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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우리 고미 술 을 만 나 다
〈풍림정거도 楓林停車圖

안중식安中植, 1861~1919
1913년경, 비단에 채색, 164.4 × 70.4cm

심전心田 안중식은 조석진趙錫晋, 1853~1920과 함께 조선 시대의 마지막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했다. 안중식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났으며 산수, 인물, 화조, 영모翎毛 등 여러 화목畵目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
였다. 20세 때인 1881년에 그는 조석진과 함께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 이끄는 영선사領選使의 일행으로 중
국 천진天津에 파견되었다. 그는 제도사製圖士로 선발되어 청나라의 각종 신무기와 신식 기계를 묘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2년에 안중식은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의 어진를 그렸다. 안중식은 화가로서도 뛰
어났지만 미술교육가로도 저명했다. 1911년에 그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교육 기관인 서화미술회
書畵美術會
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이상범李象範, 1897~1972, 노수현盧壽鉉, 1899~1978, 변관식卞寬植, 1899~1976
등 많은 제자를 육성하였다.
〈풍림정거도〉는 그가 서화미술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1913년경에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당나
라의 시인인 두목杜牧, 803~852의 〈산행山行〉 중 “저물어가는 가을 단풍 숲을 사랑해서 수레를 멈추고 앉아
바라보니, 서리 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더 붉구나停車坐愛楓林晩, 霜葉紅於二月花”라는 구절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풍림정거도〉의 화면 하단에는 멈춘 수레 옆에 서 있는 두 명의 시동과 바위에 앉아 붉게 물
든 단풍을 바라보는 두목이 그려져 있다.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것은 거대한 산봉우리이다. 각이 진
바위들이 중첩되어 하늘로 치솟은 웅장한 암봉의 산세山勢와 산허리를 감싼 짙은 구름은 선경仙境과 같
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화려한 빛깔을 뽐내는 단풍 숲을 바라보며, 대자연의 아름다
움을 느껴보는 것은 인생의 큰 행복이다.

글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그림(소장) 삼성미술관 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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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Contents
U RIM U N HWA
A KORE AN LOCAL
C U LT U R E M O N T H LY

월간 우리문화 별별마당
vol.289 | 2020 11
1 우리 고미술을 만나다
발행인 김태웅
〈풍림정거도〉 / 장진성
발행일 2020년 11월 1일
편집고문 권용태
4 테마기획
편집주간 한춘섭
편집위원 곽효환, 김종, 김찬석, 오광수, ‘농업의 국가 대표’ 국가중요농업유산 / 이유직
오양열, 장진성, 지두환
편집담당 음소형 14 시와 사진 한 모금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단풍 절정 / 이근화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홈페이지 www.kccf.or.kr
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문화마당 Cultural Encounters
등록번호 마포,라00557
기획편집번역제작 서울셀렉션 02)734-9567 16 옹기종기 Iconic Items
지혜를 엮어 만든 ‘짚’ / 안유미
Jjp: Making the Most of Nature’s Gifts / An Youmee

18 한국의 서원 ⑧ Korea’s Seowon


오랜 역사, 독특한 방식의 정읍 무성서원 / 이종호
Museongseowon in Jeongeup: A Long History and Unique Methods / Lee Jongho

24 지역문화 스토리 Local Culture Stories


전통의 재해석과 재창조, 대전 민속놀이 열한 마당 / 김효경
Reinterpretation and Recreation of Traditions Eleven Folk Entertainment Customs of
Daejeon / Kim Hyo-kyung

32 느린 마을 기행 ⑦ Slow City Travel


“산 따라 물 따라” 자연 치유도시 제천 / 임운석
“Along the Mountains, Along the Waters”: The Natural Healing City of Jecheon
/ Im Unseok

38 팔도음식 Provincial Cuisine


맛은 당연, 건강은 보너스! 제천 약초순대 / 최갑수
Jecheon’s Yakcho Sundae: Tasty and Healthy! / Choi Gab-su

우리 놀이문화 _ 널뛰기 42 한국을 보다 Through Foreign Eyes

표지 이야기
헨드릭 하멜, 그가 남긴 이야기에 빠지다 / 헨니 사브나이에(이해강)
The Story of Hendrik Hamel, and How I Came to Research It / Henny Savenije (Lee Haekang)
긴 널빤지 양쪽 끝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두 사람이
번갈아 뛰어올랐다가 발을 굴렀다 하는 놀이.

표지 그림 박수영 일러스트레이터
공감마당
18 46 서울 스케치
익선동에서 드는 두 가지 의문 / 김형근

48 조선 人 LOVE ⑪
임금 자리와 맞바꾼 양녕대군의 상사병 / 권경률

52 바다너머
물 위에 띄운 예술, 베트남 수상 인형극 / 이은영

24 56 오! 세이
기억의 힘 / 정지아

우리마당

58 삶과 문화
“코로나19가 바꾼 문화생태계, 문화원이 선도적 역할 선점해야”
김선유 한국문화원연합회 부회장(김제문화 원장) / 한춘섭

32 62 북한사회 문화 읽기 ㉑
북한 출판계의 ‘위대성 도서’ 발간 / 오양열

66 한문연 소식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발표 / 음소형

68 문화원 소식
문화원, 온라인의 세계로! / 음소형

72 NEWS, 편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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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 기증 탁본전 〈국토의 역사와 향기〉 등 / 편집부

ISSN 1599-4236
■ 《우리문화》에 대한 의견은 편집부(eumso@kccf.or.kr)로 보내주세요.
■ 게재된 기사 및 이미지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 책자는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제작합니다.
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농업의 국가 대표’
국가중요농업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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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농업을 주업으로 살아온 우리에게는 전국 곳곳에 그 지역의 환경과 여건에 맞추어 적응하며 일구어온 전통과 문화가 남아
있다. 근대화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변화와 변형, 그리고 멸실이 있었지만 농촌의 곳곳에는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는 보석
같은 농업문화가 있다. 그 속에는 오랜 시간 대대로 전승되어온 지혜와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있으며, 땅을 일구고 경작하며 살아온 삶
의 방식들이 자연과 함께 씨줄과 날줄이 되어 얽히면서 독특한 경관을 연출한다.

보성 전통차 농업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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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산수유 농업

‘농업 유산’이란 무엇인가 농업 인구의 고령화, 그리고 농촌의 과소화는 어제오


인류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영위해온 농경 활 늘의 문제가 아니며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동의 역사 속에 수 세대에 걸쳐 축적된 전통 지식 및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는 2012년 국가중요
실천을 토대로 한 농업 시스템을 농업 유산이라 부 농업유산 제도를 실시하였다. 농업·농촌이 가진 유·
른다. 농업 유산은 정치·사회·경제·문화·생태 등 여러 무형의 자원을 보전, 활용, 계승하고 농촌을 유지해
외부 환경과 그 변화에 대해 농업을 통해 적응하면서 온 전통 농업 경관의 멸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진화해온 산물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이어지는, ‘살아 는 위기감이 이 제도 도입을 서두르게 했다. 또한 개
있는 유산’이다.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농촌에 면 발 위주의 지역 개발에서 한 단계 나아가 보전을 통
면히 흐르는 농업 기술, 생물 다양성, 농업 문화, 공동 한 성장,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농업·농촌의 역할
체 활동, 경관 등은 지역을 특징짓는 독특한 개성일 을 다하기 위한 소명과 기대 또한 이 제도 도입의 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그렇 요 배경이다.
지만 개인 삶의 방식과 기호의 변화, 고령화와 과소
화, 산업 구조의 변화, 나아가 지구적인 기후 변화 등 역사성과 지속성을 가진 ‘국가중요농업유산’
은 기존의 농업·농촌의 전통을 급속히 해체하고 있으 국가중요농업유산은 전국에 산재해 있는 여러
며 위기로 내몰고 있다. 농업 유산 역시 새로운 품종 농업 유산들 중에서 소정의 기준을 충족해야 지정된
의 보급과 농법의 발전, 대규모 생산을 위한 기계화 다. 역사성과 지속성을 가진 농업 활동으로 농산물
영농과 농업의 국제화에 따른 경영 악화 등으로 근 의 생산이 지역 주민의 생계유지에 이용되고 있는지,
본적인 변화에 노출되고 있다. 더군다나 인구 감소와 고유의 농업 기술 또는 기법과 농업 활동이 연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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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농업 문화가 이어지고 있는지, 농업 활동과 관 한 장소에서 4~6년 생육을 하는 금산 인삼 농업에는
련된 특별한 경관을 형성하고 생물 다양성의 보존 및 수확 후 10년 이상의 다음번 재배를 위한 준비와 노
증진에 기여하는지, 그리고 지역주민들은 이를 아끼 력의 과정이 숨어 있다. 대체로 1년을 주기로 하는 농
고 가꾸고 있는지를 두루 검토해 보고, 그 내용이 국 업과는 전혀 다른 패턴이 금산의 인삼 농업에는 담겨
가 대표급이면 지정한다. 그래서 국가중요농업유산 있다.
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그 속에는 지역사회의 농업적, 하동과 보성, 그리고 장흥은 다 같이 차를 주제로 하
문화적 활동과 문화 가치, 사회적 공동체, 농업 활동 지만 재배하고 수확하며 가공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
과 연계된 토지 이용과 그것이 연출하는 특유의 농업 다. 하동에서는 섬진강 변 기슭의 지형과 어우러진
경관, 유전자원의 확보나 지속적인 환경 보전을 위한 자연형의 차밭을 볼 수 있는 반면, 보성에서는 등고
노력을 읽을 수 있다. 선을 따라 가지런히 늘어선 차밭의 풍경을 마주할 수
우리나라는 2013년 청산도 구들장논과 제주 밭담을 있다. 장흥에서는 차를 발효시키고 구워서 엽전 모양
시작으로 지난해 완주 생강 전통 농업 시스템, 고성 의 청태전이란 전통 발효차를 만들어 즐긴다.
해안 지역 둠벙 관개 시스템, 상주 전통 곶감에 이르 상주는 곶감이 유명하다. 떫은 감은 시간이 지나 말
기까지 그동안 총 15군데를 지정하였다. 그간 지정된 랑말랑해지면 홍시가 되는데, 딱딱할 때 수확하고 깎
국가중요농업유산을 살펴보면 대략 세 가지 유형으 아 말려 곶감을 만든다. 딱딱한 떫은 감을 덕장에 매
로 나눌 수 있다. 달아 숙성시키면 하얀 분으로 덮인 단맛이 응축된 곶
감이 된다. ‘상주둥시’는 전통 품종을 보전한 결과이
유형① 특정 작물의 재배가 오래 이어진 경우 다. 완주의 생강 농업을 살펴보면 더욱더 재미있다.
첫 번째는 특정 작물의 재배나 이를 가공한 특산 생강은 섭씨 13도 이하면 동해를 입는 대표적인 고온
물 생산을 오랜 기간 이어온 경우이다. 구례 산수유 성 작물인데 겨울철 생강 종자를 보관하기 위하여 온
농업, 담양 대나무밭, 금산 인삼 농업, 하동 전통 차농 돌식 주택의 고래 밑에 생강 저장굴을 고안해 냈다.
업, 보성 전통차 농업 시스템, 장흥 발효차 청태전 농 겨울철 아궁이의 열기가 생강굴 위로 지나가도록 하
업 시스템, 완주 생강 전통 농업 시스템, 상주 전통 곶 여 추위를 난다. 이러한 저장 방식은 이 지역의 주택
감, 그리고 부안 유유동 양잠 농업이 이 유형에 속한 양식에도 영향을 줬다. 마루에 올라서는 댓돌 옆에
다. 이들 지역의 농업 유산 속에는 해당 작물을 재배 생강굴로 내려가는 조그만 입구가 현재에도 남아있
하는 지식이 오랜 시간 전해 내려오고 주민들의 삶과 는 온돌식 생강굴 방 주택이 140채가 넘는다.
농업 활동이 동화되어 있다. 또한 지역의 환경에 순
응하거나 대응하여 농업 활동과 농업환경이 서로 안
정된 상태에 도달한 모습을 보여준다. 때에 따라서는
특별한 시설의 조성이나 주거 유형에도 영향을 주기
도 하여 독특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구례의 풍경에서 산수유를 뗄 수 없다. 마을과 농경
지 주변에는 으레 산수유가 자리 잡고 있으며 특유의
시비법과 씨 제거 방법이 전해 내려온다. 천여 년 전
부터 생계수단으로 시작한 산수유 재배로 구례의 봄
은 노란 꽃으로 물들고 가을은 빨간 열매로 불탄다. 상주 전통곶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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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의 모든 마을은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대나무 유형② 시설이나 농업 환경 조성
밭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텃밭을 지나 논으로 흘러들 두 번째는 특별한 시설이나 농업 환경을 조성한
어 담양의 농업은 대나무밭에서 시작한다. 대나무는 유형이다. 청산도 구들장논과 제주 밭담, 의성 전통
생활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어 사람들은 대나무를 수리농업 시스템, 고성 해안지역 둠벙 관개 시스템이
이용하여 자식들을 교육시켰다. 갖가지 생활 도구를 여기에 속한다. 청산도는 여느 섬들처럼 논이 부족하
만들고 음식도 만들고 술도 빚는다. 담양의 문학, 원 여 다랑논다랭이 논을 만들어 쌀을 생산했는데, 이곳은
림, 예술은 대나무와 떼려야 뗄 수 없다. 특히 물 빠짐이 심한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구들
양잠 농업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부안 유유동에는 장 놓듯이 바닥에 돌을 깔아 계단식으로 논을 만들었
뽕나무 재배에서 누에 사육까지의 일괄 시스템이 전 다.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논바닥에 돌을
승되고 있다. 조선 시대 때부터 부안의 토산품은 뽕 깔고, 상부의 논에서 넘쳐 나온 물을 아래 논에서 이
으로 기록돼 있을 정도로 역사성을 지닌 이곳에는 누 용할 수 있도록 통수로를 조성하였다. 구들장을 깔아
에 생육에 가장 중요한 온도, 통풍관리 등이 타지역 만든 다랑논이기에 일반 논과는 다른 농기구가 필요
과 다른 독특한 전통 잠실이 보전되고 있다. 한 것은 당연한 이치. 이렇듯 어렵게 고립된 섬 지역

청산도 구들장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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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밭담

에서의 쌀 농업을 이어왔다. 위한 ‘둠벙웅덩이’이 440여 개가 남아 여전히 농업용


제주도 또한 돌이 많고 척박한 토양과 바람이 심한 수로 이용되고 있다. 고성의 둠벙은 항상 물이 고여
지역 환경에 맞서, 밭담을 쌓아 토양 유실을 방지하 있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 보전과 증진에 기여하는 농
고 농업에 적합한 미기후를 조성하여 농사를 지었다. 업생태계의 보고이다.
이렇게 조성한 현무암 담장이 만리장성에 3배도 넘
는 22,000km에 이른다. 흑룡만리 제주 밭담은 제주 유형③ 특정한 농업 환경에 적응
도 농업 경관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세 번째는 특정한 농업 환경에 적응하면서 이루
의성군에는 저수지가 6,400개가 넘는다. 금성산이 어온 지역의 특별한 총체적 농업 방식이다. 울진 금
화산 폭발을 하여 이루어진 지역의 농업 환경에 맞서 강송 산지 농업과 울릉 화산섬 밭 농업이 이 범주에
논농사를 위해서 삼국 시대부터 저수지를 조성하여 속한다. 울진은 고대 국가의 전설이 남아 있는 흥미
벼농사를 짓고, 벼 수확이 끝나면 밭으로 전환하는 롭고 신비로운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 이곳은 황장봉
이모작을 일찍부터 실시해왔다. 오늘날 유명한 의성 산이라 불리는 왕실에 필요한 목재를 공급하는 곳으
의 마늘은 이런 전통 수리농업 시스템과 이모작이 가 로 지정된 일종의 ‘금단의 땅’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지고 온 이 지역의 특산물이다. 집마다 마늘을 말리 소나무 숲을 보호하면서도 생존을 위한 농업 활동을
는 건가 시설은 독특한 의성의 농촌 경관을 이룬다. 오늘에까지 이어오고 있다. 백두대간의 산속에서 송
우리나라는 산업화 시대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농지 계, 보계 등 공동체 문화를 일구면서 지역의 농업 환
를 경지 정리하고 현대적인 기계 영농이 가능하도록 경에 적응해 온 결과가 울진 금강송 산지 농업이다.
전환하였다. 그렇지만 고성에는 아직 경지정리가 안 울진만큼, 아니 훨씬 더 고립된 곳이 울릉도이다. 울
된 곳들이 해안을 따라 남아 있다. 이곳에는 빗물이 릉도는 육지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화
바다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이 물을 농업에 활용하기 산섬이라는 조건으로 농업을 이어가기가 매우 어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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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중요농업유산의 핵심이 되는 세 가지
원래 농업유산제도는 UN 산하 국제식량농업
기구FAO: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가 2002년부
터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 Globally Important Agricultural
Heritage Systems 제도를 도입한 데서 출발한다. UN이
주창하는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농업 부문 프로젝
트의 하나로 시행되었다. 일반적인 농업 유산의 개념
에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의 이념을 추가하여 새롭게
농업 유산을 정의하고 이 제도를 시작한 것이다. 세
계중요농업유산 제도 운용의 목적은 오랜 세월에 걸
친 인류의 농업 활동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전통적 토
지 이용 시스템과 이로 인해 형성된 경관을 보전하자
는 것이다. 그리고 식량과 농업을 위한 생물 다양성

울진 금강송 산지 농업 과 유전자원의 지속 가능한 사용을 도모하는 것인데


전통적 농업 시스템, 고유한 경관, 생물 다양성은 세
계중요농업유산을 구성하는 세 가지 주요 핵심 요소
이다.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가 생물 다양성과 천연자
곳이었다. 급경사지에 밭을 일구고 토양 유실을 방지 원의 보존 및 지속가능한 사용을 강화하고, 기후 변
해주는 다년생 작물을 재배하였다. 이 나물을 육지에 화에 대한 취약성을 줄여 그 결과로서 식량 안보와
내다 팔아 삶을 이어온 농업 문화가 이곳에 있다. 울 빈곤 완화에 기여하고자 한다.
릉도산 건채는 특산물로서 매우 인기가 높고 급경사 2020년 9월 현재 전 세계 22개 나라에서 62개의 세
와 분지에서 이루어지는 농업 경관은 울릉도의 관광 계중요농업유산이 등재되어 있으며, 15개 지역이 등
상품이 되고 있다. 재 지정을 위한 소정의 절차를 밟고 있다. 우리나라
이처럼 국가중요농업유산은 지역의 환경·사회·풍습 는 다섯 군데가 지정되었는데 2014년에 청산도 구들
등에 적응하면서 오랫동안 형성시켜온 유형·무형의 장 논과 제주 밭담이, 그리고 2017년 2018년 2020
농업 자원이자 문화 자원이다. 이 속에는 생산과 농 년에 하동 전통 차농업, 금산 인삼 농업, 담양 대나무
업 환경 유지에 따른 전통문화가 녹아 있고, 농업 생 밭 농업이 각각 등재되었다. 그리고 국가중요어업유
물 다양성과 생태계의 복원을 위한 지혜가 담겨 있으 산 제1호인 제주 해녀 어업과 제7호 섬진강 재첩잡이
며, 미적인 아름다움이 숨 쉬고 있다. 나아가 현재에 손틀어업이 현재 신청 절차 중에 있다.
도 식량 생산의 큰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중요한 생 지정된 세계중요농업유산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
산 자원이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간섭이 오 지하는 것은 척박한 토지나 부족한 물 등 열악한 환
랜 시간 누적되고 상호 적응하면서, 농업 활동에 따 경 조건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안된 고유한 농업 방
른 그 지역 특유의 생물 다양성과 생태계가 보전되고 식들이다. 우리나라 청산도의 구들장논, 중국의 하니
있다. 역사성과 지속성, 생계유지, 고유한 농업기술, 다랑이논, 모로코의 아틀라스산맥 오아시스 시스템,
전통 농업문화, 특별한 경관, 생물 다양성, 주민참여 물 위에 인공섬을 띄워 농업을 하는 멕시코의 치남파
는 국가중요농업유산을 읽는 일곱 개의 키워드다. 시스템 등이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그리고 특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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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작 기술이나 수확 기술처럼 특별한 농법을 지닌 농 의해 인공적으로 형성된 생산 활동 지역이 과학적,
업 시스템들도 지정되었다. 인도 카슈미르 지방의 사 심미적, 그리고 생물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존할 가치
프란 재배, 이탈리아 아씨씨와 스폴레토 지역의 올리 를 가져야 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현재에
브 농업, 일본 시즈오카의 와사비 재배, 그리고 금산 도 농어업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로 인해 주민의
의 인삼 재배 등이 있다. 이밖에 임업과 농업, 어업과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고 있으며, 또한 그 결과로서
농업 등이 복합적으로 작동되는 영농 시스템들도 있 생물 다양성의 증진이 촉진되어야 하는 점을 중시한
는데 탄자니아의 키함바, 중국 저장성 롱시안의 물고 다. 그밖에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에 추가한 복합 유산
기 농업 시스템, 일본 구니사키 반도 우사 지역의 임 과 문화적 경관 제도가 있다. 세계중요농업유산은 현
업 농수산 통합 시스템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재 농어업 활동이 진행되고 있어야 하고, 주민과 환
국제식량농업기구가 운영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제 경의 동반적 적응 과정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에
도와 유사한 것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제도가 있 서 복합유산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문화적
다. 두 제도는 유사한 듯 보이지만 구별되는 차이점 경관은 세계중요농업유산과 많이 유사하지만, 문화
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제도 중 자연 유산은 대 적 경관이 유적을 중심으로 한 경관을 보다 강조하는
체로 ‘자연적 생성물’을 대상으로 하고 문화유산은 데 반해 세계중요농업유산은 생산 및 생활 시스템과
‘인공과 자연이 결합된 유적지’를 주로 대상으로 한 생태적 특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
다. 이에 반해 세계중요농업유산은 농림어업 활동에 다고 하겠다.

담양 대나무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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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중요농업유산 현황
지정번호 지정년도 명칭 지정 지역 주요 특징

청산도 완도청산도 전역 급경사로 돌이 많고 물 빠짐이 심하여 논농업이 불리한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제1호 2013
구들장논 (5.0ha) 위해 전통 온돌방식을 도입, 독특한 구들장 방식의 통수로와 논 조성

제주도 전역 돌, 바람이 많은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밭담을 쌓아 바람과 토양


제2호 2013 제주 밭담
(542ha, 22,108km) 유실 방지, 농업 생물 다양성, 수려한 농업경관 형성

구례 구례군 산동면 생계유지를 위해 집과 농경지 주변 등에 산수유를 심어 주변 경관과 어우러


제3호 2014
산수유농업 (228ha) 지는 아름다운 경관 형성, 다양한 생물 서식지, 시비와 씨 제거 등 전통농법

담양 담양읍 삼다리 다양한 생물의 서식지이며 대나무 숲은 독특한 농업경관 형성, 죽초액과 대
제4호 2014
대나무밭 (56.2ha) 나무 숯을 활용하여 병충해 방재 및 토양개량 등 전통농법

금산 금산군 일원 인삼재배의 최적지, 재배지 선정, 관리, 재배, 채굴, 가공 등 전통농법 유지, 주
제5호 2015
인삼농업 (297ha) 변 산과 하천이 어우러지는 경관 형성

하동군 화개면
하동 생계유지를 위해 1,200년 동안 전승된 전통적인 농업, 풀비배 등 전통방식의
제6호 2015 일대
전통 차농업 차 재배 유지, 차밭 주변의 산림과 바위가 어우러지는 독특한 경관 형성
(597.8ha)

울진군 금강송면
울진 금강송 왕실에서 황장봉산으로 지정 관리,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송계와 산림계를
제7호 2016 북면 일대
산지농업 조직하여 관리, 주변 계곡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 형성
(14,188ha)

부안군 변산면
부안 유유동 뽕 재배에서 누에 사육 등 일괄 시스템이 보전·관리되고 친환경적 뽕나무 재
제8호 2017 유유동 일대
양잠농업 배, 생물 다양성, 주변 산림과 뽕나무밭이 조화된 우수한 경관
(58.9ha)

급경사지 밭을 일구면서 띠녹지를 조성하여 토양유실 방지하고 주변 산림지


울릉 화산섬 울릉군 일대
제9호 2017 역의 유기물을 활용하였으며, 울릉에 자생하는 식물을 재배하였고, 산림과
밭농업 (7,286ha)
해안이 어우러지는 패치형태의 독특한 경관

의성 삼한 시대 조문국 시대부터 2,000년의 농업역사를 가지고 있는 금성면 일대


의성군 금성면 등
제10호 2018 전통 수리농업 는 약 1,500개의 제언이 축조, 이를 통해 농업용수를 저장·활용함으로써 이
4개면 일원
시스템 모작 전환시스템 구축

보성 전통차 새끼줄을 기준 삼아 경사지 등고선에 따라 간격과 수평을 맞추는 계단식 차


제11호 2018 보성군 일원
농업 시스템 밭 조성 기술과 경관 형성

장흥 발효차
반음반양의 차 재배환경 조성 및 친환경 농법, 발효차 전통 제다 지식체계, 굽
제12호 2018 청태전 장흥군 일원
는 과정이 추가되는 독특한 청태전 음다법 등 구축·전승
농업 시스템

완주 생강 겨울철 생강종자 보관을 위해 토굴을 활용한 저장시스템으로 농가의 아궁이


제13호 2019 완주군 일원
전통 농업 시스템 열을 이용한 온돌 방식, 수직강하 방식 등이 있음

고성 해안지역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둠벙을 조성하고 활용하여 빗물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제14호 2019 둠벙 고성군 일원
해안지역의 자연적 특성 극복
관개 시스템

상주 ‘상주둥시’ 전통 품종보전을 통한 감 재배 적지선정·관리·가공 등 곶감의


제15호 2019 상주시 일원
전통곶감 전통적 방식 계승

자료 출처: 농림축산식품부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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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국가중요농업유산 하동 전통 차농업

국가중요농업유산 제도가 제 역할을 다하기 위


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제도에 대한 국민적 이해와 인
식을 높이는 일이 제일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 주변
에 관심을 지녀야 할 농업 유산으로 무엇이 있으며,
어떤 특징들이 있는지 알 수 있도록 ‘잘 알리는 것’에
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동안 정부에서는 매년 한두
개씩 지정해 왔는데 국가대표급 농업유산이 매년 그
렇게 새롭게 발굴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어느 시점부
터는 새로운 지정보다는 지정한 유산들을 보전, 활용
하는데 초점이 모일 것으로 보인다. 국가중요농업유
산 제도를 운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 농업 유산을 지키고 가꾸는 데에는 많은 수고와 노
농업 문화를 대표하는 농업 지식, 생태, 경관, 문화 등 력, 그리고 불편함과 경제적 손실이 수반된다. 대부
이 더는 멸실되지 않도록 지키고 가꾸어 후세에 전해 분 이런 부담은 해당 주민들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
주는 일이라 하겠다.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독 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책을
자에게 국가중요농업유산 제도를 소개하며 두 가지 마련하지 않으면 해당 유산은 금방 위험으로 내몰릴
점을 환기해 드리고 싶다. 가능성이 크다. 농업 유산 소유자가 새로운 농업 여
첫 번째는 국가중요농업유산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건 변화에 직면하여 농업 유산을 보전할 것인가 아니
유산이라는 점이다. 농업 유산은 정지된 유물이 아니 면 다른 용도로 전환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라 현재에도 진행되는 동적인 유산이다. 여전히 그 섰을 때, 보전하는 데 따른 이익이 다른 용도로 전환
지역에서 주민들은 농업 활동을 유지하고 있으며 생 했을 때보다 크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농업 유
계에 도움을 받고 있다. 동적이라는 바로 그 점 때문 산이 지속할 수 있게 보전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드
에 농업 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으며, 바로 그 동적인 는 비용을 우리 사회가 나누어 부담할 방안이 필요할
상황 때문에 지속성을 담보하기가 쉽지 않다. 농업에 것이다. 입장료를 내거나 직불금을 지급하거나, 혹은
서 원형을 보전하여 지속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농업유산브랜드가 붙은 제품에 추가적인 비용을 지
현재의 방식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적응의 산물이기 불하는 것도 방법이 된다. 나아가 농업 유산 지역에
때문이다. 그렇기에 농업유산 제도는 원형 보전과 유 대한 관광 등도 대안이 될 수 있겠는데, 이에 대해서
산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수준에서의 변화 도 독자 여러분의 애정 어린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
를 수용하는 유연한 보존의 적절한 조화가 관건이다. 다. 국가중요농업유산은 우리 농업의 전통과 문화를
농업 유산과 관련된 여러 주체가 계속 이 부분을 고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박
민하고 어떻게 보전·보존할 것인지 노력하고 있다는 물관이자 주민들이 운영하는 지붕 없는 박물관 에코
점을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 뮤지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대부분의 국가중요농업유산의 소유권이
개인에게 있다는 점이다. 유산은 개인이 지니고 있고
그 편익은 사회 전체에 미치는 셈이기에 국가가 나서
글 이유직 부산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농업유산자문위원장
서 정책적으로 매개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구조이다. 사진 이유직, 농림축산식품부, 제주관광공사(visitjej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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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시와 사진 한 모 금

단풍 절정

서울탕은 서울에 없어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시장뒷길 공중목욕탕.

주차장이 없어요. 장날이 아니라면 아무데나 주차해도 상관없다는 아주머니의


우렁찬 목소리. 주민들이 대부분 주말에 대부분. 장날에만 우르르 꽝꽝 복잡하
고요. 여탕은 1층 남탕은 2층인데 그건 여자가 더 오래 씻기 때문일까요. 온탕
하나 냉탕 하나 한증막 하나. 번갈아 담가도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강원도의
서울탕. 의자도 대야도 몇 개인지 다 셀 수 있어요.

서울탕은 서울에 없다니까요. 아무도 옷장을 잠그지 않습니다. 동네 사람들 너


도 나도 다 아는데 내 손 네 손 다를 게 뭐야. 털어봐야 그게 그거겠지요. 서울탕
은 서울로 옮길 수가 없어요. 지하수가 샘솟는 진부 시장 뒷길에 딱 버티고 있
어요. 현관이 낡아 삐걱거리고 신발을 벗어 던져놔도 잃어버릴 수가 없어요. 단
풍잎은 아무도 가져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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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수건이 없으면 오백 원 초록색입니다. 샴푸가 없어도 오백 원 드봉 차밍입니
다. 강원도까지 가서 서울탕에 몸을 담그니 강원도 물의 힘이 느껴집니다. 뜨거
운 물은 무지하게 뜨겁고 찬 물은 가열차게 찹니다. 증기는 숨이 턱턱 막히고요.
세신사는 조선족 아줌마. 아들 걱정이 많습니다. 딸도 서울처럼 걱정스럽죠. 이
가을 걱정이 깊어가고요.

온탕 냉탕 한증막을 드나들며 걱정을 씻어냅니다. 서울탕은 강원도에만 있어


요. 옷장은 잠기지만 잠그지 않고요. 마음도 걱정이지만 잠기지 않아요. 옷깃이
문 사이 삐죽 새나오고요. 흰 우유 바카스 식혜 블랙커피가 천 원. 서울탕의 강
원도를 마셔요. 강원도는 고개가 많고 군인이 많고 감자도 많지만 많은 건 다
셀 수가 없어 붉어지고요.
이근화 시인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 《차가운 잠》 등 서울탕의 조건은 강원도. 이 가을엔 서울탕으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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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옹기 종 기

지혜를 엮어 만든


Jjp
Making the Most of
Nature’s Gifts

짚을 엮어 만든 초가지붕
A roof thatched with jip (str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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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I c onic I tem s

짚이란, 벼·밀·보리·조 따위의 이삭을 떨어낸 줄기를 말한 Jip, or straw, is the stalks left over after the chaff and grain have been
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벼농사를 주로 지어왔기 때문에 removed from cereal plants such as rice, wheat, and barley. As Korea
짚 중에서도 특히 ‘볏짚’을 이용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is traditionally a country of rice farmers, Koreans have long utilized
썼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짚신부터, 옛사람들이 비옷으로 입었 rice straw to craft goods necessary for daily life. Items including
던 도롱이, 곡식의 씨앗을 보관했던 씨오쟁이, 채소나 과일 등을 jipsin sandals, dorongi raincoats, ssiojaengi pouches for storing seeds,
담았던 멱둥구미가 다 짚으로 만든 것들이다. 어디 그뿐인가. 짚 and myeokdunggumi baskets for storing produce were all made from
으로 이엉을 엮어 초가에 지붕으로 얹고, 멍석을 짜 그 위에서 곡 rice straw. But it didn’t stop there. Koreans used rice straw to thatch
식을 말리기도 하고 쉬기도 했다. 또 금줄이나 제웅을 만들어 악 roofs for their homes and made straw mats called meongseok where
운이 물러가길 바라는가 하면 볏가릿대를 세워 풍년을 기원하기 they dried their grains. They even used the straw to make ceremonial
도 하였다. 이처럼 짚은 특히 농촌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 ropes (geumjul) or effigy dolls (jeung) to chase away malignant
계를 맺어 왔다. spirits. They used the same straw to create teepee-like structures

used in prayers for abundant harvests. Straw was an essential part of


왜 많은 재료 중에 ‘짚’이었을까? 짚은 돈이 들지 않는 흔한 rural life in pre-industrial Korea.
재료였을 뿐만 아니라, 곡식의 줄기 속에 있던 물기가 마르고 섬 But why straw of all materials? Not only was straw abundant
유질이 주성분으로 남아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가볍고도 질기고, and cost-free, but the fiber left in the dried grain stalks made them
그러면서도 손으로 비비거나 몇 차례 꺾어주면 부드러워져 가공 light and durable, and rubbing them with the hands or bending
이 쉬웠다. 다른 재료에 비해 구하기 쉽고 다루기도 어렵지 않으 them repeatedly rendered the material pliable enough for a variety of
니, 농민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무언가를 만드는 데 짚만큼 요긴 uses. Because it was more accessible than other materials and easily
한 재료는 없었다. manipulated, there wasn’t a better material for daily use for poor

farmers.
그러나 현대에 들어 값싼 생활용품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 This straw-based culture, however, disappeared in the face of
서 짚 문화는 사라졌다. 하지만 짚 문화의 가치마저 사라진 것은 cheap, mass-produced goods in the modern industrial era. Yet the
아니다. 우리 짚 문화의 가치는 수천 년 동안 이 땅을 지켜 온 농 value of this culture has not disappeared. This value can be found
민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데 있다. 농민들은 보잘것없 in the wisdom of the farmers who tilled and tended to Korea’s
는 짚을 요긴하게 쓰는 가운데 그것이 닳거나 썩으면 땔감으로 land for thousands of years, as it has been preserved in this straw
쓰거나 두엄을 만들어 거름으로 다시 썼다. 자연에서 얻은 것을 culture. These farmers were experts in utilizing an otherwise useless
귀하게 쓰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참으로 지혜로운 삶을 byproduct, and even when the straw was rotten or worn, they used
살았던 것이다. it for kindling or manure. These farmers lived truly sagacious lives,

cherishing what they could harvest from nature only to send it back
to into her arms.

글 안유미 편집팀 Written by An Youmee, editing team


사진 아이클릭아트 Photographs courtesy of iclick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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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의 서 원 ⑧

오랜 역사, 독특한 방식의


정읍 무성서원
Museongseowon in Jeongeup:
A Long History and Unique Methods

명륜당 너머로 보이는 테산사 내삼문


The naesammun of Taesansa seen from across the myeongnyun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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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Korea’s Seowon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무성서원사적 제166호은 지 Unlike the other seowon that have been shared in these
금껏 소개한 서원과는 달리, 배향 인물이 유학자의 효시로 꼽는 pages that honor Joseon-era scholars, Museongseowon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다. 한마디로 (Historic Site No. 166) in Museong-ri, Chilbo-myeon,
주 배향 인물 가운데 가장 오래전 사람이다. 그만큼 오랜 역사를 Jeongeup, Jeollabuk-do, honors Choe Chi-won (857–
자랑하는 무성서원은 조선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이듬해 unknown, pen name Goun), a late Unified Silla scholar
인 1906년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 둔헌遯軒 임병찬林秉瓚, who is considered one of the forerunners of Confucian
1851~1916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기 위해 호남 의병을 창의唱義한 scholarship in Korea—in other words, the oldest of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the personages honored at one of these academies.
In addition to its long history, Museongseowon is also
noted as the place where Choe Ik-hyeon (pen name
Myeonam) and Im Byeong-chan (Dunheon) raised an
army in the Honam region to oppose imperial Japanese
aggressions in 1906, the year after the late Joseon-era
Eulsa Treaty was signed.

태산현 군수, 고운 최치원의 치적 기리며 세워 Built by Taesan county head to honor Choe’s achievements
최치원이 태산현 군수로 부임하여 8년 동안 선정과 많은 치 Appointed county head of Taesan-hyeon, Choe Chi-won served
적을 남기고 합천군수로 전출하자 고을 사람들이 최치원을 기리 for eight years, ruling in exemplary fashion and realizing many
기 위하여 유상대流觴臺 위에 생사당生祠堂: 백성들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achievements before his transfer to serve as county head in
받들어 모시는 사당인 선현사先賢祠를 지었다. 선현사를 조선 시대인 성 Hapcheon. In his honor, residents build Seonhyeonsa, a saengsadang
종 15년1484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태산사泰山祠로 불렀다. 이 (shrine built by the public to honor someone who is still living) at
후 중종 39년1544, 태인현감으로 부임한 신잠申潛, 1491~1554이 6년에 Yusangdae. During the Joseon era, the shrine was relocated in year
걸쳐 선정을 베풀다가 강원도 간성군수로 전임되어 떠나자 주민 15 of King Seongjong (1484) to its current location, where it was
들이 역시 생사당을 세워 배향하면서 고운의 태산사와 합사合祠했 given the name Taesansa. In year 39 of King Jungjong (1544), Sin
다. 숙종 22년1696에 서원이 확대되면서 ‘무성武城’이라는 사액을 Jam (1491–1554) was appointed as hyeongam (county magistrate)
받았다. 이후 전국의 서원이 철폐되고 47개만 존속되었을 때 전 in Taein, serving admirably for six years before his transfer to serve
북 도내에서 유일하게 폐사되지 않고 존속되었다. as county head in Ganseong, Gangwon-do. He too was honored by
무성서원은 매우 독특한 배열 방식을 취하고 있다. 마을 안 낮은 residents with a saengsadang, where he was enshrined together with
구릉을 등지고 평지에 자리한 무성서원은 명륜당강당과 사당을 잇 Choe’s Taesansa. The seowon underwent an expansion in year 22 of
는 직선 축을 중심으로 문루인 현가루絃歌樓와 내삼문을 배치했다. King Sukjong (1696), at which time it was royally bestowed with the
현가루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것으로 ‘거문고를 타 name “Museong.” Later on, seowon across Korea would be abolished,
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 있다. 이는 어려움을 당하고 힘 leaving only 47 that survived. Museongseowon was the only one in
든 상황이 되어도 학문을 계속한다는 의미이다. Jeollabuk-do to survive.
서원의 중앙에는 ‘사당’과 선생들이 기거하는 ‘명륜당’이 자리하 Museongseowon boasts a highly distinctive arrangement.
고 있다. 두 곳 다 입구로부터 먼 쪽에 있는데 사당이 명륜당보다 Located on flatland with the low village hills to its back, it center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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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먼 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함부로 범접하지 말라는 뜻과 다 a straight-line axis from the myeongnyundang (lecture hall) to the
름없는 것으로 무성서원의 자부심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특히 명 shrine, with a gate tower called Hyeongaru and a naesammun (inner
륜당과 사당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어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고 three-door gate). The name “Hyeongaru” comes from the Analects
또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무성서원 전체가 외부와 and the phrase “xian ge bu chuo,” which means “playing the qin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다. 대문을 열면 명륜당을 통해 뒤쪽의 and singing without stopping.” It conveys the idea of continuing to
사당 문이 보이고, 사당 문이 열려 있다고 가정하면 사당 건물 안 pursue scholarship even when faced with difficulties and trials.
쪽까지도 보인다. 그러나 이들 모두 터 있는 것이 아니라 큰 대문, At the seowon’s center is the shrine and the lecture hall, where
명륜당 앞에 놓인 비석, 명륜당, 사당문 등 여러 겹의 여과 장치를 the teachers went about their lives. Both are located on the far
두고 있다. side from the entrance, with the lecture hall farther back than the

shrine. This could fairly be seen as a gesture of pride on the part


아무나 범접할 수 없도록 만든 명륜당과 사당 of Museongseowon—effectively sending the message that no one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당으로 3칸 대청은 앞뒤 모 should approach it lightly. The lecture hall and shrine are also ringed
두 벽이나 문이 없어 앞뒤로 시야가 훤히 트인다. 따라서 마당에서 by a wall, which makes them not only inaccessible but also not

무성서원 태산사의 측면
A lateral view of Taesansa in Museongse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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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깃든 무성서원 내부 모습
Museongseowon adorned with early autumn leaves

바라보면 사당의 내삼문이 바로 보이며 사당 영역이 모든 시선 readily visible. This is not to say that the whole of Museongseowon
의 중심을 이룬다. 특히 명륜당 마당 중앙에 묘정비를 세워 사당 is completely shut off from the outside. When the gate is open, the
으로 향하는 중심 축선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또 하나 특이한 점 door to the shrine in back can be seen through the lecture hall, and
은 명륜당 대청의 앞과 뒤쪽에 ‘보’가 하나씩 더 붙어 있다는 것 one can even see inside the shrine building (assuming the door is
이다. 이것은 보통 집에 딸린 평범한 대청마루에서는 볼 수 없는 open). But these features are not all out in the open—various layers
것으로, 대청마루를 가진 곳은 귀하디 귀한 곳이라는 의미로 읽 of “filters” are present with the stele in front of the lecture hall, the
힌다. ‘보’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놓이는 부재로서 지붕의 하중을 hall itself, and the shrine door.
받아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명륜당 대청에 있는
보는 이런 역할과는 무관하게 순전히 장식적인 역할을 하는데 한 Lecture hall and shrine made inaccessible
국의 건축에서는 보기 힘든 경우다. Measuring five kan (the space between columns) on its front and two
사당 앞에 중문中門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중문은 서원의 주요 출 kan on its side, the lecture hall has a three-kan daecheong (porch)
입문인 전문前門과 같이 문짝이 세 개인 내삼문으로 되어 있다. 그 with no walls or doors in front or behind it, opening up the view to
런데 특이하게도 이 문의 지붕 높이가 아주 낮다. 보통 성인의 경 the front and back. Looking from the courtyard, one immediately
우 똑바로 선 자세로는 이 문을 통과할 수 없는데, 이는 옛 조선 sees the shrine’s naesammun, and the shrine section forms the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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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 키가 작았다는 것이 아니라 일단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갈 to every sightline. The placement of a stone memorial at the center of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이 낮다는 것은 일종의 제어를 의미 the lecture hall’s courtyard further accentuates the straight-line axis
하며 경건함에 대한 요구로도 볼 수 있다. in the shrine’s direction. Another unique feature is the placement of
명륜당은 1828년에 중건하였고, 사당인 태산사는 1884년에 중수 one extra bo (crossbeam) each in front of and behind the lecture hall’s
하였는데 두 건물 모두 소박한 규모와 형태를 띠고 있으며, 기단 porch. Not seen in the typical wooden-floor hall (daecheongmaru)
과 건물 높이도 낮아 대지에 밀착된 듯 평활한 외형을 갖는다. 이 found in normal homes, this is seen as signifying the great importance
러한 수평적 조형은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방 건축의 특징으로 이 of the section with the wooden floor. The bo is a structural material
른바 ‘평지형’ 건축의 범례라 할 수 있다. placed between columns, serving to transfer the roof ’s load to
무성서원에서 특이한 점은 또 있다. 그것은 바로 동재와 고직사 them. The bo in the lecture hall porch here, however, play a purely
모두 비교적 많은 사람이 생활하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담 decorative role—something rarely found in Korean architecture.
밖으로 나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배치는 앞서 언급했듯 ‘사당과 In front of the shrine is a central gate, which, like the front
명륜당은 일반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성소’라는 것을 단적으 gate that serves as a major entrance point for the seowon, consists
로 보여준다. of a triple naesammun. Interestingly, the height of the roof at

this gate is quite low. The height is such that an adult cannot pass
무성서원에 배향된 당대 최고의 학자 through standing fully upright—showing not that the people of old
신라는 관직을 골품제를 토대로 했으므로 성골과 진골이 아 Joseon were short in stature, but that they had to lower their heads
닌 사람은 진급이 제한되었다. 아무리 출중한 능력이 있어도 6두 before they could go inside. The low-ceilinged gate may be seen as
품六頭品 이상의 고위직이 될 수 없었는데, 당대의 많은 고관을 제 signifying a kind of control that demanded reverence.
치고 현재까지 잘 알려진 인물은 6두품에 불과한 최치원이다. 최 The lecture hall was rebuilt in 1828, while the shrine of Taesansa
치원은 경문왕 8년868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was remodeled in 1884. Both are simple in scale and form, with a low
떠나게 되었는데, 유학한 지 7년 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빈 stylobate and building height that appears smooth, as though stuck
공과賓貢科에 합격할 만큼 천재성을 보였다. closely to the ground. This horizontal design, which is characteristic

of local architecture in the Chungcheong-do and Jeollabuk-do

regions, could be characterized as a model of “flatland architecture.”


무성서원의 문루(현가루)
Hyeongaru in Museongseowon Museongseowon has another interesting feature to it: the fact

that the dongjae (east dormitory) and gojiksa (caretaker’s residence)

are fully outside of the wall, even though they were places with a

relatively large number of residents. As mentioned before, this kind

of arrangement may be seen as showing how the shrine and lecture

hall were “sacred places” not accessible to ordinary people.

Greatest scholar of his era enshrined at Museongseowon


In Silla, government positions were based on the golpumje (“bone

rank system”), and the roles of those who did not belong to the

seonggol (sacred bone) or jingol (true bone) classes were limited. No

matter how gifted a person might be, they could never attain a sen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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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ition of yukdupum (head rank six) or higher. One person who is

well known to this day for surpassing many high officials of his era is

Choe Chi-won, who only reached the yukdupum class. Choe’s genius

was evident: at the young age of 12, he traveled to study in Tang

Dynasty China in year eight of King Gyeongmun (868), and seven

years after his overseas studies he passed the foreigners’ civil service

examination (bingongke) in 874 at the age of 18.

Choe Chi-won’s reputation truly spread far and wide when

he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of secretary under the banner of

명륜당 오른쪽에 자리한 강수재. 유생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Gao Pian, head of the punitive forces following an 879 rebellion
Gangsujae, a former student residence located on the right side of the
myeongnyundang Huang Chao. At the time, Choe wrote a document called

Tohwangsogyeokmun (Letter to rebuke Huang Chao), which is


최치원이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라는 famously well written. News of his writing talent traveled, leading to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토벌대장 고변의 휘하에서 서기의 책 his work being recorded in the “Yiwenzhi (Treatise on Literature)” of
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이때 그가 작성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the Tangshu (Book of Tang). He returned home in 885 at the age of
은 명문으로 유명하다. 그의 글재주는 널리 알려져 당나라 역 885, serving as a taesu (administrative officer) in several places and
사 기록지 《당서》의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 명이 수록되었 eventually becoming an achan, the highest rank available to someone
다. 그는 885년 29살에 귀국한 뒤, 여러 곳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 of the yukdupum class at the time.
고 당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다. Although he considered himself a Confucian scholar, Choe
최치원은 자신을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was also deeply interested in Buddhism, interacting with monks
가져 승려들과 교유하고, 불교와 관련한 글들을 많이 남겼다. 만 and leaving behind many writings related to the religion. In his later
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는데, 해인사에서 언제 세 years, he went to live at Haeinsa Temple on Gayasan Mountain.
상을 떠났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효공왕 12년908 말까지 생존했던 It is not known for certain when he passed away there, but he is
것은 분명하다. 그 뒤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는데 신선이 되었다 known to have survived as late as year 12 of King Hyogong (908).
는 속설이 있는가 하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닌가 하 No information is available about his activities after that; folk beliefs
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hold that he became a sinseon (Taoist immortal), while others
‘무성서원’하면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가사문학의 효 suggest he may have taken his own life.
시로 꼽히는 정극인丁克仁, 1401~1481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정극인은 No discussion of Museongseowon is complete without a mention
성종 12년1481 사망 후 인조 8년1630 무성서원에 배향되었다. of Jeong Geuk-in (1401–1481), an early Joseon scholar-official who

is considered one of the pioneers of gasa literature (a form of poetry).

Jeong passed away in year 12 of King Seongjong (1481) and was


enshrined at Museongseowon in year 8 of King Injo (1630).

Written by Lee Jongho, author of UNESCO World Heritage: Korea’s Seowon


Academies, former member of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글 이종호 《유네스코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저자, 前 ‘조선왕조실록 Return Committee
환수위원회’ 위원 Photographs courtesy of Lee Jongho; Jeongeup City Office Department of
사진 이종호, 정읍시청 문화예술과, 이범수-한국관광공사 Culture and Arts; Lee Bumsu, Korea Tourism Organization

23
문화마당 ㅣ 지역 문 화 스 토 리

목상동 들말 두레소리 〈토산다지는소리〉


A performance of the “earthen mound packing song,” part of the duresori of Deulmal Village, Moksang-dong

24
Cultural Encounters ㅣ L oc a l Culture Stories

[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 ]

전통의 재해석과 재창조


대전 민속놀이 열한 마당

대전광역시에는 열한 개 민속놀이 보존회가 결성되어 있다. 이


들 보존회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전국민속예술축제 출
품을 위해 발굴된 놀이 보존 주체이다.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
기 위해 결성된 보존회의 노력으로 대전 전통놀이는 소멸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놀이의 발굴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다. 민속놀이는 ‘박물관에 박제된 전통’
이 아닌, ‘살아 숨 쉬는 놀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Regional Cultural Content Development Project ]

Reinterpretation and
Recreation of Traditions:
Eleven Folk
Entertainment Customs
of Daejeon
The city of Daejeon is home to 11 folk entertainment
preservation associations. These preservation
associations were formed with the purpose of preserving
entertainment customs featured at the Korea Folk Arts
Festival, which began in the early 1990s. Traditional
entertainment customs of Daejeon continue to thrive
thanks to the efforts of these associations to preserve
and transmit traditions. More meaningful than the
discovery of folk customs is the active participation of
residents. These are living folk customs, as opposed to
ones that are preserved in museum set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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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휴식’ 아닌 일상에서 즐기는 ‘PLAY’ Fun for everyday life
대전에서 보전 중인 전통민속놀이는 △공주말 디딜방아 뱅 Traditional folk entertainment customs preserved in Daejeon
이 △가양동 흥룡마을 가마놀이 △문창동 엿장수 놀이 △부사동 include the didilbanga baengi of Gongjumal Village; the palanquin
칠석놀이 △숯뱅이 두레 △무수봉 산신제 및 토제마 짐대놀이 △ performance of Heungryong Village, Gayang-dong; taffy seller
버드내 보싸움 놀이 △봉산동 앞바구니 둥구나무제 △전민동 산 performances of Munchang-dong; the chilseok performance of
소골 상여놀이 △계족산 무제 △목상동 들말 두레소리 등이다. Busa-dong; sutbaengi dure; the ritual for the mountain deity of
네덜란드의 학자 하위징아Huizinga는 《호모 루덴스》를 통해, 놀이 Musubong Peak and clay horse pole performance; the reservoir
를 “비일상적, 비생산적이지만 일상과 생산을 위해서 필수 불가 fight performance at Beodeunae Stream; the donggunamu festival of
결한 것”으로 이야기했다. 놀이는 ‘휴식하며 즐기는 것’, ‘일상에 Bongsan-dong Apbaguni; the funeral bier performance of Sansogol
서의 탈피’라 하지만, 일상적인 삶과 자유로운 모든 인간의 활동 Village, Jeonmin-dong; shamanistic rituals of Gyejoksan Mountain;
도 놀이에 포함된다. 일상 속 놀이는 제의祭儀와 함께하기도 하고, and duresori of Deulmal Village, Moksang-dong.
일노동과 함께하기도 한다. 디딜방아 뱅이, 둥구나무제, 산제 토제 Dutch scholar Johan Huizinga defined “play” in Homo
마 짐대놀이, 기우제, 칠석놀이, 상여놀이 등은 종교적 순간으로, Ludens as activities that are “unordinary and unproductive” yet
성스러운 영역에 속한 놀이이다. 반면에 숯뱅이두레, 들말두레소 are “necessary” for ordinary life and production. Play is generally
리 등은 일의 현장 속에 놀이가 함께 어우러진다. understood as enjoying one’s time while relaxing and escaping from

routine, but play also manifests in ordinary life and all free human
노동 행위를 놀이로 승화한 ‘상여놀이’ activities. Play in ordinary life sometimes accompanies rituals or
‘전민동 산소골 상여놀이’는 망자를 장지까지 운반하는 상 labor. The didilbanga baengi, the donggunamu festival, the ritual for a
여를 가지고 노는 놀이다. 여러 명의 상두꾼이 상여를 가지고 할 mountain deity, the clay horse pole performance, the ritual for rain,
수 있는 다양한 것을 표현한다. 여러 명의 상두꾼은 상여를 메고 the chilseok performance, and the funeral bier performance offer
상여가 가는 길목의 자연 지형에 따라 각기 다른 상여 운구 방식 religious moments as forms of play that belong in the sacred realm.
을 곡예처럼 펼친다. 징검다리나 외나무다리를 만났을 때, 나무 On the other hand, the sutbaengi dure and the duresori of Deulmal
밑을 지날 때, 개울을 건널 때마다 안전하게 상여를 운구하기 위 Village are forms of play that are incorporated at sites of labor.
한 제각기 다른 운구 방식을 선보인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오래
Acts of labor brightened through play

계족산에서 지내는 기우제, ‘계족산 무제’


The funeral bier performance of Sansogol Village, Jeonmin-dong,
A shamanistic ritual for rain performed at Gyejoksan Mountain is a performance using a funeral bier to reenact the transportation

of the dead to a burial site. A team of bier carriers portrays various

situations involving a funeral bier. Different feats of carrying the

funeral bier over different terrains along the route are demonstrated.

Different methods displayed show how to carry the funeral bier

safely across stepping—tones or a log bridge, under a tree, and

across a stream. Beyond demonstrating acts of skilled labor, the

performance showcases the wisdom of uplifting labor through play.

Another notable feature of the funeral bier performance of

Sansogol Village is the variety of funeral songs (manga) perfor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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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동 산소골 상여놀이
The funeral bier performance of Sansogol Village, Jeongmin-dong

숙련된 ‘노동 행위’지만, 여기에는 일을 놀이로 승화하는 지혜가 while transporting the funeral bier. There are different funeral songs
담겨 있다. for each of the different places that the funeral bier passes. For
또 ‘전민동 산소골 상여놀이’는 상여를 운구하는 과정에서 부르 example, there is a funeral song for after the ritual of carrying the
는 만가輓歌, 挽歌의 종류가 다양하다. 집을 떠나기 전 발인제를 한 bier out of the house, for street rituals, for climbing a hill, and for
후 부르는 만가, 노제를 지낼 때 부르는 만가, 산 오를 때 부르는 crossing a stream on stepping-stones. Funeral songs are generally
만가, 징검다리 건널 때 부르는 만가 등 상여가 지나게 되는 공간 divided into those expressing the sorrow of the moment of sending
의 특성에 따라 만가가 각기 구성돼 있다. 일반적으로 만가는 망 off the dead and those used during transportation of the funeral
자를 떠나보내는 순간의 애절함을 담은 만가와 상여를 운구할 때 bier. The wide range of funeral songs in this performance is in itself
사용하는 만가로 구분되고 있으므로 이처럼 다양한 만가의 구분 special.
은 그 자체로도 특별하다.
Resolving conflict through play
이웃 마을 간 갈등을 놀이를 통한 화합으로 In contemporary society, vacation and respite are concepts that
현대 사회에서 일·노동·작업과 대비되는 것은 ‘휴가’ 혹은 contrast work and labor. In traditional society, the concept that
‘휴식’이다. 그러나 전통 사회에서 일·노동과 대비되는 것은 ‘놀 contrasted work was play. In the form of play, people not only
이’다. 힘든 모심기나 김매기를 하거나 풍장을 치며 놀기도 하지 simulated the labor of transplanting rice and weeding to joyous
만, 농수農水를 차지하기 위해 보洑 싸움을 하거나, 농기農旗를 가지 percussion music, they also reenacted conflicts over reservoirs to
고 기 싸움을 한다. occupy agricultural water and fights using agricultural implements.
‘버드내유천동 보싸움 놀이’는 농경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The reservoir fight performance at Beodeunae Stream (Yuc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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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 is a performance that highlights the importance of reservoirs

in agricultural societies. Through play, villagers transcend conflicts

that arise over who gets first access to the reservoir, and they achieve

harmony. The reservoir fight performance at Beodeunae Stream, a

tradition of the fertile breadbasket of Dajeon, helped communities

overcome conflict wisely and promoted harmony among residents

managing water, an integral resource in an agricultural society

centered on rice farming. The fight among neighboring communities

over a reservoir ends in harmony, which is meaningful in numerous

공주말 디딜방아 뱅이, ‘디딜방아 훔쳐내기’ ways.


A performance of the “didilbanga stealing song,” part of the didilbanga baengi of
Gongjumal Village

Casting a spell to prevent an epidemic


보와 관련된 놀이다. 보를 누가 먼저 사용하느냐의 문제로 파생 “An epidemic has hit the people of Geum-dong.” A rumor would
될 수 있는 갈등을, 놀이를 통한 화합으로 승화시켰다. 대전 한밭 rise, and housewives would begin whispering. The villagers made
벌의 비옥한 곡창지대에서 행해지던 버드내 보싸움 놀이는 벼농 backwards-twisted rope and laid it once around the village and
사 중심의 농경사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을 관리하면서 주 placed red clay at the village entrance and in front of the front gate of
민 간의 갈등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화합을 도모하는 기능을 했 each household to ward off evil spirits. When ominous signs loomed,
다. 특히 보를 두고 이웃 마을끼리 싸움을 벌이지만, 화합을 통한 the headman convened a village conference and planned a baengi.
마무리는 여러 의미를 지닌다. The word baengi is thought to be local dialect for bangye, meaning

disease prevention. Residents of Gongjumal Village in Daejeon used


전염병 예방을 위한 주술, ‘디딜방아 뱅이’ the terms baengae and baengi interchangeably for an incantation
“저기 금동에서 돌림병이 돈다네”라는 소식이 들리면 주부 ritual performed in situations that could not be resolved through
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왼새끼를 꼬아 마을 전체 한 바퀴를 두 human volition.
르고, 마을 입구와 각 가정 대문 앞에는 붉은 황토를 놓아 잡귀의 The didilbanga baengi of Gongjumal Village involves stealing
범접을 막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면 좌상오늘날 이장은 마 a didilbanga, or a foot-operated mill, from a neighboring village
을 회의를 열어 ‘뱅이’를 결정했다. ‘뱅이’는 질병을 미리 대처하 during an epidemic and performing funeral procession songs and
여 막는 ‘방예防豫’의 우리식 표현으로 추정되며 대전 동구 공주말 shamanistic rituals as they carry it away. Although this act appears
주민들은 흔히 ‘뱅애’, ‘뱅이’라 불렀다. 인간의 의지로 해결할 수 irrational by modern standards, the ritual bears some significance. A
없는 상황에서 주로 행하는 주술 의례다. didilbanga resembles the human body. People in funeral dress wail as
‘공주말 디딜방아 뱅이’는 전염병 등이 돌 때 옆 마을에서 디딜방 they carry the didilbanga on a long wooden frame, recalling a funeral
아를 훔쳐 와 상엿소리를 내고 고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현대사 procession. Perhaps they were hoping that the mock funeral would
회에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위지만 나름의 뜻이 내포되어 있 prevent any more deaths.
다. 디딜방아는 사람처럼 생겼다. 디딜방아를 장강틀에 얹고 상
복을 입고 곡을 하며 행진하는 모습이 상여 행렬과 흡사하다. 이 Taffy-making brought by new settlers
렇게 누군가의 장례를 치렀으니 이제 죽음이 없길 바란다는 마음 Daejeon’s urbanization and its geographical setting beside Gyesoksan
이 아니었을까 싶다. Mountain and on the meandering Geumgang River are reflected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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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 만든 놀이 ‘문창동 엿장수 놀이’ folk entertainment. The taffy seller performance of Munchang-dong
한편 대전의 도시화와 계속산, 금강錦江이 굽이쳐 흐르는 지 clearly reveals the urban characteristics of Daejeon. Starting with
리적 환경이 놀이에도 투영되어 있다. ‘문창동 엿장수 놀이’에는 the construction of Daejeon Station in 1907, Daejeon’s urbanization
대전의 도시적 특성이 잘 드러난다. 대전은 1907년 대전역이 건 occurred relatively early compared to surrounding regions. Small
립되면서 주변 지역과 비교해 일찍 도시화가 이뤄졌다. 대전역 and medium-sized food processing factories sprang up around
주변으로 중소 규모의 식품 공장이 들어섰다. 천동 물엿 공장 인 Daejeon Station. After a starch syrup factory was established in
근 문장동에서는 그 물엿을 공급받아 엿방을 설치하고 갖가지 엿 Cheon-dong, nearby Munchang-dong set up production of various
을 만들었다. 수백 번 엿물을 늘이기를 반복해 한 가락이 엿을 뽑 types of taffy made with starch syrup. Molten taffy was pulled
았다. 일찍이 산업 경제에 눈뜬 대전으로 이주해온 이주민은, 소 hundreds of times to make the final product. Many settlers to
자본으로 엿장수가 되어 시골 마을과 장터를 돌며 팔았다. ‘문창 Daejeon, which achieved an industrial economy early on, became
동 엿장수 놀이’는 이러한 문창동 주민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 small-capital taffy sellers who went around rural villages and
다. 엿 제작에 관한 주민 간의 갈등, 엿이 판매되는 장터풍경, 엿 markets. The taffy seller performance of Munchang-dong tells the
치기 놀이 등이 놀이로 승화되었다. true story of Munchang-dong residents. Conflict among residents

over taffy production, markets where taffy was sold, and the taffy

breaking game are recounted in this performance.


문창동 엿장수 놀이 ‘엿치기’
A performance of the “taffy breaking song,” part of the taffy seller performance of
Munchang-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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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ong to prevent flood damage
The duresori of Deulmal Village is a traditional narrative song that

depicts the lives of Deulmal Village residents, who faced life-and-

death situations due to flooding. Deulmal is positioned where two

rivers meet, and any excess rain flooded the village. In order to

minimize flood damage, the residents built earthen mounds at the

highest points of the village, where they would keep valuables and

perform rituals. Their struggles are immortalized in the duresori

of Deulmal Village, Muksang-dong. Dure refers to village-wide

목상동 들말 두레소리 〈샘고사〉 cooperation and labor exchange. Duresori is a labor song that people
A performance of the “spring well ritual song,” part of the duresori of Deulmal Village,
Moksang-dong sang to forget the difficulties of labor and increase the efficiency of

their work. A special feature of the duresori of Deulmal Village is the


물난리를 피하기 위한 소리, ‘들말두레소리’ “earthen mound packing song” which was sung when people visited
‘목상동 들말 두레소리’에는 수침水浸의 피해로 죽음을 무릅 the earthen mounds, a tradition that continues only in Deulmal
써야 하는 위기 상황을 겪던 들말 주민들의 생활이 소리로 표현 Village.
되어 있다. 들말은 두 개의 물길이 합수되는 곳에 있어 비가 조금
만 많이 와도 물길이 범람해 수시로 마을에 물이 들어왔다. 주민 Public-private cooperation for transmission and reinvention
들은 수해를 극복하기 위해 마을 내에서 그나마 높은 고지대에 of tradition
인위적으로 토산을 쌓고, 귀중품을 옮겨 놓거나 토산제를 지냈 To preserve traditional folk entertainment customs, Daejeon
다. 이러한 우여곡절은 들말 주민들의 ‘목상동 들말 두레소리’를 Metropolitan City established a new ordinance under the Cultural
통해 남아 있다. ‘두레’는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공동 작업 Properties Protection Law in 2002, stipulating support for folk
이자 품앗이 형태를 말하며 ‘두레 소리’는 노동의 힘듦을 잊고 작 entertainment preservation associations. According to this
업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부르는 노동요를 말한다. ‘목상동 들말 ordinance, any custom of entertainment that has received an award
두레소리’의 특징은 ‘토산다짐소리’로, 토산을 다지며 부르는 노 from the Minister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 or a higher award
래는 이곳에서만 전승되고 있다. is eligible for an annual monetary grant. With the city’s support,

the 11 folk entertainment preservation associations of Daejeon are


민관民官이 함께 계승·재창조 making every effort to ensure the transmission of various forms of
대전광역시는 전통민속놀이를 보존하기 위해 지난 2002년 traditional customs of entertainment.
전통놀이보존회 지원과 관련한 〈문화재보호법>에 조례를 신설했 Unfortunately, as the basis of transmission of these customs
다. 이를 통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이상을 수상한 놀이의 경 continues to disappear, the operation of these preservation
우, 해마다 일정액을 지원받는다. 이러한 지원 속에서 대전 전통놀 associations is challenged, and the continued existence of traditional
이 보존회 11개 단체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전통놀이가 전승될 수 customs of entertainment is threatened. Participating residents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놀이 전승 기반이 점차 사 are aging, and finding new transmitters of tradition is extremely
라지는 상황에서 전통놀이를 보존하기 위한 보존회의 운영과 놀 difficult. Because Daejeon was the first area in Chungcheongnam-
이 존속은 녹록지 않은 일이다. 참여 주민의 고령화로 인해 전승 do to experience urbanization, its foundation of traditional culture
주체인 놀이 참여자를 구할 수조차 없다. 더군다나 대전광역시는 has long since faded away. Entire areas where customs were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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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뱅이두레 〈술맥이〉
A performance of the “liquor offering song,” part of the sutbaengi dure

충청남도에서 가장 일찍 도시화가 진행된 지역으로 전통문화의 transmitted have disappeared due to new developments. Unlike in
기반 자체가 이미 사라진 지역이다. 신도시 개발로 인해 놀이 전 the past, the folk entertainment customs being transmitted today
승 지역이 사라지기도 했다. 전통 시대와 달리 현대에서 전승되는 are not based on the lives of the people. Because people’s lives are
민속놀이는 그들의 삶에 기반하지 않는다. 이미 전통과 유리된 채 isolated from tradition, folk entertainment customs are not always
생활하고 있기에 민속놀이는 소멸하기도 하고 전승되기도 한다. passed on.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 전통놀이보존회는 전통 전승에 소홀함 Despite these circumstances, the folk entertainment
이 없다. 최근에는 새로운 전통놀이의 재해석을 통한 재창조가 preservation associations of Daejeon are conscientiously transmitting
현장별로 이루어지고 있다. 주민들의 의지로 새로운 행위를 추가 traditions. In a recent trend, traditional customs of entertainment
하기도 하고,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필요 없다 생각되 are being reinterpreted and reinvented in each locale. Residents
는 부분은 과감하게 삭제하기도 한다. 전통의 자기화 과정이다. opt to add new acts and employ new tools. Sometimes they boldly
계족산 무제는 ‘신新 계족산 무제’라 하여 새로운 해석에 기반한 erase parts that seem extraneous. This is a process of internalizing
전통의 재창출이 시도되었고, ‘숯뱅이 두레’는 오늘날의 시대적 tradition. The “new” shamanistic ritual of Gyejoksan Mountain is
흐름에 맞춰 공연 시간을 대폭 줄이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 an attempt to reinvent tradition through reinterpretation. The run
처럼 재창조된 대전 전통놀이는 전통의 창조적 계승 과정을 겪고 time of the sutbaengi dure has been shortened significantly to suit
있기에 그 미래가 밝다. contemporary lifestyles. Daejeon’s traditional entertainment customs

글·사진 김효경 겨레문화유산연구소 소장, 한남대학교 중앙박물관 특별연구원 are being reinvented through creative transmission processes,
heralding a brighter future.

‘지역N문화’ 누리집에서 Written and photographed by Kim Hyo-kyung, director, Gyeore Institute of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Cultural Heritage; research fellow, Hannam University Centr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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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느린 마을 기 행 ⑦

“산 따라 물 따라” 한반도의 내륙, 충청북도. 그 품 윗단에 자리한 제천은 동쪽에 충주, 서쪽에 단양을 이웃
하고, 북쪽으로는 강원도 원주와 영월에 맞닿아 있다. 내륙에 자리한 까닭에 제천은 예

자연 치유도시 제천 부터 약령시가 크게 발달했다. 그 맥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제천을 ‘자연 치유도시’라 부


르게 되었다. 제천에 가면 빠듯한 일상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휴식과 치유를
기대하며 슬로시티 제천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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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Slow City T ravel

“Along the Mountains, Along the Waters”:


The Natural Healing City of Jecheon
Jecheon is located in the upper portion of the Korean Peninsula’s inland province of Chungcheongbuk-
do, bordering Chungju to the east, Danyang to the west, and Wonju and Yeongwol in Gangwon-do to the
north. Thanks to its inland location, it has a highly developed medicinal herb market—a tradition that
has continued through today, earning Jecheon the nickname of the “natural healing city.” Traveling to
Jecheon, one feels as though they can let go of the baggage of daily life. We traveled to the Slow City of
Jecheon in the hopes of finding rest and healing.

백봉전망대에서 맞이하는 청풍호의 아침 풍광


A morning view of Cheongpungho Lake as seen from the Baekbong observa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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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산이 아름다운 수산면 산야초마을 Susan’s Sanyacho: Beauty of water and mountains
청풍호의 넉넉한 물과 금수산, 가은산, 옥순봉으로 이어지는 The pride of this Slow City’s Susan-myeon township is the abundance
울창한 산림이 슬로시티 수산면의 자랑이다. 수산이라는 이름도 of water in its Cheongpungho Lake and the luxuriant forest that
물水과 산山에서 따왔다. 청풍호는 1985년 충주댐을 건설하면서 stretches from Geumsusan Mountain to Gaeunsan Mountain and
생겨난 인공호수다. ‘내륙의 바다’라 불릴 만큼 규모가 커서 제천 Oksunbong Peak. The name “Susan” itself means “water” (su) and
시와 충주시, 단양군에 걸쳐 있다. 재미난 것은 똑같은 호수를 두 “mountain” (san). Cheongpungho is an artificial lake created by the
고 제천에서는 청풍호, 충주에서는 충주호, 단양에서는 단양호라 1985 construction of Chungju Dam. Large enough to be described
부른다는 것이다. 요즘에 와서야 호수에 자기네 고장 이름을 붙 as an “inland sea,” it spans portions of Jecheon, Chungju, and
여 부르지만, 인공호수가 조성될 때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수몰 Danyang-gun County. Interestingly, the same lake goes by different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한숨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다. 조상 names: “Cheongpungho” in Jecheon, “Chungjuho” in Chungju, and
대대로 살아오던 생활 터전이 하루아침에 물에 잠긴다는 걸 누군 “Danyangho” in Danyang. While the different communities have
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랴. 이에 수몰 지역 주민들은 고향 지키 taken to attaching their own name to the body of water, the situation
기 운동을 전개해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렇게 조성된 곳 was a bit different back when the artificial lake was being created.
이 수산면의 산야초마을이다. 예부터 산야초마을이 있는 수산면 Those days were a time of unending struggle for the people who had
하천리는 약초의 주산지로 유명했다. 게다가 금수산이 병풍처럼 lived in the inundated regions. Certainly there are few people who
드리우고 남한강이 유유히 흘러드는 곳이니 풍광 또한 빼어났다. would simply accept their home—the place where their families
가까운 곳에 있는 능강솟대문화공간도 챙겨볼 만하다. 솟대는 오 had been living since the time of their ancestors—being flooded
리나 기러기 등을 장대에 올려놓은 것으로 고조선 시대부터 이어 overnight. Waging a campaign to protect their community, the
온 우리의 고유문화다. 주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 residents created a new “nest”: the community of Sanyacho in Susan-
해 마을 입구에 세우곤 한다. 공원에는 청풍호를 배경으로 서 있 myeon. Hacheon-ri, the village in Susan-myeon where Sanyacho
는 다양한 솟대 작품과 야생화를 감상할 수 있다. is located, has long been renowned as a major production site for

medicinal plants. It also boasts spectacular scenery, surrounded by


슬로시티 제천의 느린 풍경 따라 Geumsusan Mountain like a folding screen with the Namhangang
‘슬로시티’다운 풍광을 즐기고 싶다면 자연의 숨결을 따라 River flowing gently by.
느리게 걷는 청풍호 자드락길을 걸어보자. 자드락길이란 ‘산기슭 Also worth a visit is the nearby Neunggang Sotdae Museum.
비탈진 곳에 난 오솔길’을 뜻한다. 수산면에 속한 코스는 6코스 Sotdae are poles with duck or goose figurines on top that are erected
‘괴곡성벽길’이다. 괴곡리에 있는 옥순봉쉼터에서 출발해 다불리 at village entrances as a gesture of prayer. Visitors to the museum can
를 거쳐 지곡리까지 갔다가 괴곡마을에서 마무리한다. 총 길이는 view different sotdae works and wildflowers against the backdrop of
9.9km다. 완주하려면 반나절은 잡아야 한다. 시간 여유가 없다면 Cheongpungho Lake.
다불리까지 갔다가 되돌아와도 괜찮다. 여유롭게 걸어도 1시간이
면 충분하다. 그래도 아쉽지 않은 이유는 이 구간에서 보는 전망 Slow City of Jecheon: Following the leisurely landscape
이 가장 탁월하기 때문이다. 특히 백봉전망대에서 보는 청풍호의 If you’re looking to enjoy a landscape befitting a Slow City, take a
풍광은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압도적이다. walk along Cheongpungho’s Jadeurakgil course, which stretches out
외줄에 매달려 청풍호반의 풍광을 한눈에 조망할 생각이라면 청 its leisurely path to the rhythm of nature. The name “Jadeurakgil”
풍호반케이블카를 이용하자. 운행 구간은 청풍면 물태리에서 비 literally means a “trail amid lower mountain slopes.” The Susan-
봉산 정상까지 2.3km다. 캐빈에 오르는 순간부터 눈이 휘둥그레 myeon course is #6, the Goegok Fortress Wall Trail. It starts at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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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며 지금껏 누리지 못했던 호사를 경험하게 된다. 여기저기 아 Oksunbong Peak shelter in Goegok-ri and continues to Dabul-ri and
름다운 풍경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빼어나다. 하지만 Jigok-ri before ending once again at Goegok. The total length in 9.9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서론에 불과하다. 비봉산 정상에 있는 전 kilometers; those hoping to complete it should set aside a good half a
망대에 오르면 월악산국립공원과 금수산의 능선이 너울성 파도 day. If you don’t have that much time to spend, you can always travel
처럼 일렁인다. 산을 담고 있는 청풍호의 아름다운 자태 또한 놓 as far as Dabul-ri and back—an hour should be enough even if you
치기 아까운 비경이다. 올라갈 때 케이블카를 이용했다면 내려올 go slowly. You won’t be disappointed, as the view from this stretch
때는 모노레일을 이용해보자. 하늘에서 보는 풍경과 다른 숲의 is the most splendid of all. The landscape of Cheongpungho as seen
속살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from the Baekbong observatory is likely to leave you gasping in
여유로운 시골 마을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수산면사무소 주변 admiration.
마을 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슬로시티만의 느림 문화와 옛 향 If you’re interested in surveying the lakeside scenery from up
수를 자극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정겨운 장터 분위기도 느낄 in the air, give the Cheongpung Cable Car a try. It operates over
수 있는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토정비결》의 주인공 이지함을 a 2.3-kilometer section from Multae-ri village in Cheongpung-
모티브로 꾸민 전봇대다. 더불어 수산면사무소 인근에 있는 슬로 myeon to the top of Bibongsan Mountain (531 meters). From the
시티 방문자 센터를 찾아가면 여행 정보를 챙길 수 있다. very moment you set foot in the cabin, your eyes will widen as you
제천은 수산면과 함께 박달재가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다. 박달재에 take in the never-before-seen splendor, with exquisitely beautiful
는 전설이 전해온다. 때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운의 꿈 landscapes in every direction. All of this is just a prelude, however:
에 부푼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중, 박달재 아랫 once you reach the observatory atop Bibongsan Mountain, you can
마을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이때 금봉이라는 처녀를 만나 사랑을 see Woraksan Mountain National Park and the ridges of Geumsusan
나누며 몇 날 며칠을 보냈다. 과거 날짜가 임박하자 박달은 장원급 Mountain rolling like ocean waves. The beauty of the mountains
제해서 꼭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한양으로 떠났다. 그러나 몇 날이 reflected in Cheongpungho is not to be missed. Since you took the
지나도 박달은 소식이 없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해 절망한 금봉은 cable car to the top, give the monorail a go on your way down. It’s a
숨을 거두었다. 뒤늦게 달려온 박달은 금봉의 환영幻影을 잡으려다 thrilling opportunity to see the forest up close, offering a different

look from what you saw from the air.

If you’d like a taste of the leisurely country village atmosphere,


비봉산을 오르는 청풍호반케이블카
The Cheongpung Cable Car going up Bibongsan Mountain take a walk along the village’s roads around Susan-myeon’s township

office. Here you will find wall art that evokes the leisurely culture of a

Slow City and awakens a sense of nostalgia. You can also experience

a warm market atmosphere—the telephone poles decorated in honor

of Tojeong bigyeol writer Lee Ji-ham are particularly striking. Travel

information can be obtained by stopping at the Slow City Visitor

Center near the village office.

In addition to Susan-myeon, Jecheon’s Bakdaljae Pass has also

earned Slow City designation. There’s a legend associated with this

pass. It dates back to the Joseon era, when an ambitious seonbi

(Confucian scholar) named Bakdal traveled to Hanyang (the old

name of Seoul) to take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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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때부터 이 고개를 박달재라 부른다. spent the night at a village below what is now Bakdaljae Pass. There
이 안타까운 사연은 요즘 아이돌보다 더 핫한 트로트의 〈울고 넘 he met a maiden named Geumbong. The two of them spent several
는 박달재〉 노래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 romantic days together. As the day of the examination drew nearer,
는 우리 님아로…”로 시작하는데 이 구성진 노랫말은 박달재조각 Bakdal left for Hanyang, pledging to return having finished with
공원과 박달재목각공원 곳곳에 조각 작품으로 표현되어 있다. the highest score. But days passed without any word from him.

Geumbong waited and waited before finally taking her own life in
두 시간이면 넉넉한 의림지 산책 despair. Arriving too late, Bakdal chased after a phantom image of
박달재에서 20분 남짓한 거리에 의림지가 있다. 의림지는 용 Geumbong, only to fall from a cliff to his death. Ever since, the pass
두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농경 수리시설이 has been known as “Bakdaljae.” The tragic story can be heard in the
다. 삼한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김제 벽제골, 밀양 수산제 song “Ulgo Neomneun Bakdaljae (Crying over Bakdaljae Pass),”
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관개시설이다. a song in the trot style, a 20th-century pop genre that has lately
구전에 따르면 의림지는 신라 진흥왕 13년552에 악사 우륵이 축조 regained popularity. Beginning with the line, “My love comes crying

over Bakdaljae Pass on Cheondeungsan Mountain,” the lyrics of this

enchanting tune are embodied in sculptures throughout Bakdaljae


박달재 전설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
A sculpture inspired by the legend of Bakdal Sculpture Park and Wood Sculpture Park.

Walking Uirimji Reservoir: Two hours is more than enough


A little over 20 minutes away from Bakdaljae Ridge is Uirimji

Reservoir. This farmland irrigation facility was created with a levee

blocking the brooks flowing down from Yongdusan Mountain. It is

one of the oldest irrigation facilities in Korea, alongside Byeokjegol

in Gimje and Susanje in Miryang, which were said to have been built

during the Samhan Period.

According to oral tradition, Uirimji Reservoir was built in year

13 of the reign of King Jinheung of Silla Kingdom (552) by a musician

named Ureuk. Named as one of Korea’s three legendary gugak

musicians, Ureuk was a master of the gayageum. As if to offer proof

of the stories of Ureuk having built the reservoir, the site includes a

rock called “Ureukdae” where he is said to have played the gayageum,

and a well called “Ureuksaem” from which he is said to have drunk.

The reservoir was known at the time as “Imji,” with the name “Uirimji”

entering use by year 11 of King Seongjong of Goryeo Dynasty (992).

Alongside the reservoir are the pavilions of Yeonghojeong, built in

year 7 of King Sunjo of Joseon Dynasty (1807), and Gyeonghoru,

built in 1948. As you sit in the pavilion and gaze out on the tranquil

surface of the water, it feels as though all the worries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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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1 전망대에서 바라본 의림지 풍경


Uirimji Reservoir as seen from the observatory
2 우륵이 마셨다는 우물 ‘우륵샘’
Ureuksaem Well, from which Ureuk is said to have drunk

했다고 전한다. 우륵은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가야금의 대가로 are simply washed away. In the distance, Yongdusan Mountain (871
손꼽힌다. 우륵이 의림지를 축조했다는 설화를 증명이라도 하듯 meters) appears like something out of a dream.
의림지에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바위 ‘우륵대’와 그가 마셨다 If anything has changed since the old days, it’s the fountain at
는 우물 ‘우륵샘’이 있다. 당시에는 ‘임지’라 부르다가 고려 성종 the reservoir’s center and wooden-fenced path that travels around
11년992에 이르러 의림지라 부르기 시작했다. 의림지에는 순조 7 the lake. At the path’s entrance is an observation deck resembling a
년1807에 지은 ‘영호정’과 1948년에 지은 ‘경호루’가 있다. 누정에 watchtower; an artificial waterfall and cave along the way only add to
올라 고요한 수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세상 시름이 말끔히 씻겨 the enjoyment of your stroll. In terms of scale, Uirimji Reservoir can
날아가는 것 같다. 아득한 용두산의 모습도 꿈처럼 아련하다. be walked in about an hour and a half, even at a leisurely pace.
옛 모습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의림지 중앙의 분수와 호수 주변 The Slow City journey that leads from Susan-myeon to
에 목책 길이 놓인 것이다. 길 초입에는 망루 같은 전망대가 있고, Bakdaljae Pass and Uirimji Reservoir is an endless parade of water
중간 지점엔 인공폭포와 동굴이 있어 걷는 재미를 더한다. 의림 and mountains. Water has long been said to represent the origins
지는 여유롭게 걸어도 1시간 30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규모다. of life, and mountains to be akin to a mother’s bosom. It’s easy to
수산면과 박달재 그리고 의림지로 이어지는 슬로시티 여행은 물 understand why Jecheon has been described as a “natural healing
과 산의 연속이다. 예부터 물은 생명의 근원이라 했고, 산은 어머 city.” With the water and mountains that it boasts, the name only
니의 품 같은 곳이라 했다. 제천을 자연 치유도시라 부르는 이유를 seems right.
조금은 알 것 같다. 물과 산이 있으니, 그리 불러도 되지 않을까.
Written by Im Unseok, travel writer
Photographs courtesy of Im Unseok; Lee Sunghwan, Korea Tourism
글 임운석 여행작가 Organization
사진 임운석, 이성환-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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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mmended Course
여행 정보
Susan-myeon Slow City Visitor Center > Oksunbong Peak Shelter
•코스 소개 수
 산면 슬로시티방문자센터 ~ 옥순봉쉼터(자드락길) ~ 산야초 (Jadeurakgil) > Sanyacho Village > Neunggang Sotdae Museum >
마을 ~ 솟대문화공간 ~ 청풍호반케이블카 ~ 박달재 ~ 의림지 Cheongpung Cable Car > Bakdaljae Pass > Uirimji Reserv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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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팔도 음 식

맛은 당연, 건강은 보너스! Jecheon’s Yakcho Sundae:


제천 약초순대 Tasty and Healthy!
제천은 한국의 4대 약령시가 있는 곳이다. 약초로 유명한 제천이 Jecheon is the home of one of Korea’s four largest
다 보니 약초를 이용해 만든 요리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약초순 medicine markets. The city is known for its medicinal
대’가 유명하다. 황기와 당귀 등을 우려낸 약초액을 첨가해 만든 herbs, so it makes sense its cuisine features many dishes
약초순대는 제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that employ those herbs. Yakcho sundae, or medicinal
herb blood sausage, is the most famous among these.
The Korean street-food favorite is augmented by extracts
of hwanggi (Mongolian milkvetch) and danggwi (Korean
angelica) and has been a local favorite since the old days.

제천 약초순대
Jecheon's yakcho sund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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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Pr ovinc ial Cuisine

질 좋은 약재 그리고 한방 음식 Quality medicinal herbs and Korea’s medicinal cuisine


월악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제천은 ‘청풍명월’의 고장으로 불린 Nestled at the foot of Woraksan Mountain, Jecheon was known in
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의 고장이라는 뜻이다. 겹겹이 어깨를 걸 the old days as the land of the “fresh wind and bright moon.” The
친 산과 청아한 호수가 어울려 빚어내는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 man-made Cheongpungho (“Fresh Wind”) Lake, which was formed
이 바로 제천이다. during the construction of Chungju Dam in 1985, augments the
월악산을 끼고 들어앉은 제천은 전형적인 산악 지형으로 질 좋은 majestic beauty of Woraksan Mountain. Jecheon is the perfect place
약재를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미 조선 시대부터 약령시藥令 to admire the pristine lake amid a backdrop of mountainous layers.
市가 만들어질 정도로 한약재가 유명했는데, 한반도 가운데 자리 The mountainous landscape gifted by Jecheon’s location beneath
한 중부 지방 물산의 집산지로 유통에도 여러모로 유리한 조건을 Woraksan Mountain has helped the city build its reputation as a
갖추고 있었다. 제천 약초시장은 처음에 크고 작은 점포 10곳으로 producer of quality medicinal herbs. In fact, the region was so well
시작했는데, 일제 강점기에도 꾸준히 발전을 거듭해 서울과 대구, known for its high-quality herbs that a market was formed here in
금산에 이은 4대 약령시장으로 자리를 굳히게 됐다. the Joseon era. Its central location on the Korean Peninsula made the
제천에서 나는 많은 약초 가운데서 특히 유명한 것은 황기와 당귀 city an ideal trading post, and the city’s medicinal herb market that
다. 제천의 황기와 당귀 생산량은 전국의 70~80%를 차지한다고 started off as just 10 shops, both big and small, continued to develop
한다. 제천시는 제천에서 나는 약초를 이용한 음식을 ‘약채락’이라 even throughout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Jecheon eventually
는 브랜드로 만들어 널리 홍보하고 있다. 제천을 여행하다 보면 곳 established its reputation as one of Korea’s four largest medicinal
곳에서 한방 음식을 내건 식당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herb centers alongside Seoul, Daegu, and Geumsan.

Among the many herbs the city is known for, hwanggi


오랜 역사의 순대, 제천의 대표 음식이 되다 (Mongolian milkvetch) and danngwi (Korean angelica) are
제천에는 자랑할 만한 향토음식이 많다. 민물매운탕, 도토리 particularly famous. In fact, Jecheon alone is responsible for 70 to 80
묵밥, 매운 등갈비, 떡갈비 등이 제천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최근 percent of Korea’s production of these herbs. The city has capitalized
들어 제천시는 ‘제천 가스트로 투어미식 여행’라는 여행 코스를 만 on its medicinal reputation to promote its local cuisine as “medicinal
들어 선보이고 있는데 이 상품을 따라가다 보면 찹쌀떡, 대파불고 food,” even creating a brand called Yakchaerak. Visitors can roam the
기 등 제천의 새로운 음식을 맛볼 수 있다. streets and find a number of eateries specializing in medicinal cuisine.

Sundae with rich history is the city’s quintessential dish


약초순대국밥
Yakcho sundaegukbap Jecheon has a lot native dishes to boast about: freshwater fish spicy

stew, acorn jelly rice, spicy baby back ribs, and short-rib patties—just

to name a few. The city has recently introduced its own Gastro Tour

that allows visitors to sample new creations such as sticky rice cakes

and green onion bulgogi.

But the city’s most famous dish by far is yakcho sundae

(medicinal herb blood sausage). As the name suggests, it’s blood

sausage made with medicinal herbs. Blood sausage, or sundae,

is traditionally made by stuffing pork and beef intestines with

various ingredients and steaming it. People throughout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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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 다양한 향토음식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약초순대’다. have enjoyed variations of the same dish for centuries, and Korea
이름 그대로 약초를 이용해 만든 순대다. 순대는 소나 돼지의 창 is no exception. Korea’s earliest record of sundae appears in Yi
자 속에 여러 가지 재료를 소로 넣어 쪄서 만든 음식으로 인류가 Bingheogak’s Gyuhap chongseo, an encyclopedia for household
아주 오래전부터 즐겨 먹던 음식이다.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순 chores published in 1809 (nin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unjo), in
대를 먹어왔는데 순조 9년1809 빙허각 이씨가 엮은 가정 살림에 which it describes “steamed beef intestines” made by stuffing beef
관한 내용의 책인 《규합총서》에도 소 창자에 피를 넣고, 창자 양 intestines with blood, tying off the ends with string, and steaming
끝을 실로 매어 쪄서 익혀 만든 쇠창자찜이 소개되어 있고, 조선 them. Siuijeonseo, a cookbook published in the late 19th century,
말기의 조리서인 《시의전서》에도 돼지피, 숙주, 미나리, 무, 두부, describes a pork blood sausage made by stuffing pork blood, mung
배추김치 등을 섞어 만든 소를 돼지 창자에 넣어 삶아낸 돼지순대 bean sprouts, water celery, radish, tofu, and napa cabbage kimchi
가 소개돼 있다. into pork intestines and boiling them.
함경도에 ‘명태순대’가 있고 강원도에 ‘오징어순대’가 있다면 제천 Hamgyeong-do province is known for putting Alaska pollock
에는 ‘약초순대’가 있다. 왜 제천하면 약초순대인지는 제천시에 자 in its blood sausage, while Gangwon-do adds squid, but Jecheon is
리한 내토시장과 중앙시장을 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제천에 있는 known for its medicinal herb variety. A visit to the city’s Naetosijang
시장들은 약초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이처럼 몸에 좋은 약초를 Market or Jungangsijang Market immediately reveals why Jecheon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순대에도 약초를 넣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 is known for its herbs. The city’s markets are invariably tied to
지만, 아직도 약초순대를 만들어 파는 곳들이 있다. 약초순대는 황 medicinal herbs. The city has such an abundant supply of healthy
기와 당귀 등 제천의 대표 한약재와 더덕, 감초 등을 더해 24시간 herbs that cooks couldn’t help but put them in their blood sausage.

Although the number of eateries offering medicinal herb blood

sausage has diminished throughout the years, Jecheon still offers a


황기, 당귀 등의 약재들
Medicinal herbs including hwanggi and danng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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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1 제천의 또 다른 대표음식 '순두부'


Sundubu, another dish representative of Jecheon
2 제천에서 맛 본 두부찌개
fair share of them. The dish is prepared with key herbs of hwanggi
Jecheon-style dubujjigae and danggwi, as well as deodeok (lance asiabell) and gamcho (Chinese

licorice), all boiled in a broth for 24 hours. Not only are such herbs
우린 육수를 넣어 만든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약초를 구하기 수 plentiful in the region, but they’re perfect for getting rid of boar taint
월할 뿐만 아니라, 돼지고기와 내장의 잡내를 잡는 데 약초만한 when cooking pork. The blood sausage can be served as is or in a
게 없기 때문이다. 약초순대는 그 자체로 즐길 수도 있고, 국밥으 broth with rice. The soup and rice, known as gukbap, is made with
로도 즐길 수 있다. 약초순대와 머리고기, 내장 등을 푸짐하게 넣 generous portions of blood sausage, pork head meat, and intestines.
어 말아낸 국밥에는 들깻가루가 수북이 들어가 진한 육수 맛에 The richness of the broth is complemented by the earthy nuttiness of
구수함을 더한다. perilla seed powder.

반전의 맛, 순두부와 산초기름 Taste the unexpected: sundubu with Sichuan pepper oil
제천의 또 다른 대표 음식은 순두부다. 제천 두학동에는 ‘시 Sundubu, or soft tofu, is another regional specialty of Jecheon.
골 순두부’라는 두부집이 있다. 매일 아침 두부를 직접 만들어 파 Nestled in the city’s Duhak-dong neighborhood is a tofu joint called
는 집이다. 지금은 좀처럼 맛보기 힘든 산초기름을 넉넉히 두르 Sigol Sundubu, where they make their tofu fresh every morning.
고 지져낸 두부를 맛볼 수 있다. 일반 기름과 달리 산초기름은 맛 One of their dishes is tofu coated generously with Sichuan pepper oil
과 향이 강해 호불호가 갈리는데, 이 산초기름이 두부와 만나면 and then fried, a treat that’s hard to find nowadays. Sichuan pepper
그 맛이 또 달라진다. 두부의 구수한 맛이 산초의 알싸한 향과 어 oil has a much stronger flavor than standard oil, which means you
울려 한결 깊으면서도 화려한 맛을 빚어낸다고나 할까. 두부를 나 either love it or hate it, but it brings a different flavor when paired
박나박 썰어 버섯을 넣고 다진 마늘로 양념을 한 두부찌개도 별미 with tofu. The savoriness of the tofu goes perfectly with the piquant
중의 별미다. bite and aroma of the Sichuan pepper oil, adding a certain flashiness

that also has depth. To cook up a nice tofu stew, cut the tofu into thin

squares, add mushrooms, and season with minced garlic. It doesn’t


get any better than that.

Written by Choi Gab-su, travel writer and author of Take a Day Trip, Then Take
글 최갑수 여행작가, 《하루 여행 하루 더 여행》 저자 Another
사진 최갑수, 아이클릭아트 Photographs courtesy of Choi Gab-su, iclick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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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을 보 다

헨드릭 하멜, The Story of Hendrik


그가 남긴 이야기에 Hamel, and How I Came
빠지다 to Research It
《하멜 표류기》1668는 한국인 대부분이 아는 친숙한 이야기다. 물 The story of Hendrick Hamel is, for most Koreans, a
론 그것이 역사적 기록이 아닌, 그저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familiar one, but some seem to think it’s just that—a
고 여기는 이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story, not history.

《하멜표류기》(1946년 이병도 역주) 《하멜표류기》(1954년 이병도 역주)


The Journal of Hendrick Hamel (translated and annotated by Lee Byeongdo in 1946) The Journal of Hendrick Hamel (translated and annotated by Lee Byeongdo in 1954)

나는 네덜란드 사람임에도 1980년대 후반까지 ‘핸드릭 하멜 As a Dutchman, I had never heard of Hendrick Hamel until the late
Hendrick Hamel’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아시아 나 1980s. Come to think of it, even though I read every book I could
라들을 다룬 책이라면 모조리 찾아 읽었는데도 유독, 한국에 대 find about Asian countries, I could find nothing about Korea. My
한 책은 접하지 못했다. 내가 아시아에 대해 흥미를 가진 것은 interest for Asia came from my auntie, who had lived in Indonesia
1936~1946년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살다 온 이모님 덕분이었다. from 1936 to 1946, and when she and her husband came back, th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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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T hr ough Foreign Eyes

이모님 내외가 끌고 온 짐이 어찌나 많았는지 집에 모두 둘 수가 brought so much stuff, they couldn’t store it in their house and a lot
없었고, 그 바람에 그 중 상당수가 우리 손에 들어왔던 것이다. 나 of it ended up in ours. As a child I, was fascinated by it. Indonesian
는 그 물건들에 푹 빠져버렸다. 인도네시아 물건뿐만 아니라 도 but also Chinese and Japanese things, porcelain, statues, a Chinese
자기, 석상, 퍼즐 같은 중국과 일본 물건들도 있었는데, 거기에 매 puzzle—I loved it all, and I started reading everything I could lay
료된 나는 아시아에 대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my hands on about Asian countries. I knew of Korea only from
하지만 한국에 대한 정보는 6.25 전쟁 참전 용사들과 네덜란드로 some stories of veterans who had fought in the Korean War and the
건너온 한국 출신 입양아 이야기에서 얻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 Korean adoptees who had come to the Netherlands. A mother of one
러던 중 한국 아이를 입양한 어느 어머니에게 하멜에 관한 책이 of the adoptees had a book about Hamel, and I decided to buy the
있는 걸 보고, 나도 그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이 내가 한 book myself and read it. It was the first book ever I read about Korea,
국에 대해 읽은 최초의 책이었는데, 그 속에선 참으로 흥미진진 and I thought it was a fascinating story.
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At a certain moment I decided I should go to Asia. I went
그러다가 문득 아시아에 직접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먼저 to Japan first, stayed there for six months, and then went to the
일본으로 건너가 여섯 달을 머물다가 다음으로 필리핀에 가서 아 Philippines, where I stayed nine months. I met lots of Koreans there.
홉 달을 지냈다. 그곳에서 한국인을 많이 만났고, 그 친구들이 좋 I liked those guys, and we hung out a lot. They convinced me to
아 함께 자주 어울려 다녔다. 친구들은 꼭 한국에 가 보라고 권했 visit Korea, and I stayed and never left. When I had just come here,
고, 그렇게 한국에 온 다음 쭉 눌러 살고 있다. 그때 한국에 와서 somebody else had written a book about Hamel in English, and I
보니 어떤 사람이 하멜에 대해 영어로 쓴 책이 있었는데, 내가 알 realized it was different from what I had read before. I decided to
던 것과는 내용이 사뭇 달랐다. 어느 쪽이 더 정확한지 알아보려 discover which account was most correct. I went to the archives
고 헤이그에 있는 네덜란드 국립공문서보관소에 갔더니 하멜의 in The Hague, discovered the original manuscript, and started to
육필 원고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베껴다가 네덜란드와 한국의 transcribe it and translate it with a lot of additional Dutch and
자료들을 동원해 가며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Korean resources.
헤이그에는 자료가 넘쳐나서 다양한 네덜란드 측 관련 기록에 접 With almost endless resources available at The Hague, I was
근할 수 있었다. 찾아낸 내용을 영어로 번역해서 하멜 전문 웹사 able to access various records from the Dutch side of the story. I
이트를 만들어 올렸는데, 이 사이트가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한 also made use of translating my findings into English and uploading
국과 네덜란드를 막론하고 많은 이가 내가 올려 놓은 정보를 통 them onto a website on Hamel that I made for this particular
해 나를 알게 되었고, 그들이 내가 한국 측 기록을 조사하러 한국 purpose. The website was of great help, as many people, Korean and
에 방문했을 때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Dutch, reached out to me about the information I shared, and they
근 30년간 하멜에 대한 조사를 이어오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수 later aided me greatly when I came to Korea to inspect the Korean
많은 질문을 받았다. 흔히 하는 질문 중 하나는 하멜과 동료 선원 records.
들이 조선에서 어떻게 생활했으며, 그 오랜 체류 기간 동안 어떤 Having researched Hamel for almost 30 years, I have been asked
심정으로 지냈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 중 두 명이 당시 조선을 방 a number of questions from many people. A common question
문했던 중국 사신과 접촉해 탈출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새 posed to me when I talk about my research is how Hamel and his
로운 정착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반면 조선 fellow sailors lived and felt during their long stay in Joseon. The fact
에 애착을 가지게 된 선원들도 좀 있었던 모양이다. 고국으로 무 that two of the men tried to escape by contacting a Chinese envoy
사히 돌아간 선원 둘이 암스테르담 시장에게 “나는 기독교 물이 visiting Joseon at the time shows that they did not enjoy their new
다 빠졌어”라며 조선 떠나기를 거부하고 남은 선원이 있었다고 home. On the other hand, some of the sailors seemed to have g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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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걸 보면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에서 한국과 교역 attached to Joseon. There is an account of two men, after they had
할 목적으로 ‘코레아Corea’라는 이름의 상선이 건조되자, 조선에서 made it safely back home, telling the mayor of Amsterdam that
13년을 보냈던 선원 셋이 당장에 승선하겠다고 나선 일도 있었다. one of their fellow sailors had refused to leave Joseon and stayed
그들은 두고 온 집이 있는 나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behind, saying “He had no Christian hair on his body anymore.”
이런 소소한 사건들은 난파 생존자 36명이 13년간 체류하면서 실 Furthermore, when the Dutch built a ship called Corea with the aim
제로 조선에 애착을 갖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살 집을 마련했던 of doing business with Korea, three of the sailors who had spent 13
전라병영에서 그들은 대부분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던 것으로 years in Joseon signed on immediately. They wanted to go back to
보인다. 하멜 본인은 한국에서 가정을 꾸렸다는 말을 일언반구도 the country where they had left their houses behind.
하지 않았다. 비유럽계 나라 사람들과의 혼인을 백안시하는 풍토 These small incidents show that the 36 men who survived the
가 있었던 데다 하멜의 동료 중 많은 수가 이미 네덜란드에서 결 shipwreck, in their 13 year stay, did indeed form an attachment to
혼을 한 터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선 배우자와 가정을 이루고 Joseon. In Jeolla Byeongyeong (the military headquarters of Jeolla-
살았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그들보다 먼저 조선에 정착하여 살았 do) they set up their own houses and most likely married and had
던 또 다른 네덜란드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박연도 네덜란드에 children. Hamel does not mention anything about families because
두고 온 식솔이 있었지만, 조선에서 다시 혼인하여 자식을 낳았 marrying a local in non-European countries was frowned upon and
다는 당시 기록 때문이다. many of the men he was with were already married in Holland as
하멜의 동료는 아니지만 박연도 언급할 가치가 있는 흥미로운 인 well. However we can infer that the men probably did make some
물이다. 그는 왕의 고문이자 훈련도감의 장교 자리까지 올랐는 sort of life with a Joseon spouse as records from Joseon indicate that
데, 이는 조난자 처지에서는 물론이요, 조선의 웬만한 양반에게 Jan Janse Weltevree (Park Yeon), whom was another Dutchman
도 괜찮은 위치였다. who had ended up in Joseon at an earlier date, was married to a
한편 조선 측 입장에서 볼 때,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조선 사람 Korean and had children, even though he also had a family in the
이 이 네덜란드 사람들을 받아들여 주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 Netherlands and had a child there. Though not a companion of
들도 있다. 하멜과 동료 선원들에게는 늘 관원이 한 명씩 배정되 Hamel, Park Yeon is an interesting man to touch upon. He became
었는데 처우는 제 각각이어서 어떤 이는 그들이 겪는 고초를 안 an advisor of the king and captain of the guards, which is not a bad
쓰럽게 여겼고, 어떤 이는 잡일을 시키며 함부로 대했다. 또 하멜 career for your average Joseon nobleman, let alone a castaway.
일행은 쌀을 배급 받았지만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 On the other end of the spectrum, there are also accounts that
이니, 다른 조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먹을 고기와 채소 suggest that the Dutchmen were accepted by many if not all the
를 직접 구해야만 했다. 하멜의 글이 그들의 일상생활을 들여다 people of Joseon. There was always an official assigned to Hamel and
볼 수 있을 만큼 세세하지는 않지만, 행간을 살펴보면 이들은 분 his men, though the treatment of the sailors may have differed. Some
명 다른 주민들과 잘 지냈던 것 같다. 특히나 구걸이 합법적인 생 officials were sympathetic to the plight of the men, while others
존 수단이며 천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말이다. 그래서 made them do menial chores and treated them badly. The men
그들은 여러 사찰을 찾아다녔고, 호기심 어린 승려들은 이들을 were granted a ration of rice, but as anyone knows, one cannot live
반기며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on only rice. The men had to supply their own meat and vegetables
이들이 조선 사람들에게서 경험한 포용과 호기심은 내게도 낯설 like any other man in Joseon. Hamel’s writing does not offer a great
지가 않다. 26년간 한국에 살면서 만난 한국 사람들도 나에 대해 amount of insight into their daily life, but if you read between the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고, 한편으로는 선입견과 편견도 많았다. lines, it is apparent that the men had good relations with other locals,
한 예로, 18년 전 나는 한국어를 간절히 배우고 싶어서 1년 동안 especially when they discovered that begging was a legitimate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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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surviving and was not looked down upon. So, they visited lots of

temples and were welcomed there by the curious monks who asked

them many questions.

This acceptance and curiosity that the men experienced from

the locals rings a bell with me, after having lived here for 26 years.

People I meet also want to know many things about me but also

have many preconceptions and prejudices, which are, of course, not

uniquely Korean. For instance, I studied Korean some 18 years ago

as I desperately wanted to learn the language. For one year, I would

sit in a coffee shop and study for three hours a day, every single day.

미국 육군 중장 윌리엄 K 해리슨 역할을 맡았던 영화 촬영지에서의 필자 I remember during this time that hardly anybody spoke Korean to
Henny Savenije at a film set playing the role of US Army lieutenant general William K.
Harrison me. Upon meeting me, people would have one of two reactions:

“Oh a foreigner! I want to learn English! Let’s talk to him!” or “Oh a


매일 3시간씩 카페에서 한국어 공부를 했는데, 당시엔 아무도 나 foreigner! I can’t speak English. I am scared. What should I do?”
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혼자 앉아 있는 나를 본 사 Of course, there were a few people who would come and talk
람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였다. ‘어, 외국인이다. 영어 공부 삼 to me, and I came to understand that Koreans appreciate it a lot
아 말이나 걸어 볼까’ 또는 ‘어, 외국인이다. 영어를 못해서 말을 if you speak Korean, even if just a very little. I have had several
못 걸겠는데 어쩐다?’ experiences where some Koreans were so fixed on their perception
내게 말을 걸어주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외국인이 한국어 that foreigners can’t speak Korean that they don’t understand you,
를 조금만 할 줄 알아도 대단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실제 한 no matter how good your Korean is, but this seems to be changing
국어 실력은 제쳐 두고 외국인은 한국어를 못해서 한국인들을 이 as there are more foreigners learning the language. Now I am proud
해하지 못한다는 편견도 여러 차례 경험했다. 물론 한국인에게만 of how far my Korean language skills have come. My career as not
이런 면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편견은 한국어를 배우 just a researcher of a shipwrecked Dutchman but a professor and
는 외국인이 많아지면서 점차 사라지는 듯하다. 지금 나의 한국 occasional actor has helped me become more fluent. It may also be
어 실력은 자랑할만한 수준이다. 그동안 하멜에 대한 조사만 한 due to the fact that my dog listens only to Korean commands, who
게 아니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끔 연기 활동도 한 덕 knows?
분이다. 어쩌면 우리 집 강아지가 한국어만 알아들어서 그럴지도 Nevertheless, as someone who was born Dutch but through the
모르겠다. course of my own curiosity and acceptance became a naturalized
어쨌거나 네덜란드 태생으로 한국인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포용 Korean citizen, I feel at home here. Especially when random Koreans
속에서 한국에 귀화한 나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게 편안하다. 특히 ask me for directions in Korean.
지나가는 한국 사람이 나에게 한국말로 길을 물어 올 때는 더더욱.

Written by Henny Savenije (Lee Haekang), former professor at Hyupsung


University and Konkuk University
글 헨니 사브나이에(이해강) 전 협성대·건국대 교수 Photographs courtesy of Henny Savenije; Jeju National Museum; National
사진 헨니 사브나이에, 국립제주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Museum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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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서울 스케 치

익선동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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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선동 골목 풍경

익선동에서 드는
두 가지 의문
종로3가역 4번 출구 인근, 이제 저녁이 되면 젊은이들이 10개 세대의 터였다. 소고기국밥 한 그릇과 소주 한 잔으로 세상을 다
가 채 안 되는 인근 골목골목을 가득 채울 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얻은 일용직 아저씨들의 저렴한 주거지이기도 했다. 간혹 호사를
낡고 낮은 집들의 동네인 이곳으로 모이게 하는 걸까. 세월의 무 부릴 때면 골목 깊숙이 자리한 홍어집에서 발효된 홍어와 막걸리
게에 겸손하게 웅크린 남루한 한옥 처마 밑을 찾게 하는 걸까. 답 의 흥취를 즐기는 곳이었다.
은 문화다. 문화란 정의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생활양 요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와 소통을 안 한다고 한다. 아니 소통
식이다. 문화란 한마디로 소통인 것이다.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아가 전통과는 아예 결별했다고도
삼삼오오 모여 앉아 도란도란, 혹은 깔깔거리며 소통을 한다. 한다. 그러나 익선동에 와보면 그들이 전통과의 소통을 얼마나
여기서 드는 또 하나의 의문. 왜 하필 한옥촌이 소통의 공간이 된 원하고 있는지 보인다. 병원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자란 세대들
것일까. 한옥의 마루와 마당이 공간적인 여유를 허락하고, 이렇 이 익선동에서 부모나 조부모 세대의 생활양식, 즉 전통문화를
게 생긴 여유가 타인과의 어울림에서 심리적인 편안함을 주기 때 받아들이고 나누며 즐긴다. 전통은 새로운 세대에 의해 이어져야
문일 것이다. 오랜 세월 전근대의 상징으로 구박받아온 한옥의 전통이 된다. 익선동에 어둠이 내리고 밤이 깃들 때 익선동에 가
숨은 힘이다. 1920년대에 지어져 아직 100년이 조금 안 되었지 보면 만날 수 있다. 골목길을 비추고 있는 가로등처럼 환한 전통
만, 한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한옥마을로 명명된 이곳은 탑골공원 의 젊은 얼굴들을.
에서 낙원상가로 이어지는 상권으로 인해 원래 노인들과 기성 글 김형근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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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조선 人 LO V E 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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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자리와 맞바꾼 원로대신의 첩을 빼앗은 세자 이제
1417년 2월 15일 경복궁은 세자의 간통 사건으로 발칵 뒤집

양녕대군의 상사병 혔다. 세자 이제, 곧 양녕대군이 원로대신 곽선의 첩 어리를 궁궐


에 들였다가 걸린 것이다. 세자가 은퇴한 대신의 첩을 건드리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소설 제목처럼 어떤 사 니! 임금이자 아버지인 태종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양반 관리와
람들은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그들은 금기를 범함으로써 억 사대부들은 마치 자신의 애첩이라도 빼앗긴 양 분노했다. 조선
압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맛보려고 한다. 세자 시절 양녕대군 사람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입이 쩍 벌어질 일이었다. 태종이 어
讓寧大君, 1394~1462도 그랬다. 조선 시대 후계자 수업은 빡빡했다. 디 보통 성격인가. 불호령을 내렸을 것은 뻔한 일이다. 신하들은
세자는 매일 일과표에 따라 부지런히 공부하고 궁궐의 법도 불똥이 튀기 전에 부산하게 움직이며 간통 사건의 진상을 파악했
를 익혀야 했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양녕은 그것이 숨이 다. 그 내막이 같은 날 《태종실록》에 상세히 쓰여있다.
막혔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자식 농사 세자에게 처음으로 어리의 용모가 빼어나고 재주도 뛰어나다는
다. 그 부모가 천하의 태종 이방원과 여걸 원경왕후 민씨라 걸 귀띔한 이는 악공 이오방이었다. 악공樂工은 관아에서 악기를
도 별수 없다. 연주하는 예인을 말한다. 양녕은 후계자 수업은 등한시하고 틈만
나면 궁궐을 드나드는 예인들과 어울렸다. 악공 이오방, 이법화
등이 세자에게 아첨하며 연회 자리를 마련했다. 게다가 ‘노는’ 남
자들이 환장하는 게 여색女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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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는 14살이 되던 1407년에 김한로의 딸과 부부의 연을 맺었 어리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판관 이승의 집에 숨었다. 이승은
다. 태종이 자신과 동문수학한 학우를 사돈으로 맞은 것이다. 하 곽선의 양자로, 어리를 한양에 데려온 인물이다. 그러나 세자에
지만 세자는 아내를 놔두고 장안의 내로라하는 기생들과 염문을 게 포기란 없었다. 한밤중에 내관들을 이끌고 쳐들어간 것이다.
뿌렸다. 봉지련, 초궁장, 칠점생 등 《태종실록》에는 세자와 사귄 한 나라의 세자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데, 왕조 국가의 관
여인들의 이름이 넘쳐난다. 리가 이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결국 이승은 어리를 세자에게 내
20대로 접어들자 혈기왕성한 세자는 욕정을 더욱 대담하게 표출 보내고 만다. 세자는 어리를 궁으로 데려가 구슬렸다. 어리로서
했다. 그의 시선은 외간 여인에게로 향했다. 그렇다고 양갓집 부 는 신분 격차가 워낙 큰 데다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니 선택의
녀자를 도모할 수는 없으니 남의 첩을 탐했다. 조선 시대 첩은 양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은 세자궁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그것은
인첩, 노비첩, 기생첩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어리는 실록에 재주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었다.
가 뛰어나다고 했으니 기생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어리는 진상을 파악한 태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왕명으로 이
원로대신 곽선의 본가 적성현파주에 있다가 친척을 만나려고 한양 간통 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특히 이오방과
나들이를 했다. 그러다 세자 일당의 첩보망(?)에 걸려든 것이다. 이법화는 악공 신분으로 어떻게 세자와 가까이 지냈느냐며 혹독
그들은 먼저 친척을 통해 만나자는 뜻을 전했다. 어리가 정중하 한 문초를 받았다. 이법화의 입에서 배후가 밝혀졌다. 바로 구종
게 거절했지만 세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환관을 시켜, 수놓은 비 수가 이끄는 구오방具五方이었다. 구오방은 당시 한양 도성을 휘젓
단 주머니를 선물로 보냈다. 요즘으로 치면 명품 가방으로 구애 던 왈짜 패거리였다. 그들은 유흥업을 장악하고 각종 이권에 개
한 셈이다. 입했다. 특히 두목 구종수는 선공감부정종3품 벼슬을 가진 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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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감은 토목 사업과 건물 수리를 담당한 관청이고, 부정은 오 잠긴 부모를 속인 것이다. 얼마 후 성녕대군은 세상을 떠나고 말
늘날의 부청장급 고위직이다. 뇌물과 청탁이 오가기 쉬운 분야에 았다. 태종의 상실감은 세자에 대한 분노로 변했다. 왕은 세자의
서 실세로 군림한 것이다. 장인 김한로를 유배 보내고 세자빈도 궁에서 쫓아냈다. 그러자
구종수는 이권을 노리고 세자에게 접근했다. 대나무 다리를 놓고 세자는 부왕에게 원망 가득한 편지를 보냈다.
과감하게 세자궁에 잠입했다. 그 다리로 악공들도 드나들었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에 들이시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해 받아
세자를 궁궐 밖으로 불러내기도 했다. 구종수의 집에서 바둑을 들이십니까? 지금 어리를 궁에서 내보내면 홀로 살아가기가 어
두고 장안의 명기 초궁장, 승목단이 부어주는 술을 마셨다. 그는 려울 것입니다.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이 첩 하나를 금하다가 잃
사사로이 뇌물을 바치며 후계자에게 아부했다. 세자와 어리의 간 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은 적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손들
통 사건은 그 부정 청탁의 일환이었다. 내막을 보고받은 태종은 의 첩을 모두 금할 수 있습니까? 지금 세자빈이 아이를 가졌는데
국가 기강을 흔든 죄로 다스렸다. 구종수와 이오방 등을 참수해 일체 죽도 마시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변고라도 생긴다면 어쩌
서 저자에 효수한 것이다. 반면 세자는 처가로 쫓겨났다가 며칠 시렵니까?”《태종실록》, 1418. 5. 30.
후 반성문을 제출하고 궁에 돌아왔다. 그 반성문도 사부 변계량 태종은 편지를 다 읽고 세자의 사부 변계량에게 보여주며 말했
이 임금의 명을 받고 세자와 의논해 대신 작성했다. ‘나쁜 친구 다. “이 말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아
들’은 극형에 처했지만, 자식은 솜방망이 처분에 그친 셈이다. 버지 여자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제 여자는 왜 안 됩니까? 어리를
금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겁니다. 세자빈의 배 속 아
부왕 협박하다 결국 폐위돼 이도 어찌 될지 모릅니다. 잘 생각해보고 처분하십시오.’ 어찌 보
그러나 1년 후 꺼진 줄 알았던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 그놈의 면 간청이고, 어찌 보면 협박이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냉혹했
상사병이 문제였다. 태종의 지시로 어리가 궁을 나가자, 세자는 다. 장남이 도전하자 내쳐버린 것이다.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세
그녀만 찾으면서 침식을 거른 채 앓아누웠다. 이러다간 큰일 나 자를 폐하고 셋째 왕자를 그 자리에 앉혔다. 학문이 뛰어난 충녕
겠다 싶었는지 장인 김한로가 나섰다. 그는 태종이 아닌 세자의 대군이었다. 그이가 바로 한글을 창제하고 조선의 문물을 꽃피운
신하였다. 가문의 미래가 다음 임금이 될 사위에게 달렸기 때문 세종대왕이다.
이다. 김한로는 어리를 자기 딸, 즉 세자빈의 여종으로 꾸며 궁궐 양녕대군은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 이천으로 유배를 떠났다. 임금
에 들였다. 오갈 데가 없어진 어리도 세자에게 기댔다. 재회한 사 세종은 형님을 깍듯하게 예우하고 귀양살이의 편의를 봐주었다.
랑은 뜨거웠다. 그 결실로 아이가 생겼다. 물론 비밀에 부쳐졌다. 물론 그런다고 고마워할 양녕이 아니었다. 1419년 폐세자가 돌연
세자궁 밖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철저히 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사라졌다. 궁궐과 조정은 뒤집어졌고, 그 화살은 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게 궁이다. 두 사람의 재결합 꿎은 여인에게 날아갔다. 장인 김한로의 첩과 폐세자빈의 유모가
은 들통나고 말았다. 어리를 찾아가 세자를 망쳤다며 구타한 것이다. 어리는 그날부로
“어느 날 공주들이 궁에 들어와 왕비를 보는데, 내가 마침 이르니 목을 맸다. 돌아온 양녕은 이 소식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비파를
경정공주가 말하기를 ‘세자전에서 유모를 구해 부득이 보내게 되 켰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양녕대군에게는 임금 자리와 맞
었다’고 했다. 왕비가 놀라서 ‘그 아이가 누구냐’고 물으니 공주가 바꾼 ‘상사병’이, 어리에게는 서러움에 목을 맨 ‘비극’이 되고 말
‘어리의 소산’이라고 고했다.”《태종실록》, 1418. 3. 6. 았다. 그러나 세종대왕을 역사 무대로 불러냈으니 후손들에게는
태종이 측근 조말생에게 밝힌 적발 경위다. 왕이 더욱 노한 까닭 ‘전화위복’이었다고 해야 하는 걸까?
은 그 무렵 넷째 왕자 성녕대군의 병세가 위독했기 때문이다. 태
종과 원경왕후는 1405년 늦둥이로 태어난 막내를 무척 예뻐했다.
그런 성녕이 14살 나이로 죽게 생겼으니 얼마나 슬픔이 컸겠는가.
글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하필이면 이때 맏아들이 금지된 여인을 몰래 궁에 들이고 시름에 그림 박은희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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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바다 너 머

물 위에 띄운 예술 나트랑냐짱은 베트남 동부의 긴 해안선을 따라 곳곳에 위치한 여러 휴양지들 중


에서도 가장 ‘핫한’ 곳으로 일 년 내내 러시아, 중국, 한국 등지에서 온 수많은

베트남 수상 인형극 관광객으로 붐빈다. 수상인형극장은 나트랑에서도 가장 번화한 야시장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해수욕과 진흙머드 온천, 시끌벅적한 나이트클럽 등 즐길 거리
가 많아 굳이 인형극까지는 보러 올 것 같지 않지만, 공연이 임박하자 관광객
들이 하나둘 객석을 채우기 시작하고, 경쾌한 전통음악과 함께 색색의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나무 인형들이 빙그르르 돌아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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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베트남 하노이 탕롱 수상인형극


공연 후 모습을 드러낸 인형술사들
2 하노이 탕롱 수상인형극장의
공연 모습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베트남 수상 인형극 수공업 등에 전념하다 명절이 다가오면 마을의 어른
베트남의 인형극은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장르 을 중심으로 인형극을 준비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
와 형태로 발전해 왔다. 세계 곳곳에서 베트남과 마 리고 마을의 논이나 강, 연못에 수상 인형극을 펼칠
찬가지로 다양한 형태의 인형극이 공연되고 있지만, 극장을 짓고 대나무와 실을 이용해 목각인형을 만든
물 위에서 이루어지는 전통 수상 인형극은 베트남이 다음, 각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레퍼토리들의 공연
유일하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전해졌다는 순서를 정하고 악기를 연습했다. 마침내 명절이 되면
설과 베트남에서 먼저 시작되어 중국에 전해졌다는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술사와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설이 있다. 무아 로이 느억Múa rối nước으로 불리는 베 악단이 모여 흥겨운 한판을 펼쳤다.
트남 수상 인형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하노이 인 하노이는 ‘홍 강’을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하였는데,
근의 도이사Long Đọi Sơn Pagoda에 1121년경에 세워진 비 홍 강 유역의 15개의 마을에서 수상 인형극은 명절
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리 왕조의 4대 황제 리년똥Lý 마다 빠질 수 없는 유흥거리였다고 한다. 아마추어로
Nhân Tông왕의 생일 축하연에서 벌어진 수상 인형극에 이루어지던 수상 인형극은 점차 그 규모와 형식이 발
대한 기록으로, 황금 거북이와 춤추는 요정들이 등장 달함에 따라 전문적인 공연 극단이 설립되고, 극단이
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황금 거북이와 요정은 지 각 지역을 돌며 공연을 펼칠 수 있는 영구적인 구조
금도 베트남 곳곳의 수상극장에서 공연되는 주요 레 물이 곳곳에 세워졌다. 일반적인 인형극과 달리, 신
퍼토리의 주된 캐릭터로 이용되고 있다. 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즐기는 대중
과거 수상 인형극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전문 공연자 적이고도 전문적인 공연으로 자리한 수상 인형극은
가 아닌 아마추어로, 평소에는 주로 농사나 고기잡이, 극장마다 저마다의 시나리오와 레퍼토리를 개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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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인형들을 제작해 보존해 왔다. 극장 고유의 3, 4 인형극에 사용되는
목각인형 모형
시나리오는 최근이 돼서야 외국어로 번역될 정도로 5 현지인과 외국인 관객으로
붐비는 호이안의 수상인형극장
철저한 보안이 이루어졌다.

단골 레퍼토리는 레 태조의 환검還劍 이야기


대부분의 인형극 무대는 여느 농촌 마을의 주택
을 연상시킨다. 8~10명 정도 되는 인형술사는 대나
무 발로 가려진 무대 안쪽에서 허리까지 차는 물에
선 채로 인형을 조종한다. 물 위에서 하는 공연이니
만큼 인형에는 방수를 위한 옻칠이 되어 있고, 자유
롭게 조종하기 위해 머리와 팔에 끈이 달려 있다.
극단마다 인형 조작기술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전
통이 있어, 공연자들은 자신이 속한 극단에서 길게
는 10년 정도의 교육을 거쳐야 한다. 이처럼 숙련된 3

공연자를 양성하기 때문인지 몇 년 새 수상 인형극


이 더 유명해지고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데, 베트남 정부는 이에 발맞추기라도 하듯
베트남의 문화를 세계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
로 수상 인형극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수상인형극장에서는 보통 한 번에 1시간 정도,
17~20개의 레퍼토리를 공연한다. 하노이 인근의 농
업 지대인 홍 강 유역에서 발달한 인형극은 대부분
농업과 관련된 것들로, 미리 자료를 보지 않아도 어
른이나 아이들 모두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도 익숙한 농촌의 풍경이 펼쳐지고 귀여운 인형들이 4

하나둘 등장해 추수하거나 낚시를 하고 개구리를 잡


는다. 공연장마다 고유의 레퍼토리가 있다고는 하지
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저 인형들의 익살맞은 행동
에 웃거나 때때로 펼쳐지는 화려한 인형들의 군무에
감탄하며 마음 편하게 즐기면 된다. 사전 지식이 필
요한 레퍼토리라면 유일하게 레 왕조의 창시자 레 태
조의 환검還劍 전설이 있다.
훗날 ‘레 왕조’를 건설하는 ‘레 태조’가 되는 레러이
Lê Lợi, 黎利가 아직 장군이었을 때, 베트남은 명나라의
침탈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하루는 레러이에게 한
어부가 다가와 하늘의 뜻이라 말하며 바다 밑에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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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유명 여행지라면 어디서나 쉽게 공연장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로 제대로 된 수상 인형극을 관
람하고 싶다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바로 하노이의
탕롱 수상인형극장Nhà Hát Múa Rối Thăng Long이다. 이곳은
여타의 공연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
고 우아하다.
나트랑 공연장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작은 소극장
을 연상시키는 낮은 방석이 깔린 좌석들이 줄지어 있
을 뿐이고, 에어컨을 틀어 놓아 시원하긴 하나 습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탕롱 수상인형극장은
시야가 확보되는 편안한 좌석이 삼면을 둘러싸고, 중
심에 위치한 인공 연못에는 기와지붕이 얹혀있는 무
대가 설치되어 있다. 무대 한쪽으로는 높다란 단이
6 있고 그 위에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이 자리한다.

6 하노이 호안끼엠호수 중심에 공연장의 천장이 높게 설치되어 있어 현장에서 펼쳐


세워진 거북 탑Tháp Rùa
지는 전통음악의 울림도 더 웅장하고 깊다.
찾았다는 청동 칼을 건네주었다. 레러이는 이후 이
칼에 딱 맞는 칼자루를 얻게 되자 자신이 명을 물리 수상 인형극 관람을 마치고
치는 것이 진정, 하늘의 뜻임을 깨닫고 군사를 일으 베트남 수상 인형극은 어찌 보면 단순한 스토리
켰다. 처음에는 약체에 불과했던 레러이의 군사는 점 지만, 전 세계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정서로 가득해
차 많은 사람이 가담함에 따라 그 세력이 커져 마침 누구나 쉽게 빠져들게 만든다. 또 정교하고 화려한
내 10년에 걸친 저항 끝에 명나라를 물리쳤다. 레러 인형들의 익살맞은 연기로 지루할 새가 없다. 공연이
이는 레 왕조를 건설하고 첫 번째 황제의 자리에 오 끝나고 무대 뒤에서 등장하는 인형술사들은 허리까
른다. 그렇게 명을 물리치고 레 왕조를 건국한 레 테 지 차는 물속에서 한 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있었음
조가 탕롱Thăng Long, 지금의 하노이의 호수에서 뱃놀이를 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공연을 잘 마쳐 뿌듯하다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황금 거북이가 나타난다. 이 는 밝은 미소를 짓고 있다. 이에 대한 답례로 관객들
에 놀란 레 태조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리자, 은 공연자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거북이가 그 검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진다. 실제로 수상 인형극은 베트남의 독특한 정서를 압축하여 보
레 태조는 이런 이유에서 호수의 이름을 ‘검을 돌려 여주는 문화의 정수로 인정받고 있다. 인형극을 다
주었다’는 의미인 ‘호안끼엠Hồ Hoàn Kiếm, 還劍湖’으로 명 보고 나면 베트남 사람들에게 더 깊이 다가가고 싶은
명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하노이의 호안끼엠호 욕구가 솟아난다. 이것이 바로 단순하지만, 섬세하고
수 중심에서 전설 속 황금 거북이를 기리는 비석을 정교한 수상 인형극이 세계적인 이유, 베트남 정부가
볼 수 있다. 그토록 후원을 아끼지 않는 이유이다.

그 유명한 탕롱 수상인형극장
글 이은영 프리랜서 작가, 《셀프트래블 나트랑&푸꾸옥》 저자
수상 인형극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특히 인기가 사진 이은영, 위키미디어, flickr(@Ivo verhaar, @Mar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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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오! 세이

기억의
전라남도 문척면 중산리 산 514번지, 내가 태어나 자란 지번이다.
10여 호 남짓한 작은 마을은 대부분 친척이었다. 딱 한 집, 외지
인이 살았다. 그래도 다행히 이름은 기억난다. 우숙이. 아이들이

힘 여섯인가 일곱인가 그랬고 우숙이는 맏이였다. 마을 제일 윗집,


산과 맞닿아 콩이고 팥이고 노루가 잎을 다 먹어 치웠다며, 우숙
이 엄마는 종종 울상을 짓곤 했다. 우숙이 집 왼편으로는 냇물이
흘렀다. 사람 몇이 들어가 앉을 정도로 옴팍한 웅덩이가 있는 냇
코스모스가 피었다. 늘 그 길에 키 큰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 물이었다. 대숲으로 흘러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우숙이와 알몸
있었다. 섬진강 가는 길, 마을은 없는 길, 수박이나 땅콩이 자라 으로 웅덩이에 몸을 담근 적이 있었다. 남 앞에서 팬티까지 홀랑
간혹 원두막이 있던 길. 그 길을 그 날 밤, 왜 걸었는지 기억나지 벗은 건 처음이었다. 부끄러웠고 그래서 조금 달떴다. 묘한 침묵
않는다. 그러나 곁에 남자가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난생처음 이 흘렀다. 날 넘은 바람에 대숲이 날뛰었고, 수치심과 뒤섞인 희
남자와 밤길을 걸었고, 내 가슴이 콩닥콩닥, 종잡을 수 없이 뛰었 열이 발버둥 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때 갓난쟁이였던 우
다. 무엇이 그리 부끄러웠는지 나는 고개를 배배 꼬았고, 남자와 숙이 동생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숙이는 팬티도 제
정반대, 그러니까 길가에 피어있던 코스모스만 보고 또 보았다. 대로 꿰지 못한 채 동생을 향해 달려갔다. 우숙이는 늘 동생이 먼
그 남자가 누구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데 달빛 환한 가을날의 그 저였다. 학교 갈 때도 우숙이 등에는 어린 동생이 업혀 있었다. 밥
밤, 두근거리던 그 느낌만 선명하게 남았다. 을 먹을 때도 우숙이는 늘 동생들을 먼저 살뜰히 챙겼다. 우숙이
처음으로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는 누구였을까? 누군지도 모 가 혼자 있는 장면은 그날, 알몸으로 냇물에 앉아 있던 그 짧은
를 그를, 가을이 오면, 코스모스가 피면 늘 생각한다. 산다는 건 순간뿐이다.
이렇게 서늘하구나, 하고. 섬진강 가는 길의 그처럼 이름 없이 내 우숙이 집은 내가 중학교 가던 해 반내골을 떠났다. 우숙이는 당
인생에서 사라진 수많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잠 오지 않는 밤이 연히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다. 내가 검은 교복을 입고 쓰리
면 간혹 그들을 떠올린다. 때로 그들은 이름조차 없다. 세븐 가방을 든 채 반내골을 떠날 때 우숙이는 한 점의 그늘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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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도 우숙이 등에는 코찔찔이 그리곤 어여쁜 앞발로 내 머리나 팔을 슬그머니 건드린다. 만지
막내가 업혀 있었다. 그 뒤로 우숙이 소식을 듣지 못했다. 살다가 라는 의미다. 생명 있는 것들은 다 그렇다. 사랑받아야 산다. 우숙
어떤 순간 우숙이가 떠오르곤 했다. 현대중공업 파업 지지 농성 이네 어린 동생들도 그랬을 것이다. 일에 바쁜 엄마 아빠 대신 그
을 하면서, 이름도 잊어버린 어느 공장의 노조 설립 지지 농성을 아이들은 우숙이의 손길을, 사랑을 원했다. 우숙이도 사랑이 필
하면서, 나는 나와 같이 앉아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거기 요한 나이였는데, 우숙이는 제 사랑 동생들에게 다 퍼주고, 제가
어딘가 우숙이가 있을 것 같아서. 필요한 사랑은 어디서 구했을까? 어쩌면 우숙이는 그 여름, 평생
열두 살까지 함께 자란 우숙이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행 처음 오롯이 저만의 시간을 즐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여물
여 스친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기억난다. 낡은 포 지 않았던 우숙이의 가슴, 뜻밖에 뽀얗던 속살, 툭 불거진 참외 배
대기 밑으로 비죽 나와 있던 우숙이 막냇동생의 파리한 발, 동생 꼽. 더 많은 것을 기억해줘야 하는데 지금 기억나는 건 그뿐이다.
들이 부를까 언제나 귀를 쫑긋거리던 우숙이. 우숙이는 어떤 청 오십육 년을 살았고, 오십육 번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경험
춘을 지났을까? 우숙이 등에는 언제나 어린 동생들이 업혀 있었 했다. 그러나 그중 몇 개의 계절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살았으나
을 것이다. 연애할 때도 우숙이는 자기가 챙겨줘야 할 어린 동생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들의 끼니가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우숙이는 오늘, 청명한 바람이 분다. 집 앞 감나무에 쪼랑쪼랑 매달린 감들
오롯이 자신을 위해 살아봤을까? 발가벗은 채 부끄럽고 달떴던, 이 햇살 아래 발갛게 익어가고 있다.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이 느티
냇가에서의 그런 순간을 우숙이는 경험하며 살았을까? 우숙이는 나무며 대추나무며, 잎 달린 것들을 뒤흔들며 지나간다. 이 순간,
올해 쉰일곱,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했으니 일찍 결혼했을 확률이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은 듯 사라질 수많은 것들,
높다. 어쩌면 벌써 손자를 봤을지도 모르겠다. 언니, 언니, 우숙이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신이 아니라 없던 것을 존재하게 할 수는
동생들은 엄마 대신 늘 언니를 찾았고, 그때마다 우숙이는 종종 없다. 고작 기억하는 것, 그것이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걸음으로 달려갔다. 우숙이는 그 작은 세계의 신이었다. 창조다. 우숙이를 우숙이로 존재하게 하는 것, 그게 기억이다.
나는 고양이를 키운다. 사람 따위 필요 없을 것 같은 녀석들이 손님
이라도 와서 저희들 제대로 돌봐주지 않으면 내 곁으로 다가온다. 글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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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삶과 문화

“코로나19가 바꾼 문화생태계,
문화원이 선도적 역할 선점해야”
김선유 한국문화원연합회 부회장(김제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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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개원한 김제문화원은 어느새 53년의 역사를 지 리기의 특징은 매년 이기는 쪽이 같다는 것이다. 볏짚으
니게 됐다. 반백 년이란 긴 세월 속에서 김제문화원은 어 로 만든 굵은 동아줄을 마을 사람들이 남녀로 편을 갈라
떤 일을 해왔나? 당기기를 하는데, 여자 편이 이겨야 마을이 평안하고 풍
김제문화원은 1966년 30명의 인사가 모여 발족하 년이 든다고 믿기에 늘 여자 편이 승리한다.
였고, 1967년 인가를 받아 개원하여 지금까지 명맥을 이
어오고 있다. 그동안 많은 사업을 펼쳐왔는데 그중 으 늘 여자 편이 이겼다니 재밌다. 농경 문화 발상지인 만큼
뜸인 것은 문화 소외 지역을 찾아 문화 보급에 앞장서 ‘김제’하면 ‘농경 문화’가 떠오르지만, 호국영웅이 많은 지
고 있는 ‘찾아가는 문화마당’이다. ‘찾아가는 문화마당’ 역이기도 하다.
은 평균 연령 70세로 구성된 지평선 오케스트라와 마술 지난해 김제문화원은 김제 출신이자 명량해전의 영
단을 설립하고, 매년 50회 이상 무료 공연을 통해 문화 웅 ‘안위 장군’의 추모 행사 및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안
보급은 물론 도시와 농촌 간 문화 격차 해소로 김제만의 위安衛, 1563~1644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명량해전에서 조
문화 복지를 실현하는 사업이다. 이 밖에도 김제문화원 선 수군 13척으로 일본 수군 133척을 격퇴하여 이순신
은 그동안 노래만 계승되어온 ‘만경萬頃들놀이’를 조사· 장군과 함께 크게 풍전등화에 처한 조선을 구한 호국영
발굴하여 복원했다. 이렇게 발굴된 김제 만경들놀이를 웅이다. 안위 장군을 비롯해 김제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
무형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군의 전주 입성을 막기 위해 진안웅치전투에서 장렬하
게 전사한 정담 김제 군수, 구한말의 이정직, 이기, 장태
비옥한 평야의 김제는 ‘농경 문화 1번지’로도 불리는 곳이 수, 정현섭, 이종희 등 많은 인물이 있다. 그러나 훌륭한
다. ‘김제의 농경 문화’를 살린 김제만의 특별한 문화 콘 인물들이 많음에도 고증과 재조명의 부제로, 그들의 업
텐츠가 있다면? 적이 베일 속에 가려져 김제 시민은 물론이고, 국민에게
김제는 넓은 들판과 비옥한 토양으로 우리나라에서 도 우리 고장 인물의 정신과 활동상을 널리 알리지 못한
손꼽히는 곡창 지대였다. 그렇기에 예부터 농경 사회가 것이 현실이었다. 김제문화원은 김제 출신 영웅의 업적
형성되었는데 이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김제 벽골제’ 을 널리 알리고 그들의 정신을 올곧게 계승할 수 있도록
다. 벽골제는 백제가 서기 330년에 약 3.3km의 제방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한 이들이 남긴 문화적 자산을
만들어 김제 지역의 넓은 들에 농업용수로 활용할 수 있 김제 발전의 토대로 삼아, 다양한 콘텐츠 개발로 이어질
게 만든 농업용 수리 시설이자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저수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김제문화원이 나아갈 길이라
지다. 이처럼 김제의 자랑거리인 벽골제를 활용해 대표 고 생각한다.
적인 문화 콘텐츠로 거듭난 것이 5년 연속 대한민국 대
표축제 선정에 빛나는 ‘김제지평선축제’다. 광활한 평야 올해 초 인재 형제들과 함께 인재 양성을 위한 장학금을
의 지평선을 주제로 1999년 제1회 김제지평선축제를 시 기탁했다. 저출산·탈지방脫地方 현상으로 젊은 층이 줄어
작했는데, 올해 제22회 축제는 코로나19 때문에 10월 7 들고 있는 지금, 앞으로 김제에 어떤 ‘젊은 흐름’이 나타
일부터 11일까지 5일간 온라인으로 개최됐다. 그 외에 나길 바라는가?
입석동에서 전승되고 있는 ‘입석줄다리기’가 있다. 김제 지방의 인구수가 줄어드는 현상은 경제적·문화적·
는 지역마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당산제가 현재 복지 등과 같은 다양한 이유로 일어난다. 이 문제를 해
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그중 입석동에서는 당산제를 지 결하기 위해 김제는 지방의 특성을 이용하여 독자적이
낸 뒤 부대행사로 ‘입석줄다리기’를 진행한다. 입석줄다 면서도 창조적인 경제·문화를 활성화한 ‘김제판의 뉴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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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김제는 기업 유치가 적 1 입석동에서 전승되는 입석줄다리기


2 비대면, 쌍방향으로 개최된 지평성 온 가족 온라인 그림 그리기 대회
고, 문화인프라가 적은 지역이기 때문에 젊은 층의 인 3 지난해 개최한 안위 장군 추모 문화행사 및 심포지엄

구 유출이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봤을


때 ‘김제’라는 지역을 각인하고 인식시켜줄 수 있는 제
품 또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기업 유치가 필요하 인원만 앉을 수 있도록 배치하여 교육환경을 개선했다.
다. 이를 통해 청년들의 지역 정착화와 경제적 안정화를 이처럼 모든 문화원 직원과 회원이 노력한 덕분에 6월
이뤄야 한다. 또한 요즘 젊은 층에게 중요한 삶의 요건 부터 차질없이 문화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선도적 역
인 문화인프라도 갖춰질 수 있도록 지자체와 각 기관은 할을 수행함으로써 시민들의 귀감이 될 수 있었다고 자
질 높은 문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저비용으로 제공해 부한다.
야 한다. 이와 같이 젊은 층의 문화 가치 소비를 활성화
함으로써 인구를 유입하고, 경제와 문화 분야에 다양한 고민과 노력의 흔적이 느껴진다. 그러나 코로나19 이전
가치관을 지닌 젊은 흐름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 문화원도 ‘코로
나 이후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할 때인 듯하다. 50년의 역사
사상 초유의 코로나19 사태로 전국 문화원은 운영에 어려 김제문화원이 바라보는 앞으로의 50년은 어떤가?
움을 겪고 있다. 김제문화원은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가? 코로나19로 인해 전방위적인 문화가 바뀌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로 김제문화원 역시 운영에 많은 어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는 모든 활동에 있어 단체 활동
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운영의 어려움 속에서 김제문 보다 개인 활동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개인 욕
화원 직원 모두 이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다 같이 머 구 충족을 위해 새롭고 독창적인 아이템이 쏟아져 나오
리를 맞대어 고민했다. 이에 김제문화원은 1,200여 명 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제문화원이 지난
회원의 안전을 지키고 방역에 힘쓰기 위해 마스크와 마 10월 10일, 제22회 김제지평선축제의 일환으로 실시한
스크 목걸이를 문화원에 배치하고, 문화원을 방문하는 ‘지평선 온 가족 온라인 그림 그리기 대회’는 주목할만
이들에게 배포했다. 또 방문 기록과 온도 측정, 마스크 한 성과다. 다른 온라인 그림 그리기 대회는 그림을 그
착용 여부 확인은 필수이자 ‘당연한’ 방역 수칙으로 이 리고 사진을 찍어 전송하는 방식이라면, 김제문화원에
행했으며, 실내에서도 거리 두기를 실천할 수 있도록 서 추진한 이번 대회는 30팀을 인터넷으로 사전 신청
문화학교 수업 인원을 최소화하고 책상과 의자를 최소 을 받고, 실시간 양방향으로 소통하며 유튜브 생중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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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기 대회를 진행했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이처
럼 코로나19로 수많은 문화 행사들이 비대면으로 개최
됐다. 앞으로 문화 생태계는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바
뀔 것이다. 그러나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 김제문화원뿐만
아니라, 전국 모든 문화원은 앞으로 시민들의 요구를 변
화의 흐름보다 앞서 반영할 수 있도록 다양한 고민을 지
속하고, 선도적 역할을 선점해야 한다. 또한 점차 흩어
지는 민심을 문화를 통해 추스르고 서로 포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3

2012년 김제문화원장직을 맡아 지금까지 원장직을 수행


하고 있다. 처음 문화원과 어떻게 인연이 닿게 되었나? 참으로 많다. 그중 꼽자면, 지난해 ‘제25회 김제시민의
농업계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 장’에서 ‘문화장’을 수상한 것이다. 지금까지 김제시장
어서도 농촌 계몽 운동을 전개하며 생명 농업 기술을 보 상부터, 대통령 포상까지 30여 개의 상을 받아왔지만,
급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어찌 보 이 상은 김제 시민들이 추천하고 선정하여 주는 상이라
면 ‘준비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김제문화원을 처음 뿌듯함이 남달랐다. 그 밖에도 김제문화원 회원을 1,200
접한 것은 공직에 있을 때, ‘김제역사문화재교육’을 수 명 이상 확충해서 문화적 지식을 나눌 수 있다는 점과
강하면서부터다. 김제에 이렇게 훌륭한 문화재가 많은 이들에게 김제에 대해 교육하고 훌륭한 문화유산과 호
지 처음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문화원에 깊은 관심을 국영웅들의 정신을 알려줌으로써 김제에 대한 애향심을
지니기 시작했다. 이후 1976년 농촌진흥청에서 주관한 지니고 주변인들에게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면,
‘중앙4-h농업경진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문화원장이 되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든다.
연이 닿기 시작했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김제시 청소
년 30여 명을 선발하고 농촌계몽 연극단을 조직하게 김 한국문화원연합회의 부회장으로도 봉직하고 있다. 그 어
제 벽골제를 소재로 연극을 준비했다. 연극을 준비하며 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전국의 문화원 식구
벽골제의 전설인 ‘쌍용 설화’를 알아보기 위해 문화원을 들과 문화 가족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찾아 자료 조사를 했고, 이때 김제문화원이 보유한 향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다. 이럴 때일수
사적 업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문화원의 자료 덕분인 록 전국 문화원 가족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이 될 수 있
지, 연극단은 대회 첫 출연에 ‘대상’이라는 큰상을 거머 다. 코로나19 확산 위기에 문화원 가족들이 선구하여 거
쥐었다. 그때부터 김제 향토사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 리 두기의 문화 활동을 솔선수범의 자세로 보여주고, 서
면 항상 문화원을 찾아 ‘알고 싶은’ 욕구를 해소하며, 생 로를 믿으며 배려하고 응원함으로써 마음만큼은 하나로
명 농업 정책에 많은 반영을 했었다. 뭉칠 수 있다. 또한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있는 모든 문화계 관계자분들께 응원
그동안 문화원장을 역임해오면서 가장 보람찬 순간이 있 의 말을 전한다.
었다면? 정리 한춘섭 편집주간
문화원장이 되고 보람되고 뿌듯했던 순간들이 사진 소지영 사진작가, 김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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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북한 사 회 문 화 읽 기 ㉑

북한 출판계의
‘위대성 도서’ 발간

※ 이 글의 인용문은 북한 맞춤법 규정에 따라 표기한 것으로 우리나라 맞춤법 규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북한의 출판사들은 당 선전선동부 직속의 ‘중앙기관’으로 분류된다. 더불어 선전선동부


의 지도를 받는 당 출판지도총국이 북한 전체의 출판과 인쇄를 종합 기획·조정하고, 모
든 출판물을 사전 검열·통제·지도한다. 한마디로 당의 수족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
다. 북한의 출판사가 우리와 다른 점 중 하나는 출판사 자체가 하나의 전문 언론기관이
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북한의 출판사는 단행본 발간 외에 각기 취재를 통해 독자적인
신문이나 잡지를 발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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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마다 있는 출판물보급소에서 도서 선전 대외 선전매체인 《류경》2020.2.15.은 〈불멸의 업적 길이 전하는 귀
《로동신문》 2019년 11월 6일 자 논설은 출판보도물의 역할 중한 문학 재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새로운 주체 100년대
과 관련해, “…혁명의 동력은 사상이며, 사상의 위력은 중요하게 의 지난 8년간, 위대한 장군님김정일을 칭송한 소설문학작품이 수
출판보도물의 역할에 의하여 담보된다. 출판보도물이 대중을 교 백편이나 창작 발표되어 우리 인민의 가슴가슴을 절세위인에 대
양하고 당의 로선과 정책 관철에로 힘 있게 불러일으켜야 혁명이 한 영원한 그리움으로 불타게 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주요 작품
생기와 활력에 넘쳐 승승장구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들을 소개했다. 2018년 말에는 《로동신문》2018.12.25.이 “올해에 절
은 우상화 도서를 ‘위대성 도서’라고 부르는데, 북한에는 군郡마 세위인들의 불멸의 업적을 길이 전하는 120여종의 위대성 도서
다 당위원회에 출판물보급소가 있어 보급원들이 선전활동을 통 들이 출판되였다”고 보도하고 있어, 이 정도의 우상화 도서가 매
해 “절세위인들의 위대성을 깊이 새겨주기 위한 교양사업‘위대성 교 년 출판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양사업’을 진행”한다. 보급원들로 ‘도서해설 선전대’를 조직하여 공 이어 《로동신문》이 소개한 바에 따르면, 2018년에 문학예술종합
장, 기업소, 협동농장, 건설장 등을 찾아 우상화 도서에 대한 선전 출판사에서 나온 우상화 도서는 우선 4.15문학창작단 소속 작가
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때 우상화 도서의 장, 절 체계를 요약한 도 가 창작한 총서 《불멸의 력사》김일성 우상화 장편소설 작품집 중 장편소설
표 등 ‘직관물’을 만들어 활용하기도 하고, 보급원들이 기타, 손풍 〈한 식솔〉김삼복, 《불멸의 향도》김정일 우상화 장편소설 작품집 중 장편소
금을 가지고 시와 노래를 배합하여 도서선전의 실효를 높이기도 설 〈군가뢰성〉조권일이 있다. 북한 최고의 작가들이 포진하고 있는
한다. 북한은 매년 5월 전국 규모의 ‘도서해설 선전경연대회’를 4.15문학창작단은 최상급의 대우를 받고 있어 북한사회 내에서
개최하는데, 올해는 제21회 대회를 치렀다.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집단이다. 동 창작단은 2017년에 창립
북한에서 첫 손에 꼽히는 출판사는 1945년 10월에 창립된 당 직 1967.6.20. 50돌을 맞아 기념보고회를 통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영 조선로동당출판사로, 김일성과 김정일의 저작집, 당 중앙위 의 축하문이 전달되었다. 《로동신문》2017.6.21.은 당 중앙위원회가
기관지인 《근로자》, 주민 사상교양을 위한 도서 등을 집필, 편집, 축하문에서, “…최근년 간에만 하여도 총서 《불멸의 력사》, 《불멸
발간한다. 문예물의 발간은 여타의 출판사에서도 이루어지고 있 의 향도》, 《충성의 한 길에서》김정일 친모인 김정숙 우상화 장편소설 작품집 중
지만, 1946년 9월에 창립된 문학예술종합출판사가 큰 역할을 담 수십 편의 장편소설들과 혁명소설들을 훌륭히 창작하여 수령형
당하고 있다. 총서에 속하는 장편소설들은 물론이고 중·단편소 상문학의 보물고를 더욱 풍부히 하고 주체문학 발전에 기여하였
설과 시집, 작가동맹이 발간하는 주간 《문학신문》, 월간 《조선문 으며, 외국작품 및 도서 번역에서도 성과를 이룩한데 대하여 지적
학》, 《청년문학》, 《아동문학》, 문예총이 발간하는 월간 《조선예 하였다.”고 밝혔다. 참고로 북한에서 ‘지적指摘’이란 낱말은 긍정
술》, 계간 《시문학》, 《극문학》 등을 출판한다. 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남북 간에 문화적 차이를 보
분야에 관계없이 큰 규모의 출판사와 중소 규모의 출판사가 공존 이는 단어이다. 동 창작단 방문기《문학신문》, 2017.5.20.에 따르면, 김정
하는 우리와는 달리, 비경쟁체제인 북한에는 분야별로 한 개씩의 일이 창작단 사업과 관련하여 770차가 넘는 지도를 했다고 한다.
대형 출판사가 존재한다.
총서 《불멸의 력사》와 《불멸의 향도》는 총 80여 편에 달해
4.15문학창작단, 770차례가 넘도록 김정일 지도받아 인터넷 선전매체 《류경》2020.7.9.은 지금까지 발간된 총서장편
북한의 모든 분야 도서에는 글머리에 반드시 김일성 3대를 소설 작품집 《불멸의 력사》와 《불멸의 향도》는 총 80여 편에 달한
우러르는 우상화 문구가 들어가지만, 모든 분야를 통틀어 가장 다고 밝히고, 총서를 “위대한 수령님들의 고귀한 혁명 생애와 불
우상화가 심한 분야는 단연 문학예술 분야 도서들이다. 우상화와 멸의 업적, 위인적 풍모를 훌륭히 형상한 국보적인 문학작품들”
선전·선동 등 정치·경제적 기능이 문학예술의 본질적 기능 중 하 로 규정했다. 총서 중 가장 먼저 나온 작품은 김일성 60세 생일
나로 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매년 발행되어 나오는 우상화 도 1972.4.15.에 출간된 《불멸의 력사》 중 장편소설 〈1932년〉권정웅이다.
서는 그 종류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한의 인터넷 2019년에는 총서 《불멸의 력사》 중 장편소설 〈조선청년〉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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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1 《불멸의 려정》 중 〈부흥〉


2 《불멸의 향도》 중 〈군가뢰성〉
3 《충성의 한길에서》 중 〈별들은 빛난다〉
4 《백두산 위인들께서 들려 주신 이야기 7》 〈산중대왕의 죽음〉

총서 《불멸의 향도》 중 장편소설 〈혈통〉오현락, 총서 《충성의 한길 다는 이야기들 60편을 각색하여 이야기 그림책 전 60권으로 펴
에서》 중 장편소설 〈진달래〉증보판가 창작 내지 재편집되어 나왔 내고, 이를 그림과 녹음으로 함께 편집한 ‘다매체편집물’멀티 미디
고, 2020년에는 총서 《불멸의 향도》 중 장편소설 〈누리의 붉은 어물로도 제작하여 보급했다고 한다. 또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이
노을〉김창훈, 〈봄에서 봄으로〉리유철가 나왔다. 《로동신문》2020.9.18.에 들려주었다는 이야기들을 동화로 옮긴 작품집 《백두산 3대장군
따르면, 올해 9월 중순에는 “4.15문학창작단에서 경애하는 최고 동화전집》전 5권도 펴냈다.
령도자 김정은 동지의 위대성과 불멸의 혁명 업적을 집대성한 총 위에서 언급한 도서 외에도 2019년과 2020년에 발행한 우상화
서 《불멸의 려정》의 첫 장편소설 〈부흥〉백남룡을 창작하여 내놓았 도서는 많다. 2019년의 경우 5월 이전에 이미 김일성 3대의 “천
다”면서, “소설은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께서 새 세기 출 위인상을 수록”한 도서 수십 종을 출판했다《로동신문》, 2019.5.18..
교육혁명의 불길을 지펴주시고 전민全民 과학기술 인재화, 인재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도서 《인민사랑의 집》, 《전설적 위인과 만
강국화의 길을 열어 나가시던 력사적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 수대예술단》, 《절세위인들을 모시고》, 《위인의 멸사복무》 등을
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하나의 우상화 장편소설 연속작품집이 출판했고, 근로단체출판사는 도서 《총대와 평화》, 《사랑과 헌신
총서 《불멸의 려정》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의 열두 달》 등을 편집 발행했다.
또한 금성청년출판사는 “위대한 장군님김정일께서 평양제1중학교
출판사의 전문분야와 상관없이 우상화 도서 펴내 고급반 시절에 보여주신 비상한 조직력과 뜨거운 인정의 세계를
《로동신문》2018.12.25.에 따르면, 2018년도에는 앞서 언급한 도 감명 깊게 형상”한 장편소설 《남산의 새 아침》과 “자력으로 비약
서 외에도 사회과학출판사, 금성청년출판사, 근로단체출판사, 공 하는 사회주의 건설의 일대 전환기를 열어나가시는 경애하는 최
업출판사, 농업출판사 등에서도 전문분야와는 상관없이 ‘위대성 고령도자 동지김정은의 령도의 현명성을 수록”한 도서 《자력갱생
도서’라는 이름으로 우상화 도서를 펴냈다. 특히 과학백과사전출 의 70년》 제3권을 출판했으며, “과학백과사전출판사, 공업출판
판사에서는 김정은 관련 우상화 도서를 2종 발간했고, 교육도서 사, 철도출판사에서도 《도덕의리의 최고 귀감 김정은 동지》, 《장
출판사는 초급 및 고급 중학교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작품 340여 편 군님과 산업미술》, 《동맥 우위에 빛나는 태양 일화》 제2집을 비롯
을 수록한 《빛나라 김정일 장군의 나라》 제13권을 펴냈으며, 재 한 위대성 도서들이 발행되여, 일군들과 근로자들을 참다운 김일
일본조선사회과학자협회도 406쪽 분량의 도서 《21세기의 태양 성-김정일주의자로 준비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김정은 원수님》을 발행했다. 한편 조선중앙방송2016.8.8.의 보도에 《류경》2020.5.17.은 올해 들어와서도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작
따르면 2013년에는 김일성20편, 김정일25편, 김정숙15편이 들려주었 가들이 김일성 3대의 우상화를 위한 수십 편의 시와 단편소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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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창작했다며 그 내용을 소개했다. 이어서 같은 신문은 사흘 후 위하여》1권-3권, 회상실기집 《인민들 속에서》1권-107권, 《주체시대를
다시 2020년에 들어와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위대성 도서’들 빛내이시며》1권-76권,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1권-20권, 《조
인 회상실기 《력사의 정의》와 《영원한 태양의 미소》, 혁명일화총 국 해방전쟁 참가자들의 회상기》, 《중국 동북해방전쟁 참가자들
서 《선군태양 김정일장군》 제11권하 증보판, 도서 《주체조선의 위 의 회상기》, 《김일성 전승기》1권-5권, 《위대한 한 생》, 《시간과 정
대한 태양 김정은동지》 제5권과 《인류의 칭송 〈태양 김정은〉》 등 의》, 《자주외교의 거장 김일성》, 《선군태양 김정일 장군》 증보판1
을 출판했다고 보도했다. 8월 초에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권-5권, 《김정일 동지처럼 사랑하라》, 《영결과 영생》, 《원수님과 인
작가들의 작품들인 《고요한 저녁》, 《행운》, 《메아리》를 비롯한 소 민의 꿈》, 《위대한 인민의 아들 김정은 동지》 등이다. 여기서 ‘회
설들은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한없이 고매한 풍모 상실기집’이라는 것은 지도자의 활동을 목격한 주민들의 회고
를 지니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 글들을 모아서 만든 책으로, 김일성 대상 《인민들 속에서》, 김정
지,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의 위인상을 감명 깊게 보 일 대상 《주체시대를 빛내이시며》, 김정은 대상 《선군혁명 령도
여주고 있다”고 《조선중앙통신》2020.8.6.이 보도했다. 특히 최근 를 이어가시며》가 있다. 2020년 7월 초에는 김일성 혁명실화 총
2020. 8. 22. 최고인민회의우리의 국회에 해당 상임위원회는 정령 제376 서인 《민족과 더불어》 제1권이 새로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총서
호로, 앞서 언급한 혁명일화총서 《선군태양 김정일장군》에 김정 1.0’은 해당 도서들에 대한 제목 및 내용, 날자날짜 검색기능을 갖
일상을 수여 했다. 추고 있고, 개발자들은 ‘총서 1.0’을 판형태블릿콤퓨터용, 망네트워크
봉사기용, Windows용, 〈붉은별〉 조작체계용 열람프로그람으로
전자도서 열람프로그램 ‘총서 1.0’ 구분하여 개발하였으며, 현재 이들은 음성랑독낭독기능을 비롯한
오늘날 북한에서는 시리즈물이나 총서류, 백과사전류를 중 보다 다양한 기능을 갖춘 ‘총서 2.0’의 개발을 적극 추진”하고 있
심으로 디지털화가 진행 중이다. 최근 사례를 보면, 2019년 7월 다고 《로동신문》2019.7.5.이 전했다.
초 조선로동당출판사 ‘아래’산하 총서보급기술사에서 ‘총서 1.0’을 북한은 올해 1월 초에 과학기술전당이 개발했다는 ‘대중백과’ 프
개발해 내놨다. ‘총서 1.0’은 김일성 3대의 “불후의 고전적 로작 로그램에 대해 “세계적으로 사전편찬 분야에서 앞섰다고 하는 나
들과 회상실기, 위대성 도서들이 집대성된 백과전서적인 전자도 라들의 질적 수준을 훨씬 릉가능가하는 직결식 대규모 백과사전체
서 열람프로그람”이다. ‘총서 1.0’에 수록된 ‘위대성 도서’는 《김 계로서, 사전편찬 형식과 규모, 올림말 개수에 있어서 높은 급의
일성전집》1권-100권, 《김일성전집》 증보판1권-4권, 《김정일선집》 증 프로그람으로 인정되고 있다”《메아리》, 2020.1.8.며, 자부심을 드러냈
보판1권-25권, 《김정일전집》1권-23권, 《주체의 사회주의강국 건설을 다. 올해 6월에는 삼흥경제정보기술사에서 ‘새 세기 1.0’이 개발
되어 나왔는데, 이는 조선말대사전 검색프로그램으로서 사진기
5 〈보이지 않는 화폭〉
를 통한 문자 인식기능과 음성 인식기능이 추가되어 있다고 한다.
6 〈나포〉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노력과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대북정보 전
문 매체인 《데일리NK》2020.8.27.가 《로동신문》의 제작과 사진 편
집, 웹사이트 ‘조선의 출판물’에 올린 김일성 3대의 노작勞作과 각
종 도서들의 메타데이터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모두 미국의 소
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주민들에게는 국산품 애
용과 자력갱생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북한 당국은 ‘원쑤원수 나
라’에서 개발된 프로그램들을 체제 유지를 위한 각종 출판과 언
론매체 제작에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글 오양열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초빙석좌연구위원


5 6 사진 《조선중앙통신》, 《우리민족끼리》, 《메아리》, 《류경》, 《로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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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한문 연 소 식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발표
우리나라의 주역이 될 어린이·청소년 세대가 지역문화에 관심
과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한편, 전국 230개 지방문화원과
연결고리를 생성하고, 고故 금남 이수홍제22대·23대 한국문화원연합회장 선
생을 기리기 위해 개최한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의 수
상작이 최종 발표됐다. 이번 공모전은 전국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국문화원연합회·지방문화원 주최·주관, (재)한국문화협회의 후원으
로 개최됐다. 금남상으로 뽑힌 〈왜, 용동일까요〉는 주제와의 연관
성, 적합성 그리고 참신성과 독창성에 대해 좋은 평을 받았으며 으
뜸상으로 뽑힌 〈‘펄벅 기념관’을 다녀와서〉는 주제의 적절성, 작품
의 구성도, 문장력에 대해 좋은 평을 받았다.
금남상과 으뜸상의 시상식은 한국문화원연합회에서 열릴 예정이
며, 버금상과 반짝상 시상식은 응모자 거주지 관내 문화원에서 개최
될 예정이다.

글 음소형 편집팀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수상자

부문 수상작 이름 부문 수상작 이름
금남상 문화유산 지킴이는 바로 나야 나! 허요한
((재)한국문화협회 왜 용동일까요? 이율희
빛이 탄생시킨 빛고을의 문화유산 송유나
이사장상)
아름답고 따뜻한 제주의 '정낭' 강수안
으뜸상
‘펄벅 기념관’을 다녀와서 한주원
(한국문화원연합회장상) 영주를 대표하는 절, 부석사 이소정
거돈사지를 다녀와서 유연준 외암마을 다시보기 정여원
나만 몰랐던 나의 고장 이야기 송민선 우리 동네에는 지명유래 설화가 있어요 한준서
버금상
나의 문화유산 부석사 김동현 (지방문화원장상) 우리 동네의 연산군 묘 이민준
담양 소쇄원을 다녀와서 김다솜 우리 동네의 지역문화재,
버금상 이연호
두 물의 머리가 만나서 대동법시행기념비
(지방문화원장상) 문성빈
한강이 되는 곳 우리동네 진주성으로 강예원
뗏목 만들어 북한강 건너기 문성호 제주의 3대 폭포 강이안
만화 도시 '부천'을 소개합니다 한연재 하얀 천 휘날리며 차시은
무릉계곡 미션 게임 홍서현 행주산성을 찾아서 이지후

※ 반짝상 수상자는 한국문화원연합회 누리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심사위원 오순택(시인,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 회장), 박상재(동화작가, 前 한국아동문학학회 회장), 한춘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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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보다 다사다난한 2020년이 어느덧 쌀쌀함을 느끼는 가을이 되었습니다. 재단법인 한국문화협회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함
께 전국규모의 글짓기 대회에 일조하여, 또 다른 모티브와 기회를 제공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울러, 故 금남 이수홍 전 회장님
의 전통문화 및 글 창작에 대한 애정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어느 때 보다 디지털 소통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의 창의적인 글은 언제나 새롭고 활기 넘치
는 긍정적 자극으로 우리를 재생해 주는 것 같습니다. 또한 어린이와 청소년이 우리 동네의 소중한 지역문화유산을 관찰하고,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포근한 사랑과 편안함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공모전에 참여해주신 모든 응모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이용석 한국문화협회 이사장

금남상 수상작 〈왜 용동일까요?〉(이율희)

안녕하세요? 저는 용동초등학교 4학년 이율희입니다. 저희 학교는 상계동 그리고 공릉동 우리 노원구는 딱 이렇게 5개 동만 있어요.
노원구 중계동에 있어요. 공릉동을 제외하면 모두 이름에 ‘계溪’자가 들어가요. 이 계자가 의
어느 날 저는 궁금했어요. 왜 우리 학교 이름은 용동인 거지? 중계초 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시내’입니다.
등학교는 중계동에 있고 공릉초등학교는 공릉동에 있어요. 또 상계 월계는 맑은 시냇물이 달에 비치고 중랑천과 우이천으로 둘러싸인
초등학교는 상계동에 있고, 불암산 아래에는 불암초등학교가 있어 마을이 반달 모양이라 월계月溪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참 이쁜
요. 그런데 우리 학교는 왜 용동이지? 그래서 저의 이름 알아보기 모 이름이지요? 그리고 상계, 중계, 하계는 각각 한천의 위쪽, 중간, 아
험이 시작됐답니다. 래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에요. 그 당시에는 ‘한천’이라는 시내가 얼
우선 이름 유래를 알아보는 건 힘들었어요.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 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어요. 아마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사
요. 그래서 노원구청에 들어갔지요. 구청에는 노원에 대한 모든 일 는 데 꼭 필요한 시내였을 거예요. 공릉동은 서쪽의 공덕리와 동쪽
들이 있으니까요. 구청에는 우리 지역 지명 유래가 나와 있었어요. 의 태릉이 합쳐진 이름이라고 해요.
거기에 ‘용동’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있었어요. 한천은 한강의 위쪽에 흐르는 냇물이라는 뜻이라는데 지금은 한천
옛날 이곳에 살던 미꾸라지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지만 나이가 이라는 이름 대신 중랑천이라고 불러요. 1911년 일제에 의해 발행된
모자라 하늘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왔다는 뜻이라고 해 경성부지도 이후 중랑천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는데 저는 한강의
요. 그래서 ‘되룡골’이라고도 한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름을 딴 한천이 더 쉽고 좋은 이름 같아요,
미꾸라지가 너무 불쌍했어요. 용이 되는 줄 알고 얼마나 좋아했을까 가족들과 자주 중랑천 산책로를 걸었는데 이제 이 시내가 한천이라
요? 나이가 모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조금 더 참았다가 올라갔을 텐 는 걸 알았어요. 다음에 산책할 때는 가족들에게 한천에 대해 알려
데. 미꾸라지가 용이 되었다면 ‘용동’이라는 이름은 바뀌었을까요? 줄 거예요.
그 후에 미꾸라지가 다시 나이를 채워 용이 되었다는 전설이 없어 지금까지 저는 우리 학교 이름을 시작으로 노원구의 다섯 동 이름,
더 안타까웠어요. 미꾸라지의 지난 시간들이 모두 헛수고가 되었으 그리고 그 동을 흐르는 시내의 이름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모험이
니까요. 끝났다고 생각하셨나요? 왜 그 이름이 붙여졌는지 알아보면서 우리
저는 용동이라는 지역도 옛 지도를 통해 알아봤어요. 우리 학교에서 마을이 더 친근하게 느껴졌고, 그 지역을 지날 때는 더 유심히 보게
조금 더 가면 서울시립과학관 그곳을 가기 전 터가 바로 ‘용동마을’ 되었어요. 이제 저의 글을 읽으셨으니 우리 노원구에 오시면 이름에
이었어요. 지금은 아파트들이 우뚝 서 있지만 옛날에는 작은 집들이 대해 한 번씩 더 생각해주세요.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을 거예요. 그 생각을 하고 근처를 지나갈 저의 이름 알아보기 모험! 아직도 우리 마을에는 왜 이 이름이 붙여
때 유심히 보았어요. 마치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어요. 졌지? 하고 궁금한 곳이 있어요. 그래서 저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
저는 우리 마을의 동 이름에 대해서도 알아봤어요. 학교는 중계동에 았어요. 지금까지 노원구를 사랑하는 용동초등학교 4학년 이율희였
있지만 저는 하계동에 살고 있어요. 중계동과 하계동, 또 월계동과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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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문화 원 소 식

한문연, 페이스북 생방송으로 심포지엄 열어


문화원, 활발한 토론과 즉각적인 의견 제시가 필요한 심포지엄토론회은

온라인의 세계로!
모든 참여자가 참석한 오프라인, 즉 대면對面 행사로 개최되어 왔다.
그러나 수도권 코로나19 확진자가 연일 급증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
가 2단계로 격상당시 기준됨에 따라 한국문화원연합회 부설 정책연구
소는 지난 9월 25일, 비대면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는 한국문화원
연합회에서도 최초로 시도한 ‘페이스북 생방송 심포지엄’이었다.
인류의 역사 중 ‘한 단어’로 특정할 수 있 ‘포스트 코로나, 지방문화원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를 주제로 열
는 ‘한 해’는 많지 않다. 그러나 단언컨대 린 이번 심포지엄은, 사회자 박주석명지대 기록정보대학원 교수와 발제자
올해는 하나의 단어로 회자될 것이다. 바 장훈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 토론자 이형호GKL 혁신경영본부장·임학순
로 ‘코로나19’다. 코로나19는 우리 생활 카톨릭대 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강지연더커뮤니케이션 대표·강성봉성북문화원 사무

전반에 걸쳐 강제적이고 자발적인 수많 국장·김선혁레벨나인 대표 등 총 7명의 참여자와 소수의 방송 송출 인력


은 변화를 끌어냈다. 코로나 이후포스트 코 만이 참여하여 진행되었다.
로나는 ‘도래할 것’이 아니라 이미 도래했 페이스북을 통해 심포지엄을 시청한 시청자들은 토론자들의 이야
다. 우리는 이제 좋으나 싫으나, 코로나 기에 바로바로 반응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댓글을 통해 표현하기도
이후를 살아가야 한다. 격동의 시대, 문 했다. 이어 토론 발표가 마무리되자 시청자가 댓글로 남긴 질문에
화원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참석자들이 대답하는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이번 심포지엄을 시
청한 한 시청자는 “오프라인 심포지엄은 토론자의 목소리가 작을
경우 잘 안 들리는 단점이 있는데, 온라인 심포지엄은 시청자가 원
하는 대로 소리 크기를 조절할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고 호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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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강좌 게재하거나 생중계
동작문화원은 최근 유튜브에 공식 채널을 개설하고, ‘미술작품
의 읽기와 재구성 – 감상은 또 다른 창작’을 주제로 한 강좌를 지속
해서 게재하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거리 두기로 지친 국민들의 문
화적 단절감 극복과 인문학적 소양 고취를 통한 문화적 갈증 해소를
위해 기획된 이번 온라인 시민 강좌는, 대학교수와 미술관 관장 등
전문가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미술 작품 속 숨은 의미, 작품 감상
법, 에피소드 등의 영상을 매일 동작문화원 유튜브 채널에 게재한다.
인천중구문화원 역시 인천 중구를 대표하는 ‘근대近代’를 바탕으로,
근대 음악이 어우러진 프로그램 ‘인천개항장 근대 음악 쌀롱’을 지
난 6월부터 10월까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유튜브로 생중계한
바 있다.

1 심포지엄 현장 모습
2 심포지엄 페이스북 생방송
2 송출 모습

노원문화원, 온라인으로 개최한 트로트 경연대회


노원문화원은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과 동영상 플랫폼 유튜
브를 활용해 ‘2020 집콕 챌린지 트로트 온라인 경연대회’를 지난 4
월부터 5월까지 개최했다. 음원·음반 발매 이력이 없는 대한민국 국
민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으며, 본인의 영상을 촬영하여 인적사항과
함께 이메일 또는 카카오톡 계정으로 전송하여 참가 신청을 하는 방
식이었다. 심사는 노원문화원과 공동 주최·주관한 버드뮤직의 유튜
브 채널에 참가자의 영상을 올리고 이뤄졌다. 예선은 버드뮤직 자체 3 트로트 온라인 경연대회
포스터
심사를 통해 진행됐지만, 결선에서는 ‘관객 심사’의 일환으로 유튜브 4 경연대회 참가자들의 영상.
‘좋아요’와 ‘댓글’이 심사
의 ‘좋아요’와 ‘댓글’이 20% 반영되었다. 점수로 반영됐다. 3
이와 더불어 ‘2020 문화가 있는 날 지자체 자유기획프로그램’의 일
환인 ‘창작극과 함께 하는 우리 마을 역사문화 골든벨’은 노원문화
원 공식 유튜브 채널을 활용했다.
이 밖에도 본래 관내 초등학생과 문화재 탐방을 떠나는 프로그램인
‘초등학생 문화재 탐방교실’은, 노원문화원 해설사가 출연하여 관내
문화재 5개소를 소개하는 유튜브 교육용 영상으로 제작되어 노원문
화원 유튜브에 게재될 예정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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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천중구문화원의 ‘근대 음악 쌀롱’ 유튜브 송출 작업 모습


6 ‘줌’으로 열린 인천중구문화원의 ‘DLSR 사진 교육’ 모습
5 7 ‘줌’을 활용한 ‘꿈의 오케스트라’ 프로그램(세종문화원)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은 ‘탈출구’ 도시로서의 변주’를 주제로 줌을 통해 2시간 30분 동안 강의와 토
코로나19 이후 주목받은 화상회의 플랫폼 ‘줌’은 코로나19 상황 론을 진행했다.
속에서 문화원의 탈출구로 이용되고 있다. 줌은 누구나 접속해 실시 세종문화원은 지난 4월부터 줌으로 ‘꿈의 오케스트라 5년 차’ 프로
간 송출 방송 모습이나, 추후 녹화된 영상본을 볼 수 있는 유튜브와 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플랫폼 화면, 실시간 댓글 등을 활용해 단원
는 달리, 사전 신청을 받아 접속자 인원을 제한하기에 관계자와 접 의 참여 여부를 확인하고, 실시간 수업을 듣지 못한 단원을 위해 스
속자 외에는 영상을 볼 수 없다. 또한 유튜브는 생중계를 진행하는 트리밍을 녹화, 저장하여 시청을 돕는다.
이의 모습만 송출되며 시청자는 댓글을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지만, 이 밖에도 예산문화원은 대면으로 운영 중이던 중학생 여름 방학
줌은 접속한 모든 이의 얼굴을 보며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다는 점 프로그램 ‘내가 보고 듣는 세상, 그 너머의 이야기’를 지난 9월부터
도 다르다. 비대면으로 전환하여 줌을 통해 운영한 바 있으며 성남문화원은 이
인천중구문화원은 ‘줌’을 활용해 관내 60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달 30일까지 평생학습기관 특성화 프로그램인 ‘내 삶을 디자인하
DLSR 카메라 사진 촬영 교육 및 컴퓨터 보정프로그램일러스트, 포토샵을 는 행복’을 줌을 통해 일상 인문학+나만의 문장 만들기 내용으로 강
교육했으며 미추홀학산문화원은 지난 9월 3일 ‘미추홀 지속 가능한 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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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11회 허암예술제 포스터(인천서구문화원)


온라인 안으로 들어온 축제와 행사 9 제11회 허암예술제 '집에서 푸는 온라인 일간 모의고사'(인천서구문화원)
10 온라인 시민창작예술축제 제7회 학산마당극놀래 포스터(미추홀학산문화원)
인천서구문화원은 인천 서구의 역사 속 인물 중 조선 시대 문인
으로 귀감이 되는 허암 정희량 선생의 선비 정신을 배우는 ‘허암예
술제’를 올해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지난 8월부터 10월까지 열린 제
11회 온라인 허암예술제는 ‘집에서 쓰는 온라인 백일장’, ‘집에서 푸
는 온라인 일간 모의고사’, ‘집에서 보는 허암예술제카드뉴스’, ‘집에서
관람하는 우수작품 전시회’ 등의 세부 프로그램이 준비되었다. 이중 수원문화원, ‘톡! 쏜다 프로젝트’
‘집에서 푸는 온라인 일간 모의고사’는 인천 서구문화원 홈페이지와 수원문화원은 카카오톡의 ‘라이브톡’ 기능을 활용한 ‘톡! 쏜다
페이스북을 활용해 특색있게 개최되었는데, 9월 14일부터 25일까 프로젝트’이하 ‘톡!’를 이달 3일에 진행한다. 라이브톡은 실시간 라이
지 매일 1문제씩 총 20개의 문제가 공개되고 이를 풀어 응모한 응모 브 영상을 보며 채팅을 할 수 있는 기능으로, 별도의 앱 설치 없이
자 중 고득점자와 우수참여자를 선정하여 기념품을 제공했다. 카카오톡 그룹채팅방 내에서 실행할 수 있다. 이번에 기획된 ‘톡!’은
미추홀학산문화원 또한 이달 24일~28일 동안 ‘제7회 학산 마당극 출연자의 공연 및 인터뷰를 통해 문화원 회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
놀래’를 온라인 개최한다. 24일부터 27일까지 열리는 축제 연계행 전달을 목표로 한다.
사와 사전행사는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되며, 28일 축제 본행사는
글 음소형 편집팀
사전 녹화된 공연의 편집본을 온라인을 통해 상영하는 방식으로 개
사진 한국문화원연합회, 노원문화원, 인천중구문화원, 세종문화원, 인천서구
최된다. 문화원, 미추홀학산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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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 기증 탁본전 〈국토의 역사와 향기〉
U RIM U N HWA 전시일 10월 9일 ~ 12월 30일 ㅣ 전시장 부여문화원 전시실

국민적인 스테디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이자 문화재청장을 지

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수집·소장한 탁본 70여 점을 중점으로 한 기

증유물전 〈국토의 역사와 향기〉 전시회가 오는 12월 30일까지 부여문화원

전시실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회에는 광개토왕비 모탁본, 백제 사택지적

비 등 삼국 시대 비문탁본과 김유신장군묘 십이지신상, 성덕대왕신종 비천

상, 연곡사 동승탑 조각상 등 통일신라 조각상 탁본을 비롯하여 이순신 장군

명랑대첩비, 영조대왕의 탕평비, 추사 김정희의 〈시경〉, 〈불광〉 등 우리나라

의 역대 유명 금석문의 탁본을 망라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무료로 개최되며 △부여군 페이스북 △부여문화원 홈페이지 △유튜브 부자되는여행TV 등을 통해 온

라인으로도 관람할 수 있다.

이수영 회장과 장상호 국장, 2020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선정

이수영 경남문화원연합

회장과 장상호 한국문

화원연합회 운영지원

팀장(국장)이 ‘2020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

로 선정돼 문화훈장을
1 2 수훈했다. 문화체육관

1 옥관 문화훈장을 수훈한 이수영 경남문화원연합회장 광부는 지난 10월 18일


2 화관 문화훈장을 수훈한 장상호 한국문화원연합회 사무국장
‘2020년 문화예술발전

유공자’로 총 36명을 선정해 발표하고, 10월 19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시상식을 개최했다. 이날 시상식에서 이수

영 회장은 37년간 지역문화 발전 기반 구축과 창달에 기여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옥관 문화훈장을 수훈했으며, 장

상호 국장은 지방문화원 및 시·도문화원연합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화관 문화훈장을 수훈했다.

편집후기

한문연의 큰 잡지로 편집주간 한춘섭

어느 사이에 통권 289호가 된 〈우리문화〉가 1년 후에는 지령 300호 성장의 나무숲을 쳐다볼 것 같다. 편집

위원과 출판 실무팀의 치밀한 계획, 디자인을 입혀, 달마다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필자 섭외와 현지촬영과
2020 11

수정작업의 수고가 고스란히 녹아든 시간을 쌓아 가고 있다. 이번 11월호 〈우리문화〉는 국가중요농업유산

기사를 중점으로 온 문화 가족들에게 안내하게 되었다.

어느덧 시련의 세월도, 막막한 인생도, 아쉬운 가을도 가고 있다. 그러나 십 년의 법칙에 방향성을 더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듯, 한 분야에 몰입하여 헌신하는 삶이야말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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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lttwigi

ISSN 1599-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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