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에 대하여 - 조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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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 저항에 대하여

<설국열차 비평문>
2017226036 조경인

- 설국열차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사회에서 저항이라는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해당 텍스트는 관객들에게 사회적 계층, 그리고 그것에서부터 오는 억압적인
체제에 대해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며 그것에 대해 고찰하는 텍스트이다.

- 설국열차에 존재하는 각자의 자리

설국열차는 관객들에게 이 텍스트의 주제를 망설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질문한다.


그리고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는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면서 각자의 위치가
정해져 있다고. 열차의 꼬리 칸, 그리고 특별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열차의
앞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각자의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애초부터 출발선부터 달랐다. 영화의 초반 메이슨이 하는 연설은 다소 충격적으로
들린다. ‘질서 덕에 얼어 죽지 않는다.’ , ‘열차 안 모두는 각자 정해진 자리를 지켜야
한다, 애초부터 점지 된 바로 그 자리를 말이야.’ 라는 대사로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경제적 불평등에서 비롯된 경직되어 버린 사회적 구조는 인위적인 것이 아는
선천적인 자질에 따라 구분된 것임을 계속하여 주장한다.

- 사회적 구조를 타파하고자 하는 대중

그렇다면 그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구조를 역사적으로 인간들이 그저 감내를 해왔나?


물론 아니다. 모든 역사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간들은 항상 기존의 체제를 붕괴하고
새로운 혁명을 해 나가며 모든 문명은 발전해 왔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체제를 뒤엎어버리고 싶어하는 꼬리 칸의 사람들. 그리고 커티스. 이들은
기존의 질서를 타파하고 싶어하고 새로운 시대에 도전하고 싶어하는 대중들을
묘사한다. 도전, 그리고 저항. 이 영화는 압도적인 역경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용기를
강조하며, 저항을 이끄는 절박함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영화에서 보여주는 저항의 의미

그러나 영화를 보며 후반으로 달려갈수록 이러한 저항이 과연 올바른 지에 대한


생각이 계속 들게 된다. 물론 영화 초반 자신들의 상황을 부수기 위해 모두 용기를
내어 서로를 돕고 무언 가에 도전하는 모습은 정말 멋있게 묘사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들이 희생되고 등장인물들이 극단적인 선택, 예를 들면 폭력과 죽음 등을 겪는
모습들을 보며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저항’ 이라는 모습은 썩 좋게 묘사되지는 않는 것 같다. 소위 말하는 ‘
영웅적인 모습’은 등장인물 중 주인공인 급인 커티스 에게서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저항이라는 것은 항상 좋은 가치는
아니다‘ 라는 것을. 어쩌면 커티스는 길리엄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을 지도
모른다. 물 공급 칸에서 멈추어야 했다는 길리엄의 말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머리 칸 쪽으로 나아가는 커티스는 결국 꼬리 칸에서 같이 출발했던 모든
동료들을 잃게 되고 결국은 혼자 남게 되는데 이러한 모습을 보며 나는 ‘과연 이러한
저항에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죽음을 감수하면서 하는 저항은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는 일일까?‘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폭력을
휘둘러 사람을 해한 일은 과연 선한 일인가 악한 일인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질문의 답변에 답을 하려면 정말 많은 생각을
해 봐야겠지만 아마 이러한 내용에 정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도 실제로 자신이 혁명의 과정에 존재했더라면 중간에서 멈추지는 않았을 것
같다. 혁명이란 그런 것이니까.

- 길리엄은 어떤 인물인가?

그리고 또한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길리엄의 실체. 그것을 듣는 순간 그것은


우리에게 정말 충격적이게 다가온다. 또한, 길리엄의 정체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생각해
볼만 하다. 길리엄은 커티스가 반란을 준비하고 있던, 혹은 평상시에 그들의
우두머리라고 불릴 만한 그들이 존경하는 소위 말하는 ’권력자‘ 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커티스가 말한 길리엄이 자신의 팔을 잘라 어린아이를 살리고 다른 사람의
식량을 대신한 일화를 들으면 그들은 길리엄을 자신들의 우두머리로 대우해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라서 나오게 되는 길리엄의 실체를 듣는
순간 길리엄은 순식간에 영화 내 등장인물에게도,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도 다른
인물로 변신하게 된다. 그는 박쥐였던 것이다. 조금 더 어렵게 말하자면 그는 동일화의
양상을 보인다. 윌포드와 커티스가 가지고 있는 이항대립의 양상에 중간에 위치하고
싶어하며 그 두 쪽의 권력 모두를 탐내고 있는 인물이다. 만약 혁명이 실패하게 되어
그들이 다시 꼬리 칸으로 돌아가게 되었어도 그는 권력을 유지하여 사람들의 선망을
받았을 것이며 성공적으로 혁명이 완료되어 그들이 원하는 사회를 열차 내에 구축한다
하더라도 그는 마찬가지로 그들의 우두머리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의 혁명은 제 3 의 길을 찾는 방향으로 끝나게 되었고 그의 실체는 모두 발설되어
그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 제3의 길

그렇다면 과연 남궁민수가 하고자 하는 ’밖으로의 탈출 계획‘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만 하다. 이것은 결국 ’안과 밖‘이라는
이데올로기이다. 사실 어쩌면 제 3 의 길이라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 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의 열차는 곧 세계를 의미한다. 즉. 인류에게 지구는 열차의 확장이며 ’안‘으로
표상되는 열차의 시스템의 ’안‘과 ’밖‘은 결국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의 해석으로는 이 영화는 ’안‘보다는 ’밖‘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의 ’밖‘은 곧 희망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물론 그것이 진짜일 지는 모른다. 왜냐면 그들은
이제야 ’밖‘으로 나섰고 가능성의 문을 아직 열어보기 전이니 말이다. 어쩌면 더 큰
절망과 실패가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밖‘
으로 나서는 것이다.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레드가 익숙해진 감옥을 뒤로 하고
세상 밖으로 나서는 것처럼.

- 마무리

해당 영화를 보고, 이 비평문을 쓰며 또한 다른 텍스트에서는 어떠한 저항을 다루고


있었고 실제로 우리의 역사속에서는 어떠한 저항이 있었는지를 생각을 해 보면 서
평소에는 잘 실감이 되지는 않지만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저항의 역사를 살아왔고,
어쩌면 지금도 저항속에서 살고 있지 않나 싶다. 또한 어쩌면 무언가를, 누군가를
억압하며 살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 속에서 어떤 희생을 했고, 혹은
당했으며 어떠한 이기심을 부렸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고 또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이 드는 것이
이래서 많은 텍스트들을 접하고 스스로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하는 이유인 듯하다.

사회적 구조, 경제적 불평등, 저항과 억압, 희생과 이기 등 많은 흥미로운 주제들과


이항대립이 영화에서는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과 메시지가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감독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것은 말하고자 하는
의미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고 모순되는 내용이기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 가며 세상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며 그것을 이겨내


가는 것도 일종의 사소한 ‘저항’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것을 이겨내 가며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고 성장하며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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