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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 테스트 종료4
베타 테스트 종료4
‘왜?’
‘죽어…. 죽어 버려.’
‘아하….’
‘꿈이겠지, 이건….’
‘꿈….’
“태림 씨….”
“그만해요…. 그만.”
“그만해요, 이제….”
‘누구….’
박준우. 흩어진 내 기억의 핵심이 되는 퍼즐 조각은 난데없게도 그 남자다. 건방지고 무례한 열성 알파,
박준우…. 그를 ‘준우야’ 하고 친근하게 부르던 강해아가 기억난다. 박준우는 강해아의 대학원
동창이었고, 친구였다. …꼴에 말이다.
나는 낭만적인 남자는 못 된다. 그러나 부부간에 첫 섹…, …관계를 맺었던 늦봄의 밤 이후부터
강해아에게 뇌리 한구석을 내주었다. 고쳐 말해 그는 언제나 내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태림 씨?’
2 층의 강해아는 내가 알던 예민한 남자로 돌아왔다.
내 변호사는 물론이며 경찰을 통해서도 나는 그 남자의 기록을 찾아낼 수 없었다. 기억하기로는 이름이
‘박준우’ 석 자가 맞고 한국대학원 출신의 화가인지 지망생인지 그러한데, 제대로 된 나이와 출생지,
주민 등록 번호 정보를 찾아내려니 아무런 자료가 없었다.
박준우라는 남자는 없댄다. 변호사의 말이 그랬고 경찰의 말이 그랬다. 없는 남자를 고소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설명까지도 친절하게 이어질 적에, 나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한성 그룹 아들을 건드렸으니 그 남자도 자기가 잘못한 건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지레 겁을 먹고 잠적해
버린 걸 수도 있죠.”
아니 보통, 그렇게까지 하나. 이름도 은밀하게 바꾸고 사회적인 활동을 일절 끊어 버리고 아예 잠수를 타
버리나, 그저 있을지도 모르는 보복이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귀여운 막내인 해아가 제 아버지에게 박준우에 대한 고민을 전했을까? 대학원 동창이랍시고 알고 지내던
놈이 제 몸에 멍울을 남겼다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그 김에 화가 난 강 회장이 손을 썼을까?
번식 탈락자 열성 알파가 내 새끼를 함부로 건드렸다고…. 나라도 그랬을 테니 그도 그랬겠지.
‘…그런 거면 다행이고.’
변호사에게는 ‘주시해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그러나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변호사 또한 ‘
알겠습니다’ 하며 귀담아듣는 시늉을 했을 뿐, 내가 뉴욕행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박준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어떤 소식도 연락도 없었다.
뉴욕과 시카고를 오가며 업무를 보면서도 두어 번인가 그에 대해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고민은 늘 짧게
마쳐 버렸다. 내 인생의 진정한 골칫덩어리는 박준우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강해아.’
뉴욕 출장은 최악이었다. 그마저도 원흉을 찾자면 강해아였다.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내
출장을 망칠 수 있겠냐만은, 자리에 없기 때문에 그는 내 출장을 망쳐 놨다.
테스트 자체 성과보다는, 대표 이사가 직접 AOM 을 이용해 반려를 구하고 결혼까지 했다는 이슈가 가진
힘이 컸다. 덕분에 한성을 비롯한 협력사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얻으며 새로운 연구와 2 차 테스트를
진행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실상은 개발팀 책상마다 탑처럼 쌓인 일회용 커피 컵과 같았다. 그럴싸한 모습을 한 버그 덩어리란
의미였다.
‘팀장님, 서버 다운됐어요.’
프로그램이 잘 돌아가도 안 돌아가도 울부짖는 개발팀원들, 야근의 일수만큼이나 빈번하게 출연하는 버그,
…그리고, 얕게나마 사람 피부에 칩을 삽입해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 칩의 가격이 최소 천 단위인
데다 의료 보험 처리는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문제이고….
‘여드름 패치 붙인 사람 되기 vs. 강간, 폭력, 사기, 횡령, 어쩌면 살인죄를 저지를지도 모르는 사람과
평생 살기’라면… 누구라도 전자를 택할 것이었다.
-그저께-
[해아 씨. 별일 없습니까?]
오전 10:00
[[국제발신] 네???]
오전 10:15
[...안부 문자 보낸 겁니다.]
오전 11:00
[[국제발신] 넵! 별일 없어요!]
오전 11:06
-어제-
를 받을 수 없습니다.
00 시 이후에 다시 연락 주세요.]
오후 12:00
를 받을 수 없습니다.
00 시 이후에 다시 연락 주세요.]
오후 1:00
를 받을 수 없습니다.
00 시 이후에 다시 연락 주세요.]
오후 2:00
[자동 응답 문구라도 좀
설정해 두든가요.]
오후 2:01
-오늘-
[[국제발신] 죄송해요...
어제 왜 전화 주셨어요?
무슨 일 있어요?]
오전 12:27
[안부 전화 건 겁니다...]
오전 12:30
오 기사는 매일같이 ‘오늘의 작가님’ 소식을 부지런히 전해 주었다. 와이프 가져다주라고 선물을 챙겨
준 덕분인지 전화로 들려주는 목소리며 보내오는 메시지에도 느낌표가 잔뜩 들어가 활기찬 모습이었다.
[작가님 컨디션이 안 좋으십니다. 오전에 브런치 모임에 다녀왔는데 이후 점심은 거르셨고 저녁 약속은
취소했습니다.]
‘주신 카드’란 출장을 떠나기 전날에 오 기사에게 미리 건네준 내 카드를 뜻했다. 그럼 그 카드로 제대로
된 식당이라도 데려가 달라 했더니, 식당으로는 출발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혼이 났단다.
―‘봐줄 사람’이요?
“은철아, 바쁘냐.”
“그래…, 너만 믿는다.”
그런데,
“…….”
―…….
“…….”
“하….”
그러고는 실소했다.
결단코 강해아는 바람 따위를 피울 사람이 아니었다. 바람이라는 건 상대에게 질렸을 때 피우는 것인데
그는, 애초에 나를 잘 알지도 못하니까 말이었다.
임건 때문이었다.
‘자기 집에 불이 났다거나.’
‘강도가 들었다거나.’
‘뭐 이런… 개 같은 새끼가.’
“미친놈이.”
“…미안해. 신경 쓰지 말고 운전해.”
‘나야말로 미친 건가.’
아니, 아니지. 내가 왜, 뭐가. 미치기는 뭘 미쳐? 막 결혼한 사람한테 ‘나의 불안을 진정시켜 줘요’
같은 편지나 보내는 새끼가 미친놈이지. 허… 다시 생각하니까 더 어이없네.
“공항으로 가.”
“네?”
“앞을 봐야지.”
“아, 네네!”
“아, 아니, 대표님…. 서울로 가시는 거예요? 지금이요? 도착하면 내일일 텐데?”
“서울은 내일 아니야.”
“…서울은 밤일 거야.”
‘자나 보다….’
혹시 도둑이라도 든 게 아닌가 뾰족한 의심이 일었다. 거실에 달린 조명 하나만 뜯어다 팔아도 몇천쯤은
우스운 값이었다.
턱을 들고 방범 카메라부터 확인했고,
마음에도 없는, 싫은 소리 내뱉을 일 없게 성질을 죽여 가며, 나는 조용히 문간에 섰다. 그제야 강해아가
보였다.
“…….”
살면서 그를 정확히 알게 될 날이 오기는 할까. 감정이 상해서는 일까지 집어치우고 날아온 순간에, 나를
감동하게 만드는 강해아를.
“어….”
작업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 그의 그림을 다시 한번 살폈다. 가까이서 보자니 그림의 섬세함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렇게나 격정적인 감상을 하기란 평생에 두 번은 없을 것이었다. 심장이 벌렁거리다가 이내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천태림은 옹졸한 남자다. 화가 나서는,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나 보겠다며 서울까지 강해아를 찾아온
편협한 남자. 그런 남자를 강해아는 작품으로 그려 놓았다.
“어…, 태림 씨?”
“나 혼자 두지 말아요.”
다만 느낄 뿐이었다.
‘각인…했구나.’
‘내 오메가….’
“나 두고 가지 마요. 두고 갈 바에 그냥 죽여 줘요….”
‘내 사람.’
“나 좀 안아 줘요.”
“너무 후회돼요.”
꼭 내가 해야 할 말을 뺏긴 듯이 느껴졌다.
‘아니야, 나는 몰랐어.’
“아니야. 사실 몰랐어요.”
“태림 씨. 나랑 사는 게 숨 막혔어요?”
‘이건 고문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고문이다, 일부러 내게 고통을 주려는 의도가 실린….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목적도 악의도 없이 나를 이렇게까지 아프게 할 순 없었다. 바라는 답이 무언지 안다면 자백을 할 텐데,
해답은커녕 강해아를 달랠 방법조차 나는 알지 못했다.
‘그만해.’
“미안해.”
“전부 내 잘못이야.”
“너를 혼자 두고 가다니….”
다른 날의 다른 내가 하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고 나는 강해아를 세게,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제야 그의 색색거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천천히 달아오르는 뺨의 온도는 더는 차갑지 않았다. 소리 내며 뛰는 심장 박동도 다시금 내 흉곽을
두들겨 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내 남편 바람 안 났어.
그놈도 알파 아니고.]
오전 12:02
‘아니지.’
‘…아니야.’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혹시 은철이가….’
‘…강해아를 좋아하나?’
90 년대 노래 가사 같은 막장극이 내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아니지. 이건 ‘친구의 친구를 좋아했네’도
아니고, ‘친구의 남편을’… 시커먼 생각에 깊이 심취하기 전에, 은철이는 빠른 답장을 보내 주었다.
[????????????
너 지금 서울이야??]
오전 12:03
[아니... 난 그 사람이랑
해아 씨 둘이 분위기가
알려 준 거지--;;]
오전 12:03
오전 12:04
강해아를 이해하는 방법을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그가 외간 남자와 키스한 이유를 그렇게 설명한다면,
그게 진실일 확률이 높았다.
그로부터 자백을 듣던 순간에는, 상대가 임건이 아니라는 사실에만 집중하느라 안도했었다. 하지만
되짚어 보니 시은철은 그 일에 대해 내게 언급조차 한 일이 없었다.
‘…도 됩니다.’
입버릇처럼 존댓말이 나오려는 것을 속으로 삼켰다. 강해아는… 아니, …해아는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것 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강해아는 믿을 만한 사람이지.’
‘…….’
“이런 데선 못 자는데….”
잠든 이를 앞에 두고 나는 안 하던 혼잣말을 했다.
“강해아 씨.”
그렇게도,
“해아야.”
이렇게도 불러 보면서,
“…해아야.”
그렇게 두어 시간을 헤맨 끝에 완연한 아침이 됐다. 섬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였다. 그물 걷는
노인네들을 쫓아 나는 물 빠진 펄 근처까지 걸어 내려갔다. 개를 찾는다며 수소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근방에서 흰 개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흰 개를 보았다는 이야기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그러고는 더 먼 산을 가리켰다.
적당한 인사를 남기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나중에 한번 들러, 밥 먹으러’ 하는 외침이
들렸다. 힐끔 살펴본 가게는 국밥을 파는 식당이었다. 해아가 내장 섞인 돼지국밥을 과연 먹어나 봤을까
…. 애매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그대로 보호소 정보를 찾아 연락한 것까지는 좋았다. 진도 믹스와 흰 개라는 조건에 부합하는 유기견이
스무 마리가 넘는다는 소식에, 잠든 해아를 깨우지 않고 산길을 운전해 올라간 것도, 급하게 빵과
주스라도 사다가 먹인 것도, 마침내 해아가 ‘멍멍아’ 하며 하얀 개를 안아 든 것도 좋았다.
‘어디서… 본 적 있는데.’
‘아, 알겠다….’
“해아야.”
“좋아해.”
강해아가 좋았다.
―저… 혹시 미치셨나요?
내가 물었고,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셈 쳤다.
“윤 비서.”
대신에, 메일로 전달받은 보고서 파일을 열면서 막내 비서를 불렀다. 화면 하단에서 ‘네’ 하고 자세를
고쳐 앉는 막내가 보였다.
―그리고 임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전원의 의견은 아니고 몇몇 분들께서… 단순히 궁금증이
있으시다면서.
―‘미국 지사 터는 풍수를 보고 잡았냐’고…, ‘아는 무당이 있는데 추천해 주겠다’. 그러고서 연락처를
남기셨어요. 뭐라고 답해야 좋을까요?
―정말요?
“…아니.”
“시은철 실장한테 받은 연락처 넘기고, 관련 전화도 전부 그쪽으로 넘겨. 알아서 처리해 줄 거야.”
“자리는 상관없어.”
“…날짜가 문제지.”
“그런 게 아니라….”
“…….”
“그냥 받아 주면 안 돼요?”
“네?”
“나 애교 안 부렸는데요….”
해아가 농담했다.
입을 다물고 나는 패배를 시인했다. 솔직히 귀여워 죽겠다. 다 큰 성인 남자가 이렇게까지 귀여울 필요가
있나….
그러나 속에선 천불이 끓었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해아의 생각은 어떤지 몰라도 임건에게는,
강해아가 평범한 지인이 아니었다. 반듯한 척 표정을 고치고도 그는 눈빛 안에 남은 미련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지는 회의는 더더욱 나를 의아하게 했다. 각자 명함에 쓰인 명분대로 모여든 사람들과 개인전에 걸릴
작품을 확인하고 전시 개요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해아는 액자 이야기로 이상하리만치 애를 썼고 박
실장이라는 놈은 또 대단히도 고깝게 굴었다.
‘하….’
‘이거 아주 개새끼네.’
임건이 강해아가 말한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분명해졌다. 덧붙여, 어쩌면 강해아 역시, 내가
생각한 것만큼 강단 있는 작가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임 선생님’.”
그렇게 불러 세우자 임건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무얼 추궁할 거라 생각했는지 웃는 낯으로 입을 여는데,
나는 그가 하는 어떤 변명이라도 들을 마음이 없었다. 변명도 사과도 벌써 해아에게 받았다. 내가 신경
쓰는 것도 오직 그뿐이었다.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나는 그를 배웅해 주었다.
‘강준일 회장 사람이군.’
이쯤 되니 해아가 걱정됐다.
“너무 귀엽죠!”
“도진아, 이리 와. 새 옷 입자!”
“…….”
“…….”
‘도진이랑 간접 키스 한 격이네.’
“으, 응….”
해아는 키스를 잘하는 것 같다…, 짜증 나게도 그랬다. 먼저 달려들고 리드하려던 건 나인데, 어느새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서 나는 안달만 내고 진짜 주도권은 그가 쥔 듯했다. 그의 허리를 끌어당기고 더듬어
대느라 나는 바빴고 열이 났다. 어린애 달래기라도 하는 듯, 해아가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흐…, 으응….”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 내자 해아의 고개가 날 쫓듯이 딸려 왔다. 순하게 내려간 눈동자가 평소보다 훨씬
몽롱해 보였다.
“네?”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태림 씨?”
할 수만 있다면 강해아를 내 캐리어에 숨겨서 미국으로 데려가고 싶다. 수갑이라도 채워서 내 옆구리에
붙어살게 하고 싶다.
기대에 찬 나머지 직접 찾아가 설명서와 물건을 받아 나오면서는 심장이 나비처럼 날갯짓을 해 댔다. 없는
실력으로 포장까지 마쳐서는, 짐 가방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
가지런한 목에 입을 맞추고픈 걸 억지로 참았다. 입을 맞추면 키스를 하고, 키스를 하면 섹스를 하고플
테니까. 그러나 끓는 욕정을 애써 모른 척하는 나보다도,
“으, 응….”
“흐… 으읏….”
‘…오래 참은 거 티 내냐.’
다행히 해아는 제 엉덩이를 살필 정신도 없어 보였다. 피임약 부작용 때문인지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태림 씨….”
“그래, 그래….”
코끝이 빨개져선 내 이름만 불러 대는 해아를 안자니, 무뚝뚝한 나조차도 다정한 사람이 됐다. 그의 뺨에
입을 맞추자 눈물 맛이 짭조름했다.
“도진아!”
“해아야.”
고백하고픈 말은 많지만 전부 삼켰다. 이마까지 붉어진 채 기쁘게 웃는 해아의 자정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생일 축하해.”
그러자 해아의 입술이 호를 그리고 두 눈을 서서히 내리깔았다. 느릿느릿 그 입술에 내 입술을 맞대자
열여덟 살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해아가 내게 주는 모든 환호가 그렇듯이, 그와 내 마음이 통했다는 기쁨은 아주 잠깐 내려앉았다가
떠나 버렸다. 키스를 마치기도 전에 그가 얼굴을 떼어 내고는, 고개를 숙여 버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조금 혼미해졌다.
“같이 누워요.”
해아가 속삭였다.
하얀 꼬리가 흔들리며 시트를 건드려 댔다. 부부 침대 중앙에 누워 분홍색 배를 내민, 도진이는 개답게도
눈치가 없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체향이며 페로몬을 쏟아 냈으니 당연히 알아챌 거라 생각했건만, 피임약 부작용
때문에 해아는 그 모든 걸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속이 끓는 건 나뿐이었다.
내 정서에는 너랑 꽃잠 자는 게 더 좋은데….
“진짜 가족 맞잖아.”
‘미치겠네….’
아침이면 그는 나를 만난 첫날로 돌아가곤 했다. 오메가를 각인시켜 놓고도 불안해하는 알파가 될 줄은,
나는 꿈에도 몰랐었다.
‘아기 옷은 무슨.’
화내기도 잠깐, 테라스 아래를 내려다보며 ‘도진아’ 하고는 세상 속상한 소리를 냈다. 정원에서 도진이
녀석이 대답하듯 짖는 소리가 월월 들려왔다.
‘50 년은 더….’
“돌려줘, 제발….”
“제발….”
‘제발, 태림 씨….’
‘돌려주세요, 제발….’
날카로운 비명이 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강해아의 애원에 외면으로 응답하는 나 자신을 본 순간,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나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검은 상복을 입고 우울감과 증오만이 남은 얼굴을 한
천태림에게 온 힘으로 뛰어들어, 그를 때려눕히고 깔아뭉갰다.
‘죽을 거면 네가 죽어.’
요란한 비명 소리가 내 몸 아래에서 새어 나왔다. 불쾌감이 들 정도로 뜨거운 타인의 육신이 엉덩이와
허벅지 아래로 느껴졌고, 두 손바닥으로 움켜쥔 누군가의 목은 땀으로 미끌거렸다. 내 목덜미에서 퉁퉁
뛰는 맥박 소리가 북을 두들기는 듯했다. 시야는 온통 희뿌옇게 흐렸다. 아릿한 충격이 아래턱과 뺨에
연이어 닿았다.
“태림 씨….”
“태림 씨, 뺨….”
“천태림!”
“태림아, 정신 좀 들어?”
“해아.”
차라리 비명을 지르는 게 더 나았을 것이었다. 내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외침은 그보다 더 나쁘게 들렸다.
끔찍하게 절박해서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해아…, 해아는?”
고개를 움직여 사방을 훑어보는데, 핏자국과 무너진 의자, 비틀어진 책상이 놓인 비품실이 보였다. 바닥
한가운데에 이리저리 피가 튀어 있었다. 온통 난장판이라 여기에서 사람 하나가 죽었대도 놀랍지 않을
성싶었다.
시은철이 외쳤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오늘이 며칠이야? 여기가 어딘지 말해 봐. 좀 전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
손끝으로 벅벅 제 살갗을 긁더니, 그는 무얼 고민하는 듯 이마를 찡그렸다. 친숙한 얼굴에 갖가지 감정이
올랐다가 사라졌다.
거기까지였다. 더는 그를 혼자 둘 수가 없었다.
나는 성큼걸이로 해아에게 걸어갔다. 조급한 기색을 못 감추며 다가서는데, 나를 보면서 강해아가 웃었다.
그의 눈 아래 살이 파르르 떨리고 목덜미에 파란 핏줄이 섰다. 그가 삼킨 처참한 기분이 도리어 내게로
전이되었다.
“나가자.”
내 말에 그가 대답하지 않아도,
“여기서 나가자.”
주차장 밖으로 나서자 세단 옆에 선 은철이가 보였다. 무어라 말을 전달했는지, 오건민 기사가 뒷좌석
문을 열던 참이었다. 주위를 살필 정신도 없어 보이는 해아를, 나는 차량 뒷좌석에 얼른 앉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그 얼굴이 새빨갰다가 이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무서웠다, 해아가 기절할까
봐. 그대로 일어나지 못할까 봐.
“태림아!”
“…….”
어머니의 의심에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벌여 온 소란과 사건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합리적
의심이었다. 다만, 나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걱정과 약간의 화가 담겼던 눈빛에 더 큰 절망이
스몄다.
“…그럼, 누구니?”
“강일해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가,
“…해아를.”
나는 답지 않게 말을 더듬어 댔다.
…언제부터 아파서 병원 가는데 기록 남는 것부터 신경 썼을까. 해답이 간단한 문제조차 풀어내기 어려웠다.
풀어내어 알고 싶지가 않았다.
강해아의 자화상, 그 그림을 찾아야 했다.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그 끔찍하고 슬퍼 보이던 그림을….
“악, 태림 씨.”
“하지 마요!”
“자화상?”
“네가….”
내 목소리는 신음처럼,
그림을 놓아 버리고, 나는 강해아를 붙들어 쥐었다. 검고, 파랗고, 빨간… 불쾌감이 들 정도로
어두침침한 자화상 따위는 읽어 낼 수 없을 만치, 젊고 찬란하고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농담하듯 피식거리며 말하는 소리가 내 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도대체 몇 번을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속여 왔으면, 이 순간 내 앞에서 이미지 마케팅이라는 변명을 웃는 낯으로 할 수 있는 걸까….
“아니, 달라….”
“화내지 마세요.”
‘…뭐?’
“해아야, 제발….”
그의 어깨를 고쳐 쥐며 나는 애원했다.
그저,
“화…내지 마세요.”
“강해아.”
“흐…, 흑.”
“나, 나 숨 못 쉬겠어요….”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확인할 때는, 억지로라도 병원으로 끌고 갔어야 했다는 후회부터 솟구쳤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애원했다.
신음하듯 말했다.
“좋아서 하는 거긴 해?”
“나 태림 씨 남편인 거 좋아해요.”
웃지도, 울지도 않고 강해아가 말했다. 입매는 서늘하고 두 눈은 지독하게 외로운 사람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마침내 그를 만났다. 내 앞에서 최초로 진심인 그를 만났다.
“해아야, 그만….”
“…나 태림 씨 옆에 있는 거 좋아해요.”
“그…만, 그만 말해.”
“태림 씨… 좋아해요.”
“좋아해요….”
이상한, 괴물 숨소리 같은 신음이 목구멍 밑에서 기어 나왔다. 심장이 찢어지고 머리는 깨지는 것 같았다.
“보호자님, 놔주세요.”
병원…. 병원으로 진작 갔어야 하는 건데. 차 안에서… 언쟁하지 말걸.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걸. 그냥
안아 줄걸. 왜 숨겼냐고 따지지도, 억지로 밀어붙이지도 말걸. 울게 하지 말걸….
“보호자님?”
“보호자님, 괜찮으세요?”
“…해아야.”
정신을 차리고 한발 늦게, 의사와 간호사들을 쫓아가는데 강해아가 눈을 떴다. 병원 백열등 빛이 비친
그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훨씬 밝아 보였고, 동공은 이상하게 큼직했다.
“태림 씨.”
“나… 내 목걸이….”
“내 목걸이….”
포악한 독처럼 내 피부 밖으로 흘러 나가는 체향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무엇도 통제할 수가 없었다.
터져 나오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제…가.”
뜻 모를 말들이 우수수,
“제가 잘못했습니다.”
강해아의 가슴 위에, 나는 무거운 머리를 기댔다. 그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잇새로 숨결이 새어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태림아.”
그제야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내 어깨를 잡고, 달래며 어머니가 나를 해아로부터 떼 놓았다. 의사,
간호사들이 멀찍이 서 있다가 뒤늦게 다가왔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 하는 그의 몸짓이 자유분방한 영혼처럼 보였다. 내 손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눈짓은 도도한 천성 같았다. 내 고백을 받아 주지 않는 이유가 그 자신의 부유함에 있다고 생각됐었다.
나조차도 사업, 외모, 형질을 이용해 공작처럼 깃을 털어 대야 한다고도 자조한 적 있었다.
분했다. 그를 똑바로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것에. 좋아한다고 손쉬운 고백을 하고 흥미로운 퍼즐처럼 그를
다뤄 온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분노로 눈알이 빠질 것만 같았다.
‘괜찮아요, 태림 씨.’
‘자화상….’
한결 차가워진 머리로 가만히 앉아, 나는 잠든 해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팔뚝에 수혈 링거를 달고서 깊은
잠에 빠진 얼굴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내가 알던 천진난만한 해아의 외모 그대로건만, 한편으로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 같아서였다.
‘도진이….’
‘제발 그만 때려….’
정신없이 꿈결인 얼굴이 잔뜩 상해 보였다. 눈 아래는 푸르스름했고 입술은 메마른 채였다. 아픈 사람을
보는 건 좋지 못한 일이었다. 그 사람이 내 남편이라면 더더욱.
‘돌려줘, 제발….’
‘내 목걸이….’
훌쩍거리며 찾던 해아의 목소리도 되새김질하듯 다시 들려왔다. 빼앗긴 것이다, 내가 준 생일 선물을…
그 목걸이를 꽤나 좋아해서, 잘 때조차 풀지 않던 해아였다. 파자마 칼라 밑을 정돈하는 인기척을 조용히
들려주었었는데.
‘그래서 그렇게….’
‘그걸 돌려 달라고….’
내 사람의 목에….
“…….”
“태림아.”
그러고는 병실 창밖, 복도를 힐끔 살피셨다. 시선이 향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내 고개를, 어머니는
손끝으로 가볍게 잡아 돌렸다. 허리를 왕창 숙이고 구부정하게 선 채 나는 어머니에게로 두 눈을
고정시켰다.
“아, …그래요.”
그러나 해아를 때렸다는 오해를 받는 건 결이 다른 문제였다. 언제고 온화하던 미간에 구김이 생긴,
어머니는 속상하다 못해 화가 난 듯 보였다.
도대체 왜 그랬느냐고?
“모르겠어요.”
모르겠다.
분주히 오가는 의료인들을 피해 병원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섰다. 그리고 그녀와 잠시간 통화를
나눴다. 부사장과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협업 계약 관련하여 크게 미팅이 있는 날에만 두 번 만나
대화를 나눈 게 전부였다.
―왜 제가 천 대표님 편을 들 거라 생각하셨어요?
그러니 이런저런 말들로 강해인을 꼬드길 수가, 있긴 할 터였다. 앞으로 AOM 과 한성 사이의 큰 다리는
전부 당신을 통해 놓겠다고 말할 수도 있었고, 꼴 보기 싫을 남동생을 치워 주겠다고 청소부 노릇을
자처할 수도 있었다.
“그럼 안 됩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되물었다. 강해인이라면 이유쯤이야 알아서 추측할 테고, 나는 휴대폰 배터리가 별로
없으니까.
―알겠으니 뜻대로 하세요. 말 몇 마디 거들어 드리는 게 어렵지는 않아요. …그런데 다음에는요, …뭐, 천
대표님께서 나한테 할 다음 부탁이랄 게 있을까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 좀 덜 사무적으로
대화할까요?
“‘덜 사무적으로’요.”
‘혀까지 씹었나.’
‘그래, 그럼 그렇지….’
오 기사의 핸들을 움직인 이는 강해아가 아니었다. 자유로운 게 좋다고 노래를 부르던 강해아가 구태여
저를 따라다닐 기사를 고용했겠는가.
결국 강준일이다.
‘어디서 보든 상관없지.’
‘오히려 잘됐어.’
그들은 형제이면서 참 달랐다. 대외적인 이미지만 훑어보던 예전에는 강일해와 강해아가 닮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강해인 부사장이 그 집 셋째, 강미해와 닮은 것처럼 말이다.
“…….”
저 결정이 단순한 루비가 아니라는 걸, 해아는 모르지만 강일해는 아는 눈치였다. 하긴, 그러니 빼앗아
갔겠지. 당연히 내 것이고 강해아의 것인 도난품을 트레이드 카드라도 된다는 양 내놓은 알량함에 기가
찼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아끼는 시계라서.”
해아가 준 거거든.
“이왕이면… 지금 대답해 줬으면 합니다.”
“왜 그런 겁니까?”
그러자 강일해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과장된 웃음을 터뜨리기도 잠시,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당황한 기색을 지워 내기 바빴다.
강일해의 혓바닥이 길어졌다. ‘형제끼리 싸웠다’는 거짓말을 뻔뻔하게 늘어놓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토기가 치밀었다. 양심이 없으면 일방 폭행도 다툼이 되나 보다.
“하….”
“이봐, 천 대표님.”
“당신 환자지?”
“이런 식으로 협박한다고 내가 없는 이유라도 술술 만들어 불 것 같냐? 당신이 무슨, 깡패도 아니고….
진짜 어이가 없어서.”
“…….”
“…….”
대답 없이 나는 그의 태도를 관찰했다.
‘그게 하루 이틀이어야지.’
“뭐, 뭐야?”
“닮아서 그래.”
“아악!”
‘셋, …넷.’
“‘그거’?”
“…….”
‘나쁜 일….’
…결국 나였다. 강해아를 향해 품었던 모든 질문의 대답이 나였다. 그렇게 잘하는 그림까지 하루아침에
접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맨정신으로 사람을 팬다는 게 결코 유쾌한 일은 되지 못했다. 강일해를 아프게 한들, 하물며 죽인다고
해도 내 화가 식는 일도 해아가 씻은 듯이 낫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어차피 질문에 대한 답은 들었다. 이제 와서 무얼 어쩐다고 해서, 내 아버지 일을 알아내겠다고 강일해를
따라 나간 해아의 걸음이 멈추지는 않는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불려 가서 맞았다던 십 대 강해아가
씻은 듯 사라지진 않는다. 유학 가기 싫어서 울면서도 부득불 비행기에 태워졌던 여섯 살 강해아가
괜찮아지진 않는다.
하지만….
‘…아니지.’
‘태림 씨.’
…강일해의 얼굴은 가리지 않아도 될 뻔했다. 입버릇 하나까지도 전부 다르건만 그의 얼굴을 보고 때린다고
해아 생각이 나겠나…, 그러나 생각만 그렇게 할 뿐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묶은 재킷을 벗겨 주지
않았다. 눈물인지 땀인지 침인지 모를 액체로 젖어서, 천이 얼굴에 말려 숨도 못 쉴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힉…, 히익….”
“제…발, 좀….”
“그, 그만해….”
나는 내 코와 턱 밑을 문질러 닦았다.
“알지.”
코와 입을 온통 틀어막던 천을 치워 주자,
“허억…!”
“강일해 씨.”
“악!”
내 손날에 제 손을 채이면서 강일해는 휘두르던 것을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도자기 파편이, 여러 갈래로
박살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왜, 왜 강, 강해아야….”
“왜 그딴 공사를 꾸몄느냐고?”
“…….”
코피로 얼룩진 고개가 얼떨떨하니 바닥을 향했다. 애매하게 해아와 닮은 눈동자를 채우던 초라한 열등감도
삽시간에 자리를 비웠다. 이내 그의 검은 눈동자에 약간의 절망이 스몄다.
그대로 찢어진 손을 들었다가 시계를 망쳐 버렸다. 구태여 벗어 놓았던 보람이 없게 됐다. 그가 휘두른
자기 조각에 찢어진 살이 너덜너덜하게 벌어졌고, 흘러나온 피가 시계를 지나 팔뚝까지 삽시간에 적셨다.
“똑똑하게 좀 행동해….”
“불량품이야.”
그러고는 돌아섰다.
손날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차에 오른 뒤에도 피가 멈추질 않아서, 넥타이를 풀어 둘둘 감아야 했다.
‘피곤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싸늘할 정도로 침착하던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그래서 안심됐다. 뒤늦게
마음이 불안하고 머리는 어지러운 것이 내가 아주… 순 깡패 새끼는 아니라는 증거 같았다.
‘피곤해….’
…나랑 결혼했기 때문에. 그런 터무니없는 이유 하나로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는 걸 해아는 아직 모를까.
만약에 알고 있었더라면 나한테 언질이라도 해 줬을까. 또 몰랐다면, 그 이야기를 이제야 듣고서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렇게 웃지 좀 마….’
[약속 지키세요.]
‘하긴….’
‘강일해는 뇌가 없나?’
“…….”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을 맞닥뜨린 탓에 내 기분은 진흙탕에 빠졌다. 피차 얼굴을 마주할 예정이 없었는지
그 또한 당황한 표정이었다. 백색 세단 앞에 선 그는 평상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전자 담배가 들린 채였다.
해아가 제 말마따나 ‘새끼 작가’이던 시절에,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앞두고 긴장하자 임건이 안겨 준
것도 헬레보루스 꽃다발이었다.
대거리가 와락 치밀었다.
“하….”
“작가님께 대신 전해 주시겠습니까?”
덕분에 나는 속이 아주 가벼워졌다.
내 등 뒤로,
“작가님에게서 나를 뗄 순 없습니다.”
“강 작가님에게서… 나를 뗄 순 없다고요.”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가며 임건이 말했고,
“강해아한테선 뗄 수 있지.”
내 대답은 단순했다.
강해아 본인의 선언으로 그는 이제 화가가 아니다. 문외한인 나조차도 놀라게 하던 재능이 아깝기는
하지만, 해아가 선택한 은퇴에 일언반구 반박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결국은 날 찾아올 겁니다. 그 사람한텐 나밖에 없어요. 당신이 무서워져서
몸을 숨길 데가 필요해지면, 결국 나를….”
“입 닥쳐.”
“뱉으면 다 말인 줄 알아?”
혼란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나는 조용히 눈에 담았다. 멋대로 지껄여 놓고는 기억도 못 하는 꼴을 보자니
어금니가 꽉 악물렸다.
“…안달 난 게 누구인지.”
“임 선생님.”
“…….”
‘이럴 때가 아니지.’
그저, 해아를 보고 싶었다. 말간 얼굴로 일어나서는, 저는 괜찮다는 거짓말을 뻔뻔하게 들려줄 내 남편이
보고 싶었다.
“나다운 게 뭔데.”
“아야.”
“은철아.”
그런데 피곤했다.
밋밋한 내 낯짝에서 시선을 떼어 내며 은철이가 중얼거렸다. 표정만 봐도,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게
도드라졌다. 하여간 서정적인 놈이다.
“시은철. 너 솔직히….”
그리고 물었다.
“강해아 좋아하냐?”
“뭐?”
정수리 위를 밝히던 복도의 센서 등이 픽 소리를 내며 꺼졌다. 왼손을 들고 휘휘, 허공을 휘젓자 백열등
빛이 도로 환해졌다. 덕분에, 시은철의 떡 벌어진 입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아…니, 이….”
“이, 이 미친놈아!”
바락 욕부터 해 댔다.
“너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아니야! 아니라고!”
“진짜 아니냐?”
그 점을 짚어 주려 입을 열었다가,
“…….”
“여기까진 그럼 왜 왔냐?”
“…….”
‘뭐야…. 왜 이래?’
“…….”
“…….”
지금 시은철의 얼굴에 정확히 그날의 그 표정이 떠 있었다, …늦게 제 감정을 깨달은 표정이.
‘…이게 아닌데.’
물끄러미 훑는 눈길을 느낀 듯,
“…안 좋아한다고.”
시은철이 얼렁뚱땅 말했다. 구겨진 눈썹이며 빨개진 귓불의 색도 수습하지 못하는 주제에 거짓말이었다.
떨떠름하니 한숨 쉬며 나는 두어 걸음 물러섰다.
내심은,
생각이 해아에게로 뻗치자 더는 은철이에겐 볼일이 없었다. 그대로 내 남편이 있는 병실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흉내 내지 마. 돌았냐?”
“…….”
즐비한 선물에 둘러싸인 채 불우한 표정을 한 해아의 모습은 비관적인 사진작가의 작품 같았다. 편지며
꽃바구니, 포장된 상자들이 어둠 안에서도 은색으로 반짝이는데, 무엇 하나 뜯어 본 흔적이 없었다.
“태림 씨….”
“집에 가고 싶어요….”
‘이것 봐.’
나는 흡족했다.
‘개부터 찾을 줄 알았어.’
그것만으로도 나의 해아는,
“좋아해요, 태림 씨.”
젖은 눈동자를 쉽게 비추었다.
“좋아해요….”
“좋아해.”
“…….”
“…해아야, 하지 마.”
“왜요?”
‘시은철….’
“손….”
“…….”
“못살겠어, 너 때문에.”
“집에… 가고 싶어요….”
“우리 집에 가요….”
“…그래.”
“해아야.”
나를 편하게 여겼으면, 제 것처럼 생각하며 마음대로 주물렀으면, 가끔은 고집을 부렸으면, 욕심도 내
주었으면… 내가 그러듯이 해아 너도 그랬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내 팔 안에 안길 때면, 지난날을 보상받고 치료받는 기분이 들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잠기운에 웃는 네가 그랬으면 좋겠다.
“…….”
‘이미 알고 있다고만 전해 주십시오. 해아 발현율을 속여서 결혼시킨 것도, AOM 과의 제휴 관계가 아니라
정계 인맥을 보고 접근해 온 것도, 전부 다 알고 있다고.’
‘와…, 제법 아프네.’
‘상이 다 뭐라고.’
탄탄한 몸의 맵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맞춤 정장은 얇은 소재에 빛깔이 화사했다. 그 바람에, 충분히
잘생긴 사람에게 부드럽고 천진난만한 분위기까지 더해졌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강해아’를 알아보고
힐끔거리며 지나갔다가, 반드시 다시 한번 돌아와 그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나 참, 오늘 너무 멋있는 거 아니에요?”
“…….”
헛소리로 갈무리당했다.
해아의 진면목은 매력적인 오메가라는 외형에만 있지 않았다. 나조차도 모르는 사업가 이야기를 술술 읊고
알려 주는 방식으로, 그는 든든한 날개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AOM 과 내 이름을 걸고 국내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을 얻고도 나는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숱하게 다가오는 사업가 양반들을 만나고 얼굴이며 이름을 익히는 와중에도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속에서 나쁜 예감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저는 괜찮다며 웃는 해아의 낯을 보자니 그랬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가 기회였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강해아를 납치라도 해서
집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아니. 필요 없고 당장 퇴근하세요.”
문제는 나였다.
“네? 대표님?”
“으으응….”
달뜬 신음을 흘리며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목빗근을 잘근잘근 깨물고 핥아 올리는 앞니와
혓바닥의 감촉이, 시시각각 아팠다가 부드러웠다가 하며 내 혼을 쥐어뜯었다. 흉통 위에 맞닿는 가슴은
콩닥콩닥 움직거리고, 발갛게 흥분한 성기는 프리컴을 줄줄 흘리는 채였다. 체향이며 페로몬이
넘쳐흐르는 통에 정신이 혼미했다. 그에게 닿는 피부가 뜨겁다 못해 따갑게 느껴졌다. 학학거리는 숨결이
너무 달아서 들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무엇보다도,
‘제압하기 쉽긴 뭐가 쉬워.’
이가 절로 악물렸다.
“하자아….”
훌쩍훌쩍 우는 소리를 내며 해아가 상체를 움직거렸다. 느릿하게 앞뒤로 흔들리는 허리가 은근히 유연했다.
내 가슴 위를 집착적으로 만지작거리는 손도, 녹진녹진 애정이 어린 눈동자도 온통 나를 뒤흔들었다.
“해요…, 한 번만.”
“그래, 그래….”
사전적 의미로 ‘노팅’이란 ‘사정 시 상대의 임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알파의 성기가 변이하는 성적
결합 행위’인데, 속된 말로 ‘안에 싸면 좆이 커진다’는 뜻이었다.
다수의 베타 남성들이 알파를 선망, 혹은 질투하는 이유도 노팅에 있었다. 자기 가슴 크기에 집착하는
여자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지만, 자기 좆 크기에 집착하는 남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솔직히 말해 제
성기 길이를 자로 재 보지 않은 남자는 지구상에 없을 터였다. 그것도 발기 전후 두 가지 종류로.
당연스럽게도, 대다수 알파들이 노팅을 좋아했다. 오죽하면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고
노래를 불러 댈까. 성적 쾌감만을 위해 강제 노팅을 일삼는 놈들도 더러 있었다.
극우성 알파에게 노팅되는 순간 오메가에게 강제 각인은 당연한 수순이다. 베타도 오메가로 발현하게
만든다는 잘못된 소문까지 돌 정도이고, 자칫 잘못하다간 복상사시킬 수도 있다. 뭐… 오메가 입장에선
깔려 죽는 거니 복하사라고 해야 하나.
세간에 떠도는, 우성 알파와의 노팅 경험담은 하나같이 멀쩡하질 못했다. 알파의 흥분이 식질 않아서
삽입한 채 병원에 실려 가는 일도 가끔 있었고, 오메가가 억지로 도망치려다 다쳐서 피를 보는 일도
다반사였다.
“태림 씨….”
‘…안 되겠는데.’
“…….”
“으으음….”
“후….”
해아는 나를 기분 좋게, 그러면서도 멍청하게 만들었다. 핏줄을 세우고 꺼덕거리는 성기로 온 감각이
쏠릴수록 지능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입 안 가득 성기 끝을 머금고는, 볼우물이 패도록 빨아 대는
얼굴이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찌르르 솟구치는 감각은 현실적인데 눈앞의 광경은 나를 얼떨떨하게 했다.
“해아야.”
“음, 응….”
“하아…, 해아야.”
나는 축축하게 젖은 그의 것을 움켜쥐었다.
“아!”
‘열성….’
“윽, 읏….”
“괜찮아, 해아야.”
앓는 듯한 신음을 들을 수 있었다.
“…….”
“으응, 빨리….”
“윽.”
“헉, 헉….”
“악….”
비명을 흘리며 나는 거의 펄쩍 뛰었다. 팔을 뻗어 그를 밀쳐 내려다가, 두 번째 같은 자리를 깨무는
입질에 신음했다. 가슴팍 근육 위에 세게 박힌 잇자국이 남았다. 해아는 그 자국 위를 할짝할짝 핥고
빨아 댔다. 두 다리는 내 허리를, 코알라처럼 꽉 휘감은 채였다.
헐떡거리며 달려드는 해아를 억지로 떼어 내려는 시도가 몇 차례, 죽어도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올라타는 몸짓에 부딪쳤다. 나는 그의 손톱에 등과 팔뚝을 죄 긁혔고, 각인한 알파가 왜 저를 거부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해아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됐다.
“흑, 윽….”
진이 빠져 나마저 멍해졌다.
“천태림….”
“좋아….”
“좋아해.”
“헉, 윽….”
“아, 아….”
작은 신음을 흘리며 해아가 느릿느릿 내려앉았다. 꽉 조이는 자극에 성기가 끊어질 것처럼 아렸다. 터져
나오는 체향에 숨이 가빠, 목과 아랫도리를 동시에 죄는 느낌이었다.
“흑….”
“헉…, 헉, 해아…야.”
“이, 런 씨발….”
“뭘, 도대체….”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된다.
‘…어떻게 얻어 낸 마음인데.’
“…….”
“안…, 안 돼.”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싸우기를 연거푸 했다. 몸싸움은 사실상 일방 폭행에 가까웠다. 껄떡거리는 남성이
커지기 전에 억지로 몸을 떼어 내자 해아가 나를, 죽도록 치고 꼬집고 긁어 댔다. 지쳐 침대 위에
나가떨어지면 배 위에 올라타고, 억지로 밀어 내어 눕혔다 싶으면 제 살을 내 몸에 붙여 댔다.
“해아야, 그만…!”
“해아야.”
“으응….”
“해아야….”
“응.”
“…….”
“흐응….”
기분 좋은 신음을 내며 해아가 입을 벌리자마자 그의 잇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올라타다시피
덮치자 내 몸 아래서 분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뺨을 쳐 대는 손이 매서웠다.
“싫어, 싫어….”
“…….”
‘아, 진짜 돌겠네.’
“싫어….”
눈물 번진 얼굴이 무한정 서러워 보였다.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약병을 쥔 손은 뺨으로 향했다.
약을 좀 먹이려 했을 뿐인데 해아는 두 눈을 움찔대더니 꽉 감아 버렸다. 흐느끼던 입술이 닫히고 턱에는
호두 무늬가 생겼다.
정신없이 애원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단숨에 손에서 힘이 빠지고 온몸이 느슨해졌다.
여태껏 이해하기 어렵던 해아의 모습들은 모두, 강일해가 원인이었다고 생각했다. 맞고 자란 기억 때문에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내 손길을 피하고 눈짓을 외면하고 이따금,
‘때리지 마요….’
그런데…
“태림 씨….”
너는 왜 내 이름을 부르지?
“윽…!”
“그만….”
“컥….”
“미안해.”
“흐…, 흑….”
이내,
“왜….”
“해아야, 아니야.”
“왜, 왜… 왜 나… 나를….”
“아니…, 아니야!”
짧은 정적 끝에,
“흑…, 내가 그런 거예요?”
“어떡해요….”
“괜찮아.”
허리 숙여 나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뺨이 따끈하고 말랑했다.
“때려서 미안해요.”
“해아야. …약 안 삼켰어?”
“무슨 약이요?”
“해아, 야….”
내 손이 배 언저리에 닿자마자,
“윽….”
“아파요.”
“아파요…, 태림 씨.”
“안아 주세요….”
난 평생 강해아를 이길 수가 없다.
“사랑해요….”
대번에, 발끝부터 정수리 위까지 낯선 감각이 절정으로 차올랐다. 성감이라고 부르기엔 고상하고
기쁨이라고 말하기엔 애처로운 감정에 나는 먹혔다.
“사랑해….”
“악…!”
어느 때보다 깊이 그의 속에 파고든 순간에는 흥분에 눈이 멀었다. 옴짝달싹 못 하는 채 아파 우는
소리에도, 그를 놓아주긴커녕 페로몬을 쏟아 냈다.
“허억, 헉….”
그러나 욕정에 물들어 해아를 짓누르고 옭아맨 이유를 그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다. 내 성기가 꿈틀꿈틀
부풀며 그의 속을 벌리고 장기를 밀쳐 올리다시피 하는 순간에, 해아는 반항하지 않았다.
“아, 아….”
그, 온전한 믿음에 내 시간이 멈춘 듯했다. 충격에 잠겨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때리지 말라고 빌고
아프다고 눈물을 흘린 주제에 해아가 나를 믿는다…. 이대로 힘주어 짓누르기만 해도 그의 몸이 망가질
것만 같은데, 나조차도 나를 못 믿겠는데 해아는 이성을 잃은 와중에도 나를 믿었다.
그의 떨리는 숨결 하나, 근육의 경련 하나까지도 내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 해아가 웃었다. 이마와 두
뺨은 빨갛게 익고 두 뺨에 눈물이 줄지어 흐르는데, 그가 웃었다.
“태림 씨….”
“사랑해.”
그의 뺨에 입술을 가져다 붙이고 그렇게 말했다. 아직 고백할 준비가 되지 않았건만 내 혓바닥이 제멋대로
감당하기 힘든 고백을 뱉어 냈다.
“사랑해, 해아야.”
어째선지 눈물이 났다. 성감에 머리가 돌고 색욕에 짐승이 되어야 할 순간에, 내 정신은 오히려 차가운
물에 씻긴 듯했고 시야는 더욱이 또렷해졌다.
“미안해….”
그러면서 나는 사과했다.
연거푸,
이유 모를 말을 반복했다.
“괜찮아요.”
“아…윽, 악….”
“흐윽….”
“너…는 왜.”
‘뭐 어쩌겠어.’
‘잘 때면 꼭 이러더라.’
“해아야.”
“으응….”
“자?”
“응….”
‘왜 안 되는 거지?’
‘내 자리야.’
‘내 사람이고….’
‘내 오메가다.’
“임신하면 어떡하죠?”
어제는, ‘각인한 상대가 다른 사람과 노팅하면 어떻게 되냐’고 묻던 해아였다. 잠결에 속삭이는 음성이
무척 듣기 좋았다. 그런 경우 각인이 풀리게 마련이라고 말해 주었더니, 만족스러운 사람처럼 웃으며
꿈나라로 빠져들었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나는, 내심 자식을 원하는 전형적인 알파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 보세요’라고 하면 삐뚤빼뚤한 솜씨로 삼각형 지붕을 얹은 집과 배우자와 자녀 둘을 그렸었다. 그
배우자가 강해아고 자녀가 그를 닮은 아이라면… 축구단을 만들래도 좋을 것만 같았다.
“나는 아니거든요.”
피부가 아니라 기억에 새겨진 상처도 마찬가지다. 실재 여부와 관련 없이 불쑥 시야에 들어올 때가 있다.
“…노려볼 때도 있고,”
“무표정할 때도 있고.”
무표정했던 때 역시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 그런 적 없어.”
“…그럼 내가 증거 보여 줄게요.”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탐정처럼 말하는 그가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스파를 마치고 나란히 몸을 닦은 뒤,
보송보송한 잠옷을 세트로 꺼내어 입고 거실에 앉을 때까지도 즐겁기만 했다.
“바닥에서 뭐 해. 이리 와, 앉아.”
그러나 해아는,
“…….”
해아는 침대에 틀어박혀 꼼짝을 않았다. 나는 그의 어깨와 손을 주무르고, 뭐라도 먹어야지 않겠냐며
식사를 만들어 바치고, 체온계를 들이밀고 해열제도 먹이려 해 보았다. 그러나 해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 주질 않았다.
같은 애원을 천 번은 더 한 날에,
“태림 씨….”
짧게 묻자,
“내가요….”
해아가 속삭였다. 그러고는 그대로 입술을 벌린 채 한참이나 아무 소리도 없었다. 머뭇거림이 길었다.
해아는 내게 긴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침대에 사물처럼 덩그러니 앉은 채로, 기나긴
고백을 잇는 내내 그의 목소리엔 어조가 없었다.
“살고 싶어요.”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요.”
“해아야.”
데자뷔를 느꼈거나 꿈을 꿨다거나, 그런 이유를 든다면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따금은
나도 그를 볼 때 데자뷔를 느꼈고, 언제나 꿈속에서 그를 만났으므로. 나마저도 전생에 강해아를
만났을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농담할 지경이었다. 감성 충만한 예술가인 해아라면, 비슷한 느낌을 받고도
다른 해석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됐다.
“전부 읽고서 나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해도 괜찮고, 정신 병원에 데려가도 이해해요. 하지만 날…, 날
떠나지는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럴 리가 없잖아.”
‘강해아 미래 일지’.
강해아\test.txt
안녕, 다이어리야.
…보통은 이렇게들 시작하던데. 내 일지는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까. 무슨 말부터 적어야 하나…. 안녕,
내 시간을 돌려놓은 신이신지 누구신지야. 아니다…, 그만두자.
그땐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는 느릿느릿 자기소개를 했다. 아직 한국어에 서툴다며 보이던 멋쩍은 미소가 귀여웠다. 어눌한
억양조차 너무나 듣기 좋았다. 번역된 소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문어체를 간간이 섞어 쓰는 것조차
신기하고 새롭게 생각됐다. 그의 목소리엔 이어질 말이 무언지 기대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타히티에서의 날들이 전부 좋지만은 않았지만, 새로이 안 사실도 있기는 했다. 강해아가 꽤 귀여운
사람이란 점이었다.
어떤 밤에는 같이 저녁을 먹다가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는 말을 했더니, 그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웨이터가 다가와 후식을 추천하는 사이에 내 눈에 들어온 휴대폰 화면에는
포털 사이트 창이 띄워져 있었다. ‘고깐 뜻’을 검색해 놓은 화면을 못 본 척 연기하기가 쉽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폭력이 익숙했다. 상대가 천태림 씨라는 건 두렵고 낯설었지만, 폭력 자체는 익숙했다.
다행이지… 내 형이 강일해인 게 도움이 될 때가 있긴 하다는 게.
그리고 벌을 받았다. 러트가 온 남편을 놔두고 도망간 벌….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가려다 뒤늦게 토기가
치밀었다. 갑자기 전신의 근육이 종잇장처럼 가벼워졌다. 반면에 체중은 바위처럼 묵직했다.
그날의 느낌이 아직도 또렷하게 생각난다. 허벅지 근육이 터질 것처럼 당기던 거나 온몸에 아프지 않은
데가 없던 느낌. 높다란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울다가, 나는 기절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태림 씨.”
그날 이후 강해아는 병원에 입원했고 갖가지 치료를 받았다. 잘생기고 예쁘기만 하던 얼굴의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해서, 결국 세 바늘을 꿰매야 했다. 가족들에게는 계단을 굴러서 생긴 상처라고 하기에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강해아도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말해 왔다. 집을 지키면서 회복도 하고, 운 좋으면 그사이에 오메가로
발현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웃었다. 그가 웃을 때면 뺨에 붙인 밴드가 쭈글쭈글 구겨졌다.
그때마다 발현했다는 소식을 기대했지만, 바라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자고, 나는
자괴감과 싸웠다. 조금만 더, 해아 씨가 발현하기 전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그럼 지나간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없을 거고, 평생 그 미안함을 갚을 수 있을 거라고.
…개인 전시회 <빛과 잎>을 열었다. 정신없고 즐거운 날이었다. 내가 걸기를 원했던 그림자 시리즈는 전부
첨삭을 당해서 아쉬웠지만, 장모님께서 그림이 참 좋다고 말해 주셔서 몹시 기뻤다.
대학 시절부터 매달 오픈식 참여가 일상인 나로서는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신나는 일이었다. 전시회를
보여 주겠다는 핑계로 같이 외출하자는 말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가 좋다고 말해 주어서 얼마나 기쁘던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 누나에겐 건물
로비에 걸 그림 한 점을 티켓값으로 선물했다. 그러고도 아깝지가 않았다. 결혼하고도 신혼여행을
제외하면, 태림 씨와 단둘이 목적 없는 외출을 해 본 일이 없었으니까.
…강해아의 웃는 얼굴을 보기가 처음이었다. 소리를 내면서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기가. 그
사실이 자못 충격이었다.
심드렁하니 느릿느릿, 강해아의 보폭에 맞춰 그림을 감상하는 척하는데 갑자기 그가 웃었다. 두 귀에는
오디오 가이드 이어폰을 끼운 채 그림을 바라보며 혼자 웃더니, 뒤늦게 내 표정을 살피고는 입가를 닦아
냈다. 잠깐 묻힌 우유 거품처럼 웃음기가 싹 닦였다.
그에게 안겨서 기분 좋아야 하는데, 태림 씨랑 관계하고 우리 사이가 깊어지는 날만을 기다려 왔는데,
나는 이러다 죽겠구나 생각했다. 피가 흐르고 배가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고통에 짓눌려서 덜렁덜렁
흔들거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혼 계약서의 카피본이 구깃구깃해지고 계약서 자체의 내용보다도 덧붙인 메모가 많아질 무렵에는 가장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만 알게 됐다. 나는 사기당했다, 인생의 반려자가 될 거라 믿었던 남자에게.
마지막 법률 상담을 마치고 돌아온 차 안에는 묵직한 서류가 둘 놓였다. 하나는 한성 그룹에서 걸어온
계약에 숨겨진 설계를 파헤친 자료였다. 강해아의 형질과는 관계없이, 그와 이혼하려면 내 사업을
고스란히 한성 그룹에 넘겨야만 했다.
소송에 도움이 될 만한 서류를 글로브 박스에서 꺼냈다. 이어질 분쟁을 생각해 강해아에게는 보여 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손에 든 채 집으로 들어갔다. 내심으로는 패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피해 도망친 강해아는 친구라는 평론가의 집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그들이 전년도 겨울까지만 해도
사귀던 사이라는 걸 시은철에게 전해 들을 때, 나는 휴지통에 이혼 소송 서류를 집어넣고 작은 불을 내던
차였다.
그 사람도 베타라더라.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낼 때마다 일해 형은 날 주저앉혔다. 별다른 수고는 필요치 않았다. ‘네가
오메가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그가 뭐라고 할 것 같냐’는 질문 하나면, 나를 넘어뜨리기 충분했다.
‘정치 공작’, ‘로비’, 그리고 익숙한 의원님들 이름이 몇 명씩 뭉쳐 흘러나왔다. 또박또박 울려 나오는
말이 외계어처럼 느껴졌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해 형에게 상담을 시도했지만 괜히 나서서 여론을 망치지 말고 엎드려 있으라는 말만 들었다. 아버지는
연락을 잘 받지 않았고 작은누나는 해외에 있었다. 큰누나는, 한성 그룹이 받을 타격을 막느라 바쁘다고
했다.
끝내 거짓 연기를 하고,
나는 차가워졌다.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바위를 흉내 냈다. 단단해져야만 했다, 미안하다며 빌고
애원하는 강해아를 끝끝내 용서하지 않기 위해서.
강해아에게 흔들리는 순간마다 나는 패륜아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눈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잊어버리고는 했다.
일해 형을 통해 오메가 페로몬이 섞였다는 향수를 구했다. 내 체취가 사라지게끔 온몸을 박박 문질러 씻고,
두어 번 몸에 뿌렸다. 태림 씨가 나를 오메가라 착각해 주었으면, 그래서 내게 노팅해 줬으면
바라서였다.
우리는 붙어 있어선 안 됐다. 서로를 좀먹고 물어뜯고 난자할 뿐이었다. 억지로 그를 떼어 내고서 나는
끔찍하게 넓은 집을 떠났다.
세상이 말하고 내 이성이 판단한 것처럼 당신이 천부적인 거짓말쟁이인 건지. 아니면 남들 전부 거짓을
말하는데 당신 홀로 순전한 무고자인 건지. 당신 반응을 보고 내 평생의 미스터리를 풀고 싶다.
그날, 그 밤에… 분노와 증오로 얼룩져 이성을 잃어버린 날에. 당신이 가짜 오메가 페로몬을 뒤집어쓰고
내 배 밑으로 기어들어 온 날에… 당신은 기억도 못 하고, 안다 한들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각인했다고. 존재하지도 않는 강해아라는 오메가에게 각인했다고.
수많은 말들을 쏟아 내는 대신 나는 쉬운 대답을 했다. 이제는 사고도 놀랄 소식도 들리지 않았으면 해서,
조용했으면 좋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비행기가 뜨기 전까지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강해아는 받지 않았다. 이제 내가 아니라 당신이 밤인가
보다, 이륙 공지를 들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웬일로 갑자기 연락해서는, 돌아오면 뭘 하고 싶냐고 내
일정을 다 묻다니….
「부탁할 게 하나 있어요.」
‘왜….’
「이제까지 많이 미안했어요.」
“괜찮으십니까?”
“강해아 씨….”
그래서 우리의 안녕은 당신만이 홀가분했다. 나는 무너졌다. 무너지고 깨지고 산산이 부서졌다. 무릎
꿇린 채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잊자, 전부. 창백한 당신을 끌어안고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나는 소원했다. 당신이 내게 준 상처도
내가 당신에게 준 상처도 전부 잊겠노라고. 전부 잊어버리리라. 지워 버리리라. 당신을 만나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게….
피로 적신 눈이 뜨거웠다.
♡ ♡ ᕬ ᕬ ♡ ♡
+ ♡ ( ⌯′-′⌯) ♡ +
┏━♡━ U U━♡━┓
♡ @김골드 ♡
♡재업금지공금절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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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 속의 닭
‘태림 씨. 아파요….’
“왜….”
그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물었다.
비명처럼 내지른 외침에 해아가 입을 벙긋거렸다. 내가 왜 우는지, 어째서 화를 내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모른다, 강해아는… 그 모든 일을 겪은 이가 저 혼자만은 아니라는 걸.
다정한 손으로 내 뒷머리를 만지며 그가 물었다. 꼭 지난날의 나처럼, 재밌는 장난이라도 겪는다는 듯이
가짜 웃음소리를 섞은 목소리였다.
“처음 내리는 눈은…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 버리잖아요. 비처럼요. 그러다가… 안 녹고, 바닥에 붙어서,
하얗게 쌓이는 첫 눈송이가 있고…. 그 눈송이 때문에 다음 눈송이, 또 다음 눈송이가 쌓이잖아요.”
해아가 운다.
“그래서 좋아했어요.”
그래, 그러자.
“…살고 싶어요.”
우리 같이 살자….
“…사랑해, 해아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토끼처럼 보이는 흰 앞니를 나는 구경했다. 그러면서 지나간,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고백들과 함께 밀물처럼 밀려오는 기억을 가만히 맛봤다. 안개 낀 밤처럼 희미하던 부분들도 하나둘씩 내
기억의 공란들을 채워 놓았다.
“태림 씨.”
행복에 젖어 나는 웃는데,
“울지 마세요.”
“…해아야.”
“사랑해….”
저물어 가는 창밖의 하늘이 남색을 띠기 시작했다. 우리의 그림자가 더 길어지기 전에, 나는 해아를 안아
들고 2 층 침실로 향했다. 부끄러운 듯 내 어깨에 이마를 묻고도 해아는 내려 달라는 거절만은 하지
않았다.
“태림 씨.”
“좋아?”
내가 물었고,
“네….”
“…….”
나는 악기를 연주하듯 해아를 만졌다. 그의 목덜미를 힘주어 주물렀다가, 말랑한 팔뚝을 슬그머니
쓸었다가, 가파르게 가늘어지는 허리의 도돌도돌한 갈비뼈 윤곽을 기타 줄 만지듯 살짝 퉁겼다. 그러자
색색거리던 숨소리가 씨근덕대는 신음으로 변했다.
“안고 싶어.”
내가 속삭였고,
해아는 나를 탓했다.
“흐, 으읏….”
“…힉.”
“으, 응….”
“그래, 그렇게….”
“네, 네….”
목덜미까지 빨갛게 익힌 뒤통수가 끄덕끄덕 움직여 대는 게, 이렇게나 이뻐 보일 수가 없었다.
“좋아?”
“힉…, 힉….”
체중으로 짓누르다시피 하며 연거푸, 손바닥을 거칠게 움직였다. 무릎을 꽉 오므린 채 움찔움찔 떨리는
해아의 허벅다리 살과 근육이, 내 성기를 꽉 조였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아…, 앗, 아!”
해아는 내가 밀면 미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흔들흔들 움직였다. 성기를 꽉 조이는 허벅지 근육에
나는 이마에 핏대가 섰고, 해아의 몸에선 달콤한 체향이 퍼져 나왔다.
“흐으… 응….”
정액으로 질척해진 손으로 그의 아랫배를 가볍게 받치고, 무너진 자세를 고쳐 주었다. 두 팔로 끌어안아
상체를 세우고 베개를 안겨 주자 해아는 그 위에 편안하게 엎어졌다.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는 등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 바람에 나는 웃어 버렸다.
“계속할까?”
“…….”
“대답해 줘.”
“태림 씨….”
“응, 해아야.”
“왜… 왜 안 넣어요?”
질색팔색하며 도망칠 줄 알았던 해아는 뜻밖에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베개를 제 가슴 밑에 단단히
받쳐 껴안고, 무릎을 세워 엉덩이를 올렸다.
“저…, 저는 아, 안 하는 게… 그게 더 힘든…데.”
“넣어 줘?”
“더… 더 세게 안아 주세요.”
“응…, 뭔데요?”
“응. 기억해요.”
“응…. 기억해요.”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슬프고 괴롭게 남겨져 집착하는 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물었다.
“…많이 아팠니?”
갑자기, 질문을 꺼낸 일 자체가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니야, 됐어, 대답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번복하려 입을 연 순간에,
해아는 나를 구해 주었다.
“…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까 모르게 되어 해아의 골똘한
얼굴만 바라보는데, 그는 그 나름대로 지난 일을 회상하느라 심각했다.
“…조작. 다시 시작해?”
그러고는 해아가 고개를 좌우로 잘게 저었다. ‘아, 몰라’ 하는 속 편한 소리를 터뜨리더니, 그는 부끄럼
많은 사람처럼 내 어깨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대표님!”
“어어?”
‘아니야….’
‘아…니.’
“…….”
‘어떻게 몰랐을까.’
‘왜… 몰랐을까.’
‘똑똑’… 두 번 울리는 공손한 노크에 고개를 들자, 양손에 커피 한 잔씩을 든 시은철이 보였다. 놀란
눈으로 그는 서류 태풍이 지나간 듯한 대표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천 대표님아.”
허리 숙이며 서류를 정리하는 시은철을 나는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잇새로 한숨이 푹 나오고 목울대로는
침을 넘기는 게 보였다. 허리를 세울 때 ‘에휴’ 소리 내고, 못마땅한 얼굴로 두 눈에는 걱정을 담아
나를 살폈다.
‘‘진짜 시은철’이라니.’
“…아니.”
나는 웃어 보였다.
결혼 계약이 오갈 적에, 강해아와 천태림의 정보로 돌린 AOM 프로그램 베타 테스트가 있었다. ‘그저
무난하게 좋은 결과’를 얻어 냈던 기억이 내 머리 안에 존재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보를 떠올리자면
어떠한 문장 하나, 그래프 한 줄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테스트 보고서는 완성되지 않았고 그 결과를 보고받은 일 역시 일어난 적
없었다. …베타 테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테스트 안에 존재했다.
“아니.”
“아니야.”
“잠깐… 집에 가야겠어.”
“…같이 안 가 줘도 돼.”
“태림아.”
“…아냐, 아무것도.”
“오늘 일정 급하진 않으니까 천천히 갔다 오라고. 운전도 조심하고. 그리고… 너 발작할 때마다 옆에서
달래 주는 거, 사실 힘들었다고.”
“아…, 그래?”
그러면서 녀석의 얼굴을 본 순간, 그제야 몇 달 묵은 위화감이 해소됐다. 대뜸 낯설게 보이던 녀석의
얼굴은, 그날 변한 것이 맞았다.
“해아야.”
“아….”
별안간 깨달음이 내 뒤통수를 쳤다. 익숙해진 나머지 미처 몰랐던 사실이 대뜸, 낯선 손을 흔드는 순간이
연이어 닥쳐왔다.
몸을 앉힌 소파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차라리 침대라고 불러야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되던
소파였다. 엉덩이 깔고 앉는 자리가 깊은 나머지 해아는 이 소파에 곧게 앉는 때보다 가로로 눕는 경우가
더 많았다. 지금 보니 내 다리 길이에 딱 맞았다.
“…….”
‘그런데 이… 집은.’
이 집은 강해아를 위한 선물이 아니었다. 멀리, 자주 떠나는 배우자를 두고 외로움 많이 타는 사람이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크고 넓었다. 층고가 높은 탓에 툭하면 어지럼증에 비틀거리는 그가 오르내리기에는
계단이 지나치게 가팔랐다.
그래도 스물여섯 살의 그날에, 해아는 이 집을 원했다. 가구, 조명은 물론이며 선반의 높이, 욕조의 크기,
스위치의 위치 하나까지도 사사건건 고를 정도로 깐깐한 도련님이, 이 집을 구했고 꾸며 놓았다.
대번에 심장이 더워졌다. 그리고 만끽했다, 여태껏 스물여섯 살의 젊고도 어린 해아가 선물한 집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태림 씨!”
환호성에 가까운 외침이 내 정신을 깨웠다. 멍하니 2 층을 올려다보던 고개를 현관으로 돌리자, 놀람 반
기쁨 반으로 웃으며 선 해아가 보였다.
“뭐야, 우리 태림 씨. 그런 말도 할 줄 아네….”
“태림 씨.”
“…사랑해, 강해아.”
일평생 해아가 적극적인 행위로 내게 입힐 상처는 결국, 그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뿐임을 나는 안다.
그마저도 나의 부탁으로…
‘좀 조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거면 된다.
‘아니야….’
‘안 돼.’
“사랑해요, 태림 씨.”
울컥울컥 치미는 불안정한 의혹에 심장은 터질 것처럼, 갈비뼈가 아프도록 세차게 뛰어 대는데 머릿속은
차분하기 짝이 없었다. 이성과 감성이 따로 놀고 있었다. 감성이 하는 일 없이 억울함과 분노와 허탈함을
토로하는 동안에, 이성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채 기계처럼 생각했다.
‘침착하자.’
그제야 흐릿하게 지나간 의문들이 전부 해소되었다. 경찰에 신고하고 변호사를 통해 수소문해도 모습을
보이지 않던 박준우의 실종도, 어째서 우리 프로그램이 잡아내질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눈에 띄던
강일해의 그 성격도, 왜… 해아가 신이 제 시간을 돌려놓았다고 생각해야 했는지 그 의문도… 전부 풀렸다.
펜의 잉크가 번지도록 글자 위에 빗금을 죽죽 그었다. 그러고는 명단을 적어 내렸다. 해아와 나의, AOM
테스트 시뮬레이션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적는데 꼭, 우리 결혼의 하객 명단 도입부를 작성하는
기분이었다.
나, 해아, 우리 부모님과 강준일 회장, 강일해, 강해인… 테스트에 참여한 인물의 수는 많지 않았다.
인당 하나씩, 한 번밖에 쓰지 못하는 기기값이 개당 천만 원을 호가하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어지간히
친한 친구가 아니고서야 지인의 결혼을 위한답시고 제 관자놀이에 작은 기계를 삽입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게 나에게는 시은철이었고, 강해아에게는 임건이었다.
‘그럼 그렇지….’
강일해도 매한가지였다.
‘나는….’
‘그럼, 해아는?’
‘…그냥, 다.’
해아의 말이 맞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가 옳았다. 해아는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 프로그램과
그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오직 나의 요청에 의해 테스트에 참여해
주었고,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을 겪어야 할 어떤 이유도 해아에게는 없었다.
웃음이 났다. 이곳에 신 같은 건 없었다. 절대적인 어떤 존재 따위는 없다. 해아의 시간을 돌려놓은
작자는,
“대표님, 부르셨어요?”
“들어와.”
내가 물었다.
“아? 아니요…. 보통은 못 그러죠, 곧장 압축해 주지 않으면 데이터가 엄청나게 불어서 디스크가 터질
지경이거든요. 퍼센테이지 뜨자마자 내용은 축약시켰…던 것 같은데… 흠? 잘 생각이 안 나네요.”
“저, 대표님….”
“그런 거 아니야.”
그러자 김 팀장이 소파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손끝으로 턱을 긁적거리며 고민하기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아, 대표님 그거 아시죠? 비둘기 프로그래밍 에러 짤방이요. 날개가 움직여서 날아야 하는데, 목이
돌아서 프로펠러처럼 붕붕 나는 비둘기 짤. 헤헤, 그런 경우면은 중도 체크 할 거 같은데?”
“…….”
“…그렇군.”
더 이상의 긴 이야기는 삼가야 했다. 그마저 나처럼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이
테스트의 결괏값이 어떻게 손상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정에 이상이라.’
‘과정에 이상….’
엄지로 눈가를 문지르며, 나는 의자를 돌렸다. 대표실의 큼직한 창문 밖으로 도로가 내려다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정장을 입은 회사원들이 둘씩 짝지어 길을 걷고,
누군가는 갓길에 나가 손을 흔들며 택시를 잡고 있었다. 차들이 줄지어 지나가는 와중에 노란 택시 한
대가 멈추어서 그를 태웠다.
그대로 시계를 보기를 잠시, 10 분 뒤 같은 남자가 건물에서 뛰어나와 갓길에 섰다. 손을 흔들며 그는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둘씩 짝지은 회사원이 다시, 같은 방향에서 등장해 길을 걸었다.
몇몇 철학자들이,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티의 어중이떠중이 대학생들이 염려하던 ‘인공 지능의 반란’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저 자신이 인공 지능이라는 걸 알 수조차 없을 테니까.
그래서 나빴다.
“태림 씨.”
“10 분만.”
눈을 감고 전한 고백에,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해아가 웃었다.
누구는 강해아를 천진하다 말했고 누구는 철부지 부자라고 말했고 누구는 덩치가 저만하다고 무시하지
말랬지만, 내게 해아는 그저 해아였다. 품에 안으면 보드라운 뺨이 내 턱에 닿고, 늘씬하고 우아한 몸은
어린 강아지처럼 내 팔 안에 쏙 들어오는, 그저 해아. 내 해아였다.
“…뭐?”
“어어, 나 칼 쥐고 있어.”
“그래. 이리 줘.”
해아를 기쁘게 하기란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직접 해 준 요리와, 유리잔 가득 간얼음을 넣고 와인을
따라 주면 그만이었다. 마주 보고 앉은 자리에서 해아는 특별한 이벤트 없이도 싱글벙글했다.
“왜. 이상해?”
“응.”
“그거 결과가 어떻게 나왔었어요? 그래도 우리가… 평균 점수는 됐으니까 태림 씨가 나랑 결혼한 거죠?”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안아 줄래요?”
그가 물었고,
“너도.”
나는 그의 허리를 두 팔로 휘감았다.
“…너도 나 좀 안아 줄래?”
그러자 해아가 숨넘어가듯 웃음소리를 냈다. 술기운에 큰 소리로 웃더니 민망한 듯 그가 입가를 닦았다.
소리 없이, 다만 내 품 안에 폴짝 뛰어 안겼다.
“태림 씨….”
그래서,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그를 떠나야 했다. 어느 때보다 기쁜 순간에 슬픈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해아야.”
부르자,
“응.”
“사랑해.”
“사랑해, 해아야….”
긴 문장은 속으로만 삼켰다. 나의 내일에는 네가 있어야 해…, 네가 없는 내일은 생각할 수도 없어…
그런 말을 건넸다가는 해아를 깨울까 봐,
“조금 이따 다시 만나자.”
그저 그렇게 인사했다.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대고 숨을 죽이기를 한참, 나는 가까스로 허리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조용히
침대 밖으로 나섰다. 매일 밤 해아가 그랬듯이 이번에, 러그 깔린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가는 건 내
몫이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제발 알아채라….’
―경로를….
액셀에 발을 대고는 힘껏 밟자마자 온 세상이 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차체가 가드레일을 치고, 절벽을
향해 붕 떴다가 고스란히 추락했다. 퍽 소리와 함께 돌인지 흙인지 나무인지 모를 것에 한 번 부딪쳤고,
거친 소음을 내며 비탈길을 미끄러진 끝에 세 번째 충격이 크게 닥쳐왔다.
우스운 마음에 웃는데 내 숨소리가 이상했다. 공기가 피식피식 새는 듯 ‘히익’, ‘히익’ 기괴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숨을 쉬는 게 고통인 순간이 몇 초간 이어졌다. 평생 겪어 보지 못한 통증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고장 난 의식 속에 그저 후회만이 샘솟았다.
‘괜찮아….’
‘한 번만….’
‘한 번만 더 안아 주고 나올걸….’
이 이야기를 해아에게 해 주고 싶었다. 그 그림, 이제 알겠다고… 그렇게 말하면 해아는 웃을까, 울까.
그 반응이 궁금했다. 아이처럼 웃는 모습이건 섧게 우는 얼굴이건 그가 보고 싶었다.
‘태림 씨.’
천진한 그를 보며 나도 따라 웃었다.
베타 테스트 종료
“흐아아암…!”
“쩝.”
늦봄부터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게 만드는 원흉, 쿨러를 제아무리 돌려도 열이 펄펄 끓는 컴퓨터 앞으로
그는 후다닥 다가갔다.
“그럴 리가 없는데.”
흥분해 뿜어낸 김으로 흐려진 안경알을 올렸다가 내리면서, 그는 모니터 앞으로 구부정하게 다가갔다.
거북 목을 뻗어 출력된 값을 확인하는 눈이 위아래로 분주했다.
“어…? 잠시만.”
부하 직원이 콕 짚은 문제를,
김민수는 묵살했다.
“두 분 싸우지 마세요.”
“싸우는 거 아닙니다아!”
“버근가?”
빨대를 쪽쪽 빨아 아메리카노를 흡입하면서, 김민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결과는 좋지만 과정에 문제가
생겼으니,
“이거… 전부 출력해야겠네….”
“새치기하지 마세요.”
허공에 두 손을 붕붕 저으며 전달하는 공지에 팀장들이 볼멘소리를 냈다. 하나둘, 가져온 서류들을
시은철에게 넘기기 시작했고 김민수도 무거운 서류 카트의 방향을 고쳤다.
“네. 저기 두고 가세요.”
시은철의 대꾸는 간단명료했다. 지시대로 카트를 주차하려다, 김민수가 눈을 좁혔다. 비서실장의 반듯한
관자놀이 양쪽에 붙은 패치가 두 장,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
“시은철….”
김 팀장의 뻔뻔한 대처에 시은철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사내에서 가장 봉급 높은 개발팀 팀장에,
천재랍시고 천태림 대표가 아끼는 사원이라곤 하나 오늘은 그 무례가 지나쳤다.
대놓고 오래도록 노려보는 눈길에도 김민수는 꿈쩍 않았다. 오히려, 천태림 대표 자리로 쫄래쫄래 걸어가
주인 없는 포스트잇을 한 장 뜯었다. 미리 건넬 메모를 적어 파일철 위에 붙이기 위해서였다.
“뭐 하나, 주인 없는 방에서.”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그러자 대표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커다란 몸을 사무용 의자에 앉힌 채 천태림은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냈다. 그러고는 외근으로 구겨진 셔츠 소매를 굵은 팔뚝 위로 걷어붙였다.
“앉지.”
배우자를 선택할 적에 천태림이 원한 것은 단순한 데이터 조각이 아니었다. AOM 대표로서 말하기에는
민망한 소리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제아무리 테스트 결과가 좋다 한들 얼굴 한번 마주 보고, 인사 한번
나누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에겐 결국 남이었다.
하물며 그 테스트가 그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물건인지라, 예정에 없던 사건 사고로 점철된 상태라면
그의 대답은 더더욱 ‘아니요’였다. 개발팀장이 큰소리 떵떵 치며 올린 보고에 대한 그의 감상이
그러했다.
개발팀장이 자신하며 내놓은 테스트 결과를 천태림은 신뢰하지 않았다. 자정까지 테스트 결과를 읽어 내린
감상은,
“쯧.”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애초에 천태림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간에 누구의 외모에 반해 본 적이 없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문장만큼
그와 무관한 말도 없을 터였다.
‘77 퍼센트라.’
‘…….’
그러나,
‘굳이?’
‘정말… 알 수가 없군.’
업무에 방해가 될 정도로 뻔질나게 대표실을 찾아오던 한성 그룹 변호사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천태림은
그들을 원망했다.
우두커니 멈추어 서서 천태림은 눈을 좁혔다. 아무리 깐깐하게 살피려 해도 강해아에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단점이 없었다. 몸의 흐름은 늘씬하고 우아했고 얼굴의 부드러운 미소가 보기 좋았다. 고동빛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 맑다 못해 뿌옇다는 느낌마저 드는 흰 피부까지 모든 것이 남들보다 흐릿한데 오히려 그
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두커니 선 천태림을 마침내 강해아가 알아본 순간에, 말간 얼굴의 부드러운 미소가 짙어졌다.
“태림 씨.”
그렇게 부를 적에는,
‘틀렸군.’
“일찍 나오셨군요.”
천태림이 말했고,
“음…, 네.”
“…….”
“…….”
“미안해요.”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사실 저도 처음입니다.”
“…긴장됩니다, 마찬가지로.”
‘…….’
고민에 빠진 듯 침묵 끝에,
“…강해아 씨는 아직 발현 전이시죠.”
“네? 아아, 네. 하지만 금방 발현할 거예요. 듣기로는 파트너 알파가 있으면 늦은 발현도 안정적이라죠?
그래서 기대 중이에요. 음…, 아버지를 통해 말씀드린 줄로 알았는데, 아니었나요?”
천태림이 물었다.
의문에 사로잡힌 순간에는 답을 찾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깐깐한 성격이 빚어낸 질문이었다.
“네?”
천태림은 뺨을 살짝 찡그렸다.
긴 문장으로 고쳐 질문하자,
“아, 아…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는 확인해야 할 내용이었다, 강해아의 동그란 이마 가쪽에, AOM
테스트기 칩을 빼낸 흔적이 점처럼 남아 있는 한은.
“아니에요.”
“저 오메가 맞는데?”
도리질 치며 강해아는 웃었다. 입매에 그려진 미소는 그러나, 천태림의 무뚝뚝한 얼굴 앞에서 서서히
흐릿해졌다.
“아버지께서 분명….”
“혀, 형 말이 다 맞아. …응. 정말로 미안해…. …알았어, 천태림 씨한테도 그렇게 말할게.”
“하….”
보다 못해 천태림이 다가섰다. 저벅저벅 구둣발 소리가 닥쳐들자 강해아가 고개를 들었다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라 라이터를 떨어뜨렸다.
“잠시 실례합니다.”
그러나 강해아가 본능적으로 대비하는 폭력은 닥쳐오지 않았다. 다만 천태림은 묘하게 반질반질한 감촉이
드는 그의 뺨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 냈다. 얼어붙은 이의 귓가에 네 손가락을 붙인 채 그는
엄지손가락만 펼쳐 손금 위에 닦인 파운데이션을 확인했다.
“…….”
박박 문지른 탓에 뺨이 붉었다. 고개를 가까이 기울이며 천태림은 그 아래에 진 연두색 멍울을 확인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멀어지는 발소리는 들려오질 않았다. 대신에 ‘후’, 먼지 부는 소리와
‘틱’, ‘틱’,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났다.
소리 없이 그는 담배를 태웠다.
천태림이 물었다. 그러자 강해아가 두 눈을 느릿느릿 끔벅거렸다. 붉어진 눈꺼풀 밑으로 삐질삐질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네?”
한발 늦게 그가 되물었고,
“저…는.”
“…네. 인사 때문이에요.”
강해아가 속삭였고,
“그게 무슨….”
그는 고백했다.
…지금은 순진하고도 순전해서, 사랑이 아니어도 된다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다정한 키스 한 번이면
슬픔을 이겨 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걸.
“앗! 뜨…거.”
“나….”
그러고는 속삭였다.
“…담, 배… 끊을게요.”
추신.
똘망똘망한 윤 비서의 얼굴 뒤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검정 간판이 묵직한 분위기를 풍겼다. 양각으로
새겨 넣은 ‘AOM’ 세 글자가 간헐적으로 백색 빛을 냈다.
“안녕하세요.”
분홍, 연두, 아이보리 컬러로 화사한 꽃바구니를 두 팔로 껴안은 남자가 말했다. 얼굴이 꽃잎에 가려진
탓에, 마치 그가 아닌 꽃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러자 뒤뚱뒤뚱 다가온 꽃바구니가 데스크 위에 조심스럽게 놓이더니, 남자의 얼굴이 연두색 이파리
옆으로 쑥 등장했다. 그 바람에 윤 비서의 심장이 철렁했다.
“저….”
“저기요?”
“아아, 그럼 기다릴게요.”
“음. 저….”
“네, 왜 그러세요?”
어리둥절해진 채 윤 비서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남자는 반듯한 눈썹을 묘하게 구기면서 웃었다.
“아!”
“아…아.”
“네? 아, 네….”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돌아섰다. 그사이 계기판의 숫자는 B2 가 되어 있었다.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그의 시선은 대표실로 통하는 복도 중앙의 그림에 머물렀다.
“이걸 여기 걸어 두셨구나….”
페로몬 냄새를 감추지 않는 그의 태도만 봐도 그랬다. 초면에 알파나 오메가가 향을 슬쩍 뿌리는 건 보통,
당신이 마음에 든다는 신호였다. 그러니 당신도 체향을 내어 형질을 알려 달라는, 달콤한 줄다리기의
출발 신호.
“저….”
“혹시, 연락처….”
“네?”
“관심이요?”
묘한 말을 끝으로,
“그럼, 수고하세요.”
‘까였네….’
‘향기 좋다….’
“아, 네네.”
“근데 그 꽃은?”
“배달원이?”
“어….”
이내 번뜩, 그녀의 머릿속이 창백하게 맑아졌다. 뿌옇던 기시감이 걷히고 정신이 봄날 계곡 물처럼 확
트이는 순간이었다.
“뭐?”
“언제 나갔습니까?”
윤 비서는 절박해졌다.
“아닐 수도 있어요, 대표님! 자기가 강해아라고 말해 주지도 않았고, 그, 그리고 사진이랑 너무 달랐단
말이에요!”
퉁!
철제문이 요란하게 닫히고, 윤 비서는 허탈한 듯 몸을 도로 앉혔다.
“윤 비서 이제 죽겠네.”
차라리 강준일 회장을 까고 말지… 누군가 얹은 말에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섞였다. 강준일 회장까지야
바람맞힌 적 없다지만, 그 댁 첫째 아들이 얼굴이 빨개진 채 쫓겨난 일이 있기는 했다.
‘아아안 돼….’
그러나 뜻밖에, 승강기에서 걸어 나오는 천태림은 관대한 미소를 머금어 황금 부처상 같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목덜미에는 불그스름한 열기와 약간의 땀이 반들거렸고, 오른손에는 편지 봉투가 들린
채였다. 조금 전 강해아가, 미처 막내 비서에게는 맡기지 못하고 수거했던 연애편지였다.
“마…, 만나셨구나.”
“그래. 1 층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더라고. 말로는 카페인이 땡겼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냥 가기 서운했던
모양이야.”
“아니.”
그러고는 예사로운 얼굴로 읊어 놓았다. 다소 장황하게 들리는 설명에 윤 비서는 정신이 희미해졌다.
“그럴 리가 없잖아.”
“…네?”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군.”
“…….”
마차에서 내린 왕자를 맞이하는 신데렐라도 저런 표정은 못 지었을 터였다. 새카만 속눈썹이 촘촘하게
자리한, 고민 많은 짐승처럼 깊어 보이는 두 눈을 반쯤 내리깐 채 꽃 내음을 맡는 천태림을 바라보며,
‘역시 공주님….’
윤 비서는 생각했다.
비서실 직원들끼리 부르는 말로 천태림 대표의 최근 별명이 ‘공주님’이었다. 로맨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이국의 왕자에게 청혼받는 공주님이 꼭 그와 같기 때문이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귀한 선물을 실은
마차를 맞이하고 편지를 받는 식이었다.
그렇게 닷새 전에는 손목시계, 나흘 전에는 다이아가 알알이 박힌 팔찌, 엊그제는 휴일이었지만 갑자기
변한 분위기를 보아하니 정장을 풀 세트로 받은 듯했고, 어제는 넥타이와 샴페인, 오늘은 꽃바구니와
꽃말이 쓰인 편지를 선물 받았다.
“정확해.”
한때 천태림은 그녀의 완벽한 상사였다. 그러나 연애를 시작한 이후에 그는,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았다.
“윤 비서.”
“네네, 뭔데요?”
뭔데, 이게? 앉은 자리에서 눈만 끔벅거리면서 윤 비서는 관련 검색어를 클릭해 댔다. 다음에 대표님께서
꽃 선물을 고민하시거든, 이깟 것보다 훨씬 더 로맨틱한 꽃말을 추천해 드리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어라….’
조금 전 달콤한 꽃향기와 함께 들이켰던, 은은한 페로몬 냄새를 떠올린 것이었다. 그 냄새가 오롯이
강해아의 체취일 리가 없다는 사실 역시 한발 늦게 깨달았다.
이내 전화기가 울리더니,
그 외에는,
“…….”
죽음 같은 침묵. 그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야근도 그에게는 충분히 즐거운 일일 수 있었다, 최고 상사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
그놈의 공부 자료는 빗금과 메모로 너덜너덜할 지경이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김민수가 카트에
모조리 실어다가 제발 좀 봐 주십사 부탁하며 올린 베타 테스트 보고서였다.
‘씨이….’
김민수는 생각했다.
비난의 화살이 강해아를 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천태림이 대뜸 대단한 인센티브 보너스를 제시하며
야근을 제안해 온 게, 바로 그 강해아를 처음 만나고 돌아온 저녁이기 때문이었다.
‘강해아 씨 AI 는 아직 자고 있나?’
대뜸 소식을 물어 온 것도 그맘때의 일이었다.
아니, 씨부랄 그게 말이나 쉽지… 김민수는 생각했다. 자체 종료 시점에 접어들어 알아서 정지된
프로그램을, 그것도 별도의 리세팅 하나 없이, 재가동만 시키라니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하여간 천태림은 존재 자체로 불평등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남자다. 알아듣기 힘든 소리만 골라 늘어놓는
건 그쪽인데, 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바보여야 하는 건지, 김민수로서는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타오르는 눈빛으로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들기던 손은 그러나 금세 멈췄다. 오늘만 열다섯 번째 팝업된
에러 창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김민수는 멋없게 구글 검색창을 열었다.
탁, 타닥… 시무룩한 손가락이 에러 문구를 고스란히 옮겨 적었다. 수많은 개발자가 진작에 찾아본
문구들이 우르르, 관련 검색어로 줄을 지었다.
김민수가 자괴감과 싸우는 사이, 천태림의 전화가 미약하게 울렸다. 간헐적으로 진동하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천태림은 재빨리 통화 버튼을 밀어 눌렀다. 미소 짓는 그의 뺨에 휴대폰 액정이 닿았다.
“응, 자기야.”
도란도란, 언제 들어도 좋기만 한 목소리에 천태림은 온몸의 근육이 느슨해지는 감각에 취했다.
―자려는데 내가 깨운 건 아니죠?
강해아가 속삭였다.
“하하.”
이내 침묵이 찾아들었다. 너무나 편안한 고요였다. 달아오른 액정이 뿜는 열기로 귀는 한쪽만이 따끈했고,
아주 작게 들려오는 소음은 전화 너머 연인의 숨소리였다.
“그래. 내일 봐. 잘 자, 해아야.”
[동물구조협회 운영진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실까요?]
오후 10:22
[이동 봉사자님이 아이
댁으로 이동 중이세요.
봉사자님 연락처 보내
드립니다.]
오후 10:23
―네, 안녕하세요!
“…….”
천태림의 미간이 조용히 구겨졌다. 단순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빈집에서 남편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대신에 개를 받아 주었다니, 그 상황이 어리둥절하니 할 말이 없었다.
침묵에서 의아한 기색이 느껴졌는지, 휴대폰 너머의 봉사자가 상냥한 설명을 덧붙였다.
―댁에 계시기에 인사드리고, 보호소에서 나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알겠다고, 맡기고 가시라고 하셔서요! 와,
저는 서류만 보고는 동명이인이겠거니 했는데… 정말 강해아 작가님이실 줄은 몰랐어요.
“아…, 알겠습니다.”
‘에이, 설마.’
“김 팀장.”
“네에, 네. 저도 이제 다 되어 가요.”
“나 먼저 들어가 볼게.”
“예?”
“…….”
두 눈을 끔벅이며 김민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천태림이 사라진 사무실이, 벽 하나를 허물었다는 느낌이
일 정도로 황량하고 넓게 느껴졌다. 내심 불청객 취급하고 어색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사라진 그의
존재감을 무시하기란 너무 힘든 일이었다.
“흥.”
“그래도 이건 제가 이겼거든요.”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눈꺼풀 안에 뻑뻑한 기름이 낀 듯했다. 이물감이 느껴지는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눈을 뜨자, 차창 밖의
빛 얼룩이 시야를 채웠다.
“다녀오셨어요?”
여상스러운 인사. 그것을 나누는 날만을 기다려 온 사람이 수줍어서는, 제 바람이 이뤄지는 순간이 못내
쑥스러운 눈치였다.
“응, 다녀왔어.”
그러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유치하고도 애달픈 감정에 취해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온 모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소리 내어 웃더니, 소파 깊숙이 뭉개던 몸을 일으킨다.
“태림 씨.”
해아가 나를 부른다.
그래서 말해 주었다.
창밖으로 은근한 불빛이 새어 나갔다. 긴긴 길을 돌아 마침내 도착한, 사방은 온통, 어쩌면 내게 너무나
다정한 세계.
여상스러운 밤이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