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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명사는 고정지시어이다
그리하여 (b.1)과 (b.4)는 아무런 차이가 나지 않는데 비해, (c.1)과 (c.2)는 차이를 보인다. 이
것은 양상문맥에서 이름과 기술어구가 다르게 거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b)는 개별자 정약용
에 관한 단칭주장이지만, (c.1)은 정약용과 특별한 관련이 없는 일반주장이다. 따라서 일반적
으로 말해, 기술문장은 전칭내용을 담고 있다. (b)가 정약용이 실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주장되
었을 경우, 다시 말해 ‘정약용’이 빈-이름이 될 경우, (b)는 참된 진술이 아닐 수 있다. 반면에
(c.1)은 정약용이 실재하건 말건 상관없이, 단지 <목민심서>의 저자가 실재하기만 하면 참된
주장이다. 이것은 ‘정약용’이 가능세계에 따라 지시대상이 변하지 않는 고정지시어인 반면,
‘<목민심서>의 저자’는 가능세계에 따라 그 지시대상이 변하는 비고정지시어이기 때문에 생기
는 차이이다.
크립키 논증의 핵심은 양상문맥에서 이름과 기술어구가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에, 이름은 기술
어구와 다르며, 이름의 의미를 기술어구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크립
키의 고정지시어 개념은 이름이 양상문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줄 뿐, 이름이 현실세
계에서 어떻게 대상과 지시관계에 돌입하게 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크립키
자신의 반대(크립키 1972, 12)에도 불구하고, 고정지시는 오직 양상문맥에만 관계한다. 그의
논증은 불행히도 지시와 의미의 차이를 해명하지 못하며, 단어가 어떻게 대상을 지시하게 되
었는지도 보여주지 못한다.
잘못된 기술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여전히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사례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지아가 미혼이라는 판단은 서태지와의 혼인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술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지아는 동일한 대상을 가리
킨다. 크립키에 의하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술어구가 아니라 이름이 지칭체를 확정한다고
한다. 이지아라는 이름이 기술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는 것은 직관적으
로 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름이 지칭체를 확정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타당한가?
속성도 지칭체를 확정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특정 대상의 이름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 대
상을 다른 대상들과 구별할 수 있다. 이름에 대한 기억이 소멸되었을지라도 대상을 동일하게
지칭하는 것이 가능하다. 대상이 지닌 속성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칭체 확정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지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그 얼굴 생김새를 보고 그녀를
지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얼굴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형이 되었다면 그 한 가지 속성의
변화만으로도 그녀를 지시하는 데에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그 대상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면
일련의 속성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조건
은 판단하는 주체에게 이름이 알려졌는가 알려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기술어구는 지칭체를 확정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어구는 대상을 필연적으로 지시할 수 없다.
따라서 기술이론, 다발이론은 결국 주관주의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논리실증주의의 오류이며
영국경험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