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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역사학대회

과학사 분과

2021년 10월 30일 토요일


9:40 AM – 6:20 PM

ZOOM 회의 ID: 817 5148 5562


PW: 2021
입장 및 개회사
문중양 (한국과학사학회회장, 서울대)
9:40-10:00

엔지니어 개념 형성을 둘러싼 100년 간의 투쟁 한경희(연세대) 2


세션 1
부안 방사성폐기물처리장 반대운동을 통해 살펴본 김효민(UNIST),
역사 속의 위기와 4
사회기술적 전망의 주류화와 주변화 정승미(KAIST)
과학기술학의 대응
부르디외, 역사사회학, 그리고 과학기술학:
10:00-11:20 전준 (충남대) 6
비판적 실재론을 중심으로

사회: 김준수 (서울대)


토론: 유상운 (한밭대)
보건과 환경위생의 갈림길:
박지영 (인제대) 9
국립보건연구원의 재편과 국립환경연구소의 설립
“민주적 진압 기술”?:
현재환 (부산대) 11
세션 2 최루탄 공해와 시위 마스크의 냉전적 기원
환경과 보건 공해 문제와 환경과학의 등장:
원주영 (서울대) 15
11:30-13:00 학술원 공해문제연구위원회를 중심으로
산업환경의 부상:
박승만 (가톨릭대) 17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의 국가와 산업의학
사회: 장하원 (경희대)
토론: 강연실 (KAIST)

홍대용의 농수각, 유학자의 천문대 임종태 (서울대) 21

세션 3 자연문화물 두루미를 통해 본 조선 실학의 도구성:


이정 (이화여대) 24
조선시대의 기회만 있고 위기는 없었던 조선 학문의 전환
과학과 기술
이순신 거북선의 공격선과 수송선의 기능에 적합한 구조와 외형 채연석 (UST) 27
13:50-15:10
사회: 남경욱 (과천과학관)
토론: 이기복 (서울대)

다윈은 어떻게 ‘라마르크주의자’가 되었는가 이종찬 (아주대) 31

세션 4 기로에 선 물리학: 솔베이 회의, 1911-1933 김재영 (한국과학영재학교) 33


근현대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 호르몬 치료의 상품화, 회춘 연구의 정당화 김나영 (서울대) 36
15:20–17:00 메타볼리즘에서 회복탄력성으로: 조현정 (KAIST),
39
인류세적 관점에서 본 전후 일본 건축의 쟁점 박범순 (KAIST)
사회: 신유정 (전북대)
토론: 박민아 (한양대)

특별강연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메타과학 연구자로 살아가기 이상욱 (한양대)


17:10-18:00 사회: 선유정 (전북대)

18:00-18:20 한국과학사학회 총회 및 폐회사 사회: 이정(이화여대)


세션 1
역사 속의 위기와 과학기술학의 대응
10:00-11:20

엔지니어 개념 형성을 둘러싼 100년 간의 투쟁 한경희(연세대)

부안 방사성폐기물처리장 반대운동을 통해 살펴본


사회기술적 전망의 주류화와 주변화 김효민(UNIST), 정승미(KAIST)

부르디외, 역사사회학, 그리고 과학기술학:


전준 (충남대)
비판적 실재론을 중심으로

사회: 김준수 (서울대)


토론: 유상운 (한밭대)
엔지니어 개념 형성을 둘러싼 100년간의 투쟁

한경희 (연세대 공학교육혁신센터)

이 연구는 엔지니어라는 근대 직업인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이 직업의 정체성이 한국 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려는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이 질문은 20세기 이후 세계 어느 곳을 가
더라도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엔지니어의 자격과 활동, 사회적 위상이 사실은 역사적, 사회적 다
양성과 독특한 특징을 담고 있다는 선행 연구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과학(science)과 공학
(engineering)이 지식과 인공물, 제도와 조직, 문화로서 등장하고 성장하는 과정은 내내 갈등과 투
쟁의 연속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 갈등 과정이 갖는 보편성과 지역
성(locality)은 놀라울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과학, 기술, 공학의 용어와 의미가 정착된 것은 이들을 학습하고 실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
고 그것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엄격한 절차와 규칙, 제도를 만들어낸 일련의 과정과 일치한다.
그 메카니즘과 성과를 분석하고 방향성을 가늠하는 것이 국가와 현대 지식인들의 도전 과제가 된
지 오래다. 많은 연구들을 통해 과학과 공학이 근대와 지금의 삶을 구성한 핵심 원리임을 밝혔
다. 이 연구 또한 그러한 지적 성과 위에 서 있다.
근대 한국의 성립과 특징을 이해하는 데에도 공학과 엔지니어를 일종의 표제어로 사용할 수
있다. 그만큼 이들 용어와 용어를 둘러싼 인식은 우리 사회에서 문제적이다. 그 이유는 첫째, 우
리가 사용하는 엔지니어 개념 자체가 사회적 구성물이고,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개념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리제이션이 진행되면서 엔지니어라는 표현이 크게 낯설지 않게 되었지만,
공식적으로 혹은 현실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는 여전히 과학기술이나 과학기술자라는 표현이다.
흥미롭게도 이공계열을 전공한 당사자들 다수는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정체성이 다르다고 생각하
지만 정책적 관점이나 대중적 관점에서는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이처럼 용어 사용을 둘러싼 인
식, 그 내부에는 근대적 직업의 자리와 위신, 역할을 둘러싼 서로 다른 관점들의 충돌과 협상, 타
협이 꿈틀대고 있다.
둘째, 엔지니어의 직업적, 사회적 지위에 관한 한 과학기술계 엘리트 집단의 판단은 크게 변하
지 않고 한결같아 보인다. 한국 사회의 이공계 경시 문화가 여전히 팽배하여 과학기술자들의 사
기를 떨어뜨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우수 인재 충원을 막는 고질적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농공상의 위계를 신봉했던 오랜 전통이나 뿌리 깊은 중인의식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 연구는
이러한 주장과 확신의 기저에 흐르는 역사적, 사회적 경험에 주목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과학기술
개념이 널리 사용된 배경도 이와 관련하여 다룰 수 있다.
엔지니어 용어가 갖는 세 번째 문제적 특성은 엔지니어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에 대한 내부와
외부의 인식이 동기화된 과정과 관련된다. 한국 사회에서 엔지니어는 전문가적 지식과 실천에만
의존하고 활동해야 한다는 엑스퍼티즘(expertism)이 강하다. 이에 비해 전문가에 대한 사회적 인
정과 평가를 요구하는 만큼 조직적으로 전문직의 역할과 책임을 논의하고 지향하려는 전문직주의
(professionalism)는 취약한 편이다. 모든 국민이 누리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의지와 실천이 마치
엔지니어 집단에게는,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제한된 조건과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능력인
듯 보인다. 제한된 조건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진행할 필요가 있다.
엔지니어 관련 용어의 정착과 실제 엔지니어 활동에 대한 인식과 판단은 어떤 장소에서든 고
정된 적이 없다. 그것은 여전히 열려 있는 이슈이다. 엔지니어 관련 용어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어떤 경로를 지나왔는지의 과정과 그 영향은 한국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아이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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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야말로 근대한국, 기술한국, 과학기술 중심사회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엔지
니어의 등장과 정체성, 그들의 활동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의 전선이 누구와 관련하여 어떻게 진
행되어왔는지, 그것이 갖는 의미와 결과에 관해 논의할 것이다. 그 출발점이 한말부터 2000년 무
렵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어왔기에 이를 100년간의 투쟁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제안한다. 그 주요한 논점을 다음의 항목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 근대 초기 엔지니어의 기원과 공(工)의 분화: ‘기술직 중인’에 담긴 현대적 시선과 한중일
근대화에서 공(工)이 분화된 과정 (工學/工程/工業)
[2] 일제강점기: ‘식민지 기술자’의 틀 안에서 조선인을 하급 기능인으로 제한하려 했던 일본의
정책과 그에 맞서 ‘조선인 기술자’의 공간과 미래를 만들고자 했던 엔지니어들
[3] 테크노크라트(1): 과학기술 거버넌스 구축과 그 주체를 둘러싼 해방 초기의 갈등, ‘과학기
술’, ‘과학기술자’ 개념의 형성과 그 의미
[4] 테크노크라트(2): ‘원자력’과 ‘박정희’를 둘러싼 담론 경쟁
[5] 일하며 싸우는 국민, ‘산업역군’: 중등 기술교육과 기술자격제도의 역설
[6] 공돌이와 공학인: 생산직과 사무직 엔지니어의 결별
[7] 탈정치적 주체 이슈와 기술논쟁의 전개
[8] 전문가 정체성: 이공계 기피 혹은 위기의 원인을 둘러싼 논쟁

결국 엔지니어 정체성의 형성 과정은 근대 한국에 대한 청사진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의 상


상과 그들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기술-국가 시스템 안에서 엔지니
어의 위상과 지위, 역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의식으로 나타났다. 근대화 이후 식민 권
력의 지배로부터 개발독재를 이끈 정부, 발전주의 패러다임을 지지한 일련의 정책들, 재벌의 성장
과 지배력 강화, 경쟁력 담론의 우위 등은 엔지니어를 하급 기술자, 산업 역군, 기능적 전문인,
인적 자본, 탈정치적 혹은 중립적 전문가로 규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 위로부터의 힘이었다. 그것
은 제도와 문화의 구축을 통해 실행되고 재생산되었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은 이러한 상황에 그저 순응한 것만은 아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에 호기심
을 갖고 개인의 역량을 키우고 발휘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탐색하고 또 도전했다. 서
양과 인접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압도하는 기술력에 대항할 나름대로의 방법을 모색했고 그것을
과학과 발명의 개념에 담거나 교육을 통해, 혹은 현장 경험을 통해 배우기 위해 분투했다. 총력
전체제를 통해 몸에 밴 규율 속에서도 조국 근대화의 기수이기 이전에 가족과 공동체의 안전과
발전에 가치를 두었고 그렇게 행동했다. 한편으로는 경쟁력 있는 인적 자원이 되기 위해 분투했
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경쟁력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대안을 찾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
았다. 정치적 주체로서 각성하고 행동한 1980년대 이후의 시간들, 국내외에서 제기된 각종 재난
사고와 위기, 1990년대 후반 금융위기 이후 불거진 이공계 위기 담론에 대한 대응 필요성은 소위
전문성, 혹은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 정체성을 둘러싼 논의로 나아갔다.
지나온 한국 엔지니어의 정체성 투쟁의 역사를 보면, 이 시대에 그들이 다루어야 할 일과 방향
을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주는 듯하다. 연구, 교육, 산업 등에서 기술-국가 프레임을 넘어서는 사회
적 상상과 그것의 실질적 구현, 엑스퍼티즘에서 전문직주의로의 전환, 엘리트주의를 성찰하고 그
에 대응할 집합적 목소리 만들기, 대립하는 가치들, 예를 들면 발전주의를 둘러싼 담론들 사이에
서 새 길 찾기, 여성 및 소수자 등 과소대표된 주체들의 목소리와 자리를 엔지니어링 안에 동기
화할 방법을 모색하는 등의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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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방사성폐기물처리장 반대운동을 통해 살펴본 사회기술적 전망의 주류화와 주변화

정승미(KAIST), 김효민 (UNIST)

이 발표는 한국의 지역 주민들이 원자력 관련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고, 그들이 공유하였던


사회기술적 전망(sociotechnical vision) 또한 주변화되었던 과정을 부안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하
방폐장) 반대운동(2003년-2004년)이라는 한 역사적 사례를 통하여 살펴본다. 텍스트 분석을 위해
서는 2010년 사회갈등연구소가 출간한 「부안 방폐장 관련 주민운동 백서」를 활용하여 지역 주민
들의 인터뷰에서 자주 등장하였던 단어, 사이중심성과 근접중심성이 높은 단어들을 찾고 시각화
하였다. 또한 원자력 전문가들과 시민환경단체 활동가들의 언설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부안 방폐
장”을 언급한 총 52개의 기고문을 활용하였다.
“공업 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는 그날엔 국가 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눈앞에 도
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라는 박정희의 연설문이 그리는 강력한 국가에 대한 지지 또는 비판
은 한국 원자력에 대한 사회적, 학술적 논의에서도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과학기술을 통
한 국가 경쟁력 강화의 서사는 찬핵 진영의 성장과 함께 확산되었다. 한편 ‘핵발전’으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산업주의, 권위주의적 기술체계에 대한 비판 의식은 반핵 진영의 형성 과정과 연계되어
성장하였다. 반핵 진영은 원자력 기술을 “중앙정부가 반민주적 방식으로 강요한 핵발전정책”의
요체로 보아 비판하였으며,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부안 방폐장 반대운동을 “부안항쟁”으로 부르
는 언설은 때로 “‘광주항쟁’에 대한 인식”까지도 언급해왔다. 즉, (과학기술에 의해 추동된) 국가
의 산업 발전, 그리고 반민주적인 중앙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에 저항하는 시민의 성장이라는 두
사회기술적 전망이 모두 한국에서 특별한 위치를 확보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의 원자력
기술을 자신과 유관한 사물로서 이해하는 행위자가 자기 감각(sense of self)을 분명히 하는 과정
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좋은 사회(good society)의 질서가 마땅히 어떠해야한다는 정념이
며, 이것은 앞서 언급된 두 전망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렇게 구도가 선명한 이야기에 더 이상 분석을 보탤 수가 있을까? 이 연구는 원자력 시설 주
변 지역 주민들에게 주목하여, 그동안 이들을 찬핵과 반핵 둘 중 어느 틀에도 꼭 들어맞지 않으
며 따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욕구를 갖고 있는 행위자로 만들어왔던 기제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물론 우리는 경제 성장에 대한 희구와 반민주적 절차에 대한 비판, 둘 중 하나로 요약되지 않는
주민의 이야기가 있으리라 상식적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바로 이 공백이, 찬핵과 반핵의 서사가 주도적인 사회기술적 상상(dominant
sociotechnical imaginaries)의 지위를 차지하였음을 보여준다.
발표는 찬핵 및 반핵 진영의 전문가들과 부안 지역 주민들이 방폐장 입지 및 원자력발전 정책
결정 과정 속에서 자신들이 취했던 입장을 어떻게 서사화하는지에 주목하여, 각 집단이 공유했던
사회기술적 전망이 어떻게 확산 또는 주변화되었는지를 논의한다. 부안 방폐장 반대운동은 부안
군수 김종규가 기자회견을 열어 위도 방폐장 유치를 전격 선언한 2003년 7월 11일 이후 일어나
이후 15 개월 간 지속되었다. 7 만 인구 부안군 주민 중 2 만 명이 모였던 촛불집회, 서해안 고
속도로 점거, 학생 등교 거부, 공권력에 의한 강경 진압, 군수 폭행, 주민투표 등 일련의 격렬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후 2005년 3월 31일 국회는 「중․저준위폐기물시설의 유치지역에 관한 특별
법」을 의결했고, 이 법에 따라 유치지역 선정 시 주민투표를 거칠 것이 의무화되었으며 선정지역
은 특별지원금을 사업개시 초기단계에 지급받도록 보장되었다. 반대파의 비판이 집중되었던 인물
인 김종규 군수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낙선하였으나 2014년에 재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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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문 분석 결과는, 과학기술전문가들과 환경시민단체 활동가들이 각각 원자력을 통한
경제발전과 참여적 거버넌스를 통한 정치적 진보라는 대립하는 두 사회기술적 전망을 제시하였음
을 보여준다. 과학기술전문가들의 발화는 2014년 경주 중․저준위 방폐장 완공이라는 물질적 변화
로, 환경시민단체의 발화는 주민투표와 공론조사를 포함한 참여적 거버넌스라는 제도적 변화로
각각 이어져, 두 행위자 그룹의 사회기술적 전망이 국가적 수준의 사회기술적 상상으로 확대되었
다. 반면 부안 주민들의 사회기술적 전망은 더 큰 사회와의 연계를 만들지 못한 지역 내 담론으
로 머물렀다. 주민들의 인터뷰 분석 결과는, 부안이라는 한 지역사회가 국가가 진보하는 과정에서
담당했던 역할에 대한 보상이 주어졌어야 마땅했다는 발화를 보여준다. 이는 유치 찬성과 반대
주민 모두에게서 나타난 발화였으며, 다만 유치 찬성 주민은 국가의 경제적 성장에, 반대 주민은
국가의 정치적 진보에 주목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다음의 문제를 제기하여 주의를 환기하고자 한다. 원자력 관련 시설 주
변 및 후보지 주변 주민들이 경험해야했던 일들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그것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에 “적합한 보상”은 지급되기 이전에 논의조차
충분히 되지 않고 있다. 지역 사회의 주민들이 시설 유치 찬반 입장과 무관하게 형성한 보상에
대한 요구는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심도 거의 끌어내지 못하
였다. 반면 찬핵과 반핵 진영의 서사는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2017년 신고리 5,6호
기 공론화는 두 서사를 더욱 확산시키는 제도적 장치로서 작동하였다. 우리는 원자력 관련 문제
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그 과정에서 책임, 권리, 위험, 혜택, 자원을 어떻게 분배하는 사회를 ‘좋
은 사회’라 부를 것인가? 이 문제에 응답하는 지역 주민들의 말, 전망, 상상이 속박된 채로 남는
한, 원자력 거버넌스는 정의롭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본 발표를 통해 우리는 시민참여와
함께 “탈원전”을 지향하는 현 정부에서도 남아있는 갈등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지역, 사회기술적
전망, 상상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발표는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과 역사학, 사회학의 접점에 대
해서도 논의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과학기술학은, 과학기술의 진보에 대한 신뢰가 위기에 처한
현대 사회의 문제를 시민참여적 거버넌스를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기획에 이바지하는 학문으로
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학은, 한 사회가 확실한 ‘증명’으로 받아들인 과학적 ‘사실’이나
‘유용’한 것으로서 수용한 기술산물의 안정된 위치를 흔들면서 비판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과학기술학은, 과학기술의 지적 권위가 어떻게 달성되었는가의 문제를 분석적으로 다루어왔다. 역
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문제의식, 예컨대 한 정체(polity)의 경계 안에서 비교적 장기간 순환하는
사회기술적 상상이 어떻게 주도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는가와 같은 문제에 대한 천착이 과학
기술학의 중심에 놓여있다. 이는 물론 이미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한 사회기술적 상상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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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 역사 사회학, 그리고 과학기술학: 비판적 실재론을 중심으로

전준 (충남대학교)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20 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었던 현대 사회이론가중


한명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과학기술사회학과 과학사의 영역에서 부르디외의 유용성을 활용한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본 연구는 특히 역사 사회학자로서의 부르디외를 조명해 내고 과학사
연구에 있어서의 잠재적인 유용성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첫째, 부르디외의 장, 자본, 아비투스의
개념은 사회 현상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사회 현상은 체화된 역사성의 선택적 발현이다. 둘째, 부르디외의 사회 이해는 비판적
실재론 (Critical Realism)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는 현상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실재들(realities)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부르디외에 따르면, 사회현상이란 축적된 역사성으로 펼쳐진 장(field)과 역사를 체화한
개인의 아비투스 사이의 상호작용이 된다. 셋째, 이러한 역사 사회학적인 방법론은 과학기술학에
유용한 도구를 제공한다. 특히, 권력과 과학기술장의 상호작용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 부르디외의
이론들은 역사학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학적인 통찰력을 가져다 준다는 점을 보일 것이다.

부르디외의 장, 자본, 그리고 아비투스의 개념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연관


행위자와 제도의 역사성을 사용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사회학의 연구 대상이 되는 행위자의
관점을 현실 인식의 1 차적인 재료로 사용한다면, 이는 현상의 실재가 모든 행위자들에게
동등하게 관찰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는 점에서 오류를 범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해당 행위자의
관점과 행위를 역사적이고 사회학적인 메타분석의 대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점을
갖게 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태도를 자발적 사회학(spontaneous sociology)라고 부르며 꾸준히
비판한 바 있다 (Wacquant, 2002). 그가 보기에 사회학의 핵심은 성찰성 (reflexivity)인데, 그것은
사회학 연구의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제도와 권력의 구조와 기능을 분석해 내고, 그러한
지형도에 개개인을 위치시켜 대상화 (objectivation)하는 능력이다 (Bourdieu and Wacquant, 1992).
이렇게 대상화된 집단은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권력이 작동하는 제도의 장 안에서 자신의 삶의
궤적 (trajectory)에 따라 아비투스를 발휘하는 개체가 된다. 따라서, "모든 사회학은
역사학적이어야 하며, 모든 역사학 또한 사회학적이어야 한다 (Bourdieu and Wacquant, 1992:
90)"는 말처럼, 부르디외는 사회학과 역사학의 인위적인 구별과 분업을 거부했다.

이러한 부르디외의 사회적 분석 방법론은 실제의 다층성에 대한 그의 인식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자발적 사회학은 발화와 상호작용의 관찰을 통해 사회 현상의 실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
장하지만, 부르디외는 이를 실제의 여러 층 중 한 겹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상호작용의
진실은 절대로 상호작용 안에서 만은 찾을 수 없다 (Bourdieu, 2005: 148)"고 한 것이며, 이는 행
위자들이 위치하고 있는 사회적 공간이 진실의 또 다른 축임을 뜻한다. 비판적 실재론에 따르면
사회의 실재적인 구조는 세 가지 영역에서 공존한다. 첫째, 경험적 (empirical) 영역은 개별 행위
자의 감각 경험을 통해 구성된다. 둘째, 현실적 (actual) 영역은 개별 행위자가 자신이 위치한 구
조적 맥락과 교차하면서 인식해 내는 실재이다. 셋째, 참 (real)의 영역은 가장 심원하고 근원적인
데, 사건 (events)이 발생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동인을 포괄한다 (Decoteau, 2015). 부르디외의 역
사사회학은 비판적 실재론에서 지칭하는 세 가지 영역의 "실재들"을 모두 활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특히 자본-장의 구성과 작동 방식은 참의 영역을, 아비투스-장의 교차는 현실적 영역을,
아비투스를 바탕으로 한 개별 행위자의 사회 인식은 경험적 영역의 실재를 구축하는데 사용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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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따라서, 부르디외의 역사사회학은 과학기술학에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과학기술학에는
역사사회학, 신제도주의, 구조주의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한 연구들과 참여관찰연구를 바탕으로 한
연구들 사이의 긴장이 존재하는데, 비판적 실재론과 부르디외의 이론은 이 긴장을 중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부르디외는 스스로 알렉산드르 코이레와 가스통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의
계보에 위치하고 있다고 고백했으며, 과학 활동을 기호론적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몇몇 실험실
에스노그래피들과 과학을 순수한 권력의 구성으로 표현하는 학자들에 골고루 유보적인 입장을
보인 바 있다 (Bourdieu, 2004).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불문하고, 과학장은 장의 상대적인
자율성(relative autonomy)을 획득하고, 개별 행위자의 과학적 자본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투쟁의 장이다. 이러한 과학장의 구조와 작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비투스를 체화한 과학장의 참여자들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특정 과학장의 무대에서 어떻게
"시행"(set-in-motion)되는지 파악해야 한다 (Bourdieu, 1988).

참고문헌

Bourdieu P (1988) Homo academicus. Stanford University Press.

Bourdieu P (2004) Science of science and reflexivit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Bourdieu P (2005) The social structures of the economy. Polity.

Bourdieu P and Wacquant L (1992) An invitation to reflexive sociolog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Decoteau CL (2015) The reflexive habitus: Critical realist and Bourdieusian social action.
European Journal of Social Theory 19(3). SAGE Publications Ltd: 303–321. DOI:
10.1177/1368431015590700.

Wacquant L (2002) Scrutinizing the Street: Poverty, Morality, and the Pitfalls of Urban
Ethnography.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107(6): 1468–1532. DOI: 10.1086/340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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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2
환경과 보건
11:30-13:00

보건과 환경위생의 갈림길:


박지영 (인제대)
국립보건연구원의 재편과 국립환경연구소의 설립

“민주적 진압 기술”?:
현재환 (부산대)
최루탄 공해와 시위 마스크의 냉전적 기원

공해 문제와 환경과학의 등장:


원주영 (서울대)
학술원 공해문제연구위원회를 중심으로

산업환경의 부상:
박승만 (가톨릭대)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의 국가와 산업의학

사회: 장하원 (경희대)


토론: 강연실 (KAIST)
‘위생’에서 ‘환경’으로: 해방 후 환경위생 연구의 제도화를 통해 본 ‘위생학’의 재구성

박지영 (인제대)

이 논문은 해방 후 환경위생 연구를 담당한 정부 기관들의 활동과 변천을 추적함으로써, 식민


지시기에 근대적인 건강관리의 도구이자 통치의 수단으로서 도입되었던 ‘위생학’이 해방 후 한국
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환경위생학’으로 재편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위생
학은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적, 사회적 요인을 탐구하는 분야로, 위생정책 수립의 기초 자료
를 제공했다. 식민정부는 위생시험소 같은 연구기관을 설치하여 시정에 필요한 자료를 생산하는
역할을 맡겼다. 그곳의 조선의 위생학자들은 조선의 기후와 풍토가 일본인 이주자의 정착에 적합
한지, 그들이 조선의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조선의 기온, 기압, 습도, 수질,
토질 등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했고, 나아가 일본인이 주로 정착하는 도시 지역의 먼지,
소음, 오수에 대해 조사했다.
식민지 위생체계는 해방과 함께 미국식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식민지시기 환경위생 연구의
기본 방식은 계속 유지되었다. 조선총독부 산하의 위생시험소는 1945년 9월 중앙화학연구소로 개
편되었으며, 그 소장을 맡은 인물은 1930년부터 위생시험소 연구원으로 근무해 온 한구동이었다.
상하수도 수질 검사, 분변 검사, 시판 음료수 검사 등 질병을 야기하는 요인의 탐색에 몰두해 온
위생시험소와 유사하게 중앙화학연구소의 초점 또한 건강 문제와 관련된 물질들의 검사에 맞추어
져 있었다. 중앙화학연구소직제에 따르면 그 주된 업무는 약품의 제조와 검사, 음식의 영양과 위
생에 관한 연구, 교육, 조사, 대기와 수질에 대한 검사, 위생시책에 관한 조사 연구를 포함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의 환경위생 연구는 큰 제도적 개편을 겪게 되었다. 1963년 중앙
화학연구소의 후신인 국립화학연구소와 국립방역연구소, 국립생약시험소, 국립보건원이 통합되어
방역, 환경위생, 약품 제조 및 검사, 보건 교육 기능을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국립보건원이 출범했
다. 이런 제도 개편은 해방 이래 각종 원조 및 유학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의 공중보건 재건에 강
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미국의 공중보건 모델을 반영한 결과였다. 미국식 공중보건 모델은 관련
분야들의 긴밀한 협력을 중시했고, 그 효율적인 실행을 위해 여러 분과들을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통합적 연구교육기관의 설립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한국의 사회경제적 상황 또한 환경위생 연구의 제도적 개편을 촉진했다. 1960년대
부터 진행된 급속한 공업화는 공해를 사회적 이슈로 만들었다. 공장에서 배출되는 오폐수와 각종
산업폐기물, 그리고 자동차의 배기가스는 환경오염이 인체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경각심을 일
깨웠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 대응하여 정부는 1966년 공해방지법을 제정했고 1967년에는 국립보
건연구원에 공해과를 신설하여 환경오염과 관련된 연구를 전담하도록 했다. 공해과의 활동은 산
업 발달과 함께 점점 더 증가하여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증한 조사 업무를 소화하기 위해 그
산하에 두 개의 과와 세 개의 연구담당관실을 두도록 확대 개편되었다. 1972년에 개설된 그 분과
들은 각각 대기보전과, 수질보전과, 환경위생담당관실, 공해담당관실, 위생공학담당관실이었다.
이처럼 1970년대 초까지 정부의 환경위생 연구기관은 공기 및 수질 검사에서 각종 산업공해
에 관한 분야들로 업무 영역을 확장하고 연구를 심화해 나갔다. 그러나 그 성장은 산업공해라는
주제에 국한된 것이었고, 그 연구 결과마저도 국민 건강과 환경 보호보다 산업 발전을 우선시하
는 정부 방침으로 인해 실행으로 충분히 옮겨지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런 상황은 전문가
와 대중의 우려를 불러일으켰으며, 이상기후와 지구온난화에 대한 국제적 논의와 대응에 뒤쳐질
수 있다는 정부의 위기감을 자극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77년 공해방지법을 폐지하고 그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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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종합적인 환경오염 규제를 위해 환경보전법을 제정했으며, 1980년 1월에는 환경문제를 전담할
행정기관으로 환경청을 신설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헌법상의 권리 항목에 환경권을 추가
하여 적극적인 환경보호 사업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국립환경연구소의 설립은 이런 환경정책
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1978년 정부는 국립보건원 공해과를 폐지하고 환경문제를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인 국립
환경연구소를 설립했다. 국립보건원의 공해 관련 업무는 국립환경연구소로 이관되었다. 그에 따라
국립환경연구소는 산업공해 연구를 담당하게 되었으나, 그 이상으로 환경문제에 관한 보다 더 포
괄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1980년 국립환경연구소의 연구 조직은 3부, 즉 대기연구부, 수질연구부,
환경보건연구부로 구성되었고, 각각의 산하에 대기공학, 대기화학, 기상연구, 자동차 공해, 소음진
동, 수질공학, 수질미생물, 수질화학, 토양오염, 폐기물처리, 해양환경, 환경보건, 환경생물, 환경영
향평가 등의 세부주제를 연구하는 연구담당관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국립보건원 시절의 연구가
환경오염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국립환경연구소의 연구는 환경오염의 원인
그 자체와 그것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까지 포함했다. 이와 같은 연구 중점의 이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해당 분야에 대한 해외 원조와 전문가 집단의 변화 때문이었다. 국립환경연구소는 국제기
구들의 환경보전 증진에 힘입어 15억 여원의 원조를 통해 연구 시설과 장비를 확보했고, 이런 국
제적 흐름에 따라 국내에서 성장해가던 위생공학 전문가들을 연구 인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해방 후부터 1980년대 초까지 전개된 환경위생의 형성 과정은 이 분야가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치와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 그리고 전문가 집단의 성장이라는 세 가지 맥락이 얽혀서 만들
어진 산물임을 보여준다. 즉, 환경위생 연구의 성장은 자유진영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미국의 공중보건 원조와 환경 논의의 확산, 한국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과 공해 중심의 환경문제
인식, 그리고 식민지시기의 위생학에서 탈피하기를 원하던 위생학자들과 새로이 부상한 위생공학
전문가들의 움직임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한 결과였으며, 이것이 건강에 대한 공해의 영향이라는
초기 환경위생 연구의 특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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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진압 기술”?: 최루탄 공해와 시위 마스크의 냉전적 기원

현재환 (부산대학교)

본 연구자는 20세기 마스크 착용의 역사를 전염병 방역 외에 다른 환경적, 정치적, 사회적 맥


락에서 살펴보려는 최근의 연구들을 좇아 1980년대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의 진압대, 시위대, 그
리고 시민들의 마스크 사용 실천과 그 배경을 검토한다.1) 1980년대 초중반에 전두환 정권은 학
생 운동을 탄압하는 데 최루탄을 적극 활용했으며, 최루탄 노출을 피하기 위해 시위 장소에서 활
동하는 경찰 진압대와 기자들은 방독면으로, 학생 시위대와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일반 위생 마스
크 혹은 손수건과 비닐랩으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가 널리 이루어졌다.2)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 일어나기 전 2년 동안 공식적으로 사용된 최루탄 개수는 약 50만 개로, 대학가와 주요 시위
장소들은 일 년 내내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가득 찼다. 그로 인한 건강 피해는 시위 참가자뿐만
아니라 주변 거주자 및 행인, 그리고 근린 지역의 소규모 생태계와 인근 동물원의 동물들을 포함
한 비인간들에게로 확대되었다. 이런 이유로 1980년대에 새로운 종류의 환경 공해로 “최루탄 공
해”가 부상했고, 당시 대학가는 흔히 “최루탄 공해 지대”로 불렸다.3) 대학 캠퍼스에서 근무하는
청소 노동자와 경비원 등이 방독면을 착용한 모습이나, 이 신공해가 인체와 환경 양측에 끼치는
영향을 문제시하며 민주화 운동과 반공해 운동이 결합된 형태로 최루탄 추방 운동이 등장한 것은
당시 최루탄 공해가 갖는 정치적 상징성과 환경보건적 위해가 막대했음을 잘 보여준다.4) 이렇게
시위 마스크의 등장과 보편화가 최루탄 공해의 부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위 마스
크의 역사는 단순히 특정한 인공물 사용의 역사가 아니라 환경사와 정치사, 그리고 기술사가 교
차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발표는 최루탄 공해와 시위용 마스크의 출현 배경을 탐구하기 위한 시론적인 작업으로,
이와 관련해 제기될 수 있는 여러 연구 문제들 가운데 다음의 질문만을 간략히 살피고 답하려
한다.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로 한국에 시위 진압용 도구로 최루탄이 도입되었으며, 어떻
게 특정 지역을 “공해 지대”로 만들만큼 대량으로 최루탄을 살포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는가?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서 최루탄은 주로 1980년대 학생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는 권위주의 정부의 상징
정도로 다루어져 왔다. 오직 소수의 연구만이 당시 전두환 정권의 최루탄 사용 규모와 이에 대한

1) Jaehwan Hyun, “Masked Societies in East Asia:A Forum on the Socio-Material History of Face Masks”,
East Asian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An International Journal (forthcoming). 한국의 사례로는
Heewon Kim and Hyungsub Choi, “COVID-19 and the Reenactment of Mass Masking in South Korea”,
History and Philosophy of Life Sciences 43 (2021): 44.
2) 현재 연구 중인 내용이지만 해방 이후 한국 시위의 역사에서 시위대가 마스크를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
이고, 이런 마스크 착용이 일반적인 시위 실천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80년대로 파악된다. 일본의 경우 1966년 나리타시
농촌 지역에 신도쿄국제공항을 설립하는 계획에 반대해 신좌파 학생 운동가들이 벌인 산리즈카 투쟁(三里塚闘争) 초기
부터 시위대가 마스크를 착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Tanaka Shunsuke and Tomohisa Sumida, ““This was Not a
Mask”: The Meanings of Towel Masks for Student Protesters in Late 1960s Japan” (unpublished
manuscript). 아직 섣부를 수 있지만, 연구자는 1960년대 후반 한국에서의 시위 마스크 등장 및 일반화는 1968년 주민
등록법 개정을 통한 주민등록증제도의 법제화의 결과 시위 참여자의 개인 신원 확인이 용이해지고 시위 진압에서 최루탄
사용량이 증가되는 두 요인을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추정한다. 이에 관해서는 후속 연구에서 다룰 예정이다. 한국 주민등록
제도의 역사에 관해서는 다음의 두 논문을 참고. 김영미, “해방 이후 주민등록제도의 변천과 그 성격 ―한국 주민등록증
의 역사적 연원―”, 한국사연구 136 (2007), 287-323쪽; 홍성태, “유신 독재와 주민등록제도”, 역사비평 99
(2012), 91-112쪽.
3) “「최루탄공해지대」로 불리는 대학가 주변”, 동아일보 1971년 10월 12일, 7면.
4) 최루탄 공해를 서울의 대기오염 및 수질오염과 함께 심각한 공해 문제로 다룬 당시 반공해 운동 진영의 논의로는 다음을
참고. 니시다 겐이치(仁科建一), 노다 교우미(野田京美) 저, 육혜영 역, 한국공해리포트 (서울: 개마고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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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정치적 논란, 그리고 학생 진영의 대응 등을 소략하게 논의했을 뿐이다.5) 다른 한편으로
화학 무기의 개발, 사용, 사후 처리에 대한 환경사와 기술사 두 분야의 관심 덕분인지 최루탄 관
련 연구가 북미와 유럽 사례를 중심으로 상당히 전개되었다.6) 특히 전시(戰時)에 생물학 무기 및
화학 무기의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 의정서 체결(1925) 이후 미국에서 최루탄이 민간 진압용으로
재활용되기 시작한 기술 개발의 역사나 베트남전에서의 미군의 최루탄 사용을 둘러싼 당시의 정
치 논쟁에 관한 여러 연구들이 제출되었다.7) 최근에는 영국을 중심으로 식민지기 식민 통치의 도
구로 활용되던 최루탄이 1940년대를 기점으로 민간 소요 통제를 위한 “비치사적(非致死的)” 도구
로 재구성되는 과정 또한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8) 이런 선행 연구들 가운데 한국의 최루탄 역사
와 연관해 흥미로운 관찰은 1950-60년대 미군이 최루탄을 미국 바깥의 미군 관할 지역이나 전시
지역에서 민간 소요를 진압하는 “대민 기술(civilian technology)”로 활용했다는 것이다.9)
이 글은 위의 관찰을 실마리로 삼아 해방 이후 한국 경찰이 “좌익 시위”에 대응한 “치안 안
정”의 도구로 최루탄을 사용하게 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와 미군이 맡은 역할을 검토한다. 본
연구는 이를 위해 국립중앙도서관과 국사편찬위원회가 수집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의 미군정 자료, 한국전쟁기 전후 문서, 주한미국대
사관 서신 및 비망록 자료 등을 주요 사료로 활용한다.
현재까지의 초보적 연구에 기초한 관찰 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한반도에 “시위 진압(riot
control)”을 목적으로 최루탄 사용을 처음으로 구상하고 도입한 것은 미군정청이다. 1945년 가을
미군정청은 한반도 이남을 접수한 후 화학 무기 현황을 조사해 최루탄이 하나도 없음을 확인했
다. 이후 미군정청은 “민간 소요(civil disturbances)”와 같은 “긴급 상황” 발생을 대비한 최루탄
공급을 본국에 요청했으며, 이듬해부터는 한국 경찰과 군대에게 최루탄 사용법을 훈련시킬 것을
계획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가을 미군은 북한군 및 중공군의 벙커와 대공용 포좌 등을 공격
하는 수단으로 최루탄 사용을 허가했을 뿐만 아니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도 포로들의 소요를
진압하는 주요 수단으로 최루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이듬해 5월부터 소요시마다 M7
최루수류탄(충전재: 클로로아세트페논, CN)을 투척했다. 휴전 직후인 1953년부터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은 대구 등지에서 일어나는 휴전 반대 운동을 분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96개의 최루탄을
사용한 계기로 민간 시위 진압에도 활용하기 시작했다. 미경비대가 민간인을 대상으로 최루탄을

5) 홍석률, “최루탄과 화염병, 1980년대 학생운동”, 내일을 여는 역사 28 (2007), 72-86쪽. 이외에도 “최루탄 공해”를 당
시 민주화 운동의 생활사의 일부로 다룬 분석으로는 김정한, “민주화 운동의 시대”, 김종엽 외 저, 한국 현대 생활 문화
사 1980년대: 스포츠공화국과 양념통닭 (서울: 창비, 2016). 한국에서의 “시위”와 “기술”의 관계에 대해 고찰한 짧은
비평으로는 다음을 참고, 임태훈, “1990년 골리앗 크레인”, 임태훈, 이영준, 최형섭, 오영진, 전치형,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 배반당한 과학기술 입국의 해부도 (서울, 알마: 2017).
6) Daniel P. Jones, “From Military to Civilian Technology: The Introduction of Tear Gas for Civil Riot
Control”, Technology and Culture (1978), pp. 151-168; Kim Coleman, A History of Chemical Warfare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5); Neil Davison, ‘Non-lethal’ Weapons (New York: Plagrave
Macmillan, 2009).
7)David Zierler, The Invention of Ecocide: Agent Orange, Vietnam, and the Scientists who Changed the Way
We Think about the Environment (Athens: University of Georgia Press, 2011); Roger Eardley-Pryor, “The
Paradoxes of Tear Gas in the Vietnam Era,” in James Rodger Fleming and Ann Johnson eds., Toxic
Airs: Body, Place, Planet in Historical Perspective (Pittsburgh, PA: The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2014), pp. 50-76.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최루탄을 사용한 군사적 실천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 David Bigs,
Footprints of War: Militarized Landscapes in Vietnam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18).
8) Alexander Chanan Mankoo, A Historical Sociology of Teargas in Britain and the Empire, 1925-1965 (A
Doctoral Dissertation at University College of London, 2019); Erik Linstrum, “Domesticating Chemical
Weapons: Tear Gas and the Militarization of Policing in the British Imperial World, 1919–1981,”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91 (2019), pp. 557-585.
9) Eardley-Pryor, “The Paradoxes” (Ref.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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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활용한 것은 1955년 7월부터 전국적으로 벌어진 “적정감시단 축출 국민운동” 시위에
서였다.
1956년부터 미국은 유엔군총사령부 휘하 주한경제조정관실 기술협조처 공안부의 공안 자문을
두고 국제협조처(ICA, 1959년 이후 주한미국경제협조처 USOM으로 개편)의 원조 자금을 활용해
“국립 경찰 현대화 계획(National Police Modernization Program)”이란 이름으로 한국인 경찰 간부
의 미국 교육 연수 및 훈련, 무기 구입 등을 지원했는데, 이런 경찰원조의 일부로 최루탄 공급이
진행되었다.10) 일례로 1960년 7월 주한경제조정관실 공안부는 이 사업의 일환으로 37mm 구경의
최루탄 발사기 57정, 발사형 최루탄 1,456개, 방독면 248개, 최루수류탄 784개를 구매했다. 4.19
혁명 전후에 한국 경찰이 사용한 발사형 최루탄은 241개, 최루수류탄은 254개로, 미국 측이 한국
내 “실수요”에 비해 세 배 내지 다섯 배에 가깝게 그 공급량을 늘린 것이다. 4.19 혁명의 도화선
이 마산 의거에 참여한 김주열의 사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된 것이었기 때문에, 1961년
4월까지도 장면 정권은 경찰에게 최루탄을 보급하여 계속되는 시위를 진압하는데 사용하라는 공
안부의 제안을 거부했다. 미국 공안 자문들은 이런 최루탄 도입과 이에 관한 한국 경찰 훈련이
한국 경찰을 “민주적 법 집행 기관”으로 만드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최루탄
은 대민 진압 도구로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 폭력을 분쇄하거나 예
방할 수 있는 유일한 민주적 방법(the only democratic way)”이었다. 당시는 반공법 및 데모 규제
규탄 대회가 대구를 중심으로 일어났을 때로, 4.19 혁명 1주년 기념 시위와 그 결과로 일어날 수
있는 정부 전복 및 적화 통일 시나리오를 우려하던 공안부는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1,350개의 최
루탄을 한국 경찰에게 긴급히 배부했다. 이와 함께 한국군에게 CN제 최루탄뿐만 아니라 CS제(충
전재: 2-클로로벤질리덴말로노나이트릴) 최루탄을 이용한 “폭동 진압 훈련”을 제공하는 동시에 장
면 정부에게 시위로 정부 기능이 마비될 것을 대비해 군부의 개입을 포함한 시위 진압 계획 수
립을 권고했다.
5.16 쿠데타 이후 수립된 군사 정권 하에서 미국의 경찰원조는 중단되었지만, 미군이 한국 경
찰에 최루탄을 공급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한일회담 반대 학생 시위 진압
부터 최루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1967년 6월 8일 국회의원 선거 이후 이에 대한 학
생 주도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서도 최루탄을 사용했고, 야당인 신민당은 이에 반발해 같은 해
7월에 미 대사관을 방문해 “민주주의 탄압”에 이용되는 최루탄 공급 중단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 대사관은 미군이 최루탄을 공급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최루탄은 군중 진압에 [사상] 피해가 없
는 제제이고 미국과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최루탄 사용
이 “경찰이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데 곤봉이나 총을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덜 위험하”며, 미국의
최루탄 공급은 오직 “한국 경찰이 전 인민의 이익을 위해 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보조”하는
수단이라고 답변했다. 미 대사관은 “미국 전문가들은 최루탄이 무해하고 눈에도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며 신체 피해를 주장하는 학생들은 최루탄 자체에 의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듬해 비무장지대에서 북한군과의 교전이 잦아지면서 6월부터 “경찰장비공급협정”이란 이름으로
미국의 대한 경찰원조가 재개되었다. 그 결과 1968년부터 1971년 사이에 약 635만 달러의 물자
가 경찰원조의 이름으로 공급되었다.11) 이 중에는 1969년 9월 한국 정부가 “시민 질서 통제” 목
적으로 요청한 4만 개의 최루탄(CS제, 28.4만 달러)이 포함되어 있었고, 주한미군은 미 대사관의
구매 타당성 문의에 대해 당시 거세지는 한미군사훈련 반대 학생 시위를 고려해보았을 때 타당한

10) 1950-60년대 미국의 대한경찰원조에 대한 논의로는 다음을 보라. 권혁은, “1960년대 미 대한경찰원조의 전개: 경찰 ‘현
대화’와 대반란전(counterinsurgency) 수행”, 사림 74 (2020), 149-171쪽.
11) 1967-1971년 사이 미국의 대한경찰원조 금액에 대해서는 권혁은, “대한경찰원조” 165쪽 (Ref.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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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라는 의견을 냈다. 그 결과 한국 경찰로의 대규모 최루탄 공급안이 승인되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에서 CS제 최루탄 사용으로 화학 무기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다는
비판에 대해 최루탄은 “비치사적”, “시민 통제”용 기술이므로 제네바 협정에 해당되는 사안이 아
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12) 같은 선상에서 주한미군은 최루탄이 “시민 통제”에 적합한 “비치사성
대민 기술”임을 강조하며 공급안을 지지했다.
1979년 삼양화학이 독자 개발한 최루탄을 공급하기 전까지 미국은 한국 경찰의 핵심적인 최루
탄 공급원 역할을 맡았다. 본 연구자는 미국이 미군정기부터 일관되게 “좌파 소요”에 대한 “민주
적 진압 기술”이란 논리를 펼치며 적극적으로 한국의 시위 현장에 최루탄을 도입했으며, 박정희
정권이 학생 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대규모 지원을 요청했을 때에도 이를 승인했다는 점에 주목하
여 1980년대의 최루탄 공해는–적어도 그 공급 측면에서라도-냉전적 기원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원론”을 넘어서 실제로 최루탄 사용의 급증이 시위 현장에서의 마스크 착용 실천의 확산
에 끼친 영향이나 인체 및 근린 생태계에 끼친 건강 피해 규모 등과 같은 문제는 추후 과제로
남겨둔다.

12) 각주 7의 문헌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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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해 문제와 환경과학의 등장: 학술원 공해문제연구위원회를 중심으로

원주영 (서울대학교)

1970년대 초 한국에서 환경 문제는 공중보건은 물론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와 긴


밀히 연결되었다.1) 대기오염과 수질오염 등 각종 공해의 발생과 더불어 정책적, 학술적 논의가
확대되면서 환경 문제의 해결 없이 국가의 발전이 지속되기 어렵다는 전망이 등장했다.2) 선거 때
마다 후보자들은 부족한 도시의 기반시설을 확대해 환경의 질을 개선하겠다고 공약했다.3) 본 연
구는 이런 역사적 맥락을 배경으로 두고 1970년대 한국의 환경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예방의학,
행정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이 필요했던 상황에 주목한다. 환경관리를 위한 명확한 방
법이 확립되지도, 하나의 독립된 분과로서의 환경과학이 체계화되지도 않았던 상황에서 공해와
같은 환경 문제는 특정 분과의 전문지식으로 해결될 수 없었다.4) 또한 환경 문제가 “사회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요소와 연결되어 나타나는 복잡한 현상”이었기 때문에 외국의 지식과 제도를 활
용해 해결하기도 어려웠다.5)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학술원 산하 공해문제연구위원회를 중심
으로 1970년대 한국의 전문가들이 환경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했는지 검토한다. 이와 같은
접근은 1970년대 한국의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 기구 및 법규의 제도적 개편 및 확대에만
주목해왔던 선행 연구에서 놓친 부분들, 즉 학술적 차원에서 환경 문제가 어떻게 정의되고 대응
이 이루어져 왔는가를 보이는 데 기여할 것이다.
1971년 8월 학술원은 공해에 직접적으로 대응하기에 앞서 공해를 학술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공해문제연구위원회를 조직하여 대기오염과 수질오염 등 대표적 공해 현상
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 위원회에는 생물학, 의학 분야 전문가는 물론 법학, 경제학, 논리학
등 사회과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는데,6) 이와 같은 형태의 위원회가 만들어진 이유는 공해
라는 환경오염이 한 분야의 전문성에 기대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7) 본
연구는 특히 공해문제연구위원회에 참여했던 권숙표와 차철환이라는 두 연구자의 활동을 토대로
1970년대 초 환경 문제를 둘러싼 학술적 논의의 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권숙표
와 차철환은 공해 박사라 불렸던 한국 1세대 환경과학자로서 1967년 환경위생학 교과서 집필을
계기로 만났으며, 이후 공해의 해결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공해문제연
구위원회에서 권숙표는 수질오염 그리고 차철환은 대기오염 분과위원회 전문위원이었다.8)
이들을 중심으로 공해문제연구위원회의 활동을 검토할 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위원회의
연구대상이 공해에서 환경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9) 1972년 4월, 학술원은 공해라는 한정된 문

1) 이희규, “매연단속에 과감하라: 일반버스의 매연 세례가 가장 커”, 『도시문제』, 4:9 (1969), 68쪽.
2) 1969년 15%를 기록한 이래 1972년 7.2% 정도로 경제성장률이 감소했다. 이와 도시의 인구변화를 연결지은 내용은 다
음을 참조. The Future of U.S. Technical Cooperation With Korea (Office of the Foreign Secretary and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969).
3) “7대 대통령에게 바란다”, 『조선일보』, 1971.4.29; 최유리, “1960년대 서울시 무허가주택문제: 박정희정권 시기 무허가
주택 철거와 철거민 대책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4) Rachel Rothchild, Poisonous Skies: Acid Rain and the Globalization of Polluti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9).
5) 신응균, 개회사, 『韓國의 公害現況과 그 防止對策에 관한 學術會議 報告書 (1970.6.25)』 (한국과학기술연구소,
1970).
6) “공해문제연구위 발족”, 『조선일보』, 1971.8.28.
7) 이병도, “서문”, 『公害問題에 관한 調査硏究報告書』 (대한민국학술원, 1971).
8) 권숙표, “東巖 車喆煥박사 퇴임을 맞아”, 차철환 저, 『도리깨』 (고려대학교 예방의학교실동문회, 1993), 105쪽.
9) 노상호, “미국의 대한원조(對韓援助)와 환경패러다임의 변화(2):USAID의 1972년 서울 도시환경보고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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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에서 벗어나 인간 환경 문제 전반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면서 위원회의 명칭을 환경문제연구위
원회로 변경하고 환경 문제에 관한 종합보고서 작성을 기획했다. 위원회 명칭 변경은 공해가 아
닌 환경 개념이 중시되던 당대의 맥락과 교차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같은 해 6월 스톡홀롬에서
는 유엔 인간환경회의가 개최되었으며, 10월에는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본 연구는 공해문제연구위원회 활동 속에서 국내외의 환경 이슈가 어떻게 다루어졌는
지, 권숙표와 차철환을 중심으로 위원회에 속했던 연구자들이 환경을 정의하는 방식은 무엇이었
는지 검토함으로써 한국의 환경 담론에서 국제적 환경오염과 환경논의들이 연결되었는가도 다루
어 볼 것이다.

『생태환경과역사』, 통권 4호 (2018), 9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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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환경의 부상: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의 국가와 산업의학

박승만 (가톨릭대학교)

이 발표는 산업화가 진행 중이던 1960–70년대 한국에서 산업의학계와 국가가 산업환경에 주목


하고 개입하며, 이를 매개로 상호작용하는 역사적 과정을 돌아본다. 산업화 당시 산업의학계와 국
가는 산업환경의 유지와 관리에 관여하는 주요 행위자에 해당하지만, 이들의 실천과 관계에 대해
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산업환경 또는 산업재해에 대한 역사학과 과학기술학의 연
구는 원진 레이온 사건이나 작업성 경견완 장애, 석면 운동,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건 등 1980년
대 이후의 일에 집중되었고(황교련, 2021; 김향수, 2016; 강연실, 2018; 김종영, 김희윤, 2013),
1960–70년대의 흐름은 대한산업보건협회나 노동부, 가톨릭대학교 산업의학센터 등에서 발간한 기
관사에서 다루었을 따름이었다(대한산업보건협회, 2013; 노동부, 2006;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
원 직업환경의학센터, 2012).
물론 통념은 존재한다. 하나는 산업환경을 향하여 산업의학계와 국가가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
으리라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산업의학계는 노동자 건강이라는 인도적인 견지에서, 그리고 국가
는 산업 생산성 향상이라는 경제적인 견지에서 산업환경에 접근했으리라는 추정이다. 산업의학계
에서 정리한 기관사와 회고는 이러한 통념을 강화한다. 대한산업보건협회는 지난 역사를 “근로자
의 건강 보호와 증진”, “모든 근로자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베풀어보겠다는 순박한 약속”과 같은
말로 정리하였고, 대한직업환경의학회 역시 학회의 지난 30년을 “노동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한” 역사로 정의하였다(대한산업보건협회, 2013; 대한직업환경의학회, 2018).
이러한 대립 구도는 사태를 온전히 반영하는가. 다이애나 월시는 직업환경의학이 노동과 건강
의 관계를 연구하는 의학적인 목적뿐 아니라 노동의 규율을 통하여 산업 생산성을 향상하는 경제
적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지난날을 돌이켜보았을 때 후자를 향한 동력이 더욱더 강하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Walsh, 1987). 이는 산업화 당시 한국의 산업의학계 역시 노동자 건강 수호뿐 아
니라 산업 생산성 제고에 복무하였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
경향신문》
이 가톨릭대학 의학부 산업
의학연구소의 개설을 알리며 붙인 “노동 관리 과학화에 거보”라는 제목은 이러한 심증을 굳히는
물증이다.
국가의 태도 역시 생산성 향상만으로 간단히 환원되지 않는다. 김조설이 밝힌 바와 같이 한국
의 복지 정책이 형성되는 궤적 속에서 보건사회부 내의 정책 자문 기관이었던 사회보장심의위원
회 전문위원 연구실(이하 사보심)과 장관 정희섭(鄭熙燮, 1920–1987) 등은 다른 부처의 경제 성장
우선주의에 대항하여, 사회보장 정책의 필요성을 지속하여 제기하였다(김조설, 2017). 한국 최초
의 사회보험인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정권 초창기에 해당하는 1963년에 제정되어 이듬해부터 시
행된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는 국가 기구 내에 노동과 산업환경을 향한 서로 다른 시선이 경
합하였음을 시사한다.
또 다른 통념도 있다. 산업화에 사활을 걸었던 박정희(朴正熙, 1917–1979) 군사정권이 산업화
초기부터 산업환경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산업환경의 관리를 위해 산업의학계를 적극적으로 동원
하였다는 생각이다. 1950년대에 이미 ‘과학적 관리’가 한국에 소개되고, 1960년대 초반에 국영기
업인 조선기계제작소에 노동 생산성 향상을 위하여 경영 합리화가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황병주, 2013; 신원철, 2005). 앞서 언급한 월시의 지적처럼 산업의학이 직업성
질환의 치료뿐만 아니라 생산성의 제고를 위한 학문이라면, 과학적 관리의 일환으로 산업의학이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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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역시 사실과 거리가 있다. 후술하겠으나 산업화 초기부터 산업환경의 개선에 몰두했
던 산업의학계와 달리, 박정희 군사정권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산업환경에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에 이미 안전하지 못한 산업환경과 이에 따른 산업재해와 생산
성 저하 문제가 불거졌음에도, 1967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산업환경에 대한 조사를 시행하였음
은 상징적이다. 산업화를 위해 사회 전반을 동원했던 박정희 군사정권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다소
의아한 일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다시 첫 번째 통념이 향하는 바, 즉 산업의학계와 국가라는 두
행위자에게 산업환경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통념에 대항하여, 이 발표는 다음을 주장한다. 먼저 1960년대 중반까지 산
업환경은 국가 정책의 부재 속에 산업의학계에 일임된 공간이었으며, 이러한 자율 속에서 산업의
학계는 산업환경의 개선을 통하여 노동자 건강 수호와 생산성 제고라는 이중과업을 동시에 달성
하고자 했다. 집권 초기만 하더라도 박정희 군사정권은 산업환경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
다. 상기한 사보심과 정희섭이 산업환경 관리의 중요성을 주장하였지만, 이러한 소수 의견은 기각
되었다. 다른 정부 기구 대부분은 당대의 빈약한 경제 수준과 조립 가공업 중심인 산업 구조를
고려할 때, 산업환경의 개선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였다(양재진, 2004).
국가의 무관심으로 강제된 자율의 공간 속에서, 산업의학계는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하고자 했
다. 한국의 산업의학은 노동자의 건강 관리를 위해 시작된 학문인 동시에, 노동 과정의 규율을
통한 생산의 합리화를 위한 학문이기도 하였다. 산업의학의 태동기에 활동하던 이들은 전자를 위
해 직업병의 진단과 치료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한편, “작업장에 있어서 효율적인 노동 인간을 만
드는” 인간공학을 탐구하려고 하였다. 이들에게 두 가지 목적은 상충하지 않았다. 동작의 개선을
통해 산업재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며, 생산성 제고라는 당의정을 활용해 산업환경을 향한
국가와 기업의 관심과 투자를 유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산업의학계의 활동은 산업재해의 진단과 치료에 집중되었다. 인적, 물적 자원의 한정으
로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반 당시 한국에서 산업의학을
연구하고 직업병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기관은 가톨릭대학 의학부 산업의학연구소와 대한석탄공
사 장성병원 등이 전부였다. 전국의 산업재해 환자를 이들 기관이 모두 담당해야 하는 상황이었
다. 연구 설비도 충분하지 않았다. 인간공학 연구를 위해 필요한 폐 기능 검사 장비 등은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에서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밀려드는 산업재해 환자와 연구 기반의 부재
앞에서, 인간공학 연구는 뒷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1960년대 후반이 되면서 변화하였다. 경제적,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국가
가 산업환경에 주목한 결과였다. 먼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실행과 함께 산업 구조의 변
화가 예고되면서, 숙련 노동력의 수급과 보전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높은 생산성을 위해
서는 훈련된 인력을 적소에 공급하고, 산업재해를 미연에 방지하고 조기에 치료함으로써 노동력
을 최대한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노동청은 「
노동사업 5개년 계획」
을 발표하여 노동과
산업환경의 관리를 천명하였다. 노동력 개발과 분배를 위한 직업 훈련과 직업 안정 사업 등과 함
께 노동력 보호와 생산성 향상을 위한 산업환경 관리가 계획되었으며, 그 방안으로 산업안전과
산업보건 개선, 산재보험의 확대 및 강화가 제시되었다.
노동력 보존을 통한 생산성 제고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했다. 군사정권의 정당성이 경제 성장에
바탕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으로 경제 성장의 둔화가 정당성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했
다. 실제로 경기 악화는 지지율 하락을 초래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경기는 급속도로 나빠져,
1971년에는 경상이익률이 최저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때마침 치러진 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
(金大中, 1924–2009)과 채 백만 표의 차이도 내지 못하고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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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러진 제8대 총선에서도 김대중의 신민당은 개헌저지석을 스무 석이나 초과하는 선전을 보였다
(이덕재, 2009). 정권 유지를 위해서도 생산성은 향상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산업환경의 개선을 위한 투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정부는 산업재해를 방지
하고 치료하여 숙련 노동자를 보호하기보다는 인력 훈련을 통해 숙련 노동자를 대규모로 공급하
는 데 열중했다(장미현, 2017). 산업재해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조치는 여전히 뒷순위였다. 산업
환경을 관리하는 산업안전위원회나 보건위생위원회의 설치는 강제가 아닌 권고 사항이었고, 산재
보험의 대상 역시 제한적이었다(장미현, 2014). 산재보험의 적용을 엄격하게 제한함으로써, 오히
려 사업주와 노동자의 안전 의식을 고취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산업재해의 진료는 계속해서 민간의 몫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산업환경을
향한 정부의 관심은 역설적으로 산업의학계의 활동을 제한하였다. 196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산
업의학계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투자를 요구했다. 상기한바, 가톨릭대학 의학부 등을 비롯한
몇몇 기관의 활동만으로는 전국의 산업재해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정부의 개입은 어딘가 굴절된 형태로 실행되었다. 정부의
관심은 노동자 건강 보호가 아닌 노동 합리화를 통한 생산력 제고에 놓여 있었고, 산업의학계 역
시 이러한 방침에 부응해야 했다.
이는 이중과업의 축소를 의미했다. 산업환경의 실상에 대한 조사나 연구는 가로막혔다. 정부는
사회 불안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산업환경의 실태 조사를 방해했다. 산업재활원의 설치나 외국 원
조 유치 등 산업재해 진료에 대한 투자도 없지 않았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산재노동자를 방기하
지 않는다는 정권의 인상을 위함이었다. 반면 인간공학 연구는 장려되었다. 인적, 물적 자원의 부
족으로 진행되지 않던 인간공학 연구는 생산성 제고를 향한 정부의 관심과 때마침 이루어진 해외
원조를 기반으로 본격화되었다. 생산성을 저해하는 인자가 업종별로 조사되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산업환경의 개선 방안이 연구되었다.
이처럼 산업환경을 둘러싼 국가와 산업의학계의 태도와 관계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달라졌다.
1960년대 초중반까지 국가는 산업환경에 주목하지 않았고, 산업환경의 관리는 모두 민간에 일임
되었다. 강제된 자율 속에서 산업의학계는 노동자 건강 관리와 노동 합리화의 이중과업을 수행하
고자 했으나, 자원의 한계로 전자에 집중하였다. 상황은 1960년대 후반부터 변화하였다. 산업 구
조의 변화가 예고되고 이에 따라 산업 생산성의 확보를 위하여 숙련 노동자의 수급과 보전이 중
요해진 결과였다. 그러나 국가는 여전히 산업환경의 개선보다는 인력 훈련에 방점을 두었고, 별다
른 투자 없이 민간을 동원하여 산업환경을 관리하고자 했다. 이로 인하여 산업의학계의 이중과업
은 노동 합리화로 축소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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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3
조선 시대의 과학과 기술
13:50-15:10

홍대용의 농수각, 유학자의 천문대 임종태 (서울대)

자연문화물 두루미를 통해 본 조선 실학의 도구성:


이정 (이화여대)
기회만 있고 위기는 없었던 조선 학문의 전환

이순신 거북선의 공격선과 수송선의 기능에 적합한 구조와 외형 채연석 (UST)

사회: 남경욱 (과천과학관)


토론: 이기복 (서울대)
홍대용의 농수각(籠⽔閣), 유학자의 천문대

임종태 (서울대학교)

농수각(籠水閣)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 사상가로 널리 알려진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1731-1783)이 수촌(壽村, 오늘날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의 자택에 건설한 천문대이다. 1763년 즈
음 자신의 거실(居室) 남쪽에 정사각형의 연못을 파고 그 가운데 둥근 모양으로 낸 섬에 세운 이
누각에는 그가 화순(和順)의 기계 제작자 나경적(羅景績, 1690-1762)과 함께 제작한 혼천의(渾天
儀)와 혼상(渾象)을 안치했다. “해와 달은 조롱[籠] 속의 새요, 하늘과 땅은 물[水] 위의 부평초”라
는 두보(杜甫)의 시구(詩句)를 따서 이름 지은 농수각은, 시구 그대로 해, 달, 천지의 재현을 품은
소우주였다.
홍대용은 농수각을 천문학과 수학에 깊은 관심을 지닌 유학자로서 자신의 학문적 지향을 집약
한 장소로 기획했다. 그는 한편으로 서양식 평면 의기인 측관의(測管儀) 등 새로운 관측기구를 제
작하여 시설을 보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농수각과 의기들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농수각에 체현된 자신의 학문적 지향과 덕성을 자신의 동료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기문(記文)이나 시(詩)를 지어 기념하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대표적인 예로
1766년 초 북경에서 만나 교류한 항주 출신의 선비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에게 그는 자신의
저택 담헌(湛軒)의 여덟 경관에 대한 제영(題詠)과 기문(記文)을 부탁했는데, 그 중 “섬 속 누각에
서 종을 울리다”와 “선기옥형으로 하늘을 보다”의 두 경관은 농수각 의기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
보다 뒤늦게 만난 육비(陸飛)에게는 특별히 농수각 혼천의에 대한 기문을 청탁했다.1)
이 글은 농수각과 그 의기를 만들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홍대용의 실천을 따라가면서
동시대의 양반 청중들에게 홍대용이 보여주고 싶어 했던 학문적 지향은 무엇이었고, 그와 같은
실천을 통해 그가 주조해낸 새로운 유학자 상(象)은 어떤 것이었는지 추적해 보려는 시도이다. 이
를 통해 18세기 중엽 수학 · 천문학 분야의 전문적 실천이 양반 엘리트 문화의 정당한 구성 요
소로 자리 잡아 가고, 양반 수학자라는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 학자가 등장하는 변화의 과정을 이
해해 보려 한다. 홍대용은 그 흐름을 선도한 인물의 하나로서, 농수각을 세우고 이를 동료들에게
선전함으로써 수리과학의 가치를 양반 사회에 선양하려 했지만, 우리는 그가 기구를 제작하고 관
측하는 행위가 옛 성인의 도(道)에 대한 유학의 추구와 어떻게 맞물린다고 생각했는지 충분히 이
해하지 못하고 있다. 연구가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농수각에 주목한 박성래와 한영호의 예외적 연
구는 그 해석이 서로 크게 엇갈리고 있다.
박성래는 40여 년 전의 논문에서 농수각을 홍대용의 학문적 기획을 대변하는 장소로 부각했다.
그는 그때까지 주로 지전설 등 선진적 우주론의 주창자로만 알려져 있던 홍대용에 대해, 그가 이
룩한 진정한 혁신은 당시 유입되고 있던 서양과학의 핵심을 “수학적 계산과 기구를 이용한 관측”
이라고 꿰뚫어 본 데 있다고 지적했다.2) 하지만 박성래는 홍대용이 그러한 통찰을 넘어 스스로가
서양과학의 전문적 실행자가 되는 데는 실패했다고 보았다. 농수각 천문의기를 제작하고 수학서
인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함으로써 홍대용은 자신이 파악한 서양과학의 장점을 실천에 옮
기려 했지만, 그것을 전문적으로 구현할 만큼의 소양을 지니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1) 홍대용, 국역 담헌서 외집 권2 “항전척독—간정동필담”, 1766년 2월 5일; 2월 24일.


2) 朴星來, “한국 근세의 서구과학수용”, 동방학지 20 (1978), 257-292; 박성래, “홍대용의 과학사상”, 한국학보
7(2) (1981), 159-180. 10여 년 뒤의 논문에서 그는 이를 “서양과학의 발견”이라고 불렀다. 박성래, “홍대용 담헌서
의 서양과학 발견”, 역사학보 79 (1995), 247-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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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수용의 수학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으며, 농수각의 의기는 실제 천문 관측에 사용되지 않
고 “더럽혀질까 염려하여 호수 가운데에 격리 보관”하는 “완상용”(玩賞用)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요컨대 홍대용은 전문적 과학자라기보다는 “서양과학의 여러 가지 생각들을 나름대로 소화해 낸
과학사상가”에 가까운 인물로서, “유교적 교양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다.3)
박성래가 농수각 의기를 “완상용”이라고 본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홍대용이 1766년 봄
북경에서 중국인 벗들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할 당시 농수각에 설치되어있던 혼천의와 혼상은 본
격적인 천체 관측기구라기보다는 천체의 모양과 운행의 재현 모델에 가까웠다. 실제로 홍대용은
자신의 혼천의 제작에 대해 경학(經學)의 교보재로 혼천의를 이용했던 주희(朱熹), 이황(李滉), 송
시열(宋時烈)과 같은 도학자(道學者)의 선례를 계승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이 의기를
완상(玩賞)하는 일을 “정자에서 거문고를 타고”, “감실(龕室)에서 주역 점을 치며”, “활터에서 활
을 쏘는” 행위와 함께 “담헌 팔경(八景)”을 구성하는 요소로 제시했다. 즉 농수각의 천문학은 선
기옥형(璇璣玉衡)을 제작한 옛 성인의 모범을 재현하려는 도학(道學)의 관심사, 음악과 활쏘기의
예(藝)를 실천함으로써 이상적 군자의 삶을 구현하려는 복고적 지향 속에 녹아 들어가 있었다. 하
지만 이와 같은 완상의 행위가 애초부터 수리과학의 전문적 실행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실제로 농수각의 천문 의기와 주해수용에 관해 한영호 등이 수행한 실증적인 연구는 홍대용
의 기구 제작과 수학 저술을 “교양 수준”의 성취로 치부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주해수
용의 기하학을 살펴본 그는 홍대용이 평면기하학에 대해 전문가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으며, 이
러한 소양을 바탕으로 청나라 수리정온(數理精蘊)의 기하학을 실용 측량의 관점에서 재편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농수각의 여러 의기에 대해서도 그는 조선의 천문의기 전통과 서양의 방법을
절충한 수준 높은 성취로 평가했다.4) 즉 박성래의 평가와는 달리 홍대용은 자신이 파악한 서양과
학의 핵심을 전문적 수준에서 훌륭히 구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대용은 천문학과 수학의 전
문적 실천이 어떤 점에서 옛 성인의 도를 따르는 유학자가 추구할 만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할 사
업이라고 생각했을까?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주해수용과 “농수각 의기지(籠水閣 儀器志)”에 주목해서 살펴보고
자 한다. 1766년 북경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1775년 관직 생활을 시작하기 이전의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저술에는 농수각 의기들의 구조와 사용법, 곱셈 나눗셈의 간단한 계산으로
부터 천체의 크기와 거리에 대한 측정에 이르기까지의 산법이 체계적 정리되어 있다. 필자는 홍
대용의 이 저술을 유학자 청중을 대상으로 그들의 삶에 긴요하게 쓰일[需用] 천문학·수학을 소개
하려는 동기에서 저술된 것으로 보고, 그가 그 쓰임새로 무엇을 제시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특히
북경에서 돌아온 뒤 제작한 서양식 평면의기 “측관의(測管儀)”에 대한 홍대용의 해설이 그에 관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측관의”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쓰임새를 제시했다.

의기를 살펴 천체를 관찰하고 곱셈과 나눗셈으로 추산하면, 아주 짧은 순간에 대해서도 나


태한 이에게 세월을 아끼는 마음이 일어나게 할 수 있고, 절기가 가지런히 나누어져 산중에
서도 달력이 없음을 근심하지 않는다. 그 심목(心目)을 넓혀 세상의 어지러움을 가라앉히는

3) 박성래, “한국 근세의 서구과학수용”, 271-272쪽. 박성래는 “유교적 교양주의”를 홍대용이 아니라 19세기 말 조선 엘리
트들의 태도를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 박성래, “개화기의 과학수용”, 김영식 · 김근배 엮음, 근현대 한국사회의 과학
(창작과 비평사, 1998), 15-39 중 28쪽. 하지만 그가 홍대용에게서 이후 서양과학의 전문적 수용에는 실패하고 “과학이
중요하다”는 사상적(교양적) 각성만 비대해질 한국 근대 과학사의 전조를 발견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4) 한영호, “서양 기하학의 조선 전래와 홍대용의 주해수용”, 역사학보 170 (2001), 53-89; 한영호, 이재효, 이문규,
서문호, 남문현, “洪大容의 測管儀 연구”, 역사학보 164(1999), 125-164; 한영호, “농수각 천문 시계”, 역사학보
 177 (2003),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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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에서도 학자들이 풍속을 고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된다.5)

이중 앞의 두 가지가 학자 개인의 수양 및 일상생활에서 천문학과 수학의 쓰임이라는 점에서


수기(修己)의 실천과 연관된다면, 세 번째 항목에서는 관측과 계산의 실천이 사람들의 소견을 넓
혀 편협한 풍속을 교정하는 치인(治人)의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필자는 홍대용이
의산문답에서 제시한 무한우주의 관념과 중화주의 비판이 바로 천문학과 수학을 통해 “심목을
넓히고 풍속을 고치는” 실천의 구체적 사례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주해수용에서 제시된
관측과 계산이 의산문답의 점성술 비판과 우주론의 토대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연구가 제시되었
다.6) 이 발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홍대용이 생각했던 수학적 계몽의 핵심에 관측 시점이 달
라짐에 따라 현상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 추산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실천이 있었음을 주
장하려 한다.

5) 홍대용, 국역 담헌서 외집 권6 “농수각 의기지, 측관의”. 按器瞡影, 乘除而推之, 隙駟芒忽, 可以起懶夫惜陰之
心; 節氣分齊, 不患山中之無曆; 若其恢拓心目, 消落世紛, 亦或爲學人毉俗之一助也.
6) 홍유진, “홍대용(洪大容) 주해수용(籌解需用)의 구성과 저술 목적”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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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문화물 두루미를 통해 본 조선 실학의 도구성: 기회만 있고 위기는 없었던 조선 학문의 전환

이정 (이화여대)

두루미 혹은 학(鶴)은 한반도나 중국 중남부 등지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고고한 자태로 닭 모이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는 학을 선비의 상징으로 삼아, 학처럼 검은 띠를
두른 흰 두루마기, 학창의(鶴氅衣)를 입었다. 또 벼슬을 거부한 채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
들로 삼아서 살았다는 송대 문인 임포(林逋, 967-1028)를 따라 학을 길렀다. 허목(1595-1682), 윤
휴(1617-1680), 박세당(1629-1703)이 학을 길렀고, 이익(1681-1763)의 주변에도 학을 키우는 이들
이 많았다. 이 글은 선비들이 학을 키웠다는 인간 중심적 이야기 대신 학이 새로운 선비, 새로운
학문,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드러내는 사물(事物) 중심적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조
선 후기 실학의 새로운 경향으로 이야기되는 박학(博學), 명물도수(名物度數), 격물치지(格物致知),
실사구시(實事求是)는 그 탐구의 대상인 사물 고유의 작동 방식과 사물과 조선 선비들의 관계 변
화 등을 통해 그 의미가 구체화될 수 있다.
은거를 선택한 산림학자들의 학 키우기가 서울의 경화세족 사이에 퍼지는 것은 18세기 중엽이
다. 사행과 무역을 통해 금석문, 책, 고동서화 등 다양한 사물이 유입되는 이 시기, 규장각의 후
원에서도 노닐게 되는 학은 경화세족이 강한 애호와 수집벽을 드러낸 여러 사물 중의 하나였다.
학은 특히 사물에 휘둘려 뜻을 잃는 완물상지(玩物喪志)가 아닌 청정한 즐김(청완淸玩)을 통해
“정(情)”을 다스리는 완물적정(玩物適情)을 상징하며 성시산림(城市山林)을 거닐었다. 학은 홍계희
의 “평생도”에서 고동서화와 함께 그의 말년을 장식했고,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과 교유했던
이서구는 젊어서부터 학을 키웠다. 학은 이서구의 집을 자주 오갔던 이들 ‘북학파’와 강하게 교류
했다. 박지원은 『
양반전』
에서 학을 먹이는 곡식이 마당에 흩어져 있는 양반가의 모습을 풍자했지
만, 며느리는 신행 때 학과 나란히 걸어와서, 박규수의 어릴 적 이름은 규학이었다. 수선화와 앵
무새처럼 수입되기도 한 이런 동식물은 새로운 선비적 이상과 자연을 아우르는 혼종이고, 자연/
문화를 나누는 근대적 이분법을 비판하는 브뤼노 라투르, 도나 해러웨이 등이 말하는“자연문화물
natureculture”이다. 학은 그러한 혼종이자 선비들의 “반려종”으로서 새로운 학문적 접근을 요구했
다.
조선에서 학의 특징과 학을 키우는 법을 소개한 최초의 저작은 은거의 지침서인 17세기 말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이다. 두어 줄 남짓인 『
산림경제』
의 학 조목과 1766년의 증보판 『
증보산림경
제(增補山林經濟)』
의 대조는 학이 성시산림으로 들어오며 일으키는 변화의 일단을 드러낸다. 중국
책 두 권을 참고한 세 가지 사실을 적시했을 뿐인 『
산림경제』
에 비해, 『
증보산림경제』
는 태어난
지 3년 만에 이마가 붉어지며 단정학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특징을 드러내게 되는 성장 과정, 먹
이와 질병 처치법, 알을 품고 키우는 행동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일부일처를 이루는 번
식과 양육기 동안의 역할 분담, 영역 침범을 허락하지 않아 침범이 일어나면 알을 깨뜨리고 새끼
를 죽이는 행동은 현대 조류도감의 내용과 일치한다. 학에게 춤을 가르치는 법도 두 가지 소개했
는데, 굶겼다가 먹이와 소리로 길들이는 중국의 방법과, 뜨거운 온돌에 둥근 박을 두고, 박 위에
서 균형을 잡는 과정에서 춤을 익히게 하는 조선의 방법이다. 학춤은 장수를 기원하고 아취를 돋
우는 회갑연 행사였다. 이덕무와 성해응은 덫에 걸리고, 우물에 떨어져 죽고, 새끼를 죽이고, 춤
추는 학에 대한 사실을 고증하며 자연(天)과 인공(人), 정절과 효 등의 덕목에 대한 논의를 펼쳤
다.
19세기의 서유구와 이규경은 학에 대한 지식을 한층 더 확대한다. 학과 같은 사물에 대한 애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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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들의 손에 들어오는 책과 함께 명물도수학을 일신시킨다. 서유구는 『
금화경독기』
에서 학을
다루고, 『
임원경제지』
의 『
이운지』
에서 선비의 반려가 될 수 있는 다섯 가지 동물 중의 첫 번째로
학을 다룬다. 비오리, 사슴, 금붕어, 거북이 그 뒤를 이었다. 서유구는 기원전 2세기 저작인 『
상학
경(相鶴經)』
을 비롯해 『
산가청사(山家淸事)』 『
구선신은서(臞仙神隱書)』 『
준생팔전(遵生八牋)』 『
고금
비원(古今祕苑)』『
화경(花鏡)』등 중국 문헌을 널리 활용했다. 기물(器物)과 서화 등 청완품에 대한
지식을 갖추었다고 평가받는 필기 소품류이다. 『
금화경독기』
는 『
시경집주』
에서 주희가 언급한
“학의 꼬리는 검다”라는 말을 두고 “이 노인네는 서 있는 학만 보고, 날아가는 학은 보지 못했
냐”고 조롱한 청의 고증학자 모기령의 말을 언급한 뒤, 이것이 이미 밝혀진 단순한 오류에 대한
저속한 비방임을 고증을 통해 주장했다. 또 『
고금비원』
에서 이야기한 향을 피워 학을 잡는다는
것을 “방사(方士)”의 황당한 말이라 비판하며, 실제 연안 등지에서 논 위에 덫을 놓아 학을 잡는
법을 소개했다. 물리지 않도록 부리를 싸매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깃촉을 자르고, 배가 부르면 사
람이 주는 것을 먹지 않으니 며칠씩 굶겼다가 음식 주기를 몇 달 반복하고, 혹시라도 다음 해에
무리가 돌아올 때 함께 돌아가지 않도록 가둘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규경의 “상학변증설
(相鶴辨證說)”은 서유구의 인용서목을 거의 포괄했을 뿐 아니라 『
야객총서(野客叢書)』
, 『
소창청기
, 『
(小窗淸紀)』 본초강목』 등을 더해 두 배 이상의 서적을 참고했다. 모기령의 말에 대한 유사한
비판을 포함한 학에 대한 변증은 이들 문헌의 비교, 대조, 분류 작업에 자신의 추론과 한 쌍의
학을 키운 경험을 더한 것이다. 달빛이 좋은 날 키우던 학 둘이 마치 사람이 없는 듯 풀잎과 나
뭇가지 등을 던져서 서로 장난을 쳐가며 춤을 추던 일은 학이 가르치지 않아도 춤을 출 수 있다
는 것을 증명했고, 나아가 새와 같은 것도 지각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었다.
학을 제외하고도 이들이 다룬 동식물은 거의 정원, 임원, 도시, 농촌의 거주자이다. 책에서 수
집되고, 야생이 아닌 정원과 논밭에서 관찰되는 “자연문화물”이 새로운 명물도수학의 핵심인 것
이다. 서유규의 『
난호어명고』
, 유희(1773-1837)의 『
물명고(物名攷)』
, 정학유(1786-1855)의 『
시명다
식(詩名多識)』
에서도 뚜렷한 경향이다. 이 “자연문화물”은 조선의 지식 전환이 동시대 흐름과 갖
는 유사성과 고유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해롤드 쿡이 Matters of Exchange(2007)에서 사상사 중심
의 과학혁명 논의를 비판하며 지적했듯 교환되는 사물이 지적 전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같다. 조선 학인들의 학에 대한 접근과 그 안의 분기 역시 중시되어온 “인물성동이론”의 성리학
적 입장보다 사물과 정치의 흔적을 더 드러낸다. 다만 유럽인들이 책에서 찾을 수 없는 ‘신대륙’
의 자연물을 접하며 지적 위기를 경험하고, 자연 혹은 야만 상태의 타자를 발견하거나, 차, 비단,
커피, 설탕, 코코아, 향신료 등의 유혹적인 자연물에 대한 믿을만한 사실을 확보하기 위해 표본을
수집하고, 객관적 방법론을 고민했다면, 조선 학자들을 사로잡은 사물은 다른 관계와 접근을 요구
했다. 이적시했던 청, 나아가 일본과의 더 개방된 교류가 필요해졌고, 이 교류를 통해 늘려간 자
연문화물의 본뜻은 그것에 의미를 부여했던 사물인 책 속에서 찾을 수 있었기에 가장 애호되고
축적된 사물은 책이다. 처음부터 “서실의 완상품” 자리를 무리없이 차지한 서학서와 일본 책도
배제하지 않는 책에 대한 욕구는 정보의 폭증을 낳았지만, “명물도수” 문헌에 드러나는 지식의
차이는 경전의 권위를 저해하지 않는, 단지 경전에 대한 논의로는 얻을 수 없었던 흥미로운 새
지식활동을 낳았다. 더러 분출되던 학문에 대한 반성은 이 “자연문화물”이 가져다준 기회에 압도
되었다. “자연문화물”이 주도한 조선 지식의 전환에는 그래서 위기감보다는, 정교한 비교분석이
가능해짐으로써 얻어지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자신감과, 엄청난 지식욕, 이 흥미로운 학문을 유학
자다운 명물도수학의 틀 안에서 ‘실용’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학은 식량이나 옷이나 장신구가 되는 도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야생의 학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을 추구하지 않은 이들은 길들여지지 않는 학을 길들여서, 학과 나란히 걷는, 자연과 하나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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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을 위해서 학을 탐구했고, 학은 자주 이들을 떠남으로써 이들의 학문활동을 확대시켰다. 이
새로운 학문은 자연문화의 정치적 도구를 얻기 위한 자연문화적 탐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문화적 도구성은 자연과 하나됨을 말하고 학의 우아함과 덕을 칭송하는 이들의 언어만 분석
한다면 간과할 수 있지만, 떠나는 학을 생각한다면 놓칠 수 없고, 조선 학문의 전환을 근대유럽
의 전환에 비견케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도구성은 문화/자연, 문명/야만, 서구/비서구를 구분하고,
자연/야만/비서구를 정복한 근대유럽 전환의 과학기술적 특징으로 지목된다. 더 면밀한 논증을 통
해 ‘자연/문화’가 결합된 조선 학문의 전환에 유사한 도구성이 있었음을 지적하려는 데는 세 가지
목표가 있다. 첫째는 사물로 연결된 세계에 눈을 돌려, 세계를 연결시키며 폭증하고 있던 인간
주변 사물의 심대한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둘째는 조선을 전근대/비서구로 위치
시켜 근대/서구적 폐해라고만 할 수 없는 생태 위기에 대한 면죄부를 버리는 것이다. 셋째는 근
대적 이분법에 대한 정교한, 그러나 구체성 없이 반복되는 비판이 이분법의 극복이라는 쉬운 과
제로 오해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는 것이다. 혼종의 근대에도 엄연한 모든 학문의 구체적 한계
들에 대한 논의를 “자연문화”라는 말로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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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선과 수송선의 특성을 갖춘 이순신 거북선의 모습

채연석 (전 문화재전문위원)

1. 함포 배치를 위한 거북선의 구조

1) 1592년 거북선에 장착하였던 함포는 4종류인데, 이중 대형함포에 해당하는 천자총통은 길이


297cm의 대장군전을, 지자총통은 길이 192cm의 장군전을 발사함으로 장전할 때 길고 넓은 면적
이 필요하다1). 한번 발사할 때 사용하는 화약량이 30냥과 20냥으로 발사충격량이 현자총통과 황
자총통보다 5~10배가량 크며 넓은 발사 준비 구역을 준비할 수 있고 무거워서 복원력 등 안전성
을 고려하여 거북선의 2층 전면에 배치를 하여야 한다2).
2) 천자총통은 무게 296kg으로 무거위서 거북선의 앞부분에 무게 중심이 쏠리는 것을 방지하
고 청동을 구하기 어려운 점 등을 고려하여 2층 전면 중앙에 1대 배치.
3) 지자총통은 무게 92kg으로 거북선의 좌우 균형을 위해 2층 전면 좌우에 2대 배치3).
4) 3층은 판자를 깔아 경사진 갑판을 만들고 그 위에 방패를 세우며 지붕을 씌워 복판(개판)을
만들었다.(그림 1) 갑판과 복판 위에 송곳과 칼을 꽂아 적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한다.
5) 3층 복판 전면의 용두에 무게 26.5kg의 현자총통 1대 배치
6) 3층 복판(개판) 좌우에 무게 19.5kg의 황자총통 12대 배치
7) 3층 뒷면의 꼬리 좌우에 황자총통 2대 배치
8) 따라서 1592년 거북선에는 2층 전면 중앙에 천자총통 1대, 2층 전면 좌우에 지자총통 2대,
3층 전면 용두 뒤에 현자총통 1대, 3층 좌우에 황자총통 12대, 3층 뒷면에 황자총통 2대, 등 모
두 18대의 함포를 배치하였다.(그림 4)

(그림 1) 이충무공전서의 ‘전라좌수영 거북선’. 거북선의 복판에 모서리를 표시한


모서리 2와 3(빨간줄)이 총구멍 6개와 창문(2개) 위, 아래에 그려져 있다.

2. 이충무공전서의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그림 1, 그림3)과 임진왜란 거북선의 모습

1) 채연석, ‘함포의 배치를 중심으로 본 이순신 거북선의 구조 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2018년 제 40권 제 1호, p. 11
2)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년) 6월 7일(갑진), ‘임진년 간에 왜와 서로 대적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
배(군선과 거북선)의 선두에 대포(천자, 지자총통)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3) 채연석, 앞 논문, pp. 21~22, 지자총통을 3층 전면 좌우에 배치하였는데 거북선의 무게 중심을 낮추어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2층 전면 좌우로 배치하면서 천자총통은 2층 전면 좌우 2대에서 중앙에 1대만 배치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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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과 가장 비슷한 거북선 그림은 이충무공전서에 있는 귀선도(그림 1)로
추정된다. 이충무공전서에 있는 2장의 거북선 그림 중 하나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그림이다. 3
층의 측면에 함포를 배치하기 위해서는 (그림 2)의 단면도 1처럼 모서리 2와 3부분을 벽처럼 세
워서 함포의 총구를 복판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함포를 발사했을 때 화약의 폭발에
의한 화염과 많은 연기가 총구를 통해서 밖으로 배출해야 되기 때문이며 발사준비 공간도 넓게
만들 수 있다.단면도 2처럼 복판을 둥글게 만들면 함포의 포구를 밖으로 내보내기가 어렵고 공간
이 비좁아 발사준비가 어렵다. 전라좌수영귀선도(그림 1)에 모서리 2와 3이 그려져 있는 것은 모
서리 2와 3에서 거북선의 복판 표면이 접혔다는 뜻이다. 즉 모서리 1에서 모서리 2 까지는 경사
진 형태로 만든 갑판이다. 모서리 2에서 3사이는 방패를 세우듯 갑판위에 세워진 벽으로 이곳에
2개의 창과 6개의 총구가 나있는 것이다. 따라서 복판은 (그림 1)의 복판경사도처럼 만들어졌을
것이며 단면은 (그림 2)의 단면도 1처럼 생겼을 것이다. 왜군이 기어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적군
을 살상하기 위해 함포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단면도 1처럼 거북선의 복판을 만드는 것이 단면도
2보다는 효과적이다.

(그림 2) 단면도 1과 같이 모서리 2와 3사이를 방패(벽)처럼 세워야 함포의 총구를


복판 밖으로 내놓고 총구를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넓은 각도로 발사할 수 있다.

(그림 3) 이충무공전서의 1795년 거북선 그림. 3층 복판 중 좌개판은 11장의 판자를 이어


붙여서 제작하였다. ⑧번 판자에 12개의 포 구멍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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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의 복판(개판)이 둥근 형태가 아닌 것은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그림(그림 3)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림 3) 3층 복판의 반쪽인 좌개판은 11개의 판자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있다4).
판자 ①~⑤까지 5장은 3층 갑판을 수평으로 만드는데 쓰고, 판자 ⑥~⑧까지 3장은 세워서 개판의
벽을 만들고, 판자 ⑨~⑪까지 3장은 개판의 지붕이다(그림 3). 결국 이충무공전서의 전라좌수영
거북선(그림 1)과 1795년 거북선(그림 3)의 복판(개판)은 (그림 2)의 단면도 2처럼 둥근형태가 아
니다. 복판(개판)이 둥근 형태의 거북선으로는 (그림 4)처럼 목재를 싣고 운반하기는 어렵고, 공
간이 비좁아 함포를 설치해서 발사하기에도 불편하며 복원력 등 안전성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난중일기의 1594년 2월 15일자, ‘새벽에 거북선 2척과 보성 배 1척을 멍에 쓸 재목 치는 곳으
로 보내어 초저녁에 실어 왔다’5) 처럼 군선 건조용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거북선의 복판(개
판)이 둥근 형태로는 어렵다. 그리고 승정원일기, 영조 10년(1743년) 6월 5일 기사에 ‘판자 위는
경사지고 미끄러워서 사람이 그 위로 걸어다니기 어렵기...’ 때문에 (그림2)의 단면도 1처럼 거북
선의 3층에 경사진 갑판을 깔고 중앙에 복판을 만들면 3층 복판양쪽의 갑판 위에 충분히 목재를
싣고 운반할 수 있다. 더욱이 적들이 사방에 숨어있는 상태에서는 전선보다도 거북선이 더 안전
하게 목재를 운반할 수 있었을 것이다.6)

(그림 4) 18대의 함포를 장착하고 3층 복판 좌우에 목재를 싣고 운반할 수 있


는 갑판이 있는 이순신 거북선의 상상도.

3. 결론

임진왜란 때 사용한 거북선은 18대의 함포를 장착하여 적선에 가까이 접근하여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에서 대장군전과 장군전을 발사하여 적선을 파괴, 격침시키고 사방으로 함포 공격을 하
여 적군을 살상할 수 있는 뛰어난 공격선이었다. 또한 적군으로부터 안전하게 전선제작에 사용할
목제를 실어 나를 수 있는 구조를 갖춘 수송선이었다. 18대의 함포를 장착한 이순신거북선은 (그
림 2)의 단면도 1과 같이 개판을 씌운 형태이며 목재를 운반할 수 있는 이순신 거북선의 모습은
(그림 4)와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이충무공전서 권수 도설, ‘개판 또는 귀배판에 11개의 판자를 비늘처럼 마주 덮고’


5) 이은상, 위 책, p. 65. 전함 건조에 쓸 큰 통나무를 거북선으로 실어왔다.
6)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1594년 1월 19일 한산도에 도착한다. 그리고 2월 23일, 흥양의 전선 2척이 들어왔다. 2
월 초4일에는 본영(여수)의 전선과 거북선이 들어왔다. 2월 초7일에는 보성 전선 2척이 들어왔다. 2월 15일 멍에에 쓸
재목을 치러 거북선 2척과 보성 전선 1척을 보낼 때 다른 전선도 있었는데 거북선을 2척이나 보낸 것은 거북선이 보성
전선을 호위하면서 목재를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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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4
근현대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
15:20-17:00

다윈은 어떻게 ‘라마르크주의자’가 되었는가 이종찬 (아주대)

기로에 선 물리학: 솔베이 회의, 1911-1933 김재영 (한국과학영재학교)

호르몬 치료의 상품화, 회춘 연구의 정당화 김나영 (서울대)

메타볼리즘에서 회복탄력성으로:
조현정 (KAIST), 박범순 (KAIST)
인류세적 관점에서 본 전후 일본 건축의 쟁점

사회: 신유정 (전북대)


토론: 박민아 (한양대)
다윈은 어떻게 ‘라마르크주의자’가 되었는가

이종찬 (아주대 열대학연구소)

모두 기억할 것이다. 2009년에 찰스 다윈 탄생 150주년과 《


종의 기원》출간 200주년을 기념하
는 학술 모임과 각종 전시회가 한국을 포함해서 여러 나라에서 열렸다. 한국에서는 이때를 맞추
어 다윈의 평전과 관련 서적들이 출간되었다. 하지만, 장 바티스트 라마라크(1744-1829)의 《
동물
철학》
(1809) 출간 250주년은 한국 과학사학계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라마르크는 비운의 ‘자연학자’이다. 그는 이 두터운 분량의 저작에서 ‘기린’에 대해 달랑 한 단
락만 서술했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 기린의 목에 대한 ‘용불용설’의
창안자로 낙인이 찍혀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시기 네덜란드 서부 지역의 가뭄,
빈곤, 출생에 관한 사회역학적 조사 이래로,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태어나고 있는 신생아에 관
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라마르크는 후성유전학을 통해 확실히 부활하고 있다.
본 발표의 목적은 분명하다. 《
종의 기원》
의 초판에서는 고개를 돌렸던 라마르크의 진화 이론에
대해, 다윈이 최종 개정판(1872)인 6판에 이르러 이를 수용하게 된 과정과 이유를 규명하는데 있
다. 이를 위해 세 가지 핵심적인 문제를 다룬다.
첫째, 라마르크의 ‘환경-적응’ 이론이야말로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보다도 반세기나 앞서서 정
립된 최초의 진화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라마르크의 진화 이론은 두 가지 특징
을 보여준다. 하나는 개별 생물체는 점진적으로 조직화의 복잡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동물은 환경에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그의 진화 이
론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두 저작이 《
수리지질학》
과 《
생물체의 조직화에 관한 연구》
이다.
1802년에 의도적으로 이 두 책을 동시에 출간했던 그는 유기체와 무기물 사이의 순환 관계를 통
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구 사상사에서 오랜 기간 지배적인 관념이었던 ‘존재의 대사슬’을
해체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진화 이론을 정립했다. 라마르크는 수리지질학, 그 자신이 창안한 용
어인 ‘생물학’, 기후학을 통합하는 학문으로 ‘지구물리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처럼 라마르
크는 종의 기원과 생명의 기원을 종합적으로 탐구했음을 강조한다. 이 점이 다윈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둘째, 다윈은 《
종의 기원》
의 초판에서 개정 4판에 이르기까지 라마르크의 진화론을 점진적으로
수용했다. 4판(1866)은 다윈 이론의 전환점을 보여준다. 4판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상당히
바뀌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다윈은 각 장마다 소제목들을 첨가했다. 다윈은 초판에서 라마르크 진
화 이론의 주요 개념인 “습성, 환경을 뜻하는 외적인 조건, 신체 기관의 사용과 사용하지 않음”
과 같은 요인들이 종 분화에 영향을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다윈은
지질학의 스승인 찰스 라이엘, ‘적자생존’을 창안한 허버트 스펜서, 자신보다 먼저 진화론을 발표
한 알프레드 월리스, 라마르크의 환경-적응 이론을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보다 더 선호했던 에른
스트 헤켈 등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다윈은 4판에서 라마르크가 말했던 요인들이 종의 분화를 초
래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다윈은 종 분화가 자연선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음
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윈이 라마르크의 환경-적응 진화 이론을 완전히 수
용한 것은 아니었다.
라마르크는 5판(1869)에서 확실히 되살아났다. 다윈이 자연선택에 따른 종의 변이와 비선택적
변이를 구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초판의 내용과 크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하버드대학의 과학
사학자 재닛 브라운이 《
찰스 다윈 평전》 2권에서 말했듯이, 다윈은 5판을 출간하면서,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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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르크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셋째, 최종판을 세밀히 읽어 보면, 다윈이 라마르크적 진화의 개념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용
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다윈은 초판부터 5판까지에는 없었던, 「
7장 자연선택 이론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
를 최종판에 새로 추가했다. 기린이 긴 다리와 목과 같은 “신체 기관을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이런 형질이 유전이 되어” 반추류(反芻類)로서의 종을 지속적으로 보존할 수 있었다고
다윈은 말했다. 초판에서는 라마르크를 인정하지 않았던, 다윈은 결국 비선택적인 기전을 통한 종
의 진화는 자연선택과는 독립적으로 일어난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그는 신체 기관의 사용과 사
용하지 않음, 습성, 외적인 조건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작용 등이 종 분화를 직접적으로 추동시
킬 수 있음을 인정했다. 이렇게 최종판에서 다윈은 라마르크주의자로 변해 있었다!
사실 다윈은 최종판보다도 4년 전에 출간했던 《
사육동물과 재배식물의 변이》
(1868)을 통해 자
신의 자연선택 이론과 라마르크의 환경-적응 이론이 양립가능하다는 인식을 명확하게 보여주었
다. 뿐만 아니라, 《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1870)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70년을 전후해서 그는 라
마르크와 공존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천명했다. 다윈은 1876년 10월 3일 모리츠 바그너에게 보
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저질렀던 가장 큰 실수는, 자연선택과 별개로 일어나는, 음
식이나 기후와 같은 환경의 직접적인 작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
종의 기원》
을 서술하고 몇 년이 지났을 때는 환경의 이런 작용에 대한 근거가 별로 없었답니다. 하지만, 지
금은 이에 관한 상당한 근거들이 차고도 넘칩니다.” 거꾸로 말하면, 다윈의 고백은 이런 근거들이
참으로 부족하던 시기에 환경이 진화에 미친 작용을 탐구했던 라마르크가 얼마나 위대한 자연학
자였는지를 반증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신다윈주의자들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무시, 폄하, 왜곡해버렸다.
결론적으로 본 발표는 라마르크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을 보여주는데 의의가 있다. 또한, 본 발표는 다윈 진화론의 정수를 이해하려면, 최종판을 꼭
읽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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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물리학: 솔베이 회의, 1911-1933

김재영 (한국과학영재학교)

양자역학의 시대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막스 플랑크가 루벤스와 프링스하임의 흑체복사 실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이산적인 에너지 가설을 도입한 1899년일까? 1905년 빛의
생성과 변환에 관련된 냉광, 형광, 광전효과 등을 설명하기 위해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빛 양자
개념을 통해 그 에너지가 플랑크 에너지의 자연수배만 허용된다는 가설을 제안한 1905년일까?
닐스 보어가 원자핵이 있는 원자모형을 안정하게 만들기 위해 빛띠 데이터로부터 각운동량 조건
을 강제로 부여한 1913년일까?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헬골란트의 여명 속에서 교환법칙이 성립
하지 않는 새로운 동역학의 아이디어를 얻은 1925년일까? 기라성같은 물리학자들이 브뤼셀 자유
대학에 모여 보른-하이젠베르크-요르단의 양자역학과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을 놓고 심각하
게 논쟁을 벌이던 1927년일까?
과학사에서 어떤 새로운 시대의 시작점을 확정하는 작업은 쉽지 않지만 그만큼 의미 있는 일
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를 말할 때 ‘구체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새로운 체제의
정립이 중요한 기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양자이론의 시대가 언제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지 묻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는 단순히 물리학 문제를 풀이를 위한 계산이나 특정의 실험방법이 확립된
때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바탕 관념과 존재론적 믿음과 인식론적 전제가 달라진 새로운 시대
의 시작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 논문은 1911년부터 1933년까지 솔베이 회의의 전개를 분석하여 기로에 선 고전물리학이 새
로운 물리학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추적한다.1) 1911년에 시작된 솔베이 회의는 1890년대부터 서
서히 모습을 드러낸 고전물리학의 위기에 대한 고육지책의 대응이었다.2) 러더퍼드의 원자모형뿐
아니라 보어의 원자 모형과 이후 보어-조머펠트 이론도 여전히 고전물리학에 기반을 둔 것이었
다. 보른-하이젠베르크-요르단의 양자역학과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이 제안되고 활발히 논의되기 시
작했지만, 1927년의 5차 솔베이 회의까지도 여전히 고전물리학의 바탕 관념을 벗어나지 않고 있
었다. 새로운 형식체계가 만들어지고 이를 기반으로 그때까지 풀리지 않던 문제들, 예를 들어 비
정상 제만 효과, 헬륨 문제, 슈타르크 효과 등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인 바탕 관념은 19세
기에 정립된 것을 넘어서지 않고 있었다.
바치아갈루피와 발렌티니가 편집한 1927년 솔베이 학술회의를 다룬 책의 제목은 “기로에 선
양자이론 (Quantum Theory at the Crossroads)”이다.3) 1931년 런던에서 열린 제2회 과학기술사
국제학술대회(ICHST)의 제목 “기로에 선 과학 (Science at the Cross Roads)”을 상기시키는 제목
이다. 그러나 1927년 솔베이 회의를 양자이론의 기로(岐路)로 보는 것이 과연 옳은 접근일까?
솔베이 학술회의가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발터 네른스트이다. 네른스트는 물
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닌 화학자였다. 1911년 빌헬름 황제와의 친분을 활용하여 카이저 빌

1) 솔베이 학술회의에 대한 기존 연구로 J. Mehra. The Solvay Cooferences on Physics: Aspects of the
Development of Physics Since 1911. D.Reidel (1975); P. Marage, G. Wallenborn (eds.) The Solvay
Councils and the Birth of Modern Physics. Springer (1999); F. Lambert, F. Berends, M. Eckert (eds.)
“The Early Solvay Councils and the Advent of the Quantum Era”. Eur. Phys. J. Special Topics 224,
2011–2125 (2015) 등 참조.
2) Mary Jo Nye. The Question of Atom: From the Karlsruhe Congress to the 1. Solvay Conference
1860-1911. (1984)
3) G. Bacciagaluppi, A. Valentini. Quantum Theory at the Crossroads Reconsidering the 1927 Solvay
Conference (2009).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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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름 협회를 만든 주역이다. 그가 기초과학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진 벨기에의 사업가 에르네스
트 솔베이(Ernest Solvay 1838-1922)를 설득하여 유럽의 저명한 물리학자/화학자를 초청하여 최신
의 기초과학을 함께 이야기하는 소규모 학술회의를 처음 연 것이 1911년이다.
7차까지의 솔베이 회의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1차: 복사이론과 양자 (La théorie du rayonnement et les quanta 1911)


2차: 물질의 구조 (La structure de la matière 1913)
3차: 원자와 전자 (Atomes et électrons 1921)
4차: 금속의 전기전도 (Conductibilité électrique des métaux et problèmes connexes 1924)
5차: 전자와 빛알 (Electrons et photons 1927)
6차: 자기 (Le magnétisme 1930)
7차: 원자핵의 구조와 성질 (Structure et propriétés des noyaux atomiques 1933)

양자역학과 파동역학이 발표된 직후에 열린 5차 솔베이 회의는 이 새로운 역학을 둘러싼 논쟁


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가 확립된 것으로 흔히 여겨진다. 특히 보어와 아인
슈타인의 논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후 양자역학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이 첨예하게
맞선 것으로 회자된다.
그러나 1928년에 출간된 발표문 모음(Rapports et Discussions du Cinquiéme Conseil de
Physique)에 있는 발표논문은 윌리엄 브래그의 “엑스선 반사의 세기”, 아서 컴프턴의 “복사의 실
험과 전자기이론 사이의 불일치”, 루이 드브로이 “양자의 새로운 역학”, 막스 보른과 베르너 하이
젠베르크의 “양자역학”,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의 다섯 편뿐이고, 널리 알려진 보어와 아
인슈타인의 논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보어가 코모에서 발표한 논문의 프랑스어 번역본이 실
려 있지만, 이는 발표문 모음의 편집 과정에서 보어가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은
애초에 발표자로 섭외되지 않았고, 발표문 모음만으로 판단하면 5차 솔베이 회의에서 이 두 물리
학자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은 회의가 끝난 뒤 파울 에렌페스트가 레이덴 대학의 동료와 학생
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짧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보어가 아인슈타인과의 대화를 회고한 것은
1949년의 일이었으며, 하이젠베르크가 이 논쟁을 기록으로 남긴 것도 1967년이었다. 오토 슈테른
이 1961년 레스 요스트와 이 일화와 대화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슈테른은 5차 솔베이 회의에 참
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1930년의 6차 솔베이 회의와 혼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5차 솔베이 회의는 새로운 양자이론의 이해가 확립된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엑스선 회절과 컴
프턴 산란을 고전물리학 및 보어-조머펠트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움을 심각하게 논의하고, 당시
막 발표된 양자역학과 파동역학을 정리하여 소개하고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자리였
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참석자들은 이 새로운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고전물리학의 바탕 관념
을 근간에 둔 질문과 비판을 이어나갔다. 특히 1차부터 5차까지 줄곧 좌장을 맡았던 헨드릭 안톤
로렌츠의 질문은 특히 고전역학의 존재론을 벗어나지 않는다.
1933년 7차 솔베이 회의에 대해 스튜워는 “이 회의는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열린 마
지막 회합이었으며, 핵물리학과 인류사 모두의 기로에 서 있었다.”라고 평가했다.4) 6개국(대부분
독일 또는 프랑스) 18명이 참가했던 1차 솔베이 회의에 비해 11개국 41명이 참석한 명실공히 국

4) Stuewer R.H. “The Seventh Solvay Conference: Nuclear Physics at the Crossroads”. In: Kox A.J., Siegel
D.M. (eds) No Truth Except in the Details. Springer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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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술대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26살의 루돌프 파이얼스부터 65살의 마리 퀴리에 이르기까
지 세대를 아우르는 학술모임이기도 했다. 이는 1931년 5월 20-24일 ETH 취리히, 1931년 10월
11-18일 로마 (엔리코 페르미), 1933년 9월 24-30일 레닌그라드 (블라드미르 포크 등)를 잇는 네
번째 핵물리학 학술대회였다.
1931년 12월 해럴드 유리는 중수소핵을 발견했고, 제임스 채드윅은 중성자를 발견하여 1932년
2월에 발표했다. 1932년 8월에는 칼 앤더슨이 양전자를 발견했다. 이보다 앞서 이렌느 졸리오-퀴
리와 프레데릭 졸리오-퀴리도 중성자와 양전자를 발견했고, 나아가 인공방사능을 실험으로 확인
했다. 그 무렵 미국 버클리 대학의 어니스트 로렌스와 영국 케임브리지의 존 콕크로프트와 어니
스트 월턴이 각각 새로운 입자가속기를 만들었다. 채드윅과 콕크로프트-월턴 그리고 졸리오-퀴리
부부의 새로운 발견은 7차 솔베이 회의에서 중요한 발표주제였다.
새로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및 실험적 접근에서는 양자역학보다도 양자마당이론이 더
큰 역할을 했다. 폴 디랙은 1927년 “복사의 방출과 흡수에 대한 양자이론”을 발표했지만, 이듬해
발표한 디랙 방정식은 점입자에 대한 이론으로 여겨졌다. 하이젠베르크와 파울리는 1929년과
1930년 양자전기역학(Quantenelektrodynamik)을 새로 제안했다. 여기에서는 전자나 양성자 등의
물질도 파동역학으로 다루어졌다. 1930년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디랙의 이론에 따라 속박 전자의
스스로 에너지를 계산하여, 입자와 마당의 상호작용 때문에 전자와 같은 바닥상태의 에너지 수준
이 무한대 값만큼 옮겨짐을 보였다. 1932년 한스 베테와 엔리코 페르미는 전자기 상호작용을 곧
빛알의 상호교환으로 보는, 매우 혁명적이면서도 이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이디어를 냄
으로써 양자마당이론의 중요한 걸음을 내딛었다. 디랙은 7차 솔베이 회의에서 음에너지 전자들의
앙상블을 밀도행렬로 나타내고 하트리-폭 어림을 써서 외부마당에서 유도된 전하밀도를 발산하는
부분과 유한한 부분으로 나누는 방법을 다룬 논문, “양전자의 이론”을 발표했다. 여기에 도입된
밀도행렬 정식화나 컷오프의 도입은 로렌츠 불변성과 양립하지 않았지만, 디랙은 곧 로렌츠 불변
성과 게이지 불변성과 양립하는 새로운 공변 밀도행렬 정식화에 성공했다.
7차 솔베이 회의에서 주목할 또 다른 연구는 게오르기 가모프가 알파붕괴를 양자역학의 터널
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제 양자이론은 원자의 영역뿐 아니라 명실공히 핵의 영역까지 포괄하는
보편적 이론으로 여겨질 수 있게 되었다.
7차 솔베이 회의가 끝난 뒤 두 주가 채 지나지 않아 1932년에 정해지지 않은 노벨물리학상과
1933년의 노벨물리학상이 각각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디랙에게 주어짐으로써 이제 양자이론은
명실공히 새로운 시대의 물리학 기본이론으로 공인되었다.
원자물리학의 탐구에서 생겨난 양자역학은 그 해석과 개념적 기반에 대한 논의에서 심각한 논
쟁거리였지만, 이를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현상, 즉 원자 아래에 속하는 핵물리학에 적용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장치를 만들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새로운 양자물리학의 바탕 관념이 제자리
를 잡기 시작했다.
솔베이 회의는 고전물리학과 그 바탕 관념에 대한 위기를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양자이론으로
의 점진적 변화를 상징하는 학술대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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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 치료의 상품화, 회춘 연구의 정당화1)

김나영 (서울대학교)

19세기 말부터 독일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지에서는 나이가 들면 성욕이 감퇴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생식선과 성적 특성, 노화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려는 시도가 동물학 ․ 생리학 분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유럽 과학계의 지적 성과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망명한 지식인들을 통해 미
국으로 전해졌는데, 그중에는 당대 최고의 생리학자로 명성을 날리며 회춘 연구를 주도했던 오이
겐 슈타이나흐(Eugen Steinach, 1861-1944)의 제자 해리 벤자민(Harry Benjamin, 1885-1996)도 있
었다. 독일 출신의 의사이자 생리학자 벤자민은 슈타이나흐가 고안한 회춘 수술을 미국 사회에
도입했다. 그는 400건에 가까운 수술을 집도하고 다수의 임상 논문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학술활
동을 전개했으며 대중 강연을 열어 적극적으로 수술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슈타이나흐 수술
(the Steinach Operation)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급격히 증가하는 가운데, 대량생산 ? 소비 시대
를 맞이한 미국 시장에는 출처와 효능이 명확하지 않은 각종 회춘 상품들이 경쟁적으로 출시됐
다. 이 논문은 슈타이나흐 수술 사례를 중심으로 1920년대 미국 사회를 특징짓는 소비 문화
(consumer culture)와 의학 지식의 형성 및 실행 사이의 상호작용에 주목함으로써, 회춘 상품
범람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돌팔이 의학(quackery)이라는 비난에 직면했던 회춘 연구가 상품화의
목표를 내세우고 성호르몬 연구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과학적 의학(scientific medicine)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음을 보이려 한다.2)
일군의 과학사학자들은 1920년대에 급격히 유행했다가 1930년 무렵 종적을 감춘 슈타이나흐
수술을 내분비학 발전 역사에 꼭 들어맞는 사례로 간주했다. 정관을 묶거나 난소에 직접 방사선
을 가하는 방식의 수술이 1930년대에 성호르몬 치료로 대체되었던 것은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치료법의 등장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것이다.3) 이후의 연구들은 과학이 특정 지역의
사회와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는 인간 활동의 산물임을 고려하며 과학 내적 발전에 치중했던 기존
서사를 보완했다. 과학사학자 찬닥 센굽타(Chandak Sengoopta)는 회춘 치료가 크게 유행한 1920
년대가 젊은이들이 대중소비문화를 주도하던 광란의 20년대(the Roaring Twenties)였으며, 새
로이 주목받게 된 젊음의 가치가 전후 미국 사회의 재건을 위한 일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work)과 동일시되기도 했음을 지적했다. 그는 젊음을 되찾아 주는 이 수술이 대중의 열렬한 관
심에도 불구하고 사라지게 된 이유가 수술의 합당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당대 의료계의 몰이
해에 있다고 보았다.4) 센굽타가 대중과 전후 미국 사회의 관계에 주목했다면, 과학철학자 제시카

1) 이 논문은 김나영의 석사학위논문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김나영, 슈타이나흐 수술, 성호르몬, 그리고 회춘의 상품
화: 20세기 초 해리 벤자민의 회춘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1).
2) Nancy Tomes, Merchants of Health: Medicine and Consumer Culture in the United States, 1900-1940,"
The Journal of American History 88:2 (2001), 519-547.
3) Stephen Lock, 'O That I were Young Again': Yeats and the Steinach Operation, British Medical
Journal 287:6409 (1983), 1964-1968; Dirk Schultheiss, J. Denil and Udo Jonas, "Rejuvenation in the
Early 20th Century," Andrologia 29:6 (1997), 351-355; Julia E. Rechter, 'The Glands of Destiny': A
History of Popular, Medical and Scientific Views of the Sex Hormones in 1920s America. (PhD dis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1999)
4) Chandak Sengoopta, The Most Secret Quintessence of Life: Sex, Glands, and Hormones, 1850-1950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2006), 69-115; Chandak Sengoopta, Dr Steinach Coming to Make
Old Young!: Sex Glands, Vasectomy and the Quest for Rejuvenation in the Roaring Twenties,
Endeavour 27:3 (2003), 12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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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헬(Jessica Jahiel)은 20세기 초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 AMA)의 권위와 영
향력이 확대되던 의학사적 맥락에 초점을 두었다. 자헬은 당시 회춘에 대한 일부 전문가 집단의
회의적인 태도가 회춘 치료법의 전환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고, 이와 관련하여 진단과
사후치료를 중시하는 AMA의 질병 패러다임에 부합하는 치료만이 과학적 의학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명확한 진단 기준이 없었던 수술과 달리 호르몬 치료에서는 신체 표준 호
르몬 용량을 기준으로 노화를 진단할 수 있었고, 결국 주류 패러다임에 부합하는 호르몬 치료만
이 전문 의학으로 인정받아 존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5)
다양한 측면에서 슈타이나흐 수술이 사라지게 된 맥락을 제시하는 기존 연구들은 수술에서 호
르몬 치료로의 이행이 불연속적이라는 합의를 공유하는데, 이 논문은 이러한 단절적 서사에 의문
을 제기한다. 벤자민이 슈타이나흐 수술의 권위자인 동시에 1920년대 말 부상한 회춘 호르몬 연
구의 선두주자였으며, 성호르몬 치료가 슈타이나흐 수술을 계승하는 것임을 그가 누차 강조했다
는 사실이 두 치료법 사이의 연속성을 밝히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이 논문은 AMA로부터 돌
팔이 의학이라는 의심을 받았던 1920년대 회춘 연구의 불안정한 지위를 살펴보는 것에서 출발하
여, 당대 미국에서 과학적 의학과 돌팔이 의학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어떠한
맥락에서 등장하고 작동할 수 있었는지를 검토한다. 회춘 연구의 지위 논쟁에 직 ㆍ 간접적으로
참여한 회춘 연구자 벤자민, 미국의사협회지(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JAMA)의
편집장을 역임(1924-1950)한 모리스 피쉬베인(Morris Fishbein, 1889-1976), 화학자 카지미르 풍크
(Casimir Funk, 1882-1967)의 변화하는 입장과 실행은 주요한 분석 대상이 될 것이다.
슈타이나흐 수술과 성호르몬 치료 사이의 연속성을 보이기 위해 이 논문은 1920년대 미국 회
춘 치료의 역사를 다음 두 가지 상업화의 맥락을 중심으로 재구성한다. 첫째, 1920년대 중반 시
장을 선점하려는 각종 회춘 상품의 경쟁적인 출시와 홍보는 의료 규제 기관에서 과도한 상업화
여부를 기준으로 돌팔이 의학과 과학적 의학을 구분하도록 부추겼다. 이러한 기준의 제시와 적용
은 AMA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했던 피쉬베인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는데, 그는 슈타이나흐 수술
이 도입된 1920년대 초부터 회춘이라는 표현이 내포하는 과장성을 문제삼으며 회춘 치료의 과학
적 근거에 의구심을 가졌다. 슈타이나흐 수술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1920년대 중반에는 회춘을
소재로 한 소설과 영화가 크게 흥행했는데, 이는 유례없는 회춘 유행으로 이어져 미국 전역에 각
종 회춘 상품이 범람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문제는 그중 다수가 의료 사기꾼과 가짜 치료제였다
는 것으로, 규제 당국의 인력만으로 이들 모두를 단속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회춘의 과학적
근거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대중들의 회춘 상품에 대한 자발적 검열을 촉구하던 피
쉬베인은 급기야 회춘 치료와 상품 일체를 돌팔이 의학이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슈타이
나흐 수술에 대한 돌팔이 의학이라는 낙인은 '과학적 근거의 부족, 전문가들의 몰이해, 상이한 질
병 패러다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20세기 초 피쉬베인을 필두로 한 AMA가 규제 기관
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가운데 회춘 치료의 지나친 상업화에 대응하는 수사 전략이었던 것
이다. 특히 이 논문에서는 피쉬베인의 두 저작 『
의학 풍자극(The Medical Follies)』
(1925)과 『

(新) 의학 풍자극(The New Medical Follies)』
(1927)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회춘 치료에 대한 피쉬
베인의 입장 번복, 그리고 과도한 상업화를 기준으로 적법한 의료 행위를 구분 짓는 논리가 어떤
방식으로 제시되었는가를 알아본다.6)

5) Jessica Jahiel, Rejuvenation Research and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Paradigms in Conflict. (PhD diss., University of Boston, 1992).
6) Morris Fishbein, The Medical Follies (New York: Boni and Liveright, 1925); Morris Fishbein, The New
Medical Follies (New York: Boni and Liveright,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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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돌팔이 의학이라는 비판에 직면하여 과학적 근거와 정당화를 끊임없이 요구받던 회춘 연
구는 1920년대 말 상품화의 목표를 내걸고 호르몬 치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과학 연구의 지위
를 획득하게 된다. 1920년대 초 비타민제의 대대적인 성공으로 치료제 대량생산의 가능성을 목격
한 미국 화학계는 가격을 비롯한 접근성 측면에서 소비자 친화적인 의료 상품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다. 당시 막 연구가 시작된 호르몬은 알약과 같은 상품 제조에서의 주요한 자원으로 여겨지
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는데, 미국 화학계는 호르몬 연구를 지원하는 동시에 산업계 ㆍ 의학
계와의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호르몬 상품의 제작 및 유통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피쉬베인의 공
세로 치료와 연구 활동에 난항을 겪던 벤자민은 1929년 우연한 계기로 화학자 풍크의 성호르몬
임상 검증에 참여했고, 협업 과정에서 비타민제 제조 경험이 있던 풍크와 상업화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게 된다. 두 사람은 곧 성호르몬을 이용한 회춘 알약 생산을 공동의 목표로 삼고, 수술에
비해 저렴하고 간편하며 효율적인 새로운 치료제의 개발이 과학적 진보이자 성취임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화학계는 상품화의 목표를 내건 회춘 치료를 과학 연구의 일환으로 수용했으며, 메이오
재단(Mayo Foundation)과 제약회사 파크-데이비스(Park-Davis), 맥코믹(McCormick) 가(家)를 비롯
한 자선가들은 회춘 상품의 지속적인 수요를 예측하고 회춘 호르몬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수십 년이 지나 회춘을 돌팔이 의학이라 단언했던 피쉬베인이 별안간 슈타이나흐 수술의 과학적
전문성을 인정했을 무렵, 벤자민은 이미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된 미국 노화학(geronotology) 분과
의 핵심 연구자로 발돋움해 있었다.
슈타이나흐 수술의 사례는 1920년대 동안 미국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던 상업화가 의학 지식이
만들어지고 수행되는 기반이자 동력이었음을 드러낸다. 우선 회춘 상품의 급격한 유행은 회춘 치
료를 돌팔이 의학으로 선언하게끔 한 주요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치료의 상품화 가능성이 전문가
집단에서 발견되었을 때, 과학적 진보의 표상으로 제시된 상품성은 회춘 연구가 과학적 의학의
지위를 부여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의학 지식 또한 상업화 양상에 영향을 미쳤다.
회춘이 과학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가운데 회춘 연구에의 지원과 회춘 상품에 대한 수요가
지속되었고, 이는 수많은 회춘 상품 제조사들이 1930년대 대공황 이후까지도 존속하는 기반이 된
것이다. 이렇듯 사회 구성원 간 이해관계와 입장을 변화시키는 상업화의 맥락에 초점을 맞춰
1920년대 돌팔이 의학과 과학적 의학의 구분, 나아가 특정 질병의 표준 치료가 성립되기까지의
과정을 밝혀냄으로써, 이 논문은 기존 의학사 연구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던 상업화와 의학
지식 사이의 상호작용을 면밀히 분석할 이유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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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볼리즘에서 회복탄력성으로: 인류세적 관점에서 본 전후 일본 건축의 쟁점

조현정 (KAIST), 박범순 (KAIST)

과학사에서 건축은 한 사회에서 과학의 목적, 방법, 수단, 노동관계를 읽어내는 중요한 소재가
되어왔다. 예컨대 16세기 연금술이 행해진 실험실의 배치와 구조를 통해 사회가 연금술에 기대하
는 것(부와 권력)과 연금술 공간의 여러 이미지(비밀스럽고 음습함) 사이의 관계를 보았고, 이차
세계대전 중 군사 목적의 연구를 수행하던 대학의 실험실 공간에서 다학제 연구가 이루어지는 방
식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와는 달리, 과학에서의 개념이나 이론이 건축학에 영향을 주어 일반
건축에 있어서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는 경우는 없을까? 다시 말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과학의
아이디어가 사회에 소환되는 상황도 있지 않을까?
본 발표는 일본의 아방가르드 건축 운동인 메타볼리즘의 현재적 의의를 인류세적인 관점에서
재검토함으로써 메타볼리즘을 생존 건축의 선례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1960년 도쿄에서 결성된
메타볼리즘 운동은 ‘신진대사’라는 생물학 개념을 건축에 도입하여 유연하고 가변적인 건축을 지
향했다. 메타볼리즘의 등장으로 인해, 일본 현대건축은 이국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지역 건축에서
동시대 건축계의 보편적인 이슈를 공유하고, 때로는 선점하기까지 하는 국제 건축계의 중심으로
단숨에 부상했다. 건축이 유기체처럼 성장과 죽음, 재생의 순환을 겪는다는 메타볼리즘의 독특한
건축론은 2차 대전으로 인한 파괴와 폐허, 냉전 불안 속에서 재건에 성공한 전후 일본 사회의 경
험과 무관하지 않다.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론과 성장에 대한 기대가 메타볼리즘 건축론의 한 축
을 이룬다면, 다른 한 축을 이루는 감수성은 임박한 파국과 소멸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재생을 열망하는 태도이다.
메타볼리즘은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기점으로 그룹으로서 활동을 접었지만, 2011년 3월
일본 도호쿠 지방을 강타한 대재난 이후 일본 건축계에서 활발하게 재평가되고 있다. 메타볼리즘
결성 50주년을 맞아 2011년 모리 미술관에서 대대적으로 개최된 회고전은 과거 일본의 재건에
앞장섰던 메타볼리스트들의 ‘용기’가 포스트 3.11 시대에 특별한 울림을 갖는다고 강조했다. 3.11
이 초래한 위기가 건축가들에게 미적 대상으로서의 건축에서 벗어나 건축의 사회적 책임을 각성
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재난 이후 활성화된 메타볼리즘
운동의 재평가는 이들의 건축이 위기를 끌어안고 생존하는 법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생물학적 용어에서 온 ‘신진대사’의 건축론은 생태학 분야에서 발전된 개념인 ‘회복탄력성
(resilience)’ 논의의 부상과 맞물려 그 현재적 의의를 찾고 있다.
2012년 3월 일본건축학회 기관지 『
建築雑誌』
는 재난 1주년을 맞아 ‘레질리언트 소사이어티’를
특집으로 삼아, 건축과 도시를 넘어 물론 일본 사회 전반이 회복탄력성을 부흥의 목표로 강조했
다. 회복탄력성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이어져 재난 10주기를 맞아 기획된 2020년 1월 『
建築雑誌』
는 “회복탄력성 건축사회의 도래”를 특집으로 지역재생과 부흥 사업에 대한 그간의 성과를 평가
했다. 회복탄력성이란 시스템이 위기 시에도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
고 회복하는 능력으로, 자연과학은 물론 심리학, 경영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었고,
2000년대 들어서 건축과 도시 분야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했다. 재난과 관련된 기존 일본
건축의 논의가 건조 환경의 물리적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었다면, 3.11 이후에는 시스템의 ‘회
복탄력성’으로 강조점이 옮겨간 것이다.
본 발표는 ‘메타볼리즘’과 ‘회복탄력성’이라는 과학적 개념이 건축 이론과 실천에 끼친 영향을
후 전후 일본 사회의 특수한 조건과 시대적 변화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960년대의 메타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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즘 논의와 현재의 회복탄력성 논의는 어떻게 연결되고 또 차이점은 무엇인가? 냉전이 한창인
1960년대와 ‘재후(災後)’ 사회로 규정되는 2010년대 일본 건축에서 위기에 대응하고 미래의 생존
을 모색하는 전략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필자는 흔히 유토피아 건축 운동으로 여겨져 온 메타
볼리즘 건축에 내재된 종말에 대한 위기감을 전쟁에 대한 기억과 현재 진행형인 냉전의 불안 속
에서 드러냄으로써 메타볼리즘 운동의 생존 건축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위
기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하고 가변적인 건축을 향한 메타볼리즘의 지향을 ‘메
가스트럭쳐’와 ‘그룹 형태’라는 두 가지 접근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비록 메타볼리즘이 그룹으로
활동한 기간은 짧지만, 해체 이후에도 ‘메타볼리즘’의 사유는 다양한 방식으로 전유되며 시대적
조건에 맞게 그 함의를 갱신하고 있다. 발표는 메타볼리즘 운동의 유산을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
리한다. 메타볼리즘의 교훈을 생태주의나 지속가능성 같은 건축계의 화두 속에서 재조명하고, 기
후변화로 인한 지구 위기의 시대인 인류세 시대의 생존 건축의 방향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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