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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역하렘 게임 속 악마들이 내게 집착한다 001 120
19 역하렘 게임 속 악마들이 내게 집착한다 001 120
프롤로그
갈기갈기 찢어진 새하얀 네글리제가 바닥에 나뒹굴고, 가느다란 나신이 달빛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율리아는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는 거대한 창문 앞에서 뒤돌아섰다.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르고 둥근 어깨, 봉긋하게 부푼 유방과 파르르 떨리는 젖꼭지, 잘록한 허리를 지나서 다리 사이의 깊고
축축한 곳까지. 악마의 시선은 마치 손길처럼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헤집었다.
율리아는 그제야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는 악마들의 왕, 바엘이었으니까. 절망한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내려앉은 악마는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율리아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지만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녀의 머리채가 강한 힘으로 붙들렸다.
"흣, 흐윽……."
"아, 아!"
손가락이 들락거릴 때마다 율리아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바엘의 손이 움직이는 모양은 명백히 페니스를
닮아있었다. 굵은 손가락이 내벽을 긁고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절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뱃속이
저릿저릿 뜨겁게 욱신거렸다.
"흐응, 아앙!"
구멍에 들어간 손가락은 어느새 네 개로 늘어나 있었다. 바엘이 손가락을 크게 벌리자 투명한 액체 방울이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흘렀다. 보기 드문 절경이었다.
바엘은 손을 빼내어 그녀의 애액을 제 성기에 치덕치덕 문질렀다. 팔뚝만큼 부풀어 올라 핏줄이 툭 불거진
페니스가 고개를 들이밀 구멍을 찾아 무섭도록 꺼떡였다.
"안 돼, 아, 싫어!"
"이미 늦었어."
입꼬리를 비튼 바엘이 율리아의 무릎 안쪽을 하나씩 붙잡아 들어 올렸다. 그녀의 허벅지가 저항할 새도
없이 활짝 펼쳐졌다.
액으로 범벅된 질구가 삼킬 것을 찾아 음란하게 벌름거렸다. 그 모습을 발견한 바엘의 머릿속에 여유가
사라졌다. 그는 율리아의 입구를 제 선단에 맞춘 뒤 곧장 내리꽂았다.
"아, 아앙!"
* * *
바야흐로 인간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이었다. 웅장하고 적막한 홀에 또각또각, 절제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마들의 형형한 눈동자가 소리의 근원을 향해 느릿하게 옮겨 갔다.
나태하게 늘어져 있던 공기가 대공의 한마디에 급변했다. 수많은 안광이 깜빡임도 멈춘 채 그녀를
직시했다. 고개를 든 아가레스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
아가레스의 말에는 '인간들의 수도 아벨딧심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라는 부분이 생략되어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책사 바르바토스가 왕을 대신해 제동을 걸었다.
"차후의 일을 생각해."
"난 그딴 거 모르겠는데?"
바르바토스를 노려보는 아가레스의 시선엔 명백한 적의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마왕에게 군 통수권을
위임받아 최전선에서 마군을 이끌었다. 적인 인간의 편을 드는 듯한 바르바토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주군, 마침 전황이 인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이쯤에서 우리 마족의 자비를 보여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
"베리드가 인계의 정보에 능하니 그를 사자로 보내시지요. 브에스드라에서 황녀를 내놓는다면 그 성의를
보아 전쟁을 종결하겠다고 말입니다."
까닥까닥, 나태하게 늘어진 자세로 턱을 괴고 있던 사내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칠흑의 긴 머리칼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단순한 행동일 뿐이었는데도 거대한 홀에 강력한 마력의 파장이 밀어닥쳤다. 왕의 심기가 썩 좋지 않음을
깨달은 아가레스와 바르바토스가 다급히 부복했다. 동시에 한 악마가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최고급
원단으로 지은 로브가 그의 조각 같은 근육을 빈틈없이 감쌌다.
뱀처럼 날카로운 동공이 넓은 홀을 천천히 훑었다. 왕의 시선을 받은 모든 마족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묵중한 위압감이 그들을 지배했다. 피할 수 없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어깨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이것이 유례없이 강대한 마력으로 지하를 통일하고 이제는 마신의 지위까지 넘보고 있는 마왕 바엘의
권능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주군."
"……젠장."
조만간 원정군이 귀환할 거라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백성들의 얼굴에 희망이
깃들었다. 피 튀기는 전쟁터에 동원된 이들은 누군가의 부모, 형제, 혹은 자식들이었다. 그들을 보내
놓고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었던 사람들은 원정군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렸다.
양손을 결박당한 그녀는 펄펄 끓으며 매캐한 증기를 내뿜는 용암 앞에서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녀가
저항할수록 창을 든 기사들은 더더욱 그녀를 궁지로 몰아세웠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모두 제국의 평화를 위한 일입니다. 계속 저항한다면 억지로라도 집행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부러질 듯 연약한 몸에는 이미 수많은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국경까지 끌려오는 동안 도망치려
저항하는 과정에 생긴 것이었다.
날카로운 창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 왔다. 하지만 그녀를 겨누는 사내들의 얼굴엔 일말의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 혹은 필요 없는 쓰레기라도 버리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 희망을 포기한 그녀는 눈을 감았다. 강한 힘으로 떠밀린 몸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게임은 주인공 에스델의 열여덟 살 생일에서부터 시작한다. 탄신연이 끝나고 내궁으로 돌아온 황제와
에스델에게 한 악마가 찾아와 제안한다.
이후 그녀는 '19 금 피폐 역하렘'의 이름값을 다하듯 마계의 잘생긴 악마들과 이런저런 거사를 치르며
육체적 쾌락에 눈을 뜨는……. 대충 그러한 내용이었다고 기억한다.
'황궁에 고귀한 손님이 들었으니 방 밖으로 나오지 말라'거나, '돌아가신 황후 폐하의 기일이니
경거망동을 삼가라'거나, 심지어는 '폐하께서 노하셨으니 삼 일간 금식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곤
정말 아무것도 안 줬다. 힘겨웠던 과거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처절한 대우였다.
'난 반드시 궁을 빠져나갈 거야. 외국으로 도망가서 조용히 평화롭게 살아야지.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돼. 괜찮아…….'
가서 에스델인 척을 하든 아니면 마족을 유혹해 목숨을 건지든 인간계에 해 끼치지 않도록 조용히
처신하라는 황제의 말에, 율리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뒤돌아 나가는 그녀를 보던 황제의 눈빛엔 속 시끄러운 것 하나 처리했다는 후련함이 가득했고, 에스델은
평소처럼 그녀를 하잘것없는 개미 보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2화
아득히 높은 곳에서 내던져진 부유감과 귓가를 스치던 바람 소리, 온몸을 집어삼킨 뜨거운 열기가 아직도
생생했다.
'익숙한 배경…….'
머리맡에는 두툼한 사슬이 치렁치렁 걸려 있었는데, 그것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딱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불안한 눈동자가 테라스 창 너머 어두운 밤하늘로 향했다. 핏빛의 커다란 보름달이 마계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늘 화려하게 빛나던 브에스드라 황궁과는 전혀 다른 음산한 분위기에, 등골에
오싹한 기운이 타고 올랐다.
힘없이 눈꺼풀을 내리깐 율리아는 세운 무릎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심장이 따끔따끔 옥죄었지만, 그녀는
홀로 인내하듯 그저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그녀가 아니란 걸 들켰다간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할 거다. 마정석의 진짜 열쇠인 에스델조차
악마들에게 온갖 처참한 짓을 당하며 정신이 무너져 내렸는데, 가짜의 목숨 따윈 그들의 안중에도 없을 게
분명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열쇠를 얻었는데 왜 당장 탑으로 보내지 않는 거야? 한시라도 빨리 마정석의 봉인을
풀어야지!"
"열쇠가 이상한데?"
"……!"
성큼성큼 걸어온 레라지에는 그녀가 목숨줄처럼 붙들고 있던 시트를 한 손으로 잡아 걷어냈다. 율리아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악마의 힘에는 당할 수 없었다. 사실 가느다랗고 연약한
그녀의 몸은 악마가 아니라 누구의 힘도 당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형에게서 율리아를 빼앗은 레라지에가 다시금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살폈다. 설익은 과일처럼 엷은 빛을
띤 머리카락이 그의 손길에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저, 저는 정말로……."
"마정석 앞에 세워 보면 확실해지겠지. 당장 따라와."
"인형이라니……."
마신의 탑 최상층에 도착한 에스델은 두 마족에 의해 수정구가 봉인된 공간 안으로 억지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마정석이 내뿜는 마력은 너무도 강력해서 아직 '열쇠'로 개화하지 않은 인간의 몸으로 버틸
수 없었고, 그대로 실신하여 목숨만 간신히 건지게 된다.
'죽고 싶지 않아…….'
저도 모르게 레라지에의 옷자락을 움켜쥔 율리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가녀린
모습에 측은지심이라도 느낄 법하건만, 레라지에는 율리아 쪽에서 매달려 오는 게 즐거운 듯 그녀를 잡은
손을 느슨하게 풀기까지 했다.
레라지에가 마찬가지로 창틀을 넘어 뛰어내리자 율리아의 공포는 절정에 달했다. 아득히 먼 땅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악마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직 하나만을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마신의 탑에 도착하고, 두 마족이 맥동치는 마력에 힘겨워하며 계단을 오르고,
마침내 위대한 제단 앞에 설 때까지도 온전히 레라지에의 목에 매달려 있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율리아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었다. 그녀의 눈앞엔 어느새 짙은 보랏빛의 거대한 구체가 웅웅 소리를
내며 발광하고 있었다.
태양을 직접 보면 눈이 멀어 버리듯, 율리아 또한 엄청난 파장을 내뿜는 그것을 오래 보고 있기가
힘겨웠다.
"어라, 형……."
"보고 있다."
어색하게 선 율리아의 귓가에 조금 아연한 듯한 신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그들을
돌아보았고,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아챘다.
기억 속 모습과 같았지만, 단순히 모니터 너머로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마치
태초의 자연 앞에 선 듯, 무한한 경외심이 율리아의 다른 모든 감정을 집어삼켰다.
3화
한편 바닥엔 마신의 힘을 억제하기 위한 광활한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것은 수정구가 점멸할
때마다 그에 맞춰 온갖 색으로 발광했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님에도 마정석의 힘을 억제하기 힘겨워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수십 수백의 기회를 날린 끝에 처음으로 성공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자신들의 위대한 주군을
마침내 마신으로 만들 기회가!
모든 인간을 미물처럼 취급하는 부분에서는 여전히 같았지만, 최소한 마신의 탑에서 내려와 이동하는 내내
그녀의 육체가 손상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쓰는 걸 잊지 않았다.
"너무해요……."
처음 깨어났을 때의 방으로 옮겨진 율리아는 삽시간에 씻기고 빗기고 입혀졌다. 마계에 떨어진 이후 줄곧
엉망이었던 그녀의 몰골이 비로소 사람 꼴을 찾았다. 그녀를 직접 꾸민 레라지에는 물론이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바르바토스조차 멈칫할 정도였다.
"이게 아까 그 열쇠라고."
"큭큭, 대단하지?"
그녀에게 입혀진 드레스는 온통 새카만 색이었다. 하지만 섬세한 레이스와 화려한 보석을 아낌없이 퍼부어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치맛자락이 몸에 사르르 감겨왔다. 게다가 칠흑 같은 원단이 그녀의 새하얗고
연약한 피부와 무척 잘 어울렸다.
"……."
자신은 열쇠가 아니고 인형은 더더욱 아니라고 당당히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율리아의 간은
여전히 콩알만 했고, 두 마족의 기세는 하늘을 뚫을 듯 대단했다.
바엘은 혼란하고 무질서하던 지옥을 그의 이름 아래 완전히 개편할 정도로 강하고 잔혹했다. 그럼에도
그의 욕망은 끝을 모르고 내달려 인-마 전쟁을 일으켰고, 동시에 지옥의 심연에 묻혀 있던 마정석을
발굴해 내 그 강대한 힘을 곧장 삼키려 시도했다.
마정석엔 고위급 악마인 바르바토스와 레라지에조차 제대로 버티기 힘들 정도로 강대한 마신의 힘이
잠들어 있었다. 바엘은 그 앞에 온전히 설 수 있었으나, 힘을 흡수하는 일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 그
반작용으로 되레 끔찍한 마력 폭주를 겪어야 했다.
실패의 대가는 매번 다르게 나타났다. 단발적으로 그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는 날뛰는
마력을 주체하지 못해 주변 일대를 삽시간에 황폐화시켰다.
폭주하는 그를 곧장 마주했다간 제아무리 고위급 악마라도 무사히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마족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그들은 왕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가장 고귀한 인간'을 열쇠로
삼으라는 옛 기록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아가레스가 찾아."
"왜?"
"……복잡하게 됐군."
[▷바르바토스
이렇게 인물의 생각이 지문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탓이었다. 걷거나 이동할 때는 시야에 방해가 되기
때문인지 사라졌지만 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 보면 도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구석에 SKIP 버튼이 있기는
했지만, 율리아는 아직 그것까지 조작할 여유가 없었다.
"어쨌든 주군의 명이다. 열쇠를 가져가되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지키는 것으로 하지."
[▷레라지에
하지만 아래에 떠오른 창을 보니 그 미소가 아름답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날름 가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무서워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다행히 성 안에서만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율리아는 레라지에에게 아등바등 매달리지 않고
두 다리로 직접 이동할 수 있었다. 악마들의 키가 훤칠하게 큰 탓에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거의 뛰어야
했지만 말이다.
한참을 걸은 세 사람은 거대한 기둥이 줄지어 늘어선 웅장한 회랑 입구에 도착했다. 형제가 먼저 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높고 날카로운 외침이 고막을 찔렀다.
"내가 직접 보지."
호리호리하고 탄탄한 몸매를 검은 군복이 빈틈없이 감쌌다.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높이 묶고 허리엔 검과 채찍을 찼다. 그녀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어깨의 견장이 규칙적인
금속음을 내며 흔들렸다.
"흠."
"……."
"과연, 알겠다."
스치듯 찰나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아가레스는 무엇을 본 걸까, 율리아와 마주친 그녀의 두 눈엔 명백한
호의가 깃들어 있었다.
[▷아가레스
이 인간, 뭐야? 너무 귀여워. 진짜 사랑스럽잖아? 내 침대에 눕혀 놓고 발가락 하나하나까지 쪽쪽
빨아먹고 싶어.]
그는 마정석을 삼키려다 실패할 때마다 심각한 마력 폭주를 일으켜 주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그렇게
매번 성이 폐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위급 마족들이 나서 방어막을 걸곤 했는데, 마계의 이인자가
직접 나설 정도면 이번 폭주 규모는 상당히 큰 듯했다.
"……."
4화
그녀는 원작에서 보았던 에스델과 마왕의 첫 대면을 떠올렸다. 그때의 마왕은 오늘처럼 심각한 폭주
상태가 아니었는데도 강력한 마력을 드러내 주인공을 반죽음으로 만들었다. 그만큼이나 '열쇠'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의미였다.
"주군, 바르바토스입니다."
"……."
쨍그랑!
방 안에선 허락의 말 대신 무언가 깨지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바르바토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뒤돌아섰다.
"허락하셨으니 들어가지."
"허락이요? 저, 저게요?"
"들어가겠습니다."
"으읏!"
돌풍과 같은 마력이 끊임없이 밀어닥쳤다. 율리아의 긴 머리칼이 난폭한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
마구 흩날렸다.
"형, 빨리!"
두 형제의 손아귀에서 크기를 키운 어두운 구체가 블랙홀처럼 마력의 파장을 안으로 빨아들였다. 돌풍의
강도가 조금이나마 약해진 사이, 율리아는 다급히 정신을 차리고 문 안쪽을 훑어보았다.
[▷바엘
"주군, 힘듭니다."
"……."
"앞서 보고받으셨겠지만, 이번 열쇠는 진짜일 확률이 높습니다. 마정석 앞에서 이처럼 멀쩡하게 살아남은
인간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큭, 주군!"
[▷레라지에
레라지에의 생각을 본 율리아는 두려움에 양손을 꼭 붙들었다. 고위 악마인 그가 이토록 힘겨워할 정도면
자신도 곧 같은 꼴이 될 게 뻔했다. 자신은 주인공인 에스델이 아니니까,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을지
몰랐다.
저벅저벅.
[▷바엘
"대답해."
"……네?"
'아.'
레라지에의 외마디 비명이 무거운 침묵을 깼다. 바엘은 그녀를 내던지다시피 놓아주며 마른세수를 했고,
대신 다급히 일어난 아가레스가 휘청거리던 율리아를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챘다.
"그, 그게……."
"예, 주군."
"그게……."
"먹으면 되지 않을까?"
"뭐?"
"일리가 있군."
"방금도 보셨지 않습니까! 간신히 찾아낸 열쇠입니다.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기회일 수 있는데,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내 앞을 막은 건가?"
모두의 시선이 일순 율리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레라지에, 아가레스, 바르바토스가 차례로 발언했다. 정기를 빼앗기는 당사자인 율리아의 의사는 그다지
중요치 않은 듯, 그들은 일제히 주군의 허가를 구했다.
"싫은데."
당연히 누구라도 허락하겠지. 바엘의 입장에선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인……. 음?
두려움에 머리를 헝클이던 율리아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바엘의 대답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어쩌면 너무 무서워서 가는 귀 먹은 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주군, 어째서죠?"
"마음에 차지 않는군."
[▷아가레스
[▷바엘
율리아는 혹시나 마왕의 생각을 알 수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바엘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5화
"내키지 않아."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좋았다. 그에게 식사 당하든 색사 당하든 어느 쪽이든 싫었기 때문에 율리아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치가 싹 증발한 기색인 레라지에는 점점 갈수록 싫은 안을 내놓았다.
"뭐?"
본론은 마지막 문장에 있는 듯했지만, 어쨌든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여겼는지 나머지 두 악마가 동조의
빛을 내비쳤다.
'언제는 내가 죽지 않게 지켜 주겠다며!'
율리아는 기본적으로 소심한 성격이었지만 그렇다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까지 일관적이진 않았다.
와장창 깨져 나뒹굴던 마력의 파편과 폐부를 짓누르던 묵직한 공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바엘은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그의 붉은 눈만큼은 율리아에게 정확히
고정되어 있었다. 겁먹은 그녀는 어깨를 바짝 웅크린 채 바닥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자신을 얼마짜리 인간으로 품평했을까. 진짜 열쇠인 에스델처럼 고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잉그렘
5 세의 정부들처럼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도 않다. 바엘의 눈엔 분명 기가 찰 정도로 볼품없어 보였을
터였다.
"좋아, 인간."
"……."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말해."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기에 사실은 어떤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분명 그랬다.
"……."
'아, 맞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STATUS (스탯)
▷PROGRESS (진행도)
▷SKILL (스킬)
▷ITEM (아이템)
▷SETTING (설정)
▷HP (체력)
▷REP (항마력)
▷LUK (행운)
▶SIGHT (시야)
물론 일반적인 게임과는 다른 요소도 존재했다. 다수의 캐릭터를 원하는 만큼 공략해서 역하렘 엔딩을 낼
수 있다는 점, '마정석의 열쇠'라는 메인 에피소드와 완전히 동떨어진 독자적인 전개가 가능하다는 점,
19 금 피폐 장르에 걸맞게 고어한 에피소드와 엔딩이 상당히 많다는 점 등이었다.
게임의 자유도가 높고 세계관이 방대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들인 자본도 대단했는지 그녀가
추천받기 전에도 각종 매체에서 연일 광고를 내보내곤 했다.
▷STATUS (스탯)
▶PROGRESS (진행도)
▷SKILL (스킬)
▷ITEM (아이템)
▷SETTING (설정)
'진행도……?'
[▷SYSTEM
'바엘이라니, 어째서?'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다른 인물의 지문은 제대로 뜨는데 바엘만이 가려진 채 표시되었고,
폭주하는 마력에 세 악마가 속절없이 쓰러질 때도 자신은 그가 내뿜는 위압감이 두려웠을 뿐 그 이상의
고통은 느끼지 못했다.
[▷REP (항마력) : ∞]
"윽, 크윽……."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그녀는 재빨리 화면을 종료하고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누군가 들어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소파에 기대어 짧은 잠을 청하던 바엘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빛이 번져 가고 있었다.
마신이 되기 위해 마정석에 무한히 부딪힌 대가였다. 바엘의 내부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마력이 마정석의
파장을 버티지 못하고 날뛰며 그를 지독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는데 마음이 무거워졌다. 화면 너머도 아니고, 눈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누군가가
이토록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파도와 같은 괴로움을 홀로 견뎌 내고 있었다.
죽기 전에도, 그리고 죽어서 게임 속으로 끌려온 뒤에도. 자신이 아파할 때 챙겨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늘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모든 고통을 삭여야 했다. 며칠이고 몇 주고, 겉으로라도 대충 괜찮아 보일
때까지. 적당히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바엘이라면 지금도 충분히 만족할 텐데. 그토록 강하면서 왜 자꾸 마신의 힘을 갈구하는 걸까.'
왜인지 만족스러운 듯한 한숨이 그녀의 귓가를 뜨겁게 간지럽혔다. 반면 율리아의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섞였다.
'어떡하지. 자세가…….'
6화
감히 누구도 넘보지 못할 가장 강대한 마력을 지녔고, 그 때문에 혼란스럽던 마계를 단번에 점령한 뒤
고대의 마신이 잠든 탑 바로 옆에 거대한 둥지를 세웠다. 혹자는 그것을 마왕성이라 부른다지만 바엘에겐
그저 잠시 머물다 떠날 의미 없는 자리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왕 놀이를 할 생각도 없었다. 마계 각지를 주름잡던 악마들이 바엘의 강대한 힘에 이끌려 그의
둥지에 제멋대로 모여들었던 것뿐이다.
정작 그가 지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강대한 마력을 지닌 탓일까, 지옥의 변두리에서 태어나 자아를 갖게 된
시점부터 그는 늘 괴로웠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면 주변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완전한 무(無)의 상태. 바엘이 폭주에서 깨어나면
으레 맞이하던 모습이었다.
'오늘따라 이상하군. 상태가 썩 나쁘지 않은데.'
그의 낮은 중얼거림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율리아가 가느다란 신음을 냈다. 바엘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툭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기지도 않는 짓을."
* * *
"흐응……."
혼곤함에 고개를 내젓던 그녀의 뇌리에 이번엔 다른 기억이 스쳤다. 이를테면 어젯밤 바엘에게 붙들려
그의 허벅지에 올라탄 것이나, 자신은 그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한 적이 없다거나, 지금은 이미 해가
중천에…….
"어, 어?!"
"드디어 깼네?"
"아, 안녕하세요."
"네에……."
"내 이름은 키마리스. 너를 완전한 열쇠로 만들 때까지 옆에서 잘 지켜보라는 명령을 받았어. 앞으로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을 테니까 편하게 불러."
지금의 그는 마계의 악마들 중 그나마 상식인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저 모습은 꾸며 낸 것이다. 그의
내면엔 다른 악마들 못지않은 끔찍한 광기가 숨어 있었다.
"그럼 저는……."
언젠가 다시 땅 위로 돌아갈 수 있나요. 열쇠의 역할을 끝내고도 제가 살아 있을 수 있다면.
단 하나뿐인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이건 분명 함정일 터였다. 앞으로 그가 자신의 앞에서
가면을 벗을지 말지 선택하는.
"일? 일이라고?"
"요리라든가."
율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게임에서 악마들이 식사하는 모습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지만, 말만
들어도 인간처럼 평범한 걸 먹지는 않을 것 같았다.
"청소……."
"이래도?"
"마왕성은 주군께서 그분의 마력으로 직접 세운 요새 겸 둥지라서, 이렇게 조금만 손보면 태초에 지어진
모습대로 돌아가거든. 할 수 있겠어?"
"아뇨, 저는……."
"아마 너랑 이야기도 잘 통할 거야. 레벤나는 인형처럼 예쁜 걸 좋아하거든."
* * *
악마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이목을 끄는 외모를 지녔지만, 눈앞의 이는 어떤 말로도 그 화려한 미모를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눈부시도록 채도 높은 금발이 파도치듯 내려오고 커다란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났다. 일반적인 사람은 그
무게를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프릴과 레이스가 그녀의 드레스 한 벌에 쓰였다. 매달린
보석의 크기도 마찬가지였다.
"들켰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쨍하고 카랑카랑한 편이었는데, 묻는 듯 말꼬리를 조금 올리는 독특한 말투와 합쳐지니
귀엽다기보다 되레 귀족적이고 우아하게 느껴졌다.
웬만해선 상대를 외양으로 평가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레벤나의 방은 주인의 눈부신 외모에 걸맞게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어딘지 모르게 한때 율리아가 부러워하던 에스델의 호화로운 침실을 연상시키는
것도 같았다.
7화
"으음, 손님맞이가 영 부실하네? 잠시 기다리렴?"
"저는 괜찮아요!"
"옷이 불편하지 않니? 분명 레라지에의 짓이겠지? 센스도 없어서는, 무조건 까맣고 반짝이면 예쁜 줄
안단다. 까마귀도 아니고."
"아, 아니에요."
긴 속눈썹을 팔랑인 그녀가 손가락을 우아하게 내저었다. 그러자 율리아가 입고 있던 옷이 어느새 산뜻한
하늘색 원피스로 바뀌었다. 손끝에 닿는 원단이 무척이나 부드럽고 몸에도 딱 맞아서, 솔직히 방금까지
걸쳤던 치렁치렁한 드레스보다 가볍고 편했다.
테이블에 앉은 레벤나가 자연스럽게 반대편을 손짓했다. 율리아가 앉자마자 그녀는 차를 따르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
"나는 이제껏 수많은 인간 열쇠를 봐 왔어. 하나같이 절망하거나 벌벌 떨며 저주를 퍼붓기도 했단다. 네
입장에서도 이곳에서 지내는 게 썩 달갑지는 않겠지?"
율리아가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자 그녀는 이런 분위기를 만들려는 게 아니었다는 듯 재빨리 주제를 돌렸다.
"짐승이라면 혹시 마수인가요?"
"일단 마계에 사는 짐승이니까 마수라고 불러 줘야지? 하지만 인간들의 고정 관념처럼 무조건 사나운 건
아니야. 게다가 시키는 대로 축사에 얌전히 갇혀 있는 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것들뿐이란다?"
"네에……."
"그럼 결정이구나?"
그녀가 아까처럼 손가락을 내젓자 율리아의 시야가 점멸하듯 일그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마왕성 한쪽의 축사 입구에 서 있었다.
* * *
꼬르륵.
놀이를 빙자해 하릴없이 끌려다니던 율리아가 밧줄을 놓쳤다. 그러자 신나게 놀던 어린 늑대가 힘에 못
이겨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낑!"
"미안해. 잠깐 힘이 빠졌어!"
'배고파…….'
그녀가 힘없이 어깨를 떨구는데 뺨에 축축하고 뜨끈한 것이 와 닿았다. 방금까지 놀던 새끼 늑대가 기대감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 보며 바짝 엎드렸다. 이것 또한 색다른 놀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마주한 온기였다. 율리아는 부디 거부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늑대를
끌어안았다. 아직 어리다지만 품에 가득 차는 부피감이 그녀의 허한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 주었다.
"킹?"
레벤나가 말하길 이곳은 갓 태어난 짐승들이 지내는 축사라고 했다. 그럼 저 낙타도 어린 마수란
뜻이었는데, 만약 저대로 멀리 나가 해코지라도 당한다면 기껏 믿고 맡겨 준 레벤나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녀는 원반을 내려놓고 낙타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율리아의 머리카락이 순간
쭈욱 당겨졌다.
"키잉, 킹!"
"어어……."
"캉캉!"
돌아보니 어린 늑대가 그녀의 머리칼에 와락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이 꼭 가지 말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것 같아서, 율리아는 쩔쩔매며 녀석에게 물린 머리칼을 붙들었다.
"크응!"
"이, 이것 좀 놓아줘."
"크으응!"
나름대로 강도를 조절하는지 아픈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덩치가 있다 보니 율리아는 늑대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나폴나폴 휘둘렸다. 입에 머리카락을 잔뜩 문 탓에 제대로 짖지도 못하면서, 늑대는
아예 발라당 누워 흙바닥을 마구 뒹굴었다.
"착하지? 금방 올게."
율리아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풀을 뜯던 낙타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고
커다란 눈을 멍하니 끔뻑였다.
"빼애애애액……."
"어라."
"메에에에엑……."
율리아는 낙타가 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생각해 보면 성대가 있으니 소리는 내겠지만 이건
예상 밖의 독특함이었다. 사이렌이 길게 늘어지는 소리와 비슷할까.
그녀는 근처에 우거진 풀을 잡아 뽑아 천천히 흔들었다. 그러자 낙타의 촉촉하고 기다란 혀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화악-!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기운을 들이마신 낙타가 삽시간에 거대한 근육질의 흑마로 변했다. 율리아보다
눈높이가 몇 배나 높은 흑마는 그녀의 뒷목을 물어 허공에 내던졌다. 너무 놀라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읏……!"
"히이이잉!"
"머, 멈춰!"
그녀의 애처로운 비명은 세찬 말발굽 소리에 가려졌다. 갈기를 꽉 움켜쥔 채 고개를 웅크렸지만, 숲의
날카로운 넝쿨과 나뭇가지가 그녀의 여린 살갗을 마구잡이로 할퀴었다.
말이 왜 갑자기 나타난 건지, 어째서 이렇게 흥분한 건지, 어디로 가는 건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마왕성을 둘러싼 숲을 가로질러 맹렬히 질주할 뿐이었다.
당황한 그녀의 의문에 답하듯, 마왕성의 거대한 첨탑이 등 뒤로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모습을 감췄다.
이젠 자신이 달리는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길이 점점 험해지더니 이내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은 완전한 황무지로 변했다.
"크르르릉……."
"인간의 냄새다."
"저쪽에서 포위하자고."
"잡아, 킥킥."
섬뜩한 예감을 느낀 그녀가 입술을 사리문 그때였다.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흑마가 갑자기 앞발을
치켜들며 날뛰었다.
"히이이이잉!"
"꺄악!"
8화
"읏! 흐윽……."
"여리고 미성숙한……."
몸의 반쪽은 짐승, 반쪽은 어설픈 사람의 형태를 갖춘 악마들이 율리아를 보며 짙은 점액질의 타액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저를 응시하는 시선들로부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악마들이 모여드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광기로 물든 안광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녀를 찢어발길 듯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누, 누가 도와줘…….'
차디찬 눈이 펑펑 내리던 한겨울, 그녀는 시골 보육원 앞에 버려져 있었다. 자라면서 늘 곤궁했던 보육원
사정을 도우려 밤엔 일을 하고 학교에선 지쳐 쓰러지듯 잠들었다.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늘 주변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고 자랐다. 버스도 제대로 다니지 않는 변두리
마을이다 보니 사람들은 알음알음 서로의 사정을 전부 알았고, 그렇게 그녀가 부모 없는 고아란 사실은
온갖 자극적인 헛소문과 더해져 까발리듯 퍼뜨려졌다.
하지만, 하지만…….
고작 에스델의 대용품이 되기 위해서? 일상이 따분하고 심심한 악마들 사이에서 장난감처럼 굴려지다가
죽기 위해서?
"흑, 흐윽."
사실은 그래도 살고 싶었다. 진창 속에서 구르고 비참한 기억에 짓눌리더라도, 결국엔 넝마처럼
버려지더라도. 그래도 살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그녀의 입에서 오열 섞인 비명이 터졌다.
시야가 차단됐어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까맣고 역겨운 피, 도축당하는 짐승의
처절한 울부짖음, 폐부에 훅 끼쳐 오는 비릿하고 불쾌한 죽음의 냄새.
"……."
한참을 부서지고 터지는 끔찍한 소리만 들리던 주변에 불현듯 적막이 찾아왔다. 그것이 되레 섬뜩해
심장이 미친 듯 달음박질쳤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숨어 있는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선명한
시선을.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누군가
억지로라도 알려 주길 바랐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알 수 있는데도, 새하얗게 굳어 버린 머릿속엔 온갖
끔찍한 상상이 날뛰었다.
지그시 사려 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녀는 이윽고 마음을 다잡았다. 나직이 심호흡한 율리아가
저를 덮은 칠흑의 장막을 들어 올렸다.
"흡!"
바엘은 저를 향한 시선을 알아챘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넌 좀 닥쳐."
"아가레스 님……."
"절대 곱게 안 죽일 줄 알아."
"누구를……?"
"……."
"주군!"
"쯧, 짜증 나게."
* * *
"그래도 열쇠는 뭐, 나쁘지 않지. 식욕 돋을 정도로 귀엽고. 감시하는 겸사겸사 좀 손댄다고 닳기야
하겠어?"
그때마다 주군은 심히 불쾌해하며 마계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의 둥지에 72 위까지의 마족만 기거할 수
있는 건 그러한 이유도 숨어 있었다. 웬만한 마력으론 왕의 분노를 버텨 낼 수 없었다.
'덕분에 주군의 기분도 좋아 보였지. 별다른 말씀은 없었지만, 마력의 파장부터 평소와 다르게
차분하던데.'
열쇠가 없었다.
9화
"네가 직접 말해."
"……."
"열쇠를 빼돌렸습니다."
하지만 레라지에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날카로운 굽으로 그의 머리를 짓밟아 저항하지 못하게 막은 뒤
그의 옷을 찢어발기듯 헤쳤다. 그의 가슴팍이 완전히 드러나자, 그제야 레라지에는 만족스러운 듯 그의
머리채를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혼자 한 일 아니잖아?"
"……."
우둑, 뚜두둑.
억지로 열린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그는 반대편 손까지 동원해 키마리스의
가슴팍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그제야 의아한 얼굴을 하던 마족들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낮은 비소를 머금은 목소리가 두 악마의 입을 다물게 했다. 바엘은 일말의 소란에도 처음부터 태연자약한
낯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예?!"
"……."
제 손을 내려다보는 바엘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난폭한 마력의 파장이 거대한 홀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대공 아가레스가 나섰다.
"건방진……."
남은 악마들은 마왕성에 불어올 파란을 예감했다. 하지만 그들조차 몰랐던 사실이 있었으니, 오늘의 일을
기점으로 마계의 질서가 완전히 새롭게 재편되리라는 것이었다.
* * *
그녀는 원래도 몸이 약했지만, 마계로 떠밀려진 이후 줄곧 긴장 상태를 유지하다 결국엔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까지 몰렸다. 아가레스의 품에서 내려온 그녀가 줄 끊긴 인형처럼 쓰러진 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악마들은 그녀를 근처 침실로 옮기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마력을 불어넣었다.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인간이라서 그런 거 아니야?"
파직, 파지지직!
"믿을 수 없어."
치료 쪽에 조예가 있다는 고위급 악마는 이미 전부 소환되어 그녀의 상태를 보았다.
'에스델 브에스드라'는 마정석 앞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왔을 뿐 아니라 마왕의 폭주마저 견뎌낸, 사실상
진짜 열쇠라고 확실시되는 인간이었다.
그제야 악마들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열쇠에겐 그 어떠한 마력도 통하지 않는다. 반면 물리력엔
한없이 취약하다. 제일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주군의 강력한 권능은 상식의 범주를 넘어섰다. 누구도 살아 나갈 수 없던 폐허의 땅, 마신의 수정구
바로 옆에 이렇게나 거대한 둥지를 세우지 않았나. 처음엔 다들 비웃었지만, 지금은 어떻지?"
"도망치는 거지."
레라지에의 답은 깔끔 명료했다.
"그럼 결정이군."
"……."
"흐윽, 흣……."
"이렇게 약해 빠져서야."
10 화
이후 자꾸만 근처를 맴돌며 수족을 자처하는 잔챙이들이 짜증 나서 거대한 둥지를 세우고 안에 드나들 수
있는 이를 한정시켰다. 왕이 해야 하는 일은 그들을 대리로 세워 처리하게 했다. 그는 그저 마신의 힘에
도전하고 폭주하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다른 마족들은 주기적으로 정기를 보충해야 한다지만 바엘은 달랐다. 그의 내핵에 잠든 막대한 마력은
오히려 주변의 다른 마력을 끌어들여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었다. 무엇도 먹을 필요가 없으니 그의 동선은
자연히 그가 내키는 대로 한정되었다.
"흐으……."
지긋지긋하게 날뛰던 마력이, 지옥 변두리 절망의 늪에서 태어나 자아를 가지던 그 순간부터 그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마력의 고통이…… 그녀와 살갗을 맞댄 순간부터 안개가 걷히듯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생경한 감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서히 느려지던 맥이 완전히
끊긴 것을 깨달은 그가 저도 모르게 손을 물린 것이다.
"헉, 콜록……."
바르르 어깨를 떨던 인간이 힘없이 추욱 늘어졌다. 그것을 보던 바엘의 심장이 쿵, 쿵 세차게 뛰었다.
저도 모르게 조바심이 났다.
방금까지 그녀를 죽이려던 손바닥 아래 붉은 파장이 생겨났다. 가장 순수한 마력은 완전한 칠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바엘이 지옥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랬다.
파지직, 파직!
거부 반응이 일었지만 애초에 그 정도는 예상했다. 바엘은 더더욱 힘을 더했다. 붉은 마력의 파장이 이내
실내를 뒤덮을 듯 거대하게 확산됐다.
"후우."
"그렇다면……."
그의 손가락이 율리아의 뒤통수를 느릿하게 헤집었다. 옅은 분홍빛이 감도는 백금발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얽히며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이래도 버티는지, 어디 볼까."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적막에 잠긴 침실을 울렸다. 바엘은 제 타액을 그녀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목울대가 작게 경련하는 걸 확인한 뒤 몸을 떼자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잔뜩 상기된 붉은 뺨에 눈에
들어왔다.
"큭, 역시."
* * *
율리아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의식을 찾았다 잃기를 반복했다. 온몸이 펄펄 끓는 유황불에 절여지는 것
같았다.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워 목구멍이 따끔거렸고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는 말 등처럼 마구 흔들리는
듯했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내던져진 부유감과 귓가를 스치던 바람 소리, 갓 스무 살 된 가엾은 고아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장면이 전환된다. 인형처럼 가녀린 소녀를 뜨거운 열기가 집어 삼킨다.
"……."
말 등에서 굴러떨어진 후, 간간이 기억이 끊기긴 했지만 바엘이 자신을 구해 준 것까지는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모두 꿈인 것처럼, 거대한 창밖엔 붉은 달이 떠올라 있었다.
"깼군."
"왜 웃지?"
"아……."
마계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바르바토스의 딱딱한 목소리가 걱정을 담은 듯 상냥하게 느껴지는 게
조금 재미있었다. 브에스드라 황실의 사람들보다 말이다.
"당연한 말을."
"저……."
그녀의 시선이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말에게 납치되어 숲속을 구르고 맨땅을 뒹구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더 이전의, 마계의 입구로 끌려오면서 생긴 상흔들까지
말끔하게 없어졌다.
문제는 그녀가 현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놀란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달음박질쳤지만
내심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악마들 중엔 번거롭다며 옷을 걸치지 않는 이도 제법 있었다. 유난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타인에게 나신을 보이는 건 생각보다 훨씬 부끄러웠다. 결국 견디지 못한 그녀가 조심스레 시트를
끌어 올리는데, 바르바토스가 재빨리 뒷걸음질 쳐 몸을 물렸다.
"읏!"
덕분에 율리아는 그대로 고꾸라져 침대에 얼굴부터 박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르바토스는 미묘하게
시선을 돌린 채 말을 이었다.
"감사 인사는 내가 아닌 주군께 하도록. 주군이 아니었으면 넌 산산이 찢겨 뼈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
테니."
"그래도……."
"음?"
"소, 속옷."
속옷이란 단어를 들은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마치 터져 죽은 지렁이를 보듯 굳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내려다보는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무척이나 살기등등했기 때문에, 율리아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율리아는 치미는 현기증을 애써 참으며 로브를 걸치고 허리를 꽉 묶었다. 길이가 길어서 바닥에 질질
끌리긴 했지만 어쨌든 몸 전체가 푹 덮였다. 이 정도라면 잠깐 움직인다고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뭐지?"
설마.
"……."
11 화
"독하기는."
"……너보다야 할까."
아가레스가 짓씹듯 중얼거렸고 레벤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의 옆에는 마찬가지로 살가죽이
넝마가 된 키마리스, 그리고 그를 고문하는 레라지에가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
키마리스는 체념한 듯 가만 눈을 감았다. 어차피 고위급 악마는 온몸이 뭉그러질 정도로 다치고 피
흘린다고 죽지 않았다. 저보다 강한 마력을 지닌 자가 심장을 완전히 터뜨려야 한다. 레벤나가
키마리스의 심장을 빼앗아 노예로 만든 것과 비슷했다.
"흐음?"
일말의 과정을 지루한 듯 지켜보던 바엘의 안광에 일순 이채가 스몄다. 그가 손짓하자 마왕의 근처에
똬리를 틀고 있던 거대한 뱀, 17 위의 악마 보티스가 몸을 일으켰다.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바르바토스를 따라 긴 계단을 내려온 율리아는 지하에 들어서자마자 들이닥친 습한 공기와 악취,
무엇보다 흉측한 모습을 한 거대한 뱀이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모습에 놀랐다.
"읏……."
포식자 앞에 내던져진 쥐처럼 온몸이 얼어붙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바르바토스의
냉막한 시선이 압박했다. 지금 도망치면 영영 끝이라는 것처럼.
결국 율리아는 천천히 발을 떼어 감옥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저벅.
그녀의 새하얀 맨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득한 무언가가 들러붙었다. 생리적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율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어 견뎠다.
나직이 숨을 들이켠 율리아는 이내 걸음을 옮겨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가레스가 그녀를 가로막듯
팔을 들었지만 율리아는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
"웃기는 소리……."
그녀의 높고 카랑하던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거칠게 갈라졌다. 경쾌하게 끝을 올리던 독특한 말투도 차갑고
딱딱하게 변했다.
역시나 먼저 인내심이 바닥난 건 레벤나 쪽이었다. 그녀는 먹고 떨어지라는 듯 신랄한 말투로 율리아를
비웃었다.
그들은 율리아가 레벤나를 잔뜩 비웃는 장면을 기대했다. 작고 나약한 인간이니 물리력을 쓰지는
못하겠지만, 본인을 사지로 몰아넣은 레벤나를 절대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다.
"레벤나 님, 저는……."
율리아는 거대한 흑마에게 납치되어 거친 숲길을 하릴없이 내달리던 때를 생각했다. 말 등에서 추락해
무시무시한 악마들의 손아귀에 떨어져, 죽음을 앞둔 채 살고 싶다며 울부짖던 때를 떠올렸다.
"뭐?"
"얼마나 많은 마력을 쏟아부었든 제게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거예요. 제가 레벤나 님을 좋아했던
이유는 고작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
그녀 이전에도 자신에게 호감을 내비쳤던 악마는 있었다. 아가레스나 레라지에처럼 말이다. 하지만
레벤나가 보여 준 호의는 그들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나는 이제껏 수많은 인간 열쇠를 봐 왔어. 하나같이 절망했고, 벌벌 떨며 저주를 퍼붓기도 했단다. 네
입장에서도 이곳에서 지내는 게 썩 달갑지는 않겠지?'
그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침묵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당장은 안전해 보일지라도 말이다.
레벤나만이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듯 드러내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해 주었다. 얼핏 쉽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배려가 습관처럼 몸에 배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율리아가
레벤나에게 호감을 가진 최초의 이유였다.
"……."
"내가…… 그래?"
그녀의 눈동자엔 짙은 불신과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가 스며 있었다.
왜인지 레벤나가 품은 상처가 눈에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끝없이 실망하고 결국엔 마음의 벽을 쳐 버렸을
그녀의 지난 기억이 말이다.
"……."
레벤나에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율리아는 또다시 기다렸다. 그녀의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율리아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가슴 아팠다. 날카롭게 가시를 세우고 무엇 하나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지
못하게 지키는 모습이 꼭 고슴도치 같았다. 보다 못한 율리아가 재차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뚝, 뚝.
"당신을 용서할게요."
"흐윽, 끅……."
너무나 오랜 시간을 살아온 악마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은 절대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악마보다
더욱 악마다운 인간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에게 율리아의 '용서'는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12 화
"……."
그때, 보티스의 말을 들은 율리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탈진한 팔다리가 볼품없이 후들거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엘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 꿇었다.
"그래서?"
바엘의 고압적인 시선이 그녀에게 곧장 내리꽂혔다. 마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내뿜는 절대적
위압감까지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율리아의 작은 어깨가 두려움에 덜덜 떨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의견을 물리지 않았다.
"저는……."
"나를 마신으로 만들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열쇠로서 달갑고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해."
"……."
"알겠어요."
바엘의 의도를 깨달은 율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왕은 퍽 만족스러운 얼굴로
높은 계단에서 느릿하게 걸어 내려왔다. 그만큼 그가 주는 중압감 또한 커져서, 율리아뿐 아니라 다른
악마들까지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문장을 끝마친 그녀의 입술에 바엘의 뜨거운 혀가 침입한 순간, 그녀의 목에 가장 고귀하고 순도 높은
붉은 마력이 감겨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장으로 변해 그녀의 목에 사슬처럼
몇 겹이나 얽매였다.
율리아는 이것이 악마와의 계약임을 알았다. 계약의 대가는 목숨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애초부터 거절할 명분도, 능력도 없었다.
"좋아."
"콜록, 컥!"
바엘은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제야 악마들은 주술과 같은 왕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 *
"아가레스 님……."
율리아는 머리맡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이와 눈을 맞췄다. 아가레스의 예리한 동공엔 그녀를 향한 깊은
염려가 자리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치미는 현기증을 억누르며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가레스는 그런 그녀를 만류하며
입가에 컵을 대 주었다. 의아함에 시선을 내린 율리아는 그것이 물이란 걸 알았다. 마계에는 나지 않는,
인간이 마실 수 있는 보통의 물.
"콜록, 콜록!"
사레들린 율리아가 힘겹게 기침을 내뱉는데, 순간 미간을 구긴 아가레스가 미묘하게 시선을 피했다. 늘
당당하던 그녀의 표정이 지금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워 보였다.
"아니에요. 저는 괜찮……."
"사흘이라니……."
놀란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감옥에선 살점이 잔뜩 뭉그러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는데 지금은 말끔하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율리아는 그들이 악마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그래도요. 물도 구해 주시고……."
"……예?"
"예?!"
두 악마가 율리아를 사이에 두고 투닥거리는 사이, 그녀는 치미는 현기증을 참으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키마리스는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반면 레벤나는 몸을 움찔하더니 재빨리
시선을 피해 버렸다.
율리아의 어깨가 내심 쳐졌다. 생색을 내려고 한 일은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레벤나에게 느꼈던 호감은
진심이었기에 이왕이면 그녀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레벤나는 자신 때문에 심장을 잃었다. 더불어 키마리스의 심장까지 함께 빼앗기지 않았던가.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아뇨, 그냥……."
"뭐든 들어줄 테니까 말해봐. 다시 생각해 보니 저 녀석들 심장을 터트리고 싶어졌어? 해 줄까?"
"저것들과?"
"네……."
아가레스는 '둘'의 의미를 묻듯 말없이 턱을 까딱였다. 설마설마하는 눈치였지만 율리아는 그것이 맞다는
의미로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보는 아가레스의 눈은
하고 명백히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크고 또렷한 눈빛으로 아가레스를
마주했다.
"……."
13 화
괜찮은 척 먼저 나서긴 했지만, 사실은 아직 두려웠다. 특히 키마리스가 그랬다. 자신을 납치한 거대한
흑마의 정체가 키마리스란 걸 아는 까닭이었다. 그의 까만 피부와 윤기 나는 머리칼은 아등바등 붙잡았던
갈기와 겹쳐져 그날의 악몽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당시의 그는 레벤나에게 심장을 빼앗긴 상태였다. 게다가
레벤나에게 자신을 넘길 때, 그의 눈빛엔 미미한 주저가 담겨있었다. 당시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죄책감
때문이라고 하면 모든 게 설명됐다.
"저, 몸은 괜찮으세요?"
"……."
"콜록, 콜록!"
한참을 기침하다 지친 율리아가 어깨를 바르르 떨며 머리맡에 힘없이 몸을 기대자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움찔거렸다. 다가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속내가 인간인 율리아에게조차 훤히 들여다보였다.
율리아는 이번엔 키마리스를 응시했다. 그는 다리를 벌리고 뒷짐을 진, 전형적인 군인의 자세로 서
있었다. 레벤나의 생각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 그의 속내는 아직 오리무중이었다.
[▷SYSTEM
멈칫한 율리아가 어깨를 굳혔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지그시 보며 그의 생각을 알고 싶다고 떠올리면 시야
기능이 작동하는 듯했다. 납치당한 이후 이 기능이 뜨지 않은 이유는, 시스템의 설명을 빌어 보자면
체력이 낮기 때문이었고 말이다.
"누워, 멍청아."
"레벤나 님……."
레벤나의 체구는 악마들 중에선 나름 작은 편이었는데도 한 손으로 율리아를 너끈히 들었다. 그녀는
베개를 팡팡 두드려 높이를 맞춘 뒤 율리아를 커다란 침대 가운데 정확히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렸다.
그녀의 손길은 얼핏 기계적으로 느껴졌지만, 사실은 세심하고 다정했다. 울컥한 율리아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르는데, 그녀가 홱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고마워요, 레벤나."
"흥……."
그녀는 마지못해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율리아의 머리맡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풍성한 드레스 자락과
장신구가 율리아의 얼굴을 스치지 않도록 다른 손으로 슬쩍 여미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저 녀석은 이제 아가레스의 노예란다? 내 심장을 뺏어가면서 녀석의 심장도 같이 가져갔어. 아가레스는
너에게 나름대로 잘해 주는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키마리스 님, 어째서?"
"이러지 마세요."
율리아의 눈동자에 당혹감과 더불어 아픈 빛이 어렸다. 이러려고 그들을 구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끝끝내 이곳에 온 건, 자신을 그토록 증오하던 사람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땅에 뿌리내려 보고 싶었다.
"아가레스 님께 심장을 돌려달라고 부탁해 볼게요. 그러니까 제가 싫으시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가 레벤나에게 심장을 빼앗긴 건 마왕성이 세워진 직후의 일이라고 들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노예로 살았으니 그는 체념한 걸지도 몰랐다.
"……."
율리아의 두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고였다. 줄곧 말하지 못했던 진심이 울먹이는 목소리에 애처롭게
섞여들었다.
"어라."
그녀의 손목이 부드러운 힘으로 붙들렸다. 낮고 울림이 큰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
"네?"
하지만 이제껏 율리아에게 손등을 구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황실에서의 그녀는 누군가의 경의를
받을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저 귀족들이 황제나 에스델의 손등에 입 맞추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을
뿐이었다.
그녀의 가슴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선뜻 허락해도 좋을지, 막상 키마리스를 실망시키는 건 아닐지
두려움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가 망설이는 동안에도 키마리스는 흔들림 없이 곧은 눈동자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좋아요."
"나의 주인님."
화악, 그의 머리칼을 닮은 짙은 남빛의 마력이 미풍처럼 율리아를 감쌌다. 하지만 전혀 아프거나 두렵지
않았다. 기분 좋은 산들바람을 맞는 듯 잔잔하고 따뜻한 기분이 그녀를 휘감을 뿐이었다.
14 화
"네?"
그러나 키마리스 정도 되는 고위급 마족은 스스로를 마수화시키느니 차라리 죽기를 선택했다. 그 정도로
굴욕적인 계약이었다.
율리아는 키마리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력이 통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신이 나를 구원했으니까."
"아뇨."
레벤나가 팔락거리던 부채를 탁 접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성큼성큼, 그러면서도 우아하게 걸음을 옮긴
그녀가 키마리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건 아니야."
키마리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녀와 싸우던 때를 생각하니 다시금 소름이 끼치는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전혀 몰랐던 레벤나의 색다른 과거가 드러났다. 바엘이 마계를 휩쓸기 전엔 26 개의 군단을
이끌었다더니…….
율리아는 내심 궁금증이 일었지만 참기로 했다. 아니, 최소한 키마리스의 앞에선 묻지 않기로 했다.
레벤나를 보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싫어 보이는 탓이었다.
"지금 뭐라고……."
율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자신이 제대로 된 얼굴을 하고 있는지 계산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표정을 숨기는데 재주가 없었다. 율리아의 동요를 읽은 키마리스가 그녀를
감싸며 레벤나를 힐끗 노려보았다.
"……."
진실을 들켜 버렸다. 게다가 레벤나는 자신이 열쇠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원작을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진짜 열쇠는 에스델이고, 자신은 원래대로라면 존재해선 안 될 이물질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자신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란 걸 알게 되면 이들마저 자신을
경멸할 텐데, 어떻게 차마 그걸 말해…….
"……."
두 악마의 시선이 오롯이 그녀에게 향했다. 율리아를 보는 그들의 눈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용기를 내기로 했다.
"말도 안 돼!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한밤중 갑자기 들이닥친 군사들이 그녀를 폐궁에서 속절없이 끌어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황제의
침실이었고, 그의 곁엔 언제나처럼 에스델이 서 있었다.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입에 수건이 물리고, 얼굴엔 두꺼운 자루가 쓰였다. 직후 마차에 강제로 태워져
며칠 밤낮을 쉴 새 없이 달렸다. 도중에 에스델의 옷과 장신구가 억지로 걸쳐졌고, 도망치려 할 때마다
그녀를 얽맨 구속구는 점점 그 수를 늘렸다.
마족과의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황궁 한구석에 박혀 있던 자신이라도 때때로 잔혹한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걸리면 즉결 처형임에도 황실 재산을 빼돌리는 하녀가 늘어났다. 병사들은 매번
교체되어 나이 스물을 넘긴 자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힘없이 시선을 내리까는 율리아의 손 위에 다른 온기가 겹쳐졌다. 율리아를 보는 레벤나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으려는 듯 되레 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은 율리아를 두 악마가 부축해 도로 침대에 앉혔다. 레벤나가 문득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상관없지만 주군이 사실을 안다면 율리아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열쇠든 뭐든, 그분을 거스르고
살아남은 자는 없어. 무서운 분이란다."
"고마워요."
* * *
어린 나이에 소드마스터로 개화한 그를, 게다가 마침 마땅한 국적도 없던 그를 수많은 나라에서 탐냈다.
그러나 레기온은 망설임 없이 브에스드라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아직인가.'
황제의 뒤편엔 아름답게 차려입은 황녀 에스델이 있었다. 하지만 레기온이 기다리는 이는 그녀가 아니었다.
"대륙에 셋뿐인 소드마스터가 여기 이곳에 왔으니 짐은 마땅히 영웅을 대우할 것이다. 공작의 지위와 함께
자손 대대로 이어질 영지를 하사하겠다. 또한……."
젊은 영웅이 황제의 말을 끊었지만 누구도 그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존엄을 올려다보는 레기온의
눈빛이 마치 가을날 하늘처럼 청명하게 빛나고 있는 까닭이었다.
"……."
순간 황제의 표정에 미미한 불편함이 감돌았다. 인간으로서 궁극의 경지에 오른 레기온이 그 변화를 모를
리가 없었지만, 그는 이유를 짐작하고 모른 체 입을 다물었다.
15 화
"흐음, 따로 원하는 바는 없는가? 짐에게는 장차 황위를 이어받을 황녀 에스델이 있다. 자네가 원한다면
황녀와 혼인하여 국서가 되는 것뿐 아니라 공동통치의 권한을 위임할 생각도 있어. 에스델과도 이미
의논이 끝났다."
"황공하오나 황녀 전하……."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 이상했다. 에스델의 표정은 타고난 고귀한 피에 걸맞게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다. 그러나 황제를
비롯한 주변 몇몇의 얼굴엔 미미한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들을라. 조용하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인간과 마족의 대립은 오랜 기간 첨예하게 이어졌다. 전쟁터는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었다. 한시라도 마음을 놓았다간 땅에 뒹구는 수많은 시신 중 하나가 될 뿐인 그런 곳.
하지만 어느 날인가 마족들은 일시에 공격을 멈추고 군을 거뒀다. 처음엔 그것이 함정이라 생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낭설 같은 소문 하나가 퍼졌다. 마족이 '황녀' 에스델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분노를 억누르는 레기온의 손끝에 푸른 섬광이 비치더니 이내 대검의 형태를 갖췄다. 소드마스터의 증표,
소울 소드였다.
그가 방출하는 강력한 검기에 수많은 귀족이 괴로워하며 무릎 꿇었다. 잉그렘 5 세도 끝끝내 비틀거린
가운데, 에스델만이 힘겨운 듯 서서 입꼬리를 비틀 뿐이었다.
"……."
우드득, 쿠릉!
* * *
"독하다니, 저는 잘 모르겠는데……."
웬만한 방법으론 마력 저항을 뚫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키마리스가 주종인을 맺으려 몇
차례나 기습적으로 시도했지만, 항마력에 막혀 번번이 실패한 이후에 말이다.
'나를 마신으로 만들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열쇠로서 달갑고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해.'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내 일엔 신경 끄려무나?"
"흠, 귀엽네."
"앗……!"
율리아는 화들짝 놀라 주섬주섬 가슴을 다시 여몄다. 마계에서 그녀만 보면 입맛을 다시는 대표적인 두
악마 중 하나, 아가레스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녀가 여성체라고 편하게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악마들의 낙원]은 동성 캐릭터의 공략이 가능한
게임이었다. 지금은 설정상 바엘을 제외한 전원이 막혀 있지만, 원래대로라면 아가레스 역시 공략 캐릭터
중 하나로 존재해야 했다.
"찻잔을 하나 더 준비해야겠구나?"
"독 타지 마."
겉보기엔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지만 율리아는 SIGHT 기능을 통해 아가레스가 온 진짜 이유를 알아챘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본론으로 들어갔다.
"알면서 묻나."
[▷아가레스
[▷레벤나
그들은 혹여나 율리아가 두려워할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그간 그녀가 지내는 침실에 수많은
마족이 습격해 왔다. 일부는 말로만 듣던 율리아의 절대적 마력 저항을 확인하기 위해, 혹은 소문만
시끄러운 인간을 죽여 없애기 위해.
그리하여 율리아와 가깝게 지내던 악마들이 그녀를 지키고자 보초를 자처했다. 특히 키마리스가 밤낮을
불문하고 문 앞을 지키고 섰다. 율리아의 앞에선 입도 뻥긋 않았지만 말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응?"
[▷아가레스
[▷레벤나
악마들이 한자리에 모이려고 할까 모르겠구나? 게다가 인간인 율리아가 소환했다고 하면 자존심 상해서
아무도 안 나올 것 같은데?]
그래도 직접 거절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안 되는 걸 억지로 요구해서 상대방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역시. 율리아는 애써 웃으며 말을 바꿨다.
16 화
"하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죠? 무려 고대의 마신이 잠들어 있는 탑인데, 인간인 제가 함부로 들어가면
신성 모독이고……."
"작은 열쇠야, 너는 귀엽고 사랑스러우니까 마신도 이해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구나."
[▷아가레스
[▷레벤나
결론적으로 마신은 왕인 바엘과 마찬가지로 강하기 때문에 숭배될 뿐이고, 강한 존재에 대한 경외 이외에
특별한 감정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벤나의 설명을 새겨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작
자신 따위를 지키느라 고생하는 악마들을 위해, 인간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하겠다고.
* * *
'괜찮아. 할 수 있어.'
"키마리스 님."
"일어나세요."
"……."
키마리스는 거절하듯 입가를 굳혔다. 그럼에도 율리아는 사실대로 털어놓기가 애매했다. 마계의
유일무이한 군주, 마왕 바엘을 만나러 갈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그를 만나서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할 예정이었다. 마왕이 직접 마족들을 탑 앞으로 소환하면
독단적 성향이 강한 그들일지라도 차마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마정석의 앞에 서서, 멀쩡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게 이번 계획의 목표였다.
정 안 되면 스스로를 진짜 열쇠라고 속여서라도 그의 협조를 구해낼 생각이었다. 열쇠가 죽어 없어지면
가장 곤란한 건 마신이 되고 싶어 하는 그일 테니까 말이다.
"실은 마왕님께……."
"안 됩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그럼 함께 가겠습니다."
"아무렇지 않습니다."
율리아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건 몰래 나가기 위해서도 있지만 온종일 성 전체가 쿵, 쿵 울렸던 까닭도
있었다. 바엘의 심장박동과 비슷한 이 파동은 그가 폭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
소리가 조금 잦아든 것이다.
"고마워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기둥이 끝없이 이어진 웅장한 회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끝에 자리한
마왕의 둥지는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고, 폭주의 여파가 남았는지 성 바깥엔 짙은 뇌운이 끼어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바르바토스 님."
"주군께선 너를 찾지 않으셨다. 돌아가라."
"놓아주세요, 아파요."
"그분을 놔."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마력을 사용하는지 적막하던 회랑에 삽시간에 돌풍이 몰아닥쳤다.
하지만 이에 영향받지 않는 율리아는 저를 붙든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몸을 날렸다. 놀란 둘이 시선을
돌렸지만 늦었다.
"으읏!"
왕의 둥지는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마력으로 복구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거대한 방을 단
하루 만에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놀랍고도 두려웠다.
"……뭐지."
선잠에서 막 깨어난 건지, 아니면 그저 침입자의 존재가 불쾌했던 건지. 단 한 마디만으로도 바엘의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걸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죽고 싶나 보지?"
"……."
바엘이 느릿하게 미간을 눌렀다. 그의 표정은 정말로 그리할까 고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율리아는
이제껏 살면서 수많은 종류의 적의를 마주했다. 그의 중얼거림이 진심이란 걸 모를 수 없었다.
살짝 열린 문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바르바토스와 그것을 막는 키마리스 사이에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도와줄 이는 없었다. 바엘과의 대화는 오직 홀로 담판 지어야 했다.
"넌 이미 나와 계약을 맺었다. 네 심장에 새겨진 그것이 바로 증거지. 내 심기를 거스른다면 주박을
파기하고 심장을 터트리면 그만이야."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바엘은 누군가 자신을 거스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나치게
강하게 태어나 오랜 시간을 절대적인 존재로 살았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의 뜻에 반하는 존재를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어조와 다르게, 상체를 반쯤 일으킨 바엘의 안광은 섬뜩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았다. 그것에 스민 감정은 명백한 노기였다.
"무슨 짓을 한 거지?"
"……."
"말해."
"모르겠어요."
"젠장!"
17 화
"주군, 무슨 일이십니까?"
마계의 안정을 위해서, 사실 율리아의 제안은 썩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바엘이 이를 받아들이는가
여부였다. 지하의 악마들을 소환할 수 있는 건 오직 바엘 하나뿐이었기에.
"그러니까 요점은……."
"……."
"예."
"열쇠는 빼고."
"……."
바엘이 어떤 방법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만을 침실에 남겨 둔 건 제안에 응할 생각이 있다는 뜻이었다.
고작 인간 따위가 죽어 봤자라고 도발에 눈도 깜짝하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인 일이었다.
스르륵, 부드러운 천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엘이 걸치고 있던 검은 로브였다. 행동의
의미를 알지 못한 그녀가 그것을 멍하니 응시하는 동안, 바엘은 느른하게 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삐걱,
위태로운 소리가 울렸다.
"멍청하게 서서 뭐하지?"
"아……."
그녀는 바엘과의 첫 만남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정사를 권하는 레라지에에게 화를 냈다.
그건 하급 마족인 몽마 따위나 벌이는 하찮은 일이라고 말이다.
'모르겠어.'
"읏!"
침대가 크고 푹신한 탓에 아프진 않았다. 그러나 살갗에 닿는 부드러운 침구의 감촉과 푹신하게 튕기는
매트리스가 되레 그녀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바엘이 침대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그녀는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침대의 크기가 넉넉한 덕분에
바엘이 누울 자리를 충분히 확보하고도 율리아는 반대편에 떨어지지 않은 채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커다란 침대를 욕심껏 차지하고 누운 바엘이 눈을 감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눈꺼풀 너머로 스르륵
모습을 감췄다.
"누워."
"……."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 몰랐다. 설정이 바엘에게만 다르게 작동하는 이유를 알아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
그녀는 바엘의 시선에서 보이지 않도록 등을 돌린 채 오른쪽 상단에 반짝이는 아이콘에 손을 뻗었다. 몇
번이나 보아 익숙해진 창이 떠올랐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STATUS (스탯)
▷PROGRESS (진행도)
▷SKILL (스킬)
▷ITEM (아이템)
▷SETTING (설정)
▷REP (항마력)
▷LUK (행운)
▶SIGHT (시야)
시야의 사용법은 간단했다. 기능을 활성화시킨 뒤 상대방을 지그시 보며 그의 생각을 알고 싶다고 바라는
것이다.
율리아가 세운 가설은 이랬다. 바엘은 마족 중 거의 최상급의 능력치를 지녔기 때문에, 그에게 SIGHT 를
사용하기 위해선 잔여 HP 수치 역시 높은 수준으로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가설이 성립한다면 지금이야말로 바엘의 머릿속이 보일 것이다. 율리아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보통 때라면 그를 지그시 응시하는 게 허락될 리 없으니, 그가 잠든 지금이 사실상 유일한 기회였다.
[▷바엘
'보이지 않아.'
그녀의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그간 체력을 높이고자 답답할 정도로 몸을 사렸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른 스탯들은 바엘의 침실에 오기 전 이미 확인했다. 마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녀는 반쯤 체념한 상태로 진행도를 눌렀다. 어쨌든 시스템이 원하는 바가 바엘에게 있다면, 지금
상황에서 무언가 변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SYSTEM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운 가운데 침대 옆자리엔 가장 두려운 존재가 잠들어 있었다. 자신의 앞날이 꼭 이와
같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마왕의 침실까지 기껏 용기를 내어
왔건만, 결과는 그의 심기를 건드려 침실에 갇혔을 뿐이다.
"흐으……."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깊은 절망감과 관계없이 마왕성을 뒤흔들던 바엘의 파장은 천천히 가라앉아 어느새
제자리를 찾아 가고 있었다.
* * *
해가 중천에 뜬 늦은 오후, 율리아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혈압이 낮은 그녀는 잠에서
완전히 깨어날 때까지 남들보다 오랜 시간을 소모하는 편이었다.
"으응……."
쪼그리고 앉아 울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막막한 감정이 또다시 치밀어오를 것 같아서
율리아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시야가 부옇고 눈가가 뻑뻑한 게 눈물이 말라붙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닦으려다가 바엘이
깨어난다면 그게 더 문제였다. 인간을 극도로 하찮게 여기는 그가, 자신과 무려 이런 상태로 잠들었다는
걸 깨닫는다면 말이다.
깊이 잠든 탓인지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이 다소 누그러졌다. 덕분에 고대의 조각상처럼 깎아지르듯 완벽한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오오, 건강!'
18 화
아가레스에게 듣기로 바엘은 잠귀가 예민해서 성에서 소란이 일면 곧장 화를 내며 마력을 날린다고 했는데,
정작 눈앞의 그는 너무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속된말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였다.
'어쨌든 다행이야.'
"……!"
웅장한 회랑 너머, 선두에 선 바르바토스와 키마리스를 비롯해 수십의 악마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하 감옥에서도 악마들과 마주치긴 했지만 ,그때보다 더욱 많은 숫자였다.
[▷바르바토스
율리아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바르바토스가 말하는 '효율'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겐 썩 좋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바로 그때였다.
"작은 열쇠야!"
"아가레스 님?"
[▷아가레스
"넌 주군을 노리고 나는 작은 열쇠를 노리는 거지. 피차 원하는 바가 다른데 간섭하지 말지?"
레벤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녀는 타인의 앞에서 율리아를 부르는 걸 유독 어려워했다. 열쇠라고
부르는 건 그녀를 도구로 취급하는 것 같아 싫지만, 그렇다고 에스델이라고 부르는 건 더더욱 싫었다.
"어쨌든! 이렇게 엉망이 된 아이한테 침이나 흘리는 건 무슨 경우니? 주군이 부드럽게 다뤄주지도 않았을
텐데, 이 연약한 몸이 그걸 어떻게 버텼겠어?"
율리아는 이 상황이 다소 의아했다. 바엘이 난폭한 성격인 건 맞았지만, 실은 말로만 그랬을 뿐 신체적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레벤나는 자신을 마치 당장이라도 깨질 듯한 공예품 다루듯 조심스럽게
대했다.
"괜찮으십니까?"
이들은 악마이기 이전에 군인이었다. 반면 자신은 평범한 노예다. 이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인사하는 건
가당치도 않았다.
"그게……."
잠들기 전까지 침대 가장자리에 불편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밤새 바엘의 묵직한 팔을
받치고 있었던 탓인지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를 상대로 감정에 호소해 봤자 먹힐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보기로 했다.
바엘은 그녀를 말없이 빤히 응시했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는데 홀로 서 있으니 두드러져 보였던 걸까
싶었지만, 마족들의 덩치가 워낙 커서 그들이 앉은키나 자신이 선키나 별로 차이가 없었다.
"거짓말이요?"
"명심해. 넌 나의 것이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바르바토스
* * *
깊은 잠에 들었던 바엘은 불현듯 모골이 송연한 기분에 눈을 떴다. 품이 허전한 것 같기도 했고,
마정석의 파장에 동화된 마력이 또다시 날뛰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와 같은 풍경에도 그는 서늘하고 공허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열쇠가 없군.'
'설마 도망쳤나.'
열쇠의 힘없는 목소리가 뇌리를 스치고, 그의 시선이 불현듯 문밖으로 향했다. 비록 그의 권능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지라도 많은 악마가 밖에 모여 있다는 걸 마력의 흐름으로 느낄 수 있었다.
"……."
19 화
하지만 열쇠는 제게 접촉한 모든 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같은 공간에만 있어도 미미한 수준의 영향을
주지만 직접 접촉하면 마치 수식을 지닌 본인인 듯 저항력이 높아졌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지만 제법
편리하게 이용했다.
"밤새 있어 주신 건가요?"
자리의 모두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복종했건만, 열쇠는 눈치도 없는지 말똥말똥한 눈을 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바엘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짓을 하려나 봤더니
같잖은 애교라도 부릴 셈이었는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거짓말이요?"
"명심해. 넌 나의 것이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에스델 브에스드라, 인간들의 황녀라고 했던가. 높은 권력을 손아귀에 쥐었던 인간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아니, 나락까지 떨어져 절망하는 꼴을 상상하니 퍽
즐겁기까지 했다.
바엘은 자신의 물건을 취하듯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감싸곤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번 기회에 열쇠를 탐내는 것들에게도 할 필요가 있었다. 열쇠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권능을
지녔는지.
* * *
율리아는 현재 많은 악마에게 둘러싸여 마왕성 복도를 걷고 있었다. 마왕의 침실에 끌려들어갔던 그녀가
무사히 탈출한 건 그로부터 딱 사흘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간 또다시 그녀의 목숨이 위협당할 게 분명했다. 기껏 위험을 감수하고 마왕의
침실까지 쳐들어간 보람이 사라지는 것이다.
"몸 상태는?"
"괜찮아요."
"불편한 곳은?"
"없어요."
"낑, 낑?"
"놀아주는 건 조금 나중에."
다들 한 마디씩 첨언하기 바쁜 와중에도 율리아는 열심히 걸었다. 조금은 어색하게, 하지만 힘차게.
뚜벅뚜벅.
"후우……."
참다못한 율리아가 자리에 가만 섰다. 그러자 잠깐 새 저 앞까지 나아갔던 악마들도 의아한 듯 멈춰 섰다.
율리아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나름대로 투정을 부렸다.
"종족 차를 생각하세요!"
"낑?"
"너는 아니야."
되돌아온 어린 늑대가 고개를 갸웃했다. 율리아는 냉정하게 손바닥을 내보였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대형견의 지도는 제대로 해야 나중에 고생하지 않는다.
일전에 가르친 대로 얌전히 앉는 녀석을 폭풍 칭찬해 주려는 찰나, 재빨리 다가온 레라지에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율리아는 삽시간이 올라간 눈높이에 놀라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 내려 주세요!"
[▷레라지에
바엘에게서 벗어나 오랜만에 제대로 된 지문이 떠올랐건만, 그 내용은 여전히 달갑지 않았다. 율리아는
그를 밀어내는 척 SKIP 버튼을 눌러 창을 꺼 버렸다.
"그분을 내려놔."
율리아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실내를 둘러보던 그때, 어떤 악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놀란 그녀가 퍼뜩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악마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는 게 더 빨랐다.
20 화
율리아가 그를 따라 수줍게 입꼬리를 올리려는 찰나였다. 하필 타이밍 나쁘게 끼어든 레라지에가 그녀의
얼굴 앞에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의미를 알 수 없어 가만 내려다보고만 있자, 그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아."
"가자꾸나?"
"존나 많아!"
"누구……."
"아뇨, 저 지금 떨고 있어요."
"과찬이세요……."
베리드가 말하는 '황녀'는 오직 에스델 브에스드라,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매를 일컫는
단어일 터였다.
악마들은 인간을 벌레 보듯 경시했다. 자신들과 비교했을 때 신체 능력은 한없이 뒤처지고 특별한 이능도
없다. 오직 숫자 하나만 믿고선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종족이란 게 인간에 대한 보편적 생각이었다.
그래서 악마들은 인간을 지위에 상관없이 대충 아무렇게나 불렀는데, 베리드는 브에스드라의 황제인
잉그렘 5 세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당신은 어땠습니까?"
"저는……."
"아뇨……."
"백성들에게 사랑받던 황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흉, 부정의 증거, 천하고 더러운 피, 저주받아 마땅한
영혼."
"율리아 브에스드라."
"읏!"
숨이 가빠왔다. 시야가 캄캄해지며 계단이 어지럽게 일렁였다. 발갛던 뺨은 핏기가 빠져 새하얗게 질렸다.
과거의 악몽이 눈앞을 휩쓸었다.
이로써 베리드는 약점을 간파하고 답을 얻었으리라. 율리아는 절망했다. 나약한 자신이 싫었다.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큭큭."
"주군."
바엘의 서늘하고 붉은 안광이 홀의 악마들을 느릿하게 훑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진작부터 기분이 몹시
저조했는지, 그는 악마 하나하나에게 를 되새기듯 시선을 각인시켰다.
"없습니다."
바엘을 상대로는 어쭙잖은 변명이 되레 화를 불러온다. 베리드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저었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왕이 잠시 눈을 돌린 새, 율리아를 보는 사내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만약 가짜란 걸 들키면 바엘은 열쇠든 아니든 기필코 자신을 죽일 것이다. 레벤나와 키마리스도 동의한
일이었다.
그녀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걸 눈치챘는지, 베리드의 아름다운 얼굴에 짙고 끈적한 욕망이 떠올랐다.
* * *
바엘의 등장, 그리고 급격히 나빠진 율리아의 상태로 인해 홀에서의 만남은 시작과 동시에 끝났다.
그럼에도 결과로만 말하자면 바르바토스의 계획은 큰 성공을 거뒀다.
"조금 긴장해서……."
"뭐."
"아뇨, 계속 주무시라고……."
물론 본의는 아닐 것이다. 그는 색사에 흥미가 없고, 양질의 수면에 막대한 관심이 있으며, 슬프게도
자신의 몸은 악마들처럼 육감적이거나 섹시하지 않았다. 바엘에게 자신은 정말 말 그대로 베개였다.
'게다가 언제는 내가 나가는 걸 허락했으면서.'
'그럼 나도 한번?'
"……."
"허락하신 거로 알고……."
"누워."
"네."
21 화
자신이 오래 떨어져 있으면 마력 저항의 효과가 사라져 바엘이 깨어난다. 그렇게 눈을 뜬 그는 평소보다
기분이 더욱 저조해졌다. 어제는 홀에 모여 있던 72 악마가 방패막이가 되어 줬지만 이번엔 그 화가
오롯이 자신에게 미칠 가능성이 높았다.
"오셨습니까, 율리아."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그녀가 이상했던지 두 악마가 시선을 교환했다. 율리아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닥치니 어느 것부터 꺼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베리드 님이……."
"음?"
율리아가 궁금한 건 두 가지였다. 인계로 통하는 문은 전쟁이 끝난 뒤 바엘에 의해 완전히 폐쇄되었다.
그곳을 드나들 수 있는 건 일찍이 허락받은 극소수의 악마뿐이었다. 심지어는 2 인자인 아가레스조차
멋대로 출입하는 게 불가능했다.
"들켰어요."
"……."
'백성들에게 사랑받던 황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흉, 부정의 증거, 천하고 더러운 피, 저주받아 마땅한
영혼.'
'율리아 브에스드라.'
비틀거리며 무너지는 그녀를 단단한 팔이 붙들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간신히 내뱉으며 시선을 드니,
키마리스가 왜인지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이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하지만……."
[▷키마리스
자리에서 일어난 레벤나가 부채를 접어 키마리스의 손등을 탁, 내리쳤다. 그녀는 율리아를 부축해 의자에
앉히고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런 평소 같은 반응이 율리아의 두려움을
차분하게 진정시켰다.
"그리고?"
인간에게 악마란 절대적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베리드는 연금술과 지식을 관장하기에 예외적으로
일부 집단의 숭배를 받고 있었다.
지식을 탐구하는 부류는 대부분 먹고살 만한 여유가 있는 고위층이다. 에스델이 멀쩡히 돌아다니는 모습과
반대로 율리아가 자취를 감춘 것을 보며 깨달은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에스델을 지극히 아끼는 황제가, 소중한 딸을 대신해 그녀와 비슷하게 생긴 골칫덩이를 지옥에
떨어뜨렸을 거란 비정한 진실을 말이다.
[▷레벤나
율리아도 세계관의 설정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고위급 악마는 72 위계로 구분되어 있지만, 20 위
아래쪽으론 그 차이가 서로 비등했다.
"설마……."
[▷키마리스
굳이 마신의 힘을 삼키지 않아도 마력을 높일 방법이 있다면 어쩔 텐가. 이미 주군의 파장이 그것을
증명했어.]
[▷레벤나
"감히……."
테이블 아래 그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것을 말렸을 레벤나지만, 그녀조차 부채를
부러뜨릴 듯 손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 * *
베리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의견이 오갔다. 그들은 바르바토스와 레라지에는 위험할지
몰라도, 최소한 아가레스에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아가레스는 불과 얼마 전까지 치열한 전장의 선두에서 마군을 지휘했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혐오가
강했고, 기만당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크게 분노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만큼 율리아에 대한 호감도
컸다. 일단은 그것에 기대 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율리아는 떠밀리듯 마왕의 침실로 돌아왔다. 바엘이 깨면 안 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레벤나와
키마리스는 만일의 경우 목숨을 걸어서라도 베리드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왕의 침실로 돌아온 그녀는 문을 등지고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자신이 진짜 에스델이었다면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또 뭐지?"
"마왕님."
바엘의 시선이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로 향했다. 율리아는 세수를 하듯 눈가를 박박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가요……."
"이상하군."
"……."
율리아는 퍼뜩 입꼬리를 풀었고, 바엘은 그제야 미간의 주름을 거두며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저벅저벅
걸어간 그가 마신의 탑을 응시했다. 율리아의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22 화
[▷바엘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은 천덕꾸러기 황녀일 뿐이고, 그는 지하를 단숨에 통일한 위대한 군주인데.
자꾸만 그의 고독이 신경 쓰이는 게…….
"죄송해요. 제가 주제넘었어요."
"……마신의 힘."
길고 아름다운 칠흑의 머리칼이 바람에 잔잔히 날렸다. 바엘의 붉은 안광이 율리아에게 향했다. 마치
먹잇감을 탐색하는 맹수처럼.
"신이 되고 싶으신가요?"
"아니."
"차고 넘치지."
"……."
"……."
"읍……!"
* * *
"말도 안 돼."
"아가레스, 잠시 진정하고……."
"인간 놈들이 우리가 요구한 열쇠를 바꿔치기했다고? 하등한 종족 주제에 감히 우리 마족을 우롱해?!"
아가레스의 검은 마력이 그녀의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듯 불같이 일렁였다. 말을 꺼낸 키마리스와 레벤나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하여 유사시에 왕인 바엘을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악마, 대공 아가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쪽으로
당락이 잡혔다. 그녀의 선에서 위로 올라가는 정보를 차단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예방책이기
때문이었다.
레벤나의 현실적인 지적에 아가레스는 어깨를 움찔했다. 그녀는 분노를 억누르려 노력했지만 기만당했다는
생각에 좀처럼 화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작은 열쇠의 사정은 가엾고 딱했다. 태어나 평생 천대만 당하다 언니를 대신하여 죽을 자리인 이곳 마계에
버려졌다. 그럼에도 인계보다 이곳에서 지내는 게 더 행복하다는 그 가녀린 열쇠를 어떻게 찢어 죽인단
말인가. 손끝도 대기 아까운 것을.
하지만 인간에 대한 분노는 달랐다. 전장의 선두에 섰던 그녀는 인간이 얼마나 비열한 종족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엔 마계의 경계를 슬금슬금 침범하더니, 결국엔 돈이 된다는 이유로 채 눈도 뜨지 않은
마족의 씨앗이나 어린 마수를 잡아갔다.
"인간에게 반감을 가진 악마는 너뿐만이 아니야.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그녀는 죽어."
"내가 보호하면……!"
"네 분풀이를 하고자 율리아를 죽이겠다면 어쩔 수 없구나? 우리는 율리아를 데리고 인계로 도망치는
수밖에?"
"젠장!"
* * *
율리아는 검은 자루에 억지로 욱여넣어진 채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었다. 그동안에도 바엘의 심장 소리가
쿵, 쿵 고막을 울렸다. 베리드는 괜히 멀리 이동해 흔적을 남길 생각은 없는지, 마왕성 안에서 볼일을
끝내고 모른 척할 심산인 모양이었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흔들리던 자루도 멈췄다. 율리아는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베리드
시야가 트이니 그제야 지문 창이 떠올랐다. 율리아는 그것을 읽으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무서워서……."
[▷베리드
주군이 한 번 탑으로 떠나면 돌아올 때까지 최소 반나절, 오래는 사나흘씩도 걸리지. 남은 시간은 많으니
찬찬히, 뼛속까지 훑어 즐겨야지.]
"아뇨……."
[▷SYSTEM
[▷SYSTEM
[▷SYSTEM
- 미션: 생존하시오.
23 화
마신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선 그만큼 대형의 수식이 들어가야 했다. 탑의 홀은 그 크기에 맞춰 지어졌지만,
그럼에도 마정석이 점멸할 때마다 방어진은 온갖 색으로 빠르게 점멸했다. 마치 힘겹게,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처럼.
"크윽, 컥!"
파지직, 마정석에서 튕겨 나간 바엘의 몸이 바닥에 거세게 내팽개쳐졌다. 칠흑의 거대한 날개는 군데군데
찢겼고 내장이 파열됐는지 코와 입에선 피가 뚝뚝 떨어졌다.
"허억, 헉……."
거대한 두 마력이 충돌한 여파로 번개와 같은 날카로운 파장이 홀 곳곳에 내리쳤다. 기둥이 부서지고
강렬한 돌풍이 몰아치는 가운데도 마정석은 중앙에 부유한 채 꼿꼿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후두둑, 바엘이 일어서자 더욱 많은 피가 쏟아져 웅덩이를 이뤘다. 그럼에도 그의 기세는
사그라들기는커녕 더욱 광폭하게 날뛰었다.
마정석이 잠든 홀에는 위아래 사방으로 구체의 방어막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뚫고 허공에서 직접 돌진할
수 있는 건 오직 바엘뿐이었다.
마정석이 토해 낸 번개가 바엘이 서 있던 자리를 내리쳤다. 그것을 피하려 도약했지만, 바엘의 경로를
미리 파악한 듯 그곳에도 곧장 공격이 몰아쳤다.
보랏빛 구체가 흉흉하게 발광했다. 끈질긴 찬탈자를 이번엔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마신의 수정구를 지키던 광활한 홀은 이제 바엘을 가두는 완벽한 새장이 되었다.
우웅, 웅웅!
"……."
* * *
쨍그랑!
"아."
[▷SYSTEM
율리아가 와인 잔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시스템 창이 사라졌다. 포도주가 넘어간 식도부터 뜨거운 감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혹감에 몸을 웅크렸다.
'독? 하지만 베리드는 내가 죽는 걸 원치 않았는데…….'
안에 이상한 걸 넣었을지 모른다는 걱정은 당연히 했다. 하지만 베리드의 생각을 읽었을 때 포도주에
별다른 짓을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는 이것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고자 했을 뿐이었으니까.
"걱정 마. 독은 아니니까."
"하지만……."
[▷베리드
그녀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가슴을 헐떡였다. 고작 신발과 장신구 몇 개를 빼앗겼을 뿐인데, 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이상하고 기분 나쁜 감각이 뇌리를 장악했다.
"두려운가?"
"……."
"주군과는 비교하지 말도록 해. 그분은 거칠기만 하겠지만 난 다르거든. 극상의 쾌락을 기대해도 좋아."
"뭐지?"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자연스러운 핑계였다. 율리아가 상체를 세우자 베리드의 손가락이 그녀의 허리선을
타고 오르다 자연스럽게 등 뒤로 들어갔다.
그가 매듭을 향해 시선을 내린 짧은 순간, 율리아는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읏!"
하필 일어서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넘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실수로 칼날을 강하게 움켜쥔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래도 검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율리아는 재빨리 단검을 고쳐
쥐었다.
눈매를 가늘게 휘던 그의 표정이 불현듯 딱딱하게 굳었다. 날이 향한 방향은 베리드가 아닌, 율리아의
가느다란 목이었다.
"무슨 속셈이지?"
"네가 죽으면 아쉽겠지만 시체를 먼 어딘가에 내다 버리면 그만이야. 주군의 폭주가 임박해 아무도 널
보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생긴 일을 누가 어떻게 알까?"
단지 등에 머리카락이 스쳤을 뿐인데 강렬하고 찌릿한 감각이 전신에 화악 퍼졌다. 허리가 파드득 튀자
목에 바짝 대고 있던 칼날이 살갗을 깊게 파고들었다.
"……."
"큭큭."
"아아아아아악!!"
"어……?"
"작은 열쇠야!!"
율리아는 그제야 성 곳곳에 시끄러운 고함과 비명이 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 그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율리아, 손을……!"
"키마리스 님!"
"흐읏."
"너 다쳤니?!"
걸음에 방해가 되는 드레스 밑단을 북북 찢어 버리고 달려오던 레벤나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목을 깊게
가로지른 자상이 난리통 중에 더욱 크게 벌어졌다. 율리아의 흰 원피스는 이제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레벤나의 양손에서 칠흑 같은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비록 범위는 넓지 않았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마력의
폭풍을 막아 줄 정도는 되었다.
24 화
"아, 응!"
"작은 열쇠야?"
"흐윽, 읏!"
이상을 감지한 그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사이 레벤나가 찬장에 나뒹굴던 대량의 미약 병을 찾아냈다.
레벤나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베리드?"
"다들 지금 뭐 하는 거지?"
"……."
베리드가 관장하는 영역은 연금술과 지식. 그러나 그것이 좋은 방면으로만 발휘되는 건 아니었다.
무언가를 안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건 아니다.
"저 인간은 우리 마족을 우롱했어! 명예롭게 전사한 동료들의 죽음을 우롱한 거라고!"
"……."
"인간이 얼마나 악랄하고 비열한 종족인지 생각해! 저 인간 역시 우릴 조롱할 목적으로 이곳에 온 거야!
멍청히 속아 넘어가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런 인간을 위해 동족인 내게 해를 가할 셈이야?!"
그것을 본 베리드의 얼굴이 성공을 확신하는 빛으로 바뀌었고, 레벤나와 키마리스는 긴장한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인간은 열쇠를 바꿔치기해서 우리를 우롱했지. 하지만 작은 열쇠는 잘못이 없어."
"흣, 어째서……."
"설마, 아가레스."
베리드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전격을 두른 단검과 발갛게 물들어 헐떡이는 율리아, 그리고 아가레스의
비틀린 입매를 차례로 보았다. 그녀는 율리아의 목덜미를 상냥하게 쓸어내리며 귓가에 중얼거렸다.
"아가레스!!"
아가레스의 의도를 알아챈 키마리스가 발끈하며 나서려 했지만 레벤나가 그런 그를 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확실하게 아가레스를 아군으로 만들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가레스는 율리아를 좋아한다. '개인'의 입장에서 말이다. 아가레스는 군단장으로서의 긍지가 너무도
강했다. 아가레스가 군에서 세운 수훈은 그녀의 인생, 바로 그 자체였다.
율리아가 인간과 내통한 베리드를 직접 죽이는 것만이, 그녀를 완전한 아군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아가레스 내부의 모순을 완전히 정리할 수 있는 길임을 이해한 것이다.
"흐윽, 흣!"
바닥에 내려진 율리아를 관객 삼아 우두둑, 베리드의 늑골이 활짝 열렸다. 벌건 속살을 드러낸 심장이
주인의 두려움을 보여 주듯 펄떡펄떡 빠르게 날뛰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아니야. 아니야……."
흔들리는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으응!"
"칼을 잡아요."
채근하는 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살결이 키마리스의 차디찬
손바닥에 부드럽게 감겼다.
"흑, 아!"
푸욱, 깔끔하게 떨어진 단 한 번의 칼날. 발악하며 저주를 퍼붓던 베리드가 움직임을 멈추고, 마지막까지
맥박 치던 심장은 율리아의 얼굴에 질척한 피를 흩뿌렸다.
첫 번째 살인이었다.
[▷SYSTEM
1st Episode. 첫 번째 죽음]
[완료]
* * *
걸음을 강하게 내디딜 때마다 율리아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날아서 가면 그녀를 좀 더
편하게 해 줄 수 있었겠지만 성내가 아수라장이었다. 마력을 사용해도 복구되지 않을뿐더러 살아 있는
생물처럼 뒤틀리기까지 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괴로워. 힘들어……."
"조금만 참으십시오."
움찔거린 그녀의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원피스를 걷고 다리 사이를 찾아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았다. 각자 제 살기에 바빠 신경 쓰지 않을 뿐, 사태가 진정되면 분명 율리아를 음욕 어린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으응!"
"바르바토스?!"
"미쳤나?! 이제껏 이런 상태의 주군은 본 적 없다. 마력 저항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몰라도 들어가면
열쇠도 너도 죽어!"
"그래도 상관없어."
"뭐?"
'당신을 용서할게요.'
이윽고 다다른 마왕의 둥지, 반쯤 깨져 나간 문 건너편에 거대한 날개를 펼친 바엘이 쓰러져 있었다.
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탑을 마주 보고 있는 벽면이 모조리 뜯겨나갔다.
소름 끼치는 사실이었지만 키마리스에겐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바엘이 의식을 잃었다는 건 율리아의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25 화
"……."
결심을 굳힌 그가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던 그녀를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키마리스가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무릎 꿇자 그녀의 다리가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아까보다 한결 이완된 율리아의 손이 다시금 다리 사이로 향했다. 이번엔 키마리스도 그것을 막지 않았다.
원피스를 끌어 올린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벅지 언저리를 맴돌았다.
"율리아 님, 어째서?"
"으응……."
가쁘게 헐떡이는 얼굴과 허벅지 근처를 하염없이 배회하는 손가락, 그것을 뚫어져라 보던 키마리스의
눈빛이 이내 당혹감에 물들었다. 깨달음은 찰나였지만 그 충격은 컸다.
"아파……."
"……죄송합니다, 율리아."
그녀의 손아귀에 목숨줄처럼 붙들려 있던 원피스가 찌익, 너무나 손쉽게 반으로 갈라졌다. 발갛게
달아오른 나신이 그의 눈에 속속들이 들어왔다.
섬세한 공예품을 만지듯 여체를 목덜미부터 천천히 쓸어내리던 그의 손바닥이 이윽고 율리아의 다리
사이에 다다랐다. 이미 푹 젖어서 축축해진 속옷 위를 손가락을 세워 조심스럽게 덧그렸다. 비부가 울컥,
경련하더니 진하게 젖어 든 부위가 좀 더 넓어졌다.
침대 밖으로 축 늘어진 율리아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녀의 허벅지 사이, 바닥에 무릎 꿇은 키마리스의
시선이 축축이 젖은 안쪽으로 향했다.
"율리아."
"으앙! 아, 아!"
키마리스는 감로수를 마시듯 경련하는 내부로 혀를 더욱 들이밀었다. 가느다란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깊이
파묻고 키스하듯 내벽을 샅샅이 훑고 강하게 빨아들였다.
"아응, 하악……."
"율리아, 숨 쉬어요."
"……."
"율리아."
"아!"
뜨거운 혀를 잃은 비부가 갑작스러운 한기에 바르르 떨었다. 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키마리스가
율리아의 목덜미에 입 맞추려는 순간이었다.
쿵, 쿵.
그때였다.
"비켜라."
"안 됩니다."
"비켜."
"윽, 커억……!"
눅진하게 풀어진 점막이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거부하듯 바르르 경련했다. 바엘의 길고 두꺼운 손가락이
비좁은 내벽을 강하게 쑤시며 자리를 넓혔다. 그녀의 심장에 새겨진 인이 흐릿한 붉은 빛을 냈다.
"아응, 흣! 아파!"
"바엘……!"
"더 해 주세요……."
"……."
"긁어 줘."
"내 허락 없이 가면 안 되지."
"긁어 줘. 긁어……."
그녀는 더 해 달라며 젖은 목소리로 울먹였다. 그 가느다란 애원에 바엘의 성기가 하의를 들어 올리며
단단히 발기했다.
"아, 안 들어가."
바엘이 그녀의 안에서 손가락을 거칠게 빼내자 율리아의 목이 뻣뻣하게 뒤로 젖혀졌다. 가벼운 절정에
올랐는지 움직임도 숨도 모두 멈춘 채 작은 가슴을 부풀렸다.
그는 율리아의 허벅지를 활짝 벌리고 입구에 선단을 맞췄다. 반이나 들어갈까 의심될 정도로 작은 구멍이
방금 빠져나간 것을 찾아 빠끔거리고 있었다.
바엘은 겁먹은 듯 슬금슬금 위로 올라가는 율리아의 허리를 잡아 밑으로 끌어내렸다. 저항하듯 시트를
움켜쥐었지만, 속절없이 끌려온 그녀의 질구가 바엘의 물건과 바로 맞닿았다.
"크윽."
바엘은 두툼한 귀두가 맞춰지자마자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거대한 성기가 그녀의 구멍에 곧장
짓쳐들어왔다. 신음도 내지 못한 율리아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안을 가득 채운 것이 버거워 호흡조차
하지 못하고 눈을 홉떴다.
"힘 풀어."
"꺼내, 꺼내……!"
그에게 바짝 들러붙은 내벽은 눅진하고 뜨거우며 습했다. 이것이 좆을 전부 감싸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엘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조금 뺐다가 다시금 짓쳐 올렸다. 액이 덕지덕지 발린 물건이 비부의 틈새로
미끄러지듯 깊숙이 파고들었다.
26 화
덜덜 떨리는 율리아의 복부에 푹 꽂힌 남근의 형태가 선연히 드러났다. 바엘은 유두를 희롱하던 손바닥을
아랫배로 옮겨 튀어나온 곳을 꾹 눌렀다.
"아, 흣!"
"……!"
바엘과 율리아는 뒤통수를 내려치는 듯 묵직한 쾌락에 숨을 멈췄다. 마찰부에서 번져 나간 전격이 온몸을
잘게 관통하며 빠져나갔다. 말초를 구성하는 신경 하나하나가 뜨거운 불에 지져지고 타들어 갔다. 아득히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들의 이성은 여기서 끊겼다. 아무런 생각 없이, 바엘은 그저 쾌락을 좇아 세찬 허릿짓을 시작했다. 온
복부와 허벅지에 철퍽철퍽 투명한 물이 튀었다.
두툼한 흉기가 내벽을 사납게 긁어내는 감각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녀의 안에서 울컥, 무언가 따뜻한 게
흘러나옴과 동시에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앙! 아, 아! 응!"
"큭!"
"싫어……!"
바엘은 그녀의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결박하고, 나머지 손으로 통통하게 달아오른 돌기를 강하게
문질렀다. 열락에 흐느끼던 율리아의 입에서 높다란 비명이 터지자 바엘의 얼굴에도 제법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래, 이렇게."
"하윽, 아앙!"
"아주 좋아."
바엘의 혀가 메마른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하지만 위쪽과 달리 하체는 정신없이 쑤셔지고 내뱉어졌다.
두툼한 귀두가 내벽을 주욱 긁어 내릴 때마다 율리아의 비명은 점점 커지고 높아졌다.
그녀가 몇 번이나 절정에 달했을까. 드디어 바엘의 허리가 점점 빠르고 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침대가 삐걱대는 소음이 폐허가 된 둥지를 가득 울렸다.
꿰뚫린 채 빠르게 비벼지는 곳에서 부글부글 포말이 일었다. 율리아는 결국 거대한 쾌락의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놓았다.
"윽!"
"……."
흐릿하게 감은 율리아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도로록 흘렀다. 새하얀 시트에 연분홍빛 핏물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 * *
"으응, 여기 어디……."
밤새 비명을 내지른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머리맡을 짚고 힘겹게 일어서려던 그녀가 도로 풀썩
엎어졌다. 허리의 둔통으로 온몸이 잘게 쪼개지는 듯했다. 괴로움에 바르작거리던 율리아가 불현듯
멈칫했다.
"윽."
율리아는 생각을 멈췄다. 양손이 붉게 물든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질기게 들러붙어 아무리 박박 닦아도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그녀의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시야 상단의 아이콘이 점멸하는 게 보였다. 들어가 보니 새로운
알림을 나타내는 붉은 점이 선택지마다 전부 찍혀 있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STATUS ° (스탯)
▷PROGRESS ° (진행도)
▷SKILL ° (스킬)
▷ITEM ° (아이템)
▷SETTING ° (설정)
어젯밤의 사건이 스토리 진행에 큰 영향을 미친 게 분명해 보였다. 율리아는 아이콘을 확인하기 전 재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따란 침실엔 오직 그녀 혼자만이 덩그러니 눕혀져 있었다. 다만 바엘은 나태한 성격이라 어딜 가더라도
둥지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았고, 바르바토스도 생각보다 자주 이곳을 들락거렸기 때문에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SYSTEM
그녀의 의식이 자꾸만 욱신거리는 다리 사이로 향했다. 다음으로 이어지려는 상념을 율리아는 고개를
내저어 털어 냈다.
인게임에서 공략 대상의 호감도 수치를 확인하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최종장에 다다르면 플레이 과정에서
쌓아온 스탯과 호감도를 조합해 엔딩의 종류가 나뉠 뿐이었다.
캐릭터 특성을 결정짓는 선행 스킬은 전부 확인이 가능했다. 하지만 트리의 최상단에 있는 궁극기는
자물쇠가 걸려 있어 현 상황에선 열람할 수 없었다.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일단 뒤로 이동해서 이번엔 ITEM 을 클릭했다.
원래 텅 비어 있던 화면에 물품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율리아는 그것의 설명을 눌렀다.
[▷마력을 두른 단검
"어라……."
율리아의 얼굴이 의문에 물들었다가 불현듯 굳었다. 아가레스의 유독 자상한 목소리가 뇌리에 스쳤다.
'나의 마력을 실은 검이야. 이걸로 베리드의 심장을 찔러. 그럼 이후의 일은 내가 처리해 주마.'
그를 죽여야 했다는 걸 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쯤 분노한 바엘과 악마들의 손에 갈가리 찢겨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죽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두렵고 끔찍했다.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 악마성에 내팽개쳐져, 결국엔 '나'라는
실낱같은 자아마저 모두 잃고 그저 이 비현실적인 세상의 일부가 되어 버릴까 봐.
아니, 이미 약하다는 핑계로 키마리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베리드의 심장을 찌른 시점에서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나, 어떡해……."
"어딜 보는 거지."
"네?"
"뭐지?"
"……."
레라지에는 제가 관장하는 영역을 읊으며 편하게 턱까지 괴었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하더라도 바엘은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으리란 걸 레라지에라고 모르지 않을 텐데.
"웃기지도 않은 짓을……."
27 화
"흐응."
"왜 그러세요?"
"나도 너랑 해 보고 싶다. 엄청 기분 좋을 것 같아. 하지만 그랬다간 주군한테 죽겠지."
"……!"
"네?!"
"……."
애초에 악마가 사실을 순순히 털어놓을 거라 기대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말을
들으니 차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아무리 마족들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더라도 마계에서 자신은 어디까지나 외부인일 뿐이었다. 그런 자신이
함부로 나섰다간 감옥에 있는 그를 되레 궁지에 몰아넣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나마 경이로운 회복력이
있으니 팔다리는 원래대로 돌아올 거란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형이 너 뛰쳐나가지 못하게 잘 감시하라고 했거든. 네 그 성격에 사정을 들었다간 틀림없이 뛰쳐나갈
텐데, 그럼 이번에야말로 키마리스는 죽는다고 말이야."
체력이 바닥나 SIGHT 를 못 쓰는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는 이렇게 막 나가도 괜찮은 걸까.
"네에……."
베리드의 죽음을 비롯해 사정을 전부 아는 소수의 고위급 악마에겐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율리아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진짜 이름을 찾게 되었다.
"……."
"너한테 나름대로 빚을 졌어. 갚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낑?"
"아냐, 아무것도."
* * *
그의 굳은 표정엔 일말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느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바엘의 머릿속엔
이상하게도 눈물이 가득 찬 눈동자가 슬금슬금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더 해 주세요…….'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고 빠져들었다. 불쾌하게 날뛰던 마력이 가라앉고 의식을 되찾은 뒤에도 바엘은
열쇠의 가녀린 몸을 끊임없이 탐했다. 더 울리고 싶었고 훨씬 괴롭게 만들고 싶었다. 헐떡이며 높은
비명을 내지르는 목소리가 듣기에 제법 기꺼웠다.
하지만 왜일까.
'나, 어떡해…….'
그날 밤과 똑같이 울고 있는데도 삽시간에 기분이 바닥을 쳤다. 보기 싫어서 억지로라도 입을 다물게 만들
생각이었다. 다른 놈이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그랬을 거다.
그런데 여자의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한 번쯤은 눈감아 줄까 생각하게 되는 스스로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변덕에 휩쓸린 적은 많았지만 그 결과가 죽음이 아닌 다른 걸로 끝난 기억은 여태껏 없었다.
'왜지.'
자신은 마족이고 그녀는 열쇠라서? 설마하니 이 몸에 흐르는 붉은 마력이, 증오스러운 마신의 파편에
저도 모르게 이끌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주군!"
"……."
바엘의 폭주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마계의 유일무이한 왕, 위대한 정복자 바엘은 마족의 본능에 따라 더
큰 마력을 원하고 있었고 그 끝엔 마신의 힘이 있었다.
"평소에는 열쇠랑 접촉만 해도 마력의 증폭이 잦아들었는데, 이번엔 밤새도록 꼬박 색사를 벌여서야 겨우
진정되시지 않았습니까!"
그제야 바엘이 걸음을 멈췄다. 바르바토스는 왕의 붉은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끼며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왕의 강대한 기운이 바로 코앞에서 넘실거렸다. 다만 그것은 지금까지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차분하고
안정적이어서, 그릇에 차고도 넘치던 마력이 지금은 온전히 그의 통제 아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열쇠와 단순히 접촉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확실히 이상했지."
"예?"
마신의 힘을 흡수하기 위해선 홀 바닥의 마법진을 전부 해제하고 마정석을 제단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탑은 마신을 억제하기 위한 일종의 새장이었지만, 다르게 보자면 그 힘을 온전히 지키기 위한
파수꾼이기도 했다.
"……기대하지."
28 화
'열어 줘, 제발!'
율리아의 등 뒤에서 황제가 뭐라 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병사들에 의해 양팔이 결박된 채 하릴없이
질질 끌려 왕의 앞에 내던져졌다.
하염없이…….
"얘, 율리아?"
"아……."
율리아는 회상에서 깨어나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녀의 눈앞엔 레벤나가 브에스드라의 황도 아벨딧심까지
가서 직접 구해온 산해진미가 한껏 차려져 있었다.
"으으!"
일의 발단은 율리아가 모처럼 인간계 음식을 보며 옛 기억을 떠올린 데서 시작됐다. 폐궁에 갇혀 살아야
했던 그녀는 때때로 에스델이 귀족 영애들과 함께 식사를 즐기거나 티 타임을 가지며 담소를 나누는 것을
부러워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레이스 테이블보와 예쁘게 차려입은 동갑내기 친구들. 먹는 사람을 위해 한껏 장식된
접시와 즐거운 듯 까르르, 높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누구, 감옥에 처박힌 키마리스? 주둥이 잘못 놀려 변방에 쫓겨난 레라지에? 아니면 밥맛 떨어지게
바르바토스라도 부를까?"
"몰라!"
레벤나는 볼을 잔뜩 부풀리더니 율리아의 접시에 이것저것 음식을 올렸다. 율리아의 기준으론 온종일 꼭꼭
씹어먹어도 벅찰 양이었지만 아가레스는 부족하다는 듯 다른 접시까지 끌어왔다.
[▷아가레스
[▷저항 전이 Lv.1
"어, 무슨 일 있나요?"
율리아의 포크가 멈칫하자 낭패감 섞인 얼굴로 미간을 구긴 두 악마가 그녀의 시선에 다시 해사하게
표정을 폈다. 그들은 창밖을 힐끗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 강력한 악마의 씨라도 태어난 거 아닐까? 주군이 탑에서 크게 날뛰었으니 지하의 마력이 또 한 번
요동쳤을 테지?"
"어, 어……."
방금 밖으로 날아갔던 악마들이 실신한 누군가를 업어든 채 귀환하고 있었다. 힘없이 내려앉은 검은 날개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고, 아래로 축 처진 팔다리는 불에 탄 듯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시체나 다름없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악마의 경이로운 회복력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심한 고문을 받아 형체마저 사라졌던 레벤나와 키마리스도 이삼일 만에 원래 모습을 회복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레벤나에게 무언가 눈짓을 보냈다.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뒤로한 채, 아가레스는
테라스에서 단번에 날아올랐다.
율리아는 갑자기 식욕이 사라져 버렸다. 피를 봐서도 함께 있던 누군가가 자리를 떠서도 아니었다.
'레라지에 님은 나를 구해 준 거겠지.'
"같이 가자꾸나?"
"괜찮을까요……."
"나는 주군으로부터 너를 가두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단다?"
* * *
마왕성의 거대한 중앙홀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정확히는 레라지에가 내뱉는 저주와 절규가 메아리치며
고막을 날카롭게 찔렀다.
29 화
"주군이 직접 닫은 문이다. 아무리 배신자가 있더라도 웬만한 힘으론 어림없어. 아무래도 이번에
개화했다는 인간이 생각보다 대단한 모양이군."
"……."
"됐다, 쉬어라."
바르바토스의 질문에도 레라지에는 침묵한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혓바닥 가볍게 놀린 죄로 변방에 쫓겨난
녀석이 입을 다물었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레라지에
이 내가 손끝 하나 못 댔어. 고작 스무 살 언저리밖에 안된 코흘리개 애송이한테!]
"율리아, 안 가니?"
그때, 바엘의 흉흉한 표정을 회상하던 율리아의 손끝에 불현듯 핏기가 가셨다. 좋지 않은 가정이 뇌리를
스쳤다.
바엘의 심각한 마력 폭주를 겪어 본 악마들은 그것을 당연한 일처럼 여겼지만,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상황이었다. 노예처럼 끌려간 황녀가 매일 밤 마왕의 침소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다니.
"음, 당분간 마계가 시끄러워질 것 같으니 그편이 안전하겠구나? 그런데 부탁이라니, 나한테 말하면 굳이
밤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않니?"
"아뇨, 정말 별일 아니에요."
* * *
"어지러워……."
이윽고 문이 열렸지만 안으로 들어선 바엘은 자신을 마중하는 율리아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를 뒤따르던 바르바토스 역시, 마치 그녀가 보이지 않는 듯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설 뿐이었다.
바엘의 겉옷을 받으며 말문을 열어 보려던 율리아는 두 악마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일단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아아……."
"개화한 지 얼마 안 된 소드마스터라고?"
"예, 주군."
바엘은 느긋이 방을 가로질러 마신의 탑이 보이는 창가로 향했다. 굳게 닫힌 창문을 손가락 끝으로 툭,
툭 두드린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바르바토스
"저……."
"뭐지?"
바르바토스에게선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숙였던 그녀가 쭈뼛쭈뼛 시선을 드는데, 정작 그는
별 희한한 소릴 다 듣겠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고, 율리아는 창가에 걸터앉은 바엘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둥지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여느 때처럼 탑을 응시하고 있었다.
'심장이 또…….'
바엘과 단둘이 남아 있을 때면 각인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듯 기이한 감각을 끌어내곤 했다. 어쩌면 허튼
생각 말고 계약을 완수해내라는 일종의 압박일 수도 있었다.
'나를 마신으로 만들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열쇠로서 달갑고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해.'
"뭐지?"
"이유는."
30 화
"그건 그렇지만……."
"아주 편해 보이던데."
"읏."
율리아는 이유도 모르게 홧홧해지는 얼굴을 잘 추스르려 노력했다. 그녀의 심장은 각인으로 인해 바엘의
손안에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작은 변화라도 예민한 그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내가 언제."
"……."
"마, 마왕님?"
"네?"
"……피곤하군."
나직이 중얼거린 그는 율리아의 허리를 낚아채 침대로 향했다. 평소처럼 곧장 누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엘은 그녀의 드러난 어깨를 힐끗 보더니 자신의 로브를 벗어 그녀의 머리 위에 덮어버렸다.
* * *
치열한 전투 소리가 메마르고 황폐한 대지를 울렸다. 푸른 섬광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마수의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마법사가 방어막을 치는 사이 후방을 지원하던 궁수가 맹독을 바른 화살을 비처럼
쏘아 댔다.
마족과의 피 튀기는 싸움에서 소드마스터로 개화해 명성을 날리던 그는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장
브에스드라의 황도 아벨딧심으로 향했다. 그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이름, 황녀 율리아 브에스드라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전부 고개 숙여!"
"이봐, 레기온?"
황량한 바닥에 대검을 내리꽂은 레기온이 양손에 푸른 마나를 결집시켰다. 파지직, 전기 튀는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뜨겁게 달궈진 쇠처럼 빛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법사의 방어진 안으로 뛰어든 순간, 수많은 마수가 득실거리던 대지가 과자
부스러지듯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시뻘겋게 아가리를 벌린 지옥의 틈새로 바위와 마수가 뒤섞여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레기온이 서 있는 자리를 제외한 일대가 모조리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허공에서 투명하게 점멸하는 마법진
아래로 그 참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맞아."
그를 따라 마계까지 내려온 네 명의 인간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의 대기를 환하게 비추던
푸른빛은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난 뒤에야 잠잠해졌다.
"레기온, 괜찮아?"
드디어 주어진 짧은 휴식에 동료들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개화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한계치에
근접한 마나를 운용한 레기온 역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온갖 고생 끝에 마계의 틈을 연 이후, 그들은 수없이 대립각을 세웠다. 레기온은 그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그들은 레기온을 따라가기 위해.
"하지만 난……!"
그때, 그들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아론이 흙먼지를 털고 일어나 제 스태프 끝으로 레기온의 가슴팍을
툭 건드렸다. 그는 마법계의 소드마스터 격인 대마법사의 경지를 앞두고 있는 실력자였다.
"저 녀석 말은 듣지 마. 정 위험하다 싶으면 너만 두고 잽싸게 도망갈 테니까."
"……."
31 화
아론은 법사로서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오른 만큼 판단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마계의 변두리에선 자신들이
도움이 될지 몰라도, 괴물이 득실거리는 중심부에선 결국 레기온의 발목을 잡게 될까 우려하고 있었다.
"젠장, 잠깐 쉴 틈을 안 주네."
"괜찮겠어?"
"잘 가, 친구."
"……."
'그래, 믿자.'
이번이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도 동료들도, 다음에 만날 땐 지상의 아름다운 태양 아래
서게 될 것이다. 물론 율리아도 함께 말이다.
"지금이야, 레기온!"
"가라!!"
* * *
율리아는 평화롭게 흘러가는 적막 속에서 눈을 떴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던 건지, 바엘은 이미 자리에
없었고 해는 중천에 떴다.
"졸려……."
저혈압에 허덕이다 도로 잠에 빠져들 뻔했던 율리아는 문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힘겹게 눈을 떴다.
또각또각, 자리를 느릿하게 서성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레벤나가 벌써 와서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급하게 일어나려다 우당탕 엎어진 율리아는 빠르게 머리를 빗질하고 밤새 흐트러진 나이트가운의 허리끈을
꽉 조여 묶었다. 옷은 레벤나가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골라 주기 때문에 따로 입을 필요는 없었다.
"어머, 잘 잤니?"
"낑?"
"으응……?"
[▷바르바토스
봄 꽃잎을 닮은 연노랑의 화사한 미니드레스에 하늘하늘한 샤 원단으로 커다란 리본을 허리에 매달았다.
멀리서 보면 노란 은방울꽃이 커다란 잎사귀를 매단 모습처럼 보였다.
장난감으로 착각했는지 반색하며 달려드는 베로에게 다급히 '앉아'를 외치며, 율리아는 다시금
바르바토스를 보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왜인지 뻣뻣하게 굳은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비쳤다.
[▷바르바토스
소드마스터가 마계에 침입한 이유를 확실히 밝히기 전까지는 열쇠를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워낙 간교하고
영악해 신용할 수 없는 종족이니, 저런 순진해 빠진 얼굴 밑에 무슨 속셈을 숨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
* * *
성 밖으로 나가는 건 여전히 허락되지 않았지만, 체력이 약한 율리아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을 구경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구역을 나눠 매일 조금씩 돌아다니고는 있지만 아직 남은 곳이 더 많을 정도로 악마성은
거대하고 복잡했다.
율리아는 뒤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바르바토스의 시선을 느끼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율리아는 기회가 될 때마다 레벤나의 사역마를 빌리고자 노력했다. 레기온에게 편지를 보내 당장 마계를
떠나라고 설득하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그게, 당분간은 마왕님의 침실이 아니라 제 방에서 지내려고 해요. 그러려면 여기서 꺾어야 하니까…
…."
"무슨 일이지."
악마는 청력이 좋은 편이니 아까의 대화를 온전히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시 묻는 이유엔 사실상
불허의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 아마도……."
어젯밤 물었을 때 바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만약 불허했다면 그렇다고 분명히 대답했을 것이다.
율리아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바토스
이상하군. 하필 이런 민감한 시기에 열쇠를 밖으로 내보내다니. 드디어 변덕을 끝내신 건가, 아니면
인간이 거짓을 고하는 건가.]
[▷바르바토스
만약 사실이라면 인간을 주군의 둥지에 다시 들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다만 거짓일 경우엔 열쇠의
장난질에 놀아나는 꼴이 될 텐데, 곤란하군.]
"헥헥."
율리아의 시선을 받은 베로가 냉큼 다가와 꼬리를 붕붕 휘둘렀다. 그녀가 등 뒤로 간식을 흔들고 있다는
걸 모르는 바르바토스는 이번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32 화
어쨌든 시간을 지체할 틈이 없었다. 네글리제로 갈아입은 그녀는 외출복 속에 꼭꼭 숨겨 두었던 종이와
펜을 꺼냈다.
율리아는 복도를 지키고 선 독수리들이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틈틈이 작은 소음을 내며 편지를 한
줄씩 적어 나갔다.
[레기온, 소드마스터 하나가 지하로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어. 혹시 너니? 네가 나를 찾으러 온 거니?
다급히 적어 내리던 율리아는 불현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독한 자괴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레기온을 사지에 몰아넣은 대가로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것도 모자라 레기온이 목숨 걸고 싸웠던
악마들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말았다. 차마 그걸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없어서, 그래서 레기온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평생 사죄하며 살아도 부족한데 혼자만 행복해지다니, 이렇게 이기적인 나를 차마 까발릴 수 없어.
레기온에게 미움받는 게 무서워…….'
오늘 낮, 율리아는 마계의 지평선 너머에 푸른빛과 검은 마력이 번갈아 점멸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마다
바르바토스와 레벤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노력했지만, 시야 기능을 쓰는 율리아의 앞에선
소용없는 짓이었다.
"끼잉?"
베로의 반짝이는 시선이 율리아의 손끝을 따라갔다. 달빛이 내려앉은 붉은 지평선 너머, 레기온이 오고
있을 그곳을 향해서.
"어때?"
율리아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베로를 보았다. 녀석은 잘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그저 즐거운 건지,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붕붕 흔들고 있었다.
베로의 목에 편지를 매단 그녀는 바깥에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테라스와 연결된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틈새로 밀려든 밤바람이 율리아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였다.
"헥헥헥헥!"
"옳지, 잡기 하자."
율리아는 베로의 목에 편지가 확실히 묶였는지 재차 확인했다. 그러곤 커다란 원반을 던지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자아, 준비."
"헥헥!"
"달려……. 꺅!"
율리아가 장난감을 던지는 척하려는 찰나였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베로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듯 물더니
테라스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시야가 삽시간에 반전되고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율리아는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물린 곳이 아픈 건 아니었다. 베로는 아직 이빨도 제대로 나지 않았으니까.
"흣, 베로……."
"컹컹! 컹!"
시야가 거칠게 흔들리니 멀미 때문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는 걸 알 것 같았다.
"율리아!!"
[▷SYSTEM
[▷SYSTEM
[▷SYSTEM
- 보상: 공략 대상 추가
"안 돼! 안 돼, 절대!"
"크르르릉!"
율리아가 대경실색하며 비명을 지르자 베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질주를 멈추고 기세 좋게
이빨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직 어린 개체인지라 조금도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겨우 고개를 내민
송곳니 끄트머리가 베로의 이빨 전부였다.
그 모습을 본 레기온의 눈매가 미미하게 구겨졌다. 그가 방출한 마나는 여전히 대검을 흉흉하게 휘감고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를 온몸으로 감싸며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짐승의 태도에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그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크르르릉! 컹!"
율리아가 목소리를 높인 탓인지 베로가 덩달아 흥분하며 짖어댔다. 율리아는 어린 늑대를 진정시키려
평소처럼 작게 속삭이며 레기온의 검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녀의 신호를 눈치챈 레기온이 검기를 완전히 잠재우고 율리아에게 달려왔다. 그러더니 피할 틈도 없이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레기온……."
"……."
"돌아가자."
'하지만 여기는 아벨딧심도 아니고 무려 마계인데.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위험했을까.'
"……."
"그럼 마왕에게 덤비면 내 진심을 알아 줄래? 그놈을 쓰러뜨려 심장을 가져오면 나를 믿을 수 있겠어?"
"아니, 괜찮아"
"레기온, 레기온."
"……."
"팔 내려 줘. 왜 그러는데."
"큭큭."
걱정되다 못해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려던 찰나, 그의 굳은 입꼬리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르륵 내려간 팔 아래,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가 율리아를 오롯이 비췄다. 반듯한 이마와 쭉 뻗은 콧대,
예전보다 날카로워진 턱선. 그녀를 바라보는 레기온은 어느새 완연한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입가에 걸린 웃음만큼은 어릴 적 폐궁의 뒤편에 숨어 놀던 때와 같았다.
"설마 날 속인 거야?"
그녀의 솜 주먹을 전부 맞아주던 레기온이 돌연 고개를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가을날의 하늘처럼
푸르고 깊은 눈동자가 율리아의 모습을 비췄다.
"레기온?"
"이게 뭐야."
"읏!"
굳은살 박인 손가락의 감촉이 거칠고 아팠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고 율리아의 윗가슴을 꾸욱 누르듯
쓸어 내렸다.
"누가 너한테 이딴 걸 새겨 놓은 거야."
"……."
"설마, 아니겠지."
반은 사고이긴 했지만 어쨌든 레기온과 만났다. 그가 전쟁터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안도했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래도 다른 악마들이 알아채기 전에 빨리 그를 지상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이런, 미안. 놀랐지? 일단은 돌아가면서 이야기하자. 아론이 아직 마계에 있다면 각인에 대해 자세히
봐 줄 수 있을 거야."
"레기온, 잠시만."
"응?"
율리아는 자신을 안아들려는 레기온의 어깨를 강하게 밀었다. 거절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굳어 버린
그의 눈빛을 애써 못 본 체하며, 그녀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함께……."
"……."
레기온의 시선은 율리아의 가슴에 못박인 듯 고정되어 있었다. 율리아는 왜인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차마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 버렸다.
"율리아."
그녀가 생각에 잠긴 동안, 레기온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얗고 작은 손이 혹여나
다칠까 제 커다란 손 안에 가두고 마치 애교를 부리듯 부드럽게 팔을 흔들었다.
"레기온……."
그때의 일을 어떻게 잊을까. 어떻게 감히 잊을까. 하지만 레기온은 그녀의 안색이 흐려질 틈도 없이
맞잡은 손을 휘휘 더 크게 움직였다.
"이제 예전이랑 달라. 우릴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너는 잉그렘 5 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고 나는
나름대로 쓸 만한 검사가 됐어. 외국에 친구도 많이 생겼고, 사실은 우리가 지낼 마을도 몇 군데 추려
뒀어."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율리아."
율리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을 감쌌다. 이건 분명 바엘의 마력이었다. 마신의 탑과 악마성 인근을
이런 식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34 화
이것을 실전에서 써 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들지, 유효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저항 전이 Lv.1
그와 동시에 투명하게 빛나는 장막이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와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레기온을 완전히 감싼 채로 성장을 멈췄다. 그는 오감이 극도로 발달된 소드마스터였지만 극도로 긴장한
탓인지 막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광경이지? 침실을 장식해야 할 물건이 어디로 그리 열심히 도망치나 봤더니, 고작 앞뜰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나."
붉은 밤하늘 아래 거대한 날개를 펼친 바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편엔 마찬가지로 날개를 펄럭이는
몇몇 고위 마족의 그림자가 보였다.
"마왕님, 여긴 어떻게……."
"물건? 지금 율리아를 물건이라고 한 건가?"
[▷저항 전이 Lv.1
제한 시간 4 분 47 초]
'어떡하지? 어떡해야…….'
그녀는 바엘의 뒤편에 흉흉한 눈빛을 한 채 자리한 마족들을 보았다. 바르바토스, 보티스, 외에도 얼굴만
아는 악마가 더 있었지만 이 상황을 중재할 만한 중도적 성향의 마족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생성된 에피소드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다름 아닌 바엘의 회유. 자신이 그를 어떻게
설득하고 움직이느냐에 따라 레기온의 생사가 결정되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선택할 길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율리아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저항 전이의 범위에서 벗어난 레기온이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무너지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역시나 바엘은 이미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혹여 바엘이나 다른 악마가 이상을 느낄까 스킬도 도중에 종료해 버렸다. 원래도 썩 높지 않던 체력이
반이나 떨어지자 구토감이 들 정도로 극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율리아는 자연스럽게 보이고자 목소리에 최대한 애교를 섞고 활짝 웃었다. 바엘은 자신이 웃는 모습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레기온을 무사히 돌려보내야 했으니까.
율리아의 해사한 미소를 내려다본 바엘의 표정이 역시나 굳었다. 내심 뜨끔했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었다. 율리아는 바엘의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선명하게 갈라진 근육이 얇은
네글리제 너머로 뜨겁게 달라붙었다.
안도하기가 무섭게 또다시 시야가 일그러졌다. 율리아는 숨을 헐떡이며 바엘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으응, 앗!"
그러기 전에 떨어지려던 율리아는 강한 힘으로 붙들려 다시금 바엘의 품에 갇혔다. 넘어지며 실수로 짚은
바엘의 복근이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놀라서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던 그녀는 등 뒤의 시선을 느끼고
멈칫했다.
"주군, 어떡하시겠습니까."
"……."
이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레기온은 자신이 멀쩡하다는 걸 확인했다. 자신도 지상에 돌아갈 생각이
없음을 그에게 분명히 말했다. 비록 레라지에가 크게 다치긴 했지만, 악마니까 머지않아 멀쩡히 회복할
것이다.
율리아는 눈물로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슬그머니 들었다. 마주친 바엘의 표정은 조각처럼 무기질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문 찰나, 바엘의 입매가 비틀렸다.
"죽여."
율리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엘은 상황을 즐기듯 재차 강조했다.
"예, 주군."
율리아가 다급히 바르바토스를 붙잡으려는 찰나, 바엘이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고개를 숙였다.
"으읍!"
뜨겁고 단단한 혀가 앙다문 입술을 비집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자꾸만 도망치는 작은 혀를 얽매고
움찔거리는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도망치려 안간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지만 바엘의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큭……."
"마왕님!"
율리아는 다급히 밑을 내려다보았다. 잿더미 속에 묻힌 지상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사납게 달려드는
악마들의 뒷모습과 그런 그들에게 저항하는 푸른 마나가 그녀의 눈에 담긴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방의 모든 출입구가 사슬과 자물쇠로 숨 막히게 가로막힌 폐궁. 손끝만 닿아도 저주받았다며 몸서리치는
하녀들과 감시 카메라처럼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주시하는 병사들.
'황후의 죽음에 대한 복수'라는 최초의 이유조차 잊고, 힘없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일은 어느새 관성이
되어 버렸다. 아무도 불합리를 느끼지 못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으니까.
율리아는 아프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머릿속 목소리를 무시하고 가만 눈을 감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왜인지 근처가 소란스러워졌다. 소리를 죽인 발걸음이 점점 가까워졌고 성인 사내로 추정되는 몇몇
목소리도 들렸다.
평소라면 몰라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외로움에 푹 젖어 있던 율리아의 머릿속에서 기대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혹시 누군가 자신을 만나러 와 준 건 아닐까 하는 그런 기대. 그러나 동시에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율리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타성처럼 잠겨 든 쓸쓸한 기분이 그녀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작은 한숨을 내쉰 율리아가 다시 침실로 돌아가려는 찰나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가 그녀의
입을 강하게 틀어막았다.
"읍……!"
"조용히 있어!"
35 화
"……."
저벅저벅.
'설마, 레기온?'
하지만 '피폐'라는 장르에 걸맞게 레기온은 손속이 잔인하고 냉혹하며 계산적이었다. 에스델을 구하는
대가로 이미 황제에게 많은 것을 약속받았으면서, 열쇠인 에스델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내키는 대로 희망
고문을 일삼았던 것이다.
"……?"
주변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거나 불길한 것 취급당하는 건 무척이나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 마주한
소년에게조차 그런 취급을 받고 있자니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었다.
증명하고 싶었다. 자신은 발로 찬다고 말없이 구르기만 하는 돌멩이가 아니란 사실을. 율리아는 곧장
소년의 손목을 붙들었다.
"따라와."
"무슨 짓을……!"
"빨리. 서둘러."
사내들의 대화 내용으로 짐작해 보자면 레기온은 간 크게도 탄신연을 노려 황궁을 털려고 시도한
모양이었다. 그 와중 숨어든 곳이 하필이면 이런 폐궁이었고 말이다.
"누, 누구야?"
"용건이 있어 잠시 방을 뒤지겠습니다."
"누구냐고 물었어."
"근위대입니다. 에스델 황녀 전하께 진상된 패물을 빼돌린 좀도둑이 있어 수색 중이죠. 그러니 방해하지
말고 물러서십시오."
안으로 사정없이 들이닥쳐 이것저것 열어보고 뒤지는 사내들을 보며 율리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장래 인-마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마족 측이 확실한 승기를 거머쥐었던 전황을 다시금 교착
상태로 몰아넣는다. 이는 결국 마족 측에서 '열쇠'를 대가로 종전 협상을 요구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그 작은 소리에도 기사들은 냉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율리아의 발치를 구르는 작은 보석들을 발견했다.
입을 연 사람은 없을지언정, 해명을 요구하는 시선만큼은 그녀에게 뚜렷하게 와 박혔다.
"……내가 훔쳤어."
자신을 향한 시선이 경멸과 혐오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익숙한 일이니 전혀
아프지 않았다. 조금도.
* * *
그는 강하기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레기온이라도 최고위급 마족이 몇이나
달려들었는데 무사히 빠져나가기는 힘들었다. 자신이 도와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막막했다. 범람하는 절망감의 크기만큼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럴수록 자신을 향한 바엘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진다는 걸 알면서도.
"후우."
그는 여전히 날개를 늘어뜨린 채로 느릿하게 목덜미를 주물렀다. 미끄러뜨리듯 로브를 벗으니 떡 벌어진
어깨와 조각처럼 깊게 굴곡진 근육이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하의는 바엘의 탄탄한 엉덩이
근육과 허벅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마왕님……."
머뭇머뭇, 율리아는 다리 사이에서 민망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느릿하게 걸어가 바엘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아주 작고 가벼운 힘이었는데도 그의 시선이 자신과 맞닿은 곳에 쏠려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군."
"으응……!"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눈앞에서 흔들리는 얇은 네글리제 밑단을 붙들었다. 차가운 손이 납작한 복부와
완만한 젖가슴을 느릿하게 타고 올라가 붉게 달아오른 율리아의 아랫입술을 살살 매만졌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저릿한 열기가 퍼졌다. 율리아는 제 몸을 샅샅이 유린하는 사내의 손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 버렸다. 허리를 뒤틀며 몸을 빼려고 했지만 바엘의 다른 손이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구속했다.
"물어."
그렇게 시선을 내리자 실오라기 하나 없이 가녀린 나신이 눈앞에 남김없이 드러났다. 상아처럼 새하얗고
부드러운 여체가 설익은 과실처럼 발갛게 물들어 갔다. 주변에 꽃 한 송이 없건만 달큰하게 풍겨오는 살
내음에 바엘의 시야가 까맣게 침잠했다.
36 화
사내의 커다란 손이 율리아의 가랑이 사이로 주저 없이 비집고 들어갔다. 민감한 곳을 찔린 그녀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바엘의 손목 위로 나이트가운이 툭 떨어졌다.
"아, 제발 살살……!"
"싫어, 싫, 흐읍!"
율리아가 옷자락을 물기 무섭게 그는 다시금 손가락을 강하게 쑤셔 넣었다. 그녀의 입에서 뭉그러진
신음이 새어 나왔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내부를 긁으며 빠져나갔다가 다시 쳐들어오는 감각이 등골을
선뜩하게 울렸다.
거친 움직임 탓에 다시 허벅지 안쪽이 움찔거리고 다리엔 힘이 풀렸다. 조금씩 비틀비틀 앞으로 다가가던
율리아의 정강이가 이윽고 침대 매트리스가 닿았다. 그녀의 명치께에 바엘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쓸렸다.
"흐, 읍, 읍, 흐으!"
"……."
"응, 응, 으으응!"
억눌린 비음과 찌걱대는 소리만이 적막한 둥지를 스산하게 울렸다. 파도처럼 차곡차곡 밀려들던 쾌락이
정점에 다다르기 직전, 바엘이 그녀의 안에서 손가락을 빼내며 푹 젖어버린 속옷을 무릎 아래까지 내렸다.
뜨거운 열락에 빠져들던 하복부에 거짓말처럼 찬기가 밀어닥쳤다. 미처 도달하지 못한 욕구는 율리아의
머릿속을 짓뭉개며 몸 구석구석을 쑤시고 돌아다녔다. 그녀는 치맛자락이 흘러내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헐떡헐떡 몸을 뒤틀었다.
"아앙, 아!"
"……."
바닥에 무릎 꿇은 그녀는 눈앞에 드러난 광경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핏줄이 도드라진 거대한 기둥이
당장에라도 파고들만 한 구멍을 찾아 꺼떡거리고 있었다.
"빨아."
"으읍, 욱!"
"이 정도로 관대한 처벌이라니, 다른 이들이 들으면 놀라 자빠지겠군."
권태로운 목소리와 다르게 그녀를 짓누르는 손길은 더욱 잔인해졌다. 무자비하게 파고든 물건이 그녀의
작은 입 안을 거칠게 유린했다. 율리아의 목에서 비명을 닮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컥, 우욱……!"
살고자 하는 욕구와 지배하고자 하는 가학성이 팽팽하게 맞부딪혔다. 그때, 그녀의 머리칼을 쥐고 거칠게
움직이던 그의 미간이 일순 구겨졌다. 율리아의 이가 페니스에 스쳤다.
머리채를 쥔 손아귀가 떨어져 나가자 율리아는 힘없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뺨은 어느새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정신이 멍해 턱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타액을 닦을 틈도 없었다.
바엘의 붉은 눈동자가 울먹이는 그녀를 뚫어져라 직시했다. 난폭하게 들끓는 욕망에 휩쓸려, 그는 제
성기를 길게 훑으며 수음을 시작했다. 선단까지 밀려 올라갔던 표피가 팽팽하게 당겨져 내려갔다. 탁탁,
건조한 마찰음이 율리아의 고막에 자극적으로 들러붙었다.
원래도 선명했던 바엘의 복근이 더욱 짙은 음영을 그리며 수축했다. 바엘은 절정에 달할 때까지 오직
율리아의 모습만을 지독하게 쫓았다. 페니스가 토해 낸 정액이 그의 복부와 허벅지에 난잡하게 튀었다.
"후우."
"마왕님……."
"이리와."
"마왕님, 제발."
"읏……."
"가까이."
"더."
"마음에 안 드는군."
그것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바엘의 미간이 구겨짐과 동시에 찌익, 그녀가 쥐고 있던 네글리제가 간단하게
찢겨 버렸다. 바르르 떨리는 새하얀 여체가 바엘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올라와."
"어, 어디로……."
"……."
인간 주제에 감히 마왕의 얼굴을 깔고 앉는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알몸으로 있다는 수치심은
둘째치고라도, 그렇게 하면 바엘이 정말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으로 올라와."
"이런 짓 해 본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르고……."
겁먹어 굳어버린 율리아를 다그치듯, 바엘이 그녀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픔과
동시에 미묘한 쾌락이 몸속을 내달렸다.
"으응!"
그녀가 저도 모르게 무릎으로 반쯤 일어선 틈을 놓치지 않고 바엘은 그녀의 안으로 다시금 손가락을
넣었다. 겁먹은 탓에 뻑뻑하게 말라 버린 내벽이 그의 손가락을 힘겹게 밀어냈지만 그럼에도 바엘은
중지를 꾸역꾸역 끝까지 쑤셔 넣었다.
율리아는 자신의 배 속에서 앞쪽을 향해 당기는 힘에 버티지 못했다. 결국 가랑이 사이를 두 손으로 가린
채 머뭇머뭇 그의 얼굴을 향해 무릎걸음으로 기었다.
"더."
바엘의 턱 부근에서 멈춘 율리아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그의 시야에
속속들이 닿게 된다. 다리 사이를 훤히 보여 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뜨겁게
뻐끔거리는 그곳조차.
그녀가 망설이자 바엘은 그녀의 안에 꽂아 넣은 손가락을 다시금 당겼다. 혹시나 찢어지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녀는 주춤주춤 한 걸음 더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앉아."
율리아의 주저를 알아챘는지 바엘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음핵을 슬쩍 밀듯이 굴렸다. 그와 맨몸으로
맞닿아 있는 데다 비부엔 습하고 뜨거운 숨이 와닿고, 거기에 길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음핵을 문지르고
있으니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으응!"
그와 맞닿은 유일한 곳에서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결국 도망치지 못한 채 양손으로 입술만 틀어막았다.
37 화
"흐윽, 아!"
그에게 밀부를 고스란히 내어준 율리아는 침대 헤드에 매달려 가쁜 숨만 할딱였다. 붉은 꽃잎을 벌리던
손가락은 어느새 밖으로 빠져나와 율리아의 미성숙한 젖가슴을 움켜쥐고 유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위아래로 자극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일어서지 마."
"아, 안 돼, 흑……!"
입을 벌린 그는 한입에 들어갈 정도로 앙증맞은 음부를 더욱 강하게 쑤시고 핥았다. 달큰하게 새어 나오는
액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삼켰다. 그의 목울대가 흥분으로 거칠게 오르내렸다.
젖은 소리가 이제는 온 실내를 가득 메웠다. 바엘은 율리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붙잡고 위아래로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오르내리면서도 율리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하염없이 신음만 흘렸다.
"더는, 흐흑……."
힘이 다했는지 흐느적거리며 쓰러지는 그녀의 목덜미를 받친 채로, 바엘은 순식간에 자세를 역전시켰다.
그는 제 밑에 깔린 새하얀 여체를 손끝으로 길게 훑으며 귓가에 중얼거렸다.
바엘은 율리아의 둔덕을 한껏 벌리고, 그 사이에 팽팽하게 달아오른 성기를 끼워 넣었다. 삽입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느긋하게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음핵이 압박당해 아찔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마계의 밤은 길지."
"흐으……."
"내가 밤이라고 말하면, 설령 하늘에 태양이 떴다 하더라도 밤이라 불리게 될 테니."
바엘은 허리를 뒤로 물리며 자세를 바꿨다. 율리아의 가녀린 허리를 끌어당겨 제 붉은 살덩어리와 맞춘 뒤,
준비할 틈도 없이 말랑하게 젖은 구멍을 단번에 꿰뚫었다.
"아앙!!"
빠듯하게 들어찬 페니스는 단지 존재만으로도 온 내벽을 거세게 압박했다. 지독한 쾌락을 견디지 못해
몸을 뒤트는 작은 먹잇감을 보며, 왕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도망칠 수 없어."
그는 율리아의 허리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뒤로 물렸던 허리를 다시금 힘껏 쳐 올렸다. 그녀의 작은
구멍이 거대한 페니스를 뿌리 끝까지 온전히 삼켰다. 그는 기다리지 않고 재차 허리를 튕겼다. 움직임에
맞춰 붙든 허리를 밑으로 끌어당기니 결합은 더욱 깊어졌다.
"큭."
"흐흑, 그만……!"
빠르게 살 부딪히는 소리와 율리아의 끊어질 듯 높다란 교성, 그리고 왕의 붉은 안광이 밤의 끝자락을
빼곡히 채워 갔다.
* * *
"……."
'약하군.'
나름 부드럽게 잡았는데도 젖은 가죽으로 조인 것처럼 짙은 자국이 남았다. 허리, 허벅지, 팔뚝, 손목.
상흔을 하나하나 훑던 바엘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아닌 그 누가 보더라도 혀를 찰
정도로 약했다.
그의 자제심은 언제 끊어질지 모를 실낱과 같았다. 인간 사내가 열쇠의 가슴을 소중히 어루만지는 모습을
봤을 때, 타인의 손에 순순히 몸을 맡기는 그녀를 봤을 때, 실은 그것이 각인과 관련된 행동임을
알면서도 들끓는 분노로 눈앞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목이 타는데.'
"쯧."
자리에서 일어선 바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새 벌어진 격한 정사로 인해 난장판이 됐던 둥지는 바엘의
손짓 한 번으로 눈 깜짝할 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마력이 통하지 않는 단 하나의 존재만이 여전히 엉망인 상태로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 뒷머리를 당기는 것처럼 신경이 곤두섰다.
* * *
"큭, 인간 주제에……!"
푸른빛에 닿은 보티스의 꼬리가 일전 레라지에의 몸처럼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것을 확인한 바르바토스는
재빨리 퇴각을 외쳤다. 왕과 열쇠가 떠난 뒤 줄곧 멍한 얼굴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만 하던 인간의 첫
공격이었다.
그의 예측대로 레기온의 마나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깊은 호수에 빠진 사람처럼 어두컴컴한 바닥으로
가라앉는 감각이 팔다리를 무겁게 옭아맸다. 몸에서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붙들 수 없었다. 그는 마나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율리아, 어째서……."
끝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채워갔다. 자신을 내버려둔 채 마왕의 품에 파고들던 그녀의 뒷모습이. 투정
부리듯 중얼거리는 달콤한 목소리가.
그런데 어째서?
38 화
"욱! 쿨럭!"
마나가 폭주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한 바닥이 광범위하게 갈라지고 무너져 내렸다. 악마들이 비웃음 띈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도 자신의 끝이 임박했다는 걸 눈치챈 것이리라.
"젠장……."
육신이 내지르는 비명을 무시하며 한 발씩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그때,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악마들이
레기온의 머리 위로 매서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방어막은 마력을 튕겨냈지만 충격은 안에 있던
레기온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크아아악!"
"허억, 허억……!"
율리아를 보는 마왕의 시선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지옥의 밑바닥처럼 아득히 어둡고
시체 속 구더기처럼 지독하게 들끓는, 그건 분명 사내로서의 집착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시야가 벌겋게 물들었다. 극렬한 분노가 레기온을 집어삼키고, 그가 내뿜는 마나의 색이
점점 어둡게 변질되어 갔다.
"예감이 좋지 않군."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악마들이 공격을 멈췄다. 상황을 지켜보던 바르바토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죽여야지."
대지가 갈라질 듯 엄청난 충격파가 울리며 도끼가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자루에 묶여 있던 물건은 작은
흠집 하나 없이 레기온의 발치에 툭 떨어졌다.
"이 멍청한 인간 같으니! 누군가를 상처 주느니 차라리 제가 다치고 마는 율리아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편지에 숨은 진심이 뭔지 정말 모르겠단 말이야?!"
빽 소리친 레벤나가 도끼로 다시금 방어막을 내리쳤다. 고막을 쩡하니 울리는 파공음과 함께 무기가
산산조각 났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네 악마가 모두 인상을 찡그렸지만 서로를 노려보는 레벤나와
레기온의 시선에 흔들림 따윈 없었다.
다만 방금의 충격으로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레기온은 손안의 편지를 움켜쥐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실은 율리아의 머리카락에 닿은 순간부터 흐릿하게 멀어져 가던 정신이 점점 맑게 개어 가고
있었다.
방금까지 자신이 읊조렸던 온갖 폭력적인 상념이 뇌리를 스쳤다. 율리아의 선택을 저주하고 원망하며,
그녀의 마음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을 찍겠다고 결심했다. 단지 생각한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평생
사과해야 할 만큼 잔인한 내용이었다.
고갈되어 완전히 빠져나간 마나 대신 새롭게 채워진 힘이 육체를 재구성해 나갔다. 그것은 레기온이 원래
사용하던 마나와 비슷하되 조금 달랐다. 따뜻하고 상냥한 느낌이 드는, 이건 분명 율리아와 닮은
힘이었다.
길었던 밤이 지나 드디어 먼동이 터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웃을 때처럼 선홍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며 레기온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 * *
"……내가 훔쳤어."
방을 뒤지던 사내들이 삽시간에 소녀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기사 중 하나가 그녀의 발치에 떨어진
보석을 낚아채듯 주웠고, 낡은 침대맡에 놓인 싸구려 초에 비춰 그것이 잃어버린 물건이 맞음을 확인했다.
"왜 이런 짓을 했습니까."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이래서야 도둑이 누군지 알아냈다고 우리가 공을 인정받을 수나 있겠어? 이딴 계집이 부린 수작질 따위,
쉬쉬하면서 없던 일로 묻어 버릴 텐데!"
"그만!"
말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기색이 섞였다.
그의 판결을 신호로 기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마지막까지 씨근덕대던 사내도 이윽고 방을 떠났다.
내내 긴장하느라 지친 소녀는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는 태어나 평생을 거리의 아이로 살았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을 들어본 적도 건네본 적도
없었다. 소년의 목소리가 절로 퉁명스럽게 나갔다.
"……."
순간 소년은 멈칫했다. 그를 말없이 올려다본 소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
"아,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소년의 뇌리에 수많은 귀빈 사이에서 즐거운 듯 웃던 황녀의 모습과 다 낡아빠진 폐궁에 홀로 웅크리고
있는 작고 가녀린 어깨가 번갈아 스쳤다.
'젠장.'
아무리 저항해 봤자 애초부터 결론이 정해진 싸움이었다. 고뇌하듯 제 머리칼을 마구 흩뜨리던 소년이
결국 침대 발치에 털썩 걸터앉았다.
"……율리아."
"으윽……."
하지만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길 여유는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율리아가 살짝 뒤척인 순간, 끔찍한
통증이 밀어닥치며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내지른 탓이었다. 경악한 그녀가 헉, 숨을 들이켰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관절이 격하게 삐걱대고 몸은 침대 아래로 푹푹 꺼졌다. 민망한 곳에서
느껴지는 붓고 쓰라린 통증은 덤이었다. 밀려드는 고통에 허덕이던 그녀는 머리맡에 놓인 물을
들이켜고서야 간신히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시야에 들어온 그녀의 나신은 엉망이었다. 팔다리는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멍이 들었고 가슴 언저리엔
무언가에 물린 듯 울긋불긋한 상흔과 잇자국이 가득했다.
아랫배 부근에 뭉쳐있는 시트를 걷어 안의 상황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다. 밖으로
드러난 부분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을 거란 걸 아는 까닭이었다.
이 침대 위에서 바엘과 벌인 정사의 기억은 그만큼 강렬했다. 도저히 떨쳐낼 수 없을 정도로 뇌리에
선명히 각인됐다. 잔인한 열락으로 점철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던 그녀의 어깨가 불현듯 굳었다.
"밖에, 레기온이……."
"흐윽!"
[▷SYSTEM
진행도 확인 불가]
[▷SYSTEM
"이딴 게 다 무슨 소용이야."
[▷SYSTEM
[▷SYSTEM
근처에 마족이 다가올 때마다 떠오르던 지문 창이 전원 꺼지듯 픽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시야 가장자리도
붉게 젖어 들며 그 면적을 조금씩 넓혀 가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초조한 눈빛으로 복도 너머를 응시했다. 저곳에서 꺾으면 1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거대한 홀이
있었다. 성 밖으로 나가는 길목이 저곳에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베로를 축사에서 꺼내려면 이 루트를
통과하는 게 가장 빨랐다.
[▷SYSTEM
잔여 HP 가 4% 미만입니다.]
"진정해, 레라지에."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병신 꼴이 됐는데!"
"뭐라고?!"
저도 모르게 일어선 율리아는 홀린 듯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이들은 여전히
뜨거운 공방을 이어가고 있었다.
레라지에는 펄펄 뛰었고 레기온은 냉소적인 눈빛을 한 채 코웃음 쳤다. 레벤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길게
하품을 하며 베로를 쓰다듬었고, 바르바토스는 모노클을 벗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들 외에도
아가레스나 보티스를 비롯한 악마 두엇이 더 자리하고 있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조합이었다. 율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지만 그렇다고 눈 앞에 펼쳐진 생소한
광경이 없던 일이 되진 않았다.
[▷SYSTEM
잔여 HP 가 3% 미만입니다.]
"아……."
[▷SYSTEM
레기온의 얼굴이 왜 어색하게 굳는지, 아가레스와 레벤나는 어째서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는지 알지
못했다. 준비할 틈도 없이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
"그게, 그러니까……."
"조금 섭섭하구나? 인계에 그리 중요한 사람을 두고 왔다고 왜 말하지 않았니? 네 편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난 까맣게 모르고 구경이나 했잖니? 늦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네……?"
40 화
"몸은 좀 괜찮아?"
"아, 응."
"레기온, 어젯밤엔 어떻게 된 거야? 성엔 어떻게 들어온 거고, 그보다 왜 인계로 돌아가지 않았어?"
"나 때문이구나."
"레기온."
"크흠."
레기온은 그녀가 매달리기 쉽도록 자세를 바꾸며 작은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당황한 율리아의
안중엔 그런 변화 따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발만 콩콩 굴렀다.
"거짓말 아닌데……."
"뭐?!"
"아뇨, 아무 말 안 했어요."
"그래도 이거 하난 확실하지."
"뭐가."
"……."
[▷SYSTEM
HP 가 5% 강제 회복되었습니다.]
[▷SYSTEM
[▷SYSTEM
[완료]
* * *
악마성이 모처럼 깊은 정적에 잠긴 밤, 넓은 집무실을 울리던 펜 마찰하는 소리가 불현듯 멈췄다. 새하얀
종이에 검은 잉크 한 방울이 튀어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본 바르바토스의 눈매가 미미하게 굳었다.
"후우, 젠장."
바르바토스는 흑백이 명확한 것을 좋아했다. 마계와 인계로 나뉜 세상도, 강자와 약자로 이분법 된
지옥의 질서도 모두 그의 취향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이제껏 법칙에서 어긋나는 일을 본 적이
없었다.
자신들이 원래 필요로 했던 인간은 지상에서 가장 고귀한 별이라 불리는 에스델 브에스드라였다. 그런데
정작 도착한 건 일찍이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율리아 브에스드라였다.
인간들은 단순히 가짜를 희생시켜 소중한 황녀를 지키고 싶었겠지만, 놀랍게도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진짜
열쇠였다. 그녀는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강력한 마력 저항을 지녀 마정석과 주군의 마력까지 철저히 막아
냈다. 아무리 열쇠라 하더라도 결국엔 나약한 인간이건만 말이다.
그래, 여기까진 열쇠의 특수성이라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 * *
04. 마신의 탑
[▷SYSTEM
에피소드 완료 보상으로 진행도가 10% 올랐고, 바엘만 존재하던 공략 캐릭터에 레기온이 추가되었으며
스킬 포인트도 3 개 생겨났다. 그 외에도 기본 스탯이 자잘하게 올랐지만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레기온'의
해금이었다.
율리아는 이제껏 엔딩 이후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정석의 봉인을 풀고서도
자신이 살아있을 수 있다면, 역시 인계로 돌아가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인 자신이 이곳에서 머무는 건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뿐이었다. 마성이 없는 물과 음식을
지속적으로 가져와야 하고, 아주 짧은 외출조차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나약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은 역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편이 나았다. 이곳에서의 일들은 행복했던 추억으로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나면 레기온과 함께 지상으로 돌아가자고, 율리아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녀는 다음으로 스킬에 들어갔다. 거대한 금빛 나무가 뿌리부터 불을 밝히며 환하게 피어났다. 그리고
세 개의 이파리가 화면 가장자리에서 선택을 기다리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41 화
'우선 체력부터 올려야지. 항마력 계통 스킬은 가뜩이나 체력 소모가 큰데, 매번 쓰러져서 주변에 민폐를
끼칠 순 없어."
레기온과 신체 접촉을 하면 마나의 영향을 받아 체력이 강제로 회복된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실제로
활용하기는 어려웠다. 입맞춤과 같은 밀접한 접촉이 있어야 그나마 효율이 높고, 일상적인 스킨십은
하나마나인 탓이었다.
[▷VIT Lv.2
율리아는 이것에 한 개의 이파리를 소모한 뒤 다시 전체 트리로 빠져나왔다. 다음은 액티브 스킬을 선택할
차례였다. 그녀는 미리 봐 뒀던 두 스킬을 번갈아 클릭했다.
[▷저항 전이 Lv.2
[▷저항 거점 Lv.1
플레이어가 지정한 좌표에 일정 시간 항마력을 부여할 수 있다. 잔여 체력의 50%를 소모한다. SP 40]
'어떡하지.'
스킬 레벨을 올리면 기존보다 위력이 올라감과 동시에 소모되는 체력은 10% 감소했다. 다소 무리를
감수하면 스킬을 두 번 연속으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자, 잠깐……!"
놀란 율리아는 스킬을 올리지 못한 채 시스템을 종료했다. 거대한 황금빛 나무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직후,
문이 벌컥 열렸다.
"마왕님?"
"또 그런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은 악마성이었고 바엘의 권능이 미치는 장소였다. 레기온이 마족들에게 포위당해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하는 모습은 또 보고 싶지 않았다.
뒤늦게 머쓱해진 율리아가 손을 피하려 했지만, 레기온은 눈치도 없이 왜 그러냐며 되레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왜인지 레기온의 목소리가 조금 싸늘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눈치챈 율리아가 그를 돌아보려는데,
어느새 성큼 다가온 키마리스가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키마리스 님, 다친 곳은 좀 어떠세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율리아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바르바토스가 무미건조한 성격이라 그 정도만
떠올렸던 걸 정말 다행이라고 해야 할 판이었다.
[▷키마리스
"레기온, 방금 뭐 했어?"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키마리스는 레기온의 더듬거리는 변명을 끊으며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등 위에 조심스레 입을 맞춘 그가 다시금 시선을 들었다.
"제 호위요?"
하며 웃었다.
"들으셨습니까?"
"그래도 정말 죄송해요."
"율리아."
"말솜씨 한번 좋네. 말이 좋아 호위지, 결국엔 감시역일 뿐이면서. 중요한 열쇠가 도망치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그건……."
대답하던 말꼬리가 미묘하게 늘어진 찰나였다. 레기온의 시선이 불현듯 창밖으로 향했다. 키마리스 역시
어깨를 굳히더니 거대한 창 너머 마신의 탑을 올려다보았다.
탑 정상의 수정구에서 마력의 파장이 거세게 맥박치고 있었다. 율리아는 평소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이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율리아, 피해!"
"위험합니다!"
레기온의 손아귀에 푸른 섬광이 맴돌더니 거대한 대검이 생겨났다. 동시에 키마리스가 그녀를 다급히
끌어당겼다.
"젠장, 전부 고개 숙여!"
점점 빠르게 점멸하는 마정석의 파장이 한계가 임박했음을 알렸다. 레기온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대량의 마나를 폭발시켜 충격을 상쇄하려는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린 율리아가 시스템을 열었다. 그러곤
생각할 틈도 없이 스킬을 발동시켰다.
[▷저항 전이 Lv.1
42 화
직후, 방의 유리가 와장창 깨져나갔다. 태풍에 휩쓸린 듯 무시무시한 풍압이 실내를 폐허로 만들었고,
눈을 멀게 할 작정인지 섬광과 전격도 연달아 내리쳤다. 일반적인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
"율리아?"
거리는 멀었지만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편 칠흑의 그림자가, 바엘의 육체가 산산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하고 처참해서, 율리아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거대한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마력은 나약한 존재들을 전부 터뜨려 죽인 뒤에야 사그라졌다. 때마침 5 분의
시간이 지나 스킬이 종료되고, 율리아는 반이나 깎여 나간 체력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하지만 성의 진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레기온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들은 서로를 형형한 안광으로 노려보았지만 실랑이는 길지 않았다. 탑에서 쿠르릉,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사위가 번쩍 밝아진 것이다. 마정석의 폭주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어, 어?!"
"……!"
"율리아, 뒤로!"
후드득, 잿빛 흙먼지가 휘날리는 가운데 셋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바닥에 팬 기다란 흔적
사이로 보랏빛 기운이 파직거리다 녹아들 듯 느릿하게 사라졌다.
"이게 무슨……."
그것을 발견한 둘의 눈초리가 삽시간에 가늘어졌다. 그들은 율리아가 듣지 못하도록 나직이 속삭였다.
등 뒤에서 오가는 은밀한 거래를 알지 못한 율리아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시야를 뿌옇게 가리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쥐죽은 듯 잠잠해진 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자코 기다렸지만 탑에선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강대한 마력을 지녔어도 그런 무시무시한 마력을 직격으로 맞았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어쩌면
안에서 정신을 잃은 채 죽어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키마리스 님."
"예."
"그게……."
"안 됩니다."
그가 이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자신이 가야만 한다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강박감에 휩싸였다.
"이봐, 인간!"
"뭐가 문제야? 율리아가 원하는 일이잖아. 난 율리아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하겠다고 결정한 건 뭐든
하게 해 주고 싶다고. 그게 바로 내가 강해진 이유니까."
홀로 남은 키마리스는 점점 멀어져 가는 두 인영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 * *
"그 정도야?"
레기온처럼 마기를 감지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위압적인 공기 속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호의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안으로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이제 정말 들어가야겠어."
"같이 가."
율리아는 레기온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다 멈칫했다. 그녀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SYSTEM
[▷SYSTEM
퀘스트 '탑의 비밀'이 해금되었다. 내용을 훑어보던 율리아의 시선이 보상에서 멈췄다.
커맨드 시스템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뜻만 보자면 제법 유용해 보이는 기능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같았다.
율리아는 창을 종료하고 시선을 내렸다. 입구 바닥에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원형 마법진이 빛나고 있었다.
율리아는 저것이 해금 조건에 해당하는 포탈이라는 걸 알았다. 바엘은 이미 탑 안에 있으니 자신과
레기온까지 내부로 진입하면 퀘스트 사건으로 이동하는 것이리라.
율리아는 앞서 걷는 레기온을 붙들려고 했다. 새롭게 떠오른 시스템 창이 시야를 막지만 않았어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SYSTEM
"왜 그래?"
"그, 그게……."
43 화
"그냥 가려고?"
"응, 왜?"
"아……."
"왜 그래?"
자리에서 일어선 레기온은 가파른 계단을 거의 날다시피 뛰어 올라갔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지상이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격하게 달리면서도 거친 숨 한번 내뱉지 않는 그를 보며, 율리아는 남몰래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마정석의 파장에 휩쓸려 산산이 찢겨 나가던 그의 모습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미친 듯 웃던 그의 얼굴이…….
"마, 마왕님!"
"율리아, 잠깐 기다려!"
[▷바엘
그 순간, 바엘의 발밑으로 다가가던 그녀의 뺨에 피 한 방울이 튀었다. 짙은 죽음의 냄새가 코끝에
스몄다. 율리아가 보기엔 너무나 처참한 광경이었다.
"우욱!"
어째서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싫다면 차라리 다 버리고
떠나 자유롭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자 한다면 능히 그럴 힘이 있으면서, 지하의 누구보다 강대한
권능을 지녔으면서, 무엇 때문에?
율리아의 커다란 눈동자에 더럭 눈물이 고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지독한 고독에 함께 매몰되어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율리아는 축 늘어진 그의 날개에 손을 뻗었다. 마정석의 힘은 어느새 완전히 물러난
뒤였다. 그녀는 해방된 바엘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뉘었다.
이건 끔찍한 자해일 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죽지 않는다고 고통까지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 텐데.
거친 숨을 몰아쉬던 율리아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바엘의 벌어진 살점 아래, 벌레처럼 가느다란
보랏빛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몸부림치듯 형태를 뒤틀며 바엘의 상처를 점점 더 크고
예리하게 찢어발겼다.
그녀는 일전 마나에 당했던 레라지에의 상처를 기억해 냈다. 형인 바르바토스가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어
그를 치료하려 했지만, 푸른 마나가 그것을 철저히 막아선 탓에 레라지에는 평소와 달리 한참이나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바엘의 신체는 끝없이 치유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수정구의 마력이 아물려는
부분을 도로 뜯고 해체했다. 그러니 회복되긴커녕 상처만 더 심해지는 것이다.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STATUS (스탯)
▷PROGRESS (진행도)
▷SKILL (스킬)
▷ITEM (아이템)
▷SETTING (설정)
[▷저항 전이 Lv.2
율리아는 레벨을 올리고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막이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와 점점
크기를 키워 갔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바엘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저항 전이 Lv.2
제한 시간 9 분 58 초]
예상대로 보랏빛 마력이 징그러울 정도로 격하게 몸부림치다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회복을 방해하던 것이 사라지자 찢어진 채 피를 뚝뚝 떨구던 상처도 하나하나 자연스럽게 붙었다.
안도의 한숨을 쉰 율리아가 바엘의 이마에 번들거리는 식은땀을 닦아 내려는 찰나였다. 그녀의 손목이
붙들림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읏……."
"말해."
끔찍한 쇳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놀란 그녀는 붙들린 손목을 뿌리치지도, 그렇다고 그가 원하는 답을 해
주지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녀를 응시하던 바엘의 시선이 불현듯 움직였다. 레기온이 율리아의 등 뒤에서 그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바엘의 입꼬리가 피식 비틀렸다.
"그게 아니라……."
바엘의 손목을 쥔 레기온의 손아귀에 빠드득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율리아를 얽맨 바엘의 손에도 덩달아
힘이 들어가고,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하얗게 질려 갔다. 그것을 본 레기온은 결국 마지못해 힘을 푼
뒤 율리아의 허리를 잡아끌었다.
"가자, 이딴 곳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아."
그는 시선을 들었다. 율리아의 마력 저항에 의해 밀려났던 마정석의 힘이, 그녀가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마왕을 삼키겠다는 듯 흉흉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44 화
레기온은 등허리가 쭈뼛 서는 원초적인 불쾌감을 느끼며 시선을 내렸다. 율리아는 여전히 마왕의 머리맡에
앉은 채 갈등하고 있었다.
'기분 나쁜 새끼.'
악마의 사고방식은 기본적으로 다 똑같았다. 재미를 위해서든 생존을 위해서든 상대의 약한 부분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아무리 강인한 존재라 할지라도 결국엔 인간이기에 불완전한 틈새가 남아 있다. 악마는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것을 건드리는 존재, 그야말로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레기온의 손아귀에서 푸른 마나가 일렁였다. 마왕이 드물게 무력화된 지금이 바로 그를 죽이고 율리아와
함께 지상으로 돌아갈 기회였다. 그녀도 처음엔 놀라 당황하겠지만 결국엔 자신의 진심을 이해해 줄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율리아에게 해로웠다.
"아가레스 님."
"시찰은 잘 다녀오셨어요?"
"작은 열쇠야."
"네?"
"주군을 구해 줘서 고마워.
"네."
율리아는 앞서 최상층을 떠나는 세 악마의 뒤를 따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자신들은 모두
무사했다. 그녀는 시야 상단을 힐끗 보았다가 이내 걸음을 서둘렀다.
[▷저항 전이 Lv.2
제한 시간 0 분 14 초]
'누가 부른 것 같았는데.'
드넓은 공간은 바람 부는 소리를 제외하면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어깨를 으쓱한 그는 이내 율리아를
따라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 * *
피처럼 붉은 달빛이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밤이었다. 마정석의 폭주로 인해 엉망이 됐던 악마성이 다시금
무거운 적막에 잠겼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귀환한 왕의 안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
깊은 잠에서 깨어난 바엘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몸이 무겁고 뻐근했다. 마정석의 폭주에
휩쓸린 이후의 기억이 없어서, 그저 긴 악몽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바엘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상체를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새액새액, 작고 가녀린 숨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바엘의 손끝이 율리아의 얼굴에 닿았다. 희고 동그란 이마를 타고 내려가 작고 오똑한 콧대를 지나,
선홍빛의 부드러운 입술에 닿았다가 갸름한 턱선을 간질였다. 그의 손길은 마치 미지의 존재를 탐험하듯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낯선 감정이 기분 나쁘게 일렁였다.
바엘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는 새 그녀와 조금씩 가까워지던 찰나였다. 레벤나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그의
뇌리를 스쳤다.
흔들리던 그의 눈매가 차갑게 굳었다. 열쇠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목이 너무나 약하고 가느다래서, 정말 스치기만 해도 죽을 것 같은 탓이었다.
"후우."
어차피 자신은 마신의 속내를 알고 있고, 마신 또한 자신의 속내를 알고 있다. 그러니 피차 원하는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선 싸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신들의 운명은 결코 공존할 수 없으니 말이다.
율리아의 입술을 시험하듯 건드리던 그는 어느새 앙다문 입을 벌리고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실수록
더욱 빠져드는 술과 같았다. 바엘은 저보다 작고 가녀린 인간에서 어느새 절박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 * *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디던 율리아는 불현듯 생각했다. 어젯밤 바엘의 머리맡에 앉아 상처를 돌보다 HP 가
낮다는 와 함께 기절하듯 잠든 게 기억의 전부였다.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어때.'
그래도 나름 얌전히 자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유독 뒤통수 부근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밤새 얼마나 험하게 뒹군 건지, 환자 옆에서 어마어마한 민폐를 끼친 것 같았다.
45 화
'아팠을 텐데…….'
바엘에겐 마정석과 싸워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절대 물러설 수 없기에
자해나 다름없는 짓을 몸이 나을 때마다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그런 모습을 보면 신경 쓰이고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그녀는 모처럼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마왕의 이부자리를 정돈해 주며 그렇게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SYSTEM
[▷SYSTEM
'마신의 탑 영구 진입 불가…….'
'싫어. 안 돼.'
율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버려지는 미래를 떠올리자마자 타성처럼 불안감이 치달았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려 노력했다. 탑 내부를 조사해서 시스템이 원하는 무언가를 찾아내기만
하면 모두 괜찮아지는 것이다.
[▷바르바토스
"일단 앉지."
"저, 무슨 일로……."
그동안 아가레스는 율리아의 옆자리에 앉았고, 보티스는 왜인지 율리아를 지키듯 그녀의 뒤편에 똬리를
틀고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바로 등 뒤에서 거대한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게 썩 산뜻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보티스의 자리 선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바르바토스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면 마정석엔 분명 이변이 일어나고 있어. 그리고 그 원인은 열쇠인 율리아
브에스드라…….]
그녀는 바르바토스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마침 아가레스가 그녀를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게 어색하지 않도록 보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율리아는 그녀가 겪었던 두 번의 파장과 탑에 들어간 이후의 일까지 최대한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아가레스
[▷바르바토스
그녀가 홀로 열심히 삽질하는 동안, 시선을 나눈 악마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위협을 느낄 때만큼은 특유의 소심함을 내던지는 율리아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래 봤자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녀를 노려보는 바엘의 눈초리는 아주 확실하고도 명백하게 말하고 있었다.
"졸리다. 더 자라."
"하지만 저 많이 잤는데요."
"그래서?"
어쩌면 그가 매사에 놀라울 정도로 태연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신하들이 불안해할 정도로 크게
다쳤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더 자고 싶어 하는 그를 보며, 자신도 이쯤이야 뭐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모처럼 햇살이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 율리아는 옆에서 들리는 낮은 숨소리를 들으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 * *
[▷SYSTEM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언젠가 바엘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을 취소할 용의가 있었다.
'설마 이게 시스템이 말했던 난이도 조절인가? 그렇다면 너무하잖아. 하다못해 탑에는 들어갈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녀는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고 꿈틀꿈틀 움직여 바엘의 팔 밑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재빨리 베개를
끌어와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처음엔 불편한 듯 미간을 구기던 그도 율리아가 토닥여주니 금세 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후우, 성공이다."
"과연 어떨지?"
"……아."
46 화
그녀는 최대한 무해하게 보이도록 방긋방긋 예쁘게 웃었지만 그럴수록 바엘의 눈초리는 점점 매서워지기만
했다. 얼버무리는 것으로 상황을 넘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율리아는 결국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어디."
"그러니까 어디."
율리아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마신의 탑은 마족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장소였고, 그녀는 마정석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열쇠라고 여겨지는 존재이기도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억울한 의심을 살 수 있기에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가뜩이나 퀘스트를 못 깰까 심란하고 열쇠가 아니란 사실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데 바엘이 기름을 뿌리고
불까지 지피니 율리아의 인내심이 똑 끊어져 버렸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홱 고개를 돌렸다.
"마신의 탑에 가려고 했어요."
율리아가 입술을 쭉 내밀고 툴툴대는데 바엘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 위협적일 정도로 잘 짜인 근육에 키도
한참이나 큰 사내가 그렇게 다가오니, 처음엔 꼿꼿하게 잘 버티고 있던 율리아도 조금씩 작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흑표범 앞의 뱁새처럼 눈을 바짝 내리깐 그녀의 시선에 폭력적일 정도로 관능적이고 선명한 복근이
들어왔다. 갓 일어난 탓에 걸치고 있는 옷이라곤 허리춤에 낮게 두른 로인클로스가 전부였다.
"꺄악!"
마왕의 어깨에 포댓자루처럼 얹혀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얼어붙었던 그녀가 불현듯 가만 멈춰서 바엘을
돌아보았다.
바엘은 그녀를 어깨에 둘러맨 채 넓은 침실을 가로질렀다. 발로 창문을 깨고 테라스 난간에 올라선 뒤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그제야 마왕의 속내를 알아챈 율리아가 눈을 크게 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바엘은 단번에 도약했다.
* * *
[▷SYSTEM
그렇게 몇 개의 층에서 허탕을 치고서야 율리아는 깨달았다. 그녀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지난 며칠간 퀘스트 내용을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주어진 정보라곤 '탑
내부를 조사하시오'가 전부였다.
그녀가 돌바닥을 두드리며 힘없이 쪼그려 앉은 찰나였다. 줄곧 멀리서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바엘이 한
마디 툭 던졌다.
"볼일이 아직 남았나?"
"남았어요."
"저도 알거든요."
그녀는 등 뒤에서 새어드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벽을 더듬었다. 촘촘하게 쌓여 있는 벽돌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계단과 인접한 부근은 아래층의 빛 덕분에 대략적인 형태 구분 정도는 가능했다. 하지만 안쪽은 바로
코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왜인지 조금 소름끼쳐.'
"……."
"안 계세요?"
텅 빈 복도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율리아는 쿵쿵 달음박질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율리아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스산한 공기가 살갗을 감싸고 외로운 발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STATUS (스탯)
▷PROGRESS (진행도)
▷SKILL (스킬)
▷ITEM (아이템)
▷SETTING (설정)
예상대로 눈앞이 조금 밝아졌다. 그녀는 반투명하게 빛나는 글자를 손전등 대신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지만 그렇게 나온 결론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미로?'
사방을 에워싼 벽과 기둥은 모두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미로의 한가운데 들어와
버린 것이다. 아차 싶었던 그녀는 다급히 왔던 길로 되돌아갔지만 아무리 걸어도 출구는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점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결국 걸음을 멈췄다. 발밑이 어지럽고 이명이 윙윙 울렸다. 무겁게 내리깔린 어둠과 이정표
없이 이어진 끝없는 침묵 속에서 그녀는 삽시간에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거기 누구 없나요?"
"……."
"아무도 없어요?"
무한히 늘어선 벽이 소리마저 흡수해 버린 듯, 이젠 메아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겁먹은 그녀의 심장이
쿵쿵 위태롭게 뛰었다.
"……!"
"마왕님, 이제 그만 나오세요."
"……."
율리아는 막막함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 벽면이 소리를 방음벽처럼 흡수하고 있어 크게 소리쳐 봤자 무용지물이었다.
"읏!"
하지만 웅크린 채 신음하던 그녀도 이내 멍하니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불빛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율리아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마수가 독액이 가득 고인 손톱을 휘갈겼다.
47 화
쾅, 굉음이 터지며 돌벽이 무너져 내렸다. 율리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옆으로 몸을 굴렸다. 다리
힘이 풀려 바닥에 볼품없이 나동그라졌지만 그대로 누워있을 여유는 없었다. 사냥감을 놓친 마수가 악취
섞인 숨을 내뱉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율리아 역시 이대로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다리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통증을
무시하고 끝없이 이어진 복도를 내달렸다.
[▷마력을 두른 단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저 마수가 얼마나 강하든 아가레스의 마력에는 미치지 못할 테니,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가 녀석이 나타나는 즉시 단검을 찔러 넣으면 이길 가능성이 있다는 계산이 섰다.
"크르릉."
'무서워. 죽고 싶지 않아.'
마수가 부딪힌 벽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힘없이 갈라졌다. 자세히 보니 손톱뿐 아니라 온몸에서 질척한
독액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 같은 인간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녹아 사라질 거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어깨가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덜덜 떨렸지만 그럴수록
검을 움켜쥔 손아귀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휘날리는 마력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엘이 율리아를 뒤로 밀어내며 눈매를 좁혔다. 동시에 질식할
듯한 중압감이 비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키에에에엑!"
단지 바엘이 앞에 나섰을 뿐인데, 거의 삼 미터에 육박하는 괴수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게다가 괴수의 몸뚱이에서 우득우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쇳덩어리에 짓눌린 듯 온몸의
뼈가 짓뭉개져 부서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엘은 그것에서 끝내지 않았다. 그는 마수를 완전히 터트려 죽여 버린 뒤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들이 딛고 있던 바닥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바엘은 공간 자체를 찢어발길
생각이었다.
놀란 율리아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입꼬리를 비튼 바엘의 손끝에서 강력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칠흑의 공간이 종이 찢어지듯 산산이 붕괴하고,
바깥에서 파고든 태양빛이 그녀의 눈을 찔렀다.
* * *
해가 저물어가며 광활한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근처의 나무와 꽃이 거대한 날개가 일으킨 바람에
작게 흔들렸다.
"아, 죄송해요."
그녀는 나직이 사과하며 바엘이 놓아주길 기다렸지만 그는 입을 열지도 팔의 힘을 풀지도 않았다. 찰나의
침묵이 지나고, 그가 마지못한 기색으로 허리를 놓아주자 율리아는 홀로 걸어서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에 주저앉았다.
지평선 너머까지 만개한 꽃과 느릿하게 흘러가는 구름이 시야에 보이는 전부였다. 아까의 환각 미로와는
다른 의미로 비현실적인 공간이었지만 보이는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율리아는 줄곧 긴장했던 몸의
힘을 풀었다.
암흑 미로에서 빠져나온 뒤, 율리아는 눈앞에 보이는 탑의 광경에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바엘이 공간
자체를 무너뜨렸는데 탑은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 하다못해 잔해 부스러기 하나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바엘은 짧게 설명해 주었다. 이번 층엔 먹잇감의 약점을 파고들어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 영원히 가둬 버리는 주술이 걸려 있었다고 말이다.
율리아는 처음에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환각이라고는 하지만 긴박했던 순간들이 뇌리에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 있던 탓이었다.
"……."
손바닥의 상처를 내려다보며 회상에서 깨어난 율리아의 옆에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언제 다가왔는지
바엘이 그녀의 곁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아프고 외로울 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말해도 답이 돌아오지 않는, 외로운
메아리가 될 뿐인 현실이 너무도 여실히 느껴져서.
"감사합니다."
"……."
"저, 신경 쓰이세요?"
"죄송해요. 농담이었어요."
"……."
"진짜 농담이었는데……."
"유혹하는 데 도가 텄군."
"읏!"
상체를 일으킨 그가 율리아의 귓가에 짓씹듯 속삭였다. 바엘의 맹렬한 기세에 눌려 몸을 뒤로 젖히며,
그녀는 더운 숨을 내뱉었다. 그의 안광에 거칠고 파괴적인 정복욕이 들끓었다.
"아, 아파요……."
"정말 눈 돌아가겠군."
바엘은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강하게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압력을 받은 무릎의 상처에서 작은
핏방울이 퐁퐁 맺혔다.
사실은 미궁의 틈을 벌리고 들어가 엷게 퍼진 피 냄새를 맡았을 때부터, 바엘은 그녀에게 발정하고 있었다.
"아!"
"부족해."
바엘은 상처를 입술로 덮고 볼이 패일 정도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녀의 체향만큼이나 황홀하고 중독적인
피가 마른 입 안을 흠뻑 적셨다.
"아직 부족해."
"보라고 해. 그래 봤자 넌 내 것인데."
"으으응!"
"심장이 뛰는 한 영원히 내 것이지. 오직 나만의 것."
속옷을 옆으로 밀어내며 침범하는 거친 손가락에 그녀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바엘은 길게 갈라진 음부를
중지로 쓸다가 손끝에 닿은 음핵을 지그시 굴렸다. 주인을 닮아 작고 순종적인 살덩어리가 바엘의
손가락에 밀려 이리저리 짓뭉개졌다.
이곳이 탁 트인 야외라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표백되고, 오직 스멀스멀 차오르는 쾌감만이 가녀린
육체를 점령했다. 그녀는 결국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하읏, 아!"
샘에서 비어져 나온 물이 음부를 푹 적시며 찌걱찌걱 소리를 냈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율리아를
보며, 바엘의 뇌관이 흥분으로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당장에라도 속살에 저를 파묻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율리아의 아래는 너무도 비좁았다.
48 화
그는 율리아의 얼굴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뜨겁고 비좁은 구멍을 헤집었다. 중지뿐아니라 손 전체가 들어갈
정도로 격하게,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고 깊숙이 쑤셔 박았다.
"……!"
굵고 단단한 손가락이 들락거릴 때마다 그녀는 절정에 도달했다. 바엘의 행위가 숨 막힐 정도로 좋았다.
등허리가 오싹하게 떨리고 작은 자극에도 솜털이 오소소 곤두섰다. 그가 엉망으로 쑤셔대는 안쪽에 모든
신경이 집중됐다.
비참할 정도로 덜덜 경련하던 율리아는 그런 제 모습이 부끄러워 얼굴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쾌락에 절은
몸은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수치스러움에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바엘의 가학심을 건드렸다. 그는 율리아의 양 손목을 단단히
결박한 채 손가락을 더욱 거칠게 휘저었다.
"허벅지 힘 풀어."
"제발, 제발 보지 말, 으읏."
그녀는 가쁜 숨을 헐떡이다 불현듯 몸을 굳혔다. 바엘이 무너진 여체를 한계까지 벌린 뒤 거대한 페니스를
단번에 삽입한 것이다.
"하아, 젠장."
바엘은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율리아의 매끄러운 다리를 팔꿈치에 걸쳤다. 허벅지가 활짝 펼쳐지며
붉게 충혈된 점막이 공기 중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율리아의 구멍은 제 안에 빠듯하게 들어찬 페니스를
전부 삼키고자 힘겹게 움찔거리고 있었다.
"잘하고 있어."
그들의 교접부에서 철퍽철퍽 물이 튀고 흰 포말이 일었다. 두툼한 귀두가 내벽을 긁을 때마다 율리아는
가느다란 교성을 질렀다.
"거짓말."
"아냐, 흑, 아니에요."
퍽퍽 허리를 쳐올리던 바엘의 시선이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향했다. 이 여자가 자신의 소유란 증거가
있어야 하건만, 천 쪼가리에 감싸여 보이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게."
바엘은 이를 짓씹으며 율리아의 가슴팍을 아무렇게나 잡아 뜯었다. 단추가 후두둑 떨어져 나가며 위아래로
빠르게 흔들리는 선홍빛 유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바엘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미묘한 낌새를 느끼고 시선을 내린 율리아는
바엘의 시선이 흔들리는 가슴에 꽂혀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녀의 몸이 수치심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그가 손목의 결박을 푼 틈에 율리아는 양팔로 가슴을 그러모았다. 하지만 아무리 저항해 봤자 그녀의 몸은
바엘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가 허리를 쿵쿵 찧어 댔다.
"이대로 성으로 돌아가 모두에게 보여 줄까? 네 가슴 모양이 어떤지, 젖꼭지는 무슨 색인지, 이 콩알만
한 걸 만질 때마다 구멍이 얼마나 빠듯하게 조이는지. 내친김에 키마리스를 불러 직접 확인하게 해 주는
건 어때."
"그럼 팔 내려."
"흑, 읏, 으으응!"
그는 율리아의 양 다리를 어깨 위에 걸치고 가느다란 허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움직임에
맞춰 아래쪽으로 쿵쿵 내리찍었다.
바엘은 여전히 내부에 머문 채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뜨거운 전율이 그의 뇌리를 잠식하고,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둘의 그림자가 다시금 합쳐졌다.
* * *
간간이 움찔거리며 허리를 뒤트는 걸 보니 안에 깊숙이 파묻힌 물건이 불편한 모양이었지만, 바엘은
그것을 꺼내 줄 생각이 없었다. 되레 짐승처럼 쑤시고 싶은 걸 인내하는 중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열쇠는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다. 머나먼 태초부터 그러했고, 세상에 태어난 그녀의
심장을 손아귀에 넣는 순간 소유 관계는 더더욱 확실해졌다. 가슴의 붉은 각인이 있는 한 그녀는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계단으로 올라간 열쇠가 환각 미궁에 빠진 걸 알았을 때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짐승에게 덮쳐져
죽기 직전의 그녀를 발견했을 때 어째서 턱이 떨릴 만큼 분노했는가.
'감사합니다.'
'…….'
이 손이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좆을 흔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두 팔이 자신의 목덜미에 간절히 매달려
오고 마른 어깨와 봉긋한 가슴이 정신없이 흔들렸으면 좋겠다고, 붉은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어 줬으면 좋겠다고.
마계를 복속시킨 절대 군주가 이렇게 비좁은 구멍에 들어가서야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젠장."
상념에서 깨어난 그의 얼굴이 욕망으로 일그러졌다. 단지 상상만으로도 페니스가 부피를 피우며 꿈틀댔고,
아직 늘어날 준비가 되지 않은 질벽은 제가 머금은 것을 강하게 압박했다. 바엘의 호흡에 점점 뜨거운
열기가 뒤섞였다.
"으응……."
"이제 깼나?"
"네에……."
"그럼 하던 것 마저 하고 싶은데."
"뭐를……. 읏!"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어떤 자세로 올라타 있는지 드디어 눈치챈 듯했다. 따뜻하고 눅진하던 내벽이
바르르 떨리며 조여들었다. 심장의 각인 역시 붉게 점멸했다.
"아앙, 아, 안 돼……."
"큭, 진짜 잘라먹겠군."
"움직이면, 안 돼, 아, 아아!"
바엘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끊어졌다. 진짜 멈추게 하고 싶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고 적당히 맞춰 주면서 흥미를 식게 하는 편이 나았겠지만 바엘은 그것을 굳이 지적해주지 않았다.
그가 하체를 쳐올릴 때마다 그녀의 유방이 바엘의 가슴팍에 마구 뭉개지고 비벼졌다. 율리아는 힘겨워
비명을 질렀지만 그에겐 아직 한참 부족했다.
"상체 일으켜."
"왜, 왜……."
또다시 정사가 시작될 기미를 느낀 걸까, 열쇠가 주춤거리며 몸을 굳혔다. 그와 동시에 구멍도 빡빡하게
조여드니 바엘은 정말로 이성을 날려 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열쇠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따르게 만들면 된다. 그는 열쇠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손톱으로
젖꼭지를 살살 긁었다. 작은 쾌락에도 쉽게 휩쓸리는 열쇠의 몸이 다시금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교접부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물이 줄줄 샜다.
그녀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졌다. 안절부절 못하며 허리를 찧더니 음부를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사색이
되어 마구 도리질 치는 모습은 흡사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율리아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속삭였다.
"뭐가?"
"제대로 말해야지."
"크윽!"
박아 넣는 힘과 체중이 합쳐져 거대한 귀두가 율리아의 자궁구를 힘차게 때렸다. 동시에 그녀의 요도에서
투명한 액체가 질질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소변도 아니고 애액도 아닌 그것은 바엘의 배 위에 한참을 쏟아져 내리다 그의 파정이 멈출 때쯤에야
가까스로 잦아들었다.
49 화
자다 깼는데 자신의 아래에 웬 거대한 흉물이 들어와 있었다. 여기까진 정말 마음을 넓게 써서 넘긴다
치더라도-사실은 이것도 절대 안 되지만-이후 온갖 수치스러운 짓을 다 당하고 결국엔 실례까지 하고
말았다.
쾌락이 가라앉고 정신을 차린 뒤, 축축하게 젖은 바엘의 몸과 머리카락, 그리고 자신의 하반신을 보면서
율리아는 정말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편, 율리아가 안다면 참으로 상심하겠지만 바엘은 그녀의 책망을 들으면서도 전혀 반성하는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모습이 어린 토끼 같아서 정말이지 가소롭게
느껴졌다.
그녀는 정사와 관련된 단어를 말할 땐 어김없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그래도 마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땐 의견은커녕 고개도 제대로 못 들었다.
"……?"
그렇다면 진범은 누구인가. 어안이 벙벙해진 율리아가 멍하니 입을 벌린 그때, 마침 그녀의 얼굴을
간질이던 것이 바람을 타고 눈앞으로 이동했다. 범인은 다름 아닌 솜털 같은 흰 꽃가루였다.
"이게 왜 여기에……."
"마왕님, 이게 뭐예요?"
"……야광화."
그녀는 화려하게 만개한 꽃잎을 살살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끝부터 끝까지
전부 야광화로 뒤덮여 있었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사위 속, 수많은 불빛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서, 율리아의
시선이 흐릿하게 번져들었다.
"시끄러워요."
"이게 뭔가요?"
"이걸 왜 제게……."
율리아는 가슴께에 흔들리는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크기는 작았지만 자세히 보니 안에 붉은 기운이 느리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바엘을 마주 보았다. 역시 이 보석은 그의 눈동자와
닮아 있었다.
마왕 바엘이 자신의 강력한 마력을 불어넣어 만든 목걸이. 바엘을 제외한 모든 악마의 접근을 막아 준다.
사용 기회 3]
[▷야광화
이러다 살갗이 닿기라도 하면…… 이번엔 두 다리로 멀쩡히 걸을 수 없게 되리라. 그녀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참아."
"……."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팔은 율리아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그녀는 담요 안으로 얼굴을
숨기며 살풋 웃고 말았다.
위압적인 크기의 날개가 단번에 펼쳐지고, 두 인영이 붉은 달이 뜬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느새 선잠에
빠진 그녀의 앞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ERROR
마왕 바엘이 ??? ??? ??? ???? ?? 목걸이. 바엘을 제외한 모든 ??? 접근을 ????. 사용 기회 ?]
* * *
율리아는 현재 탑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등 뒤에서 열심히 꼬리를 흔드는 베로를 뒤로한 채 거대한
문고리를 잡았다.
[▷SYSTEM
[▷SYSTEM
'후우, 할 수 있어.'
비록 지난 6 일간 거하게 허탕을 치긴 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포기할 수는 않아서, 위험을 무릅쓰고 베로와
단둘이 성에서 빠져나왔다.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바엘에게 받은 목걸이를 쓸 생각이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마수를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탑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육중한 문이 율리아를 환영하듯 활짝 열렸다. 그 안에 보이는 풍경은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과 차단시키려는 듯 문이 저절로 닫혔다.
아무런 역할도 없는 요소를 마신의 탑이란 가장 중심적인 존재에 배치했을 리 없었다. 율리아는 그러한
생각의 끝에서 이번 퀘스트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벽에 새겨진 조각에 힌트가 있다는 건 알았어. 하지만 아직도 범위가 너무 넓어."
율리아는 복도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느릿하게 훑었다. 완전한 무의 공간에 씨앗 하나가 눈뜨고
있었다. 장차 마신으로 자라날 존재였다.
'나를 마신으로 만들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열쇠로서 달갑고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해.'
지하 감옥을 울리던 바엘의 무감한 목소리가 뇌리에 남았다. 열쇠의 심장을 얻어 그토록 바라던 마신이 될
날에 가까워졌음에도 그는 어째서…….
[▷ERROR
마왕 바엘이 ??? ??? ??? ???? ?? 목걸이. 바엘을 제외한 모든 ??? 접근을 ????. 사용 기회 ?]
"베로야!"
"컹, 컹컹!"
제한 시간 9 분 59 초]
"컹컹!"
율리아는 정신없이 흔들리는 등 위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시야가 홱홱 바뀌니 어지러워 제대로 앉아
있기 힘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간신히 얻은 기회를 이대로 허망하게 놓칠 수 없었다.
"크르릉!"
그녀의 손짓에 따라 베로가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그들이 멈춘 곳은 폭포가 떨어지는 거대한 호수였다.
바엘의 붉은 마력은 호수 근처를 크게 맴돌더니 물에 녹아들며 천천히 사라졌다.
50 화
"세상에……."
율리아는 홀린 듯 짙은 물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가 호숫가에 앉으려던 찰나, 등 뒤에서
또다시 붉은 마력이 점멸했다. 흐릿하게 확장됐던 그녀의 동공이 퍼뜩 원래의 빛을 찾았다. 그녀의
발끝은 호수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뭐였지, 방금.'
[▷SYSTEM
커맨드 시스템을 활성화합니다.]
[▷SYSTEM
[완료]
[▷저항 전이 Lv.2
제한 시간 0 분 05 초]
"끼잉……."
"앗, 베로!
"낑낑."
"미안해. 이제 괜찮아."
[▷SYSTEM
"컹, 컹컹!"
베로는 재빨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혹시나 나가는 도중 스킬이 종료될까 안절부절 못하던 율리아는 1
층 복도에 도달하고 나서야 기절하듯 눈을 감을 수 있었다.
* * *
"너도 시끄러워, 키마리스. 환자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레라지에 옆에 얌전히 앉든가, 아니면
밖에 나가서 머리 식히고 와."
키마리스의 머릿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끊어 낸 건 아가레스였다. 율리아 앞에서 답지 않게 입술을
짓씹던 그는 퍼뜩 인상을 풀고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
"그러실 필요 없는데……."
"하하……."
"응? 왜."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마족을 증오하는 레기온 앞에서 마왕님을 걱정하다니 그래선 안 됐는데, 분명
내게 실망한 거야.'
"아, 아니에요."
레라지에는 신경질 섞인 얼굴로 새까맣게 탄 왼손을 내보였다. 상처의 모양이나 크기가 레기온이 자주
읽는 책과 흡사해서, 그것만 보아도 설명은 충분했다.
* * *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건조한 모래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레기온은 겉옷 깃을 세우며 미간을 찌푸렸다.
바엘이 마신으로 각성하는 순간 율리아는 죽는다. 그녀가 죽는 이유가 단지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붉은
각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무척이나 악질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날, 마계의 광야에서 악마들과 싸우던 날, 레기온은 새로운 기억에 눈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것은 기억이라기보다 일종의 '본능'에 가까웠다.
그때의 끔찍한 기억을 돌아보던 레기온의 눈이 불현듯 부릅뜨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낯익은 기척이
느껴졌다.
한때는 살아 있었을, 하지만 지금은 오래된 미라처럼 형편없이 쪼그라든 시체가 뿌리에 겹겹이 얽혀
있었다.
51 화
강약 구분이 철저한 지하에서 죽음의 나무는 명백히 강자에 속한 존재였다. 이 나무뿐 아니라 '죽음'
이라는 칭호가 붙은, 마계에 이상 현상을 일으키는 모든 장소가 그러했다.
'이대로 성으로 돌아가 모두에게 보여 줄까? 네 가슴 모양이 어떤지, 젖꼭지는 무슨 색인지, 이 콩알만
한 걸 만질 때마다 구멍이 얼마나 빠듯하게 조이는지. 내친김에 키마리스를 불러 직접 확인하게 해 주는
건 어때.'
'그럼 팔 내려.'
'흑, 읏, 으으응!'
그렇게 죽음의 땅으로 향했던 그는 발견했다. 나신으로 얽힌 채 탁 트인 평야를 뒹굴던 남녀의 모습을.
격하게 흔들리다 때때로 가녀린 비명을 내지르던 목소리를. 새하얀 나체를 정신없이 먹어치우던 흉포한
짐승의 형상을.
"크윽!"
채찍을 닮은 검은 파장이 목에 날아들기 직전, 이상을 눈치챈 레기온이 기민하게 몸을 피하며 대검을
생성해 냈다. 푸른빛이 짧게 번쩍하더니 그의 손아귀에 소울 소드가 쥐어졌다.
챙!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운 쇳소리가 사위에 퍼졌다. 레기온이 뒤로 멀찍이 물러섰지만 나무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은 그런 그를 재빠르게 뒤쫓았다. 눈을 부릅뜬 레기온의 몸에서도 푸른 마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콰앙!
거대한 파열음이 황량한 대지를 뒤흔들고 짙은 먼지가 숨쉬기 힘들 정도로 자욱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한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검을 휘둘러 잔해를 털어 냈다.
* * *
'탑의 비밀' 퀘스트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여유로운 오후, 바엘의 침실에 홀로 선 율리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커맨드 시스템."
그녀의 손끝에서 마치 조명이 켜지듯 환한 빛이 퍼져나갔다. 율리아는 그것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로라처럼 일렁이던 그것은 그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느릿하게 사라졌다. 몇 번을 보아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커맨드 시스템. 단어만 보면 시스템에게 무언가 명령한다는 뜻 같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기능을 알
도리가 없었다. 아이콘을 찾아봐도 따로 추가된 항목이 없는 탓이었다. 그녀는 고심하듯 중얼거렸다.
커맨드 시스템, 하고.
율리아의 눈앞에 곧장 거대한 황금빛 나무가 피어났다. 가장자리엔 스킬 포인트 3 개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난 퀘스트를 달성하면서 보상으로 얻은 것이었다. 그녀는 곧장 '저항 거점'을 레벨 2 까지 올렸다.
[▷저항 거점 Lv.2
플레이어가 지정한 좌표에 일정 시간 항마력을 부여할 수 있다. 잔여 체력의 40%를 소모한다. SP 40]
"저항 강탈이라니……."
[▷저항 강탈 Lv.1
플레이어가 지정한 대상에 일정 시간 항마력의 50%를 강탈한다. 잔여 체력의 70%를 소모한다. SP 60]
[▷SYSTEM
마족은 본인이 지닌 마력의 크기에 비례해 일정 수준의 항마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마력
방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커맨드 시스템을 사용하면 아이콘을 일일이 누를 필요가 없어서 편했지만, 대신 손끝에서 일렁이는 빛이
다른 마족들에게도 보인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졸리니까 나가."
"그놈이 왜."
바르바토스가 왕에게 묵례하며 침실을 빠져나갔다. 율리아는 바엘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못마땅해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 언짢은 것 같기도 했다. 율리아는
그의 불만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긴 로브를 걸쳐 맨 살갗이 닿지 않도록 꼼꼼히 가리고 먼저 침대에 누웠다. 바엘의 표정이
아까보다 조금 더 굳었다.
"식사는."
"입 벌려."
"읏!"
그의 목소리에 흉흉한 기색이 섞였다. 입을 벌리지 않으면 턱을 비틀어 빼서라도 먹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문 채 참아 보려던 그녀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바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지만, 그것을 모르는 율리아는 까르르 해맑게 웃었다.
"……."
"무슨 헛소리지?"
"마왕님을 마신으로 만들어 드리기로 약속했잖아요. 마왕님의 명령을 어긴 레벤나와 키마리스 님을 살리는
대가로요. 잊지 않았어요."
"……."
52 화
그렇게 한참을 열중하던 그녀는 슬며시 눈동자를 굴렸다. 언제부터인지 바엘의 시선이 그녀의 오물거리는
입술에 박혀 있었다. 게다가 발걸이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느긋하게 턱을 괴기까지 했다. 마치 흥미로운
연극이라도 보는 듯한 자세였다.
"저, 마왕님."
"뭐지."
"괜찮으시다면 같이 드실래요?"
"……."
바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다 불현듯 미간을 구겼다. 그가 딱히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율리아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왜 이딴 쓰레기를 먹고 있는지 생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음."
그가 탑도 레기온도 건들지 않고, 덤으로 자신도 건들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율리아를 보는 바엘의 안광에 묘한 이채가 스민 찰나, 악마성 입구에서 갑자기 요란한 팡파르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지만 멀리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거리감을 좁히며 점점
가까워졌다. 그것은 명백히 마왕의 침실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율리아를 바엘은 기어코 낚아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바엘의 무릎
위에 넘어지기 무섭게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무척이나 아름다운, 이곳이 지옥만 아니었다면 천사로 착각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지극히 영광스럽다는 얼굴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행동과 말투는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상당히 고전적이었다.
물 흐르듯 자리에서 일어선 파이몬은 바엘과 그의 무릎에 앉아 있는 율리아를 보더니 기쁘게 미소 지었다.
"아아, 서쪽에서 지내는 동안 주군께서 애첩을 들이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간 공사가 다망하여
이리 늦게 찾아뵙고 경하드리오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놀라서 몸을 비틀던 율리아는 엉덩이 밑에서 슬슬 부피감을 키워 가는 묵직한 무언가를 느꼈다. 가만히
있어도 워낙 괴물 같은 크기인 탓에 조금만 힘을 얻어도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간 뒷일을 장담할 수 없었다. 율리아는 손바닥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앞으로 조금 당겨
앉았다. 그녀가 얌전히 있자 바엘의 힘도 조금 느슨해졌다.
율리아는 바엘의 무릎 위에서 내려가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허리를 감은 팔은 뱀처럼 꽁꽁 휘감겨 왔다.
그녀는 결국 어정쩡하게 앉은 채로 손을 내밀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파이몬의 머리카락은 꼭 풍성한
솜털처럼 보였다.
아이를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이 눅진하게 녹아들었다. 그렇게 소년의 작은 손이 그녀에게 닿은 순간이었다.
[▷파이몬
켁, 못생겼어. 비쩍 말라서 머리통 뽑으면 앞뒤 구분도 안 되겠네. 바엘이 드디어 눈이 삐었나? 그리고
재수 없게 친한 척은 왜 해? 아아, 내 입술 썩겠네.]
[▷파이몬
똑바로 선 파이몬의 자세는 조각처럼 바르고 두 눈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건만, 얼굴 밑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은 온갖 비속어와 욕설이 난무했다. 양쪽을 번갈아 보느라 도저히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율리아는 일단 어색하게라도 웃었다.
"후우, 피곤하군."
아니나 다를까, 율리아의 머리 위에서 긴 한숨이 들려왔다. 바엘의 인내심이 실시간으로 바닥나고 있었다.
파이몬이 아무리 얄밉다지만 그래도 아이답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니 차마 바엘의 분노에 노출되도록
놔둘 수 없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 하하……."
[▷파이몬
바엘은 흐물흐물하게 늘어진 율리아를 안아 올려 침대로 걸어갔다. 그녀를 안쪽에 눕혔지만 정작 본인은
미간을 주무르며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전부 귀찮아."
율리아는 잠결에 흐릿하게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말 싫었다면 72 악마를 성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확신할 순 없지만 왜인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
"뭐지?"
"아뇨, 조금 놀라서요."
53 화
"율리아."
한 발 앞서간 키마리스가 그녀를 마주보고 섰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아름답고도 연약한 주인을 응시했다.
"키마리스 님."
"저뿐 아니라 다른 모두가 그렇겠죠. 정말 파이몬을 위한다면 그를 멀리하시고 그가 둥지에 머무는 동안은
어딜 가든 꼭 저나 다른 누군가를 대동하십시오."
그가 착잡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표정을 정리하는 동안 율리아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몬 님, 안에 계세요?"
"……."
율리아가 안쪽의 반응을 기다리던 그때,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키마리스가 사나운 기세로 문을 열어젖히고
먼저 침실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복도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율리아는 안쪽의 공기가 미묘하게 얼어붙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잠에서 막 깬 듯한 파이몬이 키마리스를 기세등등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커맨드. 전이!"
그녀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화악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구체의 형태로 율리아의 몸에서 빠져나가
키마리스를 온전히 감쌌다. 빠르게 달려들던 창이 그녀의 실드를 맞고 산산이 부서셨다. 주변 가구에
옮겨 붙은 불이 맹렬히 타올랐다.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열기가 그녀를 덮쳤다. 하지만 율리아는 놀랄 여유조차 없었다.
[▷SYSTEM
[▷SYSTEM
[▷SYSTEM
[▷SYSTEM
'악마의 구원자'는 '마력의 행방'의 프리퀄 에피소드이며 각 단계마다 별도의 보상이 존재합니다.]
창이 사라지자 율리아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키마리스는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한 채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이몬의 화마가 워낙 강력한 탓에 주변은 이미 온통 불바다였다.
파이몬의 전신이 불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불덩어리를 쉴 새
없이 날렸고, 율리아는 그것을 모두 막아 냈다. 하지만 물리 데미지까지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기에 불과
연기는 실드를 고스란히 통과해 들어왔다.
최고위급 마족인 파이몬의 속성 저항을 깰 수 있는 건 지하를 통틀어 바엘과 아가레스 정도라고 했다.
키마리스도 마침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호흡기를 감싸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뿐 아니라 다른 모두가 그렇겠죠. 정말 파이몬을 위한다면 그를 멀리하시고 그가 둥지에 머무는 동안은
어딜 가든 꼭 저나 다른 누군가를 대동하십시오.'
자신이 자리를 떠나면 키마리스와 파이몬,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다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희생양은 아마 키마리스……. 그 역시 72 악마의 일원이었지만 그래도 파이몬의 마력에 비할 순
없었다.
그녀는 키마리스의 옷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동안 무차별적으로 화마를 날리던 파이몬은 자신의
공격이 번번이 막히자 더욱 분노해 비명을 질러 댔다.
율리아는 제한 시간이 빠르게 줄어드는 스킬창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스킬을 연달아
사용해야 했다. 체력이 부족해 쓰러지는 건 괜찮았지만 매번 주변을 걱정에 빠뜨릴 만한 상황이 생기는 게
마음에 걸렸다.
집채만 한 불덩어리가 실드를 강타할 때마다 발밑이 흔들리고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키마리스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율리아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율리아는 미친 듯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떠오른 파이몬이 능력을 이용해
주변 공기를 모두 빨아들이고 있었다. 산소를 머금은 화마가 폭탄 터지듯 일시에 크기를 키웠다. 빠르게
번진 불길이 키마리스의 발밑을 가로막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가 호흡기를 타고 들어왔다. 가슴을 움켜쥔 율리아가 힘겹게 몸을 뒤틀었다.
"으흑! 콜록 콜록!"
"율리아!"
"흑, 숨을 못 쉬겠……."
"사라져라."
그가 해방시킨 붉은 마력은 율리아와 키마리스를 포위한 화마를 모조리 잡아먹고 그대로 파이몬에게
돌진했다. 불타오르던 아이의 몸을 더욱 거대한 불덩어리가 고스란히 집어삼켰다.
54 화
"끄윽!"
"아파! 아파아아아악!"
"……."
"아아아악!"
"시끄러워."
하지만 바엘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방금 파이몬을 삼켰던 화마는 이번엔 집채만 한 붉은 거미로 변했다.
그것은 날카로운 주둥이로 파이몬의 목을 물어뜯고 독액을 주입했다. 비명을 지르며 뒹굴던 소년이
이윽고 움직임을 멈췄다.
지옥 같은 정적이 찾아들었다. 율리아의 흔들리는 시선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헤쳐 널어진 잔해로 향했다.
키마리스는 바르르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무슨 말씀을……."
"그래, 재미있군."
"……."
"아, 윽, 콜록!"
힘겹게 기침을 내뱉던 그녀의 몸이 갑작스레 위로 끌어 올려졌다. 바엘의 붉은 눈동자가 율리아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가까이서 보니 희게 질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처럼 보였다.
왕의 시선이 열쇠의 뒤에서 적대감을 드러내는 키마리스에게 향했다. 바엘은 율리아를 보란 듯 끌어안고
가느다란 몸을 살살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열쇠의 허리가 움찔 비틀렸다.
"욕심만 많지 지킬 줄은 모르는군."
바르르 위태롭게 떨리는 숨이 바엘의 얼굴에 닿았다. 솜털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 감각이 더더욱
바엘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그의 목울대가 거칠게 오르내리고 성대 안쪽에서 낮은 신음이 울렸다. 그는
어느새 율리아에게 빠져들어 몰입했다.
바엘의 커다란 손바닥이 명백한 의도를 담고 그녀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상당한 키 차이 탓에 고개가 꺾인
채 힘겹게 입맞춤을 받아들이던 율리아는 문득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하아, 으응……."
목 안쪽을 날카롭게 긁던 통증이 바엘과 키스하는 동안 어느새 사라졌다. 쇳소리 나던 숨소리도 평소처럼
부드럽게 돌아왔고 기침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얼마 전 들판에서 정사를 가진 뒤 손바닥과 무릎의 상처가 치료된 것을 보며, 그녀는 바엘과 밀접한
행위를 나누면 상처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베리드를 피하려다 목에 큰 상처를
입었을 때도 바엘과 관계를 나눈 뒤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
"아, 드디어!"
익숙한 대상의 등장에 안도한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뒤에 남은 두 사내가 서로를
노려보며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 * *
"놔, 이거 놔! 다 죽일 거야!!"
손바닥에 대못이 하나 더 박힌 직후, 파이몬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과 사슬이 철그렁대는 소리가 고막을
마구 때렸다.
"왜, 왜?! 인간은 노예잖아! 내키는 대로 괴롭히고 죽여도 된다고 했잖아! 서쪽 땅에선 아무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어!"
분위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 보티스가 상석을 올려다보았다. 악마들의 번들거리는 시선이
침묵하고 있는 왕에게로 향했다. 바엘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느른하게 쓸어 올렸다.
"네게 맡기지."
"탑으로 가시겠습니까?"
바엘의 목적을 짐작한 바르바토스가 눈치 빠르게 덧붙였다. 그리고 키마리스의 이름이 나온 순간, 주군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는 것 또한 알아챘다.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송구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알겠습니다."
바엘은 스스로 말하고도 기분이 몹시 저조해지는 걸 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속에서 짜증이 치밀었다.
열쇠의 눈에 기어코 눈물을 내어서라도 이 화를 풀고 싶었다. 그 작은 인간이 울먹이며 매달리는 모습을
떠올리니 되레 구미가 당기기까지 했다.
"……."
파이몬이 폭주하던 그때, 탑으로 향하던 바엘은 성내에서 불안정하게 휘몰아치는 마력의 파장을 느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율리아 브에스드라의 말갛고 멍청한 얼굴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열쇠가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어디까지나 도구에 지나지 않건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이유를, 그럼에도 파이몬을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않은 이유를, 그리고…….
'아, 드디어!'
55 화
* * *
"컹! 헥헥."
"쉿, 쉿."
"헥."
"옳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누군가 파이몬이 무섭지 않냐고, 혹은 그가 밉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아니라고 대답할 자신은
없었다. 거대한 불의 장벽에 갇힌 채 옴짝달싹 못했던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고아라고 손가락질할 뿐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른들은 자신이 상처받아 울먹일 때마다
귀찮다며 서로에게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자신은 말문을 닫고 감정을 꼭꼭 숨기게
되었다. 이야기해 봤자 어차피 주변에 폐가 될 뿐이니까.
악마성 지하에 내려온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 탓에 한동안 미로 같은 복도를 헤매던 그녀는 드디어
눈에 익은 계단을 발견했다. 저곳을 내려가면 바로 감옥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다."
"어째서 이런 끔찍한……."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율리아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 독사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달려가
핏덩어리를 안아 들었다.
정신을 잃은 새끼 용이 그녀의 품 안에서 힘없이 늘어졌다. 손끝에 닿는 따끔한 감각에 고개를 내리니
파이몬의 작은 몸에 팔뚝만 한 대못이 몇 개나 박혀 있었다. 수없이 많은 송곳니가 살가죽을 뚫고
들어갔고 맹독에 의해 온몸이 검붉게 물들었다.
"커맨드. 전이."
"컹컹!"
힘겹게 숨만 헐떡이던 파이몬이 진심으로 혐오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그는 율리아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틀며 발악했다.
"……."
"하고 싶은 말은 다 끝났나요?"
"……."
"더 하셔도 돼요.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어요. 그렇게라도 파이몬 님의 기분이 풀린다면요."
율리아는 로브의 허리끈을 풀어 파이몬의 몸 위에 조심히 덮었다. 어린 아이가 누워 있기에 이곳의 공기는
너무 차가웠다.
"……."
"아파."
"이제 괜찮아요."
"아파, 나 아파……."
그녀는 기도하듯 눈을 감은 채 소년과 이마를 맞댔다. 아이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텅 빈 지하를 쓸쓸히
울렸다.
[▷SYSTEM
[완료]
* * *
'작은 열쇠야, 마력을 조금 나눠 주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지만 파이몬은 너를 죽이려고 했어. 도와줘
봤자 은혜도 모를 텐데 굳이 살려 줄 필요가 있니?'
'조금?'
'……마, 많이.'
율리아는 다음으로 레라지에를 찾아갔다. 이번 문제는 상처를 치료해 준다고 끝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파이몬의 잘못을 객관적 입장에서 들은 뒤 혼낼 부분은 혼내고 용서를 구할 일이 있다면 돌아다니며
제대로 사과시킬 생각이었다.
'흐응, 수상하네. 어차피 끝난 목숨인데 잘잘못 따져서 뭐하려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지난번처럼
구해 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때와는 일의 경중이 다르니까.'
56 화
'마왕님께서 직접…….'
레라지에가 의도한 바와는 많이 달랐지만, 어쨌든 율리아는 그 덕분에 이번 사건을 해결할 아주 결정적인
단서를 얻었다.
그녀는 바엘이 성에 돌아오기를 밤새 기다렸다. 그것도 일부러 마족들이 많이 오가는 중앙 복도에 쪼그려
앉아서 기다렸다. 귀성한 바엘이 텅 빈 침실을 보면 가장 먼저 자신을 찾을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파이몬을 용서해 주신다면 일주일 동안 침대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마왕님 곁에만 있을게요.
원하신다면 안마도 해 드리고 자장가도 불러 드리고…….'
"나가라."
"싫어요."
"마, 마왕님."
"파이몬이랑 나가서 놀면 안 돼? 둥지에서만 지내기 답답하지 않아? 주군도 우리가 나가는 걸 더 좋아할
텐데?"
"……."
"파이몬은 주군이랑 달라. 파이몬은 율리아가 열쇠가 아니라도, 마력 저항이 없어도 좋아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해."
"진짜?"
"헤헤."
그때, 율리아의 허리에 단단한 팔뚝이 감겨 들어왔다. 옆구리의 굴곡을 타고 내려온 손바닥이 납작한
배를 문지르다 아래쪽으로 느릿하게 내려갔다. 그것이 다리 사이에 도달하기 전, 율리아는 퍼뜩 바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기어코 허벅지 안쪽을 파고든 손바닥이 하얗고 말랑한 허벅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신음을 간신히 삼킨
그녀는 파이몬이 이상하게 여길까 안절부절 못하며 말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으, 응! 궁금하네."
율리아는 죽음의 산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그러자 파이몬은 그녀가 서쪽 땅에 관심을 가진다고 여겼는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죽음이란 이름은 마계에서 특이 현상을 일으키는 아주 특별한 장소에만 붙어! 서쪽에 딱 두 곳이 있는데
하나가 죽음의 산이고, 나머지 하나는 죽음의 나무야."
"마족을 잡아먹어."
"잡아…… 먹는다고?"
관심을 빼앗길까 봐 두려웠는지 소년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율리아는 빠르게 대답해줄 수 없었다.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오른 탓이었다.
[▷SYSTEM
[▷SYSTEM
[▷SYSTEM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율리아는 불현듯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파이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들어차 있었다.
"설령 내가 그 산을 특별하게 여긴다고 해도, 이유는 그곳이 파이몬이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이야.
인간에게 고향은 정말 의미 있는 장소거든."
"브에스드라처럼?"
"으, 응?"
"죽음의 산 근처에 온천이 있어! 인간들은 몸이 안 좋을 때마다 온천에 요양을 간다며? 율리아도 몸이
약하니까 파이몬이랑 같이 가. 분명 마음에 들 거야!"
"누, 누구라고?"
마찰당한 선단에서 스멀스멀 퍼지는 열기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이상한 형태로 융기하는 흰 시트가 더더욱
문제였다. 누가 봐도 속에서 가슴을 주무르는 모양새였다.
"갈 텐가?"
"허락, 해 주시면……."
서쪽 땅에 가야만 했다. 에피소드 진행을 위해선 이동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레기온이
위험에 처해 있었다.
자신의 마력 저항이 그곳에서도 통할지 모르겠지만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지난
에피소드 달성으로 받은 스킬 포인트도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왜인지 그녀를 얽매는 바엘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내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나."
"왜 안 돼요?"
그녀는 바엘의 손가락을 열심히 저지하느라 파이몬이 움직이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등
뒤에서, 파이몬은 처음 악마성에 도달했을 때처럼 동공을 가늘게 좁혔다.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
* * *
율리아가 황금으로 지어진 대저택 발코니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레라지에와 파이몬이 몹시
불만스러운 얼굴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힘 빠진 목소리가 복도 너머로 빠르게 멀어져갔다. 경쟁자 하나를 내보낸 파이몬의 시선이 다음으로
율리아의 뒤편에 서 있던 키마리스에게 향했다.
57 화
"으응, 아냐."
율리아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는 나무가 사라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쪽으로 오면서
죽음의 나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들었기에, 오히려 레기온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창밖 경치가 마음에 들어? 이 저택, 파이몬이 특별히 고심해서 지었어. 멋지지? 구경하고 싶지 않아?"
이번엔 파이몬이 그녀의 손을 붙들고 붕붕 흔들었다. 그에게 익숙한 장소라서 그런지 마왕성에 있을
때보다 표정도 훨씬 밝아지고 어리광도 늘었다.
"율리아, 추워?"
율리아는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전에 파이몬이 주변 창문을 일제히 닫았다. 그러곤 몇 발짝
뒤에서 따라오던 키마리스를 차갑게 노려보며 일갈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파이몬은 이러한 방법에 잘 적응해 주었다. 그녀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소년과 눈을
맞췄다.
"흐음?"
"……미안해."
반색했던 파이몬은 율리아가 단호하게 나오자 의외로 깔끔하게 사과한 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한숨을 쉰 율리아는 파이몬을 번쩍 안아 들며 키마리스에게 눈짓했다.
* * *
율리아는 초저녁부터 잠든 파이몬을 침대에 눕혀 준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에게 주어진 객실은
파이몬의 침실 바로 옆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노을로 붉게 물드는 서부 땅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녀는 오늘 하루를 마감하듯 겉옷을 벗어 내려놓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긴장이 풀리니 팔다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후우, 지쳤어."
햇살이 따스하니 노곤노곤 눈이 감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객실에 굳이 일찍 돌아온 이유가 있었다.
실은 탑에서 퀘스트를 달성한 이후부터 사건이 연달아 터진 탓에 시스템을 제대로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커맨드 시스템의 정확한 기능을 파악하지 못해 수박 겉핥기 같은 느낌으로만 사용한 건 물론이고,
에피소드 보상으로 받은 스킬 포인트조차 아직 사용하지 못했다.
"커맨드 시스템."
[율리아 브에스드라]
▶STATUS (스탯)
▷PROGRESS (진행도)
▷SKILL ° (스킬)
▷ITEM (아이템)
▷SETTING ° (설정)
율리아가 나직이 읊조리자 손바닥 위에 빛나는 이펙트가 생겨났다. 떠오른 메뉴 창에서 스킬과 설정에
새로운 알림 표시가 되어 있었다.
[▷저항 강탈 Lv.1
플레이어가 지정한 대상에 일정 시간 항마력의 50%를 강탈한다. 잔여 체력의 70%를 소모한다. SP 60]
[▷물리 실드 Lv.1
'스킬 레벨을 올릴 때마다 체력 소모가 10 퍼센트씩 줄어들어. 60 퍼센트 소모라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야.'
"세팅."
율리아는 사실 SETTING 메뉴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제껏 수없이 들어가 봤지만 기존 게임에서
흔히 보던 환경 설정이나 제작사 소개 정도만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마저도 열람할 수 없도록 막혀
있었다.
[▷SYSTEM
[▷ERROR
"읏!"
[HIDDEN STATUS]
▶CHARM (매력)
▷FAME (명성)
▷DEVILISM (마성)
▷STRESS (스트레스)
[▷SYSTEM
[HIDDEN STORY]
▷EPISODE (에피소드)
▷QUEST (퀘스트)
▷CHARACTER (인물)
▷ERROR (???)
* * *
58 화
마계 각지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흡수되어 사라지고 있다. 죽음의 땅, 죽음의 나무, 죽음의 동굴
등 탄생의 근원을 알 수 없는 특이점이 주변을 떠도는 마력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마족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 왔으니까.
하지만 이방인인 레기온은 달랐다. 특이점에게 먹힌 마력은 단지 소멸되는 것뿐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사라진 힘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는 의문을 품었다.
마나가 지상의 생태를 순환시키는 힘이라면 마력은 지하의 법칙을 유지하는 힘이었다. 그것은 창세 이래로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채 존재해 왔다. 어긋남은 곧 균열과 붕괴로 이어진다는 걸, 대자연의
축복을 받은 레기온은 알고 있었다.
레기온은 죽음의 나무와 싸우던 도중, 이것을 완전히 소멸시키면 사라진 마력의 행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에 이르렀다. 생각은 갑작스러웠지만 결정은 빨랐다.
"크르르릉."
아까부터 느껴지는 살기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수의 안광이었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거대한 짐승들이
그가 걸터앉은 바위를 어느새 완전히 포위했다,
"젠장, 되는 일이 없네."
* * *
그녀는 한동안 주변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젯밤 분명 객실에서 잠들었는데, 지금 그녀의 시야에
보이는 천장은 아주 높고 푸르며 심지어 광활했다.
[▷ERROR
마왕 바엘이 ??? ??? ??? ???? ?? 목걸이. 바엘을 제외한 모든 ??? 접근을 ????. 사용 기회 ?]
"읏!"
'죽음의 산.'
혹시 자신의 주변에도 그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조차 신경이 곤두섰다.
자신에겐 그들과 맞닥뜨렸을 경우 무사히 살아남을 능력이 없었다.
쏴아아, 작은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율리아는 울창한 나무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지금은 움직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폐물이 전혀 없었던 아까에 비해 폭포 근처는 숨을
곳이 많을뿐더러 한쪽이 절벽처럼 가파르게 트여있었다.
그녀가 눈빛을 반짝이며 물가로 나가려는 찰나였다. 등 뒤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울렸다. 푸른 눈동자가
율리아의 얼굴을 담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꺄악!"
"유, 율리아?!"
콰앙-! 푸른 힘에 맞은 바위가 무너져 내리는 굉음과, 작은 무언가가 물속으로 퐁당 빠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율리아!!"
그녀는 목 끝까지 치미는 책망을 말없이 삼켰다. 푹 떨군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풀이 죽은 듯 보였다.
"……응."
"뭐라고?"
"조, 좋은 생각 같다고."
"그게……."
율리아는 결국 듣기에 그럴듯하게 상황을 얼버무렸다. 레기온이 서쪽에 있다는 말을 들고 찾으러 나왔다가
길을 잃었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키마리스나 레라지에와 이야기해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말을 비틀었다.
다행히 그녀의 혼란스러운 기색을 읽었는지 레기온도 더는 묻지 않았다. 율리아는 속으로 작게 안도하며
다시금 레기온의 상처를 살폈다. 이번엔 그도 순순히 몸을 맡겼다.
"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59 화
"레기온, 내 옷 찢어 줘."
"무, 무슨 소리야."
"응? 빨리."
"……."
"빨리!"
멈칫하던 레기온은 그녀에게 붙들리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제 머리칼을 사정없이 헝클였다. 반짝이던
금발이 새 둥지처럼 부풀었음에도 그는 괴로운 신음만 연거푸 내쉬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응."
옆구리는 이미 탄탄하게 감겨 있었지만 어깨의 상처는 혼자 치료하기 어려워 보였다. 머뭇거리던 레기온은
그녀에게 천을 넘긴 뒤 말없이 등을 보였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천이 부드럽게 마찰하는 소리만 귓가를 울렸다. 상처가 무척 아픈 모양인지
레기온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율리아는 치료를 더욱 서둘렀다.
* * *
깊은 산 속이라 그런지 해가 평소보다 빨리 떨어지고 있었다. 비탈진 산길을 앞서 오르던 레기온의 걸음이
멈췄다. 묵묵히 뒤따르던 율리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응?"
빠르게 되돌아온 그가 손등으로 율리아의 이마를 짚었다. 피부에 닿는 서늘한 감각이 좋아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데 머리 위에서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열이 있잖아."
"아."
하지만 폭포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숫자의 대형 마물이
산허리에 포진하고 있던 탓이었다.
"괜찮아. 나 더 걸을 수 있어."
"자, 이리 가까이와."
"응."
레기온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다만 율리아의 거짓말을 간파했는지 자신의 어깨에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꾹 눌러 기대게 했다. 그러면서 얼음장처럼 식은 팔뚝을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렀다.
굳은살 박인 손바닥은 돌처럼 거친데 살갗에 닿는 감촉은 마치 쉽게 깨어지는 인형을 다루는 듯해서,
그녀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흐릿해졌다.
낮에 마물 무리와 마주쳤을 때만 해도, 자신만 없었더라면 레기온은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전부 해치울 수 없다고 해도 길을 뚫고 그대로 돌진하는 건 가능했을 터였다. 자신 때문에
그는 이 산에 갇혀 버렸다.
율리아의 숨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레기온은 타닥거리는 모닥불을 응시하다가 이내 시선을 들었다.
"……."
그의 기억은 전쟁터에 끌려가기 전, 두 사람이 아직 평범한 소년 소녀에 불과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그 겨울에 우리는 궁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거야. 황도 아벨딧심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간신히
브에스드라 국경 항구로 이동했어. 배를 타고 외국으로 도망쳐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산 속에
숨어서 잠깐 상황을 보기로 해."
"……."
"앗, 저 밑에 군사가 오고 있어. 깃발을 보니까 황실 근위대인 것 같아. 우리를 수색하러 왔나보지?
그래 봤자 우리를 감히 찾아낼 수는 없을 거야."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점점 지치고 초조해진 근위대 놈들은 자신들이 헛다리짚은 건 아닌가 고민하게 돼.
고작 아이 둘인데 도망쳐 봤자 어디로 갈 수 있겠냐고 얕본 거지"
"그래서?"
"놈들은 병력을 이곳저곳에 분산하기 시작했고 그만큼 포위망은 느슨해지고 말았어. 물론 우리에겐
행운이었지.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아주 멋지게 탈출해서 밀항에 성공해."
"착하다."
"내가 애야?"
"레기온?"
"쉿."
얼떨결에 끌려간 율리아가 놀라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 전에 레기온이 그녀의 입술을 꾹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율리아는 레기온이 숨어든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크르르릉."
스산하게 이는 바람소리 너머로 마수의 성난 숨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다수, 그들은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레기온."
"약속할게. 널 두곤 절대 안 죽어."
그는 율리아가 붙잡을 새도 없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면을 박차고 달려가는 발소리와 흥분에 찬 마수의
울부짖음, 날카로운 것끼리 맞부딪히고 부서지는 소리가 밤공기를 소름끼치게 울렸다.
"크윽, 감히 어딜……!"
"키에에에엑!"
"절대 못 보내!"
마수의 사나운 울부짖음이 율리아의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전투의 거리감이 아까보다 훨씬 가까워졌다.
바위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바로 등 뒤에서 싸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캬아아아악!"
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율리아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두 손은 볼품없이 떨리고
있다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쿵-!
"율리아!!"
"……!"
레기온이 후방의 상황을 뒤늦게 알아채고 미친 듯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마수의 거대한
손톱은 율리아의 머리 바로 위에 있었다.
"커맨드. 아이템!"
60 화
"아흑!"
"키에에에엑!"
파지직, 전격이 일며 강력한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다. 뒤로 내동댕이쳐진 율리아는 거대한 나무에
부딪히며 힘없이 쓰러졌다.
"흐윽, 헉!"
율리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절박하게 바닥을 긁었다. 폐가 찌그러진 것처럼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어깨에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엄습했다.
"숨을, 흑, 나아……."
"나를 봐.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끅, 허억!"
"잘하고 있어."
"흐윽……."
"옳지."
율리아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그것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레기온은 그녀의 젖은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그렇게 얼마나 더 지났을까, 율리아의 눈동자가 마침내 원래의 투명한 빛을 찾았다. 레기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 * *
레기온은 율리아가 진정되지마자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에서 떠났다. 아가레스의 마력이 무척이나 강력했던
탓에 주변 마물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 부서진 탓이었다. 피 냄새를 맡은 다른 마물들이 추가로 몰려들
가능성이 있었다.
'혹시 내게 화가 난 걸까.'
"물가에 거의 다 온 것 같지?"
"조금만 더 가면 돼."
"나 이제 내려 줘. 혼자 걸을 수 있어."
"……그냥 있어."
"……."
"……."
"맞아, 사실 나 지금 화났어."
"미안해……."
그의 입매가 쓰게 구겨졌다.
"레기온."
"……."
그때, 그녀의 귀에 아까보다 더 선명한 물소리가 들렸다. 율리아의 신경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쏠렸다.
"그래, 반드시……."
"응?"
"아니야, 아무것도."
레기온이 무언가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거센 물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당기곤 끝까지 걸어 냇가 바로 앞에서야 그녀를 내려 주었다.
율리아가 발끝으로 물을 튕기며 온도에 적응하는 동안, 레기온은 바지 하나만 걸친 채 그대로 냇물에
뛰어들었다. 투명한 물이 그의 허리 근처에서 찰랑거렸다.
"왜 그래."
"춥지 않아?"
"고작 이 정도쯤이야."
"아닌 것 같은데?"
"음……."
"이거 보이지?"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물가에 얌전히 앉자 레기온은 다시 깊은 곳까지 헤엄쳐 들어갔다. 율리아는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불현듯 놀랐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냇물을 들이키고 있었다.
"어라, 그 물."
"응?"
그는 율리아의 물음에 어색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아주 찰나였고, 이내 평상시처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 난 괜찮아. 소드마스터니까 평범한 인간과는 조금 다르거든."
"그렇구나."
"왜 그래?"
"아깐 그냥 우연이겠거니 했는데, 저 위에 마력이 무척 강하게 느껴지는 장소가 있어. 마정석의 축소판
같은 느낌인데 예감이 좋지 않아."
"글쎄."
[▷SYSTEM
[▷SYSTEM
[▷SYSTEM
- 보상: 히든 스탯 대폭 증가
[▷SYSTEM
"마력의 흐름을 따라서? 그럼 산에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될 텐데, 나가는 길을 찾기가 더 어려워질 거야."
"아마도……."
이유를 묻는다면 어떻게 얼버무려야 좋을지 난감했는데 레기온이 때마침 적당한 핑계를 들어 주어
다행이었다.
61 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게 정상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녀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라지에의 말도 틀린 건 아닌가.'
악마의 생은 지나치게 길다. 그렇기에 그들은 나태해지고, 뭐든 흘러가는 대로 방관하는 경향이 있었다.
무언가에 폭발적인 열정을 지니는 건 파이몬처럼 갓 태어난 신생에게나 가능한 일일 뿐, 몇백 년이 지나면
그조차도 모두 허무한 일로 치부되곤 했다.
단순히 주군을 위하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이 마음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바엘의 손아귀에 갇힌 것만으로도 이미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울 것을 알기에.
'너무 오래 굶어도 좋지 않을 텐데.'
"율리아, 키마리스입니다."
"……."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키마리스는 답이 돌아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율리아는 몸이 약해 완전히 깨어날 때까지 오랜 시간을
소모하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안에선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율리아, 괜찮습니까?"
"열쇠가 늦잠 잔대."
"레라지에, 너……."
"어라?"
"……."
"헛소리하지 마."
"주군의 둥지에서, 널 공격하려던 파이몬을 열쇠가 끼어들어 막았지? 마력 저항에 확장 마법을 섞었던가.
기초적인 수준이긴 했지만 분명 복합 마술이었지."
율리아의 힘은 양날의 검이었다. 마력 저항만 해도 충분히 희소하고 구미가 당기는 능력이었지만, 그래도
쓸 만한 곳이 한정되었기에 노리는 자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능력까지 있다는 게 알려진다면 그녀를 빼앗기 위해 누군가는 바엘의 분노마저도 불사할
가능성이 있었다. 키마리스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시트를 움켜쥔 채 울부짖던 파이몬이 용으로 변해 강력한 화염을 내뿜었다. 그가 공들여 지은 저택이
삽시간에 불구덩이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하고 불길한 힘이, 세 악마의 촉각을 스쳐 지났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들의 직감은 단서를 놓치지 않았다. 세 악마의 시선이 일순 한곳으로 향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젠장."
하나의 목숨엔 하나의 대가.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마수정의 봉인을 푼 대가로 죽을 것이다.
절망적인 신음을 짓씹은 키마리스가 즉시 날개를 펼치고 바닥을 박찼다. 짧게 시선을 맞춘 파이몬과
레라지에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급히 도약해 그를 뒤따랐다.
* * *
[▷SYSTEM
기진맥진해 초점도 제대로 못 맞추는 상황에서 짙은 증기가 시야를 방해하고 때때로 화마에 비쳐 붉게
일렁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현재 위치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딱 중간 지점.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SYSTEM
"읏!"
눈앞에서 갑자기 번쩍이는 빛에 율리아는 중심을 잃을 뻔했다. 아까보다 더욱 많은 자갈이 밑으로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숨을 들이키기가 무섭게 밑에서 레기온의 외침이 들렸다.
"율리아, 괜찮아?!"
앞서가면서도 틈날 때마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던 레기온이 결국 올라오려는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길이 너무 좁아 제자리에서 뒤돌아설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자신도 그러한데 자신보다 훨씬 체구가 큰
레기온은 더더욱 힘들 것이다.
62 화
레기온이 마계에서 지내기로 결정했을 때, 그가 이마에 스킨십을 했더니 체력이 소량이지만 강제 증가했다.
바엘과 접촉하면 육체의 상처가 회복되는 것과 비슷하게, 레기온과 접촉하면 HP 수치가 회복되는
모양이었다.
레기온이 알면 무척이나 기분 나빠할 테지만, 그래도 일단은 무사히 살아서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도
만약 사실을 알았다면 이런 자신을 용서해 줬을 것이다.
"그러려면 일단은 밑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어. 조금만 더 힘내자."
율리아는 아주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공기는 비록 아주 뜨겁고 습했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서서 쉬었다고
후들후들 떨리던 팔다리가 다시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
"율리아!"
"……."
"널 절대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이윽고 눈을 뜬 율리아가 레기온의 목덜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양손에서 환한 이펙트가 빛났다.
"실드."
[▷물리 실드 Lv.1
[▷SYSTEM
시스템 창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며 두 사람의 몸을 투명한 구체가 빈틈없이 감쌌다. 레기온의 놀란 시선이
율리아에게 향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빠르게 가까워지는 지면을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율리아는 사위가 적막에 잠기자 뒤늦게 눈을 떴다. 그녀의 밑에서 레기온이
팔다리를 뻗은 채 힘없이 누워 있었다.
맞닿은 가슴이 미동도 없이 멈춰 있다. 눈을 뜨길 기다렸지만 그에게선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율리아가 가슴팍을 때리자 레기온이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그래봤자 장난스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빤히
보였으므로 두 번 속아 줄 생각은 없었다. 율리아는 최후의 일격으로 그의 팔뚝을 꼬집으며 벌떡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얼마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 건지, 절벽 꼭대기는 짙은 증기에 감싸여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하까지 떨어진 탓에 주변 공기가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마치 찜통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율리아가 손가락만 꼼지락대며 전전긍긍하는 사이, 근처를 조사하던 레기온이 어떤 지점을 응시했다.
주변과 다를 것 없는 절벽의 한 부분이었지만 그의 눈엔 다르게 보이는 듯했다.
날카로운 파편과 흙먼지가 자욱하게 휘날리는 가운데, 어느새 레기온의 품에서 안전히 보호받던 율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듯한 기분이,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꺄악!"
뿌연 흙먼지 속에서 수많은 마력의 촉수가 율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기온이 즉시 마나를 개방하고
그것들을 저지했지만 틈새로 놓친 몇 개가 율리아의 가녀린 몸을 강하게 낚아챘다.
"으흑, 아파……!"
"빌어먹을, 당장 놓지 못해!"
허리와 허벅지, 팔다리까지 전부 결박된 탓에 아무리 몸을 뒤틀어도 꼼짝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얽매인 곳만 더욱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혹시나 율리아가 다칠까 봐 레기온이 공격하지 못하고 멈칫한 사이, 검은 촉수가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중력의 압박이 느껴질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레기온이 방출하는 푸른빛이 눈 깜짝할 새 먼지에 뒤덮여 멀어졌다. 율리아는 아득히 깊은 동굴 안으로
끝없이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사위가 어두워 위아래도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공간에서 율리아는 결국
시스템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환하게 빛나던 이펙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스킬을 주의해서 사용하라던 시스템의 를
떠올린 탓이었다.
율리아는 덜덜 떨리는 주먹을 움켜쥔 채 귓가를 스치는 빠른 바람 소리에 집중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바깥의 빛이 완전히 차단되고 온통 암흑의 공간으로 변했다. 환각 미궁 때와는 달리 시스템을 전개해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풀어져라, 제발."
몸부림칠 때마다 여린 살갗이 돌바닥에 긁혀 찢어지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지치기만 할
뿐 도저히 움직일 수 없어서 절망하던 그때, 율리아는 기이한 감촉을 느꼈다. 서늘하고 끈끈한 것이 무릎
안쪽을 타고 뭉근하게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설마 뱀……?"
"아, 읏."
"아, 아이템."
율리아가 굳은 혀를 간신히 움직였지만 눈앞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도 않는 건 아니라고, 그녀의 몸을 결박한 존재가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야광화!"
[▷야광화
칠흑 같은 어둠이 눈 깜짝할 새 물러가며 그녀를 범하려던 존재도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자유를
되찾은 율리아는 마침내 자신이 끌려온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경악한 그녀의 눈꺼풀이 크게 벌어졌다.
광활한 공간, 온통 새까만 천장과 바닥, 높고 육중한 기둥과 바닥을 빼곡히 덮은 마법진, 중앙의 제단.
모든 것이 같았지만 단 하나, 마정석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수정은 단지 마력을 담는 아티팩트가 아니던가. 무생물이 의지가 존재하는 지성체처럼 사람을 납치하고
억압하려 들다니, 아무리 마계라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63 화
[▷SYSTEM
스킬 '물리 실드' 사용 시 잔여 HP 가 5% 미만으로 떨어집니다.]
[▷SYSTEM
스킬을 사용하면 폭주로 죽고, 그렇다고 사용하지 않으면 폭발에 휘말려 죽는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강하게 사려 문 입술에서 따끔, 날카로운 감각이 느껴진 찰나였다.
"레기온?!"
소드마스터가 내뿜는 마나의 위력은 가히 파괴적이었다. 공격을 빗맞은 것만으로도 거대한 기둥이
쓰러지고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율리아는 갈등했다. 둘 사이의 공방이 워낙 빠르고 치열해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아주 흐릿한 잔상뿐이었다.
그녀는 대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 마나가 번개처럼 번뜩일 때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마수정의
본체가 눈에 들어왔다. 어둠의 범위가 시시각각 변화하는 와중에도 단 하나,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
곳이 있었다.
'마법진이 새겨진 제단의 중앙. 저곳에 마수정의 본체가 있어. 하지만 어떻게 해야…….'
잘그락.
본체에 타격을 줄 방법을 찾던 율리아의 귀에 이질적인 금속음이 들렸다. 마수정의 검은 마력에 반응하듯
바엘의 붉은 목걸이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ERROR
마왕 바엘이 ??? ??? ??? ???? ?? 목걸이. 바엘을 제외한 모든 ??? 접근을 ????. 사용 기회 ?]
율리아는 점멸하는 목걸이를 움켜쥐고 칠흑의 핵과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하에서 가장 순도 높은 바엘의
붉은 마력. 만약 이것을 마수정의 핵에 박아 넣고 폭발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는 결과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다만 방법이 문제였다. 마수정에게 접근하는 것부터
난항이었고, 이것을 핵과 함께 폭발시키는 것도 상당한 위험이 따랐다.
'아니, 할 수 있어.'
율리아의 머릿속에 이를 성공시킬 만한 계책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제야 시스템의 를 이해할 수 있었다.
스킬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녀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을 바라보았다. 수백 개의 날카로운 창끝이 레기온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보이는 건 오직 흐릿한 잔상뿐이지만, 율리아는 그가 얼마나 긴장한 채 소드를 휘두르고 있는지
깨달았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디뎌도 자신이 죽고, 뒤이어 율리아도 죽는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레기온은
누구보다도 절박하게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커맨드 시스템."
마수정이 내뿜는 마력은 모조리 레기온의 방향으로 치우쳐 있었다. 율리아는 그 틈을 타 재빨리 제단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뒤쪽엔 높다란 턱만 있을 뿐 중심부로 가는 계단이 없었다. 율리아는 거의 암벽
등반하다시피 돌바닥을 붙들고 위로 기어 올라갔다.
"콜록, 콜록!"
숨을 헐떡일 때마다 지하의 뜨거운 열기가 폐부로 고스란히 전달됐다. 호흡기가 타는 듯한 고통에
계속해서 기침이 나왔지만 율리아는 이를 악 물고 몸을 움직였다.
파지직, 파직!
그녀가 제단에 발을 디디는 순간, 마법진이 또다시 위태로운 파열음을 냈다. 작고 하얀 발바닥이 닿는
곳마다 자잘한 균열이 생겼다.
검을 휘두르던 레기온이 무언가 이상을 느꼈는지 제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율리아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거점, 레기온."
[▷저항 거점 Lv.2
플레이어가 지정한 좌표에 일정 시간 항마력을 부여할 수 있다. 잔여 체력의 40%를 소모한다. SP 40]
[▷SYSTEM
[▷SYSTEM
상태에서 스킬 사용 시 상태 이상 '폭주'가 발생합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강탈, 마수정."
[▷저항 강탈 Lv.1
플레이어가 지정한 대상에 일정 시간 항마력의 50%를 강탈한다. 잔여 체력의 70%를 소모한다. SP 60]
[▷SYSTEM
[▷SYSTEM
10 초 후, 상태 이상 '폭주'가 시작됩니다.]
"율리아!!"
[WARNING!][WARNING!][WARNING!]
"레기온……."
"……!"
파지직, 파직. 소름끼치는 파열음이 고막을 긁었다. 마수정의 최후를 확신한 레기온이 검을 뽑아들고
쓰러진 율리아의 곁으로 착지했다. 그는 힘없이 늘어진 몸을 안아 든 뒤 제단 밑으로 빠르게 내려섰다.
율리아는 흐릿한 시야 너머, 블랙홀의 최후처럼 붕괴해가는 마수정과 제단을 바라보았다.
[▷SYSTEM
[▷SYSTEM
[완료]
* * *
"율리아, 눈 좀 떠 봐."
레기온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미약한 숨결은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레기온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자신이 부족해 마수정을 제대로 상대해내지
못하니까, 이 착하고 순진한 바보가 목숨과 맞바꾸어 대신 자신이라도 살려 내려고 한 거다.
짙은 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강력한 적과 싸우며 순간의 호승심에 취해, 율리아보다
마수정과의 싸움을 선택했던 어리석은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율리아의 손이 처음으로 빛나던 순간, 온몸을 짓눌러오던 마력의 압박감이 깨끗하게 사라졌고 그녀가 두
번째 힘을 쓰자 거대한 빛의 화살이 마수정의 핵에 내리꽂혀 빈틈없이 강력하던 마력을 무르게 만들었다.
"……."
"끄윽, 끄으으으!"
그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레기온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었다. 식어
가는 몸을 끌어안고 눈을 감은 채 한없이 눈물만 떨어뜨렸다.
"아……."
옅은 분홍빛의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가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율리아의 마나였다. 그것을
올려다보던 레기온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살릴 수 있어."
64 화
레기온의 메마른 입술이 율리아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타액에 마나를 실어 그녀의 안에 밀어
넣으며, 반대편 손으로 얇은 네글리제 끈을 조심스럽게 끌어내렸다. 끈이 어깨를 타고 내려가며 율리아의
한쪽 가슴이 살포시 드러났다.
율리아를 이런 식으로 취하고 싶지 않았다. 마신의 잔재가 남은 이따위 더러운 곳에서 짐승처럼 그녀를
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괴로워하는 머리와 다르게 레기온의 하체는 이미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이대로 가면 율리아는 죽는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선 짐승 같은 행위라도 저질러야만 했다. 그녀를 상처
주는 짓이라 할지라도, 더러운 이기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율리아가 살아 있기를 원했다.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사랑해, 율리아."
"사랑해."
율리아의 창백한 입술에선 여전히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몸을 쥐고 애무하는
사내의 등 근육은 흥분으로 꿈틀대며 깊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는 율리아의 살결에 입술을 붙인 채로 조금씩 밑으로 내려갔다. 가느다란 목선에 입을 맞추고 툭 불거진
쇄골을 훑었다. 윗가슴의 각인이 눈에 들어왔을 때 분노로 턱이 갈렸지만 그 아래의 작고 사랑스러운
유실이 그의 뇌리를 마비시켰다.
"하아, 율리아……."
레기온의 손이 네글리제 밑으로 성급하게 들어갔다. 손바닥에 착 감기는 허벅지를 쓸어 올리며 그는 점점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그 정점에 저를 파묻고 싶었다.
굳은살 박인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얇디얇은 속옷을 옆으로 밀어냈다. 이제 굳게 맞물린 입구를 힘주어
벌리고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머뭇거리던 그의 얼굴이 율리아의 가슴께로 힘없이 떨어졌다.
"……."
"제발, 나를 용서해."
그의 손가락이 이윽고 율리아의 안을 비집고 들어갔다. 의식을 잃었어도 고통은 느낄 수 있는지 그녀의
허벅지가 파드득 떨렸다. 레기온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유두를 집요하게 빨아 올리고
잇새로 부드럽게 긁었다.
위로는 젖꼭지를 애무하며 동시에 밑으로 손가락을 움직이자, 율리아의 찢어질 듯 비좁았던 내벽이 천천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작은 살덩어리가 통통하게 달아오른 이후에도 자극을 멈추지 않는데, 그녀의 입술에서 마침내 끊어질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읏……."
그 소리를 들은 레기온의 팔뚝이 움찔 떨렸다. 율리아의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자신의 손길에
반응하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도 간신히 삼키는 구멍에 이런 것을 집어넣어도 되는지 레기온은 갈등했다. 하지만 그가
괴로워하면 할수록 아랫도리엔 끝도 없이 피가 쏠렸다.
"아, 응."
"흐응!"
고작 귀두만 욱여넣었을 뿐인데 율리아의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이 터졌다. 비좁은 구멍이 침입자를
몰아내기 위해 정신없이 조여들었다. 레기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율리아의 머리맡에 팔을 기댔다.
내려다본 율리아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레기온은 입술을 포개며 허리를 짓쳐 올렸다. 율리아의 몸이 위로 밀려 올라가자 레기온은 그녀의 골반을
붙들고 밑으로 강하게 내리꽂았다. 굵은 페니스가 남김없이 삼켜지며 두 사람의 밀부가 바짝 밀착됐다.
"크윽."
"응……!"
"아, 율리아."
다시금 빠져나가는 그의 성기를 율리아의 구멍이 빡빡하게 사리물었다. 자신에게서 나가지 말라는 듯,
가뜩이나 비좁은 내벽이 그를 꽉 물고 오물거렸다. 그런 모습까지 레기온의 눈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흐응……."
허리 짓을 할 때마다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철썩철썩 울렸다. 음부가 액으로 범벅이 되어 갔다.
찌걱대며 마찰하는 소리와 질척한 물소리가 난잡하게 섞여 들었다.
율리아의 가느다란 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이 페니스와 바짝 맞물려 부연 거품이
일었다. 빠르게 박아 넣을 때마다 율리아의 고개가 움찔움찔 떨렸다. 레기온은 성기를 강하게 밀어
넣으며 율리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흐으……."
그녀의 눈꺼풀이 들리며 색소가 옅은 동공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율리아는 제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본능에 따라 가쁜 신음을 흘려 댔다. 파르르 떨리던 허벅지가 레기온의 허리를 꽉
조였다.
"아앙, 읏, 앗!"
"얼마나 더 길게 이 짓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
그녀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기 위해선 얼마나 긴 시간을 교접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최소한 그
시간동안 율리아는 자신만의 것이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레기온의 등골이 선뜩하게 전율했다.
"좋아, 더……."
"여기가 좋아?"
"이렇게?"
"아, 해 줘어!"
"아앙, 핫, 흐응!"
그래봤자 살짝만 쥐어도 부러질 정도로 가느다란 팔뚝이었다. 레기온은 밀어내는 힘을 무시하고 골반을 쳐
올리며 상냥하게 속삭였다.
"아흑……!"
레기온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유두를 살살 굴렸다. 스칠 듯 말 듯 할 때마다 그녀의 구멍이 안타까운 듯
꾹꾹 조여들었다.
"아니야아, 흑, 아."
"그럼 이건?"
비음을 흘리며 쾌락을 찾아 스스로를 애무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결국 레기온의 인내심이 먼저 끊어져
버렸다.
65 화
"잘 보고 있어."
"흐읏!"
그의 머리 위에서 끊어질 듯 애타는 할딱임이 들렸다. 위아래를 동시에 괴롭힘 당한 율리아가 초과량의
쾌락을 견디지 못하고 작게 울먹였다. 뒤늦게 알아챈 레기온이 시선을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무서, 워, 흐윽!"
레기온은 결국 머리 위로 결박한 팔을 놓아주며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삼켰다. 율리아의 억눌린 신음이
레기온의 입 안에서 사라져갔다.
"흐으, 으으응!"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동굴을 울리던 찰나, 율리아의 머리맡에 희미한 그늘이 내려앉았다. 레기온은
율리아의 이마에 붙은 잔머리를 쓸어 올리며, 불청객에게 비소를 보냈다.
"……악마 주제에."
율리아를 강탈하고 그 순결한 육체를 더럽히려 한 악마 주제에. 자기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멍청이는 그냥 저 위에서 체면이나 차리고 있으면 된다.
레기온은 허리를 움직이며 비좁은 내벽을 천천히 휘저었다. 그녀가 느끼는 부분을 집요하게 뭉개고
짓눌렀다. 뜨끈한 살점에 감싸인 페니스가 사정없이 조여들었다. 레기온은 팽팽하게 벌어진 입구를 살살
어루만졌다.
"율리아, 기분 좋아?"
"응, 으응."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가 레기온의 허리에 감겨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 바엘의 얼굴이
매섭게 구겨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레기온은 시선을 내렸다. 율리아의 발갛게 물든 눈가가 사랑스러웠다.
팔뚝만한 페니스가 비좁은 내벽을 들락거리며 자극적인 마찰음을 만들어 냈다. 귀두가 자궁구를 탁탁 때릴
때마다 율리아는 울먹이며 교성을 내질렀다.
"……."
"그러니까 오늘의 '불청객'은 이만 꺼지지 그래? 아무리 너라도 하나뿐인 열쇠가 죽는 건 바라지
않겠지."
"……."
그녀에게 박혀 있던 붉은 안광이 천천히 위를 향했다. 사납게 일그러진 레기온의 얼굴을 보며, 바엘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설마 내가 억지로 새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유감이지만 이건 열쇠가 직접 선택한 결과다. 이걸 지우는
방법은 오직 숙주의 죽음뿐인데, 그럼 네가 벌이는 정사도 영영 쓸모없는 짓이 되겠군. 그렇지?"
"으응……!"
바엘의 살갗에 닿자 율리아의 목대가 꼿꼿이 서고, 레기온의 좆을 물고 있던 내벽이 바르르 경련했다.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내에게서 쾌락을 얻고 있었다. 레기온은 그 사실이 죽을 만큼 저주스러웠다.
"하아, 흐읏."
"입 벌려."
"율리아에게서 손 떼!"
바엘이 율리아의 아랫입술을 톡톡 건드리자 그녀가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바엘은 율리아의 목덜미를
들어 올리며 부드러운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한 쪽으로 치웠다. 그러곤 이미 빳빳하게 발기한 제 것을 입에
물렸다.
"흐응……."
"더 깊이."
"흐윽, 웁, 우웁!"
"그만둬!"
"잘하고 있어."
하지만 레기온은 율리아를 빼낼 수 없었다. 저대로 놔두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쾌락에 몸부림치는
그녀의 모습에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미칠 듯 꽉꽉 조여드는 내벽과 거칠게 헐떡이는 숨이, 마치
이대로 계속해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바엘이 율리아의 목덜미를 애무하며 허리를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의 페니스가 율리아의 입 안을 유린하며
점점 깊이 파고들었다.
"……웃기는 소리."
골반을 쥔 레기온의 손가락이 하얗게 바랬다. 도발이란 걸 알면서도 차오르는 분노를 멈출 수 없었다.
동시의 그의 성기가 율리아의 자궁구를 강하게 쳐올렸다.
"흐읍!"
"율리아는 나를 선택하게 될 거야."
"……."
얼핏 들으면 승기는 명백히 바엘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레기온은 바엘의 붉은 안광에 담긴 분노를
보았다. 역시 악마는 멍청하다. 질려 버릴 정도로.
레기온은 그녀와의 결합부를 내려다보았다. 희뿌연 액이 율리아의 하반신에 엉망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말로는 그녀를 살리기 위함이라지만 진실은 그런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사랑스럽다. 감정의 밑바닥에 진득하게 눌어붙은 이 파괴적인 독점욕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
위아래로 찌걱거리는 질펀한 마찰음과 힘겹게 새어 나오는 여자의 신음이 무거운 밤공기를 울렸다.
66 화
[▷SYSTEM
상태 이상 '폭주'를 종료합니다.]
그녀는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시스템의 를 무시하고 마지막 스킬을 사용한 뒤, 끝없이
생겨난 붉은 창이 시야를 가득 뒤덮었다.
목구멍에서 뜨겁게 역류하던 피의 감각이 생생했다.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끔찍한 고통이
되살아날 것만 같아서 율리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유를 알 수 없이 뇌리에
맴도는 장면이 있었다.
"아……!"
율리아는 제대로 목소리가 나지 않는 목을 힘겹게 부여 쥐었다. 하지만 바엘의 시선은 그녀가 불편한 듯
꼼지락거리는 다리 사이로 향해 있었다.
그제야 율리아는 자신이 네글리제 하나만 달랑 입은 채 바엘의 무릎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장소는
다행히 실내라 다른 누군가에게 보일 염려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 편히 쉴 만한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콜록! 일단 놓아주……."
"어림없는 소리를."
바엘의 커다란 손이 율리아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는 새하얀 등을 미끄러지듯 내려가 율리아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올렸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일으켜져 바엘을 마주 본 채로 그의 허벅지 위에 앉혀졌다.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훑는 바엘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그의 맨손이 닿는 등허리에서 찌릿한 감각이
타고 오르는 것도 걱정됐다. 이러다간 그의 무릎 위에서 온갖 민망한 꼴을 보이게 될 것만 같았다.
"흐으, 으응."
바엘은 뒤로 도망치는 혀를 붙들어 뿌리까지 거칠게 빨아들였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고개를 비틀어
목젖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난폭한 움직임이 무서웠다. 율리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애원했다.
바엘은 율리아의 시야가 까맣게 암전될 쯤에야 그녀의 안에서 빠져나갔다. 율리아는 옆으로 쓰러지려
했지만 목덜미를 붙든 바엘의 손아귀는 그녀가 잠시라도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율리아는 결국
그의 품에 안겨 힘겹게 기침을 내뱉었다.
"무슨 소리지."
바엘의 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구겨졌다. 하지만 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그는 명백히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
율리아의 해명에도 바엘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율리아는 반쯤 체념한 채 말을 이었다.
"레기온에 대해서라면, 마왕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싫어하시는 줄 몰랐어요. 그간 별다른 말씀이 없었고
전쟁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들어서……. 레기온과 함께 있었던 건 제 본의가 아니었어요."
"본의가 아니다."
이상하게도 나직한 바엘의 목소리가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도 내비치지
않던 그가.
"계속해."
율리아는 쇄골 언저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말을 멈췄다. 바엘의 손가락이 당장이라도 가슴골을 파고들
것처럼 위태롭게 까딱였다.
"왜 갑자기 그런 곳에서 깨어났는지 무섭고 이유도 몰랐지만 일단은 움직여 보자고 생각하다가 레기온을
만났어요. 단지 그뿐이에요. 걱정하실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네?"
무감한 얼굴을 한 바엘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이번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전혀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어쩌면 무감한 껍질 이면의 존재를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가만 안 둬. 가만 안 둬. 가만 안 둬. 죽여 버릴 거야!!"
2 층에 위치한 율리아의 침실 너머로 거대한 화마가 단번에 솟구쳤다. 대경실색한 그녀는 곧장 침대에서
뛰어내려 문 밖을 향해 미친 듯 달려갔다.
"……."
"이상한 일이지."
바엘은 느릿하게 고개를 젖혔다. 열쇠의 뒷모습은 어느새 복도 너머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67 화
07. 지상에서 온 사자
율리아는 악마성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소란스러운 환대를 받았다. 서쪽 땅에서 지낸 시간은 고작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중간에 엄청난 일을 겪었기 때문일까, 눈앞의 풍경을 아주 오랜만에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아가레스의 뒤편엔 동생에게 왜인지 잔소리를 퍼붓는 바르바토스가 있었고, 꼬리를 붕붕 흔들며 덤벼들
준비를 마친 베로, 그런 베로의 옆에서 덩달아 꼬리를 흔드는 보티스가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엔 왕인 바엘을 따라가는 거겠지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고위급 마족이 고작 인간 하나를
뒤따른다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래서 뭐지."
"쉬익, 쉬이이익."
"내가 왜, 작은 열쇠야?"
"쉬익, 쉬이이익."
* * *
"안 그래도 확인하라고 키마리스를 보냈어. 하지만 아직인 것 같네.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두 악마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율리아는 빠져나가 보려 슬쩍슬쩍 허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아가레스의
완력이 너무 강한 탓에 마치 바위틈에 끼인 듯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율리아는 결국 깨끗하게 포기하고 아가레스에게 몸을 맡겼다. 그녀의 입꼬리가 큰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지금쯤 지상에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을 이들을 떠올렸다. 눈엣가시 같던 자신이 사라졌으니 그들은
조금은 더 행복해졌을까.
율리아는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있기 때문에 불행했던 사람들이었다. 뼈아픈 부정의
증거가 눈앞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고 있으니 얼마나 거슬렸을까. 물건이었다면 부숴서 버렸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은 사람이기에 그러지 못했을 뿐이었다.
"마왕님께 무슨 일이 생겼었나요?"
율리아는 퀘스트를 완료한 뒤 파이몬의 저택에서 눈을 떴을 때를 떠올렸다. 바엘의 행동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었다. 그는 화를 내고 있었고, 파괴적인 갈망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바엘은 그때그때 기분대로 움직일지언정 행동에 기준이 없는 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율리아는 이제껏 그를
대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의 사적 영역을 지켜 준다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너그럽게 넘어가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바엘은 확실히 달랐다. 단지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뿐이었다. 그의 영역을 침범하는
무신경한 짓 따위 하지 않았다.
"신하된 몸으로 주군을 욕하기는 좀 그런데 말이지, 결론만 말하자면 작은 열쇠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 네가 마계로 내려오기 전 주군께서 어떤 분이었는지 새삼 추억할 수 있었지."
"네……?"
아가레스는 바엘의 명예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나름대로 최대한 말한 것 같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율리아의
입장에선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자세히."
"너의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거지? 그건 열쇠로서의 권능인가? 난 이제껏 네가 일정수준에 도달한
마법사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네 능력의 끝을 짐작할 수 없어. 말도 안 되는 가정일지 모르지만, 네가
마신의 힘 일부를 끌어 쓰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바르바토스
"레기온."
율리아가 그를 말리려 했지만 아가레스도 썩 편해 보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의 말에 동조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작은 열쇠를 찾아온 목적은 그게 아니잖아? 주군께 작은 열쇠는 그만큼 중요한 존재이니 이젠
키마리스 하나에게만 호위를 맡길 수 없게 됐기 때문이지. 작은 열쇠를 공연히 괴롭히지 마."
방금까지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점을 지적당한 바르바토스가 표정을 굳혔다. 그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68 화
율리아는 양쪽을 번갈아 보며 애꿎은 치맛자락만 붙들었다. 낮게 한숨을 쉰 바르바토스는 보티스를 이끌고
나가 문고리를 돌렸다.
[▷바르바토스
[▷바르바토스
한편, 율리아는 빠르게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사리물었다. 불안감으로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남의 귀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바르바토스는 판단력이 예리해 율리아가 대하기 가장 어려운 악마 중 하나였다. 수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항상 행동을 조심하고 말을 아꼈다. 그의 날카로운 눈초리 앞에선 시스템 창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군요……."
"물론 너는 예외니까 그런 표정 할 것 없단다. 어쨌든 그래서 앞으론 최고위급 마족이 너의 호위를 맡게
될 거야. 인간 측에서 사자가 오게 되면 감히 접촉하려 들 수도 있고, 무엇보다 너는 주군의 안정을 지켜
주는 소중한 존재니까."
그제야 율리아의 시선도 아가레스를 향했다. 전쟁이 끝났으니 이런저런 협정을 맺어야 할 테고 그러다
보면 사람이 오가야 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사절이 와도 자신을 피하면 피했지 그쪽에서 먼저
접촉할 일은 없었다.
"그게 무슨……."
"싫어요……."
"작은 열쇠야?"
"저는 가기 싫어요."
"아가레스 님……."
[▷아가레스
이 작고 여린 게 지상에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말만 들어도 울어. 빌어먹을 인간들.]
등 뒤에서 레기온의 뚫어질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은 이제껏 그의 앞에서 어두운 과거를 내색한 적이
없었다. 레기온야말로 전쟁터에서 생사를 오가며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테니까, 자신은 그럴 자격 따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을 끌어 안아주는 아가레스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율리아는 그녀의 품에
비비적대며 파고들었다.
[▷아가레스
"……젠장."
어쩐지 등 뒤가 조용하다 싶더니 아가레스와 레기온이 시선만으로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 * *
달이 뜰 즈음에 율리아는 바엘의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바엘은 때마침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피곤한 듯 인상을 쓴 채 눈을 감았다. 벗은 상체가 붉은 달빛에 고스란히 비쳤는데, 탄탄하고 깊게 패인
근육이 붉게 물드니 더욱 위협적으로 보였다.
"……."
율리아는 잠옷과 로브를 꺼내며 난처하게 눈알을 굴렸다. 최근 들어 바엘과의 관계가 조금 풀어지려는 것
같았는데 이런 바보 같은 실수로 분위기를 망치는 일은 있어선 안 됐다.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율리아는 잠시 대답을 기다렸지만 바엘은 움직이지 않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바엘의 고개가 다시 창밖으로 돌아갔다.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율리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원피스 끈을 풀었다.
어느새 침대 근처까지 걸어온 바엘이 그녀를 선명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둡게 드리운 그늘 안에 서서,
마치 예술품을 감상하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가 느끼기에 그녀의 신체는 육감적이고 건강한 몸과 거리가 한참 멀었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서
누구도 욕심내지 않을 그런 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덜미 부근을 진득하게 훑는 시선을 느꼈다. 당연히 착각이겠지 싶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율리아는 자꾸만 등 뒤로 향하려는 신경을 애써 억눌렀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던 눅진한 시선이 가느다란
등줄기를 따라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율리아는 착각이라고 간주했다.
그녀는 바엘이 누운 침대 반대편에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크고 무거운 이불을 들추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시시각각 넘쳐나는 마력을 안정시키기 위해선 살갗이 직접 닿지 않는 선에서 그와 최대한 가까워져야 했다.
율리아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 담담한 척 했지만 바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율리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지만 바엘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까보다 좀 더 짙어진 안광으로
되물었다.
"어째서."
그녀는 담담하게 시선을 들었다. 바엘은 여전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위협적인 빛은 사라졌다. 대신
그의 손가락이 조금 갈급하게 내려와 율리아의 윗가슴을 문질렀다. 각인이 있는 자리를 확인하듯 몇
번이나 반복해서.
69 화
바엘과 접촉이 길어질수록,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였던 것 같기도 했다. 율리아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시선 하나하나에 예민해지고 신경이 곤두섰다.
"으응……."
어째서일까. 지금도 바엘의 숨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박혀들고 있건만, 그것이 조금 더 크고 거칠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 때문에 이성을 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상하지?"
바엘이 가슴을 주무를 때마다 단단한 손바닥 아래 여린 유두가 몇 번이고 쓸렸다. 보지 않아도 끝이
뾰족하게 섰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 어떡해."
율리아의 허벅지 안쪽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다리를 배배 꼬자 안쪽의 음핵이 압박되며 야릇한
감각이 더 강하게 퍼졌다.
"아, 흑……!"
"쯧, 안 되지."
"하윽, 아, 이런 거, 싫어."
"싫어, 싫어어……."
해갈되지 못한 충동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 들수록 바엘의 입 안은 바짝 말랐다.
달콤한 샘이 눈앞에 있었다. 그를 위해 고인 아주 다디단 샘이.
바엘의 입술이 팬티의 젖어 든 부분에 닿았다. 그는 마치 키스하듯 비부를 집어삼키고 그녀의 구멍이 있을
부분을 혀끝으로 쿡쿡 찔렀다. 그가 고개를 비틀 때마다 날렵한 코끝이 율리아의 음핵을 뭉갰다.
"아아, 아, 어떡해."
율리아의 턱이 빳빳하게 들렸다. 속옷을 입고 있음에도 아래에서 질척한 물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바엘의 입술과 맞닿은 부분에서, 그의 혀가 파고 들어갈 듯 강하게 찌르는 곳에서.
"안 돼, 아, 아……!"
가느다랗고 위태롭던 교성이 일순 끊겼다. 율리아가 도달하기 직전, 바엘이 고개를 든 것이다. 율리아의
커다란 눈망울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미칠 듯한 열기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쑤시고 돌아다녔다.
그녀가 정말로 울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바엘이 그녀의 몸을 미끄러지듯 타고 올라왔다. 키스하듯
종이 한 장 차이의 거리를 두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바엘이 속삭였다.
"무엇을 원하지?"
"다, 당신……."
"읏!"
"갈망하는 것을 말해."
"나의 왕, 바엘."
"보기 좋군."
"바엘……."
"……."
"당신을 원해요."
율리아는 자신 혼자만 미쳐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독한 쾌락에 굴복해 간절히 애원하는 동안, 살을
맞댄 바엘에게선 열기의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율리아의 가쁜 숨소리에 미미한 원망이 섞여 갔다. 그녀의 등허리를 끌어안은 바엘의 안광이 돌이킬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흑……!"
율리아는 제 몸을 가르고 들어오는 육중한 부피감에 허덕였다. 흡사 짐승의 성기가 파고드는 것 같았다.
핏줄이 흉흉하게 곤두선 뱀의 머리가 비좁은 틈에 억지로 고개를 쑤셔 넣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봤다면
무서워서 울먹일 게 분명한 광경이었다.
"하윽, 끅, 마왕님!"
"그게 아니지."
"바엘, 바엘……."
페니스가 눅진하게 녹아든 점막을 후비는 감각이 미칠 정도로 좋았다. 뭉툭한 귀두가 내벽을 긁을 때마다
쾌감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뭉그러졌다.
"끅……!"
고개만 간신히 들이밀고 있던 성기가 율리아의 안을 단번에 찌르고 들어갔다. 거칠게 자극당한 내벽에서
지독한 쾌감이 퍼져 나갔다.
바엘을 머금은 곳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점막을 난잡하게 짓뭉개는 페니스 때문에 절정이 쉴 새 없이
몰아닥쳤다. 그의 막대한 부피감은 단지 안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율리아에게 죽고 싶을 정도의 열락을
선사했다.
"하악, 하, 으응!"
"괴로운가."
바엘은 반대편 손으로 율리아의 한쪽 허벅지를 들어올렸다. 뜨겁고 질척한 점막이 그의 핏줄 선 육중한
기둥에 더덕더덕 들러붙었다. 깊이 맞물린 채 꾹꾹 조여드는 구멍에 홀려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낮고 깊은 목소리가 율리아의 고막을 긁었다. 동시에 그녀의 안에서 때를 기다리던 기둥이 빠르고
집요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둥이 박혀 들며 자궁구를 쳐 올릴 때마다 율리아의 시야가 까맣게 암전됐다. 호흡이 막히자 지독한
쾌락이 숨의 빈자리를 대신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율리아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처박혔다.
정점에 도달하며 뱃속이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보루가 터진 것처럼 뜨거운 열락이 그녀의 몸을 마구
들쑤시고 점령했다. 몰아치는 쾌락에 그녀는 턱을 치켜든 채 덜덜 떨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바엘이 그녀의 턱 끝에 부드럽게 입술을 갖다 댔다. 그러곤 조금의 휴식도 없이 곧장
허리를 흔들었다. 이미 정점에 도달한 상태에서 쾌락이 겹겹이 몰아치자 율리아의 몸이 더욱 빳빳하게
굳었다.
"크윽, 좁군."
페니스가 구멍을 꿰뚫을 때마다 율리아의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하지만 바엘은 속도를 줄이기커녕 더욱
빠르게 엉덩이를 쳐 올렸다. 지옥 같은 쾌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70 화
"율리아."
그의 나직한 중얼거림은 탁탁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에 묻혔다. 또다시 절정에 치달은 율리아의 내벽이 확
조여들고, 그녀에게 자극받은 바엘 역시 버티지 못하고 파정했다.
사정과 동시에 펼쳐진 거대한 날개가 두 사람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바엘이 지독한 열락을 견디지 못하고
힘을 개방한 것이다. 강력한 돌풍이 둥지 근처에 휘몰아쳤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는 오직 제 품에 안긴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너를 믿어 보겠다."
"……네."
* * *
지상에서 출발한 백 명 남짓한 사신단이 지옥문을 통과해 마계로 내려왔다. 비록 숫자는 적을지언정
그들은 각 지역에서 손꼽히는 전사들이었다. 거대한 깃발을 펄럭이며 행진하는 사내들의 기세는 드높았다.
'브에스드라 황실 친위대…….'
황가의 검이자 방패인 친위대가 브에스드라 밖을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그들이 이런 먼 곳까지
직접 온 이유는 아마 자신 때문일 터였다. 명목상이라도 황녀의 이름을 갖고 있는 자신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발등에 급한 불이 꺼졌으니 이제 열쇠를 회수해 갈 속셈이야. 정말로 마신이 탄생해
버리면 곤란해질 테니까.'
사신단이 마왕성에 체류하는 기간엔 밖을 돌아다닐 생각이 없었다. 아가레스도 일처리가 끝나는 대로
그들을 하루속히 내쫓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들과 같은 장소에 머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율리아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잔상이 지금의 평온을 산산이 깨뜨리려는 것 같아서.
"마왕님?"
오늘도 바엘은 하의만 대충 걸치고 있었다. 남자답게 크고 떡 벌어진 골격과 깊게 굴곡진 복근이 그녀의
눈앞에서 꿈틀댔다.
밤마다 낮에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늘어놓는 정도는 약과였다. 가끔은 옛 기억을 조금씩 털어놓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바엘은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심기가 썩 편해 보이진 않았다. 왜인지
험한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었다.
"나가면 도망치려고?"
"못 믿겠군."
바엘은 그녀의 뒤통수를 제 가슴팍 위로 꾹 눌렀다. 그의 뱀처럼 날카로운 동공이 율리아의 동그란 정수리
너머 지평선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율리아는 갑작스러운 침묵에 눈만 깜빡였다.
"네?"
피처럼 붉은 보석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바엘의 시선이 그곳에 짧게 머물렀다가 이내 율리아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은 제 가슴팍에 떨어진 목걸이로 향해 있었다.
"예뻐요. 감사합니다."
"또 갖고 싶은 게 있나?"
"……."
두 악마가 나누는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율리아는 바엘의 뒤에 숨어서 작게 손부채질을 했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도 아니고 그냥 목걸이를 받았을 뿐인데 심장이 쿵쿵 달음박질 쳤다.
율리아는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작게 심호흡했다. 청력이 뛰어난 마족들 앞에선 전혀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말이다.
보고를 마치고 자리에서 빠르게 물러나던 바르바토스는 문을 닫기 직전, 뒤돌아 선 열쇠의 허리를 감싸는
왕의 모습을 발견했다. 간지럽다는 듯 작게 웃는 열쇠를 왕은 선명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지난 수백 년간 왕을 따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 * *
바엘에게서 군 통수권을 위임받은 아가레스는 홀에 늘어선 인간들을 구경하며 대놓고 실소를 흘렸다.
조금이라도 먼저 발언권을 행사하기 위해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이는 이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웃음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지옥에 왔다면 지옥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 너희가 이곳에서 지켜야 할 준칙을 어길
시 결과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으니 언사를 신중히 할 것을 권한다."
"인질의 신병조차 확인하지 못하게 하다니, 황녀 전하께서 이곳에 와 얼마나 지독한 대우를 받고 계신
건지 알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정식으로 항의 서한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71 화
"……."
* * *
결국 침대에서 일어난 엘고스의 출신의 기사들은 저마다 오늘의 감상을 털어놓았다. 가장 먼저 화두에
오른 건 단연 율리아에 대한 소문이었다.
"마왕이 황녀를 밤마다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고 들었어. 이름이 율리아라고 했던가. 사내 후리는데
둘째가라면 서러운 타고난 요부라더군. 브에스드라의 전쟁 영웅마저 꾀어냈다는 말이 있어."
* * *
율리아는 며칠째 바엘의 침실에만 머물고 있었다. 사실 지상에서 온 사절단은 악마성과 별도로 떨어진
구역을 숙소로 배정받았기에 그녀가 본성만 나서지 않는다면 그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율리아 본인의 의지였다.
"아, 이거 맛있어요!"
율리아는 때늦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앉은 테이블엔 수프, 빵, 소시지, 훈제생선, 치즈와 과일
등이 늘어서 있었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저장식으로 늘 먹던 것과 다르지 않은 식단이었다.
율리아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열기를 애써 외면했다. 바엘은 아무런 생각도 없을 게 분명한데 괜스레 혼자
의식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보다 더 쓰레기였다고."
"음……."
그녀의 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바엘은 창밖으로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바엘의 둥지는 악마성에서도
가장 높고 탁 트인 곳에 위치했다. 그래서 본성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사절단의 숙소도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
일순 바엘의 안광이 무섭도록 낮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마주한 그는 평소처럼 무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택 사항이지."
"필수는 아니란 뜻이군요. 예전에 키마리스 님께 악마성에 주방이 있긴 하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지금 먹고 싶은 게 있긴 해.
"마왕님이요?"
턱을 괸 바엘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여 목덜미를 주물렀다. 완전히 드러난 상반신, 탄탄하게 융기한
근육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확연히 도드라졌다. 골격이 워낙 크고 선명해서인지 움직임 하나하나가
맹수처럼 사납고도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눈으로 율리아를 훑으며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율리아는 그의 눈앞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바엘의
시선이 얇은 네글리제 아래를 고스란히 들여다보는 듯해서.
"읏,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바엘이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복근이 크게 꿈틀대고, 팽팽하게 당겨진 하의 너머로 둔중한
그림자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율리아는 숨을 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들킬까 봐 신경 쓰였다. 그녀는
결국 점점 달아오르는 공기를 참지 못했다.
율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바엘의 시선이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뒤따랐다. 그녀는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신경이 잔뜩 곤두섰기 때문일까. 엉덩이 밑으로 새하얀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생생하게 느껴졌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율리아는 바엘을 자리에 얌전히 눕히기 위해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다 끌어왔다.
"어서요."
인계에서 내려온 사절단 탓에 어차피 둥지 밖을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바엘이 깊게
잠들어 주길 바랐다. 평소처럼 이박 삼일 눈도 안 떠 주면 더욱 좋고 말이다.
바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율리아의 반대편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손을 잡아끌자
마지못한 듯 누우면서도 눈빛이 미묘하게 풀어졌다. 비록 남들과 비교하면 표정이 없는 수준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율리아의 눈엔 그가 느끼는 안정감이 보였다.
오직 자신의 곁에서 마왕이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뿌듯하게 느껴졌다.
"답답한가?"
'어떡하지. 이건 조금…….'
72 화
"안달 났군."
잠든 줄 알았던 바엘의 반응에 율리아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켰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른 채, 그녀가 숨어 버린다는 말을 중얼거렸을 때 바엘의 눈빛이 얼마나 위험하게
번뜩였는지도 모른 채.
"그럼 안 되지."
"으읏."
"……."
바엘의 시선이 그녀를 위아래로 느긋하게 훑었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마치 배부른 맹수를 연상시켰다.
그런 그의 눈에 율리아는 구석에 몰린 희고 작은 토끼일 뿐이었다.
다행히 맹수는 토끼의 재롱을 어디 구경이나 할 심산인 모양이었다. 찰나의 유예를 얻은 율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율리아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렇다고 당장 말을 멈추면 뒷일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그녀는
구명줄을 붙잡듯 시트를 움켜쥐었다.
편안하게 이완된 눈빛으로 율리아를 올려다보던 바엘의 얼굴이 일순 얼어붙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정말 미미한 차이일 뿐이었기에,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율리아는 생각 없이 말을 이었다.
"……."
그녀 나름대로는 커다란 발견이라고 생각했다. 바엘도 그들처럼 놀라는 기색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율리아의 커다란 눈이 기대감을 담아 빛난 찰나였다.
"네?"
율리아는 나름대로 용기를 다해 말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비웃듯 바엘의 입꼬리는 냉소적으로 비틀렸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율리아의 눈 뒤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제껏 그에게 느꼈던 말 못 할 친밀감은 정말로 자신 혼자만의 감정이었나 싶어서. 그가 변했다고 생각한
건 자신의 어리석은 착각일 뿐이고, 자신은 여전히 그가 기분 내키는 대로 막 다뤄도 되는 싸구려 인형일
뿐인가 싶어서.
"제가 없으면 마왕님의 염원은 누가 무슨 수로 이뤄 주죠? 어떻게 마정석의 봉인을 풀고 마신의 거대한
힘을 삼킬 건가요?"
자괴감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혼자 멋대로 기대해 놓고 실망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았고, 그것을 핑계로
바엘을 상처 입히려고 하는 자기 자신이 징그러운 괴물처럼 느껴졌다.
"흣!"
화악, 심장이 터질 듯 조여드는 고통에 율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픔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지만
돌처럼 굳어 버린 사지는 그녀의 바람을 무시하고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손가락 하나 들 수 없을
정도로 모든 힘을 빼앗겨 버렸다.
침대 위에 힘없이 쓰러진 율리아는 매몰차게 침실을 나서는 바엘의 뒷모습을 울음 섞인 눈으로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아, 그 전에 나는 누구였더라?'
가슴속 깊이 사무치는 외로움이 안타까워 눈물이 나왔다. 그럼에도 선뜻 그렇지 않다고 말해 줄 수 없었다.
그건 과거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끔찍한 부유감에 몸을 내맡기던 순간, 자신이 그토록 바라왔던 게
바로 그것이었는데.
그녀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이제야 알아챈 것이다. 이건 처음부터 자신의 기억이 아니었다는 걸.
"으흑……!"
'제가 없으면 마왕님도 더는 견디시지 못하잖아요. 욕심껏 집어삼킨 거대한 마력을 주체하지 못해서 제게
기대지 않으면 잠 한번 편히 잘 수 없으면서……!'
그녀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 기이한 장소가 어디인지, 바엘은 어째서 그런 곳에 갇혀
있었던 건지, 팔다리를 끔찍하게 얽매던 그 축축한 감각의 정체는 무엇인지.
각인의 후유증 탓인지 몸에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율리아는 억지로라도 비척비척 침대를
딛고 상체를 일으켰다. 도중에 몇 번이고 몸이 무너졌지만 그때마다 자신을 보던 바엘의 시선을 떠올렸다.
73 화
* * *
고막이 찢어질 듯 거대한 천둥 번개가 쉴 새 없이 내리쳤다. 번개가 직격했는지 지평선 너머에 커다란
섬광이 일더니 곧이어 악마성이 쿠르릉 진동했다.
"흑!"
비틀비틀 걸어가는 율리아를 지나가던 악마들이 기이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행색은 평소와 달리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늘 차분하던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파르라니 얇은 잠옷도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각인이 새겨진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어째서 갑자기 그런 환상을 본 걸까, 엉망이 된 머릿속을
헤집던 율리아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
심장을 속박하는 붉은 각인은 바엘과 자신의 연결 고리였다. 그리고 자신들은 각인의 부작용으로 인해
때때로 서로의 감각을 공유하곤 했다. 살갗이 닿기만 해도 참을 수 없이 신열이 오르고 가슴이 저릿저릿
요동쳤다.
자신은 그에게 동화되었다. 바엘이 심장의 각인을 발동시켰을 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과거의 잔상이
자신의 기억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래서 환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었던 거다.
"허억, 헉……."
어느새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복도를 뛰다시피 가로지르던 율리아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본성의
담벼락 밑에 사람 그림자가 숨어들고 있었다.
잠에서 깬 이후로 줄곧 호수 밑바닥을 헤매던 머릿속이 그제야 조금 차분해졌다. 사절단이 머무는 외성과
이곳 본성은 거리가 제법 있었다. 실수로라도 착각하기 힘들었기에, 그들을 발견한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SYSTEM
[▷SYSTEM
[▷SYSTEM
- 보상: 특수 무기 '유성우' 획득
아주 짧게 멈췄던 시야가 다시금 빠르게 밀어닥쳤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섭게 헝클였다.
율리아는 급박하게 손을 뻗었다.
"실드!"
[▷물리 실드 Lv.1
"……!"
무언가 툭 터지는 소리와 함께 얇은 잠옷 너머 거칠고 차가운 흙바닥이 피부에 와 닿았다. 실드가 보호해
준 덕분에 직접적인 타격은 없었지만 높은 곳에서 추락하며 느꼈던 공포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동그라진 충격에 콜록콜록 숨을 헐떡이는데 눈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들어왔다. 고개를 드니 익숙한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모두 제국의 평화를 위한 일입니다. 계속 저항한다면 억지로라도 집행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폐하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식을 지하에 떨어뜨린 아버지의 심정이 오죽하겠느냐마는,
매일 깊이 근심하며 밤잠을 설치십니다. 에스델 전하께서도 물론 그렇고요."
황제에게 있어 자신은 수치스러운 하룻밤 실수의 증거였다. 차마 직접 죽이지 못해 폐궁에 가두고 알아서
죽기를 기다렸다. 자신을 향한 에스델의 증오는 새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태어난 건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그들의 증오가 아프고 시렸지만 율리아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렇다고 용서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자신이 사라졌으니 그들이 과거는 돌아보지 말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럼 자신도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내는 율리아의 표정에 떠오른 불신을 읽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다만 흥미롭다는 듯
눈매를 좁힐 뿐이었다.
지독한 현기증이 일었다. 율리아는 미미하게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루슬란의 맹렬한 시선을 피했다.
지금은 그가 꾸며 낸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바엘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거래입니까?"
나름대로 강하게 나갔건만 사내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되레 우악스러운 손길로 율리아의 맨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율리아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하지만 마왕을 마신으로 만들 진짜 열쇠는 당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재주로 악마들을 속였는지는
모르지만."
율리아는 태연한 척 루슬란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숨소리만큼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뚫어져라 살피던 사내의 눈매에 이채가 돌았다. 눈앞의 멍청한 여자는 역시나 자신의 진짜
가치를 알지 못한다. 혹시나 해서 찔러 본 것인데 제대로 짚었다.
"거짓말은 영원할 수 없어요. 당신이 새빨간 가짜라는 사실을 언젠가는 들키고 말겠죠. 그때도 마왕과
악마들이 당신을 지금처럼 대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고작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을?"
새빨간 가짜. 존재 가치도 없는 쓰레기. 날 때부터 버려진, 세상 누구도 원하지 않던 처치 곤란한 이물질.
눈치 없이 목숨만 질겨서는 왜 아직도 눈앞에서 얼쩡거리는가.
"그, 그럼 왜……."
"당신의 거짓말이 들키는 순간, 수많은 희생으로 간신히 이뤄 낸 인계의 평화는 끝납니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와 함께 지상으로 돌아간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곁에 없는데 가짜란 걸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민폐입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우리는 당신의 거짓말을 대신 수습해 주려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껏 당신이 끼어든 일마다 결과가 좋았던 적이 있었습니까?"
고개를 내젓는 율리아의 주변을 사내가 느긋하게 돌았다. 그녀를 향한 질책의 목소리가 올가미처럼 바짝
조여들었다.
"그게 무슨."
74 화
자신은 레기온이 마계에 내려온 대가로 무엇을 잃어야 했을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냥 모든
일이 끝나면 그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가 남은 생을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런 속 좋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율리아의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어 갔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남자는 만족스럽게 입매를 올렸다.
"틀렸어요……."
루슬란이 어디론가 슬쩍 눈짓하자 건물 그림자 속에서 사내 대여섯이 모습을 드러냈다. 율리아는 자신을
노리는 존재들을 알지 못한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너를 믿어 보겠다.'
율리아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생각보다 쉽게
풀리겠군, 하는 말소리가 오갔지만 율리아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
"황도 아벨딧심의 폐궁이야말로 당신에게 가장 걸맞은 거처라고, 이젠 당신도 그리 생각하시겠죠?"
"……네."
율리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는 남자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 * *
"젠장, 미쳤군."
순진한 척 웃는 낯짝이 가증스러웠다. 눈앞이 분노로 새까맣게 물들어, 파편이든 무엇이든 그냥 심장을
터트려 버려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바엘은 격노했다. 등 뒤에서 힘없이 쓰러지는 기척이 들렸지만 모두 무시한 채 정신없이 둥지를
뛰쳐나왔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또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아아, 이제야 알겠다. 이건 모두 그녀가 파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시달려 온 납득할 수
없는 모든 현상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다.
"……."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붉게 내려앉은 노을이 침실에 길게 드리우고 미적지근한 온기가 피부를 감싼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대신 침대 가운데가 작게 솟아 있었다. 여자는 저 안에 바짝 웅크리고 누워
잠들어 있으리라.
동그랗게 융기한 이불 앞에서 바엘은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처음부터 주저 따윈
없었다는 듯, 그는 우악스럽게 이불을 젖혔다.
"하."
침대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가 없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듯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삽시간에 몰려든 분노로 흰자위가 벌겋게 터져 물들었다.
바엘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갔다. 그의 붉은 안광은 사냥감을 쫓는 맹수처럼 위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대기에 녹아든 마력을 샅샅이 훑었다. 수많은 파동이 복잡하게 얽혀 들었지만 그중에서 피 같은
절규를 내지르는 단 하나의 힘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악마성의 모두가 경외와 두려움으로 숨죽인 가운데, 바엘이 도달한 곳은 인간과의 협상이 진행 중인
외성이었다.
때마침 안에서 나오던 바르바토스가 바엘을 발견하곤 다급히 달려와 부복했다. 마왕의 최측근이라는 8
위의 최고위급 마족이 몸소 경의를 표하는 상대였다. 더 듣지 않아도 눈앞에 선 악마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틀렸다. 마계의 지배자인 그는 실제로 눈앞에 있었다. 압도하는 두려움을 깨닫기도 전에
기사의 무릎이 하나씩 꿇렸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그들은 채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지는 기사들을 뒤로하고 바엘은 외궁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바엘은 두꺼운 벽 너머에서 완벽에 가까운 마력 저항을 느꼈다. 역시 이곳에 있었군, 하고 중얼거린
바엘의 입술이 비릿하게 휘었다.
"커헉!"
75 화
끝이 아득할 정도로 넓은 실내에 수많은 마족과 인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엘은 원하던 여자의
모습을 단번에 찾아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파리한 안색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녀의 나지막한 한 마디에 실내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상석에 앉아 있던 아가레스와 레라지에가 경악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큭!"
하지만 그의 의기양양한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바엘이 루슬란의 손목을 움켜쥔
탓이었다.
아가레스를 비롯한 마족들이 일제히 무릎 꿇고 눈앞의 악마를 향해 경배를 올렸다. 그의 정체가 확실해진
순간, 루슬란은 율리아를 움켜쥔 손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더 할 말은?"
왕의 여자를 노리던 도전자가 꼬리를 내렸다.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다시금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바엘은 날뛰는 마력을 주체하지 못했다. 뇌관이 모조리 타버릴 것 같은 맹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커맨드, 거점."
하지만 작은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든 순간, 바엘의 시선은 어느새 눈앞의 여자에게로 옮겨졌다. 능력을
사용했는지 양손에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흔들리던 실내가 눈 깜짝할 새 잠잠해졌다.
"아……."
눈동자의 초점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가느다란 몸이 위태롭게 휘청였지만 바엘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율리아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밖으로 향하는 그를 감히 누구도 막지 못했다.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아니, 이건 배신감 따위가 아니다. 애초부터 간악한 태에서 난 파편의 말은 믿지
않았다. 이건 주인을 기만한 종에 대한 분노였다.
"닥쳐."
빠르게 걷는 그의 뒤에서 율리아는 거의 짐승처럼 끌려가다시피 했다. 등 뒤에서 가냘픈 신음이 들렸지만
까맣게 암전된 바엘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침실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방을 장식한 육중하고 거대한 가구들이 모조리 뒤집혀
나뒹굴었다. 바엘은 율리아를 침대 위에 내던졌다.
"그래, 재미있었나."
"……."
"상처?"
바엘은 시선을 내렸다. 조금만 힘주어 눌러도 단번에 부러질 듯 마르고 가녀린 목이 눈앞에 있었다.
"……."
"한때 네 입으로 지껄였었지. 나를 마신으로 만들어, 그 방법이 무엇이든 달갑고 기쁘게 받아들이겠다고.
대가가 무엇이라 하더라도."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로 메말라 버린 사고의 바닥이 드러났다. 과거의 편린 몇 조각만이 그의 눈을 가렸다.
마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 하얗게 질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율리아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다.
실로 미묘한 기분이었다. 참담하고 시린 호수의 물이 발밑부터 차근차근 적시며 타고 올랐다. 분노도
아니고 그렇다고 희열은 더더욱 아닌, 여태껏 느껴 본 적 없는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하지만 죽일 수도 없지."
붉은 월광이 가녀린 여체를 속속들이 훑고 지나갔다. 또다시 목이 탔다. 지독한 열망과 충동이 그를
부채질했다. 마족이란 게 원래 본능에 쉽게 휩쓸리는 이기적이고 흉포한 존재들이다. 창세자부터
그러할진대 자식들이라고 다를까.
시선을 들어 보랏빛 마정석을 짧게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율리아의 팔뚝을 붙들어 강제로 침대 헤드까지
끌어올렸다.
철컹, 둔탁한 사슬 소리가 서늘한 밤공기를 울렸다. 바엘은 그녀의 양손을 머리 위로 결박해 사슬로
묶었다. 그것의 반대편 끝은 벽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어리석은 열쇠는 그제야 자신이 미래를 예측한
모양이었다.
"마왕님?"
"이, 이것 좀 놔주세요."
철컹철컹 둔탁한 쇳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고작 밧줄 굵기의 사슬 하나 어쩌지 못해서 사색이 된 열쇠의
모습이 무척 거슬렸다. 그녀는 사냥꾼의 덫에 걸려 죽어 가는 연약하고 순결한 사슴 같았다.
열쇠가 도망친다.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바엘은
숨통이 조여들고 손끝이 차게 식었다. 몸 안에 맥박 치는 피의 흐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둑이 터지듯 툭, 떨어지는 여자의 눈물과 깊은 속내를 털어놓듯 속삭이는
혐오스럽다는 한 마디가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바엘은 화를 누르듯 말을 멈췄다. 하지만 열쇠의 푹 젖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등골이 선뜻하게
전율했다. 참을 수 없이 초조해 견딜 수 없었다.
코앞까지 들이밀어진 맹수의 이빨이 두려웠던 걸까. 그녀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몸부림치며
눈물을 떨궜다. 금속이 찰캉거리는 소리와 거칠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폐허 같은 실내를 울렸다.
"흐윽, 싫어……."
바엘이 율리아의 치맛자락을 들추려 짧게 시선을 내린 찰나였다. 여자의 마르고 둥그스름한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달빛에 비춰 붉게 물든 살결에 이질적인 푸른빛이 감돌았다.
76 화
바엘은 아까 보았던 인간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율리아 브에스드라가 제 소유인 양 어깨를 움켜쥐고
조종하려 들던 사내.
스쳐지나간 상념은 찰나였지만 바엘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들끓었다. 가느다란 허벅지를 움켜쥔
그의 악력이 더욱 거세어졌다. 사내의 밑에 깔린 몸이 움찔 튀었다.
"흑!"
"가만 있어."
바엘은 저항하며 발버둥치는 다리를 무릎으로 간단히 억누르고 리본으로 매듭지어진 가슴 역시 단번에
뜯어냈다. 툭 불거져 나온 새하얀 유방이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바엘의 욕망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바엘은 머리 위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를 무시한 채 선단의 돌기를 빨아올렸다. 파르르 떠는 허벅지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안쪽이 속속들이 보이도록 활짝 펼쳤다.
그의 중지가 말랑한 점막 내부를 파고들었다. 아니, 파고들려고 했다. 하지만 율리아의 안쪽은 평소와
달리 메말라 있었다. 늘 환희에 차 그를 받아들이던 것과 달리, 손가락 하나조차 받아들이기 버거워 했다.
"무서워. 제발 살려 줘, 바엘……."
바엘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여전히 욕망하고 있었다. 산산이 조각나 버린 인내심은 목구멍
안쪽에 지독하게 들러붙은 갈증을 풀기 전까지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해갈되지 않은 열기가 그의
몸을 들쑤셨다.
"젠장!"
굴종을 가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눈이었다. 그 인간 사내를 내버려
뒀다간 또다시 자신의 것에 손을 뻗어 오리라.
"허락할 수 없어."
* * *
[▷SYSTEM
상태 이상 '세뇌'를 종료합니다.]
사위가 온통 새까만 그림자로만 보였다. 창밖의 마정석이 아니었다면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기억을 되짚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성에서 떨어지면서 대량의 체력을 사용한 탓일까. 드문드문 끊기던 기억은 회담장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려
두 번째 스킬을 쓴 시점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그때 상태 이상에 대한 창이 떴지만 다급한 상황과 몽롱한 정신이 겹치며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철컹.
"이, 이게 뭐지?"
그녀가 있는 곳은 역시나 바엘의 침실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가 곧장 적응하지 못했던 이유는 실내가 온통
난장판이기 때문이었다.
성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밀었을 땐 꼼짝도 하지 않던 거대하고 육중한 가구들이 어린아이의
장난감처럼 뒤집혀 나뒹굴었고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조차 어딘가 부러졌는지 비스듬히 기울었다. 심지어
헤드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커맨드 시스템."
[▷SYSTEM
5th Episode. '지상에서 온 사자' 진행 중]
[▷SYSTEM
- 보상: 특수 무기 '유성우' 획득
손이 결박되었어도 커맨드를 쓸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율리아는 시스템 내용을 찬찬히 훑었다.
[▷저항 강탈 Lv.2
플레이어가 지정한 대상에 일정 시간 항마력의 60%를 강탈한다. 잔여 체력의 60%를 소모한다. SP 60]
[▷물리 실드 Lv.2
각각의 레벨을 한 단계씩 올리고 난 뒤에, 율리아는 다시 진행도 창으로 돌아와 이번 에피소드의 보상을
확인했다. 특수 무기는 플레이어 성향에 따라 지급되는 종류가 달랐는데, 유성우는 역시나 처음 보는
것이었다.
호수 밑바닥에 수장된 꿈에서 막 깨어났을 땐 바엘이 느끼는 감정에 휩쓸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독한 고독감과 우울감이 온 정신을 지배했다. 그런 상태로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과거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상대까지 마주쳤다.
철컹, 철컹!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율리아는 온 힘을 다해 사슬을 당겼다. 살갗이 두툼한 이음매 사이에 걸려
찢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몸부림쳤다.
"헉, 헉……."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친 율리아는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커맨드 시스템."
[▷레라지에의 갚을 기회
[▷명령어를 입력하시오.]
율리아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찰나였다. 바로 머리 위에서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몹시도 놀란 듯한 외침이 들렸다. 한동안 충격에 빠져 허우적대던 레라지에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인영을 발견하고서야 멋쩍은 듯 낮게 기침했다.
"큼."
"……."
"그런데 넌 왜 벗고 있냐?"
77 화
탁탁 가벼운 발소리가 악마성의 웅장한 회랑을 울렸다. 다급히 달려 나가는 율리아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창밖에서 비친 달그림자가 성 바닥에 길게 너울거렸다.
'마왕님이 왜…….'
감금 엔딩이 두렵기 이전에, 수많은 목숨에 대한 죄책감을 끌어안은 채 멀쩡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기에 자신은 너무나 나약한 인간이었다.
'난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착한 인간이 아니야. 나는 그냥…… 이제 그만 행복해지고 싶어.'
콰앙,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성이 마구 흔들렸다. 정신없이 달리던 율리아는 중심을 잃은 채
바닥에 저만치 나동그라졌다.
"콜록, 헉!"
비틀비틀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창틀을 붙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목에서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엄습했지만 이를 악 물고 발을 내디뎠다. 이윽고 광야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다급히 뛰어나가려던 율리아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넘어지면서 스치듯 눈에 들어온 발목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율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돌바닥을 짚은 순간, 사내 대여섯 명 정도의 묵직한 발소리가 적막한 복도를
울렸다. 철제의 중갑 신발이 율리아의 가느다란 손가락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조금만 수틀려도 손가락을
분지를 수 있을 듯한 그런 거리에.
"엘고스?"
"……."
머리 위에서 칼날이 번뜩였다. 수직으로 곧게 세워진 그것이 율리아의 숨통으로 떨어지려는 찰나였다.
고막을 긁어내리는 섬뜩한 목소리에 그녀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복도 끝에서 키마리스가 눈을 부릅뜬 채
서 있었다. 적막에 잠긴 공간을 조용히 훑던 그의 눈알이 길게 찢어졌다.
키마리스의 육체를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감쌌다. 그 모습을 보던 엘고스의 기사들에게서 경악의 신음성이
터졌다.
"설마, 후작 키마리스……!"
"으흑, 아……."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듯 키마리스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체가 변이하기
시작했다. 짧게 구불거리던 남빛의 머리카락이 흑마 갈기처럼 길어지고, 셔츠가 팽팽하게 부풀며 근육이
거칠게 융기했다.
한 생물이 다른 존재로 변이하는 과정은 너무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생살을 찢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육신이 고개를 들이민다. 끔찍하게 터져 나오는 피와 살을 신생이 환희의 절정 속에 집어삼킨다. 옛
육체가 산채로 뜯어 먹히는 것이다.
일제히 무기를 빼어 든 사내들이 율리아를 겨눴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율리아는
키마리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떠밀려 넘어질 듯한 풍압이 복도를 휩쓸었다. 방금까지 키마리스가 서 있던 곳엔 변이를 끝마친 거대한
마수가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는 키마리스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럽고 상냥했다. 목숨이 오가는 이런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키마리스 님, 안 돼요!"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린 찰나, 율리아의 허리가 강한 힘으로 낚아채였다. 그녀가 붙들려 있던 자리엔
어느새 짙은 피 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율리아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걱정하는 건 그들이 아니라고, 당신이야말로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두려움에 휩쓸린 혀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주, 죽였나요?"
"……."
"설마 정말 죽였나요?"
낮은 말발굽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율리아를 제대로 안아 든 키마리스가 걸음을 돌리는 소리였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뒤돌아보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이 율리아의 뒤통수를 지그시 눌러 제
가슴팍에 기대게 했다.
투구 속 새까만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피가……."
"그보다 율리아가 빠져나갈 루트를 마련해 뒀습니다. 바엘의 시선이 미끼들에게 향한 지금이 기회입니다.
인간 소드마스터와 함께 서둘러 도망치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키마리스는 걸음을 최대한 조심했다. 그가 발굽을 크게 내디딜 때마다 골절된 발목에 충격을 받은
율리아가 사색이 된다는 걸 알아챈 탓이었다.
78 화
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부러진 발목에선 여전히 끔찍한 통증이 타고 올랐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죽음의 협곡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인계로 빠져나가기엔 가장
용이한 곳입니다."
"쓰레기 같은 놈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키마리스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가진 스킬을 전부 떠올려 봐도, 시스템
기능 하나하나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가 놔주지 않는다면 도망칠 수 없었다.
"……."
"고개를 들어보십시오."
자욱한 모래바람 사이로 희미한 인영이 그림자처럼 비쳤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를 푸른 돔 형태의 구체가
감싸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것이 마나라는 걸 알아보았다. 하지만 레기온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의 마나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선명한 빛을 뿜어냈다. 모래바람 따위에 가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구체는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롭게 점멸하고 있었다.
율리아의 뜻을 알아챈 키마리스는 마지못해 그녀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팔로 단단히
지탱한 채로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게다가 키마리스의 얼굴은 두꺼운 투구에 가려져 입술과 턱 부분밖에 보이지 않았음에도, 율리아는 지금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고마워요."
그녀는 키마리스가 붙잡을 틈도 없이 마법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동시에 외부 시야가 차단되며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악몽의 창
자루를 바짝 움켜쥔 율리아는 창날을 지팡이처럼 짚고 다리를 질질 끌었다. 부러진 발목에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통증이 퍼졌지만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율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바닥은 붉고 주변은 온통 희뿌연 벽으로 가로막혔다. 무턱대고 움직이기만 해선
소용없을 게 분명해 보였다.
그녀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동안 바엘의 눈동자가 그녀의 발목으로 향했다. 멀리서 보아도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억지로 붙잡아 꺾어 놓기라도 한 듯 기이한 방향으로 비틀려 있었다.
제게 다가오는 여자를 보며, 바엘의 뇌리에 시끄러운 경종이 울렸다. 저 울음 섞인 목소리에 현혹되면 안
된다. 상대가 누구든 쉽게 마음을 내어주는 계집이다. 제 약함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인간이다.
율리아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평소의 바엘과 달랐다. 그는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인간들과 내통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바엘의 시선이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는 게 느껴졌다. 사람들을 살릴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잡았다!"
"당장 우리를 해방시키시오! 그렇지 않는다면 당신이 총애하는 여인을 가장 끔찍하게 죽이겠소!"
사내들의 다급한 외침 속에서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발악했다. 율리아의 손목을 간신히 결박한 기사가
뒤이어 그녀의 허리를 억세게 끌어안았다.
79 화
인질의 반항이 생각보다 거셌는지 주변 사내들 두엇이 더 나서서 그녀를 붙잡았다. 바엘을 자극하려는
목적이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이러지, 흑, 안 돼요……!"
실내복의 왼팔이 완전히 찢어지며 율리아의 새하얀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
사이에서 일순 무거운 정적이 흘렀지만 그렇다고 행동까지 멈추진 않았다. 지금은 고위 귀족으로서의
긍지보다 생존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젠장, 잡을 수가 없어!"
무언가를 다급히 외치던 사내들의 목소리가 일순 기이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들의 시선은 율리아의
가슴에 새겨진 붉은 각인으로 향해 있었다.
살갗을 찌르는 적의가 두렵고 수치스러웠다. 가슴을 드러낸 채 끅끅 눈물만 떨어뜨리던 율리아는 구속이
약해진 틈을 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마왕님? 어째서……."
바엘이 가볍게 손을 내젓자 칼날 형태의 얼음 덩어리가 인간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떨어져 내렸다. 기사들은
바엘의 의도대로 율리아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협상 카드를 이대로 놓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잔뜩 움츠린 율리아의 머리 위로 다급한 고성이 오갔다. 마나와 마력이 부딪히며 전기가 터지는 듯한
폭발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한편, 율리아는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바엘의 공격은 그쳤지만 방금까지 머리 위로 쏟아지던 예리한
칼날이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그가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바엘과 정사를 나누는 일도 조금도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목가에 와 닿는 들뜬 숨과,
오직 자신에게만 깊게 몰입하는 듯한 그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가슴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그 눈은 옹이구멍만도 못하군. 마왕은 당신을 공격했습니다. 당신을 노리던 그 수많은 칼날을 벌써
잊었냐는 말입니다."
"당신은 마족들에게도 버림받은 거야. 이젠 마왕조차 당신을 원하지 않는데, 이번엔 누구에게 빌붙을
셈이지?"
"……."
"멍청하게도 매번 걸려드는군."
[▷SYSTEM
[▷SYSTEM
[▷SYSTEM
[▷ERROR
율리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루슬란에게 붙들린 순간부터 수많은 시스템 창이 눈앞에 밀려들었다.
뇌를 끄집어내 정보를 강제로 주입시키려는 것처럼 그녀를 향한 루슬란의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더러운 계집. 죽어 마땅한 부정한 존재. 불쌍한 척, 가련한 척 하며 주변 동정을 갉아먹고 사는 기생충.
주제도 모르고 황족의 이름을 탐한 죄악의 증거.'
시스템 창이 우후죽순 떠오르고 루슬란의 증오 섞인 목소리가 뇌리를 악몽처럼 울리던 와중, 그녀의
시야가 반전되며 새하얀 눈밭이 펼쳐졌다.
날 선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정신을 잃은 소년의 발치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그어지던 4 년 전 겨울의 풍경.
[▷SYSTEM
상태 이상 '세뇌' 완전 파훼됩니다.]
[▷SYSTEM
율리아의 흐릿한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눈을 부릅뜬 그녀가 루슬란의 손목을 역으로 움켜쥐었다.
"당신인가요?"
"에스델이 시켰나요? 나에게 가짜 편지를 보내고 아직 어렸던 레기온을 가장 치열한 최전선으로 보내버린
것. 전부 에스델의 짓이었나요?"
순간 비릿한 피 냄새가 율리아의 후각에 파고들었다. 서걱, 몸 안에서 무언가 꿰뚫리고 찢어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명치 부근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흐……."
파지직, 파직!
"루슬란 경, 이게 무슨 짓이오!"
"당신 지금 미쳤어?!"
"화내지 말아요……."
"그만."
율리아가 숨을 헐떡일 때마다 분수처럼 솟은 피가 어느새 그녀의 주변에 질척한 웅덩이를 이뤘다. 붉은
마법진이 그녀의 피를 정신없이 집어삼켰지만 그럼에도 출혈 속도를 따라가진 못했다. 이대로라면 그녀는
몇 분도 안 가서 죽을 것이다.
지상에서 온 사자들은 절망했다. 열쇠가 죽는다면 다음은 틀림없이 자신들의 차례였다. 시체도 무사히
남기지 못할 것이다. 기사로서 가장 불명예한 죽음이었다.
"입 벌려."
"으응……."
"흐읏."
마왕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탄탄한 등 근육이 율리아의 움직임에 따라 깊게 굴곡지며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지금의 그는 지옥의 왕이 아닌, 연인에게 정염을 퍼붓는 하나의 사내일 뿐이었다. 누구라도
그것을 명백히 느낄 수 있었다.
80 화
"하아, 상처는?"
"이제 괜찮아요……."
"아닌 것 같은데."
"이제 다시 절 믿어 주실 건가요?"
"하는 거 봐서."
말과는 달리 바엘의 손은 여전히 율리아의 복부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행동을 자각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바꿔 생각하면 무의식중에도 그녀의 상태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대로 마법진이 해제되고 장벽이 사라지면 인계에서 온 사자들은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럼 모두
이전처럼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뺨이 모조리 불타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자신을
보는 바엘의 표정이 얼마나 집요한지도 모른 채, 율리아는 부끄러움을 참듯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루슬란이 율리아를 겨누며 창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날카로운 창끝에선 자욱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자칫 스치기만 해도 비참한 결말을 맞을 거란 걸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저항 거점 Lv.2
플레이어가 지정한 좌표에 일정 시간 항마력을 부여할 수 있다. 잔여 체력의 40%를 소모한다. SP 40]
[▷SYSTEM
[▷SYSTEM
반면 바엘의 얼굴은 더욱 차갑게 굳었다. 율리아가 마력을 쓸 때마다 대량의 마나가 소모되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손에 닿는 그녀의 생명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제발……."
아까보다 확연히 가늘어진 숨소리가 바엘의 신경을 긁었다. 그가 화를 억누르듯 한 마디, 한 마디를 낮게
토해 냈다.
바엘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무척이나 강한 존재이지만, 그래도 자신과 같은
나약한 존재가 느끼는 두려움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의 목숨을 빼앗고도 멀쩡하게 살아갈 정도로 자신은 단단하지 못했다. 실수로 누구 하나를
다치게만 만들어도 마음이 무겁고 죄스러운데, 이 수많은 목숨이 고작 자신 때문에 스러진다면 평생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숨 쉬는 일조차 지옥이 될 것이다.
바엘은 제게 매달린 율리아의 모습을 집요하게 훑었다. 창백해진 뺨, 초조한 듯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
우물쭈물 닿아 오는 손길.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망설임 없이 선명하다. 기만하는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마침 잘 되었군."
"네?"
"으아악, 으아아아아악!!"
키마리스가 열쇠의 손에 저것을 쥐여 준 이유는 능력을 자신에게 쓰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가소롭기
이를 데 없었다.
루슬란의 비명은 바엘에 의해 눈이 가려진 율리아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녀가 불안한 듯 바엘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마왕님, 이게 무슨 소리에요?"
"……."
"마왕님!"
이대로 누군가의 목숨이 끊어지면 자신의 미래 또한 없었다. 조바심이 든 그녀가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바엘의 품에서 벗어나려던 찰나였다.
"네?"
"바엘."
"……."
그녀는 채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바엘이 짐승처럼 달려들어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동시에 사방을
에워싸던 불투명한 유막이 녹아들 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숨 쉬듯 빛나던 붉은 마법진 역시 땅 밑으로
흐릿하게 잠겨들었다.
"주군! 지상에서 열쇠의 반환 요구를 철회할 테니 사신들을 무사히 돌려보내 달라는 정식 서한이
도착했습니다. 부디 고정하십시, 아."
"예."
자리에 부복한 바르바토스는 지상의 사신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브에스드라 출신의
사내 하나가 악몽에 먹혀 미친 듯 발악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붉은 거미의 독까지 주입 당했다.
"저, 마왕님……."
[▷SYSTEM
잔여 HP 가 3% 미만입니다.]
바엘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맹독처럼 치명적이지만 온 시선을 빼앗겨 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로 오직
그녀 하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만 율리아가 '마왕님'이라고 했을 때, 무언가 아주 불만족스러운
사람처럼 미간을 구겼다.
[▷SYSTEM
[▷SYSTEM
- 특수 무기 '유성우'를 획득합니다.
[▷SYSTEM
[완료]
81 화
일으켜 앉혀진 등 뒤로 사내의 탄탄한 가슴과 복근이 와 닿았다. 근육은 깊고 선명하게 갈라져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 형태를 느낄 수 있었다. 등 뒤에서 넘어온 손이 율리아의 가슴을 움켜쥐고 거칠게
유린했다. 꼿꼿하게 선 유두를 손가락으로 마구 괴롭혔다.
"흐읏……."
"정신이 들었나?"
율리아의 귓불에 입술을 갖다 댄 바엘이 느른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들끓는 흥분으로 낮게 갈라져
있었다.
빠듯하게 다물린 입구가 차근차근 젖어 갔다. 입구를 빠르게 들락이는 살덩어리가 그녀의 성감대를
사정없이 압박했다.
"흐으, 아앙……."
동시에 다리 사이에서도 욱신거리는 열기가 밀려들었다. 축축한 살덩어리가 파고들 때마다 아랫배가
본능적으로 조여들었다. 점막에 치덕치덕 들러붙는 혀의 모양새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율리아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았던 사내가 상체를 일으키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철컥, 바지
버클 푸는 소리가 들렸다.
"도저히 안 되겠어."
"……."
아, 레기온이다.
율리아는 그에게 붙들린 허리를 마구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축 늘어진 여체의
주도권은 여전히 두 사내에게 있었다. 그녀는 의식만 살아 자신의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레기온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크윽, 아, 너무 조여!"
안 돼. 싫어, 아파……!
그때, 율리아의 고개가 뒤로 휙 돌려졌다. 율리아의 턱을 움켜쥔 바엘이 그녀의 작은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거센 조류에 휩쓸리는 것 같았다. 숨 막히는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매몰되어 갔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처음 침실에 들어선 레기온을 향해 율리아의 탐스러운 나신을 적나라하게
내보였다. 전시하듯 애무하고 입 맞췄다.
퍽, 레기온의 허리가 세차게 움직였다. 비좁은 구멍이 뿌리까지 들어찬 페니스를 사정없이 쥐어짰다.
그는 몰아치는 쾌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녀의 골반만 움켜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크윽!"
레기온의 손이 팽팽하게 벌어진 질구를 확인하듯 더듬고 문질렀다. 간혹 미끄러진 손끝이 구멍을 벌리며
들어갈 때마다 율리아는 쾌락을 견디지 못하고 자지러졌다.
"좋아서 숨넘어가는군. 너 때문에 지하에 홍수가 나겠어. 그럼 키마리스도 물을 구하러 지상까지 힘들게
다녀올 필요가 없겠지."
이번엔 바엘의 목소리였다. 방금까지 그녀의 턱을 쥐었던 손이 율리아의 엉덩이로 내려가 양쪽을 힘껏
벌렸다. 레기온의 것으로 가득 찼던 질구에 빠끔 틈이 드러났다.
바엘이 자세를 바꿈과 동시에 그녀의 아래에 뜨거운 선단이 비벼졌다. 하지만 율리아는 수치와 고통,
그리고 쾌락에 물들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
가뜩이나 빠듯했던 내벽이 찢어질 듯 팽팽하게 늘어났다. 바엘의 귀두가 그녀의 질구를 파고들고 있었다.
온몸에 벼락이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숨도 못 쉴 듯한 압박감이 밀어닥쳤다.
"과연 어떨까."
"너, 바엘!!"
"잘 느껴 봐."
"아흑!"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어 버렸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페니스에 곤두선 핏줄의 맥박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주 조금의 틈도 없이 아래가 가득 찼다. 율리아는 스스로 깨닫지 못했지만 그녀의 두려움과 아픔 너머엔
아주 작고 희미한 만족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엔 어떻게 될까 하는 기대감도.
"정말 아프기만 한지 말이야."
"아흥, 끅, 으으응."
"……."
"빌어먹을 새끼."
레기온의 푸른 눈동자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어두운 각막 너머 바엘에게 짐승처럼 범해지는 율리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푹 들어온 레기온의 페니스가 율리아의 자궁구를 거세게 때렸다. 율리아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지만
눈을 질끈 감은 그는 다시금 허리를 짓쳐 올렸다. 지독한 쾌감이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더듬더듬 밑으로 내려간 그녀의 손이 레기온의 하복부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녀의 손길은 되레 레기온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아아!!"
바엘이 율리아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며 허리를 강하게 쳐 올렸다. 묵직한 둔기가 연약한 내벽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율리아의 손이 다른 사내에게 붙들린 틈을 타 바엘은 그녀의 음핵을 중지로 마구
굴렸다.
"멈춰 주길 바라?"
"흣, 으응……. 으으응!"
"멈추는 게 싫단 말이지?"
열쇠의 질척한 밑은 윤활액이 따로 필요 없었다. 바엘은 손가락 사이에 음핵을 끼워 넣고 찌걱찌걱 소리가
나도록 비틀었다. 동시에 반대편 손으로 율리아의 식은땀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녀의 내벽은 연이은 절정으로 자지를 힘껏 씹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흥분을 티내지 않으려는
듯 딱딱하게 굳었다. 그 모습이 미치도록 유혹적이었다.
바엘은 턱밑으로 흐르는 율리아의 타액을 최후의 만찬처럼 쭉 빨아 삼켰다. 그녀는 모든 것이 달았다.
젖이라곤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유방까지 달아 죽을 것 같았다.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속삭이는 입과 달리, 바엘의 손가락은 율리아의 작은 열매를 사정없이 짓누르고
사방으로 돌려댔다.
"그만, 거기 아, 아아아!"
"아……!"
율리아의 허리를 휘감은 바엘이 그녀를 밑으로 강하게 쳐 내렸다. 가뜩이나 비좁은 구멍이 사정없이
조여들었지만 바엘은 자비 없이 그녀를 휘둘렀다.
"미안, 율리아."
붉은 달빛 아래에 흔들리는 율리아의 모습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희게 빛나는 나신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액으로 흠뻑 젖었다. 오밀조밀 작지만 또렷한 이목구비가 때때로 쾌락을 이기지 못하고 힘겹게
구겨졌다.
지금의 율리아는 성녀의 탈을 쓴 요부 같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엔 가련한 눈물이 아롱아롱 매달려
있었지만, 활짝 벌린 가랑이 안쪽은 두 사내를 한가득 품은 채 미끈한 액을 질질 흘려대고 있었다.
위아래가 너무도 달랐다.
그때, 율리아의 등허리가 갑자기 크게 휘었다. 그녀는 제 안에 파묻힌 페니스를 빼내려 헐떡헐떡 발버둥
쳤다.
"큭!"
"율리아."
바엘과 레기온도 강렬한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뜨거운 씨물이 자궁에 퍼져 나가고,
속절없이 흔들리던 그녀의 몸은 아주 짧은 정적을 맞이했다.
율리아는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쾌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경련했다. 끊임없이 절정에 오르고 또
올랐다. 너무 지독한 쾌감은 되레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무력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붉은 달빛이 엉켜든 셋의 나신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것은 이성이 거세된, 완전한 짐승의 교미였다.
82 화
[▷SYSTEM
특수 무기 '유성우'를 장비 창에 추가합니다.]
오늘은 지상에서 온 사자들이 다시 인계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악마성이 모처럼 분주해진 와중, 가까스로
혼자 있을 기회를 얻은 율리아는 삐걱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율리아의 손에 환한 이펙트가 떠오르더니 이내 형태를 바꿨다. 얼음 결정 모양의 거대한 활이 그녀의
왼손에 장착됐다. 그리고 오른쪽 손가락 끝엔 희미한 빛이 반짝였다.
"사용해 봐도 될까?"
율리아가 활시위 부근에 손가락을 올리자 화살이 메겨졌다. 나직이 숨을 고른 그녀는 창문을 살짝 열고 그
틈으로 무기를 장전했다.
그녀가 손을 놓은 찰나였다.
[▷SYSTEM
"앗!"
[▷프로즌 애로우
마력을 보유한 적 1 인에게 강력한 3 연속 공격을 쏘아 보낸다. 잔여 체력의 20%를 소모한다. SP 20]
[▷멀티 스나이핑
마력을 보유한 적 다수를 추적해 공격한다. 스탯 'SIGHT'의 영향을 받는다. 잔여 체력의 30%를
소모한다. SP 30]
'드디어 가는구나.'
"아……!"
"오셨어요?"
"……그래."
누구도 죽이지 않고 지상으로 살려서 돌려보내겠다는 약속을 지켜 주었다. 그런 바엘의 앞에서 꼴사납게
떠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다.
율리아는 자신을 말없이 끌어당기는 그의 커다란 품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댔다. 그러곤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바엘
그녀의 의문을 해소시켜 주려는 듯 명령어를 넣지도 않았는데 눈앞의 시스템 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그것이 멈춘 건 히든 스탯의 특정 항목이었다.
서쪽 땅에서 보았을 때 고작 80 에 불과하던 마성이 이렇게나 올랐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히든 스탯은 플레이어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했다. 하지만 플레이 과정에 따라 임의로
증감될 수 있다고, 시스템은 그렇게 말했다.
"서쪽의 마수정이 모조리 사라졌으니 힘의 균열로 말미암아 마정석의 폭주가 시작되고 말 거야. 이제
어쩌면 좋을까……."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레벤나의 침실엔 싸늘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다만 창밖을 노려보는 그녀의 안광만이
형형하게 빛날 뿐이었다.
07. 이변의 징조
"전하, 부디 고정하십시오!"
올해로 열여덟 성인이 된 에스델 브에스드라는 난산으로 세상을 뜬 황후를 쏙 빼닮은, 제국의 누구보다도
완벽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모든 행실이 자로 잰 듯 완벽하고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위로는 아버지인 황제를 극진히 섬기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에게 엄하면서도 자비로웠다.
제국의 모두가 에스델을 사랑하고 그녀의 뛰어남을 찬양했다. 그런 황녀를 섬기는 일은 아랫사람으로서 큰
자부심이자 기쁨이었다.
"……."
"혹 루슬란 경이 전하를 노엽게 하였습니까? 지하에서 귀환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그런…
…."
"예!"
시녀를 내려다보는 에스델의 표정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침실의 모두가 엎드려 있던 터라 그것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슴푸레한 새벽. 사람들이 입궁하기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시녀의 눈앞에 연분홍빛 도는 백금발이 탐스럽게 떨어져 내렸다. 놀라서 퍼뜩
고개를 든 영애의 눈앞에 에스델의 얼굴이 들어왔다. 고작 시녀 하나를 위해 제국의 후계자가 몸을 낮춘
것이다.
그녀는 감격했다. 그리하여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에스델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말았다.
"끅……!"
단번에 동맥이 끊어졌는지 시녀의 피가 분수처럼 흘러넘쳤다. 에스델은 옆에서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다른 시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저 죽은 이보다 눈치는 빨랐던지 그녀가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끅, 도, 도와……."
피 웅덩이 속에서 간헐적으로 경련하던 시녀가 살려달란 듯 여인의 발목에 매달려 왔다. 목의 살점이
너덜너덜 떨어져서는 움직일 때마다 대량의 피가 울컥 쏟아졌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쨍그랑!
83 화
"이름이 뭐지?"
"그래, 내가 너를 기억하겠다."
벨라에게 손등을 허락한 에스델은 이내 시체의 머리맡에 양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언제 웃었냐는 듯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죽은 시녀의 얼굴을 하릴없이 쓸어내렸다.
가장 충실한 개였던 루슬란을 잃었다. 루슬란을 그리 만든 범인은 미천한 창녀의 딸, 사사건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바로 그 계집. 자신의 명예를 갉아먹고 그 외의 모든 것을 빼앗아야 속이 편할
혐오스러운 이복 자매.
* * *
같은 시간, 마왕성의 커다란 침대에 악마 둘과 사람 하나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자리도 넓건만 악마들은
가운데에 율리아를 끼워 넣고선 서로를 견제하듯 신경질적으로 투닥거렸다.
'조금?'
'……마, 많이.'
"흥."
레벤나를 저격했건만 사이에 얌전히 끼어서 눈만 깜빡이던 율리아가 대미지를 입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
올망올망 설움이 들어찼다. 아닌 척 낮게 심호흡했지만 그럴수록 차오르는 민망함에 얼굴만 발갛게
달아올랐다.
"제가 괜히 폐를 끼친 것 같아서……."
"……."
"뭐?! 그런 법이 어딨어!"
"여기 있단다."
"앗……!"
"너 미쳤니?!"
율리아는 퍼뜩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거대 악어가 왜인지 모르게 입맛을 다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겠지.'
허공을 응시하던 율리아는 다시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악어는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해사하게 눈매를
휘었다. 그녀를 절대 입 안에 넣지 않겠다고 호소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미 늦었다.
"이렇게 막 나가면 나도 더는 못 참아! 너 사실은 율리아를 멋대로 구슬려서 ***하고 **하면서 ****
하려고 했잖아?! 그냥 내버려 뒀으면 지금쯤 무슨 꼴이 났을지 눈에 훤해!"
"제, 제가요?!"
그녀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찰나, 머리 위에서 쩌렁쩌렁 울리던 고함이 멈췄다. 눈 깜짝할 새 시선을
맞춘 두 악마가 율리아에게 달려들었다.
"작은 열쇠야!"
"위험해……!"
84 화
쿠르릉, 악마성이 요동쳤다. 단순한 진동 수준이 아니라 성 전체가 위아래로 요동치고 뒤틀렸다.
놀이기구를 타도 이보단 나을 것 같았다.
"천장이 무너지잖아?!"
"무, 무슨 일이에요?"
"꺅!"
아가레스의 설명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침실의 한 면을 가득 메운 거대한 창틀이 이격을 버티지 못하고
반으로 쪼개진 것이다. 묵직한 유리가 와장창 폭발했다.
"커맨드, 전이!"
[▷저항 전이 Lv.2
"잘했어, 작은 열쇠야."
"네!"
가벼운 실내복 차림인 그의 머리카락은 마치 다급히 날아온 사람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언제나 조각같이
무결하던 눈동자에 깊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의 수려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긴장한 듯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바엘……."
"이리 와."
"왜 그래요?"
그녀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몸을 돌리자, 무슨 오해를 했는지 바엘의 얼굴이 단번에 사나워졌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 전에 파이몬이 파닥파닥 돌진하다시피 날아들었다.
목에 매달려 오는 아이를 끌어안은 채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맞은편에 선 레기온을 똑바로 쳐다볼
낯이 없었다.
'미쳤어. 정말 미쳤어.'
"주군, 탑에 다녀오셨습니까."
율리아는 모처럼 어색한 침묵을 깨 준 두 형제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바엘의
답을 기다리는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바엘
[▷바엘
그녀를 천천히 훑어 내리는 시선은 온갖 질척한 갈등으로 뒤얽혀 있어서, 율리아는 범 앞에 몰린 토끼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율리아는 도망치듯 시야 창을 꺼버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악마들은 각자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바엘이 마계의 왕으로 군림하기 전, 그는 북쪽에 존재하던 유일한 마수정인 죽음의 호수를 완전 파괴했다.
이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지하의 균형은 인간 소드마스터 레기온이 서쪽의 두 마수정을 격파하며
무너졌다.
"……."
레벤나의 날카로운 동공이 탑 최상층에서 점멸하는 마정석으로 향했다. 복도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지만 율리아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자신을 응시하는 바엘의 시선만이 애달팠다.
* * *
그날 새벽, 복도에서의 이야기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지옥의 변방을 지키던 72 악마의 사역마가
일제히 악마성으로 몰려든 탓이었다.
마계 곳곳에 이상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어떤 곳은 강력한 지진으로 바닥이 갈라지며 시뻘건 내핵이
드러났고, 또 다른 곳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온 빛이 그 지역의 모든 하급 악마를 태워 죽였다고 했다.
지역마다 발생한 재앙이 천차만별이었다.
결국 정리를 포기한 아가레스와 바르바토스는 직접 조사를 나가야 할 것 같다며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각기 시찰지가 정해지는 와중에도 북부만큼은 누구도 자원하는 이가 없었다. 왜인지 다들 꺼리는
눈치였다.
바엘은 자신이 태어난 호수를 떠나며 그곳을 영원한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호수를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조리 말려 버렸고, 근처에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 없도록 거대한 메테오를 몇 번이나 떨어뜨렸다.
율리아는 얼굴을 거세게 때리는 바람에 현실로 돌아왔다. 하늘을 가르는 바엘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한낮임에도 주변 공기가 조금씩 붉게 변해 가고 있었다.
아득히 먼 발밑에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 때문에 지표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 분위기만
보면 아무래도 예상이 맞는 듯싶었다.
85 화
"……."
율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모처럼의 외출에 조금은 들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스스로가 무척 부끄러워졌다. 바엘에겐 못마땅한 외출이었을 텐데, 정작 자신은 이기적으로 굴고
있었던 것이다.
율리아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바엘의 눈빛에 찰나의 후회가 스쳤지만
율리아가 그것을 알아채는 일은 없었다.
독수리처럼 상공을 배회하던 바엘이 이윽고 바닥에 느릿하게 내려앉았다. 율리아는 그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공에서 보았던 안개는 짙은 붉은빛이었는데, 정작 밑에선 흐릿한
분홍빛으로 흩어졌다.
[▷SYSTEM
[▷SYSTEM
- 보상: 스킬 포인트 6 개
[▷SYSTEM
'호수의 비밀'은 공략 캐릭터 '바엘'과의 관계가 일정 수치에 도달했을 때만 발생하는 히든
이벤트입니다.]
순간 우후죽순 나타난 시스템 창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덕분에 발밑을 보지 못한 그녀가 힘없이 휘청였다.
"괜찮나?"
"아, 그게."
"몸이 안 좋은 건가."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느라 잠깐 멈칫한 모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바엘이 그녀를 도로 안아 들었다.
율리아는 다급히 그를 붙들었다.
[▷SYSTEM
정체 모를 것이 육신을 좀먹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율리아는 바엘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이마를 기댔다. 바엘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
"하여간 약해 빠졌군."
괜스레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율리아는 바엘의 냉랭한 목소리에 풀죽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바엘은
귀찮은 듯 미간을 구기더니 그녀를 작은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죽여야만 할 그림자 마물도, 그것을 죽이지 못한다면 자신이 죽을 거란 사실도, 자욱한 안개 속에
숨어 있을 마성도 모두 낯설고 두려웠다. 정체 모를 새로운 지배자에 대한 것도 그랬다.
"팔 벌려."
"네, 네?"
놀라서 퍼뜩 고개를 들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재촉하듯 그녀의 양 손목을 툭툭 건드렸다.
로브를 벗은 바엘이 그것을 율리아에게 입히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율리아가 얼떨결에 팔을 벌리자 바엘이 로브의 널따란 소매를 하나씩 끼워 넣었다. 큼직한 로브가 어깨
위에 푹 얹어지자 그의 짙은 체향이 콧속에 스몄다. 마치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말랐군. 그딴 쓰레기를 맛있다고 먹는 입맛이니 어련할까."
바엘의 미간이 불만스러운 듯 구겨졌다. 그와 동시에 가느다란 허리가 넓은 끈으로 강하게 조여들었다.
쇄골에 닿는 그의 숨이 뜨거웠다. 율리아는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어쩔 줄 모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율리아의 시야가 눈 깜짝할 새 높아졌다. 바엘이 그녀의 등과 허벅지 뒤쪽을 단단하게 받치며 안아 들었다.
고개를 푹 숙인 율리아는 바엘 몰래 입술을 삐죽였다. 자신은 폐허나 다름없는 이곳이 무서워 죽겠고,
그런 와중에 바엘이 힘들어하면 어쩌나 신경이 잔뜩 곤두섰는데. 정작 그는 걱정이 무색하도록 아주
멀쩡해 보였다.
"……그럼 내려주세요."
"가만있는 편이 좋을 텐데."
"왜요?"
그녀는 초조하게 숨을 들이켰다. 엉덩이를 스치는 이 단단하고 폭력적인 감촉은 무조건 실제가 아니어야
했다. 단지 기분 탓이어야만 했다.
율리아는 다리 사이에 바엘의 손이나 기타 무서운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허벅지를 딱 붙였다.
"쯧."
바엘은 그런 율리아를 말없이 더욱 강하게 안았다. 둘의 그림자가 자욱한 안개 너머로 사라져 갔다.
86 화
"이상 현상이 나타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제대로 확인해서 아가레스 님에게 전달해야 할 텐데, 막상
오니까 잘 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돼요."
[▷SYSTEM
아까의창이 다시 떠올랐다.
[▷SYSTEM
[▷SYSTEM
- 해금 조건: 바엘과 함께 거점 '죽음의 호수'에 진입한다.
- 보상: 스킬 포인트 6 개
[▷SYSTEM
웬만한 마족은 붉은 안개에 닿기만 해도 몸이 녹아내린다고 했다. 벨제붑은 인간으로 치면 방사능 지대나
다름없는 마계 북부에서도 멀쩡히 살아남은 마물이었다. 보통 상대가 아닐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유성우가 주어진 건 이 퀘스트 때문이겠지. 강력한 무기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어.'
[▷프로즌 애로우
마력을 보유한 적 1 인에게 강력한 3 연속 공격을 쏘아 보낸다. 잔여 체력의 20%를 소모한다. SP 20]
[▷멀티 스나이핑
마력을 보유한 적 다수를 추적해 공격한다. 스탯 'SIGHT'의 영향을 받는다. 잔여 체력의 30%를
소모한다. SP 30]
"프로즌 애로우."
율리아가 커맨드를 입력하자 작은 얼음 결정이 그녀의 손가락 끝에 이펙트처럼 회전하다 사라졌다. 그녀는
스킬 트리를 종료하고 다시 퀘스트 설명을 읽어 내렸다.
'플레이어 사망…….'
"왜 그러지."
"……."
"……."
"이상한가요? 하지만 정말로 그런 걸요. 사람들은 보통 안개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이 자욱한 것 너머에
어떤 무서운 것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요."
물비린내 나는 이 자욱한 안개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마물 벨제붑이 안광을 형형하게 빛내며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율리아는 그런 속내를 숨긴 채 평소처럼 흐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바엘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율리아의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그녀의 뺨을 재차 쓸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이 의아했지만 율리아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열심히 휘저어도 꿈쩍도
않던 안개가 눈 깜짝할 새 멀찍이 물러난 것이다. 실내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시야 일정 반경이 마치
먹구름이 개듯 선명해졌다.
"어쩜, 너무 예뻐요!"
태어나 처음 보는 절경에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일어섰다. 호수에서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뺨을 작게 간질였다. 한동안 넋 놓고 봐도 아깝지 않을 풍경이었다.
율리아는 그의 단단한 어깨를 꾹 눌렀다. 연약한 여자가 민다고 쉽게 밀릴 몸이 아니건만, 의외로 바엘은
절대적인 힘에 얽매인 듯 그녀에게 이끌려 침대에 얌전히 누웠다.
율리아는 바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혹여나 힘들어하는 기색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의 눈동자는
조금 복잡한 빛을 띠고 있을지언정 생각보다는 괜찮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를 올려다보는 바엘의 표정에 노골적인 불만이 섞였다. 그녀는 깨닫지 못했지만 사실 그의 눈빛에
단순히 불만만 담긴 것은 아니었다.
더욱 질척하고 본능적인, 심연에 고인 욕망이 그녀의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작은 얼굴,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턱선, 겁먹은 토끼 같은 커다란 눈동자, 탐스러운 복숭아처럼 길게
너울진 머릿결.
그녀의 깊은 안쪽, 울컥 젖은 달큰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코를 들이박고 더욱 가까운 곳에서 느끼고
싶었다. 바엘은 율리아를 밀어내며 상체를 세웠다.
"읏……."
87 화
바엘의 시선이 율리아의 허벅지 안쪽을 노골적으로 찔러댔다. 질식할 듯한 열기가 폐부 가득 밀려들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바엘과 숨을 나누고 있었다.
"저 아파요."
"뭐?"
그제야 바엘의 숨결이 조금 멀어졌다. 왜인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율리아는 몸을 옆으로 굴린 채
팔다리를 작게 웅크렸다. 어깨끈 아래 드러난 가느다란 팔뚝에 그의 손바닥이 와 닿았다. 몇 번
쓸어보더니 바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아……."
"푹 자면 금방 나을 거예요."
"아."
그녀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바엘의 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석양을 받아 깊게 그림자 진 근육이 자극받은
듯 꿈틀댔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율리아는 순진한 얼굴로 작게 하품할 뿐이었다.
"네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지만 금방 찾아온 수마가 그녀의 눈을 무겁게 덮었다. 어느새 색색 애처로운
숨소리가 사위를 울리고,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며 바엘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 * *
정오가 조금 지난 오후, 율리아가 잠들어 있는 침대 위로 쨍한 해가 내리쬐었다. 느릿하게 끌어올려지는
의식 너머로 잔잔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율리아는 전날보다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이끌고 침대 밖으로 나섰다. 바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호수는 바로 근처에 있었다. 잠깐 나간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았다.
율리아가 가까이 다가가자 호수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퐁, 퐁-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호수에
실로폰을 연주하듯 깨끗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마치 사랑스러운 동화 속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SYSTEM
갑자기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한 발을 내디디며 중심을 잃었다. 근처에 붙잡을 것을 찾았지만 물가엔 기이할 정도로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다.
그녀가 결국 깊은 물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들려는 찰나, 허리가 강한 힘으로 당겨졌다. 뒤이어 사내의
뜨겁고 탄탄한 근육이 그녀의 등에 바짝 닿았다.
"……."
그녀는 이제껏 마계의 물과 음식을 되도록 입에 대지 않았다. 히든 스탯인 마성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엔
더욱 주의해서, 차라리 굶을지언정 인계로 떠난 키마리스나 레벤나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을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바엘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쥔
탓이었다.
"죽고 싶나?"
그의 목소리는 명백한 힐난조를 띠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바엘은 율리아의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똑바로 봐.
짓씹듯 중얼거린 바엘이 호수를 향해 거대한 마력을 방출했다. 직후 강력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육중한 고목이 뿌리째 뽑혀 나뒹굴었고, 심지어는 하늘의 구름마저 반으로 갈라졌다.
율리아의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물을 흉내 낸다고……?'
"몰랐어요, 저는 정말."
"……."
"열쇠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 줄 아나? 마정석의 봉인을 푸는 존재, 단지 그뿐일 것 같나? 아니, 열쇠는
마신에게서 갈라져 나온 파편이야. 종말을 예견한 그가 나름대로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겠다고 먼
인계까지 보낸 모양이지만 그 더러운 본능이 어디 갈까. 결국엔……."
그녀는 방금 바엘이 말한 것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열쇠의 진짜 의미, 마신의 파편, 종말의 예견,
가장 중요한 것, 그리고 본능.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바엘은 열쇠가 마정석에 의해 잘못될까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열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붉은 각인의 탓일까, 바엘의 말뜻을 깨닫자마자 갑자기 심장이 간지러워졌다. 입을 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율리아는 조심스레 바엘의 손가락 하나를 붙들었다.
"내가 너를 걱정한다고."
율리아 브에스드라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바엘은 정작 그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88 화
흐릿한 물안개 사이로 달빛이 산란하는 밤이었다. 온종일 기다려도 이상 현상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누군가에 의해 침대에 눕혀진 늦은 밤.
바엘은 마계의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마력을 지녔다. 하지만 지나치게 강대한 힘은 육신
안에서 끊임없이 몸집을 부풀리며 되레 그를 끔찍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바엘?"
"바엘, 괜찮아요?"
스산한 붉은 달빛이 바엘의 나신을 비췄다. 그의 호흡을 확인하려 고개를 숙였던 율리아는 조각처럼
선명히 굴곡진 근육에 일순 시선을 빼앗겼다.
촉, 바엘의 메마른 입술에 가볍고 말캉한 버드 키스가 내려앉았다. 이 정도로는 부족할까 싶어서 쪽, 쪽-
몇 번 더 입술을 눌렀다. 바엘과 이보다 더한 일도 몇 번이나 했는데, 율리아는 고작 입맞춤만으로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짧은 접촉으로도 마력 저항의 효과가 나타난 걸까, 바엘의 떨림이 조금씩 멎기 시작했다. 안도한
율리아가 다시 고개를 들려는 찰나였다.
"흡……!"
그녀의 목덜미가 강한 힘으로 당겨졌다. 도망칠 새도 없이 바엘의 혀가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그는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맹렬히 덤벼들었다. 율리아를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로 뒤통수를 억눌렀다.
"아읏, 잠시!"
[▷SYSTEM
눈앞의 수치가 시시각각 올라갔다. 놀란 율리아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의 애처로운 목소리는 바엘의 입
안으로 고스란히 삼켜졌다. 그의 밑에서 벗어나려 있는 힘껏 저항해도 압도적인 완력 차 앞에선 소용없는
짓이었다.
'눈동자 색이…….'
바엘이 아니었다.
"바엘, 바엘!"
"……."
"바엘은 지금 어디에 있죠? 그를 어떻게 한 거예요?"
"알고 싶나?"
그렇다면 더더욱 마물을 공격할 수 없었다. 유성우를 쏘면 벨제붑을 처리할 수 있을지언정 몸의 주인인
바엘 역시 무사할 수 없었다. 고작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잠든 자신을 조심스레 침대에 옮겨 주던,
이불을 덮어 주고 머리를 자상하게 쓸어 주던 그를.
율리아는 치미는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저것을 처치하지 않는다면 돌아오는 대가는 자신의
죽음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당긴 활시위를 쉽사리 놓을 수 없었다.
"잡아."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마물의 기분 나쁜 안광이 율리아의 얼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네가 어떤 반항을 하든 힘없는 계집의 의사 따윈 쉽게 꺾을 수 있다는 것처럼.
그러한 모습을 마주한 순간, 율리아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바엘은 자신을 이런 식으로 짓밟지 않았다.
그러니 저것은 절대 바엘이 될 수 없었다.
'키마리스 님이 말했어. 악마는 심장만 무사하면 죽지 않는다고. 바엘의 심장은 악마성 그 자체야.'
커맨드 시스템.
율리아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같은 공간에 있는 유일한 대상인 마물이 자동 타기팅 되었다. 동시에 스킬
명령을 기다리듯 유성우가 밝게 빛났다. 누가 보아도 공격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지만 마물의 표정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넌 내 거야."
침대가 위태롭게 삐걱대는 소리가 축축한 밤공기를 울렸다. 마물은 도망치려는 율리아의 발목을 움켜쥐고
밑으로 쭉 끌어내렸다.
그녀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헤드에 안간힘을 다해 매달렸다. 하지만 강제로 당기는 마물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물은 마치 꽃을 꺾듯 그녀를 손쉽게 잡아당겼다.
"이거 놔, 꺄악!"
마물은 그녀를 개처럼 엎드리게 했다. 그러곤 강제로 치켜 들린 엉덩이에 제 하반신을 눌렀다. 뜨겁고
팔뚝만 한 무언가가 얇은 네글리제 너머로 선명히 느껴졌다. 바엘이되 바엘이 아닌 것이 자신에게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프로즌 애로우!"
[▷프로즌 애로우
마력을 보유한 적 1 인에게 강력한 3 연속 공격을 쏘아 보낸다. 잔여 체력의 20%를 소모한다. SP 20]
하지만 그가 타기팅 되기 직전, 율리아의 양 손목이 침대에 거칠게 내리눌렸다. 벨제붑이 그녀의 주먹을
움켜쥔 팔에 체중을 싣는 순간, 우두둑- 무언가 섬뜩하게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벨제붑이 그녀의 손목과 손가락 관절을 모조리 으깨 버렸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패닉이 엄습했다. 손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뺨에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89 화
바로 그때, 마물의 고개가 푹 꺾였다. 율리아의 손목을 짓누르던 힘이 갑자기 사라지고,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진 마물이 성난 맹수처럼 포효했다.
"……."
간신히 고개를 든 율리아는 홀로 바닥을 뒹구는 마물을 내려다보았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흑발 사이,
언뜻 드러난 눈동자가 흐릿한 붉은 빛을 띠었다.
"바엘, 바엘!"
"오지 마!"
"이리 오지 못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율리아가 불현듯 멈칫했다. 그림자 마물 벨제붑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바엘이 몸을 빼앗길 정도라면, 그를 호수 밑바닥에 처박을 수 있는 존재라면.
영창과 동시에 주변 시야가 삽시간에 반전됐다. 바닥을 뒹구는 마물의 발아래 희게 빛나는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림자 마물 벨제붑
공격 판정 -3%
공격 판정 -3%
공격 판정 -5%]
벨제붑의 시선이 뭉개진 손목에 닿은 순간, 겁먹은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다시 스킬을 사용했다.
[▷그림자 마물 벨제붑
공격 판정 -2%
공격 판정 -1%
공격 판정 -3%]
"킬킬킬킬."
"크윽, 헉! 허억……!"
지독한 악몽 밑바닥으로 침잠해가던 그녀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발톱을 뽑으려 발버둥 치던 악마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채 괴로운 신음을 들이켰다. 바닥을 기며 뱀처럼 몸을 뒤틀었다.
칠흑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악마의 눈동자 색을 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율리아는 어떤 직감에 의해 한 발을 내디뎠다.
"당신이에요?"
"……."
그녀는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중엔 미안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바엘이
고통에 바스락대는 소리와 율리아의 울먹이는 숨소리만이 밤의 깊은 정적을 울렸다.
그때, 바엘이 탈진한 듯 바닥에 엎드려 힘없이 늘어졌다. 그런 그의 모습이 어쩐지 숨이 멎기 직전처럼
위태로워 보여서, 율리아는 참지 못하고 그의 머리맡에 무너지듯 엎드렸다. 차갑고 단단한 등 위에
눈물로 푹 젖은 뺨을 기댔다.
쩌적-
악마가 그녀를 끌어안은 채 호수 속으로 뛰어든 순간, 물결을 흉내 내듯 이질적으로 일렁이던 수면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마치 거울 깨지는 소리처럼.
'아, 나는 어쩜 이렇게…….'
* * *
쏴아아,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율리아의 귓가에 맴돌았다. 축축한 물안개가 살갗에 무겁게 달라붙었다.
"콜록, 콜록! 헉!"
율리아는 뭍에 반쯤 걸쳐진 상태로 눈을 떴다. 힘없이 드러누운 그녀의 시야에 여러 줄기로 이뤄진 거대한
폭포가 들어왔다. 각 줄기는 물감을 탄 듯 색이 조금씩 달랐는데, 호수에 섞여 들며 아름다운 오로라
빛으로 일렁였다.
[▷SYSTEM
하지만 시스템 창은 여전히 그녀가 퀘스트 '호수의 비밀'을 진행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꿈이 아닌
현실이란 의미였다.
"흑, 아파!"
바닥을 짚으려던 율리아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졌다. 시선을 내리자 여전히 엉망으로 으스러져 있는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율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왜 마신의 탑까지 온 건지, 이곳이
정말 탑은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전에 자신 혼자만 이곳에 쓸려왔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벨제붑은 자신을 끌어안은 채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실수가 아닌 의도적 행동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그렇게 한 것에 이유가 있다는 뜻이 되었다. 마신의 탑으로 와야 할 이유가.
유례없이 강력한 마력을 지닌 대군주 바엘의 육체를 빼앗을 수 있는 존재. 탑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는
마정석의 열쇠를 '자신의 일부'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존재. 이미 죽어 없어졌으면서도 의지를 잇는
아티팩트를 마계 곳곳에 퍼뜨릴 수 있는 존재.
마물 벨제붑은 마신의 그림자이다.
누군가가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주기를, 손을 내밀어 주기를 사실은 간절히 기다렸던 것 같다.
바엘이 벨제붑과 싸우며 괴로워하는 동안에도 자신은 그저 두려워 울기만 했다. 약하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여, 여긴 어디죠?"
율리아는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를 응시했다. 힘차게 낙하하는 폭포 사이로 수원이 말라버린 듯 기이하게
빈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딱 두 줄기 정도의 공백.
90 화
"나의 어리석고 사랑스러운 파편. 넌 자신의 팔다리를, 영혼과 육체와 자아를 알아보지 못할 수 있나?"
이 세상의 주인공은 에스델 브에스드라였다. 자신은 원인 모를 사고로 우연히 끼어든 불청객이자 원래라면
세상에 실재하지 않았을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율리아가 줄곧 침묵하자 그것을 어떻게 생각한 건지, 벨제붑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궁금한 건 다 풀었나?"
그건 더 이상 바엘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주 거대하고 불길한 그림자의 형태로 화했다. 바엘을 구하기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마신인가요?"
"……."
글쎄, 어떨까?
"스킬, 강탈!"
[▷저항 강탈 Lv.2
플레이어가 지정한 대상에 일정 시간 항마력의 60%를 강탈한다. 잔여 체력의 60%를 소모한다. SP 60]
화살 형태의 거대하고 눈부신 이펙트가 자욱한 그림자 사이로 내리꽂혔다. 그녀의 반항을 알아챈 벨제붑이
포효했다.
벨제붑의 외침에 온 동굴이 쩌렁쩌렁 울렸다. 율리아는 격하게 헐떡이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유성우를
장착했다. 그러곤 그림자를 소리 없이 저격했다.
"프로즌 애로우."
[▷그림자 마물 벨제붑
공격 판정 -6%
공격 판정 -5%
공격 판정 -8%]
[▷SYSTEM
게이지를 확인한 율리아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모험은 반만 성공했다. 아까보다 유효 공격력이
확연히 올라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체력이 떨어지는 속도가 마물보다 훨씬 빨랐다.
게다가 창이 사라진 직후, 벨제붑의 발밑에 검은 그림자가 뿌리처럼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율리아가 숨어
있는 곳을 뒤지려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육체의 원래 형태에서 더더욱 멀어지고 있기도 했다.
"꺄악!"
[▷그림자 마물 벨제붑
공격 판정 -0%
공격 판정 -0%
공격 판정 -0%]
[▷SYSTEM
"이거 놔, 싫어!"
이젠 무엇을 공격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바엘의 외양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린 그림자는 그 크기를
무한히 확장했고, 발밑으로 뻗어 나온 촉수들이 사방에 꿈틀거렸다.
"읏, 아, 안 돼……!"
지난번의 실패에서 무언가 배웠는지, 촉수들은 무작정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하기보다 율리아의 예민한
부분들을 돌리고 문질렀다. 가녀린 여체가 파드득 경련할 때마다 주변 촉수들이 그곳에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흑, 으응!"
율리아는 몸의 정점들에서 찌르르 차오르는 감각을 애써 무시했다. 신음이 새어 나오려 할 때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람도 악마도 아니고 하물며 짐승조차 아닌 것에게 유린당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림자는 바엘의
모습으로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공격은 먹히지 않았으며 설상가상 자신에게 남은 체력은 거의 바닥이었다.
'죽는다고?'
[▷SYSTEM
눈에 익은 붉은 구슬이 율리아의 눈앞에서 느리게 회전했다. 그제야 그녀는 유성우의 중심에 오목한 반구
형태의 홈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SYSTEM
촉수에 얽매여있던 그녀의 손목이 환한 빛과 함께 자유로워지고, 유성우와 마력구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활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활 표면에 길게 파인 홈에서 은은한 붉은빛이 퍼져 나갔다. 투명하던
유성우가 붉게 숨 쉬었다.
[▷SYSTEM
제한 시간 59 분 59 초]
아이템 이름이 바뀌며 시야 상단에 제한 시간이 떠올랐다. 율리아가 활시위를 당기자 일반적인 스킬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이펙트가 발광했다.
"프로즌 애로우!"
[▷마력 촉수
공격 판정 -100%
공격 판정 -0%
공격 판정 -0%]
드넓은 실내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촉수가 이변을 알아챈 듯 움찔 그녀를 돌아보았다. 율리아는 눈을
부릅뜨고 호수에 잠긴 촉수를 겨눴다.
"프로즌 애로우!"
[▷마력 촉수
공격 판정 -100%
공격 판정 -0%
공격 판정 -0%]
그녀의 눈보라가 휘몰아친 공간엔 어떠한 촉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본체와 연결된 모든 촉수를 잘라 내자
드디어 벨제붑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바엘과 같은 모습, 하지만 보랏빛 눈동자.
"이게 무슨……!"
율리아의 격렬한 감정 상태를 드러내듯 유성우의 빛이 실내를 가득 메웠다. 벨제붑의 발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림자 마물 벨제붑
공격 판정 -10%
공격 판정 -10%
공격 판정 -18%]
벨제붑의 마지막 발악은 거센 바람 소리에 묻혀 사그라졌다. 실내에 강력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날개를
활짝 펼친 악마의 몸에서 보랏빛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찰나의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림자에서 해방된 바엘이 바닥으로 느리게 무너져 내렸다. 쏴아아, 폭포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울렸다.
91 화
"바엘?"
"……."
"……."
그럼에도 율리아는 눈앞의 사내가 바엘이란 확실한 증거를 찾고 싶었다. 그는 정말 무사하다고, 그러니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바엘의 육체를 마력 그득한 호수 안으로 밀어 넣었다. 벨제붑이
이곳에서 힘을 채웠으니 바엘 역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탓이었다.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그냥
무엇이든 해 보고 싶었다.
율리아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작게 일렁였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린 채로, 그녀는 바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손목이 너무 아파요."
둥글고 부드러운 여체가 자욱한 물안개 사이로 희게 산란했다. 젖은 머리칼이 곡선을 타고 흐르고 도톰한
입술은 조금 푸르게 질려 있었다. 붉은 목걸이만이 그녀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색채 같았다.
"아……."
"으응."
억지로 넣으려던 율리아의 눈동자에 다시금 물기가 어렸다. 힘주어 앉아 보려다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진 탓이었다. 덜컥 겁이 들었다.
사실 율리아의 기억엔 한 가지 오류가 있었다. 바엘과 레기온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크다는 것과 율리아의
안이 비좁고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혀와 손가락으로 밑을 충분히 풀어 준 뒤에
삽입했다.
벨제붑의 촉수가 스치고 지나간 곳들이 기분 나쁠 정도로 간지러웠다. 빨리 바엘의 것으로 깨끗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경련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채 방치되는 감각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이 새하얀 여체를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갈라진 둔덕 앞에서 조금 망설이던 손가락이 통통하게
달아오른 음핵을 슬며시 짓눌렀다.
"아!"
"으응, 응……."
눈을 뜬 바엘이 수음하는 그녀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숨 가쁘게 오르내리던 율리아의 가슴이
움찔, 움직임을 멈췄다.
도대체 언제부터 정신을 차린 건지, 자신의 그 부끄러운 짓들을 그에게 전부 보였다고 생각하면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바엘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게 너무 좋았다. 이해할 수
없이 벅찬 기분이 차올랐다.
눈물로 시야가 부옇게 흐려진 율리아에겐 그런 바엘의 눈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밑을
건드리는 손가락을 느끼며 변명하듯 고개를 저었다.
"으응, 이건 내가 흘린 물이 아닌데에……."
"아니라고?"
"으읏, 아, 자꾸 그러면!"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찌걱찌걱 느릿한 마찰음이 들렸다. 질구를 벌리고 안으로 손가락을 쑥 밀어
넣은 바엘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러다 또 골골 앓지."
조금 기다려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를 마주 보려 고개를 비틀던 바엘이 불편한 듯 미간을 좁혔다.
"고개 좀 들어 보지?"
"싫어요……."
"왜."
사과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 손바닥 사이로 칭얼대듯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수록 자신을 더욱
자극할 뿐이란 걸, 열쇠는 어째서 알지 못하는 걸까.
"손 빼요."
한편, 율리아는 자신의 안에서 여전히 굼질거리는 손가락이 무척 민망하고 거슬렸다. 그것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찌걱찌걱 젖은 점액질 소리가 나는 것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가슴을 주무르더니 유두를 희롱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뜩이나
연약한 선단을 집요하게 굴려대니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눈앞의 악마가 벨제붑이 아니란 것에 안심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뒤통수를 맞은 듯 경악스러운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동시에 그녀의 다리 사이에 파묻혀 있던 촉수가 페니스처럼 팽창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건지, 내벽에
들러붙어 온 성감대를 쭉쭉 빨아대자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간신히 세웠던 몸을 무너뜨렸다.
바엘은 힘겹게 헐떡이는 율리아를 안아주기는커녕 힘으로 도로 일으켜 앉혔다. 그러자 촉수가 그녀의 양쪽
겨드랑이 밑을 파고들어 자세를 단단히 고정했다. 바엘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이리저리 휘젓던 고개도
흔들림 없이 붙들었다.
단정하던 율리아의 눈썹이 잔뜩 구겨지고 커다란 눈동자엔 눈물이 아롱졌다. 높고 오똑한 콧대, 새하얗고
마른 뺨도 움찔움찔 떨렸다.
"흣, 으응!"
바엘은 자신의 배 위에서 움찔움찔 경련하는 율리아를 만족스러운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마치 바닷가에
누워 일광욕이라도 하는 듯 여유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하윽! 빼 줘, 제발……."
성감대가 자극당할 때마다 눈앞이 새까맣게 암전됐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허락된
움직임은 엉덩이를 들썩이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깊숙이 박힌 촉수가 내벽을 주욱 긁어내리는 탓에
율리아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래가?"
"흐읍!"
"이러다 촉수 터지겠어."
"으으응!"
'조금만 더.'
그림자에 의해 우두둑, 가녀린 손목이 으스러지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고통 탓에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는 그녀를 구해 주지 못했다.
"아니야, 안 돼, 소, 소변……!"
"……."
"아, 아, 아니야아!"
지나치게 육중한 둔기가 온 질벽을 압박하자 율리아는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그녀의 요도에서 투명한
액이 뿜어져 나왔다. 견딜 수 없는 쾌락에 뇌가 곤죽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어떤 게 더 좋지?"
율리아의 입가에 뭉툭하고 번들거리는 것이 와 닿았다. 그녀가 숨을 쉬느라 헐떡이는 사이, 붉은 입술을
몇 번이고 문지르던 그것이 입 안으로 쑥 들어갔다.
"우웁!"
바엘의 추삽질 탓에 떨어져 나갔던 두 촉수가 율리아의 가슴에 다시금 흡판처럼 들러붙었다.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꼭지가 시커먼 아가리 너머로 사라졌다.
이번엔 그녀의 클리토리스에도 촉수가 붙었다. 작고 통통한 열매를 이리저리 눌러 보던 촉수가 그것을
한입에 삼켰다. 마치 사탕 빨 듯 그것을 쪽쪽 빨아들이자 율리아의 시야가 번쩍 튀었다.
누군가 그렇게 묻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율리아는 흐릿한 정신에도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휑하게
벌어진 밑을 아주 커다란 것이 채워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갑게 식어 버린 몸을 다시 달아오르게
해 달라고.
그녀의 허벅지가 활짝 펼쳐지고, 수많은 다발이 입구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한 개가 들어갔을 때보다는
훨씬 얇았지만 그것들 전부가 합쳐지자 되레 더욱 두꺼워진 다발이, 그녀의 안을 꿈틀꿈틀 헤집어 댔다.
"아, 아아!"
"흐으, 흐응……."
붉고 선명한 태양 아래, 마왕의 의식이 깃든 수많은 촉수가 오직 한 여자만을 집요하고 고통스럽게 탐했다.
말 그대로 절경이었다.
[▷SYSTEM
[완료]
* * *
원래의 육체로 돌아온 바엘은 북부 지대에 고여 있던 무지막지한 마력을 흡수한 대가로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말라붙은 호수 바닥을 긁으며,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비명에 가까운 절규를 내질렀다.
"하아, 큭! 율리아……."
'당신은 마신인가요?'
글쎄, 어떨까?
마신은 붉은 씨앗이 눈을 뜬 이곳에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마수정을 세웠다. 오로지 이 마력을 흡수하기
위해서.
무한한 침묵 속 가끔씩 들려오는 그 울림이 자신에겐 유일한 구원이었다. 세상의 유일무이한 법칙이었다.
바엘은 멍하니 누워 생각했다. 물속에 흐릿하게 비치는 저 햇빛을 피부로 느껴 보고 싶다. 수면에
내려앉는 풀벌레 소리나 바람이 나뭇잎에 사부작거리는 소리도 선명히 듣고 싶다.
93 화
지금은 난생 처음 보는 침실에 누워 있었다. 이곳이 어딘지 창밖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누운 침대엔
폭 넓은 천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일어나려 구물구물 움직이던 율리아는 결국 끊어질 듯한 허리 통증에
도로 풀썩 엎어졌다.
'익숙한 배경…….'
그녀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몇 번의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레기온은 일어나 있는 율리아를 보더니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미, 미안해……."
레기온이 도톰한 침구를 들추며 그 속으로 율리아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머뭇머뭇 활짝 열린 문
밖을 내다보았다. 말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얼굴이었다.
"상황이라니, 무슨 일 있어?"
"이게 무슨."
"그러지 마."
힘들게 몸을 일으킨 그녀의 앞을 레기온이 단호히 가로막았다. 율리아는 비켜 달라는 의미로 그의 어깨를
짚었지만, 그럼에도 레기온은 꿈쩍도 하지 않고 되레 그녀를 침대에 도로 눕히려고 했다.
문밖을 내다보는 율리아의 표정이 의아함에 물들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레기온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낭패감 섞인 눈빛으로 천장을 응시했지만 이미 늦었다.
"……."
인계로 내쫓는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를? 그리고 레기온은 왜 이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거지? 전쟁터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무서운 표정을 짓는 거야?
"……그런가."
"응, 목말라."
"사과도 먹고 싶어."
복도 밖으로 끌려가는지 파이몬의 외침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고열로 머릿속이 흐릿한 와중에도,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지 모른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율리아! 파이몬이랑 지금 당장 서쪽으로 가자! 파이몬의 둥지로 가면 누구도 율리아를 멋대로 데려갈 수
없어! 감히 누구 멋대로 추방이야!"
"추방?"
"추방이라니, 내가?"
율리아는 다리에 매달려 오는 파이몬도 알아채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보티스가
낭패라는 듯 시선을 외면했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 그럴 리가 없어. 바엘이 내게 그럴 리가 없어. 내게 어떻게 그래.
태어나 너무도 오랜 시간을 부초처럼 이리저리 떠밀렸지만, 이번에 도달한 곳이야말로 마지막 안식처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바엘은 어디 있어?"
어느새 달려온 레기온이 그녀를 붙들었다. 율리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무대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가엾은 비렁뱅이가 된 기분이었다. 레기온, 보티스, 파이몬, 이곳에 없는 다른
모두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아파. 토할 것 같아.
"내가 왜!"
쫓겨나야 해? 뭘 잘 못했는데?
"미, 미안해."
"……."
자신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도 알지 못했다. 율리아는 그저 하릴없이 빌기를 반복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나, 난 괜찮아!"
94 화
그녀는 레기온에게 저항하지 못해 질질 끌려가면서 당혹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바엘에게
따져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되레 그와 다른 악마들의 미움을 살 게 분명한데도.
함께 화내주는 레기온이 있어서,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이 절망감을 이해받는 기분을 느꼈다. 이번엔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고, 그러니 말은 한번 꺼내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마왕성의 기나긴 복도를 지나는 동안 율리아는 한 번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예전과 똑같아.'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도 없었다. 지금 레기온의 행동에 반기를 들었다간 유일한 아군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래."
"뭐……?"
하지만 율리아는 그런 레기온의 등 뒤에서 몰래 시야 기능을 열었다. 죽음의 호수로 떠나기 전, 자신을
두고 갈등하는 바엘의 모습을 보며 덜컥 두려움이 인 탓에 한 번도 설정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벨제붑이 자신의 손을 으스러뜨리고 범하려던 바로 그때. 바엘은 왜 그림자에게 저항했던
걸까. 그리도 처절하게 외쳤던 걸까.
'오지 마!'
'이리 오지 못해?!'
'여기서 나가! 당장!'
어느새 나타난 마족들이 홀로 휘청거리며 걸어가는 율리아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붙들려는 레기온의 어깨를 잡아채는 것 같기도 했다.
'바엘.'
[▷바엘
[▷바엘
가늘게 좁혀든 눈동자가 율리아의 등 뒤, 수많은 마족이 모여 있는 곳으로 느릿하게 돌아갔다. 율리아는
구역질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멀건 위액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컥! 우욱."
"작은 열쇠야!"
"잘못, 했어요……."
율리아는 덜덜 경련하는 손으로 바엘의 발을 붙들었다. 혹시라도 그에게 내쳐질까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그저 가느다란 손끝만 뻗은 채로 엉금엉금 바닥을 기었다.
"마, 마정석의 재료로 저를 쓰신다고 해도…… 끝까지 감사할 수 있어요. 너무 행복한 꿈속에서 지내느라,
태어나서 처음 겪는 행복이라, 주제 넘는 것을 바랐어요."
"……."
복도 너머에서 레기온의 찢어질 듯한 절규와 거대한 힘이 쿵쿵 맞부딪히는 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아프도록
때렸다. 하지만 율리아의 뇌리엔 분노를 참는 듯 일렁이는 붉은 안광만이 시리게 박혔다.
이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열쇠이기 때문에 이곳에 머물고 모두의
애정을 받을 수 있었던 건데, 존재의의 자체를 거부하려 들다니. 이런 뻔뻔스러운 생각을 바엘도 알았던
게 틀림없었다.
"내게 방해만 될 뿐이니 어디로든 돌아오지 못하게 내쫓아. 누구 하나라도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직접
사지를 찢어 주지."
율리아는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가레스, 바르바토스, 레라지에, 파이몬, 보티스, 레벤나, 그
외에도 평소 지나가듯 얼굴을 익혔던 악마들 대부분이 그곳에 서 있었다.
또 다시 혼자가 되었다.
* * *
08. 이름 없는 황녀
"맞아."
레기온은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에서 지내는 동안엔 사사건건 율리아의 주변을 맴도는 키마리스가
무척 거슬렸지만, 지금은 그저 씁쓸한 마음뿐이었다.
"방해 안 해."
"미안해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95 화
북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무엇 때문에 바엘이 곧장 율리아를 쫓아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설령 이유가 무엇이라 하더라도 그녀를 이런 식으로 내쫓아선 안 되었다.
몸에 생긴 상처는 언젠가 없어질지언정 기억에 새겨진 상처는 영원히 남는다. 율리아는 이미 충분히
아팠는데, 자신도 아는 사실을 바엘은 어째서 모르는 걸까.
"……."
"당신의 충실한 종으로서, 언젠가 반드시 당신이 느꼈을 치욕을 갚아 보이겠습니다.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율리아."
"병사가 오고 있어."
"혹시 일이 생기면 이곳으로 연락해. 마법사고 이름은 아론. 쿼터라 마족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야."
키마리스는 말에 올라타며 레기온이 건넨 쪽지를 주머니 안쪽에 넣었다. 그가 말허리를 박차고 달려감과
동시에 마차에 병사들이 당도했다.
브에스드라는 확실히 마기가 약한 땅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먼 곳까지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키마리스는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 * *
스산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율리아는 레기온의 부축을 받으며 화려한 정원에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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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상: 스킬 트리 최상단 오픈
율리아가 멈칫하자 레기온이 의아한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시스템 창이 추가로 생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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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 왜 그래?"
"……."
릴리궁 곳곳에 놓인 생화와 장식들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황궁에 방문한 여성 국빈에게 주로
주어지는 이 궁은 규모는 작을지언정 건축에 사용된 자재 하나하나가 전부 최고급품이었다.
"어의인 시몬입니다. 미천한 몸으로 고귀한 황녀 전하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브에스드라에 요양차
조용히 방문하셨다고 들었는데 이리 상태가 악화되어 몹시 유감입니다."
"요양차……. 그렇단 말이지."
마계에서 인계로 보내는 전언은 무조건 아가레스 혹은 바르바토스를 거쳐야 했다. 그들이 절대군주 바엘을
안팎으로 보좌하는 실권자인 탓이었다.
레기온은 이로써 일의 전모를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키마리스가 악마성을 빠져나가는 데 도움을
준 것처럼, 이번에도 바엘의 눈을 피해 율리아를 잘 챙기라는 전언을 보낸 모양이었다.
레기온이 율리아의 증상을 설명하자, 시몬은 다소 심각한 얼굴이 되어 율리아의 상태를 살폈다.
레기온이 입술을 짓씹는 사이, 어느새 진료를 끝내고 처방을 내린 시몬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하녀에게
침대의 휘장을 내리라 지시한 뒤 레기온에게 슬쩍 눈짓했다.
* * *
[▷SYSTEM
"아, 레벤나의 쪽지는 머리맡에 뒀어. 마차에 실었다던 짐은 저쪽에 뒀고. 한번 볼래?"
"나중에……."
"눕고 싶어."
"우욱!"
율리아는 치미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침대 밖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녀들은 트레이에
놓인 만찬을 침대 옆으로 꾸준히 실어 날랐다.
"커헉, 흑!"
96 화
"괘, 괜찮……!"
힘겹게 일어나 앉은 그녀의 시야가 핑 돌았다. 하녀들은 어서 먹으란 듯 테이블을 그녀의 코앞으로 밀어
넣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어서 식기를 들라고 재촉하는 수많은 시선. 그들의 소리 없는 압박이 피부에 따끔따끔 와 닿았다.
율리아는 거의 날 것이나 다름없는 송아지 고기를 한입, 향신료에 범벅이 된 철갑상어와 원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공작새 구이도 조금씩 잘라 입에 넣었다. 식탁 위가 온통 기름지고 짠 것뿐이었다.
비참하고 끔찍한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 치미는 눈물을 간신히 억누르자, 그 대신인 것처럼 위장이
꿀렁꿀렁 뒤집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우욱……!"
비참한 기분은 이제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율리아는 치미는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새하얀 침대보 위에 소리 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젠장!"
"예."
레기온의 미간이 움찔 굳었다. 그의 흉흉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시종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 *
"왔니?"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팔락팔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무거운 적막을 울렸다.
율리아는 현기증으로 자꾸만 움츠러드는 고개를 힘겹게 치켜들었다. 율리아는 이 자리가 불편해 죽을 것
같았는데, 에스델과 그녀의 시녀는 일련의 과정이 마치 일상처럼 편안해 보였다.
'옷이 불편해.'
에스델의 부름은 말만 부름일 뿐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에 율리아는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하녀들은 그녀를 침실에 딸린 드레스 룸으로 이끌었다. 공간 자체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드레스부터
구두나 장갑까지 많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어떤 드레스엔 보석이 빼곡하게 박혀 있어서
햇빛을 받을 때마다 다채롭게 빛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입고 나갈 옷이 없는걸.'
하녀들은 율리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행동했다. 얇은 잠옷을 벗기고 힘없이 휘청거리는 그녀를
억지로 붙들어 앉히기까지 했다.
아무리 레기온이 곁을 지킨다지만 그래도 이곳까지 들어오지 못한다는 걸 아는 탓일까, 율리아의 머리채를
붙드는 그녀들의 손길은 좀 더 노골적이 되었다.
'아, 아파.'
'미안, 내가 너무 까다롭지…….'
그렇게 완성된 율리아의 모습은, 솔직히 그녀 본인이 보기에도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촌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최신 유행이라는 하녀들의 말에 그녀는 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
"믿고 맡겨 봐. 벨라는 로뎀 자작가 출신인데, 동쪽에 작은 무역로를 가지고 있어서 찻잎을 다루는 데
아주 능숙하거든."
"동쪽의 델바르사 지역에서 공수한 찻잎입니다. 이곳 장미궁의 장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향이 뛰어난 게
특징이죠."
설명을 마친 그녀는 스푼으로 찻잎을 덜어 내 작은 주전자에 옮겨 담았다. 그러곤 바닥에 깔린 찻잎 위에
끓는 물을 느릿하게 부었다.
물이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장미 정원은 다시금 침묵에 잠겼다. 율리아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드레스가 너무 조이는 탓에 허리를 조금 수그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괘, 괜찮아요."
설탕을 얼마나 원하는지 묻는 말에 율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벨라는 그중 한 잔에만 설탕을 두
스푼 넣은 뒤 각자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넌 이제 가 봐."
에스델은 손을 흔들어 벨라를 자리에서 물렸다. 드넓은 정원에 오직 둘만이 남았다. 이제는 본론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차를 마시는 에스델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저, 나를 왜 부른 거야?"
"아아, 그거."
"정말 별일 아니었는데."
지하의 일과 관련해서.
에스델이 그렇게 덧붙이자,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려던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를 대신해 지하에 간
일로 감사 인사를 들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율리아는 에스델의 감사에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애매해졌다. 그녀가 난처한 듯 고개를 숙인 순간,
에스델의 한쪽 입꼬리가 날카롭게 휘었다.
"응?"
만약 자신을 노려보는 에스델의 안광에 힘이 있다면, 이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겼을 거다. 율리아는 그렇게 느꼈다.
97 화
율리아가 벌떡 일어나자 쓰러진 의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요란한 소리가 울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에스델의 앞으로 다가갔다. 날이 시퍼렇게 선 눈동자가 율리아에게 향했다.
"천박하게."
"네 짓이지?"
"……."
"……."
그때, 완전히 물러난 줄 알았던 시녀 벨라가 다가왔다. 그녀는 위태롭게 숨을 헐떡이는 율리아를 지나쳐
에스델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다리라고 해."
"그래?"
"……."
"왜, 너도 만나게?"
악셀 후작과 그 아들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율리아는 욱하는 감정이 치밀었다. 시의적절한 타이밍이었다.
후계자가 저지른 짓을 가주가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므로, 정말 따지고 싶었다면 그에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만난다고 생각하니 몸이 굳었다.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하나뿐인 후계자를 잃은 거물의 분노를 자신은 홀로 상대해낼 수 있을까. 게다가 옆엔 에스델까지 있는데.
하지만 율리아의 두 다리는 생각과 달리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흔들리는 율리아의 눈동자를 두
여자가 만족스러운 듯 지켜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분명 무표정한데, 자신은 왜 그렇게
생각했지?
'읏!'
* * *
양탄자를 움켜쥔 손등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마력 폭주에 의해 거대한 창이 산산이 부서셨다. 바닥을
나뒹구는 바엘의 몸 위로 날카로운 파편들이 고스란히 떨어져 내렸다.
어디 네 마음대로 될까봐?
바엘이 비웃기 무섭게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저항하는 그의 육신에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마신은 자신의 보랏빛 마력을 바엘의 심장 안에 한껏 쑤셔 넣고 있었다.
'뭐라고?!'
죽음의 호수에서 잠시나마 육신을 빼앗겼던 게 문제였다. 원래대로라면 사념체 따위에게 밀릴 일은 없었을
텐데. 곁에 열쇠가 있어서, 그 작고 연약한 인간이 해를 입을까 봐.
"더 해보지 그래. 내가 네놈의 마력을 전부 흡수하면 다음은 어떻게 될 줄 알고, 응? 이미 북부에 고여
있던 마력 전부를 빼앗겼지 않나."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자신의 약점이었다. 그녀가 마계에서 떠나던 날, 자신은 애처로운 눈물에 홀려
마정석에게 몸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몸의 통제권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인간
소드마스터가, 마신의 또 다른 파편이 그것을 보았다.
마정석이 눈뜨는 순간, 그것을 집어삼키고 새로운 마신이 될 것이다. 마신이 죽어가며 바라던 일을 대신
해내겠다. 그리고 그것의 하찮은 계획을 우롱하듯, 가장 완벽한 죽음을 맞이하겠다.
바엘은 깨진 유리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파편이 살갗에 깊숙이 박혀들수록, 강제로 주입
당했던 이질적인 마력 또한 몸 곳곳으로 퍼져 녹아들었다. 새로운 힘을 얻은 피가 거칠게 날뛰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바엘에게 말려든다는 걸 깨달았는지, 무한히 주입되던 마력이 일순 단절됐다. 온몸을 날카롭게 저미던
통증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후우."
바엘은 처참히 헤져 걸레짝이 된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바엘, 다녀오셨어요?'
'피곤해. 쉬고 싶군…….'
* * *
레기온은 율리아가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반면 다른 이들은 나약한 그녀가 마계로 떠나기 전으로
돌아간 거라며 비웃었다. 폐궁에 갇혀서 멍하니 시간만 흘려보내던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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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화
장미궁에서 돌아온 직후 스트레스 수치는 998 까지 올라갔다. 극소한 차이로 스탯의 리셋은 막았지만
그뿐이었다. 이틀 내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죽은 듯 잠만 잤는데도 수치는 고작 3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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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상: 스킬 트리 최상단 오픈
그때, 근처에서 무언가 바스락대는 소리가 났다. 머리맡 탁자에 놓여 있던 쪽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율리아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스트레스 수치가 또 상승했다. 율리아는 시큰거리는 눈시울을 매만지며 곧장
쪽지를 펼쳤다. 급하게 휘갈긴 듯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나와 아가레스가 방법을 찾고 있단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버텨 주렴. 반드시 주군이 네 발밑에 엎드려
빌게 만들 테니까.]
레벤나의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고작 편지일 뿐인데, 이러다간 꼴사납게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율리아는 마구 손부채질을 했다.
널 돕지 못해서 미안해.]
한참이나 망설인 듯, 위와는 조금 다른 반듯한 글씨체로 레벤나의 편지는 끝났다. 율리아는 그 마지막
문장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자신이 버림받은 게 아니라는 걸 눈으로 확인하니까, 자신들의 인연을
끊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니까. 역시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아!"
역시 무력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찰나, 문밖에서 건조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율리아는 시선을
들었다. 결심이 섰으니 이젠 행동으로 나설 때였다.
"그런가요."
"언제……."
"오늘 밤입니다."
제안을 거절할 명분 따윈 없었다. 정계의 거물인 브랜틀리 악셀이 무려 자신의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를
연다는데, 주인공이 빠진다면 큰 구설에 오를 게 분명했다.
"네, 기대되네요."
"……."
"황녀 전하?"
"마음만 받을게요."
* * *
"……."
악셀 후작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 후작과 안면이 있다는 레기온에게 율리아는 그가 전쟁터로 끌려가게 된
전말을 털어놓았다.
'내 필적을 베껴서 네게 구해 달라는 편지를 보낸 사람, 네 답장을 가로채 내게 잘못된 시간과 장소를
전달한 사람이 바로 루슬란이었어.'
'…….'
의외의 말이었다. 율리아가 놀라서 고개를 든 찰나, 반대편에서 건너온 레기온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간 힘들었지."
"레기온……."
귀걸이와 목걸이는 드레스의 색채에 맞춘 투명한 물방울 다이아몬드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 가치를
산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알이 굵고 커팅이 섬세했지만, 그럼에도 단연 돋보이는 건 율리아의 가녀리고
사랑스러운 외모였다.
"저, 혹시 나 이상해?"
"……."
"레기온?"
"어? 어!"
율리아는 연회장으로 들어서기까지 긴 복도를 걸으며 못내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멍하니 멈춰 서서 자신을 힐끔거리는 것만으로도 창피했는데, 이젠 레기온마저 자꾸 눈을 피하거나
헛기침을 반복했다.
율리아와 레기온은 이윽고 연회장 입구에 섰다. 입구를 지키던 시종이 두 사람의 등장을 알렸다.
율리아는 역시나 싶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레스로 물 먹이려던 계획이 엎어진 탓인지 불참을 통보한
모양이었다.
"미색이 뛰어나면 뭐하나. 에스델 전하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힘없고 불쌍한 하녀들만 못살게 군다는데."
살면서 이보다 훨씬 심한 말도 수없이 들었다. 게다가 마계를 떠나면서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듯 괴롭다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그러니 저런 말 따윈 웃어넘길 수 있었다. 고작 뒤에서 수군거리는 게
전부인 사람들,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99 화
들으란 듯 크게 웃고 떠드는 소리에도 의연하게 대처한 덕분일까, 그녀를 손가락질하던 귀족들이 머쓱하게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명성 수치가 올라갔다.
'레기온은 의지하라고 말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부담을 줄 순 없어. 기사에겐 전우애가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악셀 후작에게 칼을 겨누라고 할 수는…….'
율리아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내를 뒤로한 채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레기온이 난처한
듯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후작을 비롯한 군 장성들에게 붙들려 버렸다. 다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
"앞서 다가온 남자들을 차갑게 내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신께 닿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지른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길."
율리아의 거절을 못 들은 척 넘긴 백작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화술이 뛰어나고 이성을 다루는 데 능숙한
자였다. 주변에서 그를 지칭하듯 들려오는 바람둥이, 난봉꾼 등의 단어가 신빙성을 더했다.
율리아는 여전히 그에게 붙들려 있는 손을 새초롬하게 꺼냈다. 이번엔 가브리엘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
"……."
율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사람이 거절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으면 물러나는 게 신사의 도리 아닌가.
"죄송하지만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요."
"혼자면 충분해요."
"길을 아십니까?"
그의 능글맞은 눈빛 탓일까, 숄에 가려진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사이 가브리엘의 용기에
힘입은 사내가 몇 더 다가왔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사내들 틈에서 율리아는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등 뒤에서 레기온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군 장성들을 마음대로 뿌리칠 수 없는 그처럼 자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전하, 잠시!"
등 뒤에서 가브리엘의 외침이 들렸지만, 다행히 지나가는 인파가 그의 움직임을 막아주었다. 율리아는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레기온에게 눈짓으로 신호만 보낸 뒤 먼저 마차에 들어가 있을 생각이었다.
놀란 율리아는 재빨리 시선을 들었다. 알레한드로 가브리엘이 와인을 뒤집어쓴 채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붉은 포도주의 색채가 알레한드로의 새하얀 성장과 대비되어 확연히 눈에 띄었다.
아니, 어쩌면 백작은 처음부터 수상쩍은 기류를 눈치채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리아와
눈이 마주친 그가 능글맞게 눈매를 휘었다.
가브리엘의 눈짓에 율리아는 시선을 내렸다. 치맛단 일부에 붉은 물방울이 튀어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가브리엘이었다. 쏟아진 와인의 대부분을 뒤집어쓴 탓에 새하얀 성장이 보기 흉하게 얼룩졌다.
"제 것도 쓰세요."
그를 지켜보던 율리아가 손수건을 꺼내든 순간, 인파를 헤치고 달려온 레기온이 율리아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정작 와인을 뒤집어쓴 이는 따로 있는데, 레기온은 그녀의 안위만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살폈다.
"아, 잠깐!"
백작의 외모는 확실히 뛰어났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외모를 무기처럼 다룰 줄 아는 부류의 사람처럼
보였다. 주변에서 하는 말에 선입견을 가져 부끄럽다고 생각한 게 바로 전이었건만, 유감스럽게도 눈에
보이는 증거가 무척 명확했다.
그동안 악셀 후작에게 양해를 구한 레기온이 시종장의 안내로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연회장에서
나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음악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쉿."
'아.'
순간 무언가에 생각이 미친 율리아가 멈칫했다. 그들은 호위가 아닌 감시 역이였다. 투구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녀의 짐작은 어느새 확신이 되어 있었다.
"어, 어쩌려고?"
"……."
"전하?"
100 화
"율리아?"
"사람들이 보고 있어."
자신에게 덧씌워진 나쁜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를
지경이었지만 율리아는 민망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고 레기온을 유혹적으로 올려다보았다.
"……."
"감당 못 할 텐데."
율리아가 보낸 무언의 신호를 알아챈 걸까, 레기온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채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나 만져 줘."
"어디, 여기?"
레기온의 어깨가 넓고 두툼한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얼추 가려 주었다. 율리아는 그의 품 안에서 스스로
허리 리본을 풀어 바닥에 스르륵 흘렸다. 레기온이 그녀를 도우려는 듯 드레스 단추를 푸는 소리를 냈다.
"빨리……."
율리아가 레기온의 허리에 다리를 감는 순간, 이윽고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시종장이 사람들을 물리고
문을 닫았다. 레기온의 어깨에 턱을 걸치고 있던 그녀는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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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상: 공략 대상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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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떠올린 율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은 시간은 30 분뿐이었다. 아까의 낯 뜨거운 연기로
번 시간이 고작 이 정도였다.
[▷SYSTEM
그녀는 고심했지만 결심까지 오랜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보조 아이템을 포기하기에 이번 퀘스트는 주어진
단서가 너무 부족했다.
악셀 후작저의 내부 지리도 모르고 조력자도 없으며 하다못해 생각할 시간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이를 악문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하아."
[▷SYSTEM
[▷SYSTEM
율리아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욕실을 나선 찰나, 침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부를
염탐하기 위해 문가에 귀를 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흑, 아파……!"
"정말인 것 같군."
"아앙, 으으응……!"
그때, 왜인지 명성이 떨어지더니 문밖의 인기척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게다가 고작 13 분 남았던 제한
시간이 무려 1 시간으로 늘어나기까지 했다.
"……."
시스템 창이 사라진 뒤, 그녀는 양손바닥을 느릿하게 들어 얼굴을 가렸다. 결과만 보자면
천만다행이었지만 그럼에도 차마 수습하기 힘든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어닥쳐 견딜 수 없었다.
[▷SYSTEM
* * *
온 저택을 헤매고 돌아다니다 우연히 도달한 곳이었지만 율리아는 쉽사리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음산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지척에 깔려 있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키마리스의 마기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끄아아아아악!!"
[▷SYSTEM
[▷SYSTEM
- 보상: 공략 대상 추가
나름대로 빠르게 저택을 뒤지고 다녔지만 그래도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았다. 율리아는 풀숲에서 나와 건물
벽에 조심스럽게 붙어 섰다.
"유성우."
"허억, 헉! 크아아아악!!"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 들어갈수록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기괴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가
사람이 아니라는 의심은 들지 않았다. 고통 섞인 비명 사이로 율리아를 저주하는 절규가 반복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사람이 내는 소리 같지 않아.'
"읏!"
"무슨 소리를……!"
"아……!"
샛노랗게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스르륵 돌아가 율리아를 응시했다. 커튼이 젖혀지며 모습이 드러난 건
루슬란뿐만이 아니었다. 율리아는 뒤늦게 제 옷에 걸린 커튼 자락을 떼어 냈지만 이미 늦었다.
"꺄악!"
"배, 백작님?!"
루슬란의 힘에 밀린 가브리엘이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율리아는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안전한
곳까지 물러난 뒤 유성우의 시위를 당겼다.
'타깃이 둘이라고?'
하지만 예상과 달리 화살 끝에 두 대상이 타깃팅 됐다. 하나는 루슬란의 오른쪽 반신을 잠식한 창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알레한드로 가브리엘 백작이었다.
"프로즌 애로우."
[▷프로즌 애로우
마력을 보유한 적 1 인에게 강력한 3 연속 공격을 쏘아 보낸다. 잔여 체력의 20%를 소모한다. SP 20]
[▷악몽의 창
공격 판정 -10%
공격 판정 -10%
공격 판정 -15%]
"전하, 방금 마나를……!"
율리아가 공격한 건 마력이 있는 키마리스의 창이었지만 그것과 합성된 루슬란의 신체도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고통스럽게 피를 토해 내면서도 다시금 몸을 일으켜 율리아에게 돌진했다.
"프로즌 애로우."
[▷SYSTEM
창이 사라짐과 동시에 루슬란이 창을 휘두를 때마다 검은 파동이 허공을 가르고 온 침실을 폐허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체력이 불안해졌지만 그렇다고 미션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녀가 다시금 시위를 당기려는 찰나, 백작의 스태프에서 맹렬한 화염이 터져 나왔다.
"인페르노!"
"허억, 전하! 나의 전하!!"
[▷SYSTEM
[▷SYSTEM
[완료]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복도 너머가 삽시간에 시끄러워진 탓이었다. 별채에서
벌어진 소란을 눈치챈 듯 수많은 발소리가 몰려들고 있었다.
"과연 그럴까요?"
"율리아?!"
"……."
* * *
그곳엔 악셀 후작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루슬란 악셀이 쓰러져 있었다. 신성 기사라는 이명에 어울리지
않게 신체 오른쪽 반절이 검게 썩어 들어간 끔찍한 모습이었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대로한 황제는 곧장 조사를 명했고, 이내 루슬란 악셀의 진짜 정체가 밝혀졌다. 그는
마족이 브에스드라에 심어둔 첩자였다. 기사로서 더욱 강한 힘을 갈구한 나머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이다.
졸지에 죄인으로 몰린 악셀 후작은 재수사를 강력히 요구했다. 누군가 저택에 침입해 루슬란의 육체에
억지로 마력을 주입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마도구를 이용한 감식 결과와 후작저에 근무하던 사용인들의 진술을 종합했을 때, 루슬란이 검은
마력을 지닌 고위급 악마에게 힘을 받은 정황이 명백해 보였다.
처음엔 그저 방탕한 바람둥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훤칠한 육체와 뛰어난 외모를 무기처럼 다루는 계산적인
사내라고 말이다.
'단지 맘에 든 여자의 환심을 사고 싶었을 뿐이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야. 최소한 포도주를 맞은
뒤에 크게 생색이라도 냈겠지. 하지만 백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날 감싼다고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별채에 몰래 숨어든 자신이 루슬란에게 공격당한 순간,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가브리엘이 악몽의 창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엔 마법사임을 나타내는 스태프가 들려 있었다.
102 화
'답답해.'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났는데도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막막하게 밤하늘을 올려다본 율리아의 귀에
레기온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냥……."
그에게 주어진 침실이 따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레기온은 줄곧 율리아의 곁을 지켰다. 연약하고 섬세한
탓에 쉽게 상처 입는 그녀가 너무도 위태롭게 느껴지는 탓이었다.
"화내지 마, 응?"
침대에서 스르륵 내려오는 소리가 적막에 찬 사위를 울렸다. 안 보는 척 하면서도 그녀가 움직이는 동선을
착실히 좇는 모양인지, 레기온은 그녀가 다가오는 반대편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
"후작가의 중정에 유폐되어 있더라. 악몽의 창 때문인지 에스델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나와
눈이 마주치니까 바로 달려드는데……."
"갈 거면 나도 데려가."
'이봐, 인간!'
'뭐가 문제야? 율리아가 원하는 일이잖아. 난 율리아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하겠다고 결정한 건 뭐든
하게 해 주고 싶다고. 그게 바로 내가 강해진 이유니까.'
마신의 탑에 올라가 바엘을 구하고 싶다고 부탁했을 때, 반발하는 키마리스에게 레기온은 말했다.
자신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고. 그것이 그가 강해진 이유라고.
그래, 처음엔 레기온을 말리려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남의 뒤에 숨기만 해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레기온의 자상함에 기대기만 할 순 없었다.
"나도 같이 가."
* * *
심지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밑창에 무언가 터지거나 찐득하게 들러붙는 감각이 느껴졌다. 본능적인
혐오감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아……."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합쳐도 감옥에 내던져진 루슬란의 몰골만큼 끔찍하지 않았다. 그 충격적인 모습에
율리아는 차마 시선도 돌리지 못하고 멍하니 굳어 버렸다.
악몽의 창을 파괴한 직후엔 오른쪽 상반신 정도만 까맣게 물들었었다. 하지만 이젠 몸의 거의 대부분이
썩은 듯 뭉그러졌다. 온몸을 빼곡히 뒤덮은 수포는 진물이 터져 번들거렸고, 벌겋게 드러난 새살
사이에선 또다시 액체가 끓듯 새로운 수포가 차오르고 있었다.
루슬란은 온몸에 차오른 수포를 견딜 수 없는지 손톱으로 긁고 또 긁었다. 하지만 그것이 터질 때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벌레처럼 몸을 뒤틀었고, 그렇게 살갗이 돌바닥에 긁히면서 되레 상처가 벌어지고
수포만 더 올라왔다.
"왜, 왜 이런 꼴이……."
"마력 부적응이야. 체내에 주입된 마성을 견뎌내지 못한 거지. 우린 예외적인 경우일 뿐, 대부분은
이렇게 되고 말아. 마력은 인간을 구성하는 마나와 상극이니까."
"날 알아보겠어요?"
"전하, 나의 전하……."
하지만 이젠 동정에 휩쓸릴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그녀는 배다른 자매처럼 목소리를 내리깔고 루슬란이
갇힌 철창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림자 속에 숨어 율리아를 지켜보던 레기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스스로를 창녀의 딸이라고
지칭하는 게 듣기 괴로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밑을 기는 루슬란을 내려다보았다.
"더한 짓?"
"당신은 평생 이해 못 할 거야."
"전하, 전하!"
비록 계기는 자신과 가브리엘 백작이 마련했을지 몰라도 그 우연을 십분 활용해 제가 원하는 상황으로
몰아간 건 다름 아닌 에스델 브에스드라, 루슬란의 주인이라고.
"그랬던 거야."
103 화
"……."
"율리아, 괜찮아?"
"전하, 전하!"
루슬란이 발버둥 칠 때마다 철창 틈에 끼인 수포가 우수수 터지며 찌걱찌걱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레기온이 붙든 율리아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루슬란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당신의 진짜 주인은 누구죠?"
"……."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 율리아는 유성우를 조준했다. 반짝이는 얼음 활이 루슬란의 미간을 똑바로 향했다.
"전하……?"
"나의 기사 루슬란."
"예, 전하."
"감사합니다, 나의……."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
* * *
'미안해, 미안해…….'
루슬란에게 활을 쏜 율리아는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숨소리가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의연하게 서서 죽어
가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사해처럼 드넓은 슬픔을 오직 속으로 눌러 삭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기온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위태롭게 선 율리아를 끌어안아 품에 가두고 싶었다. 그렇게 아파할 거면 차라리 자신에게 기대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 힘은 모두 율리아만을 위한 것인데, 자신의 주인이 바로 그녀인데.
'내가 약해서 미안해. 이젠 단단해질 거라고 했으면서 결국 또 흔들려 버렸어. 가슴이 너무 아파…….'
율리아는 숨이 끊어진 루슬란을 보며 스스로의 마음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루슬란을 죽인 이유조차 지극히
이타적이면서, 어쩌면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살인자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원죄처럼 여기고 있었다.
"……."
레기온은 율리아의 머리맡에 소리 없이 걸터앉았다. 창밖에서 들어온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희게 비췄다.
'나의 율리아.'
레기온의 손가락이 율리아의 입술에서 멈췄다. 충동을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동안 그의 손등에 우악스러운
핏줄이 불거졌다. 창백한 얼굴과 대조된 그녀의 입술이 자꾸만 각인되듯 시야에 박혔다.
친구를 자처하며 영원히 널 지키겠다고 속살거리면서도 사실은 율리아를 원하고 있었다. 마나를 넘긴다는
것도 전부 핑계였다. 그런 같잖은 이유를 들먹이며 그녀 곁에 맴도는 것이다.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기회를 찾아 끊임없이.
레기온의 커다란 어깨가 가쁘게 오르내렸다. 율리아를 보는 그의 시선에 타들어 갈 듯한 열기가 섞였다.
가장 뜨거운 불꽃은 푸른색이란 말처럼, 그의 안광이 새파랗게 번뜩였다.
레기온이 고개를 숙이자 뜨겁게 작열하는 호흡이 그녀의 입술 위에 떨어졌다. 하나가 된 그림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 * *
하지만 몰락한 악셀 가문의 이야기는 처음의 충격과 다르게 수면 아래로 빠르게 사라졌다. 다들 루슬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길 쉬쉬했고 꼭 그를 지칭해야할 땐 다른 표현으로 에둘러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과 관계없이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날씨는 쾌청했고 릴리궁 정원엔 계절에
맞는 꽃이 한가득 피었다.
"향기 좋다."
예쁘게 다듬어진 꽃밭을 걷던 율리아의 등 뒤로 묵직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꽃잎을 쓰다듬으며
생각 없이 물었다.
"……."
"백작님?"
"그……."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던 율리아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알레한드로 가브리엘이
능글맞게 윙크하며 성큼 다가온 탓이었다.
혼인 적령기에 들어선 보통의 영애였다면 분명 그의 수작에 흔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율리아는 타인의
진심을 믿기에 이미 너무 많이 상처받았다.
"진심이세요?"
"아, 예……."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율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가장 궁금했던 건 백작이 사용하는
마법에 대한 것이었다. 무려 키마리스의 마력을 막아 낼 정도의 실력자이면서도, 백작은 그것에 대해선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백작님, 그날 괜찮으셨어요?"
"기억합니까?"
"네?"
104 화
"나온 지 삼십 분도 안 됐는데?"
팔꿈치로 백작의 명치를 찍은 레기온이 해사하게 웃으며 율리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뒤도 돌아볼
새 없이 그에게 이끌려 자리를 옮겨야 했다.
"구해 주긴 개뿔. 허리에 치마만 둘렀다하면 발정…… 이 아니라 흥분하기를 밥 먹듯이 하기로 유명했던
놈이야. 내 말 믿어."
"아는 사이야?"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스태프를 소환한 백작이 레기온의 품에 갇혀 있던 율리아를 날름 낚아챘다. 아니,
정확히는 채 가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
"잠깐이면 돼."
레기온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백작의 목덜미를 꽉 붙잡고선 율리아를 자상하게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백작을 움켜쥔 그의 손아귀만큼은 흉흉하고 우악스러운 핏줄이 불거져 있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소파에 앉은 율리아를 향해 아론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뒤에는 레기온이 안광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굳건히 서 있었다.
"황녀 전하를 납치하려 한 것을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분이신지라 저도 모르게 그만."
"아론."
"경박이라니, 말이 너무……!"
"시끄러워."
"응."
"가브리엘 백작님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난 사람들 앞에서 망신만 당했을 거야. 그리고 어쩌면 루슬란과
싸우다 크게 다쳤을지도 모르잖아."
"화려?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레기온이 말을 고르는 동안, 풀죽어 있던 백작이 슬그머니 시선을 들었다. 율리아를 올려다보는 아론의
표정은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웠다.
"전 벌써 잊었는걸요."
"어……. 예?"
율리아는 속았다.
"네에."
율리아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족과 인간 사이에선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고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마법사는 마력이 아닌 마나를 다루는 술사라고, 그래서 소드마스터와 마찬가지로 대자연의 축복을
받은 자라고 들어 왔다.
그런데 아론은 본인이 쿼터이고, 마력을 상당한 수준으로 다루는 마법사이며, 그런 대단한 능력을 이용해
율리아의 뒤를 밟으려 한 것까지 술술 털어놓았다.
"내가 말했잖아."
그동안 율리아는 치열한(?) 몸싸움 끝에 아론이 가져갔던 손수건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도 같은
방법을 써서 릴리궁에 방문했다는 걸 들킨 탓이었다.
아론은 실망한 척 어깨를 늘어뜨리며 율리아의 팔찌를 은근슬쩍 빼냈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신기하군요. 율리에겐 마력이 통하지 않다니."
"그만. 하지 마."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레기온이 등받이 뒤에서 율리아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내려다보는 레기온의 안광에 새파란 독이 올라있었다.
"그래서 싫어?"
장미궁은 에스델이 기거하는 제 1 황녀궁의 이명이었다. 레기온이 낮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것이 신호인양
침실 벽에 별안간 작은 포탈이 생겨났다.
"또 봐."
"그래."
'난 좋은데.'
"악연이야."
"게브라는 도시가 있었어. 마계와 인접했으면서 드물게 마나의 기운이 강해서 군의 주요 거점으로 쓰였던
곳이야. 황족이나 고위 귀족들이 주로 주둔했는데, 악마 놈들이 힘을 끌어 쓰지 못하는 땅이니까 비교적
안전하다 판단한 탓이었어. 뭐든 절대적인 건 없는데."
후일 게브 섬멸전이라 불리게 될 전투는 비등하게 이어지던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야습당한 인계 연합군은 마군의 공격을 제대로 버텨내지 못했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
레기온은 가볍게 말했지만 그때의 상황을 상상한 율리아의 기분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의 레기온이
아론을 단지 다그치기만 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혼자 우는 이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자상한
사람이었으니까.
"율리아."
율리아는 그의 손을 꼭 붙들었고, 레기온은 그녀의 착각을 어떻게 알려야 좋을지 고심했다. 아론은
선입견이 문제가 아니라 정말…… 그렇기 때문이었다.
105 화
* * *
지하의 모습은 율리아가 떠날 때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수많은 화산 지대에 폭발이 일었고 지반은
붕괴했으며 별안간 내려친 천둥 번개가 대지를 불바다로 만드는 등 이상 현상이 속출했다.
아가레스를 필두로 한 72 악마는 처음엔 사태를 관망했다. 하지만 상황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고,
이대로는 종족의 존속이 위태로워질 거란 판단 하에 결국 직접 방어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잠깐 쉬지도 않으시고 밤낮 폭주하는 마정석에 맞서 싸우기만 하시지 않나. 눈앞이 암담하군.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아."
율리아가 지하를 떠난 시기와 겹쳐 마정석에 본격적인 폭주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탑 최상층의 봉인이
헐거워졌는지 악마성을 향한 공격이 퍼부어졌지만, 정작 공격 대상인 바엘은 무기력한 사람처럼 둥지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폭주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결국 지상으로 향하는 입구가 뒤틀려 인간들이 사는 접경지에 마물이
출몰하기 시작했을 때, 바엘은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마정석을 파괴시킬
기세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정석의 폭주는 열쇠가 지하를 떠난 것과 관련이 있어. 그렇다면 주군께서 열쇠를 추방한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되지 않나."
처음엔 그저 타이밍이 비슷했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가던 악마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정석에 의한 폭주가 점점 갈수록 지하 동쪽으로 집요하게 집중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가레스가 끼어들자 레라지에의 눈초리가 금세 뾰족하게 섰다. 아무리 신경이 날카로워졌다지만 도발도
서슴지 않았다. 율리아가 지하로 내려오기 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조소하는 바르바토스조차 율리아가 만들어 낸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툭하면 싸움이 일고 누군가 일상처럼 죽어 나가던 마왕성에 처음으로 찾아온 평화였다.
'이해가 안 되는군. 마신은 마계를 창세한 뒤 그 역할을 다하고 영면에 들었다. 그런데 이제 와
부활이라고?'
'마족은 타고나길 이기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존재들이지. 그런데 그 아비라고 다를까? 스스로를 썩은
거름으로 삼아 다른 존재를 꽃피우기를, 과연 지하의 어느 누가 바랄까.'
군단장을 도발해 놓고 고작 말싸움으로 끝나다니 참으로 하찮고 평화로운 해결법이었다. 또다시 느껴지는
열쇠의 흔적에, 바르바토스는 뻣뻣하게 당기는 목덜미를 주물렀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또 싫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키마리스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마계 서쪽으로 향한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후일 주군이 질책하거든 그녀가 막아 주기를, 바르바토스는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다.
* * *
황도 아벨딧심에 땅거미가 어둑어둑 스러져 갔다. 하지만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에스델의 일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일을 위해 후계자로서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피곤을 느낄 틈이 없었다.
"다음 가져와."
"예, 전하."
"최근 인계에 마물이 잇따라 출몰하고 있습니다. 내륙까지 들어온 건 아니지만 변방의 피해는 제법
심각하다고 합니다. 특히 큰 피해를 입은 변방 국가들에서 저희와 엘고스 측에 중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중재?"
보좌관은 말없이 고개를 숙임으로써 주인의 말에 긍정했다. 에스델은 신하가 내민 서류를 눈으로 훑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다급한 모양인지 웬만해선 사용하지 않을 노골적 표현의 사용까지 서슴지 않았다.
"힘을 독점하지 말라? 브에스드라와 엘고스에 소드마스터가 있는 건 맞지만 그들이 어디 물건처럼 다룰 수
있는 존재던가? 주인의 숨통이나 물지 않으면 다행인 것을."
"그래?"
에스델의 불쾌감을 읽은 보좌관이 나직이 덧붙였다. 원한다면 무슨 죄목을 붙여서든 처형시킬 수 있다는
속뜻이 담겨 있었다.
에스델은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상아를 깎아 만든 유려한 디자인의 만년필이 춤추듯 부드러운 선을
만들어 냈다. 율리아의 이름을 쓸 때조차 그녀의 필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누구나 예상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황족과 마부는 끌어내어져 죽임 당했으며 말과 마차는
강탈당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면 자신이 이렇게 되새길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분노에 눈먼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니까 말이다.
106 화
마차를 탈취한 빈민들은 당장의 추위를 해결하기 위해 최고급 오동나무를 싸구려 장작처럼 불에 태웠다.
천금준마는 한낱 고깃덩어리가 되었으며 보석은 잔뜩 상처 나고 깨져 가치를 잃었다. 그것들의 원래 값을
합치면 빈민촌의 모두가 한 계절을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였는데 말이다.
"증오하는 마족에게 빌붙은 계집이 눈앞에 있는데, 그들이 과연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드레스나 장신구 따위로 물 먹이려던 것은…… 이쪽의 패배였다. 결과가 너무 명백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나도 진심이야."
* * *
비 내리는 창밖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던 율리아는 모처럼 찾아온 방문객에 고개를 들었다. 잉그렘 5 세의
명령을 가져온 사내는 그녀의 시선을 받자 말없이 묵례했다. 그러곤 일언반구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설마 지금 바로 말인가요?"
"예."
레기온이 곁에 없어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마계로 내려가기 전에도 황제의 얼굴을
본 횟수가 손에 꼽았다. 그조차도 늘 모욕당하기 일쑤였으니, 이번에도 좋은 일로 부르는 건 아닐 터였다.
"예, 전하."
자신은 지금 마왕 바엘의 총희로서 고국에 방문한 것이었다. 누군가의 시중을 받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여야만 했다. 어색함에 몸이 굳을 때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가 레벤나라고, 평소처럼 옷을
골라 주는 것뿐이라고 끊임없이 암시를 걸었다.
그렇게 드레스 룸으로 걸음을 옮기던 율리아가 멈칫했다. 어느새 고개를 든 보좌관이 그녀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납득한 사람처럼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전하."
* * *
"콜록, 콜록!"
"전하, 괜찮으십니까?"
폐병은 전염력이 강하고 제대로 된 치료법도 없어 걸리면 사실상 죽는다고 보아야 했다. 율리아가 입을
가린 손수건에 피는 묻어 있지 않았지만 보좌관은 선뜻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날카로운 빗소리가 귓가에 생경하게 울리고 차가운 빗방울이 온몸을 아프게 때렸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었다.
율리아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문 바로 그때, 가녀린 어깨를 때리던 빗방울이 갑자기 멎었다. 이국의
복장을 한 험상궂은 사내가 그녀의 머리 위에 커다란 우산을 드리웠다.
"겸손할 것 없소만."
갑작스럽게 시스템 창이 떠오르고, 엉겁결에 고개를 든 율리아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사막계 특유의
구릿빛 피부와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얼굴의 반을 가린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당신의 가족을 조심하시오. 잉그렘 5 세와 에스델 브에스드라. 그들은 당신을 이번 사태의 희생양으로
몰아갈 생각인 듯하니."
"도망칠 생각이 있다면 우리가 도와주겠소. 타국에도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도 있소."
자우하르인의 말대로였다. 자신의 등 뒤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것을 피부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 * *
율리아는 비바람을 뚫고 가까스로 황제 궁에 도착했지만 벌써 한참을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황제는 먼저 와 있던 에스델과 식사가 한창이었다. 지각 탓이라고 하기엔 테이블 위의 모든 음식이 딱 2
인분씩만 준비되어 있었다.
젖었던 몸이 마르며 뼛속까지 한기가 스몄다. 온몸의 관절이 조각조각 마비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율리아가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처럼 치이며 휘청이는 동안에도 사이좋은 두 부녀는 담소를 나누며
경쾌하게 웃었다.
그녀가 선 발치에 어느새 물웅덩이가 고였다. 두피를 타고 뺨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물방울의 감각이
섬뜩했다. 의연하게 버텨 보려 했지만 이젠 한계였다. 율리아는 마침 지나가는 시종을 붙들었다.
"저기, 수건을……."
율리아는 담담하게 시선을 내렸다.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그녀가 스스로를 변호해선 안 됐다.
황제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뿌득, 황제의 어금니가 갈렸다. 율리아의 의연한 태도가 맘에 들지 않기라도 했는지, 그가 테이블을
거칠게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송구합니다."
나를 마계로 보낸 건 다름 아닌 당신이었으면서.
107 화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려왔다.
"하지만 폐하의 말씀대로 저는 마왕의 유일한 총희입니다. 바엘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된 유일한
인간이요, 그를 마신으로 만들 단 하나뿐인 열쇠입니다."
"……."
주변에 꿇어앉아 있던 하인들이 경악성을 삼키며 숨을 들이켰다. 아버지의 등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에스델은 제법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었다.
그리고 황제는, 율리아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숨소리는, 마치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거칠게 들끓었다.
짜악, 짝! 율리아의 뺨에서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울렸다. 애써 버티던 그녀가 바닥에 힘없이
나동그라질 때까지 황제는 율리아의 가녀린 뺨을 쉴 새 없이 내리쳤다.
"읏……."
황제는 율리아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강제로 꿇어앉혔다. 율리아의 입에서 작은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차게 식은 무릎이 얼음장 같은 대리석 바닥에 짓눌리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죄하지 않았다. 전처럼 이유도 없이 잘못했다고,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비참하게 울며
빌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아프고 두려웠지만, 한편에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해방감이 차올랐다.
"……."
처절한 폭력이 이어졌다. 황제는 율리아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휘어잡고 반대쪽 손으로 퍽, 퍽 돌
깨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그녀의 머리통을 마구 내리쳤다.
황제는 율리아의 얼굴을 뭉개 버리겠다 호언장담했으면서도, 마왕의 분노가 두려운 모양인지 따귀 때리던
것을 멈추고 대신 얼굴을 피해 주먹질을 퍼부었다. 그녀는 쓰러지지도 못하고 황제의 화를 고스란히 받아
냈다.
언제 끝날지 모를 폭력이 빗소리에 뒤섞여 떨어져 내렸다. 차라리 빌라고, 근처에 꿇어앉은 누군가가
애타게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바마마."
율리아의 턱밑에 선혈이 뚝뚝 흘러내릴 쯤에야, 자리에서 일어선 에스델이 황제의 발밑에 읍소했다.
두 부녀는 화려한 대리석 바닥에 피 웅덩이를 만들어 내는 율리아를 본체만체하며 살가운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깔딱깔딱 위태로워지자, 그들의 표정 역시
귀찮다는 듯 변했다.
주저하는 사용인들을 대신해 에스델이 재차 나섰다. 또각또각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거대한 홀을 울렸다.
"……."
에스델은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율리아를 우악스럽게 붙들어 일으켰다. 평소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지라 사람 하나 억지로 일으키는 건 어린애 팔 비틀 듯 쉬운 일이었다.
"아, 그리고."
* * *
만약 그 광경을 목도한 자가 있다면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인간들에겐 그만큼
이질적이고 비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바엘은 푹 젖은 앞머리를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허공에 드러난 그의 미간이 불쾌한 듯 구겨져 있었다.
퍼붓는 비에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인간들의 더러운 감정에서 비롯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사위가 조용했지만 어차피 그들의 목적지는 이곳 브에스드라 황성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피 냄새……."
코를 스치는 달큰하고 유혹적인 향기에 그의 안광이 붉게 번뜩였다. 바엘은 다시금 날개를 펼쳐 어디론가
홀린 듯 날아갔다.
새하얀 건물 앞자락에 다홍빛 시클라멘이 만발했다. 하지만 방금 느꼈던 그 전율할 듯한 향기의 정체는
고작 꽃 따위가 아니었다. 어느 발코니에 내려앉은 바엘의 앞섶에 선명한 윤곽이 드리웠다. 아까보다
더욱 짙어진 체향이 굳게 선 이성을 무너뜨릴 듯했다.
차가운 빗줄기가 바엘의 머리 위로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 팽팽하게 선 근육을 타고 흐르던 물방울들이
움푹 패인 장골에 잔뜩 고여 들었다.
창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바엘은 굶주린 개처럼 서둘러 그것을 밀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어쩌면 배신자를 쫓는다는 이유조차 처음부터 핑계였을 수도 있었다.
"……."
하지만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정신없이 고여 들던 욕망 위로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파괴욕이 한겨울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어째서. 누가 감히……."
율리아를 안아 들려던 바엘은 이도저도 못하고 굳어 버렸다. 고개가 들린 순간, 율리아의 양쪽 코에서
맑은 피가 줄줄 흘렀다. 뇌수 섞인 피. 어떻게 보아도 그녀는 죽어 가고 있었다.
텅 빈 둥지를 보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가녀린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와도 흔들리지 않았다. 침대
옆자리 가지런히 놓인 얇디얇은 네글리제를 보면서도 이것이 너였으면 좋겠다 상상하지 않았다. 결코
그러지 않았다.
108 화
"일어나."
그는 율리아에게 입 맞추며 붉은 마력을 넘겼다. 그녀의 육체가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자 방해되는
네글리제를 찢어 내고 심장 위 붉은 각인에 손바닥을 눌렀다. 파지직, 제대로 흡수되지 못한 마력이
사방으로 튀며 섬뜩한 파열음을 냈다.
"눈 뜨고 나를 봐."
축 늘어진 그녀의 목덜미를 받치고 일으켰다. 병든 닭처럼 힘없이 무너진 고개가 바엘을 불안하게 했다.
이곳이 마나의 땅이기 때문일까, 지하에 있을 때처럼 마력이 쉬이 먹혀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해진
끔찍한 폭력의 흔적을 볼 때마다 바엘의 눈앞이 분노로 들끓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팔꿈치를 받치고 다시금 입술을 겹쳤다. 피비린내 나는 혀를 애타게 얽으며 마력을
꾸역꾸역 넘겼다. 그녀가 힘겨워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바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부어버린 입 안 점막을
부러 샅샅이 훑었다.
"꿈, 이겠지……."
뜨겁고 집요한 기운이 율리아의 속을 울컥 헤집었다. 그녀에겐 어느새 익숙해진 감각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필요 없어진 자신에게 바엘이 찾아올 리 없었다.
"왜 나를 버렸어요?"
황제궁을 나서며 정신을 잃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잠깐 의식이 들었고, 완전히 눈을 떴을 때 자신은
릴리궁 침실에 홀로 돌아와 있었다.
맞은 곳들이 불붙은 듯 아프고 쓰렸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았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항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후련함까지 느껴졌다.
황제나 에스델의 발밑에서 비참하게 기거나 때리지만 말아 달라고 비굴하게 애원하지 않았다. 남들은 뭐라
비웃을지 몰라도 자신에겐 그것만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
"모두가 나를 버릴 거야. 난 쓸모없고 무가치한…… 그런 존재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이상해졌다.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 견딜 수 없었다. 자꾸만
구역질이 나고 시야가 어지러웠다.
"아파, 흑, 아파……."
"안아 주세요."
"나를 원하나?"
"……."
"거짓말."
자신을 버린 이에게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수치스러웠고, 어차피 환상뿐일 존재에게 수치심을
느낀다는 게 또 비참했다. 그럼에도…….
"바엘."
한참을 망설이고 또 망설이던 율리아가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은 찰나, 차게 식은 그녀의 몸 위로 사내의
커다랗고 단단한 몸이 겹쳐들었다. 그가 정말로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절절 끓는 열기가 맞닿은
피부로 녹아들었다.
'아아, 내가 결국 미쳤구나.'
잠깐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지만 이내 중요치 않다고 느꼈다. 사내의 뜨거운 손이 그녀의 작달막한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두툼한 손바닥에 율리아의 두 봉우리가 전부 잡혔다.
"아, 흑!"
"다리 벌려."
"힘이, 안 들어가요……."
그것을 보던 사내의 안광에 살의와 분노가 다시금 부글부글 들끓었다. 하지만 율리아가 그것을 알 방법은
없었다. 제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무릎에 온 신경을 빼앗겨 버렸다.
"어디에요?"
"내게서."
"……."
자꾸 말대꾸하는 그녀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허벅지로 율리아가 다리를 다물지 못하도록 단단히 막고
두 손가락을 차츰 밀어 넣었다. 내부는 여전히 비좁았지만 이번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조금 젖은
점막이 쫀득하게 조여들었다.
"흑!"
"아픈가?"
"으음……."
율리아의 굳은 얼굴이 일순 사르르 풀렸다. 아무리 꿈이고 환상이라도,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벌려."
바엘의 혀끝이 율리아의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간지러워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밑에서 찌걱대는 손가락에
놀라 작은 비명을 질렀다. 두 손가락이 점액으로 미끈거리는 내벽 안에서 가위질하듯 교차됐다.
"옳지."
찔꺽찔꺽, 마찰당한 점막에서 미묘한 열감이 타고 올랐다. 동시에 줄곧 잠잠하던 그녀의 심장 위 각인이
파르르, 희미하게 빛을 냈다.
그것을 본 바엘은 갈급하게 허리끈을 풀고 로인클로스를 내던졌다. 진즉부터 액이 번들거리던 페니스가
반사적으로 튕겨 나왔다. 팔뚝만 한 그것은 시퍼런 핏줄을 흉흉하게 곤두세운 채 배꼽까지 바짝
올라붙었다.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방증했다.
"아, 아앙……!"
그는 말없이 선단을 맞추고 허리를 쳐 올렸다. 금세 오그라들었던 질구가 머리부터 꿰뚫는 둔기에 맞춰
빠듯하게 팽창했다. 액이 질척하게 고여 있던 주름이 펼쳐지며 강제로 욱여넣어진 것을 쫀득하게 조여
댔다.
"꺄읏……!"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도리질 쳤다. 파도 같은 쾌감이 등골을 선뜩하게 내려치며 온몸의
말초까지 밀어닥쳤다.
"아흑, 흑, 끅, 끅!"
"후우, 힘든가?"
"좋아서 죽을 것 같단 말이지?"
"나아, 끅, 이제……."
자신의 애원을 귓등으로 흘리는 바엘에게 저항하듯 율리아의 하복부가 바르르 경련했다. 바엘은 황홀감에
젖어 시선을 내렸다.
찔꺽찔꺽, 흘레붙은 둘의 하복부에 물이 질척하게 튀었다. 모양새가 뚜렷한 귀두는 비좁은 질벽을 긁어
내고 빠져나올 때마다 흰 포말을 일으켰다. 선액이 회음부를 타고 엉덩이골 밑으로 툭툭 떨어지는 통에
벌써 시트가 흥건하게 물들었다.
109 화
"하악, 하아……!"
내벽을 쑤시던 페니스의 기세가 썩 너그러워졌다. 무게를 실어 사납게 찍어 내리던 움직임이 뭉근하고
질척해졌다. 사정없이 흔들리던 율리아는 그제야 날카로운 비명 대신 달큰한 신음을 흘렸다.
"누가 너를 그리 만들었지?"
날이 저물어 둥지에 들어갈 때마다 넓은 침소에 온통 짜디짠 눈물 냄새가 풍기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녀는 드넓은 사해 같은 슬픔을 그 작은 몸 안에 온전히 가두고 또 가뒀다.
"읏!"
그를 올려다보던 율리아의 눈매에 그렁그렁 눈물이 들어찼다. 자상한 소리 한마디 듣지 못했지만, 자신을
보는 바엘의 눈빛 속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전해지는 감정이, 이상하게도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그렇게 몇 번이고 다짐하며 단단히 세워 둔 둑이 슬금슬금 무너져 내리려고 한다. 꿈에서라도 이토록
소중한 사람처럼 대해지니까.
새벽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어두운 것들의 시간이 결국 끝나 간다. 바엘은 희게 비치는 샛별을 날개를
펼쳐 가로막았다.
"……."
"율리아."
그녀는 어느새 가벼워진 다리로 바엘의 허리를 꼬옥 감쌌다. 바엘에 비하면 아주 작은 힘이었지만, 그는
천근 바위에 떠밀린 듯 그녀의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아아!"
"크윽……."
* * *
"으응……."
"숨어서 여기까지 오느라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그래도 잘 참았으니까 파이몬 칭찬해 줘!"
파이몬은 제 머리통을 율리아의 목덜미에 마구 문질렀다. 복슬복슬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도통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가슴 위에서 신나게 뒹구는 파이몬은
둘째치더라도 레기온과 그 옆의 키마리스까지 전혀 대수롭지 않은 듯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율리아는 머뭇머뭇 상체를 일으키려다 또 한 번 놀랐다. 탁자 위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멍 하나 없이
말끔했다. 피고름이 줄줄 흐르던 두피도 멀쩡했고 지독한 구역질과 두통도 씻은 듯 나았다.
황제에게 머리를 맞은 이후부터 모든 기억이 드문드문 끊기다가 초저녁 이후부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이 죽어서 꿈을 꾼다고 믿는 편이 훨씬 현실성 있을 것 같았다.
"율리아."
"황궁을 둘러싼 항마 수식이 완전히 파괴되어 있더군요. 원래는 파이몬만 마력구에 봉인시켜 들여보낼
계획이었는데, 덕분에 저까지 함께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율리아는 문득 자신의 상처가 회복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파이몬은 사계왕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마력을
지녔으니 그가 자신을 고쳐 준 게 분명해 보였다.
상대는 악마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린 아이에게 보여줄 만한 꼴은 아니었을 거다. 율리아는 힐끔 시선을
내린 그때, 레기온이 이상하다는 듯 덧붙였다.
하지만 그녀를 말갛게 올려다보는 파이몬의 눈빛엔 어떤 괴이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레기온과
키마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율리아는 그들이 어제 낮의 일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누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율리아의 앞에서 티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가 말해 줄 생각이 없다면
이쪽에서 직접 알아내고, 필요하다면 뒤에서 처리하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 * *
10. 돌아가야 할 곳
이에 대책을 논하는 회의가 아벨딧심에서 열렸다. 사안이 얼마나 시급했는지, 브에스드라와 사이가 썩
좋지 않은 엘고스마저 사람을 보내 왔다.
"아프지 않습니까?"
감시자가 없으니 움직이기 한결 편해진 그들은 인간이 떠난 빈자리를 대신해 율리아의 주변을 세심하게
돌봤다. 주변 이목을 피해 몰래 오가던 아론조차 이젠 대놓고 마법을 써 가며 릴리궁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110 화
하지만 율리아는 그 또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 회의의 진짜 내막과 황가의 속셈,
그리고 해외 귀빈들의 반응까지 모두 면밀히 조사해 물어다 나른 게 바로 그였다.
'당신의 가족을 조심하시오. 잉그렘 5 세와 에스델 브에스드라. 그들은 당신을 이번 사태의 희생양으로
몰아갈 생각인 듯하니.'
때마침 마족에 대한 증오가 불거진 상황이었다. 사태가 심각해질 경우, 마왕의 여자인 그녀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율리의 부탁인데 두말하면 잔소리죠. 알아내는데 제법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었어요.
이게 터지면 브에스드라 황가의 이미지는 바닥까지 떨어질 겁니다. 이걸 눈치챈 게 대단하네요."
루슬란의 죽음 이후, 율리아는 줄곧 한 가지 의문을 가져 왔다. 어쩌면 황제는 에스델을 경계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가장 사랑했던 황후의 하나뿐인 딸을 말이다.
'…….'
그때의 루슬란은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자신을 에스델로 착각하고 있었으면서, 그녀가
진짜 주인이라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제 마지막을 예견했기 때문일까, 사랑하는 여인에게 차마
거짓말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을 율리아는 이해했다.
"율리, 죽은 황후는 뛰어난 정치인이었어요. 귀족원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고 백성들도 그녀를 사랑했죠.
그에 반해 잉그렘 5 세는 무늬만 황족일 뿐 실상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어요. 황제에겐 실질적인 힘이
없었어요."
"설마……."
"황제는 황후의 뛰어난 능력을 질시하고 경계했습니다. 황후를 아내가 아닌 경쟁자로 보았죠."
아이러니였다. 아론의 말을 종합하면 황제는 황후를 사랑하기커녕 눈엣가시처럼 여겼다는 소리가 되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딸인 에스델조차 그런 식으로 여겼다는 뜻인데…….
"그리고 이건 위험한 발언일 수 있지만, 아무래도 황후의 죽음이……. 아뇨, 아닙니다. 지금 황후궁의
옛 시녀들을 찾고 있으니 좀 더 정확해지면 말씀드리죠."
그들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만 있던 레기온이 아론의 정수리를 꽉 움켜쥐었다. 게다가 파이몬은 양손에서
불덩어리를 저글링하고, 키마리스는 율리아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서며 동공을 세로로 가늘게 좁혔다.
* * *
회의 시작을 목전에 둔 시각, 복도에 서 있던 수많은 인파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율리아와
레기온이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율리아, 차라리……."
[▷SYSTEM
[▷SYSTEM
- 보상: 스킬 트리 최상단 오픈
율리아에겐 그간 명성을 올릴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작은 단위로 오르내리던 수치는 황제에게
불려가 속절없이 맞은 날을 기점으로 빠르게 추락했다.
"레기온……."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입장하며 빈자리가 채워졌다. 이제 곧 회의가 시작될 분위기였다. 긴장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이윽고 황제와 에스델이 입장하며 회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각 국가에서 내놓은 해결책은 역시나
지지부진했다.
"브에스드라와 엘고스는 인계에 존재하는 유이한 제국으로서 책임을 다해 주십시오! 언제까지 외면만 하실
작정입니까?!"
"하오나……!"
에스델의 한 마디에 들끓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율리아는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레기온도 그것을 느꼈는지 율리아의 등 뒤로 바짝 다가와 섰다.
111 화
"하지만 여러분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면 기껏 여러분을 모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자리에서 일어선 에스델은 좌중을 한 번 훑었다가, 이윽고 맞은편에 앉은 배다른 동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율리아?"
사람들에게 인정받겠다고 마계의 상황을 모조리 털어놓을 순 없었다. 악마들은 자신을 믿었기에 그들의
사정을 거리낌 없이 알려 주었을 것이다. 마치 동족처럼. 그런 그들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율리아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한계선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붉은 마력은 마계에서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힘이라 일컬어집니다. 그것을 지닌 바엘은 명실상부한
마계의 지배자이며, 마족들도 그런 그를 진심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바엘이 세운 질서에
불복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이 누굽니까?"
예상대로 율리아에게 맹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녀가 입을 열지 못할 정도로 원색적이고 모욕적인 욕설이
날아들었다. 삽시간에 끓어오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몇몇은 어리둥절해하며 헛기침을 반복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여러분의 말씀대로 마왕에게 거역하는 존재가 이런 사태를 만들어 냈습니다. 변방의 마물 출몰은
마왕성과 전혀 무관합니다."
"지금 정치가 장난인 줄 알아?! 어린애 소꿉장난인 줄 아느냔 말이야! 폐궁에 줄곧 갇혀 있었다더니
머리가 제대로 돌아 버렸어!"
등 뒤에서 레기온이 씨근덕대는 소리가 들렸다. 회의장은 무기의 반입이 불가했지만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레기온은 단지 마나만으로 소울 소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율리아?!"
"이게 지금 무슨 소리요!"
소드마스터에 근접한 기사들도 운이 나쁘면 하루를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죽는 곳이었다. 집채만 한 대형
마물이 수시로 출몰해 인간을 공격했고, 흙과 대기에 지독한 마기가 들끓어 먹을 것을 하루만 방치해도
짙은 마성을 띠었다.
"듣자 듣자 하니 반편이에 앞잡이, 심지어 창녀라고? 종전을 대가로 율리아가 어떤 희생을 치러야 했는데!
네놈들이 어떻게 그걸 잊어?!"
결국 참다못한 레기온이 율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엔 성스러운 빛을 내뿜는 소울 소드가 들려
있었다.
그가 무기를 듦으로써 금제가 깨어졌다. 요인을 지키던 각국 기사들도 일제히 무기를 빼 들었다. 비록
소드마스터에 비할 순 없을지라도 기사들에겐 각자의 국가를 향한 신념과 충의가 있었다.
"레기온!"
"너, 결국엔 저런 하찮은 인간들 구하겠다고 네 목숨 갉아 쓰겠다는 거잖아. 나한테 어떻게 이래. 네가
날 구하겠답시고 마수정 앞에서 죽어 갈 때, 그때 내 억장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생각 안 해? 널 사랑하는
내가!!"
"무슨……."
널 사랑하는 내가.
"레기온."
"어, 언제부터……."
자신은 그에게 친애의 정을 주었다. 하지만 사랑과 우정은 명백히 다른 감정이라 그가 바라던 것과는 한참
멀었을 테다. 결국 자신이 레기온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회의장 내 수많은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무언가 단단하고 푸른 벽에 가로막힌 듯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상 2 황녀와 소드마스터가 서로 갈등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애매하게 대치하던 그때, 갑자기 발밑이 진동하더니 날카로운 뿔 고동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큰일입니다! 당장 대피하셔야 합니다!!"
"항마 수식은 어떻게 된 겁니까! 브에스드라 황궁엔 마력의 이동을 원천 차단하는 항마 수식이 걸려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것이……."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 혼자만 아프다고 착각해서, 지독한 자기 연민에 매몰되고 침잠되어 눈앞에
멀쩡히 보이는 사실을 외면했다. 이전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레기온과 바엘은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런 나 때문에.
불현듯 찾아온 책임의 무게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저 울고만 있을 순 없었다. 이제껏 미뤄 온 대가를
지금이라도 치러야 했다.
"커맨드, 유성우."
지금쯤이면 파이몬과 키마리스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을 터였다. 그들이 생판 모르는, 게다가
율리아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한 인간을 지켜 줄 리는 없으니 이쪽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맡는 수밖에
없었다.
"응."
"내가 함께 가겠소."
"잘 부탁드려요."
게다가 그것들에게 마력을 공급하기 위함인지 사방에 짙은 마기까지 깔려서, 아직 낮임에도 한밤중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시야가 어두웠다.
[▷멀티 스나이핑
마력을 보유한 적 다수를 추적해 공격한다. 스탯 'SIGHT'의 영향을 받는다. 잔여 체력의 30%를
소모한다. SP 30]
스킬이 장전되자 그녀의 시야에 수많은 타깃이 일제히 잡혔다. 그녀의 SIGHT 수치가 절대적으로 높기
때문일까,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는 마수까지 모조리 포착됐다.
율리아의 기척을 알아챈 마물들이 덤벼들기 전, 그녀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동시에 하늘에서 수많은
유성우가 떨어져 내렸다. 눈부신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SYSTEM
타깃이 모두 처리되었습니다.]
"이제 된 건가?"
사방에서 경탄이 터져 나왔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디선가 생겨난 마물이 빈자리를 삽시간에
메웠고 하늘은 다시 새까맣게 물들었다. 마물을 몇이나 죽이든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의 스킬이 마물을 제대로 유인했다는 점이었다. 성 밑에서 들려오던 비명 소리가
점점 사그라졌다. 주변의 기사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일제히 율리아를 보호하고 섰다.
"저쪽이에요!"
율리아가 가리킨 방향으로 자우하르인들이 호기롭게 나섰다. 사막의 전사들은 긴 사슬에 매달린 차크람
형태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그동안 율리아는 스킬을 장전하지 않은 일반 공격으로 하나씩 마물을 맞춰 나갔다. 유연히 활시위를
놓쳤다가 체력 소모 없이도 공격이 먹힌다는 걸, 즉 평타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잠깐, 다들 멈춰!"
하지만 희망적인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목적지였던 폐궁은 이미 마물에게 점령당한 뒤였다.
그곳에 도사리고 있던 수백 마리 마수가 모두 율리아를 향해 몰려들었다.
"멀티 스나이핑!"
…
[▷SYSTEM
타깃이 모두 처리되었습니다.]
일행에게 달려든 마물의 반절이 율리아의 대단위 스킬에 휩쓸려 죽었다. 하지만 타깃팅 범위 바깥에 있던
나머지 반은 여전히 살아남아 인간들에게 달려들었다. 율리아는 즉시 스킬을 시전했지만 발동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으아아악!!"
방어진이 무너지며 기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한 바로 그때였다. 마물과 대치한 인간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강력한 화마가 휘몰아치더니 뒤이어 주변을 에워싼 마물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율리아!!"
"율리아, 이쪽입니다!"
"율리아, 괜찮으십니까?"
"키마리스 님."
"마계에 연락을 넣느라 늦었습니다. 아가레스가 마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전까진 이
목걸이를……."
[▷SYSTEM
유성우와 마력구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활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활 표면에 길게 파인 홈에서 은은한
붉은빛이 퍼져 나갔다. 투명하던 유성우가 붉게 숨 쉬었다.
[▷SYSTEM
제한 시간 59 분 59 초]
그것을 보던 키마리스가 마치 고해하듯 속삭였다.
율리아가 등에 올라타자 파이몬이 엎드렸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한참이나 멀어진
지상을 그녀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따르던 기사들이 악마인 키마리스를 일원으로 받아들이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우리도 이만 가자."
[▷멀티 스나이핑
마력을 보유한 적 다수를 추적해 공격한다. 스탯 'SIGHT'의 영향을 받는다. 잔여 체력의 30%를
소모한다. SP 30]
아까보다 더욱 넓은 범위로 무수히 많은 대상이 타깃팅 되었다. 스킬 시전으로 대규모 이펙트가 휘몰아친
직후, 눈앞이 희게 암전될 정도로 수많은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타깃이 모두 처리되었습니다.]
알림을 기다릴 시간도 부족했다. 율리아는 시스템 창을 완전히 꺼 버리고 허공을 향해 무작위로 스킬을
발동했다. 거대 이펙트가 지상에 몇 번이고 내리꽂혔다.
"율리아, 저기 좀 봐! 문이 열렸어!"
[▷비정상적 포탈]
[▷HP 100%]
시스템 창을 복구시키자 율리아가 그것을 처치해 주기 바라는 것처럼 체력 바가 떠올랐다. 그녀는 스킬을
교체한 뒤 유성우의 시위를 장전했다.
"프로즌 애로우."
[▷프로즌 애로우
마력을 보유한 적 1 인에게 강력한 3 연속 공격을 쏘아 보낸다. 잔여 체력의 20%를 소모한다. SP 20]
[▷비정상적 포탈
공격 판정 -30%
공격 판정 -30%
공격 판정 -40%]
이것이 제 손에서 나온 스킬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멍하니 시선을 내려 유성우를
응시하던 율리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시야 상단의 시스템 창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제한 시간 08 분 32 초]
[▷SYSTEM
스킬 트리 최상단이 활성화되었습니다.]
[▷SYSTEM
6th Episode. 이름 없는 황녀]
[완료]
113 화
* * *
걱정스러운 듯 자꾸만 주변을 돌아보는 그녀의 곁엔 자우하르의 사신과 아론, 그리고 파이몬이 있었다.
키마리스는 마계로 떠나기 전 릴리궁에서 율리아의 짐을 정리하느라 자리를 비웠다.
반면 레기온은 그녀가 마물 토벌을 끝내고 돌아온 시점부터 줄곧 보이지 않았다. 벌써 반나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야, 마력이야!"
자우하르인에게 으르렁대던 파이몬이 율리아의 다리에 무겁게 매달렸지만 그녀는 차마 시선을 내리지
못했다. 폐궁으로 들어오는 좁은 길 너머, 석양을 등진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기 좀 해. 할 말이 있어."
"……나도 그래."
배다른 자매를 고요히 응시하던 율리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걱정하는 셋을 간신히 멀리
떠나보내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정말 미워."
"알아."
"전부 너 때문이야. 네가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어마마마가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시진 않았을 거야.
그늘을 잃은 나는 늘 아바마마의 눈치를 봐야 했고, 신하들의 기색을 살펴야 했고, 백성들의 여론에
목매며 이 자리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어. 사방이 내 편 하나 없이 온통 적뿐이었다고.
노력 하나 없이 편하게 살아온 네가 그걸 알긴 해?!"
어쩌면 황제보다 더욱 고귀하고 긍지 높았을 황후는, 그래서 만백성의 사랑을 받았던 황후는, 고작 천한
평민 따위가 자신의 남편을 유혹해 부른 배를 한 채 궁에 들어온 걸 참지 못했다.
그녀는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조산했고, 하혈을 멈추지 못해 산실에서 그대로 사망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나 강인하고 고고했던 황후가, 정치적 능력이 뛰어나 되레
남편인 황제를 뒷방으로 밀어낼 정도였던 황후가. 고작 투기 때문에 조산하고 목숨을 잃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배다른 언니가 그렇게나 강하고 단단해 보였는데, 지금은 그녀를 홀로 두고
떠나는 게 왜 이리 눈에 밟히는지.
"에스델."
"그건 정말 나 때문이었니?"
하필이면 에스델이 뒷걸음질 치는 자신의 손목을 움켜쥔 순간이어서, 그것을 본 레기온의 눈초리가 단박에
날카로워졌다. 율리아는 그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손목을 털어 냈다.
"넌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에스델. 분명 좋은 황제가 될 거야. 그냥, 힘든 기억은 모두 내 탓으로 돌려.
우린 앞으로 만날 일 없을 테니까……."
"기다리라니까!"
율리아는 에스델을 남겨둔 채 몸을 돌렸다. 레기온은 그녀를 쫓으려던 에스델을 단단히 막아섰다. 그는
율리아가 충분히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비키란 말……!"
관성적으로 소리치려던 에스델이 멈칫했다. 방금 레기온의 말뜻을 이해하고야 만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옷에 묻어 있는 피와 살점의 정체를, 에스델은 알아채고야 말았다.
"내 복수의 칼날이 당신에게까지 향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이 기회는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닌, 이
땅에 남을 백성들을 위한 내 마지막 자비이니 말입니다."
"……."
"그러니 이제 그만 하십시오."
에스델은 위태롭게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허탈한 얼굴을 한 채로.
"레기온, 나는……."
율리아는 온 용기를 끌어내어 간신히 턱을 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레기온의 시선은 오직 그녀에게만
열렬히 반응했다.
"있지, 나는."
"정답이라니, 그게 무슨……."
"상관없어."
"레기온!"
"무, 무……!"
"작별인사라면 됐어요. 저도 조만간 다 정리하고 마계로 따라갈 생각이니까요. 레기온과 율리가 그곳에
있기도 하고, 마법사라고 이방인 취급당하는 것도 지겹고……."
"앞으론 분명 좋아질 거예요."
율리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키마리스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인계의 기사들을 응시했다. 율리아를 따랐던
기사들이 고스란히 지하로 떠나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나섰다. 잠깐 새 정이 든 모양이었다.
"정말 그럴까요?"
114 화
"감사해요……."
* * *
'조용하군.'
시간이 느리게 흐를수록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과거의 그때 이랬으면 좋지 않았을까 저랬다면 좋지
않았을까 되새기게 된다. 그 끝엔 늘 여자의 가녀린 흐느낌이 잔상처럼 스쳤다.
"들어간다."
"신기하지."
"네가 왜……."
"율리아."
"죽고 싶은가?"
'자, 보아라.'
형태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의 것이 돌아오고 있다. 나의 사랑스러운 제물이 되기 위해.'
바엘의 동공이 가늘게 좁혀졌다. 지하의 지배자인 그가 제 영토를 드나드는 거대한 힘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바엘은 한 점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마력을 방출했다. 펼쳐진 거대한 날개가 온 침실을 뒤덮고
무소의 뿔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이 그의 이마에 돋아났다.
바엘이 처음으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마기를 띠는 지하의 모든 것들이 진정한 왕의
등장에 삼가 경배했다.
피차 양보할 수 없었다. 마신 부활을 위해선 분리된 에고, 열쇠가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바엘도
율리아를 포기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결코 놓아줄 수 없었다.
* * *
"돌아가고 싶다고 줄곧 생각했지만 정말 이렇게 되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바엘이 제게 화내지 않을까요?
추방당한 주제에 허락도 없이 멋대로 돌아왔다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
그녀는 의기양양한 참새처럼 가슴을 한껏 부풀렸다가 주변의 흐뭇한 시선을 알아채고 퍼뜩 숨을 내뱉었다.
당당하게 보이길 바란 건데 반대 효과가 난 것 같아 머쓱해졌다.
그는 세상에 어둠을 창조해 낸 존재이자 마족들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완전한 무의 상태에서 태어난
태초의 악마이고, 창세의 역할을 마친 뒤엔 스스로를 양분으로 삼기 위해 지하의 내핵에 잠들었다.
그렇게 남은 마력이 마정석이 되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마신은 여전히 마계를 지배하고 싶어 했다. 자신의 사념을 잇는
아티팩트 마수정을 지하 곳곳에 남겨 막대한 마력을 빨아들였고, 사념체 벨제붑을 만들어 내어 바엘의
몸을 지배하고자 했다.
"지하가 이 꼴이 되고도 바르바토스는 마신의 탑에 새겨진 고대의 기억을 토대로 연구를 이어 나갔어.
그리고 마침내 알아냈지."
"네……?"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마정석의 봉인을 푸는 열쇠였다. 바엘이 마신이 되기 위해선 마정석의 힘을
온전히 삼켜야 했기에, 자신은 바로 그때를 위해 필요한 존재였다.
"주군께선 그 모든 걸 알고 널 인계로 보내신 거야. 네가 휘말리길 바라지 않으셨으니까."
"……."
자신은 바엘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드넓은 죽음의 호수에 갇혀 끝없는 적막 가운데 수없는 밤을 홀로
지새우며, '외롭다'는 기분조차 깨닫지 못했다.
115 화
바로 그때, 하늘을 순조롭게 활공하던 파이몬이 갑자기 몸을 뒤틀었다. 거대한 보랏빛 신기루가 그들의
눈앞에 화악 덮쳐들었다.
"꺄악……!"
"작은 열쇠야!"
"율리아!!"
중심을 잃은 율리아가 파이몬의 등에서 튕겨 나갔다. 근처에 있던 아가레스와 레기온이 동시에 그녀의
손을 붙드는 데 성공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힘을 써도 그녀를 끌어올릴 수 없었다.
키마리스는 고통스럽게 비틀거리는 파이몬에게 마력을 주입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폐허나 다름없는 땅
가운데 거대한 보랏빛 돌이 불쑥 솟았다.
"저쪽을 봐! 마수정이다!"
"읏……."
[▷SYSTEM
스토리 진행도 85%]
[▷SYSTEM
[▷SYSTEM
- 엔딩: 미정
율리아는 불안해졌다. 엔딩 이후의 세계는, 연극이 끝나면 불이 꺼지고 장막이 내려가는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할지. 설령 세상이 유지된다 하더라도 이방인인 자신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을지.
'마수정은 지하의 마력을 마정석에게 넘기는 일종의 포탈이야. 저 끝엔 마신의 탑이 연결되어 있어. 이게
만약 시스템의 뜻이라면…….'
주변의 마족들은 물론이고 매달린 채 그를 올려다보던 율리아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레기온은 그
모든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으흑!"
붙들린 손목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율리아의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이 새어나왔지만 그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레기온은 이성을 잃었다. 그녀를 영원히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잠식했다.
율리아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온전히 자신을 볼 때까지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럼 왜……!"
자신이 손을 놓으면 율리아는 저 아래로 속절없이 떨어지게 된다. 생각만 해도 숨통이 막히는데,
율리아는 어째서 놓아달라고 하는 걸까. 이것이 살기 위한 방법이라고 외치는 걸까.
"젠장, 안 돼. 안 돼!!"
[▷SYSTEM
- '레기온'이 마력 각성 상태입니다.
[▷SYSTEM
피날레의 막이 올랐다.
* * *
율리아가 의식을 차렸을 때, 그녀는 드넓은 수면 위를 누운 채 떠다니고 있었다. 삼면을 둘러싼 험준한
절벽 아래 호수가 자리한 기이한 지형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율리아는 번쩍 눈을 떴다. 시선을 내리니 제 몸에서 희미한 무언가가 물에 녹아들 듯 퍼져가고 있었다.
호수에 힘을 빼앗기고 있었다.
"콜록, 콜록!"
'여기는 분명…….'
마수정은 지하 각지에서 마력을 빨아들여 탑의 마정석에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아가레스를 비롯한
악마들이 마계 각지의 마수정을 파괴하며 모든 물줄기가 말라 버렸고, 그렇게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기에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울퉁불퉁한 벽을 짚은 채 안으로 신중이 발을 내딛던 그녀의 손끝에 무언가 턱 걸렸다. 매끄럽진 않았지만
무언가의 형상을 인위적으로 조각한 것처럼 연속된 무늬가 만져졌다.
"뭐지? 읏!"
어둠 속에서 파문 형태로 번져가는 무늬를 더듬더듬 훑던 그녀가 반사적으로 손을 뗐다. 날카로운 부분에
베인 듯 따끔한 감각이 들었다.
이윽고 드러난 건 죽어가는 하나의 거대한 태양, 그리고 아버지의 무덤에서 눈을 뜬 세 개의 유성.
'빛과 어둠은 하나의 태에서 눈을 뜬다. 동전의 양면처럼 그들은 영원히 닿을 순 없으되 오직 한 몸이오,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또한 없다.'
'두려워 말라.'
무한히 넓은 우주에 비하면 손톱 크기나 될까. 약하고 어여쁜 그것은 두려워 말라는 타이름에 되레 덜덜
떨며 몸을 숨겼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이내 빼꼼 시선을 든다.
심장이 거세게 달음박질 쳤다. 마정석과의 결전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도망칠 방법 따윈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모두가 있는 세상에서 함께 살고 싶었으니까.
"커맨드 시스템."
116 화
[▷이터널 캐논
"……."
완전한 무의 세계. 피아를 구별할 수 없고 그렇기에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덩어리에 불과한 공허의 세계.
그곳에서 눈을 뜬 태초의 씨앗.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악마.
태초의 무덤에서 다시 태어난 그릇은 빛으로 걸어가 가장 강력한 마나가 되었고, 영혼은 어둠에 잠겨 붉은
힘이 되었다. 그리고 자아는 다름 아닌 이곳에, 자신에게.
[▷DEVILISM (마성) : ∞]
[▷SYSTEM
- '레기온'이 마력 각성 상태입니다.
- '플레이어'가 마력 각성 상태입니다.]
하지만 시스템을 보지 않아도 율리아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제껏 왜 느끼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몸속에서 요동쳤다. 그녀가 보는 시야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하지만 율리아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가만히 멈춰 선 그녀를 재촉하듯 바닥 전체가 우르릉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
율리아의 불안감 섞인 시선이 아까보다 더욱 환하게 빛나는 포탈로 향했다. 제동 장치를 잃은 기관차처럼,
돌아갈 방법은 더 이상 없었다.
* * *
마정석이 깨어난 탑 최상층에 강력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강대한 마력을 실은 뇌전이 번쩍일 때마다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 날개를 펼친 바엘은 제게 닥쳐드는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하며 마력을
방출했다.
'과연 그럴까?'
충격파가 돌아오기 전에 바엘은 급히 진로를 선회했다. 강력한 폭발이 주변을 에워싸며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하지만 치열한 격전에도 불구하고 탑은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봉인도 마찬가지였다. 아득한
심해에 갇힌 것처럼, 완전한 구체의 형태로 탑 정상을 가둔 채 시리게 일렁였다.
순리에 반해 살고자 발악하던 마신을 억제하기 위해 세워진 봉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되레
바엘의 탈주를 막고 있는 듯 보였다.
'아무래도 상관없나.'
마왕성을 이루는 근간, 악마의 마력을 담는 가장 강력한 그릇인 심장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바엘이라고 마정석이 자꾸만 제 심장을 입에 올리는 속셈을 모르지 않았다.
오직 힘만이 진리인 세계였다. 누군가는 그런 바엘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반절의
힘으로도 마계 전체를 지배할 만큼 그는 위대한 악마였다.
마신의 완전 부활을 위해선 각성 상태의 파편이 셋, 불완전하게나마 부활하기 위해선 둘 이상이 필요했다.
그것을 아는 바엘은 마정석의 도발에 코웃음 쳤다.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필요한 파편인 '열쇠'는 아직…
….
바로 그때, 바엘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주술을 통해 연결된 각인에서 평소와 다른 파장이 느껴졌다.
율리아가 각성했다.
그렇게 수천수만 번의 시간이 지나 간신히 열쇠가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 조금만 험하게 다뤄도
죽어 버리는 작고 가녀린 인간이었다.
"마신의 이름을 자처한 주제에 조바심이나 부리다니 꼴사납군. 내가 심장을 되돌려 각성한다 한들 네가
어쩔 수 있을 것 같나? 너는 날 절대 쓰러뜨릴 수 없어."
호수의 마수정을 파괴할 당시만 해도 이런 때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마정석을 조롱하기 위해.
썩어가는 시체가 지니지 못한 힘을 손아귀에 넣어, 네가 그토록 갈구하던 결말을 눈앞에 두고 죽는 고통을
맛보라고 실컷 비웃어 줄 생각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미래를 알지 못한 채.
* * *
"우리도 처음엔 몰랐어. 형하고 마정석을 쓰러뜨릴 방법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진이 난 것처럼
발밑이 흔들리더니 천장이 무너지는 거야! 급하게 다른 층으로 이동했는데 알고 보니 최상층을 제외한
모든 곳이 무너지고 있었어!"
"마정석은 우리의 존재가 자신에게 방해가 될 거라 판단한 것 같다. 시공의 축이 완전히 비틀려 안으로
진입할 모든 방법이 막혔어."
바르바토스는 제게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며 마력을 전개했다. 마정석은 최후의 발악을 하듯 마력을
아낌없이 퍼부어 새로운 군대를 탄생시키고 있었다.
적을 하나씩 베어 나가던 아가레스가 참다못해 본모습을 개방했다. 자욱한 마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칠흑의 앨리게이터가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앞을 가로막는 모든 적을 섬멸했다.
"그럴 염려는 없단다? 마정석은 율리아를 해칠 수 없어. 주군을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말이야."
아가레스가 치솟는 노기를 이기지 못해 펄펄 뛰었지만 그녀에게 답하는 바르바토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탑이 붕괴하기 직전, 그는 마침내 정답에 도달했다.
"마력 각성 상태의 열쇠와 접촉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지금까진 비각성 상태였기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었던 거다."
아가레스의 샛노란 안광이 바르바토스에게 향했다. 그가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 바르바토스는 작은 열쇠에게 늘 냉정했었다.
"무슨……."
117 화
* * *
게다가 마정석이 폭주하고 있으면 어쩌나 두려움에 떨었던 게 무색하도록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포탈의 빛이 사그라지자 무거운 적막이 피부에 와 닿았다.
"어떻게 된 거지."
새로운 힘에 눈 떴지만 아직 힘의 사용에 익숙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으니 절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어둠과 적막 속에서 그녀는 더듬더듬 걸음을 내디뎠다.
불안해하는 율리아를 안심시키듯 자상한 울림이 또다시 기억을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되레 불안해졌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걸 놓친 기분이었다. 실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커맨드 시스템."
[▷SYSTEM
[▷SYSTEM
- 엔딩: 미정
그녀는 다시금 시스템을 살폈다. 마정석을 파괴하기 위해선 일단 봉인부터 풀어야 했다. 시스템이 바라는
방향대로 가고 있었다.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다.
막대한 마력이 폭발함과 동시에 마정석이 환하게 발광했다. 어둠의 장막이 찢기고 사위가 환히 밝아
올랐지만, 율리아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어, 어째서……."
"바엘?!"
"바엘, 바엘!!"
하지만 율리아의 부름에 눈을 뜬 건 바엘이 아니었다. 위태롭게 점멸하던 마법진이 결국 완전히 파훼되고,
그와 동시에 어둠처럼 일렁이는 촉수가 사방에서 뻗어 나왔다.
"꺄악!"
그것에 찰나라도 스칠 때마다 칼에 벤 듯 날카로운 통증이 퍼졌다. 율리아는 흔들리며 무너져가는 제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스킬을 걸지 않은 채로 활을 겨눴다. 혹여나 제 힘이 바엘에게 해가 될까
두려웠다.
'어째서 날 두려워하지?'
[▷SYSTEM
제한 시간 59 분 59 초]
"프로즌 애로우!"
[▷마정석
공격 판정 -0.1%
공격 판정 -0.1%
공격 판정 -0.1%]
인계를 덮친 마물을 해치우기 위해 공격력을 3 배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마정석은 그조차 역부족일 정도로
막대한 체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수정의 꼭대기에 떠오른 체력 바는 무려 열다섯 줄이 넘었다.
악마들은 대상을 구분할 때 그것이 지닌 마력 파장을 주로 느낀다. 율리아가 각성하며 그녀의 파장이
마정석과 동화되었기 때문에, 단지 그릇임을 알면서도 바엘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넌 내게 거역하지 않을 테지. 다른 것들과는 다르니까. 나와의 약속을 지키러 이렇게 와 주었어.'
"싫어……."
율리아는 현실을 부정하듯 마구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바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몸은 처참히 망가졌지만 표정만큼은 평온해서, 그저 잠들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으흑!"
그런 그녀의 반응이 마정석의 심기를 건드렸는가. 마정석은 바엘에게 하듯 율리아의 심장에 독한 마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고통에 익숙지 않은 연약한 몸이었다. 갑자기 주입된 막대한 마력이 펄펄 끓는 마그마처럼 온몸의 핏줄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컥……!"
하지만 지금 자신이 무너지면 다음은 다른 악마들의 차례였다. 사무치도록 외로운 싸움. 등 뒤를 받쳐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파, 바엘……."
덜덜 경련하던 그녀는 불현듯 시선을 들었다. 눈물로 흐릿한 시야 너머, 마정석에 갇힌 바엘의 모습이
보였다.
아득히 긴 세월을 이런 고통 속에 살아왔다고 했다. 강대한 육체가 그보다 더욱 강대한 마력을 이기지
못해, 채 한 시간도 편히 잠든 날이 없다고 했었다. 분명 지금의 자신보다 더욱 괴로웠으리라.
아아, 바엘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했을까. 악마는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들이라고 말한 건 그였는데.
무언가를 부탁할 땐 신중하라고 비웃은 것도 그였는데.
'내게 방해만 될 뿐이니 어디로든 돌아오지 못하게 내쫓아. 누구 하나라도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직접
사지를 찢어 주지.'
크고 단단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했다. 어리석은 자신. 구제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멍청한
자신.
평소 같았으면 이 말 한 마디에 만사 제쳐두고 달려왔을 것이다. 겉으론 냉정하고 무감한 척하지만 바엘은
늘 자상했다. 자신이 조잘대는 소리에 가장 먼저 귀를 기울였다.
그의 열렬한 눈빛이, 부드러운 표정이, 자상한 목소리가, 뜨거운 체온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단지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하염없이 눈물만 떨어뜨리는 동안에도 마정석 속 바엘의 눈꺼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율리아는 고통에 휘청대면서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저항을 알아챈 마정석이 이젠 바엘에게 하던
것 이상의 막대한 마력을 퍼부어 댔지만 그녀는 떨리는 숨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었다.
바엘이 있기에, 비로소 자신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란 걸 알았다. 그림자조차 애틋해 밟지
못할 정도로 절절한 사랑. 그것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고 싶었다.
[▷이터널 캐논
보유한 모든 스킬을 복합해서 사용할 수 있다. 잔여 체력의 100%를 소모한다. SP 0]
[▷SYSTEM
내 목숨을 가져가고 대신 그를 살려 줘.
118 화
'율리아…….'
"……."
튕기듯 일어선 바엘의 시선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머릿속은 벌써 그녀의 곁에 다가가고도 남음인데, 몸은
고목나무처럼 우뚝 멈춰 선 채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째서?'
세상이 무너져 간다. 태초가 죽고 마침내 이 세계는 끝을 맺었다. 진정한 엔딩. 망막에 맺힌 상이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시스템이 하나둘 꺼져 간다.
산산이 깨진 마정석의 파편이 아찔한 비명을 내지르며 소멸했다. 속박에서 풀려난 바엘의 모습의 점점
흐려진다. 해질녘 땅거미가 내려앉듯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잠겨 들고 있었다.
"……."
"나를 마신으로 만들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열쇠로서 달갑고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해."
나 역시 네게 하지 못한 말이 있어.
"크. 윽……!
마정석의 폭주가 멈추며 마침내 비틀렸던 시공의 축이 하나로 맞춰졌다. 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간
악마들은 퀴퀴한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한, 세월의 흐름 탓에 다 무너져 가는 계단과 통로를 겨우
기어오르다시피 해 마침내 최상층에 다다랐다.
레라지에는 벽에 자욱이 내려앉은 먼지를 손끝으로 훑으며 몸서리쳤다. 아래층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상황은 점점 더 심해졌다. 같은 건물 안에서도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적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드디어 도달한 최상층, 파괴된 문 앞에 돌처럼 선 레기온,
키마리스와 마주친 탓이었다.
"……."
"그만."
무너진 성전, 훤히 드러난 밤하늘, 가라앉은 먼지에 섞여 반짝반짝 빛나는 마력의 편린, 사라진 마정석과
봉인, 그리고…….
'그렇군. 주군은 결국 선택하신 건가.'
그녀와 함께 했던 찰나의 기억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석처럼 몇 번이고 갈고닦아 가슴에 품으며, 혹여
조금이라도 흐려질까 곱씹고 또 곱씹으며.
"주군……."
누군가는 비통히 무릎 꿇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절규를 닮은 울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아가레스는 마침내
결단했다.
시간은 물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마정석의 폭주로 폐허가 되었던 마계 전역이 차츰 복구되고, 무너졌던
둥지와 악마성이 재건되고, 마물 출몰 사태로 인해 단절됐던 인계와의 교류가 어느덧 재개된다.
119 화
에필로그
"시끄러우니까 닥쳐."
"쯧, 입만 험해서는?"
밖에선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인 아가레스가 한참이나 서열 낮은 레벤나의 앞에서 머쓱하게 목덜미를
주무른다. 오직 힘만이 절대적 가치이자 불변의 진리인 마계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존재는 이미 세상에 없다. 그녀를 기억하던 이들 또한 점점 사라져 간다. 잠시
씁쓸하게 시선을 내리깔던 레벤나가 이내 말을 이었다.
"어디에서."
그것을 떠올린 아가레스가 의아함에 미간을 좁혔다. 국가가 안팎으로 정신없을 시기인데 마계까지 사람을
보내는 이유를 예측할 수 없었다.
"유언?"
"사죄해야만 할 일이 있다고……."
아가레스는 레벤나가 브에스드라 황실에 얼마나 치를 떠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사신을 안으로
들인 데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가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죄를 받을 사람은 이미 없지만, 대신 레기온이라도 보내. 유언장을 어떻게 처리하든 녀석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해."
레벤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폐허나 다름없던 마계도 수없는 노력 끝에 이제야
간신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어리석었지."
"응, 어리석었어……."
* * *
눈꺼풀을 들자 무너진 천장 너머로 새하얀 햇빛이 비춰 든다. 불어드는 바람결에 꽃 내음이 나부끼고,
주변을 감싼 대기는 마치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하고 안온했다.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녀의 시야에 또 다른 기억이
겹쳤다.
바엘…….
그녀의 창백한 뺨이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은 어떻게 됐는지, 그런 사소한
일 따윈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흑……."
"……."
"내가, 잘못했다."
시간의 흐름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먼 세월을 오직 그녀가 눈뜨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정작
깨어난 그녀는 너무도 상처 입은 채였다. 돌이키지 못할까 두려웠다.
바엘은 자신을 향한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 이윽고 자신의 존재를 알아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이 오싹한 전율이 등허리를 타고 올랐다. 이런 스스로가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
율리아는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럼에도 힘없이 무릎 꿇은 바엘의 얼굴은 여전히 그녀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
"사랑해요."
드디어, 드디어 가슴에 사무쳤던 이 말을 그에게 건넸다. 이것이 설령 꿈이라도 좋았다. 바엘이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을 리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분명 꿈이었다,
"사랑한다, 율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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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120 화
권능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대악마가 둘이나 눈을 뜨니 마계 전체가 뜨거운 전율에 휩싸였다. 마성을
지닌 모든 것이 성지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지배자의 위광을 맞이했다.
모두가 마왕 복권을 염원했다. 신정부를 이끌던 아가레스나 바르바토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들은
마계를 진정한 주인께 돌려드린다며 기쁘게 무릎 꿇었다.
태초의 심장과 합치된 바엘의 육신은 더 이상 단순한 그릇이 아니었고, 율리아를 깨우기 위해 스스로를
죽인 억겁의 시간은 역으로 그가 새로이 얻은 마력을 온전히 융화시킬 기회가 되었다.
비로소 그는 신이 되었다.
율리아는 어느덧 아름다운 청년으로 성장한 파이몬의 손을 잡고 성 뒤편에 자리한 베로의 집에 찾아갔다.
갓 몸을 푼 베로는 그런 둘을 발견하고 붕붕 꼬리를 흔들었다.
베로의 배 밑으로 꼬물거리는 머리 셋이 보였다. 율리아가 재차 힘차게 베로의 노고를 위로하려는 찰나,
파이몬이 해맑게 답했다.
"한 마리야!"
"그래도 한 마리야!"
하지만 그녀는 축하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쉽게 분간할 수 없었다. 무리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새끼가
혹여나 따돌림 당하진 않을까 염려한 탓이었다.
새끼가 타고난 마력을 생각하면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어쨌든 베로는 그런 율리아의 마음도 모른
채 눈을 반짝였다. 그녀가 만져 주니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상황을 알아채기 전, 바엘은 율리아의 이마 위로 느긋이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마력을 이용해
침실로 옮겨갔다. 남들 앞에서 애정 표현하는 걸 매번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
바엘의 시선이 율리아의 납작한 배를 진득하게 훑었다. 밑에 제 씨를 가득 머금은 그녀의 절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성기에 피가 쏠렸다.
지금처럼 번번이 찾아와 밀월을 방해하는 놈들이나, 율리아의 주변을 친구 혹은 신하란 핑계로 끝없이
맴도는 놈들이나, 순진해 빠져선 그들의 거짓말만 믿고 순진하게 곁을 내어주는 율리아도. 전부.
"흐응!"
중지로 음핵을 슬쩍 비벼 주었을 뿐인데 율리아는 파르르 떨더니 바엘의 목덜미에 와락 안겨들었다.
밀려드는 쾌락을 애써 참으려는 작은 몸이 애처롭다.
"당신, 흑, 정말……."
그럼 율리아는 쾌락에 굴복해 성기를 가득 삼키면서도 기어이 눈물을 터뜨리고 말리라. 그 모습을
상상하자 잔인한 가학심이 머릿속에 득실거렸다.
"하으!"
"여기가 좋지?"
그럼에도 들끓는 정염을 억누르며 기다리는 것이다. 애가 탄 그녀가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자신을
받아들이길. 그녀가 자신을 갈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길 말이다.
"여기?"
"아니야아……."
바엘이 손가락으로 질구만 대충 쑤걱거리자 율리아는 애가 탔다. 안쪽이 간지럽다 못해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는 바엘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내렸다. 마침 타이밍이 들어맞아 굵직한 손가락이
뿌리까지 남김없이 삽입됐다. 율리아는 분주히 허리를 찧어대면서도 한편으론 아이처럼 칭얼댔다.
본능적으로 더 크고 단단한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질책하는 바엘의 목소리는 엄하고 차갑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정작 붉은 눈매는 배부른
맹수처럼 만족스럽게 휘었다.
그제야 그는 율리아를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러곤 그녀의 골반을 끌어당겨 흉흉하게 발기한
선단에 질구를 맞췄다. 푹 젖은 채 안을 채워 줄 것을 찾아 애타게 벌름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자아라도
있는 듯 보였다.
"빨리이."
"그러니 그냥 다 죽여 버릴까."
사실 바엘은 줄곧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사랑한다 말해도 안심할 수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가 율리아의 심장에 각인이 되어 남았다. 그녀가 악마로 다시 태어나서도 사라지지 않을 만큼
깊은 원죄였다.
'율리아가 알면 치를 떨겠군.'
바엘은 자조했다.
"바엘의 씨를 내게 주세요."
마치 그의 모든 생각을 아는 것처럼.
비좁은 뱃전에 파도처럼 넘나드는 쾌락 너머, 해일과 같은 열렬한 감정이 밀려든다. 연결된 각인 너머로
바엘이 느끼는 감정에 동화되어 율리아는 속절없이 몸을 맡겼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고 안온하다.
"사랑한다, 율리아."
"아……!"
눅진한 씨물이 메마른 자궁을 가득 적셨다. 율리아는 열락에 허덕이면서도 그것을 다른 무엇보다 소중히
품었다.
* * *
"작다……."
"너희 둘 다 따라오렴?"
"왜, 왜……!"
"일단 오렴?"
자신들의 속내를 아는 바엘이 몸서리칠 때마다 되레 즐거워진다. 악마란 이토록 이기적인 존재들이었다.
"하나 이리 줘. 힘들겠다."
"응."
그녀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토록 사랑스러워진다. 레기온은 아이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친 채
등을 토닥였다.
어쩐지 주변이 조용하다 싶더니, 자신과는 다른 의미로 호시탐탐 율리아를 노리던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율리아가 어어-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안고 있던 여자아이가 목을 가누더니 율리아의 품에서
벗어나 파닥파닥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당황한 레기온이 그들을 쫓아 달리고, 율리아도 빠르게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찰나였다. 등 뒤에서 바엘이
나타났다.
"괜찮으니 그냥 있어."
"하지만……."
"차분히 지켜봐."
"당신 말이 맞았네요?"
"그럼 상을 줘야지."
"……."
율리아가 시선을 들자 바엘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이 여실히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