈춘 듯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잘 먹는 While the coronavirus pandemic may seem to have put culinary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사회적 거리두기는 하되 제철 음식은 가까 adventuring on pause, I venture to suggest that eating well has never
이하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주춤했던 우리의 미각과 건강을 깨 been more important. Surely we need the wisdom to maintain social
우기 위해서라도…. distance while keeping seasonal foods close at hand. Not only for

our languishing palates, of course, but also for our health!

글 김형우 문화관광 전문기자


사진 목포시청 관광과 Written and photographed by Kim Hyungwoo, culture and travel repor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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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을 보 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만난


천방지축, ‘조랑말’

The Korean Pony: Equine Wickedness in the Realm


of the Morning Ca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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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T hr ough Foreign Eyes

옛날 한국에서는 호랑이를 상징적 존재로 여겼다. 흉포한 산군 Tigers are often thought of as the iconic creature of
山君 호랑이는 제 영역을 침범한 어리석은 자들을 오금 저리게 Korea’s past. They were the ferocious monarchs of the
했다. 그런데 19세기 말 한국을 방문하는 서양인들의 여행기를 wilderness and commanded respect from anyone foolish
잔뜩 메운 짐승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조랑말이다. enough to enter their domain. However, it might surprise
you to know there was another beast—a domesticated
animal—that dominated the travel accounts of
Westerners visiting Korea in the late 19th century. It was
the Korean pony.

서양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조랑말 Korean ponies in the eyes of Westerners


1890년대 한국에 머물렀던 캐나다 출신 선교사 제임스 스카 James Scarth Gale, a Canadian missionary in Korea in the 1890s,
스 개일은 자신의 책에서 조랑말에 한 장章 전체를 할애하며 이렇 dedicated an entire chapter of his book to the Korean pony. He
게 기술했다. “내가 만나본 모든 동물 중에서 내게 개인적으로 가 claimed: “Among the creatures that have crossed my path, the one
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한국의 조랑말이었다.” 그렇게 느낀 사람이 that has had the most influence on my personal character is the
개일만은 아니었다. Korean pony.”
구한말의 조선을 생생히 소개한 영국의 여성 여행작가 이사벨라 He was not the only one to share this sentiment.
버드 비숍은 조랑말을 타본 후 이렇게 썼다. “(내가 탄) 조랑말은 After mounting her pony, Isabella Bird Bishop, an English travel
매우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터벅터벅 나아갔지만 동료다른 조랑말가 writer who vividly portrayed late-Joseon-period Korea for English
다가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하이에나처럼 소리 지르며 필사적 readers, wrote, “He trudged along very steadily, unless any of his
으로 달려들었는데, 그때는 입에 물린 재갈이나 등에 탄 사람을 fellows [other ponies] came near him, when, with an evil glare in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his eyes and a hyena-like yell, he rushed upon them teeth and hoof,
조랑말들은 쉬는 시간에조차 골칫거리였다. 마구간에 있을 때도 entirely oblivious of bit and rider.”
여물통에 묶어 머리를 쳐들지 못 하게 하고 배에 뱃대끈을 매어 Even in rest, the ponies were troublesome. At the stables, the
서로를 공격하지 못 하게 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비숍 여사 ponies were chained to their troughs so that they could barely lift
는 또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성질 나쁜 동물조랑말이 괴성을 질러대 their heads and had a sling placed under their bellies in an effort
는 통에 나는 여러 날 동안 잠도 못 자고 밤을 새워야 했다. 이 동 to keep them from attacking one another, but it did little good.
물은 힘닿는 대로 옆에 있는 다른 동물들을 발로 차거나 물어대 According to Bishop, “On many a night I have been kept awake
어 요동치게 하거나 꽥꽥거리게 했는데, 매타작하고 욕설을 해대 by the screams of some fractious animal, kicking and biting his
어야 다소나마 질서가 회복됐다.” neighbors as well as he was able, till there was a general plunging

and squealing, which lasted till blows and execrations restored some

degree of order.”

While the ponies may have been troublesome, they were


1 말 탄 한국인과 마부들
Korean on a horse with handlers extremely valued for their surefootedness, ability to carry heavy

49
2

2 1890년대 말의 서울
Seoul in the late 1890s
3 한국인과 조랑말
Korean with a pony
4 조랑말에 편자 신기기
Shoeing a pony
5 한국 양반과 그의 말
A Korean gentleman with his ho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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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고뭉치이긴 해도 조랑말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 loads, and endurance. William H. Jackson, an American who visited
는 걸음걸이와 무거운 짐을 나르는 능력, 강한 인내력 덕에 매우 Korean in the mid-1890s wrote:
소중히 여겨졌다. 1890년대 중반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인 윌리 “My travelling stead was a singular-looking, shaggy little beast,
엄 H. 잭슨은 이렇게 기술했다. “내 여행 조수는 특이하게 생긴 equipped with a very aged saddle, and from his appearance and that
텁수룩한 작은 짐승으로 낡디 낡은 안장을 얹고 있었다. 한국의 of his companion, who was already loaded up with my baggage to a
조랑말에 대해 잘 모른다면, 그의 겉모습이나, 이미 위험할 정도 height that looked dangerous, no one unacquainted with the Korean
로 높이 쌓아 올린 내 짐을 진 그의 동료의 겉모습을 보고, 이 작 pony could have expected to find them fully equal to the task before
은 말들이 맡은 바 임무를 완벽하게 해내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 them.”
으리라.”
Were the ponies as wicked to Koreans?
조랑말은 한국인에게도 천방지축이었다? The ponies were not just cantankerous to Westerners; they were
조랑말이 서양인들에게만 심술궂었던 건 아니다. 한국 사람 equally ill-tempered to their Korean handlers. In the late 1880s, an
들에게도 그만큼 못되게 굴었다. 1880년대 말 어떤 미국 언론인 American journalist described the manner in which Korean ponies
이 한국 조랑말에 편자를 붙이는 장면을 묘사한 적이 있다. 그에 were shod. According to him, they were usually strapped up to poles
따르면, 대장장이가 작업하는 동안엔 조랑말을 기둥에 묶어 두 so that only two of their feet rested on the ground with a band placed
발만 땅에 닿도록 하고 배에는 뱃대끈을 감아서 몸무게를 지탱하 under their belly to help support their weight while the blacksmith
도록 했다. 그래도 성가시게 하는 조랑말은 바닥에 던진 후, 네 다 worked. However, if the pony was especially troublesome, “it was
리를 한꺼번에 묶어서 발길질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first thrown to the ground, and his four legs were tied together so
개일은 한국의 조랑말과 승강이를 벌이고 난 후, 가슴에 쌓이는 that he couldn’t possibly kick.”
“농축되고 지독한 악감정의 양”에 스스로 놀라 이렇게 고백했다. Gale, who was surprised at the “amount of concentrated evil” in
“나는 그 조랑말에 편자를 박는 것을 보고 싶다. 머리, 발, 꼬리까 his heart after dealing with Korean ponies, confessed:
지 하나로 꽁꽁 묶어서 가지를 넓게 뻗은 밤나무 아래에 눕혀 놓 “I love to see the pony shod—see him pinioned tooth and nail,
고 마을의 대장장이가 그 말의 발굽에 편자를 박아서 조랑말의 bound head, feet, and tail in one hard knot, lying on his back under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싶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그 조랑 the spreading chestnut tree, with the village smithy putting tacks into
말이 자신에게 준 무수한 고통과 시련에 합당한 ‘시적 정의’라고 him that brings tears to his eyes.”
주장했다. He claimed it was “poetic justice” for all of the pain and
어쩌면 1891년에 한국을 찾은 영국의 작가이자 화가 아놀드 헨리 tribulations the pony had caused him.
새비지 랜더의 표현이야말로 조랑말에 대한 가장 적합한 정의일 Perhaps it was Arnold Henry Savage Landor, an English writer
지 모른다. 그는 조랑말이야말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들쑤시 and artist who visited Korea in 1891, who summed up the Korean
는 네 발 달린 요물’이라 천명했다. pony the best. They are, he declared, the “equine wickedness in the

Realm of the Morning Calm.”

글·사진 로버트 네프 칼럼니스트, 왕립아시아학회 극동지부 회원 Written and photographed by Robert Ne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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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조선 人 LO V E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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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 자를 어서 끌어내지 못할까!” 분기탱천한 사또가 호통치자 구실
아치들이 나섰다. 그리고 거지 행색의 선비를 잔칫상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때 촉석루 바깥에 숨어있던 역졸들이 함성을 지르며 쏟아져 들어왔다.
“암행어사 출두요!” 사또와 아전들은 사색이 되어 황급히 누각 아래로 내
려갔다. 거지 선비, 아니 어사가 높은 자리에 앉자 수령들은 사모관대를
갖추고 뵙기를 청했다. 예가 끝난 후, 어사는 문제의 기생을 데려오게 하
고 그 어미도 불러들였다.
《청구야담》 권7 ‘촉석루의 암행어사’

촉석루의 암행어사,
사랑을 심판하다

사랑을 심판하러 온 암행어사의 대명사


어쩐지 친숙한 대목이다. <춘향전>의 암행어
사 출두 장면이 떠오른다. 그런데 무대가 남원이
아니다. 춘향이 그네 타던 곳은 광한루인데, 여기는
촉석루란다. 진주를 상징하는 명소다. 그렇다면 촉
석루에 출두한 암행어사는 대체 누구였을까? 이
이야기의 출처는 19세기 중엽에 편찬된 것으로 추
정되는 《청구야담》이다. 편찬자는 알 수 없지만, 민
간의 구전과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역사적 일화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어사 박문수의 일
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영조 때의 문신, 박문수는 이른바 암행어사의 대명
사다. ‘암행어사暗行御史’는 은밀히 지방관을 감찰하
고 민심을 살피는 직책이다. 설화 속에서 그는 탐
관오리의 비리를 밝히는 정의의 사도이자,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고충 해결사였다. 《청구야담》
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색다른 임무를 맡긴다.
박문수를 ‘사랑의 심판자’로 등장시킨 것이다. 일화
에 따르면 박문수는 그의 젊은 시절 진주에 부임한
외숙부를 따라왔다가 한 기생을 보고 홀딱 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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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돌아가지 않고 ‘책방 도령’으로 눌러앉았다. 로 마음을 표시하려 했습니다. 누추하지만 저의 집
기생도 장래가 촉망되는 사또의 조카가 싫지 않았 에서 머무십시오. 곧 따뜻한 밥을 차리겠습니다.”
다. 청춘남녀는 사랑에 푹 빠지고 만다. 같은 날 죽 《청구야담》 권7 ‘촉석루의 암행어사’

기로 맹세할 만큼 뜨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서재


에 있던 박문수는 물 긷는 여종을 두고 여러 사람 이 이야기에선 흥미롭게도 여종이 일편단심의 절
이 비웃는 소리를 듣는다. 여종이 못생겨서 서른이 의節義를 지킨다. 《춘향전》으로 치면 춘향이 아니라
다 되어도 음양의 이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여종 향단이 주인공이 된 셈이다. 박문수는 여종의 정성
을 측은히 여긴 책방 도령은 그날 밤 여종을 불러 에 감동하는 한편 의를 저버린 기생을 응징하기로
동침한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박문수는 얼마 후 상 한다. 다음 날 그는 잔치가 열리는 촉석루로 향한
경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다. 눈코 뜰 다. 《춘향전》의 이몽룡처럼 말석에 앉아 푸대접을
새 없이 바쁜 나날 속에 진주와의 연통은 끊어지고 감수했다. 잔치가 무르익으며 병마절도사와 본관
만다. 그가 다시 이곳을 찾은 것은 10년이 지난 후 사또가 기생에게 수작을 걸자 어사는 행동을 개시
였다. 그 사이 임금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경상우도 했다. 술 내놔라, 음식이 이게 뭐냐, 시비를 걸다가
암행어사가 된 것이다. 진주에 당도하자 어사는 죽 냅다 출두한 것이다. 암행어사가 심판한 것은 변학
고 못 살던 그 기생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임무를 도 같은 악덕 수령이 아니었다. 대신 절의를 지키
수행하려면 신분을 감춰야 했기에 박문수는 거지 지 않은 여인이 심판대에 올랐다. 그는 기생에게
행색으로 꾸며 기생집을 찾아갔다. 문밖에 서서 밥 태형笞刑을 선고하고 급수비汲水婢, 물 긷는 여종으로
을 구걸하니, 기생의 어미가 알아보고 방에 불러들 강등시켰다. 또 수절한 여종은 사랑하는 여인이라
였다. 불쌍하게 여겨 밥이라도 먹이려 한 것이다. 하여 상금으로 이백 냥을 내리고, 기생들을 통솔하
반면 기생은 옛 정인의 초라한 행색에 기겁하여 화 는 행수직을 맡겼다. 다음은 선고의 변辯이다.
를 내고 냉대했다. 게다가 다음날 병마절도사의 생
일잔치가 있다면서 눈길도 주지 않고 옷만 챙겨 떠 “예전에 나와 너의 애정이 어떠했느냐? 산이 무너
났다. 쓸쓸하게 기생집을 나선 박문수는 그 옛날 져도, 바다가 말라도 변치 않으리라 맹세했었지.
하룻밤을 함께한 물 긷는 여종에게 갔다. 기생과 오늘 내가 이 모양으로 왔더라도 너는 옛정을 생각
달리 여종은 꿈에 그리던 책방 도령과 재회하자 반 해 좋은 말로 위로하고 안부를 물어주는 것이 옳거
갑고 놀라워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박문수를 자 늘 어찌 그리 화만 냈느냐? 먹을 것은 안 주고 표
신의 오두막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허름한 주박만 깨뜨린다고 하더니, 진정 이를 두고 한 말
상자를 꺼내는데 안에 비단옷 한 벌이 들어있었다. 이로다.”
여종은 간곡히 그 옷으로 갈아입을 것을 청했다. 《청구야담》 권7 ‘촉석루의 암행어사’

“날이 이리 추운데…. 저는 서방님이 크게 현달하 기생의 절의까지 거론하는 이율배반의 사회


시리라 믿었습니다. 어찌 이 지경이 되리라 짐작했 아무리 야담집에 나오는 일화라지만 너무하다.
겠습니까? 이건 여러 해 동안 제가 물 길어 모은 삯 사랑을 심판하다니. 암행어사의 본분에 맞지 않는
이옵니다. 돈을 모아 비단을 사고 사람을 써서 지 다. 물론 박문수의 실제 행적과도 거리가 멀다. 사
어두었지요. 이생에 서방님을 다시 만나면 이 옷으 실 그는 암행어사로 활동한 적이 없다. 《영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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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면 그에게 주어진 소임은 ‘별견어사別遣御史’ 덕으로 삼고 ‘백성에게 널리 알려진’ 박문수의 이
였다. 암행어사가 아닌 임금의 특명을 받아 공개적 름으로 설파한다.
으로 파견된 것이다. 나라에 가뭄이 들고 홍수가 수절은 원래 ‘유교 국가’ 조선이 규중 여인들에게
날 때마다 박문수는 재난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요구한 사회 규범이다. 양반가 여자들은 남편이 죽
1727년 영남안집어사, 1731년 호서감진어사, 1741 은 뒤에도 재가再嫁하기 어려웠다. “재가녀 자손은
년 북도진휼사, 1750년 관동영남균세사 등 네 차례 문관과 무관직에 등용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조선
나 별견어사를 맡아 굶어 죽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시하기도 했다. 수절 문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누구보다 뛰어난 수 화는 조선 후기에 이르며 하층민에게까지 확산한
완을 발휘했기에, 영조 임금도 그를 깊이 신뢰했다. 다. 심지어는 기생의 절의까지 거론하는 이율배반
어사로서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밥이었다. 백성에 의 사회였다.
겐 밥이 하늘이다. 백성을 굶기는 탐관오리는 임금 진주 촉석루의 박문수도, 남원 광한루의 춘향이도
에게 처벌을 요청했다. 어사의 소임을 마친 후에도 전하고자 하는 바는 한 가지다. 수절하는 여자들에
현지를 왕래하면서 구휼이 잘 이뤄지는지 꼭 확인 게 복이 있나니, 세상의 찬양을 받을 것이라! 그럼
했다. 그 행적들이 구전으로 전해지며 살이 붙어 조선 남자들은 어째서 수절하지 않았을까? 왜 기
암행어사 설화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래서 어사 생과 여종에게 한눈팔았을까? 대체 뭘 믿고 허구
박문수의 이야기에는 그 시절 민초들의 삶이 오롯 한 날 첩질에 열을 올렸을까? 그것을 ‘풍류風流’라
이 담겨 있다. ‘촉석루의 암행어사’ 또한 당대의 풍 일컫는다. ‘풍류’라고 쓰고 ‘바람’으로 읽으면 된다.
속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일화에서 박문수가 사랑 바람 부는 세월 속에 수절 여인들의 ‘한恨’은 깊어
을 심판한 기준은 절의節義, 곧 절개와 의리다. 절의 갔다.
를 지킨 여종은 상을 받았고, 절의를 저버린 기생
글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은 벌을 받았다. 이른바 수절守節을 모든 여성의 미 그림 신경란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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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지역 따라 노 래 따 라

한국철도는 1899년 개통 이후 파란만장한 우리 근현대사가 펼쳐지는 동안 온 국민의 발이자 친근한 벗이


었다. 그러므로 대중의 희로애락을 담은 대중가요에 기차가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별의 부
산 정거장>, <비 내리는 호남선>, <고래 사냥> 등 기차가 등장하는 수많은 노래는 그 시대를 살던 대중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환희가 스며있다.

기차 타고 온
노래들

신문명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로망이 담겨있다.


그리고 <신고산 타령> 불행하게도 우리 철도는 호시탐탐 조선 병탄남의 영
토를 제 것으로 만듦을 노리던 일제에 의해 계획되고 건
신고산이 우르르 함흥 차 떠나는 소리에 설되었다. 경인선에 이어 경부선, 경의선이 차례로
구고산 큰 애기 단봇짐만 싸누나 완공될 때마다 일제는 야금야금 조선의 국권을 침
탈해갔다. 급기야 한일 강제 병합이 이루어질 무렵
개화기 때 유행했던 함경도 민요 <신고산 타령>의 엔 전국이 거의 철도망으로 연결되었다. 함경남도
첫 소절이다.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은 호남선 의 작은 마을 고산까지 기차가 다니게 된 이유다.
과 더불어 1914년 개통되었다. 민요에 나오는 ‘고 이때부터 조선의 백성들은 타율적이나마 ‘철도’라
산’은 원산 인근 작은 마을이다. 경원선 철로가 지 는 근대문명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이런 까닭
나면서 ‘신고산역’이 생기자 원래 있던 고산은 ‘구 에 기차를 바라보는 조선 사람들의 생각은 이중적
고산’이 되었다. 애절하면서도 구성진 가락이 일품 이었다. 침략자들이 타고 들어왔으므로 우르르한
인 이 민요는 도시로 떠나는 기차에 대한 애증을 ‘굉음’처럼 두려웠지만,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기
표현했다. 지축을 흔드는 ‘우르르’한 굉음과 ‘단봇 위해선 ‘단봇짐’처럼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이후,
짐’을 싸는 시골 처녀의 부푼 마음이 그것이다. 노 조선 민중은 철도를 통해 혹독한 인적, 물적 착취
래가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과 정서를 반영한다고 를 당하면서도 근대화의 혜택을 입는 역설적 상황
할 때 이 민요에는 신문명, 즉 기차에 대한 두려움 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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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린 피난의 경험이 서린 오로지 주소로 배달되는 편지를 통해서만 알 수 있
<이별의 부산정거장> 었다. ‘고향에 가시거든 한두 자 봄소식을 전해 주
해방의 기쁨도 잠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소서’란 가사가 애절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얽혀 남북이 분단되고, 곧이어 동서 냉전의 대리전 남한에서의 이산가족 상봉이 한 TV 프로그램을 통
이라 할 수 있는 한국전쟁을 치렀다. 수많은 사람 해 1983년에야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보
이 목숨을 잃었고, 남은 사람은 생존을 위한 사투 다 한 세대 전 이별의 장면을 담은 이 노랫말이 결
를 벌이며 고난의 피난길에 나섰다. 코 감정의 과잉일 순 없다. 이 노래는 당시 ‘세대경
험’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사의 고난의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결정체라 할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노랫말 속
유리창에 적어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 애달픈 이별이 전쟁에서 비롯되었단 점을 암시하
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 한두 자 면서 떠나가는 기차를 매개로 헤어짐이란 이산의
봄소식을 전해주소서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몸부림치는 몸을 뿌리치며 떠나가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기차에서 숨진 야당 대통령 후보를 추모하며 부른
<비 내리는 호남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사 3절이다. 이 노래는 한
국전쟁 직후 전쟁과 피난의 기억을 담아 박시춘이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작곡한 트로트 곡이다. 휴전 이듬해인 1954년 남 돌아서서 이 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인수가 불러 유명해졌으며,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 사랑이란 이런 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져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부산은, 몇 년 전 개봉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
인 것처럼 수많은 사람이 ‘한 많은 피난살이’를 했 1956년 대통령 선거, 자유당 후보 이승만에게 맞서
던 곳이다.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부산역에서 기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해공 신익희가 유세 도중 호
차를 타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가사의 주제 남선 열차에서 서거했다. 그러자 그를 지지하던 많
는 정든 연인과 이별을 앞둔 경상도 큰애기 사랑의 은 국민이 <비 내리는 호남선>을 부르며 그를 추
순애보다. 고향으로 떠나기 위해 기차에 오른 한 모했다. 나중에 이 노래는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청년이 플랫폼에 서 있는 연인을 향해 간절한 이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는 현직 대통령이던 이
별의 메시지를 김 서린 유리창에 몇 자 적는다. 기 승만과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격돌했다. 당시 이
차가 눈물의 기적을 울리며 떠나고, 이별이 아쉬 승만 정권의 부패에 실망한 국민들은 신익희에게
워 발을 구르며 몸부림치는 경상도 아가씨의 모습 열화 같은 지지를 보냈다.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이 보슬비 내리는 부산역 플랫폼에서 더욱 안타깝 신익희의 유세 때 자그마치 30만 인파가 몰렸다.
다. 발달한 통신수단 덕분에 언제 어디서나 연락 당시 서울 인구가 150만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30만
할 수 있고, 심지어 숨을 곳조차 없는 현대 사회의 인파는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그만큼 정권교
젊은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다. 하지만 그때 체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이 컸다. 하지만 애석하게
는 한 번 헤어지면 좀처럼 다시 만나기 힘든 시대 도 그는 투표 열흘을 앞두고 전라도 유세를 위해
였다. 전화는 물론 자동차도 귀했다. 연인의 안부는 전주로 가던 중 여수행 제33열차 안에서 뇌내출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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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청년들의 말과 행위를 부조리한 정치 권력이 억압
신익희의 죽음은 야당을 비롯해 그를 지지하던 많 하고 감시했다. 길 가던 청년이 장발이란 이유로
은 국민을 슬픔에 빠트렸다. 특히 그가 호남선 열 붙들려 머리카락을 잘리고, 처녀의 치맛자락이 짧
차에서 숨진 것이 정권교체를 바라던 대중의 정서 다며 우악스러운 경찰의 손이 가녀린 여성의 허벅
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이 노래를 애창하게 만들었 지에 눈금자를 들이대던 야만의 시절이었다. 그러
다. 이 때문에 <비 내리는 호남선>은 민주당 당가 므로 청춘들이 즐겨 찾던 경춘선 열차는 그들만의
로도 활용됐다. 또 노랫말을 신익희의 부인이 썼다 해방구였고, 여기서 부르는 노래와 춤은 더 강렬했
는 소문이 돌면서 가수 손인호가 작사·작곡가와 함 다. 이 노래는 젊은 청춘들이 미래의 보석과도 같
께 경찰에 붙잡혀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이 노 은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을 노래한다. 그러나 시
래가 신익희 서거 3개월 전에 작곡했다는 사실이 대의 그늘은 늘 불확실한 미래에 희망을 주지 못했
밝혀지면서 모두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다. 하지만 노래는 1등, 2등보다 3등 인생이 더 많
은 세상에서 보통 사람들과 완행열차를 타고 블루
청춘의 해방구, 경춘선의 정서가 담긴 오션을 찾아 떠나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고래사냥> 40년 전 고래사냥을 부르던 청춘의 가슴은 아직
식지 않았다. 지나간 추억과 낭만은 이제 ‘ITX청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춘’이란 기차 이름으로 남아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해 추억의 손길을 뻗게 만든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기차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는 이 밖에도 수없이 많
모두가 돌아앉았네 다. <대전 부르스>를 비롯해 야구장에 울려 퍼지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 는 <남행열차>, 명절 전후 단골로 등장하는 <고향
기차를 타고 역>, <녹슬은 기찻길> 등 기차를 소재로 한 수많은
노래는 이 땅을 120년 동안이나 내달린 기차를 타
아마 가수 송창식이 1975년에 부른 <고래사냥>을 고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모르는 70·80세대는 없을 것이다. 1970년대엔 통
기타를 들고 MT에 나선 대학생들이 주로 타는 열
차가 경춘선 완행열차였다. 그런데 그 시대는 젊은 글 손민두 한국철도(코레일) KTX 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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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오! 세이

지난해 3월부터 3권 분량의 장편소설 집필을


시작했다. 생애 처음 기획한 방대한 분량의 장편소
설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내용의 주제
가 인간의 운명을 다루는 것이라 더욱 큰 부담감
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장편을 쓰기 위한 준
비가 20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하니 말 그대로
‘필생의 작품’에 도전한 격이었다.
장편 작업을 진행하는 13개월 동안 엄청나게 많은

눈물 속에 물리적, 정신적 시련이 있었다. 어머니가 갑작스럽


게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병원에 입원해 삼 개월

피는 꽃 정도 투병하다 세상을 떠나고, 아끼던 제자가 세상


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는 교통사고를
당해 허리를 다치는 일까지 겹쳤다. 온전한 상태에
서 세 권 분량의 장편을 써도 숨이 막혀 전전긍긍
할 판국에 그와 같은 시련까지 겹치니 말 그대로
설상가상이 따로 없었다.
나는 시련이 올 때마다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
들였다. 어머니가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는 날마다 아침 여덟 시에 병원으로 가 담당 의사
의 회진을 기다렸고, 하루에 열 시간씩 병원에 머
무르며 묵묵히 어머니의 병상을 지켰다. 제자가 세
상을 떠났을 때는 그 슬픔을 가슴에 묻고 해바라기
를 하며 정서에 가득 스민 습기가 증발하기를 기
다렸다.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쳤을 때는 묵묵히 통
증이 스러지기를 기다리며 마음의 조바심을 다스
렸다. 세상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의 노정에는 막
히는 과정과 열리는 과정, 그리고 나아가는 과정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3개월의 시련을
견디며 장편소설을 탈고하고 나니, 세상에는 코로
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해 혼돈이 극에 달해 있었다.
국내 상황과 해외 상황이 생중계 상황처럼 다루어
지며 지구촌 전체가 환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장편소설을 탈고하고 나면 원 없이 여행을 다니리
라, 시련이 닥칠 때마다 나 자신을 달래곤 했었다.
하지만 장편이 끝나고 나니 문밖출입도 하기 어려
운 상황, 생애 처음 들어보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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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되는 시점에 이르러 있었다. 세상에 봄꽃이 지 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천으로 흐드러진데 그 꽃들을 구경 다니는 상춘객 아니다. 세상만사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니 자작자
의 행렬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봄마다 인산인해를 수 자업자득自作自受 自業自得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루던 올매화마을, 산수유마을, 쌍계사 벚꽃 십리 며칠 전 이학성 시인이 짧은 자작시 한 편을 문자
길, 윤중로 벚꽃길의 공허가 뉴스 화면을 스쳐 갈 메시지로 보내왔다. 코로나19 환란기를 보내며 나
때마다 세상 좋은 시절, 다 끝나버린 듯한 종말적 름 느낀 점이 짙게 밴 시여서 가슴이 선뜩했다. 그
분위기가 언뜻언뜻 스쳐 기분이 이를 데 없이 막막 제목이 <댓글러>였다.
해지곤 했다.
코로나19 환란기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인류 얼치기 기사보다는 댓글에 공감한다. / 세계 곳곳
의 유전자 속에 그와 같은 바이러스 전염병에 대한 의 공장이 멈춰서고 / 도로를 질주하던 자동차 행
충격과 공포가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일 터이다. 발 렬이 줄어드니 / 서울 뉴욕 파리 북경 할 것 없이
생 5년 만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800 대기질이 깨끗해졌단다. / 사회적 거리두기가 당면
만 명의 사망자를 낸 페스트를 비롯하여 5,000만 명 한 진실을 파헤쳤다. / 촌철살인적 탁견으로 정곡
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 3,600만을 사망에 이 을 찌른 / 두고두고 새겨봄 직한 댓글 전문을 여기
르게 한 에이즈 바이러스, 콜레라, 천연두, 매독, 결 옮긴다. / “지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 인간이 흉악
핵, 지카, 에볼라, 신종플루, 사스, 메르스 등등 듣는 한 바이러스, 코로나가 백신이다.” / 충분히 그가 옳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게 만드는 전염병은 인 아서 엄지척, 경의를 띄우나 / 쓸개즙을 사발로 들
류의 역사에 충격과 공포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이킨 듯 입가에 쓴맛이 괸다. / 우린 악랄한 지구의
단기간 기하급수적으로 전파되는 전염병은 인간에 약탈자, / 나 역시도 노략질에 가담한 패거리였다.
게 공포와 충격을 주며 인간 세상을 변하게 한다.
페스트는 급격한 인구 감소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는 결국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시
많은 일자리와 높은 임금을 구가하는 경제적 이득 간이다. 그동안 인류가 너무 무반성적이고 즉흥적
을 얻게 했다. 일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니 자연 인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데 대한 자각과
스럽게 노예제도가 없어지고 식량 부족을 걱정할 반성. 전 세계 3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에 갇혀
필요도 없게 된 것이다. 페스트 이전의 유럽 대부분 그런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면 분명, 세상은
지역이 기근과 빈곤에 시달린 걸 감안하면 놀라운 이전보다 나아지고 깊어지고 또한 넓어질 것이다.
사회적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매독으로 인한 얼마 전 문득 고등학교 시절에 즐겨듣던 쟈니 도렐
사망자가 늘어나면서 문란한 성생활에 경종이 울 리Johnny Dorelli의 <눈물 속에 피는 꽃L’immensità>이라는
리고 금욕적인 삶이 중시되는 풍조가 일어나는가 칸초네가 떠올라 유튜브에서 찾아 들었다. 그 까마
하면, 수인성 질병인 콜레라는 상·하수 시설과 청 득한 옛날 노래를 코로나19 환란이 극에 달한 시기
결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일깨워 주었다. 지금 전 세 에 왜 찾아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우리가 힘들
계적으로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19만 하더라도 국 게 관통하고 있는 이 시기가 ‘눈물 속에서 꽃을 피우
가적 방역 시스템과 검진 시스템, 그리고 확진자 관 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코
리 시스템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일깨우고 있다. 이 로나19가 지나가면 우리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전의 실패 경험을 이후의 상황을 위한 준비와 대처
능력 함양의 계기로 삼은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글 박상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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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한류 포 커 스

서태지와 아이들부터 1992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그룹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서태지보다 ‘아이들’이란 존재를 더 신기해했다. ‘서태지는 왜 백

방탄소년단까지 댄서를 두지 않고 댄서를 자신의 그룹 내에 멤버로 포함했을까?


저 웅얼거리는 노래는 멜로디인가, 아닌가?’ 필자는 MBC TV에
서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신인 그룹을 놓고, 전영록을 비롯한 당
대의 가수들이 랩이란 장르를 한편은 신기하게, 한편은 신랄하
게 비평하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돌 시대가 열리다 이내믹하게 노래를 이끌어 가는 ‘아이돌 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후 가요계는 대’가 열린 것이다. 이를 위해 대형 기획사
많은 것이 바뀌었다. 팬덤이니 랩이니 하 는 곡조차 집단 체제로 만들어 리스크를 최
는 말이 일상이 된 것도 그런 변화 중 하나 소화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여러 국적의
였다. 그리고 가요계는 H.O.T.의 등장으로 작곡가들이 모여들어 송 라이팅 캠프를 차
또 한 번 변화를 겪는다. 1996년 등장한 아 리고, 한 곡에 대해 50개 이상의 버전을 만
이돌 그룹 H.O.T.는 개개인의 가수가 아닌 들어서 실험 후, 치밀한 홍보 전략과 함께
집합체로서 아이돌이란 개념을 정립하는 아시아의 전 지역에 어필한다. 유창한 영어
데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노래 못지않은 댄 로 랩이 가능한 멤버의 영입도 두드러졌다.
스 실력으로 ‘노래하다’라는 개념을 ‘퍼포 처음에는 북미 출신이었지만 이어 태국이
먼스’란 개념으로 바꿔 놓은 그룹이다. 더 나 중국 멤버들도 영어만 가능하다면 오케
중요한 것은 H.O.T. 등장 이후로 대형 매 이! 2011년 ‘SM타운 라이브’가 프랑스에서
니지먼트 회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자 대성황을 이루고, 보아가 197위로 빌보드
본이 청소년을 육성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1 차트에 첫 진입 하면서 대형 기획사, 즉 아
H.O.T.를 ‘핫’이라고 발음하면 노땅으로 취 이돌 사관학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급받는, K–PopKorean Pop 또는 Korean Popular Music의 신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일대 사건 <강남스타일>
빅뱅, 샤이니, 슈퍼주니어, 원더걸스 등을 성공시키며 대형 기획사 2010년도만 해도 전 세계 인터넷의 ‘한류’ 언급량은 평균 5만8
는 가요계의 몸집을 계속해서 키웠다. 콘서트도 체육관이 아니라 천 건에 불과했다. 이마저 연관어 대부분은 ‘드라마’와 관련됐고, ‘K–
돔구장 정도는 되어야 했고, 적극적인 글로벌 팬덤들은 자신의 팬 Pop’은 2,412건을 기록했을 뿐이다. 이때까지는 K–Pop이 아닌 드라
덤명도 지을 만큼 또 다른 세력으로 커졌다. 또한 팬덤의 힘으로 본 마가 한류 열풍을 견인했고, 또 제아무리 글로벌 그룹임을 주장해
인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키운다는 자부심도 갖게 되었다. 동방신기 도, K–Pop 매출의 80%가 일본에서 나왔다. 이를 역발상의 전환으
란 이름처럼 중국을 제패하겠다는 국제적 전략이 통하고, 의미보다 로 진짜 글로벌화하겠다는 것이 기획사들의 최고 소망이었음은 물
발음에 치중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재미난 발음이 주는 후크송 론이다. SM은 보아, YG는 세븐, JYP는 비와 원더걸스를 북미 시장
의 전략도 아시아에 두루 먹혔다. 링딩동. 소리소리. 픽미픽미. 즉 비 에 전격 진출시켰다. 그러나 원더걸스 선미는 “1년 동안 50개 도시
트가 멜로디를 밀어내고 뼈대를 얹으면, 거기에 군무와 박자가 다 를 도는 이런 삶을 견디기 힘들다”며 2010년에 그룹을 탈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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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싸이가 2013년 5월 뉴욕 록펠러 광장에서 열린 <투데이 쇼>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2 방탄소년단이 2019년 5월 뉴욕 센트럴 파크 <굿모닝 아메리카>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모두의 마음속에 ‘글로벌’이라는 자신감을 심어준 일대 방탄의 기획사 ‘빅히트’는 소규모 기획사였다. 이 때문인지 대형 기
전환은 전혀 다른 곳,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2012년 7월, 획사가 팬들과의 소통 대신 신비주의 전략을 택한 반면, 방탄은 SNS
갑자기 유튜브에서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가 소위 ‘떴다’. 외국 란 시대의 산물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팬들과 적극 소통한다. 이것은
인들이 서툰 한국 발음으로 가사를 따라 하고, 오빠를 외치며 말춤 새로운 전략이었고, 전 세계에 아미방탄소년단 팬덤명의 씨앗을 뿌렸다.
을 추고, 강남이 어디인지 알고 싶어서 강남이란 단어를 검색하기 방송보다 공연이고, 리듬보다 화성이었고, 오락보다 메시지였다. 이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강남이라는 지정학적 관련 검색어가 25만 것은 안젤리나 졸리의 아들조차 K–Pop에 매료되어 한국으로 유학
9,534건으로 증가했다. 급기야 꿈이라고 여겼던 빌보드 차트 1위의 오게 만드는 마법적인 힘을 발휘했다. 방탄의 인기곡 <피 땀 눈물>
목전까지 가게 되면서 <강남스타일>은 세계를 한바탕 뒤흔들어 놓 의 노랫말에는 헤르만 헤세의 고전 ‘데미안’이 등장한다. 그들의 노
았다. 이 현상은 매우 특별한 점이 있었다. 싸이는 아이돌이 아니다. 래 중엔 철학적 각성을 의미하는 <에피파니Epiphany>란 곡도 있다.
이웃집 삼촌처럼 생긴 데다, <강남스타일>은 포스트 모던한 짬뽕 즉 이야기가 철저히 서구 친화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너 자신을
장르 그 자체였는데, 게다가 그 전파가 주로 유튜브에서 이루어진 사랑하라는 메시지’도 자기 계발을 사랑하는, 지극히 서구적인 개인
것이다. 이는 K–Pop이 아시아의 국지적인 인기를 등에 업은 마니아 주의적 문화 코드를 강조한다. 방탄은 그래미를 정복했고, 빌보드
음악이라는 세계인의 인식을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하지만 <강남 200에 4번째 1위를 달성했다.
스타일>의 글로벌한 인기가 우발적인 신드롬이나 해프닝이 아닐까 이제는 한국인 없는 K–Pop도 가능하다. 미국인들로만 이뤄진 남성
하는 우려도 존재했다. 4인조 그룹 EXP에디션EXP EDITION이 등장했고, 비非한국인 아시아
인들로 구성된 지보이즈Z-Boys와 지걸즈Z-Girls도 나타났다. 현지인으
방탄소년단의 등장, 그리고 로 구성된 K–Pop 콘텐츠 사업뿐만 아니라, 음원 유통과 도시 브랜딩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앞서 언급한 우려를 무색하게 하 사업에도 진출하고 있다. 이제 K–Pop은 유튜브와 인터넷을 통해 동
는 새로운 신드롬이 나타났다. 바로 소비되는 K–Pop을 감상하는 시성으로 승부하고 있다.
K–Pop으로, 희화화된 코믹한 K–Pop을 메시지와 멜로디가 있는 K–
글 심영섭 심영섭아트테라피 대표, 영화평론가
Pop으로 만든 방탄소년단(이하 ‘방탄’)이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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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북한 사 회 문 화 읽 기 ⑮

태양의 꽃
2

그리고,
불멸의 꽃
김 부자父子를 상징하는 김일성화花와 김정일화는
북한의 대표적인 우상화물 중 하나로, 이에 대한
북한 당국 및 주민들의 관심과 열정은 상상을 초 모든 장르 문학예술 작품의 소재와 주제
월한다. 2월 김정일 생일광명성절과 4월 김일성 생 김일성화는 1965년 초 인도네시아 보고르식
일태양절 행사 기간에 김정일화축전과 김일성화축 물원에서 발견된 난초과 석곡속의 한 품종으로,
전이 진행되는데, 한 외국인의 관람기에 따르면 1965년 4월 김일성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할 당시
북한 주민 중에는 단순히 꽃구경만 하는 것이 아 수카르노 대통령이 ‘김일성화’라고 작명한 후 교배
니라 노래도 부르고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다고 육종하여 1975년 평양에 보냈다. 이후 김일성 65
한다. 회 생일 때인 1977년 4월 주민들에게 처음 공개되
면서 1999년부터 매년 김일성 생일 행사들 중 하
나로 전시회를 진행해 오고 있다. 한편 김정일화는
일본 시즈오카현의 조총련계 원예학자인 가모 모
토테루加茂元照가 20년 동안 연구하여 품종을 개량
했다는 남아메리카 원산, 베고니아의 한 품종이다.
1988년 2월 김정일의 46세 생일에 선물로 받은 후
북한 전 지역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1997년부터 매
년 김정일 생일에 김정일화 전시회를 연다. 열대성
※ 이 글의 인용문은 북한 맞춤법 규정에 따라 표기한 것으
로 우리나라 맞춤법 규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난과에 속하는 김일성화는 북한에서 기르기 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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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운 데 비해, 김정일화는 북한 기후에도 잘 맞고
번식력도 강해 일반 가정에서도 쉽게 기를 수 있다
고 한다. 오늘날 북한에서 김일성화와 김정일화는
모두 ‘불멸의 꽃’이라 불리는데, 구분이 필요할 경
우에는 ‘태양의 꽃’김일성화과 ‘불멸의 꽃’김정일화으로
나누어 부른다.
북한에서 김일성화와 김정일화는 모든 장르 문학
예술 작품의 소재와 주제가 된다. 예를 들면, 김일
3 4 5
성화와 김정일화를 형상화한 소설(《김정일화와
1 김일성화
세계》)과 시(<혁명의 꽃 김일성화>), 조선화, 유
2 김정일화
화, 보석화, 아크릴화, 선전화, 우표, 도자공예품(< 단위와 각 계층 근로자들, 청소년 학생들이 피운 3 3 제19차 김정일화축전 선전화
4 제21차 김일성화축전 선전화
김일성화 김정일화 장식화병>), 수예(<불멸의 꽃 만여 송이가 전시되고, 해외 동포들과 단체들, 주북
5 제23차 김정일화축전 선전화
김일성화 김정일화>), 얼음조각(<불멸의 꽃 김정 외교 단체들과 개별 인사들이 키워낸 ‘뜨거운 지성
일화>), 공연(무용 <온 세상에 만발한 김일성화>, 至誠이 어린 불멸의 꽃들’도 전시된다.
관현악곡 <불멸의 꽃 축전가>), 대중가요(<김정일 폐막식에서는 우수한 평가를 받은 성, 중앙기관, 무
화>, <김일성화의 노래>), 영화(<김정일화>, <태양 력기관 등의 많은 단위 기관과 재배공들, 해설 강
의 꽃 김일성화>) 등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들을 비롯한 모범적인 참가자들에게 김일성화
2018년 12월 29일 자 《노동신문》의 기사‘미술교육과 우 축전상 상장을, 개별참가자들에게는 참가증을 수
리 생활’는 유치원에서 고급중학교까지 미술교육을 여하며 해외동포들과 외국인에게도 상장을 수여한
통해 무엇보다 먼저, 김일성화와 김정일화, 국가 상 다. 또 축전 기간 동안 북한의 각 시·도 등 지방에
징물들을 비롯하여 ‘절세의 위인들을 칭송하고 나 서도 ‘불멸의 꽃’ 전시회와 김일성화김정일화온실
라를 상징하는 대상’들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는 참관사업이 진행된다. 김정일화축전과 김일성화축
능력과 창작의 기초를 다져주어야 한다고 주장하 전은 매년 일정한 주제 하에 개최되는데, 2018년의
고 있다. 경우 ‘위대한 강국으로 영광 떨치는 주체조선에 만
양 축전은 매년 각각 8일간 진행되는데 올해 김정 발한 김정일화’, ‘우리 수령님 그리워 더욱 붉게 피
일화축전은 제24차, 김일성화축전은 제22차 행사 여난피어난 김일성화’였다. 관련 조직으로는 조선김
를 맞이했다. 조선김일성화김정일화위원회가 주 일성화김정일화위원회 외에 그 산하조직으로 각
관하는 이들 축전들은 북한 당국이 매우 중요시하 시·도위원회가 있고, 불멸의꽃보급후원회국제명칭, 김
는 행사로, 여타 생일 행사들과는 별도의 트랙으 일성화김정일화보급후원회라는 단체도 있다.
로 진행되고 있다. 양 축전은 평양 김일성화김정일
화전시관에서 개최되는데, 전시 대상만 바뀔 뿐 진 북한 전역에 김일성화, 김정일화 재배 온실 산재
행 방식과 과정은 같다. 축전 때마다 《노동신문》은 김일성화와 김정일화를 재배하거나 전시하는
축전 개최 예고, 축전 추진 상황, 선전화 출판, 개막 시설 또는 재배와 전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시설
식, 주북 외교 및 국제기구대표들 참관 사실 보도, 은, 규모는 제각각이지만 북한 전역에 산재해 있다.
방문기, 폐막식 기사를 순차적으로 내보낸다. 양 축 북한은 당초 1988년 4월 평양 대성산 조선중앙식
전에는 성省, 중앙기관, 무력기관을 비롯한 80여 개 물원에 김정일화온실을 처음 설치했고, 시·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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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 있는 식물원에도 김정일화온실을 마련했다.
이후 2002년 4월 평양 대동강변에 김일성화김정
일화전시관지하 1층, 지상 2층, 연건평 5,000㎡을 개관했다.
전시관 지하층에는 매년 10만여 그루의 김일성화,
김정일화를 키워낼 수 있는 조직배양실이 있고 1층
과 2층에는 재배실과 전시장이 있는데, 이곳의 온·
습도와 빛 조절 등은 모두 자동화 및 컴퓨터화되어
있다. 2005년에 황해남도 해주시에 황남전시관연건
평 3,750㎡이, 2013년에는 평안남도 평성시에 평남전
6 시관이 건립되었다. 타 시·도 역시 비슷한 규모의
전시 시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모든 시·군·구역뿐만 아니라, 당·정·군 기
관과 근로단체, 기업소와 공장 등에도 김일성화김
정일화온실이 있다. 조선외국문도서출판사가 발
간하는 종합월간지인 《오늘의 조선》2016.2.15.은 지
난 19년간 김정일화축전 참가 단위 수는 1,400여
7 개, 참가 인원은 750여만 명해외동포, 외국인 포함에 달
한다고 보도했고, 《노동신문》 2019년 4월 9일 자
기사‘세계 화초사에 특기할 위인 칭송의 꽃 축전’는 다음과 같
이 선전했다. “년대연대와 세기를 이어오며 20차례
에 걸쳐 열린 김일성화축전에 31만여 상송이의 불
멸의 꽃이 전시되였으며, 참관자수는 630여만 명
에 달하였다… 어버이 수령님의 탄생 100돐돌이 되
는 2012년에 진행된 제14차 김일성화축전에는 2만
7,600여 상의 태양의 꽃이 전시되여 만사람을 경
탄시켰다.”

세계원예박람회에서 수차례 수상
전시회는 김 부자 생일 때만 개최되는 것이 아
니다. 이른바 ‘꺾어지는 해정주년; 5주년 10주년 주기’를 맞
이한 기념일의 경우에도 똑같은 진행 방식과 과정
을 거쳐 치르기도 한다. 2012년 4월 ‘조선인민군창
건 80돌 경축’, 2013년 7월 ‘조국해방전쟁승리정전
6 김일성화를 소재로 한 무용
7 김일성화와 김정일화 자수 협정 60돌 경축’, 2015년 10월 ‘조선로동당 창건 70
8 김일성화무늬 도자화병
돌 경축’ 김일성화김정일화전시회가 그러한 사례
9 제21차 김일성화축전 개막
8 10 제23차 김정일화축전 개막 들이다. 한편 2015년 4월에는 김일성화 명명 50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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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맞이하여 기념우표 2종, 그리고 북한과 인도네
시아 공동우표 1종이 발행되고, 기념보고회가 열렸
다. 또 2018년 2월에는 김정일화 명명 30돌을 맞이
하여 기념우표 1종이 발행되었으며, 조선우표 집중
전시회와 기념보고회가 개최되었다.
김일성화와 김정일화는 세계원예박람회에서 수차
례 수상한 바 있다. 중국에서 개최된 ‘2011 시안세
계원예박람회’2011. 4.에서 국제란꽃 경쟁 최고상인
9
금상김일성화과 전시展示금상김정일화을 받았다. 이어
서 ‘2012 네덜란드 벤로 세계원예박람회’2012. 8.에
서 최고상김정일화, 중국 해남성 ‘제8차 국제란꽃박
람회’2014. 1.에서 특별상김일성화, 그리고 중국 산동
성 ‘2014 청도세계원예박람회’2014. 5-6.에서는 금상
김일성화과 국제분재경쟁 특별전시상김정일화을 받았
다. 또한 2014년 3월 몽골에서 진행된 ‘국제화초전
시회’에서 김정일화가 최고상인 1등상을 수상한 데
10
이어, 다음 해인 2015년 3월에도 같은 전시회에서
김정일화가 또다시 1등상을 수상했다. 2018년 4월
에는 김일성화와 김정일화가 중국 사천성 ‘제15차
중국 두견화전시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올해 달력엔 김일성화, 김정일화 대신 ‘장미’
김일성화김정일화전시회는 북한의 각종 기념일과 《데일리 NK》2020. 1. 8.에 의하면, 북한의 출판
경축일에 해외에서도 활발히 개최되고 있다. 간혹 물수출입사가 2020년 새해를 맞아 출판한 꽃 사진
단독행사로 규모 있게 개최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 달력에서 2월과 4월 의례적으로 담아왔던 김일성
진·도서·우표·미술·수공예품 전시회, 영화감상회 화, 김정일화 대신 장미꽃을 비롯한 다른 꽃 사진
등과 종합행사로 치러지는 경우가 많다. 매년 개도 을 삽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수십 년간 북한
국이나 제3세계에서 무수히 치러지고 있는 이러한 출판사들은 꽃 달력을 제작할 때 김정일, 김일성
소규모 행사들은 현지의 북한 대사관과 주로 제3세 생일에 맞춰 으레 2월에는 김정일화, 4월에는 김
계의 공산주의 계열 단체, 주체사상 연구조직, 북한 일성화 사진을 넣어 왔다. 그러나 2020년 달력은
과 거래하고 있는 민간기업, 친목회, 기타 비정부단 2월 사진으로 사랑을 고백할 때 주는 연분홍 장미
체가 주최한 대내외 선전용, 언론 보도용 행사들이 꽃을 싣고 영어로 ‘Propose프러포즈’라고 써놓고 있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김 부자 생일, 정권공화국과 다고 한다. 이러한 파격은 정상국가 이미지를 구축
당 창건일 등 주요 기념일들은 물론이고, 김정일과 하고 있는 북한이 김씨 일가 우상화에 대한 외부의
김정은을 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한 26돌과 6돌, 곱지 않은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분석
김정일을 당 총비서로 추대한 21돌, 당 중앙위 사업 이다.
을 시작한 지 53돌, 사망 3돌 등에도 이를 기념하여
글 오양열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초빙석좌연구위원
해외에서 김일성화김정일화전시회를 개최한다. 사진 출처 《조선중앙통신》, 《조선의 오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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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있다 , 없 다 ?

코로나19의 확산은 우리의 삶을 여러모로 바꿔 놓 통신의 역사는 전화의 역사


았다. 일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으로부터 통신을 이야기하자면 전화기를 빼놓을 수 없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비대면, ‘사회적 거리두기’ 다. 그레이엄 벨이 발명하고 1896년 고종에 의해
를 실천하며 접촉이 아닌 접속의 세계에서 안부를 우리나라에 처음 설치된 전화기는 이후 지난 120
묻는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서로의 여 년간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존재해 왔다.
안부를 접속으로 물어 온 것은 비단, 전염병 창궐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기로 알려진 궁내부 전화는
이후의 일이 아니다. 먼 곳의 너와 나는 이미 오래 스웨덴 자석식 전화기로 벽걸이형이었으며 신하들
전부터 통신장비로 연결되어왔으며 다양한 일들 은 통화를 위해 보이지 않는 황제의 목소리 앞에서
을 접속의 세상에서 해결해 왔다. 예를 갖추고 네 번의 큰절을 해야 했다. 당시 전화
기는 황실 소속이어서 일반인들은 이용할 수 없었
고, 이름 또한 텔레폰을 음역한 덕진풍, 덕률풍 혹
은 말 전하는 기계란 뜻의 전어기, 어화통으로 불

공중전화기 있다, 없다?


렸다. 애초에 전화의 목적이 소통이었겠으나 개화
기에 소개된 근대문물로서의 전화기는 특권 그 자
체였으며, 이 전화기로 고종이 김구의 사형 집행을
중지시켰단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1902년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통신용 전화기가
개통되었는데, 이 전화기는 전화소에서 교환원을
통해서만 통화가 이루어졌다. 이 전화기 역시 관청
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본인과 소수 부유층의 몫이
어서 그 소유자의 권력과 재력을 드러내는 구실을
했다. 재밌는 사실은 통화 중 말다툼을 하거나 저
속한 언어 욕설을 하면 교환원이 통화를 중단시키
기도 하고, 다음 대기자가 있으면 10분을 넘길 수
없었다고도 한다. 이후 1970년대까지도 전화기는
집 한 채 값과 맞먹을 정도로 서민들에겐 진기한
사치품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렇듯 귀했던 전화기
가 서민의 애용품으로 변화한 것은 바로 공중전화
기에 의해서다.

모두의 전화기였던 ‘공중전화기’


‘모두의 전화기’로 불린 공중전화기가 등장한
것은 1954년 사람이 관리하는 유인 공중전화 서비
스가 시작되면서였다. 이후 동전 주입식 옥외 무
인 공중전화기를 거쳐 일반전화 회선에 접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간이형 공중전화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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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이형 전화기는 주로 다방, 약국, 생필품점 등
에 설치되었는데, 그런 이유로 1950년대 내내 다방 자동심장충격기 등 응급 의료장비를 비치하고, 현
은 전화가 없는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 금 입출금기로 변형된 부스를 넣어 운영 중이다.
는 ‘전화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인터넷 이용도 가능한 공중전화기로 재탄생
1982년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일명 하며 멀티부스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하지만 공
D.D.D.Direct Distance Dial가 등장한다. 국내에서 최 중전화기가 그 변화를 더 하지 않더라도 완전히 사
초로 개발된 시내·외 겸용 자동 공중전화기인 라질 일은 없을 거라고 한다.
D.D.D.는 1980년대 말 가수 김혜림이 부른 노래 현재 전국의 공중전화는 KT의 자회사인 KT링커
제목으로도 인기를 끌었지만, 2003년을 기점으로 스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재난 등 특수한 상황에서
모두 철거되는 아쉬움을 겪기도 했다. 당시를 살았 사용될 가능성과 공공재라는 특성상 평생 쓰이지
던 사람들에게 십 원짜리 동전 2개를 들고 길게 늘 않더라도 유지, 보수된다고 한다. 즉, 공중전화는
어선 줄 뒤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했던 공중전 기본적으로 국가가 제공해야 할 보편적 서비스의
화기와의 일상은, 삶 그 자체였으며, 서로의 안부를 일환인 셈이다.
묻고 위로를 전할 수 있게 해 준 값싸고 고마운 기 인간의 필요로 만들어졌으나 사라져가는 것이 비
계 그 이상을 의미했다. 한때는 이렇듯 우리 모두 단 공중전화만은 아닐 것이다. 제 몫의 기능을 다
의 전화기로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공중전 하고 새로운 기술에 밀려 자리를 내놓는 물건들의
화기. 하지만 지금은 쉬이 만날 수 없는 추억의 산 흥망성쇠는 흡사 우리의 인생과도 닮은 것이어서
물이자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를 감당해야 할 형편 아쉬움을 자아낸다.
이 되었다. 전염병으로 접촉을 금지하는 요즘,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하며 함께 힘을 모아 어려운 상황을
쓰이지 않더라도 평생 우리 곁에 극복해나가고자 한다. 오래전 공중전화기 속에서 서
공중전화기가 사라지게 된 이유는 단연 휴대 로에게 전했던 그 따스한 위로와 연대가 지금 여기
전화기의 보급 때문이다. 휴대 전화기 덕분에 우리 의 휴대폰과 인터넷을 통해 재현되길 바란다. 혹여
는 더 이상 공중전화기를 찾아 헤매거나 줄을 설 길거리를 가다 공중전화부스와 마주친다면, 주저 말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 그래서일까? 공중전화기 1 고 들어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에게 전화 한 통 걸
대에서 나오는 매출보다 유지하는 비용이 더 커지 어보는 건 어떨까? 손에 쥔 휴대폰을 두고 이 무슨
고 있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흘러나오고 있으 이상한 짓인가 할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만난 그 공
며,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도 휴대 전화에 밀려 전 중전화기가 어쩌면 당신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만나
국의 공중전화기가 사라져 가는 중이다. 하지만 공 게 될 공중전화기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중전화기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기존의 공
중전화부스를 변형시켜 전기차 충전설비시설이나 글 문진영 스토리너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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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독자 투고

아름답고 매서운 산세로


수도 지켜낸
‘북한산성’
우리나라의 유일한 수도권 내 국립공원이자, 세계
적으로도 보기 드문 도심 속 국립공원인 북한산.
‘도심 속 산’이라고 해서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백
운대836m, 인수봉810m, 만경대799m 등 30여 개가
넘는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북한산은 일반인이 오
를 수 없는 위험한 구간도 곳곳에 있을 정도로 산
세가 험준하고 가파르기 때문이다. 그 대신 기암
괴석과 어우러진 자연경관은 비현실적으로 아름
답다. 그리고 이 아름답고 웅장한 북한산에는 북
한산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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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방어 위한 천혜의 조건
수도와 가까우며 험난한 산세의 북한산은 수도
방어를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산성의 역사가 깊다.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처
음 쌓인 것으로 전해지지만 당시엔 토성이었기에 지
금 우리가 보는 성곽 대부분은 조선 숙종 37년1711에
축성된 것이다. 해발 800m 넘는 곳에서 해발 50m
도 되지 않는 곳까지 산 정상과 골짜기, 계곡, 능선,
바위 등에 걸쳐 총 11.85km중성문 성곽 250m 포함의 길
이의 성곽이 남아 있으며, 고양시[약 98%]와 서울시
[2%]에 걸쳐있다.
북한산성과 성곽 안쪽에 대한 문화재의 조사와 발굴
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지표조사, 시굴
조사, 발굴조사로 진행된 북한산성 문화재의 조사 및
정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한양도성~탕춘
대성~북한산성의 연결고리를 찾는 일이 중요한 연구
과제로 부각되었다. 더불어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 그리고 수원화성과 비슷
한 성격이 있어 북한산성 또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1 백운대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다.


2 북한산성 대서문과 봄 벚꽃
3 북한산 문수봉으로 이어진
산성 성곽 글·사진 정동일 고양시청 역사문화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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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 W S
U RIM U N HWA
도봉산 발행처·문의 도봉문화원

도봉문화원은 2019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도봉산의 가치

를 재해석한 《도봉산》을 발간하였다. 《도봉산》은 △문헌을 통해 확인되는 도봉산과 그

양상 △문헌 속에서의 도봉산 △도봉서원 관련 조선왕조실록의 내용 △고전문학 속에

나타난 도봉 등 도봉산을 중심으로 다양한 주민들의 흔적과 역사적 사실을 담아냈다.

한국문화원연합회
김문경 정책연구소장*전 구리문화원장/靑松 정책연구개발비 기부
한국문화원연합회 부설 정책연구소는 전국 지방문화원의 발전을 위해 문화정책 조사·연구·개발

등을 추진하고자 2016년 5월에 발족한 연구소이다. 지난 2019년 1월 정책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

된 김문경 전 구리문화원장은 지난 4월, 정책연구소의 연구개발비로 1천 5백만 원을 쾌척하였다.

* ‘07년~‘18년 구리문화원장 역임, 제28·29·30대 한국문화원연합회 부회장 역임

제1회 금남(金南)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한국문화원연합회는 미래세대가 지역문화에 대한 관심과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한편 고 이수홍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을 개최한다.

•응모자격 전국 초등학생(동등 연령이면 응모 가능)


•공모분야 글짓기+삽화(삽화는 글짓기 작품에 따른 부가적 선택 사항)
•주 제 우리 동네, 소중한 지역문화유산 살펴보기
•제출분량 200자 원고지 7~10매 내외(200자 원고자에 자필 작성)
•제출방법 전국 230개 지방문화원 방문접수 또는 우편접수
•응모기간 ‘20년 6월 25일 ~ 8월 7일
•시 상 1등(금남상, 1명) 포함 총 72명
※ 자세한 내용은 추후 안내합니다. 故 이수홍 한국문화원연합회 전 회장

편집후기

이 불안을 열고 꽃 잔치의 5월이다.


그러나 세계는 한꺼번에 같은 병을 앓는 충격에 휩싸였다.
일상이 무너지니, 서민을 위협하는 공포가 가장 기본적인 것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식이위천食以爲天이라는 말이 있다.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뜻이다.
위기는 우리를 모두 밥 먹는 짐승이라는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2020 05

그래도 화창한 하늘이 있는 한,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여유의 시간이 하루빨리 찾아들기를 바라며,


설레며 꽃구경 가듯 마음의 양식이나마 책에 가득 실어 본다.

한춘섭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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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
Ssireum

ISSN 1599-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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