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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견은 살생하지 않는 상생의 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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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6-11 13:52

https://www.nocutnews.co.kr/news/304949

세상에 일격필살의 무술은 없다, 대한택견연맹 이용복 상임부회장

태껸
 어렸을 때부터 무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1 살의 어린 나이에
당수에 입문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태권도라는 말이 아주 생소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19 살의 나이로 태권도장을 차리고 후진을 양성했습니다. 강호의


고수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무술의 고수가 있다는 소문만 있으면
울릉도 성인봉이든 계룡산이든 어디든 달려가 대결을 청했습니다.

그러다가 태권도의 역사를 찾아 나서던 중 택견을 만나게 됐습니다.


일격필살의 무술이란 이 세상에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무술은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끼치지 않고 이기는


것이고 서로 원수가 되지 않고 겨루는 것이며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상호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곤 택견 연구에 몰입하게 됩니다. 23 년을 택견 수련과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수련생도 키웠습니다. 이제 전국체육대회
종목으로까지 올랐습니다.

한국 택견의 산 증인, 대한택견연맹의 이용복 부회장을 6 월 11 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 시 5
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격파는 기술과 요령, 벽돌 소리만 들어도 알아

[BestNocut_L]▶ 들어오실 때부터 이용복 부회장님이신 줄 알았어요.


체구가 운동하신 분 같아요.

어릴 때부터 운동을 했기 때문에 풍기는 인상이 자연히 다른


사람들한테 그런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 실례지만, 키와 몸무게가 어느 정도세요?

키는 175cm 였는데 나이가 드니까 조금 줄어들어서 174cm 가 되었고


몸무게는 늘어서 86kg 정도입니다.

▶ 풍채가 아주 좋으신데, 요즘도 매일 운동을 하시나요?

요즘은 매일 운동을 하지 않는 편인데요, 그래도 가끔씩 지도도 하고


설명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운동은 되는 편입니다.

▶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제가 48 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60 세죠.

▶ 얼굴은 굉장히 동안이신데, 운동 덕인가 봐요. 청취자 여러분께


손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굉장히 단단하세요.

원래는 손이 예쁘고 작은 편인데, 점점 두꺼워지고 특히 가운데


손가락이 잘 펴지질 않습니다. 가운데 손가락이 잘 펴지지 않는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주먹을 쥐기만 하고, 폈을 때도 당수라고 해서
격파 같은 것을 할 때 손가락을 살짝 안쪽으로 굽혀주어야 기가
안쪽으로 모이거든요. 벽돌이나 단단한 격파물을 때리다 보니까 뼈가
부러지고 붙고 하는 과정에서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것이죠.왼손과
오른손도 차이가 납니다. 왼손을 보면 50% 정도 더 연습을 많이
했지만 오른손이 힘이 세고 격파 같은 것을 할 때도 좋은 효과를 내기
위해서 주로 오른손으로 하다 보니까 오른손이 그렇게 됐습니다.

▶ 격파는 어느 정도까지 하시나요?

빨간 벽돌을 깰 때 손바닥에 두 장을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공중에서


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왓장 같은 경우는 20 장 정도는 완파를
했는데 그 이상은 신장이 따라주지 않는가 봐요. 위에서 내려치는,
기왓장 20 장 이장은 키가 우리 무릎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그러니까
손이 허리에서부터 내려오는 데 거리가 짧기 때문에 더 이상 격파
능력을 낼 수는 없습니다.

▶ 벽돌을 격파할 때 보통 벽돌을 쓰나요, 아니면 격파용 벽돌이 따로


있나요?

현재 태권도에서 경연대회를 할 때는 재질을 맞추어서 강도 160kg


에서 깨지도록 특수하게 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과거에 격파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줄 때는 공사장에서
가져오든지, 벽돌공장에서 사가지고 와서 하는데, 사실상 벽돌이 KS
마크로 되어 있는 벽돌은 300kg 에서도 깨지지 않습니다. 사람
손으로는 깨지지 않는 것이죠.오래된 벽돌이든지, 그리고 많이
벽돌을 보게 되면 들어보거나 때려보기만 해도 소리로 잘 깨질지 안
깨질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잘 깨지는 것을 고르는 것도
기술이죠.(웃음)

▶ 기와도 마찬가지인가요?

기와도 보면 용마루에 올리는 기와는 날개가 없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깨야 하는데 만약 그렇지 않으면 10 여 장 정도밖에 깨지지
않을 겁니다. 물리적인 원리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사람의 힘은
그렇게 무한정하거나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 뛰어나게 많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조그마한 차이입니다. 결국은 격파물을 잘 고르고 어디를
때려야 잘 깨진다는 기술적인 부분이 격파의 요령이고 격파를 잘
하는 것이죠.
◇ 위기와 이완의 마찰음 ''''익크''''

▶ 택견 연구도 하시고 보급에도 힘쓰고 계시는데, 택견이란


무엇인가요?

방송에서 고정프로로 택견 경기가 매주 나가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택견''''하면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신문을 비롯한 언론에서도 택견을 태껸으로 표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택견으로 표기를 하고 있거든요.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이고, 중요무형문화재에서도 택견으로 되어 있는데,
신문에서 태껸으로 쓰고 있는 이유는 국어사전에서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택견은 한글로만 기록이 될 수 있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발생연원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기반문화로서 원시시대부터 발달된 여러 가지 체계가 있는데, 한국
사람의 특징에 맞춰서 발달되고 계발된 무술입니다. 일절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데 특히 태권도 같은 경우는 헤드기어 같은 보호
장비를 착용하거나 권투 같은 경우는 사람 몸에는 보호 장비를
착용하지 않지만 때리는 주먹에 솜을 넣은 장갑을 끼고 하게 되죠. 이
글러브에 솜을 몇 온스를 넣었느냐에 따라서 안전도에 차이가 나게
됩니다. 하지만 택견은 그런 것도 없이 맨 몸으로, 공격하는 데도
맨손과 맨발이고 방어를 하는 쪽에서도 평상복 그대로 경기를 하게
되는 것이죠.

▶ 유니폼이 따로 없고요?

과거에는 고의적삼을 입고 했는데 지금은 우리들이 과거 고려시대


무사들이 입던 철릭을 마침 중앙대학교 의상예술학과에 계시는
소황옥 교수님이 연구팀을 만들어서 좋은 택견복을 제정을 했습니다.

▶ 무술이 아니라 마치 무용처럼 리듬을 타는 것처럼 보이던데, 혹시


구호를 넣습니까?

구호는 없지만 여러 사람이 무거운 물건을 함께 들 때는 구령에


맞춰서 ''''하나, 둘, 셋'''' 하든지 ''''영차 영차'''' 이렇게 맞춰야 하는데,
택견에서는 연습을 할 때 주로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춰서 힘의 조화를
잘 이루어야만 힘이 덜 들고 쉽게 운동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기합소리를 내는데 ''''익크, 에크, 익크, 에크'''' 이렇게 하면
리드미컬하게, 노래를 부르듯이 흥얼흥얼 리듬이 나오게 됩니다.
몸에 따라서 저절로 소리가 나오게 되지요. 그리고 ''''익크'''' 하는 것은
긴장이 되었을 때 외부로부터 위험이 감지되면 우리 몸은 거기에
반응을 해서 ''''악!'''' 하고 기가 하나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긴장이
되었을 때 내지르는 외마디 소리가 ''''악!''''이고 이완이 되어서 위기가
지나가면 안도의 한숨을 ''''휴~''''하고 내쉬는데 ''''악''''과 ''''휴''''가
마찰을 일으켜서 ''''익크'''' 하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 태권도와 택견은 어떻게 다른 건가요?

일반적으로 태권도와 택견을 같은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많고 특히


초. 중. 고교 체육 교과서에 보면 태권도가 나오는데, 택견을 승계,
발전해서 현대화시킨 것이 태권도라고 나와 있기 때문에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국민들이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그러나
태권도와 택견은 명칭이 다르듯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사실
태권도는 일제시대 때 일본에 유학을 했거나 당시에 만주 쪽에,
외부에 나가서 삶을 살았던 지식인들 중에서 무술을 배워온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무술이나 중국 무술이죠.그 무술을 배운
분들이 해방을 전후로 한국에 들어와서 이것을 보급하고자 했는데
해방이 되고 나니까 배일 감정이 상당히 팽배한 사회에서 그냥 일본
것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이것을 뭔가 한국적인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민족의식이 발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전통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게 없을까 하다가 마침 택견이라는 것이 과거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최홍희라는 분이 1955 년에 그 이전에는 당수,
공수, 가라테라고 부른 것을 태권도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글을
썼을 때는 태권도인데, 태권도라고 그대로 발음하면
이상하잖습니까? 택꿘도라고 불러야 하는데 사실상 택꿘도는 잘못된
발음이거든요.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면 택견과 음을 연결시켜서
역사성과 전통성을 태권도가 택견을 차용을 해 갔죠. 그래서 일부러
연결시키자는 의미로 태권이라고 글을 적어놓고 부를 때는
택꿘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1970 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민서관에서 나온 국어사전을 보면, ''''태''''에다가 ''''ㅅ'''' 받침과
''''ㄲ''을 붙여서 ''''탯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태권도를 하시는 분들에게 여쭤보면 다른 대답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현재 4,50 대 태권도 소장파 학자들은 그 사실을 이미


인정하고 있고 아직 공식화 되지는 않았지만 시중의 서적 중에서
지금 나오는 태권도 서적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 공수가 가라테인가요?

원래 당수라고 하는데 당수도 일본말로 가라테입니다. 처음에 당수를


쓸 때 ''''당나라 당(唐)자''''로 썼는데 중국의 문화라는 것을 자랑삼아,
요즘 선진국인 미국처럼 문물을 가져오면 잘난척하고 자랑하는 것이
과거 일본에도 있어서 당나라에서 나온 기술이라고 하면 뭔가
우월감을 가졌었나 봐요.그래서 당수라고 짓고 자기들 이름으로는
가라테라고 했는데 중일전쟁으로 중국과 사이가 나빠지자, 중국말을
그대로 사대주의적인 이름을 쓸 수 없으니까, 공수라는 ''''빌 공(空)
자''''에 ''''손 수(手)자''''를 넣었는데 그것 역시 ''''가라(空)''''라는 뜻의
가라테가 된 거죠.

▶ 이용복 부회장님은 택견의 고수시잖아요. 공수하는 사람과 겨루면


누가 이겨요?

59 년도부터 당시의 당수, 공수를 배워서 25 년간이나 열심히


태권도로써 수련을 했습니다. 75 년에 6 단까지 받았고 그 이후에 10
년쯤 있다가 택견을 태권도의 원형인줄 알고 찾다가 전혀 다르다는
걸 알고 택견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전향을 했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했기 때문에 지금도 택견보다는 태권도를
훨씬 더 잘하는 편이죠.그래서 저한테는 당수하는 사람과 일대일로
대결을 하라고 하면 저도 당수를 써 버리니까 저하고는 비교하면 안
됩니다.(웃음)우리가 씨름과 스모가 대결을 하면 씨름의 룰로 하면
씨름 선수들이 다 이깁니다. 그러나 스모 룰로 하면 스로 선수들이 다
이기듯이 태권도와 택견이 경기를 하게 되면, 태권도 룰로 하면
택견은 상대도 되지 않고 또 태권도를 잘 하는 선수들이 택견 룰로
하면 반칙 때문에 반칙패로 질 것 같습니다.(웃음)

◇ 우리 무예 택견은 상생의 무예, 맨몸 무술의 진수

▶ 택견이 전국체육대회 종목이 되었나요?

금년에 우리가 신청을 해서 전국체전위원회에 통과를 해야 하기


때문에 과정은 남아있지만 전국체전종목이 될 수 있는 자격은 획득을
했습니다.
▶ 그렇게 되면 어떤 점이 달라지는 건가요?

국고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우리가 내는 자격증이 사회 일반에서


인정을 하게 되고 특히 경찰채용이나 승진 시에 고과점수에 가산점을
주게 됩니다. 지금 태권도, 검도, 유도가 그렇게 되어 있고 합기도가
얼마 전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뭔가 문제가 생겨서 퇴출되었다가
다시 들어갈 것 같고요. 이번에 택견이 들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 이렇게 되면 경찰뿐만 아니라 군대도 가능할까요?

군대는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태권도나 유도의 유단자들에 대해서


가산점을 주는 제도는 없고 지금 경찰과 국가정보원, 청와대 경호실
같은 특수한 직종에는 고과에 가산점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만 경찰과 군대에서는 공식적인 무술을 태권도, 유도, 검도, 합기도,
그리고 특공무술 등을 군대나 부대에서 만들어서 사용하는 있는데
아직 택견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 우리나라에 택견 인구가 얼마나 되나요?

연맹을 거쳐 간 회원들 숫자가 100 만 명이 넘어섰고 매일 수련하는


숫자가 15 만~20 만 명 사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불과 70 년대
초기에 딱 한 곳 밖에 살아남지 않았었는데 30 년이 흐르면서 100 만
배 정도 확대되었습니다.

▶ 여성도 있어요?

여성들이 20% 정도 되는데요, 전에는 여성들이 더 많이 했는데


요즘은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리드미컬하게 보이는 율동 때문에
여성들이 하게 되면 어느 무술보다도 빨리 배우게 되고 잘하게
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게 되면 남자들의 신체적인 조건 때문에
여자들이 직접 대결을 하면 불리하지만 개인적인 기능은 여자들이
상당히 좋은 기량을 가질 수 있습니다.

▶ 배우기도 재미있고 호신술로도 배우면 좋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아마도 제가 세계 최초일 것 같은데, 택견 기술을


응용해서 ''''위험할 때 호루라기 세 번''''이라고 여성호신술
전문서적을 낸 적이 있습니다. 택견 기술을 이용하는 것은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어떤 위기에서 한 번쯤은 빠져나올 수 있는
좋은 기술이 많이 있습니다.

▶ 택견의 매력을 말씀해 주세요.

우선 택견이라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라는 면에 비추어서 모든


분들이 좋은 감정으로 대하고 있고, 우리 한국 사람의 신체적
조건에는 너무 적합합니다. 우리의 국악도 처음에는 지루하게
느껴지는데 이것을 자꾸 듣고 해보게 되면 재미가 있고 확실히
느낌을 체득하게 되죠. 택견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이색적으로
보이지만 한 2~3 일 정도 자기가 직접 해보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드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리 핏줄에 있는 민족적인 소질,
DNA 같은 것이 택견을 금방 매력적으로 흡수해 버리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택견은 살생하지 않는 상생의 무예, 택견의 매력은 상대를


죽이지 않고 누가 더 강한가를 가리는 지혜가 숨어있는 무술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무술은 인체를 도구 대신 사용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택견은 맨몸 무술의 진수다」 이런 글도 쓰셨어요.

제 손이 기형적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과거에 무리하게 마치 주먹은


망치처럼, 그리고 모서리는 칼날처럼, 손끝은 창끝처럼 사용할 수
있는 줄 알았었습니다. 우리 스승이나 선배들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죠. 제가 기와도 격파하고 돌이나 벽돌을 무수히 깨어봤지만
그것이 간단한 원시적인 도구 하나에 미치지를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기왓장 20 장을 깨는 것을 몇 십 년을 걸쳐서
겨우, 신체적으로도 적은 신체가 아닌 나 같은 사람이 그런 수준의
격파 위력을 나타냈다 해도 초등학교 4,5 학년 되는 어린 학생이라도
돌을 깨는 큰 망치를 들고 내려치면 제 주먹보다도 훨씬 더 강한
위력을 나타나게 된다는 거죠. 결국 인체는 도구에 미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맨손 무술이 필요한가 하면 택견에 대한 과거
중국의 2500 년 전의 기록에 의하면 각력(角力)이라고 합니다. 사슴
같은 뿔이 난 동물들이 교미할 시기가 되면 암컷들을 두고 서로
경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긴 강자가 그 일대에 있는 암컷들을
거느리고 자기만의 새끼들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1 년 후에 또 다시
경쟁을 하는데 나이가 들거나 게을러서 연습을 안 하면 힘이 지쳐서
물러나고 새로운 강자가 새로운 새끼를 갖게 되거든요. 그것은 종의
보전을 위한 하나의 본능적 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원시시대에는 집단생활을 할 때 리더가 필요하죠.


지금도 이 사회에서 리더가 가장 중요한 것처럼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냥을 하는데 있어서 용감하고
지혜롭고 신체적 조건도 좋은 리더가 있어야 배를 곪지 않고 좀 더
사냥을 잘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 필요에 의해서 강자를 선출해야
하는데 선출하는 방식이 요즘처럼 민주주의로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오로지 능력을 직접적으로 시험을 해야 했죠. 그런데
사람들은 도구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냥할 때처럼 원시적인
돌이라든지 나무막대기로 때리다 보면 죽고 다치게 됩니다. 그러면
노동력과 전투력이 상실되니까 그런 부분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기를 놓고 하는데도 주먹으로 뼈를 부러뜨린다든지 발로 차서
다치게 하면 또 다시 똑같은 역효과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런
부분들도 배제하자, 이렇게 된 것이 맨손무술의 출발이고 중국에서는
각력이라고 지혜로운 이름을 붙인 것이죠. 결국 이것은 각력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자는 것에 맨몸무술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을 죽이려면 도구를 사용해야 하는데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하는 것은 상대를 다치지 않고 서로 경쟁을 하는
절제된 경쟁원리가 거기에 숨어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동양무술의 대부분이 견적필살이니 일격필살이라고


해서 보는 대로 죽인다, 한 번에 죽인다, 이런 아주 살벌한 구호를
외치는데 이것은 일제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인정신을 모든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수용했던 것입니다. 무술이라는 것은 맨손으로도 총을 이길
수 있고 칼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절대 과장광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택견에서 보는 맨몸무술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국 절제된 경쟁을 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충동과 자극을 줘서
서로의 향상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도록 해 나가는 것인 본래의
목적인 것이죠.그래서 택견을 상생과 공영의 무예라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태껸 2
◇ ''''한 잽이 가족사'''' 직계가족만 100 명

▶ 11 살 때부터 당수에 입문하셨는데,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하셨어요?

집의 어른도 젊을 때 ''''한 잽이''''했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경상도에서는 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 고향은 부산이고 부친은
울주군이니까 울산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잽이라는 것이 지방에서
택견과 같은 기술입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는 챕이, 찹이 이렇게
말하고요.잽이라는 말이 지방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지만 잽이가
잡는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한 번 잡아보자, 붙어보자는 이런
용어인데 이런 걸 붙인 분도 있었고 유도를 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아버님이 한 잽이 하셨는데 우리들이 어렸을 때, 여름에는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을 깔아놓고 보통 그곳에서 저녁식사를 많이
했어요. 그러면 어머니가 식사 준비하시는 동안에 어린 아이들과
장난삼아 멍석을 펴 놓고 집어던지기도 했던 것이,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면서 언제부터 배웠는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무술 쪽으로 흘러들어간 것 같습니다.

▶ 아버님의 체격이 크셨나요?

아버님은 키는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강골이라서 힘이 아주


장사셨어요. 그래서 짐 자전거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는 내기도 하고
하는 것을 어릴 때 목격을 했는데 그런 소질을 제가 이어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 형제들은 어떻게 되세요?

저희들은 4 녀, 6 남이니까 10 남매의 7 째입니다.(웃음) 어머니가 10


명을 낳으셨는데 한 사람도 실패작 없이 몽땅 잘 컸기 때문에 큰
형님이 76 세이신데 형제들이 다 살아있거든요. 지금은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살아 계세요. 그래서 어머님 생신 때 다 모이면
직계가족만 100 명씩 모입니다.

▶ 그러면 6 남이 다 운동을 하셨어요?

대체적으로 다 했고요, 여동생도 태권도를 가르쳐서 다 유단자고


밑의 남동생도 태권도 5 단에 택견 경북지부장도 맡고 있습니다.

▶ 그 집안은 아무도 대적할 사람이 없었겠어요.(웃음)

제가 어렸을 때 싸우게 되면 바로 위의 형이 나와서 말리는 척하면서


거들어주고 그러면 상대방 쪽에서도 형이 나오면 더 큰 형이 나오고
하니까 항상 대장 집안이었죠.(웃음)

▶ 10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어떻게 먹이고 가르치셨는지,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에 저희들이 어렸을 때 목격한 바에 의하면


굉장히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봄이 되면 버섯 따러 산에
올라가시고 나물 뜯어서 시장에 내다 파시고 하면서 생활했는데 우리
주변에서 밥을 굶는 사람들이 많았고 초등학교 때는 한 반에 8,90
명이 되는 아이들 중에서 10 명 정도는 밥을 못 먹었어요.저는
부모님이 열심히 일을 하신 덕분에 밥은 굶지 않았지만 보리밥이라도
3 끼를 먹을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하는 시절에
살았지요.

▶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셨어요?

특별한 일은 없었고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건너가셔서 모래나 자갈


같은 것을 채취하셨는데 돈을 많이 버셨나 봐요. 그런데 고향에 아는
분이 자꾸 오셔서 돈을 빌려 간다, 어쩐다 했는데 알고 보니
독립운동을 하셨나 봐요. 그 분이 잡히셨는지 우리 아버님은
독립운동하고 관계가 없는데도 잡혀가셔서 상당한 고문을
당했는데도 당시의 기록이 없어서 독립유공자 가족이 되지는
못했고요. 그런걸 보면 부친이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고 의리를
베푸는 호걸 기질이 상당히 있었던 모양입니다.

▶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몇 살 때부터였어요?

11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했습니다. 태권도는 당수가 이름이 저절로


변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서 저하고는 관계없이 변한 겁니다.

◇ 바람의 파이터, 고수 찾아 삼만리

▶ 19 살 때 도장을 차리셨다고요?

최홍희 장군이라는 분이 태권도를 지은 분인데 이 분에게


국제사범교육을 받으러 갔었는데 저는 나이도 어리고 단도 3 단밖에
되지 않아서 자격이 없어서 청강생으로 3 개월을 배웠습니다. 그때 그
분이 전 국토를 태권도 도장으로 만들고 전 국민을 태권도 유단자화
한다면 얼마나 강한 국민이 되겠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가장
나이가 어리니까 저를 지적하면서 몇 단이냐고 하시기에 3 단이라고
했더니, ''''그 정도면 어디 가서 한 두 사람 정도는 대적해서 충분히
이길 수 있겠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자네처럼 모든 국민이 다 그렇다고 한다면 얼마나 강한 민족이
되겠느냐, 세계에서 1 등 국민이 되려면 전 국민이 태권도 유단자를
시키자는 말에 감동을 받아서 부산으로 왔습니다.바로 산에 가서
조그마한 틀을 닦아서 아이들을 모아서 전 국토의 도장화를
실현하려고 했었죠.(웃음)

▶ 그렇게 도장을 차리다 보면 다른 도장과의 다툼은 없었나요?

당시 부산의 초량이라는 곳이었는데 바로 밑이 부산역이에요.


부산역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지금은 달라졌지만 과거의
역전이라고 하면 불량배들이 많고 범죄의 소굴이었습니다. 그곳의
넝마주이 패들이라든지 소매치기 패들이 자기들의 힘이 필요하니까
저에게 찾아와서 운동을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제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게는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하니까 위협을 하더라고요.제가
거기에 굴복할 수 없으니까 자연히 목숨을 건 경쟁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이도 어린데다가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의 자존심과 올바른 길만 선택한 반면에 그
사람들은 다 계산을 하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부딪히면
손해겠다 싶으니까 좋은 말로 하고 물러서고 했었어요.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들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소개해 주세요.

우리는 산에서 도장이라고 하고 있는데 등산을 한다든지 그런


사람들이 신발 신고 들어와서 아무렇게나 왔다 갔다 합니다. 심신
수련을 하는 도장이니까 누구든지 출입을 금지한다고 말목을 치고
새끼줄을 쳐서 출입금지를 시켜 놨는데 거기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하면 혼이 나게 되는 거죠. 일부러 시비를 걸기 위해서
시내에 있는 도장 사람들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제가 있을 때는 말로
하든지 주먹으로 하든지 처치를 하지만 제가 없을 때 다른 사람이
오게 되면 피해를 입게 되죠. 그러면 제가 다음 날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그 도장으로 쳐들어가서 직접 한 번 대결을 해 보자, 너희들이
도장에 와서 그렇게 했으니까 나도 신발 신고 바닥을 밟아야겠다
해서 시내에서 치고 박고 한 적도 있었어요.그 당시는 10 대 말에서 20
대 초니까 혈기왕성할 때라서 철이 없었죠. 그리고 오로지 하나에
충실하다 보니까 그런 일이 생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이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길가다가도
나무가 있으면 붕 날아가서 차보고 당시에는 나무 전봇대가 많았는데
주먹으로 쳐 보기도 하고 그러면 주먹이 깨쳐서 쳐지는
상황이었는데도 전신주가 부르르 흔들리는 재미로 치고, 친구들
중에도 운동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가 더 전깃줄을 많이 흔드느냐
하면서 발로 차기도 하고 때리기도 했습니다.재미있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을 선배들이 좋은 쪽으로 유도를 해 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길거리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요. 그런데 주의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웃음)

▶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고, 장풍을 날리면 멀리서 사람을


쓰러뜨리고, 발차기를 해도 발이 보이지 않고, 한 번의 주먹으로
사람을 살상시킬 수 있는 고수를 찾아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건
무슨 내용인가요?
예전에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에서 이상인이라는 배우가 하던
행동이나 짓이 제가 어릴 때 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공중부양이라든지 날아다니는 게 실제로 있는 줄 알았어요. 또
거짓말로 선전 하는 선데이 서울 같은 선정적인 잡지에서 말도 안
되는 기사들이 나오면 그걸 보고 찾아다니고 돌아다니다 보니까,
울릉도에 도인이 있는데 날아다닌다고 해서 울릉도에 가보기도
했어요.(웃음) 가보니 그런 사람들이 있지도 않았죠.그뿐만 아니라
가끔 보면 공중에 뜬 사람이 있고 어느 절에 가보니까 정말 소문대로
바위가 있는데 손자국이 찍혀 있더라, 바위를 손으로 찍어버리니까
진흙에 마치 손을 찍었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어요. 그게 운문사 절
암자 앞이라고 해서 찾아가 봤더니 실제로 그런 바위가 있기는
했는데 제가 자세히 보니까 끌로 조각을 한 것이지 사람 손이 될 수
없는 거더라고요. 너무 반듯하게 되어 있거든요. 우리가 손을 진흙에
찍는다고 하면 깊이 들어가는 부분과 잘 찍히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나와서 골곡이 있어야 하는데 골곡이 없어요. 평면이라서 아니라는
것을 알았죠. 실제로 40 대 되는 주지스님이 있어서 그 분이 찍었다고
해서 굉장히 크게 나와 있었어요. 제가 주지스님을 만났는데
거짓말로 판명이 났어요. 그러나 실제로 한 분이, 범어사
청련암이라고 지금은 꽤 큰 절이 되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양익스님이라는 분이 우리 불교계에서 최고의 고수였었습니다.
무술을 하신 스님이신데 어떤 무술을 하시는 분인지는 모르고 한
번은 장풍을 써서 날린다든지, 제일 중요한 것은 사회 무술 사범들이
나와서 모두 참패를 했다고 해서 친구들 몇 명과 도전하려고
올라갔어요. 사실은 그 분이 그렇게 한 게 아니고 밑에 있는 추종
스님들이 기자들을 만나서 재미삼아 거짓말을 했던 것이 신문에 크게
나 버렸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서 양익스님과 교류를 했습니다. 불교
무술도 배우고 우리가 태권도 하는 것도 보여드리고 했는데 정말
초인적인 힘을 가진 분이 없냐고 하도 조르니까 한 분을 소개를 해
주시더라고요. 부석사의 영연스님이라고 1928 년생, 저보다 20 살이
많은 분이었는데 우리나라 복싱 국가대표 선수였는데 올림픽에
나가서 첫 판에 패배를 하고는 실망해서 스님이 되신 분이었어요.이
분은 스님이 되시고도 자신이 초인적인 힘을 얻으려고 굉장히 노력을
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만나서 한 달 반 정도를 있으면서
단전호흡도 해 봤는데 그 분은 절대로 그런 것은 없다, 그리고 도력을
기르려고 한다면 태권도 사범은 태권도 도장에서 길러야 하고
스님들은 절에서 해야 한다면서 명백하게 이야기하면서 저를 자꾸
내려가라고 해요.안 가고 버티다가 우연한 기회에 느낌이 오는 것이
제가 단전호흡을 하고 있었는데 무량수전 앞에서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는데 4 시간 정도가 지나버렸어요. 그렇게 경험하고 나니까
좋다는 것은 분명 알겠는데 인생은 유한한데 이렇게 앉아만 가지고
몇 시간이 지나가면 살아가는 재미가 뭐가 있겠느냐 하고 내려와
버렸어요.그러고 난 다음부터는 그런 미망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열심히 태권도만 했었죠.

▶ 그런 고수를 못 만나신 거예요?

그렇죠.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중국에도 아직 국제적인


교류가 있기 전인 88 년에 26 일 간 어떤 경로를 통해서 중국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때 소림사는 가지 않고 웬만한 곳은 다 다니면서
고수라는 사람들을 찾아봤는데, 그 분들이 하고 있는 것은 너무
허장성세이기 때문에 중국무술은 실제로 겨루기를 하게 되면
우리한테 집니다. 폼만 좋았지 사실상 실속이 없습니다.

▶ 택견의 송덕기 선생님은 어떤 분이세요?

송덕기 선생님이 1893 년생이신데, 유일하게 택견의 씨앗으로


남아계셨던 분이에요. 서울의 사직동 쪽 우대마을에서 대대로 사셨던
분입니다. 우대마을은 원래 중인들이 살았던 곳이거든요. 서울 각
관청의 아전들이 사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택견을 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거기에 정말 마지막 남아있는 택견의 한 톨의 씨앗이었는데
1971 년 태권도誌에 태권도의 원형으로 소개된 적이 있었어요. 제가
그것을 보고 기억을 해 두었다가 태권도를 열심히 한 덕에 1980
년부터 나이가 어렸음에도 부산시 태권도협회 전무이사를 맡게
되었었어요.그러나 태권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어서 실망을 하고 이제는 태권도는 취미 삼아서
하고 돈이나 벌어서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83 년에
떠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아쉽기도 하고 그동안 생명처럼,
신앙처럼 대했던 태권도를 버리려고 하니까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배웠던 것을 정리해서 책이라도 해서 기록을 남겨놓으려고 자료를
수집하는데 책을 쓰려면 역사부터 나오잖아요.태권도의 역사는
택견으로부터 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저 역시 태권도와
택견이 같은 걸로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71 년도에 태권도지에서
얼핏 봤던 송덕기라는 분이 있다는 걸 알고 찾아가서 뵈었는데, 처음
71 년도 잡지를 봤을 때는 제가 나이가 어렸을 때니까 연세 많은 분이
하나 보다 하고 예사로 봤는데 10 년 후인 83 년에 찾아가서 하시는 걸
보니까 우리 무술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였다는 거죠.

당시에 연세가 90 세가 넘은 분이 하는 동작을 보고 파악을 할 수


있었어요. 그때 제가 6 단 받고도 10 년이 되었으니까 그걸 판단할 수
있는 소양이 길러졌던 셈이었죠. 그래서 저는 태권도가 택견을
수용해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태권도 쪽에 제가 부산지부
전무니까 김운용 회장님부터 시작해서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택견을
태권도가 수용해야 되지 않겠냐고 이야기하는데 아무도 수용해 주지
않았어요.그러다가 제가 택견을 직접 배우고 하면서 택견은
독자적으로 크지 않으면 태권도에 함몰되겠구나, 그러면 정말 택견이
갖고 있는 소중한 가치가 유실된다, 함몰되어서 없어져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독자적으로 키우겠다 해서 84 년도에 태권도를
완전히 접고 택견으로 전향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술을 접고 사업을
해서 돈 벌겠다는 꿈도 접어버리고 택견이야말로 일생일대의 큰
사업으로 키울 수도 있고 명예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가 잘
하는 것이고 또 개인의 돈이 아닌 국익에도 굉장한 경제적인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택견을 해 보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이죠.

▶ 돈은 좀 버셨습니까?

재단법인을 만들려면 현금이 많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재단법인도


만들었고 제가 가정에 돈을 보태주는 것은 상당히 짠 편이고 우리
제자들에게도 짠돌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야물게 하는
편입니다만, 그렇게 모아가지고 기반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계속
축적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 택견은 상생과 공영의 지혜의 보고(寶庫)

▶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제가 그렇게 무예를 좇다보니까 결혼이 좀 늦어서 35 살에 했는데


우리 집사람이 저와 10 살 차이인데, 사실 31 살 때까지는 안 가겠다고
했지만 그 뒤로는 가려고 했었어요. 지금은 뚱뚱하지만 총각 때는
78kg 으로 아주 이상적인 체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디 가면 빛이
난다고 하고 자세도 반듯하니까 주변에서 여자 분들이 보면 다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도를 하는 사람들은 무도에만 충실해야
한다고, 한 눈을 팔면 안 된다고 해서 바른 자세만 갖고 앞만 보고
갔어요.

그런데 31 살이 되서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사이 옆에서


눈길을 주던 아가씨들은 다 시집을 가고 나니까 장가가기
힘들어지더라고요. 중요한 문제는 가끔씩 친구들 부인들이 후배들을
소개해 주는데 본의 아니게 선을 보게 되면 당사자들은 좋아합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을 찾아뵈면 부모님들이 제일 먼저 직업을
물어보잖아요. 성실한 사람인가 보다는 뭘 하는 사람인가
물어보니까, 태권도 사범이라고 대답하면 깡패다, 하지 마라 대뜸
이렇게 나와서 매번 미역국만 마셨죠. 그래서 지금도 전업으로
택견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저처럼 장가가는데 지장이 없는
대우를 받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남자아이들 둘이 있습니다.

▶ 아이들도 택견을 하나요?

어릴 때 가르쳤는데 제가 집은 부산에 있고 서울에 올라와 있으니까


집은 비우고 사방으로 다니니까 집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었어요.
가서 조금 가르치고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니까요. 하다못해 태권도
도장에라도 보내서 발차기 연습이라도 시키면 전환시키기 쉽다고
했지만 요즘 태권도 도장이 제 마음에 들게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서
보내지도 못했는데, 지금 큰 애는 택견을 보급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3 년 동안 있다가 현재는 군에 복무 중이고, 작은
애는 택견을 어릴 때 해서 애기 택견 대회에서 우승도 하고 경력도
있지만 중. 고등학교 때 가서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다행히 운동을 안 하는 대신에 학교는 좋은 곳에 가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다 보니까 제 애는 못 가르친 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처럼 비슷한 상황이 되었습니다.(웃음)

▶ 제자들에게 짠돌이 선생님으로 소문 난 거 알고 계세요?(웃음)

시범을 하게 되면 사례비를 주는데, 예를 들어 100 만원을 받았다고


하면 사람이 20 명이 갔을 때 5 천 원 이상은 먹으면 안 되죠. 그리고
제가 제일 높은 사람이니까 저보다 밑의 사람들이 저보다 맛있는 걸
먹으면 예의에 어긋나잖습니까. 그래서 제가 ''''자장면 보통'''' 이러면
''''자장면 보통'''' 밖에 못 시키는 거죠. 자장면 곱빼기까지는 허용해
주고 더 이상 시키면 눈총을 받는 정도가 아니고 불러서 야단치기도
하고 심지어는 한 대 쥐어 박히기도 하고 그렇게 한 번씩 본때를
보이면 소문이 나서 선생님이 시키면 동일하거나 낮게 해서 돈을
아껴야 하는 거죠.

▶ 세상에서 어떤 게 제일 겁나세요?

사회의 인심이나 여론이 가장 무섭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사실


택견을 키워나가는데 있어서도 택견에 대한 인식을 좋게 해야 한다는
데에 상당히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까 택견이 춤처럼
보인다고 하셨는데 사실 춤은 아니거든요. 택견의 진실한 면이
아직까지 덜 보여줘서 그렇습니다. 그런 걸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한 번 소문이 잘 못 난다든지 여론이 나빠지면 그걸
돌이키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세요.

택견을 세계화시키고 이것을 경기로서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택견이


갖고 있는 상생과 공영의 지혜를 전 인류에게 보급해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조금 더 바른 길로, 지혜롭게 살아가게 하는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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