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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논문집

철학논집 제21집 2010. 05.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1949 년 이후)
치아오 칭쥐 (남개대학)

요약

이 논문은 현대 중국에서 이루어진 중국철학에 대한 연구를


철학사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20세기 중반 이후
중국철학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 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949년
이후 중국에서 수행된 중국철학 연구는 여섯 단계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1949~1956년, 1957~1959년, 1960~1966년, 1966~1976년,
1976~1989년, 그리고 1989년 이후, 이렇게 여섯 시기로 현대의
중국철학 연구사를 정리하는 것이 주요할 것으로 본다. 특히, 1980년대
이후의 현대 신유학 연구는 학계의 시야의 폭을 넓혔고 중국철학에 대한
인식을 풍부하게 하였으며, 1949년 이래 존재하던 중국철학연구의 단순
비판적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1949년 이후의 중국철학사 연구를
전반적으로 반성해 보면, 연구방법론의 전환이 중국사회의 발전과
상호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이성의 성숙과 중국문화의 주체성의 확립을
지향하여 발전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주제분류: 현대중국철학
핵 심 어: 중국철학사학사(中國哲學史學史), 이성의 성숙, 문화주체성, 중국
철학의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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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이후의 중국철학사 연구에 관하여 본 논문은 대략 4부분으


로 나누어 다룬다. 1장은 중국학술계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중국철
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논의이다. 2장에서는 1949년~1999년 사이의
중국고대철학 연구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다.(이 주제에 관하여 필자
는 이성의 반성과 초월-현대중국철학사학사(理性的反思与超越——
当代中国哲学史学史)라는 70만자 분량의 글을 썼는데, 올해 상반기
에 남개대학출판사에서 상하권의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3장에서
는 1980년 이후의 현대 신유학연구의 의의를 다루는데, 개인적 관점
의 연구는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4장에서는 중국철학사 연구
분야 전반의 존재의의와 발전방향에 대하여 필자의 견해를 제시한다.
필자가 사용하는 “현대중국”에서 “현대”란 1949년 이후를 가리키
고, “중국”은 중국대륙 학술계에 국한되며 홍콩 및 대만 학술계는 포
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949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중국대륙 학술
계는 홍콩 및 대만, 해외와 거의 교류가 없었고,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학술연구방식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대륙 학
술계는 홍콩, 대만, 미국, 일본 학술계와의 교류가 점차 증가하였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하였다. 중국철학과 한국 학술계의
관계는 1992년 중한 수교 이후 대규모의 진전이 있었다.

중국에서의 철학”으로부터 “중국의 철학”으로:


1. “
“중국철학” 개념의 설명

“중국철학”에서 “중국”과 “철학”은 형용 관계로서 “중국의 철학”이


라고 할 수 있으며, 중국에서 형성되고 발전한 철학이 바로 중국 전통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7

철학이다. 그러나 “중국철학”은 “중국에서의 철학”을 가리키기도 하


므로 여기에는 서양철학, 인도철학, 마르크스 철학 등이 모두 포함되
며, 여기서는 일종의 집합개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중국은 지
역명이며 중국에서의 철학과 “중국” 사이에는 내재적 관계가 없다.
“중국철학”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으니, 전적으로 “마르크스 철학”을
가리킨다.
“중국철학”과 “중국철학사”의 적용 역시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중국고대철학의 연구를 “중국철학사”라고 지칭한다. 대학
교 철학과의 전공체계는 대체로 “(현대 신유학을 포함한) 중국현대철
학”을 독자적인 전공분야로 둔다. 하지만 근래 들어 각 대학마다 구성
원의 감소로 인하여 전공체계에서 두 분야가 하나로 통합되는 현상이
매우 많아졌다. 상황이 이러하긴 하지만 두 분야는 여전히 적용에 미
묘한 차이가 있다. “중국철학사”는 역사상의 중국철학을 객관적 연구
대상으로 삼는 데 치중한다. 반면 “중국철학”은 주로 중국철학을 발전
시킨다는 의미를 띤다. “사(史)”는 오래된 태도와 방법을 의미하는 것
으로 비춰지며, “사”가 없는 “중국철학”은 새로운 태도와 방법을 의미
한다. 이것은 중국철학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가 아닌가를 두
고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이밖에 “서양철학”과 대칭된 의미로도 보통
“중국철학” 개념을 사용한다. 중국에서 서양철학사 분과는 마르크스
철학의 탄생까지로 시기를 제한하고 이후는 현대서양철학이라고 부른
다.
오늘날 중국의 철학연구의 발전추세를 보면 “중국에서의 철학”으로
부터 “중국의 철학”으로 점차 변모하였다.
현대(1919년)에 들어선 이후 중국철학은 주로 유럽대륙철학, 특히
독일철학과 영미분석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에서의 철학은 주
로 서양철학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독일철학과 중국철학의 관계는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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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오래되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찍이 17세기에 선교사가 중국철학


의 전적을 서양으로 전하였고, 중국철학은 독일의 라이프니츠, 볼프,
칸트 철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687년 독일에서 공자와 중국철학
1
이 출판되었으며 , 1716년 라이프니츠는 중국철학에 관한 서신을
출판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주로 독일철학이 중국철학에 영향을 끼쳤
다. 1923년 봄, 중국학자 장이(張頤)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헤겔을 연
구하였으며, 후에 다시 독일 에를랑겐(Erlangen) 대학으로 유학하여
헤겔윤리탐구(영문판)를 저술하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장이 교수는 귀국 후 북경(北京) 대학, 하문(厦門) 대학,
사천(四川) 대학에서 재직하였다. 20세기의 30-40년대에 중국철학계
는 주로 칸트,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풍우란(馮友蘭), 하린(賀
麟) 등은 모두 헤겔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모종삼(牟宗三),
당군의(唐君毅) 선생도 칸트,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매우 확
실하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철학은 다시 유럽대륙, 주로 독일과 프랑
스 철학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였으며,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 정신분
석학도 받아들였다. 쇼펜하우어, 니체,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카
뮈 등이 중국에서 일으킨 철학적 파장은 매우 대단하였다. 중국철학
연구영역에서 현상학과 하이데거 철학을 이용하여 중국 전통철학을
연구한 저작이 등장하였다. 마르크스 철학도 독일철학으로 간주한다
면 중국이 독일철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독일철학뿐만 아니라 영미분석철학이 중국철학에 미친 영향 역시

1. 1687년 백응리(柏應理)는 파리에서 라틴어판 중국현철공자(中國賢哲孔子)


(Confucius Sinarum Philosophus)를 출판하였는데, 중국어 서명은 서문사
서직해(西文四書直解)(실제로는 맹자가 결본이어서 세 권뿐이다.)이다. 이
는 17세기 유럽에 공자와 그 저술을 소개한 가장 완비된 서적이며, 네 명의
선교사 殷鐸澤, 恩理格, 魯日滿, 柏應理가 다년간 중국에서 선교한 공동의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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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하였다. 풍우란 특히 김악림(金岳霖)은 분석철학적 방법을 채택하


였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분석철학적 방법을 채택하였을 뿐 그것의
반형이상학(反形而上學)적 결론이나 관념을 채택하지는 않았다. 풍우
란, 김악림은 모두 신실재론자(新實在論者)로서, 분석과 논리의 방법
을 사용하여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를 세우고 논증하였다. 그들이 이렇
게 한 것은 사실상 본체 의미를 지닌 중국철학의 건설과 서양 선진문
화의 수용이 서로 결합한 결과이다. 이것은 또한 “중국에서의 철학”이
중국의 철학으로 변모하였음을 설명해준다.
1949년 이후 철학자가 자신의 체계를 세울 가능성은 사라졌다. 웅
십력(熊十力) 이외에 모든 학자들은 중국철학사를 객관적 대상으로
삼아 연구를 진행하였다. 지난 세기 90년대 이후에 이러한 태도에 변
화가 일어났다. 예를 들면 장세영(張世英, 천인합일(天人合一), 징
명지경(澄明之境))은 기본적으로 독일철학을 소화한 바탕 위에서 자
신의 철학을 해석하고 수립하였다. 기타 학자들도 이러한 경향을 띠는
데, 장상용(張祥龍) 등의 연구가 그러하며, 장입문(張立文)은 자신의
“합화(合和)철학”을 세우고 있다. 90년대 이후 분석철학의 방법에 의
존하여 자신의 철학을 수립한 학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석철학이 지나치게 전문화, 기술화되어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고, 중국철학과도 더욱 멀어진 탓이다.

2. 민족이성이 성숙해가는 여정: 1949년 이후의


중국고대철학연구
이제 “민족이성이 성숙해감”을 주제삼아, 1949년부터 2009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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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중국철학사 연구를 하나의 분과로 놓고 “중국철학사학사(中國哲學


史學史)”에 대하여 탐구하겠다.
현대중국은 근대 이래의 문화적 단절을 계승하였고, 고대철학은 정
태적이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대상”이자 “유산”이 되었다. 각종
외래 사조가 끊임없이 유입되어 중국철학사 연구의 사관(史觀), 방법
론, 원이론(元理論) 내지 지도사상이 되었으며, 중국철학사 연구는 중
국에 들어온 뒤에 서로 다른 정도의 변형이 발생한 이들 “원이론”을
가지고 중국철학을 주시하는 과정이 되었다. 이처럼 현대 중국철학사
연구 또는 중국철학사학사에는 내용상으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는 원이론 혹은 사관의 발전이고 둘째는 원이론을 바탕으로 획득된
중국철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이 두 측면은 현대중국의 철학의
발전과 사상적 면모를 실질적으로 반영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철학사
학사 또한 중국철학사 연구를 중심 분야로 삼는 현대 중국사상사, 철
학사이며, 이는 현대 중국철학사학사의 본질이다. 현대의 중국고대철
학 연구는 아래의 몇 가지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1949-1957) : 중국철학연구의 유형과 용어 체계의


개조 이 단계의 주요 임무는 주다노프(Zhdanov) 유형과 모택동 사상
을 보급하여 1949년 이전 풍우란 등이 확립한 연구방법을 바꾸는 것
이다.
1949년 전후 일어난 중국철학사연구의 원이론의 변화는 의심할 여
지없이 1949년 정권교체의 논리적 산물이다. 신정권과 학계는 모두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47년 6월 20일, 소련 공산당 중앙
의 의식형태 주관 서기 주다노프는 소련 공산당 중앙을 대표하여 알
렉산드로프의 저서 서양철학사에 대한 토론회에서 강연하였다. 이
강연은 신속하게 이립삼(李立三)에 의해 번역되어 각지에서 출판되었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11

고, 주다노프의 「서양철학사」 토론회에서의 강연이라는 제목으로


2
1954년까지 8만부가 인쇄되었다. 학자 측에서도 자발적인 이해를 거
쳐 주다노프 유형의 적용을 시험하였다. 1949년 5월 24일부터 정흔
(鄭昕)과 김악림이 관련 학자들을 소집하여 철학과 철학사 문제를 토
론하였으며, 그 가운데 세 번째 모임에서는 주다노프의 철학사 정의
3
문제를 토론하였다. 1949년 6월 19일, 풍우란은 철학자가 당면한
임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글머리에서 주다노프의 강연을 언급하
였다. 이것은 아마도 중국철학사계의 이 강연에 대한 가장 이른 언급
4
일 것이다. 1950년부터 중국철학사계는 관련 분야의 요구로 체계적
으로 이 강연을 학습하기 시작하였고, 연구 유형을 전환하여 새로운
용어체계에 적응하였다. 주요 학습자료는 소련공산당사간명교정(聯
共(布)黨史簡明敎程), 주다노프의 알렉산드로프 「서양철학사」 토론
회에서의 강연, 실천론, 모순론이었다. 사상개조운동은 동시에
모택동 사상을 보급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학습과 개조를 통하여 학술
계는 기본적으로 주다노프 유형을 받아들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1. 투쟁사관(史觀): 철학사는 유물론과 유심론의 투쟁사이다.

2. 1949년 10월을 전후하여 화북신화서점, 산동신화서점, 동북서점, 익노예(翼


魯豫), 보찰익(普察翼), 상해시대서보사, 중원신화서점 등이 각각 论哲学史
诸问题及目前哲学战线的任务, 苏联哲学问题, 日丹诺夫同志关于西方哲学
史的发言, 论哲学史诸问题及目前哲学战线的任务, 论文学艺术哲学问题
등의 이름으로 인쇄되었다. 1950년과 1954년에 다시 각각 苏联哲学问题,
在关于亚历山大洛夫著〈西欧哲学史〉一书讨论会上的发言의 명칭으로 신화
서점과 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3.《新建设》报道“中国新哲学研究会组织之座谈会自49年5月24日起,开会32
次。”
4. 冯友兰:《三松堂全集》,河南人民出版社,1994年,第13卷,第3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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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적론사관: 철학사는 과학적 유물주의의 잉태와 발전의 역사이


다.
3. 혁명사관: 철학사연구는 현실의 혁명을 위한 과정이다.
4. 대응사관: 철학에서 유물론과 유심론의 구별은 정치적으로 진보
및 반동계급과 각각 대응한다.

이 네 가지 관점은 상당히 오랜 시기 동안 중국철학사 연구의 금과


옥조가 되었다.

두 번째 단계(1957-1959) : 새로운 유형의 초보적 반성 및 그 좌


절 이 단계에서는 주로 주다노프 유형을 반성함으로써 “반우(反右)”
와 “수정주의에 대한 반대”에 작별을 고한다.
투쟁사관의 논리적 결론은 유물론과 유심론이 각자 발전하여 각자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목적사관의 논리적 결론은 마르크스주의 정점
이론이다. 혁명사관의 논리적 결과는 협의의 “복무(服務)사관”이다. 대
응사관은 철학사적 인물에 대한 계급 분석에서 잘못된 지위의 선정을
야기하였다. 1956년 5월 25일, 중국공산당 중앙은 “백화제방, 백가쟁
명”을 제시하여 “인민 내부는 유심주의를 선전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
5
하였다. 이후에 사회는 점차 자유개방의 분위기를 형성하였고, 학술계
역시 교조주의에 반대하는 토론이 이루어졌다. 1956년 10월 18일, 정
흔은 인민일보에 유심주의를 개방하자는 글을 발표하여 대학에 유
심주의 철학과정의 개설을 허용하고 일부 사람들이 유심주의를 견지하
는 것을 허락하자고 제안하였다. 10월 23일, 풍우란은 인민일보에 
중국철학사연구에 관한 두 가지 문제라는 글을 발표하여 유물주의와

5. 이러한 발언은 百花齐放、百家争鸣——一九五六年五月二十六日在怀仁堂的


讲话라는 제목으로 1956년 6월 13일 일민일보에 발표되었다.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13

유심주의 사이에도 상호 흡수와 전환이 있다고 제기하였다. 11월 16


일, 풍우란은 중국 인민대학 철학과에서 중국철학사에서 사상의 계승
문제라는 강연을 통해 “추상의 계승”이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1957년 1월 30일, 주백곤(朱伯崑)은 인민일보에 우리가 중국철학
사 연구 중에 직면하는 문제들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유물론과 유심론
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유심주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계급분석
을 어떻게 잘 적용할 것인가, 역사유물주의란 있는가 없는가 등의 중국
철학사 연구가 당면한 문제들을 새로운 유형으로써 체계적으로 분석하
6
였다. 필자는 이들을 중국철학연구의 “주백곤 문제”라고 칭한다.
1957년1월 22일-26일, 북경대학 철학과는 “중국철학사 문제”라는 학
술토론회를 열었는데, 주제는 “교조주의”의 반대였다. 그러나 반우(反
右) 운동의 개입으로 반성은 곧 좌절을 맛보았고, “교조주의”의 반대는
“수정주의”의 반대로 급변하였다. 손정국(孫定國)은 다음과 같이 말하
였다. “수정주의자는 ‘교조주의’를 공격한다는 미명하에 마르크스주의
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을 공격한다. 따라서 자산계급 우파분자의 진공
을 철저히 분쇄하기 위하여 철학 전선에서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투쟁
7
을 전개한다.” 관봉(關鋒)은 당시 “중국철학사 문제 좌담회”에서 “수
정주의 경향”의 막심한 해악에 대해 언급하였다. 장대년(張岱年), 장항
수(張恒壽) 등은 우파라고 공격당했고, 하린, 주백곤의 일련의 발언은
8
“반당 반사회주의적 언행”이 되었다.

6. 주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이 글은 우광원(于光遠)의 요청으로 인민일보에


실리기로 되어 있었다. 발표 전에 우광원이 미리 살펴보고 잘 썼다고 하였
다. 그후 반우 운동 시기에 이 글은 우파 언론의 선봉으로 간주되었고 이
때문에 주선생은 비판을 받았다.
7. 孙定国:《反对哲学思想中的修正主义》,《哲学研究》,1958年,第1期,第1
页。
8. 关锋:《反对哲学史工作中的修正主义》,《哲学研究》,1958年,第1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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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단계(1960-1965) : 상대적으로 평온한 수확의 시기 이 단


계는 대약진 등이 초래한 경제적 곤란으로 인해 대규모의 정치운동이
상대적으로 감소하여 학계는 어렵사리 몇 년간의 상대적인 평온을 누
렸으며 몇몇 성과가 나타났다. 예를 들면 풍우란의 중국철학사신편
(中國哲學史新編) 제1, 2책, 임계유(任繼愈) 주편(主編) 중국철학사
4권, 후외려(侯外廬) 주편 중국사상통사(中國思想通史) 5권 6책이
이때에 전부 출간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중국철학사연구의 걸출한 성
과이다.

네 번째 단계(1966-1976) : 문화대혁명과 평법비유(評法批儒) -


기로에 한 걸음 더 빠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중국철학사 연구는 학
문분야로서의 독립성을 철저히 상실하였고 정치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였다. 유림과 공자를 비판하며 법가를 평가하고 유가를 비판하는 것
이 이들 분야에 주어진 유일한 활동이 되었다. 중국철학 연구가 잘못
된 길로 더욱 빠져들게 된 데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내재적 논리가 있
다. 혁명사관의 극치가 바로 “복무사관”이다. 1950년 3월, 애사기(艾
思奇)는 철학사 연구의 임무는 과거를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
9
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철학사연구도
당연히 현실의 유법투쟁을 위해 복무할 수 있다. 동시에 유법(儒法)투
쟁이 학술적 사실이 된 것도 유형 전환의 결과이며, 그것은 내재적으
로 새로운 유형 속에 포함된다. 평법비유 이전에 풍우란은 중국철학
사신편(초고) 맹자 장에서 이미 “유가와 법가 두 파”의 첨예한 투쟁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문화대혁명은 단지 새로운 유형에 포함된
논리적 결론을 충분히 전개하여 극치로 이끌었을 뿐이다.

9.《新建设》,第3卷,第1期,第22页。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15

다섯 번째 단계(1976-1989) : 개혁개방 이후의 재반성과 새로운


시작 1976년 “사인방”의 분쇄는 중국철학사 연구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1949년과 맞먹는 중요한 대표적 사건이다. 중국철학사 연구는
반성 속에서 문혁을 빠져나와 정상 궤도에 진입하였다. 반성은 사학을
암시하는 데서 시작하여 점차 주다노프식 철학사 정의에 대한 재인식
으로 심화되었으며, 철학사는 일반적인 인식사라는 레닌의 정의를 적
용하여 유심주의를 재평가하고 “과학적” 중국철학사를 건립하였다.
장장 10년 동안의 극좌 사조의 여파로 이때의 반성의 시작은 1957년
보다 미미했고, 깊이도 그때만 못하였다. 80년대 중반에 들어선 이후
인식사의 투쟁사에 대한 지양으로서의 논리적 전개는 중국철학의 연
구대상이 다양화되어 가는 추세를 반영하였고, “범주”와 철학사 발전
의 논리적 전개, 사유방식, 인간의 가치문제에 대한 연구가 등장하였
다. 80년대 역시 통사 출판이 가장 집중된 시기이며 11종의 통사가
출판되었다.

여섯 번째 단계(1990년 이후) : 방법의 다원화, 중국철학의 의의의


재발견과 부흥의 제안 지난 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중국에 발생한
최대의 사회변동은 시장경제 체제의 수립의 제안과 개혁의 심화, 인간
존재의 다원화이다. 이와 동시에, 중국철학 연구의 방법론 역시 다원
화의 추세를 반영하였다. “중화민족정신과 문화 응집력”, “국학열풍”,
“전통문화와 시장경제”, “천인합일”, “화(和)”, “현대신유학”, “마르크
스주의와 유학의 관계” 등의 문제에 대한 토론은 90년대 이후 중국철
학 연구의 풍부한 배경을 조성하였다. 중국철학 연구는 역학철학, 도
가철학 등의 측면에서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실존주의, 현대 서양윤리
학의 관점, 헤겔철학의 이념의 진화 사상은 중국철학의 연구 가운데
방법으로 전환되었다. 중국철학 연구는 해석적 특색을 드러내며,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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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가치는 인간의 정신적 경지를 끌어올리는 데 있다는 것이 학


계의 공론이 되었다. 중국철학의 현대적 의의와 미래의 발전의 문제
역시 학자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풍우란 등은 현대신“인
학(仁學)”을 수립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탕일개(湯一介) 선생은 “중국
적 해석학의 수립”을 제안하였다. 호부침(胡孚琛), 허항생(許抗生), 동
광벽(董光璧)과 같은 도가, 도교학자들은 “현대신도가”를 수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들 관점은 모두 학계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다. 마왕
퇴한묘문물(馬王堆漢墓文物), 곽점초묘죽간(郭店楚墓竹簡), 상해
박물관장전국초죽서(上海博物館藏戰國楚竹書) 등 출토자료의 발표는
중국철학 연구의 주제를 더욱 풍부하게 하였고, 중국철학에 대한 기존
의 인식을 적잖이 바꾸게 하였다. 2000년 이후 중국철학계에는 다시
“중국철학의 합법성 문제”에 대한 토론이 일어나 “철학”적 방법에 대
한 새로운 반성을 낳았다.

(1) 주백곤의 역학철학 연구 주백곤 선생의 150만자에 달하는 역저


역학철학사 4권은 의심의 여지없이 중국철학사 분야가 성립한 이래
10
가장 중요한 성과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 저작의 의의로는 대략 다음
의 네 가지를 꼽을 수 있다.
1. 중국철학 연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2. 중국철학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켰다.
3. 관습화된 잘못된 견해들을 바꾸어 놓았다.

10. 이 책은 1986년 북경대학출판사에서 상중권으로 출판되었고, 완간되지는


못하였다. 1992년 대만란등출판사업공사는 4권짜리 번체본을 출판하였다.
1995년 북경화북출판사는 전4권을 출판하였다. 일본에서는 북해도대학 이
동윤후(伊東倫厚)교수의 주관으로 전 4권을 번역하여12권으로 나뉘어 출판
되었다.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17

4. 중국철학 자체의 특징을 설명해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철학사는 풍우란 선생에서부터 진정한 하나의
독립된 학문분야로 되었고,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풍우란
이 철학사를 저술한 방법은, “중국역사상의 각종 학문들 가운데 서양
에서 말하는 철학으로 일컬어질 만한 것들을 뽑아서 서술한다.”는 것
11
이다. 이러한 작업이 초래한 명확한 결과는 중국철학의 정합성을 무
너뜨리고 그 특징들을 없애버렸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풍우란은 정
씨역전(程氏易傳)의 “체용일원(體用一源), 현미무간(顯微無間)”이라
는 명제에 대하여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명제는 정이철
학뿐만 아니라 전체 중국철학에 대해서 보더라도 매우 근본적인 것이
다. 주백곤 선생은 풍우란 선생의 조수로 일할 당시에 풍우란 선생에
게 왜 정씨역전을 언급하지 않았는지 여쭤본 적이 있다. 풍우란 선
생은 이에 대하여, 역학에는 여러 술어들이 있으며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철학사를 쓸 때는 단지 몇몇 개념을 뽑아서 분석하는 수밖
12
에 없다고 대답하였다. 중국철학사학사로부터 보면, 역학철학사는
중국철학을 경학이라는 원생태적 배경 가운데 놓고 중국철학의 특징
을 구현하였다. 중국철학의 특징에 관하여 이 학문분야가 성립한 이래
로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이 있는데, 예를 들면 중국철학은
형이상학 전통이 결여되어 있고, 논리적 사유가 발달되지 않았다, 본
체론은 윤리문제의 해결을 기반으로 하며, 이것은 윤리화된 본체화이
라거나 중국철학은 윤리형태의 철학이라는 것 등이 그것이다. 주백곤

11. 冯友兰:《中国哲学史》上《第二章:泛论子学时代》:《三松堂全集》,第2卷,
第23页。
12. 乔清举:《深林人不知,明月来相照—朱伯崑访谈录》,《中国传统哲学新论—朱
伯崑教授七十五寿辰纪念文集》,郑万耕主编,九洲图书出版社,1999年,第
651-652页。
18 철학논집 21집

은 서양과의 접촉 이전의 근대에는 중국철학자들이 주역에 대한 해석


13
을 통하여 이론적 사유수준을 끌어올려왔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철학
사에는 주역의 해석과 결합한 하나의 독립된 형이상학 체계가 있다.
“중국철학 속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선진 노자에서 시작된다. … 노자
는 형이상학적 원칙을 제안하여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장학
(莊學)의 해명을 거쳐 위진 시기의 왕필에 이르렀고, 마침내 이 원칙
14
을 본체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한대 철학은 주역의 “태극(太
極)”을 “원기(元氣)” 또는 “기(氣)”로 해석하였고, 우주론에 속한다.
왕필의 역학철학은 노자철학과 결합하여 “태극”을 “무(無)”로 보고,
“‘천하만물개이무위본(天下萬物皆以無爲本)’의 명제를 제기하였다. 이
른바 ‘무’는 어떠한 규정성이 없는 실체를 가리킨다.” 중국철학은 이
로부터 본체론으로 진입한다. 송명철학 중의 오대 유파는 理학파, 數
15
학파, 氣학파, 心학파, 公利학파인데, 모두 역학이론과 결합하였다.
이학은 “태극”을 “리”로 해석하고, 심학은 태극을 심으로 해석하며,
기학은 태극을 기로 해석하였다. 이로써 중국철학은 자신의 형이상학
전통을 형성하였다.

(2) 진고응(陳鼓應)의 “도가철학 주도론”과 “역전(易傳)이 도가에


속한다는 주장” 90년대초 진고응 등은 도가철학이 중국철학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에 진고응은 더 나아가 역전이
도가계통에 속한다고 논증하였다. 이 두 가지 관점은 학계의 토론을
야기하였다.

1. 도가철학 주도론 중국문화의 주류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역대로

13.《易学哲学史》,上册,第4页。
14.《谈宋明理学的中体用一源观》:《朱伯崑论著》,第255页。
15.《易学哲学史》上册,第5页。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19

유가설, 유도상호보완설 등이 있어왔다. 1988년, 진고응은 “중국철학


16
사는 도가가 주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1992년, 진고응은 노장신
론(老莊新論)을 출판하여 “선진철학사에서 도가의 주도적 위치”를
집중적으로 서술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철학사의 중요
논제로는 도덕(道德)설, 유무(有無)설, 동정(動靜)설, 허실(虛實)설, 천
인(天人)설, 일만(一萬)설, 상변(常變)설, 반복(反覆)설, 점착(漸著)설
등의 범주가 있으며, 모두 노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자철학은
사대 유파로 나뉜다. 첫째는 도가주류파이고, 둘째는 직하(稷下)도가
이며, 셋째는 초나라 황로학(黃老學)이고, 넷째는 도가별파, 즉 역전
학파이다. 이밖에 노자는 기타 각 가(家), 특히 유가, 병가, 법가에 대
17
하여 철학적 기초이론상으로 모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18
2. “역전은 도가계통의 저작이다” “역전이 도가계통의 저작”
이라는 주장은 2천년 이래의 인식에 대한 전복이다. 진고응은 노자가
역경과 역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역전
의 사상적 근원은 주로 도가의 우주관, 음양가와 도가의 음양설, 그리
고 유가의 윤리교육(倫敎)관이다.” 역전의 “천도(天道)관, 천도(天
道)에서 인도(人道)를 이끌어내는 사유방식, 순환론, 사물의 모순대립
과 발전변화의 변증법사상 등 역전 철학사상의 주요 구성은 대부분
도가의 노자에서 나온 것이다.” 진고응은 13가지 중요 개념을 열거하
며 이러한 관점을 설명한다. 그는 역전의 “천동지정(天動地靜)”설이
장자의 「천도(天道)」편과 같으며, “강유상추(剛柔相推)”설은 노자의

16.《道儒墨法互补与文化多元——刘笑敢访陈鼓应》:《老庄新论》,第307页。
17.《老子与先秦道家各流派——道家在先秦哲学史上的主干地位》:《老庄新
论》,第99页。
18. 陈鼓应:《〈易传·系辞〉所受老子的影响——兼论〈易传〉乃道家系统之作》,
《哲学研究》,1989年,第1期,第34页。
20 철학논집 21집

“이유극강(以柔克剛)”설의 진일보한 발전이고, “이지간능(易知簡能)”


은 노자의 간이(簡易)의 도이고, “원시반종(原始反終)”설은 노장 자연
관의 특징이며, “精氣”설은 노자에서 유래하며, “神” 개념은 노장과
같은 의미이고, “음양설”은 본래 도가와 음양가의 주장이며, “태극”관
념은 도가에서 유래하며, “道氣설”은 본래 노자에 속하며, “變通설”은
노장사상의 발전이고, “幾”는 노자의 “微明”이고, “도”와 “덕”의 철학
적 함의는 노장과 같은 의미이며, “言意관계”의 토론은 노장과 의미가
같다고 설명한다. 진고응은 또 변증법적 체계로 볼 때, 역전과 노
자의 관계는 유가와의 관계에 비하여 더욱 밀접하다고 주장하였다.
종합해 보면, “역전의 변증법적 사상의 방법과 노자의 변증법은 명
19
확히 동일한 체계에 속한다.” 진고응의 관점에 찬성하는 이로는 왕
보현(王葆玹) 등의 학자가 있으며, 찬성하지 않는 학자로는 이존산(李
存山) 등이 있다.

(3) 진래(陳來), 양국영(楊國榮), 장학지(張學智) 등의 송명이학 연


구 진래의 송명이학은 1992년에 출판되었으며, 송명이학 연구의 새
로운 특징들을 반영하였다.

1. 송명이학에 대한 저항적 명칭 바로잡기. 진래는 “송명이학의 정


명(正名)”에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다. 송명이학에서 그는 “존천리
멸인욕(存天理滅人欲)”과 공자의 “극기(克己)”, 맹자의 “취의(取義)”
와 칸트 윤리학의 일치성을 논하고, “아사사소실절사대(餓死事小失節
事大)”의 “절(節)”은 절기(節氣), 절의(節義), 도덕이상으로 볼 수 있
으며, 대진(戴震)의 “인사우리(人死于理), 기수령지(其誰怜之)”의 본질

19.《〈易传·系辞〉所受老子的影响——兼论〈易传〉乃道家系统之作》,《哲学
研究》,1989年,第1期,第42页。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21

은 전통준칙 가운데 등급제를 유지하는 일면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


20
장하였다.

2. 송명이학에 대한 저항적 위치정립. 진래는 당나라 중엽 이후에


21
중국이 “근세”를 향해 갔다는 개념을 채택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러한 근세화의 문화형태는 중세 정신과 근대 공업문명
의 중간 형태로 볼 수 있으며, 그 기본 정신은 세속성, 합리성, 평민성
이 두드러진다. 송명이학은 ‘근세화’ 범주에서 적극적으로 긍정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위가 정립되면 우리는 이학에 대하여 평이
22
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3. 교과서로서의 평이함과 객관성. 이 책은 평이함과 객관성이라는


교재의 특징을 구현하였으며, 송명이학을 학술, 철학의 일종으로 간주
하고 철학적 사유 자체에 대한 소개와 이해에 중점을 두었다. 예를 들
면, 양명철학에 대한 연구에서 송명이학과 유무지경(有無之境)은
매우 흥미로운 대비를 이룬다. 후자는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와의
대비로부터 출발하여 “무선무악(無善無惡)”의 심체(心體)를 “반성 이
전의 자아 사유(我思)”로 해석한다. 송명이학은 무선무악의 심체는
“근본적으로 정서로서의 심-심리적 감수 주체의 무체성(無滯性)과 무
집착성-을 강조한다”고 평이하게 주장한다.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소옹(邵雍) 등이 추구한 쇄락(洒落), 화락
(和樂)의 자득경계이며, 그 안에는 선종의 생존지혜가 확실히 반영되
23
었다.”

20. 陈来:《宋明理学·引言》(第2版),华东师范大学出版社,2004年,第1-6页。
21.《宋明理学·引言》,第13页。
22.《宋明理学·引言》(第2版),第14页。
23.《宋明理学》(第2版),第216、217页。
22 철학논집 21집

4. 시야로서의 경계설. 본서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풍우란의 경


계설을 채택하여 송명이학자들, 예컨대 주돈이의 “공안낙처(孔顔樂
處)”, 장재(張載)의 “민포물여(民胞物與)”, 정호의 “혼연여물동체(渾然
24
與物同體)”를 평가하였다는 점이다. 유무지경의 방법론적 특징은
경계론과 공부론(功夫論)으로부터 양명철학을 연구한다는 것이다. 진
래가 보기에, “유”, “무”의 지혜와 경계는 중국철학의 핵심문제이다.
그의 저서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양명이 어떻게 유의 경계와 무
의 지혜의 대립과 연관성 문제를 해결하고, 그리하여 전체 송명이학의
내재적 단서와 과제, 그리고 왕양명과 그의 철학의 지위와 공헌을 드
25
러내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진래는 “무”가 본체론, 공부론, 경계
론 세 측면으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유무지경이 서술하는 것은 공부
론과 경계론의 문제이다. 이러한 “무”의 경계에 대하여 진래는 비교문
화 또는 비교철학의 방법을 적용하였는데, 그는 실존주의에서 출발하
여 왕양명의 “무선무악”의 심이 사르트르의 “반성 이전의 자아 사유
(我思)”, 하이데거의 “본래적 진리(本眞)가 살아난 상태”, “기본적인
마음상태의 현현(現身情態)” 등과 상통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저자의 동서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반영하였고, 양명철학을 비롯한
중국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선도적 의의를 지닌다.
양국영의 특징은 개념의 진화로 왕학(王學)과 그 변모과정을 설명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지식을 덕성으로 변화시킨다(化知識爲德性)는
부분은 풍계(馮契)의 “이론을 덕성으로 변화시킨다(化理論爲德性)”에
서 나온 것으로, 풍계(馮契)의 철학관점이 포함되어 있다. 양국영이
보기에 주희는 양지(良知)가 천(天)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였고, 왕양명

24.《宋明理学·引言》(第2版),第11页.
25. 陈来:《有无之境—王阳明哲学的精神》,人民出版社,1991年,第5页。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23

은 양지가 사람에게 달려있다고 강조하였으니, “이로써 (양지가) 주체


26
의 덕성과 인격으로 옮겨가 초월적 천리와 구별되었다.” “지선(知善)
에서 행선(行善)으로 가는 전제는 지식을 덕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동시에 행착(行著), 습찰(習察)을 통하여 양
지로 하여금 이론 속의 이성으로부터 실유제기(實有諸己)의 진실된
존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실유제기로서의 덕성과 양지는 주체의
27
진정한 자아를 구성한다.” “왕양명은 양지를 본체로 보고 도덕실천
(功夫)이란 덕성을 덕행으로 변화시키는 과정, 즉 덕성윤리가 함유된
정도라고 이해하였다. 정주에서 왕양명에 이르기까지 이념적 윤리에
28
서 덕성윤리로의 전환이 논리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영역의 저작으
로는 다시 장학지의 명대철학사(북경대학출판사 2000년 출판), 칠
협(漆俠)의 송학의 발전과 변모과정(하북인민출판사 2002년 10월
출판), 하준(何俊)의 남송사상사(상해고적출판사 2008년 출판) 등
이 있다.

(4) 인학(仁學)의 재건과 “유학 제4기” 발전론 유가철학은 인학(人


學)이다. 이 개념은 풍우란에서 유래한다. 그는 1988년 한편의 글에
서, “중국철학의 특징은 인학(人學)을 고취하여 사람에 대한 논의에
29
치중한다는 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90년대에 이르
러 동의와 수용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학계는 신인학(新仁學)의
수립이라는 목표를 제시하였고, 김춘봉(金春峰)도 80년대에 “인학(仁
學)”이 5.4운동 이후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모

26. 杨国荣:《良知与德性》:《哲学研究》,1996年,第8期,第62页。
27.《良知与德性》:《哲学研究》,1996年,第8期,第63页。
28.《良知与德性》:《哲学研究》,1996年,第8期,第69页。
29. 冯友兰:《论中国传统文化》,三联书店,1988年,第140页。
24 철학논집 21집

종감(牟鐘鑒)은 인학이 “중화민족 정신의 발전 방향을 대표하고 이으


며, 인도주의와 민본주의의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어서 중국의 지
식인들에게 절실하고 원대한 인생의 신앙과 독특한 문화적 가치이상
을 제공하였다.”고 하였다. 모종감은 인학을 초기, 중기, 말기의 삼기
로 나눴다. 초기는 공맹이 대표인으로서, 공자의 인은 “인류의 동료애
이며, 보편적인 동정심이다.” 맹자의 인에 대한 공헌은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성선설은 인성론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둘째, “인
자인야(仁者人也)”라는 사상을 제시하였다. 셋째, 인심(仁心)으로부터
인정(仁政)을 도출하였다. 넷째, 인애를 만물로 확장하여 “친친이인민,
인민이애물(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을 주장하고 범애사상을 형성하
였다. 다섯째, 인(仁)과 의(義)를 연결시켜 사용하였다. 중기 인학의
대표인은 주희와 왕양명이다. 그들은 “생(生)”을 이용하여 애의 의미
를 심화시켰으며, “생명가치의 의의를 강조하고, 생명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보호를 강조하였다. ... 인으로 하여금 초도덕적인 생태적 의의
30
를 지니도록 하였다.” 말기는 담사동(譚嗣同)이 대표인이다. 그의 인
학은 근대 서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인은 “통(通)”을 제일의로 한다고
주장하고, 민주정치, 인격의 자유, 경제현대화 등을 주장하여, 인의 사
회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 제4기 발전론의 창도자는 이택후(李澤厚)이다. 그는 역사적 사
실로부터 볼 때 유학의 제1기는 공맹순이고, 제2기는 한유(漢儒)이며,
제3기는 송명, 제4기는 현재 혹은 미래의 발전이라고 주장하였다. 모
종삼, 두유명 등은 웅십력, 양수명 등의 유학사상을 현대신유가로 보
고 유학의 제3기 발전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결점은 첫째,
심성-도덕이론으로 유학발전사를 개괄하고 순자, 한유를 말살시켜 한

30. 牟钟鉴:《儒家仁学的演变与重建》,《哲学研究》,1992年 第4期 第46-48页。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25

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둘째, 이론상의 난점이 있다. 그 하나는 “내성


개외왕(內聖開外王)”이고, 그 둘은 “초월이내재(超越而內在)”이다. 셋
째, 실천상으로도 두 가지 문제가 있다. 그 하나는 학원식 연구에 국
한되어 사회적 영향이 결여되었다는 것이고, 그 둘은 학자의 학술과
인격의 분리이다.

(5) “현대 신도가”의 수립 신도가의 수립을 제안한 학자로는 허항


생, 호부침, 동광벽 등이 있다. 동광벽에 따르면 도가는 “현대적 형식”
을 발전시켰으며, 니담(Needam), 탕천수수(湯川秀樹), 카프라(Capra)
등은 모두 현대 신도가들이다. 니담은 자신을 “명예도가”라고 칭하고,
과학에는 기계론과 유기론의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기계론적 세계관
은 이미 유행이 지났으며, 미래의 과학발전은 유기론 유형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도가는 “유기인도주의”적 세계관이며, 도가
사상의 세계적 의의는 인류역사의 전환기에 인류에게 “새로운 문화부
31
흥과 계몽운동의 기점”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탕천수수는
도가철학에서 과학연구에 대하여 커다란 의의가 있는 “직각사유”를
발견하였고, 카프라는 그 안에서 “생태 지혜”를 발견하였다. 호부침이
말하는 “도학”은 전통적 도가, 도교와 방선술을 포괄한다. 그는 “도
학” 개념이 “노자의 도의 학설을 이론적 지주로 삼는 문화체계 전반,
그 안에 도가의 철학문화, 도교의 종교문화, 선학의 생명과학문화를
32
포괄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호부침은 “노자는
33
도학의 종주” 라고 주장하고, “도학문화 안에 중화민족 흥기의 생기
와 희망이 담겨져 있으며, … 신도학은 중화민족이 전지구적 일체화를

31. 董光璧:《当代新道家》,第35页。
32. 胡孚琛:《道学通论—道家、道教、仙学》,第7页,社科文献出版社,1999年。
33. 胡孚琛:《道学通论—道家、道教、仙学》,第3页。
26 철학논집 21집

34
받아들여 대동사회로 향하는 문화전략”이라고 주장하였다.

(6) 중서철학의 비교 90년대 후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실존주의가


중국철학 연구 범위에 들어왔고 특히 하이데거 철학은 비교연구의 기
본틀이 되었다. 장재림의 弘道—中国古典哲学与现象学, 中西哲学
比较论, 장상용의 海德格尔思想与中国天道—终极视域和开启与交融
, 장세영의 进入澄明之境 등의 저서가 앞을 다투어 세상에 등장했
다.
장재림은 홍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중국철학은 완전히
현상학적이다. 또는 반대로 말하면 서양 현상학은 완전히 중국철학적
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철학의 종점은 바로 중국철학의 기점으로
볼 수 있으며, 인식론적 의의상의 ‘진리’가 아닌 인간에 대하여 더욱
절절한 의미의 ‘실존(生存)’은 중국철학이 처음부터 주목하던 관심사
35
였다.” 뒤에 출판된 중서철학비교론에서 장재림은 현상학의 의미
는 철저한 경험주의, 인본주의, 유생(唯生)주의인데 이것이 바로 중국
철학의 기본정신이며, 현상학 이래의 서양철학은 중서철학의 화합을
드러냈다고 주장하였다. 현상학 운동에도 상호주관성(主體間性)에 대
한 발견과 중시가 나타났고, 이 모든 것이 “교왕이성(交往理性)”의 출
현을 야기하였는데, 인학이 바로 교왕이성이다.
하이데거와 노장철학에 대한 장상용의 연구의 키워드는 “구성성(構
成性)”이다. “‘구성적’이란 우선 현성(現成)적이 아니고 이미 거기에
놓여져 누군가에 의해 지배되지 않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탄생되
36
어 나옴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구성적”이란 본체나 궁극적 실

34. 胡孚琛:《道学通论—道家、道教、仙学》,第689页。
35. 张再林:《弘道—中国古典哲学与现象学》,陕西人民教育出版社,1991年 第
81页。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27

체가 아니며, 절대이념도 아니고 형식의 형식도 아니며 스스로 본원적


의미의 경지(義境)를 드러냄으로써 궁극적 실재의 의의를 밝히는 것
이다. 구성적 관념에서 출발하여 장상용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는 중
국의 천도관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구성적이며, 어떠한
현성자도 아니고 장에서 살아 숨쉬는 것이며, 인간의 세속적 생존 가
운데서 생생하게 드러난다고 주장하였다. 노장과 공자는 도(道)의 구
성성이라는 관점에서 같다고 보았다.
장세영은 니체, 하이데거, 가다머 이후부터 서양철학은 새로이 영원
을 추궁하는 방식을 시작하였다고 보았다. 그것은 더 이상 영원한 개
념 혹은 본질을 찾지 않고 사물 배후로 가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찾는다. 이러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 역시 현실 사물이며 추상적인
영원한 개념이 아니다. 현재에 은폐되어 있는 현전하는 사물 배후의
현재하지 않는 현실적 사물에 대한 초월적 추구는 현재함과 현재하지
않음, 은폐된 것과 현시된 것을 결합시키며, 그 방법은 상상이다. 장세
영이 보기에, 존재론의 제일의 범주는“상통”이어야 한다. 만물은 다르
면서도 서로 통한다. 예를 들면 중국전통의 천인합일과 일기관통이 있
다. 개인은 모두 우주를 향하여 개방되어 일체를 망라한다. 일체는 다
37
시 그를 향해 집중되어 “만유가 상통하고 고금이 융합한다.” 하이데
거의 광명 또한 인간과 만물의 상통이니, 인심이 곧 천지만물의 심인
것이다. 인간의 만물일체에 대한 체득은 “진정한 광명의 경지이며, 만
사만물은 모두 여기서 광명을 얻고 밝음을 얻고, 깨달음을 얻는다. 왕
38
양명이 말한 ‘발규처(發竅處)’가 바로 광명의 경지이다.” 하이데거의

36. 张祥龙:《海德格尔思想与中国天道—终极视域和开启与交融》,三联书店,
1997年 第183页。
37. 张世英:《进入澄明之境—哲学的新方向》,商务印书馆,1999年,《进入澄明
之境—哲学的新方向》,第45页。
28 철학논집 21집

현존재(Dasein)는 왕양명의 “인심”이다. 하지만 광명의 경지에 진입


하는 여정에 관하여 하이데거와 왕양명은 입장이 다르다. 양명의 광명
의 경지는 일종의 도덕의식이고 하이데거의 광명의 경지는 도덕의 범
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존재하는 전체에 대한 초월이고 무이다. 반면
에 양명은 여전히 유를 원칙으로 삼는다. 하이데거의 광명의 경지는
현대철학의 진취성을 지니고,“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추구 행위 중에
있으며, 중국전통철학이 말하는 허정, 취욕의 공부 가운데 획득되는
39
것이 아니다.”

(7) 출토된 초간백서의 연구 최근 20년간 중국에서 대량의 초간 백


서 문헌이 출토되었다. 이들 문헌의 발표는 중국철학사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였고 기존의 인식들을 변모시켰으며 사상사의 누락된
연결고리를 보충하여 중국철학의 재인식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1. 마왕퇴한묘백서(馬王堆漢墓帛書) : 1992년 5월 호남출판사


에서 마왕퇴한묘문물이라는 서적을 출판하여, 백서로 된 계사(繫
辭) 도편과 해석문을 발표하였다. 1993년 8월, 진고응 선생 주편 
도가문화연구 제3집에서 백서 역전 중의 역지의(易之義), 이삼
자문(二三子問), 요(要)의 해석문과 재정리된 계사 해석문을 발
표하였다. 백서 계사는 통행본 계사와 비교할 때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장절을 구분하지 않았고 제목이 없다. 둘째, 통행
본에 비해 글자가 약 1만 6천자 적다. 정리자는 백서 역전을 이삼자
문, 계사, 역지의, 요, 무화(繆和), 소력(昭力)으로 정리하
였다.

38. 张世英:《进入澄明之境——哲学的新方向》,第132页。
39. 张世英:《进入澄明之境——哲学的新方向》,第137页。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29

백서역전을 둘러싼 논의로는 다음이 포함된다.


① 전승문제 : 이 역전은 누가 전하였는가? 장대년 등의 학자는 금
본 역전은 전하(田何)가 전한 것이고, 백서는 초(楚)지역의 전본(傳
本)이라고 주장하였다.
② 편을 나누는 문제 : 백서 역전은 두 장의 누런 비단 위에 베껴
적었는데, 편명이 없다. 따라서 어떻게 편을 나누는가가 논쟁거리가
되었다.
③ 금본 역전과의 대조 문제 : 백서에는 상(象), 단(彖), 문언
(文言), 서괘(序卦), 잡괘(雜卦), 설괘(說卦)가 없고 설괘의
앞의 세 장(章)이 역지의편 안에 들어있다. 백서 계사에는 “대연
장(大衍章)”이 없고, 금본 계사의 몇몇 장절은 따로 나뉘어 백서의
역지의, 요 안에 들어 있다. 두 판본은 문자상으로도 커다란 차이
가 있다. 예컨대 금본의 “乾”은 백서에는 “鍵”으로 되어 있고, 금본의
“坤”은 백서에는 “ ”라고 되어 있다. 료명춘(廖名春) 등의 학자는 백
서가 금본의 요약본이며, 금본 계사는 전국시기에 이미 형성되었다
고 보았다. 루우열(樓宇烈) 등의 학자는 백서가 먼저이고 백서에 있으
나 금본에 없는 내용은 전국 이후에 누군가 편집해 넣은 것이라고 보
았다.
④ 백서의 소속파 문제 : 백서가 유가의 저작인가 도가의 저작인가
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가의 저작에 속한다고 보았는데 진
고응 등은 도가 저작에 속한다고 보았다.
⑤ 두 판본의 학술적 가치에 관한 문제 : 주백곤, 이학근(李學勤)은
양자 간에 연관 관계가 없으며, 금본 계사의 가치는 부정될 수 없다
고 보았다.

2. 곽점초묘죽간 : 1998년 문물출판사는 곽점초간죽간을 출판


30 철학논집 21집

하였다. 죽간에는 노자갑을병 3종(1900자 내외, 편폭은 대략 금본


노자의 삼분의 일 넓이), 태일생수와 같은 도가의 저작도 있고, 노
목공문자사, 묘의, 궁달이시, 성자명출과 같은 유가의 저작도
있다. 노자 갑을병 3종의 통행본과 가장 큰 차이는 극렬히 유가를 비
판하는 통행본의 “절성기지”,“절인기의”등의 구절이 없다는 점이다.
유가 쪽의 자료는 “사맹학파”의 존재를 긍정하였고, 공자에서 맹자에
이르는 사이의 공백을 보충해 주었으며, 사맹“오행”의 문제를 해결하
였다. 노자 3종의 출토는 다시금 노자의 시대와 그 책의 형성 시대에
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금본과 죽간의 관계가 토론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왕박(王博)은 죽간이 태자를 교육하는 데 사용한 통행본의
절선본이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주장은 꽤 많은 인정을 받았다.
노자 금본과 형성본의 관계에 대하여 필자는 “역형성” 개념을 제안
하였다. 노자 판본은 유가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개조되어 간 것처럼
40
보이는데, 이 때문에 반유의 노자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금본 노
자, 죽간본, 백서 노자의 대조를 통하여 노자본에는 개조되어간
과정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일례로 노자 19장의 죽간본과 통
행본의 차이를 비교해 보자.

郭店甲:绝智弃辩,民利百倍;绝巧弃利,盗贼亡有;绝伪弃诈,
民复季子(孝慈)。
帛书乙:绝圣弃智,而民利百倍;绝仁弃义,而民复孝慈;绝巧弃
利,盗贼无有。
王弼本:绝圣弃智,民利百倍;绝仁弃义,民复孝慈;绝巧弃利,
盗贼无有。

40. 乔清举:《论中国思想史的泥形成特点—以老子为例》,《哲学门》,第13
辑,北京大学出版社,2006年。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31

여기서 통행본의“절성기지”, “절인기의”는 곽점본에서 각각“절지기


변”, “절위기사”가 된다. 인의예지성은 사맹학파의 이른바“오행”이고,
“절성기지”, “절인기의”가 유가를 겨냥한 의미라는 점은 매우 명확하
다. 그러나 곽점본이 유가를 겨냥한 의미는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사마담, 사마천, 유향, 유흠 부자의 고대 전적에 대한 정리가
오늘날 고대철학 연구에 미친 영향을 더욱 깊이 반성하도록 한다.

(8) 중국철학의 합법성에 대한 논의 중국철학의 합법성 문제에 대


한 논의는 2004-2006년 전후에 가장 활발하였다. 합법성 문제의 제
기는 중국철학 연구의 방법론 의식과 중국문화 의식에 대한 중첩적
자각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각 시대의 중국철학연구의 변모 혹은 심
화는 모두 방법론 의식에 대한 각성과 관련이 있다. 학법성 문제의 기
본적 의미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철학”은 중국의 철학과
유사한 학문의 범주로서 적합한가? 중국에는 “철학”이 있는가? “철
학”으로 중국의 철학과 유사한 학문을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학문으
로 하여금 자신의 특징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식
민화”가 아닌가? 대체로 진래 등의 관점은 “철학”이 합리적 방식임을
41
긍정하였고 정가동(鄭家棟)의 관점의 사회적 효과는 부정적이다. 그
는 부정적 입장에서 출발하여 중국문화의 식민화 등 파생된 문제로
더욱 확장하였다. 필자의 기본적 태도는 문화에는 독점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학습되고 흡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은 우리가 고대자
료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 해석의 결과 우리는 고대를
이해하는 시야를 발견하게 되고, 고대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철학

41. 陈来:《世纪末‘中国哲学’研究的挑战》:《中国哲学史》,1999年第四期。
郑家栋:《“中国哲学”的“合法性”问题》:《中国哲学年鉴》(2001年),
《中国社会科学文摘》(2002年第2期)。
32 철학논집 21집

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식민화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며,


도리어 모종삼이 시도한 바와 같이 서양철학의 가치를 중국철학의 아
래에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20세기 이래 우리는 대규모로 서양문화
를 흡수하기 시작하여 개념과 사유방식에서 모두 서양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영향을 받지 않던 상태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영향이 반드시 모두 나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예를
들면 “리(理)” 개념은 현대용어로 보면 각각 “규율”, “본질”, “의거”,
“조리” 등의 의미가 있는데, 개념의 증가가 철학적 사유의 심화를 나
42
타내고 있음을 수긍해야할 것이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중국
철학 영역은 매 차례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뒤에는 항상 연
구가 이어져 돌파구를 마련하여 왔으며, 우리는 합법성 문제의 논의
역시 구체적 연구 영역에서 새로운 성과를 가져올 것을 기대한다.

(9) 1949년 이후 중국철학사 분야 발전에 관한 몇 가지 소고 역사


적 사건의 필연 관계로부터 볼 때, 현대의 중국철학사 연구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철학사 연구의 원이론(元
理論)의 발전과 사회진보는 상호 통일적이다. 둘째, 지식과 인간의 존
재는 동일한 구조를 띈다. 셋째, 민족이성은 성숙해 가고 있다. 이상은
중국철학사 연구에 대한 철학적 반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원이론의 선택과 발전은 현대 중국사회의 발전과 협동 관계를 형성
한다. 첫째, 원이론의 선택은 사회발전에 의해 결정된다. 둘째, 원이론
에 대한 인식의 변화 역시 사회발전의 과정을 반영하고 제약을 받는
다. 원이론에 대한 인식의 발전과 심화는 또한 원이론 자체의 논리적

42. 乔清举:《西方话语:中国哲学合法性危机问题中的隐影》,《北京行政学院学
报》,2004年第 2期。Translated and Republished By Contemporary
Chinese Thought, Spring, 2006, M.E.Sharpe Inc.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33

전개로 표현된다. 즉 이론에 포함된 각종 논리의 의미와 그것의 합리


성과 불합리성을 충분히 전개함으로써 원이론의 발전을 촉진한다. 원
이론의 논리적 전개 과정은 사실상 중국철학사의 원이론에 대한 인식
의 끊임없는 심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사회의 변동, 원이론의 논리적
전개, 인식의 심화 이 삼자는 일치한다.
이른바 지식과 존재의 동일 구조란 현대 중국철학사 연구의 과정
가운데 역사상의 중국철학, 학자 개인이 수립한 철학체계, 현실 속의
중국철학사 분야, 학자의 이 분야에 대한 연구 사자(四者)와 학자 자
신의 존재 사이에 깊은 내재적 동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서의 학자와 그의 학술 연구 사이에는 상호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결
정짓는다. 분야의 의의, 연구의 의의, 연구자의 존재 의의는 내재적으
로 일치한다. 지식과 존재의 동일구조는 현대 중국철학사학사의 중요
한 특징이다. 1949년 이후의 중국철학사 연구는 역사적 객관 사실에
대한 진술, 설명, 논증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학자의 자신의 존재상태
에 대한 서술이기도 하다. 학술연구 과정 역시 지식인의 독립적 인격
의 형성과정이다.
만일 1949년 이후의 전체 중국 지식영역을 5.4운동 이후 또는 더
거슬러 올라가 1840년 혹은 더 먼 역사의 과정에 놓는다면 1949년
이후의 지식영역이 역사와 밀접한 내재적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발견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연관관계는 지식영역이 중화민족의 “이성적
성숙” 또는 “정신적 성숙” 과정의 일부분이라는 것으로 표현된다. 민
족이성의 성숙은 현대 중국철학사학사의 실질이며, 전체 현대 중국철
학 연구를 조망하는 내재적 척도 중 하나이다. 유일한 권위로서의 하
나의 유형을 외재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철학사연구의 방법론을
자각적으로 반성하는 태도로, 한 종류의 방법에서 다원적 방법으로,
이 분야가 오직 마르크스주의적 정확성의 도구적 가치를 증명할 뿐이
34 철학논집 21집

라는 시각에서 그것이 인간의 정신적 경지를 끌어올리는 의의를 지님


을 긍정하는 시각으로, 그것을 “유산”으로 간주하는 입장에서 그것의
새로운 생명력을 탐구하는 입장으로의 변화과정은 중국철학사 분야의
중국철학에 대한 인식이 더욱 이성화되었고, 민족이성이 성숙해 갔음
을 나타내 준다. 현대 중국철학사 연구는 마침내 이러한 단계에 이르
렀다. : 중국철학 자신의 가치를 긍정하고 그것을 죽은 유산이 아닌
삶의 원천으로 간주하며, 그것에 거듭 활력을 불어 넣고 그것의 지혜
를 탐구하며 재탄생하게끔 하여 오늘날 세계와 인류를 곤혹스럽게 하
는 난제를 해결하도록 돕는다. 민족이성은 수십 년의 우여곡절과 발전
을 거쳐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3. 현대 신유학의 중국철학사 연구에 대한 의의


(1980년~)

중국학술계의 현대 신유학 연구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984


년 10월, 풍우란, 장대년, 주백곤, 탕일개 등의 학자들이 북경, 홍콩,
대만과 해외의 수십 명의 교수를 모아서 하나의 민간학교(“중국문화
서원”)를 세우고, 탕일개 선생이 원장을 맡았다. 이 강습의 의의 중의
하나는, 양수명이나 풍우란과 같이 1949년 이전에 자신의 사상체계를
세우고, 1949년 이후에 비판을 받은 학자 및 그들의 사상 즉 현대신
유학도 공개적으로 강의되었다는 데에 있다. 가령 풍우란은 유가철학
은 인학(人學)이자 인학(仁學)으로 인간의 정신적 경지를 고양시키는
데 중점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모두 문화서원의 강습반에서 강의한
것이다. 양수명과 풍우란 같은 대학자는 여전히 사람들의 환영과 존경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35

을 받았다. 두유명, 성중영 등의 강좌 또한 사람들이 전통문화를 객관


적이고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87년에 이택후는중국현대사상사론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그 중의「현대신유가에 대해 간략히 논함」이라는 글에서 웅십력, 양
수명, 풍우란, 모종삼의 사상을 논하였다. 이는 아마도 중국에서 처음
으로 나온 현대 신유학에 관한 논문일 것이다. 현대 신유학 또는 신유
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방극립
(方克立)과 이금전(李錦全) 두 선생이 주관한 “현대 신유학 사조 연
구”가 중국국가사과기금(中國國家社科基金) “칠오”(七五) 기획의 중
점과제로 선정된 1986년 11월의 일이다. 이 과제팀은현대신유학 연
구논집(제1집과 2집은 방극립∙이금전 주편. 중국사회과학출판사,
1989, 1991 출판),현대신유가학안(現代新儒家學案)(전3권) 등 일련
의 현대 신유학 저작집과 “현대신유학연구총서” 연구논집을 출판하
여, 학술계와 사회 전체의 현대 신유학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였다. 이
학술단체에는 송지명, 곽제용, 정가동, 진소명 등의 학자가 포함되어
있고, 이 단체 외에도 진래(陳來), 장학지(張學智), 나의준(羅義俊) 등
의 학자가 현대 신유학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나는 1995년부터
현대 신유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는데, 첫 번째 논문은
「현대 신유학의 “유”와 “신”」(现代新儒学的“儒”与“新”)이었다. 현대
신유가 양수명, 장군매, 웅십력, 마일부, 풍우란, 하린, 전목, 모종삼,
당군의, 서복관, 방동미 등의 학자에 관한 연구였다. 필자가 이 글을
쓸 당시에 현대 신유가에 관한 저작은 이미 200여권에 달하고 있었고
논문 또한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가령 양수명 한 사람에 관한 논문만
해도 1500편에 달했고, 풍우란 같은 경우에는 더욱 많았다: 이 외에
도 수많은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따라서 현대 신유학 연구는 오늘날
중국학계에서 하나의 장관을 이루는 학술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6 철학논집 21집

지면의 제한으로 구체적인 숫자는 나열하지 못하겠다. 그 대신 현대


신유학 연구가 현대 중국철학계의 학술연구에서 지니는 의미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1) 학문적 폐쇄성을 타파하였다 1980년대 초반, 중국철학사 학계


는 이미 문화대혁명의 영향에서 벗어나 “철학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과 토론을 전개하여, “철학사는 일반적인 인식사”라는 레닌의 정
의가 “철학사는 투쟁사”라고 하는 주다노프의 정의를 대체하였지만,
연구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여전히 고대철학과 근대철학에 국한되어
있었고, 현대철학에 관해서는 주로 이대조, 진독수, 모택동 등의 사상
에 대한 연구에 국한되어 있었다. 현대 신유학은기본적으로 금지구역
에 속하였다. 풍우란이 1930-40년대에 창립한 “신이학(新理學)”은
1949년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 언급되든지 간에 모두 비판을 받았고,
풍우란 자신도 수차례 자기비판을 하였다. 학계에서는 현대 신유학은
마르크스주의에 패배한 학술사상으로 간주되었다. 중국은 이미 사회
주의를 건립하였고,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의심할 여지없이 학술적 고
지를 점령하였다. 그래서 신리학과 같은 자산계급과 봉건주의가 뒤섞
인 사상은 비판의 꺼리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가치도 없었
다. 그래서 모든 학계는 현대 신유학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그것에 대
해서 알면서도 비교적 예의를 차리며 방치해 두든지, 아니면 그것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고 여전히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아예 모르거
나 아니면 안다 해도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다. 결론적으
로, 학계는 전체적으로 여전히 매우 폐쇄적이다. 현대 신유학 연구의
시작은 연구과제를 풍부하게 하였고, 따라서 학문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여, 학계의 폐쇄성을 타파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37

(2) 학문적 태도를 바꾸었다 현대 신유학 연구의 전개는 학계의 태


도 또한 변화시켰다. 현대 신유학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기 전에는 물
론 연구가 막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그에 대해 경직되고 교조적인 이
론을 적용하여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
나 연구가 진행되는 가운데 연구자의 태도 또한 점점 변하여 더 이상
과거처럼 무의미한 비판은 하지 않았다. 가령 방극립 선생은 현대 신
유학에 대해서 “동정적으로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토론하며 비판적으
로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였다. “동정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과거
의 터무니없고 독단적인 비판태도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학계에
는 현대 신유학에 대한 저작이 대량으로 출판되었다. 제일 먼저 양수
명과 풍우란의 과거저작들이 다시 출간되었고, 웅십력의 일부 저작들
도 80년대에 정리∙출판되었다. 그 뒤에 대만과 홍콩의 신유가 저작 선
집이 출판되었다. 이 저작들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인해 사람들은 현대
신유학에 대한 과거의 시각을 바꾸게 되었고, 점차 그것이 중서(中西)
의 철학과 문화의 융합으로, 중국 사회의 현대화에 상응하는 발전적인
사조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신유가들은 모두 자신들만의 독특한 철학
적 관점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1949년 이후의 새로운 것은 창조하지
못하고 비판만 일삼는 학문적 풍토와는 완전히 다르다. 중국은 지금
새로운 철학을 구축하려고 하는데, 현대 신유가의 철학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앞서나간 선구자이다.
80년대에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철학사 연구에 대해 반성을 하면
서, “철학사 연구는 민족이념과 사유수준을 단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엥겔스의 관점으로 과거의 비판적인 태도를 대체하였는데, 이것은 하
나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현대 신유학은 중국철학의 초점
은 인간의 정신경계를 고양시키는 데에 있고, 중국철학의 정수는 천도
와 성명이 관통되는 관점이라고 주장하여, 철학과 철학사 연구에 대한
38 철학논집 21집

학계의 태도를 한 걸음 더 발전시켰다. 철학은 단지 하나의 개념과 사


유의 훈련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심신(心身)과 성명(性命)에 관한 학
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사에 대한 인식과 연구에 있어서 모두 적
극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국학계의 유학 자체에 대한 태도도 바뀌었
다. 1995년 말에 장대년 선생은, 유학이 독존하던 시대는 지났고 유
학을 비판하는 시대도 지났으며, 미래의 중국 사상에서 유가철학은 하
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장대년의 태도보다 더 급
진적인 것은 최근 중국에 등장한 진명, 장경, 강효광 등을 대표로 하
는 대륙 제4세대 신유가이다. 유학은 현대 중국의 여러 사상 중의 하
나가 될 수 있고, 이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
시 말하면, 유가 철학은 더 이상 죽은 “유산”이 아니고, 더 이상 단지
수정과 비판만 받아야 하는 “봉건의 잔재”가 아니라, 중국철학이 한
걸음 더 나아간 “자원”이다. 이는 태도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두유명 선생은 일조를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원”이라는 말은 그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3) 학문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켰다 현대 신유학은 중국 철학계에


많은 새로운 과제를 가져왔는데, 이 과제들은 학계의 시야를 넓히고
인식을 심화시켰다.
첫째, 전통과 현대의 관계에 대한 인식 이 문제는 1980년대의 중국
의 개혁개방과 함께 제시된 것이다. 문호가 개방되자 학계는 전통문화
와 현대화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중국
이 낙후된 이유는 전통문화 특히 유가문화의 짐을 짊어지고 있기 때
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현대화를 실현하려면 철저하게 전통문
화를 비판하고 버려야 한다. 어떤 학자는 심지어 마르크스가 유럽의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39

중세문화를 평가했던 말을 인용하여, 중국문화는 인류의 동물시대의


문화라고 했다. 여기에는 비판대상의 착오라고 하는 문제가 개제되어
있다. 즉 넓은 의미의 사회비판을 전통문화비판으로 대체해 버린 것이
다. 그러나 대만, 싱가폴, 한국, 홍콩 등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에서 앞의 세 나라는 모두 전통문화를 보유하면서도 고도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로부터 전통문화가 반드시 현대화의 방해가 된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세 나라의 발전의 동력은 무엇인가? 이 나라들에는 하
나의 공통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유가문화이다. 이처럼, 유가
문화는 현대화 발전의 동력이 된 것이지 저해가 된 것은 아니다. 이후
에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유가의 현대화, 유가 자본주의, 동아
시아 현대화 모델, 베버의 유가관 등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두유명이 이러한 문제를 포스트 모더니즘과 결합하여 다
원현대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유가문화와 현대화에 대한 학계
의 인식은 깊이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그 넓이에 있어서도 이전 시기
를 넘어섰다. 유학과 현대화의 관계 문제라는 틀 안에서, 유학과 과학
기술의 관계 또한 새로운 인식을 얻었다. 일본학자인 내등호남(內藤湖
南) 등의 당송변혁론도 학계에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인식들
이 전제로 작용하여, 중국철학에 대한 평가가(기존의) 장기적으로 낙
후, 폐쇄, 정체된 봉건사회에서의 철학이라는 평가와는 커다란 차이를
낳게 되었다. 가령 진래의송명이학은 당송변혁론의 관점을 취하여,
인물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후외려(侯外廬) 주편의송명이학사와는
차이가 있다.
둘째, 문명대화의 제시와 전개 유가문화가 “유산”에서 “자원”으로
바뀌고 나서, 중국문화와 세계문화가 대화하는 전제 혹은 기초가 마련
되었다. 1990년대에 미국학자 헌팅턴은 일찍이 “문명충돌”이라는 학
설을 제시하여, 유가문화와 이슬람문화를 서양문화의 적수이자 미래
40 철학논집 21집

전쟁의 발원지라고 하였다. 헌팅턴의 이론이 나오자 적지 않은 중국학


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탕일개 선생은, 유가문화는 “합이부동(合而不
同)”으로, 그 기본 태도는 서로 다른 민족이 각자의 문화적 특징을 유
지한다는 전제하에 화해공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중
국철학계의 공감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국제학계에서도 인정을 받았
다. 유가의 윤리관념도 서양학계에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1993년에 독일의 한스 큉(Hans Kung) 교수의 주도 하에「세계윤리
선언」의 초안이 작성되었는데, 120명의 종교 대표인사가 이「선언」
에 서명하였다. 이「선언」에서는, 공자가 2500년 전에 제시한 “자기
가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세계 각
문명에 공통으로 받아들여지는 윤리적 원칙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된 문제 중에 유가철학과 현대 민주정치, 자유주의와 인
권에 관한 문제가 있다. “왜 중국의 근대는 낙후되었는가”라는 반성을
할 때에, 중국학자는 일반적으로 민주정치의 결핍을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꼽는다. 많은 학자들이 중국이 1949년 이후에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없었던 원인을 대개 전통문화, 봉건주의, 전제주의, 몽매주
의, 우민정치 등으로 돌린다. 얼마 전에 서거한 임계유 선생은 아마도
이 방면에서 저명한 대표적 인물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주편한중국
철학발전사 서문에서, 중국철학사 연구는 반봉건적인 계몽의 의의를
43
지닌다고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편
으로는 사람들의 시야가 확대됨에 따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전통
문화를 유지하면서 어느 정도 민주정치를 발전시키고, 나아가서 경제
상의 탁월한 성과를 이루어낸 것을 학계가 알게 되었는데, 이러한 발
견이 민주정치와 경제발전의 저해를 전통문화와 연관시키는 기존의

43. 任继愈 主编中国哲学发展史∙导演(先秦) 18쪽.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41

인식을 바꾸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90년대에 들어서서 모종삼 등의 사


상이 광범위하게 전파되자, “양지가 감함하여”(良知坎陷) 민주와 과학
의 “신외왕”(新外王)을 만든다는 관점이 사람들의 어느 정도의 이해
와 동정과 지지를 얻었다. 21세기에 들어선 뒤로 한동안은, 당시 사회
의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以德治國)는 주장의 영향을 받아 유가
의 덕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유가
의 덕치를 경유하여 민주정치에 진입하자는 의견을 제창하였다. 당시
의 정치 담론 중에서, 덕치의 사상은 사회주의 민주정치를 풍부하게
하고 보완해준다는 논법도 널리 유행하였다. 이 외에도 다른 관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드베리와 같은 미국학자의 유가의 자유주의, 유
가의 인권사상에 관한 연구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총괄하면, 학계는
유가철학이 현대화의 모든 요소와 대립된다는 과거의 시각에서 탈피
하여 서양과의 연계와 융합이라는 새로운 태도로 전향하였다.
셋째, 유가의 종교성과 초월성 유학은 종교인가? 이 문제가 나오게
된 배경은 매우 복잡하고 특이하다. 5∙4 운동 이전에 강유위와 진환장
등은 유학은 종교라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유학의 지위를 높이기 위
해서였다. 5∙4 운동 시기에 양수명 등은 유학은 종교가 아니라고 하였
는데, 이는 유학의 이성주의적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당
시에 종교는 과학과 대립되는 미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만약에 유학
이 종교이게 되면 그것은 곧 제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종교가 아니
게 되면 긍정할만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진독수 등은 유학은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그의 의도는 유학의 종교로서의 권리를 박탈하
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약에 유학이 종교라고 한다면, 종교의
자유라는 조건 하에서 그것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고 또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풍우란도 유학은 종교가 아니라고
하였다. 1937년에 당시의 민국정부는 공교(孔敎)의 종교로서의 자격
42 철학논집 21집

을 박탈하고, 공교회(孔敎會)는 “공학회”(孔學會)로 개칭되도록 강요


받았다. 80년대에 “유학은 종교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논
쟁이 벌어졌을 때에, 임계유와 같은 긍정론자의 출발점은 “봉건적” 유
가사상을 비판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두말할 것 없이 5∙4 운동(의 관
점)을 이어 받은 것이고, 또한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유가사상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최고조에 달한 봉건주의의 원천으로
인식되었고, 그래서 “유학”은 “유교”의 차원으로 강등되어 비판을 받
았다. 부정론자의 출발점은 유학이 황당무계한 미신이 아니고, 여전히
긍정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9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문제에 근본적인 역전 현상이 발생하였다. 유학이 종교이거나
혹은 종교적 성격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곧 그것이 일반적인 “학
문”(學) 보다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유학에
종교적 성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을 폄하하는 것이었
다. 유가가 종교이거나 혹은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관점
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태도의 변화를 가져 온 실마리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종교의 인식
에 대한 심화이고, 다른 하나는 홍콩과 대만의 신유가의 영향이다. 마
르크스는 종교는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아편이라고 하였는데, 중국학
계는 아편전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종교는 반동적이라고 생각하
였다. 90년에 마르크스 저작을 재해석 하는 과정에서, 학계는 마르크
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종교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종교에 대한 인식은 과거에 비해
관용적으로 바뀌었다. 90년대 이후에는 모종삼 등의 유학사상 및 미
국의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의 “종교는 궁극적 관심
(ultimate concern)”이라는 관점의 전파로 인해, 학계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종교는 초월적 세계와 궁극적 관심이 서로 연관되는 문화의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43

최고 형태라고 생각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대만과 홍콩의 신유가 및


재미 중국인 두유명 등의 유가의 종교성에 관한 사상을 받아들였다.
현대 신유가 중에서 하린은 30, 40년대에 종교가 서구문화에서 지
니는 가치를 인식하고,중용의 “성”(誠)에는 종교적 의미가 있다고
44
하였다. 50, 60년대의 홍콩∙대만의 신유가인 당군의와 모종삼 등은
「중국문화가 세계 인사들에게 경고함」(为中国文化警告世界人士宣
言)라는 글에서 유가는 초월적인 정감 혹은 종교정신을 지녔다고 하
였다. 이후에 모종삼은 유가는 내재적이면서 초월적인 “덕을 완성하
는 가르침”(成德之教)이라고 강조하였다. 당군의는「중국인문정신의
발전」이라는 글에서 유가의 정신에는 종교적 성격이 있고, 유가는 곧
도덕의 종교라고 지적하였다. 80년대 후반에 재미학자 두유명 등과
홍콩∙대만 신유가의 관점이 점차 대륙에 영향을 주어, 대륙학자들도
종교 자체를 긍정하고 유학의 종교적 성격을 인정하거나 혹은 유학은
종교라고 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종교”에 대한 인식은 기독교
를 유일한 전형과 표준으로 보는 관점도 타파하였다.
모종감(牟鐘鑒)은 유학은 종교라고 긍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
였다: “전통종교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의 거대한 응집력이다. 그것
이 형성한 종교의례는 중화민족공동체를 묶는 정신적 힘이었다. 사회
도덕의 풍조를 개선하는 데 있어 적극적인 작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
45
에 유학에 일정한 역사적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 하광호(何光滬)는
유학의 “반본(返本)과 개신(開新)”의 각도에서 “유교”는 모든 유가나
혹은 유학에 국한되지 않고, “은주 이래 3천년 동안 이어져 온 중국의
토착종교로, 천지신앙을 핵심으로 하고, ‘상제’ 개념, ‘천명’ 체험, 제
사활동과 제도를 포함하고 있으며, 유생(儒生)을 사회의 중추로 하고,

44. 贺麟儒家思想的新展开(文化与人生商务印书馆,1947) 6~7쪽.


45. 任继愈主编儒家问题争论集(宗教文化出版社,2000) 262쪽.
44 철학논집 21집

유학 중의 관련내용을 이념으로 삼는 일종의 종교체계”라고 지적하였


다. 유교와 유학이라는 각도에서 보면 “유교는 원류이고 유학은 지류
이다. 유교는 뿌리고 유학은 꽃이다. 유교의 이론은 유학에 있고 유학
의 정신은 유교에 있다.”46 그는 선진(先秦)의 초월적인 “천제관”(天
帝觀)으로 되돌아가서, 개방적인 태도로 밖으로는 기독교 사상을 흡수
하고 안으로는 민중과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동시에 과거의 철저한 부정론자들도 긍정론자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
하였다. 가령 장대년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만약에 넓은 의미로
종교를 이해한다면, 비록 귀신을 믿지 않고 내세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생에 대해 일정한 이해를 갖고 있고 인생에 대한 일정한 신념
을 제공하며 사람들의 생활을 인도하는 작용을 할 수 있으면 그것은
47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학을 종교로 보는 것은 가능하다.”

(4) 연구방법을 발전시켰다 중국철학사 연구는 줄곧 서양철학의 영


향을 받으며, 비교적 엄격하게 서양철학의 개념을 운용하여 중국철학

46. 何光沪中国文化的根与花 - 谈儒学的“返本”与“开新” (儒教问题争论集》


310쪽.
47. 「“儒学是否宗教”笔谈」 儒教问题争论集, 411쪽. 또한 방입천(方立天)의 회
고에 따르면, 장대년 선생은 홍콩의 공교교학원(孔敎敎學院) 원장인 탕은계
(汤恩佳) 선생의 공자논집(孔学论集)의 서문을 쓰면서, "공자는 괴력난신
(怪力亂神)에 대해 말하지 않고, 삶에 대해서만 말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말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자의 사상은 다른 종교와 다르다. 하지만
공학(孔學)은 인간은 반드시 사람의 도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하고, 사람들
로 하여금 굳건한 생활신앙을 갖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자의 학설에
는 종교의 기능이 있다. 공학은 ‘인도’(人道)를 주요내용으로 하고 ‘사람’을
궁극적 관심으로 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방입천은, 장대년 선생이 만
년에 공자의 사상에는 종교와 비종교의 이중적인 의미가 들어있음을 인정
하였다고 생각하였다.方立天, 「说不尽的感激,说不尽的追念」(不息集 北京
大学出版社,2005) 123쪽.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45

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중국철학에서 본체


론이든 우주론이든 모두 서양철학의 개념처럼 순수하지는 않다. 가령
주희철학에서 리와 기는 리가 기를 낳는 관계에 있는데, 이것은 본체
론과는 다르다. 또한 기의 물질성과 정신성의 문제에서, 기는 원래 물
질인데 아직 물질과 정신의 구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부정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아예 긍정적으로 보
아서 기가 물질과 정신의 통일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 태도와 관점이다. 중국철학계는 종종 서양철학을 기준으로 하
여, 중국철학의 우주론 혹은 본체론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모종삼은 중국철학은 우주본체론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였고,
두유명은 중국철학의 기는 물질과 정신의 통일이라고 하였는데, 이러
한 견해는 대륙학자들을 고취시켜, 중국철학의 특징으로 중국철학을
설명하고, 서양철학의 개념을 빌리되 서양을 기준으로 삼지는 않도록
하였다. 맹자는 만물은 내 안에 다 갖추어져 있다(萬物皆備於我)고 하
였고, 또한 진심(盡心)∙지성(知性)∙지천(知天)을 논했는데, ‘나’와 ‘천’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궁극적인 개념인가? 과거의 방법에 따르면, 만약
에 전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관유심주의가 되어 “천”의 문제를 처리
할 방법이 없게 된다. 만약에 후자라고 한다면 이는 객관유심주의가
되어 진심의 문제를 처리할 방법이 없게 된다. 만약에 유물과 유심의
분석틀 포기하고, 천도와 성명의 관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맹자도 천
명과 인성의 관통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분명히 중국
철학의 특징에 근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모종삼 등의 철학사 연구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이미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외
에도 장재 철학의 ‘허(虛)’ 개념의 해석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모종
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장재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한 장대년 선생의
“‘허’는 기이다”는 관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종삼은 송명이학을
46 철학논집 21집

세 종류로 나누었는데, 정주이학(程朱理學)이 “서자(別子爲宗)”라는


관점 또한 영향을 끼쳤다.

(5) 학술연구의 목적을 확립하였다 단순하게 객관적인 연구가 아니


라, 중국철학이 인간 존재와 사회발전 및 인류 미래에 대해서 지니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서 중국철학이 미래의 인류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가치 있는 지도이념을 제공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중국철학
을 발전시키는 태도로, 풍우란 선생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면, “이어
서” 말하는 것이지 단순하게 “따라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
한 중국철학의 생명력을 긍정하고 발전시키는 태도이지, 그것을 하나
의 죽은 유산 혹은 대상으로 보고비판을 가하는 태도가 아니다. 이러
한 태도가 학계에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기 시작하자, 어떤 학자는 지금
도 자기의 철학체계를 건립하고 있다.

4. 결론 : “철학”의 기대 - 동아시아 철학의 세계적


의의
이 부분은 필자의 근대이래 중국철학의 발전과 연구에 관한 감상이
다. 모두가 함께 논의에 참여하기 바란다. 현대에 이르러 “내성외왕”
의 이상은 기본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낮아졌고 사회는 직업의 도덕적
48
모범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양지”는 일반인의 실천이성일 뿐 더
이상 성인의 표지가 아니다. 따라서 미래의 “중국철학의 생명의 부흥”
은 더욱더 “철학”적 형식을 채택해야 한다.

48. 이것은 풍우란, 김악림의 관점이다. 필자도 여기에 동의한다.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47

“철학”적 형식의 채택은 근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자 우리가 세


계로 나아가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확실한 방법이다. “철학”을
채택하여 중국의 전통적 학문을 이해하는 것에는 자연히 선천적 한계
가 있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전통학문이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그것
을 모두 “철학”으로 간주해야 하고, 그것을 “철학적으로 사고”해야 한
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만이 “중국철학”을 만들어낼 수 있다. “중
국철학”이라고 부르지 않고 도학, 도술학, 의리지학 등으로 부른다 하
더라도 서양과 접촉하기 이전의 순수함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서양적 배경은 이 분야의 소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
기 때문인데, 심지어 경학, 제자학의 일부분을 찾아내어 하나의 분야
로 삼는 사유방식 자체가 바로 서양철학의 투사이다. 이러한 “철학적
으로 사고”하는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중국철학 연구에 있
어서 일종의 “구조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
로 “철학”을 이용하여 중국 전통자료를 정리하는 것의 선천적 한계이
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중국철학 연구는 실질적으로 오직 하나의 유
형, 즉 “서양으로 중국으로 해석하는(以西釋中)” 유형만이 있어 왔으
며, 이른바 “중국화된 연구”, “서양화된 연구”라는 유형의 구별은 근
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점은 오직 이러한 유형의 활용이 적합
하였는가 여부와 숙련되었는가의 여부만이 있을 뿐이다.
국제적 차원에서 볼 때 중국철학과 관련된 가장 이른 철학사 저술
은 1895년 일본 정상철차랑(井上哲次郞)이 독일 유심론의 방법을 사
용하여 지은 일본의 주자학, 일본의 양명학이다. 이는 서양적 지
식 혹은 철학의 틀로써 동양 사료를 정리한 효시이다. 이러한 태도와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포함하고 있다. 중국 전통학문의 존재방식
에 근본적 전환, 즉 도통의 소멸이 발생하여 도통의 연속성이 중단되
고 문화의 내재 발전이 중단되며 중국 전통학문은 대상, 객체이자 과
48 철학논집 21집

거의 사체로 간주 되어 대상적 연구태도가 수립되고 이와 대응되는


실유제기라는 일체적인 공부론적 태도는 포기된다는 것이다. 성현지
학, 의리지학은 중국“철학”으로 전환된다. 이는 근대 이래 중국문화
발전의 단서이며 “중국철학”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 또는 중국철학적
유형의 형성인 것이다. 후에 모든 중국철학사 연구는 대체로 이러한
사유방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전환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중국
과 전체 동양문화의 근대적 전환 가운데 있다. 일본의 최초의 중국철
학사통사는 송본문삼랑이 1898년 출판한 중국철학사이며, 그 뒤로
각각 원등융길이 1900년 출판한 중국철학사, 우야철인이 1914년
출판한 중국철학사강화 등이 있다. 중국 최초의 근대적 의의의 철학
사는 사무량의 중국철학사(1915)이고, 그 후에 호적의 중국철학사
대강(1919)이 있는데, 이 분야의 기초를 다진 것은 풍우란의 중국
철학사 상하권(1930, 1934)이다. 독일 최초의 중국철학사는 포크
(Alfred Forke)가 1927년에 출판한 중국고대철학사(Geschichte
der alten chinesischen Philosophie)이며, 그 뒤 1934년과 1938년에
각각 중국중세기철학사(Geschichte der mittelalterlichen Chinesi-
schen Philosophie)와 중국근대철학사(Geschichte der neueren
Chinesischen Philosophie)를 출판하였다. 60-70년대에 이르러 모종
삼은 심체와 성체, 재성과 현리, 불성과 반야 등의 저작을 출판
하였고, 노사광이 중국철학사, 나광이 중국철학사상사를 출판하는
등 1949년 이후 중국 대륙은 각종 철학사 및 통사 교재를 출판하였
다. 이상을 종합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중국철학 연구는 전부 “서양으
로 중국을 해석하는” “철학적 방식”의 산물이다. 이는 근대 이래 중국
철학사 연구의 첫 번째 보편 명제이다.
중국에는 일관된 독립적 학문분야로서의 “철학”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철학”을 떠올리면 “중국의 철학”이든 “중국에서의 철학”이든 간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49

에 모두 “철학”을 공동의 전제로 삼게 되었고, 이러한 전제를 배경 혹


은 무대로 한 연출은 이에 대한 의식이 있는가를 문제 삼을 뿐이었다.
“철학”이 “중국철학”의 “원죄”라는 것은 지금까지 모든 중국철학 연
구의 유형은 “비교철학연구”의 형태를 띠며, 이것이 근대 이래 중국철
학사 연구의 두 번째 보편명제로서 첫 번째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되어 나오는 명제임을 의미한다. 이는 “철학적 방식”의 채택에 의
해 필연적으로 발생한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숙명이며 중국철학사가
지닌 방법상의 선천적 한계이다. 철학이라면 철학적 연구방법이어야
하고, “철학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학자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양철학을 보편적 방법으로 간주하여 중국철
학을 건립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볼 때, 이른바
“이론을 방법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이론이 처한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묘사이며, 중국철학 연구 방법론에 대한 표현이며, 서양
철학의 보편화라는 결론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철학을
이용하여 중국철학을 연구할 때에 서양철학은 “철학”으로 변화되었
고, 방법, 표준, 가치관으로 변화되었다. 연구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중국철학“에 대한(ueber)” 연구가 되었으며, 서양철학을 표준으
로 삼아 비판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방법은 1949년 이후 한동안
극에 달하였다.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비교연구”는 비교에 대한 자각
을 더할 뿐으로, 쌍방 각자의 특징을 더욱 명료하게 할 따름이다.
근대 이래 중국철학 연구에 관한 세 번째 명제는 서로 다른 서양철
학마다 “중국철학”에 대하여 서로 다른 적합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
또한 중국철학사학사의 기본적 사실이다. 중국 스스로의 철학사 연구
에 대하여 말하면, 사무량의 철학사 역시 우주론, 지식론 등의 유형을
채택하였으며, 5.4운동 시기에 비교적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호적의 실
용주의적 중국철학사로서, 묵자 등에 대한 서술은 봐줄만 하나 공손룡
50 철학논집 21집

등에 대한 서술은 상당히 미흡하다. 중국철학사의 진정한 초석을 다진


풍우란의 철학사는 실험주의의 기초 위에 신실재론의 관점을 취하였
다. 이 저작의 공손룡, 정주이학에 대한 해석은 지금까지 통용되는 관
점이다. 풍우란의 신실재론적 철학사는 중국철학에 의심의 여지없이
더욱 잘 적용되지만 육왕학에 대한 분석에서는 약간의 결함을 드러낸
다. 모종삼은 칸트철학으로 중국철학사를 해석하고 육왕에 대한 이해
를 더욱 심화시켰으나, 정주에 대한 해석은 독단적인 측면이 있다. 그
밖에 노사광의 철학사는 도덕 주체성을 근본으로 삼아 중국철학을 이
해하고 맹자, 육왕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지만, 수많은 철학자들을
철학 영역 바깥으로 배척하였다. 나광의 철학사는 “천”, “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동시에 천을 “상제”로 변화시켜 비교적 분명한 스
토아철학의 특징을 드러냈다. 주다노프 유형의 결함은 본 글에서 이미
분석한 바 있다.
편향성은 모든 중국철학사 연구방법의 공통적 특징이며, 중국철학
사 연구에는 일시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해결책이란
없다고 할 수 있다. 시대의 전진과 철학의 발전은 방법론의 개선을 가
져온다. 이것이 바로 중국철학사 연구의 네 번째 명제이다.: 의식하든
않든 간에 지금까지 “중국철학”은 모두 서양철학에 기대어 정립되었
다. 서양철학은 중국철학 배후의 버팀목이다. 우선 한 시대의 서양철
학이 있고난 뒤에 비로소 이 시대의 중국철학에 대한 “최신”의 이해가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서양철학을 방법론으로 하여 중국철학사학
사를 한 차례 둘러볼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왕국유의 칸
트, 쇼펜하우어, 니체철학, 호적의 실험주의, 풍우란의 신실재론, 모종
삼의 칸트철학, 하린 등의 칸트, 헤겔철학, 노사광의 주체성철학, 나광
의 신스토아 철학, 중국대륙의 장장 50년에 걸친 마르크스주의 철학,
최근 수년간의 후설의 현상학, 영미의 분석철학, 하이데거, 사르트르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51

등의 실존주의, 가다머의 해석학 등이다. 매번 새로운 해석이 중국철


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고, 중국철학의 가치를 바로 세웠다. 그러
나 동시에 우리에게 중국철학은 결국 어떠한 서양철학과 같은가, 무엇
이 중국철학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우리는 무엇이
자유로우며, 서양에 의해 “움직이지”않는 중국철학인가에 대한 감각
을 상실하였고, 일종의 실어증에 걸렸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철학사
연구는 “식민화”의 지경에 이르러 버렸다. 이는 1949년 이후 주다노
프 유형이 중국철학사의 가치를 마르크스주의의 정확성을 논증하는
것으로 확정지어버린 것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철학사 연구의 “식민
화”는 현대 중국철학연구 현황에 관한 다섯 번째 명제이다. 물론 여기
서의 식민화가 문화혁명 기간 및 문화혁명 이전과 다른 점은 현재의
연구는 중국철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쪽이 주류이나, 과거에는 부정하
는 쪽이 주류였다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 태도의 차이이다. 같은 점은
모두 서양철학을 사용하여 중국철학의 시비, 옳음과 잘못, 가치의 유
무를 가린다는 것이다. 학술의 식민화는 한편으로는 “철학”적 형식을
선택하는 숙명을 지니는데, “철학”을 선택하기만 하면 식민화를 선택
할 수밖에 없고, 타자를 패권적 용어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식민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러한 식민화에도 적극적 의미가 있다. 첫째, 식민화는 무엇이 중국철
학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둘째, 현재의 식민화는 중국철학
의 가치를 긍정하여 과거의 태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만일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식민화는 연구방법상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며 결론
적으로는 도리어 서양철학이 식민화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예컨대
모종삼은 칸트에는 인간이 지적 지각을 지녔다는 사상이 없다고 주장
하고 중국 성현의 학의 관점에서 지적 지각을 긍정하고 반대로 칸트철
학을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식민화 태도는 방법상으로 표현된
52 철학논집 21집

것일 뿐이며, 결론적으로 표현된 것은 아니다. 또한 형식적인 것이지


실질적인 것이 아니다. 셋째, 어느 정도의 식민화는 피할 수 없다. 근
대 이후의 사회는 식민화로 발전하여 외부환경에 합법성을 부여하였
다. 학술 이론 자체는 발전하여 내재적 합법성을 부여하였다. 따라서
넷째, 식민화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객관적 인식이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중국철학 자체의 내재성에서 출발하여 그 가치에 대
한 논증을 최종적으로 확립해야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 대상적 방법을 벗어나도록 요구하는데, 중국철학을 죽
은 과거의 유물로 보아선 안 되고 다만 몇 가지 새로운 방법을 이용하
여 연구해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중간에 끊기더라도 다시 연결하여
이어나가는 태도이며 일체화된 건설적 태도이며 해석학적 태도이다.
건설적 입장을 취하여 이해하는 가운데 중국철학을 건설하고 발전
시키자는 것이 필자가 제기하고자 하는 결론이다. 이는 우리의 중국철
학사 연구 방법론에 관한 건의이기도 하다. 이것이 중국철학 연구에
관한 여섯 번째 명제이다. 우리가 말하는 건설적 입장이란 우선 대상
적 태도, 즉 중국철학을 죽은 객관대상으로 간주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태도를 버리고 자신이 이러한 철학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객관
적으로” 관찰하고 자세히 살피며 비판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반
대로 우리는 이러한 철학과 “대화”하는 관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
현실의 시계(視域)에서 출발하여 이러한 철학과 부단히 시계(視域) 융
합적인 대화를 나누며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시계를 확장하고 “중국
철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다. 이러한 이해 역시 중국철학에 대한
건설이다. 해석학은 여기서 방법론적 의의만을 지닌다.
건설이란 전통에 활력을 불어넣고, 중국철학을 살아 숨쉬며 커나가
는 전통으로 대우하는 것으로서, 근대이후의 정신적 단절을 다시금 이
어나가는 것이다. 중국철학을 죽음에서 다시 살려내는 것이 해석학적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53

입장의 기본적 요구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제기하고자 하는 중국철


학사 연구에 관한 일곱 번째 명제이다. 즉 해석학을 통해 건립된 것은
중국적 “해석학”이 아니라 중국철학인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현대 중국철학 연구의 여덟 번째 명제 혹은 희망
사항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중국문화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이러한
주체성은 “철학”의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서양철학”은 아니다. 그것
은 “철학” 이전의 중국학술을 기본정신으로 삼지만 원교조주의적으로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이러한 주체성은 서양철학을 광범위하
게 흡수한 기초 위에서 중국철학 발전의 연장선을 따라 새로운 세계
문화 이념을 제안하고 새로운 철학을 건립하여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서양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중국과도 연결된
다. 주체성이란 사실은 창조성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원동력이
지,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중국철학”으로 돌아간다는 것
은 허구의 명제인데, 중국에는 과거에 “철학”이라는 학문분야가 존재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곳으로 돌아가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 하유진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 본 논문의 중국어 원문은 http://hompi.sogang.ac.kr/sgriphil/에서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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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10년 4월 9일 접수되고


2010년 5월 3일 심사 완료되어
2010년 5월 10일 게재가 확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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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Study of the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in


Contemporary China from 1949 to 2009

Qiao Qing-Ju (Nankai Univ.)

The study history of the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in main land


China from 1949 on can be divided into 6 periods as follows. Due to the
liberation the task of the Chinese philosophy circle in the first period which
began in 1949 and ended in 1957 was to remove the study paradigm
founded by philosopher Feng You-lan etc. and to accept Marxism as well as
Maoism. Accepting a former Soviet Union high officer Andrei
Aleksandrovich Zhdanov’s point that a history of philosophy is one that
materialism comes to maturity in the process of taking idealism as its target
to struggle with, Chinese scholars in this field erected a view of purposive
history. In the second period from 1957 to 1959, Scholars began to reflect
on the purposive view of history, admitting idealism has its positive aspects
to human thinking, but this reflection was interrupted by political movement
"Anti-Rightists" in which many intellectuals were labeled as "the Rightist"
and lost their rights of study. The third period from 1959 to 1966 is a
somewhat peaceful interval in which there were relatively fewer political
activities that interfere academic research and many general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were published such as Feng You-lan’s A New Edition
of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and Hou Wai-lu’s A General History of
Chinese Thoughts.The fourth period was the ten years "the great cultural
현대중국의 중국철학 연구 59

revolution" dated from 1966 to 1976, in which all academic research were
stopped except the "to value the legalist school and to criticize the
Confucian school"movement that can not be deemed as academic research at
all. The fifth period from 1976 to 1989 was a new start to the circle of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in which scholars replaced Zhdanov’s view
with Lenin’s view that "a history of philosophy is generally speaking a
history of human recognition"and began to study Chinese philosophy from
angles of conceptsor categories evolves. Many general history books of
Chinese philosophy were also published in this time with a newhistory view
that deems Chinese philosophy as a history of thinking instead of merely a
history of materialism overcomes idealism. The sixth and also the final
period date from 1989 to the present time with characteristics of plural
methodology and a revival of the life of Chinese philosophy. Such western
philosophical theories as Hegelianism and Existentialism were adopted by
academia of Chinese philosophy as methodology. As time went on, many
scholars gradually became conscious that traditional Chinese philosophies
still have vitality to be revived they advocated "New Daoism", "New
Benevolence theory", "the Fourth Development of Confucianism". "Modern
Confucianism study program"conducted from last 80s on changed the mere
critical attitude to traditional Chinesephilosophy existing in academia from
1949 on and enriched the scholar’s view about Chinese philosophy. Taking
the entire study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in main land China as a
whole it can be recognized that the study is deeply influenced by society
transition and the developing trend of the study is that the reason of Chinese
people is becoming maturity and the subjectivity of Chinese culture is being
erected.

Key words: The study history of the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maturity of reason,
subjectivity of Chinese culture, the vitality of Chinese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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