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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1.10.

26 07:25:16

처널리즘과 황우석 보도

요령 있게 만든 새 말은 관심을 끈다. ‘처널리즘’이란 말도 그랬다. 제품을 대량으로


찍어낸다는 뜻(churn out)과 저널리즘이 합쳐진 서양말 처널리즘은 쉽게 저널리즘을
떠올리면서도 엇나간 저널리즘 세태를 찌른다. 이 말을 처음 들은 것은 2009 년 세계
과학언론인회의의 런던 대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관련 주제의 토론을 지켜보며 느낀
분위기로는, 처널리즘은 이미 영국 언론계에서 유행어였고 특히 전문 분야 홍보자료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과학 기사를 쓰는 이들 사이에서 관심사였던 게 분명했다.

이 말은 만든 사람이 따로 있지만 영국 탐사보도 언론인 닉 데이비스의 책 <편평한 지구


뉴스>(2008)를 통해 널리 퍼졌다. 그는 이 책에서 영국의 유수 언론에 실린 기사 중
상당수가 보도자료에 의존한 것이라는 어느 매체 연구 결과를 다뤘고 이는 논쟁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이 말은 이제 ‘홍보자료나 통신사 보도를 그대로 옮겨적는 언론 보도
세태’를 이르는 말로 굳어졌다.

그저 언론 세태를 꾸짖는 신조어 중 하나려니 생각했는데, 몇달 전엔 영국에서


처널리즘닷컴(churnalism.com)이라는 웹사이트까지 만들어졌다. 보도자료와 기사를 비교
검색해 기사가 보도자료를 몇%나 그대로 옮겨적었는지 계산해주는 검색엔진이다. 홍보자료
전체나 특정 문장을 따다가 검색창에 넣으면 홍보자료와 닮은 영국 매체 기사를 보여준다.
일치 비율이 20% 미만인 기사도 많지만 70~80%나 되는 불명예 기사도 뜬다. 이름난
<비비시> 방송의 기사도 처널리즘 혐의에 걸려들기도 한다.

이 사이트를 처음 봤을 때 국내 과학 기사들은 사정이 어떨까 궁금했다. 국내엔 이런


검색엔진이 없으니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먼저 보도된 뉴스의 홍보자료 원문을 정부나
기관의 웹사이트에서 찾는다. 그런 뒤에 일부 문장을 따다가 네이버 뉴스의 검색창에다 넣고
검색한다. 그랬더니 ‘너무 많은’ 매체 기사들이 홍보자료와 ‘너무 많이’ 닮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사의 자존심과 같은 첫 문장(리드)이 홍보자료의 첫 문장과 일치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연히 좋은 보도자료는 많이 인용될 만하다. 마감에 쫓기며 생소한 기사를 쓰는 기자한테


홍보자료는 취재의 유익한 출발점일 수 있다. 기사가 보도자료와 닮았다 해서 곧바로 비판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기사가 홍보자료와 닮은 ‘집단적 패턴’은
무언가 깊은 씁쓸함을 던져주었다.
몇달이 지났다. 최근 황우석 박사 연구팀과 경기도가 “멸종위기에 처한 코요테를 개
난자를 써서 복제했으며 이런 이종복제는 개과 동물로 세계 최초”라는 연구결과를 크게
홍보했을 때 다시 처널리즘이 떠올랐다. 많은 매체가 연구성과에 찬사를 보냈으며 ‘황우석의
컴백’ 드라마를 전하는 기사들도 눈에 띄었다. 이번 보도에서 우리 언론은 홍보자료를
어떻게 활용했을까? 다시 궁금해졌다.

경기도와 연구팀이 낸 홍보자료의 문장들을 따서 뉴스를 검색했다. 여러 온라인 기사에서


홍보자료의 주요 대목이 토씨까지 똑같게 나타났다. ‘멸종위기에 처한 코요테’라는 잘못된
문구도, 학술적 논란의 여지를 남긴 ‘세계 최초’라는 연구팀의 자체 평가도 여과 없이
기사에 옮겨졌다. 첫 문장까지 같은 기사도 꽤 있었다.

온라인 시대에 많은 매체가 거의 실시간으로 빠르게 보도하려고 경쟁한다. 이제 더 빠르고


더 많아진 뉴스는 독자의 정보생활을 유익하게 바꿔놓았을까? 속도 경쟁에 빠진 우리는
홍보자료가 마련해준 스토리텔링의 길을 따져보지도 못한 채 잘라내기와 붙여넣기로
따라가고 있진 않은지 다시 생각해본다.
[오철우 기자 / <한겨레> 10 월 26 일치 칼럼 '한겨레프리즘']
보도자료의 첫 문장인 " 황우석 박사 연구팀이 세계최초로 멸종위기에 처한 코요테 복제에
성공"이란 문장을 네이버 뉴스에서 검색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일부). 네이버 화면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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