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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비명 소리가 내 몸 아래에서 새어 나왔다.

불쾌감이 들 정도로 뜨거운 타인의 육신이 엉덩이와


허벅지 아래로 느껴졌고, 두 손바닥으로 움켜쥔 누군가의 목은 땀으로 미끌거렸다. 내 목덜미에서 퉁퉁
뛰는 맥박 소리가 북을 두들기는 듯했다. 시야는 온통 희뿌옇게 흐렸다. 아릿한 충격이 아래턱과 뺨에
연이어 닿았다.

순차적으로 깨어나는 감각들이 합쳐진 끝에 나는 아리송해졌다. 누군가의 위에 올라타 그의 목을 조르고


있다…. 그렇게밖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러고 있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의문을 던지는 이성보다도,

‘죽어…. 죽어 버려.’

성난 채 부르짖는 감정이 앞섰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자 눈에 씐 안개가 걷히는 듯했다. 붉은 피로 범벅된 남자의 얼굴이 대뜸 보였다. 내


두 손에 졸린 목의 얼마 안 되는 살이 턱 밑까지 밀려 올라가 무척 이상한 모습이었다. 컥컥거리는 밭은
신음과 뭉개진 욕설을 뱉으며 그는 내 턱과 어깨를 마구잡이로 치고 있었다.

등 뒤로 누군가의 비명과 탄식이 들려왔다.

‘아하….’

나는 해이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꿈이겠지, 이건….’

피로 뒤범벅된 얼굴이 언뜻 내가 아는 사람을 닮았다. 콧등 피부가 찢어지고 두 눈이 허옇게 뒤집어져


알아보기 어렵지만, 언뜻… 눈썹이 강해아 같다.

‘꿈….’

꿈이겠지. 꿈이야. 꿈이어야만 한다, 이 남자가 강해아라면….

“태림 씨….”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부르는 강해아의 목소리였다. 고개 숙여 피범벅이 된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할 적에, 내 팔이며 다리며 할 것 없이 더운 땀이 비 내리듯 흘렀다. 팔뚝을 타고 흐르는 굵은
땀방울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얀 공포에 질린 순간에도 나는 두 손의 힘을 풀지 못했다. 정신은 어둑했고 두 손은 제멋대로 분노했다.


불쑥 겁이 났다. 그러나 닥쳐온 것은 충격도 고통도 아니었다.

맡기 좋은 포근한 향과 부드러운 손바닥의 감촉이 내 등을 어루만지고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그만해요…. 그만.”

강해아가 애원한다, 듣기 좋게 여린 목소리가 온통 쉬어 버린 채로.

“그만해요, 이제….”

스물여섯 살의 강해아가 나를 말려 댔다. 약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던 정신이 대번에 훤해지고


피투성이 남자의 얼굴이 보다 뚜렷해졌다. 숨통이 죄인 탓에 입을 벌리고 있어, 그의 입천장과 윗니까지
보였다.

헐떡이는 강해아의 숨소리는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의 팔이 내 허리에 감겨 있었다.

‘그럼… 이 남자는 누구지.’

내 남편 강해아가 아니면, 스물여섯 살의 해맑은 강해아가 아니면….

‘누구….’

그리고 여기는 어디야?

박준우. 흩어진 내 기억의 핵심이 되는 퍼즐 조각은 난데없게도 그 남자다. 건방지고 무례한 열성 알파,
박준우…. 그를 ‘준우야’ 하고 친근하게 부르던 강해아가 기억난다. 박준우는 강해아의 대학원
동창이었고, 친구였다. …꼴에 말이다.

‘해아 씨 당신이 뭐가 모자라서, 왜 그런 쓰레기 같은 놈에게 친구라는 번듯한 택을 붙여 주느냐’ 하는


의문은 차치해 둬야 했다. 강해아가 주는 의문 하나하나에 물음표를 붙였다가는 내 세상을 압류당할
테니까.

박준우의 향을 덕지덕지 묻혀 왔던 날 강해아의 옆구리와 등에는 파란 멍울이 져 있었다. 그 멍이


연두색으로, 다시 노란색으로 빠지기까지 한 달 넘는 시간이 걸렸다.

미국 출장을 앞둔 시점에 나를 거슬리게 만든 것도 바로 그 멍울의 노란빛이었다.

나는 낭만적인 남자는 못 된다. 그러나 부부간에 첫 섹…, …관계를 맺었던 늦봄의 밤 이후부터
강해아에게 뇌리 한구석을 내주었다. 고쳐 말해 그는 언제나 내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일에 대한 열망과 약간의 스트레스로 채워 온 내 머릿속을 강해아는 꽃밭으로 만들어 놨다. 그 때문에


나는 침착하지도 계산적이지도 못하게 됐다. 그는 내 속을 멋대로 헤집으며 걷고, 뛰고, 그림을 그리고,
웃거나 울고, 좋거나 아프고는 했다. 노란 멍을 단 강해아는 그중에서도 큰 존재감을 자랑했다.

지난달에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연락 없이 집으로 돌아간 날이 있었다. 낯선 콧노래가 들리기에 2


층으로 올라갔다가, 욕실에서 걸어 나오는 그를 봤다. 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물이 허리까지 흐르도록
내버려 둔 채 그는 벌거벗은 모습이었다.

두툼한 가운에 한쪽 팔을 꿰어 넣으면서도, 강해아는 문간에 선 내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무방비하게


내보인 등이 늘씬했고 모든 동작은 배부른 동물처럼 여유로웠다. 어물쩍 가사를 흘려 가며 흥얼거리는
노래가 듣기 좋았다.

일순 내가 없는 시간의 그를 훔쳐보는 기분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날씬한 허리 밑에 남은 노란 멍울에


신경이 거슬렸다.

나는 조용히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방금 도착한 시늉을 하며 헛기침 소리를 내자 노랫소리가 그치고,

‘태림 씨?’
2 층의 강해아는 내가 알던 예민한 남자로 돌아왔다.

실내복을 차려입고 내려오는 그를 볼 때엔, 나는 그의 마른 허리를 만졌던 지난밤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내 머릿속에 오래 남은 건 그 멍울의 빛깔이었다.

그, 노란 멍. 도통 내 것이 되어 주질 않는 남자의 허리에 남은 다른 알파의 흔적.

…그대로 미국으로 가 버릴 순 없었다. 그랬다가는 40 일이 넘는 출장 내내, 내 머릿속의 강해아는 허리에


노란 멍을 단 강해아일 터였다. 죽도록 신경이 쓰일 게 뻔한데, 나로서는 억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멍은 잘 없어졌냐’며 사진이라도 보내 달라 연락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사정이 있어 그러는데, 몸 잘 보이게 사진 좀 찍어다 보내 주십시오. 물론 홀딱 벗은 채로요.’

그런 문자를 보냈다가는 대문짝만 하게 프린트되어 법정에서 휘날리게 될 테고….

파렴치한 취급 받기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계획이 필요했다. 출장 기간 내내 내 남편의 안위를 염려하며


신경을 긁히느니, 진작 그의 주변을 청소하고 떠나야겠다는 계획이. 한 번 강해아에게 접근한 알파가 두
번은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말이었다.

강해아는 말투가 반듯한가 하면 속에 담긴 이야기는 우유부단하고, 어디에서나 갑이면서도 열성


오메가였으며, 도도하지만 친절한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타깃이 되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란 의미다.
그를 위해 보초를 서고 경계하는 일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그래서 박준우를 찾았다. 정확히는, 찾고자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한국대학원 출신에 이름은 박준우. …그런 사람은 없는데요.”

내 변호사는 물론이며 경찰을 통해서도 나는 그 남자의 기록을 찾아낼 수 없었다. 기억하기로는 이름이
‘박준우’ 석 자가 맞고 한국대학원 출신의 화가인지 지망생인지 그러한데, 제대로 된 나이와 출생지,
주민 등록 번호 정보를 찾아내려니 아무런 자료가 없었다.

박준우라는 남자는 없댄다. 변호사의 말이 그랬고 경찰의 말이 그랬다. 없는 남자를 고소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설명까지도 친절하게 이어질 적에, 나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해아랑 있는 걸 분명, 봤는데…. 내가 폭행했고 엊그제는 해아 몸에 체향까지 묻혀 왔는데, 없는


사람이라고?’

혹시 그사이에 죽기라도 한 게 아닌가 생각했으나 사망 신고조차 되어 있질 않았다. 개명을 했나 하고


조사했지만 찾아낸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며칠간의 고생 끝에 변호사는 편한 가설을 내세웠다.

“한성 그룹 아들을 건드렸으니 그 남자도 자기가 잘못한 건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지레 겁을 먹고 잠적해
버린 걸 수도 있죠.”

아니 보통, 그렇게까지 하나. 이름도 은밀하게 바꾸고 사회적인 활동을 일절 끊어 버리고 아예 잠수를 타
버리나, 그저 있을지도 모르는 보복이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한성에서 먼저 손을 썼을 수도 있죠. 어떻게 조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겉보기에나 심각하고


요상하지, 실체를 알고 보면 별일 아닌 경우가 은근히 많아요. 요즘 세상에 대기업이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말을 마치며 변호사는 입맛을 다셨다. 떨떠름하니 눈알을 굴려 대는 걸 보면, 저도 제가 하는 소리가


범죄 영화에서나 등장할 만한 대사임을 아는 눈치였다. 나는 그 점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솔직히,
차라리 그 편이 더 가능성 있는 얘기라고도 생각했다.

강해아는 강준일 회장이 지독하게 아끼는 막냇자식이었다. 결혼 계약이 오갈 때에 한성에서 보내온


사람들이 줄줄이 읊던 레퍼토리가 딱 그랬다.

‘회장님께서는’, 혹은 ‘막내아드님께서는’을 주어로 강 회장을 육아 예능 프로그램에라도 출연해야 할


수준의 팔불출로, 강해아를 스물여섯이 아닌 여섯 살배기 귀염둥이 막내로 포장하는 말을, 나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었다.

막상 결혼을 한 뒤에는 강준일 회장이 신혼집에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어서 의외였다. 두어 번인가 내게


직접 안부 전화를 준 일이 있긴 했다. 그러나 각오했던 것만큼의 간섭은 일절 없었다. 강해아도 내게,
사담으로라도 제 가족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자기들끼리만 나누는 얘기가 따로 있나….’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뿐이지 강씨 부자 사이야 좋을 터였다. 어떻게 나쁠 수 있겠는가, 강해아가 내


자식이라면 나는 그를 입에 넣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위험하니까 낮에도 함부로 다니지 말라고 입
꾹 닫고, 가끔 보기 좋은 풍경이나 보라고 여행지에서만 꺼내 줬겠지.

귀여운 막내인 해아가 제 아버지에게 박준우에 대한 고민을 전했을까? 대학원 동창이랍시고 알고 지내던
놈이 제 몸에 멍울을 남겼다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그 김에 화가 난 강 회장이 손을 썼을까?
번식 탈락자 열성 알파가 내 새끼를 함부로 건드렸다고…. 나라도 그랬을 테니 그도 그랬겠지.

‘…그런 거면 다행이고.’

그대로 나는 박준우에 대한 처리를 미뤄 놓았다. 찝찝한 구석이야 남았지만 깊게 조사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됐다.

변호사에게는 ‘주시해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그러나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변호사 또한 ‘
알겠습니다’ 하며 귀담아듣는 시늉을 했을 뿐, 내가 뉴욕행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박준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어떤 소식도 연락도 없었다.

뉴욕과 시카고를 오가며 업무를 보면서도 두어 번인가 그에 대해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고민은 늘 짧게
마쳐 버렸다. 내 인생의 진정한 골칫덩어리는 박준우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강해아.’

내게 나타난 애매한 혼선들, 전에 없던 난관들, 거추장스러운 기억 장애. 그 모든 게 강해아 때문이다.


그러니… 그래, 강해아. 강해아가 문제다.

뉴욕 출장은 최악이었다. 그마저도 원흉을 찾자면 강해아였다.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내
출장을 망칠 수 있겠냐만은, 자리에 없기 때문에 그는 내 출장을 망쳐 놨다.

객관적으로 업무만을 논하자면 성공적이었다. 한 번 해 본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문제가 술술


풀렸으니 말이다.

까탈스러운 협력사의 태도도, 계약 이후 논쟁거리가 된 조항조차도, 몇 마디 말과 두어 시간의 미팅으로


서로가 좋게 해결되었다. 그러니 AOM 이야 향후 10 년간은 추락할 걱정 없는 날개를 달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전례 없이 거대한 페널티가 걸린 비밀 유지 조항에 연구원 전원의 서명을 받아 낸 뒤에는, 우리가 가진


기술력의 민낯을 드러낼 차례였다. 한성과의 콜라보레이션 상품 회의에서조차 선보이지 않은 비밀 병기가
따로 있었다. AOM 은, 개발팀 김 팀장의 말에 따르면 ‘민낯이 훨씬 예뻤다’.

민낯이니 나발이니 하는 말본새부터 상하 관계의 선을 못 지키는 비사회적인 성격을 차치하고서 김민수를


팀장 자리에 앉힌 이유도 마찬가지, AI 기술력 때문이었다.

흔히들 AI 라 하면 영화 속의 버림받은 아이 로봇이나 인간을 증오하는 휴머노이드를 떠올릴 텐데, 현실의


인공 지능이란 그렇게 심도 깊은 단계까지는 못 됐다.

AOM 속 AI 은 인간의 사고 메커니즘을 수박 겉핥기로 본뜬 수준이었다. AOM 은 그것들로 움직이는


계산기다. 인공 지능들이 길게는 10 년 짧게는 3 년간, 어떤 상호 작용을 하고 그 과정에서 각인이나
노팅이 일어날 확률은 몇 퍼센트인가를 뽑아내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계산기.

몇 달 전에 마친 테스트만 해도 그런 식이었다. 회사의 얼굴인 나와 셀러브리티인 강해아의 정보로 치른


베타 테스트. 개발이 필요한 단계인 만큼 결과가 구체적이진 못했지만….

‘무난한 상승세 그래프가 나왔던가, 뭐 그랬었지.’

결괏값이 불투명한 바람에 개선 방향을 잡는 데에나 큰 도움이 됐었다.

테스트 자체 성과보다는, 대표 이사가 직접 AOM 을 이용해 반려를 구하고 결혼까지 했다는 이슈가 가진
힘이 컸다. 덕분에 한성을 비롯한 협력사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얻으며 새로운 연구와 2 차 테스트를
진행할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인터넷 뉴스에서는 우리 프로그램을 로맨틱한 신세계 장비처럼 다뤘다.

그러나 실상은 개발팀 책상마다 탑처럼 쌓인 일회용 커피 컵과 같았다. 그럴싸한 모습을 한 버그 덩어리란
의미였다.

‘똑같은 쿼리로 돌렸는데 왜! 왜 어제 퇴근 전까진 안 되더니 오늘은 갑자기 잘 되냐고!’

‘어? 이…, 이게 작동할 리가 없는데… 작동되면 안 되는데….’

‘팀장님, 서버 다운됐어요.’

‘본체 옆구리 때려 봤어?’

개발팀에서 자주 들리는 대화였다. 상용화를 위한 완제품을 내놓기에는, 그만큼이나 문제가 많았다.

프로그램이 잘 돌아가도 안 돌아가도 울부짖는 개발팀원들, 야근의 일수만큼이나 빈번하게 출연하는 버그,
…그리고, 얕게나마 사람 피부에 칩을 삽입해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 칩의 가격이 최소 천 단위인
데다 의료 보험 처리는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문제이고….

그래서 미국 지사며 협업이 필요했다. 우리 쪽 엔지니어들을 도와줄 과학자들이 뉴욕에 숨어 있었다.


일회용 삽입형 칩을, 영구 활용 가능한 단순 부착형 감지기로 만든다면 접근성이 훨씬 좋아질 터였다.

그 누가 거절하겠는가. 2 주간 관자놀이에 스티커만 붙이고 지내면, 내가 결혼하기로 선택한 상대가


멀쩡한 알파, 혹은 오메가가 맞는지 검증받을 수 있다는데.

‘여드름 패치 붙인 사람 되기 vs. 강간, 폭력, 사기, 횡령, 어쩌면 살인죄를 저지를지도 모르는 사람과
평생 살기’라면… 누구라도 전자를 택할 것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랑 인체 과학이 얼마나 비슷한지 아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회의실 밖으로 걸어 나올 무렵 개발팀장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 기술에 감동받은 미국 연구팀이 준


선물을 안아 들고 우쭐대는 김 팀장의 얼굴이 내 기분을 진창에 밀어 넣었다. 진작 잡쳐 놓은 성격에 더
모가 나는 느낌이었다.

일 잘하는 김 팀장에게는 죄가 없었다. 내 성격이 더러워진 나머지 남의 웃는 얼굴만 봐도 성질이 나게 된


까닭은 강해아에게 있었다.

‘도대체 한 번을,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네.’

휴대폰에 둥둥 떠다니는 문자들은 죄 맥락이 시답잖은데 그마저도 내가 보낸 것들이었다. 생각나고 보고플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 가며 연락을 하는 건 내 몫이고, 그것들을 느릿느릿 받아만 주는 강해아는
도도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께-

[해아 씨. 별일 없습니까?]

오전 10:00

[[국제발신] 네???]

오전 10:15

[...안부 문자 보낸 겁니다.]

오전 11:00

[[국제발신] 넵! 별일 없어요!]

오전 11:06

-어제-

[[국제발신] <///> 중이라 전화

를 받을 수 없습니다.

00 시 이후에 다시 연락 주세요.]
오후 12:00

[[국제발신] <///> 중이라 전화

를 받을 수 없습니다.

00 시 이후에 다시 연락 주세요.]

오후 1:00

[[국제발신] <///> 중이라 전화

를 받을 수 없습니다.

00 시 이후에 다시 연락 주세요.]

오후 2:00

[자동 응답 문구라도 좀

설정해 두든가요.]

오후 2:01

-오늘-

[[국제발신] 죄송해요...

어제 왜 전화 주셨어요?

무슨 일 있어요?]

오전 12:27

[안부 전화 건 겁니다...]

오전 12:30

나는 뭐 말 많은 천출 거지이고 그쪽 휴대폰은 고고하신 선비님들 읍소만 가려 받는 신문고인가?

그다음은 오건민 기사의 쓸모를 통감할 차례였다. 매일 어디로 출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멀리 혹은 자주


외출하는 성격도 딱히 아닌 강해아에게 왜 전속 기사가 있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강해아가 도통
연락을 빠릿빠릿하게 받아 주질 않으니, 대신에 그의 근황을 알려 줄 주변인이 필요한 것이었다.
미국에 온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아 오건민 씨가 강해아의 기사인지 내가 심은 첩자인지 모르게 됐다. 그를
시켜 내 남편 식사 좀 대신 챙겨 주라고 지시하는 것도 처음에나 쑥스러웠지 두세 번 반복하고 나니
일과가 됐다.

오 기사는 매일같이 ‘오늘의 작가님’ 소식을 부지런히 전해 주었다. 와이프 가져다주라고 선물을 챙겨
준 덕분인지 전화로 들려주는 목소리며 보내오는 메시지에도 느낌표가 잔뜩 들어가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러나 전해 오는 소식들은 하나같이 내 마음에 들질 못했다.

[작가님 컨디션이 안 좋으십니다. 오전에 브런치 모임에 다녀왔는데 이후 점심은 거르셨고 저녁 약속은
취소했습니다.]

[황옥혜 아주머니께서 장기 휴가를 신청하셨습니다. 아드님이 독감을 심하게 앓는 모양입니다.


작가님께서 유급 휴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내일부터 댁에 아주머니가 안 계실 예정입니다.]

[작가님 종일 멍해 보이십니다. 주신 카드로 샌드위치를 사 드리긴 했는데 드시진 않습니다. 저녁에는


퍼스널 쇼퍼를 부르셔서 저는 일찍 퇴근했습니다.]

‘주신 카드’란 출장을 떠나기 전날에 오 기사에게 미리 건네준 내 카드를 뜻했다. 그럼 그 카드로 제대로
된 식당이라도 데려가 달라 했더니, 식당으로는 출발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혼이 났단다.

―무슨 돈이 있어서 비싼 밥을 산다는 거냐고 자꾸 추궁하시는데…, 어떡합니까?

급하게 걸려온 전화를 받을 적에 나는 골머리가 다 아팠다. 강해아 밥 한번 먹이기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수준이었다. 원격 조종을 하려고 보니 난이도는 더욱 극악이었다. 오건민 기사는 빠릿빠릿하고 말
잘 듣는 아바타였지만, 강해아를 벌떡 일으킬 인물은 못 됐다.

내가 보낸 문자며 가끔씩 핑곗거리를 찾아 거는 전화에는 해맑은 답만 건네주는 남편인데, 오 기사의


보고에 실린 ‘작가님’은 순 다른 사람이었다.

“…됐습니다, 그럼. 해아 씨 컨디션은 잘 알겠고… 내일 봐줄 사람을 보낼 테니 걱정 말고 퇴근하세요.”

―‘봐줄 사람’이요?

“내 비서인데… 오메가니까. 아마 해아 씨도 그쪽이 편할 겁니다.”

―아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대표님!

굽신 허리 숙이는 실루엣이 눈에 보이는 듯한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액정에 비친 통화 기록을


보면서는 어이가 없었다. 미국에 와서 강해아와 나눈 통화만 합쳐도 20 분은 못 될 것 같은데, 오늘 오
기사와 나눈 통화 기록이 30 분을 훌쩍 넘겼다.

황당함에 이마를 짚기도 잠시였다. 나는 두 번째 전화를 바삐 걸었다. 서울 본사에서 나를 대신해 급한


용무를 처리해 주는 비서실장에게, 그보다 더 급한 일을 하나 맡기기 위해서였다.
[시아버지]

신호음이 다섯 번쯤 울리다가 멈췄다.

―네네. 무슨 일이세요, 대표님?

“은철아, 바쁘냐.”

―어…, 아니. 별로 안 바빠. 왜?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회사 일은 아니고….”

시간 되거든 내 집으로 가 해아 씨를 봐줄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기까지 여러 변명이 필요했다. 대뜸


‘내 남편 좀 봐줘’ 하기가 굉장히 머쓱해서였다.

다행히, 은철이는 ‘알았다’는 답을 쉽게 들려주었다. 도움이 될 만한 약도 챙기고, 오메가끼리


이야기도 나눠 볼 테니 이쪽 일은 걱정 말라고 오히려 큰소리였다.

“그래…, 너만 믿는다.”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오 기사를 못 믿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각인 상대가 있는 알파였다. 제 짝 이외의 오메가에게는


아무래도 감이라는 게 둔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같은 오메가인 데다 우성인 은철이라면, 오 기사가 못
본 면모를 대신 알아채 주지 않을까 싶었다.

시은철은 훌륭한 비서였다. 그는 맡은 일을 곧잘 수행했고, 나를 실망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진짜라니까. 너네 신혼집에서 아침부터 그 평론가 양반이 나오는데…. 해아 씨는 그걸 또, 무슨


출근하는 남편 배웅하듯이 보고 있더라고.

녀석은 뜬금없는 소리로 내 골을 아주 뭉개 놓았다.

“…….”

―…….

“…….”

―…여보세요? 야, 듣고 있어, 천태림? 네 남편 바람난 것 같다니까.

무어라 고자질이 흘러나오는 휴대폰을 나는 귀에서 떼어 냈다.

“하….”

그러고는 실소했다.

‘그래, 어쩐지 잠잠하다 했어.’

강해아가 그래 봐야 태풍의 눈이지. 날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토라진 건지 화가 난 건지 이리 튈지


아니면 저리로 사라져 버릴지 알 수 없는, 그게 내 남편인데.
강해아는 믿음직스러운 배우자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때때로 창문 밖 정원의 나무를 오래도록
노려볼 때면 도대체 무슨 생각 중인 건지, 나를 보며 웃다가 미간을 찡그릴 때면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건지
꼴도 보기 싫어하는 건지 그것조차도 모르겠지만… 나는 강해아를 믿었다.

강해아에게라면 나는 못 맡길 게 없었다. …아, 아니다. 칼이나 총 같은 건 열외다, 실수로 제 손을


베거나 발등을 쏴 버릴까 봐 무서우니까. 그 외의 것들이라면 무어든지, 특히나 우리 결혼 생활이라면
확실하게 맡길 수 있었다.

결단코 강해아는 바람 따위를 피울 사람이 아니었다. 바람이라는 건 상대에게 질렸을 때 피우는 것인데
그는, 애초에 나를 잘 알지도 못하니까 말이었다.

강해아를 향한 내 신뢰는 그렇게, 모호하면서도 견고한 구석이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 하면


설명하긴 어렵지만 내 목숨 줄을 그의 손에 쥐여 놓더라도 불안하지 않을 성싶었다. 오히려 그는 내
신변을 단단한 금고 속에 넣어 종일 끌어안고 지켜 줄 남자였다.

그러니까, 당장 인천 공항이든 김포 공항이든 간에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급하게 찾는 이유는


강해아가 아니라,

‘그놈이 우리 신혼집에서 자고 갔다고?’

임건 때문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관대한 마음으로, 차분히 생각해 보려 노력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국제 전화를 끊은


직후 2 분간은 그랬다. 뭐, 임건 그 양반도 무슨 사정이 있었으니 새벽 댓바람부터 남의 집에서 걸어
나왔겠지.

‘자기 집에 불이 났다거나.’

아니, 그럼 화가가 아니라 소방관을 찾았어야지.

‘강도가 들었다거나.’

무서우면 경찰서 유치장에라도 들어가서 자든지.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집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거나.’

허, 그렇다 한들 모텔비 몇만 원이 없을까. 하다못해 제 차에서라도 자면 될 일 아닌가, 마침 남편이


자리를 비운 전 애인의 신혼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느니. 거지도 아니고 버젓하게 책도 여러 권 낸
양반이 그렇게까지 경황없이 굴 수가 있느냔 말이었다.

아 맞다, 그 책 뒤표지에도 강해아가 적어 준 추천 문구가 쓰였고 1 쇄본에 두른 띠지에는 ‘강해아를


발굴한 눈’ 따위의 소개 글이 적혀 있었지.

‘뭐 이런… 개 같은 새끼가.’

피가 펄펄 끓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성화가 내 이성을 마비시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기억


속 임건을 탈탈 털어다가, 아주 사소한 트집거리 하나까지도 증오스러운 범죄처럼 확대 해석 하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내 남편에 대해 더 잘 안다는 양 과시하듯 말하던 것하며, 강해아가 말하지 않은 과거 이야기를
구태여 눈치 없이 끄집어낸 것이며, 오해하기 딱 좋은 꽃다발과 편지를 보낸 일까지.

“미친놈이.”

욕을 읊조리며 주먹으로 차 문짝을 치자, 일정을 읊던 막내 비서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당황한 채


백미러를 살피는 막내와 눈이 마주쳤다.

“어…, 대표님, 왜….”

“아니. …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고….”

얼얼한 손으로 이마를 가릴 때는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미안해. 신경 쓰지 말고 운전해.”

열성 알파들에게 자극을 받아서 이성을 잃었을 때를 제외하고, 여지껏 이렇게까지 화난 적이 있었나?


막내가 걸어오는 말도 잘 들리지 않고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도 어려웠다. 성이 났다고 벽이나 쳐 대는
꼴은 평소 내가 가장 하찮게 생각하던 남자의 모습이었다.

‘나야말로 미친 건가.’

아니, 아니지. 내가 왜, 뭐가. 미치기는 뭘 미쳐? 막 결혼한 사람한테 ‘나의 불안을 진정시켜 줘요’
같은 편지나 보내는 새끼가 미친놈이지. 허… 다시 생각하니까 더 어이없네.

어떤 사유가 있었건 간에 임건이라는 그 남자는 강해아와 나의 신혼집에서 자고 가서는 안 됐다. 그들이


과거 연인이었다는 걸 내가 아는 이상에는, 그 점을 짚어 불편하다는 기색을 이미 비춘 시점에서는.

애초에 그가 나를 존중해 주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나도 그놈을, 그다지 존중하진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실망할 것도 없다. 하지만 강해아는 달랐다. 강해아의 입장을 생각하고 그를 눈곱만큼이라도
존중한다면 임건은 그래선 안 됐다.

전부터 내심 거슬리던 불순물이 물 위로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과 평론가이자


작가라는 직업적인 이미지에 덮여 희미하던 점이 대뜸 보였다. 임건은 결코 내 집에서 순수한 손님이 될
수 없다는 간단명료한 사실 한 점이.

실수가 반복되면 그건 습관이다. 가든파티 날 내 앞에서 은근히 과거 일을 논한 점을 재평가해야 할


때였다. 그 남자는 강해아가 누군가의 남편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째선지는
모르겠으나 강해아에게 남은 미련이, 몹시 많은 게 틀림없었다.

“공항으로 가.”

번쩍 고개를 들고 그렇게 말했다.

“네?”

백미러를 두고 홱, 고개 돌려 나를 살피는 막내 비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로 인해 지체되는 몇


초마저도 아깝게 생각되어, 나는 엄한 차창을 똑똑 두들겼다.

“앞을 봐야지.”

“아, 네네!”

“내 여권, 지금 가지고 있지?”


“네? 네, 가지고 있긴 한데….”

“당장 공항으로 가. 차 돌려.”

성질 급한 내 태도만큼이나 막내의 운전에도 속도가 붙었다. 덕분에 우리는 지체 없이 공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급하게 구한, 서울로 향하는 가장 빠른 티켓은 한 장이었다.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윤 비서는 개발팀에 합류해서 일정 처리 좀 도와줘.”

“아, 아니, 대표님…. 서울로 가시는 거예요? 지금이요? 도착하면 내일일 텐데?”

“서울은 내일 아니야.”

이코노미 좌석으로, 그마저도 매진 직전에 겨우 구한 티켓을 들여다보며 나는 눈을 좁혔다.

“…서울은 밤일 거야.”

그러고는 뛰다시피 하며 검문대를 지났다. 항공기 출발 직전, 탑승객을 급히 찾는 방송이 흘러나올


즈음에야 가까스로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대로 내 자리를 찾자마자, 먼저 앉은 옆자리 승객이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키가 2 미터 직전에 멈추고 평생을 운동에 미쳐 살다 보니 저 표정이 이젠 친숙했다. 전철이건 기차건


간에 누군가의 옆자리에 앉으려 하면 내가 아주 죄인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진작 두 자리를
구매했겠지만, 당장은 그런 배려를 할 수가 없었다.

‘나야말로 절망이다, 웬 늙다리 베타가 내 남편이랑 잤을지도 모르는데.’

14 시간의 비행 내내 꽉 낀 팔짱을 풀지 않았다. 큰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는 별의별 망상에 시달렸다.


난기류를 통과하느라 비행 자체도 힘겨웠으며 내 기분의 기류는 그보다 더 나빴다. 구름이 아니라 고름
속에서 뒹구는 것 같았다.

김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잡았다. 곧장 집으로 향하면서는 차가 아니라 내가 달리는 기분이었다.

보름 만에 돌아온 집 앞에 섰을 때엔, 시침이 자정에 가까웠다.

대뜸 들이닥친 나를 보거든 강해아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궁금했다. 불청객이라도 본 것처럼 당황할 것


같다가도, 오히려 아무렇잖게 반겨 주려나 싶기도 했고, 쿨쿨 자느라 내가 온 줄을 모를 것도 같았다.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가면서는 ‘쿨쿨 자느라 내가 온 줄을 모르는’ 강해아만이 머릿속에 남았다. 집 안


가득 컴컴한 어둠이 깔려, 늘 환하던 복도 등조차 꺼져 있었다.

‘자나 보다….’

허탈하게 추측하며 현관문을 열려는데, 황당하게도 문틈 새가 살짝 벌어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문을 잠그기는커녕 열어 둔 채 자나 싶었다.

혹시 도둑이라도 든 게 아닌가 뾰족한 의심이 일었다. 거실에 달린 조명 하나만 뜯어다 팔아도 몇천쯤은
우스운 값이었다.

턱을 들고 방범 카메라부터 확인했고,

‘…전에도 이러다가 엄한 사람 쳐 버렸었지.’


꽉 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등 뒤로 현관문을 닫으며 나는 조용히 걸음을 움직였다. 긴 복도의 센서 등이 정수리 위를 밝혔다. 2


층으로 향하는 계단 옆으로, 마름모꼴의 빛이 번져 흐르고 있었다. 작업실 백열등의 빛이었다.

넝마처럼 구겨진 셔츠 차림에, 집착 덩어리 스토커가 된 기분으로 나는 저벅저벅 강해아의 작업실로


향했다. 얼굴을 보거든 할 말이 많았다. 그 조그만 머리통으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건지 알려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싫은 소리 내뱉을 일 없게 성질을 죽여 가며, 나는 조용히 문간에 섰다. 그제야 강해아가
보였다.

내 가슴 안에 들끓던 성화가 단숨에 식어 버렸다.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넓은 의자 위에 불편하게 몸을 구긴 그의 뒷머리가 주먹만 했다. 거북이처럼 앞으로 구부린 목은 가늘고,


어깨는 내 기억보다 말라 보였다. 물감 기름이 누덕누덕 묻은 작업복 위로 날개뼈 윤곽이 올라 있었다.

살짝 보이는 옆얼굴에는 아주 몰두한 사람 특유의 무표정이 앉아 있었다. 고개를 느릿느릿 기울이며 그는


작은 붓을 움직이고 있었다. 입술을 벌리고 두 눈을 내리깐 채 조심조심 물감을 닦아 내듯 다듬는 캔버스
속에, 내가 있었다.

“…….”

멍하니 그림 안의 내 모습을 바라보는데 낯선 이를 보는 듯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저렇게 따듯한 풍경


속에서 다정한 얼굴을 한, 완벽한 연인이었던 적 없었다. 나를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봐 준 사람 또한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강해아는 내 기척을 느끼질 못했다. 둔한 사람이라는 힐난이 떠올랐다가, 그만큼이나


집중력 좋은 장인이라는 칭찬으로 바뀌었다.

…좋았다. 덕분에 나는 여유 있게 그를 관찰할 수 있었다.

살면서 그를 정확히 알게 될 날이 오기는 할까. 감정이 상해서는 일까지 집어치우고 날아온 순간에, 나를
감동하게 만드는 강해아를.

각진 시계 속의 분침이 열 칸은 더 움직인 뒤에야, 강해아가 무얼 느낀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갈색 눈이 흐리멍덩했다. 취한 사람 같기도, 몹시 졸린 사람
같기도, 슬픈 사람 같기도 했다.

날 보고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기를 기다리며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는 다시 캔버스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붓 끝에 묻은 기름을 걸레에 문질러 닦아 내는 손이 느릿느릿, 고장 난 기계처럼
움직였다.

몇 초인가 지난 뒤에 그가 또 한 번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제 입을 벙긋거리면서,

“어….”

하는 의미 없는 신음만 흘렸다. 그의 눈길이 내 머리부터 지저분하게 구겨진 셔츠, 먼지 묻은 바지, 까만


구두까지를 느릿느릿 훑었다.

빛 없는 갈색 눈은 내게 큰 슬픔을, 느닷없이 안겨 주었다. 억지로 미소 지으며 그와 시선을 마주할 적에,


서서히 위축되어 가는 그 얼굴을 볼 적에… 나는 이상할 정도로 많이 슬펐다.

작업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 그의 그림을 다시 한번 살폈다. 가까이서 보자니 그림의 섬세함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렇게나 격정적인 감상을 하기란 평생에 두 번은 없을 것이었다. 심장이 벌렁거리다가 이내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천태림은 옹졸한 남자다. 화가 나서는,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나 보겠다며 서울까지 강해아를 찾아온
편협한 남자. 그런 남자를 강해아는 작품으로 그려 놓았다.

나란히 그림을 바라보기를 한참, 강해아가 웃었다. 뜻 모를 미소가 걸린 그의 입술이야말로 누군가 그려


놓은 작품 같았다. 천천히 손을 뻗어 나는 그의 뺨을 만졌다. 하얀 살결이, 겁이 날 정도로 차가웠다.

“어…, 태림 씨?”

이내 그가 나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귀신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실재 여부를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나를


더듬어 대는 그를 볼 때는.

강해아의 표정은 갑작스럽게 무너졌다. 언제고 그의 변화는 너무 빨라서, 나로서는 따라잡기 벅찰 때가


많았다. 덤덤한 눈동자에 눈물이 넘실거리더니, 곱던 미간에 주름이 생기고 도도하던 눈썹이 일그러졌다.

“나 혼자 두지 말아요.”

그러고는 애원한다. 내게 준비할 시간조차 주지를 않고, 큰 울음을 터뜨리면서.

“제발요, 네? 부탁할게요. 혼자는 못 있겠어요. 내내 혼자였는데, 내내 괜찮았는데, 사실 아닌가 봐요


….”

굵은 눈물이 그의 눈동자에서 펑펑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내 손바닥에 볼을 기대며 앓는 신음이, 목구멍


안에서부터 끙끙대며 끓는 듯했다. 그 모든 게 나로서는 벅차기만 했다. 눈물과 말과 절망의 원인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제발 나랑 같이 있어 줘요. 제발….”

다만 느낄 뿐이었다.

‘각인…했구나.’

내 오른손을 생명줄처럼 움켜쥐고, 손바닥에 입 맞추는 그를 마주하자니,

‘내 오메가….’

심장이 뻘겋게 뛰어 댔다.

“나 두고 가지 마요. 두고 갈 바에 그냥 죽여 줘요….”

서글픈 고백들이 내 손금 위로 뭉개졌다.

‘내 사람.’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다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열렸다 다물리는 입술 새로 가느다란 신음이 재차


흘렀다. 그의 터질 것 같은 심장 박동이 마치 내 것처럼 들려왔다.

“태림 씨…. 진짜예요?”

이리저리 나를 만져 대는 그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른 손으로 내 윗가슴과 구겨진 셔츠 깃을


쓰다듬기를 한참, 이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힘주어 나를 당기는 건 강해아인데, 나는 끄떡 않고 오히려
그의 상체가 내 품 안으로 안겨 들어왔다.
그 간절함이 마치 물에 빠진 사람 같았다.

“나 좀 안아 줘요.”

강해아가 그렇게 말하는데, 있는 힘껏 안아 주는 것 외에 내겐 주어진 선택지가 없었다. 소리 없이


헐떡이다 연이어 울음을 터뜨리는, 어느 때보다 더 약해 보이는 그의 허리를 나는 와락 끌어안았다.

‘멍멍이’, 하며 그는 낯선 소리를 횡설수설 이었다.

“멍멍이…. 어떡해요? 흑, 걔도 혼자 있기 싫었을 텐데… 나 때문에 걱정했을 텐데. 문, 열어 달라고


내내 긁어 댔는데. 낑낑 울었는데….”

내 귓가에 대고 헐떡이며 강해아가 하는 소리가,

“너무 후회돼요.”

꼭 내가 해야 할 말을 뺏긴 듯이 느껴졌다.

“너무 미안해…. 내가… 내가 두고 가 버렸어요…. 흑, 윽… 잃어버렸어요, 영영 못 만나게 될 거


알았는데.”

내…가, 내가 두고 가 버렸다. 잃어버렸다, 영영 못 만나게 될 걸 알았으면서.

‘아니야, 나는 몰랐어.’

그렇게 변명하려 입을 연 순간,

“아니야. 사실 몰랐어요.”

강해아가 소리쳤다. 내 대변인이라도 된 것처럼 튀어나온 외침에 심장이 거칠게 뛰어 댔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무 생각도 못 했어요. 흐윽….”

할 말을 전부 뺏겨 버린 순간 나는 어리둥절했다. 속이 텅 빈 인간처럼 눈을 끔벅거리는 동안 억울해서


숨이 막혔다. 내가 언제, 누구를 두고 갔지. 뭘 잃어버렸다는 거지…, 그 무엇도 알 수가 없건만 슬펐다.

눈물에 전염성이 있단 말은 들어 본 적 없는데 강해아의 울음은 내게 옮아왔다. 두 눈의 핏줄이 터질 듯


팽창하는 게 느껴졌다. 눈알이 아리고 가슴에서 물리적인 통증이 이는 듯했다. 불가해한 충격에 장기마저
꿈틀거렸다.

“태림 씨. 나랑 사는 게 숨 막혔어요?”

질문에 내 몸은 돌처럼 굳었다. 이상한 충동이 나를 감쌌다. 당장 강해아를 떼어 내어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그래야만 한다는 숙명 같은 충동이.

그의 어깨를 움켜쥐고 밀어 내려 시도했으나 내, 발작 같은 움직임은 쉽게 제지당했다. 강해아가 나를


안고 놓아주질 않는 탓이었다. 그의 두 팔이 밧줄처럼 내 허리를 휘감았고 눈물 젖은 얼굴은 내 어깨에
파묻히다시피 했다. 그러나 입술로는 아무런 말도 들려주질 않았다.

나는 돌연 두려워졌다. 무서웠다, 그가 침묵하는 것이. 그의 체온이 서늘해진 것이. 가까스로 침묵을


깨고 입을 열고도,

“내가 베타였더라면… 태림 씨… 나랑 사는 게, 그런 느낌이었을까요?”


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을 꺼낸다는 것이.

“내가, 막… 사물처럼… 흑, 좋아하려 해도… 설레지가 않고, 석상이랑 사는 것처럼… 그랬을까요?”

‘이건 고문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고문이다, 일부러 내게 고통을 주려는 의도가 실린….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목적도 악의도 없이 나를 이렇게까지 아프게 할 순 없었다. 바라는 답이 무언지 안다면 자백을 할 텐데,
해답은커녕 강해아를 달랠 방법조차 나는 알지 못했다.

눈물이 났다. 내 무지함이 억울했다.

내 품 안에 감춘 얼굴을 확인하려 거듭 그를 떼어 내려는데,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남자를 밀어 내기가


조금도 쉽지 않았다.

‘그만해.’

거대한 공포가 검은 말처럼 내게로 달려들었다.

‘제발 그만해…. 무서워. 무섭다고….’

겁에 질린 혀가 제멋대로 움직여 댔다.

“미안해.”

그러니까 그만해, 그만…. 난 네 얼굴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라고… 애원하는 심정으로 나는 외쳤다.

“너를 두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몰랐어, 네가….”

사과와 변명이 여과 없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나는 강해아를 내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체향, 작은 숨결의 온도, 혹은


그저 보이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그가 내 것이라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건, 각인한 오메가를 두고
떠나 버린 일에 대한 사과였다.

“전부 내 잘못이야.”

그런데 가슴 안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피 같은 말들은,

“너를 혼자 두고 가다니….”

다른 날의 다른 내가 하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고 나는 강해아를 세게,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제야 그의 색색거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천천히 달아오르는 뺨의 온도는 더는 차갑지 않았다. 소리 내며 뛰는 심장 박동도 다시금 내 흉곽을
두들겨 댔다.

도통 어떤 마음인지 알 길 없던 강해아가 내게 각인했다는 게 좋았다. 나를 좋아하게 되어서이건, 내


형질의 영향이건 간에 그는 이제 내 오메가였다. 그 사실이 좋았다. 그래서 기뻐야 하는데… 나는 영문
모를 눈물만 흘려 댔다.

이상한 일이다, 그 앞에서는 눈물이 쉬워진다는 게.

이내 내 정신은 강해아를 담는 그릇이 됐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내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세계에서 그만이 중요했고 그만이 실체 있는 존재라고 생각됐다. 내가 계획한 일정대로, 상상한 모습으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움직이는 톱니바퀴 같은 일상들이 아니라….

내 손바닥에 뺨이 뭉개지도록 얼굴을 대고 훌쩍훌쩍 눈물짓는, 집 안 가득 정체 모를 선물들을 쌓아


놓고는 내 코트 한 벌, 양말 한 짝에까지 제 체향을 묻혀 놓은, 한 번도 내색한 적 없던 광활한 외로움을
대뜸 쏟아 내는, 이 남자가 아니면.

강해아가 아닌 다른 무엇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의 페로몬으로 가득 찬 드레스 룸의 중앙에 섰을 때는 거의 화가 났다.

‘누가 바람을 피웠다고?’

머리꼭지로 열이 확 올랐다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허튼소리를 한 건 시은철이지만,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서울까지 날아온 건 결국 나였다.

그래도 녀석에게 한 소리는 해야만 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침실에서 강해아를 기다리면서, 나는 휴대폰을 두들겼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내 남편 바람 안 났어.

그놈도 알파 아니고.]

오전 12:02

살다 살다 시은철한테 이런 말을 다 해 보는구나 싶었다. 늘 내 편이던 놈이 왜, 정작 중요한 순간에만


이상하게 행동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든파티 날부터 조금, 특이한 점이 있기는 했다.

‘…아니야.’

그보다 훨씬 전, 결혼 이야기가 오갈 때부터 시은철이 비춘 기색이 영 탐탁잖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야 내 결혼이 개인의 경사라기보다는 기업 간의 계약이었던지라, 오래도록 친구인 녀석이 내 쪽 득을
더 따지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혹시 은철이가….’

천천히, 눈살이 찌푸려졌다. 합당한 결론이 하나 있기는 했다.

‘…강해아를 좋아하나?’
90 년대 노래 가사 같은 막장극이 내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아니지. 이건 ‘친구의 친구를 좋아했네’도
아니고, ‘친구의 남편을’… 시커먼 생각에 깊이 심취하기 전에, 은철이는 빠른 답장을 보내 주었다.

[????????????

너 지금 서울이야??]

오전 12:03

[아니... 난 그 사람이랑

해아 씨 둘이 분위기가

이상해 보여서 걱정돼서

알려 준 거지--;;]

오전 12:03

문자를 물끄러미 읽어 내리면서도 껄끄러운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제 일도 아닌데 그렇게 화가 나서는,


정확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사실처럼 말하다니…. 아무래도 은철이답지가 않았다.

만에 하나 이 녀석이 강해아를 좋아하고 있다면,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게 끊어 놓는 것도 내가 할


일이었다.

[해아 씨 나한테 각인했어.]

오전 12:04

그러고는 휴대폰을 내렸다.

후드 재킷을 손에 들고 머뭇머뭇 걸어 나오는 강해아가 보였다. 물감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작업복에서,


편해 보이는 맨투맨 차림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난장판이 된 드레스 룸을 보인 게 부끄러운지 그의 얼굴에 홍조가 만연했다. 일자형 눈썹이 오늘따라


시무룩하니 끝이 처지고, 두 손은 애꿎은 옷소매를 구겨 쥔 채였다. 속을 알 듯 말 듯 아리송한 사람이,
유독 부끄러움을 감추는 데엔 젬병이었다.

귓불까지 발갛게 익힌 그를 보자니 내 안의 작은 의심이 꿈틀거렸다. …내 친구가 내 남편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의심이.

‘그래, 저런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하고 배겨.’

그러고 보면 가든파티 날에는 둘이 입술까지 맞췄다고 그랬었다.


‘…입 막으려고요. 시은철 씨가 하는 말 더 듣기 싫어서 그랬는데요.’

강해아를 이해하는 방법을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그가 외간 남자와 키스한 이유를 그렇게 설명한다면,
그게 진실일 확률이 높았다.

그로부터 자백을 듣던 순간에는, 상대가 임건이 아니라는 사실에만 집중하느라 안도했었다. 하지만
되짚어 보니 시은철은 그 일에 대해 내게 언급조차 한 일이 없었다.

‘인기 있는 남편을 두면 이렇게 되는군…. 사람이 옹졸해져.’

깊은 한숨을 참으며 나는 그를 데리고 차고로 내려갔다. 일 잘하는 오 기사가 기름을 가득 채워 둔 덕에,


주유소에 들를 필요도 없이 곧장 울시도로 향할 수가 있었다.

“피곤하면 뒷좌석에서 눈 좀 붙여.”

‘…도 됩니다.’

입버릇처럼 존댓말이 나오려는 것을 속으로 삼켰다. 강해아는… 아니, …해아는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운전하는 사람 피곤하게 어떻게 그래요. 옆에 앉아서 갈게요. …가는 동안 얘기라도 해요.”

그새 부어서 퉁퉁해진 두 눈을 끔벅거리면서도, 말씨는 듣기 좋고 상냥하기만 했다.

그런 남편을 조수석에 앉혀 두고 운전대를 잡는 내겐 피로도, 졸음도 없었다. 역겹고 어지럽기 짝이 없던,


14 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돌아와 놓고는 어디서 이런 힘이 나는지 미스터리였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지쳐서 뻗는 한이 있더라도 강해아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단 것이었다. 일방 각인을


해 놓고도 웃는 얼굴로 나를 미국으로 보내 버린 천부적인 연기자를, 실망시켰다가는 실망시킨 줄도
모르게 될 터였다.

그게 날 두렵게 했다. 강해아가 내가 생각하던 것만큼 자존심 세고 천진한 사람은 아니라는 게, 나로


인해 상처 입고 속이 곪아도 죽는 날까지 감춰 버릴 남자라는 게.

‘멍멍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가 어떠한 기회처럼 생각됐다. 그 개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다 해아의


품에 안겨 주고 싶었다. ‘두고 가 버렸다’, ‘다시 못 보게 되어 버렸다’… 사무치는 울음을 터뜨리는
꼴을 두 번 봤다가는 내 머리가 고장 날 게 틀림없었으므로.

낯선 섬의 바닷가에 도착하기까지 꾸준히 조잘거리며 해아는 라디오 노릇을 해 주었다. 그가 전하는, ‘


어디서 들은 건데요’로 시작되는 이런저런 얘기들은 배꼽 빠지게 웃기지도, 반전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재밌었다.

하기야 그런 얼굴에 그런 목소리로 남을 못 웃기기가 어디 쉽겠는가. 아무 짝에도 흥미 없는 학회


논총이라 해도 그가 낭독하면 듣기 좋을 터였다. 쌀쌀한 바닷가의 바위 위에 앉아, 임건을 집에서
재웠었다고 어렵사리 전하는 말조차도 그랬다.

반나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입에서 나올 말이 변명이든 핑계든지 상관없노라고, 지난밤의 일을 어떻게


설명할지 한번 듣기나 해 보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가 후드 재킷 소매 위를 손가락으로 깔짝이며,

“저… 태림 씨. 나 바보짓 했어요.”

고백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어제… 아니다. 그제 임 선생님 불러서 작품 보여 줬었는데, 제가 게스트 룸에서 재웠어요. 아무 일도
없었고요, 그냥…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취한 사람을 운전하게 할 수도 없고….”

‘이것 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강해아는 믿을 만한 사람이지.’

그가 범죄자가 아니라는 게 나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순하기 짝이 없는 눈동자만 봐도 설득이 되어서,


그가 당장에 사람을 죽였대도 ‘뭐 어때, 괜찮아. 상대가 죽을 짓을 했겠지’ 하고는 송장 하나쯤 거뜬히
치워 주지 싶었다.

그러니 이 남자가 착해 빠진 사람임은 내겐 천운이다. 그가 나쁜 살인마였더라면 나는 시체 유기범이었을


테니까.

‘…….’

아니지. 저 곱상한 손으로 죽이긴 누굴 죽인다고….

해돋이를 구경하느라 지쳤는지 해아는 뒤늦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저는 괜찮다, 안 졸리다며


고집부리는 그를 조수석에 눕혀 놓고 담요 하나를 덮어 주었다. 그러자,

“이런 데선 못 자는데….”

들릴 듯 말 듯 작은 투정을 유언처럼 남기고는 삽시간에 잠들어 버렸다. 힘 빠진 머리를 조수석 등받이에


푹 기댄 채 ‘커어…’ 작게 코 고는 소리를 내기까지 1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황당해서 웃음이 났다. 혼자 실없이 미소 지으며 그 얼굴을 구경하다가, 불쑥 손가락을 그의 코 밑에


가져다 댔다. 색색 새어 나오는 숨결이 내 살결을 간질였다.

잠든 이를 앞에 두고 나는 안 하던 혼잣말을 했다.

“강해아 씨.”

그렇게도,

“해아야.”

이렇게도 불러 보면서,

“…해아야.”

그 이름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곯아떨어진 그가 깨지 않게끔, 인적 없는 주차장까지 느릿느릿 서행했다. 가장 구석 자리에 차를 댄


다음에는 혼자 내려 부둣가를 걸었다.

섬 주변을 크게 돌다 보니 좁은 도로 갓길에 도착했다. 아무렇게나 쇠줄을 채워 놓은 시골 개들이 보였다.


개중 흰 녀석이 있는지 살피면서는 도둑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헤맨 끝에 완연한 아침이 됐다. 섬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였다. 그물 걷는
노인네들을 쫓아 나는 물 빠진 펄 근처까지 걸어 내려갔다. 개를 찾는다며 수소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근방에서 흰 개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흰 개를 보았다는 이야기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와 놓고 못 찾으면 어떡하지?’

녹슨 울타리에 기대어 선 채 나는 불안했다.

‘…해아가 실망할 텐데.’

시무룩한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내가 죄인처럼 생각됐다. 무턱대고 이 먼 섬까지 해아를 데려온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개 찾는 전단지를 만들든지, 사전 조사라도 해 볼 걸 그랬다. 그저, 점수 딸 생각에
눈이 멀어서는….

머리가 나빴으니 몸이라도 바빠야 했다. 나는 이 집, 저 집,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한 가게들을 돌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쩌어기 뫼에 옥자네 함매가 차린 견사가 있긴 한데….”

새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분홍색 비닐 토시를 찬 아주머니가 산길을 손가락질하며 중얼대는 소리였다.

“저기 산 위에, 옥자네 할머니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중얼중얼 말을 따라 하자 아주머니의 찌푸린 얼굴이 서서히 펴졌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대놓고 이목구비를 훑어보더니, 살갑게 내 어깨를 두들기기까지 했다.

“아니 아니, 쩌어기.”

그러고는 더 먼 산을 가리켰다.

“음…,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적당한 인사를 남기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나중에 한번 들러, 밥 먹으러’ 하는 외침이
들렸다. 힐끔 살펴본 가게는 국밥을 파는 식당이었다. 해아가 내장 섞인 돼지국밥을 과연 먹어나 봤을까
…. 애매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조수석에 뻗어 여직 잠든 해아를 확인하고, 점심을 알리는 시계도 확인했다. 서너 시간을 걸어 다닌 탓에


운동화가 지저분했다. 차 문 밖에 대고 탈탈 털어도 개흙 자국은 지워지질 않았다.

그대로 보호소 정보를 찾아 연락한 것까지는 좋았다. 진도 믹스와 흰 개라는 조건에 부합하는 유기견이
스무 마리가 넘는다는 소식에, 잠든 해아를 깨우지 않고 산길을 운전해 올라간 것도, 급하게 빵과
주스라도 사다가 먹인 것도, 마침내 해아가 ‘멍멍아’ 하며 하얀 개를 안아 든 것도 좋았다.

‘어디서… 본 적 있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었을 터였다. 어정쩡하게 눈에 익은, 하얀 강아지가 주는 이상한 기시감만


아니었더라면.

보호소에서 보낸 40 분 남짓한 시간은 온통 이상했다. 해아가 지난겨울 잃어버렸다던 개는 성견일 텐데,


‘얘예요’ 하며 안아 든 개는 배가 통통한 어린 강아지였다. 울고불고 미안하다며 찾던 모습을 생각하면
잃어버린 개를 완전히 포기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는 묘하게 상쾌해 보였다.

그가 유기견 입양 서류에 또박또박 글자를 채워 넣는 동안, 나는 내 무릎 위에 앉은 흰 개를 내려다봤다.


코 위에 얼룩처럼 찍힌 점이며, 입가에 난 털이 적어서 분홍색 살빛이 보이는 것하며, 쌍꺼풀 진 순한
눈동자가 너무 익숙했다. 개를 보고 구면이라는 인상을 받긴 처음이었다.

컹, 컹… 컨테이너 바깥에서부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고개를 들고 창문 밖을 살피자 문득, ‘사지 말고 입양하세요’ 문구가 적힌 캠페인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녹색 배경에 활짝 웃는 믹스견의 얼굴이 프린트된 포스터였다.

‘아, 알겠다….’

이내 나는 허탈해졌다. 그러고 보면 비슷하게 생긴 흰 개를, 회사 직원의 탁상 달력에서 본 것도 같았다.


‘새로운 가족을 기다립니다’ 같은 희망찬 문구가 쓰인 달력을, 동물 실험 때문에 담배도 끊었다던 박민희
사원이 갖고 있었다.

수익금이 전액 기부된다는 이유로 같은 달력 열다섯 개를 사다가 돌린 탓에 개발팀 직원들이 모조리


똑같은 달력을 쓰던가, 그랬다.

‘그래, 달력에서 본 것도 같네….’

꼬리 치며 내 턱을 핥아 대는 녀석을 나는 심란하게 내려다봤다. 오답을 마킹한 듯 텁텁한 감각이 입 안을


맴돌았다. 애매한 두통이 골머리를 울리려다가, 해아가 ‘기부’라는 이름으로 쾌척한 천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에 싹 가셨다.

“해아야.”

나는 그런 해아가 좋았다. 내 삶의 장르를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어 버리는 해아가,

“좋아해.”

고백하는 내 말에는, 자는 척 눈을 감아 버리는 해아가.

강해아가 좋았다.

―저… 혹시 미치셨나요?

노트북 스피커를 통해 새어 나온 말이었다. 직사각형 모니터 속에는 여덟 개의 칸으로 나뉜 여덟 명의


사원들이 화상 회의에 참여 중이었고, 개중 일곱은 내 눈치만 살폈다.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대표님, 진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궁시렁궁시렁 목소리를 내는 이는 화면 오른쪽 하단에 위치한 개발팀장, 김민수뿐이었다. ‘허어’ 하고


과장된 한숨까지 내쉬는 그의 의도를 나는 십분 이해했다. 내가 서울에 와 버린 탓에 개발팀 전원이
고대하고 또 고대하던 뉴욕에서의 미팅 일정이 최소 사흘씩은 밀렸으니, 서운한 티를 내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마. 일은 어떻게 됐어?”

내가 물었고,

―일이 잘되었으면 제가 쓸데없는 말씀을 드렸을까요?

김 팀장이 쓸데없는 소리를 한마디 더 붙였다. 6 월 한 달 내내 야근을 자처해 가며 완성시킨 프로젝트가


있건만, 일정이 밀리면서 그 보람도 반절 사라진 셈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잠 좀 자 가면서 준비했
죠’ 하고 투덜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셈 쳤다.

“윤 비서.”

대신에, 메일로 전달받은 보고서 파일을 열면서 막내 비서를 불렀다. 화면 하단에서 ‘네’ 하고 자세를
고쳐 앉는 막내가 보였다.

개발팀 직원들은 딱 봐도 잠옷 차림에 와이셔츠만 걸쳐 입은 모습인데, 막내만은 머리 세팅부터 셔츠에


넥타이, 재킷까지 차려입어 반듯했다. 화상 회의가 지겹도록 잦은 회사라는 걸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네, 대표님! 일정 조율 잘 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손을 깍지 껴 쥐고서, 막내가 보고했다. 거의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 태도였다.

―그리고 임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전원의 의견은 아니고 몇몇 분들께서… 단순히 궁금증이
있으시다면서.

“아, 그렇습니까. 뭐랍니까.”

사무적인 말투를 흉내 내며 대꾸하는데, 정작 막내는 내 장난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허둥지둥 준비해


둔 노트를 열더니 메모한 통화 내용을 찾아 읽기 바빴다.

―‘미국 지사 터는 풍수를 보고 잡았냐’고…, ‘아는 무당이 있는데 추천해 주겠다’. 그러고서 연락처를
남기셨어요. 뭐라고 답해야 좋을까요?

“터세 굿판 벌였다고 해. 국산 돼지머리도 가져다가 놓고 입구에 부적도 묻었다고.”

―정말요?

“…아니.”

웃음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으면서, 나는 심각하고 진지한 척 표정을 고쳤다.

임원회 노인네들이 무당 소리 꺼내는 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우습다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네들은


진지했다. 무시하고 넘겼다간 더는 재미없게 될 터였다. 그런 건수를 처리해 주는 전문가라면 따로
있었다.

“시은철 실장한테 받은 연락처 넘기고, 관련 전화도 전부 그쪽으로 넘겨. 알아서 처리해 줄 거야.”

―아, 네! 저, 그리고… 돌아오실 비행기 표가 마땅치 않아서요…, 이코노미 좌석밖에 안 남았는데


어떡해요? 붙여서 두 자리라도 예약해 둘까요?

“자리는 상관없어.”

그렇게 대꾸하면서 힐끔, 노트북 모니터 구석에 위치한 달력을 확인했다.

“…날짜가 문제지.”

작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가능하다면 서울 집에 이틀은 더 머무르다 가고 싶었다. 해아가 내게


각인했고, 오늘은 오전부터 달달한 체향을 폴폴 풍기면서 안겨 오기까지 했다.

‘어디 안기기만 했나….’


도도한 입술이 자진해서 내 걸 빨아 대는 아침을,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누릴까.

그런 해아와, 새 식구 도진이가 있는 집을 두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한탄스러웠다. 뷔페 놔두고


벌레 먹으러 가는 꼴이었다.

화면 위에 달력을 띄워 놓고 나는 눈을 좁혔다. 이미 밀린 일정을 어떻게 구겨 넣어야 이틀을 더 비울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막내 비서는 내 한숨을 다른 의미로 착각한 듯했다.

―자리가 왜 상관이 없으실까. 비즈니스석도 좁아서 무릎도 못 펴시잖아요. 어휴…, 좀 더 찾아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두 번 들렸다. 모니터 위로 고개를 들자, 말간 얼굴의 해아가


보였다. 손에는 과일이 올라간 접시를 들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조그만 포크까지 야무지게 챙겨 든
채였다.

노트북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해아는 소리 없이 다가왔다. 가져온 접시를 그대로 내 책상 위에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났다.

―…우선 내일로 일정 잡혔는데 어떡할까요. 연구 자료 오픈하고 테스트 결과 보고하고, 아무튼 중요한


날인 거 아시잖아요. 대표님, 꼭 오셔야 돼요.

노트북 밖으로 김 팀장이 투덜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키보드 음량 키로 내 손은 거의 날아가다시피


했다.

―대체 무슨 급한 일이 생겼길래 천 대표님이 갑자기 욕을 다 하시고, 공항까지 분노의 질주를 찍으….

쪽팔리게 허튼소리까지 줄줄 읊는 것을, 버튼을 마구 연타해 음소거 상태로 만들었다.

“…….”

민망함에 손가락이 절로 굳었다. …해아가 들었을까? 눈치를 살피려는데 그는 아무 말 없이, 종종걸음으로


서재를 떠나 버렸다.

긴 한숨을 소리 나게 뱉으며 나는 모니터를 노려봤다. 들리지 않는 줄도 모르고서 주절주절 말하는 김


팀장의 입이 화면 안에서 벙긋거리고 있었다. 부하가 아니라 웬수가 따로 없다.

아무래도 그 바람에, 해아가 몰라도 될 이야기를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내일 일정이 있으면 빨리


돌아가라며, 내 등을 떠미느라 비싼 티켓까지 구해다 놓은 것이었다. 반지르르한 티켓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공손한 너구리처럼 건네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나 내보내려고 티켓을, 얼마를 주고 구한 거야?”

이틀만 더 같이 놀다 가겠다는데, 그는 나를 일중독자로 만들려 했다. 세상의 어떤 알파가, 암만 일에


미쳤다고 해도 저한테 각인한 남편 놔두고 출장을 간단 말인가. ‘고자 아니냐’ 하고는 안주거리 삼을
일이었다.

이건 고문이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내 사타구니에 얼굴을 파묻질 않나 달콤한 페로몬을 뿌리며


찌르르 몸을 떨어 대질 않나 나를 굶주린 개로 만들어 버린 사람이, 배부르게는 해 주지 않겠다며 한 입
맛본 애피타이저로 만족하랜다.

‘내가 결혼을 한 건가, 배스킨라빈스에 온 건가….’


그래 놓고 강해아는 되려, 어리둥절한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까지 지어 댔다.

할 말이 드글드글 입 안에서 넘쳤지만 뱉을 수 있는 소리는 적었다.

“그냥 받아 주면 안 돼요?”

목소리는 낮추고 어깨는 끌어 올리면서 그렇게 묻는 얼굴을 맞대고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면서,

“네?”

그렇게 꼬드기는 강해아 앞에서는 살살 녹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제가요, 태림 씨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내 멋대로 입히고 그러지는 않잖아요. 그냥 태림 씨가 탈 비행기,


차는 시계만… 아니다. 그리고 구두까지만요. 응?”

“…너는 꼭 이럴 때만 애교를 부리더라.”

“나 애교 안 부렸는데요….”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얼굴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그도 멀뚱멀뚱 갈색


눈에 나를 담았다. 잠깐 침묵이 오간 끝에,

“많이 귀여웠나 보죠?”

해아가 농담했다.

입을 다물고 나는 패배를 시인했다. 솔직히 귀여워 죽겠다. 다 큰 성인 남자가 이렇게까지 귀여울 필요가
있나….

또박또박 저 잘났다고 말하는 목소리도 듣기 좋고 아직도 나와 대화하는 게 낯설기라도 한지 입술을 핥아


대는 습관도 야했다. 내가 열성이었더라면 지금쯤 정신이 홱 돌아서 그를 잡아먹었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열성이 아니라도 좀 더, 솔직했더라면 그랬겠지.

해아조차도 잊었던 손님들이 느닷없이 닥쳐오지만 않았더라도, 그랬을 것이었다.

“미안해요, 태림 씨…. 약속 잡힌 걸 잊고 있었어요.”

그러고는, 해아는 줄줄이 찾아드는 손님 하나하나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퍼블리시스트 실장을 봤을 때는


놀랍지 않았다. 셀러브리티 ‘강해아’에게 매달린 전문가가 없을 거라곤 생각하기 어려웠으므로. 대학원
시절 은사님이라는 나이 든 교수도 납득할 만한 손님이었다.

하지만 임건은 아니었다.

“천 대표님 계실 줄 알았더라면 뭐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봐요.”

주절주절 퍼블리시스트가 하는 말이 왼쪽 귀로 들어왔다가 오른쪽 귀로 흘러 나갔다. 저도 찔리는 게


있는지 어깨가 굳은 임건과 내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내가 와 있을 줄 몰랐나 보지.’

몇 주 자리 비운 새 내 신혼집에, 그것도 오밤중에 와서 아침까지 머물러 놓고는 사흘도 안 지나서 말끔한


척 다시 찾아오다니 기가 막혔다. 마음 같아선 방역 업체를 불러다가 그가 묵었다는 게스트 룸부터 앉았던
자리 하나까지 소독이라도 하고 싶었다.
느릿하게, 나는 해아의 팔뚝을 손으로 감쌌다. 웃으며 선 그를 내게 맞는 퍼즐인 양 끌어당기며,

“출장 중에 잠시 들른 겁니다. 집에 새 식구가 생겼거든요.”

부러 가볍게 말했다. 임건의 반응을 확인해 보려 꺼낸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손님들의 얼굴이 해아에게로, 정확히는 그의 배로 향했다. 퍼블리시스트 박 실장은 웃는


낯이었고 교수는 순수하게 놀란 듯했는데, 임건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짧은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매가 굳었다.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무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해아가 창문 밖의 ‘새 식구’를 소개했다.

“귀엽죠? 이름은 도진이야.”

개를 자랑하느라 신이 난 해아의 어깨에 나는 팔을 둘렀다. 그를 내 옆구리에 바짝 붙여 안다시피 하면서,


자연스러운 미소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속에선 천불이 끓었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해아의 생각은 어떤지 몰라도 임건에게는,
강해아가 평범한 지인이 아니었다. 반듯한 척 표정을 고치고도 그는 눈빛 안에 남은 미련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지는 회의는 더더욱 나를 의아하게 했다. 각자 명함에 쓰인 명분대로 모여든 사람들과 개인전에 걸릴
작품을 확인하고 전시 개요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해아는 액자 이야기로 이상하리만치 애를 썼고 박
실장이라는 놈은 또 대단히도 고깝게 굴었다.

“액자는… 실장님 의견 한번 들어 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임건까지 실장 말에 힘을 싣고 나니 해아가 도통 맥을 못 추렸다.

‘하….’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대놓고 혀를 차건 박장대소를 하건 둘 중 하나는 저질러 버릴


성싶었다. 이 모임 자체가 내겐 한 편의 코미디였다.

액자 그까짓 게 도대체 뭐라고, 강해아가 정하게 놔두질 못해 입을 댄단 말인가? 그가 그린 그림이


없으면 액자는 나무틀을 쓰든 금칠을 하든 하물며 다이아를 가져다 박아 댄대도 쓸모없는 포장지에
불과했다.

그런데 작가 본인이, 미리 자료도 다 준비해서 규격까지 정해 놓은 액자 하나 마음대로 못 쓴다니 말도 안


되는 촌극이었다.

“…선생님이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 해요?”

자신만만하던 해아의 태도는 눈에 띄게 시들해졌다. 시무룩해지다 못해 거의 멍해져서는, 태블릿 액정을


향해 고개가 천천히 내려가기까지 했다.

그 반응이 내겐 기름 부은 땔감이었다. 속에서 화재가 났다.

시류 운운하며 비싼 액자를 고집하는 게, 박 실장이야 퍼블리시스트라니 납득이 갔지만 임건은 아니었다.


해아는 그를 소개하면서 ‘나를 도와주는 평론가 선생님’이라 말했었지만, 그 또한 틀린 소리였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가 편을 들어 주는 이가 따로 있었다.

‘이거 아주 개새끼네.’
임건이 강해아가 말한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분명해졌다. 덧붙여, 어쩌면 강해아 역시, 내가
생각한 것만큼 강단 있는 작가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제가 그려 낸 작품 앞에서, 제 이름을 건 개인전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감독이 되질 못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도록 완성시킨 그림을 방패막이처럼 세워 놓고도, 해아는 자진해서 일개 스태프처럼 굴고 있었다.

퍼블리시스트건 평론가건 간에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언제부터 그를 쥐락펴락해 온 건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당장은 그 점을 꼬집어 물을 수 없었다.

손을 들어, 나는 열을 재는 척 해아의 이마와 눈가를 쓰다듬고 가려 주었다. 내 손바닥이 솥뚜껑처럼


시야를 가로막자, 해아는 멍하니 떴던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그러더니 감아 버렸다. 몹시도 피곤한
사람처럼 기대 오는 얼굴이 따끈따끈했다.

“중요한 이야기는 마무리된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 주시죠. 오전부터 해아 컨디션이 나쁜지라 안


되겠습니다.”

그의 손님들을 나는 멋대로 물렸다.

“이미 주문 넣었습니다, 액자는. …결혼하고서 제 남편 첫 전시인데, 제가 맞추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주문 들어간 건이니 더 논의드릴 게 없습니다.”

이러려고 결혼한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민 많은 얼굴로 앉은 해아를 도진이에게 맡겨 두고, 나는 배웅을 빙자하여 손님들 뒤를 쫓았다. 교수는


제 차 앞에 선 제자를 혼내기 바빴고 박 실장은 날 보며 수다를 떠는가 싶더니 휴대폰을 들고 갓길 아래로
먼저 나섰다.

내가 붙잡은 이는 마지막으로 정원을 나서는 임건이었다.

“‘임 선생님’.”

그렇게 불러 세우자 임건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무얼 추궁할 거라 생각했는지 웃는 낯으로 입을 여는데,
나는 그가 하는 어떤 변명이라도 들을 마음이 없었다. 변명도 사과도 벌써 해아에게 받았다. 내가 신경
쓰는 것도 오직 그뿐이었다.

“두 번 다시는, 사적으로 내 남편 만나는 일 없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몹시 정중한 어투로 내가 말했다. 모 아니면 도였다.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정신 줄을 꽉 붙들고 행동하지


않으면, 난생처음 알파가 아닌 베타 때문에 주먹을 휘두르는 불상사가 벌어질 터였다.

당장은, 내가 아니라 해아의 면이 걸린 모임이므로 싸움은 삼가야 했다. 폭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화가 난 만큼 허리는 바로 세워야 했다. 가볍게 묵례하듯 고개 숙이자, 임건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얼굴이었다.

“…한번 연기를 시작했으면 끝까지 마치십시오.”

말 속에 숨은 뜻을, 그 정도 배운 사람이면 알아챌 것이었다. 강해아를 두고 어쭙잖게 흔들리지도 수작


부리지도 감정 싣지도 말란 의미인 것도,

“같은 부탁을 두 번 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게 마지막 경고라는 것도.

대답 없는 임건의 얼굴을 나는 빤히 내려다보았다. 곤혹스러운 기색을 비추며 그는 신음 같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와는 더 나눌 말이 없었다. 집을 등지고 선 채,

“그럼 살펴 가십시오.”

나는 그를 배웅해 주었다.

끝내 그럴싸한 대답을 듣진 못했으나 나는 그 침묵에 만족했다. 싫어하는 상대의 한계점을 구경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덕분에,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임건의 뒷모습을 따라 내 속의 화도 떠났다. 잿더미 위에 선 기분으로


나는 강해아를 걱정했다. 정작 제삼자인 나만이 알아차렸을 뿐, 해아는 아직 모른다. 임건이라는
평론가가 제, 순수한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선생님’ 하고 그를 부를 때 목소리에 순전한 호의를 싣는 이는 오직 해아뿐이었다. 대뜸 박 실장의 말에


편을 들고, 그놈의 액자 문제가 무언지는 몰라도 은근히 다른 길로 틀기를 종용하는 꼴을 보자니 내
눈에는 임건이 부리는 수작이 뻔했다.

‘강준일 회장 사람이군.’

이성은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데 반해 감성에는 불이 붙었다.

‘그런 주제에 해아랑 연애는 왜 한 거야?’

이쯤 되니 해아가 걱정됐다.

사람 인생이 뭐 이렇단 말인가? 한국판 트루먼 쇼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대학원 친구라는 놈은 그를


돈주머니에 열성 오메가로만 보고, 믿을 만한 선생님이라는 임건은 강해아가 아닌 그 아버지의 편이라니.

…강준일 회장에겐 이것도 ‘보호’의 일종인가.

‘차라리 목에 감시 카메라를 걸어 놓지, 왜.’

문득 지난날의 술집이 생각났다. 위스키 향기가 코를 찔러 대던 복도에 우두커니 선 해아가 있었다.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난잡한 농담으로 다루는 제 험담을 들으면서,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눈만 깜빡거리던 그 옆얼굴이, 내 머릿속에 부조로 새겨졌다.

같은 표정을 두 번 볼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임건이 됐건 옛 친구가 됐건 간에, 그가 누구의 사람이고


어떤 의도와 감정을 갖고 강해아를 대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강해아를 배신하고 상처 입히느냐,
그것만이 중요했다.

해아는 이미 내 사람이었다. 내 사람이고 가족이고 남편이었다. 그는 가만히 복도에 서 웃는대도 내가


참지 않을 것이었다. 받은 만큼, 해아가 못 돌려줄지언정 내가 갚아 줄 것이다.

상대가 누구이건 관계없이, 그게 설령 나 자신이 될지라도….

그런 각오를 하며 돌아온 집 안에서는, 어느새 명랑해진 해아가 웃고 있었다. 손님들의 잔이 치워진


테이블 위에는 택배 박스가 쌓였고 옥혜 아주머니가 그의 옆에 붙어 앉아 쪽가위를 쥔 채였다.
“태림 씨, 이거 봐요.”

언제 멍하니 지쳤었나 싶을 만치 기운 넘치는 얼굴로, 해아가 외쳤다.

“너무 귀엽죠!”

박스 안에서 작은 옷을 꺼내 드는 손을 나는 놀란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의 손에 들린, 어른 손바닥만 한


스웨터가 일순 아기 옷처럼 보였다. 짧은 순간 내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왜… 왜 해아가 아기 옷을 샀지? 누구 입히려고…, 혹시.’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볼 붉히는 내 앞에서,

“도진아, 이리 와. 새 옷 입자!”

해아는 성능 좋은 소화기가 됐다.

“우리 도진이는 무슨 색이든 다 잘 어울리지요, 그쵸오?”

“…….”

가슴 안에 피웠던 불이 잠깐이지만 뜨끈했었다. 푸쉬식 꺼진 연기가 머리 위로 피어올랐다.

“오구 좋아. 오구 그랬어?”

도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해아는 털 뭉치 녀석을 무릎 위에 안아 들고 저 혼자 갖은 대꾸를 다 해


댔다. 아주머니가 꺼내 놓은 옷들을 한 벌 한 벌, 개의 목에 둘러 보며 뭐가 잘 어울리고 뭐가 안
어울린다느니 아주 진지한 모습이었다.

“목 티는 싫어? 목 티 안 입어요? 그럼 이거 입을까? 우리 도진이 셔츠 입을까요?”

“…….”

“아이 이쁘다. 잘생겼다, 우리 도진이. 형아한테 뽀뽀해 줘.”

설탕 풀풀 날리는 말투가 인상적인 탓에, 복사기처럼 흉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주어를 ‘우리 해


아’로 바꿔 농담할까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도도한 강해아가 내 농담을 받아 주지 않으면,
‘형아한테 뽀뽀해 줘! 라고 말했다가 쪽팔려서 세상을 떠남’이라는 문구가 내 묘비에 새겨질 테니까….

‘나한테도 좀 그렇게 굴어 주지.’

팔짱을 끼고 벽에 붙어 서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그대로 나는 강해아를 구경했다. 흰 개의 주둥이와 까만 코에 입을 맞추면서, ‘예쁜 도진이’, ‘착한


도진이’… 칭찬하기 바쁜 강해아를. 쌍꺼풀 진 눈매와 하얀 얼굴, 갈색 눈동자가 저도 꼭 어린 백구처럼
생겨서는, 예쁘고 착한 강해아를.

우리 집 똥강아지는 아주 상전이신데, 정작 남편인 나는 그에게 키스할 기회를 찾기 위해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빨리 미국으로 가 버리라고 등을 떠밀기는 했어도, 최소한 배웅은 해 주시겠다고
조수석에 앉아 따라와 준 해아였다.
“그, 체향 조금…, 조금만 묻혀 놓고 가지 않을래요?”

그 입에서 페로몬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물론, 강해아 성격에 ‘천태림 씨 체향 좀 묻혀 두고 가시라’ 말하는 게 뽀뽀를 해 달라는 뜻일 리가


없었다. 차라리 정액 채취용 병 하나를 주고는 여기다 대고 싸고 가라고 말하는 게 좀 더, 나의 도도하신
도련님께서 할 행동에 가까웠다.

그러니 키스는 그냥 키스였다. 내가 하고 싶어서, 체향을 핑계로 댄 입맞춤이었다.

‘도진이랑 간접 키스 한 격이네.’

눈을 가늘게 뜨고 애매모호한 찝찝함을 느꼈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엄지 끝마디로 아래턱을 건드리자, 딱


다물렸던 해아의 입술도 느릿느릿 열렸고,

“으, 응….”

달콤한 신음이 콧소리로 흘러나왔다.

해아는 키스를 잘하는 것 같다…, 짜증 나게도 그랬다. 먼저 달려들고 리드하려던 건 나인데, 어느새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서 나는 안달만 내고 진짜 주도권은 그가 쥔 듯했다. 그의 허리를 끌어당기고 더듬어
대느라 나는 바빴고 열이 났다. 어린애 달래기라도 하는 듯, 해아가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흐…, 으응….”

혀를 빨고 입천장을 훑기만 해도 예민한 악기처럼 소리를 내어 대니 미칠 노릇이었다. 체향을 묻혀


달라더니 오히려, 제 체향을 내게 묻히는 꼴이었다. 할딱거리는 그의 숨결로 달짝지근한 향이 묻어
나왔고 거듭 흘리는 신음이 내 몸 중심으로 피가 쏠리게 했다.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 내자 해아의 고개가 날 쫓듯이 딸려 왔다. 순하게 내려간 눈동자가 평소보다 훨씬
몽롱해 보였다.

그새 붉어진 그의 입술 위를, 나는 검지로 가로막았다.

“소리…, 일부러 내는 거야?”

진지하게 물은 말에 강해아는 눈썹부터 찡그렸다. ‘왜 그래요, 진짜’ 하며 나를 이상한 놈인 양


매도하기까지 했다.

“…오해하지 마. 나 유혹하려고 그러는 건지 진짜 헷갈려서 그래.”

“네?”

토끼 눈을 뜨고 빤히 날 보는 눈빛에 작은 힐난이 담겼다.

“태림 씨 그렇게 쉬운 남자예요?”

그렇게 쏘아붙여 대기까지 하니, 이젠 황당해서 헛웃음이 났다.

“진짜 말이라도 못하면.”

강해아랑 있으면 왜 이렇게 재밌는 건지 미스터리다. 왜, 하루 이틀은 한두 시간이 되어 버리고 28 년을


버텨 온 정신이 물에 빠진 솜사탕처럼 녹아 버리는지.
비행기를 놓치기 직전이 될 때까지 나는 그를 품에 안았다. 일하러 가기가 이렇게나 싫었던 적이 있던가….
업무고 미팅이고 참 보람 없는 짓거리다. 남들 짝 찾아 주는 기계 하나 출시하자고, 내게 각인한 해아를
내 마음대로 안지도 못한다니.

14 시간을 이코노미 좌석에 구겨져서 날아왔는데… 왕복 7 시간 운전해서 개도 데려왔는데. 세상에서 가장


벌건 아침도 열었으니 저녁에는 섹스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나를 이렇게 보낸다고….

‘…지금 혹시 벌받는 건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지난번 러트 때 내 태도가 나빴다고, 해아가 나를 벌주는 건가.’

의심이 합리적인 만큼이나 내 속은 답답해졌다. 어땠는지 기억이라도 나면 억울하지나 않지.

안달복달인 나야말로 열성 알파인 것 같다. 일방 각인 한 주제에 말간 얼굴로,

“비행기 출발하겠어요. 이제 가도 돼요, 태림 씨.”

허락하시는 강해아는 극우성 오메가이신 듯하다.

“태림 씨?”

대답 없는 내 어깨를, 해아가 조심스레 건드렸다. 다녀오시라는 인사가 내 등을 완곡히 떠밀고 있었다.


별수 없이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리면서 나는 아주 울적했다.

‘쉬운 남자 맞네, 천태림….’

할 수만 있다면 강해아를 내 캐리어에 숨겨서 미국으로 데려가고 싶다. 수갑이라도 채워서 내 옆구리에
붙어살게 하고 싶다.

출장의 보람을 그나마, 미리 주문해 둔 목걸이를 받을 적에 찾을 수 있었다. 미국 본점에서만 한정 제작,


판매하는 목걸이는 예정대로 7 월 5 일에 내 손안에 들어왔다. 해아의 생일 이틀 전날이었다.

기대에 찬 나머지 직접 찾아가 설명서와 물건을 받아 나오면서는 심장이 나비처럼 날갯짓을 해 댔다. 없는
실력으로 포장까지 마쳐서는, 짐 가방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운전대를 쥔 막내 비서도 은근히 싱글벙글거렸다.

“가끔 보면 대표님, 정말 의외인 면이 있으신 거 같아요.”

한 손에 딱 들어오는 선물 상자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막내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머쓱한 기운을


읽었는지 막내도 웃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나이 스물여덟에, 남편을 상대로 첫 연애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해아의 뒷덜미에 작은 훅을 잠가 주며 목걸이를 걸 때에는 기쁨이 배가 됐다. 해아 역시 기쁜 듯 미소를


보여 주었다. 목걸이 중앙에 걸린 보라색 결정을 만지는 손길이 소중한 것 다루는 양 조심스러웠다.

남들 보기엔 루비 같겠지만 그건 단순한 보석이 아니었다. 내 체향을 심은 결정이었다.

어지간한 보석 값어치를 훨씬 웃도는 비용과 수고를 들여 만들어 낸… 그 목걸이는 내 소유욕의 증표나


다름없었다.

이쪽 문화에 아직 서툰 해아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들여다보면서도 그 정체는 못 알아챈 듯했다.


대체로 알파의 결정이란 잘 해 봐야 연분홍빛을 띠게 마련이므로, 우성 알파인 내 결정의 진한 보라색이
낯설어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언젠가 그가 물어 온다면 기쁘게 알려 줄 말들이 있었다. 알파의 결정을 오메가의 목에 거는 것은 일종의


표식이라고. 갓 발현했거나 각인하여 불안한 오메가가 지니고 다니게 하면 불안 증세가 가라앉는 효과가
있다고…, 아직 발현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 시기를 앞당긴다는 미신 역시, 있다고.

만일 해아가 아직 발현 않은 베타였더라도 나는 같은 물건을 선물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

가지런한 목에 입을 맞추고픈 걸 억지로 참았다. 입을 맞추면 키스를 하고, 키스를 하면 섹스를 하고플
테니까. 그러나 끓는 욕정을 애써 모른 척하는 나보다도,

“…자고 가요, 오늘.”

강해아가 백 배는 더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와 나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데이트를 했다. 온 시간이 내도록 즐거워서, 생일 전날의


선물은 오히려 내가 받는 느낌이었다. 강해아가 얼마나 완벽한 사람인지 알면 알수록 내게는 놀람뿐이었다.
그가 골라낸 영화는 무척 재밌었고 익숙한 듯 만들어 낸 요리까지 완벽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스테이크를 굽는 정도인데, 해아는 연어를 말아다가 속에 채소를 채우고,


어니언 수프 위에 빵을 구워 올리고, 삶은 새우를 넣어 샐러드까지 뚝딱 만들어 냈다.

“넌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그의 잔에 와인을 따라 주며 그렇게 물었을 때, 해아는 골똘한 얼굴을 보여 주었다.

“못하는 거요? 어…, 나 못하는 거 되게 많아요. 춤도 잘 못 추는 편이고요…, 할 줄 아는 운동이 거의


없어요. 엄청 몸치예요.”

겸손을 떠느라 하는 거짓말일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얼마나 유연하고


늘씬한 몸을 가졌는지, 침대에서는 또 어떤지.

침대에서 그는 말이 없는 편이었다. 다물린 입이 벌어질 때는 내가 그의 목과 입술을 힘주어 빨 때, 땀에


젖은 피부끼리 부딪치며 질척대는 소리를 내는 순간뿐이었다. 그마저도 말하는 문장은 없고 온통
신음성이었다.

예민한 악기 다루듯 조심조심 풀어 준 보람이 있었다. 해아는 허리를 젖혀 가며 나를 받아들이고 흥분한


손으로 내 귀와 목덜미를 만져 댔다. 부끄러운 행복감에 젖어 나는 그의 속에 사정했다.

“으, 응….”

해아는 아주 민감하게 나를 따라왔다. 일전에는 착각인가 했던 것이 이제야 분명해졌다. 내가 헐떡이면


그도 숨이 거칠어졌고, 낮게 신음하면 움찔거리며 뒤를 조였다. 살결을 문지르며 내가 사정하면, 저도 그
기분을 따라 느끼는 듯 탁한 정액을 흘렸다.

“흐… 으읏….”

붉어진 뺨을 시트 위에 문지르는 해아를 나는 멍하니 내려다봤다. 눈물을 찔끔 흘리며 움찔대는 게 힘겨워


보여 몸을 떼어 내자, 동그랗게 벌어졌던 뒷구멍이 느릿느릿 좁아졌다. 내가 싸 놓은 정액이 완전히
불투명한 흰색으로 질질 넘쳐흘렀다.

‘…오래 참은 거 티 내냐.’

많이도 쌌다, 쪽팔리게.

다행히 해아는 제 엉덩이를 살필 정신도 없어 보였다. 피임약 부작용 때문인지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태림 씨….”

얌전히 내 팔 안에 감겨 들어올 뿐이었다.

“그래, 그래….”

코끝이 빨개져선 내 이름만 불러 대는 해아를 안자니, 무뚝뚝한 나조차도 다정한 사람이 됐다. 그의 뺨에
입을 맞추자 눈물 맛이 짭조름했다.

해아가 사랑스러운 만큼 나는 우스워졌다. 답지 않게 칭얼거리는 그를 안고 어르자니 꼭, 우는 아이


달래어 주사 놓는 기분이었다. 착한 놈인 척 흉내 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리 사이로는 열이 몰리고
심장은 뜨듯해졌다.

밤새도록 몸을 섞을 생각 만만인 나와 해아의 뇌 구조가 다르다는 건 한발 늦게 알았다. 부부 침실 문을


박박 긁는,

“도진아!”

강해아 씨의 반려견 천도진 씨 덕분이었다.

“아, 아니…, 형 좀, 좀 씻고….”

침실 문을 열어 주자마자 천진난만한 똥강아지가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서러운 소리를 낑낑


내며 해아의 얼굴을 연신 핥았다. 해아는 그런 개를 부부 침대 위에 눕혀 놓았다.

작은 불청객을 껴안고 해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바람에 나는 넋이 빠졌다. 강해아는 온종일 미소를


머금는 사람이었지만, 웃음이 요란스럽진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하얀 개를 품에 안고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들기며 그는 소리 내어 웃는다. 가지런한 아랫니를 보이며 진실로 행복한 사람처럼….

괜스레 턱을 닦으며 나는 그를 따라 웃었다. 천천히 침대 옆자리로 다가가자, 해아가 어린 개와 함께


나를 꼭 안아 주었다.

“해아야.”

고백하고픈 말은 많지만 전부 삼켰다. 이마까지 붉어진 채 기쁘게 웃는 해아의 자정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생일 축하해.”

그러자 해아의 입술이 호를 그리고 두 눈을 서서히 내리깔았다. 느릿느릿 그 입술에 내 입술을 맞대자
열여덟 살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해아가 내게 주는 모든 환호가 그렇듯이, 그와 내 마음이 통했다는 기쁨은 아주 잠깐 내려앉았다가
떠나 버렸다. 키스를 마치기도 전에 그가 얼굴을 떼어 내고는, 고개를 숙여 버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조금 혼미해졌다.

가벼운 입맞춤에 만족한 듯 볼을 붉히고 수줍은 숨소리를 내면서,

“같이 누워요.”

해아가 속삭였다.

“어? 어…, 그래. …졸려? …벌써 자게?”

“아뇨, 아직. 태림 씨 피곤해요?”

“아니. 전혀. 조금도 안 피곤해.”

나는 심각한데 해아는 웃는다. 멋쩍은 듯 손등으로 뺨을 훔치더니, 도진이를 아예 우리 사이에 눕히고


저도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붙였다.

그러고는 청천벽력 같은 쐐기를 박았다.

“내일 태림 씨 다시 미국 갈 텐데, 같이 이야기 많이 하다 자요.”

…이게 무슨 수련회 밤 같은 소리야?

하얀 꼬리가 흔들리며 시트를 건드려 댔다. 부부 침대 중앙에 누워 분홍색 배를 내민, 도진이는 개답게도
눈치가 없었다.

나를 황당하게 만드는 건 그보다도 해아였다. 환하니 맑은 얼굴로 개 뱃살을 조물조물 만지면서, 그는


전체연령가의 밤에 돌입한 채였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체향이며 페로몬을 쏟아 냈으니 당연히 알아챌 거라 생각했건만, 피임약 부작용
때문에 해아는 그 모든 걸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 번만 더 하자’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기 위해 나는 입을 꽉 다물어야 했다. 어설프게 자리에


누우면서 살피자니, 해아는 얼굴이 반질반질한 게 짧은 섹스로 벌써 만족한 것 같았다.

‘섹스가… 별로였나? …아니, 그럴 리가 없지. …혹시 벌써 만족한 건가? 너무 잘해 버렸나.’

속이 끓는 건 나뿐이었다.

슬쩍 팔을 둘러 해아를 안으려고도 했다. 그러나 내게 안겨 들어오는 이라고는 애꿎은 도진이뿐이었다.


꼬리 치며 좋아하는 녀석의 발에 내 가슴이 꾹꾹 짓밟혔다.

“우리 도진이는 태림 형아가 좋대요.”

태림 형…아. 너는 그 소리를 왜 이럴 때만 들려줘?

“보호자랑 같이 자는 게 강아지 정서에 좋대요.”

내 정서에는 너랑 꽃잠 자는 게 더 좋은데….

속으로 투정을 삼키는 나를 향해 해아가 모로 누웠다. 나를 담는 두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했다. 한


침대에 같이 누웠을 뿐인데 이게 그렇게 좋은가.
“이러니까 우리… 진짜 가족 같아요. 그죠….”

“진짜 가족 맞잖아.”

그러자 해아가 헤헤 웃는다. 귀엽든지 야하든지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조금 덜 괴로웠을까.

‘미치겠네….’

아무래도 나만 욕구 불만인가 보다. 그 몸을 연구하길 원하는 것도 그 입술이 원하는 답을 내어 주길


갈구하는 것도 그저 나만의 일 같았다.

침대 옆에 누운 그가 내 가족이어서, 나도 좋았다. 도란도란 들려주는 제 그림 이야기며 유학 시절


친구들 일화도, 듣기에 좋긴 했다. 그러나 기대하던 고백은 날이 새도록 들을 수가 없었다.

해아의 진심이 알고 싶다, 내가 갈망하는 지식일랑 그게 전부였다. 그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무지


속을 헤매는 것보다야 덜 괴로울 것이었다. 그러나 강해아는 내 품 안에 매달리고 입술을 문지르고 달콤한
향으로 나를 담가 놓고도, 모래처럼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아침이면 그는 나를 만난 첫날로 돌아가곤 했다. 오메가를 각인시켜 놓고도 불안해하는 알파가 될 줄은,
나는 꿈에도 몰랐었다.

이따금은, 강해아에게 나 이외의 사랑이 너무 많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도대체 해아한테 개라는 건 뭘까….’

그런 고민마저 심각하게 다룬 날이 있었다.

‘개 키우는 사람들은 다 저러나?’

다들 저렇게, 개 앞에서만 방정을 떨고 사람을 대할 때보다 친절해지는 건가…. 내 앞에서는 해사한


웃음조차 가뭄에 콩 나듯이 보여 주면서, 도진이에게는 칭찬 세례로도 모자라 뽀뽀까지 열 번을 연거푸 해
대는 그를 보며 떠올린 의문이었다.

심지어는 쏟아지는 애정을 못 견딘 도진이가 아르릉 소리 내며 발버둥을 칠 지경이었다.

“오구, 이뻐라. 정원에서 많이 놀았어요? 이모랑 산책도 갔다 왔어요? 그랬어요?”

‘이모’라는 말에 아주머니가 싱글벙글 미소 지었다. 그녀가 깎아다 가져온 셀러리마저 해아의 입을 아주


잠깐 거쳤다가, 도진이의 간식이 됐다.

흰 털덩이 녀석에게 옷은 필수품이 됐다. 매일 목욕을 시킬 순 없다며 정원 잔디밭을 뒹굴 때마다 올인원


외출복을 입혀 놓는데, 엉덩이와 배만 뚫린 모양새가 제법 웃기고 귀여웠다.

‘아기 옷은 무슨.’

허무한 마음에 나는 실소했다.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해 버렸던 건지, 저 옷을 꺼내는 해아를 봤을 때


아주 잠깐이나마 설레고 기대했던 내가 우스웠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보고 싶었다, 어린 개마저 저렇게 아끼는 강해아가 제 자식에게는 어떨지. 그와 나


사이의 아이는 누구를 더 닮았을지, 나처럼 사고뭉치 청소년기를 보내게 될지 해아처럼 순하고 얌전한
성미일지.

단 한 가지 확신하는 건, 강해아는 유난스러운 학부모가 될 것이란 점이었다. 해아 일이라면 무조건 편을


들고 보는 오 기사나 아주머니조차도 이 말에는 반박하지 못할 터였다.

월요일 아침부터 뜨거워진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아니, 우리 도진이가 크긴 뭐가 커요, 아직 5 킬로밖에 안 나가는데?”

전화 너머 상대와 열띤 말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보자면 그러했다.

“우리 애 믹스라고 무시하는 겁니까, 지금? 개가 다 같은 개지, 왜 믹스견은 원생으로 못 받는다는


거예요? …아니, 당신 말이 방금 그랬잖아!”

강해아가 그렇게까지 언성 높이며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인 줄 나는 처음 알았다. 얼이 빠진 얼굴로


쳐다보는데 그는 내 시선조차 느끼지 못했다. 제 분을 못 이겨, 2 층 테라스 자리를 빙빙 돌듯 걷기
바빴다.

“강아지 유치원 원장이 바뀌었다네요.”

아주머니가 그의 전화 상대가 누구인지 알려 주었다.

친절한 설명에 나는 더더욱 어리둥절했다. 강아지와 유치원이라는 단어가 한데 뭉칠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어서였다.

“무슨 훈련사가 개 품종서를 따져? 무슨 놈의 유치원이 그래? 당신들 유치원 다닐 때도 부모 품종서


뗐어?”

반면에 해아는 몹시 심각했다. 듣기로는 그 ‘강아지 유치원’에서 도진이를 못 받아 준다는 것 같았다.


그 똥개가 한성 그룹 막내가 키우는 똥개인 줄은 아마 꿈에도 모르겠지…, 황당해서 웃음만 났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해아는 한참 식식거렸다.

“여기 아니면 뭐, 우리 애가 갈 곳이 없을까 봐?”

화내기도 잠깐, 테라스 아래를 내려다보며 ‘도진아’ 하고는 세상 속상한 소리를 냈다. 정원에서 도진이
녀석이 대답하듯 짖는 소리가 월월 들려왔다.

월요일 아침부터, 강해아는 정말 이상하고 웃겼다.

“걱정 마, 도진아! 형이 대신 복수해 줄게!”

더 좋은 유치원을 찾아 주겠다며 개는 알아듣지도 못할 약속을 하는, 그는 아주 순수하고 해맑았다. 평생


저렇게 떵떵거리며 살겠구나 싶었다.

나는 그 인생의 동반자이자 한편으로는 관객이었다. 남은 평생간 그를 지켜보며, 그와 가장 가까운 내


자리를 지켜 낼 것이었다. 한 50 년은 더 봐야 적응이 되어서, 덜 웃게 될까 싶었다.

‘50 년은 더….’

나는 지금의 강해아를 좋아했으며 미래의 강해아를 기대했다.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고 제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어린 개에게 넥타이를 묶어 주고는 바닥을 굴러 가며 사진을 찍고, 평일이면 내 출근 시간에
맞춰 억지로 일어나고 주말이면 오후 3 시가 되도록 침대 밖을 나오는 일 없는, 그저 강해아. 강해아로
지내 주었으면 했다.
누구의 발에 매달려 신음하고 우는 일 없이….

내 두 눈은 뻑뻑하게 움직였다. 눈꺼풀이 말라붙은 과일 껍질처럼 끈적하게 감겼다가 열렸고 시야는 흰


막이 덮인 것처럼 흐릿했다. 갤러리 비품실의 구석에 처박혀 우는 해아가 뿌옇게 보였다.

“돌려줘, 제발….”

참혹하게 비현실적이었다, 강해아가 눈물로 애원을 한다는 게.

그 순간 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고 기억은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내 세계는 강해아로 돌아가는데,


강해아가 고장 났기 때문에.

강일해가 그를 고장 냈다. 마른 몸이 붕 뜨도록 발길질을 해 대고 턱 밑이 피와 눈물로 분홍빛이 되도록


끔찍하게 울려 놓았다.

“제발….”

애원하는 해아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을 때 나는 강일해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발견했다.

그 순간 사방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갤러리 복도 구석의 창고가, 조문객보다 기자가 더 많은 병원 장례식장이 됐다. 무릎 꿇고 매달리는


강해아는 동일한데, 그 앞에 선 남자는 검은 상복을 입은 나였다.

‘제발, 태림 씨….’

차가운 복도에 무릎 꿇고 앉은 채 해아가 제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기도하듯 움켜쥐었다가, 파리처럼


싹싹 문지르며 빌기 시작했다. 희던 목에는 생채기가 났고 두 눈은 충격이 자아낸 울음으로 일렁거렸다.

‘돌려주세요, 제발….’

날카로운 비명이 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강해아의 애원에 외면으로 응답하는 나 자신을 본 순간,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나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검은 상복을 입고 우울감과 증오만이 남은 얼굴을 한
천태림에게 온 힘으로 뛰어들어, 그를 때려눕히고 깔아뭉갰다.

모든 것이 충동으로 흘러갔다. 전신의 피가 분노로 끓는 듯했다.

쿵 소리가 나도록 몸을 무너뜨린 이의 얼굴에 나는 주먹을 내다 꽂았다. 코가 뭉개지고 피가 터져


나오도록 연거푸, 팔의 근육이 경련할 때까지 주먹질을 해 댔다.

‘죽을 거면 네가 죽어.’

타인의 피와 침이 내 주먹에 묻었다.


‘네가 죽어. 네가….’

뭉개진 코뼈에 손을 찔리고 뻘건 피가 내 뺨에 튀도록 주먹을 휘두르면서, 내 영혼이 그렇게 외쳤다.

‘강해아 대신… 차라리 네가 죽어.’

두 손에 체중을 실어 나는 나 자신의 목을 콱 쥐고 졸랐다.

요란한 비명 소리가 내 몸 아래에서 새어 나왔다. 불쾌감이 들 정도로 뜨거운 타인의 육신이 엉덩이와
허벅지 아래로 느껴졌고, 두 손바닥으로 움켜쥔 누군가의 목은 땀으로 미끌거렸다. 내 목덜미에서 퉁퉁
뛰는 맥박 소리가 북을 두들기는 듯했다. 시야는 온통 희뿌옇게 흐렸다. 아릿한 충격이 아래턱과 뺨에
연이어 닿았다.

순차적으로 깨어나는 감각들이 있었다.

“태림 씨….”

내 등 뒤로 업히다시피 하며 나를 뜯어말리던 강해아가 있었고,

“나, 나 봐요…, 제발요.”

콜록, 콜록 기침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내 눈앞의 얼굴이 휙휙 변했다. 전부 강해아지만 모두 다른 사람이었다. 몸무게가


훌쩍 늘어 7 킬로그램이 된 도진이를 아기 안듯이 받쳐 들고 웃다가, 입술을 내밀고 눈을 감은 채 키스를
기다리다가, 뺨에 꿰맨 상처를 달고 놀란 눈으로 나를 보다가… 눈물범벅이 되어 내 뺨을 더듬거렸다.

“태림 씨, 뺨….”

누가 내… 해아인지 알 수 없었다. 전부 내 사람인데, 그 언젠가는 아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와 함께 가야 했다. 어디로든 상관없었다. 당장 여기가 아닌 어디로든,


그를 데리고 나가야 했다….

희뿌연 인영이 사방에서 일렁거렸다.

“천태림!”

벌벌 떨리는 피투성이 손이 내려다보였다. 하드보일드 극에나 등장할 법한 모양새에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데, 물티슈를 쥔 또 다른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피에 젖은 손이 내 것임을 알았다.

“태림아, 정신 좀 들어?”

고개를 들자 분주히 내 두 손을 닦아 내는 시은철이 보였다. 녀석의 얼굴이 일순 고등학생 시절의 어린


낯이었다가, 뒤늦게 어른으로 돌아왔다.

“해아.”

차라리 비명을 지르는 게 더 나았을 것이었다. 내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외침은 그보다 더 나쁘게 들렸다.
끔찍하게 절박해서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해아…, 해아는?”

고개를 움직여 사방을 훑어보는데, 핏자국과 무너진 의자, 비틀어진 책상이 놓인 비품실이 보였다. 바닥
한가운데에 이리저리 피가 튀어 있었다. 온통 난장판이라 여기에서 사람 하나가 죽었대도 놀랍지 않을
성싶었다.

그러나 강해아는 보이지 않았다. 누구인지 분간도 못 하는 채 내가 패 놓은, 강일해인지 나인지 모를


시체도 보이질 않았다.

두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는 것도 잊은 내 어깨를 움켜쥐고,

“정신 차려, 천태림!”

시은철이 외쳤다.

“…천천히 생각해. 잘 생각해 봐.”

나를 진정시키고 달래는 게 익숙한, 시은철에겐 대본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내가 폭주하듯 날뛸


때마다 으레 읊어 놓는 대사가 있었고, 질문의 순서에도 규칙이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오늘이 며칠이야? 여기가 어딘지 말해 봐. 좀 전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

귀에 익은 목소리만큼이나, 내 뺨을 건드리는 녀석의 손길도 습관적이었다. 나는 그런 시은철의 손을


잡아 내렸다.

“강해아. …해아 어디 있어?”

그러자 녀석이 한숨 쉬었다. 고민하는 듯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 숙이더니, 내게 잡힌 손을 뿌리치듯


빼냈다. 이마를 문지르는 시은철의 손안에서 분홍색이 된 물티슈가 구겨졌다.

“전시회장…으로, 강 회장 비서인지 누군지, 아무튼 그 사람이 다시 데려가긴 했는데….”

손끝으로 벅벅 제 살갗을 긁더니, 그는 무얼 고민하는 듯 이마를 찡그렸다. 친숙한 얼굴에 갖가지 감정이
올랐다가 사라졌다.

이내 은철이가 내 앞에서 비켜섰다.

“…소란 피우지 않을 거지?”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는 그를 지나쳤다.

갤러리 입구에 멈추어 선 순간 나는 몹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지나간 소란은 전부 꿈이었던 게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밝은 조명등 아래서 미소 짓고 선 강해아 때문이었다.

멀쩡한 척 연기하는 실력이 어찌나 수준급인지 나마저도 속을 지경이었다. 제자리에 우뚝 선 채


아무렇잖게 웃고 있는 그 모습을,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엉엉 울며 애원하고 고통에 비명을 내질러 놓고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반듯한 얼굴로… 그는 웃고


있었다. 미소는 천사 같고 쭉 뻗은 등허리는 의기양양하며 전신의 흐름이 그저 우아하기만 했다.
그 때문에 나는 참혹해졌다. 큰 돌 같은 것에 뒤통수를 내리쳐진 느낌이었다. 충격으로 머리가 터지는 게
느껴졌다. 당장 눈앞에 선 강해아는, 내가 봐 온 강해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귀여워서 갖고 싶어 하고, 평생 함께 살면 즐겁겠다고 생각했던 그 강해아. 내가 좋아했던 그의 껍데기….

아버지의 친구라며 자주 보았던, 어느 의원과 나란히 선 채 웃을 적에 강해아의 왼쪽 손이 배에 머물렀다.


희게 질린 채 윗배에 닿는 손만이, 그나마 겉으로 드러나는 통증의 흔적이었다.

아픔인지 슬픔인지 모를 것이 그의 속에서 천천히 번져 가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웃는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자세가 묘하게 움츠러들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잠시간 벽을 보다가, 습관적인 미소를 짓다가,
이내 무표정해졌다.

그래도 강해아는 울지 않았다. 울 것 같은 건 오히려 나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나는 탄식했다. 강준일 회장 곁에 선 임건이 보였다. 무어라 말을


나누던 걸 멈추고, 그가 해아에게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느릿느릿, 해아는 그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울렁이는 목울대로 그의 감정이 드러났다. 누구 하나 손만 잡아 주어도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울상이 됐다.

거기까지였다. 더는 그를 혼자 둘 수가 없었다.

나는 성큼걸이로 해아에게 걸어갔다. 조급한 기색을 못 감추며 다가서는데, 나를 보면서 강해아가 웃었다.
그의 눈 아래 살이 파르르 떨리고 목덜미에 파란 핏줄이 섰다. 그가 삼킨 처참한 기분이 도리어 내게로
전이되었다.

나는 울분을 참는 데에 재능이 없었다. 당장 화를 내지 않고 억누르는 이유는 그저, 오늘의 전시를 위해


캔버스 앞에 앉아 몇 날 며칠 붓 끝을 씹던 그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는 무엇도 나를 말릴 게 없었다…, 강해아밖에는.

“나가자.”

내 말에 그가 대답하지 않아도,

“여기서 나가자.”

나는 해아의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의 감촉이 무섭도록 차가웠다.

따라 나오지 않으면 당장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협박이라도 할 마음이었건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가


주춤주춤 날 따라 걸었다. 점점 붉어지는 얼굴이 보였고 젖어 드는 갈색 눈이 보였다. 울먹거리는 그를
데리고 갤러리를 가로질러 나오는데, 어째선지 작가가 아니라 작품을 훔치는 기분이었다.

주차장 밖으로 나서자 세단 옆에 선 은철이가 보였다. 무어라 말을 전달했는지, 오건민 기사가 뒷좌석
문을 열던 참이었다. 주위를 살필 정신도 없어 보이는 해아를, 나는 차량 뒷좌석에 얼른 앉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그 얼굴이 새빨갰다가 이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무서웠다, 해아가 기절할까
봐. 그대로 일어나지 못할까 봐.

“태림아!”

그를 따라 차에 오르려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와 함께, 허둥지둥하며 우리를 따라 나오는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니. 응?”


차 안에서 해아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가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나는 차량 문을 닫아 버렸다. 오
기사에게 턱짓하자, 그 역시 운전석에 올랐다.

그대로 어머니를 향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됐다. 그저 입만 벙긋거릴 뿐 내게선 어떤 말도 새어 나오질 않았다.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마 어머니의 눈에 보이는 내 모습이, 전에 없이 나쁜 꼴일 터였다.

어머니는 내 셔츠 소매에 묻은 피를 먼저 살폈다. 벌겋게 살갗이 까진 내 주먹을 보더니 차 안에 숨은


해아의 실루엣을 한 번 보기에, 무얼 의심하시는지 나는 알았다. 잠깐이나마 내가 강해아를 때렸을까,
걱정하는 눈짓이었다.

어머니의 의심에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벌여 온 소란과 사건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합리적
의심이었다. 다만, 나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걱정과 약간의 화가 담겼던 눈빛에 더 큰 절망이
스몄다.

어머니와는 늘 이런 식이다. 나와 같은 알파인 쪽은 아버지이건만, 나와 진정 통하는 사람은 어머니셨다.


내 망설임과 치미는 울분, 몇 가지 제스처만으로도 어머니는 무얼 알아챈 듯 손을 들어 입을 가리셨다.

그리고 입모양이 보이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그럼, 누구니?”

짧은 질문에 많은 추측이 담겨 있었다. 입을 다문 채 나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봤다. 점심까지만 해도


맑던 날씨가 믿을 수 없게 우중충해진 채였다. 저녁이 오기도 전에 벌써 구름이 컴컴했다.

“강일해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가,

“…해아를.”

나는 답지 않게 말을 더듬어 댔다.

“해아…, 해아가 많이 다쳤어요. 병원부터… 데려갈 테니까.”

그렇게 흐지부지 말을 마쳤다. 어머니는 내 두 눈동자를 바삐 살피다가, 이내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래, 얼른 가…. 전화해, 태림아.”

그렇게 인사하는 두 분을 주차장에 두고 나는 차에 올랐다.

‘전화…, 그럴 여유가 있나, 이런 상황에….’

답은 ‘아니요’였다. 당장 목소리도 잘 나오지를 않았고 지나간 일을 설명할 문장도 꾸려 내기 어려웠다.


갤러리의 그, 작은 창고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를 나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내
감정 하나 갈무리하지 못하니, 피부 밖의 무엇도 챙길 여유가 없었다.

“나… 별로 안 아파. 의사를 불러도 집으로 부를 거야, 병원 안 가. 진단 기록 남겨서 좋을 거 없어,


가기 싫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대는 강해아 때문에 내 정신은 더욱 혼미해졌다.


‘왜 기록부터 신경 쓰지?’

…언제부터 아파서 병원 가는데 기록 남는 것부터 신경 썼을까. 해답이 간단한 문제조차 풀어내기 어려웠다.
풀어내어 알고 싶지가 않았다.

해아의 고집대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차량 밖으로 뛰어내리다시피 했다. 그대로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강 회장의 친절한 강압이 스민 커다란 건물 안으로 들어가, 1 층 작업실 문을 열었다.

주요 작품들이 전부 빠진 작업실에는 그래도 많은 그림들이 남아 있었다. 나를 그린 초상화가 있었고 그


밖에, 전시에 걸리지 못한 시커먼 그림들이 있었다. 그 시커먼 그림들을 나는 마구잡이로 헤집어 냈다.

강해아의 자화상, 그 그림을 찾아야 했다.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그 끔찍하고 슬퍼 보이던 그림을….

몇 주 사이 귀퉁이에 먼지가 앉은 그림을 꺼내어 본 순간 충격이 닥쳤다. 전에는 강해아가 왜 스스로를


이런 색으로 그렸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형태는 없고 색과 면만이 존재하는
그림 안에, 창고 방에 쓰러져 울던 강해아가 들어 있었다.

잠시간 그림을 바라보다 나는 캔버스째 그 그림을 던져 버렸다.

“악, 태림 씨.”

꼭 저를 해친다는 양 해아가 소리를 질렀다. 캔버스 틀을 쥐고 박살 내 버리려는 내 팔을, 해아는 두


손으로 붙들고 매달렸다. ‘힉’, 놀란 숨과 함께,

“하지 마요!”

애원하는 외침이 작게 들렸다.

“그러지 마요…, 하지 마!”

“자화상?”

마침내 울분이 솟구쳐 나왔다.

“네가….”

내 목소리는 신음처럼,

“왜 그래야 해, 왜 네가 이런 그림이어야 해!”

비명처럼 흘러나왔다. 내 손안에서 망가진 캔버스가 떨어져 나갔다.

“하지 마요, 하지 마…, 속여서 미안해요. 미안하다고요!”

그림을 놓아 버리고, 나는 강해아를 붙들어 쥐었다. 검고, 파랗고, 빨간… 불쾌감이 들 정도로
어두침침한 자화상 따위는 읽어 낼 수 없을 만치, 젊고 찬란하고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나 그, 예쁜 껍데기가 박살 난 순간을 나는 이미 알았다. 이제 와 다시 들여다본들 해아는 더는


이전의 해아가 아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저녁에는 뭘 먹을까 데이트를 기대하던 그였는데, 지금
내 눈앞에, 내 손안에는 부서진 자화상이 하나 있었다.

강해아는 나를 미치게 했다. 저 때문에 화내고 저 대신에 슬픈 나를 두고, 그는 웃었다. 헤헤 소리까지


내어 가며 웃는 얼굴에, 나는 온몸의 피가 퍼렇게 질렸다.
“태…, 태림 씨도 그러잖아요. 화요일마다 대중교통 이용하잖아요. 회사 이미지 마케팅 하느라 그런
거잖아요…? 나도 비슷해요, 아니… 똑같아요. 그냥… 집안 이미지 마케팅 하는 거예요.”

농담하듯 피식거리며 말하는 소리가 내 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도대체 몇 번을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속여 왔으면, 이 순간 내 앞에서 이미지 마케팅이라는 변명을 웃는 낯으로 할 수 있는 걸까….

“아니, 달라….”

신음하듯 흐느끼는 나를,

“똑같아요. 똑같잖아요. 다 사람들 보기에 좋으라고 하는 건데 뭐가 나빠요….”

도리어 해아가 어르고 달래려 들었다.

“그거랑 이게 어떻게 똑같아….”

문득 속절없는 두려움이 닥쳐왔다. 이대로 강해아가 나를 떠나 버릴 거라는 근거 없는 공포가 전신을 쑤셔


댔다. 눈처럼 하얗게 식어 버린 그의 얼굴을 보자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뒤돌아 달아날 수 없게,
나는 그의 마른 어깨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불안과 걱정으로 내 속은 찢기도록 난도질을 당했는데,

“화내지 마세요.”

그는 멍하니 허튼소리를 했다.

‘…뭐?’

그 순간 강해아가 사람 같지 않았다. 웃음기 가신 얼굴로 덩그러니 서서는, ‘화내지 마세요’… 감정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가 사람 같지 않았다.

“해아야, 제발….”

그의 어깨를 고쳐 쥐며 나는 애원했다.

“사람 속에 불 질러 놓고 괜찮다는 거짓말을 왜 해? 네 가족 발길질에 개처럼 맞아 놓고 웃으면


그만이야?”

절절매며 사정해 봐도 해아는 미동조차 보여 주질 않았다. 차라리 울기라도 해 주었으면, 속에 든 말을


쏟아 내기라도 해 주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해아는 말이 없었다.

그저,

“화…내지 마세요.”

애처로운 소리를 연거푸 낼 뿐이었다. 겁에 질린 사람처럼 떨어 대는 뺨을 보자니 그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담이 놓인 기분이었다.

“강해아.”

그는 못 본다. 지금 내 표정이, 말투가, 심정이 어떤지…. 나는 슬픔에 잠식당했는데 그는 성난 이를


만난 것처럼 눈가를 움찔거렸다.

“화내지 마세요, 진짜….”


내가 도대체 언제 너에게 화를 냈어? 너는 왜 이렇게 나를 두려워해… 따지려 입을 열었다가 밭은 숨만
겨우 흘렸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해아도 미쳐 있었다.

“흐…, 흑.”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모를 신음을 흘리다가 그가 비틀거렸다. 제자리에서 허물어지는 그를 얼른


끌어안아 받쳤다.

“나, 나 숨 못 쉬겠어요….”

가늘게 새어 나오는 숨이 약하게만 들렸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는 그를 작업실 소파에 앉혔다.


속상하고 화가 났다. 눈물이 났다.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확인할 때는, 억지로라도 병원으로 끌고 갔어야 했다는 후회부터 솟구쳤다.

“해아야. 해아야…, 제발. 제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애원했다.

“제발 말 좀 해…. 왜 나한테 솔직하게 말을 안 해.”

더운 숨을 고르며 씩씩댄 끝에,

“그림 그리는 건… 좋아하니?”

신음하듯 말했다.

“좋아서 하는 거긴 해?”

네가 하는 일 중에 좋아서 하는 일이 하나라도 있기는 하냐고… 그렇게 묻자 강해아가 완전히


무표정해졌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허연 게 달 같았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그의 이마에 들러붙었다.

“나 태림 씨 남편인 거 좋아해요.”

웃지도, 울지도 않고 강해아가 말했다. 입매는 서늘하고 두 눈은 지독하게 외로운 사람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마침내 그를 만났다. 내 앞에서 최초로 진심인 그를 만났다.

“태림 씨가 결혼 상대를 잘 골랐다고,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날개 폈다고, 좋아 보인다고, 둘이 잘


어울린다고… 그런 소리 듣게 하는 거…, 나 그거 좋아해요.”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는 반듯한데 눈빛은 매 초마다 흐려져 갔다.

“해아야, 그만….”

나는 겁에 질렸다. 맑은 물이 그의 코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 태림 씨 옆에 있는 거 좋아해요.”

“그…만, 그만 말해.”

“태림 씨… 좋아해요.”

해아의 목덜미에 물이 만든 길이 생겼다. 떨리는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그의 귓바퀴가 축축했다.


“머…리. 머리를 맞은 거야?”

발작하듯 소리 지르는 내 목소리를 그는 못 듣는 듯했다.

“좋아해요….”

같은 말만 멍하니 반복하고는 내 어깨를 향해 몸을 쓰러뜨렸다.

말 없는 해아를 끌어안은 채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일순 부스럭거리며 구겨지는 비닐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상한, 괴물 숨소리 같은 신음이 목구멍 밑에서 기어 나왔다. 심장이 찢어지고 머리는 깨지는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드는데, 119, 그 쉬운 번호를 누르질 못해서 두 번인가 다시 전화


아이콘을 눌러야 했다. 헐떡거리며 아무렇게나 말하는 내 목소리를 구급 요원조차 알아듣질 못했다.

영겁 같은 시간이 몇 분인가 흐른 뒤 구급차 소리가 들려왔다. 해아를 끌어안은 채 나는 넋이 빠져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구급 요원 두 사람이 들것을 펼쳐 해아를 눕히려 했고,

“보호자님, 놔주세요.”

구급 요원이 그의 상체를 떠안은 내 팔을 억지로 풀어 내렸다.

“놔주세요, 진정하시고…. 진정하세요, 이제 병원으로 갈 겁니다.”

구급차 뒷좌석에 따라 오르는 순간 머리통이 깨질 듯이 아파 왔다.

병원…. 병원으로 진작 갔어야 하는 건데. 차 안에서… 언쟁하지 말걸.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걸. 그냥
안아 줄걸. 왜 숨겼냐고 따지지도, 억지로 밀어붙이지도 말걸. 울게 하지 말걸….

“보호자님?”

그날 전화를 그렇게 받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보호자님, 괜찮으세요?”

번뜩 고개를 들자 눈물방울이 허벅지로 떨어졌다.

“와 주실 다른 가족은 안 계세요? 한 분 더 불러 주세요, 보호자님도 많이 불안해 보이시는데.”

멍하니 구급 요원을 쳐다보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액정이 흔들거리기에 고장이라도 났나 싶어 다시


살피는데, 정작 고장 난 건 내 손이었다. 떨림이 멎지 않아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만 반복했다.

보다 못해, 구급 요원이 내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가 대신에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병원에 도착한 뒤로는 내 피부 밖의 상황이 온통 연극처럼 느껴졌다. 간호사가 옷을 걷어 확인한 강해아의


배와 옆구리에 손바닥만 한 보라색 멍울이 덕지덕지, 바늘로 찌르면 피가 쏟아져 나올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해아와는 조금도 어울리지가 않았다. 가짜 분장 같았다.

놀란 의사가 달려와 CT 부터 찍자며 침대째로 그를 옮기는 게 연기 같았고, 내 손에 잔뜩 묻은 땀이며


얼굴을 적신 눈물이 그저 생수 같았다.

“…해아야.”
정신을 차리고 한발 늦게, 의사와 간호사들을 쫓아가는데 강해아가 눈을 떴다. 병원 백열등 빛이 비친
그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훨씬 밝아 보였고, 동공은 이상하게 큼직했다.

“태림 씨.”

횡설수설하며 해아가 날 찾았다. 침대 옆으로 붙어 걸으며 손을 잡자,

“나… 내 목걸이….”

눈물방울이 그의 눈매를 타고 흘렀다.

“내 목걸이….”

흐느끼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오다가 이내 그쳤다. 눈이 반쯤 감기고 입술이 벌어진 채 그가 멈추었다.


당황해 나는 두 손을 그의 가슴에 올리고, 고개를 코앞까지 들이댔다. 간호사들이 떨어지라는 안내를
하다가 이내 두어 발짝 물러섰다.

포악한 독처럼 내 피부 밖으로 흘러 나가는 체향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무엇도 통제할 수가 없었다.
터져 나오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제…가.”

뜻 모를 말들이 우수수,

“제가 잘못했습니다.”

말이 아니라 빠진 이를 뱉어 내듯이 쏟아져 나왔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해아 씨. 제가….”

깊이 고개 숙이자 눈물방울이 턱에 고였다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제발… 떠나지 마세요.”

강해아의 가슴 위에, 나는 무거운 머리를 기댔다. 그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잇새로 숨결이 새어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태림아.”

그제야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내 어깨를 잡고, 달래며 어머니가 나를 해아로부터 떼 놓았다. 의사,
간호사들이 멀찍이 서 있다가 뒤늦게 다가왔다.

침대에 실린 해아가 검사실 문 너머로 사라졌다. 두세 걸음 그를 따라 걷다가 나는 멈추었다.

“괜찮아, 태림아. 괜찮을 거래.”

내 어깨를 다독이는 어머니의 말이 거짓 같았다. 괜찮을 리 없다, 내 세계의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체향도 통제할 수 없고 손은 중독자처럼 떨리고 목구멍이 자꾸만 턱 막혔다. 두 눈에선 눈물이 무한정
쏟아졌다. 슬프고 화가 났다. 슬퍼서 화가 났다.

병원 복도에 놓인 의자 위에, 나는 쓰러지듯 앉았다.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리다가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우는 내 모습에 어머니조차 당황한 숨소리를 냈다. 태어날 적에도 잠깐 울다 그쳐서는,
갓난아기가 울지를 않아서 병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무섭게 하더라고 그랬었는데. 이제 나는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저… 숨이 막혔다.
나는 강해아를 좋아했다. 표정부터 독특한 분위기, 알 수 없는 성격, 몸짓, 말투, 습관들… 그의 모든
것을 좋아했다. 좋아하고야 말았다, 아프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던 연기였을 뿐인데. 그런 점이 매력이라고
착각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 하는 그의 몸짓이 자유분방한 영혼처럼 보였다. 내 손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눈짓은 도도한 천성 같았다. 내 고백을 받아 주지 않는 이유가 그 자신의 부유함에 있다고 생각됐었다.
나조차도 사업, 외모, 형질을 이용해 공작처럼 깃을 털어 대야 한다고도 자조한 적 있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 고백을 외면하며 자는 척 숨을 색색거릴 적엔. 자기


공간을 따지길 좋아하는 도도한 고양이라고 생각했다, 내 손길에 눈가를 찌푸리고 어깨를 움츠릴 적엔.
너무 많은 사랑을 받으며 풍족한 인생을 살아온 남자라고 착각했다, 내가 쏟는 애정들을 밑 빠진 독처럼
그저 흘려보내기에.

나는 0 점짜리 남편이었다. 강해아에 대해 아는 사실은 전부 오답이었다. 그라는 금고 문을 열자마자 내가


본 것은 내가 알아 온 강해아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때리지 말아 달라는 원초적인 애원을 하며 제 형제의
발에 매달리는 강해아가 살아온 여섯 살, 열다섯 살, 스무 살의 인생을 나는 모른다.

분했다. 그를 똑바로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것에. 좋아한다고 손쉬운 고백을 하고 흥미로운 퍼즐처럼 그를
다뤄 온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분노로 눈알이 빠질 것만 같았다.

헐떡거리며 우는 내 머리를 다정한 품이 끌어안았다.

“괜찮아, 태림아. 괜찮을 거야.”

달래는 말씀도 연이어 이어졌다.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나도… 어머니 말씀 한마디, 포옹 한 번이면


괜찮아지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나의 창조주조차도 내게 위로를 주지 못했다.

괜찮다는 말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

‘괜찮아요, 태림 씨.’

그 말들은 단 한 번도 거짓이 아니었던 적 없었다.

해아의 상태는 다행히 수술 없이 호전되었다. 비장 내 출혈이 더 생기진 않을지 경과를 지켜봐야 하며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당장 개복하고 수술을 해야 할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마른 허리에 칭칭 감긴 붕대 밑으로, 반나절 만에 멍울이 영역을 넓혀 번진 귀퉁이를 보이고 있었다.


거무죽죽하고 퍼런 빛깔이 눈에 익었다.

‘자화상….’

강해아가 숨어 그렸던 자화상 귀퉁이에 발린 색이었다.

한결 차가워진 머리로 가만히 앉아, 나는 잠든 해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팔뚝에 수혈 링거를 달고서 깊은
잠에 빠진 얼굴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내가 알던 천진난만한 해아의 외모 그대로건만, 한편으로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 같아서였다.
‘도진이….’

그제야 개 생각이 났다.

‘집에서… 낑낑거리고 있을 텐데. 내가 현관문을… 열어 두고 나왔던가?’

녀석의 안위를 뒤늦게 걱정하자니 내 무책임함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해아라면 집에 불이 났대도


개부터 챙겼을 텐데….

옥혜 아주머니에게 연락해야 했다. 며칠, 집에서 머무르며 개를 봐주실 수 있겠느냐 전화하자 걱정


마시라는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한숨으로 전화를 끊고 잠든 해아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불러 댔었다, 어린 개를 거둬 오던 날. 그런 모습만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 흰 개를


제 동생이라고 부르면서 셔츠를 입히질 않나, 에어컨 바람이 차가울 거라며 담요로 둘둘 말아 아기
포대처럼 등에 업고 다니지를 않나, 개의 배에 대고 부르르 배방구를 뀌었다가 도진이의 짜증스러운
아르릉 소리를 듣고 웃어 댔었다.

장난꾸러기처럼 해맑은 얼굴을 떠올리니 내 뺨에도 미소가 올랐다.

‘제발 그만 때려….’

그렇게 애원하는 목소리에는 뼛속까지 서늘해졌다.

나는 해아의 손을 조용히 감싸 잡았다. 손끝이 푸르스름하기에 몇 번이고 주무르자 느릿느릿 혈색이


돌아왔다. 선홍색이 된 그의 손을 따듯한 이불 속에 넣어 주었다. 조심조심, 일자로 팔을 뻗게 하고
흐트러진 머리칼도, 흘러내린 이불도 목 위까지 정돈해 주었다.

정신없이 꿈결인 얼굴이 잔뜩 상해 보였다. 눈 아래는 푸르스름했고 입술은 메마른 채였다. 아픈 사람을
보는 건 좋지 못한 일이었다. 그 사람이 내 남편이라면 더더욱.

천천히 시선을 내리는데 문득, 목덜미에 남은 야트막한 생채기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끌어 올려 덮어 주었던 이불을 도로 내리고는 그의 목을


이리저리 살폈다.

없었다, 응당 있어야 할 것이.

‘돌려줘, 제발….’

그제야 나는 해아가 왜, 제 형의 발에 매달려 연거푸 애원했는지 이유를 알았다. 갤러리 창고에서 잠시


목격했던 환영도 스멀스멀 머릿속에 떠올랐다. 보라색 결정이 박힌 목걸이를 앗아 쥔 나 자신을
보았었는데… 그 환영이 순 거짓은 아니었던 셈이다.

‘내 목걸이….’
훌쩍거리며 찾던 해아의 목소리도 되새김질하듯 다시 들려왔다. 빼앗긴 것이다, 내가 준 생일 선물을…
그 목걸이를 꽤나 좋아해서, 잘 때조차 풀지 않던 해아였다. 파자마 칼라 밑을 정돈하는 인기척을 조용히
들려주었었는데.

그날, 강일해가 그걸 빼앗아 간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제발, 제발… 울며 매달리는 이유가 맞아서, 아파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걸 돌려 달라고….’

심장이 철골처럼 차가워졌다. 천천히, 두툼한 이불을 올려 덮어 주며 나는 숨을 골랐다.

어떻게든 되찾아야 했다. 해아의 목에 걸려 있어야만 했다, 그 목걸이는.

내 사람의 목에….

“…….”

잠든 이의 목을 나는 검지 끝으로 매만졌다. 아주 얇은 딱지가 앉은 흰 피부가,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아픈 강해아가 주는 기묘한 데자뷔가 내 속을 역겹게 뒤집어 놓았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면서 나는 어머니에게 침대 옆자리를 양보했다. 어딜 가느냐고 묻고 붙잡는


손에 멈추기도 아주 잠시였다.

“…받아 올 물건이 있어서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내 팔뚝을 쥔 어머니의 손을 천천히 떼어 내려다 나는 오히려 두 손을 마주 잡혔다. 내 큰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어머니는 전에 본 적 없이 심란한 얼굴이었다.

“태림아.”

그러고는 병실 창밖, 복도를 힐끔 살피셨다. 시선이 향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내 고개를, 어머니는
손끝으로 가볍게 잡아 돌렸다. 허리를 왕창 숙이고 구부정하게 선 채 나는 어머니에게로 두 눈을
고정시켰다.

“사실 밖에 경찰들이 와 있어. 지금 네 아버지랑 얘기 중이야. …큰일이 난 건 아니고, 응급실 간호사가


신고를 했었다나 봐. 가해자가 너인 줄 착각해서 그랬다더라.”

“아, …그래요.”

쉬쉬하며 전해 주신 오해가 나를 떨떠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주 불가해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


주먹과 뺨에는 강일해를 덮칠 때의 생채기가 남았고, 해아는 의식을 잃은 채로 무방비하게 실려 왔다.
덩치 큰 우성 알파가 기절한 열성 오메가를 안고 소란을 피워 댔으니, 누구라도 내가 그를 때렸다고
오해할 법했다.

내 납득이 쉬운 만큼 어머니는 속이 상한 기색이었다. 자랑거리는 못 되지만, 폭력배 취급을 받는 게


나로서는 생소한 일이 아니었다. 십 대 시절에는 형질을 못 견디고 본능을 못 이겨서 사고를 치기도
했었다. 그러니 강일해를 패 놓은 것을 아시면서도, 그에 대해선 일언반구 이유조차 묻지 않으셨다.

그러나 해아를 때렸다는 오해를 받는 건 결이 다른 문제였다. 언제고 온화하던 미간에 구김이 생긴,
어머니는 속상하다 못해 화가 난 듯 보였다.

“듣기로는… 네가 오해할 만큼 이상한 소리를 했다던데. 네 행동이랑 말이, 꼭 가해자인 것 같았다던데….


그게 사실이니? 도대체 왜 그런 거니?”

금이 간 이마를 펴 드리고 싶고 속상한 마음도 풀어 드리고 싶지만,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차게


식은 얼굴로 들것에 실린 강해아를 못 데려가게 붙든 내 행동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입 밖으로 쏟아낸 문장들도 충분히 수상쩍었다.

도대체 왜 그랬느냐고?

“모르겠어요.”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어요, 어머니.”

그냥, 그랬다. 안 그러면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아서. 지금 말고는 다시는 해아를 잡을 기회가 없는 것


같아서. 내 뇌에 콘크리트로 지은 댐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자꾸 물이 새서… 말이라도 뱉지 않으면 곧
터질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금방 다녀올게요. 저 대신 해아 좀 봐주세요.”

어머니의 손을 놓아 드리며 나는 잠든 해아의 얼굴을 살폈다. 마른 입술이 건조하게 갈라진 채였지만 그는


전보다 편안한 듯 보였다.

“혹시 저 없는 사이에 해아가 깨면… 일어났을 때 옆에 좀 계셔 주세요. 혼자 있지 않게 해 주세요.”

내 부탁에 어머니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으셨다. 속 썩이는 자식새끼인 나를 외면하면서, 막내아들


다루듯이 해아의 손을 대신해 잡을 뿐이었다.

병원을 나설 무렵에는 먹구름이 컴컴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 평소보다 낮아 보였다.


거무죽죽한 구름을 잠깐 올려다보다가,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배터리가 거의 닳아 가는 휴대폰을 꺼내 연락한 상대는 강일해보다 먼저, 강해인 부사장이었다.

분주히 오가는 의료인들을 피해 병원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섰다. 그리고 그녀와 잠시간 통화를
나눴다. 부사장과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협업 계약 관련하여 크게 미팅이 있는 날에만 두 번 만나
대화를 나눈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강해인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기는 충분했다. 그녀가 나와 같은 우성 알파여서만은


아니었다. 어지간히 야망 있고 똑똑하지 않고서는, 전체 임원의 9 퍼센트만이 여자인 그룹의 부사장
자리까지 오르진 못했을 게 분명해서였다.

―왜 제가 천 대표님 편을 들 거라 생각하셨어요?

몇 마디 이야기가 오간 끝에 강해인이 물었다. 휴대폰을 고쳐 쥐며 나는 돌을 깎아 다듬어 낸 건물 벽면에


어깨를 기댔다.

부사장이 내 편을 들어 줄 이유야 많았다. 중요한 골조를 다 짜 놓은 협업 미팅에 대뜸, 인계를 받아


왔다며 강일해가 끼어들고 강해인은 보이지 않게 된 점이라든가.

한성에서는, 다리 사이에 뭐 하나 달린 게 참 대단한 벼슬이었다. 일개 사원도 아니고 우성 알파


부사장이 다듬어 놓은 회사 간의 큰일을, 열성 알파 상무 이사가 이어받았다며 찾아온 꼴을 보자니 우습고
황당했다. 강일해라고 순 무능력자는 아니었지만 강해인을 대신할 정도로 유능하냐면 결단코 그렇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저런 말들로 강해인을 꼬드길 수가, 있긴 할 터였다. 앞으로 AOM 과 한성 사이의 큰 다리는
전부 당신을 통해 놓겠다고 말할 수도 있었고, 꼴 보기 싫을 남동생을 치워 주겠다고 청소부 노릇을
자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전부 뱉는 것만큼, 사업에서 불필요한 짓이 없었다.

“그럼 안 됩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되물었다. 강해인이라면 이유쯤이야 알아서 추측할 테고, 나는 휴대폰 배터리가 별로
없으니까.

―분석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네요.

강해인이 피식 새는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알겠으니 뜻대로 하세요. 말 몇 마디 거들어 드리는 게 어렵지는 않아요. …그런데 다음에는요, …뭐, 천
대표님께서 나한테 할 다음 부탁이랄 게 있을까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 좀 덜 사무적으로
대화할까요?

“‘덜 사무적으로’요.”

―…그래도 해아 걔 내 동생이거든요. 천 대표님도, 이제는 한 식구고요.

그러고는 전화가 끊겼다.

뜨거워진 휴대폰을 손에 쥔 채 나는 강해인에게 그녀만의 온정이나 사정이 있을까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똑똑한 사람이 재빨리 썩은 줄을 잘라 버린다고도 느껴졌다.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5 퍼센트 남은 배터리를 확인하고는, 다른 ‘식구’에게 전화했다.

강해인에 비해 강일해는 응답이 느릿느릿했다. 이쪽에서 걸어올 연락만 기다렸을 게 뻔하건만, 자동


응답으로 넘어가기 직전에야 전화를 받는 의도가 분명해서 오히려 우스웠다.

용건은 간단했다. 나는 당신에게 줄 게 있고, 당신도 내게서 받을 게 있지 않으냐고 읊어 놓자 강일해는


덥석 대답해 왔다. 문자를 보낼 테니 확인하라 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놓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아둔하게 들렸다.

‘혀까지 씹었나.’

휴대폰 모서리를 검지로 툭, 툭 두들기다, 오건민 기사를 호출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내 차를 끌고 와


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그때… 바로 병원으로 모셨어야 하는 건데….”

“됐습니다. 대기하지 말고 퇴근하세요.”

내게 키를 건네준 뒤에도 오 기사는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쥐여 주려는 택시비를 구태여 거절하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병원 건물을 연신 올려다보았다.

어깨가 축 처진 그를 병원 주차장에 남겨 두고 나는 먼저 차를 뺐다.

‘그래, 그럼 그렇지….’

코 밖으로 피식, 실소인지 한숨인지 모를 공기가 샜다.

지난 오후에는, 병원으로 가자는 내 말 대신 집으로 가 달라는 해아의 부탁을 듣는 오 기사가 미웠다.


그러나 오늘 수염이 꺼칠하게 난 얼굴을 보아하니 저도 제 잘못을 진작 알던 눈치였다.

오 기사의 핸들을 움직인 이는 강해아가 아니었다. 자유로운 게 좋다고 노래를 부르던 강해아가 구태여
저를 따라다닐 기사를 고용했겠는가.

‘지금 병원 가면 회장님 난리 나…. 집으로 가.’

결국 강준일이다.

턱을 꽉 다문 탓에 어금니끼리 빳빳하게 눌릴 즈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이대로 연락을 피하거든


회사로 찾아갈 심산이었으나 강일해가 친히 알려 준 주소는 서울 중앙에 위치한 오피스텔이었다.

‘어디서 보든 상관없지.’

땅값이 오를 대로 오른 동네 큰길을 차로 가로지를 때는,

‘오히려 잘됐어.’

마음이 서서히 가벼워졌다.

나는 세월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새 건물 앞에 섰다. SD 모델링을 돌린 완공 예상도라고 생각해도


손색없을 수준이었다.

강준일 회장이 이렇게 갓 지어 놓고는 갖고만 있는 고층 건물이 열 손가락을 채우고, 개중 강일해가


굴리는 건물이 둘은 된다는 이야기를 재작년 즈음 들은 기억이 났다.

솔직히 웃겼다, 제 건물 안으로 불러들이면 그게 저를 지키는 방패라도 될 줄 아는 모양새가. …제 작품을


건 벽들에 둘러싸인 채로도 강해아는 울상이었는데.

그들은 형제이면서 참 달랐다. 대외적인 이미지만 훑어보던 예전에는 강일해와 강해아가 닮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강해인 부사장이 그 집 셋째, 강미해와 닮은 것처럼 말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나 지금 와 통탄해 봐야 늦었지만, 그런들 후회하지 않을 순 없었다.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강일해야 남이니 그럴 수 있다지만, 내 남편인 강해아를 내가 몰라봤다.

얼마나 어리석었나…. 깊게 들여다보았더라면 진작 알았을 것이었다. 아니, 깊게 들여다보아 진작


알았어야 했다. 강일해와 강해아가 조금도 닮지 않았음을.
번질번질해서는 내 얼굴을 비추는 엘리베이터 9 층 버튼에 지문을 남겼다. 올라와서는 간격 넓게 놓인
문의 호수를 확인했고, 문자로 받은 주소지에 도착했다. 벌어진 문틈 새로 삐져나오는 전등 빛에 손을
대자니 강도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노크 없이 문을 열었다.

저벅저벅 들어서자 집 안에서 놀란 듯한 인기척이 잠시 들렸다. 턱을 들고 나를 보는, 강일해의 얼굴은


낯선 모양새였다.

두 눈 안쪽엔 퍼런 멍이 들고 콧대 위에는 깁스를 찬 꼴을 보니 전화로 들리던 목소리가 어눌하던 것도


이해가 됐다. 되는 대로 그를 패 놓은 기억이 어슴푸레해서 어디까지가 현실이었는지 분간되지 않았었는데,
얼굴을 보니 전부 실제였던 모양이었다.

넓은 집의 거실에 우두커니 선 채 나는 펜트하우스처럼 꾸며진 인테리어를 훑어보았다. 벽에는 선을 죽죽


그어 놓은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해아의 작품보단 못했고, 가죽 소파는 광택 넘치는 재질에 유리 테이블은
검은 골조가 다 보이도록 투명했다.

그 위에, 눈에 익은 목걸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신경 써 보관하지도 않았는지 줄이 엉킨 채였다.

보라색 결정에 전등 빛이 투과되어, 테이블 위에 빛으로 된 선이 생겼다.

“…….”

저 결정이 단순한 루비가 아니라는 걸, 해아는 모르지만 강일해는 아는 눈치였다. 하긴, 그러니 빼앗아
갔겠지. 당연히 내 것이고 강해아의 것인 도난품을 트레이드 카드라도 된다는 양 내놓은 알량함에 기가
찼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뭡니까?”

소파 팔걸이를 향해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며 강일해가 물었다. 번질번질한 눈동자에는 긴장한 기색이 반,


기대감이 남은 절반을 채우고 있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벌떡 일어나 악수를 청해 오더니, 인사치레는 어제부로 관둔 모양이었다. 이제 내가


그에게 협력사 대표도, 하다못해 매제도 아니게 된 걸 보니 몹시 반가웠다. 나 역시 그쪽 회사 상무
이사나 시숙을 보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느릿느릿, 나는 걸친 재킷을 벗었다.

“…줄 게 있다고 했지.”

태평하기 짝이 없는, 내가 들려줄 사과의 말을 기다리는 철면피의 강일해는 내 남편과 대척점에 선


존재였다. 살아 본 적 없는 건물을 제 방패라고 내미는 저 남자에 비해, 강해아는 제 집 안에서조차 단
한 번 편안한 얼굴을 보여 준 일 없었다.

회색 재킷을 내려놓은 다음엔 손목의 시계 줄을 풀었다. 강일해는 그런 나를 멀뚱멀뚱 올려다보기만 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가 물었다. 내 주먹을 보니 이제야 맞았던 기억이 나는 모양이었다. 바깥에 경비가 있다느니 뻔한


소리를 뱉는 그를, 나야말로 멀뚱멀뚱 내려다봤다.

“아끼는 시계라서.”

해아가 준 거거든.
“이왕이면… 지금 대답해 줬으면 합니다.”

시계를 왼쪽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나는 그를 내려다봤다.

“왜 그런 겁니까?”

그리고 물었다,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구기는 강일해를 향해.

“전시회 갤러리, 비품실에서. 왜 그랬느냐고.”

그러자 강일해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과장된 웃음을 터뜨리기도 잠시,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당황한 기색을 지워 내기 바빴다.

그의 놀란 기색이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아무래도 그에게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왜 동생을 때렸느냐고


물은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 그게 무슨 헛소리지? 형제끼리 싸우는데 이유 같은 게 어딨습니까. 우리 집안이 원래… 싸울 때는


다른 집보다 더… 치고받고 그러거든요? 어제는, 뭐… 그냥 사고 같은 거였고.”

강일해의 혓바닥이 길어졌다. ‘형제끼리 싸웠다’는 거짓말을 뻔뻔하게 늘어놓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토기가 치밀었다. 양심이 없으면 일방 폭행도 다툼이 되나 보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는 이야기는 벌써 들어서 알고….”

끓어오르는 화를 참느라 내 말끝이 떨렸다. 마른침을 넘기는데 목구멍에 가시가 박힌 듯했다.

“…그래도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내 남편이 왜, 더러운 바닥에 엎드려서 울어야 했는지 나는 그 연유를 알아야겠다. 그걸 모르고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느낌이다. 해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숨을 쉬기 위해서, 알아야겠다. 강해아가
도대체 왜 나를 두고 그 구석진 방까지 강일해를 따라갔는지…, 둘이서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왜 맞아야만 했는지.

“하….”

강일해가 긴 숨을 과장하듯 내쉬었다. 내 세계의 깊은 고민을 별것 아닌 양 치부하는 한숨이었다.

“이봐, 천 대표님.”

눈썹 사이를 구기며, 그가 상체를 내밀었다.

“당신 환자지?”

그러고는 대번에 목소리가 변했다.

“이런 식으로 협박한다고 내가 없는 이유라도 술술 만들어 불 것 같냐? 당신이 무슨, 깡패도 아니고….
진짜 어이가 없어서.”

“…….”

“그거 병이라며? 극우성 알파랍시고 다른 알파들한테 괜히 폼 잡는 병. 머리꼭지 돌 때만 그런다며. 나도


다 알아봤어. 그런 가짜 협박이 나한테 먹힐 거 같았어?”

“…….”
대답 없이 나는 그의 태도를 관찰했다.

꼴을 보아하니 나를 고소할 수 있나 벌써 각을 재 본 모양이었다. 경찰 개입도 법원 명령서도 없이 환자


정보를 빼낸 변호사 얼굴이 궁금해지는 시점이었다.

병이니 환자니 하는 말로 비방하려 해 봐야 내겐 아무런 타격감이 없었다.

‘그게 하루 이틀이어야지.’

처음 동급생 알파를 폭행했을 땐 외과부터 신경, 정신과까지 돌아다니며 갖은 진료를 다 받았었다. 어떤


의사는 병이라 하고 다른 누구는 아니라고 했지만, 소견은 얼추 비슷했다. 적당한 오메가를 진정제 삼는
것 외에 고칠 방법이 따로 없다는 것. 그리고, 폭력성과 기억 장애는 발작 증세로 진단한다는 것.

그러니 이 자리에 뻔뻔해질 수 있는 남자가 강일해뿐만은 아니다. 그도 아는 눈치다, 제가 강해아를


폭행한 사실을 얼렁뚱땅 부인하듯이, 내가 그의 코를 뭉갠 것도 폭행 사건이 아니라고 둘러댈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검사장네 외아들이 ‘불치병 발작’을 일으켰다는데 유죄 판결을 내릴 판사가 몇 명이나 있을까. 내가


알기로는 없다.

“우리 해아는 당신 환자인 거 알고 결혼했대? 아차차, 어제까진 몰랐겠네. 천 대표님, 알파한테만


도지는 동물의 왕국병 환자시니까.”

강일해는 줄줄이 힌트를 흘려 댔다. 뒷조사를 마쳐 놓곤 따로 입단속을 않는다는 건 법정 싸움까지 갈


생각은 접었다는 의미였다.

“…당신 맨정신에는, 사람 팬 적 한 번도 없잖아.”

입술 끝에 걸린 비웃음을 보아하니 순순히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뭐든지 처음은 있는 법이지.”

사실 당장은, 그 입을 잠깐만 닥쳐 주었으면 싶었다.

그대로, 나는 계절감에 비해 두꺼운 재킷을 강일해의 얼굴 위에 덮었다.

“뭐, 뭐야?”

버둥거리는 그의 머리는 오른손으로 콱 움켜쥐었다. 뒤통수가 소파 등허리에 붙게끔, 손바닥으로 얼굴을


누르자 부러진 코가 건들렸는지 그는 새된 비명을 질러 댔다. 이까짓 일로 사내자식이 엄살이라니.

“닮아서 그래.”

재킷 소매를 끈 삼아, 붕대라도 두르듯이 그의 얼굴을 칭칭 감아 가리고 꽉 묶었다. 저에게 닥친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몸짓을 꽤나 거세게 보여 주기에, 친절하게 설명도 해 주었다.

“당신 눈썹이 해아랑 닮아서… 마주 보고 때리기가 좀 그렇다고.”

“아, 아니, 씨, 무슨…. 허세 부리지 말라고!”

강일해의 몸이 벌써 떨리고 있었다. 이따금 사람의 본모습이라는 건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강해아의


본성은 나를 울게 만들었고 강일해의 본성은 황당함에 실소하게 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고작 두 살이었다. 체격도, 강일해가 조금 더 큰 편이긴 하나 유의미하게 차이
나진 않았다. 그러니 강해아가 진심으로 반항하고 싸움을 했더라면, 그와의 몸싸움에서 이겼을지도
몰랐다.

‘어릴 적부터 맞지만 않았더라면.’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강일해의 배에 주먹을 꽂고 바닥에 내팽개치면서는.

“아악!”

아니다. ‘이겼을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이겼을 것이다’. 한 대 맞았다고 고함부터 지르고 보는 놈에


비해, 해아는 멍울에 피가 차오르는 몸으로도 전시회장 중앙에 뻔뻔하게 섰으니까. 주먹다짐이라도
나누었더라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채이고 바닥을 기진 않았을 텐데… 강해아가 그러지를 못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해아는 제 형 앞에서 아직도 여섯 살 꼬마인 셈이다. 그의 형은 그런 동생을 뇌진탕이 오고


비장이 상하도록 걷어찬 남자였다.

나는 그의 입에서 애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 번, 두 번, 축구공 다루듯 발로 그의 배를 차올리면서.

“이제 질문에 대답해.”

허공에 붕 떴다가 벽면에 등을 부딪쳐 가며 강일해는 허우적거렸다. 제 배를 감싸 쥐고는 ‘컥, 컥’


밭은 기침 소리를 냈다.

“그 방에서 해아랑 무슨 대화를 했지?”

거칠어진 손을 들어, 나는 입가를 문질렀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모양새로 일그러진 입매가


얼얼하게 느껴졌다.

강일해로부터 내가 원하는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물며 애원하는 소리조차 없었다.

‘셋, …넷.’

횟수를 셈하며 나는 그의 배를 걷어차고 밟았다. 해아의 몸에 남은 멍울을 생각하며, 그나마 비슷한


위치를 골랐다.

완전히 똑같이 보복해 주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강일해처럼 멍청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장기가


파열되도록 증거를 남길 마음은 없다.

다섯 번째 발길질이 날아들 즈음 그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막았다. 어찌나 요란하게 발버둥을 쳐 대는지


그의 팔에 부딪힌 협탁이 가로로 쓰러지고 도자기 화병이 박살 났다.

“대, 대답할, 할게! 한다고….”

그러고는 허둥지둥하며 제 얼굴을 감싼 재킷을 풀어내기에, 나는 그의 왼쪽 가슴을 찼다.

퍽 소리를 내며 단단한 흉곽이 깨지는 듯 아픈 소리가 났고,

“아악! 악! 씨발! 말한다고! 말해!”

주먹으로 바닥을 쳐 가며 강일해가 소리를 꽥꽥 질러 댔다. 그는 나를 못 이긴다, 제 분노조차도 못


이기는 놈이 타인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씨발…, 그, 새끼, 아니, 강해아가… 걔가 그런 애가 아닌데… 내 동생이라서 내가 안다고. 근데
어제는, 눈이 돌아서 개기잖아. 그, 그거….”

“‘그거’?”

“다, 당신 아버지… 천 검사장. …건드릴 거냐고.”

무릎 위를 밟으려던 발이 허공에서 멈췄다. 소리 없이 비틀거리며 나는 두 발로 땅을 디뎠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자빠질 것만 같았다. 사방의 벽이 한꺼번에 내 머리로 밀려들어 오는 느낌이었다.

늘 이런 식이다. 해아는… 나를 자꾸 놀라게 한다. 심약한 사람처럼 전전긍긍하게 하고, 내가 견딜 수


없는 충격을 가장 견디고 싶지 않은 순간에 벌컥 던져 놓는다.

“씨발 나, 는, 힉… 아직, 아니,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 그 새끼가 먼저 생사람을 잡아서….”

두 눈이 뜨거워진 채 멍하니 선 내 침묵을 성화로 읽었는지 강일해가 변명했다.

“난 억울해서… 그…, 아, 아무 짓도 안 했잖아, 겨, 결과적으로 그렇잖아. 증거 있어? 내가 씨발 뭐


했다는 증거 있냐고…, 없잖아! 없다고! 어?”

“…….”

“어차피 공사 물 건너갔어…. 됐어?”

그의 말이 먹어 본 음식처럼 소화되기도, 몹시 낯설고 아리송하기도 했다.

“…‘공사’. 그런 짓을 꾸민 이유가 뭐지?”

“하…, 이유가 뭐가 중요해? 그 새끼가 붓을 꺾는다잖아. 나는 아무 짓도 안 했고, 앞으로도 안 할


거니까…. 이, 이것 좀 벗겨 봐….”

잠시간 정신이 멍했다. 강일해가 무슨 수작을 부리건 내 아버지께 나쁜 일이 생길 리 없다는 믿음이


빳빳하다가도,

‘나쁜 일….’

등골에 진땀이 흐르고 발밑이 시커메졌다.

원하던 답을 듣고도 나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숨이 막혔다.

…결국 나였다. 강해아를 향해 품었던 모든 질문의 대답이 나였다. 그렇게 잘하는 그림까지 하루아침에
접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나는 발을 뻗었다. 구둣발로 강일해의 왼쪽 가슴을 짓이기고 체중을 실어 밟자,


그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강일해는 내 종아리를 주먹으로 치고 밀어 대다가, 이내 두 손으로 긁으며 매달렸다.

“이…, 제 된 거 아냐? 그만, 해, 히익…, 그만해, 미친 새끼야….”

평생 폭력과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내 인생에 빨간 줄은 아직 없었다. 남에게 상해를 입힌 적은 많지만 이


순간이, 개중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맨정신으로 사람을 팬다는 게 결코 유쾌한 일은 되지 못했다. 강일해를 아프게 한들, 하물며 죽인다고
해도 내 화가 식는 일도 해아가 씻은 듯이 낫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어차피 질문에 대한 답은 들었다. 이제 와서 무얼 어쩐다고 해서, 내 아버지 일을 알아내겠다고 강일해를
따라 나간 해아의 걸음이 멈추지는 않는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불려 가서 맞았다던 십 대 강해아가
씻은 듯 사라지진 않는다. 유학 가기 싫어서 울면서도 부득불 비행기에 태워졌던 여섯 살 강해아가
괜찮아지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용서해 줄 이유도 없지 않나?’

강일해의 가슴을 밟아 주지 않으면 남은 평생, 해아의 옆에서 숨쉬기가 부끄러울 텐데 그러느니 빨간 줄


몇 개쯤 그이는 게 나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감방 생활을 해야 한대도 상관없었다.

‘…아니지.’

그건 좀 곤란하겠다. 내가 감옥에라도 들어가면 해아는 어떡하겠어. 내 체향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인데.


일방 각인 문제로 금단 현상에라도 시달리게 될지 모를 일이다.

“허억, 컥… 씨…발, 흑….”

강일해의 신음이 나는 웃겼다. 피식피식 웃고 있자니 그 언젠가 내게 얻어맞은 놈들이 하던 욕설,


그대로의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또라이 새끼. 미친놈. 정신 이상자, 폭력배, 깡패 새끼….

‘태림 씨.’

…강일해의 얼굴은 가리지 않아도 될 뻔했다. 입버릇 하나까지도 전부 다르건만 그의 얼굴을 보고 때린다고
해아 생각이 나겠나…, 그러나 생각만 그렇게 할 뿐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묶은 재킷을 벗겨 주지
않았다. 눈물인지 땀인지 침인지 모를 액체로 젖어서, 천이 얼굴에 말려 숨도 못 쉴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힉…, 히익….”

마침내 강일해가 조용해졌다.

“제…발, 좀….”

고달픈 숨소리를 내는 그 앞에 나는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고약한 알파 향이 아주 흐릿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열성 알파의 냄새였다.

그의 형질이야 소문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향을 맡으니 아주 우스웠다. 선물할 상대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의 체향으로 결정을 만든다 해도, 내가 해아에게 준 것과 같이 진한 보라색은 나오지 않지
싶었다.

‘그래서 뺏었나, 제가 갖고 싶어서.’

웃긴 상상을 하는데 웃음은 나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가까이,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고 나는 그저


졸렬한 냄새를 맡았다. 내 인기척에 그가 어깨를 흠칫거렸다.

“그, 그만해….”

그러고는 성급하게 빌어 댔고,


“강일해 씨.”

나는 내 코와 턱 밑을 문질러 닦았다.

“당신 앞으로 소장 하나가 접수될 거야…. 쓸모없는 짓 하지 말고 얌전히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고.”

검지 끝에 닿는 턱의 감촉이 까칠까칠했다. 수염 때문이었다. 앞으로 반나절만 지나도 꼴이 꽤나


지저분해지지 싶었다. 면도해야겠네, 해아 깨기 전에….

“소, 소장? 씨, 발 지금, 지금 사람 팬 게 누, 누군데….”

“내 이름으로 간다고는 안 했어.”

강일해는 평생 나를 이기지 못한다. 앞으로 평생, 그는 내 남편인 강해아를 건드릴 수 없다.

“내, 내가 누, 누구인지 알고….”

“알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허우적대는 그의 팔을 내려 내 발밑에 뒀다. 팔목을 지르밟는데 강일해는


그것만으로도 엄살을 부려 댔다. 쯧 혀를 차는 대신에, 나는 그의 얼굴에 매듭지은 재킷 소매를 풀어
주었다.

코와 입을 온통 틀어막던 천을 치워 주자,

“허억…!”

강일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들이쉬었다. 콧등 깁스 밑으로 피가 삐질삐질 흐르고 있었다. 울었는지


눈이 시뻘겋고 얼굴이 온통 축축했다.

잔뜩 열이 오른 눈으로 그가 나를 노려봤다. 그렇게 짓밟고 걷어찼는데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모습이었다.

“당신 그 성격을 왜 우리 테스트에서 잡아내지 못했는지 미스터리야.”

한숨 쉬며 실소하자 그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더 겁먹고, 더 울었으면 했건만… 그런 의미에서 강일해는


참 대단한 에고의 소유자였다.

“핏줄이란 게 참 신기하지. 같은 집안에서 강해아가 나고 너 같은 새끼가 나고. 그리고 강해인 부사장이


났다는 게….”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테이블 자리로 향했다. 이제 볼일은 끝났다. 줄 것을 주었으니 받을 것을 챙길


차례였다. 풀어 두었던 시계를 다시 차고서, 줄이 엉킨 목걸이를 챙겨 들었다.

“안 어울리게 똑똑한 누나를 뒀더군.”

그러자 강일해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우성 알파이자 제 상사인 누나 이야기에는, 그 안의 어떤 버튼이


눌리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당신 가족은 당신 편이 되어 주지 않을 거라고, 알려 줄까 하고 입을 열었다.

“강일해 씨.”

그러나 내 입 밖으로 나오는 건 허탈한 한숨이었다.

“당신은 이제 누구도 아니야.”


한심한 얼굴을 몇 초간 내려다보다가, 나는 돌아섰다. 그대로 문을 잠가 둔 현관으로 향하려는데, 등
뒤로 역한 냄새가 대뜸 끼쳐 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마자 나는 주먹부터 휘둘렀다.

“악!”

내 손날에 제 손을 채이면서 강일해는 휘두르던 것을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도자기 파편이, 여러 갈래로
박살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생채기가 난 그의 손에 이어 당황한 듯 붉힌 얼굴이 보였다.

“왜, 왜 강, 강해아야….”

강일해가 헛소리했다. 충혈된 두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대는 모습을 나는 굳은 채 내려다봤다.

“왜 항상, 왜 또… 이, 제 와서 강해아…, 그 새끼냐고…, 그 새끼는 알파도 뭣도 아닌데. 씨…발 평생,


인생 편하게, 산 놈이… 무슨 가치가, 어, 얼마나 있다고. 좀 건드려서 그게 뭐 어쨌다고….”

분을 못 참고 씨근덕거리는 그의 코 밑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부러진 코의 상처가 다시 찢어진 모양이었다.


거무죽죽하게 얼룩진 붕대를 단 채 강일해는 시커먼 눈동자를 정처 없이 흔들어 댔다.

두서없는 헛소리를 들어 줄 마음은 없었다. 대충 그를 저지하고 떠나려는데,

“왜 그딴 공사를 꾸몄느냐고?”

강일해가 내 마음을 바꿔 놓았다.

“천 대표 당신 때문이잖아, 굳이 당신이 걔랑 결혼해서…. 이제 와서 그 새끼가,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고, 주제넘게 기어오르고 아들 행세를 하니까.”

내 어깨 위로 김이 오르는 듯했다. 소리 없는 분노로 몸이 펄펄 끓었다. 그러나 대답 없이,

“…….”

나는 참았다. 안 돼. 안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화를 냈다가는 강일해를, 정말로 죽여 버리고야


말 것 같았다.

“강해아 그 새끼는, 딱 우리 집 애완견이야…. 알아? 당신 개랑 결혼했어. 걔는 사람이 아니라고.


겉으로 멀쩡해 보이게 만든 건 다, 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릴 적에 그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코피로 얼룩진 고개가 얼떨떨하니 바닥을 향했다. 애매하게 해아와 닮은 눈동자를 채우던 초라한 열등감도
삽시간에 자리를 비웠다. 이내 그의 검은 눈동자에 약간의 절망이 스몄다.

뚝, 뚝…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따라 시선을 내리자 그제야 바닥에 고인 빨간 피가 보였다.

내 손날에서 쏟아지듯 흐르는 혈액이, 거짓말처럼 순수하게 빨강이었다.

문득 해아가 생각났다. 차가운 브라운이니 따듯한 브라운이니 뜻 모를 말을 읊던 해아가. 몰래 그의


작업실을 구경할 때면, 나는 좌대에 놓인 물감들을 열심히 관찰했었다.

덕분에 지금, 내 손을 적신 빨강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차이니즈 레드.’

내 생각을 들었더라면 해아가 웃을까.

나는 두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일순 멍해졌던 정신이 느릿하게 돌아왔다.

그대로 찢어진 손을 들었다가 시계를 망쳐 버렸다. 구태여 벗어 놓았던 보람이 없게 됐다. 그가 휘두른
자기 조각에 찢어진 살이 너덜너덜하게 벌어졌고, 흘러나온 피가 시계를 지나 팔뚝까지 삽시간에 적셨다.

긴 한숨을 쉬며 나는 반대 손에 쥔 목걸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상처 위를 손바닥으로 눌러


막았다.

“똑똑하게 좀 행동해….”

그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가 서면서는 입 밖으로 맥 빠진 목소리가 나왔다. 더는 강일해를, 상대할


기운조차 나질 않았다.

“당신 남매들에 비하면 강일해, 당신은 아주….”

피 젖은 손으로 얼빠진 놈의 뺨을 툭, 툭 쳐 주었다.

“불량품이야.”

그러고는 돌아섰다.

이번에 강일해는 나를 잡지 않았다. 등을 찌르겠다고 패기 있게 달려들어 놓고는, 막상 피가 쏟아지니


당황한 모양이었다.

손날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차에 오른 뒤에도 피가 멈추질 않아서, 넥타이를 풀어 둘둘 감아야 했다.

붕대 삼아 감은 넥타이마저도 금세 시뻘겋게 젖었다. 한 손으로 상처 위를 짓누른 채 나는 운전석


등받이에 뒤통수를 푹 기댔다. 갑작스러운 피로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아직도 발끝에 강일해의 몸을
차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물이 든 가죽 주머니처럼 느껴지던 복부의 감촉이 생생했다.

‘피곤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싸늘할 정도로 침착하던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그래서 안심됐다. 뒤늦게
마음이 불안하고 머리는 어지러운 것이 내가 아주… 순 깡패 새끼는 아니라는 증거 같았다.

차창 밖이 핑글핑글 도는 환각을 바라보면서 내 몸이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럽고 지친 김에


이대로 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피곤해….’

…나랑 결혼했기 때문에. 그런 터무니없는 이유 하나로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는 걸 해아는 아직 모를까.
만약에 알고 있었더라면 나한테 언질이라도 해 줬을까. 또 몰랐다면, 그 이야기를 이제야 듣고서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냥 웃어 버릴까 봐 무섭다. 잠깐 멍하니 나를 보다가는, 그저 보기 좋게 웃어 버릴까 봐….

‘그렇게 웃지 좀 마….’

그 표정이 무섭다. 무서울 정도로 편해 보이는 표정. 사는 데 아무런 미련 없는 사람 같은 그, 풀 죽은


미소….

‘웅웅’… 휴대폰 진동음에 눈이 번쩍 뜨였다. 잠깐이나마 까맣게 꺼졌던 시야가 도로 밝아졌다. 잠시


숨을 고른다는 게, 차 안에서 기절했던 모양이다.

더듬더듬, 피 묻은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자 잔여 배터리가 거의 없다는 안내창이 먼저 떴고,


다음으로는 문자에 실린 사진이 열렸다.

두 눈을 크게 뜬 사진 속 해아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토라진 애처럼 표정이 뚱해 보였다. 발신인 이름


‘강해인 부사장’에 이어,

[약속 지키세요.]

문자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화면이 꺼져 버렸다.

전원 버튼을 두세 번 꾹꾹 눌러도 방전된 휴대폰은 다시 켜지질 않았다. 갑자기 어지럼증이 가시고, 머리


안에 뜨듯한 혈기가 펑펑 돌았다. 대번에 뚜렷해진 정신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묵묵히 차를 끌고 병원에 도착했을 땐 회색 넥타이가 검정색이 되어 있었고 아주 약간 어지러웠다.


핏자국이 핸들을 타고 흘러내린 바람에 운전석 꼴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대로 병원 입구에 들어서자 간호사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응급실로 안내받아 걸으면서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했다. 당장 해아를 보러 병실로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간호사는 나를 간이침대 위에 앉혀
놓았다.

‘하긴….’

이 꼴을 하고 갔다가는 기껏 깬 사람이 다시 졸도하지 싶었다.

의사가 달려와 무슨 일이냐 묻기에, 적당히 추려 낸 말만 전해 주었다. 미친놈한테 베였으며, 경찰을


부를 필요는 없지만 치료 기록은 떼 달라고 요청했다. 찢어진 손날은 열두 바늘을 꿰매야 했다.

불투명한 밴드 밑으로 빨갛고 까맣게 보이는 꿰맨 자국을 보자니 기가 막혔다.

‘강일해는 뇌가 없나?’

오히려 내게 잘된 일이었다, 일방적인 폭행이 이제 쌍방이 되었으니. 지금쯤 그 댁 변호사의 골머리가


썩어 들어가겠지….

만에 하나 내 선에서 정리되지 않는다 해도 아버지가 가만있지 않으실 터였다. 겉으로야 매정해 보일


정도로 차분한 분이지만 그 속이 성화로 끓는 것을 나와 어머니는 안다. 강씨 집안에서 강해아의 취급이
어떠했건 그건 그 집안의 문제일 뿐이다. 천씨 집안에 검은 양이어도 좋을 식구는 없다.

열이 올라 끓는 듯하던 숨통이 이제야 트였다.

‘마음 같아선 해아 성까지 바꿨으면 싶은데….’


상상에 날개를 달며 느리게 움직이던 내 발걸음은 그러나, 병원 정문으로 통하는 주차장 앞에서 멈췄다.

원흉은 느닷없이 임건이었다.

“…….”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을 맞닥뜨린 탓에 내 기분은 진흙탕에 빠졌다. 피차 얼굴을 마주할 예정이 없었는지
그 또한 당황한 표정이었다. 백색 세단 앞에 선 그는 평상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전자 담배가 들린 채였다.

겉으로 보아 아직 안경 낀 얼굴을 누구에게 얻어맞진 않은 모양이니, 이 병원에 온 목적은 뻔했다.

‘내 남편을 보러 왔다고, 이 시간에….’

신경이 예민해진 와중에 그의 차량 루프 위에 놓인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불안을 진정시켜 달라느니


애먼 쪽지에 쓰였던 글귀가 저, 빌어먹을 꽃의 꽃말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백합도 아니고 장미도 아니고 ‘헬레보루스’. 내 평생에 연이 없는 꽃 이름까지 외웠으니 말 다 한


셈이다.

해아가 제 말마따나 ‘새끼 작가’이던 시절에,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앞두고 긴장하자 임건이 안겨 준
것도 헬레보루스 꽃다발이었다.

‘꽃이 대신 불안해해 줄 테니까 아무 걱정 말라고… 좋은 뜻에서 주셨던 거예요.’

내가 넌지시 물었을 때 해아는 그 일을 예쁜 추억인 양 말했었다. 그러나 내 귀에는 그 이야기가, 사회


초년생을 꼬드기는 몰염치한 늙다리의 개수작처럼 들렸다.

그를 좋은 어른이라고 믿어 ‘선생님’, ‘선생님’ 하며 따르는 스물두 살의 강해아를 상상하기만 해도,

‘양심 얼마에 팔았어?’

대거리가 와락 치밀었다.

내가 임건을 대놓고 관찰하는 동안, 그 역시 내 행색을 훑고 있었다. 비스듬히 선 나를 담는 그의 안경에


오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비쳤다.

“하….”

짧은 한숨을 쉬며 나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뻔뻔한 양반이 제 차 루프에 놓인 꽃다발을 대뜸 집어,


내게 건넸다.

“작가님께 대신 전해 주시겠습니까?”

터무니없는 부탁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화를 부추길 걸 알면서도 황당한 말을 하는 의도가 뭘까.

둘 중 하나였다. 진정시켜야 할 게 불안이 아니라 불알이든지, 이렇게라도 해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든지.

“좋아하시는 꽃이라 챙겨 왔는데, 직접 뵐 수는 없네요. 아직 깨지 않으셨다고 해서….”


쓴 침묵을 깨 보려 임건이 덧붙인 말에, 나는 침착해졌다. 해아라면 진작에 깨어난 지 오래였으므로.

누가 거짓말을 전했는지는 몰라도 강 회장 쪽 사람이겠지. 그렇다면 의중이 분명했다. 강해아가 붓을


꺾겠다고 선언하여 판도가 바뀌었으니, 이제 임건이라는 평론가도 그 옆에 붙여 놓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속이 아주 가벼워졌다.

“적당히 하고 돌아가시죠. 당신 꽃다발 전해 줄 손은 없으니까.”

한숨으로 말을 마치며 나는 쉽게 돌아섰다. 더 이상 해아에게 중요하지 않게 된 남자라면 내게도, 감정을


소비할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내 등 뒤로,

“작가님에게서 나를 뗄 순 없습니다.”

임건이 말했다. 거의 외침에 가까운 간절한 소리였다.

허튼소리가 심한 바람에 나는 발을 잡혔다.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며 돌아볼 적에, 그의 얼굴엔 영문 모를


화가 묻어 있었다. 볕 드는 정원에 서서 샴페인 잔을 들고 웃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강 작가님에게서… 나를 뗄 순 없다고요.”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가며 임건이 말했고,

“강해아한테선 뗄 수 있지.”

내 대답은 단순했다.

강해아 본인의 선언으로 그는 이제 화가가 아니다. 문외한인 나조차도 놀라게 하던 재능이 아깝기는
하지만, 해아가 선택한 은퇴에 일언반구 반박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런데 평론가라는 사람이 뭔데 그의 은퇴를 인정하지 않는 건지 의문이었다.

‘뭐라도 된 줄… 착각을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냐?’

가까이서 물끄러미 내려다볼 적에, 임건의 눈망울이 시커멓게 일렁거렸다.

“작가님은… 해아는, 결국 나를 찾을 겁니다.”

이내 정돈되지 못한 질투가 나를 반겼다.

“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결국은 날 찾아올 겁니다. 그 사람한텐 나밖에 없어요. 당신이 무서워져서
몸을 숨길 데가 필요해지면, 결국 나를….”

“입 닥쳐.”

더러운 욕설이 울컥 치밀었다.

“뱉으면 다 말인 줄 알아?”

화를 못 감추며 을러 놓자, 웅변하듯 지껄이던 입이 벌어진 채 얼어붙었다. 안경에 김이 서리도록 흥분한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흔들거렸다.
“뭐라고요?”

그러고는 오히려 반문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죠?”

혼란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나는 조용히 눈에 담았다. 멋대로 지껄여 놓고는 기억도 못 하는 꼴을 보자니
어금니가 꽉 악물렸다.

내가 아무리 개차반으로 군대도, 해아가 암만 겁에 질린대도, 나를 두고 임건을 찾아갈 리 없었다.


그런데 ‘전에도 그랬다’느니 헛소리를 하는 저의가 뭐란 말인가.

“예술이니 외설이니 평가하던 똑똑한 머리로 잘 생각해 봐.”

검지 끝으로 툭, 그의 귀에 걸린 안경다리를 튕겼다.

“지금 일방적으로 목매고.”

툭… 소리와 함께 안경이 콧대 위에서 삐뚤어졌고,

“…안달 난 게 누구인지.”

툭, 세게 튕긴 손가락에 임건의 턱이 움찔 움직이더니 맨얼굴이 됐다. 발치에 나동그라진 안경을 깔아


보면서도, 그는 고개만은 빳빳하게 추켜들었다.

“내가 원해서 헤어진 게 아닙니다.”

중얼거리는 놈에게 나는 가까이 다가섰다. 그것만으로도 눈높이 정리는 그만이었다.

“내가 원해서… 그래서 밀어 낸 게 아니라고요.”

“그건 해아도 알아.”

내가 알아챘는데 그 예민한 사람이 모를 리 없다. 벌써 깨닫고는 속으로 파묻었을 터였다.

“당신 입으로 적시한들 해아가 좋아할까?”

꽃다발까지 줘 가며 꼬실 때는 언제고 연애는 일주일 만에 끝내 버리는 ‘선생님’께서, 저와의 사랑보단


강 회장과의 계약을 중시했단 사실을….

“임 선생님.”

발을 뻗어, 나는 떨어진 안경을 지르밟았다. 구둣발 아래서 설탕 과자 부서지듯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해아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건 진심이 아니야. 당신 입에 제 입술을 박았대도 진심이 아니라고.”

내가 안다. 불리할 때면 몸부터 나가는 게 내 남편의 못된 습관인 것을. 나한테도 가끔 그러더라고, 입


좀 닥치라는 듯이.

간절하고 비굴한 그의 태도가 이 남자 눈에는 귀여웠을까? 내 눈에는 불쌍한… 그 발악이.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나? 같은 말을 두 번 하진 않겠다고.”

임건의 왼쪽 귓가로 내 손이 올라갔다. 애써 주먹을 말아 쥐며 나는 그의 귀를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

묵묵히 손을 거두고 물러설 적에, 두 발이 여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임건의 반응은 불안정했다. 멍하니 제 콧잔등을 쓸어 올리듯이 한 번, 건드릴 따름이었다. 안경을


뺏기고도 습관적으로 벌이는 동작이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내 협박에 질린 건지, 멍청한 실언이 부끄러워진 건지 알 수 없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대로 제 차 운전석에 오르더니, 군말 없이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나는 오래 보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시간을 뺏기고 감정을 소비했다는 게 불쾌할 따름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저, 해아를 보고 싶었다. 말간 얼굴로 일어나서는, 저는 괜찮다는 거짓말을 뻔뻔하게 들려줄 내 남편이
보고 싶었다.

병실 앞 복도는 응급실과 달리 고요했다. 나는 몹시 지쳐 버려서, 새벽이 주는 차분함에 위로받을


지경이었다. 긴 하루의 끝에 해아를 볼 생각에 내 기분도 느릿느릿 난기류에 진입했다.

그런데 해아보다도 먼저, 그의 병실 문 앞에 선 남자가 보였다.

‘또 누구야, 뭐 하는 새끼가 이 시간에….’

뻔뻔하게 주억거리던 임건 때문에 내 속은 뒤집힐 대로 뒤집혀 있었다. 세상 밖의 모든 게 불청객처럼


느껴져 인상을 찌푸렸다가,

“야, 천태림…. 너 그 피 뭐야?”

그 정체를 알고서는 맥이 빠졌다.

“여기 왜 있어, 네가?”

황당한 감정을 첨삭 없이 드러내자, 시은철의 얼굴이 딱 나만큼 구겨졌다. 한껏 화난 표정을 짓더니, 내


팔뚝을 잡고 해아가 있는 병실에서 멀리 떨어진 복도 끝까지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는 군말 없이 시은철을 따라 걸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해아를 살피러 온 녀석이 수상쩍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은 비상구 문 앞이었다. 오가는 이 없는 복도 구석으로 나를 밀어 넣으며,


은철이는 다짜고짜 잔소리부터 퍼부었다.

“야…. 네가 아직도 중학생인 줄 알아? 도대체 회사 대표로서 자각이 없으세요?”

누가 십년지기 아니랄까 봐, 녀석은 나를 잘 안다. 내가 다치고 온 것만 봐도, 나를 건드린 상대는 더


다쳤을 거라고 쉽게 유추해 낸다.

“천태림. 결혼하고서 너 변했어!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진지하게 몰아세우는 질문에,

“나다운 게 뭔데.”

대충 대꾸하자 시은철이 내 어깨를 쥐어박았다.

“웃겨? 너는 이 상황이 웃기냐?”

“아야.”

손날의 꿰맨 상처가 보이게끔 어깨를 아픈 척 감쌌다. 그제야 녀석도 입을 다물었다.

굳이 은철이의 걱정을 풀어 주자면 할 말이야 많았다. 상황이 어찌 되었건 옷에 묻은 건 내 피라든가,


그쪽에서도 찔리는 게 있으니 함부로 신고하진 못할 거라든가….

“은철아.”

그런데 피곤했다.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짧게 대꾸하자 시은철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말로 그어 놓은 선을 물리적으로 느끼기라도 한 듯한


동작이었다.

“…언제부터 네 문제가 그냥 네 문제가 됐냐. 옛날엔… 그게 우리 문제였는데.”

밋밋한 내 낯짝에서 시선을 떼어 내며 은철이가 중얼거렸다. 표정만 봐도,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게
도드라졌다. 하여간 서정적인 놈이다.

내심 한숨이 났다. 속이 곯아도 기색조차 않으시는 어느 도련님께서도, 나한테 좀 이래 주면 얼마나


좋을까.

“안 그래도 너한테 물어볼 게 있었는데.”

그가 내뺀 한 발짝을 내가 다시 채웠다. 가까이 몰아붙이듯 다가서며 고개 숙이자, 그렇잖아도 왕방울만


한 은철이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무조건 솔직하게 대답해.”

주먹으로 벽을 짚어 나는 그의 퇴로를 차단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앞으로 그와 나의 관계가 손바닥


뒤집듯 반전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뭐, 뭔데? 왜….”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은철이도 긴장한 기색이었다. 머뭇머뭇 굴려 대는 녀석의 눈동자와, 나는 애써


시선을 맞췄다.

“시은철. 너 솔직히….”

그리고 물었다.

“강해아 좋아하냐?”

“뭐?”
정수리 위를 밝히던 복도의 센서 등이 픽 소리를 내며 꺼졌다. 왼손을 들고 휘휘, 허공을 휘젓자 백열등
빛이 도로 환해졌다. 덕분에, 시은철의 떡 벌어진 입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아…니, 이….”

녀석은 의미 없이 입을 벌렸다가 다물길 반복하다가,

“이, 이 미친놈아!”

바락 욕부터 해 댔다.

“너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제자리에서 발을 굴러 가며 시은철이 외쳤다. ‘아니’라는 대답이 개운하게 나오질 않은 게 나로서는


미심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눈을 좁게 뜨고 내려다보자, 녀석이 그제야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이러면 이러는 대로 또 의심스럽다. 왜 이렇게 언성까지 높여 가며 강조하지?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

“진짜 아니냐?”

“진짜 아니야, 미친놈아.”

“그게 아니면, 왜 해아 일에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뭐, 예민? 내가 진짜 왜 이 지랄을 떠는데! 따지자면 이게 다, 네 페로몬 때문….”

분위기가 과격해지자 복도 멀찍이서, 간호사가 헛기침 소리를 들려주었다. 말소리를 낮춰 달란 작은


경고도 따라붙었다.

그제야 시은철의 언성이 줄어들었다.

“…됐고. 천태림. 너 무슨, 의부증 뭐 그런 거냐? 미친놈…, 걔 앞에서 내숭이나 떨지 마.”

혀를 쯧쯧 차며 읊조리는 말에 나는 기분이 삐딱해졌다. ‘걔’라느니 해아를 지칭하는 말에 거리감이


없다는 게 거슬렸다.

그 점을 짚어 주려 입을 열었다가,

“…….”

다시 조용히 다물었다. 그랬다간 정말로 의부증 환자로 취급받지 싶어서였다.

나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내가 의부증이건 의처증이건, 강해아 앞에서 내숭을 떨건 부채춤을


추건 말건, 그걸 시은철이 왜 신경 쓰느냔 말이다.

“내가 부탁해서 집에 몇 번 찾아간 건 그렇다고 쳐.”

저릿저릿한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누르면서, 내가 말했다.


“…해아가 집에 평론가 양반을 불렀다고 알파로 오해한 것까지도… 그래, 그렇다고 치자고.”

나는 아주 가까이 고개를 대고 관찰해 냈다. 팔짱을 꽉 낀 채 득의양양하던 시은철의 눈썹이,

“여기까진 그럼 왜 왔냐?”

꿈틀 감전된 뱀처럼 움직이는 것을.

“…신경 쓰이고 걱정돼서 온 게, 정말 아니라고?”

“…….”

시은철은 말이 없었다. 말재간이 좋아서는 주 7 일 막내 비서부터 각 부서 팀장들까지도 심심찮게


몰아붙이던 녀석이었다. 한 번도 할 말 잃고 침묵한 적 없던 녀석이, 지금은 입에 걸쇠를 달았다.

‘뭐야…. 왜 이래?’

도도하던 놈이 막상 잠잠해지자 당황스러웠다. 어색한 기류가 내 어깨에 닭살을 올려놓았다.

“너… 진짜 해아 안 좋아하는 거 맞지?”

마지막으로 확인받고픈 마음에 질문했다.

“…….”

“…….”

그런데 대답이 없다.

나는 너절한 주접으로 그를 몰아붙인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누가 십년지기 아니랄까 봐, 시은철이


나를 아는 만큼 나도 녀석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 비추는 저 얼굴을, 전에도 본 적 있었다.

중학교 2 학년 때던가. 피구 잘하는 3 학년 알파 누나가 매일같이 사다 주는 과자며 선물들을 죄 싫다고


내다 버리고 무시하더니, 정작 그 선배가 졸업한 날에는 종일 우울해하던, 그 표정.

지금 시은철의 얼굴에 정확히 그날의 그 표정이 떠 있었다, …늦게 제 감정을 깨달은 표정이.

‘…이게 아닌데.’

나는 빨리, 후련한 마음으로 해아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스민 바깥 공기가 뚝 끊긴 대화의 빈자리를 채웠다. 까칠해진 턱을 훑는


새벽바람을 간지럽게 느끼면서, 나는 시은철을 내려다봤다.

물끄러미 훑는 눈길을 느낀 듯,

“…안 좋아한다고.”

시은철이 얼렁뚱땅 말했다. 구겨진 눈썹이며 빨개진 귓불의 색도 수습하지 못하는 주제에 거짓말이었다.

“어, 그래…. 알겠어.”

떨떠름하니 한숨 쉬며 나는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래, 은철아. 네 말 믿는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며 나는 시은철의 어깨를 두 번 토닥거렸다.

“네가 내 남편을 좋아할 리 없지. 오해해서 미안하다.”

내심은,

‘괜히 심부름은 시켜서….’

복잡한 감정으로 질펀했다.

오메가라고 오메가에게 눈 맞지 말란 법은 없는데 내가 너무 방심했다. 말씨도 도란도란하니 다정한


해아가, 저 봐주러 찾아온 시은철에겐 또 얼마나 착하게 굴었을까. 그렇게 달래 주고 살펴 주고 하다
보면 마음이 생길 수밖에….

따져 보면 작금의 사태가, 순전히 은철이 잘못만도 아니었다.

‘앞으론 무조건 직접 챙겨야지. 아… 아니다, 아예 출장 갈 때 해아도 데려가야겠어.’

생각이 해아에게로 뻗치자 더는 은철이에겐 볼일이 없었다. 그대로 내 남편이 있는 병실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아! 어딜 가…, 미친놈아.”

시은철이 내 팔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말끔한 손가락이 굵은 팔 위를 미끄러져 셔츠를 꼬집고, 뒤로


세게 당겼다.

“겨우 일어난 네 남편 다시 기절시키고 싶냐? 강해아가 얼쑤 좋다 하시겠어? ‘태림 씨이, 꼬락서니가 왜


그 모양이에요? 어떡행…, 네에? 제 형을 존나게 패고 오셨다고요?’”

“…흉내 내지 마. 돌았냐?”

소름 돋는 성대모사에 내 말투가 거칠어졌다. 묘하게 비슷한 바람에 더 기분 나빴다.

잡힌 팔뚝을 털듯이 뿌리치자 시은철은 순순히 나를 놓아주었다.

대신에 그는 내 옷소매를 손가락질했다. 테두리부터 황갈색으로 변색되어 가는 피 얼룩이, 선명하게


팔꿈치까지 스며 있었다.

“소매까지 빡빡 씻고 들어가, 천태림. 멀쩡한 척 내숭 계속 떨고 싶으면.”

그대로 화장실 방향을 알려 주고는, 시은철이 물러났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천태림 대표님.”

과장된 태도로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는 놈을 나는 짧게 노려봤다.

“간호사님께 저얼대 저얼대로 방해하지 마시라고 전해 드릴게요.”

인사하는 말에 가시가 뾰족했다.


그리고 어두운 병실 중앙에 덩그러니 앉아 날 기다리는 강해아를 본 순간에는,

“…….”

커다란 안도감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털썩 주저앉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즐비한 선물에 둘러싸인 채 불우한 표정을 한 해아의 모습은 비관적인 사진작가의 작품 같았다. 편지며
꽃바구니, 포장된 상자들이 어둠 안에서도 은색으로 반짝이는데, 무엇 하나 뜯어 본 흔적이 없었다.

긴장 어린 얼굴로 해아는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 동작과 그 표정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린


뺨에 아픈 기색이 남고 환자복 밑으로 두드러진 깁스의 실루엣이 두둑한데, 나로서는 그를 안아 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는데… 마치 내가 외면할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간절하게 눈썹을 웅크리는 게.

나는 그에게로 느릿느릿 다가갔다. 의식적으로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가는, 그를 너무 세게 끌어안아


다치게 할 것만 같았다.

환자복의 짧은 칼라는 물론이며 무릎 위 이불마저 단정한 그에게, 나는 포옹으로 구김을 남겼다.

“태림 씨….”

내 셔츠의 물방울들을 닦아 주는 해아의 손길은 상냥했다.

“손이 왜 이렇게 차요. 어디 다녀왔어요? 비까지 맞고….”

핏자국이 남지 않게 세면대 물로 박박 씻어 낸 것을, 비를 맞은 줄로 착각한 눈치였다.

그가 나를 걱정하도록 나는 내버려 두었다.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실려 온 주제에 나를 안쓰럽게


살피도록 허락하고, 그의 동정을 마음껏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완전하고 안전한 집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집에 가고 싶어요….”

해아의 속삭임도 내 마음과 같았다.

“도진이도 보고 싶고… 우리 집….”

‘이것 봐.’

나는 흡족했다.

‘개부터 찾을 줄 알았어.’

걱정 많은 해아를 침대 한편에 길게 눕혔다. 남은 자리에 끼워 맞추듯 나 역시 모로 눕고는, 종일 그립던


얼굴을 들여다보고 전리품을 자랑하듯 목걸이도 돌려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해아는,

“좋아해요, 태림 씨.”

젖은 눈동자를 쉽게 비추었다.

“좋아해요….”

강해아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나의 해아는 나만이 알았다. 내 품 안에 안겨 애정을 고백하고 입술을


맞추는 강해아는, 오직 나만이 아는 내 사람이었다.
소유욕에 취해 나는 보람을 느꼈다. 얼얼한 손의 상처도 뒤늦게 밀려드는 빈혈도 내 기분을 해쳐 놓지
못했다.

“좋아해.”

그토록 듣고팠던 고백을 듣는 순간엔 하루의 피로가 싹 가셨고,

“…….”

길고도 거친 하루의 끝을 다듬어 주던 사람이 내 가슴을 더듬기 시작하자 혼이 쏙 빠지고야 말았다.

깁스 밑에 깔려 제멋대로 눌린 주사 버튼이 원흉이었다. 적어도 두세 번은 주사된 게 분명한 약 기운에,


못 참고 퍼부어 댄 내 페로몬까지 섞여 해아의 갈색 눈엔 초점이 없었다.

“…해아야, 하지 마.”

몽롱한 눈으로 그는 자꾸만 내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이를 세워 깨물어 대는 탓에 빗장뼈가 침으로


축축해지고 사타구니로 열이 몰렸다.

“그, 그만. 그만 만져.”

내가 허둥지둥하며 말리면 말릴수록,

“왜요?”

해아의 손길은 더욱 나빠졌다.

불쑥 따끈한 손이 내 바지 위에 닿았다. 더듬거리며 수색하는 듯하다 발기한 성기를 되는 대로 움켜쥐는


통에 등허리가 찌릿해졌다.

‘동…, 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죽을힘으로 참는 내가 웃긴지 해아가 피식 숨소리를 냈다. 서툰 손이 더욱 노골적으로 움직여 댔고,


성기는 눈치 없이 뜨끈하게 부풀었다.

‘나,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애국가를 외우며 나는 슬픈 생각을 하려 애썼다. 필사적으로 호출 벨을 두드리는데도 돌아오는 응답이


없었다.

‘시은철….’

저얼대 방해하지 말라고 전해 두겠다더니 허언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의료인한테 그딴 부탁을 해도 되는 거야?’

병동 간호사한테 일하지 말라고 요청해도 되는 거냐고… 여기 알파 죽겠는데.

손만 잡고 자자, 안 된다, 만지지 마라… 울고 싶은 기분으로 어르고 달랜 끝에 해아가 유혹을 멈췄다.


내 얼굴이 뻘겋게 익고 그는 바지가 반쯤 벗겨져 엉덩이가 슬쩍 보일 지경이었다.

“손….”

작은 소리로 뱉은 혼잣말을 끝으로,


“으… 음….”

해아는 까무룩 잠들었다. 턱턱 막히던 내 숨통에도 쉴 구멍이 트였다.

“…….”

발기한 물건을 식혀 놓기까지 한참의 시간과 자괴감이 소요됐다. 허리 밑을 적신 땀을 말리고 허탈한


한숨을 내쉰 뒤에야, 잠든 해아를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못살겠어, 너 때문에.”

내 팔을 베개 삼아 곯아떨어진 얼굴이 하얬다. 계곡물에 씻어 올린 듯 말간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자,

“집에… 가고 싶어요….”

제법 뚜렷한 잠꼬대가 새어 나왔다.

“우리 집에 가요….”

“…그래.”

조심조심, 꼬인 링거 줄을 정리하고 얇은 이불을 덮어 주자 해아의 표정도 편안해졌다. 큰 손으로


머리칼을 정리해 주자니, 그의 얼굴이 너무 작다고 생각됐다.

믿어지지 않았다, 이 조그만 머리통에 내가 모르는 세계가 들어 있고 매일같이 몹시 바쁘다는 게. 혼자서


나를 걱정하고 내 아버지 일을 생각하며 강일해를 쫓아갔다는 게. 그 끔찍한 가족들 틈바구니에서, 검은
양으로 살았으면서 하얗게 다정한 사람이라는 게….

나는 해아를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존경할 만한 아버지와 언제나 뒤를 봐주시는 어머니를 가진 내가,


무슨 수로 그의 세계를 이해할까. 그저, 그가 아주 강한 사람이라고 알면 그만이다.

그런 일을 겪고도 해아는 지금의 해아가 되었다. 그러니 해아는 강한 사람이다. 그를 때려눕힌


강일해보다도, 그것들을 견뎌 낸 해아가 천 배는 더 강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해아가 좋았다.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질 만큼….

그를 내 팔 안에 안을 때면, 내 어떤 행동이건 감정이건 보상받고 치료받는 느낌이 들 만큼.

“해아야.”

내 손을 움켜쥐고 색색 잠든 얼굴을 볼 적에는,

“네가 좀… 못됐으면 좋겠어.”

그의 이마를 만져 주며 나는 그렇게 소원했다.

참 착하고 맑다고, 천진난만하다고 생각되던 강해아가 나는 이제 싫었다. 그가 착한 동생이고 말 잘 듣는


아들이고 배려 깊은 남편인 것이 싫었다. 차라리 그가 이기적인 사람이길 나는 소망했다. 나에게만이라도
못된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나를 편하게 여겼으면, 제 것처럼 생각하며 마음대로 주물렀으면, 가끔은 고집을 부렸으면, 욕심도 내
주었으면… 내가 그러듯이 해아 너도 그랬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내 팔 안에 안길 때면, 지난날을 보상받고 치료받는 기분이 들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잠기운에 웃는 네가 그랬으면 좋겠다.

강일해 앞으로 접근 금지 명령을 따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내 손의 상처며 열두 바늘을 꿰맨 진단


기록까지야, 구태여 보여 줄 필요도 없었다. 제 아들이 다친 건수를 활용할 마음이 전혀 없는 장인어른
덕이었다.

강준일은, 과연 한성 그룹을 30 년간 받치고 선 회장다웠다. 좋게 말해 침착했고, 나쁘게 말해 감정이


없었다. 잘한 짓이 없다고는 하나 강일해도 제 자식인데, 코뼈가 뭉개지도록 내게 얻어맞은 것을 두고
조금도 속상해하질 않는 눈치여서 이상할 정도였다.

강준일 회장이 고분고분 내 부모님에게, 그리고 나에게 사과하는 것을 두고 어머니는 놀란 눈치였다.

“무슨 수라도 쓴 거니, 태림아?”

내 팔뚝을 꼬집으면서 묻는 말에 나는 고개만 내저었다.

“수를 쓰긴 뭘 씁니까, 해아가 저렇게 다쳤는데요.”

어깨를 으쓱이며 모르쇠로 일관하자 어머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참 의심하는 듯 내 얼굴을 쳐다보시기에,


나는 묵묵히 퇴원 짐 가방이나 챙겼다.

마지막으로 검사실에 불려 갔던 해아는 내 아버지가 끌어 주는 휠체어에, 몹시도 불편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앉은 채 돌아왔다.

세상 다정한 얼굴로 해아를 내려다보던 아버지와 내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

나는 그저 웃고는 말았다. 다가가서, 내 남편의 휠체어를 마저 끌어 주는 것으로 할 말들을 대신했다.

무슨 수를 썼느냐고 묻느냐면 솔직히, 두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창의력은 이 일을


해결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내게 그 수를 알려 준 사람이, 진작부터 강해아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알고 있다고만 전해 주십시오. 해아 발현율을 속여서 결혼시킨 것도, AOM 과의 제휴 관계가 아니라
정계 인맥을 보고 접근해 온 것도, 전부 다 알고 있다고.’

강해인 부사장에게 전화로 건넨 말은 그저 사실을 읊은 것에 불과했다. 착해 빠진 강해아가, 진작 알고도


방패로는 못 세운 이야기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강준일 회장의 바쁜 병문안을 구경하기에는 말이다.

아버지와 내게 분주히 변명을 늘어놓는 강준일 회장이, 제 막냇자식인 해아에게는 어떤 말을 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가족사에 대해 더는 무엇도 알고 싶지 않았다.

내 관심사는 오직 강해아, 그뿐이었다.


‘좋아서 한 결혼입니다. 계약 때문이 아니라, 강해아가 좋아서.’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갈팡질팡하며 지나간 한 계절이, 꼭 6 년은 되는 것 같았다.

내 평생에 강해아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를 지켜 줄 것이라고, 누구도 함부로 상처


입히거나 허튼수작으로 손대지 못하게 하겠노라고 다짐할 적에 쥔 주먹의 힘이 아직 풀리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굳었던 다짐이, 이렇게 큰 고난으로 돌아올 줄을 나는 몰랐었다.

장기를 깔아뭉갤 기세로 내 배 위에 올라탄 강해아의 주먹에 얻어맞고,

‘와…, 제법 아프네.’

화난 사람처럼 식식거리다가 혼자 눈물까지 뚝뚝 흘리는 얼굴을 올려다볼 때는… 그를 다치게 하지 않기가,


나는 죽도록 힘겨웠다.

‘상이 다 뭐라고.’

기술 혁신이고 나발이고… 그 상이, 시상식이, 파티가 문제였다.

‘…그냥 나가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할딱할딱 더운 숨을 쉬며 우는 해아의 무릎을, 나는 느릿느릿 어루만졌다. 제 열기를 못 버티고 감정을


못 이겨 흐느끼는 얼굴을 보자니 기분이 묘했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진짜 강해아의
모습이라고 생각됐다. 사회적인 체면을 전부 떼어 놓고 발가벗겨… 본능만을 남긴 진짜 모습이라고.

3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강해아는 세상에서 가장 번듯한 남편이었다. 시상식과 파티의 밤 내내 그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 옆자리에 머물렀다.

탄탄한 몸의 맵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맞춤 정장은 얇은 소재에 빛깔이 화사했다. 그 바람에, 충분히
잘생긴 사람에게 부드럽고 천진난만한 분위기까지 더해졌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강해아’를 알아보고
힐끔거리며 지나갔다가, 반드시 다시 한번 돌아와 그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나 참, 오늘 너무 멋있는 거 아니에요?”

내게로 어깨를 기울이며 해아가 소곤거렸다. 겸손한 사람이 어쩐 일로 자찬을 한다 싶어 흐뭇했다가,

“사람들이 태림 씨만 쳐다보네. 우리 대표님 얼굴 닳겠다.”

“…….”

헛소리로 갈무리당했다.

해아의 진면목은 매력적인 오메가라는 외형에만 있지 않았다. 나조차도 모르는 사업가 이야기를 술술 읊고
알려 주는 방식으로, 그는 든든한 날개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AOM 과 내 이름을 걸고 국내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을 얻고도 나는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숱하게 다가오는 사업가 양반들을 만나고 얼굴이며 이름을 익히는 와중에도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속에서 나쁜 예감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저는 괜찮다며 웃는 해아의 낯을 보자니 그랬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시상식도 끝났고 볼 장 다 봤으니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평생 침대와 친해 본 적이


없건만 이틀 즈음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와 이부자리나 뭉개고팠다.

에어컨 바람 때문에 춥다며 파티장 안팎으로 팔랑팔랑 돌아다니는 해아를 찾아다닐 적엔 내 속이


가관이었다. 가능하다면 목줄이라도 손에 쥐고픈 심정이었다. 내 오른손을 기준으로 반경 2 미터 밖으로
벗어날 수 없게 그의 목에 줄을 채우는 상상을 할 적엔, 내 성격이 문제인 건지 해아가 유독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지 모호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가 기회였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강해아를 납치라도 해서
집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그에게 첫 히트 사이클이 온 줄을 알았더라면, 발정난 개가 되어 내게로 달려들 줄을 알았더라면, …내 배


위에 앉아 자위하며 나를 고문시킬 줄을 알았더라면.

열에 들뜬 해아를 뒷좌석에 싣고 귀가하면서, 오건민 기사는 연신 백미러를 살피며 걱정 어린 표정을


보였다.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우선 자택 안으로 모시게끔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내와 쌍방 각인에 노팅까지 마친 오 기사였다. 그는 해아의 체향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음으로써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남자였다. 하물며 지난달을 끝으로 강준일 회장과의 계약은 퇴직으로 마무리
짓고, 내 하청으로 새로 고용까지 마친 상태였다.

“…아니. 필요 없고 당장 퇴근하세요.”

문제는 나였다.

“네? 대표님?”

누가 됐건 간에 발정 난 강해아 옆에 나 이외의 알파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차에서 내리세요. 부탁이니까, 지금 당장.”

바락바락 치미는 신경질이 느껴졌는지, 오 기사가 급히 운전석을 떠났다. 그를 거의 내치다시피 몰아낼


적엔 내 안의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서, 미안한 감정은 차치하고 해아를 독점하는 것만이 우선이었다.

그래도 참을 걸 그랬다. 해아가 이렇게, 힘이 좋은 데다 고집마저 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를


제압하고 약을 먹이는 일이 쉬울 거라고 착각한 게 죄였다.

그 죗값을 치르고자, 나는 침대 위에 꼼짝없이 드러누운 채 좀비가 된 해아를 만나야 했다.

“으으응….”

달뜬 신음을 흘리며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목빗근을 잘근잘근 깨물고 핥아 올리는 앞니와
혓바닥의 감촉이, 시시각각 아팠다가 부드러웠다가 하며 내 혼을 쥐어뜯었다. 흉통 위에 맞닿는 가슴은
콩닥콩닥 움직거리고, 발갛게 흥분한 성기는 프리컴을 줄줄 흘리는 채였다. 체향이며 페로몬이
넘쳐흐르는 통에 정신이 혼미했다. 그에게 닿는 피부가 뜨겁다 못해 따갑게 느껴졌다. 학학거리는 숨결이
너무 달아서 들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무엇보다도,

“흑, 응…, 제발… 태림 씨…, 해 줘요, 응?”

의식 없는 소리임을 알면서도 저 유혹에, 모르는 척 넘어가고 싶은 내 양심이 힘들었다.

‘제압하기 쉽긴 뭐가 쉬워.’

강해아를 제압하기는커녕 나는 그에게 완전히 제압당해 버렸다. 내가 무슨 수로 해아를 이긴단 말인가,


울면서 달려드는 그를 한 번 밀치는 것조차 어려웠다.

붕대를 푼 지 보름도 채 안 된 배에,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피가 밖으로 흐를 것처럼 끔찍한 멍이 들어


있었다. 거무죽죽하고 푸르스름한, 썩은 복숭아 빛깔 멍을 보다가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가 절로 악물렸다.

“하자아….”

훌쩍훌쩍 우는 소리를 내며 해아가 상체를 움직거렸다. 느릿하게 앞뒤로 흔들리는 허리가 은근히 유연했다.
내 가슴 위를 집착적으로 만지작거리는 손도, 녹진녹진 애정이 어린 눈동자도 온통 나를 뒤흔들었다.

진작 발기한 내 성기 위에 제 엉덩이를 비벼 대면서,

“해요…, 한 번만.”

그가 어눌한 목소리를 냈다.

핏대 오른 이마를 찡그리면서 나는 웃었다.

“그래, 그래….”

애써 그를 달래는 내 음성에도 흥분이 섞였다. 솔직히 말해 죽을 맛이었다. 당장 그가 말하는 소원대로


그를 안고 싶었다. 다가올 알파를 기대하느라 흥건해진 그의 엉덩이에 입 맞추고, 뒷구멍을 움켜쥐어
벌려 보고, 내 것을 쑤셔 넣고 싶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가 원하는 건 도리 없이 노팅인데… 내가


우성 알파라는 게, 난생처음 문제였다.

사전적 의미로 ‘노팅’이란 ‘사정 시 상대의 임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알파의 성기가 변이하는 성적
결합 행위’인데, 속된 말로 ‘안에 싸면 좆이 커진다’는 뜻이었다.

다수의 베타 남성들이 알파를 선망, 혹은 질투하는 이유도 노팅에 있었다. 자기 가슴 크기에 집착하는
여자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지만, 자기 좆 크기에 집착하는 남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솔직히 말해 제
성기 길이를 자로 재 보지 않은 남자는 지구상에 없을 터였다. 그것도 발기 전후 두 가지 종류로.

그런데 ‘알파는 노팅을 하면 발기 때보다 더 커진다’, ‘노팅 시 평소 성감의 열 배를 느낀다’니, 고추


달린 놈들에겐 판타지일 수밖에 없다.

당연스럽게도, 대다수 알파들이 노팅을 좋아했다. 오죽하면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고
노래를 불러 댈까. 성적 쾌감만을 위해 강제 노팅을 일삼는 놈들도 더러 있었다.

…그 바람에 ‘나라에서 제한하는 마약’이 되어 버린 게 10 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상대의 허락 없이


노팅하는 행위는 이제 범법이다.
그 모든 게 여지껏,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내가 우성 알파이기 때문이었고, 개중에서도 극우성으로
분류되는 놈인 탓이었다.

극우성 알파에게 노팅되는 순간 오메가에게 강제 각인은 당연한 수순이다. 베타도 오메가로 발현하게
만든다는 잘못된 소문까지 돌 정도이고, 자칫 잘못하다간 복상사시킬 수도 있다. 뭐… 오메가 입장에선
깔려 죽는 거니 복하사라고 해야 하나.

우성 알파의 성기는 노팅 시 ‘평소보다 좀 커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통상 두 배 크기로 부풀었고 사정


후에도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상대의 생식기에서 빠지지 않았다.

세간에 떠도는, 우성 알파와의 노팅 경험담은 하나같이 멀쩡하질 못했다. 알파의 흥분이 식질 않아서
삽입한 채 병원에 실려 가는 일도 가끔 있었고, 오메가가 억지로 도망치려다 다쳐서 피를 보는 일도
다반사였다.

“태림 씨….”

두 손을 올려, 나는 할딱대는 해아의 허리를 감쌌다. 그러자 해아가 웃었다. 저를 안아 주는 줄로 착각한


눈치였다.

손을 들어 나는 그의 배꼽 위를 덮어 보았다. 그러고는 눈대중했다, 이대로 삽입하면 내 살덩이가, 그의


배를 얼마나 불릴지를….

‘…안 되겠는데.’

보름 전까지만 해도 병원 신세를 진 데다 당장은 제정신도 아닌 해아였다. 그를 울리지도, 다치지도,


아프게 하지도 않고 노팅할 자신이 내겐 없었다. 노팅만 생략하고 가볍게 섹스를 할 자신도, 내겐 없었다.

내 갈등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아가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들뜬 숨소리가 ‘흐응’, ‘흐응’ 바람 새는


듯 들렸다. 붓 끝을 쥐던 하얀 손이 내 허리에 닿았다. 갈비뼈 위 근육의 윤곽을 찬찬히 문지르고, 배
밑까지 천천히 흘러내려 가더니, 이내 성기를 움켜쥔다.

“…….”

그제야 지나간 아침의 미스터리가 풀렸다. 그가 내 다리 사이에 앉아 있던 아침, 멀건 액을 뒤집어쓴


꼴로 얼굴 붉히던 그 시간의 정체가 내 눈앞에 놓였다.

뜨끈한 침을 삼키는 소리가 꿀꺽… 경박할 지경으로 크게 울렸다.

해아는 아주 천천히 내 무릎 사이로 기어 내려갔다. 그나마 ‘태림 씨’ 하며 말을 하기에 정신이 조금은


있는 걸까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제정신이라면, 내가 아는 강해아는 자진해서 입술을 벌리고 내
허벅다리에 고개를 파묻을 사람이 아니었다.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 나는 그를 구경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말리고 떼어 내야 하는데, 말이야


쉽지… 내 도덕성은 아무래도 후졌다. 설렌 얼굴로 혀를 내미는 강해아를 막을 양반은 결코 되질 못했다.

작고 더운 입에 들어가자 묵직한 살덩이가 대번에 단단해졌다.

“으으음….”

좆을 빨리는 건 난데 왜 신음은 그가 내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후….”

숨을 길게 내쉬며 나는 눈가를 찌푸렸다. 귀두를 핥는 혀의 감촉에 척추가 곤두서고, 그의 코로 새어


나온 숨결의 바람조차 나를 움찔대게 했다.

해아는 나를 기분 좋게, 그러면서도 멍청하게 만들었다. 핏줄을 세우고 꺼덕거리는 성기로 온 감각이
쏠릴수록 지능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입 안 가득 성기 끝을 머금고는, 볼우물이 패도록 빨아 대는
얼굴이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찌르르 솟구치는 감각은 현실적인데 눈앞의 광경은 나를 얼떨떨하게 했다.

“해아야.”

“음, 응….”

허리 근육이 경련하듯 꿈틀 움직였다.

“하아…, 해아야.”

껄떡거리며 괴물처럼 핏줄을 세우는 내 것을 그는 꼼꼼히도 핥고 빨았다. 듣기 좋은 말만 뱉던 입술이


동그랗게 말리고 ‘쪽’ 소리를 내자 그에게 잡아먹히는 기분이었다.

잠깐 새 부어오른 그의 입술이 프리컴으로 젖은 채 떨어졌다. 헉헉거리며 참았던 숨을 내쉬면서, 해아는


벌떡 선 내 것에 제 뺨을 기댔다. 핏줄을 울퉁불퉁 세운, 검붉은 좆에 얼마 없는 그의 볼살이 눌렸다.
거의 황홀해 보이기까지 하는 해아의 얼굴을 나는 그저 바라만 봤다. 대놓고 내 체향을 킁킁 맡으며
흐르는 액을 핥을 적에, 그는 내가 알던 강해아가 아니었다.

이내 그가 다시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몸짓에 달뜬 흥분이


가득했다. 그대로, 통증이 일 정도로 발기한 내 성기를 깔고 앉는 바람에 나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묵직한 체중과 탄탄한 피부가 주는 기분 좋은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더운 숨을 참았다가 내쉬는데, 멍하니 입을 벌린 해아가 올려다보였다. 애써 웃어 주자 그도 나를 따라


입꼬리를 올린다.

나는 축축하게 젖은 그의 것을 움켜쥐었다.

“아!”

돌아오는 반응은 거세고도 재빨랐다. 허리를 쭉 뻗고 할딱거리며, 그는 자진해서 몸을 움직여 댔다.


손바닥으로 감싼 성기가 앞뒤로 움직거리며 자극을 갈구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나는 손을 움직여 주었다. 축축한 액이 묻어나는 성기를 만져 주기를 한참, 더운 신음


끝에 그가 허벅지를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나 사정까지는 가질 못했다. 내 배 위에 도로 주저앉아, 서러운 숨을 길게 내쉴 뿐이었다.

‘열성….’

알파의 삽입 없이 사정하지 못하는 건 열성 오메가가 보이는 흔한 히트 사이클 증세였다. 제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해아는 울음소리를 흘려 댔다. 힘들 정도로 흥분될 텐데, 사정하지 못해 낑낑대는
모습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아픈 원인도 모르는 채 그는 내 손을 움켜쥐고는 제 가슴에, 배에, 아래에 대며 만져 달라고 애원해 댔다.


마른침을 넘기며 나는 그의 것을 쓸어 주었다. 진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성기 끝에서 말간 쿠퍼액만
찔끔찔끔 묻어 나왔다.

“윽, 읏….”

그래도 앓는 신음만 흘릴 뿐, 애무로는 그의 열을 풀어 줄 수 없었다. 다만 긴장이 풀리게끔, 약을 찾아


먹일 타이밍을 찾을 수는 있었다.

“괜찮아, 해아야.”

달래듯이 속닥거리며 나는 한 손으로 그의 것을 움켜쥐었다. 힘주어 만졌다가 풀어 주기를 반복할 때마다,

“윽! …읏, 흐으….”

앓는 듯한 신음을 들을 수 있었다.

남은 한 손으로는 천천히 해아의 허리를 만졌다. 느리게 허벅지로 손을 옮겼다가, 무릎 끝을 둥글게


어루만지다가, 이내 그의 어깨를 쥐고 뒤로 밀쳤다.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우며 해아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거칠게 가슴팍을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면서,


배를 보인 채 눈만 끔벅였다. 벌어진 허벅다리 밑으로 체액으로 축축해진 하얀 엉덩이가 보였다.

“…….”

그 바람에 한눈이 팔려서는, 찾으려던 약도 잊고 잠시 감상해야 했다.

“…금방 괜찮아질 거야.”

허리 숙여,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그가 내 입술을 살짝 핥았다. 작은 동작에 내 흉통엔 불이 났다. 초점


없이 흥분으로 찬 눈이 나를 담았고, 귀하고 고운 육신이 나를 원했다. 느릿느릿, 좌우로 벌어지는 무릎
사이로 나는 천천히 자리 잡았다.

“으응, 빨리….”

독촉하려는 것처럼 해아가 누운 채로 허리를 들썩거렸다.

평소 같으면 머리에 총구가 겨눠진대도 하지 않을 짓을 자진해서 벌이는 그가 귀여웠다. 옷을 발가벗고


이성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그래, 그래… 착해. 착하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만져 주고 벌어진 입술 위에 내 입술을 뭉개듯 문질렀다. 작은 감각들을 만끽하려는


사람처럼 해아는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얌전해진 그의 뺨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고는, 나는
협탁으로 팔을 뻗었다.

안정제는 알파냐, 오메가냐에 따라 성분이 천차만별이라지만 억제제는, 다행스럽게도 공동 복용이


가능했다. 내게 맞는 약이라면 해아에게는, 절반만 투여해도 효과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여유 있게 주사 가방을 꺼내는 순간,

“윽.”

거친 주먹이 내 뺨을 쳤다. 볼을 맞은 아픔보다도, 강해아가 나를 쳤다는 놀람이 컸다. 억제제가 든


주사가 고스란히 바닥을 나뒹굴고, 열로 얼룩진 해아의 얼굴이 보였다. 배신이라도 당한 듯 화난
표정이었다.

“헉, 헉….”

제 분을 못 이겨 그가 내 어깨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가슴 위를 세게 깨물었다.

“악….”
비명을 흘리며 나는 거의 펄쩍 뛰었다. 팔을 뻗어 그를 밀쳐 내려다가, 두 번째 같은 자리를 깨무는
입질에 신음했다. 가슴팍 근육 위에 세게 박힌 잇자국이 남았다. 해아는 그 자국 위를 할짝할짝 핥고
빨아 댔다. 두 다리는 내 허리를, 코알라처럼 꽉 휘감은 채였다.

그가 체중을 실어 깔아뭉개자 내 몸은 절로 뒤로 넘어갔다. 침대 헤드에 정수리를 부딪치며 나는 벌러덩


눕혀졌고, 해아의 두 팔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문장을 꾸려 낼 정신도
없는 듯이 보였다.

헐떡거리며 달려드는 해아를 억지로 떼어 내려는 시도가 몇 차례, 죽어도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올라타는 몸짓에 부딪쳤다. 나는 그의 손톱에 등과 팔뚝을 죄 긁혔고, 각인한 알파가 왜 저를 거부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해아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됐다.

“흑, 윽….”

흐느끼며 안겨 드는 그의 뒷머리를 손으로 감싸 주었다. 내 품 안으로 파고들고, 또 파고들면서 그는


섧게 울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그를 안으면서는,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지?’

진이 빠져 나마저 멍해졌다.

“해아야, 잠시… 약…부터.”

중얼거리는 내 몸 위로 올라탄 해아의 체중이 묵직했다. 내 이마에 이마를, 코끝에 코끝을 대고 그가


숨을 달싹거렸다.

“천태림….”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좋아….”

들인 힘 없이 내 기운을 앗아가 버렸다.

“좋아해.”

마침내 보드라운 입술이 내 입을 덮었다. 놀라 숨을 들이쉰 순간 달콤한 체향이 폐를 가득 채웠고,


해아는 자세를 고쳐 안겨 들었다. 발기한 내 것을 쥐고는 억지로 제 뒤에 대고, 끝부터 누르듯 쑤셔 넣은
것이었다.

“헉, 윽….”

절로 눈이 감기고 입술이 벌어졌다. 귀두부터 기둥 반절까지 꾸역꾸역, 뜨겁고 좁은 근육이 우물대는


감각이 저릿저릿 머리를 점령했다.

“아, 아….”

작은 신음을 흘리며 해아가 느릿느릿 내려앉았다. 꽉 조이는 자극에 성기가 끊어질 것처럼 아렸다. 터져
나오는 체향에 숨이 가빠, 목과 아랫도리를 동시에 죄는 느낌이었다.

“으, 으응…, 흐응….”

천천히 위로, 아래로 움직이는 해아의 동작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팽팽하게 부푼 내 것에 비해 그는


엉덩이가 작은 편이었고, 성기를 전부 삽입하기는커녕 긴 흥분에 지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두어 번
꿈질꿈질 허리를 흔드는 듯하다가,

“흑….”

목의 힘줄을 세우며 줄줄 토정하기에 이르렀다.

내 배와 가슴에 튀도록 흰 정액을 싸 대는 그를, 나는 멍하니 쳐다봤다. 황당할 지경으로 짧고 엉성한


겁탈인데 이상하게도, 그 점이 나를 흥분시켰다. 이번에, 남의 성기에 고개를 처박고 싶은 이는 나였다.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그대로 벌떡 상체를 일으키자 해아의 몸이 발라당 뒤로 넘어갔다. 마른 등이 시트 위에 닿고 두 발이


허공에 떴다. 와중에도 좁은 구멍에 박아 넣은 내 물건은 빠지질 않고 도리어 깊이 들어갔다.

학, 학… 더운 숨을 뱉으며 그가 시트를 움켜쥐고 구겨 댔다. 이리저리 발을 굴렀지만 의미 없는


반항이었다.

“흑, 흐윽…, 읏….”

이내 움찔움찔 근육을 조이며 해아가 허리를 들썩거렸다. 마른 배가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모습을


노려보다가, 나는 그를 끌어안고는 몸을 처박다시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액이 애매하게 마른 탓에
끈적해진 접합부에서 질척질척 소리가 났다.

“으, 윽…, 응… 아, 아!”

자지러지는 신음성이 귓가에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는 내 등과 어깨를 긁어 댔고 나는 그를 구겨 버릴


듯이 세게 끌어안았다.

“앗, 아, 흑…, 아, …아!”

“헉…, 헉, 해아…야.”

잇새로 절로 욕이 새어 나갔다. 좋았다, 미치게… 그의 안에 사정하고 노팅하고 싶었다. 여린 배가


터지도록 성기를 부풀리고 그대로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나 없이는 살 수도 없게 하고 싶었다. 그러다
죽인다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그는 영원히 내 오메가로 남을 테니까.

“이, 런 씨발….”

어금니가 아플 정도로 이를 꽉 악물었다. 겨우 붙든 정신이 ‘미친 새끼’, 하고 나 자신을 욕했다.

“뭘, 도대체….”

더운 숨을 내쉬며 나는 해아의 어깨에 이마를 찧었다. 갑자기 박치기를 당한 해아가 얼떨떨하니 입을


벙긋거렸다. 그는 천진한데 나는 괴물 같았다.

꿈틀꿈틀 온몸의 근육이 충동과 이성 사이에서 요동쳤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된다.

절대로 노팅은 안 될 일이었다. 정신이 온전찮고 몸 상태도 나쁜 해아에게…


‘다치게 하면 안 돼.’

그럴 수는 없었다. 노팅 후에는 본능적으로 관계의 성격이 변한다는데 그것 또한 달갑지 못한 일이었다.

‘…어떻게 얻어 낸 마음인데.’

차라리 각인을 한다면 좋을 텐데. 그런 열망이 불쑥 샘솟았다. 쌍방 각인을 했더라면 암만 히트 사이클이


왔다고 한들 해아가 이처럼 절박하진 않았으리라. 그는 불안에 떨고 있었고 모든 원흉은 나였다.
오메가를 쉽게 각인시켜 놓고는 모르쇠 하는, 빌어먹을 우성 알파가 나였다.

마음으로는 무진 간절하게, 나도 해아에게 각인하고 싶다. 그가 한 번의 관계 만에 내게 인생을 저당


잡혔듯이… 나도 강해아에게 손쉽게 묶이고 싶다. 강해아의 알파가 되고 싶고 평생 내 오메가도
강해아뿐이기를 원한다. 이렇게나 그를 원하는데, 눈물 나게 좋아하는데, 아무리 형질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내, 빌어먹을 영혼이 왜 그에게 묶이지를 않는 건지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달리기를 마친 사람처럼 뜨거운 숨이 ‘후욱’, ‘후욱’ 코 밖으로 빠져나갔다. 해아는 마약 찾는 개처럼


내가 뱉은 숨까지 들이마시려 들었다. 그의 뒤에 쑤셔 넣은 성기를 억지로 빼내려는데, 해아의 다리 두
짝이 내 허리에 휘감겼다.

“…….”

말 없는 싸움이 다시금 시작됐다. 무릎을 쥐고 풀어내면 해아는 다시 내 가슴에 안기고, 향을 뿌려 대고


신음을 질러 댔다. 좁은 뒤의 근육이 우물우물 내 것을 물고 삼키는 듯했다. 찌릿한 흥분에 이성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안…, 안 돼.”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싸우기를 연거푸 했다. 몸싸움은 사실상 일방 폭행에 가까웠다. 껄떡거리는 남성이
커지기 전에 억지로 몸을 떼어 내자 해아가 나를, 죽도록 치고 꼬집고 긁어 댔다. 지쳐 침대 위에
나가떨어지면 배 위에 올라타고, 억지로 밀어 내어 눕혔다 싶으면 제 살을 내 몸에 붙여 댔다.

“해아야, 그만…!”

퍽퍽 소리가 나게 내 어깨며 얼굴을 가리지 않고 쳐 댈 땐 지랄 맞다는 생각까지 절로 드는데, 품 안으로


파고드는 몸짓은 또 따끈하고 보드라웠다. 내 가슴 중앙에 이마를 쿵 붙이고는 칭얼댈 적엔, 머리칼에서
풍기는 향기조차 기분 좋았다. 산 채로 입에 넣고 삼켜 버리고 싶었다.

“해아야.”

“으응….”

“해아야….”

“응.”

가만히 머리를 만져 주자 그도 강아지처럼 내게 기대 왔다.

“…….”

힘으로 제압하기를 포기하고 나는 수를 썼다. 얌전해진 그의 사랑스러운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


문지르고, 방심한 입술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다.

“흐응….”
기분 좋은 신음을 내며 해아가 입을 벌리자마자 그의 잇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올라타다시피
덮치자 내 몸 아래서 분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뺨을 쳐 대는 손이 매서웠다.

철썩 소리가 나도록 나를 때리고 손가락을 씹어 대는 것을 무시하면서, 남는 손을 뻗어 다시 서랍을


뒤졌다. 주사를 놓기는 진작 포기했지만, 물약이라면 먹일 수 있지 싶었다. 뚜껑을 이로 돌려 열고 갈색
약병을 보여 주자, 해아가 울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

“안… 돼, 그…러지 마요…. 싫어….”

‘아, 진짜 돌겠네.’

흐느끼며 우는 얼굴을 보니 또 내가 악당 같았다.

“미안. 미안해…. 싫은 거 알아.”

“싫어….”

쩔쩔매며 달래는 말도 절로 나왔다.

“그래도 한 입만…, 한 모금만 삼키자, 응?”

버둥거리는 그를 짓누르다가 힘이 빠져 놓치길 여러 차례 했다. 해아는 안간힘을 썼고 나는 그를 차마


강하게 진압하지 못했다.

결국 두 팔의 근육이 아플 정도로 팽팽해지고 내 숨마저 거칠어졌다. 내 허리에 두 다리를 칭칭 감은 채


해아가 시트 위에 짓눌렸다. 식식거리며 분한 숨을 쉬고, 뜨거운 눈물을 삐질삐질 흘려 댔다.

눈물 번진 얼굴이 무한정 서러워 보였다.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약병을 쥔 손은 뺨으로 향했다.
약을 좀 먹이려 했을 뿐인데 해아는 두 눈을 움찔대더니 꽉 감아 버렸다. 흐느끼던 입술이 닫히고 턱에는
호두 무늬가 생겼다.

“자, 잘…못, 잘못했어요….”

비교적 또박또박, 그가 말을 흘렸다.

“나, 난 정말… 모, 몰랐어요…, 때, 때리지 마…. 화…내지 마세요….”

정신없이 애원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단숨에 손에서 힘이 빠지고 온몸이 느슨해졌다.

여태껏 이해하기 어렵던 해아의 모습들은 모두, 강일해가 원인이었다고 생각했다. 맞고 자란 기억 때문에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내 손길을 피하고 눈짓을 외면하고 이따금,

‘때리지 마요….’

정신없이 애원하는 원흉은 모두 강일해라고.

그런데…
“태림 씨….”

너는 왜 내 이름을 부르지?

혼란스러워 멈춘 내 두 뺨을, 그의 손이 와락 갈퀴처럼 움켜쥐었다. 귀를 찢어 버릴 기세로 꽉 쥐어


당기고는 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릿한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사적으로 주먹이 꽉 말렸다.

“윽…!”

그가 짓씹다시피 하던 내 입술을 놓아주더니, 이내 뺨을 핥고 빨기 시작했다. 입 안에만 머무르던 키스를


뺨에, 턱에, 그리고 온몸에 퍼붓는 식이었다. 잡아먹히기라도 하는 기분에 나는 피부가 달아올랐고
해아는, 달뜬 숨을 내쉬며 내 어깨에 이를 박았다.

“그만….”

어깨 살을 뜯어 먹을 기세로 깨무는 해아의 뒷머리를, 나는 그대로 잡고 눌렀다. 밀어 내는 대신에


오히려 더 씹으라는 듯 품 안으로 눌러 주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상처 난 어깨 위를 핥기
시작했다.

발정 난 짐승 같은 해아의 목을 나는 한 손으로 낚아채듯 쥐었다. 그대로 시트 위로 내리누르는데 온몸에


더운 땀이 흘렀다. 힘준 손을 휘두르자마자 그가, 너무 쉽게 나자빠진 탓이었다.

“컥….”

밭은 기침을 하며 해아가 온몸을 비틀었다. 짓눌린 건 해아인데 벌벌 떠는 쪽은 그의 목을 쥔 나였다.

‘왜… 이렇게 약해.’

겁이 났다. 그가 나를 때리고, 긁고, 깨물고 곤죽으로 패 놓는 건 괜찮았지만, 내 손길에 그가 다치는 건


무서웠다. 나로 하여금 그가 너무 쉽게 지배당하고 여차하면 죽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끔찍했다.

“미안해.”

공포감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억지로 손에 힘을 줬다.

“미안해…, 해아야. 정말 미안해.”

“흐…, 흑….”

“제발 울지 마. 네가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그대로 그의 턱을 쥐고 벌리자, 눈물범벅이 된 뺨이 눌리고 입술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열렸다. 훌쩍훌쩍


기침하며 우는 그의 잇새로 분홍색 억제제를 들이부었다.

그대로 그의 입을 닫고, 입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제발…. 한 모금만 삼키자.”

싫다고, 해아가 다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러트가 온 알파이건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이건 억제제를


강제로 주입하기란 문자 그대로 고역이었다.

“해아야, 제발… 부탁이니까….”

온 힘을 다해 휘둘러 대는 그의 주먹에 턱과 어깨, 귀를 맞아 가며 나는 버텼다.


“삼켜.”

그대로 몇 초인지 몇 분인지 모를 시간 동안 해아는 내 목을 졸라 댔다. 이마 위로 핏줄이 오르고 목젖이


꽉 눌려도 나는 숨을 참고 버텼다. 제풀에 지쳐 그는 금세 나가떨어졌다.

손날 위로 더운 콧김만 내뿜는가 싶더니, 그의 구겨졌던 눈썹이 서서히 펴졌다. 갈색 눈은 휘둥그레졌다.


울음을 멈추고 멍하니 나를 보는 듯하다가, 재차 눈물을 쏟아 내며 밀치기 시작했다.

내 손바닥 밑에서 뭉개진 발음으로 그가, ‘태림 씨…’ 하고 날 부른 것도 같았다. 나는 퍼뜩 손을


치웠고, 그는 거의 즉시 침대 밖으로 기어가더니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놀란 나머지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퍽 소리가 나게 바닥에 나뒹굴더니, 해아는 멍든 배를 감싸 안고


끙끙거렸다.

이내,

“왜….”

그가 울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눈동자에 이제야 이성이 비쳤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해아는 내 마음을


찢어 놓았다. 당혹감에, 식은땀이 났다.

“해아야, 아니야.”

나는 그를 쫓아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갔다. 반쯤 선 내 성기와 제 알몸을 정신없이 살필 적에, 그는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왜, 왜… 왜 나… 나를….”

해아가 뒤로 기다시피 하며 나를 피했다. 침실 벽에 뒤통수가 닿을 때까지 엉금엉금 물러서는 모습에


황당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아니야!”

평생 이렇게 억울했던 적이 없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내가 아니야, 해아야…!”

그렇게 외치고 나니 얼굴로 열이 확 올랐다.

짧은 정적 끝에,

“흑…, 내가 그런 거예요?”

훌쩍훌쩍 소리 내어 울며 해아가 구석으로 물러났다. 발가벗은 몸으로 침실 구석에 콕 박혀서 ‘어떡해’


하며 제 입을 틀어막는 모습에, 좀 전의 색욕 좀비는 온데간데없었다. 충격 어린 눈으로 내 전신을 훑는
그는 진지한데, 미안하지만 나는 그가 귀여웠다.

“어떡해요….”

그러게, 어떡하냐…. 진짜 귀여워서 어떡하지?

머리털이고 팔뚝이고 다 물리고 뜯기고 긁혀 놓고도 아직 그가 귀여운 걸 보면 나도 중증이었다.

“괜찮아.”
허리 숙여 나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뺨이 따끈하고 말랑했다.

“네가 다칠까 봐 그런 거니까 오해하지 마. 히트 사이클 때문이니까 자책하지도 말고. 나 안 다쳤어.”

조용히 달래 주자 해아가 제 두 손을 내 손등 위에 겹쳤다. 키만 해도 머리통 하나 차이에 덩치는 선수로


치자면 체급이 휙휙 변할 수준이었다. 그런 주제에 나를 좀 때렸기로서니 죄책감에 물든 눈이 순하기 짝이
없었다.

조용히 두 팔을 벌리자 해아가 내 품 안에 쏙 들어왔다. 제가 마구 긁어 놓은 어깨를 만지작거리면서 또


훌쩍거리는데, 나는 속이 간질간질했다. 어떻게 안 귀여워하고 배길까, 미안하다고 하염없이 속삭이며
안기는데.

하여간 강해아는 나를 이상한 놈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내 몸의 축을 움켜쥐고 모빌처럼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돌아 버리게 하는 재주가….

“때려서 미안해요.”

그 바람에 나는 뻔한 사실 하나 알아채질 못했다. 여전히 펄펄 끓는 듯한 그의 체온을 느끼고


달짝지근하게 흘러나오는 향을 맡으면서도, 그에게 속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해아야. …약 안 삼켰어?”

억제제는 혓바닥에나 조금 묻혔지 모르는 새 전부 뱉어 냈다는 것도,

“무슨 약이요?”

작정하고 페로몬을 쏟아 내면 더는 귀엽지 않게 된다는 것도.

“해아, 야….”

속수무책으로 침대 위로 떠밀리는 순간, 목줄을 잡힌 건 오히려 나였다.

내 몸 위로 올라타는 그의 엉덩이 밑에, 도대체 몇 번째 깔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말간 눈동자가


조금이나마, 좀 전보다 깨어 있었다. 그래서 거부하기가 더욱 힘겨웠다. 이 순간 그를 팽개치고
제압했다가는 ‘천태림’이 그런 모습으로, 강해아의 뇌리에 박제될까 봐 걱정됐다.

깨도 깨도 더 어려운 보스가 나오는 악질 게임을 하는 기분인데, 매판 보스가 온통 강해아다.

그는 내 입술을 빨고 가슴 위를 더듬거렸고 나는 등 아래가 흥건해졌다. 받아 온 자극이 사라지질 않고


누적되기라도 하는 양, 이제는 작은 몸짓에도 성기로 피가 쏠렸다. 솔직히 말해 좆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를 밀어 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해아는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았다. 내가 모르는 약점까지도….

내 손이 배 언저리에 닿자마자,

“윽….”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 반응을 보자마자 나는 힘을 잃어버렸다. 놀라고 당황해 치운 손은 곧장 그의 두 손바닥 밑에 깔렸다.


내 전신은 그의 흥분을 돋우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해아는 재차 몸을 문질러 댔다.
아픈 듯 움찔대던 표정이 연기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러나 확신은 들질 않았다. 그를 뿌리치려 할
때마다,

“아파요.”

내 몸에서 내려놓으려 쥘 때마다,

“아파요…, 태림 씨.”

강해아는 한마디 말로 나를 굴복시켰다.

그러나 강제로 내 몸을 내리누르며 성교하는 행위보다도, 누가 누굴 겁탈하는 것인지 모를 죄 없는


눈빛보다도,

“안아 주세요….”

후 하고 불면 꺼질 듯 작은 속삭임이 나를 미치게 했다.

“안 참아도…, 돼요, 노팅해요, 제발… 하고 싶어요. 해 주세요…, 응?”

난 평생 강해아를 이길 수가 없다.

“사랑해요….”

속삭임에 심장이 벌게지고 귀가 멍해지는 것을 보면….

“사랑해요, 태림 씨. 정말로 많이… 가끔은 울고 싶을 만큼….”

대번에, 발끝부터 정수리 위까지 낯선 감각이 절정으로 차올랐다. 성감이라고 부르기엔 고상하고
기쁨이라고 말하기엔 애처로운 감정에 나는 먹혔다.

“내가, 많이… 사랑해요.”

머릿속의 전구가 팍하고 깨졌고,

“사랑해….”

그대로 나는 본능에 몸을 맡겼다. 여태껏 곧게 세워 왔던 도덕적 잣대를 넘어뜨린 순간에는 믿을 수 없게


큰 해방감이 찾아들었다. 도리어 해아가 놀라 물러설 만큼 나는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당장에 침대 위에
엎어 놓고는 귀를 빨고 목덜미를 깨물었다. 여린 살에 이를 박자 그가 우는 듯한 신음을 흘려 댔다.

되는 대로 깊이 남성을 쑤셔 박으면서는 온몸이 심장 소리로 벌렁벌렁 울렸다. 움찔거리며 구멍을 조이는


해아의 육신이, 내 몸보다 더욱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의 피부 밑에서 내 성기가 꿈틀거리며 커지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나를 움직이는 게 그에 대한 애정인지 욕심인지 알 수 없었다.

정작 나의 몸뚱이는 내 것이 아니게 됐다. 팔과 다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조차 나는 잊어버렸다. 두


다리는 해아의 몸에 올라타는 사다리였고 두 팔은 달아나지 못하게 그를 묶는 밧줄이 됐다. 체중을 실어
짓누름으로써 나는 그를 속박했다.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한 운동 하나 없이 그저 성기를 욱여넣고 전신으로 압박하자, 해아가 아픈 신음을


내질렀다.

“악…!”
어느 때보다 깊이 그의 속에 파고든 순간에는 흥분에 눈이 멀었다. 옴짝달싹 못 하는 채 아파 우는
소리에도, 그를 놓아주긴커녕 페로몬을 쏟아 냈다.

“허억, 헉….”

그러나 욕정에 물들어 해아를 짓누르고 옭아맨 이유를 그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다. 내 성기가 꿈틀꿈틀
부풀며 그의 속을 벌리고 장기를 밀쳐 올리다시피 하는 순간에, 해아는 반항하지 않았다.

“아, 아….”

눈물을 펑펑 쏟고 성기로는 물까지 흘려 대면서도 해아는 도망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감싼 그의


아랫배가 불룩하게 부푸는 게 느껴져 나마저 놀란 순간에, 그는 도리어 엉덩이를 들어 내 몸 아래에 제
피부가 더욱 닿게 했다.

그, 온전한 믿음에 내 시간이 멈춘 듯했다. 충격에 잠겨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때리지 말라고 빌고
아프다고 눈물을 흘린 주제에 해아가 나를 믿는다…. 이대로 힘주어 짓누르기만 해도 그의 몸이 망가질
것만 같은데, 나조차도 나를 못 믿겠는데 해아는 이성을 잃은 와중에도 나를 믿었다.

그의 떨리는 숨결 하나, 근육의 경련 하나까지도 내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 해아가 웃었다. 이마와 두
뺨은 빨갛게 익고 두 뺨에 눈물이 줄지어 흐르는데, 그가 웃었다.

“태림 씨….”

흐느끼듯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무너졌다.

“사랑해.”

그의 뺨에 입술을 가져다 붙이고 그렇게 말했다. 아직 고백할 준비가 되지 않았건만 내 혓바닥이 제멋대로
감당하기 힘든 고백을 뱉어 냈다.

“사랑해, 해아야.”

어째선지 눈물이 났다. 성감에 머리가 돌고 색욕에 짐승이 되어야 할 순간에, 내 정신은 오히려 차가운
물에 씻긴 듯했고 시야는 더욱이 또렷해졌다.

“전부터 쭉…, 너를 좋아했어.”

흐릿한 세계에 홀로 선명한 강해아를 두 팔로 끌어안고, 그 속에 내 씨를 심으면서도 도무지 갈증이 멎질


않았다. 오히려 나는 더욱, 더욱이 그를 원하게 됐다. 그가 나를 잡아먹었으면 좋겠고 내 심장을 꺼내어
씹어 먹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미안해….”

그러면서 나는 사과했다.

연거푸,

“미안해. 용서해 줘.”

이유 모를 말을 반복했다.

“미안해, 해아야.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내가 ‘미안해’라고 말하는 순간만큼은 해아가 울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트에 뺨을 붙이고 엉덩이만 내 몸에 닿게 추켜들린 채로,

“괜찮아요.”

미치게 익숙한 소리를 건네주었다.

“괜찮아…, 윽, 응…. 괜찮아요, 태림 씨. 괜찮아….”

짐승처럼 폭력적인 노팅을 걱정한 내게 해아는 용서를 안겨 줬다. 땀에 젖은 피부가 너 나 할 것 없이


들러붙고 깊게 쑤셔 박은 내 성기가 그의 아랫배를 부풀리는데, 가장 동물적인 순간에도 해아는 나를
달랬다.

무어라 속닥속닥 말소리가 들리기에 해아의 등을 덮으며 고개 숙이면,

“전부 괜…찮아…. 태림 씨 잘못이… 아니야.”

허벅다리를 벌벌 떨면서 그는 나를 변호했다.

헐떡거리던 말소리는 내 몸이 지붕처럼 그를 완전히 덮은 순간 그쳤다. 숨이 막히는지 소리도 내지 못하고,


해아는 몸에 있는 물을 전부 빼내다시피 했다.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며 실금할 적에
침대 매트리스가 물로 젖어 축축해졌고 굽은 발가락으로 시트를 뒤로, 뒤로 밀며 구겨 댔다.

“아…윽, 악….”

밭은 비명을 내지르며 해아는 상체를 둥글게 말았다가, 턱을 추켜들었다가 하며 밀려드는 성감에


나자빠졌다.

“으, 읏… 흑, 흐윽, 아, 아….”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부푼 아랫배에 손바닥을 댄 채 나는 더운 숨만 씩씩거렸다. 머리를 채우는 성감은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난생처음 해 보는 노팅의 순간은 씨…발 좆같았다. 아무 감정이나 되는 대로 땀에 적셔서는 내 정신에


덕지덕지 붙인 것만 같았다. 슬프기 싫은데, 씨발 떠올리기 싫은데… 싫어, 싫다고 근육이 꿈틀꿈틀
경련하는데 기어코 슬펐다. 슬프고, 화나고, 억울하고,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다.

“흐윽….”

볼썽사납게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나는 해아를 내 품 안에 욱여넣었다. 벌써 기절했는지 말없이 늘어진


해아의 뜨끈한 몸에 대고 성기를 밀어 넣은 채로, 미친놈처럼 엉엉 울며 사정했다. 사정감보단 배뇨감이
들 정도로 긴긴 토정이었다. 사정 후에 내 성기는 줄었는데, 해아의 배는 오히려 더 부풀 지경이었다.

“너…는 왜.”

눈물 쏟으며 나는 울었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던가. 그 말은 전부 틀렸다. 내 품 안에서 잠든


해아를 껴안은 채 나는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울었고 상을 치른 자식처럼 울었고 세상천지를 다 잃은
놈처럼 울었다.

노팅을 마치고도 해아는 죽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런 생각을 누가 들었더라면 스스로를 너무 과신하는 게 아니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내가 그를 죽일 줄 알았다. 내 ‘미안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소리가 될까 봐 무서웠다,
기절했다 깨어난 뒤에도 성감에 미친 해아가 몸을 떨며 우는 얼굴을 볼 때는 그랬다.

…다시 생각해 보니 해아는 성감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날 따라 운 걸지도 모르겠다.

노팅과 체내 사정이, 피임약을 챙겨 먹던 그를 떠올리면 못할 짓이었음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러나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를 들이쉬며 내 몸에 찰싹 붙은 해아를 볼 적에는,

‘뭐 어쩌겠어.’

그런 뻔뻔한 생각이 잘도 고개를 들었다.

‘너무 좋은데 어떡하라고….’

콧김을 흥 내쉬자 해아가 코끝을 움찔거렸다. 기절하다시피 잠든 이의 얼굴을 나는 조목조목 뜯어보았다.


의식 없이 감긴 눈의 속눈썹이 촘촘했고 콧대는 높은 편은 아니나 모양이 예뻐서 조각 같았다. 입술은 새
부리처럼 삐죽 나온 채였다.

‘잘 때면 꼭 이러더라.’

잇새는 살짝 벌어지고 윗입술이 뾰족하게 내밀어진 얼굴이 나를 웃게 했다. 소리 죽여 혼자 웃다가 검지


끝을 인중 위에 가져다 대자, 벌어졌던 입술이 꾹 닫히고 ‘으응’ 하는 잠투정이 흘러나왔다.

“해아야.”

“으응….”

“자?”

“응….”

이어지는 며칠간의 대화가 그런 식이었다. 히트 사이클이 지나기까지 며칠 동안이나 해아는 잠에, 혹은


성욕에 취해 있었고 나는 그를 따라 움직였다.

‘네게 각인만 하면 모든 게 완벽할 텐데….’

내가 갖는 열망이란 오직 그뿐이었다. 노팅을 마쳤으니 자연스레 일방 각인도 쌍방이 될 줄 알았는데,


그를 향한 내 애정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보다 더 진심일 수가 없는데, 그런데도 나는 해아에게
완전히 얽매이질 못했다.

그가 내게 묶이고 영혼이라 불리는 깊은 본능까지 쉬이 내게 바친 것처럼 나도 그러고만 싶었다.


사랑한다는 속삭임에 진심을 더 싣고, 나로 인한 불안들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그는 나만의 오메가로
나는 그만의 알파로 남고 싶었다.

‘왜 안 되는 거지?’

잠든 해아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나는 어리둥절했고, 조금은 억울했다. 혹여 내 몸에


문제라도 있는 게 아닌지, 각인이라는 일에 내가 모르는 거부 반응이라도 가진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의 각인을 문제 삼는 이는 오직 나뿐이었다. 애초에 해아는 쌍방 각인까지는 기대조차 하지 않은


눈치였다. 그 사실에 안심해야 할지 서운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들었다.
해아는 노팅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 듯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 또한 기뻤다.

순전한 너는 모를 것이다, 내 모자람을 고민하는 일 없이 항상 용서하는 너로 인해 매 순간 구제받는 나를.

노팅 이후 해아와 내 관계는, 걱정했던 만큼 변하기는 하였으나 걱정했던 방향으로는 아니었다.

내 피부 밖에 존재하는 타인을 내 육신처럼 여기는 기분은 몹시 생경했다. 그러나 기묘한 감각은


낯설지언정 밉지 않았다. 새로운 자극은 나를 있어야 할 곳에 데려다 놓았다.

‘내 자리야.’

강해아를 품에 안고, 혹은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 적에 나는 난생처음 그렇게 느꼈다. 여태껏 그와


한집에 살며 같은 침대에 눕고 함께 식사해 온 지난날들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내 사람이고….’

애처로운 감각이 그렇게 좋았다.

‘내 오메가다.’

몇 번이고 해아를 안고 몇 번이고 그의 속에 내 씨를 뿌려 대면서 그저 좋았다.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연락에도 응답하지 않고 찾아드는 손님 하나 없는 며칠이 그보다 더 온전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나는 거의 먹지도, 자지도, 마시지도 않고도 멀쩡했다. 내 몸 위에 제 몸을 길게 뻗고 색색 숨소리를


들려주는 해아만 봐도 굶주림도 피로감도 갈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임신하면 어떡하죠?”

온전한 행복에 작은 구멍을 뚫은 것도, 그 행복을 안겨 준 해아 본인이었다.

대뜸 건네 온 목소리에 나는 눈을 끔벅거렸다. 제 턱을 내 가슴 중앙에 괴고서, 해아는 졸린 눈을 하고


있었다.

“아기 잘 키울 자신이 없는데, 나는….”

가물가물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작았다. 며칠 새 그의 잠꼬대가 익숙해져서,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어제는, ‘각인한 상대가 다른 사람과 노팅하면 어떻게 되냐’고 묻던 해아였다. 잠결에 속삭이는 음성이
무척 듣기 좋았다. 그런 경우 각인이 풀리게 마련이라고 말해 주었더니, 만족스러운 사람처럼 웃으며
꿈나라로 빠져들었었다.

‘오늘은 또 무슨 꿈을 꾸길래 이런 말을 하지?’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주면서, 나는 그의 동그란 이마 위를 엄지로 문질렀다.

“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 남들은… 결혼하면 자식부터 떠올리잖아.”

그처럼 작은 목소리로 속닥속닥 물을 적엔, 그게 뭐라고 가슴이 떨렸다.

어느 쪽이냐 하면 나는, 내심 자식을 원하는 전형적인 알파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 보세요’라고 하면 삐뚤빼뚤한 솜씨로 삼각형 지붕을 얹은 집과 배우자와 자녀 둘을 그렸었다. 그
배우자가 강해아고 자녀가 그를 닮은 아이라면… 축구단을 만들래도 좋을 것만 같았다.

“나는 아니거든요.”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해아가 불쑥 말했다.

그의 거절이 놀랍지는 않았다. 욕실 거울 찬장 너머에 쌓여 있던 피임약만 떠올려 봐도 뻔한 문제였다.


그 성향을 어렴풋이 알기 때문에 구태여 자녀 계획을 논한 적도 없었으니까.

“뭐가 그렇게 겁이 나?”

그래도, 그 이유가 궁금했다.

평생 베타로서 생각하며 살아와서 임신이 두려운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최선을 다해 회복한다


해도 출산 이전의 건강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 그런 페널티를 원치 않는다면, 그것 또한 마땅히 존중받을
문제였다.

해아의 입이 느릿느릿 열렸다가, 머뭇거리며 도로 닫혔다. 그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무어건 나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엄마 기일… 내 생일 아니에요.”

그러나 강해아에게는 언제고, 나를 쥐락펴락 주무르는 재주가 있었다.

“…사실 일주일 뒤인데 거짓말한 거예요, 회장님이….”

나는 두 번 놀라야 했다. 그가 전한 이야기 자체도 불가해하고 이상했지만, 늘 ‘아버지가’, ‘아버지


는’ 하며 친근하게 지칭하던 이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그의 무의식이 더욱 이상했다.

“엄마…, 나 낳다가 죽지 않았어요. 나 낳고 일주일 있다가… 우울증 때문에 그렇게 됐대요.”

섬뜩함과 애처로움이 동시에 느껴질 수가 있는 거구나, 나는 생각했다. 이해하기 힘들 만치 비인간적인


가족사가 섬뜩했고, 강녕한 아버지는 ‘회장님’이라 부르면서 만난 기억조차 없을 어머니는 ‘엄마’라고
부르는 해아가 애처로웠다.

“나는… 엄마를… 닮았어요.”

조용히 입을 다물더니 해아는 제 뺨을 내 심장 위에 기댔다. 두 손이 느릿느릿, 길게 뻗은 내 팔을 찾아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숨만 길게 내쉬었다. 긴긴 한숨에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해방감이 느껴졌다.

해아야, 네가 이 이야기를 잊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소망했다. 내게 슬픈 말들을 고백했다는 걸


알면 너는 수치스러워 울음을 터뜨릴까.

“…그러니까 내 임테기에 두 줄이 뜨면, 그건 고환암에 걸린 거예요.”

…이런 말은 나야말로 잊게 되면 좋겠고.

살이 팬 흉터는 잊힐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잠자코 흐려져 가는 와중에도 옷 아래에 잠복 중이라, 가장


방심한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이를테면 내 정강이의 흉터가 그러했다. 서핑에 미쳐 있던 스무 살의 여름에 얻은 한 뼘 길이의 일자형
상흔인데, 해변에서 처음 만난 오메가와 몇 마디 말을 튼 일을 두고 알파들이 시비를 걸어온 게
화근이었다. 서핑 보드 바로 뒤를 보트로 쫓아오는 미친놈들을 피하려다 산호초에 부딪치는 바람에 나는
정강이를 길게 베였고, 놈들 인생엔 빨간 줄이 그어졌다.

그때부터 햇수로 8 년째 달고 다닌 흉터다. 이제는 통증도 없고 눈에 띄게 흉물스러운 빛깔이지도 않았다.


덩어리진 비복근과 교묘하게 겹쳐서는, 종아리 힘줄인지 흉터인지도 분간 안 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 흉터는 잊을 만하면 눈에 거슬리며 내 기분을 잡쳐 놓았다. 그날의 불쾌한 분위기와 상처


안으로 빠르게 파고들던 소금물의 흰 거품이, 살갗 안에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피부가 아니라 기억에 새겨진 상처도 마찬가지다. 실재 여부와 관련 없이 불쑥 시야에 들어올 때가 있다.

심지어는 타인의 상처도 매한가지라, 배려 없이 대뜸 닥쳐오고는 한다.

“태림 씨가 나 볼 때…, 가끔… 화난 사람처럼 쳐다보잖아요.”

해아가 꺼내 보인 흉터도 그런 식이었다. 만족스러운 섹스를 마치고 욕조에 나란히 앉은 때였다.

나는 그것이 생채기 자국인 줄도 모르고서 그저 골똘히, 내가 그 앞에서 화난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나를


고민했다.

답은 뻔했다. 나는 해아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노려볼 때도 있고,”

그를 노려본 기억도 없으며,

“무표정할 때도 있고.”

무표정했던 때 역시 없었다.

애초에, 표정 없이 해아를 바라보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의문스러웠다. 지나치게 흐물거리는 표정을


관리하려 애쓴 기억만 한가득했다.

“완전히 고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좀 더 웃어 주면 좋겠어서….”

어리둥절한 내 팔뚝에 제 어깨를 기대면서 해아가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 그런 적 없어.”

“…그럼 내가 증거 보여 줄게요.”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탐정처럼 말하는 그가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스파를 마치고 나란히 몸을 닦은 뒤,
보송보송한 잠옷을 세트로 꺼내어 입고 거실에 앉을 때까지도 즐겁기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 기억이 맞았다. 해아가 ‘증거’라며 꺼내어 틀어 놓은 홈 비디오 속 내 모습은 다소


민망할 정도로 싱글벙글했다. 캠코더로 찍고 있는 줄을 알았더라면 얼굴 근육을 좀 관리했을 텐데 아쉬울
정도였다.

‘예쁜 남편 얻었다고 좋댄다.’


주먹으로 턱을 괸 채 나는 텔레비전 화면 속 파티를 감상했다. 오히려 무표정인 쪽은 내가 아닌 해아처럼
보였다. 천사같이 미소 지으며 내 곁에 붙어 서긴 했지만, 몇 초 간격으로 모호하게 표정이 흐릿해졌다.

텔레비전 앞에 붙어 앉은 해아의 뒤통수가 동그랬다. 소파 자리로 올 생각도 않고 화면만 올려다보는 그의


귀가 느릿느릿 붉어지는 게 보였다.

“저날 은근히 재밌었는데. 종일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더라고. 신기한 남자랑 결혼했다고


생각했었지.”

홈 비디오를 감상하면서 나는 소파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바닥에서 뭐 해. 이리 와, 앉아.”

그러나 해아는,

“…….”

새로운 방법으로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날, 그 밤에, 홈 비디오가 끝나도록 그는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이 자그마치 이틀을


갔다.

강해아의 침묵과 외면이 만들어 낸 48 시간이 내게는 지옥이었다. 다문 입을 열지 않고 내 눈길을 피할


적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놀라고 상처 입은 사람 같았다. 그가 느끼는 혼란과 슬픔이 내게도 전이되는
듯했다. 그러나 어떠한 설명도 없어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발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심장만
연거푸 느낄 뿐이었다.

해아는 침대에 틀어박혀 꼼짝을 않았다. 나는 그의 어깨와 손을 주무르고, 뭐라도 먹어야지 않겠냐며
식사를 만들어 바치고, 체온계를 들이밀고 해열제도 먹이려 해 보았다. 그러나 해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 주질 않았다.

유의미한 표정 변화라고는 이따금 입을 벙긋거리며 내 얼굴을 살피는 것뿐이었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 봐.”

같은 애원을 천 번은 더 한 날에,

“태림 씨….”

해아가 목메어 엉긴 음성을 들려주었다. 혹여 노팅의 부작용은 아닐까 싶어 강제로라도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무겁기 짝이 없는 얼굴에 슬픈 듯한 눈동자를 비칠지언정, 그가 침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잡는다는 것에 나는 기뻤다.

“그래, 해아야…. 무슨 이야기든지 말 좀 해 줘.”

두 손을 고쳐 맞잡으며 나는 그의 손가락에 마구 입을 맞췄다. 손의 온도가 시릴 지경이기에 두 손바닥에


끼우고는 싹싹 문지르기까지 했다. 그런 내 얼굴을, 해아는 처음 보는 책을 펼친 사람처럼 가만히 훑었다.

“인정…하지 못하나 봐요. 태림 씨가… 좋아해 준다는 걸….”

더듬더듬, 느린 말로 전하는 말이 어렵게 와 닿았다.


“누가.”

짧게 묻자,

“내가요….”

해아가 속삭였다. 그러고는 그대로 입술을 벌린 채 한참이나 아무 소리도 없었다. 머뭇거림이 길었다.

“…난 본 적이 없어요, 태림 씨가 그렇게… 그렇게 웃어 주는 걸. 매일 날 그렇게 봐 주길 원했는데…


밤마다 한 생각이 그랬어요. 내일은 나를 좋아해 줄까…, 내일은 나를 보면서 웃어 줄까, 어떻게 해야
당신 마음에 들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해도 좋으니 그저, 목소리만이라도 들려주었으면 바라던 간절함도 잊은 채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보다 더 불가해한 문장이 있을까. 내가 좋아해 주기를 바라고 웃어 주기를 기다리며 내
마음에 들고 싶어 하는 강해아라니….

나는 처음부터 그를 좋아했다. 그를 볼 때면 자연히 웃음이 났고, 새하얀 연미복을 차려입고 내게로


걸어온 순간부터 마음 안에 강해아를 들여놓았다.

“이건 불공평해요. 왜…, 나만 그 미소를 못 누린 건지.”

그건 내게도 불공평한 이야기였다. 여태껏 퍼부은 애정이 전부 그를 빗겨 흐르기라도 했다는 뜻 같았다.

해아는 내게 긴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침대에 사물처럼 덩그러니 앉은 채로, 기나긴
고백을 잇는 내내 그의 목소리엔 어조가 없었다.

“하루가 4 시간 같고, 가끔은 2 시간 같아요. 전에는 그게 좋았어요.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게… 힘든


하루가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게. 부담스러운 눈빛도 고통스러운 긴장감도 잠깐만 버티면 된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전에는… 네, 그렇게 생각했어요. 당신을 사랑하고…, 나도 사랑을 받게 되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아니, 사랑이 아니어도 돼…. 그냥 다정한 키스 한 번만, 내 눈을 보고 해 준다면 그걸로도 오늘의
슬픔을 이겨 낼 수 있을 거…라고. 벌써 6 년 전 이야기네요.”

기이한 고백에 내 정신은 컴컴해졌다. 그가 내게 흔히 말해 주는 ‘괜찮아’라는 대답이 내 잇새로


흐르려다가, 그치고야 말았다.

괜찮다고 달래 주고, 너를 이해한다고 다독이고, 제대로 된 병원 상담을 잡아 주고… 배우자로서 내가 해


주어야 할 일들이 하나둘 생각났다. 그래야만 했고, 그랬을 것이었다. 병증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해아의 말들이 내 귀에, 익숙하지만 않았더라면.

익숙…하다. 그의 말들이, 표현이, 6 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의 단위가.

“…하루가 오려져서 아무렇게나 붙여져도 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태림 씨만 기억하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태림 씨만 중요하니까. 내 세상에… 태림 씨만 중요하니까.”

나도 그랬다. 해아만이 중요했다. 하루에도 열 번, 천 번, 만 번씩. 내 세상에… 강해아만 중요했다. 그


외의 것들은 부속품에 불과했다. 오가는 말들도, 사람들도, 가끔은 내 시간조차도, 모든 게 소음이고
조연이고 장치일 뿐, 해아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태림 씨를 똑바로 보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지금도… 태림 씨가 나, 나한테 화낼 리가


없는데… 지금도 그렇게 보여요. 나를 원망…하는 것처럼. 미워하는 것처럼…. 나… 나 자신도
잃어버렸나 봐요.”
두 손 안에 움켜쥔 해아의 손목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언제고 맑던 눈동자에 눈물이 파도처럼
차올랐다. 마른침을 연신 삼키면서 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면서도 내 눈을, 코와 입을,
표정을 살피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내 지나간 이틀이 이해됐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이틀간 해아는 용기를 냈다.


오늘의 고백을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건네줄 답이 없었다.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는 순간 나는 무능력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저 아팠다. 머리가 아프고 심장이 발치를 구르는 것 같고 생살이 다 찢긴 기분이었다. 또, 울 것


같았다. 영문 모를 감정들이 엉망진창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괜찮은 건 해아였다.

“난 행복해지고 싶어요. 태림 씨를 행복하게 지켜 주고 싶은 만큼이나…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요. 태림


씨가 내게 해 주는 좋은 말들, 지어 주는 미소, 전부 온전히 느끼고 싶어요.”

더 이상 그는 손을 떨지 않았다. 눈물로 흐려졌던 눈동자도 두 방울 떨구고 나니 다시금 맑아졌다.

“느끼고… 싶어요. 살아 있다고.”

고백하는 입술에도 작은 생기가 돌았다.

이내 어둠 안에서 두려운 이는 나뿐이었다. 온몸이 바위처럼 그저 무던하고,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이유를 몰라서 어리둥절한, 나는 겁을 집어먹었다.

“살고 싶어요.”

그 말이 왜 사무치게 기쁜 건지 알 길 없이 나는 웃었다. 그러자 해아가 웃는다, 나를 따라 뺨이


둥글어지도록 미소 짓고, 눈물 젖은 입술을 가볍게 내 입술에 맞댔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요.”

이내 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이틀 사이 힘이 빠진 듯한 다리로


앞장섰다. 그를 따라 계단을 내려갈 적에 내 마음 안에는 혼란만이 가득했다.

자못 결연하기까지 한 얼굴로 해아는 작업실에 섰다. ‘붓을 꺾겠다’던 선언 이후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작업실에는 빈집 같은 서늘함이 감돌았다. 캔버스를 내린 이젤 앞에 우두커니 선 순간, 맞잡은 손에
어찌나 힘이 실려 오는지 내 손끝이 희게 질릴 지경이었다.

“사실, 이게 처음이 아니라면요?”

해아가 물었다. 나는 그 말에 응할 적당한 대꾸를 찾지 못했다. 슬슬 걱정됐다. 좀 전과는 다른 방식의


걱정이었다.

“나…, 내가… 같은 인생을 두 번 살아 본 거라면 어떨 거 같아요?”

혹시 해아가 미친 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 거라면 큰일이었다. 그가 미쳤다면 그의 말을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나 역시도 미쳤다는 의미이니까.

차라리 나를 놀리려고 연기를 했대도 웃고 넘어갈 수 있을 성싶었다. 순전히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이틀


동안 전전긍긍 애를 태웠대도 쉽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그랬으면 바랐다.
“태림 씨가… 내게 뭘 원하고, 우리 사이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부 다 알았던 거라면요.”

그러나 해아는 내게,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했다.

“해아야.”

그를 지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데자뷔를 느꼈거나 꿈을 꿨다거나, 그런 이유를 든다면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따금은
나도 그를 볼 때 데자뷔를 느꼈고, 언제나 꿈속에서 그를 만났으므로. 나마저도 전생에 강해아를
만났을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농담할 지경이었다. 감성 충만한 예술가인 해아라면, 비슷한 느낌을 받고도
다른 해석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됐다.

그가 내 손을 놓고는, 책상 서랍 마지막 칸을 뒤적이기 전까지는 그랬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요. …아니, 사실 보여 주고 싶지 않은데… 보여 줘야만 하는 게, 있어요.”

횡설수설하며 해아가 내 앞에, 두 손을 뻗었다.

“전부 읽고서 나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해도 괜찮고, 정신 병원에 데려가도 이해해요. 하지만 날…, 날
떠나지는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럴 리가 없잖아.”

내 대답은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두 눈으론 떨리는 손으로 그가 건넨, 붉은 가죽 노트를 담았다.


벽돌처럼 빳빳한 재질의 겉표지에는 꾹꾹 눌러쓴 필체로 흉터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강해아 미래 일지’.

낯선 표지를 펼치면서 나는 그것을 읽고 싶기도, 불길 속에 던져 버리고 싶기도 했다.

강해아\test.txt

안녕, 다이어리야.

…보통은 이렇게들 시작하던데. 내 일지는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까. 무슨 말부터 적어야 하나…. 안녕,
내 시간을 돌려놓은 신이신지 누구신지야. 아니다…, 그만두자.

우선은… 6 년 전에… 그러니까 천태림 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적어야겠다.

첫 만남에 나는 천태림 씨가 좋았다. 이유는 많은데 전부 단순했다. 얼굴이 잘생겨서 좋았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어 주어서 좋았고, 무뚝뚝한 말투로 전하는 소소한 농담들이 재밌어서 좋았다….
천태림은 내 부푼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남자였다. 마침내 나에게도 평생 머물 집이, 함께할 가족이
생겼다. 그게 태림 씨여서 몹시 들떴었다.
두 번째 만남에 우리 결혼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태림 씨는, 이 결혼이 사업상의 계약임을 강조했다.
그때 나는 아주 많이 부끄러웠다. 일방적으로 들뜨고 설렌 내 감정을 들킨 것만 같아서 그랬다. 태림
씨와 긴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결혼 서약을 적은 종이를 찾았다. 그대로 구겨서 버렸다.
이상형이나 애정 운운하던 어린애 같은 서약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약속’과 ‘신뢰’라는 말로
시작하는 서약을 새로 적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태림 씨와 나의 차이는 안나 카레니나 법칙을 고스란히 증명해 냈다. 태림 씨는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


행복한 가정을 가진 사람이었고, 나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사유로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그의 옆자리에서 나는 가난이라는 게 뭔지 처음 느꼈다. 태림 씨에겐 이미 완벽한 가족과 충만한 애정,


그만을 위해 주는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셋 중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그를 향해 끓어오르는
선망과 저열한 질투의 감정을 느낄 때는 입천장에서 씁쓰레한 맛이 났다.

결혼식을 앞둔 날 밤에는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 매시간, 매분, 매초 동안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곱씹으면서 인정하려고 노력했다. 가족, 애정, 친구. 나는 그 모든 걸 천태림 씨에게 주고 또 그로
하여금 받길 원했지만 태림 씨는 그런 날 원하지 않는다는 걸. 천태림은 내게 그 모든 걸 줄 이유도 받을
필요도 없는 충만한 사람이라는 걸.

결혼식은 숨 가쁘고 정신없이 흘러갔다. 내내 허둥지둥하느라 귀빈도 못 알아보는 나 때문에 태림 씨의


고생만 두 배였다. 그날을 회상하면 부끄러워서 울고만 싶다. 그때쯤 태림 씨도 알았을까? 내가 그
인생의 짐이라는 걸.

여행지로 향하던 차 안에서 내게 일정을 알려 주던 태림 씨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피로한 기색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그는 ‘우리’가 아닌 ‘그’의 일정을 말했다. 그는 사업의 목표를 진작 정하고 그
자신의 인생 설계마저 마친 사람이었다.

태림 씨는 앞으로 2 년 동안은 서울에 있는 시간이 반 이하, 미국에 있는 시간이 반 이상일 예정이었다.


잦은 출장을 이해해 줄 배우자를 원한다는 거야 진작 알던 내용이라 놀랍지 않았다.

나는 그저 노력했다. 그의 내일에 내가 없다는 것에 놀라워하지 않으려고, 궁핍한 내 영혼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그 출장 중에 혹시 내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까 묻지 않으려고….

욕심을 버리고 보니 많은 것이 다행스러웠다. 한성 그룹이 태림 씨가 원하는 날개를 달아 주는 협력


관계라는 게 자랑스러웠고 또, 그런 집안에서 난 덕분에 그처럼 완벽한 남자를 만나게 됐으니 행운이었다.

잦은 출장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떵떵거릴 때 내심으로는 머릿속의 나사를 꽉 조였다. 태림 씨가


나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에라도, 여태껏 그래 온 것처럼 착한 강해아가 되기로 했다. 밝고 힘찬, 그에게
힘이 되어 주는 남편이, 2 년 중 절반 이하라면 충분히 될 수 있었다. 남은 반절의 외로움을 합하더라도
이제까지의 외로움보다는 덜할 테니까.

그땐 그렇게 생각했었지….

…아. 그래, 그랬다.


강해아와는 레스토랑에서 처음 만났다.

남자를 보고 예쁘다는 느낌을 받기는 난생처음이었다. 그는 우아하고 여유 넘치는 사람이었다. 평생 만나


본 이들 중 가장 잘생긴 데다 특유의, 흉내 낼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나 날 보며 인사하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깜짝 놀랄 정도로 듣기 좋은 게, 꼭 성우 같은 목소리였다.

그는 느릿느릿 자기소개를 했다. 아직 한국어에 서툴다며 보이던 멋쩍은 미소가 귀여웠다. 어눌한
억양조차 너무나 듣기 좋았다. 번역된 소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문어체를 간간이 섞어 쓰는 것조차
신기하고 새롭게 생각됐다. 그의 목소리엔 이어질 말이 무언지 기대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이런 사람이면 함께 살 만할 거라고 생각됐다. 남은 인생 내내 파트너로 생활하기에 그는 충분히 좋은


남자였다. 그는 내 관심을 끌었고, 나는 그의 호감을 얻어 냈다. 그 밖에 다른 조건은, 한성 그룹의
막내인 강해아에게는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함께 러트를 보내자면 당연히… 오메가여야 한다는 것
정도일까.

결혼식 자체는 업무나 다름없었다. 하객은 너무 많았고 기자들까지 들끓어서 종일 혼이 빠진 날이었다.


네가 결혼하면 울 것 같다던 어머니조차 어떤 무드를 느끼실 새가 없을 지경이었다.

휘황찬란한 신혼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지쳐 버렸다. 강해아와의 첫날밤을 그렇게 허투루 흘려보냈다.


그 역시 별다른 사건을 기대하진 않은 눈치였다. 테라스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서의 아침은 다소
느끼했다.

타히티에서의 날들이 전부 좋지만은 않았지만, 새로이 안 사실도 있기는 했다. 강해아가 꽤 귀여운
사람이란 점이었다.

어떤 밤에는 같이 저녁을 먹다가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는 말을 했더니, 그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웨이터가 다가와 후식을 추천하는 사이에 내 눈에 들어온 휴대폰 화면에는
포털 사이트 창이 띄워져 있었다. ‘고깐 뜻’을 검색해 놓은 화면을 못 본 척 연기하기가 쉽진 않았다.

…천태림 씨에게 러트가 왔다. 결혼 이후 처음으로 겪는 러트였다.

…이맘때 즈음이면 벌써 발현했겠거니 했던 나는 아직도 오메가가 아니었고, 태림 씨는 대뜸 찾아온 러트


증세에 나보다 더 놀란 눈치였다. 더운 사람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가 화난 사람처럼 숨을 몰아 내쉬더니,
그는 2 층 침실에 틀어박혔다.

오메가였더라면 본능적으로 알았을까? 그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를…. 그러나 베타에 불과한 나는


모자람투성이였다. 그저 허둥지둥했다. 최소한 침착하기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처음 겪어 보는
일에 경황이 없었다.

체향을 맡지 못하고 페로몬도 느끼지 못하는 타인으로서 바라보기에 태림 씨는 그저, 아주 많이 아픈 사람


같았다. 나는 그가 걱정됐다. 두루뭉술한 지식과 걱정에 힘입은 용기만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그의 말을
무시할 정도로… 나는 태림 씨가 걱정됐다. 걱정됐을 뿐인데….

내가 바보였다. 다 내 잘못이다. 그의 흥분을 달래 주지도 못하는 주제에 용감하게 다가간 게 잘못이고,


그가 내 말을 전부 이해하는 줄로 착각하고 허튼소리로 달래려 든 게 잘못이고, 흥분 상태의 알파에게
억제제 주사를 놓으려던 게 잘못이었다.

베타 주제에 러트 상태에 접어든 우성 알파를 제압하려 든 죗값은 톡톡히 치러야 했다. 태림 씨가 내 팔을


세게 쳐 내고 나를 침대에 내리눌렀다. 내가 반항하지 않아서 더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거기서 더 고집을 부렸더라면 의식 없는 태림 씨 손에 죽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폭력이 익숙했다. 상대가 천태림 씨라는 건 두렵고 낯설었지만, 폭력 자체는 익숙했다.
다행이지… 내 형이 강일해인 게 도움이 될 때가 있긴 하다는 게.

이성보다도 내 몸이 더 빠르게 반응했던 것 같다. 목이 죄여 침대에 처박히자마자 손에 든 주사기를


버리고, 죽은 듯 두 팔을 납작하게 뻗었다. 반항하기는커녕 미동도 않는 나를 볼 때 태림 씨의 눈동자엔
빛이 없었다. 그냥… 새카맸다.

그대로 두어 번 기침하더니, 그는 내 어깨에 이마를 박았다. 더운 숨을 내뿜는 태림 씨가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를 제대로 달래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두 팔 뻗어 그의 머리를 안았을 때, 그는 나를
뿌리치려다 내 뺨을 쳤다.

세게 휘두른 팔에 얼굴을 맞고 나는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처음엔 바닥에 부딪친 몸이 더 아팠는데,


나중엔 그런 통증은 잘 느껴지지도 않았다. 뺨과 귀가 얼얼하게 달아오르고 온몸에 더운 땀이 흘렀다.
머리가 세게 흔들려서, 어지러웠다. 형에게 맞을 때랑은 너무 달랐다, 태림 씨는 그보다 훨씬 컸고 힘이
강했다.

그때 느끼기로, 태림 씨는 내 존재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침대가 흔들거리도록 그는 매트리스 위에


넘어졌고, 핏대 오른 목 안으로 끓는 듯한 소리를 냈다. 상체를 구기고 더듬더듬, 내가 놓친 주사를 찾는
그의 손을 보자마자 나는 일어나 달아났다.

그리고 벌을 받았다. 러트가 온 남편을 놔두고 도망간 벌….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가려다 뒤늦게 토기가
치밀었다. 갑자기 전신의 근육이 종잇장처럼 가벼워졌다. 반면에 체중은 바위처럼 묵직했다.

나는 그대로 비명을 지르면서 계단을 굴렀다. 쿵, 쿵 소리가 나게 두어 번 세게 부딪치며 떨어지다가,


난간에 발이 걸려 겨우 멈췄다.

그날의 느낌이 아직도 또렷하게 생각난다. 허벅지 근육이 터질 것처럼 당기던 거나 온몸에 아프지 않은
데가 없던 느낌. 높다란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울다가, 나는 기절했다.

태림 씨가 나를 발견한 건 거의 1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제 팔뚝에 억제제 주사를 칼처럼 꽂아 넣고


터덜터덜 나왔다가 날 발견했을 때, 강인한 태림 씨에게조차 그 모습이 트라우마로 남았을 터였다.
난간에 걸린 발은 부러져 있어서 모양이 이상했고 거꾸로 고꾸라져서 목이 꺾여 보였을 거고, 뺨에서는
피가 났으니까….

나중에 듣기로는 코와 귀에서도 물이 흘렀다고 했다, 뇌진탕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나는 어린애처럼 우는 태림 씨의 얼굴을 봤다. 다행히 부러지지 않아 멀쩡한 내 목을


제 허벅지에 올려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 그는 정신없이 울고 있었다.

“괜찮아요.”

내가 그렇게 말했다. 억제제를 맞고 우는 태림 씨보다는 차라리 내가 더 제정신이었다. 숨을 헐떡거리고


말을 더듬으면서 태림 씨는 구급차를 불러 주었고,

“괜찮아요, 태림 씨.”

나는 열심히 그를 달랬다. 괜찮아요, 나 안 아파요. 태림 씨 때문이 아니에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런 말을 뱉는 이유는 내가 상냥한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태림
씨를 아주 많이 사랑해서도, 순전히 그만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괜찮다, 안 아프다. 태림 씨 때문이 아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니까 괜찮다….


그건 나 자신을 달래는 소리였다.

…모든 게 하루아침에 엉망진창이 됐다.

계단 아래에 쓰러진 강해아를 발견했을 땐 충격에 미치는 줄 알았다. 고운 뺨에서 피가 흐르고 계단


난간에 걸린 발가락이 비틀어져 있었다. 그의 코와 귀에서 물이 흐르는데, 크게 잘못되었단 생각에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이었다. 그의 가족들보다 내 부모님이 먼저 찾아왔다. 아버지는 내게 크게 화를


내셨다. 남편이 계단에서 떨어진 줄도 모르고 뭘 했냐고, 꾸중하는 말을 듣는 게 차라리 홀가분했다.
강해아는 내게 괜찮다는 말밖에 하지 않아서 답답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괜찮다고만 말해서….

그날 이후 강해아는 병원에 입원했고 갖가지 치료를 받았다. 잘생기고 예쁘기만 하던 얼굴의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해서, 결국 세 바늘을 꿰매야 했다. 가족들에게는 계단을 굴러서 생긴 상처라고 하기에
나도 그런 줄 알았다.

3 주 동안 나 또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그의 뺨이 찢어지도록 팔로 얼굴을 친 일이 상담 치료 도중에


갑자기 생각났다. 어떻게, 잠깐이래도 그 사실을 잊었을까? 내 팔에 맞자마자 몸이 홱 돌도록 날아가
버리던 모습이 영화 속 모습처럼 번쩍번쩍 떠올랐다. 천둥처럼 내리치고는 두 번 다시 뇌리에서 잊히지
않게 됐다.

드문 형질로 고생을 했을지언정 평생 나 자신을 미워한 적은 없었는데 이때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강해아가 누운 병실 앞에 서서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물어 댈 뿐이었다. 러트에 미쳐서, 사리 분간도
못 하고 그를 때렸다는 사실이 악몽 같았다. 그냥 어지러워서 계단을 굴렀다더니… 왜 나를 감싸 준 건지
그의 배려가 이해되지 않았다.

쩔쩔매며 사과하는 내게 강해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나를 안쓰러워했다. 단순히 사고일


뿐이었으니 당신 잘못이 아니라며 달래기까지 했다.

강해아의 뺨에는 결국 흉터가 남았다. 내가 휘두른 손에 단 한 번 맞았을 뿐인데,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았다. 그게 꼭, 결함 없는 그의 인생에 남은 최초의 오점처럼 생각됐다.

미국 출장 일정이 잡혀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옆에 붙어 있다가 또 한 번 러트라도 온다면, 그땐 내


목에 목줄이라도 매야 하나 무서울 지경이었으니까.

강해아도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말해 왔다. 집을 지키면서 회복도 하고, 운 좋으면 그사이에 오메가로
발현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웃었다. 그가 웃을 때면 뺨에 붙인 밴드가 쭈글쭈글 구겨졌다.

미국으로 출장을 떠나면서 나는 더 강한 억제제를 챙겼고, 현지 병원에도 정신과 상담을 예약했다.


뉴욕에서 보내는 기간 동안 두어 번, 신혼집으로 은철이를 보냈다. USB 를 두고 왔다거나 책을 좀 찾아
달라는 둥 뻔한 핑계를 대면서 강해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때마다 발현했다는 소식을 기대했지만, 바라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자고, 나는
자괴감과 싸웠다. 조금만 더, 해아 씨가 발현하기 전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그럼 지나간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없을 거고, 평생 그 미안함을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날에는 강해아에게 생일 선물을 건네줬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에 그는 연신


괜찮다면서 싱글벙글했다. 혼자 지내는 게 더 편하다더니 날 반기는 모습은 또 외로움 잘 타는 강아지
같았다.
내 체향이 담긴 결정 목걸이를 걸어 주고서 나는 혼자 만족했다. 언제나 걸고 다니라고 신신당부하기도
잊지 않았다, 그 김에 발현이 조금이라도 더 앞당겨지길 바라면서.

…개인 전시회 <빛과 잎>을 열었다. 정신없고 즐거운 날이었다. 내가 걸기를 원했던 그림자 시리즈는 전부
첨삭을 당해서 아쉬웠지만, 장모님께서 그림이 참 좋다고 말해 주셔서 몹시 기뻤다.

이날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하나, 태림 씨는 전시회를 가 본 경험이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고 했다.


여행지에서 큼직큼직한 미술관에 들른 적은 있지만, 누군가의 전시 오픈식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대학 시절부터 매달 오픈식 참여가 일상인 나로서는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신나는 일이었다. 전시회를
보여 주겠다는 핑계로 같이 외출하자는 말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다음 주말이면 큰누나네 미술관에서 러시아 거장 그림을 들여온다 했으니, 오픈 전날인 금요일에 가서


미리 보자고 이야기했다. 다른 관객은 아무도 없이, 오직 단둘이서….

그가 좋다고 말해 주어서 얼마나 기쁘던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 누나에겐 건물
로비에 걸 그림 한 점을 티켓값으로 선물했다. 그러고도 아깝지가 않았다. 결혼하고도 신혼여행을
제외하면, 태림 씨와 단둘이 목적 없는 외출을 해 본 일이 없었으니까.

여느 사랑 노래 가사 같은 데이트를 해 보고 싶었다. 우리들의 집에서 같이 나가고, 돌아올 때에도 함께


귀가하는… 그런 평범한 부부가 되어 보고 싶었다. 그럼 진짜로 가족을 가진 기분을 알 수 있을 테니까.

…강해아의 웃는 얼굴을 보기가 처음이었다. 소리를 내면서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기가. 그
사실이 자못 충격이었다.

사람 적고 조명 불빛이 잔잔한 전시회를 단둘이, 오픈도 전에 보러 온 것 자체는 좋았다. 그런데 대단한


거장 작품이라는 그림은 그저 그랬다. 별로 감동적이지도 않고, 잘 그리긴 했지만 어떤 점이 위대하다는
건지도 공감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별채 작업실 창문 밖으로 자주 보이는 강해아의 그림이 더 나은 것
같았다.

심드렁하니 느릿느릿, 강해아의 보폭에 맞춰 그림을 감상하는 척하는데 갑자기 그가 웃었다. 두 귀에는
오디오 가이드 이어폰을 끼운 채 그림을 바라보며 혼자 웃더니, 뒤늦게 내 표정을 살피고는 입가를 닦아
냈다. 잠깐 묻힌 우유 거품처럼 웃음기가 싹 닦였다.

그러고는 앞서 가 버렸다. 한국어로 된 내 오디오 가이드에서는 한발 늦게, 아마도 그가 불어로 들었을


농담이 흘러나왔다.

아쉬웠다. 잠깐 봤던 웃는 얼굴이 달처럼 환했는데, 제대로 감상하기도 전에 지워져 버렸다는 게.

…태림 씨에게 두 번째 러트가 왔다.

나는 아직도 오메가가 되지 못했는데, 태림 씨는 러트가 벌써 두 번째였다. 우성 알파랑 같이 살면 그


페로몬에라도 자극받아서 발현할 줄로 알았는데… 너무나 실망스럽고 미안했다.
태림 씨에 비해 난 너무 덜떨어진 남편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었다. 우성 알파와
관계하면 오메가 발현이 더 빨리 일어날 수 있단 말이 기억나서, 어떻게든 내 몸으로 그의 러트를 달래
주고 발현도 앞당기고 싶어서, 그래서 함부로 덤볐다. 그땐 내가 오메가인 줄 알았으니까… 그렇게만
하면 발현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으니까.

흥분한 태림 씨가 나를 안은 게 다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그 밤 내내 나는 고통밖에 느끼질 못했다.


이성 없는 태림 씨조차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오메가들은 괜찮다던데… 알파에게 안기는 게
기쁨이라던데… 왜 나는 그렇지 못한지 자존심이 상하고 또 그만큼 아팠다.

그에게 안겨서 기분 좋아야 하는데, 태림 씨랑 관계하고 우리 사이가 깊어지는 날만을 기다려 왔는데,
나는 이러다 죽겠구나 생각했다. 피가 흐르고 배가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고통에 짓눌려서 덜렁덜렁
흔들거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의 체중에 뭉개진 내내 나는 내 팔에 얼굴을 묻고 연신 킁킁거렸다. 이제 발현했을까, 오메가 향이라는


게 좀 날까 하고 울면서 냄새를 맡았다. 결국 발현은 되지 않았고 다치기만 했다.

몇 번인가 도망치려다가 태림 씨한테 붙잡혔는데, 그때 오른팔을 다치는 바람에 놀라서 비명을 질러 댄 게


화근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이웃이 경찰을 불렀다. 경찰차를 타고 병원에 가야 했다.

나에 대한 일은 내가 먼저 알면 좋겠는데… 내 인생은 늘 남이 먼저 알았다. 내 장래 희망이 무어여야


하는지, 어디에서 살고 누구와 친하게 지내야 하는지, 몇 살에 결혼하고 어떤 남편이 되어야 하는지,
가끔은… 내가 사실상 베타인 것조차도… 전부 남이 먼저 알았다.

태림 씨가 먼저 알았다…, 내 발현율이 80 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걸. 강해아는 베타라는 걸, 그의


짝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걸, 가짜 매물이었다는 걸. 나보다도 먼저….

…강해아와 이혼할 방법을 찾느라 몇 주를 썼다.

결혼 계약서의 카피본이 구깃구깃해지고 계약서 자체의 내용보다도 덧붙인 메모가 많아질 무렵에는 가장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만 알게 됐다. 나는 사기당했다, 인생의 반려자가 될 거라 믿었던 남자에게.

마지막 법률 상담을 마치고 돌아온 차 안에는 묵직한 서류가 둘 놓였다. 하나는 한성 그룹에서 걸어온
계약에 숨겨진 설계를 파헤친 자료였다. 강해아의 형질과는 관계없이, 그와 이혼하려면 내 사업을
고스란히 한성 그룹에 넘겨야만 했다.

두 번째 서류는 더욱 악질이었다. 한성 측에서는 애초에 그 모든 자료 조사를 결혼 전에 마쳤다는 증거가,


부인할 수 없게 분명했다.

헤드라이트를 끄는 것도 잊고 운전석에 앉아 열리는 차고 문을 볼 적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제 아버지와 친근하게 안부 전화를 나누던
강해아가 떠올랐다.

그도 알고 있었을까. 내게 중요한 건 그뿐이었다.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갖은 증거들이 그렇게 말했다. 강해아도 제 형질을 알았다고, 겁 없는 성격이라 77


퍼센트 확률에 기대어 도박을 건 거라고, 강일해가 보낸 대변인이 대놓고 말하는 소리가 내 정신을
뒤흔들어 놓았다.

소송에 도움이 될 만한 서류를 글로브 박스에서 꺼냈다. 이어질 분쟁을 생각해 강해아에게는 보여 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손에 든 채 집으로 들어갔다. 내심으로는 패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강해아가 내 계획을 알아차리고, 내가 모르는 어떤 사정과 자초지종을 들려주고, 이혼하지 말자고,


이 고난을 저와 같이 버텨 달라고 부탁하길 원했다. 그런 강해아에게 기꺼이 져 주고 싶었다.

그러나 강해아는 없었다. 서류 뭉치를 내려놓고 온 집 안을 뒤졌지만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존재감이 사라진 집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나 역시 속이 빈 채로 광활한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고야 말았다.

휴대폰과 지갑만 챙겨 들고 그는 우리의 집을 떠나 버렸다. 나와의 대면을 피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라고


생각됐다. 알고 있었던 거라고. 알고도 나를 속여서, 그래서 도망을 친 거라고.

잠깐이나마 그를 걱정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닭 쫓던 개가 된 기분이었다.

나를 피해 도망친 강해아는 친구라는 평론가의 집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그들이 전년도 겨울까지만 해도
사귀던 사이라는 걸 시은철에게 전해 들을 때, 나는 휴지통에 이혼 소송 서류를 집어넣고 작은 불을 내던
차였다.

그 사람도 베타라더라.

여태껏 그 말이 내게 소외감을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날, 그 순간을 제외한다면.

…도망치고야 말았다. 태림 씨를 마주 보는 게 무서워서. 형이 보낸 서류들과 사진 몇 장에 겁을 먹어서….

나는 조금도 어른이지 못했고, 어른답지 못한 짓을 해 버렸다. 그때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처럼 생각됐다. 맨정신인 태림 씨마저 나를 비난한다면, 장애물처럼 밀쳐 버린다면, 때린다면…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혀서, 당황스럽고, 부끄럽고, 무서워서…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세상에서 제일 내 편이라고 생각되는 임 선생님 집에 숨었다. 그 외에는 누구도 만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곧 발현할 거라고 큰소리를 떵떵 쳐 댄 지난날이 대번에 한심해졌다.

선생님은 애써 나를 달랬다. 내가 베타이든 오메가이든 상관없다는 말을 들을 적에는 그게 위로인지


속박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낼 때마다 일해 형은 날 주저앉혔다. 별다른 수고는 필요치 않았다. ‘네가
오메가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그가 뭐라고 할 것 같냐’는 질문 하나면, 나를 넘어뜨리기 충분했다.

뺨을 맞은 순간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형의 말에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더는 태림 씨가 나를 봐줄


이유도 내 실수를 참아 주고 내 옆자리에서 견뎌 줄 이유도, 없었다. 오메가로 발현할 거라는 기다림.
그것만이 우리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이유였는데, 그게 사라졌다. 평생 내가 기다리던 유일한 일이었는데
… 그게 사라졌다.

발현율이 77 퍼센트나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재수 없을 수가 있냐고 형은 나를 욕했다. 아버지가 연락을


받지 않는 이유도 내게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했고, 전부 내 탓이라고만 했다.

그땐 그게 맞는 말 같았다. 내가 발현만 제대로 했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것 하나를 제대로 못해서


우리 결혼을 망쳐 버렸다.

마침내 용기 내서 집으로 돌아갈 적엔 내 손에 들린 편지가 열두 장이었다. 태림 씨가 내게 화를 낼까 봐,


이번에야말로 맨정신으로 나를 증오하는 그를 보게 될까 봐 무서워서, 편지로나마 내 입장을 적어 그에게
건네줄 계획이었다. 사람 인생을 망쳐 놓고 어린애 장난을 치느냐고 성내는 모습을 쉼 없이 상상하면서
나는 편지 겉면에 식은땀을 묻혀 댔다.

아직 태림 씨가 돌아오지 않은 집에 앉아서는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 채널을 틀어 놓는 게 당시 내겐 습관


같은 거였다. 한국어 발음을 듣고, 배우려는 습관…. 아나운서가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적어 둔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텔레비전 너머에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뉴스가, 그런데 이상했다.

서울지검, 동부지검, 천희중 검사장… 벙찐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나운서의 옆에


자료 화면으로 띄워진 그림은 내가 그린, 내 그림이었다. 황금 테를 두른 <빛과 잎>.

‘정치 공작’, ‘로비’, 그리고 익숙한 의원님들 이름이 몇 명씩 뭉쳐 흘러나왔다. 또박또박 울려 나오는
말이 외계어처럼 느껴졌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깐 지나가는 찌라시겠지… 그게 내 희망 사항이었다. 그러나 거짓일지언정 소식이 정정되는 일은 없었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온 태림 씨는 거실 소파에 앉은 나를 바라봤다. 바라만, 봤다. 걱정했던 비난도


무서웠던 폭력도 없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내가 있는 집을 떠났다.

천희중 검사장님을 향한 언론의 인신공격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나는 그 말들을 좇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서부터 가짜인지, 어떻게 된 일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게 됐다.
평생을 아버지 손 아래서 꼭두각시로 살다 보니 내겐 누굴 지킬 힘도 지식도 없었다.

일해 형에게 상담을 시도했지만 괜히 나서서 여론을 망치지 말고 엎드려 있으라는 말만 들었다. 아버지는
연락을 잘 받지 않았고 작은누나는 해외에 있었다. 큰누나는, 한성 그룹이 받을 타격을 막느라 바쁘다고
했다.

그럼, 태림 씨가 받는 타격은 어떻게 하지…, 집에 틀어박혀 머리칼을 움켜쥐고 떨던 밤이 있었다. 평생


내 이름과 얼굴을 걸고 남이 시키는 대로 나 자신을 팔던 SNS 화면이 띄워진 휴대폰이 있었다.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 오류입니다.]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 오류입니다.]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 오류입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잘 쓰던 계정의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잠깐이나마 순진하게, 내가


비밀번호를 까먹었구나 착각했다. 휴대폰 인증 페이지로 넘어간 뒤에야, 그 계정의 실질적인 주인은 내가
아닌 퍼블리시스트라는 걸 깨달았다.

내 얼굴을 건 내 계정인데, 지난 6 년간 그렇게 써 왔는데… 내가 접속할 수 없었다. 차단당해 버렸다.

평생 느껴 보지 못했던 무력감이 내 몸을 바위처럼 짓눌러 댔다.

며칠 만에 태림 씨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강해아가 가해자가 된 순간이 있었다. 천태림의 기나긴 고통을


기만하고 피해자 행세까지 한 더러운 베타가 되는 순간이….

…지옥 같은 한 달이 지나갔을 때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끝에 미쳐 버려서는, 해방감을… 느꼈다. 본가 앞에 줄지어 선 기자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다 자리를 치울 적에 아주 짧게, 영문도 모르는 채 잠깐이나마 안도했다. 벌레 같은 기자
새끼들이 드디어 우리 가족을 놓아주는구나, 물어뜯을 다른 사건을 찾았나 보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는 그 직후 받았다. 사인은 심장 마비였다.

내 발밑의 땅이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병원 앞에 도착해서는 쌩쌩 달리는 차들을 볼 적에 그대로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러면 다음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도피성 충동이 벌컥 들었다가, 내 팔에 몸을
기대고 우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가라앉았다.

이후 석 달의 기억은 드문드문했다. 곧장 준비된 장례식장을 찾아온 강준일 회장 일가는 조용히 내쫓았다.


그래도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소란은 피우지 말자고, 나를 다잡는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셨다.

강해아는, 돌아가 달라는 내 부탁 하나를 들어주질 않았다. 사람 없는 복도에서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는 날 고문했다.

염치도 모르는 손으로, 그가 내게 봉투를 건넸다. 구깃구깃 닳아 빠진 편지 따위가 부조금과 함께 들어


있었다. 내게, 내 아버지에게, 내 어머니에게 이런 짓을 벌여 놓고 돈을 주는 그가 악마 같았다. 나는
그것들을 봉투째로 갈가리 찢어 버렸다. 그의 얼굴에 종이 뭉치를 내던지고 마음에도 없는 모욕을 뱉었다.

당신을 죽도록 혐오한다…고, 왜 나만이 악당이고 짐승 새끼여야 하느냐고,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다른 모든 걸 전부 용서하더라도 거짓말만큼은 용서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고, 비명인지
외침인지를 토해 냈다.

그렇게 기어코, 나는 강해아를 상처 입혔다. 소리 없이 눈물 흘리며 그는 감전된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유난히 반짝거리던 갈색 눈동자가 절망으로 컴컴해졌다.

그는 그 순간에도 내가 선물한 목걸이를 두르고 있었다. 그 흰 목에, 내 사람이라는 표식으로 걸어


주었던 목걸이를…, 그 빌어먹을 목걸이를 나는 빼앗았다.

그러자 발작하듯 그가 애원했다. 제발 돌려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고 제 두 손바닥을 파리처럼 싹싹


문지르며,

‘정말, 몰랐어요. …난 정말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정말….’

끝내 거짓 연기를 하고,

‘돌려주세요, 제발…. 제발, 태림 씨.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내가 떠난 뒤에도 복도에 널브러져 몇 시간을 버텼다.

나를 속이고 내 세계를 망가뜨린 강해아가 미웠다. 그를 망치고 그가 나만큼 우는 꼴을 보면 속이 시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목덜미에 생긴 생채기 하나, 저는 정말 몰랐다며 애원하며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 나를 조금도 기쁘게 해 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내 상실을 보상해 주지 못했다.

그저 끔찍했다. 강해아의 말끔한 얼굴도, 귀염성 있는 말투도, 우유부단한 성격도. 그의 존재가 나는


끔찍했다. 내 아버지의 시신이 든 관짝을 바로 옆방에 놓고도 아직도 그를 싫어하지 않는 내가 끔찍했다.

나는 차가워졌다.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바위를 흉내 냈다. 단단해져야만 했다, 미안하다며 빌고
애원하는 강해아를 끝끝내 용서하지 않기 위해서.
강해아에게 흔들리는 순간마다 나는 패륜아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눈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잊어버리고는 했다.

매일 한나절의 절반조차 기억나질 않는데, 강해아의 우는 얼굴만이 뇌리에 또렷했다.

…천태림 씨는 완전히 망가졌다.

그의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 또한 상실이 가져다준 슬픔에 무너졌다. 잘 통제되는가 싶던 러트 사이클이


엉망진창이 됐다.

나는 그만큼 미쳐 있었다. 의식 없이 화와 흥분으로 가득 찬 태림 씨의 배 밑으로 기어들어 갈 만큼…


나는 미쳐 있었다.

우성 알파가 노팅을 해 주면, 베타라도 오메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제 내가 믿을 확률은


그것뿐이었다. 각인을 하든 그 때문에 죽게 되든 어쩌든 다 좋았다. 오메가가 될 수만 있다면, 태림 씨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에게 최소한의 보상이라도 해 줄 수 있는 몸이 된다면… 내가
바란 건 그뿐이었다.

일해 형을 통해 오메가 페로몬이 섞였다는 향수를 구했다. 내 체취가 사라지게끔 온몸을 박박 문질러 씻고,
두어 번 몸에 뿌렸다. 태림 씨가 나를 오메가라 착각해 주었으면, 그래서 내게 노팅해 줬으면
바라서였다.

내 못된 계획은 반은 성공했고 반은 실패했다. 그에게 억지로 안겨 피를 흘리며 노팅하기는 했지만, 나는


오메가가 되진 못했다.

내 사타구니 사이를 적신 피가 갈색으로 변하고 뜨끈한 정액이 굳어 말라 갈 즈음에야 태림 씨는 정신을


차렸다. 비명을 지르는 그를 끌어안고 괴물처럼 나는 애원했다. 태림 씨, 태림 씨, 가지 마세요… 그런
말들을 했다. 버리고 가지 말라고… 다시 안아 달라고, 한 번 더 하면 그땐 오메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악몽에서 깬 사람처럼 태림 씨는 끝없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의 팔에 매달려 눈물을 묻혔다.

억지로 턱을 뻗어 키스하는 나를 태림 씨는 눈물로 받아 주었다. 그러고는 내팽개쳤다.

침대 헤드로 튕겨져 나간 나는 철제 스탠드에 이마를 부딪쳤다. 잠시 기절했다가 깼을 때 태림 씨는 나를


껴안고 있었다. 뭉개진 발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고 나를 저주하고 있었다. 내 이마를 기댄 그의 뜨거운
가슴 안에서 심장이 광포하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척 연기했다. 조금이라도 더 그가 날 안아 줬으면 바라서….

그대로 태림 씨는 나를 떠났다. 내 구차한 애원과 가난한 설득을 들어주어 이혼만은 하지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나를 떠났다.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강해아의 옆에서는 도무지 살 수가 없다.

용서해 달라고 빌고 안아 달라고 우는 그 남자의 곁에서 나는 한시라도 빨리 떨어져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곁에 머물렀다가는, 그를 용서하고 안아 주게 될 것 같았다.
괜찮다는 말만큼은 절대로 해선 안 됐다. 그렇게 말했다간 내 아버지를 죽인 일을 용서하는 꼴이었다.
모든 정황이 강해아를 겨냥하는데 나는 그를 완전히 놔 버릴 수가 없었다. 뚜렷한 증거들이 그를 빌어먹을
베타, 내 삶을 망치려고 작정한 사기꾼, 뻔뻔한 강씨 집안의 연기자라는데 내 앞에 놓인 강해아를 보면…
나는 다시 그가 좋아지려 했다.

우리는 붙어 있어선 안 됐다. 서로를 좀먹고 물어뜯고 난자할 뿐이었다. 억지로 그를 떼어 내고서 나는
끔찍하게 넓은 집을 떠났다.

한 해, 두 해… 자그마치 6 년을, 나는 그를 떠나기만 했다. 미국으로의 마지막 출장을 떠날 적에


강해아는 더는 내게 인사하지 않았다. 다녀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기다리겠다는 말도 하질 않았다.
본래 게스트 룸이던 제 방에 틀어박혀 그는 얼굴조차 보여 주질 않았다.

나 역시 구태여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캐리어를 챙겨 들고 조용히 현관으로 나설


따름이었다. 그럴 적에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감기에 걸렸나.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추운가, 집이. 많이 추운가… 하고.

기나긴 출장이 넉 달째 이어지던 밤에 갑작스러운 전화가 걸려 왔다. 액정에 뜬, ‘강해아’ 이름 세


글자를 쳐다보면서 나는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길게 울리는 신호음은 한 차례 그쳤다가, 다시금 울리기
시작했다.

망설임 끝에 받은 전화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답잖은 연락이었다.

대뜸 전화해 놓고는, 강해아는 내게 집으로 돌아오면 무얼 하고 싶으냐고 질문했다. 여러 가지 문장들이


내 머리를 채웠다.

뭘 하고 싶으냐고?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그대로 6 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당신을 만난 그날 그


자리로 돌아가서, 내가 아는 사실을 낱낱이 밝히고 당신 표정을 확인하고 싶다.

세상이 말하고 내 이성이 판단한 것처럼 당신이 천부적인 거짓말쟁이인 건지. 아니면 남들 전부 거짓을
말하는데 당신 홀로 순전한 무고자인 건지. 당신 반응을 보고 내 평생의 미스터리를 풀고 싶다.

그리고 말해 주고 싶다. 나는 네게 각인했노라고.

그날, 그 밤에… 분노와 증오로 얼룩져 이성을 잃어버린 날에. 당신이 가짜 오메가 페로몬을 뒤집어쓰고
내 배 밑으로 기어들어 온 날에… 당신은 기억도 못 하고, 안다 한들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각인했다고. 존재하지도 않는 강해아라는 오메가에게 각인했다고.

당신은 오메가가 아닌데, 내게 안길 수도, 내 흉측해진 육신을 품을 수도 없는 남자인데, 그 알량한


페로몬 향수 몇 방울이 나를 속였다. 미쳐서는 당신이 오메가가 되었다고 착각한 순간이 기억난다.
꺽꺽거리며 울어 대는 당신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서는… 이제 내가 당신을 용서하더라도 모두가 날 이해해
주겠지… 오메가라서 그런 거니까, 오메가라면 별수 없으니까…. 구차한 기대감에 잠깐이나마 빌어먹게
행복했다.

착해 보이는 눈을 한 당신 얼굴에 대고 소리치고 싶다. 내 삶을 망치고 자아를 부숴 놓은 건 당신이


베타라는 사실도 아버지의 죽음도 아니었다고. 내가 당신에게 각인해서, 영원히 나를 받아 줄 수 없고
내게 각인할 일 없는 벽과 같은 당신에게 미쳐서, 그날 이후 매일매일 상실감을 겪으며 사노라고. 죽지
못해서 살고 헤어지지 못해서 견딘다고….

수많은 말들을 쏟아 내는 대신 나는 쉬운 대답을 했다. 이제는 사고도 놀랄 소식도 들리지 않았으면 해서,
조용했으면 좋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어딘지 이상한, 밤이었다. 땀과 눈물로 젖은 휴대폰을 내려놓았을 때 속이 뒤집히고 역한 토기가


치밀었다. 불안 증세 때문에 약을 꺼내 씹어 먹고는, 그 맛이 입 안을 떠나기도 전에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가 뜨기 전까지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강해아는 받지 않았다. 이제 내가 아니라 당신이 밤인가
보다, 이륙 공지를 들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웬일로 갑자기 연락해서는, 돌아오면 뭘 하고 싶냐고 내
일정을 다 묻다니….

잠깐이나마 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어쩌면 결혼 이후 6 년 만에, 내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난 지 5 년


만에, 강해아라는 사람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해맑은 생각을.

밤의 뉴욕을 떠나 도착한 서울은 다시 밤이었다. 우중충한 저녁 하늘을 쳐다보며 나는 집으로 향했다.


한편으로 시커멓게 불안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에 차, 아주 기괴한 상태였다. 어쩌면 기대감은 불길한
예감에 집중하지 않기 위한 방패인지도 몰랐다.

내 인생의 궤가 어쩌다 이렇게 뒤집혔을까. 컴컴하니 불 꺼진 이층집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난생처음 보는 개가 나를 향해 달려오며 짖어 댔다. 목걸이를 찬 녀석의 뒤로 커다란
개집이 보였다. 어느새 내가, 이 집의 손님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대뜸 들이닥친 나를 보거든 강해아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궁금했다. 불청객이라도 본 것처럼 당황할 것


같다가도, 오히려 아무렇잖게 인사하려나 싶기도 했고, 방 안에 틀어박혀 나를 외면하겠거니 생각됐다.

저벅저벅 본채로 걸어가려는데 흰 개가 내 앞을 연거푸 막아섰다. 대충 녀석을 피하며 도착한 현관문은 한


뼘 간격으로 열린 채였다. 문 잠그는 것도 잊었나… 허술한 모양새에 황당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여상해서 이상했던 전화 따위는 잊어버리고, 벌써 잠들었나 보다.

소리 없이 들어선 온 집 안은 놀랍도록 깨끗했다. 어둠 안에서도 열을 맞추어 정리된 장식장과 먼지 하나


떠다니지 않는 말끔한 복도가 훤히 보였다. 사람 사는 집이라기보다 손님 맞을 준비를 마친 펜트하우스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무심결에 발을 움직였다가 나는 무얼 걷어차고야 말았다. 동시에 복도의 센서 등이 훤히 켜졌다. 고개


숙여 내려다보니 데구르르 굴러간 세라믹 밥그릇과, 쏟아진 개 사료가 보였다. 똑같은 그릇이 한둘이
아니었다. 복도 곳곳 모서리마다 그릇이 여럿, 사료며 물을 잔뜩 부어다 채운 모습이었다.

혹시 강해아가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간 게 아닌가. 나는 침음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벌컥


열자, 어둡다고 느껴질 만치 빼곡하게 채워진 반찬 통이며 래핑된 음식들이 보였다. 개 사료를 챙겨
두었듯이 사람 몫도 챙겨 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사실상 강해아는 혼자 사는 사람이나 진배없는데, 왜.
어딜 갔길래….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잠긴 채 나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당장 그를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쏟아


내려던 열망은 묘한 불안감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손 안에 쥔 짐 가방만 괜히 들썩거리며 거실로 향했다.

그제야, 테이블 중앙에 놓인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줄 노트 낱장을 찢어다가 적어 둔 메모였다.

「냉장고에 반찬 해 놨어요. 빨래는 다 말랐을 테니까 걷어만 주세요.

월요일부터 일하실 분 구했어요. 급여는 이미 지급했으니 그냥 좀 써 주세요.」

한글을 쓸 때면 꾹꾹 눌러 적던 강해아였다. 그가 무얼 받아 적고 나면 그 아래 받쳤던 종이에도 펜이


눌린 흔적이 남고는 했었다. 어린 학생이 공들여 필기한 듯한 글씨체를 보자니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나왔다.
「마당에 있는 진도 믹스 내쫓지 말고 이름 붙여 주세요. 중성화 했고, 코로나라는 것도 접종했어요.
자꾸 눈물을 흘리는데 결막염이 있어서 그렇대요. 전염되는 병 아니래요. 거의 다 나았어요.」

…아무렴 내가 당신 개를 쫓아내기라도 할까.

「부탁할 게 하나 있어요.」

부탁? 당신은 나한테 그런 거, 안 하잖아.

「저는 지금 별채에 있을 건데, 태림 씨는 절대로 들어오지 마세요.

그냥 경찰에 신고만 해 주세요. 출동할 때 사이렌 켤 필요 없다고 해 주세요.

절대로 태림 씨는 별채로 들어오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드리는 부탁이에요.」

온몸이 대번에 둔해졌다. 당신이 지금 별채에 있나.

‘왜….’

쓰이지 않게 된 지 오래인데.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몇 년도 더 전 일인데. 왜


별채에 있나, 기침을 하던 사람이. 이 추운 날에….

「이제까지 많이 미안했어요.」

마지막 문장을 두 번, 세 번, 네 번을 읽어 내렸다. 그런데도 이해되질 않았다. 간단한 문장에 속이


체하고야 말았다.

나는 빨리 움직이지 못했다. 악몽을 꾸는 것처럼 팔다리가 무거워서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집 밖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나를 향해,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가 어서 가라고, 가서 그를 보라고 독촉하는
듯했다.

떨리는 무릎으로 거대한 집을 빠져나오자 하얀 개가 다시 보였다. 별채 문을 박박 긁으며 그 개는 소리


내어 짖다가, 낑낑거리며 울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갈색 얼룩으로 눈 밑을 적신 개를 향해, 나는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차가운 문고리를 당기는데 왜, 수백 수천 번을 본 눈물짓는 얼굴이 아닌 당신 웃음이 생각나던지.

6 년 전 딱 한 번 보여 준, 미소가…. 데이트를 하자며 나를 데려간 전시회장에 작품보다 더 작품처럼


서서,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얼굴이…, 왜 하필이면 그 얼굴이 생각났는지.
“강해아 씨.”

날씨가 흐린 탓에 별채의 거대한 창문조차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컴컴한 어둠 속에 긴 소파가


보였다. 강해아는 잠들어 있었다. 소파 위에 길게 누운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바닥까지 덮어 놓은 비닐
위로 내 가방이 떨어졌다. 발을 뻗고 싶었다. 그러나 다가설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나는 알았다, 이미 그는 죽었다는 것을.

“…해아 씨. 강해아 씨?”

중얼거리는 내 옆을 이름 모를 개 한 마리가 스쳐 지났다. 희고 투박하게 생긴 개가 강해아의 볼과 입을


핥기 시작했다. 우울과 슬픔이 서려 있던 얼굴이 쿠션 밑으로 흘러내렸다. 감긴 눈과 벌어진 입술은
기이할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그가 잠들어 있을 때에만. 깨어나 나를 마주 볼 때면 그 평안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그는 영원히 나를 볼 일이 없게 되었다. 영원히 편안해지기로 결정 내린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곧 깨어날 사람 다루듯이 나는 물었다. 돌아올 답이 없다는 걸 이미 알았다. 그런데도 상처


입었다. 강해아가 대답하지 않는다, 내 질문에 반응하지 않는다. 욕을 해도 좋으니 한마디 말 좀 해
달라고 매달리던 사람인데.

한 발 다가서자 무릎부터 무너졌다. 쿵 소리를 내며 바닥 위로 넘어졌다. 찬 비닐의 감촉이 퍼석퍼석했다.

나는 그에게로 기어가다시피 했다. 말라빠진 뺨을 핥는 개를 억지로 밀어 냈다. 죽은 이의 체중이 얼마나


묵직한가를 나는 아버지의 관을 들며 익혔었다. 그런데 강해아의 시체는 몹시도 가벼웠다. 끔찍하게
슬프고 무섭도록 끈질기던 생명력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강해아 씨, 일어나 보세요.”

여윈 뺨을 더듬거리며 내가 말했다. 내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났다. 괜한 장난을 다 겪는다는 듯이.

“지금 일어나면… 전부 없던 일로 할 테니까.”

부드러운 머리칼을 산 사람 다루듯 헤집으며 그렇게 속삭였다.

“용서할게요. 당신 이야기도 다 믿을게… 우리 다시 시작합시다. 당신은 그냥 일어나기만 하면 돼.


그러니까….”

저주 같던 각인이 끊어졌다. 나를 묶었던 족쇄도 풀렸다. 더는 그와 떨어져 지낸다 해서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됐다. 오래도록 내 목을 조이던 상실도 이제는 끝이 났다.

“일어나 봐요, 해아 씨.”

해방의 순간에 나는 무너졌다.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지만 입 밖으로 새어 나온 건 가느다란 숨에


불과했다.

“강해아 씨….”

그러고 보면 당신 이름을 부르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세상 둘도 없이 지옥 같은 이름이 되어 버린 지도


딱 그만큼 오래됐다.

그 긴 시간 동안 당신은 나를 붙잡고 버텼다. 우리 사이에 ‘안녕’은 없는 거라며 눈물로 매달렸다.


그런 게 가족이 아니냐고, 그러니 우리는 헤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 당신을 진심으로 증오한 순간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안녕이라고 나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내가 견디고 넘어가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내가 참아


내고 내가 견디면, 당신은 언제 돌아가건 남아 있는 집인 줄로 알았다. 내가 침묵하는 동안에 당신은 잘
참았다. 당신이 언제나 나를 기다린다는 사실이 익숙해져 버릴 정도로, 오래도록 잘 참았다.

그래서 우리의 안녕은 당신만이 홀가분했다. 나는 무너졌다. 무너지고 깨지고 산산이 부서졌다. 무릎
꿇린 채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잊자, 전부. 창백한 당신을 끌어안고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나는 소원했다. 당신이 내게 준 상처도
내가 당신에게 준 상처도 전부 잊겠노라고. 전부 잊어버리리라. 지워 버리리라. 당신을 만나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게….

그러나 나는 당신을 모르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피로 적신 눈이 뜨거웠다.

  ♡ ♡ ᕬ ᕬ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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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골드  ♡
♡재업금지공금절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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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 속의 닭

바닥에 쓰러져 울면서 나는 등을 한껏 웅크렸다. 두 팔 안에 안았던 차가운 몸이 온데간데없었다. 뜨겁던


눈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고, 헥헥거리며 짖어 대는 놀란 개 소리도 사라졌다. 마지막 페이지가
덩그러니 펼쳐진 노트 하나가 꼭 나처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수없이 그인 빗금들이 빨갰다. 수많은 문장과 고백들을 적어 놓고는 구기고, 찢고, 줄을 쳐 가려 놓은


일지가, 그저 빨갰다.

나는 해아를 귀여워했다, 그가 내뱉는 모든 말이 그저 귀엽게만 생각됐었다.

‘태림 씨. 아파요….’

이따금 불분명한 잠꼬대를 해 대는 밤이면, 나는 그의 이마를 만져 보곤 했다. 열은 없는데…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말았다. 흔들어 깨울까 하다 그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토닥, 토닥
… 두들겨 주면서,

‘해아야. 그래. 괜찮아.’


그런 말로 그의 악몽을 달랬다. …그랬었다. 그럴 자격도 없는 주제에.

“왜….”

눈물 젖은 얼굴을 들자 해아가 보였다. 스물여섯 살, 뭘 해도 예쁘고 찬란하던 해아가, 서른두 살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슬픔에 신음하고 바닥에 무너져 내린 나를 보는 두 눈동자가 놀란 듯이 보였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왜… 왜 나랑 다시 결혼한 거야?”

내가 물었다.

“그냥 연을 끊어 버렸어야지. 도망이라도 쳤어야지…. 내가 어떤 새끼인 줄 알고 다시 결혼을 해?


좋아한다고, 어떻게 다시 말을 해?”

비명처럼 내지른 외침에 해아가 입을 벙긋거렸다. 내가 왜 우는지, 어째서 화를 내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모른다, 강해아는… 그 모든 일을 겪은 이가 저 혼자만은 아니라는 걸.

“왜 나랑 결혼했어. 멀리 떠났어야지…, 떠나 버렸어야지. 파리든, 피렌체든,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든


가서 네 인생을 살았어야지….”

나를 버렸어야지, 떠났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해아에게 무릎으로 기어갔다. 허수아비처럼 멍하니


선 그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마른 배에 얼굴을 묻었다. 내 눈물이 축축하게 해아의 옷을 적셨다.

“태림 씨, 첫눈 내리는 거 본 적 있어요?”

다정한 손으로 내 뒷머리를 만지며 그가 물었다. 꼭 지난날의 나처럼, 재밌는 장난이라도 겪는다는 듯이
가짜 웃음소리를 섞은 목소리였다.

“처음 내리는 눈은…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 버리잖아요. 비처럼요. 그러다가… 안 녹고, 바닥에 붙어서,
하얗게 쌓이는 첫 눈송이가 있고…. 그 눈송이 때문에 다음 눈송이, 또 다음 눈송이가 쌓이잖아요.”

이내 그의 두 손이 내 볼을 감쌌다. 천천히, 고개를 들게 하고 내 시선에 제 시선을 맞추었다.

“태림 씨가 나한테 딱 그랬어요…. 우리 처음 만난 날에 본 웃어 주는 얼굴 하나, 그 기대감, 기분 좋게


설레던 게…. 그게 내 마음에 남아서 녹질 않았어요. 다음, 또 다음 눈송이가 거기에 매달려서 자꾸만
쌓였어요.”

해아가 운다.

“그래서 좋아했어요.”

고백이, 과거형이었다. 내내 과거형이다, 예쁜 말로 속삭이는 말들이… 지금의 내가 아닌 예전의 나를


포장하고 있었다.

“나… 한 번도 태림 씨를 미워한 적이 없어요. 헤어지고 싶었던 적도, 멀어지고 싶었던 적도 없어요.


다시 결혼해서 참 좋았어요….”

눈물이 빗방울처럼 내 뺨 위로 떨어졌다.

“아직… 우리, 서로를 제대로 만나 보지도 못했으니까.”


후두둑 떨어뜨린 눈물방울을 엄지 끝마디로 닦아 주더니, 해아는 웃었다. 착해 보이는 눈동자가 미소로
좁아졌다. 새 눈물이 같은 자리에 또 떨어졌다.

“근데 이제는…, 이제는요. 나는 태림 씨한테 사랑받고 싶어요. 내가 누구인지 알아주는 태림 씨한테…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요. 태림 씨랑 살고 싶어요.”

그래, 그러자.

“…살고 싶어요.”

우리 같이 살자….

대답하는 대신 나는 그를 껴안았다. 나를 일으키는 대신에 해아는, 나를 따라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고마워요, 내 이야기… 믿어 줘서.”

부둥켜안은 채 서로의 어깨를 눈물로 적실 적에 해아가 그렇게 속삭였다. 기쁨으로 떨리는 말 앞에 나는


고백을 삼켰다.

지나간 상실은 너만이 겪은 일이 아니라고, 나도 모든 게 기억났다고, 이제는 모두 알겠다고… 그런 말은


구태여 뱉지 않았다. 해아가 멋대로 추측하고, 좋을 대로 재단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이제는 알았다, 그는 홀로 순전한 무고자라는 걸. 나를 죽도록 좋아하고 내게 무엇이건 내어 줄


사람이라서, 지나간 잘못으로 내가 울었다는 걸 알면 저까지 따라 울 사람이라는 걸.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라는 걸 알더라도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 괜찮다는 말로 나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말로 끌어안아 줄
거라는 걸… 그런 해아에게 나는 용서받고 싶지 않았다.

“…사랑해, 해아야.”

처음 느끼는 행복이 내 가슴 안에 차올랐다. 이제야 만났어…, 그렇게 생각했다. 마침내 강해아를…


강해아를 다시 만났다.

히트 사이클의 마지막 날에 우리는 집을 청소했다. 집으로 돌아온 도진이를 끌어안고 정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았고, 언제나 너무 넓어서 비어 보인다고 생각했던 2 층 베란다에는 새 화분을 들였다.

초록 잎 앞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서 해아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햇볕을 느끼는 코끝이 익어 가는


열매처럼 불그스름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토끼처럼 보이는 흰 앞니를 나는 구경했다. 그러면서 지나간,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고백들과 함께 밀물처럼 밀려오는 기억을 가만히 맛봤다. 안개 낀 밤처럼 희미하던 부분들도 하나둘씩 내
기억의 공란들을 채워 놓았다.

어느 때보다 맑은 미소로 햇살을 만끽하는 해아를 볼 적에, 죽은 해아를 끌어안고 울음을 쏟아 내던


순간이 기억났다. 차갑게 식어 버린 체온이 주던 서늘함과 편안한 듯 감긴 눈꺼풀 위로 핏줄이 나비
날개처럼 얇게 비쳐 보이던 것이, 어떻게 이제까지 몰랐을까 후회될 지경으로 뇌리에 뚜렷하게 남았다.

우두커니 선 채 바라만 보았을 뿐인데, 눈길이 마주치자마자 해아는 내 마음을 읽은 듯이 움직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내게로 달려오더니, 나무처럼 굳은 허리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대어
붙이며 나를 안아 주었다. 그럴 적에 그의 몸이 나에 비해 작아서, 온 힘을 다해 나를 안아 주면서도
내게 안긴 듯했다.
나는 해아의 부드러운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마른 목덜미에 내가 걸어 준 목걸이가 걸린 것을 확인했고,
그와 내 심장이 한데 엉킨 것처럼 같은 박자로 뛰는 것을 느꼈다.

“태림 씨.”

행복에 젖어 나는 웃는데,

“울지 마세요.”

해아는 그런 나마저도 달래 주었다.

큼직하고 중대한 것부터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나는 해아를 알게 됐다. 부부 침실에 나란히


눕기만 해도 기쁜 기색을 못 감추던 얼굴부터, 긴장할 때면 죄를 지은 사람처럼 용서를 구하는 듯 손을
모아 쥐던 것, 내가 설렘에 가득 차 웃으며 바라보아도 나를 보지 못하는 양 굴던 것에 이르기까지….

이제야 전부 알았다. 내가 이따금 환영처럼 서른두 살의 강해아를 볼 때와 같이, 해아 역시 바위를 흉내


내던 서른네 살의 천태림을 바라보았음을.

“…해아야.”

그러나 그와 나 사이의 비범한 슬픔이 나는 싫지 않았다. 덜 아문 상처와 눈물방울이, 도리어 오늘의


애정에 힘을 싣는 듯했다.

“사랑해….”

허리 숙여, 해아의 뺨에 볼을 붙이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커지고


달짝지근한 체향이 새어 나왔다. 달뜬 한숨도 귓가로 흐르매 나는 벌써 답을 들었는데,

“나, 나도… 사랑해요, 태림 씨.”

해아는 내게 이미 아는 사실을 고백하는 데에조차 애를 썼다.

저물어 가는 창밖의 하늘이 남색을 띠기 시작했다. 우리의 그림자가 더 길어지기 전에, 나는 해아를 안아
들고 2 층 침실로 향했다. 부끄러운 듯 내 어깨에 이마를 묻고도 해아는 내려 달라는 거절만은 하지
않았다.

침대에 나란히 누울 즈음에, 도진이는 어쩐 일로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해아는 착한 개가 저를 피하는


이유를 몰라 서운한 기색이었지만, 그의 알파 된 도리로 나는 원인을 알았다.

“네 냄새가 너무 짙어서 그래.”

지난 며칠 사이 많이 가시긴 했지만 아직도, 히트 사이클의 잔향이 해아의 피부에 남아 있었다.

그의 어깨에 코를 문지르며 나란히 눕자 해아는 부끄러운 얼굴을 했다. 노팅까지 마치면서 서로 간에 짐승


같은 꼴이란 꼴은 다 보았는데, 내가 안을 때면 아직 수줍은 그가 신기하기도 귀엽기도 했다.

“태림 씨.”

제법 용기 낸 목소리로 해아가 나를 불렀다.


“…태림 씨 위에 안겨 있어도 돼요?”

질문에 답하는 대신 나는 배가 보이게 바로 누웠다. 그러자 해아가 지난밤처럼, 기쁜 기색을 못 감추고


얼른 내 위로 몸을 올렸다. 내 배에 제 배가 닿게끔 엎드리더니, 가슴 위에 얼굴을 기대고 작게 웃었다.

“좋아?”

내가 물었고,

“네….”

해아의 볼은 사과처럼 새빨갰다.

진짜 짐승이라도 됐나 보다… 나는 약간의 자책에 사로잡혔다. 해아는 가물가물 졸린 눈을 하는데, 그


귀여운 얼굴을 보면서도 좆이 서는 내가 짐승 새끼였다. 팔뚝으로 열이 오르고 배의 근육이 삽시간에
단단해졌다.

그 바람에 해아가 불편해진 듯 뒤척였다. 그래도 나를 피해 도망가진 않았다. 가만히 내 배 위에 엎드린


그는 좋은 자리를 찾은 고양이 같았다.

딱딱해진 성기에 닿는 해아의 허벅다리 살이 부들부들했다.

“…….”

내 가슴에 볼살이 눌리도록 얼굴을 대고, 그는 말이 없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나는 그의


표정을 확인했다. 이마가 빨개진 채 말아 쥔 주먹을 입 앞에 대고서, 눈을 내리깐 얼굴이 내 성욕을
북돋웠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그를 원했다. 강해아가 누구이고 천태림이 누구인지 알게 된 지금 이 순간에, 그를


안고 싶고, 보듬고 싶고,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하고, 안심하고 싶었다. 내 존재가 그를 마모시키지 않고 그는, 숨을 들이쉬고 심장이 뛰는


것만으로도 내 슬픔을 증발시키는 것을.

나는 악기를 연주하듯 해아를 만졌다. 그의 목덜미를 힘주어 주물렀다가, 말랑한 팔뚝을 슬그머니
쓸었다가, 가파르게 가늘어지는 허리의 도돌도돌한 갈비뼈 윤곽을 기타 줄 만지듯 살짝 퉁겼다. 그러자
색색거리던 숨소리가 씨근덕대는 신음으로 변했다.

부드럽게 감싸 쥐어 볼 적에 늘씬한 허리가 내 두 손에 거의 딱 맞았다. 해아를 만질 때면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는 가느다랗고 유연한데, 나는 모든 게 크고 거칠고 굵기만 했다.

“안고 싶어.”

조용히 속삭이자 해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아프게 안 할게. …만지기만 할게.”

그대로 조심조심, 내 몸 위의 그를 옆자리에 내려 눕혔다. 그것만으로도 해아는 앓는 듯한 숨소리를 냈다.


온몸에 물고 빨고 박아 댄 흔적이 얼룩덜룩 선명한 채였다.

내게 등을 보이고 돌아누운 그의 어깨에 조심스레 입술을 문질렀다. 그래도 그가 거부하지 않기에,


말라붙은 배 위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어도 주었다. 멍울진 자리를 살살 만지다가 손을 내리자, 단단해진
성기 끝이 엄지손가락에 닿았다.
“…섰네.”

내가 속삭였고,

“태림 씨가 자…꾸만 만지니까….”

해아는 나를 탓했다.

끝이 축축하게 젖은 그의 것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살짝 힘을 실어 콱 쥐자 ‘힉’, 놀란 소리를 흘리며


해아가 전신을 옹송그렸다. 시트에 이마를 문질러 대는 통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질 않았다.

나는 그의 둔부에 배를 대고 반쯤 올라타다시피 했다. 내 상체가 지붕처럼 등을 덮자 손안에 쥔 해아의


성기가 작게 껄떡거렸다. 보드라운 몸에 예민한 부위가 비단 이것 하나만은 아니었다.

“흐, 으읏….”

붉게 피가 쏠린 귀에 입을 맞추자 듣기 좋은 신음성이 나왔다. 혀끝으로 툭 치듯 핥을 적에 동그란 귓불


살이 말캉했다. 그대로 잡아먹을 기세로 빨아 주자 해아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직거렸다.

“아, 앗, 앗…! 잠… 잠시만….”

느슨해진 표정이 얼핏 보였다. 힘 빠진 눈이며 벌겋게 익은 그의 뺨이, 내게 대뜸 가학성을 안겨 줬다.

해아의 것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나는 그의 귀를 핥고, 빨았다. 귓바퀴에 자국이 남게 윗니로 살짝살짝


씹는 시늉 하는데, 그때마다 내 몸 아래에 깔린 그의 허리가 좌우로 파드득 비틀렸다.

“아! 아… 읏, 윽… 아파, 아, 아파요….”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해아는 뒤늦게 내게서 벗어나려 애썼다. 못된 포식자가 된 기분으로 나는 그의


엉덩이에 내 아랫배를 바짝 붙였다.

“태림 씨…, 놔, 놔주세요, 이거….”

통통한 입술로는 거절하는데,

“…힉.”

젖은 신음성이며 내 손목까지 흘러내리는 프리컴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쪽, 쪽 소리가 잘 들리게끔 나는 그의 연한 귀에 연신 입을 맞췄다. 혀로 훑고, 빨고, 부러 귓가에 대고


숨을 불어 넣기도 했다. 해아의 발끝이 시트 위를 긁고, 밀어 댔다.

“흐, 흐윽, 읏….”

마른 배를 내밀며 허리를 젖힌, 해아의 둔부가 내 성기를 살로 누르다시피 했다. 삽시간에 땀에 젖은


그의 몸에선 성욕 도는 냄새가 났다. 바짝 붙인 허벅지가 통통한 모양새로 나를 유혹해 댔다. 물끄러미
구경하기도 잠시, 핏줄 돋아 가며 발기한 좆을 그 틈새로 끼워 넣었다.

“으, 응….”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해아가 두 무릎을 딱 붙이며 허벅지를 오므렸다.

“그래, 그렇게….”

“네, 네….”
목덜미까지 빨갛게 익힌 뒤통수가 끄덕끄덕 움직여 대는 게, 이렇게나 이뻐 보일 수가 없었다.

손안에서 미끌거리는 해아의 것을 도로 고쳐 잡았다. 기대감에 찬 숨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대로, 곧게


선 성기 끝을 엄지를 쓱쓱 문질러 주자,

“아, 앗…, 아!”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내 품 안에서 뭉개졌다.

“좋아?”

“힉…, 힉….”

“정말 예민하다, 너.”

“흑, 읏, …네, 네… 으응….”

체중으로 짓누르다시피 하며 연거푸, 손바닥을 거칠게 움직였다. 무릎을 꽉 오므린 채 움찔움찔 떨리는
해아의 허벅다리 살과 근육이, 내 성기를 꽉 조였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달뜬 흥분을 못 견디고 나는 그의 둔부에 대고 허리를 두어 번 밀어붙였다. 철썩거리는 소리를 내며


해아의 엉덩이 밑과 허벅다리가 금세 빨갛게 맞은 자국을 드러냈다.

“아…, 앗, 아!”

해아는 내가 밀면 미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흔들흔들 움직였다. 성기를 꽉 조이는 허벅지 근육에
나는 이마에 핏대가 섰고, 해아의 몸에선 달콤한 체향이 퍼져 나왔다.

이내, 약한 신음성과 눈물을 보이며 그가 내 손안에 사정했다. 마른 허리가 달달 떨리고 고개가 위로


들렸다가, 이내 푹 고꾸라졌다. 엉거주춤 엎어진 채 연이어 말간 정액을 흘리는, 그의 것을 가볍게 쥐고
흔들자 맑은 정액이 찔끔찔끔 계속 흘러나왔다.

“흐으… 응….”

정액으로 질척해진 손으로 그의 아랫배를 가볍게 받치고, 무너진 자세를 고쳐 주었다. 두 팔로 끌어안아
상체를 세우고 베개를 안겨 주자 해아는 그 위에 편안하게 엎어졌다.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는 등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벌써 지쳐 버렸나 생각하는데 그가 허벅다리를 다시 붙여 모았다. 쿠퍼액으로 질척해진 내 성기를, 제


다리 사이로 손 뻗어 도로 끼우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나는 웃어 버렸다.

“계속할까?”

“…….”

“대답해 줘.”

“…네, 기분 좋아…. 좋아요….”

주먹만 한 뒤통수가 끄덕끄덕 움직였다. 없는 허벅지 살을 모아 보겠다고 무릎을 꼬는 통에, 성기가


조이다 못해 끊어지지 싶었다. 황당해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왜 웃어요.”

해아가 옆눈으로 나를 흘겼고,

“네가 귀엽게 굴잖아, 자꾸.”

천천히 상체를 숙여 나는 그의 귓가에 볼을 붙였다.

“태림 씨….”

“응, 해아야.”

“왜… 왜 안 넣어요?”

와락 덮친 자세로 그를 껴안고 나는 무진 얼떨떨했다. 왜 안 넣냐니… 질문에 절로 시선이 그의 엉덩이로


향했다. 며칠간 개처럼 박아 댄 탓에 하얗던 엉덩이에 살 맞은 자국이 생겼고, 뒷구멍은 아직도 조금
발갛게 부어 있었다.

“…너 힘들까 봐 참는 건데.”

그대로 해아의 오른쪽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너무 많이 해서 살이 좀 닳았나, 어째 엉덩이가 더 작아진


것 같다. 살짝 쥐고 옆으로 벌리자, 발개진 게 안쓰러운 한편 귀여운 구멍이 내려다보였다.

질색팔색하며 도망칠 줄 알았던 해아는 뜻밖에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베개를 제 가슴 밑에 단단히
받쳐 껴안고, 무릎을 세워 엉덩이를 올렸다.

“저…, 저는 아, 안 하는 게… 그게 더 힘든…데.”

말은 더듬더듬, 피부 위에는 홍조가 올라서는 부끄러운 티가 나는데, 삽입하자며 보채는 행동에 나는


열이 올랐다.

“넣어 줘?”

그의 엉덩이 골 위에 나는 굵은 성기를 툭 걸쳤다. 살짝 부어서는 말랑한 뒤가 움찔 움츠러드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누구랄 것 없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꼴깍 울렸다.

“네, 밤에 할 때처럼… 해 줘요.”

늘씬한 허리를 추켜들고서 해아가 속삭였다.

“더… 더 세게 안아 주세요.”

작은 속삭임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 더는 언어가 없었다. 애정 한번 받아 본 적 없는 거지처럼 나는 그의


품을 갈구하듯 파고들었고, 해아는 내 두 팔에 갇힌 듯한 모양새로 안겨 눈물과 그보다 많은 신음성을
쏟아 냈다.

그의 몸을 언젠가의 내가 잃어버렸던 조각처럼 느끼는 순간에 나는 궁금했다. 해아도 나를 그렇게 느끼고


있을지… 맞댄 피부만이 살아 있는 듯 뜨거운지, 성욕을 해소하면서도 한편으론 위로받는 기분에 숨이
막혀 오는지, 말로는 이 감정을 알릴 수 없어 심장을 꺼내서 보여 주고픈 충동에 휩싸이는지.

궁금증은 많았으나 그 무엇도 내 입 밖으로 구태여 뱉어 낼 필요가 없었다. 해아의 기분이 마치 전기


오르듯이, 피부를 타고 내게로 전이되어 흘러온 탓이었다.

나는 강해아의 모든 걸 이해했고 이기적으로 사랑했다. 내가 깨달은 사실들은 나만의 금고에 집어넣은


채로, 나는 그를 위로하되 그에겐 내 기억의 물꼬를 알려 주지 않는 방식으로, 나의 상처는 나의 것으로,
그의 상처도 나의 것으로… 피 흐르는 기억들을 욕심쟁이처럼 긁어모았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많은 기억을 떠안은 내게도 단 하나, 빈칸이 있었다. 나로서는 알 길이 없어


끔찍하게 두렵지만, 눈물 쏟는 한이 있더라도 간절하게 궁금한 치열한 질문이, 자꾸만 내 목젖을 두들겨
댔다.

“해아야. 나 궁금한 게 있어.”

입천장 밖으로 그 질문을 꺼낼 적에는 여상스러운 척 가장하려 안간힘을 썼다.

“응…, 뭔데요?”

페로몬이 마구잡이로 뒤엉키고 체온으로 달아오른 시트 위, 나의 옆자리로 해아는 느릿느릿 파고들었다.


교성을 질러 댄 끝에 목소리는 쉬어 버렸지만, 미소가 전에 비해 편안해지고 두 눈동자에는 빛이 도는
채였다.

“너는… 그러니까. 예전…, 지나간 삶의 일들을 전부 기억해?”

그의 귓불을 살짝 건드리며 내가 물었고,

“응. 기억해요.”

해아의 왼쪽 뺨이 자연스레 내 손바닥에 기대어 왔다.

“그럼, 어떻게 죽었는지도… 기억해?”

“응…. 기억해요.”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슬프고 괴롭게 남겨져 집착하는 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물었다.

“…많이 아팠니?”

그러자 해아가 입을 열더니, 다물었다. 그는 모를 것이었다. 그가 마른 입술을 축이는 짧은 순간이 내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 주는가를. 그 입에서 ‘아팠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나는 더는 숨도 쉬질 못할
것만 같았다.

갑자기, 질문을 꺼낸 일 자체가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니야, 됐어, 대답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번복하려 입을 연 순간에,

“아뇨…, 하나도 안 아팠어요.”

해아는 나를 구해 주었다.

“태림 씨한테 이런 이야기, 꺼내기 부끄럽지만… 나 약이랑 수면제를… 엄청 많이 먹었거든요. 그래서


정말로 그냥, 자는 듯이…. 그래서 조금도 안 아팠어요.”

내, 벌어진 잇새로 안도한 숨이 가느다랗게 새어 나갔다. 어떤 표정도 쉽게 짓질 못하는 나에게로 해아는


기는 듯한 자세로 다가왔다. 허공에 뜬 내 손을 깍지 껴 잡고는 시트 위에 내려놓고, 그는 조심스럽게 내
몸 위에 제 몸을 겹쳤다.
그, 다정하고 따스한 접촉이 나를 오늘로 돌려놓았다. 맞댄 가슴 안에서 그의 심장이 콩닥콩닥 울리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마침내 내가 웃자 해아도 나를 따라 웃었다. 가벼운 입맞춤을 한 번, 두 번 나눈 끝에 그는 내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수다를 늘어놓았다.

“으음. 대신에 정신이 좀 없더라고요.”

“…왜?”

“뭐라고 해야 하나…, 그, 음…. 갑자기 신이 나한테 말을 걸었다…고 해야 할까요? 하하…, 이렇게


말하니까 좀 웃기다. 아무튼 환청 같은 게 들리더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까 모르게 되어 해아의 골똘한
얼굴만 바라보는데, 그는 그 나름대로 지난 일을 회상하느라 심각했다.

그의 구겨진 눈썹 사이를, 나는 엄지 손끝으로 눌러 펴 주었다. 그러자 해아가 ‘아’ 하고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무얼 깨달은 양 말하기를,

“내 이름을 불렀던 거 같아요. ‘강해아 씨’라고 부르면서… 뭐라더라? 아직 조작은 할 수 있다고


그랬어요. 자기들끼리 대화를 막 하던데, 나한테… 다시 시작하자면서요.”

“…조작. 다시 시작해?”

“응. 나는 이렇게 되면 안 된다고….”

그러고는 해아가 고개를 좌우로 잘게 저었다. ‘아, 몰라’ 하는 속 편한 소리를 터뜨리더니, 그는 부끄럼
많은 사람처럼 내 어깨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몰라요, 그냥… 바보 같은 얘기예요.”

쑥스럽게 웃는 그의 숨결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따끈따끈한 살결을 느끼며 나는 손을 들었다.


습관적으로 해아의 뒷머리를 만져 주고,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가 다시 결대로 쓰다듬기를 반복했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 짧은 순간에 나는 숨 쉬는 방법을 까먹었다.

―아직 조작은 가능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 목소리들을 기억해 낼 적에는….

―어떡하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그 음성이 누구 것인지 차라리 못 알아챘더라면 좋았을 터였다.


본사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고층으로 오르는 내내 내 심장은 한 층 더, 한 층 더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내다보이는 로비와 각 층의 사무실을 나는 가만히 바라봤다.

AOM 은 내게 다른 의미의 가족이었다. 내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 개개인의 얼굴과 이름을 나는 전부 외웠다.


출신 대학이며 주로 보는 업무는 물론이고, 성격조차 하나하나 모두 알았다. 그러니 못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내가 고용하고 내가 쓰는 이들의 목소리를….

마지막 층에 멈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저 우뚝 선 채로 나는 내리질 못했다. 가만히 멈추어


깨끗한 복도와 비서들이 앉은 자리를, 정면에 걸린 검은 간판에 양각으로 ‘AOM’… 새겨진 글씨를
바라봤다.

유리문이 도로 닫히려는 때에,

“대표님!”

시은철이 팔 뻗어 버튼을 다시 눌렀다. 탁, 탁 소리 나게 왼발을 구르며 그가 내게 나오라고 턱짓했다.


여상스러운 얼굴로 웃는 그를 몇 초간 쳐다보다가 나는 짧은 복도를 느리게 걸었다.

“쉬고 오시더니 신수가 아주 훤해지셨어? 책상 위에 보고서 뒀으니까 그것부터 확인하시면 됩니다. 아,


오늘 오후 미팅 내일 오전으로 옮긴 거, 연락받으셨죠? 그쪽에서 보내온 자료도 보고서 옆에 뒀어요,
파란 파일.”

그대로 직진하여 대표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문을 닫았다. 등 뒤로,

“어어?”

놀란 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반응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아닐 거야.’

떨리는 걸음으로 향한 곳은 곧장 책상이었다. 늘 그렇듯 시은철이 깔끔한 솜씨로 정리해 둔 보고서로


시선이 내려갔다.

‘아니야….’

그럴싸하게 쓰인 타이틀 밑에는 회사 이름과 담당자명이 찍혀 있었다.

‘아…니.’

그러나 그 외의 칸들은 죄 비어 있거나 아무 의미 없는 문자들이 출력된 채였다.

“…….”

서류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대신 나는 바로 옆의 파란 파일을 열었다. 두어 장의 공장 레일과 부품


사진 뒤에 남겨진 종이들 역시 백지였다.

몇 초간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만 반복했다. 이내 손을 올려 나는 내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재킷


안주머니에 손가락을 넣고, 작은 열쇠를 꺼냈다. 대표실 가장 구석 자리에 잠겨 있는 캐비닛을 벌컥 열자,
검은 서랍장이 모습을 보였다.

데이터가 아닌 실물 형태로 보관해야 하는 최소한의 서류들을 모은 서랍장에는 한 칸 한 칸, 지난 몇 달간


고군분투하며 따낸 계약서들이 들어 있었다. 검지로 한 장 한 장 종이들을 벌려 보다가, 서랍장을 통째로
뽑아 들었다. 그대로 안에 든 서류들을 책상 위로 쏟아 냈다.
흩어진 서류를 일일이 뒤집고 펼쳐 확인할 적에 하나하나가 다 백지였다. 여태껏 회의하고, 논의하고,
야근하고 출장까지 다녀오면서 얻은 자료와 따낸 계약서들이, 모조리 백지였다.

‘어떻게 몰랐을까.’

지난주까지도 출근하고 보고를 받고 업무 미팅을 봤으면서, 나는 몰랐다. 보고를 받는다는 행위와 업무


미팅이라는 모임 자체는 존재했지만 그것을 통해 주고받은 어떠한 구체적인 정보도 내 머릿속엔 없다는 걸.

그저, ‘무난하게 괜찮은 업무였다’는 사실만이 허구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왜… 몰랐을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하다가, 종아리에 의자가 걸려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내


몸무게에 사무용 의자가 흔들리더니 느릿느릿 옆으로 돌았다.

구두를 신은 발목이 기울어지도록 상체를 옆으로 돌려, 나는 창문 밖을 내려다봤다. 두엇씩 뭉쳐 오가는


직장인들과, 택시를 잡겠다고 갓길까지 나와 팔 흔드는 남자가 보였다.

문득 숨이 턱 막혔다. 말도 나오질 않고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가 시커멓게 내려앉기만을 반복했다.


악몽을 꾸는 사람처럼 놀라고 가위에 눌리기라도 한 듯이 얼어붙은 나를 부른 건 노크 소리였다.

‘똑똑’… 두 번 울리는 공손한 노크에 고개를 들자, 양손에 커피 한 잔씩을 든 시은철이 보였다. 놀란
눈으로 그는 서류 태풍이 지나간 듯한 대표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천 대표님아.”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그가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하나는 날 위한 것이고 남은 한 잔은 제가


마시려고 가져온 라떼였다.

“태림아, 왜 그래. 휴가 끝나고 정신없나 싶어서 와 봤더니만 이게 뭐야? 대체 뭘 찾은 건데…, 무슨 일


있어?”

허리 숙이며 서류를 정리하는 시은철을 나는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잇새로 한숨이 푹 나오고 목울대로는
침을 넘기는 게 보였다. 허리를 세울 때 ‘에휴’ 소리 내고, 못마땅한 얼굴로 두 눈에는 걱정을 담아
나를 살폈다.

너무 진짜 같았다, 진짜 시은철 같았다.

‘‘진짜 시은철’이라니.’

그 생각조차 나를 우습게 만들었다.

‘나조차도 진짜 천태림이 아닌데.’

“…아니.”

나는 웃어 보였다.

“아니야, 아무 일도. 그냥 피곤해서 그래….”

그러자 안심한 기색으로 시은철이, 흩어진 서류들을 도로 서랍 속에 정리했다. 그럴 적에 그는 그것들이


알맹이 없는 백지라는 사실을 전혀 못 알아챘다. 바로 어제의 나처럼, 이 모든 게 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베타 테스트….’

결혼 계약이 오갈 적에, 강해아와 천태림의 정보로 돌린 AOM 프로그램 베타 테스트가 있었다. ‘그저
무난하게 좋은 결과’를 얻어 냈던 기억이 내 머리 안에 존재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보를 떠올리자면
어떠한 문장 하나, 그래프 한 줄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테스트 보고서는 완성되지 않았고 그 결과를 보고받은 일 역시 일어난 적
없었다. …베타 테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테스트 안에 존재했다.

“아니.”

기침 같은 외침이 잇새로 빠져나갔다.

“아니야.”

이성이 판단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벌떡 일어서자 의자 바퀴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뒤로


굴러갔다. 무릎이 빳빳하게 느껴졌고 목젖 아래서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역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조바심이 나고 손바닥에 땀이 찼다. 삽시간에 허술해진 세계가 내 몸 안으로 밀려드는 것만 같은데, 이


끔찍한 기분 안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덩그러니 앉아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더운 숨을 내리누르며 나는 대표실 문밖으로 걸어갔다.

“잠깐… 집에 가야겠어.”

엘리베이터 앞에 선 채 그렇게 말했다. 혼잣말하며 돌발적으로 움직이는 내게로, 시은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가왔다.

“…같이 안 가 줘도 돼.”

십중팔구 따라붙을 녀석이라 습관적으로 말하는데,

“누가 따라가기나 한대?”

내 옆으로 팔을 뻗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줄 뿐, 은철이는 그것으로 물러섰다. 덕분에 잠깐이나마


속을 죄던 압박감이 환기되는 느낌이었다. 시은철이 어쩐 일로, 나를 그냥 놔주나 싶었다.

“태림아.”

6, 7, 8… 한 층 한 층 가까워 오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올려다보며 은철이가 나를 불렀다. 그 얼굴을


어떻게 봐야 좋을지 모르게 되어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말았다. 안내 층수가 13 에 멈추어 문이
열렸고,

“…아냐, 아무것도.”

사각 백열등이 밝은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는 나뿐이었다.

“오늘 일정 급하진 않으니까 천천히 갔다 오라고. 운전도 조심하고. 그리고… 너 발작할 때마다 옆에서
달래 주는 거, 사실 힘들었다고.”

문이 닫히기 직전, 복도에서 우두커니 전해 온 말에 나는 얼떨떨해졌다. 저는 우성이라 괜찮다며 언제고


나를 찾아 출동하던 건 시은철이었다. 자진해서 그러길래 괜찮은 줄 알았는데 ‘사실 힘들었다’니 황당한
얘기였다.

“아…, 그래?”

그러면서 녀석의 얼굴을 본 순간, 그제야 몇 달 묵은 위화감이 해소됐다. 대뜸 낯설게 보이던 녀석의
얼굴은, 그날 변한 것이 맞았다.

‘어려져서 그랬구나, 6 년 전으로 돌아와서.’

그대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러고는,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어린애 같은 감정에 못


이겨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해아가 보고 싶었고 해아를 안고 싶었다. 그러기만 한다면, 복잡해서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끓는 머릿속이 식혀질 것 같았다.

출근할 적과 달리 이층집은 고요했다. 대낮의 풍경을 낯설게 느끼며 나는 현관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걸었다.

“해아야.”

그렇게 외치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꼬리 치며 달려오는 개도 황옥혜 아주머니도 없는 것을 보면,


셋이 함께 외출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거실 중앙으로 걸어가 나는 힘 빠진 몸을 소파에 주저앉혔다. 그제야, 좁고 작고 답답하게 느껴지던


세상이 편안해졌다. 익숙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머리를 비우기를 한참, 다시 눈을 떴을 땐 높은 천장이
올려다보였다.

“아….”

별안간 깨달음이 내 뒤통수를 쳤다. 익숙해진 나머지 미처 몰랐던 사실이 대뜸, 낯선 손을 흔드는 순간이
연이어 닥쳐왔다.

몸을 앉힌 소파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차라리 침대라고 불러야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되던
소파였다. 엉덩이 깔고 앉는 자리가 깊은 나머지 해아는 이 소파에 곧게 앉는 때보다 가로로 눕는 경우가
더 많았다. 지금 보니 내 다리 길이에 딱 맞았다.

“…….”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사방을 천천히 둘러봤다. 천장이 유독 높을 뿐만 아니라 복도도 넓고 문짝들도


하나같이 보통의 1.5 배로 커서, ‘이건 집이 아니라 성이라고 불러야지’, ‘너무 높고 커서 휑하다’고
생각되던 집이었다. 내게 비아냥의 대상이었던 공간이 어느새, 세상에서 가장 편한 우리 집이 됐다.

거실 중앙에 멍하니 선 채 나는 웃었다. 처음 결혼할 적에는, 이 집이 강해아의 사치를 상징한다고


생각했었다. 왜 이렇게 큰 집을 무리하게 원했는지, 제 아버지에게 조르기까지 하며 얻어 낸 건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집, 차, 선물들…. 강준일 회장이 건넨 관심들이 하나둘 쌓여 강해아의 목을 졸랐었다. 우성 알파와의


결혼이 유세냐며 강일해가 저열한 악의를 품는 이유가 되었었다.

‘그런데 이… 집은.’
이 집은 강해아를 위한 선물이 아니었다. 멀리, 자주 떠나는 배우자를 두고 외로움 많이 타는 사람이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크고 넓었다. 층고가 높은 탓에 툭하면 어지럼증에 비틀거리는 그가 오르내리기에는
계단이 지나치게 가팔랐다.

그래도 스물여섯 살의 그날에, 해아는 이 집을 원했다. 가구, 조명은 물론이며 선반의 높이, 욕조의 크기,
스위치의 위치 하나까지도 사사건건 고를 정도로 깐깐한 도련님이, 이 집을 구했고 꾸며 놓았다.

그 모든 게 내 키에 맞고 덩치에 맞고 눈높이에 맞았다.

대번에 심장이 더워졌다. 그리고 만끽했다, 여태껏 스물여섯 살의 젊고도 어린 해아가 선물한 집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태림 씨!”

환호성에 가까운 외침이 내 정신을 깨웠다. 멍하니 2 층을 올려다보던 고개를 현관으로 돌리자, 놀람 반
기쁨 반으로 웃으며 선 해아가 보였다.

“뭐예요, 이 시간에! 말도 없이… 뭐 두고 갔어요? USB? 서류? 뭐 찾아 줄까요?”

어깨가 들썩대도록 웃으며 다가오는 얼굴이 환했다. 연하늘색 반팔 셔츠는 넓은 깃이 헐렁했고 무릎


위까지 오는 반바지 주머니엔 도진이의 리드 줄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어린 개를 강아지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온 모양이었다.

주저 없이 내게로 다가오는 그를 와락 끌어안기를, 나는 참지 못했다. 여름 볕을 받은 해아의 살결은


따끈하고 부드러웠다. 놀라 들이켜는 숨소리와, 콩닥거리는 가슴의 울림조차 눈물 나게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악몽에서 깬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몸살처럼 전신을 짓누르던 불안도 뻗쳤던 손을
거뒀다.

숨통이 트였다. 꽉 막혔던 머릿속으로 산소가 통하는 느낌이 시원했다.

“응…, 두고 갔어. 깜빡하고… 너를 두고 갔더라고.”

그렇게 말하자 내 턱 밑에 놓인 그의 어깨가 웃음으로 들썩거렸다.

“뭐야, 우리 태림 씨. 그런 말도 할 줄 아네….”

아마도 해아는 모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를 웃게 하는 그의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지….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나는 해아의 얼굴을 살폈다. 뺨과 귀를 움켜쥐듯 감싸고 쓰다듬으며 그의 맑은


눈동자와 좁은 콧방울과 미소짓느라 얇아지는 입술, 눈썹의 원만한 결과 왼쪽 볼의 아주 작은 점의
위치까지 하나하나 관찰했다. 혹여 그의 무엇 하나라도 허점을 드러낸 서류처럼 비어 버리진 않았는지,
속눈썹의 개수까지 셈했다.

그러나 해아는 해아였다.

“태림 씨.”

그는 속삭이며 부르는 소리 하나로 내게 사고처럼 닥쳐온 충격을 낫게 하고, 포옹 한 번으로 위태로운 내


이성을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내 허리를 둘러 안는 팔에 신난 사람 특유의 강한 힘이 실렸다. 약간의 땀이 묻은 목덜미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맞닿은 가슴 안에서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고, 헝클어진 머리칼의 감촉이 내 턱을 기분
좋게 간질였다.
‘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기시감도 그저 사랑이 주는 왜곡인 줄 오인했을 뿐, 내 세계에는 진작에


강해아만이 중요했고 강해아만이 진짜였다.

본능적으로는 진작 알았다. 그 밖의 것들은… 소음, 조연, 소품에 불과하다는 걸.

“…사랑해, 강해아.”

조용히 고백하자 해아의 웃음소리가 더욱 짙어졌다. 한참을 웃음으로 수줍음을 위장하더니, 이내 내


어깨에 감췄던 얼굴을 떼어 내고 붉어진 얼굴을 보여 주었다. 대뜸 집에 찾아와 한마디 고백을 전했을
뿐인데, 갈색 눈동자가 감동으로 축축했다.

눈을 감고 조심조심 고개 뻗는 그에게로 나는 목을 숙였다. 코끝이 스치듯 좌로, 우로 닿다가 부드럽게


미끄러진 뒤 찾아온 입맞춤은 달짝지근했다.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던 낮은 담이 사라졌음을 나는 느꼈다. 내내 각인을 거부하던 몸이 동요하는 것


또한, 나는 느꼈다.

비로소 진정으로 자유로운 순간이었다. 추호의 슬픔조차 애정으로 자리바꿈했다. 나는 이제 각인이


두렵지 않았다. 해아에게 내 모든 걸 바치고 싶었다. 그런들 실망으로 몸을 떨고 정신이 실타래처럼 얽힐
일은 없을 것이다. 갈 곳 잃은 분노와 원망, 갈증으로 범벅되어 약을 먹는 나날도 없을 테고, 분노로
그를 밀어내고 나 자신을 몰아낼 필요도 없었다.

일평생 해아가 적극적인 행위로 내게 입힐 상처는 결국, 그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뿐임을 나는 안다.
그마저도 나의 부탁으로…

‘좀 조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렇게나 뱉은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어주느라.

이제 그는 조용할 필요가 없다. 그가 최대한 시끄러웠으면 좋겠다. 평생 내 곁을 어지럽히고, 지루한


일상을 뒤흔들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거면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세계가 진짜이든 가짜이든, 현실이건 테스트이건 그런 문제는, 나만 잊어버리고


나만 모르는 척 하면….

‘아니야….’

뜨거운 숨이 씨근덕대는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안 돼.’

타는 듯 끓는 애정으로 원했던 각인이 코앞인 순간에 나는 숨을 참았다. 제 페로몬을 들이켜지 않으려


억제하는 내 표정을 긴장으로 읽었는지, 해아가 손을 들어 나를 달랬다. 언제고 다정하던 그의 손에 볼을
기댄 채 나는 웃어 보였다.

머릿속으로는, AOM 베타 테스트가 자동 종료되는 두 가지 조건을 떠올렸다.


하나, AI 주체 둘이 서로에게 각인과 노팅을 마치는 100 퍼센트 해피 엔딩의 순간.

둘, AI 주체 둘 중 하나가 죽음을 맞이하여 테스트를 이어 나갈 수 없는 순간.

“사랑해요, 태림 씨.”

심장을 녹여 놓는 고백을 들으며 나는 이 테스트의 결말에 골몰했다.

회사로 돌아와서는 오후 내내 지루했다. 책상 자리에 앉아 일상적으로 움직이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버럭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부수고 날뛰는 상상을 하긴 했지만, 그런들 무얼 바꿀 수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울컥울컥 치미는 불안정한 의혹에 심장은 터질 것처럼, 갈비뼈가 아프도록 세차게 뛰어 대는데 머릿속은
차분하기 짝이 없었다. 이성과 감성이 따로 놀고 있었다. 감성이 하는 일 없이 억울함과 분노와 허탈함을
토로하는 동안에, 이성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채 기계처럼 생각했다.

‘침착하자.’

그래, 침착해야 했다. 침착하게,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이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부터


깨우쳐야 했다.

분명한 것은, 내가 개발한 프로그램의 베타 테스트 속에 갇혀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아니라고, 잠깐


미쳐서 착각하는 게 분명하다고 행복 회로가 패앵패앵 돌아가며 그 증거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냉정한 현실만이 더더욱 또렷해질 뿐이었다.

객관적인 사실이 머릿속에 순차적으로 나열되었다.

‘내가 개발한 프로그램.’

그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먼저였다. 흉내 내기식으로 만들어진 복제품으로


존재할 뿐 나는 진짜 천태림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천태림이라고 믿는 프로그램 속 인공 지능에 불과했다.

마음을 굳게 먹자마자 나는 몹시 냉정해졌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놀라울 지경으로 그랬다. ‘프로그램


바깥으로 나갈 방법이 없을까’를 가장 먼저 고민했고, 그럴 방법 따위는 없으며 그럴 이유 또한 없다는
답을 내놓았다.

‘나가기는 어디를 나간다고….’

AOM 의 대표 이사 천태림이라는 자아가 고개를 들 때마다, 나는 그가 아니라는 걸 상기해야 했다. 그를


본떠 만들어졌을 뿐, 프로그램 밖에선 존재조차 하지 않는 AI 라는 사실을, 연거푸 씹어 삼키고
되새김질했다.

그제야 흐릿하게 지나간 의문들이 전부 해소되었다. 경찰에 신고하고 변호사를 통해 수소문해도 모습을
보이지 않던 박준우의 실종도, 어째서 우리 프로그램이 잡아내질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눈에 띄던
강일해의 그 성격도, 왜… 해아가 신이 제 시간을 돌려놓았다고 생각해야 했는지 그 의문도… 전부 풀렸다.

미스터리란 언제고, 풀리지 않았을 때 더 멋진 법이었다. 불가해한 사건들의 해답은 알고 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박준우는 애초에 잠적을 해 버린 적도, 한성으로부터 무슨 일을 당한 적도 없었다. 그를 포함해 해아의
친구라는 사람들은 애초에 AOM 베타 테스트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없었으므로, 해아의 데이터에
의존하여 존재했다. 그러니 해아 없이는… 나는 그를 외따로 만날 수 없었다.

당장 떠올리려 해 보아도 내 기억 속의 박준우는 ‘어떤 열성 알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목구비 생김새는커녕 목소리가 높았는지 낮았는지, 머리는 무슨 색이었고 키는 얼마만 했는지,
그것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오류가 있을 줄이야….’

습관적으로 메모지를 뜯어 ‘AI 오류 사항’을 갈겨 적다가, 나는 손을 멈췄다. 헛웃음이 피식 나왔다.

‘정신 차려, 지금… 내가 이걸 고쳐서 뭘 어떡할 건데.’

멍하니 자괴감을 씹기도 아주 잠깐이었다.

펜의 잉크가 번지도록 글자 위에 빗금을 죽죽 그었다. 그러고는 명단을 적어 내렸다. 해아와 나의, AOM
테스트 시뮬레이션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적는데 꼭, 우리 결혼의 하객 명단 도입부를 작성하는
기분이었다.

나, 해아, 우리 부모님과 강준일 회장, 강일해, 강해인… 테스트에 참여한 인물의 수는 많지 않았다.
인당 하나씩, 한 번밖에 쓰지 못하는 기기값이 개당 천만 원을 호가하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어지간히
친한 친구가 아니고서야 지인의 결혼을 위한답시고 제 관자놀이에 작은 기계를 삽입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게 나에게는 시은철이었고, 강해아에게는 임건이었다.

시은철, 임건… 두 개의 이름을 추가로 적고 나니 이제야, 막혔던 길이 뚫린 느낌이었다.

‘그럼 그렇지….’

임건의 그, 거슬릴 지경으로 해아에게 미련 갖던 입장이며 성격을 우리 프로그램이 놓쳤을 리 없었다.

‘당신 그 성격을 왜 우리 테스트에서 잡아내지 못했는지 미스터리야.’

강일해도 매한가지였다.

‘아주 잘… 보여 주고 있잖아, 지금.’

두 손으로 이마를 짚자 내 고개가 절로 내려갔다. 이제 와 자책하고 의심해 봐야 별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알지만, 그런들 죄스러운 감정이 가시지는 않았다.

이 순간에는 무지가 나의 죄였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상용화를 하겠다고 추진하면서도, 테스트 속의 AI


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기능할 수 있는 건지 가늠해 내질 못했다. 이것만은 변명이 아닌 사실이었다.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드는 줄 알았더라면… 절절하게 사랑하고 미치게 마음 아프고


분노로 치가 떨리는 줄을 알았더라면, 나는 테스트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나는 천태림이다. 지금 이 순간에조차 그렇게 확신했다. 복사해 낸 데이터 AI 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천태림이라고. 천희중 검사장의 아들 천태림. AOM 의 대표 이사 천태림. 강해아의 남편이 된 천태림…
그게 나였다.
그러니 나는 괜찮았다. 내가 벌여 놓은 덫에 내가 빠진 격이니까.

‘그럼, 해아는?’

책상 자리에 고개 숙이고 앉은 채 나는 지난날을 떠올렸다. 우리 결혼식 날에, 넋이 나간 채 대기실


소파에 등을 묻던 그를 생각했다. 백색 정장 차림새로 팔뚝을 멍하니 내놓고서,

‘태림 씨, 저는… 전 정말 몰랐어요….’

빛 없는 눈으로 중얼거린 말이 있었다. 그땐 그 고백을 뜬구름 잡는 헛소리로 치부했었다. 정신 빠진


그를 놀리느라, 뭘 몰랐느냐고 추궁했던 것도 같다.

‘…그냥, 다.’

힘없던 대답을 떠올리자니 주먹이 꽉 말렸다. 당장 후려치고 싶은 건 그날의 내 낯짝이었다. 갈 곳 없는


분노를 삭이느라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해아의 말이 맞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가 옳았다. 해아는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 프로그램과
그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오직 나의 요청에 의해 테스트에 참여해
주었고,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을 겪어야 할 어떤 이유도 해아에게는 없었다.

문득, 닳아 빠진 빨간 노트가 생각났다. ‘안녕, 다이어리야’ 하는 말 대신에, 신인지 누구인지 모를


사람을 찾던 해아의 꾹꾹 눌러쓴 필체를 떠올렸다.

웃음이 났다. 이곳에 신 같은 건 없었다. 절대적인 어떤 존재 따위는 없다. 해아의 시간을 돌려놓은
작자는,

“대표님, 부르셨어요?”

…우리 회사 개발팀 직원들에 불과했다.

“들어와.”

의자에 상체를 기대어 붙이면서, 나는 개발팀장 김민수를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내 뇌리에 남은


목소리의 주인인 그 아래 직원들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예전… AOM 베테 때, 인지 카피 같이 뜬 게 김 팀장뿐이지, 아마?”

손끝으로 턱을 문지르며 여상스럽게 말했다. 건성건성 가볍게 묻는 목소리에 김 팀장도 긴장이 풀린 듯


어깨를 올렸다가 내렸다.

“아, 물론이죠. 히야…, 그때까지만 해도 칩 형태였었죠. 그거 넣고서는 관자놀이가 간지러워 가지고,


샤워할 때 긁고 싶은 거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주절주절 수다를 떠는 걸 보니 확실했다. 그는 프로그램이 나를 속이기 위해, 수많은 백지 서류들처럼


적당히 만들어 낸 픽션은 아니라는 게.
‘개발팀장’ 네 글자 옆에 물음표를 적어 놓은 메모를, 나는 손안에 움켜쥐고는 구겼다. 나를 둘러싼
시간도 사건도, 내 존재마저도 가짜라는 걸 알아 버린 지금, 현실적이며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상대가
김민수뿐이었다.

엄지 끝마디에 대고 검지 손톱을 툭, 툭 퉁겼다. 굳은살이 박인 살갗에 오르는 간지러움이 생생했다.


손을 들어 목덜미를 감싸자 퉁, 퉁… 달리는 발소리처럼 울리는 맥박도 느껴졌다.

여상스러운 감각들에 위안을 얻으며, 나는 시선을 추켜올렸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비스듬하니 선


김민수가 보였다.

“…그때 했던 테스트. 결과 검토를 어떻게 했지?”

내가 물었다.

“…개발팀에서 테스트 과정을 일일이 읽어 봤나?”

“아? 아니요…. 보통은 못 그러죠, 곧장 압축해 주지 않으면 데이터가 엄청나게 불어서 디스크가 터질
지경이거든요. 퍼센테이지 뜨자마자 내용은 축약시켰…던 것 같은데… 흠? 잘 생각이 안 나네요.”

그러고는 김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실제로는 일어나질 않아 없는 기억에 대해 너무 깊이


고민하기 전에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럼, 데이터를 축약하기 전에 굳이 훑어볼 만한 사례가 있나?”

에둘러 묻자 김 팀장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피로감에 찌든 눈을 두어 번 끔벅거리더니, 그는 내 얼굴을


한 번, 제 옷차림을 한 번 훑어보았다. 컵라면 국물이 튄 갈색 맨투맨의 배 부분이 꾸깃꾸깃 구겨진
채였다.

“저, 대표님….”

두 손바닥을 바지 허벅지에 문질러 닦으며, 그가 자세를 고쳤다.

“…이거 혹시 무슨 시험이나 그런 건가요? 면접 복장으로 갈아입고 와야 할까요?”

“그런 거 아니야.”

내 잇새로 한숨이 푹 나왔다.

“그냥 좀… 궁금해져서. 사적으로 물어보는 거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그러자 김 팀장이 소파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손끝으로 턱을 긁적거리며 고민하기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으음. 테스트 중도 체크라….”

무엇 하나라도 의미 있는 대답이 나오기를 나는 기다렸다. 빌어먹을 테스트 안에서 내가 우리를 …아니,


해아를 위해 무엇이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를 기대했다.

“아, 대표님 그거 아시죠? 비둘기 프로그래밍 에러 짤방이요. 날개가 움직여서 날아야 하는데, 목이
돌아서 프로펠러처럼 붕붕 나는 비둘기 짤. 헤헤, 그런 경우면은 중도 체크 할 거 같은데?”

“…….”

입을 다문 채 나는 그를 오래도록 노려봤다. 어차피 그도 나도 진짜가 아닌데 몇 대 쥐어 패지 못할


이유가 있나 생각할 즈음, 김 팀장도 내 눈빛을 이해했는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대, 대표님 스타일로 설명하자면… 결과가 멀쩡해도 과정에 이상이 생기면 확인합니다.”

“…그렇군.”

타이밍 좋게, 막내 비서가 커피와 서류를 갖고 들어왔다. 내 책상 위에 새로운 보고서가, 김 팀장 앞에는


커피 잔이 놓이자마자, 나는 손을 휘저어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더 이상의 긴 이야기는 삼가야 했다. 그마저 나처럼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이
테스트의 결괏값이 어떻게 손상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AI 라는 걸 아는 AI 는 버그지…, 여기에 버그는 나 하나로도 충분하고.’

서러운 얼굴로 커피를 두고 떠나는 김 팀장의 뒤통수를, 나는 잠깐 바라봤다.

‘…과정에 이상이라.’

그저 백지에 불과한 서류를, 나는 진지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읽는 시늉을 한 끝에


펜을 들고, 아무런 의미 없는 종이에 서명했다.

‘과정에 이상….’

막내에게 서류를 넘기면서 나는 계획을 하나 세웠다. 어떤 변수로 이 테스트를 중단시킬지, 어떻게 해야


해아의 아팠던 6 년을 보상해 줄 수 있을지, 현실에선 아직 잠정적인 구상에 불과한 일들을 빌어먹을
프로그램 바깥으로 알릴 계획을….

그리고 그 계획이란 나만이 떠올리고 실행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장본인이자 테스트


대상인 천태림이기 때문에, 회사에 대하여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하여 속속들이 전부 알기에, 나여서
가능한 미친 짓거리였다.

엄지로 눈가를 문지르며, 나는 의자를 돌렸다. 대표실의 큼직한 창문 밖으로 도로가 내려다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정장을 입은 회사원들이 둘씩 짝지어 길을 걷고,
누군가는 갓길에 나가 손을 흔들며 택시를 잡고 있었다. 차들이 줄지어 지나가는 와중에 노란 택시 한
대가 멈추어서 그를 태웠다.

그대로 시계를 보기를 잠시, 10 분 뒤 같은 남자가 건물에서 뛰어나와 갓길에 섰다. 손을 흔들며 그는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둘씩 짝지은 회사원이 다시, 같은 방향에서 등장해 길을 걸었다.

어떤 일에나 교훈은 있는 법이었다. 아버지 말씀이 딱 그랬다. 실패의 기록에서도 슬픈 경험에서도 배울


점은 있는 법이라고.

내게 닥친 비현실적인, 동시에 몹시도 나다운 반전에도 딱 하나 긍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내가 만들어 낸


프로그램이 아주 훌륭하단 점이 그랬다.

몇몇 철학자들이,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티의 어중이떠중이 대학생들이 염려하던 ‘인공 지능의 반란’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저 자신이 인공 지능이라는 걸 알 수조차 없을 테니까.

나만 해도 그랬다. 테스트 재시작 오류가 아니었더라면, 하다못해 해아가 제 일지를 내게 보여 주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개발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해 내지만 않았더라면, 평생 아무것도 모르는 채 강해아를
껴안고 행복하게 살다가 종료당했겠지. 나도 이곳도 현실이 아니라 프로그램 속의 데이터에 불과하단 사실
따위 꿈에도 모르는 채, 진짜 천태림과 진짜 강해아가 첫 단추를 잘못 채우고 서로를 오해하고 울게 하고
죽게 하건 말건 내 알 바가 아닌 채로.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수없이 커다랗게 닥쳐온 나쁜 사실 가운데 최악인 점을 하나 꼽자면 내가, 나라는 점이었다.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종료를 앞둔 테스트 속에서의 짧은 삶보다 중요한 삶이 따로 있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래서 나빴다.

‘과정 안의 이상’…, 그건 나로 하여금 만들어져야 했다. 그래야만 빌어먹을 진짜 천태림이, 테스트


결과를 조금이라도 더 관심 있게 살필 테니까.

강해아를 알기 전의 나는 그런 남자였다. 나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면 타인의 그 무엇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자만에 가까운 자신감으로 둘러싸인 남자.

다정한 이층집 창밖으로 훈훈한 빛이 흘러나왔다. 차에서 내려 정원 앞에 서자마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잔디 위에 누운 해아 때문이었다.

노란색 체크무늬 피크닉 매트를 깔아 놓고, 해아는 청재킷 차림새로 누워 있었다. 벌써 해가 져서


어둑하건만 몇 시부터 이렇게 있었던 건지, 콧대 위에 선글라스까지 낀 채였다.

그의 옆에, 배를 보인 채 함께 누운 도진이가 보였다. 눈을 좁힌 채 나는 도진이의 말린 꼬리와 탄탄한


뒷발을 살펴보았다.

‘역시 내 기억이 맞았어.’

실소와 함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개발팀 직원들 책상에 놓인 탁상 달력 속의 유기견, 그래, 그 개가


맞았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맞힌 정답에 웃기만 하는데, 해아가 손을 움직였다.

그가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들긴 덕분에 나는 그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이리 와요, 태림 씨.”

그의 주문대로 나는 천천히 그의 옆자리로 가 몸을 눕혔다. 피크닉 매트 밖으로 두 발이 삐져나가는 게


느껴지고 등허리 밑에 뭉개진 잔디의 푹신한 감촉이 생생했다. 말없이, 풀냄새를 맡으며 몇 분을 그렇게
누워 있었을까, 해아가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팔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도로 내리눌렀다. 내 옆자리에 다시 눕히자 놀란 비명과 함께 새소리처럼


깍깍대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침 섞어 웃어 가며 해아가 내 어깨에 제 이마를 꿍 찧었다. 나는 두 팔
안에 그를 끌어안았다.

“태림 씨.”

턱에 닿는 머리칼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둥근 이마의 온도도 따끈했다. 해아에게선 볕에 말린 이불 같은


냄새가 났다.

“10 분만.”

졸린 아이처럼 나는 그렇게 말했다.

“10 분만 더… 가만히 있어 줘. 소원이야.”

그러자 말없이, 해아가 내 품 안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내 소원을 들어주는 것을 알고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믿었다, 온통 흐릿하고 의미 없는 세상에… 강해아만이 진짜라고 생각했던 내 감각을.

“다음에 우리가 만날 때는… 나만이 모든 걸 알고 있을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쇠 긁는 듯 쉰 채로 흘러나갔다.

“…네가 베타이건 오메가이건 상관없어, 해아야. 너는 나에 대해 조금도 몰라도 돼.”

손바닥 밑에 잡히는 그의 날개뼈가 불룩하고 단단했다. 마른 어깨를 한 줌에 움켜쥔 채 나는 그를 더욱


가까이, 내 품 안에 붙였다.

“너는 전부 다 잊어도 돼.”

눈을 감고 전한 고백에,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해아가 웃었다.

키득거리며 들썩이는 숨통 탓에 내 몸까지 흔들렸다. 그는 내 말을 낯간지러운 농담으로 이해한 듯했다.

귀하게 얻은 남은 9 분간, 나는 해아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보냈다.

누구는 강해아를 천진하다 말했고 누구는 철부지 부자라고 말했고 누구는 덩치가 저만하다고 무시하지
말랬지만, 내게 해아는 그저 해아였다. 품에 안으면 보드라운 뺨이 내 턱에 닿고, 늘씬하고 우아한 몸은
어린 강아지처럼 내 팔 안에 쏙 들어오는, 그저 해아. 내 해아였다.

천천히 나는 포옹을 풀었다. 어찌나 세게 안았었는지 해아의 뺨에 눌린 자국이 발갛게 남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내 팔을, 이번에는 그가 잡고 당겼다.

“어어? 가만히 있어야죠.”

“…뭐?”

“이제 태림 씨 차례거든요, 10 분 동안 가만히 있기.”

피크닉 매트 위로 내 몸이 풀썩 눕혀졌다. 내 가슴 위에 납작하게 엎드리면서, 해아가 키득거렸다.


해처럼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더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하며 선글라스를 벗어 걸쳐 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나는 붉어지는 눈시울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쪽, 쪽… 소리 내는 입맞춤이 연거푸 나의 턱에 내려앉았다. 부드러운 손끝이 내 눈썹을 결대로 만지고


이마 위를 빗질하듯 쓸었다.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들리는 듯했다. 내 몸 위에 실린 그의 체중이 기분
좋게 묵직했다. 달콤하고 보드랍게 풍기는 체향은 온전히 내 사람의 것이었다.

기분 좋게 웃는 그의 눈매가 달처럼 휘는 것이, 선글라스의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그 점만이


아쉬웠다.
저녁에는 없는 실력으로 요리를 했다. 태블릿 PC 에 레시피를 띄워 놓고 양파를 써는 나를, 해아가 어찌나
웃으며 쳐다보는지 뒤통수가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어어, 나 칼 쥐고 있어.”

해아는 앞치마를 맨 내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고는 놓아주질 않았다. 요리하는 내내 내 등에 얼굴을 묻고


‘너무 좋다’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찌나 달게 들리는지, 어른용 포대기 같은 건 없나 생각될 정도였다.

그가 좋아하던 방식으로 구워 낸 연어 스테이크에 치즈를 갈아 올린 샐러드, 딱 한 번 만들어 준 적 있는


볶음밥을 올려놓자 해아가 와인을 가져왔다.

“금주해야 하는 건 아는데 오늘만 봐줘요. 네?”

화이트와인 병을 안아 들고 유혹하는 말에,

“그래. 이리 줘.”

그러고는 코르크 마개를 따 주었다.

해아를 기쁘게 하기란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직접 해 준 요리와, 유리잔 가득 간얼음을 넣고 와인을
따라 주면 그만이었다. 마주 보고 앉은 자리에서 해아는 특별한 이벤트 없이도 싱글벙글했다.

“오늘따라 왜 이래요, 태림 씨?”

식탁 위를 가로지른 내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고, 결혼반지 위를 검지로 문질문질 매만지면서 해아가


물었다.

“왜. 이상해?”

손바닥이 서로 닿도록 손을 뒤집으며 나는 다만 되물었다. 그러자 해아가 쑥스러움 많은 아이처럼 웃었다.


어깨가 귀에 닿도록 으쓱이는 얼굴에 흡족한 기쁨이 넘쳐흘렀다.

“응. 왜 날 그렇게 느끼하게 쳐다봐요? 기분 좋게….”

손을 잡고 말을 나누다가, 식사를 하다가, 다시 수다를 늘어놓으면서 그와 나는 여태껏 가져 본 적 없는


긴긴 저녁을 보냈다. 와인 잔 속의 얼음이 녹아 물이 될 즈음에 해아는 취해 버렸다. 도수 낮은 와인 두
잔을 못 이겨 볼이 빨개진 채로, 그는 예전처럼 어눌한 발음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나… 내내 궁금했던 게 있는데요. 그때 우리…, AOM 테스트 한 거 말이에요, 나랑 태림 씨로 했던 거.”

“응.”

“그거 결과가 어떻게 나왔었어요? 그래도 우리가… 평균 점수는 됐으니까 태림 씨가 나랑 결혼한 거죠?”

긴 고민이 느껴지는 질문에 나는 그저 미소 지었다. 평균 점수…, 우리의 테스트 결과는 그 이상일


것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렇게 나왔어, 결과가.”

우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거라고…, 느린 목소리로 다시 한번 되짚어 주자 해아의 방실방실한 얼굴이


사르르 풀렸다.

“듣기 좋네요.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

식탁 의자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그를 따라, 나는 냅킨을 내려놓고 마주 섰다. 휘청휘청 한 발 두 발


걷기에 다가서며 팔을 뻗자 해아가 내 어깨에 매달려 왔다.

“안아 줄래요?”

그가 물었고,

“너도.”

나는 그의 허리를 두 팔로 휘감았다.

“…너도 나 좀 안아 줄래?”

그러자 해아가 숨넘어가듯 웃음소리를 냈다. 술기운에 큰 소리로 웃더니 민망한 듯 그가 입가를 닦았다.
소리 없이, 다만 내 품 안에 폴짝 뛰어 안겼다.

그대로, 코알라처럼 안기는 해아를 든 채로 나는 계단을 올랐다. 빽빽하게 풀칠해 붙인 러그 위를 한 칸


두 칸 밟아 올라갈 적에… 내게는 죽음이 필요했다.

푹신한 부부 침대 위에 해아를 눕혀 놓고, 내 상체를 힘껏 끌어안고 푸슬푸슬 웃는 해아를 바라볼 적에,


그를 오직 내 사람으로 느끼고 나를 오직 그만의 것으로 내다 바칠 적에… 그에게 온전히 각인되어
테스트가 종료되기 직전에.

나는 나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죽음을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삐뚜름한 에러처럼, 모난 버그처럼


보일지를 고민했다. 그렇게 되자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에 대해서 내내 생각했다.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다 죽어야 할까를.

“태림 씨….”

무슨 말을 들려줄 것처럼 입을 열더니 고스란히 잠든 해아의 곁을,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죽어야만


한다면 최대한도로 날짜를 미루고 싶었다. 어느 때보다 더 삶에 대한 의지가 충만한 밤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그를 떠나야 했다. 어느 때보다 기쁜 순간에 슬픈 결정을 내려야 했다.

보드라운 해아의 뺨에 나는 입술을 문질렀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따듯하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해아야.”

부르자,

“응.”

잠결에도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해.”

그러자 해아가 미소 짓는다. 꿈속에서도 나에게 같은 말을 듣고 있을까.

“사랑해, 해아야….”
긴 문장은 속으로만 삼켰다. 나의 내일에는 네가 있어야 해…, 네가 없는 내일은 생각할 수도 없어…
그런 말을 건넸다가는 해아를 깨울까 봐,

“조금 이따 다시 만나자.”

그저 그렇게 인사했다.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대고 숨을 죽이기를 한참, 나는 가까스로 허리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조용히
침대 밖으로 나섰다. 매일 밤 해아가 그랬듯이 이번에, 러그 깔린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가는 건 내
몫이었다.

차고로 들어가 운전석에 앉는데, 도진이가 하품하며 나를 따라왔다. 소풍이라도 가는 줄 알고 혀를


보이는 녀석을 안아 들고, 귀와 머리를 쓱쓱 만져 주었다.

“도진아. 형아한테 가. 가서 잘 자는지 봐 줘.”

그러고는 바닥에 내려 주자 똑똑한 녀석이 도로 집 안으로 향했다. ‘형아’라는 말이 해아를 뜻한다는 걸


녀석도 아는 것이었다. 희고 착한 도진이는 멀뚱멀뚱 나를 한 번 돌아보더니,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녀석 덕분에 나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슬픔에 절여진 듯하던 머리가 맑아졌고, 의식이 점차 또렷해졌다.

최대한 조용히 나는 차를 몰았다. 헤드라이트를 끈 채로 집 밖으로 나갔고, 그대로 정처 없이 차를


몰았다. 인적 없고 조용한 산길을 찾아 오를 즈음에,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시키지도 않은 경고음을 냈다.

서울 안이긴 한 건지 그것마저 의심스럽게 험한 커브 길을, 빙글빙글 돌며 나는 산길 위로, 위로 올랐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거듭 경고하는 내비게이션을 툭툭 때리다시피 눌러 꺼 버리고는, 산꼭대기로 향하는 길목에서 천천히 차를


돌렸다. 검은 밤의 하늘과 헤드라이트 불빛에 반사되어 은색 빛을 내는 가드레일이 보였다.

폐를 가득 채우도록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제발 알아채라….’

그리고 나는 기도했다. 있지도 않은 신이라는 작자가 아니라, 내 존재를 손쉽게 카피 떠서 프로그램 안에


처박은 진짜 천태림에게. 제발 알아채라고, 제발… 내가 너라는 걸, 제발 알아채라고…. 나라서,
천태림이라서 이런 선택을 하는 거라는 걸. 부정하지도 거부하지도 말고.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지 말고,
그저 알아만 달라고.
‘그리고 해아를 만나.’

강해아를 만나면 보자마자 믿게 될 것이었다. 내가, 그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경로를….

액셀에 발을 대고는 힘껏 밟자마자 온 세상이 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차체가 가드레일을 치고, 절벽을
향해 붕 떴다가 고스란히 추락했다. 퍽 소리와 함께 돌인지 흙인지 나무인지 모를 것에 한 번 부딪쳤고,
거친 소음을 내며 비탈길을 미끄러진 끝에 세 번째 충격이 크게 닥쳐왔다.

모로 꺾여 뒤집히는 차창을 바라본 순간 눈앞이 하얗게 터졌다.

‘아니, 제발… 좀.’

에어백에 고개를 처박은 채 나는 실소했다.

‘안전벨트는 풀었어야지. 죽을 거면….’

우스운 마음에 웃는데 내 숨소리가 이상했다. 공기가 피식피식 새는 듯 ‘히익’, ‘히익’ 기괴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숨을 쉬는 게 고통인 순간이 몇 초간 이어졌다. 평생 겪어 보지 못한 통증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고통은 금세 가셨다. 깜빡…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사방의 빛이 꺼져 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고장 난 의식 속에 그저 후회만이 샘솟았다.

‘괜찮아….’

내가 죽는 건 괜찮다, 진짜 강해아를 예견된 불행에 몰아넣느니…. 내 인생은 아무래도 괜찮다, 그를


차가운 비닐 위에 눕히느니….

하지만 지금 당장에는, 한 번 더 해아를 안아 보지 않고 나온 것이 후회됐다. 아무리 AI 라도 그는 나의


해아인데, 내게는 그야말로 산 사람인데….

‘한 번만….’

허옇던 눈앞이 빨갰다가, 검었다가, 푸르스름해졌다. 나는 이 색을 알았다. 해아가 그린 자화상이 꼭


이런 빛깔이었는데….

‘한 번만 더 안아 주고 나올걸….’

이제야 내가 그와 같은 색을 본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갈림길을 걷는다. 나는 아주 이해했다, 그가


왜 자기 자신을, 그런 빛깔로 그려 냈던 것인지.

이 이야기를 해아에게 해 주고 싶었다. 그 그림, 이제 알겠다고… 그렇게 말하면 해아는 웃을까, 울까.
그 반응이 궁금했다. 아이처럼 웃는 모습이건 섧게 우는 얼굴이건 그가 보고 싶었다.

아. 한 번만 더… 부들부들한 머리카락 사이로 내 손가락을 집어넣고 싶다. 한 번만 더 나를 담는 순한


눈을 마주 보고 싶다. 듣기 좋은 소리만 새어 나오는 입술에 내 입술을 누르고 싶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 대는 소리도 듣고 싶고, 코끝을 찡그리는 표정도 보고 싶고,

‘태림 씨.’

말해 주어야 하는데… 그 목소리를 처음 들은 순간부터 너를 사랑했다고.

…저 멀리 웃고 있는 해아의 옆얼굴이 보인다. 박살 난 차창 밖에, 8 월의 전시회를 감상하는 그가 있다.


은은하게 켜진 조명 불빛 아래에서, 오디오 가이드가 불어로 농담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해아가 웃는다.

제 미소에 시선을 앗긴 나를 발견하고도 그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도리어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뻗어


온다.

천진한 그를 보며 나도 따라 웃었다.

베타 테스트 종료

“흐아아암…!”

머리칼은 푸석푸석하고 도수 높은 안경알 너머의 눈은 벌겋게 충혈된 남자가, 찢어지게 하품했다. 쩝


소리 나게 입맛을 다시면서 그는 제 책상 자리로 걸어갔다. 커피 컵으로 쌓인 탑 아래에, ‘개발팀장
김민수’라는 출입증은 깔려 가려진 지 오래였다. 근 일주일간 내내 수면실에서 살다시피 하니, 회사
건물 밖으로 나갈 일이 없어 출입증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쩝.”

소리 내어 입을 떼면서 그는 어지러운 테이블 위 탁상 달력을 들었다. 처음 보자마자 제법 마음에 들었던,


‘가족을 찾아요’ 여섯 글자 아래의 진도 믹스 사진을 한 번 어루만지고는, 홱 뒷장으로 넘겼다.

개발팀 신입 가운데 가장 똑소리 나는 인재인 양민희 씨가 선물해 주어 몹시도 설렜던 그 달력은, 알고


보니 열다섯 개를 사들여서 팀원 전체에게 돌린 우정의 선물이었다.

5 월의 새 페이지에 실린 열 살배기 요크셔테리어의 프로필을 읽어 내리면서 김민수는 커피 잔을 들었다.

그의 눈이 힐끔 컴퓨터 자리로 향했다가, 튀어나올 기세로 부리부리하게 커졌다.

“어…. 어! 내가 돌린 시뮬, 누가 리부팅했어?”

자리에서 펄쩍 뛰면서 김민수가 외쳤다. 그 바람에 믹스 커피 두어 방울이 그의 티셔츠 가슴으로 튀었다.

늦봄부터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게 만드는 원흉, 쿨러를 제아무리 돌려도 열이 펄펄 끓는 컴퓨터 앞으로
그는 후다닥 다가갔다.

“김 팀장님, 정신 어디 두고 다니는 거예요. 그거 설정값 오류 나서 리부팅했어요, 강해아 설정에 베타


체크 되어 있던데.”
파티션 너머 자리에서 의자를 뒤로 빼내며, 개발팀 직원들이 이구동성을 냈다. 어떻게 대표님 결혼이
걸린 테스트에 설정값을 틀릴 수가 있느냐고 구시렁대는 말에 김민수의 이마가 퍽 구겨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흥분해 뿜어낸 김으로 흐려진 안경알을 올렸다가 내리면서, 그는 모니터 앞으로 구부정하게 다가갔다.
거북 목을 뻗어 출력된 값을 확인하는 눈이 위아래로 분주했다.

“오, 와…, 틀리긴 뭐가 틀려. 이거 발현 확률대로 돌린 거라고. 그냥 첫 회차에는 강해아 AI 가 똥


밟았네. 낮은 확률로 발현 안 된 버전으로 출력된 모양인데?”

푸르스름한 눈 밑을 손끝으로 긁적이면서 김민수가 말했다.

따박따박 따지는 목소리에, 좀 전까지만 해도 이리저리 그의 잘못을 지적하던 직원들은 전원 입을


다물었다. 컴퓨터를 식히느라 추울 지경인 개발팀 내부에는 키보드 소리만이 탁탁 울렸다.

“어…? 잠시만.”

부하 직원들의 실수를 지적할 기회에 김 팀장은 그야말로 신이 났다. 출력되어 나온 값을 요리조리


확인하면서, 그는 ‘쯧쯧’ 부러 소리 내어 혀를 찼다.

“이거 포맷도 없이 리부팅한 거야? 싹 다 밀고 시작한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싹 다 민다는 거예요. 데이터 크기가 얼만데.”

“아니, 누가 프로그램을 리셋하래? AI 정보값이라도 초기 설정으로 적용했어야지!”

“아, 팀장님…. 스파게티를 뭘 어떻게 건드리라고요, 우리한테….”

파티션 아래로 고개를 숨긴 직원이, 소심하게 지적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과정만 놓고 보면 블랙


기업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만큼, AOM 의 AI 개발은 전적으로 김민수가 도맡았다. 그렇다 보니 속칭
‘스파게티’ 꼴이 나도록 프로그램 코드가 그만이 이해할 수 있게 꼬인 실정이었다.

부하 직원이 콕 짚은 문제를,

“아, 그러면 막 건드리질 말든가!”

김민수는 묵살했다.

“나 원 참…, 이러면 결과 개판이라 진짜 프로그램을 리셋해야 되잖아.”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큰소리를 떵떵 치는 김민수 옆으로, 신입 양민희가 조심스레 다가섰다. 플리스


지퍼를 목 끝까지 잠근 채, 그녀는 갓 사 온 아메리카노 한 잔을 김 팀장 가까이에 내려놓았다.

“두 분 싸우지 마세요.”

아끼는 신입이 건넨 소리에,

“싸우는 거 아닙니다아!”

김민수는 과장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내 그는 컴퓨터 앞으로 사무용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테스트 결과를 훑는 그의 뒤에서, 민희를 향해


그녀의 구제를 받은 직원이 두 손을 모아 쥐고 기도하는 시늉을 했다.
“어…, 이상한 게 섞여 있네….”

침침한 눈을 문질러 가며 김민수는 목을 길게 뻗었다. 테스트 결과는 아주 훌륭했다. 깐깐하고 무서운


천태림 대표님과, 자유분방한 아티스트 강해아의 AOM 결괏값을 두고 돈 내기까지 걸어 둔 상태이건만
개발팀 내부에는 승자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압도적 긍정, 여태껏 돌려 본 여느 테스트
결과보다도 높은 점수가 산출되었다.

“버근가?”

그러나 단순히 지나칠 수 없는 이상한 요인이 하나 섞여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부하 직원들이


멋대로 리부팅 돌려 버린 1 회 차는 강해아의 AI 가 자살했고 결괏값은 당연히 아주 나빴다. 그런데
결괏값이 무척 좋게 나온 2 회 차조차, 천태림의 AI 가 자살해 버린 것이었다.

‘둘이 죽고 죽이기라도 했나.’

빨대를 쪽쪽 빨아 아메리카노를 흡입하면서, 김민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결과는 좋지만 과정에 문제가
생겼으니,

“이거… 전부 출력해야겠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하나하나 훑어볼 차례였다.

오후 7 시면 대표 이사 천태림이 퇴근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6 시 30 분이면, 결재받을 보고서를 안아


든 각 부서 팀장들이 대표실 앞에 줄지어 서 그의 퇴근을 저지하는 때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모가 열린 금요일 오후 6 시 30 분에, 치열한 행렬 사이로 개발팀장 김민수가


끼어들었다.

“새치기하지 마세요.”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고개 돌린 인사팀장의 눈이 금세 휘둥그레졌다. 김민수의 손에 대형 마트에서나


볼 법한 카트 손잡이가 들렸고, 그 속에 서류가 아주 더미로 실린 탓이었다.

“아무리 대표님이래도 그걸 다 봐 주시진 않을걸요.”

인사팀장이 실소 섞어 말했다. 그 말에 김민수가 무어라 대거리하기도 전에, 비서실장이 행렬을


갈라놓았다.

“대표님께서는 다시 회사로 안 오실 겁니다. 업체 미팅 마치고서 바로 퇴근하실 테니까, 서류는 다 여기


맡기고 내려가 주세요.”

허공에 두 손을 붕붕 저으며 전달하는 공지에 팀장들이 볼멘소리를 냈다. 하나둘, 가져온 서류들을
시은철에게 넘기기 시작했고 김민수도 무거운 서류 카트의 방향을 고쳤다.

아쉬운 마음에 흐트러진 서류철 위를 매만지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돌아오시는 대로 이거 꼭 좀 봐 달라고 전달해 주세요. 그 왜…, 천 대표님 AI 로 돌린 AOM 베타


테스트 자료입니다.”

“네. 저기 두고 가세요.”
시은철의 대꾸는 간단명료했다. 지시대로 카트를 주차하려다, 김민수가 눈을 좁혔다. 비서실장의 반듯한
관자놀이 양쪽에 붙은 패치가 두 장,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천태림 대표가 헤드 헌팅씩이나 해 가며 팀장 자리에 앉힌 개발자가 김민수였다. AOM 의 핵심 인력인 그를,


그러나 시은철은 좋아하지 않았다. 사회성 없는 사람일지라도 성격에 따라 호감일 수도 있는 법인데,
김민수는 비사회적인 데다가 매너까지 없기 때문이었다.

“…….”

지금도 이런 식으로 입을 쩍 벌린 채 남의 얼굴을 뚫어져라 관찰하지를 않나,

“시은철….”

하고는 친하지도 않은 주제에 이름을 제멋대로 중얼중얼 불러 댔다.

한쪽 눈썹을 추켜올린 채 시은철이 그에게 다가갔다. 차라리 직접 서류 카트를 받고 쫓아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김민수는 제자리에서 펄쩍 크게 뛰는 것으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러고는 카트 손잡이를
움켜쥐고 대표실로 직진하기 시작했다.

“에이, 아니에요! 제가 안에서 직접 기다릴게요!”

“뭐라고요? 아니…, 천 대표님 자리 비우신 와중에 그렇게 함부로 출입하시면….”

비서실장의 거절을 거절하며 김민수는 대표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건물 내에서 가장 천장 높고 전망 좋은


방에 카트를 끌고 들어가서는, 소파 중앙에 떡하니 앉아 보이기까지 했다.

“커피는 롱 블랙으로 부탁드릴게요.”

김 팀장의 뻔뻔한 대처에 시은철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사내에서 가장 봉급 높은 개발팀 팀장에,
천재랍시고 천태림 대표가 아끼는 사원이라곤 하나 오늘은 그 무례가 지나쳤다.

대놓고 오래도록 노려보는 눈길에도 김민수는 꿈쩍 않았다. 오히려, 천태림 대표 자리로 쫄래쫄래 걸어가
주인 없는 포스트잇을 한 장 뜯었다. 미리 건넬 메모를 적어 파일철 위에 붙이기 위해서였다.

구부정하니 허리를 숙이고 꼬깃꼬깃 메모지를 적는 그의 뒤로,

“뭐 하나, 주인 없는 방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김민수는 헛숨을 들이켰다. 허리가 바짝 서고 손에 쥔 포스트잇이 주먹 안에 구겨졌다.

마른침을 삼키며 느릿느릿 몸을 돌리자 검은 정장으로 몸을 감싼 거대한 남자가 그를, 심드렁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걷어 넘긴 머리칼은 단정해서 한 올 흐트러짐 없었고, 깊은 홑꺼풀 속 시커먼 눈동자는 무심했다. 키가


매우 크고 어깨와 팔뚝은 돌덩이 같아 이따금 사람이 아니라 석상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깎아 만든
듯한 이목구비에서도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어딘지 무서웠다.

알파나 오메가가 아니어도 그에게서 풍기는, 감춰지지 않는 기류를 읽어 낼 수 있었다. 베타인


김민수조차도 첫눈에 그가 우성 알파라는 걸 알아보았을 지경이었다.

주춤주춤 뒷걸음질하며, 김민수는 카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어, 그게… 대표님께서 꼭 좀, 봐 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보고하자, 천태림의 눈이 서류 카트 위에 닿았다. 빽빽하게 쌓인 서류철과


파일들은 대충 살펴도 하루 만에 전부 읽기는 무리인 양이었다.

“바쁜데 간략히 보고 가능한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그는 김민수를 지나쳐 걸었다. 요약 보고가 안 될 것 같으면 당장 나가 달라는


신호였다.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으면서 김민수는 선 자세를 고쳤다. 아메리카노 두 방울이 튄 옷이 뒤늦게


부끄러웠지만, 제가 만든 프로그램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번듯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켜 대길 한참, 김민수가 용기 내어 말했다.

“대표님은 본인 AI 가 왜 자살까지 하면서 이걸 전부 출력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러자 대표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커다란 몸을 사무용 의자에 앉힌 채 천태림은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냈다. 그러고는 외근으로 구겨진 셔츠 소매를 굵은 팔뚝 위로 걷어붙였다.

“앉지.”

기쁜 얼굴을 못 감추며 김민수는 카트 속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그가 테이블 위에 1 회 차, 2 회 차의


기나긴 보고서를 나열하는 동안, 천태림은 제 구두 앞에 떨어진 종잇조각을 발견했다. 꼬깃꼬깃 구겨진
하늘색 포스트잇이었다.

삐뚤빼뚤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갈겨 적은 메모를, 그는 조용히 내려다봤다.

‘베타 테스트 결과 압도적 긍정입니다. 응원 보내 드립니다!

P.S. 강해아 씨 설정값이 베타로 적용된 테스트의 경우 결과는 좋지 못했으나 상호 간의 애정도는 매우


높게 측정되었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한쪽 눈썹을 들어 보이는 천태림 앞에서, 김민수는 목구멍이 조이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배우자를 선택할 적에 천태림이 원한 것은 단순한 데이터 조각이 아니었다. AOM 대표로서 말하기에는
민망한 소리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제아무리 테스트 결과가 좋다 한들 얼굴 한번 마주 보고, 인사 한번
나누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에겐 결국 남이었다.

하물며 그 테스트가 그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물건인지라, 예정에 없던 사건 사고로 점철된 상태라면
그의 대답은 더더욱 ‘아니요’였다. 개발팀장이 큰소리 떵떵 치며 올린 보고에 대한 그의 감상이
그러했다.

강해아와의 결혼은 진행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테스트 속 그 자신의 인공 지능부터 잘못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천태림이라는 남자는 그리
로맨틱한 존재가 못 됐다. 누굴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는 해 본 일이 없었으며, 저를 폭주하게 만드는
오메가라면 멀리 두었으면 멀리 두었지, 좋다며 옆구리에 붙여 놓고 산다는 게 참으로 비이성적이라고
생각됐다.

개발팀장이 자신하며 내놓은 테스트 결과를 천태림은 신뢰하지 않았다. 자정까지 테스트 결과를 읽어 내린
감상은,

“쯧.”

혀를 차는 것으로만 마쳤다. 그러고는 마지막 서류철을 무심하게 내던졌다.

강해아를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었으나 사진이라면 인터넷을 통해 지겹도록 자주 봐 왔다. 한성 그룹에서


보내온 변호사들 역시 뻔질나게 천태림의 대표실을 드나들었지만, 개중 누구도 강해아의 외모를 칭찬한 적
없었다.

강해아야 눈, 코, 입에 문제가 없고 객관적으로 잘생긴 사람이긴 했다. 그러나 베타 테스트가 말하는


내용처럼, 첫눈에 반해 정신도 못 차릴 수준의 미인은 아니었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애초에 천태림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간에 누구의 외모에 반해 본 적이 없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문장만큼
그와 무관한 말도 없을 터였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서울 야경의 불빛은 번쩍번쩍 밝았다. 괜히 시간 낭비를 했다는 생각에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77 퍼센트라.’

발현 확률이 그것밖에 안 된다니, 결혼 계약을 무를 사유로 충분했다. 불쑥불쑥 튀는 결과로 놓인


강일해의 인성도 문제였고 임건인지 뭔지 하는 걸림돌도 문제였다.

‘…….’

물론 천태림 자신에게도 문제가 많았다. 당장 내일,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비서실장인 시은철에게 일방


각인 문제부터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내 남편이랑 키스한다고… 그 시은철이. 열성 오메가랑?’

아무래도 AI 형성이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만에 하나 AI 들은 아주 멀쩡하게 기능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닥쳐올 문제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두통을 느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 강해아와 결혼할 수도 있기는 했다. 테스트 2 회 차 결과가 그렇게 말해 오고


있었다. 사전 지식이 있으니 노력을 한다면 문제 있는 결혼 생활도 문제없는 해피 엔딩으로 끝맺을 수
있다고. 테스트 속의 ‘천태림’이 원한 것도 그것이리라.

그러나,

‘굳이?’

그 말이 천태림의 속에서 대거리를 해 댔다.

‘강해아가 불쌍해서. 그래서 뭐? 어차피 남인 사람인데.’


천태림의 머릿속이 대번에 복잡해졌다. 김민수가 흥분을 못 감추고 가져온 테스트 결과는 과연, 4 시간을
들여 읽을 정도로 대단한 스토리이긴 했다.

‘…불쌍하단 이유로 그와 결혼해서 평생을 같이 산다고. 불완전한 사람이랑?’

그게 도무지 제가 주인공인 이야기로는 안 읽혀서 문제였다.

중지로 책상 자리를 툭, 툭 치며 천태림은 쌓인 서류를 노려봤다. 꾸깃꾸깃한 하늘색 포스트잇이 특히나


그의 신경을 긁어 놓았다.

결국, 당장에 가진 정보로는 그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검토하는 데에 4 시간이 쓰인 서류 더미조차도


강해아와의 결혼을 강행할 증거물은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방을 챙겨 대표실을 빠져나갈 적에 천태림은 그답게 생각했다.

‘만나 보고 거절해도 늦진 않아.’

그것이 맞선이라는 이름을 붙여 마련된 약속일, 커피 한잔 마시자고 찾기에는 과하다 싶은 레스토랑에서


들어선 이유였다.

출근 복장에서 넥타이만 바꾸어 맨 채 강해아를 만난 시각에 천태림은 인상부터 퍽 찡그렸다. 레스토랑


입구에 서자마자 그는 심장이 광포하게 달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 알 수가 없군.’

멀찍이, 창밖을 바라보며 앉은 강해아의 얼굴을 실물로 보자마자 그는 도로 몸을 돌렸다. 2 층 계단으로


이어지는 기둥 뒤로 큼직한 어깨를 감춘 채 삐뚜름한 넥타이를 고쳐 맸다. 조금은 화마저 난 채였다.

업무에 방해가 될 정도로 뻔질나게 대표실을 찾아오던 한성 그룹 변호사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천태림은
그들을 원망했다.

‘…왜 아무도 언질을 안 해 줬지?’

다시 힐끔 곁눈질로 테이블 자리를 살피면서 그는 얼이 빠져 버렸다. 스스로가 그렇게나 멍청하고 둔하게


느껴지기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강해아만이 제 앞에 놓인 느낌을 받은
순간에, 그는 남은 평생 이날을 잊지 못하겠거니 짐작했다.

볕 드는 테이블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는 강해아는 잘생기다 못해 아름다웠다. 첫눈에 반한다는 문장이


천태림의 것이 되기에 충분할 수준이었다.

‘저렇게 생겼으면 그렇다고 미리 말을 해 줬어야지.’

우두커니 멈추어 서서 천태림은 눈을 좁혔다. 아무리 깐깐하게 살피려 해도 강해아에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단점이 없었다. 몸의 흐름은 늘씬하고 우아했고 얼굴의 부드러운 미소가 보기 좋았다. 고동빛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 맑다 못해 뿌옇다는 느낌마저 드는 흰 피부까지 모든 것이 남들보다 흐릿한데 오히려 그
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순간 천태림은 간밤 제 잠을 설치게 한 기록들을 되새김질했다. 두툼한 서류철 속의 강해아를, 눈앞에


놓인 완벽한 남자 옆에 대고 견주어 보았다.
프로그램이 말하는 강해아는 비틀어진 한국 사회가 만들어 낸 괴물이었다. 재벌가의 막내아들이자 천진한
예술가, 만인을 제 발밑에 깔아 놓고는 순전한 외톨이, 거인을 개미로 만들어 놓고는 겁내는 울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천태림은 의아해졌다. 제 눈앞의 강해아는 그렇게 슬픈 사람 같지 않았다.


눈동자는 어린아이처럼 반짝이고 두 뺨에서는 튤립처럼 빛이 났다.

우두커니 선 천태림을 마침내 강해아가 알아본 순간에, 말간 얼굴의 부드러운 미소가 짙어졌다.

토끼처럼 흰 앞니 두 개를 보이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태림 씨.”

그렇게 부를 적에는,

‘틀렸군.’

천태림은 가장 쉽고 매혹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베타 테스트가 틀렸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확신에 가득 찬 채 그는 단추를 채운 재킷 속에 넥타이 끝을 집어넣어 감췄다. 그러고는 반듯하게 걸었다.


반가움 반, 어색함 반으로 웃는 강해아를 향해 가볍게 묵례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일찍 나오셨군요.”

천태림이 말했고,

“아, 네. 초행이라 늦을까 봐서….”

강해아는 말끝을 흐렸다.

“음…, 네.”

천태림은 스몰 토크라는 것에 소질이 없었다. 스물여덟 해의 인생 평생에 걸쳐 만난 이들 대다수가 그와


대화하기 위해 애를 써 준 덕분이었다.

“…….”

“…….”

애석하게도 그것만큼은 강해아도 매한가지였다.

햇살 드는 테이블에 침묵이 일찍 찾아왔다. 머릿속이 복잡한 탓에 천태림은 뭐라고 자기소개를 해야


할까를 긴 시간 들여 고민했다. 수많은 문장이 그의 머릿속에서 부유하다가 먼지처럼 쓸려 나가기를
반복했다.

이내, 강해아의 예쁜 갈색 눈동자가 그에게서 떠났다. 메뉴판 글씨를 내려다볼 뿐, 도통 다시금 살펴


주질 않는 모습이 긴 침묵에 지루해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 바람에 천태림은 안달이 났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하지, 보통 이럴 때는….’

이내 강해아의 예민해 보이는 코 밖으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입술마저 반듯하게 다물자 그는 몹시


도도하고 차가운 사람처럼 보였다. 곤혹스러운 기분이 되어 천태림은 물 한 잔을 제 입 안에 털어
넣다시피 했다.

그제야 강해아가 표정을 보였다. 더운 사람처럼 손부채질을 하더니,

“미안해요.”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제가…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서. 조금 긴장한 바람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미소 지으며 뺨을 붉힐 뿐인데 그는 숫기 없는 소년처럼 보였다. 단숨에 변한 분위기에 천태림은 시선을


사로잡혔다.

“사실 저도 처음입니다.”

딱딱하게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천태림이 말했다.

“…긴장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러자 강해아가 실소했다.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다행이에요.”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소리 내어 웃더니, 그는 제 앞에 놓인 잔을 들고 한 모금 커피를 마셨다. 아주


짧은 순간 가지런하던 눈썹이 구겨졌다가, 다시 반듯하니 돌아왔다.

순간 포착이라 불러도 좋을 만치 잠깐 보인 표정에 천태림의 손끝이 둔해졌다. 툭, 툭 소리가 나도록


검지 끝을 움직이며 그는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검은 눈동자는 물끄러미 강해아를 담았다.

‘…….’

고민에 빠진 듯 침묵 끝에,

“…강해아 씨는 아직 발현 전이시죠.”

천태림이 입을 열었다. 무얼 확인하려는 듯한 말투였다.

“네? 아아, 네. 하지만 금방 발현할 거예요. 듣기로는 파트너 알파가 있으면 늦은 발현도 안정적이라죠?
그래서 기대 중이에요. 음…, 아버지를 통해 말씀드린 줄로 알았는데, 아니었나요?”

확신 어린 얼굴에 반짝이는 눈을 달고, 강해아가 또박또박 말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대화의 본질을


흐리게 두지 않으려 천태림은 머리에 힘을 꽉 줬다. 예쁜 얼굴과 상냥한 말씨를 차치하고 들어보면,
강해아의 한국어 솜씨는 말 잘하는 외국인 수준이었다. 번역된 문장을 읽는 것처럼 군데군데 어색하기까지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암만 외국 생활을 오래 했다 한들 가족들이 전부 한국인인데, 한국말 대화가 서툴다니.

작은 의심을 몇 번이고 솎아 낸 끝에,

“…본인 발현율은, 알고 있습니까?”

천태림이 물었다.
의문에 사로잡힌 순간에는 답을 찾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깐깐한 성격이 빚어낸 질문이었다.

“네?”

간단한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강해아가 되물었다. 두 눈은 빠르게 깜빡거리고 눈동자에 작은 지진이


일었다. 발현율이라는 단어조차도 금시초문인 기색이었다.

천태림은 뺨을 살짝 찡그렸다.

“오메가 형질 검사 언제 했습니까? 정확한 수치와 검사 날짜를 기억합니까?”

긴 문장으로 고쳐 질문하자,

“아, 아… 잘 모르겠어요.”

강해아의 손끝이 제 윗입술을, 그리고 왼쪽 뺨을 더듬다가 테이블 밑으로 사라졌다. 곤혹스러워하는 착한


얼굴을 마주하자니 천태림은 스스로가 아주 나쁜 놈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AOM 이 잡아내기로는 강해아 씨 발현율이 77 퍼센트였습니다. 20 년 전 검사 결과로 77 퍼센트니까,


실제로는 확률이 조금 더 낮겠죠. 오메가가 아닌 베타이실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래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는 확인해야 할 내용이었다, 강해아의 동그란 이마 가쪽에, AOM
테스트기 칩을 빼낸 흔적이 점처럼 남아 있는 한은.

“아니에요.”

돌아오는 반응은 재빨랐다.

“저 오메가 맞는데?”

도리질 치며 강해아는 웃었다. 입매에 그려진 미소는 그러나, 천태림의 무뚝뚝한 얼굴 앞에서 서서히
흐릿해졌다.

“아버지께서 분명….”

그의 하얀 손이 다시, 제 왼쪽 뺨에 닿았다. 갈색 눈동자는 테이블 위를 분주하게 훑어 댔다. 명백한


질문에 내놓을 수 있는 답이 그의 머릿속엔 없는 듯했다.

“전화라도 한 통화 하고 올게요, 제가… 지금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이야기여서.”

눈을 접으며 강해아는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표정 변화가 빠른 사람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거라는


양 어깨를 추켜올렸다가 내리고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태도가 느릿하다 못해 우아했다.

“편하게 다녀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제게 양해를 구하고 차분하게 자리를 비우는 강해아를, 천태림은 보내 주었다. 다만 웃음기 많고 밝은


남자가 떠나자마자 그의 커피 잔을 살폈다.

손을 뻗어 잔의 겉을 만지는데 그 온도가 차가웠다. 얼마나 일찍 도착해서 기다렸으면, 잔은 벌써 식었고


커피도 거의 다 마신 탓에 밑바닥을 보일 듯 말 듯 했다. 굵은 눈썹을 찡그린 채 천태림은 몇 초간
갈등했다.

그러나 머뭇거림은 길지 않았다. 그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해아를 쫓아 나갔다.


전화 한 통 하고 돌아온다던 말이며 여상스레 웃는 얼굴을 생각하면 멀리 떠났을 것 같지 않건만,
레스토랑의 입구는 물론이며 그 주변 주차장에서도 강해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천태림은 걸음이 닿는 대로 움직였다. 스무 발짝은 더 걸어간 뒤에야 등장한 건물


후문 골목길에서,

“그럼 회장님께 말씀 좀 전해 줘…. 나중에라도 꼭 연락해 달라고….”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장님’이라는 호칭에 천태림의 신경이 삐죽 섰다.

“아, 아니야, 형. 나는 그런 게 아니고… 가, 갑자기 물어보시니까, 혹시나 해서….”

발걸음을 멈추고서 천태림은 골목 풍경을 눈에 담았다. 느릿느릿, ‘형’을 연신 불러 가며 전화하는


강해아의 자세가 구부정했다. 주억거리는 고개는 땅을 향해 내려간 지 오래여서 맞선 상대가 저를 찾아
나온 것도 발견하질 못했고, 높다란 건물의 시커먼 그림자에 정수리까지 덮여 흰 피부가 진회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응. 아니야, 못 믿는 게 아니라…. …응, 미, 미안해. …응.”

두 손으로 휴대폰을 감싸 쥔 채 그가 사과했다.

“혀, 형 말이 다 맞아. …응. 정말로 미안해…. …알았어, 천태림 씨한테도 그렇게 말할게.”

그러고는 말이 없었다. 휴대폰을 든 손이 스르륵 내려가고 입술이 꾹 다물린 것을 보면 전화는 끊긴 지


오래인데, 강해아의 두 발은 레스토랑으로 돌아가지 않고 멈춰 버렸다.

도리어 그는 두 손으로 제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작은 소리를 내며 건물 외벽에 등을 기대더니,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기에 이르렀다. 조금 전 보여 주었던 여유 넘치는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하….”

떨리는 숨을 뱉으며 강해아는 제 재킷 안주머니를 더듬더듬 만졌다. 흰 손에 딸려 나온 것은 구겨질 대로


구겨진 담배 한 갑이었다. 한 개비 담배를 꺼내는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필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만져 대는데, 불조차 제대로 켜질 못하고 헛손질이었다.

보다 못해 천태림이 다가섰다. 저벅저벅 구둣발 소리가 닥쳐들자 강해아가 고개를 들었다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라 라이터를 떨어뜨렸다.

“태, 태림 씨…, 그게.”

흡연자인 줄 모르긴 했지만, 한 가닥 이름 날린 예술가이니 담배 정도야 못 피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강해아의 태도만 보면 담배가 아니라 마약이라도 하다 걸린 사람 같았다.

“잠시 실례합니다.”

그를 마주 보며 천태림이 허리 숙였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딛고 쪼그려 앉아, 그는 강해아의 왼쪽 뺨에


손을 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짱하게 웃던 눈이 경련하듯 움찔 감겼다.

그러나 강해아가 본능적으로 대비하는 폭력은 닥쳐오지 않았다. 다만 천태림은 묘하게 반질반질한 감촉이
드는 그의 뺨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 냈다. 얼어붙은 이의 귓가에 네 손가락을 붙인 채 그는
엄지손가락만 펼쳐 손금 위에 닦인 파운데이션을 확인했다.

“…….”
박박 문지른 탓에 뺨이 붉었다. 고개를 가까이 기울이며 천태림은 그 아래에 진 연두색 멍울을 확인했다.

그대로 강해아의 아랫입술을 엄지 끝으로 누르자, 작은 입이 덜덜 떨리며 열렸다. 하얗고 가지런한


잇새로 안쪽 뺨이 동굴처럼 드러났다. 덜 아문 생채기의 붉은빛이 그제야 천태림의 눈에 들어왔다. 뺨을
세게 맞아 볼 안이 터진 흔적이었다.

그러니 식은 커피를 마셔도 아픈 것이었다.

“아, 이… 이건… 그러니까.”

수치심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에 휩싸여 강해아는 떨고 있었다.

“너, 넘…어져서, 제가….”

얼김에 변명하는 그의 얼굴을 놓아주고,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가, 천태림의 손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대로 강해아는 눈을 꽉 감았다. 고개를 떨구고 어깨는 축 처진 채, 그는 맞선 상대가 저를 두고 떠나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멀어지는 발소리는 들려오질 않았다. 대신에 ‘후’, 먼지 부는 소리와
‘틱’, ‘틱’,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났다.

천천히 눈을 뜬 강해아의 시야를 밝힌 것은 작은 불씨였다. 그가 떨어뜨린 라이터를 손에 쥔 채, 불을 켜


든 천태림의 얼굴이 뚜렷했다.

볕이 잘 들도록 큰 창을 낸, 건물의 후면 골목은 어둑했다. 꼭 달의 뒷면만큼 너저분하고 컴컴한


공간이었다. 서로의 눈동자에 비치는 라이터 불빛마저 관찰될 지경이었다.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날 지경으로 턱을 떨며 강해아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얗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낯선 상대가 불붙여 준 담배를, 그는 볼이 패도록 빨았다.

매캐한 연기가 잠깐이나마 강해아의 표정을 가려 주었다. 그마저도 가신 뒤에는, 젖은 속눈썹을 가릴


도구가 없게 됐다.

소리 없이 그는 담배를 태웠다.

“강해아 씨는 왜 결혼이 하고 싶습니까?”

천태림이 물었다. 그러자 강해아가 두 눈을 느릿느릿 끔벅거렸다. 붉어진 눈꺼풀 밑으로 삐질삐질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네?”

한발 늦게 그가 되물었고,

“결혼이, 왜 하고 싶으시냐고 물었습니다.”

천태림의 음성은 부쩍 상냥해졌다.

“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강해아가 웅얼거렸다.

“가족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표현이 불분명한 대답이었다. 우유부단한 성미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제 말 자체에 확신이
없어서였다. 제대로 된 가족을 가져 본 적 없으니 그게 있으면 좋은지 어떤지도 모르고, 그저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유추할 뿐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불이 켜져 있고…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다녀오셨어요, 응, 다녀왔어…. 그렇게


인사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사람은 누구든지 다…, 그런 가정을 원하잖아요.”

고백하는 말이 드문드문 끊겼다. 숨을 참는 사이사이마다 눈물 혹은 담배 연기가 흐르는 탓이었다.

“인사 때문이네요. …인사 때문에, 결혼하고 싶으신 거네요.”

“…네. 인사 때문이에요.”

이제 강해아는 웃지 않았다. 웃음으로 무마하고 듣기 좋은 말로 얼버무릴 단계가 지났다는 걸 그조차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변명하는 대신에 그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태림 씨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내 발현 확률… 정말 그렇게 낮은가 봐요. …죄송해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신나서. 집이나 찾아다니고…, 아, 짐도 다 옮겨 놨는데… 진짜… 바보 같애….”

보기 좋게 보송보송하던 머리칼을 마구 구기는 손을, 천태림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붓을 쥐는 오른손


중지에만 특이한 모양의 굳은살이 잡혀 있었다. 손가락 자체도 살짝 휜 듯 보였다.

“괜…히 시간만… 버리셨네요. 죄송해요. 이 결혼은… 안 될 것 같네요.”

강해아가 속삭였고,

“네, 강해아 씨.”

천태림은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 정략결혼은 그른 것 같습니다.”

그러자 ‘흑’ 소리가 작게 울렸다. 자책이 섞인 더운 울음소리였다. 중요한 자리를 망쳐 버리고, 놀라


전화한 형으로부터는 욕설인지 꾸중인지 둘 다인지를 듣고, 맞선 상대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우는
강해아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 같았다.

“…대신에, 연애결혼. 저랑… 그거 합시다.”

그의 울음이 더 커지기 전에 천태림이 서두르며 말했다.

“울지 마세요. 하자고요, 저랑. 연애.”

급하게 꾸려 내느라 표현이 뒤죽박죽이었다.

“제가 강해아 씨…, 좋아할 겁니다.”

불확실성을 띤 말을 아주 확신하는 양 뱉으면서 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주 많이. 많이 좋아하고, …또 사랑할 겁니다. 해아 씨가 베타이든 오메가든 간에.”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집을 부렸다, 베타 테스트가 틀렸고 AI 가 잘못되었고 그


결과는 믿을 수 없다고.

아니었으면 해서 부정했다. 제가 좋아하게 될 남자가 슬프고 아프고 마모된 사람이라는 걸. 자신이


비열한 모함을 못 이겨, 그런 배우자를 내버리고 죽게 만드는 나약한 남자라는 것도.

“무…슨 말씀이신지, 잘….”

갈색 눈을 바삐 흔들며 강해아는 천태림의 두 눈동자를 살폈다. 그러나 파도처럼 일렁이는 눈동자는


그만의 것일 뿐, 천태림의 눈빛에는 일말의 혼란도 후회도 없었다.

“지금 청혼하는 겁니다.”

대뜸 닥쳐온 제안에 강해아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알아선 안 될 사실을 알았고 들켜선 안 될


모습을 들킨 순간에 듣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게 무슨….”

그러고는 눈물을 삼키는 그를 보며, 천태림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상한 소리가 되겠지만 들어 주세요.”

큼직한 흉곽이 부풀도록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당신은 내가 낯설겠지만… 나는 당신의 모든 걸 압니다.”

그는 고백했다.

“당신이 고기보다는 해산물을 좋아하고, 고양이보다는 개를 더 좋아하고, 색깔에 몹시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 저는 압니다. 스물여섯 살이 될 때까지 열심히 살았다는 걸, 당신에게도 진짜 당신 편이, 당신
가족이, 당신 집이 생기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지금은 순진하고도 순전해서, 사랑이 아니어도 된다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다정한 키스 한 번이면
슬픔을 이겨 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걸.

뒷말을 눌러 삼킨 끝에 천태림이 목을 뻗었다. 그들 사이 거리가 몹시 가까운 탓에 약간의 움직임이 대뜸


입맞춤을 낳았다. 다정하게 느껴지도록, 어색하게 입술을 위아래로 문지른 뒤 천태림은 느릿하게 고개를
떼어 냈다.

강해아의 왼손에 쥔 담배는 대번에 구깃해졌다. 천태림의 코 밖으로는 더운 숨이 흘렀다.

키와 몸매는 하드보일드 극에서 튀어나온 듯하고 두 눈동자는 진중하기가 짝이 없는데, 터무니없는


고백으로도 모자라 기습적인 키스를 하며 귀를 빨갛게 붉힌 천태림을, 강해아는 멍하니 올려다봤다.

바싹 타 버린 담뱃재가 후두둑 그의 손가락을 타고 떨어졌고,

“앗! 뜨…거.”

화들짝 놀라 움직대는 손을 천태림이 와락 붙들었다. 흰 살결에 붙은 뜨거운 재를 후우, 후우… 소리가


나게 불어 내는 낯선 얼굴을, 강해아는 입을 벌린 채 바라봤다.

“나….”

그러고는 속삭였다.

“…담, 배… 끊을게요.”

긴장으로 이마까지 붉게 익힌, 천태림이 웃었다. 어깨가 떨리도록 소리 내어 웃는 그를 따라 강해아도


마른 웃음을 흘렸다.

베타 테스트는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덕분에 천태림은 알았다. 제 눈앞의 이 남자가, 먼 길을


돌아서라도 그를 안아 줄 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뜨거운 홍조로 각자 귀를 태우면서.

추신.

13 층 엘리베이터와 마주 보는 일자형 데스크는 비서들의 업무 공간이었다. 사내 전화기와 듀오백 의자,


비밀번호가 걸린 미니 서랍까지 모든 게 두 개씩이었지만, 오늘 자리에 앉은 이는 윤은아뿐이었다.

종일 허리를 곧게 세워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업무 전화를 받을 때엔 신호음 세 번을 넘기지 않으며, 할


일이 없으면 안경알이라도 열심히 닦아 내는, 윤은아는 기합이 바짝 들어간 막내 비서였다.

똘망똘망한 윤 비서의 얼굴 뒤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검정 간판이 묵직한 분위기를 풍겼다. 양각으로
새겨 넣은 ‘AOM’ 세 글자가 간헐적으로 백색 빛을 냈다.

윤 비서는 그 빛이 몇 초 간격으로 반짝이는지 초를 재 보았다. 그것밖에는 지금, 그녀로서는 할 일이


없었다. 직속 상사인 천태림 대표가 회의에 한창인 오후 1 시 59 분은 그렇게나 느긋하고 심심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땡’ 소리를 내며 열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윤 비서가 고개를 들자, 2 시 정각으로


바뀐 시계 침과 거대한 꽃바구니가 동시에 시야를 채웠다.

“안녕하세요.”

분홍, 연두, 아이보리 컬러로 화사한 꽃바구니를 두 팔로 껴안은 남자가 말했다. 얼굴이 꽃잎에 가려진
탓에, 마치 그가 아닌 꽃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리며, 윤 비서가 물었다.

그러자 뒤뚱뒤뚱 다가온 꽃바구니가 데스크 위에 조심스럽게 놓이더니, 남자의 얼굴이 연두색 이파리
옆으로 쑥 등장했다. 그 바람에 윤 비서의 심장이 철렁했다.

만약 그가 길바닥에 흔히 돌아다니는 평균치의 한국 남성이었더라면, 얼굴을 들이미는 동작에 ‘시발 뭐


야’ 싶었겠지 놀라진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같은 행동도 잘생긴 남자가 하니 교태로 느껴졌다.

‘하…, 무슨 꽃집 배달원이 이렇게 생겼지?’

담대한 윤 비서조차 귀가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천태림 대표님을 뵈러 왔는데요.”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아….”

윤 비서는 멍하니 그의 낯을 훑어보았다. 작은 얼굴 안에 이목구비가 하나같이 또렷해 자기주장이 강한데,


눈매가 은은하고 턱선이 가늘어서 무엇 하나 과하지 않았다. 피부는 아기 팔뚝 안쪽 살로만 이뤄진 듯하고,
눈빛은 요즘 세상에 흔치 않게 영롱했다.

평생 만나 볼 남자 중 최고 미남은 천태림 대표라고 생각해 온 윤 비서였다. 그, 넓은 어깨며 진하고


묵직한 생김새에 익숙해져 이제 어지간해선 설레지 않겠다 싶던 심장이 간만에 콩닥콩닥 뛰었다.

벙찐 얼굴로 침묵하는 윤 비서를 향해, 남자가 조금 더 고개를 가까이했다.

“저….”

그러자 진한 향기가 훅 끼쳐 왔다.

꽃향기로도 미처 감춰지지 않은 우디 향이 윤 비서의 코끝을 건드렸다. 신선하면서도 중후한 멋이 있는,


남자다운 그 체취는 페로몬의 냄새였다.

‘알파일까? 아니면… 오메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지만, 그의 페로몬은 너무나 희미했고 꽃바구니 향기는 매우


짙어 둘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순간 그녀가 21 세기의 막내 비서가 아니라 16 세기 청나라 황제였더라면, 이 남자를 귀비 삼고 황자


열둘을 낳을 때까지 안 놔줬을 터였다.

“저기요?”

일순 윤 비서는 잠에서 깬 사람처럼 파드득 놀랐다.

“아, 네. 네! 뭐라고 말씀하셨죠?”

두 눈을 빠르게 깜박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남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꽃바구니요. 천태림 대표님께 전해 드리려 하는데요. 혹시 지금 회사에 계시나요?”

“아…, 그,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는 지금 미팅 중이십니다.”

“아아, 그럼 기다릴게요.”

“네? 아닙니다. 저한테 맡겨 놓고 가시면 됩니다.”

후다닥 대답하며 윤 비서는 꽃바구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신속하게 뻗어 온 남자의 팔이 바구니와


그녀 사이를 갈라놓았다. 마치 제 애장품을 사수하려는 듯한 동작이었다.

“음. 저….”

그러고는 멋쩍은 미소를 보이는 것이었다.

“네, 왜 그러세요?”

어리둥절해진 채 윤 비서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남자는 반듯한 눈썹을 묘하게 구기면서 웃었다.

“으음, 그게. 제가….”


겸연쩍은 미소와 무안한 감정을 실은 눈동자를 뻔히 보고도, 윤 비서는 그가 망설이는 이유를 알아채질
못했다.

“아!”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잠깐이나마 반짝 빛이 들었던 그의 낯이,

“혹시 본인 서명 필요하세요? 영수증 저한테 주세요, 제가 해 드릴게요.”

부끄러운 듯 귀까지 달아오르고야 말았다.

“아…아.”

주춤주춤 두 발을 이유 없이 움직이며, 그는 손등으로 입가와 뺨을 문질렀다.

“아뇨, 괜찮아요. 하하.”

그러고는 뭐가 재밌는지 혼자 소리 내어 웃다가, 꽃바구니에 꽂힌 하늘색 봉투를 꺼내어 제 주머니에


챙겼다.

“네. 그럼, 대표님께 꽃이라도 꼭 전해 주세요. 윤 비서님.”

“네? 아, 네….”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돌아섰다. 그사이 계기판의 숫자는 B2 가 되어 있었다.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그의 시선은 대표실로 통하는 복도 중앙의 그림에 머물렀다.

여러 색을 세련되게 겹쳐 올린, 붓 터치가 돋보이는 추상화는 어느 날엔가 천태림 대표가 대뜸 옆구리에


끼고 들여온 작품이었다. 전용 프레임까지 나무로 주문 제작 해서, 먼지 한 톨 들어갈 수 없게 글라스
틀로 둘러싸인 채였다.

“이걸 여기 걸어 두셨구나….”

남자가 작은 소리로 혼잣말했다.

이내 그는 목을 뻗으며, 그림과 대표실의 투명한 창을 번갈아 살폈다. 그러더니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서


대놓고 그림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림이 걸린 위치가 곧, 대표실 자리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임을
확인한 것이었다.

즐거운 비밀을 발견한 소년처럼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힘입어, 윤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생긴 꽃집 청년이 쉽사리 자리를 뜨지 않는 게, 혹시


새로운 만남의 기회는 아닐까 조바심이 나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페로몬 냄새를 감추지 않는 그의 태도만 봐도 그랬다. 초면에 알파나 오메가가 향을 슬쩍 뿌리는 건 보통,
당신이 마음에 든다는 신호였다. 그러니 당신도 체향을 내어 형질을 알려 달라는, 달콤한 줄다리기의
출발 신호.

“저….”

용기 내어, 윤 비서가 입을 열었다.

“혹시, 연락처….”
“네?”

“저, 혹시 전화번호… 알려 주시겠어요? 아, 제가 오해한 거라면 죄송한데 혹시… 관심 있으신가


하고요.”

“관심이요?”

이내, 복도 위에 고요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의 어리둥절한 눈을 본 순간, 윤 비서는 제가 무얼


착각했구나 깨달았다.

그러나 남자는 ‘저 여친 있어서요’라거나 ‘죄송한데 그쪽한테 관심 없어요’와 같은 흔한 거절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이상한 말을 했다.

“아아, 하하. 전화번호는 괜찮아요. 꽃만 전해 주면 태림 씨가 나인 줄 알 거예요. 이미 알거든요,


전화번호는.”

묘한 말을 끝으로,

“그럼, 수고하세요.”

그는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승강기 문이 빠르게 닫혔다.

‘까였네….’

윤 비서의 몸이 털썩 사무용 의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으휴’, 소리 내어 한숨 쉬며 그녀는 제


콧방울을 긁적였다.

‘나는 또, 좋다 말았네…. 에이! 아냐, 너무 어려 보였어! 대학생이었을 거야. 잘생겨서 인기 많은


연하남이라니 내가 그런 남자랑 연애할 때가 아니지.’

동화 속 여우가 투정하듯이, 그녀는 그를 폄하하려 애썼다. 먹고 보면 덜 익은 신 포도일 것이다! 갈색


눈이 맑은 호수처럼 빛나고, 미소는 천진난만하니 해맑고, 조곤조곤 대본을 읽는 듯한 목소리에선 다정한
성정이 묻어났지만, 그래도….

곰곰히 생각에 잠긴 그녀의 고개가 이내, 갸우뚱 기울어졌다.

‘근데,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누굴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이제와 하기엔 늦은 고민이었다. 그녀 곁에 남은 것이라곤 해사한 꽃바구니뿐이었다. 제대로 살펴보니


여간 예쁜 게 아니었다. 길거리 꽃집에서 파는 흔한 바구니가 아니라, 꽃꽂이 작품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하얀 꽃줄기가 좌로 길게 뻗었고 색색의 꽃망울이 많지도, 적지도 않게 모여든 모양새에, 중앙에는 색이
옅은 수국이 분홍색 천일홍을 감싸고 있었다.

‘향기 좋다….’

자리에 앉아 바구니를 구경하는데,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짧은 평화를 무너뜨렸다. 회의실에서 걸어 나온


팀장들이 우르르, 직원 하나씩을 옆에 끼고 무어라 말들을 쏟아 냈다.

행렬의 맨 끝에, 천태림이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만큼 큰 탓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며,


그는 데스크 앞에 멈춰 섰다.

“강해인 부사장 방문 몇 시지?”

툭, 내려놓는 서류를 두 손으로 받으며 윤 비서는 재빨리 스케줄러를 확인했다.


“내일 오전 10 시입니다.”

“11 시 반으로 옮기자고 해. 식사하면서 대화하자고.”

“아, 네네.”

펜 끝을 딸칵 누르고, 윤 비서가 들은 말을 곧이곧대로 메모하기 시작했다. 아직 일머리가 없는 막내를


위해 천태림은 ‘사적인 자리에서 좀 더 유도리가 있는 편’이라고, 한성의 부사장을 손쉽게 평가했다.

“근데 그 꽃은?”

굵은 팔을 데스크에 얹어 두고 그가 물었다. ‘유도리’까지 메모하던 윤 비서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아, 이거! 조금 전에 배달 왔어요. 대표님께 전해 주시라고, 배달원…이.”

“배달원이?”

“어….”

이내 번뜩, 그녀의 머릿속이 창백하게 맑아졌다. 뿌옇던 기시감이 걷히고 정신이 봄날 계곡 물처럼 확
트이는 순간이었다.

“제…가 혹시… 강해아 씨를 돌려보낸 걸…까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윤 비서가 말했다.

“뭐?”

그와 대조적으로, 천태림의 목소리는 외침에 가까웠다. 버럭 내지른 소리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릴 지경이었다.

“언제 나갔습니까?”

단숨에 굳은 얼굴로 천태림이 물었다.

“조…, 조금 전에요. 진짜, 진짜 방금 전에….”

눈치 빠른 팀장들이 좌로, 우로,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터주었으나 엘리베이터 계기판의 숫자는 3 에서 2


로 내려갔다. 천태림은 제자리에서 구둣발 소리를 냈다. 그의 속이 안달복달 타는 것이 맨눈으로도
보이는 듯했다.

윤 비서는 절박해졌다.

“아닐 수도 있어요, 대표님! 자기가 강해아라고 말해 주지도 않았고, 그, 그리고 사진이랑 너무 달랐단
말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나 외치는 변명에,

“원래 사진빨을 안 받아, 강해아가!”

소리치다시피 대꾸하고는 천태림은 복도에서 사라졌다. 비상계단으로 뛰어간 것이었다.

퉁!
철제문이 요란하게 닫히고, 윤 비서는 허탈한 듯 몸을 도로 앉혔다.

‘맙소사, 사고 쳤어. 어디서 많이 봤다고만 생각했지…. 아니, 근데 사진이랑 너무 달랐다고요! 실물이


훨씬 잘생겼잖아!’

제 머리를 쥐어뜯는 윤 비서를 구경하며, 팀장들은 숨을 죽였다.

이게 다, 시은철 실장이 무려 석 달이나 되는 휴가를 떠난 탓이었다. 뭐가 그리 급했던지 주요 업무를


메신저 공지로만 대강 남겨 놓고 잠수를 타는 바람에, 인수인계가 덜 됐고 실장 자리도 공석인 상태였다.

소문으로는 복권에 당첨됐다고도, 사고를 쳐서 교도소에 들어갔다고도, 갑자기 결혼했다고도, 천


대표에게 일방 각인 한 사실이 들통나는 바람에 의술의 도움을 받아 치료 중이라고도 했다.

“아아, 시 비서님…. 제발 빨리 돌아오세요….”

고통스러운 속삭임을 애써 외면하며 팀장들은 계기판만 올려다보았다.

“윤 비서 이제 죽겠네.”

누군가 아주 낮게 읊조렸다. 농담조로 나누는 귓속말이었다.

“하필이면 대표님 애인을 돌려보내냐?”

차라리 강준일 회장을 까고 말지… 누군가 얹은 말에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섞였다. 강준일 회장까지야
바람맞힌 적 없다지만, 그 댁 첫째 아들이 얼굴이 빨개진 채 쫓겨난 일이 있기는 했다.

“아, 불쌍해서 어떡하냐.”

대충 중얼거린 말을 끝으로 팀장들의 화두는 점심 메뉴로 옮겨 갔다. 그대로 승강기를 타고 사라지는


팀장들을, 윤 비서는 분노에 차 노려보았다.

이내 복도에는 없느니만 못한 침묵만이 머물렀다. 윤 비서의 불안한 눈동자는 엘리베이터 계기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걸려 온 업무 전화를 받으면서도, 도무지 걱정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계기판의
숫자가 오르락내리락 움직일 때마다 윤 비서의 심장도 좌로 쿵, 우로 쿵 떨어지는 듯했다.

마침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엘리베이터가 9 층에 잠시 멈추었다가, 10, 11, 12 를 지나, 13 층에서


‘땡’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아안 돼….’

무시무시하게 화내는 대표 이사의 얼굴을 상상하느라 윤 비서의 두 뺨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뜻밖에, 승강기에서 걸어 나오는 천태림은 관대한 미소를 머금어 황금 부처상 같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목덜미에는 불그스름한 열기와 약간의 땀이 반들거렸고, 오른손에는 편지 봉투가 들린
채였다. 조금 전 강해아가, 미처 막내 비서에게는 맡기지 못하고 수거했던 연애편지였다.

“마…, 만나셨구나.”

안심한 기색을 못 감추며 윤 비서가 혼잣말했다.

“그래. 1 층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더라고. 말로는 카페인이 땡겼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냥 가기 서운했던
모양이야.”

말수 적고 무뚝뚝한 천태림은, 주어가 ‘강해아’인 문장만 유독 길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안도감에 긴 한숨을 내쉬며 윤 비서는 자세를 고쳤다. 그러고는 재빨리 활기를 되찾았다. 제 실수를
자연스럽게 덮고 넘어갈 기회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1 층 카페에서요? 거기 아메리카노 천오백 원인데. 재벌도 그런 걸 마셔요?”

소소한 대화를 이어 보려 윤 비서가 말했고,

“아니.”

천태림의 대답은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강해아 씨께서는 1 세대 바리스타가 95 도 끓는 물로 한 방울 한 방울 정성껏 내린 루왁 커피가 아니면


입도 안 대지.”

그러고는 예사로운 얼굴로 읊어 놓았다. 다소 장황하게 들리는 설명에 윤 비서는 정신이 희미해졌다.

“우와…, 재벌은 진짜 그러는구나….”

입이 벌어진 채 윤 비서가 중얼거렸고,

“그럴 리가 없잖아.”

천태림이 짙은 눈썹을 찡그렸다.

“…네?”

“루왁은 무슨 루왁이야. 동물 학대의 산물이라고 불매를 했으면 했지.”

말끝에 피식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아, 네’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밖에, 윤 비서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질 못했다.

천태림의 관심은 어리둥절한 윤 비서에게서 금세 걷혔다. 흐뭇한 미소를 못 감추며 그는 데스크 앞에 선


채 꽃바구니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느라 힐끔힐끔 살필 적에, 큼직한 손에 소중하게 들린 편지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붙은


하트 모양 스티커의 구겨진 자국에서 이미 개봉한 흔적이 엿보였다.

“윤 비서. 천일홍의 꽃말이 뭔 줄 알아?”

문득 천태림이 물었다. ‘아, 넵, 잠시만요’ 하며 윤 비서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녀가


검색창을 열고 낯선 꽃의 이름을 입력하는 것보다도, 한껏 들뜬 천태림이 손에 들린 편지를 꺼내 읽는
것이 더 빨랐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군.”

“…….”

동물이었더라면 육식계가 분명한 얼굴을 하고, 그는 허리 숙여 꽃내음을 깊게 들이마셨다.

마차에서 내린 왕자를 맞이하는 신데렐라도 저런 표정은 못 지었을 터였다. 새카만 속눈썹이 촘촘하게
자리한, 고민 많은 짐승처럼 깊어 보이는 두 눈을 반쯤 내리깐 채 꽃 내음을 맡는 천태림을 바라보며,

‘역시 공주님….’
윤 비서는 생각했다.

비서실 직원들끼리 부르는 말로 천태림 대표의 최근 별명이 ‘공주님’이었다. 로맨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이국의 왕자에게 청혼받는 공주님이 꼭 그와 같기 때문이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귀한 선물을 실은
마차를 맞이하고 편지를 받는 식이었다.

비단을 실은 마차 대신, 대표실에는 그보다 훨씬 작지만 값비싼 선물들이 매일매일 들어왔다. 누가


알았겠는가, 집안 내력부터가 검소하고 청렴하기로 소문난 천태림 대표 앞으로, 흰 장갑을 낀 백화점
직원 두 사람이 모시다시피 하는 시계가 도착할 줄을….

그렇게 닷새 전에는 손목시계, 나흘 전에는 다이아가 알알이 박힌 팔찌, 엊그제는 휴일이었지만 갑자기
변한 분위기를 보아하니 정장을 풀 세트로 받은 듯했고, 어제는 넥타이와 샴페인, 오늘은 꽃바구니와
꽃말이 쓰인 편지를 선물 받았다.

“이제 구두만 오면 완벽하네요.”

손등에 턱을 괴고, 윤 비서가 중얼거렸다. 의문이 담긴 얼굴로 천태림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지금 대표님 복장에서, 구두만 그분이 주신 게 아닌 것 같아서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천태림의 눈길이 제 굵직한 몸으로 내려갔다.

“정확해.”

그러더니 그는 웃기 시작했다. 대뜸 크게 터뜨린 웃음소리에 윤 비서는 떨떠름하니 두 눈만 끔벅거렸다.

한때 천태림은 그녀의 완벽한 상사였다. 그러나 연애를 시작한 이후에 그는,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았다.

혼자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천태림이야 막내 비서의 속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다만 언젠가 강해아가


중얼거린 말을 떠올렸다.

‘애인한테 구두를 사 주면 거꾸로 신고 바람피우러 가 버린대요. 정말 무서운 이야기 아니에요? 구두가


얼마나 딱딱한데, 왜 그걸 거꾸로 신는 거래요?’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군인들의 고무신 이야기와 구두 선물 일화를 섞어 말할 적에 그 표정이 몹시


진중해서, 너무나 귀여웠었다.

일평생 몇 명의 사람을 만나건 간에, 강해아만큼 재밌는 사람이 둘은 없을 것이었다. 적어도


천태림에게는 그러했다. 그의 무료한 삶이 비즈니스맨의 별이라면, 강해아는 기꺼이 그 별에 정착한 어린
왕자였다.

천태림은 거대한 꽃바구니를 아기 다루듯 안아 올렸다.

‘보답으로 장미라도 선물해야 하나….’

즐거운 고민에 잠겨 꽃말이 쓰인 편지를 제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다가, 그는 동작을 멈췄다. 은은한


미소가 걷힌 얼굴은 단숨에 서늘해졌다.

“윤 비서.”

그리고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그럼 헬레보루스 꽃말은, 뭔지 아나?”

“네네, 뭔데요?”

스케줄러에 붙은 포스트잇을 정리하며, 윤 비서는 대충 대꾸했다. 그러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못마땅한


음성이 툭, 발밑으로 떨어지듯 무겁게 들려왔다.

“그딴 걸 왜 알아야 해?”

‘하’, 한숨 쉬며 그는 예쁘장한 편지 봉투를 다시 확인했다. 무뚝뚝한 얼굴로 성난 빛이 드러났다가,


슬픈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검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귓불까지 붉어지는 홍조로 목이 뒤덮였다.

“나도 참 미친놈이지. 받아 본 게 이거뿐이라서 흉내 내는 사람을… 다 알면서, 그게 왜 좋을까.”

혼잣말하는 목소리가 어찌나 낮은지, 말이 끝난 뒤에 찾아든 침묵도 그의 목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민에 잠긴 얼굴로 천태림은 대표실 안으로 사라졌다. 성큼성큼 걷는 뒷모습과 소리 없이 닫히는 문을


바라보면서, 윤 비서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직계이자 최고 상사께서 자꾸만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통에,
이러다가는 심장 마비가 오지 싶었다.

‘요새 왜 저러시지, 진짜? 일정만 잘 정리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제 꽃말까지 알아 둬야 하나?’

고민하며 그녀는 마우스를 잡고는 좌우로 살살 흔들었다. 잠깐 사이 꺼졌던 모니터가 금세 도로 밝아졌다.


검색하던 ‘천일ㅎ’을 삭제하고, ‘헬레보루스’를 입력했다. 엔터를 툭 치자 꽃의 정보가 주르륵 화면을
채웠다.

“꽃말. ‘나의 불안을 진정시켜 줘요’?”

뭔데, 이게? 앉은 자리에서 눈만 끔벅거리면서 윤 비서는 관련 검색어를 클릭해 댔다. 다음에 대표님께서
꽃 선물을 고민하시거든, 이깟 것보다 훨씬 더 로맨틱한 꽃말을 추천해 드리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다 문득, 윤 비서는 손을 멈췄다.

‘어라….’

조금 전 달콤한 꽃향기와 함께 들이켰던, 은은한 페로몬 냄새를 떠올린 것이었다. 그 냄새가 오롯이
강해아의 체취일 리가 없다는 사실 역시 한발 늦게 깨달았다.

‘시스템이 포용하는 관계의 패러독스’, ‘수식으로 풀 수 없는 사랑’, ‘반드시 맺어져야만 하는 인연’


… 그런 낯간지럽고 소름 끼치는 홍보 문구를 실은 서류를 벌써 몇 번째 전달했는지 모른다. 한성에서
콜라보 사업 재계약 논의와 함께 제시해 오면, 천태림이 일괄 거절하는 식이었다.

아직 발현조차 하지 않은 강해아에게 청혼하고, 약혼반지를 끼우고야 만 천태림이었다. AOM 의 대표


이사와 셀러브리티 강해아의 연애는 기업 간에 좋은 홍보 수단이었다. 돈 냄새는 귀신같이 맡는 한성은
그들 연애사를 세간에 팔지 못해 안달이 났고, 천태림은… 솔직히 말해 윤 비서는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어떻게 하면… 베타 몸에 알파 페로몬이 그렇게까지 밸 수가 있지?’

다만 소름 끼치는 깨달음에 몸을 부르르 떨 뿐이었다.

‘으악, 으악, 으악! 내가 대표님 페로몬을 킁킁거렸다니!’


헛구역질하며 윤 비서는 티슈를 뽑아 코를 팽 풀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 코를 떼어 내서, 콸콸
흐르는 물에 헹궈 버리고팠다.

껄끄럽기 짝이 없는 기분에 몸서리치기도 그러나 잠깐이었다.

이내 전화기가 울리더니,

―윤 비서. 부사장한테 연락하는 거 잊지 마. …그리고 김민수 팀장 올라오라고 해.

새로운 일감이 밀려든 탓이었다.

4 층 전역에 푸르스름한 어둠이 절반만 내려앉았다. 타자기 두들기는 소음 역시 절반, 백열등이 켜진


구역에서만 연신 울렸다.

부하 직원 전원이 퇴근한 자리에, 피로감이 보라색 다크서클로 남은 남자는 개발팀장 김민수였다. 그는


빛이 쏟아지는 모니터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메모지의 공란을 채우다가,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키보드를 투둑투둑 두들겨 댔다. 말라빠진 손목에 붙인 원형 파스는 귀퉁이가 벗겨져
너덜너덜했고 무접점 키보드에서는 타닥거리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그 외에는,

“…….”

죽음 같은 침묵. 그뿐이었다.

AOM 은 여태껏 상용화는커녕 기업 차원에서 연구조차 이뤄진 적 없던 신생 분야의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탄탄한 기반과 경쟁력을 지녔음은 물론이고, 직원 복지가 빼어나서 3 년 동안 평균 퇴사율이 7 퍼센트, 1
년 차 이하 직원의 퇴사율도 10 퍼센트를 넘기지 않았다. 스타트업 회사임을 감안하자면 엄청난 성과였다.

수치가 말하는 바와 같이 AOM 사원들은 하나같이 애사심이 유별났다. 어느 부서든 한 주에 한 번은


단체로 야근해야 돌아갈 정도로 바빴지만, 금전적인 복지가 그 모든 단점을 무너뜨렸다. 입사 첫 월급에
이어 ‘환영금’ 세 글자가 붙은 100 만 원이 통장을 채우는데 어느 신입이 그만두겠는가. 게다가 근무
연수 1 년을 채우고 나면 매달 붙는 인센티브가 두 배였다.

덕분에 모든 직원이 서로에게 상냥하기가 공무원 사회 못잖았다. 나도 너도 이 회사에 뼈를 묻을 텐데,


괜히 싸웠다가 30 년을 서먹할 순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김민수는 그런 사원들 가운데에서도 괴짜라 불릴 정도로 일중독자였다. 그는 일을 사랑했고, 잘했다.


마침 집까지 먼 편이다 보니 그에게 있어 야근은 일상이자 취미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야근도 그에게는 충분히 즐거운 일일 수 있었다, 최고 상사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

힐끔, 김민수는 모니터 위로 눈길을 올렸다. 맞은편 자리 책상 위에 걸터앉아 닳아 빠진 서류를 읽어


내리는 천태림이 그와 함께였다.

‘저 인간은 다리에 쥐도 안 나나….’


바위처럼 곧게 앉은 채 눈동자와 손만 움직이기를 벌써 오늘만 두 시간째였다. 날짜로는, 오늘로 두
달째였다.

매주 금요일 밤마다 대표 이사와 개발팀장은 4 층 개발팀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불건전한 소문이 돌기


딱 좋게 비밀스러운 만남이었으나, 실제 분위기는 수능 전날 독서실이 따로 없었다. 김민수는 그가 시킨
업무를 보고, 천태림은 자칭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그놈의 공부 자료는 빗금과 메모로 너덜너덜할 지경이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김민수가 카트에
모조리 실어다가 제발 좀 봐 주십사 부탁하며 올린 베타 테스트 보고서였다.

그것들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삼류 소설이라고 비아냥대고, 그냥 파쇄하라고 명령하던 천태림은 이


자리에 없었다. 오늘, 그는 몹시 진지한 얼굴로 해독 안 된 코드를 일일이 옮겨 적고, 불확실한 그래프를
분석하기 바빴다.

우성 알파 중에서도 극우성으로 분류되는 형질을 타고나, 사람을 잘 조종하고 사업에 능한 모습이야 익히


알던 천태림 대표였다. 그런데 프로그래밍 언어 능력까지 좋을 줄은 몰랐다.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김민수가 제멋대로 바꿔 놓은 코드를 알아채고 지적하더니, 두 달 만에 AOM 결괏값을 자체 해독
하기에 이르렀다.

‘그걸 왜 굳이, 나랑 같이 하셔야 하느냐고요….’

부지런하고 똑똑하고 완벽한 상사 때문에 김민수는 난생처음 퇴사 욕구를 느꼈다.

한숨을 꾹꾹 눌러 삼키며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씨이….’

벌써 천태림 대표는 베타 테스트 보고서의 마지막 그래프를 분석 중이었다. 각자 일의 복잡도가


다르다지만, 함께 스타트 라인을 끊은 이상에야 김민수는 제가 맡은 일이 그가 해내는 공부보다 늦는
것만큼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어떤 경쟁도 이렇게까지 치열하고 애처로울 순 없을 터였다.

‘이게 전부 강해아 때문이야!’

김민수는 생각했다.

‘도대체 대표님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비난의 화살이 강해아를 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천태림이 대뜸 대단한 인센티브 보너스를 제시하며
야근을 제안해 온 게, 바로 그 강해아를 처음 만나고 돌아온 저녁이기 때문이었다.

듣기로는 평범한 맞선 자리였다고는 하는데, 도중에 외계인에게 납치라도 당했던 건지 그날 이후 천태림은


변했다. 한동안 넋 빠진 사람처럼 구는가 싶더니 파트너 포켓몬처럼 달고 다니던 비서실장 시은철에게
휴가를 내 주었고, 갑자기 패셔니스타 뺨 후려갈기게 꾸미고 다니길 시작하고, 미국 출장에 대비하여
뉴욕에서 지낼 집까지 그야말로 호화 저택을 예물도 아니고 ‘선물’이라며 구입했다.

베타 테스트 AI 설정값이 잘못되었다는 힐난으로 김민수의 자존심을 갈가리 찢어 놓을 땐 언제고,

‘강해아 씨 AI 는 아직 자고 있나?’
대뜸 소식을 물어 온 것도 그맘때의 일이었다.

‘예에? 인공 지능이 뭔 놈의 잠을 자요. 종료 시점에서 정지 상태인 거죠.’

벗겨진 입술 살을 뜯으며 김민수는 건성으로 대꾸했었다. 그에 천태림은 한동안 무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동 정지된 프로그램을 재가동시키라는 단순하고도 명료한 명령을 내리며 야근을 제안해 왔다.

‘다시 시작시켜. 내 AI 도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네? 원래 자리요? 그게 뭔, 뭔 말입니까?’

‘집으로 돌아가게 만들라는 말이야.’

아니, 씨부랄 그게 말이나 쉽지… 김민수는 생각했다. 자체 종료 시점에 접어들어 알아서 정지된
프로그램을, 그것도 별도의 리세팅 하나 없이, 재가동만 시키라니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종료 포인트를 왜 만들었단 말인가? 프로그램의 존재 의의와 완전히 대치되는, 너무나


의미 없고 수고로운 짓거리가 아닌가?

그러나 김민수에게도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이라는 게 있었다.

‘왜, 김 팀장? 못 해?’

‘오늘 정시 퇴근 못 해요’, ‘금연 못 하겠어요’, ‘이번 생엔 결혼 못 해요’라는 말은 감정의 고조


없이 쉽게 뱉는 입이지만 차마, 제가 만든 제 새끼인 AOM 프로그램 관련해서는 ‘못 해요’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김민수는 괜히 변죽을 올렸었다. 왜 하필 집으로 보내야 하느냐고, 이게 무슨 심즈인 줄 아시냐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천태림은 모호한 감정에 사로잡힌 듯한 얼굴로,

‘그럼 알 거야, 하려던 말이 전달됐다는 걸. …내가 알아. 나라면 그럴 테니까.’

하등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것이었다. 김민수가 알아챈 것은 천태림이 ‘심즈’가 뭔지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하여간 천태림은 존재 자체로 불평등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남자다. 알아듣기 힘든 소리만 골라 늘어놓는
건 그쪽인데, 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바보여야 하는 건지, 김민수로서는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설명한다 해도 김 팀장은 이해 못 할 거야. 빚지고 사는 기분이 얼마나 좆같은지….’

아니, 그게 뭔 개소리세요, 천 대표 당신이 학자금 대출이 뭔지나 알아? 금숟갈 물고 태어나서


다이아몬드 포크랑 연애하는 대표님이 빚에 대해 알긴 뭘 아냐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김민수는
성질을 꾹꾹 눌러 담았다. 천태림이 제안한 인센티브가 제 연금과 맞먹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대표님 AI 연애까지 도와야 하는 건데요?’

…라고 거절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김민수에겐 꿈이 있었다. 그는 차도 사고 싶었고, 집도 사고 싶었으며, HPC… 그러니까 슈퍼컴퓨터도


사고 싶었다. 이 회사에 입사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멋진 HPC 를 보유하고 있어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가슴이 설레서….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일산에서 서울로 출퇴근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밤 11 시에 일이 끝나도,


차라리 수면실에서 눈 붙이고 야근하는 게 더 효율적일 정도였다.

‘열심히 벌어서 서울에 집 사야지!’

희망 하나를 품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에 힘이 실렸다.

타오르는 눈빛으로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들기던 손은 그러나 금세 멈췄다. 오늘만 열다섯 번째 팝업된
에러 창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김민수는 멋없게 구글 검색창을 열었다.

‘T… y… pe… Error… object….’

탁, 타닥… 시무룩한 손가락이 에러 문구를 고스란히 옮겨 적었다. 수많은 개발자가 진작에 찾아본
문구들이 우르르, 관련 검색어로 줄을 지었다.

김민수가 자괴감과 싸우는 사이, 천태림의 전화가 미약하게 울렸다. 간헐적으로 진동하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천태림은 재빨리 통화 버튼을 밀어 눌렀다. 미소 짓는 그의 뺨에 휴대폰 액정이 닿았다.

“예. 전화받았습니다, 강해아 씨.”

단단한 목소리로 딱딱하게 인사하자, 휴대폰 너머에서는 말이 없었다. 몇 초인가 잠잠하다가, 이내 ‘


흐음’ 하는 못마땅한 콧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 걸었나 봐요.

그러고는 말이 뚝 끊겼다. 7 초의 통화 기록을 내려다보며 천태림은 실소했다. 딱딱한 척 장난을


쳤기로서니 그쪽에서 전화를 끊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정적도 잠깐이었다. 또 한 번, 직사각형 액정이 녹색으로 변했다. 조금 전과 같은 발신인을


확인한 뒤, 천태림은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응, 자기야.”

그러자 작은 웃음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응, 태림 씨.

도란도란, 언제 들어도 좋기만 한 목소리에 천태림은 온몸의 근육이 느슨해지는 감각에 취했다.

―자려는데 내가 깨운 건 아니죠?

조곤조곤한 음성에 귀를 붙이며, 천태림은 목을 살짝 젖혔다. 강해아에겐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다감한 말을 속삭이면, 잊고 있던 피로감이 속수무책으로 몰려들어서 어리광을 부리고만
싶어진다.

“아냐…, 나 아직 회사야. 마무리 지을 일이 좀 있어서.”

베타 테스트 보고서 뭉치를 툭툭 건드리며 그가 말했다. 스테이플러로 다닥다닥 찍어 박은 숱한 메모와


덧댄 자료들로 인해, 보고서는 두 달 전에 비해 곱절로 두툼해진 모습이었다.

―아, 일하는 중이었구나. 방해해서 미안해요. 끊을까요?

“아니, 아냐. 괜찮아. 왜 전화했어?”

그러자 휴대폰 너머에선 몇 초간 말이 없었다. 천태림이 재차 용무를 물으려 입을 열 때쯤,

―그냥 보고 싶어서 전화했죠.

강해아가 속삭였다.

천태림은 활짝 미소 지었다. 침대에 앉아 맨발을 이불 밑에 숨기고, 전화에 귀를 기대는 약혼자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펄떡펄떡 내달리는 맥박을 목덜미로 느끼면서,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나도 보고 싶어. 내일은 시간 어때? 우리 작가님, 작업하느라 요즘도 바쁘신지요?”

―바쁘죠, 바쁜데… 우리 대표님 만나 뵐 시간은 어떻게 내 볼 수 있을 것도 같고요?

“하하.”

이내 침묵이 찾아들었다. 너무나 편안한 고요였다. 달아오른 액정이 뿜는 열기로 귀는 한쪽만이 따끈했고,
아주 작게 들려오는 소음은 전화 너머 연인의 숨소리였다.

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사무실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천태림은 꺼진 컴퓨터며 살짝 돌아간 의자, 갖가지


숫자와 알파벳 그리고 우스갯소리가 적힌 화이트보드를 훑어보았다. 대뜸 주변을 둘러싼 물건들을 훑어본
이유는 따로 없었다. 기분 좋은 밤을 만끽하고자 무엇이건 관찰한 것에 불과했다.

아마 강해아도 저와 같을 거라고, 천태림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피로한 눈을 깜빡이자마자,

―그럼… 끊을게요. 잘 자요, 태림 씨.

미뤘던 인사를 건네 올 순 없었다.

피식 새는 웃음을 삼키며, 천태림은 느리게 속삭였다.

“그래. 내일 봐. 잘 자, 해아야.”

대화보다 정적이 길었던, 편안한 전화가 끊겼다.


열기로 번들번들해진 휴대폰을 닦으려다가, 천태림은 상단에 뜬 부재중 전화 기록을 발견했다. 낯선
번호로부터 걸려온 전화 기록이 총 세 통이었다.

익숙한 뒷번호 네 자리를 바라보다가, 그는 메시지함을 열었다. 그러고는 움찔 손을 굳혔다.

두 개의 메시지가 대뜸, 잠깐이나마 흐려졌던 정신을 일깨웠다.

[동물구조협회 운영진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실까요?]

오후 10:22

[이동 봉사자님이 아이

댁으로 이동 중이세요.

봉사자님 연락처 보내

드립니다.]

오후 10:23

놀란 마음에 입 안에 고인 쓴침을 삼키고, 천태림은 캘린더 앱을 확인했다. 업무 안팎으로 자잘한 일정


전부를 3 일 전, 하루 전, 1 시간 전마다 상기시켜 주던 비서실장이 자리를 비운 탓에, 잊고 있었다.

‘아…, 이사 날짜가 원래는 오늘이었지.’

…그 일자에 맞추어 진도 믹스 유기견을 입양하겠노라 신청서를 보내 두고, 집 주소까지 넘긴 것을.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그의 사정이 달라졌다. ‘도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개를 입양하겠다는


마음이야 여전히 굳건했다. 문제는 한성과의 결혼 계약을 파기하고 강해아와 차근차근 연애를 시작하면서
결혼 예정일이 변했고, 그 바람에 신혼집으로 이사할 날도 덩달아 밀린 점이었다.

때문에 이동 봉사자라는 사람이 어린 개를 데려갔을 그 커다란 집은, 아직 짐조차 들여놓지 않은


빈집이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손짓으로, 천태림은 받은 연락처를 급히 확인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엄지손가락에 식은땀이 묻었다.

―네, 안녕하세요!

전화를 받은 봉사자는 젊은 여자였다. 밝은 음성에 천태림은 아주 약간 안심했고,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

“늦게 전화드려 죄송합니다. 일이 바빠 연락을 못 받았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할 테니까, 20 분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들려온 답은 뜻밖이었다.


―아하하, 아니에요. 아이는 남편분께서 받아 주셨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천태림의 미간이 조용히 구겨졌다. 단순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빈집에서 남편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대신에 개를 받아 주었다니, 그 상황이 어리둥절하니 할 말이 없었다.

침묵에서 의아한 기색이 느껴졌는지, 휴대폰 너머의 봉사자가 상냥한 설명을 덧붙였다.

―댁에 계시기에 인사드리고, 보호소에서 나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알겠다고, 맡기고 가시라고 하셔서요! 와,
저는 서류만 보고는 동명이인이겠거니 했는데… 정말 강해아 작가님이실 줄은 몰랐어요.

“아…, 알겠습니다.”

‘강해아’라는 이름을 들은 뒤에야 그가 대답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자마자, 작은


탄식이 코끝으로 빠져나갔다.

‘왜… 이 늦은 시간에, 해아가 그 집에 가 있지?’

잘 자라는 인사를 끝으로 그와 통화한 게 고작 5 분 전 일이었다. 다정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강해아는


집이나 개에 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천태림은 제 머릿속 메트로놈이 느릿느릿 똑딱이는 것을 느꼈다. 혹시 해아는, 오늘이 이사


예정일이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을까? 날짜가 바뀐 걸 알면서도 아쉬운 마음에, 혼자서라도 그 집에 가
있기라도 한 걸까?

‘에이, 설마.’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가, 우뚝 멈췄다.

―그냥 보고 싶어서 전화했죠.

크고 텅 빈 집에 혼자 앉아서, 갑자기 찾아온 낯선 개를 안아 주면서 강해아는 그렇게 거짓말할


사람이었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될 지경으로 배려심이 넘치고, 천진난만한 얼굴을 달고서는 세상 누구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는… ‘설마’로 사람 잡을 도련님이었다.

이내 천태림은 바빠졌다. 구깃구깃 접어 올렸던 셔츠 소매를 급히 풀어 내리고, 그는 재킷을 찾아 걸쳤다.


이리저리 흩어진 서류와 노트들도 한데 모아 제 사각 가방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었다.

“김 팀장.”

“네에, 네. 저도 이제 다 되어 가요.”

반쯤 벗었던 구두에 발뒤꿈치를 쑤셔 넣을 적에 천태림은 김민수를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나 먼저 들어가 볼게.”

“예?”

그러고는 아끼는 부하의 인사도 듣질 않고 뛰쳐 나가 버렸다. 거대한 존재감으로 자리를 채울 때는 언제고,


퇴장은 몹시 신속해서 마치 번개가 지나간 듯했다.

“…….”

두 눈을 끔벅이며 김민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천태림이 사라진 사무실이, 벽 하나를 허물었다는 느낌이
일 정도로 황량하고 넓게 느껴졌다. 내심 불청객 취급하고 어색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사라진 그의
존재감을 무시하기란 너무 힘든 일이었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김민수의 정수리 머리칼을 소리 없이 흔들었다. 한 차례 부르르 몸을 떤 다음,


김민수는 뒤늦게 울컥 화를 냈다.

“씨이, 나도 서울 집 갖고야 만다. 나도 이 시간에, 뛰어나가서 집에 가고야 만다….”

마른 목을 길게 뻗어, 그는 천태림이 머물던 자리를 확인했다. 아직 해석이 덜 된 그래프 낱장이 한 장,


육아 휴직 중인 직원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흥.”

김민수가 콧방귀를 꼈다.

“그래도 이건 제가 이겼거든요.”

들어 줄 이 없는 허세를 부리며, 그는 검지로 엔터를 눌렀다. ‘달칵’ 소리를 끝으로, 종료됐던


프로그램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눈꺼풀 안에 뻑뻑한 기름이 낀 듯했다. 이물감이 느껴지는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눈을 뜨자, 차창 밖의
빛 얼룩이 시야를 채웠다.

몇 초 늦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창은 말끔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이삼 분쯤을 흘려보낸 것도


같았다. 길 밖으로 몇몇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자정이 닥쳐오는, 어둡고 깊은 밤이었다.

―‘집’으로의 안내를 시작합니다.

손을 들어 핸들을 움켜잡았다. 피로감에 물든 팔 자체가 둔하게 느껴지고, 손가락 하나하나가 뻐근했다.

긴 밤 내내 고생한 끝에 몸이야 피곤하긴 했지만, 운전을 못 할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조용히 출발시킨 차가 매끄럽게 서울의 도로 위를 달렸다. 몇몇 신호등은 자체적인 휴식 시간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밝은 사거리 신호등조차 운 좋게도 모조리 청색이었다.

놀랍도록 빠르고 손쉽게, 집에 도착했다. 야트막한 오르막길에 잠시 차를 세워 놓고 올려다볼 적에, 불이


꺼져 있어야 할 커다란 2 층집의 차창으로 주홍색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원 등이 길 안내하길 좋아하는 도깨비불처럼 환했다. 넓은 거실의 테라스 창은 마름모꼴의 밝은 빛을


카펫처럼 뿜어냈다.

순간 여러 감정이 뒤섞여서, 아직 아무도 이름 붙이지 않은 어떤 기분이 들었다. 애정으로 채운 마음


안에 달콤한 안도감과 심장이 널을 뛰는 반가움이 뒤엉켰다. 몸살 기운처럼 전신에 퍼진 피로감조차
적당해서,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아주 느리게 차에서 내려, 이미 열려 있는 정원 문을 밀고 들어섰다. 현관문마저 찾아올 이를 예감한 듯


활짝 벌어진 채였다. 긴 다리로 효율성 없이 느릿느릿 걸어 들어선 온 집 안은 온통 따듯하고 다정하기만
했다.

높다란 층고를 자랑하는 거실 소파 위로, 작은 뒤통수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소파 등에 무심하게 걸친


손도 함께 보였다. 편안하기 짝이 없는 잠옷 차림새로, 그는 제 몸에 비해 훨씬 큰 소파에 푹 파묻혀
있었다.

그보다도 먼저 발소리를 들은 것은 하얀 개였다. 제 주인의 무릎에 앉아 있던 녀석이 소파 팔걸이 너머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달려와 반기지는 않고, 꼬리만 붕붕 흔드는 모습에서 게으른 개의 성격이
엿보였다.

녀석의 머리를 만져 주던 이도 이내, 뒤따라 고개를 돌려 보였다. 여린 두 뺨에 졸린 기색이 홍조로 퍼져


있었다.

아무 변명도 설명도 하지 않고 그저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도, 따라 하길 좋아하는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느릿느릿 퍼져 가는 웃음기 속에 먼저 입을 연 쪽은 소파에 앉은 그였다.

“다녀오셨어요?”

졸음에 취한 미소에 이내 머쓱한 감정이 스몄다.

여상스러운 인사. 그것을 나누는 날만을 기다려 온 사람이 수줍어서는, 제 바람이 이뤄지는 순간이 못내
쑥스러운 눈치였다.

“응, 다녀왔어.”

대답은 부러 또박또박, 큰 소리로 건넸다.

그러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유치하고도 애달픈 감정에 취해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온 모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소리 내어 웃더니, 소파 깊숙이 뭉개던 몸을 일으킨다.

조용히 팔 벌리는 이의 품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그는 잠깐의 기다림조차 싫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 순간을 길게 만끽하고픈 마음에 어쩔 수 없었다.

천천히 다가서 몸을 붙이자 그의 두 팔이 다정하게 모여들었다.

그를 강하게 끌어안고, 부들부들한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순한 눈을 마주했다.

그의 입술에 입술을 내리누르자,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 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코끝을 찡그리며 두


뺨을 붉히고는,

“태림 씨.”
해아가 나를 부른다.

그래서 말해 주었다.

“사랑해. 그 목소리를 처음 들은 순간부터… 내도록, 사랑해.”

창밖으로 은근한 불빛이 새어 나갔다. 긴긴 길을 돌아 마침내 도착한, 사방은 온통, 어쩌면 내게 너무나
다정한 세계.

여상스러운 밤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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