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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서철학회논문집

『동서철학연구』 제36호, 2005. 6.

하버마스의 담론윤리와 책임*1)


개별적 인간은 인간 종(種) 전체에 대해 책임이 있는가?

이 진 우 (계명대)

한글 요약

인간복제의 가능성은 철학의 핵심 물음, 즉 인간본성에 관한 물음을 유발한다. 생명공학


기술이 인간본성의 변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한, 생명공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불가피하다. 이제 철학은 새삼스럽게 물어야 한다. "인간은 어떤 존재로서 어떤 식
으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가?" 생명공학기술의 발전이 인간본성의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
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위기의식은 현대 담론윤리의 거장 하버마스에게서도 발견된다.
하버마스의 생각에 의하면 생명공학기술은 우리에게 인간본성에 대한 철학적 반성, 즉 ‘종
(種)의 윤리’(Gattungsethik)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공학기술
은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공
학기술시대에 새롭게 요구되는 새로운 윤리는 인류의 본성과 관련된 자기이해를 핵심 내
용으로 하는 생명윤리이자 책임윤리이다. 하버마스가 파악하는 이 시대의 새로운 책임윤
리의 핵심 물음은 ‘과연 인간 각자가 인류 전체에 대해 어떤 책임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생명공학기술은 인간의 난치병 치료와 수명 연장을 명분으로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 과정
에 개입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개입은 정당한 것인가? 부당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 하
버마스와 아펠의 담론 윤리는 한스 요나스가 제시한 ‘책임의 원칙’을 이성적 관점에서 재
구성함으로써 이들 물음에 대답하고자 한다.

주제어 : 인간복제, 인간본성, 인류의 자기이해, 생명공학, 종의 윤리, 담론윤리, 책임윤


리, 하버마스, 아펠.

* 이 논문은 2003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KRF-2003-074-AS0015)


2 이 진 우

1. 인간본성도 담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인간복제의 가능성은 우리를 철학의 핵심적 문제로 인도한다.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결정하고 계획하고 생산할 수 있다는 생명공학적 현실은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성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으로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계몽주의적 질문이 근대의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다면,
대상영역을 우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외부자연에서 스스로도 자연의 일부이기도한
인간자신에게까지 확대한 현대의 생명공학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
한다. “인간은 어떤 존재로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
우리가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생명공학의 현실을 지켜
보면, 이러한 질문의 방향전환은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다. 줄기세포 연구, 유전
자 분리 및 결합, 유전자 형질 변경 등으로 진행되는 현재의 생명공학은 실제로 인
간의 본성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이라
는 도발적인 글에서 “문명과정은 장기적으로 인류의 특성을 유전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1) 주장을 통해 인간복제를 둘러싼 윤리적 문제의 민감한 핵심을 건드
렸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생명공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인간본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본성에 관한 물
음은 인간복제시대의 필연적 운명이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향, 기질, 품성이 설령 바뀐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본
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진화과
정이 가져올 무시무시한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하든 아니면 자신의 운명을
기술적 진보에 내맡기는 도덕적 불감증에서 기인하든,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생명공학이 인간의 존재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인간본성
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거부하는 사람조차 실존양식에 관한 물음만큼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로 살기를 원하는가?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입장에서 슬로터다이크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하버마스도 이 점에서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모든 자연을 도구적으로 지배하
고자 하는 현대의 과학기술은 결국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의 경계를 허물어뜨

1) P. Sloterdijk, Regeln für den Menschenpark: Ein Atnwortschreiben zu Heideggers


Brief über den Humanismus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9), p.49. 한국어판: 페
터 슬로터다이크 지음/이진우․박미애 옮김,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한길사, 2004, 73
쪽. 아래에서는 원문과 한국어판의 쪽수를 병기하여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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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으로써 이제까지 불변적인 것으로 전제되었던 인간본성을 생명공학적으로 해체


시킨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는 피부색, 인종, 종
교, 관습과 같은 문화적 다양성에 따라 상대화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원
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것인지 아니면 대체 에너지를 활성화할 것인지는 문화
적 삶의 형식에서 다르게 결정될 수 있지만, 생명은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
모든 인류를 당사자로 만드는 초월적 문제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이 문제는 “우
리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동일시하고 다른 생명체들과 구별해주는 직관적인 자기서
술, 다시 말해 유적 존재인 우리 자신의 자기이해”2)를 건드린다.
하버마스는 인간복제의 관점에서 도덕과 윤리의 관계를 새롭게 규명한다. 잘 알
려진 것처럼 하버마스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관점을 규정하는 ‘도덕’과
개인의 삶의 형식과 실존적 정체성을 해명하는 ‘윤리’를 구별하였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또는 우리는 누구이고 싶은지, 즉 올바른 삶에 관
한 개인적 생각은 다르기 때문에 도덕적 관점은 대체로 이러한 윤리적 물음들을 초
월한다. 그러나 인류의 실존양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생명공학은 올바른
삶에 관한 윤리적 물음을 새롭게 제기한다. 우리는 어떤 존재로서 스스로를 이해하
고 싶은가? 우리가 스스로를 유적 존재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
버마스는 생명공학이 새로운 “인류의 윤리”(Gattungsethik)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
장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과학기술들은 우리에게 문화적 삶의 형식 그 자
체의 올바른 이해에 대한 공적 담론을 진행하도록 내몰고 있다.”3)
그러나 인간복제에 관한 담론은 합의는커녕 과학자 공동체와 종교 공동체 사이
에서 양극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복제가 신의 섭리에 간섭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존엄을 훼손할 것이라는 비판론과 복제 인간이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과학에 관한 무지에서 기인한다는 옹호론이 평행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4) 이러한 담론의 양극화는 인간복제와 같은 생명공학의 발전에 반대하는
것이 오로지 종교적 신념 때문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만약 이러한 과정이 복
제, 세포연구, 유전공학과 같은 생명과학은 종교적 신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2) J. Habermas, Die Zukunft der menschlichen Natur. Auf dem Weg zu einer liberalen
Eugenik, Frankfurt am Main, 2001, p.72. 한국어판: 위르겐 하버마스/장은주 옮김, 『인
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자유주의적 우생학 비판』(나남출판, 2003), 80쪽. 아래에서는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로 약하여 원문과 번역판의 쪽수를 병기하여 인용함.

3) J. Habermas,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33/46쪽.

4) 이에 관해서는 이진우 외 지음,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2004),


36-49쪽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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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만을 심화시킨다면, 다시 말해 과학의 가치중립성만을 강화한다면, 생명공학의


발전은 아무런 제재 없이 자동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우리는 우선 종교적 신념과는 관계없이 생명공학을 제재할 수 있는 도덕적 관점
을 획득해야 한다. 만약 생명공학이 생명을 대상으로 한다면, 생명의 본질로부터
도덕적 관점을 도출할 수는 없는 것일까? 후쿠야마는 옳고 그름에 관한 견해는 궁
극적으로 인간본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수용
함으로써 인간복제에 관한 담론 역시 인간본성에 관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시작해
야 한다고 주장한다.5) 유전자 지도가 모두 밝혀진다고 해서 인간본성이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인류역사를 관통하는 불변의 인간본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욱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과거의 역사에서 배우고 또
이러한 교훈을 비유전적 수단을 통해 다음 세대로 넘겨준다. 이 점에서 인간은 본
성적으로 문화적 동물이다. 인류가 지속적인 문화적인 자기변형을 시도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인간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류의 생물
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여기서 어떤 사람은 인간
의 생물학적 진화에 개입하는 것도 인간의 문화적 본성에 속하지 않는가 하고 반문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복제에 관한 담론이 복잡해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인간이 생명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탐구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을 통해 생명
의 질서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
러한 생명공학적 현상이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로부터 생명공학의
정당성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과 기술은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을 실현하고
자 하는 인류의 문화적 노력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간본성은 인류의 문화적 자기
변형에 의미를 부여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정당화하는 궁극적 목표이다. 만약
자유가 인간의 본성이라면, 인간의 모든 문화적 활동은 자유의 진보를 실현할 때에
비로소 정당화될 것이다. 모든 정치적 발전이 자동적으로 자유의 진보를 가져오지
않는 것처럼, 모든 기술적 진보가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지 않을 수 있다.6) 따라서
어떤 생명공학적 행위가 인간본성의 실현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복제마저 가능하게 만든 생명공학을 도덕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본성에 관해 합의를 하고 있는가? 모든 현상을 하나의 동일한 근
원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형이상학의 토대가 붕괴된 지금 인간본성에 관한 담론

5) Francis Fukuyama, Our posthuman future. Consequences of the biotechnology


revolution, (New York: Picador, 2002), 12쪽 이하를 참조할 것.

6) Ibid, 15쪽.
하버마스의 담론윤리와 책임 5

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7) 만약 우리가 인간본성에 관해 플라톤처럼 강한 전제를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목
표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도 훼손될 수 없는 인간본성을 전제해야만 한다.
인간복제를 가능하게 하는 생명공학 기술은 인간의 가장 민감한 본성의 문제를 건
드리기 때문에 새롭게 요청되는 생명윤리는 결과적으로 인간본성에 관한 담론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복제 시대의 책임윤리는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한편으로 책임윤리는 인
간본성에 관한 강한 전제를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존엄에 대한 기술공학적 훼
손을 윤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관점(약한 목적론적 관점)을 획득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관점은 합리적 논증을 통해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합리성
(의무론적 관점)에 근거해야만 한다. 하버마스와 아펠이 발전시킨 담론윤리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모델을 제공한다. 물론 담론윤리는 실존하는
의사소통 공동체 내의 도덕적 관점과 주로 관련이 있지만, 새롭게 요구되는 책임윤
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실현될 인간본성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
서 하버마스는 인간복제를 가능케 하는 생명공학이 “인류 전체의 윤리적 자기이해”
와 관련된 “다른 종류의 문제”8)를 제기한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근본물음은 간단하다. 인간 개개인은 인류전체에 대해 책임이 있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선 인간의 문화적 진화가 어떻게 책임문제와 연결되어 있
는가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도덕과 윤리의 차이에 관한 하버마스의 입장을 재구성
한 다음, 끝으로 인간복제와 관련한 담론윤리의 책임개념을 해명하고자 한다.

2. 인간의 문화적 진보와 인류에 대한 책임

이제까지 책임의 문제는 행위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와


동시성의 차원에서 현재에 국한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자연에 대해 책
임을 질 필요가 없었으며,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먼 미래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수사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생명공학과 같은 새로운 기술권력은
전통윤리의 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환경오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
간 이외의 세계 역시 심각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생명공학은 인간

7) 이에 관해서는 위르겐 하버마스/이진우 옮김, 『탈형이상학적 사유』, (문예출판사, 2000),


제 3장: “탈형이상학적 사유의 동기들”을 참조할 것.

8) J. Habermas,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3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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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본성마저 변화시키고 있다. 또한 발전한 과학 덕택에 우리는 현재의 기술행위가


가져올 미래의 결과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윤리가 요청되고 있는 것이
다.
이제는 인간 스스로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발전한 기술의 관점에서 책임을 미래
의 차원으로 확장한 철학자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한스 요나스이다. 현대의 기술이
우리 인간의 실존에까지 영향을 준다면, 우리는 기술행위의 개별적 결과뿐만 아니
라 인간실존 자체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고안되었던 자연 정복은 이제 인간 본성 자체에까지 확장되고 있는 그 과도한 성공
의 결과 때문에 가장 커다란 도전을 야기하였다. 그런데 인간 존재에 대한 이 도전
은 인간 자신의 행위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이 도전에 나타나는 모든 점은 그 종류
와 규모에 있어 전혀 새로운 것이며, 이제까지의 그 어떤 것과도 유사하지 않다.”9)
한스 요나스는 기술의 진보를 통해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근대의 유토피아
주의가 인간의 본성마저 파괴할 수 있는 디스토피아의 위험을 가져왔다고 주장하
면서 이러한 유토피아주의와 과감하게 결별하고 미래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새
로운 책임윤리를 제안한다.
요나스의 책임윤리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물음으로 압축된다. “왜 인간은 결국
이 세계에 존재해야만 하는가?” “인간의 실존을 미래에도 보장해야 하는 무제약적
정언 명법이 왜 타당해야 하는가?”10) 전통윤리에서 인간의 실존은 당연한 것이었
고,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전제되었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실존을 개선
한다는 명분으로 인류의 실존마저 위협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공학은 난치병을 고
치고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킨다는 명분으로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과정에 간섭하고
있다. 한스 요나스에 의하면 “자신의 구상에 따라 인류를 개선하고 변화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이제 인간은 스스로 진화의 작업을 인수하고자”11)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래의 책임윤리는 진화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과학과 기술
의 진보 역시 인류의 진화과정에 속한 것은 아닌가? 왜 우리는 인류의 생물학적 진
화과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기술의 진보 자체가 인류의 목적이 아니라 인류가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기술을 진보시키는 것이라면, 우리가 인류의

9) Hans Jonas, Das Prinzip Verantwortung. Versuch einer Ethik für die technologische
Zivilisation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4), p.7. 한국어판: H. 요나스 지음/이진
우 옮김, 『책임의 원칙: 기술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서광사, 1994), 5쪽. 아래에서는
『책임의 원칙』으로 줄여 원문과 번역본의 쪽수를 병기하여 인용함.

10) H. 요나스, 『책임의 원칙』, 8/6쪽.

11) Ibid 52/56쪽.


하버마스의 담론윤리와 책임 7

문화적 진화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도 인간본성에 관한 진지한 성찰을 해야 하는 것


은 아닌가? 담론 윤리는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을 이성의 관점에서 재구성함
으로써 이 물음에 대한 의미 있는 답을 시도한다. 한스 요나스의 책임윤리는 미래
의 문제를 다루기는 하지만 “후손의 소망”에 관한 논의는 아니다. 그의 책임윤리는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니며 현재의 우리와 후손 모두를 넘어서는 문제인 그들의 당
위(Sollen)”에 관한 논의이다. 요나스에 의하면 “실존의 당위가 후손에게 불가능하
도록 만드는 것이 본래의 범죄이다.”12) 미래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미래 세대의 단
순한 실존이 아니라 그들의 당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당위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버마스
의 다음과 같은 질문은 이미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도대체 스스로를 규범적 존재로서 이해하고 싶은가? 그것도 서로 연대책임을 지고
상호간에 평등한 존중을 기대할 수 있는 규범적 존재로서 이해하고 싶은가?”13) 인
간의 존엄이 현상의 단순한 보존을 통해 구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향
하는 목적의 이념을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미래를 위해 책임
져야 하는 것에는 단순한 인류의 실존뿐만 아니라 인류의 당위도 포함된다.
담론윤리는 미래에도 지속되어야 할 당위를 이성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자연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마저 이미 오래전부터 기술적, 사회문화적으로 변형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은 “기술적, 사회적 진보에 관한 규제적 이념 없이는”14)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술적 사회적 진보의 규제적 이념은 동시에 우리가 과
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야 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기술적 진보가 이러한
목적의 실현에 해가 된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러한 규제적 이념이 단순한 도덕적 구호나 이상으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구체적
현실에 대해서 도덕적 구속력을 가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담론윤리는 인간존엄
의 윤리적 보존을 인간다운 사회적 관계의 구축과 연결시킨다. 다시 말해 서로에게
연대적 책임을 지고 상호 평등한 존중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를 실현하지
않고서는 인간존엄을 윤리적으로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12) H. 요나스, 『책임의 원칙』, 89/88쪽.

13) J. Habermas,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32/45쪽.

14) Karl-Otto Apel, Diskurs und Verantwortung. Das Problem des Übergangs zur
postkonventionellen Moral,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8), p.184. 특히
“Verantwortung heute - nur noch Prinzip der Bewahrung und Selbstbeschränkung
oder immer noch der Befreiung und Verwirklichung von Humanität?”(179-216쪽)을 참
조할 것.
8 이 진 우

담론윤리는 우선 인간의 기술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도덕적 이념을 이성의 개념


으로 환원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아펠은 한스 요나스가 현대의 진보이념을 비판한
다고 해서 동시에 현대의 이성 원칙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인간의
이성이 - 고전적 형이상학에서나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 여전히 다른 동
물과 인류를 구별하는 본질적 특성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과 기술에 내재하는
도구적 합리성이 인간 이성과 동일시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담론
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도구적 합리성은 대체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과 관련
되어 있는 반면, 인간의 언어에 내재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
다른 한편, 담론윤리가 인간본성을 규제적 이념으로 끌어들이기는 하지만 결코
형이상학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형이상학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특정한 사회의 동시대적 인간 상호관계에 국한된 관습을 뛰어넘는 보편적 도덕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담론윤리는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장소에서만 타당성을 갖는
관습적 도덕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이성원칙에 바탕을 둔 탈관습적 도덕으
로의 이행이 인류의 모든 문화가 안고 있는 문제라고 전제한다.15)
탈관습적 도덕의 대표적인 모델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계약에 의한 도덕의 정당
화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스 요나스가 제시하는 새로운 명법을 계약론적으로 정
당화할 수 있는가? 한스 요나스는 미래에 대한 책임을 “너의 행위의 효과가 지상에
서의 진정한 인간적 삶의 지속과 조화될 수 있도록 행위 하라”16)는 명법으로 표현
한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기존의 관습과 법칙으로는 이러한 명법의 도덕적 의
미를 해명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인간 생명과 존엄의 지속적인 보존에 관심을 갖
고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명법에 합의하게 될 것이라는 원초적 계약의 가정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덕의 정당성을 상호이익에 바탕을 둔 ‘계약’에
입각하여 설명하는 탈관습적 도덕의식의 단계만으로는 미래의 책임윤리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미래의 인류와 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 단계의 문제점을 분
명하게 드러낸다. 이 명법을 준수하는 것이 현재의 행위자에게도 유익하다는 이유
만으로 미래에 대한 책임을 도덕적으로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배아세포 연구가 설령 인간복제의 길을 열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현재
의 불치병을 치유하는 것이 유익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담론윤리는 완전히

15) 이에 관해서는 Karl-Otto Apel, Diskurs und Verantwortung. 앞의 책, 190쪽을 볼 것.

16) H. 요나스, 『책임의 원칙』, 36/41쪽.


하버마스의 담론윤리와 책임 9

일반화될 수 있는 호혜성에 바탕을 둔 보편적 관점을 도덕적 관점으로 제시한다.


도덕적 관점에 의하면 “왜 우리는 계약과 규칙을 준수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는 반드시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기 때문에”라는 대답이 수반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은 단순히 계약체결에 참여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해 영향을 받는 모든 당사자”17)를 포괄한다. 아펠
과 하버마스가 대변하는 담론윤리는 이처럼 칸트의 정언 명법을 새롭게 해석하여
일반적인 도덕 법칙의 내용은 모든 당사자들의 합의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
한다.18)
미래에 대한 책임은 일반화될 수 있는 호혜성의 원리를 미래에까지 확장할 것을
요구한다. 한스 요나스는 결코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인류 존재의 보존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한스 요나스는 한편으로 현재의 기술행위가 미래의 인간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인류에 의한 이성의 실현이
미래의 인류에 의한 이성의 실현과 일치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우리가 미래에 영
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규칙에 합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류가 그러한 규칙의 실
천을 통해 자신의 이성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를 통해
실현된다는 점에서 구체적이지만 모든 문화적 진화과정을 관통한다는 점에서 초역
사적이고 일반적인 이성을 전제해야 하지 않는가? 담론윤리는 이렇게 우리가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실현해야 하고 동시에 보존해야 하는, 즉 구체적이고 일반적
인 인간본성이 있다고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본성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된 과학과 기술이 인간본성의 실현 자체를 훼손한다면, 우리는 이러
한 과학과 기술을 도덕적으로 비판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문화적 진보는
인간적 삶의 실현이라는 도덕적 진보에 관한 성찰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므
로 우리가 인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다양한 개인들을 연결시키는 보편
적 이성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명과 진화의 과정에
간섭하려는 생명공학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성
의 사실을 전제해야만 한다.

3. 인간복제의 담론과 ‘종(種)의 윤리’

17) Karl-Otto Apel, Diskurs und Verantwortung. 앞의 책, 191쪽.

18) 담론윤리의 도덕적 관점에 관해서는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이진우 옮김, 『담론윤리의 해
명』, (문예출판사, 1997), 특히 제 3장, “정의와 유대성: 단계 6에 관한 논의”를 참조할
것.
10 이 진 우

인간본성마저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복제의 기술은 전통적 도덕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제 우리는 윤리적 지평을 상호 예측할 수 있는 인간 상
호간의 관계로만 국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담론윤리 자체에서도 감지
된다. 하버마스는 인간복제 기술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말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주체들의 윤리적 자기이해 전체가 문제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철학적 입장표명은 필연적으로 “종의 윤리(Gattungsethik)의 물음”19)을 함축한다
고 말한다. 하버마스가 제안하는 새로운 윤리는 분명 인류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인류적 윤리”20)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문제제기의 맥락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
다. 복제, 배아연구, 유전자 조작과 같은 생명공학의 문제로 야기된 도덕적 질문들
은 한결같이 인간존재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린다. 인간은 하나의 종(種)으로서
왜 계속 존재해야만 하는가?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로서 스스로를 이해하고자
하는가? 이 물음들은 모두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본질적으로 구별하는 종차적(種
差的)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본질적으로 정의한 것
처럼 인간은 분명 “말할 수 있고 행위 할 수 있는 동물”(zoon logon echon)이다. 인
간이 아무리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문화적으로 변형시킨다고 하
더라도 인간의 종차적 특성이 훼손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
을 것이다. 종차적 특성은 우리가 생명공학을 규범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우리가 하버마스의 새로운 윤리를 ‘종의 윤리’로 이해하려는 까닭이 여기
에 있다.
하버마스는 인간이 언어의 존재라는 점에서 출발하여 한편으로는 인간의 언어에
의사소통적 구조가 선험적으로 내재한다는 점을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따르면 우리의 우연적 관습과 이해관계를 초월할 수 있는 도
덕적 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담론윤리를 발전시켰다. 하버마스는 이 과정에서 도
덕과 윤리를 엄격하게 분리한다.21) 도덕은 사회정의를 다루는데 반하여, 윤리는 개

19) J. Habermas,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27/41쪽.

20) 이 책의 한국어 번역자 장은주는 독일어 “가퉁스에틱”(Gattungsethik)을 “전인류적 윤리”


로 번역하고, 이 단어에서 파생된 형용사 “가퉁스에티쉬”(gattungsethisch)는 “인류 전체
와 연관된 윤리적”으로 풀어서 옮기고 있다. 이 번역어가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나 하버마스가 새로운 윤리의 토대가 될 수 있는 보편적 이성원칙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종차적 특성은 간과하고 있다.

21) 이에 관해서는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이진우 옮김, 『담론윤리의 해명』 (문예출판사,


1997), 123-145쪽: “실천이성의 실용적, 윤리적, 도덕적 사용에 관하여”를 참조할 것.
하버마스의 담론윤리와 책임 11

인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실존


적-윤리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대체로 “나는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자 하
는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자기이해는 이처럼 특별한 삶의 역사와 관련이 있으며,
무엇이 특정한 인격에 좋은가에 관한 가치평가적 발언으로 연결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좋은 삶, 올바른 삶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과 세계
관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세계관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도덕적 관점은 습관화된 구체적 관습의 자명성과 결별하고 자신의 정체성
에 기여하는 삶의 맥락으로부터 거리를 둘 때에만 획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도덕
적 관점은 문제가 된 규범과 행위방식의 타당성 주장을 논증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정당화의 근거이다. 물론 하버마스는 논증적 의사형성의 과정에 참여하고자 하는
자율적 의지가 인간 이성에 내재하고 있다고 본다. 이처럼 정체성을 지향하는 윤리
는 역사를 통해 형성된 특정한 공동체에 국한 되었으며,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도
덕은 공동체의 역사적 맥락을 초월하는 보편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하버마스는 인간존재의 물음을 새롭게 제기하는 인간복제와 직면하여 이러한 도
덕과 윤리의 관계를 재규정한다. 하버마스는 물론 인간복제와 관련된 근본적 물음
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인간복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해
서는 안 되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이미 자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인
간복제의 기술을 통제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정말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가? 하버
마스는 “정당화된 절제, ‘올바른 삶’의 문제에 관한 탈형이상학적 대답은 있는가
?”22)라는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이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이 물음은 이미 인간복제
의 가능성에 직면하여 새롭게 요구되는 ‘종의 윤리’가 도덕적 문제이기보다는 윤리
적 문제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복제와 관련된 도덕적 의식을 세 단계로 구별할 수 있다. 첫
째 단계는 특정한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 삶의 역사와 정체성을 다루는
윤리(윤리1)이며, 둘째 단계는 모든 사람이 좋은 삶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 평등한 자유를 보장하는 정의의 도덕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단계는
이러한 도덕적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류 전체의 자기이해와 연관된 윤리(윤리
2)이다. 정체성의 윤리와 정의의 도덕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특성상 서로
동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버마스가 ‘종의 윤리’로 서술하고 있는 세 번째 윤
리는 우리가 윤리적일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며 동시에 왜 우리가 도덕적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는 최종적 근거이다.
주지하다시피 올바른 삶에 관한 “윤리적 문제들은 일정한 삶의 역사 또는 특별

22) J. Habermas,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11/25쪽.


12 이 진 우

한 삶의 형식의 맥락 안에서 제기된다. 그 문제들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우리는 누구이며 누구이고 싶은지에 대한 정체성에 관한 물음과 연
결되어 있다.”23) 이러한 삶의 형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이러한 능력에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모든 개인에게 자신의 고유한 삶을 자율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적 정의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처
럼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음’(Selbstseinkönnen)은 인간이 도덕적일 수 있는 가능성
의 조건이다.
이러한 가능성의 조건이 인간복제의 기술로 인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다. 하버마스는 인간의 정체성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를 인류전체의 차원에서 거론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버마스의 ‘종의 윤리’를 다시 한번 인간의 종차적 특성과 연
결시킬 필요가 있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본질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
가?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의 근본차이는 무엇인가? 하버마스는 이 질문에 대해 이
렇게 간단하게 대답한다. 우리는 “도덕적”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 하버
마스는 인간에게 주어진 인격의 극단적 훼손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해 발전된 모든
직관들을 도덕적이라고 명명하면서, 이러한 도덕적 직관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
고 단언한다. “도덕은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문화적 사회형식들 속에 구조적
으로 설치되어 있는 훼손가능성을 보완하는 보호 장치”라고 말하면서, 하버마스는
인간의 정체성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개별적 표본들
로의 인류의 시․공적 개인화는 종(種)으로부터 개별적 유기체로 직접 전해지는 유
전학적 성향을 통해 이미 규제되지 않는다.”24) 어떤 개인의 정체성은 그가 특정 언
어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상호 주관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생활세계 속에 성장해
들어감으로써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복제의 기술은 이러한 가능성을 훼손하는 것인가? 하버마스는 인
간복제의 기술이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주어져 있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음의 능력
을 훼손함으로써 우리가 도덕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박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복제는 내가 나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인간복제의 기술은 우리의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음”에 영향을 줌으로써 인류의 도
덕적 자기이해와 관련된 두 가지 물음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1) 우리는 여전히 우
리 자신을 우리의 삶의 유일한 저자로 이해할 수 있는가? (2) 우리는 여전히 서로

23) J. Habermas,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14/29쪽.

24)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이진우 옮김, 『담론윤리의 해명』, 앞의 책, 21쪽.


하버마스의 담론윤리와 책임 13

를 자율적으로 행위 하는 평등한 인격체로서 인정할 수 있는가?25) 인간의 생명마


저 도구화하는 생명공학에는 바로 이와 같은 종의 윤리적 문제가 걸려있다는 것이
다.
우리는 이러한 윤리적 전제조건들이 인류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인류는 긴 역사 과정을 통해 이와 같은 윤리적 자기이해를 발전시킨 것이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도덕적이어야 하는 까닭이 신의 계시 또는 주어진 본성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의 입장은 탈관습적이고 탈(脫)형이상학적이다. 우
리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인류의 윤리적 자기이해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이 윤리적
관점에서 인간복제를 규범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도덕적 관점을 형성할 수 있는 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복제가 우리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은 “왜 우리가 도덕적이
어야 하는가?”라는 지극히 간단한 물음이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도덕적 공동체
에 속하는 데 대한 실존적인 관심”26)을 가지고 있는가? 어쩌면 하버마스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존중과 연대적 책임을 요구하는 공동체의 성원
이 되고 싶다는 것이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이 자명하다
는 것을 밝히는 것이 바로 도덕의 과제이다. 그러나 인간복제는 이러한 자명성을
끊임없이 침식하고 있지 않는가. 생명공학은 이미 생명의 단계를 불투명하게 만들
고 있으며, 유전공학적 발전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자연스럽게 성장한 것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 사이의 범주적 구분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 생
명을 도구로 만드는 생명공학의 기술적 행위를 규범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생명이 탄생한 이후 가시화되었던
인간의 신체적, 인격적 훼손가능성은 이제 탄생 이전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행위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인 삶의 보장과 확대라는 목적에 의해 정당화되
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적 삶의 본질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인가? 인간의 자기보존이
문제되면 될 수록, 인간의 윤리적 자기이해는 더욱 더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다.

4. 진보의 윤리로서 책임윤리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은 한편으로는 인간본성과 직결되고, 다른 한편으

25) J. Habermas,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124/126쪽을 참조할 것.

26) Ibid.
14 이 진 우

로는 진화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본성’과 ‘진화’는 어떤 관계에 있는


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함으로써 실현하고 추구해야 할 목적이 바로 본성으로 이
해된다면, 인간본성은 그 자체 목적론적 요소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
문에 혹자는 인간복제를 윤리적으로 규제하기 위해서는 강한 목적론적 존재론을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의 정당성은 특정한 세계상에 근거하고, 이 세계상
은 변하지 않는 인간본성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27) 만약 우리가 이러한
도덕과 세계상의 논리적 순환관계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세계상들이 존재하
는 현대사회에서 세계관적으로 중립적인 보편적 도덕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28)
인류 전체와 관련된 인간복제 문제는 결코 역사적으로 형성된 특정한 세계상으
로는 해결될 수 없다. 보편주의적 이성원칙에 입각한 생명존중사상이 문화적으로
생활화된 서양과 자연주의적 순환론의 경향을 보이는 동양의 생명사상 사이에는
인간복제의 문제와 관련하여 비교적 커다란 차이가 있다. 만약 인간복제의 문제가
특정한 문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전체와 연관된 ‘종의 윤리’를 요청한다면,
다양한 문화와 세계상들을 뛰어넘는 보편적 규범이 있어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평등주의적 보편주의는 현대의 위대한 성취”로서 계속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다
른 도덕이나 다른 인류전체와 연관된 윤리적 입장에 의해 도전을 받지 않고 있다
.”29)
하버마스의 담론윤리는 이성원칙에 토대를 두기 때문에 약한 존재론을 전제한
다. 인간존재에 관한 내용이 결정되어 있다는 인식이 강한 존재론이라면, 약한 존
재론은 인간본성이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세계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본성은 근본적으로 진보를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성과 진화는 밀
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의 문화적 진화를 다윈식의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요나스가 주장하는 인류의 지속적인 보존 역시 다윈
적 의미의 자기보존과는 다른 개념이다. 인류의 자기보존에는 미래에 실현될 본성
과 이상에 대한 이성적 예측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요청되는 책임윤리는 항상 미래윤리의 성격을 띤다. 예컨대 전통윤리는 모
든 개인은 스스로 사유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참여한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언뜻 보기에는 이러한 방법론적 유아론이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전제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릇된 것이다. 경험적 관점에서 보면

27) 이에 관해서는 R. Spaemann, “Habermas über Bioethik,” in: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49(2001)를 참조할 것.

28) 위르겐 하버마스,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152쪽을 참조할 것.

29) Ibid.
하버마스의 담론윤리와 책임 15

우리는 오직 자신을 위해 생각하고 행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행


위를 할 때에도 이미 상호주관적 타당성을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배아연구는 인류
에게 유익하다’는 발언을 한다면, 이러한 발언은 이 명제가 갖고 있는 진리의 관점
에서 뿐만 아니라 의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언어적으로 서술된
이 명제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담론윤
리는 언어와 행위가 갖고 있는 의사소통적 토대를 전제한다.
물론 이러한 의사소통적 토대가 이제까지는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는 특정 집단
에 국한되어 있었다. 담론윤리는 이러한 토대에 내재하고 있는 이성적-보편주의적
규칙들을 밝힘으로써 이 토대가 근본적으로 동시대의 모든 인류로 확장될 수 있다
고 주장한다. 미래윤리로서 발전되는 담론윤리, 즉 ‘종의 윤리’는 이 의사소통적 토
대가 동시대의 인류뿐만 아니라 후세대의 모든 인류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
한다. 예컨대 배아연구는 유전적 불치병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현재세대의 인류에게 유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만약
배아연구가 인간복제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없는 미래세대의 인류에게도 유익한 것인가? 인간복제에 관한 담론은 ‘모든 사람들
에게’ 유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담론윤리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배분적 이익을 추구하지만, 어떤 규범도 실제
로 모든 사람의 동의를 받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현재의 인류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도 의미 있는 윤리적 규범을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잠재적
으로 제약이 없는 논증공동체의 일반화된 상호성”30)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이미 미
래의 책임윤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인간복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호
이해를 위한 논증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현세대의 인류만이 (실제적) 의사소통공동
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미래 세대 역시 경험적으로는 참여할 수 없지만 (이상적) 의
사소통공동체의 구성원인 것이다. 미래 세대는 자신의 의견과 이해관계를 직접 대
변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미래 세대를 이성적으로 예견하여 대변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현재의 세대나 미래 세대는 모두 문제 해결에 있어서 평등하게 존
중되어야 한다.
담론윤리는 이처럼 “지금 살아있고 담론의 능력을 가진 실제 의사소통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문제해결에 대한 책임을 지금은 담론의 능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가능한 문제에까지, 다시 말해 미래에 실존할 것이라고 예견되는 무제약
적 의사소통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까지” 확장한다.31) 이처럼 실제의 의사소통공동

30) K.-O, Apel, Diskurs und Verantwortung. Das Problem des Übergangs zur
postkonventionellen Moral, 같은 책, 201쪽.
16 이 진 우

체와 이상적 의사소통공동체의 간격에는 이성적 진보의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다.


현재의 조건 속에는 이미 미래의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으며, 현재의 가능성을 이성
적으로 실현할 때 비로소 미래의 이상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
면, “이상적 의사소통공동체는 항상 실제의 의사소통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 진보
적으로 - 실현되어야만 한다.”32) 우리는 이처럼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의 진보의 윤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결코 인간실존의 보존윤리만을 주장할 수 없
다.
한스 요나스가 미래에도 인류는 존재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바로 이와
같은 진보의 윤리를 말하는 것이다. 배아연구 및 인간복제가 인간에게 인간다운 삶
을 보장하려는 기술적 진보라고 한다면, 이는 반드시 인류의 윤리적 진보와 함께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책임은 “윤리적 과제로서 주어진
진보의 원칙”33)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복제가 가시권에 들어온 지금 우
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배아연구를 인간복지를 향상시킨다는 명분으
로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존엄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금지해야 하는가? 하
버마스는 이 물음에 대해 구체적인 대답을 피한다. 배아연구를 자연주의적 생명개
념에 입각하여 금지하려는 입장에 대해서는 생명의 시작을 경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계하고, 착
상 전 유전자 검사나 소모적 배아연구의 허용여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는
데 대해서는 소극적 우생학에서 적극적 우생학으로의 이행과정은 미끄러운 언덕이
될 수 있다고 대답한다.
담론윤리는 이처럼 인간복제의 윤리적 문제에 관해 명쾌한 대답을 주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사실, 담론윤리는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적 담론의 형식적(절차적)
논증원리만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담론윤리는 모든 당사자들이 제시하는 문제해결
의 대안이 타당하며 모든 사람에 의해 동의를 받을 수 있는가를 검증할 수 있는 형
식적 원리만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어떤 기술적 진보가 특정 단
계에서 과연 인간본성의 실현에 기여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기도 하다. 담
론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기준은 지극히 간단한 질문으로 표현될 수 있다. 우리
는 아직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담론의 능력을 가지게 될 미래의 세대가 우리가 지향
하는 것과 같은 도덕 공동체에 속하기를 바라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미래의 세대

31) K.-O, Apel, Diskurs und Verantwortung. 같은 책, 202쪽.

32) Ibid., 203쪽.

33) Ibid., 204쪽.


하버마스의 담론윤리와 책임 17

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하나의 평등한 인격체로서 생각하는가?


우리가 여전히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인간다움의
규범적 방향을 설정하는 인간이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역사적 과정을 통해
발전해온 인간이해는 기술적 진보를 도덕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규제적 이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인간복제에 관한 윤리적 성찰이 기술자체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배아단계의 생명을 다루는 데 필요한
규범적 자기제한은 유전공학적 간섭 그 자체를 반대하는 식으로 향해서는 안 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유전공학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과 영향이 문제다.
우리들의 도덕 공동체의 잠재적 성원들의 유전적 상태에 간섭하는 데 대한 도덕적
망설임은 그런 간섭을 어떤 태도를 가지고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34) 우리가 여
전히 우리 자신을 자율적으로 행위 하는 인격체로서 이해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인
간복제를 윤리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규범에 합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복제의 담론은 이러한 인류의 자기이해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배아
연구, 유전자 조작, 인간복제를 둘러싼 담론들에는 다양한 태도들이 혼란스럽게 유
통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에 대한 실존
적 태도를 요구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이 과학적 연구 과정에서 성찰적으로 반영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
스 요나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기술적 진보의 과잉성공으로 인해 이러한 질문은 연
구와 적용의 타당성을 정당화하는 단순한 수사학으로 변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생명공학은 이러한 질문을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빨리 발전하고 있는지도 모른
다. 여기에서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되는 것이 바로 ‘자기 실존에 대한 태도’이다. 우
리의 생명과 인간존엄과 관련된 문제를 생명과학자들과 공상과학에 도취된 기술자
들의 손에 내맡겨야 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스스로 어떤 존재로
살고자 하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그것이 인간복제 시대의 책임윤리가
던지는 근본적인 도전이다.

34) 위르겐 하버마스,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78/84쪽. 강조는 논자에 의한 것임.
18 이 진 우

참고문헌
1. 위르겐 하버마스, 이진우 옮김, 『담론윤리의 해명』, 문예출판사, 1997.
2. 위르겐 하버마스, 이진우 옮김, 『탈형이상학적 사유』, 문예출판사, 2000.
3. 이진우 외 지음,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2004.
4. Francis Fukuyama, Our posthuman future. Consequences of the bio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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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의 담론윤리와 책임 19

[Abstract]

Habermassche Zukunftsethik und die Verantwortung


Lee, Jin-woo (Keimyung Univ.)

Die Möglichkeit des Menschenklonens verursacht die grundlegendste Frage nach


dem Wesen bzw. der Natur des Menschen. Die philosophische Reflektion über die
biotechnologische Entwicklungen ist heutzutage unvermeitlich, insofern sie die
Möglichkeit der Wandlungen der Natur des Menschen impliziert. In diesem Kontext
muß die Philosophie erneut fragen: “In welcher Weise, als welches Naturwesen
wollen wir Menschen auf der Erde in Zukunft existieren?”
Dieses Problem ist von Habermas als eine der philosophischen Grundfragen
anerkannt worden. Habermas’ Diskursethik versucht, nun bekanntlich die
Grundbedingungen menschlicher Verständigungsprozesse zu erklären. Dabei geht es
ihm darum, universale, d. h. formale Bedingungen einer möglichen Verständigung zu
identifizieren und nachzukonstruieren. In diesem diskursethischen Hinblick entwickelt
Habermas seine Gattungsethik, die eine Verantworung auf die zukünftige Generation
fordert. Aber eine Hauptkritik an dem Modell der Diskursethik besteht darin, daß die
Positionen von Unmündigen und Ungeborenen im diskursiven Prozeß nicht
berücksichtigt werden, obwohl sie von den Folgen der Entscheidungen durchaus
betroffen sein können. Daher sieht Habermas die Aufgabe der zukünftigen
Verantwortungsethik darin, die nicht am Diskurs teilnehmenden Individuen mit in
ihre moralische Bewertung einzubeziehen. Neben den zukünftigen Generationen soll
beispielsweise auch die Natur in das Spektrum der ethischen Verantwortung
einbezogen werden.

Keywords : Menschenklonen, Natur des Menschen, Biotechnologie, Selbstverständ-


nis der Menschheit, Gattungsethik, Diskursethik, Verantwortungsethik,
Habermas, Apel, Jonas

□ 이 논문은 2005년 5월 11일 접수되고


2005년 6월 15일 심사 완료되어
2005년 6월 16일 게재가 확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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