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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2020년 8월호 (Urimunhwa August 2020)
우리문화 2020년 8월호 (Urimunhwa August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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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도 > 午睡圖
이재관李在寬, 1783~1837년
19세기 초, 종이에 수묵담채, 122.0 × 56.0cm
월간 우리문화 별별마당
vol.286 | 2020 08
4 테마기획
발행인 김태웅
1945년 8월 15일, 그날의 이름 ‘해방’과 ‘광복’ / 주철희
발행일 2020년 8월 1일
편집고문 권용태
10 삶과 문화
편집주간 한춘섭
편집위원 곽효환, 김종, 김찬석, 오광수, 역사의 상흔 속에서 비롯되는 이야기 _ 소설가 문영숙 / 음소형
오양열, 장진성, 지두환
편집담당 음소형 16 시와 사진 한 모금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광복 75주년에 부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 / 길공섭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홈페이지 www.kccf.or.kr
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문화마당 Cultural Encounters
등록번호 마포,라00557
기획편집번역제작 서울셀렉션 02)734-9567 18 옹기종기 Iconic Items
일곱 가지 보물의 빛깔, ‘칠보七寶 공예’ / 이행림
Chilbo: Cloisonné in the Colors of Seven Treasures / Lee Haengrim
표지 그림 박수영 일러스트레이터
공감마당
10 48 조선 人 LOVE ⑧
‘왕의 고양이’와 ‘의로운 개’의 사랑법 / 권경률
52 문화보고
한의약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_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 / 양지예
56 바다 너머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전통 공예, 바틱 / 정민영
20 우리마당
60 불현듯
근대기 석탑과의 만남 / 엄기표
64 북한사회 문화 읽기 ⑱
양악기를 ‘조선음악’에 복종시키려 한 북한의 배합관현악 / 오양열
68 칼럼
‘우리 문화’ 속 ‘우리 사상’ / 지두환
34 70 문화달력
한국문화원연합회, 지방문화원 일정
72 NEWS, 편집후기
수원문화원 《사라져 가는 직업과 생업공간》 등 / 편집부
52
ISSN 1599-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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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재된 기사 및 이미지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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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1945년 8월 15일,
그날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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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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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4일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연합국에 항복한다는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 종
반성도 사죄도 없었던 결 조서大東亞戰爭終結詔書>의 낭독방송을 녹음한다. 일본에서는 이를 ‘옥음방송玉音放送’이라고
일본의 항복선언문 한다. 다음날인 15일 정오 일본 동경방송JOAK은 이를 일본 전역에 방송하고, 조선 경성중앙
방송국에서도 이를 받아 조선 전역의 방송국에 중계한다. 4분 37초의 대동아 전쟁 종결 조
서로 불리는 항복선언문에는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반성과 사죄가 없었다.
<대동아 전쟁 종결 조서> 주요 내용을 보면,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
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나의 뜻이 아니다”고 했다. 조선과 대만 그리고 동남아
시아의 침략전쟁이 주권 침탈과 영토 침략이 아니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은 것이다. “뿐만 아
니라 적敵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번번이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였으며, 그 참
해慘害가 미치는 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민족의 멸망을 면하기 위
해 항복했다고 하였다.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는 부정하면서 미국의 원자탄에 대해서
는 무고한 백성을 살상했다고 강변하고 있다. 특히, 히로히토의 종결 조서에는 “나는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시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
다. 어느 나라가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력’하였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들의 침략이 동아시아
에 어떤 ‘해방’을 가져다주었다는 말인가. 일본은 연합군에게 패망하면서 항복을 선언하였
다. 하지만 침략전쟁의 희생양이 된 이웃 나라에 대해서는 ‘유감’이란 두 글자와 함께 침략전
쟁의 동조자로 내몰았다. 히로히토의 종결 조서는 또 다른 망언이었으며, 조선과 대만 등 침
1945년 9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왼쪽)와
히로히토 일왕(오른쪽) 략전쟁의 피해국을 능욕한 문서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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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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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8월 15일 해방 4주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1주년으로 그 의미가 가려졌다. 정
해방정국에서 등장한 부가 정한 ‘한 번 뭉처 민국수립 두 번 뭉처 남북통일’이란 구호는 대다수 신문 1면에 실렸다.
‘독립’과 ‘통일’ 당시 언론에서는 대체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독립 1주년’으로 표기했다. 당시 언론에서
‘독립’을 강조했던 이유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한 결과로 보인다. 1945년 8월 해방의 기쁨도
잠시,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문제는 남쪽을 대립과 갈등으로 몰아넣었다. 서로
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우익에서는 ‘자주독립국가 건설’, 좌익에서는 ‘자주통일국
가 건설’을 외쳤다. ‘독립’과 ‘통일’이라는 단어의 차이는 엄청났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일명 ‘정읍발언’에서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
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
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 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고 주장한다. 통일국가 건설이 어렵다는 것을 알리면서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나섰고, 이를 ‘자주독립국가’의 범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은 해방정국에서 자
신들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독립 1주년’이란 표현을 권장했고, 언론도 이
를 보도하였다.
당시 《자유신문》은 ‘만화로 본 독립 1년사’를 게재하였는데, 이 만화에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1년간 있었던 주요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눈여겨볼 사건으로는 1948년 12월 8일 유엔에서의 ‘대한민국
독립 승인안찬반 41대 6’이다. 이를 두고 유엔에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
한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고 오랫동안 교과서에 게재하였고, 교육하였다. 이
는 2011년, 2018년 역사교과서 개정을 위한 집필 기준에서도 논란이 되었
다. 진보학자들은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한 1948년 유엔 총
회 결의는 한반도 전체가 아니라 유엔 임시위원단 협의 및 감시 아래 선거
3
가 벌어진 지역에 한정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1991년 남·북이 유엔
3 만화로 본 독립 1년사 《자유신문》, 1945년 8월 15일
4,5 해방 4주년 《동아일보》, 《호남일보》, 1945년 8월 에 동시 가입을 통해 모두 인정받고 있는 현 상황에서 더욱더 적절한 표현
15일, 당시 언론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대체
로 ‘독립 1주년’으로 표기하였다. 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
6 해방 4주년 구호, 《호남일보》, 1945년 8월 15일
부라는 말은 당시1948년 한반도에서 유엔으로부터 합법 정부로 인정받은 유
일한 정체政體였다는 점을 확인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엔 총회에
서 채택된 결의 제195호(Ⅲ) 2항의 내용을 진보학자가 오역한 데서 온 결과
라는 것이다. 해묵은 논쟁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왜 남쪽에서
만 선거가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당시 국내 상황과 국제사회의 관계가 아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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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대한민국 현대사는 국가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가 깊게 투영되어 조작
6 과 왜곡이 점철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료 검증을 통한 재해석의 여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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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에서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광복’이란 단어도 만만치 않게 등장한
다. 특히 ‘광복’이란 단어는 임시정부를 환영하거나 선열을 추념하는 표현으로 주로 썼다. 임 이념적 사고를 탈피해
정 요인들의 글과 기자회견에서도 ‘광복’은 자주 등장한다. 1945년 12월 4일 《동아일보》 사 8.15의 진정성 찾아야
설에는 “춘풍추우 수십여 성상 이국에서 조국 광복의 포부, 오직 꿈속에서 그리다가 금의환
국하시니 감개가 무량하려니와 우리 삼천만은 제위의 노고에 오직 감사로서 맞이할 뿐이다”
면서 임시정부 환국을 환영하였다.
당시 언론에 노출된 ‘해방’과 ‘광복’이란 단어에는 이데올로기가 투영되어 있다. <표>는 당시 신
문 보도에서 ‘해방’과 ‘광복’을 단순하게 검색하여 나타난 횟수와 상대적 비율이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단어 자체만을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각 신문에서 검색하
여 나타낸 표기이다. 언론별 창간과 폐간이 달라 수치에 차이가 크다. 전반적으로 ‘해방’이란 단
어가 월등하게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익계 신문인 《대동신문》의 경우 ‘광복’이 <표> ‘해방’과 ‘광복’이란 단어 보도 횟수와 비율
* 기간: 1945년 8월 15일 ~ 1948년 8월 15일
란 단어가 ‘해방’이란 단어에 비하여 20.2%로 나타났다. 반면, 좌익계 신문인 《우리신문》의 경우
■ 해방 ■ 광복
‘광복’이란 단어가 한 번도 표현되지 않았다. 즉 우익계 언론에서 다른 언론에 비하여 상대적으
로 ‘광복’이란 단어가 더 많이 노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좌익에 비하여 지지 세력이 약
4.4%
했던 우익 세력이 지지기반을 만회하고 결집하는 데 활용되었다. ‘광복’에는 사전적 의미 외에도
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임시정부 요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00%
대한민국 정부 수립 1주년 행사를 마친 정부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정에 나섰다. 정부
95.6%
에서 초안으로 작성한 법률안을 보면, 3월 1일을 ‘3.1절’, 7월 17일을 ‘헌법공포기념일’, 8월 15
《우리신문》 《경향신문》
일을 ‘독립기념일’, 10월 3일을 ‘개천절’로 국회에 제출하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
공포기념일’을 ‘제헌절’로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수정하여 국회 본회의에서 제출하였고,
통과되었다. 당시에는 본회의만 국회 회의록을 작성하였기에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어떤 논
13.4% 20.2%
의와 누가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주장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정부가 <국경일에 관한 법률>
86.6% 79.8%
을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로 공포하면서 지금의 광복절이 탄생하였다.
남·북의 정권이 각각 수립된 1948년부터 체제 우월성 경쟁이 심화되었다. 어느 쪽이 더 ‘민
《동아일보》 《대동신문》
족사적 정통성’이 있는가를 증명하던 치열한 체제경쟁에서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다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민족 해방’보다는 ‘조국 광복’에 부합하였다. 따라서 ‘해방절’ 또
는 ‘민족해방기념일북쪽에서 사용’이 좌익의 주장에 부합한 용어라고 한다면 ‘광복절’은 우익의
주장이며,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맞물려 있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광복’이란 단어의
의미가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이라고 했다. 우리가 빼앗긴 주권은 대한제국이었다. 왕정
국가 대한제국이 아닌 민주공화국 체제의 대한민국으로 새롭게 출범하는 계기가 8.15라고
한다면, ‘광복절’은 불완전한 측면이 있다. ‘해방’과 ‘광복’이 두 용어는 어떤 의미로, 어떤 쓰임
새를 위해 사용하느냐에 따라 재해석할 수 있다. 냉전체제의 이념적 사고를 탈피하여 현실에
맞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8.15의 진정성을 찾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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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삶과 문화
역사의
상흔
속에서
비롯되는
이야기
소 설 가 문 영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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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록되지 않고 잊히는 순간, 사라진다.
깊은 상흔이 맺힌 역사일수록 끊임없이 기억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야만 한다.
흐릿해지는 역사를 글 안으로 불러와 명료히 되살리는
일을 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역사 작가들이다.
문영숙 작가는 일제 강점기 강제노역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사기 이민,
강제 이주, 탈북민 등 자칫하면 역사의 ‘틈’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역사 소설과 동화로 꾸준히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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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로, 중앙아시아로, 중국으로, 또 광복 후에는 단일민족국가가 아니었다는 증명이 되기도 한다.
독일 등으로 조국을 떠나 흩어졌다. 지금은 우리나 우리는 이미 다문화 사회가 되었고 그들의 모국과
라의 경제 사정이 좋아져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친밀하게 지내야만 하는 당위성을 안고 있다. 대한
되었던 고려인 후손들도 들어오고, 사할린에 강제 민국은 인구절벽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고 이 시점
징용으로 끌려갔던 후손들도 들어오고 있다. 또한 에서 글로벌, 세계화 정책은 필수 불가결하다. 세계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 화 속에서 서로 보완하며 공생의 길을 가야 한다고
국에 들어와 살고 있다. 이들도 가족과 떨어진 디 생각한다.
아스포라이며, 북한의 탈북자 또한 디아스포라이
다. 즉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오늘까지 이어져 반복 주 독자층이 청소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청소년들
되고 있다. 의 반응은 어떤가.
가끔 메일로 독후감을 보내는 학생들도 있다.
만주와 연해주에 이주한 고려인, 한국전쟁 이후 수 작가인 나보다 나라를 걱정하면서 다시는 불행한
십만의 입양인, 탈북민, 미주 교포 등 누구보다 디아 역사를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글을 볼 때 보람
스포라를 깊게 경험한 우리나라지만, ‘단일민족’이 을 느낀다. 나는 청소년들이 우리 역사를 알고 대
라는 통념으로 다문화 사회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비하면서 미래를 열어가길 희망한다.
부족한 편이다.
나 또한 ‘단일민족’이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역사 소설은 방대한 자료조사와 취재가 뒷받침되어
세대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는 고대 때부터 다 야 하는 만큼, 집필 과정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문화 국가였다. 가야 시대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에 자료 조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완전히 알
서 건너와 김수로왕의 부인이 된 허황후도 있으며, 지 않고는 서사를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관련 서
고려 시대 때는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 때도 있었 적도 읽고 논문도 읽으며, 인터넷 검색을 통해 큰
다. 백제와 고려 모두 해양왕국으로 서역까지 활발 도움을 받을 때도 있다. 인터넷을 활용하는 시대
한 교류를 했고 많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다(웃음). 고대사를 소재로
살았다. 고분에서 발굴되는 낯선 보석들은 우리가 쓸 경우는 사료가 없어 고전할 때도 있다. 첫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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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숙 작가가 집필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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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속의 그림》을 쓸 때였는데 그림을 전공한 것
도 아니고 또 고구려 시대의 문화나 풍속, 생활상
을 알지 못해 고민스러웠다. 그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어느 교수님이 고구려 벽화를 분석해서 쓴 방
대한 논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논문이 고구려
시대를 재현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글을
쓰다가 어느 부분에서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는 잠
시 접고 관련 서적이나 같은 시대를 그린 소설을
읽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느 소설의 한 문장에서
번개처럼 번쩍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1
최재형 독립운동가의 기념사업회 이사장직도 역임
하고 있다.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
지난 2012년, 고려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내용으로 청소년 소설 《까레
이스키, 끝없는 방랑》을 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바이칼 호수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들
의 아픔을 좀 더 가까이 느껴보고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보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그때 블라디
보스토크에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이 우
수리스크였다. 그곳에서 ‘최재형’이란 이름을 처
음 만났다. 낯선 이름이었으나 가이드에게 들은 최
2
재형의 삶은 나를 흥분 시킬 정도로 드라마틱했다.
1 지난해 8월 열린 최재형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 문영숙 작가(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이후 그에게 매료되어 청소년 소설로 《독립운동가
왼편(오른쪽에서 세 번째)에 서 있는 이가 최재형 선생의 손자인 최발렌틴 한국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
그는 올해 2월, 향년 8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최재형》을 펴냈다. 그때 국내에 나처럼 여행을 갔
2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기념관 개관식에서 탐방단과 문영숙 작가
다가 최재형의 삶에 감동한 분들이 설립한 ‘최재형
장학회’가 이미 있었다. 나는 책을 낸 것에 인연이
닿아 최재형 독립운동가 홍보대사를 시작으로 장
학회가 사단법인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로
거듭날 때, 상임이사를 거쳐 지난해 2월 이사장직
을 맡게 되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책이 이사장
직을 만들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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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는 1860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심한 기근과 탐관오리들
의 학정으로 생계가 어려워지자 부친과 함께 9살
에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다. 연해주 지신허地新墟
에 터를 잡은 최재형의 부친은 둘째 아들인 최재형
을 러시아 정교회 학교에 보내지만, 굶은 날이 잦
아 허기를 참지 못하고 가출을 하게 된다. 포시에
트 항구에 쓰러진 최재형은 선한 러시아 선장 부부
에게 발견되어 선원이 되었고, 배를 타고 6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해한다. 선장 부인의 지극한
교육으로 18세에 ‘글로벌 청년’이 되어 블라디보스
토크에 돌아온다. 이때부터 최재형은 유창한 러시
아어로 한인들의 대변자가 되고 한인들의 자치주
인 얀치혜의 군수가 된다. 러시아의 동방 정책으로
군납업을 시작한 최재형은 엄청난 부를 이루고 한
최재형 독립운동가(1860~1920)(맨 오른쪽)
인들을 위해 32개의 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 양성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한인들은 최재형의 초상
화를 집마다 걸을 정도로 존경했다고 한다. 러일전
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고 을사늑약으로 일
제의 한국 식민화 정책이 본격화되자, 최재형은 일 이 책의 내용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함경북도 청
본의 야욕을 간파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서면서 안 진에서 살다가, 광복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과정
중근을 만나 하얼빈 의거를 배후에서 모의하고 지 에서 한국인이 일본인 요코 가족을 괴롭혔다는 내
원한다. 안중근은 최재형의 집에서 단지 동맹을 맺 용이다. 이 소설이 미국 어느 학교에선 부교재로
고 최재형이 사준 권총으로 최재형의 집에서 사격 도 쓰인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 요코 가족은 선량
연습을 하고 하얼빈 의거를 성공시킨다. 이후 최재 한 일본인으로, 한국인은 아주 미개하고 폭력적인
형은 안중근의 가족을 돌보고 권업회를 조직하여 나쁜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소설이 미국의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펼치고 또 지원한다. 이후 최 학교에서 부교재로 쓰일 수 있는 것은 일본 외교
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의 외교부장과 상해 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도 이제는 세계가 부러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 총장에 선임되었지만, 1920 워하는 경제를 이뤄냈다. 대한민국도 ‘문화외교’에
년 일본이 일으킨 사월 참변신한촌 참변으로 4월 7일 좀 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일본의 총탄에 순국하고 만다.
마지막으로 ‘문영숙’에게 ‘역사’란?
올해로 광복 75주년을 맞이했다. 광복 75주년을 맞 내 책의 보물창고이자 내 창작의 화수분
아 역사를 알리는 데 힘써 온 문학인으로서 하고 싶
은 이야기가 있다면?
정리 음소형 편집팀
《요코 이야기》라는 일본인이 쓴 소설이 있다. 사진 김정호 사진작가, 문영숙,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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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시와 사진 한 모 금
광복 75주년에 부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
대한독립만세 ! 대한독립만세 !
피의 몸부림으로 찾은 찬란한 빛
우리 조국 금수강산
문화통치, 민족 말살에
조선의 기 충 천 衝天 하 여
3 6 년 한 풀어낸
아 ~ 밝은 빛이여 광복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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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역사 왜곡, 무역보복
독도를 찬탈하려는
우리 광장 광복의 빛
3 . 1 만세의 광 풍 光風 으 로
방방곡곡 울려 퍼진 감격시대
7 5 년의 사랑을 축복하나니
우리 다 같이 외쳐보자
만세 만세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세 백의민족 만세
만세 만세 자유독립 만세
길공섭
시인,
대전동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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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옹기 종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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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I c onic I tem s
칠보 공예는 금, 은, 구리 등의 표면에 유리질의 유약을 녹여 Chilbo is one of Korea’s traditional forms of craft, just like boudoir
꽃, 새, 인물 따위의 무늬를 나타내는 공예로 규방 공예나 도자 공 craft and ceramics. Also known as cloisonné, this enameling
예처럼 우리 전통 공예 가운데 하나이다. 마치 일곱 가지 보물금· technique entails melting vitreous enamel pastes onto gold, silver,
은·유리·파리·거거·적주·마노과 같은 색이 난다고 하여 ‘칠보七寶’라는 이 or copperware to produce colorful designs of flowers, birds, and
름을 갖게 된 칠보 공예는 여인들의 장신구에 주로 사용될 만큼 figures. The name chilbo, meaning “seven treasures,” was given to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the technique as it creates finishes reminiscent of gold, silver, lapis
lazuli, crystal, coral, agate, and pearl. Often used to adorn women’s
우리나라 칠보의 역사는 ‘파란’으로부터 시작한다. 1900년 accessories, this technique produces astoundingly beautiful results.
대 이전까지 칠보를 파란으로 불렀기 때문인데, 이 파란은 삼국 The history of enameling in Korea begins with paran (which
시대의 금제 장신구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때 파란은 저화도약 was what chilbo was called until the 18th century), first used in the
500℃ 이하에서 녹는 청색 한 가지뿐이었다. 그 후 조선 시대에 이르 Three Kingdoms Period to embellish gold jewelry. Paran, meaning
러 황색짙은 노랑, 검정과 남색의 중간색인 감색紺色, 파란색과 초록 “blue” in Korean, referred to a type of enamel that melted below
색의 중간색인 벽색碧色, 보라색 계열의 가지색紫色, 이 네 가지 색 500 degrees Celsius and only came in blue. It was later in the Joseon
상이 사용되었다. 이 색들은 온도의 차이와 유약의 두께에 따라 Period that this kind of enamel became available in a rich yellow,
다소 변화가 있어서 고온600℃∼700℃일 경우, 황색은 금향색錦香色, dark blue, bluish-green, and purple. The shades of these colors
누런색, 감색은 회보라색으로 발색되어 색상은 진하게 되고 어두워 would vary depending on the temperature of the heat treatment
진다. 저온일 경우는 전체적으로 색이 엷고, 유약이 잘 녹지 않으 and the thickness of the coat. Fired at a higher temperature (600 to
면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투명한 맛이 적어진다. 파란 유약은 색 700 degrees Celsius for example), the yellow would turn ocherish
끼리 섞어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 가지 색의 대비 효과가 and the dark blue would turn into a grayish violet—more saturated
뚜렷하여 명도 대비·한난 대비·보색 대비가 가능하며, 어떤 색과 and dark—whereas fired at a lower temperature, the colors would
도 잘 어울리는 배색으로 화사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generally turn out lighter. If the enamel did not melt completely, the
such) were often coated with clear enamel. And as these type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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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의 서 원 ⑤
도동서원 환주문
Hwanjumun Gate at Dodongse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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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Korea’s Seowon
김굉필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은 성종 11년1460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 In the year 1460 (year 11 of the reign of King Seongjong),
관에 입학했고 그 뒤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등이 되었지만 연산 the early Joseon neo-Confucian scholar Kim Goeng-pil
군 4년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 passed the saengwonsi examination and entered the
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1504 nation’s foremost educational institution, Seonggyungwan
때 극형에 처한다. 그러나 중종반정1506 이후 곧바로 복권되었고 National Academy. He would go on to become an
후학들이 김굉필의 뜻을 기리고자 그가 공부하고 가르치던 자리 inspector with the Saheonbu (Office of the Inspector
에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세웠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 General) and a jwarang of the Hyeongjo (Ministry of
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한 바 있는데, ‘도동道東’으로 사액한 것도 Punishment). But after the Literati Purge of 1498 (fourth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東來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year of King Yeonsangun), or Muo Sahwa, he was
banished to Huicheon, Pyeongan-do, for the crime of
creating a faction as a student of Kim Jong-jik. He was
later sentenced to death after the Literati Purge of 1504
(10th year of King Yeonsangun), also known as the Gapja
Sahwa. He was immediately reinstated after the Jungjong
Banjeong (Enthronement of King Jungjong), however, and
his students went on to honor his aims by establishing
Dodongseowon Confucian Academy in the place where
he had studied and taught. Yi Hwang praised Kim Goeng-
pil as the “greatest of the Eastern [Korean] scholars of the
way,” and the name “Dodong” was given to express the
도동서원 전경
Panoramic view of Dodongseowon idea of the way (do) of Confucius arriving in the east (dong).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 Built to honor Kim Goeng-pil’s scholarship and virtue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자리한 달성 도동서원사적 Located in the village of Dodong-ri in Guji-myeon, Dalseong-gun,
제488호은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의 도학과 덕행을 기리 Daegu Metropolitan City, Dodongseowon (Historic Site No. 488)
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선조 is a seowon (Confucian academy) built to honor the scholarship
38년1605 지금의 자리에 ‘보로동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중건했 and virtue of Kim Goeng-pil (1454~1504, known by the pen name
으며,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Hanhwondang”). It was destroyed in 1597 during the Japa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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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asions of Korea, but was rebuilt in its current location under
“Dodongseowon.”
Dodongseowon.
서원 앞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 As we move past this ginkgo tree that has stood firm in its
400-year-old ginko tree outside the academy
place through a tumultuous history, we enter the seowon proper.
Along its straight central axis, we find the three-section outer gate
서원 앞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일명 ‘김 (oesammun), the pavilion of Suwollu, the gate of Hwanjumun, and
굉필 은행나무’라 불리는 이 은행나무를 심은 사람은 김굉필의 the Jungjeongdang lecture hall, the eastern house of Geoinjae, the
외증손자이자 남인 예학의 대가로 알려진 한강 정구寒江 鄭逑; 1543∼ western house of Geouijae, and jangpangak. From there, the three-
1620로, 도동사원이 사액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식수한 것이라 전 section inner gate (naesammun) and shrine are positioned in turn,
해진다. with a corridor and staircase situated on the central axis to clearly
굴곡진 역사를 견디며 꿋꿋이 자리를 지켜온 은행나무를 뒤로하 indicate this layout. This is seen as a representation of the “pivot”
고 서원으로 들어서면 반듯하게 설정한 중심축을 따라 외삼문과 (shuniu) spoken of by Zhu Xi (1130~1200) in his synthesis of neo-
누각 수월루水月樓, 환주문喚主門, 강당 중정당中正堂, 동재 거인재, 서 Confucianism—expressing centrality and the axis of all things.
재 거의재, 장판각이 있고, 뒤이어 내삼문과 사당이 차례로 배열 Indeed, the positioning of important structures along a central axis
되어 있으며, 중심축에는 이 배열을 명확히 하기 위한 통로와 계 is a feature often found in hyanggyo and seowon. It is uncommon,
단이 자리한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말한 추뉴樞紐, 즉 however, to find an example such as Dodongseowon, where the
만물의 축과 중심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서원의 중 narrow paths and stairs are all situated along a central axis that
요한 건물이 중심축 선상에 배열되는 것은 향교나 서원에서 흔 has been emphasized all the more through its finishing with well-
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동서원처럼 좁은 폭의 길과 계단을 모두 polished stone figures. Symmetry is said to represent the norm for all
중심축 선상에 놓고 잘 정제된 석물들로 마감하여 중심축을 더 Confucian architecture, but it is also exceedingly rare to see the sort
욱 강조하고 있는 곳은 흔치 않다. 대칭성은 모든 유교 건축의 규 of perfect symmetry found in Dodongseowon, without even a hint
범이라 하지만 도동서원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대칭을 of deviation. Surprisingly, this rule of symmetry has been applied
이루는 경우 또한 매우 드물다. 놀라운 것은 의례 공간뿐만 아니 not only to the ceremonial space, but also to the “everyday space”
라 일상생활 공간인 고직사전사청까지도 대칭의 규범을 적용했다 of the administrative office (gojiksa or jeonsacheong). Built during
는 것이다. 1600년대에 건립된 강당과 사당 등은 당시 서원과 사 the 1600s, the lecture hall and shrine are so exquisitely designed
묘건축을 대표할 만큼 매우 훌륭한 짜임새와 수법을 보인다. 서 and crafted as to serve as exemplars of seowon and shrine building
원을 둘러싼 담과 석물들도 우수하여 이들 모두 보물 제350호로 architecture at the time. Also superb are the fence and stone fig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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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되었다. 담장은 자연석을 정렬시킨 지대석 위에 자연막돌을 that surround the seowon, which have been collectively designated
쌓고 그 위에 암키와를 5단으로 줄 바르게 놓아 그사이에 진흙층 as National Treasure No. 350. To build the fence, natural stones
을 쌓아 올리고,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워 넣었다. have been assembled on top of other natural stones assembled as
담장에 암키와와 수막새를 사용한 것은 음양의 조화를 통해 장식 foundation stones. Five levels of concave tiles have been placed over
효과를 최대한 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top of that in a straight line with mud layers placed in between them;
students. The spaces devoted to the sages of old, the teachers, the
도동서원 누각 수월루
The Suwollu Pavilion at Dodongseowon students, and the servants also follow a sequence based on their
respective statuses.
the face stones have been cut into small and complex shapes that
were then fitted together like puzzle pieces to form the platform—
resulting in something that seems less like technique and more like
cut so that none were exactly the same size; they were then pieced
expended that there seem to be more stones with six or more si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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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돌을 똑같은 크기가 하나도 없게 다듬어 마치 조각보를 than the four-sided stones that are normally seen; in some cases,
깁듯이 하나하나 짜 맞추었다. 4각 돌보다 6각 이상 각이 진 돌들 stones with as many as 12 sides can be found.
이 더 많아 보일 정도로 공력을 들였는데, 심지어는 12각의 돌도 Ascending the steep staircase behind the lecture hall, we find
발견된다. the naesammun (three-section inner gate), behind which the shrine
강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서 있고, 그 뒤에는 담으 sits in a section ringed by a fence. As the setting for ceremonial rites,
로 두른 일곽에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제향 공간으로 서원의 가장 the shrine occupies the highest place in the seowon. It is a double-
높은 곳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eaved, gambrel-roofed building with three sections at the front and
정면과 측면의 칸수가 같지만 정면의 칸살이 넓어 평면은 장방형 three at the side. While the number of sections at the front and side
이다. 건물 자체는 19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기단은 초 are the same, the plan is oblong due to the broadness of the front
창기 서원이 지어질 때의 것으로 추정한다. sections. The building itself is believed to have been built in the 19th
sided stone pillar in the courtyard to the west of the lecture hall is
pine branches or oil upon the slab. Used in seowon for ceremonies
the east of the shrine. The cha is used to burn the jemun (funeral
separate cha, setting the jemun alight instead in a corner beside the
has been carved out in a square shape, with a convex tile inserted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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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들이 공부하던 도동서원 강당(중정당)
Lecture hall (Jungjeongdang) for Confucian students
돌기둥에 받쳐진 정사각형의 판돌이 하나 놓여 있다. 이는 향사 with another tablet enshrined for Jeong Gu. To the left and right
를 위해 마련한 제물을 검사하던 곳인 생단牲壇이다. 강당의 대청 are two wall paintings representing the spirit of Kim’s studies of the
앞 기단의 중앙에 놓인 정료대庭燎臺는 긴 돌기둥과 사각형의 상석 way. In addition to Dodongseowon, some of the other seowon in
으로 이루어졌다. 정료대란 상석 위에 솔가지나 기름통을 올려놓 Kim Goeng-pil’s honor that can be found in South Korea include
고 불을 밝히는 일종의 조명대다. 서원의 정료대는 야간에 치르 Okcheonseowon in Suncheon, Jeollanam-do; Gyeonghyeonseowon
는 제례 때 쓰이며, 보통 사당 앞마당에 설치되는데 도동서원처 in Naju, Jeollanam-do; Haemangseowon in Hwasun, Jeollanam-do;
럼 강당 바로 앞에 놓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and Donamseowon in Sangju, Gyeongsangbuk-do.
사당의 동쪽 담장에는 차次라고 하는 정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
다. 제사에 쓰인 제문을 태워버리는 설비다. 많은 서원에서 별도
의 차를 두지 않고 사당 기단의 한 모퉁이에서 제문을 태워버리
지만, 도동서원에서는 담장의 한 부분을 정사각형으로 파내고 담
장 바깥과 통하도록 수키와를 끼워 굴뚝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사당에는 김굉필을 주벽으로 하여 한강 정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로 김굉필의 도학 정신을 표현한 벽화 두 점이 있다.
한훤당 선생을 입향한 전국에 현존하는 서원으로는 도동서원을
비롯해 전남 순천 옥천서원, 전남 나주 경현서원, 전남 화순 해망
서원, 경북 상주 도남서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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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지역 문 화 스 토 리
일본 바닷가 작은 마을에 잠든
베 짜는 조선 소녀의 혼魂
2018년 11월 12일, 일본 오사카에서 온 후쿠시마 도시오 목사가
《무궁화 꽃 소녀》라는 그림책을 가지고 남원문화원을 방문했다.
후쿠시마 목사의 말에 따르면, 일본 고치현高知県 구로시오초黑潮町
가미카와구치上川口에 ‘조선국녀朝鮮國女’의 묘가 있는데
묘의 주인은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끌려온 베 짜는 직공으로,
그녀의 고향이 남원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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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L oc a l Culture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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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으로 많은 기술자들 끌려가 Many skilled workers seized during Japanese invasion
1597년 8월, 임진왜란의 정전회담 결렬에 따라 도요토미 히 After armistice talks broke down during the second Japanese
데요시는 14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다시 침략했다. 임진왜란의 invasion in August 1597, Toyotomi Hideyoshi invaded Joseon once
패전 요인이 보급품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라 여긴 again with an army of 140,000 men. Believing the reason for their
왜군은 재침의 첫 번째 점령 목표를 호남으로 삼았다. previous defeat had been a failure to properly distribute supplies, the
우군과 좌군으로 편성된 왜군 가운데 우키다 히데이宇喜多秀家가 Japanese military selected the Honam (Jeolla-do) region as its first
이끄는 좌군 56,800명은 부산포를 출발하여 고성, 사천, 하동, 구 occupation target for the renewed invasion.
례를 휩쓸며 북상하여 8월 13일 남원에 도착, 남원성을 포위하고 The Japanese forces were divided into “right” and “left” armies.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14일부터 치열한 전투가 벌어 The 56,800 troops in the left army, under the leadership of Ukida
졌고 남원성은 3일간을 버티다 16일에 함락되었다. 남원성이 함 Hideie, departed Busanpo and swept over Goseong, Sacheon,
락되고 성 내에 남아있는 건물은 겨우 3채뿐이었다고 한다. Hadong, and Gurye before arriving on August 13 in Namwon, where
1592년에서 1599년까지 7년의 전쟁 중 정유재란은 전라도에 가 they encircled Namwonseong Fortress and prepared for a massive
장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상처는 전쟁으로만 끝 offensive. Intense fighting began on August 14, and Namwonseong
나지 않았다. 정유재란은 문화 약탈의 전쟁이었다. 조선을 침략 held out for three days before falling on August 16. A mere three
하고 유린한 왜군은 가는 곳마다 도공, 직공, 토공, 서예가, 금속 buildings are said to have remained standing within the fortress after
공, 학자 등을 강제로 연행하여 영주다이묘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its 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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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력을 지닌 젊은 남녀는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넘겼 During the seven-year war from 1592 to 1599, the second
다. 이때 이삼평, 심당길과 같은 도공들을 비롯해 많은 기술자가 invasion (known as the Jeongyu Jaeran) saw the greatest damage
남원에서 끌려갔고 그 가운데 베 짜는 기술이 뛰어난 직공織工도 being inflicted on Jeolla-do. But the scars left by the Jeongyu Jaeran
이곳 남원에서 끌려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were not limited to warfare. This second invasion was also a war of
전쟁이 끝나고 조선은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를 데려오기 위해 cultural plunder. In their invasion of Joseon, Japanese forces seized
45년간 다섯 차례 쇄환사刷還使를 파견하였지만 돌아온 조선인은 potters, weavers, earthworkers, calligraphers, metalworkers, and
6천 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한 수 scholars wherever they went. The captured workers were delivered
만 명 중 베 짜는 기술이 뛰어난 한 직공이 ‘조선국녀조선의 여인’로 to the daimyo (feudal lords), while younger males and females who
이름 지어져 일본 고치현의 벽촌 바닷가에 묻혀 있었다. could be put to work were sold as slaves to Portuguese merchants.
1 가미카와구치 전경
Panoramic view of Kami-Kawaguchi
2 가미카와구치 마을 입구에 세워진 조선국녀의 묘 안내 표지판
Sign for the Joseon woman’s grave at the Kami-Kawaguchi village entrance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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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녀의 묘 앞에 세워진 유래비
Memorial stone telling the origins of the Joseon woman’s grave
weaving techniques
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소녀는 베틀에 앉아 베를 짜며 고향을 그 Odani Yojuro fought during the Jeongyu Jaeran in 1597 as a busho
리워하는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military commander) for Chosokabe Motochika (1539~1599),
소녀의 기술로 짠 베는 너무도 곱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세련 the lord of Kochi Castle. He is said to have attempted to seize three
되어 감탄을 자아냈다. 그녀의 뛰어난 직조 기술은 점차 소문이 gifted young female hemp-weavers in Joseon and take them to
났고 직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많은 여성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Japan. One of them managed to escape in Busan; another flung
소문은 멀리까지 퍼져나가 이요국伊予国; 지금의 에히메현 사람들까지 herself into the sea while traveling on the boat. Odani had the last
찾아와 배울 정도였고, 오다니 오쥬로는 새로운 작업장까지 만들 remaining girl imprisoned in a cabin below deck, keeping her under
며 적극적으로 직조 기술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고치 close surveillance all the way to Kami-Kawaguchi in the town of
현 하타幡多 지역의 직물 산업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그녀는 Okata-cho, Kochi-ken Prefecture. Taken to a distant land against her
직공주로 추앙받았다. will, the girl tearfully pleaded to be returned to her Joseon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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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녀의 묘
Joseon woman’s grave
The hemp cloth woven with the girl’s methods drew admiration
for its softness, beauty, and refinement. Word began to spread about
에몬与左右衛門과의 혼인을 추진하고자 했지만, 그녀는 “나는 고향 her outstanding technique, and women began arriving in droves to
으로 돌아갈 사람”이라며 그의 요구를 진즉에 거절한 터였다. gain insights into her methods. Information traveled so far and wide
그녀는 베 짜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고향 산천의 이야기를 that people even began visiting from Iyo (now Ehime-ken Prefecture)
들려주며 늘 고국으로의 귀향을 염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그 to learn more, while Odani built a new workshop and began actively
희망을 이루지 못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영원히 잠들고야 만다. 그 studying the weaving techniques. The weaving industry in Kochi-
뒤 오다니 요쥬로의 4대손, 오다니 야스지小谷安次는 망향의 한을 ken’s Hata region underwent astonishing development, and the
품고 외롭게 이국땅에 살다 간 그녀의 고귀한 삶을 기리기 위해 young Joseon woman became revered as a weaver.
묘비를 세우고 오다니가家의 묘역인 계장사桂藏寺에 안장하였다.
그녀의 묘비는 정면에 ‘朝鮮國女墓조선국녀묘’라고 새겨져 있고 우 Girl’s story used to teach about human rights
측면에 ‘天正 年中來천정연중래’, 좌측에는 ‘卒年不知졸년부지’라고 새 As the years passed, the girl who was captured in her youth grew
겨져 있다. 이는 천정연간1573-1583에 이곳에 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older. Having watched her over the years, Odani wished to marry
조선국녀가 어느 때 죽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뜻이 her to his own eldest son Yozaemon, but she refused his request,
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강제 연행 사실을 감추고자 insisting that she would someday return home.
‘천정연간’으로 새긴 것으로 일본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Indeed, the girl is said to have always yearned to return to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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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1980년대 나카무라시에 사는 오카무라岡村씨가 고치 homeland, sharing stories of its landscape with the people learning
신문에 ‘망향의 한을 안고 이국땅에서 숨을 거둔 고독한 조선 여 her techniques. In the end, however, her wish remained unrealized,
인의 영혼을 모국으로 돌려보내고 싶다’는 내용이 담긴 ‘어떤 조 and she went to her eternal rest in a foreign land. Later, Odani Yasuji,
선인 여성의 표석’이라는 원고를 투고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알 a fourth-generation descendant of Odani Yojuro, had a gravestone
려졌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1997년 가미카와구치 초등학교 placed to commemorate the noble life of this woman who lived a
교사였던 우에노 마사에植野雅枝와 그의 남편 우에노 스에마루植野 lonely life in a foreign country while dreaming of her homeland. Her
末丸에 의해 《무궁화 꽃 소녀》라는 그림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 remains were interred at Keizo-ji Temple, the Odani family cemetery.
은 이 지역 초등학교 부교재로 채택되어 학생들에게 인권 교육 Inscribed on the front surface of the stone are the characters “朝鮮國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女墓,” meaning “grave of the Joseon woman.” The right side re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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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waguchi Elementary School, and her husband Ueno Suemaru. The
pay respects at her grave. Located on the foothills behind the Kami-
구로시오정립도서관에서 조선국녀의 자료를 찾는 모습 Kawaguchi train station—remote even within Kochi-ken Prefecture—
Tracing records of the Joseon woman at the Kuroshio Library
the grave was relatively well maintained. The NCC research team laid
out ritual food items that had been prepared in Namwon and paid their
가미카와구치는 오다니가의 영지로, 지금도 그 후손들이 터전을 respects as descendants of Joseon visiting 420 years after the fact.
이루며 살고 있다. 오다니가의 후손들은 매년 조선국녀를 위해 Kami-Kawaguchi was part of the Odani clan’s territory, and
추모 행사를 연다고 한다. 조사단은 조선국녀 이야기를 《무궁화 its descendants live there to this day. The members of the Odani
꽃 소녀》로 각색하여 쓴 우에노 마사에 작가를 찾아가 그림책을 family are said to hold commemorative events for the Joseon woman
만들게 된 사연과 함께 “지금이라도 고향을 찾아 돌아갈 수 있었 each year. The NCC team also visited Ueno Masae, the author who
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진심 어린 마음도 전해 들었다. adapted the Joseon woman’s story into the book The Rose-of-Sharon
그녀의 고향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이 지역의 향토자료를 수 Girl, to hear the story behind how she came to write the picture
집하고 관리하는 ‘구로시오정립도서관’ 서고를 찾았다. 1961년과 book. Ueno also shared her heartfelt hope that the Joseon woman
1994년 발간된 《大方町史대방정사》에서 조선국녀의 기록을 찾을 “might at last be able to return home.”
수 있었지만, 그녀가 조선에서 끌려왔고 베 짜는 기술이 뛰어난 To locate clues about the Joseon woman’s hometown, the team
직녀로 그녀의 묘가 있다는 사실 이외에 새로운 기록을 찾을 수 visited the collection of the Kuroshio Library, which collects and
없었다. manages local materials for the region. While some records about
그러나 이번 조사를 통해 조선국녀의 고향을 찾기 이전에 고국으 the Joseon woman could be found in the Daihochoshi volumes
로 송환하는 일이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published in 1961 and 1994, nothing new was learned apart from the
비록 조선국녀의 고향을 찾기 위한 움직임은 일본에서 먼저 시 fact that she was taken to Japan from Joseon and was an outstanding
작되었지만, 양국 민간단체에서 조선국녀의 고향을 찾기 위해 노 hemp-weaver with a grave established in her honor.
력을 기울이고 있는 만큼, 하루빨리 조선국녀의 영혼을 고국으로 At the same time, the visit left us with the feeling that
모실 수 있길 희망한다. before locating the Joseon woman’s hometown, the matte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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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느린 마을 기 행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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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Slow City T ravel
바닷물이 빠진 독살
Doksal at low t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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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자연에 기대어 사는 곳 Roots in legend and nature
서해안에 자리한 충남 태안은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반도 Situated on the coast of the West Sea in Chungcheongnam-do, Taean
지형이다. 길쭉한 반도를 중심으로 12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is a peninsula surrounded on three sides by the sea. Around 120
자리한다. 그 풍경은 ‘아름답다’라는 말로 부족해 보인다. 이런 까 islands of different sizes can be found around the long peninsula.
닭에 태안은 국내 유일의 해안 국립공원으로 등재되었다. 어디 “Beautiful” seems too mild a word to describe the scenery—a fact
그뿐이랴. 전통 어로漁撈 방식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으며, 자 that explains why Taean’s coast has been registered as Korea’s only
연에서 나온 바른 먹거리가 삶을 풍성하게 해준다. 빠른 것, 편리 coastal national park. And that’s not all: the traditional fishing
한 것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눈에는 다소 느리고 불편해 보일지 methods of the past have been passed down to this day, while life is
라도 태안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은 기꺼이 자연의 속도대로 made richer by various healthy foods harvested from nature. It may
살고 있다. seem a bit slow-paced or inconvenient to modern people who value
‘태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서해안 최고의 해넘이로 손 immediacy and convenience in all things, but the people who inhabit
꼽히는 꽃지해변의 해넘이다. 꽃지는 ‘꽃이 지천으로 펴있다’라 Taean are happy to live at nature’s pace.
는 뜻으로 그 꽃은 초여름 우리나라 해안가를 아름답게 수놓는 Certain images come to mind when people think of Taean.
해당화를 가리킨다. 하지만 꽃지해변을 서해안 최고의 해넘이 명 There are the sunsets at Kkotji Beach, which are rated among
소라 부를 수 있게 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할미·할아비바위’다. the most sublime on the West Coast. The name “Kkotji” means a
이들 바위에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profusion of flowers”—a reference to the sweetbriar roses that so
신라 제42대 흥덕왕?~836때, 장보고 대사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신 beautifully embroider Korea’s coast in the early summer. But the
라를 잇는 해상 교통로를 설치하면서 해상왕이라 칭송받았다. 장 real reason that Kkotji Beach is thought of as having the West Sea
보고 대사는 안면도 건승포를 서해안의 중심전략 기지로 삼고 책 coast’s greatest sunset is the pair of rocks known as “Halmibawi”
임자로 승언 장군을 임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승언 장군은 중요 (Grandmother Rock) and “Harabibawi” (Grandfather Rock).
한 출정을 앞두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아내 ‘미도’ Associated with these rocks is a touching love story.
태안의 바다가 영롱한 것은 자연의 시간표에 따르기 때문이다. the great Jang Bo-go was lauded as the “king of the sea” for the
The sea glitters as Taean follows nature’s pace.
maritime corridors he established between Silla, China, and Japan.
strategic base on the West Sea coast, Jang appointed a general named
feeling unsettled ahead of a major sail. The reason had to do with his
beloved wife Mido. On the day Seungeon left, Mido climbed a rock
years passed, and he did not return. Exhausted from waiting, Mido
taking the shape of Mido in her long wait for General Seungeon.
Another large rock appeared weeping beside it, and the two ro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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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 체험 외에도 맛조개 잡기, 바지락 캐기 등 다채로운 바다 체 breathtaking coastal landscapes blending in picturesque fashion with
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simple fishing village scenes. Stretching for a total of 13 kilometers,
별주부마을이 자리한 곳은 4코스 ‘솔모랫길’이다. 해안을 따라 절 it includes such highlights as Dalsanpo Beach, Cheongpodae Beach,
경이 이어지고 어촌의 소소한 풍경이 그림처럼 머리와 꼬리를 잇 Jarabawi Rock, the Taean Flower Festival venue, and salt fields. Not
대고 있어 걷기에 그만이다. 달산포해변, 청포대해변, 자라바위, too daunting as a walk, it is ideal prior to or just after taking part in a
태안꽃축제장, 염전 등을 포함해 총 13km 구간이다. 길이 험하지 doksal activity.
않아 독살 체험 전후에 걸으면 좋다.
Taean: Solace of the sea and forest
태안, 바다와 숲이 위로하다 Sambong Beach is located a little over two kilometers from Kkotji
꽃지해변에서 2km 남짓 떨어진 곳에 삼봉해변이 있다. 이곳 Beach. Earning the nickname of “Sambong forest of meditation” for
은 소나무가 울창해 삼봉사색의 숲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슬로시 its lush pine trees, it may be the beach best suited to the “slow city”
티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해변이라 하겠다. 하늘 높이 솟은 소나무 label. As they soar up into the sky, the pines seem to stretch their
들은 마치 일상에 지친 이들을 품어주겠다는 듯 두 팔을 활짝 벌 arms out wide as if to embrace people exhausted from their day-to-
리고 있다. 소나무의 환대를 아무 방해 없이 받고 싶다면 이슬이 day existence. Those who wish to enjoy the welcoming pines trees
마르기 전 아침나절에 찾아볼 일이다. 번잡하지도 않고 인기척도 unhindered are advised to visit in the morning, before the dew has
없으니 이곳의 모든 것이 온전하게 내 것이 된다. dried. Without the crowds or hustle and bustle, everything here
삼봉해변과 맞닿은 기지포해변에는 휠체어나 유모차가 다닐 수 seems to become something all your own.
있도록 1.4km 구간을 무장애 데크길로 조성해 놓았다. 이 구간을 At Gijipo Beach just adjacent to Sambong, an unobstructed
‘천사길’이라 부른다. 해안 사구에는 바람이 할퀴고 간 흔적들이 deck walkway has been put in place over a two-kilometer stretch
물결처럼 이어져 있다. 모든 것이 자연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고 to allow for visitors with wheelchairs or strollers. This section has
become known as the “Angel’s Road.” Marks raked by the wind ripple
3 사색하기 좋은 태안 노을길 삼봉사색의 숲길 like waves on its dunes—creating a landscape where all things move
Trail through the Sambong forest of meditation along Noeulgil, Taean
4 1.4km 이어진 기지포해변 천사길 according to nature’s flow.
1.4-km stretch of Angel’s Road at Gijipo B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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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모양새다. The scent of the pine trees hangs thickly throughout Anmyeondo
안면도자연휴양림은 솔향이 짙다. 고려 때부터 왕궁을 짓거나 배 Island Recreational Forest. Straight-backed pines that once provided
를 만들 때 재목으로 사용하던 올곧은 소나무가 430ha의 면적에 timber for the building of Goryeo-era royal places and the making of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무분별한 벌목을 막기 위해 왕실에서 boats form a thick forest over an area spanning 430 hectares. It is said
특별 관리했던 숲이라 전해진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도 that the forest was specially managed by the royal house to prevent
‘이순신 장군이 안면도 소나무를 벌목해서 배를 만들었다’라고 indiscriminate logging. In his book The Song of the Sword, Kim Hoon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나라에서 관리하던 소나무가 이젠 현대인 writes that Admiral Yi Sun-sin “felled an Anmyeondo pine to make
들에게 ‘쉼’을 제공한다. 휴양림은 정오보다 아침 시간이나 오후 a boat.” Once administered by the kingdom, the pines now offer
나절에 더 아름답다. 소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빛의 굴절 때문이 breathing space to modern visitors. The recreational forest is more
다. 거친 소나무 껍질 사이로 묻어나는 솔향은 정신을 맑게 해준 beautiful in the morning and afternoon hours than at midday, thanks
다. 숲에는 평상과 나무 의자, 나무 침대가 여럿 놓여 있어 긴 시 to the light’s refraction as it filters through the pines. The scent of
간 쉬어가기에도 좋다. the trees clears the mind as it emanates from the rough bark. With
중앙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면 산림전시관이 나온다. 숲과 나무가 several wooden benches, chairs, and beds laid out in the forest, this is
주는 다양한 혜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휴양림 길 건너에 있 a pleasant setting to take a long rest before heading on your way.
는 수목원도 잊지 말고 챙겨봐야 할 곳이다. 휴양림이 자연 친화 Following along the central walking path, you come to the
적인 솔숲이라면 수목원은 아기자기한 정원이다. 한국전통정원 Forest Exhibition Hall—a place where you can learn more about the
을 비롯한 각종 테마정원이 있어 계절마다 다른 꽃들을 피우고 many benefits that forests and trees have to offer. Visitors should
다른 색을 선보인다. 숲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면 ‘숲속의 집’ be sure not to miss the Arboretum located across the road from
을 이용해보자. 늦은 시각 숲의 고요를 즐기고 이른 아침 찬란하 the forest. The gardens serve as a charming counterpoint to the
게 빛나는 숲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 내가 정한 시간이 아닌, 자 recreational forest’s nature-friendly pine woodlands. It boasts a
연의 시간표에 따라 하루 정도 살아보는 것이 느린 삶을 향한 작 Korean traditional garden and various themed gardens, each offering
은 실천일 것이다. a different palette of colors with its seasonal blossoms. If you would
like to spend a night in the forest, give the House in the Forest a try.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There, you can bask in the tranquility of nature during the evening
But perhaps the best step toward practicing the “slow life” would be
Travel Course
여행 정보
•Travel Tip Plan your course well when you visit Taean. For more efficient
•여행 팁 태안을 여행할 때는 동선을 잘 짜야 한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혹은 travel, cut your transit times by traveling from south to north or north to
그 반대로 이동해야 이동 시간을 줄여 효과적이다. 현재 안면도자연휴양림 south. If you plan on staying at the House in the Forest at Anmyeondo
‘숲속의 집’ 이용 시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본인 신분증을 확인하고 있 Recreational Forest, make sure to bring identification, which is being
으니 신분증을 꼭 챙겨가야 한다. checked for COVID-19 prevention purpo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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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팔도 음 식
우럭젓국
Ureokjeotguk (dried rockfish s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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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Pr ovinc ial Cuisine
모든 음식에는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그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 In every culinary dish, there is a story. A dish embodies
의 지리적 환경과 생활문화, 언어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다른 나 the physical environment from which the ingredients
라, 혹은 다른 지역 문화를 알고자 한다면 먼저 그곳을 대표하 came, as well as the culture and language of the region
는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 같은 말로 태안을 알고자 한다면 태안 from which it originates. Therefore, one must sample the
을 대표하는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 그렇다면 태안을 대표하는 famous local dishes to begin to understand an unfamiliar
음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 손에 꼽는 town or country. To get to know Taean, in this sense,
것은 ‘우럭젓국’이다. one must try its signature dish. And by far the most
recommended of the many dishes that speak for Taean is
ureokjeotguk (dried rockfish soup).
the surface, is so good for the health that there is a saying in Taean that
우럭포의 이유 있는 변신 ‘우럭젓국’ “If you don’t eat rockfish soup at borinureum (barley ripening), you
태안 지방의 제사상엔 반드시 찐 우럭포가 올라간다. 오죽하 won’t make it through the midsummer heat.” As such, there has always
면 우럭포를 올리지 않은 제사는 반半만 지냈다고 했을까. 우럭젓 been a strong tie between rockfish and the people of Taean, and thus
국은 제사 음식에서 비롯됐다. 태안 지방에서는 제사를 모시고 난 ureokjeotguk has naturally been an essential part of their lives.
뒤 음복술을 나누면서 안주로 진설陳設한 우럭포의 살점을 발라
먹었다.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을 추억하는 자리다. 자손들은 제사 Ureokjeotguk, a fitting transformation of dried rockfish
음식을 매개로 서로 교감交感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의 연줄을 Steamed dried rockfish never fails to make it to the tabletops of jesa
확인했다. 이런 따뜻한 의례儀禮에 우럭포가 한몫을 한 것이다. 사 (ancestral rites) in Taean. The item is so essential that a jesa without
람들은 우럭포의 살점을 발라 먹으며 밤늦도록 돌아가신 조상과 it is considered incomplete (or “half a jesa,” as they say). Ureokjeotguk
자손들의 삶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다음 날이면 has its roots in this practice. In the region, family members wou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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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
Ureok (rock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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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e a ceremonial drink after a jesa, deboning and snacking on
the dried rockfish that has done its job as an offering. A jesa is a
ritual. While deboning and chewing on the tough bits of flesh, family
members would share tales of their ancestors and stories from their
lives late into the night. In the morning, the leftover head and bones
말린 우럭 breakfast. And like that, the family could share another meal.
Dried rockfish
Ureokjeotguk is quite simple to make. Leftover dried rockfish,
tofu, and jeon (pan fried dish), which served as offerings in the jesa,
대충 살점을 발라 먹고 남은 우럭포의 머리와 뼈가 우럭젓국으로 are boiled in the last of the water used to wash the rice, along with
탄생하여 밥상 위에 올라왔다. 그리고 그것을 또 함께 나눴다. six cloves of garlic, scallions, and salt. After a good simmer, the broth
우럭젓국을 끓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쌀뜨물에 우럭포와 제사상 develops a subtle taste, free of any fishy odor, while the bones soften
에 올렸던 두부, 전 종류를 넣고 끓이는데 양념으로 육쪽마늘과 and become savory.
파를 곁들이고 간은 소금으로 한다. 그 맛은 비린내 없이 담백하
고 폭 끓인 뼈는 잘 씹히며 고소하다. Ureokjeotguk becomes Taean’s signature dish
The people of Taean have often enjoyed ureokjeotguk even in the
우럭젓국이 태안의 대표 음식이 되기까지 absence of a jesa. Tasty and simple to make, the dish became part
제사상에서 유래된 우럭젓국을 태안 사람들은 자주 끓여 먹 of their everyday meal, and as the custom continued, over time
었다. 요리하는 방법이 간단하고 맛까지 좋으니 태안 사람들의 밥 ureokjeotguk settled in as Taean’s signature dish. The people of Taean
상에 자주 올랐고, 그것이 오랜 세월 이어져 태안의 대표 음식으 still stock up on dried rockfish in the fall and use it throughout
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금도 태안 사람들은 가을에 잘 말린 우 the year, not only for ancestral rites but also for everyday batches
럭포를 사서 보관했다가 명절 차례상이나 제사상에 올릴 뿐만 아 of ureokjeotguk. The reason the people of Taean favor the dish so
니라 평상시에도 우럭젓국으로 끓여 먹는다. much is perhaps because it is humble fare made of a common fish
이렇게 우럭젓국이 태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이유는 우럭이 흔 that embodies a story unique to the region. In any case, with such
한 생선이고 서민 음식이며 지역만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지 싶 a delightfully palatable flavor, how could anyone resist it? Though
다. 게다가 담백하고 고소하기까지 하니 사랑받을 수밖에 없지 않 people from elsewhere may never have heard of it, ureokjeotguk is a
았을까. 타 지역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게 여겨질지도 모르는 우럭 dish that symbolizes the 559.3 kilometers of Taean’s shores and the
젓국은 559.3km의 해안선을 가진 태안의 바다와 그 바다에 기대 customs and language of the people who have lived off the sea. In
어 살던 사람들의 풍습과 언어를 오롯이 간직한 음식이다. 그래서 that sense, it may be a dish best suited for August, when one most
시원한 바닷바람 생각나는 8월에 어쩌면 더 어울리는 음식일지도 craves a cool sea breeze.
모르겠다.
Written by Jeong Nakchu, head of the Taean Cultural Center
글 정낙추 태안문화원장 Photographs from Inquiring Anmyeondo Island of History, iclickart,
사진 출처 《안면도에 역사를 묻다》, 아이클릭아트, 셔터스톡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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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을 보 다
찰스 어셔 부부의 전통 혼례 모습
Traditional wedding of Charles and Soyi Us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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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T hr ough Foreign Eyes
20대 중반에 한국으로 건너와 교제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 When I moved to Korea in my mid-20s and began dating,
아 나는 ‘100일’이 한국에서 중요한 기념일로 여겨진다는 사실 I soon learned that the 100-day mark of a relationship
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자란 미국에서는 이맘때면 아직 상대방의 is treated as a significant milestone here. In the US, I’d
마음을 살피는 시기여서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라는 호칭조차 쓰 grown up in a dating culture where it was typical to still
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 한국에서는 100일 만에 청혼하는 be feeling things out at that point, to not even call the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당시 여자친구였던 소이에 other person your boyfriend or girlfriend yet. Now I was
게 청혼을 하기까지 5년이나 걸렸다. in a culture where it wasn’t uncommon for marriage
proposals to be made on Day 100. Old habits are hard
to shake, and by the time I finally proposed to my then-
girlfriend, Soyi, five years had pa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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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을 향한 의미 있는 첫걸음 ‘전통 혼례’ dissatisfaction with the perfunctory way weddings are typically
우리는 몇 가지 선택지를 찾다가 조선 시대식의 전통 혼례로 conducted. When it came to our own wedding, Soyi and I knew that
마음을 정했다. 둘 다 특별히 옛 풍습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지 we wanted to do things differently.
만 뭔가 뜻깊고 상징성 있는 예식이 되기를 바랐고, 웨딩홀 방식
으로는 우리 바람을 채우지 못할 것 같았다. 게다가 전통 혼례를 A traditional wedding as a conscious step towards a new life
올리면 해외에서 오는 친지들에게 한국의 전통 관습과 상징의 유 We spent some time looking around at different options before
래를 가까이서 보게 해줄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그래서 소이와 settling on a traditional ceremony of the sort that might have been
나는 몇 군데 장소를 물색해 본 뒤 조선 왕족이 기거하던 운현궁 performed during the Joseon Dynasty. Neither of us had any special
에서 5월에 혼례를 치르기로 예약하고 광장시장으로 가 옷감을 predisposition toward doing things the old-fashioned way, but we
고르고 혼례용 한복을 맞췄다. wanted a ceremony where it felt like there was some meaning and
혼례는 운현궁의 안마당 중 하나인 ‘노락당’에서 올렸다. 바람이 symbolism to what was going on, a standard that we felt wedding
거세게 불고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날씨여서 만약을 대비해 hall weddings didn’t meet. And a traditional ceremony had the
손님들이 비를 피할 천막을 쳤다. 천막 아래에는 가운데 둔 대례 added benefit of giving friends and family who would be visiting
상을 향해 접이식 의자 수십 개를 놓았지만, 하객 대부분은 주변 from overseas an intimate glimpse of traditional Korean beliefs
건물의 돌계단과 쪽마루에 앉아야 했다. 그런 허물없고 정감 어 and practices. So after exploring our options, Soyi and I made a
린 풍경을 보니 공원이나 뒷마당처럼 부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 reservation for the following May at the former royal residence
는 장소에서 열리는 고향의 결혼식이 떠올랐다. 운현궁이 개인적 Unhyeongung and went to Gwangjang Market to pick out fabric and
으로 의미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웨딩홀의 화려한 조명 아래보 get fitted for our hanbok.
다는 운현궁에 있는 편이 더 마음 편했다. 게다가 신랑·신부와 하 The ceremony took place in the Norakdang, one of
객들 간 자리가 가까워 하객들이 예식에서 눈을 뗄 수 없던 것은 Unhyeongung’s inner courtyards. The weather was blustery and
덤이었다. 또한 처음 접하는 모습이었다는 점도 하객들의 눈길을 threatening rain, and tents had been set up to keep the guests dry
잡아놓았다. 소이의 하객들도 대개 전통 혼례 참석은 처음이어서 in case the clouds did open up. Beneath them, a few dozen folding
but most guests had to sit on the stone steps and the narrow
전통 혼례에서 산 기러기 대신 쓰는 나무 기러기(목안)
Wooden geese used instead of live geese at the traditional wedding wooden terraces of the encircling buildings. This gave the event
home that had been held in parks or backyards or other places that
People’s attention was also held by the fact that they were seeing
something completely new. For almost all of Soyi’s guests, ours was
the first traditional wedding they’d ever been to and the pro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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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는 운현궁의 노락당에서 치러졌다.
The ceremony took place at Unhyeongung’s Norakdang.
was nearly as new to them as it was to me or my family. In place
of the white dress and suit, there were flowing crimson robes and
나와 우리 가족들만큼이나 전통 혼례가 신기했을 터였다. 우리는 ornamental headpieces. Instead of spoken vows, there were bows
하얀 드레스와 턱시도 대신 풍성한 자락의 진홍색 의관을 갖추 that brought us to the ground in professions of devotion. Instead of
고, 말로 하는 서약 대신 신의를 다짐하며 절을 주고받았다. 또 반 an exchange of rings, there were ritual toasts and the entwining of
지 대신 술잔을 교환하고 청실홍실을 엮었다. 절하는 법과 어느 red and blue ropes. I never completely understood what I was doing
방향으로 돌고 술을 어떻게 마실지 알려주는 사전 준비 과정이 or why I was doing it—preparations and explanations had consisted
10분 만에 끝난 터라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 of a 10-minute pre-ceremony crash course in how to bow, where to
가 있는지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전통 혼례를 선택한 것 turn, and how to properly drink—but I never doubted that Soyi and
이 옳은 결정이었다는 데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I had made the right decision in opting for a traditional wedding.
웨딩홀의 예식은 진정한 서양식도, 그렇다고 한국식도 아닌 두 A ceremony in a wedding hall would have felt neither truly
문화의 공허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꼈고, 그것은 우리가 Western nor truly Korean but a hollow imitation of both cultures,
원하는 결합의 방식이 아니었다. 우리는 결혼이 각자 자기 문화 and that wasn’t how we viewed our union. We weren’t each bringing
의 절반씩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 문화 모두를 오롯이 취하 half of our culture to the marriage. We were bringing all of both. The
는 것이라 생각했다. 비록 내가 태어난 문화권의 방식은 아니었 traditional ceremony may not have been part of my birth culture, but
지만, 이 전통 혼례는 내가 채택하고 선택한 온전한 결혼 방식이 it was fully part of the one I’d adopted and chosen to marry into. For
었다. 소이와 나는 바로 그 예스러운 방식에서 새로운 삶으로 나 Soyi and I, it was the old ways that offered the most meaningful start
아가는 가장 의미 있는 첫걸음을 떼었다. to a new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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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조선 人 LO V E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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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 황금빛 고양이 있었으니 / 임금께서 사랑하시어 아름다운 이름 내리셨네.
금묘야, 하고 부르면 곧 달려오니 / 잠깐 사이에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네.
기린과 공작도 오히려 멀리하셨건만 / 금묘만 홀로 임금님 가까이 모시고 좋은 음식 먹었네.
낮에는 한가로이 섬돌 위에서 낯을 씻고 / 밤에 추우면 몸을 동그랗게 말아 용상 곁에서 잠들었네.
비빈과 궁녀들은 감히 손대지 못하게 하였으나 / 임금의 손길만은 받아들여 어루만지는 은택을 입었네.”
김시민, 《동포집》 - <금묘가>
‘왕의 고양이’와
‘의로운 개’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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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고양이는 어떻게 냉혹하고 무자비한 임금을 집사로 길들 밥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날마다 임금의 위패를 모신 빈전
였을까? 으로 달려가 구슬프게 울었다. 그 곡소리가 너무 서글퍼 궁인들
이 모두 눈물을 떨구었다. 금묘는 20일 동안 곡만 하다가 주인을
“내가 기르던 고양이가 죽어서 사람을 시켜 묻도록 하였으니, 귀 따라 죽고 말았다. 피골이 상접하고 털이 거칠어져 참혹한 모습
한 짐승이라서가 아니라 주인을 따랐음을 아끼기 때문이다.” 이었다. 동시대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 일을 거론했다.
- 《열성어제》, 숙종대왕 <매사묘> 고양이는 여러 해를 길들이고 친하게 지내도 하루만 비위에 안
맞으면 가버리는데 금묘의 행동은 특이하다는 것이었다. 송나라
조선 시대 역대 임금들의 시문들을 모은 시문집, 《열성어제》에는 의 도화견桃花犬처럼 황제를 따라 죽은 개는 들어봤어도 고양이는
숙종이 쓴 <매사묘埋死猫>라는 글이 실려 있다. 죽은 고양이를 묻 유례가 없다며 그는 혀를 내둘렀다.
어주며 자신의 심정을 밝힌 조사弔辭다. 어느 날 임금은 궁궐 후원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는 금묘를 수레에 실어 명릉 근처에 묻어주
에서 굶어 죽어가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그는 유기 고양이에게 게 했다. 임금의 은혜를 목숨으로 갚은 고양이를 왕가의 일원으
먹이를 줘서 살려내고, ‘금덕金德’이라는 이름을 붙여 애정을 쏟았 로 죽은 자의 집에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신하와 백성
다. ‘매사묘’는 세월이 흘러 금덕이 죽자 애도하기 위해 지은 것 들을 향한 무언의 가르침이 숨어 있다. 털 난 짐승도 숙종의 은혜
이다. 어미 고양이 금덕에게는 새끼가 있었는데 궁인들이 ‘금손金 를 잊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따라 죽지
孫’이라고 불렀다. 홀로 남은 금손은 마치 어미를 따르듯 숙종을 는 못할망정 임금의 덕을 입고도 의리를 저버린다면 금수만도 못
따랐다. 이 고양이가 바로 김시민이 한시로 기린 ‘금묘’다. 하게 된다. 그러니 숙종의 뜻을 받들어 새 임금에게도 충성을 바
1720년 숙종 임금이 세상을 떠났다. 금묘는 슬픔을 못 이기는 듯 치라,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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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관아에서 짖어댄 의로운 개
인간과 달리 반려동물의 사랑은 배신이 드물다. 사람은 동물
에게 애정을 쏟다가도 싫증이 나면 갖다 버리곤 하지만, 동물은
사람을 한결같이 대하고 제 목숨까지 던진다. 반려동물의 충성스
러운 사랑은 개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 조선 시대 야담野談 가운
데도 개의 의리를 칭송하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다.
선산구미의 의구총義狗冢 유래담은 1629년 선산부사 안응창이 지
은 《의열도》에 전한다. 한 역참의 아전이 개를 길렀는데, 이 개가
영리하여 사람의 동정을 잘 살폈다. 하루는 주인이 이웃 마을에
서 술 취하여 돌아오다가 큰길가에 쓰러져 잠들었다. 때마침 들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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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문화 보 고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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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원普濟院의 정신을 이어받은 한의약박물관 한약재로 만든 상품을 전시·판매하는 한방상품 홍
국내 한약재 거래의 70% 이상을 책임지고 있 보관이 있다. 홍보관은 그냥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는 서울 약령시 약재 거리를 걷다 보면 달콤·쌉싸 족하지만 한방카페 야외테라스에서 향기로운 한방
름한 한방차 향이 발걸음을 사로잡는다. 한방차 향 차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에게도 차
을 따라 또 걷다 보면 푸릇푸릇한 잔디 마당에 3층 한 잔의 여유를 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박물관 관
규모의 고풍스러운 기와 건물이 손님을 맞이한다. 람이 먼저라고 생각된다면 차의 유혹을 이기고 입
바로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이하 박물관’이다. 건물 구 안으로 들어가 보자.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조
정면을 가득 채운, 판본체 붓글씨로 쓰인 동의보감 선 시대 애민과 구휼 기관의 상징이었던 옛 보제원
문구가 박물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운데, 입구 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디오라마가 박물관의 기
오른쪽으로는 향긋한 한방차 향이 관람객의 발길 원을 설명한다. 박물관이 위치한 서울 약령시는 널
을 끌어당기는 한방카페가 있고 왼쪽으로는 각종 리 백성을 구제한다는 보제원의 설치 정신이 살아
있는 역사적 현장인 것이다. 이곳 1층은 조선 시대
의관과 의녀복을 입어볼 수 있는 전통의상체험실,
약초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과정을 게임하듯 재미
있게 배울 수 있는 영상체험실, 한의약의 역사 교
육을 비롯해 관련 체험을 진행하는 교육문화체험
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만 둘러보아도 이곳
이 단순히 관람만을 위한 박물관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한층 더 흥미롭게 한의약에 대해 배울 수 있
는 한방복합문화체험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층에 이어 2층 전시실에서도 한의약의 역사가 계
속되는데, 2층 전시실에서는 다양한 한의약·학 자
료들, 그리고 현대의 한의학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한의약·학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자료들을 들여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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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으로 당시 한의학의 성립과 발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부터 이어온 우리 고유 의학의 결정체를
담아내며 국제적 독자성을 확보한 허준許浚; 1539~1615
의 《동의보감》과 ‘사상의학’을 창시해 한의학의 새
지평을 연 이제마李濟馬; 1837~1899의 《동의수세보원》
등 우리에게 친숙한 의학서적도 박물관에 소장되
어 있어 눈길을 끈다.
박물관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다양한 약재들이다.
이곳은 서울 약령시에서 거래되는 약 380종의 약
재가 전시된 공간으로, 전통 한의약에서 활용되는
식물, 동물, 광물성 약재들과 특화 약재, 희귀 약재,
독성 약재 등을 관람할 수 있다. 그중 경동시장 약
재 거리에서도 볼 수 있었던 식물성 약재들은 식물
의 뿌리, 줄기, 나무껍질, 열매, 잎, 씨 등 약이 되는
식물의 모든 부분을 활용한 것이다. 한의약에서 약
1
은 본초本草; 뿌리와 풀라고 할 만큼 식물성 약재의 비
중이 높은데 우리가 한약을 지어 먹을 때 흔히 들
어가는 당귀, 황귀, 감초, 오가피 등이 그 예다. 동
물·광물성 약재도 식물성 약재 못지않게 흥미롭다.
그 밖에도 영지, 능이, 상황 등 버섯류와 흑삼, 홍
삼, 산삼 등 인삼류, 아울러 사향, 침향, 백화사 등
희귀 약재도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전시된
약재 옆에는 그 이름은 물론 효능까지 자세히 기록
해 놓아 관람객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볼거리 가운데서는 한의약·학기구도 빼놓을 수 없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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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패널을 통해 경험할 수 있도록 해놓은 공
간들이 관람의 즐거움을 더한다. 약재와 관련된 한
방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검색대와 약재를 직접 만
져볼 수 있는 공간은 관람의 재미뿐만 아니라 알찬
정보까지 챙겨갈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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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바다 너머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전통 공예, 바틱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했을 당시, 인간의 생애주기와 관련된 철학이 담긴 바틱의 문양
인도네시아 조코위 대통령이 커플룩을 선물해 화제가 되었는데, 인도네시아의 오래된 수공예 기술인 ‘바틱Batik’은 옷감에 밀
그 선물이 바로 인도네시아의 전통의상 ‘바틱batik’이었다. 랍을 발라 염색하여 무늬를 만드는 방염기술이다. 바틱의 역사는
기하학적 무늬와 다채로운 색상이 특징인 바틱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대 이집트문명 유적과 중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혼과 정성이 오롯이 녹아 있는 국 당 왕조 시대의 장식 조각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바틱이라
귀한 문화유산이다. 는 말은 원래 자바어로 ‘점이나 얼룩이 있는 천’이라는 뜻의 ‘암
바틱ambatik’에서 유래하였다.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바틱은 페칼
롱안, 솔로, 욕야카르타, 라숨, 바누마스 등 20여 개 이상의 도시
에서 연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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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가 담겨 있다. 결혼식에서 양가 부모들이 입는 바틱 문양으
로는 ‘물려준다’는 의미가 있는 트룬툼truntum 문양이 쓰인다. 사
람이 죽을 때 쓰이는 문양은 슬로복slobog으로, 망자의 영혼이 사
후세계로 순조롭게 넘어가게 해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바틱을 제작하는 것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매
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현대에 들어 전통 바틱 제작을
지속하려는 장인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자
1 최근에는 바틱 전통을 미래 세대에게 전승하고자 하는 다양한 노
력과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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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렸다. 그러나 점차 싼 값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제 바틱이 바틱이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데에도 일조했다. 젊은 세대는 바틱
나오면서 마을 주민들의 수입이 매우 감소하였고, 젊은 세대는 공예의 지식과 기술을 새롭게 이해하고, 바틱 연행자를 존경하게
바틱에 관심이 없어 세대 간 전승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 되었으며 미래 직업으로서 바틱 산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황에서 2006년 페칼롱간에 바틱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박물관
개관 초기에는 바틱에 대한 저조한 사회적 관심을 반영하듯, 찾 바틱을 테마로 한 체험상품과 패션쇼도 선보여
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최근에는 인도네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관광객들에게 바틱을
바틱을 포함한 무형문화유산은 대부분 가정 내에서 구전이나 직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기릴로요Giriloyo 지역
접 경험을 통해 대대로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젊 은 300년 이상의 바틱 역사를 가진 지역이다. 기릴로요에서는 바
은 세대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기 때문에 가정 내에 틱을 테마로 한 체험 관광 상품이 만들어져 많은 관광객이 방문
서 바틱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이러한 위기에서 페칼 하고 있는데 관광객들은 바틱 패키지를 신청하여 두 시간 정도
롱간 바틱 박물관장은 어떻게 하면 젊은 세대가 바틱에 관심을 지역 주민들에게 바틱의 역사와 이론에 대해서 배우고 염색단계
갖게 할지 고민하다가 학교에서 바틱을 가르치도록 하는 아이디 까지 체험하게 된다. 마을 주민들이 바틱 공장에서 온종일 일하
어를 냈다. 이는 페칼롱간 시장의 동의를 얻고 훈령 제정 등을 통 고 받는 수입이 보통 3만~3만 5천 루피아였는데, 바틱 패키지를
해 바로 현실화가 되었고, 바틱 수업을 희망하는 유치원, 초·중· 통해서는 두 시간 정도 관광객들의 실습을 도와주고 2만 5천~3만
고등학교, 기술전문학교의 교과과정에 바틱을 포함할 수 있게 되 루피아를 벌 수 있다. 바틱 체험관광이 마을 주민들의 소득 증대
었다. 초기에는 학생들이 단체로 박물관을 방문하여 바틱의 이론과 에도 톡톡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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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가치에 대한 강의를 듣고, 직접 손으로 무늬를 그리고 만드 최근에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바틱을 활용해 현대적인 의상을 제
는 실습을 진행하였다. 이후에는 교사들이 직접 바틱 교육을 할 작하고 패션쇼에 출품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8
수 있도록 교사 대상의 훈련도 제공되었다. 2006년 한 초등학교 년 욕야카르타Yogyakarta에서 개최된 국제 바틱 비엔날레에서는
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된 이 수업은 3년 후 페칼롱간 소재의 모든 많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바틱을 활용한 의상을 선보였다. 이 비
학교230개 학교로 확대되었고, 2009년에는 유네스코에서 해당 프 엔날레에 참여한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카리나 리마 멜라티Karina
로그램을 ‘무형유산 보호를 위한 모범사례’로 선정하였다. Rima Melati’는 바틱공예가이자 디자이너로, 어머니의 대를 이어
이 프로그램은 페칼롱간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다른 지역에서 발라이바틱Balai Batik이라는 바틱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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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불현 듯
근대기 석탑과의
만남
우리는 ‘탑’ 하면 일반적으로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을
떠올린다. 한 발 더 나가면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나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국보 제9호도 아련히 생각나고, 경주 대왕암 가까
이에 있는 감은사지 동·서 3층 석탑국보 제112호도 머릿속을 스쳐 간
다. 여기서 좀 더 가면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에 우뚝 서 있는 고려
시대 건립된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제86호,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조선 시대의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제2호도 떠오른다. 이들 모두
교과서에 나와 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탑들이다.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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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신앙의 확산…전국에 걸쳐 세워진 사찰과 탑 다양한 감각과 역량 보여주는 삼국 시대 석탑
우리 역사는 일찍이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고 삼국 시대 처음 건립된 석탑은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구려는 372년, 백제는 384년에 공인했다고 하며, 신라는 이보다 더욱 발전하였고, 사찰이나 장인에 따라 다양한 감각과 역량을 보
한참 늦은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가 있고 나서야 신앙하도록 개 여주는 기교 넘치는 탑들이 건립되었다. 특히, 불교를 국시로 삼았
방했다고 한다. 고구려와 신라가 겉으로는 150여 년의 차이를 보 던 고려 시대에는 전국에 수많은 사찰이 창건되었고, 그에 따라 헤
이나 신라도 실제로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전에 불교를 받아들여 아릴 수 없이 많은 석탑이 건립되었다. 조선 시대 들어와서는 억불
많은 사람이 신앙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숭유 정책 기조에 따라 불교계가 위축되고, 사찰과 관련된 일들이
불교 신앙은 우리 땅에 들어오자마자 폭발적으로 확산하였다. 그 크게 줄면서 석탑이 거의 건립되지 않았지만, 조선 세조 때 불교가
이유로 기존의 토속 민간신앙과는 달리 문자화된 경전이 있었고, 일시적으로 성행하면서 여러 기의 석탑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조
복잡한 교리 체계와 함께 살아생전의 행적에 따라 내가 갈 수 있 선 후기에는 불교 신앙이 다시 부흥하면서 전국에 걸쳐 사찰에 대
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한 대대적인 중창 사업이 펼쳐진다. 그러나 많은 사찰에 이미 석탑
있다. 그것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이 건립되었던 터라 또다시 세울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전혀 세
죽은 후에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극락에 갈 수도 있고, 돌 워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사찰마다 필요에 따라 석탑이 건립되
이키기 힘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었다. 그래서 오늘날 법당이나 불상은 흔적도 없지만 파손된 크고
현실 속에서 당시 사람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신앙 원리였다. 작은 석탑들이 무던히 남아, 그곳이 예전에 많은 사람이 드나들면
그에 따라 신도들이 예배하고 모일 수 있는 많은 사찰이 전국에 서 예배를 올렸던 사찰이 있었던 장소임을 전해주고 있다.
걸쳐 세워졌는데, 불교 신앙의 요체는 부처님의 사리였고, 사리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이 불교 신앙과 사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
를 모신 시설이 탑이었다. 던 고대 사회에서 석탑은 혁신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획기적인 조
이처럼 사찰과 탑은 하나의 세트였으며, 탑은 어느 사찰이나 한 형물이었다. 석탑은 기본적으로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그것
가운데 건립되어 상징물이 되었다. 그래서 백제 수도에는 절과 을 설계하고 시공한 장인의 예술적 역량이 발휘된 작품이기도 했
탑이 매우 많았고사탑심다; 寺塔甚多, 신라 수도에는 절들이 별처럼 많 다. 그래서 석탑은 우리나라 문화유산 중에서 신앙과 예술의 절
았고사사성장; 寺寺星張 탑들이 기러기 날아가듯탑탑안행; 塔塔鴈行 하였다 묘한 조화를 이루어냈으며, 오늘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
는 말까지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탑은 나무, 돌, 벽돌, 청동, 금, 도자기 등 여러 재료
로 만들어졌는데, 돌로 만든 석탑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석 근대기 우리나라에 세워진 석탑들
탑은 불교가 공인된 직후가 아니라 어느 정도 불교 신앙이 널리 한편 우리나라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전쟁
확산하고, 사찰을 조영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된 시기에 이르러 과 외세 침탈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고려 시대 거란과 몽골의 침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략, 조선 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은 특히, 겪지 말았어야 할
불교가 공인된 후 200여 년 정도 지난 600년대 초반에 백제가 뼈아픈 침략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유
처음으로 석탑을 창안해 냈다. 석탑은 다른 재료에 비하여 여러 린당하였고, 수천 년 이어 온 문화유산들이 잿더미가 되거나 침
가지 장점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불에 타지 않고 내구성이 강하 탈당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 세계정세의 변화와 외세의 침략에
다는 점이다. 한번 사찰에 세우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다 나름대로 악전고투하면서 발 빠르게 대응하려 했지만, 많은 고초
시 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많은 인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가 를 겪으면서 1876년 개항하게 된다.
능했고, 비용도 저렴하였다. 그렇다고 다른 재료에 비하여 신앙 다소 이견은 있을 수 있지만 통상 1876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
의 대상으로서 품격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를 근대기라고 한다. 이 시기에 내 나라 땅에서 우리 자신의 역사
대부분의 탑은 돌을 깎고 다듬어 세운 석탑이었다. 와 문화를 온전히 일구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수천 년 이어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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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도선사 7층 석탑
2 마산 정법사 5층 석탑
3 목포 달성사 3층 석탑
4 군산 사가와 5층 석탑
5 서울 불교제중원 5층 석탑
6 서울 조계사 7층 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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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을 건립하는 전통은 계속되었다. 이때 세워진 석탑 중에서 고층인 7층 석탑이 세워졌고, 1940년대 들어와서도 영암 축성사
건립 시기를 명확하게 알 수 있고,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측면에 와 진도 쌍계사 등 여러 곳에 다양한 양식의 석탑이 건립되었다.
서 중요한 석탑들이 상당수 전해지고 있다. 이 중에 우리의 시선
을 끌 만한 석탑이 여럿 있는데, 먼저 1887년 세워진 서울 도선사 근대기 석탑, 기존의 고정 개념 깨고 다양해져
7층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표면에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크고 근대기에 건립된 석탑들은 그 이전과 비교하여 몇 가지 차별
웅장하게 제작되었다. 광주광역시 증심사에는 사찰을 대대적으 화된 특징들을 보인다. 먼저 석탑의 구조와 외관이 전통적인 석
로 중창할 때 많은 시주를 한 강진 최 씨와 조 씨를 위하여 1915 탑 양식에서 서서히 이탈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인데, 이전에 건
년과 1919년에 석탑을 건립해 주었다. 사찰에서는 보기 드물게 립된 전통적인 석탑들은 기단부를 높고 넓게 마련하였으며, 탑신
여성 재가신자인 우바이優婆夷를 위하여 부처님의 사리탑 양식을 부는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일정한 체감을 보여 안정된 인상을 주
채용한 석탑을 세워 주목된다. 었다. 그런데 근대기 석탑들은 기단부를 낮게 마련하거나 생략하
마산 정법사에는 대보부모은중탑大報父母恩重塔이라고 하여 부모의 였고, 탑신부도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체감률이 거의 없다. 그래
큰 은혜에 보답하고, 중생들의 소원 성취와 깨달음을 기원하기 위 서 날씬한 인상을 주지만 불안하다. 이처럼 근대기에 들어와 이
하여 5층 석탑을 건립했다. 이 석탑은 1918년 8월 세워졌는데, 규 전과는 많이 다른 새로운 구조와 양식의 석탑이 등장하였다.
모가 크면서도 각 부의 비례가 잘 어울려 안정된 구도를 보이며, 근대기에는 석탑이 사찰에서 예배의 대상으로 조성되기도 하지
각 층의 탑신에 조각상을 새겨 예술적으로도 뛰어나다. 양산 통 만 정원을 꾸미기 위한 석물로도 많이 세워졌다. 이것은 석탑이
도사 경내에는 우리의 전통적인 석탑 양식을 적용한 5층 석탑을 근대기에 들어와 순수한 신앙적인 목적도 있지만 장식물로도 제
1920년 4월에 건립했다. 그리고 일본으로의 물자 반출의 중요 항 작되어, 석탑을 건립하는 목적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나타
구였던 인천을 비롯하여 목포와 군산에 상당량의 근대기 석탑이 낸다. 즉, 석탑의 용도와 기능이 기존의 고정 관념을 깨고 다양해
남아 있는데, 그 중 달성사에는 받침부를 높은 사각형 기둥처럼 졌으며,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측면이 공존했음을 알려준다.
세워 탑의 몸체를 받치도록 한 이색적인 탑이 1921년 5월에 건립 한편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한 도시인 부산, 인
되었다. 이 석탑은 일본 석탑을 닮은 일본식이다. 목포 정광정혜원 천, 군산, 목포 등을 중심으로 소위 일본식 석탑들이 상당수 건립
에는 각 층을 석등 형식으로 제작한 3층 석탑이 1931년 세워졌다. 되었다. 이는 일본인들의 후원과 주도로 건립된 석탑이 많으며,
한편 군산에도 우리의 옛 석탑을 모방하거나 군산 사가와 5층 석 일본식 석탑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음을 시사한다. 일본식 석탑
탑처럼 일본식 석탑을 그대로 닮은 탑이 상당수 건립되었는데, 또한 우리 땅에 세워진 것이기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
시간이 지나면서 파손된 경우도 있고, 일제 잔재 청산 사업의 일 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땅에 있는데 남의 힘으로 만들어졌다고 하
환으로 철거되기도 했다. 또한 장성 백양사 사리탑1924, 청도 신둔 여, 그것이 우리 역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사 5층 석탑1924, 김제 조앙사 7층 석탑1926 등이 1920년대 중반에 이처럼 역사의 변화는 문화에도 영향을 주며, 문화는 그 시대의
건립된 석탑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울 불교제중원에도 거칠게 제 조형물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문화재를 시대적 소산이라
작되었지만 날씬한 모습의 5층 석탑이 건립되었다. 이외에도 서 고 한다. 시대적 소산인 근대기 석탑을 보면서 변화된 시대적 흐
울 조계사에는 태국 왕실에서 간직하고 있던 진신사리를 스리랑 름과 특성을 읽어내고, 그것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임을 되새기면
카 스님이 가지고 있다가 경호 스님의 주선으로 전해주어 이를 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파도 소리도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봉안한 7층 석탑이 1930년에 건립되었다. 예산 수덕사에는 일본 그저 소음이 될 수도 있고, 아름다우면서 깨달음을 주는 음악의
인들도 존경했던 만공 스님이 1931년 세운 7층 석탑을 비롯하여 선율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근대기 석탑도 우리 역사의 파도 소
여러 기의 석탑이 전해지고 있다. 김해 은하사에는 파손된 고려 리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대 석탑 부재를 재활용하여 1932년 새롭게 만든 세련된 기법의
글 엄기표 단국대학교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석탑이 세워져 있다. 군위 극락암과 부산 금정사에는 날씬하면서 사진 엄기표, 아이클릭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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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북한 사 회 문 화 읽 기 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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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합관현악 편성은 크게 ‘부분’과 ‘전면’ 두 유형 설득력이 있다. <피바다식> 혁명가극들에서 보듯이, 전통악기를
북한은 배합관현악을 탄생시킨 이유에 대해 “서양의 관현악 양악기와 같이 화성을 연주하여 웅장한 소리를 내고 혁명적이고
이 형식주의, 퇴페주의퇴폐주의의 위험 속에서 헤매이고헤매고 있기 전투적인 극적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음악예술
때문에”라는 주장과 함께, “양악기는… 음량의 변화로 요술을 피 론≫김정일, 1991에 배합편성, 배합관현악이 1960년대 말 혁명가극
울 뿐 아니라 타악기들의 요란한 소음으로 사람들의 신경을 자극 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지시로 시작된 것이라고 언급한 사
하는 등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음악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 실, 그리고 옥류금이 당초 <피바다식> 혁명가극을 위해 제작된
는 이유도 제시한다. 그러나 북한이 배합관현악을 발전시키려 한 것이라는 사실 등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실질적인 이유는 당시 북한 음악계의 현실적인 요구 때문이라는 배합관현악 편성의 유형은 크게 ‘부분’ 배합관현악 편성과 ‘전면’
주장≪국악누리≫, <북한의 민족음악 – 민족악기 개량과 배합 관현악>, 2019.12.2.이 더 배합관현악 편성이 있다. 먼저 ‘부분’ 배합관현악 편성은 양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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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을 기본으로 하되 장구, 꽹과리, 장새납 등을 일부 추가하는 강, 음량의 증폭, 재질 대체, 음조절장치 고안 등 악기 구조 개선,
형태를 말한다. 북한에서 자주 연주되고 있는 관현악곡 <청산벌 사장악기死藏樂器의 복원·재현, 악기 종류의 확대 등이다.
에 풍년이 왔네>가 부분 편성의 대표적인 곡이다. 이에 비해 ‘전 남과 북이 전통악기 개량의 이념적 배경은 다르지만, 전통악기
면’ 편성은 양악기와 민족악기를 1 : 1로 편성하는 방식이다. 예를 개량의 방향은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한에서는 국
들면 하나의 곡을 연주하는데 바이올린과 소해금을 각 10대, 목 악기와 양악기를 모두 사용하여 연주하는 전통음악을 ‘퓨전fusion
관악기와 민족목관악기를 각 10대씩 편성하는 식이다. 근래에 실 국악’이라 부르는데, 오늘날에는 여러 공연단체가 국악기와 양악
제 사례로는 2011년 ‘설 명절구정 음악회’ 이후부터 계속 전면 편 기를 혼합 편성하여 크로스오버, 퓨전팝스까지 연주하는 것이 붐
성으로 연주한 은하수관현악단이 유일하다고 한다. 을 이루고 있다. 북한과는 정반대의 상황인 셈이다.
그러나 2013년 8월 ‘부화방탕’ 사건으로 은하수관현악단이 해체
되면서, 오늘날 북한에서 전면 배합관현악의 맥이 끊어진 상황이 1964년, 국립국악원 ‘국악기개량연구위원회’ 발족
다.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 방남 공연 직후인 4월에 정규악 서인화의 <남과 북의 악기 개량>2008, ≪동양음악≫ vol.30, pp.41~61
단으로 출범하여 10월에 전용극장삼지연관현악단극장, 삼지연극장까지 마 을 참조하여 간략하게 남한에서의 국악기 개량 역사를 살펴보도
련한 삼지연관현악단도, 부분적으로 장새납이나 꽹과리를 활용 록 하자. 먼저 가야금12현은 13현, 15현1960년대, 17현1990, 18현1980년대,
하는 것 외에는 아직 전면 배합관현악 편성 연주를 시도한 적이 21현1985, 22현1995, 25현, 34현, 그리고 전자 가야금인 고음창금과
없다. 그 결과 – 오늘날 북한에서 <피바다식> 혁명가극 공연이 거 저음창금 등 개량 종류가 많지만, 현재 25현 가야금이 가장 널리
의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 배합관현악 연주는 부분 편성 형 사용되고 있다. 거문고6현는 7현1980년대 중반, 8현2000년, 10현 거문
태로 국립교향악단 음악회를 통해 간간이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고2001년가 제작되었고, 음향 개선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한편 해
금2현도 1999년에 고음해금, 저음해금, 대해금, 4현 해금, 그리고
남북한, 전통악기 개량의 방향은 거의 일치 아쟁7현은 10현 아쟁이 개발·제작되었다. 양금14현도 크기를 키우
민간부문이 존재하지 않는 북한은 전통악기 개량사업의 이 고 현을 늘린 개량양금이 개발되었으며, 대금과 피리 역시 1980
념적인 토대 마련과 실제 사업 추진을 모두 당과 국가기관이 주 년대 후반과 1990년대 후반부터 개량한 대금, 피리들이 제작되
도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이미 오래전에 악기 개량을 시작한 중국 었다.
의 사례를 많이 참조했고, 우리 음악 특유의 농음弄音이나 시김새 한편 국가 기관과 단체의 경우는 1963년 2월부터 1964년 11월까
는 가능한 한 살리려고 했으며, 대량 생산을 위해 규격화된 설계 지 서울음대 국악과에서 전통 현악기에 대한 개량 연구가 있었
로 개량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대중악기뿐만 아니라 민족악기 고, 1964년 12월에는 국립국악원에서 국악기개량연구위원회가
도 시·도 악기공장과 평양악기공장1953.10.26. 출범에서 제작해 왔으 발족하여 개량 성과를 1967년 4월 전시회를 통해 발표했다. 1974
나, 2017년 말에 평양민족악기공장이 건설되었다. 매년 9월에는 ∼1975년에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 국악기 규
‘평양악기전시회’를 개최하는데, 작년 제10차 전시회의 경우 민 격화와 보급을 위한 지원사업을 실시했고, 1985년에는 국립국악
족악기와 대중악기 50종 800여 대, 부분품과 소모품 40여 종 원과 문예진흥원이 아시안게임1986과 서울 올림픽1988 연주에 대
700여 점이 전시되었다. 비하여 국악기개량위원회를 결성하여 그 성과를 1989년 12월 시
한편 남한의 경우는 연주자나 작곡가, 제작자 개인들, 혹은 이들 연회와 전시회를 통해 발표했다. 1990년대 말부터는 지방자치단
이 구성한 민간 위원회나 연구회가 국악기 개량을 주도하는 한 체들이 국악기 개량에 뛰어들었으며, 특히 2006년에 국립국악원
편, 국가 기관과 단체가 간헐적으로 이에 참여해 왔다. 또 근래에 은 악기연구소를 개소하여 과학적 기초 위에서 악기 개량을 추진
는 지방자치단체들도 국악기 개량에 가세하고 있다. 우리의 국악 해 나가고 있다.
기 개량은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이념 아래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추진해 왔다. 전통악기 음역의 확대저음부나 고음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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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남북한 음악 소개되며, 양측 관심 높아져 기 시작했고, 농현이나 시김새 등 북한에서 사라진 전통적인 연
남북한 간에 예술교류의 물꼬가 터진 것은 1985년 9월 제 주방식을 복원하려는 연구도 활발해졌다는 것이다. 북한의 민족
1차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 때이다. 악기 개량에서 아쉬움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탁성을 제거함으
1985.9.21.∼22. 양일간 평양평양대극장과 서울국립중앙극장에서 서울예 로써 우리 전통음악의 깊은 맛을 잃고 다소 중국음악의 발성법을
술단과 평양예술단이 각 2회의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특히 북측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적은 곧 개량 전통악기 남북
은 이때 개량 민족악기인 장새납 독주 <그네 뛰는 처녀>, <풍년 교류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통일에 대비하여 전
든 금강마을>과 가야금 독주 <봄>을 선보였다. 그러나 방문 공연 통악기 개량의 기존 성과를 교환·전시하고 학술회의를 통해 앞
이 끝난 후 양측은 각자의 문예관에 따라 상대측 공연에 대해 격 으로의 개량 방향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렬히 비난을 퍼부었다. 이후 1990년 9월부터 1992년 5월까지 여 양측의 전통악기 개량 경험과 과학적 접근 성과는 양측에 크나큰
덟 차례의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되면 시너지 효과와 함께 악기 개량사업에 활력을 가져다줄 것이다.
서 회담 참석자에 대한 환영 행사로 매번 대규모 특별공연이 있
었다. 특히 첫 남북고위급회담이 개최된 직후인 1990년 10월과
12월에 남북한 예술교류가 한 차례 더 있었다. 즉 평양8곳에서 개
최된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서울전통음악연주단17명이 방북 연주
하고, 이에 대한 답례 형식으로 서울2곳에서 개최된 ‘90송년 통일
전통음악회’에 북한의 평양민족음악단26명이 방문 연주한 것이다.
이때 양측 공연 중 전통악기 연주만 추리면, 우리 측은 2·8문화회
관1990.10.19.∼20.에서 가야금 독주 <비단길>, 단소 독주 <청성곡>,
<사물놀이>김덕수패 등을, 그리고 봉화예술극장10.21.에서 <사물놀
이> 등을 연주했다. 평양민족음악단의 예술의전당1990.12.9.과 국립
중앙극장12.10. 연주에서는 민요와 함께 옥류금 독주 <도라지>, 단
소 독주 <중모리 및 안땅>, 가야금 독주와 병창 <옹헤야>를 선보
였다.
1990년 10월과 12월 공연에 대한 양측의 반응은 1985년 9월 공
연에 대한 반응과는 사뭇 달랐다. 북측이 단소 독주 <청성곡>과
<사물놀이>에 대해 ‘민족음악 전통의 고유한 장단과 가락, 청아
하고 구성진 음색적 특징을 잘 살려냈다, 전통음악의 진수를 맛
볼 수 있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한 것이다. 북측 공연에 대한
우리 전문가들의 평가도 남한과는 다른 전통 계승 방법과 국악기
개량사업의 성과, 북한 음악의 개성적 면모를 어느 정도 인정하
고, 통일 지향적으로 서로의 공통점을 찾으면서, 참고할 만한 점
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면모를 보였다.
1990년대에 남북한의 음악이 서로 소개되면서, 남한에서는
1990년대 이후 악기 개량작업이 활발해진 반면, 북한에서는 남
한의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한겨레21≫ 제314호,
글 오양열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초빙석좌연구위원
2000.6.29.. 봉건 음악으로 치부하던 산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 사진 Flickr(@Republic of Korea), 위키미디어,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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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칼럼
‘우리 문화’와 ‘우리 사상’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문화와 사상의 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우선
문화와 사상은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교 ‘사상’이 들어오면 불교 ‘문화’가 들어오고, 불교 사상이 우리 사상이 되며 우리만의
‘불교문화’가 만들어진다. 유교, 기독교 사상과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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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우리 민족의 저력, 바로 ‘근면성’
우리 문화에는 무교 문화, 불교문화, 유교문화, 기독교문화가 우리나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매일 침략만 당하여 한恨
시대에 따라 주류를 이루면서 혼재되어 있다. 무당에게 가서 굿을 이 맺히고 은근慇懃과 끈기로만 살아 온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중
하고 사주를 보고, 절에 가서 49재를 지내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국보다 이민족의 침략을 받은 것이 오히려 훨씬 적다. 또한 7차에
보살이라는 염불을 외고, 백일기도, 천일기도를 하고, 부모가 돌아 걸쳐 몽골에게 침략을 받은 이후에도 30년 만에 전쟁 복구를 마치
가시면 유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명절에 차례를 지내고 기일에 제 고 부흥하여 원나라를 쫓아내고 조선을 건국한다. 임진왜란, 병자호
사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기독교문화로 인해 제사를 안 지내고 기 란을 당하고도 30년 만에 복구하여 북벌론을 주장할 정도로 전쟁
도회로 대신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문화는 오랜 역사가 흐르는 복구 능력도 탁월하다. 우리 민족은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6.25전쟁
동안 여러 문화가 혼재되었고 우리 사상도 혼재되어왔다. 을 겪고 그 초토화 된 땅에서 30년 만에 경제 부흥을 이뤄내는 민족
그렇다면 우리 문화와 우리 사상의 특성과 우수성을 어디서 찾고 인 것이다.
어떻게 찾아야 올바르게 찾는 것인가. 문제는 서양 문화와 비교하 이러한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근면성이다. 이러한 저력은 고
여 우리 문화, 동양 문화를 열등하게 여기고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 려 말에 문익점이 면화를 들여와 재배하여 면화 왕국을 만들고, 세
해 있다는 점이다. 이를 고치기 위해 새로운 시각을 지닐 필요가 있 종 대부터는 면포를 일본에 수출하여 조선 전기의 부강을 누리고,
다. 문화는 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체계적으로 이해 조선 후기에는 비단을 청나라에서 들여오고 일본에 팔아 이익을 남
할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철학으로 불교의 화엄 철학과 유교의 기는 중계무역으로 부강을 이룬다. 또 조선 후기에 이룩한 뛰어난
성리 철학을 들 수 있고, 현대에는 서양의 헤겔 철학을 들 수 있다. 농업기술은 일본 강점기에 중국인들도 농사를 포기한 만주의 황무
불교의 화엄 철학이 당나라의 문화를 만들었고, 성리 철학은 원나 지를 개간하여 농토로 만들어 독립운동기지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
라, 명나라 문화를 만들었고, 헤겔 철학은 근·현대 유럽 문화를 만들 고 여성들이 베틀에 앉아 많은 면포를 짜 의복 걱정을 하지 않는 나
었다. 라가 됐다. 조선 후기는 ‘면화 왕국’이라고 할 정도로 전국에서 여성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에 원효 의상이 화엄 철학을 받아들여 석 들이 면포를 생산하고 있었고, 남성과 여성이 분업이 매우 잘 되고
굴암, 불국사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조선은 성 있었다. 이러한 문화국가가 일제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리 철학을 바탕으로 성리학적인 이상 사회를 건설하였던 나라였다. 제삼 세계제3세계라는 후진국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주자성리학을 받아들여 조선을 건국하고 집현전 학
자들을 길러 세종·성종 대에 최고 수준의 문화를 이루어냈다. 조선 국가의 문화융성 방향
후기에는 퇴계 율곡이 주자성리학을 심학 단계로 끌어 올려 완성하 우리는 화엄 철학으로 종교가 주柱가 되는 불교문화를 만들었
니 이에 따라 세계 최고 수준의 철학을 완성하고, 완성된 성리 철학 고, 그래서 전국에 사찰이 산재해 있다. 성리 철학으로 윤리가 주가
은 영조·정조 대 문예 부흥이라는 고유문화를 창조해냈다. 이러한 되는 유교문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전국에 향교와 서원이 산재해
고유문화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창덕궁과 종묘 왕릉 있다. 이러한 전통을 기반한 유교문화의 정수를 간직한 곳이 바로
그리고 서원으로,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왕실 궁중 문화이다. 이를 복원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다음
시대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 바로 국가의 ‘문화융성’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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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 LENDER SUN MON TUE
문 화 달 력 202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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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 W S
사라져 가는 직업과 생업공간
U RIM U N HWA 집필 김현미 외 9인 ㅣ 발행처 수원문화원
강진의 역사문화
집필 최성미 외 2인 ㅣ 발행처 임실문화원
편집후기
꿈같은 자유 언덕
쉬어질 것 같다.
한문연 60년사 편찬위원 위촉식
지난 7월 2일, 《한문연 60년사》 발간 편찬위원 어쩔 수 없이 편집위원 모임도 뒷날로 미룬
준비 중이다. 위촉된 인사는 권용태고문, 김명자 어서어서 평온이 찾아와서 서로서로 반갑게
은평문화원장, 나종우전주문화원장, 박주석명지대학 교수, 만나는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2020 08
72
숨바꼭질
Sumbakkokjil
ISSN 1599-4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