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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쓰겠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으로 전부터 많은 주목을 이끌었다.
내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나자마자 나온 반응은 ‘응…?’이었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전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미야자키 하야오는 명확하게 하고자 하는 말들이 있었다.
자연, 사랑, 평화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것들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몇몇
사람들은 보다가 졸았다는 말과 난해하다는 말들을 남겼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좀 다르다.
우선 제목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핵심을 맞춰보자. 어머니를 잃은 한 아이의 어머니를
찾는 여정이다. 이 아이가 어머니를 찾아가는 과정은 험난하기만 한 길들이었다. 중간중간 달콤한
회유를 거절한 채 달리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거친 길을 달리면서 아이는 소중한 사람들을
얻었다. 와라와라를 보살피는 키리코, 처음에 적이었지만 나중에는 둘도 없이 친해진 왜가리, 다른
세계에 있던 아이의 엄마 등 거칠지만 올바른 길을 감으로써 많은 것을 아이는 경험 했다. 여기서
왜가리에 대해 주목해보자. 왜가리는 왜 아이를 도와줬을까? 처음에 왜가리는 아이를 공격하고
회유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이 회유는 통하지 않았고 아이는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개척하며
살아갔다. 이에 왜가리는 아이의 견고함과 순수함에 이끌려 도와줬던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지브리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순수하지만 단단하고 무섭지만 계속해서 도전하는
모습 말이다. 다른 지브리에서도 이번 작품에서도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달려가고 넘어짐을 반복했다.
주변의 만류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난 참 이러한 부분들이 좋다. 올곧지만 고지식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지만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따스함이 지브리에서는 잘 녹아있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알고 남의 기쁨을 나의 기쁨인 모습은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현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더욱 보는 입장에선 따스함을 느끼는 것 같다.
말이 너무 왔다갔다하기에 나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아자키 하야오가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이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은
내일을 살아갈 것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내일을 당신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남에게 따뜻하고 삶을 살아감에 있어 더 올곧게 살아가고 싶다. 주인공이 앞장서서 엄마를 구출한 것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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