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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잎․열

업에서 헤어나는 길
카렐 베르네르 지음 김봉래 옮김
|
The Law of Kamma
and Mindfulness
Karel Werner
1973, Bodhi Leaves No. 61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일러두기
이 책에 나오는 경經의 출전은 영국 빠알리성전협회PTS

에서 간행한 로마자 본 빠알리 경임.


로마자 빠알리어는 이탤릭체로 표기함.

모든 주는 역주譯註임.

차례

업에서 헤어나는 길 7
정신적 의지가 가져오는 결과들 24
내면적 성향 33
업 지음을 멈추자면 40
저자 소개 59
업에서 헤어나는 길

사람들은 이 세상을 자기의 뜻과는 아무 관계없


이 별개로 돌아가는 세계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
가고 있다. 때로는 어떤 개선의 노력도 소용이 없
는 적대적인 세계 속에 자신이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느낌마저도 갖는다.
인류 발전의 초기 단계에 사람들은 물질세계에
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의식을 가진
개체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이들을 보통 신 또는 신령이라 부르면서 이들 강
력한 세력과 협상이나 타협을 해보려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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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신의 처분만 기다리기보다는 직접적인


개인적 이득을 위해 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 다음 발전 단계에 오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
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물론 자기 생에 일어나
는 사건까지도 죄다 관장하는 힘과 권능을 어떤
절대적 존재, 전능하신 한 분의 창조주에게로 돌
리게 되고, 그러고는 이전 단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력 있는 존재  ̄ 사사로운 인격체이면서도 보편
적 힘을 가진 것으로 상정된 존재  ̄ 와 교섭을 해보
고자 애를 썼다.
사람들이 이 창조주이자 세계의 통치자인 존재
를 상대로 해서 자기 이익을 꾀하는 방법은 실로
업에서 헤어나는 길 9
다양하여 갖가지 가치관이 동원되고 있다. 즉 기
도를 통해 설득하려 드는 천진한 방법에서부터 물
질적 복을 기대해 희생을 올리겠다는 신과의 흥정
방식이 있는가 하면 명상을 통해 접근해 가는 신
비주의자의 미묘한 방법에 이르기까지 여러 길이
있는 것이다.
과학이 자리 잡게 된 최근의 발전 단계에 와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조정하
는 비인격적인 자연의 힘을 공식으로 설명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힘을 자연의 법칙이라 부르고 있
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기껏 물리적 사건이나 일부
심리적 현상에 관한 법칙을 파악, 이해하는 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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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뿐이고, 도덕적 행위의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


는 법칙성에까지 그들의 관찰을 확대하지는 못하
는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자들 역시 현명하고 전능한
창조주가 세상을 잘 돌보시어 사람들이 하는 소행
에 대해 공정한 응보를 내려줄 것으로 믿어마지
않거나, 아니면 인간의 도덕적 행위가 가져오는
결과에 있어 어떤 원칙성이 작용한다는 생각 자체
를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그 어느 쪽이건 둘 다 현대인들의 시야가 얼마
나 좁디좁은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오늘
날 세상이 이처럼 한심하게 돌아가게 된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업에서 헤어나는 길 11
전능하신 창조주를 믿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
의 믿음 때문에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내고 추
상적 사유 과정을 통해 공식화시킨 자연법칙에 관
한 자신들의 지식을 도덕적 행위의 영역에까지 확
대시키는 노력을 제대로 해볼 수가 없게 되는 것
이다.
만일 매사가 신의 뜻에 달려 있고, 신이 바라지
않는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믿어 버린다
면, 도덕적 영역에도 어떤 자연법이 작용하고 있
는지 탐구해 보려는 의욕이 생겨날 수가 없기 때
문이다. 또 그 반대로 요즘 자주 목격되듯이 신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거나 아주 사라져 버릴 경우에
는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이 야박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히 남에게야 어떤 해악을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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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든 돌아볼 것도 없이 자기 이익만 최대로 챙기


면 그만이라는 식이 될 것이다.
남에게 끼친 결과가 언젠가는 자기를 되옭아매
게 될지도 모른다고는 꿈에도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오관五官을 통해 인식한 것만 믿
으려 들고, 그 밖에 선험적인 것들을 모두 부정해
버린다면 이런 사람들은 도덕적 영역에 작용하고
있는 법칙들에 대해서는 캄캄할 수밖에 없다. 설
사 그가 제 아무리 우수한 과학자라 하더라도, 또
현상계의 법칙에 밝고 이것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이런 사람의 행위
는 결과적으로 고도의 도덕적 수준에 적합한 것이
되기 어려우며, 따라서 그의 그 훌륭한 과학도 권
업에서 헤어나는 길 13
력을 탐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가장 사악한 목적을
위해서 봉사하게 되어 버릴 수가 얼마든지 있다.
이런 유의 사람들은 보통 모든 이웃들의 안녕과
복지를 생각하는 현명함보다는 목전의 이익이나
만족을 추구하는 근시안적 우를 범하고 만다. 오
늘날 동서양의 모든 국가들이 이런 근시안적 철학
에 입각해서 정치를 펴나가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라나 사회 집단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는 이
유는 지배자가 탄압에 의해서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또 이런 잘못된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가
자기네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을 줄로, 또 미치더라
도 모면해 낼 수 있을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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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하긴 온 세계의 사활이 달린 핵전쟁의 경우


는 요즘 와서 핵전쟁을 발발시킬 능력을 갖춘 자
신들도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까
무모한 짓은 않을 것이라고 다소 마음을 놓으려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끔찍한 세계전의 발발 가능성
을 두고 이런 논리에 의거해 안전을 믿는다는 것
이 과연 현명한 일일는지? 따라서 세상사 돌아가
는 법칙에 대해서 보다 깊은 통찰을 가해 볼 필요
가 절요切要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과학이 비인격적인 자연법 개념을 형성해
내기 훨씬 이전 베다시대에 이미 인도의 현자들은
우주의 돌아가는 모습에 관한 깊은 통찰에서 지혜
[洞察智]를 얻어냈다. 그들은 이 통찰 결과를 ‘리타
ṛta’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전 우주에
업에서 헤어나는 길 15
걸쳐 사물의 돌아가는 일관된 법칙성을 의미한다.
이 개념에 의하면 우주는 비인격적인 어떤 법칙에
의해 통어되며, 이 법칙은 밖으로는 물리세계의
자연 질서로 나타나고 안으로는 사람과 신들의 마
음속에 올바름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나타난다.
만약 리타의 도가 행해지면 세계는 조화에 의해
운행된다. 하늘에 뜨는 해와 별들이 하루같이 그
궤도를 도는 것이나 정의로운 사람이 일상 행위를
영위하는 것이나 모두가 동일한 조화의 법에 따른
것이다. 천체의 세계에 나타나는 외부적 질서나
도덕으로 나타나는 인간 내면의 질서나 똑같은
‘리타’라는 비인격적인 법칙의 소산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처럼 리타라는 개념이 밖으로는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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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적으로 또 안으로는 도덕의 영역에서 사태의 돌


아가는 진로를 지배하는 비인격적 힘이라는 의미
로서 고스란히 그 순수한 뜻을 간직해 내려온 것
은 아니다. 처음에는 수호신 바루나의 개념과 접
합되었고, 계속 내려오면서 다른 신들이나 혹은
하나의 절대신과 접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본
래의 깊은 철학적 의미를 모든 인도 사상가들은
결코 잊지 않았으며 마침내 업業이라는 교설로 보
다 정교하게 다듬어지게 되었다. 사실 업은 리타
의 개념을 개개인의 도덕적 면에 적용시켜 다듬은
것에 불과하다.
이런 사상적 배경 탓인지 인도나 그 밖의 동양
국가의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네가 행하는 도덕적
행위가 조만간에 자기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힘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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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작용하게 되며 결코 그냥 묻혀 버리는 법은 없
다고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에 반해 현
대 유럽인들은 과학에서는 자연법칙의 개념을 잘
다듬어 놓으면서도 도덕의 분야에 이 개념을 연결
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도덕의 영역은 전능
한 창조주의 독점분야로 치부되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신의 의지에 따라 은총을
베풀기도 하고, 인간의 소행에 따라 상벌을 내리
기도 하는 것으로 믿어왔다. 현대에 와서 그런 신
앙심이 사라져 버리면서 유럽인들은 도덕적 과보
라는 관념을 잊어버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는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마저
지려 들지 않는 수가 많아졌다. 이 점은 특히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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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가 각종 법령이나 법조문에 범죄나 위반 사항


으로 명기되어 있지 않을 경우 두드러지게 나타난
다. 따라서 도덕적 영역에 관한 한 현대 유럽인들
은 소박유물론자 가 되어 버린 셈이다.
1

서양 철학자들은 보통 자신들의 철학 체계의 한


부분을 할애하여 필수적 도덕 가치 목록을 나열하
고서는 그 가치들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원칙적

1 소박유물론素朴唯物論 naive materialism : 과학적으로 논


증되지 않는 유물론의 한 형태. 유물론자들에 의하면 인간
은 그 실천에 있어 항상 자연과 관련을 갖지 않을 수 없으
므로 거기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유물론적인 의식이 나온다
고 한다. 즉 명확하게 자각되지는 않지만 자연은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박유물론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
아 이론적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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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들을 사변적 방식에 의해서 짜내려고 헛되이
애만 쓰고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서양 사람들은
배운 사람들일수록 바깥 물질세계의 여러 현상 간
에 일어나는 필연적 인과관계는 잘 이해하고 또
과학적 공식으로 표현도 잘해 내면서 유독 인간사
에 작용하고 있는 도덕적 응보에 대해서는 그 의
미를 제대로 파악하질 못하는 것 같다.
도덕적 측면이 개개인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자연
스러운 사태 진전으로 드러나는지 그 모습을 가장
잘 정리하여 우리 앞에 보여준 것이 바로 부처님
이 설하신 업의 가르침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행위라는 뜻이지만 이는
결코 외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 용
어는 어떤 존재가 외부 사태에 대하여, 이를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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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데서 멈추지를 못하고 그 사태에 정신적으로


관여하여 이러저러한 입장과 자신과를 동일시하
거나 반대하거나 하는 등으로 바깥 경계에 휘말려
들 때의 ‘의사’ 또는 ‘의지’라고 하는 정신적 과정
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외부적인 일에 관여하거나 휘말려 들
게 되면 당연히 몸이나 말로 저지르는 어떤 행위
또는 단순히 생각만으로 범하는 어떤 행위가 즉각
뒤따라 일어나게 된다.
이와 같이 어떤 경계에 말려들게 되는 것은 무
지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비실체성을 잘 모
르고 자기가 정신 활동이나 외적 활동에 있어 독
립적 중심체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이 자신
의 비실체성에 대해서 무지한 탓으로 그는 자기의
개성을 중시하고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
업에서 헤어나는 길 21
는 것이다. 자기 개성을 함양하다 보면 자연히 어
떤 것은 바람직하고 어떤 것은 불필요하다는 식의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이 그릇된 분별의 결과로 자기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은 추구하게 되고 불필요한 것은 피하게
된다. 이러한 추구와 기피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
나는데 그 중에는 좋다, 싫다 하는 미세한 느낌으
로부터 갈애와 증오라는 거친 감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대단히 빠른 속도로 마
음속에서 일어나며, 그 때문에 보통은 그 복잡하
게 얽혀 돌아간 최종적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이
라는 점이다. 즉 이미 행하여진 행위나 뱉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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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형성된 생각 또는 어떤 특정한 마음 상태 등
의 형식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심리적
진행 과정의 미묘한 내막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보
려면 그것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이나 아니면 진행
된 후에라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이들 심리적 진
행을 매우 주의 깊게 거듭해서 분석해 보는 길 밖
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 심리적 과정은 정도의 차이
는 있지만 본인의 창의적 참여가 불가능할 정도로
거의 자동적으로 전개된다.
당사자는 그저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대상
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다고 혼자서 생각하고 있
는 것이지만, 실은 거기에는 즐거움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맹목적 추구와 예측 못할 결과가 존재
할 뿐이다. 모든 존재의 행복은 이 심리적 진행
업에서 헤어나는 길 23
과정의 질적 차이에 달려 있는 만큼 이 과정을 들
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는 것은 누구에게나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신적 의지가 가져오는 결과들

‘의지’라고 하는 정신적 행위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마음이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한
것임을 먼저 명심해 두어야겠다. 이 의지는 바깥
으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 발생
한다. 이 반응을 사람들은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
고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이
의지는 다시 갖가지 결과를 빚어낸다. 그 중 몇
가지만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정신적 의지가 가져오는 첫 번째 결과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빚어내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그
정신적 의지가 가져오는 결과들 25
당장에는 행위자 자신의 자유의사로 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아니면 자체가 흥미 있기 때문에
행하였다고 느끼거나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가 행하는 행위가 그 후에 빚게 되
는 결과는 행위자의 의견과는 전연 무관하며, 그
가 바라던 대로 되어 주는 일은 희소하다. 그의
행위는 주변 환경과 남들이 그에게 대해 가지게
되는 태도에 영향을 끼치게 되며, 남들은 보통 자
기네 나름대로의 다른 목적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서로 간에 충돌이 불가피해진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는 행위 때문에 우리는
다시 미래에도 그와 유사하게 행위 할 가능성을
만들게 된다. 말하자면 어떤 행위 방식, 어떤 습
관이나 기질상의 성향 같은 것을 만드는 기초 작
26

업을 하는 셈이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자


신의 인격적 특성에 대해 새로운 면모를 첨가하거
나 오랜 면모를 강화시켜 줌으로써 이 존재라는
조건 지어진 상태를 영속하도록 만들며 또한 장차
자기 품격의 질을 결정짓는다. 뿐만 아니라 마음
씀씀이나 몸과 말에 의한 행위가 가져오는 정신적
부수 효과에 의해서 우리는 자신의 외양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즉 행위를 행하고 있는 동안에도
순간순간 일어나는 변화를 우리는 분명히 볼 수가
있다. 친절한 행위나 친절한 말을 하게 되는 심리
적인 상태라든가 친절한 생각은 우리의 얼굴을 밝
고 즐겁게, 심지어는 아름답게까지도 만든다.
성내거나 미워하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는 우
리 얼굴에 추한 모습을 만들어낸다.
정신적 의지가 가져오는 결과들 27
현재의 모습을 대체로 견지하게 마련인 금생 동
안에는 이런 변화들이 가져오는 지속적 효과는 그
다지 두드러지지 않아서 길게 인생을 살아보지 않
고서는 그 결과를 추적해낼 수 없으며, 또 우리의
신체적 외양은 인격상의 변화를 일일이 알맞게 반
영해낼 수도 없다. 그러나 다음 생에 새로운 모습
으로 태어날 때에는 그 순간에 갖추고 있는 인격
에 일치되게 외양을 갖추게 마련이다. 이 점에 대
해서는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서 직접 언급하신 부
분을 찾을 수 있다. 2

중부》 135경 : 브라만계급의 수브하 가정을 방문하셨을


2 《
때 부처님께서 하신 법문. 사람의 수명이 왜 길고 짧은지,
얼굴의 용모가 왜 잘나고 못났는지, 재물의 복이 왜 각각
다른지 등에 대해 부처님께서 수브하에게 인과업보의 작용
으로 설명해 주심.
28

행위가 주변 환경이나 주위 사람들의 태도 면에


끼치는 직접적 결과 이외에도 보다 먼 장래에 끼
치는 훨씬 중요한 결과가 또 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주변 환경에 끼친 직접적 영향의 확대판이
라 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가 짓는 모든 행위는
그 하나하나가 전 우주와 그 질서정연한 진행을
바꾸어 놓는다. 물론 그 변화는 지극히 작은 것이
긴 하다. 그러나 한 개인이 전 생애에 걸쳐 짓는
행위의 총체는 그가 씨 뿌린 영향력의 양을 나타
내는 것이며, 그것은 반드시 때가 되면 익어서 열
매를 맺는다.
이렇게 하여 그 행위자의 내적 성향 및 외적 행
동과 정확히 부합되는 적절한 환경이 도출된다.
그런데도 그 개인은 무지한 탓으로 자기가 살고
정신적 의지가 가져오는 결과들 29
있는 환경이 실제로는 자기 마음이 투사된 것에
불과하며, 또 자기가 봉착하는 갖가지 사건이나
사태도 자신이 과거에 지은 행위가 빚은 열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개개인 간에 겹겹으로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
와 그리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수많은
유사한 욕구와 성향 때문에 온갖 존재들이, 이를
테면 하나의 동일한 세계에 함께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세계뿐 아니라 모든 우주까지도 존재
들의 내면적이며 맹목적인 성향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며, 그 세계에서 존재체들은 자기네의 욕구와
성향이 갈구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각기 특유
의 목표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하나의 같은 세계 안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정
30

신적으로는 각자 나름의 세계관이라는 그물에 사


로잡혀 있는 것이며, 사실상 자기가 스스로 만든
자기네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계 창조 과정의 법칙에 무지한 탓으
로 인해, 그리고 현재의 세계를 배출시킨 진짜 씨
앗인 자기 과거의 욕구 소망 분노 희망 등을
· · ·

기억하지 못하는 탓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릇된 견


해, 즉 이 세상은 의식을 가진 존재들과 전연 별
개의 독립된 객관적 세계이고 자신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한낱 동떨어진 주체라고 생각하는 견해
를 가지게 된다.
베다와 우파니샤드 시대의 일부 현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이런 통찰
정신적 의지가 가져오는 결과들 31
의 지혜는 힌두철학에 오면 마아야[幻]이론으로
정립되는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면서 잘못 이해
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변을 일삼아 철학 이론들
을 더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눈뜨신 분께서는 모
든 사변이 헛된 것이고 실천적으로 해탈을 향한
길을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실
례로 보여주시지 않았는가. 일단 업의 법칙이 어
떻게 작용하는지에 관해 초보적 통찰이나마 얻은
이상 우리는 어떻게든 이를 일상생활 속에서 노력
을 통해 유익하게 활용하여 저 위대한 해탈解脫의
순간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마음을 챙기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모든 상태와 모든 행위
32

를 빠뜨리지 않고 낱낱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럼


으로써 우리는 과거 업의 결과vipāka가 현재의 우
리 마음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또 그것에 대해
마음이 구체적 반응을 취하는 중요한 순간을 포착
하고, 다시 말해서 의지적 행위가 취해져 업의 전
개를 다시 한 번 작동시키고 그래서 결국 영속적
으로 거듭 되풀이되도록 만들고 마는 그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3

3 〈 고요한소리〉 보리수잎 넷 《인과와 도덕적 책임》 참조.


·
내면적 성향

우리는 지각 작용을 기초로 해서 의식 생활을


영위한다. 그렇지만 지각된 것이 모두 충분하게
의식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리적 과정들
은 각양각색의 감관적 지각에 대해 신경계가 반응
하여 빚는 산물이지만, 그 감관적 지각을 우리는
알아차릴 수 없고 살펴볼 수도 없다.
이와 같이 비록 자각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자
각할 수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서도 신경계의 반응
은 조건 지어진 상태로서의 우리 존재의 한 구성
요소임은 분명하다.
34

분명 그것들은 우리를 주변 상황 속에 더욱 휘
말려 들게끔 조장하며, 그리하여 우리를 현재의
부자유한 존재 상태에 옭아맨다. 그렇다고 힌두교
의 요가에서 하듯이 이 무의식적 반응을 의식의
지배하에 두려고 애쓰는 것은 의식 상태의 정신적
반응들이 반사적으로 작용해 버리도록 방치하는
한 부질없는 짓일 수밖에 없다.
또 우리가 어느 정도나마 의식하게 되는 지각
작용들도 있다. 그 경우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식
으로 살아가는 방식에 쓸모가 있을지 어떨지 건성
으로 살피면서 잠깐 신경 쓰다가 이내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일단 지각 작용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게
내면적 성향 35
되면 그때는 그 지각 작용들은 충분히 의식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들 성격 가운데 일
부 내면적 성향들과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런 종류의 지각 작용에 대해 경우에 따라 연장시
키거나 반복시키거나 기피하는 등 조치를 알맞도
록 취하게 된다.
비록 이 과정은 의식되어진 상태에서 진행은 되
지만 이 역시 정신 현상들이 반사적이고 맹목적으
로 이어지는 연속일 뿐 아무런 실제적 의미는 없
으며 살아있는 유기체 내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적
생리 현상의 연속 작용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이들 두 종류의 전개 과정은 단지 그 과정 자체를
영속화시켜 끝없이 계속 재생시킨다는 것 이외에
36

달리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때 의식[識]은 본격적인 추상화 작업은 연출
하지 않으며, 단지 선택 과정이 도달하는 귀착점
에 불과하다. 우리의 감관에 떠오르는 그 허다한
지각 대상 중에서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우
리의 내적 성향 중 어떤 것과 부합되는 것들만이
좋고 싫은 느낌을 통해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되고
그래서 의식되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선택당하여
의식과 상면하게 된 지각들은 그때 비로소 우리의
욕구나 집착, 아니면 증오나 반감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모든 지각은 우리가 과거에 행한 행위의
결과인 것이다. 실은 지각 외에 달리 어떤 환경도
어떤 세계도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내면적 성향 37
지각은 우리가 몸으로 지은 일, 입으로 지은 일
그리고 적극적 마음 상태로 지은 일들의 결과인
것이다. 요컨대 일체의 지각 작용은 그것이 의식
되든 않든 간에 모두가 업의 소산인 것이다.
우리 내부로부터 어떤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하
여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지각들은 더
이상 결과를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그러나 우리
내부에서 반응을 이끌어 낸 지각들은 우리의 관심
을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행위를 위한 계기가 되며
이렇게 해서 업 짓는 과정은 거듭된다.
우리가 노력하기만 하면 어떤 대상이 지각을 통
해 우리의 마음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우리
의 마음이 즉각적으로 취하는 반응을 지켜볼 수
38

있다.
우리는 그 대상을 좋아하거나 아니면 싫어한다.
그 대상은 우리를 즐겁게 만들거나 슬프게 만든
다. 그 대상은 소유욕을 일으키기도 하고 남이 가
진 것에 대해서는 부러운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
다. 이러한 반응이 일어나면 대체로 실질적 조치
가 따르게 된다. 즉 우리는 그 원하는 대상을 획
득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에 수정을 가하게 되며,
못마땅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강구
하게 되며, 자기의 의도에 반하는 발언자를 침묵
시키기 위해 거친 말을 내뱉기도 한다. 거기까지
는 안가더라도 남들의 논란을 듣기만 하고 있을
경우에나, 어떤 사건을 지켜보고 있을 경우에도
그 사건이 자기와 개인적으로는 아무 관련이 없는
데도 마음속으로는 시비를 가리고 누군가의 편을
내면적 성향 39
들게 된다.
이 모두가 행위이며, 이 모두가 업이다. 이 모
두가 미래에 결과를 빚어 갖가지로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 지각의 모습을 덮어쓰고 우리에게 돌아
오게 된다. 이는 다시 우리의 미래의 삶에다 유쾌
하거나 불쾌한 조건들을 만들고 좋은 일이나 궂은
일들을 마련하게 된다.
40

업 지음을 멈추자면

이처럼 끝없이 무의미하게 이어지고 있는 현상


들의 변화무쌍한 연속적 윤회輪回가 참으로 허망
한 것인 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세심한 주의성에
힘입어 어떤 특정 순간에 어떤 특정 상황에서 그
연속을 중단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순
간만은 필시 우리를 윤회의 흐름에 들도록 몰아치
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즉 자동적으
로 조건 지어 나가는 윤회의 전개 과정을 두고 그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맹목적으로 우기는 짓
거리를 멈추게 되는 것이다.
업 지음을 멈추자면 41
이렇게 계속해 나아가면 마침내 우리는 자기에
게 일어나는 일이나 자기가 짓게 되는 일을 일일
이 공정하게 관찰하는 태도를 익힐 수 있다. 그래
서 우리는 주변 상황이 몰아치는 대로 정신없이
휩쓸려들어 자기 자신을 이 세상과 분리하여 고정
된 행동 중심체인 줄 착각하여 이 세상을 만족감
이나 채우는 데 쓸모 있는 정도의 한낱 이기적 활
동의 무대로 보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게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무
언가를 추구하기를 멈추게 되는 것이며, 무엇을
획득한다는 관념 심지어 자신을 위한 최상의 영구
한 행복이라는 관념마저도 버리게 되는 것이며,
아무런 결과도 기대함이 없이 오로지 빈틈없는 바
른 마음챙김[正念]의 관찰 태도를 견지하게 되는
것이다.
42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외면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존재인 인격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일
이 처음부터 곧바로 잘 되어 나가지만은 않을 것
은 당연하다. 이전에 하던 식으로 행동과 말, 느
낌 그리고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열심히 되풀이하
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라도 이를 지켜보겠다는 의도를 되챙기게 되면 적
어도 돌이켜 회상하는 식으로나마 이런 노력을 지
어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여했던 일을 돌이켜 회상하는 경우에
는 그 일이나 그 일에 있어서의 자신의 역할을 평
가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며 이 점 매우 중
요한 사항이니만큼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 일
들을 찬성해서도 안 되며 비난해서도 안 된다. 그
업 지음을 멈추자면 43
럴 경우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정신적 의지 행
위가 될 것이며, 새로운 업 짓는 활동이 된다. 따
라서 그 일들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더라도 그저
꼭두각시놀음을 보듯 이해관계를 떠난 눈으로 바
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노력해 나아가면, 곧 우리
는 단순히 지나쳐 놓고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이
번에 어떤 행위가 진행되고 있는 그 현장을 곧바
로 지켜보는 순간들이 가끔씩 있다는 것을 알아차
리게 될 것이다. 그런 때 그 순간들과 그 순간 동
안 우리가 취한 행동을 분석해 보면 우리들의 그
행동이 다음의 사실, 즉 우리가 이 행동을 알면서
하고 있었다는 사실, 우리가 그 행동에 대해 마음
을 기울여 지켜보고 있었다는 그 단순한 사실에서
44

깊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
다.
물론 어떤 일을 충분히 알면서 행할 때, 즉 자
신이 무언가를 행하고 있고 그 행하는 일이 어떤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 행동하고 있다면 결코
뒷날 후회하게 될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우리의 행동은 밖으로는 누구에게나 사심 없는 것
으로 비춰지게 될 것이고 또 안으로는 기쁨과 행
복을 구태여 찾고 싶지 않은 기분이 될 것이다.
가령 우리가 자기중심 성향을 조장시키게 될 어
떤 일을 막 시작하고 있거나 아니면 이익을 바라
는 마음에서거나 미움이나 선망 그 밖의 미혹된
마음에서 어떤 일을 하려들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업 지음을 멈추자면 45
에 때맞춰 빈틈없는 바른 마음챙김의 태도를 갖추
면 그 시작된 행동은 끝맺지 않은 채 멈추게 되는
것이고 시작하려던 마음도 미수인 채 남게 될 것
이다. 미혹된 마음 상태는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
갈 것이며 그 서서히 사라져 가는 모양을 우리는
지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관찰 태도는 점차적으로 더
깊어지고 더 넓어져 갈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 자
신이나 이웃들의 행태를 관찰하다가 나중에는 별
로 힘들이지 않고도 그 행태의 배후에 있는 동기
를 관찰하는 쪽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 관찰
은 어디까지나 관찰일 뿐 심판은 아니므로 남들이
취하는 행동에서 자기중심적인 숨은 동기를 보게
된다고 해서 이를 비난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46

오히려 그 때문에 그들이 맛보는 달갑잖은 귀결들


을 보면서 연민의 정을 금치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미망에 찬 행동과 의
도들이 나오게 된 참 동기를 보게 되면서 우리는
그것들을 더 이상 지속시키지 않게 된다. 왜냐하
면 이미 이들 행동이나 의도들이 전적으로 우리
것은 아니라는 것, 이들은 오히려 그 배후에 숨어
있던 동기들이 상황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튕겨져
나온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
다. 하지만 동기 그 자체는 무력한 것으로 어떤
힘도 지니고 있지 않다.
행위를 수행하는 힘은 오히려 우리가 그 동기에
관여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리고 우리가 그 동
기를 알고 있으면, 다시 말해 동기 자체를 관찰의
업 지음을 멈추자면 47
대상으로 삼고 있으면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게 된
다.
우리가 업의 법칙의 작용에 대해 실다운 통찰력
을 얻게 되는 계기는 바로 자기 내면에 들어앉은
것들을 주의 깊게 자각하며 지내는 그 삶의 순간
에 이루어진다.
바른 마음챙김을 잊고 있는 동안은 무자비하게
몰아치는 상황의 필연성에 쫓기며 사는 기간이고
마음을 챙기고 있는 동안은 자유의 문턱에 서 있
는 기간임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마음을 챙기는 공부를 지어나감으로써
이른바 업의 법칙이라는 비인격적 법칙에 따라 서
로 꼬리를 물며 이어져 나가는 정신적 현상들의
48

맹목적 흐름에서 헤어날 수 있다. 이 말을 바꿔


표현하면, 과거 업의 결과인 지각 작용에 뒤이어
기계적으로 맹목적인 반응이 나타나고 이 반응에
서 파생되거나 그 반응을 구성하는 부분으로 정신
적 의지가 생기고, 이는 다시 그 다음의 업보를
낳는 업력으로 작용하는 식으로 끝없이 계속되어
나가는 윤회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른 마음챙김 공부를 지어 나가면 우리들 존재
가 지니고 있는 맹목적 무지, 즉 존재[有]의 생성
과정 자체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도록 만드는 장
본이 되는 그 무지를 점차적으로 흩어버릴 수 있
으며, 따라서 보다 높은 인식에 점진적으로 접근
하게 된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불교 덕목 중 가
장 중요한 덕목인 지혜와 자비가 우리 안에서 발
업 지음을 멈추자면 49
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끊임없이 마음챙기기를 일상화
시키고 관찰하는 태도를 몸에 배게 했다 하여 반
드시 외부 활동을 모두 멈추고 절이나 은거 생활
로 들어가야 한다는 법은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가족들과 같이 살면서 알맞은 직업에 종사할 수
있다. 얼핏 보아서는 도대체 우리가 변화한 것 같
이 보이질 않을 것이다. 진실로 마음을 챙기고 있
다면 결코 남 보기에 기이하게 보이거나 이채로운
방식으로 남의 이목을 끌게 되는 따위의 짓은 하
지 않을 것이다.
다만 주의 깊게 살펴 볼 경우, 자신의 말씨나
행위가 보다 적절해졌고 동기 또한 비이기적인 면
50

모를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게 될 때 어떻게든 자기에게 이롭도록 하고 좀
더 정확히 표현해서 자기에게 이롭다고 믿어지는
결과를 얻으려고 행동하게 된다. 때때로 남들의
이익도 고려하긴 하겠지만 때로는 이기심이나 무
관심 때문에 그런 고려를 못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참된 인식이나 지혜를 지니
고 있지 못한 바로 그 까닭에 우리에게 해로운 일
을 오히려 이로운 것으로 아는 경우도 흔히 있다.
예를 들어 뜻밖의 결과를 가져와서 우리를 더욱
더 상황 속에 휘말려들게 만들고 그리하여 결과적
으로는 존재라는 조건 지어진 상태를 계속 연장시
업 지음을 멈추자면 51
키게 만드는 따위의 사건을 흔히 우리는 이로운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까다로운 상황에 처해서도
빈틈없이 마음챙기는 태도를 성공적으로 지속시
켜 낼 수만 있으면 자기중심적 동기에서 나온 행
동 욕구는 떨어져 나가게 되고, 따라서 미래에 업
보를 초래하게 될 근거를 마련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삶이란 결코 정지된 상태가 아니며 무위
도 아니다. 삶은 동적 과정이며, 정지하지 않는
것이며,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며, 개개인의 이기
적 활동에 부딪치면 보통 부적절한 방향으로 빗나
가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지만 삶은 본질적으로
조화로움을 지니고 자유를 지향하는 흐름이다. 갈
52

애 욕망 증오 따위들은 삶의 권속이 아니며, 단


· ·

순한 현상에 불과한 것들로 죽음의 영역에 속한


다.
우리가 의도했던 행위가 잘못된 것인 줄 알아차
릴 수 있게 되고 그래서 그 행위를 그만둘 수 있
게 되었다면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밖으로 사태
를 올바르고 조화롭게 타결하는데 필요한 외면적
행위나 말을 가려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와 같은 적절한 행동을 수행하
게 될 것이고 적절한 말을 하게 될 것은 당연하
다.
이런 것도 업 짓는 행위일까? 그렇지 않다고 나
는 생각한다. 이 행위는 남 보기에 비이기적 자기
희생적 이타적 행위로 비쳐질 것이고 그것은 보답
업 지음을 멈추자면 53
을 받아야 하는 선행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만
약 그 행동이 완전히 사심 없는 마음으로 단지 그
상황에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타당
하다는 순간적 직관에서 취해진 행동이거나 보편
적인 자비심에 기인한 행동이라면 이런 선행에는
보상 받기를 바라는 데서 오는 어떤 업 짓는 힘도
내포되어 있지 않다.
의도적으로 행한 선행과는 반대로 사심 없는 선
행에는 우리를 해방시키는 효과가 있다. 단 한순
간만이라도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만든다면
그 행동은 분명 해탈에 이바지한다.
다만 주의해야 할 일은 이 경우 혹시라도 자신
의 생각에 대해서 이를 부단히 챙겨 살피기를 등
한히 하면, 사변思辯이 갖고 있는 유혹적이고도
54

기만적인 힘이 우리를 휘어잡아 버려서 우리의 이


조그마한 자아가 어떤 보다 ‘큰 자아’, ‘뛰어난 자
아’, ‘보다 높은 자아’ 등등의 가면을 쓰고 나와 우
리를 속일 위험성이 많다는 점이다.
따라서 바깥의 긴박한 상황, 즉 우리 안에 있는
가장 강력한 성향을 촉발시켜 우리를 즉각적이고
맹목적인 반응으로 몰아치는 상황에 처해서도 혼
란되지 않은 채 순수한 마음챙김이 어느 일정 기
간만이라도 공고히 견지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언젠가 문득 자기가 지금 이 순간 해방되어 있다
는 것을 분명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
는 자기 내면의 성향이란 것이 자기 것이 아니며,
그 성향에는 ‘나’란 것이 없으며, 그 성향들이 자
기 안에 ‘자아’를 구축하는 것도 아니란 것을 분명
업 지음을 멈추자면 55
히 보게 된다.
소小자아든 대大자아든 그 순간엔 느껴지지도
경험되지도 않는다. 꼭 맞는 표현은 아니지만 그
것은 순수한 앎의 순간적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순간적인 해탈’이다.
시간이 경과하면 다시 ‘나’니 ‘내 것’이니 ‘자아’
니 하는 따위의 조건 지어진 개인적 삶의 과정이
도로 나타나겠지만 어쨌든 이 ‘순간적’ 해탈 속에
는 ‘온전한’ 해탈이 들어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은 아직은 다른 존재들보다 해탈에 더 가
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차이점
은 있다. 즉 새로운 업보를 더 이상 짓지 않거나
짓더라도 그 양을 줄여 나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과거 행위로부터 오는 업보가 환경
56

·사건 생각이나 착상에 대한 지각의 형태로 자


·

신에게 제기되어 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기에 그


는 언젠가는 마침내 이들 업보가 종식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 자아라는 실체가 해탈에 접근
해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주의해야 한다. 조
건 지어진 현상들의 연속적 일어남이 점차 끝나가
고 있을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조건 지어진 현상
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미혹된 짓을 이미 되풀이하
지 않기 때문에 그 현상들에 더 이상 생명을 부여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히 끝장이 나려면 어느
정도의 세월이 어쩌면 몇 겁의 세월이 걸릴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여기선 이미 시간은 아무런 의미
도 가지지 못한다.
업 지음을 멈추자면 57
물론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별다른 생각 없이
지은 선행들은 나름대로 선한 과보를 가져온다.
그 개인은 점차 좋지 못한 환경에서 빠져나오게
되고 그의 ‘운세’는 더욱 좋아진다.
불교에서 미래의 부처님들은 고귀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그러나 빈틈없는 마음챙김이 그 사람을 지켜주
기 때문에 그는 이익에 집착하거나 추구하지 않는
다. 다만 그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외적 이익을 가
끔씩 어떤 상황을 조화롭게 타결하기 위해서 쓰거
나 남들을 보다 나은 인식에로 이끌어 주기 위해
서 뜻있게 쓸 수 있다. 이런 일은 그가 통찰력이
늘다 보니 지혜로워져서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 대
58

한 사랑과 연민이 생긴 나머지 자연히 행하게 되


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안락한 외부적 환
경이 장애가 된다고 생각할 때엔 그것도 물리쳐
버린다. 또 이런 안락한 환경이나 심지어 남을 도
울 수 있는 여지마저 박탈당하게 되는 경우에도
그는 아무런 회한 없이 마음을 챙기며 여여如如할
따름이다.
이와 같이 바른 마음챙김[正念 sati] 공부야말로
어떤 상황에서도 현상들이 조건 지으며 연속해 가
는 것을 끝낼 수 있고 업 짓는 과정을 중단시킬
수 있는 길, 즉 해탈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저자 소개
카렐 베르네르Karel Werner
1926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고 1968년 영국으로 이
주하여 그 다음해부터 더럼 대학교Durham University에서
인도철학을 강의하였고 1988년 현재 런던대학교 명예교수
로 있다.
〈고요한소리〉에서 펴낸 책으로는 보리수잎 셋 《세상에 무 ·

거운 짐, 삼독심The Three Roots of Ill and Our Daily Life》


(BL No. 24, BPS)과 보리수잎 마흔하나 《동 서양의 윤
· ·

회관The Doctrine of Rebirth in Eastern and Western


Thought》(BL No. 100, BPS)이 있다.
〈 고요한소리〉는
• 근본불교 대장경인 빠알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
는 불사를 감당하고자 발원한 모임으로, 먼저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한 훌륭한 불서 및 논문들을 국내
에 번역 소개하고 있습니다.
• 이 작은 책자는 근본불교․불교철학 심리학 수행
· ·

법 등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연간


물連刊物입니다. 이 책들은 실천불교의 진수로서, 불법을 가
깝게 하려는 분이나 좀 더 깊이 수행해보고자 하는 분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이 책의 출판 비용은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이 보
내주시는 회비로 충당되며, 판매 비용은 전액 빠알리 경전의
역경과 그 준비 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됩니다. 출판 비
용과 기금 조성에 도움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며 〈고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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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한소리〉 책 읽기와 듣기는 리디북스RIDI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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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맑게 하는 〈고요한소리〉 도서

금구의 말씀 시리즈
하나 염신경念身經
소리 시리즈
하나 지식과 지혜
둘 소리 빗질, 마음 빗질
셋 불교의 시작과 끝, 사성제 - 四聖諦의 짜임새
넷 지금 여기 챙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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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참선과 중도
일곱 참선과 팔정도
여덟 중도, 이 시대의 길
아홉 오계와 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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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나 부처님 생애 이야기
열둘 진 선 미와 탐 진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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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넷 시간관과 현대의 고苦
- 시간관이 다르면 고苦의 질도 다르다
열다섯 담마와 아비담마 - 종교 얘기를 곁들여서
열여섯 인도여행으로 본 계 정 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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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일상생활과 불교공부


열여덟 의意를 가진 존재, 사람 - 불교의 인간관
열아홉 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 정견定見
스물 활성스님, 이 시대 불교를 말하다
법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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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구도의 마음, 자유 - 까알라아마 경
셋 다르마빨라 - 불교중흥의 기수
넷 존재의 세 가지 속성-삼법인(무상 고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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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한 발은 풍진 속에 둔 채
- 현대인을 위한 불교의 가르침
여섯 옛 이야기 - 빠알리 주석서에서 모음
일곱 마음, 과연 무엇인가 - 불교의 심리학적 측면
여덟 자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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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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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셋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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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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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불자의 참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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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둘 부처님이 세운 법의 도시 - 밀린다왕문경 제5장
마흔셋 슬픔의 뒤안길에서 만나는 기쁨
마흔넷 출가의 길
마흔다섯 불교와 합리주의
마흔여섯 학문의 세계와 윤회
마흔일곱 부처님의 실용적 가르침
마흔여덟 법의 도전 / 재가불자를 위한 이정표
마흔아홉 원숭이 덫 이야기
쉰 불제자의 칠보
단행본
붓다의 말씀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보리수잎․열
업에서 헤어나는 길
년 11월 10일 1판 1쇄 발행
1988
년 4월 20일 2판 5쇄 발행
2020

지은이 카렐 베르네르
옮긴이 김봉래
펴낸이 하주락 · 변영섭
펴낸곳 (사)고요한소리
출판등록 제1-879호 1989. 2. 18.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 47-5 (우 03145)
연락처 전화 02-739-6328, 725-3408 팩스 02-723-9804
부산지부 051-513-6650 대구지부 053-755-6035
대전지부 042-488-1689
홈페이지 www.calmvoice.org
이메일 calmvs@hanmail.net
ISBN 978-89-85186-13-1

값 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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