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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주의descriptiveism라 불리는 지시이론은 단어와 대상 사이의 지시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대상이 하나의 기술어구 또는 여러 기술어구들을 만족할 때, 그 대상은 기술어구에


상응하는 어떤 이름에 의해 지시된다. 크립키는 프레게의 이론을 기술주의의 일종으로 취급했
지만, 이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프레게가 아니라 오히려 러셀의 이론이 기술주의에 해당하고,
서얼과 스트로슨도 이 입장을 지지했다. 기술적 지시이론의 기본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이름 ‘N’은 대상 O가 기술어구 Φ를 만족할 때 오직 그 때만 O를 지시한다. 둘
째 이름의 의미는 기술어구로 표현될 수 있고, 이름의 의미론적 기능은 기술어구의 의미론적
기능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고유명사는 고정지시어이다

크립키는 이름과 기술어구가 양상 논리학에서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는 이유로 기술주의가 틀


렸다고 결론 내린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생각해 보자.

(a) 정약용은 <목민심서>의 저자이다.


(b) 정약용은 기중기의 고안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c) <목민심서>의 저자는 기중기의 고안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문장 (b)를 양상연산자 ⃟ [= possibly]를 사용하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b.1) ⃟ 정약용은 기중기의 고안자가 아니었다.


Possibly Jeong was not the inventor of the Lift.

그리고 (b.1)은 가능세계 개념을 도입하여 달리 표현될 수 있다.

(b.2) 정약용이 기중기의 고안자가 아니었던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There is a world in which Jeong was not the inventor of the Lift.

여기서 가능세계란 현실세계와 다른 일이 벌어지는 가능적 세계를 말한다. 사물과 사건의 목


록 및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변경하면 새로운 가능세계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크립키에 의하면, (b.2)는 다음과 같이 바꾸어도 된다.

(b.3) 정약용은 그가 기중기의 고안자가 아니었던 가능세계가 존재하는 그런 인물이다.


Jeong is such that there is a world in which he was not the inventor of the
Lift.

마지막으로 (b.3)을 양상연산자를 사용하여 표현하면,


(b.4) 정약용은 그가 기중기의 고안자가 아닐 수 있는 그런 인물이다.
Jeong is such that possibly he was not the inventor of the Lift.

이것은 다음과 같은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

(b.4) 정약용은 ⃟ 기중기의 고안자가 아니었다


Jeong possibly was not the inventor of the Lift

여기서처럼 양상연산자 의 범위가 ‘정약용’을 포함하지 않을 경우 ‘정약용’은 현실세계의 정


약용을 가리킨다. 풀어쓰면 현실세계의 정약용은 그가 그 속에서 기중기의 고안자가 아니었던
가능세계가 존재하는 그런 인물이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b.1)과 (b.4)는 동일한 주장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


의 범위가 이름을 포함하든 배제하든 문장 전체의 의미론적 값(진리값)에는 아무런 차이가 발
생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약용’의 의미론적 값(지시관계)이 세계의 변경에 따라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뜻한다. ‘정약용’이 빈-이름이 아닌 한, ‘정약용’의 지시대상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하다. 따라서 이름의 의미론적 값은 가능세계의 변경에도 불구하고 고정되어 있고, 이름
은 말하자면 “고정지시어”rigid designator이다. 고정지시어는 크립키가 도입한 용어인데, 다
음과 같이 정의된다: 하나의 이름은 그 이름의 지시대상이 실재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
한 개체를 지시할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고정지시어이다.

기술어구는 고정지시어가 아니다

그러나 비록 ‘<목민심서>의 저자’는 현실세계에서 정약용을 가리키지만, 이 기술어구는 양상


문맥에서 ‘정약용’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목민심서>의 저자’가 정약용을 지시하
는 것은 현실세계에서 일어난 우연적 사실이지만, 다른 가능세계에서 이 표현은 정약용을 지
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문장 (c)는

(c.1) ⃟ <목민심서>의 저자는 기중기의 고안자가 아니었다


(c.2) <목민심서>의 저자는 ⃟ 기중기의 고안자가 아니었다

로 각기 달리 쓸 수 있지만, 이 둘은 동일한 내용을 주장하지 않는다. (c.1)은, <목민심서>의


저자가 기중기의 고안자가 아닌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고 주장한다. <목민심서>는 정약용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저술될 수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정약용이 그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실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c.1)은 참될 수 있다. 따라서 (c.1)은 개별자 정약용에 관한 주장
이 전혀 아니다. 반면 (c.2)는, <목민심서>의 저자는 그가 기중기의 고안자가 아닌 가능세계가
존재하는 그런 인물이다, 고 주장한다. 의 범위가 ‘<목민심서>의 저자’를 포함하지 않을 경
우, ‘<목민심서>의 저자’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목민심서>의 저자 즉 정약용을 지시한다. 따
라서 (c.2)는 정약용에 관한 주장이다. (c.2)가 주장하는 바는, 현실세계에서 <목민심서>를 저
술했던 사람은 다른 세계에서 기중기의 고안자가 아닐 수도 있는 그런 인물이다, 라는 것이
다. 이것은 개별자 정약용에 관한 주장이고, 이것의 의미론적 값은 (b.4)의 의미론적 값과 동
일하다.

그리하여 (b.1)과 (b.4)는 아무런 차이가 나지 않는데 비해, (c.1)과 (c.2)는 차이를 보인다. 이
것은 양상문맥에서 이름과 기술어구가 다르게 거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b)는 개별자 정약용
에 관한 단칭주장이지만, (c.1)은 정약용과 특별한 관련이 없는 일반주장이다. 따라서 일반적
으로 말해, 기술문장은 전칭내용을 담고 있다. (b)가 정약용이 실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주장되
었을 경우, 다시 말해 ‘정약용’이 빈-이름이 될 경우, (b)는 참된 진술이 아닐 수 있다. 반면에
(c.1)은 정약용이 실재하건 말건 상관없이, 단지 <목민심서>의 저자가 실재하기만 하면 참된
주장이다. 이것은 ‘정약용’이 가능세계에 따라 지시대상이 변하지 않는 고정지시어인 반면,
‘<목민심서>의 저자’는 가능세계에 따라 그 지시대상이 변하는 비고정지시어이기 때문에 생기
는 차이이다.

무엇이 고유명사를 고정지시어로 만드는가?

이름이 일단 대상에 부착되기만 하면, 그 대상의 우연적 속성의 변경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


은 여전히 그 대상을 지시한다. ‘김명석’은 김명석이 늙었거나, 국적을 바꾸었거나, 사지를 잃
었거나, 심장을 인공심장으로 바꾸었거나, 성형수술이나 성전환수술을 했거나 상관없이 여전
히 김명석을 지시한다. 마찬가지로 ‘정약용’은 정약용이 기중기를 개발하지 않았어도, <목민심
서>를 저술하지 않았어도 여전히 정약용을 지시한다. 일단 붙여진 이름은 그 지시대상이 항구
적으로 고정된다. 명자가 ‘아키코’로 이름으로 바꾸어도 ‘명자’는 여전히 아키코를 지시하고,
‘아키코’는 여전히 명자를 지시한다. 그리하여 이름의 변경에 관계없이 아키코는 명자이다. 이
름의 지시대상은 그 개체의 역사 내내, 심지어 우주 역사 내내 고정된다. 그러나 기술어구의
지시대상은 그 개체가 그 기술어구를 만족하지 않을 때 변경된다. 하리수의 주민등록번호는
한 개체 하리수를 골라낼 수 있지만, 하리수가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할 경우, 주민등록번호의
기술은 더 이상 하리수를 지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리수’는 주민등록번호 변경 이후에도 여
전히 하리수를 지시한다. 이것이 이름과 기술어구의 차이이다.

크립키의 논증은 분석철학에서 무시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우연의 구별을 회복시켰다.


새로운 문제는 정약용을 정약용이게 하는 것, 하리수를 하리수이게 하는 것, 즉 각 개체의 본
질적 속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본질적 속성은 정약용이 세계의 변경 가운데서도 여전
히 정약용이게 하는 속성이다. 이름 ‘정약용’은 바로 이 불변적 속성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 사물의 본질속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 중에는 예컨대 그 사물의 기원이
있다.

크립키 논증의 핵심은 양상문맥에서 이름과 기술어구가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에, 이름은 기술
어구와 다르며, 이름의 의미를 기술어구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크립
키의 고정지시어 개념은 이름이 양상문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줄 뿐, 이름이 현실세
계에서 어떻게 대상과 지시관계에 돌입하게 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크립키
자신의 반대(크립키 1972, 12)에도 불구하고, 고정지시는 오직 양상문맥에만 관계한다. 그의
논증은 불행히도 지시와 의미의 차이를 해명하지 못하며, 단어가 어떻게 대상을 지시하게 되
었는지도 보여주지 못한다.

크립키에 의하면 이름은 고정지시어이다. 기술이론이나 다발이론에 의하면 기술어구가 지칭체


를 확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크립키는 기술이 실패하더라도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이 변하지
않음을 보임으로써 이름에 의해 지칭체가 확정됨을 논증한다.

잘못된 기술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여전히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사례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지아가 미혼이라는 판단은 서태지와의 혼인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술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지아는 동일한 대상을 가리
킨다. 크립키에 의하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술어구가 아니라 이름이 지칭체를 확정한다고
한다. 이지아라는 이름이 기술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는 것은 직관적으
로 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름이 지칭체를 확정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타당한가?

이지아라는 이름으로 그 대상을 포착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 있다. 그것은 일단 그 대상을 경


험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외모와 외형, 성격, 역할, 활동, 관계 등등 몇 가지 그 대상
의 고유한 특성들을 경험적으로 앎으로써 그 대상을 다른 사물 혹은 인물로부터 구별할 수 있
다. 이러한 구별에는 이지아라는 이름은 필요조건이 되지 않는다. 이름으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은 대상을 경험적으로 식별한 이후에 가능하다. 따라서 먼저 파악되는 것은 대상의 속성이
고 이름 없이도 대상의 속성을 파악함으로써 지칭체가 확정될 수 있다. 이렇게 파악된 속성들
은 기술 어구에 해당한다. 그러나 크립키는 이러한 작용은 최초 명명시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한다.

파악된 속성에 오류나 거짓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오류로 인해 지시


하는 대상이 달라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잘못된 기술에도 불구하고 대상은 바뀌지 않는
다. 크립키도 여기에 의견을 같이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가 이름이 지칭체를 확정하기 때
문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만일 속성 즉 기술어구가 지칭체를 확정한다면 대상이 바뀌어야
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다발이론이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 다
발이론에 따르면 몇몇 기술에 오류가 있을지라도 중요한 대부분의 성질이 만족된다면 지시 대
상이 바뀌지 않는다. 이지아가 미혼이라는 속성이 거짓일지라도 그녀의 외모나 활동 등에 관
한 속성들이 그녀를 지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립키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발이론은
문제가 있다. 중요한 속성이 무엇인지 확정짓는 방식이 일종의 민주주의 혹은 주주총회와 유
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대상을 필연적으로 지칭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
리는 특정 대상이 현실 세계에서 말하는 속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반사실적 상황에서도
필연적으로 바로 그 대상을 지칭한다. ‘이지아는 정준하와 같은 외모를 한 남성이다.’라는 반
사실적 상황 가운데에서도 이지아는 현실 세계에서와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
이름이 반사실적 상황에서도 필연적으로 특정 대상을 지칭한다는 말은 항상 참인가? 그렇다면
반사실적 상황에서는 정준하와 같은 외모를 한 어느 남성도 이지아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직관적으로 그러하다. 물론 이것은 질적인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다.

속성도 지칭체를 확정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특정 대상의 이름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 대
상을 다른 대상들과 구별할 수 있다. 이름에 대한 기억이 소멸되었을지라도 대상을 동일하게
지칭하는 것이 가능하다. 대상이 지닌 속성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칭체 확정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지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그 얼굴 생김새를 보고 그녀를
지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얼굴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형이 되었다면 그 한 가지 속성의
변화만으로도 그녀를 지시하는 데에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그 대상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면
일련의 속성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조건
은 판단하는 주체에게 이름이 알려졌는가 알려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기술어구는 지칭체를 확정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어구는 대상을 필연적으로 지시할 수 없다.
따라서 기술이론, 다발이론은 결국 주관주의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논리실증주의의 오류이며
영국경험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이름은 다른 무엇의 도움 없이


지칭체를 필연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는 기술 어구에 의해 두 대상의
구별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의 함축은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하기 위해서 대상
에 대한 속성 서술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쉽게 논박될 수 있다. 대상
에 대한 속성 서술이 그 대상에 적용된다는 것은 이미 대상에 대한 고정적 지시를 전제하기
때문에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하기 위해 속성 서술은 필연적이지 않다. 이 논증은 형이상학
의 차원에서 보자면 항상 참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의 차원에서는 일종의 초월적 자아가 전제
되어 있다. 이것은, 동일한 이름이지만 서로 다른 대상이라는 가정을 알고 있는 자아를 전제
하고서 이루어지는 논증이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우리의 판단은 이러한 가정을 의식하지 못
한 채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식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논증이 항상 참일 수 없다. 닉슨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존재한다고 가정 하자. 하나는 대통령이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
아닌 학교 선생님이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닉슨이 TV에 나왔다고 할 때 단지 닉슨이라는
이름만으로 이 둘의 구별이 가능한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대통령 혹은 선생님과 같은 속성이
언급되어야만 화자가 의도한 대상이 지시된다. 이러한 속성들이 닉슨을 필연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속성들이 언급되지 않고서는 하나의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할 수 없다
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는 크립키의 고정지시어 이론이 참일 수 있겠지만 인식의 차원에서는 기


술이론이 더 설득력이 있다. 크립키의 논증은 형이상학적 차원과 인식적 차원이 구분되지 않
은 채 혼재되어 이루어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만일 기술이론이 형이상학적 차원을 논하는 것
이라면 크립키의 비판은 타당하다. 그러나 인식의 차원이라면 크립키의 비판은 일종의 범주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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