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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同 논 문 집
제23집 2003. 12.

*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 1)

이 찬 훈**
2)

요 약 문
서구의 실체론적 사고에 대한 대안으로 각광받는 화이트헤드 철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화엄불교와 화이트헤드의 과정 형이상학을 비교 연구하여 왔다. 그런데 그동안 이런 비교 연구
가 주로 화이트헤드의 입장에 서 있는 서구 학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도
드러나게 되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점을 검토함으로써 화엄불교와 화이트헤드 철학이 보다
올바로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보려는 시도이다. 스티브 오딘은 화엄철학과 과정 형이상학 사이
의 유사점을 인정하면서도 양자의 차이점을 강조한다. 그가 보기에 양자의 중대한 차이점은 인
과관계에 대한 설명방식이다. 그리고 오딘이 보기에는 과정 형이상학의 설명이 화엄철학의 설명
보다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화이트헤드의 과정 형이상학의 입장에 서
서 화엄철학을 비판한다. 그 비판의 핵심은 화엄철학이 인과적 시간구조와 개별자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엄철학에 대한 이런 일방적인 비판은 화엄철학의 개념들
과 그것을 관통하는 핵심적 사상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화엄철학의 핵심인 불이사상을 해명하고, 이에 기초해서 화엄철학의 근본적 관점을 밝히고 화엄
철학에 대한 오딘의 비판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또한 본 논문은 그 바탕 위
에서 화엄철학과 화이트헤드 과정 형이상학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 주요어 : 화엄불교, 과정 형이상학, 불이사상, 상즉과 상입, 사사무애, 인과관계.

* 이 논문은 2002년도 인제연구장학재단 국외연수지원에 의한 연구결과임.


** 인제대학교 인문문화학부 교수.
2 이 찬 훈

1. 서론
오랫동안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세계관은 세상 만물을 고립된 실체로
간주하는 원자론적이고 기계론적인 세계관이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인간과 자연, 나와 너, 몸과 마음을 비롯한 세계의 온갖 것들을 고립된 것
으로 취급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한편으로 이 세계를 엄밀하게 분석하
여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도구적 이성을 주었다. 그러나 한때 찬란
한 물질문명의 발달을 촉진하면서 인간에게 눈부신 미래를 약속하는 것
같았던 도구적 이성의 대가는 생각보다 쓰라린 것이었다. 인간과 자연,
나와 너, 몸과 마음, 세상 만물을 고립되고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는 이러
한 사고방식은 필연적으로 모든 것의 분리와 경쟁과 정복과 지배의 논리
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결국 생태계의 위기, 공
동체 붕괴의 위기, 인간적 삶의 상실과 같은 현대문명의 심각한 위기상황
을 초래하고 말았다.1)
그렇지만 서구에서도 이러한 원자론적이고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이 세계 전체를 상호의존적으로 통합된 전체와 과정으로 파악하는 유기
체적인 형이상학적 관점을 제시한 현대 서양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 과정 형이상학은 서구의 원
자론적인 실체론에 대한 중요한 대안적 세계관으로서 많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리고 화이트헤드 철학을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은 동양의 여러 철
학 사상들 그 중에서도 특히 불교의 화엄사상과 화이트헤드의 철학 사이
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서구의
많은 화이트헤드 학자들은 화엄불교와 화이트헤드의 과정 형이상학을 비
교 연구하여 왔다. 그런데 그동안 이런 비교 연구가 주로 화이트헤드의
입장에 서 있는 서구 학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
도 드러나게 되었다.2)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점을 검토함으로써 화엄불

1) 서구의 경쟁과 승리, 정복과 지배의 논리와 가치가 초래한 현대 문명의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해서는 이찬훈, 둘이 아닌 세상 , 이후, 2002, 3부 1장 참조.
2) 하와이 대학의 스티브 오딘을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 들 수 있다. 오딘은 현대의 대표적인 화
이트헤드 학자 중의 한사람이자 화이트헤드 철학과 화엄불교의 비교연구에서 커다란 영향력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 3

교와 화이트헤드 철학이 보다 올바로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보려는 하


나의 시도이다.
화엄철학과 화이트헤드의 과정 형이상학은 세상 만물을 유기적 연관성
과 과정 속에서 파악하는 유사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양자 사이에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스티브 오딘은 화엄철학과 과정 형이상학 사이에 존
재하는 유사점을 인정하면서도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강조한
다. 그가 보기에 양자 사이의 중대한 차이점은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방식
이다. 그리고 오딘이 보기에는 과정 형이상학의 설명이 화엄철학의 설명
보다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화이트헤드의 과정
형이상학의 입장에 서서 화엄철학을 비판한다. 그 비판의 핵심은 화엄철
학이 인과적 시간구조와 개별자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부정한다는 것이
다.
그러나 화엄철학에 대한 이런 일방적인 비판은 화엄철학의 개념들과
그것을 관통하는 핵심적 사상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화엄철학을 관통하는 불이사상을 해명하고, 이에 기
초해서 화엄철학의 근본적 관점과 견해를 밝히고 화엄철학에 대한 오딘
의 비판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또한 본 논문은 그
바탕 위에서 화엄철학과 화이트헤드 과정 형이상학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서로 상당히 다른 공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탄생한 화엄철학과 화이트

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이다. 특히 서양인들에게는 상당히 난해하게 여겨질 화엄불교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오딘이 화엄불교에 가한 해석, 그리고 그것과 화이트헤드 철학과의
비교연구는 화이트헤드 연구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 방면에서 그의
영향력은 단지 서구 학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전문 연구영역 간의 간극 탓으로 화
엄불교가 비교적 낯선 국내의 많은 화이트헤드 연구자들도 이 분야에서 오딘의 견해를 대체
적으로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화이트헤드 학회에서 만난 국내의 여러
화이트헤드 연구자들로부터도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화엄불
교에 대한 오딘의 해석과 그에 기초한 화엄불교와 화이트헤드 철학의 비교는 상당한 문제점
을 갖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국내에서 올바른 화엄불교의 관점에
서서 화엄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을 비교 설명하려는 시도는 거의 전무한 형편이었다. 이러
한 상황에서는 자칫 화엄불교에 대한 오해와 그에 따라 화이트헤드 철학과의 상당히 왜곡된
비교연구가 계속적으로 재생산될 소지가 다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본 논문은 화
엄불교의 입장에 서서 화엄철학을 오딘과 달리 해석하고 이에 기초해서 화엄불교와 화이트
헤드 철학을 새롭게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실마리를 열어보고자 한다.
4 이 찬 훈

헤드의 과정 형이상학이 갖고 있는 공통점과 차이를 올바로 드러내고 이


들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은 동서와 고금의 사상들을
서로 회통시켜 진정으로 생명력 있는 철학 사상을 가다듬어 내어 현대
문명이 부딪친 수많은 문제들을 해명하고 해결해 나가려는 노력의 일환
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과정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행하는 화엄사상의 비판적 분석


지금까지 화엄철학과 화이트헤드의 과정 형이상학을 비교 연구한 사람
들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 중에서도 프란시스 쿡(Francis H. Cook)은 화
엄불교와 화이트헤드 과정 형이상학의 유사점을 강조한 대표적인 학자라
고 할 수 있다. 쿡은 “‘존재한다는 것은 원인의 영향을 행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화이트헤드의 진술은, 하나의 원자에서부터 우주 그 자
체까지 우주 내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다른 모든 것들을 위한 원인으
로 작용한다는 화엄의 우주관과 매우 유사하다”3)고 주장한다.
스티브 오딘(Steve Odin)은 그러한 쿡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화엄불교와
화이트헤드에 의해 전개된 우주론적 인과관계론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
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두 체계에 의해 전개된 논의 모두가 “개개의
사건은 우주 속의 모든 다른 사건과 인과관계를 맺음으로써 순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사건)은 그 자신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로서
그들 모두를 포함한다는 것”을 주장한다고 간주한다.4) 또한 오딘은 화이
트헤드가 정식화한 현실태의 유기체적 개념이 원융회통과 걸림 없는 호
용이라는 화엄이론과 분명히 근접함을 보인다고도 주장한다.5) 특히 그는
“연속체는 각 현실적 존재자 속에 현재하고 그리고 각 현실적 존재자는
그 연속체에 침투해 있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은 “수축하면 모든 사물들
이 한 터럭의 먼지 속에 드러나고, 확장되면 한 조각의 먼지는 모든 것에
보편적으로 퍼져간다”고 하는 법장의 선언과 극히 유사하다고 간주한

3) F.H. Cook, Hua-yen Buddhism : The Jewel Net of Indra, The Pennsylvania State Univ.
Press, 1977, p. 73. 문찬주 옮김, 화엄불교의 세계 , 불교시대사, 1994년, 144쪽.
4) S. Odin, Process Metaphysics and Hua-yen Buddhism : A Critical Study of Cumulative
Penetration Vs. Interpenetration, State Univ. of New York Press, 1982, p. 2. 안형관 옮김,
과정형이상학과 화엄불교 , 이문출판사, 1999, 47쪽.
5) S. Odin, 같은 책, 같은 곳. 안형관 옮김, 앞의 책, 같은 곳.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 5

다.6)
이처럼 오딘은 화엄불교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이 상당한 유사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중대한 차이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딘이 양자의 중대한 차이점이라고 간
주하는 것은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그가 보기에 화엄불교와 화이트
헤드는 모두 만물이 인과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공통
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방식에서는 커다란 차이
를 보이고 있다.
오딘은 의상의 해인도를 분석하여 화엄불교의 인과관계론을 설명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화엄불교에서 모든 법(dharma)은 공간적 의미에서 상
입할 뿐 아니라 보다 엄격한 시간적 의미에서도 상입하여, 하나의 법은
그 선행하는 것들로부터 인과적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동시적인 것들과
후속하는 것들로부터도 마찬가지로 인과적 영향을 받는다.7) 즉 그가 보
기에 화엄의 입장에서 작용인은 과거, 현재, 미래의 방향에서 동일한 힘
으로 흘러나와 세 시간대에 있는 모든 사건들 사이에 동시상입의 조화와
무애 상호함용을 이룬다.8) 이러한 화엄불교의 입장을 오딘은 ‘전적으로
대칭적인 인과관계 이론’9)이라고 부른다.
오딘에 따르면 이에 반해서 화이트헤드의 과정이론에 의하면 과거, 현
재, 미래의 사건들은 화엄불교에서처럼 하나의 사건 속으로 모두 상입하
지 않는다. 모든 사건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인과적 영향이 한 방향으로
흐르면서 그 후속자들에 누적적으로 진입한다.10) 즉 인과관계는 과거로
부터의 인과관계이거나 선행자들에 의해 조건지어진 것으로, 생기들 사
이의 진입이나 내재성은 구조적으로 항상 누적적이다.11) 이러한 입장을
오딘은 엄격히 비대칭적인 인과적 전이의 이론에 의해 구성된 ‘누적적 융
섭’, ‘누적적 내재성’, ‘누적적 진입’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12)
오딘은 전적으로 대칭적인 양식으로 만물의 완전한 상입 또는 상호융

6) S. Odin, 같은 책, p. 70. 안형관 옮김, 앞의 책, 162쪽.


7) S. Odin, 같은 책, p. 3. 안형관 옮김, 앞의 책, 같은 곳.
8) S. Odin, 같은 책, 같은 곳. 안형관 옮김, 앞의 책, 49쪽.
9) S. Odin, 같은 책, 같은 곳. 안형관 옮김, 앞의 책, 같은 곳.
10) S. Odin, 같은 책, 같은 곳. 안형관 옮김, 앞의 책, 같은 곳.
11) S. Odin, 같은 책, 같은 곳. 안형관 옮김, 앞의 책, 같은 곳.
12) S. Odin, 같은 책, 같은 곳. 안형관 옮김, 앞의 책, 같은 곳.
6 이 찬 훈

섭과 같은 동시상호 인과관계나 동시상호성립을 주장하는 화엄의 입장은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래서 그는 이보다는 사건들의
비대칭적인 누적적 진입을 주장하는 현실태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과정모
형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13) 오딘은 현실을 대칭적인 상호의존관계
로 설명하려는 화엄철학의 문제점은 각 사물들의 개별성과 새로운 존재
의 발생에 따르는 창조성이나 새로움 및 자유 같은 것들을 모두 부정하
게 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가 보기에는 만약 화엄철학에서처럼 각 사
건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관계들은 양끝
에서 닫히거나 결정되어 있어서, 창조성, 새로움 및 자유를 위한 자리가
없다.14) 이런 이론에 따르면, 각 단위사건은 그 인과적 관계와 조건들로
남김없이 요소화되거나 환원적으로 분석될 수 있으며, 각 사건이란 그 원
인들로 완전히 환원되는 하나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엄불교의 이
론은 결국 총체적 결정론이라 할 수 있다.15) 오딘은 이런 화엄불교에 비
해, 화이트헤드의 누적적 진입의 형이상학이 인과과정에 대한 설명이론
으로서 더 명확하며16), 그것이 자유 대 결정론과 같은 근본적인 형이상학
적 문제에 대해 보다 정합적이고 논리적인 해답을 제시한다고 주장한
다.17)
오딘에 따르면 과정이론의 비대칭적인 보편적 상대성의 학설은 화엄의
이론과 달리 ‘자기창조나 결단의 자유’, ‘창조적 자유와 창발적 새로움’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비대칭성은 관계들이 한쪽 끝에서는 닫히거나 한정
되어 있고 다른 끝에서는 열려 있거나 무한정하여, 인과적 연속성과 창조
적 새로움의 여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18) 여기서는 어떠한 사건도 인과
관계로 환원되어 분해되거나 그 선행조건들로 남김없이 분석될 수 없
다.19) 모든 사건은 창발적 종합이다. 창조적 자기 결정성과 창발적 새로
움, 결단의 자유 등은 모두 경험적 종합으로서의 현실태 자체에 전적으로
고유하다.20)

13) S. Odin, 같은 책, 제3장 및 4장 참조.


14) S. Odin, 같은 책, p. 80. 안형관 옮김, 앞의 책, 179쪽.
15) S. Odin, 같은 책, p. 136 참조. 안형관 옮김, 앞의 책, 276쪽 참조.
16) S. Odin, 같은 책, pp. 53-54. 안형관 옮김, 앞의 책, 136쪽.
17) S. Odin, 같은 책, p. 4. 안형관 옮김, 앞의 책, 51쪽.
18) S. Odin, 같은 책, p. 77. 안형관 옮김, 앞의 책, 174쪽.
19) S. Odin, 같은 책, p. 78. 안형관 옮김, 앞의 책, 175쪽.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 7

이처럼 창조적 자기 결정성과 창발적 새로움을 갖고 이접적으로 주어


진 선행하는 사건들을 종합하는 모든 하나의 사물 또는 사건은 각기 고
유한 실재를 지닌 하나의 실체이다.21) 이 세상 만물은 모두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닌 환원 불가능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오딘은 화엄불교가 개
별적 특성을 지닌 실체라는 범주를 전적으로 포기하는 데 반해, 화이트헤
드의 학설은 실체의 범주를 철저하게 재정식화해서 살려내고 있다고 간
주한다.22)
이처럼 오딘은 과정 형이상학의 입장에 서서 화엄사상을 비판한다. 문
제는 화엄사상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분석이 과연 얼마나 올바른가 하는
것이다. 화엄철학은 오딘이 보는 것처럼 과거, 현재, 미래를 뒤섞어 과학
적 인과율을 무시하고, 개개의 사물들이 갖는 창조성, 자유, 개성 같은 것
들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총체적인 결정론에 빠진다고 할 수 있는가?
화엄사상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화엄철학에서 말하는 상즉과 상입, 사사무애 같은
개념들이나 거기에서 드러나는 인과관계의 개념에 대한 오해, 그리고 특
히 그러한 개념들을 관통하고 있는 불이사상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기인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화엄철학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불이사상이며, 화엄의 상즉과 상입, 사사무애 등의 개념에서 드러나는 불
이사상에 기초해서 이 세계의 존재방식을 이해할 때에 비로소 화엄불교
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고, 그때 비로소 다시 그것을 과정 형이상학과 소
통시킬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3. 화엄의 불이사상
화엄불교의 중요한 관심사는 상호인과적 관계에 의해 유기적으로 연결
되어 있는 우주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선 주의해야 하는 것은 여
기서 말하는 인과관계의 의미이다. 쿡의 지적처럼 화엄철학에서 인과관
계란 일반적으로 상호의존성 또는 상호조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23) 화

20) S. Odin, 같은 책, p. 136. 안형관 옮김, 앞의 책, 277쪽.


21) S. Odin, 같은 책, 같은 곳. 안형관 옮김, 앞의 책, 같은 곳.
22) S. Odin, 같은 책, p. 111. 안형관 옮김, 앞의 책, 231쪽.
23) F.H. Cook, 같은 책, p. 14. 문찬주 옮김, 앞의 책, 43쪽.
8 이 찬 훈

엄철학에서는 인과관계라는 개념을 대체적으로는 시간적 선후와 상관없


이 사물들의 상호의존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한다. 인과개념을 이
런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화엄불교에만 독특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
도 대승불교 전반에 공통된 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만물
의 상호의존성을 말하는 상입이라는 개념도 시간적인 인과작용을 의미하
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화엄철학의 대표자인 법장은 그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 의 마지막 부
분에서 건물과 그 부분들의 관계라는 유비를 통해서 우주 만물의 상호의
존적인 인과관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위에서 방금 말한 인과
개념의 특색이 잘 드러나 있다. 거기서 법장은 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만
물의 관계를 육상원융의( )란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
법장은 이 육상의 뜻을 우선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총상이란 하나에 많은 덕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며, 별상이란 많은 덕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니, 개별이 전체에 의지하여 머물면서
저 전체를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동상이란 많은 구성요소의 취지가 서로 어긋나
지 않아 함께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상이란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서
로 마주하지만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성상이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연기를 이루기 때문이다. 괴상이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스스로의 존
재형태로 머물러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24)

법장은 집과 그 부분들의 관계라는 유비를 통해서 이 뜻을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총상( )이란 집이 서까래 등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포함
하면서 하나의 집을 이루는 것처럼, 이 우주가 하나의 보편적 존재임을
말한다. 서까래 등과 같은 부분들은 각기 다르면서도 하나의 집을 이루는
부분들이라는 의미에서 집 전체라는 보편적 존재에 통합되어 있어 서로
다르지 않은 존재들이기도 하다. 또한 서까래 등의 각 부분은 전체 집에
속하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서까래 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별상( )이
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을 이루는 여러 부분들이 여전히 전체와는 구분
되는 특유의 성질을 가짐을 의미한다. 개별이 없으면 전체도 성립할 수

24) , 敎 卷4, 大 45, p. 507c. 多德故 多德 故


故同 多 同 故 多 各各 故
起 故壞 各 動故.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 9

없다. 서까래 같은 집의 여러 부분들이 전체와 다른 자신의 특성을 유지


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서로 합쳐 집을 만들 수가 있다. 그러므로 결국 전
체는 부분 때문에 그러한 전체일 수 있고, 부분은 전체 때문에 그러한 부
분일 수 있다. 전체는 부분에, 부분은 전체에 의존한다. 이처럼 부분은 전
체의 원인이며 전체는 부분의 원인이다.
동상(同 )이란 이 우주의 모든 존재자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말한
다. 집을 이루는 여러 부분들이 만약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라면 그
것들이 모여 하나의 집을 이룰 수 없다. 하나의 보편적 존재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서로 다르지 않은 성질을 가져야만 한다. 이상( )이란 우주의
여러 존재들이 각각 다른 존재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서까래 등
과 같은 여러 부분들이 모여 집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서로 다른
특성과 쓰임을 갖고 있어야 한다. 만약 모든 부분들이 서로 같기만 하다
면 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성상( )이란 이 우주가 수많은 요소들의 협동적인 조합에 의해서 이
루어짐을 의미한다. 서까래 등과 같은 모든 연들이 서로 모여 집을 이루
며, 집을 이루기 때문에 그것들은 서까래 등일 수 있는 것이다. 괴상(壞 )
이란 각 요소가 그 자신의 특성을 가진 개별자로서 여전히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서까래 등의 모든 구성 요소들이 그 자신의 특성을 상실하지
않고 남아 있어야만 그것들이 모여 집을 지을 수 있다.
육상에 대한 법장의 해설은 집 전체와 그 부분들이 상호의존하면서 존
재하고 있는 것처럼, 우주 속의 만물이 서로 상즉 상입의 상관관계 속에
서만 존재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주 만물의 상즉과 상입의 상관관계
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생각은 불이사상( )이
다. ‘불이’라는 말은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우주의 전체와 부분, 그리
고 각 부분들은 서로 둘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라고 할 수도 없고, 둘이
라고 할 수도 없으므로 둘이 아니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것들이 서로
전혀 다른 둘이라고 한다면, 그것들은 하나의 우주를 구성할 수 없다. 둘
이라고 하면 그것들이 하나의 우주를 구성한다는 서로 다르지 않은 성질
을 갖고 있음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애당초 하나라고 한다
면 역시 다양한 만물을 포함하는 우주는 있을 수가 없다. 애당초 그것들
이 하나라면 만물들 사이의 어떠한 구분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아무런
관계도 있을 수 없으며, 만물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우주도
10 이 찬 훈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것들은 하나라 할 수 없다. 만약 하나라고 한다면


그것들이 같지 않음을 표현할 수 없다. 육상에 대한 법장의 설명을 자세
히 들여다보면 그가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들이 서로 다르지 않으면서
도 같지도 않은 불이적 관계로 상즉 상입하고 있음을 얼마나 공들여 얘
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세 쌍의 개념들 중에서 총상(
), 동상(同 ), 성상( )은 모두 하나의 우주를 이루는 만물이 서로 다
르지 않음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별상( ), 이상( ), 괴상(壞 )은
모두 만물이 서로 같지 않음을 얘기한다.
만물의 상호의존관계를 표현하는 상즉 상입이라는 화엄철학의 개념은
오딘의 오해처럼 만물 상호간의 완전한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것은 서로 다르지 않으면서 같지도 않은 존재들이 서로의 개별적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함께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이 우주의 존재론적 관
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화엄철학은 만물의 고유한 창조성, 자유,
개별성을 무시하고 그것들을 그 원인과 조건들로 완전히 환원해 버리는
총체적 결정론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만물은 각자 자신의 개별
성을 확고히 갖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개별적 존재들의
상즉과 상입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체 우주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화엄철학이 개별적 사물의 창조성이나 특성을 무시하게 된다는 오딘의
오해는 결국 화엄철학의 불이사상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세상 만물이 불이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은, 우주 만물이 서로
상즉 상입하여 원융무애한 연기의 체계인 사사무애법계( 界)를
이루고 있음을 나타내는 십현문 속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화엄
논사들이 십현문25)을 통해서 밝히고 있는 이러한 불이적인 사사무애법계
라는 사상이야말로 화엄철학에서 말하는 법계연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만물의 공간적인 상즉 상입의 관계가 잘 드러나 있는 것

25) 상즉 상입의 원융무애한 연기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 사사무애법계를 설명하는 십현문을 법


장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同 具 廣 多 同 俱
羅 界 九 隔 具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 11

은 일다상용부동문( 多 同 )과 제법상즉자재문( )이
다. 먼저 법장은 일다상용부동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 일 속에 다를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일은 여전히 그 다가 아니다. …


그런데 이 일과 다는 또한 서로를 포함하고 받아들여서 자재롭고 걸리는 것이 없
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몸은 같지 않는 것이다.26)

여기서 드러나는 것처럼 우주 속의 각 사물은 다른 모든 사물을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으면서, 또한 스스로는 다른 모든 사물 속에 포함되는
존재이다. 이것은 우주 만물이 각기 고유한 개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우주
만물을 포섭하고 또 그에 포섭되는 상입의 관계에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제법상즉자재문은 개별적 사물이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는 다른 모
든 만물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스스로의 모습을 유지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법장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모든 법이 상즉하면서 자재롭다는 법문, 이것은 이 위에서의 여러 뜻이 하나


가 일체요 일체가 하나로서 서로 융합되면서도 자유자재함이 걸림 없이 이루어지
고 있다는 것이다.27)

이처럼 만물의 공간적인 상즉 상입의 관계 이외에, 시간적인 상즉 상입


의 관계를 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동시구족상응문(同 具 )과 십
세격법이성문( 隔 )이다. 먼저 동시구족상응문에 대해 법장은
이렇게 말한다.

동시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으며 서로 상응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법문. 이


위의 열 가지 뜻이 동시에 서로 상응관계를 이루어서 하나의 연기를 이룬다. 이것
들은 앞뒤 시작과 끝 등의 구별이 없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으며, 자유자재로
역과 순을 섞으면서도 또한 뒤섞여져 엉키지 않고, 연기의 궁극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해인삼매에 의하여 환하게 동시에 나타나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28)

26) , 敎 卷4, 大 45, 505a. 具 多 其多 .....


多 同
27) , 敎 卷4, 大 45, 505a.

28) , 敎 卷4, 大 45, 505a. 同 具 同


12 이 찬 훈

동시구족상응문은 각 사물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사물을 그 속에


구족하고 있으면서 그것들과 상응함을 의미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
든 사물은 하나의 사물 속에 들어있다. 만약 과거가 없다면 현재는 있을
수 없다. 현재 속에는 과거가 담겨 있다. 또한 현재 속에 미래가 담겨 있
지 않다면 미래는 도래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 속에는 미래가 담겨 있
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 미래는 서로 다르지 않고, 하나의 사물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전적으로 같기만 하다면 과거에서 현재가, 현재에서 미래가 출현
할 수는 없다. 과거 속에 이미 현재가, 현재 속에 미래가 이미 완전하게
들어 있어 새롭게 출현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현재가, 현재
로부터 미래가 출현할 수 있는 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서로 완전히 같
지만은 않을 때뿐이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의 만물이 서로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을 구족하면서도 서로 상응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서
로 다르지 않으면서도 또한 같지도 않은 불이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법장이 ‘앞뒤 시작과 끝 등의 구별이 없다( 等 )’고 한 것은 과
거, 현재, 미래의 사물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가 자유자재로 역과 순을 ‘섞으면서도 또한 뒤섞여져 엉키지 않는다(
)’라고 한 것은 그것들이 서로 같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다. 물론
等 이라든가 과 같은 말들을 그 자체로만 떼어놓고 보
면, 그것이 마치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을 없애버리고, 만물이 선행하는
것들은 물론 동시적인 것들과 후속하는 것들로부터도 시간적 의미에서의
인과적 영향을 받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면 이와 모순되는 과 같은 구절과 이것들을 조화시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절들을 시간적 의미에서의 인과적 상입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그 속에 포섭하면서도 여전히 서
로 같지 않은 자신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불이적 상입관계
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
할 때에만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원융하게 통하면서도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는 일견 모순된 듯한 주장을 조화시킬 수가 있다.
이러한 사정은 십세격법이성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법장은 이것

起 等 具 起 同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 13

을 이렇게 설명한다.

십세라고 하는 것은 과거미래현재의 삼세가 각각 과거미래현재를 지


니니 바로 9세가 되며 그리고 이 구세는 서로 상즉하기 때문에 하나의 총체의 경
우를 이룬다. 총체와 별체를 합하면 십세를 이룬다. 이 십세는 서로 다름을 갖추
면서도 동시에 나타나서 연기를 이루기 때문에 즉입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 에 “ 劫으로써 短劫에 들고, 단겁이 장겁에 들어간다. 때로는 백천대겁
을 일념으로 하니 일념이 백천대겁에 즉한다. 혹은 과거겁이 미래겁에 들고, 미래
겁이 과거겁에 든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자재롭게 시간과 겁이 무애하게
상즉상입하여 혼합융통을 이루고 있다.29)

여기서도 법장이 힘들여 얘기하고 있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총체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또한 각각 서로
같지 않다는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불이적 상즉 상입의 관계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불이적으로 상즉 상입하므로,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다르지 않으며(상즉), 과거 속에는 현재와 미래가, 현재 속에는 과거와 미
래가, 미래 속에는 과거와 현재가 들어있다(상입)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일부 글귀만을 따로 떼어 법장이 마치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
들이 아무 구분 없이 마구 뒤섞여 시간적 의미에서 인과 작용을 미친다
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불이적
상즉 상입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세상 만물이 불이적인 상즉 상입의 상호인과관계, 상호의존관
계에 있다는 것이야말로 사사무애법계를 설명하는 십현문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사무애법계의 불이적 상즉 상입의 모습을 무엇보다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의상의 법성게 이다. 이 속에서 우주
만물의 상즉 상입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
다.

하나 안에 일체 있고, 여럿 안에 하나 있네.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


일세. 한 티끌 속에 온 세상이 들어있고, 모든 티끌 역시 그러해. 한없이 먼 시간

29) , 敎 卷4, 大 45, 506c-507a. 過去 各 過


去 及 九 九 故 句 具
同 起故 得 故 經 劫 短劫 短劫 劫 大劫 念 念
大劫 過去劫 劫 劫 過去劫 劫
14 이 찬 훈

도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한없는 시간이라. 구세와 십세가 서로 부합하지


만, 뒤섞이는 일 없이 떨어져 서 있네.30)

법성게 의 이 구절은 세상 만물이 시공간적으로 서로 걸림 없이(무애)


상즉 상입( )하는 불이적 존재임을 잘 표현하고 있다.31) 의상은
이것을 총괄하여 “하나 안에 일체 있고, 여럿 안에 하나 있네.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일세”라고 한다. 그런 뒤에 그는 한 사물이 공간적
으로 걸림 없이 다른 모든 사물을 포섭하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사물에
포섭되는 관계를 “한 티끌 속에 온 세상이 들어 있고, 모든 티끌 역시 그
러해”라고 표현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각 고유한 존재자
로서 존재한다. 하나의 고유한 존재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라
고 부를 수도 없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존재한다. 이처럼 모든 것이 온
우주의 모든 존재자들과의 연관 속에서만 만들어지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티끌 속에도 온 우주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각각 고유한 특성을 지닌 개별적 존재자이면서도 다른
모든 것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으며 그러한 것들과 독립적이지 않은 불
이적 존재이다. 이것을 의상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의상은 한 순간이 시간적으로 영원한 시간을 포섭하는 동시에 영
원 속에 포섭됨을 “한없이 먼 시간도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한없
는 시간이라. 구세와 십세가 서로 부합하지만, 뒤섞이는 일 없이 떨어져
서 있네”라고 표현한다. 현재는 무한한 과거의 시간들을 담고 있으며, 또
한 미래에 펼쳐질 무한한 시간도 그 속에 품고 있다. 현재는 무한한 과거
가 응축된 점이며, 무한한 미래가 펼쳐져 나가는 기점이다. 따라서 매 순
간은 다른 순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매 순간이 똑같은 것도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 구세 십세의 모든 시간들
은 똑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 관계도 역시 서로 부
합하면서도 뒤섞이지는 않는 불이적 관계라고 할 수밖에 없다.

30) 동국대학교 출판부 발행, 한국불교전서 (1979) 제2책, 1쪽에 실려 있는 의상의 화엄일승법
계도 참조. 多 , 多 . , . 劫
念, 念 劫. 九 , 亂隔 .
31) 이하 의상의 법성게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이찬훈, 앞의 책, 164-165쪽 참조.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 15

오딘은 법성게의 이 구절을 분석하면서, 화엄불교의 입장은 모든 법이


공간적 의미에서 뿐 아니라 시간적 의미에서도 상입한다고 주장하기 때
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마구 뒤섞여 시간적 인과 작용을
미친다고 하는 ‘전적으로 대칭적인 인과관계 이론’에 떨어진다고 설명하
였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가 설명했듯이 화엄불교를 관통하고 있는 만물
의 불이적 상즉 상입관계라는 관점에서 이 구절을 이해한다면 그러한 오
해는 해소되어 버린다.
더구나 여기서 의상이 일반적으로 만물의 상즉 상입의 관계를 주장하
면서도 공간적 의미에서 만물의 상즉 상입의 관계를 설명할 때와 시간적
의미에서 만물의 상즉 상입을 설명할 때에는 미묘한 차이를 두고 있음에
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상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만물의 공간적인 상
호 관계를 설명할 때에는 하나의 사물 속에 만물이 들어있고, 만물 속에
하나가 들어있는 상입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에 나타나는 이라는 글자가 잘 표현하고 있다. 반면에
시간적인 만물의 상호 관계를 설명할 때에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사건들
이 서로 부합하면서도 따로 떨어져 서 있다는 상즉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劫 念 念 劫九 亂隔
에 나오는 이라는 글자가 잘 표현하고 있다. 물론 불이적인 관점에
서 볼 때, 공간적인 만물의 관계나 시간적인 만물의 관계는 모두 상즉 상
입하는 것으로서 문제가 없는 것이지만, 의상의 주도면밀한 표현은 자칫
시간적인 인과관계를 마구 뒤섞어놓는 것처럼 오해할 여지마저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법성게의 글귀 어디에서도 과거, 현재, 미래가 구분 없
이 뒤섞이면서 시간적인 인과 작용을 주고받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근거
는 찾을 수 없다.

4. 화엄철학과 과정 형이상학의 관점
이상에서 우리는 화엄불교에 대한 오딘의 비판이 화엄철학에 대한 상
당한 오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혔다. 우리는 육상의에 대한 설명을 중심
으로 화엄철학에서 인과관계는 대체적으로 시간적 선후와 상관없이 사물
들의 상호의존관계를 나타낸다는 것, 그리고 상호의존관계에 있는 세상
만물은 불이적 관계라는 것을 보았다. 또한 우리는 사사무애법계를 설명
16 이 찬 훈

하는 십현문을 중심으로 화엄의 상즉 상입은 만물의 완전한 동일성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각기 서로를 포함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르지 않으면서도 또한 여전히 각자의 특성을 유지하는 불이적 관
계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사물들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화엄철학이 과
거, 현재, 미래를 마구 뒤섞어 과학적 인과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며, 개
개의 사건이 갖는 창조성, 자유, 개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총체적 결정론
도 아님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만물의 불이적 상즉과 상입 관
계에 대한 관점은 의상의 법성게에서 가장 명확히 표현되어 있으며, 오히
려 거기에서야말로 우리는 화엄불교에 대한 오딘의 이해가 상당한 오해
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도 보았다.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태어난 화엄불교와 과정 형이상학의 사상
적 배경이나 주된 관심사와 목표 같은 것들에 상당히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화엄사상을 과정 형이상학과 똑같은 지평
으로 끌어내려 단순히 재단하려는 것은 무리이다. 화엄불교는 자연과학
의 심대한 영향을 받은 화이트헤드와 달리 만물의 생성 메커니즘에 대한
상세한 인과적 설명을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 애당초 만물 생성의 시간적
인 인과적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려고 하지 않는 화엄사상을 가
지고 그것에 대한 화엄불교의 설명은 잘못된 것이고, 그 때문에 과정 형
이상학이 더 낫다는 주장은 상당히 무리한 주장으로 보인다.
화엄불교는 세상 만물의 존재 방식에 대한 근원적인 깨달음에 기초해
서 중생을 자유롭고 고통 없는 해탈의 경지로 이끈다는 불교의 근본적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다만 화엄불교는 그 나름의 독특한 개념을 통해
이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할 뿐이다.
인도의 공(空)사상에서는 인연에 따라 생성 소멸하는 만물을 본래 공한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엄밀히 보면 공이라는 것도 사실은 유무불이의 중
도임에 틀림없지만, 아무래도 공이라 할 때에 강조점은 각 사물들이 갖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실체성을 타파하는 부정적인 성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는 사물들이 실체성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하는 것이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여기서는 만물이 갖고 있는 연기적
공성을 깨달아 모든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해탈의 경지에 이르
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 17

화엄철학은 이와는 다른 미묘한 차이점을 갖고 있다. 화엄철학에서는


우주가 만물이 상호의존하고 있는 하나의 세계(사사무애법계)임을 강조
한다. 만물은 서로 서로 의지하고 있으며, 개별은 전체에, 전체는 개별에
의존하고 있다. 아무리 작은 사물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것이 없다면, 우
주는 이미 같은 우주라 할 수 없다. 만물을 포섭하는 동시에 만물에 포섭
되는 사물 하나하나는 우주 전체를 지금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하게 만드
는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이 우주는 그러한 절대적 가치를 갖고 있
는 다양한 만물들이 어우러져 엮어내고 있는 장엄한 화엄 세계이다.32) 이
런 화엄철학의 입장은 인도의 공사상과는 그 강조점이 상당히 다르다. 여
기에는 개개의 사물이 갖는 가치에 대한 강한 긍정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화엄철학이 개별 사물의 실체성에 사로잡히는 것은 결
코 아니다. 세상 만물은 각기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독특한 존
재요,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상 만
물은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모든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다
른 것에 영향을 주면서 존재한다. 화엄철학에서는 이러한 만물의 상호관
계를 철저하게 불이적인 상즉 상입의 관계로 파악한다.
화엄철학이 철저한 불이적 관점에 서 있다는 것은 유무에 대한 그 견
해 속에서도 볼 수 있다. 무릇 존재하는 것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며, 고정적인 독립적 성질( )
을 갖고 있지 않다. 즉 모든 존재는 무아( )이며 무자성( )이다. 그
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결국 공(空)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이라고 함은
유무불이( )인 상태를 의미한다. 유무불이는 있음과 없음이 둘이
아님을 말한다. 세상 만물은 고정된 자성이 없고 여러 가지의 관계(인연)
에 따라 일시적으로 성립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실은 그 자체로 존
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동
시에 또한 그것은 존재하고 있음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
다.33)

32) 개별자의 가치를 이와 같이 강조하는 화엄철학의 입장에 대해서는 이미 쿡이 적절하게 지


적한 바 있다. F.H. Cook, 앞의 책, pp. 49, 67 등을 참고. 문찬주 옮김, 앞의 책, 102-103,
135쪽 등을 참고.
18 이 찬 훈

화엄철학이 유무에 대해 이처럼 철저한 유무불이의 관점을 취하고 있


음은 삼성( )에 대한 법장의 설명 속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삼성은 유
무불이라는 존재의 참 모습을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한 것이다. 법장은
존재의 궁극적인 참 모습인 진여는 본래 불변하는 것으로서 아무런 모습
이 없으므로 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한 그것이 인연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유라고 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
는 현상계에 존재하는 만물의 모습은 인연에 따라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므로 유( )라고 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은 자성이 없으므로 무라고
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중생의 마음의 집착 속에서 만물
은 있다고 느껴지므로 있다( )고 할 수 있으면서도, 이치상으로는 사실
없는 것( )이라고 설명한다.34)
법장은 ‘문답에 의한 결택’ 부분에서도 삼성 각각의 유무에 대한 질문
에 대해 모두 부정으로써 답함으로써, 존재의 참모습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유이면서도 무인 것도 아니고, 유도 아니면서 무도 아닌 것도 아
니라는 것, 즉 유무불이임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라의 표원은 법장을 비롯한 화엄철학의 정수를 해설한 그의 뛰어난
책 속에서 존재의 참 모습은 바로 이러한 유무불이에 있음을 다음과 같
이 표현하고 있다.

는 로써 체를 삼으니 사절의 바깥이 끊어진 것이다. 그런 연후에 假


에 의탁해서 명목을 무라 하고 또 유라 한다. 유가 무와 다르지 않고 무는 유와
다르지 않는 유와 무는 불이이니, 이를 여의 체로 삼는다. 유는 무와 다르지 않으
니 일여이다. 무는 유와 다르지 않으니 이고, 는 둘이 없으니 여여의 체
로 삼는다.35)

이렇게 볼 때 결국 화엄철학이 도달한 존재론적 진리는 우주 만물과


유무가 불이라는 것이다. 화엄철학은 우주의 이러한 존재론적 진리를 밝
힘으로써, 원융무애한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다. 불

33) 이상의 유무불이에 대한 설명에 관해서는 이찬훈, 앞의 책, 181쪽 참고.


34) , 敎 권4, 大 45, 499a 참조.
35) , 經 決 答 , 東國大 校 刊 內, 國 敎 ,
國 敎 , 2-371 중. 寄假

. 한글 번역은 황규찬( 신라 표원의 화엄학 , 민족사, 1998, 220쪽에 따름).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 19

이적 관점의 핵심은 일과 다, 유와 무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이다. 각 사물의 개별성만을 강조한다면 만물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간과
하여 전체를 무시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우주의 총체성만을 강조한
다면 만물이 서로 같지 않음을 간과하여 개별적인 것들을 무시하는 잘못
을 저지를 수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음만을 보고 그
것이 근원적으로는 무상한 것(무)임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집
착함으로써 수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게 된다. 반면에 우리가 없음에 사로
잡혀 모든 것을 그저 공허한 것이라고만 간주한다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짐으로써 생의 모든 의미와 목표와 가치를 상실해 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있음과 없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유무불이라는 확
고한 중도의 입장을 취해야만 한다.36)
불이적 통찰에 도달한 사람은 우주와 나는 둘이 아니며( ), 너와
나는 둘이 아니며( ),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님( )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을 얻을 때 원융무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해탈의 경지가 열린다. 우주와 나,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를 자연과 분리시켜 스스로 자연 위에 군림하면서 자연을 소
유하고 지배하여 우리의 무한한 욕망만을 충족시켜 나가려는 비뚤어진
인간 중심주의( )와 쾌락주의의 족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은 우
리를 왜곡된 무한한 욕망의 지배로부터 해방하고 우리의 삶의 터전인 자
연과 공생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된다. 타인과 내가 서로 둘이 아닌 존
재임( )을 깨달을 때, 우리는 분리와 경쟁의식( )이 아니라 너와
네가 둘이 아니라는 의식에 기초한 공생과 상생의 공동체적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나아가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님( )을 깨달을 때, 우리
는 값진 인생에 대한 진지한 반성도 없이 맹목적으로 나의 삶에만 집착
( ,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 가치 있는 인생을 위해 힘껏 노력하
다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불이적 통찰에 기
초해서 나와 내 것, 생사의 온갖 집착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어
떠한 것에도 걸리지 않는 무애의 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무
애행을 할 수 있게 된 사람은 자연히 타자(중생)를 위하는 지극한 보살행
을 행하게 된다.37)

36) 유무불이에 대한 이런 태도에 대해서는 이찬훈, 앞의 책, 194-5쪽 참조.


20 이 찬 훈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화엄불교는 이 세상 만물이 생성되는 메커니즘


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만물을 담고 있는 우주 전체의 존재론적
진상에 대한 근원적 통찰을 제공하고, 그에 기초해서 고통에 찬 이 세계
로부터 벗어나 걸림 없는 무애행과 지극한 보살행을 실천해 나갈 수 있
도록 중생들을 이끄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상즉 상입하
는 상호의존적 우주에 대한 화엄불교의 설명은 과학적이고 이론적이라기
보다는 역시 종교적이고 실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비교해 볼 때, 화이트헤드의 관점은 보다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이
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적으로 정교한 우주론을 제시하는 일
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설명하려고 하는 철학
의 구도를 ‘유기체의 철학’이라고 하면서38) 그가 의도하는 바는 “우주론
의 관념들을 압축시킨 구도를 제시하고, … 궁극적으로는 모든 특수한 논
제를 서로 결합시킬 수 있는 충분한 우주론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데 있
다”39)고 얘기한다.
화이트헤드는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관계와 과정 속에서 존
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철학을 ‘유기체의 철학’이라
부른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다른 것들과
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어떠한 존재
도 우주의 체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서는 파악될 수 없다”40)고 표현한
다. 이렇게 볼 때 화이트헤드가 파악하는 우주는 그 속에 존재하는 만물
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호 관계 속에서 결합되어 있는 상호의존성의
우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우리가 본 화엄불교의 우주관과
매우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우주 속에 존재하는 현실적 존재가 어떻게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는가를 설명할 때, 그것을 주로 현실적 존
재가 과거의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또 미래의 다른 존
재들과의 관계 속으로 객체화되어 가는 시간적 과정 속에서 설명한다. 이
런 화이트헤드의 생각은 역시 화엄불교가 얘기하는 시간적 상즉 상입의

37) 불이적 통찰에 기초한 무애행과 보살행에 대해서는 이찬훈, 앞의 책, 3부, 4장을 참조.
38) A.N.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유기체적 세계관의 구성 , 오영환 옮김, 민음사, 1991, 39쪽.
39) 앞의 책, 41쪽.
40) 앞의 책, 50쪽.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 21

관계와 유사하다. 다만 화이트헤드는 화엄불교와는 달리 현실적 존재들


의 구체적인 생성 메커니즘을 보다 과학적으로 상세히 밝히려 한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가 주어진 여건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
는 활동을 ‘파악’이라고 부른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41) 파악은 세 가지
요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a) 파악하는 주체, 즉 그 파악을 자신의
구체적인 요소로 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 (b) 파악되는 <여건>, (c) 그 주
체가 그 여건을 파악하는 방식인 <주체적 형식>이다.42)
그리고 파악하는 주체가 파악되는 여건을 파악할 때 거기에는 두 종류
의 파악이 있다. 그것은 ‘느낌’이라고 부르는 ‘긍정적 파악’과 ‘느낌으로부
터 배제하는 것’이라고 부르는 ‘부정적 파악’이다.43) 하나의 현실적 존재
가 생성되려면 우선 과거의 여건들로부터 어떤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
아들여야만 한다. 이것이 곧 ‘긍정적 파악’이다. 그러나 어떤 일정한 현실
적 존재가 생성되기 위해서는 또한 주어진 여건 가운데서 어떤 것들은
배제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주어진 여건 모두를 받아들인다면 독특한 성
격을 가진 현실적 존재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부정적
파악’이다. 현실적 존재는 주체가 과거의 여건으로부터 어떤 것들은 긍정
적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들은 배제하면서, 그것들을 그만의 독특한 형
식으로 만들어 나갈 때 생성된다. 이것은 변증법에서 말하는 변증법적 지
양의 과정과 흡사하다.
화이트헤드는 수많은 파악들을 통일하여 하나의 현실적 존재가 생성되
는 과정을 합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합생의 과정에는 창조성의 원
리가 작용한다. 합생 과정에서 주체는 주어져 있는 여건을 있는 그대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생성하는 현실적 존재
는 여건으로 주어진 기존의 현실적 존재들의 내적 구조에 의해 어느 정
도는 결정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현실적 존재의 생성 과정에
는 주체 자신의 결단에 맡겨지는 측면, 주체 자신의 주체적 성격, 주체적
지향에 의해 규정되는 측면도 또한 분명히 있다. 이런 측면을 화이트헤드
는 창조성이라 부른다. 그에 따르면 “<창조성>은 <새로움>의 원리이다.
현실적 계기는 그것이 통일하고 있는 <다자>에 있어서의 어떠한 존재와

41) 앞의 책, 82쪽.
42) 같은 곳.
43) 같은 곳.
22 이 찬 훈

도 다른, 새로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창조성>은 이접적인 방식의 우주인


다자의 내용에 새로움을 도입한다.”44) 창조성은 여건으로 주어진 현실적
존재들에다 주체가 지향하는 새로움을 끌어들이면서 하나의 새로운 현실
적 존재를 생성해 낸다. 그러므로 창조성은 “이접적 방식의 우주인 다자
를, 연접적 방식의 우주인 하나의 현실적 계기로 만드는 궁극적 원리이
다.”45)
현실적 존재는 주체가 주어진 여건들에 의해 어느 정도는 결정되면서
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주체적인 지향에 따라 그것들을 선택하고 가
공해 가면서 ‘만족’에 이르게 될 때 존재하게 된다. 그 때 비로소 독특한
개성을 지닌 새로운 하나의 현실적 존재가 생성된다. 만족은 “현실적 존
재를 구성하는 합생 과정의 마지막 위상”46)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생 과
정 속에서 생성된 새로운 현실적 존재는 결코 실체적으로 그 자리에 머
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그 자체가 하나의 현실적 존재로서 새로
이 생성하는 현실적 존재들의 한 여건으로서 그것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
에 객체화되어 간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주 속의 모든 현실
적 존재들은 서로 연결된 거대한 하나의 유기적 체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5. 결론
어떤 두 사상 체계가 대화를 나누는 의미는 서로 다르지 않은 공통의
관심사나 관점 같은 것을 확인하여 상대와의 동질감을 확대하고, 서로 같
지 않은 부분 중에서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상대로부터 빌려와 보완하
고, 서로 대립하는 부분은 상호 비판을 통해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 나
감으로써 둘 다 한 차원 높은 사상 체계로 발전해 나가는 데 있다.
그런데 두 사상 체계가 대화를 진행할 때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 중
의 하나는 자신과 같지 않은 상대방의 견해를 넓게 포용하지 못하고 그
것을 끝까지 자신의 사상 틀에다 맞추어 재단해 버리려 하는 것이다. 많
은 경우 차이는 서로를 풍부하게 해 주고 보완해 줄 수 있는 것임에도 불

44) 앞의 책, 78쪽.
45) 같은 곳.
46) 앞의 책, 85쪽.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 23

구하고, 흔히 그것을 자신과 서로 용납할 수 없이 대립하는 것으로 오해


해서 자신의 관점에서 그것을 비판하고 그것을 섣불리 교정하려고 하는
잘못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두 사상 체계 사이의 생산
적인 대화와 대화를 통해 쌍방 모두가 한 차원 높게 발전하기를 기대하
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두 사상 체계의 대화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서로
의 차이를 충분히 인정하고 그것들이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지 않는 한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는 겸
허한 태도를 취하는 일이다.
우리는 화엄불교와 화이트헤드 과정 형이상학이라는 두 사상 체계의
대화에서도 이 같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오딘과 같이 화이트
헤드의 과정 형이상학의 입장을 따르고 있는 철학자들이 그 사상 체계의
우월함을 주장하면서, 화엄불교처럼 그것과 비교되는 사상 체계의 결함
을 지적하고 그것을 비판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밝혔듯이, 다른 문제의식과 관심 또는 목적을 갖고
있는 화엄사상을 과정 형이상학의 틀로 재단하여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자연과학의 세례를 받은 화이트헤드
와 달리 화엄불교에서는 만물의 생성 메커니즘에 대한 시간적인 인과적
설명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화엄불교의 시간적 인
과관계에 대한 설명은 잘못된 것이고 화이트헤드의 관점이 더 합리적이
라는 주장은 상당히 초점을 잘못 맞춘 주장임을 지적하였다. 또한 우리는
화엄철학의 핵심사상인 불이사상의 틀로 화엄불교를 해석한다면 화엄불
교에 대한 오해의 상당한 부분이 해소될 수 있으며, 그것을 과정 형이상
학과 서로 용납할 수 없이 대립한다거나, 과정 형이상학을 통해 교정되어
야 마땅한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지적하였다.
우리는 화엄불교와 화이트헤드의 과정 형이상학의 관점은 서로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음도 이미 보았다. 화엄불교는 상즉 상입하면서 상호의존
하고 있는 우주 전체의 존재론적 진리에 대한 근원적 통찰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중생들을 고통에 찬 이 세상으로부터 구원하려는 종교적이고
실천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다. 이에 비해 화이트헤드는 시간적인 인과관
계와 과정 속에서 존재하는 만물의 생성 메커니즘을 상세하게 밝혀 보다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정교한 우주론을 제시하는 일을 과제로 삼고 있었
다.
24 이 찬 훈

그러나 이런 차이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서로에게 부족한 면을 보완해


주어 서로를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차원의 것이지 서로 대립하고 투쟁
해서 어느 쪽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해야 할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아
직 이 두 가지 사상 체계 사이에 그런 대립적인 면이 있는지, 있다면 그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검토하지 못하였다. 만일 그런 게 있다면 이 또한
이 두 사상 체계의 발전을 위해서 마땅히 검토해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면에 대한 검토는 본 논문의 틀을 벗어나는 또 다른 연구
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 논문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은 서로 다르지 않은 점과 같지 않은 점을 동
시에 갖고 있으면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고 서로에게 많은 영
감과 자극을 주면서 생산적인 대화를 지속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참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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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정형이상학과 화엄불교 , 안형관 옮김, 이문출판사, 1999.

Abstract

Not Two Thoughts of Hua Yen Buddhism and Process Metaphysics

― Lee Chan Hun ―

Many scholars who studies Whitehead's philosophy which is welcomed as a alternative to


western substantialist thoughts have made comparative study of Hua yen Buddhism and process
metaphysics. So far these studies generally have been performed by western scholars who have
viewpoint of Whitehead. For that reason in these studies many problems have occurred. This
study makes an attempt to examine these problems, and to find a way these two thoughts
understand more appropriately each other. Steve Odin recognizes similarity of Hua yen philosophy
and process metaphysics, while he emphasizes difference of the two. He regards most important
difference of Hua yen philosophy and process metaphysics as explanations for causal relation of
the two. Steve Odin regards explanation of process metaphysics as more logical and reasonable
than that of Hua yen philosophy. Therefore he criticize from the standpoint of process metaphysics
the Hua yen philosophy. The kernel of his critics is that Hua yen philosophy disregards and denies
causal temporal structure and originality of individuals. But this one sided critics on Hua yen
philosophy originates from misunderstanding about concepts and core thoughts of Hua yen
philosophy. Hence this study elucidate that Not Two Thoughts is the kernel of Hua yen philosophy,
and explain the fundamental viewpoint. So this study show the problems of Steve Odin's critics on
Hua yen philosophy. And this study on this basis freshly elucidate the similarity and difference of
Hua yen philosophy and process metaphysics.

※ Key Words : Hua yen Buddhism, process metaphysics, Not Two Thoughts, mutual identity
and mutual intercausality, shih-shih-wu-ai, caus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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