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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핏빛 초승달이 형형하게 뜬 밤이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새하얀 네글리제가 바닥에 나뒹굴고, 가느다란 나신이 달빛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율리아는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는 거대한 창문 앞에서 뒤돌아섰다.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 안 돼요. 제발……."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붉은 안광은 율리아의 나신을 샅샅이 훑었다.

마르고 둥근 어깨, 봉긋하게 부푼 유방과 파르르 떨리는 젖꼭지, 잘록한 허리를 지나서 다리 사이의 깊고
축축한 곳까지. 악마의 시선은 마치 손길처럼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헤집었다.

율리아는 그제야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는 악마들의 왕, 바엘이었으니까. 절망한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언제쯤 깨달을 텐가."

바닥에 내려앉은 악마는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율리아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지만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녀의 머리채가 강한 힘으로 붙들렸다.

"넌 죽어도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흣, 흐윽……."

"손가락 하나, 머리카락 한 올, 그리고 이곳까지 전부 내 것이니."

바엘의 길고 굵은 손가락이 율리아의 다리 사이를 곧장 헤집고 들어갔다. 이미 질척하게 젖어있던 구멍은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기꺼이 반겼다. 찌걱찌걱 음란한 물소리가 무거운 밤공기를 울렸다.

"아, 아!"

"이렇게 좋아하면서 말이지."

손가락이 들락거릴 때마다 율리아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바엘의 손이 움직이는 모양은 명백히 페니스를
닮아있었다. 굵은 손가락이 내벽을 긁고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절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뱃속이
저릿저릿 뜨겁게 욱신거렸다.

"흐응, 아앙!"

"좋다고 질질 싸는군. 몇 개라도 들어가겠어."

구멍에 들어간 손가락은 어느새 네 개로 늘어나 있었다. 바엘이 손가락을 크게 벌리자 투명한 액체 방울이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흘렀다. 보기 드문 절경이었다.

바엘은 손을 빼내어 그녀의 애액을 제 성기에 치덕치덕 문질렀다. 팔뚝만큼 부풀어 올라 핏줄이 툭 불거진
페니스가 고개를 들이밀 구멍을 찾아 무섭도록 꺼떡였다.

"내게 얌전히 복종한다면 이제껏 겪지 못한 쾌락을 선사해주지."

"안 돼, 아, 싫어!"
"이미 늦었어."

입꼬리를 비튼 바엘이 율리아의 무릎 안쪽을 하나씩 붙잡아 들어 올렸다. 그녀의 허벅지가 저항할 새도
없이 활짝 펼쳐졌다.

액으로 범벅된 질구가 삼킬 것을 찾아 음란하게 벌름거렸다. 그 모습을 발견한 바엘의 머릿속에 여유가
사라졌다. 그는 율리아의 입구를 제 선단에 맞춘 뒤 곧장 내리꽂았다.

"아, 아앙!"

거센 피스톤질에 목구멍이 턱하니 막혔다. 지독한 쾌락에 잠식당한 율리아가 숨도 못 쉬고 울먹이며


바엘의 성기를 조였다. 그는 제 성기에 더덕더덕 들러붙는 따뜻한 점막을 느끼며 턱을 치켜들었다. 순도
높은 마력이 바엘의 몸속에 차오르고 있었다.

악마의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바야흐로 인간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이었다. 웅장하고 적막한 홀에 또각또각, 절제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마들의 형형한 눈동자가 소리의 근원을 향해 느릿하게 옮겨 갔다.

홀의 침묵을 깬 당사자, 대공 아가레스는 저를 향한 수많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계단을 올라


차분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군, 드디어 찾았습니다."

나태하게 늘어져 있던 공기가 대공의 한마디에 급변했다. 수많은 안광이 깜빡임도 멈춘 채 그녀를
직시했다. 고개를 든 아가레스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인간들의 황녀, 가장 고귀한 인간 에스델 브에스드라. 그녀가 바로 주군을 마신으로 만들 열쇠입니다."

"……."

"허락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열쇠를 끌고 오겠습니다."

아가레스의 말에는 '인간들의 수도 아벨딧심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라는 부분이 생략되어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책사 바르바토스가 왕을 대신해 제동을 걸었다.

"마음대로 되겠나? 얼마 전 인간 측에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개화했다."

"까짓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

"차후의 일을 생각해."

"난 그딴 거 모르겠는데?"

바르바토스를 노려보는 아가레스의 시선엔 명백한 적의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마왕에게 군 통수권을
위임받아 최전선에서 마군을 이끌었다. 적인 인간의 편을 드는 듯한 바르바토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반면 바르바토스는 그 나름대로 아가레스의 사고방식이 답답했다. 마족과 인간 사이 벌어진 오랜 전쟁으로


인계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이 황폐화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장래 황제가 될 중요한 인간을 그리
쉽게 끌고 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인간 하나하나는 최하급 마수보다도 약할지언정 머릿수만큼은 마족을 훨씬 압도했다. 바르바토스는
지금이야말로 쓸모없는 소모전을 끝낼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곧장 왕에게 직언했다.

"주군, 마침 전황이 인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이쯤에서 우리 마족의 자비를 보여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

"베리드가 인계의 정보에 능하니 그를 사자로 보내시지요. 브에스드라에서 황녀를 내놓는다면 그 성의를
보아 전쟁을 종결하겠다고 말입니다."

까닥까닥, 나태하게 늘어진 자세로 턱을 괴고 있던 사내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칠흑의 긴 머리칼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단순한 행동일 뿐이었는데도 거대한 홀에 강력한 마력의 파장이 밀어닥쳤다. 왕의 심기가 썩 좋지 않음을
깨달은 아가레스와 바르바토스가 다급히 부복했다. 동시에 한 악마가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최고급
원단으로 지은 로브가 그의 조각 같은 근육을 빈틈없이 감쌌다.

"열쇠가 브에스드라 황가에 태어났다는 말이지. 재미있군."

뱀처럼 날카로운 동공이 넓은 홀을 천천히 훑었다. 왕의 시선을 받은 모든 마족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묵중한 위압감이 그들을 지배했다. 피할 수 없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어깨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이것이 유례없이 강대한 마력으로 지하를 통일하고 이제는 마신의 지위까지 넘보고 있는 마왕 바엘의
권능이었다.

그가 한 발짝씩 내딛을 때마다 왕이 지닌 절대적 힘이 더욱 여실히 느껴졌다. 감히 비교조차 허락되지


않을 정도로 순도 높고 강력한 마력이었다. 결국 72 악마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이들은 왕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기절하기 시작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마정석의 열쇠를 내 앞으로 가져와. 그 여자는 오직 나만의 것이다."

바엘은 다른 악마들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고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그의 집요한 시선 끝에는 순도


높은 마력에 감응한 듯 보랏빛으로 위태롭게 점멸하는 마신의 힘, 마정석이 있었다.

"이번엔 진짜여야 할 거야. 또다시 날 실망시킨다면……."

"명심하겠습니다, 주군."

아가레스와 바르바토스가 지체 없이 답했고, 그것을 들은 왕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비틀렸다. 광활한


테라스에 선 바엘이 이내 허공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지옥의 붉은 달 아래 점점 멀어져 가는 왕의 뒷모습을 보며 두 악마가 나직이 시선을 교환했다.

"좋아, 베리드든 나발이든 일단 보내. 난 오래 살고 싶으니까."

"정전 협상도 함께 진행하지."

"……젠장."

대공 아가레스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욕을 지껄였다. 건방진 인간들에게 갚아 줘야 할 빚이 아직 많이


남았지만 그래 봤자 왕의 뜻을 거스를 순 없었다.

그녀는 사역마를 소환해 베리드에게 전언을 보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 * *

제국 브에스드라의 황도 아벨딧심에 백성들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사악한 마족 무리가 드디어 인간의


땅에서 물러나고 인계는 평화를 되찾았다. 인-마 전쟁 발발 30 년 만의 일이었다.

조만간 원정군이 귀환할 거라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백성들의 얼굴에 희망이
깃들었다. 피 튀기는 전쟁터에 동원된 이들은 누군가의 부모, 형제, 혹은 자식들이었다. 그들을 보내
놓고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었던 사람들은 원정군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렸다.

개중 시류를 앞선 이들은 그보다 훨씬 이후의 일을 내다보기도 했다. 그간 전선에 우선적으로 보급되었던


막대한 물자가 내수로 돌아오고 막혔던 국가 간 상업 교류도 재개될 것이다. 남들보다 앞서 준비를
끝마치기 위한 치열한 물밑 경쟁이 이어졌다.

각자가 부푼 꿈을 안고 미래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정작 그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준 단 하나의 존재를


망각한 채로.

깎아지를 듯 솟은 협곡 끄트머리에 가느다란 인영이 서 있었다.

양손을 결박당한 그녀는 펄펄 끓으며 매캐한 증기를 내뿜는 용암 앞에서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녀가
저항할수록 창을 든 기사들은 더더욱 그녀를 궁지로 몰아세웠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들어가라니, 이런 유황불에 무슨 수로……!"

"모두 제국의 평화를 위한 일입니다. 계속 저항한다면 억지로라도 집행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부러질 듯 연약한 몸에는 이미 수많은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국경까지 끌려오는 동안 도망치려
저항하는 과정에 생긴 것이었다.

눈앞엔 황제 잉그렘 5 세와 1 황녀 에스델을 따르는, 그리고 황가의 일원인 그녀 또한 섬겨야 마땅한 황실


기사들이 있었다. 등 뒤엔 펄펄 끓는 유황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양편을 번갈아 응시하던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본능적인 공포가 어렸다.

날카로운 창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 왔다. 하지만 그녀를 겨누는 사내들의 얼굴엔 일말의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 혹은 필요 없는 쓰레기라도 버리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 희망을 포기한 그녀는 눈을 감았다. 강한 힘으로 떠밀린 몸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01. 악마성에 떨어졌습니다.

율리아가 19 금 피폐 역하렘 게임, [악마들의 낙원] 속 세계로 끌려온 지 이제 4 년이 조금 지났다.

게임은 주인공 에스델의 열여덟 살 생일에서부터 시작한다. 탄신연이 끝나고 내궁으로 돌아온 황제와
에스델에게 한 악마가 찾아와 제안한다.

'황녀를 우리의 주군께 바쳐라. 그럼 이 전쟁을 끝내 주지.'

마왕의 목표는 마정석에 깃든 강대한 힘을 흡수하여 마신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도를 찾지 못해


번번이 실패하던 와중, 가장 고귀한 인간을 매개체로 사용하면 마정석의 봉인을 완전히 해제할 수 있다는
예언을 듣게 된다.
이에 악마들은 인간계에서 가장 고귀하다 일컬어지는 황녀 에스델에게 '마정석의 열쇠'가 될 것을
요구했다.

애초 황제는 그 황당무계한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전세는 점점 인간 측에 불리하게


기울었고, 결국 에스델은 스스로를 희생해 지옥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19 금 피폐 역하렘'의 이름값을 다하듯 마계의 잘생긴 악마들과 이런저런 거사를 치르며
육체적 쾌락에 눈을 뜨는……. 대충 그러한 내용이었다고 기억한다.

'같이 일하던 선배가 해 보라며 억지로 쥐여 준 게임이었으니까, 제대로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서 처음 눈을 떴을 땐 정말 당황했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있는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이라는 걸 상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도 원작에는 없던 두 번째 황녀 '율리아'라는 인물로
말이다.

처음 몇 달간은 꿈이라도 꾸는 걸까 생각했다. 자신은 사실 죽는 것에 실패하여 혼수상태에 빠져 있고


몸은 병원에 누워 있으며, 오직 정신만이 '통 속의 뇌'처럼 이런 기이한 세계를 만들어 낸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의심 말이다.

하지만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이곳에서의 삶도 현실 못지않게 비참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먼지 구더기와 천장 모서리마다 길게 늘어진 거미줄, 폐부에 쿰쿰한


곰팡내가 스미는 이곳이 바로 황녀 율리아의 방이었다.

그녀 본인도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된 건지, 한창 성장기에 접어들었을 팔다리는 한 줌도 안 될 듯


가느다랬고 태양을 보지 못한 피부는 하얗다기보다 창백했다.

하녀들은 매번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와 제 할 말만 하고 나가 버리기 일쑤였는데 그마저도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황궁에 고귀한 손님이 들었으니 방 밖으로 나오지 말라'거나, '돌아가신 황후 폐하의 기일이니
경거망동을 삼가라'거나, 심지어는 '폐하께서 노하셨으니 삼 일간 금식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곤
정말 아무것도 안 줬다. 힘겨웠던 과거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처절한 대우였다.

그럼에도 게임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을 수 없어 결국 이 세상에서 살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기적이게도 자신이 에스델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사실이었다.

'난 반드시 궁을 빠져나갈 거야. 외국으로 도망가서 조용히 평화롭게 살아야지.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돼. 괜찮아…….'

모두에게 사랑받던 황녀 에스델은 열여덟 살이 되는 해 마계로 끌려가고, 불시에 닥친 비극에 황궁은 물론


제국 전역이 뒤집혀 난리가 난다. 돌려 말하면 그때가 바로 자신이 탈출할 수 있는 기회란 뜻이었다.

황가의 오점이라며 제대로 돌보지도 않았으면서, 밖으로 나가 살 기회조차 주지 않는 잔인한 사람들에게서


도망칠 유일한 기회 말이다.

에스델에게 개인적인 유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작 황제는 전혀


다른 계획을 품고 있었다.

'지하엔 네가 가도록 해. 설마하니 에스델을 보낼 수는 없지.'

'하지만 마족들이 요구한 건 가장 고귀한 인간인데 제가 어떻게…….'


'그래, 에스델은 가장 고귀한 아이다. 쓸데없이 밥만 축내고 매번 불화만 일으키는 너와는 다르지. 그간
키워 준 값을 해라. 아니면 이 자리에서 맨몸으로 쫓겨날 텐가?'

가서 에스델인 척을 하든 아니면 마족을 유혹해 목숨을 건지든 인간계에 해 끼치지 않도록 조용히
처신하라는 황제의 말에, 율리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뒤돌아 나가는 그녀를 보던 황제의 눈빛엔 속 시끄러운 것 하나 처리했다는 후련함이 가득했고, 에스델은
평소처럼 그녀를 하잘것없는 개미 보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2화

"하지만 정말로 이렇게 되다니……."

머리 위로 높게 뜬 붉은 보름달을 보며 회상에서 깨어난 율리아는 침대에서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치미는 현기증에 괴로워하다 불현듯 시트를 걷어 제 팔다리를 내려다보았다. 툭 치면 부러질 듯


마르고 창백한 건 여전했지만 다행히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펄펄 끓는 유황불에 몸을 던졌다. 정확히는 창에 떠밀린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내던져진 부유감과 귓가를 스치던 바람 소리, 온몸을 집어삼킨 뜨거운 열기가 아직도
생생했다.

게임 속 에스델이 마계로 가던 방식과 같았기에 머리로는 무사할 거란 걸 알았지만 실제로 닥쳐 보니 그저


두려움에 벌벌 떨다 까무룩 정신을 잃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몸의 안위를 확인하니 그제야 제가 처한 상황에 대해 미미한 호기심이 일었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드니


가장 먼저 회색의 차가운 돌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익숙한 배경…….'

게임 속 CG 에서 봤던 배경이었다. 방의 크기는 넓었지만 딱 필요한 물건만 놔둔 듯 생활감 없이 휑한


분위기였다. 바닥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 가죽이 깔려 있고, 폐부를 스미는 공기는 차갑다 못해
선뜩했다.

머리맡에는 두툼한 사슬이 치렁치렁 걸려 있었는데, 그것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딱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진짜 마계에 왔어. 원래대로라면 에스델이 끌려와야 할 곳인데, 내가 온 거야.'

들키면 어떡하지, 설마 바로 죽이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었다. 마족이 요구한 건


'가장 고귀한 인간'이었는데 자신은 고귀는커녕 평생 손가락질만 받으며 살아온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그녀의 불안한 눈동자가 테라스 창 너머 어두운 밤하늘로 향했다. 핏빛의 커다란 보름달이 마계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늘 화려하게 빛나던 브에스드라 황궁과는 전혀 다른 음산한 분위기에, 등골에
오싹한 기운이 타고 올랐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이제 어쩌면 좋지?"

힘없이 눈꺼풀을 내리깐 율리아는 세운 무릎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심장이 따끔따끔 옥죄었지만, 그녀는
홀로 인내하듯 그저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살기 위해서 정말 에스델인 척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그녀가 아니란 걸 들켰다간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할 거다. 마정석의 진짜 열쇠인 에스델조차
악마들에게 온갖 처참한 짓을 당하며 정신이 무너져 내렸는데, 가짜의 목숨 따윈 그들의 안중에도 없을 게
분명했다.

앞날이 막막해 나직이 한숨을 내쉰 그때, 왜인지 근처가 소란스러워졌다. 몇 개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능글거리듯 한없이 가벼운 목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그토록 기다리던 열쇠를 얻었는데 왜 당장 탑으로 보내지 않는 거야? 한시라도 빨리 마정석의 봉인을
풀어야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보고만 있다고 문이 저절로 열려? 하여간 형은 답답한 게 탈이야."

"그러다 실패하면 마정석도 잃고 열쇠도 잃고, 주군께서 퍽이나 기뻐하시겠군."

냉막한 목소리가 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던 율리아가 숨을 들이켜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침대 시트를 목숨줄처럼 움켜쥔 그녀와 나란히 서 있던 두 악마의 시선이 곧장 마주쳤다. 율리아는 퍼뜩


시선을 내렸지만, 그보다 사내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게 더 빨랐다.

'진짜야. 진짜로 마족이야…….'

고양이처럼 길게 찢어진 동공과 날카로운 송곳니, 등에 달린 한 쌍의 검은 날개, 무엇보다 초면임에도


익숙한 생김새로 율리아는 그들의 정체를 곧장 간파했다.

목소리가 능글능글한 쪽은 살짝 처진 눈꼬리와 근처에 난 점이 특징이었는데, 게임 속의 악마 '


레라지에'의 모습과 판박이였다. 겉보기엔 아름다운 미청년처럼 생겼지만, 마계 14 위의 고위 악마로
사랑과 쾌락을 관장했다.

나머지 한쪽은 그의 쌍둥이 형제로, 마계 8 위의 악마 '바르바토스'였다. 무채색의 단정한 머리와 핏기


없는 얇은 입술, 외눈 안경을 낀 모습을 보면 얼핏 학구파로 보이기 쉬웠지만 실은 절망, 잔혹, 무자비를
관장하는 만큼 손속이 상당히 잔인하고 거칠었다.

'게임 프롤로그와 똑같아.'

원작에서 그들은 에스델을 곧장 탑에 있는 마신의 수정구 앞으로 끌고 간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이 쉽게


풀리면 재미없기 때문일까, 그녀는 마정석의 강대한 힘에 무너져 오랜 시간 사경을 헤매게 된다.

'주인공인 에스델도 그렇게 당하는데, 원작에도 없던 나는 정말 죽을 거야.'

황제 잉그렘 5 세가 말했던 인간계의 평화니 뭐니, 그런 것에는 한 톨의 관심도 없었다. 그저 살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아니, 정말 하루라도 좋으니까 남들처럼 그저 평범하게 살아 보고 싶었다.

저도 모르는 새 시트를 움켜쥔 그녀의 손아귀가 파르르 떨렸다.

"열쇠가 이상한데?"

"겁먹은 거겠지. 인간은 나약하니까."

"그래도 보통 저렇게까지 약해? 내가 키우는 늑대보다도 작잖아."

"그것보다 큰 인간은 세상에 없을 거다. 멍청한 소리 그만해."


율리아는 대화를 주고받는 둘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원작의 에스델은 황족으로서 자긍심이 대단했고, 그래서 이 둘과 처음 마주했을 때 그녀는 끝까지


고고하고 당당하게 행동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족들로 하여금 비틀린 흥미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율리아에게 그런 대담함은 없었다. 그저 저들이 언제 자신을 죽일까 하는 두려움에 돌처럼 굳어


버렸을 뿐이었다. 뭘 어떡해야 좋을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불현듯 레라지에와 눈이 마주쳤다.

"……!"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머리 위로 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뭐야, 생각보다 귀엽잖아? 엄청 대단한 황녀라기에 어떻게 기를 꺾어 놓을까 나름 기대했는데."

성큼성큼 걸어온 레라지에는 그녀가 목숨줄처럼 붙들고 있던 시트를 한 손으로 잡아 걷어냈다. 율리아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악마의 힘에는 당할 수 없었다. 사실 가느다랗고 연약한
그녀의 몸은 악마가 아니라 누구의 힘도 당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침대에 휘청거리며 엎어진 그녀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줄곧 침묵하던 바르바토스였다.

"더 볼 것도 없군. 탑으로 데려가지."

"뭐? 방금까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큰소리 뻥뻥 쳤잖아?"

"아무리 봐도 이상하지 않나."

바르바토스는 하찮은 인간에게 직접 닿기도 싫다는 듯 손수건을 꺼내 율리아의 턱을 움켜쥐었다. 뱀처럼


가느다란 눈동자가 그녀의 생김새를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외양은 대충 비슷하지만, 이 태도는 아무리 봐도 황녀의 것이 아니야. 굴종에 익숙한 인간이다."

"대용품이란 거야? 그래도 설마, 분홍빛 도는 백금발은 브에스드라 황실의 상징인데!"

형에게서 율리아를 빼앗은 레라지에가 다시금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살폈다. 설익은 과일처럼 엷은 빛을
띤 머리카락이 그의 손길에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두 형제 사이에서 이리저리 공처럼 옮겨지는 동안, 율리아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굳은 확신이 섰다.


이대로 가면 마정석의 힘에 휩쓸려 죽든, 감히 마족을 속였다며 괘씸죄로 죽든 확실하고도 명확하게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최소한 살기 위해 노력은 해야 했다. 율리아는 온 용기를 끌어모아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 저는 황녀가 맞아요……."

그녀는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스스로 듣기에도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경알 너머 바르바토스의 눈매가 더욱 싸늘해졌다. 레라지에가 뭐라 덧붙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장난칠 시간 없다고 했을 텐데, 인간."

"저, 저는 정말로……."
"마정석 앞에 세워 보면 확실해지겠지. 당장 따라와."

그는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매몰차게 뒤돌아섰다. 율리아가 마지막 말의 의미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레라지에가 한 손으로 그녀를 가볍게 들어 안았다. 그러곤 아무래도 좋다는 듯 걸음도 가볍게 형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나름 위로라고 한 마디 덧붙이기를.

"형이 저렇게까지 강하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대신 네 시체는 내가 세심하게 엮어서 인형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인형이라니……."

"물론 멀쩡한 부위가 있다면 말이지, 큭큭!"

죽는 것보다 인형이 되는 게 훨씬 무섭다고 솔직히 말하기에, 율리아는 간이 무척 작았다. 그녀는 제


가느다란 허리를 지분대는 레라지에의 손길을 애써 피하며 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비록 정체를 의심받긴 했지만, 상황 자체는 게임 프롤로그와 똑같이 진행되고 있었다.

마신의 탑 최상층에 도착한 에스델은 두 마족에 의해 수정구가 봉인된 공간 안으로 억지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마정석이 내뿜는 마력은 너무도 강력해서 아직 '열쇠'로 개화하지 않은 인간의 몸으로 버틸
수 없었고, 그대로 실신하여 목숨만 간신히 건지게 된다.

이후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되며 각종 능력치를 올려 나가면 되는데, 자신이 여기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수정구 앞은커녕 마신의 탑에 들어가자마자 거품 물고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아…….'

저도 모르게 레라지에의 옷자락을 움켜쥔 율리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가녀린
모습에 측은지심이라도 느낄 법하건만, 레라지에는 율리아 쪽에서 매달려 오는 게 즐거운 듯 그녀를 잡은
손을 느슨하게 풀기까지 했다.

"이, 이러다 떨어지겠어요!"

"그럼 날 더 꽉 안으면 되잖아? 죽을힘을 다해 매달려 봐. 떨어져도 안 도와줄 거니까."

픽 웃은 그의 등에서 거대한 날개가 꽃잎이 터지듯 펼쳐졌다. 그보다 앞서 걷던 바르바토스는 어느새


허공에 도약해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레라지에가 마찬가지로 창틀을 넘어 뛰어내리자 율리아의 공포는 절정에 달했다. 아득히 먼 땅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악마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직 하나만을 생각했다.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마신의 탑에 도착하고, 두 마족이 맥동치는 마력에 힘겨워하며 계단을 오르고,
마침내 위대한 제단 앞에 설 때까지도 온전히 레라지에의 목에 매달려 있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율리아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었다. 그녀의 눈앞엔 어느새 짙은 보랏빛의 거대한 구체가 웅웅 소리를
내며 발광하고 있었다.
태양을 직접 보면 눈이 멀어 버리듯, 율리아 또한 엄청난 파장을 내뿜는 그것을 오래 보고 있기가
힘겨웠다.

"어라, 형……."

"보고 있다."

어색하게 선 율리아의 귓가에 조금 아연한 듯한 신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그들을
돌아보았고,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아챘다.

'게임 속 CG 와 똑같아. 이건 분명 마신의 수정구야.'

경기장만큼이나 웅장하고 거대한 홀 전체가 오직 마정석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기억 속 모습과 같았지만, 단순히 모니터 너머로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마치
태초의 자연 앞에 선 듯, 무한한 경외심이 율리아의 다른 모든 감정을 집어삼켰다.

3화

마정석을 중심으로 거대한 아치형 기둥이 끝없이 늘어섰고, 보통 키의 스무 배는 족히 넘을 듯 아득한


높이의 천장엔 마계의 역사가 그림으로 새겨져 있었다.

한편 바닥엔 마신의 힘을 억제하기 위한 광활한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것은 수정구가 점멸할
때마다 그에 맞춰 온갖 색으로 발광했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님에도 마정석의 힘을 억제하기 힘겨워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흠, 다행히 헛수고한 건 아닌 것 같군."

"이건 헛수고 정도가 아니잖아?!"

율리아를 짐짝처럼 옮겨 왔던 두 마족은 그녀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제단 아래에서 굳은 얼굴을 한 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율리아는 제가 마정석을 앞에 두고도 사지 멀쩡히 서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진짜 열쇠인


에스델은 마정석과 처음 마주했을 때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는데, 정작 가짜인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주변 풍경이나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뒤늦게 엄습한 두려움에 숨도 못 쉬고 질식할 지경이었다. 당장에라도 초라하게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버텼다. 지금 아무렇지 않은 척 참아 내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을 거란
직감이 뇌리를 스친 탓이었다.

그런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마족들은 이제껏 인계에서 비밀리에 마정석의 열쇠를 찾아다녔지만, 매번 실패했다. 마신의 탑에


내려놓기도 전에 힘에 짓눌려 터져 죽은 경우도 있었고, 그나마 성공이라고 할 만한 사례도 마정석을 앞에
두고 정신이 나가 폐인이 되어 버린 인간 정도였다.

그렇게 수십 수백의 기회를 날린 끝에 처음으로 성공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자신들의 위대한 주군을
마침내 마신으로 만들 기회가!

율리아를 보는 두 악마의 안광은 마치 탐스러운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탑에서의 일을 기점으로 율리아를 대하는 바르바토스의 태도가 삽시간에 달라졌다.

모든 인간을 미물처럼 취급하는 부분에서는 여전히 같았지만, 최소한 마신의 탑에서 내려와 이동하는 내내
그녀의 육체가 손상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쓰는 걸 잊지 않았다.

반면 레라지에의 태도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그녀를 예쁜 장난감 보듯 다뤘으며, 제 형이 보지


않을 때는 허공에서 두 손을 완전히 떼 버리고 율리아가 아등바등 매달리는 걸 즐기기까지 했다.

"너무해요……."

"떨어지기 싫으면 더 꽉 잡으면 되잖아."

좀 살 만해진 율리아가 용기를 그러모아 항의해도 레라지에는 되레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처음 깨어났을 때의 방으로 옮겨진 율리아는 삽시간에 씻기고 빗기고 입혀졌다. 마계에 떨어진 이후 줄곧
엉망이었던 그녀의 몰골이 비로소 사람 꼴을 찾았다. 그녀를 직접 꾸민 레라지에는 물론이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바르바토스조차 멈칫할 정도였다.

"이게 아까 그 열쇠라고."

"큭큭, 대단하지?"

거울 앞에 선 율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녀에게 입혀진 드레스는 온통 새카만 색이었다. 하지만 섬세한 레이스와 화려한 보석을 아낌없이 퍼부어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치맛자락이 몸에 사르르 감겨왔다. 게다가 칠흑 같은 원단이 그녀의 새하얗고
연약한 피부와 무척 잘 어울렸다.

"아까는 거지 비렁뱅이 같았는데, 이 정도면 주군께서도 열쇠라는 걸 믿어 주시겠군."

"거지 비렁뱅이라니! 내 인형한테 말이 심하네, 형!"

"……."

자신은 열쇠가 아니고 인형은 더더욱 아니라고 당당히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율리아의 간은
여전히 콩알만 했고, 두 마족의 기세는 하늘을 뚫을 듯 대단했다.

율리아는 설전을 벌이는 두 형제를 피해 테이블 아래에 슬그머니 쪼그리고 앉았다.

프롤로그의 시험은 어찌어찌 무사히 해결한 듯했지만 산 넘어 산이라고, 시험을 끝낸 주인공의 다음


에피소드는 바로 마왕과의 대면이었다.

[마계를 통일한 최초의 군주, 대악마 바엘(Ba'al)]

바엘은 혼란하고 무질서하던 지옥을 그의 이름 아래 완전히 개편할 정도로 강하고 잔혹했다. 그럼에도
그의 욕망은 끝을 모르고 내달려 인-마 전쟁을 일으켰고, 동시에 지옥의 심연에 묻혀 있던 마정석을
발굴해 내 그 강대한 힘을 곧장 삼키려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바엘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

마정석엔 고위급 악마인 바르바토스와 레라지에조차 제대로 버티기 힘들 정도로 강대한 마신의 힘이
잠들어 있었다. 바엘은 그 앞에 온전히 설 수 있었으나, 힘을 흡수하는 일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 그
반작용으로 되레 끔찍한 마력 폭주를 겪어야 했다.
실패의 대가는 매번 다르게 나타났다. 단발적으로 그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는 날뛰는
마력을 주체하지 못해 주변 일대를 삽시간에 황폐화시켰다.

폭주하는 그를 곧장 마주했다간 제아무리 고위급 악마라도 무사히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마족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그들은 왕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가장 고귀한 인간'을 열쇠로
삼으라는 옛 기록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마족들이 매번 실패하면서도 열쇠가 될 만한 인간을 끊임없이 찾았던 데는 그런 사정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번엔 부디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군."

바르바토스가 나직이 중얼거린 찰나, 박쥐 한 마리가 살짝 열린 창문 너머에서 날아들었다. 그것과


접촉한 레라지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아가레스가 찾아."

"왜?"

"주군의 폭주가 시작됐대. 죽기 싫으면 당장 열쇠를 대령하라네."

"……복잡하게 됐군."

미간을 주무른 바르바토스의 시선이 테이블 아래 얌전히 들어가 있던 율리아에게로 향했다.

폭주 상태의 주군은 자신들조차 버텨 내기가 쉽지 않은데, 그런 주군에게 열쇠를 대령했다가 크게


상하거나 죽기라도 했다간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 힘들었다.

율리아 역시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염려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사실은 방금 프롤로그를 끝낸


이후의 시점부터…….

[▷바르바토스

폭주 상태의 주군에게 열쇠를 대령했다가 크게 상하거나 죽기라도 했다간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렇게 인물의 생각이 지문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탓이었다. 걷거나 이동할 때는 시야에 방해가 되기
때문인지 사라졌지만 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 보면 도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구석에 SKIP 버튼이 있기는
했지만, 율리아는 아직 그것까지 조작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더 신경 쓰이는 건…….'

시야 오른쪽 상단에 마정석처럼 생긴 보랏빛 아이콘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엇인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팔을 쭉 뻗어야 했기에, 율리아는 애매하게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동안 두 형제는 계속해서 토론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럼 폭주가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는 건 어때?"

"어쨌든 주군의 명이다. 열쇠를 가져가되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지키는 것으로 하지."

"그렇게 죽고 싶으면 혼자 힘내라고 하고 싶지만……. 이번엔 확실한 열쇠 같으니까 어쩔 수 없네. 같이


가 줄게."
그는 율리아를 보며 살짝 처진 눈꼬리를 매혹적으로 휘었다. 마치 탐스러운 나비를 꾀는 거미처럼.

[▷레라지에

운이 좋아 주군께서 내친다면 내가 날름 가질 수도 있고.]

하지만 아래에 떠오른 창을 보니 그 미소가 아름답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날름 가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무서워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다행히 성 안에서만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율리아는 레라지에에게 아등바등 매달리지 않고
두 다리로 직접 이동할 수 있었다. 악마들의 키가 훤칠하게 큰 탓에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거의 뛰어야
했지만 말이다.

한참을 걸은 세 사람은 거대한 기둥이 줄지어 늘어선 웅장한 회랑 입구에 도착했다. 형제가 먼저 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높고 날카로운 외침이 고막을 찔렀다.

"당장 가져오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놀란 율리아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지만, 그 전에 레라지에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앞으로 끌고 오는


게 더 빨랐다.

"주군의 눈에 들도록 치장하느라 좀 걸렸지. 어때?"

"쓸모없는 짓을……. 어차피 또 가짜일 텐데."

"이번엔 달라! 마정석 앞에서도 멀쩡하게 버텨 냈는걸."

"내가 직접 보지."

또각또각 절도 있는 굽 소리가 돔 형태의 천장을 날카롭게 울렸다. 율리아보다 키가 한참이나 큰 미인이


강압적인 시선을 한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왕의 대리인이자 마계 이인자, 대공 아가레스(Agares)]

율리아는 아가레스가 내뿜는 엄청난 박력에 정신을 못 차리고 눈만 깜빡였다.

호리호리하고 탄탄한 몸매를 검은 군복이 빈틈없이 감쌌다.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높이 묶고 허리엔 검과 채찍을 찼다. 그녀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어깨의 견장이 규칙적인
금속음을 내며 흔들렸다.

어느새 율리아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다짜고짜 율리아의 턱을 쥐어 제 쪽으로 들어올렸다.


악어처럼 가느다란 동공이 형형하게 빛났다.

"흠."

"……."

"과연, 알겠다."

스치듯 찰나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아가레스는 무엇을 본 걸까, 율리아와 마주친 그녀의 두 눈엔 명백한
호의가 깃들어 있었다.

때맞춰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아가레스
이 인간, 뭐야? 너무 귀여워. 진짜 사랑스럽잖아? 내 침대에 눕혀 놓고 발가락 하나하나까지 쪽쪽
빨아먹고 싶어.]

비록 호의의 맥락이 조금……. 아니, 많이 달갑지 않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작은 열쇠야, 겁먹지 말라고 미리 말해 주는 거니 잘 들으렴."

아가레스는 장미처럼 붉은 입술을 혀끝으로 핥아 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서 있는 이곳부터 저 뒤, 복도가 끝나는 지점까지는 내 방어막이 걸려 있단다. 하지만 마지막


기둥을 넘어가는 순간, 이제껏 겪지 못한 강대한 힘을 맞닥뜨리게 될 거야."

율리아의 시선이 긴 회랑의 끝, 거대한 문으로 자연스럽게 향했다. 게임에서 이미 봤던 장면이었다. 저


문 너머가 바로 마왕 바엘의 둥지였다.

그는 마정석을 삼키려다 실패할 때마다 심각한 마력 폭주를 일으켜 주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그렇게
매번 성이 폐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위급 마족들이 나서 방어막을 걸곤 했는데, 마계의 이인자가
직접 나설 정도면 이번 폭주 규모는 상당히 큰 듯했다.

겁먹은 얼굴로 주춤거리는 그녀를 향해 아가레스가 재차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곁에 있으니 죽지는 않을 거야. 조금 고통스러울 순 있겠지만."

"잡담은 여기까지 하지. 기세가 심상치 않다."

복도 밖에 휘몰아치는 뇌운을 응시하던 바르바토스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가레스는 짜증 난다는 듯


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지만, 상황이 급박하긴 한지라 율리아를 향해 이만 가자며 손을 뻗었다.

"……."

잔뜩 겁먹은 율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를 채근하듯 지그시


응시하는 세 악마의 시선에, 결국 떠밀리다시피 아가레스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4화

텅 빈 회랑에 그들의 발소리가 메아리치듯 소름 끼치게 울렸다. 율리아는 제 키의 몇 배는 족히 될 듯한


문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원작에서 보았던 에스델과 마왕의 첫 대면을 떠올렸다. 그때의 마왕은 오늘처럼 심각한 폭주
상태가 아니었는데도 강력한 마력을 드러내 주인공을 반죽음으로 만들었다. 그만큼이나 '열쇠'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의미였다.

율리아의 머뭇거림을 알아챈 걸까, 바르바토스가 먼저 결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심해와 같은 적막 속,


그의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이 흘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능글거리던 레라지에조차 긴장으로 얼굴을 굳혔다.

"주군, 바르바토스입니다."

"……."

"열쇠를 가져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쨍그랑!
방 안에선 허락의 말 대신 무언가 깨지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바르바토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뒤돌아섰다.

"허락하셨으니 들어가지."

"허락이요? 저, 저게요?"

"꺼지라고 하지 않았으니 허락이지. 들어가자, 작은 열쇠야."

아가레스가 율리아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손바닥 아래 가느다랗고 여린 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걸 알


텐데도, 아가레스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완력에 이끌린 율리아는 저항할 새도 없이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쿵, 지금까지와는 다른 엄청난 중압감이 율리아의 어깨를 짓눌렀다. 거대한 바위 밑에 깔린 듯 숨조차


제대로 들이쉴 수 없었다.

작은 헐떡임조차 허락되지 않는 절대적인 힘. 당장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야 할 것 같은 초자연적인


권능. 두꺼운 문이 가로막고 있음에도 율리아는 그 강대함을 여실히 체감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바르바토스가 문손잡이를 잡았다.

"으읏!"

"와, 주군께선 오늘도 화끈하시네."

등 뒤의 방어막이 끔찍한 파열음을 내며 와장창 깨져 나갔다. 만일 저 안에 있었더라면 깨진 마력의


파편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세 마족 중에선 아가레스가 그나마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뿐이었다.


율리아는 그녀의 손톱이 제 어깨를 점점 강하게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이인자라는 그녀조차 긴장하고
있었다.

돌풍과 같은 마력이 끊임없이 밀어닥쳤다. 율리아의 긴 머리칼이 난폭한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
마구 흩날렸다.

"형, 빨리!"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하고 있다."

두 형제의 손아귀에서 크기를 키운 어두운 구체가 블랙홀처럼 마력의 파장을 안으로 빨아들였다. 돌풍의
강도가 조금이나마 약해진 사이, 율리아는 다급히 정신을 차리고 문 안쪽을 훑어보았다.

내부는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거대한 침실 한 면을 차지한 유리창은 완전히 깨져 틀만 앙상하게 남았고


값비싼 커튼과 카펫은 초라한 넝마가 되었다. 기물이나 내장재도 모조리 부서지고 깨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 방의 한가운데에 마왕, 바엘이 누워 있었다.

긴 흑발은 새하얀 시트 위에 엉망으로 흐트러졌고, 옷을 걸치지 않아 고스란히 드러난 탄탄한 가슴팍은


힘에 겨운 듯 세차게 오르내렸다.
바엘의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불현듯 방향을 틀어 문밖의 불청객을 훑었다. 맹수 앞에 선 토끼처럼,
율리아는 꼼짝도 못 하고 굳어 버렸다.

[▷바엘

……. ……. …….]

이전처럼 인물의 생각을 알려 주는 지문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름만이 있을 뿐, 내용은 추측할 수 없게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지금 그의 기분이 좋은지 혹은 나쁜지조차……. 일단 겉으로만 보자면 최악인 것
같긴 했지만.

"주군, 힘듭니다."

"……."

"앞서 보고받으셨겠지만, 이번 열쇠는 진짜일 확률이 높습니다. 마정석 앞에서 이처럼 멀쩡하게 살아남은
인간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바엘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듯 낮고 음산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세 마족의 몸이 차례로 무너졌다.

"큭, 주군!"

"내가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닐 텐데."

그는 침대에 누이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단지 상체를 세웠을 뿐인데도 세 마족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레라지에

이런, 날 잘못 잡았다. 오늘은 진짜 장난 없네. 이러다 죽겠어!]

레라지에의 생각을 본 율리아는 두려움에 양손을 꼭 붙들었다. 고위 악마인 그가 이토록 힘겨워할 정도면
자신도 곧 같은 꼴이 될 게 뻔했다. 자신은 주인공인 에스델이 아니니까,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을지
몰랐다.

그녀는 몰려드는 공포로 두 눈을 꽉 감은 채 바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 탓에 그녀를 보는 주변


시선이 놀라움에서 경악으로 점점 바뀌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저벅저벅.

단단한 파편이 짓밟혀 가루로 변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바엘

……. ……. …….]

율리아의 뒤통수가 삽시간에 붙들려 끌어 당겨졌다. 강제로 고개가 들린 그녀는 도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화마처럼 들끓는 안광이 그녀를 곧장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버티고 있지?"


"……."

"대답해."

"……네?"

어리둥절해진 율리아가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뒤통수가 그의 손아귀에 꽉 잡혀 있는 탓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차선으로 눈을 내리깔려 하자 맘에 들지 않았는지 뒤통수를 움켜쥔 힘이 더 강해졌다. 율리아는 결국


바엘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아.'

피처럼 붉은 눈동자 속에 뱀의 동공처럼 소름 끼치는 냉기가 스며있었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이유를 알


수 없이 눈길이 갔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바엘의 눈가로 손을 뻗은 찰나였다.

"주군, 제발! 이러다 저희 다 죽어요!"

레라지에의 외마디 비명이 무거운 침묵을 깼다. 바엘은 그녀를 내던지다시피 놓아주며 마른세수를 했고,
대신 다급히 일어난 아가레스가 휘청거리던 율리아를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챘다.

아가레스는 첫 대면부터 고압적인 당당함을 자랑했다. 하지만 지금 품 안의 율리아를 보는 그녀의 눈빛엔


일말의 경탄이 자리하고 있었다.

"작은 열쇠야,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에스델?"

"그, 그게……."

"에스델 브에스드라, 인간들의 황녀다."

짧은 시간에 흐트러진 외관을 완벽히 정돈한 바르바토스가 외눈 안경을 치켜들며 대신 답했다. 책사


역할을 겸하는 그가 에스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바엘은 흥미 없다는 듯 몸을 돌려 크고 깊숙한
소파에 쓰러지다시피 몸을 파묻었다.

그는 자꾸만 두통이 이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검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 인간이 마정석 앞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왔단 말이지."

"예, 주군."

"그럼 봉인은 풀렸나?"

"유감스럽게도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확실할 거라 생각합니다."

바르바토스를 응시하던 마왕의 시선이 율리아에게로 옮겨 갔다. 무언가를 계산하듯 그의 눈초리가 더욱


가늘어졌다.

바엘은 미간을 주무르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젖혔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목울대가 툭 불거졌다.

"그런 것 같군. 열쇠의 사용법은?"

"그게……."

줄곧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던 바르바토스가 처음으로 멈칫했다.


게임에서도 인간인 에스델이 어떻게 '열쇠'가 되는지는 철저하게 비밀에 감춰져 있었다. 히든 엔딩을
깨면 알 수 있다고 들었지만, 율리아는 생전에 그렇게까지 열정적인 성격이 아니었고, 그저 추천에 못
이겨 몇 가지 엔딩을 내 본 게 다였다. 참고로 모두 데드 엔딩이었다…….

그런 그녀의 입장에서 인간이 열쇠가 되는 방식이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마정석과 함께 용광로에


투척해서 녹이기, 죽여서 마정석 위에 피 흩뿌리기 등과 같은 무시무시한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장르마저 19 금 피폐였으니 말이다.

겉보기엔 가장 멀쩡했던 인간계의 용사 루트조차 선택지를 잘못 타면 장기자랑 엔딩이 나왔다. 누구의


장기를 자랑하는지는…… 딱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턱을 만지작거리던 레라지에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먹으면 되지 않을까?"

"뭐?"

"힘을 흡수하는 방법은 먹는 게 최고잖아. 그러니까 주군께서도 매번 마정석을 먹으려다 이 사달이 나는


거고."

"일리가 있군."

"무슨 소리를! 주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엘마저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정작 바르바토스가 사색이 됐다. 그는 마왕의 앞에 부복한 채


말을 이었다.

"방금도 보셨지 않습니까! 간신히 찾아낸 열쇠입니다.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기회일 수 있는데,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내 앞을 막은 건가?"

"주군께서 마신이 되는 것이야말로 이 바르바토스 필생의 바람입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부디 숙고해


주십시오. 방법을 찾을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항상 과묵하던 바르바토스가 이렇게까지 말을 길게 하는 건 처음 봤다. 레라지에도 그런 제 형이 신기한


듯 위아래로 훑더니 재차 손을 들어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식사가 안 된다면, 색사(色事)는?"

모두의 시선이 일순 율리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예로부터 인간의 정기를 흡수하는데 정사 만한 것도 없었지."

"작은 열쇠를 죽이는 건 좀 그랬는데, 색사 정도라면 나름 괜찮네."

"과연, 그것이라면 지금 당장 시도해 볼 수 있겠습니다."

레라지에, 아가레스, 바르바토스가 차례로 발언했다. 정기를 빼앗기는 당사자인 율리아의 의사는 그다지
중요치 않은 듯, 그들은 일제히 주군의 허가를 구했다.

"싫은데."
당연히 누구라도 허락하겠지. 바엘의 입장에선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인……. 음?

두려움에 머리를 헝클이던 율리아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바엘의 대답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어쩌면 너무 무서워서 가는 귀 먹은 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잘못 들은 건 아니었는지, 악마 셋이 일제히 눈을 부릅뜨며 반문했다.

"주군, 어째서죠?"

"마음에 차지 않는군."

[▷아가레스

주군의 눈이 어떻게 된 걸까? 마력 폭주의 부작용인가?]

마계의 이인자이자 마왕에게 기어오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마족, 대공 아가레스가 율리아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으며 읍소했다.

"주군, 눈을 크게 뜨고 잘 보십시오! 이렇게 인형처럼 예쁘고 가련한 인간을 보신 적 있습니까? 손대면


살살 녹을 듯 부드러운 피부에 설익은 과실 빛의 머리카락, 동글동글 순종적인 눈동자와 미성숙한 분위기.
솔직히 주군만 아니었어도 제가 두고두고 벗겨 먹고 싶을 정도인데요?"

아가레스가 율리아의 드레스 가슴팍을 손톱 끝으로 살포시 끌어내리며 천연덕스럽게 눈을 휘었다.

사실 율리아가 듣기엔 전혀 공감되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그렇다고 마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두


악마의 대화에 끼어들 용기는 없어서 입만 꾹 다물었다.

[▷바엘

……. ……. …….]

율리아는 혹시나 마왕의 생각을 알 수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바엘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시스템이 바엘에게만 다르게 작동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율리아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애초에


마왕은 유저들 사이에서도 공략 난이도가 너무 높다는 원성이 자자한 캐릭터였고, 그것을 들은 율리아는
그를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대가로 율리아는 자신의 운명을 그의 말 한마디에 맡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말이다.

5화

"내키지 않아."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마계의 주인인 내가 고작 몽마 따위나 하는 짓을 흉내 내라니……."

살갗이 따끔거렸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주변 공기가 다시금 날뛰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바엘의 말을 해석해 보자면 무려 마계 통일의 위업을 이룬 절대 군주인 본인이 하급 마족인 몽마처럼


정사를 통해 힘을 얻어야 한다는 게 못마땅하다는 의미 같았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좋았다. 그에게 식사 당하든 색사 당하든 어느 쪽이든 싫었기 때문에 율리아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치가 싹 증발한 기색인 레라지에는 점점 갈수록 싫은 안을 내놓았다.

"주군, 그럼 일단 곁에 두고 보기라도 하세요."

"뭐?"

"열쇠를 구워 드시든 삶아 드시든 저희는 일절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시종 필요하시잖아요? 얼마


전에 또 죽었으니까요. 솔직히 폭주하는 주군 매번 뒤처리하기 귀찮고……."

본론은 마지막 문장에 있는 듯했지만, 어쨌든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여겼는지 나머지 두 악마가 동조의
빛을 내비쳤다.

저들끼리 쑥덕거리던 셋은 바엘이 잠깐 시선을 돌린 새 도망치듯 뒷걸음질 쳐 문을 닫았다. 그 모습을


보던 율리아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언제는 내가 죽지 않게 지켜 주겠다며!'

율리아는 기본적으로 소심한 성격이었지만 그렇다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까지 일관적이진 않았다.
와장창 깨져 나뒹굴던 마력의 파편과 폐부를 짓누르던 묵직한 공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넓은 침실 가운데 덩그러니 남은 그녀는 차마 닫힌 문 너머 마족들을 따라가지도, 그렇다고 마왕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섰다. 조금이라도 발을 떼었다간 거슬린다며 마력의 폭풍의 몰아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바엘은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그의 붉은 눈만큼은 율리아에게 정확히
고정되어 있었다. 겁먹은 그녀는 어깨를 바짝 웅크린 채 바닥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무서워. 도망치고 싶어.'

눈을 꽉 감고 있음에도 제 몸을 훑는 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발끝부터 천천히 타고 오른


시선이 가느다란 허리와 마른 가슴을 지나 이윽고 얼굴에서 멈춘다.

질식할 듯한 침묵이 그녀를 압박했다.

그는 자신을 얼마짜리 인간으로 품평했을까. 진짜 열쇠인 에스델처럼 고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잉그렘
5 세의 정부들처럼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도 않다. 바엘의 눈엔 분명 기가 찰 정도로 볼품없어 보였을
터였다.

"좋아, 인간."

"……."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말해."

바엘은 단지 그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율리아는 말을 듣는 순간 스스로가 쓸모없는 존재 같다고 느꼈다.


어쩌면 바엘이 그런 자신을 경멸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기에 사실은 어떤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분명 그랬다.

그녀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를 겨우 펼치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청소, 빨래, 요리도 조금……."


"내가 지금 그딴 농담이나 들을 만큼 한가해 보이나 보지?"

힘겨운 노력도 부질없이 그녀의 어깨가 도로 작게 움츠러들었다. 겉보기엔 나이 열여덟의 황녀라지만


실제론 이곳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현대에서 20 년을 살았고, 죽은 후 게임 속으로 끌려와선 황녀궁에 4
년을 홀로 유폐되어 있었다.

양쪽 세상의 기억을 전부 합쳐도 살기 위한 허드렛일 외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바엘이 어떤


거창한 걸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율리아의 말이 농담이 아니란 걸 알았는지 그에게서 픽 비웃는 소리가 났다.

"설마 진심인가? 하찮기 그지없군. 손댈 가치도 없겠어."

"……."

"그럼 그토록 자신 있는 청소나 해. 허튼짓할 생각 말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일갈한 그는 피곤한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엉망이 된 방을 한참 동안 말없이 정리하던 율리아는 불현듯 바엘이 깊게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불면증이란 설정은 어디로 내버렸는지 낮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백색 소음의 힘일까?'

깨어 있을 땐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정작 자신이 청소하는 소리에 잠들었다고 생각하니 어이없게도


뿌듯한 기분이 고개를 들었다. 무려 마왕을 잠재운 것이다.

'아, 맞다.'

그제야 율리아는 프롤로그 장면 이후 줄곧 잊고 있던 아이콘에 생각이 미쳤다.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핀


그녀는 바엘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뒤 탁자 아래 몸을 작게 웅크리고 앉았다.

아이콘은 여전히 시야 오른쪽 상단에 자리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것에 손을 뻗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STATUS (스탯)

▷PROGRESS (진행도)

▷SKILL (스킬)

▷ITEM (아이템)

▷SETTING (설정)

맨 위에 이름이 뜨더니 그 밑으로 선택창이 줄줄이 나열됐다. 게임 화면에서 봤던 것과 같았다.

율리아는 기계적으로 첫 번째 STATUS 를 선택했다. 역시나 익숙한 수치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짧은


스크롤을 단번에 내렸다.

▷HP (체력)

▷SP (스킬 포인트)


.

▷REP (항마력)

▷LUK (행운)

▶SIGHT (시야)

종류가 몇 안 되는 스탯은 시야를 마지막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와 4 년 만에 처음 나타난 화면이었다. 율리아는 아이콘이 왜 이제야 생겨났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했다.

[악마들의 낙원]은 여느 연애 시뮬레이션처럼 주인공을 육성해 능력치를 올리고, 그 능력을 이용해


캐릭터를 공략하고 사건을 해결하며 엔딩에 도달하는 게임이다.

물론 일반적인 게임과는 다른 요소도 존재했다. 다수의 캐릭터를 원하는 만큼 공략해서 역하렘 엔딩을 낼
수 있다는 점, '마정석의 열쇠'라는 메인 에피소드와 완전히 동떨어진 독자적인 전개가 가능하다는 점,
19 금 피폐 장르에 걸맞게 고어한 에피소드와 엔딩이 상당히 많다는 점 등이었다.

게임의 자유도가 높고 세계관이 방대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들인 자본도 대단했는지 그녀가
추천받기 전에도 각종 매체에서 연일 광고를 내보내곤 했다.

'어차피 초반이니까 능력치는 다 기본에서 시작하겠지.'

별 소득 없이 창을 끄려던 그녀는 초기 화면에서 유독 눈에 띄는 메뉴를 발견했다.

▷STATUS (스탯)

▶PROGRESS (진행도)

▷SKILL (스킬)

▷ITEM (아이템)

▷SETTING (설정)

'진행도……?'

율리아는 멈칫했다.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튜토리얼을 따라 하라고 유도하는 것처럼, PROGRESS


버튼만이 유독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홀린 듯 그것을 선택했다. 기억과 다른 단출한 창이 떠올랐다.

[▷SYSTEM

스토리 진행도 1%]

[마계를 통일한 최초의 군주, 대악마 바엘(Ba'al)]

'바엘이라니, 어째서?'

실제 게임에선 PROGRESS 를 선택하면 스토리 진행에 따른 공략 가능 캐릭터가 나열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프롤로그만 갓 끝낸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바엘의 이름이 곧장 튀어나왔다. 반면 마계에서
처음 만난 두 형제나 아가레스, 심지어 4 년 전 몇 번이나 만났던 인간 용사조차 선택할 수 없도록
무채색으로 막혀 있었다.

'바엘 하나만 공략할 수 있다는 것처럼…….'

생각에 잠겼던 율리아의 움직임이 불현듯 멈췄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다른 인물의 지문은 제대로 뜨는데 바엘만이 가려진 채 표시되었고,
폭주하는 마력에 세 악마가 속절없이 쓰러질 때도 자신은 그가 내뿜는 위압감이 두려웠을 뿐 그 이상의
고통은 느끼지 못했다.

'네가 서 있는 이곳부터 저 뒤, 복도가 끝나는 지점까지는 내 방어막이 걸려 있단다. 하지만 마지막


기둥을 넘어가는 순간, 이제껏 겪지 못한 강대한 힘을 맞닥뜨리게 될 거야.'

'내가 곁에 있으니 죽지는 않을 거야. 조금 고통스러울 순 있겠지만.'

율리아는 퍼뜩 창을 나가 도로 STATUS 로 들어갔다.

마왕 바엘의 공략 난이도가 극악 중의 극악이라 불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요인은


그가 게임의 메인 스토리인 '마정석의 열쇠'와 깊이 얽혀 있는 캐릭터란 점이었다. 마정석에 무사히
다가가기 위해선 관련 스탯을 상당히 높은 수치까지 쌓아야 했다.

'마정석까지 직접 보고 왔으면서, 어째서 난 의심하지 않았을까.'

그중에서도 가장 올리기 어렵다던 마력 저항이 무려…….

[▷REP (항마력) : ∞]

무한대 기호로 표시되어 있었다. 놀란 율리아가 다른 스탯들도 살펴보려는 찰나였다.

"윽, 크윽……."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그녀는 재빨리 화면을 종료하고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누군가 들어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소파에 기대어 짧은 잠을 청하던 바엘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빛이 번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인기척을 내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척 괴로워 보여.'

소파를 움켜쥔 그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핏기 없는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신이 되기 위해 마정석에 무한히 부딪힌 대가였다. 바엘의 내부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마력이 마정석의
파장을 버티지 못하고 날뛰며 그를 지독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는데 마음이 무거워졌다. 화면 너머도 아니고, 눈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누군가가
이토록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파도와 같은 괴로움을 홀로 견뎌 내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죽기 전에도, 그리고 죽어서 게임 속으로 끌려온 뒤에도. 자신이 아파할 때 챙겨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늘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모든 고통을 삭여야 했다. 며칠이고 몇 주고, 겉으로라도 대충 괜찮아 보일
때까지. 적당히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바엘이라면 지금도 충분히 만족할 텐데. 그토록 강하면서 왜 자꾸 마신의 힘을 갈구하는 걸까.'

율리아는 그의 식은땀을 닦아 내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의 살갗에 닿은 순간, 왜인지


말초부터 전기가 오르듯 찌릿한 느낌이 퍼졌다.

깜짝 놀란 그녀가 손을 물리려 했지만 잠든 바엘의 고개가 그녀를 따라 자연스레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그는 율리아의 허리를 감아 제 품 안으로 낚아채곤 베개를 끌어안듯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왜인지 만족스러운 듯한 한숨이 그녀의 귓가를 뜨겁게 간지럽혔다. 반면 율리아의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섞였다.

'어떡하지. 자세가…….'

엉겁결에 그에게 안겨 단단한 허벅지 위에 올라타 버렸다. 키 차이가 큰 탓에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내려가기도 어려웠다. 포기하지 않고 슬금슬금 움직여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바엘은 미간을 구기며 그녀를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

자칫 잠든 그를 깨울까 봐 움직이지도 못한 채, 율리아는 그저 가만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엘의 숨소리가 아까보다 한결 안정적으로 변했다. 그가 깊이 잠든


것을 확신한 율리아는 긴장으로 굳은 어깨를 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편안해져서 다행이야…….'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어렵다고 지레 포기하지 말고 바엘 루트도 도전해 볼 것을 그랬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실마리가 그에게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직이 한숨을 쉰 율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어둠의 장막 끝, 붉은 달이 저물고 있었다.

6화

채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 바엘은 가벼운 몸을 느끼며 눈을 떴다.

감히 누구도 넘보지 못할 가장 강대한 마력을 지녔고, 그 때문에 혼란스럽던 마계를 단번에 점령한 뒤
고대의 마신이 잠든 탑 바로 옆에 거대한 둥지를 세웠다. 혹자는 그것을 마왕성이라 부른다지만 바엘에겐
그저 잠시 머물다 떠날 의미 없는 자리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왕 놀이를 할 생각도 없었다. 마계 각지를 주름잡던 악마들이 바엘의 강대한 힘에 이끌려 그의
둥지에 제멋대로 모여들었던 것뿐이다.

바엘이 그런 그들을 내버려 두는 건 처리하기 귀찮아서, 그리고 잠깐 쓰고 버릴 도구로선 나름대로 괜찮기


때문이었다.

정작 그가 지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강대한 마력을 지닌 탓일까, 지옥의 변두리에서 태어나 자아를 갖게 된
시점부터 그는 늘 괴로웠다.

그의 육신은 어느 마족도 감히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특별했다. 하지만 요동치는 마력을 감당하기엔


때때로 그 육신조차 역부족이었다. 외부의 변화에 따라, 혹은 달의 주기에 따라서도 버티지 못하고
폭주를 일으키곤 했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면 주변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완전한 무(無)의 상태. 바엘이 폭주에서 깨어나면
으레 맞이하던 모습이었다.
'오늘따라 이상하군. 상태가 썩 나쁘지 않은데.'

어제 열쇠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충동적으로 탑에 향했다. 짜증이 올랐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없이도


마신의 힘을 삼킬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생각을 멈춘 그는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결국 또 폭주했고, 늦은 밤 즈음엔 잠시 정신이


돌아왔던 것도 같지만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도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움직임이 가벼웠다.

처음 느끼는 이질적인 기분에 천천히 주먹을 쥐어보던 그는 제 가슴팍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작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어젯밤 제 둥지에 버려진 인간이었다. 새털처럼 작고 가벼운 탓에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바엘은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깨어나긴커녕 되레 몸을 뒤척여 좀 더


편한 자세를 찾았다.

"인간 주제에 지금 누구에게……."

불쾌감에 어금니를 짓씹던 그는 불현듯 제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상대가 너무 작고 하찮은 탓에 화를


낼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제가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도 모른 채 곤히 잠든 여자의 얼굴은 멍청하게까지
느껴졌다.

평소 같았으면 하찮은 것이 둥지에 침입한 대가로 갈기갈기 찢어 버려도 모자랐겠지만, 지금의 그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너그러웠다. 바엘은 그 이유를 짐작했다.

"그래, 열쇠니까 말이지.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를."

그의 낮은 중얼거림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율리아가 가느다란 신음을 냈다. 바엘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툭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느릿하게 쓸어넘기던 그의 시선이 다시금 소파에 잠들어 있는 율리아에게 향했다.

자는 것에 한이라도 품었는지, 그녀는 작은 몸을 더 작게 웅크리며 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바엘이 앉아


있을 땐 옷처럼 딱 맞던 소파가 정작 그녀에겐 버거울 정도로 거대해 보였다.

헛웃음을 흘리던 그의 얼굴이 문득 굳었다.

"웃기지도 않는 짓을."

자조적으로 짓씹은 그의 냉막한 시선이 율리아에게서 미련 없이 거둬졌다. 맹수의 걸음걸이처럼 느긋한


발소리가 적막한 회랑을 지나 천천히 사라져갔다.

* * *

커다란 창 너머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졸음에 겨워 작은 한숨을 내쉰 율리아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빛을 잔뜩 받은 그녀의 속눈썹이 눈물에 젖어 보석처럼 빛났다.

"흐응……."

작게 하품을 하던 그녀의 뇌리에 불현듯 어젯밤 일이 스쳤다.

엉망이 된 방을 정리하다가 주변에 보는 눈이 없는 틈을 타 게임 아이콘을 확인했다. 공략 대상에 오직


바엘 하나만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과 그를 공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스탯인 마력 저항이 무한대로
늘어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시스템은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걸까?'

혼곤함에 고개를 내젓던 그녀의 뇌리에 이번엔 다른 기억이 스쳤다. 이를테면 어젯밤 바엘에게 붙들려
그의 허벅지에 올라탄 것이나, 자신은 그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한 적이 없다거나, 지금은 이미 해가
중천에…….

"어, 어?!"

놀란 그녀가 퍼뜩 몸을 일으키는데 등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깼네?"

[길을 인도하는 마계 66 위의 악마, 후작 키마리스(Kimaris)]

까만 피부에 균형 잡힌 근육을 지닌 청년이 창틀에 기댔던 몸을 세웠다. 게임 내에서 맨 처음 '열쇠'의


존재를 예언한 자이자 주인공 에스델의 곁에서 그녀를 끊임없이 감시하는 자이기도 했다.

거의 모든 루트의 초반부터 주인공의 곁에 붙어 있는 인물인 만큼, 율리아는 키마리스에 대해 비교적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주인공이 도망치려 할 때마다 온갖 악랄한 수를 쓰며 훼방 놓곤 했다. 심지어는 자살을 시도할


때조차 그랬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율리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항시 붙어 있게 될 상대이니만큼 처음부터 이상하게 보이는


건 좋지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게다가 태평하기까지 하고."

키마리스는 짐짓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기대 잠들었던 소파 팔걸이에 앉았다.

"주군의 둥지에서 밤을 보내고도 무사히 살아남은 건 네가 처음이란 걸 알아? 겁도 없지. 이걸 들으면


다들 경악할 텐데."

"네에……."

"내 이름은 키마리스. 너를 완전한 열쇠로 만들 때까지 옆에서 잘 지켜보라는 명령을 받았어. 앞으로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을 테니까 편하게 불러."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금의 그는 마계의 악마들 중 그나마 상식인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저 모습은 꾸며 낸 것이다. 그의
내면엔 다른 악마들 못지않은 끔찍한 광기가 숨어 있었다.

그녀의 경계를 아는지 모르는지, 키마리스가 말을 이었다.

"마계는 처음일 텐데 궁금한 점 있어? 뭐든 물어봐도 좋아."

"그럼 저는……."
언젠가 다시 땅 위로 돌아갈 수 있나요. 열쇠의 역할을 끝내고도 제가 살아 있을 수 있다면.

단 하나뿐인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이건 분명 함정일 터였다. 앞으로 그가 자신의 앞에서
가면을 벗을지 말지 선택하는.

'무서운 건 싫어. 웃는 얼굴은 단지 겉모습일 뿐이라도.'

그녀는 손바닥에 고인 식은땀을 훔치며 다음으로 궁금한 걸 물었다.

"저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일? 일이라고?"

키마리스의 눈이 의아하다는 듯 크게 뜨였다. 마치 못 들은 걸 들었다는 표정이라, 율리아는 재차 말을


덧붙였다.

"저는 손님도 아니고 밥만 축낼 수는 없으니까……. 뭐든 시켜 주시면 열심히 할게요."

"뜻밖에 기특한 생각이라 놀랍긴 한데,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해?"

"요리라든가."

"우리 주방, 네가 보면 기절할 텐데."

율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게임에서 악마들이 식사하는 모습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지만, 말만
들어도 인간처럼 평범한 걸 먹지는 않을 것 같았다.

수긍한 그녀는 냉큼 단어를 바꿨다.

"청소……."

"이래도?"

그가 손을 휙 내젓자 어젯밤 미처 다 치우지 못해 엉망진창이던 내부가 삽시간에 원상 복구됐다.

"마왕성은 주군께서 그분의 마력으로 직접 세운 요새 겸 둥지라서, 이렇게 조금만 손보면 태초에 지어진
모습대로 돌아가거든. 할 수 있겠어?"

마력 없는 인간한테 그렇게 물어보니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율리아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현대에서 배웠던 모든 것들이 이곳에선 쓸모없었고,


게임 속으로 넘어와 황녀가 된 이후엔 폐궁에 방치되어 마땅히 배워야 할 기본 상식을 익히지 못했다.

'쓸모없는 취급 받기는 싫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선 시켜 달라고 매달리는 것조차 민폐가 될 수 있다는 걸 이미 겪어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녀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는데, 키마리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레벤나라면 네가 할 만한 일을 알지도 모르겠네."

"아뇨, 저는……."
"아마 너랑 이야기도 잘 통할 거야. 레벤나는 인형처럼 예쁜 걸 좋아하거든."

좋은 생각이라고 자화자찬하던 그는 어느새 문가에 서서 턱을 까딱였다. 바로 움직이자는 의미였다.

키마리스가 이렇게까지 제안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결국 율리아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 * *

율리아는 자신의 앞에 선 인형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악마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이목을 끄는 외모를 지녔지만, 눈앞의 이는 어떤 말로도 그 화려한 미모를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눈부시도록 채도 높은 금발이 파도치듯 내려오고 커다란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났다. 일반적인 사람은 그
무게를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프릴과 레이스가 그녀의 드레스 한 벌에 쓰였다. 매달린
보석의 크기도 마찬가지였다.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악마가 아니라 도자기 인형이라 해도 능히 믿을 만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작


움츠러든 율리아를 보며 즐거운 듯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그 에스델이니? 듣던 대로 작고 귀엽구나?"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퍼졌나 보네."

"키마리스도 참, 주군께서 강림한 뒤로는 할 일 없이 자수나 놓는 신세지만 그래도 한때 26 개 군단을


이끌던 몸이었단다?"

"솔직히 말해. 레라지에가 범인이지."

"들켰구나."

산뜻하게 인정하는 걸 보니 성격도 좋아 보였다. 게임에선 보지 못한 인물이었지만 첫눈에 사로잡힐


정도로 호감이 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쨍하고 카랑카랑한 편이었는데, 묻는 듯 말꼬리를 조금 올리는 독특한 말투와 합쳐지니
귀엽다기보다 되레 귀족적이고 우아하게 느껴졌다.

"해가 지기 전에 데리러 올게. 그럼 잘 부탁해, 레벤나."

"걱정 말려무나, 키마리스."

왜인지 뒤돌아서는 키마리스의 목소리가 조금 힘없게 느껴졌다. 레벤나는 율리아의 손을 잡고 그녀를 제


공간 안으로 이끌었다.

웬만해선 상대를 외양으로 평가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레벤나의 방은 주인의 눈부신 외모에 걸맞게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어딘지 모르게 한때 율리아가 부러워하던 에스델의 호화로운 침실을 연상시키는
것도 같았다.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레벤나의 사랑스러운 분위기는 율리아의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지나가는 마수 한 마리조차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마계에서 처음으로 마음 편히 있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7화
"으음, 손님맞이가 영 부실하네? 잠시 기다리렴?"

"저는 괜찮아요!"

"사양할 것 없단다? 내가 예쁜 걸 좋아하는 것뿐이니까."

레벤나는 폭이 넓은 부채를 팔랑거리며 탁자 위에 늘어져 있던 자수틀을 싹 밀어 치웠다. 눈 깜짝할 새


화려한 티 테이블이 완성되었다. 감히 함부로 앉아도 될지 망설이게 될 정도였다.

쭈뼛거리는 율리아의 기색을 알아챘는지 레벤나가 붉은 입꼬리를 매혹적으로 휘었다.

"옷이 불편하지 않니? 분명 레라지에의 짓이겠지? 센스도 없어서는, 무조건 까맣고 반짝이면 예쁜 줄
안단다. 까마귀도 아니고."

"아, 아니에요."

"레라지에를 감싸 주는 거니? 너는 작고 귀여운 데다 착하기까지 하구나?"

긴 속눈썹을 팔랑인 그녀가 손가락을 우아하게 내저었다. 그러자 율리아가 입고 있던 옷이 어느새 산뜻한
하늘색 원피스로 바뀌었다. 손끝에 닿는 원단이 무척이나 부드럽고 몸에도 딱 맞아서, 솔직히 방금까지
걸쳤던 치렁치렁한 드레스보다 가볍고 편했다.

테이블에 앉은 레벤나가 자연스럽게 반대편을 손짓했다. 율리아가 앉자마자 그녀는 차를 따르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에스델? 그러니까 일을 하고 싶다고?"

"네."

"이유를 물으면 대답해 줄 테니?"

"그냥…… 책임을 다하고 싶었어요."

쓸모없이 버려지는 게 싫었다고 말하려던 그녀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악마들에게 자신은 율리아가 아닌 에스델이었다. 가장 고귀한 인간, 장차 황제가 될 브에스드라의 별.


그녀는 자신처럼 이렇게 초라한 답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에스델이 했을 법한 말을 되풀이했을 뿐인데, 레벤나는 의외라는 듯 재차 눈을 깜빡였다.

"의외의 답이로구나. 혹시 잊은 거니? 너는 이곳에 끌려온 거란다?"

"……."

"나는 이제껏 수많은 인간 열쇠를 봐 왔어. 하나같이 절망하거나 벌벌 떨며 저주를 퍼붓기도 했단다. 네
입장에서도 이곳에서 지내는 게 썩 달갑지는 않겠지?"

율리아가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자 그녀는 이런 분위기를 만들려는 게 아니었다는 듯 재빨리 주제를 돌렸다.

"알겠지만 네게 일을 맡기더라도 성 밖으로 나가는 건 불가하단다? 성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안


돼."

"알고 있어요. 저…… 레벤나 님?"

율리아가 고르고 고른 호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레벤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괜찮다면 짐승들의 축사를 맡으면 어떻겠니?"

"짐승이라면 혹시 마수인가요?"

게임의 배드 엔딩 중엔 에스델이 마수에게 범해진 뒤 먹히는 정말 하드코어한 종류도 있었다. 깜짝 놀라서


게임기를 떨어뜨릴 뻔했던 기억이 났다.

율리아의 걱정 섞인 질문에 레벤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일단 마계에 사는 짐승이니까 마수라고 불러 줘야지? 하지만 인간들의 고정 관념처럼 무조건 사나운 건
아니야. 게다가 시키는 대로 축사에 얌전히 갇혀 있는 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것들뿐이란다?"

"네에……."

"축사에서 일하면 몸은 고되겠지만 마음은 편해질 거야. 어린 개체는 종을 불문하고 뭐든 사랑스럽거든.


지금의 너한테 딱이지?"

율리아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로 떨어지기 전의 기억을 떠올린 탓이었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 늘 변두리만 맴돌던 자신에게 동물만큼은 아무 거리낌 없이 다가와 주었다. 이런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상황에 어린 짐승이라도 돌볼 수 있다면 레벤나의 말처럼 마음의 위안이 될 게
분명했다.

그녀가 동의하자 레벤나의 눈꼬리가 화사하게 접혔다.

"그럼 결정이구나?"

그녀가 아까처럼 손가락을 내젓자 율리아의 시야가 점멸하듯 일그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마왕성 한쪽의 축사 입구에 서 있었다.

'어려운 일 있으면 나를 부르렴? 그럼 열심히 하도록 해?'

레벤나의 높고 카랑한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처럼 울리다 천천히 사그라졌다.

* * *

율리아는 별달리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축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른 관리자가 있는 건지, 아니면


키마리스가 했던 것처럼 마력 한 번이면 깨끗해지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일은 빈 먹이통을
채워 주고, 심심해하는 어린 마수들과 놀아 주는 정도였다.

레벤나가 말했던 '갓 태어난' 마수는 현대의 대형견 정도 크기였는데, 덕분에 놀아 주는 동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 아무런 걱정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꼬르륵.

놀이를 빙자해 하릴없이 끌려다니던 율리아가 밧줄을 놓쳤다. 그러자 신나게 놀던 어린 늑대가 힘에 못
이겨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낑!"

"미안해. 잠깐 힘이 빠졌어!"

급히 일어나려던 그녀는 눈앞이 핑 도는 현기증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니 마계에 온 뒤로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했다.
노예처럼 끌려온 몸이니 마족들 입장에선 특별히 챙겨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차라리 힘없이 누워 있는 편이 그들에겐 더 좋을지 몰랐다.

'배고파…….'

그녀가 힘없이 어깨를 떨구는데 뺨에 축축하고 뜨끈한 것이 와 닿았다. 방금까지 놀던 새끼 늑대가 기대감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 보며 바짝 엎드렸다. 이것 또한 색다른 놀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비록 동물이라도 나를 필요로 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게, 기분 좋아…….'

무척이나 오랜만에 마주한 온기였다. 율리아는 부디 거부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늑대를
끌어안았다. 아직 어리다지만 품에 가득 차는 부피감이 그녀의 허한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 주었다.

"킹?"

"미안, 답답했지? 또 놀아 줄게. 자꾸 미안하다는 말만 하게 되네. 아무래도 너한테만은 미움받기


싫은가 봐."

아까 봐 두었던 원반처럼 생긴 쟁반을 들자 새끼 늑대가 기대감 섞인 눈빛으로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율리아가 어느 쪽으로 던지면 좋을지 방향을 살피던 그때, 축사 바깥에 웬 낙타 한 마리가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는 게 보였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성체를 훌쩍 넘는 크기였지만 그건 눈앞의 늑대도 마찬가지였다. 덩치는


대형견보다 큰데 배냇털이 보송하게 올라와서, 아주아주 멀리서 보면 동그란 먼지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저렇게 밖에 놔둬도 괜찮을까?"

레벤나가 말하길 이곳은 갓 태어난 짐승들이 지내는 축사라고 했다. 그럼 저 낙타도 어린 마수란
뜻이었는데, 만약 저대로 멀리 나가 해코지라도 당한다면 기껏 믿고 맡겨 준 레벤나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녀는 원반을 내려놓고 낙타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율리아의 머리카락이 순간
쭈욱 당겨졌다.

"키잉, 킹!"

"어어……."

"캉캉!"

돌아보니 어린 늑대가 그녀의 머리칼에 와락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이 꼭 가지 말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것 같아서, 율리아는 쩔쩔매며 녀석에게 물린 머리칼을 붙들었다.

"저기 낙타만 안전하게 넣어 주고 다시 올게, 응?"

"크응!"

"이, 이것 좀 놓아줘."

"크으응!"

나름대로 강도를 조절하는지 아픈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덩치가 있다 보니 율리아는 늑대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나폴나폴 휘둘렸다. 입에 머리카락을 잔뜩 문 탓에 제대로 짖지도 못하면서, 늑대는
아예 발라당 누워 흙바닥을 마구 뒹굴었다.

녀석의 세찬 몸부림에 레벤나가 달아준 머리 장식이 홀랑 벗겨졌다. 율리아가 뒤로 넘어지며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늑대는 그것도 모른 채 무아지경으로 뒹굴며 놀자고 조를 뿐이었다. 다행이었다.

"착하지? 금방 올게."

율리아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풀을 뜯던 낙타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고
커다란 눈을 멍하니 끔뻑였다.

"빼애애애액……."

"어라."

"메에에에엑……."

율리아는 낙타가 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생각해 보면 성대가 있으니 소리는 내겠지만 이건
예상 밖의 독특함이었다. 사이렌이 길게 늘어지는 소리와 비슷할까.

'사람을 처음 봐서 놀란 건지도 몰라.'

그녀는 근처에 우거진 풀을 잡아 뽑아 천천히 흔들었다. 그러자 낙타의 촉촉하고 기다란 혀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먹을까? 이대로 안까지 유인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율리아는 풀을 나긋나긋 흔들며 축사 문을 열었다. 그렇게 안으로 슬슬 뒷걸음질 치려는 찰나였다.

화악-!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기운을 들이마신 낙타가 삽시간에 거대한 근육질의 흑마로 변했다. 율리아보다
눈높이가 몇 배나 높은 흑마는 그녀의 뒷목을 물어 허공에 내던졌다. 너무 놀라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읏……!"

"히이이잉!"

바닥을 향해 속절없이 떨어지는 그녀를 흑마가 받아 챘다. 그러곤 미친 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마구잡이로 뒤집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율리아는 안장도 없는 말 등에 안간힘을 다해 매달렸다.

"머, 멈춰!"

그녀의 애처로운 비명은 세찬 말발굽 소리에 가려졌다. 갈기를 꽉 움켜쥔 채 고개를 웅크렸지만, 숲의
날카로운 넝쿨과 나뭇가지가 그녀의 여린 살갗을 마구잡이로 할퀴었다.

흑마는 거추장스럽게 매달린 그녀를 떨어뜨리려는 듯 더욱 세차게 날뛰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시야 탓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말이 왜 갑자기 나타난 건지, 어째서 이렇게 흥분한 건지, 어디로 가는 건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마왕성을 둘러싼 숲을 가로질러 맹렬히 질주할 뿐이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얼마나 지나온 거지?'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빠른 속도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뒤늦게 현실을 직시한 그녀의 눈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설마 나 지금 성을 벗어나고 있는 거야?!'

당황한 그녀의 의문에 답하듯, 마왕성의 거대한 첨탑이 등 뒤로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모습을 감췄다.
이젠 자신이 달리는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길이 점점 험해지더니 이내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은 완전한 황무지로 변했다.

긴장으로 잔뜩 굳은 그녀의 귓가에 이질적인 소리가 스쳤다.

"크르르릉……."

"인간의 냄새다."

"달고 연약한 인간의 냄새야."

욕망이 뚝뚝 묻어나는 시선이 율리아의 온몸을 탐욕스럽게 훑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소녀가


맨몸으로 악마들 사이에 떨어졌다. 그것도 순결하고 설익은, 무척이나 맛있어 보이는 소녀가.

율리아의 뇌리에 본능적인 가 울렸다. 저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간 무슨 꼴이 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갈기를 움켜쥔 그녀의 손끝이 하얗게 바랬다.

"저쪽에서 포위하자고."

"잡아, 킥킥."

쇠를 긁는 듯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율리아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맹수 앞의 무력한 초식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끔찍했다. 악마는 맹수보다


지능이 높고 신체 능력도 우월했다. 반면 자신은 초식 동물보다도 느리고 나약했다.

섬뜩한 예감을 느낀 그녀가 입술을 사리문 그때였다.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흑마가 갑자기 앞발을
치켜들며 날뛰었다.

"히이이이잉!"

"꺄악!"

갈기를 놓친 율리아의 시야가 마구잡이로 반전됐다.

8화

"읏! 흐윽……."

후두둑, 두둑. 결국 말 등에서 떨어진 율리아가 메마른 땅을 힘없이 굴렀다.

죽은 덤불 위에 먼저 떨어지고 바닥으로 튕긴 탓에 곧장 목이 부러지는 건 면했다. 하지만 그녀가 굶주린


악마들 사이에 맨몸으로 버려졌단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옷은 반쯤 뜯어져 오른쪽 어깨부터 통째로 찢겨 나갔고, 돌바닥에 깨진 두 무릎에선 따뜻한 피가 퐁퐁


솟았다. 율리아는 내던져진 충격에 몸을 웅크리지도 못하고 숨만 헐떡였다.

하지만 그녀에겐 몸을 추스를 찰나의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피 냄새다."

"여리고 미성숙한……."

"핥으면 달콤한 맛이 나겠지?"

몸의 반쪽은 짐승, 반쪽은 어설픈 사람의 형태를 갖춘 악마들이 율리아를 보며 짙은 점액질의 타액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저를 응시하는 시선들로부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악마들이 모여드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광기로 물든 안광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녀를 찢어발길 듯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급 악마일수록 힘을 얻는 방법이 제한적이다. 그런 그들의 앞에 떨어진 율리아는 메마른 사막의


오아시스나 다를 바 없었다.

'누, 누가 도와줘…….'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소리가 되어 나가지 못했다. 불현듯 깨달은 탓이었다.

'나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단지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아주 예전, 태어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차디찬 눈이 펑펑 내리던 한겨울, 그녀는 시골 보육원 앞에 버려져 있었다. 자라면서 늘 곤궁했던 보육원
사정을 도우려 밤엔 일을 하고 학교에선 지쳐 쓰러지듯 잠들었다.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늘 주변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고 자랐다. 버스도 제대로 다니지 않는 변두리
마을이다 보니 사람들은 알음알음 서로의 사정을 전부 알았고, 그렇게 그녀가 부모 없는 고아란 사실은
온갖 자극적인 헛소문과 더해져 까발리듯 퍼뜨려졌다.

학기 초 친하게 지내자고 약속했던 친구들이 며칠 뒤 서슬 퍼런 눈빛으로 돌변하는 것을 보며, 그런


일들이 매번 반복되는 것을 겪으며, 결국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줄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단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 난 왜 이곳으로 끌려온 거야?'

고작 에스델의 대용품이 되기 위해서? 일상이 따분하고 심심한 악마들 사이에서 장난감처럼 굴려지다가
죽기 위해서?

정말 그렇다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한번 죽었으면 됐지 왜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끔찍한 기억밖에 남기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흑, 흐윽."

율리아는 뺨에 얼룩진 눈물을 벅벅 아무렇게나 닦아 냈다.

사실은 그래도 살고 싶었다. 진창 속에서 구르고 비참한 기억에 짓눌리더라도, 결국엔 넝마처럼
버려지더라도. 그래도 살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그녀의 입에서 오열 섞인 비명이 터졌다.

"누구라도…… 살려 주세요! 난 살고 싶어!!"

동시에 율리아의 머리 위를 크고 어두운 그림자가 덮쳤다. 시야를 차단하듯 칠흑 같은 어둠이 그녀를


감쌌다. 거대한 마력의 파장이 대지를 쿵, 쿵 섬뜩하게 울렸다.

시야가 차단됐어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까맣고 역겨운 피, 도축당하는 짐승의
처절한 울부짖음, 폐부에 훅 끼쳐 오는 비릿하고 불쾌한 죽음의 냄새.

율리아는 새하얗게 질려 눈도 깜짝할 수 없었다. 단 한 사람이 내뿜는 위압적인 살기가 그녀의 몸을


올가미처럼 강제하고 속박했다.

"……."

한참을 부서지고 터지는 끔찍한 소리만 들리던 주변에 불현듯 적막이 찾아왔다. 그것이 되레 섬뜩해
심장이 미친 듯 달음박질쳤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숨어 있는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선명한
시선을.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누군가
억지로라도 알려 주길 바랐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알 수 있는데도, 새하얗게 굳어 버린 머릿속엔 온갖
끔찍한 상상이 날뛰었다.

만약 눈앞에 있는 게 자신을 도와주러 온 이가 아니라면…….

'그래도 살고 싶다고, 비참하게 버려지더라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

지그시 사려 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녀는 이윽고 마음을 다잡았다. 나직이 심호흡한 율리아가
저를 덮은 칠흑의 장막을 들어 올렸다.

"흡!"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 눈앞에 있었다. 시야의 모든 것이 오직 붉은색이었다. 말 그대로 지옥.

그 가운데 한 악마가 서 있었다. 뇌리에 깊이 박혀 평생 잊히지 않을 끔찍한 살육을 벌이고서도, 정말


지독하게 나태한 얼굴을 한 채로.

바엘은 저를 향한 시선을 알아챘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저를 귀찮게 만든 것에, 아니면 인간 주제에 성을


멋대로 빠져나간 것에 화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일단 감사 인사는 해야겠지. 나를 살려 줬으니까.'

꿀꺽 침을 삼킨 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어디선가 벼락같은 노호성이 들려왔다.

"주군, 어째서 먼저 가신 겁니까! 이런 하찮은 일은 늘 제게 믿고 맡겨주시지 않았습니까!"

"넌 좀 닥쳐."

살짝 들어 올린 천 너머로 두 악마, 바르바토스와 아가레스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그중 아가레스는


새까만 천 아래에 깔려 있는 율리아를 발견하더니 삽시간에 착지해 그녀를 끌어안았다.
"작은 열쇠야, 괜찮니?"

"아가레스 님……."

"레벤나랑 키마리스, 그 죽일 새끼들이 감히 너를!"

율리아를 덮었던 검은 천은 아무래도 바엘의 옷인 모양이었다. 아가레스는 그것을 껍질 벗기듯 홀라당


내던지곤 율리아의 몸 곳곳을 살폈다. 반쯤 찢겨나간 원피스와 그 아래 파편처럼 새겨진 선홍빛 상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아가레스는 마치 제가 다친 양 낮게 으르렁댔다.

"절대 곱게 안 죽일 줄 알아."

"누구를……?"

"주군께선 먼저 가셨으면서 왜 작은 열쇠가 이 꼴이 되도록 놔두셨습니까?"

곱게 안 죽인다는 대상이 누구인지 상당히 신경 쓰였다.

율리아는 성 밖으로 빠져나온 게 고의가 아니라 열심히 변명했지만, 아가레스는 듣지도 않은 채 군복


재킷을 벗어 그녀를 꽁꽁 감싸 안았다. 그러곤 바알을 향해 으르렁댔다.

"아가레스, 주군께 무례하다."

그런 그녀를 막은 건 바엘의 충직한 심복인 바르바토스였다. 물론 그의 만류가 아가레스의 귀에 들릴 리


만무했다.

"우리보다 훨씬 먼저 가셨으니, 작은 열쇠가 이 꼴이 되기 전에 막을 수 있었던 게 아닙니까?"

"……."

"주군!"

"목숨만 붙여 놓으면 된 거 아닌가."

아주 짧은 시간, 율리아의 상처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바엘은 거슬린다는 듯 미간을 구기고는 날개를 펼쳐


먼저 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바르바토스 역시 그런 주인을 뒤따랐고, 율리아와 아가레스만이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 남았다.

"쯧, 짜증 나게."

율리아의 머리 위로 무언가 짓씹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율리아가 위를 올려다봤을 때,


아가레스는 품 안의 그녀와 눈을 맞추며 매혹적으로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 * *

마계에 도착한 율리아가 바엘의 침실에 들어간 지 하루가 지났다.

해가 중천에 뜬 느지막한 오후, 성 복도를 걷던 레라지에의 입술이 댓 발 나왔다. 멀리서 봐도 상당히


불만이 많은 듯한 얼굴이었다.

"형은 만만한 게 꼭 나지. 14 위의 눈부신 마력을 자랑하는 이 몸한테, 고작 인간 따위의 시중이나


들라고 하고."
하지만 그가 구시렁거리는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들어 보자면…….

"그래도 열쇠는 뭐, 나쁘지 않지. 식욕 돋을 정도로 귀엽고. 감시하는 겸사겸사 좀 손댄다고 닳기야
하겠어?"

기실 레라지에의 심미안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게다가 미식가 기질도 있었다. 그는 악마랍시고 품위


없게 구는-가리지 않고 게걸스럽게 먹어 대는-족속들을 제일 혐오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
격이 다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떨어진 열쇠는 오랜만에 그의 욕구를 자극하는 대상이었다. 그 순진무구한 얼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고였다.

"형도 나한테 맡길 때 이 정도는 예상했겠지."

마왕성의 모두가 오직 인간 하나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콧대 높은 그들로선 웬만해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진짜 '열쇠'일 가능성이 높은 존재를 찾아낸 것이다.

이제껏 열쇠랍시고 바쳐지거나 끌려온 인간들은 마신의 탑에 들어서는 순간 반이 죽고, 나머지 반은


마정석 앞에 서는 순간 죽거나 미치며, 그 뒤 주군의 앞에 대령하면 결국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마다 주군은 심히 불쾌해하며 마계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의 둥지에 72 위까지의 마족만 기거할 수
있는 건 그러한 이유도 숨어 있었다. 웬만한 마력으론 왕의 분노를 버텨 낼 수 없었다.

자존심상 말은 안 해도 다들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초자연적 권능 앞에서 버틸 수


있는 것과 동시에 본능적 공포를 느끼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열쇠는 고작 인간인데도 주군의 강력한 마력에 눈 하나 깜짝 안 했지. 주군도 내심 놀랐을걸?'

그녀가 진짜 열쇠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은 바로 그때 확신으로 변했다. 그 모습을 직접 보지 않는 녀석들은


아직도 가타부타 말이 많았지만 레라지에는 자신했다. 이번에야말로, '에스델 브에스드라'야말로 진짜
열쇠였다.

'덕분에 주군의 기분도 좋아 보였지. 별다른 말씀은 없었지만, 마력의 파장부터 평소와 다르게
차분하던데.'

결론에 다다른 레라지에의 머릿속에 아까까지의 불평불만은 어느새 쏙 들어가 있었다.

무려 주군을 위대한 마신으로 만들 열쇠의 감시를 맡게 된 거다. 그 작고 가련한 열쇠가 제 발로 도망칠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으니, 감시라기보다 누군가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쪽에 더
가깝긴 했다.

그렇게 걸음도 가볍게 바엘의 방문을 연 그는 일순 얼어붙었다.

열쇠가 없었다.

"어떤 쥐새낀지는 몰라도 내 눈은 못 속이지."

살짝 내려간 눈꼬리에 짙은 살기가 스몄다. 공기 중에 남은 불쾌한 마력이 제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해서 더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이 개새끼가……. 감히 이 몸에게 도전장을 내밀어?"


검을 뽑아 든 레라지에가 홱 몸을 돌렸다. 신경질적인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져 갔다.

9화

바엘은 제 발치에 억지로 무릎 꿇려진 키마리스를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왕의 곁을 지키던 몇몇


고위 악마만이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레라지에를 응시했다.

그는 구두 굽으로 키마리스의 얼굴을 걷어차며 짓씹었다.

"네가 직접 말해."

"……."

"이 자리에서 눈알이 뽑혀야 정신을 차리려나?"

"열쇠를 빼돌렸습니다."

키마리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은 애초부터 일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레라지에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날카로운 굽으로 그의 머리를 짓밟아 저항하지 못하게 막은 뒤
그의 옷을 찢어발기듯 헤쳤다. 그의 가슴팍이 완전히 드러나자, 그제야 레라지에는 만족스러운 듯 그의
머리채를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혼자 한 일 아니잖아?"

"……."

"너는 얼핏 보기에 주군을 따르는 것 같지만 말이야."

레라지에의 길고 예리한 손톱이 키마리스의 왼쪽 가슴을 파고들었다. 피가 주르륵 흐르며 벌건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는 고작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깊숙이 손톱을 찔러 넣었다.

우둑, 뚜두둑.

억지로 열린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그는 반대편 손까지 동원해 키마리스의
가슴팍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그제야 의아한 얼굴을 하던 마족들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었다. 다른 악마에게 노예로서 잡혀 있다는 증거였다.

"네 주인은 따로 있지. 안 그래?"

나직이 이죽거린 그가 열쇠를 어디로 빼돌렸는지 심문하려는 찰나였다. 상황과 맞지 않는 느긋하고


귀족적인 발소리가 탁 트인 홀로 또각또각 다가왔다.

"주군께서 저를 찾으실 때가 된 것 같아서요."

모두의 시선을 받은 불청객, 레벤나가 태연자약하게 웃어 보였다.

"저는 화가 났답니다? 그토록 간절히 애원해도 밤의 끝자락 한 번 내어주신 적 없던 주군께서 하찮은 인간


계집의 시중을 허락하셨다는데, 제가 어찌 가만있겠어요?"

"오호라, 진범이 제 발로 찾아왔네."

레이스를 겹겹이 두른 화려한 드레스가 레벤나의 걸음에 맞춰 사부작거렸다. 그녀는 눈이 아프도록 쨍한


금발을 쓸어 올리며 바엘의 앞에 섰다. 그러곤 미간을 찌푸리며 한 마디 덧붙였다.
"키마리스가 아무리 내 도구라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구나. 넌 하는 짓이 어쩜 그리 경박하니,
레라지에."

"너야말로 그 품위 없는 옷차림 좀 어떻게 하지?"

"미의식도 여전히 엉망이구나?"

마계에서 취향이 제일 까다롭기로 손꼽히는 둘이었다. 그만큼 말이 잘 통하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바꿔


말하면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잘 간파한다는 뜻이었다.

레라지에는 레벤나의 속내를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마왕과 밤을 보내 그의 강력한 마력을 제 것으로


흡수하고 싶다는 악마로서 가장 원초적인 본능.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인물의 제거.

레라지에가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둔 건 자신에게 손해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열쇠가 사라지기 전까진


말이다.

"안 도망치고 잘도 나왔군."

낮은 비소를 머금은 목소리가 두 악마의 입을 다물게 했다. 바엘은 일말의 소란에도 처음부터 태연자약한
낯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열쇠가 중요하지 않을 리 없었다. 마신의 힘을 삼킬 수 있는 사실상 유일무이한


방법이었으니까 말이다.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바르바토스는 그런 주군의 심중을 조심스럽게 유추했다.

"혹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어째서 그냥 내버려……."

"열쇠에게 주술을 걸었다. 내 둥지에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주변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도록."

"예?!"

"열쇠가 도망치면 곤란하지만 그럴 능력은 없어 보이고, 감히 내 물건을 훔치려는 쥐새끼가 있다면


벌해야지."

주군의 말을 들은 바르바토스가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턱을 만지작거렸다.

"바깥이 조용한 걸 보면 열쇠를 멀리 빼돌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즉시 성 내를 수색하겠습니다."

"……."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벤나와 키마리스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바르바토스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해 미간을 구겼지만 대신 바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폭발 직전처럼 일렁이는 엄청난 마력에 홀에
있던 악마들이 일제히 무릎 꿇었다.

왕의 손끝에서 순도 높은 붉은 마력이 점멸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의


의미를 알았다.

'열쇠에게 심었던 마력이 되돌아왔다.'


열쇠는 왕의 힘을 견뎌 낸 게 아니었다. 그의 마력을 물 위의 기름처럼 완전히 튕겨내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열쇠에겐 처음부터 주술이 걸린 적이 없었던 거다.

제 손을 내려다보는 바엘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난폭한 마력의 파장이 거대한 홀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 바엘은 테라스 창을 손짓 하나로 부숴버리며 날개를 펼쳤다. 그의 거대한


마력만큼이나 크고 매혹적인 날개가 재차 돌풍을 일으켰다. 악마들을 옥죄던 주박이 풀린 건 그가 떠나고
한참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대공 아가레스가 나섰다.

"내가 가지. 나머지는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해."

"멋대로 결정하지 마. 나도 간다."

"건방진……."

바르바토스를 노려본 그녀는 결국 말없이 몸을 돌렸다. 바르바토스는 제 주인을 지극히 숭배했다. 그런


그를 떼놓고 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은 악마들은 마왕성에 불어올 파란을 예감했다. 하지만 그들조차 몰랐던 사실이 있었으니, 오늘의 일을
기점으로 마계의 질서가 완전히 새롭게 재편되리라는 것이었다.

* * *

율리아는 마왕성에 돌아온 뒤에도 좀처럼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그녀는 원래도 몸이 약했지만, 마계로 떠밀려진 이후 줄곧 긴장 상태를 유지하다 결국엔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까지 몰렸다. 아가레스의 품에서 내려온 그녀가 줄 끊긴 인형처럼 쓰러진 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악마들은 그녀를 근처 침실로 옮기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마력을 불어넣었다.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마력이 들지를 않아."

"인간이라서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이전의 가짜들은 별문제 없었잖아. 죽으려는 걸 살려 낸 게 몇 번인데……."

"다 비켜. 전부 쓸모없군."

보다 못한 아가레스가 끼어들었다. 치료 쪽으로 마력을 운용해 본 적은 없었으나 그녀가 지닌 강대한 힘은


마왕 바엘의 바로 뒤를 이을 정도였다.

율리아의 주변에 모여들었던 악마들이 물러나고, 아가레스는 시체처럼 누워 있는 그녀의 이마에 제


손바닥을 겹쳤다. 직후 강력한 마력의 폭풍이 넓은 침실을 뒤덮었다.

파직, 파지지직!

순도 높은 검은 마력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아가레스는 성공을 자신하며 입꼬리를 비틀었지만 이내 얼굴을


굳혔다. 하얀 살갗에 휘갈겨진 상처는 그녀가 손대기 전 그대로였다.

"믿을 수 없어."
치료 쪽에 조예가 있다는 고위급 악마는 이미 전부 소환되어 그녀의 상태를 보았다.

'에스델 브에스드라'는 마정석 앞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왔을 뿐 아니라 마왕의 폭주마저 견뎌낸, 사실상
진짜 열쇠라고 확실시되는 인간이었다.

그 중요성은 실로 대단했기에 지옥의 한구석에 은거하던 악마들까지 그녀의 치료를 위해 모두 끌려왔다.


그럼에도 방법이 없었기에 아가레스의 강대한 마력에 기대 보았지만, 그마저도 소용없게 되었다.

그제야 악마들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열쇠에겐 그 어떠한 마력도 통하지 않는다. 반면 물리력엔
한없이 취약하다. 제일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율리아의 머리맡을 줄곧 지키고 있던 레라지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살짝 내려간 눈꼬리에 아주 잠시


암담한 기색이 스쳤다.

"그럼 열쇠는 이대로 죽는 건가?"

"개소리 집어치워, 레라지에."

"틀린 말도 아니잖아. 인간은 너무 약해. 제대로 놀아 볼 틈도 주지 않고 죽어 버린다고."

그는 율리아의 연분홍빛 머리칼 끝을 느릿하게 만지작거렸다. 둘의 대화를 듣던 다른 악마가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이라면 해결할 수 있는 건 주군뿐일지도 모르겠어."

"마력이 아예 듣질 않는데 이걸 누가 풀어내."

"주군의 강력한 권능은 상식의 범주를 넘어섰다. 누구도 살아 나갈 수 없던 폐허의 땅, 마신의 수정구
바로 옆에 이렇게나 거대한 둥지를 세우지 않았나. 처음엔 다들 비웃었지만, 지금은 어떻지?"

한때 바엘을 코웃음 치던 존재들이 이젠 그의 둥지에 살고 있었다. 마계 각지를 통치하던 고위 마족들이


오직 그 하나의 존재로 인해 이곳에 모인 것이다.

아가레스가 수긍한 듯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듣고 보니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당장 열쇠부터 주군의 침실로 옮기자."

"왕께서 분노하면 어쩔 건데."

"도망치는 거지."

레라지에의 답은 깔끔 명료했다.

바엘의 강함이 상식을 넘어선 만큼 그가 분노할 때는 마왕성의 모두가 살기 위해 숨을 죽였다. 하지만


분노는 순간일 뿐, 그는 뒤끝이 없었다. 성격이 나태해 나서는 걸 귀찮아한다고 보는 편이 더 맞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본인의 일 외에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열쇠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차라리 가능성 있는 쪽으로라도 시도해 보는 편이 옳았다.

"그럼 결정이군."

아가레스는 더 말하지 않고 열이 절절 끓는 율리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그런 그녀를 레라지에가


느릿하게 뒤따랐다.
* * *

밤이 되면 지옥의 하늘엔 마왕의 눈을 닮은 붉은 달이 떠오른다. 그것은 모두에게 상기시켰다. 이 지옥을


손아귀에 넣은 절대적 강자가 누구인지, 그런 그를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창틀에 걸터앉은 바엘은 그의 둥지에서 곧장 마주 보이는 마신의 탑을 응시했다. 그 최상층에 눈부신


파장이 점멸했다. 방어진에 얽매인 마신의 힘이 발악하듯 맥동 치고 있었다.

"……."

바엘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지금쯤 마정석과 동화된 몸 안의 마력이 미친 듯 날뛰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드넓은 죽음의 호수, 그가 태어나고 자란
요람의 표면처럼.

그의 시선은 이내 침대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여자에게 향했다. 침대 시트와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새하얀 몸에 채찍처럼 기다란 상처가 벌겋게 속살을 드러냈다.

고작 맨몸으로 숲을 지나간 것뿐인데 저렇게 극성스러운 상처가 생겼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흐윽, 흣……."

그녀는 깊은 잠이 든 와중에도 간간이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꿈을 꾸는 건지 무언가를 괴로운 듯


중얼거리기도 했다. 항상 깊은 적막에 잠겨 있던 그의 둥지에 처음으로 생긴 이질적 존재였다.

긴 흑발을 쓸어 올린 바엘이 천천히 바닥에 발을 디뎠다.

인간들은 타고나길 작고 약하다지만 이 여자는 그중에서도 특히 가냘팠다. 아가레스가 귀가 따갑도록 작은


열쇠 어쩌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이렇게 약해 빠져서야."

10 화

바엘이 마계를 쓸어 버린 이유는 간단했다. 약한 것은 존재할 가치가 없으니까,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역하고 거슬리니까 직접 없애준 것이다.

이후 자꾸만 근처를 맴돌며 수족을 자처하는 잔챙이들이 짜증 나서 거대한 둥지를 세우고 안에 드나들 수
있는 이를 한정시켰다. 왕이 해야 하는 일은 그들을 대리로 세워 처리하게 했다. 그는 그저 마신의 힘에
도전하고 폭주하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다른 마족들은 주기적으로 정기를 보충해야 한다지만 바엘은 달랐다. 그의 내핵에 잠든 막대한 마력은
오히려 주변의 다른 마력을 끌어들여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었다. 무엇도 먹을 필요가 없으니 그의 동선은
자연히 그가 내키는 대로 한정되었다.

손마디가 불거진 그의 크고 차가운 손바닥이 율리아의 가느다란 목을 천천히 짓눌렀다. 얇고 여린 피부


아래 가느다랗게 뛰는 핏줄이 느껴졌다.

"흐으……."

아주 조금 힘을 줬을 뿐인데 손아래 뛰던 맥이 점점 미약해졌다. 하지만 바엘은 조금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게 날뛰던 마력이, 지옥 변두리 절망의 늪에서 태어나 자아를 가지던 그 순간부터 그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마력의 고통이…… 그녀와 살갗을 맞댄 순간부터 안개가 걷히듯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생경한 감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서히 느려지던 맥이 완전히
끊긴 것을 깨달은 그가 저도 모르게 손을 물린 것이다.

"헉, 콜록……."

바르르 어깨를 떨던 인간이 힘없이 추욱 늘어졌다. 그것을 보던 바엘의 심장이 쿵, 쿵 세차게 뛰었다.
저도 모르게 조바심이 났다.

방금까지 그녀를 죽이려던 손바닥 아래 붉은 파장이 생겨났다. 가장 순수한 마력은 완전한 칠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바엘이 지옥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랬다.

쓸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뿐인, 가장 고귀하고도 순도 높은 붉은 마력이 그의 손아래 응축됐다. 그는


그것을 율리아의 심장 위에 지그시 내리눌렀다.

파지직, 파직!

거부 반응이 일었지만 애초에 그 정도는 예상했다. 바엘은 더더욱 힘을 더했다. 붉은 마력의 파장이 이내
실내를 뒤덮을 듯 거대하게 확산됐다.

성 전체가 쿵, 쿵 진동했다. 이 정도면 다른 악마들도 둥지에서 생긴 이변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율리아의 신체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여전히 창백하고 새하얬다. 상처 입어 움츠러든 작은 새처럼.

"후우."

발악하듯 비명을 지르던 마력이 결국엔 튕겨 나가 허공에 붉은 궤적을 그리며 녹아들었다.

그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바엘은 이런 능력을 본 적 있었다. 마력 저항, 혹은 항마력. 모든


종류의 마력을 원천 차단할 수 있는 최고위급 수식이었다. 고작 인간에게 그런 희귀한 수식이 새겨져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주 먼 예전, 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알게 한 존재는 결국 산산이 찢겨나가 죽었다. 같잖은


잔재주로 그의 신경을 거스른 대가였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열쇠의 마력 저항은 제 한 몸 지키는 걸 넘어서 살갗을 직접 맞댄 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웬만한 방법으론 부술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인지했다.

"감히 내 힘에 도전을 했단 말이지."

불쾌감을 담아 낮아진 목소리에 짙은 냉기가 뚝뚝 흘렀다.

그의 나태함은 일상적으로 시달리는 지독한 두통, 그리고 그의 권능에 견줄 자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제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누구든 땅에 바짝 엎드려 벌벌 긴다. 이런 상황에 그 누가 부지런할
필요를 느낄 수 있을까.

그의 나태함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비극이었으나 바엘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에게 거스르는


존재가 나온 지금,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욕구가 모처럼 고개를 쳐들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손가락이 율리아의 뒤통수를 느릿하게 헤집었다. 옅은 분홍빛이 감도는 백금발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얽히며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이래도 버티는지, 어디 볼까."

그의 입꼬리가 비틀림과 동시에 율리아에 상체가 들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깊이 겹쳐졌다.

바엘은 조그맣고 뜨거운 혀를 감으며 입 안 깊숙이 저를 밀어 넣었다. 작은 몸만큼이나 비좁은 입은 그를


받아들이기 버거운지 간헐적으로 헐떡이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럴수록 바엘은 제가 쥔 그녀를 놓지
않은 채 더욱 집요하게 혀를 빨아들였다.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적막에 잠긴 침실을 울렸다. 바엘은 제 타액을 그녀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목울대가 작게 경련하는 걸 확인한 뒤 몸을 떼자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잔뜩 상기된 붉은 뺨에 눈에
들어왔다.

"큭, 역시."

그는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만족스럽게 핥아 냈다. 아무리 단단한 마력 저항이라도 장기 내부까지


마력을 직접 밀어 넣으면 어쩔 수 없다.

그는 빠르게 사라져가는 상처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안광을 빛냈다.

* * *

율리아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의식을 찾았다 잃기를 반복했다. 온몸이 펄펄 끓는 유황불에 절여지는 것
같았다.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워 목구멍이 따끔거렸고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는 말 등처럼 마구 흔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꿈속에 있었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내던져진 부유감과 귓가를 스치던 바람 소리, 갓 스무 살 된 가엾은 고아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장면이 전환된다. 인형처럼 가녀린 소녀를 뜨거운 열기가 집어 삼킨다.

아득히 잠식되어 간다. 아득히.

"……."

율리아는 눈을 떴다. 칠흑 같은 어둠이 그녀를 맞았다.

말 등에서 굴러떨어진 후, 간간이 기억이 끊기긴 했지만 바엘이 자신을 구해 준 것까지는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모두 꿈인 것처럼, 거대한 창밖엔 붉은 달이 떠올라 있었다.

사위는 온통 적막뿐이었다. 다시 눈을 감으면 브에스드라 황성에서 홀로 죽은 듯 지내던 때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깼군."

그런 그녀의 바람은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로 깨어졌다. 율리아는 이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지?"

"아……."

마계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바르바토스의 딱딱한 목소리가 걱정을 담은 듯 상냥하게 느껴지는 게
조금 재미있었다. 브에스드라 황실의 사람들보다 말이다.

어쩌면 아직도 꿈을 꾸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제가 정말로 살아 있구나 싶어서요."

"당연한 말을."

"그때 인사를 못 드렸어요.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어나기 위해 팔에 힘을 주던 그녀가 불현듯 고꾸라졌다. 하지만 베개에 얼굴째로 처박는 꼴은 면했다.


그 전에 바르바토스가 그녀를 붙든 덕분이었다.

의외의 도움에 놀란 율리아가 그를 올려다보는데, 정작 모노클 너머 바르바토스의 눈은 그녀보다 더 놀란


듯한 빛을 띠고 있었다.

공기 중에 감도는 침묵이 멋쩍었다. 참다못한 율리아가 먼저 입을 뗐다.

"저……."

바르바토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율리아는 제 어깨를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직접 닿기조차 싫어 손수건부터 꺼내던 그가,


이젠 양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 쥐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말에게 납치되어 숲속을 구르고 맨땅을 뒹구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더 이전의, 마계의 입구로 끌려오면서 생긴 상흔들까지
말끔하게 없어졌다.

문제는 그녀가 현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놀란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달음박질쳤지만
내심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악마들 중엔 번거롭다며 옷을 걸치지 않는 이도 제법 있었다. 유난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타인에게 나신을 보이는 건 생각보다 훨씬 부끄러웠다. 결국 견디지 못한 그녀가 조심스레 시트를
끌어 올리는데, 바르바토스가 재빨리 뒷걸음질 쳐 몸을 물렸다.

"읏!"

덕분에 율리아는 그대로 고꾸라져 침대에 얼굴부터 박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르바토스는 미묘하게
시선을 돌린 채 말을 이었다.

"감사 인사는 내가 아닌 주군께 하도록. 주군이 아니었으면 넌 산산이 찢겨 뼈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
테니."

"그래도……."

"또한 난 레라지에처럼 번잡스러운 성격이 아니다. 이것으로 만족하도록 해."

그가 손바닥을 펼치자 온통 새까맣고 커다란 로브가 생겨났다. 이걸로 몸을 감싸라는 의미 같았다.

율리아는 제 앞에 놓인 그것을 집어 들며 재차 감사 인사를 했다. 하지만 로브를 뒤적거리던 그녀의


표정이 이내 애매하게 변했다.

"저, 그런데 속옷은 어디에……."

"음?"

"소, 속옷."
속옷이란 단어를 들은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마치 터져 죽은 지렁이를 보듯 굳었다.

율리아는 혹시 자신이 뭘 잘못 말했나 되짚었지만, 별달리 거슬릴만한 점은 없었다. 단지 속옷을 달라고


한 것뿐이었다. 제대로 된 옷은 레벤나에게 따로 부탁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그 전까지 알몸에 로브만
두르고 돌아다니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그녀를 내려다보는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무척이나 살기등등했기 때문에, 율리아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상대가 인간 혐오로 유명한 그 바르바토스인데, 로브라도 던져 준 게 어디인가 싶었다.

율리아는 치미는 현기증을 애써 참으며 로브를 걸치고 허리를 꽉 묶었다. 길이가 길어서 바닥에 질질
끌리긴 했지만 어쨌든 몸 전체가 푹 덮였다. 이 정도라면 잠깐 움직인다고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아까의 속옷 일도 해서, 율리아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더욱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저, 바르바토스 님."

"뭐지?"

"혹시 귀찮지 않으시다면, 레벤나 님을 만날 수……."

율리아는 차마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아까의 '속옷'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보는 바르바토스의 표정은 마치 천하에 둘도 없는 호구 천치를 보는
듯했다.

역시 하찮은 인간 주제에 무언가를 부탁한 게 문제인 것 같았다. 율리아는 빠르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바르바토스 님을 귀찮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너는 멍청인가? 뇌가 달려 있기는 한 건가?"

"일단은 달려 있다는 느낌인데……."

"너를 그 꼴로 만든 게 누군지 알고나 하는 부탁이냔 말이다."

힐난에 놀란 율리아가 더듬더듬 자책하는데 바르바토스가 답답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율리아는


불현듯 말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설마.

율리아의 표정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그가 모노클을 벗으며 미간을 주물렀다.

"원래 같았으면 어림도 없지만, 주군을 마신으로 만들어 줄 귀한 열쇠니 어쩔 수 없지."

"……."

"직접 보도록 해. 네 눈으로 말이야, 인간."

11 화

사위가 온통 어둠에 잠긴 성 지하, 채찍 부딪히는 소리와 고통을 참는 듯 작은 비명이 습한 공기를 울렸다.


살기 띤 눈빛을 한 아가레스가 살점 묻은 채찍을 내던졌다. 그것이 떨어진 곳 바로 옆에 시커먼 핏덩이가
꿈틀거렸다. 겉으로만 보면 원래 누구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처참히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떨어진 레이스와 보석 등으로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독하기는."

"……너보다야 할까."

아가레스가 짓씹듯 중얼거렸고 레벤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의 옆에는 마찬가지로 살가죽이
넝마가 된 키마리스, 그리고 그를 고문하는 레라지에가 있었다.

낮게 웃은 레라지에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살짝 내려간 눈꼬리가 매혹적으로 휘었지만, 그의 손아귀는


키마리스의 머리채를 무지막지하게 붙들고 있었다.

"아주 재미있었지, 응?"

"이쯤이면 만족했겠지. 죽여."

"누구 마음대로."

"……."

"노예 짓이 그렇게 싫었으면 열쇠에 손댈 게 아니라 따로 부탁했어야지. 그럼 들어줬을지도 모르는데."

피를 잔뜩 묻힌 채 눈매를 휘는 레라지에의 분위기는 얼핏 색정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안광만큼은


짙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키마리스는 체념한 듯 가만 눈을 감았다. 어차피 고위급 악마는 온몸이 뭉그러질 정도로 다치고 피
흘린다고 죽지 않았다. 저보다 강한 마력을 지닌 자가 심장을 완전히 터뜨려야 한다. 레벤나가
키마리스의 심장을 빼앗아 노예로 만든 것과 비슷했다.

키마리스가 입을 다물자 무시당했다고 여긴 레라지에가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하지만 그는 고통스러운


기색도 없이 그저 낮은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때, 감옥으로 내려오는 계단 통로에 두 사람 분의 발소리가 울렸다.

"흐음?"

일말의 과정을 지루한 듯 지켜보던 바엘의 안광에 일순 이채가 스몄다. 그가 손짓하자 마왕의 근처에
똬리를 틀고 있던 거대한 뱀, 17 위의 악마 보티스가 몸을 일으켰다.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바르바토스를 따라 긴 계단을 내려온 율리아는 지하에 들어서자마자 들이닥친 습한 공기와 악취,
무엇보다 흉측한 모습을 한 거대한 뱀이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모습에 놀랐다.

그뿐 아니었다. 바로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온통 어두운 사위 속, 그녀는 저를 향해 번들거리는 수십 쌍의


형형한 안광과 마주했다.

"읏……."

포식자 앞에 내던져진 쥐처럼 온몸이 얼어붙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바르바토스의
냉막한 시선이 압박했다. 지금 도망치면 영영 끝이라는 것처럼.
결국 율리아는 천천히 발을 떼어 감옥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저벅.

그녀의 새하얀 맨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득한 무언가가 들러붙었다. 생리적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율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어 견뎠다.

사실 바르바토스는 율리아에게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도 상관없다는 선택지를 제시했다.


거절한 건 그녀였다. 그녀 본인의 의지로 이곳에 있기를 선택했다. 살고 싶었기에, 더 이상 타인의
사정에 휘둘리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기에.

실은 자신을 혐오했다는 레벤나도, 레벤나의 노예로서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키마리스도.

'선택은 내가 한 거야. 이 눈으로 직접 보겠다고…….'

그런 그녀라도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보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고깃덩어리라고 봐도 좋을 두 악마가 사슬에 얽힌 채 더러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녀에게 늘


친숙한 얼굴만을 보여 주었던 아가레스와 레라지에도, 당장 그것들을 찢어발길 듯 포악한 짐승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직이 숨을 들이켠 율리아는 이내 걸음을 옮겨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가레스가 그녀를 가로막듯
팔을 들었지만 율리아는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제게 진실을 알려 주세요. 남의 말만 듣고 판단하고 싶지 않아요."

"……."

"그렇게 해 주실 거죠? 레벤나 님, 키마리스 님."

끝없는 침묵 끝에 핏덩어리 속에서 두 개의 눈알이 빠끔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처음 만났을 때와 모습은


전혀 다르다 할지라도 율리아는 그것이 레벤나라는 걸 알았다.

"당신은 상냥한 분이잖아요."

"웃기는 소리……."

그녀의 높고 카랑하던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거칠게 갈라졌다. 경쾌하게 끝을 올리던 독특한 말투도 차갑고
딱딱하게 변했다.

그 한 마디를 끝으로 레벤나는 도로 입을 닫았지만, 율리아는 기다렸다. 비록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언제나 주변에 분란만 만드는 자신이라 할지라도, 딱 하나, 기다리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역시나 먼저 인내심이 바닥난 건 레벤나 쪽이었다. 그녀는 먹고 떨어지라는 듯 신랄한 말투로 율리아를
비웃었다.

"나는 인간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어. 내가 손만 까딱하면 그게 누구든, 얼마든지 내게 호감을 품게 할


수 있다고."

"맞아요. 저는 레벤나 님이 무척 좋았어요."

"네가 내게 가진 호감은 고작 그런 거야. 강제로 만들어진 거라고. 너를 끌어들이기 위해 어마어마한


마력을 쏟아부었으니까."
악마들의 흥미 섞인 시선이 둘에게 집중됐다. 줄곧 갇혀 고문당한 그녀는 모르겠지만 율리아에겐 마력이
통하지 않는다. 레벤나와 키마리스를 제외한 둥지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율리아가 레벤나를 잔뜩 비웃는 장면을 기대했다. 작고 나약한 인간이니 물리력을 쓰지는
못하겠지만, 본인을 사지로 몰아넣은 레벤나를 절대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약한 것이 안간힘을 다해 바르작거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즐겁다. 그리고 그 약한 것에 하릴없이 당해야


하는 강자의 굴욕을 보는 건 더욱 즐겁다.

"레벤나 님, 저는……."

율리아는 거대한 흑마에게 납치되어 거친 숲길을 하릴없이 내달리던 때를 생각했다. 말 등에서 추락해
무시무시한 악마들의 손아귀에 떨어져, 죽음을 앞둔 채 살고 싶다며 울부짖던 때를 떠올렸다.

"저에겐 마력이 통하지 않아요. 제가 당신에게 품은 호감은 진심이었어요."

"뭐?"

"진심으로 레벤나 님을 좋아했어요. 이곳에 떨어진 지는 비록 얼마 안 됐지만, 레벤나 님은 제 처지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이해해 준 첫 번째 분이었어요."

"그러니까 그건 내가 널 이용하려고 마력을……!"

"얼마나 많은 마력을 쏟아부었든 제게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거예요. 제가 레벤나 님을 좋아했던
이유는 고작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

그녀 이전에도 자신에게 호감을 내비쳤던 악마는 있었다. 아가레스나 레라지에처럼 말이다. 하지만
레벤나가 보여 준 호의는 그들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나는 이제껏 수많은 인간 열쇠를 봐 왔어. 하나같이 절망했고, 벌벌 떨며 저주를 퍼붓기도 했단다. 네
입장에서도 이곳에서 지내는 게 썩 달갑지는 않겠지?'

바람 부는 소리에도 두려워 주눅 들었다. 먼 곳을 지나가는 발소리마저 혹시나 삽시간에 돌변해


달려들지는 않을까 본능적으로 몸이 굳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행동 하나 말 한마디를 꺼낼 때마다
조마조마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침묵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당장은 안전해 보일지라도 말이다.

레벤나만이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듯 드러내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해 주었다. 얼핏 쉽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배려가 습관처럼 몸에 배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율리아가
레벤나에게 호감을 가진 최초의 이유였다.

핏덩어리 속 커다란 두 눈이 멍하니 깜빡였다. 율리아는 웅크리고 앉아 그런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자 레벤나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더욱 잘 드러나 보였다.

"마력 따위가 없어도, 레벤나 님은 정말 사랑스러운 분인걸요."

"……."

"그러니 어떻게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내가…… 그래?"
그녀의 눈동자엔 짙은 불신과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가 스며 있었다.

레벤나는 강한 악마였다. 단순히 힘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기억이 존재하는 한


마음엔 흉터가 남는다.

'나는 인간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어. 내가 손만 까딱하면 그게 누구든, 얼마든지 내게 호감을 갖게 할


수 있다고.'

'네가 내게 가진 호감은 고작 그런 거야.'

왜인지 레벤나가 품은 상처가 눈에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끝없이 실망하고 결국엔 마음의 벽을 쳐 버렸을
그녀의 지난 기억이 말이다.

단지 사탕발림뿐이었다면 율리아도 이렇게까지 그녀에게 마음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벤나는


상대가 하찮은 인간이라고 대충 넘겨짚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을 이해해 주었고, 그때의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이었는지 알아주었다.

끝끝내 상냥한 본성을 놓지 않았던 그녀의 용기가 율리아는 부러웠다.

레벤나의 기억을 들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상처받아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던 과거가 있기에, 단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 주고 싶었다.

"그런 자상한 마음을 고작 저따위를 미워하는 데 쓰지 말아 주세요. 레벤나 님은 아름다운 외모나 남을


유혹하는 능력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분이에요."

"……."

레벤나에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율리아는 또다시 기다렸다. 그녀의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그녀의 눈빛이 차츰 변해 갔다. 불신, 혼란, 어쩌면, 하지만…….

율리아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가슴 아팠다. 날카롭게 가시를 세우고 무엇 하나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지
못하게 지키는 모습이 꼭 고슴도치 같았다. 보다 못한 율리아가 재차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뚝, 뚝.

레벤나의 핏발 선 눈알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도 서러웠는지,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율리아는 피가 웅덩이처럼 고인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레벤나의 뭉그러진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겹쳤다.

비록 인간이지만, 악마에게 비할 수 없이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다면.

"당신을 용서할게요."

"흐윽, 끅……."

악마들은 그런 둘의 모습을 기이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레벤나는 열쇠를 기만했다. 그런 상대에게 분노를 쏟아내며 온갖 모욕을 다 줘도 모자랄 텐데, 정작


열쇠는 더러운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레벤나를 위해 눈물 흘렸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살아온 악마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은 절대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악마보다
더욱 악마다운 인간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에게 율리아의 '용서'는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12 화

17 위의 악마 보티스가 혼란을 담은 눈으로 가장 높은 자리를 올려다보았다. 인간이 레벤나를 용서하든


아니든 이곳은 마왕의 둥지, 오직 그만이 레벤나의 처우를 결정할 수 있었다.

"주군, 처형의 시간입니다."

"……."

"우선 키마리스부터 처단하겠습니다."

어렵게 찾아낸 열쇠를 너무나 어이없이 잃을 뻔한 사건이었다. 레벤나는 열쇠의 뜻을 고려해 잠시 살려


두더라도, 키마리스는 향후를 위해 본보기를 남길 필요가 있었다. 왕의 물건에 손을 댔다간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에 대해서.

그때, 보티스의 말을 들은 율리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탈진한 팔다리가 볼품없이 후들거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엘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 꿇었다.

"제, 제가 현명하게 처신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키마리스 님은 심장을 담보로 잡혔을 뿐이잖아요. 부디 사정을 들어 주세요. 절대 마왕님을 거스르고


싶었던 건 아닐 거예요."

바엘의 고압적인 시선이 그녀에게 곧장 내리꽂혔다. 마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내뿜는 절대적
위압감까지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율리아의 작은 어깨가 두려움에 덜덜 떨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의견을 물리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지나고, 피식 입꼬리를 비튼 마왕이 물었다.

"그럼 넌 내게 무엇을 줄 테지?"

"저는……."

"넌 내 것이다. 저 두 버러지는 감히 주인의 소유를 탐했지."

지극히 권태로운 목소리가 습한 감옥을 웅웅 울렸다. 율리아를 내려다보는 바엘의 눈빛에 숨길 수 없는


비소가 섞였다.

"가는 게 있다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저들을 살려 준다면 대신 내게 무엇을 주겠나?"

율리아는 머뭇거렸다. 자신은 가진 게 없었다. 바엘이 손만 스쳐도 죽을 이 나약한 몸뚱이조차, 마계로


떨어진 시점에서 이미 그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엘은 그녀의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읽었다. 그의 안광이 만족스럽게 빛났다.

"나를 마신으로 만들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열쇠로서 달갑고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해."

"……."

"절대 벗어날 수 없어. 너의 몸뚱이,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인간을 매개로 한 술법은 변수가 잦은 편이었다. 매개체의 의지나 감정에 따라 영향을 받는 종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방법을 찾았는데 그것이 열쇠의 자발적인 도움이 필요한 것이라면, 상황은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바엘의 의도를 깨달은 율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왕은 퍽 만족스러운 얼굴로
높은 계단에서 느릿하게 걸어 내려왔다. 그만큼 그가 주는 중압감 또한 커져서, 율리아뿐 아니라 다른
악마들까지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율리아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가득 움켜쥐었다. 끌려 올라간 그녀의 귓가에 바엘이


비소하듯 속삭였다.

"설령 네가 죽는다 하더라도."

"……설령 제가 죽는다 하더라도."

율리아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말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귓불에 닿을 듯 말 듯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던 바엘의 숨결이 가느다란 목선을 타고 턱 아래로, 다음은 여린 입술로 둥근 궤적을 그리며
이동했다.

당장에라도 입술이 닿고 숨이 섞일 듯한 거리에서 움직임을 멈춘 그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기꺼이 받아들여 나를 마신으로 만들도록."

"……기쁘게 받아들여 당신을 마신으로 만들겠습니다."

문장을 끝마친 그녀의 입술에 바엘의 뜨거운 혀가 침입한 순간, 그녀의 목에 가장 고귀하고 순도 높은
붉은 마력이 감겨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장으로 변해 그녀의 목에 사슬처럼
몇 겹이나 얽매였다.

율리아는 이것이 악마와의 계약임을 알았다. 계약의 대가는 목숨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애초부터 거절할 명분도, 능력도 없었다.

"좋아."

"콜록, 컥!"

입술을 뗀 마왕이 손을 놓자 그녀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가장 근처에 있던 바르바토스가 그런 그녀를


반사적으로 받았다.

이미 정신을 잃은 그녀의 심장 위엔 각인이 남겨져 있었다. 만약 계약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장


그녀의 목숨을 갉아먹으리라. 지옥과 같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바엘은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제야 악마들은 주술과 같은 왕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 *

율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커다란 창 너머로 환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방의 구조는


낯설었지만, 창밖엔 마신의 탑이 우뚝 서 있어서, 이곳이 여전히 마왕성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작은 열쇠야, 깼어?"

"아가레스 님……."
율리아는 머리맡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이와 눈을 맞췄다. 아가레스의 예리한 동공엔 그녀를 향한 깊은
염려가 자리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치미는 현기증을 억누르며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가레스는 그런 그녀를 만류하며
입가에 컵을 대 주었다. 의아함에 시선을 내린 율리아는 그것이 물이란 걸 알았다. 마계에는 나지 않는,
인간이 마실 수 있는 보통의 물.

동시에 그간 잊고 있던 갈증이 삽시간에 밀려들었다. 그녀는 커다란 컵을 양손에 쥐고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콜록, 콜록!"

사레들린 율리아가 힘겹게 기침을 내뱉는데, 순간 미간을 구긴 아가레스가 미묘하게 시선을 피했다. 늘
당당하던 그녀의 표정이 지금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워 보였다.

"미안해, 작은 열쇠야. 인간은 우리랑 다르게 매일 힘을 흡수해야 한다는 걸 몰랐어."

"아니에요. 저는 괜찮……."

"멍청해서 그래. 말을 해야 알지. 아니면 죽고 싶었나 보지?"

둘의 대화에 갑자기 가시 돋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레라지에였다. 그 역시 평소의 여유로움이 사라진


다소 신경질적인 눈초리로 율리아를 노려보았다.

"그냥 조금 잠들었던 것뿐인걸요."

"사흘씩이나 퍼질러 잔 게 조금이라니, 변명도 정도껏 해야지."

"사흘이라니……."

놀란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렇게나 오래 의식을 잃었다는 게 의외긴 했지만, 그보다 더 놀란 건 눈을 떴을 때 아가레스와


레라지에가 바로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환자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그 긴 시간을 기약
없이 줄곧 지켜봤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레라지에는 정작 깨어난 율리아에게 가까이 오지 않고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제야


율리아는 그의 뒤편에 다른 두 악마가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레벤나와 키마리스였다.

감옥에선 살점이 잔뜩 뭉그러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는데 지금은 말끔하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율리아는 그들이 악마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저를 지켜 주신 거군요. 감사해요."

"너는 마정석의 열쇠야. 당연한 말을 하게 하지 마."

"그래도요. 물도 구해 주시고……."

마계에도 물이 있긴 했지만, 인간이 오래 먹으면 마성에 의한 중독 증상이 나타났다. 맹독까진


아닐지라도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건 분명했다. 체력이 약한 율리아에겐 특히 그랬다.

기침이 멎은 그녀는 잔의 물을 전부 비웠다. 아가레스는 빈 잔을 도로 가져가며 이번엔 빵과 과일 같이


먹기 쉬운 간편식을 내밀었다. 그것들을 자그마한 입 안에 욱여넣는 율리아를 보며 아가레스는 표정을
굳혔다. 그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 것에 자책하는 얼굴이었다.

"인계에 다녀온 건 레벤나야. 이번엔 아니었지만 키마리스도 보낼 거고."

"……예?"

"앞으론 저 녀석들을 종처럼 부려먹어. 내가 저 둘의 심장을 뺏었거든."

"예?!"

경악한 그녀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하지만 아가레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저놈들은 살려 준 것만으로도 네게 평생 감사해야 해."

"그런 대가를 바란 건 아니었어요."

"그럼 또 굶을래? 죽고 싶다면 미리 말해 줘. 이번에야말로 내 인형으로 만들어 오래도록 예뻐해 줄


테니까."

레라지에는 납치 사건의 두 원흉을 끝까지 노려보다가 율리아가 누운 침대, 아가레스의 반대편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율리아의 발간 뺨을 덧그리듯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진짜 맛있게 생겼네. 당장 먹고 싶게."

"더러운 새끼, 닥쳐."

"너도 속으론 군침 흘리는 거 다 알아. 웬 점잖은 척?"

"바르바토스한테 네가 열쇠를 탐낸다고 찔러 버릴까."

"인간한테까지 신경 쓸 겨를 없을걸? 형이 요즘 좀 바쁘거든!"

두 악마가 율리아를 사이에 두고 투닥거리는 사이, 그녀는 치미는 현기증을 참으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키마리스는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반면 레벤나는 몸을 움찔하더니 재빨리
시선을 피해 버렸다.

율리아의 어깨가 내심 쳐졌다. 생색을 내려고 한 일은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레벤나에게 느꼈던 호감은
진심이었기에 이왕이면 그녀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레벤나는 자신 때문에 심장을 잃었다. 더불어 키마리스의 심장까지 함께 빼앗기지 않았던가.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작은 열쇠야, 왜 그래? 갑자기 힘이 없네."

"아뇨, 그냥……."

"뭐든 들어줄 테니까 말해봐. 다시 생각해 보니 저 녀석들 심장을 터트리고 싶어졌어? 해 줄까?"

"직접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아? 속 시원하게."

"아, 아뇨! 아뇨!"

대경실색한 율리아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가레스와 레라지에는 나름대로 생각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율리아에겐 그저 재앙이었다. 그럼에도 두 악마가 계속 채근하자 율리아는 마지못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괜찮다면 두 분과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저것들과?"

"네……."

아가레스는 '둘'의 의미를 묻듯 말없이 턱을 까딱였다. 설마설마하는 눈치였지만 율리아는 그것이 맞다는
의미로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보는 아가레스의 눈은

'작은 열쇠야, 너 미쳤니?'

하고 명백히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크고 또렷한 눈빛으로 아가레스를
마주했다.

결국 눈망울 공격에 패배한 아가레스와 레라지에가 방을 나섰다. 그러면서도 레벤나와 키마리스에게


손대면 죽는다고 끝까지 협박하는 걸 잊지 않았다.

"……."

탁, 문이 닫히고 넓은 방엔 셋만 남았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입도 열지 않으니 실내엔 어색한 공기만


감돌았다.

결국 율리아가 먼저 행동으로 옮겼다. 젖은 수건처럼 축축 처지는 몸을 추스르고 조심스럽게 발에 땅을


내디뎠다. 하지만 일어서려 하기가 무섭게 또다시 현기증이 일었다. 율리아는 휘청거리며 침대 기둥을
짚었다.

"읏, 평소엔 괜찮았는데……."

결국 보다 못한 둘이 몇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을 보지 못한 율리아는 무너지듯 침대에 걸터앉았다.

13 화

머리가 쿵쿵 울리고 심장이 거세게 달음박질쳤다.

괜찮은 척 먼저 나서긴 했지만, 사실은 아직 두려웠다. 특히 키마리스가 그랬다. 자신을 납치한 거대한
흑마의 정체가 키마리스란 걸 아는 까닭이었다. 그의 까만 피부와 윤기 나는 머리칼은 아등바등 붙잡았던
갈기와 겹쳐져 그날의 악몽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당시의 그는 레벤나에게 심장을 빼앗긴 상태였다. 게다가
레벤나에게 자신을 넘길 때, 그의 눈빛엔 미미한 주저가 담겨있었다. 당시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죄책감
때문이라고 하면 모든 게 설명됐다.

"저, 몸은 괜찮으세요?"

"……."

"감옥에서 두 분의 상처가 너무 심해 보여서 걱정했어요."

"넌 지금 누구 약 올리니? 아니면 착한 척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레벤나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쨍하고 카랑카랑했지만 잘 들어 보면 끝이 조금 갈라져 있었다. 겉보기만


멀쩡하지 아직 속까지 나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혹시 잊은 거니? 나는 너를 죽이려고 했어."

"하지만 지금은 안 그러잖아요."

"그, 그건 아가레스가 내 심장을 가지고 협박을……!"

"콜록, 콜록!"

이불 밖에 오래 있어 몸이 식은 걸까, 자꾸만 밭은기침이 새어 나왔다. 덕분에 말을 멈춘 레벤나의


표정이 조금 멋쩍어 보였다.

한참을 기침하다 지친 율리아가 어깨를 바르르 떨며 머리맡에 힘없이 몸을 기대자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움찔거렸다. 다가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속내가 인간인 율리아에게조차 훤히 들여다보였다.

율리아는 이번엔 키마리스를 응시했다. 그는 다리를 벌리고 뒷짐을 진, 전형적인 군인의 자세로 서
있었다. 레벤나의 생각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 그의 속내는 아직 오리무중이었다.

율리아가 답답한 마음에 그를 지그시 응시한 순간이었다. 눈앞에 붉은 에러 창이 떴다.

[▷SYSTEM

HP 부족으로 SIGHT 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멈칫한 율리아가 어깨를 굳혔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지그시 보며 그의 생각을 알고 싶다고 떠올리면 시야
기능이 작동하는 듯했다. 납치당한 이후 이 기능이 뜨지 않은 이유는, 시스템의 설명을 빌어 보자면
체력이 낮기 때문이었고 말이다.

그녀가 갑자기 알게 된 사실에 놀라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레벤나가 다소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를 안아 올렸다.

"누워, 멍청아."

"레벤나 님……."

"제 몸 하나 간수 못 하는 주제에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는 것도 병이란다?"

레벤나의 체구는 악마들 중에선 나름 작은 편이었는데도 한 손으로 율리아를 너끈히 들었다. 그녀는
베개를 팡팡 두드려 높이를 맞춘 뒤 율리아를 커다란 침대 가운데 정확히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렸다.

그녀의 손길은 얼핏 기계적으로 느껴졌지만, 사실은 세심하고 다정했다. 울컥한 율리아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르는데, 그녀가 홱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차, 착각하지는 말려무나? 내 심장이 아가레스한테 있어서 그런 거뿐이니까."

"감사합니다, 레벤나 님."

"노예한테 님자 붙이는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 있니?"

레벤나가 다시 멀어지려는 기색을 보이자,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혹시나 거부당할까 두려워 소매 끝을 잡는 게 전부였지만 레벤나는 움찔하며 행동을 멈췄을 뿐 간신히
다가온 작은 손을 내치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레벤나."
"흥……."

그녀는 마지못해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율리아의 머리맡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풍성한 드레스 자락과
장신구가 율리아의 얼굴을 스치지 않도록 다른 손으로 슬쩍 여미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새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죽기 전에도, 이 세계에 넘어와서도 이렇게까지 비현실적으로 인형처럼 생긴


이는 보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가, 레벤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얼굴 좀 예쁘다고 좋을 거 없단다? 외모에만 홀려서 내가 어떤 악마인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으니까. 이


얼굴이 없다면 전부 돌아서 버릴 테지. 그럴 거면 보티스처럼 차라리 처음부터 괴물같이 생긴 게 나아."

"……."

"너 같은 인간은 처음이야. 내가 고깃덩어리 꼴을 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서 얼굴을


맞대다니, 비위도 좋구나?"

"레벤나는 레벤나니까요.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너는 볼수록 이상한 인간이구나."

레벤나는 제가 말하고도 멋쩍었는지 괜스레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더니 키마리스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묻지도 않았건만 그와의 주종 관계에 대해 줄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이제 아가레스의 노예란다? 내 심장을 뺏어가면서 녀석의 심장도 같이 가져갔어. 아가레스는
너에게 나름대로 잘해 주는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심장……. 그것을 가져간 상대의 말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나요?"

"일반적으론 그렇지? 세상에 나서서 죽고 싶은 별종은 몇 없을 테니까?"

하지만 율리아는 들었다. 바르바토스를 따라 감옥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던 중, 저를 죽이라는


키마리스의 목소리를.

'이쯤이면 만족했겠지. 죽여.'

그의 무감한 목소리가 아직까지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울림이 크고 시원스러운


분위기였는데, 그것조차 전부 자신을 꾀어내기 위한 연기였던 걸까.

대화 주제가 본인으로 바뀌었는데도 키마리스는 냉랭한 낯을 유지하며 율리아를 응시했다. 만약 시선에


물리력이 있다면 얼굴이 뚫릴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잠시 했다.

"키마리스 님, 그렇게 오래 서 있으면 다리 아프실 텐데……."

하지만 그녀는 채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소리 없이 다가온 그가 그녀의 발밑에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한


탓이었다. 경악한 율리아가 침대에서 구르다시피 일어나 그를 끌어당겼지만 키마리스는 옴짝달싹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키마리스 님, 어째서?"

"종의 머리는 주인보다 높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율리아의 눈동자에 당혹감과 더불어 아픈 빛이 어렸다. 이러려고 그들을 구한 게 아니었다.

사실 마계로 끌려오는 게 정말로 싫었다면 죽음으로 거부할 수도 있었다. 이미 한 번 해 봤으니까…….

그럼에도 끝끝내 이곳에 온 건, 자신을 그토록 증오하던 사람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땅에 뿌리내려 보고 싶었다.

악마성의 존재들에게 상냥한 척 한 것 역시 조금이라도 미운털을 뽑아 보려고, 그래서 자그마한 애정의


편린이나마 받아 보고 싶어서.

그 이해타산적인 마음의 말로가 이런 식으로 귀결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럼 스스로가 너무 혐오스러워질


것 같았다. 존재만으로 또 남에게 피해를 끼친 꼴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어쩌면 이 역시도 이기적인 생각이겠지만…….

"아가레스 님께 심장을 돌려달라고 부탁해 볼게요. 그러니까 제가 싫으시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약속할게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주세요."

율리아는 키마리스의 앞에 마주 보고 서서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의 키가 훌쩍 큰 탓에 율리아가 선


것과 그가 부복한 것의 눈높이가 비슷했다.

키마리스는 왜인지 그녀에게 잡힌 손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진심이 통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율리아는 그를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가 레벤나에게 심장을 빼앗긴 건 마왕성이 세워진 직후의 일이라고 들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노예로 살았으니 그는 체념한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포기하지 마세요. 그럼 언젠가는 키마리스 님이 원하는 대로, 마음 닿는 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몰라요."

마왕에게 속박된 인간이 이런 말을 한다며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율리아의 말은 진심이었다. 모순되게도


브에스드라 황성에서 지낼 때보다 지금이 훨씬 자유로웠다. 과거의 그녀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지금도 날마다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간절함이 통한 걸까, 키마리스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시선을 받은 율리아는 그의 손에 제 이마를


기대며 고해성사하듯 속삭였다.

"저도 언젠가는 자유로워지길 바라요."

"……."

"저 키마리스 님에게 거짓말했어요. 궁금한 게 있냐고 물었을 때, 사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어요. 아주 먼 훗날이라도 좋으니까, 제가 열쇠의 역할을 끝낸 뒤에도 살아 있을 수 있다면."

율리아의 두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고였다. 줄곧 말하지 못했던 진심이 울먹이는 목소리에 애처롭게
섞여들었다.

"그땐 저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지, 사실은 그걸 묻고 싶었어요."


참으려 꾹 깨문 입술에서 작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이토록 긴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의 두 눈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을 만났다. 그런 사실이 너무 기뻐서…….

가슴 속에 단단히 웅크리고 있던 멍울이 물에 담근 잉크처럼 풀려 갔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어라."

율리아는 문득 제가 흘린 눈물이 키마리스의 손등 위로 고스란히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혹시 인간의 눈물이라 더럽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놀란 그녀가 재빨리 뒷걸음질 치려는 찰나였다.

그녀의 손목이 부드러운 힘으로 붙들렸다. 낮고 울림이 큰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당신의 바람이 곧 나의 바람."

"아……."

"이 키마리스,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신의 바람을 이뤄 드리겠습니다."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짙은 안개가 걷힌 듯 선명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허락한다면 당신의 손등을 제게 주십시오."

"네?"

놀란 그녀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방금 키마리스의 부탁은 사교계에서 흔히 쓰이는 인사법이었다.


상대에 대한 경의를 손등에 입 맞추는 것으로 돌려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율리아에게 손등을 구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황실에서의 그녀는 누군가의 경의를
받을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저 귀족들이 황제나 에스델의 손등에 입 맞추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을
뿐이었다.

그녀의 가슴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선뜻 허락해도 좋을지, 막상 키마리스를 실망시키는 건 아닐지
두려움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가 망설이는 동안에도 키마리스는 흔들림 없이 곧은 눈동자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율리아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신경 쓰며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의 주인님."

그의 입술이 손등에 조심스럽게 맞닿은 순간이었다.

화악, 그의 머리칼을 닮은 짙은 남빛의 마력이 미풍처럼 율리아를 감쌌다. 하지만 전혀 아프거나 두렵지
않았다. 기분 좋은 산들바람을 맞는 듯 잔잔하고 따뜻한 기분이 그녀를 휘감을 뿐이었다.

14 화

이내 바람이 잦아들고, 입술을 뗀 키마리스는 잠시 당혹스러운 듯 눈을 깜빡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력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었군요."

"제게 뭔가를 하려고 했나요?"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계약을 맺고자 했습니다만."

"네?"

마족들은 종종, 그러나 고위 마족일수록 몹시 드물게, 자기 자신을 누군가에게 종속시키는 계약을 맺곤


했다. 계약자가 인을 풀어줄 때까지 그들은 영원한 주인의 종이 된다. 그가 필요로 할 때마다 언제든
소환되는 일종의 '마수'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키마리스 정도 되는 고위급 마족은 스스로를 마수화시키느니 차라리 죽기를 선택했다. 그 정도로
굴욕적인 계약이었다.

율리아는 키마리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력이 통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셨어요?"

"당신이 나를 구원했으니까."

"감옥에서의 일을 말하는 거라면 그건……."

"아뇨."

키마리스가 부정의 의미로 고개를 저으려는 찰나였다. 잠시 잊고 있던 존재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웬만하면 받아들이렴? 키마리스는 외골수 기질이 있거든. 의외로 궁상도 잘 떤단다?"

레벤나가 팔락거리던 부채를 탁 접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성큼성큼, 그러면서도 우아하게 걸음을 옮긴
그녀가 키마리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나저나 기분이 나쁘구나? 키마리스, 너 나에게 심장을 빼앗길 때 대충 봐준 거였니?"

"그건 아니야."

"아니면? 생각해 보면 그때 넌 나에게 제대로 저항하지 않았지? 아프게 맞는 거 좋아하니? 지금이라도


실컷 때려 줄까?"

"마력을 잔뜩 실은 배틀액스를 괴물처럼 휘두르는데, 그걸 누가 당해."

키마리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녀와 싸우던 때를 생각하니 다시금 소름이 끼치는 모양이었다.

"죽을 생각으로 네게 덤볐던 건 맞아. 하지만 눈을 시뻘겋게 부릅뜨고 웃으며 덤벼드는데 그딴 것에 죽고


싶진 않더군.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율리아는 전혀 몰랐던 레벤나의 색다른 과거가 드러났다. 바엘이 마계를 휩쓸기 전엔 26 개의 군단을
이끌었다더니…….

율리아는 내심 궁금증이 일었지만 참기로 했다. 아니, 최소한 키마리스의 앞에선 묻지 않기로 했다.
레벤나를 보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싫어 보이는 탓이었다.

레벤나도 그의 대답에 나름대로 만족했는지 다시 부채를 펼쳐 우아하게 팔락였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그럼 되었구나. 이제 너는 율리아의 편이라고 봐도 되겠지?"


생각 없이 지나치려던 율리아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크게 홉뜨였다. 지나가듯 한 말이었지만 그 한
마디가 그녀에게 미치는 충격은 대단했다.

"지금 뭐라고……."

"나는 알고 있었단다? 너 사실은 에스델이 아니지?"

"무, 무슨 소리예요. 저는 에스델이에요."

율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자신이 제대로 된 얼굴을 하고 있는지 계산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표정을 숨기는데 재주가 없었다. 율리아의 동요를 읽은 키마리스가 그녀를
감싸며 레벤나를 힐끗 노려보았다.

"레벤나,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털어놔."

키마리스의 표정이 삽시간에 돌변했다. 그의 눈은 여차하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는 듯 흉흉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란다? 마성이 없는 물을 찾아 인간계에 갔다가 에스델 브에스드라를 봤거든.


아주 잘 지내더구나? 너는 지옥에 처박아 두고 말이야?"

"……."

"네가 진짜 열쇠였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한 걸 알고 있니? 주군은 기만당하는 걸 싫어해.


시끄러운 것도, 하찮은 것이 기어오르는 것도 말이야."

"그럼 저는…… 이제 죽게 되겠군요."

변명을 포기한 율리아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진실을 들켜 버렸다. 게다가 레벤나는 자신이 열쇠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원작을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진짜 열쇠는 에스델이고, 자신은 원래대로라면 존재해선 안 될 이물질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자신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란 걸 알게 되면 이들마저 자신을
경멸할 텐데, 어떻게 차마 그걸 말해…….

율리아의 시야가 눈물로 흐릿하게 번진 찰나, 레벤나가 그녀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구나. 여기에 오기까지 아주 힘든 사정이 있었겠지?"

"……."

"걱정 말려무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나랑 키마리스가 너를 지켜 줄 테니까."

"이곳을 떠나길 원한다면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나의 주인님."

두 악마의 시선이 오롯이 그녀에게 향했다. 율리아를 보는 그들의 눈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용기를 내기로 했다.

율리아는 마계로 넘어오기 전, 브에스드라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꼴사납게


눈물이라도 터뜨리면 어쩌나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그런 모습이 되레 둘을
화나게 만든다는 건 알지 못한 채로.
"그래서 폐하께선 에스델 대신 저를 보내기로 하셨어요. 에스델은 장차 황제가 될 고귀한 몸이고, 저는
쓸모없고 처치 곤란한 존재니까……."

"말도 안 돼!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폐하의 결정을 이해해요. 방법이 조금 강압적이긴 했지만요."

한밤중 갑자기 들이닥친 군사들이 그녀를 폐궁에서 속절없이 끌어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황제의
침실이었고, 그의 곁엔 언제나처럼 에스델이 서 있었다.

마족과의 종전을 위해 지금 당장 떠나라는 그들에게, 율리아는 눈물로 애원했다,

'그럼 편지라도 한 장 남기게 해 주세요. 저를 걱정할 사람이 있어요.'

'핑계도 가지가지 하는군. 누가 너 따위를 걱정한다고.'

'한 시간만, 아니, 10 분 만이라도……!'

'두말할 것 없다. 지금 당장 끌어내!'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입에 수건이 물리고, 얼굴엔 두꺼운 자루가 쓰였다. 직후 마차에 강제로 태워져
며칠 밤낮을 쉴 새 없이 달렸다. 도중에 에스델의 옷과 장신구가 억지로 걸쳐졌고, 도망치려 할 때마다
그녀를 얽맨 구속구는 점점 그 수를 늘렸다.

그렇게 지옥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율리아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만신창이 꼴이 되어 있었다.

"결국 전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마족과의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황궁 한구석에 박혀 있던 자신이라도 때때로 잔혹한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걸리면 즉결 처형임에도 황실 재산을 빼돌리는 하녀가 늘어났다. 병사들은 매번
교체되어 나이 스물을 넘긴 자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힘들게 했던 건, 피 튀기는 전쟁의 선두에서 싸우고 있을 벗의 존재였다. 자신


탓에 자유로운 미래를 빼앗긴 채 전쟁터로 끌려간 그가.

힘없이 시선을 내리까는 율리아의 손 위에 다른 온기가 겹쳐졌다. 율리아를 보는 레벤나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으려는 듯 되레 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인간은 원래 간교한 존재라지만, 네 가족들은 정말이지 악마보다 더 악마 같구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어디든, 당신이 원하는 곳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이곳에 있고 싶어요. 제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은 율리아를 두 악마가 부축해 도로 침대에 앉혔다. 레벤나가 문득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상관없지만 주군이 사실을 안다면 율리아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열쇠든 뭐든, 그분을 거스르고
살아남은 자는 없어. 무서운 분이란다."

"율리아 님의 정체를 숨기는 게 급선무겠군."

"맞아,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으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레벤나가 덧붙였다.

"율리아, 밖에선 너를 다른 이들처럼 열쇠라고 불러야겠구나. 아무리 그래도 생판 모르는 인간의


이름으론 부르고 싶지 않아."

"고마워요."

마침 전쟁이 끝나 바엘이 마계의 문을 걸어 잠근 게 다행이었다. 그들 셋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율리아의


정체를 숨기기로 결의했다.

* * *

같은 시간, 승전의 깃발을 든 수많은 기사가 제국 브에스드라의 황도 아벨딧심에 들어섰다. 그들의


선두엔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젊은 영웅, 소드마스터 레기온이 있었다.

천민 출신인 그는 검에 천부적 재능을 지녀 어린 나이에 전쟁에 참전했고, 마족과의 처절한 전투 속에서


대륙에 단 셋뿐인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다.

레기온과 그의 동료들은 무수한 격전지에서 전승을 거두며 적을 무찔렀고, 그 결과 브에스드라의 황제


잉그렘 5 세의 눈에 들어 개선 행렬의 선두에 서는 영예를 얻었다.

제국 모든 귀족들이 모인 황궁의 중앙 홀, 붉은 융단 카펫을 가로지른 그가 절도 있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 레기온, 브에스드라의 잉그렘 5 세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군. 대륙의 영웅인 자네를 진심으로 환영한다."

황제의 허락을 받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연회장의 중앙에 그가 서 있었다. 벽과 천장을 빼곡히 장식한 보석이 불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어린 나이에 소드마스터로 개화한 그를, 게다가 마침 마땅한 국적도 없던 그를 수많은 나라에서 탐냈다.
그러나 레기온은 망설임 없이 브에스드라의 손을 잡았다.

레기온은 저를 우러르는 수많은 시선을 뒤로한 채 황제의 주변을 훑었다.

'그녀는 아직인가.'

황제의 뒤편엔 아름답게 차려입은 황녀 에스델이 있었다. 하지만 레기온이 기다리는 이는 그녀가 아니었다.

황제가 선선히 웃어 보이며 손을 펼쳤다.

"대륙에 셋뿐인 소드마스터가 여기 이곳에 왔으니 짐은 마땅히 영웅을 대우할 것이다. 공작의 지위와 함께
자손 대대로 이어질 영지를 하사하겠다. 또한……."

"송구하오나 폐하, 제 바람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젊은 영웅이 황제의 말을 끊었지만 누구도 그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존엄을 올려다보는 레기온의
눈빛이 마치 가을날 하늘처럼 청명하게 빛나고 있는 까닭이었다.

"폐하의 두 번째 황녀이신 율리아 님께 청혼하고 싶습니다. 제겐 그분 외에 어떠한 영광도 필요치


않습니다."

"……."

순간 황제의 표정에 미미한 불편함이 감돌았다. 인간으로서 궁극의 경지에 오른 레기온이 그 변화를 모를
리가 없었지만, 그는 이유를 짐작하고 모른 체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 서 있는 에스델과 마찬가지로 황녀이되 어떠한 대우도 받지 못한, 하지만 웃는 모습만큼은 늘


수줍고 아름답던 율리아. 뜻밖의 이름을 들으니 황제가 당황한 거라고, 레기온은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이어진 황제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15 화

"흐음, 따로 원하는 바는 없는가? 짐에게는 장차 황위를 이어받을 황녀 에스델이 있다. 자네가 원한다면
황녀와 혼인하여 국서가 되는 것뿐 아니라 공동통치의 권한을 위임할 생각도 있어. 에스델과도 이미
의논이 끝났다."

부황의 눈빛을 받은 에스델이 고고히 턱을 들고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나비 날개처럼 투명한 장갑을


벗은 그녀는 레기온의 앞에 손을 내밀고 그가 그곳에 입을 맞추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되레 레기온은 한
발짝 물러났다.

"황공하오나 황녀 전하……."

"레기온 공, 유감이지만 율리아는 몸이 좋지 않아 당분간 바깥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제가 직접 그분을 뵙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어려운 일이다."

레기온과 에스델의 대화에 황제가 끼어들었다. 황제의 표정에 자리 잡은 불편감이 조금 더 커졌다.

레기온은 애초에 율리아를 데려오는 일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비록 모두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아 외궁에 유폐된 황녀라지만 레기온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었다.

그는 그런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었고, 제국 측에선 율리아의 신병을 빌미로 이런저런 걸 요구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너무 다른데.'

무언가 이상했다. 에스델의 표정은 타고난 고귀한 피에 걸맞게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다. 그러나 황제를
비롯한 주변 몇몇의 얼굴엔 미미한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레기온은 지체없이 소드마스터의 힘을 개방했다. 그리고 이 황성 어디에도 그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몸이 약한 데다 주변의 악의 어린 시선에 민감하여 황성 밖으론 나가 본 적 없는 이였다. 불안감을 느낀


레기온의 시선이 곧장 황제에게 향했다.

에스델이 그런 레기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례하군요, 레기온 공. 감히 폐하의 안전에서 그런 불손한 눈빛을 보이다니요."

"황녀 전하께선 물러나 주십시오. 폐하께 직접 이야기를 들어야겠습니다."

"어째서 율리아를 찾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름만 황녀일 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가치는 황녀 전하께서 결정하실 사항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피차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서던 중, 그의 귓가에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미 죽음의 계곡에 떨어진 자를 어떻게 살려오나……."

"들을라. 조용하게."

하지만 오감이 극도로 발달한 레기온에게 그 작은 소리를 알아채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밀려드는 분노로 삽시간에 벌게진 눈동자가 황제 부녀를 향했다.

"율리아 님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인간과 마족의 대립은 오랜 기간 첨예하게 이어졌다. 전쟁터는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었다. 한시라도 마음을 놓았다간 땅에 뒹구는 수많은 시신 중 하나가 될 뿐인 그런 곳.

하지만 어느 날인가 마족들은 일시에 공격을 멈추고 군을 거뒀다. 처음엔 그것이 함정이라 생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낭설 같은 소문 하나가 퍼졌다. 마족이 '황녀' 에스델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녀 '에스델'은 이곳에 있었다.

"율리아를 어떻게 했느냐 물었습니다!"

분노를 억누르는 레기온의 손끝에 푸른 섬광이 비치더니 이내 대검의 형태를 갖췄다. 소드마스터의 증표,
소울 소드였다.

그가 방출하는 강력한 검기에 수많은 귀족이 괴로워하며 무릎 꿇었다. 잉그렘 5 세도 끝끝내 비틀거린
가운데, 에스델만이 힘겨운 듯 서서 입꼬리를 비틀 뿐이었다.

"이미 눈치챈 것 같지만 율리아는 이곳에 없어. 정확히는 이 땅에 없다고 하는 게 맞겠지."

"……."

"휴전을 대가로 그 아이를 마족에게 넘겼거든."

우드득, 쿠릉!

그의 손에 쥐어진 푸른 검이 연회장의 대리석 바닥을 완전히 반으로 쪼개 버렸다.

레기온은 저를 가로막는 수많은 기사를 검기만으로 단번에 쓰러뜨리며 몸을 돌렸고, 동료들 역시 그를


따라 제국 브에스드라의 황궁을 떠났다.

'율리아를 찾아야 해.'

아무리 대륙에 셋뿐인 소드마스터라도 소울 소드를 황제에게 겨눴다. 그 시점에서 반역자가 된 거나


다름없었으나 레기온의 푸른 안광은 짙은 살기를 띠며 삼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 * *

02. 악마들이 이상합니다

납치 사건 이후 율리아가 체력을 완전히 회복하기까지는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일찍이 율리아와


안면을 튼 몇몇 악마가 병상에 누운 그녀를 몸소 살폈고, 덕분에 그녀의 침실은 조용할 날 없이 북적였다.

한편 바엘의 일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맨몸으로 마정석에 부딪힌 뒤 힘을 이기지 못해


폭주하거나, 혹은 그의 둥지에 나태하게 늘어져 시간을 보냈다.
바엘이 폭주를 할 때면 거대한 성 전체가 쿵, 쿵 울렸는데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음에도 율리아는
두려움을 느끼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레벤나가 달려와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 주었다.

사실 다른 악마들이 쳐들어와도 레벤나가 시끄럽다며 전부 내쫓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쩜 지워지지도 않고, 무슨 주술이 이렇게 독할까? 주군과 똑 닮았구나?"

"독하다니, 저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마족이고 율리아는 인간이니까 당연한 말이지?"

율리아는 앞섶을 풀어헤친 채 전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미간을 구긴 레벤나가 마왕이


새긴 각인을 내려다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율리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심장이 뛰는 왼쪽 가슴을 쓸었다. 고대 문자가 빼곡히 새겨진 각인이


문신처럼 선명히 박혀 있었다.

이것이 바로 레벤나와 키마리스를 살린 대가였다. 앞으로 왕을 거스르거나 계약 내용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경우 즉시 심장이 터져 죽게 된다.

'믿기지 않아. 내 심장이 다른 이의 손에 쥐어져 있다니.'

웬만한 방법으론 마력 저항을 뚫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키마리스가 주종인을 맺으려 몇
차례나 기습적으로 시도했지만, 항마력에 막혀 번번이 실패한 이후에 말이다.

'나를 마신으로 만들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열쇠로서 달갑고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해.'

'설령 네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날, 바엘의 무감한 목소리가 뇌리에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는 무한대의 마력 저항을 뚫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악마였다. 그렇다면 그는 얼마나 강한 걸까.


이미 강한데 왜 자꾸 마신의 힘을 탐하는 걸까. 폭주로 인해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꼭 자해하려는
사람처럼…….

그녀의 눈꺼풀이 힘없이 가라앉는데 문밖에서 또각또각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너무 자주 오니 이젠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아가레스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작은 열쇠야, 안녕?"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그녀에게 고개를 까딱인 아가레스가 이번엔 레벤나를 노려보았다.

"넌 어떻게 올 때마다 있어? 그럴 거면 여기서 아예 살지 그래?"

"내 일엔 신경 끄려무나?"

"작은 열쇠랑 둘만 있을 시간이 없잖아. 너 때문에!"

아가레스는 율리아가 무서워하는 채찍을-감옥에서 고문하는 모습을 본 이후부터였다-입구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레벤나가 차린 아기자기한 티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았다.
프릴과 레이스가 가득한 테이블에 칼처럼 빳빳한 군복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가레스는 율리아의 흐트러진 가슴팍을 빤히 응시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흠, 귀엽네."

"앗……!"

율리아는 화들짝 놀라 주섬주섬 가슴을 다시 여몄다. 마계에서 그녀만 보면 입맛을 다시는 대표적인 두
악마 중 하나, 아가레스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녀가 여성체라고 편하게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악마들의 낙원]은 동성 캐릭터의 공략이 가능한
게임이었다. 지금은 설정상 바엘을 제외한 전원이 막혀 있지만, 원래대로라면 아가레스 역시 공략 캐릭터
중 하나로 존재해야 했다.

"찻잔을 하나 더 준비해야겠구나?"

"독 타지 마."

"내가 너니, 아가레스?"

귀찮다는 듯 대놓고 한숨을 내쉰 레벤나가 아가레스로부터 가장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세


개였으니 이제 남은 자리는 하나뿐이었다. 결국 율리아는 두 악마의 사이에 딱 끼어 앉았다. 모두가
행복한(?) 자리 선정이었다.

겉보기엔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지만 율리아는 SIGHT 기능을 통해 아가레스가 온 진짜 이유를 알아챘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 정말 짜증나는 새끼들이야."

"주군은 여전히 나설 생각이 없으시다니?"

"알면서 묻나."

아가레스는 골 때린다는 듯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박박 흩트렸다.

마계에서 인간인 율리아에게 호의적인 악마는 극히 소수뿐이었다. 왕인 바엘의 뜻에 따라 방관하겠다는


중도파 악마도 있긴 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인간인 그녀를 벌레 보듯 혐오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율리아의 마력 저항을 직접 목도한 이들이 전자, 보지 못한 이들이 후자를


구성했다.

[▷아가레스

어젯밤에만 붙잡은 악마랑 마수 새끼들이 몇인지. 쯧, 신경 거슬리게.]

[▷레벤나

후후, 오랜만에 내 배틀액스를 꺼낼 때가 되었구나?]

율리아는 눈앞에 떠오른 지문 창을 소리 없이 읽었다.

그들은 혹여나 율리아가 두려워할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그간 그녀가 지내는 침실에 수많은
마족이 습격해 왔다. 일부는 말로만 듣던 율리아의 절대적 마력 저항을 확인하기 위해, 혹은 소문만
시끄러운 인간을 죽여 없애기 위해.
그리하여 율리아와 가깝게 지내던 악마들이 그녀를 지키고자 보초를 자처했다. 특히 키마리스가 밤낮을
불문하고 문 앞을 지키고 섰다. 율리아의 앞에선 입도 뻥긋 않았지만 말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응?"

"이를테면 마족 분들을 모아 두고 탑에 멀쩡히 들어갔다 나오는 걸 보여 준다거나……."

"작은 열쇠야, 설마 바깥일을 알고 있었니?"

"지난번 레라지에 님의 소매에 피가 묻은 걸 보고 대충 짐작했어요."

얼떨결에 레라지에를 팔아넘긴 율리아가 지레 찔려 시선을 피했다.

진짜 열쇠는 원작의 주인공 에스델이다. 자신은 그녀를 대신할 가짜, 고작 대용품일 뿐.

그래서 마족들에게 마정석의 봉인을 푼다든가 하는 엄청난 일을 보여 줄 순 없었지만, 대신 무한대로 찬


마력 저항을 이용해 작은 눈속임을 벌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아가레스

주군께서 탑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데. 사실대로 말하면 실망하겠지.]

[▷레벤나

악마들이 한자리에 모이려고 할까 모르겠구나? 게다가 인간인 율리아가 소환했다고 하면 자존심 상해서
아무도 안 나올 것 같은데?]

두 악마의 생각이 여과 없이 전해졌다. SIGHT 기능의 좋은 점이자 슬픈 점이었다.

그래도 직접 거절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안 되는 걸 억지로 요구해서 상대방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역시. 율리아는 애써 웃으며 말을 바꿨다.

16 화

"하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죠? 무려 고대의 마신이 잠들어 있는 탑인데, 인간인 제가 함부로 들어가면
신성 모독이고……."

"작은 열쇠야, 너는 귀엽고 사랑스러우니까 마신도 이해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구나."

[▷아가레스

인간은 신의 개념이 우리와 다르다고 듣긴 했는데 진짜인가. 어쨌든 다행이군.]

[▷레벤나

그래도 사실대로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구나? 어쩌면 좋을까?]

레벤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였고, 아가레스는 그런 그녀를 눈치 주듯 노려보았다.


분위기가 첨예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율리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싱긋 웃어 보였다. 자신 때문에
두 악마가 대립하는 걸 원치 않았다.

"저, 마신님에 대해 배워 보고 싶어요. 이곳에도 성서나 지켜야 할 율법이 있나요?"

"인간들이 아는 것과 별로 다를 건 없다고 생각한단다? 세상에 어둠을 창조해 낸 존재지. 우리 마족들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창세의 역할을 마친 뒤엔 스스로를 양분으로 삼기 위해 지하의 내핵에 잠들었어.
그렇게 남은 마력이 탑의 수정구에 모인 거지."

결론적으로 마신은 왕인 바엘과 마찬가지로 강하기 때문에 숭배될 뿐이고, 강한 존재에 대한 경외 이외에
특별한 감정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벤나의 설명을 새겨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작
자신 따위를 지키느라 고생하는 악마들을 위해, 인간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하겠다고.

* * *

대부분의 악마가 잠든 늦은 밤, 율리아는 옷장을 열어 검은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니 심장이 두려움으로 터질 것 같았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그녀는 시야에 방해만 될 뿐, 만나고자 하는 대상에게 전혀 쓸모없는 SIGHT 기능을 종료하고 마력 저항


게이지가 여전히 무한으로 차 있는 걸 확인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 그녀의 시야에 크고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녀의 침실 앞에 줄곧 서


있던 듯, 키마리스가 가까이 다가와 부복했다.

"왜 나오셨습니까? 위험합니다."

"키마리스 님."

"필요한 게 있다면 제게 지시하십시오."

"일어나세요."

율리아가 그를 끌어당기자 아주 작은 힘에도 훤칠한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가까스로 합의해 '주군'이라 불리는 건 면했다. 하지만 율리아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여전히 감히 손댈 수
없는 구원자를 대하는 듯했다.

율리아가 더 편하게 대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것까진 협의가 불가능해서, 결국 그의 부담스러운 경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직접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못 본 척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

키마리스는 거절하듯 입가를 굳혔다. 그럼에도 율리아는 사실대로 털어놓기가 애매했다. 마계의
유일무이한 군주, 마왕 바엘을 만나러 갈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그를 만나서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할 예정이었다. 마왕이 직접 마족들을 탑 앞으로 소환하면
독단적 성향이 강한 그들일지라도 차마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마정석의 앞에 서서, 멀쩡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게 이번 계획의 목표였다.
정 안 되면 스스로를 진짜 열쇠라고 속여서라도 그의 협조를 구해낼 생각이었다. 열쇠가 죽어 없어지면
가장 곤란한 건 마신이 되고 싶어 하는 그일 테니까 말이다.

"어디로 가는지, 그것만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실은 마왕님께……."

"안 됩니다."

입을 떼기가 무섭게 거절의 답이 돌아왔다. 키마리스의 눈빛이 위험한 것을 보듯 딱딱하게 굳었다.


율리아가 긴장하자 금방 힘을 풀었지만 경계하는 표정은 여전했다. 여차하면 그녀의 몸에 손을 대서라도
도로 침실 안으로 집어넣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하지만 율리아의 결심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가 지키고 있을 거란 예상은 했다.


레벤나였다면 일이 조금 더 수월했겠지만, 키마리스도 자신을 위해 이렇게 단호히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을 접고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 갔다.

"마족 분들께 제가 마정석 앞에서 멀쩡하다는 걸 보여 줄 수만 있다면, 그럼 키마리스 님도 밤새 힘들게


저를 지키지 않아도 될 거예요."

"힘들지 않습니다."

"저도 훨씬 안전할 거고요. 브에스드라 황성에서 줄곧 갇혀 지냈는데, 이곳에서까지 그러고 싶지


않아요."

답은 없었지만 키마리스의 기세가 조금이나마 누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인계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이 그의


입장에선 그렇게나 충격인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진심을 담아 그의 팔뚝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가느다랗고 하얀 손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키마리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럼 함께 가겠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저는 마력에 둔감하지만 키마리스 님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율리아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건 몰래 나가기 위해서도 있지만 온종일 성 전체가 쿵, 쿵 울렸던 까닭도
있었다. 바엘의 심장박동과 비슷한 이 파동은 그가 폭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
소리가 조금 잦아든 것이다.

"고마워요."

여기까지가 그의 타협 선이리라.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뒤를


키마리스가 조용히 따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기둥이 끝없이 이어진 웅장한 회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끝에 자리한
마왕의 둥지는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고, 폭주의 여파가 남았는지 성 바깥엔 짙은 뇌운이 끼어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바르바토스 님."
"주군께선 너를 찾지 않으셨다. 돌아가라."

율리아를 부른 그의 목소리에 딱딱한 긴장이 섞여 있었다. 오늘 방어진을 전개한 건 그인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랑 안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바르바토스의 얼굴에 미미하나마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늘 순종적으로 굴던 그녀가 돌발적으로 나선 것이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바르바토스 님은 키마리스 님과 달라. 사실대로 말하면 날 절대 들여보내 주지 않을 거야. 나를


싫어하니까…….'

역시나, 문에 손을 대려는 그녀를 바르바토스가 막아섰다.

"주군의 휴식을 방해한다면 물리력을 쓸 수밖에 없다."

"놓아주세요, 아파요."

"네가 물러나면 될 일이다."

"아니, 물러나야 할 건 너지."

그녀를 붙든 바르바토스의 손목을 키마리스가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아프다는 말에 멈칫했던 바르바토스의


안광에 삽시간에 살기가 섞였다.

"이게 무슨 짓이지, 키마리스."

"그분을 놔."

"감히 내게 도전하겠다는 건가?"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마력을 사용하는지 적막하던 회랑에 삽시간에 돌풍이 몰아닥쳤다.
하지만 이에 영향받지 않는 율리아는 저를 붙든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몸을 날렸다. 놀란 둘이 시선을
돌렸지만 늦었다.

"으읏!"

무겁고 거대한 문은 그녀가 온 힘을 다해 들이박아서야 겨우 열렸다. 틈은 자그마했지만, 율리아의


체구는 그보다 더 작았기에 안으로 쏙 몸을 들이밀었다.

왕의 둥지는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마력으로 복구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거대한 방을 단
하루 만에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놀랍고도 두려웠다.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기가 무섭게,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뭐지."

선잠에서 막 깨어난 건지, 아니면 그저 침입자의 존재가 불쾌했던 건지. 단 한 마디만으로도 바엘의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걸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율리아는 그를 자극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 왕이 기대어 있는 소파 발치에 무릎 꿇었다.


피처럼 붉은 시선이 움직임을 따라 이동하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비소가 섞였다.

"죽고 싶나 보지?"
"……."

"마력 저항, 그깟 잔재주를 부려 봤자 목 한번 조르면 끝인 것을."

바엘이 느릿하게 미간을 눌렀다. 그의 표정은 정말로 그리할까 고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율리아는
이제껏 살면서 수많은 종류의 적의를 마주했다. 그의 중얼거림이 진심이란 걸 모를 수 없었다.

목이 탔다. 두려움으로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살짝 열린 문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바르바토스와 그것을 막는 키마리스 사이에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도와줄 이는 없었다. 바엘과의 대화는 오직 홀로 담판 지어야 했다.

율리아는 고개를 바닥에 조아리며 신중히 입을 열었다.

"열쇠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넌 이미 나와 계약을 맺었다. 네 심장에 새겨진 그것이 바로 증거지. 내 심기를 거스른다면 주박을
파기하고 심장을 터트리면 그만이야."

"제겐 마왕님으로부터 도피할 방법이 있어요."

머리 위에서 낮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율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방법은 간단해요. 왕께서 주박을 파기하기 전에, 제가 먼저 죽는다면……."

그녀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악마들은 주군인 바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마계의 누구도 감히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태하다. 그가 진심으로 힘을


개방하는 걸 본 이가 없다. 날로 그 힘이 강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바엘은 누군가 자신을 거스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나치게
강하게 태어나 오랜 시간을 절대적인 존재로 살았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의 뜻에 반하는 존재를 견디지
못했다.

율리아는 그것을 노렸다.

"마왕님의 성에는 저를 싫어하는 악마가 많아요. 알고 계시나요? 저를 죽이기 위해 매일 밤 많은 마족과


마수가 찾아오고 있어요."

"그래서."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어조와 다르게, 상체를 반쯤 일으킨 바엘의 안광은 섬뜩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았다. 그것에 스민 감정은 명백한 노기였다.

"그저 지금 이 방에서 나가 제 침실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저는 죽을 수 있어요. 당신의 손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율리아는 말을 채 끝마치지 못했다. 바엘이 그녀의 턱을 휙 들어 올린 까닭이었다. 강한 악력에 턱이


옥죄었지만, 율리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비록 두려움에 떠는 눈동자일지라도, 끝까지 마주하는 게 그녀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바로 그때, 율리아의 심장이 갑자기 불에 덴 듯 뜨겁게 조여들었다. 얼핏 고통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해


바엘이 자신을 죽이려는 건가 생각했지만 뭔가 달랐다. 그의 표정에도 미미한 혼란이 섞여 든 것이다. 이
기이한 감각을 그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율리아는 결국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

"말해."

"모르겠어요."

가슴 위에 새겨진 각인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와 접촉이 길어질수록 기이한 감각은 등골을 따라


저릿저릿 퍼져나갔다. 호흡이 가빠지고 뱃속 깊은 곳이 자꾸만 욱신거렸다. 바엘도 이유를 알 수 없는지
미간을 구겼다.

율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잖아요. 제가 바라는 건 오직 마왕님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악마들을 모아


주세요. 되도록 많이. 그리고 탑에서 제가 열쇠라는 걸……."

"젠장!"

온몸을 감도는 이질적인 감각에 인내심이 바닥난 그가 결국 율리아를 내팽개쳤다.

때마침 침실에 들어온 바르바토스가 힘없이 쓰러지는 그녀를 받아들었다. 그의 뒤엔 한발 늦은 키마리스가


낭패감 서린 눈으로 서 있었다.

17 화

"주군, 무슨 일이십니까?"

바르바토스는 계산이 뛰어났다. 율리아의 말을 짧게나마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그녀의 속셈을 간파했을


터였다. 다만 바엘에게 되묻는 건 그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마계의 안정을 위해서, 사실 율리아의 제안은 썩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바엘이 이를 받아들이는가
여부였다. 지하의 악마들을 소환할 수 있는 건 오직 바엘 하나뿐이었기에.

용기를 얻은 율리아가 다시금 그의 발밑에 무릎 꿇었다.

"한 번만 생각해 주세요. 그럼 앞으로는 마왕님의 말씀에 뭐든 따를게요."

"그러니까 요점은……."

마주 본 그의 입꼬리가 불길하게 비틀렸다. 율리아의 뇌리에 위험을 알리는 경종이 울렸다.

"네가 내 것이라고 알리면 되는 것 아닌가."

"……."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오직 나만의 것이라고. 그렇지?"

바엘은 율리아의 어깨를 붙든 바르바토스의 손을 노려보았다. 한발 늦게, 그가 손을 떼고 물러나


부복했다. 왕이 명령했다.
"전부 나가라."

"예."

"열쇠는 빼고."

두 악마와 함께 나가려던 율리아가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바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방법은 내가 정해야지. 설마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투정 부릴 생각은 아니겠지?"

"……."

"네 말대로 이곳은 나의 왕국이니까 말이야."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앉은 왕의 얼굴은 퍽 너그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 속엔 거절 따윈 허락하지


않겠다는 속내가 도사리고 있었다.

격렬히 반발하는 키마리스를 바르바토스가 끌고 나갔다. 짧은 정적의 틈새로 왕이 조금이라도 자비를 보여


줄 때 따라야 한다는 속삭임이 들렸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율리아의 자그마한 어깨가 화들짝 놀라 움찔했다. 완전히 밀폐된 방에


마왕과 단둘이 남았다. 압박감은 생각보다 컸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겁먹지 말자. 원하던 대로 됐잖아.'

바엘이 어떤 방법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만을 침실에 남겨 둔 건 제안에 응할 생각이 있다는 뜻이었다.
고작 인간 따위가 죽어 봤자라고 도발에 눈도 깜짝하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인 일이었다.

그녀는 바엘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리라 여기며 그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스르륵, 부드러운 천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엘이 걸치고 있던 검은 로브였다. 행동의
의미를 알지 못한 그녀가 그것을 멍하니 응시하는 동안, 바엘은 느른하게 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삐걱,
위태로운 소리가 울렸다.

"멍청하게 서서 뭐하지?"

"아……."

고개를 든 율리아의 눈에 침대에 기대어 서 있는 바엘이 들어왔다. 넓은 어깨와 터질 듯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상체엔 실오라기 하나 없었고, 다만 허리에 팽팽하게 감긴 로인클로스가 그의 하체를 가리고
있었다. 얇은 천 너머로 허벅지의 탄탄한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남자에 면역이 없는 율리아에겐 충분히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바엘은 제가 기댄 침대를 향해


턱짓해 보일 뿐, 그 외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저기에 누우라는 뜻인가?'

설마. 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바엘과의 첫 만남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정사를 권하는 레라지에에게 화를 냈다.
그건 하급 마족인 몽마 따위나 벌이는 하찮은 일이라고 말이다.

인간보다 확연히 긴 수명을 지닌 바엘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율리아 역시 양쪽 세상에서의 시간을


합쳐 24 년 정도를 살았다. 정사라는 게 대략 어떤 일인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

그녀가 자리에서 미적거리자 바엘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자칫 간신히 얻은 기회마저 날릴 위기였다.

율리아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다가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사나운 범이


아가리를 벌리는 굴에 스스로 발을 디디는 기분이었다.

'모르겠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일분일초가 억겁의 시간과 같았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는가. 쯧, 혀를 찬 바엘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그러곤


침대에 던지듯 떠밀었다.

"읏!"

침대가 크고 푹신한 탓에 아프진 않았다. 그러나 살갗에 닿는 부드러운 침구의 감촉과 푹신하게 튕기는
매트리스가 되레 그녀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바엘이 침대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그녀는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침대의 크기가 넉넉한 덕분에
바엘이 누울 자리를 충분히 확보하고도 율리아는 반대편에 떨어지지 않은 채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커다란 침대를 욕심껏 차지하고 누운 바엘이 눈을 감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눈꺼풀 너머로 스르륵
모습을 감췄다.

'이대로 잠들 생각인가? 역시 괜한 걱정이었나 봐.'

나직이 안도한 율리아가 침대 밖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려는 찰나였다.

"누워."

"……."

"내가 언제 나가도 좋다고 허락했지?"

멈칫한 율리아는 도로 얌전히 침대 끝자락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그녀는 잔뜩 긴장하며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바엘은 이후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그가 깊이 잠들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쯤 율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마왕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 몰랐다. 설정이 바엘에게만 다르게 작동하는 이유를 알아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

그녀는 바엘의 시선에서 보이지 않도록 등을 돌린 채 오른쪽 상단에 반짝이는 아이콘에 손을 뻗었다. 몇
번이나 보아 익숙해진 창이 떠올랐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STATUS (스탯)

▷PROGRESS (진행도)

▷SKILL (스킬)
▷ITEM (아이템)

▷SETTING (설정)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STATUS 를 선택한 뒤 스크롤을 맨 아래까지 내렸다.

▷REP (항마력)

▷LUK (행운)

▶SIGHT (시야)

시야의 사용법은 간단했다. 기능을 활성화시킨 뒤 상대방을 지그시 보며 그의 생각을 알고 싶다고 바라는
것이다.

다만 사용상 몇 가지 제약이 있었는데, SIGHT 는 작게나마 지속적으로 체력을 소모하기 때문에 HP 가 낮은


상황에선 사용할 수 없었다. 보티스-뱀-처럼 마수형 악마에게도 사용이 불가했다. 하지만 왜인지 바엘은
인간형임에도 마찬가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율리아가 세운 가설은 이랬다. 바엘은 마족 중 거의 최상급의 능력치를 지녔기 때문에, 그에게 SIGHT 를
사용하기 위해선 잔여 HP 수치 역시 높은 수준으로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간 침실에 박혀 잘 요양한 덕에 율리아의 체력 수치는 이제껏 그녀가 봐 온 중 가장 높았다. 체력


소모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웬만해선 시야 기능을 꺼 두었고, 입맛이 없더라도 레벤나가 인계에서
가져온 보존식으로 최대한 끼니를 챙겼다.

만약 가설이 성립한다면 지금이야말로 바엘의 머릿속이 보일 것이다. 율리아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보통 때라면 그를 지그시 응시하는 게 허락될 리 없으니, 그가 잠든 지금이 사실상 유일한 기회였다.

[▷바엘

……. ……. …….]

율리아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그를 응시했지만, 그것은 이내 실망으로 변했다.

'보이지 않아.'

그녀의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그간 체력을 높이고자 답답할 정도로 몸을 사렸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른 스탯들은 바엘의 침실에 오기 전 이미 확인했다. 마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녀는 반쯤 체념한 상태로 진행도를 눌렀다. 어쨌든 시스템이 원하는 바가 바엘에게 있다면, 지금
상황에서 무언가 변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SYSTEM

스토리 진행도 3%]

[마계를 통일한 최초의 군주, 대악마 바엘(Ba'al)]


고작 2%가 올랐다. 그토록 구르고 깨지며 죽을 고비까지 넘겼는데, 스토리 진행도는 여전히 시작점을
맴돌았다. 다른 인물을 활성화시키려 해도 바엘 외엔 여전히 막혀 있는 상태라 다른 방법도 없었다.

'도대체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대로 도구로 쓰이다 죽는 수밖에 없는 거야?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그녀는 무릎을 세우고 몸을 작게 웅크렸다. 그러곤 무릎 위에 힘없이 고개를 묻었다.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운 가운데 침대 옆자리엔 가장 두려운 존재가 잠들어 있었다. 자신의 앞날이 꼭 이와
같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마왕의 침실까지 기껏 용기를 내어
왔건만, 결과는 그의 심기를 건드려 침실에 갇혔을 뿐이다.

"흐으……."

그녀가 감싸 안은 두 무릎이 소리 없이 젖어갔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깊은 절망감과 관계없이 마왕성을 뒤흔들던 바엘의 파장은 천천히 가라앉아 어느새
제자리를 찾아 가고 있었다.

* * *

해가 중천에 뜬 늦은 오후, 율리아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혈압이 낮은 그녀는 잠에서
완전히 깨어날 때까지 남들보다 오랜 시간을 소모하는 편이었다.

"으응……."

하지만 그런 율리아라도 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흐릿한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사내의 탄탄하고 굴곡진 가슴이었다. 놀라서 졸음이 단박에 달아났다.

품 안의 그녀가 바스락거리고 있음에도 바엘의 넓고 두툼한 흉통은 마냥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얼마나


깊게 잠든 건지 도통 잠에서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율리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바랬다. 도대체 어쩌다 그의 가슴팍에 쏙 안긴 채로 잠든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난 어제 침대 한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울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막막한 감정이 또다시 치밀어오를 것 같아서
율리아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시야가 부옇고 눈가가 뻑뻑한 게 눈물이 말라붙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닦으려다가 바엘이
깨어난다면 그게 더 문제였다. 인간을 극도로 하찮게 여기는 그가, 자신과 무려 이런 상태로 잠들었다는
걸 깨닫는다면 말이다.

사고 회로가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율리아는 가만 누워 눈만 깜빡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길고


매끄러운 칠흑의 머리칼이 간질였다. 바엘의 것이었다.

'새삼스럽지만 얼굴만큼은 참 아름답네.'

깊이 잠든 탓인지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이 다소 누그러졌다. 덕분에 고대의 조각상처럼 깎아지르듯 완벽한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에 관심이 없는 그녀조차 얼굴만 보자면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인데, 이런 그를 고작 마력 증강


용도로만 노렸던 레벤나가 어떤 의미론 대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천 년 된 산삼을 보고도 가격 생각은
안 하고

'오오, 건강!'

을 외치는 심마니와 비슷할까.

18 화

허튼 생각도 나름 생각이라고, 율리아는 차츰 멍한 정신을 되찾았다. 이쯤이면 일어나도 현기증은 일지


않을 것 같았지만 바엘의 반응이 걱정이었다.

이대로 가만있자니 인간을 혐오하는 그의 품에 계속 안겨 있기가 애매했고, 그렇다고 움직이자니 허락


없이 침대에서 나서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는 꼴이 된다.

'이래도 불벼락, 저래도 불벼락이면 그냥 몰래 빠져나간 거로 혼나는 편이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율리아는 제 허리에 둘린 묵직한 팔을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작게 웅크린 뒤 데굴데굴


굴러서 널따란 침대를 빠져나갔다.

아가레스에게 듣기로 바엘은 잠귀가 예민해서 성에서 소란이 일면 곧장 화를 내며 마력을 날린다고 했는데,
정작 눈앞의 그는 너무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속된말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였다.

'어쨌든 다행이야.'

율리아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중하게 걸어서 입구에 다다랐다. 그리고 묵직한 문을 소리 없이 열기


위해 또 한참을 씨름했다.

그렇게 열린 틈새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이민 찰나였다.

"……!"

이제 고작 아침인데 놀라는 횟수가 너무 많으니 심장이 다 뻐근해졌다.

웅장한 회랑 너머, 선두에 선 바르바토스와 키마리스를 비롯해 수십의 악마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하 감옥에서도 악마들과 마주치긴 했지만 ,그때보다 더욱 많은 숫자였다.

"바르바토스의 말이 사실이었군. 열쇠가 다른 쪽으로도 주군의 마음에 든 모양이야."

"어쩐지, 레벤나와 키마리스를 그냥 살려 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베갯머리에서 속살거린 게 통한 모양이지. 썩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주군의 선택이다. 토 달지 말도록 해."

저마다 웅성거리는 악마들을 바르바토스가 제지했다. 어젯밤 켜 놓고 잠들었던 SIGHT 기능이 다시


작동했다.

[▷바르바토스

예상이 맞았어. 역시 이편이 효율적이군. 내가 모을 수 있는 악마는 전부 끌어왔으니 이 정도면 소문도


제법 빠르게 퍼지겠지.]

율리아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바르바토스가 말하는 '효율'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겐 썩 좋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바로 그때였다.
"작은 열쇠야!"

"아가레스 님?"

"이건 말도 안 돼. 얼마나 심하게 해 댔으면 눈이 이렇게나 퉁퉁 부어? 귀엽고 앙증맞은 얼굴이 온통


상했잖아!"

[▷아가레스

젠장, 주군은 색사에 흥미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먹을걸! 아니면 지금이라도


슬쩍…….]

율리아를 끌어안은 아가레스의 손이 허리춤으로 슬슬 내려갔다. 잠옷 위에 망토만 걸친 차림이라 그녀의


의미심장한 손길에 기분이 조금 찝찝해졌다.

그때, 또각또각 경쾌하게 다가온 발소리가 아가레스의 손을 휙 잡아챘다.

"애가 다 죽어 가는 거 안 보이니? 침 흘릴 때와 참을 때는 구분하려무나?"

"넌 주군을 노리고 나는 작은 열쇠를 노리는 거지. 피차 원하는 바가 다른데 간섭하지 말지?"

"말은 똑바로 하렴? 난 주군의 '마력'을 노리는 거고, 너는 그냥……."

레벤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녀는 타인의 앞에서 율리아를 부르는 걸 유독 어려워했다. 열쇠라고
부르는 건 그녀를 도구로 취급하는 것 같아 싫지만, 그렇다고 에스델이라고 부르는 건 더더욱 싫었다.

"어쨌든! 이렇게 엉망이 된 아이한테 침이나 흘리는 건 무슨 경우니? 주군이 부드럽게 다뤄주지도 않았을
텐데, 이 연약한 몸이 그걸 어떻게 버텼겠어?"

실크 장갑을 낀 부드러운 손이 눈물이 말라붙은 율리아의 눈꺼풀을 살살 매만졌다.

율리아는 이 상황이 다소 의아했다. 바엘이 난폭한 성격인 건 맞았지만, 실은 말로만 그랬을 뿐 신체적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레벤나는 자신을 마치 당장이라도 깨질 듯한 공예품 다루듯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들을 주시하던 악마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진 그때, 소리 없이 다가온 키마리스가 율리아의 앞에 섰다.


그는 밤새 문 앞을 지키고 있었는지 어젯밤과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밤새 있어 주신 건가요?"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은 나의……."

키마리스의 손이 율리아를 향해 뻗어진 찰나, 그녀가 서 있던 등 뒤의 문이 열렸다. 그 사이에서 나온


바엘은 여전히 반라의 차림이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들었던 그는 컨디션이 썩 나쁘지 않은지 목덜미를 주무르며 느릿하게 몸을


풀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자리에 있던 악마들이 모두 무릎 꿇었고, 마지막까지 서 있던 키마리스 역시
율리아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며 부복했다.

'나도 꿇어야 할까?'

이들은 악마이기 이전에 군인이었다. 반면 자신은 평범한 노예다. 이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인사하는 건
가당치도 않았다.

홀로 남은 율리아는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평범하게 아침 인사를 하기로 했다.

"마왕님, 안녕히 주무셨나요?"

"내 허락 없이 침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게……."

그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율리아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그가 불쾌해하는 이유는 틀림없이 어젯밤의


명령에 불복했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나름대로 열쇠인데, 건강 문제라고 호소하면 괜찮지 않을까. 실제로도 아프고…….'

잠들기 전까지 침대 가장자리에 불편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밤새 바엘의 묵직한 팔을
받치고 있었던 탓인지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를 상대로 감정에 호소해 봤자 먹힐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보기로 했다.

"마왕님의 명령을 거스를 생각은 아니었어요. 다만 허리가 너무 아파서, 조금 걸으면 나아질까 해서


나왔는데 왜인지 마족 분들이 모여 있어서……."

바엘은 그녀를 말없이 빤히 응시했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는데 홀로 서 있으니 두드러져 보였던 걸까
싶었지만, 마족들의 덩치가 워낙 커서 그들이 앉은키나 자신이 선키나 별로 차이가 없었다.

어쨌든 율리아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금방 다시 들어갈 생각이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나에게 감히 거짓말을 하려고 했단 말이지?"

"거짓말이요?"

"내가 잠든 새 쥐도 새도 모르게 나갔다가 아닌 척 들어와 시치미를 떼려 했다는 뜻 아닌가."

속이 어떻게 꼬였으면 사람이…… 아니, 악마가 말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입 밖으로 냈다간 곧장 저승행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율리아는 냉큼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보다 바엘의 말이 더 빨랐다.

"명심해. 넌 나의 것이다."

느릿하게 걸어온 그가 율리아가 걸친 로브 위, 심장이 있는 곳을 정확히 짚었다. 살갗이 곧장 닿은 것도


아닌데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요동쳤다.

"이번 한 번만 말하지. 난 내 것을 남과 공유할 정도로 그리 너그럽지 않아."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인간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니 믿을 수 없다. 두고 봐야겠으니 앞으론 내 둥지에서 지내도록 해. 묶여


있기 싫다면 얌전히 구는 편이 좋을 거야."

"주군, 말씀 중에 송구하나 둥지라 함은?"


놀란 율리아가 반발하려는 찰나, 바르바토스가 나섰다. '둥지'는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로 쓰일 수
있었다.

근처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하급 마족에겐 성과 탑을 포함한 인근 전체가 마왕의 둥지였고, 어느 정도


접근이 가능한 고위 마족에겐 바엘이 직접 지은 성이 바로 둥지였다. 그러나 바엘에게 한정하자면 그
의미는 한없이 좁아졌다.

바엘은 그의 말을 코웃음 치듯 무시하고 율리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낚아챘다. 그녀를 품 안에 넣은 뒤,


그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좀 더 자야겠으니 방해 말고 물러가라."

[▷바르바토스

이걸로 열쇠의 소유가 분명해졌으니 잘된 일이긴 하지만, 설마 진짜로 밤을 보낸 건…….]

율리아의 시야에 온갖 지문 창이 마구잡이로 떠오른 가운데, 바르바토스의 것을 마지막으로 문이 쿵


닫히며 그것들이 일제히 종료되었다.

도망칠 새도 없이 침대로 끌려간 율리아는 바엘에 의해 강제로 눕혀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곧장 잠든


그를, 율리아는 묵직한 팔 아래 깔린 채 오랜 시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다.

* * *

깊은 잠에 들었던 바엘은 불현듯 모골이 송연한 기분에 눈을 떴다. 품이 허전한 것 같기도 했고,
마정석의 파장에 동화된 마력이 또다시 날뛰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깨어난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마신의 탑이었다. 그 정상에 잠든 마정석은 언제나처럼 폭발을


갈구했고, 회랑 전체에 새겨진 수식은 그것을 막듯 간헐적으로 발광하며 막대한 빛을 뿜어냈다.

하지만 언제나와 같은 풍경에도 그는 서늘하고 공허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열쇠가 없군.'

침대 옆자리엔 열쇠의 작은 몸에 딱 맞는 크기의 주름이 져 있었다. 그러나 자리를 뜬 지는 제법 오래된


듯, 짚어 본 곳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도망쳤나.'

바엘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그는 죽음을 원하는 이의 눈을 알고 있었다. 마계를 쓸어 버리고


이곳에 둥지를 세우기까지 수없이 봐 왔던 것이었다.

'마왕님의 성에는 저를 싫어하는 악마가 많아요. 알고 계시나요? 저를 죽이기 위해 매일 밤 많은 마족과


마수가 찾아오고 있어요.'

'그저 지금 이 방에서 나가 제 침실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저는 죽을 수 있어요. 당신의 손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열쇠의 힘없는 목소리가 뇌리를 스치고, 그의 시선이 불현듯 문밖으로 향했다. 비록 그의 권능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지라도 많은 악마가 밖에 모여 있다는 걸 마력의 흐름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바엘은 무언가에 홀린 듯 빠르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불쾌한 기분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무언가에 재촉당하는 것처럼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팔다리를 잘라 새장에 가둬버리는 게 낫겠군."

방을 가로지르는 짧은 시간 동안 바엘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지금 자신이 불쾌한 이유는 명확했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왕을 휘두르려 한 게 발칙하고 괘씸한 것이다.

일일이 신경 써야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올랐다. 열쇠의 사용법을 언제 찾을 수 있는지


때를 기약하기도 어려운데, 그때까지 열쇠의 신변에 대해 매번 신경을 곤두세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

하지만 문을 열기 직전, 그는 멈칫했다.

고작 한 걸음 너머 가냘프게 펄떡이는 열쇠의 심장이 느껴졌다. 각인을 통해 그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바엘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마력을 가득 실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단지 손짓 한 번이면 모든 것이


끝날 텐데, 왜인지 누군가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생경한
감각이었다.

'어째서지? 고작 툭 치면 죽을 인간일 뿐인데.'

19 화

아니, 열쇠에겐 보기 드문 능력이 있었다. 일찍이 마력 저항의 수식이 존재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식이 새겨진 본인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열쇠는 제게 접촉한 모든 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같은 공간에만 있어도 미미한 수준의 영향을
주지만 직접 접촉하면 마치 수식을 지닌 본인인 듯 저항력이 높아졌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지만 제법
편리하게 이용했다.

'아깝긴 하다만 단지 그뿐이지.'

기나긴 시간을 살았던 그였다. 세상 모든 것은 언제든 더 나은 대체품이 생긴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살기 띤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밤새 있어 주신 건가요?"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은 나의……."

밖으로 나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열쇠의 작고 둥근 뒤통수였다. 문 앞에서 한 발짝이나 나갔을까.


열쇠는 많은 악마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시선을 돌리던 바엘의 눈에 무언가 걸렸다. 열쇠를 향해 퍽이나 안타까운 낯을 하고 손을 뻗는


키마리스였다. 순간 이유를 알 수 없이 그의 심사가 뒤틀렸다.

바엘이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전에 마력이 본능적으로 날뛰었다. 그가 가만 서서 목덜미를 푼 것만으로도


왕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린 악마들이 일제히 무릎 꿇었다. 남들보다 한발 늦게 꿇은 키마리스가
거슬렸지만, 일단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넘어갔다.

자리의 모두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복종했건만, 열쇠는 눈치도 없는지 말똥말똥한 눈을 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왕님, 안녕히 주무셨나요?"


어이가 없어서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방금까지 솟구치던 살의가 그 한심하고 구태의연한 얼굴을 앞에
두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열쇠는 방금까지 제가 죽을 뻔한 걸 알기나 하는지, 선악과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와 마족들을


번갈아 보며 뒤늦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한심한 노릇이었다.

바엘은 대화에 내심 귀를 기울이는 마족들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내 허락 없이 침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게……."

상황을 모면하려 그 작은 머리통을 이리저리 굴리는 게 눈에 훤히 들여다보였다. 바엘은 열쇠가 무슨


참신한 수라도 내려나 방관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마왕님의 명령을 거스를 생각은 아니었어요. 다만 허리가 너무 아파서, 조금 걸으면 나아질까 해서


나왔는데 왜인지 마족 분들이 모여 있어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바엘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짓을 하려나 봤더니
같잖은 애교라도 부릴 셈이었는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러는 동안에도 열쇠는 겉모습처럼 작고 연약한 목소리로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금방 다시 들어갈 생각이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나에게 감히 거짓말을 하려고 했단 말이지?"

"거짓말이요?"

"내가 잠든 새 쥐도 새도 모르게 나갔다가 아닌 척 들어와 시치미를 떼려 했다는 뜻 아닌가."

다른 놈들은 작디작은 것이 애교를 부리면 그냥 너그럽게 넘어가 줄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었다.


바르바토스가 말한 대로 열쇠의 대우를 좋게 만들어 줄 생각은 애초에 없었고, 그렇다고 탑에서 웃기지도
않은 쇼를 벌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녀를 가졌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제 손아귀에 있었으니까.

"명심해. 넌 나의 것이다."

바엘은 열쇠의 심장 위로 손을 뻗었다. 거추장스러운 옷이 가로막고 있음에도 여린 살갗 아래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살갗이 직접 닿은 게 아니니 각인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닐 테다.

하지만 혹시 또 모른다. 작고 맹랑한 인간 주제에 듣도 보도 못한 일을 벌이며 악마 속을 뒤집어 놓는


잔재주가 있었으니.

"이번 한 번만 말하지. 난 내 것을 남과 공유할 정도로 그리 너그럽지 않아."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인간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니 믿을 수 없다. 두고 봐야겠으니 앞으론 내 둥지에서 지내도록 해. 묶여


있기 싫다면 얌전히 구는 편이 좋을 거야."

에스델 브에스드라, 인간들의 황녀라고 했던가. 높은 권력을 손아귀에 쥐었던 인간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아니, 나락까지 떨어져 절망하는 꼴을 상상하니 퍽
즐겁기까지 했다.

이러니 곁에 두고 볼 수밖에. 인간 주제에 무려 악마를 기대하게 만들지 않는가.

바엘은 자신의 물건을 취하듯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감싸곤 입꼬리를 비틀었다.

"좀 더 자야겠으니 방해 말고 물러가라."

이번 기회에 열쇠를 탐내는 것들에게도 할 필요가 있었다. 열쇠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권능을
지녔는지.

바엘은 부러 보란 듯 열쇠를 침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결정은 충동적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어쨌거나


열쇠는 자꾸만 팽창하려는 마력을 안정시키는데 제법 쓸 만한 도구였으니까.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던 열쇠의 눈동자는 문을 닫는 순간 차분히 제자리를 찾았다. 대신 가까이


다가오는 바엘을 두려운 듯 올려다보며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제야 바엘은 만족했다.

할 일도 끝났으니 부족한 잠이나 더 자야겠다. 그는 열쇠를 침대로 끌어당겨 품에 가두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율리아는 현재 많은 악마에게 둘러싸여 마왕성 복도를 걷고 있었다. 마왕의 침실에 끌려들어갔던 그녀가
무사히 탈출한 건 그로부터 딱 사흘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 시간 동안 마왕의 파장은 무척이나 안정적이고 또 견고해져서, 악마들은 율리아와 바엘이 이미


동침했다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또한 바엘이 율리아를 제법 총애한다는 소문도 사실처럼
돌았다. 그녀의 입장에선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동침…… 하긴 했지. 사흘 내내 오로지 잠만 잤으니까.'

누가 보면 잠에 한 들린 악마인 줄 알 거다. 어떻게 시체처럼 그렇게 긴 시간을 잠만 잘 수 있는지.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간 또다시 그녀의 목숨이 위협당할 게 분명했다. 기껏 위험을 감수하고 마왕의
침실까지 쳐들어간 보람이 사라지는 것이다.

아가레스나 레벤나에게만 나중에 따로 알려 두기로 하고, 그녀는 바르바토스가 '마왕의 애첩'이란


명분하에 공식적으로 붙인 호위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다만 그 구성이 다소 부담스러웠는데, 레벤나와 키마리스는 물론이고 마계의 2 인자로서 항상 바쁘다는


아가레스, 맡은 일은 없지만 어쨌든 바쁘다는 레라지에, 그리고 그가 키우는 어린 늑대도 함께였다.
일전에 축사에서 만났던 그 새끼 늑대였다.

"몸 상태는?"

"괜찮아요."

"불편한 곳은?"

"없어요."

"낑, 낑?"

"놀아주는 건 조금 나중에."
다들 한 마디씩 첨언하기 바쁜 와중에도 율리아는 열심히 걸었다. 조금은 어색하게, 하지만 힘차게.
뚜벅뚜벅.

그래 봤자 주변 악마들이 워낙 키도 크고 다리도 길다 보니 함께 걷던 그녀는 점점 갈수록 뒤처졌다.


하다못해 새끼 늑대 역시 그녀보다 한참이나 앞서 걸었다.

나름 마수라고, 며칠 못 봤을 뿐인데 덩치가 두 배나 불었다. 아직 보송보송한 핑크빛 젤리가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성체라고 착각할 뻔했다.

그때, 앞서가던 아가레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열쇠야, 왜 이렇게 걸음이 느려? 역시 어디 아픈 거 아니니?"

"후우……."

참다못한 율리아가 자리에 가만 섰다. 그러자 잠깐 새 저 앞까지 나아갔던 악마들도 의아한 듯 멈춰 섰다.
율리아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나름대로 투정을 부렸다.

"키 차이가 이렇게 나는데, 제가 전속력으로 걸어도 여러분은 못 쫓아가요."

"흐응, 그래서 최대한 천천히 걸었는데?"

"종족 차를 생각하세요!"

"낑?"

"너는 아니야."

되돌아온 어린 늑대가 고개를 갸웃했다. 율리아는 냉정하게 손바닥을 내보였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대형견의 지도는 제대로 해야 나중에 고생하지 않는다.

일전에 가르친 대로 얌전히 앉는 녀석을 폭풍 칭찬해 주려는 찰나, 재빨리 다가온 레라지에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율리아는 삽시간이 올라간 눈높이에 놀라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 내려 주세요!"

"이렇게 가면 피차 편하고 좋잖아?"

[▷레라지에

사실은 내가 좋지만. 후후,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

바엘에게서 벗어나 오랜만에 제대로 된 지문이 떠올랐건만, 그 내용은 여전히 달갑지 않았다. 율리아는
그를 밀어내는 척 SKIP 버튼을 눌러 창을 꺼 버렸다.

그런 레라지에의 목에 스릉, 검이 겨눠졌다. 키마리스의 흉흉한 안광이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분을 내려놔."

"어라,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안 그래도 감옥에서의 분이 아직 안 풀렸는데 말이지?"

제 목에 붉은 실금이 그어지는데도 레라지에는 재미있다는 듯 눈을 번뜩이기만 했다. 율리아는 점점


깊어지는 그의 상처를 보며 저도 모르게 눈을 가렸다. 그녀가 겁먹었다는 걸 깨닫자, 그제야 키마리스는
검을 거뒀다.
"너흰 역시 생각이 없구나? 멍청한 짓 그만하렴?"

어느새 다가온 레벤나가 율리아를 쏙 빼앗아 대신 안아 들었다. 그녀는 악마들 중엔 키가 작은 편에


속했지만, 종족이 종족인 만큼 완력 자체는 월등해서, 그녀는 율리아를 안아 든 채로 걸음도 가볍게
또각또각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던 아가레스의 눈이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듯 번뜩였지만, 율리아는 레벤나가 시선을 돌린 새


양손을 싹싹 빌며 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작은 열쇠가 그렇다면야……."

덕분에 율리아 쟁탈전은 시작도 전에 종결되었다.

그럼에도 몇 번은 더 티격태격한 끝에, 그들은 목적지인 마왕성의 중앙홀에 도착했다. 72 악마 전원이


들어갈 수 있도록 거대하게 증축됐다는 이 공간은 때때로 중요한 회의나 사건을 알릴 때 쓴다고 했다.

'바르바토스 님께는 매번 도움을 받네.'

사실 율리아가 바엘의 침실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이렇게 외출할 수 있었던 건 전부


바르바토스의 작품이었다.

마왕 바엘은 태어나 긴 시간을 오직 홀로 지내며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애첩'을 만들었다는 것에 많은 악마가 반신반의하며 믿지 않았다. 오늘은 바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자리였다.

바엘이 직접 나서 준다면 일이 훨씬 수월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으니, 그가 새겼던 각인으로 살짝 장난을


친다는 게 바르바토스의 계획이었다.

"저 여자가 바로……."

"인간계의 황녀를 용케 데려왔군."

마계 각지로 파견을 나가 있거나 지옥의 내핵에 잠들어 있어 소환하지 못한 이를 제외하고 72 악마의


대부분이 모였다.

아가레스의 등 뒤에 선 율리아는 그들의 면면을 조심스럽게 훑어보았다. 보티스처럼 무섭게 생긴 마수형


악마만 가득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레벤나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악마라든가 혹은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해 보이는 악마도 있었다.

율리아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실내를 둘러보던 그때, 어떤 악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놀란 그녀가 퍼뜩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악마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는 게 더 빨랐다.

레벤나 못지않게 눈부신 외모를 지닌, 아까 그 악마였다.

20 화

[연금술과 지식을 관장하는 28 위의 악마, 공작 베리드(Berith)]

그의 차분하고 매혹적인 미소는 수많은 악마 사이에서도 유독 돋보였다. 사실 계속해서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조각 같은 얼굴이었다.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를 응시했다. 베리드 역시 그녀의 호의를 알아챘는지 재차 가볍게 눈매를


휘었다.
'그래도 모두가 날 싫어하는 건 아니라 다행이야.'

율리아가 그를 따라 수줍게 입꼬리를 올리려는 찰나였다. 하필 타이밍 나쁘게 끼어든 레라지에가 그녀의
얼굴 앞에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의미를 알 수 없어 가만 내려다보고만 있자, 그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뭐해, 안 내려가? 위에서 평생 살려고?"

"혹시 이거…… 에스코트인가요."

"이 레라지에 님께서 기껏 인간들처럼 맞춰주고 있잖아."

율리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는 뭐가 불만이냐는 듯 눈을 불퉁하게 떴다.

"아."

사실 문제는 그가 아닌 율리아에게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에스코트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 손이 자신을 위해 내밀어진 거란 걸 깨달았을 때,


레라지에는 이미 몹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녀인 그녀에게 에스코트 경험이 없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녀의 진짜 과거를 아는 레벤나, 키마리스만이 긴장한 듯 얼굴을 굳혔다. 결국 한숨을 내쉰 레벤나가


품속에서 아주 두꺼운 장갑을 꺼내 끼고 레라지에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가자꾸나?"

"엑, 뭐야. 너 잡으라고 한 거 아니거든?"

"이 레벤나 님을 에스코트 하는 영광을 주겠다는데, 문제 있니?"

"존나 많아!"

레벤나가 시비 아닌 시비를 걸어 준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는 단박에 사라졌다.

두 악마가 계단 앞에서 티격태격하는 동안 그녀의 앞에 새로운 손이 내밀어졌다. 이번에는 명백히


에스코트를 요청하듯, 한 손을 뒤로 물린 사내가 정중히 묵례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홀의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던 베리드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제게 당신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시길 바랍니다."

"누구……."

"이런, 실례했습니다. 저는 공작 베리드,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베리드 님."

율리아는 그의 커다란 손 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겹쳤다. 싱긋 웃은 그는 율리아의 작은 걸음에


맞춰 느릿하게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열쇠 '에스델 브에스드라'의 모습이 정식으로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레라지에와 악마들은 뜬금없이


나타난 베리드에게 순서를 빼앗기고도, 혹여 율리아의 평판에 해가 될까 질투로 손수건만 잘근잘근 씹을
수밖에 없었다.

베리드는 나름대로 사려 깊은 성격을 지녔는지, 긴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동안 어색하지 않도록 사소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의연한 모습에 놀랐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많은 악마를 보는 건 처음일 텐데요."

"아뇨, 저 지금 떨고 있어요."

율리아는 베리드에게 얹어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레벤나가 기껏 하얗고 예쁜 장갑을 만들어 준 게


무색할 정도로 작은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와 곧장 맞닿은 베리드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모른 척 더욱 짙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하지요. 인간이라도 황녀이기 때문일까요?"

"과찬이세요……."

그가 황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순간, 율리아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황녀가


맞기는 했지만 황제가 하룻밤 외도로 낳은 자식인지라 인간계에선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베리드가 말하는 '황녀'는 오직 에스델 브에스드라,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매를 일컫는
단어일 터였다.

율리아의 눈꺼풀이 힘없이 내려가는데, 순간 베리드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아 제게 밀착시켰다.


퍼뜩 시선을 든 그녀에게 베리드는 다른 생각을 하지 말란 듯 나직이 속삭였다.

"불편해 보이는군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냥 칭찬받는 게 조금 어색해서……."

"잉그렘 5 세의 교육이 제법 엄했나 봅니다. 인간들은 귀애하는 자식일수록 때로 절벽에서 떨어뜨리듯


키운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잉그렘 5 세라니, 이곳 마왕성에서 들으리라곤 생각도 못 한 이름이었다.

악마들은 인간을 벌레 보듯 경시했다. 자신들과 비교했을 때 신체 능력은 한없이 뒤처지고 특별한 이능도
없다. 오직 숫자 하나만 믿고선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종족이란 게 인간에 대한 보편적 생각이었다.

그래서 악마들은 인간을 지위에 상관없이 대충 아무렇게나 불렀는데, 베리드는 브에스드라의 황제인
잉그렘 5 세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의문을 알았는지, 그는 율리아의 허리를 감은 손에 지그시 힘을 더했다.

"당신은 어땠습니까?"

"저는……."

부녀 관계를 묻는 그에게 무슨 대답을 해 줘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율리아는 베리드의 온화한 눈빛을 보며


나직이 심호흡을 했다.

처음 뜬 인물 창에 그는 '연금술과 지식'을 관장하는 악마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어쩌면 베리드는 본인과


전혀 다른 종족인 인간의 생활 방식이 궁금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야 기능을 켜 뒀다면 좋았을 텐데.'

중앙 홀로 오는 길에 아가레스와 레라지에가 자꾸 입맛을 다시는 게 찝찝해서 안 보는 게 약이라는


심정으로 창을 꺼버렸다. 새삼 후회가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무난히 넘어갈 만한 대답을 골랐다.

"베리드 님 말씀대로 자상한 아버지는 아니셨어요."

"이해합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뇨……."

"백성들에게 사랑받던 황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흉, 부정의 증거, 천하고 더러운 피, 저주받아 마땅한
영혼."

그가 한 마디씩 태연히 덧붙일수록 율리아의 머리는 차갑게 식어 갔다. 황성에서 지난 4 년간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들어왔던, 바로 자신을 수식하는 단어들이었다.

덜덜 떠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움켜쥐며, 그는 즐거운 듯 나직이 속삭였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읏!"

온몸에 힘이 빠져 더 이상 두 다리로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베리드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그가 물러나면, 자신은 수많은 악마 앞에서 꼴사납게 바닥에 무너지리라.

숨이 가빠왔다. 시야가 캄캄해지며 계단이 어지럽게 일렁였다. 발갛던 뺨은 핏기가 빠져 새하얗게 질렸다.
과거의 악몽이 눈앞을 휩쓸었다.

이로써 베리드는 약점을 간파하고 답을 얻었으리라. 율리아는 절망했다. 나약한 자신이 싫었다.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큭큭."

베리드의 악의 섞인 웃음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다.

힘을 잃은 율리아가 속절없이 무너지려는 찰나였다. 무언가 강한 힘이 그녀를 이끌어 품에 가뒀다.


동시에 베리드를 비롯한 홀의 모두가 부복했다.

"내 것에 손대지 말라 했을 텐데."

"주군."

바엘의 서늘하고 붉은 안광이 홀의 악마들을 느릿하게 훑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진작부터 기분이 몹시
저조했는지, 그는 악마 하나하나에게 를 되새기듯 시선을 각인시켰다.

"열쇠를 만지고, 소유하고, 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그러더니 율리아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감싸 안았다.

"변명할 말이 있나, 베리드."

"없습니다."
바엘을 상대로는 어쭙잖은 변명이 되레 화를 불러온다. 베리드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저었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왕이 잠시 눈을 돌린 새, 율리아를 보는 사내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정체를 들켜 죽고 싶지 않다면 내 말에 따르는 게 좋을 거야.'

그가 소리 없는 입 모양을 냈다. 율리아는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만약 가짜란 걸 들키면 바엘은 열쇠든 아니든 기필코 자신을 죽일 것이다. 레벤나와 키마리스도 동의한
일이었다.

그녀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걸 눈치챘는지, 베리드의 아름다운 얼굴에 짙고 끈적한 욕망이 떠올랐다.

'기다리고 있어. 우린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테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입술을 사리문 율리아는 그저 바엘에게 안겨 그가 빨리 자리를 뜨길 무력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바엘의 등장, 그리고 급격히 나빠진 율리아의 상태로 인해 홀에서의 만남은 시작과 동시에 끝났다.
그럼에도 결과로만 말하자면 바르바토스의 계획은 큰 성공을 거뒀다.

비록 바엘이 두 팔 걷어붙이고 협조한 건 아니었지만-율리아가 멀어지니 마력이 불안정해져 잠에서 깼다고,


그는 말했다-그녀를 찾아 직접 홀까지 내려왔고, 상태가 좋지 않은 그녀를 보호하듯 강력한 마력까지
방출해 냈다.

72 악마 하나하나가 한때는 마계의 각지를 통치하던 위대한 몸들이었다. 지금은 비록 바엘 밑에 모인


신하일 뿐이지만 말이다.

이로써 왕의 여자인 '에스델 브에스드라'를 건드릴 간 큰 마족은 사라질 것이다.

"이봐, 왜 이렇게 죽어가는 거지?"

"조금 긴장해서……."

"이 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네가 멋대로 침실을 빠져나간 걸 용서하지 않았나."

율리아는 현재 굉장히 난처했다.

홀에서 빠져나가면 곧장 레벤나와 키마리스에게 이번 일을 논의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끼어든 바엘이


그녀를 빈틈없이 안아 도로 침실로 돌아왔다. 살갗이 직접 닿으면 이상한 감각이 꿈틀대니 그녀를 큼직한
담요로 둘둘 말아 놓은 건 덤이었다.

하필 담요는 또 검은색이고 율리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서, 꼭 작은 김밥처럼 보였다.

"저기 손을 조금만 다른 쪽으로……."

"뭐."

"아뇨, 계속 주무시라고……."

바엘의 손이 자꾸만 허리와 엉덩이 부근을 스치는 탓에 그녀는 신경이 곤두섰다.

물론 본의는 아닐 것이다. 그는 색사에 흥미가 없고, 양질의 수면에 막대한 관심이 있으며, 슬프게도
자신의 몸은 악마들처럼 육감적이거나 섹시하지 않았다. 바엘에게 자신은 정말 말 그대로 베개였다.
'게다가 언제는 내가 나가는 걸 허락했으면서.'

잠결이긴 했지만 바르바토스가 와다다 쏘아붙이는 잔소리에 그는 귀찮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바토스는 이제껏 이런 식으로 바엘의 승인을 받고 일을 처리해 왔다고 했다.

'그럼 나도 한번?'

베리드가 다른 곳에 말을 흘리기 전에 레벤나와 키마리스를 만나야 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론


마왕의 품을 벗어날 방법이 요원했다.

때마침 바엘의 숨소리에 짙은 수마가 섞였다. 그녀는 결의를 굳게 다지고 입을 열었다.

"저, 잠시 나갔다 와도 될까요?"

"……."

"허락하신 거로 알고……."

"누워."

"네."

슬그머니 담요를 풀려던 율리아는 도로 김밥 자세로 돌아갔다. 그녀의 턱에 서글픔을 담은 자그마한


호두가 새겨졌다.

21 화

율리아는 마왕성 복도를 다급히 내달렸다. 덩달아 졸음이 오는 것을 참아 내고 바엘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 슬금슬금 몸을 굴려 침대를 탈출했다.

자신이 오래 떨어져 있으면 마력 저항의 효과가 사라져 바엘이 깨어난다. 그렇게 눈을 뜬 그는 평소보다
기분이 더욱 저조해졌다. 어제는 홀에 모여 있던 72 악마가 방패막이가 되어 줬지만 이번엔 그 화가
오롯이 자신에게 미칠 가능성이 높았다.

'베리드가 일을 치기 전에 빨리, 레벤나와 키마리스 님을 만나야 해.'

이제는 나름 익숙해진 길을 내달려 자신이 쓰던 침실 앞에 도착했다. 홀에서 바엘에게 붙들려 끌려가기 전,


레벤나에게 눈짓으로 곧 찾아가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레벤나가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키마리스도 함께 있었다. 안에 둘 뿐인 것을 확인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꼭꼭 잠갔다.

"오셨습니까, 율리아."

"생각보다 잘 빠져나왔구나? 그나저나 무슨 일이니?"

"마, 마계의 문……."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그녀가 이상했던지 두 악마가 시선을 교환했다. 율리아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닥치니 어느 것부터 꺼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베리드 님이……."

"음?"
율리아가 궁금한 건 두 가지였다. 인계로 통하는 문은 전쟁이 끝난 뒤 바엘에 의해 완전히 폐쇄되었다.
그곳을 드나들 수 있는 건 일찍이 허락받은 극소수의 악마뿐이었다. 심지어는 2 인자인 아가레스조차
멋대로 출입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녀의 질문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레벤나가 답했다.

"우리가 열쇠의 존재를 막 깨달았을 시기에 인계와 마계를 오간 게 베리드란다? 고작 인간 하나를 찾아


지상을 헤매고 싶었던 악마는 아무도 없었거든."

"하지만 제가 온 걸 끝으로 문이 완전히 닫혔다고 들었는데……."

"베리드와 문제가 생겼니?"

눈매를 가늘게 좁힌 레벤나가 몸을 반쯤 일으켰다. 마침 홀에서 그가 율리아에게 유독 친밀하게 굴던 게


이상했던 차였다.

레벤나가 뻗은 손이 율리아에게 닫기 전, 그녀가 중얼거렸다.

"들켰어요."

"……."

"알고 있었어요. 제 진짜 이름을."

그의 악의 섞인 웃음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눈앞이 또다시 새까맣게 물들었다.

'백성들에게 사랑받던 황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흉, 부정의 증거, 천하고 더러운 피, 저주받아 마땅한
영혼.'

'율리아 브에스드라.'

비틀거리며 무너지는 그녀를 단단한 팔이 붙들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간신히 내뱉으며 시선을 드니,
키마리스가 왜인지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이겠습니다."

그는 율리아를 안심시키듯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단단한 손길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하지만……."

[▷키마리스

당신이 안심할 수 있다면,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키마리스의 생각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베리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닌 모양인지, 그는 짧은 시간 목숨을


걸 각오까지 끝마쳤다.

율리아는 걱정 섞인 얼굴로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 없다는 듯 담담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서렴? 그 능구렁이 같은 베리드가 아무 준비 없이 일을 쳤을까?"


"레벤나, 말조심해."

"율리아에겐 알 권리가 있단다? 안 보이도록 덮어 준다고 능사가 아닌 걸 왜 모르니?"

자리에서 일어난 레벤나가 부채를 접어 키마리스의 손등을 탁, 내리쳤다. 그녀는 율리아를 부축해 의자에
앉히고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런 평소 같은 반응이 율리아의 두려움을
차분하게 진정시켰다.

"정체가 밝혀져서 죽고 싶지 않으면 그분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조만간 만나게 될 거라고……. 무슨 방법을 쓸지는 모르겠지만요."

"흠, 베리드는 72 악마 중에서도 조금 유별난 녀석이란다? 인간의 숭배를 받고 있거든."

레벤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며 하나하나 설명을 풀어 나갔다.

인간에게 악마란 절대적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베리드는 연금술과 지식을 관장하기에 예외적으로
일부 집단의 숭배를 받고 있었다.

지식을 탐구하는 부류는 대부분 먹고살 만한 여유가 있는 고위층이다. 에스델이 멀쩡히 돌아다니는 모습과
반대로 율리아가 자취를 감춘 것을 보며 깨달은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에스델을 지극히 아끼는 황제가, 소중한 딸을 대신해 그녀와 비슷하게 생긴 골칫덩이를 지옥에
떨어뜨렸을 거란 비정한 진실을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왜 그런 짓을 벌였을까 하는 거란다? 주군의 것을 잘못 건드렸다간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야? 혼자 죽으면 다행이지."

"베리드는 욕심이 커. 위계에 대한 집착도 강하고."

"애초에 마력의 강함으로 결정된 위계인데, 그걸 제가 어떻게 뒤집겠다고?"

레벤나가 상앗빛 찻잔을 입에 대며 생각에 잠겼다.

[▷레벤나

20 위 안으로 들어가면 대우가 달라지긴 하니까, 욕심이 날 법도 한가?]

율리아도 세계관의 설정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고위급 악마는 72 위계로 구분되어 있지만, 20 위
아래쪽으론 그 차이가 서로 비등했다.

1 위 바엘과 2 위 아가레스의 차이는 종잡을 수 없고, 8 위인 바르바토스와 17 위인 보티스의 차이 역시


압도적이다. 그러나 20 위를 넘어가게 되면 한 끗 차이로 강함의 정도가 결정됐다. 작디작은 수 하나가
더해지는 것만으로 위계가 크게 상승하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설마……."

그때, 키마리스의 안광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둘의 의문 섞인 시선을 받은 그가 확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열쇠인 율리아를 이용해 마정석을 삼킬 심산인 건 아니겠지."


"베리드가 아무리 욕심이 많기로서니 그 정도까지야 할까? 마신의 힘은 주군도 어쩌지 못하는데,
실패했을 때의 대가가 너무 크잖아?"

바엘은 며칠 폭주하는 것에 그쳤지만 베리드 정도가 되면 말 그대로 심장이 산산이 찢겨 나갈 것이다.


그의 마력은 기껏해야 탑에 발을 들여놓는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레벤나는 키마리스의 조용한 눈짓을 받았다. 율리아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그는 말을


삼갔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둘의 생각을 읽고 말았다.

[▷키마리스

굳이 마신의 힘을 삼키지 않아도 마력을 높일 방법이 있다면 어쩔 텐가. 이미 주군의 파장이 그것을
증명했어.]

[▷레벤나

설마, 율리아를 강제로 취할 속셈인가? 몸을 자세히 살피지 않는 이상 겉보기에 이상은 없을 테고,


베리드가 지는 위험은 자연히 낮아질 테니?]

율리아가 그들의 생각을 읽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키마리스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턱을 아드득 짓씹었다.

"감히……."

테이블 아래 그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것을 말렸을 레벤나지만, 그녀조차 부채를
부러뜨릴 듯 손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정체를 들켜 죽고 싶지 않다면, 내 몸을…… 내어 달라는 뜻이구나.'

숨이 턱 막혔다. 베리드의 목적을 깨달은 율리아의 시야가 아득히 침잠했다.

* * *

베리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의견이 오갔다. 그들은 바르바토스와 레라지에는 위험할지
몰라도, 최소한 아가레스에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아가레스는 불과 얼마 전까지 치열한 전장의 선두에서 마군을 지휘했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혐오가
강했고, 기만당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크게 분노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만큼 율리아에 대한 호감도
컸다. 일단은 그것에 기대 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율리아는 떠밀리듯 마왕의 침실로 돌아왔다. 바엘이 깨면 안 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레벤나와
키마리스는 만일의 경우 목숨을 걸어서라도 베리드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두 악마는 율리아가 자신들의 계획을 알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어떡하지. 만약 아가레스 님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면 두 분은…….'

마왕의 침실로 돌아온 그녀는 문을 등지고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자신이 진짜 에스델이었다면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율리아의 눈에 사내의 맨발이 들어왔다. 놀란 그녀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형형한 붉은 안광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뭐지?"
"마왕님."

"멋대로 돌아다니는 걸 묵인해 줬더니 자꾸 어디 하나 상해서 돌아오는군. 정말 묶어 둬야 정신을 차릴


텐가?"

바엘의 시선이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로 향했다. 율리아는 세수를 하듯 눈가를 박박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 멀리 간 건 아닌데 깨셨나요?"

"난 잠귀가 밝아."

"그런가요……."

아닐 텐데. 바르바토스가 오가면서 잔소리를 퍼부어도 안 깨던데.

하지만 생각은 생각으로 그쳤다. 가뜩이나 위태로운 상황에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사슬에 묶이는 건 더더욱 싫었다.

율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애써 활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바엘의 미간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이상하군."

"……."

"보통은 널 근처에 두면 마력이 안정돼 썩 편한데 말이지, 지금은 그 멍청하게 웃는 얼굴이 나를 심히


불쾌하게 만들어."

이로써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율리아는 퍼뜩 입꼬리를 풀었고, 바엘은 그제야 미간의 주름을 거두며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저벅저벅
걸어간 그가 마신의 탑을 응시했다. 율리아의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처음 마정석의 앞에 섰을 때 느꼈던 압도적인 감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보랏빛의 거대한 구체가 웅웅 소리를 내며 발광했다. 태양을 직접 보면 눈이 멀어버리듯, 그녀 또한


엄청난 파장을 내뿜는 그것을 오래 보고 있기가 힘겨웠다.

마력 저항이 무한으로 차 있으니 직접적으로 마력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닐 테다. 다만 마정석엔 어둠의


창세자이자 모든 마족들의 아버지인 마신의 힘이 잠들어 있었다. 그건 마치 태초의 자연 앞에 선 듯한
압도적 경외감이었다.

22 화

[▷바엘

……. ……. …….]

바엘은 저를 향한 시선도 눈치채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율리아는 그런 그의 뒤편으로 천천히


걸어가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멈춰 섰다. 바엘은 깨어 있는 동안 자신에게 누군가 접근하는 것을 꺼렸다.
고독에 익숙한 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질문은 충동적이었다. 바엘의 눈빛이 겹쳐 보인 탓이었다. 유폐된 폐궁의 한구석에서, 밝게 빛나던
브에스드라의 황궁을 바라보던 과거 자신의 모습과.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은 천덕꾸러기 황녀일 뿐이고, 그는 지하를 단숨에 통일한 위대한 군주인데.
자꾸만 그의 고독이 신경 쓰이는 게…….

"죄송해요. 제가 주제넘었어요."

"……마신의 힘."

혹여나 그가 화를 낼까 재빨리 사과했지만 바엘은 듣지 못한 양 나직이 중얼거렸다. 활짝 열린 창문에서


서늘한 밤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길고 아름다운 칠흑의 머리칼이 바람에 잔잔히 날렸다. 바엘의 붉은 안광이 율리아에게 향했다. 마치
먹잇감을 탐색하는 맹수처럼.

하지만 그녀는 그런 바엘이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최소한 지금만큼은.

"신이 되고 싶으신가요?"

"아니."

"지금의 힘에 만족하지 못하시나요?"

"차고 넘치지."

바엘의 마력은 때로 그가 괴로워할 정도로 점점 그 크기를 불려 갔다. 그런 그를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


주는 존재인 율리아에게, 바엘은 저도 모르는 새 이끌렸다. 남과 공간을 나누는 걸 싫어하면서도 부득불
그녀를 침대까지 끌어들이는 게 그 증거였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바엘과 율리아만이 깨닫지 못할 뿐.

'그럼 왜 마신의 힘을 쫓는 건가요.'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은 소리가 되어 나가지 못한 채 율리아의 입 안을 맴돌았다. 물으면 안 된다고,


줄을 타는 듯 위태롭지만 평화로운 분위기가 깨질 거라고, 본능이 하고 있었다.

바엘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너를 써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천한 몽마들의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그게 열쇠를 사용하는


방법이라면."

"……."

"그렇게 마신의 힘을 흡수하면 나는 평생 바라 마지않던 것을 이루게 되겠지."

율리아는 잠자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바엘의 언사는 지극히 위협적이었지만 그에 담긴 감정은


담담했고, 무언가 조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왜 네게 손을 뻗지 못하는 걸까."

"……."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두려워한다니, 지하의 절대자인 그가 도대체 누구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는 말인가. 율리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머리칼을 느릿하게 쓸어 올린 그의 등에 마치 꽃이 개화하듯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방 안의 기물이 마구 쓰러지는 가운데, 바엘의 붉은 안광은 율리아에게서 벗어나
탑으로 향했다.

저를 향한 위협을 느꼈는지 탑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장이 더욱 강해졌다. 빛이 점멸하는 속도 역시 점점


빠르고 격렬해졌다. 마왕의 둥지가 또다시 쿵, 쿵 요동쳤다.

이 성은 그의 심장 그 자체였구나. 율리아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얌전히 있도록 해. 돌아왔을 때 보이지 않는다면, 이번에야말로 용서치 않겠다."

테라스로 걸어간 그가 난간을 밟고 미련 없이 뛰어내렸다.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응시하던 율리아는


자신의 등 뒤로 다가오는 또 다른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시선을 돌렸을 땐 이미 늦었다.

"드디어 왕이 자리를 비웠군."

"읍……!"

율리아의 입술이 강한 악력으로 틀어막혔다. 발버둥 치려 했지만 압도적인 체격 차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녀는 강제로 끌려가며 힘겹게 뒤를 돌아보았다.

베리드가 욕망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말도 안 돼."

"아가레스, 잠시 진정하고……."

"인간 놈들이 우리가 요구한 열쇠를 바꿔치기했다고? 하등한 종족 주제에 감히 우리 마족을 우롱해?!"

아가레스의 검은 마력이 그녀의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듯 불같이 일렁였다. 말을 꺼낸 키마리스와 레벤나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율리아를 왕의 거처로 돌려보낸 둘은 역시 베리드를 죽여 입을 막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었다. 비록 극소수라 할지라도 인계에 드나들 수 있는 마족이 또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베리드가 방심하여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이런 행운이 두 번씩이나 존재하리라곤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유사시에 왕인 바엘을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악마, 대공 아가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쪽으로
당락이 잡혔다. 그녀의 선에서 위로 올라가는 정보를 차단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예방책이기
때문이었다.

"이러다 들키겠구나? 아가레스, 좀!"

"하하!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 고작 황녀 하나의 목숨으로 전쟁을 끝내 주었건만, 이번 일을 그냥 넘기란


말인가?"

"그럼 어쩔 테니? 원칙대로 율리아의 사지를 찢고 목을 꺾어 효수라도 할 테니?"


"그건……!"

레벤나의 현실적인 지적에 아가레스는 어깨를 움찔했다. 그녀는 분노를 억누르려 노력했지만 기만당했다는
생각에 좀처럼 화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래도 인간 놈들이, 감히……."

작은 열쇠의 사정은 가엾고 딱했다. 태어나 평생 천대만 당하다 언니를 대신하여 죽을 자리인 이곳 마계에
버려졌다. 그럼에도 인계보다 이곳에서 지내는 게 더 행복하다는 그 가녀린 열쇠를 어떻게 찢어 죽인단
말인가. 손끝도 대기 아까운 것을.

하지만 인간에 대한 분노는 달랐다. 전장의 선두에 섰던 그녀는 인간이 얼마나 비열한 종족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엔 마계의 경계를 슬금슬금 침범하더니, 결국엔 돈이 된다는 이유로 채 눈도 뜨지 않은
마족의 씨앗이나 어린 마수를 잡아갔다.

마족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편이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바르바토스와 레라지에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눈을 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곁을 내어 준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역시 그때 모두 쓸어 버렸어야 했어. 봐주는 게 아니었어!"

그녀는 흥분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방 안을 서성였다. 높게 올려 묶은 긴 머리칼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휙휙 채찍처럼 휘날렸다.

기다리다 못한 키마리스가 재차 나섰다. 지금 기댈 수 있는 건 아가레스뿐이었다.

"인간에게 반감을 가진 악마는 너뿐만이 아니야.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그녀는 죽어."

"내가 보호하면……!"

"언제까지. 인간의 수명이 짧다지만 그래도 몇십 년이 넘는 시간을 그녀 하나만 지키며 살 수 있나? 잊지


마. 인간은 지나칠 정도로 연약해. 아차 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을 거다."

키마리스는 율리아가 악마들 사이에 떨어져 크게 다쳤던 때를 상기시켰다.

의술 쪽에 조예가 깊은 악마들, 심지어는 아가레스의 마력조차 그녀의 마력 저항을 뚫지 못했다. 바엘이


어떻게 율리아를 치료했는지는 몰라도, 그의 자비를 두 번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걸 아가레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네 분풀이를 하고자 율리아를 죽이겠다면 어쩔 수 없구나? 우리는 율리아를 데리고 인계로 도망치는
수밖에?"

"작은 열쇠는 주군에게 필요한 존재야."

"주군에게만 필요한 존재니?"

레벤나는 부채처럼 긴 속눈썹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녀의 눈이 묻고 있었다. 율리아는 단지 '열쇠'이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니, 하고.

입술을 짓씹은 아가레스가 탁자를 내리쳤다. 두꺼운 원목으로 짠 상판이 간단히 두 동강 나며 위에


쌓여있던 수많은 서류가 바닥에 와르르 무너졌다.

"왜 나한테 온 거야?! 바르바토스나 레라지에도 있었잖아!"


"……."

"젠장!"

벽에 걸린 채찍을 낚아채듯 집은 그녀가 집무실 문을 걷어차 활짝 열었다. 놀란 키마리스가 따라붙었다.

"어디 가려는 거야!"

"베리드는 인간과 사적으로 접촉했어. 군법에 따라 놈을 처형한다. 이의 있나?"

그녀의 서슬 퍼런 시선을 받은 두 악마가 고개를 저었다. 아가레스가 말은 저렇게 해도, 일단 베리드를


죽여 입을 막을 생각임을 알아챈 것이다.

화를 가득 실은 그녀의 발소리가 또각또각, 조용한 복도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 * *

율리아는 검은 자루에 억지로 욱여넣어진 채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었다. 그동안에도 바엘의 심장 소리가
쿵, 쿵 고막을 울렸다. 베리드는 괜히 멀리 이동해 흔적을 남길 생각은 없는지, 마왕성 안에서 볼일을
끝내고 모른 척할 심산인 모양이었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흔들리던 자루도 멈췄다. 율리아는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얌전히 있지 않으면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거다."

자루로 시야가 막혀있어 SIGHT 기능을 쓸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그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아이콘


구석구석을 다급히 훑었다. 스킬 창으로 들어가니 무언가 복잡하게 연결된 트리가 떠올랐지만 해금 조건이
있는지 뿌리부터 모두 비활성화되어 있었다.

베리드는 율리아가 조용한 게 이상했는지 자루를 찢어 그녀를 거칠게 끌어냈다.

"왜 아무 반응도 없는 거지?"

[▷베리드

의외로 순종적이군. 잘만 한다면 주기적으로 마력을 흡수할 수 있겠어.]

시야가 트이니 그제야 지문 창이 떠올랐다. 율리아는 그것을 읽으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무서워서……."

"큭, 내 명령에 잘 따른다면 아마 네게도 상당히 좋은 시간이 될 거다."

그의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인간을 유혹할 때 으레 쓰던 방법이었지만 율리아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을 빠르게 스치는 그의 생각들이 너무나 징그러울 뿐이었다.

[▷베리드

주군이 한 번 탑으로 떠나면 돌아올 때까지 최소 반나절, 오래는 사나흘씩도 걸리지. 남은 시간은 많으니
찬찬히, 뼛속까지 훑어 즐겨야지.]

왕은 오랜 휴식 끝에 탑으로 떠났으니 분명 며칠은 걸릴 거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지나갔다. 직후


베리드의 어깨가 한결 이완됐다. 율리아에게서 장기적으로 마력을 뽑아내려면 그녀를 유혹해서 협조적으로
굴게 만드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와인 마실 줄 아나?"

"아뇨……."

"마계의 것은 먹지 않는다지? 걱정 마, 이건 인간들이 내게 바친 공물이니."

그는 장식장을 열고 잔 두 개를 꺼냈다. 포도주의 감미로운 향이 공기 중에 퍼져 나가고, 피처럼 붉은


와인이 그녀에게 건네졌다.

"마성이 있는 음식이 인간의 몸에 해롭다는 걸 알지. 나는 네가 이곳에서 되도록 오래 지내 주길 바라."

그녀는 일단 거부하지 않고 잔을 받아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SYSTEM

스토리 진행도 3%]

그녀가 실행시키지도 않았는데 진행도 안내가 떠올랐다. 뒤이어 또 다른 창이 생성됐다.

[▷SYSTEM

1st Episode. 첫 번째 죽음]

[▷SYSTEM

- 미션: 생존하시오.

- 보상: 스킬트리 활성화

- 실패 페널티: 플레이어 사망]

바엘 루트에 들어서기 위한 첫 번째 사건이 떠올랐다.

23 화

마정석이 잠든 탑의 정상은 얼핏 광활하게 트인 홀처럼 보였다. 돔 형태의 천장을 아치형의 기둥들이


묵직하게 떠받들고, 올라오기까지 거쳐야 하는 복도와 계단엔 마계의 역사가 장엄하게 새겨져 있다.

그렇게 정상으로 올라오자마자 보이는 건 마정석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온 바닥에 깔린 광활한 마법진이다.

마신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선 그만큼 대형의 수식이 들어가야 했다. 탑의 홀은 그 크기에 맞춰 지어졌지만,
그럼에도 마정석이 점멸할 때마다 방어진은 온갖 색으로 빠르게 점멸했다. 마치 힘겹게,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처럼.

"크윽, 컥!"

파지직, 마정석에서 튕겨 나간 바엘의 몸이 바닥에 거세게 내팽개쳐졌다. 칠흑의 거대한 날개는 군데군데
찢겼고 내장이 파열됐는지 코와 입에선 피가 뚝뚝 떨어졌다.

"허억, 헉……."

피보다 더욱 붉은 눈동자가 중앙에서 엄청난 기세로 발광하고 있는 마정석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두 마력이 충돌한 여파로 번개와 같은 날카로운 파장이 홀 곳곳에 내리쳤다. 기둥이 부서지고
강렬한 돌풍이 몰아치는 가운데도 마정석은 중앙에 부유한 채 꼿꼿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후두둑, 바엘이 일어서자 더욱 많은 피가 쏟아져 웅덩이를 이뤘다. 그럼에도 그의 기세는
사그라들기는커녕 더욱 광폭하게 날뛰었다.

"어쩐지 오늘은 쉽다 했지."

마정석이 잠든 홀에는 위아래 사방으로 구체의 방어막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뚫고 허공에서 직접 돌진할
수 있는 건 오직 바엘뿐이었다.

직전까지 열쇠와 함께 있었던 탓일까, 그의 견고한 마력 앞에 방어막은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베일로 된


커튼을 찢어발기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기세를 탄 바엘은 곧장 마정석에 제일 강력한 마력구를 날렸다.

거대한 붉은 폭풍이 광활한 공간을 완전히 뒤덮었다. 그래서 먹혀든 듯했으나…….

"이딴 잔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마정석은 바엘의 힘을 그대로 튕겨냈다. 수백 년간 마신과 싸워오며 처음 보는 능력이었다. 결국 바엘은


고스란히 되돌아온 자신의 마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정석이 토해 낸 번개가 바엘이 서 있던 자리를 내리쳤다. 그것을 피하려 도약했지만, 바엘의 경로를
미리 파악한 듯 그곳에도 곧장 공격이 몰아쳤다.

보랏빛 구체가 흉흉하게 발광했다. 끈질긴 찬탈자를 이번엔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마신의 수정구를 지키던 광활한 홀은 이제 바엘을 가두는 완벽한 새장이 되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는 거지."

바엘의 몸에서 순도 높은 붉은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폭풍처럼 그의 몸을 감싸고 이윽고


거대하게 확산되어 갔다. 마정석 역시 다가올 공격에 대비하듯 보랏빛 파장을 뿜어내며 그 영역을 점점
넓혀 가기 시작했다.

우웅, 웅웅!

바닥에 새겨진 수식이 마치 파괴 일보 직전처럼 미친 듯 울부짖었다. 이윽고 허공을 박찬 바엘이 마정석을


향해 도약했다.

"……."

순간 사위가 적막에 휩싸였다. 그리고 잠시 후, 어마어마한 폭발음과 함께 눈이 멀듯 강렬한 빛이 마계의


하늘을 뒤덮었다.

사지가 찢겨나가는 고통 속에서, 바엘의 눈은 격렬한 환희로 번뜩이고 있었다.

* * *

쨍그랑!

"아."

[▷SYSTEM

1st Episode. 첫 번째 죽음]

율리아가 와인 잔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시스템 창이 사라졌다. 포도주가 넘어간 식도부터 뜨거운 감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혹감에 몸을 웅크렸다.
'독? 하지만 베리드는 내가 죽는 걸 원치 않았는데…….'

안에 이상한 걸 넣었을지 모른다는 걱정은 당연히 했다. 하지만 베리드의 생각을 읽었을 때 포도주에
별다른 짓을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는 이것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고자 했을 뿐이었으니까.

그녀의 당혹감을 읽었는지 베리드는 술을 마저 들이켠 채 그녀에게 느긋이 걸어왔다. 어깨를 살짝 밀어


침대에 눕히고,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걱정 마. 독은 아니니까."

"하지만……."

"분위기를 풀도록 도와주는 걸 조금 넣었을 뿐이야. 기분이 좋아지도록."

그는 목을 옥죄던 크라바트 매듭을 우아하게 풀어냈다. 힘없이 늘어진 천을 근처에 내려놓으며 그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베리드

좋군, 이제 슬슬 시작해도 되겠지.]

율리아는 자신이 예상한 '부드러운 분위기'가 그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장갑을 벗자 길고 새하얀 손가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것으로 율리아의 신발부터 하나씩 벗겨 갔다.

그녀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가슴을 헐떡였다. 고작 신발과 장신구 몇 개를 빼앗겼을 뿐인데, 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이상하고 기분 나쁜 감각이 뇌리를 장악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나, 베리드가 얼핏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두려운가?"

"……."

"주군과는 비교하지 말도록 해. 그분은 거칠기만 하겠지만 난 다르거든. 극상의 쾌락을 기대해도 좋아."

베리드의 속살대는 목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물고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문득 단검이 들어왔다. 잘 벼려져 서슬 퍼런 광을 내는 단검이 머리맡 탁자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째서 단검이 검집에서 빠진 채로 자신의 손이 닿을 만한 곳에 놓여 있는 걸까. 마치 사용해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평소라면 의문을 가졌겠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몸을 반쯤 일으키자


베리드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뭐지?"

"드레스 매듭이 등에 있어서……."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자연스러운 핑계였다. 율리아가 상체를 세우자 베리드의 손가락이 그녀의 허리선을
타고 오르다 자연스럽게 등 뒤로 들어갔다.
그가 매듭을 향해 시선을 내린 짧은 순간, 율리아는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읏!"

하필 일어서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넘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실수로 칼날을 강하게 움켜쥔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래도 검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율리아는 재빨리 단검을 고쳐
쥐었다.

여전히 침대에 앉아 있던 베리드가 그 모습을 보며 비소를 흘렸다.

"네 속셈이 고작 그거였나?"

"순순히 당하진, 흐윽, 않겠어요……."

"정말이지 애처롭고 가엾어. 마족에게 그딴 건 장난감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아직 몰랐나 봐?"

눈매를 가늘게 휘던 그의 표정이 불현듯 딱딱하게 굳었다. 날이 향한 방향은 베리드가 아닌, 율리아의
가느다란 목이었다.

미약에 취한 손이 덜덜 떨렸다. 그만큼 새하얀 살갗에 붉은 실금이 늘어갔다.

"내가 죽으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해."

"무슨 속셈이지?"

"나는, 마왕님의 것……."

약에 취해 흐릿해진 눈동자 속에서도 죽음을 향한 의지만큼은 진심이었다. 동시에 베리드가 쓰고 있던


신사적인 가면이 한 꺼풀 벗겨졌다. 그는 뱀처럼 서늘한 안광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네가 죽으면 아쉽겠지만 시체를 먼 어딘가에 내다 버리면 그만이야. 주군의 폭주가 임박해 아무도 널
보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생긴 일을 누가 어떻게 알까?"

"당신보다 먼저, 내 진짜 이름을 알았던, 흐윽!"

단지 등에 머리카락이 스쳤을 뿐인데 강렬하고 찌릿한 감각이 전신에 화악 퍼졌다. 허리가 파드득 튀자
목에 바짝 대고 있던 칼날이 살갗을 깊게 파고들었다.

가느다란 목덜미를 타고 흐른 피가 순백의 원피스를 붉게 물들였다.

"나보다 먼저 알았다니, 누가?"

"……."

율리아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베리드는 28 위의 고위급 악마다. 20 위 아래로는 서로 한 끗 차이의


비등한 마력을 지녔다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가 레벤나와 키마리스에게 화를 미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큭큭."

그녀가 끝내 입을 열지 못하자 거짓말이라고 여겼는지 베리드의 안광이 완벽한 환희로 물들었다. 그는


유희의 끝을 선언하며 율리아에게 달려들었다.

율리아는 결국 단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의 도구가 되어 굴욕적으로 힘을 빼앗기기 전에, 차라리


스스로 급소를 찔러 숨통을 끊어 버리기 위해서.
'결국 이렇게…….'

그녀가 날을 세운 순간, 주변 모든 소리가 소름 끼치는 정적으로 물들었다. 베리드의 웃음소리도, 그녀


자신의 뜨겁고 가쁜 숨소리조차. 그리고 뒤이어-

"아아아아아악!!"

그녀의 등 뒤, 거대한 창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든 시야가


새하얗게 반전됐다. 마치 세상이 끝나 버리는 순간인 것처럼.

그것을 등지고 있던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는 것에서 그쳤지만, 그 빛을 마주 보고 있던 베리드는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뒤이어 거대한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 나갔다. 강력한 기압 차에 휩쓸린
성 내의 모든 것이 마신의 탑 쪽을 향하여 쏠렸다.

"어……?"

작고 가벼운 율리아의 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 거대한 가구들과 함께 창밖으로


쓸려 나가고 있었다.

놀란 그녀가 절박하게 손을 뻗은 바로 그때였다.

"작은 열쇠야!!"

검은 군복 재킷에서 뻗어진 팔이 율리아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높게 묶은 말총머리가 세찬 돌풍에


미친 듯 휘날렸다.

"뭐 하고 섰어! 빨리 도와!"

"우리가 전부, 너 같은 괴물인 줄, 아니?!"

아가레스의 등 뒤로 레벤나의 높다란 비명이 들렸다.

마력 저항이 있는 율리아는 몰랐지만, 탑에서 일어난 대형 폭발은 성을 비롯해 인근의 모든 영토를


휩쓸었다. 폭발에 버티지 못한 모든 마족이 흔적도 없이 소멸됐다. 고위급 마족이 키우던 사역마도
마찬가지였다.

율리아는 그제야 성 곳곳에 시끄러운 고함과 비명이 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 그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율리아, 손을……!"

"키마리스 님!"

돌풍에 휩쓸릴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아가레스의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 율리아는 제가 들고 있던 단검을


망설임 없이 내버렸다. 그리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공에서 간발의 차로 엇갈리던 손이 이윽고 맞닿았다.

"당겨! 젠장, 주군은 도대체 뭘 한 거야!"

"흐읏."

"너 다쳤니?!"
걸음에 방해가 되는 드레스 밑단을 북북 찢어 버리고 달려오던 레벤나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목을 깊게
가로지른 자상이 난리통 중에 더욱 크게 벌어졌다. 율리아의 흰 원피스는 이제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레벤나의 양손에서 칠흑 같은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비록 범위는 넓지 않았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마력의
폭풍을 막아 줄 정도는 되었다.

"작은 열쇠야, 어디 봐!"

그 사이 아가레스는 율리아를 품 안 깊숙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양손이 자유로워지자 완전하고 견고한


방어막을 만들어 냈다. 사방에 휘몰아치는 돌풍 속에서 그들이 주저앉은 공간만이 원래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24 화

아가레스는 검은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지고 율리아의 목을 살폈다. 그러나 손가락이 닿은 순간, 율리아의


작은 몸이 파드득 튀었다.

"아, 응!"

"작은 열쇠야?"

"흐윽, 읏!"

이상을 감지한 그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사이 레벤나가 찬장에 나뒹굴던 대량의 미약 병을 찾아냈다.
레벤나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베리드?"

강렬한 빛 때문에 눈이 멀었던 베리드는 악마의 치유력으로 인해 도로 시력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는


율리아를 둘러싼 악마들을 보며 헛웃음을 쳤다.

"다들 지금 뭐 하는 거지?"

"……."

"이봐, 아가레스! 전장에서 죽은 동료들을 잊은 거야?!"

베리드가 관장하는 영역은 연금술과 지식. 그러나 그것이 좋은 방면으로만 발휘되는 건 아니었다.
무언가를 안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가 관장하는 또 다른 영역은 '거짓'이었다.

"저 인간은 우리 마족을 우롱했어! 명예롭게 전사한 동료들의 죽음을 우롱한 거라고!"

"……."

"인간이 얼마나 악랄하고 비열한 종족인지 생각해! 저 인간 역시 우릴 조롱할 목적으로 이곳에 온 거야!
멍청히 속아 넘어가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런 인간을 위해 동족인 내게 해를 가할 셈이야?!"

베리드가 그녀의 가장 아픈 곳을 파고들었다. 생각에 잠겼던 아가레스의 표정이 이내 싸늘하게 식었다.

그것을 본 베리드의 얼굴이 성공을 확신하는 빛으로 바뀌었고, 레벤나와 키마리스는 긴장한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인간은 열쇠를 바꿔치기해서 우리를 우롱했지. 하지만 작은 열쇠는 잘못이 없어."

"아가레스! 군단장으로서 긍지는……!"

"그래서 기회를 줄까 해."

아가레스는 주저앉은 채 헐떡이는 율리아의 손에 단검을 쥐여 주었다. 방금 폭풍에 휘말려 사라졌던


단검이 왜인지 다시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퍼렇게 선 날이 전격을 두른 듯 번쩍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율리아의 눈이 쾌락으로 혼몽하게 젖어 들었다.

"흣, 어째서……."

"베리드는 주군의 명을 어기고 인간과 내통했다. 그는 우리 마족의 배신자야."

"설마, 아가레스."

베리드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전격을 두른 단검과 발갛게 물들어 헐떡이는 율리아, 그리고 아가레스의
비틀린 입매를 차례로 보았다. 그녀는 율리아의 목덜미를 상냥하게 쓸어내리며 귓가에 중얼거렸다.

"나의 마력을 실은 검이야. 이걸로 베리드의 심장을 찔러."

"아가레스!!"

"그럼 이후의 일은 내가 처리해 주마."

너는 내통자를 처벌한 영웅이 되는 거란다. 낮게 중얼거린 아가레스가 율리아를 안아 든 채 구둣발로


베리드의 머리를 짓밟았다.

아가레스의 의도를 알아챈 키마리스가 발끈하며 나서려 했지만 레벤나가 그런 그를 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확실하게 아가레스를 아군으로 만들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가레스는 율리아를 좋아한다. '개인'의 입장에서 말이다. 아가레스는 군단장으로서의 긍지가 너무도
강했다. 아가레스가 군에서 세운 수훈은 그녀의 인생, 바로 그 자체였다.

율리아가 인간과 내통한 베리드를 직접 죽이는 것만이, 그녀를 완전한 아군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아가레스 내부의 모순을 완전히 정리할 수 있는 길임을 이해한 것이다.

"흐윽, 흣!"

바닥에 내려진 율리아를 관객 삼아 우두둑, 베리드의 늑골이 활짝 열렸다. 벌건 속살을 드러낸 심장이
주인의 두려움을 보여 주듯 펄떡펄떡 빠르게 날뛰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닥치고 있어, 배신자."

"인간 따위에게 날 넘길 셈이야?!"

베리드의 저주 섞인 끔찍한 단말마가 율리아의 고막을 마구 찔렀다.

이젠 살갗에 스치는 모든 것이 거슬렸다.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양탄자조차 그녀의 욕망을 자극했다.


온몸의 말초신경을 따라 작열감이 끊임없이 밀어닥쳤다. 이대로 과부하를 견디지 못한 뇌가 뭉그러질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달콤한 속살거림이 들려왔다.

'괜찮아. 단지 검을 내리꽂는 것뿐이잖아. 아니면 이대로 죽을 거니? 산 채로 사지가 찢겨 유황불 속에


던져지고 싶은 거야?'

"아니야. 아니야……."

'편해질 수 있어. 한 번이면 돼. 단 한 번만 움직이면 모두 끝난다고. 이 타는 듯한 괴로움 뒤에 무엇이


올지, 사실은 기대되잖아?'

흔들리는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검을 쥔 손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욕망에 휩쓸리듯 치켜 들렸다가 양심에 억눌려 내려지길 반복했다.


아가레스는 그런 그녀를 기다리듯 지켜봐 주었다. 하지만 유예는 그리 길지 않았다. 율리아의 몸 상태
때문이었다.

그녀는 작고 연약했다. 악마에겐 적당히 기분 좋은 약일지라도 그녀에겐 정량보다 훨씬 차고 넘쳤다. 약


기운을 빠르게 해소해 주지 않는다면 몇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스러지리라. 지금처럼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도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용서하지 마십시오, 율리아."

그때, 이를 악문 키마리스가 나섰다. 주저앉은 율리아의 등 뒤에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해, 가녀린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으응!"

"칼을 잡아요."

채근하는 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살결이 키마리스의 차디찬
손바닥에 부드럽게 감겼다.

커다란 손에 폭 감싸이는 작은 어깨를 덧그리듯 훑다가, 검을 더 강하게 움켜쥐라고 재차 속삭였다.


율리아의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닿는다. 견디지 못하고 파드득 튄 그녀가 키마리스의 품에 깊숙이 안겼다.

"흑, 아!"

율리아의 목소리에 점점 가느다란 교성이 섞였다. 다리 사이, 무엇도 닿은 적 없는 깊은 곳에 이유 모를


작열감이 피어올랐다. 뜨겁고 축축하다. 욱신욱신 밀려드는 감각을 참느라 발끝이 절로 곱아들었다.

키마리스는 제 가슴팍에 뒤통수를 묻은 채 마구 도리질 치는 사랑스러운 이를 내려다보았다. 스치는 듯한


자극만으로도 그녀의 눈에서 이성이 자취를 감췄다. 이쯤이면 현실과 꿈을 제대로 구분해 내지 못하리라.

키마리스는 그녀의 팔을 움켜쥔 채 칼을 치켜들었다. 그러면서 흘끗 아가레스를 보자, 이 정도는


봐주겠다는 듯 펄떡이는 심장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푸욱, 깔끔하게 떨어진 단 한 번의 칼날. 발악하며 저주를 퍼붓던 베리드가 움직임을 멈추고, 마지막까지
맥박 치던 심장은 율리아의 얼굴에 질척한 피를 흩뿌렸다.

첫 번째 살인이었다.

[▷SYSTEM
1st Episode. 첫 번째 죽음]

[완료]

* * *

키마리스는 축 늘어진 율리아의 몸을 안고 흔들리는 성 복도를 다급히 내달렸다.

걸음을 강하게 내디딜 때마다 율리아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날아서 가면 그녀를 좀 더
편하게 해 줄 수 있었겠지만 성내가 아수라장이었다. 마력을 사용해도 복구되지 않을뿐더러 살아 있는
생물처럼 뒤틀리기까지 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이런 상황에선 쉽사리 날 수도 없었다. 자칫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몰라도 연약한 율리아는 크게


다칠 테니까.

'큰일이다. 피가 멈추지 않아.'

그녀의 손을 움직이게 해 베리드의 심장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지금 키마리스를 적신 피는 모두 율리아의


목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녀의 마력 저항을 뚫고 치료할 수 있는 건 마계에서 가장 강대한 마력을 지닌 바엘뿐이다. 한시가


급했다. 힘겨운 듯 뒤채며 교성을 흘리는 율리아를 그는 더욱 강하게 안아 들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 그의 옷깃이 작은 힘에 붙들렸다. 키마리스가 밑을 내려다보자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그를 맞았다.

"괴로워. 힘들어……."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상, 이상해. 간지러워. 아파."

움찔거린 그녀의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원피스를 걷고 다리 사이를 찾아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았다. 각자 제 살기에 바빠 신경 쓰지 않을 뿐, 사태가 진정되면 분명 율리아를 음욕 어린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키마리스는 스스로의 모순을 깨달으며 비소했다. 이미 그녀를 향해 욕정하고 있으면서.

그는 율리아의 움직임을 억제하듯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무도 당신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아. 조금만 더."

"으응!"

대답인지 교성인지 모를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스쳤다.

이제 곧 왕의 둥지였다. 그가 긴 회랑을 내달리려던 바로 그때, 그의 시야에 바르바토스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그가 전개한 마력이 둥지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바르바토스?!"

"마침 잘 됐군. 이건 나 혼자 안 돼. 당장 아가레스를 데려와, 당장!"


키마리스는 아가레스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새까맣게 타 버린 베리드의 재를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그녀는 마족과 인간 사이에서 결국 인간을 선택해 버린 제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율리아가 살기를 바랐다. 주군이 둥지에 당도했으니 데리고 나가라고 한 것도 그녀였다.

"아가레스는 올 수 없을 거야. 왕은 안에 있나?"

"그래, 폭발이 있고 얼마 안 가 오셨다."

마력 전개에 집중하던 그가 불현듯 눈을 부릅떴다. 피에 푹 젖은 율리아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무슨, 열쇠는 왜 이런 거지?"

"왕에게 가야 해. 이분을 살리려면……."

"미쳤나?! 이제껏 이런 상태의 주군은 본 적 없다. 마력 저항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몰라도 들어가면
열쇠도 너도 죽어!"

고함을 내지른 바르바토스의 눈에, 열쇠는 몰라도 너는 틀림없이 죽을 거란 단언이 쓰여 있었다.


키마리스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상관없어."

"뭐?"

"왕이 안에 있다면 그걸로 됐어."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 그의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쳤다.

악마의 수명이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아득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의 흐름을 망각한 채 멈춰


서기도 했다. 인간들은 단지 오래 사는 것을 질시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알지 못했다. 잊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 삶이 얼마나 끔찍한 저주인지.

'당신을 용서할게요.'

과거를 용서하지 못한 채 부유하던 자신을, 이 작은 목소리가 붙잡아 주었다. 기적과 같은 구원…….

만약 악마에게도 구원자가 있을 수 있다면, 그건 오직 율리아 브에스드라였다.

안광을 빛낸 키마리스는 바르바토스가 채 붙잡기도 전에 돌풍을 뚫고 방어진 밖으로 나갔다. 칼날에


베이는 듯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그는 율리아를 품 안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들여 지킬 뿐이었다.

이윽고 다다른 마왕의 둥지, 반쯤 깨져 나간 문 건너편에 거대한 날개를 펼친 바엘이 쓰러져 있었다.
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탑을 마주 보고 있는 벽면이 모조리 뜯겨나갔다.

피 웅덩이 사이 누워 있는 그는 의식이 없어 보였다. 단지 마력의 잔재만으로 성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다.

소름 끼치는 사실이었지만 키마리스에겐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바엘이 의식을 잃었다는 건 율리아의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25 화

"……."
결심을 굳힌 그가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던 그녀를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키마리스가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무릎 꿇자 그녀의 다리가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아까보다 한결 이완된 율리아의 손이 다시금 다리 사이로 향했다. 이번엔 키마리스도 그것을 막지 않았다.
원피스를 끌어 올린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벅지 언저리를 맴돌았다.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근처에 있다는 건 알지만 차마 직접 손을 대지 못하는 눈치였다.

"율리아 님, 어째서?"

"으응……."

그녀는 이미 마왕과 관계를 가졌다. 폭주하던 왕의 마력을 매번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지 않았던가.

가쁘게 헐떡이는 얼굴과 허벅지 근처를 하염없이 배회하는 손가락, 그것을 뚫어져라 보던 키마리스의
눈빛이 이내 당혹감에 물들었다. 깨달음은 찰나였지만 그 충격은 컸다.

그의 시선이 다시금 피 웅덩이 속 바엘에게 향했다. 왕을 노려보는 그의 표정에 찰나의 원망과 작은


안도감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아파……."

그가 잠시 시선을 돌린 새 율리아는 손톱을 세워 제 허벅지 주변을 긁어내리기 시작했다. 붉게 달아오른


피부가 너무도 괴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막던 키마리스의 하체 역시 당장이라도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었다.

그는 마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율리아."

그녀의 손아귀에 목숨줄처럼 붙들려 있던 원피스가 찌익, 너무나 손쉽게 반으로 갈라졌다. 발갛게
달아오른 나신이 그의 눈에 속속들이 들어왔다.

섬세한 공예품을 만지듯 여체를 목덜미부터 천천히 쓸어내리던 그의 손바닥이 이윽고 율리아의 다리
사이에 다다랐다. 이미 푹 젖어서 축축해진 속옷 위를 손가락을 세워 조심스럽게 덧그렸다. 비부가 울컥,
경련하더니 진하게 젖어 든 부위가 좀 더 넓어졌다.

침대 밖으로 축 늘어진 율리아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녀의 허벅지 사이, 바닥에 무릎 꿇은 키마리스의
시선이 축축이 젖은 안쪽으로 향했다.

속옷을 벗겨내자 붉고 통통하게 무르익은 둔덕이 그의 시야에 곧장 들어왔다.

"율리아."

그는 자꾸만 오그라드는 허벅지를 활짝 벌렸다. 꼭 다물렸던 입구도 덩달아 빠끔 속살을 드러냈다.


키마리스는 마치 키스하듯 그녀의 음순에 입을 맞췄다. 긴장으로 메마른 입술이 그녀로 인해 푹 젖어 갔다.

"으앙! 아, 아!"

뾰족하게 세운 혀가 꽉 다물린 질구 근처를 살살 쓸고 갈라진 곳을 위아래로 훑었다. 엄지손가락으로는


점점 부풀어가는 음핵을 빙글빙글 돌렸다.

키마리스의 머리 위에서 들리던 신음에 달큰한 교성이 섞였다. 그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라졌다.


"사랑스러운 나의 주인님."

"아, 아앙, 앗!"

그는 비부에 입술을 맞댄 채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자극받아 울컥, 쏟아지는 액을 감미롭게


빨아들이며 미끈하게 젖은 혀를 갈라진 틈 안으로 집어넣었다. 좁고 뜨거운 내부가 첫 침입자를
맞아들이며 바르르 경련했다.

키마리스는 감로수를 마시듯 경련하는 내부로 혀를 더욱 들이밀었다. 가느다란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깊이
파묻고 키스하듯 내벽을 샅샅이 훑고 강하게 빨아들였다.

"아응, 하악……."

율리아는 고작 혀 하나에도 버거워 신음했다. 헐떡이던 그녀의 숨이 간헐적으로 끊어졌다. 키마리스는


음핵을 굴리던 손을 떼어 그녀의 가슴으로 올라갔다.

그는 꼿꼿이 선 유두를 자극적으로 꼬집으며 속삭였다.

"율리아, 숨 쉬어요."

"……."

"율리아."

"아!"

혀를 쑥 찔러 넣어 깊숙한 곳에 다다르자 막힌 숨이 터지듯 내뱉어졌다. 키마리스는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거칠게 그녀의 유두를 비비고 긁어냈다. 만족감 섞인 한숨이 연달아 새어 나오며 그녀의 밀부가 더욱
질척하게 젖어갔다.

마시고 싶다. 더 많은 것을. 과실주처럼 달큰하고 감미로운 그녀의 물을.

그가 욕망하는 동안 율리아의 허벅지를 움켜쥔 손아귀에도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정도로 활짝 열린 엉덩이가 침대에서 높이 뜨였다. 키마리스 역시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맡에
한쪽 팔을 지탱한 채 몸을 숙였다.

뜨거운 혀를 잃은 비부가 갑작스러운 한기에 바르르 떨었다. 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키마리스가
율리아의 목덜미에 입 맞추려는 순간이었다.

쿵, 쿵.

율리아의 마력 저항 탓에 잠시 약해진 듯하던 바엘의 마력이 다시 요동치듯 성을 울렸다. 거대한 침대


기둥이 굉음을 내며 뽑혀 나감과 동시에, 키마리스는 율리아를 보호하려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때였다.

"비켜라."

이성을 날려 버린 듯 눈이 풀린 바엘이 둘을 흉흉한 안광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마리스의 벗은 등을


보며 미간을 구기던 그의 시선이 이내 그의 밑에 깔려 헐떡이는 율리아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바스락거리며 교성을 흘릴 때마다 바엘의 눈초리 역시 더욱 날카로워졌다.

"안 됩니다."
"비켜."

"당신께 이분은 그냥 열쇠일지 모르겠지만, 제겐 오직 하나뿐인 주인입니다."

바엘의 입꼬리가 위협적으로 비틀렸다.

키마리스는 바엘이 결코 두 번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비 따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역시.

하지만 이대로 율리아를 빼앗긴다면 그녀는 더욱 큰 위험에 처할 것이다. 이성을 잃은 왕이 그녀에게 어떤


끔찍한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바엘의 눈이 샐쭉 휘었다. 그 순간, 마력에 의해 옴짝달싹 못 하게 붙들린 키마리스의 팔과 다리가


하나씩 잘려 나갔다. 마지막 팔 하나만을 남겨 둔 상황에서도 고통을 억누르며 끝까지 율리아를 지키던
그의 몸이 이윽고 바닥으로 강하게 내쳐졌다.

"윽, 커억……!"

"거기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 너와 썩 어울리는 자리군."

바엘은 그를 끝까지 노려보며 율리아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보란 듯 잡아챘다. 작은 뒤통수를 들어 올린


그가 곧장 율리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바엘은 거추장스러운 상의를 찢어 버린 채 침대 위 율리아의 나신에 올라탔다. 그러곤 율리아에게 입 맞춘


상태로 그녀의 다리 사이를 손가락으로 거칠게 헤집었다.

눅진하게 풀어진 점막이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거부하듯 바르르 경련했다. 바엘의 길고 두꺼운 손가락이
비좁은 내벽을 강하게 쑤시며 자리를 넓혔다. 그녀의 심장에 새겨진 인이 흐릿한 붉은 빛을 냈다.

"아응, 흣! 아파!"

"바엘……!"

아프다는 말 한 마디에 분노한 키마리스가 피 끓듯 절규했다.

바엘은 제 것에 욕망하는 키마리스의 존재가 불쾌해졌다. 그의 등에서 흘러내린 긴 머리칼과 거대한


날개가 키마리스의 시야로부터 새하얀 여체를 완전히 차단시켰다. 다만 키마리스에게 허락된 건 괴로운 듯
침대 시트를 마구 긁는 작은 발가락뿐.

거대한 날개로 만들어진 완전한 새장 속에서, 율리아의 하늘색 눈동자가 저를 가둔 이를 올려다보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어미를 따르는 어린 새처럼, 양팔을 활짝 벌린 그녀가 바엘의
목덜미를 쓸었다.

"더 해 주세요……."

"……."

"긁어 줘."

성행위의 개념이 없는 율리아는 제 다리 사이를 헤집어 쾌락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행동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가려운 곳을 긁는 것처럼, 욱신거리고 뜨거운 내벽을 긁어서 자신의 괴로움을 해소할 수
있다고.

"나의 열쇠가 원한다면야."

아쉬운 듯 맞붙은 입술을 느릿하게 뗀 바엘이 손가락 하나를 더 쑤셔 넣었다.


찌걱찌걱, 손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질수록 시트를 긁던 그녀의 발끝 역시 가느다랗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끝까지 처넣을 때마다 예쁘게 부푼 음핵이 손바닥에 착착 맞붙었다. 양쪽에서 동시에 가해지는
쾌락에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리를 튕겼다.

바엘은 그런 그녀의 아랫배를 꾹 억눌렀다.

"내 허락 없이 가면 안 되지."

"긁어 줘. 긁어……."

그녀는 더 해 달라며 젖은 목소리로 울먹였다. 그 가느다란 애원에 바엘의 성기가 하의를 들어 올리며
단단히 발기했다.

허리에 두른 로인클로스를 내버리자 흉흉하게 선 남근이 곧장 튕겨 나왔다. 굵은 핏줄이 툭 불거진 성기는


이미 선단에서 흘린 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율리아는 혼곤한 시야 너머 자꾸만 제 음부를 건드리는 살덩어리를 내려다보았다. 사내 팔뚝만 한 물건이


가랑이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와중에도 그녀의 표정이 두려움에 물들었다.

"아, 안 들어가."

"해 달라고 한 건 너야."

"소, 손으로, 응!"

바엘이 그녀의 안에서 손가락을 거칠게 빼내자 율리아의 목이 뻣뻣하게 뒤로 젖혀졌다. 가벼운 절정에
올랐는지 움직임도 숨도 모두 멈춘 채 작은 가슴을 부풀렸다.

그는 율리아의 허벅지를 활짝 벌리고 입구에 선단을 맞췄다. 반이나 들어갈까 의심될 정도로 작은 구멍이
방금 빠져나간 것을 찾아 빠끔거리고 있었다.

바엘은 겁먹은 듯 슬금슬금 위로 올라가는 율리아의 허리를 잡아 밑으로 끌어내렸다. 저항하듯 시트를
움켜쥐었지만, 속절없이 끌려온 그녀의 질구가 바엘의 물건과 바로 맞닿았다.

도리질치는 그녀와 달리 다리 사이는 기대감에 젖어 투명한 액을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었다.

"아, 안 돼…… 아!!"

"크윽."

바엘은 두툼한 귀두가 맞춰지자마자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거대한 성기가 그녀의 구멍에 곧장
짓쳐들어왔다. 신음도 내지 못한 율리아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안을 가득 채운 것이 버거워 호흡조차
하지 못하고 눈을 홉떴다.

이미 잔뜩 젖어 눅진해진 질구가 바엘의 물건을 받아들이려 한껏 입을 벌렸다. 찢어질 듯 팽팽하게 벌어진


결합부를 바엘은 일그러진 미간으로 훑었다. 액이 부족하지는 않으니 단지 크기의 문제였다.

"힘 풀어."

"꺼내, 꺼내……!"

바엘은 도리질 치며 움찔거리는 나신을 강하게 억눌렀다. 고작 반절 들어갔는데 좆이 끊어질 것 같았다.


자꾸만 안으로 쳐들어오려는 것을 밀어내듯, 내벽이 꽉꽉 조이며 되레 비좁게 오그라들었다. 바엘의
어금니가 뿌득 갈렸다.

"협조적으로 나오는 게 좋을 거야."

심장에 새겨진 인의 영향은 율리아만 받는 게 아니었다. 주술의 시전자인 바엘 역시 뇌가 곤죽이 될 듯한


쾌감에 휩쓸리고 있었다. 협조하라는 그의 제안은 정말로 끝까지 쑤셔 넣기 전의 마지막 배려였다.

자신을 향한 위협을 깨달았는지 율리아는 혼몽한 와중에도 숨을 크게 헐떡였다. 몸이 반으로 찢기는 듯한


압박감 속, 미미하게 고개를 치켜든 열락을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바엘도 그에 맞춰 율리아의 여리고
미성숙한 가슴을 손바닥 전체로 훑었다.

작은 돌기가 거친 손바닥 아래에서 이리저리 굴려진다. 선단에서부터 퍼진 열기가 뱃속을 찌르르하게


울렸다. 율리아의 입에서 다시금 애처로운 교성이 흘렀다.

그녀의 내벽이 조여지자 바엘의 입에서도 버티지 못하고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에게 바짝 들러붙은 내벽은 눅진하고 뜨거우며 습했다. 이것이 좆을 전부 감싸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엘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조금 뺐다가 다시금 짓쳐 올렸다. 액이 덕지덕지 발린 물건이 비부의 틈새로
미끄러지듯 깊숙이 파고들었다.

26 화

덜덜 떨리는 율리아의 복부에 푹 꽂힌 남근의 형태가 선연히 드러났다. 바엘은 유두를 희롱하던 손바닥을
아랫배로 옮겨 튀어나온 곳을 꾹 눌렀다.

"아, 흣!"

파드득 몸을 뒤튼 그녀가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다리로 애써 발버둥 쳤다. 침입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위쪽으로 조금씩 기어 올라갔다.

그 모습을 가만 내려다보던 그는 성기가 반쯤 빠져나갔을 때 다시 그녀의 허리를 잡고 밑으로 강하게


내려쳤다.

"……!"

바엘과 율리아는 뒤통수를 내려치는 듯 묵직한 쾌락에 숨을 멈췄다. 마찰부에서 번져 나간 전격이 온몸을
잘게 관통하며 빠져나갔다. 말초를 구성하는 신경 하나하나가 뜨거운 불에 지져지고 타들어 갔다. 아득히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들의 이성은 여기서 끊겼다. 아무런 생각 없이, 바엘은 그저 쾌락을 좇아 세찬 허릿짓을 시작했다. 온
복부와 허벅지에 철퍽철퍽 투명한 물이 튀었다.

하체가 반쯤 들려 정신없이 흔들리던 그녀의 작은 손이 무심결에 제 허리를 붙든 바엘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의 안을 가득 채우던 물건이 더더욱 커져 온 장기를 압박했다.

두툼한 흉기가 내벽을 사납게 긁어내는 감각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녀의 안에서 울컥, 무언가 따뜻한 게
흘러나옴과 동시에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앙! 아, 아! 응!"

"큭!"

율리아는 습득이 빠른 편이었다. 아까 키마리스가 제 음핵을 굴려 줬을 때의 쾌락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엔 헤매지 않은 손가락이 제대로 된 곳에 곧장 자리 잡았다. 양손으로 그곳을 꾹꾹 누르는데 바엘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낮아졌다.

"다른 사내에게서 배운 걸 쓰면 안 되지?"

"싫어……!"

바엘은 그녀의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결박하고, 나머지 손으로 통통하게 달아오른 돌기를 강하게
문질렀다. 열락에 흐느끼던 율리아의 입에서 높다란 비명이 터지자 바엘의 얼굴에도 제법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래, 이렇게."

"하윽, 아앙!"

"아주 좋아."

바엘의 혀가 메마른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하지만 위쪽과 달리 하체는 정신없이 쑤셔지고 내뱉어졌다.
두툼한 귀두가 내벽을 주욱 긁어 내릴 때마다 율리아의 비명은 점점 커지고 높아졌다.

그녀가 몇 번이나 절정에 달했을까. 드디어 바엘의 허리가 점점 빠르고 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침대가 삐걱대는 소음이 폐허가 된 둥지를 가득 울렸다.

"흐아, 제발, 아! 빨라, 아……!"

꿰뚫린 채 빠르게 비벼지는 곳에서 부글부글 포말이 일었다. 율리아는 결국 거대한 쾌락의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놓았다.

힘이 빠진 채 축 늘어진 여체는 바엘의 거대한 물건을 한결 움직이기 쉽게 만들었다. 혼절한 와중에도


움찔거리는 허리를 꽉 붙든 채로 그는 마지막 속도를 높였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그의 좆이 꿈틀거렸다. 더욱 깊은 곳으로, 질척하고 습한 구멍의 가장 깊고


순결한 곳까지 헤집기 위해.

"윽!"

이윽고 그의 허릿짓이 멈췄다. 퍽퍽 맞붙던 살갗도 질척하게 튀던 물소리도 일시에 끊겼다.

그가 파정한 씨물이 율리아의 좁은 내벽을 가득 채워갔다. 더는 쏟아 부어질 공간이 없어 구멍 밖으로


액이 질질 새어 나올 때까지.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끔찍하게도 쾌락적인 전율이었다. 바엘의 붉은 눈동자가 지옥의 내핵처럼


시커멓게 물들었다.

"……."

흐릿하게 감은 율리아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도로록 흘렀다. 새하얀 시트에 연분홍빛 핏물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 * *

율리아는 다리 사이에 차마 말로 하기 힘든 작열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부옇게 말라붙었던 시야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선명해졌다.

"으응, 여기 어디……."
밤새 비명을 내지른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머리맡을 짚고 힘겹게 일어서려던 그녀가 도로 풀썩
엎어졌다. 허리의 둔통으로 온몸이 잘게 쪼개지는 듯했다. 괴로움에 바르작거리던 율리아가 불현듯
멈칫했다.

'어젯밤 베리드의 방에 갔었는데, 왜 이곳에 돌아와 있지.'

기억이 고장 난 필름처럼 조각조각 나뉘었다. 그가 준 포도주를 마셨는데 사실은 안에 약이 들어 있었고,


도망치려던 와중에 단검을 발견했는데 탑에서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서…….

"윽."

율리아는 생각을 멈췄다. 양손이 붉게 물든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질기게 들러붙어 아무리 박박 닦아도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다만 모든 기억의 끝에 그가 있었다. 칠흑의 새장 속 형형하게 번뜩이던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시야 상단의 아이콘이 점멸하는 게 보였다. 들어가 보니 새로운
알림을 나타내는 붉은 점이 선택지마다 전부 찍혀 있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STATUS ° (스탯)

▷PROGRESS ° (진행도)

▷SKILL ° (스킬)

▷ITEM ° (아이템)

▷SETTING ° (설정)

어젯밤의 사건이 스토리 진행에 큰 영향을 미친 게 분명해 보였다. 율리아는 아이콘을 확인하기 전 재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따란 침실엔 오직 그녀 혼자만이 덩그러니 눕혀져 있었다. 다만 바엘은 나태한 성격이라 어딜 가더라도
둥지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았고, 바르바토스도 생각보다 자주 이곳을 들락거렸기 때문에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율리아는 우선 진행도부터 눌렀다. 어제 의식을 잃기 전, 바엘 공략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에피소드가


떴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SYSTEM

스토리 진행도 20%]

[마계를 통일한 최초의 군주, 대악마 바엘(Ba'al)]

전에 봤을 때 3%였으니 정확히 17%가 올랐다. 엔딩 분기점에 다다르려면 앞으로 80%의 스토리를 더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 같은 일만 계속된다면 그때까지 자신이 살아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어찌어찌


엔딩에 도달하더라도 이후엔 어떻게 되는 건지 아는 바가 전무했다. 이제껏 상황에 휩쓸리느라 제대로
생각할 여유가 없던 탓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실패 페널티는 죽음이지만 자신은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지금은 일단 시스템의 요구에 협조해서 스토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짓이라도.

'의식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어젯밤 이곳에서…….'

그녀의 의식이 자꾸만 욱신거리는 다리 사이로 향했다. 다음으로 이어지려는 상념을 율리아는 고개를
내저어 털어 냈다.

인게임에서 공략 대상의 호감도 수치를 확인하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최종장에 다다르면 플레이 과정에서
쌓아온 스탯과 호감도를 조합해 엔딩의 종류가 나뉠 뿐이었다.

현실 세계에 있었다면 치트 프로그램이라도 돌렸겠지만 이런 상황에선 어림없는 소리였다. 시스템에 따라


엔딩까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엔 없었다.

할 수 없는 일에는 크게 미련을 두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음으로 SKILL 을


클릭했다. 그녀의 눈앞에 금빛의 거대한 나무가 피어났다.

'이건 뭐지. 뿌리가 살아났어?'

어제 봤을 땐 스킬트리가 전부 비활성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뿌리 부분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이파리 모양의 스킬 포인트가 3 개 생겨났다.

그녀는 화면을 확대했다. 각 나뭇가지마다 특화할 수 있는 능력치가 달랐는데, 기본 스탯을 올려주는


종류도 있었지만 게임의 메인 스토리가 '마정석의 열쇠'이니만큼 항마력과 관련된 스킬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캐릭터 특성을 결정짓는 선행 스킬은 전부 확인이 가능했다. 하지만 트리의 최상단에 있는 궁극기는
자물쇠가 걸려 있어 현 상황에선 열람할 수 없었다.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일단 뒤로 이동해서 이번엔 ITEM 을 클릭했다.
원래 텅 비어 있던 화면에 물품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율리아는 그것의 설명을 눌렀다.

[▷마력을 두른 단검

대공 아가레스의 강력한 마력이 담겨 있는 단검. 사용 기회 1]

"어라……."

율리아의 얼굴이 의문에 물들었다가 불현듯 굳었다. 아가레스의 유독 자상한 목소리가 뇌리에 스쳤다.

'나의 마력을 실은 검이야. 이걸로 베리드의 심장을 찔러. 그럼 이후의 일은 내가 처리해 주마.'

드문드문 끊기는 기억 속에서 베리드의 심장을 곧장 찌른 제 손이 보였다.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지더니


이내 잿가루처럼 까맣게 변해가던 그의 몸도.

'내가 죽였어? 정말로?'

율리아는 퍼뜩 손을 내려다보았다. 상처 하나 없이 하얗고 마른 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허벅지에 벅벅 문질렀다.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적막한 침실을 가득 메웠다.

그를 죽여야 했다는 걸 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쯤 분노한 바엘과 악마들의 손에 갈가리 찢겨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죽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두렵고 끔찍했다.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 악마성에 내팽개쳐져, 결국엔 '나'라는
실낱같은 자아마저 모두 잃고 그저 이 비현실적인 세상의 일부가 되어 버릴까 봐.

아니, 이미 약하다는 핑계로 키마리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베리드의 심장을 찌른 시점에서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나, 어떡해……."

율리아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녀는 손을 닦던 움직임도 멈춘 채 고개를 떨궜다.


새하얀 시트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첫 살인의 죄책감과 그에 따른 인간 실격에 대한 걱정 중 후자 쪽이 훨씬 무겁게 느껴지는 스스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두려워졌다.

몸을 작게 웅크린 채 고개를 파묻은 그녀의 턱이 갑자기 홱 들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바엘이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편엔 바르바토스와 레라지에가 서
있었다.

"어딜 보는 거지."

"네?"

사정을 모르는 율리아가 눈만 깜빡이는데,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을 붙든 그의 손가락에 닿았다.


그것을 발견한 바엘의 안광이 서슬 퍼렇게 내려앉았다. 위험하다는 직감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함께 밤을 보냈는데도 가까워지기커녕 전보다 더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도 그가 화를 내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고…….

부담스러움에 시선을 피하려는 율리아를 바엘이 강하게 붙든 찰나, 레라지에가 침대 발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긴 다리를 우아하게 꼬더니 눈매를 샐쭉 휘며 바엘을 응시했다.

"뭐지?"

"계속하십시오, 주군. 저는 그냥 구경꾼이니까요."

"……."

"저는 음욕과 쾌락이 그득할 만한 곳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만."

레라지에는 제가 관장하는 영역을 읊으며 편하게 턱까지 괴었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하더라도 바엘은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으리란 걸 레라지에라고 모르지 않을 텐데.

그의 반짝이는 두 눈이 바엘과 율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웃기지도 않은 짓을……."

바엘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율리아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러더니 홱 몸을 돌려 침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바르바토스가 그런 그를 다급히 뒤따랐지만 레라지에는 여전히 남아 율리아를 응시했다.

27 화

"흐응."

"왜 그러세요?"
"나도 너랑 해 보고 싶다. 엄청 기분 좋을 것 같아. 하지만 그랬다간 주군한테 죽겠지."

"……!"

율리아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방금 레라지에가 했던 말뜻을 이해한 것이다. 음욕과 쾌락이 있을 만한


곳을 본능적으로 느낀다고.

'설마, 바엘이 방금 또 정사를 치르려고 한 거야?'

그녀는 퍼뜩 침대 시트를 내려다보았다. 지난밤의 난리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빳빳하고 깨끗했다.


목에 있던 검상 역시 말끔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시트 아래 있는 몸은 여지없이 나체였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기분 좋게 훑으며, 레라지에가 싱긋 웃었다.

"응, 뒤처리는 내가 다 했지."

"네?!"

"주군이 그런 번잡한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나한테 고마워하는 게 좋을걸?"

율리아는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차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당시의 기억이 제대로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분명 엄청나게 흉한 꼴이었을 텐데, 그걸 생판 남에게 고스란히 보였다고 생각하니 수치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멍하니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를 보며 킥킥 웃던 레라지에가 뒤늦게 덧붙였다.

"방금 그건 농담. 주군의 독점욕이 얼마나 강한데."

"……."

"하지만 전부 거짓말은 아냐. 형이 아니었다면 키마리스는 지금쯤 죽었을 테니까."

싸늘하게 식어 가던 그녀의 표정이 키마리스의 이름을 들은 순간 어색하게 굳었다.

애초에 악마가 사실을 순순히 털어놓을 거라 기대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말을
들으니 차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런 장관이 또 없더라. 그 자리에 그딴 녀석 말고 내가 있었으면 제대로 즐겼을 텐데."

단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사실 베리드를 죽인 후의 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미칠 듯


강렬했던 쾌락만이 뇌리에 깊이 새겨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새겨 놓은 이가 아마 바엘이란 것 정도.

율리아는 새하얀 시트를 코 바로 아래까지 쭈욱 끌어당기며 물었다.

"키마리스 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아, 별건 아니고. 팔다리 잘려서 죽어 가는 거 수습해서 감옥에 가둬 놨지. 눈이 완전히 돌아서는


주군한테 덤비려고 난리를 부리는데, 어휴."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가 안 되는 일투성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이가 팔다리는 왜 잘렸고, 또


어째서 바엘한테 덤비려고 했단 말인가.

다만 레라지에의 말을 들을수록 확실해지는 한 가지는, 키마리스가 자신을 위해 그런 일을 벌인 것 같다는


직감이었다.
'인간인 내가 선처해 달라고 나서면 상황은 더 악화되겠지.'

아무리 마족들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더라도 마계에서 자신은 어디까지나 외부인일 뿐이었다. 그런 자신이
함부로 나섰다간 감옥에 있는 그를 되레 궁지에 몰아넣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나마 경이로운 회복력이
있으니 팔다리는 원래대로 돌아올 거란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게다가 베리드가 죽은 후, 아가레스가 자신의 진짜 정체에 대해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신경 쓰였다. 자칫


잘못했다간 사실을 숨겨 준 레벤나와 키마리스에게까지 해가 될 수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끝까지 주변에 폐만 끼치는구나…….'

그녀가 자책하며 힘없이 어깨를 웅크리는데, 레라지에가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찼다.

"뭐야, 다 듣고도 생각보다 얌전하잖아."

"무슨 말씀이세요."

"형이 너 뛰쳐나가지 못하게 잘 감시하라고 했거든. 네 그 성격에 사정을 들었다간 틀림없이 뛰쳐나갈
텐데, 그럼 이번에야말로 키마리스는 죽는다고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바르바토스가 말하지 말라고 했던 걸 자신에게 나불거리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체력이 바닥나 SIGHT 를 못 쓰는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는 이렇게 막 나가도 괜찮은 걸까.

'어쨌든 나서지 않는 게 정답이었구나. 키마리스 님, 괜찮아야 할 텐데.'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했다. 조금만 잘못 선택해도 나락으로 떨어진다. 게임이었다면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었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날 선 적의와 목숨의 무게가 피부에 직접 느껴지는, 명백한 현실.

"아, 이거 먼저 말해야 하는데. 레벤나는 지금 인계에 갔어. 너 몸보신시킨다고."

"네에……."

"너 쓰러져있는 동안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 인간 하나 때문에 마계가 뒤집히다니, 구경하는 입장에선


재밌었지만 두 번은 싫어. 그러니까 처신 잘해."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레라지에는 온갖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그의 말을 정리해보자면


베리드가 죽은 후, 아가레스는 그녀가 지닌 정치적 권력을 이용하여 마계의 기록을 아예 고쳐버렸다고
했다.

에스델 브에스드라가 열쇠라는 건 주군이 꾸민 거짓말이다. 바엘은 처음부터 열쇠가 '율리아


브에스드라'라는 걸 알고 있었으며, 다만 진짜의 신변에 위협이 생길 것을 대비해 에스델을 그녀의
방패막이로 내세웠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현재 율리아가 열쇠라는 것이 확실시된 상황이고 바엘 또한


아가레스의 발언을 묵인했다.

베리드의 죽음을 비롯해 사정을 전부 아는 소수의 고위급 악마에겐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율리아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진짜 이름을 찾게 되었다.

"그나저나 너 이번에 큰일 했더라? 무려 주군의 그 미친 폭주를 진정시키고? 이번엔 진짜 끝장났다고


생각했어. 영토를 거느리는 삶도 나쁘진 않았지만, 사실 난 지금이 더 좋거든."

"……."
"너한테 나름대로 빚을 졌어. 갚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다가온 레라지에의 손가락이 그녀의 발그레한 뺨을 자연스럽게 훑고 내려갔다.

그가 시트를 움켜쥐는 모양새를 보니 '갚을 기회'란 게 딱히 달가운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율리아는


엉덩이 걸음으로 슬금슬금 물러나며 말을 돌렸다.

"이렇게 저한테 다 말씀하셔도 괜찮은 건가요? 바르바토스 님이 말하지 말라고 했다면서……."

"설마 형이 나를 벌하겠어? 이 레라지에를?"

"두 분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물론이지. 형이랑 나는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눈을 떴다고. 마계에서 이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 넌


모르겠지."

모르는 것은 맞았지만 딱히 궁금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율리아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고,


레라지에는 만족한 듯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풀어놓고는 심심하면 얘랑 놀라면서 낯익은 어린 늑대를 휙
던져주고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율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어."

"낑?"

"아냐, 아무것도."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수를 바닥에 앉혀놓고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그녀는 모르는 사실이 둘 있었으니 레라지에는 방을 나간 직후 바르바토스에게 크게 혼나 마계


변방으로 쫓겨났고, 율리아의 아이템 창엔 '레라지에의 갚을 기회'라는 별 쓸데없는 물건이 하나 더
생성되었다는 것이었다.

* * *

바엘의 발소리가 적막한 홀을 울렸다. 어깨에 대충 걸친 로브가 대리석 바닥에 길게 끌렸다.

그의 굳은 표정엔 일말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느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바엘의 머릿속엔
이상하게도 눈물이 가득 찬 눈동자가 슬금슬금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더 해 주세요…….'

감당하지 못할 쾌락으로 덜덜 떨리던 허벅지. 잔뜩 상기된 뺨과 열에 들뜬 숨. 요사스럽게 벌려진 붉은


입술.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고 빠져들었다. 불쾌하게 날뛰던 마력이 가라앉고 의식을 되찾은 뒤에도 바엘은
열쇠의 가녀린 몸을 끊임없이 탐했다. 더 울리고 싶었고 훨씬 괴롭게 만들고 싶었다. 헐떡이며 높은
비명을 내지르는 목소리가 듣기에 제법 기꺼웠다.

하지만 왜일까.

'나, 어떡해…….'
그날 밤과 똑같이 울고 있는데도 삽시간에 기분이 바닥을 쳤다. 보기 싫어서 억지로라도 입을 다물게 만들
생각이었다. 다른 놈이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그랬을 거다.

그런데 여자의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한 번쯤은 눈감아 줄까 생각하게 되는 스스로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변덕에 휩쓸린 적은 많았지만 그 결과가 죽음이 아닌 다른 걸로 끝난 기억은 여태껏 없었다.

'왜지.'

자신은 마족이고 그녀는 열쇠라서? 설마하니 이 몸에 흐르는 붉은 마력이, 증오스러운 마신의 파편에
저도 모르게 이끌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바엘의 안광이 맹수처럼 사나워진 그때, 그를 뒤따라온 바르바토스가 급하게 외쳤다.

"주군!"

달려오는 그의 머리칼이 답지 않게 흐트러졌다. 바엘의 걸음이 평소보다 훨씬 빨랐던 탓이었다. 그는


얼핏 무언가에 쫓기는 이처럼 보였다. 왕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였지만 바르바토스는 그렇게 느꼈다.

어쨌든 그는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도대체 탑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

"다른 악마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저는 분명히 느꼈습니다. 마정석에서 평소와는 다른 파장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주군께서 그리 크게 폭주하신 것 아닙니까?"

바엘의 폭주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마계의 유일무이한 왕, 위대한 정복자 바엘은 마족의 본능에 따라 더
큰 마력을 원하고 있었고 그 끝엔 마신의 힘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그의 침실 앞에 줄곧 서서, 성에 가는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몰려드는 마력의 폭풍을 막아 내며 몸소 느꼈다.

"평소에는 열쇠랑 접촉만 해도 마력의 증폭이 잦아들었는데, 이번엔 밤새도록 꼬박 색사를 벌여서야 겨우
진정되시지 않았습니까!"

그제야 바엘이 걸음을 멈췄다. 바르바토스는 왕의 붉은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끼며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왕의 강대한 기운이 바로 코앞에서 넘실거렸다. 다만 그것은 지금까지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차분하고
안정적이어서, 그릇에 차고도 넘치던 마력이 지금은 온전히 그의 통제 아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열쇠와 단순히 접촉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때 몸이 약한 열쇠가 다 죽어 가지만 않았더라도 주기적으로 권하고 싶을 정도로…….

"확실히 이상했지."

"예?"

"마정석이 움직이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마신의 힘을 흡수하기 위해선 홀 바닥의 마법진을 전부 해제하고 마정석을 제단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탑은 마신을 억제하기 위한 일종의 새장이었지만, 다르게 보자면 그 힘을 온전히 지키기 위한
파수꾼이기도 했다.

바엘의 혼잣말이 질책이라 생각한 바르바토스가 재차 부복했다.

"송구합니다. 열쇠의 사용법은 이 바르바토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기대하지."

입꼬리를 미묘하게 비튼 바엘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바르바토스는 그런 그를 더 이상 뒤따르지 않았다.

28 화

03. 악마성의 침입자

'안 돼요, 안 돼요! 제발……!'

브에스드라 전역에 날 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한겨울이었다. 율리아는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레기온을 온


힘을 다해 쫓았다.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그의 발아래로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그어졌다.

율리아는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죽을힘을 다해 그를 쫓았다. 하지만 레기온을 집어삼킨 거대한 문은


그녀가 간절하게 뻗은 손 너머로 냉정하게 닫혔다.

'열어 줘, 제발!'

굳게 닫힌 문 앞에 주저앉아 그녀는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그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어쩌면 난생처음일지 모를 오열이었다. 그럼에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와 에스델의 표정은 최고급
자기처럼 흠 하나 없이 완벽했다.

율리아의 등 뒤에서 황제가 뭐라 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병사들에 의해 양팔이 결박된 채 하릴없이
질질 끌려 왕의 앞에 내던져졌다.

상앗빛 대리석이 깔린 깨끗한 바닥에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떨어졌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며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1 황녀 에스델 브에스드라가 나섰다.

그녀는 혐오감 섞인 눈빛으로 바닥을 기는 율리아는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못났다지만 황족으로서 기본적인 체통은 지켜.'

'레기온을 살려 줘. 그는 잘못이 없어.'

'잘못이 없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칼바람 부는 바깥보다 시린 눈빛이 율리아에게 곧장 내리꽂혔다. 제대로 된 외투 하나 걸치지 못한 그녀는


가녀린 몸을 더욱 작게 움츠리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소중한 친구조차 구해 줄 수 없는 스스로가 너무나 미워서, 지금 제가 느끼는 고통보다 그가 앞으로


걸어야 할 가시밭길이 더욱 괴로울 것을 알기에, 그저 하염없이 울었다.

하염없이…….

"얘, 율리아?"

"아……."

"입에 안 맞니? 모처럼 인계까지 가서 구해 온 건데?"


"아니에요. 맛있어요."

율리아는 회상에서 깨어나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녀의 눈앞엔 레벤나가 브에스드라의 황도 아벨딧심까지
가서 직접 구해온 산해진미가 한껏 차려져 있었다.

"작은 열쇠야, 이건 뭐니? 인간들 음식도 썩 못 먹을 건 아니네."

"내가 너 먹으라고 가져온 줄 아니? 당장 손 못 놔?"

"작은 열쇠가 원하잖아?"

"으으!"

몇이 둘러앉아도 좋을 거대한 테이블이건만, 아가레스와 레벤나는 율리아를 사이에 두고 바짝 붙어 앉았다.

일의 발단은 율리아가 모처럼 인간계 음식을 보며 옛 기억을 떠올린 데서 시작됐다. 폐궁에 갇혀 살아야
했던 그녀는 때때로 에스델이 귀족 영애들과 함께 식사를 즐기거나 티 타임을 가지며 담소를 나누는 것을
부러워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레이스 테이블보와 예쁘게 차려입은 동갑내기 친구들. 먹는 사람을 위해 한껏 장식된
접시와 즐거운 듯 까르르, 높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폐궁에 웅크리고 앉아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율리아는 만약 자신이 저 사이에 있다면 어땠을까 눈을 감고


상상하곤 했다.

지나가듯 한 이야기였는데, 레벤나는 즉시 사역마를 보내 아가레스를 불렀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내가 잘못 선택했어! 다른 녀석을 불렀어야 했는데!"

"누구, 감옥에 처박힌 키마리스? 주둥이 잘못 놀려 변방에 쫓겨난 레라지에? 아니면 밥맛 떨어지게
바르바토스라도 부를까?"

"몰라!"

레벤나는 볼을 잔뜩 부풀리더니 율리아의 접시에 이것저것 음식을 올렸다. 율리아의 기준으론 온종일 꼭꼭
씹어먹어도 벅찰 양이었지만 아가레스는 부족하다는 듯 다른 접시까지 끌어왔다.

이제껏 율리아가 봐왔던 것과는 조금 다른 만찬회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행복했다.

"천천히 주세요. 저 다 못 먹어요."

"괜찮단다? 못 먹겠으면 남기려무나?"

"그래도 모처럼 멀리까지 다녀온 건데……. 음, 전부 먹어볼게요!"

율리아는 두 눈을 굳게 빛내며 놓았던 나이프와 포크를 재차 집어 들었다.

악마들 눈에는 깨작깨작 꼭꼭 씹어 먹는 게 썩 성에 차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사실 보존식만 산더미처럼


쟁여 두던 레벤나가 인간계의 제대로 된 만찬을 공수해 온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엔 악마들의 기준으로 마구 먹였는데,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전부 먹은 율리아가 결국 크게 체해


일주일을 꼬박 앓아누웠다. 바엘과 율리아의 다음 색사를 비밀리에 계획 중이던 바르바토스가 이에 크게
분노한 건 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조금씩 먹는 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잘 구워진 양갈비를 작게 잘라서 오물오물 열심히 먹는 모습이 꼭 다람쥐 같았다. 말랑한 뺨을 저도


모르게 찔러 보려던 아가레스는 맞은편에서 눈을 부라리는 레벤나의 모습에 도로 손가락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포기하기 어려운지 쩝,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아가레스

역시 인계 음식보단 그냥 인간이 좋지. 이렇게 작고 보들보들하고 귀여운…….]

체력이 차올랐는지 그간 잠잠하던 시야 기능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어깨를 굳힌 율리아는 재빨리


SKIP 을 누르고 식사에만 열심히 집중했다.

'그래도 스킬을 올렸다고 나름대로 변화가 생겼구나.'

율리아는 긴 고심 끝에 스킬 포인트를 기초 스탯을 올리는데 사용하기로 했다. 항마력 쪽의 스킬들은 거의


대량의 HP 사용이 기본으로 전제되는 탓이었다.

이왕 무한으로 차 있는 유일한 스탯이기도 하고 바엘 공략에 필수적인 요소이니만큼, 율리아는 다른


요소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마력 저항에만 힘을 실었다.

그렇게 체력 풀 게이지를 높이는 데 1 개, 시간당 HP/SP 회복량을 높이는 데 1 개의 이파리를 사용하고,


나머지 하나는 '저항 전이'라는 액티브 스킬에 사용했다.

[▷저항 전이 Lv.1

항마력이 미치는 범위를 일정 시간 넓힐 수 있다. 잔여 체력의 50%를 소모한다. SP 30]

'그래봤자 조금이라서, 아직은 몇 발자국 떨어진 정도지만…….'

상위 스킬로 올라갈수록 그 범위가 점점 더 넓어졌다. 아직 가려져 있는 최상위 스킬은 아마 훨씬 넓은


범위를 사용할 수 있으리라.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아가레스와 레벤나의 열화와 같은 응원 하에 다시금 포크를 집어 든


찰나였다. 응접실 창문 밖으로 얼굴만 아는 몇몇 고위급 악마가 다급히 날아가는 게 보였다.

"어, 무슨 일 있나요?"

율리아의 포크가 멈칫하자 낭패감 섞인 얼굴로 미간을 구긴 두 악마가 그녀의 시선에 다시 해사하게
표정을 폈다. 그들은 창밖을 힐끗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요즘은 뭐 딱히 없는데."

"어디 강력한 악마의 씨라도 태어난 거 아닐까? 주군이 탑에서 크게 날뛰었으니 지하의 마력이 또 한 번
요동쳤을 테지?"

"그래 봤자 우리 72 악마만 하려고."

"그건 그래. 의외로 머리가 좋구나?"

강력한 마족은 처음 눈을 뜰 때 그에 걸맞은 마력의 파장을 흩뿌린다. 호전적인 악마들은 부러 겨뤄보고자


그런 신호를 기다리기도 할 정도였으니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이럴 때만큼은 죽이 잘 맞는 둘이었다. 율리아도 놀란 얼굴을 풀고 배시시 작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들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어, 어……."

"저게 누구야? 레라지에 아니니?"

방금 밖으로 날아갔던 악마들이 실신한 누군가를 업어든 채 귀환하고 있었다. 힘없이 내려앉은 검은 날개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고, 아래로 축 처진 팔다리는 불에 탄 듯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시체나 다름없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악마의 경이로운 회복력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심한 고문을 받아 형체마저 사라졌던 레벤나와 키마리스도 이삼일 만에 원래 모습을 회복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레라지에 님은 14 위의 고위급 악마인데, 어째서?'

가장 먼저 반응한 건 군단장 아가레스였다. 거대한 날개를 펼친 그녀가 율리아의 뺨을 툭툭 쓸었다.

"별일 아니니까 얌전히 있으렴, 작은 열쇠야."

그러면서 레벤나에게 무언가 눈짓을 보냈다.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뒤로한 채, 아가레스는
테라스에서 단번에 날아올랐다.

율리아는 갑자기 식욕이 사라져 버렸다. 피를 봐서도 함께 있던 누군가가 자리를 떠서도 아니었다.

'계속하십시오, 주군. 저는 그냥 구경꾼이니까요.'

'저는 음욕과 쾌락이 그득할 만한 곳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만.'

그때, 긴 밤을 치르고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바엘은 왜인지 자신을 보며 극도로 기분 나빠했다. 턱을


쥐는 손엔 힘이 잔뜩 들어갔고 안광도 흉흉하게 낮아졌다. 여자가 우는 걸 싫어하는 사내가 있으니,
인간이 우는 걸 싫어하는 악마도 충분히 있을 법했다.

'레라지에 님은 나를 구해 준 거겠지.'

위험을 무릅쓰고 바엘의 화를 대신 맞아 준 것이리라.

그녀가 가만 손을 멈추자 레벤나가 그녀의 옆자리로 더 바짝 붙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니? 우리 둘만 있어서 허전하면 보티스라도 부르……. 아니야, 난 대머리가 싫어."

"레라지에 님은 상처 회복 능력이 없나요?"

"아니? 우리 중에 엄살도 제일 많아서 조금만 다쳐도 온 성이 떠나가라 구르는 녀석인데?"

레벤나는 그의 과거사에 대해 신나게 읊다가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그런 레라지에가 전혀 회복이 안 되어


처참한 상태로 성에 귀환할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란 뜻일 텐데, 상황이 이상하다는 암시를 너무 손쉽게
알려 준 것이다.

결국 율리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말없이 레벤나의 눈치를 살폈다. 브에스드라에서 갇혀 지낼 때의 습관이


아직 남아 있는 탓이었다. 그것을 아는 레벤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가자꾸나?"

"괜찮을까요……."
"나는 주군으로부터 너를 가두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단다?"

레벤나의 말을 들은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율리아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방을 나섰고, 마력을


사용해 탁자 위를 말끔히 치운 레벤나가 곧장 뒤를 따랐다.

* * *

마왕성의 거대한 중앙홀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정확히는 레라지에가 내뱉는 저주와 절규가 메아리치며
고막을 날카롭게 찔렀다.

"젠장, 그 인간 뭐야? 뭔데 감히 이 나를!"

"어떻게 된 거지, 레라지에."

"형이 직접 봤어야 해! 그 빌어먹을 인간이, 아악!!"

목 아래부터의 살가죽이 완전히 타 버려 흉측한 몰골을 한 레라지에가 참지 못하고 고통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바르바토스가 그런 동생을 치료하려 마력을 불어넣었지만, 마력 저항과는 다른 느낌의 푸른 파장이 그가


치료되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바르바토스의 미간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한편, 레벤나의 품에 안겨 넓은 성을 가로지른 율리아는 마침내 홀에 다다랐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아가레스와 바르바토스를 비롯한 최고위급 마족이 그의 주변에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29 화

"마계의 입구는 분명 닫혀 있을 텐데, 인간 주제에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안에 배신자가 있는 거 아냐?"

"주군이 직접 닫은 문이다. 아무리 배신자가 있더라도 웬만한 힘으론 어림없어. 아무래도 이번에
개화했다는 인간이 생각보다 대단한 모양이군."

나직이 중얼거린 바르바토스가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마력을 불어넣어도 레라지에의 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계속 이러고 있어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그 인간은 어쨌지?"

"……."

"됐다, 쉬어라."

바르바토스의 질문에도 레라지에는 침묵한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혓바닥 가볍게 놀린 죄로 변방에 쫓겨난
녀석이 입을 다물었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바르바토스가 손짓하자 사역마가 나타나 레라지에를 조심스럽게 들어 옮겼다. 남은 악마들 사이에선


인간이 갑작스럽게 마계에 침입한 목적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계단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율리아는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바르바토스가


레라지에에게 침입자에 대해 물었을 때, 시야 기능으로 그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읽어버린 탓이었다.

[▷레라지에
이 내가 손끝 하나 못 댔어. 고작 스무 살 언저리밖에 안된 코흘리개 애송이한테!]

인간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르면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외모 또한 실제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며,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대륙에 있는 두 소드마스터는 나이가 이백 살이 넘었는데도 고작 30 대
초반의 외견을 지녔다고 들었다.

'이번 전쟁에서 세 번째 소드마스터가 개화했다고 했어. 국적도 신분도 없는, 갓 스무 살이 된 금발의


용사님.'

율리아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진짜 그가 온 건 아니겠지. 설마…….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그녀의 어깨를 레벤나가 톡 건드렸다.

"율리아, 안 가니?"

"아무래도 분위기가……. 제가 끼면 안 될 것 같아요."

"넌 누가 뭐래도 주군의 것인데, 이보다 강력한 비호가 있을지 모르겠구나?"

레벤나는 나름대로 용기를 북돋아 주려 한 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율리아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현재 바엘의 감시를 받는 처지였다.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침대 밖으로 나가 그의 심기를 거스른
벌이었다.

'인간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니 믿을 수 없다. 두고 봐야겠으니 앞으론 내 둥지에서 지내도록 해. 묶여


있기 싫다면 얌전히 구는 편이 좋을 거야.'

그때, 바엘의 흉흉한 표정을 회상하던 율리아의 손끝에 불현듯 핏기가 가셨다. 좋지 않은 가정이 뇌리를
스쳤다.

'침입자가 정말로 레기온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찾아낼 거야. 하지만 그러다 바엘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레기온은 어떻게 되는 거지?'

바엘은 정사를 나눈 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다행히 별다른 강요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해가 진 뒤엔 늘


그의 눈이 닿는 곳에, 둥지 안에 있어야 했다.

바엘의 심각한 마력 폭주를 겪어 본 악마들은 그것을 당연한 일처럼 여겼지만,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상황이었다. 노예처럼 끌려간 황녀가 매일 밤 마왕의 침소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다니.

시야가 갑자기 새까맣게 암전된다. 칼날처럼 살을 에던 추위와 눈 쌓인 하얀 바닥을 붉게 물들이던 피가…


….

'또 그때처럼 될 거야.'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난간을 짚었다. 어느새 다시 평범한 계단 위에 서 있는데도, 그날의


기억이 잔상처럼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마왕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지 아나요?"

"글쎄, 성 안에 기척은 안 느껴지지만 아마 멀리 가신 건 아닐 거란다?"

바엘의 마력은 워낙 거대했고, 그 또한 자신의 강대한 힘을 숨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마들은 그가


있는 곳을 쉽게 유추해 내곤 했다.
레벤나의 답을 들은 율리아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마왕님께 부탁드릴 일도 있고……."

"음, 당분간 마계가 시끄러워질 것 같으니 그편이 안전하겠구나? 그런데 부탁이라니, 나한테 말하면 굳이
밤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않니?"

"아뇨, 정말 별일 아니에요."

머뭇거림은 찰나였지만 눈치 빠른 레벤나는 그것이 제가 들어줄 수 있는 종류가 아님을 알아챘다.


레벤나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율리아의 손을 잡아끄는 것으로 오늘의 짧은 외출을 마무리
지었다.

* * *

넓디넓은 왕의 침소. 그 한구석에 앉은 율리아는 초조한 얼굴로 석양이 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낮에 일찍 돌아온 후로 그녀는 줄곧 바깥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나 바엘이 또 탑에 간 건 아닐까,


다른 누군가가 레라지에처럼 초주검이 되어 돌아오면 어쩌나, 혹은 만에 하나라도 마계의 문을 비집고
들어온 인간이 정말 레기온임을 확신할 수 있는 소식이라도 들려올까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데 해가 질 때까지도 평소처럼 조용하니 안도감이 듦과 동시에 아득한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어지러워……."

맥이 탁 풀려버린 그녀가 등받이에 짧게나마 머리를 기대려는 찰나였다. 복도 밖에서 저벅저벅,


느릿하지만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바엘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픈 티가 나지 않도록 밝은 낯을 꾸몄다. 그가 폭주한 상태가


아니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지금의 부탁이 받아들여질 리 없었을 테니까.

이윽고 문이 열렸지만 안으로 들어선 바엘은 자신을 마중하는 율리아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를 뒤따르던 바르바토스 역시, 마치 그녀가 보이지 않는 듯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설 뿐이었다.

바엘의 겉옷을 받으며 말문을 열어 보려던 율리아는 두 악마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일단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주군, 마계의 문이 열렸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바르바토스는 첫마디부터 폭탄을 던졌다.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인간 몇이 입구를 억지로 비틀어 열려고 하더군. 그래서 열어 줬지."

"직접 열어 주셨다니, 혹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대로 뒀다간 몇 날 며칠을 귀찮게 굴 기세라."

"아아……."

동생이 그렇게 크게 다쳤는데도 바르바토스는 부러 놓아줬다는 왕에게 반발하지 않았다. 되레 그의


통제하에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한 듯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악마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율리아는 상념을 털어내며 둘의 대화에 가만 귀를 기울였다. 바르바토스가 말을 이었다.


"레라지에에게 듣기로 인간의 목적은 이곳, 주군의 성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용사 놀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인데 어떡하시겠습니까."

"개화한 지 얼마 안 된 소드마스터라고?"

"예, 주군."

바엘은 느긋이 방을 가로질러 마신의 탑이 보이는 창가로 향했다. 굳게 닫힌 창문을 손가락 끝으로 툭,
툭 두드린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사지 멀쩡히 오지도 못하겠지만, 만일 온다면……."

찰나의 정적이 지나고, 왕의 무감한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짧은 유희 정도는 즐길 수 있겠지."

"그럼 다른 녀석들이 손대지 못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율리아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실은 레벤나의 사역마를 빌려 레기온에게 당장 인계로 돌아가라고 부탁할


계획이었는데, 상황이 이래서야 근방에 도착하기도 전에 곧장 바엘의 앞으로 끌려오게 생겼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마왕을 무슨 수로 이겨. 어떻게든 도망치게 해야 하는데…….'

그때, 그녀의 눈앞으로 지문 창이 떴다.

[▷바르바토스

아무래도 인간의 목적이 단지 용사 놀이뿐만은 아닌 것 같군.]

눈치 빠른 그는 율리아의 작은 반응만으로도 두 인간 사이의 상관 관계를 직감한 듯했다.

율리아는 이내 사라지는 창을 보며 등허리를 바짝 세웠다. 자신의 탓으로 친구를 지키지 못하는 일은 한


번이면 족했다. 아니, 그 한 번조차 평생을 죄스럽게 여겨야 마땅했다.

바엘과 바르바토스는 짧은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대화를 끝냈다. 침실을 나서던 바르바토스는 때마침


근처에 앉아 있던 율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을 뗐다.

"저……."

"뭐지?"

"제가 들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눈치가 없었어요. 다음부턴 다른 곳에 가 있을게요.


죄송합니다."

바르바토스에게선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숙였던 그녀가 쭈뼛쭈뼛 시선을 드는데, 정작 그는
별 희한한 소릴 다 듣겠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주군과 내 이야기를 듣는다고 네가 뭘 할 수 있지?"

"하지만……."

"어차피 넌 살아서는 성을 나갈 수 없을 텐데, 쓸데없이 경계하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 없지."

율리아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는 고저 없이 냉랭했으나 딱히 그녀의 상처를 후벼 파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다. 바르바토스의 입장에선 말 그대로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그는 점차 흐릿해지는 그녀의
시선을 뒤로한 채 왕의 침소를 나섰다.

문이 닫히고, 율리아는 창가에 걸터앉은 바엘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둥지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여느 때처럼 탑을 응시하고 있었다.

'심장이 또…….'

바엘과 단둘이 남아 있을 때면 각인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듯 기이한 감각을 끌어내곤 했다. 어쩌면 허튼
생각 말고 계약을 완수해내라는 일종의 압박일 수도 있었다.

'나를 마신으로 만들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열쇠로서 달갑고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해.'

'절대 벗어날 수 없어. 너의 몸뚱이,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그의 비소 섞인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율리아는 점점 빠르게 뛰는 심장을 억누른 채 그의 뒤편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몇 걸음을 남겨둔 시점에서 가만 멈추고 그가 뒤돌아보길 기다렸다.

그 역시 작게나마 인의 영향을 받는 눈치였으니 자신이 다가왔다는 건 알아챘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여전히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물었다.

"뭐지?"

"마왕님께 부탁이 있어서요."

나직이 숨을 들이켠 율리아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떼었다. 누구의 눈도 신경 쓰지 않고 레기온과 만날


기회가 필요했다. 그를 인간계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제가 이전에 쓰던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당분간이라도 좋아요."

창밖에 고정된 붉은 안광이 그녀를 향해 느릿하게 움직였다. 단지 말 없는 시선을 받았을 뿐인데도 마치


그의 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이유는."

"피, 피곤해서 혼자 자고 싶어요."

그가 이유까지 물어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바엘에 대해 오래 안 건 아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베리드에게 끌려갔던 날도, 탑의 폭발로 마계가 그 난장판이 됐는데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급하게 갖다 붙인 핑계였지만 나름대로 그럴듯하지 않나 싶었는데, 그의 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구겨졌다.

30 화

"지금도 충분히 혼자 자고 있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율리아는 침대를 돌아보는 척하며 바엘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폭주를 하지 않을 때는 신체 접촉도 필요


없으니, 자연스럽게 침대의 왼쪽 구석이 그녀의 잠자리가 되었다.

사실 말만 구석이지, 체구가 작은 율리아에게 침대는 몇 번을 뒹굴어도 끝이 없을 운동장만 한 크기였다.


바엘이 그 부분을 지적했다.

"아주 편해 보이던데."

"제가 사실 잠자리를 좀 타는 편이라……. 그, 그보다 제가 자는 걸 보셨어요?"

"내 침대 위에서 일어난 일인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나."

"읏."

율리아는 이유도 모르게 홧홧해지는 얼굴을 잘 추스르려 노력했다. 그녀의 심장은 각인으로 인해 바엘의
손안에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작은 변화라도 예민한 그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어쨌든 허락하시는 거로 알고……."

"내가 언제."

그는 제 손안의 것을 놓지 않으려는 성질이 있는 듯했다. 원래도 날카로웠던 안광이 더욱 흉흉하게


번뜩였다. 덕분에 양질의 수면권을 주장하려던 율리아의 어깨가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제가 있으면 불편하지 않으세요? 마왕님의 둥지를 인간인 제가 침범한 꼴인데."

"……."

"요즘은 탑에 안 가셔서 마력도 안정적인 것 같고, 그러니까 당분간은 딱히 제가 필요 없을 것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드는 부분이고……."

쭈뼛쭈뼛하면서도 나름대로 당차게 말을 잇는 율리아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어느새 창가에서


일어난 바엘이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놀라서 움찔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곧장 율리아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진의를


파악하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마, 마왕님?"

"참 이상한 일이지. 어디라도 가둬버리면 편할 텐데."

"네?"

"……피곤하군."

나직이 중얼거린 그는 율리아의 허리를 낚아채 침대로 향했다. 평소처럼 곧장 누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엘은 그녀의 드러난 어깨를 힐끗 보더니 자신의 로브를 벗어 그녀의 머리 위에 덮어버렸다.

둘의 키 차이가 큰 탓에 머리부터 뒤집어써도 발치가 끌렸다. 어쨌든 밑 작업(?)을 끝낸 그는 율리아를


도로 낚아채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덩달아 그의 옆에 엎어진 율리아는 사위가 조용해지자 조심스럽게 겉옷을 들어 올려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바엘이 눈을 감은 채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살짝 구겨진 미간이 그의 피곤함을 드러내는 듯했다.

'바엘도 생각보다 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나 봐.'

그와 닿을 때면 등골에 찌르르한 전류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 감각은 이내 잘게 쪼개져서 온몸으로


스미듯 퍼져 나간다.
사실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고 그래서 처음엔 각인의 부작용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계에선
주술 자체가 보편적인 방법이 아니다 보니 정말로 부작용인지 구분해 낼 방법이 없었다.

주변에 물어봐도 다들 눈알만 굴리며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뿐이고…….

'어쨌든 안 된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괜찮겠지.'

자신이 잠자리를 옮기는 게 싫었다면 바엘의 그 성격에 진작 말하고도 남았을 거다.

율리아는 그의 묵직한 팔 아래에서 슬금슬금 몸을 굴려 천장을 보고 누웠다. 그러다 다시금 조심스럽게


옆자리를 보니 바엘의 잠든 얼굴이 곧장 보였다.

느슨히 감긴 눈과 조각 같은 콧날, 조금 두툼한 입술이 정갈하게 다물려 있었다. 서늘하지만 아름답다.


객관적으로 얼굴만큼은 율리아의 취향이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편안한 얼굴로 지낸다면 좋을 텐데.'

그의 잠든 모습을 가만 응시하고 있으려니 미묘한 기분이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멋진 얼굴을 막 쓰는 게


조금 안타깝기도 하고, 웃는 얼굴을 한 번쯤은 보고 싶기도 했다. 아마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안녕히 주무세요, 마왕님."

율리아는 꼼질꼼질 편한 자세를 찾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마왕성의 밤이 저물었다.

* * *

치열한 전투 소리가 메마르고 황폐한 대지를 울렸다. 푸른 섬광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마수의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마법사가 방어막을 치는 사이 후방을 지원하던 궁수가 맹독을 바른 화살을 비처럼
쏘아 댔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몰려드는 마수 무리는 끝이 없었다. 마계의 변두리, 제대로 먹을 것조차 없는 땅에


인간들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이능까지 지닌 아주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운 인간들이.

"젠장, 도대체 언제쯤 끝나는 거야?"

"그 징그러운 악마 새끼가 어마어마한 짓을 벌여 놨어!"

"다시 마주치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달려오는 마수를 향해 차크람을 날린 사내가 이를 으득 갈았다. 그 시선의 끝에는 마나를 전면 개방해


주변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중인 소드마스터 레기온이 있었다.

마족과의 피 튀기는 싸움에서 소드마스터로 개화해 명성을 날리던 그는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장
브에스드라의 황도 아벨딧심으로 향했다. 그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이름, 황녀 율리아 브에스드라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각자 레기온에게 목숨 빚을 진 동료들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도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그 레기온이 목을


매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평생을 진창 속만 뒹굴던 레기온에게 내밀어진 단 하나뿐인 행복의 조건이었다.

"전부 고개 숙여!"

"이봐, 레기온?"
황량한 바닥에 대검을 내리꽂은 레기온이 양손에 푸른 마나를 결집시켰다. 파지직, 전기 튀는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뜨겁게 달궈진 쇠처럼 빛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법사의 방어진 안으로 뛰어든 순간, 수많은 마수가 득실거리던 대지가 과자
부스러지듯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시뻘겋게 아가리를 벌린 지옥의 틈새로 바위와 마수가 뒤섞여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레기온이 서 있는 자리를 제외한 일대가 모조리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허공에서 투명하게 점멸하는 마법진
아래로 그 참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역시 레기온은 대단해……."

"그러니까 우리의 대장이지."

"맞아."

그를 따라 마계까지 내려온 네 명의 인간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의 대기를 환하게 비추던
푸른빛은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난 뒤에야 잠잠해졌다.

검을 뽑아들고 마나를 정갈히 마무리한 그의 뒤로 동료들이 모여들었다.

"레기온, 괜찮아?"

"화려하게 해치웠네. 이 정도면 마왕성에서도 보일지 모르겠는데?"

"응, 그랬으면 좋겠네."

짧은 금발 아래 푸른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그의 시선은 마계의 검붉은 하늘 어딘가를 그리운 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레기온과 동료들이 마계의 틈을 비집고 진입했을 때, 하필 운 나쁘게도 근처에 고위급으로 추정되는


악마가 있었다.

눈매가 살짝 내려가서 능글능글하고 기분 나쁘게 생긴 그 악마는 레기온의 검기에 못 이겨 도망치면서도


그들에게 마수가 꼬이도록 순도 높은 마력을 잔뜩 흩뿌려 놓았다. 덕분에 발이 묶여 이 고생을 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주어진 짧은 휴식에 동료들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개화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한계치에
근접한 마나를 운용한 레기온 역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작정하고 오긴 했지만 역시 힘드네."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잖아. 그렇지, 대장?"

"물론이야. 율리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드디어 그녀와 같은 하늘 아래 섰다. 하루하루가 끔찍했던 전쟁터에서 자신을 버티고 움직이게 했던 세상


단 하나뿐인 보석이었다.

율리아가 마계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땐 온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비참하게 태어나 늘 경멸의 시선을 받던 그녀가 잉그렘 5 세의 핏줄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인계에서


잔인하게 내쫓겼다. 정작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는 그런 비극 따위 남 일인 양 평소와 다름없이 잘 지내고
있는데 말이다.
분노해 황성을 폐허로 만들려던 레기온을 만류한 건 동료들, 그리고 전장에서 안면을 튼 두
소드마스터였다.

소식을 듣고 브에스드라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그들은 마계의 틈이 있는 장소를 알려 주며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차라리 난 잘 됐다고 생각해. 소드마스터가 국가에 귀속되어 봤자 피곤한 일만 늘지. 널 이용하려고 그


연약한 황녀를 얼마나 들볶을까 말이야.'

'운명이 참 기구하지? 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어릴 때 꿈을 지금이라도 이룬다고 생각해. 황녀를


구하는 데 성공하면 어디 시골에라도 박혀서 조용히 잘 살아.'

'아, 훗날 후회하지 않도록 행복하게 말이야. 때 되면 연락하고…….'

소드마스터의 수명이 악마처럼 무한하지는 않을지언정 평범한 인간에 비해 터무니없이 긴 건 사실이었다.


그보다 먼저 개화한 두 소드마스터는 겉보기엔 30 대 초반처럼 보이지만 벌써 200 살이 훌쩍 넘었다.

율리아가 죽은 뒤, 궁상떨지 말고 찾아오라는 농담 섞인 잔소리에 레기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들 쉬었으면 이만 이동할까? 마수가 또 몰려오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아니, 잠시만. 들어줬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어."

레기온은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동료들을 붙잡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턴 나 혼자 움직이는 게 좋겠어. 너희는 이만 인계로 돌아가."

"그 부분에 대해선 이미 끝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소드마스터인 네게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우리도


각자 부대 하나 정도의 전력은 돼."

"하지만 여긴 고작 마계의 변방에 불과해. 중앙에 다가갈수록 더 강력한 마수나 악마가……."

"네 소중한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선 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거 아니었어?"

짧게 침묵했던 레기온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온갖 고생 끝에 마계의 틈을 연 이후, 그들은 수없이 대립각을 세웠다. 레기온은 그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그들은 레기온을 따라가기 위해.

갑자기 징그러운 악마 놈이 나타나며 이야기가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레기온은 지금이라도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했다.

"만일의 상황이 온다면 난 주저 없이 율리아를 선택할 거야. 너희가 아니라."

"알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를 기꺼이 이용해."

"하지만 난……!"

"잊지 마, 레기온. 네 꿈이 우리의 꿈이야. 네가 사랑하는 공주님을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반드시 구할 거야. 어찌 보면 우리도 그분께 구원받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때, 그들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아론이 흙먼지를 털고 일어나 제 스태프 끝으로 레기온의 가슴팍을
툭 건드렸다. 그는 마법계의 소드마스터 격인 대마법사의 경지를 앞두고 있는 실력자였다.
"저 녀석 말은 듣지 마. 정 위험하다 싶으면 너만 두고 잽싸게 도망갈 테니까."

"……."

"진심이니까 그렇게 부담 갖지 말라고. 너의 율리아 님을 못 만나고 돌아가는 건 조금 아쉽지만 말이야."

31 화

아론은 법사로서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오른 만큼 판단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마계의 변두리에선 자신들이
도움이 될지 몰라도, 괴물이 득실거리는 중심부에선 결국 레기온의 발목을 잡게 될까 우려하고 있었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비단 아론뿐만은 아니었다. 그는 사악하게 입꼬리를 비틀며 나머지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끝까지 함께 가지 못하는 게 미안해서 괜히 투정 부리는 거야, 저 녀석들."

"윽! 네 소름 끼치는 독심술을 고작 이런 데 쓰지 말라고……."

일행 중 가장 큰 소리를 내던 사내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다들 웃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을 발견한 마수 무리가 재차 모여들기 시작한 탓이었다.

"젠장, 잠깐 쉴 틈을 안 주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겠어. 내가 마법으로 힘닿는 데까지 길을 뚫을 테니까, 넌 그냥 전력으로 달려."

"괜찮겠어?"

"대기 중에 마력이 가득해서 그런가, 이렇게 힘을 쓰기 수월한 건 처음이야. 사람들이 왜 마법사를


꺼리는지 알 것 같기도 해. 지옥에서 되레 생생해지는 인간이라니."

씁쓸한 웃음을 지은 아론은 스태프를 고쳐 잡은 뒤 그 끝에 힘을 집중했다. 대기에 녹아든 농도 짙은


마력이 그의 주문에 복종하듯 한데 모여들었다. 그는 보란 듯 고개를 까딱이며 웃었다.

"잘 가, 친구."

"……."

레기온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대신 동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다들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찰나의 침묵 속, 치열한 전쟁터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들의 진심이 파도처럼 와닿았다.

'그래, 믿자.'

이번이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도 동료들도, 다음에 만날 땐 지상의 아름다운 태양 아래
서게 될 것이다. 물론 율리아도 함께 말이다.

결심을 마친 레기온은 이윽고 아론의 스태프가 가리키는 방향을 응시했다.

그가 뒤돌아선 것을 신호로 엄청난 직경의 마법구가 곧장 발사됐다. 경로 안에 들어 있던 마수들이


삽시간에 증발하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마어마한 마력을 퍼부은 아론의 공격은 검붉은 지평선
너머까지 길게 이어졌다.

"지금이야, 레기온!"
"가라!!"

그는 온몸에 푸른 검기를 두르고 마법구가 지나간 길을 따라 땅을 박찼다.

레기온은 자신이 떠난 자리에 수많은 마수가 재차 몰려드는 기척을 느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건,


오직 동료가 선물한 마지막 기회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율리아. 내가 가고 있어!'

* * *

율리아는 평화롭게 흘러가는 적막 속에서 눈을 떴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던 건지, 바엘은 이미 자리에
없었고 해는 중천에 떴다.

"졸려……."

저혈압에 허덕이다 도로 잠에 빠져들 뻔했던 율리아는 문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힘겹게 눈을 떴다.
또각또각, 자리를 느릿하게 서성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레벤나가 벌써 와서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바엘의 침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건 율리아와 바르바토스, 이렇게


둘뿐이었다. 그 말을 들은 후론 조금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는데 어젯밤엔 생각에 잠겨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잠들고 말았다.

급하게 일어나려다 우당탕 엎어진 율리아는 빠르게 머리를 빗질하고 밤새 흐트러진 나이트가운의 허리끈을
꽉 조여 묶었다. 옷은 레벤나가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골라 주기 때문에 따로 입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문을 박차고 나간 율리아는 제 앞에 선 두 악마와 마수 한 마리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레벤나와


어린 늑대, 그리고 바르바토스가 나란히 서 있었다.

"어머, 잘 잤니?"

"낑?"

"평소보다 늦었군. 시간을 버렸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친 율리아는 도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의문에


물들었다.

"으응……?"

레벤나와 어린 마수까진 이해했다. 녀석은 원래 레라지에가 기르던 늑대 무리의 새끼였는데, 그간 많이


친해져서 '베로'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 줄 정도가 되었다. 지옥의 파수견으로 유명한 케르베로스의
줄임말이었다. 비록 베로의 머리는 하나뿐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어째서?'

그는 단언컨대 이곳 마왕성에서 가장 바쁜 악마였다. 아가레스가 둥지 바깥의 일을 주로 처리한다면


바르바토스는 공무와 마왕 수행 양쪽을 빈틈없이 해내며 성 안팎으로 활약했다.

언뜻 보기에도 잘 시간이 있기는 한지 궁금할 정도였는데, 그런 그가 왜 자신을 기다렸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날 기다린 게 아니겠지. 분명 마왕님께 용무가 있었던 걸 거야.'


율리아가 그렇게 고개를 주억거린 찰나, 등 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쑥 들어온 바르바토스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억세게 움켜쥐고 바깥으로 꺼냈다.

[▷바르바토스

자꾸 귀찮게 구는군. 이럴 바에야 차라리 목줄을 거는 편이 낫겠는데.]

도망치려 버둥거리던 율리아는 SIGHT 창이 뜨자 냉큼 얌전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가 왜 갑자기


이러는지 이유를 물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뒤따른 지문으로 인해 마계에 침입한 인간과 관련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었다.

'이제 진짜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구나. 침입자가 정말 레기온일 가능성에 대해…….'

어젯밤 내내 그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설마 하는 의심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자신 따위가 뭐라고, 쓸모없고 변변찮은 탓에 버림받은 황녀 따위가 고작 뭐라고, 소드마스터씩이나 된


그가 부귀와 영달을 모두 내버리고 이런 지옥으로 뛰어든단 말인가.

게다가 자신은 그를 끔찍한 사지로 내몬 장본인인데…….

"평소엔 빨빨거리며 잘만 돌아다니더니, 오늘은 무슨 일이지."

"율리아가 개니? 그딴 식으로 붙들면 나가려던 마음도 식어 버리겠구나?"

레벤나는 목덜미를 잡힌 채 매달려 있는 율리아를 낚아채듯 구출했다. 그러곤 마력을 써서 삽시간에


그녀를 외출복으로 갈아입혔다.

봄 꽃잎을 닮은 연노랑의 화사한 미니드레스에 하늘하늘한 샤 원단으로 커다란 리본을 허리에 매달았다.
멀리서 보면 노란 은방울꽃이 커다란 잎사귀를 매단 모습처럼 보였다.

장난감으로 착각했는지 반색하며 달려드는 베로에게 다급히 '앉아'를 외치며, 율리아는 다시금
바르바토스를 보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왜인지 뻣뻣하게 굳은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비쳤다.

"저,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마왕님은 안에 안 계시던데요."

"널 감시……. 큭!"

멀쩡히 잘 말하던 바르바토스가 갑자기 오만상을 쓰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발등에 레벤나의 높고 뾰족한


굽이 쿡 박혀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아파 보여서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지문이 떠올랐다.

[▷바르바토스

소드마스터가 마계에 침입한 이유를 확실히 밝히기 전까지는 열쇠를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워낙 간교하고
영악해 신용할 수 없는 종족이니, 저런 순진해 빠진 얼굴 밑에 무슨 속셈을 숨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

율리아는 즉시 생각을 바꿨다. 슬쩍 엄지손가락을 들어 레벤나에게 보여 주니 그녀는 화답하듯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발뒤꿈치를 강하게 비틀었다.

* * *

평소보다 하루가 늦게 시작된 만큼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성 밖으로 나가는 건 여전히 허락되지 않았지만, 체력이 약한 율리아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을 구경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구역을 나눠 매일 조금씩 돌아다니고는 있지만 아직 남은 곳이 더 많을 정도로 악마성은
거대하고 복잡했다.

율리아는 뒤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바르바토스의 시선을 느끼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레벤나와 둘만 있어야 부탁하기가 쉬운데, 어쩌지.'

율리아는 기회가 될 때마다 레벤나의 사역마를 빌리고자 노력했다. 레기온에게 편지를 보내 당장 마계를
떠나라고 설득하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어디든 쫓아다닐뿐더러, 자칫 일이 어긋나면 레벤나 역시


문책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쉽사리 말문을 열 수 없었다.

율리아가 안절부절못하며 기회만 엿보는 동안 해는 금세 저물어 버렸다. 어둑해진 마계의 하늘에 붉은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창밖을 보던 율리아는 바엘의 둥지로 돌아가던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나머지 두
악마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니? 지쳤으면 안아 줄까?"

율리아가 설탕 인형만큼이나 약하다는 걸 아는 레벤나가 급하게 다가왔다. 그녀에게 달랑 들리기 전,


율리아는 빠르게 고개를 내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게, 당분간은 마왕님의 침실이 아니라 제 방에서 지내려고 해요. 그러려면 여기서 꺾어야 하니까…
…."

"네가 이전에 잠깐 지냈던 방 말이구나? 내가 계속 관리하긴 했지만, 갑자기 왜? 설마 주군께서 널


쫓아낸 거니?"

"무슨 일이지."

온종일 입을 꾹 다문 채 율리아의 뒤만 쫓아다니던 바르바토스가 거의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악마는 청력이 좋은 편이니 아까의 대화를 온전히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시 묻는 이유엔 사실상
불허의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젯밤 마왕님께도 말씀드렸어요."

"주군의 허락을 받았다. 확실한가?"

"네, 아마도……."

어젯밤 물었을 때 바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만약 불허했다면 그렇다고 분명히 대답했을 것이다.
율리아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바토스

이상하군. 하필 이런 민감한 시기에 열쇠를 밖으로 내보내다니. 드디어 변덕을 끝내신 건가, 아니면
인간이 거짓을 고하는 건가.]

역시나 바르바토스는 의심하고 있었다. 처음엔 당당했던 율리아도 그의 냉랭한 시선 앞에선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작게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바르바토스
만약 사실이라면 인간을 주군의 둥지에 다시 들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다만 거짓일 경우엔 열쇠의
장난질에 놀아나는 꼴이 될 텐데, 곤란하군.]

무감하고 냉막한 표정 아래 수많은 계산이 오가고 있었다. 이럴 때 말을 보태면 되레 의심을 살 수 있기에,


율리아는 그의 생각이 끝나길 가만히 기다렸다. 모노클을 벗은 바르바토스가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물렀다.

"일단 방에서 기다리도록 해.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주군께 직접 여쭤보겠다. 그리고 문 앞에


감시자를 세울 테니 허튼짓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대신 베로와 함께 자도 될까요? 혼자는 무섭고 외로워서……."

"헥헥."

율리아의 시선을 받은 베로가 냉큼 다가와 꼬리를 붕붕 휘둘렀다. 그녀가 등 뒤로 간식을 흔들고 있다는
걸 모르는 바르바토스는 이번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제법 잘 따르는군. 그건 레라지에의 사역마니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감사합니다!"

율리아는 그가 시선을 돌린 사이 간식을 냉큼 베로의 입 안에 던져 넣었다. 그러곤 덩치만 큰 어린 마수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32 화

하필 마왕이 성에 부재한 탓에 바르바토스는 율리아의 방문 앞에 사역마를 두 마리나 세워 두었다. 그의


사역마는 덩치가 사람만 한 독수리였는데, 안광이 흉흉하고 부리가 날카로운 게 마치 거슬리는 짓을 하면
힘으로라도 막겠다고 하는 듯했다.

베로의 뒤에 숨어 소심하게 떨던 율리아는 문이 닫힌 뒤에야 한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태어나서 그렇게 큰 새는 처음 봤어."

정확히는 새라기보다 마수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시간을 지체할 틈이 없었다. 네글리제로 갈아입은 그녀는 외출복 속에 꼭꼭 숨겨 두었던 종이와
펜을 꺼냈다.

딱히 귀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갑자기 요구하면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 뻔했기에, 공무로


외출한 아가레스를 기다리는 척하며 그녀의 방에서 몰래 가져왔다. 아가레스의 집무실엔 비슷한 물건이
많아 하나씩 빼돌려도 티가 나지 않았다.

율리아는 복도를 지키고 선 독수리들이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틈틈이 작은 소음을 내며 편지를 한
줄씩 적어 나갔다.

[레기온, 소드마스터 하나가 지하로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어. 혹시 너니? 네가 나를 찾으러 온 거니?

정말 그런 거라면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장 인계로 돌아가. 난 너를 따라가지 않을 거야.


만나고 싶지 않아. 널 보면 지상에서 비참하게 지내던 악몽이 되살아날까 두려워. 그러니까 날 걱정하지
말고 평생 떠올리지도 말고 그냥 머릿속에서 지워 버려.]

다급히 적어 내리던 율리아는 불현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독한 자괴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게 뭐야. 적반하장이 따로 없어.'


4 년 전 떠나려는 그를 붙들지만 않았어도. 아니, 하다못해 그가 내미는 손을 망설임 없이 잡기만 했어도
…….

지금쯤 자유롭게 살았을 친구를 끝끝내 진창 속에 밀어 넣고 말았다. 정의롭고 마음 약한 레기온을 얽맨


것도 모자라 지금은 그를 상처 주는 말만 이렇게 골라서 내뱉고 있었다.

율리아는 괜스레 시큰해지는 눈가를 비비며 펜을 고쳐 쥐었다.

'약해지지 말자. 전부 내가 선택한 길이잖아.'

생각할수록 조금씩 깊어지는 죄책감에 매몰될 것 같았다. 이래서야 눈치 빠른 그는 자신의 생각을


알아채고 말 것이다.

레기온을 사지에 몰아넣은 대가로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것도 모자라 레기온이 목숨 걸고 싸웠던
악마들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말았다. 차마 그걸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없어서, 그래서 레기온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평생 사죄하며 살아도 부족한데 혼자만 행복해지다니, 이렇게 이기적인 나를 차마 까발릴 수 없어.
레기온에게 미움받는 게 무서워…….'

언제나 햇살처럼 웃던 그가 자신에게 경멸 섞인 시선을 보낸다. 그의 적이자 원수인 악마들 속에 있는


자신을 증오한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따끔따끔 아팠다.

[네가 나를 찾는 것 자체가 내겐 끔찍할 정도로 민폐야. 너무 소름 끼치고 숨 막혀. 제발 부탁이니까


지상으로 돌아가. 두 번 다신 오지 마.]

'네가 위험해지는 걸 원치 않아. 따사로운 태양 아래에서 내 몫까지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아 줬으면


좋겠어. 이번에야말로 나 따위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다들 자신에게 잘해 주는 이유가 열쇠로서 쓸모 때문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누군가에게 속박당하는 것에서


비로소 안정감을 느꼈다. 평생을 부초처럼 떠돌기만 하던 자신을 강하게 붙들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비록 행복은 잠시뿐이요, 결말은 죽음이 된다 하더라도.

입술을 꾸욱 깨문 율리아는 머리카락 끝을 조금 잘라 편지 사이에 끼웠다.

오늘 낮, 율리아는 마계의 지평선 너머에 푸른빛과 검은 마력이 번갈아 점멸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마다
바르바토스와 레벤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노력했지만, 시야 기능을 쓰는 율리아의 앞에선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녀는 빛이 점멸하는 방향의 끝에 레기온이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베로,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을까."

"끼잉?"

"저쪽 방향으로 쭉 가면 어떤 사람과 마주칠 텐데, 그럼 이걸 전해 줬으면 해. 환한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아주 멋진 용사님이야. 무척 착하고 자상한 데다 내 오랜 친구이기도 해서, 베로도 분명 맘에 들
거야."

베로의 반짝이는 시선이 율리아의 손끝을 따라갔다. 달빛이 내려앉은 붉은 지평선 너머, 레기온이 오고
있을 그곳을 향해서.
"어때?"

율리아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베로를 보았다. 녀석은 잘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그저 즐거운 건지,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붕붕 흔들고 있었다.

베로의 목에 편지를 매단 그녀는 바깥에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테라스와 연결된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틈새로 밀려든 밤바람이 율리아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였다.

추위를 무릅쓰고 먼저 테라스로 나간 그녀는 숨겨뒀던 장난감을 슬쩍 꺼내 들었다.

"베로, 우리 잡기 놀이할까? 잡기?"

"헥헥헥헥!"

"옳지, 잡기 하자."

평소 놀아 줄 때처럼 무릎을 탁탁 치며 목소리를 높이자 어린 늑대의 눈빛이 단번에 달라졌다. 뭔가를


던지기만 해도 당장 뛰쳐나갈 준비가 만만이었다. 평소에도 레벤나나 레라지에가 장난감을 지평선 끝까지
던져 줄 때면 바람같이 달려 나가 물어오곤 했다.

율리아는 베로의 목에 편지가 확실히 묶였는지 재차 확인했다. 그러곤 커다란 원반을 던지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속여서 미안해. 대신 돌아오면 맛있는 거 많이 줄게.'

그녀에겐 무언가를 지평선 끝까지 던질 힘이 없었다. 지평선은커녕 침실 앞 작은 정원을 넘어가기만 해도


기적이었다. 그러므로 던지는 척을 해서 베로를 속일 생각이었다. 눈썰미가 좋은 레기온이라면 스치듯
지나가는 머리카락도 분명 알아봐 줄 테니까.

"자아, 준비."

"헥헥!"

"달려……. 꺅!"

율리아가 장난감을 던지는 척하려는 찰나였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베로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듯 물더니
테라스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시야가 삽시간에 반전되고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율리아는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물린 곳이 아픈 건 아니었다. 베로는 아직 이빨도 제대로 나지 않았으니까.

다만 이런 식으로 납치되어 성을 빠져나간 게 처음이 아닌 탓에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율리아는 덩치만 큰 어린 마수에게 매달린 채 점점 멀어지는 악마성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또 성에서


빠져나간 걸 바엘이 알아챈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두려웠다. 인간을 지독히 불신하는 바르바토스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을까?'

율리아는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다. 베로는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밤 산책에 잔뜩 흥분했는지 침을


소나기처럼 흩뿌리며 맹렬히 질주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녀석을 진정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흣, 베로……."
"컹컹! 컹!"

시야가 거칠게 흔들리니 멀미 때문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는 걸 알 것 같았다.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시선을 내린 율리아는 바닥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강력한


화염방사기에 스친 것처럼 땅이 까맣게 그슬려 있었다. 지평선 너머부터 악마성 인근까지 곧장 그어진
형태였는데, 그 주변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잿더미가 스산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성 밖을 달리는 동안 악마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어.'

예전 같았으면 먹이를 찾아 나온 마수들에게 삽시간에 포위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본능적으로 어깨를 굳힌 찰나였다.

"율리아!!"

머나먼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절규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낮고 거칠었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그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SYSTEM

스토리 진행도 20%]

그녀가 시선을 든 순간,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SYSTEM

2nd Episode. 과거의 궤적]

[▷SYSTEM

- 미션: 바엘을 회유하시오.

- 보상: 공략 대상 추가

- 실패 페널티: 레기온 사망]

베리드에게 끌려갔을 때와 같은, 바엘 루트의 두 번째 사건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지만 오래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녀의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가까워졌다.

"율리아, 조금만 기다려! 당장 구해 줄게!"

대검에 푸른 기운을 실은 레기온이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그의 서슬 퍼런 안광은 율리아를 납치한


마수에게 정확히 향해 있었다.

그는 상황을 오해하고 있었다. 베로를 죽일 생각이었다.

"안 돼! 안 돼, 절대!"

"크르르릉!"

율리아가 대경실색하며 비명을 지르자 베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질주를 멈추고 기세 좋게
이빨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직 어린 개체인지라 조금도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겨우 고개를 내민
송곳니 끄트머리가 베로의 이빨 전부였다.
그 모습을 본 레기온의 눈매가 미미하게 구겨졌다. 그가 방출한 마나는 여전히 대검을 흉흉하게 휘감고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를 온몸으로 감싸며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짐승의 태도에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그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나야말로 묻고 싶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왜 네가 악마성 주변에 있는 거야?"

"크르르릉! 컹!"

"괜찮아, 베로. 소리쳐서 미안해. 나쁜 사람 아니야."

율리아가 목소리를 높인 탓인지 베로가 덩달아 흥분하며 짖어댔다. 율리아는 어린 늑대를 진정시키려
평소처럼 작게 속삭이며 레기온의 검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녀의 신호를 눈치챈 레기온이 검기를 완전히 잠재우고 율리아에게 달려왔다. 그러더니 피할 틈도 없이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율리아."

"레기온……."

"지독한 브에스드라 놈들. 너를 어떻게, 무슨 염치로!"

떨리는 손에서 느껴지는 울음 같은 감정에 율리아는 차마 그를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마주 안아 주지도


못하고 멍하니 섰다. 얼마나 오랫동안 달린 건지, 바짝 맞닿은 가슴에서 그의 터질 듯한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레기온은 4 년 전 기억보다 훌쩍 자라 어느새 그녀가 알던 게임 속 모습을 하고 있었다. 훤칠하게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는 완연한 청년의 분위기를 풍겼고, 짧은 금발과 푸른 눈동자는 동화 속 아름다운 왕자님을
연상시켰다.

"이제 괜찮아. 너를 구하러 왔어."

"……."

"돌아가자."

이만 가자고 하면서도 그는 율리아를 가둔 두 팔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의 귓가로 낮게 떨리는 숨소리가


새어들었다.

'나를 따라 마계까지 오다니,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지른 거야.'

레기온은 작고 약한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했다. 아닌 척하지만 정의롭고 고결했다. 그러니 유폐된


황녀 따위를 만나러 황궁 담장을 목숨 걸고 넘었으리라. 어떤 약한 소리를 해도 외면하지 못하고, 그
자신이 위험한 지경에 다다를 때까지도.

'하지만 여기는 아벨딧심도 아니고 무려 마계인데.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위험했을까.'

율리아는 순간 현실을 직시했다. 진정 그를 위한다면 이런 애매한 태도는 오히려 독이었다. 정말 그를


단념시키고 지상으로 돌려보내고 싶다면 냉정하게 대해야만 했다.
33 화

그녀는 레기온의 가슴팍을 온 힘을 다해 밀어냈다. 소드마스터인 그에 비하면 아주 미약한 힘일 뿐인데,


그는 천근 바위에 밀린 사람처럼 뒷걸음질 쳤다.

찰나의 정적을 덮듯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흙먼지 때문에 좀 더럽지?"

"……."

율리아는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레기온의 표정에 낙심한 빛이 떠올랐지만, 그는 겉으로 티 내지 않고


되레 미안한 듯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늦게 와서 실망했구나. 이해해. 이젠 내 얼굴도 보기 싫겠지. 이렇게 무능력한 남자가 용사라니,


내 어딜 믿고 함께 가겠어."

"그걸 알면서 왜……."

"그럼 마왕에게 덤비면 내 진심을 알아 줄래? 그놈을 쓰러뜨려 심장을 가져오면 나를 믿을 수 있겠어?"

"무슨,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마왕을 어떻게 이겨!"

당혹스러웠다. 이런 답을 바란 게 아니었는데, 그의 눈동자엔 마왕을 향한 명백한 전의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고서야 멀쩡히 잘 있는 바엘은 왜 건드린단 말인가. 그의 막대한
마력을 어떻게 당해 내려고.

'지상으로 돌아가서 나 따위는 잊고 행복하게 살란 말이야, 이 멍청아!'

마음도 몰라주고 되레 엇나가는 그가 야속했다. 발끈한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라 아플 리가 없는데도 레기온은 움찔 뒤로 밀려나며 미간을 찡그렸다.

율리아는 그를 때리다 말고 멈칫했다.

"왜 그래. 혹시 어디 다쳤어?"

"아니, 괜찮아"

"그런데 왜 자꾸 눈을 피해? 나 좀 봐, 응?"

좀처럼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그가 겉으로 티를 낼 정도였다.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건지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율리아는 이리저리 고개를 피하는 레기온을 졸졸 쫓아 자리를 맴돌았다. 그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채


끝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다만 팔 아래로 보이는 꽉 다문 입술이 그의 안 좋은 상태를 대신 말하는
듯했다.

"레기온, 레기온."

"……."

"팔 내려 줘. 왜 그러는데."

"큭큭."
걱정되다 못해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려던 찰나, 그의 굳은 입꼬리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르륵 내려간 팔 아래,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가 율리아를 오롯이 비췄다. 반듯한 이마와 쭉 뻗은 콧대,
예전보다 날카로워진 턱선. 그녀를 바라보는 레기온은 어느새 완연한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입가에 걸린 웃음만큼은 어릴 적 폐궁의 뒤편에 숨어 놀던 때와 같았다.

잠시 상황을 잊었던 율리아의 표정이 일순 황망함으로 굳었다.

"설마 날 속인 거야?"

"큭큭, 티 났어? 애초에 마왕한테 어떻게 덤벼. 너만 데리고 날름 튀어야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이 바보야, 멍청아!"

"그러게 처음부터 속이려고 하질 말았어야지. 고작 몇 년 떨어져 있었다고 내가 널 모를까 봐."

그녀의 솜 주먹을 전부 맞아주던 레기온이 돌연 고개를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가을날의 하늘처럼
푸르고 깊은 눈동자가 율리아의 모습을 비췄다.

레기온은 전투용 장갑을 이로 물어 벗어 내며 그녀의 뺨을 쓸었다. 율리아가 눈치채지 못한 새, 그의


잇새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다.

"너무 말랐잖아. 망할 악마 놈들."

"마르기는, 내가 얼마나 잘 지내는데. 어제만 해도 너무 먹어서……."

"팔뚝이 한 줌인데 어디 찻잔이나 제대로 들겠어? 흥, 어쩔 수 없지. 내가 평생 먹여 살리는 수밖에."

레기온은 단단한 근육이 붙은 제 팔과 율리아의 가느다란 팔을 번갈아 확인했다. 애초에 소드마스터인


그가 평범한 사람과 신체 조건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못 본 새 과장이 늘었어.'

율리아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그녀의 발간 뺨을 몇 번이나 조심스럽게 훑던 레기온의 손가락이


불현듯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율리아의 심장 부근, 마치 정체된 듯 막혀 있는 마력의 덩어리로 향했다. 무언가 아주


불순하고 사특한 것이 꼬여 정상적인 기의 흐름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레기온?"

갑자기 행동을 멈춘 그가 이상했다. 하지만 율리아의 의문 섞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점점


끔찍한 것을 보듯 구겨졌다. 레기온은 저항하는 그녀를 붙들고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나비 날개처럼 파르라니 얇은 네글리제 아래, 옷으로 채 가려지지 않은 왼쪽 윗가슴에 새겨진 붉은 각인이


선명히 드러났다.

"이게 뭐야."

"읏!"

굳은살 박인 손가락의 감촉이 거칠고 아팠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고 율리아의 윗가슴을 꾸욱 누르듯
쓸어 내렸다.
"누가 너한테 이딴 걸 새겨 놓은 거야."

"……."

"설마, 아니겠지."

각인에서 손을 뗀 그는 제자리를 서성거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가 이내 마른세수를 했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나직이 욕설을 지껄이기도 했다. 지금 그는 확실히 초조해 보였다. 그녀가 원래
알던 레기온의 모습이 아니었다.

율리아는 멍하니 서서 그런 친구를 바라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데, 그는 어째서 갑자기 화를


내고 있는 걸까.

'아,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닌데.'

반은 사고이긴 했지만 어쨌든 레기온과 만났다. 그가 전쟁터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안도했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래도 다른 악마들이 알아채기 전에 빨리 그를 지상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율리아는 다시금 거리를 좁혀 레기온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의 키가 한참이나 커 버린 탓에 그녀의 머리


위로 긴 달그림자가 졌다.

"이런, 미안. 놀랐지? 일단은 돌아가면서 이야기하자. 아론이 아직 마계에 있다면 각인에 대해 자세히
봐 줄 수 있을 거야."

"레기온, 잠시만."

"응?"

율리아는 자신을 안아들려는 레기온의 어깨를 강하게 밀었다. 거절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굳어 버린
그의 눈빛을 애써 못 본 체하며, 그녀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성에서 몰래 빠져나오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고였어.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돌아가야 해.

"그게 무슨 소리야?"

"빨리 지상으로 돌아가."

"그러니까 함께……."

"가는 건 너 혼자야, 레기온. 나는 이곳 마계에 남을 거야."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율리아를 레기온이 성큼 따라잡았다.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조금 사라졌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그래? 그래서 화난 거야?"

"……."

"많이 무서웠지? 알아, 악마 놈들이 널 어떻게 다뤘을지 이토록 눈에 선명한데."

레기온의 시선은 율리아의 가슴에 못박인 듯 고정되어 있었다. 율리아는 왜인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차마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가 이곳에 오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엘이 마계의 문을 걸어 잠근 상태에서 누군가 억지로


침입했다는 것에 다들 놀란 기색을 보였으니까. 게다가 14 위의 고위 마족인 레라지에까지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않았던가.

널 구하려고 이렇게 노력하고 희생했다고, 한 마디라도 할 법한데 끝까지 제 탓만 하며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 주는 그가 미안하고 고마웠다.

"율리아."

그녀가 생각에 잠긴 동안, 레기온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얗고 작은 손이 혹여나
다칠까 제 커다란 손 안에 가두고 마치 애교를 부리듯 부드럽게 팔을 흔들었다.

"내가 이제부터 잘할게. 지금까지 힘들었던 기억은 떠오르지도 않도록 많이 노력할게."

"레기온……."

"우리 어릴 때 생각나? 외국의 작은 항구 도시에서 바다를 보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했었잖아.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상단 회계 일을 하고, 그럼 나는 같은 상단에서 용병 일이나 하겠다고 했었지."

그때의 일을 어떻게 잊을까. 어떻게 감히 잊을까. 하지만 레기온은 그녀의 안색이 흐려질 틈도 없이
맞잡은 손을 휘휘 더 크게 움직였다.

"이제 예전이랑 달라. 우릴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너는 잉그렘 5 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고 나는
나름대로 쓸 만한 검사가 됐어. 외국에 친구도 많이 생겼고, 사실은 우리가 지낼 마을도 몇 군데 추려
뒀어."

밝은 얼굴로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는 그를 율리아는 멍하니 응시했다. 말한 본인조차 잊었을 정도로


스치듯 지나간 대화였는데, 그걸 마음에 담아 뒀다가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준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해야 레기온이 나를 구하는 걸 포기할까.'

이제야 간신히 살 만해진 그의 미래를 가로막을 순 없었다. 하지만 레기온은 자신이 정한 일을 결코


번복하지 않았다. 심지가 굳다는 건 다른 말로 고집이 세다는 뜻이었으니까.

율리아는 볼 안쪽을 강하게 사리물었다. 애써 냉정한 얼굴과 목소리를 꾸며냈다.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율리아."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너는 몰라. 이곳에 와서도……."

율리아는 불현듯 말을 멈췄다.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떤 힘든 일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건 레기온의 고초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아무리 꾸며낸 말일지라도
어떻게 징징대는 소리를 한단 말인가. 염치없이.

그때, 레기온의 어깨가 굳었다. 뒤이어 율리아의 눈도 크게 뜨였다.

발밑의 자갈들이 잘그락 소리를 내며 떨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밤하늘에 짙은 뇌운이 끼고 강한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근처에 얌전히 앉아 있던 베로가 꼬리를 안으로 말고 율리아의 등 뒤에 머리를
숨겼다.

삽시간에 표정을 굳힌 레기온이 대검을 뽑아 들며 일갈했다.

"미안, 율리아.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빨리 인계로 돌아가, 빨리!"

싸울 생각임을 눈치챈 율리아가 그의 어깨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되레


율리아의 등을 떠밀었다.

"위험하니까 그 강아지 데리고 도망쳐 있어."

"바보야? 사람 말 못 알아들어? 네가 싫다고!"

"원망은 나중에……. 나중에 들을게."

율리아를 외면하는 레기온의 얼굴이 상처 입은 사람처럼 굳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부러


머리를 쓸어 올리며 대검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검에서 피어오른 푸른빛이 주변의 대기를 집어삼킬
듯 넘실거렸다.

율리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을 감쌌다. 이건 분명 바엘의 마력이었다. 마신의 탑과 악마성 인근을
이런 식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어떡해. 나 때문에 또…….'

새하얀 눈밭 위에 길게 늘어진 붉은 핏자국이 뇌리를 스쳤다. 또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둘 수는 없었다.

34 화

절망에서 깨어난 율리아는 레기온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시스템을 타고 스킬 창으로


들어가자 가장 최근에 찍었던 스킬이 곧장 떠올랐다.

이것을 실전에서 써 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들지, 유효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율리아는 곧장 스킬을 실행했다.

[▷저항 전이 Lv.1

항마력이 미치는 범위를 일정 시간 넓힐 수 있다. 잔여 체력의 50%를 소모한다. SP 30]

그와 동시에 투명하게 빛나는 장막이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와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레기온을 완전히 감싼 채로 성장을 멈췄다. 그는 오감이 극도로 발달된 소드마스터였지만 극도로 긴장한
탓인지 막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율리아의 힘도 강력한 물리력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얼마 안 가 바닥을 울리는 진동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제대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흔들림이 심해졌다.

"이게 무슨 광경이지? 침실을 장식해야 할 물건이 어디로 그리 열심히 도망치나 봤더니, 고작 앞뜰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나."

낮고 섬뜩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고막을 찔렀다.

붉은 밤하늘 아래 거대한 날개를 펼친 바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편엔 마찬가지로 날개를 펄럭이는
몇몇 고위 마족의 그림자가 보였다.

"마왕님, 여긴 어떻게……."
"물건? 지금 율리아를 물건이라고 한 건가?"

레기온의 대검이 푸른빛을 흩뿌리며 웅웅 진동했다. 그에 맞서듯 바엘의 주변에도 순도 높은 붉은 마력이


모여들었다.

[▷저항 전이 Lv.1

제한 시간 4 분 47 초]

시야 상단에 스킬의 잔여 시간이 떠올랐다. 앞으로 5 분 정도는 버틸 수 있었지만 이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방어막의 범위가 고작 주변 몇 발자국 정도에 불과해 레기온을 보호하기 위해선 계속 그의 곁에


붙어 있어야 했는데, 그는 전투가 일어난다면 자신부터 곧장 떨어뜨릴 게 분명했다.

'어떡하지? 어떡해야…….'

그녀는 바엘의 뒤편에 흉흉한 눈빛을 한 채 자리한 마족들을 보았다. 바르바토스, 보티스, 외에도 얼굴만
아는 악마가 더 있었지만 이 상황을 중재할 만한 중도적 성향의 마족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생성된 에피소드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다름 아닌 바엘의 회유. 자신이 그를 어떻게
설득하고 움직이느냐에 따라 레기온의 생사가 결정되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선택할 길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해, 날 용서하지 마.'

율리아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저항 전이의 범위에서 벗어난 레기온이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무너지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역시나 바엘은 이미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마왕님, 죄송해요. 베로가 답답해하는 것 같아 잠깐 놀아 주려고 했는데, 작은 사고가 생겨서 이렇게


멀리까지 나와 버렸어요."

혹여 바엘이나 다른 악마가 이상을 느낄까 스킬도 도중에 종료해 버렸다. 원래도 썩 높지 않던 체력이
반이나 떨어지자 구토감이 들 정도로 극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마왕님의 침실을 나온 건…… 허락하신 줄 알았어요. 어젯밤에도 아무 말 없으셨잖아요?"

땅의 진동이 멈췄는데도 세상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작은 돌부리에 걸린 율리아는 몸의


균형을 잃고 그만 바엘의 품에 와락 안겨 버렸다. 맞닿은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는 게 느껴졌다.

"화 풀어 주세요.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레기온의 뚫어질 듯 집요한 시선이 등 뒤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율리아는 자연스럽게 보이고자 목소리에 최대한 애교를 섞고 활짝 웃었다. 바엘은 자신이 웃는 모습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레기온을 무사히 돌려보내야 했으니까.

율리아의 해사한 미소를 내려다본 바엘의 표정이 역시나 굳었다. 내심 뜨끔했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었다. 율리아는 바엘의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선명하게 갈라진 근육이 얇은
네글리제 너머로 뜨겁게 달라붙었다.

그때, 율리아의 머리 위로 비소 섞인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양 떠는 꼴이 발정 난 암고양이 같군. 흘레붙고 싶었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나."

율리아의 가느다란 어깨 위에 바엘의 손이 올라갔다. 꽉 붙드는 그의 악력은 평소와 다르게 강하고


거칠었다. 심장 위의 각인이 희미한 붉은빛을 흩뿌렸다. 접촉을 통해 바엘이 흥분했다는 증거였다.

'어쨌든 됐어. 이대로 마왕님과 성으로 돌아가서…….'

안도하기가 무섭게 또다시 시야가 일그러졌다. 율리아는 숨을 헐떡이며 바엘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각인의 부작용은 곧장 나타났다. 아찔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퍼져 온몸을 지분댔다. 아랫배가 바짝


조여들었고 그보다 더욱 깊은 안쪽 역시 뜨겁게 욱신거렸다.

반쯤 의도한 상황이었지만 막상 저지르고 보니 덜컥 겁이 났다. 혹여나 이 많은 눈들 앞에서 안 좋은 꼴을


보이게 될까 봐.

"으응, 앗!"

그러기 전에 떨어지려던 율리아는 강한 힘으로 붙들려 다시금 바엘의 품에 갇혔다. 넘어지며 실수로 짚은
바엘의 복근이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놀라서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던 그녀는 등 뒤의 시선을 느끼고
멈칫했다.

푸른 검기가 거대한 파장을 그리며 일렁이고 있었다. 자신이 있는 탓에 함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보지 않아도 그려졌다.

지상에 내려선 바르바토스가 바엘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주군, 어떡하시겠습니까."

"……."

입을 꾹 다문 율리아는 자신을 속박한 바엘의 팔뚝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이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레기온은 자신이 멀쩡하다는 걸 확인했다. 자신도 지상에 돌아갈 생각이
없음을 그에게 분명히 말했다. 비록 레라지에가 크게 다치긴 했지만, 악마니까 머지않아 멀쩡히 회복할
것이다.

이대로 레기온을 놓아주기만 하면, 그가 지상으로 떠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율리아는 눈물로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슬그머니 들었다. 마주친 바엘의 표정은 조각처럼 무기질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문 찰나, 바엘의 입매가 비틀렸다.

"죽여."

율리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엘은 상황을 즐기듯 재차 강조했다.

"소드마스터의 심장을 파서 내게 가져와. 모처럼 진미를 맛보겠군."

"예, 주군."

"안 돼요! 그런, 레기온은……!"

율리아가 다급히 바르바토스를 붙잡으려는 찰나, 바엘이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고개를 숙였다.
"으읍!"

뜨겁고 단단한 혀가 앙다문 입술을 비집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자꾸만 도망치는 작은 혀를 얽매고
움찔거리는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도망치려 안간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지만 바엘의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입술을 뗀 바엘은 율리아의 가벼운 몸을 제 어깨 위로 간단히 들어 올렸다. 손에 잡을 것이 사라지니 그의


목에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당장 바닥에 떨어질 듯 무게 중심이 위태로워졌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
율리아는 다급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큭……."

웃음기 섞인 낮은 울림이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즉시 거대한 날개를 펼친 바엘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마왕님!"

"먼저 유혹했으니 뺄 생각은 마."

"이, 이런 일을 원한 게 아니었어요! 모두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잖아요!"

율리아는 다급히 밑을 내려다보았다. 잿더미 속에 묻힌 지상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사납게 달려드는
악마들의 뒷모습과 그런 그들에게 저항하는 푸른 마나가 그녀의 눈에 담긴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4 년 전, 먼지가 뽀얗게 낀 창 너머 어두운 사위 속에서 홀로 화려하게 반짝이는 연회장이 시야에 선명히


들어왔다. 에스델의 열네 번째 생일을 기념한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율리아는 게임 속 세상으로 끌려온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그런


와중에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자신은 이곳에서조차 썩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란 사실이었다.

방의 모든 출입구가 사슬과 자물쇠로 숨 막히게 가로막힌 폐궁. 손끝만 닿아도 저주받았다며 몸서리치는
하녀들과 감시 카메라처럼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주시하는 병사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모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자신은 그저 심심풀이용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황후의 죽음에 대한 복수'라는 최초의 이유조차 잊고, 힘없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일은 어느새 관성이
되어 버렸다. 아무도 불합리를 느끼지 못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으니까.

'그래도 괜찮아. 4 년만 더 기다리면…….'

그녀는 작게 웅크린 무릎 위에 고개를 뉘었다. 에스델이 색색의 아름다운 빛을 흩뿌리는 연회장 같은


존재라면, 자신은 그것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어둠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위치야말로 서로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일 터였다.

율리아는 아프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머릿속 목소리를 무시하고 가만 눈을 감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왜인지 근처가 소란스러워졌다. 소리를 죽인 발걸음이 점점 가까워졌고 성인 사내로 추정되는 몇몇
목소리도 들렸다.

'무슨 일이지? 에스델의 생일에 이런 폐궁까지 오다니.'

평소라면 몰라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외로움에 푹 젖어 있던 율리아의 머릿속에서 기대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혹시 누군가 자신을 만나러 와 준 건 아닐까 하는 그런 기대. 그러나 동시에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잠시 보기만 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혹시 길을 잃은 손님이라면 연회장으로 가는 길을 알려 줄 수도


있고.'

율리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타성처럼 잠겨 든 쓸쓸한 기분이 그녀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힘없이 눈을 깜빡인 율리아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불 꺼진 복도는 인기척


하나 없이 음산했고, 풀벌레 소리만이 을씨년스럽게 울리고 있었다.

"내가 착각했나 봐. 이런 곳까지 누가 온다고……."

작은 한숨을 내쉰 율리아가 다시 침실로 돌아가려는 찰나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가 그녀의
입을 강하게 틀어막았다.

"읍……!"

"조용히 있어!"

저항하려 미친 듯 몸부림쳤지만 가느다랗고 약한 몸으로 사내에게 저항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입을


틀어막은 손등을 미친 듯 할퀴어도, 그는 가렵지도 않다는 듯 율리아를 간단히 제압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죽고 싶지 않다는 외침이 머릿속에 마구 날뛰었다. 그녀가 눈앞의 손을 있는 힘껏 물어뜯으려던 순간,


양손을 결박한 힘이 한결 느슨해졌다.

"너, 이곳 하녀야? 금방 풀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다급히 속삭이는 목소리에 앳된 느낌이 섞여 있었다. 힐끗 등 뒤를 보니 키도 그다지 크지 않아


사내라기보다 소년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겼다.

35 화

율리아가 조금 잠잠해지자 소년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벽에 기대며 속삭였다.

"풀어주면 조용히 할 거야?"

"……."

율리아는 눈을 말갛게 깜빡이며 제 등 뒤에 선 이를 올려다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먼지를 뒤집어써


부옇게 바랜 금발과 그럼에도 가을 하늘처럼 깊고 푸른 눈동자였다.

저벅저벅.

얇은 문 너머 묵직한 발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등 뒤로 맞닿은 소년의 가슴이 빠르게 두방망이질 쳤다.


동시에 무언가를 깨달은 율리아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생김새는 기억보다 조금 앳되었지만, 그럼에도 율리아는 그의 정체를 알아챘다.

'설마, 레기온?'

게임 [악마들의 낙원]에서 공략 가능한 캐릭터 중 하나로 기본 설정은 천민 출신의 소드마스터였다.

그는 마족과의 전쟁 중 이능을 발현하여 속수무책으로 밀고 들어오던 마군을 단신으로 막아 낸 영웅이


되고, 이후 황제 잉그렘 5 세와 계약하여 황녀 에스델을 구하기 위해 마계로 잠입하게 된다.

하지만 '피폐'라는 장르에 걸맞게 레기온은 손속이 잔인하고 냉혹하며 계산적이었다. 에스델을 구하는
대가로 이미 황제에게 많은 것을 약속받았으면서, 열쇠인 에스델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내키는 대로 희망
고문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것을 떠올린 율리아의 귓가에 아찔한 이명이 울렸다.

'말도 안 돼. 왜 벌써부터 레기온이 황궁에 나타난 거야?'

게임 프롤로그가 시작되는 시점까지 아직 4 년의 시간이 남았다. 처음 만나는 공략 캐릭터인지라 놀란


마음이 컸지만, 그보다 레기온에 대한 두려움이 더더욱 컸다.

그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전부 들어주고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그녀는 곧장, 미친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

이쪽을 보는 소년의 시선이 조금 의문에 찼지만 아무렴 어떨까. 율리아는 현재 매우 간절했다.

'뭔지는 몰라도 제발 풀어줘. 난 이렇게 어이없이 죽고 싶지 않아!'

혼신의 힘을 다한 호소가 먹힌 걸까, 그녀를 억누르던 소년의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러나 문밖의


발소리 또한 아까보다 더욱 가까워졌다. 이젠 그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도 선명하게 들렸다.

"좀도둑 놈이 설마 여기까지 숨어들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2 황녀의 거처인데."

"그까짓 거 말이 좋아 황녀지, 제 탄신연인데 참석도 못 하잖아."

"말은 바로 해. 오늘 열린 건 어디까지나 에스델 황녀님을 위한 연회지. 어쩌다 날짜 좀 겹친 거 가지고.


황후 폐하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셨는데 또 사람 잡을 일 있나?"

발소리는 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한 형국이었다.

등 뒤로 맞닿은 소년의 가슴팍이 마구 두방망이질 치는 게 느껴졌다. 문밖 사내들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듯,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낭패감에 찬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젠장, 하필이면 이딴……."

소년의 흉흉한 목소리에 율리아는 힘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을 보는 그의 시선엔 다른 이들과 같은


짙은 혐오가 섞여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거나 불길한 것 취급당하는 건 무척이나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 마주한
소년에게조차 그런 취급을 받고 있자니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었다.

증명하고 싶었다. 자신은 발로 찬다고 말없이 구르기만 하는 돌멩이가 아니란 사실을. 율리아는 곧장
소년의 손목을 붙들었다.

"따라와."

"무슨 짓을……!"

"황녀의 방이라고 뒤지지 않을 사람들이 아냐."

등 뒤에서 짜증 섞인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율리아는 애써 무시했다. 충동적으로 일을 벌였지만 그렇다고


감정에만 따른 결정은 아니었다. 이대로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빨리. 서둘러."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

"싫어. 넌 고작 이런 곳에서 잡혀선 안 돼."

사내들의 대화 내용으로 짐작해 보자면 레기온은 간 크게도 탄신연을 노려 황궁을 털려고 시도한
모양이었다. 그 와중 숨어든 곳이 하필이면 이런 폐궁이었고 말이다.

그의 허리춤을 더듬자 작은 보석 몇 개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율리아는 곧장 그것을 집어 들고,


소년이 뭐라 할 틈도 없이 그를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동시에 벌컥, 문이 열렸다.

"누, 누구야?"

"용건이 있어 잠시 방을 뒤지겠습니다."

"누구냐고 물었어."

율리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단지 무기를 든 사내들을 가로막고 있는 것만으로도,


방금까지 솟구쳤던 기세는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식어 버렸다. 저들의 큰 키와 극한까지 단련된 근육,
맹수같이 매서운 눈초리는 단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압박감을 자아냈다.

구둣발로 밀고 들어오던 기사들은 앞에서 얼쩡대는 작고 초라한 그녀가 귀찮았는지, 마지못해 대꾸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근위대입니다. 에스델 황녀 전하께 진상된 패물을 빼돌린 좀도둑이 있어 수색 중이죠. 그러니 방해하지
말고 물러서십시오."

안으로 사정없이 들이닥쳐 이것저것 열어보고 뒤지는 사내들을 보며 율리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대로 가면 침대 밑에 숨은 레기온이 금세 발각될 것이다. 무려 제국의 하나뿐인 별인 에스델의 물건을


건드렸으니, 보석의 가치가 어떻든 그는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레기온이 지금 죽으면, 그럼 인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는 장래 인-마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마족 측이 확실한 승기를 거머쥐었던 전황을 다시금 교착
상태로 몰아넣는다. 이는 결국 마족 측에서 '열쇠'를 대가로 종전 협상을 요구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만약 인간이 속절없이 밀리는 상황이라면, 악마들의 입장에서도 거리낄 것 없이 황도 아벨딧심의 방위를


뚫고 에스델을 강탈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마신이 태어나면 결국 인간은 마족들의 노예로 전락하리라.

'안 돼, 절대 안 돼.'

생각 이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율리아는 손바닥을 천천히 펼쳤고, 그녀의 손아귀에 있던 물건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그 작은 소리에도 기사들은 냉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율리아의 발치를 구르는 작은 보석들을 발견했다.
입을 연 사람은 없을지언정, 해명을 요구하는 시선만큼은 그녀에게 뚜렷하게 와 박혔다.
"……내가 훔쳤어."

자신을 향한 시선이 경멸과 혐오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익숙한 일이니 전혀
아프지 않았다. 조금도.

* * *

율리아는 바엘이 앉은 침대 앞에 서 있었다. 거대한 창에 반사된 붉은 달빛이 그녀의 발치를 스산하게


비췄다.

성까지 날아오는 동안 각인의 부작용은 절정에 달했다. 남들 눈앞에서 흉한 꼴을 보인 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지금도 안심할 수 없었다. 속옷 안쪽이 미끌미끌하게 젖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찌걱찌걱 민망한 소리가 날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창밖만 응시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레기온은 소드마스터니까 그래도 잠시간은 버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오래는 아니겠지.'

그는 강하기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레기온이라도 최고위급 마족이 몇이나
달려들었는데 무사히 빠져나가기는 힘들었다. 자신이 도와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막막했다. 범람하는 절망감의 크기만큼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럴수록 자신을 향한 바엘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진다는 걸 알면서도.

"후우."

그는 여전히 날개를 늘어뜨린 채로 느릿하게 목덜미를 주물렀다. 미끄러뜨리듯 로브를 벗으니 떡 벌어진
어깨와 조각처럼 깊게 굴곡진 근육이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하의는 바엘의 탄탄한 엉덩이
근육과 허벅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율리아를 노려보는 그의 안광은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다는 듯 흉흉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는 이대로 눈물만 떨어뜨리고 있을 수 없다는 현실을 자각했다. 군 통수권을 지닌 아가레스조차


어쩌지 못할 사내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각인의 당혹스러운 부작용을 느끼고 있을
사내가 말이다.

"마왕님……."

머뭇머뭇, 율리아는 다리 사이에서 민망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느릿하게 걸어가 바엘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아주 작고 가벼운 힘이었는데도 그의 시선이 자신과 맞닿은 곳에 쏠려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입을 떼야 하는데,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율리아는 입을 열었다가 닫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고, 바보 같은 스스로의 모습에 자책하며


입술을 깨물기를 반복했다. 그동안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그만큼 바엘의 인내심이 점점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그렇군."

그는 율리아의 연분홍빛 머리칼을 얼핏 다정하게 쓸어 올렸다. 긴 머리카락의 흐름을 따라 등 뒤로 넘어간


손이 돌연 가느다란 허리를 안아 바짝 끌어당겼다.
열쇠를 볼수록 자꾸만 갈증 난 것처럼 목이 말랐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부글부글 들끓는 속을 빈약한
껍질로 덮어 위장하고, 두려울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로 율리아의 바보 같은 모습을 꼬집었다.

"그리 백치처럼 서 있다고 유혹이 되겠나?"

낮고 축축한, 울림이 큰 목소리가 율리아의 고막을 건드렸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허리가 움찔


비틀렸다. 저도 모르게 헐떡이는 숨을 참아내려 입술을 깨물었지만, 바엘은 말도 없이 뒷걸음질 치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내 것에 흠집을 내면 안 되지."

"으응……!"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눈앞에서 흔들리는 얇은 네글리제 밑단을 붙들었다. 차가운 손이 납작한 복부와
완만한 젖가슴을 느릿하게 타고 올라가 붉게 달아오른 율리아의 아랫입술을 살살 매만졌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저릿한 열기가 퍼졌다. 율리아는 제 몸을 샅샅이 유린하는 사내의 손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 버렸다. 허리를 뒤틀며 몸을 빼려고 했지만 바엘의 다른 손이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구속했다.

입술 근처까지 끌려 올라간 순백의 치맛자락이 나붓하게 흔들렸다. 그가 율리아의 아랫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물어."

명령은 간단했지만 위협적이었다. 바엘은 머뭇머뭇 벌려진 붉은 입술 사이로 치맛자락을 깊이 쑤셔 넣었다.

그렇게 시선을 내리자 실오라기 하나 없이 가녀린 나신이 눈앞에 남김없이 드러났다. 상아처럼 새하얗고
부드러운 여체가 설익은 과실처럼 발갛게 물들어 갔다. 주변에 꽃 한 송이 없건만 달큰하게 풍겨오는 살
내음에 바엘의 시야가 까맣게 침잠했다.

36 화

사내의 커다란 손이 율리아의 가랑이 사이로 주저 없이 비집고 들어갔다. 민감한 곳을 찔린 그녀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바엘의 손목 위로 나이트가운이 툭 떨어졌다.

벌써부터 푹 젖은 비부는 그의 침입을 너무도 간단히 허용했다.

"아, 제발 살살……!"

찌걱대는 소리에 맞춰 율리아의 몸이 위태롭게 들썩였다. 마찰부에서 슬금슬금 치고 올라오는 감각에


허벅지 안쪽이 잘게 경련했다. 버티고 설 힘을 잃었음에도 바엘의 손가락은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며 여린
속살을 헤집었다.

다리를 덜덜 떨던 율리아가 그의 품 안에 허물어졌지만, 바엘은 그녀의 상체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곤


손가락을 하나 더 쑤셔 넣었다. 무게 중심이 비부로 옮겨가며 그가 더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오자 율리아는
견디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질척한 속살이 손가락을 끊어 먹을 듯 조이는 것을 느끼며 바엘은 다시 그녀의 치맛자락을 걷었다. 다리


사이에 여전히 손가락을 꽂은 채로, 그는 여유롭게 입매를 비틀었다.

"다시 물어. 강하게."


"무, 무서워요. 이러지……."

"또 놓쳤다간 용서하지 않겠다. 벌이 취미라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싫어, 싫, 흐읍!"

율리아가 옷자락을 물기 무섭게 그는 다시금 손가락을 강하게 쑤셔 넣었다. 그녀의 입에서 뭉그러진
신음이 새어 나왔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내부를 긁으며 빠져나갔다가 다시 쳐들어오는 감각이 등골을
선뜩하게 울렸다.

거친 움직임 탓에 다시 허벅지 안쪽이 움찔거리고 다리엔 힘이 풀렸다. 조금씩 비틀비틀 앞으로 다가가던
율리아의 정강이가 이윽고 침대 매트리스가 닿았다. 그녀의 명치께에 바엘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쓸렸다.

순간 짓쳐들어오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손가락이 페니스의 움직임을 닮아 점점 빠르고 격해졌다. 괴로울


정도로 몰아치는 쾌감에 숨이 막혔다.

"흐, 읍, 읍, 흐으!"

"……."

"응, 응, 으으응!"

억눌린 비음과 찌걱대는 소리만이 적막한 둥지를 스산하게 울렸다. 파도처럼 차곡차곡 밀려들던 쾌락이
정점에 다다르기 직전, 바엘이 그녀의 안에서 손가락을 빼내며 푹 젖어버린 속옷을 무릎 아래까지 내렸다.

뜨거운 열락에 빠져들던 하복부에 거짓말처럼 찬기가 밀어닥쳤다. 미처 도달하지 못한 욕구는 율리아의
머릿속을 짓뭉개며 몸 구석구석을 쑤시고 돌아다녔다. 그녀는 치맛자락이 흘러내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헐떡헐떡 몸을 뒤틀었다.

"아앙, 아!"

"……."

"마, 마왕님. 이상해요. 저, 배 속이, 응……."

"내가 분명 놓지 말라고 했을 텐데."

율리아의 목덜미에 뱀이 기어가듯 차가운 손바닥이 올라갔다. 바엘은 벌벌 떠는 그녀를 아주 작은


힘만으로 털썩 주저앉혔다.

바닥에 무릎 꿇은 그녀는 눈앞에 드러난 광경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핏줄이 도드라진 거대한 기둥이
당장에라도 파고들만 한 구멍을 찾아 꺼떡거리고 있었다.

그는 율리아의 뒤통수를 누르며 짐짓 상냥한 듯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빨아."

"하, 하지만 어떻게……."

그녀가 입을 여는 타이밍에 맞춰 바엘이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그녀의 입 안에 묵직한 살덩어리가


쳐들어왔다.

"내 명령을 어긴 벌을 받아야지."

"으읍, 욱!"
"이 정도로 관대한 처벌이라니, 다른 이들이 들으면 놀라 자빠지겠군."

권태로운 목소리와 다르게 그녀를 짓누르는 손길은 더욱 잔인해졌다. 무자비하게 파고든 물건이 그녀의
작은 입 안을 거칠게 유린했다. 율리아의 목에서 비명을 닮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뭉툭한 귀두가 식도 너머까지 쳐들어와 괴로웠지만 그보다 숨을 쉴 수 없는 것이 더 두려웠다. 바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칠수록 그녀를 강압하는 힘 역시 강해졌다.

"컥, 우욱……!"

살고자 하는 욕구와 지배하고자 하는 가학성이 팽팽하게 맞부딪혔다. 그때, 그녀의 머리칼을 쥐고 거칠게
움직이던 그의 미간이 일순 구겨졌다. 율리아의 이가 페니스에 스쳤다.

"젠장, 정말이지 쓸모없군. 벌리는 것 하나 제대로 못 하나?"

"쿨럭! 흐윽, 끕!"

머리채를 쥔 손아귀가 떨어져 나가자 율리아는 힘없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뺨은 어느새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정신이 멍해 턱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타액을 닦을 틈도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떨어뜨리는 눈물은 되레 바엘의 가학심을 부채질했다. 그의 성기는


수그러들기커녕 꿈틀거리며 경악스럽도록 크기를 키워갔다.

바엘의 붉은 눈동자가 울먹이는 그녀를 뚫어져라 직시했다. 난폭하게 들끓는 욕망에 휩쓸려, 그는 제
성기를 길게 훑으며 수음을 시작했다. 선단까지 밀려 올라갔던 표피가 팽팽하게 당겨져 내려갔다. 탁탁,
건조한 마찰음이 율리아의 고막에 자극적으로 들러붙었다.

'기분이 이상해. 무서워…….'

원래도 선명했던 바엘의 복근이 더욱 짙은 음영을 그리며 수축했다. 바엘은 절정에 달할 때까지 오직
율리아의 모습만을 지독하게 쫓았다. 페니스가 토해 낸 정액이 그의 복부와 허벅지에 난잡하게 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두렵고 겁이 났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것이 자신의 안을


드나들던 때의 감각이 머릿속에 뒤엉켰다. 활짝 열린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온 내벽을 압박해, 기어코
절정에 도달하게 만들던 무자비한 움직임을.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율리아에게 턱짓했다. 가까이 다가오란 의미였다.

다시금 힘을 얻어 부피를 키워 가는 물건을 보며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거칠게 다뤄지는 게 두려웠다.

"마왕님……."

"나를 거절할 입장인가, 네가?"

"수, 숨이 막혀요. 턱이 아프고, 맛도 이상하고, 흑, 싫어."

그녀가 히끅대며 거절을 늘어놓을수록 바엘의 인상은 점점 차갑게 굳어갔다. 율리아의 말을 끊은 그가


험악한 얼굴로 재차 손가락을 까딱였다.

율리아는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 너머 어둠의 왕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침대에 앉아 있던 그는 백탁액을


시트로 대충 닦아 내고 그것을 아무렇게나 내버렸다.

"이리와."

"마왕님, 제발."

"지독하게 대하는 게 좋다면 어쩔 수 없지."

"읏……."

그의 목소리가 빙점을 뚫고 내려갈수록 저 거대한 흉기는 더욱 존재감을 과시하듯 꺼떡거렸다. 이대로


계속 머뭇거리며 시간을 끈다면 정말 좋지 않을 꼴을 당하게 될 거라 말하는 듯했다. 결국 율리아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이."

율리아는 입술을 꾹 깨문 채 한 발짝 다가갔다.

"더."

침대에 걸터앉은 그의 긴 다리가 율리아의 무릎 바로 앞까지 뻗어 있었다. 이 상태에서 더 다가가려면


다리를 벌려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야 했다. 겁먹어 히끅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그녀의 두 손이
얇은 치맛자락 한 장을 생명줄처럼 움켜쥐었다.

"마음에 안 드는군."

그것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바엘의 미간이 구겨짐과 동시에 찌익, 그녀가 쥐고 있던 네글리제가 간단하게
찢겨 버렸다. 바르르 떨리는 새하얀 여체가 바엘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의 목울대가 거칠게 오르내렸다. 단단한 팔에 구속당한 율리아는 눈 깜짝할 새 그의 몸 위로 쓰러졌다.

바엘이 침대에 누웠고, 율리아는 그런 그의 가슴팍에 허벅지를 활짝 벌린 채 올라탔다. 이런 자세만 해도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는데, 그는 만족하지 않고 더한 것을 요구했다.

"올라와."

"어, 어디로……."

율리아는 그의 가슴팍 위에 앉아 있었고, 여기서 더 올라가면 곧장 얼굴이었다. 설마하니 정말 그곳에


앉으라는 뜻은 아닐 것 같아 답을 기다렸지만 바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흉흉하게 안광을
번뜩일 뿐이었다.

"억지로 쑤셔 넣어 주기를 바라나?"

"오, 올라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정말이에요."

"……."

"하지만 더 올라가면 얼굴인데, 정말 올라가면 찢어 죽일 거잖아요."

인간 주제에 감히 마왕의 얼굴을 깔고 앉는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알몸으로 있다는 수치심은
둘째치고라도, 그렇게 하면 바엘이 정말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와 살갗이 직접 닿은 탓에 심장 위의 각인이 붉은빛을 흩뿌리는데도, 율리아는 등허리를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생소한 감각보다 그것이 더 중요했다.
"정말로 저는 모르겠는데, 거짓말 아닌데."

"이곳으로 올라와."

"이런 짓 해 본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르고……."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으며 뚝뚝 눈물을 떨어뜨리던 율리아가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정말 그의 얼굴


위로 올라오라는 의미인지, 바엘이 깊은 구멍을 헤집을 때처럼 혀끝을 뾰족하게 세웠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겁먹어 굳어버린 율리아를 다그치듯, 바엘이 그녀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픔과
동시에 미묘한 쾌락이 몸속을 내달렸다.

"으응!"

그녀가 저도 모르게 무릎으로 반쯤 일어선 틈을 놓치지 않고 바엘은 그녀의 안으로 다시금 손가락을
넣었다. 겁먹은 탓에 뻑뻑하게 말라 버린 내벽이 그의 손가락을 힘겹게 밀어냈지만 그럼에도 바엘은
중지를 꾸역꾸역 끝까지 쑤셔 넣었다.

율리아는 자신의 배 속에서 앞쪽을 향해 당기는 힘에 버티지 못했다. 결국 가랑이 사이를 두 손으로 가린
채 머뭇머뭇 그의 얼굴을 향해 무릎걸음으로 기었다.

"더."

바엘의 턱 부근에서 멈춘 율리아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그의 시야에
속속들이 닿게 된다. 다리 사이를 훤히 보여 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뜨겁게
뻐끔거리는 그곳조차.

그녀가 망설이자 바엘은 그녀의 안에 꽂아 넣은 손가락을 다시금 당겼다. 혹시나 찢어지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녀는 주춤주춤 한 걸음 더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바엘은 비부를 가린 두 손을 단번에 떼어 내 등 뒤로 결박했다. 어깨가 뒤쪽으로 펼쳐지며 작게 움츠렸던


가슴이 절로 내밀어졌다. 그는 구멍에서 꺼낸 손가락으로 젖가슴 끝의 분홍빛 유실을 느릿하게 굴렸다.
쾌감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앉아."

"으응, 아, 안 돼요. 앉으면……."

그의 입술 위에 가장 깊고 은밀한 곳이 직접 닿게 된다.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잘 모르지만


무척이나 괴로운 일을 당할 것 같은, 그런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다.

율리아의 주저를 알아챘는지 바엘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음핵을 슬쩍 밀듯이 굴렸다. 그와 맨몸으로
맞닿아 있는 데다 비부엔 습하고 뜨거운 숨이 와닿고, 거기에 길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음핵을 문지르고
있으니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눈가만 발갛게 붉히던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바르르 경련했다. 허벅지 힘이 풀려 그의


위에 주저앉자 바엘은 양손으로 살점을 벌리고 곧장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으응!"

그와 맞닿은 유일한 곳에서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결국 도망치지 못한 채 양손으로 입술만 틀어막았다.
37 화

"흐윽, 아!"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감각이 허리 아래부터 서서히 퍼져 나갔다. 아까 도달하지 못했던 쾌락은 그 배의


충격으로 그녀의 신경계를 잠식하고 있었다.

두껍고 뜨거운 혀가 구멍 안 구석구석을 탐험하듯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인간의 혀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깊이였다.

그에게 밀부를 고스란히 내어준 율리아는 침대 헤드에 매달려 가쁜 숨만 할딱였다. 붉은 꽃잎을 벌리던
손가락은 어느새 밖으로 빠져나와 율리아의 미성숙한 젖가슴을 움켜쥐고 유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위아래로 자극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아, 마왕님, 너무, 깊어."

"일어서지 마."

"아, 안 돼, 흑……!"

불규칙적이던 혀의 움직임이 마치 피스톤질을 할 때처럼 일정한 규칙성을 띠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율리아는 저도 모르는 새 허리를 흔들었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바엘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입을 벌린 그는 한입에 들어갈 정도로 앙증맞은 음부를 더욱 강하게 쑤시고 핥았다. 달큰하게 새어 나오는
액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삼켰다. 그의 목울대가 흥분으로 거칠게 오르내렸다.

젖은 소리가 이제는 온 실내를 가득 메웠다. 바엘은 율리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붙잡고 위아래로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오르내리면서도 율리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하염없이 신음만 흘렸다.

"싫어, 거긴, 아, 안 돼!!"

바엘의 혀가 어떤 곳을 꾹 짓누른 순간, 부드럽고 말캉하던 내벽이 덜덜 떨리더니 일순 빳빳하게


조여들었다. 오르가즘에 도달한 율리아가 고개를 젖히며 마구 도리질 치는 탓에,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바엘의 복부 위로 쏟아져 흔들렸다.

그는 액을 더 잘 마실 수 있도록 그녀의 허벅지를 힘주어 활짝 펼쳤다. 혀를 끝까지 내밀어 음부 전체를


세로로 길게 훑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애액을 마시기 위하여.

"더는, 흐흑……."

힘이 다했는지 흐느적거리며 쓰러지는 그녀의 목덜미를 받친 채로, 바엘은 순식간에 자세를 역전시켰다.
그는 제 밑에 깔린 새하얀 여체를 손끝으로 길게 훑으며 귓가에 중얼거렸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곤란해.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아직, 가고 있는, 아!"

바엘은 율리아의 둔덕을 한껏 벌리고, 그 사이에 팽팽하게 달아오른 성기를 끼워 넣었다. 삽입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느긋하게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음핵이 압박당해 아찔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마계의 밤은 길지."

"흐으……."
"내가 밤이라고 말하면, 설령 하늘에 태양이 떴다 하더라도 밤이라 불리게 될 테니."

바엘은 허리를 뒤로 물리며 자세를 바꿨다. 율리아의 가녀린 허리를 끌어당겨 제 붉은 살덩어리와 맞춘 뒤,
준비할 틈도 없이 말랑하게 젖은 구멍을 단번에 꿰뚫었다.

"아앙!!"

빠듯하게 들어찬 페니스는 단지 존재만으로도 온 내벽을 거세게 압박했다. 지독한 쾌락을 견디지 못해
몸을 뒤트는 작은 먹잇감을 보며, 왕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도망칠 수 없어."

그는 율리아의 허리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뒤로 물렸던 허리를 다시금 힘껏 쳐 올렸다. 그녀의 작은
구멍이 거대한 페니스를 뿌리 끝까지 온전히 삼켰다. 그는 기다리지 않고 재차 허리를 튕겼다. 움직임에
맞춰 붙든 허리를 밑으로 끌어당기니 결합은 더욱 깊어졌다.

"제발, 마왕님, 너무, 빨라!"

"큭."

"흐흑, 그만……!"

미칠 듯한 쾌락에 질식당할 것만 같았다. 율리아는 거세게 몰아치는 그를 막으려 했지만 되레 손목만 머리


위로 붙들렸다.

그가 거칠게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마찰부에서 파도 같은 열기가 밀려들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실낱같이 붙들고 있던 이성이 새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빠르게 살 부딪히는 소리와 율리아의 끊어질 듯 높다란 교성, 그리고 왕의 붉은 안광이 밤의 끝자락을
빼곡히 채워 갔다.

* * *

긴 밤이 지나 어스름한 새벽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바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흑발을 대충 쓸어 올렸다.

"……."

고개를 돌려보니 밤새 괴로운 신음을 흘리던 열쇠가 쌕쌕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


위로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바엘은 그녀의 부어오른 눈가를 손끝으로 슬며시 쓸었다. 푹 익은
과실처럼 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스쳤다.

그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새하얀 나신 군데군데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하반신을 쳐 올릴 때마다 반동 탓에 열쇠가 자꾸 흔들리는 것이 귀찮아 붙든 부분이었다.

'약하군.'

나름 부드럽게 잡았는데도 젖은 가죽으로 조인 것처럼 짙은 자국이 남았다. 허리, 허벅지, 팔뚝, 손목.
상흔을 하나하나 훑던 바엘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아닌 그 누가 보더라도 혀를 찰
정도로 약했다.

'그런 주제에 유혹을 하겠다고 어설프게 설쳤던 말이지. 목숨 내버리는 짓인 줄 모르고.'

그의 자제심은 언제 끊어질지 모를 실낱과 같았다. 인간 사내가 열쇠의 가슴을 소중히 어루만지는 모습을
봤을 때, 타인의 손에 순순히 몸을 맡기는 그녀를 봤을 때, 실은 그것이 각인과 관련된 행동임을
알면서도 들끓는 분노로 눈앞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율리아가 바엘의 품에 짐짓 살갑게 안겨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둘은 죽은 목숨이었으리라.

왕의 운명을 지니고 가장 강하게 태어난 악마, 어느 것에도 굴복당한 적 없는 지옥의 절대자가 바로


그였다. 인내할 필요도 없고 그 이유가 남의 안위가 될 일은 더더욱 없었다. 또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바엘이 이성을 되찾지 못한다면 결과는 열쇠의 죽음이었다.

'목이 타는데.'

멍든 허벅지를 훑던 그의 손바닥이 자연스럽게 점점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사이에 자리한 샘이


자신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깊은 안락함과 만족감을 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신이 송두리째 홀릴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앞에 두고 먹지 못한 채 바라만 봐야 하는 심정이 이와


비슷할까. 안 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애가 닳고 입 안이 쓰게 말랐다.

"쯧."

힘들게 손을 떼어 낸 그는 이내 혀를 차며 몸을 물렸다. 이대로 더 했다간 정말 죽을 것이다. 어떻게


찾아낸 파편인데, 복상사로 어이없이 잃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바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새 벌어진 격한 정사로 인해 난장판이 됐던 둥지는 바엘의
손짓 한 번으로 눈 깜짝할 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마력이 통하지 않는 단 하나의 존재만이 여전히 엉망인 상태로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 뒷머리를 당기는 것처럼 신경이 곤두섰다.

'잠시라도 혼자 내버려 두면 몸이 식으니 어쩔 수 없지.'

교접 중 허리를 뒤로 물릴 때마다 한기를 버티지 못해 바르르 떨던 모습이 뇌리에 잔상처럼 맴돌았다.


떨쳐 내려 할수록 되레 지독하게 들러붙었다. 그 순간 느꼈던 가학성과 쾌락을 다시 되살리라 유혹하는
것처럼. 손만 뻗으면 맛볼 수 있다고 속삭이는 것처럼.

그의 안광이 짙게 내려앉은 찰나, 둥지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바엘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바깥의 객은 주저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이른 시간에 송구합니다. 하지만 사안이 시급해 어쩔 수 없었답니다?"

홀로 선 레벤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지쳐 쓰러진 율리아에게 짧게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천천히 부복했다.

"인간 소드마스터에 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굳은 얼굴을 한 레벤나의 등 뒤엔 원래 목적지에 닿지 못한 작은 편지가 감춰져 있었다.

* * *

시커먼 재가 휘날리는 황량한 대지, 푸른 돔 형태의 방어막 위로 악마 넷의 공격이 끝없이 쏟아졌다.


대기 중에 짙게 녹아든 마력이 그들의 힘을 무한히 채워 넣었다. 마나와 마력의 경계가 흐린 접경지에서
싸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악마 쪽이 확실한 승기를 잡고 있었다.

바닥에 대검을 꽂은 레기온은 두 손으로 손잡이를 움켜쥔 채 마나 주입에 집중했다. 소드마스터의


증표이자 마나의 운용을 돕는 매개체 소울 소드가 푸른빛을 내며 진동했다.
방어막 표면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바르르 파장이 일었다. 그것은 점점 크기를 키워 가더니, 이내 제게
닿았던 마력의 궤적을 따라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날려 대기 시작했다.

"물러서! 다들 공격을 멈춰!"

"큭, 인간 주제에……!"

푸른빛에 닿은 보티스의 꼬리가 일전 레라지에의 몸처럼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것을 확인한 바르바토스는
재빨리 퇴각을 외쳤다. 왕과 열쇠가 떠난 뒤 줄곧 멍한 얼굴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만 하던 인간의 첫
공격이었다.

마계에서 태어난 모든 것이 마나에 닿은 순간 새까맣게 타들어 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지상이 삽시간에


폐허로 변하는 것을 보며 한 악마가 질렸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지독하군. 이래서야 주군의 폭주와 다를 게 없겠어."

"아니, 저 짓도 머지않아 한계가 드러날 거다. 마력으로 가득 찬 대기에서 인간이 무슨 수로 힘을


끌어모으겠나. 제 살 깎아 먹기일 뿐이지. 우린 기다리기만 하면 돼."

모노클 너머 바르바토스의 눈매가 냉소적으로 가늘어졌다.

그의 예측대로 레기온의 마나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깊은 호수에 빠진 사람처럼 어두컴컴한 바닥으로
가라앉는 감각이 팔다리를 무겁게 옭아맸다. 몸에서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붙들 수 없었다. 그는 마나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율리아, 어째서……."

끝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채워갔다. 자신을 내버려둔 채 마왕의 품에 파고들던 그녀의 뒷모습이. 투정
부리듯 중얼거리는 달콤한 목소리가.

'마왕님, 죄송해요. 베로가 답답해하는 것 같아 잠깐 놀아 주려고 했는데, 작은 사고가 생겨서 이렇게


멀리까지 나와 버렸어요.'

'마왕님의 침실을 나온 건…… 허락하신 줄 알았어요. 어젯밤에도 아무 말 없으셨잖아요?'

모두 과거 자신에게만 보여 주던 모습들이었다. 오직 자신에게만.

"뭐가 잘못된 거지."

그는 광야에 홀로 선 채 과거의 기억을 샅샅이 헤집었다. 혼란스럽고 눈앞이 아득했다.

율리아가 자신을 친구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내를 남자로 볼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상처가 많은 탓에 타인을 대할 때 늘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주변에 다른 누군가가 맴돌아도 먼저


손을 내밀기를 두려워했고, 바깥에서 단단한 알을 깨 주어야만 겨우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 주었다.
자신도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던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선 행렬을 이끌고 황도 아벨딧심으로 돌아오면서,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율리아의 마지막 남은 껍질마저 완전히 부숴 버리겠다고, 기필코 자신을 남자로 보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어째서?
38 화

"욱! 쿨럭!"

순간적으로 숨이 턱 하니 막혔다. 몸 안의 마나가 뜨겁게 요동치며 몸속을 역류하는 게 느껴졌다.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힘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실핏줄이 터지며 흰자위가 벌겋게 물들었다.

마나가 폭주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한 바닥이 광범위하게 갈라지고 무너져 내렸다. 악마들이 비웃음 띈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도 자신의 끝이 임박했다는 걸 눈치챈 것이리라.

"젠장……."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율리아에게 가고 싶었다. 과거의 인연으로 망각되고 싶지 않았다. 이


미칠 듯한 갈망을 그녀의 뇌리에 아로새겨, 평생 잊지 못할 상처로라도 남고 싶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다른 누구도 손댈 수 없었다. 이기적이라 손가락질당할지라도.

육신이 내지르는 비명을 무시하며 한 발씩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그때,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악마들이
레기온의 머리 위로 매서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방어막은 마력을 튕겨냈지만 충격은 안에 있던
레기온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크아아악!"

"안됐군. 기껏 소드마스터가 됐는데 이리 허무하게 죽다니."

"그러게 인간 주제에 분수를 알았어야지!"

"마나를 통제하지 못해 죽는 소드마스터라니, 희귀한 구경을 하겠어."

내장이 파열되고 근육이 끊어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 속에서 레기온은 고개를 들었다.

율리아가 모습을 감춘 악마성, 깎아지를 듯 아찔하게 솟은 첨탑에 붉은 달이 걸려 있었다. 마왕 바엘의


안광을 닮은 붉은 초승달이.

"허억, 허억……!"

율리아를 보는 마왕의 시선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지옥의 밑바닥처럼 아득히 어둡고
시체 속 구더기처럼 지독하게 들끓는, 그건 분명 사내로서의 집착이었다.

전쟁터에 모습 한 번 드러낸 적 없을 정도로 만사에 무심하던 마왕이, 율리아에게 욕망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시야가 벌겋게 물들었다. 극렬한 분노가 레기온을 집어삼키고, 그가 내뿜는 마나의 색이
점점 어둡게 변질되어 갔다.

"저건 뭐지? 아까보다 힘이 더 강해졌잖아?"

"예감이 좋지 않군."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악마들이 공격을 멈췄다. 상황을 지켜보던 바르바토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검의 중심부에 박혀 있던 보석이 불에 타들어 가듯 검게 변이하기 시작했다. 소울 소드가 소드마스터의


마나를 보다 증폭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면, 그 중심에 있는 스톤은 넘치는 생명력의 근원이자 개화한
이능의 본체였다.

"그래 봤자 결론은 하나지. 영혼이 망가졌으니 저 인간은 앞으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끝났다."


"그럼 어떡할까?"

"문제의 여지를 남겨 주군을 번거롭게 할 순 없으니……."

소드마스터의 경지는 인간으로서 꽃피울 수 있는 이능의 정점이었다. 그런 존재가 마나 폭주를 일으키고


심지어는 스톤마저 잃다니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었다.

주군이 마신의 힘을 얻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건만, 이곳 마계에 아주 조금이라도 위험한 변수를 남겨


둘 수는 없었다.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죽여야지."

나직이 중얼거린 바르바토스의 손안에서 검은 구체가 블랙홀처럼 크기를 키워 갔다. 단번에 숨을 끊어


놓겠다는 그의 의지에 다른 악마들 역시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바로 그때, 왕의 둥지가 있는 방향에서 웬 거대한 도끼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형체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들이닥쳐 레기온의 방어막에 직격했다.

대지가 갈라질 듯 엄청난 충격파가 울리며 도끼가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자루에 묶여 있던 물건은 작은
흠집 하나 없이 레기온의 발치에 툭 떨어졌다.

길게 접은 종이 사이에 눈에 익은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끼워져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레기온이 홀린 듯


몸을 숙여 그것을 주워 들었다.

그의 굳은살 박인 손바닥에 머리칼 몇 올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언제


다가왔는지 그의 귓가에 높고 카랑한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시간 끌지 말고 내용이나 읽으렴? 그리고 율리아의 눈앞에서 멍청한 짓 할 거면 당장 인계로 돌아가!"

레벤나의 시선이 검게 일그러진 구체 안, 안광을 기괴하게 번뜩이는 청년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손엔


방금 날아온 도끼와 똑같이 생긴 것이 하나 더 들려 있었다.

"이 멍청한 인간 같으니! 누군가를 상처 주느니 차라리 제가 다치고 마는 율리아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편지에 숨은 진심이 뭔지 정말 모르겠단 말이야?!"

"악마 주제에 율리아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여!"

"최소한 지금 너보다는 잘 아는 것 같구나? 네가 이대로 죽으면 율리아는 어떻게 될 거 같니? 정말 죽고


싶다면 최소한 이곳에선 꺼져 버려! 난 율리아만 행복하면 그만이란 말이야!"

빽 소리친 레벤나가 도끼로 다시금 방어막을 내리쳤다. 고막을 쩡하니 울리는 파공음과 함께 무기가
산산조각 났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네 악마가 모두 인상을 찡그렸지만 서로를 노려보는 레벤나와
레기온의 시선에 흔들림 따윈 없었다.

다만 방금의 충격으로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레기온은 손안의 편지를 움켜쥐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실은 율리아의 머리카락에 닿은 순간부터 흐릿하게 멀어져 가던 정신이 점점 맑게 개어 가고
있었다.

시선을 든 그는 바로 앞에 서 있던 쨍한 금발의 악마를 보았다. 그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선 마왕과


함께 왔던 네 악마가 비행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돌발 행동을 일으킨 금발의 악마를 허망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은 그들이 원하던 바가 아니란 뜻이었다.


"악마 따위에게 도움을 받다니, 할 말이 없군."

방금까지 자신이 읊조렸던 온갖 폭력적인 상념이 뇌리를 스쳤다. 율리아의 선택을 저주하고 원망하며,
그녀의 마음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을 찍겠다고 결심했다. 단지 생각한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평생
사과해야 할 만큼 잔인한 내용이었다.

"그래……. 아직 율리아를 구해 내지 못했는데 이대로 죽을 순 없지."

손안에 든 율리아의 머리카락이 유독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몸속을 날뛰며 고통스럽게 역류하던 힘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느껴졌다.

고갈되어 완전히 빠져나간 마나 대신 새롭게 채워진 힘이 육체를 재구성해 나갔다. 그것은 레기온이 원래
사용하던 마나와 비슷하되 조금 달랐다. 따뜻하고 상냥한 느낌이 드는, 이건 분명 율리아와 닮은
힘이었다.

길었던 밤이 지나 드디어 먼동이 터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웃을 때처럼 선홍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며 레기온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 * *

"……내가 훔쳤어."

침대 밑에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던 한 소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시야가 낮은 탓에 볼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치맛자락을 붙든 채 덜덜 떠는 작은 손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방을 뒤지던 사내들이 삽시간에 소녀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기사 중 하나가 그녀의 발치에 떨어진
보석을 낚아채듯 주웠고, 낡은 침대맡에 놓인 싸구려 초에 비춰 그것이 잃어버린 물건이 맞음을 확인했다.

"왜 이런 짓을 했습니까."

"에스델의 눈에 차지 않을 만한 물건은 없어져도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어. 그리고 오늘은 내 생일이기도


하니까 조금쯤은……."

"고작 그딴 이유로 도둑질을 했단 말입니까? 오직 에스델 황녀님을 위해 진상된 물건을?"

"낯짝도 두껍지. 제 자매의 것을 욕심내다니, 길거리 비렁뱅이도 이보다는 떳떳하겠네."

"아무리 그래도 말이 심해."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소녀를 둘러싼 사내들의 대화 내용은 점점 원색적으로 변해 갔다. 자신들 몸집의 반도 안 되는 여자아이를


둘러싼 채로, 그들은 어떠한 배려도 없이 위협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이래서야 도둑이 누군지 알아냈다고 우리가 공을 인정받을 수나 있겠어? 이딴 계집이 부린 수작질 따위,
쉬쉬하면서 없던 일로 묻어 버릴 텐데!"

"어디 가서 말 못 할 일이긴 하지."

"평민이었으면 실컷 패면서 화풀이라도 하지, 이딴 것도 피가 섞였다고……."

"그만!"
말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기색이 섞였다.

이번 탄신연은 제국의 각 분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데다 공을 날려서 억울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방금 동료가 언급한 '피'는
다름 아닌 최고 존엄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이야기가 윗선에 전달됐다간 자칫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기에, 그는 율리아를 힐끗대며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주물렀다.

"어차피 당신의 말은 누구도 믿지 않을 겁니다. 도둑질을 모면하기 위해 허튼 수나 쓴다고 생각하겠죠.


우리야 잠깐 피곤해지고 말겠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을 거란 걸 충고해 두겠습니다."

"저, 걱정하지 않으셔도……."

"에스델 전하께 올라온 진상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죄로 이미 많은 병사가 처벌받았습니다. 지금은


근위대까지 나서 온 궁을 수색하고 있죠. 그 가벼운 머리로는 절대 감당하지 못할 욕심 때문에."

한 자씩 나직이, 짓씹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고함을 지르던 다른 사내보다 훨씬 위협적이고


소름 끼쳤다.

반걸음 물러선 그는 다시 평범한 기사의 얼굴로 돌아갔다. 빠른 변화에 적응할 틈도 없이 사내가 말을


이었다.

"이 일은 폐하와 황녀 전하께 즉시 아뢰겠습니다. 따로 사람이 올 때까지 안에서 근신하십시오."

그의 판결을 신호로 기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마지막까지 씨근덕대던 사내도 이윽고 방을 떠났다.
내내 긴장하느라 지친 소녀는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침대 밑에서 줄곧 숨죽이고 있던 소년은 머리를 벅벅 흩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작게 웅크린 소녀의 등은


그로 하여금 미묘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사내들의 시선이 바늘이었다면 온몸에서 따끔따끔 피가 배어 나왔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신


탓에 봉변을 당한 그녀에게 내심 미안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태어나 평생을 거리의 아이로 살았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을 들어본 적도 건네본 적도
없었다. 소년의 목소리가 절로 퉁명스럽게 나갔다.

"주제에 누가 누굴 동정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감싸 주면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어?"

"……."

"그래 봤자 너도 나와 다를 바 없잖아. 아니, 네겐 저주받은 피가 흐르잖아!"

순간 소년은 멈칫했다. 그를 말없이 올려다본 소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왜, 왜 울어! 지금 내 탓을 하고 싶은 거야?!"

"……."

"벙어리야? 뭐라고 말 좀 해!"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소년은 안절부절못하며 방안을 서성였다. 소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졸졸 쫓았다.
39 화

"아, 진짜!"

결국 소년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그는 놀랄 틈도 없이 소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척척 걸어서 낡아빠진


침대 위에 그녀를 떨궜다.

소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눈처럼 희고 순한 게 꼭 갓 태어난 새끼 양 같았다. 뺨이 설익은 과실처럼


발갛게 물든 탓에 더더욱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느릿하게 숨을 고르던 그녀의 입에선 의외로 단호한 말이 나왔다.

"걱정하지 마. 너에 대해선 아무 말 안 할게. 오늘 밤 보석을 훔친 건 나니까, 너도 이 일은 기억에서


지워 버려."

"뭐야, 지금 날 동정하는 거야? 주제에 내가 가엾어 보이냐고!"

당황한 소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힐난이 튀어나왔다. 소녀는 일순 아픈 듯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흐릿하게 웃고만 말았다. 그 모습을 보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곳에 계속 있다간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 신경이 곤두섰다.

비쩍 말라서는 눈만 커다란 소녀의 어디에서 이런 분위기가 나는 건지, 뜨뜻미지근한 물에 푹 잠긴 것처럼


편안하고도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긴장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쉬어도 된다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상식적으로 당장 처음 본 사람에게서 그런 기분을 느낄 리 만무하거니와, 지켜 줄 어른이 없는 거리의


아이가 긴장과 경계를 버리고 느슨해졌다간 기다리는 결말은 하나뿐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소년이 쯧, 혀를 차며 몸을 돌린 그때였다. 그의 손목이 작은 힘으로 붙들렸다.

"이럴 땐 그냥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

잠깐 새 한결 진정됐는지 담담하게 중얼거린 소녀는 그의 시선을 피해 손을 떼었다.

"그리고 동정 같은 게 아니었어. 혹시 마음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 잘 가."

할 말은 이제 끝났다는 듯, 소녀는 힘없이 몸을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그 시야의 끝엔 크고 아름다운


연회장이 있었다. 간간이 경쾌한 음악과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그래서 적막뿐인 이곳이 더욱 서늘하게
느껴지는.

소년의 뇌리에 수많은 귀빈 사이에서 즐거운 듯 웃던 황녀의 모습과 다 낡아빠진 폐궁에 홀로 웅크리고
있는 작고 가녀린 어깨가 번갈아 스쳤다.

'젠장.'

아무리 저항해 봤자 애초부터 결론이 정해진 싸움이었다. 고뇌하듯 제 머리칼을 마구 흩뜨리던 소년이
결국 침대 발치에 털썩 걸터앉았다.

"뭐, 이것도 인연이겠지. 내 이름은 레기온이야. 너는?"

"……율리아."

잠시 머뭇거리던 소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러곤 레기온이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 * *

감은 눈 사이로 환한 빛이 새어들었다. 수면 위로 기분 좋게 떠 오르는 의식을 느끼며, 율리아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바엘의 침실,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계에 온 뒤로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정적이었다.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거대한 방은 마치 깊이


잠들어 있는 유적처럼 보였다.

"으윽……."

하지만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길 여유는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율리아가 살짝 뒤척인 순간, 끔찍한
통증이 밀어닥치며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내지른 탓이었다. 경악한 그녀가 헉, 숨을 들이켰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관절이 격하게 삐걱대고 몸은 침대 아래로 푹푹 꺼졌다. 민망한 곳에서
느껴지는 붓고 쓰라린 통증은 덤이었다. 밀려드는 고통에 허덕이던 그녀는 머리맡에 놓인 물을
들이켜고서야 간신히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시야에 들어온 그녀의 나신은 엉망이었다. 팔다리는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멍이 들었고 가슴 언저리엔
무언가에 물린 듯 울긋불긋한 상흔과 잇자국이 가득했다.

아랫배 부근에 뭉쳐있는 시트를 걷어 안의 상황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다. 밖으로
드러난 부분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을 거란 걸 아는 까닭이었다.

이 침대 위에서 바엘과 벌인 정사의 기억은 그만큼 강렬했다. 도저히 떨쳐낼 수 없을 정도로 뇌리에
선명히 각인됐다. 잔인한 열락으로 점철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던 그녀의 어깨가 불현듯 굳었다.

"밖에, 레기온이……."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 늦은 밤 전투가 벌어졌으니 그때부터 쭉 싸워 왔다면 벌써 반나절이 훌쩍 넘었을


시간이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고위급 악마 넷을 상대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버텨 낼 수 있을까.'

이미 늦었을지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덜덜 떨며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던 율리아가


바닥에 힘없이 뒹굴었다.

"흐윽!"

넘어지면서 무언가를 잘못 건드렸는지, 그녀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SYSTEM

진행도 확인 불가]

[▷SYSTEM

2nd Episode. '과거의 궤적' 진행 중]

율리아는 후들거리는 팔을 짚고 몸을 일으키다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딴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자괴감에 빠진 율리아는 내용도 읽지 않고 창을 꺼 버렸다. 대신 SIGHT 기능을 활성화시키자 기다렸다는


듯 창이 떠올랐다.

[▷SYSTEM

잔여 HP 가 10% 미만입니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기능을 제외한 모든 스킬을 해제하십시오.]

몇 초간 시야 가장자리가 붉게 점멸하더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를 무시한 채 몸을


일으켰다. 근처에 걸려 있던 긴 로브로 몸을 감싸고, 땅에 질질 끌리는 부분은 대충 찢으려다 안 되어
손아귀에 강하게 움켜쥐었다.

"밖으로 나가야 해. 그 폐허로……."

문을 열어 보니 넓은 복도엔 싸늘한 정적만이 맴돌고 있었다. 다들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도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베로를 찾아 성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리고 레기온을 구해야 했다.

율리아는 미친 듯 달음박질쳤다. 간간이 악마들을 마주칠 때마다 시야 기능을 확인하며 몸을 숨기고


그들이 지나가면 다시 달리길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엔 체력이 위험 수준까지 떨어졌다는 가 나타났다.

[▷SYSTEM

잔여 HP 가 5% 미만입니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기능을 제외한 모든 스킬을 강제 해제합니다.]

근처에 마족이 다가올 때마다 떠오르던 지문 창이 전원 꺼지듯 픽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시야 가장자리도
붉게 젖어 들며 그 면적을 조금씩 넓혀 가기 시작했다.

플레이어 사망 엔딩의 징조였다.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순간에, 낭패였다.

'하지만 체력이 차기를 기다리기엔 이미 시간을 너무 끌었어. 어떡하지?'

시간당 HP 회복량은 전체 체력의 2%였는데, 이마저도 스킬 포인트를 사용해 한 단계 높인 수치였다.


이대로 대책 없이 움직였다간 체력이 바닥나 죽겠지만, 그렇다고 움직이지 않으면 레기온이 악마들에게
죽을 게 분명했다.

율리아는 초조한 눈빛으로 복도 너머를 응시했다. 저곳에서 꺾으면 1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거대한 홀이
있었다. 성 밖으로 나가는 길목이 저곳에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베로를 축사에서 꺼내려면 이 루트를
통과하는 게 가장 빨랐다.

식은땀으로 등허리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레기온은 친구에 불과한


자신을 구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악마성까지 쳐들어왔는데, 멍청하고 바보 같은 자신은 고작 기둥 뒤에
숨어 우물쭈물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레기온은 정말 죽을 거다. 충격으로 인한 무력감이 그녀를 깊은 어둠 속에 매몰시켰다.

[▷SYSTEM

잔여 HP 가 4% 미만입니다.]

율리아가 바닥에 힘없이 무릎 꿇은 찰나였다. 계단 아래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 소리가 긴 통로를 타고


그녀가 숨어 있는 복도까지 전해졌다.

"이게 무슨 헛소리야? 누구를 어쩐다고?"

"진정해, 레라지에."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병신 꼴이 됐는데!"

"그래서 고쳐 줬잖아. 애초에 변방에서 마주쳤을 때 그렇게 무작정 덤벼들지만 않았어도 피차 얼굴 붉힐


일 없었을 텐데, 이건 학습 능력이 없는 건지 지능이 딸리는 건지."

"뭐라고?!"

저도 모르게 일어선 율리아는 홀린 듯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이들은 여전히
뜨거운 공방을 이어가고 있었다.

레라지에는 펄펄 뛰었고 레기온은 냉소적인 눈빛을 한 채 코웃음 쳤다. 레벤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길게
하품을 하며 베로를 쓰다듬었고, 바르바토스는 모노클을 벗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들 외에도
아가레스나 보티스를 비롯한 악마 두엇이 더 자리하고 있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조합이었다. 율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지만 그렇다고 눈 앞에 펼쳐진 생소한
광경이 없던 일이 되진 않았다.

"멍청한 악마 새끼. 나라고 네놈이 좋아서 고쳐 준 줄 알아? 자꾸 그딴 식으로 굴면 좋은 꼴 못 보는


수가 있어. 또 지져 버리기 전에 율리아 앞에선 친한 척……."

[▷SYSTEM

잔여 HP 가 3% 미만입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음이 레기온의 말소리를 덮어 버렸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인기척을 느낀


이들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챈 뒤였다.

"유, 율리아? 혹시 들었어?"

"아……."

[▷SYSTEM

잔여 HP 가 2% 미만입니다. 플레이어 보호를 위해 생명 유지 모드로 전환됩니다.]

레기온의 얼굴이 왜 어색하게 굳는지, 아가레스와 레벤나는 어째서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는지 알지
못했다. 준비할 틈도 없이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

율리아는 개인 침실에서 다시 눈을 떴다. 이번 혼절은 그리 길지 않았던 모양인지, 태양의 위치가


쓰러지기 직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어났구나? 정신이 좀 드니?"

율리아의 이마 위로 차가운 손바닥이 내려앉았다. 태양에 반사된 레벤나의 금발이 쨍한 빛을 흩뿌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지하 감옥에서도 얼굴색이 이렇게까지 창백하진 않았는데, 아프면 움직이지 말고 누가 오길 기다렸어야지?


안 그래도 레라지에만 진정되면 바로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그게, 그러니까……."

율리아는 어물어물 말을 더듬었다. 궁금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보니 되레 말문이 막혔다. 어젯밤


황야에 홀로 남았던 레기온은 이후 어떻게 된 건지, 지금은 왜 그리 태연하게 악마성에 들어와 있는 건지,
그리고 그의 생명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는 없는지.

레벤나는 그런 율리아의 속내를 알아챘는지, 천천히 하란 듯 픽 웃어 보였다.

"조금 섭섭하구나? 인계에 그리 중요한 사람을 두고 왔다고 왜 말하지 않았니? 네 편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난 까맣게 모르고 구경이나 했잖니? 늦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네……?"

"눈치라곤 약에 쓸래야 없는 다른 녀석들은 모르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내 눈까지 속일 순 없단다? 그


인간 소드마스터가 네 연인인 거지? 안 그럼 왜 이런 곳까지 찾아왔겠니?"

40 화

영문 모를 소리에 율리아는 멍하니 입을 벌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레벤나는 의자에서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뺨 위에 팔랑팔랑 그림자를 드리웠다.

"궁금한 건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렴? 모처럼의 재회니까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내가 막아 줄게."

조금은 들뜬 듯 걸어 나간 그녀는 문밖에 선 누군가를 툭툭 쳤다. 둘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가고, 이윽고


레기온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그의 눈동자가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이내


원래의 푸른색으로 돌아왔지만, 율리아는 그에게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하지만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레기온이 그녀의 머리맡에 앉았다.

"몸은 좀 괜찮아?"

"아, 응."

"갑자기 쓰러져서 놀랐어. 조금만 늦었어도 어떻게 됐을지."

율리아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손끝만 어색하게 꼼지락댔다.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휙휙


돌변하는 상황을 쉽사리 따라갈 수 없었다.

"레기온, 어젯밤엔 어떻게 된 거야? 성엔 어떻게 들어온 거고, 그보다 왜 인계로 돌아가지 않았어?"

"그냥…… 밤새 이런저런 일이 있었는데, 지금 말하기엔 좀 긴 내용이지만 어쨌든 모두 잘 해결됐어.


그리고 나도 앞으로 이곳에서 지낼까 해."

목소리만 들으면 어디 집 근처에라도 놀러 가는 사람 같았지만 내용은 상상 이상이었다. 인간이, 그것도


소드마스터가 지옥에 기약 없이 눌러앉겠다니. 한때 목숨 걸고 싸웠던 악마들과 한 공간에서 지내겠다니.

그녀의 기분이 무겁게 침잠했다. 또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는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나 때문이구나."

"아니, 뭐 그런 이유도 있고. 이젠 네 곁에 있고 싶……."

"역시 나를 빌미로 협박당하고 있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레기온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몸을 일으킨 율리아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럼 다른 이유는 또 뭐가 있는데? 내 탓이 아니면 왜 굳이 이런 위험한 이곳에 남아?"

"탓이라고 하지 마. 어디까지나 내가 원해서 있는 거야."

"레기온."

"그런 눈으로 봐도 안 가. 절대 안 가."

레기온은 씨근덕대면서도 시선을 은근슬쩍 사선으로 내리깔았다. 그는 할 말이 없거나 혼날 것 같을 때


이런 식으로 눈을 피하곤 했다. 이럴 때는 좀처럼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율리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일단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레벤나랑 무슨 일 있었어? 우리 사이를 그……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오해하고 있던데."

"레벤나? 아아, 아까 전의 금발 악마를 말하는 거라면 도움을 좀 받았어. 널 좋아하니까 악마성에서


지내게 도와달라고 했거든. 그랬더니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면서 의외로 쉽게 허락하더라. 좀 놀랐어."

말을 듣던 율리아의 입이 놀란 아기 새처럼 떡 벌어졌다. 그녀는 침대에서 잽싸게 뛰쳐나가 레기온의


가슴팍에 매달렸다.

"레벤나에게 그랬다고? 농담이지? 거짓말이지?"

"크흠."

레기온은 그녀가 매달리기 쉽도록 자세를 바꾸며 작은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당황한 율리아의
안중엔 그런 변화 따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발만 콩콩 굴렀다.

"어, 어쩌자고 그런 거짓말을 해? 미쳤어, 미쳤어! 앞으로 레벤나를 무슨 낯으로 봐!"

"거짓말 아닌데……."

"뭐?!"

"아뇨, 아무 말 안 했어요."

율리아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을 마주한 레기온이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그의 어깨 위로


율리아의 주먹이 마구 쏟아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솜 주먹이었다. 투닥투닥 레기온을 때리던
율리아는 되레 얼얼해진 손을 주무르며 침대에 엎어졌다.

레기온은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율리아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씨익


웃었다.

"그래도 이거 하난 확실하지."

"뭐가."

"브에스드라에서 지낼 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해 보여.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

"그렇다고 널 포기하진 않을 거야. 둘이 함께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으니까.


다만 네 마음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어. 알지? 내 수명은 이제 너보다 한참 길다는걸."
레기온의 단단한 손가락이 분홍빛 도는 백금발을 따라 밑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녀의 턱에 다다랐을
즈음, 슬쩍 고개를 숙인 레기온이 그녀의 위로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래도 너무 오래는 아니었으면 좋겠네."

쪽, 율리아의 이마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동시에 그녀의 시야에 환한 상태 창이 우후죽순


떠올랐다.

[▷SYSTEM

HP 가 5% 강제 회복되었습니다.]

[▷SYSTEM

공략 캐릭터 '레기온'이 활성화되었습니다.]

[▷SYSTEM

2nd Episode. 과거의 궤적]

[완료]

* * *

악마성이 모처럼 깊은 정적에 잠긴 밤, 넓은 집무실을 울리던 펜 마찰하는 소리가 불현듯 멈췄다. 새하얀
종이에 검은 잉크 한 방울이 튀어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본 바르바토스의 눈매가 미미하게 굳었다.

"후우, 젠장."

종이를 구겨 버리려던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집무실 한구석에서 털을 고르던 두


마리 독수리가 제 주인을 쳐다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바르바토스는 흑백이 명확한 것을 좋아했다. 마계와 인계로 나뉜 세상도, 강자와 약자로 이분법 된
지옥의 질서도 모두 그의 취향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이제껏 법칙에서 어긋나는 일을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경험을 기준으로 일을 범주화했다.

'그래 봤자 결론은 하나지. 영혼이 망가졌으니 저 인간은 앞으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끝났다.'

붉은 초승달 아래 검게 타들어 가는 광야를 내려다보며 바르바토스는 단언했다.

소드마스터가 내뿜는 마나의 색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생명력의 근원이자 개화한


이능의 본체인 스톤 역시 원래의 힘을 상실했다. 그에게 남은 결말은 마나 역류로 인한 비참한
죽음뿐이었다.

색다른 구경거리였지만 예상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마나와 마력은 서로 상반된 성질을 지녔다. 같은


그릇 안에서 공존할 수 없고, 만약 억지로 그렇게 가둬 둔다 해도 더 강한 힘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소드마스터는 달랐어."

그는 변이한 스톤을 제어해 대기 중의 마력을 마나로 변환시켰다. 소울 소드의 형태를 바꿔 육체에 가는


부담을 줄이고 힘의 회로를 재구축했다. 이로써 마나의 축복을 받은 소드마스터는 마계에서도 악마들과
같은 무한한 힘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인간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도대체 어디부터 어긋난 건지……."

생각해 보면 열쇠가 마계에서 눈을 뜨면서부터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원래 필요로 했던 인간은 지상에서 가장 고귀한 별이라 불리는 에스델 브에스드라였다. 그런데
정작 도착한 건 일찍이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율리아 브에스드라였다.

인간들은 단순히 가짜를 희생시켜 소중한 황녀를 지키고 싶었겠지만, 놀랍게도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진짜
열쇠였다. 그녀는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강력한 마력 저항을 지녀 마정석과 주군의 마력까지 철저히 막아
냈다. 아무리 열쇠라 하더라도 결국엔 나약한 인간이건만 말이다.

그래, 여기까진 열쇠의 특수성이라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신이 잠든 탑과 마정석 역시 변화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건 한 번뿐이어서 알아챈 이가 거의


없지만 성이 크게 뒤집혔던 날, 탑의 마법진은 왕을 구속했고 마정석의 칼날은 주군의 목을 향했다.

완전무결한 철벽의 요새라 불리는 마정석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공격한 것이다.

'열쇠가 근처에 다가온 탓이라고 한다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창세 이래로 지켜져 왔던 흑과 백의 법칙이 애매하게 빗겨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바르바토스의 신경을 긁었다.

"주군이 말한 파편은 무엇인가. 마신의 파편……."

낮게 중얼거린 바르바토스의 어금니가 뿌득 갈렸다. 빈 종이를 말없이 노려보았지만, 그렇다고 이 기이한


일들을 해결할 수단이 생길 리 만무했다.

탑에 들러 기록이라도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04. 마신의 탑

율리아가 두 번째 에피소드를 완료하고 며칠쯤 지난, 따사로운 볕이 들어오는 느지막한 오후였다.

바엘은 그날 밤 이후 어디로 갔는지 좀처럼 얼굴을 보지 못했고, 레벤나는 힘을 많이 써서 피곤하다며


마력 회복을 위한 긴 잠에 빠졌다.

레기온은 처음 며칠간은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그녀가 지내는 환경을 지켜보더니, 이젠 나름 안전하다고


판단했는지 잠깐씩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율리아는 자연스럽게 주인 없는 왕의 둥지에서 지내게 되었다. 외부의 침략을 받을 일이 없어


마계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이기도 하거니와, 바르바토스가 '이것이 바로 주군의 뜻'이라며 의아해하는
그녀를 굳이 밀어 넣은 탓이었다.

침대 헤드에 기댄 율리아는 스토리 진행도를 확인하며 얕은 생각에 잠겼다.

[▷SYSTEM

스토리 진행도 30%]


[마계를 통일한 최초의 군주, 대악마 바엘(Ba'al)]

[인계의 젊은 영웅, 소드마스터 레기온(Legion)]

에피소드 완료 보상으로 진행도가 10% 올랐고, 바엘만 존재하던 공략 캐릭터에 레기온이 추가되었으며
스킬 포인트도 3 개 생겨났다. 그 외에도 기본 스탯이 자잘하게 올랐지만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레기온'의
해금이었다.

'레기온을 지상으로 돌려보내기엔 이미 늦은 거겠지. 그렇다면…….'

율리아는 이제껏 엔딩 이후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정석의 봉인을 풀고서도
자신이 살아있을 수 있다면, 역시 인계로 돌아가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계에서의 일상이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과분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즐겁고 감사했다.

하지만 인간인 자신이 이곳에서 머무는 건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뿐이었다. 마성이 없는 물과 음식을
지속적으로 가져와야 하고, 아주 짧은 외출조차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나약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은 역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편이 나았다. 이곳에서의 일들은 행복했던 추억으로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나면 레기온과 함께 지상으로 돌아가자고, 율리아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녀는 다음으로 스킬에 들어갔다. 거대한 금빛 나무가 뿌리부터 불을 밝히며 환하게 피어났다. 그리고
세 개의 이파리가 화면 가장자리에서 선택을 기다리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41 화

'우선 체력부터 올려야지. 항마력 계통 스킬은 가뜩이나 체력 소모가 큰데, 매번 쓰러져서 주변에 민폐를
끼칠 순 없어."

레기온과 신체 접촉을 하면 마나의 영향을 받아 체력이 강제로 회복된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실제로
활용하기는 어려웠다. 입맞춤과 같은 밀접한 접촉이 있어야 그나마 효율이 높고, 일상적인 스킨십은
하나마나인 탓이었다.

마음을 정한 율리아는 황금 이파리 하나를 쥐고 기초 스탯 쪽으로 향했다. 이전에 한 단계 높여 뒀던


VIT-VITAL-를 선택하자 곧장 설명이 떠올랐다.

[▷VIT Lv.2

시간당 HP/SP 회복력이 2% 상승한다.]

율리아는 이것에 한 개의 이파리를 소모한 뒤 다시 전체 트리로 빠져나왔다. 다음은 액티브 스킬을 선택할
차례였다. 그녀는 미리 봐 뒀던 두 스킬을 번갈아 클릭했다.

[▷저항 전이 Lv.2

항마력이 미치는 범위를 일정 시간 넓힐 수 있다. 잔여 체력의 40%를 소모한다. SP 30]

[▷저항 거점 Lv.1

플레이어가 지정한 좌표에 일정 시간 항마력을 부여할 수 있다. 잔여 체력의 50%를 소모한다. SP 40]

낮은 단계의 스킬을 습득할 땐 한 개의 포인트면 충분했지만 단계가 올라갈수록 두 개,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저항 거점에 필요한 포인트는 한 개, 저항 전이는 두 개였다. 두 스킬을 모두
올리기엔 남은 포인트가 부족했다.

'어떡하지.'

당장 어느 것이 더 유용하게 쓰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간 스킬을 쓸 기회가 한 번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바엘이 이상하게 여길까 봐 도중에 종료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당장은 체력 소모를 줄이는 데 집중해야 해. 그럼 역시 저항 전이를 올리는 게 나을까?'

스킬 레벨을 올리면 기존보다 위력이 올라감과 동시에 소모되는 체력은 10% 감소했다. 다소 무리를
감수하면 스킬을 두 번 연속으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마음을 정한 그녀가 남은 이파리 두 장에 손을 뻗은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율리아, 일어났어? 나 들어갈게."

"자, 잠깐……!"

놀란 율리아는 스킬을 올리지 못한 채 시스템을 종료했다. 거대한 황금빛 나무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직후,
문이 벌컥 열렸다.

험악한 표정으로 안을 훑던 레기온은 그녀가 고개를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바엘이 자리를 비운 덕분에 그는 마왕의 침실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었다.

"입 더러운 박쥐 새끼는 아직 안 돌아왔나 봐."

"마왕님?"

"님은 무슨, 그냥 놈이라고 불러. 이왕 사라진 김에 영원히 얼굴 볼 일 없으면 더 좋고."

"또 그런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은 악마성이었고 바엘의 권능이 미치는 장소였다. 레기온이 마족들에게 포위당해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하는 모습은 또 보고 싶지 않았다.

율리아가 새초롬하게 눈을 흘긴 찰나, 문밖에서 또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에 계십니까? 율리아, 문이 열려 있어서……."

안으로 들어서던 키마리스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그의 시선은 가장 먼저 침대 위 율리아에게


향했다가, 뒤이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친밀한 듯 쓸어 넘기는 레기온에게 향했다.

뒤늦게 머쓱해진 율리아가 손을 피하려 했지만, 레기온은 눈치도 없이 왜 그러냐며 되레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금발 말고도 너랑 친한 악마가 또 있었어? 내가 곁에 없는 동안 그래도 쓸쓸하진 않았겠네."

왜인지 레기온의 목소리가 조금 싸늘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눈치챈 율리아가 그를 돌아보려는데,
어느새 성큼 다가온 키마리스가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의 주인님."

"키마리스 님, 다친 곳은 좀 어떠세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율리아도 그간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네에……."

율리아는 어색하게 손끝을 꼼지락댔다. 처음엔 그가 왜 다친 채로 감옥에 갇혔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와 대화하던 도중 우연히 시야 기능이 발현해 키마리스가 그렇게 된 이유를 깨닫게 됐다.

'내가 베리드의 미약 때문에 힘들어할 때 키마리스 님이 도와줬다고 했어.'

그때 그 모습을 본 건 바르바토스 하나뿐이었고, 그는 입이 무거운 편이라 다른 악마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질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냥 다행이라고 넘기기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이 너무
컸다.

'너무 창피해.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걸. 키마리스 님은 나를 편하게 해 주려고 그런 힘든 일까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율리아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바르바토스가 무미건조한 성격이라 그 정도만
떠올렸던 걸 정말 다행이라고 해야 할 판이었다.

"율리아,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는데 몸이 불편한 건 아닙니까?"

"아, 아뇨. 조금 더운 것 같아서요."

"이 날씨에 덥다니, 혹시 열나는 거 아냐? 어디 봐."

등 뒤에서 불쑥 나온 손이 그녀의 이마를 떡하니 짚었다. 동시에 SIGHT 화면이 떠올랐다.

[▷키마리스

저 인간이 바르바토스가 말했던 소드마스터인가. 유치하기 짝이 없군. 도발도 정도껏 해야지.]

율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레기온이 잠깐 조용하다 싶더니 등 뒤에서 몰래 무슨 짓인가 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냉큼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레기온의 입가가 멈칫 굳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이미 늦었다.

"레기온, 방금 뭐 했어?"

"……아니?"

대답 전에 짧지만 명백한 침묵이 있었다. 율리아는 눈꺼풀을 짐짓 힘없이 내리깔았다.

"키마리스 님에게도 상냥하게 대해 줘. 안 그럼 나 슬플 것 같아. 둘 다 내겐 정말로 소중한 사람인걸."

"난 그런 게 아니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율리아. 그저 짧게 눈인사를 나눈 것뿐입니다."

키마리스는 레기온의 더듬거리는 변명을 끊으며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등 위에 조심스레 입을 맞춘 그가 다시금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불편한 게 있다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율리아의 호위를 맡게 됐습니다."

"제 호위요?"

"바르바토스에게 대략적인 사정은 들었습니다. 레벤나가 잠들었다고요."

율리아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극히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자신 주변의 악마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녀 본인도 삼천 살이 넘은 이후로는 나이 세는 걸 그만두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레벤나는 겉보기에 여전히 젊고 매력적이지만 그래도 마력 소모량은 예전 같지 않았고, 그래서 이처럼


주기적으로 잠에 들어야 했다. 그녀는 놀란 자신을 다독이며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하며 웃었다.

율리아는 짧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키마리스는 여전히 몸을 낮춘 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신 곁을 비울 수는 없으니 대신 제가 선택된 것이겠죠. 제가 풀려난 건 모두 율리아 덕분입니다."

"아뇨, 저를 도우려다 다치신걸요. 죄송해요."

"들으셨습니까?"

키마리스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가늘어졌다. 율리아는 그 짧은 한마디만으로도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아챘다.

미약에 취한 이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느냐 떠보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어렴풋이나마 떠올릴 수 있는 건 베리드가 죽은 시점까지였다. 게다가 바르바토스는


침실에서의 일을 직접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멋대로 그의 생각을 읽었을 뿐이니까.

"그렇게만 들었어요. 바르바토스 님이 자세한 내용은 말해 주시지 않아서……."

그녀가 고개를 젓자 키마리스는 짧은 침묵 후 미묘하게 긴장이 풀린 듯한 얼굴을 했다.

"당신을 지키는 건 충실한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래도 정말 죄송해요."

"율리아."

몸을 일으킨 키마리스가 율리아를 향해 손을 뻗은 그때였다.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레기온이 그의 손을


탁 쳐냈다. 그러곤 적의 섞인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말솜씨 한번 좋네. 말이 좋아 호위지, 결국엔 감시역일 뿐이면서. 중요한 열쇠가 도망치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레기온, 아까부터 왜 그래?"

"저 악마 놈이 네 손등에 입을 맞췄잖아! 넌 아무렇지도 않아?"

"인사일 뿐이잖아. 여긴 마계인데 인간의 사고방식에 맞추면 어떡해."

마족들은 다들 스킨십을 좋아했다. 아가레스나 레라지에는 자신만 보면 잡아먹지 못해서 대신 핥기라도


(?) 하려고 안달이었고, 바엘이나 레벤나에겐 수시로 끌어안기니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바르바토스조차 가끔 뺨을 찹쌀떡 만지듯 주무를 때가 있었다.

키마리스가 율리아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인사일 뿐인데 사사건건 율리아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마."


"네놈은 자신의 눈빛도 자각 못 하나 보지? 침실에 들어왔을 때 날 그렇게 뚫어져라 노려보던 건 뭔데!"

"그건……."

대답하던 말꼬리가 미묘하게 늘어진 찰나였다. 레기온의 시선이 불현듯 창밖으로 향했다. 키마리스 역시
어깨를 굳히더니 거대한 창 너머 마신의 탑을 올려다보았다.

탑 정상의 수정구에서 마력의 파장이 거세게 맥박치고 있었다. 율리아는 평소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이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보랏빛 마력이 주변 하늘을 집어삼키듯 범위를 넓히기 시작한 것이다.

"율리아, 피해!"

"위험합니다!"

레기온의 손아귀에 푸른 섬광이 맴돌더니 거대한 대검이 생겨났다. 동시에 키마리스가 그녀를 다급히
끌어당겼다.

바엘의 심장 그 자체인 마왕성이 미친 듯 요동쳤다. 둥지 안에서 가장 약한 존재부터 차근차근, 최후의


단말마를 내지르며 사라져가는 게 느껴졌다. 마왕의 영토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소드를 치켜든 레기온이 호전적인 기세로 탑을 겨누고, 탑을 등진 키마리스는 율리아를 품에 가둔 채


마력을 방출했다. 하지만 그녀는 키마리스의 어깨 너머, 발광하는 마정석을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색채에
홀린 듯, 본능적으로 그 빛과 닿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서려는 그녀를 키마리스가 가로막았다. 등 뒤에서 벌어지는 작은 실랑이를


느꼈는지 레기온이 다급히 외쳤다.

"율리아, 위험하니까 멀리 떨어져!"

"저와 함께 뒤로 가져야 합니다."

"젠장, 전부 고개 숙여!"

점점 빠르게 점멸하는 마정석의 파장이 한계가 임박했음을 알렸다. 레기온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대량의 마나를 폭발시켜 충격을 상쇄하려는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린 율리아가 시스템을 열었다. 그러곤
생각할 틈도 없이 스킬을 발동시켰다.

[▷저항 전이 Lv.1

항마력이 미치는 범위를 일정 시간 넓힐 수 있다. 잔여 체력의 50%를 소모한다. SP 30]

42 화

그녀의 시야 상단에 5 분 제한 타이머가 떠올랐다. 맹렬히 날뛰던 파장이 마력 저항에 의해 차단되자 둘의


시선이 곧장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율리아가 지닌 힘의 위력에 놀라면서도 다가올 물리적 충격에
대비해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직후, 방의 유리가 와장창 깨져나갔다. 태풍에 휩쓸린 듯 무시무시한 풍압이 실내를 폐허로 만들었고,
눈을 멀게 할 작정인지 섬광과 전격도 연달아 내리쳤다. 일반적인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레기온은 대검을 바닥에 깊숙이 박아 고정시킨 뒤 율리아를 더욱 강하게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접전지에서도 겪은 적 없는 난장판에 그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도대체 뭐야! 뭐 이딴 게 다 있어?!"

"율리아, 시력이 다칠 수 있으니 눈을 가리겠습니다."

"……."

"율리아?"

둘 사이에 갇힌 율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탑 안에 누군가 갇혀 있다는 걸


알아챈 탓이었다.

거리는 멀었지만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편 칠흑의 그림자가, 바엘의 육체가 산산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하고 처참해서, 율리아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거대한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마력은 나약한 존재들을 전부 터뜨려 죽인 뒤에야 사그라졌다. 때마침 5 분의
시간이 지나 스킬이 종료되고, 율리아는 반이나 깎여 나간 체력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하지만 성의 진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레기온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어쩌지,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일단은 나한테 업혀. 밖으로 빠져나가자."

"도망치고 싶다면 혼자 가도록 해, 인간. 지금은 차라리 왕의 둥지에 있는 편이 안전하니까."

"성을 난장판으로 만든 범인은 네놈들의 왕이 아니던가? 겁쟁이 새끼."

그들은 서로를 형형한 안광으로 노려보았지만 실랑이는 길지 않았다. 탑에서 쿠르릉,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사위가 번쩍 밝아진 것이다. 마정석의 폭주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어, 어?!"

"……!"

"율리아, 뒤로!"

눈 깜짝할 새 의견을 맞춘 둘은 언제 싸웠냐는 듯 율리아를 둘러업고 복도 방향을 향해 냅다 달렸다.


거대한 유성처럼 날아든 마력은 뼈대만 남은 창살을 완전히 깨부수고 천장과 바닥을 처참하게 긁은 뒤에야
움직임을 멈췄다.

후드득, 잿빛 흙먼지가 휘날리는 가운데 셋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바닥에 팬 기다란 흔적
사이로 보랏빛 기운이 파직거리다 녹아들 듯 느릿하게 사라졌다.

두 번째 파장의 궤적은 명백히 율리아를 향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빌어먹을,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것을 발견한 둘의 눈초리가 삽시간에 가늘어졌다. 그들은 율리아가 듣지 못하도록 나직이 속삭였다.

"이봐, 악마. 더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우리 일은 나중에 따로 해결하는 게 어때."

"네 제안에 동의할 날이 올 줄은 몰랐군."

등 뒤에서 오가는 은밀한 거래를 알지 못한 율리아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시야를 뿌옇게 가리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쥐죽은 듯 잠잠해진 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왕님은 어떻게 된 거지?'

잠자코 기다렸지만 탑에선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강대한 마력을 지녔어도 그런 무시무시한 마력을 직격으로 맞았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어쩌면
안에서 정신을 잃은 채 죽어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키마리스 님."

"예."

"바르바토스 님은 지금 근처에 있을까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기척이 느껴집니다.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게……."

마신의 탑은 72 악마 중에서도 최상위급 악마 정도는 되어야 큰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다고 들었다.


게다가 자신이 마계에서 처음 눈을 뜬 날, 그는 탑까지 직접 따라와 열쇠로서의 자격을 확인했다. 그라면
자신을 탑까지 데리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창밖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율리아의 시선에서 속내를 읽었는가, 키마리스가 앞을 막아섰다.

"안 됩니다."

"구해야 해요. 마정석 앞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저뿐이잖아요."

"바엘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크게 다쳤을 거예요.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다면 왜 아직도 빠져나오지 않겠어요."

이유를 알 수 없이 심장이 쿵쿵 달음박질쳤다. 마력에 의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면서도 기꺼이 몸을


내어주던 그의 모습이 뇌리에 잔상처럼 남았다.

그가 이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자신이 가야만 한다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강박감에 휩싸였다.

"탑으로 가야겠어요. 저를 바르바토스 님에게 데려다주세요."

"위험합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율리아."

하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키마리스의 표정은 단호했다. 절대 보내 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가 싫다고 한다면 탑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연약한


인간이 홀로 성을 나서 광야를 지나 탑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기가 죽어 손가락만 꼼지락대던 그녀가 다시금 키마리스를 설득해 보려 시선을 든 찰나였다. 순간적으로


강한 힘에 떠밀린 그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키마리스를 밀친 레기온이 사악한 악당처럼 웃어 보였다.

"말 바꿔서 미안하지만 동맹은 깨야겠다. 나랑 같이 가, 율리아."

"이봐, 인간!"

"뭐가 문제야? 율리아가 원하는 일이잖아. 난 율리아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하겠다고 결정한 건 뭐든
하게 해 주고 싶다고. 그게 바로 내가 강해진 이유니까."

말을 마친 레기온은 누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율리아를 안아 들었다. 폐허가 된 침실을 가로질러 앙상한


뼈대만 남은 창틀을 발로 차 완전히 부숴 버리곤 그 너머로 훌쩍 뛰어내렸다.

홀로 남은 키마리스는 점점 멀어져 가는 두 인영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 * *

율리아는 레기온의 품에서 내려 두 발을 땅에 디뎠다. 거센 바람이 불어 위를 올려다보니 탑의 꼭대기가


아득히 높은 곳에 있었다. 그 위압적인 형상은 마치 웅장한 성전을 보는 듯해서,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살짝 기가 죽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레기온이 질린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기 한번 지독하네. 웬만해선 발도 못 들여놓겠어."

"그 정도야?"

"마기는 보통 주인의 성향에 따라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는데, 이곳의 마력은 뭐든 다 찢어 죽여


버리겠다고 발악하는 느낌이야. 내가 소드마스터라 유독 공격적으로 느끼는 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내
감상은 그래."

마력 저항이 있는 율리아는 레기온의 말을 쉽사리 체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평소 약한 소리 한번 하지


않던 그가 이렇게 말할 정도니 정말 지독하긴 한가 보다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었다.

'사실 내가 느끼는 인상은 좀 다른데…….'

레기온처럼 마기를 감지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위압적인 공기 속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호의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안으로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주먹을 강하게 움켜쥔 율리아가 친구를 돌아보았다.

"레기온, 괜찮겠어? 안에는 나 혼자 들어가도 되는데."

"누가 할 소릴. 너야말로 괜찮겠어? 마력 저항이 대단하다는 건 아까 봐서 알지만, 그래도 마기가 너무


독해서 어떤 상황이 생길지도 몰라."

"나는 아무렇지 않아. 전에도 온 적 있는걸. 그냥…… 기분이 조금 이상해."

바엘의 침실에서 마주 봤을 때 탑은 그저 풍경의 일부였을 뿐,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흐릿하게 점멸하는 보랏빛 마력을 보고 있자니 그립고도 슬픈, 아득히 먼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자신이 태어난 곳은 이 세계가 아닌데 고향이라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율리아는 상념을


떨치고자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정말 들어가야겠어."

"같이 가."

"하지만 레기온, 마기가 지독해서 버티기 힘들다고 했잖아."


"기분이 더러워서 그렇지 힘든 건 아냐. 애초에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상에서 강하기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소드마스터 레기온 님이라고. 자, 가자."

율리아는 레기온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다 멈칫했다. 그녀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Main Quest. 탑의 비밀]

[▷SYSTEM

- 해금 조건: 바엘, 레기온과 함께 거점 '마신의 탑'에 진입한다.

- 미션: 탑 내부를 조사하시오. 제한 시간 7 일.

- 보상: 커맨드 시스템 활성화

- 실패 페널티: 거점 '마신의 탑' 영구 진입 불가]

[▷SYSTEM

플레이어 레벨이 낮습니다. 실패 확률이 상향 조정됩니다. 재시도 불가.]

퀘스트 '탑의 비밀'이 해금되었다. 내용을 훑어보던 율리아의 시선이 보상에서 멈췄다.

'커맨드 시스템 활성화? 이게 뭐지?'

커맨드 시스템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뜻만 보자면 제법 유용해 보이는 기능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같았다.

율리아는 창을 종료하고 시선을 내렸다. 입구 바닥에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원형 마법진이 빛나고 있었다.
율리아는 저것이 해금 조건에 해당하는 포탈이라는 걸 알았다. 바엘은 이미 탑 안에 있으니 자신과
레기온까지 내부로 진입하면 퀘스트 사건으로 이동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탑에 영원히 진입할 수 없다는 건 열쇠라고 속이는 일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뜻이니까…….'

율리아는 앞서 걷는 레기온을 붙들려고 했다. 새롭게 떠오른 시스템 창이 시야를 막지만 않았어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SYSTEM

Main Quest. '탑의 비밀' 진행 중]

율리아는 제가 디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원형의 포탈은 이미 그녀의 등 뒤에 있었다. 놀라서 움찔 굳자,


앞서 걷던 레기온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그, 그게……."

율리아는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레기온의 눈동자가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가 눈 깜짝할 새 원래의


푸른색으로 돌아온 것이다. 변화는 이질적이었지만 너무 순식간이라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다.

'착각일까? 분명 잘못 본 거겠지. 탑은 마신이 잠든 곳이니까 긴장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


그의 눈을 빤히 보고 있으려니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율리아는 팔을 부러 크게 휘두르며 레기온보다
먼저 탑의 복도에 들어섰다.

43 화

"생각했던 것보다 내부가 화려해서, 좀 놀랐어."

검은 벽돌로 쌓아 올린 내부는 시간의 흐름은 있을지언정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거대한 기둥과 창문 틈엔


보라색 덩굴이 길게 늘어졌고, 새까만 벽과 바닥은 밖에서 들어온 빛을 받아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실내를 둘러보던 레기온이 벽에 가까이 다가섰다. 멀리서 볼 땐 그저 돌의 성분 때문에 빛나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벽화를 연상시키는 조각이 세밀하고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다. 바닥을 제외한
삼면이 모두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연결된 형태였다.

"이건 뭐지? 일일이 새긴 건가?"

"마계의 창세 신화라고 들었어. 마신의 탄생부터 잠들 때까지의 역사를 담았다고 하더라. 사실 난 봐도


잘 모르겠지만……."

조각이 무척 세밀한 탓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야 그 모양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웅장하고 화려해 기가 죽을 정도였는데, 아가레스와 레벤나는 석벽 위의 조각들이 모두


자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덧붙였다. 누군가 손을 댄 것도 아닌데 조금씩 변화하더니 오늘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율리아는 조각을 만져 보려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탑에 들어선 목표는 따로 있으니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그녀는 긴 복도 너머 원형 계단을 가리켰다.

"마왕님은 최상층에 있을 거야. 어서 올라가자."

"그냥 가려고?"

"응, 왜?"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눈만 깜빡이는데, 레기온이 작은 한숨을 쉬더니 그녀의 앞에 등을 보이며 무릎


꿇었다.

"네 체력으로 끝까지 올라가는 건 무리잖아. 자, 업혀."

"아……."

"왜 그래?"

"그냥, 나 정말 바보 같아서. 그러게. 혼자서 어떻게 올라가려고 했을까."

율리아는 실없이 웃으며 레기온의 등에 업혔다. 그가 아주 나직이 바보 맞네, 하고 덧붙였지만 그녀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레기온은 가파른 계단을 거의 날다시피 뛰어 올라갔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지상이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격하게 달리면서도 거친 숨 한번 내뱉지 않는 그를 보며, 율리아는 남몰래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말 멍청하게도, 이제야 레기온에게 지독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는 오랜 시간을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보냈다. 죽지 않기 위해, 오직 악마들과 싸우기 위해.

'적들의 왕인 바엘을 구하러 가는 게 좋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마정석의 파장에 휩쓸려 산산이 찢겨 나가던 그의 모습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미친 듯 웃던 그의 얼굴이…….

짧은 상념에 잠긴 동안 어느새 레기온의 움직임이 멈췄다. 지금까지 지나 왔던 그 어떤 층보다 층고가


높았다. 그리고 긴 복도 끝엔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이 우뚝 서 있었다. 레기온은 미간을 구기며 문에
새겨진 조각을 훑었다.

"취향 한번 지독하네. 마신이란 녀석."

셀 수 없이 많은 해골이 산처럼 얽혀 있었고, 그 정상에 낫을 치켜든 그림자가 뼈가 반쯤 드러난 악마의


목을 자르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날개가 바닥에 힘없이 축 늘어졌고, 악마가 흘린 피는 검고 긴
머리카락을 따라 웅덩이처럼 고였다.

율리아는 죽음을 눈앞에 둔 악마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마, 마왕님!"

"율리아, 잠깐 기다려!"

밀어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문이 마치 율리아를 환영하듯 천천히 열렸다. 하지만 그 너머 보이는


광경은 끔찍했다. 온 벽과 바닥이 전부 붉은 피로 뒤덮였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런 지옥도의 중심에 누군가 힘없이 매달려 있었다.

[▷바엘

……. ……. …….]

피투성이가 된 바엘이 보랏빛 마력에 얽매인 채 허공에 들려 있었다.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고결한 신을 보는 것 같았다. 수백, 수천 번을 채찍질 당한 흉터가 뼈를 산산이


부수고 살점을 발라 냈다. 그의 근육은 조각가가 빚은 듯 아름다웠지만, 벌겋게 아가리를 벌린 상처
사이에선 번들거리는 피와 살 조각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바엘의 발밑으로 다가가던 그녀의 뺨에 피 한 방울이 튀었다. 짙은 죽음의 냄새가 코끝에
스몄다. 율리아가 보기엔 너무나 처참한 광경이었다.

"우욱!"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속이 뒤틀려 도저히 멀쩡히 서 있을 수 없었다. 단지 피


냄새가 역겹고 눈에 들어온 광경이 두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싫다면 차라리 다 버리고
떠나 자유롭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자 한다면 능히 그럴 힘이 있으면서, 지하의 누구보다 강대한
권능을 지녔으면서, 무엇 때문에?

율리아의 커다란 눈동자에 더럭 눈물이 고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지독한 고독에 함께 매몰되어 버릴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이유를 듣고 말 거야. 어떡해서든지.'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낸 율리아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바엘을 옥죄던 마력은
조금씩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자기 자신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율리아는 축 늘어진 그의 날개에 손을 뻗었다. 마정석의 힘은 어느새 완전히 물러난
뒤였다. 그녀는 해방된 바엘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뉘었다.

아주 잠깐 스쳤을 뿐인데 그녀의 새하얀 손이 덩달아 붉게 물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상처는 더욱


심각했다. 살점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그 사이로 뼈가 훤히 드러났다. 그 모습이 너무 처참해서 도저히
만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설마 매번 탑에 다녀올 때마다 이런 꼴을 당했던 거야? 그런데도 몸이 괜찮아지면 또 가고 또다시 가고…


….'

이건 끔찍한 자해일 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죽지 않는다고 고통까지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 텐데.

거친 숨을 몰아쉬던 율리아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바엘의 벌어진 살점 아래, 벌레처럼 가느다란
보랏빛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몸부림치듯 형태를 뒤틀며 바엘의 상처를 점점 더 크고
예리하게 찢어발겼다.

'수정구의 마력이 회복을 방해하고 있어.'

그녀는 일전 마나에 당했던 레라지에의 상처를 기억해 냈다. 형인 바르바토스가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어
그를 치료하려 했지만, 푸른 마나가 그것을 철저히 막아선 탓에 레라지에는 평소와 달리 한참이나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바엘의 신체는 끝없이 치유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수정구의 마력이 아물려는
부분을 도로 뜯고 해체했다. 그러니 회복되긴커녕 상처만 더 심해지는 것이다.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했다.

'이 방법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어.'

[율리아 브에스드라]

▶STATUS (스탯)

▷PROGRESS (진행도)

▷SKILL (스킬)

▷ITEM (아이템)

▷SETTING (설정)

그녀는 누가 보든 아랑곳하지 않고 시야 상단의 아이콘을 클릭했다. 먼저 스탯을 확인했지만 스킬을


사용하기에 잔여 체력이 너무 낮았다. 아까 마왕성에서 탑의 1 차 폭주를 막기 위해 이미 스킬을 사용한
탓이었다.

그녀는 스킬창으로 들어가 곧장 이파리 두 개를 쥐었다. 당장 체력을 채울 방법이 없으니 차선책으로


소모량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저항 전이 Lv.2

항마력이 미치는 범위를 일정 시간 넓힐 수 있다. 잔여 체력의 40%를 소모한다. SP 30]


'스킬 레벨을 올리면 소모 체력이 10% 줄어들어. 이 정도면 당장 스킬을 사용해도 쓰러지진 않을 거야.'

율리아는 레벨을 올리고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막이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와 점점
크기를 키워 갔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바엘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저항 전이 Lv.2

제한 시간 9 분 58 초]

그녀는 상단에 떠오른 타이머를 힐끗 응시하다가 시선을 내렸다.

예상대로 보랏빛 마력이 징그러울 정도로 격하게 몸부림치다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회복을 방해하던 것이 사라지자 찢어진 채 피를 뚝뚝 떨구던 상처도 하나하나 자연스럽게 붙었다.

안도의 한숨을 쉰 율리아가 바엘의 이마에 번들거리는 식은땀을 닦아 내려는 찰나였다. 그녀의 손목이
붙들림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피보다 붉고 선명한 눈동자가 그녀를 담았다.

"네가 왜, 이곳에 있지. 큭, 어떻게 온 거야."

"읏……."

"말해."

끔찍한 쇳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놀란 그녀는 붙들린 손목을 뿌리치지도, 그렇다고 그가 원하는 답을 해
주지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녀를 응시하던 바엘의 시선이 불현듯 움직였다. 레기온이 율리아의 등 뒤에서 그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바엘의 입꼬리가 피식 비틀렸다.

"기회를 잡았으니 나를 죽이러 온 건가. 과연 인간답군."

"그게 아니라……."

"며칠 전 밤도 그렇고, 한시라도 사내에게 매달리지 않곤 버틸 수 없나 보지? 대가는 보나 마나 몸일


테고, 난잡하기 짝이 없군."

손목을 옥죄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율리아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온 찰나,


성큼 다가온 레기온이 바엘의 손목을 낚아챘다.

"더러운 악마 새끼가! 그딴 식으로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 율리아는 너 같은 짐승 새끼라도 진심으로


걱정했어. 죽을 위험을 각오하고 온 거라고!"

"당장 손 떼. 놓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그럼 어디 해 봐. 보아하니 뼈와 관절이 모조리 으스러진 거 같은데, 지금이라면 나도 네놈을 죽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바엘의 손목을 쥔 레기온의 손아귀에 빠드득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율리아를 얽맨 바엘의 손에도 덩달아
힘이 들어가고,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하얗게 질려 갔다. 그것을 본 레기온은 결국 마지못해 힘을 푼
뒤 율리아의 허리를 잡아끌었다.
"가자, 이딴 곳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지금 떠나면 마정석이 또 마왕님을 공격할 텐데……."

"도와줘 봤자 은혜도 모를 놈이야. 게다가 너, 그 강력한 힘을 쓸 때마다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는 거


알아? 이러다 진짜 쓰러지겠어."

레기온은 희미하게 반짝이는 막을 손으로 휘저었다. 하지만 사라지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채 여전히 같은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씁쓸하게 혀를 차던 그는 여전히 앉아 있는 율리아를 일으키려다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사방에 흩뿌려진


바엘의 피가 건물 틈새로 스멀스멀 스며들고 있었다. 마신의 탑이 마치 왕의 피를 달게 흡수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는 시선을 들었다. 율리아의 마력 저항에 의해 밀려났던 마정석의 힘이, 그녀가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마왕을 삼키겠다는 듯 흉흉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신은 이미 죽어 없어진 존재인데 꼭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고 있어. 기분 나쁘게.'

44 화

바깥에선 오로라 빛의 아름다운 구슬처럼 보이던 탑 최상층의 방어막도, 막상 안에서 보니 도망칠 틈 없이


완전무결한 새장이나 다름없었다. 이음새 하나 없이 매끈하게 일렁이는 모양새가 마치 아득한 심해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레기온은 등허리가 쭈뼛 서는 원초적인 불쾌감을 느끼며 시선을 내렸다. 율리아는 여전히 마왕의 머리맡에
앉은 채 갈등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엘의 시선은 그런 율리아에게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레기온의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저 손을 잘라 버리고 싶다는 듯 짙게 타오르는 안광을 보며, 레기온은
속으로 이를 짓씹었다.

'기분 나쁜 새끼.'

악마의 사고방식은 기본적으로 다 똑같았다. 재미를 위해서든 생존을 위해서든 상대의 약한 부분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아무리 강인한 존재라 할지라도 결국엔 인간이기에 불완전한 틈새가 남아 있다. 악마는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것을 건드리는 존재, 그야말로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율리아를 현혹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어.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먼저…….'

레기온의 손아귀에서 푸른 마나가 일렁였다. 마왕이 드물게 무력화된 지금이 바로 그를 죽이고 율리아와
함께 지상으로 돌아갈 기회였다. 그녀도 처음엔 놀라 당황하겠지만 결국엔 자신의 진심을 이해해 줄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율리아에게 해로웠다.

소울 소드가 웅웅 진동하기 시작한 찰나, 활짝 열린 문 너머에서 거친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낮게


혀를 찬 레기온이 힘을 거두기 무섭게 검은 군복차림에 긴 포니테일을 묶은 악마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작은 열쇠야, 괜찮니?!"

"아가레스 님."

"키마리스에게 듣고 바로 왔어. 어디 다치지 않았어?"


마계의 이인자인 그녀는 드넓은 최상층을 한번 훑어본 것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한 듯했다. 생소하게 빛나는
막 앞에서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안으로 뛰어 들어가 율리아를 끌어안았다.

"내가 잠시 둥지를 떠나 있는 동안 이런 일이 생기다니, 무사해서 다행이야."

"시찰은 잘 다녀오셨어요?"

"작은 열쇠야."

"네?"

"주군을 구해 줘서 고마워.

생전 처음 듣는 감사에 그녀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가레스는 율리아의 발간 뺨을


한번 쓸어내린 뒤 바닥에 누워있는 왕을 일으켜 세웠다. 직후 다소 지친 기색의 바르바토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문에 기대어 힘겨운 듯 숨을 몰아쉬다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율리아의 방어막 뒤로


밀려난 마력을 향하고 있었다.

"마력 저항의 위력이 이 정도였다니……."

미간을 좁힌 바르바토스는 드넓은 제단을 지나 빛나는 방어막 앞에 섰다. 그러곤 짧게 심호흡한 뒤,


이윽고 걸음을 내디디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잠깐 새에도 바엘의 상처는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훤히 드러났던 뼈가 붉게 차오르는


살갗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주군, 모시러 왔습니다."

"긴말하지 말고 일단 내려가자. 작은 열쇠야, 잘 따라와야 해."

"네."

율리아는 앞서 최상층을 떠나는 세 악마의 뒤를 따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자신들은 모두
무사했다. 그녀는 시야 상단을 힐끗 보았다가 이내 걸음을 서둘렀다.

[▷저항 전이 Lv.2

제한 시간 0 분 14 초]

한편, 맨 뒤에서 걷던 레기온은 문을 나서기 전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사방이 탁 트인 거대한 홀의


중앙, 수정구는 여전히 화려한 빛을 뿜으며 그곳에 서 있었다.

'누가 부른 것 같았는데.'

드넓은 공간은 바람 부는 소리를 제외하면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어깨를 으쓱한 그는 이내 율리아를
따라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는 탑의 제단. 보랏빛 마력이 스산한 공기 사이로 서서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 * *

피처럼 붉은 달빛이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밤이었다. 마정석의 폭주로 인해 엉망이 됐던 악마성이 다시금
무거운 적막에 잠겼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귀환한 왕의 안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마족의 회복력은 그가 가진 마력에 비례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엘의 회복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다만 오늘 같은 경우엔 마신과 정면으로 맞붙어 온몸이 말 그대로 산산조각 났기 때문에, 아무리
바엘이라도 하룻밤 휴식은 필요했다.

"……."

깊은 잠에서 깨어난 바엘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몸이 무겁고 뻐근했다. 마정석의 폭주에
휩쓸린 이후의 기억이 없어서, 그저 긴 악몽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바엘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상체를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새액새액, 작고 가녀린 숨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에게 기댄 채 잠든 율리아의 이마 위로 은은한 달빛이 흐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바엘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반쯤 마른 물수건을 발견했다. 조금 떨어진 탁자에 놓인 세면 그릇 안엔


핏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어째서 인간이 제 머리맡에 기대어 잠들었는지 이유를 찾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지하의 절대자인 자신에게 고작 연약한 인간 따위가 동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마력 저항이 있다 한들


자신이 손만 까딱하면 죽을 목숨인데 말이다.

'하찮고 어리석기 그지없군.'

바엘의 손끝이 율리아의 얼굴에 닿았다. 희고 동그란 이마를 타고 내려가 작고 오똑한 콧대를 지나,
선홍빛의 부드러운 입술에 닿았다가 갸름한 턱선을 간질였다. 그의 손길은 마치 미지의 존재를 탐험하듯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낯선 감정이 기분 나쁘게 일렁였다.

바엘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는 새 그녀와 조금씩 가까워지던 찰나였다. 레벤나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그의
뇌리를 스쳤다.

'율리아를 찾아온 인간 소드마스터를 이대로 죽게 놔두면 후회하실 거랍니다? 왜냐하면 그 인간은…….'

흔들리던 그의 눈매가 차갑게 굳었다. 열쇠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목이 너무나 약하고 가느다래서, 정말 스치기만 해도 죽을 것 같은 탓이었다.

홱 고개를 돌린 바엘이 침대 밖으로 발을 디디며 몸을 일으켰다. 그를 덮고 있던 시트가 스르륵 떨어지자


맹수처럼 길고 다부진 몸매가 달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각같이 깊게 패인 근육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짙은 음영을 만들어 냈다.

"후우."

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던 그가 문득 미간을 구겼다. 자세를 바꿀 때마다 뼈와 근육이


찢어질 듯 날카로운 통증을 호소했다. 탑에서 돌아온 지 반나절이 지났는데도 아직 회복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느릿하게 목덜미를 주무르며 몸을 풀던 그의 시야에 무언가 걸렸다. 어깨 부근에 웬 붕대가 얼기설기 감겨


있었다.
왕인 자신의 몸에 손을 댈 간 큰 마족은 없었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이따위 어설픈 리본 매듭을 지었을
리는 없으니 범인은 보나 마나 하나뿐이었다.

그의 온 신경이 침대에 엎드린 채 잠든 여자를 향해 곤두섰다.

얼마 전 갓 성인이 된 작고 미욱한 인간. 향도 모양새도 꼭 발갛게 익은 과일 같아서, 한입 베어 물면


달큰한 과즙이 혀를 적실 듯 보이는 연약한 여자.

단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언저리가 불편해졌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폭력적인 충동이 치달았다.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아주 불쾌한 기분이었다.

"파편 주제에 감히 왕에게 이딴 싸구려 동정을……."

바엘은 어깨의 붕대를 두둑, 뜯어냈다. 힘에 못 이겨 상처가 도로 벌어지고 붉은 핏방울이 배어 나왔지만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한결 편해 보였다.

그는 붕대를 아무렇게나 내버리고 붉은 달빛이 가득 비치는 창가로 걸어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잠잠하던


탑은 저를 노려보는 바엘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마력을 흩뿌리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비틀렸다.

"그래, 나를 먹고 싶겠지. 이 상황이 따분한 게 나뿐만은 아닐 거다."

그는 피가 묻은 손바닥을 창문에 주욱 그어 내렸다. 유리에 남은 붉은 궤적이 창밖의 시야를 가렸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마신의 속내를 알고 있고, 마신 또한 자신의 속내를 알고 있다. 그러니 피차 원하는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선 싸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신들의 운명은 결코 공존할 수 없으니 말이다.

마정석은 약이 오른 듯 마력을 더욱 강하게 피워냈다. 그래봤자 바엘은 여유로웠다. 파편은 지금 그의


손안에 있었다.

다시금 침대로 걸어간 바엘은 잠든 율리아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살 매만졌다.

"가지고 싶다면 어서 깨어나도록 해. 아니면 내가 먹어 버릴 테니."

바엘의 고개가 율리아를 향해 깊고 느긋하게 기울었다. 코끝에 스미는 열쇠의 체향이 참을 수 없이


달콤하고 감미로웠다. 어쩌면 그녀를 엉망으로 만들 때까지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서, 바엘은 저도 모르게
침대 헤드를 움켜쥐었다.

율리아의 입술을 시험하듯 건드리던 그는 어느새 앙다문 입을 벌리고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실수록
더욱 빠져드는 술과 같았다. 바엘은 저보다 작고 가녀린 인간에서 어느새 절박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질척하게 얽혀드는 소리가 무거운 침묵 속 유일한 흔적이었다.

* * *

이른 아침, 눈을 뜬 율리아는 옆자리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바엘을 발견했다. 그녀는 부스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지하에 떨어지고 얼마 안 됐을 즈음엔 바엘의 마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함께 잠자리에 드는 날이 많았지만,


최근엔 이렇게 아침까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항상 그가 먼저 자리를 뜬 탓이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전날 입은 부상의 여파로 늦게까지 잠들어 있는 듯했다.


'어라, 내가 침대 위에서 잤던가?'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디던 율리아는 불현듯 생각했다. 어젯밤 바엘의 머리맡에 앉아 상처를 돌보다 HP 가
낮다는 와 함께 기절하듯 잠든 게 기억의 전부였다.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어때.'

그녀는 쭈욱 기지개를 켜고 헝클어진 연분홍빛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쓱쓱 정리했다.

그래도 나름 얌전히 자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유독 뒤통수 부근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밤새 얼마나 험하게 뒹군 건지, 환자 옆에서 어마어마한 민폐를 끼친 것 같았다.

45 화

작은 한숨을 쉬며 로브를 걸치던 그녀의 발치에 무언가 걸렸다. 시선을 내려 보니 피에 젖은 붕대가


엉망으로 찢긴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율리아는 말없이 그것들을 주웠다.

'아팠을 텐데…….'

그녀는 바엘이 범람하는 힘을 이기지 못해 폭주하는 모습을 매번 보아 왔다.

그는 온 성이 흔들리도록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면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밤만 되면 마력 저항이 있는 자신에게 저도 모르게 이끌렸다. 가끔은 한밤중 눈을 떴을 때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던 날도 있었다.

그런 그가 철없는 어린아이 같다고 내심 생각했었다. 마정석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진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그런 끔찍한 꼴을 당하는 게 정말 좋을 리가 없잖아.'

벌어진 상처를 징그럽게 파고들던 마력에 생각이 미치자, 율리아는 어깨를 떨며 소름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바엘에겐 마정석과 싸워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절대 물러설 수 없기에
자해나 다름없는 짓을 몸이 나을 때마다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그런 모습을 보면 신경 쓰이고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그녀는 모처럼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마왕의 이부자리를 정돈해 주며 그렇게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피에 젖은 붕대와 수건, 세면 그릇을 치우며 부산하게 움직이던 그녀의 눈에 고요하게 잠든 탑이 들어왔다.


율리아는 그제야 전날 받은 퀘스트를 상기해 냈다.

[▷SYSTEM

Main Quest. '탑의 비밀' 진행 중]

[▷SYSTEM

- 해금 조건: 바엘, 레기온과 함께 거점 '마신의 탑'에 진입한다.

- 미션: 탑 내부를 조사하시오. 제한 시간 6 일.

- 보상: 커맨드 시스템 활성화

- 실패 페널티: 거점 '마신의 탑' 영구 진입 불가]


[▷SYSTEM

플레이어 레벨이 낮습니다. 실패 확률이 상향 조정됩니다. 재시도 불가.]

어제와 달라진 점은 없었다. 다만 제한 시간이 7 일에서 6 일로 하루 줄었다.

'마신의 탑 영구 진입 불가…….'

율리아는 가장 먼저 실패 페널티부터 확인했다. 상황 탓인지, 아니면 원래 조심성이 많은 성격 때문인지


보상보다는 실패할 경우 쪽으로 자연스럽게 눈이 갔다.

마신의 탑은 게임의 메인 스토리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였다. 열쇠라는 키워드나 무한대의 항마력 모두


결과적으로는 탑에 잠들어 있는 '마정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건 자신의
쓸모 역시 소멸한다는 걸 의미했다.

다시 쓸모없는 존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제야 겨우 모두와 잘 지낼 수 있게 되었는데.

'싫어. 안 돼.'

율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버려지는 미래를 떠올리자마자 타성처럼 불안감이 치달았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려 노력했다. 탑 내부를 조사해서 시스템이 원하는 무언가를 찾아내기만
하면 모두 괜찮아지는 것이다.

'그럼 계속 열쇠인 척을 할 수 있어.'

그녀는 조마조마하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나직이 심호흡을 했다.

그때, 문밖에서 귀에 익은 기계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바르바토스가 바엘의 상황을 보러 온


모양이었다. 율리아가 재빨리 로브 허리끈을 묶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바르바토스

흠, 깨어 있었군. 이야기가 빠르겠어.]

율리아는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바르바토스의 뒤로 아가레스와 보티스가 서 있었다.


그들은 왕의 둥지 안으로 겁 없이 들어가는 바르바토스를 신기한 듯 손가락질하더니 이내 슬금슬금 그를
따라 들어왔다.

먼저 소파에 앉은 바르바토스가 반대편을 향해 턱짓했다.

"일단 앉지."

"저, 무슨 일로……."

"물어볼 것이 있어 왔다. 주군은 네가 곁에 있어야 안정을 느끼니 이곳에서 이야기하지."

자칫 다른 의미로 착각할 수도 있는 말을 그는 태연한 얼굴로 내뱉었다.

그동안 아가레스는 율리아의 옆자리에 앉았고, 보티스는 왜인지 율리아를 지키듯 그녀의 뒤편에 똬리를
틀고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바로 등 뒤에서 거대한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게 썩 산뜻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보티스의 자리 선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작은 열쇠야, 우린 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들으러 왔어."


"탑이요? 하지만 그땐 두 분도 함께 계셨잖아요."

"난 시찰에서 막 돌아오던 길이어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바르바토스는 도통 입을 열지를


않고."

"어쨌든 네가 본 건 하나도 빠짐없이 말하도록 해.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바르바토스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면 마정석엔 분명 이변이 일어나고 있어. 그리고 그 원인은 열쇠인 율리아
브에스드라…….]

그녀는 바르바토스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마침 아가레스가 그녀를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게 어색하지 않도록 보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율리아는 그녀가 겪었던 두 번의 파장과 탑에 들어간 이후의 일까지 최대한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악마들은 두 번째 파장의 궤적이 정확히 그녀를 향했다는 말에 크게 놀란 기색을 내비쳤고, 바엘이 탑의


최상층에서 얼마나 심한 몰골을 하고 있었는지 말할 땐 말 그대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가레스

주군이 마신의 힘에 밀렸다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바르바토스

주군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가. 수정구가 붉은 마력을 흡수하도록 내버려 두다니.]

보티스는 마수형이라 생각은 읽을 수 없었지만 대신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놀랐다는 걸


알기엔 충분했다.

바엘의 명예를 고려해 조금 축소해서 말한 건데도 이 정도였다. 율리아는 좀 더 원만하게 말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에 빠졌다. 아무리 그래도 마왕인데, 신하들의 동정을 받는 모습을 상상하니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홀로 열심히 삽질하는 동안, 시선을 나눈 악마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율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불길한 예감에 뒤를 돌아보니 언제


깨어났는지 바엘이 안광을 흉흉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설마 다들 날 두고 도망친 거야?!'

위협을 느낄 때만큼은 특유의 소심함을 내던지는 율리아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래 봤자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녀를 노려보는 바엘의 눈초리는 아주 확실하고도 명백하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갈까, 아니면 네가 올래.'

한동안 잊고 지냈지만 갓 잠에서 깬 바엘은 정말 인정사정없이 무서웠다. 율리아는 걸음도 사뿐하게


소파에서 내려와 총총걸음으로 침대 근처에 다가갔다. 그리고 달랑 들려서 도로 바엘의 품에 안겼다.

율리아가 가만 누워 눈만 깜빡거리고 있으려니 바엘이 그녀의 얼굴 위로 손을 덮었다.

"졸리다. 더 자라."

"하지만 저 많이 잤는데요."
"그래서?"

"아, 아뇨. 더 자고 싶다고……."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제한 시간이 줄어들고 있을 탑 수색 퀘스트라든가 아니면 자신 때문에


실추된(?) 마왕의 명예라든가.

방금까지도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헝클이던 잡다한 고민들이, 바엘의 단단한 품에 갇혀 있으려니 눈 녹듯


사라지고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일들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가 매사에 놀라울 정도로 태연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신하들이 불안해할 정도로 크게
다쳤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더 자고 싶어 하는 그를 보며, 자신도 이쯤이야 뭐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언젠가 마왕님처럼 강하고 무던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모처럼 햇살이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 율리아는 옆에서 들리는 낮은 숨소리를 들으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 * *

율리아는 이른 아침부터 멍하니 누워 시스템 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SYSTEM

- 해금 조건: 바엘, 레기온과 함께 거점 '마신의 탑'에 진입한다.

- 미션: 탑 내부를 조사하시오. 제한 시간 2 일.

- 보상: 커맨드 시스템 활성화

- 실패 페널티: 거점 '마신의 탑' 영구 진입 불가]

처음엔 여유로웠던 그녀도 날이 갈수록 마음이 조금씩 다급해졌다. 어딜 가든 바엘이 계속 따라다니거나,


혹은 긴 팔다리를 이용해 아예 침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넝쿨처럼 감겨오는 탓이었다.

'이틀 남았어. 그간 아무것도 못 했는데 고작 이틀 남았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언젠가 바엘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을 취소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바엘은 율리아가 절규를 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때려도 안


깨고 슬쩍 꼬집어도 안 깨고, 참다못해 시트를 걷고 맨살을 겹쳐 보았다가 하반신의 흉기가 무섭도록
존재감을 빛낸 탓에 그야말로 큰일 날 뻔했다.

율리아는 사내가 자는 와중에도 일어설(?) 수 있음을 깨달았다. 딱히 알고 싶지 않았던 깨달음이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설마 이게 시스템이 말했던 난이도 조절인가? 그렇다면 너무하잖아. 하다못해 탑에는 들어갈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율리아는 서러웠다. 턱밑에 설움을 가득 담은 작은 호두가 생겨났지만 알아줄 이는 없었다. 바엘이 둥지


근처로 아무도 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아선 탓에 그 바르바토스조차 하루 한 번 식사거리를 몰아서
가져다주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실패 페널티를 막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탑에 진입해 조사 퀘스트를
마무리해야 했다.

'숨을 죽이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굴러가는 거야.'

그녀는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고 꿈틀꿈틀 움직여 바엘의 팔 밑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재빨리 베개를
끌어와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처음엔 불편한 듯 미간을 구기던 그도 율리아가 토닥여주니 금세 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간 탈출 실패 원인 1 위에 빛나던 '바엘의 팔에서 빠져나오기'를 성공했다. 제일 어려운 일을 해내고


나니 이후는 쉬웠다. 율리아는 넓은 침대를 데굴데굴 굴러 바닥에 안착하고, 소리 없이 이동해 옷을
갈아입었으며, 물 흐르듯 뒷걸음질 쳐 침실을 빠져나왔다.

"후우, 성공이다."

"과연 어떨지?"

"……아."

율리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건지, 바엘이 문을 짚은 채 삐딱하게 서 있었다.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상황에


율리아는 다시금 속으로 절규를 내질렀다.

46 화

그녀는 최대한 무해하게 보이도록 방긋방긋 예쁘게 웃었지만 그럴수록 바엘의 눈초리는 점점 매서워지기만
했다. 얼버무리는 것으로 상황을 넘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율리아는 결국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자,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어디."

"오해하지 마세요. 저 도망치려던 거 아니었어요. 그냥 잠깐만 나갔다 오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디."

율리아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마신의 탑은 마족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장소였고, 그녀는 마정석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열쇠라고 여겨지는 존재이기도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억울한 의심을 살 수 있기에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적절한 답을 찾는 동안, 바엘의 동공이 불길할 정도로 가늘어졌다. 왕의 붉은


눈초리에서 냉막한 기운이 뚝뚝 흘렀다.

"인간 사내와 둘이 도망치기라도 하려던 모양이지?"

"레기온을 왜 자꾸 그런 쪽으로 걸고넘어지세요."

"정곡을 찌른 게 고깝나? 사랑하는 사내와 함께하지 못해 애가 타나 보지?"

"그런 거 아니라고 했어요. 레기온과 저는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요. 계속 그러시면 저 정말 화낼


거예요."

가뜩이나 퀘스트를 못 깰까 심란하고 열쇠가 아니란 사실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데 바엘이 기름을 뿌리고
불까지 지피니 율리아의 인내심이 똑 끊어져 버렸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홱 고개를 돌렸다.
"마신의 탑에 가려고 했어요."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라지. 아무리 마왕이라도 열쇠…… 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 비슷한 존재를 쉽게


처리할 순 없을 거다. 그는 마신의 힘을 삼키고 싶어 하고, 다른 마족들 역시 자신들의 하나뿐인 주군을
마신으로 만들고 싶어 하니까 말이다.

율리아가 입술을 쭉 내밀고 툴툴대는데 바엘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 위협적일 정도로 잘 짜인 근육에 키도
한참이나 큰 사내가 그렇게 다가오니, 처음엔 꼿꼿하게 잘 버티고 있던 율리아도 조금씩 작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흑표범 앞의 뱁새처럼 눈을 바짝 내리깐 그녀의 시선에 폭력적일 정도로 관능적이고 선명한 복근이
들어왔다. 갓 일어난 탓에 걸치고 있는 옷이라곤 허리춤에 낮게 두른 로인클로스가 전부였다.

작은 움직임에도 깊게 도드라지는 치골을 저도 모르게 응시하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시야가 순식간에 반전됐다.

"꺄악!"

"귀에 대고 소리 지르지 마."

"왜, 왜 이러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깐 그냥 말이 헛나왔어요!"

"탑에 가려던 게 아니라고?"

마왕의 어깨에 포댓자루처럼 얹혀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얼어붙었던 그녀가 불현듯 가만 멈춰서 바엘을
돌아보았다.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그러기에 바엘의 시선은 분명하게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오른 마신의 탑으로.

"캐물으실 줄 알았어요. 탑에 무얼 하러 가는지, 아니면 왜 가고 싶은지라도……."

"내가 꼭 알아야 하나?"

"그건 아니지만, 만약 제가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면 어쩌시려고요. 마왕님을 위험에


빠뜨린다든가."

자신의 위험성을 진지하게 토로하는 율리아의 머리 위로 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목소리엔


아주 명백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바엘은 그녀를 어깨에 둘러맨 채 넓은 침실을 가로질렀다. 발로 창문을 깨고 테라스 난간에 올라선 뒤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그제야 마왕의 속내를 알아챈 율리아가 눈을 크게 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바엘은 단번에 도약했다.

율리아의 높다란 비명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 * *

[▷SYSTEM

Main Quest. '탑의 비밀' 진행 중]


고지대의 거센 바람이 율리아의 머리칼을 마구 흩뜨렸다. 그녀는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현재 벽 없이 훤히 트여있는 층에 서 있었다. 자칫 바람에 떠밀리기라도 했다간
아득히 먼 지면으로 추락할 게 분명했다.

마신의 탑은 겉보기와 다르게 층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엘이 처음 내려선 곳은 탑 중상층에 위치한 실내 정원이었다.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았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식물들이 기하학적으로 배열되어 있었지만, 기대와 달리 율리아는 그곳에서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몇 개의 층에서 허탕을 치고서야 율리아는 깨달았다. 그녀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을 하고 있었다.

'해도 해도 너무 심하잖아. 난이도 조절도 정도가 있지…….'

게임 [악마들의 낙원]을 할 때 바엘 공략을 시도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다른 캐릭터 루트에서 퀘스트를


깬 적은 있었다. 그때 시스템은 플레이어에게 힌트와 준비물을 제공했다. 혹은 추리해서라도 깰 수
있도록 사전에 여러 설정을 배치했다.

율리아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지난 며칠간 퀘스트 내용을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주어진 정보라곤 '탑
내부를 조사하시오'가 전부였다.

그녀가 돌바닥을 두드리며 힘없이 쪼그려 앉은 찰나였다. 줄곧 멀리서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바엘이 한
마디 툭 던졌다.

"볼일이 아직 남았나?"

"남았어요."

"멍청하게 바닥만 두드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저도 알거든요."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야."

복도를 울리는 바엘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잠겼다. 틀림없이 본인 졸리니까 슬슬 돌아가자고 말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축 처진 어깨를 추스르며 힘차게 일어섰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대로 허탈하게
놓칠 순 없었다.

"여긴 다 봤으니까 다음 층으로 올라갈게요."

그녀는 바엘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훤히 트여 있어 햇빛이 바로 비치던


아래층과 달리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녀는 등 뒤에서 새어드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벽을 더듬었다. 촘촘하게 쌓여 있는 벽돌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계단과 인접한 부근은 아래층의 빛 덕분에 대략적인 형태 구분 정도는 가능했다. 하지만 안쪽은 바로
코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왜인지 조금 소름끼쳐.'

실내는 깊은 동굴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아래층 복도에 서 있던 바엘은 잠깐 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차단된 장소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마왕님."

"……."

"안 계세요?"

텅 빈 복도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율리아는 쿵쿵 달음박질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괜찮아. 혼자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무섭지 않아.'

이곳에 자신과 바엘 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리 없었다. 보통의 마족은 탑 근처에도 다가올 수 없고,


최상위급 악마 정도는 되어야 내부를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이곳에 갑자기 나타날 이유는 없었다.

율리아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스산한 공기가 살갗을 감싸고 외로운 발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이번 층은 다행히도 바닥이 평평하고 벽이나 기둥이 곳곳에 존재했다. 몇 걸음 안 가서 벽을 마주하고,


또 얼마 가지 않아 장애물과 맞닿았다. 손끝에 수시로 무언가 걸리니 앞이 보이지 않아도 넘어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걷기만 해선 조사가 힘들 텐데.'

짧은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이내 더듬더듬 팔을 들었다. 시스템 아이콘이 있을만한 곳을 몇 번이나


훑고서야 간신히 창을 불러낼 수 있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STATUS (스탯)

▷PROGRESS (진행도)

▷SKILL (스킬)

▷ITEM (아이템)

▷SETTING (설정)

예상대로 눈앞이 조금 밝아졌다. 그녀는 반투명하게 빛나는 글자를 손전등 대신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지만 그렇게 나온 결론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미로?'

사방을 에워싼 벽과 기둥은 모두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미로의 한가운데 들어와
버린 것이다. 아차 싶었던 그녀는 다급히 왔던 길로 되돌아갔지만 아무리 걸어도 출구는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점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이 방향으로 왔던가?'

율리아는 결국 걸음을 멈췄다. 발밑이 어지럽고 이명이 윙윙 울렸다. 무겁게 내리깔린 어둠과 이정표
없이 이어진 끝없는 침묵 속에서 그녀는 삽시간에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거기 누구 없나요?"

"……."
"아무도 없어요?"

무한히 늘어선 벽이 소리마저 흡수해 버린 듯, 이젠 메아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겁먹은 그녀의 심장이
쿵쿵 위태롭게 뛰었다.

"……!"

바로 그때, 율리아의 등 뒤로 무언가 지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의 등골이 쭈뼛 곤두섰다.

"자, 장난치지 마세요.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까요."

율리아는 다시 흠칫하며 어깨를 웅크렸다. 너무 조용해도 이명이 들린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정말


소리가 들리는 건지 아니면 착각인지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았다.

"마왕님, 이제 그만 나오세요."

"……."

"진짜 안 계세요? 이, 이 나쁜 놈아."

멋들어지게 욕하고 싶었지만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녀는 제 소심함을 원망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혹시라도 바엘이 들었을 경우의 뒷일이 너무 무서웠다.

때마침 두꺼운 벽 너머에서 휘이잉,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화들짝 놀란


율리아가 시스템 메뉴를 종료해 버리고, 희미한 빛마저 사라진 사위는 다시금 깊은 어둠에 잠겼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율리아는 막막함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 벽면이 소리를 방음벽처럼 흡수하고 있어 크게 소리쳐 봤자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어떡해서든 스스로 탈출해야만 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건 게임 퀘스트지 현실이 아니야. 아무리 난이도가 높아도 아예 깨지 못할 상황을 던져 주진 않았을


테니까, 나는 그 방법을 찾으면 되는 거야. 할 수 있어.'

그녀가 주먹을 움켜쥔 찰나, 비좁은 통로 끝에 웬 불그스름한 빛이 반짝였다. 미로에 진입한 뒤로 처음


보는 발광체였다.

그것은 아주 느릿하게 깜빡였다. 사라졌나 싶으면 다시 생겨나고, 이젠 제대로 켜져 있으려나 싶으면


다시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빛이 또 언제 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율리아는 그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전에 급하게 내달렸다.

"읏!"

그런 그녀의 몸이 불시에 내던져졌다. 튀어나온 돌바닥 틈에 신발이 걸린 것이다. 넘어지면서 손바닥과


무릎이 길게 쓸렸는지 욱신거리는 통증이 신경을 타고 올랐다.

하지만 웅크린 채 신음하던 그녀도 이내 멍하니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불빛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율리아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마수가 독액이 가득 고인 손톱을 휘갈겼다.

점멸하는 불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수의 안광이었다.

47 화
쾅, 굉음이 터지며 돌벽이 무너져 내렸다. 율리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옆으로 몸을 굴렸다. 다리
힘이 풀려 바닥에 볼품없이 나동그라졌지만 그대로 누워있을 여유는 없었다. 사냥감을 놓친 마수가 악취
섞인 숨을 내뱉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율리아 역시 이대로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다리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통증을
무시하고 끝없이 이어진 복도를 내달렸다.

[▷마력을 두른 단검

대공 아가레스의 강력한 마력이 담겨 있는 단검. 사용 기회 1]

그녀는 앞을 분간하려 시스템을 불러왔다가 그간 잊고 있던 아이템에 생각이 미쳤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곧장 그것을 장착하자 파지직, 전격이 튀는 소리와 함께 예리한 단검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저 마수가 얼마나 강하든 아가레스의 마력에는 미치지 못할 테니,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가 녀석이 나타나는 즉시 단검을 찔러 넣으면 이길 가능성이 있다는 계산이 섰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삽시간에 깨어졌다. 통로의 끝, 막다른 벽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크르릉."

등 뒤에서 네 발 달린 짐승이 미친 듯 따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율리아는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쥔 채 몸을


돌렸다. 악어처럼 길게 찢어진 동공이 소름끼치도록 번들거리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서워. 죽고 싶지 않아.'

마수가 부딪힌 벽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힘없이 갈라졌다. 자세히 보니 손톱뿐 아니라 온몸에서 질척한
독액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 같은 인간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녹아 사라질 거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난 살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살 거라고…….'

이대로 허무하게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어깨가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덜덜 떨렸지만 그럴수록
검을 움켜쥔 손아귀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마수의 검붉은 아가리가 쩌억 벌어졌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검을 치켜들었다.

"잠은 그만 자고 날 구해, 이 나쁜 바엘!"

"보기보다 간이 크군. 감히 왕의 이름을 부르다니."

마수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친 순간, 사방에 붉은 마법진이 피어났다.

휘날리는 마력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엘이 율리아를 뒤로 밀어내며 눈매를 좁혔다. 동시에 질식할
듯한 중압감이 비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키에에에엑!"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급변하는 상황을 시야에 담았다.

단지 바엘이 앞에 나섰을 뿐인데, 거의 삼 미터에 육박하는 괴수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게다가 괴수의 몸뚱이에서 우득우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쇳덩어리에 짓눌린 듯 온몸의
뼈가 짓뭉개져 부서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엘은 그것에서 끝내지 않았다. 그는 마수를 완전히 터트려 죽여 버린 뒤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들이 딛고 있던 바닥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바엘은 공간 자체를 찢어발길
생각이었다.

놀란 율리아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마왕님, 이러다 탑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내 것을 빼앗으려 한 죗값은 치러야지."

입꼬리를 비튼 바엘의 손끝에서 강력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칠흑의 공간이 종이 찢어지듯 산산이 붕괴하고,
바깥에서 파고든 태양빛이 그녀의 눈을 찔렀다.

방금까지 겪었던 일은 모두 꿈인 것처럼, 그들은 어느새 평범한 홀 가운데 서 있었다.

* * *

해가 저물어가며 광활한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근처의 나무와 꽃이 거대한 날개가 일으킨 바람에
작게 흔들렸다.

바엘이 날개를 접으며 내려앉고, 율리아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아, 죄송해요."

아까 넘어진 탓에 크게 쓸린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율리아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는데 바엘이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그녀는 나직이 사과하며 바엘이 놓아주길 기다렸지만 그는 입을 열지도 팔의 힘을 풀지도 않았다. 찰나의
침묵이 지나고, 그가 마지못한 기색으로 허리를 놓아주자 율리아는 홀로 걸어서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에 주저앉았다.

지평선 너머까지 만개한 꽃과 느릿하게 흘러가는 구름이 시야에 보이는 전부였다. 아까의 환각 미로와는
다른 의미로 비현실적인 공간이었지만 보이는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율리아는 줄곧 긴장했던 몸의
힘을 풀었다.

'정말 죽을 뻔했는데 그게 환각이었다니.'

암흑 미로에서 빠져나온 뒤, 율리아는 눈앞에 보이는 탑의 광경에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바엘이 공간
자체를 무너뜨렸는데 탑은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 하다못해 잔해 부스러기 하나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바엘은 짧게 설명해 주었다. 이번 층엔 먹잇감의 약점을 파고들어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 영원히 가둬 버리는 주술이 걸려 있었다고 말이다.

율리아는 처음에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환각이라고는 하지만 긴박했던 순간들이 뇌리에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 있던 탓이었다.

그런 와중 그녀는 기둥 앞에 서 있던 한 물체를 발견했다. 방금까지 그녀를 죽이려 했던 거대 괴수가


평범한 석상의 모습을 한 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아가리를 벌린 채 포효하는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지만, 그것은 단지 석상일 뿐 아무리


기다려도 율리아를 집어삼키려 달려드는 일은 없었다.

"……."
손바닥의 상처를 내려다보며 회상에서 깨어난 율리아의 옆에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언제 다가왔는지
바엘이 그녀의 곁에 누워 있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늘 혼자였어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데 곁엔 아무도 없으니까, 그냥 가끔씩


누군가 함께 있는 척을 해 보곤 했어요."

텅 빈 집을 나서며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와서는 잘 다녀왔습니다, 무언가 먹을 땐 맛있게 먹겠습니다,


잠자리에 들 땐 안녕히 주무세요.

하지만 정말로 아프고 외로울 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말해도 답이 돌아오지 않는, 외로운
메아리가 될 뿐인 현실이 너무도 여실히 느껴져서.

"제가 불렀을 때 정말로 누군가 나타나 준 건 처음이에요. 그래서……."

율리아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느릿하게 꼬았다.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긴 이야기를


뒤죽박죽 늘어놓았다. 물론 그는 전부 다 귀찮고, 그냥 이 좋은 풍경을 감상하며 자고 싶을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

"아까 이 말씀을 못 드린 게 계속 신경 쓰였어요."

환각 미궁은 사람의 내면 세계 속에만 존재하는 어두운 덫이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기 위해 그는


얼마나 큰 힘을 써야 했을까.

생각해 보면 처음 악마성 밖으로 납치됐던 때도 그랬다. 다른 악마들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자신을 직접 찾으러 와 주었다. 살고 싶다고 외쳤을 때 그가 나타나 주었다. 고작 자신 따위를 구하기
위해서.

율리아는 왼쪽 가슴에 새겨진 붉은 각인을 손끝으로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심장이 뛰어. 아마도 각인 때문이겠지.'

바엘이 아무 고통 없이 편안히 잠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명이 다르니 영원히 곁에 있어 줄


순 없겠지만, 최소한 그가 더욱 큰 고통을 향해 제 발로 걸어가는 건 막아서고 싶었다.

율리아는 자신의 마력 저항이 닿도록 그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하지만 바엘은 아직 잠들


생각이 없는지 율리아를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뜨거운 시선을 느낀 율리아는 이내 그의 눈길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알아챘다. 핏방울 맺힌 손바닥이었다.

"저, 신경 쓰이세요?"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고서 금세 후회했다. 스스로의 행동이 아픈 곳을 봐 달라고 투정부리는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죄송해요. 농담이었어요."

"……."

"진짜 농담이었는데……."

아무 말 없이 상처를 내려다보던 바엘은 그녀가 물리려던 손을 낚아챘다. 그러곤 느릿하게 혀를 내밀어


핏방울을 핥아 올렸다.

한 번으론 만족하지 못한 듯, 그는 새빨갛게 물든 혀로 상처를 얼얼할 정도로 파고들었다. 바엘의 잘


짜인 등 근육이 흥분으로 꿈틀댔다.

"유혹하는 데 도가 텄군."

"읏!"

상체를 일으킨 그가 율리아의 귓가에 짓씹듯 속삭였다. 바엘의 맹렬한 기세에 눌려 몸을 뒤로 젖히며,
그녀는 더운 숨을 내뱉었다. 그의 안광에 거칠고 파괴적인 정복욕이 들끓었다.

바엘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머리 위로 결박하며 치맛자락을 끌어 올렸다. 붉은 석양 아래 발갛게 물든


허벅지가 훤히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라면 눈보다 희었을 그녀의 살갗은 포도주에 담근 듯 적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슨 피 냄새가 이렇게 달달한지."

"아, 아파요……."

"정말 눈 돌아가겠군."

바엘은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강하게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압력을 받은 무릎의 상처에서 작은
핏방울이 퐁퐁 맺혔다.

그는 한껏 벌려진 허벅지에 코를 박고 숨을 깊이 들이켰다. 짙은 애욕과 식욕이 뒤섞여 이 보드라운


살갗을 뜯어 삼키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사실은 미궁의 틈을 벌리고 들어가 엷게 퍼진 피 냄새를 맡았을 때부터, 바엘은 그녀에게 발정하고 있었다.

"아!"

"부족해."

바엘은 상처를 입술로 덮고 볼이 패일 정도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녀의 체향만큼이나 황홀하고 중독적인
피가 마른 입 안을 흠뻑 적셨다.

하지만 그 한 모금이 전부였다. 이 미칠 듯한 갈증은 여전히 바엘의 몸 안에 날뛰고 있는데, 율리아의


상처는 그의 점막이 닿자 깨끗이 아물어 버렸다.

"아직 부족해."

미처 채우지 못한 식욕은 그의 다른 욕구를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만들었다. 피처럼 붉은 안광이 위험한


수준까지 일렁였다. 기실 그는 더욱 만족스러운 물을 내어주는 샘을 알고 있었다.

그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여린 허벅지를 쓸어 올리며 더욱 은밀한 곳을 찾아 파고들었다. 열락에


헐떡이던 율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안 돼, 안 돼요. 누가 보면……!"

"보라고 해. 그래 봤자 넌 내 것인데."

"으으응!"
"심장이 뛰는 한 영원히 내 것이지. 오직 나만의 것."

뜨겁고 달콤한 비부를 고작 손바닥 크기도 안 되는 얇은 천 쪼가리가 가리고 있었다. 이 얼마나


애처롭고도 부질없는가.

속옷을 옆으로 밀어내며 침범하는 거친 손가락에 그녀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바엘은 길게 갈라진 음부를
중지로 쓸다가 손끝에 닿은 음핵을 지그시 굴렸다. 주인을 닮아 작고 순종적인 살덩어리가 바엘의
손가락에 밀려 이리저리 짓뭉개졌다.

이곳이 탁 트인 야외라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표백되고, 오직 스멀스멀 차오르는 쾌감만이 가녀린
육체를 점령했다. 그녀는 결국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하읏, 아!"

"들리나? 고작 손가락 하나에도 좋아 죽는군."

"그건, 마왕님이, 아!"

샘에서 비어져 나온 물이 음부를 푹 적시며 찌걱찌걱 소리를 냈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율리아를
보며, 바엘의 뇌관이 흥분으로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당장에라도 속살에 저를 파묻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율리아의 아래는 너무도 비좁았다.

바엘은 대신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행동은 성급했으나 눅진하게 녹아 있던 내부는 마치


좆질하듯 드나드는 침입자를 격하게 환영했다.

48 화

그는 율리아의 얼굴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뜨겁고 비좁은 구멍을 헤집었다. 중지뿐아니라 손 전체가 들어갈
정도로 격하게,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고 깊숙이 쑤셔 박았다.

"……!"

굵고 단단한 손가락이 들락거릴 때마다 그녀는 절정에 도달했다. 바엘의 행위가 숨 막힐 정도로 좋았다.
등허리가 오싹하게 떨리고 작은 자극에도 솜털이 오소소 곤두섰다. 그가 엉망으로 쑤셔대는 안쪽에 모든
신경이 집중됐다.

비참할 정도로 덜덜 경련하던 율리아는 그런 제 모습이 부끄러워 얼굴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쾌락에 절은
몸은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수치스러움에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바엘의 가학심을 건드렸다. 그는 율리아의 양 손목을 단단히
결박한 채 손가락을 더욱 거칠게 휘저었다.

"허벅지 힘 풀어."

"제발, 제발 보지 말, 으읏."

"거부할 거면 이렇게 꿀떡꿀떡 맛있게 삼키질 말았어야지. 내가 쑤셔 줄 때마다 좋아서 뒤집어지는


주제에."

"그건 각인, 부작용, 아아!"

그녀는 가쁜 숨을 헐떡이다 불현듯 몸을 굳혔다. 바엘이 무너진 여체를 한계까지 벌린 뒤 거대한 페니스를
단번에 삽입한 것이다.
"하아, 젠장."

바엘은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율리아의 매끄러운 다리를 팔꿈치에 걸쳤다. 허벅지가 활짝 펼쳐지며
붉게 충혈된 점막이 공기 중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율리아의 구멍은 제 안에 빠듯하게 들어찬 페니스를
전부 삼키고자 힘겹게 움찔거리고 있었다.

"빼, 빼 주세요, 무서워, 찢어지면……."

"잘하고 있어."

그는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는 율리아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러곤 마른 입술을 핥으며 곧장 허리


짓을 시작했다. 아직 그밖에 닿은 적 없는, 몹시도 깊고 은밀한 곳을 향해서 끊임없이 짓쳐들고
빠져나오길 반복했다.

그들의 교접부에서 철퍽철퍽 물이 튀고 흰 포말이 일었다. 두툼한 귀두가 내벽을 긁을 때마다 율리아는
가느다란 교성을 질렀다.

"으흑, 천천히, 아파……!"

"거짓말."

"아냐, 흑, 아니에요."

"난 거짓말을 싫어하지. 기만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워지거든."

쾌락에 자지러지던 그녀의 목이 뒤로 홱 꺾였다. 바엘은 율리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로 피스톤질


속도를 더욱 높였다. 갑자기 난폭해진 움직임에 율리아는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만 냈다. 지독하게
범람하는 쾌락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퍽퍽 허리를 쳐올리던 바엘의 시선이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향했다. 이 여자가 자신의 소유란 증거가
있어야 하건만, 천 쪼가리에 감싸여 보이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게."

바엘은 이를 짓씹으며 율리아의 가슴팍을 아무렇게나 잡아 뜯었다. 단추가 후두둑 떨어져 나가며 위아래로
빠르게 흔들리는 선홍빛 유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붉은 각인이, 그녀가 느끼는 미칠 듯한 쾌락을 반영하듯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바엘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미묘한 낌새를 느끼고 시선을 내린 율리아는
바엘의 시선이 흔들리는 가슴에 꽂혀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녀의 몸이 수치심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보, 보지 말아요. 왜 그런……!"

그가 손목의 결박을 푼 틈에 율리아는 양팔로 가슴을 그러모았다. 하지만 아무리 저항해 봤자 그녀의 몸은
바엘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가 허리를 쿵쿵 찧어 댔다.

"이대로 성으로 돌아가 모두에게 보여 줄까? 네 가슴 모양이 어떤지, 젖꼭지는 무슨 색인지, 이 콩알만
한 걸 만질 때마다 구멍이 얼마나 빠듯하게 조이는지. 내친김에 키마리스를 불러 직접 확인하게 해 주는
건 어때."

"싫어요, 싫어, 아, 안 돼."

"그럼 팔 내려."
"흑, 읏, 으으응!"

그녀가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자 바엘의 안광이 더욱 흉흉해졌다. 그는 고환까지 쑤셔 박을 기세로


하반신을 마구 짓쳐 올렸다. 팔뚝만 한 페니스가 깊숙이 파고들어 자궁을 마구 찔러 댔다. 거친 삽입이
이어지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전율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홀쭉했던 배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불룩하게 오르내렸다. 정신이 끊어질 것 같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가슴을 가리는 대신 바엘의 어깨를 밀어내는 것을 택했다. 그와 동시에 바엘의 페니스가
자궁구를 찍어 올렸다.

율리아는 이제 자신도 모른 새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연한 색의 속눈썹이 애처롭게 젖어들었지만


그 모습이 되레 바엘의 정복욕을 부추겼다.

그는 등골을 선뜻하게 저미는 쾌락의 징조를 감지하곤 느른하게 웃었다.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전부 먹어."

그는 율리아의 양 다리를 어깨 위에 걸치고 가느다란 허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움직임에
맞춰 아래쪽으로 쿵쿵 내리찍었다.

난폭한 움직임의 끝, 이윽고 그녀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함께 움직임을


멈춘 바엘의 목울대가 거칠게 오르내렸다. 파정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바엘은 여전히 내부에 머문 채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뜨거운 전율이 그의 뇌리를 잠식하고,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둘의 그림자가 다시금 합쳐졌다.

* * *

해가 완전히 저문 늦은 밤, 바엘은 제 가슴팍에 기대어 곤히 잠든 작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야외는 안


된다고 울먹일 땐 언제고, 지금은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작게 뒤척이고 있었다.

간간이 움찔거리며 허리를 뒤트는 걸 보니 안에 깊숙이 파묻힌 물건이 불편한 모양이었지만, 바엘은
그것을 꺼내 줄 생각이 없었다. 되레 짐승처럼 쑤시고 싶은 걸 인내하는 중이었다.

"하아, 잘라먹으려고 작정했나."

그는 율리아의 허벅지를 벌려 그 사이의 접합부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위쪽과는 달리 욕심도 많아서,


빠듯하게 들어찬 것을 뿌리까지 삼키려는 듯 오물대고 있었다. 그때마다 바엘은 욕지거리가 치밀 정도의
쾌감과 동시에 다른 감정을 하나 더 느꼈다.

이 여자는 자신의 것이라는,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라는 깊은 충족감.

이상한 일이었다. 열쇠는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다. 머나먼 태초부터 그러했고, 세상에 태어난 그녀의
심장을 손아귀에 넣는 순간 소유 관계는 더더욱 확실해졌다. 가슴의 붉은 각인이 있는 한 그녀는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여긴 다 봤으니까 다음 층으로 올라갈게요.'

계단으로 올라간 열쇠가 환각 미궁에 빠진 걸 알았을 때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짐승에게 덮쳐져
죽기 직전의 그녀를 발견했을 때 어째서 턱이 떨릴 만큼 분노했는가.

'감사합니다.'
'…….'

'아까 이 말씀을 못 드린 게 계속 신경 쓰였어요.'

왜 그리도 쉽게 휩쓸려 버렸는가. 눈앞에 내밀어진, 남과 다를 것 없는 작고 창백한 손가락에 이성을


잃고 말았는가.

이 손이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좆을 흔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두 팔이 자신의 목덜미에 간절히 매달려
오고 마른 어깨와 봉긋한 가슴이 정신없이 흔들렸으면 좋겠다고, 붉은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어 줬으면 좋겠다고.

마계를 복속시킨 절대 군주가 이렇게 비좁은 구멍에 들어가서야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젠장."

상념에서 깨어난 그의 얼굴이 욕망으로 일그러졌다. 단지 상상만으로도 페니스가 부피를 피우며 꿈틀댔고,
아직 늘어날 준비가 되지 않은 질벽은 제가 머금은 것을 강하게 압박했다. 바엘의 호흡에 점점 뜨거운
열기가 뒤섞였다.

"으응……."

그의 턱밑에서 작은 신음이 울렸다. 열쇠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이 약한


탓인지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시간을 끌곤 했는데, 지금도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늘 무감하던 바엘의 눈빛이 저도 모른 새 어떤 빛을 띠었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율리아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이제 깼나?"

"네에……."

"그럼 하던 것 마저 하고 싶은데."

"뭐를……. 읏!"

그녀의 눈이 일순 크게 뜨이더니 상체가 벌떡 섰다. 그래 봤자 곧 바엘의 위로 힘없이 엎어졌지만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어떤 자세로 올라타 있는지 드디어 눈치챈 듯했다. 따뜻하고 눅진하던 내벽이
바르르 떨리며 조여들었다. 심장의 각인 역시 붉게 점멸했다.

바엘은 사색이 되어 굳어 버린 열쇠를 즐겁게 관찰했다. 그녀는 빠져나가려 몸을 비틀었지만 그때마다


바엘이 슬쩍 허리를 쳐올린 탓에 되레 자극만 더 커졌다.

"아앙, 아, 안 돼……."

"큭, 진짜 잘라먹겠군."

"움직이면, 안 돼, 아, 아아!"

바엘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끊어졌다. 진짜 멈추게 하고 싶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고 적당히 맞춰 주면서 흥미를 식게 하는 편이 나았겠지만 바엘은 그것을 굳이 지적해주지 않았다.
그가 하체를 쳐올릴 때마다 그녀의 유방이 바엘의 가슴팍에 마구 뭉개지고 비벼졌다. 율리아는 힘겨워
비명을 질렀지만 그에겐 아직 한참 부족했다.

보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고 퉁퉁 부을 때까지 빨아올리고 싶었다. 살성이 여리니 몇 번만 빨아 줘도 금세


빨갛게 벗겨져 꼭지를 세울 것이다.

"상체 일으켜."

"왜, 왜……."

또다시 정사가 시작될 기미를 느낀 걸까, 열쇠가 주춤거리며 몸을 굳혔다. 그와 동시에 구멍도 빡빡하게
조여드니 바엘은 정말로 이성을 날려 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열쇠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따르게 만들면 된다. 그는 열쇠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손톱으로
젖꼭지를 살살 긁었다. 작은 쾌락에도 쉽게 휩쓸리는 열쇠의 몸이 다시금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교접부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물이 줄줄 샜다.

그녀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졌다. 안절부절 못하며 허리를 찧더니 음부를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사색이
되어 마구 도리질 치는 모습은 흡사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율리아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속삭였다.

"나아, 이상해, 이상해요, 손, 놓아줘."

"뭐가?"

"기분이, 이상해, 밑이, 밑……."

"제대로 말해야지."

가뜩이나 맨몸이 닿은 상태에서 밑은 강하게 쑤셔지고 위는 손톱으로 긁히고 귓바퀴는 뜨거운 혀에


속속들이 유린당했다. 눈이 반쯤 풀린 상태로 흔들리는 여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기색이었다.

내부가 쉴 새 없이 경련하며 바엘의 것을 마구 조여 댔다. 이윽고 사정감을 느낀 바엘이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 귀두만 머금게 한 뒤, 다시 거칠게 당겨 내리며 푹 젖은 안으로 세차게 찔러 넣었다.

"크윽!"

"시, 싫어, 아, 아!!"

박아 넣는 힘과 체중이 합쳐져 거대한 귀두가 율리아의 자궁구를 힘차게 때렸다. 동시에 그녀의 요도에서
투명한 액체가 질질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소변도 아니고 애액도 아닌 그것은 바엘의 배 위에 한참을 쏟아져 내리다 그의 파정이 멈출 때쯤에야
가까스로 잦아들었다.

49 화

율리아는 화났다. 진심으로 화났다.

자다 깼는데 자신의 아래에 웬 거대한 흉물이 들어와 있었다. 여기까진 정말 마음을 넓게 써서 넘긴다
치더라도-사실은 이것도 절대 안 되지만-이후 온갖 수치스러운 짓을 다 당하고 결국엔 실례까지 하고
말았다.

쾌락이 가라앉고 정신을 차린 뒤, 축축하게 젖은 바엘의 몸과 머리카락, 그리고 자신의 하반신을 보면서
율리아는 정말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죽을 순 없으니 그 화는 고스란히 바엘에게로 돌아갔다.

"어떻게 자는 사람에게 그, 그런 짓을 해요? 짐승도 그러진 않을 거예요!"

한편, 율리아가 안다면 참으로 상심하겠지만 바엘은 그녀의 책망을 들으면서도 전혀 반성하는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모습이 어린 토끼 같아서 정말이지 가소롭게
느껴졌다.

게다가 소위 '짐승보다 못한 놈'의 눈에, 홀딱 벗은 채 웅크리고 있는 토끼는 참으로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었다.

물론 그것을 모르는 율리아는 여전히 씩씩대며 분노 표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 입장에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정말 죽다가 살아났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저랑 살갗이 닿으면 이상한, 그런, 요, 욕구가 생기는 건 알지만, 그럼 얼른 저를 떼어내셨어야죠!"

그녀는 정사와 관련된 단어를 말할 땐 어김없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그래도 마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땐 의견은커녕 고개도 제대로 못 들었다.

새삼 감개무량을 느끼며 마저 화를 내려던 율리아는 제 뺨을 툭툭 장난스럽게 건드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녀의 눈이 홱 부릅뜨였다.

"이럴 때 장난치시면 어떡해요!"

"……?"

그녀의 시선을 받은 바엘은 반쯤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그는 팔꿈치를 기대고 누운 채 율리아가


쫑알거리는 모습을 말없이 감상하고 있었다. 율리아 역시 그것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진범은 누구인가. 어안이 벙벙해진 율리아가 멍하니 입을 벌린 그때, 마침 그녀의 얼굴을
간질이던 것이 바람을 타고 눈앞으로 이동했다. 범인은 다름 아닌 솜털 같은 흰 꽃가루였다.

율리아는 이거 참 멋진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왜 여기에……."

꽃가루를 내려다보던 율리아의 눈에 문득 주변 풍경이 들어왔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을 잡아끈 건 그게 아니었다. 그들이 누워 있는 꽃밭 전체가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율리아는 바로 앞에 핀 꽃잎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꽃술이 간지럽다는 듯 파르르 떨며 더 많은 빛을


뿜어냈다. 그녀는 방금까지 화내던 것도 잊은 채 눈을 크게 떴다.

"마왕님, 이게 뭐예요?"

"……야광화."

"이렇게 예쁜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밝을 땐 몰랐는데 밤에만 피는 꽃인가 봐요. 어쩜 이렇게


아름답게 빛날까요."

그녀는 화려하게 만개한 꽃잎을 살살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끝부터 끝까지
전부 야광화로 뒤덮여 있었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사위 속, 수많은 불빛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서, 율리아의
시선이 흐릿하게 번져들었다.

더는 먼지 낀 창문 너머로 몰래 훔쳐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보다 훨씬 좋은 것을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을 아마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흐읏, 저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인데 너무 놀라서 그런가. 눈물이 다 말라 버렸어요."

"아까 너무 많이 울어서 그렇겠지."

"시끄러워요."

율리아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바엘을 등지고 앉아 풍경이나 마저


감상하려는데, 그녀의 뒤에서 순간 붉은빛이 번쩍였다. 그러더니 그녀가 고개를 돌린 틈도 없이 바엘이
다가왔다.

율리아의 새하얀 목덜미를 가리던 긴 머리카락이 치워지고, 대신 피처럼 붉은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채워졌다.

"항상 가지고 다녀."

"이게 뭔가요?"

"내 마력을 담은 수정구."

"이걸 왜 제게……."

"마음 바뀌기 전에 순순히 받는 게 좋을 거야."

율리아는 가슴께에 흔들리는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크기는 작았지만 자세히 보니 안에 붉은 기운이 느리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바엘을 마주 보았다. 역시 이 보석은 그의 눈동자와
닮아 있었다.

[▷붉은 마력의 목걸이

마왕 바엘이 자신의 강력한 마력을 불어넣어 만든 목걸이. 바엘을 제외한 모든 악마의 접근을 막아 준다.
사용 기회 3]

[▷야광화

밤이 되면 빛나는 꽃. 죽음의 땅에서만 자란다. 사용 기회 1]

'목걸이는 받은 거지만 꽃은 왜……?'

눈을 동그랗게 뜬 율리아가 시선을 돌렸다. 바엘의 손에 빛나는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그는 별생각


없는 얼굴로 율리아의 귀에 그것을 꽂아 넣었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귓가를 훑는데, 덕분에 죄 없는
그녀만 몸을 작게 움츠렸다.

이러다 살갗이 닿기라도 하면…… 이번엔 두 다리로 멀쩡히 걸을 수 없게 되리라. 그녀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이만 성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다들 걱정할 텐데."


"하라고 해."

"밤바람이 쌀쌀해서 그런지 조금 추워요."

"참아."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배고프고."

"……."

귀찮은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던 바엘은 '배고프다'는 말 한마디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새까만 천을 만들어내 율리아를 둘둘 감은 뒤 안아 올렸다.

"꽉 잡아. 떨어지면 두고 갈 거야."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팔은 율리아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그녀는 담요 안으로 얼굴을
숨기며 살풋 웃고 말았다.

위압적인 크기의 날개가 단번에 펼쳐지고, 두 인영이 붉은 달이 뜬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느새 선잠에
빠진 그녀의 앞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ERROR

ERROR?? ERROR?? ERROR??]

[▷?? ??? 목걸이

마왕 바엘이 ??? ??? ??? ???? ?? 목걸이. 바엘을 제외한 모든 ??? 접근을 ????. 사용 기회 ?]

* * *

율리아는 현재 탑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등 뒤에서 열심히 꼬리를 흔드는 베로를 뒤로한 채 거대한
문고리를 잡았다.

[▷SYSTEM

Main Quest. '탑의 비밀' 진행 중]

[▷SYSTEM

- 해금 조건: 바엘, 레기온과 함께 거점 '마신의 탑'에 진입한다.

- 미션: 탑 내부를 조사하시오. 제한 시간 1 일.

- 보상: 커맨드 시스템 활성화

- 실패 페널티: 거점 '마신의 탑' 영구 진입 불가]

눈앞에 떠오르는 퀘스트 창을 보며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후우, 할 수 있어.'

오늘은 퀘스트 '탑의 비밀' 마지막 날이었다.

비록 지난 6 일간 거하게 허탕을 치긴 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포기할 수는 않아서, 위험을 무릅쓰고 베로와
단둘이 성에서 빠져나왔다.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바엘에게 받은 목걸이를 쓸 생각이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마수를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탑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육중한 문이 율리아를 환영하듯 활짝 열렸다. 그 안에 보이는 풍경은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과 차단시키려는 듯 문이 저절로 닫혔다.

율리아는 주먹을 굳게 움켜쥐었다. 마냥 몸으로 부딪혀서 될 일이 아니란 건 어제 충분히 깨달았다.

'일단 퀘스트 제목을 잘 고려해야 해.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어.'

단적인 예로 첫 에피소드였던 '첫 번째 죽음'의 해답은 베리드의 죽음이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대신


자신이 죽게 될 거라는 일종의 이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힌트는 탑의 내벽에 숨어 있겠지.'

율리아는 '탑의 비밀'이 마신의 창세 신화에 숨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 거대한 탑의 역할은 마정석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1 층부터 꼭대기까지 모두 마계의 창세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종의 성서와 같았다. 마정석의 역할은 게임의 메인 키워드인 '열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지만, 그렇다면 창세기는?

아무런 역할도 없는 요소를 마신의 탑이란 가장 중심적인 존재에 배치했을 리 없었다. 율리아는 그러한
생각의 끝에서 이번 퀘스트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벽에 새겨진 조각에 힌트가 있다는 건 알았어. 하지만 아직도 범위가 너무 넓어."

율리아는 복도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느릿하게 훑었다. 완전한 무의 공간에 씨앗 하나가 눈뜨고
있었다. 장차 마신으로 자라날 존재였다.

'나를 마신으로 만들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열쇠로서 달갑고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해.'

지하 감옥을 울리던 바엘의 무감한 목소리가 뇌리에 남았다. 열쇠의 심장을 얻어 그토록 바라던 마신이 될
날에 가까워졌음에도 그는 어째서…….

그녀의 손이 자연스레 붉은 목걸이로 향한 찰나였다.

[▷ERROR

ERROR?? ERROR?? ERROR??]

[▷?? ??? 목걸이

마왕 바엘이 ??? ??? ??? ???? ?? 목걸이. 바엘을 제외한 모든 ??? 접근을 ????. 사용 기회 ?]

조각에 새겨진 홈을 따라 붉은빛이 화악 번져 나갔다. 빛의 궤적은 긴 복도를 빠른 속도로 달음박질쳐


계단을 올라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율리아는 그것을 따라가는 대신, 복도 반대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베로야!"

"컹, 컹컹!"

그녀는 늑대 등에 뛰어오르며 스킬창을 열었다. 베로를 탑에 무사히 진입시키기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저항 전이 Lv.2

제한 시간 9 분 59 초]

그녀는 상단에 떠오른 시간 바를 확인한 뒤 탑 안쪽을 손짓했다.

"마왕님의 마력을 따라가야 해. 최대한 빨리!"

"컹컹!"

이젠 제법 성체 티가 나는 베로는 율리아가 외치는 즉시 탑 안으로 뛰쳐 들었다. 녀석은 한참이나 높은


계단을 눈 깜짝할 새 뛰어올라갔다.

율리아는 정신없이 흔들리는 등 위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시야가 홱홱 바뀌니 어지러워 제대로 앉아
있기 힘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간신히 얻은 기회를 이대로 허망하게 놓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드디어 붉은 궤적의 꼬리가 잡혔다.

"저쪽이야! 베로, 다음 층 복도 안쪽!"

"크르릉!"

그녀의 손짓에 따라 베로가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그들이 멈춘 곳은 폭포가 떨어지는 거대한 호수였다.
바엘의 붉은 마력은 호수 근처를 크게 맴돌더니 물에 녹아들며 천천히 사라졌다.

50 화

율리아는 베로의 등에서 내리기 전, 시야 상단의 시간 바를 확인했다.

0 분 26 초. 베로가 엄청난 속도로 올라오긴 했지만 역시나 스킬 한두 번으론 무사히 빠져나가기 힘들 것


같았다. 그녀는 스스로의 정신력을 믿기로 하고 다시 스킬을 사용한 뒤 땅에 발을 디뎠다.

"세상에……."

미미한 현기증에 비틀거리던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실제로 보지 않았다면 탑 안에 이런 장소가


존재하리라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폭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줄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줄기는 물감을 탄 듯 색이


조금씩 달랐는데, 호수에 섞여들며 아름다운 오로라 빛으로 일렁였다.

율리아는 홀린 듯 짙은 물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가 호숫가에 앉으려던 찰나, 등 뒤에서
또다시 붉은 마력이 점멸했다. 흐릿하게 확장됐던 그녀의 동공이 퍼뜩 원래의 빛을 찾았다. 그녀의
발끝은 호수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뭐였지, 방금.'

그녀는 당황했지만 스킬의 시간제한 탓에 오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재빨리 몸을 돌려 빠져나가니 폭포


밑에 자리한 작은 동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의 입구엔 처음 퀘스트가 시작될 때 보았던 원형 마법진이
빛나고 있었다.

포탈을 밟자 율리아의 눈앞이 희게 변했다.

[▷SYSTEM
커맨드 시스템을 활성화합니다.]

[▷SYSTEM

Main Quest. 탑의 비밀]

[완료]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온 뒤, 그녀는 아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대단한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조사 결과는 알려 줄 줄 알았는데, 퀘스트 달성을 알리는 안내창과 함께 포탈이
사라진 게 전부였다.

"설마 이렇게 끝난 거야?"

그녀는 허망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굴 입구는 그녀가 양옆으로 팔을 뻗을 수 있는 크기 정도였다.


동굴이라기보다 그냥 굴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했다. 더 깊은 안쪽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스킬 종료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저항 전이 Lv.2

제한 시간 0 분 05 초]

"끼잉……."

"앗, 베로!

"낑낑."

"미안해. 이제 괜찮아."

이번 층에 도착한 이후 줄곧 안절부절못하던 베로가 율리아의 치맛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그녀는 급하게


다시 스킬을 사용한 뒤 베로의 힘에 못 이겨 동굴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읏, 역시 세 번까진 무리였나 봐."

[▷SYSTEM

잔여 HP 가 10% 미만입니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기능을 제외한 모든 스킬을 해제하시길 바랍니다.]

시야 가장자리가 몇 초간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가 돌아왔다. 율리아는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베로의


등에 몸을 기댔다.

동굴 안을 더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이런 상태에선 힘들었다. 스킬을 재사용하기엔 남은 SP 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HP 가 거의 바닥이었다. 율리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는지 베로가 안절부절 못하며
그녀를 돌아보려 몸을 마구 뒤틀었다.

율리아는 떨어지지 않도록 베로의 등을 꽉 붙든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만 성으로 돌아가자."

"컹, 컹컹!"

베로는 재빨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혹시나 나가는 도중 스킬이 종료될까 안절부절 못하던 율리아는 1
층 복도에 도달하고 나서야 기절하듯 눈을 감을 수 있었다.

* * *

아침나절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율리아가 정신을 잃은 채 늑대 등에 업혀 돌아왔다. 영문을 알아볼 틈도


없이 키마리스는 자책하고 아가레스는 분노했으며 바르바토스와 레라지에 형제조차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발칵 뒤집힌 악마성을 잠재울 수 있는 건 오직 율리아뿐이었다. 고위급 악마들의 기세가 하늘까지 뻗치기


전에 그녀가 깨어나기를, 마족들은 모두 숨죽인 채 기다렸다.

한편, 율리아는 다행히 하루가 가기 전에 눈을 떴다. 아주 길고 슬픈 꿈을 꾼 듯한 기분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깨어났을 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저 정말 괜찮아요. 쓰러진 게 아니라 잠깐 잠든 것뿐이었는걸요."

그녀는 눈앞에 늘어선 악마들을 보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아가레스의 생각은 달랐다.

"작은 열쇠야, 보통 흔들어도 안 깨는 상태를 잔다고 표현하진 않아."

"맞아. 단체로 매달려 통곡해도 안 깨는 걸 잠들었다고 하진 않지."

"너도 놀랐으면서 큰소리는."

"무슨 헛소리야? 내가 언제, 증거 있어?!"

율리아의 침대 근처를 괜스레 얼쩡거리던 레라지에가 버럭 소리쳤다. 그는 아가레스의 매서운 눈총을 받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침실 밖으로 나가진 않고 대신 티 테이블에 다리를 꼰 채 앉았다.

대신 줄곧 어두운 얼굴로 있던 키마리스가 그녀의 머리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율리아, 정말 아무것도 말해 주시지 않을 겁니까?"

"그냥 답답해서 바람을 좀 쐬고 싶었어요."

"마왕에게 끌려나가 밤새 성을 비우시더니 몇 시간 안 되어 또 사라지시지 않았습니까.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저는……."

키마리스는 의심하고 있었다. 여리디여린 율리아가 바엘 탓에 심한 고초를 겪고도 그를 감싸기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바엘은 손속이 잔인하고 냉혹했다. 그는 율리아를 마수들 사이에 던져 주고 그녀가 죽어 가는 모습을


즐겁게 관찰하는 것이 가능한 종류의 악마였다. 물론 지금 당장은 열쇠가 필요할 테니 그렇게까지 미친
짓은 안 하겠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마왕은 율리아의 생각보다 훨씬 비열한 자입니다. 저는 불안합니다."

율리아가 자꾸만 바엘에게 곁을 내어주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를 떠올리는 눈빛에 두려움이 아닌 다른


감정, 이를테면 커다란 연민과 아주 작은 친밀감이 떠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 한편이 무거워졌다.

그녀의 곁에 서는 게 자신이 될 순 없더라도 최소한 바엘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


걱정이 단지 기우이기를 바랐다.

"너도 시끄러워, 키마리스. 환자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레라지에 옆에 얌전히 앉든가, 아니면
밖에 나가서 머리 식히고 와."
키마리스의 머릿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끊어 낸 건 아가레스였다. 율리아 앞에서 답지 않게 입술을
짓씹던 그는 퍼뜩 인상을 풀고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

"율리아, 방금 한 말은 잊고 빨리 낫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절 걱정해 주신 거 알아요."

"문밖에 있을 테니 필요하면 부르십시오."

"그러실 필요 없는데……."

"바람이나 좀 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몸을 돌려 방을 나서는 그의 어깨가 왜인지 조금 처진 듯 보였다. 하지만 율리아가 신경 쓰기 전에


아가레스가 먼저 말을 이었다.

"하여간 사내 녀석들은 도통 쓸모가 없어. 그렇지?"

"하하……."

아가레스는 어색하게 웃는 율리아의 뺨을 마구 쓰다듬었다. 그러곤 막 깨어난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레라지에와 바르바토스를 챙겨 침실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율리아가 그녀의 옷깃을 붙들었다.

"저, 아가레스 님."

"응? 왜."

"요 며칠 레기온이 보이질 않아서, 혹시 어디로 갔는지……."

탑 최상층에서 바엘을 구해 낸 이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잠든 바엘에게 붙들린 날이 길어서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사실 레기온은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본인이 원한다면 마왕의
방문이라도 부수고 들어올 녀석이었다.

처음엔 그가 정말로 쳐들어왔다가 싸움이라도 붙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 돌이켜보면 그는


이미 악마성을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마족을 증오하는 레기온 앞에서 마왕님을 걱정하다니 그래선 안 됐는데, 분명
내게 실망한 거야.'

머리로는 그가 떠나는 게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되니 후회할 일들만 자꾸 떠올랐다.

"네 인간 친구 말이지? 글쎄, 하필 죽음의 동굴에 시찰 다녀온 직후라 내가 누굴 챙길 정신이 없었네.


지금이라도 알아볼까?"

"아, 아니에요."

"흥, 그 재수 더럽게 없는 소드마스터라면 일주일 전쯤 밤에 성을 나서는 걸 봤지. 짐을 싹 두고 간 걸


보면 아예 떠난 건 아닌 거 같던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니, 글쎄. 놈 물건에 장난이나 좀 치려고 했는데."

레라지에는 신경질 섞인 얼굴로 새까맣게 탄 왼손을 내보였다. 상처의 모양이나 크기가 레기온이 자주
읽는 책과 흡사해서, 그것만 보아도 설명은 충분했다.

아가레스와 바르바토스는 레라지에를 몹시 한심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율리아는 어색하게 턱을 긁적이다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감상을 대신했다.

* * *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건조한 모래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레기온은 겉옷 깃을 세우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그가 마계에 남은 건 율리아의 곁에 있고 싶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전, 마신의 탑으로 달려가는 율리아의 모습을 보며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마왕이 마신이 되는 것을 저지한다.'

바엘이 마신으로 각성하는 순간 율리아는 죽는다. 그녀가 죽는 이유가 단지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붉은
각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무척이나 악질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날, 마계의 광야에서 악마들과 싸우던 날, 레기온은 새로운 기억에 눈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것은 기억이라기보다 일종의 '본능'에 가까웠다.

완전히 고갈된 마나 대신 그의 육신을 가득 채운 것은 마력이었다. 그것은 마신에게서 태어난 것 중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산물이었다. 마나 역류로 인해 산산이 끊어지고 부서져가던 그의 몸을 마력이 이어
붙여 살려 냈다.

그때의 끔찍한 기억을 돌아보던 레기온의 눈이 불현듯 부릅뜨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낯익은 기척이
느껴졌다.

"저게 바로 죽음의 나무로군."

온통 황량하게 말라붙은 대지 위,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위용을 자랑하듯 당당하게 서 있었다. 뿌리내린


땅이 척박한 탓에 양분도 없을 텐데, 나뭇가지에 달린 이파리는 여름날의 정원처럼 푸르고 싱그러웠다.

"아니, 양분은 충분한가."

레기온의 시선이 땅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로 향했다. 원래 고목의 뿌리는 그 세월만큼이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 법이라지만 죽음의 나무는 조금 달랐다. 그것의 뿌리에 얽혀 있는 건 다름 아닌 마족이었다.

한때는 살아 있었을, 하지만 지금은 오래된 미라처럼 형편없이 쪼그라든 시체가 뿌리에 겹겹이 얽혀
있었다.

51 화

멀리서 보기에도 썩 좋은 광경은 아닌지라 레기온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그럼에도 조사를 위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던 그의 눈에 어떤 흉터가 들어왔다. 성인 네다섯 명이 끌어안아도 모자랄 두께의 줄기에
깊게 팬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범인이 누군지 보지 않아도 알겠군."

강약 구분이 철저한 지하에서 죽음의 나무는 명백히 강자에 속한 존재였다. 이 나무뿐 아니라 '죽음'
이라는 칭호가 붙은, 마계에 이상 현상을 일으키는 모든 장소가 그러했다.

레기온은 마계에 터를 잡은 직후 그런 위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성으로 돌아가 모두에게 보여 줄까? 네 가슴 모양이 어떤지, 젖꼭지는 무슨 색인지, 이 콩알만
한 걸 만질 때마다 구멍이 얼마나 빠듯하게 조이는지. 내친김에 키마리스를 불러 직접 확인하게 해 주는
건 어때.'

'싫어요, 싫어, 아, 안 돼.'

'그럼 팔 내려.'

'흑, 읏, 으으응!'

그렇게 죽음의 땅으로 향했던 그는 발견했다. 나신으로 얽힌 채 탁 트인 평야를 뒹굴던 남녀의 모습을.
격하게 흔들리다 때때로 가녀린 비명을 내지르던 목소리를. 새하얀 나체를 정신없이 먹어치우던 흉포한
짐승의 형상을.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을 정도로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버렸다. 그러다 때때로 불쑥 떠올라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그런 율리아를 보며 흥분하고 말았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다른


사내에게 범해지는 광경을 보면서 절망함과 동시에 욕정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바엘이 아닌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레기온의 안광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젠장,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율리아는 마음이 지나치게 여린 탓에 그딴 놈의 술수에 속아 넘어갔다. 그녀는 지금 마왕에게 홀린 것이다.


그런데 자신마저 율리아를 더러운 방식으로 욕심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지켜져야 했다.

"그래, 욕심내지 말자. 율리아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웃던 얼굴이 뇌리 한구석을 스쳐 지나갔다. 레기온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린


찰나였다. 콰앙, 엄청난 굉음이 그가 서 있던 땅을 울렸다.

"크윽!"

채찍을 닮은 검은 파장이 목에 날아들기 직전, 이상을 눈치챈 레기온이 기민하게 몸을 피하며 대검을
생성해 냈다. 푸른빛이 짧게 번쩍하더니 그의 손아귀에 소울 소드가 쥐어졌다.

챙!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운 쇳소리가 사위에 퍼졌다. 레기온이 뒤로 멀찍이 물러섰지만 나무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은 그런 그를 재빠르게 뒤쫓았다. 눈을 부릅뜬 레기온의 몸에서도 푸른 마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멍청하게도, 상대를 가려가며 덤벼야지."

그는 단숨에 도약해 사방을 무차별적으로 내리꽂는 가지 위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나무가 사냥당하는


뱀처럼 뒤틀렸지만, 레기온의 눈매는 한 곳에 오롯이 고정되어 있었다.

깊게 팬 줄기의 상처 속, 붉은 마력이 마왕의 안광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주인도 못 알아보는 미물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그는 미친 듯 요동치는 가지를 이리저리 옮겨 타며 빠르게 정상으로 이동했다. 그러곤 검날이 밑으로


가도록 자루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나무의 정수를 겨누었다.

레기온의 동공이 짙은 보랏빛으로 바뀌고, 소드 가운데 박혀 있던 스톤 역시 타들어 가듯 검게 물들었다.


직후, 대검이 일격에 내리꽂혔다.

콰앙!

거대한 파열음이 황량한 대지를 뒤흔들고 짙은 먼지가 숨쉬기 힘들 정도로 자욱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한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검을 휘둘러 잔해를 털어 냈다.

산산이 부서진 나무를 뒤로한 채, 레기온은 떨리는 턱을 꾸욱 짓씹었다.

'만약 마왕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그땐 내가…….'

* * *

05. 악마의 구원자

'탑의 비밀' 퀘스트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여유로운 오후, 바엘의 침실에 홀로 선 율리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커맨드 시스템."

그녀의 손끝에서 마치 조명이 켜지듯 환한 빛이 퍼져나갔다. 율리아는 그것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로라처럼 일렁이던 그것은 그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느릿하게 사라졌다. 몇 번을 보아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율리아는 지난 며칠간 악마들의 성화로 인해 푹 요양하다 문득 지난 퀘스트에서 얻은 보상에 생각이


미쳤다.

커맨드 시스템. 단어만 보면 시스템에게 무언가 명령한다는 뜻 같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기능을 알
도리가 없었다. 아이콘을 찾아봐도 따로 추가된 항목이 없는 탓이었다. 그녀는 고심하듯 중얼거렸다.
커맨드 시스템, 하고.

짧은 회상에서 깨어난 그녀는 다시금 손을 펼친 뒤 입을 열었다.

"커맨드 시스템. 스킬."

율리아의 눈앞에 곧장 거대한 황금빛 나무가 피어났다. 가장자리엔 스킬 포인트 3 개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난 퀘스트를 달성하면서 보상으로 얻은 것이었다. 그녀는 곧장 '저항 거점'을 레벨 2 까지 올렸다.

[▷저항 거점 Lv.2

플레이어가 지정한 좌표에 일정 시간 항마력을 부여할 수 있다. 잔여 체력의 40%를 소모한다. SP 40]

저항 계통의 기초 스킬 2 개를 이로써 전부 올렸다. 한 단계 높은 트리가 해금되었다. 대충 살펴보니 아주


기초적 수준의 물리 실드와, 특정 대상이 지닌 항마력을 강탈하는 스킬이 있었다.

"저항 강탈이라니……."

예상외의 공격적인 단어에 당황하고 있을 때, 그녀가 명령어를 사용했다고 여겼는지 해당 스킬이


선택되었다.

[▷저항 강탈 Lv.1
플레이어가 지정한 대상에 일정 시간 항마력의 50%를 강탈한다. 잔여 체력의 70%를 소모한다. SP 60]

[▷SYSTEM

보유 스킬 포인트가 부족합니다. 해당 스킬을 해금할 수 없습니다.]

두 개의 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마력 강탈은 소모되는 SP 가 컸지만 그보다 증발되는 HP 의 양이 더욱


무시무시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쓸모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만에 하나 마족끼리 싸우는 일이
벌어진다면 아군의 서포트가 가능해지는 스킬이기 때문이었다.

'베리드의 경우가 또 생기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마족은 본인이 지닌 마력의 크기에 비례해 일정 수준의 항마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마력
방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율리아는 일단 스킬을 기억해둔 뒤 창을 종료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커맨드 시스템을 사용하면 아이콘을 일일이 누를 필요가 없어서 편했지만, 대신 손끝에서 일렁이는 빛이
다른 마족들에게도 보인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녀가 냉큼 손을 털어 내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며칠 만에 성에 돌아온 바엘이 몹시 귀찮아 보이는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졸리니까 나가."

"열쇠의 식사만 챙기고 나가겠습니다. 키마리스가 부탁하더군요."

"그놈이 왜."

"인간은 저희와 다르게 식사를 거르면 죽습니다, 주군."

탁자 위에 인계에서 가져온 빵과 치즈, 말린 과일, 우유 등을 올리던 바르바토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제스처엔 이해는 잘 안 되지만 워낙 약해 빠진 종족이니 그럴 수도 있겠죠,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졸지에 약해 빠진 종족이 된 율리아는 나직이 입술을 삐죽였다. 물론 사실이기에 반박할 순 없었지만


말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편안히 쉬십시오."

바르바토스가 왕에게 묵례하며 침실을 빠져나갔다. 율리아는 바엘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못마땅해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 언짢은 것 같기도 했다. 율리아는
그의 불만을 알 것 같았다.

"기다리실 필요 없어요. 며칠 만에 오신 거라 피곤하실 텐데 지금 침대로 들어갈게요."

그녀는 긴 로브를 걸쳐 맨 살갗이 닿지 않도록 꼼꼼히 가리고 먼저 침대에 누웠다. 바엘의 표정이
아까보다 조금 더 굳었다.

"식사는."

"별로 입맛이 없어서……."

"네가 뭔가 입에 넣는 걸 본 적이 없군. 이제 보니 죽고 싶은가 보지?"


"네?"

"말하고도 잊었나? 죽음으로써 나를 거스르고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감히 그렇게 말했었지."

율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마계에 떨어진지 얼마 안 되어 모든 것이 두렵고 위태롭던 시기에,


자신과 주변의 안위를 보장받고자 그와 거래를 하러 이 방에 왔다. 그때 비슷한 말을 하긴 했지만 왜
갑자기 당시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바엘은 침대 시트를 열어젖히고 율리아를 속에서 일으켰다. 그러곤 그녀를 거칠게 안아 소파 위에


내팽개쳤다. 쿠션이 푹신해 아프진 않았지만 어안이 벙벙한 건 여전했다.

그런 그녀의 입에 크고 뭉뚝한 것이 들이밀어졌다.

"입 벌려."

"읏!"

"먹지 않겠다면 쑤셔 넣겠다."

그의 목소리에 흉흉한 기색이 섞였다. 입을 벌리지 않으면 턱을 비틀어 빼서라도 먹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무척 두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바엘의 표정 역시 건들면 터질 듯 위태롭고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마왕의 손에 들린 게 고작 빵이라니, 게다가 그것을 자신의 입에 밀어 넣으려 갖은
협박을 동원하고 있다니.

입술을 꾹 깨문 채 참아 보려던 그녀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바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지만, 그것을 모르는 율리아는 까르르 해맑게 웃었다.

"아까 바르바토스 님의 말 때문에 그러세요?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

"음, 크흠! 틀린 말은 아닌데, 마왕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닐 거예요."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은 율리아는 한 끼 정도는 건너뛰어도 전혀 문제없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럼에도 바엘의 미심쩍은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역시 인간보단 충신의 말이 더욱 믿음직스러운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그녀의 입술을 짓누르고 있는 것을 슬며시 잡아 내렸다.

"저 죽지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무슨 헛소리지?"

"마왕님을 마신으로 만들어 드리기로 약속했잖아요. 마왕님의 명령을 어긴 레벤나와 키마리스 님을 살리는
대가로요. 잊지 않았어요."

"……."

"그때까진 저 죽지 않아요. 보세요, 먹고 있잖아요?"

율리아는 눈매를 휘며 빵을 한 입 물었다. 우물우물 씹어 삼키곤 키마리스가 그녀의 입맛에 맞춰 구해 온


달달한 과일도 집어 들었다.
입이 짧은 탓에 금방 까끌까끌한 모래를 씹는 듯한 기분이 되었지만, 그녀는 바엘의 표정을 풀기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52 화

그렇게 한참을 열중하던 그녀는 슬며시 눈동자를 굴렸다. 언제부터인지 바엘의 시선이 그녀의 오물거리는
입술에 박혀 있었다. 게다가 발걸이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느긋하게 턱을 괴기까지 했다. 마치 흥미로운
연극이라도 보는 듯한 자세였다.

"저, 마왕님."

"뭐지."

"괜찮으시다면 같이 드실래요?"

어차피 혼자 먹기엔 부담스러운 양이었다. 그도 다른 마족들처럼 인간의 음식을 궁금해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고심하던 율리아는 그의 시선이 여전히 한 곳에 박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바엘은 궁금하지만


체면상 입을 못 여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의 절대 군주가 고작 인간의 음식에 호기심을
가진다니, 남이 본다면 웃을 법한 이야기였다.

마음을 정한 율리아가 테이블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그녀의 손등 위로 검고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바엘이 그녀가 먹던 빵을 그대로 베어 문 것이다.

율리아는 왜인지 열이 오르는 얼굴을 숨기려 슬쩍 고개를 숙였다.

"……."

바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다 불현듯 미간을 구겼다. 그가 딱히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율리아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왜 이딴 쓰레기를 먹고 있는지 생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러다 자칫 죄 없는 키마리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율리아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제, 제가 부탁했어요. 마계와 인계를 자주 오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음식을 구해


달라고요. 원래 인계 음식이 이렇게까지 맛없진 않아요."

"결론은 맛이 없다는 거지."

"……음."

"이런 쓰레기를 잘도 먹었군. 그러니 몸 하나 제대로 못 가누는 거겠지."

율리아는 애매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자신은 절대 그의 생각만큼 약하지 않았다. 다만 자주 쓰러지는


이유는 스킬 사용으로 인한 체력 저하, 혹은 바엘과 정사를 나눌 때 그가 너무 격하게 몰아붙여서…….

'생각해보니 전부 마왕님 탓이잖아.'

그가 탑도 레기온도 건들지 않고, 덤으로 자신도 건들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마왕의 눈앞에서 직접 말할 용기는 없어서 생각 없이 빵만 야금야금 깨물었다. 방금 바엘이 물었던


자리였다.

율리아를 보는 바엘의 안광에 묘한 이채가 스민 찰나, 악마성 입구에서 갑자기 요란한 팡파르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지만 멀리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거리감을 좁히며 점점
가까워졌다. 그것은 명백히 마왕의 침실을 향하고 있었다.

바엘은 이유를 알아챘는지 몹시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주물렀다.

"하아, 귀찮은 녀석이 또 왔군."

"손님인가요? 그럼 이런 차림으로 있으면……."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탓에 얇은 네글리제 한 벌, 그리고 겉에 걸친 로브가 전부였다.


실내복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손님을 맞기에 썩 적절한 차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율리아를 바엘은 기어코 낚아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바엘의 무릎
위에 넘어지기 무섭게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무척이나 아름다운, 이곳이 지옥만 아니었다면 천사로 착각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한 소년이었다.

"아아, 마계의 위대한 군주이시여."

소년은 지극히 영광스럽다는 얼굴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행동과 말투는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상당히 고전적이었다.

"이 몸 파이몬, 인사 올립니다."

[서쪽과 불을 다스리는 마계 9 위의 악마, 사계왕 파이몬(Paimon)]

물 흐르듯 자리에서 일어선 파이몬은 바엘과 그의 무릎에 앉아 있는 율리아를 보더니 기쁘게 미소 지었다.

"아아, 서쪽에서 지내는 동안 주군께서 애첩을 들이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간 공사가 다망하여
이리 늦게 찾아뵙고 경하드리오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얼굴 봤으면 됐겠지. 이만 꺼져라."

"마왕님, 아이한테 무슨……!"

놀라서 몸을 비틀던 율리아는 엉덩이 밑에서 슬슬 부피감을 키워 가는 묵직한 무언가를 느꼈다. 가만히
있어도 워낙 괴물 같은 크기인 탓에 조금만 힘을 얻어도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간 뒷일을 장담할 수 없었다. 율리아는 손바닥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앞으로 조금 당겨
앉았다. 그녀가 얌전히 있자 바엘의 힘도 조금 느슨해졌다.

"참으로 상냥하시군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주군께서 정말 노하시면 고작 이 정도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이몸의 무례를 평소와 달리 너그러이 용서하신 것도, 다 애첩인 당신이 곁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많아 봤자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이토록 유려하게 말을 이으니, 악마는 외양과 실제 나이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어색해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런 율리아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파이몬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과연 주군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미색이군요. 이 몸에게 당신의 손등에 입 맞출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편하게 율리아라고 불러 주세요."

"당신은 주군의 여자이니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바다 같은 호의는 마음으로


간직하겠습니다."

율리아는 바엘의 무릎 위에서 내려가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허리를 감은 팔은 뱀처럼 꽁꽁 휘감겨 왔다.
그녀는 결국 어정쩡하게 앉은 채로 손을 내밀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파이몬의 머리카락은 꼭 풍성한
솜털처럼 보였다.

'귀엽다고 말하면 실례일까? 하지만 너무 사랑스러운걸.'

아이를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이 눅진하게 녹아들었다. 그렇게 소년의 작은 손이 그녀에게 닿은 순간이었다.

[▷파이몬

켁, 못생겼어. 비쩍 말라서 머리통 뽑으면 앞뒤 구분도 안 되겠네. 바엘이 드디어 눈이 삐었나? 그리고
재수 없게 친한 척은 왜 해? 아아, 내 입술 썩겠네.]

수많은 생각이 엄청 빠른 속도로 창을 스쳐 지나갔다. 율리아가 멍하니 굳은 동안 파이몬은 여전히 천사


같은 얼굴로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물러났다.

[▷파이몬

뭐야, 왜 저렇게 멍하게 있어? 예의라는 걸 모르는 건가? 기분 더럽게. 역시 못 배워 먹은 바엘과


끼리끼리 어울릴 만하네.]

똑바로 선 파이몬의 자세는 조각처럼 바르고 두 눈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건만, 얼굴 밑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은 온갖 비속어와 욕설이 난무했다. 양쪽을 번갈아 보느라 도저히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율리아는 일단 어색하게라도 웃었다.

"파이몬 님, 그간 서쪽에서 지냈다고 하셨는데 그럼 앞으론 이곳 성에 머무시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이 몸의 근거지는 죽음의 산이 있는 서쪽이고 주군의 둥지엔 잠시 들른 것뿐입니다. 이


몸은 다른 마족들과 달리 서쪽에 영지를 받았거든요."

"귀찮으니까 멀리 내쫓은 것뿐이다."

"주군께선 늘 그리 말씀하시지만, 다 이 몸을 믿고 맡기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많아도 최대 여덟 살짜리가 호탕하게 웃었다. 율리아는 정말 아연한 기분이 되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바엘이 왜 그를 먼 서쪽으로 보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마왕님 피곤하실 텐데, 이러다 정말 무슨 일 생기겠어.'

바엘은 마력 폭주로 인한 불면증을 아주 오랜 시간 겪어 왔다. 매일 밤 고통에 몸부림치며 하루 한 시간도


편히 잠들지 못하다 자신을 곁에 둔 뒤에야 간신히 안정을 찾았다고 들었다. 그 탓인지 바엘은 잠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게다가 그는 지난 며칠간 마계 어딘가를 떠돌다가 방금 막 귀환했다. 지금도 몹시 쉬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후우, 피곤하군."

아니나 다를까, 율리아의 머리 위에서 긴 한숨이 들려왔다. 바엘의 인내심이 실시간으로 바닥나고 있었다.
파이몬이 아무리 얄밉다지만 그래도 아이답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니 차마 바엘의 분노에 노출되도록
놔둘 수 없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파이몬 님,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기뻐요. 다만 저랑 마왕님은 방금 잠자리에 들려던 찰나였거든요.


못다한 이야기는 내일 마저 나눌 수 있을까요?"

"이런, 이 몸이 눈치가 부족해 두 분이 나누는 사랑을 방해하고 말았군요."

"아, 하하……."

파이몬의 눈썹이 은근히 올라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 또 오해를 산 모양이었지만 율리아는 그냥 깔끔하게


포기했다. 일단은 그를 빨리 내보내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악마성에 계시는 동안 편히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염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파이몬

뭐야, 자기가 이 성 주인이야? 바엘 놈도 안 내는 생색을 왜 지가 내고 있어?]

그저 방긋방긋 웃던 율리아는 파이몬이 나가고 문이 닫힌 뒤에야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뭔가 엄청난


게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바엘은 흐물흐물하게 늘어진 율리아를 안아 올려 침대로 걸어갔다. 그녀를 안쪽에 눕혔지만 정작 본인은
미간을 주무르며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골 때리는군. 기껏 내쫓았더니 왜 또 온 건지."

"마왕님이 이렇게 누굴 싫어하시는 건 처음 봐요……."

"전부 귀찮아."

율리아는 잠결에 흐릿하게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말 싫었다면 72 악마를 성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확신할 순 없지만 왜인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바엘은 발갛게 익은 율리아의 양 뺨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녀의 입술이 붕어처럼 튀어나왔다.

"특히 저놈은 믿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네가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니까."

"……."

"뭐지?"

"아뇨, 조금 놀라서요."

바엘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기본적으로 남에게 무관심한 성격이라 누가 무슨 생각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뜻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바엘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신생이 제법 쓸 만한 마력을 타고났으니 눈이 보이는 게 없을 거다. 내버려 두면 저


잘났다고 날뛰다 알아서 자멸하겠지."
"파이몬 님은 아직 어린가 봐요. 태어난 지 백 년 정도 되었나요?"

"백 년? 웃기는 소리."

바엘은 픽 실소하더니 그녀의 옆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율리아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바엘은 더


이상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결국 답을 포기하고 잠든 율리아가 파이몬의 진짜 나이를 알게 된 건 바로 다음 날의 일이었다.

53 화

"작은 열쇠야, 물어볼 게 있다고? 파이몬? 태어난 지 팔 년 정도 됐나. 하는 짓이 제법 귀엽긴 한데 내


눈엔 네가 훨씬 귀여워. 아, 못 참겠다! 당장 나한테 먹혀 줄 생각 없니?"

"네가 그건 왜 묻지? 주군께 도움이 되고 싶다고? 흠, 말 많고 요란한 게 흠이다만 하는 짓은 나름


싹싹하지. 관심 없어서 더는 모르겠군."

"싹싹? 형, 드디어 노망이라도 난 거야?! 그 재수 없는 애새끼. 서쪽 땅 떼어 줬으면 하던 대로 왕


놀이나 하면서 처박힐 것이지 왜 둥지까지 찾아오고 난리래?"

"율리아, 파이몬과는 가까이 지내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는 근래에 보기 드문 마력을 타고났지만


스스로의 힘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언젠가 반드시 감당하지 못할 문제가 생길 겁니다."

다음 날, 율리아는 주변 악마들로부터 파이몬에 대한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9 위의


최고위급 악마인 그는 강한 마족들에겐 비교적 우호적인 평판을, 그보다 낮은 위계의 마족들에겐 썩 좋지
않은 평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왕님은 파이몬의 본성을 알아챘구나.'

율리아가 전날 약속대로 파이몬을 만나러 가고 있을 때, 복도에서 그녀를 뒤따르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키마리스가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율리아가 파이몬에 대해 묻는 게 영 불안했는지 용건을 묻더니,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듣자


동석하겠다고 나섰다.

"파이몬이 사계왕이라 불리는 이유는 네 원소 중 하나인 불의 권능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화염


마법에 관련해선 그를 따라올 악마가 없고 불 속성 저항력도 무척 강하죠. 그의 속성 저항을 완전히
파훼할 수 있는 건 아마 바엘이나 아가레스 정도일 겁니다."

"하지만 아직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잖아요. 그렇게까지 위험하진……."

"율리아."

한 발 앞서간 키마리스가 그녀를 마주보고 섰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아름답고도 연약한 주인을 응시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대가는 원수의 목숨으로 치를 겁니다."

"키마리스 님."

"저뿐 아니라 다른 모두가 그렇겠죠. 정말 파이몬을 위한다면 그를 멀리하시고 그가 둥지에 머무는 동안은
어딜 가든 꼭 저나 다른 누군가를 대동하십시오."

키마리스는 율리아의 이타적인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에게 위험이 생길 거라고 하면 눈도


꿈쩍하지 않지만, 정작 남이 위험해진다고 하면 곧장 반응을 보인다. 그녀는 지하에서 살아남기에 너무나
적합하지 않았다.

그가 착잡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표정을 정리하는 동안 율리아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어요. 저는 마왕님을 마신으로 만들 중요한 재료니까요. 그때까지 다치지 않도록 더


조심할게요."

"제 말뜻은 그게 아니라……!"

"그래도 오늘까지는 봐주세요. 약속이잖아요?"

율리아는 생긋 웃어 보이며 그를 지나쳐 걸었다. 키마리스는 자책하듯 거칠게 숨을 뱉었지만 그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성을 가로지른 둘은 파이몬이 머무는 거처에 도착했다. 어쩐지 복도 초입부터 눈이 부시다 했더니, 그의


침실은 문짝부터 차원이 다른 화려함을 자랑했다. 이건 문이 아니라 금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노크했다간 내 손이 부서질 거 같아.'

문고리 앞에서 머뭇거리던 율리아는 결국 크게 소리치는 걸 택했다.

"파이몬 님, 안에 계세요?"

"……."

"저, 파이몬 님?"

율리아가 안쪽의 반응을 기다리던 그때,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키마리스가 사나운 기세로 문을 열어젖히고
먼저 침실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야, 왜 허락도 없이 들어와?!"

"역시 안에 있으면서 일부러 무시했군. 해가 중천에 떴어. 율리아를 멋대로 오라 가라 하는 것도


모자라서 왜 아직 그런 꼴로 있는 거지?"

"이 몸이 어디서 뭘 하든 네까짓 게 무슨 상관이야! 이 몸이 손만 까딱해도 살려달라고 울고불고 난리


치면서 무릎 꿇고 벌벌 길 주제에! 그리고 천한 인간이 좀 기다린다고 뭐! 어차피 곧 죽을 노예잖아?!"

복도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율리아는 안쪽의 공기가 미묘하게 얼어붙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잠에서 막 깬 듯한 파이몬이 키마리스를 기세등등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지금 감히 이 몸을 내려다보는 거야? 마력으론 이 몸의 발끝에도 못 미칠 하찮은 버러지 주제에?"

"……당장 율리아에게 사과해."

"이 몸이 왜 그래야 하는데? 건방지게."

파이몬의 입꼬리가 불길하게 비틀렸다. 그의 손아귀에서 용암 덩어리가 이글거리며 빠르게 크기를


키워갔다. 그것은 곧 거대한 창으로 변해 키마리스의 머리를 겨누었다.

"자, 살고 싶으면 이 몸에게 무릎 꿇어. 키마리스."

"율리아에게 사과하라고 했어."


"듣자하니 아가레스에게 심장을 빼앗겼다며? 단번에 죽지는 않을 테니 오히려 잘 됐어."

파이몬의 손가락이 탁 튕겨진 찰나, 율리아는 앞뒤 따질 것 없이 그들 사이로 달려들었다.

"커맨드. 전이!"

그녀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화악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구체의 형태로 율리아의 몸에서 빠져나가
키마리스를 온전히 감쌌다. 빠르게 달려들던 창이 그녀의 실드를 맞고 산산이 부서셨다. 주변 가구에
옮겨 붙은 불이 맹렬히 타올랐다.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열기가 그녀를 덮쳤다. 하지만 율리아는 놀랄 여유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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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진행도 32%]

시간이 짧게 멈추며 세 번째 에피소드를 알리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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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rd Episode. 악마의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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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션: 파이몬을 회유하시오.

- 보상: 신규 에피소드 활성화

- 실패 페널티: 플레이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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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구원자'는 '마력의 행방'의 프리퀄 에피소드이며 각 단계마다 별도의 보상이 존재합니다.]

창이 사라지자 율리아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키마리스는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한 채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이몬의 화마가 워낙 강력한 탓에 주변은 이미 온통 불바다였다.

"율리아, 율리아 눈 뜨십시오! 어째서 저를 감싼 겁니까!"

"이익, 감히 이 몸의 공격을 막아?! 가만 안 둘 거야. 용서 못 해!"

파이몬의 전신이 불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불덩어리를 쉴 새
없이 날렸고, 율리아는 그것을 모두 막아 냈다. 하지만 물리 데미지까지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기에 불과
연기는 실드를 고스란히 통과해 들어왔다.

율리아는 격한 기침을 내뱉으며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는 제한 시간을 확인했다.

'9 분 정도 남았어. 괜찮아, 이 정도면 아가레스 님이 와 주실 거야.'

최고위급 마족인 파이몬의 속성 저항을 깰 수 있는 건 지하를 통틀어 바엘과 아가레스 정도라고 했다.
키마리스도 마침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호흡기를 감싸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파이몬을 바깥으로 유인할 테니 그동안 율리아는 아가레스의 집무실까지 뒤돌아보지 말고 달리십시오."

"절대 안 돼요, 콜록 콜록! 제가 떨어지면 파이몬 님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게 되잖아요. 조금만 더


버티면 아가레스 님이 오실 텐데……."

"저는 괜찮습니다, 율리아."

그는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율리아의 머리카락을 담담하게 쓸어 올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율리아는 불안해졌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대가는 원수의 목숨으로 치를 겁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모두가 그렇겠죠. 정말 파이몬을 위한다면 그를 멀리하시고 그가 둥지에 머무는 동안은
어딜 가든 꼭 저나 다른 누군가를 대동하십시오.'

자신이 자리를 떠나면 키마리스와 파이몬,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다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희생양은 아마 키마리스……. 그 역시 72 악마의 일원이었지만 그래도 파이몬의 마력에 비할 순
없었다.

"욕심이 지나치다고 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누군가를 희생해서 저 혼자 살아남는 건 이제 싫은


걸요."

그녀는 키마리스의 옷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동안 무차별적으로 화마를 날리던 파이몬은 자신의
공격이 번번이 막히자 더욱 분노해 비명을 질러 댔다.

"이럴 순 없어! 고작 인간 주제에, 버러지 같은 노예 주제에! 왜 이 몸의 공격을 번번이 막아 내는


거야?!"

"그리고 이번엔 저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녀의 시선이 거센 화마에 집어삼켜진 작은 인영에게로 향했다. 키마리스는 율리아의 눈빛에서 굳은


의지를 읽었는지 두말하지 않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러곤 매캐한 연기를 피해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파이몬은 바짝 약이 올라 도망치는 그들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공격이 통하지 않자 화를 못 이겨 애먼


주변만 불바다로 만들었다.

율리아는 제한 시간이 빠르게 줄어드는 스킬창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스킬을 연달아
사용해야 했다. 체력이 부족해 쓰러지는 건 괜찮았지만 매번 주변을 걱정에 빠뜨릴 만한 상황이 생기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눈을 꽉 감은 채 속으로 간절히 중얼거렸다.

'아가레스 님, 부디 서둘러 주세요.'

집채만 한 불덩어리가 실드를 강타할 때마다 발밑이 흔들리고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키마리스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율리아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제 못 참아. 진짜 못 참아. 이 몸을 거스르는 버러지들은 다 죽여 버릴 거야!!"

"읏, 갑자기 무슨……."

율리아는 미친 듯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떠오른 파이몬이 능력을 이용해
주변 공기를 모두 빨아들이고 있었다. 산소를 머금은 화마가 폭탄 터지듯 일시에 크기를 키웠다. 빠르게
번진 불길이 키마리스의 발밑을 가로막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가 호흡기를 타고 들어왔다. 가슴을 움켜쥔 율리아가 힘겹게 몸을 뒤틀었다.
"으흑! 콜록 콜록!"

"율리아!"

"흑, 숨을 못 쉬겠……."

율리아의 목에서 쌔액 쌔액 위태로운 쇳소리가 들렸다. 파이몬은 구석에 몰린 둘을 보며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머리 위에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거대한 용암 덩어리가 나타났다. 파이몬이 준비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하하! 다 새까맣게 타서 죽어 버려!"

율리아의 두 눈이 질끈 감긴 그때였다. 칠흑 같은 시야 너머 번쩍, 눈이 멀 듯한 붉은 섬광이 일었다.


동시에 서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내려앉았다.

"사라져라."

악마성에서 가장 높은 첨탑에 선 바엘이 손을 뻗었다.

그가 해방시킨 붉은 마력은 율리아와 키마리스를 포위한 화마를 모조리 잡아먹고 그대로 파이몬에게
돌진했다. 불타오르던 아이의 몸을 더욱 거대한 불덩어리가 고스란히 집어삼켰다.

미묘하게 색이 다른 두 불꽃이 격렬하게 얽혔다. 파이몬은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그의 자줏빛 불꽃은


더욱 강한 선홍의 화염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54 화

"끄윽!"

소년의 작은 몸이 바닥으로 힘없이 추락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커멓게 오그라든 채 바르작거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끔찍하고 기괴했다. 율리아는 본능적으로 드는 거부감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아파! 아파아아아악!"

"……."

"아아아악!"

"시끄러워."

하지만 바엘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방금 파이몬을 삼켰던 화마는 이번엔 집채만 한 붉은 거미로 변했다.
그것은 날카로운 주둥이로 파이몬의 목을 물어뜯고 독액을 주입했다. 비명을 지르며 뒹굴던 소년이
이윽고 움직임을 멈췄다.

지옥 같은 정적이 찾아들었다. 율리아의 흔들리는 시선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헤쳐 널어진 잔해로 향했다.
키마리스는 바르르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죽지 않았습니다. 악마는 심장만 무사하다면 원래대로 회복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콜록, 기억은요?"

"무슨 말씀을……."

"몸이 회복된다고 해도, 콜록 콜록."


율리아는 불현듯 말을 멈췄다. 어느새 지상에 내려앉은 바엘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키마리스는
율리아를 보호하듯 팔에 힘을 더했지만, 그럴수록 바엘의 안광은 더욱 흉흉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재미있군."

"……."

"인계에선 주인의 것을 욕심내는 이를 반역자라 부른다지. 처형하는 방법이 인간답게 아주 흥미롭던데."

얼굴을 굳힌 키마리스는 율리아의 흐트러진 옷자락을 대신 추슬러주며 등을 떠밀었다.

"파이몬은 걱정 마시고 일단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근처에서 아가레스와 레라지에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아, 윽, 콜록!"

하지만 율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기도를 마구 할퀴었다.


아무래도 뜨거운 연기를 마신 탓에 흡입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콜록, 콜록! 아……."

힘겹게 기침을 내뱉던 그녀의 몸이 갑작스레 위로 끌어 올려졌다. 바엘의 붉은 눈동자가 율리아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가까이서 보니 희게 질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처럼 보였다.

왕의 시선이 열쇠의 뒤에서 적대감을 드러내는 키마리스에게 향했다. 바엘은 율리아를 보란 듯 끌어안고
가느다란 몸을 살살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열쇠의 허리가 움찔 비틀렸다.

"욕심만 많지 지킬 줄은 모르는군."

"내가 사죄할 이는 오직 율리아뿐입니다."

"아무렴 어떤가. 잘 보도록 해. 하나도 빠짐없이."

바엘이 율리아의 턱을 억지로 들어 올리곤 곧장 율리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당황해 굳어 버린 점막을


비집고 들어가 여린 살갗을 혀로 유린하듯 거칠게 핥았다.

바르르 위태롭게 떨리는 숨이 바엘의 얼굴에 닿았다. 솜털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 감각이 더더욱
바엘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그의 목울대가 거칠게 오르내리고 성대 안쪽에서 낮은 신음이 울렸다. 그는
어느새 율리아에게 빠져들어 몰입했다.

바엘의 커다란 손바닥이 명백한 의도를 담고 그녀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상당한 키 차이 탓에 고개가 꺾인
채 힘겹게 입맞춤을 받아들이던 율리아는 문득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하아, 으응……."

목 안쪽을 날카롭게 긁던 통증이 바엘과 키스하는 동안 어느새 사라졌다. 쇳소리 나던 숨소리도 평소처럼
부드럽게 돌아왔고 기침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얼마 전 들판에서 정사를 가진 뒤 손바닥과 무릎의 상처가 치료된 것을 보며, 그녀는 바엘과 밀접한
행위를 나누면 상처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베리드를 피하려다 목에 큰 상처를
입었을 때도 바엘과 관계를 나눈 뒤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그녀는 이제 되었다는 의미로 바엘의 혀를 톡 건드렸다. 그의 몸이 움찔 굳은 사이, 율리아는 자연스럽게


빠져나와 눈매를 휘었다.
"감사합니다, 마왕님. 저를 치료해 주려고 하신 거죠? 덕분에 깨끗하게 나았어요."

"……."

바엘은 율리아의 말갛고 순진한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가 행동을 멈추자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는 멀리서 달려오는 여러 개의 발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아까


키마리스가 말했던 대로 아가레스와 레라지에가 오는 것 같았다.

"아, 드디어!"

익숙한 대상의 등장에 안도한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뒤에 남은 두 사내가 서로를
노려보며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 * *

미로 같이 얽힌 악마성 지하, 아직 성체에 이르지 못한 새끼 용이 악에 받쳐 울부짖었다. 날카로운


비명이 습한 돌벽을 쩌렁쩌렁하게 울렸지만 그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일은 없었다.

바엘이 딱히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가 나서지 않아도 다른 마족들이 자발적으로 파이몬의 고문에


참여했다. 이전 레벤나와 키마리스를 심문할 때의 배가 넘는 악마가 자리를 지켰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감히 주군의 소유를 건드리다니."

"놔, 이거 놔! 다 죽일 거야!!"

"네가 공격한 인간은 주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여자다."

"게다가 마신의 힘이 담긴 수정구의 열쇠이기도 하고. 몰랐을 리가 없지. 베리드가 반역으로 죽은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 녀석의 목적이 의심스럽군."

"무슨 헛소리야! 이 몸이 여기서 풀리기만 하면 네놈들 전부……. 아아아아아악!!"

손바닥에 대못이 하나 더 박힌 직후, 파이몬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과 사슬이 철그렁대는 소리가 고막을
마구 때렸다.

상석에 앉은 바엘은 턱을 괸 채 파이몬의 고통 섞인 비명을 기꺼운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왕이 바라는


바를 알아챈 마족들은 지금까지보다 더욱 대담하게 나섰다. 혹시나 파이몬이 용서받는다면 몰라도 죽음이
확정된 상황에선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게 불 좀 쓴다고 안하무인 날뛸 때부터 알아봤다."

"사계왕인 이 몸의 마력을 감히 그따위로 불러?!"

"지치지도 않는군, 건방진 애새끼가."

"아아아악! 시끄러워, 닥쳐, 듣기 싫어! 아아아아악!!"

파이몬은 미친 듯 발악했다. 어차피 하루면 사라질 몸의 상처 따위 간지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왜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하는지 억울하고 분했다.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욕설을 내뱉는 마족 중엔 한때 파이몬의 수족을 자처하던 이들도 있었다. 입 안의 혀처럼


굴며 달콤하게 속삭이던 이들이 지금은 경멸 섞인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왜?! 인간은 노예잖아! 내키는 대로 괴롭히고 죽여도 된다고 했잖아! 서쪽 땅에선 아무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어!"

"물론 그랬겠지. 네가 금기를 어기든 말든 그래서 죽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야! 닥쳐, 닥쳐, 닥쳐!!"

"애초에 네가 왜 서쪽으로 쫓겨났는지 아나? 태어나지 말아야 할 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너 때문에 우리


모두의 위계가 밀려났어. 애초에 누구도 너를 반기지 않았다. 그 누구도, 단 하나도!"

악마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왕의 눈에 들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함이었다.

레벤나와 키마리스는 각각 56 위와 66 위로 위계의 끄트머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쇠의 환심을 사


최고위급 악마 못지않은 권한을 누리고 있었다. 이번에 파이몬이 죽으면 무려 9 위의 자리가 비게 된다.
악마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주군이나 애첩의 환심을 사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파이몬은 그간 지나치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며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적을 만들었다. 그의 작은


몸을 꿰뚫는 못과 망치질에 유독 힘이 실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권력을 향한 욕망과 그들 자신의 개인적 원한이 파이몬의 머리 위로 난잡하게 떨어져 내렸다.

"주군, 처형의 시간입니다."

분위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 보티스가 상석을 올려다보았다. 악마들의 번들거리는 시선이
침묵하고 있는 왕에게로 향했다. 바엘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느른하게 쓸어 올렸다.

"네게 맡기지."

"예,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선사하겠습니다."

보티스의 몸이 크게 부풀고, 그가 내뿜는 칠흑의 숨결에서 수많은 독사가 쏟아져 나와 파이몬의 몸에


우글우글 엉겨 붙었다. 독에 관련해선 지상과 지하를 통틀어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하지만 차라리 죽는 게 자비로 보일 정도로 고통스럽게.

보티스가 살아 있는 한, 파이몬은 셀 수 없이 긴 시간을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갇혀 산송장이 되어


가리라. 그것이 왕의 여자인 율리아 브에스드라를 건든 대가였다.

바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감옥에 있던 모든 악마가 굽혀 경배하며 길을 비켰다. 바르바토스가 그런


주군의 뒤를 따랐다.

"탑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둥지로 간다."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잠들었습니다. 육체에 상한 곳은 없고 레라지에와 키마리스가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바엘의 목적을 짐작한 바르바토스가 눈치 빠르게 덧붙였다. 그리고 키마리스의 이름이 나온 순간, 주군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는 것 또한 알아챘다.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송구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주인의 것을 탐하는 종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명을 내려 주십시오."

바르바토스가 즉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바엘은 그에게 시선 한 점 내어주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내 눈에 보이지 않도록 해."

"알겠습니다."

"나의 열쇠가 녀석과 제법 친밀한 듯하니, 처분은 직접 맡기는 편이 좋겠지."

바엘은 스스로 말하고도 기분이 몹시 저조해지는 걸 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속에서 짜증이 치밀었다.
열쇠의 눈에 기어코 눈물을 내어서라도 이 화를 풀고 싶었다. 그 작은 인간이 울먹이며 매달리는 모습을
떠올리니 되레 구미가 당기기까지 했다.

"……."

그런 그의 충동은 깊게 잠든 율리아를 보는 순간 깨어졌다.

자신이 지은 둥지 안에서, 제 몸보다 훨씬 큰 로브를 걸친 채 잠든 얼굴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작고


느리게 울리는 숨소리는 방금까지 그가 느끼던 의미모를 불쾌감마저 가라앉혔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소리 없이 걸터앉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열쇠를 보고 있자면 이제껏 머릿속을


잠식해 가던 온갖 파괴적인 충동들이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저 나른하게 눈이 감겼고, 몸을
이어붙인 채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마왕님. 저를 치료해 주려고 하신 거죠? 덕분에 깨끗하게 나았어요.'

파이몬이 폭주하던 그때, 탑으로 향하던 바엘은 성내에서 불안정하게 휘몰아치는 마력의 파장을 느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율리아 브에스드라의 말갛고 멍청한 얼굴이었다.

그는 결국 발길을 돌렸고 거대하게 타오르는 화마와 짙은 연기 사이에 갇힌 채 비틀거리던 여자를


발견했다. 희게 질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보며 바엘의 이성은 뚝 끊어져 버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열쇠가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어디까지나 도구에 지나지 않건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이유를, 그럼에도 파이몬을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않은 이유를, 그리고…….

'아, 드디어!'

뒤돌아선 채 멀어져가던 여자를 붙잡아 다시금 입 맞추고 싶었던 이유를.

55 화

짧은 상념에서 깨어난 그는 곤히 잠들어 있는 여자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자는 와중에도 귀찮았는지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을 보는 바엘의 입매가 저도 모르게 느슨해졌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너는 뭘 원하는 건가."

열쇠에게 묻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창 너머 마신의 탑으로 향해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수정구가 보랏빛 마력을 내뿜었다.

"곧 알게 되겠지. 봉인이 풀리고 네놈이 깨어나는 순간……."

그의 두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다가올 미래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저 쉬고 싶었다. 잔인함


따위는 모른다는 듯 말간 얼굴로 곤히 잠든 율리아 브에스드라의 곁에서.

* * *

붉은 달이 뜬 야심한 밤,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악마성 지하를 소리 없이 걷고 있었다. 벽에 붙어


슬금슬금 이동하던 그것은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기둥 뒤쪽에 재빨리 숨어들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작은 그림자가 가슴을 움켜쥔 채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번엔 들키는 줄 알았어."

"컹! 헥헥."

"쉿, 쉿."

"헥."

"옳지."

칭찬을 받은 큰 그림자가 혀를 길게 빼고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녀석의 덩치가 워낙 큰 탓에 꼬리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바람이 훅훅 일었다. 하지만 그건 하지 말라고 임의로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율리아는 차라리 빠른 이동을 택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놈은 이제 살아서 성 밖을 나서지 못할 거라고.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아주 속이 다 시원하네. 물론


너도 그렇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저는 무사하잖아요. 마왕님께서 치료해주신 덕분에 다치지도 않았고…….'

'주군께서 직접 파이몬의 처벌을 명한 건 열쇠인 네가 죽을 뻔했기 때문이지만, 원래도 놈에게 이를 가는


녀석들이 많았단 말이지. 절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걸?'

레라지에는 형의 를 잊은 채 율리아 앞에서 신나게 떠들었고, 그것은 결국 율리아를 밤중에 몰래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나름대로 감시 역이라고 두고 간 베로는 이미 그녀의 훌륭한 조력자가 된 이후였다.

누군가 파이몬이 무섭지 않냐고, 혹은 그가 밉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아니라고 대답할 자신은
없었다. 거대한 불의 장벽에 갇힌 채 옴짝달싹 못했던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만약 내게 마력 저항이 없었다면 첫 공격을 받는 순간 죽었겠지. 하지만 나도 키마리스 님도 결국엔


무사히 살았고, 무엇보다 파이몬은…….'

그녀는 보육원에서 지냈던 자신의 옛 기억을 떠올렸다.

고아라고 손가락질할 뿐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른들은 자신이 상처받아 울먹일 때마다
귀찮다며 서로에게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자신은 말문을 닫고 감정을 꼭꼭 숨기게
되었다. 이야기해 봤자 어차피 주변에 폐가 될 뿐이니까.

만약 그때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손을 붙잡고 말없이 이야기를 들어줬다면 자신은 지금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율리아는 답을 알고 있었다. 남들에 비하면 아주 많이 부족할지 몰라도, 이곳에 와서 자신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모두 상냥한 주변 이들 덕분이었다.

가끔은 자신이 말도 안 되는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려도 다들 웃어 주는 현실이 생소해서, 이게 꿈은


아닐까 싶을 때도 있었더랬다.

'내가 파이몬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 지나친 욕심일지는 몰라도, 머나먼 서쪽 땅에 홀로 버려진


아이를 방관하는 그런 치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악마성 지하에 내려온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 탓에 한동안 미로 같은 복도를 헤매던 그녀는 드디어
눈에 익은 계단을 발견했다. 저곳을 내려가면 바로 감옥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린 율리아는 다행히 잠겨 있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수백 마리 독사가 감옥 한구석에 덩어리처럼 엉겨 있었다. 뱀들이 꿈틀거릴 때마다 중심에 있는 무언가가


언뜻 드러났는데, 율리아가 그 기이한 것의 정체를 깨달은 건 한참 지난 후의 일이었다.

"어째서 이런 끔찍한……."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율리아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 독사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달려가
핏덩어리를 안아 들었다.

정신을 잃은 새끼 용이 그녀의 품 안에서 힘없이 늘어졌다. 손끝에 닿는 따끔한 감각에 고개를 내리니
파이몬의 작은 몸에 팔뚝만 한 대못이 몇 개나 박혀 있었다. 수없이 많은 송곳니가 살가죽을 뚫고
들어갔고 맹독에 의해 온몸이 검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파이몬을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그의 몸에 단단한 얽혀 있는 족쇄가 그것을 방해했다. 너무


두꺼워서 혼자 힘으로 부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쉬이이익, 수백 마리 뱀이 그녀를 위협하듯 주변을 맴돌았지만


율리아는 그것들의 형태가 어딘가 어색함을 깨달았다.

꼬리 끝이 검은 연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진짜 뱀이 아니란 뜻이었다.

"커맨드. 전이."

그녀의 손에서 환한 이펙트가 떠오르자 저항의 범위에 든 마력 뱀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베로, 이리 와서 사슬을 끊어 줘."

"컹컹!"

뱀이 무서웠는지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베로가 냉큼 달려와 벽에 매달린 구속구를 물어뜯었다. 하지만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상처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 못이 더 깊이 박힐까 두려웠다.

율리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던 찰나였다. 굳게 감겨 있던 파이몬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한동안 신음만 흘리던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안겨 있는지 깨달은 듯 몸을 굳혔다.

"파이몬 님, 정신이 드세요?"

"뭐야, 네까짓 게 왜, 여기, 큭."

힘겹게 숨만 헐떡이던 파이몬이 진심으로 혐오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그는 율리아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틀며 발악했다.

"네가, 헉 , 왜 여기 있냐고! 더러운, 손, 당장……!"

"움직이시면 안 돼요. 상처가 벌어져요."

"꺼져!! 꺼지란, 말 안 들려?!"

파이몬이 발버둥 칠수록 아직 풀지 못한 사슬은 그의 몸에 더 강하게 조여들었다. 결국 율리아는 그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새끼 용은 그녀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기 위해 바닥을 미친 듯 긁었다.

"죽어, 죽어, 죽어, 인간 따위 죽어 버려, 다 너 때문이야!"

"……."

"너 때문이야! 전부 너 때문이라고! 이 몸이 이렇게, 커헉, 소감이 어때? 재밌겠지! 그러니 이 몸을


조롱하러 온 거겠지! 여기서 풀려나면, 너부터 죽여 버릴 거야!!"

파이몬은 눈의 실핏줄이 터져 나가고 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발악하고 또 발악했다. 율리아는 그가


내뱉는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 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기다렸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을까. 온 힘을 소진한 파이몬은 용에서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바닥에 힘없이 엎드린 채 가쁜 숨만 내쉬었다. 그제야 율리아는 그의 앞에 앉아 담담하게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끝났나요?"

"……."

"더 하셔도 돼요.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어요. 그렇게라도 파이몬 님의 기분이 풀린다면요."

율리아는 로브의 허리끈을 풀어 파이몬의 몸 위에 조심히 덮었다. 어린 아이가 누워 있기에 이곳의 공기는
너무 차가웠다.

"하지만 분노 때문에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히진 마세요. 그건 너무 고통스럽잖아요."

"……."

"몸이 낫거든 언제든 찾아오세요. 제가 전부 들어드릴게요. 어떤 사소한 말이라도 괜찮아요. 그냥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좋다다든가, 맛있는 걸 먹었더니 행복해졌다거나, 기르던 식물이 죽어서
슬프다든가, 친구와 싸워서 속상하다든가."

소년의 유리알 같은 눈이 율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 상황이 무척 혼란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 이 몸은, 나는, 너를 죽이려고 했어."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저는 아마도 외로운 사람한테 약한가 봐요."

외로운 사람을 볼 때면 자신의 고독했던 과거가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면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자신의 어린 날도 구원받게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저 혼자만의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아파."

줄곧 말이 없던 파이몬이 그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감옥에 울리는 숨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그의 뺨에


어느새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 아파. 아파. 아파."

독과 피가 엉겨 붙은 상처투성이 팔이 그녀를 향해 뻗어졌다. 혹시나 거절당할까 주저하면서도 끝끝내


희망을 놓지 못했다. 한번도 닿아 본 적 없던 온기를 찾아서.

율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 조심스럽게 소년의 몸을 안아 들었다.

"이제 괜찮아요."

"아파, 나 아파……."

"전부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기도하듯 눈을 감은 채 소년과 이마를 맞댔다. 아이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텅 빈 지하를 쓸쓸히
울렸다.

[▷SYSTEM

3rd Episode. 악마의 구원자]

[완료]

* * *

율리아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몹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파이몬을 감옥에서 몰래 데리고 나온 그녀는 가장 먼저 아가레스에게 향했다. 일전 바르바토스가


레라지에의 회복을 위해 마력을 불어넣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적이 많은 파이몬을 도와줄 만한
마족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밖에 없었다.

늦은 밤 찾아온 율리아를 보며 반색하던 아가레스는 그녀의 품에 안긴 어린 소년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작은 열쇠야, 마력을 조금 나눠 주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지만 파이몬은 너를 죽이려고 했어. 도와줘
봤자 은혜도 모를 텐데 굳이 살려 줄 필요가 있니?'

'파이몬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몰랐을 뿐이에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요.'

'악마는 인간과 달라. 어미의 도움 따위 필요 없지. 신생은 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음 눈뜰 때부터


강력한 힘과 지능을 가지고 있거든. 그러니 저지른 잘못의 대가도 온전히 치러야만 해.'

아가레스의 반응은 예상외로 단호했다. 그녀가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자 파이몬을 다시 지하 감옥에


버리려 하기도 했다. 결국 율리아는 준비했던 비장의 한 수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파이몬을 구해 주신다면 저, 저를 조금 드셔도…….'

'조금?'

'……마, 많이.'

율리아가 머뭇머뭇 뺨을 붉힐 때부터 흥분을 주체 못 하던 아가레스의 입꼬리가 아주 매혹적인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거래는 훗날을 기약하며 아주 성공적으로 성사되었다.

율리아는 다음으로 레라지에를 찾아갔다. 이번 문제는 상처를 치료해 준다고 끝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파이몬의 잘못을 객관적 입장에서 들은 뒤 혼낼 부분은 혼내고 용서를 구할 일이 있다면 돌아다니며
제대로 사과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역시나 차가웠다.

'흐응, 수상하네. 어차피 끝난 목숨인데 잘잘못 따져서 뭐하려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지난번처럼
구해 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때와는 일의 경중이 다르니까.'

56 화

'경중이 다르다는 건 어떤 뜻인가요?'

'레벤나와 키마리스는 남에게 딱히 원한 살 일을 안 했지. 그러니 네가 용서하든 말든 관심 없었지만,


이번엔 다들 어떡해서든 파이몬을 죽이고 말걸? 주군께서 직접 용서하라는 명령이라도 내리지 않은
이상에야.'

'마왕님께서 직접…….'

레라지에가 의도한 바와는 많이 달랐지만, 어쨌든 율리아는 그 덕분에 이번 사건을 해결할 아주 결정적인
단서를 얻었다.

그녀는 바엘이 성에 돌아오기를 밤새 기다렸다. 그것도 일부러 마족들이 많이 오가는 중앙 복도에 쪼그려
앉아서 기다렸다. 귀성한 바엘이 텅 빈 침실을 보면 가장 먼저 자신을 찾을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역시나 무서운 기세로 닥쳐든 그에게 율리아는 애원했다.

'파이몬을 용서해 주신다면 일주일 동안 침대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마왕님 곁에만 있을게요.
원하신다면 안마도 해 드리고 자장가도 불러 드리고…….'

율리아는 결과적으로 원하던 바를 이루었다. 수많은 마족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둘 사이에 대한


다소간 부끄러운 오해를 감수하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율리아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바엘조차 몹시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 파이몬 심심해."

율리아는 약속대로 침대 밖을 나서지 않았다. 대신 파이몬이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율리아와 바엘


사이를 파고들어 그녀의 품에 폭 안긴 채 잠시라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나가라."

"싫어요."

"당장 꺼지라고 했……."

"마, 마왕님."

율리아는 퍼뜩 놀라서 바엘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몹시 심기 불편해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그렇다고


온기를 찾아 파고드는 작은 아이를 매몰차게 내쫓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파이몬의 어깨를 도닥이며 말을
이었다.

"침대가 이렇게 넓은 걸요. 마왕님 휴식에 방해되지 않게 잘 타이를게요. 그렇지?"

"파이몬 내쫓을 거야? 버릴 거야?"


"아니야. 마왕님께서 피곤하셔서 그러니까 조금만 조용히 있자."

"파이몬이랑 나가서 놀면 안 돼? 둥지에서만 지내기 답답하지 않아? 주군도 우리가 나가는 걸 더 좋아할
텐데?"

"……."

바엘의 미간이 불만스럽게 구겨졌다. 파이몬은 그런 왕을 보며 혀를 쏙 내밀었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율리아는 소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마왕님께선 내가 곁에 있어야 편하게 주무실 수 있어서 그래."

"파이몬은 주군이랑 달라. 파이몬은 율리아가 열쇠가 아니라도, 마력 저항이 없어도 좋아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해."

"나도 파이몬이 제일 좋아."

"진짜?"

소년의 천사 같은 얼굴이 해사하게 밝아졌다. 큰 부상 탓에 아직 인간화가 덜 된 꼬리가 강아지 꼬리처럼


격하게 흔들리자, 파닥파닥 앙증맞은 소리가 침실에 울렸다.

율리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파이몬의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누가 이렇게 귀여울까, 응?"

"헤헤."

그때, 율리아의 허리에 단단한 팔뚝이 감겨 들어왔다. 옆구리의 굴곡을 타고 내려온 손바닥이 납작한
배를 문지르다 아래쪽으로 느릿하게 내려갔다. 그것이 다리 사이에 도달하기 전, 율리아는 퍼뜩 바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원망 섞인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정작 바엘은 무엇이 문제냐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겠다면 내 방식대로 받아 낼 수밖에."

"하지만 지금은, 읏……."

"악마는 셈에 무척 탁월하지. 계약을 깨고 싶다면 대가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기어코 허벅지 안쪽을 파고든 손바닥이 하얗고 말랑한 허벅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신음을 간신히 삼킨
그녀는 파이몬이 이상하게 여길까 안절부절 못하며 말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소년의 눈초리가 일순 뾰족해진 것 같았지만, 그는 이내 사르르 녹아들 것처럼 웃으며 율리아의 목을


끌어안았다.

"파이몬이 지내던 서쪽 이야기해 줄까? 궁금하지 않아?"

"으, 응! 궁금하네."

주의를 돌릴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파이몬이 혼자 지냈다던 서쪽은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신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파이몬이 태어난 서쪽은 불의 땅이야. 불의 기운이 강해서 이곳저곳에 불이 잘 나. 전부 태워 버려서


동물도 없고 식물도 없어. 태초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거야. 정말 멋지지?"

"파이몬이 다 태워 버린 거야? 그 태초의 모습이란 걸 간직하고 싶어서?"

"아니, 파이몬 말고 죽음의 산이 태웠어."

율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서쪽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혹은 어떤 볼거리가 있는지 자랑하려는 줄


알았는데 정작 파이몬이 꺼낸 이야기는 그런 것들과 거리가 멀었다. 말만 들으면 불지옥이나 다름없었지만
정작 그의 표정은 무척 자랑스러워 보였다.

그 중에서도 파이몬이 가장 자랑하고 싶은 건 죽음의 산인 듯했다.

율리아는 문득 옛 기억을 되짚었다. 야광화가 핀 죽음의 땅, 최근 아가레스가 시찰을 다녀왔다던 죽음의


동굴. 모두 '죽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왕님이 눈을 뜬 곳도 죽음의 호수라고 들었는데, 혹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걸까?'

율리아는 죽음의 산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그러자 파이몬은 그녀가 서쪽 땅에 관심을 가진다고 여겼는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죽음이란 이름은 마계에서 특이 현상을 일으키는 아주 특별한 장소에만 붙어! 서쪽에 딱 두 곳이 있는데
하나가 죽음의 산이고, 나머지 하나는 죽음의 나무야."

"특이 현상? 그건 어떤 현상이야?"

"마족을 잡아먹어."

"잡아…… 먹는다고?"

"응, 근처에 다가온 마력은 전부 잡아먹어. 아주 아주 강해. 대단하지? 아, 물론 파이몬이 더 강해.


그래서 파이몬은 죽음의 산에 들어가도 아무렇지 않아! 그러니까 파이몬이 훨씬 대단해!"

관심을 빼앗길까 봐 두려웠는지 소년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율리아는 빠르게 대답해줄 수 없었다.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오른 탓이었다.

[▷SYSTEM

스토리 진행도 35%]

[▷SYSTEM

4th Episode. 마력의 행방]

그녀가 눈을 깜빡이자 화면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SYSTEM

본 에피소드 진입을 위해 플레이어는 거점 '죽음의 산'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율리아는 불현듯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파이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들어차 있었다.

"파이몬은 이제 필요 없어? 강하지 않으니까?"

"아냐, 절대 그렇지 않아."


"하지만……."

"설령 내가 그 산을 특별하게 여긴다고 해도, 이유는 그곳이 파이몬이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이야.
인간에게 고향은 정말 의미 있는 장소거든."

"브에스드라처럼?"

아이의 순진한 질문에 율리아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제야 율리아의 허리를 압박하던 손이 조금


느슨해졌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럼 파이몬이랑 같이 서쪽 땅으로 가자!"

"으, 응?"

"죽음의 산 근처에 온천이 있어! 인간들은 몸이 안 좋을 때마다 온천에 요양을 간다며? 율리아도 몸이
약하니까 파이몬이랑 같이 가. 분명 마음에 들 거야!"

바엘의 팔이 다시금 조여들기 시작했다. 혹시나 또 이상한 곳을 움켜쥘까 봐 그녀는 시트 속으로 몰래


손을 넣었다. 바엘의 움직임을 안간힘을 다해 저지하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파이몬이 생글생글 웃으며
바엘의 불편한 심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리고 또 신기한 것도 볼 수 있을걸? 서쪽에서 주군의 성으로 가는 길에 죽음의 나무가 있는데,


그곳에서 인간 소드마스터가 나무와 싸우는 걸 봤어!"

"누, 누구라고?"

"인간 주제에 서쪽 땅까지 들어와서 파이몬도 놀랐어. 하지만 어차피 죽을 테니까, 빨리 가면 죽은


소드마스터를 볼 수 있을 거야!"

"레기온이 왜……. 읏!"

율리아가 놀라 멈칫한 새, 바엘의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가슴을 위아래로 쓸기 시작했다.

마찰당한 선단에서 스멀스멀 퍼지는 열기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이상한 형태로 융기하는 흰 시트가 더더욱
문제였다. 누가 봐도 속에서 가슴을 주무르는 모양새였다.

등 뒤로 다급히 손을 뻗자 바엘의 탄탄한 복근이 닿았다. 하지만 그를 밀어낼수록 목덜미에 닿는 숨결은


점점 거칠어졌다. 뒤돌아 바엘을 보려 해도 해도 그의 힘이 허락하지 않았다. 율리아는 거의 울다시피
속삭였다.

"마왕님, 갑자기 왜……."

"갈 텐가?"

"허락, 해 주시면……."

서쪽 땅에 가야만 했다. 에피소드 진행을 위해선 이동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레기온이
위험에 처해 있었다.

자신의 마력 저항이 그곳에서도 통할지 모르겠지만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지난
에피소드 달성으로 받은 스킬 포인트도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왜인지 그녀를 얽매는 바엘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내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나."

"왜 안 돼요?"

그때, 침대를 딛고 선 파이몬이 율리아를 폴짝 뛰어넘어 왕의 앞에 섰다.

그녀는 바엘의 손가락을 열심히 저지하느라 파이몬이 움직이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등
뒤에서, 파이몬은 처음 악마성에 도달했을 때처럼 동공을 가늘게 좁혔다.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주군께도 썩 해가 되는 제안은 아닐 겁니다. 인간 소드마스터가 그곳에서 확실히 죽는다면 율리아를 나눌


대상도 줄어들 테니까요. 모든 원망의 화살은 죽음의 나무에 돌리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자고로 악마란 독점욕의 화신이지요. 아무리 강대한 힘을 지녔다 한들 본성을 피할 수 있을까요?"

바엘의 서늘한 시선이 파이몬에게 향했다. 정작 당사자는 모르는 새, 두 악마의 소리 없는 계약이


성사되고 있었다.

* * *

06. 사라진 마력의 행방

마계 서쪽의 하늘은 아침부터 무척 맑고 쾌청했다. 바엘의 둥지가 있는 중심부보다 조금 덥긴 했지만 애초


상상했던 것처럼 완전한 폐허는 아니었다. 다만 붉게 타오르는 거대한 산이 시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저게 바로 죽음의 산이구나.'

율리아가 황금으로 지어진 대저택 발코니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레라지에와 파이몬이 몹시
불만스러운 얼굴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왜 말이랑 다를까. 인간 소드마스터가 죽는 장관을 보여 주겠다더니 죽음의 나무만 흔적도 없이


소멸했잖아?"

"그래서 뭐야, 감히 이 몸에게 따지겠다는 거야?"

"너 같으면 빡이 치겠어, 안 치겠어? 덕분에 여기까지 와서 놀지도 못하고 일만 하게 생겼잖아! 왜


멀쩡하던 나무가 없어지고 지랄이야, 지랄이!"

레라지에의 머리 주변에 바르바토스의 사역마인 독수리 두 마리가 빙빙 맴돌았다. 현장 조사해서 빠르게


보고하라는 명백한 재촉이었다. 소파에 누워 펄떡펄떡 날뛰던 레라지에가 도로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그래, 내가 갑니다. 아, 간다고! 아니, 짜증이 아니라……."

힘 빠진 목소리가 복도 너머로 빠르게 멀어져갔다. 경쟁자 하나를 내보낸 파이몬의 시선이 다음으로
율리아의 뒤편에 서 있던 키마리스에게 향했다.

57 화

이번 여행은 나름 단출한 인원으로 이뤄졌다. 서쪽의 주인인 파이몬과 손님 율리아, 그녀의 호위


키마리스, 좋은 건 같이 즐기자며 끼어든 레라지에, 이렇게 넷이 전부였다.

처음부터 참석을 강력히 희망하던 아가레스는 결국 업무 과중으로 불참했다. 그녀는 몹시 비통해했다.


바엘도 당연히 불참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여행 당일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참가하리라곤 누구도 생각지 않았기에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린 파이몬이 율리아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율리아도 나무가 사라져서 속상해? 파이몬의 둥지에 온 게 후회돼?"

"으응, 아냐."

율리아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는 나무가 사라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쪽으로 오면서
죽음의 나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들었기에, 오히려 레기온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아주 잠깐, 그녀를 말없이 올려다보던 파이몬이 이내 입꼬리를 활짝 올렸다.

"창밖 경치가 마음에 들어? 이 저택, 파이몬이 특별히 고심해서 지었어. 멋지지? 구경하고 싶지 않아?"

이번엔 파이몬이 그녀의 손을 붙들고 붕붕 흔들었다. 그에게 익숙한 장소라서 그런지 마왕성에 있을
때보다 표정도 훨씬 밝아지고 어리광도 늘었다.

율리아는 소년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껏 혼자 지내 왔다는 저택은 눈 둘 곳 없을 정도로 넓고


화려했다. 파이몬의 손짓 한 번에 수많은 문과 창문이 열리거나 닫혔다. 한참을 신나서 설명하던 그는
갈림길이 나타나자 고개를 갸웃했다.

"온천은 실내에도 있고 바깥에도 있어! 율리아는 어디 먼저 가고 싶어?"

"글쎄, 나는 어디든……. 에취!"

"율리아, 추워?"

율리아는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전에 파이몬이 주변 창문을 일제히 닫았다. 그러곤 몇 발짝
뒤에서 따라오던 키마리스를 차갑게 노려보며 일갈했다.

"넌 멀뚱히 서서 뭐 해? 여기 놀러 왔어? 율리아가 춥다잖아!"

"파이몬, 남에게 함부로 소리치면 어떻다고 했지?"

"……율리아가 슬퍼한다고 했어."

공감 능력이 결여된 악마에게 선악 개념을 알려줘 봤자 무용지물이란 걸 깨달은 이후로, 율리아는


파이몬의 행동을 자신의 기분과 연결 지어 설명하게 됐다. 파이몬이 이런 행동을 하면 율리아는 슬프거나
속상하다는 식이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파이몬은 이러한 방법에 잘 적응해 주었다. 그녀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소년과 눈을
맞췄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율리아가 슬픈 건 싫어. 율리아를 슬프게 하는 건 파이몬이 전부 없애 버릴 거야."

"흐음?"

"파이몬이 키마리스에게…… 사과해야 해."


율리아가 미간을 좁히자 시선만 빙빙 돌리던 파이몬이 냉큼 정답을 뱉었다.

그동안 키마리스는 겉옷을 벗어 율리아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둘렀다. 키 차이가 워낙 큰 탓에 자루를


덮어쓴 꼴이 되어 버렸지만, 키마리스는 허리까지 세심하게 묶어 준 뒤 고개를 숙였다.

"주인의 불편은 모두 종인 저의 실책입니다. 죄송합니다, 율리아."

"그럼 파이몬은 이제 괜찮은 거야?"

"아니야, 제대로 사과드려."

"……미안해."

반색했던 파이몬은 율리아가 단호하게 나오자 의외로 깔끔하게 사과한 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한숨을 쉰 율리아는 파이몬을 번쩍 안아 들며 키마리스에게 눈짓했다.

'죄송해요, 키마리스 님.'

율리아는 소년이 보지 않는 새 입모양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을 본 키마리스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 * *

율리아는 초저녁부터 잠든 파이몬을 침대에 눕혀 준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에게 주어진 객실은
파이몬의 침실 바로 옆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노을로 붉게 물드는 서부 땅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녀는 오늘 하루를 마감하듯 겉옷을 벗어 내려놓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긴장이 풀리니 팔다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후우, 지쳤어."

햇살이 따스하니 노곤노곤 눈이 감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객실에 굳이 일찍 돌아온 이유가 있었다.

실은 탑에서 퀘스트를 달성한 이후부터 사건이 연달아 터진 탓에 시스템을 제대로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커맨드 시스템의 정확한 기능을 파악하지 못해 수박 겉핥기 같은 느낌으로만 사용한 건 물론이고,
에피소드 보상으로 받은 스킬 포인트조차 아직 사용하지 못했다.

"커맨드 시스템."

[율리아 브에스드라]

▶STATUS (스탯)

▷PROGRESS (진행도)

▷SKILL ° (스킬)

▷ITEM (아이템)

▷SETTING ° (설정)

율리아가 나직이 읊조리자 손바닥 위에 빛나는 이펙트가 생겨났다. 떠오른 메뉴 창에서 스킬과 설정에
새로운 알림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우선 스킬 창으로 들어가 미사용 스킬 포인트 3 개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배울 수 있는 스킬은 두


가지였다.

[▷저항 강탈 Lv.1

플레이어가 지정한 대상에 일정 시간 항마력의 50%를 강탈한다. 잔여 체력의 70%를 소모한다. SP 60]

[▷물리 실드 Lv.1

물리 충격으로부터 플레이어의 신체를 1 회 보호한다. 잔여 체력의 70%를 소모한다. SP 60]

"체력 소모가 70 퍼센트라니, 이건 너무……."

생각보다 훨씬 큰 수치를 본 율리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원래는 각 스킬을 한 단계씩 올릴 생각이었는데, 그럼 스킬 사용 이후에 바로 이동 불가 상태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보통 위급 상황에서 스킬을 사용한다는 걸 생각하면 제법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스킬 레벨을 올릴 때마다 체력 소모가 10 퍼센트씩 줄어들어. 60 퍼센트 소모라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스킬 레벨 2 를 만들기 위해서는 총 3 개의 포인트가 필요했다. 레벨 1 에 1 개, 레벨 2 에 2 개의


포인트가 필요한 탓이었다. 즉 한 개의 스킬만 배울 수 있었다.

율리아는 이번 에피소드의 진행 장소가 '죽음의 산'이라는 걸 떠올렸다. 이곳은 마력과 관계가 깊은


장소였다. 게다가 이 시점에 저항 강탈이 열렸다는 건 명백히 한 가지를 의미했다. 이번 에피소드의 필수
스킬이라는 것.

하지만 율리아는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제껏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어 주변에 폐만 끼쳤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만약 물리 실드를 쓸 수 있었다면……. 실드만 올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둘 다 하나씩 배우는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율리아는 결국 저항 강탈과 물리 실드를 모두 하나씩 올리고 남는 포인트는 다시 놓아주었다. 황금색


이파리 한 장이 허공에 떠올라 스킬 트리 옆에 자리 잡았다.

"세팅."

율리아는 사실 SETTING 메뉴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제껏 수없이 들어가 봤지만 기존 게임에서
흔히 보던 환경 설정이나 제작사 소개 정도만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마저도 열람할 수 없도록 막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지금까지와 다른 화면이 열렸다.

[▷SYSTEM

관리자 모드로 전환됩니다. 관리자 권한에 따라 일부 기능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ERROR

ERROR?? ERROR?? ERROR??]

"읏!"

에러 창이 깜빡이며 눈앞이 붉게 점멸했다. 빛에 적응한 그녀는 간신히 눈을 떠 화면을 확인했다.


대부분이 회색으로 비활성화되어 있었지만 일부 열람이 가능한 메뉴를 확인할 수 있었다.

[HIDDEN STATUS]

▶CHARM (매력)

▷FAME (명성)

▷DEVILISM (마성)

▷STRESS (스트레스)

히든 스탯의 옆엔 마침 설명을 뜻하는 물음표가 달려 있었다. 율리아는 그것을 선택했다.

[▷SYSTEM

해당 STATUS 는 플레이어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며, 플레이 과정에 따라 임의로 증감됩니다. 엔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입니다.]

알아봤자 플레이어가 따로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율리아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수치를 하나하나 선택했다. 네 개의 창이 연달아 나타났다.

[▷CHARM (매력) : 420]

[▷FAME (명성) : 110]

[▷DEVILISM (마성) : 80]

[▷STRESS (스트레스) : 780]

그녀는 역시나 고개를 갸웃했다. 공략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초기 수치를 아는 것도 아니기에 현 상황에선


딱히 평가할 수단이 없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스트레스 수치가 다소 높다는 것과, 마성이 스탯 상에
존재한다는 것 정도였다.

'마성은 뭐지? 내가 마력에 중독됐다는 뜻인가. 음식을 조심해서 먹긴 했는데……'

그래도 실수로 조금 먹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수치가 낮은 것이 다행이었다.


율리아는 창을 전부 종료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HIDDEN STORY]

▷EPISODE (에피소드)

▷QUEST (퀘스트)

▷CHARACTER (인물)

▷ERROR (???)

이쪽은 유감스럽게도 전부 비활성화 되어 있었다. 다만 겉으로 보기엔 일종의 앨범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율리아는 다시 화면을 나왔다. 시스템에서 생각보다 긴 시간을 머물렀는지 노을 지던 하늘은 어느새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내일도 파이몬에 손에 이끌려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텐데, 아이의 체력에 맞추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일찍 자둬야 했다.
그녀는 네글리제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줄곧 바엘과 나란히 누워 잠들다가 오랜만에 혼자
자려니 옆이 허전한 기분이었다.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가 봐.'

줄곧 혼자 지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고작 몇 달을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고 벌써부터 쓸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율리아는 쓰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여행지에서의 하루가 저물어갔다.

* * *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사막 한가운데, 허리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던 사내가 바위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가쁘게 들이쉬는 숨 사이로 진한 피비린내가 풍긴다. 마물을 꾀는 유혹적인 냄새였다.

"크윽, 진짜 더럽게 아프네."

레기온은 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피가 엉겨 붙은 셔츠를 벗었다. 죽음의 나무를 쓰러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신 몸 곳곳을 내어 줘야 했다. 그중에서도 옆구리는 가장 상태가 심했다.

검은 마력이 상처 부위를 깊게 파먹어갔다. 씻어 내서 상태를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마계 서부는


원래도 사막 지대가 많아 물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마력이 육체를 더 좀먹지 않도록 마나로 억제하는 것에서 그쳤다. 그리고 그 위에 찢어


낸 셔츠를 붕대처럼 감았다. 상처에서 흐른 피가 그가 앉은 바위를 축축하게 적셨다. 레기온이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벌써 죽고도 남았을 양이었다.

"그래, 내가 너무 방심했어. 이렇게까지 애먹일 거라곤 생각을 못 했지."

58 화

레기온이 처음 서쪽으로 이동한 건 단순히 조사를 위해서였다.

마계 각지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흡수되어 사라지고 있다. 죽음의 땅, 죽음의 나무, 죽음의 동굴
등 탄생의 근원을 알 수 없는 특이점이 주변을 떠도는 마력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마족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 왔으니까.

하지만 이방인인 레기온은 달랐다. 특이점에게 먹힌 마력은 단지 소멸되는 것뿐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사라진 힘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는 의문을 품었다.

마나가 지상의 생태를 순환시키는 힘이라면 마력은 지하의 법칙을 유지하는 힘이었다. 그것은 창세 이래로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채 존재해 왔다. 어긋남은 곧 균열과 붕괴로 이어진다는 걸, 대자연의
축복을 받은 레기온은 알고 있었다.

"사라진 마력의 행방……."

나직이 중얼거리던 그는 피부를 찌르는 살기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레기온은 죽음의 나무와 싸우던 도중, 이것을 완전히 소멸시키면 사라진 마력의 행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에 이르렀다. 생각은 갑작스러웠지만 결정은 빨랐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나무를 쓰러뜨리고도 목표했던 단서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 힘을 크게


소모하고 말았다.
"이런 잡스러운 마물에게 몰릴 정도로 말이지."

"크르르릉."

아까부터 느껴지는 살기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수의 안광이었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거대한 짐승들이
그가 걸터앉은 바위를 어느새 완전히 포위했다,

칠흑 같은 어둠 사이로 샛노란 눈알들이 기분 나쁘게 번들거렸다. 레기온은 소울 소드를 소환하며 몸 안에


남은 마나의 양을 어림잡았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더욱 안 좋아졌다.

"젠장, 되는 일이 없네."

레기온은 머리를 벅벅 흩뜨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의 동공은 기묘한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몸을 감싸던 기운이 갑자기 폭발하듯 증폭됐다.

마물들은 돌변한 분위기와, 무엇보다 고작 인간 하나가 내뿜는 압도적인 힘에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레기온의 기분은 되레 빙점을 찍고 내려갔다.

"그딴 눈으로 보지 마."

그가 숨을 들이쉬자 검게 물든 소드가 마찬가지로 흉흉하게 번뜩였다. 땅을 박찬 인영이 눈 깜짝할 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인간이야. 누가 뭐라 해도……!"

대검의 궤적이 짙은 어둠을 갈랐다.

* * *

이른 아침, 율리아는 고막을 파고드는 어수선한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그녀는 한동안 주변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젯밤 분명 객실에서 잠들었는데, 지금 그녀의 시야에
보이는 천장은 아주 높고 푸르며 심지어 광활했다.

'무슨 천장이 이렇게…….'

침대 위를 더듬거리던 그녀의 눈이 불현듯 크게 뜨였다. 손에 잡히는 건 하얗고 부드러운 시트가 아닌,


말라 부스러져가는 붉은 흙과 자갈이었다.

[▷ERROR

ERROR?? ERROR?? ERROR??]

[▷?? ??? 목걸이

마왕 바엘이 ??? ??? ??? ???? ?? 목걸이. 바엘을 제외한 모든 ??? 접근을 ????. 사용 기회 ?]

"읏!"

갓 잠에서 깬 그녀의 눈에 붉은 에러 창은 너무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눈을 감은 새 다른 시스템 창이


지나갈까 차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시큰거리며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주무르며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율리아는 탁 트인 야외에 홀로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정확히는 산 중턱으로 추정되는 곳에 아주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주변은 온통 붉은 흙과 바위뿐이었고, 그나마 있는 식물도 색 바랜 고목과 마른 덤불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녀가 아는 범위에서 이런 모습을 한 산은 딱 하나뿐이었다.

'죽음의 산.'

그녀의 가슴이 두려움으로 달음박질쳤다. 전에 듣기로 죽음의 산은 주변 모든 마력을 잡아먹지만 그중에도


예외가 있다고 했다. 바로 산 분화구에서 태어난 마수들의 마력이었다.

혹시 자신의 주변에도 그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조차 신경이 곤두섰다.
자신에겐 그들과 맞닥뜨렸을 경우 무사히 살아남을 능력이 없었다.

'다들 내가 사라진 걸 눈치채려면 얼마나 걸릴까. 아니, 설령 알게 된다 해도 나를 찾지 않을지도 몰라.


분명 내가 도망쳤다고, 배신자라고 생각할 거야. 이 산에서 혼자 능력껏 살아남아야 할지도…….'

율리아는 일전 바엘에게서 받았던 목걸이를 떠올렸다. 바엘이 붉은 마력을 불어넣어 그를 제외한 모든


마족의 접근을 막아 주는 물건이었고 지금도 그녀의 목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쉽사리 사용할 수 없는 게, 바엘에게 그것을 받은 이후부터 자꾸 에러 창이 뜨고 있었다. 마신의


탑에선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아 퀘스트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러한 오류가 이득인지
아니면 독으로 작용할지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그나마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해서 다행이다."

커맨드를 불렀을 때 이펙트가 정상적으로 나왔고 그 외의 반응 속도도 이전과 같았다. 대충 훑어봤을 때


일단 사용상 문제는 없었다.

그녀는 네글리제의 흙을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왜 이런 곳에 떨어진 건지 알 도리는


없었지만 확실한 건 절대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침 근처에 흐릿하지만 물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율리아는 일단 그곳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쏴아아, 작은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율리아는 울창한 나무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좋아, 아무도 없어."

사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흥건하게 고인 피 웅덩이를 몇 번이나 보았다. 너무 놀란 탓에 몇 번이나


주저앉을 뻔했고, 차라리 처음 눈을 떴던 장소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갈등했다.

하지만 지금은 움직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폐물이 전혀 없었던 아까에 비해 폭포 근처는 숨을
곳이 많을뿐더러 한쪽이 절벽처럼 가파르게 트여있었다.

조금만 조심하면 가장자리에 서서 산 아래쪽을 살펴볼 수 있는 모양새였는데, 만약 파이몬의 저택을


발견한다면 탈출에도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녀가 눈빛을 반짝이며 물가로 나가려는 찰나였다. 등 뒤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울렸다. 푸른 눈동자가
율리아의 얼굴을 담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꺄악!"

"유, 율리아?!"
콰앙-! 푸른 힘에 맞은 바위가 무너져 내리는 굉음과, 작은 무언가가 물속으로 퐁당 빠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율리아!!"

"어푸, 커헉, 헉……."

물속에서 허우적대던 율리아는 문득 자신이 안정적으로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불어 숨 쉬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사실 역시. 그녀가 빠진 수심은 고작 무릎 높이밖에 오지 않았다.

몸에 힘을 뺀 그녀가 멍하니 앉아 눈을 깜빡이는 동안, 레기온은 다급히 달려와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그러곤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횡설수설을 늘어놓았다.

"괜찮아? 미안해, 미안해 율리아. 나는 환각에 빠진 줄 알고, 마물 주제에 정말 지독한 짓을 하는 줄


알고, 마나를 느끼고서야 진짜 너인 줄 알았는데, 네게 어떻게 감히, 내가, 내가 너에게……."

"진정해, 레기온. 나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직전에 공격을 틀었는데, 마나를 회수하기엔 이미 늦어서, 윽, 일단 봐!"

율리아는 레기온의 힘에 속절없이 흔들리다 불현듯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주저앉은 수면에 붉은 피가


번져가고 있었다. 물살의 흐름에도 쓸려가지 않을 정도로, 옆구리에서 나온 피의 양은 상당했다.

"이게 뭐야? 레기온이야말로 어디 봐."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냥 조금 스쳐서, 윽!"

그의 행동은 말과 달랐다. 율리아가 레기온의 어깨를 붙든 순간, 그의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화들짝 놀라 손을 떼니 손바닥이 붉게 젖어 있었다. 다친 곳은 옆구리뿐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목 끝까지 치미는 책망을 말없이 삼켰다. 푹 떨군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풀이 죽은 듯 보였다.

"죽음의 나무를 쓰러뜨린 사람도 레기온이지? 네가 소드마스터이고 엄청 강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무모한 짓은 조금 가려 가면서 했으면 좋겠어."

"……응."

"일단은 물 밖으로 나가자.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

그녀는 레기온의 손목을 붙들고 앞장서 걸었다. 레기온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진 채 그녀의 등만


졸졸 따라갔다.

"혹시 마수가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저 나무 뒤에 숨자."

"근처에 마물의 기운은 안 느껴져. 그리고 만약 나타나도 걱정할 것 없어. 내가……."

"뭐라고?"

"조, 좋은 생각 같다고."

율리아가 뚱하니 볼을 부풀리자 레기온이 다급하게 수긍했다.

그늘 뒤에 숨은 그녀는 저항하는 레기온을 붙들고 억지로 상처를 확인했다. 가장 상태가 심한 건


옆구리였지만 다른 부위에도 크고 작은 상처가 여럿 있었다. 율리아는 또다시 잔소리가 나오려는 걸
힘겹게 삼켰다.

하지만 레기온도 나름대로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가 신중히 입을 열었다.

"율리아, 네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곳에 있는지 알아? 여긴 도대체 어떻게 온 거야. 악마성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서 혼자 오긴 불가능했을 텐데, 누군가에게 억지로 끌려온 거야?"

"그게……."

그녀는 딜레마에 빠졌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가지고 있던


아이템에 오류가 생겼고, 그래서 자고 일어나보니 죽음의 산이었다고 하면 어느 누가 수긍할까.

율리아는 결국 듣기에 그럴듯하게 상황을 얼버무렸다. 레기온이 서쪽에 있다는 말을 들고 찾으러 나왔다가
길을 잃었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키마리스나 레라지에와 이야기해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말을 비틀었다.

다행히 그녀의 혼란스러운 기색을 읽었는지 레기온도 더는 묻지 않았다. 율리아는 속으로 작게 안도하며
다시금 레기온의 상처를 살폈다. 이번엔 그도 순순히 몸을 맡겼다.

"짐은 어디 있어? 치료할 만한 약이나 붕대는 더 없어?"

"죽음의 나무와 싸우던 중에 잃어버렸어."

"지혈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급히 주변을 둘러보던 율리아의 눈에 흰 네글리제 자락이 들어왔다. 아까 물에 빠진 탓에 흠뻑 젖긴


했지만 천 자체는 깨끗했다. 게다가 길이도 복숭아뼈에 닿을 정도로 길어서 크게 찢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59 화

그녀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긴 뒤 치맛자락을 꾹꾹 쥐어짜 물을 빼냈다. 그러곤 끝자락을 찢어보려


했지만 밑단에 두꺼운 레이스가 박음질되어 있는 탓에 쉽지 않았다.

율리아는 결국 치맛자락을 레기온에게 한 움큼 내밀었다.

"레기온, 내 옷 찢어 줘."

"무, 무슨 소리야."

"허벅지까지 찢어도 괜찮아. 원하면 더…… 해도 되고."

상처가 워낙 크니 천이 부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어디까지 찢어도 될지 길이를


가늠하는데, 레기온의 얼굴이 이유를 알 수 없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율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응? 빨리."

피가 부족한지 눈가를 가리는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율리아는 무릎걸음으로 바짝 다가가 레기온의


손을 잡아당겼다. 마주친 그의 눈동자는 기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율리아, 지금 날 시험하는 거야?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난 절대 널 함부로……."

"지혈 안 할 거야? 어, 어떡해. 피 더 나와."

"……."

"빨리!"

멈칫하던 레기온은 그녀에게 붙들리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제 머리칼을 사정없이 헝클였다. 반짝이던
금발이 새 둥지처럼 부풀었음에도 그는 괴로운 신음만 연거푸 내쉬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운 뒤 무릎 근처까지 네글리제를 찢었다. 율리아가 할 때는 꿈쩍도 안 하던


레이스가 레기온이 살짝 힘을 준 것만으로 종이처럼 후드득 뜯겨 나갔다.

"마물이 나타나면 싸워야 하니까 응급처치는 해 둘게. 고마워."

"응."

"하지만 앞으론 단어를 좀 신중하게, 으윽,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음, 무슨 말인지는 나중에 들을 테니까 뒤돌아 볼래? 혼자 감기 힘들잖아?"

옆구리는 이미 탄탄하게 감겨 있었지만 어깨의 상처는 혼자 치료하기 어려워 보였다. 머뭇거리던 레기온은
그녀에게 천을 넘긴 뒤 말없이 등을 보였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천이 부드럽게 마찰하는 소리만 귓가를 울렸다. 상처가 무척 아픈 모양인지
레기온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율리아는 치료를 더욱 서둘렀다.

'다음부턴 아이템 창에 비상약도 조금 챙겨 두는 게 좋겠어. 난 이런 일이 생길 줄도 모르고…….'

레기온이 보지 않는 새, 그녀의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 * *

깊은 산 속이라 그런지 해가 평소보다 빨리 떨어지고 있었다. 비탈진 산길을 앞서 오르던 레기온의 걸음이
멈췄다. 묵묵히 뒤따르던 율리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미안, 내가 세심하지 못했어. 조금 더 빨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응?"

빠르게 되돌아온 그가 손등으로 율리아의 이마를 짚었다. 피부에 닿는 서늘한 감각이 좋아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데 머리 위에서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열이 있잖아."

"아."

"물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다못해 물기를 말리기만 했어도……."

"아까는 어쩔 수 없었잖아. 불이 마수를 유인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애초 두 사람은 곧장 산을 내려갈 생각이었다. 율리아는 죽음의 산에 원해서 떨어진 게 아니었고,


레기온은 계속 전진하기에 부상의 정도가 심했으므로 당연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폭포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숫자의 대형 마물이
산허리에 포진하고 있던 탓이었다.

레기온이 길을 뚫는다고 해도 그동안 후방에 남은 율리아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은 조금


멀리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길을 찾기로 했다.

그들이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조금 쉬자."

"괜찮아. 나 더 걸을 수 있어."

"내가 힘들어서 그래. 이런 산 속에서 해가 진 뒤에 움직이는 건, 정말 절박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안


하는 게 좋아."

레기온은 율리아를 바위에 앉혀 둔 뒤 눈 깜짝할 새 야영 준비를 끝냈다. 익숙한 솜씨로 불까지


피우고서야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율리아를 돌아보았다.

"자, 이리 가까이와."

"응."

"얼굴색이 안 좋아. 잠깐이라도 눈 좀 붙여."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야."

레기온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다만 율리아의 거짓말을 간파했는지 자신의 어깨에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꾹 눌러 기대게 했다. 그러면서 얼음장처럼 식은 팔뚝을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렀다.

굳은살 박인 손바닥은 돌처럼 거친데 살갗에 닿는 감촉은 마치 쉽게 깨어지는 인형을 다루는 듯해서,
그녀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흐릿해졌다.

'전부 내가 약한 탓인데. 아무리 친구라도 이런 나를 레기온은 어째서 참아 주는 걸까.'

낮에 마물 무리와 마주쳤을 때만 해도, 자신만 없었더라면 레기온은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전부 해치울 수 없다고 해도 길을 뚫고 그대로 돌진하는 건 가능했을 터였다. 자신 때문에
그는 이 산에 갇혀 버렸다.

율리아의 숨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레기온은 타닥거리는 모닥불을 응시하다가 이내 시선을 들었다.

"율리아,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

"이런 상황에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 지금 우리가 네 살씩만 어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나는 열여섯이고 너는 열넷인 거지."

그의 기억은 전쟁터에 끌려가기 전, 두 사람이 아직 평범한 소년 소녀에 불과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그 겨울에 우리는 궁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거야. 황도 아벨딧심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간신히
브에스드라 국경 항구로 이동했어. 배를 타고 외국으로 도망쳐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산 속에
숨어서 잠깐 상황을 보기로 해."

"……."

"앗, 저 밑에 군사가 오고 있어. 깃발을 보니까 황실 근위대인 것 같아. 우리를 수색하러 왔나보지?
그래 봤자 우리를 감히 찾아낼 수는 없을 거야."

그는 손바닥을 펼쳐 눈 위에 대고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마치 현실 같은 긴박한 움직임에,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가 말하는 상황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점점 지치고 초조해진 근위대 놈들은 자신들이 헛다리짚은 건 아닌가 고민하게 돼.
고작 아이 둘인데 도망쳐 봤자 어디로 갈 수 있겠냐고 얕본 거지"

"그래서?"

"놈들은 병력을 이곳저곳에 분산하기 시작했고 그만큼 포위망은 느슨해지고 말았어. 물론 우리에겐
행운이었지.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아주 멋지게 탈출해서 밀항에 성공해."

그는 율리아의 눈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시원스럽게 올렸다.

실제로 일어난 적 없는 만약의 세계. 하지만 레기온이 줄곧 꿈꿔 왔던 시간. 율리아는 그가 강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줄곧 후회만 반복하는 동안, 레기온은 만약의 세계를 실제로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겪는 일은 행복해지기 위한 일종의 시련이라는 거야. 누가 알아? 산에서 무사히


탈출했더니 아주 멋진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지?"

"……응, 레기온 말이 맞아. 약한 생각 하지 않을게."

"착하다."

"내가 애야?"

율리아가 흐릿하게 웃은 찰나였다. 레기온의 눈초리가 갑자기 매서워졌다. 그는 모닥불을 걷어차 불을 꺼


버린 뒤 율리아의 손을 잡고 큰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레기온?"

"쉿."

얼떨결에 끌려간 율리아가 놀라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 전에 레기온이 그녀의 입술을 꾹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율리아는 레기온이 숨어든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크르르릉."

스산하게 이는 바람소리 너머로 마수의 성난 숨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다수, 그들은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마수 무리를 노려보는 레기온의 안광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율리아의 안전을 위해 줄곧 전투를 피해


왔지만 이런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율리아의 머리를 꾹 눌러 바위 밑 틈에 숨도록 했다. 구멍은 작았지만 율리아의 체구는 그보다 더


가녀렸기에 무리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레기온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눈 감고 딱 100 까지만 세고 있어."

"설마 싸울 생각이야? 안 돼. 마수가 너무 많고, 무엇보다 상처가……."

"네가 걱정할까 봐 말 안 했지만 난 그동안 이보다 더한 일도 수없이 겪었어. 고작 이 정도로 쓰러지지


않아."

"레기온."

"약속할게. 널 두곤 절대 안 죽어."

그는 율리아가 붙잡을 새도 없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면을 박차고 달려가는 발소리와 흥분에 찬 마수의
울부짖음, 날카로운 것끼리 맞부딪히고 부서지는 소리가 밤공기를 소름끼치게 울렸다.

율리아는 숨을 죽인 채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섬뜩한 비명이 들릴 때마다 혹시나 레기온이 다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심장이 미친 듯 달음박질쳤다.

"크윽, 감히 어딜……!"

"키에에에엑!"

"절대 못 보내!"

마수의 사나운 울부짖음이 율리아의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전투의 거리감이 아까보다 훨씬 가까워졌다.
바위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바로 등 뒤에서 싸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캬아아아악!"

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율리아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두 손은 볼품없이 떨리고
있다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투의 양상은 시간이 갈수록 사그라지기커녕 점점 더 격렬해졌다. 레기온이 말한 100 초는 이미 훨씬


전에 지나 버렸다. 율리아는 뒤편의 상황이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차마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자신이
그랬다간 오히려 레기온의 발목을 잡게 될 걸 아는 까닭이었다.

쿵-!

그런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홉뜨였다. 검은 마기를 내뿜는 거대한 마수가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샛노랗게 번들거리는 눈알이 바위틈에 숨은 하얗고 연약한 생물을 곧장 내려다보았다.

"율리아!!"

"……!"

레기온이 후방의 상황을 뒤늦게 알아채고 미친 듯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마수의 거대한
손톱은 율리아의 머리 바로 위에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버텨 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절대 이대로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커맨드. 아이템!"

그녀의 손 위에 환한 이펙트가 떠오르며 아이템 창이 나타났다. 율리아는 눈앞에 나타난 검은 물체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마력을 두른 단검

대공 아가레스의 강력한 마력이 담겨 있는 단검. 사용 기회 1]

60 화

"아흑!"

"키에에에엑!"

채 준비할 틈도 없이 마물의 손톱과 율리아의 단검이 맞부딪혔다.

파지직, 전격이 일며 강력한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다. 뒤로 내동댕이쳐진 율리아는 거대한 나무에
부딪히며 힘없이 쓰러졌다.

"흐윽, 헉!"

율리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절박하게 바닥을 긁었다. 폐가 찌그러진 것처럼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어깨에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엄습했다.

"율리아, 율리아! 괜찮아? 정신 차려!"

"숨을, 흑, 나아……."

율리아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방금까지 마수가 있던 자리엔 마치 폭탄이 터진 듯 붉은


살덩어리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것을 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단검이 없었더라면, 그게 아니더라도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렇게 끔찍한 몰골로 죽어 있는 건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나를 봐. 괜찮아."

레기온은 그녀에게 과호흡이 온 것을 알아챘다. 그는 애써 숨소리를 낮추고 나직이 속삭였다.

"괜찮아. 다 괜찮아."

"끅, 허억!"

"너는 무사해. 나도 여기 있어. 마물은 전부 죽었어. 아무 문제도 없어."

그는 율리아가 원활히 호흡할 수 있도록 양손을 모아 그녀의 코와 입을 덮었다. 괜찮다고 모두 무사하다고


몇 번이나 되뇌는 동안, 절박하게 헐떡이던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잘하고 있어."

"흐윽……."

"옳지."

율리아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그것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레기온은 그녀의 젖은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그렇게 얼마나 더 지났을까, 율리아의 눈동자가 마침내 원래의 투명한 빛을 찾았다. 레기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 * *

레기온은 율리아가 진정되지마자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에서 떠났다. 아가레스의 마력이 무척이나 강력했던
탓에 주변 마물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 부서진 탓이었다. 피 냄새를 맡은 다른 마물들이 추가로 몰려들
가능성이 있었다.

피를 씻어 낼 수 있는 물가를 찾아 이동하는 동안, 레기온은 그녀에게 단검을 어디서 구했는지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지쳐 비틀거리는 그녀를 묻지도 않고 안아 들었다. 괜찮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그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율리아는 조바심이 들었다. 그가 단검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텐데, 그의 배려가


고마운 한편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불안했다.

'혹시 내게 화가 난 걸까.'

이동하는 내내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표정도 그답지 않게 무미건조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화가 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율리아는 생각을 바꿨다.

'어쩌면 지친 걸지도 몰라. 몇십 마리 마물을 혼자서 상대했으니까. 게다가 나까지 들고 있고.'

마침 근처에서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느끼기에 이곳에서 썩 먼 거리는 아닌 것 같았다.


율리아는 레기온을 톡톡 건드려 불렀다.

"물가에 거의 다 온 것 같지?"

"조금만 더 가면 돼."

"나 이제 내려 줘. 혼자 걸을 수 있어."

"……그냥 있어."

아무리 아둔한 사람이라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율리아는 꿋꿋이 앞만 보고 걷는


레기온을 다시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저, 혹시 화났어? 내가 뭐 잘못한 거지?"

"……."

"미안해.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눈치 빠르질 못해서 누구 마음을 상하게 해도 바보같이 잘 몰라."

레기온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답을 기다리던 율리아의 눈꺼풀이 힘없이 내려갔다.

"그러니까 말해 줬으면 좋겠어. 듣고 잘 고칠게. 앞으론 안 그럴 거야. 내가 자꾸 짐만 되는 게 귀찮은


거면, 그래도 염치없지만 산에서 내려갈 때까지만 곁에 있게 해 줘."

"……."

"키마리스 님과 레라지에 님이 서쪽에 있어. 파이몬이라는 아이도 같이 있고. 그분들이 날 찾으러 올


거야."

율리아가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는데, 이번엔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넌 잘못한 거 없어. 그 악마 놈들도 필요 없고."

"하지만 지금 화났잖아, 그렇지? 그럼 이유가 뭐든 전부 내 잘못이야."


"그런 거 아냐."

"음, 나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나을까 봐. 미안."

자신이 입을 열수록 레기온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가는 것 같았다. 율리아의 목소리가 개미 기어들어 가듯


작아지는데, 줄곧 말없이 듣고만 있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차마 율리아를 보지 못한 그의 얼굴은 무겁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를 어디까지 형편없는 놈으로 만들래?"

레기온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플 텐데, 걱정된 율리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데 그가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맞아, 사실 나 지금 화났어."

"미안해……."

"네 탓이 아냐. 내 문제야. 널 지키지 못한 내 자신한테 화가 나. 너를 지켜 주겠다고 큰소리 뻥뻥


쳤는데, 마물이 너를 죽이려고 할 때까지 난 아무것도 몰랐어. 그것도 모자라서 너한테 도움만 받고!"

그의 입매가 쓰게 구겨졌다.

"그래서 죄 없는 네게 화풀이했어. 나야말로 옹졸하다고 손가락질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레기온."

"신경 쓰게 해서 미안. 전부 내 탓이야."

레기온은 차마 그녀를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조금


놀랐지만, 율리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하지 마. 네가 날 구해 줬어. 네가 아니었다면 산 중턱에서 마물 무리와 마주쳤을 때,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라도 죽었을지 몰라."

"……."

"이곳은 서쪽에서도 가장 마성이 강한 땅이잖아. 레기온은 벌써 몇 번이나 싸워서 마나를 채울 틈도


없었고."

"그래도 널 지키지 못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어."

"그럼 앞으로 날 지켜 줘."

바엘을 마신으로 만든 이후에도 자신이 살아 있을 수 있다면, 그래서 다시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율리아는 차마 하지 못한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때, 그녀의 귀에 아까보다 더 선명한 물소리가 들렸다. 율리아의 신경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쏠렸다.

"그래, 반드시……."

"응?"

"아니야, 아무것도."
레기온이 무언가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거센 물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당기곤 끝까지 걸어 냇가 바로 앞에서야 그녀를 내려 주었다.

율리아가 발끝으로 물을 튕기며 온도에 적응하는 동안, 레기온은 바지 하나만 걸친 채 그대로 냇물에
뛰어들었다. 투명한 물이 그의 허리 근처에서 찰랑거렸다.

그는 끝까지 잠수했다가 일어서며 젖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올렸다. 탄탄하게 팽창한 등 근육


사이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져 내렸다. 그가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쉴 때마다 완벽하게 갈라진 복근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물가에 선 율리아는 그런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달빛에 속속들이 비친 그의 몸에서 뿌연 김이 오르는


게 보이는데도,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레기온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춥지 않아?"

"고작 이 정도쯤이야."

"그래? 그럼 나도 그냥 들어가 볼까?"

크게 심호흡 한 율리아가 물 안으로 다리를 뻗는데, 급히 다가온 레기온이 그녀의 발을 붙들었다.

"거짓말이야. 사실은 많이 차가우니까 충분히 준비하고 들어와."

"아닌 것 같은데?"

율리아가 수긍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단호히 덧붙였다.

"그리고 열도 나잖아. 쓰러지면 어떡해."

"음……."

"이거 보이지?"

레기온은 물로 촉촉이 젖은 제 팔뚝을 내밀었다. 굴곡진 근육 위로 김이 오르는 걸 가리키며 율리아의


발을 도로 뭍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물가에 얌전히 앉자 레기온은 다시 깊은 곳까지 헤엄쳐 들어갔다. 율리아는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불현듯 놀랐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냇물을 들이키고 있었다.

"어라, 그 물."

"응?"

"마성이 있어서 인간은 함부로 먹으면 안 되잖아. 혹시 몰랐어?"

하지만 자신도 아는 사실을 전쟁터에서 오래 지낸 그가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접경지의 군대에게 가장


중요한 물자가 마성이 없는 깨끗한 군량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율리아의 물음에 어색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아주 찰나였고, 이내 평상시처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 난 괜찮아. 소드마스터니까 평범한 인간과는 조금 다르거든."

"그렇구나."

"이 정도면 피는 대충 씻어 낸 것 같네."

레기온은 목욕을 끝내려는 모양인지 뭍으로 나와 떨어지는 물기를 대충 털어 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무척 추워 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산 위쪽의 어떠한 한 지점으로
향해 있었다.

"마력의 흐름이 조금……."

"왜 그래?"

"아깐 그냥 우연이겠거니 했는데, 저 위에 마력이 무척 강하게 느껴지는 장소가 있어. 마정석의 축소판
같은 느낌인데 예감이 좋지 않아."

"엄청 강한 마족이 있는 걸까?"

"글쎄."

그의 목소리가 확신 없이 사그라든 찰나였다. 율리아의 시야에 갑자기 강한 빛이 새어들었다.

[▷SYSTEM

스토리 진행도 35%]

[▷SYSTEM

4th Episode. 마력의 행방]

[▷SYSTEM

- 미션: 산 분화구의 마수정을 파괴하시오. 제한 시간 24 시간.

- 보상: 히든 스탯 대폭 증가

- 실패 페널티: 거점 '죽음의 산' 영구 탈출 불가]

[▷SYSTEM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재시도 불가.]

율리아는 산 속에서 줄곧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레기온이 산을 오르며 해치웠다던 마수 무리가 산 중턱을 빽빽하게 가로막고 있었고, 새로 길을 찾으려


물러선 이후엔 숲 속의 같은 장소를 끊임없이 맴돌았으며, 조금 쉬려고 생각하자마자 마물의 습격을 받아
더 높은 곳으로 피신해야 했다.

산에 떨어진 건 갑작스러운 오류였을지 몰라도, 그 레기온조차 길을 못 찾고 헤매는 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던 터였다. 무언가가 자신들을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막는 느낌을 받았었다.

'실패 페널티가 영구 탈출 불가라니…….'


말이 좋아 거점 탈출 불가지, 그냥 사망 엔딩이나 다름없었다.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섬찟한 공포가 등골에
스몄지만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레기온, 우리 저 위로 올라가 보자."

"마력의 흐름을 따라서? 그럼 산에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될 텐데, 나가는 길을 찾기가 더 어려워질 거야."

"우리 그동안 줄곧 길을 헤맸잖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탈출의 해답이 저곳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건 열쇠로서의 직감이야?"

"아마도……."

이유를 묻는다면 어떻게 얼버무려야 좋을지 난감했는데 레기온이 때마침 적당한 핑계를 들어 주어
다행이었다.

네글리제의 흙을 털어 낸 그녀는 레기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를 일으켜 줄 생각이었는데, 정작


레기온은 힘도 들이지 않고 일어나 그녀의 손을 앞서서 잡아끌었다.

"그래, 가자. 네가 원한다면 어디든."

붉은 달빛이 그들이 걸어갈 산길을 스산하게 비췄다.

61 화

키마리스는 굳게 닫힌 율리아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일어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오늘은 오후가 다 되도록 밖에 나오지 않았다. 전날 일정이 그녀에게 다소 무리였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늦은 감이 있었다.

쓰러진 나무를 조사하고 막 돌아온 레라지에가 유난이라고 빈정거렸지만 키마리스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의 신경은 온통 문 너머 잠들어 있을 한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게 정상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녀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라지에의 말도 틀린 건 아닌가.'

악마의 생은 지나치게 길다. 그렇기에 그들은 나태해지고, 뭐든 흘러가는 대로 방관하는 경향이 있었다.
무언가에 폭발적인 열정을 지니는 건 파이몬처럼 갓 태어난 신생에게나 가능한 일일 뿐, 몇백 년이 지나면
그조차도 모두 허무한 일로 치부되곤 했다.

키마리스라고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다른 누구보다도 무감각한 마족이었다. 레벤나에게


심장을 빼앗기고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만큼.

하지만 최근 들어 그는 변했다. 타인에 대해 무감한 성격은 그대로였지만 율리아에 한해서는 작은 일에도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조금만 오래 보이지 않으면 걱정되고, 그녀의 곁에 다른 존재가 얼쩡거릴 때면 신경이 곤두선다.


율리아의 작은 표정 변화 하나만으로도 그는 행복과 절망 사이를 오갔다.

단순히 주군을 위하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이 마음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바엘의 손아귀에 갇힌 것만으로도 이미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울 것을 알기에.
'너무 오래 굶어도 좋지 않을 텐데.'

율리아가 어제도 입맛이 없다며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벌써 점심때가 훌쩍


지났다. 이대로라면 저녁마저 거르게 될 게 뻔했다.

이윽고 안에 들어갈 만한 적당한 이유를 찾은 그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율리아, 키마리스입니다."

"……."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키마리스는 답이 돌아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율리아는 몸이 약해 완전히 깨어날 때까지 오랜 시간을
소모하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안에선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키마리스는 조바심을 억누르며 문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율리아, 괜찮습니까?"

키마리스가 목소리를 높인 그때, 옆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머리에 큼지막한 둥지를 튼 파이몬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복도에서 시끄럽게 뭐야? 너 때문에 이 몸이 깨버렸잖아!"

"열쇠가 늦잠 잔대."

"율리아가 잔다고? 그럼 이 몸도 같이 잘래!"

근처에서 구경 중이던 레라지에가 한 마디 거들자마자 파이몬이 냅다 뛰쳐나왔다. 그러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율리아의 방문을 열고 침대로 달려갔다.

"율리아! 파이몬, 악몽 꿨어!"

"어이쿠, 역시 신생은 팔팔해서 좋아."

"레라지에, 너……."

"불만 있으면 열쇠한테 직접 말하지 그래? 저 재수 없는 꼬맹이를 감싸고 도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니까


말이야."

레라지에의 처진 눈꼬리가 매혹적으로 휘었다. 놀리려는 속셈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키마리스는 대꾸 없이


몸을 돌렸다. 파이몬이 침대로 폴짝 뛰어들려는 걸 발견한 탓이었다.

"어라?"

"……."

하지만 키마리스와 파이몬, 심지어는 문밖에서 킬킬 웃던 레라지에마저 굳었다. 파이몬이 걷은 시트 속은


구김 한 점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서쪽 땅은 마왕의 둥지와 달랐다. 마계 중심부는 마정석과 바엘이 내뿜는 강력한 마기로 인해 반경 일정


범위까지 마물이 진입할 수 없었다.

살인적인 파장에 버틸 만한 마족은 극히 한정되었고 그들은 모두 아가레스의 제지하에 있었기에, 율리아가


혼자 돌아다닌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 만한 일은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이몬의 영토엔 그런 안전 장치가 없었다. 그의 마기가 영향을 미치는 건 고작 저택 내부뿐,


입구를 나서 바깥으로 몇 발짝만 걸어 나가도 지능 없는 마물 무리가 수없이 돌아다녔다.

제 몸 하나 지킬 수 없는 그녀에게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키마리스의 머릿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없어. 율리아가 없어!"

빈 침대를 움켜쥔 파이몬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자신의 마력을 총동원해 저택 내부를 이 잡듯 뒤졌다.


침실 내부로 들어온 레라지에 역시 미묘한 표정으로 실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침입 흔적이 없네. 설마 도망친 건가?"

"헛소리하지 마."

"열쇠가 단순히 마력 저항만 갖고 있는 건 아니잖아? 입 다문다고 비밀이 얼마나 갈 줄 알았어?"

빈정대며 다가온 레라지에가 키마리스의 굳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주군의 둥지에서, 널 공격하려던 파이몬을 열쇠가 끼어들어 막았지? 마력 저항에 확장 마법을 섞었던가.
기초적인 수준이긴 했지만 분명 복합 마술이었지."

"지금 그 말을 꺼내는 이유가 뭐야."

"그런 무서운 눈으로 보지 마. 단지 의심스럽다는 것뿐이니까. 그 순해 빠진 얼굴 뒤로 우리가 모르는


괴물 같은 능력이 또 얼마나 숨겨져 있을지 모르잖아? 너도 열쇠가 지닌 힘의 한계를 정확히 모르는 거지?
그러니까 불안한 거잖아, 안 그래?"

"이간질하지 마. 다시 한 번 율리아를 모욕한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참고로 알고 있는 건 나와 형뿐이야.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한 것도 형이라고."

"그럼 네가 범인이겠군. 네 입방정에 넘어간 누군가가 율리아를 강제로 끌고 갔겠지."

바르바토스는 기본적으로 바엘과 아가레스, 보티스를 제외한 다른 마족들과 교류가 거의 전무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는 쓸데없이 입을 여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다. 반면 레라지에는 어떨까. 입 잘못
놀렸다가 사고 친 전적이 이미 수없이 많았다.

율리아의 힘은 양날의 검이었다. 마력 저항만 해도 충분히 희소하고 구미가 당기는 능력이었지만, 그래도
쓸 만한 곳이 한정되었기에 노리는 자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능력까지 있다는 게 알려진다면 그녀를 빼앗기 위해 누군가는 바엘의 분노마저도 불사할
가능성이 있었다. 키마리스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뭐야, 레라지에가 율리아를 해친 거야? 감히 이 몸의 둥지에서?!"

"아니, 그게 아니라……."

"율리아 돌려내! 당장 돌려내! 조금이라도 다치면 죽여 버릴 거야!!"

시트를 움켜쥔 채 울부짖던 파이몬이 용으로 변해 강력한 화염을 내뿜었다. 그가 공들여 지은 저택이
삽시간에 불구덩이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하고 불길한 힘이, 세 악마의 촉각을 스쳐 지났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들의 직감은 단서를 놓치지 않았다. 세 악마의 시선이 일순 한곳으로 향했다.

"설마 죽음의 산으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 몸은 알아. 마수정이 감응하고 있어. 율리아가 저곳에 있다고!"

파이몬은 서쪽에서 태어나 누구보다도 땅의 변화에 민감했다. 외침을 들은 레라지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마정석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유일무이하고도 강력한 열쇠지. 그런 열쇠가 마수정과


만나면, 그럼 마수정의 봉인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젠장."

생각의 끝에 다다른 키마리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건 파이몬도, 그리고 말을 꺼낸 레라지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목숨엔 하나의 대가.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마수정의 봉인을 푼 대가로 죽을 것이다.

"안 돼, 당신을 잃는다면 나는……!"

절망적인 신음을 짓씹은 키마리스가 즉시 날개를 펼치고 바닥을 박찼다. 짧게 시선을 맞춘 파이몬과
레라지에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급히 도약해 그를 뒤따랐다.

* * *

[▷SYSTEM

4th Episode. '마력의 행방' 진행 중]

숨을 들이쉴 때마다 뜨거운 증기가 폐부 가득 밀어닥쳤다. 앞서가던 레기온의 모습이 바람 부는 강물처럼


일렁이고, 발밑의 길은 초점 나간 렌즈처럼 흐릿하게만 보였다.

이대로라면 자칫 발을 헛디딜 것 같아서, 율리아는 벽을 짚은 채 느릿하게 숨을 골랐다. 그녀의 발에


차인 자갈이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절벽 아래까지 내려가려면 얼마나 더 걸리는 거지?'

온갖 고생을 다 해 가며 산 정상의 분화구에 도달했다. 그곳엔 예상대로 마력의 결정체이자 마물의 탄생


근원인 마수정이 있었다. 하지만 마수정에 도달하기 위해선 또 깎아지르듯 아득하고 가파른 절벽을 또
내려가야만 했다.

체력이 부족한 플레이어를 배려해서인지 길은 나 있었지만, 오직 한 사람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넓이였다. 레기온은 율리아를 업거나 안아서 지나가 보려 했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뒤 그녀를
안전한 곳에 두고 홀로 내려가려고 했다.

율리아는 그런 그를 설득하기 위해 상당히 긴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또한 레기온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최대한 버틸 만한 척을 하며 절벽을 내려왔다. 하지만 그도 이젠 한계인 모양이었다.

'어떡하지.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겠어.'

절벽은 발 하나만 겨우 디딜 수 있을 만큼 좁았다. 상황이 그런데 잠깐 앉아서 쉴 공간 따위 존재할 리가


없었다.
탈진한 그녀의 팔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앞서 내려가던 레기온마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 이러다 떨어지겠어. 제발 앞이라도 제대로 보게 해줘.'

기진맥진해 초점도 제대로 못 맞추는 상황에서 짙은 증기가 시야를 방해하고 때때로 화마에 비쳐 붉게
일렁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현재 위치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딱 중간 지점.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SYSTEM

잔여 HP 가 50% 미만입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재시도 불가.]

"읏!"

눈앞에서 갑자기 번쩍이는 빛에 율리아는 중심을 잃을 뻔했다. 아까보다 더욱 많은 자갈이 밑으로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숨을 들이키기가 무섭게 밑에서 레기온의 외침이 들렸다.

"율리아, 괜찮아?!"

"괘, 괜찮아. 잠깐 다리 힘이 풀렸어."

"정말 괜찮아? 아니다, 내가 올라갈게. 잠시만 그대로 있어!"

"난 정말 괜찮으니까 오지 마. 조금만 서서 숨 고르면 괜찮아질 거야."

앞서가면서도 틈날 때마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던 레기온이 결국 올라오려는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길이 너무 좁아 제자리에서 뒤돌아설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자신도 그러한데 자신보다 훨씬 체구가 큰
레기온은 더더욱 힘들 것이다.

율리아가 몇 번이고 만류하자 레기온은 못 버티겠으면 꼭 말해 달라며 재차 신신당부했다. 그녀는 그를


안심시킨 뒤 다시 시스템 창을 보았다.

62 화

평소엔 체력 50% 밑으로 떨어지는 일이 잦아도 가 뜨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이번 에피소드는 스킬 사용을


위한 체력 안배가 상당히 중요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지금 체력 수치가 낮긴 해. 스킬을 여러 번 쓰기엔 힘들 텐데, 밑에 내려가면 레기온에게


부탁해서 잠깐이라도 스킨십을 하는 편이 좋을까.'

레기온이 마계에서 지내기로 결정했을 때, 그가 이마에 스킨십을 했더니 체력이 소량이지만 강제 증가했다.
바엘과 접촉하면 육체의 상처가 회복되는 것과 비슷하게, 레기온과 접촉하면 HP 수치가 회복되는
모양이었다.

다만 바엘과 자신은 살갗이 닿을 때마다 각인의 부작용으로 성적 충동이 드는 것에 반해, 레기온과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래서도 안 되고 말이다.

'땀을 닦아 주면서 실수인 척 뺨에 입술이 닿는다든지 하면 레기온도 수상한 점을 못 느끼지 않을까?


그렇게 몇 번만 반복하면 될 거야.'

레기온이 알면 무척이나 기분 나빠할 테지만, 그래도 일단은 무사히 살아서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도
만약 사실을 알았다면 이런 자신을 용서해 줬을 것이다.
"그러려면 일단은 밑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어. 조금만 더 힘내자."

율리아는 아주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공기는 비록 아주 뜨겁고 습했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서서 쉬었다고
후들후들 떨리던 팔다리가 다시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한 발을 내디딘 찰나, 가녀린 몸이 휘청하더니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

채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시야가 단번에 뒤집히고, 짙은 안개 너머 붉은 달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점멸하던 의식 너머로, 누군가의 찢어질 듯한 외침이 파고들었다.

"율리아!"

"……."

"널 절대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율리아는 어느새 레기온의 품속에 있었다. 벽을 놓고 미련 없이 뛰어내린 그가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은 채


몸을 뒤집었다. 이대로라면 그가 먼저 바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나 때문에? 내가 또 주변에 폐를 끼치는 거야? ……싫어.'

이윽고 눈을 뜬 율리아가 레기온의 목덜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양손에서 환한 이펙트가 빛났다.

"실드."

[▷물리 실드 Lv.1

물리 충격으로부터 플레이어의 신체를 1 회 보호한다. 잔여 체력의 70%를 소모한다. SP 60]

[▷SYSTEM

잔여 HP 가 15% 미만입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재시도 불가.]

시스템 창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며 두 사람의 몸을 투명한 구체가 빈틈없이 감쌌다. 레기온의 놀란 시선이
율리아에게 향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빠르게 가까워지는 지면을 응시했다.

콰앙, 폭탄이 터진 듯 엄청난 굉음이 절벽을 울렸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율리아는 사위가 적막에 잠기자 뒤늦게 눈을 떴다. 그녀의 밑에서 레기온이
팔다리를 뻗은 채 힘없이 누워 있었다.

맞닿은 가슴이 미동도 없이 멈춰 있다. 눈을 뜨길 기다렸지만 그에게선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잘못된 건……. 레, 레기온!"

놀란 율리아가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그녀의 허리가 강한 힘으로 붙들렸다. 그의 눈꺼풀이


올라가며 푸른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덕분에 살았어. 네가 이런 고위급 마법을 쓴다는 건 몰랐네."


"……."

"왜 그런 얼굴로 있어?"

"이 바보야, 죽은 줄 알았잖아! 그리고 애초에 왜 나랑 같이 떨어진 거야!"

"몰라, 그냥 몸이 저절로 움직였는걸. 내가 널 두고 어떻게, 악!"

"다음엔 혼자라도 살아! 난 그냥 내버려 둬, 알았어?"

율리아가 가슴팍을 때리자 레기온이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그래봤자 장난스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빤히
보였으므로 두 번 속아 줄 생각은 없었다. 율리아는 최후의 일격으로 그의 팔뚝을 꼬집으며 벌떡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얼마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 건지, 절벽 꼭대기는 짙은 증기에 감싸여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하까지 떨어진 탓에 주변 공기가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마치 찜통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어쨌든 내려가는 시간을 단축했으니, 결론적으론 잘 된 일일까?'

끝까지 절벽을 타고 내려왔다간 시간제한에 걸려 퀘스트는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다만 이 상황에도


문제는 있었다. 원래도 낮았던 체력이 스킬 탓에 곧장 바닥권까지 떨어진 것이다. 잔여 HP 70% 소모는
역시 압박감이 컸다.

율리아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레기온은 바지를 툭툭 털어내며 몸을 풀고 있었다.

'스킨십을 해야 하는데 키 차이가 너무…….'

평소엔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지만 이제와 새삼 실감했다. 땀을 닦아 주는 척하며 입술을 스치기에


레기온은 키가 무척 훤칠했다. 자신과의 차이를 고려했을 때 도저히 자연스럽게 입술이 닿을 만한 높이가
아니었다.

율리아가 손가락만 꼼지락대며 전전긍긍하는 사이, 근처를 조사하던 레기온이 어떤 지점을 응시했다.
주변과 다를 것 없는 절벽의 한 부분이었지만 그의 눈엔 다르게 보이는 듯했다.

"마기가 아주 요동을 치네. 마력의 핵이 이 속에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벽 속에? 하지만 전부 바위인데?"

"보면 알겠지. 다치니까 조금 물러나 있어."

레기온은 대검에 마나를 불어넣은 뒤 지체 없이 거대한 벽을 내리쳤다. 푸른빛으로 내려 그어진 절벽이 두


동강으로 갈라졌다가 이내 산산조각 나며 파열됐다.

날카로운 파편과 흙먼지가 자욱하게 휘날리는 가운데, 어느새 레기온의 품에서 안전히 보호받던 율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듯한 기분이,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왜 그래, 놀랐어?"

"아니, 그냥. 왜인지 조금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익숙한 느낌? 갑자기 왜……."

무너진 절벽 너머 동굴 같은 넓은 공간을 응시하던 레기온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러다 불현듯, 그가


외쳤다.
"안 돼, 피해!"

"꺄악!"

뿌연 흙먼지 속에서 수많은 마력의 촉수가 율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기온이 즉시 마나를 개방하고
그것들을 저지했지만 틈새로 놓친 몇 개가 율리아의 가녀린 몸을 강하게 낚아챘다.

"으흑, 아파……!"

"빌어먹을, 당장 놓지 못해!"

허리와 허벅지, 팔다리까지 전부 결박된 탓에 아무리 몸을 뒤틀어도 꼼짝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얽매인 곳만 더욱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혹시나 율리아가 다칠까 봐 레기온이 공격하지 못하고 멈칫한 사이, 검은 촉수가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중력의 압박이 느껴질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레기온이 방출하는 푸른빛이 눈 깜짝할 새 먼지에 뒤덮여 멀어졌다. 율리아는 아득히 깊은 동굴 안으로
끝없이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사위가 어두워 위아래도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공간에서 율리아는 결국
시스템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환하게 빛나던 이펙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스킬을 주의해서 사용하라던 시스템의 를
떠올린 탓이었다.

'아직 마수정과 마주치지도 못했는데, 정작 중요할 때 스킬을 못 쓰게 되면…….'

공격이 너무 갑작스러워 차마 체력을 올릴 여유도 확보하지 못했다. 게다가 SP 는 HP 와 달리 강제로


올리지도 못하기 때문에 한계가 극명했다.

율리아는 덜덜 떨리는 주먹을 움켜쥔 채 귓가를 스치는 빠른 바람 소리에 집중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바깥의 빛이 완전히 차단되고 온통 암흑의 공간으로 변했다. 환각 미궁 때와는 달리 시스템을 전개해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람 소리가 달라졌어. 무언가 거대한 벽에 부딪히는 듯한 소리.'

율리아는 자신이 긴 통로를 지나 어떤 광활한 공간 속에 멈춰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젠 움직일 수 있을까 싶어 몸을 마구 비틀었지만 촉수가 여전히 몸을 얽매고 있는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풀어져라, 제발."

몸부림칠 때마다 여린 살갗이 돌바닥에 긁혀 찢어지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지치기만 할
뿐 도저히 움직일 수 없어서 절망하던 그때, 율리아는 기이한 감촉을 느꼈다. 서늘하고 끈끈한 것이 무릎
안쪽을 타고 뭉근하게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율리아는 움직임을 멈췄다. 이런 뜨겁고 습한 동굴에서, 다리 하나 없이 길고 매끈한 몸체를 가진 존재를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설마 뱀……?"

율리아는 청각을 기민하게 곤두세웠지만 바람 소리 외엔 어떠한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대신 서늘한


그것이 그녀의 치마 속에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네글리제 자락이 들춰지고, 겉으로 드러난 허벅지
위로 눅눅한 습기가 들러붙었다.
그녀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뭉툭한 선단이 어느새 그녀의 비부 근처를 슬슬 오가고 있었다. 다리를
오므리고 싶었지만 힘을 주면 줄수록 그녀의 허벅지는 점점 넓게 벌어졌다.

"아, 읏."

양쪽 다리가 활짝 펼쳐지고 나서야, 그녀의 머릿속이 찬물을 끼얹은 듯 굳었다. 이건 정사를 나눌 때의


자세와 같았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건 평범한 동물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의 짐작이 맞다고 알려 주듯, 비부를 감싼 얇디얇은 천을 무언가가 쿵쿵 짓찧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당장에라도 천을 찢고 들어올 것 같아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아, 아이템."

율리아가 굳은 혀를 간신히 움직였지만 눈앞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도 않는 건 아니라고, 그녀의 몸을 결박한 존재가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어떤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든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되뇌며,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야광화!"

[▷야광화

밤이 되면 빛나는 꽃. 죽음의 땅에서만 자란다. 사용 기회 1]

칠흑 같은 어둠이 눈 깜짝할 새 물러가며 그녀를 범하려던 존재도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자유를
되찾은 율리아는 마침내 자신이 끌려온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경악한 그녀의 눈꺼풀이 크게 벌어졌다.

'어째서 마신의 탑과 똑같은 장소가 이곳에 있는 거야?'

광활한 공간, 온통 새까만 천장과 바닥, 높고 육중한 기둥과 바닥을 빼곡히 덮은 마법진, 중앙의 제단.
모든 것이 같았지만 단 하나, 마정석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율리아는 이내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야광화가 내뿜는 빛 덕분에 모든 것이 선명히 보이는데,


제단 중앙만큼은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짙은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를 끌어당기던
촉수처럼 다른 색 한 점 섞이지 않은, 순수한 암흑의 형상으로.

"저건 마정석이 아니야. 이곳의 핵인 마수정……. 그럼 설마 나를 납치한 것도 마수정이란 거야?


어째서?"

마수정은 단지 마력을 담는 아티팩트가 아니던가. 무생물이 의지가 존재하는 지성체처럼 사람을 납치하고
억압하려 들다니, 아무리 마계라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63 화

율리아는 마수정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높다란 계단 위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녀는 곧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제단에 새겨진 마법진이 그녀가 가까이 접근하자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저 정도 크기의 마법진이 폭발하면 동굴 내부는 쑥대밭으로 변할 것이다. 점점 격렬하게 발광하는 그것을


보며 율리아는 실드를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또다시 창이 생성됐다.

[▷SYSTEM
스킬 '물리 실드' 사용 시 잔여 HP 가 5% 미만으로 떨어집니다.]

[▷SYSTEM

상태에서 스킬 사용 시 상태 이상 '폭주'가 발생합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시스템이 말하는 '폭주'란 플레이어의 HP 와 SP 가 0 으로 떨어질 때까지 스킬을 멈출 수 없는 상태, 즉


죽음을 의미했다.

스킬을 사용하면 폭주로 죽고, 그렇다고 사용하지 않으면 폭발에 휘말려 죽는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강하게 사려 문 입술에서 따끔, 날카로운 감각이 느껴진 찰나였다.

"율리아, 비켜! 위험해!"

"레기온?!"

등 뒤에서 거친 발소리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전신에 푸른 마나를 두른 레기온이 소드를 거칠게


휘둘렀다. 칼날의 형태로 변이한 마나가 마수정에 곧장 직격했다.

콰앙,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동굴 안을 휩쓸었다. 율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로부터 몇 번이나 더 폭발음이 울렸다. 레기온은 목이 터질 듯 기합을 내지르며 공격을 반복했다.

소드마스터가 내뿜는 마나의 위력은 가히 파괴적이었다. 공격을 빗맞은 것만으로도 거대한 기둥이
쓰러지고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마수정은 그만큼의 힘을 직격으로 받았음에도 흠집 하나 없이 무사했다. 오히려 빛이 들지 않는


칠흑의 범위가 더욱 확장됐다. 그것을 본 레기온이 턱을 으득 갈았다.

"허억, 헉, 젠장! 그럼 될 때까지라도……!"

검은 마력에서 뻗어 나온 촉수가 이번엔 레기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율리아를 납치할 때와 달리 촉수의


선단이 뾰족한 창처럼 변했다. 단 한 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한다면 저 수많은 촉수가 레기온의 몸을
사정없이 관통할 것이다.

율리아는 갈등했다. 둘 사이의 공방이 워낙 빠르고 치열해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아주 흐릿한 잔상뿐이었다.

그녀는 대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 마나가 번개처럼 번뜩일 때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마수정의
본체가 눈에 들어왔다. 어둠의 범위가 시시각각 변화하는 와중에도 단 하나,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
곳이 있었다.

'마법진이 새겨진 제단의 중앙. 저곳에 마수정의 본체가 있어. 하지만 어떻게 해야…….'

잘그락.

본체에 타격을 줄 방법을 찾던 율리아의 귀에 이질적인 금속음이 들렸다. 마수정의 검은 마력에 반응하듯
바엘의 붉은 목걸이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ERROR

ERROR?? ERROR?? ERROR??]

[▷?? ??? 목걸이

마왕 바엘이 ??? ??? ??? ???? ?? 목걸이. 바엘을 제외한 모든 ??? 접근을 ????. 사용 기회 ?]
율리아는 점멸하는 목걸이를 움켜쥐고 칠흑의 핵과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하에서 가장 순도 높은 바엘의
붉은 마력. 만약 이것을 마수정의 핵에 박아 넣고 폭발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는 결과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다만 방법이 문제였다. 마수정에게 접근하는 것부터
난항이었고, 이것을 핵과 함께 폭발시키는 것도 상당한 위험이 따랐다.

'아니, 할 수 있어.'

율리아의 머릿속에 이를 성공시킬 만한 계책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제야 시스템의 를 이해할 수 있었다.
스킬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녀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을 바라보았다. 수백 개의 날카로운 창끝이 레기온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보이는 건 오직 흐릿한 잔상뿐이지만, 율리아는 그가 얼마나 긴장한 채 소드를 휘두르고 있는지
깨달았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디뎌도 자신이 죽고, 뒤이어 율리아도 죽는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레기온은
누구보다도 절박하게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를 보며, 율리아는 이윽고 결심을 굳혔다.

"커맨드 시스템."

다음 명령어를 기다리듯 텅 빈 창이 생성되었다. 기회는 오직 한 번뿐이라고 생각하니 날뛰던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마수정이 내뿜는 마력은 모조리 레기온의 방향으로 치우쳐 있었다. 율리아는 그 틈을 타 재빨리 제단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뒤쪽엔 높다란 턱만 있을 뿐 중심부로 가는 계단이 없었다. 율리아는 거의 암벽
등반하다시피 돌바닥을 붙들고 위로 기어 올라갔다.

"콜록, 콜록!"

숨을 헐떡일 때마다 지하의 뜨거운 열기가 폐부로 고스란히 전달됐다. 호흡기가 타는 듯한 고통에
계속해서 기침이 나왔지만 율리아는 이를 악 물고 몸을 움직였다.

파지직, 파직!

그녀가 제단에 발을 디디는 순간, 마법진이 또다시 위태로운 파열음을 냈다. 작고 하얀 발바닥이 닿는
곳마다 자잘한 균열이 생겼다.

검을 휘두르던 레기온이 무언가 이상을 느꼈는지 제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율리아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거점, 레기온."

[▷저항 거점 Lv.2

플레이어가 지정한 좌표에 일정 시간 항마력을 부여할 수 있다. 잔여 체력의 40%를 소모한다. SP 40]

[▷SYSTEM

잔여 HP 가 10% 미만입니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기능을 제외한 모든 스킬을 해제하시길 바랍니다.]

[▷SYSTEM
상태에서 스킬 사용 시 상태 이상 '폭주'가 발생합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율리아의 손과 레기온의 몸에 동시에 환한 이펙트가 발생했다. 그녀는 주르륵 뜨는 세 개의 창을 무시하고


재차 입을 열었다.

"강탈, 마수정."

[▷저항 강탈 Lv.1

플레이어가 지정한 대상에 일정 시간 항마력의 50%를 강탈한다. 잔여 체력의 70%를 소모한다. SP 60]

[▷SYSTEM

잔여 HP 가 3% 미만입니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기능을 제외한 모든 스킬을 자동 해제합니다.]

[▷SYSTEM

10 초 후, 상태 이상 '폭주'가 시작됩니다.]

이번엔 마수정의 핵에 화살 형태의 거대한 이펙트가 내리꽂혔다. 동시에 그녀의 가녀린 몸이 크게


휘청였다.

"율리아!!"

레기온이 미친 듯 절규하며 달려왔다. 크게 숨을 들이쉰 율리아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목걸이를 잡아 뜯어


그에게 던졌다.

"이걸 네 힘과 함께 어둠의 중심에 꽂아. 이곳에서 나갈 수……."

[WARNING!][WARNING!][WARNING!]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된 붉은 창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율리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목에서 비릿한 피가 걷잡을 수 없이 역류했다.

"레기온……."

목숨과 맞바꾸어 얻은 단 한 번의 기회였다. 부디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율리아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속삭였다.

다행히 레기온은 들리지 않는 그녀의 바람을 모두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붉은


목걸이를 낚아채 그대로 어둠의 핵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주변에 감도는 투명한 막이 마수정의 힘을 모두
튕겨냈다.

그는 키보다 높은 제단을 단번에 뛰어오른 뒤 발광하는 마법진을 밟고 도약했다. 그의 검이 파르르


진동하더니 완전한 빛의 형태로 변했다.

찬란한 빛이 붉은 목걸이를 관통하고, 뒤이어 마수정의 핵에 깊이 박혀들었다.

"……!"

어둠을 관통한 푸른 섬광이 수천 갈래로 나뉘었다.

파지직, 파직. 소름끼치는 파열음이 고막을 긁었다. 마수정의 최후를 확신한 레기온이 검을 뽑아들고
쓰러진 율리아의 곁으로 착지했다. 그는 힘없이 늘어진 몸을 안아 든 뒤 제단 밑으로 빠르게 내려섰다.
율리아는 흐릿한 시야 너머, 블랙홀의 최후처럼 붕괴해가는 마수정과 제단을 바라보았다.

[▷SYSTEM

매력, 명성, 마성, 스트레스가 대폭 증가합니다.]

[▷SYSTEM

4th Episode. 마력의 행방]

[완료]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무너져 내린 천장 틈새로 붉은 달빛이 새어 들었다. 치명적이도록


잔혹하고 위태로운, 붉은 시선을 응시하던 율리아의 눈꺼풀이 이내 천천히 감겼다.

사실 그것이 정말 월광이었는지, 율리아는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 * *

폐허로 변한 동굴 안에서, 레기온은 축 늘어진 율리아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늘 발갛게 물들어 있던 뺨이


색을 잃었고 습관처럼 꼼지락대던 작은 손가락은 차가운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였다.

"율리아, 눈 좀 떠 봐."

레기온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미약한 숨결은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날 봐, 응?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레기온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자신이 부족해 마수정을 제대로 상대해내지
못하니까, 이 착하고 순진한 바보가 목숨과 맞바꾸어 대신 자신이라도 살려 내려고 한 거다.

짙은 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강력한 적과 싸우며 순간의 호승심에 취해, 율리아보다
마수정과의 싸움을 선택했던 어리석은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율리아의 손이 처음으로 빛나던 순간, 온몸을 짓눌러오던 마력의 압박감이 깨끗하게 사라졌고 그녀가 두
번째 힘을 쓰자 거대한 빛의 화살이 마수정의 핵에 내리꽂혀 빈틈없이 강력하던 마력을 무르게 만들었다.

찬란하고도 강대했지만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절대 구현해 낼 수 없는 힘. 율리아라고 그것을 사용하는


대가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

"용사면 뭐 하고 소드마스터면 뭐 해.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두 번씩이나 놓쳤는데, 나는!"

"……."

"끄윽, 끄으으으!"

그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레기온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었다. 식어
가는 몸을 끌어안고 눈을 감은 채 한없이 눈물만 떨어뜨렸다.

모든 감각이 오직 그녀에게 집중되니 꺼질 듯 가녀린 숨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하지만


소드마스터인 그는 다른 사람은 인식할 수 없는 한 가지를 더 느낄 수 있었다. 레기온은 자신의 주변을
감싸는 따뜻한 마나의 흐름을 깨달았다.

"아……."
옅은 분홍빛의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가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율리아의 마나였다. 그것을
올려다보던 레기온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살릴 수 있어."

마나가 빠져나간다면 다시 채워 주면 된다. 율리아가 눈을 뜰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그의 엄지손가락이 율리아의 작고 창백한 입술을 쓸어내렸다. 레기온은 그녀의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받쳐


들며 속삭였다.

"깨어나면 파렴치한이라도 때리고 욕해도 돼. 그러니까 지금은 부디 용서해 줘."

64 화

레기온의 메마른 입술이 율리아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타액에 마나를 실어 그녀의 안에 밀어
넣으며, 반대편 손으로 얇은 네글리제 끈을 조심스럽게 끌어내렸다. 끈이 어깨를 타고 내려가며 율리아의
한쪽 가슴이 살포시 드러났다.

새하얀 유방 위에 연분홍색 꽃잎이 내려앉아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의 손이 이윽고 가슴 전체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작고 말랑한 살덩어리가 그의 손아귀 안에서 이리저리 뭉그러졌다.

엄지손가락으로 유두 끝을 살짝 건들자 미약하던 율리아의 호흡이 짧게 멈췄다. 아주 작은 변화였음에도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것만 같아서, 레기온은 점점 갈급해졌다.

율리아를 이런 식으로 취하고 싶지 않았다. 마신의 잔재가 남은 이따위 더러운 곳에서 짐승처럼 그녀를
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괴로워하는 머리와 다르게 레기온의 하체는 이미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이대로 가면 율리아는 죽는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선 짐승 같은 행위라도 저질러야만 했다. 그녀를 상처
주는 짓이라 할지라도, 더러운 이기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율리아가 살아 있기를 원했다.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사랑해, 율리아."

레기온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내렸다.

"사랑해."

그는 율리아의 몸을 바닥에 완전히 눕힌 뒤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입술을 맞댄 상태에서 하나 남은


어깨끈까지 내리자 작고 동그란 가슴이 온전히 드러났다. 희고 보드라운 살덩어리가 레기온의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에 온전히 담겼다.

율리아의 창백한 입술에선 여전히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몸을 쥐고 애무하는
사내의 등 근육은 흥분으로 꿈틀대며 깊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는 율리아의 살결에 입술을 붙인 채로 조금씩 밑으로 내려갔다. 가느다란 목선에 입을 맞추고 툭 불거진
쇄골을 훑었다. 윗가슴의 각인이 눈에 들어왔을 때 분노로 턱이 갈렸지만 그 아래의 작고 사랑스러운
유실이 그의 뇌리를 마비시켰다.

레기온은 조심스럽게 혀를 내어 분홍빛 끝을 어루만졌다. 작은 유두는 혓바닥이 미는 대로 이리저리


뭉그러졌다. 과실처럼 달콤하고 보드라운 살 내음이 한가득 풍겼다. 그의 숨소리가 터질 듯 거칠어졌다.

"하아, 율리아……."
레기온의 손이 네글리제 밑으로 성급하게 들어갔다. 손바닥에 착 감기는 허벅지를 쓸어 올리며 그는 점점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그 정점에 저를 파묻고 싶었다.

굳은살 박인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얇디얇은 속옷을 옆으로 밀어냈다. 이제 굳게 맞물린 입구를 힘주어
벌리고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머뭇거리던 그의 얼굴이 율리아의 가슴께로 힘없이 떨어졌다.

"깨어난 네가 나를 원망하면 어떡하지."

"……."

"네게 되돌릴 수 없는 짓을 한 내가 더럽고 무섭다고, 두 번 다시 나를 보지도 않으려고 하면 어떡하지?


이젠 너만이 내 삶의 이유인데."

레기온의 떨리는 입술이 율리아의 얼굴과 가슴 이곳저곳을 애원하듯 부드럽게 문질렀다.

율리아가 깨어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마나를 시급히 채워 넣어야 하는 상태만 아니었더라도 그녀를 더욱


배려하고 소중히 안았을 텐데. 당장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에선 밑을 공들여 풀어줄 여유조차 없었다.

"제발, 나를 용서해."

그의 손가락이 이윽고 율리아의 안을 비집고 들어갔다. 의식을 잃었어도 고통은 느낄 수 있는지 그녀의
허벅지가 파드득 떨렸다. 레기온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유두를 집요하게 빨아 올리고
잇새로 부드럽게 긁었다.

위로는 젖꼭지를 애무하며 동시에 밑으로 손가락을 움직이자, 율리아의 찢어질 듯 비좁았던 내벽이 천천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레기온은 그녀를 마구 짓쳐 올려 범하고 싶은 충동을 죽을힘을 다해 억눌렀다. 오직 그녀가 느낄 수


있도록 손가락을 쑤셔 넣으며 손바닥 아래쪽으로 음핵을 비비고 짓눌렀다.

작은 살덩어리가 통통하게 달아오른 이후에도 자극을 멈추지 않는데, 그녀의 입술에서 마침내 끊어질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읏……."

그 소리를 들은 레기온의 팔뚝이 움찔 떨렸다. 율리아의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자신의 손길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무릎으로 서서 상체를 일으켰다. 바지 앞섶이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버클을 풀자 굵은 핏줄이 불거진 페니스가 곧장 튀어나왔다. 정신을 잃은 율리아의 얼굴과 흉흉하게 선
페니스가 같은 시선 안에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레기온의 성기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팽창했다.

"내가 어떻게 네게……."

율리아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다. 붉은 달빛 아래 하얀 나신을 속속들이 드러낸 채로, 더욱 깊고 은밀한


곳까지 남김없이.

손가락 하나도 간신히 삼키는 구멍에 이런 것을 집어넣어도 되는지 레기온은 갈등했다. 하지만 그가
괴로워하면 할수록 아랫도리엔 끝도 없이 피가 쏠렸다.

레기온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율리아의 엉덩이를 힘주어 벌렸다. 탐스럽게 달아오른 비부가 시선 아래


속속들이 드러나고, 레기온은 제 페니스를 몇 번 훑은 뒤 액으로 번들거리는 선단을 그녀의 맞물린 입구에
맞췄다.

"아, 응."

"괜찮아. 아프지 않게 할게."

"흐응!"

고작 귀두만 욱여넣었을 뿐인데 율리아의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이 터졌다. 비좁은 구멍이 침입자를
몰아내기 위해 정신없이 조여들었다. 레기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율리아의 머리맡에 팔을 기댔다.
내려다본 율리아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레기온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성이 산산이 조각나는 느낌이었다. 율리아의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고 싶었다. 다리 사이에 저를 파묻고 진한 씨물을 토해 내어 그녀를 온전히 독점하고 싶었다.

레기온은 입술을 포개며 허리를 짓쳐 올렸다. 율리아의 몸이 위로 밀려 올라가자 레기온은 그녀의 골반을
붙들고 밑으로 강하게 내리꽂았다. 굵은 페니스가 남김없이 삼켜지며 두 사람의 밀부가 바짝 밀착됐다.

"크윽."

"응……!"

"아, 율리아."

레기온은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가느다란 골반을 붙든 그의 큰 손이 쾌감으로 나직이


떨렸다.

다시금 빠져나가는 그의 성기를 율리아의 구멍이 빡빡하게 사리물었다. 자신에게서 나가지 말라는 듯,
가뜩이나 비좁은 내벽이 그를 꽉 물고 오물거렸다. 그런 모습까지 레기온의 눈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흐응……."

"멈춰 달라 애원해도 어차피 늦었으니까, 이젠."

그 말을 끝으로 레기온의 성기가 그녀의 안에 강하게 파고들었다.

허리 짓을 할 때마다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철썩철썩 울렸다. 음부가 액으로 범벅이 되어 갔다.
찌걱대며 마찰하는 소리와 질척한 물소리가 난잡하게 섞여 들었다.

율리아의 가느다란 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이 페니스와 바짝 맞물려 부연 거품이
일었다. 빠르게 박아 넣을 때마다 율리아의 고개가 움찔움찔 떨렸다. 레기온은 성기를 강하게 밀어
넣으며 율리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흐으……."

"율리아, 정신이 들어?"

그녀의 눈꺼풀이 들리며 색소가 옅은 동공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율리아는 제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본능에 따라 가쁜 신음을 흘려 댔다. 파르르 떨리던 허벅지가 레기온의 허리를 꽉
조였다.

레기온은 그녀의 허벅지를 어루만지며 웃었다.


"네가 기분 좋아해서 다행이야."

"아앙, 읏, 앗!"

"얼마나 더 길게 이 짓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

밑 빠진 독처럼 텅 비어버린 몸에 마나가 직접 주입되고 있었다. 하지만 소모되는 힘의 양이 그 수준을


웃돌기에 그녀는 언제든 다시 가사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기 위해선 얼마나 긴 시간을 교접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최소한 그
시간동안 율리아는 자신만의 것이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레기온의 등골이 선뜩하게 전율했다.

"좋아, 더……."

"여기가 좋아?"

"아응, 강하게, 으응!"

"이렇게?"

레기온의 귀두가 어느 지점을 긁을 때마다 율리아의 허리가 파드득 뒤틀렸다. 그의 성기 크기가 워낙


압도적인 탓에 온 내벽이 사정없이 짓눌리고 있건만, 율리아는 더욱 큰 쾌락을 찾아 허리를 서툴게
움직였다.

그 모습에 자극받은 레기온이 턱을 으득 물었다가 이내 속도를 높였다. 율리아의 비명 같은 교성이 동굴을


울렸다.

"하응, 더, 더어, 아아앙!"

율리아의 뽀얀 가슴이 그가 튕기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바짝 곤두선 채로 바르르 떨고 있는 젖꼭지가


안타까웠다. 레기온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며 물었다.

"그럼 여기는 어때. 만져 줄까?"

"아, 해 줘어!"

"손가락으로 해 줄까, 아니면 빨아 주는 게 더 좋아? 응?"

그가 허리를 튕길 때마다 율리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발발 떨기만 했다. 쾌감이 너무 강해 혀가 꼬였다는


걸 알면서도 레기온은 부러 더욱 강하게 쑤셔 넣으며 되물었다.

페니스가 어느 지점을 긁고 때릴 때마다 율리아의 눈꺼풀이 바르르 경련했다. 레기온은 허리를 잘게


움직이며 그 한 부분만을 집요하게 긁어 댔다. 오르가즘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자 율리아의 입술이 타액에
젖어 들었다.

"아앙, 핫, 흐응!"

"어떻게 해 줄까 물었잖아. 막지 말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도 너무 과한 쾌락은 두려운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페니스가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레기온의 하복부를 밀어냈다.

그래봤자 살짝만 쥐어도 부러질 정도로 가느다란 팔뚝이었다. 레기온은 밀어내는 힘을 무시하고 골반을 쳐
올리며 상냥하게 속삭였다.

"이제 멈출 수 없다고 했잖아."

"아흑……!"

"뭘 원하는지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나는 몰라."

레기온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유두를 살살 굴렸다. 스칠 듯 말 듯 할 때마다 그녀의 구멍이 안타까운 듯
꾹꾹 조여들었다.

"아니야아, 흑, 아."

"그럼 이건?"

그는 손바닥을 펼쳐 유두를 살살 궁굴렸다. 마찬가지로 굳은살이 스칠 때마다 율리아가 높다란 교성을


흘렸다. 하지만 완벽히 만족스럽지는 못한지, 그녀는 이내 스스로 가슴을 만지기 시작했다. 분홍빛
살점을 손가락 사이에 넣어 비틀고 굴려댔다.

비음을 흘리며 쾌락을 찾아 스스로를 애무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결국 레기온의 인내심이 먼저 끊어져
버렸다.

65 화

그는 율리아의 양손을 머리 위로 단단히 결박했다. 율리아가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리를 마구 비틀며


저항했지만 레기온은 그녀의 턱을 잡아 밑을 보게 했다. 길게 나온 레기온의 혀가 그녀의 유두를 스윽
스쳤다.

"잘 보고 있어."

"흐읏!"

"달아. 우유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왜일까."

레기온은 율리아의 시선을 잡아 두기 위해 그녀의 유실을 자극적으로 빨아 들였다. 앞니로 잘근잘근


깨물고 혀끝으로 사정없이 짓눌렀다. 동시에 허리는 탁탁 강하게 치받쳤다.

그의 머리 위에서 끊어질 듯 애타는 할딱임이 들렸다. 위아래를 동시에 괴롭힘 당한 율리아가 초과량의
쾌락을 견디지 못하고 작게 울먹였다. 뒤늦게 알아챈 레기온이 시선을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나, 히끅, 놔아……."

"놓으라고? 정말 그래도 되겠어?"

"무서, 워, 흐윽!"

"네가 울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레기온은 그녀의 눈물에 한없이 약했다. 단지 눈물을 글썽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레기온은 결국 머리 위로 결박한 팔을 놓아주며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삼켰다. 율리아의 억눌린 신음이
레기온의 입 안에서 사라져갔다.
"흐으, 으으응!"

"하아, 율리아, 율리아!"

탁탁 살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더 빠르고 거세졌다. 그의 음낭이 율리아의 엉덩이를 거세게 때렸다. 점점


가빠지는 숨소리를 들으며 레기온은 더욱 강하게 허리를 내리찍었다. 끝도 없이 올라가던 율리아의 교성이
일순 잦아들었다.

고개를 빳빳이 세운 그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레기온은 그녀를 끌어안아 몸을 밀착한 채 눈을 감았다.


비좁은 내벽에 정액이 질척하게 퍼져 나갔다.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동굴을 울리던 찰나, 율리아의 머리맡에 희미한 그늘이 내려앉았다. 레기온은
율리아의 이마에 붙은 잔머리를 쓸어 올리며, 불청객에게 비소를 보냈다.

"……악마 주제에."

무너진 천장 너머, 붉은 달빛을 등진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활짝 펼쳐진 한 쌍의 날개와 그 사이에서


번뜩이는 붉고 흉흉한 안광.

붉은 목걸이에 무슨 짓을 한 건지, 용케 냄새를 맡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율리아를 향한 바엘의 눅진한


집착이 피부로 느껴졌다. 레기온은 기분이 몹시 불쾌해졌지만 이내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을 바꿨다.

레기온의 눈동자가 일순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다른 마족이라면 몰라도 바엘이 그 변이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그래, 그렇게 멀리 떨어져서 병신처럼 침이나 흘리고 있어."

율리아를 강탈하고 그 순결한 육체를 더럽히려 한 악마 주제에. 자기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멍청이는 그냥 저 위에서 체면이나 차리고 있으면 된다.

레기온은 파정했음에도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는 페니스를 율리아의 안으로 꾸욱 밀어 넣었다. 이미 한


차례 정액을 받아먹었음에도 율리아의 내벽은 다시 들어오는 침입자를 버거워했다.

레기온은 허리를 움직이며 비좁은 내벽을 천천히 휘저었다. 그녀가 느끼는 부분을 집요하게 뭉개고
짓눌렀다. 뜨끈한 살점에 감싸인 페니스가 사정없이 조여들었다. 레기온은 팽팽하게 벌어진 입구를 살살
어루만졌다.

"율리아, 기분 좋아?"

"응, 으응."

"더 많이 해 줄게. 내 허리에 다리 감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가 레기온의 허리에 감겨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 바엘의 얼굴이
매섭게 구겨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레기온은 시선을 내렸다. 율리아의 발갛게 물든 눈가가 사랑스러웠다.

팔뚝만한 페니스가 비좁은 내벽을 들락거리며 자극적인 마찰음을 만들어 냈다. 귀두가 자궁구를 탁탁 때릴
때마다 율리아는 울먹이며 교성을 내질렀다.

그때, 실내에 거센 바람이 일었다. 어느샌가 착지한 바엘이 마수정의 잔해 속에 서 있었다.

바엘은 저벅저벅 느릿하게 걸어 율리아의 머리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 위로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레기온은 치미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왜, 발정이라도 났나? 그래도 낄 자리 안 낄 자리 구분은 해야지."

"내가 할 말을 대신 하는군. 죽음의 땅에 불청객이 있었지. 왕의 정사를 훔쳐보며 헉헉대던, 인간인지


악마인지 모를 버러지 하나가."

"비열한 박쥐 새끼가 감히……."

레기온은 부러 율리아의 내벽을 강하게 헤집었다. 지금 그녀가 어떤 사내에게 안겨 있는지 똑똑히 보여


주기 위해서. 공기 중에 짙게 녹아든 마나가 누구의 것인지 과시하듯.

"인간의 몸엔 많든 적든 늘 마나가 순환하지. 이 힘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은 오직 죽은 자 뿐."

"……."

"보면 알겠지만, 나와 떨어지는 순간 숨이 끊어져."

레기온은 차마 그녀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율리아의 숨이 끊어진다고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졸리는 듯한 고통이 일어서. 입 밖에 냈다가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져서.

그의 말대로 율리아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마나를 받아먹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이유를 알 순


없지만 그녀의 몸은 마치 폭주하듯 마나를 방출하고 있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불청객'은 이만 꺼지지 그래? 아무리 너라도 하나뿐인 열쇠가 죽는 건 바라지
않겠지."

"열쇠는 오직 내게 귀속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웃기는 소리. 네 거라면서 이름 하나 기억하긴 해? 넌 죽어도 못 해. 너야말로 지하에서 가장 이기적인


영혼을 받아먹고 태어난 존재니까."

"……."

바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길고 창백한 손가락이 율리아의 발간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나의 것이다."

그녀에게 박혀 있던 붉은 안광이 천천히 위를 향했다. 사납게 일그러진 레기온의 얼굴을 보며, 바엘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허튼 마음은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 여자가 네 것이 될 일은 없을 테니."

"각인을 핑계 댈 생각이라면 언제든 지워 주겠어."

"설마 내가 억지로 새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유감이지만 이건 열쇠가 직접 선택한 결과다. 이걸 지우는
방법은 오직 숙주의 죽음뿐인데, 그럼 네가 벌이는 정사도 영영 쓸모없는 짓이 되겠군. 그렇지?"

"으응……!"

바엘의 살갗에 닿자 율리아의 목대가 꼿꼿이 서고, 레기온의 좆을 물고 있던 내벽이 바르르 경련했다.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내에게서 쾌락을 얻고 있었다. 레기온은 그 사실이 죽을 만큼 저주스러웠다.

그는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다시 안으로 퍽 쑤셔 넣었다. 율리아가 자신을 보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애원하며.

"하아, 흐읏."

"입 벌려."

"율리아에게서 손 떼!"

"그럴 순 없지. 나의 열쇠가 이렇게 자지러지게 좋아하는데."

바엘이 율리아의 아랫입술을 톡톡 건드리자 그녀가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바엘은 율리아의 목덜미를
들어 올리며 부드러운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한 쪽으로 치웠다. 그러곤 이미 빳빳하게 발기한 제 것을 입에
물렸다.

"흐응……."

"더 깊이."

율리아는 목이 꺾인 자세가 힘들었는지 작게 칭얼거렸다. 단지 귀두를 머금은 것만으로도 율리아의 입


안이 가득 찼건만, 바엘은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깊이 성기를 밀어 넣었다. 율리아의 목구멍이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그는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율리아의 목울대를 느릿하게 쓸었다.

"이쪽과 아래쪽 중에 어느 쪽이 더 맛있는지 물어볼까."

"흐윽, 웁, 우웁!"

"더 삼켜. 끝까지."

"그만둬!"

"잘하고 있어."

바엘의 육중한 페니스가 벌써 반이나 삼켜졌다. 율리아의 입이 그녀의 체구만큼이나 작은 걸 생각하면


목구멍 너머까지 성기가 넘어가 있을 게 뻔했다. 율리아는 신음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생리적인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하지만 레기온은 율리아를 빼낼 수 없었다. 저대로 놔두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쾌락에 몸부림치는
그녀의 모습에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미칠 듯 꽉꽉 조여드는 내벽과 거칠게 헐떡이는 숨이, 마치
이대로 계속해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바엘이 율리아의 목덜미를 애무하며 허리를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의 페니스가 율리아의 입 안을 유린하며
점점 깊이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내 쪽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웃기는 소리."

골반을 쥔 레기온의 손가락이 하얗게 바랬다. 도발이란 걸 알면서도 차오르는 분노를 멈출 수 없었다.
동시의 그의 성기가 율리아의 자궁구를 강하게 쳐올렸다.

"흐읍!"
"율리아는 나를 선택하게 될 거야."

"그래, 착각 속을 허우적대며 찰나의 단꿈을 꾸는 것도 좋겠지."

"……."

"그럴수록 현실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도 더욱 커질 테니까."

얼핏 들으면 승기는 명백히 바엘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레기온은 바엘의 붉은 안광에 담긴 분노를
보았다. 역시 악마는 멍청하다. 질려 버릴 정도로.

그때, 레기온의 손등 위로 부드러운 온기가 스쳤다. 율리아의 손이 그의 창백한 손을 지그시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는 바엘의 손가락을 쓰다듬었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두 사내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죽음과 가사 상태 사이를 오가느라 제대로 의식이 있을 리도 없는데, 그런 그녀의


손길이 이리도 상냥하게 느껴지는 건.

'넌 이런 상황에서까지 남의 아픔이 먼저 보이는 구나.'

레기온은 그녀와의 결합부를 내려다보았다. 희뿌연 액이 율리아의 하반신에 엉망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말로는 그녀를 살리기 위함이라지만 진실은 그런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레기온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 같은 그런 선한 영웅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가 마나


폭주 상태로 죽어 가고 있다면 자신은 끝까지 내버려 뒀을 것이다.

오직 율리아이기 때문에, 그녀를 향해 위험 수위까지 차오른 욕망을 쏟아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너는 끝까지 나를 부끄럽게 만들어.'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사랑스럽다. 감정의 밑바닥에 진득하게 눌어붙은 이 파괴적인 독점욕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레기온은 뿌리 끝까지 쑤셔 넣을 기세로 허리를 탁탁 쳐올렸다. 두려울 정도로 거대한 쾌감이 그를


집어삼켰다. 맞은편에서 비웃는 악마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레기온의 신경은 오직 율리아의
비좁은 구멍에 모조리 쏠렸다.

"악마란 결국 이토록 이기적인 존재들이지. 안 그래?"

"……."

레기온은 입술을 사리물며 바엘의 웃음 섞인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는 성기가 들락거리는 율리아의


입술로부터도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위아래로 찌걱거리는 질펀한 마찰음과 힘겹게 새어 나오는 여자의 신음이 무거운 밤공기를 울렸다.

66 화

[▷SYSTEM

상태 이상 '폭주'를 종료합니다.]

반딧불 같은 구체의 빛이 침대 주변을 퐁퐁 떠다니고 있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율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시스템의 를 무시하고 마지막 스킬을 사용한 뒤, 끝없이
생겨난 붉은 창이 시야를 가득 뒤덮었다.

율리아는 마수정의 최후를 확인할 틈도 없이 곧장 폭주 상태에 들어갔다. 붉은 창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이번엔 스킬 창이 연속으로 떠오르며 체력을 무한으로 잡아먹었다.

목구멍에서 뜨겁게 역류하던 피의 감각이 생생했다.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끔찍한 고통이
되살아날 것만 같아서 율리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유를 알 수 없이 뇌리에
맴도는 장면이 있었다.

정신을 놓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붉고 선명한 월광.

'마왕님의 눈동자를 닮았었어.'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철저히 구속당한 듯한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기분이 드는 눈빛이었다.

율리아가 눈꺼풀을 나직이 들어 올린 찰나였다. 그녀의 얼굴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느릿하게 쏟아져


내렸다. 밤의 장막이 내려진 듯 그녀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아……!"

바엘이 율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란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 도로 엎어졌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특히 골반은 뻑뻑하게 굳어서 제대로 다물어지지 않았고, 입술 가장자리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찢어졌으며,


살갗은 눈에 들어오는 곳마다 얼룩덜룩한 울혈이 가득했다.

하지만 가장 그녀를 난감하게 한 건 목구멍과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쓰라림이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양쪽 점막 모두 퉁퉁 부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율리아가 난감하게 시선을 굴리는 동안, 바엘의 안광은 점점 어둡게 가라앉았다.

"내게 말하지 못하는 걸 보니 또 그 인간 사내를 생각했나 보지."

"아뇨, 윽……. 콜록!"

율리아는 제대로 목소리가 나지 않는 목을 힘겹게 부여 쥐었다. 하지만 바엘의 시선은 그녀가 불편한 듯
꼼지락거리는 다리 사이로 향해 있었다.

그제야 율리아는 자신이 네글리제 하나만 달랑 입은 채 바엘의 무릎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장소는
다행히 실내라 다른 누군가에게 보일 염려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 편히 쉴 만한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콜록! 일단 놓아주……."

"어림없는 소리를."

바엘의 커다란 손이 율리아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는 새하얀 등을 미끄러지듯 내려가 율리아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올렸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일으켜져 바엘을 마주 본 채로 그의 허벅지 위에 앉혀졌다.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훑는 바엘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그의 맨손이 닿는 등허리에서 찌릿한 감각이
타고 오르는 것도 걱정됐다. 이러다간 그의 무릎 위에서 온갖 민망한 꼴을 보이게 될 것만 같았다.

난감해진 율리아가 눈을 피하려던 바로 그때, 그녀의 뒤통수가 강한 힘으로 바짝 당겨졌다. 바엘이


그녀의 입술을 사납게 집어삼켰다. 놀라서 입을 꾹 다물었지만 그럴수록 단단한 혀는 더욱 강압적으로
그녀의 입 안을 헤집었다.

"흐으, 으응."

바엘은 뒤로 도망치는 혀를 붙들어 뿌리까지 거칠게 빨아들였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고개를 비틀어
목젖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난폭한 움직임이 무서웠다. 율리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애원했다.

"하읏. 마왕님, 그만……!"

"넌 내 것이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목덜미를 짓누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크고 단단한 혀가 여린 점막을 샅샅이


헤집었다. 숨을 모두 빼앗겨 버린 율리아의 눈앞이 핑 돌았다. 바엘의 어깨를 밀어내던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풀려 갔다.

바엘은 율리아의 시야가 까맣게 암전될 쯤에야 그녀의 안에서 빠져나갔다. 율리아는 옆으로 쓰러지려
했지만 목덜미를 붙든 바엘의 손아귀는 그녀가 잠시라도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율리아는 결국
그의 품에 안겨 힘겹게 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콜록! 하윽, 콜록!"

"아주 깜찍한 짓을 저질렀더군. 인간 사내와 손잡고 마수정을 파괴하다니."

"그게 마왕님이 노여워하는 이유인가요?"

"무슨 소리지."

바엘의 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구겨졌다. 하지만 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그는 명백히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마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 바엘은 율리아에게 무척이나 두려운 존재였다. 첫 만남부터 그러했다. 단지


바엘의 침실 앞에 선 것만으로 아가레스의 결계가 와장창 깨져 나가고 하늘엔 귀가 찢어질 듯 번개가
내리쳤다.

그때의 바엘은 손잡이 없는 칼날 같았다. 자신의 주변에 다가오는 모든 이를 거부했다. 단지 그의 시선


앞에 놓인 것만으로 거대한 바위에 깔린 듯 숨을 쉴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의 그는 어떻던가. 자신은 홀로 선 그의 뒷모습에서 무슨 감정을 느꼈는가.

"제가 마수정을 파괴해서인가요? 아니면 인간인 레기온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

"마수정을 파괴한 것에 대해서는, 만약 그게 마왕님께 중요한 일이었다면 정말 죄송해요. 마수정의


촉수가 저를 납치하려고 했어요. 벗어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율리아의 해명에도 바엘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율리아는 반쯤 체념한 채 말을 이었다.

"레기온에 대해서라면, 마왕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싫어하시는 줄 몰랐어요. 그간 별다른 말씀이 없었고
전쟁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들어서……. 레기온과 함께 있었던 건 제 본의가 아니었어요."

"본의가 아니다."

이상하게도 나직한 바엘의 목소리가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도 내비치지
않던 그가.

"그게 아니지 않나. 인간 소드마스터가 서쪽 땅에 있다는 걸 알고 어린 용의 둥지에서 빠져나간 거겠지.


그와 함께 도망치기 위해, 이런 얼굴을 하고선 영악하게도."

바엘의 손가락이 크게 뜨인 율리아의 눈가를 툭툭 건드리며 밑으로 내려갔다. 뺨을 훑고 목가로 떨어지는


손끝에 어떠한 파괴적인 갈망이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왕님은 레기온이 그렇게나 싫었던 걸까.'

그는 레기온을 죽이지 않았다. 마왕의 권능 앞엔 마나 운용의 정점에 선 소드마스터조차 무력하다고


들었으니, 바엘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이미 레기온을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율리아는 그러한 바엘의 관용이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능력은 언제 눈떴지? 그것도 인간 소드마스터 가르쳐 주던가?"

"레기온과는 정말 무관해요. 저는 분명 파이몬의 저택에서 잠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주변이 전부 산이어서


……."

"계속해."

율리아는 쇄골 언저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말을 멈췄다. 바엘의 손가락이 당장이라도 가슴골을 파고들
것처럼 위태롭게 까딱였다.

"왜 갑자기 그런 곳에서 깨어났는지 무섭고 이유도 몰랐지만 일단은 움직여 보자고 생각하다가 레기온을
만났어요. 단지 그뿐이에요. 걱정하실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군."

"네?"

"마수정이 너를 얌전히 납치만 했을 리가 없을 텐데. 죽음의 산은 마수정이 만든 껍질에 불과해.


마정석을 보호하는 마신의 탑처럼 말이지."

바엘을 올려다본 율리아는 그가 창밖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율리아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멈칫했다. 파이몬의 저택에서 마주 보였던 거대한 산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런 율리아의 턱이 일순 붙들려 돌아갔다. 바엘의 붉은 안광이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주의 깊게


훑었다.

"네가 단순한 열쇠라고 생각하지 마. 지하에 흩어진 마수정은 전부 너를 노리고 있을 테니. 이번 같은


일을 몇 번이나 더 겪을지 모른다는 소리다."

"하지만 저는……. 마수정은 단순히 마력을 담는 아티팩트가 아닌 건가요?"

순간적으로 자신은 진짜 열쇠가 아니라고 말할 뻔했다. 진짜 열쇠는 율리아 브에스드라가 아닌 에스델


브에스드라이고, 나는 원래 이세계엔 있어선 안 될 이물질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바엘은 갑자기 말을 바꾸는 그녀가 미심쩍었는지 눈썹을 스윽 밀어 올렸지만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마수정은 마정석의 파편이다. 본체의 의지를 잇고 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

"마정석에 자아가 있다는 뜻인가요?"

"있었다…… 고 해 두지. 지금은 단지 관성에 의해 움직이는 잔재일 뿐이니."

턱을 옥죄던 손이 소리 없이 풀렸다. 바엘의 눈치를 보던 율리아는 그의 손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자


은근슬쩍 몸을 돌려 밑으로 내려왔다. 바엘의 허벅지에 앉아 있으면 그와 앉은키가 똑같아져서 눈이
정면으로 마주 보였다.

그의 시선은 무척 깊고 뜨거웠다. 단순히 보이는 것뿐인데도, 그의 눈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율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찰나,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떴을 때부터 줄곧 쓰리고


부어 있던 목구멍과 다리 사이가 깔끔히 가라앉았다. 산을 헤매고 마수정과 싸우는 동안 생겼던 크고 작은
상처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마왕님, 혹시 저를 치료해 주신 건가요?"

무감한 얼굴을 한 바엘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이번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전혀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어쩌면 무감한 껍질 이면의 존재를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다음은 없으니 두 번 다신 내게서 떨어지지 마."

그의 대답이 단순히 도구를 향한 독점욕이 아닌 '다치지 말라'는 말로 들리는 건 이상한 일일까.


율리아의 입가에 사랑스러운 미소가 걸리려던 찰나였다. 단단하게 닫힌 창문 너머에서 쩌렁쩌렁한 고함이
울렸다.

"이 망할 꼬맹이가, 당장 안 비켜?!"

"하찮은 인간 주제에! 이 몸의 둥지에 발 하나라도 들였다간 까맣게 태워서 용암에 던져 버릴 줄 알아!!"

놀란 율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앞에 바엘이 있어서 레기온에 대해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가 자신 혼자 내버려 둘 리가 없는데.

"아, 진짜! 무슨 어린애가 성격이 이따위야!"

"어린애? 지금 이 몸을 코흘리개 어린애 취급한 거야?!"

"그럼 키가 땅에 붙었는데 이게 애지 어른이냐!"

"가만 안 둬. 가만 안 둬. 가만 안 둬. 죽여 버릴 거야!!"

2 층에 위치한 율리아의 침실 너머로 거대한 화마가 단번에 솟구쳤다. 대경실색한 그녀는 곧장 침대에서
뛰어내려 문 밖을 향해 미친 듯 달려갔다.

"……."

침실에 홀로 남은 바엘은 텅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열쇠가 인간 사내에게 가는 것이 거슬렸다면 힘으로라도 다시 눕혔으면 될 일인데, 이상하게도 손이


나가지 않았다. 눈에 들어온 열쇠의 팔이 생각보다 훨씬 가느다래서, 살짝만 건드려도 아프다며 눈물을
펑펑 쏟아 낼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지."

고작 열쇠 따위가 울건 말건 자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목숨만 붙어 있다면 계획에 쓰기엔 충분할 텐데.

바엘은 느릿하게 고개를 젖혔다. 열쇠의 뒷모습은 어느새 복도 너머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67 화

07. 지상에서 온 사자

"작은 열쇠야, 고생 많았지?"

"아가레스 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이 작고 사랑스러운 열쇠를 어쩌면 좋을까, 응?"

율리아는 악마성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소란스러운 환대를 받았다. 서쪽 땅에서 지낸 시간은 고작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중간에 엄청난 일을 겪었기 때문일까, 눈앞의 풍경을 아주 오랜만에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아가레스의 뒤편엔 동생에게 왜인지 잔소리를 퍼붓는 바르바토스가 있었고, 꼬리를 붕붕 흔들며 덤벼들
준비를 마친 베로, 그런 베로의 옆에서 덩달아 꼬리를 흔드는 보티스가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사실 보티스의 잘못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보다 큰 독사의 꼬리가 맑은 마라카스 소리를 내는 걸 듣고


있자니 다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율리아는 마침 앞서 걷는 바엘을 재빨리 뒤따라가며 자리를 피하는 걸
택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광활한 홀을 지나 원형


계단을 올라 긴 회랑을 걷는 동안, 마중하러 나온 악마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율리아의 등 뒤를 따르고
있었다.

처음엔 왕인 바엘을 따라가는 거겠지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고위급 마족이 고작 인간 하나를
뒤따른다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하지만 사이에 끼어 부담스러워진 율리아가 갈림길에서 슬쩍 방향을 틀었을 때, 아가레스와 바르바토스,


그리고 보티스는 왕이 아닌 그녀의 뒤를 따르는 걸 택했다. 바엘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데, 세 마족은
주군이 가는 방향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 마왕님은 저쪽으로 가고 계신데요?"

"알고 있는데, 작은 열쇠야?"

"그래서 뭐지."

"쉬익, 쉬이이익."

율리아의 커다란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정처 없이 떨렸다. 등 뒤에서 레기온과 파이몬이 달려오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한참을 더 그렇게 있었을 것이다.

"뭐야, 왜 다들 율리아 곁에 서 있어? 율리아 괴롭혀?"


"무슨 소리야. 파이몬 말이 맞아?"

싱글싱글 사람 좋게 웃던 레기온의 눈초리가 단박에 날카로워졌다. 그의 등에 업혀 있던 파이몬의


손아귀에서 불구덩이가 끓어오른 건 덤이었다.

그들은 저택에서 한참 떨어진 사막에서 이박 삼일을 꼬박 싸운 뒤 세상 둘도 없는 형제가 되어 돌아왔다.


율리아가 사막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그들은 사나이 간의 약속이라며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씨익 웃는 모습에, 율리아는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라고 안도할 수 있었다.


레기온은 원래 어린아이들을 좋아했고, 아이들도 그를 잘 따랐으니까 말이다.

다만 지금은 흐뭇해할 때가 아니었다. 율리아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그냥 조금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어. 이제 다들 가실 거야. 그렇죠?"

"내가 왜, 작은 열쇠야?"

"나의 거취를 네 맘대로 결정하지 마라."

"쉬익, 쉬이이익."

세 악마가 일제히 반발했다. 레기온과 파이몬의 눈초리가 곧장 세모꼴이 되는 것을 보며, 율리아는


어색하게라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율리아는 낮 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게 허락된 개인 침실로 들어섰다. 그녀가 먼저 소파에 앉자 마족 넷과


인간 하나가 주변에 자연스럽게 걸터앉았다. 율리아는 그들의 면면을 살피다 문득 자리에 없는 존재에
생각이 미쳤다.

"저, 혹시 레벤나는 깨어났나요?"

"안 그래도 확인하라고 키마리스를 보냈어. 하지만 아직인 것 같네.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아가레스는 율리아의 허리를 살살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아가레스의 움직임은 툭 치면 깨질 듯한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웠지만, 그만큼 진득한 욕망 또한 함께 묻어 있었다.

"녀석이 잠든 틈에 실컷 만져 둬야지. 평소엔 입맛만 다셔도 잔소리질이니 답답해 죽겠어."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주군의 것이다. 그러니 레벤나의 주장은 합당하지."

"그래, 잔소리꾼 하나 해치웠나 싶었어."

아가레스는 바르바토스를 향해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율리아를 끌어안은 손은 풀지 않은


채였다.

두 악마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율리아는 빠져나가 보려 슬쩍슬쩍 허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아가레스의
완력이 너무 강한 탓에 마치 바위틈에 끼인 듯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율리아는 결국 깨끗하게 포기하고 아가레스에게 몸을 맡겼다. 그녀의 입꼬리가 큰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바르바토스는 그런 둘을 의아한 눈으로 응시했다. 하지만 자신이 알 바는 아니라는 듯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제게 볼일이 있으신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바르바토스 님은 시간을 조금도 허투루 쓰지 않으시잖아요. 그런데 아까부터 저를 따라오시니까 이유가


있나 생각했어요."

"뜻밖에 머리가 좋군."

율리아는 그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그에게 쓸 만한 존재인지 묻는다면, 답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아니오'였다. 책상에 앉아 복잡한 공무를 해결할 만큼 정치에 해박하지 못했고,
하다못해 인질로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치워 버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하겠지…….'

지금쯤 지상에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을 이들을 떠올렸다. 눈엣가시 같던 자신이 사라졌으니 그들은
조금은 더 행복해졌을까.

율리아는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있기 때문에 불행했던 사람들이었다. 뼈아픈 부정의
증거가 눈앞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고 있으니 얼마나 거슬렸을까. 물건이었다면 부숴서 버렸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은 사람이기에 그러지 못했을 뿐이었다.

"너의 이번 서부행은 너의 중요성에 대해 재차 검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마정석과 열쇠에 대한 것 말씀인가요?"

"그 부분에 대한 중요성 검토는 진작 끝났다. 내가 말하는 건 다른 방면에 대한 것이다."

"답답하긴. 그렇게 지껄이면 작은 열쇠가 알아듣나?"

바르바토스가 미묘하게 말을 돌리는 것 같다고 느낀 게 율리아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작은 열쇠야, 실은 네가 없는 동안 일이 좀 있었어. 주군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았거든."

"마왕님께 무슨 일이 생겼었나요?"

율리아는 퀘스트를 완료한 뒤 파이몬의 저택에서 눈을 떴을 때를 떠올렸다. 바엘의 행동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었다. 그는 화를 내고 있었고, 파괴적인 갈망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바엘은 그때그때 기분대로 움직일지언정 행동에 기준이 없는 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율리아는 이제껏 그를
대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의 사적 영역을 지켜 준다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너그럽게 넘어가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바엘은 확실히 달랐다. 단지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뿐이었다. 그의 영역을 침범하는
무신경한 짓 따위 하지 않았다.

'넌 내 것이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게 아니지 않나. 인간 소드마스터가 서쪽 땅에 있다는 걸 알고 어린 용의 둥지에서 빠져나간 거겠지.


그와 함께 도망치기 위해, 이런 얼굴을 하고선 영악하게도.'

처음엔 바엘이 화를 낸다고 생각했다. 마수정을 파괴한 일이 그를 크게 자극한 것이라고.


'다음은 없으니 두 번 다신 내게서 떨어지지 마.'

하지만 그의 다음 말은 단순히 도구를 향한 독점욕으로만 들리진 않았다. 지하에서 지내는 동안 비대해진


자의식이 불러온 착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아가레스는 짧은 상념에 잠겼던 율리아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응시하다 말을 이었다.

"신하된 몸으로 주군을 욕하기는 좀 그런데 말이지, 결론만 말하자면 작은 열쇠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 네가 마계로 내려오기 전 주군께서 어떤 분이었는지 새삼 추억할 수 있었지."

"네……?"

"바르바토스랑 보티스도 지금은 멀쩡한 척하지만 그땐 당황한 면상이 제법 볼만했단다. 네가 떠난 게 고작


며칠 전인데도, 널 데리러 서쪽 땅까지 직접 내려가려고 했었어."

아가레스는 바엘의 명예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나름대로 최대한 말한 것 같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율리아의
입장에선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율리아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바르바토스를 보았지만 그도 역시 그 이상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쯧, 혀를 차더니 곧장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서쪽 땅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듣고 싶은데."

"마수정을 파괴했어요. 죄송합니다."

"더 자세히."

그의 상체가 앞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반대편 소파에 앉은 율리아의 말을 경청하는 듯한 자세였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레라지에 님께 사역마를 붙이셨지요? 그럼 필요한 건 아마도 전부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따로


말씀드릴 일은……."

"늦은 밤이었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서쪽 하늘에 눈부신 빛기둥이 내리꽂혔다.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이 너의 힘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지. 나뿐 아니라 지하의 모두가 말이다."

율리아는 말을 잃었다. 파이몬을 무릎에 앉힌 채 놀아 주던 레기온이 바르바토스를 응시했다.

"너의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거지? 그건 열쇠로서의 권능인가? 난 이제껏 네가 일정수준에 도달한
마법사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네 능력의 끝을 짐작할 수 없어. 말도 안 되는 가정일지 모르지만, 네가
마신의 힘 일부를 끌어 쓰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대단한 것처럼 말씀하셔도, 고작 인간인 제가 마신의 힘이라니 말도 안 돼요."

"하지만 인간인 너는 마정석의 열쇠지. 네겐 힘이 있어. 단순히 마력 저항을 넘어선 무언가가. 나는


그것이……."

바르바토스는 말을 끊더니 무언가 고심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자 시야 밑에 여지없이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바르바토스

말마따나 고작 인간일 뿐인데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바보 같군. 열쇠가 마신의 권능을 끌어 쓰고


있다고? 순간적으로 조금 흥분했군.]
그의 머릿속이 자괴감으로 차갑게 식어 가던 찰나였다. 레기온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깼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따위 허무맹랑한 말로 율리아를 몰아붙일 생각이라면 그만둬."

"레기온."

"작은 열쇠야, 괜찮으니 놔두렴."

율리아가 그를 말리려 했지만 아가레스도 썩 편해 보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의 말에 동조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작은 열쇠를 찾아온 목적은 그게 아니잖아? 주군께 작은 열쇠는 그만큼 중요한 존재이니 이젠
키마리스 하나에게만 호위를 맡길 수 없게 됐기 때문이지. 작은 열쇠를 공연히 괴롭히지 마."

방금까지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점을 지적당한 바르바토스가 표정을 굳혔다. 그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68 화

율리아는 양쪽을 번갈아 보며 애꿎은 치맛자락만 붙들었다. 낮게 한숨을 쉰 바르바토스는 보티스를 이끌고
나가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다 불현듯, 시선을 돌려 율리아를 응시했다.

[▷바르바토스

본인도 힘의 근원을 모르는 기색이니 재촉해 봤자 소용없겠군.]

모노클 너머 가느다란 눈동자가 율리아와 창밖의 탑을 번갈아 보았다.

[▷바르바토스

하지만 열쇠 사용의 해답이 바로 그것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군. 탑의 기록을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겠어.]

바르바토스의 동공에 확신 어린 이채가 돌았다. 먼저 밖으로 나간 보티스가 그런 그를 툭툭 건드리고,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바르바토스는 그제야 발걸음을 옮기며 문을 닫았다.

한편, 율리아는 빠르게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사리물었다. 불안감으로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남의 귀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혹시 내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걸까.'

바르바토스는 판단력이 예리해 율리아가 대하기 가장 어려운 악마 중 하나였다. 수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항상 행동을 조심하고 말을 아꼈다. 그의 날카로운 눈초리 앞에선 시스템 창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만약 가짜라는 게 알려지면, 진짜 열쇠는 에스델이고 자신은 이 세계의 오류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또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려지게 되는 걸까.

"작은 열쇠야, 저 녀석 말은 신경 쓰지 마. 요즘 업무 과다로 돌아 버렸어. 인간 측에서 마계와의 수교와


영구 화친을 요구하고 있거든. 주제도 모르고 염치마저 없는 끔찍한 족속들이지."

"그렇군요……."
"물론 너는 예외니까 그런 표정 할 것 없단다. 어쨌든 그래서 앞으론 최고위급 마족이 너의 호위를 맡게
될 거야. 인간 측에서 사자가 오게 되면 감히 접촉하려 들 수도 있고, 무엇보다 너는 주군의 안정을 지켜
주는 소중한 존재니까."

"잠깐, 사자가 온다고?"

레기온이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설령 사자가 온다 하더라도 그게 율리아와 무슨 상관이지?"

그제야 율리아의 시선도 아가레스를 향했다. 전쟁이 끝났으니 이런저런 협정을 맺어야 할 테고 그러다
보면 사람이 오가야 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사절이 와도 자신을 피하면 피했지 그쪽에서 먼저
접촉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아가레스의 이어진 말은 율리아의 생각과 정반대였다.

"놈들이 요구하고 있는 건 황녀 율리아 브에스드라의 반환이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율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으득, 어금니를 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진짜 속셈은 그게 아니겠지. 전쟁이 끝나고 발등에 급한 불이 꺼졌으니 이제 열쇠를 회수해 갈


속셈이야. 정말로 마신이 탄생해 버리면 곤란해질 테니까."

놀란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버렸으면서, 수도 없이 버렸으면서. 누구도 너를 원치 않는다고, 그러니


사라져 버리라고 했으면서. 이제야 간신히 있어도 되는 곳을 찾았는데. 나에게서 가치를 찾아 주는
이들을 만났는데.

"싫어요……."

"작은 열쇠야?"

"저는 가기 싫어요."

"우리도 널 절대 보내지 않을 거야. 이 작고 귀여운 걸 누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넘봐."

아가레스는 율리아를 강한 힘으로 끌어안았다. 뺨에 닿는 군복이 칼날처럼 빳빳했지만 율리아는 그 촉감이


세상 무엇보다 포근하게 느껴졌다.

"인간들은 에스델 브에스드라를 지키기 위해 너를 버리고 우리를 기만했어. 결과가 어떻든 간에 난 그


원한을 절대 잊지 않아. 그런 곳에 너를 넘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아가레스 님……."

"네가 가면 또 어떤 취급을 당할 줄 알고."

아가레스는 율리아의 작고 둥근 뒤통수를 슥슥 쓰다듬었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커다란


눈망울이 그렁거렸던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아가레스
이 작고 여린 게 지상에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말만 들어도 울어. 빌어먹을 인간들.]

등 뒤에서 레기온의 뚫어질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은 이제껏 그의 앞에서 어두운 과거를 내색한 적이
없었다. 레기온야말로 전쟁터에서 생사를 오가며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테니까, 자신은 그럴 자격 따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을 끌어 안아주는 아가레스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율리아는 그녀의 품에
비비적대며 파고들었다.

[▷아가레스

훗! 봐라, 건방진 인간 소드마스터. 이것이 바로 작은 열쇠에게 사랑받는 나와 그러지 못한 너의


차이다.]

"……젠장."

어쩐지 등 뒤가 조용하다 싶더니 아가레스와 레기온이 시선만으로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 * *

율리아는 그날 해가 지기 전까지 아가레스의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공무 때문에 시간을 오래


낼 수 없었지만 대신 파이몬이 함께 있어 주었다.

달이 뜰 즈음에 율리아는 바엘의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바엘은 때마침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피곤한 듯 인상을 쓴 채 눈을 감았다. 벗은 상체가 붉은 달빛에 고스란히 비쳤는데, 탄탄하고 깊게 패인
근육이 붉게 물드니 더욱 위협적으로 보였다.

율리아는 그의 모습에 홀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불러야 할까? 하지만 방해하고 싶지 않아.'

노크까지 하고 들어왔다. 그런데도 모를 정도면 생각에 잠겨 있는 게 분명했다.

율리아는 보온용 겉옷을 벗으며 조심스럽게 실내로 들어왔다. 왕의 체구에 맞춰 모든 것이 큼직한 침실


한편에 그녀를 위해 마련된 작은 옷걸이가 있었다. 그녀가 손을 뻗은 찰나, 실수로 옷걸이에 부딪힌 탓에
달그락 쇳소리가 났다.

"……."

바엘의 붉은 안광이 흠칫 굳은 율리아의 등으로 향했다. 시퍼런 날이 섰던 안광은 율리아의 뒷모습을


발견하자 무르게 누그러졌다. 그래봤자 기본적으로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탓에 율리아가 보았을 땐 그저
무감한 얼굴처럼 보였다.

"죄송해요. 제가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율리아는 잠옷과 로브를 꺼내며 난처하게 눈알을 굴렸다. 최근 들어 바엘과의 관계가 조금 풀어지려는 것
같았는데 이런 바보 같은 실수로 분위기를 망치는 일은 있어선 안 됐다.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율리아는 잠시 대답을 기다렸지만 바엘은 움직이지 않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바엘의 고개가 다시 창밖으로 돌아갔다.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율리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원피스 끈을 풀었다.

바엘은 사적인 영역을 침범당하는 걸 가장 싫어하는데 방금 그것을 어기고 말았다. 바보 같은 자신.


차라리 침실에 조금 늦게 들어올걸.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원피스는 그녀의 발밑으로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다.

율리아는 옷을 집어 들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당황했다.

어느새 침대 근처까지 걸어온 바엘이 그녀를 선명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둡게 드리운 그늘 안에 서서,
마치 예술품을 감상하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다급히 뒤돌아섰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슴이 답답했다. 젓가락처럼 볼품없고 깡마른 몸이


태어나 처음으로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가 자신을 성애의 대상으로 느끼지 않는 걸 아는 데도 말이다.

'이제 그만 쉬려다가 타이밍이 겹친 거겠지. 방금 너무 급하게 뒤돌아선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의식한다고 생각할까? 주제도 모른다고 여기면 어떡하지.'

율리아가 느끼기에 그녀의 신체는 육감적이고 건강한 몸과 거리가 한참 멀었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서
누구도 욕심내지 않을 그런 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덜미 부근을 진득하게 훑는 시선을 느꼈다. 당연히 착각이겠지 싶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가레스 님이라면 몰라도 마왕님이 그럴 리는 없지.'

율리아는 자꾸만 등 뒤로 향하려는 신경을 애써 억눌렀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던 눅진한 시선이 가느다란
등줄기를 따라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율리아는 착각이라고 간주했다.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엘이었다. 그에게 욕망 어린 시선이라니 당치도 않은 이야기였다.

네글리제 위에 얇은 로브까지 걸치자 기분이 한결 편안해졌다. 외출복은 대부분 원피스였지만 입고 벗는


방식만 그러할 뿐 무게는 거의 드레스와 맞먹었다. 고급 원단에 보석 장식과 레이스 무게까지 합쳐진
탓이었다.

율리아는 오늘 입었던 외출복을 정리해 걸어 놓은 뒤 뒤돌아섰다. 역시나 바엘은 침대 헤드에 기댄 채로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손을 뜬금없이 왜 보는지 궁금했지만 의문을 입 밖에 내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

"들으셨나요? 지상에서 사신이 올지도 모른대요."

그녀는 바엘이 누운 침대 반대편에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크고 무거운 이불을 들추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시시각각 넘쳐나는 마력을 안정시키기 위해선 살갗이 직접 닿지 않는 선에서 그와 최대한 가까워져야 했다.

"그래서 바르바토스 님이 조금 바쁘신가 봐요. 아가레스 님도 그렇고요. 그런데도 제 호위를 맡겠다고 해


주셔서 무척 죄송스러워요.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 싶고……. 왜 그러세요?"

율리아의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졌다. 바엘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름대로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한 건데, 이미 지겹게 들은 걸 또 말한 건가 싶어서 후회가 들었다.

율리아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 담담한 척 했지만 바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인간들이 너를 내놓으라 요구했다지. 가고 싶은가?


평소 두 사람이 나누던 대화의 대부분은 율리아 혼자만의 이야기였다. 그녀가 잠들기 전 그날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털어놓으면 바엘은 그것을 자장가마냥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가 반응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율리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지만 바엘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까보다 좀 더 짙어진 안광으로
되물었다.

"그들에게 돌아갈 속셈이로군. 그렇지?"

그의 단단한 손가락이 율리아의 가느다란 목 언저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원하는 답이 아닐 경우


당장에라도 숨통을 조를 듯 위태로웠지만 그녀는 두려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아뇨, 가고 싶지 않아요. 아가레스 님에게도 부탁했어요. 저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어째서."

"저는 이곳에서 지내는 게 행복하니까요. 비록 제 쓸모가 다할 때까지라는 시간제한이 있지만요. 인간이


지상을 거부하는 게 이상해 보이나요?"

그녀는 담담하게 시선을 들었다. 바엘은 여전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위협적인 빛은 사라졌다. 대신
그의 손가락이 조금 갈급하게 내려와 율리아의 윗가슴을 문질렀다. 각인이 있는 자리를 확인하듯 몇
번이나 반복해서.

69 화

바엘과 접촉이 길어질수록,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였던 것 같기도 했다. 율리아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시선 하나하나에 예민해지고 신경이 곤두섰다.

"으응……."

어째서일까. 지금도 바엘의 숨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박혀들고 있건만, 그것이 조금 더 크고 거칠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 때문에 이성을 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율리아는 혼란스러워졌다. 평소엔 그와 정사를 나누는 게 두려웠다.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재난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기 위한 대가 같은 거라고,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 이렇게 먼저 바랐던 적은…….

"읏, 기분이 이상해요."

"어떻게 이상하지?"

"자꾸만 시선이 느껴져요. 그래서 부끄러워요. 이런 내 자신이 창피해. 아읏!"

바엘은 율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글리제 끈을 뜯고 가슴을 벗겨 냈다. 그녀의 마른 젖무덤은 바엘의


커다란 손을 반이나 채울까 싶을 정도로 작았지만, 그는 율리아의 가슴이 세상에서 가장 육감적인 것처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바엘이 가슴을 주무를 때마다 단단한 손바닥 아래 여린 유두가 몇 번이고 쓸렸다. 보지 않아도 끝이
뾰족하게 섰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혼자 반응하는군."

"그게 아니라, 으응, 손바닥이……."


율리아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바엘의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가 끼어 버렸다. 그 상태로 가슴을 주무르자
끼워진 선단이 압박되며 기묘한 기분이 슬금슬금 퍼져 나갔다. 그녀의 숨소리에 조금씩 비음이 섞여
들었다.

"아, 어떡해."

율리아가 그를 막아 보려 했지만 역효과로 되레 반대편 가슴까지 한 손에 잡혔다. 양쪽 유두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마구 희롱당했다. 기묘한 감각은 이제 가슴 언저리를 너머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율리아의 허벅지 안쪽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다리를 배배 꼬자 안쪽의 음핵이 압박되며 야릇한
감각이 더 강하게 퍼졌다.

"아, 흑……!"

그녀의 목대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자 바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녀가 허락 없이 끝에 도달하려


하고 있었다. 감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엘은 즉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켜 율리아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무엇으로 인해 절정으로 가고


있는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가련하고 욕심 많은 몸이었다. 그조차 녹여낼 만큼.

"쯧, 안 되지."

그렇다고 허락 없이 가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바엘은 네글리제를 찢다시피 벗긴 뒤 율리아의


허벅지를 붙들어 활짝 펼쳤다.

순백의 속옷 가운데가 푹 젖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자 마치 지금껏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목이 탔다.

"말해. 어떻게 해 주길 바라지?"

"놔, 놓아……. 흑!"

바엘은 율리아의 허벅지를 단단히 붙든 채 고개를 숙였다. 얇은 천은 그의 뜨거운 숨을 막는데 하등


도움도 되지 않았다. 율리아의 허리가 비틀렸다.

"하윽, 아, 이런 거, 싫어."

"그럼 말해. 지금 뭘 원하는지."

"싫어, 싫어어……."

해갈되지 못한 충동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 들수록 바엘의 입 안은 바짝 말랐다.
달콤한 샘이 눈앞에 있었다. 그를 위해 고인 아주 다디단 샘이.

바엘의 입술이 팬티의 젖어 든 부분에 닿았다. 그는 마치 키스하듯 비부를 집어삼키고 그녀의 구멍이 있을
부분을 혀끝으로 쿡쿡 찔렀다. 그가 고개를 비틀 때마다 날렵한 코끝이 율리아의 음핵을 뭉갰다.

율리아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졌다. 아랫배에서 뜨겁게 퍼져 나가는 감각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도달하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아아, 아, 어떡해."

율리아의 턱이 빳빳하게 들렸다. 속옷을 입고 있음에도 아래에서 질척한 물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바엘의 입술과 맞닿은 부분에서, 그의 혀가 파고 들어갈 듯 강하게 찌르는 곳에서.
"안 돼, 아, 아……!"

가느다랗고 위태롭던 교성이 일순 끊겼다. 율리아가 도달하기 직전, 바엘이 고개를 든 것이다. 율리아의
커다란 눈망울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미칠 듯한 열기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쑤시고 돌아다녔다.

그녀가 정말로 울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바엘이 그녀의 몸을 미끄러지듯 타고 올라왔다. 키스하듯
종이 한 장 차이의 거리를 두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바엘이 속삭였다.

"무엇을 원하지?"

"다, 당신……."

"그럼 이름을 불러."

율리아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와중에도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는 마계의 왕이었고 잔인무도한


점령자이자 모든 마족들의 정점에 선 자였다. 누구도 허락받지 못한 그의 이름을, 자신 따위가 고작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바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바르르 떠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허리를


움직였다. 두꺼운 옷 너머로도 존재감이 선명하게 느껴질 만큼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그녀의 비부를 꾹
짓눌렀다.

"읏!"

바엘의 무게를 실은 허리 짓에 율리아의 몸이 위쪽으로 떠밀렸다. 그럼에도 그녀가 답을 망설이자 바엘은


재촉하듯 제 하반신을 그녀의 다리 사이에 대고 강하게 압박했다.

"네가 가지고 싶은 악마의 이름을 불러."

"아, 제발, 용서해……."

"갈망하는 것을 말해."

"나의 왕, 바엘."

율리아는 결국 유혹에 패배했다.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음에도 바엘의 귀엔 그것이 세상 무슨 말보다도


선명하고 달콤하게 들렸다.

푹 젖어 버려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속옷은 진작 찢어져 침대 밑을 나뒹굴었다. 바엘은 자신의 하의 역시


벗어 버리며 흉기처럼 부푼 성기를 그녀의 질구에 맞췄다.

"보기 좋군."

꽉 다물린 입구 틈으로 투명한 물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이 고스란히 고여 있는 밑의 모습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바엘은 완전히 홀린 사람처럼 율리아의 음부를 응시했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바로 그때, 그의 귓가에 재촉하듯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바엘……."

율리아의 가느다란 팔이 사내의 조각 같은 가슴팍을 타고 올라 팽팽하게 힘줄이 선 목덜미를 가득


끌어안았다.
"바엘, 당신의 것을 주세요."

"……."

"당신을 원해요."

율리아는 자신 혼자만 미쳐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독한 쾌락에 굴복해 간절히 애원하는 동안, 살을
맞댄 바엘에게선 열기의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율리아의 가쁜 숨소리에 미미한 원망이 섞여 갔다. 그녀의 등허리를 끌어안은 바엘의 안광이 돌이킬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흑……!"

율리아는 제 몸을 가르고 들어오는 육중한 부피감에 허덕였다. 흡사 짐승의 성기가 파고드는 것 같았다.
핏줄이 흉흉하게 곤두선 뱀의 머리가 비좁은 틈에 억지로 고개를 쑤셔 넣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봤다면
무서워서 울먹일 게 분명한 광경이었다.

"하윽, 끅, 마왕님!"

"그게 아니지."

"바엘, 바엘……."

선홍빛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발가락이 잔뜩 곱아들어 시트를 마구 긁었다.

페니스가 눅진하게 녹아든 점막을 후비는 감각이 미칠 정도로 좋았다. 뭉툭한 귀두가 내벽을 긁을 때마다
쾌감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뭉그러졌다.

율리아는 애가 타서 허리를 들썩였다. 그녀의 구멍은 이미 터질 정도로 잔뜩 머금었지만 그럼에도


부족했다. 어서 빨리, 바엘이 더 깊은 곳까지 들어와 주길 바랐다. 저릿저릿 간지러워 견딜 수 없는
안쪽을 마구 긁어 주기를 기다렸다.

아랫배가 강하게 조여들자 머리 위 바엘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큭, 내가 봐주는 게 싫었던 모양이지. 그냥 처넣을 걸 그랬나?"

율리아의 눈망울이 불안감으로 떨렸다. 그가 거칠게 나오는 게 두려웠다. 그가 사정없이 쑤셔 주길


바랐다. 상반된 대답이 동시에 목구멍 밑까지 치밀었다. 그녀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걸까, 바엘이
허리를 크게 쳐 올렸다.

"끅……!"

고개만 간신히 들이밀고 있던 성기가 율리아의 안을 단번에 찌르고 들어갔다. 거칠게 자극당한 내벽에서
지독한 쾌감이 퍼져 나갔다.

율리아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몰아치는 절정에 할딱였다. 경련하는 입술에선 끅끅, 목 졸린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바엘을 머금은 곳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점막을 난잡하게 짓뭉개는 페니스 때문에 절정이 쉴 새 없이
몰아닥쳤다. 그의 막대한 부피감은 단지 안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율리아에게 죽고 싶을 정도의 열락을
선사했다.

"하악, 하, 으응!"
"괴로운가."

바엘의 붉은 눈동자가 제 등을 마구 긁어 대는 작고 가녀린 여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침대 헤드에 반쯤


기대 있는 율리아의 상체를 안아 들어 자신에게 완전히 밀착시켰다. 무게가 한 곳에 쏠리며 자연스럽게
삽입 지점이 깊어졌다.

바엘은 반대편 손으로 율리아의 한쪽 허벅지를 들어올렸다. 뜨겁고 질척한 점막이 그의 핏줄 선 육중한
기둥에 더덕더덕 들러붙었다. 깊이 맞물린 채 꾹꾹 조여드는 구멍에 홀려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죽고 싶어도 참아. 악마를 발정시킨 값은 치러야지, 안 그런가?"

낮고 깊은 목소리가 율리아의 고막을 긁었다. 동시에 그녀의 안에서 때를 기다리던 기둥이 빠르고
집요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엘, 끅, 아흑, 바엘!"

기둥이 박혀 들며 자궁구를 쳐 올릴 때마다 율리아의 시야가 까맣게 암전됐다. 호흡이 막히자 지독한
쾌락이 숨의 빈자리를 대신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율리아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처박혔다.

육중한 페니스는 그녀의 안쪽을 사정없이 긁어 대며 물을 밖으로 뽑아냈다. 음액이 엉덩이 골을 타고


도로륵 흐르는 감각조차 그녀에겐 버거웠다. 잔뜩 예민해진 온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제게 쏟아지는 쾌락을
기쁘게 받아먹었다.

"좋아, 좋아아, 흐응! 아, 더어……!"

비명처럼 올라가던 그녀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애처롭게 끊겼다.

정점에 도달하며 뱃속이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보루가 터진 것처럼 뜨거운 열락이 그녀의 몸을 마구
들쑤시고 점령했다. 몰아치는 쾌락에 그녀는 턱을 치켜든 채 덜덜 떨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바엘이 그녀의 턱 끝에 부드럽게 입술을 갖다 댔다. 그러곤 조금의 휴식도 없이 곧장
허리를 흔들었다. 이미 정점에 도달한 상태에서 쾌락이 겹겹이 몰아치자 율리아의 몸이 더욱 빳빳하게
굳었다.

"가고 있는데, 가고, 으으응!"

"크윽, 좁군."

"안 돼, 바엘, 아, 멈춰, 멈, 아앙!"

페니스가 구멍을 꿰뚫을 때마다 율리아의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하지만 바엘은 속도를 줄이기커녕 더욱
빠르게 엉덩이를 쳐 올렸다. 지옥 같은 쾌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70 화

"율리아."

그의 나직한 중얼거림은 탁탁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에 묻혔다. 또다시 절정에 치달은 율리아의 내벽이 확
조여들고, 그녀에게 자극받은 바엘 역시 버티지 못하고 파정했다.

사정과 동시에 펼쳐진 거대한 날개가 두 사람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바엘이 지독한 열락을 견디지 못하고
힘을 개방한 것이다. 강력한 돌풍이 둥지 근처에 휘몰아쳤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는 오직 제 품에 안긴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바르르 경련하며 몸을 뒤트는 열쇠의 모습은 그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눈을 뜬 이후로 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단지 누군가를 보는 것만으로 목구멍 안쪽이 숨 막히게 조여드는 이런 기분은.

"인간 측의 사자를 부르지."

붉은 달빛을 받은 바엘의 얼굴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서늘하고 매혹적이며 아름다웠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듯 짧게 입을 다물었다가 젖은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그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관능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너를 믿어 보겠다."

"……네."

율리아가 홀린 듯 그의 뺨을 쓰다듬자 바엘이 그쪽으로 고개를 기댔다. 그러곤 율리아의 손을 끌어다 제


입술에 부드럽게 눌렀다. 코끝에 닿는 찰나의 체향조차 그의 목을 아프도록 졸랐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엘은 결국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 * *

지상에서 출발한 백 명 남짓한 사신단이 지옥문을 통과해 마계로 내려왔다. 비록 숫자는 적을지언정
그들은 각 지역에서 손꼽히는 전사들이었다. 거대한 깃발을 펄럭이며 행진하는 사내들의 기세는 드높았다.

침실 창가에 선 율리아는 지평선 너머로 이는 뿌연 흙먼지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사자 문양 깃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자신에게 창을 겨누고 절벽 밑으로 떨어뜨린 이들의 상징.

'브에스드라 황실 친위대…….'

황가의 검이자 방패인 친위대가 브에스드라 밖을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그들이 이런 먼 곳까지
직접 온 이유는 아마 자신 때문일 터였다. 명목상이라도 황녀의 이름을 갖고 있는 자신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발등에 급한 불이 꺼졌으니 이제 열쇠를 회수해 갈 속셈이야. 정말로 마신이 탄생해
버리면 곤란해질 테니까.'

레기온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율리아는 초조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신단이 마왕성에 체류하는 기간엔 밖을 돌아다닐 생각이 없었다. 아가레스도 일처리가 끝나는 대로
그들을 하루속히 내쫓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들과 같은 장소에 머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율리아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잔상이 지금의 평온을 산산이 깨뜨리려는 것 같아서.

착잡한 얼굴을 한 율리아의 뒤로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그녀의 몸이 창을 등지도록 홱 돌려졌다.

"마왕님?"

오늘도 바엘은 하의만 대충 걸치고 있었다. 남자답게 크고 떡 벌어진 골격과 깊게 굴곡진 복근이 그녀의
눈앞에서 꿈틀댔다.

저 위에 올라타 밤새 울었던 게 고작 며칠 전이었다. 눈 깜짝할 새 얼굴이 확 익어 버린 율리아가 시선을


피하려는 찰나였다.

"왜 그렇게 밖을 유심히 보지? 이제와 마음이 바뀌었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냥 기분이 조금……."

생각 없이 속내를 털어놓으려던 율리아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언제부터인가 바엘에게 자꾸만 허물없이


굴고 있었다.

밤마다 낮에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늘어놓는 정도는 약과였다. 가끔은 옛 기억을 조금씩 털어놓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바엘은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심기가 썩 편해 보이진 않았다. 왜인지
험한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었다.

조심해야 하는데, 그의 곁에선 자꾸만 기분이 가벼워진다. 율리아는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아, 마왕님. 오늘도 나가시나요? 요즘 들어 자주 외출하시는 것 같아요."

"나가면 도망치려고?"

"또!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 어디 안 간다니까요."

"못 믿겠군."

바엘은 그녀의 뒤통수를 제 가슴팍 위로 꾹 눌렀다. 그의 뱀처럼 날카로운 동공이 율리아의 동그란 정수리
너머 지평선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율리아는 갑작스러운 침묵에 눈만 깜빡였다.

"당분간 내 곁에 붙어 있어. 멋대로 움직였다간 용서하지 않겠다."

"네?"

"낮에도 마찬가지야.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

바엘의 손이 율리아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아쥐었다. 살갗에 닿는 서늘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는데 찰그락, 맑은 금속음이 그녀의 귀에 스쳤다. 퍼뜩 시선을 내리니 익숙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붉은 마력의 목걸이

마왕 바엘이 자신의 강력한 마력을 불어넣어 만든 목걸이. 숨겨진 기능이 있다. 사용 기회 ?]

"이번엔 잃어버리지 말도록 해."

피처럼 붉은 보석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바엘의 시선이 그곳에 짧게 머물렀다가 이내 율리아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은 제 가슴팍에 떨어진 목걸이로 향해 있었다.

"예뻐요. 감사합니다."

"또 갖고 싶은 게 있나?"

"여기서 더 바라면 벌 받을 거예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율리아의 입꼬리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바엘은 그 모습에서 왜인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가 웃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 했다. 충동적으로 율리아를 끌어당긴 바엘이 고개를 숙인 찰나였다.

"주군, 인계에서 온 사자가 성으로 들어오기를 청하고……."

벌컥 문이 열리며 바르바토스가 들어왔다. 뺨이 삽시간에 익어 버린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바엘을


밀쳐냈다. 마계의 왕이 고작 새털 같은 힘에 밀릴 리가 없건만, 바엘은 생각보다 쉽게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대신 바엘의 등 뒤로 마력 저항이 있는 율리아는 알아챌 수 없는 마력의 파장이 흘렀다. 바르바토스가


바닥에 즉시 부복했다.

"제가 때를 잘못 골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

"사자의 일은 나중에 따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일단 성 안으로 들이되 제한 구역 밖으론 넘어가지 않도록


……."

두 악마가 나누는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율리아는 바엘의 뒤에 숨어서 작게 손부채질을 했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도 아니고 그냥 목걸이를 받았을 뿐인데 심장이 쿵쿵 달음박질 쳤다.

율리아는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작게 심호흡했다. 청력이 뛰어난 마족들 앞에선 전혀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말이다.

보고를 마치고 자리에서 빠르게 물러나던 바르바토스는 문을 닫기 직전, 뒤돌아 선 열쇠의 허리를 감싸는
왕의 모습을 발견했다. 간지럽다는 듯 작게 웃는 열쇠를 왕은 선명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지난 수백 년간 왕을 따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미묘한 기분에 휩싸인 바르바토스는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그러자 열쇠의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 *

인계는 두 개의 제국과 그에 귀속된 여러 소국 및 도시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래는 지금보다 더욱


많은 국가가 있었으나 마-인 전쟁이 장기화되며 두 제국을 중심으로 권력의 판도가 재편됐다. 그리고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선 오늘날의 형태로 완전히 굳어졌다.

이러한 권력 구도로 이득을 본 건 단연 두 제국, 브에스드라와 엘고스였다.

엘고스는 본디 두 명의 소드마스터를 배출한 대국으로 세계의 패자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브에스드라에서


가장 강력한 소드마스터가 탄생하며 엘고스가 독점했던 권력을 양분했다.

'즉, 같은 인간이라도 썩 편한 사이는 아니란 거지.'

바엘에게서 군 통수권을 위임받은 아가레스는 홀에 늘어선 인간들을 구경하며 대놓고 실소를 흘렸다.
조금이라도 먼저 발언권을 행사하기 위해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이는 이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웃음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아가레스의 군공과 잔혹성을 익히 아는 전사들은 그녀의 비웃음에도 차마 대놓고 항의하지 못했다.


전쟁터에서의 그녀는 말 그대로 죽음을 부르는 사신이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군. 이번 여행길은 평안했나?"

"배, 배려해 준 덕분에 큰 어려움은 없었소."

"그랬다니 다행이군. 우리의 위대한 주군께서 그대들의 여정을 위해 신경을 제법 많이 쓰셨거든."

마계와 인계 사이엔 두 지역을 오갈 수 있는 여러 통로가 있었다. 그 중에 바엘이 허락한 입구는 죽음의


계곡, 율리아가 마계로 처음 넘어오던 때 사용했던 곳이었다.
인간 측에선 당시 전황이 급박해 마족들이 요구하는 '마정석의 열쇠'를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후일의
위험을 생각하면 율리아가 지하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을 원하는 이는 없었다. 가짜라는 걸 들켰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탓이었다.

그래서 율리아가 지하에서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국경 지대까지 가는 긴 시간을 먹을 것 하나 주지 않고


굶겼다. 물건 옮길 때나 쓰는 짐마차로 먼 거리를 이동했고 넘어가는 입구도 일부러 가장 위험천만한
곳으로 골랐다.

평소 찬바람만 불어도 며칠 밤낮을 골골 앓던 천덕꾸러기였다. 브에스드라의 모두가 그녀의 죽음을


확신하고 마음을 놓았다.

베리드를 통해 율리아 브에스드라가 진짜 열쇠였음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인사말은 피차 짧을수록 좋겠지. 그보다 내일부터 종전 협정을 진행하기 전,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점이


있다."

아가레스의 시선을 받은 인간들이 숨죽인 채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지옥에 왔다면 지옥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 너희가 이곳에서 지켜야 할 준칙을 어길
시 결과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으니 언사를 신중히 할 것을 권한다."

"우리는 지하에 체류하는 동안 귀하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따를 것이오. 그러나……."

그때, 중갑을 걸친 전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가슴팍엔 제국 브에스드라를 상징하는 사자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일전 그대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황녀 전하를 돌려줄 것을 요청했소. 그런데 그분과 만날 수


없다니, 이는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니오."

"인질의 신병조차 확인하지 못하게 하다니, 황녀 전하께서 이곳에 와 얼마나 지독한 대우를 받고 계신
건지 알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정식으로 항의 서한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오호, 그래서 못 따르겠다?"

아가레스가 턱을 치켜든 것만으로도 홀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길게 찢어진 그녀의 눈동자에서 시퍼런


불덩어리가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내가 들은 이야기는 좀 다른데 말이지."

71 화

아가레스의 등 뒤, 길게 늘어진 휘장 너머로 눈알 두 쌍이 노랗게 번들거렸다. 그녀의 사역마인 식인


악어가 바닥에 집채만 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단순히 그림자의 일부가 저 정도 크기이니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면 얼마나 거대할지 예측조차 어려웠다.

소국 출신의 사자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온 가운데, 슬쩍 드러난 아가레스의 송곳니가 흉흉하게


번뜩였다.

"게다가 너희가 보낸 황녀는 애초에 우리가 요구한 것과 다르지 않았던가. 알고 보니 그것이 진짜


열쇠였다고 해서 너희가 우릴 기만한 일마저 잊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

"그 일에 분노한 게 나뿐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걸 알아주기 바라. 언사를 신중히 할 것을 권한 건


내가 너희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마지막 호의라는 것 또한."

아가레스의 말을 증명하듯 그녀의 등 뒤에 늘어선 악마들이 안광을 서늘하게 내리깔았다. 생각보다 훨씬


적대적인 마족들의 태도에, 인계에서 온 전사들은 일단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가레스는 탁 소리 나게 굽을 부딪친 뒤 '푹 쉬라'고 일갈하며 홀을 나섰다. 날이 선 듯하던 홀의


분위기가 그제야 조금 가라앉고, 인계에서 내려온 사자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늦은 밤, 어두컴컴한 실내에 피처럼 붉은 달빛이 드리웠다. 지상에서 내려온 사자들은 익숙하지 않는


풍경과 분위기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난 엘고스의 출신의 기사들은 저마다 오늘의 감상을 털어놓았다. 가장 먼저 화두에
오른 건 단연 율리아에 대한 소문이었다.

"브에스드라의 두 번째 황녀가 마왕의 애첩이 됐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군. 대공 아가레스가 무려


인간을 감싸고돌다니 말이야."

"마왕이 황녀를 밤마다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고 들었어. 이름이 율리아라고 했던가. 사내 후리는데
둘째가라면 서러운 타고난 요부라더군. 브에스드라의 전쟁 영웅마저 꾀어냈다는 말이 있어."

"잉그렘 5 세의 성정이 보통 독한 게 아니니 그 여식은 어련할까. 그런 간악한 계집이 진짜 열쇠라고 하니


참으로 큰일이야. 마왕을 어떻게 구워삶을지 모르니까 말이야."

낮게 혀를 찬 사내들의 시선이 브에스드라 사신단의 숙소로 향했다. 대외적으론 후계자인 황녀 에스델을


보호하기 위해 동생인 율리아를 대신 보냈다고 했지만 실상은 모르는 일이었다.

'계집의 미색을 이용해 마왕마저 좌지우지하고 싶은 것일지도.'

잉그렘 5 세는 능력과 그릇에 비해 욕심이 지나치게 큰 군주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공기 중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읽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 이는 없었다. 침묵은 동의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사실 엘고스에서 사신단을 보낸 이유는 단순히 마계와의 정전 협정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브에스드라의 제 2 황녀가 지하세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엘고스 측에서 그것을 가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전쟁 중 혼란한 상황을 이용해 브에스드라가
자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눈에 거슬렸다.

"우리라고 가만있을 수 없지."

"아무렴, 황녀가 브에스드라 사신단과 접촉하면 또 무슨 술수를 벌이려 할지 몰라.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지."

"모든 것은 엘고스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의 진짜 임무는 율리아 브에스드라를 죽이고 그 죄를 브에스드라 측에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마왕과


브에스드라 사이를 이간하고 이 기회를 이용해 마계와 직접 수교를 이룰 수만 있다면.

'마왕이 마신이 되는 것을 막고 동시에 브에스드라도 몰락시킬 수 있다.'

검 한 자루에 실린 임무가 막중했다. 엘고스 기사들의 안광이 굳은 결의로 번뜩였다.

* * *
율리아는 며칠째 바엘의 침실에만 머물고 있었다. 사실 지상에서 온 사절단은 악마성과 별도로 떨어진
구역을 숙소로 배정받았기에 그녀가 본성만 나서지 않는다면 그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율리아 본인의 의지였다.

율리아를 지키려는 마계와 돌려받으려는 인계 측의 의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아 분위기가 좋지 않기도


했고, 그런 상황에 공연히 움직여 주변을 걱정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아, 이거 맛있어요!"

율리아는 때늦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앉은 테이블엔 수프, 빵, 소시지, 훈제생선, 치즈와 과일
등이 늘어서 있었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저장식으로 늘 먹던 것과 다르지 않은 식단이었다.

그럼에도 율리아가 부러 크고 명랑한 제스처를 취하는 이유는 맞은편에 앉은 바엘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까닭이었다.

시선에 온도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바엘은 턱을 괸 채 느른한 얼굴을 하고 있건만, 그의 눈빛이 닿는


곳마다 이상할 정도로 뜨겁게 열이 올랐다. 툭툭 느릿하게 움직이는 중지를 볼 때마다 저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자신을 어떻게 괴롭혔는지가 자꾸만 떠올랐다.

율리아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열기를 애써 외면했다. 바엘은 아무런 생각도 없을 게 분명한데 괜스레 혼자
의식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상하군. 그딴 걸 먹으며 맛있다는 소리가 나오다니."

"마왕님께서 모르셔서 그래요. 제가 인계에서 먹던 거에 비하면 이건 정말 진수성찬인걸요."

"이보다 더 쓰레기였다고."

"음……."

율리아는 애매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음식에 대해 나쁜 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곰팡이 핀 빵과


건더기 없이 멀겋고 씁쓸한 수프에 좋은 평가를 내리긴 어려웠다.

그녀의 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바엘은 창밖으로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바엘의 둥지는 악마성에서도
가장 높고 탁 트인 곳에 위치했다. 그래서 본성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사절단의 숙소도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

일순 바엘의 안광이 무섭도록 낮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마주한 그는 평소처럼 무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율리아가 완전히 내려놓은 식기를 손짓 한 번으로 치워 버렸다. 율리아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마왕님은 아무것도 안 드시나요? 다른 마족 분들도 그렇고, 식사하는 모습을 못 본 것 같아요."

"선택 사항이지."

"필수는 아니란 뜻이군요. 예전에 키마리스 님께 악마성에 주방이 있긴 하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물론 그 주방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장소와 다르다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하급 마족들만 해도 서로를


잡아먹거나 혹은 마계에 흘러 들어온 인간을 사냥했다. 몽마는 색사를 통해 정기를 채우고 사역마도
주인이 내어 준 마력을 섭취해야 했다.
저마다 방법은 다를지언정 평범하지 않은 건 확실했다. 그때, 바엘이 낮게 중얼거렸다.

"지금 먹고 싶은 게 있긴 해.

"마왕님이요?"

턱을 괸 바엘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여 목덜미를 주물렀다. 완전히 드러난 상반신, 탄탄하게 융기한
근육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확연히 도드라졌다. 골격이 워낙 크고 선명해서인지 움직임 하나하나가
맹수처럼 사납고도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눈으로 율리아를 훑으며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율리아는 그의 눈앞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바엘의
시선이 얇은 네글리제 아래를 고스란히 들여다보는 듯해서.

"그, 그럼 외출하셔야겠어요. 이곳엔 주방이 없으니까……."

"날 어디론가 보내고 싶은가 보군."

"읏,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난 아무거나 먹지 않아. 입맛이 까다롭거든."

바엘이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복근이 크게 꿈틀대고, 팽팽하게 당겨진 하의 너머로 둔중한
그림자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율리아는 숨을 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들킬까 봐 신경 쓰였다. 그녀는
결국 점점 달아오르는 공기를 참지 못했다.

율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바엘의 시선이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뒤따랐다. 그녀는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신경이 잔뜩 곤두섰기 때문일까. 엉덩이 밑으로 새하얀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생생하게 느껴졌다.

"누, 누우세요. 분명 피곤하셔서 그런 걸 거예요. 요즘 둥지 밖에 계실 때가 많았잖아요? 그러니까


피로가 누적된 탓에 괜히 먹는 걸로 풀고 싶은 거라고요."

스스로 말하면서도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율리아는 바엘을 자리에 얌전히 눕히기 위해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다 끌어왔다.

"어서요."

바엘은 한번 잠들면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특히 율리아가 곁에 있으면 정신을 못 차리고 깊게 빠져들곤


했다.

인계에서 내려온 사절단 탓에 어차피 둥지 밖을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바엘이 깊게
잠들어 주길 바랐다. 평소처럼 이박 삼일 눈도 안 떠 주면 더욱 좋고 말이다.

그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얼굴만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짓은 이제 그만 하고 싶었다.


너무 부끄러웠다.

"왕에게 명령하는 인간이라니 듣도 보도 못 했군."

바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율리아의 반대편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손을 잡아끌자
마지못한 듯 누우면서도 눈빛이 미묘하게 풀어졌다. 비록 남들과 비교하면 표정이 없는 수준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율리아의 눈엔 그가 느끼는 안정감이 보였다.
오직 자신의 곁에서 마왕이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뿌듯하게 느껴졌다.

"사절단이 빨리 지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답답한가?"

"바로 얼마 전에 여행을 다녀와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어딘가를 발길 닿는 대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거든요."

율리아는 자꾸만 낮게 내려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추스르며 침대 위에 두 다리를 올렸다. 엉덩이를 움직여


헤드에 등을 기대자 바엘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 위에 바엘의 길고 까만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것은 얼핏 상자 속 인형을


고정시키는 구속구처럼 보였다. 멋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조여든 속박처럼.

맨살에 닿는 그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팔을 괴고 누운 바엘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면 허벅지 위의


머리카락도 여지없이 함께 살랑이며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떡하지. 이건 조금…….'

민망한 곳이 자꾸 건드려졌지만 혹시나 바엘이 잠들었을까 봐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율리아의 바로 옆에 팔을 베고 모로 누워 있었다. 바엘이 내쉬는 더운 숨이 그녀의 허벅지에 곧장 와


닿았다. 살갗을 타고 흐르는 미묘한 열기에 허리가 파드득 튀었다.

72 화

율리아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한 순간, 밑에서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달 났군."

"아, 안달이라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는데 또 이상한 짓 하시면 저 정말로 도망칠


거예요. 어디 꼭꼭 숨어서 마왕님이 사과할 때까지 절대로……."

잠든 줄 알았던 바엘의 반응에 율리아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켰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른 채, 그녀가 숨어 버린다는 말을 중얼거렸을 때 바엘의 눈빛이 얼마나 위험하게
번뜩였는지도 모른 채.

"그럼 안 되지."

"으읏."

"이 몸 구석구석 내 눈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데."

팔꿈치를 기댄 채 상체를 들어 올린 바엘이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머리카락은 이제 율리아의 온몸을


나붓하게 간질이고 있었다. 살갗이 직접 닿은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랫배가 저릿저릿 조여들었다.

율리아는 떨리는 숨을 나직이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지금 그의 눈을 피하면 또 얼마나 괴롭힘을 당할지


상상만 해도 고되고 아찔했다.

바엘은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타고난 제왕이었으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율리아는 분위기가 위험한 방향으로 흐르기 전에 먼저 주의를 돌리는 것을
택했다.
"저, 전에 다른 마족 분들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파이몬의 저택에서 지내던
때요."

"……."

바엘의 시선이 그녀를 위아래로 느긋하게 훑었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마치 배부른 맹수를 연상시켰다.
그런 그의 눈에 율리아는 구석에 몰린 희고 작은 토끼일 뿐이었다.

다행히 맹수는 토끼의 재롱을 어디 구경이나 할 심산인 모양이었다. 찰나의 유예를 얻은 율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가레스 님과 보티스 님은 마계 남쪽에서, 파이몬은 서쪽에서, 바르바토스 님과 레라지에 님은


동쪽에서 태어나셨대요. 레벤나와 키마리스 님은 지금의 둥지에서 멀지 않은 중부에서 눈을 떴다고
하셨고요."

바엘은 딱히 흥미 있어 보이는 눈치가 아니었다.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하고 턱을 괸 채, 눈앞의 작은


먹잇감을 어떻게 벗겨 먹어야 맛있을까 멍하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율리아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렇다고 당장 말을 멈추면 뒷일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그녀는
구명줄을 붙잡듯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조금 신기한 이야기도 들었어요. 이건 아마 마왕님도 모르셨을 거예요."

정확히는 그가 남에게 딱히 관심을 두는 성격이 아니기에 알 생각도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었겠지만


말이다.

"누구를 만나 물어봐도 북쪽에서 태어난 분은 없었던 거 있죠?"

편안하게 이완된 눈빛으로 율리아를 올려다보던 바엘의 얼굴이 일순 얼어붙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정말 미미한 차이일 뿐이었기에,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율리아는 생각 없이 말을 이었다.

"듣자하니 북쪽 땅은 무척이나 광활하고 또 엄청 거대한 호수도 있다던데, 어째서 북쪽에서 태어났다거나


그곳을 근거지로 둔 마족은 한 분도 없었던 걸까요?"

"……."

"마족 분들도 사적인 대화를 나눌 만큼 서로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라서 이걸 알아챈 사람은 제가


처음이라고 했어요. 이 정도면 마왕님이 듣기에도 제법 흥미롭지 않나요?"

파이몬의 저택에서 처음 그녀가 말을 꺼냈을 때, 파이몬과 레라지에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둥지에


돌아와서 다른 마족들의 의견을 물었을 때도 아가레스와 바르바토스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녀 나름대로는 커다란 발견이라고 생각했다. 바엘도 그들처럼 놀라는 기색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율리아의 커다란 눈이 기대감을 담아 빛난 찰나였다.

"그걸 다른 놈들에게 말했다고?"

"네?"

"인간 주제에 감히 무슨 자격으로 그걸 지껄여."

주변 공기가 불안하게 요동쳤다. 바엘이 느릿하게 상체를 세웠다. 그의 몸은 율리아보다 훨씬 크고


사나웠다. 단지 몸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율리아를 구석에 몰아넣고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바엘이 팔을 뻗어 침대 헤드를 짚었다. 그 사이에 갇힌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말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살기 띤 붉은 안광이 율리아를 찍어 죽일 듯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문득 억울해졌다. 다른


마족들은 다들 놀라워했는데 어째서 바엘만 저런 차가운 얼굴을 하는 걸까.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줍게 간질거리던 심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굳어 버렸다. 울컥 화가 났다.


머리는 그러지 말라고 외쳤지만 가슴은 차마 순간의 열기를 견디지 못했다.

"……어떻게 제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율리아는 나름대로 용기를 다해 말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비웃듯 바엘의 입꼬리는 냉소적으로 비틀렸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율리아의 눈 뒤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제껏 그에게 느꼈던 말 못 할 친밀감은 정말로 자신 혼자만의 감정이었나 싶어서. 그가 변했다고 생각한
건 자신의 어리석은 착각일 뿐이고, 자신은 여전히 그가 기분 내키는 대로 막 다뤄도 되는 싸구려 인형일
뿐인가 싶어서.

"제가 없으면 마왕님의 염원은 누가 무슨 수로 이뤄 주죠? 어떻게 마정석의 봉인을 풀고 마신의 거대한
힘을 삼킬 건가요?"

이제껏 살면서 누군가에게 화내 본 적 없었다. 기대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어떤 부당한 취급을 받든


상처받지 않았다. 정말 괜찮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당연히 참아야 할 일들처럼
여겨졌다.

자신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이래도 제가 그냥 평범한 인간인가요? 주제넘은 소릴 했나요? 제가 없으면 마왕님도 더는 견디시지


못하잖아요. 욕심껏 집어삼킨 거대한 마력을 주체하지 못해서 제게 기대지 않으면 잠 한번 편히 잘 수
없으면서……!"

율리아는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아, 마음을 주지 말걸. 기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어리석게 굴고 말았어.

자괴감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혼자 멋대로 기대해 놓고 실망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았고, 그것을 핑계로
바엘을 상처 입히려고 하는 자기 자신이 징그러운 괴물처럼 느껴졌다.

사위가 조용했다. 그녀의 울음 섞인 숨소리 외에 어떤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다만 피부에 와 닿는


차갑고 냉소적인 시선이 바엘의 감정을 대신 말해 주는 듯했다.

때로는 남을 상처 입히는 게 자신 또한 아프게 만든다는 걸 율리아는 이제야 처음 알았다.

"내가 그동안 너무 풀어준 모양이지. 건방진 줄 모르고……."

고개를 숙인 바엘이 그녀의 머리칼을 한 움큼 쥐었다. 발간 연분홍빛이 도는 백금발이 그의 커다란 손아귀


안에서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흣!"

화악, 심장이 터질 듯 조여드는 고통에 율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픔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지만
돌처럼 굳어 버린 사지는 그녀의 바람을 무시하고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손가락 하나 들 수 없을
정도로 모든 힘을 빼앗겨 버렸다.
침대 위에 힘없이 쓰러진 율리아는 매몰차게 침실을 나서는 바엘의 뒷모습을 울음 섞인 눈으로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율리아는 아득히 깊은 물 속에 잠겨 있었다. 느릿하게 일렁이는 물결 사이로 햇빛이 길게 비쳤다. 하지만


온기는 그녀가 잠긴 곳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헤엄치는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만들어 낸 파문도, 수면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새들이 간혹 내려앉을


때마다 들리는 작은 물방울 소리도, 사위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기며 붉은 달빛이 드리웠다가 다시금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오묘하게 물드는 하늘의 빛깔도.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는 무의 공간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오직 팔다리를 질척하게 얽매는 감각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가는 시간을 감상하는 것뿐.

이곳은 어디일까. 자신은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걸까.

'아, 그 전에 나는 누구였더라?'

어떠한 질문도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기묘한 공간 안에서 모든 생각이 사라져 갔다. 나와 남을


구별하는 경계와 감각을 잃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좇을 수 없다.

'어차피 모든 것이 무의미해. 그냥 잠들고 싶어.'

가슴속 깊이 사무치는 외로움이 안타까워 눈물이 나왔다. 그럼에도 선뜻 그렇지 않다고 말해 줄 수 없었다.
그건 과거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끔찍한 부유감에 몸을 내맡기던 순간, 자신이 그토록 바라왔던 게
바로 그것이었는데.

긴 칠흑의 머리카락이 물속을 부유한다.

그녀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이제야 알아챈 것이다. 이건 처음부터 자신의 기억이 아니었다는 걸.

"으흑……!"

눈을 뜬 율리아는 목을 움켜쥔 채 힘겹게 기침을 내뱉었다. 코와 입으로 차가운 물이 마구 밀려드는 듯


고통스러웠지만 정작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율리아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잔물결 너머 보이는 흐릿한 잔상이 아닌 제대로 된 시야가 눈에 들어왔다.


보랏빛 마력을 흩뿌리는 탑도, 붉은 초승달도 모두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이 정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는 것만으로도 끝없는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율리아는 힘없이 침대 위에


엎어졌다. 연한 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새하얀 시트 위를 수놓았다.

'제가 없으면 마왕님도 더는 견디시지 못하잖아요. 욕심껏 집어삼킨 거대한 마력을 주체하지 못해서 제게
기대지 않으면 잠 한번 편히 잘 수 없으면서……!'

아, 내가 그에게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율리아의 커다란 눈동자가 삽시간에 흐려졌다.

그녀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 기이한 장소가 어디인지, 바엘은 어째서 그런 곳에 갇혀
있었던 건지, 팔다리를 끔찍하게 얽매던 그 축축한 감각의 정체는 무엇인지.

하지만 고작 반나절 꿈속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는데, 셀 수 없이 긴 시간을


속박되어 있었던 바엘은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그곳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건 말 그대로
산송장이 아닌가.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해.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해서…….'

각인의 후유증 탓인지 몸에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율리아는 억지로라도 비척비척 침대를
딛고 상체를 일으켰다. 도중에 몇 번이고 몸이 무너졌지만 그때마다 자신을 보던 바엘의 시선을 떠올렸다.

차갑고 냉소적인, 살을 도려 내는 듯한 눈빛. 상처 입은 사람의 눈빛.

"어째서 그걸 눈치채지 못한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작고 새하얀 발이 침대 밑으로 비틀비틀 내려왔다.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거나 눈물로 푹 젖어 버린


얼굴을 감출 생각도 못한 채, 그녀는 바엘의 침실을 나섰다.

쿵, 단단히 닫힌 문 너머 깊고 아득한 물소리가 이명처럼 번져 나갔다.

73 화

* * *

고막이 찢어질 듯 거대한 천둥 번개가 쉴 새 없이 내리쳤다. 번개가 직격했는지 지평선 너머에 커다란
섬광이 일더니 곧이어 악마성이 쿠르릉 진동했다.

"흑!"

비틀거리던 율리아가 벽에 쿵 부딪혔다. 그녀가 서 있는 복도가 뒤틀리는 건지 아니면 그녀의 시야가


흔들리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한 발자국 떼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율리아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비틀비틀 걸어가는 율리아를 지나가던 악마들이 기이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행색은 평소와 달리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늘 차분하던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파르라니 얇은 잠옷도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다들 이상함을 느꼈지만 감히 왕의 여자를 건드릴 간 큰 악마는 없었다. 그들은 서로 시선만 공유할 뿐


율리아의 앞길을 막지 않고 말없이 비켜섰다.

'마왕님은 어디에 있지?'

악마성의 지리는 이제 눈을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온통 미로 같았고 깊은 물 속에 잠겨 썩어 가는 유적처럼 보였다. 그녀는 꿈의 잔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물소리가 들려. 어두컴컴한 호수 밑바닥에 갇혀 있어.'

율리아는 혼란스러웠다. 현실과 악몽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그녀는 각인이 새겨진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어째서 갑자기 그런 환상을 본 걸까, 엉망이 된 머릿속을
헤집던 율리아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

심장을 속박하는 붉은 각인은 바엘과 자신의 연결 고리였다. 그리고 자신들은 각인의 부작용으로 인해
때때로 서로의 감각을 공유하곤 했다. 살갗이 닿기만 해도 참을 수 없이 신열이 오르고 가슴이 저릿저릿
요동쳤다.

자신은 그에게 동화되었다. 바엘이 심장의 각인을 발동시켰을 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과거의 잔상이
자신의 기억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래서 환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었던 거다.

자신에게는 꿈일지언정 그에겐 명백한 현실이었으니까.

"허억, 헉……."

어느새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복도를 뛰다시피 가로지르던 율리아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본성의
담벼락 밑에 사람 그림자가 숨어들고 있었다.

체격이 크고 키가 훤칠한 탓에 얼핏 마족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아무리 응시하고 있어도 시야 창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었다.

잠에서 깬 이후로 줄곧 호수 밑바닥을 헤매던 머릿속이 그제야 조금 차분해졌다. 사절단이 머무는 외성과
이곳 본성은 거리가 제법 있었다. 실수로라도 착각하기 힘들었기에, 그들을 발견한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이런 곳까지 숨어든 거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누구에게라도 들켰다간 분명 무사하지 못할


텐데…….'

그때, 건물 그림자에 짙게 녹아든 인영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방향을 보니 성 안쪽으로 숨어들려는


기색이었다. 그들은 율리아가 있는 곳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어떡하지. 누구라도 불러야 할까? 하지만 혹시 길을 잃은 사람들이면 어떡해.'

저도 모르게 초조해진 율리아가 상체를 크게 내민 찰나였다. 성이 또다시 우르릉 진동했다. 탑에서


강력한 파장이 일더니 어두운 밤공기가 보랏빛으로 짙게 물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등을 떠민 것처럼, 율리아의 몸이 난간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SYSTEM

스토리 진행도 45%]

어느새 바닥을 향해 추락하는 그녀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SYSTEM

5th Episode. 지상에서 온 사자]

[▷SYSTEM

- 미션: 사절단 전원을 살려서 지상으로 돌려보내시오. 제한 시간 7 일.

- 보상: 특수 무기 '유성우' 획득

- 실패 페널티: 감금 엔딩 '새장 속 인형' 확정]

아주 짧게 멈췄던 시야가 다시금 빠르게 밀어닥쳤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섭게 헝클였다.
율리아는 급박하게 손을 뻗었다.

"실드!"
[▷물리 실드 Lv.1

물리 충격으로부터 플레이어의 신체를 1 회 보호한다. 잔여 체력의 70%를 소모한다. SP 60]

추락하는 그녀의 몸을 환한 이펙트가 감쌌다. 동시에 현기증으로 눈앞이 훅 일그러졌다.

도무지 혼자 있을 시간이 없어 지난 에피소드에서 받은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지 못한 탓이었다. 체력이


대량으로 깎여 나가며 시야 가장자리가 붉게 물들었다.

"……!"

눈 깜짝할 새 닥쳐드는 바닥을 보며 율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언가 툭 터지는 소리와 함께 얇은 잠옷 너머 거칠고 차가운 흙바닥이 피부에 와 닿았다. 실드가 보호해
준 덕분에 직접적인 타격은 없었지만 높은 곳에서 추락하며 느꼈던 공포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동그라진 충격에 콜록콜록 숨을 헐떡이는데 눈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들어왔다. 고개를 드니 익숙한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 전하."

낮고 서늘한 음성. 꿈에서도 잊은 적 없는 목소리였다.

'어차피 당신의 말은 누구도 믿지 않을 겁니다. 도둑질을 모면하기 위해 허튼 수나 쓴다고 생각하겠죠.


우리야 잠깐 피곤해지고 말겠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을 거란 걸 충고해 두겠습니다.'

열네 살 아이의 침실을 흙발로 짓밟으며 잇새로 사납게 읊조리던 목소리.

'어서 들어가시지요.'

'들어가라니, 이런 유황불에 무슨 수로……!'

'모두 제국의 평화를 위한 일입니다. 계속 저항한다면 억지로라도 집행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위협적으로 들이밀어진 창에 떠밀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자신을 웃는 낯으로 구경하던 그 얼굴.

"높은 성벽에서 떨어졌는데도 무사하다니, 지옥에서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악마들과 다름없는


괴물이 되셨군요."

사내, 루슬란의 눈초리는 여전히 빛을 뿜어내는 율리아의 두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마치 징그러운 괴물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치 귀빈을 대하듯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율리아는 그것을 외면한


채 홀로 일어나 흙을 털었다. 거절당한 사내의 미간이 좁혀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루슬란이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식을 지하에 떨어뜨린 아버지의 심정이 오죽하겠느냐마는,
매일 깊이 근심하며 밤잠을 설치십니다. 에스델 전하께서도 물론 그렇고요."

율리아는 침묵했다. 그들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에게 있어 자신은 수치스러운 하룻밤 실수의 증거였다. 차마 직접 죽이지 못해 폐궁에 가두고 알아서
죽기를 기다렸다. 자신을 향한 에스델의 증오는 새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태어난 건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그들의 증오가 아프고 시렸지만 율리아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렇다고 용서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자신이 사라졌으니 그들이 과거는 돌아보지 말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럼 자신도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내는 율리아의 표정에 떠오른 불신을 읽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다만 흥미롭다는 듯
눈매를 좁힐 뿐이었다.

지독한 현기증이 일었다. 율리아는 미미하게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루슬란의 맹렬한 시선을 피했다.
지금은 그가 꾸며 낸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바엘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당신이 본성에 함부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저만 아는 비밀로 할 테니 조용히 돌아가세요."

"거래입니까?"

"뭐라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전 더 이상 당신과 얽히고 싶지 않아요."

나름대로 강하게 나갔건만 사내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되레 우악스러운 손길로 율리아의 맨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율리아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당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마왕도 알고 있습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요."

율리아가 말려들기를 기다리던 사내의 눈초리가 샐쭉 휘었다.

"당신이 에스델 전하의 대용품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마왕님은 제 진짜 이름을 알아요. 다른 마족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할 거면


……."

"하지만 마왕을 마신으로 만들 진짜 열쇠는 당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재주로 악마들을 속였는지는
모르지만."

율리아는 태연한 척 루슬란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숨소리만큼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뚫어져라 살피던 사내의 눈매에 이채가 돌았다. 눈앞의 멍청한 여자는 역시나 자신의 진짜
가치를 알지 못한다. 혹시나 해서 찔러 본 것인데 제대로 짚었다.

"거짓말은 영원할 수 없어요. 당신이 새빨간 가짜라는 사실을 언젠가는 들키고 말겠죠. 그때도 마왕과
악마들이 당신을 지금처럼 대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고작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을?"

새빨간 가짜. 존재 가치도 없는 쓰레기. 날 때부터 버려진, 세상 누구도 원하지 않던 처치 곤란한 이물질.
눈치 없이 목숨만 질겨서는 왜 아직도 눈앞에서 얼쩡거리는가.

루슬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머릿속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살이 에일 듯


차가운 조수가 밀려들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숨도 쉴 수 없는 깊은
물 속에 아득히 잠겨 들었다.

"우리가 단순히 마족과의 정전 협상을 위해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그, 그럼 왜……."
"당신의 거짓말이 들키는 순간, 수많은 희생으로 간신히 이뤄 낸 인계의 평화는 끝납니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와 함께 지상으로 돌아간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곁에 없는데 가짜란 걸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마왕에게 가서 브에스드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해. 그들 외엔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해. 남자가


뱀처럼 속살거렸다.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민폐입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우리는 당신의 거짓말을 대신 수습해 주려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껏 당신이 끼어든 일마다 결과가 좋았던 적이 있었습니까?"

"제발 그만하세요. 듣고 싶지 않아. 저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고개를 내젓는 율리아의 주변을 사내가 느긋하게 돌았다. 그녀를 향한 질책의 목소리가 올가미처럼 바짝
조여들었다.

"소드마스터 레기온이 당신을 따라 이곳 지옥까지 내려왔다지요.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공작 위와 봉토를 하사받고 에스델 전하와 혼인해 장차 공동 통치의 권한을 위임받을
예정이었죠. 어떤 계집에게 홀려 폐하께 검을 들이밀기 전까지만 해도."

"그게 무슨."

설마. 다리 힘이 풀린 율리아가 크게 휘청거린 찰나였다.

74 화

"그래요,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 하나 때문에 레기온 님은 그 모든 영광을 잃고 더러운 변절자로


추락했습니다.

"하지만 레기온은 그런 말은 한 마디도……."

"뻔뻔하게도. 여태껏 어떤 죄책감도 느낀 적 없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공작 위와 봉토, 거기에 에스델과 결혼해 잉그렘 5 세의 부마가 될 예정이었단다. 남자의 말을 곱씹던


율리아의 커다란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자신은 레기온이 마계에 내려온 대가로 무엇을 잃어야 했을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냥 모든
일이 끝나면 그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가 남은 생을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런 속 좋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폐하께선 부정한 존재인 당신을 버리지 않고 거둬 주었죠. 천한 어미와 함께 죽을 운명이었던 당신을


황녀로 인정하여 이리 어엿하게 키워 내지 않았습니까."

부정의 증거가 세상 밖을 돌아다니는 게 두려웠을 뿐이면서. 브에스드라 황가의 상징인 이 머리색을


숨겨야 했기 때문이면서.

하지만 율리아는 차마 생각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보육원 입구에 서 있던 작은 뒷모습이 뇌리를 스친


탓이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키워 준 부모께 마땅히 보답하겠죠. 저는 당신이 핏줄을 내버리는 그런


배은망덕한 인간일 거라곤 생각지 않습니다."

얼음장 같은 바람이 불고 살이 에일 듯한 눈이 내려도, 아무도 안아 주지 않았던 그 마르고 여윈 어깨가.


'나는, 나는 핏줄을 내버리는 인간이 아니야. 난 그러지 않아…….'

율리아의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어 갔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남자는 만족스럽게 입매를 올렸다.

"지금 저와 함께 회담장으로 가 당신의 뜻을 밝히시죠. 우리와 함께 브에스드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입니다. 마왕이 당신을 총애한다니 입 안의 혀처럼 잘 구슬린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겁니다."

"틀렸어요……."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뜻입니까?"

루슬란이 어디론가 슬쩍 눈짓하자 건물 그림자 속에서 사내 대여섯이 모습을 드러냈다. 율리아는 자신을
노리는 존재들을 알지 못한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애첩이니 뭐니 하는 건 다른 마족들이 저를 노리지 못하게 하려는 바르바토스 님의 계획이었어요. 사실이


아니에요.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

그녀는 악몽에 잠겨 허우적대느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깊은 잠재 의식 속에 똬리를


틀었던 생각들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섞여 새어 나왔다.

"내 쓸모가 다하면 결국 누구도 나를 찾지 않을 거야. 진짜 열쇠라고 거짓말한 채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일 년? 이 년? 어쩌면 내일 당장에라도 모두의 눈앞에 이 초라한 본모습이 발가벗겨질지 몰라.
들키고 말 거야."

마력 저항은 자신이 노력해서 손에 넣은 힘이 아니었다. 눈을 떠 보니 그냥 주어져 있었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이에게 마치 기적처럼 말이다. 쓰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보면서도 조금의 현실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쉽게 얻었다는 건 그만큼 간단히 빼앗길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다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그 계기는 내 거짓말 때문이었는걸. 내가 열쇠라고 해서……."

남자의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말할수록 점점 암담해졌다. 율리아는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왕님이 저를 가까이 두는 건 제가 아닌 마력 저항이 필요해서 그런 것뿐이고, 불과 몇 시간 전에도


제게 화를 내셨어요. 모두 제 실수였어요. 그분은 이제 두 번 다시 저를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바엘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깊고 느긋하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너를 믿어 보겠다.'

아아, 자신은 어쩌면 이렇게 쓸모없을까. 누구라도 버리고 싶을 거야.

율리아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생각보다 쉽게
풀리겠군, 하는 말소리가 오갔지만 율리아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한쪽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춘 루슬란은 소리 없이 우는 그녀에게 짐짓 자상한 얼굴로 속삭였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당신은 역시 혼자가 어울립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고작 몇 달 마계에 머문


것만으로 주변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있지 않습니까. 저 혼자 살겠다고 이토록 더럽고 추잡하게
굴다니요."

"……."
"황도 아벨딧심의 폐궁이야말로 당신에게 가장 걸맞은 거처라고, 이젠 당신도 그리 생각하시겠죠?"

"……네."

율리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는 남자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 * *

검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늦은 저녁, 침실 앞에 우두커니 선 바엘은 말없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웅장한 복도를 감싼 깊은 적막이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어떻게 제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침실을 나선 직후, 화를 못 이겨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도 여자의 울음 섞인 목소리만큼은


머릿속에 들러붙어 내내 떨어지지 않았다. 아픔을 참듯 삽시간에 달아오른 눈시울이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바엘은 앞을 가로막은 문을 원수 보듯 노려보았다. 문 너머에 여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구슬처럼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뇌리에 질척하게 엉겨 붙었다.

"젠장, 미쳤군."

잇새로 욕설을 내뱉은 그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그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속아 넘어갈 만큼 대단한 수작질이었다. 친밀한 척 꼬리를


살랑대며 교태를 부리는 게 보통 익숙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토록 발칙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그 얼굴.

누구 때문인데. 누가 자신을 물 밑바닥에 처박았는데.

'또!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 어디 안 간다니까요.'

순진한 척 웃는 낯짝이 가증스러웠다. 눈앞이 분노로 새까맣게 물들어, 파편이든 무엇이든 그냥 심장을
터트려 버려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파편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눈을 마주친 순간, 어느새 힘이 빠져 버린 이는 여자가 아닌 자신이


되어 있었다. 육체를 구성하는 마력이 감히 그녀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고 반항하는 것처럼.

바엘은 격노했다. 등 뒤에서 힘없이 쓰러지는 기척이 들렸지만 모두 무시한 채 정신없이 둥지를
뛰쳐나왔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또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고작 인간 따위에게 속절없이 끌려 다니는 이유. 그녀의 작은 표정 변화 하나 손짓 하나에도 금세


달아오르고 마는 이유. 볼품없을 정도로 말라 빠져서 툭 치면 픽픽 쓰러지는 여자가 못내 신경 쓰이는
이유.

아아, 이제야 알겠다. 이건 모두 그녀가 파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시달려 온 납득할 수
없는 모든 현상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알려 줄 필요가 있겠지. 왕에게 복종하지 않는 종은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에


대해."

안광에 스몄던 혼란스러운 빛이 점차 사라져갔다. 살기등등하게 입꼬리를 비튼 그가 문을 열었다.

"……."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붉게 내려앉은 노을이 침실에 길게 드리우고 미적지근한 온기가 피부를 감싼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대신 침대 가운데가 작게 솟아 있었다. 여자는 저 안에 바짝 웅크리고 누워
잠들어 있으리라.

침대로 다가가는 바엘의 목구멍이 바짝 조여들었다. 만약 아직도 제가 피해자인 양 울고 있다면 크게 혼을


내어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잠깐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았다.

동그랗게 융기한 이불 앞에서 바엘은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처음부터 주저 따윈
없었다는 듯, 그는 우악스럽게 이불을 젖혔다.

"하."

침대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가 없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듯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삽시간에 몰려든 분노로 흰자위가 벌겋게 터져 물들었다.

"감히 내게서 도망을 쳤다고."

역시 가련한 척하던 눈물은 모두 거짓이었던 거다. 깜찍하게도, 하찮은 인간 따위가 지하의 왕을


거스르고도 무사하기를 바랐다니. 어디로 도망치든 마계 전체가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건만.

바엘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갔다. 그의 붉은 안광은 사냥감을 쫓는 맹수처럼 위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나의 열쇠가 얼마나 열심히 도망쳤는지 볼까.'

그는 대기에 녹아든 마력을 샅샅이 훑었다. 수많은 파동이 복잡하게 얽혀 들었지만 그중에서 피 같은
절규를 내지르는 단 하나의 힘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열쇠에게 넘긴 마력구를 이런 개목걸이 같은 용도로 쓰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지만, 이번 참에 영영 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도 썩 괜찮을 것이다.

바엘은 텅 빈 침실을 나서 악마성을 여유롭게 걸어 나갔다. 머릿속은 끔찍한 집착으로 뒤엉켰을지언정


표정만큼은 일상적인 풍경을 보듯 무감했다. 대신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마력이 참혹한 파열음을 내며
터져 나갔다. 왕의 기분에 감응한 결과였다.

악마성의 모두가 경외와 두려움으로 숨죽인 가운데, 바엘이 도달한 곳은 인간과의 협상이 진행 중인
외성이었다.

그의 형형한 안광이 앞을 막아선 인간 기사에게로 향했다.

"나의 열쇠는 어디에 있지?"

"넌 누구냐! 이곳이 어딘지 알고 감히……!"

"주군, 어째서 이곳에 계십니까!"

때마침 안에서 나오던 바르바토스가 바엘을 발견하곤 다급히 달려와 부복했다. 마왕의 최측근이라는 8
위의 최고위급 마족이 몸소 경의를 표하는 상대였다. 더 듣지 않아도 눈앞에 선 악마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마, 마계를 통일한 대악마가 어째서 이런 곳에…….'


그는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던 전쟁 중에도 결코 모습을 드러낸 적 없었다. 그래서 혹자는 마왕이
실존하기는 한 건지 의문을 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마왕이 이미 잠든 마신을 이르는 또 다른 칭호가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틀렸다. 마계의 지배자인 그는 실제로 눈앞에 있었다. 압도하는 두려움을 깨닫기도 전에
기사의 무릎이 하나씩 꿇렸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마족들의, 왕이시여, 부디 자비, 를……."

그들은 채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지는 기사들을 뒤로하고 바엘은 외궁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나무는 썩어 문드러지고 돌기둥은 부서져 나뒹굴었다. 외궁이 폐허로 변해 가는


와중에 회담장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건만, 닫힌 문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바엘은 두꺼운 벽 너머에서 완벽에 가까운 마력 저항을 느꼈다. 역시 이곳에 있었군, 하고 중얼거린
바엘의 입술이 비릿하게 휘었다.

"저기 수상한 자가 있……!"

"커헉!"

바엘을 발견한 호위들이 달려왔지만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입구를 가로막은 인간들을 손도 대지 않고


쓰러뜨린 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75 화

끝이 아득할 정도로 넓은 실내에 수많은 마족과 인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엘은 원하던 여자의
모습을 단번에 찾아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파리한 안색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일순,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늘 생기로 반짝이던 눈동자가 소름 끼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바엘의 눈매가 의문으로 가느다랗게


좁혀진 찰나였다.

"저는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지상으로, 브에스드라로 돌아가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그녀의 나지막한 한 마디에 실내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상석에 앉아 있던 아가레스와 레라지에가 경악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작은 열쇠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 말이 되는 소릴 해! 주군의 소유인 네가 어딜 간다는 거야!"

당황한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크게 반발하고 나선 마족 측에 이어 인간들 역시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되면 브에스드라의 세력만 더욱 커질 게 아닙니까!"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군. 진작 손을 썼어야 했는데."

"열쇠는 우리 인계로 돌아오는 것이 마땅하나, 거처는 브에스드라가 아닌 다른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형평성을 생각하면 중립국 중 하나에……."
"중립국이라고 어떻게 믿겠습니까? 열쇠를 빌미로 뒤로 호박씨나 깔지 누가 안답니까!"

인간들에게조차 율리아는 같은 사람이 아닌 '열쇠'에 불과했다. 흐릿하게 눈을 내리깐 그녀의 어깨를


루슬란이 움켜쥐었다. 어디 저들을 한번 보란 듯이, 마르고 가녀린 어깨를 아플 정도로 강하게.

"큭!"

하지만 그의 의기양양한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바엘이 루슬란의 손목을 움켜쥔
탓이었다.

"내 것에서 손 떼."

"이건 협정 위반이다! 인간과 마족은 서로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루슬란은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바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건물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한계를 짐작할 수 없는 마력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나타난 악마는 타고난
정복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가레스를 비롯한 마족들이 일제히 무릎 꿇고 눈앞의 악마를 향해 경배를 올렸다. 그의 정체가 확실해진
순간, 루슬란은 율리아를 움켜쥔 손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바엘은 그의 얼굴을 기억했다.

"더 할 말은?"

"송구합니다, 마족들의 왕이시여."

왕의 여자를 노리던 도전자가 꼬리를 내렸다.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다시금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바엘은 날뛰는 마력을 주체하지 못했다. 뇌관이 모조리 타버릴 것 같은 맹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흩뿌려진 피와 살로 대지를 흠뻑 적셔야겠다고, 붉은 자아가 속삭이고 있었다.

"커맨드, 거점."

하지만 작은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든 순간, 바엘의 시선은 어느새 눈앞의 여자에게로 옮겨졌다. 능력을
사용했는지 양손에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흔들리던 실내가 눈 깜짝할 새 잠잠해졌다.

그녀는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바엘과 눈을 맞췄다. 지독하게 짧은, 찰나의 침묵이었다.

"아……."

눈동자의 초점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가느다란 몸이 위태롭게 휘청였지만 바엘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율리아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밖으로 향하는 그를 감히 누구도 막지 못했다.

'저는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지상으로, 브에스드라로 돌아가고 싶어요.'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아니, 이건 배신감 따위가 아니다. 애초부터 간악한 태에서 난 파편의 말은 믿지
않았다. 이건 주인을 기만한 종에 대한 분노였다.

"흣, 마왕님. 어지러워서……."

"닥쳐."
빠르게 걷는 그의 뒤에서 율리아는 거의 짐승처럼 끌려가다시피 했다. 등 뒤에서 가냘픈 신음이 들렸지만
까맣게 암전된 바엘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왕이 내뿜는 분노에 악마성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다시 돌아온 침실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방을 장식한 육중하고 거대한 가구들이 모조리 뒤집혀
나뒹굴었다. 바엘은 율리아를 침대 위에 내던졌다.

"콜록! 흐윽, 콜록 콜록!"

열쇠가 괴롭다는 듯 헐떡헐떡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조차 잔뜩 곤두선 바엘을 자극했다.


침대 위에 한쪽 무릎을 올린 그가 율리아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뇌리에 날뛰는 온갖 지독한 충동들과는 반대되는, 아주 자상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래, 재미있었나."

"……."

"내가 모르는 새 인간들과 내통해서 성을 빠져나갈 계획까지 세워 뒀을 줄이야. 그간 널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아 미안해지는군."

가느다란 목을 쓰다듬던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는지 그녀가 몸을


굳혔지만, 그래 봤자 이미 늦었다.

"아, 아니에요. 저는 그, 그냥 조용히 떠나려고, 당신을 상처 입히려고 한 게……."

"상처?"

마력 폭주로 핏줄이 터져 버린 눈동자는 온통 붉게 물들어 자위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었다. 그것을 홀린


듯 바라보는 파편의 시선이 거슬렸다. 마치 속살을 파내고 쩍 벌어진 내부를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대단하군. 인간 주제에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용기가."

바엘은 시선을 내렸다. 조금만 힘주어 눌러도 단번에 부러질 듯 마르고 가녀린 목이 눈앞에 있었다.

아니, 이 여자에게서 약하지 않은 곳이 있던가. 말랑하고 따뜻하며 녹녹한, 그녀가 즐겨 먹던 간식과


비슷한 나붓한 몸.

해갈되지 않는 흥분으로 거칠어진 숨이 율리아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는 어느새 그녀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새하얀 시트 위로 바엘이 만들어낸 거대한 달그림자가 일렁였다.

"어디 말해 봐. 무슨 속셈으로 내게서 벗어나려 했는지?"

"……."

"한때 네 입으로 지껄였었지. 나를 마신으로 만들어, 그 방법이 무엇이든 달갑고 기쁘게 받아들이겠다고.
대가가 무엇이라 하더라도."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로 메말라 버린 사고의 바닥이 드러났다. 과거의 편린 몇 조각만이 그의 눈을 가렸다.
마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 하얗게 질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율리아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다.
실로 미묘한 기분이었다. 참담하고 시린 호수의 물이 발밑부터 차근차근 적시며 타고 올랐다. 분노도
아니고 그렇다고 희열은 더더욱 아닌, 여태껏 느껴 본 적 없는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기분 나쁘다. 이 여자를 보면 불쾌해 견딜 수 없다.

"하지만 죽일 수도 없지."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주 작은 힘만 줘도 툭 분질러질 정도로 가느다란 목인데, 주박에 걸린 이는


되레 자신인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래, 너는 열쇠니까. 창세자의 가장 중요한 파편이지."

실소가 절로 흘렀다. 바엘은 몸을 일으키며 침대 위에서 바르작대는 율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월광이 가녀린 여체를 속속들이 훑고 지나갔다. 또다시 목이 탔다. 지독한 열망과 충동이 그를
부채질했다. 마족이란 게 원래 본능에 쉽게 휩쓸리는 이기적이고 흉포한 존재들이다. 창세자부터
그러할진대 자식들이라고 다를까.

시선을 들어 보랏빛 마정석을 짧게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율리아의 팔뚝을 붙들어 강제로 침대 헤드까지
끌어올렸다.

"이렇게 얌전히 있어."

"아냐, 아니에요, 저는……."

바엘이 손을 놓자 율리아는 금세 몸을 작게 웅크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나 약한지 잠깐 잡았을 뿐인데


팔뚝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 스스로가, 바엘은 진저리 날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철컹, 둔탁한 사슬 소리가 서늘한 밤공기를 울렸다. 바엘은 그녀의 양손을 머리 위로 결박해 사슬로
묶었다. 그것의 반대편 끝은 벽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어리석은 열쇠는 그제야 자신이 미래를 예측한
모양이었다.

"마왕님?"

"얌전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이, 이것 좀 놔주세요."

철컹철컹 둔탁한 쇳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고작 밧줄 굵기의 사슬 하나 어쩌지 못해서 사색이 된 열쇠의
모습이 무척 거슬렸다. 그녀는 사냥꾼의 덫에 걸려 죽어 가는 연약하고 순결한 사슴 같았다.

"나에게 보라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하지만 그 모습에 속아 풀어 주는 순간, 사슴은 사냥꾼을 보란 듯 비웃으며 달아나리라.

열쇠가 도망친다.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바엘은
숨통이 조여들고 손끝이 차게 식었다. 몸 안에 맥박 치는 피의 흐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기막힌 감정의 이름은 틀림없이 분노이리라.

하지만 눈앞에서 왕을 조롱하듯 몸부림치는 여자에겐 도저히 아무런 짓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몸에 차마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이것을 열쇠도 알고 있는 걸까. 그래서 번번이 눈에 거슬리는 짓만 골라 하는 걸까.

"저, 저는 이곳에 있는 게 무서워요. 들키고 싶지 않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나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가짜인데, 그런데 분수에 안 맞는 욕심만 늘어서. 너무 혐오스러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둑이 터지듯 툭, 떨어지는 여자의 눈물과 깊은 속내를 털어놓듯 속삭이는
혐오스럽다는 한 마디가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갈 곳을 잃은 바엘의 분노가 침대 헤드를 움켜쥐었다. 손 한 뼘보다 두껍고 단단한 그것이 우두둑,


모래성처럼 쉽게 바스러졌다.

"날 돌아 버리게 만들고 싶었던 거라면 성공이군. 지금 굉장히……."

바엘은 화를 누르듯 말을 멈췄다. 하지만 열쇠의 푹 젖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등골이 선뜻하게
전율했다. 참을 수 없이 초조해 견딜 수 없었다.

"너를 엉망으로 망가뜨리고 싶을 정도로 불쾌하거든."

바엘은 율리아의 머리맡에 팔을 지탱하고 상체를 바짝 낮췄다. 오직 그녀만을 응시하는 형형하고 붉은


안광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짐승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코앞까지 들이밀어진 맹수의 이빨이 두려웠던 걸까. 그녀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몸부림치며
눈물을 떨궜다. 금속이 찰캉거리는 소리와 거칠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폐허 같은 실내를 울렸다.

"흐윽, 싫어……."

그녀가 내뱉는 숨 하나조차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전부 자신의 것이다.

바엘은 붉게 달아오른 여자의 입술을 머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 혀를 밀어 넣고 겁먹어 도망치는


작은 살덩어리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떨리는 숨결조차 나붓하고 달큰해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녀에게 매달리듯 입 맞춘 채로 바엘의 손이 내려갔다. 이보다 더욱 깊고 내밀한 곳에 자신을 파묻고


싶었다. 축축하고 따뜻한 그곳에.

바엘이 율리아의 치맛자락을 들추려 짧게 시선을 내린 찰나였다. 여자의 마르고 둥그스름한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달빛에 비춰 붉게 물든 살결에 이질적인 푸른빛이 감돌았다.

76 화

'내 것에서 손 떼.'

'이건 협정 위반이다! 인간과 마족은 서로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바엘은 아까 보았던 인간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율리아 브에스드라가 제 소유인 양 어깨를 움켜쥐고
조종하려 들던 사내.

가만 놔두어도 남자가 끊이지 않는 몸이었다. 아주 잠깐 눈을 돌린 새 단물을 빨러 온 버러지가 하나 더


들러붙었다. 마음 약한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그 사내에게 자신의 어디까지 내어줬을까.

어쩌면 이미 접붙었을지도 모른다.

스쳐지나간 상념은 찰나였지만 바엘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들끓었다. 가느다란 허벅지를 움켜쥔
그의 악력이 더욱 거세어졌다. 사내의 밑에 깔린 몸이 움찔 튀었다.
"흑!"

"가만 있어."

"놔 주세요. 아파, 싫어……."

"거부하지 마. 네까짓 게 감히 나를 거부할 수 없어."

율리아의 저항이 격렬해질수록 바엘의 머릿속에도 더욱 거대한 욕망이 자리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말라 죽을 듯한 갈증부터 풀어야 했다. 맹렬히 타오르는 목구멍을 열쇠의 피로 달게
적셔야만 했다.

율리아의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등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녀가 걸친 드레스는 마치 종잇장처럼


속절없이 찢어졌다.

바엘은 저항하며 발버둥치는 다리를 무릎으로 간단히 억누르고 리본으로 매듭지어진 가슴 역시 단번에
뜯어냈다. 툭 불거져 나온 새하얀 유방이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바엘의 욕망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버틸 수 없는 열락이 눈앞에 있었다. 그가 젖무덤 사이에 갈급하게 입 맞춘 순간이었다.

"어떡해……. 난 이제, 버려질, 끅, 싫어."

바엘은 머리 위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를 무시한 채 선단의 돌기를 빨아올렸다. 파르르 떠는 허벅지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안쪽이 속속들이 보이도록 활짝 펼쳤다.

"싫어, 들키기 싫어. 싫어, 싫어."

그의 중지가 말랑한 점막 내부를 파고들었다. 아니, 파고들려고 했다. 하지만 율리아의 안쪽은 평소와
달리 메말라 있었다. 늘 환희에 차 그를 받아들이던 것과 달리, 손가락 하나조차 받아들이기 버거워 했다.

"무서워. 제발 살려 줘, 바엘……."

가늘게 새어 나온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바엘의 커다란 몸이 우뚝 굳었다. 짐승같이 융기한 근육과


억지로라도 파고들려던 허리 역시 시간이 멈춘 듯 움직임을 그만뒀다.

바엘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여전히 욕망하고 있었다. 산산이 조각나 버린 인내심은 목구멍
안쪽에 지독하게 들러붙은 갈증을 풀기 전까지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해갈되지 않은 열기가 그의
몸을 들쑤셨다.

그런데 왜 움직일 수가 없지. 이런 새털 같은 인간 하나 어쩌지 못해서 전전긍긍 갈등하고 있는 거지.


고작 신음처럼 내뱉은 이름 한 마디에 가슴이 칼로 저미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하느냔 말이다.

"젠장!"

잇새를 짓씹은 그는 질척하게 엉겨 붙는 유혹을 떨쳐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핏빛으로 달아오른 눈동자에


깊은 짜증이 담겼지만 그 이상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하의 왕으로 태어나 이와 같은 무력감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겉옷을 벗어 율리아의 몸 위에 내던진 그가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송구합니다, 마족들의 왕이시여.'

굴종을 가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눈이었다. 그 인간 사내를 내버려
뒀다간 또다시 자신의 것에 손을 뻗어 오리라.

"허락할 수 없어."

낮은 중얼거림과 함께 문이 닫혔다. 폐허가 된 침실 안에 서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 * *

[▷SYSTEM

상태 이상 '세뇌'를 종료합니다.]

짙은 안개가 낀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율리아는 멍하니 눈꺼풀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탈력감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사위가 온통 새까만 그림자로만 보였다. 창밖의 마정석이 아니었다면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기억을 되짚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성에서 떨어지면서 대량의 체력을 사용한 탓일까. 드문드문 끊기던 기억은 회담장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려
두 번째 스킬을 쓴 시점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그때 상태 이상에 대한 창이 떴지만 다급한 상황과 몽롱한 정신이 겹치며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루슬란이 이곳에 있었어. 사절단 인원 중 하나로, 나를 지상으로 데려가려고…….'

그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 일을 생각하려고 할 때마다 지독한 거부감이


들었다. 뿌옇게 드리운 그림자 너머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철컹.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키려던 율리아는 헉 소리를 내며 다시 쓰러졌다.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가장 아픈 건 어깨였지만 팔뚝이나 허벅지도 바위에 부딪힌 듯 욱신거렸다.

그중에서도 그녀를 경악하게 한 건 사슬에 결박된 손목이었다. 두께가 거의 팔뚝만 한 쇠사슬이


벽에서부터 길게 늘어져 있었다. 누운 채로 몇 번 흔들어 보았지만 그런다고 해방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 이게 뭐지?"

어슴푸레한 어둠에 적응된 율리아의 눈은 갓 깨어났을 때보다 더욱 많은 시각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역시나 바엘의 침실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가 곧장 적응하지 못했던 이유는 실내가 온통
난장판이기 때문이었다.

성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밀었을 땐 꼼짝도 하지 않던 거대하고 육중한 가구들이 어린아이의
장난감처럼 뒤집혀 나뒹굴었고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조차 어딘가 부러졌는지 비스듬히 기울었다. 심지어
헤드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커맨드 시스템."

[▷SYSTEM
5th Episode. '지상에서 온 사자' 진행 중]

[▷SYSTEM

- 미션: 사절단 전원을 살려서 지상으로 돌려보내시오. 제한 시간 6 일.

- 보상: 특수 무기 '유성우' 획득

- 실패 페널티: 감금 엔딩 '새장 속 인형' 확정]

손이 결박되었어도 커맨드를 쓸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율리아는 시스템 내용을 찬찬히 훑었다.

'누구도 죽어선 안 된다는 게 가장 중요하구나. 이번 에피소드 미션을 실패하면 곧장 감금 엔딩이라는


뜻이고.'

율리아는 손목을 결박한 사슬을 재차 올려다보았다. 미션에 실패하면 평생 이렇게 되는 거라고 미리 보여


주는 것 같아서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바르르 몸서리친 그녀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스킬 아이콘을
실행했다.

그녀의 눈앞에 금빛의 스킬 트리와 네 개의 이파리가 떠올랐다. 지난번 사용하지 않고 남겨둔 한 개와


에피소드 보상으로 받은 세 개의 포인트였다.

[▷저항 강탈 Lv.2

플레이어가 지정한 대상에 일정 시간 항마력의 60%를 강탈한다. 잔여 체력의 60%를 소모한다. SP 60]

[▷물리 실드 Lv.2

물리 충격으로부터 플레이어의 신체를 3 회 보호한다. 잔여 체력의 60%를 소모한다. SP 60]

각각의 레벨을 한 단계씩 올리고 난 뒤에, 율리아는 다시 진행도 창으로 돌아와 이번 에피소드의 보상을
확인했다. 특수 무기는 플레이어 성향에 따라 지급되는 종류가 달랐는데, 유성우는 역시나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름만 봐서는 역시 잘 모르겠어.'

뭐든 상관없으니까 물리력과 관련된 무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물리


스킬은 실드뿐이었다. 그조차도 사용한 뒤엔 여지없이 대량의 체력이 깎여 나갔고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시야 가장자리가 때때로 붉게 물들었다. 체력이 10% 미만일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짧게 기절했다가 깨어나는 것만으로는 역시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일단 이 사슬부터 풀어야 하는데, 마왕님이 돌아올 것 같진 않…… 겠지."

몸이 욱신욱신 아팠지만 정신만큼은 지금이 가장 멀쩡했다.

호수 밑바닥에 수장된 꿈에서 막 깨어났을 땐 바엘이 느끼는 감정에 휩쓸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독한 고독감과 우울감이 온 정신을 지배했다. 그런 상태로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과거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상대까지 마주쳤다.

그때 나눈 대화 내용이 무엇인지 신경 쓰였다. 하지만 루슬란의 가느다란 눈매를 떠올린 율리아는


욱신거리는 두통에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자꾸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어렴풋한 기억 너머에 브에스드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마족과 인간
사이에 분쟁이 생겨 누군가 사망한다면 틀림없이 이것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아야 했다. 막지 못한다면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철컹, 철컹!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율리아는 온 힘을 다해 사슬을 당겼다. 살갗이 두툼한 이음매 사이에 걸려
찢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몸부림쳤다.

"헉, 헉……."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친 율리아는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곳 침실은 거대한 마왕성에서도 한 층을 거의 독채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렇게


시끄러운 쇳소리가 났는데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소리치는 건 힘만 뺄 뿐이란 결론이 났다.

"커맨드 시스템."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스템 창 구석구석을 뒤졌다. 아이콘에 들어갔다가 허탕만 치고


나오길 여러 번, 율리아는 아이템 창 밑바닥에 고이 잠들어 있던 물건을 하나 찾아냈다.

[▷레라지에의 갚을 기회

악마의 약속은 절대적이다. 사용 기회 1]

'너한테 나름대로 빚을 졌어. 갚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바엘과 첫 색사를 치른 다음 날, 악마성이 뒤집힐 정도로 거대했던 바엘의 폭주를 잠재운 것에 대한


감사로 레라지에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가 침실을 나선 뒤, 아이템 창에 이런 물건이 생성됐던 것
같기도 했다.

사실은 이제껏 줄곧 잊고 있었다. 이렇게 감금되어 있지만 않았더라도 아마 평생 잊고 있었을 것 같기도


했다.

율리아는 '레라지에의 갚을 기회'를 실행했다. 그러자 새로운 상태창이 떠올랐다.

[▷명령어를 입력하시오.]

이걸로 정말 되는 걸까. 율리아는 반신반의했지만 일단 믿을 구석은 이 이상한 아이템뿐이었다.

"사슬을 풀어 주세요, 레라지에 님."

머뭇머뭇 말하자마자 시스템 창이 픽 종료됐다. 율리아는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눈만 깜빡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사슬은 여전히 그녀의 손목에 단단히 감겨 있었다.

'레라지에 님이 부탁을 거절한 걸까.'

율리아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찰나였다. 바로 머리 위에서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뭐, 뭐야! 여기가 어디야?!"

뒤이어 몹시도 놀란 듯한 외침이 들렸다. 한동안 충격에 빠져 허우적대던 레라지에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인영을 발견하고서야 멋쩍은 듯 낮게 기침했다.

"큼."

"……."

"그런데 넌 왜 벗고 있냐?"

그제야 율리아는 자신이 홀딱 벗은 채 바엘의 겉옷 하나만 덮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77 화

탁탁 가벼운 발소리가 악마성의 웅장한 회랑을 울렸다. 다급히 달려 나가는 율리아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창밖에서 비친 달그림자가 성 바닥에 길게 너울거렸다.

'주군께서 인간들을 전부 죽여 버리겠다고 날뛰고 계셔. 형은 물론이고 인간 싫어하는 아가레스까지


사색이 돼선 말리는데, 솔직히 계란으로 바위치기지. 주군의 권능을 누가 감히 막아서겠어?'

'마왕님이 왜…….'

'인간들이 주제넘게 널 탐냈기 때문이잖아.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사슬을 잘라낸 레라지에가 당연하다는 듯 되묻는 순간, 율리아는 더 이상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가


잡기도 전에 그녀의 두 다리는 침실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예전부터 유독 자신을 싫어하는 루슬란이 원망스러웠고, 사람들이 자신을 같은 인간이 아닌 '열쇠'로만


보는 것이 안타깝고 슬펐다. 폐궁의 한편에서 소리 없이 죽어 갈 때는 모른 척하다가 이제야 황족으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떠미는 것 역시.

하지만 그렇다고 나 몰라라 방관할 순 없었다. 바엘을 말리지 않는다면 무려 백 명이 넘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죽게 된다.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 진심 아닌 말 한마디 때문에.

감금 엔딩이 두렵기 이전에, 수많은 목숨에 대한 죄책감을 끌어안은 채 멀쩡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기에 자신은 너무나 나약한 인간이었다.

'난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착한 인간이 아니야. 나는 그냥…… 이제 그만 행복해지고 싶어.'

시한부 인생 같은 행복이라 할지라도, 언제 끝날지 모를 찰나의 평화라 할지라도. 죽고 싶지 않다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넘어서서 지금에 충실한 삶을 살고 싶었다. 체념하고 싶지 않았다.

콰앙,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성이 마구 흔들렸다. 정신없이 달리던 율리아는 중심을 잃은 채
바닥에 저만치 나동그라졌다.

"콜록, 헉!"

그녀는 숨도 쉬지 못하고 바르르 몸을 떨었다. 떨어지면서 받은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릿한


통증이 온몸을 관통했다.

"왜, 왜 갑자기 이런……."

바닥을 짚은 율리아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창밖을 올려다보았지만 마정석과 탑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잠잠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비틀비틀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창틀을 붙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목에서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엄습했지만 이를 악 물고 발을 내디뎠다. 이윽고 광야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수많은 인간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일제히 검과 무기를 빼어 든 채로, 구석에 몰린 생쥐처럼 필사적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그런 그들의 맞은편엔 바엘이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주변을 전부 물린 채로 홀로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진심 어린 미소라고 생각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바엘의 안광은


잔혹한 포식자의 빛을 띠고 있었다.

"말려야 해. 빨리…… 으흑!"

다급히 뛰어나가려던 율리아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넘어지면서 스치듯 눈에 들어온 발목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엄습하는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렸다. 잠시만 정신을 놓아도 엉엉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보면 안 돼. 생각하지도 마. 지금 내가 무너지면……."

율리아는 고통 섞인 신음을 억누르며 자꾸만 발목 쪽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걸을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가야 했다. 바엘이 저들을 죽이도록 놔둘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움직여.

율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돌바닥을 짚은 순간, 사내 대여섯 명 정도의 묵직한 발소리가 적막한 복도를
울렸다. 철제의 중갑 신발이 율리아의 가느다란 손가락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조금만 수틀려도 손가락을
분지를 수 있을 듯한 그런 거리에.

"목표물이 이런 곳에 나와 있을 줄이야.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겠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낯선 목소리에 율리아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초면의 사내들에게 시스템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악마가 아닌 인간이었다.

그중 한 사내가 율리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그녀의 목줄을 겨눴다.

"대의를 위해 죽어 줘야겠소, 율리아 브에스드라."

"가, 갑자기 왜 그런……. 루슬란의 지시인가요?"

"나를 브에스드라의 개 따위와 비교하면 곤란하지, 황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율리아가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사내들의 가슴팍엔 흰 백합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엘고스?"

"……."

"어째서 저를 죽이려는 거죠? 전 당신들에게 아무런 짓도 안 했어요."

자신은 그들과 척을 진 바가 없었다. 정확히는 겹칠 일조차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이국의 기사들이


굳이 마왕성에 숨어드는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자신에겐 없었다.
"그보다 빨리 바깥으로 나가야 해요. 도와주세요. 이대로는 마왕님이 사람들을 전부 죽일 거예요!"

"그건 대의를 아주 작은 희생일 뿐이지."

"무슨 말씀이세요. 대의라니,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 인간이잖아요. 당신들과 같은……!"

"쯧, 평생을 폐궁에 갇혀 살았다더니 배운 것 하나 없이 멍청하군."

율리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대놓고 손가락질을 당한 것처럼


부끄럽고 초조했다. 남들과는 다른, 초라하고 모자란 자신의 모습이 발가벗겨진 것 같아 제대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칼날이 번뜩였다. 수직으로 곧게 세워진 그것이 율리아의 숨통으로 떨어지려는 찰나였다.

"당장 그분에게서 손 떼."

고막을 긁어내리는 섬뜩한 목소리에 그녀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복도 끝에서 키마리스가 눈을 부릅뜬 채
서 있었다. 적막에 잠긴 공간을 조용히 훑던 그의 눈알이 길게 찢어졌다.

키마리스의 육체를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감쌌다. 그 모습을 보던 엘고스의 기사들에게서 경악의 신음성이
터졌다.

"설마, 후작 키마리스……!"

그의 발치엔 율리아가 평소 즐겨 입던 가벼운 실내복이 떨어져 있었다. 레라지에에게 그녀의 상황을 듣고


다급히 올라오는 중이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한 쌍의 눈동자가 어딘가를 홀린 듯 응시하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율리아와 그녀의 목에 겨눠진 칼날, 그리고 기묘하게 틀어져 버린 발목. 그것들을 차례로 훑던
키마리스의 낯빛이 점점 기이하게 변했다.

보는 사람이 다 질릴 정도로 괴물 같은 형상으로.

"유감이지만 후작, 나서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그럼 열쇠의 목숨은 없을 테니까."

율리아의 머리채가 단번에 붙들렸다. 두피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그녀의 몸이 위로 들려 올라갔다.


바닥을 디딜 수밖에 없어진 그녀의 발목에서 덜덜 경련이 일었다.

"으흑, 아……."

"그분을, 율리아를, 놓으라고 했어."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듯 키마리스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체가 변이하기
시작했다. 짧게 구불거리던 남빛의 머리카락이 흑마 갈기처럼 길어지고, 셔츠가 팽팽하게 부풀며 근육이
거칠게 융기했다.

한 생물이 다른 존재로 변이하는 과정은 너무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생살을 찢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육신이 고개를 들이민다. 끔찍하게 터져 나오는 피와 살을 신생이 환희의 절정 속에 집어삼킨다. 옛
육체가 산채로 뜯어 먹히는 것이다.

악마가 변이하는 모습을 처음 본 율리아가 경악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오랜 전쟁을 치른


기사들에겐 그것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들은 긴장으로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율리아의
목줄을 더욱 강하게 틀어쥐었다.
"지금 우리를 죽인다면 열쇠도 함께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거요. 후작, 당신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 한들 코앞에 들이밀어진 검보다 빠를 순 없을 테니."

일제히 무기를 빼어 든 사내들이 율리아를 겨눴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율리아는
키마리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떠밀려 넘어질 듯한 풍압이 복도를 휩쓸었다. 방금까지 키마리스가 서 있던 곳엔 변이를 끝마친 거대한
마수가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상반신은 투구를 쓴 전사의 모습이고 하반신은 난폭한 군마 같았다. 양손엔 각각 창과 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네 발로 선 키가 삼 미터는 족히 넘을 듯했다. 난생 처음 보는 모습에 그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율리아, 눈을 감으십시오. 잠시면 됩니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는 키마리스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럽고 상냥했다. 목숨이 오가는 이런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율리아는 그런 키마리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언가 아주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율리아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키마리스 님, 안 돼요!"

"젠장, 열쇠를 죽여! 당장……!"

섬뜩한 칼날이 율리아의 목숨을 노리고 곧장 날아들었다. 이 거리에선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린 찰나, 율리아의 허리가 강한 힘으로 낚아채였다. 그녀가 붙들려 있던 자리엔
어느새 짙은 피 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 소드마스터에 근접한 기사 여섯이 쓰러졌다. 그들이 걸친 중갑 틈새로 진득한 피가


흘러내렸다. 망연자실하게 홉뜬 사내들의 눈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공포를 마주한 듯했다.

그런 율리아의 시야가 이내 어둡게 가로막혔다. 키마리스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눈을 조심스럽게 가렸다.


혹여나 여린 몸에 상처 입힐까 제대로 닿지도 못한 채로.

"보지 마십시오. 당신의 동정을 받을 자격도 없는 인간들입니다."

키마리스의 목소리는 언뜻 자상하게 들렸지만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면 내면에 들끓는 살의가 느껴졌다.


그가 느끼는 분노가 짧은 말 한마디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율리아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걱정하는 건 그들이 아니라고, 당신이야말로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두려움에 휩쓸린 혀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주, 죽였나요?"

"……."

"설마 정말 죽였나요?"

낮은 말발굽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율리아를 제대로 안아 든 키마리스가 걸음을 돌리는 소리였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뒤돌아보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이 율리아의 뒤통수를 지그시 눌러 제
가슴팍에 기대게 했다.
투구 속 새까만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당신이 다친 만큼만 돌려줬습니다. 나의 주인님이 안 된다고 명령했으니."

"하지만 피가……."

"그보다 율리아가 빠져나갈 루트를 마련해 뒀습니다. 바엘의 시선이 미끼들에게 향한 지금이 기회입니다.
인간 소드마스터와 함께 서둘러 도망치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제가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바엘을 막겠습니다. 당분간 상황이 조금 어지럽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땐 인계에 조용히 뿌리내릴 수 있을 겁니다."

키마리스는 걸음을 최대한 조심했다. 그가 발굽을 크게 내디딜 때마다 골절된 발목에 충격을 받은
율리아가 사색이 된다는 걸 알아챈 탓이었다.

78 화

아니, 어쩌면 단지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싶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율리아가


지상으로 떠나고 나면 죽는 날까지 볼 수 없을 거란 사실을 예감했기 때문에. 소식조차 들리지 않는 것이
되레 다행인 일이란 것을 알기에.

그런 그의 손목이 작은 힘으로 붙들렸다. 속도를 낮춘 키마리스가 율리아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더 아프다는 듯 작게 신음성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율리아. 최대한 조심히 움직이겠습니다."

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부러진 발목에선 여전히 끔찍한 통증이 타고 올랐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럼 레기온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무사한가요?"

"죽음의 협곡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인계로 빠져나가기엔 가장
용이한 곳입니다."

"레기온이 안전하다면 됐어요. 저를 마왕님 곁으로 데려다주세요."

그 말과 동시에 키마리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동공이 심연의 밑바닥처럼 짙어졌다.

"어째서 그에게 가려는 겁니까. 바엘은 결국 당신을, 당신의 목숨을……."

"제가 이대로 도망치면 이곳에 남은 사람들이 죽을 거예요."

"쓰레기 같은 놈들입니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저를 위해서, 제가 살기 위해서요."

율리아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들 중 하나라도 죽게 되면


자신은 바엘에게 끌려가 평생을 새장 속 인형처럼 살게 될 거라고, 이 말을 어떻게 믿게 만든다는 말인가.

어떤 핑계를 대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해졌다. 이대로 키마리스가 죽음의 협곡으로


향하게 되면, 자신은 최소한 죽지는 않겠지만 키마리스와 레기온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인계 전체가 절멸의 길에 들어설지도 모른다.
새장 속에 갇힌 채 피를 묻히고 돌아오는 바엘을 매일 밤 무력하게 바라봐야 하는 미래는 얼마나 끔찍할까.

자신도 모르는 새 키마리스를 붙든 손이 덜덜 떨렸다. 짧은 침묵이 지나고 다시금 키마리스의 발소리가


들렸다. 결국 틀린 걸까.

"제가 안 된다고 하면 들어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죽이지 않겠다고……."

말발굽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이내 거센 바람이 뺨을 스쳤다. 율리아는 거세게 흔들리는 자신의 몸을


부여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키마리스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가진 스킬을 전부 떠올려 봐도, 시스템
기능 하나하나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가 놔주지 않는다면 도망칠 수 없었다.

그때, 키마리스가 죄를 고해하듯 낮게 속삭였다.

"율리아, 기억하십시오. 난 오직 당신만의 종이란 걸. 나의 주인님이 원한다면 그것이 설령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기쁘게 걸어갈 겁니다."

"……."

"고개를 들어보십시오."

율리아의 엉덩이를 한 팔로 받친 키마리스가 반대편 손으로 그녀의 턱밑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의


손길을 피하려던 율리아는 결국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눈이 이윽고 크게 뜨였다.

자욱한 모래바람 사이로 희미한 인영이 그림자처럼 비쳤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를 푸른 돔 형태의 구체가
감싸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것이 마나라는 걸 알아보았다. 하지만 레기온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의 마나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선명한 빛을 뿜어냈다. 모래바람 따위에 가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구체는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롭게 점멸하고 있었다.

율리아의 의문을 알아챘는지 키마리스가 답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이들이라도 마나를 운용할 순 있습니다. 대신 대기 중의 마나를


순환시키는 것이 아닌 자신의 생명력을 태워 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율리아는 그 이면에 숨은 뜻을 짐작했다. 이대론 그들도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바엘의 손에 죽든


아니면 마나가 다해 숨이 끊어지든 어느 쪽으로라도 죽게 될 거라고.

"키마리스 님, 발밑의 마법진은 뭔가요?"

"바엘이 세운 일종의 감옥입니다. 마력을 지닌 이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죠. 아까 성이


흔들린 충격도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율리아의 뜻을 알아챈 키마리스는 마지못해 그녀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팔로 단단히
지탱한 채로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율리아는 숨 쉬듯 붉게 빛나는 거대 마법진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창밖에서 보았을 때 다른 마족들이


바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키마리스 님은 물론이고 마족이라면 누구도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여기부턴 나 혼자만의


싸움이야.'
율리아는 허리를 감은 키마리스의 팔을 밀어냈다. 그녀가 기어코 들어가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키마리스가
그녀의 손에 창을 쥐여 주었다. 손잡이 부분을 제외한 전체가 긴 원뿔형처럼 생긴 형태였다.

"고작 이런 것밖에 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

"아뇨, 만약 키마리스 님이 들어갈 방법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했을 거란 걸 알아요.


아까도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지상으로 보내려고 하셨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율리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키마리스의 고개가 밑으로 내려왔다. 짙은 남빛의 갈기가 그녀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다.

반인반마. 태어나 처음 보는 이질적인 생명체였다. 네발로 선 상태에서도 그녀보다 키가 두 배는 컸다.


그리고 핏줄이 툭 불거진 채 융기한 허벅지 근육은 살짝만 스쳐도 멀리 나가떨어질 것처럼 흉악해 보였다.

게다가 키마리스의 얼굴은 두꺼운 투구에 가려져 입술과 턱 부분밖에 보이지 않았음에도, 율리아는 지금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율리아의 손바닥이 그의 뺨을 조심스레 쓸었다. 짙게 드리운 투구 그림자 속 그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감겼다.

"고마워요."

그녀는 키마리스가 붙잡을 틈도 없이 마법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동시에 외부 시야가 차단되며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이동 제한 구역입니다. 플레이어는 거점 '바엘의 마법진'에서 벗어나실 수 없습니다.]

[▷악몽의 창

후작 키마리스의 권능이 담긴 창. 대상이 가장 두려워하는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 사용 기회 1]

율리아는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키마리스가 있던 마법진 너머는 불투명한 유막에 가려진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내부 공간이 무한히 확장됐다. 고작 한 걸음 걸어 들어왔을 뿐인데 그녀는
이 기이한 공간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일단 움직이자. 누군가 죽기 전에 사람들을 찾아서 구해야 해.'

자루를 바짝 움켜쥔 율리아는 창날을 지팡이처럼 짚고 다리를 질질 끌었다. 부러진 발목에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통증이 퍼졌지만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율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바닥은 붉고 주변은 온통 희뿌연 벽으로 가로막혔다. 무턱대고 움직이기만 해선
소용없을 게 분명해 보였다.

그녀는 탑의 환각 미로와 서쪽 땅의 죽음의 산을 떠올렸다. 눈앞의 것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공간의


제약을 깨부수고 나아가기 위해선 특별한 계기가 필요했다.

'마왕님의 기억에 잠식되었을 때, 무엇이 나를 호수 밑바닥까지 끌어당겼을까…….'

율리아는 가슴 위의 각인을 내려다보았다. 그간 바엘과 자신은 이것을 통해 서로가 느끼는 감각을


공유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달랐다. 아득히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자신이 곧 바엘이 되어 그가
보고 느끼는 모든 감각을 똑같이 공유했다.

눈을 부릅뜬 율리아는 이윽고 붉은 마력구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마치 정답이란 듯 원래와 조금 달라진


아이템 설명이 떠올랐다.

[▷붉은 마력의 목걸이

마왕 바엘이 자신의 강력한 마력을 불어넣어 만든 목걸이. 플레이어에게 일정 시간 마력을 공급한다.


재사용 대기 시간 1 일]

그녀의 손 안에서 화악, 붉은 빛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탑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율리아는


그것을 따라가려 했지만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법진의 마력에 감응한 빛이 삽시간에 그것과
융화되었다.

눈앞에 들이닥친 빛에 율리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변했다. 술렁이는 분위기와


당혹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엘의 모습이었다. 그는 마치 몰이사냥을 하듯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낮게


비행하고 있었다. 그의 굳은 시선은 율리아가 아닌 한데 몰려 있는 인간들만을 고집스럽게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건만, 마치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왕님, 죄송해요. 전부 제 탓이에요. 제가 해선 안 될 말을 했어요."

율리아는 창을 짚은 채 절뚝절뚝 발을 끌었다. 돌부리에 발목이 걸렸을 땐 차라리 혀를 깨무는 게 나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차마 내색할 수 없었다. 지금은 상처보다 바엘의 마음을 돌리는 게 훨씬 중요했다.

그녀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동안 바엘의 눈동자가 그녀의 발목으로 향했다. 멀리서 보아도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억지로 붙잡아 꺾어 놓기라도 한 듯 기이한 방향으로 비틀려 있었다.

"어떤 벌이든 전부 달게 받을게요. 저를 혼내시고 사람들은 놓아주세요. 제발, 죽이시면 안 돼요……."

제게 다가오는 여자를 보며, 바엘의 뇌리에 시끄러운 경종이 울렸다. 저 울음 섞인 목소리에 현혹되면 안
된다. 상대가 누구든 쉽게 마음을 내어주는 계집이다. 제 약함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인간이다.

지금도 누가 어떻게 부러뜨렸을지 모를 다리를 들이밀며 다른 인간들을 살려 줄 것을 종용하고 있지 않나.


지하의 정복자인 마왕에게, 고작 하찮은 파편 따위가.

"영악한 짓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런 다리로 혼자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목소리에 율리아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방금 놓친 생쥐 몇 마리가 그새 득달같이 달려간 모양이지. 이 안에 들어와 나를 현혹시키라고 말이야.


아닌가?"

율리아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평소의 바엘과 달랐다. 그는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인간들과 내통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해를 풀자고 키마리스의 이름을 말할 수는 없었다. 방금 복도에서 엘고스의 기사들과


마주쳤다는 사실은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바엘이 진심으로 노여워할 땐 타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그의 분노만 부추길 뿐이었다.

자신을 향한 바엘의 시선이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는 게 느껴졌다. 사람들을 살릴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잡았다!"

바로 그때, 율리아의 입이 강한 힘으로 틀어 막혔다.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그녀의 손이 등 뒤로


구속됐다. 마구 몸부림쳤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사내들의 중갑에 걸린 실내복이 종잇장처럼 길게
찢어졌다.

"흐읍, 하지, 읍……!"

"당장 우리를 해방시키시오! 그렇지 않는다면 당신이 총애하는 여인을 가장 끔찍하게 죽이겠소!"

"저 무기도 회수해!"

사내들의 다급한 외침 속에서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발악했다. 율리아의 손목을 간신히 결박한 기사가
뒤이어 그녀의 허리를 억세게 끌어안았다.

79 화

인질의 반항이 생각보다 거셌는지 주변 사내들 두엇이 더 나서서 그녀를 붙잡았다. 바엘을 자극하려는
목적이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이러지, 흑, 안 돼요……!"

실내복의 왼팔이 완전히 찢어지며 율리아의 새하얀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
사이에서 일순 무거운 정적이 흘렀지만 그렇다고 행동까지 멈추진 않았다. 지금은 고위 귀족으로서의
긍지보다 생존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오늘 일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할 것이오! 아무리 마왕이라도 인계에서 정식으로


파견한 사절단을 공격하다니!"

"열쇠가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 도망치거나 이상한 힘을 사용하면 우리도 끝장이야!"

"무기 쪽은 어떻게 됐어?!"

"젠장, 잡을 수가 없어!"

무언가를 다급히 외치던 사내들의 목소리가 일순 기이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들의 시선은 율리아의
가슴에 새겨진 붉은 각인으로 향해 있었다.

비록 소드마스터에 이르진 못했을지언정 일정 경지에 도달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율리아의 육체가


바엘에게 완전히 귀속되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뒤이어 그녀를 보는 시선이 마치 창녀를
마주한 듯 혐오스럽게 바뀌었다.

살갗을 찌르는 적의가 두렵고 수치스러웠다. 가슴을 드러낸 채 끅끅 눈물만 떨어뜨리던 율리아는 구속이
약해진 틈을 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무서워. 누구라도 좋으니까 나를, 도와줘…….'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이윽고 바엘과 눈이 마주쳤다.

짐승 같은 사내들 속에 내던져진 자신을 누구라도 가엾게 여겨 주길 바랐다. 아니,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도 바엘이 그렇게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의 시선이 가장 두려웠다.

"짜고 치는 연극이란 걸 누가 모를까."


하지만 그녀를 보는 바엘의 눈빛엔 명백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고리타분한 쇼를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뻔한 결론이겠지만 너희는 그 계집을 죽일 수 없어. 그게 죽는 순간 지상도 끝장이란 걸 알고 있거든."

"마왕님? 어째서……."

"어디 한번 잘 도망쳐 봐."

바엘이 가볍게 손을 내젓자 칼날 형태의 얼음 덩어리가 인간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떨어져 내렸다. 기사들은
바엘의 의도대로 율리아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협상 카드를 이대로 놓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잔뜩 움츠린 율리아의 머리 위로 다급한 고성이 오갔다. 마나와 마력이 부딪히며 전기가 터지는 듯한
폭발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젠장, 열쇠를 지켜!"

그런 기사들을 루슬란이 선두에서 지휘했다. 율리아를 넘겨받아 등 뒤에 가두고 마나를 전면 개방하여


강력한 방벽을 세웠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오직 율리아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바엘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다. 앞으로 나선


사내는 분명 낯익은 이였다. 게다가 기사 주제에 일국의 황녀를 만지는 데 있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른 놈들과 확연히 달랐다.

"역시 그랬군. 저것과 열쇠가 구면이라 이거지."

한편, 율리아는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바엘의 공격은 그쳤지만 방금까지 머리 위로 쏟아지던 예리한
칼날이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그가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이젠 정말로 내가 미워진 걸까. 믿겠다고 했으면서…….'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와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고 밤이 되면 나란히 누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떠들었다. 그때의 그는 서러워 눈물이 나올 정도로 자상했다.

바엘과 정사를 나누는 일도 조금도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목가에 와 닿는 들뜬 숨과,
오직 자신에게만 깊게 몰입하는 듯한 그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가슴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비록 허락된 시간은 제한적일지라도 그의 앞에서라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자신은 그의 곁에 있을 때 가장 편안했다.

율리아는 턱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훔쳐 냈다. 이건 모두 자신의 잘못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자신이 먼저 인계로 가겠다고 말해서 바엘을 화나게 만들었다.

'이대로 울고 있을 틈 따윈 없어. 그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잖아.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해. 마음이 풀릴


때까지 몇 번이라도.'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던 그녀의 팔목이 강한 힘으로 붙들렸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몸이 휙 돌아갔다.

"지금 어디로 도망가려는 겁니까!"

"정말 살고 싶다면 나를 놔주세요. 내가 마왕님을 설득할 수 있어요."

"그 눈은 옹이구멍만도 못하군. 마왕은 당신을 공격했습니다. 당신을 노리던 그 수많은 칼날을 벌써
잊었냐는 말입니다."

루슬란은 율리아를 압박하듯 그녀의 양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의 목소리가 심장을 후벼 파는 것처럼


낮아졌다.

"당신은 마족들에게도 버림받은 거야. 이젠 마왕조차 당신을 원하지 않는데, 이번엔 누구에게 빌붙을
셈이지?"

"……."

"살고 싶다면 얌전히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고개를 숙인 루슬란이 율리아의 귓가에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그녀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율리아의 눈이 초점 없이 흐려졌다.

"멍청하게도 매번 걸려드는군."

그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율리아의 어깨를 지그시 다독였다.

[▷SYSTEM

루슬란이 상태 이상 '세뇌'를 시도합니다.]

[▷SYSTEM

상태 이상 '세뇌' 파훼됩니다. 루슬란이 상태 이상 '세뇌'를 시도합니다.]

[▷SYSTEM

상태 이상 '세뇌' 파훼됩니다. 루슬란이 상태 이상 '세뇌'를 시도합니다.]

[▷ERROR

ERROR?? ERROR?? ERROR??]

율리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루슬란에게 붙들린 순간부터 수많은 시스템 창이 눈앞에 밀려들었다.
뇌를 끄집어내 정보를 강제로 주입시키려는 것처럼 그녀를 향한 루슬란의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더러운 계집. 죽어 마땅한 부정한 존재. 불쌍한 척, 가련한 척 하며 주변 동정을 갉아먹고 사는 기생충.
주제도 모르고 황족의 이름을 탐한 죄악의 증거.'

머리가 산산이 깨지는 것 같은 통증에 눈 하나 깜짝할 수 없었다. 그의 생각이 여과 없이 전해졌다.

'그때 무슨 수를 써서든 죽였어야 했는데, 나의 실책이다. 태양보다 고귀한 나의 주인님을 비참하게


만들고 말았어. 고작 평민 따위에게 그런 수모를 겪으실 분이 아닌데, 그 겨울에…….'

시스템 창이 우후죽순 떠오르고 루슬란의 증오 섞인 목소리가 뇌리를 악몽처럼 울리던 와중, 그녀의
시야가 반전되며 새하얀 눈밭이 펼쳐졌다.

날 선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정신을 잃은 소년의 발치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그어지던 4 년 전 겨울의 풍경.

하지만 율리아의 기억과는 조금 달랐다. 눈에 익은 편지가 사내의 손 안에 잔뜩 우그러져 있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높은 곳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았다. 정신을 잃은 채 끌려가는 소년과, 울면서 그를
쫓아가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걸려들었군. 나의 전하께 이 소식을 알려야지. 넌 죽어도 행복해질 수 없어.'

끔찍한 희열이 담긴 목소리는 분명…….

[▷SYSTEM

상태 이상 '세뇌' 완전 파훼됩니다.]

[▷SYSTEM

상태 이상 '세뇌'에 대한 완전 면역을 획득합니다.]

눈 덮인 밤의 풍경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아득히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주변 풍경은 그녀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루슬란의 우악스러운 손이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율리아의 흐릿한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눈을 부릅뜬 그녀가 루슬란의 손목을 역으로 움켜쥐었다.

"당신인가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모른다고 하지 말아요. 난 이제 당신의 말 따위 듣지 않아."

붙잡힌 이는 루슬란이건만, 되레 손목을 붙든 율리아의 손아귀가 덜덜 떨렸다.

"내가 사라졌으니 됐잖아요. 에스델을 대신해서 지옥 밑바닥으로 기어 들어갔어요. 당신 손으로 직접


떨어뜨렸죠. 살아선 두 번 다시 만날 일도 없었는데."

"그분의 존함을 감히 입에 담지 마십시오."

"에스델이 시켰나요? 나에게 가짜 편지를 보내고 아직 어렸던 레기온을 가장 치열한 최전선으로 보내버린
것. 전부 에스델의 짓이었나요?"

"감히, 더러운 계집 주제에 감히!!"

순간 비릿한 피 냄새가 율리아의 후각에 파고들었다. 서걱, 몸 안에서 무언가 꿰뚫리고 찢어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명치 부근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루슬란의 검이 복부를 찌르고 들어가 등을 완전히 관통했다.

"흐……."

그녀가 얕게 헐떡였다. 숨을 쉴 때마다 복부에서 피가 울컥울컥 분수처럼 쏟아졌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율리아는 몸을 작게 웅크렸다.

루슬란의 양손이 피로 흠뻑 젖었다. 그는 붉게 물든 손바닥을 홀린 듯 내려다보더니 방금 율리아가 놓친


창 쪽으로 달려갔다. 그것을 잡을 방법을 찾으려 모여 있던 군중들을 거칠게 밀어내고 창 손잡이를
붙들었다.

파지직, 파직!

잠시 거부 반응을 보이던 창이 루슬란의 손에 묻은 율리아의 피를 흡수하며 조용해졌다.

"하하, 진작 이랬어야 했어!"


기사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그들은 루슬란의 손에 묻은 피와 방벽 후방에 쓰러져 있는
율리아를 번갈아 보더니 사태를 눈치챈 듯 눈을 부릅떴다.

"루슬란 경, 이게 무슨 짓이오!"

"당신 지금 미쳤어?!"

"열쇠를 살려! 죽게 두면 안 돼!"

하지만 그들의 외침은 끝을 맺지 못했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허공을 딛고 서서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던 마왕이, 어느새 쓰러진 열쇠의 머리맡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이다.

"화내지 말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전부 제 잘못이에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제가 조금만 더, 콜록,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면."

"그만."

율리아가 숨을 헐떡일 때마다 분수처럼 솟은 피가 어느새 그녀의 주변에 질척한 웅덩이를 이뤘다. 붉은
마법진이 그녀의 피를 정신없이 집어삼켰지만 그럼에도 출혈 속도를 따라가진 못했다. 이대로라면 그녀는
몇 분도 안 가서 죽을 것이다.

지상에서 온 사자들은 절망했다. 열쇠가 죽는다면 다음은 틀림없이 자신들의 차례였다. 시체도 무사히
남기지 못할 것이다. 기사로서 가장 불명예한 죽음이었다.

절망 섞인 탄식을 토해 내던 사내들은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입 벌려."

"으응……."

마왕의 기세는 여전히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그는 율리아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그녀의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익숙하게 쓸어 넘기고 창백한 뺨을
어루만지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흐읏."

마왕이 고개를 비틀 때마다 깊게 얽혀드는 두 살덩어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열쇠의 작은 혀를


빨아들이고 문지르며 더욱 깊숙이 교합하기 위해 매달리는 모습이 선정적이고도 위태로웠다.

마왕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탄탄한 등 근육이 율리아의 움직임에 따라 깊게 굴곡지며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지금의 그는 지옥의 왕이 아닌, 연인에게 정염을 퍼붓는 하나의 사내일 뿐이었다. 누구라도
그것을 명백히 느낄 수 있었다.

80 화

타액에 젖은 입술을 떼어 낸 바엘이 율리아의 피에 젖은 복부를 느릿하게 훑었다.

"하아, 상처는?"

"이제 괜찮아요……."
"아닌 것 같은데."

이 정도로 깊은 상처는 입맞춤만으로는 치료되지 않는다. 아까보다 양은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피가


질척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꺾인 발목도 상태가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바엘의 살기 띤 안광이 인간들에게로 향한 찰나, 율리아가 그의 팔을 다급히 붙들었다.

"이제 다시 절 믿어 주실 건가요?"

"하는 거 봐서."

"하지만 이렇게 치료해 주셨잖아요."

"아군에게 공격당하는 꼴이 한심해서 그런 것뿐이다."

말과는 달리 바엘의 손은 여전히 율리아의 복부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행동을 자각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바꿔 생각하면 무의식중에도 그녀의 상태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대로 마법진이 해제되고 장벽이 사라지면 인계에서 온 사자들은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럼 모두
이전처럼 돌아갈 수 있었다.

율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머뭇머뭇 바엘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그럼 직접 낫게 해 주세요. 마왕님이……."

그녀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뺨이 모조리 불타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자신을
보는 바엘의 표정이 얼마나 집요한지도 모른 채, 율리아는 부끄러움을 참듯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거지?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역시 징그러운 괴물이야! 인간이 아니라고!"

그때, 운집해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양쪽으로 갈라졌다.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루슬란이 율리아를 겨누며 창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날카로운 창끝에선 자욱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자칫 스치기만 해도 비참한 결말을 맞을 거란 걸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 꼴은 보곤 잠시나마 풀린 듯했던 바엘의 표정이 지옥 불에 던져진 마수처럼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의


손끝에서 붉은 마력이 응집했다. 그것은 이전에 한번 보았던 거대한 독거미의 형태로 변이하고 있었다.

"결코 편하게 죽지 못할 거다."

"커맨드. 거점, 마법진."

[▷저항 거점 Lv.2

플레이어가 지정한 좌표에 일정 시간 항마력을 부여할 수 있다. 잔여 체력의 40%를 소모한다. SP 40]

[▷SYSTEM

잔여 HP 가 5% 미만입니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기능을 제외한 모든 스킬을 강제 해제합니다.]

[▷SYSTEM

상태에서 스킬 사용 시 상태 이상 '폭주'가 발생합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이펙트와 함께 기사들의 머리 위로 투명하게 빛나는 막이 생성됐다. 그들은 방금까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마력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이능을 경험한 사내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섞였다.

반면 바엘의 얼굴은 더욱 차갑게 굳었다. 율리아가 마력을 쓸 때마다 대량의 마나가 소모되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손에 닿는 그녀의 생명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저들을 살려 주세요. 무사히, 돌려보내 주세요."

"어째서 내게 맞서는 거지?"

"제발……."

아까보다 확연히 가늘어진 숨소리가 바엘의 신경을 긁었다. 그가 화를 억누르듯 한 마디, 한 마디를 낮게
토해 냈다.

"너의 능력엔 제한이 있겠지만 난 아니야."

"그럼 저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죽고 싶은 건가? 아니면 되도 않는 성녀 노릇이라도 하려는 건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제가 행복해지고 싶어서요."

모든 종류의 적의와 갈등에 지쳤다. 이젠 그런 감정들에 노출된 채로 아등바등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저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저 사람들을 위해서도 아니고, 착한 척 위선을 부리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냥 제가 행복해지고


싶어서요. 어떤 죄책감도 무게도 짊어지지 않고, 그냥 이곳에서 모두와 함께 지내는 일상이 너무
소중해서 그래요."

바엘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무척이나 강한 존재이지만, 그래도 자신과 같은
나약한 존재가 느끼는 두려움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의 목숨을 빼앗고도 멀쩡하게 살아갈 정도로 자신은 단단하지 못했다. 실수로 누구 하나를
다치게만 만들어도 마음이 무겁고 죄스러운데, 이 수많은 목숨이 고작 자신 때문에 스러진다면 평생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숨 쉬는 일조차 지옥이 될 것이다.

바엘은 제게 매달린 율리아의 모습을 집요하게 훑었다. 창백해진 뺨, 초조한 듯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
우물쭈물 닿아 오는 손길.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망설임 없이 선명하다. 기만하는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놈만큼은 내버려 둘 수 없어.'

루슬란이라고 했던가. 다른 건 몰라도 열쇠를 상처 입힌 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괴물 같은 계집! 열쇠로서 쓸모가 다 하면 제일 먼저 버려질 테지! 지옥 밑바닥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어


버려!!"

바엘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내가 창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손에 묻어 있던


열쇠의 피를 전부 흡수한 창이 다음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마침 잘 되었군."

"네?"

바엘은 율리아를 안아 올리는 척 자연스럽게 그녀의 눈을 가렸다. 덕분에 번거롭게 손 쓸 필요는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키마리스에게 맡기기엔 자신이 몹시 불쾌했다. 이대로 무능한
사내가 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열쇠의 눈앞에서만 죽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이래서 악마와 약속을 할 땐 신중해야 하는 법이다. 바엘이 만들어 낸 붉은 독거미가 루슬란의 중갑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열쇠의 피를 다 먹은 창이 드디어 다음 먹잇감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자루의 형태가 조금씩 변하더니


짐승의 아가리처럼 루슬란의 손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그것도 모자라 그의 팔을 야금야금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으아악, 으아아아아악!!"

키마리스의 악몽은 대상의 목숨을 빼앗지 않았다. 단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 줄 뿐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끊임없이,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지독하게 들러붙어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피곤하지만 잠을 잘 수 없다. 깨어 있어도 착란과 섬망에 시달리고 결국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렇다고 마냥 환상 속에서만 살 순 없었다. 신경과 감각은 극대화되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은 고스란히
느껴진다.

키마리스가 열쇠의 손에 저것을 쥐여 준 이유는 능력을 자신에게 쓰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가소롭기
이를 데 없었다.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야?! 죽어, 죽으란 말이야! 나의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잔뜩 확장된 안광에서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광견병 걸린 짐승처럼 거품 같은 타액이 턱밑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악몽이 제 갑옷 속에 파고든 붉은 거미를 따라 움직인다는 걸 모른 채, 자신의 팔을
집어삼키는 창을 목숨 줄처럼 움켜쥐었다.

루슬란의 비명은 바엘에 의해 눈이 가려진 율리아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녀가 불안한 듯 바엘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마왕님, 이게 무슨 소리에요?"

"……."

"마왕님!"

이대로 누군가의 목숨이 끊어지면 자신의 미래 또한 없었다. 조바심이 든 그녀가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바엘의 품에서 벗어나려던 찰나였다.

"이름을 부르면 알려 주지."

"네?"

"내 이름을 불러. 그 우습지도 않은 호칭이 아니라."

율리아는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둘 사이에 아주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자리도 아닌데, 수많은 눈이 자신들을 향하고 있는데다 가려진 시야 너머에선 익히 얼굴을 아는


누군가가 처절하게 죽어 가고 있는데.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슴이 조여들었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자신에게 와 닿는 그의 시선
하나하나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심장이 간질간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그래 왔던 사람처럼, 율리아는 자신도 모른 새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었다.

"바엘."

"……."

"바엘, 부탁이에……. 흡!"

그녀는 채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바엘이 짐승처럼 달려들어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동시에 사방을
에워싸던 불투명한 유막이 녹아들 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숨 쉬듯 빛나던 붉은 마법진 역시 땅 밑으로
흐릿하게 잠겨들었다.

인간들이 해방되고 바깥에서 전전긍긍 발만 구르던 마족들 역시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주군! 지상에서 열쇠의 반환 요구를 철회할 테니 사신들을 무사히 돌려보내 달라는 정식 서한이
도착했습니다. 부디 고정하십시, 아."

그 중 선두에 섰던 바르바토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고개를 든 바엘이


율리아를 안아 든 채 악마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간 소드마스터를 데려와. 열쇠에게 마나를 주입해야겠으니."

"예."

자리에 부복한 바르바토스는 지상의 사신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브에스드라 출신의
사내 하나가 악몽에 먹혀 미친 듯 발악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붉은 거미의 독까지 주입 당했다.

저 인간은 아주 오래 살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엔 오랜 생명이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될 테지만 말이다.

"저, 마왕님……."

[▷SYSTEM

잔여 HP 가 3% 미만입니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점멸하던 붉은빛이 점점 중앙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치미는 어지럼증과


구토감을 참고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바엘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맹독처럼 치명적이지만 온 시선을 빼앗겨 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로 오직
그녀 하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만 율리아가 '마왕님'이라고 했을 때, 무언가 아주 불만족스러운
사람처럼 미간을 구겼다.

흐릿하게 웃은 그녀는 이내 긴장으로 입매를 굳혔다.

"바엘,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되나요?"

"넌 어떻게 되길 원하지."

"지상으로 돌려보내 주셨으면 좋겠어요."

율리아는 바엘의 어깨 너머로 점점 멀어져 가는 인파를 응시했다. 루슬란의 오른팔이 키마리스의 창에


의해 완전히 삼켜졌다. 이젠 무슨 수를 쓰더라도 둘을 분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살아만 있다면 이후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율리아의 고개가 바엘의 품으로 툭 떨어졌다. 눈을 감은 그녀는 심호흡하듯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문득 섬뜩하게 느껴졌지만, 적어도 루슬란만큼은 자신과 레기온이 힘들었던


시간만큼 대가를 치르기를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이제껏 시달려 온 원망과 눈물을 풀어 낼 길이 없을 것
같았다.

[▷SYSTEM

잔여 HP 가 2% 미만입니다. 플레이어 보호를 위해 생명 유지 모드로 전환됩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시스템 창을 끝으로 율리아의 정신이 아득한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SYSTEM

- 특수 무기 '유성우'를 획득합니다.

- 플레이어의 '명성'이 대폭 증가합니다.]

[▷SYSTEM

5th Episode. 지상에서 온 사자]

[완료]

81 화

율리아의 의식이 수면 위로 빠르게 끌어 올려졌다. 몸은 아직 잠들어 있건만 정신만큼은 흐린 안개 속에서


막 빠져나온 듯 주변 상황을 인지하게 시작했다.

일으켜 앉혀진 등 뒤로 사내의 탄탄한 가슴과 복근이 와 닿았다. 근육은 깊고 선명하게 갈라져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 형태를 느낄 수 있었다. 등 뒤에서 넘어온 손이 율리아의 가슴을 움켜쥐고 거칠게
유린했다. 꼿꼿하게 선 유두를 손가락으로 마구 괴롭혔다.

"흐읏……."

"정신이 들었나?"

율리아의 귓불에 입술을 갖다 댄 바엘이 느른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들끓는 흥분으로 낮게 갈라져
있었다.

율리아는 하릴없이 입술만 빠끔거렸다.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몸은 여전히 축 늘어진 채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답이 없자 잠깐 멈췄던 등 뒤의 손이 다시금 움직였다. 커다란 손이
턱밑부터 옆구리까지 달아오른 몸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훑었다.

율리아의 온 신경이 바엘의 두 손에 집중됐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궤적을 자신도 모르게 좇았다. 잘게


퍼지는 쾌락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젠장, 보고만 있을 수가 없네."

바로 그때, 그녀의 허벅지가 양쪽으로 활짝 펼쳐졌다. 거친 손바닥이 율리아의 허벅지를 우악스럽게


붙잡고 그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단단한 혀가 길게 찢어진 틈새를 성마르게 파고들었다. 추웁, 춥- 질척한 물소리가 적막을 울렸다.

빠듯하게 다물린 입구가 차근차근 젖어 갔다. 입구를 빠르게 들락이는 살덩어리가 그녀의 성감대를
사정없이 압박했다.

"흐으, 아앙……."

율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침실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리가 없는데, 바엘의 손은 그녀의 유두를 보란


듯 괴롭히고 있었다. 앞에 다른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을 그러쥐어 깊은 골을 만든 채 꼿꼿하게 선
선단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동시에 다리 사이에서도 욱신거리는 열기가 밀려들었다. 축축한 살덩어리가 파고들 때마다 아랫배가
본능적으로 조여들었다. 점막에 치덕치덕 들러붙는 혀의 모양새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어떻게 구멍까지 이렇게 작고 귀엽지? 말도 안 돼."

율리아의 밑에 들러붙어 있던 사내가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손가락을 함께 찔러 넣었다. 살짝 굽혀진


손끝이 율리아의 성감대를 사정없이 긁어 내렸다.

"정신을 잃었는데도 빠듯하게 조여들어. 아아, 율리아."

좋아. 너무 예뻐. 귀엽고 사랑스러워. 깊숙이 박아서 펑펑 울리고 싶어.

다리 사이에서 열기에 들뜬 속삭임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율리아의 비부에 입을 맞춘 정체 모를 사내는


그녀를 향한 온갖 질척한 욕망을 토해 냈다.

"풀어 줘야 하는데, 안 그럼 분명 찢어질 텐데."

율리아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았던 사내가 상체를 일으키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철컥, 바지
버클 푸는 소리가 들렸다.

"도저히 안 되겠어."

"……."

"빌어먹을 박쥐 새끼, 네놈만 아니었어도 율리아를 이렇게 안았을 리가 없는데."

아, 레기온이다.

그녀를 괴롭히던 자극이 잠깐 멈춘 사이 율리아는 또 다른 사내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곳은 바엘의


침실이었다. 자신은 그에게 상체를 기댄 채 앉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다리를 활짝 벌려 주고 있었다.

"율리아, 나의 작고 연약한 율리아."

핏줄이 툭 불거진 팔뚝만 한 흉기가 밑에 와 닿은 순간, 그녀는 모든 생각을 멈췄다.

레기온이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으로.

'안 돼, 하지 마, 제발. 싫어, 무서워!'

율리아는 그에게 붙들린 허리를 마구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축 늘어진 여체의
주도권은 여전히 두 사내에게 있었다. 그녀는 의식만 살아 자신의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레기온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크윽, 아, 너무 조여!"
안 돼. 싫어, 아파……!

흉흉하게 곤두선 페니스가 채 준비되지 않은 구멍 틈새로 빠듯하게 욱여넣어졌다.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고통에 다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펑펑 울고 싶었지만 힘없이 늘어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율리아의 고개가 뒤로 휙 돌려졌다. 율리아의 턱을 움켜쥔 바엘이 그녀의 작은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거센 조류에 휩쓸리는 것 같았다. 숨 막히는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매몰되어 갔다.

"흡, 흐으, 우욱."

모든 정욕을 그녀에게 쏟아 붓고 있으면서도, 바엘의 형형한 안광은 레기온을 선명히 응시했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여자는 오직 자신만의 것이라고 과시하듯.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처음 침실에 들어선 레기온을 향해 율리아의 탐스러운 나신을 적나라하게
내보였다. 전시하듯 애무하고 입 맞췄다.

바엘의 의도를 깨달은 레기온의 머리에 열이 올랐다.

"율리아는 내 여자야. 네놈 따위에게 빼앗길 순……!"

퍽, 레기온의 허리가 세차게 움직였다. 비좁은 구멍이 뿌리까지 들어찬 페니스를 사정없이 쥐어짰다.
그는 몰아치는 쾌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녀의 골반만 움켜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얗게 바랜 손가락이 채 돌아오기도 전에, 그는 허리를 뒤로 뺏다가 다시금 짓쳐 올렸다.

"크윽!"

아아, 안 돼! 이러지 마, 제발!

레기온의 허리 짓이 점점 매끄럽고 빨라졌다. 율리아는 이런 상황이 수치스러워 펑펑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나도 버거운데 무려 두 명의 사내가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조여드는 밑과


가느다랗게 흘리는 신음을 고스란히 음미하고 있었다.

찌걱찌걱 사방으로 튀는 물소리가 점점 커졌다. 레기온의 페니스가 워낙 큰 탓에 온 내벽을 압박하며


성감대를 자극한 탓이었다. 수치스러운 감정과 달리 그녀의 구멍은 환희에 젖어 사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큿, 너무 좋아. 온통 조여들어. 율리아도 좋은 거지?"

"으응, 응응, 아흑!"

레기온의 손이 팽팽하게 벌어진 질구를 확인하듯 더듬고 문질렀다. 간혹 미끄러진 손끝이 구멍을 벌리며
들어갈 때마다 율리아는 쾌락을 견디지 못하고 자지러졌다.

음탕한 몸이 부끄러웠다. 쑤셔주는 대로 느껴 버리고 마는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레기온은 텅 비어버린


마나를 채워주고 있을 뿐인데. 감은 눈꺼풀 밑으로 도로록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으응! 하아, 우으응!"

"좋아서 숨넘어가는군. 너 때문에 지하에 홍수가 나겠어. 그럼 키마리스도 물을 구하러 지상까지 힘들게
다녀올 필요가 없겠지."
이번엔 바엘의 목소리였다. 방금까지 그녀의 턱을 쥐었던 손이 율리아의 엉덩이로 내려가 양쪽을 힘껏
벌렸다. 레기온의 것으로 가득 찼던 질구에 빠끔 틈이 드러났다.

바엘이 자세를 바꿈과 동시에 그녀의 아래에 뜨거운 선단이 비벼졌다. 하지만 율리아는 수치와 고통,
그리고 쾌락에 물들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

가뜩이나 빠듯했던 내벽이 찢어질 듯 팽팽하게 늘어났다. 바엘의 귀두가 그녀의 질구를 파고들고 있었다.
온몸에 벼락이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숨도 못 쉴 듯한 압박감이 밀어닥쳤다.

"아, 안 돼. 바엘, 제발, 아아, 아흑!!"

번쩍 뜨인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레기온의 얼굴이었다. 페니스를 퍽퍽 사정없이 밀어붙이던 그가


경악한 듯 움직임을 멈췄다.

"이 빌어먹을 박쥐 새끼가, 지금 뭐하는 거야!"

"아파, 제발 빼, 빼 주세, 아악!!"

율리아의 목울대가 빳빳하게 휘고 텅 비어 버린 동공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놀란 레기온이 서둘러 제


것을 빼려고 했지만 누구라도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율리아는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희게 질린 손발에 덜덜 떨렸다. 그녀는 명백히 겁에 질려 있었다.

"찢어질 거야. 아, 아파!"

"과연 어떨까."

"너, 바엘!!"

율리아의 질구 어딘가에 바엘의 두툼한 귀두가 턱 걸쳐졌다. 가장 난관이라 할 수 있는 대가리가 들어가자


다음은 비교적 수월했다. 그가 허리를 단번에 쳐 올리자 거친 수풀이 곧장 율리아의 엉덩이에 와 닿았다.

두 개의 페니스가 그녀의 보지에 함께 들어갔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눈을 홉뜬 율리아는 입술을 벌벌 떨며 그저 울기만 했다. 하지만 바엘은 그녀의


젖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붉게 빛나는 각인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네 몸은 아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야, 야나아, 이, 이상해……!"

"잘 느껴 봐."

율리아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린 바엘이 다시금 허리를 쳐 올렸다. 구멍이 워낙 빠듯해 그녀의 몸이 위로


덜컹 들렸다가 내려왔다.

"아흑!"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어 버렸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페니스에 곤두선 핏줄의 맥박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주 조금의 틈도 없이 아래가 가득 찼다. 율리아는 스스로 깨닫지 못했지만 그녀의 두려움과 아픔 너머엔
아주 작고 희미한 만족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엔 어떻게 될까 하는 기대감도.
"정말 아프기만 한지 말이야."

"아흥, 끅, 으으응."

"젠장, 역시 이건 아니야. 율리아, 조금만 참아."

얼굴을 굳힌 레기온이 율리아의 뺨에 범벅된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며 허리를 뒤로 물렸다. 그마저도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며 울먹였기 때문에 단번에 빼내지 못하고 아주 조금씩 그녀의 안색을 살펴 가며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바엘의 입꼬리가 잔인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네가 도망쳤으니 여자는 이제부터 내 것이다."

"……."

"율리아 브에스드라의 구멍은 앞으로 내 씨만 품게 되는 거야. 눈엣가시가 알아서 빠져 준다니 눈치가


없진 않군."

그는 진심으로 만족스러운 얼굴로 율리아의 아랫배를 훑었다. 이종 간 교배는 무척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빌어먹을 새끼."

레기온의 푸른 눈동자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어두운 각막 너머 바엘에게 짐승처럼 범해지는 율리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누가 그렇게 둘까 봐!"

푹 들어온 레기온의 페니스가 율리아의 자궁구를 거세게 때렸다. 율리아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지만
눈을 질끈 감은 그는 다시금 허리를 짓쳐 올렸다. 지독한 쾌감이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율리아, 미안해. 미안, 미안……."

"안 돼. 아흣! 아악! 아, 레기온!"

더듬더듬 밑으로 내려간 그녀의 손이 레기온의 하복부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녀의 손길은 되레 레기온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그는 율리아의 양손에 깍지를 끼고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덕분에 삽입점이 더욱 깊어지자 율리아는


버티지 못하고 힘겨운 비명을 토해냈다.

"아아!!"

"둘만 즐기면 안 되지."

바엘이 율리아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며 허리를 강하게 쳐 올렸다. 묵직한 둔기가 연약한 내벽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율리아의 손이 다른 사내에게 붙들린 틈을 타 바엘은 그녀의 음핵을 중지로 마구
굴렸다.

"흐으, 흑, 싫어어, 아아!"

"멈춰 주길 바라?"
"흣, 으응……. 으으응!"

"멈추는 게 싫단 말이지?"

열쇠의 질척한 밑은 윤활액이 따로 필요 없었다. 바엘은 손가락 사이에 음핵을 끼워 넣고 찌걱찌걱 소리가
나도록 비틀었다. 동시에 반대편 손으로 율리아의 식은땀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녀의 내벽은 연이은 절정으로 자지를 힘껏 씹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흥분을 티내지 않으려는
듯 딱딱하게 굳었다. 그 모습이 미치도록 유혹적이었다.

바엘은 턱밑으로 흐르는 율리아의 타액을 최후의 만찬처럼 쭉 빨아 삼켰다. 그녀는 모든 것이 달았다.
젖이라곤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유방까지 달아 죽을 것 같았다.

설령 열쇠가 싼 액으로 온 지하에 홍수가 난다 하더라도, 그 물로 목을 축일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먼저 안 된다고 했으니 이젠 무를 수 없어. 알고 있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속삭이는 입과 달리, 바엘의 손가락은 율리아의 작은 열매를 사정없이 짓누르고
사방으로 돌려댔다.

"그만, 거기 아, 아아아!"

"큭, 좆을 끊어 먹으려고 날뛰는군. 아주 좋아 죽어."

크게 휜 여체가 파르르 경련했다. 자잘한 쾌락이 끝없이 몰아치고, 피가 잔뜩 쏠린 클리토리스가


열매처럼 퉁퉁 부어올랐다. 하지만 바엘은 인정사정없이 그것을 더욱 자극하고 유린했다.

흥분으로 비어져 나온 꿀이 비좁은 내벽을 타고 질질 흘렀다. 율리아는 정신없이 흔들리며 위아래로 물을


쏟아냈다. 두려웠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망가지고 백치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만두라는 외침은 바엘에게 고스란히 삼켜지고, 왜인지 화난 듯 보이는 레기온은 붙든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밑이 빠듯하게 꿰뚫린 상태에서의 저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되레 안달 나 허리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깔짝대서 누구 하나 성이 찰까."

"아……!"

율리아의 허리를 휘감은 바엘이 그녀를 밑으로 강하게 쳐 내렸다. 가뜩이나 비좁은 구멍이 사정없이
조여들었지만 바엘은 자비 없이 그녀를 휘둘렀다.

늘 선명하고 또렷하던 레기온의 눈동자가 반쯤 풀렸다. 그는 멈췄던 허리를 다시금 움직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 율리아."

붉은 달빛 아래에 흔들리는 율리아의 모습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희게 빛나는 나신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액으로 흠뻑 젖었다. 오밀조밀 작지만 또렷한 이목구비가 때때로 쾌락을 이기지 못하고 힘겹게
구겨졌다.

"예뻐. 정말 예뻐, 율리아."

"레기온, 하지 마, 빼줘! 흡, 제발……!"


율리아의 애원을 무시한 레기온이 거칠게 흔들리는 유방을 움켜쥐고 젖꼭지를 쭉 빨았다. 작게 갈라진
틈새를 혀끝으로 찌르고 굴리자 머리 위에서 흐느낌에 가까운 신음이 들렸다.

지금의 율리아는 성녀의 탈을 쓴 요부 같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엔 가련한 눈물이 아롱아롱 매달려
있었지만, 활짝 벌린 가랑이 안쪽은 두 사내를 한가득 품은 채 미끈한 액을 질질 흘려대고 있었다.
위아래가 너무도 달랐다.

그때, 율리아의 등허리가 갑자기 크게 휘었다. 그녀는 제 안에 파묻힌 페니스를 빼내려 헐떡헐떡 발버둥
쳤다.

"아, 안 돼, 이상해, 아, 아흣……!"

교성을 내지르던 그녀의 내벽이 일순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굳어 버린 작은 몸이 덜덜 떨리더니 쉬이,


무색무취의 액체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큭!"

"율리아."

바엘과 레기온도 강렬한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뜨거운 씨물이 자궁에 퍼져 나가고,
속절없이 흔들리던 그녀의 몸은 아주 짧은 정적을 맞이했다.

그것은 몹시도 짧은 정적이었다. 다시금 힘을 얻은 두 사내가 그녀의 내벽을 찢어먹을 듯 팽창한


까닭이었다. 단지 안에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압박감을 자랑하던 그것들이 다시금 불규칙적으로
찔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내부는 여전히 비좁고 빠듯했지만 안을 가득 채운 정액 덕분인지 처음 삽입할 때보단 움직임이


조금 수월해졌다.

"다리 더 벌려. 만져 줄 테니."

"아니에요, 아니야, 하지, 으으응!"

"입 벌려 줘, 율리아. 아니면 가슴 빨아 줄까?"

"레, 레기온! 아아!"

구멍이 쑤셔지면서 동시에 클리토리스와 젖꼭지가 마구 짓눌리고 굴려졌다. 두 개의 페니스와 네 개의


손이 하나의 가녀린 몸을 속속들이 집요하게 유린했다.

율리아는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쾌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경련했다. 끊임없이 절정에 오르고 또
올랐다. 너무 지독한 쾌감은 되레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무력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붉은 달빛이 엉켜든 셋의 나신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것은 이성이 거세된, 완전한 짐승의 교미였다.

82 화

[▷SYSTEM

특수 무기 '유성우'를 장비 창에 추가합니다.]

오늘은 지상에서 온 사자들이 다시 인계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악마성이 모처럼 분주해진 와중, 가까스로
혼자 있을 기회를 얻은 율리아는 삐걱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율리아의 손에 환한 이펙트가 떠오르더니 이내 형태를 바꿨다. 얼음 결정 모양의 거대한 활이 그녀의
왼손에 장착됐다. 그리고 오른쪽 손가락 끝엔 희미한 빛이 반짝였다.

그것을 활에 가까이 가져가자 긴 화살촉이 자동으로 생성되었다.

"내 특수 무기는 활이구나. 무슨 능력이 있을까? 조금이라도 물리력이 있다면 좋을 텐데."

게임 [악마들의 낙원]은 플레이어 성향과 진행 루트에 따라 주어지는 무기의 종류가 달랐다. 비록 몇 번


해 보진 못했지만 그간 얻은 건 별 실효성 없는 무기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무기의 디자인부터 조금 특별해 보였다. 진짜 얼음 결정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활에


섬세한 세공이 들어갔다. 거의 일 미터에 육박할 정도로 길었지만 드는 데 무리가 있을 만한 무게도
아니었다.

"사용해 봐도 될까?"

율리아가 활시위 부근에 손가락을 올리자 화살이 메겨졌다. 나직이 숨을 고른 그녀는 창문을 살짝 열고 그
틈으로 무기를 장전했다.

그녀가 손을 놓은 찰나였다.

[▷SYSTEM

보유 무기 스킬이 없습니다. 스킬 트리로 이동합니다.]

"앗!"

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활시위에 메겨졌던 촉이 산산이 깨졌다. 직후 그녀의 시야에 금빛 나무가


자동으로 생성되었다. 지난 다섯 번째 에피소드의 보상으로 받은 스킬 포인트 3 개도 함께 떠올랐다.

[▷프로즌 애로우

마력을 보유한 적 1 인에게 강력한 3 연속 공격을 쏘아 보낸다. 잔여 체력의 20%를 소모한다. SP 20]

[▷멀티 스나이핑

마력을 보유한 적 다수를 추적해 공격한다. 스탯 'SIGHT'의 영향을 받는다. 잔여 체력의 30%를
소모한다. SP 30]

기존의 스킬은 레벨이 존재하며 배우기 위한 필요 스킬 포인트도 1 개부터 시작했다. 반면 무기 스킬은


레벨이 없는 대신 3 개의 포인트를 사용해야 했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성공시킬 때마다 얻는 포인트가 3 개이니 이번엔 한 개의 스킬밖에 배울 수 없었다.


율리아는 두 스킬을 비교했지만 상반된 성격의 공격기였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 쉽게 고를 수 없었다.

"당장 지금 배워야 하는 건 아니니까……."

율리아가 팔을 내리자 왼손의 유성우도 신기루처럼 녹아 사라졌다. 작게 한숨을 쉰 그녀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외성에서 수많은 인파가 나서는 게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가는구나.'

무의식적으로 인파를 훑던 그녀가 퍼뜩 시선을 돌렸다. 행여나 사람들 틈에 있는 루슬란을 발견할까


두려웠다.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난 트라우마가 되살아날 것 같았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창밖 행렬에 온 신경이 쏠린 율리아는 그녀의 뒤에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그녀의 등이 누군가와 퍽 부딪혔다.

"아……!"

화들짝 놀란 율리아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의 뺨에 사내의 커다란 손바닥이 부드럽게 와


닿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바엘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오셨어요?"

"……그래."

"제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누구도 죽이지 않고 지상으로 살려서 돌려보내겠다는 약속을 지켜 주었다. 그런 바엘의 앞에서 꼴사납게
떠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다.

율리아는 자신을 말없이 끌어당기는 그의 커다란 품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댔다. 그러곤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바엘

역시 떨고 있군. 빌어먹을 인간 놈들, 역시 살려서 보내는 게 아니었나.]

경악한 율리아의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시야 기능이 어째서 바엘에게……?'

그녀의 의문을 해소시켜 주려는 듯 명령어를 넣지도 않았는데 눈앞의 시스템 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그것이 멈춘 건 히든 스탯의 특정 항목이었다.

[▷DEVILISM (마성) : 444]

서쪽 땅에서 보았을 때 고작 80 에 불과하던 마성이 이렇게나 올랐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이후로 먹을 것에 각별히 신경 썼다. 마계의 것이라면 조금도 입에 대지 않았고 먹을 것이 없을 땐


차라리 굶는 방법을 택했다. 키마리스에게도 식재료를 신경 써 달라 각별히 부탁한 터였다.

'키마리스 님이 내 부탁에 소홀했을 리가 없어. 그럼 어째서?'

생각해 보면 히든 스탯은 플레이어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했다. 하지만 플레이 과정에 따라 임의로
증감될 수 있다고, 시스템은 그렇게 말했다.

갑작스럽게 오른 수치에 율리아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불안해졌다. 마성이 먹을 것에 영향을 받는 항목이


아니란 게 분명해졌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나 증가한 건지, 그리고 장차 무엇에 영향을 줄 요소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바엘이 딱딱하게 굳은 그녀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히고 머리를 쓸어 주는 와중에도 율리아는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저 의아해하는 바엘에게 마지못한 듯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한편, 깊은 적막에 빠져 있던 레벤나의 침실에 사르륵- 천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잠에서


깨어났는지 레벤나가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드넓은 광야 너머, 딱히 특정 지을 수 없는 어딘가로 향했다. 평소의 카랑함 대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무거운 적막을 깼다.

"서쪽의 마수정이 모조리 사라졌으니 힘의 균열로 말미암아 마정석의 폭주가 시작되고 말 거야. 이제
어쩌면 좋을까……."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레벤나의 침실엔 싸늘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다만 창밖을 노려보는 그녀의 안광만이
형형하게 빛날 뿐이었다.

07. 이변의 징조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브에스드라의 황도 아벨딧심에 위치한 제 1 황녀 에스델의


처소에 쨍그랑,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가 울렸다.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선 에스델의 손아귀엔 산산이 깨진 거울이 들려 있었다. 주인의 발밑에 무릎 꿇은


시녀들은 혹여나 주인이 다칠까 안절부절못했다.

"전하, 부디 고정하십시오!"

"저기 좀 보세요. 피, 피가 납니다! 이를 어쩜 좋아!"

올해로 열여덟 성인이 된 에스델 브에스드라는 난산으로 세상을 뜬 황후를 쏙 빼닮은, 제국의 누구보다도
완벽한 여인이었다.

잉그렘 5 세의 하나뿐인 후계자로 다섯 살에 제왕학을 익혔고, 일곱 살에 조정에 나서 신하들과 문답을


나눴으며, 열두 살에 승마와 검에 통달해 경연에서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녀는 모든 행실이 자로 잰 듯 완벽하고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위로는 아버지인 황제를 극진히 섬기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에게 엄하면서도 자비로웠다.

제국의 모두가 에스델을 사랑하고 그녀의 뛰어남을 찬양했다. 그런 황녀를 섬기는 일은 아랫사람으로서 큰
자부심이자 기쁨이었다.

"전하, 고귀한 몸이 상하십니다!"

"……."

"혹 루슬란 경이 전하를 노엽게 하였습니까? 지하에서 귀환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그런…
…."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던 그녀였다. 그런데 늦은 밤 외출했다 돌아와서는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난생 처음 보는 황녀의 모습에 시녀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폐하께 일을 아뢰십시오! 폐하께선 전하를 무척 아끼시니 아뢰기만 한다면 고작 후작가의 영식


따위가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히겠습니까?"

"아, 후작가 따위."

"예!"

시녀를 내려다보는 에스델의 표정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침실의 모두가 엎드려 있던 터라 그것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슴푸레한 새벽. 사람들이 입궁하기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황녀 궁엔 에스델을 측근에서 모시는 시녀 두엇이 남아 있을 뿐이었고, 특히 밤을 새우는 일은 온실 속


화초 같은 영애들에겐 무척이나 고되었기에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한미한 가문의
여식들이었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시녀의 눈앞에 연분홍빛 도는 백금발이 탐스럽게 떨어져 내렸다. 놀라서 퍼뜩
고개를 든 영애의 눈앞에 에스델의 얼굴이 들어왔다. 고작 시녀 하나를 위해 제국의 후계자가 몸을 낮춘
것이다.

그녀는 감격했다. 그리하여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에스델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말았다.

"사교계에 고개 들이미는 것조차 어려워 오만 사람 구두 바닥이나 핥던 남작가의 계집이, 나의 충실한


종을 그리 부르다니 배짱도 좋군."

에스델은 시녀의 얼굴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옆에 함께 꿇고 있던 여인이 이상함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지만, 그보다 에스델의 손에 들린 거울 조각이 시녀의 목을 관통하는 게 더 빨랐다.

"끅……!"

"아무리 배운 바가 없어도 최소한 염치는 알아야지."

단번에 동맥이 끊어졌는지 시녀의 피가 분수처럼 흘러넘쳤다. 에스델은 옆에서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다른 시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저 죽은 이보다 눈치는 빨랐던지 그녀가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저,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새벽의 일을 어디서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하급 귀족치고는 머리가 제법 돌아간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에스델의 서늘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살려서 후환을 두는 일보다 죽여 없애는 쪽이 훨씬 쉽고 간편했다. 여자는 그런 주인의 생각을 읽었는지


간곡하게 읍소했다.

"황녀 전하께선 지상의 누구보다도 완벽한 분이십니다. 고작 저 따위의 피로 고귀한 손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너만 죽어 없어진다면 나는 여전히 완벽한 후계자일 거야. 그리 생각지 않아?"

"루슬란 경이 지하에서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천한 창녀의 딸이 악마를 꾀어 일을 사악한


짓을 벌였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루슬란 경은 전하의 수족과 같았는데 이제 누가 그 일을 도맡아
하겠습니까!"

"내겐 충성 맹세를 한 수많은 기사가 있어."

"끅, 도, 도와……."

피 웅덩이 속에서 간헐적으로 경련하던 시녀가 살려달란 듯 여인의 발목에 매달려 왔다. 목의 살점이
너덜너덜 떨어져서는 움직일 때마다 대량의 피가 울컥 쏟아졌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그것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주인이 벌인 일을 외면하는 건 신하로서 '완벽'하지 못한


자세였다.
그녀는 깔딱깔딱 숨넘어가기 직전인 시녀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바로 옆, 침실 한편에
자리한 전신 거울에 시녀를 그대로 던져 버렸다.

쨍그랑!

2 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유리가 깨지며 온 황녀 궁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저 아래 1


층에서부터 막 잠에서 깬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인은 완전히 숨이 끊어진 시녀를 피 웅덩이 속에
자연스럽게 눕힌 뒤 황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줄곧 무감하던 에스델의 얼굴이 그제야 흥미롭게 바뀌었다.

83 화

"이름이 뭐지?"

"로뎀 자작가의 장녀 벨라입니다. 올해로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그래, 내가 너를 기억하겠다."

벨라에게 손등을 허락한 에스델은 이내 시체의 머리맡에 양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언제 웃었냐는 듯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죽은 시녀의 얼굴을 하릴없이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문밖에 수많은 인기척이 당도했다.

"전하, 황녀 전하! 괜찮으십니까! 소신이 안으로 들어가겠사옵니다!"

"전하께선 무사하십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벨라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피바다가 된 안의 풍경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가 이내 벨라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황녀 전하께서 크게 놀라셨습니다. 바깥에서 설명 드리겠으니, 일단 전하의 기사들과


어의를 불러 주십시오."

"황녀 전하께서 다치셨는가?!"

"죽은 시녀의 응급 처치를 하려다 유리 조각에 손을 베셨습니다."

문으로부터 뒤돌아 앉은 에스델의 안광이 섬뜩하게 빛났다.

루슬란이 금속성의 창에 팔을 집어 먹힌 말도 안 되는 꼴로 죽어가는 모습을 확인했을 때, 그리고


사신단이 귀환한 불과 며칠 새 기사들 사이에 율리아의 평판이 미묘하게 좋아진 것을 알았을 때.

에스델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고작 천한 창녀의 딸 따위가 자신에게 맞선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다들 이쪽으로 나오십시오. 전하께서 불안해하십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모두 죽은 시녀의 잘못입니다. 밤중에 침전을 지키는 게 피곤했는지 서서 조는데, 그 모습을 보던


전하께서 안타깝다며 이만 들어가 쉬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막 잠에서 깨어 질책당할까 지레 겁을
먹었는지, 칠칠치 못하게 굴다가 그만 사고가……."
에스델은 손에 쥐고 있던 거울 조각을 다시금 죽은 시녀의 목에 박아 넣었다. 시체를 주의 깊게
조사하다보면 상흔의 형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겠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황궁에 적을 둔 자라면 그게 누구든 나의 손안에 있으니.'

가장 충실한 개였던 루슬란을 잃었다. 루슬란을 그리 만든 범인은 미천한 창녀의 딸, 사사건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바로 그 계집. 자신의 명예를 갉아먹고 그 외의 모든 것을 빼앗아야 속이 편할
혐오스러운 이복 자매.

'한 번이라도 기회가 온다면 그땐 기필코 가만 두지 않겠다.'

붉게 터 오른 아침 동이 피에 물든 얼굴을 비췄다. 에스델 브에스드라는 오늘도 역시나 가장 완벽한


황녀였다.

* * *

같은 시간, 마왕성의 커다란 침대에 악마 둘과 사람 하나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자리도 넓건만 악마들은
가운데에 율리아를 끼워 넣고선 서로를 견제하듯 신경질적으로 투닥거렸다.

"이번엔 웬일로 일찍 깼대. 그냥 영원히 잠들어도 됐는데."

"너 보고 싶어서 일어난 거 아니니 신경 끄렴?"

"나도 너 싫어! 근데 왜 하필 오늘이어야 했냐고!"

아가레스가 율리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은 찰나, 반대편에 누워있던 레벤나가 손등을 탁 치며


연분홍빛 과실에 꾀어든 벌레를 잽싸게 떼어냈다.

울화통이 터진 아가레스가 소리쳤다.

"아, 진짜! 오늘 밤 작은 열쇠는 내 거였단 말이다!"

"시끄럽구나? 입 다물고 마저 자기나 해."

일의 발단은 율리아가 파이몬을 돕기 위해 아가레스에게 도움을 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파이몬을 구해 주신다면 저, 저를 조금 드셔도…….'

'조금?'

'……마, 많이.'

그간 이런저런 사건이 터져 지하가 줄곧 시끄러웠다. 사신들이 지상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간신히 한숨


돌리게 된 아가레스는 율리아에게 약속의 이행을 요구했다.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알지 못한 순진한 어린
양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레스는 크게 들떴다. 오늘 밤이야말로 작고 귀여우며 말랑한 열쇠에게 이런 짓, 저런 짓을 하며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거라 다짐했다. 다양한 준비물(?)도 미리 구비해 두었다.

율리아를 데리고 침실로 돌아오는 길, 아가레스는 넘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멀뚱히 서서 뭐하니? 피곤하니 어서 누우렴?'

그렇게 문을 연 침실 안, 레벤나가 턱을 괴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생각할수록 짜증 나네.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내 침실에 마음대로 드나드는데!"

"흥."

"앗, 저희가 친하지 않았……."

레벤나를 저격했건만 사이에 얌전히 끼어서 눈만 깜빡이던 율리아가 대미지를 입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
올망올망 설움이 들어찼다. 아닌 척 낮게 심호흡했지만 그럴수록 차오르는 민망함에 얼굴만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렇군요. 제가 혼자 착각해서, 괜히 들떠서 그만……."

아가레스와 생각하는 바는 달랐지만 율리아도 나름대로 오늘 밤을 기대했다. 어릴 적 비좁은 보육원에서


모두 함께 잠들던 때를 제외하면 그녀는 동성 친구와 함께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둥지에서 죽어도 벗어나지 말라고 윽박지르는-매달리는-바엘에게 파자마 파티의 뜻을 설명하고 그의


허락을 받기 위해 병아리처럼 열심히 따라다녔다. 깜짝 선물처럼 레벤나까지 등장했을 땐 넘치는 설렘으로
가슴이 일렁거렸다.

"저, 음, 아무래도 돌아가는 편이 좋겠죠."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제가 괜히 폐를 끼친 것 같아서……."

"폐 좀 끼치면 어떠니? 넌 훨씬 이기적으로 살 필요가 있단다?"

"시끄러워, 레벤나! 넌 좀 조용히 해!"

율리아가 턱에 설움 담긴 호두를 새기는 동안, 레벤나는 아가레스를 향해 날름 혀를 내밀어 보였다.

대로한 아가레스는 당장 저 혀를 잡아다 뽑고 싶었지만 지금은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작은 열쇠가


행여 눈물이라도 떨어뜨릴까 그녀는 안달이 났다.

"아니, 이렇게 귀엽고 작은 열쇠를 세상 누가 미워해. 안 그래?"

"……."

율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루슬란에게 온갖 폭언을 듣고 엘고스 출신의


기사들에게 목숨을 위협 당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애정을 받아 본 적 없었다.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감정은 증오였고, 진심을


주었을 때 가장 많이 되돌아온 반응은 비웃음이었다.

단지 길을 걷기만 해도 등 뒤에서 킥킥 손가락질하는데,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율리아가 위축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드는구나."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레벤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율리아에게 질척거리는 아가레스를 침대


끝으로 밀어 버렸다.

"넌 여기서 혼자 자렴? 난 율리아랑 내 침실에서 잘 테니까."

"뭐?! 그런 법이 어딨어!"
"여기 있단다."

"앗……!"

레벤나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율리아를 안아 올린 채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웬 거대 악어가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덤벼든 까닭이었다.

"내 작고 귀여운 열쇠를 내놔!"

"너 미쳤니?!"

레벤나가 재빨리 뒤로 물러서자마자 딱- 악어 주둥이가 다물리는 소리가 났다. 방금까지 그녀가 서 있던


자리였다. 레벤나는 안고 있던 율리아를 침대에 도로 내려놓은 뒤 아가레스에게 빽 소리쳤다.

"율리아가 다치면 어쩌려고 이래?!"

"내 앨리게이터는 누구네 낙타랑은 달라서 다치게 안 해! 조금 핥기만 할 거거든?"

율리아는 퍼뜩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거대 악어가 왜인지 모르게 입맛을 다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겠지.'

허공을 응시하던 율리아는 다시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악어는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해사하게 눈매를
휘었다. 그녀를 절대 입 안에 넣지 않겠다고 호소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미 늦었다.

"이렇게 막 나가면 나도 더는 못 참아! 너 사실은 율리아를 멋대로 구슬려서 ***하고 **하면서 ****
하려고 했잖아?! 그냥 내버려 뒀으면 지금쯤 무슨 꼴이 났을지 눈에 훤해!"

"막상 해 보면 열쇠도 좋아했을걸!"

"제, 제가요?!"

레벤나가 말하는 그 ***한 일의 정체를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율리아의 바람과 달리


상황은 점점 폭로전으로 치달았다.

"이걸 봐도 율리아가 그렇게 생각할까?"

레벤나가 활짝 연 서랍 안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기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웬 팔뚝만 한


크기의 몽둥이와 용도가 다소 불분명한 재갈, 목줄, 수갑, 양초 등을 발견했을 때, 율리아는 대략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바닥을 짚은 채 좌절한 율리아를 뒤로하고 두 악마가 피 터지게 싸웠다.

"내가 포기할 거 같아? 오늘만 날이 아니야, 이 빌어먹을 늙은이!"

"무, 뭐? 구백 살짜리 애송이가 감히 누구한테 그딴 막말이야?!"

아까 잠깐 보았던 팔뚝만 한 몽둥이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위압적인 형태와 굵기가 그,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과 무척 닮아 있었다. 설마 그걸 자신에게 넣을 생각이었을까. 아니겠지, 설마.

벌벌 떨던 율리아가 불현듯 시선을 들었다. 짙은 보라색 빛이 마치 신기루처럼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마신의 힘?'

그녀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찰나, 머리 위에서 쩌렁쩌렁 울리던 고함이 멈췄다. 눈 깜짝할 새 시선을
맞춘 두 악마가 율리아에게 달려들었다.

"작은 열쇠야!"

"위험해……!"

84 화

쿠르릉, 악마성이 요동쳤다. 단순한 진동 수준이 아니라 성 전체가 위아래로 요동치고 뒤틀렸다.
놀이기구를 타도 이보단 나을 것 같았다.

율리아를 감싼 채 바짝 엎드린 두 악마가 어딘가를 보더니 경악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천장이 무너지잖아?!"

"지금은 섣불리 마력을 쓸 수도 없다고!"

"무, 무슨 일이에요?"

"마정석의 폭주야! 설마 주군께서 움직인 건가?"

"꺅!"

아가레스의 설명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침실의 한 면을 가득 메운 거대한 창틀이 이격을 버티지 못하고
반으로 쪼개진 것이다. 묵직한 유리가 와장창 폭발했다.

"커맨드, 전이!"

[▷저항 전이 Lv.2

항마력이 미치는 범위를 일정 시간 넓힐 수 있다. 잔여 체력의 40%를 소모한다. SP 30]

율리아가 능력을 사용하자마자 해방감을 느낀 아가레스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녀가 손을 뻗자 동시에


칠흑의 방벽이 세워지고, 셋의 머리 위로 쏟아지던 수많은 유리 조각이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잘했어, 작은 열쇠야."

"일단 밖으로 나가야겠어. 서두르자꾸나?"

"네!"

아가레스가 앞서고 레벤나가 율리아를 감싼 채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들은 서두른 것이 무색하도록 침실


입구에 멈춰 섰다. 활짝 열린 방문 너머에 바엘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실내복 차림인 그의 머리카락은 마치 다급히 날아온 사람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언제나 조각같이
무결하던 눈동자에 깊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의 수려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긴장한 듯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율리아의 무사한 모습을 눈에 담은 그는 뒤늦게 큰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바엘……."
"이리 와."

"왜 그래요?"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기려던 율리아는 문득 발을 멈췄다. 등 뒤에서 아가레스와 레벤나가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구기고 있는 건 차치하더라도, 복도 너머에서 그녀를 찾는 수많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이몬, 키마리스, 바르바토스, 레라지에, 심지어 레기온까지 있었다.

바로 며칠 전, 자신은 마나 보충을 위해 지독히도 민망한 짓을 벌였다. 그날 이후로 셋이 한 자리에


모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몸을 돌리자, 무슨 오해를 했는지 바엘의 얼굴이 단번에 사나워졌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 전에 파이몬이 파닥파닥 돌진하다시피 날아들었다.

"율리아,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파이몬이야말로 괜찮아? 놀라지 않았어?"

"응, 파이몬, 놀랐어!"

목에 매달려 오는 아이를 끌어안은 채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맞은편에 선 레기온을 똑바로 쳐다볼
낯이 없었다.

율리아에게 레기온은 늘 열여섯 소년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어린 날 폐궁의 뒤편에서 몰래


만나던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마주한 그는 완연한 성인,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이 굵고 화려한 이목구비와


남자답게 넓고 떡 벌어진 어깨가 낯설었다. 옷 아래의 탄탄한 근육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미쳤어. 정말 미쳤어.'

착하디착한 레기온은 친구가 죽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게 분명했다. 서쪽 땅에서도 그의


도움을 받아 살아났는데, 이번엔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그런지 자신을 훑는 그의 시선이 무척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느끼는 어색함을 알아차린 걸까, 레기온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몇 발짝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섰다. 율리아는 품안에 파고드는 파이몬을 어르는 척하며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주군, 탑에 다녀오셨습니까."

"다녀오셨겠지. 안 그럼 마정석이 미쳤다고 혼자 지랄하겠어?"

율리아는 모처럼 어색한 침묵을 깨 준 두 형제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바엘의
답을 기다리는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력 폭주는 주로 바엘과 연관이 있었다. 요즘은 비교적 덜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마신의


힘을 삼키기 위해 틈만 나면 달려들었던 것이다. 대개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마정석의 폭주가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성에서 떨어져서 루슬란을 마주쳤을 때, 바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보랏빛 마력이 어두운 밤공기에 미풍처럼 번져들었다. 직후 자신은 무언가가 등을 떠민 듯 바닥으로


하릴없이 추락했다.

"열쇠를 아가레스에게 빼앗기고 긴 밤 적적하셨겠지. 안 그래?"

"아까의 폭주에서 주군의 붉은 마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다."

"형이 뭘 착각한 거 아냐?"

"아니, 파이몬도 느꼈어. 그건 온전한 마신의 힘이었어."

율리아의 품에 안겨있던 파이몬이 고개를 내밀었다. 바르바토스는 다른 악마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가레스는 누구랑 싸우느라 기억이 안 난다고 투덜거렸지만 레기온과 키마리스, 그리고 레벤나는
동의하듯 침묵했다.

율리아로부터 줄곧 무감한 척 시선을 돌리고 있던 바엘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엘

드디어 마정석이 눈을 뜨려는 건가. 창세부터 시작된 오랜 계획의 끝을 고하기 위해서.]

눈앞에 떠오른 창의 의미를 알지 못해, 율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바엘

기다리던 해방의 순간이 머지않았다. 그렇다면 열쇠도 이제…….]

생각을 멈춘 바엘의 턱이 까득 맞물렸다. 먼 허공을 의미 없이 헤매던 그의 눈동자가 이윽고 율리아에게


향했다.

그녀를 천천히 훑어 내리는 시선은 온갖 질척한 갈등으로 뒤얽혀 있어서, 율리아는 범 앞에 몰린 토끼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알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율리아는 도망치듯 시야 창을 꺼버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악마들은 각자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때, 평소답지 않게 복잡한 얼굴을 한 레벤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다 틀렸어. 마신은 죽었을지언정 그의 의지만큼은 아직도 지겹도록 살아있단다."

"그게 무슨 뜻이지?"

"중앙의 마정석과 지하 곳곳에 퍼져 있는 마수정이 바로 마신의 의지를 잇는 아티팩트야."

바엘이 마계의 왕으로 군림하기 전, 그는 북쪽에 존재하던 유일한 마수정인 죽음의 호수를 완전 파괴했다.
이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지하의 균형은 인간 소드마스터 레기온이 서쪽의 두 마수정을 격파하며
무너졌다.

레벤나의 설명을 듣던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알고 있다면 어째서 넌 그것을 막지 않았지?"

"작은 개울 하나를 막는다고 거대한 흐름까지 막아지겠니?"

"마정석과 마수정에게 자아가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아니, 그것들의 움직임은 단순한 관성일 뿐이란다? 마정석과 마수정은 마신의 아주 극히 일부일 뿐이야.
팔다리가 잘린 채 자아마저 거세된 존재들이니까."

"잠깐! 다 좋아, 일단 다 좋은데. 넌 그걸 어떻게 아는데?"

그때, 핵심에서 미묘하게 빗겨가는 대화가 답답했는지 레라지에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의 질문을 받은


레벤나는 입가에 씁쓸한 비소를 머금었다.

"이리 되었는데 뭘 숨기겠니. 나는 마신의 창세 직후 태어난 고대의 악마란다? 내 나이도 잊을 정도로,


잠들지 않으면 힘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래 된."

"……."

"말만 들으면 대단해 보이겠지만, 정작 내가 아는 건 그리 많지 않단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순 없다는 거야.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레벤나의 날카로운 동공이 탑 최상층에서 점멸하는 마정석으로 향했다. 복도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지만 율리아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자신을 응시하는 바엘의 시선만이 애달팠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갈등의 의미를 견딜 수가 없어서, 율리아는 그저 전부 놓아 버린 채 도망치고


싶어졌다.

* * *

그날 새벽, 복도에서의 이야기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지옥의 변방을 지키던 72 악마의 사역마가
일제히 악마성으로 몰려든 탓이었다.

마계 곳곳에 이상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어떤 곳은 강력한 지진으로 바닥이 갈라지며 시뻘건 내핵이
드러났고, 또 다른 곳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온 빛이 그 지역의 모든 하급 악마를 태워 죽였다고 했다.
지역마다 발생한 재앙이 천차만별이었다.

결국 정리를 포기한 아가레스와 바르바토스는 직접 조사를 나가야 할 것 같다며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각기 시찰지가 정해지는 와중에도 북부만큼은 누구도 자원하는 이가 없었다. 왜인지 다들 꺼리는
눈치였다.

이유를 묻는 율리아에게 바르바토스는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북부는 주군께서 눈을 뜬 곳이다. 한때 거대한 호수로 뒤덮여 있었지.'

바엘은 자신이 태어난 호수를 떠나며 그곳을 영원한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호수를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조리 말려 버렸고, 근처에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 없도록 거대한 메테오를 몇 번이나 떨어뜨렸다.

그 여파로 북부는 웬만한 마족은 접근도 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자욱하게 낀 붉은 안개에 닿기만


해도 세포가 녹아내리고 끔찍한 후유증에 시달리다 죽었다.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강력한 마기가
잔존하고 있는 탓이었다.

'그럼 저와 마왕님이 그곳으로 갈게요.'

'뭐? 작은 열쇠야, 그게 무슨 소리야!'

'저는 마력 저항이 있고, 바엘은 지하에서 제일 강한 악마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바엘이 처음 눈을 뜬


장소는 어떤 곳인지, 과거의 그는 왜 호수 밑바닥에 수장되어 있었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언제까지 외면하고만 있을 순 없으니까…….'

율리아는 얼굴을 거세게 때리는 바람에 현실로 돌아왔다. 하늘을 가르는 바엘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한낮임에도 주변 공기가 조금씩 붉게 변해 가고 있었다.

아득히 먼 발밑에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 때문에 지표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 분위기만
보면 아무래도 예상이 맞는 듯싶었다.

85 화

"바엘, 이곳이 죽음의 호수인가요?"

"……."

율리아는 자신을 안고 있는 이를 올려다보았다. 조각처럼 완벽한 바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해를 등


뒤에 둔 역광 상태에서도 유려하고 남자다운 턱선이 유독 돋보였다.

악마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마치 성서 속 묘사된 신의 모습처럼 아름다웠다.

바엘을 홀린 듯 응시하던 율리아는 이내 그의 턱이 꽉 다물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북부에 오게 된


이 상황이 불쾌한 듯했다.

율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모처럼의 외출에 조금은 들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스스로가 무척 부끄러워졌다. 바엘에겐 못마땅한 외출이었을 텐데, 정작 자신은 이기적으로 굴고
있었던 것이다.

"저, 죄송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율리아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바엘의 눈빛에 찰나의 후회가 스쳤지만
율리아가 그것을 알아채는 일은 없었다.

독수리처럼 상공을 배회하던 바엘이 이윽고 바닥에 느릿하게 내려앉았다. 율리아는 그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공에서 보았던 안개는 짙은 붉은빛이었는데, 정작 밑에선 흐릿한
분홍빛으로 흩어졌다.

덕분에 잔뜩 겁먹었던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율리아는 작게 심호흡하며 마른 땅에 발을 디뎠다.

[▷SYSTEM

Main Quest. 호수의 비밀]

[▷SYSTEM

- 해금 조건: 바엘과 함께 거점 '죽음의 호수'에 진입한다.

- 미션: 그림자 마물 벨제붑을 처치하시오. 제한 시간 3 일.

- 보상: 스킬 포인트 6 개

- 실패 페널티: 플레이어 사망]

[▷SYSTEM
'호수의 비밀'은 공략 캐릭터 '바엘'과의 관계가 일정 수치에 도달했을 때만 발생하는 히든
이벤트입니다.]

순간 우후죽순 나타난 시스템 창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덕분에 발밑을 보지 못한 그녀가 힘없이 휘청였다.

"괜찮나?"

"아, 그게."

"몸이 안 좋은 건가."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느라 잠깐 멈칫한 모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바엘이 그녀를 도로 안아 들었다.
율리아는 다급히 그를 붙들었다.

"저 괜찮아요! 정말……."

[▷SYSTEM

주변의 마성 수치가 매우 높습니다. 플레이어의 마성 수치가 999 에 도달하면 각성 엔딩 '새로운


지배자'에 진입합니다.]

'각성 엔딩? 새로운 지배자라니, 이건 무슨 뜻이지.'

율리아는 바엘에게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려던 것도 잊은 채 시스템 창을 응시했다. 마성 수치의 정체는


여전히 미궁 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마성이 높아질수록 자신에게 좋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정체 모를 것이 육신을 좀먹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율리아는 바엘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이마를 기댔다. 바엘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

"왜 이렇게 떨지."

"그, 조금 추운 것 같아요. 북쪽이라서 그런가, 옷을 조금 더 챙겨올 걸 그랬나 봐요."

"하여간 약해 빠졌군."

괜스레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율리아는 바엘의 냉랭한 목소리에 풀죽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바엘은
귀찮은 듯 미간을 구기더니 그녀를 작은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죽여야만 할 그림자 마물도, 그것을 죽이지 못한다면 자신이 죽을 거란 사실도, 자욱한 안개 속에
숨어 있을 마성도 모두 낯설고 두려웠다. 정체 모를 새로운 지배자에 대한 것도 그랬다.

긴장 탓에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귓가에 이는 바람에도 흠칫 몸이 떨렸다.

"팔 벌려."

"네, 네?"

놀라서 퍼뜩 고개를 들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재촉하듯 그녀의 양 손목을 툭툭 건드렸다.
로브를 벗은 바엘이 그것을 율리아에게 입히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율리아가 얼떨결에 팔을 벌리자 바엘이 로브의 널따란 소매를 하나씩 끼워 넣었다. 큼직한 로브가 어깨
위에 푹 얹어지자 그의 짙은 체향이 콧속에 스몄다. 마치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말랐군. 그딴 쓰레기를 맛있다고 먹는 입맛이니 어련할까."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그건 키마리스 님이 인계에서 어렵게 가져온……."

"그래, 그놈이 문제지."

바엘의 미간이 불만스러운 듯 구겨졌다. 그와 동시에 가느다란 허리가 넓은 끈으로 강하게 조여들었다.
쇄골에 닿는 그의 숨이 뜨거웠다. 율리아는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어쩔 줄 모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훑던 바엘은 칠흑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몸을 돌려 걸어가 버렸다. 율리아는 혹여나 그가


저를 버리고 갈까 재빨리 바엘의 뒤를 쫓았다.

"저도 같이, 읏!"

바엘은 기본적으로 훤칠한 마족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게 우월한 신체 조건을 지녔다. 그런 그가 걸쳤던


로브가 율리아에게 맞을 리 만무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에 천 자락이 거추장스럽게 엉켜들었다.

붉은 안개 너머 바엘의 모습이 사라져갔다. 율리아는 마음이 다급해졌지만 그럴수록 움직임은 더뎌졌다.


그녀가 재차 바엘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였다.

"이젠 걷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군."

율리아의 시야가 눈 깜짝할 새 높아졌다. 바엘이 그녀의 등과 허벅지 뒤쪽을 단단하게 받치며 안아 들었다.

뺨에 와 닿는 그의 체온이 뜨거웠다. 평소 바엘은 하의인 로인클로스만 대충 걸치거나 가끔 긴 로브를


덧입곤 했는데, 지금은 로브를 자신에게 주었으니 상체는 완벽한 나신이었다.

바엘에게서 강한 수컷의 분위기가 풍겼다. 시선을 두기 민망할 정도로 짐승 같은 근육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게다가 머리 위에서 곧장 내리꽂히는 시선도 너무 부끄러웠다. 율리아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마왕을 멋대로 부리는 간 큰 인간은 너밖에 없을 거다."

"그건 바엘이 너무 빨리 걸으니까……."

"옷마저 빼앗아 갔지. 음탕하게."

자기가 멋대로 입혀 준 거면서.

고개를 푹 숙인 율리아는 바엘 몰래 입술을 삐죽였다. 자신은 폐허나 다름없는 이곳이 무서워 죽겠고,
그런 와중에 바엘이 힘들어하면 어쩌나 신경이 잔뜩 곤두섰는데. 정작 그는 걱정이 무색하도록 아주
멀쩡해 보였다.

바엘의 약한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왜인지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그럼 내려주세요."

"가만있는 편이 좋을 텐데."

"왜요?"

"너의 음탕한 기대에 부응해주길 원한다면 어쩔 수 없고."


다리를 바동거리던 율리아는 즉시 행동을 멈췄다. 바엘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왔다.
게다가 그의 다리 사이에서 단단하게 일어선 무언가가 자꾸만 엉덩이에 닿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초조하게 숨을 들이켰다. 엉덩이를 스치는 이 단단하고 폭력적인 감촉은 무조건 실제가 아니어야
했다. 단지 기분 탓이어야만 했다.

율리아는 다리 사이에 바엘의 손이나 기타 무서운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허벅지를 딱 붙였다.

"쯧."

바로 머리 위에서 아쉬운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율리아는 모른 척 먼 허공만 내다보았다.

바엘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붉은 안개 속을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갔다. 특별한 목적지가 있는


눈치였다. 반면 율리아는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그저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을
응시했다.

어디선가 눅눅한 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것을 도화선으로 깊은 물 속에 침잠되어가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율리아는 바엘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기댔다. 바엘의 장난 아닌 장난 덕분에 잠깐 잊었던
두려움이 금세 다시 밀려들었다.

바엘은 그런 율리아를 말없이 더욱 강하게 안았다. 둘의 그림자가 자욱한 안개 너머로 사라져 갔다.

86 화

초저녁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안개 속은 바깥보다 훨씬 빠르게 어두워졌기에, 적당한 지점에서 걸음을


멈춘 바엘은 며칠 머물기에 적당한 작은 집을 만들어냈다.

사실 그건 집이라기보다 나무로 만든 일종의 정각에 가까웠다. 사방이 벽 없이 트여 있고 네 기둥을 세워


천장을 단단히 지탱했다. 공간 중앙엔 널찍한 침대가 자리했다. 그 외의 가구는 없었지만 지내는 기간이
짧으니 딱히 불편할 것 같진 않았다.

"이상 현상이 나타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제대로 확인해서 아가레스 님에게 전달해야 할 텐데, 막상
오니까 잘 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돼요."

그녀는 실내에 자욱한 안개를 손바닥으로 휘휘 쫓아냈다. 그래 봤자 달라지는 것 없이 힘만 빠졌지만


말이다.

[▷SYSTEM

주변의 마성 수치가 매우 높습니다. 플레이어의 마성 수치가 999 에 도달하면 각성 엔딩 '새로운


지배자'에 진입합니다.]

아까의창이 다시 떠올랐다.

율리아는 힐끗 시선을 돌렸다. 바엘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 먼 어딘가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육감적으로 떡 벌어진 어깨와 완벽한 역삼각 형태의 상체는 잠시 기다려보아도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북쪽에서 지내는 동안 이런 기회가 다시 올 것 같지 않았다. 율리아는 시스템에 진입해 아까 미처 보지


못했던 퀘스트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SYSTEM

Main Quest. 호수의 비밀]

[▷SYSTEM
- 해금 조건: 바엘과 함께 거점 '죽음의 호수'에 진입한다.

- 미션: 그림자 마물 벨제붑을 처치하시오. 제한 시간 3 일.

- 보상: 스킬 포인트 6 개

- 실패 페널티: 플레이어 사망]

[▷SYSTEM

'호수의 비밀'은 공략 캐릭터 '바엘'과의 관계가 일정 수치에 도달했을 때만 발생하는 히든


이벤트입니다.]

'그림자 마물 벨제붑을 처치하시오. 이게 이번 퀘스트 미션이구나. 하지만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웬만한 마족은 붉은 안개에 닿기만 해도 몸이 녹아내린다고 했다. 벨제붑은 인간으로 치면 방사능 지대나
다름없는 마계 북부에서도 멀쩡히 살아남은 마물이었다. 보통 상대가 아닐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유성우가 주어진 건 이 퀘스트 때문이겠지. 강력한 무기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어.'

무기 스킬을 미리 배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율리아는 퀘스트 창을 놓아둔 채로 스킬 트리를 불러냈다.


그녀가 직전에 보았던 두 무기 스킬이 다시 떠올랐다.

[▷프로즌 애로우

마력을 보유한 적 1 인에게 강력한 3 연속 공격을 쏘아 보낸다. 잔여 체력의 20%를 소모한다. SP 20]

[▷멀티 스나이핑

마력을 보유한 적 다수를 추적해 공격한다. 스탯 'SIGHT'의 영향을 받는다. 잔여 체력의 30%를
소모한다. SP 30]

프로즌 애로우는 단일 대상에 대한 공격이었고, 멀티 스나이핑은 다수에 대한 공격이었다. 설명을 보자면


대상이 늘어난 만큼 체력 소모가 커지고 공격력도 작게 분산되는 듯했다.

이번엔 선택이 쉬워서 다행이었다.

"프로즌 애로우."

율리아가 커맨드를 입력하자 작은 얼음 결정이 그녀의 손가락 끝에 이펙트처럼 회전하다 사라졌다. 그녀는
스킬 트리를 종료하고 다시 퀘스트 설명을 읽어 내렸다.

제한 시간이 3 일이라는 건 3 일 내에 이상 현상이 발생한다는 의미 같았다. 북부에 머무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아 다행이었다. 물론 퀘스트에 실패한다면 죽어서 영원히 북부에 머물게 되겠지만 말이다.

'플레이어 사망…….'

이 짧은 문장이 각인된 듯 머릿속을 자꾸 맴돌았다. 참을 수 없이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시스템


창을 끄며 잠깐 벗어 두었던 로브를 다시 어깨에 걸쳤다. 타이밍 좋게 바엘이 뒤돌았다.

그는 로브를 움켜쥔 채 잔뜩 웅크린 율리아를 보더니 미묘하게 걸음을 빨리 해 다가왔다.

"왜 그러지."
"……."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위태롭게 구는군."

그녀의 가녀린 뺨을 쓸어내리는 바엘의 목소리가 꼭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훗날


선택의 때가 다가왔을 때, 바엘이 열쇠인 자신의 목숨과 마신의 힘 사이에서 무엇을 움켜쥘지 안 봐도
뻔한데.

복도에서 그의 갈등하는 얼굴을 본 이후로 줄곧 시야 기능을 꺼 놓고 있었다. 바엘의 생각을 아는 게


두려웠다. 자신 따위는 제물로 쉽게 내어줄 게 분명했으니까.

바엘에게 마신의 힘을 안겨 주겠다고 굳게 약속했으면서 뭐가 그리 두려워. 이 거짓말쟁이.

"그냥 주변이 온통 붉으니까 조금 무서워서 그래요."

"……."

"이상한가요? 하지만 정말로 그런 걸요. 사람들은 보통 안개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이 자욱한 것 너머에
어떤 무서운 것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요."

물비린내 나는 이 자욱한 안개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마물 벨제붑이 안광을 형형하게 빛내며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율리아는 그런 속내를 숨긴 채 평소처럼 흐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바엘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율리아의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그녀의 뺨을 재차 쓸었다.

살갗에 닿아 오는 체온이 뜨거웠다. 율리아는 그것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댔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혼자였던 인생에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가


찾아들었다. 자신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그러니 더 많은 걸 바라면 분명 주제넘다고 벌을 받을
것이다.

"이런 안개 따위, 얼마든지……."

바로 그때, 강한 바람이 주변을 뒤덮었다. 그녀의 치맛자락과 머리카락이 허공에 훅 휘날렸다. 놀란


율리아는 힘의 근원을 찾았다. 바엘의 반대편 손에서 붉은 마력이 빛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이 의아했지만 율리아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열심히 휘저어도 꿈쩍도
않던 안개가 눈 깜짝할 새 멀찍이 물러난 것이다. 실내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시야 일정 반경이 마치
먹구름이 개듯 선명해졌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놀란 건 따로 있었다. 감탄사가 절로 터졌다.

"어쩜, 너무 예뻐요!"

사라졌다던 호수가 정각 바로 앞에 펼쳐져 있었다. 수평선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고 웅장했다.


잔잔하고 투명한 수면에 눈부신 저녁놀이 곧장 쏟아져 내렸다.

태어나 처음 보는 절경에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일어섰다. 호수에서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뺨을 작게 간질였다. 한동안 넋 놓고 봐도 아깝지 않을 풍경이었다.

그런 그녀는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하지만 호수는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남아 있는 걸까요. 마정석이 만들어 낸 이변 중


하나인 걸까요?"

"그 끈질긴 본능이 어디 가겠나."

바엘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과거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의 턱 근육이 움찔 불거졌다.

율리아는 새하얀 침대 시트를 들고 그의 앞에 섰다. 눈높이는 한참이나 차이 났지만 그래도 시트를 쥔


팔을 힘껏 위로 뻗었다. 그도 모자라 까치발까지 들자 호수를 노려보던 바엘의 시야가 아슬아슬하게
가려졌다.

"오늘은 일찍부터 움직였잖아요? 분명 피곤할 텐데 푹 쉬지 않으면 내일 고생할 거예요."

바엘의 의미 모를 시선이 율리아의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엘의 손을


잡아끌었다. 먼저 침대로 올라가서 그를 붙든 팔을 이리저리 흔들자 바엘은 마지못한 듯 침대에
걸터앉았다.

율리아는 그의 단단한 어깨를 꾹 눌렀다. 연약한 여자가 민다고 쉽게 밀릴 몸이 아니건만, 의외로 바엘은
절대적인 힘에 얽매인 듯 그녀에게 이끌려 침대에 얌전히 누웠다.

율리아는 바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혹여나 힘들어하는 기색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의 눈동자는
조금 복잡한 빛을 띠고 있을지언정 생각보다는 괜찮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양쪽 무릎을 세운 채 그 위에 턱을 괴었다. 그러곤 입을 다문 바엘의 곁에서 작게 속삭였다.

"안개 걷어 주셔서 고마워요. 저 때문에 그렇게 해 주신 거죠? 제가 무섭다고 해서요."

율리아에게 있어 바엘은 단지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그랬다. 그의 조각 같은


외모와 짐승 같은 체형, 절대적인 왕의 힘, 자비 없이 냉혹한 성격.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려워 눈물이 났다. 모든 것이 자신과 정반대인 남자였다.

그런데 몇 달간 같이 지내다 보니 숨어 있던 그의 면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깊은 고독에 잠긴 뒷모습,


말과는 다른 상냥한 행동들, 아주 가끔씩 툭툭 던지는 장난기 섞인 농담, 뜨겁게 와 닿는 체온과 순수한
욕망이 담긴 거친 숨소리.

곁에 있을수록 바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그는 누구도 감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악마였다.


자존심이 높았고 붉은 마력에 대한 긍지도 있었다. 그런 그가 단순히 마신의 힘만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정석에 도전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고, 율리아는 어느새 그렇게 확신하게 되었다.

'바엘이 진심으로 원하는 건 뭘까. 마신의 힘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면…….'

아니, 사실 정말로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단지


열쇠이기 때문에 잘 해 주는 것 같아 불안하다가도, 가끔씩 그의 상냥한 면모를 마주할 때면 기분이
말랑하게 녹아들었다.

"이곳에 함께 와 주신 것도 감사해요. 제가 이기적이었다는 걸 알아요. 제게 화내거나 함부로 하셔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런 스스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율리아는 침대 시트를 손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그런 그녀의 허리에 크고 단단한 손이 감겨들었다. 최초의 여자인 이브를 유혹하는 뱀처럼, 언제


올라왔는지 모를 그것이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율리아가 무릎을 세우고 앉은 탓에 허벅지 안쪽이 훤히 드러났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그녀가 퍼뜩
자세를 바꿨다. 위험하다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음, 그러니까 제 말뜻은……."

율리아를 올려다보는 바엘의 표정에 노골적인 불만이 섞였다. 그녀는 깨닫지 못했지만 사실 그의 눈빛에
단순히 불만만 담긴 것은 아니었다.

더욱 질척하고 본능적인, 심연에 고인 욕망이 그녀의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작은 얼굴,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턱선, 겁먹은 토끼 같은 커다란 눈동자, 탐스러운 복숭아처럼 길게
너울진 머릿결.

바엘은 자신도 모른 새 팔꿈치를 받치고 상체를 들었다.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 하는 작고 붉은 입술이


참을 수 없이 달콤해 보였다.

"내가 이제부터 널 함부로 다루겠다고 하면."

그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유혹적이었다. 욕망으로 부글부글 들끓는 머릿속과 다르게.

"넌 어떡할 텐가?"

"저, 저를 때리실 건가요."

"받아들이기에 따라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너는 늘 버거워 했으니."

율리아만을 지그시 응시하던 바엘의 입꼬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만족스럽게 비틀렸다.

그녀의 깊은 안쪽, 울컥 젖은 달큰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코를 들이박고 더욱 가까운 곳에서 느끼고
싶었다. 바엘은 율리아를 밀어내며 상체를 세웠다.

둘의 자세가 삽시간에 반전됐다. 발랑 뒤로 눕혀진 율리아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바엘은


사냥감을 발밑에 둔 맹수처럼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곳이 왜 이렇게 됐을까, 응?"

"읏……."

"북부에 조만간 호수 하나가 더 생기겠군. 이쪽 호수는 내게 제법 기꺼울 것 같은데."

87 화

바엘의 시선이 율리아의 허벅지 안쪽을 노골적으로 찔러댔다. 질식할 듯한 열기가 폐부 가득 밀려들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바엘과 숨을 나누고 있었다.

그의 호흡이 율리아의 아랫입술을 슬쩍슬쩍 건드렸다. 입을 벌리라고 종용하는 듯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초식 동물처럼 크게 벌어진 율리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위험하다. 이러다간 정말로 정사를 나누게 될 것 같았다.

"저 아파요."

"뭐?"

"오래 움직여서 그런가, 머리가 멍하고 몸도 좀 으슬으슬해요."


그녀는 바엘을 올려다보며 칭얼거리듯 속삭였다. 붉은 눈동자가 명백히 의문에 물들어 있었기에 율리아는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괜스레 콜록콜록 잔기침도 했다.

그제야 바엘의 숨결이 조금 멀어졌다. 왜인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율리아는 몸을 옆으로 굴린 채
팔다리를 작게 웅크렸다. 어깨끈 아래 드러난 가느다란 팔뚝에 그의 손바닥이 와 닿았다. 몇 번
쓸어보더니 바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왜 이제야 말하는 거지."

"아……."

율리아는 애매하게 눈을 굴렸다. 일단 잡히는 대로 내뱉긴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런


기분이었다. 몸이 붕 뜬 것처럼 어지럽고 시야가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그녀가 얕은 생각에 잠긴 동안 바엘은 상체를 일으키며 칠흑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언뜻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론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착각을 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푹 자면 금방 나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지?"

"자주 이러니까요. 툭하면 앓는다고, 선생님은 저더러 병든 닭 같다고 했어요."

"선생? 그놈은 또 누구야."

"아."

그녀는 입을 합 다물었다. 율리아의 머리맡에 도로 팔꿈치를 대고 누운 바엘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숨기지 말고 빨리 말하라는 재촉이었지만, 율리아는 눈치채지 못한 척 고개를 저었다.

바엘은 자신을 황녀로 알고 있는데, 보육원에 버려졌을 때의 일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 잠들 때까지 조금만 안아 주실 수 있나요?"

그녀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바엘의 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석양을 받아 깊게 그림자 진 근육이 자극받은
듯 꿈틀댔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율리아는 순진한 얼굴로 작게 하품할 뿐이었다.

"바엘의 품은 따뜻해서 좋아요. 나쁜 꿈에서 나를 지켜 줄 것 같아."

"허튼소리 말고 잠이나 자."

"네에."

"멀쩡해지지 않는다면 정말 호수를 하나 더 만들게 해 주지."

"으응, 그러지 말아요……."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지만 금방 찾아온 수마가 그녀의 눈을 무겁게 덮었다. 어느새 색색 애처로운
숨소리가 사위를 울리고,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며 바엘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 외엔 누구도 널 상처 입힐 수 없어. 절대로."

* * *
정오가 조금 지난 오후, 율리아가 잠들어 있는 침대 위로 쨍한 해가 내리쬐었다. 느릿하게 끌어올려지는
의식 너머로 잔잔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축 늘어지는 몸을 추스르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몸을 일으키고 가장 먼저 보인 풍경은 시리도록 푸른


호수였다. 어찌나 깊고 투명한지, 수면에 일렁이는 햇빛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율리아는 전날보다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이끌고 침대 밖으로 나섰다. 바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호수는 바로 근처에 있었다. 잠깐 나간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았다.

율리아가 가까이 다가가자 호수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퐁, 퐁-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호수에
실로폰을 연주하듯 깨끗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마치 사랑스러운 동화 속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아, 예뻐! 이런 건 난생 처음 봐."

율리아는 물가에 작게 쪼그리고 앉았다. 근처의 돌멩이를 생각 없이 주워 던져 보려 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호수 아래가 고스란히 비쳐 보이는 탓이었다. 불순물 하나 없이 투명한 호수를 괜히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발 정도는 담가도 괜찮지 않을까?'

마침 막 일어난 터라 씻기도 해야 했다. 게다가 목도 말랐다. 악마성에서 따로 챙겨 온 물이 있기는


했지만 꼭 이 호수 물이 마시고 싶었다. 무척 시리고 청량해 보여서, 한 모금만 마셔도 갈증이 전부
사라질 것 같았다.

결심을 굳힌 율리아가 이윽고 호수 안으로 발을 내디딘 찰나였다.

[▷SYSTEM

주변의 마성 수치가 매우 높습니다. 플레이어의 마성 수치가 999 에 도달하면 각성 엔딩 '새로운


지배자'에 진입합니다.]

갑자기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한 발을 내디디며 중심을 잃었다. 근처에 붙잡을 것을 찾았지만 물가엔 기이할 정도로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다.

그녀가 결국 깊은 물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들려는 찰나, 허리가 강한 힘으로 당겨졌다. 뒤이어 사내의
뜨겁고 탄탄한 근육이 그녀의 등에 바짝 닿았다.

언제 나타난 건지, 바엘이 율리아를 뒤에서 거칠게 끌어안았다.

"어째서 멋대로 나왔지?"

"……."

그제야 율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에게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일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이제껏 마계의 물과 음식을 되도록 입에 대지 않았다. 히든 스탯인 마성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엔
더욱 주의해서, 차라리 굶을지언정 인계로 떠난 키마리스나 레벤나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그런데 방금 자신은 저 호수 물을 마시려고 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저것을 마시지 않으면


갈증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하지만 그녀는 생각을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바엘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쥔
탓이었다.

"죽고 싶나?"

그의 목소리는 명백한 힐난조를 띠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바엘은 율리아의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방금 호수에 들어가려고 했군. 그렇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내 기억을 멋대로 헤집어 놓고선 몰랐다고 발뺌할 생각이라면 집어치워."

똑바로 봐.

짓씹듯 중얼거린 바엘이 호수를 향해 거대한 마력을 방출했다. 직후 강력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육중한 고목이 뿌리째 뽑혀 나뒹굴었고, 심지어는 하늘의 구름마저 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정작 공격을 받은 호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물을 흉내


내는 조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바엘의 공격을 튕겨 냈다.

율리아의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물을 흉내 낸다고……?'

아까 느꼈던 섬뜩함은 배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투명하고 맑은 호수에 물고기가 한 마리도


살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심지어는 호수 물이 닿는 물가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

율리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물이 아니다. 단지 그것의 형태를 흉내 낸 마력이었던 것이다.

"네가 아무리 쓸 만한 마력 저항을 지녔더라도 몸속까진 아닐 텐데."

"몰랐어요, 저는 정말."

"그딴 변명은 집어치우라고 했어!"

성난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낮게 으르렁댔다. 율리아의 양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거대한


해일이 몰아치기 직전의 폭풍 전야와 같았다.

그녀는 두려워졌다. 바엘이 이런 자신에게 질렸을까 봐.

"그래. 지하를 창세한 절대자가 실은 욕망에 찌든 역한 돼지 새끼라는 걸 넌 모르겠지."

"……."

"열쇠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 줄 아나? 마정석의 봉인을 푸는 존재, 단지 그뿐일 것 같나? 아니, 열쇠는
마신에게서 갈라져 나온 파편이야. 종말을 예견한 그가 나름대로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겠다고 먼
인계까지 보낸 모양이지만 그 더러운 본능이 어디 갈까. 결국엔……."

율리아의 어깨를 감싸 쥐었던 손이 그녀를 애무하듯 위로 타고 올라왔다. 가느다란 목을 손아귀에 넣은


바엘의 눈빛은 이 하찮은 것을 어쩌면 좋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널 삼키고야 말겠지."

이토록 탐스러운 성찬을 거부할 존재는 없을 테니.

율리아는 자신에게서 느릿하게 손을 물리는 바엘을 응시했다. 그는 얼핏 손을 떼기를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굶주린 맹수가 먹잇감을 보면서도 차마 그것을 죽일 수 없어 송곳니를 물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방금 바엘이 말한 것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열쇠의 진짜 의미, 마신의 파편, 종말의 예견,
가장 중요한 것, 그리고 본능.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바엘은 열쇠가 마정석에 의해 잘못될까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열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붉은 각인의 탓일까, 바엘의 말뜻을 깨닫자마자 갑자기 심장이 간지러워졌다. 입을 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율리아는 조심스레 바엘의 손가락 하나를 붙들었다.

"당신은 지금 나를 걱정하고 있는 거죠?"

그녀의 시선을 받은 바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고 묻는 듯 입가가 작게


경직됐다. 하지만 율리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내가 너를 걱정한다고."

"바엘은 열쇠를 잃는 것보다 제가 해를 입는 게 더 싫은 것처럼 보여요."

배시시 웃던 율리아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하며 덧붙였다.

"혹시 제가 틀렸더라도 고쳐 주진 마세요. 바엘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거든요. 그래 주실 거죠?"

냉정한 눈빛 이면에 감춰진 바엘의 상냥함을 알고 있었다. 남들은 모르는, 오직 자신만이 아는 그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율리아는 구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뒤 바엘을 스쳐 지나갔다. 정각을 향해 총총 뛰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바엘은 그녀에게 붙들렸던 손가락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참을 수 없이 열기가 올랐다.

붙들어 입 맞추고 싶었다. 도망치려 할수록 더욱 강렬하고 집요하게, 여자의 작은 몸이 미처 받아들지


못할 정도로 밑을 가득 채우고 흔들어서, 두려워하며 펑펑 울음을 터뜨린다면 자신은 그 눈물마저 더욱
즐겁게 삼키리라.

하지만 욕망이 난잡하게 얽혀 든 그의 머릿속에서도, 짐승 같이 율리아를 범하는 와중에도 그는 차마


그녀를 엉망으로 망가뜨리지 못했다.

'바엘은 열쇠를 잃는 것보다 제가 해를 입는 게 더 싫은 것처럼 보여요.'

율리아 브에스드라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바엘은 정작 그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칠흑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푸르고 시린 호수가 그의 목울대처럼 느리게


일렁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게.

88 화

흐릿한 물안개 사이로 달빛이 산란하는 밤이었다. 온종일 기다려도 이상 현상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누군가에 의해 침대에 눕혀진 늦은 밤.

얕은 잠에 빠졌던 율리아는 옆에서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사위가 온통 어두웠지만 침대 위에


흐드러진 머리카락은 그보다 더욱 검었다. 달빛 한 조각조차 남김없이 흡수해 버렸다.

다른 이는 몰라도 율리아에겐 무척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음, 웬일로 일찍 깼어요……?"

바엘은 마계의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마력을 지녔다. 하지만 지나치게 강대한 힘은 육신
안에서 끊임없이 몸집을 부풀리며 되레 그를 끔찍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바엘은 마력 저항을 지닌 율리아와 만난 이후에야 가까스로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오랜


불면의 고통을 보상받듯 집착적으로 잠에 매달렸다. 지금처럼 고작 몇 시간 잠들었다가 깬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엘?"

적막을 울리는 그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율리아는 잘 보이지 않는 침대 위를 더듬더듬 짚었다. 손끝에


닿는 그의 몸이 차가웠다.

"바엘, 괜찮아요?"

율리아는 덜컥 겁이 났다. 이곳 호수엔 그가 악몽처럼 여기는 과거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혹은창이 뜰


정도로 겹겹이 녹아든 마성이 마력 저항을 뚫고 그를 괴롭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불을 켜려 다급히 탁자를 돌아보았지만 이곳은 둥지가 아니었고 침대 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힘겨운 듯 몸을 뒤척이는 바엘을 보며, 율리아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다쳤을 땐 항상 당신이 치료해 줬죠. 그러니 이번엔 내가…….'

스산한 붉은 달빛이 바엘의 나신을 비췄다. 그의 호흡을 확인하려 고개를 숙였던 율리아는 조각처럼
선명히 굴곡진 근육에 일순 시선을 빼앗겼다.

위험하고 매혹적인 사내의 몸은 그녀의 손이 짧게 닿은 것만으로도 흥분한 듯 요동쳤다. 더욱 만져달라는


것처럼 허리를 느릿하게 움직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율리아는 애매하게 남아 있던 망설임을 가까스로 밀어냈다. 지금은 그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바엘의 뺨에 손을 올린 그녀가 이내 머뭇머뭇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당신 혼자 아프게 두지 않아요."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에 맞춰 비스듬히 고개를 비틀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 당장 떨어지라고 절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율리아는 이내 상념을 털어 냈다.

촉, 바엘의 메마른 입술에 가볍고 말캉한 버드 키스가 내려앉았다. 이 정도로는 부족할까 싶어서 쪽, 쪽-
몇 번 더 입술을 눌렀다. 바엘과 이보다 더한 일도 몇 번이나 했는데, 율리아는 고작 입맞춤만으로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짧은 접촉으로도 마력 저항의 효과가 나타난 걸까, 바엘의 떨림이 조금씩 멎기 시작했다. 안도한
율리아가 다시 고개를 들려는 찰나였다.

"흡……!"
그녀의 목덜미가 강한 힘으로 당겨졌다. 도망칠 새도 없이 바엘의 혀가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그는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맹렬히 덤벼들었다. 율리아를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로 뒤통수를 억눌렀다.

둘의 자세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율리아의 위에 올라탄 바엘이 만족스럽게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재차 입술을 짓눌렀다.

"아읏, 잠시!"

비좁은 입 안을 거칠게 헤집는 혀가 버거웠다. 숨이 달린 율리아는 힘들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에도


바엘은 끈질기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SYSTEM

플레이어의 체내에 대량의 마성이 주입됩니다.]

[▷DEVILISM (마성) : 555]

[▷DEVILISM (마성) : 666]

[▷DEVILISM (마성) : 777]

눈앞의 수치가 시시각각 올라갔다. 놀란 율리아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의 애처로운 목소리는 바엘의 입
안으로 고스란히 삼켜졌다. 그의 밑에서 벗어나려 있는 힘껏 저항해도 압도적인 완력 차 앞에선 소용없는
짓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잠시라도 좋으니 제발 놓아달라고 애원하려던 그때였다.

무심결에 바엘의 얼굴을 올려다본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부릅뜨였다. 짙게 드리운 어둠 속, 형형한


보랏빛 안광이 소름 끼치도록 번뜩였다.

'눈동자 색이…….'

바엘이 아니었다.

율리아는 저항하는 것도 잊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 바엘의 모습을 한 마물이 보란 듯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무기질처럼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오직 그녀만을 향하고 있었다.

율리아의 심장이 칠흑 같은 무저갱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한발 늦게 현실로 돌아온 그녀가 미친 듯


발버둥 쳤다.

"바엘, 바엘!"

"절대 벗어날 수 없어."

"당신은 누구죠? 도대체 왜 그의 모습을……!"

율리아의 왼손에 투명한 빛이 모여들었다. 화악, 눈부신 빛과 함께 그녀의 손에 얼음 결정 형태의 활이


생겨났다.

바엘의 탈을 쓴 그림자가 살짝 뒤로 물러난 틈을 타 율리아는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그림자의 미간에


예리한 화살촉이 곧장 겨눠졌다.

"떨어지지 않으면 쏘겠어요."

"……."
"바엘은 지금 어디에 있죠? 그를 어떻게 한 거예요?"

"알고 싶나?"

의외로 순순히 상체를 세운 그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길게 그었다. 보랏빛 아가리를 벌린 공간 사이로


블랙홀처럼 시커멓고 기분 나쁜 통로가 드러났다.

알고 싶다면 이 손을 잡으란 듯 유혹하는 이를, 율리아는 흔들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어떻게 해야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악마의 눈은 그가 지닌 힘을 상징한다. 눈앞의 이는 분명 바엘이


아니었지만, 눈동자 외의 부분은 원래의 그와 같았다.

그래서 율리아는 확신했다. 그림자 마물 벨제붑이 바엘의 몸을 차지했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마물을 공격할 수 없었다. 유성우를 쏘면 벨제붑을 처리할 수 있을지언정 몸의 주인인
바엘 역시 무사할 수 없었다. 고작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잠든 자신을 조심스레 침대에 옮겨 주던,
이불을 덮어 주고 머리를 자상하게 쓸어 주던 그를.

'난 못해. 어떻게 내 손으로 바엘을…….'

율리아는 치미는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저것을 처치하지 않는다면 돌아오는 대가는 자신의
죽음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당긴 활시위를 쉽사리 놓을 수 없었다.

그녀의 갈등을 무감히 바라보던 마물이 다시금 그녀의 눈앞에 손을 뻗어왔다.

"잡아."

"……당신을 따라가면 전 어떻게 되나요."

"넌 나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 오직 내게서 비롯된 존재.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파편."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마물의 기분 나쁜 안광이 율리아의 얼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네가 어떤 반항을 하든 힘없는 계집의 의사 따윈 쉽게 꺾을 수 있다는 것처럼.

그러한 모습을 마주한 순간, 율리아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바엘은 자신을 이런 식으로 짓밟지 않았다.
그러니 저것은 절대 바엘이 될 수 없었다.

'키마리스 님이 말했어. 악마는 심장만 무사하면 죽지 않는다고. 바엘의 심장은 악마성 그 자체야.'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도 바엘도 벨제붑에게 휘둘려 파멸을 맞을 뿐이었다.


율리아는 결심을 굳혔다.

"틀렸어요. 당신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내가 인정한 지하의 왕은 오직 바엘 하나뿐이니까."

커맨드 시스템.

율리아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같은 공간에 있는 유일한 대상인 마물이 자동 타기팅 되었다. 동시에 스킬
명령을 기다리듯 유성우가 밝게 빛났다. 누가 보아도 공격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지만 마물의 표정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넌 내 거야."

쇠를 긁듯 갈라지는 목소리가 소름끼쳤다. 그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영원히 내 거야."

율리아를 위아래로 훑는 동공이 짙게 번들거렸다. 단지 시선과 말뿐인데도 두려움에 숨이 턱 막히며 혀가


본능적으로 굳었다. 그 찰나의 순간, 벨제붑은 유성우를 쳐내며 그녀의 위로 거칠게 덮쳐들었다.

침대가 위태롭게 삐걱대는 소리가 축축한 밤공기를 울렸다. 마물은 도망치려는 율리아의 발목을 움켜쥐고
밑으로 쭉 끌어내렸다.

그녀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헤드에 안간힘을 다해 매달렸다. 하지만 강제로 당기는 마물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물은 마치 꽃을 꺾듯 그녀를 손쉽게 잡아당겼다.

"이거 놔, 꺄악!"

"가련하고 어리석은 나의 파편. 제 발로 나를 찾아와 놓고 이제와 도망치겠다고?"

침대 헤드를 놓친 율리아는 닥치는 대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베개와 시트뿐, 그녀는


속절없이 마물의 다리 사이로 끌려갔다. 잔뜩 흐트러진 율리아를 내려다보며 마물이 만족스럽게 눈매를
휘었다.

"오늘 밤 넌 나와 하나가 되는 거야."

"싫어! 바엘, 바엘……!"

"부활의 때가 다가온다. 이로써 나의 오랜 계획이 시작되는 것이다!"

마물은 그녀를 개처럼 엎드리게 했다. 그러곤 강제로 치켜 들린 엉덩이에 제 하반신을 눌렀다. 뜨겁고
팔뚝만 한 무언가가 얇은 네글리제 너머로 선명히 느껴졌다. 바엘이되 바엘이 아닌 것이 자신에게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징그럽고 구역질 났다. 이를 악문 그녀가 재차 외쳤다.

"프로즌 애로우!"

[▷프로즌 애로우

마력을 보유한 적 1 인에게 강력한 3 연속 공격을 쏘아 보낸다. 잔여 체력의 20%를 소모한다. SP 20]

이 공간에서 마력을 보유한 이는 벨제붑 하나뿐이다. 아까 마물이 쳐낸 탓에 산산이 부서졌던 얼음 결정이


다시금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하지만 그가 타기팅 되기 직전, 율리아의 양 손목이 침대에 거칠게 내리눌렸다. 벨제붑이 그녀의 주먹을
움켜쥔 팔에 체중을 싣는 순간, 우두둑- 무언가 섬뜩하게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큭큭, 그러게 처음부터 얌전히 따라왔다면 좋았을 것을."

고통은 직후에 찾아들었다.

"아, 아아, 아아아악!"

벨제붑이 그녀의 손목과 손가락 관절을 모조리 으깨 버렸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패닉이 엄습했다. 손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뺨에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아파, 아, 아파, 아아, 아파……."


"이제 내 것이 될 시간이다."

그녀의 손가락을 벌린 벨제붑이 보란 듯 깍지를 낀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율리아는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술만 애처롭게 뻐끔거렸다. 네글리제 자락이 가슴까지 밀려 올라갔다.

"흑, 끅! 바엘, 바엘."

충격으로 폐부의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갔다. 율리아는 자신이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지도 모른 채 입술을


덜덜 떨었다.

89 화

바로 그때, 마물의 고개가 푹 꺾였다. 율리아의 손목을 짓누르던 힘이 갑자기 사라지고,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진 마물이 성난 맹수처럼 포효했다.

"네까짓 게 날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아?!"

"……."

"네놈도 결국 나의 일부일 뿐이야. 잠깐 풀어 줬다고 해서 정말 자유라고 착각하면 곤란하지!"

간신히 고개를 든 율리아는 홀로 바닥을 뒹구는 마물을 내려다보았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흑발 사이,
언뜻 드러난 눈동자가 흐릿한 붉은 빛을 띠었다.

"바엘, 바엘!"

분명 바엘이었다. 그가 육체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벨제붑과 싸우고 있었다. 등의 날개가 폭발하듯


거대하게 펼쳐졌다. 칠흑의 깃털이 휘날리는 가운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가 엉망으로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지 마!"

"이리 오지 못해?!"

"여기서 나가! 당장!"

"날 방해하면 죽여 버릴 테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율리아가 불현듯 멈칫했다. 그림자 마물 벨제붑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바엘이 몸을 빼앗길 정도라면, 그를 호수 밑바닥에 처박을 수 있는 존재라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 바엘이…… 고작 나 같은 걸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너덜너덜해진 손가락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으스러진 뼈와 관절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영영 손을 못 쓰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를 구해야 했다.

"커맨드, 프로즌 애로우."

영창과 동시에 주변 시야가 삽시간에 반전됐다. 바닥을 뒹구는 마물의 발아래 희게 빛나는 마법진이
떠올랐다.

율리아를 올려다보는 악마의 안광이 아주 잠시, 붉게 변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길게 자라난 발톱을 바닥에 깊게 박아 넣었다.
직후, 날카로운 화살 형태의 이펙트가 그의 머리 위로 눈보라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림자 마물 벨제붑

공격 판정 -3%

공격 판정 -3%

공격 판정 -5%]

[▷HP 100% 》 89%]

벨제붑, 혹은 바엘이 괴로운 듯 몸을 뒤틀었다. 융기한 등 근육이 고통을 참듯 마구 꿈틀댔다. 그러나


정작 공격 판정은 생각보다 크게 들어가지 않았다.

아까 스킬을 쓰려다 무산당하고, 방금 중복으로 스킬을 쓴 탓에 남아 있는 체력이 많지 않았다. 아직은


버틸 수 있었지만 이 속도대로라면 벨제붑보다 자신이 먼저 쓰러질 게 분명했다.

"이 빌어먹을 놈을 처리하면 다음은 네 차례다."

바닥에 박힌 발톱만 뽑아내면 당장에라도 달려들겠다는 듯, 그녀를 아래부터 훑는 보랏빛 안광이 소름


끼치도록 번들거렸다.

벨제붑의 시선이 뭉개진 손목에 닿은 순간, 겁먹은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다시 스킬을 사용했다.

"프, 프로즌 애로우."

[▷그림자 마물 벨제붑

공격 판정 -2%

공격 판정 -1%

공격 판정 -3%]

[▷HP 89% 》 83%]

아까와 같은 공격이 들어갔지만 판정 공격 수치는 더욱 적어졌다. 반면 스킬을 연달아 세 번이나 사용한


율리아의 체력은 절반 밑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느끼는 당혹감을 마찬가지로 감지했는지 마물의 눈매가 샐쭉 휘었다.

"킬킬킬킬."

율리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누군가가 구해 주길 기다릴 정신조차 없었다. 마물에 의해


목이 뜯기는 장면이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상상 속의 그녀는 물 밖으로 끌려 나온 관상어처럼 시커먼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질척하게 고인 핏물


사이에서 멍한 눈을 한 채 죽어 가고 있었다.

"크윽, 헉! 허억……!"

지독한 악몽 밑바닥으로 침잠해가던 그녀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발톱을 뽑으려 발버둥 치던 악마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채 괴로운 신음을 들이켰다. 바닥을 기며 뱀처럼 몸을 뒤틀었다.
칠흑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악마의 눈동자 색을 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율리아는 어떤 직감에 의해 한 발을 내디뎠다.

"당신이에요?"

"……."

"고, 공격해서 미안해요. 안 그럼 마물이 바엘을 죽일 것 같아서 두려웠어요. 아니, 사실은 내가


두려웠어요. 흑, 미안해요. 미안해요. 많이 아팠죠?"

그녀는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중엔 미안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바엘이
고통에 바스락대는 소리와 율리아의 울먹이는 숨소리만이 밤의 깊은 정적을 울렸다.

그때, 바엘이 탈진한 듯 바닥에 엎드려 힘없이 늘어졌다. 그런 그의 모습이 어쩐지 숨이 멎기 직전처럼
위태로워 보여서, 율리아는 참지 못하고 그의 머리맡에 무너지듯 엎드렸다. 차갑고 단단한 등 위에
눈물로 푹 젖은 뺨을 기댔다.

곧장 맞닿은 그의 살갗이 나직이 떨렸다.

"……도와줘. 움직일 수 없어."

"어떡하면 당신을 도울 수 있죠? 뭐든 할게요."

율리아는 가장 먼저 땅에 단단히 박힌 바엘의 발톱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달려들려던 벨제붑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급한 대로 행한 미봉책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의 열 발톱이 전부 뽑혔다. 끝이 뭉뚝한, 생소한


모양새의 손가락이 검붉은 피로 번들거렸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끔찍했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참혹함 뒤, 또 다른 섬뜩한 감정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땅속에 박혀 있던 손가락이 바닥을 짚고 있다는 건.

"당신, 움직일 수 있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나의 파편. 원하는 상황을 조금 연기해 준 것만으로 내게 주저 없이 안겨 들다니!"

율리아의 몸이 허공에 붕 뜨였다. 그녀의 허리를 낚아챈 악마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짧은 거리를


달음박질쳤다. 엉망으로 부서진 정각이 빠르게 멀어지고, 율리아의 머리 위로 붉은 달빛이 길게 그림자
졌다.

쩌적-

악마가 그녀를 끌어안은 채 호수 속으로 뛰어든 순간, 물결을 흉내 내듯 이질적으로 일렁이던 수면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마치 거울 깨지는 소리처럼.

'아, 나는 어쩜 이렇게…….'

깊이 잠길수록 산산이 깨진 수면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숨을 참다못한 그녀가 결국 체념하듯 남은


공기를 모조리 뱉었다. 부글부글 터지는 기포가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워 갔다.

* * *

쏴아아,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율리아의 귓가에 맴돌았다. 축축한 물안개가 살갗에 무겁게 달라붙었다.
"콜록, 콜록! 헉!"

율리아는 뭍에 반쯤 걸쳐진 상태로 눈을 떴다. 힘없이 드러누운 그녀의 시야에 여러 줄기로 이뤄진 거대한
폭포가 들어왔다. 각 줄기는 물감을 탄 듯 색이 조금씩 달랐는데, 호수에 섞여 들며 아름다운 오로라
빛으로 일렁였다.

율리아는 흐릿한 정신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지금의 이 풍경을 기억 속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신의 탑에 숨어 있는 폭포 구역, 퀘스트 '탑의 비밀'의 종착지였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방금 전까지 마계 북부에 있었는데 어째서…….'

[▷SYSTEM

Main Quest. '호수의 비밀' 진행 중]

하지만 시스템 창은 여전히 그녀가 퀘스트 '호수의 비밀'을 진행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꿈이 아닌
현실이란 의미였다.

"흑, 아파!"

바닥을 짚으려던 율리아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졌다. 시선을 내리자 여전히 엉망으로 으스러져 있는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호수에 빠지기 전보단 나아진 것 같아.'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약간은 치료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가장 심각했던 손목의 상태는 여전했다.


하지만 벨제붑이 무게를 실어 짓누른 탓에 완전히 꺾여 버렸던 손가락은 원래의 모양새를 되찾았다.

'바엘이 입 맞춰 주면 이런 식으로 말단부터 나았는데…….'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율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왜 마신의 탑까지 온 건지, 이곳이
정말 탑은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전에 자신 혼자만 이곳에 쓸려왔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벨제붑은 자신을 끌어안은 채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실수가 아닌 의도적 행동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그렇게 한 것에 이유가 있다는 뜻이 되었다. 마신의 탑으로 와야 할 이유가.

방금까지 미묘하게 느껴지던 불안감이 확신이 되어 다가왔다.

'넌 나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 오직 내게서 비롯된 존재.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파편.'

자신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훑어 내리던 벨제붑의 눈빛.

'네까짓 게 날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아?!'

"네놈도 결국 나의 일부일 뿐이야. 잠깐 풀어 줬다고 해서 정말 자유라고 착각하면 곤란하지!"

저항하는 바엘을 향해 윽박지르던 갈라진 목소리.

'부활의 때가 다가온다. 이로써 나의 오랜 계획이 시작되는 것이다!'

유례없이 강력한 마력을 지닌 대군주 바엘의 육체를 빼앗을 수 있는 존재. 탑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는
마정석의 열쇠를 '자신의 일부'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존재. 이미 죽어 없어졌으면서도 의지를 잇는
아티팩트를 마계 곳곳에 퍼뜨릴 수 있는 존재.
마물 벨제붑은 마신의 그림자이다.

뒤죽박죽 떠오르는 기억들 사이에서 오직 그 사실만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누군가가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주기를, 손을 내밀어 주기를 사실은 간절히 기다렸던 것 같다.
바엘이 벨제붑과 싸우며 괴로워하는 동안에도 자신은 그저 두려워 울기만 했다. 약하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왜 이렇게 조용하지? 궁금한 게 많을 텐데."

등 뒤에서 저벅저벅 낮은 발소리가 들렸다. 벨제붑이 다가오고 있었다.

율리아는 덜덜 떨리는 손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물에 젖은 탓에 몸이 차게 식어 갔지만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가장했다. 벨제붑의 존재를 아는 이가 자신뿐이라면,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끌어내야
했다.

"여, 여긴 어디죠?"

"지하에서 사라진 모든 마력이 모여드는 곳."

율리아는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를 응시했다. 힘차게 낙하하는 폭포 사이로 수원이 말라버린 듯 기이하게
빈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딱 두 줄기 정도의 공백.

서쪽에서 파괴된 두 마수정이 떠오른 게 단지 우연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짓을 벌인 건가요. 바엘은, 그는 어떻게 된 건가요?"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지. 좀처럼 태어나지 않는 널 기다리는 게 외롭고 힘들었지만."

벨제붑은 바엘에 대한 질문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캐물어도 답을 얻을 수 없다면 일단은 그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었다. 율리아는 주제를 돌렸다.

90 화

"어째서 저를 기다린 거죠? 저는 누구인가요. 제가 정말로……."

"파편인지 묻는 거라면, 그래."

"당신은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요. 진짜 열쇠는 에스델이 틀림없을 텐데."

"나의 어리석고 사랑스러운 파편. 넌 자신의 팔다리를, 영혼과 육체와 자아를 알아보지 못할 수 있나?"

이 세상의 주인공은 에스델 브에스드라였다. 자신은 원인 모를 사고로 우연히 끼어든 불청객이자 원래라면
세상에 실재하지 않았을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열쇠가 맞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버려질 미래에 두려움에 무의식적으로 피해 왔던 사실이, 결국


현실로 다가오고야 말았다.

율리아가 줄곧 침묵하자 그것을 어떻게 생각한 건지, 벨제붑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궁금한 건 다 풀었나?"

"딱 한 가지만 더……."


다가오던 인기척이 바로 등 뒤에서 멈춰 섰다. 율리아는 벨제붑을 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더 이상 바엘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주 거대하고 불길한 그림자의 형태로 화했다. 바엘을 구하기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마신인가요?"

"……."

글쎄, 어떨까?

침묵하던 벨제붑이 낮게 중얼거렸다. 율리아는 이로써 답을 얻었다.

"스킬, 강탈!"

[▷저항 강탈 Lv.2

플레이어가 지정한 대상에 일정 시간 항마력의 60%를 강탈한다. 잔여 체력의 60%를 소모한다. SP 60]

화살 형태의 거대하고 눈부신 이펙트가 자욱한 그림자 사이로 내리꽂혔다. 그녀의 반항을 알아챈 벨제붑이
포효했다.

"이런다고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분노한 듯 기세를 빠르게 팽창시키는 그림자를 피해 율리아는 빠르게 질주했다. 다행히 한번 와 본 적


있는 장소라 숨어들 곳을 찾긴 쉬웠다. 그녀는 폭포 뒤편에 자리한 작은 동굴 틈에 몸을 구긴 채 숨을
죽였다.

"빌어먹을 계집이, 어디 있어! 찾아내면 몸뚱이만 남기고 사지를 찢어 버릴 테다! 가장 비참한 꼴로


전시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해 주지!!"

벨제붑의 외침에 온 동굴이 쩌렁쩌렁 울렸다. 율리아는 격하게 헐떡이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유성우를
장착했다. 그러곤 그림자를 소리 없이 저격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체력은 18 퍼센트 남짓이었다. 벨제붑의 방어력을 반절 이상 깎아 냈으니 부디 아까의


모험이 효과가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프로즌 애로우."

[▷그림자 마물 벨제붑

공격 판정 -6%

공격 판정 -5%

공격 판정 -8%]

[▷HP 83% 》 64%]

북쪽에서 썼을 때보다 더욱 거대해진 눈꽃 이펙트가 칠흑의 그림자 위로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율리아는


스킬을 사용하고 또 사용했다. 그렇게 두 번을 더 반복하자 결국 잔여 체력이 10% 미만이라는창이 떴다.

뒤이어 벨제붑의 체력 수치가 떠올랐다.

[▷HP 64% 》 51%]


[▷HP 51% 》 38%]

[▷SYSTEM

벨제붑의 체력이 40% 이하로 떨어집니다. 새로운 공격 및 회피 패턴이 추가됩니다.]

게이지를 확인한 율리아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모험은 반만 성공했다. 아까보다 유효 공격력이
확연히 올라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체력이 떨어지는 속도가 마물보다 훨씬 빨랐다.

게다가 창이 사라진 직후, 벨제붑의 발밑에 검은 그림자가 뿌리처럼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율리아가 숨어
있는 곳을 뒤지려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육체의 원래 형태에서 더더욱 멀어지고 있기도 했다.

율리아는 새파랗게 질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완전히 식어 버린 몸에선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걱정되는 건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바엘, 제발 조금만 더 버텨 줘요.'

율리아가 낮게 심호흡하며 활을 다시 조준한 그때, 무언가 차갑고 축축한 것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죽음의 산에서 보았던 검은 촉수가 가느다란 발목을 단단히 옭아맸다.

도망칠 새도 없이 끌어 당겨진 율리아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꺄악!"

"그 알량한 속임수를 모를 줄 알았지?!"

엎어진 채 동굴 밖으로 질질 끌려가던 율리아는 다급히 무기 스킬을 사용했다. 하지만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그림자 마물 벨제붑

공격 판정 -0%

공격 판정 -0%

공격 판정 -0%]

[▷HP 38% 》 38%]

[▷SYSTEM

벨제붑의 회피 패턴에 주의하십시오.]

악마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동굴 입구의 나무줄기에 매달리며 버티자, 더욱 많은 촉수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이거 놔, 싫어!"

이젠 무엇을 공격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바엘의 외양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린 그림자는 그 크기를
무한히 확장했고, 발밑으로 뻗어 나온 촉수들이 사방에 꿈틀거렸다.

"읏, 아, 안 돼……!"

뭉툭하고 두꺼운 것이 옷을 들추고 율리아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서부의 동굴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촉수 다발이 그녀의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속옷 너머에서
이리저리 비비적댔다. 뜨겁고 축축한 그것의 움직임은 욕망에 한껏 달아오른 사내의 혀와 같았다.

지난번의 실패에서 무언가 배웠는지, 촉수들은 무작정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하기보다 율리아의 예민한
부분들을 돌리고 문질렀다. 가녀린 여체가 파드득 경련할 때마다 주변 촉수들이 그곳에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흑, 으응!"

페니스를 닮은 수십 개의 촉수가 그녀를 위아래로 유린했다. 젖꼭지를 문지르고 음핵을 유린하고 꽉


다물린 질구를 뭉근하게 어루만졌다. 뜨겁고 축축한 것들이 그녀의 옷 속을 스멀스멀 기었다.

율리아는 몸의 정점들에서 찌르르 차오르는 감각을 애써 무시했다. 신음이 새어 나오려 할 때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러다 정말 안으로 들어오기라도 하면, 나는…….'

사람도 악마도 아니고 하물며 짐승조차 아닌 것에게 유린당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림자는 바엘의
모습으로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공격은 먹히지 않았으며 설상가상 자신에게 남은 체력은 거의 바닥이었다.

스킬은 이제 고작 두 번이나 더 쓸 수 있을까. 신중히 움직이지 않으면 또다시 폭주 상태에 이르고 말


것이다. 이번엔 도와줄 이가 없으니 결말은 죽음뿐이었다.

'죽는다고?'

순간, 강한 바람이 뺨을 때리고 아득히 멀던 바닥이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삶의 끈을 놓고 추락하던 때의


기억과 감각이, 스스로도 어찌할 새 없이 불쑥 찾아들었다.

소름 끼치는 부유감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싫어,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푹 파묻혀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부릅뜨며 주변을 둘러보던 율리아는 뒤늦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물의 촉수 중 반절 정도가 호수 속에 뿌리처럼 몸을 담그고 있었다. 양분을
빨아들이듯 촉수가 움찔움찔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가 실마리를 찾아낸 것을 축하하듯 새로운 시스템 창이 생성됐다.

[▷SYSTEM

벨제붑의 회피 패턴은 마력 흡수를 저지할 시 파훼됩니다.]

[▷붉은 마력의 목걸이

마왕 바엘이 자신의 강력한 마력을 불어넣어 만든 목걸이. 플레이어에게 일정 시간 마력을 공급한다.


재사용 대기 시간 1 일]

눈에 익은 붉은 구슬이 율리아의 눈앞에서 느리게 회전했다. 그제야 그녀는 유성우의 중심에 오목한 반구
형태의 홈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제야 율리아는 깨달았다. 유성우는 바엘과의 관계도가 높을 시에만 주어지는 특수 무기이고, 붉은


마력구는 그것을 서포트하는 아이템이라는 것을.
그래서 바엘에게 맨 처음 받았던 목걸이는 착용할 때마다 지속적으로 에러 창이 떴던 것이다. 그 시점에
생성될 아이템이 아니었고, 사용 방법도 틀렸으니까 말이다.

율리아는 드디어 정답을 찾았다.

[▷SYSTEM

액세서리 '붉은 마력의 목걸이'를 장비 창에 추가합니다.]

촉수에 얽매여있던 그녀의 손목이 환한 빛과 함께 자유로워지고, 유성우와 마력구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활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활 표면에 길게 파인 홈에서 은은한 붉은빛이 퍼져 나갔다. 투명하던
유성우가 붉게 숨 쉬었다.

[▷SYSTEM

특수 무기 '유성우'의 스킬 시스템이 재구축됩니다. 앞으로 1 시간 동안 플레이어의 체력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붉은 마력의 유성우

제한 시간 59 분 59 초]

아이템 이름이 바뀌며 시야 상단에 제한 시간이 떠올랐다. 율리아가 활시위를 당기자 일반적인 스킬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이펙트가 발광했다.

"프로즌 애로우!"

[▷마력 촉수

공격 판정 -100%

공격 판정 -0%

공격 판정 -0%]

[▷HP 100% 》 0%]

눈꽃이 화려하게 휘날리며 그녀에게 매달려있던 촉수 다발을 깨끗이 제거했다. 바엘에게 나눠 받은 힘


덕분에 공격 첫 타에 100% 판정이 들어가고, 나머지 두 번은 죽어 사라져가는 잔해를 의미 없이 휩쓸었다.

드넓은 실내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촉수가 이변을 알아챈 듯 움찔 그녀를 돌아보았다. 율리아는 눈을
부릅뜨고 호수에 잠긴 촉수를 겨눴다.

"프로즌 애로우!"

[▷마력 촉수

공격 판정 -100%

공격 판정 -0%

공격 판정 -0%]

[▷HP 100% 》 0%]


마력 공급원을 잃은 그림자가 더 이상 팽창하지 못하고 크기를 줄이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모든 촉수를
눈에 보이는 대로 공격했다.

[▷HP 100% 》 0%]

[▷HP 100% 》 0%]

[▷HP 100% 》 0%]

그녀의 눈보라가 휘몰아친 공간엔 어떠한 촉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본체와 연결된 모든 촉수를 잘라 내자
드디어 벨제붑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바엘과 같은 모습, 하지만 보랏빛 눈동자.

간신히 마주한 악마의 얼굴은 짙은 당혹감에 물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이제 말해. 바엘을 어떻게 했어!"

"고작 파편 주제에, 마력 한 점 나눠 갖지 못한 가장 약한 조각 주제에!!"

"대답하지 않을 거라면 직접 알아내겠어. 프로즌 애로우!"

율리아의 격렬한 감정 상태를 드러내듯 유성우의 빛이 실내를 가득 메웠다. 벨제붑의 발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림자 마물 벨제붑

공격 판정 -10%

공격 판정 -10%

공격 판정 -18%]

[▷HP 38% 》 0%]

"이럴 순 없어! 넌 내게 비롯된 존재야! 고작 자아가 주인을 공격할 순 없단 말이다!"

벨제붑의 마지막 발악은 거센 바람 소리에 묻혀 사그라졌다. 실내에 강력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날개를
활짝 펼친 악마의 몸에서 보랏빛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찰나의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림자에서 해방된 바엘이 바닥으로 느리게 무너져 내렸다. 쏴아아, 폭포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울렸다.

91 화

율리아는 승리를 자축할 틈도 없이 주춤주춤 그에게 다가갔다.

"바엘?"

"……."

"괘, 괜찮은 거죠. 그렇죠?"

거대한 그림자의 잔상이 쓰러진 바엘의 위로 겹쳐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벨제붑은 분명 죽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율리아는 바엘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머리맡에 무릎 꿇고 앉아 푹 젖은 칠흑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녀 본인도 멀쩡한 몸이 아니면서, 굳게 닫혀 있는 바엘의 눈꺼풀이 더욱
애달팠다.

"이제 다 끝났어요. 벨제붑을 죽였어요. 그러니까 잘 했다고 칭찬해 주세요."

"……."

"당신이 선물한 목걸이가 두 번이나 나를 구했어요."

율리아는 창백한 그의 얼굴을 더듬더듬 쓸어내렸다. 유성우의 공격에 타격을 받은 이는 벨제붑뿐만이


아니었다. 바엘 역시 대량의 마력을 잃었으니 당장은 눈을 뜨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율리아는 눈앞의 사내가 바엘이란 확실한 증거를 찾고 싶었다. 그는 정말 무사하다고, 그러니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바엘의 육체를 마력 그득한 호수 안으로 밀어 넣었다. 벨제붑이
이곳에서 힘을 채웠으니 바엘 역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탓이었다.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그냥
무엇이든 해 보고 싶었다.

율리아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작게 일렁였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린 채로, 그녀는 바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손목이 너무 아파요."

이렇게나 뒤늦게, 촉수에게 유린당한 곳이 욱신욱신 간지럽고 불쾌해졌다. 누군가 만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상한 손길로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기를…….

"치료해 주세요, 바엘."

잔물결이 밀려드는 호숫가에 원피스가 툭, 떨어져 내렸다. 조금 젖어 있는 얇고 보드라운 속옷이 그 옆에


놓였다.

둥글고 부드러운 여체가 자욱한 물안개 사이로 희게 산란했다. 젖은 머리칼이 곡선을 타고 흐르고 도톰한
입술은 조금 푸르게 질려 있었다. 붉은 목걸이만이 그녀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색채 같았다.

"아……."

단지 옷을 벗고 바엘의 앞에 선 것뿐인데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너무도 은밀해 촉수가 닿은 적도 없는


곳에 전류가 오른 듯, 찌르르 등골이 선뜩해졌다.

바엘의 위에 올라탄 그녀가 양 무릎으로 뭍을 짚은 채 손을 내려 그의 남근을 부드럽게 쥐었다. 정신을


잃었음에도 율리아의 손길만큼은 알아보는지 착실히 반응하며 힘을 키워 갔다.

"으응."

스스로 해 본 경험이 율리아는 조금 성급하게 바엘의 귀두를 제 밑에 맞췄다. 하지만 그는 거대하고


단단한 반면, 받아들일 곳은 아직 여리고 비좁았다.

억지로 넣으려던 율리아의 눈동자에 다시금 물기가 어렸다. 힘주어 앉아 보려다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진 탓이었다. 덜컥 겁이 들었다.

"왜, 왜……. 다른 사람이 할 땐 이렇지 않았는데."


바엘이 할 때도 레기온이 할 때도, 입구를 누르듯 몇 번 문지른 것만으로 안을 비집고 들어왔었다. 많이
버겁긴 해도 이런 아픔이 느껴진 적은 없었다.

사실 율리아의 기억엔 한 가지 오류가 있었다. 바엘과 레기온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크다는 것과 율리아의
안이 비좁고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혀와 손가락으로 밑을 충분히 풀어 준 뒤에
삽입했다.

지금처럼 조금 젖은 정도로 넣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지만, 율리아는 쾌감에 바르작대기 바빠 이 사실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가슴을 만지면…… 될지도 몰라.'

벨제붑의 촉수가 스치고 지나간 곳들이 기분 나쁠 정도로 간지러웠다. 빨리 바엘의 것으로 깨끗하게
만들고 싶었다.

결국 율리아는 머뭇머뭇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눈을 감은 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유두를


문질렀다. 살살 돌리고 눌러보기도 했지만 생각처럼 느낌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금세 울상이 됐다.

"바엘은 이렇게 했던 것 같은데……."

마음이 급했다. 엉덩이 아래에서 묵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것을 어서 빨리 안에 품고 싶었다. 단지


깔고 앉았을 뿐인데 남근의 형태와 표면에 도드라진 굵은 핏줄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경련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채 방치되는 감각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이 새하얀 여체를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갈라진 둔덕 앞에서 조금 망설이던 손가락이 통통하게
달아오른 음핵을 슬며시 짓눌렀다.

"아!"

아랫배에서부터 짜릿한 전류가 퍼져나가자 율리아의 턱이 빳빳하게 들렸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작은


살덩어리를 이리저리 뭉개고 굴렸다. 참았던 비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으응, 응……."

머릿속에 얽혀 있던 수많은 생각이 눈 녹듯 사라져 갔다. 이럴 때가 아닌데, 애가 타서 엉덩이가 절로


들썩였다. 절정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몸이 점점 빳빳하게 굳었다.

바로 그때, 율리아는 등골을 훑는 선뜻한 기운을 느꼈다.

"나의 열쇠는 정말이지 대단하군. 스치기만 해도 물을 질질 흘려대더니 결국 이런 호수를 만들었어."

눈을 뜬 바엘이 수음하는 그녀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숨 가쁘게 오르내리던 율리아의 가슴이
움찔, 움직임을 멈췄다.

바엘이 깨어났다. 그가 드디어 눈을 떴다. 마른 땅 위로 둑이 터지듯, 율리아의 뺨에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 이건, 내가 아니란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부터 정신을 차린 건지, 자신의 그 부끄러운 짓들을 그에게 전부 보였다고 생각하면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바엘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게 너무 좋았다. 이해할 수
없이 벅찬 기분이 차올랐다.

"그럼 이건 뭔데. 이렇게 질척하게 울고 있는데."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달큰한 꿀이 비어져 나오는 율리아의 질구를 쑤시듯 훑었다. 다만 그의 시선은 펑펑
울음을 터뜨리는 율리아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눈물로 시야가 부옇게 흐려진 율리아에겐 그런 바엘의 눈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밑을
건드리는 손가락을 느끼며 변명하듯 고개를 저었다.

"으응, 이건 내가 흘린 물이 아닌데에……."

"아니라고?"

"으읏, 아, 자꾸 그러면!"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찌걱찌걱 느릿한 마찰음이 들렸다. 질구를 벌리고 안으로 손가락을 쑥 밀어
넣은 바엘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어떻게 쑤시는지 잘 느껴 두도록 해. 그래야 다음에 애먹지 않을 테니."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 안 해요!"

"바엘은 이렇게 했던 것 같은데."

그가 율리아의 혼잣말을 재연하자 그녀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율리아가 양손으로 얼굴을 푹 가린


새, 바엘은 그녀의 목덜미를 제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둘의 나신이 하나로 포개졌다.

"그래, 나의 열쇠가 싼 물이 아니라면 더는 있고 싶지 않군."

폭포를 노려보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거칠게 갈라졌다. 벨제붑과 몸의 주도권을 두고 싸우느라 지쳤거나,


혹은 율리아가 다치지 않도록 폭력적으로 날뛰는 흥분을 억누르는 중이거나, 그도 아니면 둘 다일수도
있었다.

바엘은 율리아를 끌어안은 채 상체를 뒤로 젖혔다.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물 속으로 머리부터 빠져들었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이 180 도 반전됐다. 뿌연 물안개가 사라지고 높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따뜻한


태양이 호수에 잠긴 둘의 몸을 환하게 비췄다. 그들은 어느새 마계 북부, 죽음의 호수로 돌아와 있었다.

바엘은 차갑게 식어 버린 율리아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가득 감쌌다.

"이러다 또 골골 앓지."

조금 기다려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를 마주 보려 고개를 비틀던 바엘이 불편한 듯 미간을 좁혔다.

"고개 좀 들어 보지?"

"싫어요……."

"왜."

사과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 손바닥 사이로 칭얼대듯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수록 자신을 더욱
자극할 뿐이란 걸, 열쇠는 어째서 알지 못하는 걸까.

바엘은 율리아의 안에서 질척하게 젖은 손가락을 빼냈다. 그것을 가만 응시하다 호수 속에 담그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등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넘실넘실 크기를 키워 가기 시작했다.

"손 빼요."
한편, 율리아는 자신의 안에서 여전히 굼질거리는 손가락이 무척 민망하고 거슬렸다. 그것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찌걱찌걱 젖은 점액질 소리가 나는 것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정말 나빠요. 정신 차렸으면 빨리 말해 주든가, 부끄럽게 구경이나 하고……."

하지만 그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가슴을 주무르더니 유두를 희롱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뜩이나
연약한 선단을 집요하게 굴려대니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흐읏, 바엘, 당신 정말!"

참다못해 손을 내린 율리아의 눈에 경악스러운 광경이 비쳤다. 그녀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무수히 많은 촉수 다발이 바엘의 등 뒤에 펼쳐져 있었다. 그건 얼핏 보면 아주 거대한 날개처럼


느껴졌지만, 깃털처럼 보이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별개의 의지를 가진 듯 움직이고 꿈틀거렸다.

얼핏 마수정이나 벨제붑의 촉수를 연상시키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번 것은 색이 달랐다. 새까만 그림자


사이에 붉은빛이 물감처럼 섞여 들었다. 그러한 색 대비는 바엘에게 가까워질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눈앞의 악마가 벨제붑이 아니란 것에 안심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뒤통수를 맞은 듯 경악스러운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바엘은 능청스럽게 양손을 목 뒤에 받치고 누웠다. 무슨 힘인지 몰라도 그는 죽음의 호수 한가운데에


여유롭게 떠 있었다.

반면 율리아의 다리 사이엔 수많은 촉수가 몰려들었다. 먼저 안에 들어와 있던 것을 몰아내려는 듯 서로


치열하게 다퉜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광경에 율리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굳혔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이, 이거 빼 줘요!"

"아래쪽 의견도 들어 봐야 하지 않겠나."

동시에 그녀의 다리 사이에 파묻혀 있던 촉수가 페니스처럼 팽창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건지, 내벽에
들러붙어 온 성감대를 쭉쭉 빨아대자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간신히 세웠던 몸을 무너뜨렸다.

바엘은 힘겹게 헐떡이는 율리아를 안아주기는커녕 힘으로 도로 일으켜 앉혔다. 그러자 촉수가 그녀의 양쪽
겨드랑이 밑을 파고들어 자세를 단단히 고정했다. 바엘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이리저리 휘젓던 고개도
흔들림 없이 붙들었다.

단정하던 율리아의 눈썹이 잔뜩 구겨지고 커다란 눈동자엔 눈물이 아롱졌다. 높고 오똑한 콧대, 새하얗고
마른 뺨도 움찔움찔 떨렸다.

절정에 달한 그녀의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절경이었다. 바엘의 입술이 흥분으로 바짝 말랐다.

"역시 이쪽은 생각이 많이 다른 것 같군."

"흣, 으응!"

투명한 액이 촉수의 몸통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엘은 아롱진 그것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며 보란 듯 웃었다.


율리아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새하얀 여체는 수많은 촉수에 의해 착실히
삼켜졌다.
92 화

바엘은 자신의 배 위에서 움찔움찔 경련하는 율리아를 만족스러운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마치 바닷가에
누워 일광욕이라도 하는 듯 여유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이곳에 고여 있는 마력을 전부 삼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하윽! 빼 줘, 제발……."

"남은 시간도 많으니 느긋이 하자고."

아니, 틀렸다. 그는 뱀이었다. 독에 마비되어 힘겹게 움찔거리는 새앙쥐를 만족스럽게 훑는 뱀과 같았다.

촉수 두 갈래가 벌름거리는 율리아의 질구를 부드럽게 잡아 벌렸다. 안에 들어가 있던 촉수가 불쾌하다는


듯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율리아는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안을 가득 채운 촉수는 길고 두꺼울 뿐만 아니라 흡판 같은 것으로


온 내벽을 유연하게 빨아 댔다. 가슴엔 모유 한 방울 나오지 않건만, 촉수는 착유기처럼 양쪽 젖꼭지를
감싸고 쭉쭉 흡입했다.

성감대가 자극당할 때마다 눈앞이 새까맣게 암전됐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허락된
움직임은 엉덩이를 들썩이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깊숙이 박힌 촉수가 내벽을 주욱 긁어내리는 탓에
율리아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무서워요. 이거 이상해. 아래가, 끅!"

"아래가?"

"마, 망가지면……. 으응!"

"내가 그렇게 둘 리가 없지 않나."

바엘이 그녀의 골반을 붙잡아 위로 느릿하게 들어올렸다. 사람 하나를 드는 데도 표정은 작은 과일을


집어든 것처럼 여유로웠다. 다행히 촉수는 율리아의 내벽에 딸려 올라오지 않았다.

안도한 그녀가 낮게 한숨을 내쉰 찰나였다.

푸욱, 그녀의 몸이 밑으로 강하게 내리꽂혔다.

"흐읍!"

사방이 발 디딜 곳 없는 물 위였다. 그녀가 의지할 곳은 오직 다리 사이로 파고든 두툼한 촉수뿐이었다.


무게가 실린 탓에 더욱 깊숙이 박혀든 선단이 자궁구를 때리자, 율리아는 자지러졌다.

"노, 놓아주세요. 아응, 안 돼!"

"이러다 촉수 터지겠어."

"으으응!"

가뜩이나 비좁은 질구가 빳빳하게 조여드는 것이 바엘의 눈에 선명히 비췄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실은 자신이 직접 쑤셔 넣고 허리를 쳐 올리고 싶어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사실은 훨씬 전부터, 율리아 브에스드라가 옷을 벗어 내리던 순간, 혹은 그 이전부터.


하지만 아직은 안 됐다. 최소한 열쇠의 양손이 멀쩡해질 때까지는. 빌어먹을 그림자에게 마력의 반절
이상을 빼앗겼다, 수치스럽게도. 열쇠의 마력 저항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생각하면 이런 상태론 손을
빠르게 고쳐 줄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그림자에 의해 우두둑, 가녀린 손목이 으스러지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고통 탓에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는 그녀를 구해 주지 못했다.

바엘은 악몽 같은 잔상을 떨쳐 내며 그녀의 허리를 앞뒤로 우악스럽게 잡아 돌렸다. 철벅철벅- 투명한


점액이 바엘의 배 위로 난잡하게 튀고, 율리아의 양쪽 유두에 들러붙은 촉수가 흔들리는 속도를 이기지
못해 떨어져 나갔다.

"아니야, 안 돼, 소, 소변……!"

"……."

"나, 나 소변, 마려워요. 제발!"

율리아의 허벅지 안쪽이 움찔 튀는 것을 보며 바엘의 눈동자가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는 흠뻑 젖어 있던 그녀의 결합부를 잡아 벌렸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저항하듯 마구


꿈틀대는 촉수를 거칠게 잡아 뺀 뒤 이미 발기해 번들거리는 귀두를 질구에 맞췄다. 그러곤 단번에
내리꽂았다.

"아, 아, 아니야아!"

지나치게 육중한 둔기가 온 질벽을 압박하자 율리아는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그녀의 요도에서 투명한
액이 뿜어져 나왔다. 견딜 수 없는 쾌락에 뇌가 곤죽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바엘은 율리아가 쉴 틈을 주지 않고 허리 짓을 이어 갔다. 이미 가고 있는 도중에 새로운 자극을


쏟아부으니 오르가슴이 밀물처럼 밀어닥쳤다. 율리아는 그녀 자신도 모른 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떤 게 더 좋지?"

율리아의 입가에 뭉툭하고 번들거리는 것이 와 닿았다. 그녀가 숨을 쉬느라 헐떡이는 사이, 붉은 입술을
몇 번이고 문지르던 그것이 입 안으로 쑥 들어갔다.

"우웁!"

"이 중에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말해 봐."

바엘의 추삽질 탓에 떨어져 나갔던 두 촉수가 율리아의 가슴에 다시금 흡판처럼 들러붙었다.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꼭지가 시커먼 아가리 너머로 사라졌다.

이번엔 그녀의 클리토리스에도 촉수가 붙었다. 작고 통통한 열매를 이리저리 눌러 보던 촉수가 그것을
한입에 삼켰다. 마치 사탕 빨 듯 그것을 쪽쪽 빨아들이자 율리아의 시야가 번쩍 튀었다.

촉수 따위에게 범해지는 게 수치스럽다는 생각은 진작 증발되어 날아가 버렸다.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바엘에게 밑을 고스란히 꿰뚫린 채 모든 성감대마다 혀의 움직임을 닮은 것이 들러붙어 빨아 댔다.

이젠 정말 스스로가 인간인지 짐승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더, 더 해 주세요. 너무 좋아. 전부 좋아……."

그녀의 두 눈이 촉수 줄기에 의해 안대처럼 가려졌다. 몰아치는 쾌락에 휩쓸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위로


들려지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더욱 많은 촉수가 율리아의 몸에 들러붙었다. 바엘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붉은 존재들이, 본체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미치도록 열망하고 있었다. 바엘의 육체가 호수 속으로 잠겨들며 그의 의식이 촉수
다발로 완전히 옮겨졌다.

이젠 그것이 바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육체나 다름없었다.

'전부 좋다고?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누군가 그렇게 묻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율리아는 흐릿한 정신에도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휑하게
벌어진 밑을 아주 커다란 것이 채워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갑게 식어 버린 몸을 다시 달아오르게
해 달라고.

그녀의 허벅지가 활짝 펼쳐지고, 수많은 다발이 입구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한 개가 들어갔을 때보다는
훨씬 얇았지만 그것들 전부가 합쳐지자 되레 더욱 두꺼워진 다발이, 그녀의 안을 꿈틀꿈틀 헤집어 댔다.

"아, 아아!"

미친 듯 발버둥치는 수백 마리의 지렁이가 구멍 안으로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세세하고 많은 움직임이


한껏 예민해진 질벽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입 안에 들어온 남근 형태의 촉수는 목구멍 깊숙이까지 저를 박아 넣었다. 촉수 표면의 핏줄 뛰는


감각마저 선명하게 느껴졌다. 촉수들은 들어갈 수 있는 모든 구멍에 저를 처박은 것도 모자라 그녀의
온몸을 쪽쪽 빨아들이고 애무했다.

"흐으, 흐응……."

붉고 선명한 태양 아래, 마왕의 의식이 깃든 수많은 촉수가 오직 한 여자만을 집요하고 고통스럽게 탐했다.
말 그대로 절경이었다.

[▷SYSTEM

Main Quest. 호수의 비밀]

[완료]

* * *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던 호수는 이틀 밤낮이 꼬박 지나며 바닥을 드러냈고 사흘째에 다다라서야


이윽고 모두 말라버렸다.

원래의 육체로 돌아온 바엘은 북부 지대에 고여 있던 무지막지한 마력을 흡수한 대가로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말라붙은 호수 바닥을 긁으며,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비명에 가까운 절규를 내질렀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동공은 호수 한편에 누워 잠든 율리아에게 향했다. 죽어 가는 뱀처럼 몸부림치면서도


오직 그녀의 얼굴만이 보였다.

"하아, 큭! 율리아……."

그림자의 주박에서 막 해방되었을 땐 악마로서의 본능에 휩쓸려 미처 알지 못했다. 탐욕스러운 악마의


본성.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아귀에 넣어야만 적성이 풀리는 이기적인 종족.
마신과 똑 닮은 그의 자식들.

그때의 자신에겐 율리아 브에스드라 외에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안고 싶었다. 살을 맞댄 채


그녀가 내뱉는 숨결 하나조차도 전부 독차지하고 싶었다.

'당신은 마신인가요?'

글쎄, 어떨까?

그림자와 같은 몸을 공유하고 있던 자신은 그것의 숨겨진 대답을 알 수 있었다. 마신이 깨어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심지어 그 시기가 거의 임박했다는 것을.

하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때가 왔음에도, 자신은 혼란스러웠다.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지?'

마신은 붉은 씨앗이 눈을 뜬 이곳에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마수정을 세웠다. 오로지 이 마력을 흡수하기
위해서.

산채로 속박되어 혈관에 도는 붉은 마력을 끝없이 빼앗기면서도, 강대한 마력 탓에 낮과 밤이 교차되고,


계절이 흐르고, 해가 수십 수백 번이 바뀌어 가면서도.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득히 깊고 묵중한 호수
너머로 비치는 흐릿한 물그림자뿐이라 할지라도.

세상 모든 것은 나로 말미암아 태어난 생명이라. 너 또한 다름이 없으니 나의 말에 절대 거역하지 말라.

무한한 침묵 속 가끔씩 들려오는 그 울림이 자신에겐 유일한 구원이었다. 세상의 유일무이한 법칙이었다.

바엘은 멍하니 누워 생각했다. 물속에 흐릿하게 비치는 저 햇빛을 피부로 느껴 보고 싶다. 수면에
내려앉는 풀벌레 소리나 바람이 나뭇잎에 사부작거리는 소리도 선명히 듣고 싶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감각을……. 아니, 그냥 이 끔찍한 고독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반역자에겐 끔찍한 형벌뿐이라.

설령 하룻밤 꿈이라 하더라도.

바엘은 율리아에게 닿기 위한 모든 움직임을 포기했다. 멍하니 누워 몸속을 지옥처럼 들쑤시는 이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난 수백 년간 자신이 살아왔던 단 하나뿐인 이유를, 고작 찰나의 흔들림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 순간의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수백 년을 기다려온 복수와 율리아 브에스드라. 바엘의 머릿속에 자리한 추의 무게 중심은 명백히 한


곳으로 기울고 있었다.

93 화

눈을 뜬 율리아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분명 바엘과 함께 죽음의 호수에 갔었는데, 그리고 해와 달이


바뀌는 모습을 몇 번이나 지켜보며 그에게 괴, 괴롭힘을…… 당했는데.

지금은 난생 처음 보는 침실에 누워 있었다. 이곳이 어딘지 창밖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누운 침대엔
폭 넓은 천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일어나려 구물구물 움직이던 율리아는 결국 끊어질 듯한 허리 통증에
도로 풀썩 엎어졌다.

바엘-의 의식을 담은 촉수-에게 혹사당한 모든 부위가 온통 욱신욱신 쑤시는 탓에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여긴 바엘의 침실도, 내 침실도 아닌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르작대던 율리아의 시선이 문득 침대 머리맡으로 향했다. 아주 익숙한 사슬이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이번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은 넓었지만 딱 필요한 물건만 놔둔 듯 생활감 없이 휑한


공간이었다. 바닥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 가죽이 깔려 있었고, 폐부를 스미는 공기는 차갑다 못해
선뜩했다.

'익숙한 배경…….'

게임 속 CG 에서 보았던, 그녀가 마계에서 처음 눈을 뜬 날 몇 시간 짧게 머물렀던 방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정신을 잃은 동안 악마성으로 돌아와 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왜 익숙한 침실이 아니라 이런 곳에
있는지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몇 번의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레기온은 일어나 있는 율리아를 보더니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 도대체 며칠을 잠들어 있었는지 알아? 사람 걱정이란 걱정은 다 시켜 놓고!"

"미, 미안해……."

"사과 듣자고 한 소리 아니야, 이 바보야.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열이 절절 끓는데 왜 일어나 있었던


거야? 빨리 다시 누워!"

레기온이 도톰한 침구를 들추며 그 속으로 율리아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머뭇머뭇 활짝 열린 문
밖을 내다보았다. 말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얼굴이었다.

일순 레기온의 눈매가 쓰게 구겨졌다. 하지만 율리아가 올려다보았을 때, 그는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다들 널 걱정하고 보고 싶어 해. 그런데 지금 마계 상황이 썩 좋지가 못해서……."

"상황이라니, 무슨 일 있어?"

"너도 북부에서 겪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각자 시찰지로 떠난 뒤에 마정석의 폭주가 몇 번 더 발생했어.


첫 번째 폭주보다 훨씬 강력했고 덕분에 지금 지하는 완전히 엉망이야. 다들 그 일을 수습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어."

그는 저항하는 율리아를 힘으로 눕힌 뒤에 곧장 침대 휘장을 걷었다. 참혹한 바깥 풍경을 목도한 그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뒤틀려 있었다. 평소 한눈에 내려다보이던 광야는 지반이 융기하거나 꺼져서 협곡


지대나 다름없이 변했고, 성과 눈높이를 마주하던 탑은 훨씬 높이 자라나 이젠 악마성을 내려다보는
형세가 되었다.

"이게 무슨."

"성에도 제법 타격이 있었던 모양이야. 빌어먹을 박쥐 놈이 돌아오자마자 곧장 원래대로 되돌렸지만."


이곳 마왕성은 바엘의 심장이자 붉은 마력의 총체였다. 그림자와 싸우는 과정에서 대량의 마력을 빼앗기고
유성우에 의해 공격까지 받았으니 무사할 리가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서 눈을 뜬 이유도, 어쩌면 바엘의
둥지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런 율리아의 생각을 읽었는지 레기온이 미간을 잔뜩 구기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놈, 재수 없게 기세등등하더니 고작 며칠 새에 마력이 말도 못하게 불어났더라. 그러니 그 빌어먹을


놈 걱정은 하지도 말고 빨리 나을 생각이나 해."

"하지만 내가 진정시키지 않으면 마력 폭주가……."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내 역할인걸. 나, 아무래도 바엘에게 가야겠어."

"그러지 마."

힘들게 몸을 일으킨 그녀의 앞을 레기온이 단호히 가로막았다. 율리아는 비켜 달라는 의미로 그의 어깨를
짚었지만, 그럼에도 레기온은 꿈쩍도 하지 않고 되레 그녀를 침대에 도로 눕히려고 했다.

평소 같은 몸 상태라도 그를 떨쳐 내기 어려운데 지금은 열이 절절 끓기까지 했다. 현기증이 인 그녀가


결국 탈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떠밀리려는 찰나였다.

"이 몸도 율리아에게 갈 거야! 인간은 되면서 왜 이 몸은 못 가게 하는데?!"

열린 문 너머 복도에서 파이몬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울려 퍼졌다. 다른 누군가가 그런 파이몬을 말리려는


듯 낮게 속삭였지만 그럴수록 기세만 더욱 거세셨다.

"명령이고 나발이고 사계왕인 이 몸에게 그딴 핑계 들이대지 말란 말이야! 율리아랑 같이 서쪽으로 갈


거야! 감히 누구를 인계로 내쫓아?!"

문밖을 내다보는 율리아의 표정이 의아함에 물들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레기온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낭패감 섞인 눈빛으로 천장을 응시했지만 이미 늦었다.

"다들 바쁘다고 했잖아. 그런데 파이몬이 지금……."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최고위급 마족인 파이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극히 드물었다.


율리아는 말더듬이처럼 몇 번이나 버벅거렸다.

"음, 그러니까, 나, 혹시 뭐 잘못한 거야?"

"……."

"나 눈치도 없고 바보 같아서 말해 주지 않으면 몰라. 레기온, 응?"

"그런 거 아냐. 네 잘못이 아니야."

인계로 내쫓는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를? 그리고 레기온은 왜 이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거지? 전쟁터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무서운 표정을 짓는 거야?

"비켜 줘. 나 정말 잠깐이면 돼."

"정말로 별일 아니야. 그냥 지하가 조금 혼란스러우니까, 괜찮아질 때까지 잠깐 피해 있는 것뿐이야."

"파이몬은 왜 못 만나게 하는 거야."


"알잖아? 저 꼬맹이, 성격 불같아서는 뭐 하나만 맘에 안 들어도 마계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는 거."

"내가 쫓겨나는 거라고 했어."

"그렇지 않아. 누가 감히 너를 쫓아내겠어?"

레기온은 힘이 풀린 율리아를 침대에 도로 앉히고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냈다. 그녀의 발치에 무릎


꿇고 앉아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을 몇 번이고 문질렀다. 그럼에도 마르고 하얀 손가락엔 온기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열이 끓으니까 잘못 들은 거겠지. 지하엔 변변찮은 약도 없는데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어."

"……그런가."

"자고 일어나면 전부 좋아질 거야."

"응, 목말라."

율리아가 건너편 테이블에 놓인 컵을 가만 응시했다. 그녀의 머리맡에서 이것저것 부산하게 챙기던


레기온은 그 말을 듣자마자 퍼뜩 몸을 일으켰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배고프지 않아? 다른 필요한 건 없어?"

"사과도 먹고 싶어."

"으음, 하필 사과가 없네. 포도는 어때?"

레기온은 활짝 열린 문을 자연스럽게 닫으며 반대편 창가에 놓인 탁자로 걸어갔다. 숨죽인 율리아는 그가


완전히 등을 돌리길 기다렸다.

'뭔가 잘못됐어. 바엘이 나를 내칠 리가 없잖아. 분명 오해가 생긴 거야.'

복도 밖으로 끌려가는지 파이몬의 외침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고열로 머릿속이 흐릿한 와중에도,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지 모른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율리아는 그가 시선을 돌린 새 재빨리 침대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곤 파이몬이 있는 방향으로 안간힘을


다해 달렸다. 보티스에 의해 끌려가던 파이몬은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그녀를 보더니 발밑에 우글거리는
뱀을 냅다 태워 버렸다.

"율리아! 파이몬이랑 지금 당장 서쪽으로 가자! 파이몬의 둥지로 가면 누구도 율리아를 멋대로 데려갈 수
없어! 감히 누구 멋대로 추방이야!"

"추방?"

"걱정 마. 파이몬이 율리아를 지킬 거야."

"추방이라니, 내가?"

"파이몬은 바엘의 명령 따위 무섭지 않아."

"역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라, 내가, 내가 더 이상 필요 없어져서……."

율리아는 다리에 매달려 오는 파이몬도 알아채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보티스가
낭패라는 듯 시선을 외면했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 그럴 리가 없어. 바엘이 내게 그럴 리가 없어. 내게 어떻게 그래.

현실을 자각한 율리아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온갖 허울 좋은 이유를 갖다 붙이려 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또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세상 누구도 자신을 원하지 않을 거란
절망과 같은 확신이 밀어닥쳤다.

태어나 너무도 오랜 시간을 부초처럼 이리저리 떠밀렸지만, 이번에 도달한 곳이야말로 마지막 안식처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바엘은 어디 있어?"

"파이몬 녀석이 뭘 잘못 안 거야. 네가 너무 아프니까 잠깐 요양 다녀오는 것뿐이야."

"나, 나 다 나았어. 하나도 안 아파."

어느새 달려온 레기온이 그녀를 붙들었다. 율리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무대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가엾은 비렁뱅이가 된 기분이었다. 레기온, 보티스, 파이몬, 이곳에 없는 다른
모두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심을 내어 준 이는 오직 너 하나뿐이고, 너를 향한 우리들의 감정은 고작 얄팍한 동정심일 뿐이라고.


넌 이곳에 뿌리를 내린 게 아니라 우리가 툭 떠밀면 하릴없이 떠나야만 하는 존재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무 아파. 토할 것 같아.

"바엘에게 이제 나았다고 말하러 가야겠어. 나, 날 걱정할 거야."

고막을 긁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리고 있어서, 율리아는 말을 멈춘 채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울면 안 된다. 다들 분명 싫어할 테니까.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화내는 건 더더욱 안 돼. 대신 예쁘게


웃으면 된다. 어떤 말을 들어도 어떤 취급을 받아도 그냥 웃으면, 그럼 사랑받을 수 있어. 버림받지 않을
수 있어.

"율리아, 이러지 마. 게다가 지금 바엘은……."

"내가 왜!"

쫓겨나야 해? 뭘 잘 못했는데?

빽 소리치려던 율리아는 제풀에 제가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남들 귀엔 그리 크게 들리지도 않았는데


그녀에겐 온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는 듯 느껴졌다. 멈칫 굳은 레기온의 표정을 보자 그녀의 죄책감은 배가
되어 밀려들었다.

"미, 미안해."

"……."

"화낸 거 아니야. 많이 놀랐지? 이럼 안 되는데. 나 버리지 마."

자신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도 알지 못했다. 율리아는 그저 하릴없이 빌기를 반복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그 모습을 아픈 눈으로 지켜보던 레기온이 참다못해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지금 당장 바엘 놈과 담판을 짓자."

"나, 난 괜찮아!"

"사실은 나도 이해가 안 됐어. 너와 함께 지상으로 도망치려고 그간 지하를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짓을 다 했는데도, 이번 일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되더라. 옳다구나 바로 떠날 수가 없었어."

94 화

그녀는 레기온에게 저항하지 못해 질질 끌려가면서 당혹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바엘에게
따져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되레 그와 다른 악마들의 미움을 살 게 분명한데도.

"지상으로 돌아가더라도 이런 식은 아니야. 이런 불명예는 내가 용납 못해. 추방이라고? 네가 뭘


잘못했는데, 누구 멋대로 추방이야! 웃기는 소리 집어치우라고 해!"

함께 화내주는 레기온이 있어서,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이 절망감을 이해받는 기분을 느꼈다. 이번엔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고, 그러니 말은 한번 꺼내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마왕성의 기나긴 복도를 지나는 동안 율리아는 한 번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자신들을 감싼 이 미묘한 침묵이, 어디서든 따라다니는 무기질한 시선이.

'예전과 똑같아.'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도 없었다. 지금 레기온의 행동에 반기를 들었다간 유일한 아군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스스로가 멍청하고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율리아는 결국 눈에 익은 회랑 앞에 서고야 말았다.


거대한 기둥이 줄지어 늘어선 복도가 새삼 웅장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폐부를 짓누르는 거대한 압박감
탓에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큭, 제가 삼킨 마력 하나 제대로 소화를 못 해서."

"왜 그래."

"마력 폭주야, 마왕 놈."

"뭐……?"

"네 마력 저항 덕분에 아직은 괜찮은데, 혼자 왔다면 소드를 뽑아야 겨우 버텼을지도 모르겠어."

레기온은 더 이상 들어가기를 주저했다. 혼자라면 몰라도 상태가 좋지 않은 율리아가 함께 있었다. 자칫


그녀에게 작은 해라도 입힐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런 레기온의 등 뒤에서 몰래 시야 기능을 열었다. 죽음의 호수로 떠나기 전, 자신을
두고 갈등하는 바엘의 모습을 보며 덜컥 두려움이 인 탓에 한 번도 설정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벨제붑이 자신의 손을 으스러뜨리고 범하려던 바로 그때. 바엘은 왜 그림자에게 저항했던
걸까. 그리도 처절하게 외쳤던 걸까.

'오지 마!'

'이리 오지 못해?!'
'여기서 나가! 당장!'

'날 방해하면 죽여 버릴 테다!'

율리아는 기억과 달리 멀쩡한 손을 몇 번 쥐었다 펴 보았다. 바엘이 치료해 준 것이었다. 붉은 목걸이도


마찬가지였다. 유성우에 마력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가장 큰
자긍심이나 다름없는 붉은 마력을.

결심을 굳힌 율리아는 마력 폭풍이 휘몰아치는 회랑 안으로 위태로운 걸음을 내디뎠다. 파지직- 전기


터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두려움에 심장이 쿵쿵 달음박질쳤지만 어깨를 움츠릴지언정 걸음을 물리진
않았다.

복도가 이렇게나 길었던가.

어느새 나타난 마족들이 홀로 휘청거리며 걸어가는 율리아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붙들려는 레기온의 어깨를 잡아채는 것 같기도 했다.

'어지러워. 바닥이 온통 흔들려…….'

문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숨을 헐떡이던 그녀가 결국 힘없이 쓰러지려던 찰나였다.

콰앙, 커다란 굉음이 넓은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부서지다시피 열린 문 안에서 그가 나왔다.

'바엘.'

눈동자에 핏발이 잔뜩 섰고 입술은 메말랐으며 길고 매끄럽던 머리카락은 바닥을 나뒹군 듯 헝클어졌다.


마력 폭주로 인해 엉망으로 무너진 모습이었다. 끌어안고 있으면 몇 시간도 안 되어 편안해질 텐데.

모두 착각이길 바랐다. 자상함은 꿈에도 바라지 않으니 그저 평소처럼만, 빨리 들어오지 않고 멍청하게


서서 뭐하냐며 질책하기를.

하지만 돌아온 건 침묵, 그리고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바엘

내 통제에서 벗어난……. 열쇠가……. 감히…….]

북부로 떠나기 전엔 그가 생각하는 바가 선명하게 들여다보였는데, 시야 기능이 몸 상태의 영향을 받는


탓인지 생각이 드문드문 끊겼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놓칠 듯한 정신을 안간힘을 다해 부여잡았다.

[▷바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내쳤는데…….]

가늘게 좁혀든 눈동자가 율리아의 등 뒤, 수많은 마족이 모여 있는 곳으로 느릿하게 돌아갔다. 율리아는
구역질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멀건 위액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컥! 우욱."

"이 마법진 당장 풀지 못해!!"

"작은 열쇠야!"

"주군, 북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토해 내다 못해 눈알이 뽑힐 것 같았다. 온몸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머릿속이 절절 끓는 듯한 감각이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었다. 바엘이 정말로 자신을 내쳤다는 사실 외엔 어떤 것도.

"잘못, 했어요……."

율리아는 덜덜 경련하는 손으로 바엘의 발을 붙들었다. 혹시라도 그에게 내쳐질까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그저 가느다란 손끝만 뻗은 채로 엉금엉금 바닥을 기었다.

"마, 마정석의 재료로 저를 쓰신다고 해도…… 끝까지 감사할 수 있어요. 너무 행복한 꿈속에서 지내느라,
태어나서 처음 겪는 행복이라, 주제 넘는 것을 바랐어요."

"……."

"살고 싶다고, 그런 생각 같은 거……. 하지 않을 게요. 하지 않아요, 저. 그냥 이, 있게만 해 주세요.


시간이 얼마나 남았든, 그냥 있게만 해 주세요, 제발, 제발."

복도 너머에서 레기온의 찢어질 듯한 절규와 거대한 힘이 쿵쿵 맞부딪히는 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아프도록
때렸다. 하지만 율리아의 뇌리엔 분노를 참는 듯 일렁이는 붉은 안광만이 시리게 박혔다.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곳에 있고 싶어요. 다른 분들 곁에 있고 싶어요. 잘못 했어요, 잘못,


잘못 했어요. 제가……."

마정석의 첫 번째 폭주가 일어났던 그 새벽, 바엘이 자신의 목숨을 두고 저울질하는 것에 상처받았다.


그가 마신이 되는 것을 포기할 리가 없는데, 마정석의 힘을 거머쥐는 대신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바랐다.

이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열쇠이기 때문에 이곳에 머물고 모두의
애정을 받을 수 있었던 건데, 존재의의 자체를 거부하려 들다니. 이런 뻔뻔스러운 생각을 바엘도 알았던
게 틀림없었다.

한 번만 기회를 준다면 두 번 다신, 아니, 만약 한 번이라도 또 살고 싶다고 바란다면 그 자리에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형벌을 받으리라. 목줄이 걸린 채 산채로 유황불에 떠밀려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

율리아는 바엘의 자비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눈물로 범벅이 된 못난 얼굴이 부끄러워졌다. 허겁지겁 뺨을


닦아 내는 그녀의 머리 위로 단조로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이 계집을 당장 끌어내."

아무 의미 없는 존재를 마주친 듯 심드렁하게.

"내게 방해만 될 뿐이니 어디로든 돌아오지 못하게 내쫓아. 누구 하나라도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직접
사지를 찢어 주지."

바엘은 그렇게 일갈했다.

스스로도 모른 새 그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던가, 바엘이 매몰차게 걸음을 옮기자 율리아는 발에 채여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그와 동시에 고막이 찢어질 듯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대검을 든 레기온이 급하게 달려와 멍하니 눈물만 흘리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율리아, 율리아! 빌어먹을, 지금 누구에게 화풀이를……!"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의 왕국에서 그나마 사지 멀쩡히 벗어나고 싶다면


말이지."

율리아는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가레스, 바르바토스, 레라지에, 파이몬, 보티스, 레벤나, 그
외에도 평소 지나가듯 얼굴을 익혔던 악마들 대부분이 그곳에 서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녀를 마주 보아 주지 않았다. 가기 싫다고, 바엘을 말려 달라고 펑펑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었지만 그것을 들어줄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렇게 버릴 거라면, 어째서 내게 잘해 준 건가요…….'

시야 가장자리가 붉게 물들었다. 눈가에 힘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을 마지막으로, 율리아의 세상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 * *

08. 이름 없는 황녀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가 브에스드라의 황도, 아벨딧심의 검문소 앞에 멈춰 섰다. 실로 긴 여정이었다.

레기온은 열이 절절 끓는 율리아를 안은 채 도망치듯 마계를 떠났다. 그런 그들을 배웅하는 마족은 아무도


없었다. 바엘이 자신의 권속 전부에게 강력한 금제를 건 탓이었다.

파이몬은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율리아를 따라가려다 사지가 찢긴 채 들끓는 용암 덩어리에 몸통만


던져졌다. 심장이 무사하니 죽지는 않겠지만 그곳에서 홀로 회복해 기어 나오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빌어먹을 새끼. 율리아가 버림받는 것에 얼마나…….'

마부석에서 짧은 상념에 잠겨 있던 레기온은 등 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마계


변방에서부터 줄곧 마차 곁을 지키던 키마리스가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마차를 보는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내가 이 이상 들어가는 건 무리겠지."

"황도 아벨딧심엔 마족을 구별해내는 아티팩트가 있어. 네가 위험해질뿐더러……."

"율리아의 평판에도 좋지 않겠지. 마계에서 돌아온 황녀의 곁에 새로운 존재가 붙어 있다면 그건 분명


악마일 테니까."

"맞아."

레기온은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에서 지내는 동안엔 사사건건 율리아의 주변을 맴도는 키마리스가
무척 거슬렸지만, 지금은 그저 씁쓸한 마음뿐이었다.

자신과 율리아에겐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었다. 반면 키마리스는 며칠 간의 짧은 호위를 위해 신분마저


내버렸다. 그는 율리아의 권속이었으므로 바엘의 금제에 속박되진 않았지만, 대신 그녀의 도피 길에
동행한 대가로 지하에서 함께 추방당했다.

"넌 이제 어떡할 거야? 필요하다면 외국의 아는 사람을 소개해 줄게."


"마음만 받지. 그간 율리아의 식사를 조달하며 안면을 익힌 길드가 있어. 일단은 그곳에 몸을 의탁할
생각이야."

"브에스드라는 마기가 약해서 마족인 네가 지내기 어려울 텐데."

"그건 내가 감당할 문제야. 그보단 율리아에게 마지막 인사를……."

"방해 안 해."

레기온의 확답을 받은 키마리스는 두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의 훤칠한 키에 비하면 턱없이 작아 보이는


마차 앞에서, 키마리스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문을 열었다.

"힘들 텐데 누워 있지 않고요, 율리아."

율리아는 벽에 이마를 기댄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마왕의 진노를 사 하루아침에 추방당한


상황이었다. 급하게 마차를 구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연약한 그녀의 몸엔 무척이나 힘든 여정이었을 게
분명했다.

율리아에게 부담을 줄 만한 내용을 전부 걸러내느라 입을 열기까진 조금 긴 시간이 걸렸다.

"레기온과 먼저 황도에 들어가 계십시오.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건강하십시오."

"미안해요."

"수도 외곽에 지인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나온 김에 길게 회포를 풀기로 했습니다."

"미안해요……."

율리아는 차마 키마리스를 볼 용기가 없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그는 애가 탔다. 그녀가 황궁 안으로


들어가면 언제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울지 마십시오, 율리아."

"저 때문에……."

"반드시 당신을 다시 마계로 모시겠습니다. 그때까지 조금만, 부디 조금만 버텨 주십시오."

덜덜 떨리는 작은 어깨가 가냘프고 애처로웠다. 키마리스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손등에 입


맞췄다.

95 화

북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무엇 때문에 바엘이 곧장 율리아를 쫓아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설령 이유가 무엇이라 하더라도 그녀를 이런 식으로 내쫓아선 안 되었다.

몸에 생긴 상처는 언젠가 없어질지언정 기억에 새겨진 상처는 영원히 남는다. 율리아는 이미 충분히
아팠는데, 자신도 아는 사실을 바엘은 어째서 모르는 걸까.

"이것, 레벤나가 남긴 쪽지입니다. 이 마차도 레벤나가 사용하던 물건입니다. 짐칸에 유용하게 쓰일 만한


것들을 넣어 두었다고 하니 나중에 확인해 보십시오."

"……."

"아가레스에게서 심장을 돌려받았습니다. 바르바토스는 제가 둥지를 떠나는 걸 말없이 방관했고,


레라지에는 언젠가 필요한 때가 있을 거라며 보티스의 독을 건넸죠."

마차가 오래 멈춰 있는 게 이상했는지 검문소에서 이쪽을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수상해 보이지


않으려면 이만 떠나야 하는데, 그럼에도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당신의 충실한 종으로서, 언젠가 반드시 당신이 느꼈을 치욕을 갚아 보이겠습니다.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율리아."

등 돌린 율리아의 턱밑으로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하는데,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는 그녀를 달래 줘야 하는데.

"병사가 오고 있어."

마부석에서 레기온의 다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키마리스는 율리아의 손에 놓인 쪽지를 힐끗 돌아본 뒤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애써 움직였다.

찰나의 순간, 율리아가 그를 돌아본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마차 문은 이미 닫힌 뒤였다. 키마리스는


자책감으로 얼룩진 눈빛을 손으로 가렸다.

"혹시 일이 생기면 이곳으로 연락해. 마법사고 이름은 아론. 쿼터라 마족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야."

"그러지. 율리아를…… 부탁해."

키마리스는 말에 올라타며 레기온이 건넨 쪽지를 주머니 안쪽에 넣었다. 그가 말허리를 박차고 달려감과
동시에 마차에 병사들이 당도했다.

'율리아를 위해서, 나는 해야 할 일을 할 뿐.'

일단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율리아에게서 대충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것으론 부족했다. 무엇이 바엘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는지, 더 정확한 '기억'을 모아야 했다.

브에스드라는 확실히 마기가 약한 땅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먼 곳까지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키마리스는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 * *

스산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율리아는 레기온의 부축을 받으며 화려한 정원에 발을
내디뎠다.

[▷SYSTEM

스토리 진행도 68%]

[▷SYSTEM

6th Episode. 이름 없는 황녀]

[▷SYSTEM

- 미션: 히든 스탯 '명성'을 800 이상 획득하시오.

- 보상: 스킬 트리 최상단 오픈

- 실패 페널티: 유폐 엔딩 '얼굴 없는 여자' 확정]


'얼굴 없는 여자.'

율리아가 멈칫하자 레기온이 의아한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시스템 창이 추가로 생성됐다.

[▷SYSTEM

플레이어의 스트레스 수치가 매우 높습니다. 스트레스가 999 에 도달하면 플레이어는 7 일간 실신하며,


마성을 제외한 모든 수치가 0 으로 돌아갑니다.]

[▷CHARM (매력) : 700]

[▷FAME (명성) : 620]

[▷STRESS (스트레스) : 980]

[▷DEVILISM (마성) : 780]

스트레스 수치가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고작 19 밖에 남지 않았다. 율리아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당장


수치를 낮출 방법부터 찾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율리아, 왜 그래?"

"……."

"전하의 열이 더 오르는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율리아의 궁은 여기서 너무 멀어. 근처에 쓸 수 있는 침실이 있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곳 릴리궁이 2 황녀 전하께 새로이 배정된 궁입니다."

시종의 말을 들은 레기온의 미간이 의아한 듯 좁혀졌다. 하지만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율리아를 안아들고 시종의 안내에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참아. 금방 사람이 올 거야."

릴리궁 곳곳에 놓인 생화와 장식들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황궁에 방문한 여성 국빈에게 주로
주어지는 이 궁은 규모는 작을지언정 건축에 사용된 자재 하나하나가 전부 최고급품이었다.

궁에 배정된 서른 명 가량의 사용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잘 교육된 느낌을 풍겼다. 소리 없이 걷고


움직이며, 율리아가 침대에 누운 뒤에도 눈치껏 커튼을 올리거나 장작을 추가하는 등 주인의 상태를
수시로 살폈다.

그 모든 것을 보면서도 레기온은 입맛이 썼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능구렁이 같은 잉그렘 5 세가 율리아를


얼마나 휘두르려는지 그 의도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황녀 전하, 어의가 밖에서 들어오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때, 노크 소리를 들은 하녀가 율리아의 머리맡에 무릎 꿇었다. 의식이 흐릿한 그녀 대신 레기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문이 열리며 중년의 사내가 들어왔다.

"어의인 시몬입니다. 미천한 몸으로 고귀한 황녀 전하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브에스드라에 요양차
조용히 방문하셨다고 들었는데 이리 상태가 악화되어 몹시 유감입니다."
"요양차……. 그렇단 말이지."

레기온이 나직이 중얼거렸지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시몬은 미리 준비한 듯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사정을 들은 폐하께서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계십니다. 또한 폐하께선 황녀가 친정에 들르는 데


조용할 것이 무엇이냐며, 가능한 모든 부분을 세심히 챙기라 지시하셨습니다. 성심을 다해
치료하겠습니다."

마계에서 인계로 보내는 전언은 무조건 아가레스 혹은 바르바토스를 거쳐야 했다. 그들이 절대군주 바엘을
안팎으로 보좌하는 실권자인 탓이었다.

레기온은 이로써 일의 전모를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키마리스가 악마성을 빠져나가는 데 도움을
준 것처럼, 이번에도 바엘의 눈을 피해 율리아를 잘 챙기라는 전언을 보낸 모양이었다.

'마족 놈들의 도움을 받는 게 더럽고 치사하지만, 일단은 어쩔 수 없지.'

이곳까지 오는 길에 의사에게 보여 해열제를 몇 번 먹였지만 율리아는 별다른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황궁 어의 정도의 실력이라면 무언가 다를지도 몰랐다.

레기온이 율리아의 증상을 설명하자, 시몬은 다소 심각한 얼굴이 되어 율리아의 상태를 살폈다.

"약을 드시게 해도 그때뿐이고, 성 밖 의사들도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단 말씀입니까? 보아야


확실해지겠지만 이는 아무래도……. 흠, 일단 보겠습니다."

시몬은 황궁에 남아 있던 율리아의 진료기록을 읽지도 않고 내려놓았다. 만약을 대비해 줄곧 침대 맡에 서


있던 레기온은 탁자에 놓인 그것을 힐끗 보았다. 몇 줄 안 되는 일지엔 율리아가 태어난 날짜, 그리고
몸이 매우 약하다는 기본적인 사실 적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족인데, 어떻게 이딴 대우를……!'

속이 부글부글 들끓었다. 차라리 브에스드라로 오지 말고 타국으로 망명 신청을 했어야 했나 후회했지만,


당시엔 선택지가 이것뿐이었다. 다른 어디에서 율리아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엘고스 출신의 사자들마저 율리아를 죽이려 했으니.'

레기온이 입술을 짓씹는 사이, 어느새 진료를 끝내고 처방을 내린 시몬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하녀에게
침대의 휘장을 내리라 지시한 뒤 레기온에게 슬쩍 눈짓했다.

"일단 열을 내리는 약재와 마음을 안정시키는 약재를 함께 사용하겠습니다. 당분간 황녀 전하께서 큰


충격을 받지 않도록 곁에서 잘 지켜봐 주십시오."

"율리아의 상태가 자꾸 악화되는 게, 정신적인 문제 탓이라고 말하는 건가?"

"확답을 드리긴 어렵습니다만……."

레기온은 애매하게 답을 돌리는 어의를 내보내고 하녀들도 함께 내보냈다. 그러곤 침대 맡에 서서


율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쌕쌕 밭은 숨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위태로워 보였다.

방금까지 머릿속엔 분노만이 들끓었는데, 이젠 차라리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잘못한 이들은 따로 있는데, 어째서 다치는 건 늘 네가 되어야 하는 걸까.'

착하고 상냥하지만 그렇기에 늘 위태로운 너를,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지켜 낼 수 있을지.


한쪽 무릎을 꿇은 레기온은 침대 위에 놓인 율리아의 손등에 제 이마를 조심스레 얹었다. 마치 신 앞에
고해성사하는 죄인처럼, 그는 아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 * *

[▷SYSTEM

6th Episode. '이름 없는 황녀' 진행 중]

시몬의 약을 먹은 뒤 쓰러지듯 잠들었던 율리아는 하루가 꼬박 지난 점심때쯤에야 눈을 떴다.

마계에서 도망쳐 나온 뒤 처음으로 정신이 온전해졌다. 레기온은 그런 그녀에게 식사를 권했지만


거절당하자, 대신 그녀가 잠든 새 있었던 일을 간략히 줄여서 전달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율리아의 표정은 보는 이의 등골이 다 서늘하도록 무감각했다. 그녀를 몰래 도운


악마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동안에도, 기대와 달리 율리아의 눈빛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레기온은 목구멍에서 울컥 치미는 참담함을 애써 씹어 삼키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 레벤나의 쪽지는 머리맡에 뒀어. 마차에 실었다던 짐은 저쪽에 뒀고. 한번 볼래?"

"나중에……."

"배고프지 않아?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너무 오래 굶으면 회복에 좋지 않아."

"눕고 싶어."

"그러지 말고. 정 힘들면 남겨도 되니까 일단 시도라도 해 보자, 알았지?"

레기온이 근처에 서 있던 하녀에게 눈짓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요리가 한가득 담긴 트레이를 끌고


왔다. 기름지고 톡 쏘는, 일반적인 귀족들도 맛보지 못할 값비싼 향신료에 재운 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접시 위에 얹어져 있던 둥근 덮개를 벗기자 핏물이 벌겋게 고인 송아지 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욱!"

율리아는 치미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침대 밖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녀들은 트레이에
놓인 만찬을 침대 옆으로 꾸준히 실어 날랐다.

단지 냄새를 맡은 것만으로도 위장이 고통스럽게 경련했다. 그녀의 상태를 한발 늦게 눈치챈 레기온이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

"커헉, 흑!"

"그걸 지금 환자에게 먹으라고 가져온 거야?!"

"궁에 들어온 것 중에 가장 좋고 값비싼 식재료를 공수했습니다만, 내키지 않으십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아니, 아……. 욱!"

율리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레기온을 간신히 붙들었다.

그는 모든 일을 정공법으로 돌파할 정도로 강했지만 그렇기에 되레 소리 없이 스미는 독엔 무지했다.


애초에 그런 술수는 레기온에게 무의미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반면 율리아는 강한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찌르는 순간, 자신의 앞날이 결코 평탄하지 못할 것을 예견했다.


저들은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질리도록 당해 놓고도,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96 화

"이것들이 황녀 전하의 눈에 차지 않았다면 새로운 요리를 다시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괘, 괜찮……!"

그녀는 말을 끝마치지 못한 채 멀건 위액을 토해 냈다. 목구멍이 쓰리고 아파 물 한 모금 넘기기


어려웠지만, 뒷말을 만들지 않으려면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음식을 그냥 물렸다간 또 어떤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지 몰랐다.

힘겹게 일어나 앉은 그녀의 시야가 핑 돌았다. 하녀들은 어서 먹으란 듯 테이블을 그녀의 코앞으로 밀어
넣었다.

"황녀 전하께서 하루빨리 쾌차하길 바란다는 잉그렘 5 세 폐하의 전언이 있으셨습니다."

"폐하께, 감사 말씀을…… 대신 전해 줘."

"예, 그리하겠습니다."

어서 식기를 들라고 재촉하는 수많은 시선. 그들의 소리 없는 압박이 피부에 따끔따끔 와 닿았다.

율리아는 거의 날 것이나 다름없는 송아지 고기를 한입, 향신료에 범벅이 된 철갑상어와 원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공작새 구이도 조금씩 잘라 입에 넣었다. 식탁 위가 온통 기름지고 짠 것뿐이었다.

'역겨워. 입 안에 미끌미끌한 기름막이 씐 것 같아.'

하지만 가장 역겨운 건 자신이 처한 상황이었다. 많은 것을 바란 게 아닌데, 그저 이 한 몸 조용히


누이고 잠들 곳을 바란 것뿐인데. 자신뿐 아니라 레기온조차 이런 일을 겪게 만들었다.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한 그를 침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비참하고 끔찍한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 치미는 눈물을 간신히 억누르자, 그 대신인 것처럼 위장이
꿀렁꿀렁 뒤집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우욱……!"

이번엔 침대 밖으로 고개를 숙일 기력조차 없었다. 멍하니 앉아 경련하던 그녀가 침대 위에 멀건 토사물을


쏟아 냈다. 간신히 넘겼던 식사 세 입이 고스란히 역류해 나왔다.

그것을 치워야 하는 사용인들의 불만 섞인 시선이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비참한 기분은 이제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율리아는 치미는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새하얀 침대보 위에 소리 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젠장!"

낮게 욕을 짓씹은 레기온이 그런 율리아를 달랑 안아 들어 소파 위에 앉혔다. 괜찮다는 듯 작고 마른


어깨를 도닥이며, 동시에 부지런히 식사를 치우는 이들에게 명령했다.
"그딴 거 말고 침구부터 교체해."

"예."

"그리고 속 달랠 수 있는 디저트도 가져와. 간단한 과일 같은 걸로."

"후식은 장미궁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레기온의 미간이 움찔 굳었다. 그의 흉흉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시종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에스델 황녀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 *

짙은 장미 향기가 코를 찔렀다. 야외 정원에 만발한 장미 덤불 속, 테이블에 여유롭게 앉아 책을 읽던


에스델은 자박자박 작은 발소리에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왔니?"

마치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것처럼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율리아는 깊게 절을 올린 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에스델의 곁에 서 있던 시녀 하나가 눈치 좋게 자리를


권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팔락팔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무거운 적막을 울렸다.

율리아는 현기증으로 자꾸만 움츠러드는 고개를 힘겹게 치켜들었다. 율리아는 이 자리가 불편해 죽을 것
같았는데, 에스델과 그녀의 시녀는 일련의 과정이 마치 일상처럼 편안해 보였다.

율리아는 숨 쉬기 힘들 정도로 바짝 조여드는 드레스를 힘주어 늘렸다. 가슴과 팔뚝도 마찬가지였다.


그다지 큰 체형도 아니건만, 궁에서 준비해 준 모든 드레스가 사슬처럼 꽉 끼었다.

'옷이 불편해.'

에스델의 부름은 말만 부름일 뿐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에 율리아는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하녀들은 그녀를 침실에 딸린 드레스 룸으로 이끌었다. 공간 자체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드레스부터
구두나 장갑까지 많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어떤 드레스엔 보석이 빼곡하게 박혀 있어서
햇빛을 받을 때마다 다채롭게 빛나기까지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들은 하나같이 율리아의 몸에 맞지 않았다. 드레스는 꽉 끼고 구두는


턱없이 작고 얇고 가벼운 장갑은 값비싼 옷들에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미묘하게 바랜 티가 났다.

'저,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에스델 황녀 전하께서 기다리신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입고 나갈 옷이 없는걸.'

'저 드레스가 그나마 맞을 것 같네요. 너희는 가서 어울리는 구두와 장신구를 찾아와.'

하녀들은 율리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행동했다. 얇은 잠옷을 벗기고 힘없이 휘청거리는 그녀를
억지로 붙들어 앉히기까지 했다.

아무리 레기온이 곁을 지킨다지만 그래도 이곳까지 들어오지 못한다는 걸 아는 탓일까, 율리아의 머리채를
붙드는 그녀들의 손길은 좀 더 노골적이 되었다.

'아, 아파.'

'황녀님께선 지하에 오래 머무느라 알지 못하시겠지만, 새로 유행 중인 머리 장식은 원래 이렇게


착용한답니다.'

'그럼 가슴만 조금 풀어 주면 안 될까. 너무 조여서 숨쉬기가 힘들어.'

'황녀님께서 고작 몇 달 전 입으시던 치수로 제작한 드레스들인데, 지하에서 지내는 동안 살이 너무


붙으신 것 같네요. 조만간 다시 가봉하겠습니다.'

'미안, 내가 너무 까다롭지…….'

그렇게 완성된 율리아의 모습은, 솔직히 그녀 본인이 보기에도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촌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최신 유행이라는 하녀들의 말에 그녀는 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현실로 돌아온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에스델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율리아의 드레스가 짙은 광택이 도는


공단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그녀의 옷차림은 비교적 가볍고 단조로웠다.

'빨리 돌아가서 갈아입고 싶어. 숨을 못 쉬어서 그런가, 눈앞이 자꾸 흐릿해.'

에스델이 본론을 말해 주기를 기다리려 했으나 율리아의 몸 상태가 마음에 따라 주지 못했다. 점점 숨이


가빠지던 그녀가 결국 양해를 구하고 일어나려던 찰나, 에스델이 탁- 책을 덮고 시선을 들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네."

"아니야. 그, 그런데 나……."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불렀어. 실은 하고 싶은 말도 있었고."

"하고 싶은 말?"

"이런, 손님을 불러놓고 차 한 잔 대접하지 않다니. 벨라!"

테이블 위를 훑던 에스델의 눈초리가 차갑게 굳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시녀가 냉큼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두 분의 재회를 방해하지 않으려 크나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뇨, 전 괜찮아요. 에스델, 난 괜찮으니까 본론만……."

"믿고 맡겨 봐. 벨라는 로뎀 자작가 출신인데, 동쪽에 작은 무역로를 가지고 있어서 찻잎을 다루는 데
아주 능숙하거든."

율리아는 점점 숨이 막혀 왔다. 아무래도 억지로 먹은 식사가 제대로 체한 것 같았다. 현기증이 일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에스델이 이쪽을 봐 준다면 말이라도 꺼내 볼 텐데, 그녀는 벨라가 차를 타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동쪽의 델바르사 지역에서 공수한 찻잎입니다. 이곳 장미궁의 장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향이 뛰어난 게
특징이죠."
설명을 마친 그녀는 스푼으로 찻잎을 덜어 내 작은 주전자에 옮겨 담았다. 그러곤 바닥에 깔린 찻잎 위에
끓는 물을 느릿하게 부었다.

물이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장미 정원은 다시금 침묵에 잠겼다. 율리아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드레스가 너무 조이는 탓에 허리를 조금 수그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에스델이 고작 자신 따위에게 본론을 꺼내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어쩌면 중요한 일이거나, 혹은 말하기 정말 어려운 사안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마 먼저
일어나겠다고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잠깐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거야. 조금만 더.'

찻물을 우리는 5 분의 시간이 마치 50 분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벨라가 찻잔을 꺼낸 뒤 그 위에 금속으로


된 거름망을 올렸다. 그녀는 차를 컵에 붓고 그다음 우유를 따랐다. 그러곤 고개를 들었다.

"설탕은 얼마나 넣으시겠습니까?"

"괘, 괜찮아요."

"난 평소처럼 두 스푼."

설탕을 얼마나 원하는지 묻는 말에 율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벨라는 그중 한 잔에만 설탕을 두
스푼 넣은 뒤 각자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넌 이제 가 봐."

"예,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에스델은 손을 흔들어 벨라를 자리에서 물렸다. 드넓은 정원에 오직 둘만이 남았다. 이제는 본론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차를 마시는 에스델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율리아는 그녀의 기분에 맞추기 위해 차를 마시는 시늉을 하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나를 왜 부른 거야?"

율리아와 판박이처럼 닮진 않았을지언정 지닌 색채만큼은 비슷한 자매가, 심드렁하게 시선을 들었다.

"우리가 꼭 용건이 있어야 보는 사이니?"

"하지만 방금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아아, 그거."

그녀는 흥이 식었다는 듯, 아직 한참이나 남은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하지만 움직임만큼은


기품 있고 우아해서, 새하얀 테이블보엔 갈색 물방울 하나 튀지 않았다.

"정말 별일 아니었는데."

"실은 내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네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어."

지하의 일과 관련해서.
에스델이 그렇게 덧붙이자,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려던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를 대신해 지하에 간
일로 감사 인사를 들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비록 끝은 좋지 않았을지언정,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만큼은 인생의 어떤 기억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까지도 그들 모두가 소중하고 감사했다. 심지어는 바엘조차도.

"아, 아니야. 나야말로……."

율리아는 에스델의 감사에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애매해졌다. 그녀가 난처한 듯 고개를 숙인 순간,
에스델의 한쪽 입꼬리가 날카롭게 휘었다.

"나야말로? 넌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생각한 거야?"

"응?"

"이건 나의 충실한 개 루슬란을 그딴 꼴로 돌려보낸 것에 대한 감사야. 그가 자꾸 헛소리를 지껄이는 통에


아비인 후작의 입을 막느라 내가 제법 고생했거든. 덕분에 아주 재미있었어."

놀라서 번쩍 고개를 든 율리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만약 자신을 노려보는 에스델의 안광에 힘이 있다면, 이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겼을 거다. 율리아는 그렇게 느꼈다.

97 화

"네가 준 선물을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고심이 커."

율리아는 순간 떠올렸다. 새하얀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갓 뿜어져 나온 피의 열기로 붉게 녹아들던 그


겨울의 풍경을.

'에스델이 시켰나요? 나에게 가짜 편지를 보내고 아직 어렸던 레기온을 전쟁 최전선으로 보내버린 것.


전부 에스델의 짓이었나요?'

'감히, 더러운 계집 주제에 감히!!'

나 혼자 용서했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는데.

율리아가 벌떡 일어나자 쓰러진 의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요란한 소리가 울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에스델의 앞으로 다가갔다. 날이 시퍼렇게 선 눈동자가 율리아에게 향했다.

"천박하게."

"네 짓이지?"

자신이 보낸 적 없는 편지가 레기온에게 도착하고, 돌아온 답장엔 그가 원래 쓴 것과 다른 내용이 적혀


있던, 그래서 결국엔 모든 것이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4 년 전 겨울, 그 편지."

"……."

"대답해. 도대체 왜 그런 짓을 벌인 거야!"

에스델은 대답 대신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서 율리아의 앞에 섰다. 그제야 두 자매의 눈높이가


엇비슷해졌다. 동생의 예쁘장한 얼굴을 요모조모 음미하듯 뜯어보던 에스델이 일순 손을 올렸다.

"네가 내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녀의 눈빛은 따귀라도 때릴 듯 살기등등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향한 곳은 율리아의 머리카락이었다.


개를 쓰다듬는 것처럼 동생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하녀가 팽팽하게 꽂아 놓은 장신구를
움켜쥐었다.

"내게 반항하겠다고 나선 주제에, 우습게도 내 옷과 장신구를 훔쳐 치장했구나. 다 삭아빠진 장갑까지


고스란히 꼈네. 이게 그렇게 탐이 나고 예뻐 보였니?"

"무슨 소리야. 이건 폐하께서 내게……!"

"난 벌써 한참 전에 질려서 치워버린 것들이지만, 네 눈엔 달라 보였을 수도 있겠지. 넌 원래 그런


계집이니까. 남이 먹다 버린 것도 원래 네 것인 양 주워 먹는 천박한 계집."

율리아의 귓가에 한 자 한 자 짓씹듯 중얼거리던 에스델이 이윽고 손아귀 힘을 풀었다. 뽑힐 듯 팽팽하게


당겨지던 장신구와 머리카락이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찢어질 것 같은 고통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어릴 때 입다가 작아진 것들인데, 네게 잘 어울리네. 아주 딱 맞아."

"……."

"그거 말고도 다 너 줄게. 낡은 드레스 따위로 실랑이하고 싶진 않으니까."

차라리 따귀라도 맞았다면 내게 왜 이러냐고 따지기라도 했을 텐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에스델이


선심 쓰듯 던진 말에 숨겨진 가시가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영원히 내가 버린 거나 줍고 다녀. 네겐 그 모습이 딱 어울리니까.'

그때, 완전히 물러난 줄 알았던 시녀 벨라가 다가왔다. 그녀는 위태롭게 숨을 헐떡이는 율리아를 지나쳐
에스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전하, 군부대신이 변경의 일로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기다리라고 해."

"정원에 나오기 전에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바깥 사정에 어두운 율리아도 브에스드라 군부대신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브랜틀리 악셀. 다름 아닌


루슬란 악셀의 아버지였다.

"그럼 이쪽으로 불러. 넌 이만 가보고."

"……."

"왜, 너도 만나게?"

에스델의 비아냥 섞인 시선이 율리아에게 향했다. 사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악셀 후작과 그 아들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율리아는 욱하는 감정이 치밀었다. 시의적절한 타이밍이었다.
후계자가 저지른 짓을 가주가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므로, 정말 따지고 싶었다면 그에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만난다고 생각하니 몸이 굳었다.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루슬란은 키마리스의 창에 오른팔을 먹힌 뒤 완전히 미쳐버렸다. 모두 자업자득이었다. 하지만 후작의


눈엔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에스델이 말한 것처럼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질렀을 거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하나뿐인 후계자를 잃은 거물의 분노를 자신은 홀로 상대해낼 수 있을까. 게다가 옆엔 에스델까지 있는데.

'할 수 있어.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몰라. 나는 이제 나약하지 않아…….'

하지만 율리아의 두 다리는 생각과 달리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흔들리는 율리아의 눈동자를 두
여자가 만족스러운 듯 지켜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분명 무표정한데, 자신은 왜 그렇게
생각했지?

세상이 정신없이 흔들리고 뒤집혔다. 구역질나서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읏!'

탁탁탁, 뒤돌아 도망치는 율리아의 발소리가 이명처럼 메아리쳤다. 등 돌려 달아나는 비겁자의 등 뒤,


깊은 자괴감이 한 몸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 * *

밤의 장막이 내려앉은 악마성의 밤, 붉은 달빛을 받은 악마가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거친 숨소리가


메마른 사위를 울렸다.

'나의 영혼아. 내게서 떨어져 나온 붉은 파편아.'

양탄자를 움켜쥔 손등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마력 폭주에 의해 거대한 창이 산산이 부서셨다. 바닥을
나뒹구는 바엘의 몸 위로 날카로운 파편들이 고스란히 떨어져 내렸다.

'탐스럽게 무르익은 열매를 내게 가져와. 오랜 기다림의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 무른 과육을 한가득


씹어 삼켜야겠다.'

어디 네 마음대로 될까봐?

바엘이 비웃기 무섭게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저항하는 그의 육신에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마신은 자신의 보랏빛 마력을 바엘의 심장 안에 한껏 쑤셔 넣고 있었다.

왕의 심장으로 세워진 악마성이 요동치고, 그 고통은 주인인 바엘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너는 결국 나다. 네가 무엇에서 비롯됐는데, 내 의지를 거부할 수 있을 것 같아?!'

도대체 얼마나 구닥다리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세상에 네 것이라고 부를 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산산이 조각난 주제에."

'뭐라고?!'

"영혼은 내게, 육신은 어떤 말도 안 되는 새끼가 차지했고, 자아는 네놈의 손이 닿지 않는 머나먼 땅으로,


심지어는 아무렇게나 내버린 기억조차 계집에게 홀려…… 크윽!"

죽음의 호수에서 잠시나마 육신을 빼앗겼던 게 문제였다. 원래대로라면 사념체 따위에게 밀릴 일은 없었을
텐데. 곁에 열쇠가 있어서, 그 작고 연약한 인간이 해를 입을까 봐.
"더 해보지 그래. 내가 네놈의 마력을 전부 흡수하면 다음은 어떻게 될 줄 알고, 응? 이미 북부에 고여
있던 마력 전부를 빼앗겼지 않나."

"너라고 버텨낼 듯싶어?!"

"알지 않나. 누구 덕분에 참는 데엔 이골이 났거든."

무수히 오랜 시간을 마정석에 붙들려 있던 사념체는 한번 맛본 육신의 달콤함을 놓지 못했다. 둥지에


돌아온 순간부터 바엘의 몸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제 살 깎아먹는 줄도 모르고
이젠 막대한 마력까지 퍼부어대고 있었다.

바엘은 눈을 부릅떴다. 이질적인 마력이 자신의 몸을 갈가리 찢고 지나가는 것을 말없이 견뎠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그의 뇌리를 스쳤다.

'살고 싶다고, 그런 생각 같은 거……. 하지 않을 게요. 하지 않아요, 저. 그냥 이, 있게만 해주세요.


시간이 얼마나 남았든, 그냥 있게만 해주세요, 제발, 제발.'

누가 보기에도 죽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던 율리아 브에스드라가, 곁에만 있게 해준다면 차라리 죽어도


좋다고 애원했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들이 함께할 수 있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자신의 약점이었다. 그녀가 마계에서 떠나던 날, 자신은 애처로운 눈물에 홀려
마정석에게 몸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몸의 통제권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인간
소드마스터가, 마신의 또 다른 파편이 그것을 보았다.

'율리아, 율리아! 빌어먹을, 지금 누구에게 화풀이를……!'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의 왕국에서 그나마 사지 멀쩡히 벗어나고 싶다면


말이지.'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자신을 약하게 만들었다. 아득히 긴 시간 동안 홀로 싸워왔던 이유를, 마신을 향한


복수를…… 손에서 놓고 싶게 만들었다. 작은 미소 한 번에도 마음이 수백 수천 번을 흔들렸다.

'어쩌면 지금까지처럼 그녀와 함께 살아갈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고 만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데.

"내가 말했지. 네놈의 마력을 전부 흡수하면 그땐……."

마정석이 눈뜨는 순간, 그것을 집어삼키고 새로운 마신이 될 것이다. 마신이 죽어가며 바라던 일을 대신
해내겠다. 그리고 그것의 하찮은 계획을 우롱하듯, 가장 완벽한 죽음을 맞이하겠다.

바엘은 깨진 유리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파편이 살갗에 깊숙이 박혀들수록, 강제로 주입
당했던 이질적인 마력 또한 몸 곳곳으로 퍼져 녹아들었다. 새로운 힘을 얻은 피가 거칠게 날뛰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바엘에게 말려든다는 걸 깨달았는지, 무한히 주입되던 마력이 일순 단절됐다. 온몸을 날카롭게 저미던
통증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다음엔 결코 가만 두지 않겠다고, 아득한 침묵 사이로 사념체가 속삭였다.

"후우."
바엘은 처참히 헤져 걸레짝이 된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그는 텅 빈 둥지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고작 인간 하나가 빠져나갔을 뿐인데,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삭막한 둥지가.

'바엘, 다녀오셨어요?'

왜 하필 이 순간 열쇠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걸까. 자신은 이미 그녀를 버렸는데. 자신을 약하게 만들


뿐인 존재를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을 머나먼 땅으로 보내 버렸는데도.

'피곤해. 쉬고 싶군…….'

비척비척 걸음을 옮긴 바엘이 널따란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잠들지 못할 아주 기나긴 밤의 시작이었다.

* * *

에스델과 짧은 티 타임을 마치고 돌아온 율리아가 침실 문을 걸어 잠근 지 벌써 이틀째였다. 그녀는


누구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레기온조차 무시했다. 밖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침실 안은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레기온은 율리아가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반면 다른 이들은 나약한 그녀가 마계로 떠나기 전으로
돌아간 거라며 비웃었다. 폐궁에 갇혀서 멍하니 시간만 흘려보내던 그때처럼.

하지만 그들 모두 틀렸다. 율리아는 방 안을 초조한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STRESS (스트레스) : 995]

[▷SYSTEM

플레이어의 스트레스 수치가 매우 높습니다. 스트레스가 999 에 도달하면 플레이어는 7 일간 실신하며,


마성을 제외한 모든 수치가 0 으로 돌아갑니다.]

98 화

"수치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아. 분명 낮추는 방법이 있을 텐데……."

장미궁에서 돌아온 직후 스트레스 수치는 998 까지 올라갔다. 극소한 차이로 스탯의 리셋은 막았지만
그뿐이었다. 이틀 내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죽은 듯 잠만 잤는데도 수치는 고작 3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율리아는 다시금 진행도를 확인했다.

[▷SYSTEM

6th Episode. '이름 없는 황녀' 진행 중]

[▷SYSTEM

- 미션: 히든 스탯 '명성'을 800 이상 획득하시오.

- 보상: 스킬 트리 최상단 오픈

- 실패 페널티: 유폐 엔딩 '얼굴 없는 여자' 확정]


"스탯이 리셋 되면 유폐 엔딩이 확정될 거야. 그럼 마계로 돌아갈 방법도 영영 사라지고, 무엇보다 그날
겨울의 일에 대해……."

[▷STRESS (스트레스) : 996]

속이 욱신거린다고 느끼기 무섭게 스트레스가 상승했다. 율리아는 잔뜩 울상이 된 얼굴로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언가 생각하려고만 하면 같은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스트레스를 염려해 생각을 비우고 멍하니 있다 보면


수치는 떨어지지만 대신 앞일이 막막하니 애가 탔다. 그럼 또 자연스럽게 스트레스가 올라갔다.

'영영 이렇게만 지낼 순 없는데.'

그때, 근처에서 무언가 바스락대는 소리가 났다. 머리맡 탁자에 놓여 있던 쪽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율리아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아, 레벤나의 편지……."

사실 마계에서 빠져나와 브에스드라로 오는 과정은 기억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 편지도 키마리스가


급히 건네주던 모습만 흐릿하게 떠오르는 정도였다.

지금도 몸이 썩 좋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당시엔 절절 끓는 물에 담가졌다가 칼바람 부는 눈밭에


내동댕이쳐진 듯 상태가 수시로 악화됐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악마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내 집은 저곳뿐인데, 떠나고


싶지 않은데.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라 자책하며 괴로워하다 까무룩 실신하기를 반복했다.

[▷STRESS (스트레스) : 997]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스트레스 수치가 또 상승했다. 율리아는 시큰거리는 눈시울을 매만지며 곧장
쪽지를 펼쳤다. 급하게 휘갈긴 듯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나와 아가레스가 방법을 찾고 있단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버텨 주렴. 반드시 주군이 네 발밑에 엎드려
빌게 만들 테니까.]

레벤나의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고작 편지일 뿐인데, 이러다간 꼴사납게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율리아는 마구 손부채질을 했다.

'바엘이 내게 엎드려 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하지만 그런 모습을 상상하니 조금 웃음이 나긴 했다. 그녀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내렸다.

[브에스드라 측에서도 한동안 널 경계할 테니 조심해. 마-인 전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국가야. 분명


너의 귀국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할 거란다. 상황이 잠잠해지면 바로 연락할게.

널 돕지 못해서 미안해.]

한참이나 망설인 듯, 위와는 조금 다른 반듯한 글씨체로 레벤나의 편지는 끝났다. 율리아는 그 마지막
문장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자신이 버림받은 게 아니라는 걸 눈으로 확인하니까, 자신들의 인연을
끊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니까. 역시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인계에서의 일을 모두 마무리 짓고 지하로 내려갈 거야. 바엘이 내게 엎드려 비는 건 역시 힘들겠지만,


그래도 사과 한마디는 꼭 듣자."

줄곧 무겁게 조여들던 심장이 마치 구속구를 벗은 것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시야에 줄곧


떠올라 그녀를 불안하게 하던 스트레스 가 전원 꺼지듯 사라졌다.

율리아의 시선이 근처에 쌓여 있는 커다란 여행 가방으로 향했다. 레벤나가 자신을 위해 마차에 함께 실은


것들이라고 했다. 그간 정신이 없어서 열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선 맨 위의 가방을 열어 본 그녀의 입에서 작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

율리아가 지하에서 지내던 시절 입던 미니 드레스와 원피스,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두 번째 상자까지는


눈에 익은 것들이었지만 세 번째부턴 거의 연회용 드레스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눈부신 옷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방들을 일일이 열어 보던 율리아는 결국 힘에 부쳐 주저앉았다. 밑으로 갈수록 가방이 더 무거워지는


탓에 혼자 옮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레벤나는 내게 무슨 일이 생길지 미리 눈치챈 것 같아.'

역시 무력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찰나, 문밖에서 건조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율리아는 시선을
들었다. 결심이 섰으니 이젠 행동으로 나설 때였다.

모든 족쇄를 풀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황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율리아가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놀란 얼굴의 레기온이었다. 줄곧 문 앞에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음으로 마주친 건 에스델의 시녀 벨라였다.

만약 타이밍이 조금만 좋지 않았더라면 모든 수치가 리셋 될 뻔했다. 에스델이 좋은 의도로 사람을 보낼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전하께서 칩거 중이란 보고를 받고 에스델 황녀 전하께서 크게 심려하고 계십니다."

"그간 몸이 조금 안 좋았어요. 이젠 괜찮으니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에스델 전하께서 들으시면 기뻐하실 겁니다."

"그런가요."

"예, 직접 만나서 듣는다면 더욱 기뻐하시겠죠."

벨라의 뒤에 서 있던 시종이 은쟁반에 담긴 편지를 내밀었다.

"악셀 후작께서 황녀 전하의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를 여신다고 합니다."

"언제……."

"오늘 밤입니다."

제안을 거절할 명분 따윈 없었다. 정계의 거물인 브랜틀리 악셀이 무려 자신의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를
연다는데, 주인공이 빠진다면 큰 구설에 오를 게 분명했다.
"네, 기대되네요."

"에스델 전하께선 필요하다면 드레스와 장신구를 빌려줄 의향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황녀 전하?"

줄곧 밑을 내려다보고 있던 벨라의 시선이 어느새 율리아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마치 그녀가


당혹스러워하거나 흔들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음만 받을게요."

율리아는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STRESS (스트레스) : 920]

* * *

늦은 밤, 경쾌한 바이올린 선율이 저택 담장을 넘어 길가까지 울려 퍼졌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한 인파가


몰려든 가운데 릴리궁에서 출발한 마차 한 대가 건물 입구에 멈춰 섰다.

"……."

북적이는 바깥과 달리 마차 안은 고요했다. 율리아와 레기온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음에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레기온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고, 율리아는 그런 그의 눈치를 살피다 체념한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악셀 후작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 후작과 안면이 있다는 레기온에게 율리아는 그가 전쟁터로 끌려가게 된
전말을 털어놓았다.

'내 필적을 베껴서 네게 구해 달라는 편지를 보낸 사람, 네 답장을 가로채 내게 잘못된 시간과 장소를
전달한 사람이 바로 루슬란이었어.'

'…….'

'그는 에스델의 심복이야. 네가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고 전쟁터로 끌려갔던 건 모두 나 때문이었어.


정말 미안해.'

레기온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느릿하게 주물렀다. 침묵은 짧았지만, 그것조차 율리아에겐


영원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그가 말문을 열었다.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

의외의 말이었다. 율리아가 놀라서 고개를 든 찰나, 반대편에서 건너온 레기온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잘못한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왜 가장 상처 입은 너만 죄책감을 떠안아야 하는 거야."

"네가 나와 만나지만 않았어도……."

"군사들에게 잡혔겠지. 물건을 훔친 죄로 그 자리에서 양 손목이 잘렸을 테고."

레기온은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귓가에 울음을 참는 듯 떨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레기온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 낮, 에스델의 시녀가 사라진 뒤의 율리아는 누구보다 결연해
보였다.

여행 가방 속 레벤나의 선물을 발견했을 때, 미추에 별 관심이 없는 레기온은 물론이고 황궁에서 오래


일하며 온갖 좋은 것을 보아왔던 하녀들조차 경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정작 율리아는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전쟁터에 나가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간 힘들었지."

레기온은 율리아를 강하게 안은 뒤, 몸을 떼어 냈다. 마차 문을 열자 먹먹하게 퍼지던 음악 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울렸다.

먼저 밖으로 나간 레기온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 괜찮아. 더는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레기온……."

"그런 얼굴 하지 마. 지상에서 제일 강한 기사가 너를 지키고 있는데 뭐가 두려워? 나만 믿어."

각 잡힌 정복을 갖춰 입은 레기온의 등 뒤로 샹들리에 불빛이 화려하게 산란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긴장으로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마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곤 레기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연회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푸른빛이 도는 은사로 촘촘하게 짜인 벨라인 드레스가 눈부시게 반짝였다. 폭이 넓고 화려한 치맛단이


그녀의 걸음에 맞춰 물 흐르듯 움직였다.

귀걸이와 목걸이는 드레스의 색채에 맞춘 투명한 물방울 다이아몬드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 가치를
산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알이 굵고 커팅이 섬세했지만, 그럼에도 단연 돋보이는 건 율리아의 가녀리고
사랑스러운 외모였다.

"저, 혹시 나 이상해?"

"……."

"레기온?"

"어? 어!"

율리아는 연회장으로 들어서기까지 긴 복도를 걸으며 못내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멍하니 멈춰 서서 자신을 힐끔거리는 것만으로도 창피했는데, 이젠 레기온마저 자꾸 눈을 피하거나
헛기침을 반복했다.

'역시 이상한 걸까.'

그래도 레벤나가 기껏 챙겨 준 드레스였다. 요즘 유행에 맞지 않더라도 갈아입고 싶지 않았다. 레기온이


옆에서 무언가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음악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을 위로하려는 게 분명했다. 율리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고, 레기온은 크게 숨을


들이켜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기분이 조금 더 침울해졌다.

율리아와 레기온은 이윽고 연회장 입구에 섰다. 입구를 지키던 시종이 두 사람의 등장을 알렸다.

"율리아 브에스드라 황녀 전하와 소드마스터 레기온 경입니다!"


소란스럽던 실내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수많은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됐다. 아무리 허울뿐이라지만
그래도 황족인지라 관례대로 늦게 입장했고, 대부분의 귀족이 주인공을 맞이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반면
에스델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율리아는 역시나 싶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레스로 물 먹이려던 계획이 엎어진 탓인지 불참을 통보한
모양이었다.

"저 여자가 두 번째 황녀라고? 보기 끔찍할 정도로 박색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미색이 뛰어나면 뭐하나. 에스델 전하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힘없고 불쌍한 하녀들만 못살게 군다는데."

"레기온 경만 불쌍하게 됐군. 외모에 홀려 넘어간 게지."

율리아는 열 받아 반박하려는 레기온을 간신히 붙들었다. 그는 저것들 그냥 놔둘 거냐는 듯 율리아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살면서 이보다 훨씬 심한 말도 수없이 들었다. 게다가 마계를 떠나면서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듯 괴롭다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그러니 저런 말 따윈 웃어넘길 수 있었다. 고작 뒤에서 수군거리는 게
전부인 사람들,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99 화

[▷FAME (명성) : 620 》 630]

들으란 듯 크게 웃고 떠드는 소리에도 의연하게 대처한 덕분일까, 그녀를 손가락질하던 귀족들이 머쓱하게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명성 수치가 올라갔다.

동시에 연회의 주최자인 악셀 후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등장했다.

"하하! 이리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되다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율리아에게 짧게 묵례한 후작은 곧장 레기온에게 다가가 억센 악수를 나눴다. 하지만 환하게 웃는


브랜틀리 악셀과 다르게 레기온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4 년 전 겨울, 일에 직접 개입한 건 아들인 루슬란 쪽이었지만 후계자가 권력에 댄 줄을 가주가 모르긴


어려웠다. 그도 일에 연루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레기온은 의지하라고 말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부담을 줄 순 없어. 기사에겐 전우애가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악셀 후작에게 칼을 겨누라고 할 수는…….'

율리아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내를 뒤로한 채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레기온이 난처한
듯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후작을 비롯한 군 장성들에게 붙들려 버렸다. 다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홀로 선 율리아에게 초면의 사내들이 다가왔지만, 율리아는 모두 거절했다. 대충 얼굴만 비춰서 흠


잡히지 않게만 한 뒤 돌아갈 생각이었다. 긴장한 채 있다 보니 몸 상태가 좋지 않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군직에 몸담은 자는 전부 레기온에게 모여 있는 줄 알았는데,


율리아는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 환한 갈색 머리에 새하얀 성장을 갖춘 아름다운 기사였다.


"꽃향기에 이끌린 나비를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네?"

"제 이름은 알레한드로 가브리엘, 지위는 백작입니다."

그를 거절하려고 했던 율리아는 생뚱맞은 소리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사이 자신을 알레한드로


가브리엘이라 소개한 사내가 율리아의 손등을 강탈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거부할 틈이 없었다.

"앞서 다가온 남자들을 차갑게 내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신께 닿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지른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길."

"저는 가브리엘 백작께서 귀한 시간을 할애할 만큼 가치 있는 꽃이 아니에요."

"편하게 알레한드로라고 불러 주십시오."

율리아의 거절을 못 들은 척 넘긴 백작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화술이 뛰어나고 이성을 다루는 데 능숙한
자였다. 주변에서 그를 지칭하듯 들려오는 바람둥이, 난봉꾼 등의 단어가 신빙성을 더했다.

율리아는 여전히 그에게 붙들려 있는 손을 새초롬하게 꺼냈다. 이번엔 가브리엘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

"꽃의 뒤엔 무시무시한 마수가 잠들어 있답니다."

"소드마스터에게 마수라니, 레기온 경이 들으면 섭섭해하겠습니다."

"레기온은 고작 그런 일로 마음 상하지 않아요."

"제가 당신의 거절을 귓등으로 흘리는 것처럼 말이죠."

"……."

율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사람이 거절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으면 물러나는 게 신사의 도리 아닌가.

'바람둥이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이쪽을 향해 더 많은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확실하게 거절한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죄송하지만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요."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혼자면 충분해요."

"길을 아십니까?"

"시종을 부르면 되죠."

"그들도 사내입니다. 전하처럼 향기로운 꽃에 매혹되지 않고 버티겠습니까?"

그의 능글맞은 눈빛 탓일까, 숄에 가려진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사이 가브리엘의 용기에
힘입은 사내가 몇 더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은 알레한드로 가브리엘과 달리 남작 혹은 자작 정도의 지위를 가졌거나 가문을 이을 수 없는


방계 출신이었다. 사실 정계의 권력 구도를 고려하면 율리아를 건드리지 않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사내들 틈에서 율리아는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등 뒤에서 레기온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군 장성들을 마음대로 뿌리칠 수 없는 그처럼 자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 미성년의 영애들이 모여 있는 방향에서 볼멘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저 여자 좀 봐. 계속 뚱하니 있다가 신사분들이 모여드니까 표정이 활짝 폈네. 과연 폐하를


홀린 창녀의 딸다워."

"눈치가 없으니 동정이란 것도 모르는 거지. 혼자만 신났잖아?"

"고귀하신 에스델 전하와 너무 비교돼. 존재 자체가 그분께 수치야."

다행히도 그것을 들은 건 율리아 하나뿐이었다. 가브리엘과 다른 귀족 남자들은 여전히 그녀의 미색을


찬양하기 바빴다.

'아무래도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어. 명성 수치는 특히 올리기 힘드니까…….'

절대 그럴 의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소문이 도는 건 한순간이었다. 특히 이성과 관련된 추문은 다른 일들과


비교해 훨씬 오래가곤 했다.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율리아는 신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전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전하, 잠시!"

등 뒤에서 가브리엘의 외침이 들렸지만, 다행히 지나가는 인파가 그의 움직임을 막아주었다. 율리아는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레기온에게 눈짓으로 신호만 보낸 뒤 먼저 마차에 들어가 있을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와인 잔을 든 여자가 율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직후 머리 위에 긴 그림자가 지더니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율리아는 재빨리 시선을 들었다. 알레한드로 가브리엘이 와인을 뒤집어쓴 채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붉은 포도주의 색채가 알레한드로의 새하얀 성장과 대비되어 확연히 눈에 띄었다.

그런 백작의 맞은편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여자는 낯이 익었다. 아까 자신을 손가락질하던 어린


영애들 중 하나였다. 그녀의 주변에 있던 다른 소녀들도 전부 사색이 됐다.

"죄, 죄송해요. 어쩌면 좋아……."

하지만 그건 율리아도 마찬가지였다. 한발 늦게 일의 전말을 알아챈 것이다. 소녀들이 포도주를 쏟기


위해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는 것과, 그들의 계획을 가브리엘이 몸으로 저지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 어쩌면 백작은 처음부터 수상쩍은 기류를 눈치채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리아와
눈이 마주친 그가 능글맞게 눈매를 휘었다.

"이런, 날갯짓이 미숙한 아기 새가 저의 외모에 반해 그만 잔을 놓친 모양입니다. 전하, 다친 곳은


없습니까?"

"백작님, 혹시 처음부터 알고……."

"그보다 전하의 아름다운 드레스가 상했습니다."

가브리엘의 눈짓에 율리아는 시선을 내렸다. 치맛단 일부에 붉은 물방울이 튀어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가브리엘이었다. 쏟아진 와인의 대부분을 뒤집어쓴 탓에 새하얀 성장이 보기 흉하게 얼룩졌다.

그럼에도 백작은 일을 크게 만들기를 원치 않는 눈치였다. 겁먹어 울먹이는 소녀를 좋은 말로 달래


돌려보내고 손수건으로 젖은 옷을 닦았다.

처음엔 주변의 수군거림에 휘말려 나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새삼 그가 다르게 느껴졌다.

"제 것도 쓰세요."

그를 지켜보던 율리아가 손수건을 꺼내든 순간, 인파를 헤치고 달려온 레기온이 율리아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정작 와인을 뒤집어쓴 이는 따로 있는데, 레기온은 그녀의 안위만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살폈다.

"율리아, 괜찮아? 어디 다치지 않았어? 망할 늙은이들이 자꾸 시간을 끄는 바람에……."

"가브리엘 백작님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아."

"많이 놀랐지. 탈의실로 가자. 마차에 여분의 옷을 남겨 둬서 다행이야."

"아, 잠깐!"

레기온은 율리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인파가 양쪽으로 나뉘는


가운데, 율리아는 급하게 등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친 가브리엘의 입꼬리에 능글맞은 호선이 그려졌다. 그의 손엔 언제 가져갔는지 모를


율리아의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백작은 그녀를 노골적으로 응시한 채로 레이스 손수건을 가슴 안쪽에
접어 넣었다.

율리아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뭐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몰랐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바람둥이는 맞는 모양이네.'

백작의 외모는 확실히 뛰어났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외모를 무기처럼 다룰 줄 아는 부류의 사람처럼
보였다. 주변에서 하는 말에 선입견을 가져 부끄럽다고 생각한 게 바로 전이었건만, 유감스럽게도 눈에
보이는 증거가 무척 명확했다.

그동안 악셀 후작에게 양해를 구한 레기온이 시종장의 안내로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연회장에서
나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음악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어디로 가는 거야? 탈의실 방향이 아닌 것 같아."

"후작이 드레스를 빌려준다고 해."

"하지만 마차에 여분이……."

"쉿."

레기온이 자신의 등 뒤를 소리 없이 눈짓했다. 중갑을 걸친 기사들이 두 사람을 호위하듯 따라붙고 있었다.


하지만 레기온은 지상에서 제일 강한 검사였다. 이런 식의 호위는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아.'
순간 무언가에 생각이 미친 율리아가 멈칫했다. 그들은 호위가 아닌 감시 역이였다. 투구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녀의 짐작은 어느새 확신이 되어 있었다.

레기온이 자세를 고치는 척 율리아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안에 들어가면 시간을 좀 끌어 줘. 하녀는 필요 없다고 하고."

"어, 어쩌려고?"

"루슬란 악셀을 찾아봐야겠어.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모르니까."

기사 둘에 앞서 걷는 시종장까지 총 세 명의 감시역이 있었다. 레기온은 시간을 오래 벌지 못하고


율리아를 내려놓았다. 어느새 손님용 침실 앞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 넷이 율리아를 향해 고개 숙였다.

"황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

"전하?"

"황녀 전하, 안으로 드시지요."

그녀가 미적거리자 시종장이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주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율리아에게 향했지만 그녀는


좀처럼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이런 상황 속 섣부른 거절은 되레 감시자들의 의심만 부추긴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누가 봐도 그럴듯한


핑계를 생각해 내야 했다.

'생각나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슬쩍 눈치를 살피던 율리아는 레기온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러곤 교태 섞인 목소리로 그의 목을 휘감았다.

100 화

"남들이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

"율리아?"

"옷 갈아입는 거 직접 도와줘. 그럴 거지?"

"사람들이 보고 있어."

"으응, 릴리궁에서도 줄곧 같이 있었잖아."

자신에게 덧씌워진 나쁜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를
지경이었지만 율리아는 민망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고 레기온을 유혹적으로 올려다보았다.

마주친 눈동자가 갈등하듯 흔들리고, 잘 뻗은 콧대도 아주 힘든 충동을 참아 내는 사람처럼 미미하게


구겨졌다.

"몸도 안 좋으면서 이런 도발이라니."

"……."
"감당 못 할 텐데."

율리아가 보낸 무언의 신호를 알아챈 걸까, 레기온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채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열연 덕분에 주변 공기가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하녀들이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고 기사들도 낮게


헛기침을 했다. 반면 시종장은 여전히 문을 열어놓은 채 무미건조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율리아는 레기온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 만져 줘."

"어디, 여기?"

"더 안쪽. 응!"

레기온의 어깨가 넓고 두툼한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얼추 가려 주었다. 율리아는 그의 품 안에서 스스로
허리 리본을 풀어 바닥에 스르륵 흘렸다. 레기온이 그녀를 도우려는 듯 드레스 단추를 푸는 소리를 냈다.

"빨리……."

율리아가 레기온의 허리에 다리를 감는 순간, 이윽고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시종장이 사람들을 물리고
문을 닫았다. 레기온의 어깨에 턱을 걸치고 있던 그녀는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꼴에 어울리지도 않는 요부 흉내라니, 민망함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나 방금 엄청 어색했지? 정신이 없어서 내가 뭘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나."

"아니야, 잘…… 했어. 덕분에 정말 아무도 안 오겠다."

레기온은 이상하게도 스스로의 뺨을 마구 내려치며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곤 금방 다녀올 테니


기다리라고 당부한 뒤, 율리아가 답할 틈도 주지 않고 창문을 넘어 사라져 버렸다.

바로 그때, 새로운 시스템 창이 생성됐다. 이번엔 서브 퀘스트였다.

[▷SYSTEM

Sub Quest. 사냥개 처형]

[▷SYSTEM

- 해금 조건: 거점 '악셀 후작저'에 진입 후 1 시간이 경과한다.

- 미션: 루슬란 악셀을 찾으시오. 제한 시간 30 분.

- 보상: 공략 대상 추가

- 실패 페널티: 플레이어 명성 200 하락]

[▷SYSTEM

반경 80m 안에 미션을 보조할 아이템이 존재합니다.]


'아, 레기온이 방금 떠났는데!'

루슬란을 찾으라는 내용의 미션을 확인한 율리아는 시스템 창을 밀어 놓고 곧장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레기온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되레 정원을 산책하는 귀족들만 눈에 들어왔다. 율리아는
빠르게 상체를 낮춰 몸을 숨겼다.

'루슬란을 찾으라고? 설마 나 혼자서?'

공략 대상이 추가된다는 보상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만 퀘스트를 무시하기에 실패 페널티가 너무


뼈아팠다. 명성이 무려 200 이나 하락한다니, 에피소드를 통째로 날려 먹으란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결과는 자연히 유폐 엔딩이었다.

그것을 떠올린 율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은 시간은 30 분뿐이었다. 아까의 낯 뜨거운 연기로
번 시간이 고작 이 정도였다.

사실 30 분은 시스템이 주는 최고 등급의 시간이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한 율리아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할걸.'

아쉬워할 시간도 아까웠다. 미련을 털어 낸 그녀는 어둠에 잠긴 침실 안을 빠르게 돌아다녔다. 반경 80m


안에 미션에 도움을 주는 물건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시스템 창을 시야 안에 두고 위치마다 반경이
변화하는 걸 수시로 살폈다.

창가에 바짝 붙을수록 거리가 멀어졌고, 왼쪽 벽으로 다가갈수록 거리가 가까워졌다.

[▷SYSTEM

반경 10m 안에 미션을 보조할 아이템이 존재합니다.]

"아, 들어온 곳 말고도 문이 또 있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문은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이 너머에 아이템이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았지만 율리아는 쉽사리 그것을 열 수 없었다. 맞은편에서 무언가 참방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탓이었다.

그녀는 고심했지만 결심까지 오랜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보조 아이템을 포기하기에 이번 퀘스트는 주어진
단서가 너무 부족했다.

악셀 후작저의 내부 지리도 모르고 조력자도 없으며 하다못해 생각할 시간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이를 악문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하아."

내부를 확인한 율리아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곳은 침실에 딸린 작은 욕탕으로 이미 목욕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첨벙거리는 물소리는 욕조의


수면에 창밖 바람이 스치며 생겨나는 것이었다.

[▷SYSTEM

반경 4m 안에 미션을 보조할 아이템이 존재합니다.]

율리아가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남은 거리가 조금씩 짧아졌다. 하지만 욕조 앞에 서자 거리는 다시금


멀어졌다.

[▷SYSTEM

반경 7m 안에 미션을 보조할 아이템이 존재합니다.]

율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크지 않은 욕실이었지만 귀족가의 손님방인지라 뭔가 물건이 많았다. 사정


가릴 여유가 없었다. 율리아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짚었다. 거리가 시시각각 변하며
심지어는 1m 안으로 줄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모든 물건을 다 뒤지고 엎었지만 시스템 창은 반응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한 시간이 15 분으로 줄어 있었다.

'조력 아이템을 찾을 시간이 없어. 일단 나가야 해.'

율리아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욕실을 나선 찰나, 침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부를
염탐하기 위해 문가에 귀를 대는 듯한 느낌이었다.

율리아는 주춤주춤 욕실 안으로 뒷걸음질 치다 그만 미끄러져 넘어졌다. 거세게 살 부딪히는 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아흑, 아파……!"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율리아는 뒤늦게 입을 틀어막았다. 감시자들이 문 앞을 철통같이 지키고 서 있는


상황에 실수로 큰소리를 내 버렸다.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듯 달음박질쳤다.

그때, 바깥에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인 것 같군."

"아니, 눈속임일지도 몰라."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머리를 거치지 않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굴 같은 욕실 안에서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애처롭게 울렸다.

"레기온, 아흣, 아아, 거기 싫어어!"

때마침 창밖에서 불어온 거센 바람이 욕조 안의 물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첨벙첨벙 거센 물소리가 그녀의


위태로운 교정을 집어삼켰다.

"아앙, 으으응……!"

하필 바로 직전까지 욕실을 뒤지고 돌아다닌 탓에 숨이 격하게 달렸다. 율리아가 소리를 죽인 채 숨을


몰아쉬는 사이, 하필이면 바람마저 멈추며 실내가 싸늘한 정적에 휩싸였다.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들키면 어떡하지 싶어 온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다시 소리를 내기엔 사위가 너무 조용했다.

[▷FAME (명성) : 630 》 610]

그때, 왜인지 명성이 떨어지더니 문밖의 인기척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게다가 고작 13 분 남았던 제한
시간이 무려 1 시간으로 늘어나기까지 했다.

율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
시스템 창이 사라진 뒤, 그녀는 양손바닥을 느릿하게 들어 얼굴을 가렸다. 결과만 보자면
천만다행이었지만 그럼에도 차마 수습하기 힘든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어닥쳐 견딜 수 없었다.

율리아는 아직도 쿵쿵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바닥에 힘없이 누웠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시선을


옆으로 떨구자 아까까지는 보이지 않던 장식장 밑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화려한 집기들과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바구니가 그 틈새에 놓여 있었다. 끌어낸 물건 안에는 검은


메이드복 네 벌과 머리를 정돈하기 위한 헤드 드레스가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율리아의
목욕을 도운 후 하녀들이 갈아입기 위한 용도 같았다.

[▷SYSTEM

아이템 '메이드복'을 획득합니다.]

율리아는 그중 가장 사이즈가 작은 한 벌을 꺼내 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잡은


격이었지만, 어쨌든 시스템이 제시한 힌트를 알아내고야 말았다.

* * *

악셀 후작가의 모든 사용인이 연회에 동원되어 정신없이 움직이는 늦은 밤, 작고 가녀린 체구의 메이드가


후작가의 중정 안쪽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사방이 온통 벽이네. 아무리 연회 중이라지만 그래도 어떻게 이런 큰 정원에 돌아다니는 사람 하나


없지?'

온 저택을 헤매고 돌아다니다 우연히 도달한 곳이었지만 율리아는 쉽사리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음산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지척에 깔려 있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키마리스의 마기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끄아아아아악!!"

바로 그때, 건물 안쪽에서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울부짖음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율리아는 멈칫하며


시선을 들었다. 아무래도 바로 찾아온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금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SYSTEM

Sub Quest. 사냥개 처형]

[▷SYSTEM

- 해금 조건: 거점 '악셀 후작저'에 진입 후 1 시간이 경과한다.

- 미션: 루슬란 악셀을 찾으시오. 제한시간 08 분.

- 보상: 공략 대상 추가

- 실패 페널티: 플레이어 명성 200 하락]

나름대로 빠르게 저택을 뒤지고 다녔지만 그래도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았다. 율리아는 풀숲에서 나와 건물
벽에 조심스럽게 붙어 섰다.

"유성우."

그녀의 오른손에 새하얀 빛이 모여들더니 이윽고 투명한 얼음 활이 생겨났다.


101 화

비명이 울리는 건물은 그다지 넓지 않은 단층으로 되어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기 전, 율리아는 활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비록 인간에겐 쓸 수 없는 무기였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허억, 헉! 크아아아악!!"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 들어갈수록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기괴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가
사람이 아니라는 의심은 들지 않았다. 고통 섞인 비명 사이로 율리아를 저주하는 절규가 반복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사람이 내는 소리 같지 않아.'

등줄기에 오싹한 소름이 타고 올랐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되게 맑게 개었다.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몰랐다. 후작이 후계자의 상태가 좋아질 수 없음을 깨닫는다면 그 즉시 루슬란은 버림받을 것이다. 그땐
살아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냉정하게 느껴졌지만, 그가 죽기 전에 서둘러 지난 일을 밝혀내야 한다는


각오가 머릿속을 채웠다.

율리아는 시선을 들었다. 일직선으로 뚫린 긴 복도 끝에 단 하나의 문이 존재했다.

'루슬란은 분명 저곳에 있겠지. 주변에 다른 방이나 갈림길은 없어. 만약 이 건물 안에서 일이 생기면 난


도망칠 수 없을 거야.'

이 건물 전체가 오직 루슬란을 유폐하기 위한 용도인 듯했다. 육중한 문에 잠금장치가 이중으로 걸려


있었다. 그리고 위쪽엔 창살이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주변이 어두운 탓일까, 보이는 건
온통 시커먼 그림자뿐이었다.

숨죽인 그녀는 루슬란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문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달빛 한 점 새어 들지 않는


방이었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한 시간이 벌써 3 분밖에 안 남았어. 이렇게 머뭇거릴 시간이 없는데…….'

시스템 창을 확인한 그녀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만약 바보처럼 시간만 보내는 동안 다른 누군가에게


발각된다면? 혹은 침실로 되돌아온 레기온이 자신의 부재를 다른 이유로 오해해서 후작과 사람들을
공격한다면?

율리아는 홀린 듯 벽에 걸린 열쇠를 집어 들었다. 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의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 냈다.

철컥, 자물쇠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문틈 너머 살짝 보이는 실내는 여전히 어둡고 고요했다.

'들어가야 하는데 발이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아.'

망설이는 사이 제한 시간은 2 분으로 줄어들었다. 떠밀리듯 문고리를 움켜쥔 그녀의 심장이 마구


두방망이질 쳤다.

바로 그때, 문이 안쪽으로 빠르게 열렸다. 그녀는 삽시간에 안쪽으로 끌려 들어갔다.

"읏!"

힘없이 나동그라진 율리아의 뺨에 차가운 돌바닥이 스쳤다. 하지만 주변 상황을 살필 새도 없었다.


그녀는 등 뒤에서 덮쳐드는 인기척에 곧장 몸을 틀었다. 그녀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 거대한 창이
내리꽂혔다.

"나의 전하가 죽었어! 더러운 창녀가 나의 전하를 죽였어!"

"무슨 소리를……!"

"복수해야 해. 죽여야만 해. 그런데 왜 안 죽는 거야! 아아아악!!"

찢어져라 발악한 사내가 사방으로 창을 휘둘렀다. 딱히 누군가를 노렸다기보다 마구잡이로 공격한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어둠 속에서 노랗게 번들거리는 안광이 소름끼쳐서, 율리아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런 율리아의 옷에 커튼 자락이 걸렸다. 열어 젖혀진 커튼 틈으로 월광이 새어 들었다.

"아……!"

루슬란이 새하얀 달빛 아래 온전히 선 순간,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도 끔찍한


모습이었다.

원뿔 형태의 랜스가 오른쪽 팔과 어깨, 가슴 부분까지 침범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런 모습이었던


것처럼 살과 금속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마치 구겨진 전선처럼 징그럽게 튀어나온 수많은
핏줄이 그의 신체가 지는 부담을 여실히 드러냈다.

게다가 그의 입가엔 광견병 걸린 개처럼 거품 섞인 침이 뚝뚝 흘렀다. 비명을 지르며 혀를 얼마나


깨물었는지 슬쩍 열린 입 안은 완전히 피투성이였다.

"킥, 킥킥킥! 끽끽끽끽!"

샛노랗게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스르륵 돌아가 율리아를 응시했다. 커튼이 젖혀지며 모습이 드러난 건
루슬란뿐만이 아니었다. 율리아는 뒤늦게 제 옷에 걸린 커튼 자락을 떼어 냈지만 이미 늦었다.

도망칠 새도 없었다. 네발짐승처럼 도약한 루슬란이 그녀의 목을 창으로 내리찍었다.

"전하, 전하! 제가 드디어!"

"꺄악!"

"창녀의 목을 잘라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율리아가 눈을 질끈 감은 바로 그때, 허공에서 신기루처럼 나타난 누군가가 둘 사이를 가로막고 루슬란의


창에 맞섰다. 눈에 익은 갈색 머리카락과 새하얀 성장, 그리고 마법사임을 나타내는 스태프가 눈에
띄었다.

맞부딪힌 랜스와 스태프에서 날카로운 스파크가 튀었다.

"배, 백작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하처럼 향기로운 꽃이 혼자 돌아다니면 벌과 나비는 매혹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죽여야 하는데, 왜 안 죽는 거야!!"

"큭, 무슨 힘이 이렇게 괴물 같아? 이런 무식한 싸움은 내 취향이 아니란 말입니다!"

루슬란의 힘에 밀린 가브리엘이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율리아는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안전한
곳까지 물러난 뒤 유성우의 시위를 당겼다.

설령 사람에겐 스킬을 쓸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가브리엘이 루슬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짧은 틈이라도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타깃이 둘이라고?'

하지만 예상과 달리 화살 끝에 두 대상이 타깃팅 됐다. 하나는 루슬란의 오른쪽 반신을 잠식한 창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알레한드로 가브리엘 백작이었다.

율리아는 혼란스러웠지만 오래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거칠게 창을 휘둘러 가브리엘을 떨쳐 낸 루슬란이


그녀에게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로즌 애로우."

[▷프로즌 애로우

마력을 보유한 적 1 인에게 강력한 3 연속 공격을 쏘아 보낸다. 잔여 체력의 20%를 소모한다. SP 20]

[▷악몽의 창

공격 판정 -10%

공격 판정 -10%

공격 판정 -15%]

[▷HP 100% 》 65%]

세 번의 공격이 루슬란의 팔에 직격했다. 탈주한 루슬란을 뒤에서 공격하려던 가브리엘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

"전하, 방금 마나를……!"

"으아아아아악! 끄억, 끄으으윽!"

율리아가 공격한 건 마력이 있는 키마리스의 창이었지만 그것과 합성된 루슬란의 신체도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고통스럽게 피를 토해 내면서도 다시금 몸을 일으켜 율리아에게 돌진했다.

그녀는 지체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프로즌 애로우."

[▷HP 65% 》 30%]

[▷SYSTEM

악몽의 창의 체력이 40% 이하로 떨어집니다. 새로운 공격 패턴이 추가됩니다.]

창이 사라짐과 동시에 루슬란이 창을 휘두를 때마다 검은 파동이 허공을 가르고 온 침실을 폐허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체력이 불안해졌지만 그렇다고 미션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녀가 다시금 시위를 당기려는 찰나, 백작의 스태프에서 맹렬한 화염이 터져 나왔다.

"인페르노!"
"허억, 전하! 나의 전하!!"

타깃의 체력 바가 실시간으로 줄어들었다. 루슬란은 최후의 발악인지 미친 듯 몸부림치며 마기를


뿜어냈지만 백작이 친 방어막에 의해 전부 가로막혔다.

이윽고 쨍, 금속이 파열하는 소리와 함께 루슬란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SYSTEM

공략 캐릭터 '아론'이 활성화되었습니다.]

[▷SYSTEM

Sub Quest. 사냥개 처형]

[완료]

율리아는 시스템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공격을 거둔 알레한드로 가브리엘이 마찬가지로 시선을 들어


율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론은 갑자기 누구지? 아니, 그보다 백작이 마법사였다니…….'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복도 너머가 삽시간에 시끄러워진 탓이었다. 별채에서
벌어진 소란을 눈치챈 듯 수많은 발소리가 몰려들고 있었다.

"전하께 듣고 싶은 말이 무척 많지만, 일단은 돌아가 계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전 루슬란과 해결해야할 일이 있어요. 게다가 이 건물엔 도망칠 곳도 없는걸요."

"과연 그럴까요?"

루슬란이 스태프를 뻗음과 동시에 율리아의 시야가 일그러졌다. 방금까지의 일은 모두 꿈인 것처럼,


그녀는 어느새 맨 처음 안내받았던 손님용 침실에 서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엔 놀란 얼굴을 한 레기온이
있었다.

"율리아?!"

"……."

율리아는 시선을 피한 채 어색하게 웃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일을 그에게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 * *

악셀 후작저에서 벌어진 대형 사건으로 인해 황도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때는 바야흐로 연회의 흥분이 최고조에 달한 늦은 밤, 저택 안쪽에서 갑자기 대형 폭발이 일었다. 마침


연회에 참석했던 군 출신의 귀족들이 폭발 장소로 향했고, 중정에 짙게 내려앉은 마기를 감지했다.

그곳엔 악셀 후작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루슬란 악셀이 쓰러져 있었다. 신성 기사라는 이명에 어울리지
않게 신체 오른쪽 반절이 검게 썩어 들어간 끔찍한 모습이었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대로한 황제는 곧장 조사를 명했고, 이내 루슬란 악셀의 진짜 정체가 밝혀졌다. 그는
마족이 브에스드라에 심어둔 첩자였다. 기사로서 더욱 강한 힘을 갈구한 나머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이다.

졸지에 죄인으로 몰린 악셀 후작은 재수사를 강력히 요구했다. 누군가 저택에 침입해 루슬란의 육체에
억지로 마력을 주입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마도구를 이용한 감식 결과와 후작저에 근무하던 사용인들의 진술을 종합했을 때, 루슬란이 검은
마력을 지닌 고위급 악마에게 힘을 받은 정황이 명백해 보였다.

그 외에도 악셀 후작가가 저지른 군 비리가 추가로 드러남으로써, 결국 죄인의 신분이 된 루슬란과 악셀


후작은 감옥으로 이송됐다. 이 모든 일은 고작 이틀 만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한편, 릴리궁으로 무사히 돌아온 율리아는 며칠째 줄곧 의문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알레한드로 가브리엘.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처음엔 그저 방탕한 바람둥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훤칠한 육체와 뛰어난 외모를 무기처럼 다루는 계산적인
사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어린 영애들의 철없는 계획을 눈치채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허물을 들춰 망신 주거나 제


기민함을 과시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원래 타깃이었던 자신을 대신해 포도주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일을
조용히 무마시키기까지 했다.

'단지 맘에 든 여자의 환심을 사고 싶었을 뿐이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야. 최소한 포도주를 맞은
뒤에 크게 생색이라도 냈겠지. 하지만 백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날 감싼다고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별채에 몰래 숨어든 자신이 루슬란에게 공격당한 순간,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가브리엘이 악몽의 창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엔 마법사임을 나타내는 스태프가 들려 있었다.

102 화

연회장에 있어야 할 그가 자신이 위험에 처한 건 어떻게 알았는지, 후작이 꼭꼭 숨겨 둔 장소는 어찌


찾아냈는지, 키마리스의 마력을 막아 낼 정도로 강한 힘을 지녔으면서 왜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기색인지,
자신을 이동시킨 후 백작은 몰려든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한 건지, 게다가 아론은 또 누구기에 뜬금없이
공략 캐릭터로 활성화됐는지.

모든 것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뒤섞였다.

'답답해.'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났는데도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막막하게 밤하늘을 올려다본 율리아의 귀에
레기온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잠이 안 와?"

"그냥……."

율리아에게서 대답이 없자 레기온은 소파에 기댔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에게 주어진 침실이 따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레기온은 줄곧 율리아의 곁을 지켰다. 연약하고 섬세한
탓에 쉽게 상처 입는 그녀가 너무도 위태롭게 느껴지는 탓이었다.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아니야, 내가 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는데 멋대로 빠져나가서 사람 걱정시키고."

"화내지 마, 응?"

"그러면서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말도 안 해 주잖아. 참고로 나 화난 거 아냐."

소파 등받이에 턱을 괸 그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율리아의 시야에선 그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슬쩍 삐져나온 아랫입술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시스템에 대해 털어놓을 수 없는 탓에 레기온을 걱정시켰다는 걸 알면서도 차일피일 설명을 미루기만 했다.


율리아의 커다란 눈망울에 속눈썹 그림자가 드리웠다.

"미안, 내가 너무 무심했어.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랬어."

침대에서 스르륵 내려오는 소리가 적막에 찬 사위를 울렸다. 안 보는 척 하면서도 그녀가 움직이는 동선을
착실히 좇는 모양인지, 레기온은 그녀가 다가오는 반대편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넓은 소파의 끝자락에 걸터앉은 율리아가 말을 이었다.

"실은 그날 루슬란을 만났어."

"뭐?!"

"후작가의 중정에 유폐되어 있더라. 악몽의 창 때문인지 에스델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나와
눈이 마주치니까 바로 달려드는데……."

그녀를 돌아본 레기온의 눈동자가 당장에라도 터질 듯 부릅뜨였다.

"그걸,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넌 괜찮아? 다친 곳은!"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데 백작……."

"그 빌어먹을 새끼를 살려 두는 게 아니었는데."

레기온의 안광이 갑자기 낮게 가라앉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갑자기 검을 챙겨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율리아는 냉큼 그의 허리춤을 붙들었다.

"난 괜찮아! 그리고 아직 할 말도 남았어!"

"다녀와서 들을게. 금방 끝나."

레기온은 율리아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하지만 입은 웃고 있을지언정 눈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위험한 느낌이었다. 무언가 일이라도 저지를 듯한 느낌.

"만약 사람들에게 들켜서 위험해지면……."

"그럴 일 없게 할게. 내가 네게 조금이라도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없잖아."

"갈 거면 나도 데려가."

레기온을 말리려고 한 말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자상할지언정 일단 흥분하면 걷잡을 수 없이 날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악마성에 쳐들어와 마왕에서 맞서기까지 했다. 아니, 황도 아벨딧심의
폐궁에서 지내던 때조차 그랬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끄응, 낮은 신음을 흘렸지만 딱 잘라서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 너도 루슬란 악셀에게 빚이 있지. 하지만 네게 보여주기엔 그놈 몰골이 너무……."

마른세수를 하는 레기온을 보며 율리아는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말 바꿔서 미안하지만 동맹은 깨야겠다. 나랑 같이 가, 율리아.'

'이봐, 인간!'

'뭐가 문제야? 율리아가 원하는 일이잖아. 난 율리아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하겠다고 결정한 건 뭐든
하게 해 주고 싶다고. 그게 바로 내가 강해진 이유니까.'

마신의 탑에 올라가 바엘을 구하고 싶다고 부탁했을 때, 반발하는 키마리스에게 레기온은 말했다.
자신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고. 그것이 그가 강해진 이유라고.

그래, 처음엔 레기온을 말리려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남의 뒤에 숨기만 해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레기온의 자상함에 기대기만 할 순 없었다.

"나도 같이 가."

그녀는 레기온의 손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 * *

중죄인만 가둔다는 지하 감옥엔 마치 깊은 동굴처럼 습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창문 하나 없어 환기가 불가능한 실내엔 무언가 썩는 듯 불쾌한 악취가 코를 찔렀고, 벽에 세워진 거대한


고문 기구엔 살덩어리와 피딱지가 덕지덕지 엉겨 붙었다.

심지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밑창에 무언가 터지거나 찐득하게 들러붙는 감각이 느껴졌다. 본능적인
혐오감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아……."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합쳐도 감옥에 내던져진 루슬란의 몰골만큼 끔찍하지 않았다. 그 충격적인 모습에
율리아는 차마 시선도 돌리지 못하고 멍하니 굳어 버렸다.

악몽의 창을 파괴한 직후엔 오른쪽 상반신 정도만 까맣게 물들었었다. 하지만 이젠 몸의 거의 대부분이
썩은 듯 뭉그러졌다. 온몸을 빼곡히 뒤덮은 수포는 진물이 터져 번들거렸고, 벌겋게 드러난 새살
사이에선 또다시 액체가 끓듯 새로운 수포가 차오르고 있었다.

이미 구석에 나동그라진 죄수복엔 선홍빛 피고름이 가득 배었다. 우툴두툴 날카로운 돌바닥도


마찬가지였다.

루슬란은 온몸에 차오른 수포를 견딜 수 없는지 손톱으로 긁고 또 긁었다. 하지만 그것이 터질 때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벌레처럼 몸을 뒤틀었고, 그렇게 살갗이 돌바닥에 긁히면서 되레 상처가 벌어지고
수포만 더 올라왔다.

어떻게 살아 있나 싶을 정도로 온몸에 멀쩡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왜, 왜 이런 꼴이……."

"마력 부적응이야. 체내에 주입된 마성을 견뎌내지 못한 거지. 우린 예외적인 경우일 뿐, 대부분은
이렇게 되고 말아. 마력은 인간을 구성하는 마나와 상극이니까."

역겨워서 속이 울렁거렸다. 한때 에스델의 기사로 촉망받던 그가 존엄 따위 없는 저런 끔찍한 꼴로


나뒹구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결코 이런 방향은 아니었다.

"날 알아보겠어요?"

"전하, 나의 전하……."

"난 에스델이 아니에요."

"창녀의 딸을 죽여야 하는데, 그 계집의 목을 당신께 바쳐야 하는데."

고통에 미쳐 자아를 잃은 상황에서조차 그는 오직 에스델만을 애타게 부르짖었다. 그것을 보는 율리아의


기분이 미묘해졌다.

한때는 루슬란이 태산처럼 크게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지금 그의 몰골은 길거리 비렁뱅이만도 못했다.


단지 머리색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증오하던 자신 앞에서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동정에 휩쓸릴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그녀는 배다른 자매처럼 목소리를 내리깔고 루슬란이
갇힌 철창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4 년 전 겨울의 일을 기억하니, 루슬란?"

"전하에 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미천한 창녀의 딸과 그것을 감싸고돌던 눈엣가시를 치워 버린 일 말이야."

그림자 속에 숨어 율리아를 지켜보던 레기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스스로를 창녀의 딸이라고
지칭하는 게 듣기 괴로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밑을 기는 루슬란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온몸이 까맣게 썩어 들어간 상태에서도 힘겹게 몸을 일으켜 부복했다.

"전하의 마음을 위로해드릴 수 있다면, 저는 그보다 더한 짓도 했을 겁니다."

"더한 짓?"

"전하께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어머니 잃은 고통 속에 사셨는지, 폐하께선 창녀를 죽이지 못한 걸 얼마나


자책하셨는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두 분의 바람을 이뤄 드리기 위해서라면 전 언제든 기사의
명예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고통이라고……?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데. 웃풍 부는 침실에 제대로 된 옷 한 벌 없이 내던져져 손발이 검게 얼어붙어도,


사방이 새까만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해도, 창문을 두꺼운 판자로 못질한 탓에 바깥바람 한번 쐬지 못하고
심지어는 침실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어도.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의 냉정한 시선과 비아냥거림만 못했음을,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주변의 경멸어린 시선이었음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래, 내 존재를 알게 된 황후가 충격을 받아 난산으로 죽었어. 하필 내 머리카락 색이 브에스드라


황가의 색을 타고난 덕에, 그리고 그걸 너무 많은 사람이 봐 버린 탓에 죽여 치워 버릴 수 없어서. 내가
황후를 죽인 거야. 하지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버림받고 싶어서 버림받은 게 아닌데.

복수가 목적이었다면 그들은 이미 뜻은 이루었다.

"당신은 평생 이해 못 할 거야."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전……."

"난 에스델이 아니야. 눈 제대로 뜨고 봐. 네가 증오하는 계집이 눈앞에 있잖아!"

"전하, 전하!"

"기사의 명예? 지금 네게 기사의 명예가 남아 있는 것 같아?"

루슬란은 이제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고깃덩어리와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깨닫지 못하고,


제가 무슨 몰골로 널브러져 있는 줄도 모르고, 미쳐서 악몽 속에서만 살아가는 사내.

만약 자신이 에스델이었다면 그를 절대 이런 꼴로 버려두지 않았을 텐데.

불현듯 떠오른 어떤 생각에, 율리아는 시선을 들어 레기온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숨어 있음에도 금빛의 머리카락이 찬란하게 빛났고 새파란 눈동자엔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의지가 실려
있었다.

단지 바라보기만 해도 그의 올곧음과 깨끗함에 감화되어 가슴이 일렁였다. 그가 영원히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에스델은 루슬란을 버린 거야.'

그제야 율리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고작 이틀 만에 유력 귀족 가문 하나가 송두리째 무너졌다. 모든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비록 계기는 자신과 가브리엘 백작이 마련했을지 몰라도 그 우연을 십분 활용해 제가 원하는 상황으로
몰아간 건 다름 아닌 에스델 브에스드라, 루슬란의 주인이라고.

"그랬던 거야."

문득 스스로가 하는 짓이 의미 없게 느껴졌다.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상대에게 사과를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었다. 깨달음이든 복수든, 자신은 너무 늦어 버린 것이다.

율리아가 한 발씩 뒷걸음질 치자 철창 안에 있던 루슬란이 그만큼 한 걸음씩 무릎으로 기어 왔다. 철창에


매달린 그가 애절하게 손을 뻗었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참다못한 레기온이 그녀를
지키듯 가로막은 탓이었다.

103 화

"너무 오래 있었어. 이제 그만 가자."

"……."

"율리아, 괜찮아?"

"전하, 전하!"

루슬란이 발버둥 칠 때마다 철창 틈에 끼인 수포가 우수수 터지며 찌걱찌걱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레기온이 붙든 율리아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루슬란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당신의 진짜 주인은 누구죠?"

"……."

루슬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요, 그렇겠죠.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을 거야."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 율리아는 유성우를 조준했다. 반짝이는 얼음 활이 루슬란의 미간을 똑바로 향했다.

'폐하께선 창녀를 죽이지 못한 걸 얼마나 자책하셨는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에스델을 지키는 기사가 어떻게 황제에게 일어난 일을 고스란히 기억한단 말인가.

"전하……?"

"증오하는 창녀의 손에 죽는 것과 사랑하는 황녀의 손에 죽는 것. 어느 쪽이 당신에겐 해피 엔딩일까."

복수의 서막을 올려야 하는데, 자신 때문에 고통 받은 레기온을 위해서라도 흔들려선 안 되는데. 차마


시위를 놓을 수 없었다. 그건 루슬란이 인간의 몰골이 아니기 때문도, 누군가를 죽이는 게 두렵기 때문도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에서 연민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바엘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루슬란은 에스델을 사랑했어.'

하지만 모든 진실을 아는 그를, 에스델이 오래 살려 둘 리가 없었다. 반드시 그를 죽이기 위해 손쓸


것이다. 그제야 루슬란은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테고 말이다.

썩어 가는 몸뚱이를 붙들고 괴로움에 몸부림치겠지. 육체의 고통 때문이 아닌, 오직 에스델이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나의 기사 루슬란."

"예, 전하."

"눈을 감아. 그동안 나를 잘 따라 주었으니, 주인으로서 네게 마지막 선물을 주마."

"감사합니다, 나의……."

투명한 한 줄기 빛이 칠흑 같은 어둠을 관통했다. 썩은 고깃덩어리 같은 몸뚱이가 차가운 돌바닥에


느릿하게 쓰러져 내렸다.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

루슬란의 마음은 이제 결코 에스델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그를 가만 내려다보는 율리아의 눈빛은


조용하고도 담담했다.

이것이 그녀가 선택한 복수였다.

* * *

사람들 눈을 피해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온 레기온은 릴리궁에 도착해서야 줄곧 소중히 안고 있던 율리아를


내려놓았다. 정신을 잃은 그녀의 몸이 침대 위에 힘없이 늘어졌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달빛에 비친 그녀의 눈가가 발갛게 부어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를 곁에 두고도 나설 틈을 안 주네, 바보."

자조하듯 중얼거린 레기온은 자석에 이끌리듯 율리아의 푹 젖은 뺨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울음 섞인 사죄가 귓가에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미안해, 미안해…….'

루슬란에게 활을 쏜 율리아는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숨소리가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의연하게 서서 죽어
가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사해처럼 드넓은 슬픔을 오직 속으로 눌러 삭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기온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위태롭게 선 율리아를 끌어안아 품에 가두고 싶었다. 그렇게 아파할 거면 차라리 자신에게 기대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 힘은 모두 율리아만을 위한 것인데, 자신의 주인이 바로 그녀인데.

하지만 레기온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초조함에 입술이 바짝 말랐지만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루슬란의 죽음으로 인해 율리아의 안에서 무언가 정리될 것이란 걸 어렴풋이 깨달은
탓이었다.

'내가 약해서 미안해. 이젠 단단해질 거라고 했으면서 결국 또 흔들려 버렸어. 가슴이 너무 아파…….'

율리아는 숨이 끊어진 루슬란을 보며 스스로의 마음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루슬란을 죽인 이유조차 지극히
이타적이면서, 어쩌면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살인자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원죄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런 꼴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레기온은 거부하는 그녀를 강제로 안아 든 채 지하 감옥을 나섰다. 뒤늦게


눈물을 떨구는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는 게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네 곁에서 난 무력하고 못난 남자가 되어 버려."

"……."

"그런 주제에 점점 더 네게 닿고 싶어서 견딜 수 없고."

레기온은 율리아의 머리맡에 소리 없이 걸터앉았다. 창밖에서 들어온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희게 비췄다.

모든 것이 가녀리고 사랑스러웠다. 도자기 인형처럼 선이 가느다란 얼굴 안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자리했다. 부드럽고 둥근 눈썹부터 애무하듯 타고 내려오던 레기온의 시선이 작은 핏빛 입술에서 멈췄다.

도저히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목이 타는 듯 갈증이 났다.

'나의 율리아.'

레기온의 손가락이 율리아의 입술에서 멈췄다. 충동을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동안 그의 손등에 우악스러운
핏줄이 불거졌다. 창백한 얼굴과 대조된 그녀의 입술이 자꾸만 각인되듯 시야에 박혔다.

'마나를 넘기는 것뿐이라면…….'

몇 번이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던 레기온이 이내 실소하며 고개를 떨궜다. 이런 스스로의 꼴이 우스웠다.

친구를 자처하며 영원히 널 지키겠다고 속살거리면서도 사실은 율리아를 원하고 있었다. 마나를 넘긴다는
것도 전부 핑계였다. 그런 같잖은 이유를 들먹이며 그녀 곁에 맴도는 것이다.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기회를 찾아 끊임없이.

'그래도 상관없어. 널 가장 오래 전부터 사랑했던 건 나야. 이미 한 몸처럼 되어 버려서, 네가 없으면 난


안 돼.'

레기온의 커다란 어깨가 가쁘게 오르내렸다. 율리아를 보는 그의 시선에 타들어 갈 듯한 열기가 섞였다.
가장 뜨거운 불꽃은 푸른색이란 말처럼, 그의 안광이 새파랗게 번뜩였다.

'네가 없으면 난…….'

레기온이 고개를 숙이자 뜨겁게 작열하는 호흡이 그녀의 입술 위에 떨어졌다. 하나가 된 그림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루슬란이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체내에 주입된 마기를 견뎌 내지


못한 게 사망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한때 신성 기사라 칭송받던 루슬란의 비참한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남겼다.

에스델은 가장 아꼈던 기사의 배신에 마음 아파하며 외부 활동을 중단했다. 같은 일의 반복을 막기 위해


루슬란 악셀의 시체는 광장에 전시되었으며, 아들의 비보를 접한 브랜틀리 악셀이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다는 소문도 뒤따랐다.

하지만 몰락한 악셀 가문의 이야기는 처음의 충격과 다르게 수면 아래로 빠르게 사라졌다. 다들 루슬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길 쉬쉬했고 꼭 그를 지칭해야할 땐 다른 표현으로 에둘러 말하곤 했다.

율리아는 그 모든 일들을 제삼자의 눈으로 지켜보며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사람 하나의 인생을 꾸며 내고 부정하는 일이 이토록 간단하구나.'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과 관계없이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날씨는 쾌청했고 릴리궁 정원엔 계절에
맞는 꽃이 한가득 피었다.

"향기 좋다."

예쁘게 다듬어진 꽃밭을 걷던 율리아의 등 뒤로 묵직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꽃잎을 쓰다듬으며
생각 없이 물었다.

"이건 무슨 꽃일까? 레기온, 혹시 알아?"

"……."

조금 기다렸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실은 기대하고 물은 게 아니었기에 율리아는 말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던 레기온이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기에 아는 척을 했을 뿐이었으니까.

"시클라멘이로군요. 당신의 수줍은 뺨과 닮은 귀여운 다홍빛 꽃입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낯설었다. 율리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백작님?"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그……."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던 율리아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알레한드로 가브리엘이
능글맞게 윙크하며 성큼 다가온 탓이었다.

"이렇게 또 마주치다니, 저희는 역시 운명인가 봅니다."

"제가 지내는 릴리궁에 직접 찾아오셔 놓고……."

"그런 사소한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전하께서 이토록 열렬히 저를 반겨 주시니 기쁘군요."

그는 여전히 율리아의 거절을 한 귀로 흘리며 그녀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만족스러운 듯 웃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준수하고 남자다웠다. 갈색 머리카락 역시 바람 부는 밀밭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혼인 적령기에 들어선 보통의 영애였다면 분명 그의 수작에 흔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율리아는 타인의
진심을 믿기에 이미 너무 많이 상처받았다.

그런 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백작의 뛰어난 마법 수준이었다. 사실 마법사는 군의 주요 전력이지만


그 외에 알려진 건 많지 않았다. 브에스드라는 그나마 낫지만 다른 문화권에선 되레 마법사를 기피해
끔찍한 학살을 벌이기도 한다고 들었다.

만약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게 그의 약점이라면 섣불리 그것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알레한드로 가브리엘은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날 절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인사를 받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요."

"경황이 없어서…… 조금 늦은 것뿐이에요. 저도 죄송하니까 백작께 궁금한 게 많아도 참고 있는걸요."

"숙녀를 인내하게 만드는 건 신사의 도리가 아닙니다. 뭐든 물어보시죠."

"진심이세요?"

"이름 알레한드로 가브리엘. 나이 스물 셋에 유감스럽게도 독신. 이번 전쟁에서 선대 및 형제들이 모두


전사하며 뜻하지 않게 백작 위를 물려받은 행운아죠."

백작은 자신의 취미, 장점과 단점, 그 밖의 온갖 시시콜콜한 것과 심지어는 재산 규모까지 막힘없이


읊었다. 이쯤 되니 율리아는 그에 대한 경계심도 잊은 채 조금 질려 버리고 말았다.

"아, 예……."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율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가장 궁금했던 건 백작이 사용하는
마법에 대한 것이었다. 무려 키마리스의 마력을 막아 낼 정도의 실력자이면서도, 백작은 그것에 대해선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분위기가 무척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율리아는 처음의 다짐을 깨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백작님, 그날 괜찮으셨어요?"

"옷은 언제든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후작저 중정에서 당신이……."


율리아는 차마 루슬란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보던 백작의 표정은
미묘하게 굳었다. 포커페이스에 능숙한 사내인지라 금세 원래 얼굴을 되찾았지만 율리아는 찰나의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저, 가브리엘 백작님."

"기억합니까?"

"네?"

"설마 내 마법이 통하지 않는……."

104 화

바로 그때, 전력으로 달려온 누군가가 가브리엘을 냅다 걷어찼다. 속도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지만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덕분에 율리아는 그의 정체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 누구한테 수작질이야!"

"여, 오랜만이야. 잘 지냈나?"

레기온은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리는 백작을 모른 척하고 율리아에게 다가갔다.

"저 자식 말은 듣지 마. 속에 능구렁이가 천 마리는 들어앉은 녀석이니까. 피곤할 텐데 이만 들어가자."

"나온 지 삼십 분도 안 됐는데?"

"그런 말은 서운하지. 황녀 전하처럼 아름다운 여성을 향한 내 마음은 세상 누구보다도 진심, 컥!"

"이제 왜 믿으면 안 되는지 알겠지?"

팔꿈치로 백작의 명치를 찍은 레기온이 해사하게 웃으며 율리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뒤도 돌아볼
새 없이 그에게 이끌려 자리를 옮겨야 했다.

"하지만 저 사람이 날 구해줬어."

"구해 주긴 개뿔. 허리에 치마만 둘렀다하면 발정…… 이 아니라 흥분하기를 밥 먹듯이 하기로 유명했던
놈이야. 내 말 믿어."

"아는 사이야?"

"같은 부대에 아주 잠깐 있었어. 그게 전부야. 별로 안 친해. 신경 쓰지 마."

강한 부정은 오히려 긍정이란 말도 있지만 율리아는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자신이 가만있어도 곧


진실이 밝혀질 거란 예감이 든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스태프를 소환한 백작이 레기온의 품에 갇혀 있던 율리아를 날름 낚아챘다. 아니,
정확히는 채 가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만들어 낸 이펙트가 율리아의 몸에 닿은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탓이었다.

"……."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정원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율리아는 백작이 자신을 마법으로 납치하려 한 것에 충격 받았고, 레기온은 율리아를 빼앗길 뻔한 것을
보고 분노로 말문이 막혔으며, 가브리엘은 허공에 흩어진 이펙트에 놀란 듯 행동을 멈췄다.

"율리아, 잠깐 들어가 있을래? 오래 안 걸릴 거야."

"나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은데……."

"잠깐이면 돼."

레기온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백작의 목덜미를 꽉 붙잡고선 율리아를 자상하게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백작을 움켜쥔 그의 손아귀만큼은 흉흉하고 우악스러운 핏줄이 불거져 있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알레한드로 가브리엘입니다. 편하게 아론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소파에 앉은 율리아를 향해 아론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뒤에는 레기온이 안광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굳건히 서 있었다.

율리아는 내심 놀랐다. 사람이 아무리 거절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고 미꾸라지처럼 능글거리기만 하던


백작이, 무려 레기온의 눈짓 한 번에 푹 젖은 종잇장처럼 흐늘흐늘하게 말을 이었다.

"황녀 전하를 납치하려 한 것을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분이신지라 저도 모르게 그만."

"아론."

"……저의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그제야 레기온은 한결 만족스러운 얼굴로 율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영문을 몰라 하는 그녀에게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기억해? 나를 따라 지하로 내려왔던 동료 중에 마법사가 있다고 했잖아. 그게 아론이야. 하는 짓은


경박하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한 녀석이거든."

"경박이라니, 말이 너무……!"

"시끄러워."

"응."

아론은 도로 힘없이 시선을 떨궜다. 그런 그를 보며 율리아는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별것 아닌 일로-납치 미수-동료 사이에 감정이라도 상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됐고, 무엇보다 백작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까지 내려왔었다는 말을 들으니 불편한 마음이 더 커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레기온을 붙들었다.

"가브리엘 백작님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난 사람들 앞에서 망신만 당했을 거야. 그리고 어쩌면 루슬란과
싸우다 크게 다쳤을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율리아, 아론은 전적이 화려해."

"화려?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레기온이 말을 고르는 동안, 풀죽어 있던 백작이 슬그머니 시선을 들었다. 율리아를 올려다보는 아론의
표정은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웠다.

"전하,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전 벌써 잊었는걸요."

그녀는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기온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애써 못 본 척했다.

"그럼 편하게 아론이라고 불러 주시겠습니까?"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앞으로 저와 격의 없는 사이로 지내 주실 거고요?"

"어……. 예?"

"역시 전하라면 제 부탁을 들어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내친김에 서로 편하게 애칭으로 부르죠.


괜찮겠죠, 율리?"

냉큼 고개를 든 그가 율리아의 옆자리에 찰싹 붙어 앉았다. 방금까지의 애처로운 모습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율리아는 속았다.

"들어보세요, 율리! 사실은 두 사람이 황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고 줄곧 레기온이 소개시켜 주길


기다렸는데 감감무소식에, 심지어는 연회장에서 아무리 눈을 마주쳐도 모른 척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직접 인사하려던 중에 그만 일이 생긴 거죠."

"네에."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전 마법을 제법 잘 씁니다. 저의 증조할아버지가 마족이었거든요. 그래서


율리에게 받은 손수건에 역추적 마법을 걸었습니다. 마력을 이용해 주인의 위치를 감지하는 거죠.
연회장은 사람이 너무 많아 제대로 인사를 나누긴 어려웠으니까요."

기분 탓일까, 방금 무언가 엄청난 소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지나간 것 같았다.

율리아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족과 인간 사이에선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고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마법사는 마력이 아닌 마나를 다루는 술사라고, 그래서 소드마스터와 마찬가지로 대자연의 축복을
받은 자라고 들어 왔다.

그런데 아론은 본인이 쿼터이고, 마력을 상당한 수준으로 다루는 마법사이며, 그런 대단한 능력을 이용해
율리아의 뒤를 밟으려 한 것까지 술술 털어놓았다.

"내가 말했잖아."

아론의 입을 막기엔 너무 늦었다고 판단한 레기온은 그저 먼 창밖을 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동안 율리아는 치열한(?) 몸싸움 끝에 아론이 가져갔던 손수건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도 같은
방법을 써서 릴리궁에 방문했다는 걸 들킨 탓이었다.

아론은 실망한 척 어깨를 늘어뜨리며 율리아의 팔찌를 은근슬쩍 빼냈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신기하군요. 율리에겐 마력이 통하지 않다니."

"마력 저항 때문에 그래요."

"과연 진짜 열쇠는 다르군요."

그는 아주 작은 마법진을 만들어 내 율리아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의 마력은 율리아에게 닿는 족족


파훼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런 원리를 이용해 마정석의 봉인을 파훼한다는 거겠죠. 용케 지상으로 올라왔군요. 만약 제가


마왕이었다면 이런 희귀한 능력을 가진 율리를 절대 성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아닐 거예요. 전 쓸모없는……."

"그만. 하지 마."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레기온이 등받이 뒤에서 율리아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내려다보는 레기온의 안광에 새파란 독이 올라있었다.

그런 동료를 보며 아론은 더 놀리려던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오늘은 인사나 하러 들른 거야. 진작 날 만나러 왔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 자업자득이다,


레기온."

"어쩔 수 없잖아.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관계를 들키면 안 되니까."

"영원히 네게 정보만 물어다 주라고?"

"그래서 싫어?"

"그건 아니지. 넌 내 은인이니까."

어깨를 으쓱한 아론이 스태프를 소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온 목적은 얼굴 보고 싶은 것도 있고."

그는 율리아에게 능글맞은 윙크를 날린 뒤 다시 레기온을 돌아보았다.

"브랜틀리 악셀의 죽음에 장미궁이 개입되었다는 걸 알려 줄 필요도 있을 것 같아서."

장미궁은 에스델이 기거하는 제 1 황녀궁의 이명이었다. 레기온이 낮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것이 신호인양
침실 벽에 별안간 작은 포탈이 생겨났다.

"또 봐."

"그래."

"잘 지내요, 율리."

그가 재킷 매무새를 정리하자 넓은 어깨와 셔츠가 터질 듯 발달된 가슴근육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것이


유혹이란 걸 깨달은 레기온이 욱하기 직전, 크게 웃은 아론이 포탈 너머로 빠져나가며 마법진이 닫혔다.

여러모로 폭풍 같은 사람이 지나갔다.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율리아를 돌아보는 레기온의 얼굴은 조금 머쓱해 보였다. 그녀 앞에선 자상하고 세심한 모습만 보여
주다가 저도 모르게 전쟁터에서 동료들과 하던 행동이 나온 게 조금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난 좋은데.'

자신이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레기온은 이보다 훨씬 더 거칠었었다. 다짜고짜 입부터 틀어막고 욕설을


내뱉지 않았던가. 그에 비하면 지금은 양반이나 다름없을뿐더러 아론을 대하는 레기온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편안해 보였다.

"많이 친한가 봐."

"악연이야."

더 묻지 못하게 딱 잘라 대답하려던 레기온은 율리아의 흥미 섞인 눈동자를 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율리아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게브라는 도시가 있었어. 마계와 인접했으면서 드물게 마나의 기운이 강해서 군의 주요 거점으로 쓰였던
곳이야. 황족이나 고위 귀족들이 주로 주둔했는데, 악마 놈들이 힘을 끌어 쓰지 못하는 땅이니까 비교적
안전하다 판단한 탓이었어. 뭐든 절대적인 건 없는데."

후일 게브 섬멸전이라 불리게 될 전투는 비등하게 이어지던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야습당한 인계 연합군은 마군의 공격을 제대로 버텨내지 못했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내가 참전한 첫 대규모 전투였고, 그곳에서 아론을 만났어."

"……."

"웬 한량 녀석과 마주쳤는데, 엄청난 능력이 있으면서도 쓰지 않겠다고 벌벌 떨면서 버티니까 그게


답답해서 다그쳤어. 단지 그뿐이었는데 내 인생에 웬 끈질긴 녀석이 붙어 버렸어."

레기온은 가볍게 말했지만 그때의 상황을 상상한 율리아의 기분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의 레기온이
아론을 단지 다그치기만 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혼자 우는 이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자상한
사람이었으니까.

"네게 믿고 의지할 만한 친구가 생겨서 기뻐."

"율리아."

"다음엔 나도 백작…… 아론에게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 볼게. 바람둥이라고 선입견을 가진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율리아는 그의 손을 꼭 붙들었고, 레기온은 그녀의 착각을 어떻게 알려야 좋을지 고심했다. 아론은
선입견이 문제가 아니라 정말…… 그렇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는 레기온의 생각을 알지 못한 채 환하게 웃어 보였다.

105 화

* * *

그와 같은 시간, 마계에선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마정석의 폭주가 끝나 가고 있었다. 난장판이 된


동쪽의 수습을 간신히 끝내고 마왕성으로 돌아오는 악마들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더럽게 지랄 맞네. 도대체 하루를 마음 편히 쉴 수가 없잖아!"


"너만 힘든 거 아니니 입 다물렴, 레라지에?"

"넌 왜 나한테만 그러냐?!"

"둘 다 시끄러워. 키마리스는 눈 돌아서 작은 열쇠를 쫓아가더니 어디에 숨은 건지 보이지도 않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도 있다지만……."

지하의 모습은 율리아가 떠날 때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수많은 화산 지대에 폭발이 일었고 지반은
붕괴했으며 별안간 내려친 천둥 번개가 대지를 불바다로 만드는 등 이상 현상이 속출했다.

아가레스를 필두로 한 72 악마는 처음엔 사태를 관망했다. 하지만 상황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고,
이대로는 종족의 존속이 위태로워질 거란 판단 하에 결국 직접 방어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한편 레라지에, 레벤나, 아가레스와 비슷한 때에 성으로 귀환한 바르바토스의 안색이 썩 좋지 못했다.


동료들과 합류한 그는 앞선 대화를 들은 모양인지 미간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런 사소한 일 따윌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주군께선 열쇠가 떠난 뒤로……."

평소 좀처럼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그였지만, 바엘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걱정스런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잠깐 쉬지도 않으시고 밤낮 폭주하는 마정석에 맞서 싸우기만 하시지 않나. 눈앞이 암담하군.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아."

"그때보다 더 심하지 않아? 지금 주군께서 손을 놓아버리면 마정석을 막을 수 있는 악마는 아무도 없을걸?


우린 떼죽음 당하는 거야."

레라지에는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의외로 그에 반박하는 악마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율리아가 지하를 떠난 시기와 겹쳐 마정석에 본격적인 폭주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탑 최상층의 봉인이
헐거워졌는지 악마성을 향한 공격이 퍼부어졌지만, 정작 공격 대상인 바엘은 무기력한 사람처럼 둥지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폭주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결국 지상으로 향하는 입구가 뒤틀려 인간들이 사는 접경지에 마물이
출몰하기 시작했을 때, 바엘은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마정석을 파괴시킬
기세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주군의 생각을 알 방법이 없어. 분명 인계의 일을 신경 쓰고 있으면서 도대체 왜 작은 열쇠를 인계로


추방한 거지?"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갖고 놀기에 질렸다고 해도 능력만큼은 쓸 만하잖아! 그런 수준의 마력


저항을 또 어디서 찾겠어?"

"정말이지, 그만 입 닥치렴? 그러다 파이몬이 당한 꼴을 이번엔 네가 당하는 수가 있단다. 사지가 찢긴


채로 용암 밑바닥에 처박히고 싶니?"

"답답하니까 그래, 답답해서!"

땅에 내려앉은 바르바토스가 날개를 접었다. 그는 앞서 걸으며 단호히 말했다.

"확실한 건 오직 주군께서 새로운 마신이 될 거란 사실이다. 그분의 생각을 우리가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아."
악마에겐 오직 힘만이 절대적 가치다. 마력이란 최상급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한 본질이자 결코 변치 않는
미학이었다.

그런 마계에 바엘이 처음 등장하던 날, 어떤 콧대 높은 악마라도 그의 발밑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마력보다 더욱 순도 높고 고귀한 붉은 힘에 그들은 전율했다. 스스로 왕의 이름을 자처한 오만방자한
존재 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때를 회상하던 바르바토스는 잠시 벗어 두었던 모노클을 다시 착용했다.

"하지만 주군의 뜻에 한 발 앞서 움직이는 것 또한 훌륭한 신하의 자세겠지."

"그게 무슨 뜻이야? 형은 뭔가 안다는 거야?"

"마정석의 폭주는 열쇠가 지하를 떠난 것과 관련이 있어. 그렇다면 주군께서 열쇠를 추방한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되지 않나."

처음엔 그저 타이밍이 비슷했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가던 악마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정석에 의한 폭주가 점점 갈수록 지하 동쪽으로 집요하게 집중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단지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마계 동쪽은 인계와의 접경지였다.

마정석 역시 열쇠를 원하고 있다. 그것을 한발 늦게 깨달은 레라지에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지금이라도 당장 데려와야……!"

"넌 생각을 좀 해 보렴? 율리아가 지상에 머무는 한 마정석은 절대 율리아에게 해를 입힐 수 없어.


애초에 마력의 영역과 마나의 영역이 왜 철저하게 나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래서 정말 손 놓고 구경만 할 거라고? 인계의 틈이 비틀렸잖아!!"

레라지에는 답답하다는 듯 마계 동쪽을 삿대질했다. 남들은 여유로운데 오직 자신만 급한 것 같아 속이


탔다.

"다들 말린다면 나라도 가서 열쇠를 데려올 거야. 말리지 마, 진짜 말리지 마!"

"네놈이 퍽이나 브에스드라까지 무사히 도착하겠다. 마력이 모자라면 주제라도 알아야지. 너 하나 잡아


족치겠다고 이를 가는 국가가 몇인 줄 알기나 해?"

"열쇠가 지하에 있을 땐 작은 열쇠니 뭐니 감싸고돌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왜, 쫄려?"

아가레스가 끼어들자 레라지에의 눈초리가 금세 뾰족하게 섰다. 아무리 신경이 날카로워졌다지만 도발도
서슴지 않았다. 율리아가 지하로 내려오기 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아가레스는 마왕의 뒤를 잇는 최고위급 마족이었지만 레라지에는 고작 14 위의 악마에 불과했다.

'아무리 열쇠라지만 그래도 인간인데, 고작 몇 달 머문 것만으로 지난 몇백 년에 걸쳐 쌓아 온 위계를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군.'

하지만 그렇게 조소하는 바르바토스조차 율리아가 만들어 낸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툭하면 싸움이 일고 누군가 일상처럼 죽어 나가던 마왕성에 처음으로 찾아온 평화였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바르바토스는 율리아를 제법 좋아했다. 그러니 왕께 절대복종이란 스스로의 신념을


깨고, 이번에 남들의 눈을 피해 반역자인 키마리스와 접촉한 것이리라.
'열쇠는 단순히 마정석의 봉인을 푸는 존재가 아냐. 마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가장 핵심적인 파편이자 그를
완전하게 부활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이해가 안 되는군. 마신은 마계를 창세한 뒤 그 역할을 다하고 영면에 들었다. 그런데 이제 와
부활이라고?'

'마족은 타고나길 이기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존재들이지. 그런데 그 아비라고 다를까? 스스로를 썩은
거름으로 삼아 다른 존재를 꽃피우기를, 과연 지하의 어느 누가 바랄까.'

키마리스는 단언했지만 바르바토스는 그의 갑작스러운 말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차라리 열쇠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미쳤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키마리스는 그의 의심을 의미 예측했다는 듯 입매를 굳혔다. 그때 그의 표정은 마치 수천수만 년을


살며 세월에 풍화되어 버린 남루한 고목을 보는 듯했다.

"그래, 기억이라……. 미치지 않은 게 용하군."

"형, 방금 뭐라고 했어?"

그사이 레라지에는 아가레스와의 말싸움에서 패배했는지 형의 뒤로 슬금슬금 몸을 숨겼다. 바르바토스는


그런 동생을 보며 슬그머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실소였다.

군단장을 도발해 놓고 고작 말싸움으로 끝나다니 참으로 하찮고 평화로운 해결법이었다. 또다시 느껴지는
열쇠의 흔적에, 바르바토스는 뻣뻣하게 당기는 목덜미를 주물렀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또 싫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건 분명 열쇠로서가 아닌, 그저 율리아 브에스드라가 지닌 능력이겠지.'

키마리스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마계 서쪽으로 향한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후일 주군이 질책하거든 그녀가 막아 주기를, 바르바토스는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다.

* * *

황도 아벨딧심에 땅거미가 어둑어둑 스러져 갔다. 하지만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에스델의 일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일을 위해 후계자로서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피곤을 느낄 틈이 없었다.

"다음 가져와."

"예, 전하."

황녀의 수석 보좌관이 새로운 서류를 내밀었다. 브에스드라의 것이 아닌 인장이 찍혀 있었다.

"최근 인계에 마물이 잇따라 출몰하고 있습니다. 내륙까지 들어온 건 아니지만 변방의 피해는 제법
심각하다고 합니다. 특히 큰 피해를 입은 변방 국가들에서 저희와 엘고스 측에 중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중재?"

"마나의 영역에 마물이 자연 발생할 리는 없으니……."

"악마성을 의심하고 있다는 거군."

보좌관은 말없이 고개를 숙임으로써 주인의 말에 긍정했다. 에스델은 신하가 내민 서류를 눈으로 훑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다급한 모양인지 웬만해선 사용하지 않을 노골적 표현의 사용까지 서슴지 않았다.
"힘을 독점하지 말라? 브에스드라와 엘고스에 소드마스터가 있는 건 맞지만 그들이 어디 물건처럼 다룰 수
있는 존재던가? 주인의 숨통이나 물지 않으면 다행인 것을."

"사신이 아직 아벨딧심에 체류 중입니다."

"그래?"

에스델의 불쾌감을 읽은 보좌관이 나직이 덧붙였다. 원한다면 무슨 죄목을 붙여서든 처형시킬 수 있다는
속뜻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깊게 몸을 묻은 채 서신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문득 제법 괜찮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무려 마왕의 총희가 이곳 브에스드라에 있지 않나.

"무례하고 못 배워먹은 족속들이지만 그렇다고 기회도 주지 않고 내치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지. 그들도


자신들의 백성을 위해 이 먼 곳까지 왔을 텐데."

에스델은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상아를 깎아 만든 유려한 디자인의 만년필이 춤추듯 부드러운 선을
만들어 냈다. 율리아의 이름을 쓸 때조차 그녀의 필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단 한 번, 설득할 기회를 주겠다고 해. 내 동생은 나와 달리 자비로운 편이고 또 마왕의 크나큰


총애까지 받고 있으니, 죽을힘을 다해 매달려 보라고 말이야."

"명 받들겠습니다."

집무실을 나서는 보좌관을 보며 에스델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년 전 외국에 이런 사건이 있었다. 극심한 가뭄이 들어 수많은 백성이 굶어 죽어 가는 빈민촌에 길


잃은 마차 한 대가 들어섰다. 그것은 방계 황족의 사두마차였다. 귀족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값비싼
오동나무로 짜인 데다 온갖 유색 보석과 순금으로 장식된 최상등품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누구나 예상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황족과 마부는 끌어내어져 죽임 당했으며 말과 마차는
강탈당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면 자신이 이렇게 되새길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분노에 눈먼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니까 말이다.

106 화

마차를 탈취한 빈민들은 당장의 추위를 해결하기 위해 최고급 오동나무를 싸구려 장작처럼 불에 태웠다.
천금준마는 한낱 고깃덩어리가 되었으며 보석은 잔뜩 상처 나고 깨져 가치를 잃었다. 그것들의 원래 값을
합치면 빈민촌의 모두가 한 계절을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였는데 말이다.

게다가 그 모든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아무리 배운 바 없는 빈민이라지만 황족을 건들면 어떻게 될지 정말


몰랐을까?

'그럼에도 그런 선택을 한 건, 감정이 때론 이성보다 앞서는 법이기 때문이겠지.'

분노란 일단 피어나기 시작하면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감정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뒤일 것이다.

"증오하는 마족에게 빌붙은 계집이 눈앞에 있는데, 그들이 과연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드레스나 장신구 따위로 물 먹이려던 것은…… 이쪽의 패배였다. 결과가 너무 명백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답지 않게 관용을 베푼 게 패인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갔으면 좋았을 걸, 그 미천한 수준에 맞춰


주려다 재미없는 꼴만 보고 말았다.

"이번엔 나도 진심이야."

가장 낮은 곳까지 비참하게 끌어내려 줄게.

에스델이 움켜쥔 손아귀에서 새하얀 백합이 속절없이 으스러지고 있었다.

* * *

"폐하께서 황녀 전하를 모셔오라 명하셨습니다."

억센 빗줄기가 창문을 사정없이 때리는, 평소와 달리 우중충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비 내리는 창밖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던 율리아는 모처럼 찾아온 방문객에 고개를 들었다. 잉그렘 5 세의
명령을 가져온 사내는 그녀의 시선을 받자 말없이 묵례했다. 그러곤 일언반구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쏴아아,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넓은 실내에 가득 울렸다.

"설마 지금 바로 말인가요?"

"예."

"내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나요."

"부녀간에 얼굴을 마주하는 것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경의 말은 맞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율리아는 부러 제 매무시를 가다듬는 척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추레하게 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제를 알현하기엔 다소 간소한 감이 있었다.

'레기온이 궁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황도에 도착한 후로 레기온은 줄곧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죽하면 두 사람이 마왕의 눈을 피해


그렇고 그런 관계를 이어 가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그런 그도 오늘만큼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 검문소에서 헤어진 뒤 처음으로 키마리스에게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급히 지하로 가야 할 일이 생겼다고 했다.

'내가 혼자 남을 때를 노리고 있었던 거겠지.'

레기온이 곁에 없어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마계로 내려가기 전에도 황제의 얼굴을
본 횟수가 손에 꼽았다. 그조차도 늘 모욕당하기 일쑤였으니, 이번에도 좋은 일로 부르는 건 아닐 터였다.

'피할 수 없다면…… 최소한 약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해.'

소파에서 일어난 율리아는 애써 의연한 얼굴로 주변 하녀에게 손짓했다.

"들었니? 폐하를 찾아뵈어야 하니 서둘러 준비해 주렴."

"예, 전하."
자신은 지금 마왕 바엘의 총희로서 고국에 방문한 것이었다. 누군가의 시중을 받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여야만 했다. 어색함에 몸이 굳을 때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가 레벤나라고, 평소처럼 옷을
골라 주는 것뿐이라고 끊임없이 암시를 걸었다.

그렇게 드레스 룸으로 걸음을 옮기던 율리아가 멈칫했다. 어느새 고개를 든 보좌관이 그녀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납득한 사람처럼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전하의 준비를 방해할 수 없으니 잠시 후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FAME (명성) : 610 》 620]

시스템 창이 떠오름과 율리아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보좌관은 정계에 오래 몸담은 사람답게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의


눈동자에서 의표를 찔린 듯한 빛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자연스러운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던 거다.

"경의 배려에 고마워요."

"아닙니다, 전하."

마음에도 없는 덕담을 주고받는 꼴이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예쁜 옷을 입고 값비싼 보석을 줄줄이


꿰었지만 그럼에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은 그저 목줄 걸린 마리오네트 인형이었다.

* * *

외출을 준비하는 동안 날씨가 더욱 험악해져서 이젠 천둥 번개까지 내리쳤다. 하녀가 열심히 들어주는


우산이 쓸모없을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고 웅덩이를 밟지도 않았는데 드레스 밑단이 질척하게 젖어들었다.

"콜록, 콜록!"

실내에 있을 땐 몰랐지만 바깥에 나와 비 때문에 차게 식은 공기를 들이켜자 주체할 수 없이 기침이 터져


나왔다.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율리아에게 이런 날씨는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기관지가 아프게 조여들어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힘겹게 비틀거리던 그녀는 결국 호흡 곤란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콜록 콜록! 흐읍, 컥……!"

"전하, 괜찮으십니까?"

앞서가던 보좌관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기둥에 팔을 짚은 채 끊임없이 기침을 토해 내는 율리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얼핏 폐병 환자를 연상시켰다.

폐병은 전염력이 강하고 제대로 된 치료법도 없어 걸리면 사실상 죽는다고 보아야 했다. 율리아가 입을
가린 손수건에 피는 묻어 있지 않았지만 보좌관은 선뜻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보좌관이 나름 체면이라고 차린 게 이 정도니 주변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던 우산을 든 하녀가 겁먹어 뒷걸음질 치니 율리아의 몸은 곧장 빗물에 젖어들었다.

날카로운 빗소리가 귓가에 생경하게 울리고 차가운 빗방울이 온몸을 아프게 때렸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었다.

'날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자신이 비록 릴리궁에만 머물고 있지만 요즘 황궁에 타국에서 온 손님들이 자주 드나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 결핵 환자로 낙인찍혔다간 곧장 유폐행이었다.

'기침을 멈춰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율리아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문 바로 그때, 가녀린 어깨를 때리던 빗방울이 갑자기 멎었다. 이국의
복장을 한 험상궂은 사내가 그녀의 머리 위에 커다란 우산을 드리웠다.

그는 율리아에게 손잡이를 넘겨주며 나직이 속삭였다.

"대화를 나눌 기회를 줄곧 찾고 있었소. 우리 자우하르의 전사들은 오만방자한 브에스드라 놈들과 달리


은혜를 알지."

자우하르는 대륙 서부 사막 지대에 위치한 소수 민족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녀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지역이기도 했다. 마계에서 지내던 시절 사절단의 일로 인해 아가레스에게 지명이나 몇 번 들어 본 게
전부였다.

율리아는 우산을 다시 돌려주며 고개를 저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저는 그곳과 인연이 없습니다."

"겸손할 것 없소만."

[▷FAME (명성) : 620 》 640]

갑작스럽게 시스템 창이 떠오르고, 엉겁결에 고개를 든 율리아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사막계 특유의
구릿빛 피부와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얼굴의 반을 가린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짧게 생각에 잠겼던 율리아는 이내 그를 어디에서 마주쳤는지 깨달았다. 바엘이 인계에서 온 사신들을


마법진 안에 가두고 몰살시키려 했을 때가 떠올랐다.

"혹시 얼마 전 마계에 사절단으로 온 적이……."

"당신의 가족을 조심하시오. 잉그렘 5 세와 에스델 브에스드라. 그들은 당신을 이번 사태의 희생양으로
몰아갈 생각인 듯하니."

그녀의 말을 끊은 자우하르인은 오래 시간을 끌 수 없다는 듯 율리아의 등 뒤를 힐끗 보았다. 보좌관의


인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망칠 생각이 있다면 우리가 도와주겠소. 타국에도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도 있소."

거친 빗소리가 그의 제안을 완벽히 감춰 주었다. 남들이 보기에 두 사람은 우산 하나를 놓고 서로에게


양보하려 실랑이하는 것처럼 비춰졌다. 그들의 관계를 의심하던 보좌관의 표정이 다소 가벼워졌다.

"황녀 전하, 서두르시지요.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자신의 우산을 율리아에게 건넨 뒤, 그녀가 들고 있던 우산을 다시금 자우하르의 사절에게 넘겼다.


그녀를 일말의 여지도 없이 외부와 완전히 단절시키려는 의도였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고작 우산 하나일 뿐인데.'

자우하르인의 말대로였다. 자신의 등 뒤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것을 피부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 * *
율리아는 비바람을 뚫고 가까스로 황제 궁에 도착했지만 벌써 한참을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황제는 먼저 와 있던 에스델과 식사가 한창이었다. 지각 탓이라고 하기엔 테이블 위의 모든 음식이 딱 2
인분씩만 준비되어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넓은 홀을 울렸다. 황제와 에스델의 식사 시중을 위해 많은


사용인이 입구에 우두커니 선 율리아를 치고 지나갔다.

젖었던 몸이 마르며 뼛속까지 한기가 스몄다. 온몸의 관절이 조각조각 마비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율리아가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처럼 치이며 휘청이는 동안에도 사이좋은 두 부녀는 담소를 나누며
경쾌하게 웃었다.

'눈앞이 어지러워. 너무 추워.'

그녀가 선 발치에 어느새 물웅덩이가 고였다. 두피를 타고 뺨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물방울의 감각이
섬뜩했다. 의연하게 버텨 보려 했지만 이젠 한계였다. 율리아는 마침 지나가는 시종을 붙들었다.

"저기, 수건을……."

"어디서 더러운 개가 짖는구나!"

황제의 한 마디에 에스델과 율리아를 제외한 자리의 모두가 바짝 엎드렸다.

"짐이 그간 지나치게 너그러웠던 모양이지? 악마에게 몸을 팔던 창녀가 이젠 뒷배만 믿고 짐의 머리


위에서 놀려고 드는 걸 보니 말이다."

"호화로운 생활에 눈이 멀어 제 주제를 망각했습니다."

잉그렘 5 세는 처음부터 자신을 식사 자리에 끼워 줄 생각이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찍 도착했더라도


또 다른 이유를 들어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을 것이다.

율리아는 담담하게 시선을 내렸다.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그녀가 스스로를 변호해선 안 됐다.
황제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뿌득, 황제의 어금니가 갈렸다. 율리아의 의연한 태도가 맘에 들지 않기라도 했는지, 그가 테이블을
거칠게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출신이 천하니 더러운 뒷배라도 좋다고 흘레붙는구나. 감히 짐의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서


있다니!!"

"……송구합니다."

나를 마계로 보낸 건 다름 아닌 당신이었으면서.

107 화

자존심 따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거구의 황제가 눈앞에 이른 순간까지도 율리아는 도저히


무릎을 꿇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싶지 않았다. 날카로운 창끝에 밀려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 순간부터, 자신의 왕은 그가 아니었다.

짐승처럼 번뜩이는 황제의 안광이 율리아를 찢어죽일 듯 덮쳐들었다. 예전이었다면 당장 무릎을 꿇고 싹싹


빌며 그가 손을 들 때마다 더러운 새앙쥐처럼 몸을 웅크려야 했을 테다.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려왔다.
"하지만 폐하의 말씀대로 저는 마왕의 유일한 총희입니다. 바엘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된 유일한
인간이요, 그를 마신으로 만들 단 하나뿐인 열쇠입니다."

"……."

"만약 제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그땐 바엘의 분노를 무슨 수로 감당하시겠습니까."

주변에 꿇어앉아 있던 하인들이 경악성을 삼키며 숨을 들이켰다. 아버지의 등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에스델은 제법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었다.

그리고 황제는, 율리아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숨소리는, 마치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거칠게 들끓었다.

짜악, 짝! 율리아의 뺨에서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울렸다. 애써 버티던 그녀가 바닥에 힘없이
나동그라질 때까지 황제는 율리아의 가녀린 뺨을 쉴 새 없이 내리쳤다.

"읏……."

"그래, 그래. 주둥이 놀리는 솜씨가 나름 늘었구나."

황제는 율리아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강제로 꿇어앉혔다. 율리아의 입에서 작은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차게 식은 무릎이 얼음장 같은 대리석 바닥에 짓눌리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죄하지 않았다. 전처럼 이유도 없이 잘못했다고,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비참하게 울며
빌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아프고 두려웠지만, 한편에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해방감이 차올랐다.

황제가 자신을 아프게 하는 만큼, 딱 그만큼의 해방감이.

"네 그 반반한 면상을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부숴 버리면 말이다. 아니, 그냥 빈민가에 며칠 내돌리기만


해도, 그때도 네가 마왕의 총애를 받을 듯싶더냐?"

"……."

"어리석기 그지없어. 한 치 앞도 못 보는 구나. 네 몸뚱이의 값어치는 딱 그 정도란 말이다!"

처절한 폭력이 이어졌다. 황제는 율리아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휘어잡고 반대쪽 손으로 퍽, 퍽 돌
깨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그녀의 머리통을 마구 내리쳤다.

황제는 율리아의 얼굴을 뭉개 버리겠다 호언장담했으면서도, 마왕의 분노가 두려운 모양인지 따귀 때리던
것을 멈추고 대신 얼굴을 피해 주먹질을 퍼부었다. 그녀는 쓰러지지도 못하고 황제의 화를 고스란히 받아
냈다.

언제 끝날지 모를 폭력이 빗소리에 뒤섞여 떨어져 내렸다. 차라리 빌라고, 근처에 꿇어앉은 누군가가
애타게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황제가 약이 올라 어쩔 줄 몰라 할수록 율리아가 느끼는 해방감은 더더욱 커졌다. 그녀는 자신이 미친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잘못했다고 빌면 발길질 몇 번에 넘어갈지도 모르는데, 황제가 체통을 잊고
보는 눈도 잊은 채 이러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아바마마."

율리아의 턱밑에 선혈이 뚝뚝 흘러내릴 쯤에야, 자리에서 일어선 에스델이 황제의 발밑에 읍소했다.

"이러다 자칫 아바마마의 건강이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율리아는 보고 배운 바가 없어 예법에 무지하니


아바마마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시어요."
그녀가 나서자 주변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과연 에스델 전하는 다르다며 칭송하는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정말 말리고 싶었던 거라면 진작 말렸어야 했다. 거의 죽기 직전에야,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즈음에야 마지못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처럼 아바마마와 함께 하는 오찬인데 즐거운 일만 보고 싶습니다. 게다가 곧 어마마마의 기일이


아닙니까. 어마마마께선 살아생전 무척 자애로우셨죠."

"그러고 보니 곧 황후의 기일이로구나. 짐이 무심했군."

"아바마마께선 대제국을 다스리는 몸이신데 어찌 사소한 일에 신경 쓰시겠어요."

두 부녀는 화려한 대리석 바닥에 피 웅덩이를 만들어 내는 율리아를 본체만체하며 살가운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깔딱깔딱 위태로워지자, 그들의 표정 역시
귀찮다는 듯 변했다.

"시끄럽다! 저것의 주둥이를 어떡해서든 틀어막아!!"

황제가 크게 역정을 냈지만 누구 하나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혹여나 율리아와 관계되었다가 같은 꼴을


당할까 두려운 탓이었다.

주저하는 사용인들을 대신해 에스델이 재차 나섰다. 또각또각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거대한 홀을 울렸다.

그녀의 시선에 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율리아가 내려다보였다. 평소 새하얗던 뺨은 루슬란의 최후처럼


거무죽죽하게 부어오르고 입술은 죄 터져서 피로 번들거렸다. 잠깐 맞은 얼굴이 이 정도이니 머리 쪽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에스델은 선심 쓰듯 쓰러져 있는 율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곤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나직이


속삭였다.

"약한 척 불쌍한 척 눈물이나 흘릴 줄 알았는데 제법 의외였어."

"……."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 두지만 이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어. 이런 유치한 건 내 방식이 아니거든."

에스델은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율리아를 우악스럽게 붙들어 일으켰다. 평소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지라 사람 하나 억지로 일으키는 건 어린애 팔 비틀 듯 쉬운 일이었다.

그녀는 주변에 선 병사 몇을 불렀다. 그들에게 율리아를 맡기며 릴리궁까지 잘 옮기라고 지시했다.

"아, 그리고."

축 늘어진 율리아가 죄인처럼 거의 끌려가다시피 홀을 나설 무렵, 에스델이 방금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너도 알겠지만 요즘 마계와 관련해서 정세가 좀 어지러워. 조만간 대책 회의가 열릴 예정인데, 네가


그곳에 참석해서 의견을 보태 줬으면 좋겠어. 네 말대로 넌 마왕의 총희잖아, 그렇지?"

그렇게 말하는 에스델의 눈매가 선연히 휘었다.

* * *

거센 빗줄기가 밤새 쏟아지고 있었다. 달빛 한 점 들지 않는 칠흑 같은 밤, 모두가 집안에 숨어들어


길거리에 행인 한 명 돌아다니지 않는 음산한 거리.

거대한 날개 달린 그림자 하나가 밤하늘을 가르며 황성 첨탑에 내려앉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붓는 비를 아무렇지 않게 뚫고 지나갈 만큼 강하고 뼈대가 굵은 날개였다.

만약 그 광경을 목도한 자가 있다면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인간들에겐 그만큼
이질적이고 비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어둠 속에 번들거리는 붉은 안광을 보지 못해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저분한 욕망의 냄새가 나는군."

바엘은 푹 젖은 앞머리를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허공에 드러난 그의 미간이 불쾌한 듯 구겨져 있었다.
퍼붓는 비에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인간들의 더러운 감정에서 비롯된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는 적막에 잠긴 성내를 찬찬히 훑었다.

"쥐새끼들은 아직인 모양이지."

마계의 지배자인 바엘이 지상까지 직접 올라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붉은 달빛 아래 자신의 영토를


떠나는 세 악마의 기척을 느꼈다.

제 허락 없인 누구도 감히 마계를 멋대로 드나들 수 없다 선언했건만, 기억을 가져간 놈이 가장 문제였다.


마력으로 따지자면 자신에게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주제에, 번번이 빈틈을 찾아 영악하게 파고들곤
했다.

하지만 바엘은 그들이 향하는 곳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에 율리아 브에스드라가 있으니.'

사위가 조용했지만 어차피 그들의 목적지는 이곳 브에스드라 황성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목이 타고 머릿속이 초조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고 있건만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른 새 밤공기에 녹아든 수많은 기운 중에서 익숙한 단
하나를 찾기 위해 수없이 헤아리고 있었다.

"피 냄새……."

코를 스치는 달큰하고 유혹적인 향기에 그의 안광이 붉게 번뜩였다. 바엘은 다시금 날개를 펼쳐 어디론가
홀린 듯 날아갔다.

새하얀 건물 앞자락에 다홍빛 시클라멘이 만발했다. 하지만 방금 느꼈던 그 전율할 듯한 향기의 정체는
고작 꽃 따위가 아니었다. 어느 발코니에 내려앉은 바엘의 앞섶에 선명한 윤곽이 드리웠다. 아까보다
더욱 짙어진 체향이 굳게 선 이성을 무너뜨릴 듯했다.

차가운 빗줄기가 바엘의 머리 위로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 팽팽하게 선 근육을 타고 흐르던 물방울들이
움푹 패인 장골에 잔뜩 고여 들었다.

창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바엘은 굶주린 개처럼 서둘러 그것을 밀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어쩌면 배신자를 쫓는다는 이유조차 처음부터 핑계였을 수도 있었다.

"……."
하지만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정신없이 고여 들던 욕망 위로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파괴욕이 한겨울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처참한 몰골의 율리아가 그곳에 있었다.

머리에서 흘린 피로 새하얀 시트를 붉게 물들이고, 온기 한 점 없는 방에 내던져져 벌레처럼 몸을 작게


말고 있었다. 콜록콜록, 애처롭게 기침하고서도 고통을 주체하지 못해 소리 없는 신음을 흘렸다.

실내엔 빛 한 점 들지 않았지만 바엘은 그녀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보고 있었다. 그녀의 상처가 마치 제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어째서. 누가 감히……."

율리아를 안아 들려던 바엘은 이도저도 못하고 굳어 버렸다. 고개가 들린 순간, 율리아의 양쪽 코에서
맑은 피가 줄줄 흘렀다. 뇌수 섞인 피. 어떻게 보아도 그녀는 죽어 가고 있었다.

차라리 의식이라도 놓아 버렸다면 편했을 텐데, 바보 같은 여자는 그것도 하지 못한 채 제게 몰려드는


끔찍한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르겠다. 혼란스러웠다. 단지 인간 계집 하나가 죽어 가고 있는 것뿐인데, 이런 짓을 저지른 새끼를


찾아 온몸을 산 채로 으스러뜨리고 싶었다. 한편으론 화가 났다. 이런 지경이 될 때까지 반항 한 번 안
하고 버텼을 여자의 모습이 시커멓게 물든 시야 너머로 스쳐 지나갔다.

"기껏 보내 줬는데, 내 앞길에 방해만 될 네가 거슬려서 그냥 놓아줘 버렸는데."

텅 빈 둥지를 보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가녀린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와도 흔들리지 않았다. 침대
옆자리 가지런히 놓인 얇디얇은 네글리제를 보면서도 이것이 너였으면 좋겠다 상상하지 않았다. 결코
그러지 않았다.

율리아의 상태는 점점 이상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사부작사부작 몸을 뒤틀고


경련하더니 이내 쥐죽은 듯 잠잠하게 몸을 늘어뜨리길 반복했다.

바엘은 석상처럼 서서 그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죽음을 닮은 음영이


드리웠다.

108 화

그녀에게 손을 대 버리면 다시 놓을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섬뜩해졌다. 그녀가 영영


손닿을 수 없는 곳에 가 버리면…….

"일어나."

바엘은 저도 모르게 몸을 낮췄다. 지하 세계의 왕이 한낱 인간 여자의 머리맡에 무릎 꿇는 것조차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는 율리아에게 입 맞추며 붉은 마력을 넘겼다. 그녀의 육체가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자 방해되는
네글리제를 찢어 내고 심장 위 붉은 각인에 손바닥을 눌렀다. 파지직, 제대로 흡수되지 못한 마력이
사방으로 튀며 섬뜩한 파열음을 냈다.

"눈 뜨고 나를 봐."

축 늘어진 그녀의 목덜미를 받치고 일으켰다. 병든 닭처럼 힘없이 무너진 고개가 바엘을 불안하게 했다.

"너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 말해. 예전엔 묻지 않는 것까지 잘도 속살거렸으면서!"


그녀는 곧잘 그랬었다. 바엘의 기분이 조금 풀렸나 싶을 때마다 은근슬쩍 다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속살거렸다. 처음엔 귀찮다며 무시하던 그도 결국엔 말려들어 그녀의 종달새 같은 웃음소리를 내심
기꺼워했다.

이곳이 마나의 땅이기 때문일까, 지하에 있을 때처럼 마력이 쉬이 먹혀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해진
끔찍한 폭력의 흔적을 볼 때마다 바엘의 눈앞이 분노로 들끓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율리아의 속옷을 벗길 틈도 없어 옆으로 젖혀 두고 다리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비좁고 빡빡한 내부는 그를 마치 낯선 것인 양 밀어냈다.

"전부 삼켜. 뱉으면 용서하지 않을 테다."

그녀의 머리맡에 팔꿈치를 받치고 다시금 입술을 겹쳤다. 피비린내 나는 혀를 애타게 얽으며 마력을
꾸역꾸역 넘겼다. 그녀가 힘겨워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바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부어버린 입 안 점막을
부러 샅샅이 훑었다.

"아프면 눈 뜨고 일어나서 울어. 불만이 있어도 직접 말해. 이런 건 용납할 수 없어."

위도 아래도 그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율리아를 붙든 바엘의 손이 자신도 모른 새 미미하게


떨렸다. 유리 공예품처럼 섬세한 몸이 혹여나 망가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밭은 숨만 토해 냈다.
바엘은 끝없는 무저갱 속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율리아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들어 올려졌다. 빛을 잃은 눈동자가 바엘의 등 뒤 먼 천장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꿈, 이겠지……."

뜨겁고 집요한 기운이 율리아의 속을 울컥 헤집었다. 그녀에겐 어느새 익숙해진 감각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필요 없어진 자신에게 바엘이 찾아올 리 없었다.

뼛속까지 외로움이 사무쳤다. 눈앞에 바엘이 있으되 닿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었다. 가느다란 눈꼬리에서


도로록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나를 버렸어요?"

누구도 듣지 못할 원망임을 알면서도, 율리아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궁을 나서며 정신을 잃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잠깐 의식이 들었고, 완전히 눈을 떴을 때 자신은
릴리궁 침실에 홀로 돌아와 있었다.

맞은 곳들이 불붙은 듯 아프고 쓰렸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았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항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후련함까지 느껴졌다.

황제나 에스델의 발밑에서 비참하게 기거나 때리지만 말아 달라고 비굴하게 애원하지 않았다. 남들은 뭐라
비웃을지 몰라도 자신에겐 그것만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혼자 힘으로 움직일 정도는 되어 삐걱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가까스로 침대 위에 올라왔다. 걱정되는 건


레기온에게 이 상처들을 뭐라 변명하면 좋을까,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결국 내 곁엔 아무도 없어."

"……."
"모두가 나를 버릴 거야. 난 쓸모없고 무가치한…… 그런 존재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이상해졌다.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 견딜 수 없었다. 자꾸만
구역질이 나고 시야가 어지러웠다.

홀로 몸을 웅크리고 누워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또 자존심 없이 후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차라리 빌


것을, 비참하게 애원이라도 할 것을. 그럼 주제를 안다며 덜 때렸을지도 모르는데. 고통 앞에서 자존심
따위는 짓뭉개진지 오래였다.

"아파, 흑, 아파……."

눈앞의 이가 현실이 아니라도 좋았다. 그것에라도 기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율리아는


처연하게 양손을 뻗었다.

"안아 주세요."

하지만 환상 너머의 이는 돌처럼 굳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 얼마나 구질구질한가.


비현실조차 그녀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모두 체념하고 만 율리아가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자, 사내는 그제야 잔뜩 부어오른 뺨을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나를 원하나?"

"……."

"그럼 내 이름을 불러."

"거짓말."

어차피 환상인데. 동쪽 하늘을 따라 새벽 동이 터 오르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부질없는 꿈인데.


어째서 이토록 집요하게 재촉하는 걸까. 저런 애타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걸까.

자신을 버린 이에게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수치스러웠고, 어차피 환상뿐일 존재에게 수치심을
느낀다는 게 또 비참했다. 그럼에도…….

"바엘."

한참을 망설이고 또 망설이던 율리아가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은 찰나, 차게 식은 그녀의 몸 위로 사내의
커다랗고 단단한 몸이 겹쳐들었다. 그가 정말로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절절 끓는 열기가 맞닿은
피부로 녹아들었다.

'아아, 내가 결국 미쳤구나.'

잠깐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지만 이내 중요치 않다고 느꼈다. 사내의 뜨거운 손이 그녀의 작달막한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두툼한 손바닥에 율리아의 두 봉우리가 전부 잡혔다.

"아, 흑!"

"다리 벌려."

"힘이, 안 들어가요……."

축 늘어진 다리는 아무리 힘을 써도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신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제삼자의 몸


같았다.

그것을 보던 사내의 안광에 살의와 분노가 다시금 부글부글 들끓었다. 하지만 율리아가 그것을 알 방법은
없었다. 제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무릎에 온 신경을 빼앗겨 버렸다.

순간이라도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 걸 눈치챘는지, 바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눈 돌리지 마."

"어디에요?"

"내게서."

"이미 그러고 있는걸요."

율리아는 고통으로 흐릿한 정신에도 배시시 웃어 보였다. 커다란 짐승에게 안겨 든 것 같았다. 온몸


구석구석 바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전부 당신만 보여요."

"……."

자꾸 말대꾸하는 그녀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허벅지로 율리아가 다리를 다물지 못하도록 단단히 막고
두 손가락을 차츰 밀어 넣었다. 내부는 여전히 비좁았지만 이번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조금 젖은
점막이 쫀득하게 조여들었다.

"흑!"

그녀가 몸을 열어 주기 시작한 탓일까, 단단한 벽에 가로막힌 듯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마력이 조금씩


그녀의 내부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그 감각이 이상한지 파드득 몸을 떨었다.

"아픈가?"

"으음……."

율리아의 굳은 얼굴이 일순 사르르 풀렸다. 아무리 꿈이고 환상이라도,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바엘이라고 그런 그녀의 속내를 모르지 않았다.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다치고 상처 입은 작은 짐승


같았다. 언제나 그랬다.

"벌려."

바엘의 혀끝이 율리아의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간지러워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밑에서 찌걱대는 손가락에
놀라 작은 비명을 질렀다. 두 손가락이 점액으로 미끈거리는 내벽 안에서 가위질하듯 교차됐다.

그 틈에 바엘은 냉큼 혀를 밀어 넣었다. 그것을 모르는 율리아가 냉큼 입술을 다물자 그의 길고 두툼한


혀를 쪽쪽 빠는 모양새가 됐다. 사내의 타액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손가락, 아흑! 그런 식으로 하면……!"

"옳지."

찔꺽찔꺽, 마찰당한 점막에서 미묘한 열감이 타고 올랐다. 동시에 줄곧 잠잠하던 그녀의 심장 위 각인이
파르르, 희미하게 빛을 냈다.
그것을 본 바엘은 갈급하게 허리끈을 풀고 로인클로스를 내던졌다. 진즉부터 액이 번들거리던 페니스가
반사적으로 튕겨 나왔다. 팔뚝만 한 그것은 시퍼런 핏줄을 흉흉하게 곤두세운 채 배꼽까지 바짝
올라붙었다.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방증했다.

"제, 제발 그만. 아아, 히끅!"

"그렇게 애원하니 어쩔 수 없지."

바엘은 길게 찢어진 틈 안에서 마구 비집고 교차시키던 손가락을 뒤로 쑥 물렸다. 그 가벼운 자극조차


버거워 헐떡이던 율리아가 이내 대놓고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했다. 율리아가 눈물을 떨어뜨리는 모습을 볼 때면 속에서 천불이 이는 듯해 누구 하나라도 죽여 피를


보아야 속이 편했는데, 지금은 어째서 되레 그녀가 엉엉 우는 소리가 듣고 싶은 건지.

핏기 없는 몸이 전부 발갛게 익어 버릴 때까지 울려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아, 아앙……!"

그는 말없이 선단을 맞추고 허리를 쳐 올렸다. 금세 오그라들었던 질구가 머리부터 꿰뚫는 둔기에 맞춰
빠듯하게 팽창했다. 액이 질척하게 고여 있던 주름이 펼쳐지며 강제로 욱여넣어진 것을 쫀득하게 조여
댔다.

"바엘, 아흑! 시, 싫어어!"

"거짓말. 여기는 한참 굶은 것처럼 게걸스럽게 씹어대고 있는데."

"꺄읏……!"

바엘의 두툼한 어깨에 그녀의 종아리가 달랑 얹혔다. 율리아는 하복부가 반쯤 들린 채로 바엘이


무자비하게 찍어 내리는 페니스를 힘겹게 받아들였다. 검붉은 성기에 도도록이 선 핏줄이 가장 예민한
질구를 긁고 지나가는 감각이 선연했다.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도리질 쳤다. 파도 같은 쾌감이 등골을 선뜩하게 내려치며 온몸의
말초까지 밀어닥쳤다.

"아흑, 흑, 끅, 끅!"

"후우, 힘든가?"

율리아는 일말의 자비를 기대하며 제 머리맡을 짚은 바엘의 팔을 움켜쥐었다. 소리 내어 답할 수 없을


정도로 숨통이 힘껏 조여들었다. 끅, 끅.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였다.

"좋아서 죽을 것 같단 말이지?"

"나아, 끅, 이제……."

"그럼 더 해 줘야겠군. 당분간 네발로 기어 다니게."

자신의 애원을 귓등으로 흘리는 바엘에게 저항하듯 율리아의 하복부가 바르르 경련했다. 바엘은 황홀감에
젖어 시선을 내렸다.

찔꺽찔꺽, 흘레붙은 둘의 하복부에 물이 질척하게 튀었다. 모양새가 뚜렷한 귀두는 비좁은 질벽을 긁어
내고 빠져나올 때마다 흰 포말을 일으켰다. 선액이 회음부를 타고 엉덩이골 밑으로 툭툭 떨어지는 통에
벌써 시트가 흥건하게 물들었다.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여자가 제 손목을 목숨 줄처럼 붙들고 있었다. 작고 뽀얀 가슴은 그의 허리 짓에


맞춰 정신없이 흔들렸고, 반쯤 접힌 아랫배는 페니스가 삽입될 때마다 불룩 튀어나와 선명한 자욱을
만들어냈다.

율리아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상처와 피멍이 많이 사라진 게 가장


기꺼웠다. 그녀가 자신이 넘기는 마력을 열심히 삼켜 내고 있다는 게.

109 화

"하악, 하아……!"

내벽을 쑤시던 페니스의 기세가 썩 너그러워졌다. 무게를 실어 사납게 찍어 내리던 움직임이 뭉근하고
질척해졌다. 사정없이 흔들리던 율리아는 그제야 날카로운 비명 대신 달큰한 신음을 흘렸다.

상체를 숙인 바엘이 그녀의 목덜미에 입 맞췄다. 일랑일랑 풍겨 오는 살 내음이 마치 그녀가 자주 먹던


설탕 덩어리 과자 같았다.

하지만 진하게 새겨진 화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 녹듯 흐릿해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 모습은


바엘로 하여금 잠시 잊고 있던 무언가를 생각나게 했다.

"누가 너를 그리 만들었지?"

턱, 턱. 바엘은 잘게 허리를 떨며 밀어를 나누듯 속삭였다. 율리아가 쾌락에 휩쓸려 정신을 반쯤 놓은


틈에 범인의 정체를 토해 내게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쓸모없는 일은 주절주절 잘도 속살거리면서 정작 중요한 때가


오면 조가비처럼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좀처럼 그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대신
혼자 눈물로 삭여 냈다.

날이 저물어 둥지에 들어갈 때마다 넓은 침소에 온통 짜디짠 눈물 냄새가 풍기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녀는 드넓은 사해 같은 슬픔을 그 작은 몸 안에 온전히 가두고 또 가뒀다.

제가 받은 모든 상처를 강박적으로 숨기려는 사람처럼.

"누가 네게 손을 댔는지 말해."

상처는 거의 아물었지만 시트에 베인 핏물은 아직 선명했다. 그녀가 힘없이 늘어져 죽어 가던 모습이


뇌리에 잔상처럼 들러붙었다. 누가 그랬든 절대 가만둘 수 없었다.

"읏!"

분노 탓에 허리를 강하게 쳐 올렸는가, 그를 받아 내던 율리아의 몸이 움찔 굳었다. 주먹만 한 귀두가


자궁에 치받친 탓이었다.

바엘은 치미는 사정감을 참고 멈칫 몸을 뒤로 물렸다. 선단을 질구에 걸쳐 놓은 채로 율리아의 일그러진


콧대를 어루만졌다. 제 몸 문드러져도 아프다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바보 같은 여자라서, 바엘은 그녀의
표정을 세심히 살피며 상태를 파악했다.

"당신이 자꾸 그렇게 보면 꿈에서 깨었을 때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를 올려다보던 율리아의 눈매에 그렁그렁 눈물이 들어찼다. 자상한 소리 한마디 듣지 못했지만, 자신을
보는 바엘의 눈빛 속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전해지는 감정이, 이상하게도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기대하지 않겠다. 마음 주지 않겠다.

그렇게 몇 번이고 다짐하며 단단히 세워 둔 둑이 슬금슬금 무너져 내리려고 한다. 꿈에서라도 이토록
소중한 사람처럼 대해지니까.

"실제론 이렇게 자상할 리가 없는데. 당신 눈빛은 꼭 나를,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새벽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어두운 것들의 시간이 결국 끝나 간다. 바엘은 희게 비치는 샛별을 날개를
펼쳐 가로막았다.

"그래, 이건 전부 꿈이야. 그러니 말해."

"……."

"율리아."

"말하고 싶지 않아요. 이젠 약하다는 핑계로 기대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녀는 어느새 가벼워진 다리로 바엘의 허리를 꼬옥 감쌌다. 바엘에 비하면 아주 작은 힘이었지만, 그는
천근 바위에 떠밀린 듯 그녀의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아아!"

"크윽……."

색이 다른 두 육체가 하나가 된 듯 온전히 겹쳐졌다. 율리아는 자신의 안에 파정되는 농밀하고 질척한


것을 느끼며 차츰 정신을 잃었다.

숨 막히는 쾌락이 그녀의 신경을 잠식해 갔다.

* * *

"율리아! 드디어 일어났다!"

해가 쨍쨍하게 뜬 한낮이었다. 몸이 무겁게 축 늘어졌지만 제 존재를 알아달라는 듯 귓가에 부스럭부스럭


울리는 소리에 율리아는 부스스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가슴 위로 작은 생명체가 와락 덮쳐들었다. 물론 크기만 작다뿐이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묵직하고 체온이 높았다. 붕붕 좌우로 열심히 흔들리는 꼬리가 소년이 느끼는 반가움을 여실히
나타냈다.

"파이몬 보여? 율리아, 파이몬 보여?!"

"으응……."

"숨어서 여기까지 오느라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그래도 잘 참았으니까 파이몬 칭찬해 줘!"

파이몬은 제 머리통을 율리아의 목덜미에 마구 문질렀다. 복슬복슬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도통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가슴 위에서 신나게 뒹구는 파이몬은
둘째치더라도 레기온과 그 옆의 키마리스까지 전혀 대수롭지 않은 듯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율리아는 머뭇머뭇 상체를 일으키려다 또 한 번 놀랐다. 탁자 위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멍 하나 없이
말끔했다. 피고름이 줄줄 흐르던 두피도 멀쩡했고 지독한 구역질과 두통도 씻은 듯 나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황제에게 머리를 맞은 이후부터 모든 기억이 드문드문 끊기다가 초저녁 이후부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이 죽어서 꿈을 꾼다고 믿는 편이 훨씬 현실성 있을 것 같았다.

"율리아."

하지만 뺨에 와 닿는 키마리스의 서늘한 체온이, 지금 이것이 현실이란 걸 상기시켰다. 그는 율리아의


목덜미를 잡고 그녀를 완전히 일으켜 앉혔다.

"황궁을 둘러싼 항마 수식이 완전히 파괴되어 있더군요. 원래는 파이몬만 마력구에 봉인시켜 들여보낼
계획이었는데, 덕분에 저까지 함께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브에스드라는 마족에게 극히 적대적인 국가였다. 황도 아벨딧심의 검문소부터 마력을 감별해 내는


마도구가 있을 정도였다. 사정이 그러하니 황궁이 얼마나 철저히 보호되고 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게다가 릴리궁엔 사용인이 하나도 없더군요. 저나 파이몬이 지내기엔 편하겠지만……."

"또 마력구 안에 들어가라고 하지 마! 죽여 버릴 거야!"

율리아의 허벅지 위에서 고롱대던 파이몬이 냅다 눈을 부릅떴다.

율리아는 문득 자신의 상처가 회복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파이몬은 사계왕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마력을
지녔으니 그가 자신을 고쳐 준 게 분명해 보였다.

'아, 그럼 내 꼴도 봤을 텐데. 어떡하지?'

상대는 악마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린 아이에게 보여줄 만한 꼴은 아니었을 거다. 율리아는 힐끔 시선을
내린 그때, 레기온이 이상하다는 듯 덧붙였다.

"원래는 안 이랬어. 시종과 하녀의 탈을 염탐꾼들이 하루가 멀다고 드나들고 심지어는 방 안에


들어앉기까지 했다고. 시키는 일은 하나도 안 하면서 말이야. 그 뻔뻔스러움에 치가 떨릴 정도였는데."

"인간 부르지 마! 다 죽여 버릴 거야!"

"파이몬, 율리아 앞에선 말 가려서 해."

하지만 그녀를 말갛게 올려다보는 파이몬의 눈빛엔 어떤 괴이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레기온과
키마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율리아는 그들이 어제 낮의 일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누가……?'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털어 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계집을 당장 끌어내.'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의 왕국에서 그나마 사지 멀쩡히 벗어나고 싶다면


말이지.'
자신을 벌레 보듯 하던 그의 눈빛이 아직도 이토록 선명한데.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율리아는 눈물이 터질 듯 욱신거리는 눈매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에스델과 비교당하며 죽을 만큼 두드려 맞았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자신의 못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레기온은 미처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연한 복숭앗빛 머리카락에 웬


핏덩이가 이질적으로 엉겨 붙어 있었다.

'저건 누구 피지? 설령 남의 것이라도 저 정도면 시트나 옷에도 묻어 있어야 할 텐데 깨끗해. 그리고


율리아는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

레기온은 그녀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일단 눈에 보이는 상처는 없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마침


키마리스도 같은 생각인지 힐끗 눈짓하는 게 느껴졌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율리아의 앞에서 티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가 말해 줄 생각이 없다면
이쪽에서 직접 알아내고, 필요하다면 뒤에서 처리하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널 아프게 하면 그게 누구라도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거야.'

율리아는 자신의 등 뒤에서 벌어질 일을 알지 못한 채 희게 웃어 보였다.

* * *

10. 돌아가야 할 곳

브에스드라의 황도 아벨딧심이 인계 각국에서 온 사신들로 북적였다. 인파는 많았지만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최근 마계와의 국경 지대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대형 마물이 출몰하는 탓이었다.

처음엔 접경지에 그치던 마물 출몰 범위는 점점 넓어져 최근엔 내륙 지방까지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그로


인한 인명 피해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대책을 논하는 회의가 아벨딧심에서 열렸다. 사안이 얼마나 시급했는지, 브에스드라와 사이가 썩
좋지 않은 엘고스마저 사람을 보내 왔다.

그 개회가 바로 오늘이었기 때문에, 율리아는 이른 아침부터 준비에 한창이었다.

"율리아 이거 해, 분홍색 리본! 파이몬은 이게 좋아!"

"야, 그런 주먹만 한 촌스러운 리본을 어디에 쓰냐?"

"여기 드레스에 직접 달아 줄래? 너무 귀엽다."

"요즘은 주먹만 한 게 유행이지. 율리아는 역시 보는 눈이 있네."

그리고 율리아는 세 남자의 시중을 동시에 받는 호사 아닌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이번엔 리본 위치로 투닥거리는 파이몬과 레기온을 뒤로하고, 키마리스는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그녀의 두피를 섬세하게 훑어 내렸다.

"아프지 않습니까?"

"부드러워서 기분 좋은걸요. 키마리스 님이야 말로 힘들지 않으세요?"

"율리아가 좋다면 저도 좋습니다."


피떡이 되어 죽어 가던 황녀가 다음날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다니자 사람들은 경악하며 더는 그녀의 시중을
들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파괴된 항마 수식을 복구하려면 많은 시일이 필요했기 때문에, 파이몬과
키마리스는 텅 빈 릴리궁에 아예 눌러앉아 버렸다.

감시자가 없으니 움직이기 한결 편해진 그들은 인간이 떠난 빈자리를 대신해 율리아의 주변을 세심하게
돌봤다. 주변 이목을 피해 몰래 오가던 아론조차 이젠 대놓고 마법을 써 가며 릴리궁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율리, 안색이 생각보다 괜찮네요? 긴장 안 했어요? 의외로 무대 체질인가?"

"또 왔어요? 어차피 회의장에서 볼 텐데……."

"그럼 율리 대신 내가 긴장하지, 뭐. 하하!"

회의에 걸맞게 단아한 드레스를 고른 율리아가 드레스룸에서 나올 무렵, 도대체 언제 온 건지 소파에 앉아


있던 아론이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110 화

하지만 율리아는 그 또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 회의의 진짜 내막과 황가의 속셈,
그리고 해외 귀빈들의 반응까지 모두 면밀히 조사해 물어다 나른 게 바로 그였다.

'당신의 가족을 조심하시오. 잉그렘 5 세와 에스델 브에스드라. 그들은 당신을 이번 사태의 희생양으로
몰아갈 생각인 듯하니.'

불현듯 자우하르인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황가에선 만에 하나 율리아가 사태를 해결할 경우


브에스드라의 공으로 만들고, 그렇지 못하면 그녀 개인을 희생시킬 생각이었다.

때마침 마족에 대한 증오가 불거진 상황이었다. 사태가 심각해질 경우, 마왕의 여자인 그녀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지난번 부탁드린 일은 알아봤나요? 황제와 에스델의 정치적 관계에 대해서요."

"율리의 부탁인데 두말하면 잔소리죠. 알아내는데 제법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었어요.
이게 터지면 브에스드라 황가의 이미지는 바닥까지 떨어질 겁니다. 이걸 눈치챈 게 대단하네요."

루슬란의 죽음 이후, 율리아는 줄곧 한 가지 의문을 가져 왔다. 어쩌면 황제는 에스델을 경계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가장 사랑했던 황후의 하나뿐인 딸을 말이다.

'폐하께선 창녀를 죽이지 못한 걸 얼마나 자책하셨는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직 에스델만을 보좌해 오던 가장 충직한 기사가 황제의 지밀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다. 웬만한


고관대작조차 발걸음하기 어려운 그곳에서의 일을 말이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당신의 진짜 주인은 누구죠?'

'…….'

그때의 루슬란은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자신을 에스델로 착각하고 있었으면서, 그녀가
진짜 주인이라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제 마지막을 예견했기 때문일까, 사랑하는 여인에게 차마
거짓말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을 율리아는 이해했다.

그리고 의심하게 되었다. 에스델은 루슬란의 진짜 주인에 대해 알고 있을까. 황제가 천한 사생아에게


하듯 제 곁에도 눈과 귀를 붙여 뒀다는 사실을 말이다.
"잉그렘 5 세는 죽은 황후의 살아생전 그녀와 썩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제는 황후를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그래서 새 황후도 들이지 않았는걸요."

"율리, 죽은 황후는 뛰어난 정치인이었어요. 귀족원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고 백성들도 그녀를 사랑했죠.
그에 반해 잉그렘 5 세는 무늬만 황족일 뿐 실상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어요. 황제에겐 실질적인 힘이
없었어요."

"설마……."

"황제는 황후의 뛰어난 능력을 질시하고 경계했습니다. 황후를 아내가 아닌 경쟁자로 보았죠."

정치인에게 경쟁자는 곧 쓰러뜨려야 할 대상과 다름없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와중에 황후가 회임했습니다. 그녀의 배 속에 든 건 명실상부한 차기 황제였죠. 잉그렘 5 세에겐


시간이 얼마 없었어요. 황후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운데, 그녀를 뒷배로 둔 더더욱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이 임박했으니 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주 다급했을 겁니다."

"하지만 에스델은 황제의 자식이기도 한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생각하죠?"

"정치란 율리의 생각대로 단순하지 않습니다. 가족이라도 권력 앞엔 적이 될 수 있어요. 지금 율리가


겪고 있는 일처럼 말이죠."

아이러니였다. 아론의 말을 종합하면 황제는 황후를 사랑하기커녕 눈엣가시처럼 여겼다는 소리가 되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딸인 에스델조차 그런 식으로 여겼다는 뜻인데…….

"그리고 이건 위험한 발언일 수 있지만, 아무래도 황후의 죽음이……. 아뇨, 아닙니다. 지금 황후궁의
옛 시녀들을 찾고 있으니 좀 더 정확해지면 말씀드리죠."

"오늘 알려 주신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어요. 고마워요, 아론."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럼요. 아론이 작위를 내놓을 각오로 사건을 조사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미안해요."

"그렇다면 인사 대신 키스를……. 컥!"

그들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만 있던 레기온이 아론의 정수리를 꽉 움켜쥐었다. 게다가 파이몬은 양손에서
불덩어리를 저글링하고, 키마리스는 율리아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서며 동공을 세로로 가늘게 좁혔다.

하지만 아론도 포기하지 않았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테이블을 뛰어넘어 율리아의 뺨에 입을 맞추곤


그대로 창문을 뛰어넘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사람 하나 찔러 죽일 듯한 세 남자의 흉흉한 안광이 곧장 창밖으로 향했다. 율리아는 그런 그들 사이에서


그저 애매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회의 시작을 목전에 둔 시각, 복도에 서 있던 수많은 인파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율리아와
레기온이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채도 낮은 드레스에 간소한 장신구를 착용했음에도 그녀의 빼어난 외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인형이 살아 움직인다면 저런 모습일 것 같았다.
백옥 같은 피부와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 보이는 단아한 눈매, 투명한 눈동자 위로 긴 속눈썹 그림자가
드리웠다. 선악과처럼 붉은 입술과 갸름한 턱. 드레스 너머 살짝 비치는 뼈대가 가는 팔과 허리. 그녀의
모든 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율리아에게 홀려 있던 사람들은 이내 현실을 직시했다. 브에스드라의 2 황녀는 마왕의 총희였다.


자신들의 땅을 쑥대밭으로 만든 악마에게 빌붙은 더러운 계집이었다.

"과연 얼굴 하난 반반하군. 얼마나 음탕하면 얼굴에도 색기가 줄줄 흐를까."

"그러니 마왕을 유혹했겠지요."

"매일같이 사치만 일삼는다더군요. 최고급 식재료가 아니면 입도 안 대고, 그마저도 맘에 안 들면 바로


뱉어 버린답니다."

릴리궁에 처음 들어왔던 때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때 한창 열이 들끓던 율리아에게 하녀들은 온갖


향신료로 범벅된 기름진 요리를 내놓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삼키려 노력했는데, 그때의 일이 결국 이렇게
와전된 모양이었다.

"율리아, 차라리……."

레기온은 이런 현실에 환멸이 난 듯 보였다. 자우하르인의 제안처럼 다 놓고 도망가자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어 했다.

율리아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SYSTEM

6th Episode. '이름 없는 황녀' 진행 중]

[▷SYSTEM

- 미션: 히든 스탯 '명성'을 800 이상 획득하시오.

- 보상: 스킬 트리 최상단 오픈

- 실패 페널티: 유폐 엔딩 '얼굴 없는 여자' 확정]

율리아에겐 그간 명성을 올릴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작은 단위로 오르내리던 수치는 황제에게
불려가 속절없이 맞은 날을 기점으로 빠르게 추락했다.

[▷FAME (명성) : 480]

에피소드의 흐름을 보면 이번 회의야말로 엔딩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분기점이 틀림없었다. 여기서


도망쳤다간 남은 결말은 유폐 엔딩뿐,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괜찮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싫어서 그래. 내가 힘들어서……. 이젠 너 하나 충분히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데, 왜 저런 쓰레기


같은 치들을 위해 희생하려는 거야. 넌 할 만큼 했는데 왜 자꾸 가시밭길로 혼자 걸어 들어가려고 해."

"그럼 정말 도망가 버릴까? 이번에도 잘 안 되면 말이야, 그냥 네 말대로 도망가 버리자."

"아주 말만 잘하지. 너 손끝 하나라도 다쳐 봐. 내가 그날로 너 업고 세상 끝으로 도망쳐 버릴 테니까."

"말만 들어도 엄청 든든하다."


긴 회랑을 지나 상석으로 올라가는 율리아에게 더욱 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천장에
묵중한 기둥이 줄줄이 늘어선 홀의 분위기는 웅장하고 위압적이었다. 술렁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며
실내는 정적에 휩싸였다. 그녀를 향한 시선엔 적의가 가득했다.

"배은망덕한 인간들. 누구 덕분에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레기온……."

"평화란 원래 그런 거지. 그저 과거의 일일 뿐, 살아남은 자들에게 누구의 희생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

레기온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가슴 아팠다. 늘 태양처럼 웃던 그를 자신이 이렇게 만든 것 같아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율리아는 시선을 내리깐 채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그녀에게 주어진 자리는 에스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곳으로, 황제 잉그렘 5 세의 바로 다음 자리였다.


한편 레기온은 그를 위한 자리가 따로 준비되어 있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율리아의 뒤에 단단히
버티고 섰다.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입장하며 빈자리가 채워졌다. 이제 곧 회의가 시작될 분위기였다. 긴장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내가 발언하면 레기온은 어떤 반응을 할까. 내게 화내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그녀는 레기온이나 다른 악마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펄펄 뛰며 반대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율리아는 자신을 마물 출몰 지역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마력 저항 덕분에 웬만한 기사들보다 마기에 오래 버틸 수 있고, 유성우와 붉은 목걸이를 얻으며 스킬


사용에 핸디캡이 줄었다. 지난번 보상으로 받은 스킬 포인트 6 개도 고스란히 남았고, 무엇보다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만이 명성 수치를 올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윽고 황제와 에스델이 입장하며 회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각 국가에서 내놓은 해결책은 역시나
지지부진했다.

"브에스드라와 엘고스는 인계에 존재하는 유이한 제국으로서 책임을 다해 주십시오! 언제까지 외면만 하실
작정입니까?!"

"우리 브에스드라는 변방의 국가와 도시들에 군사 및 구호 물자를 보낼 것이오. 누차 강조하지 않았소?"

"그것만으로 될 일이었다면 이 먼 곳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마물을 막을 더 확실한 대책을 내


달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군사나 물자는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애초에 딱 부러지는 방도가 없었다면 우릴 왜 부른


겁니까? 지금까지와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자리에 참석한 레기온을 의식했는지 노골적으로 소드마스터를 내어놓으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들의 요구 내용을 충족시키려면 인계에 단 셋뿐인 소드마스터의 파견밖엔 답이 없었다.

각국 사신의 항의를 받은 황제의 얼굴빛이 점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반면 에스델은 여유 섞인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좌중의 모습을 훑었다. 때가 무르익었다.

"폐하의 앞에서 이 무슨 추태입니까? 여러분을 이곳에 부른 건 피해 상황을 공유하고 대책을 논의하기


위함이지,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함이 아님을 모르시겠습니까?"

"하오나……!"

"내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에스델의 한 마디에 들끓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율리아는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레기온도 그것을 느꼈는지 율리아의 등 뒤로 바짝 다가와 섰다.

111 화

"하지만 여러분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면 기껏 여러분을 모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럼 전하께선 따로 생각해 놓은 방도가 있으십니까?"

"그리 들리십니까? 유감이지만 내 능력은 경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에스델은 좌중을 한 번 훑었다가, 이윽고 맞은편에 앉은 배다른 동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몇몇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마침 율리아가 요양차 브에스드라에 돌아왔습니다. 마왕의 유일한


총희이자 현 시점에서 마계의 상황에 가장 능통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아마 여러분들도 율리아의 의견이
궁금했기에 몸소 아벨딧심까지 찾아왔으리라 생각합니다."

"……."

"율리아?"

그녀를 보는 에스델의 눈매가 선연히 휘었다. 마치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가면 아래엔 독을 품은 뱀이 도사리고 있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제게 귀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겠다고 마계의 상황을 모조리 털어놓을 순 없었다. 악마들은 자신을 믿었기에 그들의
사정을 거리낌 없이 알려 주었을 것이다. 마치 동족처럼. 그런 그들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율리아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한계선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발언에 앞서 여러분께 꼭 알려 드리고 싶은 사실이 있습니다. 저의 짧은 경험이 모든 마족의 입장을


대표할 수는 없으나, 최소한 제가 겪었던 이들만큼은 인간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더니! 지금 그딴 소리나 하려고……!"

"붉은 마력은 마계에서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힘이라 일컬어집니다. 그것을 지닌 바엘은 명실상부한
마계의 지배자이며, 마족들도 그런 그를 진심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바엘이 세운 질서에
불복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이제껏 줄곧 베일에 싸여 있던 지하 세계와 마왕의 정체가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말은 안 해도 내심


정보가 필요했던 이들은 율리아의 말에 신중히 귀를 기울였다. 생각 외로 대충 얼버무리려는 기색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것이 누굽니까?"

"설마 그자가 변경의 마물 사태를 일으킨 범인이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최근 지하에 내려갔다 온 사신 중 누구도 그자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혹 저희가 마계에 대해 잘
모른다 하여 말을 함부로 지어내시는 건 아닙니까!"

하지만 침착해진 듯하던 분위기는 이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인간들에겐 그녀의 모든 발언이 처음 듣는


생소한 것이었고, 잘 알지 못하기에 그만큼 더 불안한 것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율리아에게 맹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녀가 입을 열지 못할 정도로 원색적이고 모욕적인 욕설이
날아들었다. 삽시간에 끓어오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몇몇은 어리둥절해하며 헛기침을 반복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사람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절대자의 존재가 두려운 거야. 그 두려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대신 화를 내는 것뿐이지. 자신의 나약함을 외면할 가장 손쉬운 방법이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발언을 시작하기 전엔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는데, 정작 사람들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침착해졌다. 그들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여러분의 말씀대로 마왕에게 거역하는 존재가 이런 사태를 만들어 냈습니다. 변방의 마물 출몰은
마왕성과 전혀 무관합니다."

"그래서 그 존재가 누굽니까!"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 정치가 장난인 줄 알아?! 어린애 소꿉장난인 줄 아느냔 말이야! 폐궁에 줄곧 갇혀 있었다더니
머리가 제대로 돌아 버렸어!"

등 뒤에서 레기온이 씨근덕대는 소리가 들렸다. 회의장은 무기의 반입이 불가했지만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레기온은 단지 마나만으로 소울 소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무기를 꺼내면 일이 커진다. 율리아는 보이지 않는 등 뒤에서 레기온의 손을 꾹


붙잡은 채 말을 이었다.

"제가 대신 지키겠습니다. 저를 마물이 출몰하는 변방으로 보내 주세요."

"율리아?!"

"이게 지금 무슨 소리요!"

소드마스터에 근접한 기사들도 운이 나쁘면 하루를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죽는 곳이었다. 집채만 한 대형
마물이 수시로 출몰해 인간을 공격했고, 흙과 대기에 지독한 마기가 들끓어 먹을 것을 하루만 방치해도
짙은 마성을 띠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율리아였다. 그런 곳으로 가는 건 목숨을 내던지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레기온이 나서기 전에, 각국 사절들이 먼저 들고일어났다.

"고작 반편이 계집 주제에 무슨 수로 싸우겠다는 거야!"

"지하로 도망치려는 속셈이 틀림없어! 저년이 바로 마왕의 앞잡이다!"

"당장 끌어내! 악마에게 빌붙은 창녀를 죽여!!"

"듣자 듣자 하니 반편이에 앞잡이, 심지어 창녀라고? 종전을 대가로 율리아가 어떤 희생을 치러야 했는데!
네놈들이 어떻게 그걸 잊어?!"
결국 참다못한 레기온이 율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엔 성스러운 빛을 내뿜는 소울 소드가 들려
있었다.

그가 무기를 듦으로써 금제가 깨어졌다. 요인을 지키던 각국 기사들도 일제히 무기를 빼 들었다. 비록
소드마스터에 비할 순 없을지라도 기사들에겐 각자의 국가를 향한 신념과 충의가 있었다.

이대로 치달으면 남은 결과는 유혈 사태뿐이었다. 율리아는 다급히 레기온에게 매달렸다.

"이러지 마! 내가 변방으로 가면 돼. 내겐 마력 저항이 있잖아!"

"마력 저항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잖아!"

"레기온!"

"너, 결국엔 저런 하찮은 인간들 구하겠다고 네 목숨 갉아 쓰겠다는 거잖아. 나한테 어떻게 이래. 네가
날 구하겠답시고 마수정 앞에서 죽어 갈 때, 그때 내 억장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생각 안 해? 널 사랑하는
내가!!"

"무슨……."

순간 율리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지만 차마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 있었다.

널 사랑하는 내가.

그녀를 보는 레기온의 두 눈엔 어느새 눈물이 가득했다. 제가 말하고도 아차 싶은 듯했지만, 이내 물리고


싶지 않다는 확연한 각오가 얼굴에 드러났다. 그는 율리아의 창백한 뺨을 어루만졌다.

친구가 아닌, 그녀를 욕망하는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어. 너를 향한 내 감정을, 이딴 식으로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고."

"레기온."

"사랑해, 율리아. 제발 나랑 같이 떠나."

"어, 언제부터……."

"처음부터. 처음부터 내겐 오직 너뿐이었어."

듣는 사람의 가슴이 다 아릴 정도로 절절한 고백이었다. 하지만 그의 감정을 깨달은 순간 율리아는


절망했다. 자신이 이제껏 친구로서 해 왔던 무신경한 행동들이, 이젠 감정을 빌미로 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은 그에게 친애의 정을 주었다. 하지만 사랑과 우정은 명백히 다른 감정이라 그가 바라던 것과는 한참
멀었을 테다. 결국 자신이 레기온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아아, 난 이제껏 무슨 짓을 한 거지?'

회의장 내 수많은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무언가 단단하고 푸른 벽에 가로막힌 듯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상 2 황녀와 소드마스터가 서로 갈등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애매하게 대치하던 그때, 갑자기 발밑이 진동하더니 날카로운 뿔 고동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큰일입니다! 당장 대피하셔야 합니다!!"

회의장 문이 부서질 듯 열리더니 중갑을 걸친 기사가 뛰어 들어와 외쳤다. 황제와 에스델의 곁엔 이미


근위대가 포진해 있었다.

"황도에 마물이 나타났습니다! 한두 마리가 아닙니다. 어림잡아 수천 마리의 대형급 마물이 떼로


출몰했습니다!"

"무, 그게 무슨 소리요! 마물이 이런 내륙 지역까지 어떻게 들어왔단 말인가!"

"항마 수식은 어떻게 된 겁니까! 브에스드라 황궁엔 마력의 이동을 원천 차단하는 항마 수식이 걸려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것이……."

사방이 아수라장이었다. 심지어 몇몇은 레기온에게 당장 나가 마물을 막으라며 고함을 질러 댔다. 그의


곁에 서 있던 율리아는 버틸 새도 없이 인파에 마구잡이로 밀려났다.

그런 와중 율리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륙 최고의 마나 술사들이 몇 대에 걸쳐 만들었다는 항마


수식이 그리도 간단하게 파훼된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바엘이 정말 내게 왔었던 거야. 붉은 마력을 수식이 버티지 못했다고 하면 모든 게 설명돼.'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 혼자만 아프다고 착각해서, 지독한 자기 연민에 매몰되고 침잠되어 눈앞에
멀쩡히 보이는 사실을 외면했다. 이전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레기온과 바엘은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런 나 때문에.

불현듯 찾아온 책임의 무게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저 울고만 있을 순 없었다. 이제껏 미뤄 온 대가를
지금이라도 치러야 했다.

"커맨드, 유성우."

자신을 먼저 보호하라 악을 쓰며 아우성치던 사람들이 화려한 이펙트와 함께 생겨난 거대한 얼음 활을


보며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힘없는 계집이라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떠밀어 댔는데, 만약 저 활 끝이
자신들을 향하면 어떻게 될까 뒤늦게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차분히 레기온을 돌아보았다. 마치 화재 현장의 출구라도


되는 것처럼, 구름 떼처럼 몰려든 인파가 그를 겹겹이 에워쌌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고 빠져나오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난 괜찮으니까 대신 사람들을 지켜 줘, 레기온."

"난 너 포기 안 해. 만약 내게서 도망치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갈 거야."

"이제 날 못 믿어도 이해해. 그렇게 오래 모른 척했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더……. 이번 일이 다 끝나면,


그때 제대로 이야기하자."

끝까지 멋대로 굴어서 미안해.

그녀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레기온은 사람들에게 검을 들이밀던 것을


멈췄다. 그러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푸른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인계 각국을 대표하는 최고 수뇌부가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만약 회의장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지상은 끝장이나 다름없었다. 율리아의 걱정을 눈치채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112 화

지금쯤이면 파이몬과 키마리스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을 터였다. 그들이 생판 모르는, 게다가
율리아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한 인간을 지켜 줄 리는 없으니 이쪽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맡는 수밖에
없었다.

레기온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율리아를 응시했다.

"금방 따라갈게. 조금만 버텨 줘."

"응."

율리아는 대답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마물과 싸우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서는 그녀의 등 뒤로 몇몇


이들이 모여들었다. 자우하르인과 그를 따르는 전사들, 그리고 각자 출신이 다른 타국 기사들도 있었다.

"내가 함께 가겠소."

"저희도 뜻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모두 황녀 전하께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이제라도 과거의 부끄러운 행동을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FAME (명성) : 480 》 530]

"잘 부탁드려요."

율리아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렇게 진형을 갖춘 채 회의장을 나선 일행은 일순 경악했다. 눈에 보이는 하늘이 온통 시커먼 무언가로


뒤덮였다. 날개 달린 비행형 마수였다. 물론 지상에도 예외 없이 거대한 마물이 가득했다.

게다가 그것들에게 마력을 공급하기 위함인지 사방에 짙은 마기까지 깔려서, 아직 낮임에도 한밤중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시야가 어두웠다.

황성에서 보이는 풍경이 이 정도이니 민가 지역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물을 유인해야겠어요. 최대한 인적이 드물고 백성들 피해가 적은 곳으로……. 예전 지내던 폐궁 터가


적절할 것 같아요."

율리아는 시스템을 열었다. 사용하지 않은 6 개의 스킬 포인트 중 3 개를 공격력에 사용하고, 나머지 세


개로 지난번 배우지 못한 무기 스킬을 마저 습득했다.

[▷멀티 스나이핑

마력을 보유한 적 다수를 추적해 공격한다. 스탯 'SIGHT'의 영향을 받는다. 잔여 체력의 30%를
소모한다. SP 30]

스킬이 장전되자 그녀의 시야에 수많은 타깃이 일제히 잡혔다. 그녀의 SIGHT 수치가 절대적으로 높기
때문일까,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는 마수까지 모조리 포착됐다.

율리아의 기척을 알아챈 마물들이 덤벼들기 전, 그녀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동시에 하늘에서 수많은
유성우가 떨어져 내렸다. 눈부신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HP 100% 》 0%]


[▷HP 100% 》 0%]

[▷HP 100% 》 0%]

[▷SYSTEM

타깃이 모두 처리되었습니다.]

공격당한 마물들의 HP 수치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모든 타깃이 처리되었다는 시스템 창이 떴다.


스킬 포인트로 공격력을 세 단계나 높인 위력이었다.

"오오, 하늘이 깨끗해졌어!"

"이제 된 건가?"

사방에서 경탄이 터져 나왔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디선가 생겨난 마물이 빈자리를 삽시간에
메웠고 하늘은 다시 새까맣게 물들었다. 마물을 몇이나 죽이든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의 스킬이 마물을 제대로 유인했다는 점이었다. 성 밑에서 들려오던 비명 소리가
점점 사그라졌다. 주변의 기사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일제히 율리아를 보호하고 섰다.

애먼 회의장이 습격받기 전에 빠르게 이동해야 했다.

"내가 먼저 길을 뚫겠소! 방금 말한 폐궁 터가 어딥니까?"

"저쪽이에요!"

율리아가 가리킨 방향으로 자우하르인들이 호기롭게 나섰다. 사막의 전사들은 긴 사슬에 매달린 차크람
형태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그동안 율리아는 스킬을 장전하지 않은 일반 공격으로 하나씩 마물을 맞춰 나갔다. 유연히 활시위를
놓쳤다가 체력 소모 없이도 공격이 먹힌다는 걸, 즉 평타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잠깐, 다들 멈춰!"

"율리아 님을 최우선으로 보호하시오!"

하지만 희망적인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목적지였던 폐궁은 이미 마물에게 점령당한 뒤였다.
그곳에 도사리고 있던 수백 마리 마수가 모두 율리아를 향해 몰려들었다.

"멀티 스나이핑!"

[▷HP 100% 》 0%]

[▷HP 100% 》 0%]

[▷HP 100% 》 0%]


[▷SYSTEM

타깃이 모두 처리되었습니다.]

일행에게 달려든 마물의 반절이 율리아의 대단위 스킬에 휩쓸려 죽었다. 하지만 타깃팅 범위 바깥에 있던
나머지 반은 여전히 살아남아 인간들에게 달려들었다. 율리아는 즉시 스킬을 시전했지만 발동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젠장, 전열을 무너뜨리면 안 돼!"

"황녀 전하를 지켜! 우리가 쓰러지면 다음은 없다!"

"으아아악!!"

방어진이 무너지며 기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한 바로 그때였다. 마물과 대치한 인간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강력한 화마가 휘몰아치더니 뒤이어 주변을 에워싼 마물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율리아!!"

"율리아, 이쪽입니다!"

잿더미가 된 대지 위에 집채만 한 드래곤이 내려앉았다. 인간의 형상을 탈피한 파이몬의 진짜 모습이었다.


온몸이 금빛 비늘로 뒤덮인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그가 외쳤다.

"파이몬, 아직 덜 컸어! 이거 전부 아니야!"

율리아는 오해를 정정했다. 드래곤이 아니라 헤츨링인 모양이었다.

"율리아, 괜찮으십니까?"

"키마리스 님."

"마계에 연락을 넣느라 늦었습니다. 아가레스가 마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전까진 이
목걸이를……."

파이몬의 등에서 뛰어내린 키마리스가 그녀에게 붉은 마력구를 넘겼다. 바엘의 힘이 담긴 선물이었지만


브에스드라에 온 뒤로 줄곧 목에서 빼놓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SYSTEM

액세서리 '붉은 마력의 목걸이'를 장비 창에 추가합니다.]

유성우와 마력구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활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활 표면에 길게 파인 홈에서 은은한
붉은빛이 퍼져 나갔다. 투명하던 유성우가 붉게 숨 쉬었다.

[▷SYSTEM

특수 무기 '유성우'의 스킬 시스템이 재구축됩니다. 앞으로 1 시간 동안 플레이어의 체력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붉은 마력의 유성우

제한 시간 59 분 59 초]
그것을 보던 키마리스가 마치 고해하듯 속삭였다.

"율리아라면 역시 싸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파이몬을 타고 가십시오. 그동안 전 인계에 피해가 없도록


최대한 방어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키마리스 님……."

율리아가 등에 올라타자 파이몬이 엎드렸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한참이나 멀어진
지상을 그녀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따르던 기사들이 악마인 키마리스를 일원으로 받아들이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녀가 걱정할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우리도 이만 가자."

"응, 파이몬 꽉 잡아!"

한 쌍의 금빛 날개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율리아가 목덜미를 붙들자 파이몬은 즉시 날아올랐다. 멀미가


날 듯 주변 시야가 빠르게 바뀌더니 이내 사방에 구름이 드리우며 발아래 지상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율리아는 시위를 당기며 스킬을 발동했다.

[▷멀티 스나이핑

마력을 보유한 적 다수를 추적해 공격한다. 스탯 'SIGHT'의 영향을 받는다. 잔여 체력의 30%를
소모한다. SP 30]

아까보다 더욱 넓은 범위로 무수히 많은 대상이 타깃팅 되었다. 스킬 시전으로 대규모 이펙트가 휘몰아친
직후, 눈앞이 희게 암전될 정도로 수많은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타깃이 모두 처리되었습니다.]

알림을 기다릴 시간도 부족했다. 율리아는 시스템 창을 완전히 꺼 버리고 허공을 향해 무작위로 스킬을
발동했다. 거대 이펙트가 지상에 몇 번이고 내리꽂혔다.

"신난다, 신나! 파이몬도 다 죽일 거야!"

파이몬이 브레스를 내뿜으며 비행 속도를 더욱 높였다. 거센 바람이 율리아의 머리를 흐트러뜨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제한 시간이 끝나기 전에 더 많은 마물을 처리해야 했다.

두꺼운 구름을 뚫고 나가자 쨍쨍한 태양 빛이 율리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푸른 하늘 아래 눈부시게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사방이 끝없이 광활해서 막혔던 속이 탁 트일 것 같았다.

율리아가 스킬을 난사하고 파이몬이 브레스를 마구 뿜어대니 그들이 지나가는 길은 마물 한 마리 없이


깨끗해졌다. 파이몬의 비늘에 반사된 태양이 금빛으로 반짝일 때마다 지상에서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사람들 역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율리아, 저기 좀 봐! 문이 열렸어!"

그때, 밑을 내려다본 율리아는 절벽 틈에서 아주 이질적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블랙홀처럼 열린 시커먼


틈 사이로 마물이 끊임없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마정석에 의해 마계의 입구가 강제로 비틀린 것이다.

[▷비정상적 포탈]
[▷HP 100%]

시스템 창을 복구시키자 율리아가 그것을 처치해 주기 바라는 것처럼 체력 바가 떠올랐다. 그녀는 스킬을
교체한 뒤 유성우의 시위를 장전했다.

"프로즌 애로우."

[▷프로즌 애로우

마력을 보유한 적 1 인에게 강력한 3 연속 공격을 쏘아 보낸다. 잔여 체력의 20%를 소모한다. SP 20]

화살 끝이 쩌억, 쩍 소리를 내며 얼어붙더니 마치 폭포처럼 엄청난 직경의 이펙트가 타깃을 향해 곧장


발사됐다.

[▷비정상적 포탈

공격 판정 -30%

공격 판정 -30%

공격 판정 -40%]

[▷HP 100% 》 0%]

회피 패턴이 나올 틈도 없이 포탈의 체력 바가 말 그대로 녹아 버렸다. 절벽을 기어 올라오던 마물들이


일제히 증발해 버렸고, 포탈 역시 폭발과 함께 사그라졌다.

이것이 제 손에서 나온 스킬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멍하니 시선을 내려 유성우를
응시하던 율리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시야 상단의 시스템 창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붉은 마력의 유성우

제한 시간 08 분 32 초]

파이몬이 비행 고도를 낮추자 성 밖 상황이 더욱 잘 드러났다. 마물과 인간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성에서 가까운 곳은 그나마 기사들이 파견되었지만 먼 곳까지 나오기엔
역부족인 듯 보였다.

"파이몬, 이번엔 저쪽으로 가자! 사람들을 구해야 해!"

"맡겨만 둬! 파이몬이 세상에서 제일 빨라!"

율리아의 손짓에 따라 파이몬이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제국 브에스드라의 하늘에 금빛 궤적이 길게


늘어졌다. 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새로운 영웅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FAME (명성) : 530 》 999]

[▷SYSTEM

스킬 트리 최상단이 활성화되었습니다.]

[▷SYSTEM
6th Episode. 이름 없는 황녀]

[완료]

113 화

* * *

"레기온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요.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데……."

땅거미가 어슴푸레 내려앉은 저녁이었다. 온 도시가 마물 출몰 사태를 수습하느라 소란스러운 와중,


율리아는 인적이 드문 폐궁 터에 서 있었다.

성 바깥으로 나가면 백성들의 열렬한 환호가 따라다니고, 그렇다고 성 내에 있자니 온갖 미사여구와 함께


대단한 영웅이라며 치켜세워졌다. 그것이 부담스러운 까닭에 자꾸만 숨어들다 보니 이런 곳까지 온
것이었다.

걱정스러운 듯 자꾸만 주변을 돌아보는 그녀의 곁엔 자우하르의 사신과 아론, 그리고 파이몬이 있었다.
키마리스는 마계로 떠나기 전 릴리궁에서 율리아의 짐을 정리하느라 자리를 비웠다.

반면 레기온은 그녀가 마물 토벌을 끝내고 돌아온 시점부터 줄곧 보이지 않았다. 벌써 반나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진 않지만……. 혹시 아까의 난리통에 잘못된 건 아닐까요?"

"율리, 그거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걱정입니다.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최강인 녀석인데 한낱


마물 따위에게 당했을까 걱정하다니, 레기온이 들으면 울겠습니다."

"하지만 파이몬은 레기온의 마력이 안 느껴지는걸."

"마력? 악마 꼬맹아, 소드마스터의 의미를 모르나? 마력이 아니라 마나겠지."

"아니야, 마력이야!"

머리 위로 다가오는 자우하르인의 손을 파이몬이 딱 소리 나게 깨물었다. 간발의 차로 물러난 사내가 성질


드러운 꼬맹이라며 물릴 뻔한 손을 털었다.

"율리아, 파이몬 안아 줘! 저 까만 인간 싫어!"

자우하르인에게 으르렁대던 파이몬이 율리아의 다리에 무겁게 매달렸지만 그녀는 차마 시선을 내리지
못했다. 폐궁으로 들어오는 좁은 길 너머, 석양을 등진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에서 복귀하자마자 찾아온 듯, 피와 흙먼지가 묻어 더러워진 갑옷을 걸친 에스델이 그곳에 있었다.

"이야기 좀 해. 할 말이 있어."

"……나도 그래."

배다른 자매를 고요히 응시하던 율리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걱정하는 셋을 간신히 멀리
떠나보내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실은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는데……. 미안해. 내 존재가 널 많이 힘들게 했다는 걸 알아. 그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이곳에 왔어. 앞으론 돌아올 일 없을 거야."

"네가 정말 미워."
"알아."

"전부 너 때문이야. 네가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어마마마가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시진 않았을 거야.
그늘을 잃은 나는 늘 아바마마의 눈치를 봐야 했고, 신하들의 기색을 살펴야 했고, 백성들의 여론에
목매며 이 자리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어. 사방이 내 편 하나 없이 온통 적뿐이었다고.
노력 하나 없이 편하게 살아온 네가 그걸 알긴 해?!"

어쩌면 황제보다 더욱 고귀하고 긍지 높았을 황후는, 그래서 만백성의 사랑을 받았던 황후는, 고작 천한
평민 따위가 자신의 남편을 유혹해 부른 배를 한 채 궁에 들어온 걸 참지 못했다.

그녀는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조산했고, 하혈을 멈추지 못해 산실에서 그대로 사망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나 강인하고 고고했던 황후가, 정치적 능력이 뛰어나 되레
남편인 황제를 뒷방으로 밀어낼 정도였던 황후가. 고작 투기 때문에 조산하고 목숨을 잃었다니.

'그리고 이건 위험한 발언일 수 있지만, 아무래도 황후의 죽음이…….'

그때 아론이 하려고 했던 말을 율리아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바로 앞에서 분노를 토해 내는 에스델의


모습이 위태롭게 비춰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배다른 언니가 그렇게나 강하고 단단해 보였는데, 지금은 그녀를 홀로 두고
떠나는 게 왜 이리 눈에 밟히는지.

"전부 너 때문이라고! 너만 없었어도 난 지금쯤 이렇게 힘들고 불행하지 않았을 거야!!"

"에스델."

누군가를 탓하는 건 쉽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외면하고 눈과 귀를 막은 채 모두 남의 탓이라고 책임을


미뤄 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건 정말 나 때문이었니?"

"너, 무슨 뜻이야? 네 머리색, 연분홍빛 도는 백금발이 가장 확실한 증거잖아. 이제 와서 네가


아바마마의 딸이 아니라고 발뺌할 셈이야?!"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신 게, 그리고 네가 힘들어했던 진짜 이유가 정말 내 탓인지 묻는 거야. 내가 널


대신해 마계에서 지냈던 동안 넌 어땠니. 내가 없어 행복했니?"

"지금 무슨 뜻이냐고 묻잖아!"

울컥 화를 내는 에스델을 율리아는 말없이 응시했다. 비록 배는 달랐지만 그녀는 양쪽 세계를 통틀어


자신이 가져 본 첫 번째 가족이었다. 자신 따위보다 훨씬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니, 머지않아 분명
진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전하야 말로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그 손 놓으십시오."

그때,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한겨울 서리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언제 온 건지 레기온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하필이면 에스델이 뒷걸음질 치는 자신의 손목을 움켜쥔 순간이어서, 그것을 본 레기온의 눈초리가 단박에
날카로워졌다. 율리아는 그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손목을 털어 냈다.

"잠깐 이야기 중이었어. 아무것도 아냐."


"기다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넌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에스델. 분명 좋은 황제가 될 거야. 그냥, 힘든 기억은 모두 내 탓으로 돌려.
우린 앞으로 만날 일 없을 테니까……."

"기다리라니까!"

율리아는 에스델을 남겨둔 채 몸을 돌렸다. 레기온은 그녀를 쫓으려던 에스델을 단단히 막아섰다. 그는
율리아가 충분히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에스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당장 비키지 못해?"

"새로운 황제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폐하."

"비키란 말……!"

관성적으로 소리치려던 에스델이 멈칫했다. 방금 레기온의 말뜻을 이해하고야 만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옷에 묻어 있는 피와 살점의 정체를, 에스델은 알아채고야 말았다.

황제 잉그렘 5 세가가 죽었다. 레기온이 죽였다.

"내 복수의 칼날이 당신에게까지 향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이 기회는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닌, 이
땅에 남을 백성들을 위한 내 마지막 자비이니 말입니다."

"……."

"그러니 이제 그만 하십시오."

에스델은 위태롭게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허탈한 얼굴을 한 채로.

율리아는 멀리서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무너져 내린 에스델이 못내 신경 쓰였지만


이젠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곳 지상에 남을 테고 자신은 지하로 영영 떠날 것이다.
아까의 작별을 마지막으로 과거의 모든 인연은 끊어졌다.

그때, 율리아의 시선을 좇던 아론이 능청스럽게 눈매를 휘었다. 마치 모든 것을 알면서도 레기온을 부러


놀리듯이.

"어이, 레기온! 웬 피야? 설마 네 실력에 당했어?"

"헛소리 작작해, 아론. 싸우다 어디 스쳤나 보지."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나 보여 줘……."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이것 봐, 율리아. 멀쩡하잖아."

아론에게 냉정히 면박 주던 그는 율리아가 묻자 곧장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러곤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려다 제 손에 묻은 피를 의식한 듯 멈칫하며 물러섰다.

율리아는 순간 어쩔 줄 모르고 고개 숙였다.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을 향한 그의 시선에


명백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제 더는 감추지 않기로 결정했는지 행동 하나하나에 진득한 감정이 묻어났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알아주기를 기다리며 계속, 계속…….

"레기온, 나는……."

간지러운 듯 혹은 불안한 듯, 심장이 바르르 떨려 왔다. 이제껏 줄곧 거리낌 없이 보았던 그의 푸른


눈동자를 차마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더는 외면하지 않기로 결심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율리아는 온 용기를 끌어내어 간신히 턱을 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레기온의 시선은 오직 그녀에게만
열렬히 반응했다.

"있지, 나는."

아주 찰나에 스친 눈동자에도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심장소리가 쿵, 쿵 고막에 곧장 울려 퍼졌다.


차라리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은데, 레기온은 자꾸만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는 자신을 흔들림 없이
기다려 주었다.

"어쩌지, 율리아. 난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데."

"정답이라니, 그게 무슨……."

"나는 널 사랑하고 있어.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어. 중요한 건 오직 그것뿐이야. 난 절대


널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의 크고 두꺼운 손이 율리아의 가녀린 뺨을 남김없이 감쌌다. 이마를 곧장 맞대고서 그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었다. 이 말을 하게 될 날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내가 소드마스터라는 거 알지? 길면 천 년도 넘게 사는 게 바로 소드마스터라고. 두고 봐. 세상 끝까지


오직 너만 쫓아다닐 테니까 말이야."

그는 율리아의 당혹감 섞인 눈빛까지 모두 사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정말로 당혹스러웠다.


자신이 그에게 하려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지금 마계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고, 나약하기만 한 내


모습에 질릴지도 몰라."

"상관없어."

"레기온!"

"뭐든 상관없어. 그렇게 포기할 마음이었다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테니까. 그러니 그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홀랑 잡아먹고 싶어지니까."

"무, 무……!"

율리아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춘 레기온이 어느새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일행에게로 향했다. 파이몬이 황금룡의 형태로 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키마리스가 도착했다.

석양이 제 몸 사르듯 붉게 물들었다. 이제 정말 마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율리아는 아론과


자우하르인을 차례로 보았다.

"여러모로 감사했어요, 아론. 잘 지내요."

"작별인사라면 됐어요. 저도 조만간 다 정리하고 마계로 따라갈 생각이니까요. 레기온과 율리가 그곳에
있기도 하고, 마법사라고 이방인 취급당하는 것도 지겹고……."
"앞으론 분명 좋아질 거예요."

율리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키마리스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인계의 기사들을 응시했다. 율리아를 따랐던
기사들이 고스란히 지하로 떠나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나섰다. 잠깐 새 정이 든 모양이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정말 그럴까요?"

"그래도 가끔은 놀러 와요. 상황이 좀 안정되면요."

"율리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제가 자주 가겠습니다. 악마성에 방 하나 비워 놓으세요, 알았죠?"

'가끔'이란 단어는 한 귀로 흘렸는지, 아론은 편하게 오갈 수 있게 아예 포탈을 만들어 놓겠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율리아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돌렸다. 자우하르인이 그녀의 앞에 섰다.

114 화

"상황이 상황이라 귀인의 성함도 못 들었네요."

"때론 고작 통성명 따위에 비할 수 없는 진심도 있는 법. 그저 지상의 모두가 당신의 적은 아니었다고,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 가시오."

"감사해요……."

멀리 떠나는 황녀의 배웅이라기엔 지나치게 단출한 인원이었다. 그녀를 환송하기 위해 성 밖에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렸는지 알게 된다면 놀라겠지만, 아직은 꿈에도 모를 율리아는 일행 하나하나를 감사한
마음으로 눈에 담았다.

짧은 작별을 마친 율리아는 파이몬의 등에 오르기 전 불현듯 브에스드라 황궁을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보낸 기억들이 좋았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아마도 이게 내가 보는 인계의 마지막 풍경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이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 * *

바엘은 쥐죽은 듯 조용한 성내를 홀로 걸었다. 72 악마와 그들의 사역마로 바람 잘날 없이 소란스럽던


마왕성이 어느덧 텅 비어 버렸다. 적막이 회랑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다들 도망치기라도 한 모양이지. 잘 됐군."

마정석의 폭주로 인해 폐허가 되어 버린 마계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둥지 주변은 웬만한 고위급 마족도


버틸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어 버렸다. 평생을 따르겠다며 무릎 꿇던 이들조차 안면몰수해 달아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조용하군.'

바엘은 눈 감은 채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자신과 마정석 외엔 다른 어떠한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깊은 물속에 잠긴 것 같았다. 기억의 한구석 남아 있던, 무감각의 상태로 무수히 많은 밤을 지새워야
했던 그때처럼.

시간이 느리게 흐를수록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과거의 그때 이랬으면 좋지 않았을까 저랬다면 좋지
않았을까 되새기게 된다. 그 끝엔 늘 여자의 가녀린 흐느낌이 잔상처럼 스쳤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높다란 계단을 단번에 날아올라 자신의 침실 앞에 다다랐다. 이젠 듣는


이도 없건만, 그는 몸에 베어버린 습관대로 입을 열었다.

"들어간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벌컥 문을 열자 그녀의 체향이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 거의 희박해졌지만 그래도 기억에 새겨진 듯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덧없이 가녀린 그녀의 목덜미에 곧장 입을 맞출 때처럼 달큰하고 아득했다.

침대 위엔 여전히 순백의 네글리제 한 벌이 놓여 있었다. 율리아가 입었을 땐 조금 넉넉한 듯하던 옷이


자신의 손아귀에선 작고 얇은 종잇장처럼 보였다. 제가 걸친 로브의 반의반이나 될까 싶었다.

"신기하지."

이 작은 몸으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제게 무슨 짓을 벌인 걸까.

홀로 있는 지금을 숨 쉴 수 없게 만들었다. 혼자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 적막의 무게를


가늠하고 끝이 어딜지 무심결에 헤아리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런 무의미한 일을, 그녀가…….

'그래, 무의미한 일이지. 어차피 내게 남은 시간은 전부 이리 보내게 될 텐데.'

실소한 그가 네글리제를 내려놓고 뒤돌아선 찰나였다. 뒤에 줄곧 멀뚱히 서 있던 누군가가 그와 마주치자


눈을 크게 떴다.

율리아 브에스드라가 그곳에 있었다.

"네가 왜……."

목이 졸린 듯 우스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인계에 있어야 할 그녀가 어째서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머리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바엘은 다가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옴짝달싹 않고 가만 서 있는


그녀를 보자 애가 타고 갈증이 일었다.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목구멍이 조여들어 이름을 부르는 게 고작이었음에도.

"율리아."

하지만 그녀에게 닿은 바엘의 손은 허공을 그냥 통과해 지나갔다. 손끝에 느껴지는 건 그녀에게 있을 리


없는 보랏빛 마력의 파장뿐. 찰나의 희열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엘의 분노 띤 안광이 곧장 '그것'에게 향했다. 율리아의 형상을 한 벨제붑에게.

"죽고 싶은가?"

가짜가 바로 앞에 있음에도 그것이 율리아의 형상을 하고 있기에 차마 해할 수 없었다. 그가 분노로 덜덜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는 동안, 벨제붑의 눈이 샐쭉 휘었다.

'자, 보아라.'

형태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의 것이 돌아오고 있다. 나의 사랑스러운 제물이 되기 위해.'

바엘의 동공이 가늘게 좁혀졌다. 지하의 지배자인 그가 제 영토를 드나드는 거대한 힘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감추어 봤자 결국엔 내게 오게 되어 있어. 다른 것들은 몰라도 열쇠만큼은……!'

드륵, 멈췄던 톱니바퀴가 굴러간다. 수없이 오랜 기다림을 지나.

'강제로 분리되고 빼앗겼던 나의 모든 것을 지금 되찾겠다!!'

벨제붑의 절규와 함께 대기가 메아리치고 땅이 산산이 갈라졌다. 바엘의 힘 그 자체였던 성 역시 물밀 듯


밀려드는 마력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바엘은 한 점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마력을 방출했다. 펼쳐진 거대한 날개가 온 침실을 뒤덮고
무소의 뿔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이 그의 이마에 돋아났다.

바엘이 처음으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마기를 띠는 지하의 모든 것들이 진정한 왕의
등장에 삼가 경배했다.

"이미 썩어 문드러진 것이 감히 누구 마음대로……."

머리 위에 붉은 달을 짊어진 거대한 황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정한 지배자, 태초의 힘을 지닌 가장


순수한 악마를 뜻하는 붉은 보름달이 왕의 머리 위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그것을 본 벨제붑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절규했다.

'나야말로 진정한 왕이다! 전부 내 것이란 말이다!!'

"아니, 율리아는 오직 나만의 것이다. 네겐 입에 올리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피차 양보할 수 없었다. 마신 부활을 위해선 분리된 에고, 열쇠가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바엘도
율리아를 포기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결코 놓아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싸우는 수밖에. 때가 무르익어 세 개의 파편이 모두 모였으니, 이제야말로 잃었던 나의 권능을


되찾겠다! 일단은 너 부터다!!'

바엘을 보는 벨제붑의 안광이 희번덕거렸다.

동시에 탑의 마정석에서 왕의 심장인 성을 향해 막대한 마력이 쏟아져 폭발했다. 폐허 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마왕성이 우르릉, 거대한 흙먼지를 날리며 무너져 내렸다.

* * *

인-마 접경지에서 아가레스와 합류한 율리아 일행은 곧장 마계로 진입했다.

떠날 때는 쉬지 않고 달려도 일주일 넘게 걸렸던 거리가 돌아올 땐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신나게


비행하는 파이몬의 등에 탄 채로, 율리아는 새삼 감회에 잠겼다.

"돌아가고 싶다고 줄곧 생각했지만 정말 이렇게 되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바엘이 제게 화내지 않을까요?
추방당한 주제에 허락도 없이 멋대로 돌아왔다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황제에게 맞아 죽어 가던 밤, 마치 구원자처럼 나타난 그는 무척이나 자상했었다. 서러워 눈물이 날


정도로. 어떤 취급을 당해도 좋으니 그냥 자신을 다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자신을 악마성에서 쫓아낸 것 역시 그였다. 다른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도 영구 추방을


명했다. 그때 만약 레기온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그저 쓰러져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으리라.

어느 쪽이 바엘의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습관처럼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의 추가


기울었다.

"……."

아가레스의 답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입을 달싹일 뿐 위안이 될 만한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율리아의 불안감을 부채질했지만 그녀는 애써 생각을 비웠다. 진실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데 지레
겁부터 먹을 수는 없었다.

"만약 바엘이 화내면 저도 화낼 거예요. 저도 할 말 있어요."

그녀는 의기양양한 참새처럼 가슴을 한껏 부풀렸다가 주변의 흐뭇한 시선을 알아채고 퍼뜩 숨을 내뱉었다.
당당하게 보이길 바란 건데 반대 효과가 난 것 같아 머쓱해졌다.

어색하게 눈 둘 곳을 찾다 아래를 내려다본 그녀의 눈이 일순 크게 부릅뜨였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마계가 왜 이런……."

율리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지하의 풍경은 온통 쑥대밭이었다. 그녀가 원래 알던


모습과 완전히 다른, 인간들이 흔히 상상하는 지옥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지하 세계의 틈을 비틀어 그 너머로 수천 마리 마물을 보낼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였다.

"마정석은 봉인되어 있던 게 아니었나요? 이렇게 마계 전역에 영향을 끼칠 만한 힘이……."

"작은 열쇠야, 마계의 창세 신화에 대해 기억하니?"

그는 세상에 어둠을 창조해 낸 존재이자 마족들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완전한 무의 상태에서 태어난
태초의 악마이고, 창세의 역할을 마친 뒤엔 스스로를 양분으로 삼기 위해 지하의 내핵에 잠들었다.
그렇게 남은 마력이 마정석이 되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마신은 여전히 마계를 지배하고 싶어 했다. 자신의 사념을 잇는
아티팩트 마수정을 지하 곳곳에 남겨 막대한 마력을 빨아들였고, 사념체 벨제붑을 만들어 내어 바엘의
몸을 지배하고자 했다.

"지하가 이 꼴이 되고도 바르바토스는 마신의 탑에 새겨진 고대의 기억을 토대로 연구를 이어 나갔어.
그리고 마침내 알아냈지."

아가레스의 길고 유려한 손가락이 율리아의 새하얀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작은 열쇠야, 네가 바로 마신 부활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였어."

"네……?"

율리아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마정석의 봉인을 푸는 열쇠였다. 바엘이 마신이 되기 위해선 마정석의 힘을
온전히 삼켜야 했기에, 자신은 바로 그때를 위해 필요한 존재였다.
"주군께선 그 모든 걸 알고 널 인계로 보내신 거야. 네가 휘말리길 바라지 않으셨으니까."

"……."

"내가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주군께선 외로우신 분이야.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마력을 지녔지만, 우리 마족은 누구도 감히 그분께 먼저 다가갈 수 없어. 태어나 수백 년을 홀로
고립되어 감정을 표현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거야."

자신은 바엘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드넓은 죽음의 호수에 갇혀 끝없는 적막 가운데 수없는 밤을 홀로
지새우며, '외롭다'는 기분조차 깨닫지 못했다.

자신은 환상 속에서 잠시 겪은 것만으로도 지독한 고독에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는데.

115 화

"바위는 구르고 부딪히며 둥글게 다듬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누가 감히 그분께 부딪히겠어. 그런 주군을


이렇게까지 바꿔 놓은 게 바로 너야. 자신감을 가져. 그리고 주군의 독단을…… 부디 용서해 줘."

너의 상냥함에 기대서 미안해. 그녀를 보는 아가레스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군단장으로서 규율을 목숨과 같이 여기는 아가레스가 주군에 대해 이런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뇌했을지, 율리아는 알고 있었다. 드물게 어두운 낯빛을 한 아가레스의 손을 율리아는 소중히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하늘을 순조롭게 활공하던 파이몬이 갑자기 몸을 뒤틀었다. 거대한 보랏빛 신기루가 그들의
눈앞에 화악 덮쳐들었다.

"꺄악……!"

"작은 열쇠야!"

"율리아!!"

중심을 잃은 율리아가 파이몬의 등에서 튕겨 나갔다. 근처에 있던 아가레스와 레기온이 동시에 그녀의
손을 붙드는 데 성공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힘을 써도 그녀를 끌어올릴 수 없었다.

키마리스는 고통스럽게 비틀거리는 파이몬에게 마력을 주입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폐허나 다름없는 땅
가운데 거대한 보랏빛 돌이 불쑥 솟았다.

"저쪽을 봐! 마수정이다!"

"이런 변방에 갑자기 마수정이라고?! 분명 우리가 전부 파괴했을 텐데!"

"율리아를 삼키려는 게 틀림없어! 절대 놓치면 안 돼!"

"읏……."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이 율리아의 양 발목을 단단히 옭아매 끌어당겼다. 동시에 아가레스와 레기온도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몸이 반으로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율리아는 힐끗 시선을 내렸다. 키마리스의 말대로 거대 마수정이 폐허 위에 홀로 떠올라 있었다.

[▷SYSTEM
스토리 진행도 85%]

동시에 줄곧 잠잠하던 시스템 창이 반응했다.

[▷SYSTEM

Finale Episode. 세계의 종말]

[▷SYSTEM

- 미션: 마정석을 파괴해 마신의 부활을 저지하시오.

- 엔딩: 미정

- 실패 페널티: 플레이어 사망]

'피날레 에피소드……. 이번이 마지막이구나. 모든 것이 끝나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이 세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율리아는 불안해졌다. 엔딩 이후의 세계는, 연극이 끝나면 불이 꺼지고 장막이 내려가는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할지. 설령 세상이 유지된다 하더라도 이방인인 자신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을지.

이제껏 살아남기에 급급해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상황에 끌려 다니기만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마수정은 지하의 마력을 마정석에게 넘기는 일종의 포탈이야. 저 끝엔 마신의 탑이 연결되어 있어. 이게
만약 시스템의 뜻이라면…….'

율리아는 퍼뜩 시선을 들었다.

"저를 놓아주세요! 이대로 있다간 여러분까지 위험해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네 손을 놓친 건 4 년 전만으로도 충분해! 더 이상은 용납 못해.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레기온의 동공이 뱀처럼 길게 찢어지고, 가을 하늘처럼 마냥 푸르던 홍채는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피어오르는 강력한 마력의 파장. 그건 분명 마신의 힘이었다.

주변의 마족들은 물론이고 매달린 채 그를 올려다보던 율리아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레기온은 그
모든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으흑!"

붙들린 손목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율리아의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이 새어나왔지만 그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레기온은 이성을 잃었다. 그녀를 영원히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잠식했다.

율리아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온전히 자신을 볼 때까지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레기온, 나를 봐. 내 눈을 봐. 절대 죽지 않아. 예전 같은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

"그럼 왜……!"

"살고 싶어서, 모두가 있는 세상에 나도 함께 살고 싶어서! 그러니까 제발 놓아줘!"


레기온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율리아의 발밑을 향했다. 파이몬이 하강하기 위해 마수정의 힘을 떨쳐내며
했지만 그럴수록 반작용으로 고도만 높아지고 지면은 아득히 멀어졌다.

자신이 손을 놓으면 율리아는 저 아래로 속절없이 떨어지게 된다. 생각만 해도 숨통이 막히는데,
율리아는 어째서 놓아달라고 하는 걸까. 이것이 살기 위한 방법이라고 외치는 걸까.

머릿속으론 율리아가 희생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정작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그 뜻을 관철해내려는 사람처럼.

"먼저 마신의 탑으로 가 있을 테니까 서둘러 와. 알았지?"

"젠장, 안 돼. 안 돼!!"

마수정의 힘은 기어이 율리아를 제 뜻대로 끌어당겼다.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던 그녀의 손이 이윽고


허공에 탁 풀어졌다. 놀이기구에서 떨어진 듯 묵직한 부유감이 그녀의 심장을 압박했다.

[▷SYSTEM

- '바엘'이 마력 비각성 상태입니다.

- '레기온'이 마력 각성 상태입니다.

- '플레이어'가 마력 비각성 상태입니다.]

[▷SYSTEM

세 개의 파편 각성 실패. 에피소드 난이도가 상향 조정됩니다. 재시도 불가.]

빠르게 뒤집히는 시야 너머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율리아가 그 뜻을 헤아릴 틈도 없이


세상이 암전됐다.

피날레의 막이 올랐다.

* * *

율리아가 의식을 차렸을 때, 그녀는 드넓은 수면 위를 누운 채 떠다니고 있었다. 삼면을 둘러싼 험준한
절벽 아래 호수가 자리한 기이한 지형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양수에 몸을 마는 태아처럼 팔다리가 노곤하게 늘어졌다. 이대로 눈을 감고 안온한 꿈속으로 파고들고


싶었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자신을 상처 입히지도 않는 그런 세계로.

하지만 그런 그녀를 다그치듯 아가레스의 목소리가 뇌리에 스쳤다.

'네가 바로 마신 부활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였어.'

율리아는 번쩍 눈을 떴다. 시선을 내리니 제 몸에서 희미한 무언가가 물에 녹아들 듯 퍼져가고 있었다.
호수에 힘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뒤집어 있는 힘껏 헤엄쳤다. 무겁게 처지는 겉옷을 벗고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도 모두 풀어


던졌다. 어느 쪽이 뭍인지 찾고 싶었지만 사방에 짙은 안개가 낀 탓에 바로 눈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천운인지 허우적대던 그녀의 발에 깊은 모래 바닥이 닿았다. 율리아는 즉시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뭍에 다다를 수 있었다.

"콜록, 콜록!"

호수 밖으로 기어 나온 그녀는 힘겹게 기침하며 숨을 헐떡였다. 여전히 물안개가 가득했지만 그래도


주변을 식별할 정도는 되었다.

'여기는 분명…….'

첫눈에 알아보긴 어려웠지만, 이곳은 마신의 탑 중층부에 있는 마력 폭포였다.

마수정은 지하 각지에서 마력을 빨아들여 탑의 마정석에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아가레스를 비롯한
악마들이 마계 각지의 마수정을 파괴하며 모든 물줄기가 말라 버렸고, 그렇게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기에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그녀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원피스 밑단을 비틀어 짜낸 뒤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서 최상층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낯선 곳에 홀로 떨어져 눈앞이 막막했지만 생각해야 했다. 사실상 자력으로 탑을 오르기는 불가능했으니


분명 무언가 방법이 있을 터였다.

닥치는 대로 주변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이 절벽 밑 작은 동굴로 향했다. 사실 동굴이 아니라


틈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입구가 비좁았다. 그리고 지난 퀘스트였던 '탑의 비밀' 달성 조건이 바로
저곳이기도 했다.

당시엔 원형 마법진을 밟은 것만으로 퀘스트가 달성되었다. 하지만 줄곧 너무 쉽게 끝났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었다. 율리아는 긴장된 얼굴로 동굴 입구에 들어섰다.

울퉁불퉁한 벽을 짚은 채 안으로 신중이 발을 내딛던 그녀의 손끝에 무언가 턱 걸렸다. 매끄럽진 않았지만
무언가의 형상을 인위적으로 조각한 것처럼 연속된 무늬가 만져졌다.

"뭐지? 읏!"

어둠 속에서 파문 형태로 번져가는 무늬를 더듬더듬 훑던 그녀가 반사적으로 손을 뗐다. 날카로운 부분에
베인 듯 따끔한 감각이 들었다.

하지만 율리아의 시선은 이내 다른 것에 빼앗겼다. 그녀의 혈액을 머금은 동굴 벽이 새겨진 무늬를 따라


점점 밝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드러난 건 죽어가는 하나의 거대한 태양, 그리고 아버지의 무덤에서 눈을 뜬 세 개의 유성.

'빛과 어둠은 하나의 태에서 눈을 뜬다. 동전의 양면처럼 그들은 영원히 닿을 순 없으되 오직 한 몸이오,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또한 없다.'

밀도 짙은 대기 속에서 찰나의 섬광이 번뜩인다.

푸른 유성은 빛을 향해, 붉은 유성은 어둠을 향해 날아간다. 그들 둘은 태초의 태양에 버금갈 정도로


크고 밝게 빛났기에, 그것들이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남아 있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작고 사랑스러운 것. 무르디 무른 분홍빛을 띤 그것은 앞선 것들과 달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버지의 무덤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두려워 말라.'
무한히 넓은 우주에 비하면 손톱 크기나 될까. 약하고 어여쁜 그것은 두려워 말라는 타이름에 되레 덜덜
떨며 몸을 숨겼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이내 빼꼼 시선을 든다.

죽어가던 '태초'는 제 곁을 떠나지 않는 그것을 지극히 귀애했다.

'후일을 위해 가져가려 했으나 네게 빌려주마. 누구도 너를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할 테다.'

말갛고 수줍은 시선이 태초에게 향했다.

'대신 때가 되면 돌려주련? 내게 아주 중요한 것이니.'

태초가 지닌 가장 빛나는 편린이 유성의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앞서 떠난 두 유성도 지니지 못한 가장


순수한 권능, 천금 보석보다 귀한 것을 받아들인 유성은 편린을 제 안에 소중히 품었다.

율리아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돌아보니 원래 그녀가 서 있던 동굴 안이었다. 눈이 멀 듯 거대한 태초는 온데간데없고,


피를 머금은 동굴 벽만이 여전히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는 없던 원형 포탈이 바닥에 떠올랐다.

'마신의 탑 최상층으로 향하는 통로겠지.'

심장이 거세게 달음박질 쳤다. 마정석과의 결전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도망칠 방법 따윈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모두가 있는 세상에서 함께 살고 싶었으니까.

"커맨드 시스템."

지난 에피소드 보상으로 스킬 트리 최상단이 오픈되었다고 했었다. 마정석과 싸울 때 필요할 게 분명해


보였기에, 율리아는 우선 스킬 창으로 들어갔다. 여러 갈래로 나뉜 트리 중에서 항마력과 관련된
부분으로 이동했다.

저항 전이, 저항 거점, 저항 강탈, 물리 실드, 프로즌 애로우, 멀티 스나이핑. 율리아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하나의 마스터 스킬에 다다랐다.

116 화

[▷이터널 캐논

보유한 모든 스킬을 복합해서 사용할 수 있다. 잔여 체력의 ……%를 소모한다. SP 0]

"……."

시간이 멈춘 듯했다. 말문이 막힌 율리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시스템 창에서 손을 떼었다.


그로부터 몇 분이 더 흐르자 시스템 커맨드가 자동 종료되고 시야는 또다시 자욱한 물안개로 뒤덮였다.

"응, 그랬던 거구나. 내가 바로……."

완전한 무의 세계. 피아를 구별할 수 없고 그렇기에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덩어리에 불과한 공허의 세계.
그곳에서 눈을 뜬 태초의 씨앗.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악마.

태초의 무덤에서 다시 태어난 그릇은 빛으로 걸어가 가장 강력한 마나가 되었고, 영혼은 어둠에 잠겨 붉은
힘이 되었다. 그리고 자아는 다름 아닌 이곳에, 자신에게.

[▷DEVILISM (마성) : ∞]
[▷SYSTEM

- '바엘'이 마력 비각성 상태입니다.

- '레기온'이 마력 각성 상태입니다.

- '플레이어'가 마력 각성 상태입니다.]

그때, 갑자기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아까와 달리 플레이어의 상태가 '각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시스템을 보지 않아도 율리아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제껏 왜 느끼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몸속에서 요동쳤다. 그녀가 보는 시야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하지만 율리아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가만히 멈춰 선 그녀를 재촉하듯 바닥 전체가 우르릉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

율리아의 불안감 섞인 시선이 아까보다 더욱 환하게 빛나는 포탈로 향했다. 제동 장치를 잃은 기관차처럼,
돌아갈 방법은 더 이상 없었다.

* * *

거대한 돔 형태의 천장을 깎아지르듯 높은 기둥이 장엄하게 받치고 섰다.

마정석이 깨어난 탑 최상층에 강력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강대한 마력을 실은 뇌전이 번쩍일 때마다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 날개를 펼친 바엘은 제게 닥쳐드는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하며 마력을
방출했다.

"그따위 무른 공격으론 내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을 거다."

그가 손을 뻗자 사슬처럼 전개된 붉은 힘이 마정석을 휘감았다. 하지만 목을 조르듯 옭죄는 마력을


마정석은 파장 한 번으로 단번에 끊어 버렸다.

'과연 그럴까?'

충격파가 돌아오기 전에 바엘은 급히 진로를 선회했다. 강력한 폭발이 주변을 에워싸며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왕관을 내놔! 그건 나의 것이다!'

"어림없는 소리. 원하는 어떠한 것도 넌 취할 수 없어."

바엘은 제게 몰려드는 칠흑의 촉수를 모조리 베어 내며 탑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원한 어둠과 붉은 달. 강대한 두 힘이 부딪히며 탑 내의 시간축이 완전히 비틀려 버렸다. 얼마나 긴


시간을 싸우고 있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치열한 격전에도 불구하고 탑은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봉인도 마찬가지였다. 아득한
심해에 갇힌 것처럼, 완전한 구체의 형태로 탑 정상을 가둔 채 시리게 일렁였다.

'누가 누구를 가둔 건지 모르겠군.'

순리에 반해 살고자 발악하던 마신을 억제하기 위해 세워진 봉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되레
바엘의 탈주를 막고 있는 듯 보였다.
'아무래도 상관없나.'

저것이 있는 한, 자신들의 싸움은 바깥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아직 이 땅에 남았을지 모를


그녀에게도.

'언제까지 지리멸렬한 싸움을 이어 갈 텐가?'

마치 바엘의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마정석이 속살거렸다.

'힘을 개방해. 아직 꺼내지 않은 힘이 있잖아. 지금보다 더욱 강대한 힘이……!'

마왕성을 이루는 근간, 악마의 마력을 담는 가장 강력한 그릇인 심장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바엘이라고 마정석이 자꾸만 제 심장을 입에 올리는 속셈을 모르지 않았다.

"널 상대하는 건 이정도로 충분해."

'아닐 텐데. 마력 회복 속도가 느려진 게 내 눈엔 아주 잘 보여. 이곳은 나의 영역이고 아무리 숨기려


해도 너는 결국 나인 것을! 모든 것이 고갈되면 그땐 나의 승리다!'

바엘은 스스로 왕의 자리에 앉으며 자신의 강대한 힘을 둘로 나눴다. 그중 '태초'에게서 받은 마력은


심장에 담아 마왕성 지하에 봉인했다.

오직 힘만이 진리인 세계였다. 누군가는 그런 바엘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반절의
힘으로도 마계 전체를 지배할 만큼 그는 위대한 악마였다.

'설마 나의 부활이 그토록 두려운가?'

"큭, 부활이라고? 다 썩어문드러진 시체 주제에."

마신의 완전 부활을 위해선 각성 상태의 파편이 셋, 불완전하게나마 부활하기 위해선 둘 이상이 필요했다.
그것을 아는 바엘은 마정석의 도발에 코웃음 쳤다.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필요한 파편인 '열쇠'는 아직…
….

바로 그때, 바엘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주술을 통해 연결된 각인에서 평소와 다른 파장이 느껴졌다.

'바깥에 얌전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일한 착각이었나.'

율리아가 각성했다.

그녀는 '태초'의 죽음 이후 처음 태어난 자아였다. 붉은 씨앗은 호수 밑바닥에 가둬 두고 푸른 씨앗은


인계에서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는 동안에도, 오직 열쇠만큼은 세상이 몇 번이나 붕괴되고 재생하는 동안
줄곧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수천수만 번의 시간이 지나 간신히 열쇠가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 조금만 험하게 다뤄도
죽어 버리는 작고 가녀린 인간이었다.

"마신의 이름을 자처한 주제에 조바심이나 부리다니 꼴사납군. 내가 심장을 되돌려 각성한다 한들 네가
어쩔 수 있을 것 같나? 너는 날 절대 쓰러뜨릴 수 없어."

'그럼 너는 어떻지? 반쪽밖에 안 되는 힘으로 나를 쓰러뜨릴 수 있나? 결국 내 발밑에 무릎 꿇게 될 거다!


호수 밑바닥에 영원히 수장시켜 주마!!'

"그까짓 더러운 힘 없이도 네놈을 압도할 수 있단 걸 보여 주지."


마정석의 도발이 역으로 작용했다. 율리아의 미적지근한 따뜻함에 잠겨 잠시 잊고 지냈던, 마신을 향한
분노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호수의 마수정을 파괴할 당시만 해도 이런 때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마정석을 조롱하기 위해.
썩어가는 시체가 지니지 못한 힘을 손아귀에 넣어, 네가 그토록 갈구하던 결말을 눈앞에 두고 죽는 고통을
맛보라고 실컷 비웃어 줄 생각이었다.

자신에겐 그럴 만한 권능이 있었다.

"감히 내 것에 탐을 낸 대가를 치러야지."

마정석을 노려보는 바엘의 머리 위로 붉은 폭풍이 휘몰아쳤다. 다가온 복수의 시간. 오만한 젊은 왕의


안광이 소름끼치도록 형형하게 번뜩였다.

그를 기다리는 미래를 알지 못한 채.

* * *

한편, 탑 바깥에선 우후죽순 눈을 뜬 마정석의 군대에 맞서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탑을 조사하던


바르바토스 형제, 레벤나, 보티스와 합류한 아가레스 일행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맞닥뜨렸다.

"그게 무슨 뜻이야? 탑에 들어갈 수 없다니?"

"우리도 처음엔 몰랐어. 형하고 마정석을 쓰러뜨릴 방법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진이 난 것처럼
발밑이 흔들리더니 천장이 무너지는 거야! 급하게 다른 층으로 이동했는데 알고 보니 최상층을 제외한
모든 곳이 무너지고 있었어!"

"마정석은 우리의 존재가 자신에게 방해가 될 거라 판단한 것 같다. 시공의 축이 완전히 비틀려 안으로
진입할 모든 방법이 막혔어."

바르바토스는 제게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며 마력을 전개했다. 마정석은 최후의 발악을 하듯 마력을
아낌없이 퍼부어 새로운 군대를 탄생시키고 있었다.

아무리 마신의 잔재라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힘을 퍼 쓰는 것에 부담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을 만큼, 마정석은 자신들이 탑에 다가오지 못하게 해야 할 이유가 있는 듯했다.

적을 하나씩 베어 나가던 아가레스가 참다못해 본모습을 개방했다. 자욱한 마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칠흑의 앨리게이터가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앞을 가로막는 모든 적을 섬멸했다.

"그럼 우린 이대로 마정석의 놀음에 장단이나 맞춰 주는 수밖에 없다는 거야? 작은 열쇠가 저 안에 혼자


있어. 주군과 만나기 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럴 염려는 없단다? 마정석은 율리아를 해칠 수 없어. 주군을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말이야."

"이쪽에서 먼저 마정석을 쓰러뜨릴 방법은 없는 거야? 이건 너무 불리하잖아!!"

마계 변방에서 율리아를 마수정에게 빼앗긴 뒤, 그들 일행은 지체 않고 탑으로 날아가 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레기온과 키마리스를 제외한 나머지 악마들은 모두 실패했다. 심지어는 마계 2 위의 대악마인
아가레스조차 말이다.

"애초에 인간 소드마스터는 왜 갑자기 그런 엄청난 마력을 내뿜는 건데. 나도 못 들어가는 탑에 키마리스


녀석은 어떻게 들어간 건데!"
"마정석의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알아냈다. 허탈할 정도로 간단하더군."

아가레스가 치솟는 노기를 이기지 못해 펄펄 뛰었지만 그녀에게 답하는 바르바토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탑이 붕괴하기 직전, 그는 마침내 정답에 도달했다.

"마력 각성 상태의 열쇠와 접촉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지금까진 비각성 상태였기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었던 거다."

"마력 각성이라고? 하지만 작은 열쇠는 인간이잖아! 물론 그 소드마스터도 이상했지만,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어? 애초에 타고난 힘이 다른데……."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나, 아가레스. 열쇠를 볼 때마다 난 무력감에 휩싸였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무력감. 그저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 머릿속 모든 빗장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기분. 감히 거역할 수 없고
차마 거짓말 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게 만드는 기분 말이다."

아가레스의 샛노란 안광이 바르바토스에게 향했다. 그가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 바르바토스는 작은 열쇠에게 늘 냉정했었다.

"율리아 브에스드라는 그런 존재였던 거다.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났으되 그 안에 깃든 건 어떠한 색도


섞이지 않은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마력. 우리가 주군의 힘에 매혹됐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끌리지 않을 악마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다."

"무슨……."

"놀랄 것 없단다, 아가레스?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니까.


그저 파편들이 무사히 빠져나오길 바라며 우린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살아남자꾸나."

몸집만 한 배틀엑스를 휘두르던 레벤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모두 그녀의 말대로였다. 바깥에 있는


존재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117 화

"젠장, 그럼 이 무력감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가레스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탑 최상층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파장만으로도, 악마들은 안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지 예측할 수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 * *

율리아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포탈을 통해 도달한 곳은 예상대로 마신의 탑 최상층, 마정석이 봉인된 제단 앞이었다. 하지만


마수정에게 붙들린 게 한낮이었고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탁 트인 기둥 너머엔 칠흑
같은 어둠과 붉은 달이 가득했다.

게다가 마정석이 폭주하고 있으면 어쩌나 두려움에 떨었던 게 무색하도록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포탈의 빛이 사그라지자 무거운 적막이 피부에 와 닿았다.

"어떻게 된 거지."
새로운 힘에 눈 떴지만 아직 힘의 사용에 익숙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으니 절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어둠과 적막 속에서 그녀는 더듬더듬 걸음을 내디뎠다.

'후일을 위해 가져가려 했으나 네게 빌려주마. 누구도 너를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할 테다.'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그녀는 퍼뜩 고개를 저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공간을 가득 메운 마력이


공명하듯 터지며 찰나의 빛을 흩뿌렸다. 놀라 걸음을 멈췄던 그녀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발끝에 제단으로 오르는 계단 턱이 느껴졌다. 이 한 발짝 너머가 바로 봉인진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대신 때가 되면 돌려주련? 내게 아주 중요한 것이니.'

불안해하는 율리아를 안심시키듯 자상한 울림이 또다시 기억을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되레 불안해졌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걸 놓친 기분이었다. 실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커맨드 시스템."

[▷SYSTEM

Finale Episode. '세계의 종말' 진행 중]

[▷SYSTEM

- 미션: 마정석을 파괴해 마신의 부활을 저지하시오.

- 엔딩: 미정

- 실패 페널티: 플레이어 사망]

그녀는 다시금 시스템을 살폈다. 마정석을 파괴하기 위해선 일단 봉인부터 풀어야 했다. 시스템이 바라는
방향대로 가고 있었다.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엘은 어디에 있는 걸까. 심장의 각인은 분명…….'

율리아는 쿵쿵 뛰는 심장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녀가 얻은 새로운 힘은 각인의 경로를


역추적하여 근방에 바엘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일단 의식하고 나니 그녀를 감싼 힘이 다름 아닌 붉은 마력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상하고 포근한 감각.


그제야 율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품에 가득 안겨 있는 기분이었다.

'다들 바엘의 곁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까. 나도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되도 않는 착각이었지만 그것을 지적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크게 심호흡한 율리아는 이윽고 계단 위로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뎠다. 동시에 제단에 조각된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도미노가 무너지듯 그녀에게 닿은 부분부터 수만 년의 봉인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막대한 마력이 폭발함과 동시에 마정석이 환하게 발광했다. 어둠의 장막이 찢기고 사위가 환히 밝아
올랐지만, 율리아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어, 어째서……."

건물 2 층 높이 정도로 거대한 마정석 안에 누군가의 인영이 흐릿하게 비쳤다. 마치 거대한 수조 속에


잠겨 든 것처럼.
"설마, 설마……."

산산이 찢기고 상처 입은 몸은 그녀를 소중히 안아 주었던 이와 같았고, 굳게 다문 입술은 그녀를


능글맞게 괴롭히다 때로는 열렬히 입 맞추던 것과 같았으며, 칠흑 같은 날개는 쾌락에 물든 그녀의 나신을
밤의 풀벌레조차 보지 못하도록 감추던 것과 같았다.

마정석에 갇힌 채 정신을 잃은 바엘이 그곳에 있었다.

"바엘?!"

드넓은 제단을 정신없이 가로지른 율리아가 마정석 표면을 마구 두드렸다.

"바엘, 바엘!!"

마정석의 색이 그가 잠든 중앙부터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마력을 빼앗기고 있었다. 율리아는 손에


피가 날 때까지 마정석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눈을 떠요! 정신 차려! 당신이 왜……!"

하지만 율리아의 부름에 눈을 뜬 건 바엘이 아니었다. 위태롭게 점멸하던 마법진이 결국 완전히 파훼되고,
그와 동시에 어둠처럼 일렁이는 촉수가 사방에서 뻗어 나왔다.

"꺄악!"

그것에 찰나라도 스칠 때마다 칼에 벤 듯 날카로운 통증이 퍼졌다. 율리아는 흔들리며 무너져가는 제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스킬을 걸지 않은 채로 활을 겨눴다. 혹여나 제 힘이 바엘에게 해가 될까
두려웠다.

소리 없는 울림이 머릿속으로 곧장 파고들었다.

'어째서 날 두려워하지?'

"바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가 당신에게 패배할 리 없어. 분명 무슨 술수를 부린 거야!"

'수천수만 번의 방황 끝에 찾아낸 나의 것. 가장 사랑스러운 것.'

그녀는 마정석의 헛소리에 답하는 대신 붉은 목걸이를 풀어 유성우에 장착했다.

[▷SYSTEM

특수 무기 '유성우'의 스킬 시스템이 재구축됩니다. 앞으로 1 시간 동안 플레이어의 체력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붉은 마력의 유성우

제한 시간 59 분 59 초]

"프로즌 애로우!"

[▷마정석

공격 판정 -0.1%

공격 판정 -0.1%
공격 판정 -0.1%]

[▷HP 100% 》 99.7%]

인계를 덮친 마물을 해치우기 위해 공격력을 3 배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마정석은 그조차 역부족일 정도로
막대한 체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수정의 꼭대기에 떠오른 체력 바는 무려 열다섯 줄이 넘었다.

'붉은 것을 굴복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지. 그저 네 형상을 흉내 내 이 앞에 세워 둔 것만으로 힘 한번 못


쓰고 당하더군. 모두 네가 나와의 약속을 떠올려 준 덕분이다.'

악마들은 대상을 구분할 때 그것이 지닌 마력 파장을 주로 느낀다. 율리아가 각성하며 그녀의 파장이
마정석과 동화되었기 때문에, 단지 그릇임을 알면서도 바엘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찰나의 망설임이 마정석과 바엘의 승패를 갈랐다.

'넌 내게 거역하지 않을 테지. 다른 것들과는 다르니까. 나와의 약속을 지키러 이렇게 와 주었어.'

"싫어……."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것. 심장을 내어 보렴.'

율리아는 현실을 부정하듯 마구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바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몸은 처참히 망가졌지만 표정만큼은 평온해서, 그저 잠들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으흑!"

그런 그녀의 반응이 마정석의 심기를 건드렸는가. 마정석은 바엘에게 하듯 율리아의 심장에 독한 마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고통에 익숙지 않은 연약한 몸이었다. 갑자기 주입된 막대한 마력이 펄펄 끓는 마그마처럼 온몸의 핏줄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녀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악문 잇새로 역류한 핏물이 고여 들었다.

"컥……!"

이래도 계속 버틸 거냐는 듯, 그녀가 쓰러진 것을 기점으로 더욱 막대한 마력이 심장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찰나도 견딜 수 없을 고통이었다. 모든 사고가 마비되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무너지면 다음은 다른 악마들의 차례였다. 사무치도록 외로운 싸움. 등 뒤를 받쳐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파, 바엘……."

덜덜 경련하던 그녀는 불현듯 시선을 들었다. 눈물로 흐릿한 시야 너머, 마정석에 갇힌 바엘의 모습이
보였다.

아득히 긴 세월을 이런 고통 속에 살아왔다고 했다. 강대한 육체가 그보다 더욱 강대한 마력을 이기지
못해, 채 한 시간도 편히 잠든 날이 없다고 했었다. 분명 지금의 자신보다 더욱 괴로웠으리라.

'나, 난 정말 바엘을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


자신이 곁에 있으면 고통이 가라앉는다는 사실에, 정신 못 차리고 잠들 수 있다는 사실에……. 실은
우쭐했다. 이 능력이 있는 한 그는 자신을 버리지 못할 거라고 자만했다.

자신은 잠깐 겪은 것만으로도 정신이 붕괴될 것 같은데. 이 고통에서 해방될 방법이 있다면 설령


죽음이라도 달게 받아들일 텐데.

그는 정작 유일한 방편인 자신을 지상으로 떠나보냈다.

'주군께선 그 모든 걸 알고 널 인계로 보내신 거야. 네가 휘말리길 바라지 않으셨으니까.'

'내가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주군께선 외로우신 분이야. 태어나 수백 년을 홀로


고립되어 감정을 표현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거야.'

아아, 바엘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했을까. 악마는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들이라고 말한 건 그였는데.
무언가를 부탁할 땐 신중하라고 비웃은 것도 그였는데.

'내게 방해만 될 뿐이니 어디로든 돌아오지 못하게 내쫓아. 누구 하나라도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직접
사지를 찢어 주지.'

그때 바엘의 표정이 어땠더라. 무슨 눈빛으로 이 말을 했었지?

크고 단단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했다. 어리석은 자신. 구제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멍청한
자신.

"한 번만 나를 봐 주세요. 이제야 당신의 마음을 알았어요……."

평소 같았으면 이 말 한 마디에 만사 제쳐두고 달려왔을 것이다. 겉으론 냉정하고 무감한 척하지만 바엘은
늘 자상했다. 자신이 조잘대는 소리에 가장 먼저 귀를 기울였다.

그의 열렬한 눈빛이, 부드러운 표정이, 자상한 목소리가, 뜨거운 체온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단지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그럼 자신이라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겁쟁이에 버림받는 것에만 익숙해서, 누군가 이런 나를 사랑해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나 같은 사람을 왜……. 상처받기 싫어서 비겁하게 도망치기만 하는 겁쟁이를 왜……."

하염없이 눈물만 떨어뜨리는 동안에도 마정석 속 바엘의 눈꺼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율리아는 고통에 휘청대면서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저항을 알아챈 마정석이 이젠 바엘에게 하던
것 이상의 막대한 마력을 퍼부어 댔지만 그녀는 떨리는 숨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었다.

바엘이 있기에, 비로소 자신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란 걸 알았다. 그림자조차 애틋해 밟지
못할 정도로 절절한 사랑. 그것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고 싶었다.

눈물을 닦아낸 그녀의 표정이 결연하게 빛났다.

"이제 됐어. 하나도 두렵지 않아."

시스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이터널 캐논
보유한 모든 스킬을 복합해서 사용할 수 있다. 잔여 체력의 100%를 소모한다. SP 0]

[▷SYSTEM

궁극기 '이터널 캐논' 시전 시 플레이어는 사망하며 플레이어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가 영구 소실됩니다.


희생 엔딩 '파괴, 또 다른 재생'이 확정됩니다.]

내 목숨을 가져가고 대신 그를 살려 줘.

118 화

무거운 적막이 사위를 감쌌다. 느릿하게 눈을 뜬 바엘은 반쯤 무너져 내린 성전을 올려다보았다.

반으로 갈라진 돔형 천장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아주 낡은 유물처럼 군데군데 부식되거나 떨어져


나갔고, 그 너머로 붉은 달빛이 고스란히 스몄다.

바엘이 깨어난 곳은 본디 마정석이 봉인되어 있던 제단 위였다. 하지만 그곳에 누워 있는 건 오직 그


하나뿐. 마정석의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엷고 보드라운 파장이 하늘하늘 나부꼈다.

'율리아…….'

그녀의 목덜미에 입 맞출 때처럼 바엘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곤 그녀에게 새겨 둔 각인을 습관처럼


찾았다. 처음엔 열쇠가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젠 멀리서나마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느릿하게 오르내리던 바엘의 가슴이 이내 멈췄다. 선뜩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

무너진 폐허 더미 속, 한 여자가 바르게 누워 있었다. 양손을 모은 채 편안한 얼굴로. 누가 보면 깊게


잠들었다고 생각할 만큼.

튕기듯 일어선 바엘의 시선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머릿속은 벌써 그녀의 곁에 다가가고도 남음인데, 몸은
고목나무처럼 우뚝 멈춰 선 채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째서?'

펼쳐 든 그의 손바닥이 느릿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위로 연분홍빛 조각 한 점이 내려앉았다.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마력의 편린.

'내 목숨을 가져가고 대신 그를 살려 줘.'

채 소리가 되어 나가지 못한 울음 섞인 절규가, 맞닿은 손바닥 아래 느릿하게 녹아들었다.

바엘은 홀린 듯 제단에서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그녀를 향해 이끌리는 움직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니야, 이건 모두 꿈이라고. 그런 그의 어깨 위에 편린 한 조각이 또 내려앉았다.

'왜 자꾸 눈물이 날까요. 이렇게나 편안한 기분인데……. 이제야 모두 끝내고 쉴 수 있게 되었는데…….'

세상이 무너져 간다. 태초가 죽고 마침내 이 세계는 끝을 맺었다. 진정한 엔딩. 망막에 맺힌 상이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시스템이 하나둘 꺼져 간다.

'사랑해요, 바엘.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시점까지 가서야 깨달았어요.'


당신에게 이 말을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나에게 사랑을 준 당신인데, 정작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서. 내 마지막 목소리조차 당신에겐 닿을 수 없어서.

'당신은 내가 없는 세상에서 다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겠죠. 모든 것이 리셋 되면 그곳에 나는 없을


테니까.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바엘…….'

외로움에 사무친다. 모두에게 잊혀 결국엔 없는 존재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이 고독하다. 그들


속에서 겪었던 그 따뜻하고 안온한 감각이, 태어나 처음 가져 본 나의 돌아갈 곳이.

'미안해요. 끅! 미안해요. 나를 잊지 말아요, 제발! 당신이 날 잊는 게 너무 무서워!'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이 노력하고 더 치열하게 살아갈걸. 그럼 지금과 다른 엔딩을 맞았을지도 모르는데.

산산이 깨진 마정석의 파편이 아찔한 비명을 내지르며 소멸했다. 속박에서 풀려난 바엘의 모습의 점점
흐려진다. 해질녘 땅거미가 내려앉듯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잠겨 들고 있었다.

"……."

율리아가 죽어 가며 느끼던 온갖 감정이 바엘의 안으로 주체할 수 없이 밀려들었다. 그는 어느새 율리아의


머리맡에 힘없이 무릎 꿇었다.

잠든 모습조차 햇살처럼 따뜻하고 사랑스러워서. 암흑 같은 세상에 그녀 혼자만 유달리 눈이 부셔서.

"율리아, 일어날 시간이다."

희고 창백한 뺨 위로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고개를 떨군 그가 율리아의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나를 마신으로 만들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열쇠로서 달갑고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해."

이 말을 했던 게 언제였더라. 아주 먼 오래전 이야기 같은데. 천 년 정도 되었을까. 도통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내가 말했지. 절대 벗어날 수 없어. 너의 몸뚱이,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설령 네가 죽는다 하더라도."

바엘은 더 이상 뛰지 않는 그녀의 심장 위를 떨리는 손으로 어루만졌다. 계약이 파기되며 붉은 각인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약속의 징표가, 그녀와 자신을 잇는 유일한 끈이…….

"다시 한번 계약하지. 이번 대가는 나의 영원으로 하겠다."

나 역시 네게 하지 못한 말이 있어.

수천수만의 시간을 홀로 지새우는 것이 당연하던 내게 사무치는 외로움을 알게 하고, 흑백의 세상에


너만의 따뜻한 색채를 입혀 기쁨과 슬픔을 알게 했으며, 결국엔 이토록 가슴 찢어지는 눈물의 의미를 알게
한 너를 위해.

"크. 윽……!

축 늘어진 주검을 안아 든 채로 바엘은 마왕성 지하에 잠든 심장을 제게 융합시켰다. 마계 전체를


붕괴시킬 정도로 엄청난 마력의 이동이었다. 그 모든 마력을 단 한 순간에 받아들이니 그가 지는 육체적
부담은 상상을 초월했다.

바엘은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그런 와중에도 품에 안긴 주검만큼은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그 대비가


바엘은 선연하게 느껴졌다.

"너를 내 곁에 돌리기 위해서라면, 이 세계를 몇 번이라도 부수고 다시 세우겠다."

비겁하게 외면하고 또 외면했지만 그럴 때마다 먼저 다가와 손잡아 준 내 사랑을 위해.

그로부터 백여 년의 시간이 흘러, 다 무너져가는 탑의 통로 너머로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정석의 폭주가 멈추며 마침내 비틀렸던 시공의 축이 하나로 맞춰졌다. 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간
악마들은 퀴퀴한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한, 세월의 흐름 탓에 다 무너져 가는 계단과 통로를 겨우
기어오르다시피 해 마침내 최상층에 다다랐다.

"도대체 이게 뭐야? 나랑 형이 탑 바깥으로 쫓겨난 게 고작 며칠 전인데, 이건 뭐, 백 년은 지났다고


해도 믿겠네!"

레라지에는 벽에 자욱이 내려앉은 먼지를 손끝으로 훑으며 몸서리쳤다. 아래층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상황은 점점 더 심해졌다. 같은 건물 안에서도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적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마정석의 마력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주군께서 역시 마신이 된 게 맞겠지? 온


대기가 전부 주군의 붉은 힘으로 가득 차 있어. 진짜 대단하네."

레라지에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떴다. 아가레스를 위시한 다른 악마들도 말만 안 했을 뿐, 마찬가지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의 주군이 드디어 지하의 절대 불변한 지배자가 된 것이다. 이보다 더
경사스러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드디어 도달한 최상층, 파괴된 문 앞에 돌처럼 선 레기온,
키마리스와 마주친 탓이었다.

그들을 본 레라지에는 곧장 비아냥부터 시전했다.

"우리보다 먼저 들어간 주제에 겨우 여기까지 왔어? 하여간 너희에겐 기대도 안 했다."

"……."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정곡을 찔렀다 보지?"

"그만."

그런 레라지에를 제지한 건 바르바토스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짐작한 아가레스와 레벤나의 표정 역시


굳었다.

"안에서 주군과 열쇠의 힘이 모두 느껴진다. 분명 무사해."

하지만 정말 괜찮다기엔 레기온과 키마리스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바르바토스는 힐끗 시선을 내렸다. 자욱이 내려앉은 먼지 위로 둘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이 기이한 공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뜻이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둘을 제치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려다 우뚝 걸음을 멈췄다.

무너진 성전, 훤히 드러난 밤하늘, 가라앉은 먼지에 섞여 반짝반짝 빛나는 마력의 편린, 사라진 마정석과
봉인, 그리고…….
'그렇군. 주군은 결국 선택하신 건가.'

바르바토스는 경의의 표시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무너진 제단 위로 새하얀 야광화가 가득 피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하늘 춤추는 꽃잎 사이로 숨을


거둔 율리아가 평온히 누워 있었다.

그런 그녀의 밑으로 붉은 마법진이 희미한 빛을 흩뿌린다. 제단 밑에 처절히 무릎 꿇은 바엘이 율리아에게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 바닥에 닿은 양손바닥 아래로 붉은 마력이 끝없이 공급된다.

단지 주검을 지키기 위해 고립된 시간 속, 한 자리에 그렇게 머물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찰나의 기억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석처럼 몇 번이고 갈고닦아 가슴에 품으며, 혹여
조금이라도 흐려질까 곱씹고 또 곱씹으며.

"주군……."

그런 둘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티끌 하나 없이 순결하고 새하얗다. 흩날리는 마력의 편린 사이로


둘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명히 비쳤다. 그렇기에 누구도 감히 이 성역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누군가는 비통히 무릎 꿇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절규를 닮은 울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아가레스는 마침내
결단했다.

"탑을 폐쇄하겠다. 그 누구라도 이곳 성역에 출입하는 것을 영구히 금제한다."

전대 마왕인 바엘이 율리아와 함께 영원히 잠들었으니, 악마들을 이끌 마계의 새로운 지배자는 이제


그녀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탑은 아주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마법진으로 봉인되었다. 다만 아가레스는


마지막으로 탑을 떠나기 전 한 가지 열쇠를 남겨 두었다.

시간은 물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마정석의 폭주로 폐허가 되었던 마계 전역이 차츰 복구되고, 무너졌던
둥지와 악마성이 재건되고, 마물 출몰 사태로 인해 단절됐던 인계와의 교류가 어느덧 재개된다.

마법이 풀릴 단 하나의 기적을 기다리며, 오늘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119 화

에필로그

악마성 복도에 절도 있는 구두 굽 소리가 또각또각 울려 퍼졌다. 영면에 든 마왕 바엘의 뒤를 이어 마계


권력을 장악한 제 1 통령 아가레스의 발소리였다.

그녀의 눈빛 한 번에 갓 마군에 들어온 어린 악마들이 바짝 긴장해 전열을 갖췄다. 아가레스는 그들의


경례를 손짓해 물리며 집무실에 들어섰다.

바깥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미리 앉아있던 레벤나가 턱을 괴며 깔깔댔다.

"시끄러우니까 닥쳐."

"쯧, 입만 험해서는?"

밖에선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인 아가레스가 한참이나 서열 낮은 레벤나의 앞에서 머쓱하게 목덜미를
주무른다. 오직 힘만이 절대적 가치이자 불변의 진리인 마계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존재는 이미 세상에 없다. 그녀를 기억하던 이들 또한 점점 사라져 간다. 잠시
씁쓸하게 시선을 내리깔던 레벤나가 이내 말을 이었다.

"인계에서 사절이 왔단다?"

"어디에서."

"브에스드라. 얼마 전에 그곳의 황제가 죽은 거, 기억하니?"

"그래, 인간치고는 나름 오래 살았지."

제국 브에스드라에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불리는 명군 에스델 1 세가 최근 서거했다. 그녀는 혼인하지


않고 평생을 국가에 몸 바친 탓에 직계손이 없었고, 그 때문에 계승 문제로 오랜 기간 몸살을 앓았다.

그것을 떠올린 아가레스가 의아함에 미간을 좁혔다. 국가가 안팎으로 정신없을 시기인데 마계까지 사람을
보내는 이유를 예측할 수 없었다.

"선황의 유언을 가지고 왔다는 구나."

"유언?"

"사죄해야만 할 일이 있다고……."

에스델 1 세의 유언을 가져온 이는 다름 아닌 쿼터였다. 이종 교배가 워낙 드물고 희귀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생전 인연이 있었다는 말에 레벤나는 차마 그를 성 밖으로 내쫓지 못했다.

아가레스는 레벤나가 브에스드라 황실에 얼마나 치를 떠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사신을 안으로
들인 데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가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죄를 받을 사람은 이미 없지만, 대신 레기온이라도 보내. 유언장을 어떻게 처리하든 녀석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해."

"어머, 레기온이 어디 말 듣는 거 봤니? 키마리스랑 벌써 성 밖으로 나갔단다?"

"뭐?! 성을 지켜야 할 놈이 도대체 어디로 나다니는 거야!"

그간 레기온은 3 위의 대악마가 되었다. 물론 본의가 아닌 강제였다. 실력은 2 위인 아가레스와 호각을


이뤘지만 그는 한사코 결투를 거절했다. 만약 정말 그녀를 이기게 될 경우 마계의 모든 정치 권력이
그에게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정체성을 지닌 레기온의 악마의 길을 선택한 건,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그는 늘 처음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하여간 제대로 된 놈이 없어."

"악마의 긴 인생에서 그런 강렬한 경험을 하긴 쉽지 않으니까. 절로 외골수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니?"

레벤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폐허나 다름없던 마계도 수없는 노력 끝에 이제야
간신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마신의 탑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 무너진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이 먹은 티를 내고 싶진 않지만, 율리아가 곁에 있던 그 짧은 순간이 내 기나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다는 걸 당시엔 몰랐어."

"어리석었지."

"응, 어리석었어……."

낮게 읊조리던 레벤나의 목소리가 일순 끊겼다.

아주 그립고도 익숙한, 꿈에서도 잊은 적 없는 연분홍빛 편린이 그녀의 콧잔등에 수줍은 듯 살포시


내려앉았다.

행동을 멈춘 건 아가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탑을 응시하더니 곧장


성 밖으로 뛰쳐나갔다.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울먹이던 레벤나도 서둘러 그녀를 뒤따랐다.

마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악마들이 일제히 한 곳에 모여들었다. 희게 물든 하늘 위로 빛나는 유성우가


흐르고 있었다.

* * *

아주 길고 슬픈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눈꺼풀을 들자 무너진 천장 너머로 새하얀 햇빛이 비춰 든다. 불어드는 바람결에 꽃 내음이 나부끼고,
주변을 감싼 대기는 마치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하고 안온했다.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녀의 시야에 또 다른 기억이
겹쳤다.

'내 목숨을 가져가고 대신 그를 살려 줘.'

바엘…….

그녀의 창백한 뺨이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은 어떻게 됐는지, 그런 사소한
일 따윈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잊었다는 것에,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에 그립고 사무쳐 눈물이 흘렀다.

자신이 없는 세계에서 바엘은 지금까지와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되리라. 그러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길 수도


있고, 그녀와 행복해질 수도 있으리라. 자신에게 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인데 그는 자신을 영영
모르게 되는 것이다.

"흑……."

눈물을 닦을 힘도 없어서, 그녀는 누운 채로 마냥 울먹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사랑한다고 말할걸.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이라도 해 볼걸.

시간이 멈춘 듯 적막한 공간에 그녀가 훌쩍이는 소리만이 가득 울려 퍼졌다. 듣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할


정도로 서러운 울음소리. 머리 위로 낮은 인기척이 내려앉을 때까지도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한 섞인
울음을 토해냈다.

"……."

그런 그녀의 뺨 위로 길고 서늘한 손가락이 내려앉는다. 그러곤 율리아가 눈을 뜰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점점 더 서럽게 울었다. 이 공간에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보는 눈이 없으니 더는 참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녀는 꺽꺽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오열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바엘의 눈동자가 아프게 물들었다. 아주 오래 전에도, 율리아는 분명 이렇게 울고


싶었으리라. 이토록 거대한 슬픔을 이 작은 몸 안에 힘겹게 욱여넣었으리라.

"내가, 잘못했다."

시간의 흐름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먼 세월을 오직 그녀가 눈뜨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정작
깨어난 그녀는 너무도 상처 입은 채였다. 돌이키지 못할까 두려웠다.

바엘은 율리아에게 더는 손대지 못한 채 힘없이 무릎 꿇었다. 마계 전체를 지배하던 절대 권력의 군주가


작은 여자 하나를 위해 애원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네게 저지른 내 모든 짓이……."

율리아가 생을 되찾자 그들이 나눈 계약 또한 되살아났다. 심장 위의 붉은 각인이 다시금 선명히 떠오른다.


지울 수 없는 과거의 흔적. 자신이 그녀에게 저지른 참혹한 죄의 말로.

"나를 원망하고 있나. 내게서 벗어나고 싶겠지."

바엘은 자신을 향한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 이윽고 자신의 존재를 알아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이 오싹한 전율이 등허리를 타고 올랐다. 이런 스스로가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하지만 도저히 너를 놓을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울고 애원하더라도 차마 내 손으로 널 떠나보낼 수가


없어."

"……."

"미안하다. 이렇게 이기적인 존재가 바로 나라서. 이런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녀가 깨어나 벅찬 감정조차 죄스러웠다. 율리아의 시계추는 이제 막 흐르기 시작했지만, 수백 년 동안


멈춰 있던 바엘의 추는 여전히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였다. 고쳐줄 작고 따스한 손길을 기다린 채로,
여전히 그렇게.

"바엘, 저는요. 늘 버림받기만 했어요.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율리아는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럼에도 힘없이 무릎 꿇은 바엘의 얼굴은 여전히 그녀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나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쓸모없는 존재일 거예요. 분명 그럴 거예요."

놀란 바엘이 곧장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보다 율리아가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하지만 당신 곁에 있으면, 왜인지 내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존재처럼 느껴져요. 쓸모나


소용에 관계없이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수 있다고……."

율리아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팔을 들어 바엘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붉은 눈동자는 세월의 풍화를


견디며 차게 메말라 있었지만,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웃었다.

"당신이 나의 세상을 바꿨어요, 바엘."

"……."
"사랑해요."

드디어, 드디어 가슴에 사무쳤던 이 말을 그에게 건넸다. 이것이 설령 꿈이라도 좋았다. 바엘이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을 리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분명 꿈이었다,

하지만 그런 착각을 깨부수듯, 율리아의 손바닥 위로 물방울이 뚝뚝 고여 들었다. 놀란 그녀는 퍼뜩


시선을 들었다. 자신을 보는 바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랑한다, 율리아."

무릎걸음으로 기다시피 그는 율리아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녀의 가녀린 뺨을 양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댔다.

"내게 속죄할 기회를 줘. 너의 평생을 내게 다오."

"……."

아아, 사람이 너무 행복할 때에도 눈물이 날 수 있구나.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입술 위로 새털 같은 키스가 내려앉았다. 동시에 탑의 봉인이 깨지며


눈부신 햇빛이 행복한 연인의 머리 위로 가득 쏟아져 내렸다.

셀 수 없이 기나긴 시련과 고난 끝에, 율리아는 드디어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았다.

[▷SYSTEM

축하합니다. 히든 엔딩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이 확정됩니다.]

[▷SYSTEM

이 안내가 사라짐과 동시에 모든 시스템 기능이 파기됩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오로지 당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앞으로의 나날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120 화

마왕 바엘이 오랜 영면에서 깨어났다. 그의 사랑스러운 비와 함께였다.

권능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대악마가 둘이나 눈을 뜨니 마계 전체가 뜨거운 전율에 휩싸였다. 마성을
지닌 모든 것이 성지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지배자의 위광을 맞이했다.

모두가 마왕 복권을 염원했다. 신정부를 이끌던 아가레스나 바르바토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들은
마계를 진정한 주인께 돌려드린다며 기쁘게 무릎 꿇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가레스가 세운 통령 정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바엘의 마력이 더 이상


'왕'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초의 심장과 합치된 바엘의 육신은 더 이상 단순한 그릇이 아니었고, 율리아를 깨우기 위해 스스로를
죽인 억겁의 시간은 역으로 그가 새로이 얻은 마력을 온전히 융화시킬 기회가 되었다.

비로소 그는 신이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지하의 백성들은 더욱 환호한 반면 인계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수백 년 전 인-마


전쟁을 겪은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기억만큼은 역사를 통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발등에 불 떨어진 각 국가들은 앞다퉈 지하로 사절을 보냈다. 바엘의 환심을 사고 마계의 정황을 살피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런 인계의 분위기는 전혀 별세계 이야기인 것처럼, 온갖 꽃이 만발한 악마성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율리아, 여기 봐! 베로가 아기 낳았어!"

율리아는 어느덧 아름다운 청년으로 성장한 파이몬의 손을 잡고 성 뒤편에 자리한 베로의 집에 찾아갔다.
갓 몸을 푼 베로는 그런 둘을 발견하고 붕붕 꼬리를 흔들었다.

등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새끼 늑대일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율리아는


새삼 감격해서 베로의 목덜미를 마구 쓰다듬었다.

"너무 고생했어. 이게 다 몇 마리야?"

베로의 배 밑으로 꼬물거리는 머리 셋이 보였다. 율리아가 재차 힘차게 베로의 노고를 위로하려는 찰나,
파이몬이 해맑게 답했다.

"한 마리야!"

"하지만 머리가 세 갠데?"

"그래도 한 마리야!"

율리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이몬의 말대로 몸통 하나에 머리 세 개가 달렸다. 신화 속 지옥의


파수견이 정말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축하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쉽게 분간할 수 없었다. 무리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새끼가
혹여나 따돌림 당하진 않을까 염려한 탓이었다.

"으음, 여차하면 내가 잘 길러서 돌려보낼게. 너무 걱정 마."

새끼가 타고난 마력을 생각하면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어쨌든 베로는 그런 율리아의 마음도 모른
채 눈을 반짝였다. 그녀가 만져 주니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닐 텐데?"

바로 그때, 갑자기 나타난 바엘이 율리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화창하고 기분 좋은 날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위압적인 표정을 한 채였다.

율리아는 바엘의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가 막 일어났기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그녀가 아는 한 바엘은


가장 잠이 많은 악마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매서운 눈매는 율리아를 침실 밖으로 꼬여 낸 파이몬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가 상황을 알아채기 전, 바엘은 율리아의 이마 위로 느긋이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마력을 이용해
침실로 옮겨갔다. 남들 앞에서 애정 표현하는 걸 매번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

하지만 편안한 공간에 들어선 뒤에도 그는 율리아를 도통 품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네 소식은 도대체 언제 들려줄 거지?"

"소식이라니,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그렇게 씨를 흘려 주는데 도무지 기미가 안 보여. 얼마나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지."

바엘의 시선이 율리아의 납작한 배를 진득하게 훑었다. 밑에 제 씨를 가득 머금은 그녀의 절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성기에 피가 쏠렸다.

"성에 시끄러운 놈들이 주렁주렁 딸려 있으니 계속 꽂아 놓는 건 어렵겠지. 십 년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역시 어디론가 떠나는 편이 좋을까?"

"바엘은 농담도……. 저 힘들어서 쓰러질 거예요."

"그럼 그냥 있어. 전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바엘은 그녀를 안은 자세를 바꿨다. 한 팔로 엉덩이를 받친 채 상체를 제게 기대게 했다. 그러곤


자유로워진 나머지 손으로 그녀의 다리 안쪽을 지분거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공들여 적시고 벌려 놓았던
밀부가 시치미 떼듯 굳게 다물렸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처럼 번번이 찾아와 밀월을 방해하는 놈들이나, 율리아의 주변을 친구 혹은 신하란 핑계로 끝없이
맴도는 놈들이나, 순진해 빠져선 그들의 거짓말만 믿고 순진하게 곁을 내어주는 율리아도. 전부.

"흐응!"

"지금부터 십 년으로 할까."

"바엘, 잠깐, 잠……!"

중지로 음핵을 슬쩍 비벼 주었을 뿐인데 율리아는 파르르 떨더니 바엘의 목덜미에 와락 안겨들었다.
밀려드는 쾌락을 애써 참으려는 작은 몸이 애처롭다.

"힘 풀어야지? 그래야 내가 잘 만져 주지."

"당신, 흑, 정말……."

율리아가 협조하지 않아도 바엘은 그녀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당장 페니스를 쑤셔 넣은 채


침실의 마법진을 무너뜨려, 모두에게 그녀를 가진 사내가 누구인지 낱낱이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율리아는 쾌락에 굴복해 성기를 가득 삼키면서도 기어이 눈물을 터뜨리고 말리라. 그 모습을
상상하자 잔인한 가학심이 머릿속에 득실거렸다.

"느껴지나? 넣지도 않았는데 벌써 흥건하군."

"하으!"

"여기가 좋지?"

그럼에도 들끓는 정염을 억누르며 기다리는 것이다. 애가 탄 그녀가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자신을
받아들이길. 그녀가 자신을 갈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길 말이다.

"더 안쪽……. 응, 응!"

"여기?"

"아니야아……."
바엘이 손가락으로 질구만 대충 쑤걱거리자 율리아는 애가 탔다. 안쪽이 간지럽다 못해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는 바엘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내렸다. 마침 타이밍이 들어맞아 굵직한 손가락이
뿌리까지 남김없이 삽입됐다. 율리아는 분주히 허리를 찧어대면서도 한편으론 아이처럼 칭얼댔다.
본능적으로 더 크고 단단한 것을 원하고 있었다.

"내 허락도 없이 멋대로 움직이고 말이지."

그런 그녀를 질책하는 바엘의 목소리는 엄하고 차갑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정작 붉은 눈매는 배부른
맹수처럼 만족스럽게 휘었다.

그제야 그는 율리아를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러곤 그녀의 골반을 끌어당겨 흉흉하게 발기한
선단에 질구를 맞췄다. 푹 젖은 채 안을 채워 줄 것을 찾아 애타게 벌름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자아라도
있는 듯 보였다.

"안에 가득, 빨리……. 나, 어떻게 좀."

"내겐 너만 있으면 돼."

"빨리이."

"그러니 그냥 다 죽여 버릴까."

사실 바엘은 줄곧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사랑한다 말해도 안심할 수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가 율리아의 심장에 각인이 되어 남았다. 그녀가 악마로 다시 태어나서도 사라지지 않을 만큼
깊은 원죄였다.

그것을 목도할 때마다, 바엘은 율리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향한 모든 시선이, 그녀가 담는 모든 풍경이 눈에 거슬렸다. 마음 같아선 오직 자신만 볼 수


있도록 어딘가에 가둬 두고 싶었다. 그럼 결국 율리아가 사랑할 이도 자신밖에 안 남겠지.

'율리아가 알면 치를 떨겠군.'

바엘은 자조했다.

고립된 채 외롭게 살아온 그녀의 과거를 알기에, 남들 사이에서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


없기에. 가녀린 그녀를 차마 상처 입힐 수 없어 이런 식으로 위태로운 공생을 이어나갔다. 고작 질투나
하는 꼴사나운 자신.

'이 인내심이 끊기는 날엔 결국 율리아가 날 버릴 테지.'

상상만으로도 뇌관이 끊길 것 같았다. 주변의 마력이 위태롭게 일렁인다.

그때, 바엘의 뺨 위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닿았다. 흥분에 젖은 채로 율리아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엘의 씨를 내게 주세요."

마치 그의 모든 생각을 아는 것처럼.

"당신의 씨를 안에 가득 뿌려 주세요. 오직 당신의 것을 원해요."


단지 시선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눈이 부신, 그리하여 어째서 제 곁에 머무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하고 찬란한 나의 사랑. 기나긴 악마의 생에 단 하나뿐인 사랑.

결국 속절없이 꺾인 바엘은 그녀의 작은 몸을 부서져라 안고 또 안았다. 율리아는 세찬 풍랑에 휩쓸린


쪽배처럼 흔들리면서도 제게 매달려오는 바엘을 품안 가득 끌어안았다.

비좁은 뱃전에 파도처럼 넘나드는 쾌락 너머, 해일과 같은 열렬한 감정이 밀려든다. 연결된 각인 너머로
바엘이 느끼는 감정에 동화되어 율리아는 속절없이 몸을 맡겼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고 안온하다.

자신과 같은 감정을 그 또한 느끼고 있다는 게.

"사랑한다, 율리아."

"아……!"

눅진한 씨물이 메마른 자궁을 가득 적셨다. 율리아는 열락에 허덕이면서도 그것을 다른 무엇보다 소중히
품었다.

* * *

위로는 마계를 이끄는 세 통령부터 아래로는 머리 셋 달린 마수까지, 온갖 악마들이 하루가 멀다고 바삐


드나드는 악마성에 사랑스러운 아기 악마가 눈을 떴다.

연분홍빛 도는 백금발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녀 쌍둥이였다.

기분 좋은 햇살이 가득 비추고 세상엔 꽃이 만발한 봄날, 율리아는 정원에 앉아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토닥토닥 잠재우고 있었다.

"작다……."

"조용히 해. 쌍둥이 깨잖아."

그런 그녀의 옆에 파이몬이 쪼그리고 앉아 신기한 듯 눈을 굴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닌 척 모습을


지켜보던 레라지에가 냅다 핀잔을 줬다.

"나 참, 어이가 없네. 네놈 목소리가 더 크면서!"

"뭐가 어쩌고 어째?!"

둘은 나름 착실하게 소리를 죽였지만 그래도 막 잠들려던 아이들에겐 충분히 자극적인 소리였다. 두 쌍의


붉은 눈동자가 말똥말똥 빛을 되찾자 맞은편에 앉아 자수를 두던 레벤나가 거대한 도끼를 집어 들었다.

"너희 둘 다 따라오렴?"

"왜, 왜……!"

"일단 오렴?"

두 악마의 목덜미를 쥔 레벤나가 멀찍이 사라진 길목으로 이번엔 다른 악마가 들어온다. 마신 강림 이후


인계와의 외교를 담당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레기온이었다.

그들은 정원을 철통같이 지키는 키마리스에게 흘깃 눈짓했다가 이내 율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피차 포기할 생각은 절대 없다. 순진한 율리아에겐 다른 이유를 둘러대며 끝까지 곁에 붙어 있을 테다.


꼭 이루어져야만 사랑이던가. 그저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이토록 황홀하고 행복해 견딜 수 없는데. 만에
하나 기회가 생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말이다.

자신들의 속내를 아는 바엘이 몸서리칠 때마다 되레 즐거워진다. 악마란 이토록 이기적인 존재들이었다.

"나 때문에 아이들 깬 거야?"

"아니야, 그냥 오늘따라 좀처럼 잠에 못 드네. 날씨가 화창해서 그런가, 기분 좋은가 봐."

율리아의 속삭임에 레기온은 가만 시선을 들었다. 이곳이 인계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하늘이 높고 맑았다.


그녀의 상냥함을 닮은 날씨였다.

"하나 이리 줘. 힘들겠다."

"응."

"손 바뀌어도 칭얼거리질 않네. 널 닮았어."

레기온은 사내아이 쪽을 번쩍 안아 들었다. 겉모습은 바엘을 빼다 박았지만 지닌 마력의 파장만큼은


율리아를 닮아 온화하고 잔잔했다.

그녀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토록 사랑스러워진다. 레기온은 아이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친 채
등을 토닥였다.

어쩐지 주변이 조용하다 싶더니, 자신과는 다른 의미로 호시탐탐 율리아를 노리던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아가레스는 너한테 꿀 발라 놓은 것처럼 굴더니 오늘은 웬일로 없네."

"안 그래도 오전까지 같이 있다가 바르바토스 님이 데려가셨어. 바쁠 텐데 매번 오셔서 도와주시니까 너무


죄송스러워."

아가레스는 매번 본인이 좋아서 오는 거란 점을 분명히 밝혀 왔다. 다만 율리아는 아가레스의 항변을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란 게 문제였다.

레기온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율리아의 기분 좋은 파장이 자신에게까지 전해진다. 살갗에 닿는 아이의


온기가 따사로웠다. 이런 평화가 자신에게 올 거라곤 예전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이것이 바로
행복이리라.

그때, 율리아가 어어-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안고 있던 여자아이가 목을 가누더니 율리아의 품에서
벗어나 파닥파닥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사내아이도 냉큼 조막만한 날개를 펼치며 날갯짓을 시작한다. 그러더니 레기온이 붙들


새도 없이 두둥실 높이 떠올랐다.

"유, 율리아. 이거 괜찮은 거 맞지? 이러다 떨어지면 어떡해? 일단 잡아야……!"

"어, 어? 나도 모르겠어. 애초에 우린 어렸을 적에 인간이었잖아!"

레기온과 율리아는 당황했다. 악마로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적이 없으니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시기에


비행하는 게 정상인지 아닌지 판별하기 힘들었다.

당황한 레기온이 그들을 쫓아 달리고, 율리아도 빠르게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찰나였다. 등 뒤에서 바엘이
나타났다.

"괜찮으니 그냥 있어."
"하지만……."

"차분히 지켜봐."

그녀의 발이 땅에 닿는 것조차 아까운 듯, 그는 율리아를 소중히 안아 들고 대신 아이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까지 날아갔던 쌍둥이가 파닥파닥 열심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잠깐 새 날갯짓이


제법 익숙해진 태가 났다. 엄마인 율리아를 보며 방긋 미소 짓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당신 말이 맞았네요?"

"그럼 상을 줘야지."

"뭘 원해요?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

율리아가 시선을 들자 바엘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이 여실히 전해졌다.

그녀는 상체를 들어 바엘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너무나 행복한, 평소나 다름없는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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