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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1)

권 영 우**

Ⅰ. 서론
Ⅱ. 근대 자연법사상의 과제를 계승한 헤겔
Ⅲ. 법의 정당화 시도로서 근대 자연법사상과 근대 자연법이론에 대한 헤겔의 비판
Ⅳ. “정신의 본성법(das Recht der Natur des Geistes)”으로서 헤겔의 변형된 자연법
Ⅴ. 헤겔의 법개념이 지닌 문제에 대한 고찰
Ⅵ. 결론

〈요약문〉

근대철학의 과제는 크게 지식의 정당화와 법과 제도의 정당화 두 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 헤겔은 근대철학이 던져준 이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근대철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헤겔은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근대철학이 걸었던 길을 따라가지 않았다. 이 두 가지 과제 중 이글은 법의 정당화
근거를 찾는 헤겔의 입장을 조명하고자 한다. 왕권신수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법의 정당성을 찾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법의 정당성은 마치 자연법
칙처럼 변하지 않는 자연적 질서나 인간의 본성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자연법사상
이고, 다른 하나는 법이 우연적인 관습과 역사적 과정에서 정당화된다는 역사법학
파의 입장이다. 그런데 헤겔은 근대 자연법사상을 비판함으로써 법의 정당화 근거
가 인간의 본성이나 자연적 질서 혹은 계약에서 찾아질 수 없음을 지적한다. 이러
한 점은 헤겔의 법개념이 근대 자연법사상과 결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헤겔이 역사법학파의 입장을 따른 것도 아니다. 헤겔은 이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비
판하지만 이 두 입장과 완전히 다른 길을 간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헤
겔은 자연법이론을 비판하지만 실정법이 따라야 할 필연적 규정성을 정신의 본성에
서 찾고 있기 때문이며, 법의 필연적 정당화의 근거가 정신의 본질에서 찾아짐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과정을 통해 법이 발전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겔은
법의 정당화 근거를 자연이 아닌 정신의 본질인 자유에서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자

* 이글은 2022학년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특별연구비에 의하여 수행되었으며, 2022


년 한국헤겔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임을 밝히고, 발표 중 토론을 통해 도
움을 주신 분들과 논문의 미진했던 부분을 지적해 준 익명의 심사자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 고려대학교 부교수
68 헤겔연구 제52호

연법사상처럼 법의 필연적이고 객관적인 정당화 근거를 찾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헤


겔의 법개념은 근대 자연법사상을 변형시킨 형태로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헤겔의 법개념은 자연법(Naturrecht)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정신의 본성법
(das Recht der Natur des Geistes)으로서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Ÿ 검색어: 자연법, 법의 정당화, 헤겔 법철학, 정신의 본질, 역사법학파, 자연법이론


비판

Ⅰ. 서론

우리가 통상적으로 부르는 근대철학은 대략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친 시


기에 생겨난 철학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경험론과 합리론으로 양분하여 이
시기 철학자들을 분류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분류방식으로 이 시기 철학자들
의 사상을 모두 포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비코, 그로티우스, 홉스와 루소 같
은 철학자들은 경험론과 합리론의 논쟁으로 포섭할 수 없는 국가와 법 그리
고 역사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키며 이 시기 위대한 철학적 유산을 남겼기 때
문이다. 근대철학의 과제와 유산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지
식의 정당화 문제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 및 통치권의 정당화
문제다.
먼저 지식의 정당화 과제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세적 질서로부
터 탈피하기 위한 유럽의 문화적 운동인 르네상스가 절정에 이르렀던 16세기
무렵부터 인간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자연에 대한 지식이 정말로 참인지에
대한 회의를 시작함과 동시에 자연에 대한 참된 지식을 인간 자신의 힘으로
획득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은
갈릴레이와 베이컨에 의해서 경험적 지식획득 방법의 도입으로 나타나기 시
작했다. 이러한 경험적 방법에 의해 기존의 지식을 검증하고 이 검증을 통과
하지 못한 기존의 지식은 거짓된 앎으로 과감히 버릴 것을 역설했다.1) 이러

1) 갈릴레오 갈릴레이, 새로운 두 과학, 이무현 옮김, 서울: 사이언스북스, 2016,


128-137쪽; 프렌시스 베이컨, 신기관, 진석용 역, 파주: 한길사, 2001, 48-49쪽/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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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험주의적 학문 방법론의 발전은 우리가 오늘날 자연과학과 분리해 좁은


의미로 이해하는 ‘철학’의 발전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철학
의 발전이 자연을 탐구하는 모든 학문의 발전을 이끄는 기관차가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근대철학의 발전은 자연과학의 발전을 잉태했다. 자연과학
은 자연에 대한 참된 지식을 추구하려는 philosophia의 정신 속에서 발전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당시 자연과학은 자연철학(philosophia naturalis)
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결별하고 진정한 의미의 자연과학이 출발할 수
있게 된 중요한 계기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앎이 어떤 경우에는 지식이 될
수 없고 어떤 경우에는 지식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었다. 이것은 지
식을 지식으로 만들어 주는 지식의 본질과 근거에 대한 물음이었으며 소위
근대 시기 이 물음이 중요한 과제로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의식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근대 시기 학문적 발전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해 준 것은 경험적 방법
론의 발달이었다. 경험적 방법론의 발달은 지식을 실증하는 방법의 발달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험적 증거는 지식의 중요한 근거이자 새로운 지식의 발
견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근대철학의 또 다른 중요한 과제는 법과 국가 그리고 통치 권력의 정당성
을 정초하는 일이었다. 법과 국가 그리고 통치자의 권위가 어디서부터 오는
지를 묻는 일은 그 자체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신으로부터
왕의 권위가 왔고2) 따라서 왕이 통치하는 국가가 신성3)하며, 국가의 법률은
결국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이라고 믿었던 시대에 어떠한 법과 권력도 성서적
계시와 권위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철학
은 법과 국가 그리고 통치 권력의 권위가 신이 아닌 인간 혹은 자연 또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생각 속에서 법과
국가 그리고 통치권의 근거를 자연과 이성 또는 인간의 본성에서 찾으려는

38-40절.
2) 하겐 슐체, 새로 쓴 독일역사, 반성완 역, 서울: 지와사랑, 2001, 16-20쪽.
3) 프랑크왕국은 처음에는 “혁신 로마 제국(Renovatio Imperii Romani)”으로 불리다가
“로마제국은 이 지상을 지배하기 위하여 신이 직접 부여한 하나의 보편적 권력”을
가졌다는 의미로 1157년부터 “신성로마 제국(Das Heilige Römische Reich)”으로 불
리게 되었다(하겐 슐체, 새로 쓴 독일역사, 16쪽,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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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근대 자연법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결국 소위 근대 시기 인간의 정신은 지식의 정당화 문제와 법률과 제도의
정당화 문제를 자신의 핵심적 과제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 두 문제는 근대
철학이 해결하고자 했던 두 가지 과제가 되었고,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험론, 합리론, 자연법이론 등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선 칸트에 의해
이 두 과제 중 첫 번째 과제는 어느 정도 해결점을 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칸트가 쌓아 올린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두 과제는 미완의 문제
로 남아 있었다. 칸트가 제시한 해결책의 한계를 지적하고 미완의 상태로 남
아 있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관념론은 나름의 노력을 쏟았다. 따라
서 헤겔의 철학도 근대철학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연장선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헤겔은 근대철학의 과제를 이어갔음에도 결코 근대
철학자들이 이 과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방법과 이 문제들을 바라보는 시각
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이 점에서 헤겔은 근대철학과 결별하고 있다
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글은 법의 정당화 문제에 초점을 두고 근대철학
의 계승자인 헤겔이 근대 자연법사상을 비판함에도 자연법사상이 실정법의
필연적 정당성을 찾으려고 했던 시도를 이어가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헤
겔은 자연법을 비판하지만 자연법을 정신의 본성법이라는 변형된 형태로 계
승한다. 그리고 이글은 헤겔이 정신의 본성을 통해 마치 자연법사상처럼 현
실적 법의 필연적 발전원리와 근거를 제시하고자 했음을 해명하고자 한다.

Ⅱ. 근대 자연법사상의 과제를 계승한 헤겔

헤겔의 철학은 근대철학의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평


가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선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통해 지식이 어떻게 발
생하고 정신이 어떻게 절대적 지식 또는 절대적 진리에 도달해 가는지를 정
신의 능력과 활동 면에서 그리고 학문과 인륜의 역사적 발전과정의 측면에서
해명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고유한 논리학을 통해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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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 이념의 자기 전개 과정이 절대적 이념 자신의 자기 인식 과정이라는 점


을 주장하면서 절대자의 측면에서 볼 때 세계 자체의 출발이 지식의 출발이
라는 점을 밝히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이론철학적 시도는 근대철학이 던진 중요한 화두인 지
식의 문제와 관련된다. 근대철학이 고대와 중세 시기와 다르게 새롭게 던진
지식의 문제는 ‘참된 지식이란 무엇인가?’, ‘참된 지식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 그리고 ‘지식의 정당성은 어디서 오는가?’ 정도로 구분해 볼 수 있
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합리론과 경험론이 논쟁을 이어갔고 칸트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순수이성비판을 썼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
다. 이러한 지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연장선 속에서 헤겔은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학을 저술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은 헤겔이 근대철학이 남겨준
인식론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근대철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이러한 인식론적 과제가 반드시 근대철학적 유산이라고만 볼 수
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시대와 중세 시기에도 참된 지식이
무엇이며 진리를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의 인식론은 인간 스스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회
의적이었다.4) 그에 반해 근대철학은 고대와 중세와 다르게 지식 혹은 인식의
문제를 새롭게 설정함으로써 인류사에서 새로운 학문발전의 전기를 마련했
다.5) 근대철학이 귀납적 방법을 참된 학문 방법론으로 제시함으로써 경험적
탐구 방법이 자연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가져다준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
다.
인식론적 문제가 새롭게 근대철학의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게 된 것은 귀
납적 방법을 참된 학문의 방법론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오랫동안 논리학과 형이상학 그리고 수학을 통해 연역적 방법으로 참된 지식
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는데 오히려 불완전한 인간의 인식능력인 감각
적 경험을 통해서 참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주장이 등장하면서 귀납적

4) Scott MacDonald, “Theory of knowledge”,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Aquinas,


ed. by Norman Kretzmann & Eleonore Stump, Cambridge Univ. Press, 1993,
167-168쪽, 180쪽.
5) 다음을 참조. 프란시스 베이컨, 신기관, 114-115쪽/1권 105절.
72 헤겔연구 제52호

방법과 연역적 방법 사이에서 새로운 인식론적 논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이 담고 있는 문제와 지식에 관한 새로운 입장들은 그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인식론적 문제를 설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
기 위해 노력했던 칸트에 이어 헤겔도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과제를 계승하
고 있다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왜냐하면 헤겔철학의 중요한 한 축은 절대적
지식을 향한 정신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다만 헤겔의 해법은 근대철학자들과
사뭇 달랐다. 왜냐하면 헤겔은 인식의 주체를 더 이상 개별 인간으로 한정하
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가 헤겔이 인식론적 문제 해결에 있어서 근
대와 결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헤겔은 법철학을 통해 법의 정당성의 근거를 찾고자 했
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실천철학적 맥락에서도 분명 근대철학의 유산과 과
제를 이어받고 있다. 하지만 헤겔은 법의 정당성의 근거를 자연 혹은 인간의
본성(Natur)에서 찾으려 했던 근대철학의 입장을 비판한다. 다시 말해 헤겔은
근대철학적 과제를 계승하고 있지만 근대철학적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
았다. 따라서 헤겔은 근대철학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근대철학이 남겨준 과제
를 나름의 방식으로 이어받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
유럽의 역사에서 “유럽”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계기는 8세기
유럽지역을 최초로 통일한 프랑크왕국의 건립으로 평가된다.6) 하지만 그 왕
국에 속한 사람들의 언어나 각 지역의 정체성이 서로 달랐으며 “유럽”이라는
말은 사실상 그들에게 통합의 정체성을 제공하지 못했다.7) 따라서 이렇게 내
적으로 분열된 왕국을 하나로 규합하는 데 상당한 노력과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통합의 어려움과 분열의 위기가 있었음에도 하나의 통일된 왕국의 정
체성을 유지하게 도와준 것은 당시 유럽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낯선 종
교였던 기독교와 로마제국의 여러 행정제도였다. 프랑크왕국은 자신들이 로
마의 계승자라고 생각했으며 넓은 영토를 통치한 경험을 가진 로마제국의 법
과 행정제도와 도로 건설기술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려고 했다.8)

6) 장-바티스트 뒤로젤, 유럽의 탄생, 이규현, 이용재 역, 서울: 지식의풍경, 2004, 54쪽.
7) 장-바티스트 뒤로젤, 유럽의 탄생, 52-54쪽, 69-73쪽; 에른스트 에리히 메츠너, 「프
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에서 베르됭 조약까지」, 중세 I 476~1000, 움베르트 에
코 기획, 김효정, 최병진 역, 서울: 시공사, 2015, 220-223쪽.
8) 하겐 슐체, 새로 쓴 독일역사, 14-17쪽, 20쪽, 26쪽.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73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왕국 통치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프랑크왕국을 세운 칼(Karl) 대제가 800년에 교황으로부터 왕
관을 받았고 시저(Caesar)의 후계자로 인정받으면서 로마의 적통임을 인정받
은 바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열과 싸움으로
인해 프랑크왕국의 통치권은 불안정하게 되었다. 이후 962년 로마 가톨릭 교
황으로부터 오토(Otto) 대제가 왕관을 받은 후 프랑크왕국은 안정적인 통치를
이어갈 수 있었다. 즉 역사적 뿌리가 없었던 유럽 최초의 통일왕국의 통치권
과 법률의 정당성은 신의 권위에 의존하게 되었다.9) 이른바 유럽의 왕권신수
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국가와 법의 정당성을 신의 권위에서 찾았고 그럼
으로써 비교적 안정적으로 종교적 통치체계와 세속적 통치체계가 서로 균형
을 이루며 지속되었다. 하지만 근대로 접어들면서 법과 국가 그리고 왕권의
정당성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중요한 물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려는 근대철학의 노력이 자연법사상으로 발전했다고 생
각된다. 중세적 질서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교회의 권위가 절대적 위치를 유
지하지 못하게 되었고 30년 전쟁은 종교가 오히려 평화를 가져다주기보다 전
쟁과 재앙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법
과 국가의 권력을 정당화해 주었던 신과 교회의 권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통치자인 왕이 자신의 권위를 신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이유로 자의적으로
국가를 지배하게 된다면 국가의 법은 왕의 자의적 통치 의지에 종속하게 될
것이다. 그에 반해 법이 자연의 법칙처럼 변하지 않는 자연의 질서나 인간의
본성에 근거해야 한다면 법은 신으로부터 인정받은 왕의 자의에 의해 수립되
어서는 안 되고 일정한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본성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근대의 자연법이론으로 열매를 맺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
다.10)

9) 그런데 사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신성한 왕권과 신성한 교회가 서로 대립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음을 참조. 장-바티스트 뒤로젤, 유럽의 탄생,
58-69쪽.
10) 물론 자연법사상의 기원을 아퀴나스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퀴나스에 따르
면 이성에 근거한 자연법이 있고 그 상위에 우주 전체의 통치자인 신의 영원법이
있다. 그리고 국가의 법은 인간의 법으로서 자연법 아래에 놓인다고 아퀴나스는 말
한다(Paul E. Sigmund, “Law and Politic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Aquinas, ed. by Norman Kretzmann & Eleonore Stump, Cambridge Univ. Press,
74 헤겔연구 제52호

근대철학은 인간의 세계에 마치 물리적 자연법칙처럼 자연적 질서와 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로티우스는 자연법이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신도
자연법을 바꿀 수 없으며 자연법을 도출하는 것은 신의 도움 없이도 마치 수
학적 추론처럼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푸펜도르프에 따르면 “인간에 내재한
자연의 빛에 의해” 자명하게 신이 만든 자연법을 인간이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 차이라고 말한다.11) 그런데
이러한 자연법은 물리적 자연법칙과 달리 자유로운 인간의 법이다. 따라서
자연법의 정당화 근거는 필연적인 자연의 질서에서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인
간의 본성(Natur)에서 찾아진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이러한 생
각을 새롭게 열어준 사상가로 그로티우스와 홉스를 꼽을 수 있다.12) 이들에
따르면 자연법의 발견은 인간의 본성을 통찰할 때 발견된다. 물리적 자연법
칙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자연현상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그 법칙은 인간의
본성과 독립적이다. 하지만 자연법은 인간이 가진 근원적 본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자연법사상은 언제나 인간이 본성적으로 가지는 자연
권에 기초한다. 그래서 가령 홉스의 경우 모든 인간이 가지는 자연적 권리
(ius naturale)는 자연법(lex naturalis)의 기초다.13) 이러한 근대 자연법사상은
앞서 말한 것처럼 법의 정당성을 새롭게 정초하려는 당시의 사상사적 운동으
로 간주 될 수 있을 것이다.

1993, 222-225쪽).
11) Hugo Grotius, De jure belli ac pacis 'libri tres [On the Law of War and Peace] :
The translation Book I, translated by Francis W. Kelsey, Oxford: At The Clarendon
Press, 1925, 40쪽; 홍기원, 「후고 그로티우스의 법사상(法思想)에 있어 자연법(自然
法)과 이성(理性): 노베르토 보비오의 홉스 테제 비판시론(批判試論)」, 중앙법학 9
권 2호, 중앙법학회, 2007, 998쪽; Samuel, Freiherr von Pufendorf, On the duty of
man and citizen according to natural law, edited by James Tully, translated by
Michael Silverthorne, Cambridge/New York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35-37쪽; 조관성, 「푸펜도르프의 자연법 윤리학에서 도덕적 의무 이론-인간의 의무
에 관한 해석적 연구-」, 철학사상문화 23호,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2017, 36
쪽.
12) 그로티우스와 홉스 중 누가 근대 자연법사상을 최초로 열어준 사람인가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선 다음을 참조. 홍기원, 「후고 그로티우스의 법사상(法思想)에 있어 자
연법(自然法)과 이성(理性): 노베르토 보비오의 홉스 테제 비판시론(批判試論)」, 985-
986쪽.
13)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1, 진석용 역, 파주: 나남, 2012, 177쪽.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75

헤겔은 물론 근대 자연법이론을 비판했음에도 자연법 이론가들처럼 법의


필연적 정당성의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자연법사상과 달리
정당성의 근거를 정신의 본질 또는 정신의 본질적 본성인 자유에서 찾으려
했다.14) 물론 헤겔은 근대철학자들과 달리 객관정신이라는 새로운 정신 개념
을 도입하여 권리, 법, 제도 등의 근원과 발전을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인간
이 천부적으로 가진 자연권에 기초하여 자연법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근대 자
연법사상은 헤겔의 법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헤겔이 법의 정당성과
토대를 객관정신의 체계 속에서 사실상 주관정신의 자유의지로부터 찾아 나
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의 법철학은 근대철학이 시도했던 법, 국가와 통
치권 등에 대한 정당화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관
정신의 자유의지는 근대 자연법사상이 말하는 모든 인간의 본성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Ⅲ. 법의 정당화 시도로서 근대 자연법사상과 근대


자연법이론에 대한 헤겔의 비판

자연법이론은 자연권을 자연법의 기초로 간주한다. 자연권은 인간이 본성


상 자연적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천부적인 권리이자 자유다.15) 자연법사상은
근대 시기만의 산물은 아니었다. 신적 질서로서의 자연의 질서를 모든 실정
법의 상위법으로 생각하는 중세의 자연법사상도 있었기 때문이다.16) 하지만
근대의 자연법사상은 중세의 자연법사상과 달리 법과 국가의 정당성이 신의
권위에서 나온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장 먼저
열어준 자연법 사상가로 우리는 홉스를 꼽을 수 있다. 왜냐하면 홉스는 현실
적인 법체계로서 실정법과 이러한 법을 토대로 세워진 국가의 정당성이 자연
적 상태에서 평등한 권리를 가진 개인들이 맺은 계약에 근거한다고 생각했기

14) G. W. F. Hegel,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이하 GPR), in: TW 7, §4.
15)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1, 176쪽.
16) 다음을 참조. 임경헌, 「자연법 개념의 두 의미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론을 중심
으로-」, 가톨릭철학 37호, 한국가톨릭철학회, 2021, 199-236쪽.
76 헤겔연구 제52호

때문이다. 이러한 근대의 자연법이론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명적인 법의 정


당화 이론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은 오랫동안 유럽
왕국들의 왕권을 정당화했던 왕권신수설에 대한 비판을 의미했기 때문이며,
국가의 권력이 신으로부터가 아닌 공동체의 구성원에서 나온다는 국가 수립
의 기초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17)
홉스의 자연법이론은 아직 현실적인 법과 제도가 생기기 이전인 자연적
상태에서 현실적 법체계와 제도로 이행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 과정은 자
연법을 토대로 현실적인 법체계가 어떻게 수립되어야 하는지를 의미한다. 이
러한 과정은 아무런 매개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권을
가진 개인들이 상호적 합의라는 계약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계약의 과정이
없으면 자연법은 현실적인 법적 체계로 이행할 수 없고, 결국 인간은 자연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자연법은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궁극적으로 보장
하기 위해 자연이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명령하는 이성의 법이다.18) 이러한
이성의 명령에 따를 때 자연 상태에서 자유로 인해 오히려 생존의 위기에 몰
렸던 개인은 자연 상태를 벗어나 계약을 통해 국가를 수립할 수 있고, 이러
한 국가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 홉스의 자연
법이론의 요지다. 따라서 가장 첫째가 되는 자연법은 “평화를 추구하라”라는
이성의 명령 형태로 나타난다.19) 이러한 자연법에서 계약국가의 수립목적과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계약국가의 성립 기초는 자연권을 가진
인간들의 계약이다. 따라서 국가와 국가를 지탱하는 실정법의 정당화 근거는
자연법과 자연권이겠지만 그러한 정당성을 가진 실정법과 국가의 출현은 계
약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20) 그래서 근대 자연법사상
과 계약주의 혹은 계약국가론은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이러한 홉스의 자연법이론은 인간이 만든 법이 어떤 근거에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신으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은 왕이

17) 다음을 참조. C. B. 맥퍼슨,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황경식・강유원 공역, 서울: 박영사, 2002, 101-103쪽.
18)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1, 14-15장.
19)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1, 177쪽.
20)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1, 232-233쪽.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77

자의적으로 법을 선포하면 그 법도 정당성을 갖는다는 낡고 오래된 생각은21)


홉스와 같은 자연법이론에 의해서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근대
철학이 인류사의 발전에 공헌한 큰 성과였으며 그 성과를 우리는 아직도 누
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2) 하지만 헤겔은 자연법이론이 시도하는
법의 정당화를 비판한다. 이 비판은 소위 홉스와 로크와 같은 경험론적 자연
법이론에 대한 비판이고 칸트와 피히테와 같은 형식주의적 자연법이론에 대
한 비판은 아니다.23)
헤겔은 근대 자연법이론이 자연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하는 근거의 도
출과 그 근거로부터 자연법을 정당화하는 논증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다. 그 문제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순환론적 논증의 문제고 다른 하나는 환
원적 논증 방법의 문제다.24) 이 두 가지 문제는 사실상 경험주의적 방법이
가지는 근본적 한계로부터 파생된다. 왜냐하면 경험주의적 방법은 실제적 사
례들로부터 보편적인 원리를 도출 또는 추상하는데(abstrahieren) 그렇게 도출
된 원리는 필연성이나 보편성을 가질 수 없음에도 자연법 이론가들 예를 들
어 홉스나 로크는 그렇게 도출된 최종적 근거인 “자연적 상태”를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원리(Prinzip), 즉 최초의 출발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25)
첫 번째 순환론 문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헤겔은 자연법이론이 최종적
으로 전제하는 필연적 최초의 상황이자 원리인 “자연적 상태”를 “절대적 대

21) 다음을 참조. 니콜라스 루만, 법사회학, 강희원 역, 파주: 한길사, 2015, 350쪽.
22) 일반적으로 근대인권사상은 홉스와 로크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음을 참조. 이봉철, 현대인권사상, 서울: 아카넷, 2003, 139-157쪽, 170-182쪽.
23) 헤겔은 “자연법에 대한 학문적 취급(die wissenschaftliche Behandlung des Naturrechts)”
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G. W. F. Hegel, “Über die wissenschaftliche
Behandlungsarten des Naturrechts, seine Stelle in der praktischen Philosophie und
sein Verhältnis zu den positiven Rechtswissenschaften”(이하 WBN), in: TW 2, 439
쪽). 먼저 헤겔은 WBN의 I 장에서 홉스와 로크의 경험적 자연법사상을 다루고 II
장에서는 칸트와 피히테의 형식주의적 자연법사상을 다루고 있다. 이글에서 다루는
내용은 I 장에 해당한다. 윤삼석은 헤겔이 이 두 가지 형태의 자연법에 대해 비판한
내용을 자세히 논구한 바 있다(윤삼석, 헤겔 실천철학에서의 근대적 인륜성의 재
구성과 자연법, 고려대학교, 2015, 20-41쪽).
24) WBN, 440쪽. 윤삼석, 헤겔 실천철학에서의 근대적 인륜성의 재구성과 자연법,
21-28쪽. 여기서 윤섬석은 경험주의적 자연법 이론이 수행하고 있는 법의 정당화
방식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잘 해명하고 있다.
25) 다음을 참조. 윤삼석, 헤겔 실천철학에서의 근대적 인륜성의 재구성과 자연법, 22쪽.
78 헤겔연구 제52호

립(absoluter Gegegnsatz 또는 die absolute Entgegensetzung)”으로 표현한다.26)


그런데 자연적 상태는 “순수하게 관념적인 것의 절대적 존재(das Absolutsein
des Rein-Ideellen)”로서 선험적(apriori)이라고 헤겔은 말한다.27) 그런데 자연
상태라는 최초의 원리는 그러한 선험성을 통해 “경험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
원리(das absolute Prinzip der Empirie)”28)를 정립한다는 문제를 안게 된다.
왜냐하면 자연 상태란 최초의 원리로서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것임에도 그
내용 자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매우 경험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연 상태라는 최초의 상태를 추상하는 것은 선험적인 것
과 후험적인 것을 혼동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이것은 경험적인 것 안에 그
경험적인 것이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던 선험적 원리를 추출하는 것처럼 보이
지만 그렇게 추상된 원리가 사실상 경험적임을 헤겔은 지적한다.29) 그리고
선험적이라고 오해된, 즉 사실상 경험적 원리인 자연적 상태로부터 현실적인,
즉 후험적인 법의 정당성이 도출된다.30) 홉스의 자연적 상태는 “공통의 권력
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모든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동등한 자유를
가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는 한 누구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일종의 소결론이 도출된다.31) 결국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지
키려는 욕망을 가진 한 이러한 최초의 자연적 상태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당
위가 요구된다. 그리고 자연적 상태의 극복 방법은 각자가 자연적 상태에서
가지는 자연적 권리를 양도하는 상호적 계약을 통해 국가를 성립시키는 것이
다.32) 따라서 계약이 현실적 법과 제도를 정당화하는 표면적 근거가 된다.
가령 30년 전쟁과 같은 역사적 사례는 서로의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서로 적대적 투쟁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음
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러한 계약을 맺어야 하는 최종적 근거는 인간이 최초
에 자연적 상태에서 서로 투쟁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일종의 선험적이고

26) WBN, 439쪽.


27) WBN, 439쪽.
28) WBN, 439쪽.
29) WBN, 445쪽.
30) WBN, 445-446쪽.
31)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1, 170-172쪽.
32)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1, 232-233쪽.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79

가상적인 전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자연적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련된


현실 법과 제도의 필요성의 최종 근거는 자연적 상태가 된다. 이 자연적 상
태는 하나의 일반적 원리와 같이 누구도 경험한 바가 없는 것이며, 이러한
원리는 사실상 ‘공통의 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싸운다’는
현실적이고 경험적이며 역사적인 사례들로부터 도출 또는 추상되었다고 볼
수 있다.33) 따라서 자연법이론은 헤겔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일종의 순환론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비판의 요지는 자연법의 정당화 근거의 허구성이다. 즉 이것은 현
실적인 법이 도출된 원천인 자연 상태가 “환상(Phantasie)”이나 “허구
(Fiktion)”34)라는 점을 함축한다. 모든 현실적인 법과 그 법에 기반한 국가 제
도들의 정당성은 다시 그것들의 근거의 정당성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정당성
근거의 환원은 결국 최종적 원천의 근거로 환원될 수 있는데 최종적 원천이
허구라면 자연법이론이 시도하는 법의 정당화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자연
법이론이 법의 정당화 근거로서 최종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자연적 상태다.
그런데 이 자연적 상태는 현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경험한 실제 상황이 아니라, 단지 추상을 통한 상상의 결과물에 불과하다.35)

33) 홉스가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계약을 통해 국가를 수립해서 개인의 생존과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도록 한 역사적 배경은 17세기 있었던 영국의 내전으로
평가된다(Tom Sorell, “Introduction”,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Hobbes,
edited by Tom Sorell, Cambridge Univ. Press, 1996, 8-9쪽). 영국의 내전이 홉스에
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그의 유고인 Behemoth에서도 찾아질 수 있다고 평가
된다(Luc Borot, “History in Hobbes’s thought”,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Hobbes, edited by Tom Sorell, Cambridge Univ. Press, 1996, 318-321쪽). 그러나
1618년에서 1648년까지 있었던 ‘30년 전쟁’이 홉스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
로 보인다. 왜냐하면 30년 전쟁에 동원된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치적 선전물인
“seretissima instructio(가장 비밀스런 지령)”을 홉스가 번역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을 참조. Noel Malcolm, Reason of State, Propaganda, and the Thirty Years'
War : An Unknown Translation by Thomas Hobbes, 2007, 72-75쪽; Jason Eldred,
“Review: Hobbes and the “Reason of State””, reviewed work: Reason of State,
Propaganda, and the Thirty Years' War: An Unknown Translation by Thomas
Hobbes, in: Huntington Library Quarterly Vol. 71, No. 2,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08, 373-375쪽.
34) WBN, 444-445쪽.
35) WBN, 445쪽.
80 헤겔연구 제52호

사실 이러한 점은 계약주의가 가지는 공통의 문제일 수 있다.36) 왜냐하면 계


약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계약 당사자 간에 맺은 최초의 계약상황 혹은
조건이 서로에게 공평하다는 전제가 없다면 계약을 통한 규범의 정당화는 시
작부터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제가 여러 가지
우연적 현실로부터 추상된 상상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전제로부터
정당화된 계약의 정당성도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해서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전에 소위
“자연적 상태”라고 하는 “어떠한 공통의 권력도 없는 상황”이 있었다고 충분
히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물론 상상(Einbildung)에 근거
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상상을 단지 허상(Schein)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공통의 권력도 없는 상황”이 반드시 우리가 벗어나
야 하는 “인간이 서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참혹한 상태”로 간주되어야 한다
는 필연성은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루소의 주장처럼 “어떠한 공통의 권력
도 없는 상황”인 “자연적 상태”를 인간이 상실한 가장 원초적이고 이상적인
상태로 간주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37) 즉 자연적 상태를 “공통의 권력이 없
는 상황”으로 누구나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상태가 수용될 만
하더라도 그런 최초의 상황을 반드시 “참혹한 최초의 상태”라고 생각할 필요
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적 상태를 “최초의 가장 이상적 상태”라고 생
각해야 할 필연성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적 상태를 정당하게 가정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은 동등한 타당성을 가지고 “참혹한 상태”로
도 그리고 “이상적인 상태”로도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겔이 비판한 것과 같이 근대 자연법이론이 가정하고 있는 최초
의 자연적 상태가 정당하게 전제될만한 가치가 인정된다손 치더라도 그 상태
에 대한 정의와 성격은 달라질 수 있으며 그러한 자연적 상태가 가진 성격의
필연성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 상태는 상상의
결과에서 나왔고 그렇게 추상된 사유물을 검증할 수 있는 어떠한 경험도 우

36) 롤즈도 자신이 주장하는 이러한 최초의 상태와 같은 원초적 입장을 “가상적인
(hypothetical) 반성 과정의 결과”로 인정하고 있다(J. 롤즈, 사회정의론, 황경식
역, 서울: 서광사, 2002, 42쪽).
37)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최현 역, 파주: 집문당, 2004, 34-44쪽.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81

리에게는 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38) 결국 우리는 자연적 상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있음에도 잘 알지 못하는 최초의 전제로부터 법의 정당화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시도는 오류다.
더욱이 헤겔은 전통적인 근대의 자연법사상과 다른 독특한 자연법이론을
주장한 할러(Carl Ludwig von Haller) 또한 비판한다.39) 할러에 따르면 자연
적 상태란 신이 정한 불변하는 영원한 질서로서 그 질서는 능력이 뛰어난 강
자가 지배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그러한 지배에 복종해야 하며, 신이 정한
이러한 자연적 질서가 정의의 법칙이라고 말한다.40) 이를 통해 할러는 군주
의 통치와 지배를 정당화한다. 그리고 그는 시민사회가 오류의 근원이자 국
가를 변질시키며 망상(Grille)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41)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자신의 책에 “인위적이고 시민적인 것 속에 있는 괴물에 대항하는 자연
공동체적 상태에 관한 이론(oder Theorie des natürlich-geselligen Zustands der
Chimäre des künstlich-bürgerlichen entgegengesetzt)”을 부제로 덧붙였다고 말
한다.42) 그에 따르면 교회의 권위와 권능(Macht)이 사람들 즉 민족(Volk)으로

38) 근본적으로 이렇게 자연적 상태에 대한 상반된 정의가 가능하게 되어 가령 자연적


상태에 대한 홉스의 주장과 루소의 주장이 서로 대립하게 되는 이유와 구조는 칸트
가 지적한 이율배반이 발생하는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칸트의 이율배반에서 “세계의 시초가 있다”와 “세계의 시초가 없다”가 이성에 의해
서 동시에 추론될 수 있듯이(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2, 백종현 역, 파주: 아
카넷, 2018, 640-642쪽 / B454-457) “자연 상태는 참혹하다”와 “자연 상태는 이상적
이다”가 동시에 추론될 수 있음을 홉스와 루소의 견해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39) 이에 대해선 다음을 참조. 남기호, 헤겔과 그 적들, 일산: 사월의 책, 2019, 90-108
쪽; 남기호, 「프로이센 왕정복고와 헤겔의 정치 법학적 입장Ⅱ: 할러와의 대결을 중
심으로」, 철학연구 100호, 철학연구회, 2013, 131-160쪽. 남기호의 위 연구는 국내
에서 유일하게 할러와 헤겔의 대립을 연구한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40) C. L. von Haller, Restauration der Staats-Wissenschaft oder Theorie des natürlich-
geselligen Zustands der Chimäre des künstlich-bürgerlichen entgegengesetzt. Bd. 1,
in: Münchener DigitalisierungsZentrum (https://www.digitale-sammlungen.de/), 374-375쪽.
41) C. L. von Haller, Restauration der Staats-Wissenschaft oder Theorie des natürlich-
geselligen Zustands der Chimäre des künstlich-bürgerlichen entgegengesetzt. Bd. 1,
XXVIII-XXX.
42) C. L. von Haller, Restauration der Staats-Wissenschaft oder Theorie des natürlich-
geselligen Zustands der Chimäre des künstlich-bürgerlichen entgegengesetzt. Bd. 1,
XLVI.
82 헤겔연구 제52호

부터 올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누군가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신성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신성한 교회의 권
위는 인간으로부터 올 수 없다는 것이다.43)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세속적 국
가의 권력(Macht)도 민족 혹은 대중에서 나올 수 없다. 따라서 할러는 시민
사회를 구상하려는 “엉뚱한 시도(Grille)”가 결국 국가를 인위적으로 구성하려
는 모든 오류의 근원이라고 말한다.44) 더욱이 그는 철학적으로 국가체계를
구성하려는 혁명적 시도의 결과도 망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45) 그에 의하
면 강자가 지배하고 약자가 복종하는 자연적 질서는 신이 정한 질서며 이러
한 질서에 의해서 국가가 정당화될 때 법이란 지배자가 약자에게 부과하는
것이고, 왕이 제정한 법률은 피지배자들을 위해 왕이 베푸는 은혜로부터 온
것이다.46) 그런데 헤겔은 할러의 이러한 주장을 비판하면서 법(das Recht)이
“필연적인 어떤 것(etwas Notwendiges)”이어야 함을 우회적으로 주장한다.47)
할러는 전통적 자연법사상과는 다른 자신의 자연법이론을 발전시켰지만 법
의 정당화 근거를 자연적 상태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는 근대적 자연법사
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할러가 말하는 자연의 상태란
‘지배-복종’이라는 신이 준 자연적 질서다. 이러한 자연적 질서를 근거로 법
이 제정될 때 법은 필연적인 원리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
자의 우연적인 은혜와 자비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근대 자연법사상과 차이

43) C. L. von Haller, Restauration der Staats-Wissenschaft oder Theorie des natürlich-
geselligen Zustands der Chimäre des künstlich-bürgerlichen entgegengesetzt. Bd. 2,
in: Münchener DigitalisierungsZentrum (https://www.digitale-sammlungen.de/),
373-374쪽.
44) C. L. von Haller, Restauration der Staats-Wissenschaft oder Theorie des natürlich-
geselligen Zustands der Chimäre des künstlich-bürgerlichen entgegengesetzt. Bd. 1,
49-50쪽.
45) C. L. von Haller, Restauration der Staats-Wissenschaft oder Theorie des natürlich-
geselligen Zustands der Chimäre des künstlich-bürgerlichen entgegengesetzt. Bd. 1,
177쪽. 남기호, 헤겔과 그 적들, 96쪽.
46) C. L. von Haller, Restauration der Staats-Wissenschaft oder Theorie des natürlich-
geselligen Zustands der Chimäre des künstlich-bürgerlichen entgegengesetzt. Bd. 1,
271쪽.
47) G. W. F. Hegel, Vorel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s Rechts Berlin 1819-20,
Nachgeschrieben von Johann Rudolf Ringer, Hrsg. von E. Angehrn, M. Bondeli und
H. N. Seelmann, Hamburg 2000, 133쪽.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83

를 보인다. 이런 점에서 할러의 자연법사상은 근대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중세


적 질서를 복원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48) 헤겔은 바로 이러한 할러를
비판하면서 법이 개념적 원리에 따라 필연적인 것으로서 제정되고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오히려 헤겔이 근대 자연법사상에 부
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근대 자연법사상도 필연적인 원리와 같은
자연법에 기초해 현실적 법률이 제정되어야 함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자연법이론은 근대를 거쳐 19세기 할러에 의해 새롭게 변형되어 이어지게
되는데, 자연법이론의 이러한 분화와 발전은 자연법이론 안에서 다양한 그리
고 서로 대립하는 입장들의 출현을 잘 보여준다. 근대 자연법이론은 자연법
을 실정법의 근거로 간주하고 자연법을 실정법의 필연적 지향점이자 준거로
서 주장한다. 근대 자연법이론의 등장 이후 자연법이론의 발전과정에서 다양
한 입장들이 있었고 특히 근대 자연법이론은 실정법이 필연적인 근거를 가져
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적어도 근대 자연법이론은 법의 필연적 정당화
측면에서 헤겔과 같은 입장을 공유한다. 하지만 헤겔은 어떤 경우에도 자연
법이론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으며 자연법이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일관
되게 견지했다.

Ⅳ. “정신의 본성법(das Recht der Natur des Geistes)”으로서


헤겔의 변형된 자연법

실정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정하기 나


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도 인간이 정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법의 항구적 정당성을 담보하기란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볼 때 여전히 법을 제정하는 권력과 단지 그 입법권력에 의해 법
의 정당한 효력이 발생하고 그 효력이 유지되는 많은 경우를 볼 수 있다. 그
리고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경우를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근대 자연법사상이 가져다준 중요한 가

48) 남기호, 헤겔과 그 적들, 90-97쪽.


84 헤겔연구 제52호

치는 법을 제정하는 현실적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따라야 하는 자


연적 질서와 같은 원리에 의해 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는 점이다. 그래서 자연법사상은 중세적 왕권신수설과 왕에 의한 자의적 법
치를 인류사에서 걷어내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49) 자연법사상은 인간이 정
한 법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지만 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법이
지향해야 할 항구적 정당성을 간과하게 되면 실정법의 정당성은 힘에만 의존
하는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따라서 실정법의 객관적 정당화는 중
요한 과제로 우리에게 자각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법의 객관적 정당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법이 객관적으로 정당하다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
는 방식은 우선 두 가지로 생각될 수 있다.

첫째, 인간이 만든 법이 인간의 자의적 결정으로만 수립된 것이 아니라 인


간의 법보다 더 근원적이고 불변하는 권위를 가진 신법이나 자연법에 근거해
수립되는 경우 그 법은 정당하다.

둘째, 인간이 만든 법은 물론 자의적이고 우연적일지라도 오랫동안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지켜온 관습에 따른다면 비록 관습이 필연적이지 않더라도 인
간이 만든 법은 관습과 전통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법의 정당화 근거를 마련


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인간적 질서를 초월한 법이 정당하다는 근
거를 제시하기 어려운 문제를 지닌다. 후자의 경우는 법의 정당화 근거가 전
자처럼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며 객관적일 수 없다는 문제가 있지만 인간이 역
사적으로 어떻게 법을 제정하고 그 법에 기초한 제도와 공동체를 만들어 함
께 살아왔는지에 관한 역사적 과정과 관습적 사실에서 법의 정당성을 찾을

49)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1, 188쪽. 홉스는 여기서 신에게 맹세한 것이라도 “자연
법에 반하는 것이라면, 그 맹세는 헛된 것”이라고 말하며, 반대로 “자연법이 명한
바를 맹세한 것이라면, 그것은 맹세가 아니라 그들이 당연히 따라야 할 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홉스는 사실상 자연법은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신으로
부터도 독립된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중세적인
왕권신수설과 근대 자연법사상의 분명한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85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정당화는 관습 일반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다수의 사람이 가져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헤겔은 분명히 자연법이론을 비판했다. 따라서 ‘헤겔은 관습법주의
자인가?’라고 물음을 던져볼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헤겔은 관습법주
의자도 분명히 아니다. 왜냐하면 헤겔은 사비니와 같은 역사법학자들과 대립
각을 세우며 관습에 따라 역사적으로 법이 형성된다는 입장을 강하게 비판하
고 있기 때문이다.50) 역사법학파(die geschichtliche Schule)의 역사주의적 설명
은 ‘법의 본질이나 법의 개념에 근거해 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51) 사비니는 역사 속에서 “법은 마치 민족의 의식 속에
있는 언어처럼 살아 있다”고 말하며, 역사란 “우리의 고유한 상태를 참되게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52) 그에 따르면 “법의 내용이 민족
의 전체 과거를 통해서 주어진다.”53) 따라서 이러한 역사법학파의 입장은 합
리적인 근거로 법이 입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그러한 근거로 법의 타당
성을 설명하지 않고 역사적 과정에서 생겨나고 변화하는 법의 발전과정에 주
목한다. 헤겔도 법이 역사적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법의 역
사적 발전 속에는 개념에 의한 법의 필연적 발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현실적 법의 역사적인 생성과 발전은 이성적 법개념에 의해 필연적으
로 진행되는 법의 발전과 구별해야 한다.54)
법역사주의자들은 법이 역사적인 우연적 계기들에 의해 외적으로 생겨나고
발전하는 과정을 법개념에 의해 필연적으로 법이 역사 속에서 생겨나고 발전

50) F. C. von Savigny, Grundgedanken der Historischen Rechtsschule 1814/40, Frankfurt


a. M. 2014, 3-6쪽. 다음을 함께 참조. 남기호, 헤겔과 그 적들, 117-150쪽. 임미
원, 「헤겔과 근대 법사상의 계보-자연법학과 역사법학과 관련하여」, 법철학연구,
제24권 제2호, 한국법철학회, 2021, 203-206쪽. 또한 헤겔은 자신의 법철학에서 당
시의 역사법학자였던 Gustav Hugo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GPR, §3).
51) 물론 사비니도 역사적으로 주어지는 법의 내용들이 “내적인 필연성에 의해 주어진
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음을 참조. F. C. von Savigny, “Entstehung des
positiven Rechts”, in: Grundgedanken der Historischen Rechtsschule 1814/40, 17쪽.
52) F. C. von Savigny, “Entstehung des positiven Rechts”, in: Grundgedanken der
Historischen Rechtsschule 1814/40, 3쪽, 15쪽.
53) F. C. von Savigny, “Entstehung des positiven Rechts”, in: Grundgedanken der
Historischen Rechtsschule 1814/40, 17쪽.
54) GPR, §3.
86 헤겔연구 제52호

하는 과정과 혼동하고 있다고 헤겔은 비판한다.55) 역사법학파는 법의 정당화


는 법의 개념을 통해서도 그리고 객관적이고 필연적이며 본질적인 어떤 근거
를 통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관습에 의해 법
이 우연히 생겨나고 그렇게 생겨난 법은 민족과 종교와 함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발전하고 이러한 법의 관습적이며 역사적인 전개 과정이 법의 생성과
발전을 해명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역사법학파에게 법이란 그것이 성문화
되었다 하더라도56) 관습법과 다름없다.
그런데 헤겔은 관습법을 보편성과 객관성을 갖추지 못한 법으로 간주하고
때로는 기만적이고 때로는 큰 혼란에 빠뜨리는 것으로 평가한다.57) 왜냐하면
헤겔에 따르면 “법 혹은 권리(Recht)라는 것은 그것이 법률(Gesetz)이 됨으로
써 법이 지닌 보편성의 형식뿐만 아니라 법의 참된 규정성도 얻게 되기” 때
문이다.58) 그런데 관습법이란 보편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주관적으로 파악되고,
“법의 참된 규정성”에 의해 필연성을 갖기보다 역사적인 우연성 속에서 생겨
나고 발전한다. 따라서 헤겔은 법의 정당성을 관습에서 찾으려는 역사법학파
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59)
따라서 헤겔은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 방식으로 법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
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헤겔은 어떠한 방식으로 법의 정당화
근거를 마련하려고 했던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헤겔이 시도한 법의 정당화
시도는 이 두 가지 입장을 절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헤겔이 이러한 절
충을 의도한 것인지는 확실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헤겔의
시도는 그가 비판했던 자연법사상과 역사주의적 법이론의 두 가지 성격이 비
판적으로 절충된 형태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이유는 헤겔이 법을 정신의 한 실제적(real) 형태로 보고 있으며
법은 마치 자연법칙이 필연성을 가지는 것과 같이 정신의 필연적이고 본질적
속성인 자유에 의해서 현실적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60) 헤겔

55) GPR, §3.


56) GPR, §211 헤겔은 관습법을 법전으로 만들어 모아놓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
한 모음”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57) GPR, §211.
58) GPR, §211.
59) 다음을 참조. 윤삼석, 「헤겔 법철학에서 자연법의 문제」, 46쪽.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87

은 “법의 기초(der Boden des Rechts)”를 자유의지라고 말한다.61) 그리고 “자


유”가 “의지의 근본적 규정(Grundbestimmung)”인데, 이것은 “마치 중력(die
Schwere)이 물체의 근본적 규정인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62) 이러한 점은 법
이 그저 우연적인 인간의 관습과 역사적인 과정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
니라 정신의 본질인 자유가 가진 법칙에63) 의해서 필연적으로 실현된다는 점
을 보여준다. 따라서 헤겔은 비록 자연법이론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연법이론이 실정법은 필연적인 자연의 질서에 근거할 때 정당하다고 주장
하는 것처럼, 헤겔에게 있어서 실정법은 이미 자유의 법칙에 따라 생겨난 정
신 자신의 필연적 실현 형태다.
그러나 실정법이 따라야 하는 필연적 법의 본성을 찾으려 했던 헤겔의 시
도가 자연법이론과 다른 점은 법의 정당화 근거를 정신의 타자인 자연에서
찾지 않고 정신 자신 속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법이 따라야 하는 필
연적 법칙은 ‘자연법’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법칙’이다. 그리고 헤겔에 따
르면 자유는 정신의 본질이다.64)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 본질(Wesen)을 본성
(Natur)으로 이해해 본다면 결국 헤겔은 정신의 본성(die Natur des Geistes)에
서 법의 정당화 근거를 찾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65) 마치 자연적

60) GPR, §4 Zusatz.


61) GPR, §4.
62) GPR, §4 Zusatz. 자연법에 대한 학문은 역학(Mechanik)이나 자연학(Physik) 그리고
본질적인 철학적 학문(wesentliche philosophische Wissenschaft)과 같다고 헤겔은 말
한 바 있다(WBN, 434쪽). 헤겔은 물론 자연법에 대해 비판하지만 이러한 점은 법
의 원리와 근거가 자연의 원리처럼 필연성을 갖는다는 점을 헤겔이 인정하고 있음
을 보여준다.
63) GPR, §4 Zusatz를 보면 “중력이 물체의 근본적 규정(Grundbestimmung)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자유는 의지의 근본적 규정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필자는 이 글에서
“자유의 법칙”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여기서 “법칙”은 정확히 말하자면 필연성을
가진 “근본적 규정”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법칙과 대비를 시키기 위
해 이글에서는 “자유의 법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겠다.
64) G. W. F.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II (이하 Enz III),
in: TW 10, §382.
65) 헤겔은 GPR, §4에서 이러한 맥락으로 “정신의 본성(die Natur des Geistes)”라는 표
현을 사용한다. 또한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seine Freiheit als Natur”라는 표
현을 사용한다(G. W. F. Hegel,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이하 VPG), in: TW 12, 559쪽). 이러한 점은 헤겔이 정신의 본성(Natur)과 자유를
연관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88 헤겔연구 제52호

사물이 자연법칙에 따라 필연적인 방식으로 운동하고 생성하고 소멸하듯이


인간이 만든 법과 그 법에 기초한 제도들은 정신의 본성인 자유의 법칙에 따
라야 한다. 즉 헤겔은 법의 정당성에 대한 필연적 근거를 정신의 본성에서
찾으려 했다. 하지만 헤겔도 법의 필연적 근거를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는 자
연법사상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다만 그 근거를 객관적 자연(Natur)이
아니라 정신의 본성(die Natur des Geistes)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자연법사상
과 구별된다. 하지만 자연(Natur) 개념을 “본성”으로 이해했을 때 헤겔의 법
은 포괄적 의미에서 그리고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Natur-Recht)”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비오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가진다. 그에 따르면
헤겔의 법철학은 자연법이론에 대한 “해체”인 동시에 “완성”이기도 하다.66)
즉 헤겔은 자연법이론을 비판하지만 그는 그러한 비판을 통해 법이 필연적인
자연적 질서와 같은 원리에 의해 수립되어야 한다는 자연법이론의 궁극적 목
표를 지향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
헤겔은 법이 자의적이어서는 안 되고 모든 법이 따라야 하는 필연적인 근
거와 원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법의 기초(Boden
des Rechts)”에 대한 탐구를 이어갔다는 점에서 비록 그가 근대 자연법이론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근대 자연법이론의 과제인 ‘법을 필연적 근거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헤겔에 따르면 실정법이 정당한 이유는 정신의 필연적 본
성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이며, 헤겔은 법의 정당화 근거를 우연적이지 않
은 규정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겔은 법의 발전과 변화는 역사
적 발전 속에서 이루어짐을 역설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헤겔은 법역사주의
와 법의 역사적 발전이라는 입장을 공유한다. 자연법사상은 실정법의 정당화
근거인 자연법을 마치 불변하는 자연적 질서처럼 여긴다. 이처럼 헤겔도 법
의 정당화 근거를 정신의 본성에서 찾았기 때문에 법의 정당화 근거인 정신
의 본성은 마치 자연의 질서처럼 불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나 헤겔에게 있어 법의 근거가 되는 정신의 자유는 정신 자신을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모습과 형태로 나타나게 하고 발전시키는 자기관계적 부정성

66) Norberto Bobbio, “Hegel und die Naturrechtslehre”, in: Materialien zu Hegels
Rechtsphilosohie Bd. 2, hrsg. von Manfred Riedel, Frankfurt a. M. 1975, 81쪽.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89

을 지닌 정신의 근원적 본성이자 힘이다. 따라서 법을 정신의 한 형태로 생


각하는 헤겔이 마치 역사법학자들처럼 법의 실현과 발전을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67)
헤겔에게 있어서 법은 객관정신이다. 따라서 법의 생성과 발전은 객관정신
의 역사적 자기 전개 과정과 일치해야 한다. 만약 어떤 법이 객관정신의 역
사적 발전과정에 역행한다면 그 법과 그러한 법에 기초한 제도와 통치권은
정당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신의 본질은 자유다. 그
리고 정신의 역사적 자기 전개 과정은 정신 자신의 본질인 자유를 정신 스스
로 더 많이 의식해 나가는 과정이다.68) 이러한 정신이 자신의 본질인 자유에
대해 더 많이 의식할수록 객관정신은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개인의 자유가
더 많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자기 자신을 법과 도덕 그리고 인륜성의 형태로
현실화하면서 발전한다. 이러한 객관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은 분명히 역사적
인 과정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 발전과정의 원리는 정신의 본질적 본성
에 따라야 한다는 필연성을 갖는다. 따라서 자유에 대한 의식이 확장되면서
왕의 자의적이고 폭압적인 통치가 언젠가는 역사적으로 종식되기를 희망했던
헤겔은 나폴레옹 축출 이후 왕정복고의 흐름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69) 즉 헤겔은 법의 발전이 역사적 과정으로 나타날 때 반드시
현실적 법이 근거해야 하는 정신의 필연적 본성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그 원
리에 역행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헤겔은 법의 실제 역사적 전개는
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필연적인 법의 원리와 근거 그리고 법이 발전
해야 하는 이상 혹은 법이 결국 실현하게 될 이상적 현실과는 구분되어야 한
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법의 이상적 실현은 인륜적 국가의 형태로 이루어진
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법의 발생과 발전이 우연적인 관
습에 따라 역사적으로 전개된다고 주장하는 역사법학파의 입장과 대립할 수

67) 윤삼석, 「헤겔 법철학에서 자연법의 문제」, 45-47쪽. E. Weisser-Lohmann,


Rechtsphilosophie als praktische Philosophie : Hegels Grui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und die Grundlegung der praktischen Philosophie, Münschen 2011, 87쪽.
68) VPG, 77쪽.
69) 이에 대해선 다음을 참조. 남기호, 헤겔과 그 적들, 153-180쪽. 다음도 함께 참조.
권영우, 「헤겔 철학의 왜곡사에 대한 소고」, 철학연구 125집, 대한철학회, 2013,
42-44쪽.
90 헤겔연구 제52호

밖에 없었다.

Ⅴ. 헤겔의 법개념이 지닌 문제에 대한 고찰

법을 정신 자체로 설명하려는 헤겔의 시도는 법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독특한 법개념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물음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70)

첫째, 법의 발전이 정신의 발전이고 정신은 자기의 원리에 따라 발전하는


데 왜 법이 정신의 자기 전개 원리를 벗어나는 경우가 발생하는가?

둘째, 정신의 본질이 자유고 자유의 법칙에 따라 법이 전개될 텐데 어떻게


자유가 법의 정당화 근거로서 필연성을 가질 수 있는가? 이것은 자유와 필연
성의 양립 문제를 내포하는 것이 아닌가?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답변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헤겔


에 따르면 법의 발전은 역사의 발전 속에서 이루어지며 법과 역사의 모든 발
전은 객관정신의 발전이 현실적으로 실현된 결과다. 법과 역사의 발전은 정
신의 본질인 자유가 더 많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헤겔은 말한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인간이 만든 제도와 법은 자유를 더 억압할 수도 있고,
자유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과거보다 더 안 좋은 방향으로 역사가 퇴보할
수도 있음을 헤겔은 인정한다. 하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 즉 어느 지역이나
특정 시기에 한정하지 않고 역사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의 발전은 자유
를 자신의 본질로 갖는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헤겔의

70) 물론 다음의 두 가지 물음에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해명


이 요구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이 물음들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철학적 난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우리를 이끌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아래 두 가지 물음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준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 물음
을 회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간략히 헤겔적 관점에서 답
변할 수 있는 내용만 언급할 것이다.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91

입장이다. 따라서 중세적 왕정이 해체되고 시민사회가 등장하고 왕의 자의적


통치방식에서 벗어나 헌법에 의한 통치를 수행하는 근대적 국가가 출현했으
며, 더 나아가 오늘날 민주주의가 보편화되는 방향으로 세계사의 발전이 진
행된 것은 헤겔의 입장이 여전히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테네
에서 민주주의가 등장했던 시기 사실 거의 모든 지역에서는 왕정이 일반적이
었다는 점을 헤겔도 부정하지 않는다.71) 그리고 왕정이 무너지고 시민사회가
등장했던 시기에도 왕정복고의 역사적 흐름이 있었고,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독재자의 출현은 이어지고 있으며 어떤 지역에
서는 아직도 왕이나 부족장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계사의 흐름은 자유로운 정신의 고된 노정에 의해 정신 자신의 자유가 더
많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향해 가지만 그 흐름의 시대적 단면 속에는 발전과
퇴보와 정체가 혼재되어 있음을 헤겔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대한 세
계사의 흐름 속에서 그 흐름을 전진시키는 민족과 나라들이 세계사의 주인공
으로서 세계사라는 무대에 등장한다고 헤겔은 주장한다.72) 따라서 법과 역사
는 정신의 자기 원리에 따라 전개하고 발전하지만 그러한 원리에서 벗어나는
정신의 자기부정적 모습도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객관정신
의 역사적 발전 속에서 작용하는 모순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헤겔은 역사의 발전을 “자기 자신과 대립하는 [정신의] 언짢고 고된 노동”으
로 이해한 것인지 모른다.73)
두 번째 물음은 “자유의 원리가 필연적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귀결
될 수 있다. 칸트를 비롯해 거의 모든 철학자는 자유와 필연은 서로 대립하
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는 물질과 정신, 자연과 정신의 대립
은 풀리지 않는 형이상학적 문제로 남는다. 물론 스피노자의 파격적인 생각
은 자유를 소거함으로써 필연적 질서를 통해 세계를 하나의 실체로 해석하려
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와 필연성의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 자유를 필
연성 속으로 녹여버린 어찌 보면 너무 손쉬운 선택을 택한 나태한 이성의 결
과인지 모른다. 헤겔은 스피노자와 반대로 필연성을 자유에 녹이는 선택을

71) GPR, §347, §351.


72) GPR, §§344-347, §352; VPG, 106쪽.
73) VPG, 76쪽.
92 헤겔연구 제52호

함으로써 결과는 스피노자와 유사해 보이지만 그 과정과 의미에서 볼 때 헤


겔은 스피노자와 완전히 다른 그리고 매우 복잡한 해법을 모색한 것으로 보
인다. 헤겔은 정신과 자연이 서로 타자가 되는 관계를 형성하지만 사실상 이
념의 현상으로서 그 둘의 근원이 동일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헤겔은 스피노
자와 같이 절대자를 자연과 동일시하거나 자연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헤겔
에 따르면 전체인 이념이 자유의 원리에 따라 자기를 전개하면서 자연으로
그리고 정신으로 현상하는데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성은 사실 자유의 자
기부정적 형태로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헤겔은 본질에서 개념으로의 이행
과 실체에서 주체로의 이행이 “필연성이 사라짐으로써 필연성이 자유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것들 [필연성과 자유]의 내적인 동일성이 드러남으로써,
필연성이 자유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74) 그리고 그의 논리학은 전체인 이
념이 자기를 전개하는 모든 원리에 대한 해명이다. 즉 필연성도 사실은 이념
이라는 절대적 주체의 자신 전개 원리인 자유의 한 형태로 헤겔은 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에 따르면 필연성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실체도 사
실은 자유가 지배하는 개념의 다른 형태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헤겔은 사
실상 필연성이 자유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자유의 자기
부정적 모습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자유는 필연성과 등가적 관계를 형
성하지는 않지만 이념의 자기규정 원리로서 자기 자신을 타자로 두지 않으면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주체의 필연적 원리다. 그리고 그 주체는 자연이 아
니라 정신이며 개념이다. 따라서 자유라는 정신의 자기 전개 원리에 따라 정
신 자신이 발전하지만 정신의 발전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자기 원리이자 자신
의 본질인 자유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바로 헤겔적 의미에서 자유의 원리에
따르는 정신의 전개가 지니는 필연성이라고 볼 수 있다.

74) G. W. F. Hegel, Wissenschaft der Logik II, in: TW 6, 239쪽. 또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념 자신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필연성의 힘이자 실제적인 자유
다.”(G. W. F.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 in: TW 8,
§159).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93

Ⅵ. 결론

헤겔은 실정법이 자연법이나 계약을 통해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점은 그가 근대 자연법사상과 결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는 동시에 법이 인간의 자의적 합의나 전통 및 규약을 통해 정당화될 수 없
음을 주장한다. 이것은 헤겔과 역사법학자인 사비니의 대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헤겔은 법이 ‘필연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자연법이
론과 공유하는 지점이 있지만 그 필연성의 근거를 자연이 아니라 정신의 본
성(Natur) 또는 정신의 본질(Wesen)에서 찾으려 했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분
명히 근대철학적 입장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헤겔은 법이 자유로운 정신과 대립하는 자연에 의해서 필연성이 확보될
수 없다고 주장한 점에서 근대의 자연법이론을 비판하는 반면, 인간의 자유
에 의해 법이 정립된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역사주의법학파와
가까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헤겔은 법이 필연적 토대를 갖고 역사적으로 발전한다는 점을 설
명하기 위해 근대 자연법사상과 역사주의법학파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으려
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헤겔의 법개념은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
으로서 정확히 말하면 정신의 본성법(Naturrecht des Geistes)으로서 이해되어
야 하고, 또한 정신의 또 다른 형태인 역사 속에서 언제나 자신을 스스로 발
전시켜 나가는 정신의 한 형태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헤겔의 법개념은 근대 자연법사상이 찾고자 했던 법의 필연적 정당성을
정신의 본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함축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자연법사상
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법사상의 과제를 계승한다. 하지만 이렇게 헤
겔이 근대 자연법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는 점으로 헤겔의 법개념을 충
분히 해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헤겔은 근대 자연법의 한계를 지적함과 동
시에 법이 정신의 모습으로 이성적 발전원리에 따라 정신의 역사적 전개 과
정에서 권리의 형태, 도덕의 형태, 궁극적으로는 인륜의 형태로 발전하고 나
타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겔의 법개념을 충분히 해명하기 위해
서는 추상적 권리에서부터 최종적으로는 인륜적 국가의 실현까지 모두 살펴
94 헤겔연구 제52호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논문의 한계는 분명하다. 그것은 이 논문이 헤겔


의 법개념 전체를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단지 이 글은 헤겔의 법개념을
해명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계기로서 자연법과 헤겔의 법개념과의 관계에 주
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을 뿐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연
법과 헤겔 법개념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헤겔의 법개념을 해명하는 데
하나의 작은 기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투고일: 2022. 11. 07. 심사완료일: 2022. 12. 03. 게재확정일: 2022. 12. 03.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95

참고문헌

갈릴레오 갈릴레이, 새로운 두 과학, 이무현 옮김, 서울: 사이언스북스, 2016.


권영우, 「헤겔 철학의 왜곡사에 대한 소고」, 철학연구 125집, 대한철학회,
2013.
남기호, 「프로이센 왕정복고와 헤겔의 정치 법학적 입장Ⅱ: 할러와의 대결을
중심으로」, 철학연구 100호, 철학연구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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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헤겔연구 제52호

<Abstract>

Hegel's concept of law as a modified form of natural law

Kwon, Young Woo*


75)

Tasks of modern philosophy can be presented in two ways: justification of


knowledge and justification of laws and institutions. Hegel followed the
modern philosophical tradition since he made an effort to solve these two
problems of modern philosophy. However, Hegel did not follow the path of
modern philosophy to solve these problems. Among these two tasks, this
article aims to deal with Hegel's position related to searching for the ground
of justification for the law. As the doctrine of the theory of the Divine of
Right of Kings began to collapse, these two ways to legitimate the law could
be concerned. One refers to the theory of ​natural law that the justification of
law can be found in the unchanging natural order or human nature like the
law of nature. The other is the position of the school of historical
jurisprudence. According to this school, there is no necessary principle of law
so that law is just formed through accidental customs and historical processes.
On one hand, Hegel criticized the modern theory of ​natural law and pointed
out that the law could not be justified by human nature, natural order, or any
social contract. It showed that Hegel's concept of law was breaking with the
modern theory of ​natural law. On the other hand, Hegel denied the position
of the school of historical jurisprudence. Although Hegel criticized both
positions, he did not seem to stay completely far from these two positions
because Hegel criticized the theory of natural law, but tried to find the
necessary determination of positive law in the essential nature of spirit.
Therefore, Hegel's concept of law could be regarded as a modified form of

* Associate Professor, Dep. of Philosophy, Korea University


변형된 형태의 자연법으로서 헤겔의 법개념 99

natural law because he attempted to search for the necessary and objective
justification for law like the natural law idea. Although Hegel sought the
ground of justification for law not in nature, but in freedom, that was the
essence of the spirit. Thus, Hegel's concept of law could not belong to any
theory of natural law. It could be said to be a modified form of natural law
as law of nature of spirit.

Key Words: natural law, justification of law, Hegel’s philosophy of right,


essence of spirit, the historical school of jurisprudence,
critique of theory of natural 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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