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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Gregory Schopen(그레고리 쇼펜)


(브라운대학 교수)

번역_ 한대성
(델리대 석사)

*본 역자가 이 논문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는 다수의 초기불교학


자들이 대승불교가 불설이 아니라는 때늦은 비판을 하면서도 상좌부불교와 그 문헌이 붓다의
직설이자 오롯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고 판단해서이다. 이 논문은 초기불교 교단이 스투파
나 조상 숭배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 복의 회향의 교리가 대승불교의 이론이라
고 하는 일반적 견해를 여러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논파하였을 뿐 아니라 현재의 초기불교
교리의 설립에 핵심적 역할을 한 고등비평 이론의 허구성을 구체적 실례를 들어 반증하였다.
Bones, Stones, and Buddhist Monk — Collected Papers on the Archaeology, Epigraphy,
and Texts of Monastic Buddhism in India (1997): pp. 23-55. 원래 Studien zur Indologie
und Iranistik 10 (1985): pp. 9-47 에서 출판됨.
• 이 논문의 연구와 집필은 내가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는 인문학 번역 프로그램 국가 기금
(Translations Program of the 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의 지원으로 인
해 가능했다. 나는 고메즈(L.O.Gómez)와 두트(H. Durt) 교수에게 이 논문을 읽고 비평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린다. 나는 또한 나의 친구인 존 씨엘 박사(Dr. John Thiel)에게 이것이
더욱 판독 가능하게 만든 —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만 — 그의 영웅적인 노력에 대해 특
별히 감사드린다.

불교학리뷰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13권 (2013. 6) 193p~244p
194 불교학리뷰 vol.13

I.

아주 적은 수의 증거만 있고, 끊임없는 논쟁만이 존재하는 인도 불교


사상사와 같은 분야에는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해 보는 것이 때로는 아마 유용할 것이다. 그런 목록에서 우리가 실
제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억측, 재구성, 혹은 가정한 것들을 가능한 한
분명히 구분 짓는 것은 아마 더더욱 유용할 것이다. 다음 두 가지의 세
부적 문제에 관해 나는 그렇게 하려고 한다: 인도불교에서 승・속의 구분
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에 대한 문제가 그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문
제들에 우리가 실질적으로 알 수 있는 것으로만 우리의 연구의 범위를
제한한다면, 불교 사상사의 논의에 있어 문헌 자료의 통례적인 가치평가
와 사용이 사실상 우리의 가장 처음 문제가 되고, 우리가 가장 먼저 시
작해야 할 부분이 된다.

II.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팔리 경전 — 우리가 가진 가장 오래된 자료라고


일반적으로 용인된 — 은 기원 전 1세기의 마지막 4분기 보다 더 앞에
위치시킬 수 없다는 것이 얼마 전부터 알려져 왔고, 우리는 그렇게 알고
1)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최초의 개정판인
알루 -비하라(Alu-vihāra) 개정판의 시기를 말한다. 그것은 비판적 역사

1) 가장 최근의 논문인 O. von Hinüber, “On the Tradition of Pāli Text in India, Ceylon and Burma,”
Buddhism in Ceylon and Studies on Religious Syncretism, Abhandlungender Akademie der
Wissenschaften in Göttingen, Phil.-Hist. Klasse. Dritte Folge. Nr 108, ed. H. Bechert (Göttingen:
1978) pp. 48-49를 보라.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195

관에서 볼 때, 아무리 좋게 생각하더라도, 단지 그 시기 불교의 어떤 자


료의 역할을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라라세케라(Malalasekera)가 지적하길: ‘‥‥‥알루-비하라에서 쓰인
그 삼장과 그것의 주석서가 우리에게 지금 전해진 그것들과 얼마나 유
2)
사한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사실상, 우리가 그 경전들의 실질적
내용에 관해 얼마간 명백한 것을 알게 된 것은 붓다고사와 담마팔라, 그
리고 다른 이들의 주석서의 시기 — 기원 후 5-6세기를 일컬음— 이전에는
아니다.
우리는 또한 알루 -비하라 개정판 이전에는 정전(正典)이 존재했다는
구체적 증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아쇼카가 그의 바브라
3)
(Bhābrā) 칙령에서 승려들과 재가인들에게 그가 거명한 특정한 본문들
을 암송하라고 세부적으로 명하지만, 그가 본문들을 삼장 혹은 니까야들
로 구분한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어떠한 특징도 그의 글들에서는 보이
4)
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는 빤짜네까이까(pañcanekāyika)라는 별칭이 바
르후트(Bhārhut)와 산치(Sāñcī)비문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라모뜨가 ‘이것이 경장의 다섯 가지 문헌군을 지시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5)
고 이미 보여준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삼장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더욱 늦게 나타난다. 이것은 1974년에 퍼스만에 의해 출판된 카니쉬카

2) G.P. Malalasekera, The Pāli Literature of Ceylon (Colombo: 1928) p.44.


3) J. Bloch, Les inscription d 'Aśoka (Paris: 1950) 154.
4) E. Senart, Les inscription de Piyadasi, T. II (Paris: 1886) 103; Ét. Lamotte, Histoire du bouddisme
indien=History of Indian Buddhism=󰡔인도불교사󰡕, 258-259 와 비교하라.
5) Ét. Lamotte, Histoire du bouddhisme indien, 157; cf. 164-165; cf. H. Lüders, Bharhut Inscriptions.
Corpus Inscription Indicarum, Vol. II, Pt. 2 (Ootacamund: 1963) 71; B. M. Barua 그리고 Sinha,
Barhut Inscriptions (Calcutta: 1926) 28-30. Pacanikāyika라는 별칭은 바르후트와 산치 비문들과 대
략 거의 같은 시대로 추정되는 Pauni의 브라미 비문에서 한 번 나타난다는 것에 유의하라.
196 불교학리뷰 vol.13

6)
치세 5년의 한 비문에서 발견되었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디가(Dīgha-),
맛지마(Majjhima-), 그리고 아마 상윳다(Saṃyutta-) 니까야라는 세부적
인 언급이 발견되는 것은 나가르주나 콘다(Nāgārjunikonda)와 아마라
바띠(Amarāvatī) 비문들 — 그래서 오직 남쪽에서만 있는 — 이전은 아니
7)
라는 것을 알고 있다.
‘경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sutaṃtika 그리고 sutātika 등
(바르후트에서 한 번, 그리고 산치에서 세 번), 혹은 율을 알고 있는 사

6) G. Fussman, “Documents épigraphiques kouchans,” BEFEO 61 (1974) 54-61. [이것은 정확하지 않


은 것이다. 최초의 언급은 사실 카니쉬카 2년의 비문에서 나타난다; G. Schopen, “On Monks, Nuns,
and 'Vulgar' Practices: The Introduction of the Image Cult into Indian Buddhism”과 비교하라; 원 책
의 제 11장 아래에 있으며 주해 18에 밝혔다.]
7) J. Ph. Vogel, “Prakrit Inscriptions from a Buddhist Site at Nāgārjunikoṇḍa,” EI 20(1929) C1; J.
Burgess, The Buddhist Stūpas of Amarāvatī and Jaggayyapeta, Archaeological Survey of Southern
India, Vol. I (London:1887) 35; C. Sivaramamurti, Amarāvatī Sculptures in the Madras Government
Museum, N. S., Vol. IV (Madras: 1956) 34.2; cf. N. Dutt, “Notes on the Nāgārjunikoṇḍa-
Inscriptions,” IHQ 7 (1931) 633-653; D. L. Barua, “On Some Terms in the Nāgārjunikoṇḍa Inscriptions,”
Indian Culture 1 (1934) 107-111. Majhima-baṇaka라는명칭이세번, ekautirika-baṇaka (=Ekottarika°-)
은 한 번, 그리고 śayutaka-baṇaka (=saṃyuttaka)가 실론의 브라흐미 비문에서 한 번 나타났다는 것
은 반드시 지적되어야한다; S. Paranavitana, Inscription of Ceylon, Vol. I, Containing Cave
Inscriptions from 3rd Century B.C. to 1st Century A.C. and Other Inscriptions in the Early Brāhmī
Script (Ceylon: 1970) nos. 330, 708, 852, 407, 666을 보라; 불운하게도 이 모든 명칭들이 왕들의 이름
을 포함하는 비문에 나타나지 않기에, 정확히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기원 전
3세기나 2세기부터 기원 후 1세기 사이의 어느 연대에라도 속할 수 있으며, 혹은 더 늦을 수 도 있다;
P. E. E. Fernando, “Palaeographical Development of the Brahmi Script in Ceylon from the 3rd
Century B.C. to the 7th Century A.D,” UCR 7 (1949) 282-301과 비교하라. Pacanikāyika가 실론의
브라흐미 비문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충분히 지적할 만한 사항이다. 최종적으로, 최소
한 Lévi가 “L’inscription de Mahānāman à Bodh-gaya”에서 발견된 saṃyuktagāminaḥ라는 별칭을
Saṃyuktagāma의 분명한 지시로 본 것은 지적할 만한 사항이지만, 이 별칭, 사실 이 비문 전부는 실
론의 승려들과 관련되어 있다. S. Lévi, “L’inscription de Mahānāman à Bodh-gaya, Essai d'Exêgèse
appliquée à 1epigraphie bouddhique,” Indian Studies in Honor of Charles Rockwell Lanman
(Cambridge, Mass.: 1929) 46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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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란 뜻의 vinayadhara (산치에서 한 번), 혹은 [삼]장을 알고 있는


8)
사람이란 뜻의 peṭakin (바르후트에서 한 번) 이라는 그 명칭들은 알루-
비하라의 개정판과 동시대 혹은 그 직전에 일부의 불교 문헌들이 경과
율로 분류되어 왔고, [삼]장에 관한 어떤 사상이 이미 발생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분류들이 무엇을 포함하고 있었는가에 대
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알루 -비하라 개정판 혹은 아마 더 정확하게는 주석 개정판 —
붓다고사에게 알려진 그 개정판 등 — 에 대해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
9)
는 것은 아주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최소한 두 종류의 경전의 집합,
즉 팔게품(Aṭṭhakavagga)과 피안도품(Pārāyaṇavagga)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전의 최초의 개정판에 선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양 경집은
경장의 다른 본문들에서 그 이름이 인용되거나 참조되었다. 그리고 그
양 경집은 최초의 개정판으로 알려진 시기에 이미 주석되었고, 이것들은
그것이 가졌던 유일한 본문들이었다. 최종적으로, 그 양 집합의 주석들
10)
그 자체가 이미 초기 개정판에서 경전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아쇼카가

8) Ét. Lamotte, Histoire du bouddhisme indien, pp 164-165와 비교하라. Sutata-pāḷi- bāṇaka란 명칭


이 한 번, vinayadhara란 명칭이 실론의 브라흐미 비문에 나타남에 주목하라(Paranavitana,
Inscriptions of Ceylon, Vol. I, nos. 1202; 1178, 1207). 하지만 이 세 가지 명칭의 출현은
Paranavitana가 ‘후기’라고 분류한 비문에서 발견된다.
9) 역) Collections of texts: Sutta-nipāta의 직역으로 우리말로는 ‘경집’이라는 줄임말로 번역되었다.
10) 세부적인 내용을 위해서 최소한 S. Lévi의 ‘Sur la recitation primitive des textes bouddhiques’
JA(1915) 401-447; B. M. Baura의 ‘Aṭṭhakavagga and Pārāyaṇavagga as Two Independent Buddhist
Anthologies,’ Proceedings and Transactions of the Fourth Oriental Conference (Allahabad: 1928)
211-219; ‘Some Points Concerning the Mahāniddesa,’ Fifth Indian Oriental Conference,
Proceedings, Vol. I (Lahore: 1930) 603-615; N. A. Jayawickrama의 ‘The Sutta Nipāta: Its Title and
Form,’ UCR 6 (1948) 78-86; ‘The Vaggas of the Sutta Nipāta,’ UCR 6 (1948) 229-256; ‘Sutta
Nipāta: Some Suttas from the Aṭṭhaka Vagga,’ UCR 8 (1950) 224-255; ‘The Sutta Nipāta; Pucchās
of the Pārāyaṇa Vagga,’ UCR 9 (1951) 61-68; ‘A Critical Analysis of the Pāli Sutta Nipā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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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바브라(Bhābrā) 칙령에서 어떤 특정한 본문들의 이름을 참조시켰


기 때문에, 최소한 그 일곱 개의 본문들(dhaṃma-paliyāya)이 그에게
알려졌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이들 중 단지 세 가지
만이 (어떤 경전들로) 만장일치에 가깝게 식별되었지만, 이것들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Muni-Gāthā’=‘Suttanipāta’ vss. 207-221; ‘Moneya-Sūte’=
‘Nālaka- sutta’, ‘Suttanipāta’ vss. 699-723; ‘Upatisa-pasine’=‘Sāriputta-
11)
sutta’, ‘Suttanipāta’ vss. 955-975). 어쨌든, 만약 우리가 팔게품, 피안
도품 그리고 아마도 세 개의 아쇼카 본문들을 우리가 지금 가진 것들이
원래 형식과 거의 유사한 것이라 가정하면, 우리는 추가적으로 이 명백
하게 오래된 본문들이 모두 싯구로 된 짧은 본문이고, 그것들 어느 것도
형식과 — 우리가 볼 수 있듯이 — 내용면에서 니까야/아가마의 완성된 경
12)
전, 특히 첫째와 둘째 니까야들과 유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절대다수의 전거적 본문들이 일반적으로 이 두 니까야들로부터
인용되기 때문에 교의의 역사적 연구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우리는 또한 뤼더스(Lüders)가 ‘바르후트의 울타리(railing)들에 새겨
진 그 양각부조들과 그것들에 수반되는 짧은 문구들이 실제 경전들의

Illustrating its Gradual Growth: General Observations,’ UCR 9 (1951) 113-124를 보라.
11) N. A. Jayawickrama, ‘The Vaggas of the Sutta Nipāta,’ UCR 6 (1948) 229-232; Ét. Lamotte,
Historie du bouddhisme indien, 256-259.
12) L. O. Gómez에 의해 출판된 두 개의 흥미로운 논문 (‘Proto-Mādhyamika in the Pāli Canon,’
Philosophy of East and West 26 [1976] 137-165) 그리고 H. Nakamura (‘A Process of the
Origination of Buddhist Meditations in Connection with the Life of Buddha,’ Studies in Pali and
Buddhism [Kashyap Volume], ed. A. K. Narain [Delhi: 1979] 269-277)을 보라. 교의적 불연속성은
특별히 나카무라에 의해 지적되었지만, 고메즈는 Aṭṭhaka-와 Pārāyaṇa- vaggas 그리고 팔리 경전
전체 사이에서 후자와 전자의 유사함의 결핍에 의거하여 [나카무라와는] 다른 각도에서 그것을
제시하였다. R. Otti Franke의 ‘Die Suttanipāta-Gāthās mit ihren Parallelen,’ ZDMG 63 (1909)
1-64, 255-286, 551-586; 64 (1910) 760-807; 66(1910) 204-260, 706-708 (=Kleine Schriften
[Wiesbaden: 1978] 474-777)과 비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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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전제가 되었다’는 것을 논의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
14)
은 또다시 라모뜨에 의해 반론되었다. 어쨌든 흥미로운 점은 만약 뤼더
스가 옳다면, 우리는 그 본문들이 그 니까야들의 완성된 경전들과는 유
사하지 않다고 이미 증거를 가진 것에 더하여 또 다른 증거를 가지게
된다: 만약 바르후트 울타리[의 조각들과 비문들]가 실제 경전들의 증거
를 주는 것이라면, 그 경전들의 내용은 거의 완전하게 本生譚(Jātaka)
15)
나 譬喩說話圖(avadāna) 경전들이다. 그리고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러한 ‘경전들’로부터 삽화를 조각하게 한 시주자들은 — 우리가 상당한 숫
자의 실례들에서 보듯이 — 비구와 비구니들이었다.
우리는 또한 팔리 이외의 인도 언어로 쓰인 가장 오래된 자료는 기원
후 2세기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필사본인 간다라어의 법구경 — 이것
16) 17)
은 노만에 의하면 번역본이다 — 으로 나타난다. 현존하는 불교의 산

13) H. Lüders, Bhārhut und die buddhistischen Literatur, Abhandlungen für die Kunde des
Morgenlandes, XXVI. 3 (Leipzig: 1941) 136-176.
14) Ét. Lamotte, Histoire du bouddhisme indien, 444-445.
15) 이것에 최소한 한 가지 예외가 있다고 논의 될 수 있다. Ajātasata bhagavato vaṃdate라는 짧은 설
명이 덧붙여진, ‘Sāmaññaphala-sutta에서 묘사된 것과 같이 ‘그 왕이 방문하는 세 단계들이 나타
난’ 양각 부조는 이 세부적인 경전의 존재를 전제한다고 논의할 수도 있다; E. J. Thomas의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3rd ed. (London: 1949) x를 보라. 어쨌든, 이것은 사실상 토
마스가 말한 것처럼 Sāmaññaphala-sutta의 교의적 내용은 ‘여섯 경쟁적인 교주들과의 대면 후에
붓다에게 왔다고 말해지는 아자타사투 왕의 전설에 삽입된 것’ (ibid., 179)처럼 나타남에 따라 이
것은 단지 그 본문의 설명부의 구조를 전제할 뿐이다. 그 비문과 그 양각부조는 단지 이 ‘전설’만을
전제 할 뿐이다. 이 경전의 핵심적 교의의 구성요소들은 디가 니까야의 Sīlakkhandha-vagga
(Suttas 1-13)에서 글자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며, 이것은 거의 확실히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였
을 것(178)이라는 점에 유의하라. 본질적으로 그 동일한 설명부의 구조는 — 비록 다른 인물들이
나타나지만 — Milindapañha의 저자에 의해 또한 사용되었다는 점 역시 유의하라.
16) K. R. Norman, ‘The Gāndhārī Version of the Dharmapada,’ Buddhist Studies in Honour of I. b.
Horner, ed. L. Cousins et al. (Dordrecht/Boston: 1974) 171-179.
17) J. Brough, The Gāndhārī Dharmapada, London Oriental Series, Vol. VII (Oxford: 1962) 55-56.
200 불교학리뷰 vol.13

스크리트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이 중앙아시아에서 나왔고, 아마 그 어느


18)
것도 기원 후 5세기보다 선행하지 않을 것이다. 증일 아함경의 단편을
19)
포함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길깃(Gilgit) 필사본은 오히려 더 늦다. 현
존하는 불교 한자 자료들은 기원 후 2세기 후반 이전에는 진정 존재하
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상 니까야/아함 문헌의 주요 분류의 최소한 일부
분에 대한 실질적 교의를 우리들이 알게 해 주는 — 그것이 얼마나 불완
전하든지 간에 — 우리가 가진 최초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4
세기의 마지막 사분기에 다르마난딘(Dharmanandin)의 중아함경과 증
20)
일 아함경의 번역본에 이르기 이전은 아니다. 소승 정전(正典)의 교의
적 내용의 일부가 마침내 명백하게 연대를 추정할 수 있고, 실질적으로
검증 되는 것은 이 시기 부터이다. 따라서 그것은 기원 후 4세기 말 부
터이며, 그 이전은 아니다.

18) J. W. de Jong, ‘The Study of Buddhism. Problems and Perspectives,’ in J. W. de Jong, Buddhist
Studies, ed. G. Schopen (Berkeley: 1979) 19. [이것은 오직 정전 문헌에만 참조시키는 것임]
19) O. von Hinüber, ‘Die Erforschung der Gilgit-Handschriften (Funde buddhistscher Sanskrit-
Handschriften I),’ Nachrichten der Ak. d. W. in Göttingen. I Phil.-hist. KI., Jahrgang 1979, Nr.
12(Göttingen: 1979) 341, no. 4a.
20) E. Zürcher, The Buddhist Conquest of China, The Spread and Adaption of Buddhism in Early
Medieval China, Vol. I (Leiden: 1959): 어쨌든 ‘지금 정전의 일부분이 된 그 [중아함과 증일아함]
의 번역본은 4세기 최말단에 상가데바(Saṅghadeva)에 의해 만들어진 다르마난딘의 번역의 후기
개정판 인 듯 하다’라는 것에 주의하라 (204). 이 진술은 그것을 더 세부적으로 언급한 Ét. Lamotte
의 ‘Un sūtra composite de l’Ekottarāgama,’ BSOAS 30 (1967) 104ff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 E.
Waldschmit의 ‘Central Asian Sutra Fragment and their Relation to the Chinese Āgamas,’ Die
Sprache der ältesten buddhistischen Überlieferung, Abhandlunggen der Akademie der
Wissenschaften in Göttingen, Phil.-Hist. Klasse. Dritte Folge. Nr. I 17. Ed. H. Bechert (Göttingen:
1980) 169ff 또한 보라. 물론 이 시대 보다 앞서 번역된 단독적인 니까야/아함 문헌의 단편들이 존재
한다; L’inde classique, T. II (Paris: 1953) 2070, 2082-2083과 비교하라.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01

III.
21)
나는 물론 ‘고등 비평’ 이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개정판 이전의 시
점으로 우리의 지식의 범위를 뒤돌릴 수 있다고 주장되어 왔다’는 사실
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 불운하게도, 나는 또한 아직 비판적으로 연구되
지 않은 이 ‘고등 비평’의 핵심 이론과 그 이론의 적용에 수반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이 비평의
핵심 이론은, 결론적으로, 만약 모든 알려진 부파들의 본문과 구절이 일
치한다면 그 본문과 구절은 분명이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이것은 명백
히 그 전통의 제파분열 이전 단계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 원리
는 어떤 한 형태에서든 다른 형태이든 사실상 바로(Bareau), 프라우발너
(Frauwallner) 등등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이고 연대기적인 모든 중요한
22)
진술들의 기초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 원리를 적용함에 있어, 두 가

21) 역) Higher criticism: 저급비평에 대립되는 말이다. 저급비평이 (성서의) 원문에 관한 연구인 데 반
해, 그 저작연대와 저자, 또 역사적・사상적 배경 등의 연구를 주안으로 한다. 본문에서는 만약 모든
학파에서 어떤 내용이 일치한다면 그것은 아주 오래된 전통이고 부파분열 이전에 속한 것이라는
해석방식을 지칭함.
22) 바로에 대해서, 특히 Recherches sur la biographie du Buddha dans les Sūtrapiṭaka et les
Vinayapiṭaka anciens: de la quête de l’éveil à la conversion de Śariputra et de Maudgalyāyana
(Paris: 1963); Recherches sur la biographie du Buddha dans les Sūtrapiṭaka et les Vinayapiṭaka
anciens: les derniers mois, le parinirvāṇa et les funérailles, T. I (Paris: 1971); T. II (Paris: 1971); 그
리고 아래 주해 38을 보라. 프라우발너에 관해서는 The Earliest Vinaya and the Beginnings of
Buddhist Literature, Serie Orientale Roma, VIII (Rome: 1956); “The Historical Data We Possess
on the Person and the Doctrine of the Buddha,” EW 7 (1957) 309-312를 보라. 이 원리의 몇 가지 전
형적 발현을 보려면 Ét. Lamotte의 ‘Lotus et buddha supramondain,’ BEFE0 69 (1981) 32-33 ;
Brough, The Gāndhārī Dharmapada, xviii; K. R. Norman, ‘Four Etymologies from the Sabhiya-
Sutta,’ Buddhist Studies in Honour of Walpola Rahula, ed. S. Balasooriya et al. (London: 1980) 179
(§ 8.1)를 참조하라. 이 원리의 수용은 문헌 학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불교를 다루는 광범
위한 근대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점 또한 유의하라. 예를 들어, J. Ph. Vogel, ‘The Past
202 불교학리뷰 vol.13

지 중요한 사실들의 집합에 대해 거의 언질이 주어지지 않았다.


첫째로, 우리는 사실상 언제 부파 시대가 도래했는지에 대해 알지 못
한다. 바로가 말한 것처럼, ‘부파들의 일람표와 목록을 우리에게 전해주
는 그 저작물들은 아주 오래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기원 후 300년
이전으로 확실하게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기원 후’라는 그 자체는 그
23)
것들과 관련된 사건들로부터 대략 500년 이후 이다.’ 바로가 분명하게
보여줬듯이, 이 늦은 자료들에 적당한 정도의 동질성이 존재하며, 그것
들은 대부분 공통적이다. 어쨌든, 그것들이 보여주는 가장 충격적인 공
통 요소들 중 하나는 그것들 모두가 부파 분열의 출현에 대한 다른 시
기를 언급한다는 것이다. 바로가 ‘그 전통들 중 첫 번째 류’로 분류한
이 자료들에서 디파밤사(Dīpavaṃsa)는 ‘불멸 후 2세기 중에 모든 부파
분열이 일어났다’라고 말하고, 정량부(Sammatīya) 전통은 첫째는 불멸
후 137년, 둘째는 불멸 후 200년, 그리고 셋째는 불멸 후 400년에 부파
분열이 발생했다고 한다. 카쉬미르 전통(La tradition cachemirienne)
은 부파 분열이 불멸 후 100년, 그리고 불멸 후 2, 3, 그리고 4세기에
각각 발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불설대승선견변화문수사리문법경(Mañjuśrī-
24)
paripṛcchāsūtra)에 따르면, ‘모든 분열은 불멸 후 제 1세기에 일어났다.’
우리는, 또다시 바로가 말한 것처럼, 금석학적 자료에 의하면 ‘대부분의
그 학파들의 존재는 확실’하지만, ‘우리는 불멸 후 2세기 이전에 관한
어떠한 자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시기에 비문들은 페샤와르

Buddhas and Kāśyapa in Indian Art and Epigraphy,’ Asiatica, Festschrift Friedrich Weller
(Leipzig: 1954) 808; F. E. Reynolds, ‘The Many Lives of Buddha: A Study of Sacred Biography and
Theravāda Tradition,’ The Biographical Process, Studies in the History and Psychology of
Religion, ed. F. E. Reynolds and D. Capps (The Hague: 1976) 41; 등등.
23) Bareau, Les sectes bouddhiques du petit véhicule (Paris: 1955) 16.
24) Bareau, Les sectes bouddhiques, 16-19.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03

(Peshawar) 근처의 캐시미르 서부, 마투라와 사위성에서 설일체유부,


마투라와 까르레(Karle)에서 대중부의 존재 등을 알려 준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이 비문들에 실질적으로 ‘학파’들이 참
조된 것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 후 2세기 이전은 아니라는 것이
25)
다. 그것들은 단순히 이미 알려진 그 이전 시기의 어떤 불교 비문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비록 바르후트와 산치의 유적지에서 제파들이 궁극적
으로 출현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주장된 분업(sutaṃtika,
vinayadhara 등등)의 시초가 존재했음이 증언되었을지라도, 그 양 유적
26)
지에서 조차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알려진 어떤 아쇼카 비
문에도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비록 상가 안에서 일종의 내부적 문제
가 있었다고 나타나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쇼카는 언제나 그것을 ‘상
27)
가’ 혹은 ‘비구-상가’라고 불렀다. 따라서, 우리는 기원 전 2세기 이전
에 부파가 출현했다는 것에 어떠한 실제적 증거도 없음을 알고 있다. 이
질문에 관한 문헌전통 — 특히 율장 — 의 정확한 가치 평가는 이 세부적
비평 방식의 적용에 수반된 두 번째 문제의 군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만약 알려진 모든 본문과 구절
의 판본이 일치한다면 그 본문과 구절은 당연히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25) Bareau, Les sectes bouddhiques, 27, 36. 2세기라는 기원은 바로의 것이다. 이 시기를 좀 더 뒤로 당
길 수도 있지만, 이것은 굉장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그 저명한 Mathurā Lion Capital 비문에 의거
한 연대이다. 예를 들어, R. Salomon의 ‘The Kṣatrapas and Mahākṣatrapas of India,” WZKS 17
(1973) 11; A. K. Narain, The Indo-Greeks (Oxford: 1957) l42ff.
26) N. Dutt, Early Monastic Buddhism, Vol. II (Calcutta: 1945) 14.
27) 아쇼카의 부파분열(Schismenedikt) 발생되었다는 몇몇 개의 가설에 대해서는 L. Alsdorf,
“Aśoka’s Schismen-Edikt und das dritte Konzil,” IIJ 3 (1959) 161-174 (=Kleine Schriften
[Wiesbaden: 1974] 414-427); H. Bechert, “Aśoka’s ‘Schismenedikt' und der Begriff Sanghabheda,”
WZKS 5 (1961) 18-52; H. Bechert, “The Importance of Aśoka’s So-called Schism Edict,”
Indological and Buddhist Studies. Volume in Honour of Professor J. W. deJong on his Sixtieth
Birthday, ed. L. A. Hercus et al. (Canberra: 1982) 61-68을 보라.
204 불교학리뷰 vol.13

말하지만, 이것이 적용된 모든 자료들이 진정 아주 후기에 속한다는 사


실에 대한 설명이 지금까지 주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이미 봤
듯이 팔리 자료들은 기원 전 29년 에서 17년 이전으로 가정 할 수 없
고, 우리는 5세기 혹은 6세기 이전의 그것들의 실질적 내용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분명히 알 수 없다. 아마 어떤 한자 자료도 기원 후 2세기
이전으로 귀속되지 않으며, 대부분은 아주 후기에 속한다. 초기 문헌에
관한 산스크리트 자료들 — 여기서 우리는 필사본에 관해서만 얘기한다 —
은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 기원 후 5세기 부터 이다 — 더 늦다. 티벳
자료들은 여전히 더 늦다(7세기 이전은 아니다). 문헌 비평가들은 따라
서 공통적으로 그 문헌 전통의 후기 단계의 문헌들을 비교하였다. 만약
이것들이 언젠가 완전히 설명된다면, 그 자료들에서의 어떠한 일치점도
완전히 반대이던가 아니면 아주 다른 해석이 될 수 있다. 고등비평에 관
한 그 핵심 이론은 따라서 다음의 형식으로 재구성되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어떤 본문과 구절의 판본이 일치한다면, 그 본문과 구절은 아마 후
기에 속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 이전에 존재하던 전통의 합성, 점차적
균등화, 그리고 화합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생각은 물론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와실리에프
(Wassilieff)는 오래전 논문에서 그 전에는 대답되지 않은 여러 가지의
요점에 대해 거론하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율장의 작성의 시기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특색을 모든 논문과 모든 학파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
는 것은 거의 동일하다‥‥‥하지만 우리의 견해는 탁발수행자의 삶
에 관한 문제가 더 이상 논의의 주제가 되지 않고, 모든 학파들이
이미 사원들 안에서 아주 조용히 정착하였으며, 다른 종교에서조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05

차, 공동체생활을 위해서 율들은 이미 알려진 부분을 버릴 수 없


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 단조로운 풍조를 취하였을 때 이 특색은
우리들에게 전해진 율장들조차 늦은 시기에 써졌다는 것을 보여준
28)
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라모뜨가 프라우발너의 The Earliest Vinaya and the


Beginnings of Buddhist Literature에 대해 논평한 곳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 후자[즉, 여러 율장들] — 그리고 그중에서 특히 팔리어


율장과 화지부, 법장부 — 의 골자에서 우리가 현저한 유사점을 발
견한다면, 그 사실은 평행적 발달과정에 의해 설명 될 수 있다.
불교 공동체들은 고립적으로 살지 않으며, 그들은 그들의 이웃들
에 의해 행해지는 작업들에 관심을 가지고 따랐다. 그래서 그들이
동일한 방법들로 작업을 하였고, 실질적으로 같은 단계를 따랐다
29)
하더라도 전혀 놀랄 것이 없다.

28) W. Wassilieff, “Le bouddhisme dans son plein développement d’après les vinayas,” RHR 34 (1896)
318-325. 1896년에 Wassilieff 의 논문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S. Lévi 가 이것에 짧은 서문을 추가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거기에서 Wassilieff의 ‘의견들은……일반적 사상들에 엄청난 충격을
줄 수 있다’는 반드시 언급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음과 같은 서술을 추가하였다: ‘이것은 그
번역자가 저자와의 연대의식을 보여주려 의도함이 없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인도학 학자
로서 번역자는 Wassilieff의 대담한 결론들을 가장 형식적인 말로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조차 절
제하였다.’ 하지만 10년 뒤에 그 자신의 논문에서 Lévi는 Wassilieff의 논문의 결론을 인용하고 동
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 차례에서 나는 그 같은 것들에 질문했었다.’ 그런 다음
Wassilieff의 의도와 거의 정확히 같은 질문들을 한 장 가량 논의했다 — 그것들 중 어느 것도, 또 다
시, 대답되지 않았다. S. Lévi, “Les éléments de formation du Divyāvadāna,” TP 8 (1907) 116-117
그리고 n. 1 을 보라.
29) Ét. Lamotte, Histoire du bouddhisme indien, 197.
206 불교학리뷰 vol.13

바로 그 자신은 ‘다른 여러 학파들의 승려들 사이의 좋은 화합의 예


들’이라고 썼다. 그런 다음 그는 예를 들어 ‘오장국(Uḍḍiyāṇa)에서는 대
중부, 설일체유부, 화지부, 법장부 그리고 가섭부가 수 세기 동안 완전한
30)
화합과 진정한 공생관계로 살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마 이 일반
적 고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행스럽게도 개작되지 않은 본문과 문구
들이 여전히 보존되어 있어, 내가 제안했던 것과 같은 것을, 내가 생각
하기에, 실질적으로 우리가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로가 연구한 가섭불의 유해에 대한 설명에서 팔리본과
대중부, 화지부 그리고 법장부 본이 가섭불의 스투파가 토이카(Toyikā)
에 위치한다는 것에 모두 일치하는 사실은 이것이 단순히 오래 되었고,
부파 이전의 전통으로 인해 초래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과 반대로,
그것들이 모두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 정반대의 사실로부터 초래되었다
— 이것은 오히려 그것들이 모두 스투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초기 전
통의 판으로부터 나중에 형성되었고, 개정되었으며, 혼합된 것을 반영한
다는 사실로부터 초래된 듯하다. 불운하게도, 나는 이 중요한 문제에 관
해 단지 아주 요약된 개요만을 줄 것이지만, 우리는 이 실례에서 어떻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이 ‘고등 비평’이 적절히 작용한다고 잘못 가정
되었는지에 대한 훌륭한 예를 가졌음은 분명하고, 우리가 실제적으로 이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면 — 우리가 나중에 볼 것이지만 — 이것은 전
혀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바로가 모았던 것들로 시작하면, 우리는 명백하게 동일한 본문의 세
가지 본을 가지고 있다: 대중부, 화지부, 그리고 법장부 판이 있다. 바로

30) Bareau, Les sectes bouddhiques, 48. L. Renou and J. Filliozat, Linde classique. Manuel des Études
indiennes, T. II (Paris-Hanoi: 1953) 517 (§ 2245); H. Bechert, ‘Notes on the Formation of Buddhist
Sects and the Origins of Mahāyāna,’ German Scholars on India, Vol. I (Varanasi: 1973) 10, 11 또한
참조하라.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07

에 따르면 이 세 가지 본들은 ‘그 동일한 이전의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


31)
관되어 있고, 명백히 그것에서 나왔다.’ 우리는 팔리본 또한 가지고 있
지만, 이것은 그 모든 본들 중에 가장 나중의 것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32)
물론 분명히 다른 세 가지 본들과 관련되어있다. 이 네 가지 본들은
수많은 공통요소들을 가지고 있고, 비록 각각은 불교의 설화 문학의 공
통적 제재로부터 취한 하나 혹은 여러 다양한 부차적 줄거리와 문학적
33)
상투 구문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 본문의 기본적 요소들은 각각의 본
에서 여전히 분명히 드러나 있고, 구분 될 수 있다: 붓다는 코살라를 유
행한다; 그는 都異, 都異迦 혹은 ‘Todeyya(Skt. Toyikā)’라고 불리는
마을 근처의 한 장소에 도착한다; 그는 이 장소 아래에 가섭불의 스투
파가 묻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 근처 밭에서 일하던 한 사람과 대면
하게 된다; 붓다는 순간적으로 그 스투파가 나타나게 끔 하고, 그것이
사라진 이후, 그 혹은 그 승려들이 진흙(boue, boule de boue)으로 스
투파를 그 장소에 세운다 (팔리본의 설명에서는 돌스투파가 나타난다;
화지부는 ‘이것은 염부주 영토상의 최초의 높은 스투파였다’란 설명을
더한다; 그런 다음 이것에 — 선행된 한 경우에서 — 어떻게 스투파를 지

31) A. Bareau, ‘La construction et le culte des stūpa d ’après les Vinaya piṭaka,’ BEFEO 50 (1960)
257-261, 특히 260.
32) H. C. Norman, The Dhammapadaṭṭhakathā, Vol. III (London: 1906-1915) 250-255; cf. E. W.
Burlingame, Buddhist Legends, Pt. 3, Harvard Oriental Series, Vol. 30 (Cambridge, Mass.: 1921)
68-69.
33) 예를 들어, ‘붓다의 미소’는 아래와 같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Aṅguttara, iii, 214; Majjhima, ii, 45, 74
(cf. Saṃyutta, ii, 254; Vinaya, iii, 105 — 이 모든 지시는 P.T.S. 판을 가르킨다); Mahāvastu (Senart
ed.), i, 317; Divyāvadāna (Cowell and Neil ed.), 67ff, 138ff, 265ff, 등등. Kṛkin과 Kāśyapa왕의 이야
기도 Mūlasarvāstivāda-vinaya, Gilgit Manuscripts, iii 1, 191, 195, 200; iii 2, 17-78; iii 4,
190-193=Divyāvadāna (Cowell and Neil ed.), 22-24; Avadānasataka (Speyer ed.), II, 76, 124-125;
Avadānakalpalatā (Vaidya ed.), i, 95 (vss. 147-148), 145 (vss. 132-133), 279 (vss. 16-17);
Ratnamālāvadāna (Takahata ed.), 132; 등등에 나타난다.
208 불교학리뷰 vol.13

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시 그리고/혹은 스투파를 짓는 것과 예배하는 것


에 대한 공덕을 찬양하는 싯구들이 뒤따른다. 이 네 개의 모든 판의 그
본문의 기본적 요소들에 합치하고, 각각의 판본이 분리된 학파에 속해있
기 때문에, 우리는 — 그 기존에 수용된 원리에 따라 — 이 설명의 핵심적
요소들은 그 전통의 아주 오래된 부분에 속하거나 부파 이전 단계로 귀
속되어져야 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사실상 그 세 가지의 한문 판 사
이의 동질성과, 그와 나란히 아쇼카의 니갈리 사가르(Nigālī Sāgar) 칙
령의 자신의 해석에 의거하여 바로는 ‘이 설화는 아쇼카 이전에 나타났
34)
다’라고 결론 내린다. 여기서 어쨌든 그러한 압도적인 다수의 다른 경
우와는 같지 않게, 이 경우에서는 이 본문의 다른 판 — 이례적인 판 —
이 활용 가능함에 따라 우리는 진정 그것의 결론과 적용과정을 검증 할
수 있다.
가섭불의 유해에 관한 이 설명의 명백한 다섯 번째 판은 지금 길깃
35)
(Gilgit)에서 나온 설일체유부 율장에서 한 번, 그리고 디비야 아바다
36)
나(Divyāvadāna)에서 두 번 발견되었다. 비록 이 판은 분명히 같은

34) Bareau, ‘La construction et le culte des stūpa,’ 261.


35) Gilgit Manuscripts, iii 1, 73.16-79.2; Peking, 41, 179-3-6 to 180-4-2. 이것의 결과로써 밝혀진 새로운
사실에서, Mūlasarvāstivāda-vinaya가 상당히 늦은 편찬물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얼마간의 중
요성이 있다; Ét. Lamotte, Histoire du bouddhisme indien, 187, 196; Ét. Lamotte, “La légende du
Buddha,” RHR 134 (1948) 61-62를 참조하라. 어쨌든 Saṅghabhedavastu, i, xxff의 더 최근의 보고
를 보라. J. L. Panglung, Die Erzählstoffe des Mūlasarvāstivāda-vinaya analysiert auf Grund der
tibetischen Übersetzung, Studia Philologica Buddhica, Monograph Series III (Tokyo: 1981) 34에
서는 이 설명에 대한 한문본과 팔리본 그 어느 것도 언급하지 않았음에 유의하라; 그는 역시 다른
곳에서 발견된 그 본문의 싯구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H. Lüders의 “Weitere Beiträge zur
Geschichte und Geographie von Ostturkestan,” Philologica Indica (Göttingen: 1940) 612; E.
Waldschmidt, “Der Buddha preist die Verehrungswürdigkeit seiner Reliquien,” Von Ceylon bis
Turfan (Göttingen: 1967) 424-427을 보라.
36) E. B. Cowell 그리고 R. A. Neil, The Divyāvadāna (Cambridge: 1886) 76.10-80.9, 465.10- 69.18.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09

집단에 속하고, 동일한 기본적 서술 구조(붓다는 토이카(Toyikā)에 가


고, 그는 밭에서 일하던 한 사람과 대면하게 되며, 그의 ‘신통력으로’ 그
성골들을 승려들이 볼 수 있도록 들어올린다, 등등)를 가지지만, 이것은
다른 네 개의 판들와 최소한 두 가지의 중요한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첫
째, 이것은 다른 판에서 발견된 다양한 부차적 줄거리를 전혀 가지고 있
37)
지 않으며 — 상당히 확실한 우선권의 전조 — 둘째로 이것은 토이카의
스투파와 그것의 건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붓다
가 나타나게 한 것은 스투파가 아니었으며, 단지 정등각 가섭불의 분배되
지 않은 성골의 덩어리였다(kāśyapasya samyaksaṃbuddhasyāvikopitaḥ
śarīrasaṃghāta ucchrāpitaḥ). 그 본문은, 땅에 묻혀있던 단지 이 성골
들에 관해서만 알고 있고, 그것이나 혹은 [가섭불이 묻혀있던 곳이라고]
구획되지 않은 땅의 일부분을 숭배하거나, 축제(maha)의 형성을 통한
신성화에만 오로지 관계한다. 복덕은 첫째로는 이 지역(pṛthivīpradeśa)
을, 둘째로는, 여기서 스투파와 명백하게 어떤 관계도 없는 용어인 붓다-
짜이땨들(buddhacaitya) — 항상 복수형 — 을 찬탄함으로써 얻는 행위에
의해 발생한다. 요약하자면, 이 판은 스투파가 아직 구성요소가 아닌, 단
지 성골 숭배의 형식만 안 전통 — 명백하게 후기에는 개정되는— 을 반영
38)
한다.

37) 이것에 관계해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Kṛkin왕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부재한 것이다.
불교 산스크리트 문헌 전통은 가섭불과 그 왕을, 특히 그의 장례식과 유해의 매장에 관해, 항상 연
관시킨다. M. Hofinger, Le congrès du lac Anavatapta I: Légendes des anciens (Sthavirāvadāna)
(Louvain: 1956) 225, n. 1을 참조하라. 이 관계는 항상 일치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널리 퍼져있었다
— 주해 33의 참고 문헌들의 일견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산스크리트 본문이 이 연관성에 대
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따라서, 내가 말한 것처럼, 특별히 중요하다.
38) ‘선-스투파’의 사리숭배만을 알고 있는 문헌의 존재는 바로의 스투파와 이것의 숭배의 기원을 재
구성하는 최근의 노력들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에 주목하라. 이것은 특별히 그 문제의 본문
이 과거불들 중 한 분과 연관된 가장 우리가 가진 오래된 전통을 반영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우리
210 불교학리뷰 vol.13

이 판의 존재는 얼마간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지만, 나는 이것을 어떤


이유로든 결코 교열(校閱)된 적이 없는 아주 오래된 설명이 아닌 다른
것으로 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간단한 서술 구조, 이미 잘
알려진 부차적 줄거리와 문학적 상투 구문의 부재, 그리고 특히 스투파
에 관한 언급의 부재 — 이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을 이 세부
적 본문에 관해 알려진 역사의 시작점에 놓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
서 우리는 토이카(Toyikā) 스투파 — 그리고 이것은 중요한 스투파 이다
— 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이미 알려진 것들 중 가장 초기의 설명으
로 나타나고, 토이카의 가섭불 스투파에 대해 일치하고 후기에 속하는
대중부, 화지부, 법장부 그리고 상좌부 판을 뒤집는 것을 가졌다. 따라서
근본설일체유부의 설명에서 반영된 그 원래 판은 어느 시기에 교열되었
고, 한때 한 학파의 설명부가 이 교열을 거쳤지만, 이것은 — 여기서는
다만 개략적으로 봐서 — 근본설일체유부를 제외한 모든 학파의 서술부에
받아들여졌고, 병합된 것으로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라도, 여기서 ‘고등
비평’에 의해 만들어진 결론을 검증하는 수단이 되는 몇 가지 소수의 방
법 중 하나를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다고 나타난다. 대중부, 화지부,
법장부, 그리고 상좌부의 설명이 일치하는 것은 그것이 오래된 부파 이
전의 판을 반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틀림없이 초기의 전통을 근
39)
본적으로 변형시킨 후기의 병합된 판이라는 것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는 Nigālī Sagar 칙령으로부터 최소한 과거불 숭배가 선-아쇼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A.


Bareau의 ‘Sur l’origine des piliers dits Aśoka, des stūpa et des arbres sacrés du bouddhism e
primitif,’ Indologica Taurinensia 2 (1974) 9-36; ‘Le parinirvāṇa du Buddha et la naissance de la
religion bouddhique,’ BEFEO 61 (1974) 275-299; ‘Les récits canoniques des funérailles du Buddha
et leurs anomalies: nouvel essai d ’interprétation,’ BEFEO 62 (1975) 151-189를 참조하라.
39) 불교문헌 중에서 우리가 여기서 발견한 것과 유사한 교열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나타나는 ‘본문’
에 최소한 하나의 또 다른 실례가 있다는 것에 유의하라. 그 문제의 본문은 Vyāghrī-jātaka 이며, 비
록 이 ‘본문’의 다양한 판이 이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연구되지는 않았지만, Jātakamālā 판(Ch. I)에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11

IV.

하지만 만약 우리가 기원 후 4세기 훨씬 이전의 니까야/아함 문헌의


실질적 교의의 내용에 대하여 어떤 확실한 것도 알 수 없음을 안다면,
우리는 또한 아주 많은 수의 불교 비문들이 오래된 중아함과 증일 아함
의 한문 번역판보다 수 세기 앞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만약 우리가
인도 불교에 있어서 승려/재가자의 구분에 대한 질문 —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여기서 관계하는 질문 중에 하나이다 — 에 관한 검증 가능한 가
장 오래된 자료를 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처음부터 이 비문들
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 비문의 자료는 최소한 두 가지의 특출한 이점을 가진다. 첫째, 대
다수의 이것은 우리가 문헌 자료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들보다 시
기적으로 앞선다. 둘째, 그리고 아마 굉장한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이
자료는 일부의 교육받은 박식한 인도 불교도들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
라 상당히 많은 수의 수행하는 불교도들이 사실상 한 것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는 것이다. 불교학에서 학자들은 마치 문헌 자료들이 얼마간 실

의해 반영된 어느 한 단계에서는 그 ‘본문’이 스투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것이 분명하고,


Suvarṇabhāsottama (Ch. XVIII)에 의해 반영된 다른 어느 단계에서는 스투파에 대한 참조가 그
이야기에 완전히 병합되었고, 그것의 통합된 일부분이 되었다. 사실, Suvarṇa- bhāsottama의 필사
본 전통 그 자체는 그 교열의 별개의 두 단계를 보존하고 있는 듯하다.
좀 더 일반적 경향으로 우리는 물론 정전의 최초의 알려진 교열을 넘어서려는 다른 순전히 언어
학적인 시도가 있었음을 반드시 유의해야한다; S. Lévi의 ‘Observations sur une langue
précanonique du bouddhisme,’’ JA (1912) 495-514; H. Lüders, Beobachtungen über die Sprache
des buddhistischen Urkanons. Abh. d. Deutschen Akad. d. Wiss. zu Berlin, Kl. f. Sprachen, Lit. u.
Kunst. Jg. 1952 Nr. 10, Hg. v. E. Waldschmidt (Berlin: 1954); O. von Hinüber의 더 최근의 연구인
‘Pāli Kaṭhati: ein Beitrag zur Überlieferungsgeschichte des Theravāda-K anons,’ IIJ 21 (1979)
21-26과 상기 주해 1에 인용된 논문들을 보라. 불운하게도, 이 중요한 연구들의 결과는 지금까지
더 넓은 역사적 관점으로부터 — 만약 논박되지 않았다면 — 오히려 제한적이었다.
212 불교학리뷰 vol.13

제 행위의 묘사인 것처럼 그것을 일관되게 사용해서 역사적 진술을 만


들려고 의도하지만, 이상과 실제 사이의 거의 확실한 상위에 대한 명시
적인 고려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세부적으로 한 승려에 관계
된 아주 긴 일련의 진술들에서 잘 예증되어 있다. 그에 관해 이야기 된
것 거의 모두에 내재하는 것은 우리의 문헌 자료에 보존되어 있는 그
승려의 종교적 생활의 구조가 표준적이고 조심스럽게 고안된 이상적 사
고의 전형이 아니라 그 초기 시대의 전형적인 불교 승려의 실질적 생애
의 적절한 역사적 반영이라는 양상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우리의 주
제와 세부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된 하나의 — 막대하게 영향력 있는 — 실
례를 인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덴베르그 (Oldenberg)는 그의 고전
Buddha, his life, his doctrine, his order의 스투파/사리 숭배에 헌정
된 유일한 구절에서 그는 스투파 숭배에 관해 ‘이 같은 상가의 승려들은
이 공양의 호화스런 구경거리와 어떤 관계도 없다; 상가의 오래된 규율
40)
은 이것에 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라고 단호하게 언급했다. 하
지만 우리의 보시에 관한 비문들은 어쨌든 전혀 다른 것을 암시하는 듯
하다.

V.

바르후트와 산치의 울타리에서 나온 우리가 가진 최초기의 보시에 관


41)
한 비문들은 기원 전 120년에서 80년 정도로 연대가 추정된다. 여기

40) H. Oldenberg, Buddha, sein Leben, seine Lehre, seine Gemeinde (Stuttgart: 1923; first pub. 1881)
424; trans. Buddha: His Life, His Doctrine, His Order (London: 1882) 377.
41) R P. Chanda, Dates of the Votive Inscriptions on the Stupas at Sanchi, MASI, No. 1 (1919); A. H.
Dani, Indian Palaeography (Oxford: 1963) 62 -65 ; V. Dehejia, Early Buddhist Rock Temples, A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13

서 이미 우리는 확실히 그 보시자들 — 이 보시자들은 성스러운 대상과


성스러운 장소를 세우고 꾸미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 보시자들은
스투파 숭배, 보시와 복을 쌓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 의 상
당한 비율은 비구와 비구니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르후트를 예로 들
42)
면, 40퍼센트의 보시자들이 비구(스물 넷) 혹은 비구니(열 넷)였다. 우
리는 또한 이 개개인들의 상당한 비율이 단순한 승려들이 아니라, 교학
전문가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여섯 명이 ‘bhānakas’, 즉 ‘암송가’로
불렸다; 한 명은 ‘sutaṃtika’, 즉 ‘경전을 아는 사람’으로 불렸다; 한명
은 ‘peṭakin’, 즉 ‘정전을 아는 사람’으로 불렸다; 한 명은 ‘pacane-
kāyika’, 즉 ‘[라모뜨에 따르면] 경전 전체를 아주 잘 암송 할 수 있는 사
43)
람’이다.
코노우(Konow)에 의해 편집된 카로스티 비문들의 분석으로부터 아
주 비슷한 상황이 나타난다. 여기서,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조상
(彫像) 숭배와 스투파 숭배와 관련 있는 보시로만 한정시킨다면, 우리는
또다시 40퍼센트 이상의 보시자가 승려(열여섯)이고, 나머지는 다른 종
44)
류에 속한 재가자였다(열아홉). 여기에서 역시, 비록 카로스티 비문에

Chronological Study (London: 1972) 35-36, 186-188. 나는 여기서 Dehejia를 따랐다.


42) Ét. Lamotte, Histoire du bouddhisme indien, 455. Lüders, Bharhut Inscriptions, 1-2는 스물다섯 명
의 비구, 열여섯의 비구니, 그리고 아흔 아홉의 재가자를 보시자로 계산한다. 산치에 나타난 숫자
는 사실상 동일하다: 437명의 총 합 중에 — 19명은 보시자가 아니거나 단편적이다 — 163명이 상
가의 보시자이다. G. Bühler, ‘Votive Inscriptions from the Sānchi Stūpas,’ EI 2 (1899) 87-116;
Bühler, ‘Further Inscriptions from Sānchi,’ EI 2 (1899) 366-408.
43) M. Shizutani, Indo bukkyō himei mokuroku (=静谷正雄, 󰡔インド仏教碑銘目錄󰡕) [Catalogue of
Indian Buddhist Inscriptions](Kyoto: 1979) §§ 206, 210, 217, 223, 231, 254; 226; 277; 288; Ét.
Lamotte, Histoire du bouddhisme indien, 157.
44) S. 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with the Exception of Those of Aśoka, Corpus Inscriptionum
Indicarum, Vol. II, Pt. 1 (Calcutta: 1929). Monks: XXXV.1, XX XVI. 1, 2, 4, 5, 6, 7, 8, XL, XLII,
XLIII, XLIV, LII, LVIII, LXXXVIII, 덧붙여 Fussman에 의해 편집되어 출판된 BEFEO 61 (1974)
214 불교학리뷰 vol.13

서는 명칭들이 덜 공통적이지만, 최소한 한 승려 보시자는 ‘venaea,’


‘vainayika,’ 즉 ‘율을 아는 사람’이라 불렸고, 다른 사람은 ‘trepiḍaka,’
45)
즉 ‘삼장을 아는 사람’으로 불렸다.
우리는 또한 다른 보시에 관계된 비문으로부터 승가 보시자들의 비율
이 증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 이것은 가장 대표적인 예이
다 — 뤼더스에 의해 수집된 마투라 비문은 분명히 불교도의 것이고 보시
자의 이름이 나타났거나 보존되었는데, 50퍼센트 이상의 보시자들이 비
46)
구나 비구니이다. 이들 중에 우리는 암송가(bhānaka)와 caturvidya(뤼
더스는 이것을 ‘네 종류의 경전을 아는 사람’이란 뜻으로 취했다) 양자
로 불린 승려를 발견할 수 있다; 두 승려는 ‘prābhaṇīka,’ 즉 뤼더스에
따르면 ‘명상 수행자’로 불렸다; 우리는 또한 ‘trepiṭaka’인 비구니의 조
카딸인 비구니 보시자와 같은 명칭의 비구의 제자인 보시자도 발견 할
47)
수 있다.

54-58. XL, XLII, XLIII과 XLIV에 있는 보시자들은 ‘sadaviyarisa,’ ‘sadayarisa’ 등등의 용어에 기
반되어 승려로 취해졌다; H. Lüders, A List of Brāhmī Inscriptions from the Earliest Times to about
A .D. 400 with the Exception of Those of Aśoka, Appendix to EI (I), 1909/10 (Calcutta: 1912) 223;
Brough, The Gāndhārī Dharmapada, 177 and xx-xxi를 참조하라; Konow (107)는 그 용어를
sārdhaṃchara 혹은 sārdhaṁvihārin와 동일시 한다. 이 모든 보시자들은 상가의 이름을 가진 것으
로 나타나며, 최소한 한 경우(XLIII)에서, 비록 이것은 널리 인정되어 있듯이 얼마간 이상하지만
Konow는 그 이본을 sa[dharmarataśamanasa sadayarisa]로 재구성하였다. 재가자: I, II, XIII, XV,
XVII, X X I, XXVII, X X X I, X X X II, XXXV.4, XLVI, XLVII, XLIX, LXXIV, LXXVI,
LXXVII, LX X X , LX XXII, LXXXVI.
45) 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XXXV I.7; Fussman, BEFEO 61 (1974).
46) H. Lüders, Mathurā Inscriptions, Abh. d. Akad. d. Wiss. in Göttingen, Philo-Hist. Klasse, Dritte
Folge, Nr. 47, ed. K. L. Janert (Göttingen: 1961) §§ 4(?), 8, 24, 29, 31, 32, 33a, 33b, 35a, 35b, 36, 37,
38, 39a, 39b, 40a, 40b, 41, 44, 45, 46, 52, 53, 54, 55, 56, 58, 59, 67, 80 (?), 90, 103, 121, 126, 152, 154, 157,
179, 185, 186.
47) Lüders, Mathurā Inscriptions, §§ 33a, 33b, 35b; 46 [on prāhaṇīka cf. BHSD, 389 s.v. prahāṇa:
390 s.v. prahāṇika (“characterized by religious strenuosity”); 394 s.v. prāhāṇika (“engaging in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15

버져스(Burgess)에 의해 수집된 ‘불교 동굴 사원군’의 비문들에서는,


48)
만약 우리가 자신들을 숭배 형태(조상, 석굴 법당, 사리 등등)과 관련
보시에만 한정하고, 거처의 시주(방, 동굴, 지하실)와 그 곳에 사는 승려
와 거처를 지탱하는 물질적 기부를 제외한다면, 우리들은 65퍼센트 조금
더 넘는 보시자들이 비구이거나 비구니이고(스물여덟), 재가자들은 35퍼
49)
센트 보다 조금 더 낮음을 알 수 있다.
최종적으로, 만약 우리가 더 나아가서 내가 최근에 보여 주려 한 이
비문들 — 아마 대승의 것 — 을 본다면 그 숫자는 더 충격적이다. 대승의
것이라고 보이는 이 비문들 — 여기서 우리는 거의 80여 개의 개별적 비
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에서 70퍼센트 이상의 경우의 보시자들은 비구이
거나 비구니이고, 대부분의 경우는 전자이며, 재가자는 다만 20퍼센트 일
50)
뿐이다.
승려들에 의해 취해진 종교 활동의 종류와 재가자들에 의해 취해진
종교 활동의 종류 사이에는 엄밀한 구분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보
시와 숭배는 인도 불교의 정황에서 근본적이고 절대적으로 재가자의 몫
이었다는 그 문제에 관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관점은 얼마간은 사실
51)
일지라도, 금석학적인 증거들과 잘 조화되지 않는다. 사실, 만약 우리

[ascetic] exertion”); Th. Damsteegt, Epigraphical Hybrid Sanskrit. Its Rise, Spread,
Characteristics and Relationship to Buddhist Hybrid Sanskrit (Leiden: 1978) 247; Lüders,
Mathurā Inscriptions, 83, n. 2]; 24.
48) 역) caityagṛha: caitya는 스투파와 유사어이고 gṛha는 집이다. 따라서 탑 따위를 안치한 법당이다.
49) 승가 보시자에 관해서 J. Burgess의 Report on the Buddhist Cave Temples and Their
Inscriptions. Archaeological Survey of Western India, Vol. IV (London: 1883; repr. Varanasi:
1975) IV.7, 8, 9, 10, 20 (?); VI.2; VII.3, 8, 9, 12, 13, 14, 16, 17; VIII.17; XI.6, 7, 9; X I I .1, 3, 5, 7, 8, 10,
11, 12, 13, 14, 15를 보라.
50) G. Schopen, “Mahāyāna in Indian Inscriptions,” IIJ 21 (1979) 1-19, 특별히 9. ‘마투라 비문들’과 ‘동
굴 사원군 비문들,’ 그리고 ‘대승’이라는 표제를 붙인 이 집단끼리는 일정 정도 겹친다는 것에 유의
해야 한다. 일정 정도의 처음 두 집단은 세 번째 집단에 역시 포함된다.
216 불교학리뷰 vol.13

가 진정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에만 국한한다면, 실제는 그것의 정반대


와 같은 것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기원 전 약 150년경의 비문들로부
터 이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 그것은 말하자면, 우리의 최초기에 속하
는 알려진 보시에 관한 비문들이자 우리가 문헌 전통에 대한 어떤 확정
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 이전으로 부터 — 비구와 비구니들은 스투
파 숭배, 얼마 후에는 조상 숭배에 관련된 보시와 복을 쌓는 활동에 수
반된 것에 상당한 비율을 형성하고 있고, 이 비율은 시간이 갈수록 계속
적으로 증가하였다. 우리는 상당한 수에 해당하는 경우들에서 이 개개인
들은 일반적 승려들이 아니라 교의의 전문가들(trepiṭakas, vainayikas 등
등)과 불교 가르침의 유식한 전승자(bhānakas)였다는 것 또한 알고 있
다. 최종적으로, 대승의 숫자들은 특별히 중요하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
가 있다. 우리는 이 숫자들에 의거하여, 비문에 이것이 처음 나타날 때
부터 대승은 승려-보시의 운동이었고, 이것은 마지막으로 알려진 대승의
비문이 발견된 13세기까지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
이 이 보시에 관한 비문들로 부터 알 수 있는 전부가 아니다.

VI.

바르후트와 산치에 기록된 보시물은 지주, 울타리, 조각된 원형 장식

51) 상기에 인용된 올덴베르그의 진술을 보라. 이 입장이, 예를 들어, H. Bechert의 ‘Contradictions in
Sinhalese Buddhism,’Religion and the Legitimation of Power in Sri Lanka, ed. B. L. Smith
(Chambersburg, PA: 1978) 192-193 등에서 여전히 아주 많이 통용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어쨌든
우리는 이 견해들에 예외가 되는 최근의 두 논문 또한 인용 할 수 있다: R. F. Gombrich, Precept
and Practice. Traditional Buddhism in the Rural Highlands oj Ceylon (Oxford: 1971) 319 그
리고 D. Seyfort Ruegg, ‘A Recent Work on the Religions of Tibet and Mongolia,’ TP 61 (1976)
313-314.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17

과 그 비슷한 것들의 시주에 관계된 것이다 — 그것은 숭배의 대상으로서


의 스투파를 장식하고 두드러지게 하기위한 시주물이다. 카로스티 비문
들 역시, 비록 우리는 수많은 비문이 조상과 연관되어 있는 것 또한 발
견할 수 있지만, 최소한 그것들의 초기 양상에서는 종종 스투파/사리 숭
배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마투라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비문과 ‘동굴
사원군’의 비문들에 기록되어 있는 보시물들은 여전히 스투파와 ‘사리의
설치’라 불리는 것과 관계된 시주물을 포함하고 있지만, 상을 세우는 것
에 현저히 더 관련이 되어있으며, 대승의 비문들은 거의 배타적으로 그
러하다. 그래서 순전히 금석학적 증거의 견지에서 스투파 숭배에 관한
상가의 통제와 지배의 정도는 — 최소한 우리들의 실례들에서 — 아주 분
명하지 않지만, 조상의 숭배가 압도적으로 상가의 관심사였다는 것에는
절대적으로 의문이 없다. 코노우에 의해 편집된 열여덟 개의 카로스티
비문들에는 보시자의 이름이 나타나거나 보존된 조상의 건립이 기록되어
52)
있고, 그 중에 거의 2/3 혹은 13/18명의 보시자가 승려들이었다. 뤼더
스의 마투라 비문에 관한 숫자 또한 거의 정확히 같다: 이름이 있거나 보
존된, 그리고 조상의 보시가 기록되어 있는 스물여덟 개의 비문 중에서
53)
18/28명의 보시자— 또다시 거의 2/3이 되는— 가 비구와 비구니였다. 버
져스에 의해 수집된 조상과 관련된 열일곱 개의 ‘동굴 사원군’ 비문에서는
54)
한 명을 제외한 모든 보시자가 승려였다. 내가 대승의 것이라고 확인한

52) 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monastic: XX XVI. 1, 2, 4, 5, 6, 7, 8, XL, XLII, XLIII, XLIV,
LVIII, LXXXVIII; Fussman에 의해 보고된 비문 BEFEO 61 (1974)은 다른 하나가 될 것이다.
Konow의 재가 비문들은 다음과 같다(XXI, XXXV.4, XLVI, XLVII, XLIX).
53) Lüders, Mathurā Inscriptions, monastic: §§ 4, 8, 24, 29, 41, 67, 80, 90, 103, 121, 126, 152, 154, 155,
157, 179, 185, 186; lay: §§ 1, 74, 76, 81, 135, 136, 150, 167, 172, 180. 아래의 것들 또한 ‘대승’이라는 표
제 아래 묶어진 비문이란 것에 유의하라: §§ 8, 67, 152, 179, 185, 186.
54) Burgess, Report on the Buddhist Cave Temples, IV.7, 8, 9, 10; X I.7, 9; XII. 1, 3, 5, 7, 8, 11, 12,
13, 14, 15, 모두 상가의 것임; X II.2는 유일한 예외임. 여기서 ‘대승’의 집단과 겹치는 것이 훨씬 많
218 불교학리뷰 vol.13

비문들에서는 사실상 모든 것이 조상을 세우거나 만드는데 관계했으며, 70


55)
퍼센트 이상의 보시자가 비구나 비구니였다(또다시, 대부분은 전자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우리는 조상 숭배가 압
도적으로 상가의 관심사였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또한 통용되는 정보에
의하면, 상가에 의해 시작된 의식이었다. 우리들은 연대가 포함된 보시
에 관한 비문이 들어간 최초의 조상들 — 이것들은 마투라와 간다라 예술
의 최초기의 연대를 파악할 수 있는 일부의 예들이다 — 이 모두 비구와
비구니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예를 들어, 비구
시방편재 발라와 코삼, 사라나트, 셋-마헷(Set-Mahet), 그리고 마투라의
56) 57)
그의 제자들 혹은 카니쉬카 재위 오년 째 붓다난다가 세운 조상들 을
인용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대다수의 경우 이 상가
보시자들이 일반적 승려가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발라와
붓다난다 양자는 구체적으로 ‘trepiṭakas’, 즉 불렸다. 얼마 후 자울리안
(Jauliāñ)에서 우리는 ‘율사(v{e}nae(i)asa bhikshusa)’의 보시물이었던
58)
한 조상을 발견한다. 이 모든 승려들은 교의에 정통하였고, 그들은 모
두 대중의 숭배 수행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참여했다.

아짐. 여기서 단지 5/17 만이 비-대승의 것임: XII.2, 3, 7, 11, 13.


55) Schopen, “Mahāyāna in Indian Inscriptions,” 9.
56) Lüders, A List of Brāhmī Inscriptions, §§ 918, 919, 925, 926, 927; K. G. Goswami, EI 24 (1938) 21
Off; Lüders, Mathurā Inscriptions, § 24; Damsteegt, Epigraphical Hybrid Sanskrit, 152,
178-180; A. K. Coomaraswamy, History of Indian and Indonesian Art (London: 1927) 58-59; O.
Takata, “On the Dated Buddha Images in the Kushan Art of Mathurā, ” Bijutsu Kenkyu 184
(1956) 223-240.
57) J. C. Harle, “A Hitherto Unknown Dated Sculpture from Gandhāra: A Preliminary Report,”
South Asian Archaeology 1973, ed. J. E. van Lohuizen-De Leeuw and J. M. M. Ubaghs (Leiden:
1974) 128-135. 이 상에 있는 비문은 Fussman에 의해 출판된 것과 동일하다: BEFEO 61; 주해 6을
보라; cf. K. W. Dobbins, “Gandhāra Buddha Images with Inscribed Dates,” EW 18 (1968) 281-288.
58) 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XXXVI.7.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19

VII.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기의 보시에 관한 비문들은 최소한 기원 전 150


년부터 스투파 숭배에 적극적이고 규모 있는 승려들의 참여가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확립시킨다. 이것은 또다시 고고학과 사원의 건축의 역사
에 의해 완전히 확인된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나
가오(Nagao)가 우연히 보여준 것처럼, 그것의 실제적 증거의 시초로부
터 (예를 들자면, Kondivte, Nadsur, Pitalkhorā, Ajaṇṭā등등의 초기
59)
의 동굴군) ‘짜이땨(caitya) 는 이미 사원군의 일부분이었고’, ‘스투파는
상가에 의해 단지 승인되고 받아들여진 정도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채택
이 되어서, 수도 생활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60)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쨌든, 나가오가 아마 우리의 실제
적 증거의 바로 그 초반부터 ‘짜이땨가 이미 사원군의 일부분 이였다,
등등’을 보여주려 한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정당하
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다른 저자들처럼, 그는 사원 건축술의 발달에 대
한 몇 개의 초기 양상들을 가정하였다. 불운하게도, 이 양상들에 대한
증거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예를 들어, 이 양상들의 첫째에
대해 나가오는 기원 전 4세기 혹은 5세기에 대한 증거로써 율장으로 부
터 몇 개의 문구를 취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율장은 ‘기원의 시작 즘에
현재의 본문 구조를 갖추었고,’ ‘비록 이 본문들[율장]은 붓다 자신과 동

59) 역) caitya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스투파와 동의어로 쓰이나 종종 사리가 없는 탑을 지칭한


다. 2. 석굴 내에서 스투파가 설치된 집회실(따라서 caityagṛha와 동의어).
60) G. Nagao, “The Architectural Tradition in Buddhist Monasticism,” Studies in History of
Buddhism, ed. A. K. Narain (Delhi: 1980) 194, 195; cf. G. Nagao, The Ancient Buddhist
Community in India and its Cultural Activities (Kyoto: 1971); D. Mitra, Buddhist
Monuments (Calcutta: 1971) 20-52; Dehejia, Early Buddhist Rock Temples, 71-113.
220 불교학리뷰 vol.13

시대의 많은 사건들을 언급하지만, 그들 자신의 교열의 시기인 아주 후


기의 사고를 반영한다’고 했다. 그의 다음 단계의 양상은 고고학적 사실
의 과장에 기반되었다. 그는 어떤 것이 지바카의 망고 숲(Jīvakāmravaṇa)
— 혹은 Jīvakārāma (Pāli: Jīvakāmbavana), 그 유명한 의사 지바카에
의해 붓다께 헌상되었다고 추정되는 승원 — 인지 아닌지를 지시하고, 그
가 거기서 본 것으로 부터 여러 가지의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문제의 건물의 목적과 성질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확실히 알지 못한
다. 우리는 이것이 그 지바카의 망고 숲이었는지는 물론이거니와, 승원
이었는지 조차 알지 못하며, 우리는 그 발굴이 가져온 새로운 사실들에
대한 완전한 보고 같은 것도 여전히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상 지바카의
망고 숲이라고 불리는 것과 유사한 수많은 다른 ‘타원형 구조물들’이 존
재하며, 그것들을 연구한 사카르(Sarkar)에 따르면, 최소한 이 건물들의
61)
두 개는 ‘스투파로 확인되었다’! 나가오의 실질적이고 검증 가능한 승
원 건축에 대한 논의는 단지 그의 ‘동굴 사원군’과 그것보다 더 중요하
다고 여겨지는 이 유적들의 스투파의 장소에 관한 언급에서부터 시작한다.
불교의 승원 건축의 역사는, 어쨌든, 스투파/사리 숭배에 승려들의 적
극적인 참여를 단순히 확언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지시하는 듯하다— 그 숭배는, 우리 증거의 아주 초기부터, 상가에
의해 통제되고 좌우됐다는 것을 지시하는 듯하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스투파가 사원군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거나 아주 종종 그런 군
에 완전히 병합되어 있는 것이 거의 항상 발견되는 사실로 부터 뒤따르
는 듯 한 실례이다. 이 관계의 중요성은 스투파와 석굴 법당(caityagṛhas)
이 승원 시설로부터 분리된 것을 발견하는 것이 매우 희귀하다는 것을
인지할 때 더욱 강화된다. 내가 인용 가능한 유일한 실례는 시르캅

61) H. Sarkar, Studies in Early Buddhist Architecture of India (Delhi: 1966) 15-24, 특별히 22.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21

62)
(Sirkap)이다.
우리는 아직 특별히 언급되지 않은 두 개의 금석학적 증거를 이것에
추가할 수 있다. 첫째로, 모든 곳에, 하지만 특별히 카로스티 비문에서
인지할 수 있듯이, 사리 혹은 스투파가 재가자에 의해 주어졌을지라도,
그것들은 거의 항상 어떤 하나 혹은 다른 하나의 승가와 종파에게 ‘수용
63)
되어서(parigrahe)’ 혹은 ‘수용되기 위해(pratigrahe)’,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거나, 혹은 그것들은 세부적으로 어떤 한 승원(saṃghārāma)이나 승
64)
사(vihāra)에 함께, 아니면 한 특정한 승사(僧舍)에 주어졌다고 한다.
둘째, 우리는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한 흥미로운 카로스티 비문에 대
해 주목할 수 있다. 이 특정한 비문은 ‘그 스투파의 기둥이 세워진’(yaṭhiṃ
aropayata) 날에 ‘한 우바새’(upasika)가 ‘기둥을 세우는 것’(yaṭhi-pratiṭhana)
에 더해서 — 코노우의 해석 ṭhapa(ï)chaṃ이 옳다는 가정 하에 — ‘에워
싸는 구조물[울타리]’ 또한 보시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듯하다. 기둥
(yaṣṭi)의 건립은 중요한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 그 비문은 이것이 행
해진 날의 연대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아마 그 스투파의 완성을 암시
하고, 숭배의 대상으로써의 그것의 낙성을 신호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비록 기둥과 그 ‘에워싸는 구조물’이 여신자의 시주였지만, 그 스
투파를 숭배의 대상으로 공식적으로 채택하는 의식을 행한 사람은 한
65)
승려, 즉 한 ‘법사’(dharmakathika)였다는 것이다.

62) Sarkar, Studies, 53, 55; 어쨌든 이것들이 불교 스투파들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 적이 있다는 것
에 유의하라; Mitra, Buddhist Monuments, 124와 비교하라.
63) 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XV, LXXII, LX X X, LXXXVI.
64) 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XIII, XXVII, LXXVI, etc.
65) Hoernle, Majumdar 그리고 자신의 해석을 논의한 Konow의 Kharoshṭhī Inscriptions, 140을 보
라. 어쨌든, yaṭhi가 여기서 스투파의 ‘기둥:yaṣṭi’를 지시한다는 것에는 약간의 의문이 있을 수 있
다. yaṭhipratiṭhana와 yaṭhiṃ aropayata 양자는 문헌적 상당어이다. 우리는, 예를 들어,
Divyāvadāna (Cowell and Neil ed.), 244.7에 있는 아주 많이 연구된 스투파 문구에서 yūpa-yaṣṭir
222 불교학리뷰 vol.13

VIII.

우리는 또한 우리의 보시에 관계된 비문에 근거한 교리사에 관한 몇


가지 더 세부적인 것들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마투라의 후베
스카(Huveṣka) 51년에 속하는 한 비문을 읽는다:

(I) …{a}sya (p}u{rva}yā {bhi}kṣu{ṇā} {b}uddh{a}varmaṇā


{bhagava}taḥ {śāk}y{am}u…pratimā pratiṣṭāpita sarva{b}
uddhapūjart {th}a{m}anana d{e}yadharmaparityāgen{a} upadhy[ā]
yasya saghadāsasya {n}irvā{n}ā{va}ptaye={s}t{u} mātāpfit}
. . . buddh{a}vamias{y}a sarvad(u)khopaśamāya sarvasatva-
hitasukh{ā}r{th}a…
Lüders, Mathurā Inscriptions §29

‥‥‥이날 세존 석가모니의 상은 일체 제불의 예배를 위해 붓다바


르만 스님에 의해 세워졌다. 이 시주로 인해 그의 스승 상가다사
스님은 열반을 얻고, 그의 부모는 모든 고통에서 해탈하기를 기원

abhyantare pratipāditā라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최근의 G. Roth, “Bemerkungen zum Stūpa des


Kṣemaṃkara,” Stll 5/6 (1980) 181-190, 특히 184-186을 보라; F. B. J. Kuiper, “Yūpayaṣṭi- (Divy.
244.11),” IIJ 3 (1959) 204-205와 비교하라. 그리고 ‘yaṣṭim āropayed’는 길깃 필사본에서 내가 확
인한 Adbhutadharmaparyāya라 명명된 세 장 속의 짧은 문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O. von
Hinüber의 ‘Die Erforschung der Gilgit- Handschriften. Nachtrag,’ ZDMG 130.2 (1980)
*25*-*26* nos. 11, 13d, 그리고 18을 보라; 우리는 yo vā... mṛtpiṇḍād āmalakapramāṇaṃ
stūpaṃ pratiṣṭhāpayet sūcīmātrāṃ yaṣṭim āropayed, 등등으로 판독한다. [G. Schopen, “The
Ritual Obligations and Donor Roles of Monks in the Pāli Vinaya,” 원 책의 Ch. IV; 그리고 Y.
Bentor, “The Redactions of the Adbhutadharmaparyāya from Gilgit,” JIABS I1.2 (1988) 21-52
를 보라]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23

드린다‥‥‥일체 중생에게 행복과 복리가 있을 지어다‥‥‥


마투라에서 나온 어느 한 조상의 대좌에 있는 또 다른 비문에서 우리
는 다음과 같은 비문을 발견한다:

(II) bhikhusa budhav{ā}lasa dān(a) māt{ā}pit{r}in{a)


pujāye savasav{ā}n{a} ca
Lüders, Mathurā Inscriptions §90

비구 붓다팔라는 부모님과 일체중생들을 위해 보시하였다.

더 흥미로운 두 개의 비문이 있는데, 하나는 자말뿌르(Jamālpur) 흙둔


덕에서 나온 기둥받침(柱脚) 위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페샤와르(Peshawar)
66)
근처에서 온 것이라는’ 한 조상의 카로스티 비문이다:

67)
(III)+ {d}ā(na)ṃ bh{ik}ṣus{y}a b … + … m{i}trasya
v{o}jya+ {vaśi}kasya {mātap}i+{tṛ}ṇa {abhyat}itaka+laga{tā}nāṃ
puja{ie)+ bhavatu sa{dh}yivi+harīsya dharma{d}ev{a}s{y}a+
ar{o}g{a}dakṣiṇ{a}y{e} {bha}vat{u}
Lüders, Mathurā Inscriptions §44

68)
비구 미트라와 보쟈바시카(?)가 보시하였다. 그의 돌아가신 부

66) Harle, “A Hitherto Unknown Dated Sculpture from Gandhāra,” 128.


67) 그 열십자 기호는 이 비문에서 아주 흥미로운 특징이다. 뤼더스가 말하길, ‘이 본문은 그 단어들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일곱 번째 음절(aksara) 뒤에 새겨졌던 여덟 개의 상서로운
(maṅgala) 기호들을 포함하고 있다’ (Mathurā Inscriptions, 80)
68) 뤼더스에 의하면, ‘Vojyavaśika(?)는 아마 그 보시자의 출신지를 지칭한다’(Mathurā Inscriptions,
224 불교학리뷰 vol.13

모님을 위한 공양이 될 지어다. 이것의 공덕으로 그의 도반인 다


르마데바가 건강해지기를 될 지어다.

(IV) sa{ṃ} 4 1 phagunasa masasa di paṃcami budhanadasa


trepiḍakasa danamukhe madapidarana adhvadidana puyaya
bhavatu
Fussman, BEFEO 61 (1974) 54

5년 팔구나(Phalguna) 달의 제 5일. 삼장법사 붓다난다는 보시


를 했다. 이것으로 돌아가신 부모님께 공양을 바친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자말뿌르 흙둔덕에서 발견된 기둥받침에 있던 또


다른 비문을 인용할 수 있다:

(V) ayaṃ ku{ṃ} bhako dānaṃ bhiksunaṃ śurīyasya


buddharakṣitasya ca prābaṇīk{ā}n(aṃ) an{e}n{a} deryadharm-
maparītyāgen{a} sarvveṣ{a}ṃ pr{ā}haṇīkānaṃ arogyadakṣiṇ
{ā}ye bhavat{āṃ}
Lüders, Mathurā Inscriptions §46

69)
이 기둥받침은 명상 수행자 인 비구 수리야와 붓다락시타의 보
시물이다. 이 보시의 공덕으로 인해 모든 명상 수행자가 건강해
질 지어다.

80).
69) 이것은 뤼더스의 prābaṇīka의 번역이다; 상기 주해 47를 보라.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25

우리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이 기록들에 나타난 기본적인 사상이다.


예를 들어, 다른 이에 의해 어떤 한 사람을 위해 공양을 올린 결과로써
그 사람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기대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자신
의 부모가 살아계시거나 돌아가셨거나 간에, 그들을 위해 공양을 올리던
것이 행해졌다. 이것들이 개개인의 보시자들이 표현했던 그 생각과 의도
들이다. 우리들은 이 생각들과 목적들이 상가의 구성원들에 의해 취해졌
고, 더 중요하게는, 행해졌다는 것이며, 이것들이 사실상 출가자들의 생
각과 목표였다. 우리는 이것에 그 논제의 상가 구성원들은, 최소한 두
경우에서, 단지 평범한 승려가 아니었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
할 수 있다. 한 실례에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에게 지시하였고, 그 공덕
으로 인해 의도된 수혜자는 ‘명상수행자들’이었다. 다른 경우에 그 보시
자는 ‘삼장법사’였다고 한다.

IX.

퍼스만(Fussman)은 위에서 인용된 카로스티 비문(IV 장)에 대한 그의


소견에서 우리의 두 번째 문제를 소개한다. 그는 이 비문이 ‘복의 회향
의‥‥‥교의’의 구체적인 표현임을 숨김없이 인정한다. 사실, 그 같은 것
은 금방 인용한 모든 비문들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이 모든 것들은 어떤
한 기본적 사상에 대한 개별적 적용이며, 그 사상은 한 개인에 의해 행
해진 종교적 행위의 과보가 다른 이에게 혹은 모든 타인에게 양도나 ‘회
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하여’(sarva-satvahi-
tasukhārthaṃ), ‘부모님을 위한 공양’(matapitrina pujāye), 혹은 어떤
한 혹은 다른 개인의 ‘건강을 기원하기위해’(arogyadakṣiṇāye) 그런 행
226 불교학리뷰 vol.13

위가 취해졌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인지한 퍼스만은 더 받아들이기 어려


운 다수의 진술을 하였다. 그가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 — 상기 IV에서 인용된 보시자의 돌아가신


부모를 위한 시주 — 은 오히려 대승의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의
존재를 암시한다. 만약 우리의 해석이 옳다면, 이 양각부조는 대승
의 추종자에 의해 시주되었다‥‥‥우리는 따라서 기원 후 1세기 말
70)
엽의 북서부 인도에서 대승의 일반적 존재의 증거를 가진다.

퍼스만이 여기서 복의 회향의 교의를 보는 것은 거의 확실히 옳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 나는 이것이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 비문들
에서 나타나는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는 대승의 교의가 아니며, 카로스
티 비문을 포함한 내가 인용한 그 어떤 비문들도 대승 비문이 아니다.
우리는 퍼스만의 비문에서 발견된 ‘이것이 돌아가신 부모님께 공양이
되길 바란다’(madapidarana adhvadidana puyaya bhavatu)라고 하는
정형구가 다른 곳에서 또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위에서 인
용한 자말뿌르의 흙둔덕(III)으로부터 나온 비문의 유사한 정형구를 그
자신이 직접 참조시키며, 담스티그(Damsteegt)는 그가 이 표현의 ‘짧아
진’ 혹은 ‘확장된’ 이라고 부르는 최소한 열다섯 개의 실례들 — 퍼스만의
71)
자말뿌르의 흙둔덕을 포함한 — 을 참조시킨다.
최소한 다섯 가지 실례들인 이 우리가 아는 것들의 개관으로부터 이
정형구는 세부적인 학파 이름과 함께 나오며, 모든 실례에서 그 학파는
소승에 속한다: 씨르까르(Sircar)에 의해 편집된 대중부에 보시를 기록

70) Fussman, “Documents épigraphiques kouchans,” BEFEO 61 (1974) 56.


71) Damsteegt, Epigraphical Hybrid Sanskrit, 164-165 그리고 주해들.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27

한 마투라 비문에서 우리는 그 ‘mātāpitraṇa abhatitana{ṃ}‥‥‥’이라는


72)
표현을 발견한다. 우리는 또한 현주부(Bhādrāyaṇīyas)와 연결된 보시
인 사타바하나(Sātavāhana) 시기로 부터 연대를 추정하는 깐헤리
(Kānheri)에서 나온 한 비문에서 그 정형구 ‘{mā}tapitūnāṃ abhatītā
73)
{naṃ}‥‥‥pūjāya’를 발견한다. 담스티그가 ‘짧아진’ 형태 — mātāpit
{r}ina pujāya 등등 — 라 부르는 것은 세 가지의 실례가 있으며, 어떤
학파의 이름과 함께 나타난다: 나가르주나 콘다(Nāgārjunikoṇḍa)에서
우리는 ‘mātāpituno pūjā……’이 ‘Aparamahāvinaseliyas’(서산주부:
74)
Aparaśailas)와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본다; 깔리(Kārli)에서는 그
75)
정형구 ‘mātapituna pujā{ya}’가 대중부와 연관되었고; 그 짧은 형태
는 와르닥(Wardak)에서 나온 카로스티 비문에서도 발견되며, 이것 또한
76)
대중부와 연관되어 있다. 나는 ‘madapidarana adhvadidana puyaya,
mātapituna pūjāya’와 같은 표현이 어떤 비문에 나타날 때 그것은 항
상 그 학파들의 이름을 포함하며, 그 학파는 항상 소승 학파(현주부가
한 번, 서산주부가 한번, 그리고 대중부가 세 번)였다는 것이 이것으로
부터 분명해진다고 생각한다. 이것의 다른 단면은 ‘madapidarana
adhvadidana puyaya’ 혹은 이것의 모든 종류의 변형적 표현은 대승이

72) D. C. Sircar, EI 30 (1953-1954) 184; Damsteegt, Epigraphical Hybrid Sanskrit, 164, n. 50;
Shizutani, Indo bukkyō himei mokuroku (=静谷正雄, 󰡔インド仏教碑銘目錄󰡕) § 639 — 여기
서 나는 담스티그를 따랐다.
73) . Burgess, Report on the Elura Cave Temples and the Brahmanical and Jaina Caves of
Western India, Archaeological Survey of Western India, Vol. V (London; 1883) II. Kānheri
Inscriptions, no. 7; Damsteegt, Epigraphical Hybrid Sanskrit, 186.
74) D. C. Sircar, EI 35 (1963-1964) 7ff, no. 2 (A, B); Shizutani, Indo bukkyō himei mokuroku (=静
谷正雄, 󰡔インド仏教碑銘目錄󰡕), 715.
75) Burgess, Report on the Buddhist Cave Temples, IX.21.
76) 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LXXXVI; Damsteegt, Epigraphical Hybrid Sanskrit, 160,
165, n. 51.
228 불교학리뷰 vol.13

라는 이름 혹은 ‘Śākyabhikṣu/-bhikṣuṇī’와 ‘Paramopāsaka/-opāsikā’(내
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가 대승이라고 부르는 집단에 의해 사
용되었던)라는 명칭과 결코 함께 발견되지 않았다 — 여기서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인도에서 나온 여러 다른 시대의 80여 가지의 비문들을 이야
77)
기하고 있다. 내가 위에서 인용한 그 다섯 개의 비문들에서 발견된 어
떤 다른 정형구들을 보더라도 그와 같은 양식이 나타난다.
이 집단의 두 번째 비문에서 비구 붓다팔라는 그의 보시를 ‘그의 부
모와 일체 중생을 위한 공양’(māt{ā}pit{r}in{a} pujāye savasav
{ā}n{a} ca)으로써 행한다. 처음 것에서는 비구 붓다바르만이 한 조상
을 세우고, 이 행위 — 즉, 복을 초래하는 — 가 부분적으로 ‘일체 중생의
행복과 복리를 위하는 것(sarvasatvahitasukh{ā}r{th}a)’이라고 명기하
였다. 또다시 명백하게 ‘복의 회향의‥‥‥교의의 존재를 암시하며’인 이
후자의 정형구는 거의 대부분의 시기의 불교 비문에서 아주 종종 발견
되며, 다수의 실례에서, 이것은 또한 구체적으로 거론된 학파의 이름과
연관되었지만, 대승이라는 이름과 사캬비구 혹은 그런 종류의 칭호와는
결코 함께 나타나지 않았다. 마투라에서는 이것이 설일체유부와 한 번,
78)
그리고 대중부와 두 번 연관되어 나타난다; 까르리(Kārli)에서 이것은
79)
대중부와 다시 연관되어서 나타나며, 퍼스만에 의해 편집된 다른 카로
80)
스티 비문에서 이것은 법장부와 연관되어 나타난다; 깐헤리에서 나온 두
81)
비문에서는 현주부와 연관되어 나타났고, 포겔(Vogel)에 의해 출판된

77) Schopen, “Māhāyana in Indian Inscriptions,” 17, n. 24.


78) Lüders, Mathurā Inscriptions §§ 2; 125, 157.
79) Burgess, Report on the Buddhist Cave Temples, IX.21.
80) Fussman, “Documents épigraphiques Kouchans,” BEFEO 61 (1974) IV. “Vase inscrit de
Qunduz,” 58-61.
81) Burgess, Report on the Elura Cave Temples, II.4, 27; Shizutani, Indo bukkyō himei
mokuroku (=静谷正雄, 󰡔インド仏教碑銘目錄󰡕), §§ 464, 482.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29

나가르주나 콘다에서 나온 한 비문에서 이것은 화지부와 연관되어 나타


82)
나며, 같은 장소에서 나온 다른 것은 분별설부(Vibhajyavādins)과 연
83) 84)
관되어 나타난다. 최종적으로, 코노우에 의해 발행된 카로스티 비문
과 뷔흘러(Bühler)에 의해 발행된 까만(Kāman)에서의 한 비문에서 이
85)
것은 또다시 설일체유부와 연관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sarvasatva-
hitasukhārtha’ 혹은 그것의 변형된 정형구가 어느 비문에라도 나타날
때는 어떤 학파의 이름을 항상 포함하며, 그 학파는 항상 소승 학파였고,
그 표현은 우리가 지금 대승이라고 부르는 그 집단과 관련된 비문에서
86)
는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 자료들에 나타난 사실들에 의거해 퍼스만이 말한 그가 설명

82) J. Ph. Vogel, EI 20 (1929-1930) H; Shizutani, Indo bukkyō himei mokuroku(=静谷正雄, 󰡔イン
ド仏教碑銘目錄󰡕), § 708.
83) D. C. Sircar, EI 33 (1959-1960) 250; Shizutani, Indo bukkyō himei mokuroku(=静谷正雄, 󰡔イ
ンド仏教碑銘目錄󰡕). § 712.
84) 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LXXII; Shizutani, Indo bukkyō himei mokuroku(=静谷正
雄, 󰡔インド仏教碑銘目錄󰡕), § 1775.
85) G. Bühler, EI 2 (1892) 212, no. 42; Shizutani, Indo bukkyō himei mokuroku(=静谷正雄, 󰡔イン
ド仏教碑銘目錄󰡕), § 460.
86) 이것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하지만 나는 의문스러운, 예외가 존재한다. 뤼더스가 그의 Mathurā
Inscriptions § 135 에서 다음과 같이 판독하였다: {Ś}ā{ky}opāsakasya Suṣasya Hāruṣasya —
dānaṃ Budhaprat{i}mā Ūttarasya H{ā}ruṣa{sya} vihāre sahā mātāpitihi —
sarvasatvānaṃ hitasukhartha{ṃ}. 뤼더스가 {Ś}ā{ky}opāsakasya로 재구성 하였다는 점에
유의하라. Cunningham과 Vogel은 upāsakasya로 판독했다는 점 역시 유의하라. 만약 뤼더스의
재구성이 받아들여진다면, 이것은 45개의 sarvasatvānaṃ hitasukharthaṃ이 나타나는 비문 중
에서 Śākyabhikṣu/ -bhikṣuṇīs, Śākyopāsikas, 등등과 연합된 단 하나의 실례라는 것에도 유의
하라. 그리고 이 정형구가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이상할 뿐만 아니라 Mathurā Inscriptions § 135
의 전체 구조는 우리가 ‘Śākyabhikṣu,’ 등등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모든 곳의 그것과 다르다.
‘Dānaṃ’은 결코 후자와 함께 나타나지 않지만, 항상 deyadharmo 'yaṃ 과는 그러하고,
budhapratimā라는 용어와 sahā mātāpitihi라는 문구는 결코 그들의 비문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뤼더스의 재구성이 의문스럽다고 말한다.
230 불교학리뷰 vol.13

한 비문의 ‘대승일 수 있는 특성’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최소한 아주 중요한 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지금 의심의 여지없이 사실상 모든 소승 학파들이
암시적인 복의 회향의 교리가 숨김없이 시주물에 덧붙여 진 채 주어진,
예를 들어, 그것들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공양‘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된 것들을 받았음을 비문에서 언급했음을 알고 있다. 이것은 최소한
몇 가지 경우에서라도 아마 같은 학파에 속한 승려가 보시자였다는 사
실과 함께 우리가 대중부, 설일체유부, 현주부, 기타 등등의 이 모든 학
파들이 복의 회향의 교의를 가졌고 행했다는 것을 순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또한 대승이라
고 우리가 지금 부르는 그 집단은 복의 회향의 교리를 가지거나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그 교의가 표현된 그 정형구들
이 대승의 비문이라고 나타나는 것들에서 완전하게 부재하다는 사실로
부터 알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대승의 집단에 속한다고 나타나는 비문에
서 실제적으로 발견된 정형구로부터 이것을 알고 있다.

X.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복의 회향의 교의는 비문들에서 소승 학파


의 이름과 명시적으로 연관되어져 있으며, 그것은 다수의 정형구들에서
표현되었다. 그런 행위들은 한 ‘일체 중생의 행복과 복리를 위해,’ 혹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공양으로써,’ 혹은 좀 더 세부적으로는 한 개
87)
인 혹은 다른 이들에게 ‘건강을 주기 위해’ 취해졌다. 우리는 또한 그

87) 정형구 ‘arogyadakṣiṇāye’의 귀속에 관한 직접적 증거는 다른 정형구들에 비해 많은 편이 아니다.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31

행위가, 위에서 인용 된 마투라에서 나온 그 첫 비문에서처럼, 보시자가


아닌 다른 이의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 혹은, 탁실라의 은제 두루마리
비문에 있는 일반화 되었고 특정화되지 않은 열반의 성취를 위해 취해
88)
졌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소승의 비문들에서 보시의
89)
의도로써 자주 표현된 것이 아니다. 설일체유부와 대중부, 기타 등등의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의 변환은, 따라서, 한 특정한 목표를 향해 일관
적으로 집중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은 단순히 한 개

이것은 마투라 비문들에서 세 번(§§ 44, 46, 180), 그리고 담스티그에 따르면 일곱 카로스티 비문들
(Epigraphical Hybrid Sanskrit, 162)에 나타난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sarvasatvaṇa aroga-
daksbiṇae’가 대중부와 연관되어 발견된 Wardak Vase Inscription (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LXXXVI) 이 한 군데에서만 학파의 이름이 나타난다. 우리는 또한 최근에 퍼스만
에 의해 발행된 Haḍḍa 비문에서 설일체유부와 연관된 정형구 ‘atmaṇasya arogada {kṣ}i{ṇa...}’
를 발견한다(BEFEO 66 [1969] 5-9). 우리는 그 정형구들이 세부적으로 이름 적힌 학파와 연관되
어 나타난 그 두 실례들에서, 그 학파들은 소승 학파였고, 그 정형구들은 대승 학파 혹은 사캬비구
등과 연관된 비문들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음을 말할 수 있다.
88) 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XXVII; S. S. Ram, “Taxila Silver Scroll Inscription, Year 136,”
Indological Studies 2 (1974) 45-52.
89) 위에서 언급한 § 29의 마투라 비문에 더해서, 이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곳에서도 발견된다:
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XXVII and LX X X II; Konow에 의해 편집된 Kalawān에서 나
온 한 비문 JRAS (1932) 949ff (cf. Shizutani, Indo bukkyō himei mokuroku(=静谷正雄, 󰡔イン
ド仏教碑銘目錄󰡕), § 1745); Vogel, EI 20 (1929-1930) C3, B4, B5, C2, C5 에서의 Nāgārjunikoṇḍa
에서 나온 몇 개의 비문들; Sircar, EI 35 (1963-1964) 11-13, no. 4; cf. N. Dutt, Buddhist Sects in
India (Calcutta: 1970) 124-125.
내가 위에서 인용한 그 다섯 개의 비문들에서 나온 모든 다른 정형구들의 소속을 우리가 추적하였
기에, 우리는 정형구 sarvabuddhapūjārtham(일체 제불의 예배를 위해)가 일관되게 소승 학파
와 연관되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이것은 마투라 비문들에서 학파의 이름과 연관되어 세 번
나타난다: 정량부와 한 번 (§ 80) 그리고 대중부와 두 번 (§§ 86, 157); 이것은 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XV의 Mathurā Lion Capital Inscription에서 설일체유부와 연관되어 나타난다; 그
리고 이것은 Sircar가 발행한 EI 30 (1953-1954) 181의 마투라 비문에서는 대중부와 연관되어 또다
시 나타난다; Shizutani, Indo bukkyō himei mokuroku(=静谷正雄, 󰡔インド仏教碑銘目錄󰡕),
§ 639.
232 불교학리뷰 vol.13

인(보시자)에 의한 다른 사람(그 표현된 수혜자)에게 받는 사람의 복의


저장고를 증가시키기 위한 것 외에 다른 특별한 목적이 없는 단순한 복
의 할애에 수반되었던 것 같다. 어떤 한 특정한 목적이 언급되었을 때,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열반의 성취였지만, 더 일반적으로는 문헌 전통에
의해 인정된 종교의 목표 보다는 더 작은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90)
특정한 개인에게 무병과 장수를 기원하는 것 등이다. 대조적으로, 의문
91)
투성이인 아주 작은 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승의 비문들에서는 보

90) 무병과 장수가, 예를 들어, Nāgārjunikoṇḍa에서 나온 두 비문에서 Aparamahāvinaseliyas와 연관


되어 있다 (Vogel, EI 20 {1929 -1930} E; and Sircar, EI 35 [1963-1964] 7ff, no. 2 [A, B]; Shizutani,
Indo bukkyō himei mokuroku(=静谷正雄, 󰡔インド仏教碑銘目錄󰡕), §§ 684, 715), 그리고 Tor
Ḍherai에서 나온 한 비문에서는 설일체유부와 연관되어 있다(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XCII).
91) 네 가지 가능한 예외들이 존재한다: MadP i, Aj iii 4, Bih ii, and Sa i B(b)59; 여기서 사용된 약호(e.g.
MadP i)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Schopen, “Mahāyāna in Indian Inscriptions,” IIJ 21 (1979) 2-4에
서 찾을 수 있다. Pratītyasamutpādagāthā가 있는 그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들 중 MadP i는
아주 부주의하게 만들어졌고, 생략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의 정형구 — 그 비문의 후
반부를 형성하고 단지 yad atra puṇyaṃ tat bhavatu mātāpitarebbyaḥ로 판독되는 — 와 동일
하게 훼손되었다. Aj iii 4는 다음과 같이 판독된다: deyadharmo 'yam śākyabhi(kṣor)
bbadanta- dha{rma} devasya III mātāpitro{:} -dasya ya{d atra} pu{ṇyaṃ tad bha}vatu
cā(nutta)rājñanāvāptaye. 하지만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 쓰였고, 훼손되었다. Yad atra 절과
mātā pitṛ 절이 뒤바뀐 것에 유의하라. 하지만 ca가 anuttara-에 선행한다는 점에 특별히 유의하
라. Sarvasatvānām이 무심결에 생략되었다는 것은 훌륭한 지적이다. Deyadharmo 'yaṃ
pravara-mahāyānayāyinyā(ḥ) paramopāsikā-śau(śrī)-santoṣa- vadhu- maharokāyā yad
atra puṇyaṃ tad bbavatv iti로 판독되는 Bih ii는 — iti(=기타 등등)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 때
문에 — 명백하게 불완전하다. 그 복이 향해야할 사람이나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실례
인 Sai B(b)59는 그 가운데가 잘 쓰였고, 정확하다: deyadharmo ’yaṃ śākyabhikṣo{r}
buddhapṛi(ri) yasya yad atra puṇyaṃ tad bhavatu anuttarajñānāvatma(pta)ye. 하지만 모
든 다른 경우의 우리의 정형구에서 sarvasatvānām은 나타났거나, 혹은 이것의 부재가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히 우연히 생략되었다고 여기서 가정하는 것은 아마 틀림없다. 그 정형
구의 사실상 모든 실례에서 sarvasatva-와 anuttarajñāna- 양자의 출현에 관계된 이 언급들은 나
의 이전의 논문들에서 만들었던 일부의 성명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 후자는 어쨌든 교정되어야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33

시 행위가 첫 째로 항상 ‘일체 중생’을 위해 행해졌다고 기록되어져 있


다 — 비록 우리가 앞으로 볼 것이지만, 많은 경우에 ‘일체 중생’의 범주
에서 어떤 개개인이 세부적으로 구별되어졌다. 그리고 사실상 모든 경우
의 대승 비문에서 ‘일체 중생’에게 복을 회향하는 것은 명시적으로 하나
의 특정한 목적을 위해 언급되었고, 이것의 가장 단순한 형식은 다음과
같다: 이 공덕으로 인해 모든 중생들이 무상지를 얻기를 기원한다(yad
atra puṇyaṃ tad bhavatu sarvasatvānām anuttarajñānāvāptaye ).
말하자면, 대승 비문들에서 보시행의 공덕은 항상 특별히 무상지
92)
(anuttarajñāna)를 성취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이것은 대승 비문

만 한다. 뒤따르는 주해를 참조하라.


92) Anuttarajñānāvaptaye가 생략되었다고 나타나는 명확한 예외들이 존재한다: MadP i, Bih ii, Ma
i 185, MadP ii B, Aj iii 3, and Aj iii 5. 하지만 이것들 중 처음 두 개는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잘못되었
거나 불완전하고 (cf. n. 87), 루더스에 따르면 Ma i 또한 불완전하다(Mathurā Inscriptions, 211,
n. 4). MadP ii B 는 Phophnar Kalan에서 나온 한 벌의 일곱 신상에 있던 네 비문 중의 하나이며, 그
것들 중 두 개는 아주 짧고, 두 개는 정형구를 포함하고 있다. 이 정형구들 중 하나 — yad atra
puṇyam tad bhavatu aparimita-lokadhātusthasarvv-ānuśaya- {ba}ndhan-āvabaddha-
satva-lokasy- ānāvaraṇa-jñān-āvāptaye — 는 아주 특별하며, Gai가 지적하였듯, ‘이것은 다른
어떤 금석문에서 보이지 않는다’ (G. S. Gai, Post-script to M. Venkataramayya and C. B. Trivedi,
“Four Buddhist Inscriptions from Phophnar Kalan,” EI 37 [1967] 150). 우리는 따라서 그 다른 정형
구 — 오직 yad atra puṇya{ṃ} tad {bhavatu sa}rvva-{sa}tvānām 으로 판독되며,
Anuttarajñānāvaptaye가 생략된 — 가 매우 특이하다고 의심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며, 이것은
완전한 형태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을 뿐, 그렇지 않다면 문제없는 비문이다. 최종
적으로 Aj iii 3 그리고 5는 얼마간 더 복잡하다. Aj iii 5는 정형구 ‘yad atra (puṇyam) tad bhavatu
mā (tāpitroḥ) sarvvasatvā (nān) ca’를 가지지만, Dhavalikar가 말하길, ‘그 비문은 세 줄로 구성
되어 있지만, 네 번째 줄에 어떤 글자의 흔적이 있다’ (M. K. Dhavalikar, “New Inscriptions from
Ajaṇṭa,” ArO 7 {1968] 151). Aj iii 3은 사실상 같은 판독을 가지지만, 여기서 Dhavalikar가 그 비문
의 두 번째 문장은 ‘Mitradharma의 신심 깊은 행위에 의해 쌓여진 복은 그의 부모님과 다른 이들을
포함한 일체 중생의 무상지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언급한다(150). 이 언급에 기반되어,
Dhavalikar가 아마 그의 자역(字譯)에서 한 줄을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자료들을 다른 관점에
서 본 후, 내가 이전의 주해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의 이전 논문 ‘Mahāyāna in Indian Inscriptions’
의 여러 진술들은 반드시 교정되어져야 한다. 여기서 세부적으로 다루지는 않겠지만, 그 논문의 5
234 불교학리뷰 vol.13

들의 바로 그 시작부터 명백하고, 마투라에서 나온, 순전히 금석학적 관


점에서, 초기 원형-대승의 비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93)
처음에는 나카무라(Nakamura), 그리고 최근에는 무케르지(Mukherjee)
에 의해 출판된 원형-대승의 비문은 여러 이유로 인해 중요성을 가지지
만, 이것이 최초의, 그리고 사실상 유일하게, 인도 비문들 중에서 아미타
불에 관한 지시를 포함하고 있어서, 인도 본토에서 이 붓다와 그의 숭배
94)
에 관련한 확고한 실제 중의 하나인 것은 가치가 적지 않다. 그 비문은

페이지의 8-17 줄과 그와 관련된 32-33줄의 진술은 지워져야한다는 것을 간단히 언급한다. 그리고


이 정형구의 가장 단순하고 확실히 검증 가능한 형식은, 예를 들어, Ma i 186, Bo i 72, and Na ii에서
발견된 yad atra puṇyaṃ tad bhavatu sarvvasatvānām anuttarajnānāvāptaye 으로 보인다.
93) Shizutani, Indo bukkyō himei mokuroku(=静谷正雄, 󰡔インド仏教碑銘目錄󰡕), § 1823과 비교
하라; B. N. Mukherjee, “A Mathurā Inscription of the Year 26 and of the Period of Huvishka,”
JAIH I 1 (1977-1978) 82-84. 동일한 비문이 R. C. Sharma, “New Buddhist Sculptures from
Mathurā,” Lalit Kalā 19 (1979) 25-26; R. C. Sharma, Buddhist Art of Mathurā (Delhi: 1984)
232, n. 169에서 발생되었다. 이 두 가지 판 모두가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고, 양질의 사진본과 비
판교정본이 반드시 출판되어야 한다. [G. Schopen, “The Inscription on the Kusān Image of
Amitābha and the Character of the Early Mahāyāna in India,” JIABS 10.2 (1987) 99-134.]
94) Amitābha에 관한 ‘최초기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참조 문헌’인 듯한 것에 관하여 P. Maxwell
Harrison, “Buddhānusmṛti in the Pratyutpannabuddhasamṃukhāvasthitasamadhi-sūtra,” JIP 6
(1978) 42-44, 그리고 인도에서 아미타의 ‘숭배’에 관한 최근의 견해에 대해서 G. Schopen,
“Sukhāvatī as a Generalized Religious Goal in Sanskrit Mahāyāna Sūtra Literature,” IIJ 19 (1977)
177-210, 특히 204-205. 그리고 이 논문에 대한 추가와 교정판은 G. Schopen, “The Five Leaves of
the Buddhabalādhāna- prātihāryavikurvāṇanirdeśa- sūtra Found at Gilgit,” JIP 5 (1978) 335, n. 2.
J. C. Huntington, “A Gandhāran Image of Amitāyus’ Sukhāvatī,” Annali dell' Instituto
Orientale di Napoli 40 (1980) 651-672; International Seminar on Mathurā at Mathurā in January
1980에서 발표된 Huntington, “Mathurā Evidence for the Early Teachings of Mahāyāna”가 출판될
예정이다[D. M. Srinivasan, ed,, Mathurā. The Cultural Heritage (New Delhi: 1988) 85-92에서 출
판되었다] (Huntington교수에게 이 논문을 보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린다. 하지만 저는 더 깊은 논
의가 이 양 논문에 있는 여러 주제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추가한다); J.Brough,
“Amitābha and Avalokiteśvara in an Inscribed Gandhāran Sculpture,” Indologica Taurinensia
10 (1982) 65-70.(이것 역시 저는 추가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35

후베스카(Huveṣka) 26년에 나가락시타(Nāgarakṣita) 혹은 삼락시타


(Sāmrakṣita)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아미타불 세존의 상이 붓다의 예
배를 위해 세워졌다’( bhagavato buddha amitābhasya pratimā
95)
pratiṣṭhapita Buddha pūjāye)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비록 그의
아들은 ‘sārthavāha’, 즉 ‘대상(隊商)’, 그의 할아버지는 ‘śreṣṭhin,’ 즉
‘은행가’ 혹은 ‘길드의 장’으로 불렸지만 그에게는 그 어떤 칭호도 주어
지지 않았다. 그 기록은 그런 후 다음과 같은 말로 종결된다: 이 공덕의
선근으로 인해 일체 중생이 무상지를 얻을지어다(imena kuśalamulena
sarva(satana)anuttarajñānaṃ prātp(i)m (rd:prāptim) (bha) (va) (tu)).
비록 이 비문은 내가 생각하기에 대승이라고 보여 줄 수 있는 그 모
든 특색들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은 분명히 그것들과 관계가 있
96)
다: 우리의 전형적인 대승 비문들 의 대다수의 보시자와는 다르게 그것
의 보시자는 최승 우바새(paramopāsaka) 혹은 석가 우바새(śākyopāsaka)
— 그 과정에서 그는 거의 확실히 재가인으로 보인다 — 로 자신을 지칭
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대승 비문들은 항상 문구 ‘yad atra puṇyaṃ
tad ……’를 쓰지만, 이 비문은 다음 구절을 사용한다: imena
kuśalamulena(담스티그에 따르면 이 구절은 보드가야에서 나온 한 개
를 포함한 세 개의 카로스티 비문에서 나타나지만, 마투라를 포함한 다
른 어떤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97) 최종적으로, 현재의 비문은 우리

95) Nakamura는 nāgarakṣita로 판독한다(cf. Shizutani, Indo bukkyō himei mokuroku(=静谷正


雄, 󰡔インド仏教碑銘目錄󰡕), § 1823), Mukherjee, sāmrakṣita (cf. JAIH 83.3).
96) 직함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이름을 남긴 보시자에 의해 사용된 대승의 보시에 관한 정형구를 포함
하는 최소한 여섯 개의 비문이 존재한다. Schopen, “Mahāyāna in Indian Inscriptions,” 9와 11 쪽의
괄호 안의 진술들을 참조하라.
97) Damsteegt, Epigraphical Hybrid Sanskrit, 185. 그것과 아주 유사한 구절이, 어쨌든, 산스크리트 문
헌 자료들에서 종종 나타난다; 예를 들어, Ajitasenavyākaraṇanirdeśa, Gilgit Manuscripts, i,
129-10: anena kuśalamūlena sarvasatvā anuttarāṃ satnyaksaṃbodhim abhisaṃ-
236 불교학리뷰 vol.13

의 대승 비문들에 있는 최종적 표준구조— tad bhavatu … anutta-


rajñānāvāptaye — 대신에 ‘anuttarajñānaṃ anuttarajñānaṃ prāptiṃ
bhavatu’를 가지고 있다. 나는 현재의 비문이 정통적인 대승 비문의 형
태에 관한 발달단계를 반영한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것이 최초의 전형적인 대승 비문 보다 최소한 두 세기가 더 앞선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최종적 표준구조인) 그
후자에 선행된 원형이다’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초기 원형이 지금 대승이라고 알려진 집단과 연결된 복의 회향의 교의
와 소승 학파와 연결된 그것을 구분시켜주는 두 가지 특색을 포함한다
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명시적으로 선행으로 부터 생긴 자량(資
糧)이 ‘일체 중생’에 회향되고, 그렇게 회향된 그 자량은 구체적으로 일
98)
체 중생의 ‘무상지를 성취’하기위해 의도되었다는 것을 표명한다.
우리는 소승 학파와 연결되어 있는 비문에서 발견된 또 다른 정형구
를 대승 비문에 있는 이것의 상당물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보아

budhyante; S. Bagchi, Mūlasarvāstivadavinayavastu, Vol. I (Darbhanga: 1967) 210.18: yan


mayā bhagavataḥ kāśyapasya samyaksaṃbuddhasya {sat}kārāḥ kṛtāḥ / anena mama
kuśalamūlena bahavaḥ putrā bhaveyur iti: Bagchi, Mūlasarvāstivādavinayavastu, Vol. II
(Darbhanga: 1970) 170.20; P. L. Vaidya, Avadānaśataka(Darbhanga: 1958) 2.15, 5.11, 12, 16, 등등.
98) 비록 그것들은 여기서 논의될 수 없지만, Shizutani(=静谷正雄)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대승에 속
하는 굽타 시대에 속한 여섯 비문을 수집했음을 지적하는 것은 타당하다 (M. Shizutani,
“Mahāyāna Inscriptions in the Gupta Period,” IBK 10.1 [1962] 47-50). 나 또한 대승의 것이라고 분
류한 이것들 중의 처음 두 개를 제외하면, 그것들의 소속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것으로 나
타난다. 그것들은 분명 완전하게 논의할 가치가 있다. 내가 ‘Mahāyāna in Indian Inscriptions’
란 논문을 쓰고 난 후 Bühler에 의해 발행된 한 비문(‘The New Inscription of Toramana Shaha,’ EI
1 [1890] 238-241)이 나의 주의를 끌었고, 거기에는 만약 우리가 그의 재구성을 받아들인다면, yad
atra puṇyaṃ 따위의 정형구는 화지부와 연관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본문과 그 마지막에
는 그의 해석이 담긴 Bühler의 재구성에 관해 얼마간의 심각한 의문이 있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받
아들여지기 어렵다(이것 역시 이후에 논의되어야 한다).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37

왔듯 전자의 비문들에서 보시자는 반복적으로 그들의 시주물을 ‘그들의


부모를 위한 공양으로써’ 혹은 ‘그들의 돌아가신 부모를 위한 공양으로
써’ 보시한다. 이것은 단순히 보시자로부터 부모님께로 복의 ‘회향’으로
서 항상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 복은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
고 결코 언급되지 않았다. 대승의 비문들에서 발견된 — 그리고 아주 종
종 발견된 — 그것의 상당 정형구는 상당히 다르다. 그 표현의 가장 단순
한 형태는 다음과 같다: ‘yad atra puṇyaṃ tad bhavatu mātāpitṛpūr-
vaṅgamaṃ kṛtvā sarvasatvānāṃ anuttarajnānāvāptaye’(이 복은 저의
부모님이 우선적으로 포함된 일체중생들이 무상지를 획득하기 위한 것
일 지어다); 혹은 ‘yad atra puṇyaṃ tad bhavatu mātāpitroḥ
sarvasatvānāñ cānuttara- jñānāvāptaye,’(이 복은 저의 부모님과 모든
중생들이 무상지를 얻기 위한 것일 지어다). 여기서 다시, 그 전과 같은
동일한 기본적 정형구를 사용하며, 그 보시자는 그가 자신의 행위로 인
한 복덕이 ‘일체 중생’의 범주에 의한 무상지의 획득을 위해 쓰이길 바
란다는 것을 표명하지만, 여기서 그는 그 범주 내에서 특정한 개개인을
세부적으로 지목한 종속절의 일종을 그 정형구에 추가시켰다. 그렇게 하
거나, 혹은 그는 그가 언급하고자 하는 세부적 개개인과 그 큰 범주를
‘그리고’로 결합시켰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대승 비문들에서 보시자
의 목표된 수혜자로서 부모님들이나 세부적 개개인들이 언급되었을 때는,
소승의 비문에 있듯이 그들로만 절대 언급되지 않고, 항상 ‘일체 중생’이
라는 범주와 함께이거나 (mātāpitroḥ sarvasatvānāñ ca) 혹은 더 일반
적이게 그 범주의 종속집단으로서 속해서 나타난다(mātāpitṛpūr-
vaṅgamaṃ kṛtvā sarvasatvānāṃ). 그리고 다시, 대승과 관련된 비문들
에서 그 보시자가 그의 복덕을 ‘일체 중생’이라는 일반적 범주에 돌리든
지, 아니면 그가 세부적으로 그의 부모님이나 다른 개인을 그 큰 범주
238 불교학리뷰 vol.13

안에서 지목하던 지간에, 그의 행위로 생긴 그 복덕은 항상 ‘무상지’의


99)
획득을 위한 것이라고 명백하게 쓰였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대
승 비문에는 복덕이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혹은 무병과 장수를 위한다는
것 따위가 없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들은 — 최소한 금석문 안에서
는— 배타적으로 소승의 사상 인 듯하다.

XI.

비문들에서 발견된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의 두 가지 기본적 형태가


— 금석학적으로 — 가장 오래됐다는 것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
약 우리가 마투라에서 나온 원형-대승의 비문을 제쳐놓는다면, 우리의
100)
어떤 대승의 비문들도 4세기 보다 더 이르지 않다. 이것은 소승과 관
련되어 있는 아주 상당한 숫자의 비문들이 그것들 보다 최소한 한 세기

99) 비록 그렇게 지목된 사람은 주로 보시자의 부모님이지만, upādhyāyacārya, 즉 그의 ‘스승’에 대


한 지시도 드물지는 않다. 이것은 그의 부모님이 언급되지 않았을 때조차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
는 Bih iii 69, Bo I 76, Mai 67 등등에서처럼 ācāryopādhyāye mātāpitṛpūrvaṅgamaṃ kṛtvā나
혹은 단순히 Bih iii 51에서처럼 upādhyāyācāryapūrvaṃgamaṃ kṛtvā인 것을 볼 수 있다. 이 비
문들에서 발견된 upādhyāyacārya께 복을 회향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것과 유사한 것들이 비-대
승의 비문들에서 종종 발견된다; 상기에서 인용된 Mathurā Inscriptions, § 29를 참조하고,
Konow, Kharoshṭhī Inscriptions, LXXXVIII에서의 upajayasa+이름+puyae 그리고
Woodward에 따르면 팔리에서 복의 회향의 교의에 관한 최초의 지시는 출가자가 수계 아사리께
그의 복을 회향하는 Upasampadakammavaca에 있다; F. L. Woodward, “The Buddhist
Doctrine of Reversible Merit,” The Buddhist Review 6 (1914) 38-50, 특히 38-39를 보라; 어쨌든
R. Gombrich, “Merit Transference in Sinhalese Buddhism, A Case Study of the Interaction
between Doctrine and Practice,” History of Religions I1 (1971) 205도 참조하라. 인도 불교 비문
에서 부모의 위치에 대해 더 심도 있는 논의를 위해서 G. Schopen, “Filial Piety and the Monk in
the Practice of Indian Buddhism,” Ch. III 이후 (본 논문이 실린 원 책의 3장 이후)를 보라.
100) 아주 개략적인 연대기 요약에 대해서 Schopen, “Mahāyāna in Indian Inscriptions,” 13-14를 보라.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39

혹은 더 오랜 기간을 선행함을 의미한다. 사실상, 우리는 다양한 소승


학파들과 연관된 후기 비문에서 복의 회향의 교의의 몇 가지 형태는 바
르후트만큼이나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보시자의 의도가
실제로 표명된 한 실례에서 라모뜨가 지적한 것처럼 그 행위가
‘mātāpituna aṭhāyā,’ 즉 부모님께 복덕을 [회향하기] 위해서 행해졌다
고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라모뜨는 이것으로 부터 얼마간 다른
결론을 내렸다는 것에 유의해야한다. 라모뜨가 말했다:

[바르후트와 산치의] 시대에는 그 정신이 엄격하게 정통적이었


는데, 그건 다름 아닌 붓다의 정신이었다. 그 관대한 시주자들은
그들의 보시물들로 인해 열반을 성취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라,
단지 앙굿타라(Aṅguttara III. p. 38 — 41)에서 나타난 보시의 다
섯 가지 공덕으로부터 혜택을 얻기 위함이었다‥‥‥게다가, 그들은
이 공덕의 행위가 그들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잘 알았고‥‥‥그것
들만이 행해져야 할 것들이어서, 그들은 그 과보를 얻을 것이다.
[이 공덕의 행위를] 제 삼자에게 전해주는 것, 혹은 과보의 메커니
즘을 무력화하는 의도를 가지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온당치
101)
않다.

이것은, 어쨌든, 추측 일뿐이며, 거기서 거의 표명되지 않은 아주 세


부적인 견해를 귀속시킨 것 이다. 사실, 단순히 바르후트와 산치의 절대
다수의 보시자들의 의도에 대해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보시자
자신이 그의 의도를 표명한 단지 한 경우이고, 그것들은 다만 정확하게
라모뜨가 말한 것처럼 논외에 해당한다: ‘슝가 시대의 바르후트와 산치

101) Ét. Lamotte, Histoire du bouddhisme indien, 456.


240 불교학리뷰 vol.13

의 수많은 보시자들 중에서 사가라키타(Sagharakhita)의 경우만이 그의


비문에서 ‘부모님께 복덕을 [회향하기] 위해서’라는 정형구를 포함한다.’
그 보시자들의 나머지는 — 라모뜨가 ‘수백 명의’로 말한 — 단순히 그들의
102)
의도를 표명하지 않는다. 라모뜨의 견해는 다른 관점에서 간접적으로
시험되었다. 아게쎄(Agasse)는 라모뜨의 인도불교사의 상기 구절을 인용
한 후에 말했다:

만약 [엄격한 정통주의의] ‘쇄신’이 있어왔다면 그것은 거기의


그 본문을 포함하는 것이고, 사가라키타를 고립시킨 것이다. 따라
서 결국 이것도 ‘정통파’로 주장할 수 있다. [복의 회향]의 수행에
대해‥‥‥분명히 [붓다의] 교의의 원래 몸체에 속하는 것이고, 경전
103)
의 여러 곳에서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지금은 어쨌든 라모뜨에게는 활용가능하지 않았던 몇 개의 중요한 비


문들이 새로운 정보를 주고 있다. 비록 이것 중 어느 것도 바르후트와
산치에서 발견되지 않았지만, 하나는 이 장소들의 비문과 동시대인 것으
로, 다른 몇 개들은 상당이 이른 시기의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들 중 처
음 것은 빠우니(Pauni)에서 나왔고, 고문서학적으로 ‘후기 마우리야/초
기 슝가’ 시기에 속해있는 듯하다. 이것은 갓돌 위에서 발견되었고, 시작
부분에 몇 개의 음절( akṣaras )이 손실된 것으로 나타난다:‥‥‥ya

102) 보시자가 그들의 의도를 표명하거나 그런 개념이 발견된 정형구의 발달에 관한 일부의 견해를
위해서 E. Senart, “Notes d’épigraphie indienne,”JA (1890) 119-123, 그리고 Damsteegt,
Epigraphical Hybrid Sanskrit, Ch. III를 보라.
103) J. M. Agasse, “Le transfert de mérite dans le bouddhisme pâli classique,” JA (1978) 311-332, 특히
312-313. Agasse와 복의 회향에 관해서 짧지만 아주 중요한 논문인 J. Filliozat, “Sur le domaine
sémantique de puṇya,” Indianisme et Bouddhisme, Mélanges offerts à Mgr. Étienne Lamotte
(Louvain-La-Neuve: 1980) 101-116을 보라.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41

visamitāya dana(ṃ) sukhāya hotu savasatānaṃ , ‘이 비사미따의 보시


104)
가‥‥‥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비문들은 아주 흥미롭게도 모
두 실론에서 왔다. 이 비문들 중 처음 것은 ‘특정한 군주에게 명백하게
귀속될 수 있는 실론의 최초기 비문’ 중 하나이고, 빠라나-비타나
(Paranavitana)에 따르면, 그 연대는 ‘기원 전 210과 200년 사이’로 추정
할 수 있다: gamaṇi-uti-maharajhaha {jhita ab't-ti}śaya leṇe daśa-
diśaśa sagaye dine mata-pitaśa aṭaya, ‘가마니-우띠야 대왕의 딸 (아
비) 띠사 공주의 동굴은 시방의 상가에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께 공
105)
덕을 돌리기 위해 보시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우리는 ‘나가(Nāga)왕
의 딸이자 우띠야 왕의 아내인 (아비) 아누라디 공주’에 의해 상가에게
주어진 동굴들을 기록하였고, 그 모든 것은 끝에 그 행위가 ‘aparimita-
lokadatuya śatana śita-śukaye,’ 즉 ‘무한한 우주의 중생들의 행복과
복리를 위하여’ 행해졌다고 한 사실상 네 개의 동일한 비문을 발견한다.
비록 확실하진 않지만, 이 네 개의 비문들은 띠사 공주의 기록 보다 약
106)
간 더 앞설 가능성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라모뜨의 해석을 점점 덜 그럴싸하게 만든다: 바르후트
에서 ‘mātāpituna aṭhāya,’ 빠우니(Pauni)에서 ‘sukhāya hotu savasatānaṃ,’
기원 전 3세기의 실론에서 ‘mata-pitaśa aṭaya’와 ‘aparimita-lokadatuya
śatana śita-śukaye’의 정형구가 나온 것은 후기 비문에서 소승 학파와
연관되어 있는 복의 회향의 교의가 ‘아주 오래 되었으며 널리 퍼져있었
다’는 양자를 분명히 증명한다.

104) Deo and Joshi, Pauni Excavation, 38, no. 2; Kolte, EI 38 (1969) 174 (D).
105) Paranavitana, Inscriptions of Ceylon, Vol. I, no. 34;lii-liii 또한 보라; W. S. Karunaratne, “The
Date of the Brāhmī Inscriptions of Ceylon,” Paranavitana Felicitation Volume (Colombo:
1965) 243-250과 비교하라.
106) Paranavitana, Inscriptions of Ceylon, Vol. I, nos. 338-341; lii-liii 또한 보라.
242 불교학리뷰 vol.13

XII.

결론으로써,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팔리 경전과 현대 동남아시아의 상


좌부 불교의 복의 회향에 관한 문제에 대한 얼마간의 관심사임을 언급
할 수 있다. 많은 작자들 중에서, 베체트(Bechert)는 그 주제에 관해 전
문적으로 썼고, 비록 그의 정확한 입장은 항상 즉각적으로 분명하진 않
지만, 그는 복의 회향의 교의는 ‘대승의 사상’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예
를 들어, 그는 말했다:

복의 회향의 가능성 — 대승 불교의 바로 그 시작부터 생겨난


개념 — 이 모든 불교도들에 의해 승인되었다는 사실은 — ‘큰 수레’
의 추종자뿐만 아니라 상좌부 교도들도 — 이 이론이 어떤 범위에
서 초기 불교 교의의 논리적 귀결로써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
명히 확증한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보살 사상의 자취를 설일체유
부의 많은 본문 — 예를 들어 百喻經(Avadānaśataka) — 에서 찾
더라도,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하며, 이 자취는 외부의 영향 — 즉,
대승 교의로 부터의 영향 — 으로써 설명되지 말아야한다. 상반되
게도, 이 사상들은 초기 불교 사상사의 역동성으로부터 꽤 자연스
럽게 뒤따랐다(초기의 이 구절의 독일 본은 단지 이렇게 쓰였다:
오히려 이 사상들은 불교교의의 발달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
107)
그리고 대승은 이것들에 기반되어졌다.

내가 말한 것처럼, 여기서 그의 입장은 완전히 분명하지 않지만, 나중

107) H. Bechert, “Notes on the Formation of Buddhist Sects and the Origins of Mahāyāna,” German
Scholars on India, Vol. I (Varanasi: 1973) 17-18; “Zur Frühgeschichte des Mahāyāna-
Buddhismus,” ZDMG 113 (1964) 535.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의 두 가지 문제 — 승・속의 구분과 복의 회향에 관한 교의 — 243

108)
의 논문에서 베체트는 좀 더 직설적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결국 베체트는 복의 회향의 교의는 실론의 상좌부 불
교 안의 ‘대승 사상’이 되길 원하지만, 거기에서 두 가지 문제점이 나타
나는 듯하다. 첫째, 이것은 소승 비문 내에서 초기에 속할 뿐만 아니라
상당한 양의 그 교의의 존재를 무시한다. 둘째, 그가 복의 회향의 ‘대승
사상’이라고 제시한 것이 실제적으로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을 주지 않는다. 그의 지시는 항상 ‘그 대승의 본문들에
있는’의 형식이지만, 그 본문들은 결코 인용된 적이 없었으며, 세부적인
참고 문헌들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서의 함의는 단독의, 일체화된,
그리고 변하지 않는 개념의 그 ‘사상’이 대승의 본문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나는 대승 경전 문헌들의 한정된 지식에 근거하지만, 이것은 나에
게 아주 그럴싸하지는 않으며, 어떤 경우에라도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
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대승 문헌에서 복의 회향에 관한 사상의 완전
한 연구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아게쎄(Agasse)에 의해 가장 최근에 제
시된 자료들과 대조하거나 대비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아게쎄가 분석한 팔리 자료들이 대승의 비문에서 발견된

108) H. Bechert, “Buddha-feld und Verdienstübertragung: Mahāyāna-ideen im Theravāda-


Buddhismus Ceylons,” Académie Royale de Belgique, Bulletin de la Classe des Lettres et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5e série, T. 62 (1976) 27-51, 특히 48-49. Bechert은 37ff에서 과
거의 상좌부에서의 복의 회향에 관한 문제에 관한 과거의 대부분의 논의에 대해 인용하고 논의
한다; 추가적으로 D. S. Ruegg’s review of N. A. Jayawickrama, The Sheaf of Garlands of the
Epochs of the Conqueror, JAOS 92 (1972) 180-181, 그리고 그의 “Pali Gotta/Gotra and the
Term Gotrabhu in Pali and Buddhist Sanskrit,” Buddhist Studies in Honour of I. B. Horner,
ed. L. Cousins et al. (Dordrecht: 1974) 207 그리고 n. 37을 보라. H. S. Gehman에 의해 쓰인 두 오
래된 논문은 일관되게 복의 회향에 대한 문제를 간과하였다는 것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
“Ādisati, anvādisati, anudisati, and uddisati in the Petavatthu,” JAOS 43 (1923) 410-421; “A
Palism in Buddhist Sanskrit,” JAOS 44 (1924) 73-75.
244 불교학리뷰 vol.13

교의 보다 복의 회향의 교의와 아주 가까운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우리


가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베체트는 흥미로운 가설을 고한함으로써 아주 흥미로운 탐구를 촉망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

[이 논문의 일부 양상의 비평적 언급을 위하여 H. Bechert,


“Buddha- Field and Transfer of Merit in a Theravāda Source,”
IIJ 35 (1992) 95-108, 특히 104-106을 보라; 또한 G. Fussman,
“Documents épigraphiques kouchans (V). Buddha et bodhisattva
dans l’art de mathura: deux bodhisattvas inscrits de l’an 4 et
l’an 8,” BEFEO 57 (1988) 5-25, 특히 10-11을 보라; L. Schmithausen,
“An Attempt to Estimate the Distance in Time between Aśoka
and the Buddha in Terms of Doctrinal History,” The Dating of
the Historical Buddha/Die Datierung des historischen Buddha,
ed. H. Bechert (Göttingen: 1992) Pt. 2, 111 그리고 n. 9; 113 그
리고 nn. 15, 17, 18; 130, n. 142; 143, n.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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