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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태권도 9개관 역사 자료집


(跆拳道 9個館 歷史 資料集)

1. 강덕원(講德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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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덕관(武德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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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송무관(松武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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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도관(吾道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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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도관(正道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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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도관(智道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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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창무관(彰武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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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청도관(靑濤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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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무관(韓武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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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해외 태권도 시장 개척 태권도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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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및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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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원(講德院)
1. 역사 및 개요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3. 사료 및 사진자료
4. 수련 관련 사항
강덕원(講德院) ◂ 3

1. 역사 및 개요

○ 강덕원은 1956년 9월 홍정표와 박철희에 의해 서울 신설동에서 창설됨. 그 전에


홍정표 함께 연세대 당수도 부원들을 중심으로 ‘무도원택권권법도장’을 개관함. 당시
관장이라는 호칭은 사용하지 않아 무도원 사범은 홍정표가 맡았고 그 이후 홍정표가
몇 개월 있다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 두자 박철희가 사범을 맡으면서 ‘강덕원(講德院)’을
정식 창설함.

○ 강덕원은 ‘덕을 가르치는 집’을 표방함. 기존의 ‘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원’을 사용한 것은 박철희가 파사권법(1958)이라는 교본을 저술한 해인사의 경
학원의 ‘원’에서 차용한 것으로, 일본식 ‘관’이라는 명칭에서 탈피하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됨.

○ 박철희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YMCA 권법부라는 줄기에서 창무관이 먼저 가지를


뻗고, 그 후 강덕원이 가지를 뻗은 것이기 때문에 강덕원이 창무관 분관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함.

○ 하지만 1954년 창무관 단증대장을 보면 관번 3번이 박철희, 6번이 홍정표였음.


따라서 창무관 입장에서는 강덕원이 창무관에서 분관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음.
1958년 강덕원 지도위원 명단을 보면, 사범 박철희, 교범 홍정표, 조교 이은재·
주진철·김양일로 기록되어 있음

○ 관훈이라고 할 수 있는 서도훈(誓道訓)은 1. 우리는 무도를 수련하여 국민체위 향상을


도모하자 2. 우리는 무도를 수련하여 정도 선행하자 3. 우리는 무도를 수련하여
민족사회의 모범이 되자.

○ 강덕원은 연세대와 외국어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발전함. 1956년 대학생들을 중심


으로 대한학생택권권법회 단체를 결성했고, 1959년 전국학생택권도특별연무대회를
개최함. 당시 박철희는 기술고문, 홍정표는 대회위원장을 맡았음.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3


4 ▸ 국기원

○ 강덕원은 연무대회에도 자주 참가함. 1959년과 1960년 3월 경무대 경찰서 주관으로


열린 ‘대통령각하 친람 전국무술개인선수권대회’에서는 강덕원 소속 관원들을 중심
으로 연무가 이루어짐. 이 대회의 종목은 장권형 및 대련, 팔기권 등 이었음.

○ 강덕원은 창신동과 청진동, 서대문, 서울운동장 등으로 도장을 옮겨 다니다가


1971년 이금홍이 2대 관장을 맡으면서 인사동으로 확장 이전했음. 주요 출신자는
김용채·정화·김정후·이강희·한정일·김병수·나종남·이은재·김양일·주진철·
홍화순·최익진·지승원·임복진·홍상용 등이 있음.

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강덕원(講德院) ◂ 5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가. 계보도

❍ 관장계보

창설자 및 초대 관장

박 철 희

2대 관장

이 금 홍

3대 관장

홍 상 용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5


6 ▸ 국기원

❍ 시대별 강덕원 출신 인사

강의섭, 강정구, 고복래, 고선식, 고영진, 고태연, 김두정, 김병수, 김상수, 김용채,
김정후, 김원국, 김재곤, 김종남, 김순철, 나종남, 라해욱, 문영진, 박세혁, 신상언,
1950년대 신한영, 심영일, 송상근, 양근휘, 오무영, 우명도, 이경태, 이강희, 이금홍, 이동희,
이동호, 이영덕, 이원식, 이인석, 이해림, 임복진, 정 화, 정대경, 조남기, 차종방,
한만희, 한정일, 허상종, 허호주, 현동엽, 홍남용, 홍재학, 등

강덕영, 강명조, 강희택, 강창구, 강성일, 권오선, 권영철, 고태선, 김학래, 김시웅,
김광섭, 김하진, 김영준, 김연우, 김경호, 김명기, 김성진, 김경봉, 김동찬, 김정태,
김원길, 김정우, 김성남, 김영근, 김윤호, 김형원, 김영식, 김한오, 김천암, 김종선,
김기준, 김영한, 김동철, 김동원, 김종선, 김영부, 김상철, 김봉기, 김대웅, 김광식,
김완배, 김진태, 김준태, 김갑성, 노덕우, 나병인, 민경태, 문상용, 박명구, 박화성,
박남수, 박태봉, 박경복, 박수남, 박수용, 반응철, 배윤만, 소기호, 서원식, 서창수,
1960년대
신달승, 신양승, 심순석, 심기석, 심낙조, 이현갑, 이현기, 이재영, 이범신, 이국인,
이광진, 이윤상, 이희근, 이보교, 이윤교, 이승용, 이승준, 이무웅, 이완기, 이진우,
이철우, 이해명, 유수웅, 유두호, 안재수, 안희균, 오병근, 안영옥, 윤치상, 임문규,
임영기, 엄광성, 조동수, 조정구, 조일랑, 조원형, 조도형, 주채원, 장중영, 장석주,
전동주, 정진영, 정성대, 정성화, 정진권, 정춘섭, 정유보, 최종립, 최창호, 차등학,
채영길, 한성호, 함순호, 황미수, 홍상용, 등

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강덕원(講德院) ◂ 7

나. 주요인물 생애사

박철희 강덕원 창설자, 1대 관장

박철희는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15살 때 YMCA 권법부에서 윤병인


에게 무술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무술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박철희는 두발
당성차기로 초가에 매달린 고드름을 깨는 등 발차기를 잘했다.
YMCA 권법부에서 자유대련을 하게 되면 성인부와 학생부가 2열로 나눠 섰다가
한 명씩 돌아가면서 겨뤘다. 그는 누구보다 수련에 열심이었다. 개근했다고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윤병인에게 가장 많은 기법이나 형을 배웠다. 입관한 2개월
후에 8급 심사를 봤다. 심사 내용은 기본형 1절부터 5절까지였다. 당시 그는 권법
이외에 역도와 유도도 익혔다.
17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포병 간부 후보생으로 입대했고 1951년 3월 3
일, 육군소위로 임관됐다. 포병을 선택한 이유는 나이 제한이 없어 입대하기가 수월
했기 때문이다. 복무 중에도 꾸준히 무술을 수련했다. 1953년 광주 상무대에서 복무
할 때는 유도와 검도를 하던 전남경찰국 무덕전에서 개인 수련을 했다. 또 광주제일
고등학교에 권법부를 만들어 지도했다. 당시 청도관 출신이었던 대위 우종림이 주선
해줘 방과 후 학생들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그 후 1954년 포병학교 중위 시절, 승단심사에 응심했다. 그 때 청도관 출신 실력
자 엄운규와 대련을 해서 3단이 됐다. 그 해 육군사관학교에 ‘태권도’ 과목이 개설되
면서 2년 동안 태권도 교관을 역임하였다. 4년 동안 초단을 따야 하는 정식과목으로
채택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956년 여름 해인사에서 그동안 배운 권법을 중심으로 ‘파사권법(破邪拳法)’ 내용을
탈고했다. 박철희는 “이 책은 김용채 씨가 데리고 와서 수련하던 최성규 중령이 미국
에 가서 계속 수련을 하고 싶은데, 권법을 잊지 않겠다며 사진을 찍어 가야겠다고
해서 시작된 것인데, ‘그럴 바에 아예 교본을 한 권 만들자’라고 해서 시작된 것이
다.”고 말했다.
‘파사권법’의 파사는 삿된 것을 깨트리고 바름을 드러낸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에
서 따온 것이다. 책에는 스승인 윤병인이 창안한 기본형 1절부터 5절의 내용이 수록
되어 있다. 또 박철희가 정리한 정공형 중 제1형도 포함되어 있다. 자세를 고정한 채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7


8 ▸ 국기원

뒷손으로 찌르는 걸 해 보자는 뜻에서 형을 만들었다.


이 무렵, YMCA 권법부 출신인 이남석은 한국전쟁 때 윤병인이 월북하게 되자 체
신부 자리에 창무관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박철희는 “이남석이 체신부 자리에 창무
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서울 올라오면 여기서 운동이나 해야겠다고 말한 기
억이 나지만 창무관에 가입한 적이 없다. 나를 교범으로 해 놓았다는 기억이 난다.
이것 때문에 간혹 나와 창무관을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나는 창무관에 가입조차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창무관을 개설한 이남석과 뜻을 달리한 박철희와 홍정표는 의기투합해 활
로를 모색했다. 박철희의 후일담을 보자. <무카스, 2010년 1월 16일, 원로들의 이야기 박철
희 편>
“1956년 ‘파사권법’을 탈고하던 즈음에 YMCA권법부에서 수련한 홍정표 씨가 내게
와서 개인적으로 도장을 열고자 하는데 좀 도와 달라고 했다. 마침 집 근처에 빈 건
물이 있어서 거기서 하라고 했다. ‘명칭은 어떤 걸로 할까요’라고 하니, 한 번 나보고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무도원’과 ‘강덕원’ 두 가지를 추천했더니, 무도원이 좋
다고 했다. 무도원은 ‘무도원택견권법도장’을 편의상 줄여 부른 말이다.”
당시 관장이라는 호칭은 사용하지 않아 무도원 사범은 홍정표가 맡았다. 그런데
홍정표가 몇 개월 있다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 둬 박철희가 사범을 하게 되었다. 그
때 ‘강덕원(講德院)’이 탄생했다.
박철희는 강덕원 창설에 대해 “1956년 서울 신설동에 도장을 마련한 강덕원은 ‘익
힐 강(講)’에 ‘덕 덕(德)’ 자를 선택, 공정하고 포용성 있는 마음을 가르치는 도장을
표방했다. 원(院)이란 표현은 일본식의 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마음에 ‘파사권법’ 책
을 탈고하던 해인사의 경학원(經學院)에서 따왔다”고 말했다.
그 후 강덕원은 창신동과 청진동, 서대문, 서울운동장 등으로 도장을 옮겨 다니다가
이금홍 이 2대 관장을 맡으면서 인사동으로 확장 이전했다. 주요 출신자는 김용채,
정화, 김정후, 이강희, 한정일, 김병수, 지승원, 임복진, 홍상용 등이다.
박철희는 1950년대 말 경무대에 ‘태권술부(跆拳術部)’ 무도 사범으로 들어갔다. 당
시 경무대에선 태권도와 유도, 검도, 궁도 등을 가르쳤다. 경무대 행사 중의 하나로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기념해 ‘전국무술개인선수권대회’가 열렸다. 1958년부터 3년 동
안 박철희가 이 대회를 주관했다. YMCA 권법부 출신인 홍정표, 나종남, 최익진, 김
병수, 서영익, 박세혁, 정화, 조기정 등이 참가했다. 1959년에는 광주학생운동 30주년
을 기념해 사비를 들여 ‘전국학생태권도특별연무대회’를 시공관(市公館)에서 개최했으

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강덕원(講德院) ◂ 9

며, 주최는 강덕원이 맡았다.


박철희는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 때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한국선수단이 한국
의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 내용에 태권도가 포함되자 당시 태권도의 원형으로 삼았던
‘택견’을 촬영했다. 이 사업은 문교부 체육과가 맡았다. 그는 택견 고수 송덕기를 만
나 경복궁 경회루에서 택견 동작을 3~4시간에 걸쳐 사진 촬영을 했다.
박철희는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가 창설될 당시 이종우, 엄운규, 이남석을 도와 협
회 이사로 활동하다가 197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현재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생활
하고 있다.

홍정표 강덕원 교범

홍정표는 192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남대학교를 다니다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소련군 혹은 중
국군 포로가 되었다가 만주에서 탈출했다. 그 때가 1946년이었는데, 38도선을 따라
서울에 와서 서울 종로 YMCA 권법부 옆에서 제과점을 운영했다.
그는 YMCA 권법부가 개관하자 입관해 사범인 윤병인에게 무술을 배웠다. 여름철
에는 권법부 수련생들과 난지도로 모서수련(冒暑修鍊)을 가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란을 가서 미국 부대에서 심부
름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 후 경남 합천 해인사로 건너가 임환경(林幻鏡,
1887~1983) 스님 밑에서 승려 생활을 했다. 법명은 ‘무봉’. 1954년 해인사에 중학교
가 생겨 체육교사를 하다가 그만 두고 1955년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스승 윤병인이
월북하자 이남석이 주축이 되어 YMCA 권법부를 창무관으로 바꾸자 이에 반발하면서
1956년 박철희와 의기투합해 무도원을 만든 후 강덕원을 만들었다.
홍정표가 강덕원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못한 것은 1950년대 중반 서울대학교 행정
직에 취직해 일상이 바빴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자투리 시간을 내어 법대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다가 법대에 흥무관을 만들었다. 흥무관은 서울대가 관악으로 이전하
면서 1970대 중반 폐관됐다.
박철희와 힘을 합쳐 강덕원을 만들고 초대 관장을 지냈지만 박철희가 미국으로 이
민을 가고 강덕원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서운함을 느꼈던 홍정표는 그 후부터 강덕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9


10 ▸ 국기원

원과 거리를 두었다.
홍정표는 1962년 대한태수도협회가 창립되자 이사로 활동했고, 1965년 대한태권도
협회로 개칭했어도 이사를 역임했다. 그는 제도권 활동에 관심이 없어 협회 행사 이
외에는 흥무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4년부터 종로 YMCA에서 품새 위주로 태
권도를 가르쳤다. 품새에 태권도의 무술적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2011년 1월 타계했다.

1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강덕원(講德院) ◂ 11

3. 사료 및 사진자료

가. 개요

○ 사료 총 15점
사진기록 : 11점
문서기록 : 4점

나. 세부자료

자료_강덕원_1

❏ 1949년 박철희(강덕원 창설자)가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권법부 사범 윤병인에게


받은 단증. 윤병인은 관장이 아닌 사범 칭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강덕원의
원천 뿌리가 YMCA 권법부임을 알 수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1


12 ▸ 국기원

자료_강덕원_2

❏ 강덕원 창설자 박철희 1950년대 수련 모습

자료_강덕원_3

❏ 1956년 박철희가 저술한 ‘파사권법’ 표지와 서문

1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강덕원(講德院) ◂ 13

자료_강덕원_4

❏ 박철희와 함께 강덕원을 창립한 홍정표. 그는 교범으로 활동했다.

자료_강덕원_5

❏ 1958년 강덕원 창설자 박철희(뒷줄 오른쪽)가 제자들과 수련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3


14 ▸ 국기원

자료_강덕원_6

❏ 1961년 제주도 모슬포 강덕원 소속 도장 수련생들 모습.

자료_강덕원_7

❏ 1961년 강덕원 단증

1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강덕원(講德院) ◂ 15

자료_강덕원_8

❏1960년대 강덕원 심사 모습

자료_강덕원_9

❏ 1962년 11월 강덕원 유단자회. 둘째 줄에 박철희 관장과 홍정표 교범이 앉아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5


16 ▸ 국기원

자료_강덕원_10

❏ 1962년 강덕원 해동도장 개관식 및 특별심사

자료_강덕원_11

❏ 1962년 대한태수도협회 시절, 강덕원 강원도본관 개관식

1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강덕원(講德院) ◂ 17

자료_강덕원_12

❏ 1968년 박철희 강덕원무도회장이 발급한 단증

자료_강덕원_13

❏ 1968년 강덕원 중앙 심사기념 사진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7


18 ▸ 국기원

자료_강덕원_14

❏1968년 강덕원 심사 모습

자료_강덕원_15

❏ 강덕원 창설자 박철희 원로(오른쪽)가 제자와 파사권법을 시연하고 있다.

1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강덕원(講德院) ◂ 19

4. 수련 관련 사항

가. 관훈

○ 우리는 무도를 수련하여 국민체위 향상을 도모하자.


○ 우리는 무도를 수련하여 정도선행하자.
○ 우리는 무도를 수련하여 민족사회의 모범이 되자.

나. 수련정신

○ 국민 체력향상이라는 사회적 목적과 올바른 길을 착하게 가자는 개인적 의미,


민족사회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 되자.

다. 수련형태

○ 약속대련과 격파, 형을 주로 수련함.

○ 형의 경우 평안, 진정, 공산군, 발색, 기마초단과 삼단, 발채, 완슈, 자은, 노패,
오십사보 등을 수련함.

○ 1956년 연세대와 외국어대 등 대학교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함.

○ 1958년 강덕원 지도위원 명단을 보면 사범 박철희, 교범 홍정표, 조교 이은재·


주진철·김양일로 되어 있음.

○ 1959년과 1960년 3월 경무대 경찰서 주관으로 열린 ‘대통령각하 친람 전국


무술개인선수권대회’에서 강덕원 소속 관원들 중심으로 연무가 이루어짐.
이 대회의 종목은 가라테 형과 장권형 및 대련, 팔기권 등이었음.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9


무덕관(武德館)
1. 역사 및 개요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3. 사료 및 사진자료
4. 수련 관련 사항
무덕관(武德館) ◂ 23

1. 역사 및 개요

○ 황기(黃琦)는 1945년 11월 무덕관을 개관했다고 주장. 해방 직후 서울 용산역 부근의


철도국 건물에 ‘운수부우회(運輸部友會) 당수도부(唐手道部)’에서 출발해 무덕관으로
발전함.

○ 황기의 첫 번째 지도가 2개월도 못 가서 흐지부지되었고, 1946년 초에 운수부 동료


5명과 시작한 수련도 유명무실해졌다는 기록도 있어 무덕관 전신(前身)인 운수부우회
당수도부는 1946년 이전에 생긴 것으로 보임. 무덕관 전신의 명칭도 논란거리.
‘운수부우회 당수도’였는지 ‘운수부우회 화수도’였는지 명확하지 않음. 황기는 1949년
10월 19일 제3회 ‘회수연무대회’를 개최함.

○ 무덕관은 철도국 직원이었던 황기의 영향으로 서울 용산의 철도국 부근에 있어


‘철도국 도장’이라고도 일컬어짐. 영남과 호남 등 철도를 따라 세(勢)를 확장해 대
구, 부산, 광주 등에 뿌리를 내림. 황기는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 부산
역 인근의 초량에 있는 철도 창고를 개조해 무술을 가르침.

○ 한국전쟁 이전 수련은 중국식 세법과 보법을 주로 하고 청도관과 조선연무관


영향을 받음. 초창기 수련생은 오원영·함해성·이상초·신재영·홍성균·윤재철·
김욱·김동한 등 운수부 직원들이었으나 오래 가지 못함. 그 후 무덕관에 입관한
김은창·김용덕·유화영·이강익·홍종수·최희석·유화영·남상현·김인석·이복성·황
진태·원용범·정창영 등이 실질적인 무덕관 출신이라고 할 수 있음.

○ 1947년 7월 교통부 부우회 강당에서 연무회를 개최함. 1948년 9월에는 무덕관 제1회
승단심사를 실시함. 승단심사는 매년 봄과 가을 2회 정기심사를 함. 1949년 10월
제3회 화수도연무대회를 교통부우회 후원으로 교통학교 강당에서 개최함.

○ 1953년 서울로 돌아온 황기는 용산에 대한당수도협회(大韓唐手道協會)를 창립하고


1955년 5월 서울역 부근으로 무덕관 중앙본관을 이전. 1955년 전국에 9개 지관을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3


24 ▸ 국기원

개관하고 ‘한중친선당수도국술연무대회’를 개최하는 등 당수도 연무대회를 지속적


으로 개최하며 무덕관을 확장해 나감.

○ 1960년 제25회 승단심사에는 500명이 응심했고, 그해 10월에 열린 제26회 심사에는


경인지구에서만 400명이 응심함. 이 밖에 대구지구, 대전지구, 부산지구, 광주지구
에서도 심사가 열리는 등 무덕관의 성장세가 두드러짐.

○ 1960년 11월 무덕관 창립 15주년 기념 한-미-중 친선 당수도연무대회가 교통부


부우회관에서 열림. 한국에서는 무덕관과 지도관, 미국에서는 미8군 당수도부,
중국에서는 재한중국국술부팀이 참가함.

○ 1960년대 전북지역에 무덕관 지관을 생김. 철도공무원 오용균이 익산에서 지관을


개관한 후 정읍 조규수, 고산 김정수, 신태인 박효준, 대야 박장규, 익산 이상인이
지관을 개관함.

○ 무덕관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포고령으로 문교부에서 무술 유사단체 통합을


요구할 때 종신제 심사위원을 요구하며 통합에 동참하지 않음. 황기가 통합에 반대
하면서 무덕관 내부는 통합에 반대하는 대한수박도회 쪽과 통합에 찬성하는 파로
분열됨.

○ 당시 대한수박도회에 속한 무덕관 계열의 도장은 대한체육회 산하 단체인 대한


태수도협회 소속이 아니어서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고 공인 단증
취득도 할 수 없게 됨. 1965년 3월 중앙의 고참 사범들과 각 시도본관장들이 마
포도장에 모여 통합에 반대하는 황기 측과 결별하더라도 독자적인 길을 가가로 의
견을 모음. 그 후 통합에 찬성한 이강익과 홍종수 등은 대한수박도회를 나와 무
덕관을 정비해 협회에 가입함.

2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무덕관(武德館) ◂ 25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가. 계보도

❍ 관장계보
창설자 및 초대 관장
황 기

2대 관장
이 강 익

3대 관장
홍 종 수

4대 관장
김 인 석

5대 관장
최 남 도

6대 관장
홍 종 수

7대 관장
전 재 규

❍ 시대별 무덕관 출신 인사
김인석, 남삼현, 서상렬, 원용범, 유화영, 이강익, 이복성, 정창영, 최희석, 홍종수,
1940년대
황진태 등

강효종, 고의민, 김광수, 김봉철, 김정수, 문성열, 박명환, 박장규, 박효준, 백낙원,
1950년대 양준목, 오광웅, 오용군, 유봉호, 이상인, 이억천, 이진수, 전재규, 정해열, 조규수,
조남동, 지상섭, 차영수, 최남도, 한용석, 황춘성 등

고한수, 김세혁, 김영숙, 김창수, 김현성, 노우종, 박경환, 오세영, 오수곤, 윤웅석,
1960년대
이 봉, 이영석, 임춘길, 주신규 등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5


26 ▸ 국기원

나. 주요인물 생애사

황기 무덕관 창설자

1935년 경기상고를 졸업한 황기는 남만주 철도국에 입사했다. 이 무렵 우연히 무


술 고수를 만나 태극권과 십팔기 등 중국무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황기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미군정이 관할하는 철도국에 근무하며 운수
부에 무술을 가르치는 도장을 개관했다. 이를 두고 ‘운수부 화수도 도장’ 혹은 ‘운수
부 당수도 도장’이라고 한다.
그 후 황기는 청도관과 조선연무관과 교류하면서 가라테를 접했고, 철도국 도서관
에서 가라테 서적을 공급받아 독학으로 가라테의 기술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
만 그 당시 황기는 가라테보다 화수도(花手道)에 더 심취했다. 황기는 화수도를 사용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화(花)’자는 과거의 화랑도의 두자(頭字)를 채택한 것이니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전통으로 비추어 보더라도 의미심장한 바가 있음은 재언은 불요하니 (생략) ‘수(手)’
자는 당수도의 수자를 인용함도 되지마는 수라함은 손을 의미함이요 또 사람을 표현
함이요 나가서는 자격 실력이나 물리학적 표현도 되어 어원, 어감도 대단히 부드러워
넉넉히 사도(斯道)의 대표어로서 채택되어 부끄럼이 없다고 생각된다 (생략) ‘도(道)’
자인데 이 자는 고래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말이며 이에 대하여는 현명한 세인이 다
주지하는 사실임으로 다언을 피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삼문자로 합하여 ‘화수도(花手
道)’라 칭하게 된 것이다.” <황기(1949), 화수도교본, 조선문화교육출판사>
하지만 황기는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당수도(唐手道)’를 쉽게 포기하지 못했
다. 1958년 발행한 당수도교본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고백
했다.
“일반 대중은 ‘당수도’라고 하여야 잘 알아듣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창설 초
기인지라 일반적으로 온당한 인식과 보급을 조속하게 하려면 일반이 잘 알고 있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기 때문에 (생략) 우리나라에 적합하고 이상적인
명칭을 마련하여 나아갈 방침인 만큼 당수도라는 이름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명칭
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황기(1958), 당수도교본, 계량문화사>
황기는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수박도(手搏道)’에 빠졌다. 1956년 무예도보통지

2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무덕관(武德館) ◂ 27

를 접하게 되면서 ‘수박도’라는 명칭으로 정착하게 된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 2년에


걸쳐 필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박도’라는 명칭을 제정하게 된 것이다.
황기는 1950년대 후반부터 태권도 통합파와 갈등을 빚었다. 1959년 육군 소장 출
신인 최홍희가 문교부 체육과장과 대한체육회 이사가 입회한 가운데 청도관·오도
관·송무관·창무관·지도관·무덕관 등 6개 관(館) 대표들이 모여 대한체육회 회의
실에서 대한태권도협회(大韓跆拳道協會)를 창설했다. 이 때 황기는 무덕관 대표로 참
여해 이사장 직책을 맡았다.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기 전 협회 명칭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자 노병직과 윤쾌병, 이종우 등이 ‘공수도’를 내세운 반면 그는 ‘당수도’를 고집
했다. 왜 ‘수박도’라고 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황기는 1960년 대한당수도협회를 대한수박도회로 바꾸고 문교부에 사단법인 신청
해 그 해 6월 인가를 받았다. 하지만 수박도는 당수도와 큰 차이가 없었다. 대한수박
도회를 정식으로 내걸었지만 황기는 당수도 명칭에 거부감이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
에 황기가 말하는 수박도는 곧 당수를 말하고, 그가 이야기하는 수박도는 타격기로서
맨손무예를 지칭하는 대단히 포괄적인 용어로. 역사적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의
화랑에 대한 언급은 물론 중국의 역근경이나 조선시대의 무예도보통지를 모두 아
우르며 역사기술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1960년대 초반 태권도 경기화가 본격화하자 태권도인 사이에 찬반 논쟁이 벌어졌
다. 이 때 황기는 최홍희와 함께 경기화를 반대했다. 황기는 태권도를 무술로 규정하
고, “경기화는 결과적으로 무도정신(武道精神)을 무시하게 되고, 단(段)·급(級)의 심
사제도가 불필요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황기는 1960년대 중반까지 무덕관 중앙도장에 ‘대한수박도회’ 간판을 내걸 정도로
‘수박도’에 심취했다. 이 시기 각종 대회와 연무시범, 심사가 성황리에 열렸다. 이처
럼 황기가 ‘수박도’를 고집하면서 1960년 초 대한태수도협회와 1965년 대한태권도협
회 창립 과정에서 노병직, 이남석, 이종우, 엄운규 등 협회 창립파와 의견을 달리 하
였다. 1962년 8월, 황기는 대한태수도협회의 기본 이념과 운영방법이 문제가 있다고
하며 탈퇴했다. 아마도 30대의 젊은 제자들이 의기투합해 협회 운영을 주도해 나가
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기는 1965년 또 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그 해 1월 말레이시아 대사직을 마치고
귀국한 최홍희는 자신을 둘러싼 영향력을 활용해 대한태수도협회 제3대 회장에 취임
하고 협회 명칭을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했다. 그 당시 황기는 대한수박도회를 사단
법인체로 등록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지만, 최홍희가 주도한 태권도계 통합에 동참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7


28 ▸ 국기원

해 무덕관 대표 자격으로 통합선언서·통합합의서·통합취지서에 합의했다. 황기는


“최홍희가 회장을 하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최홍희의 회유와
대세(大勢)에 따라 통합서에 날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5년 3월 18일, 최홍희가
주축이 된 각 관의 대표자들은 대한체육회(당시 서울시청 건너편) 대강당에서 ‘태권
도 통합선언식’을 가졌다. 그러나 그 다음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황기가 통합선언
식은 ‘무효’라며 번복했다. 당시 황기와 독대한 홍종수(무덕관 지도사범)는 “황기 관장
의 무효선언은 뜻밖의 일이었다. 무덕관의 앞날과 황기 관장의 위상을 위해 하루 반
나절을 충심으로 직언했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황기 관장이 끝까지 고집을 피우자 무덕관 고단자들이 크게 반발했다. 황기가 무
덕관 관장이지만 개인적인 견해를 무덕관의 전체적인 입장인 양 호도해선 곤란하다
며 맞섰다. 고단자들은 별도로 모임을 갖고 심사숙고 끝에 통합 약속을 이행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김영택은 황기의 독단적인 결정에 따를 수 없다며 그의 출관(出館)을
주장했다. 무덕관에서 제명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김영택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최
홍희가 주도한 태권도계 통합에 기여해 최홍희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었
다. 그러나 무효 선언을 번복하도록 다시 한 번 종용하자는 내 건의에 따라 고단자
들은 마지막으로 황기 관장을 설득할 요량으로 황기를 찾아갔다. 그러나 요지부동이
었다.” <서성원(2014), 태권도뎐, 애니빅>
이른바 ‘황기 파동’을 최홍희도 불쾌하게 여겼다. 황기가 협회 통합을 놓고 변덕을
부리고 엉뚱한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그 후 황기는 무덕관 최고 의결기구인 시·도 본관장회의에서 제적당했다. 무덕관
제자들과 결별한 황기는 1965년 8월 필리핀, 66년 9월 말레이시아, 67년 월남에 무
덕관을 설치하는 등 꾸준히 활동했다. 또 65년 5월 문교부가 일방적으로 사단법인
대한수박도회의 법인체 허가를 임의로 취소하자 이에 불복하고 고등법원에 행정소송
을 제소, 66년 6월 대법원에 상고된 행정소송에서 승소했다.
이처럼 태권도 무덕관과는 별개의 유파를 형성하며 활동 반경을 넓혀온 그는 1988
년 5월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대한수박도회 무덕관을 이전하고 국내보다는 국외에
수박도를 보급하며 대한수박도회 이사장과 무덕관 관장을 겸직했다. 1995년 9월에는
수박도회가 주최한 무덕관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시범을 보이며 수박도 수련의
목표는 ‘활(活)’이라고 밝혔다. 황기는 2002년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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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덕관(武德館) ◂ 29

홍종수 무덕관 3대 관장

우당(愚堂) 홍종수는 1930년 서울 마포구 아현동 354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


났다. 서울 심산소학교 4학년 때 유학자인 조부를 따라 만주 길림성 통하로 전 가족
이 이주하게 되면서 만주에서 보고 접한 무술의 매력에 빠지며 무도 수련의 길로 들
어서게 된다.
광복 직후 귀국한 홍종수는 미군정청 운수부에 취직한 것이 인연이 되어 황기 관
장을 만나게 된다. 1945년 11월 무덕관 창설자 황기는 청년 홍종수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
홍종수는 불과 2년 만인 1947년 미 군정청 운수부 공작창에 무덕관 지부도장을 차
리고 정식 사범으로 활동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철도 경찰에 입대한 홍종수는 지리산 무장공비 소탕 작전 등
전투에 참가하면서도 배낭에는 항상 도복을 넣고 다녔다. 전쟁 중인 1950년 11월에
는 치안국 철도경찰국 교육을 수료했다.
전쟁 후 홍종수는 경북경찰국 수사과에 근무를 하면서 1953년 경북 무덕관을 대구
소방서 옥상에 열었다. 그 때 홍종수 첫 제자로 최남도(무덕관 4, 5대 관장)와 후배
인 지상섭(경북 2대 관장), 문순선 등의 훌륭한 후배와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게 된
다. 차영수, 김봉철 등은 당대에 이름을 떨친 제자이다.
홍종수는 1953년 9월 무덕관 경북본관장 겸 경북당수도협회 이사장에 취임하게 되
고 11월에는 육군 제2군 사령부 전임사범으로 군인들을 지도하게 된다.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경북 무덕관은 홍종수의 지도 아래 관세가 날로 확장되었
다. 최남도는 대신동에, 지상섭은 남부도장, 차영수는 북부도장, 김종철은 서부도장, 문
수선은 2군사령부 도장을 연이어 개설, 경북 당수도(태권도)의 중흥기를 맞는다.
1958년 홍종수는 무도와 삶을 같이하기로 맹세하고 경찰을 떠나게 된다. 경북무덕
관은 무려 4백 60개 산하 지부도장에 이르는 관세를 확장하게 된다. 1960년 경북 무
덕관 초대 관장인 홍종수가 중앙 본관장의 부름에 서울로 거처를 옮겨가게 되자 후
임에 지상섭이 경북 무덕관 제2대 관장직을 맡았다.
1962년 5월 무덕관 중앙본관 부관장에 취임한 홍종수는 1966년 2월 대한태권도협
회(KTA) 섭외이사, 1969년 1월 KTA 전무이사로 피선되고, 그해 5월 처음으로 한 달
간 미국 태권도계 시찰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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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국기원

1971년 7월에 무덕관 중앙 본관 제3대 관장에 취임한 후 1972년 1월 KTA 기술심


의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어 1973년 7월 세계태권도연맹(WTF) 실행위원에 임명되
고, 국기원 부원장에 취임했다. 당시 43세였다.
1970년대 김운용의 태권도계 등장은 중앙도장(국기원) 건립에 이어 WTF 창설, 관
통합 추진과 협회형(품새) 보급, 그리고 해외사범파견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되며 특히 국제스포츠로서의 태권도가 발돋움하게 되어 우리나라 고속
경제성장과도 맥을 같이하게 된다.
1980년 8월 홍종수는 국기원을 떠나 1982년 2월 무덕회 회장으로 취임하고, 그 해
7월 다시 국기원 부원장을 맡았다.
1986년 봄 홍종수는 아시아 7개국을 순방하면서 한일국교 정상화 문화교류사절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1987년 1OC 본부 및 유럽순회 한국태권도 시범단 단장으로서 태
권도 홍보를 통해 민간 외교의 역할을 수행했다. 1989년 대한태권도협회 상근부회장
이 되어 그 해 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 한국 대표팀 단장, 9월에는 잠실벌에서 펼쳐
진 제9회 세계대회 조직위원회 부원장직을 맡았다.
1990년부터 95년도까지 대한체육회 대의원으로 활동했고, 1998년 대한올림픽위원
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태권도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던 1998년 9월 췌장암 검진 결과가 나오자 강효종(한양대 교수)을 아우로, 강
신철(고수회 회장)을 양자로 맞아들인 후 영면했다. 10월 28일, 발인은 대한태권도협
회장으로 국기원에서 500여 명의 조문 속에 영결식을 치렀다.

김인석 무덕관 4대 관장

김인석은 1945년 11월, 무덕관에 입관했다. 당시 무덕관은 철도국 총무과에서 근


무하던 황기가 젊은 시절 중국에서 터득한 무술을 응용하여 철도국 직원들을 대상으
로 태권도(당시 당수도)를 가르쳤다. 따라서 수련도장은 철도국 직원들이 쉽게 찾아
올 수 있는 철도국 관할의 강당이나 창고 등지를 활용했다고 한다.
최초로 무덕관이 개관한 것은 용산역 부근의 창고(현재 고려대학교 부속병원 근처)
였다. 그가 무덕관을 택한 것은 철도국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경성공립직
업중학교를 중퇴(2학년)하고 철도국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때 나이 스무 살
이었다.

3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무덕관(武德館) ◂ 31

“무덕관의 수련생은 모두 철도국 직원이었어요. 청도관이나 연무관처럼 일반 학생


들이 없었지요. 따라서 수련시간도 방과 후가 아닌 점심시간(12-13시)에 짬을 내서
틈틈이 수련했어요. 당시 관원들은 무명광목으로 된 도복을 입고 수련을 했는데, 관
장이었던 황기씨는 주로 족기를 많이 가르쳤습니다. 물론 하단막기(아래막기), 중단전
진(몸통지르기) 같은 기본동작은 꾸준히 훈련했고요.”
당시 수련내용은 무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정신과 기본동작을 지도했었
는데, 주요 수련은 형(품새)이었다. 형의 종류에는 소림류(평안, 공상군 등)와 소령류
(철기, 십수형 등)가 있었는데, 무덕관에서는 형의 명칭을 중국어로 불렀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에서 무예를 익힌 황기의 영향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련(겨루기)은 각
기간도장의 특성에 따라 그 도장 나름의 기술을 연마했다고 한다.
당시 무덕관 초창기의 관원은 김웅창을 비롯하여 최이석, 한영태, 홍종수, 정창영
등이었다. 관번은 김웅창이 1번이었고, 홍종수는 10번이었다. 나머지 관원들은 6.25
때 사망하거나 북으로 납치되었고, 그나마 수련을 계속하던 관원들은 1·2단 유단자
가 된 후에 그만 두었다. 유단자 심사는 6개월에 한 번씩 열렸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인석은 황기와 함께 부산 초량에 자리
잡은 철도국 건물에 임시방편으로 도장을 만들어 후진육성을 했다. 이에 대해 김인석
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황기 선생님은 수련생 지도에 열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부산 초량에 도장
을 만들 때는 목재가 턱없이 부족해 경북 봉화까지 가셔서 목재를 구해 오시기도 했
지요. 그러나 도장은 상황에 따라 자주 옮겨 부산 부두의 한 창고에서 수련생을 가
르치기도 했습니다. 수련생은 대부분 학생들로 80여 명 됐는데, 이억천, 장길용, 최춘
식씨 등이 참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그 후 휴전이 되자 그는 철도국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뒤늦게 입대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살로 이미 혼인하여 아내가 있는 처지였다. 3년 간의 군복무를 마친 뒤 고
향(경기도 광명)에 돌아온 그는 생계유지를 위해 새로운 일거리를 모색해야만 했다. 그
때 그가 택한 것이 태권도장을 개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는 도
장을 개관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그는 장남이었다.
“아버님을 설득하여 논 다섯 마지기를 팔아 안양 한복판에 도장을 열었습니다. 도
장은 대략 40평 정도 됐는데 한 달 임대료가 3만원이었어요. 그런데 수련생(한 달
수련비 50원)이 적다보니 임대료 내기조차 힘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돈을 벌기
보다 태권도를 가르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고생은 없었습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31


32 ▸ 국기원

그가 1959년 개관한 도장은 ‘무덕관 안양본관’으로 초창기 수련생은 40여 명이었


다. 그 후 그의 노력으로 수련생은 점점 늘었다. 당시 그의 지도방침은 무도수행을
위한 윤리관 추구였다. 올바른 인격체 양성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태권도
수련은 여느 도장과 마찬가지로 형, 대련, 격파 등이 행해졌으나 무도로서의 인격수
양을 추구하기 위해 형(품새) 중심으로 수련을 했다고 한다.
1950년대 행하여졌던 형(품새)은 상대방 없이 혼자서 겨룰 수 있도록 공격과 방어
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동작과 그에 따른 움직이는 방법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각 관
의 특징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1960년대 초반 태권도 통합기구가 조직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할 때 그는 묵
묵히 자신의 도장에서 수련생을 지도하는데 전념했다. 당시 그는 경기도 광명과 안양
이 생활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중앙 행정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입신
을 위해 중앙협회를 찾아가 한자리 맡겨 달라고 요구할 성품도 아니었다.
김인석은 경기도 광명 고향집과 안양 도장을 오가며 태권도 보급과 후진양성에 심
혈을 기울였다. 그는 당시의 도장 상황에 대해 “적자를 어렵게 면하는 도장이었기 때
문에 사범을 둘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초보 사범들에게 관원 지도를 맡길 생각
도 없었다. 그 당시 가장 어려웠던 점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간을 엄수해 도장에
나가는 것이었다. 오전에는 집안에서 일 좀 보다가 오후 2시에 안양도장으로 가서
수련생을 지도한 후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데, 때론 막차를 놓칠 때도 있어 안양에서
광명까지 걸어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15년 가까이 후진양성에 전심 전력한 후 1970년대 대한태권도협회로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1973년 대한태권도협회 경기분과위원장을 맡은 그는 “일본 유도
의 실패 원인은 기술만 넘겨주고 주체성을 고려하지 않은데 있다. 따라서 이번 제1
회 태권도 세계대회에서는 종주국의 주체성을 살려 경기 용어를 계속, 갈려, 그만,
차렷, 시작, 경례 등의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15년 2월 타계했다.

3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무덕관(武德館) ◂ 33

3. 사료 및 사진자료

가. 개요

○ 사료 총 27점
사진기록 : 21점
기타 문서기록 : 6점
단증 2점, 문서기록 4점

나. 세부자료

자료_무덕관_1

❏ 무덕관의 뿌리가 된 ‘운수부 당수도부’, 황기 관장과 제자들이 행사를 마치고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33


34 ▸ 국기원

자료_무덕관_2

❏ 무덕관 창설자 황기

자료_무덕관_3

❏ 1949년 7월 교통회관 강당에서 열린 제3회 화수도연무대회 포스터. 이 시기에 무덕관


안에서는 ‘화수도’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3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무덕관(武德館) ◂ 35

자료_무덕관_4

❏ 1960년대 초반, 서울시 중구 동자동에 있던 무덕관 중앙도장 사무실 전경. 이 사무실은


1955년 5월 이 곳에 개관을 한 후 64년 수리를 했다. 황기 제자였던 홍종수가
정장차림으로 서 있다.

자료_무덕관_5

❏ 1950년대 정창영이 운영한 무덕관 효장동 지관에서 열린 무덕관 제2회 유단자 심사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35


36 ▸ 국기원

자료_무덕관_6

❏ 1967년 무덕관이 발급한 단증. 소속은 사단법인 대한체육회태권도협회

자료_무덕관_7

❏ 1960년대 무덕관에서 사용한 심사원서.

3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무덕관(武德館) ◂ 37

자료_무덕관_8

❏ 무덕관 창설자 황기가 출간한 무술교본. 제자들을 가르칠 때 활용했다.

자료_무덕관_9

❏ 1964년 무덕관 소속 경북 대봉도장 승단심사 기념사진. 무덕관 도복이 이채롭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37


38 ▸ 국기원

자료_무덕관_10

❏ 1960년대 초 무덕관 수련모습

자료_무덕관_11

❏ 무덕관 심벌마크

3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무덕관(武德館) ◂ 39

자료_무덕관_12

❏ 1960년대 수박도 무덕관 승급심사

자료_무덕관_13

❏ 1960년대 중반 무덕관 승단심사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39


40 ▸ 국기원

자료_무덕관_14

❏ 1960년대 초 무덕관 수련 모습

자료_무덕관_15

❏ 1960년대 초 무덕관 연무시범대회

4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무덕관(武德館) ◂ 41

자료_무덕관_16

❏ 1960년대 초 무덕관 제35회 유단자 심사. 황기 관장(왼쪽에서 네 번째)과


홍종수 사범(왼쪽에서 세 번째)이 나란히 앉아 심사를 지켜보고 있다.

자료_무덕관_17

❏ 1960년대 초 무덕관 홍종수 사범(앞줄)이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41


42 ▸ 국기원

자료_무덕관_18

❏ 1960년대 초 무덕관 황기 관장(가운데), 홍종수 사범(왼쪽).

자료_무덕관_19

❏ 1960년대 초 서울역 인근에 있었던 무덕관 앞에서 무덕관 관원들이 수련을 하고


있다.

4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무덕관(武德館) ◂ 43

자료_무덕관_20

❏ 1960년대 후반 무덕관 홍종수 관장(왼쪽에서 세 번째)과 경북무덕관 최남도 1대


관장(오른쪽).

자료_무덕관_21

❏ 1960년대 후반 무덕관 홍종수 관장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김영숙 수련생이


손날격파를 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43


44 ▸ 국기원

자료_무덕관_22

❏ 1965년 무덕관 정기총회를 마치고 기념촬영 모습

자료_무덕관_23

❏ 1965년 무덕관 홍종수 8단증

4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무덕관(武德館) ◂ 45

자료_무덕관_24

❏ 1968년 무덕관 총북도본관 승단심사를 마치고 기념촬영

자료_무덕관_25

❏ 1970년대 무덕관 소속 도장 승급심사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45


46 ▸ 국기원

자료_무덕관_26

❏ 1970년대 초 무덕관 출신 김영숙 관장이 무덕관 도복을 입고 태권도를 지도하고


있다.

자료_무덕관_27

❏ 1990년대 후반 무덕관 창설자 황기 관장이 행사에 참석함

4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무덕관(武德館) ◂ 47

4. 수련 관련 사항

가. 관훈 : 무실 성의 정의

나. 수련정신

○ 참되고 실속있으며, 진실되고 정성스럽게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를 행하라.

○ 무덕관 10개 신조
- 나라에 충성 : 화랑 정신에 입각하여 국가와 민족의 대의에 순함
- 부자 간 효자 : 아들은 부모에 효하고 부모는 아들에게 자함
- 부부의 애정 : 이성간 정과 애로써 화합하여 인류 행복 발전의 모체가 됨
- 형제지간 상협(相協) : 형제간 협조화목하여 단결함
- 노소지간 경보(敬保) : 예의겸양하며 정당한 역자를 보호함
- 사제간 의리 : 의정(義情)으로 진리를 배움
- 봉우간 유신(有信) : 친우는 물론 인류는 상호 신임화합하여 평화 행복함
- 살생분별 : 선악을 공평 정당하게 구별함
- 임전무퇴 : 실력 용기를 구비 매진하여 정의를 위해 희생함
- 실천필부 : 희망을 품고 반드시 실행함

다. 수련내용

○ 몸풀기, 기본동작, 기본형(50가지), 나이한찌, 찐또, 시수, 노하이, 공상군, 시샨,


왕수. 연속겨루기(삼수식, 일수식, 자유일수식), 자유대련. 호신술, 낙법, 무기술,
소림류, 소령류.

○ 수련 시간은 1시간 30분 이내. 초창기 철도국 직원들을 가르칠 때는 중국식


세법과 보법도 지도함.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47


48 ▸ 국기원

- 한국전쟁 전 수련시간은 방과 후가 아닌 점심시간에 시간을 내어 틈틈이


수련함.
- 당시 관원들은 무명, 광목으로 된 도복을 입고 수련을 함.

○ 황기는 주로 족기(足技)를 많이 가르침. 하단막기(아래막기) 중단공격(몸통


지르기) 같은 기본동작도 꾸준히 수렴함.
- 형은 소림류(평안, 공산군 등)와 소령류(철기, 십수형 등)를 했는데, 형 명칭을
중국어로 부르기도 함. 이는 중국에서 무술을 익힌 황기의 영향 때문임.

○ 1953년 무덕관 수련은 기마자세(주춤서기), 공격과 방어(상단 중단 하단), 막기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를 주로 함.
- 수도(手道)를 많이 함. 발차기는 발등이 아닌 발축을 사용함. 전굴(앞굽이)
은 옆으로 보폭을 넓게 함.

○ 수련 과정은 처음 몸풀기를 하고 기본동작, 기본 형, 삼수식, 일수식, 자유일


수식 같은 연속대련을 함. 그 후 자유대련을 함. 대련은 1보 대련, 3보 대련,
대련 3가지로 구분함.

○ 추가로 호신술과 낙법, 무기술도 함.

라. 심사형태

○ 3월과 10월 등 1년에 2번 심사. 1948년 9월 제1회 승단심사 개최.

○ 1960년대 초 6개월에 1번씩 심사. 1960년 제25회 승단심사에는 500명 응심.


주로 학생들이 많음. 전남본관과 경북본관 등 시도본관과 각 지관에서도
정기심사와 유단자 심사가 활발하게 열림.

○ 초단은 밧사이, 2단은 나이한찌, 3단은 십수를 함. 자유형과 무작위로 형 하


나를 선택함.

4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무덕관(武德館) ◂ 49

○ 겨루기는 초단은 유단자 2명 이상, 2단은 2대 1, 3단은 3대 1. 4단 이상은


논문 추가.

○ 심사에 떨어질 경우 단보를 주고 승단을 6개월 지연함


- 승급심사는 1년에 2회. 백(7-8급), 청(4-6급), 홍(1-3급)
- 승급심사의 경우 7-8급 넘어가면 기본동작 생략하고 대련과 겨루기로 심사.
지도자마다 재량권이 있었음.

○ 승단심사의 경우 형과 대련은 필수. 격파, 호신술은 심사관의 재량.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49


송무관(松武館)
1. 역사 및 개요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3. 사료 및 사진자료
4. 수련 관련 사항
송무관(松武館) ◂ 53

1. 역사 및 개요

○ 송무관은 1944년 3월 노병직이 황해도 개성시 자남동에 개관함. 노병직은 “1944년


2월에 완전히 고향에 돌아온 나는 친구들과 후배들이 찾아와 도장을 차리고 공수도를
가르쳐 달라는 간청에 용기를 내고 도장을 차릴만한 장소를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 고민하던 중 개성시 중앙부에 있는 자남동 소재 관덕정이 좋겠다는 의견을
모아 그 곳에 도장을 차리기로 결정했다.”고 증언함.

○ 당시 허가원 내용은 ▷단체명=공수도 송무관 ▷장소=개성시 자남동 관덕정 구


(舊) 정자건물 ▷지도사범=노병직 ▷교습시간=매일 아침 6시부터 2시간이었음.

○ <동아일보> 1948년 11월 9일자에는 송무관 창립 1주년 창립대회를 송도대강당에서


개최했다고 보도함. 따라서 송무관 공식 창설은 1947년 11월로 추정됨. 노병직은
1944년 3월 송무관을 창설하고 교습을 중단했다가 1946년 5월 경기도 개성시
동흥동에서 송무관을 재발족했다고 주장함.

○ 송무관이라 이름붙인 이유는 소나무(松)는 상록수로 사계절 언제나 푸르며 젊음과


삶의 생기 및 약동을 뜻했고,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나무였기 때문임. 여기에 노병직이
일본 유학시절 가라테를 전수받은 송도관(松濤館)의 ‘송(松)’자를 차용함.

○ 송무관의 관훈은 예의존중·극기겸양·부단노력·최웅만부·문성겸전. 송무관 5대


관장인 강원식은 “60년대까지는 관원 선서가 존재했지만 중앙도장에는 관훈이 존
재하지 않았다. 전라도 지역의 송무관 지관에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정함.

○ 1944년 7월 제1회 승급심사를 시행함. 응심 인원은 11명으로, 심사종목은 태극초단


3단형, 평안초단 3단형, 삼보대련임. 6급 합격자는 오경환·백태식·김영훈·이종만·
이회순·이경문·박준영·한명순이었고, 7급 합격자는 박면재·김인홍·김재 등이
었음.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53


54 ▸ 국기원

○ 송무관의 승단심사 초단은 평안 오단·철기 초단·진테 중 2개를 지정하고 자유


대련 2번과 호신법과 격파였음. 2단은 철기 이단·발새 소·반월·공산군 소·진테·
십수 중에서 형 하나를 지정해 심사를 봄.

○ 한국전쟁이 끝난 후 개성이 북한 영토로 편입되면서 송무관은 서울과 인천을


근거지로 지관을 확장해 나감. 1967년 11월 서울시 중구 중림동으로 중앙본관을
이전한 송무관은 1971년 5월 ‘송무관노병직배쟁탈개인선수권대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히 활동함.

5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송무관(松武館) ◂ 55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가. 계보도

❍ 관장계보

창설자 및 초대 관장

노 병 직

2대 관장

이 영 섭

3대 관장

송 태 학

4대 관장

강 원 식

5대 관장

전 정 웅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55


56 ▸ 국기원

❍ 시대별 송무관 출신 인사

김영훈, 김인홍, 김홍빈, 박면재, 박준영, 백택식, 송태학, 오경환, 이경문, 이영섭,
1940년대
이종만, 이회순, 이희진, 최동희, 한명순, 한상민 등

강신익, 강용래, 강원식, 김건환, 김경호, 김도기, 김동식, 김석우, 김일상, 김일주,
김치규, 곽인득, 노일환, 류호평, 문현상, 민철남, 문화룡, 민병석, 박길준, 송문호,
1950년대 안철환, 엄영철, 윤치영, 이원석, 이도윤, 이영상, 이치문, 임석환, 장진일, 장한걸,
전정웅, 정영진, 정재호, 정진무, 조규장, 조태성, 최무장, 최인수, 하대영, 하상우,
한문복, 홍영찬, 황명송, 등

강석주, 강우진, 김도기, 김명현, 김양기, 김용길, 김웅수, 김주환, 김진성, 김재환,
1960년대 김춘근, 문현상, 박경한, 박용덕, 박잉권, 안기석, 유호평, 이근만, 이병로, 이영일,
이제근, 이호성, 임현순, 임정호, 장화돈, 정종국, 지용태, 최재현, 최창신 등

5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송무관(松武館) ◂ 57

나. 주요인물 생애사

노병직 송무관 창설자

노병직은 1919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6년 12월, 일본 가라테의 본산으로 일


컬어지고 있는 공수도 송도관(松濤館)에 입관해 1944년 고향으로 귀향할 때까지 일본에
서 공수도 수련과 연구에 몰두했다.
노병직은 1939년 일본에서 가라테를 수련할 당시의 빛바랜 사진을 2007년 태권도신문
사에 보내 왔다. 그는 이 사진에 대해서 “6.25 동란과 1.4 후퇴 때 피란을 가면서 이 사
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다가 몹시 구겨졌는데, 천만다행으로 가장자리만 구겨져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병직은 이원국과 애증의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1940년대 일본 유학시절부터
이원국과 알고 지냈던 노병직은 송무관과 청도관 개관 시기를 놓고 인식이 달랐다.
노병직은 1998년 송무관 제자인 강원식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55년 청도관 고문 겸 명예관장으로 영입된 최홍희 장군은 고위 장성들과 사회
저명인사들을 청도관 고문 또는 이사들로 끌어들여 청도관 발전에 기여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국씨가 최 장군에 대해 이런 저런 (비판의) 말을 할 수 있느
냐 (…) 이원국씨가 1950년 6월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말은 6.25때 북괴의
부역을 했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핑계로 보인다. 이원국씨는 46년부터 50년 6.25동
란까지 4년간 당수도계에 있었을 뿐이다. 그 후 현재까지 수십 년 동안 국내 태권도
계와 관계를 맺지 못했고 기여를 하지 않은 사람이다.” <서성원(2014), 태권도뎐, 애니빅>
대한공수도협회 및 대한태수도협회 창립에 참여한 노병직은 1963년 12월, 한국 태
권도국가대표선수들이 일본 공수도 선수들과 친선 경기를 하러 일본을 방문할 때 감
독을 맡았다. 1966년 최홍희의 뒤를 이어 1년 동안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직을 역임한
노병직은 60년대 후반 국제태권도연맹(ITF) 부총재로 활동했다. ITF 총재였던 최홍희
는 그를 ‘개성 깍쟁이’라고 불렀다.
최홍희는 노병직처럼 이남석과 남태희도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지 못한다며 은근히
자신을 과시했다. 1980년대 중반 미국 미네소타주로 이민을 간 노병직은 1992년 12
월 제자 강원식의 요청으로 대한태권도협회가 주최한 제1회 태권도한마당 개회식에
서 고수(高手) 품새 시연을 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57


58 ▸ 국기원

2007년 10월 고국을 방문한 그는 강원식·이승완·최창신 등과 점심식사를 함께


하며 해방 이후 태권도 모체관(母體館)의 태동과 현대 태권도의 발자취 등을 이야기
하면서 “태권도 현대사는 올바르게 기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4년 9월 4일
태권도원 공식 개원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그는 우석대 태권도학과 재학생
들과 지역 태권도인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강연에서 “후배들의 열정과 노력으로 태
권도의 세계적 위상이 한층 높아져 선배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오늘의 성과에 자
만하지 말고 나를 위한 태권도가 아닌 우리를 위한 태권도라는 마음가짐을 잃지 말
고 계속 정진해 달라.”고 말했다.

강원식 송무관 4대 관장

강원식은 1938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1952년 선린중 재학 시절 동네에 송무관 공수


도 도장이 있어서 그 곳에 태권도를 배웠다. 여기서 송무관 창설자 노병직을 만났다.
부친은 마포에서 큰 제재소를 경영해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1960년
군을 제대한 그는 자신의 집 3층에 사범을 채용해 도장을 차렸다. 제재소 사업을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 시작한 도장이 그를 평생 태권도인으로 만들었다. ‘송무관 마포
본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4년간 태권도를 가르쳤다.
1973년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당시 조직위원회에서 시설부장으로 일한 그는
대한태권도협회 사무차장이 되어 단(段) 문제를 바로잡는 일에 주력했다. 그 때만 해도
9개 관에서 서류를 올리면 협회에서는 바로 단증을 발급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폐단이
많았다. 각 관에서 제대로 심사도 보지 않은 사람을 추천해 단의 권위가 실추됐다.
강원식은 이런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김운용 회장에게 ‘인준 단’을 없애자고 건의
했다. 그리고 각 관의 관장들에게 인준 단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각 관의
관장들은 싫어했지만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각 관의 반대가 만만찮았다. 그래서 그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당시 협회
부회장이었던 엄운규 등과 상의해 단증 번호 앞에 ‘명예’의 영어 표기인 ‘아너
(Honor)’의 첫 자를 따 ‘H’자를 붙이기로 했다.
강원식은 각 관의 관장들과 충돌이 잦았다. 1970년대 후반 강원식이 주도한 관 통
합 추진 과정에서도 각 관의 관장들은 반대했고, 김운용도 미온적이었다. 그 때 강원

5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송무관(松武館) ◂ 59

식은 이종우의 도움을 받아 관 통합을 밀어붙였다.


1980년 집권한 전두환 5공화국의 사회정화 바람은 태권도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사회정화위원회라는 기구를 설치해 사정 작업을 했는데 대한태
권도협회 임원들의 사표를 종용했다. 임원들의 사표가 수리됐는데 김운용 강원식의
사표는 반려되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 속에서 국기원 부원장 자리가 공석이 되자 김운용은 강원식에
게 부원장직을 권유했다. 강원식은 부원장이 됐지만 내부 문제로 얼마 되지 않아 부
원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1983년 국기원에 태권도지도자연수원이 설립되면서 연수원 부원장을 맡게
됐다. 강원식은 연수원에 있을 때 체육부에서 진행하고 있던 코치아카데미에서 태권
도만 떼어내 연수원으로 가져왔다.
강원식은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고 1988년 서울올
림픽에서 시범종목이 되자 태권도의 세계화를 위해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연구단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정찬모(단국대 교수), 김경지(경희대 교수)
등과 힘을 합쳐 1987년 11월 태권도학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그러던 1989년 강원식은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이사로 복귀했다. 1991년 김운용 회
장이 물러난 후 국방부장관 출신의 최세창이 회장이 되자 그를 보좌하며 1996년 1월
까지 전무직을 수행했다.
1992년 첫 개최한 태권도한마당은 강원식의 작품이다. 그는 수 개월 고심 끝에 경
연대회 성격의 태권도한마당을 기획해 경연규칙 제정에 착수했다. 행사에 필요한 재
정을 확보하고 첫 행사를 감안해 미국에 있던 노병직 원로를 초청해 개회식 식후공
연 때 시연을 하도록 했다.
1996년 9월 이승완의 제안으로 태권도신문사 사장이 된 그는 태권도 언론문화 창
달과 태권도 바로세우기에 정진했다. 그러던 2001년 9월, 국기원 이사였던 그는 김운
용 국기원장의 용퇴를 면전에서 촉구했다.
또 태권도신문에 ‘김운용께 드리는 고언’을 통해 “김 원장이 태권도계에 세운 업적
은 높이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 업적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다.
그 업적을 영원히 보전하는 길은 젊고 올바르며 유능한 인재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다.”고 진언했다.
그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해 그의 용기를 옹호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김운용에게 많
은 혜택을 받은 그가 이제 와서 용퇴를 하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비판하는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59


60 ▸ 국기원

사람들도 있었다.
그 후 태권도계를 떠났던 그는 2006년 대한태권도협회 사료편찬위원장을 맡았다.
조용히 연구에 정진하던 그가 태권도계의 전면에 나타난 것은 2009년 6월. 당시 홍
준표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 국기원 이사장직(원장)에 대한 의지를 내비치자 지인들
과 측근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국기원을 사랑하는 지도자연대’의 대표를 맡아 “정치인
이 국기원을 장악해선 안 된다”며 홍 회장 반대 선봉에 섰다.
그러던 2010년 6월, 강원식은 특수법인 국기원의 초대 원장이 됐다. 2010년 12월
에는 “국기원을 일하는 조직으로 만들겠다 ”고 거듭 천명했다. “현재 국기원은 고비
용-저효율 조직이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이 같은 조직형태를 고효율-저비용으
로 만드는 것”이라며 비정상적인 ‘역삼각형(▽)’의 비효율적인 형태를 ‘삼각형(△)’으로
탈바꿈하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2011년 5월에는 국기원 특수법인 전환 1주년을 맞아 3개 추진전략-12대 실천과제
-38개 세부사업을 발표했다. 강원식은 ‘TKK Win-Win-Win 2020 중장기 비전과 전략
선포식’에서 태권도와 국기원의 제 2도약을 위한 발전방향을 설명하고 ‘태권도=국기
원=코리아’의 연계성을 높이는 시너지 전략을 강조했다. 강원식은 “내 임기 안에 모
두 이루겠다는 생각은 없다. 후임자가 이를 실천하도록 토대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
다”며 “우선적으로 실행 가능한 것부터 달성하겠다.”고 말했다.
2013년 2월, 강원식은 원장직 연임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다. 임기가 3개월 남은
상황에서 강원식은 발표문을 통해 “태권도의 위상정립과 화합을 위해 국기원 원장직
연임을 포기할 것을 선언한다. 보다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임원이 선임되도록 본인이
길을 열어주는 것이 국기원 원장으로서 마지막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특수법인 전환과정에서 벌어진 반목과 갈등은 계속 이어졌고, 국기원 내부의
문제 또한 심각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의지와는 다른 결과가 나왔고, 태권도 가족
여러분에게 실망감을 안겨드린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태가 빚어진 것에 변명하지
않겠다. 대외적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먼저 너무나 부족했던 자신을 탓하고자 한다.
특수법인 국기원 1기 집행부가 성장통을 겪었다면, 2기 집행부는 태권도 중흥의 길을
걷기를 바란다.”며 원장직 수행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에 아쉬움을 내비쳤다.

6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송무관(松武館) ◂ 61

3. 사료 및 사진자료

가. 개요

○ 사료 총 33점
사진기록 : 29점
기타 문서기록 : 4점

나. 세부자료

자료_송무관_1

❏ 송무관 창설자 노병직 관장의 청년시절. 1936년 일본에서 유학할 때의 모습.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61


62 ▸ 국기원

자료_송무관_2

❏ 1975년 7월 송무관 송태학 관장 취임 기념물

자료_송무관_4

❏ 송무관 4대 강원식 관장의 30대 모습.

6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송무관(松武館) ◂ 63

자료_송무관_4

❏ 1955년 송무관 아현도장 홍영찬 수련 모습

자료_송무관_5

❏ 1956년 노병직 관장(가운데)이 서울사대 제다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63


64 ▸ 국기원

자료_송무관_6

❏ 1956년 송무관 마포도장 수련생들.

자료_송무관_7

❏ 1956년 송무관 아현도장 승급-승단 심사를 마치고 기념촬영

6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송무관(松武館) ◂ 65

자료_송무관_8

❏ 1957년 송무관 서소문도장 하상우 수련 모습

자료_송무관_9

❏ 1958년 노병직 관장이 정재호, 전정웅 등 단국대 제자들과 기념촬영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65


66 ▸ 국기원

자료_송무관_10

❏ 1958년 송무관 서소문도장 심사를 마치고 기념촬영

자료_송무관_11

❏ 1959년 대한공수도회 공수관 중앙도장 사범 노병직이 발급한 2단증

6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송무관(松武館) ◂ 67

자료_송무관_12

❏ 1962년 8월 송무관 출신 조규장회장이 초대 대한태수도협회 충남협회장 취임 당시


모습

자료_송무관_13

❏ 1964년 송무관 출신 수련생이 심사에서 등 주먹격파 시범 모습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67


68 ▸ 국기원

자료_송무관_14

❏ 1964년 송무관 서울 유단자들의 태릉 야유회 모습

자료_송무관_15

❏ 1967년 송무관 마포도장에서 열린 회의. 노병직 관장과 장진일, 빈병석, 하상우,


강원식, 엄영철, 이원식, 김석우 등이 있다.

6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송무관(松武館) ◂ 69

자료_송무관_16

❏ 1967년 송무관 목포 심사를 마치고 기념촬영. 김인작 관장과 강신익, 이영곤 등이


참가

자료_송무관_17

❏ 1967년 송무관 아현도장 노희상 수련모습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69


70 ▸ 국기원

자료_송무관_18

❏ 1969년 송무관 서소문도장 단체대항 경기

자료_송무관_19

❏ 송무관 이병렬, 이득영의 겨루기 모습

7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송무관(松武館) ◂ 71

자료_송무관_20

❏ 1969년 송무관 유단자들이 창경궁에서 연무시범을 하고 있다.

자료_송무관_21

❏ 1970년 3월 노병직총재배 태권도대회 시상식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71


72 ▸ 국기원

자료_송무관_22

❏ 1970년 송무관 충남 청양도장

자료_송무관_23

❏ 1970년대 송무관 소속 도장 행사 후 기념촬영

7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송무관(松武館) ◂ 73

자료_송무관_24

❏ 1970년대 송무관 창설자 노병직이 유럽순방을 마치고 귀국하자 송무관 인천청용


체육관이 공항에서 환영하고 있다.

자료_송무관_25

❏ 송무관 3대 관장 송태학 취임식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73


74 ▸ 국기원

자료_송무관_26

❏ 1972년 미국 오하이오 에크론테 김일주 사범과 제자들 수련 모습

자료_송무관_27

❏ 1980년대 노병직 송무관 창설자가 세미나에서 시연을 하고 있다.

7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송무관(松武館) ◂ 75

자료_송무관_28

❏ 1985년 미국에서 노병직이 송무관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

자료_송무관_29

❏ 1997년 송무관 이영섭 2대 관장이 김동섭에게 보낸 편지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75


76 ▸ 국기원

자료_송무관_30

❏ 1995년 열린 송무회 창립총회 및 송년의 밤 행사

자료_송무관_31

❏ 1997년 온양에서 열린 송무회 전국대의원 총회

7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송무관(松武館) ◂ 77

자료_송무관_32

❏ 2000년 3월 노병직 총재 모국방문 및 강원식 3대 관장 취임식

자료_송무관_33

❏ 인천 송무회 회원 기념사진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77


78 ▸ 국기원

4. 수련 관련 사항

가. 관훈 : 예의존중 극기겸양 부단노력 최웅만부 문성겸전

나. 수련정신

○ 예의, 겸손, 노력, 최고의 영웅, 문부의 겸비

다. 수련형태

○ 태극= 초단-3단, 평안= 초단-5단, 철기= 초단-3단, 십수, 발세, 공상군, 반월,
연비, 오십사보,
- 1보 대련, 3보 대련, 자유대련, 2시간 이내

라. 심사형태

○ 송무관 중앙도장 정관을 보면, 정기승단과 급 심사는 매년 3회(초창기 2회) 함.


단 필요에 따라 임시심사를 할 수 있었음.

○ 관원과 사회인사 중 송무관 발전에 공적이 많은 자는 그 정도에 따라 5단까지


수여함.

○ 승급심사 8급과 7급은 태극초단∼태극삼단형 및 삼보대련. 6급과 5급은 평안


초단∼평안삼단형 및 삼보대련, 4급부터 1급은 평안 사단, 평안5단 및 삼보
대련과 단도대련를 심사함.

○ 승단심사 초단은 평안 오단, 철기 초단, 찐테 중 2개 지정. 자유대련 2번과


호신법 및 격파. 격파는 송판과 벽돌, 기와 중 하나를 선택함. 송판은 5분
송판 2매를 정권과 이권, 수도, 봉, 앞차기, 돌려차기, 뒤돌려차기, 옆차기, 2단

7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송무관(松武館) ◂ 79

옆차기 중 하나를 선택해 격파함.

○ 벽돌은 1매를 정권과 등주먹, 수도, 약수도 중 하나를 선택해 격파함.

○ 기와는 8매를 정권과 수도, 등주먹 중 하나를 선택해 격파함. 발과 이마로


격파하는 것은 금지함.

○ 2단 심사는 철기 2단 발새 소·반월 공산군 소·진태·십수태 중 형 하나를


지정함.
- 대련은 자유대련 2회, 1대 2 대련 1회, 단도대련 1회를 함.
- 초단과 같이 호신술과 격파를 함.
- 격파는 5분(分) 송판 2매나 1치(寸) 송판 1매, 벽돌 1매, 기와 10매.

○ 3단 심사는 철기 삼단과 암학, 노패, 발새 대 중 한 개 지정함.


- 자유대련 2회, 1대 3대련 1회, 단도 및 장도 대련 1회를 함.
- 호신술과 격파는 초단과 2단은 방법이 같음. 송판에 한해서 장애물 격파도
있었음. 장애물 격파는 2단 옆차기, 2단 돌려차기.

○ 4단 이상은 철기 삼단, 공상군 대, 연비, 오십사보, 자은 중 하나를 지정함.


- 자유대련 2회, 1대 3대련, 단도 또는 장도 대련 1회, 기타 흉기 및 무기 대련를 함.
- 호신법과 격파, 논문이 있었음. 격파는 초단과 동일,
- 장애물 격파는 3단 심사와 같았음.
- 논문의 논제는 수시로 다르게 출제함.

○ 심사의 채점은 100점 만점으로 함. 75점 이상은 정식 승급 및 승단, 55점에서


70점까지는 추천으로 승급 및 승단을 결정함. 7단 이상 격파를 생략함.

○ 송무관 심사는 그 종목 구성에서 심사제도에 큰 영향을 미침.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79


오도관(吾道館)
1. 역사 및 개요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3. 사료 및 사진자료
4. 수련 관련 사항
오도관(吾道館) ◂ 83

1. 역사 및 개요

○ 최홍희 장군이 1954년 4월 1일 강원도 용대리에서 남태희를 비롯해 백준기ㆍ한차교


ㆍ우종림ㆍ고재천ㆍ김석규ㆍ곽근식ㆍ현종명 등과 함께 군 출신 장교들과 장병들을
모아서 오도관을 창설함. 오도관의 명칭에 대해 최홍희는 “오도(吾道)는 공자가
‘나는 오직 한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여야(吾道一以貫之)’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함.

○ 최홍희는 1955년 4월 11일 명칭제정위원회에서 ‘태권도’를 주장하여 통과시키고


부관 남태희에게 지시해 휘하에 있는 장병들에게 거수 경계를 할 때는 ‘태권’ 구
호를 하도록 함.

○ 오도관은 1959년 4월 서울 육군체육관과 대구 종합운동장에서 연무시범을 함. 초


창기 수련생은 김수기·이응삼·이화섭 등 장병들이 많음. 1964년에는 최홍희가
화랑·충무·계백 등 18개 틀을, 66년에는 4개 틀을 완성해 군을 중심으로 보급
함. 창헌류 형 24개는 천지 단군 도산 원효 율곡 중근 퇴계 화랑 충무 광계 포은
계백 의암 충장 고당 삼일 유신 최영 연개 을지 문무 서산 세종 통일 등 이었음.

○ 오도관 창설자 최홍희는 발만 쓰던 택견과 주로 손의 기술에만 의존하던 가라테


를 종합 연구하여 오늘과 같이 체중에 구애됨이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현대적이며 과학적인 무도로 발전시킴.

○ 최홍희는 군 전력강화 목적으로 군에 태권도 교육을 실시하고 1960년대부터 월남


(베트남)에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하여 태권도 세계화에 초석이 됨.

○ 오도관은 민간도장에서 태권도를 수련하고 입대한 장병들의 단증 중 청도관 단증


만 인정하고 나머지 관의 단증은 ‘민간단’이라고 해서 별도의 승단 심사를 하도록
해 다른 관들과 마찰을 빚음.

○ 1966년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립한 최홍희가 1972년 신변상의 이유로 캐나다로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83


84 ▸ 국기원

망명하면서 오도관은 국내에서 그 입지가 줄어 들음. 오도관 출신들 중 일부는


최홍희를 따라 ITF에 가입해 활동함.

○ 1973년 오도관은 제10회 73년도 정기총회를 열고 임원을 개편함. 총관장은 현종


명, 부관장은 우재림ㆍ김유식, 이사장은 진덕영, 기획이사 곽병오, 경기이사 강종
만, 감사 조태열ㆍ강용식 등이었음.

○ 오도관은 2005년 정기총회를 열고 한명학을 12대 총본관장으로 선출함. 한명학은


오도관 창설자 최홍희가 망명함으로써 국내ㆍ외적으로 입지가 어려워진 오도관을
재건하기 위해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태권도 제도권 인사들과 정ㆍ재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취임식을 하며, 오도관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조직개편과 동시
에 오도관 뿌리찾기 운동을 전개함.

○ 태권도 오도관 중앙총본관 조직도는 다음과 같다.


명예회장 : 백준기
회장 : 전방진
고문 : 김수련, 김길성, 고동준
자문위원 : 김강인, 김영곤, 김정기, 김종환, 김현성, 노영철, 박정길, 손향성,
유영길, 이동근, 임복현, 정판진, 지희용, 최만식, 한국선
총본관장 : 한명학
부관장 : 김귀전, 노현래, 문용구, 박치순, 박희수, 윤덕영, 양승윤, 양정승,
조치훈, 황용택
사무국장 : 노형준
감사 : 심홍택
서울특별시 본관장 : 안재윤
대구광역시 본관장 : 윤점수
인천광역시 본관장 : 이동식
광주광역시 본관장 : 임세빈
경기도 본관장 : 강연희
강원도 본관장 : 최홍배

8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85

충청북도 본관장 : 노상일


충청남도 본관장 : 정기헌
전라북도 본관장 : 강주현
전라남도 본관장 : 김형일
경상북도 본관장 : 최귀돌
제주도 본관장 : 김형우
중앙위원 : 강석기, 강익필, 김영수, 김현태, 박상봉, 박인일, 변재술, 안재로,
원태윤, 이덕희, 이석진, 이연구, 이재성, 임성근, 임시호, 정선진,
정효심, 조준섭, 최정만, 한명욱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85


86 ▸ 국기원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가. 계보도

❍ 관장계보
창설자 및 초대 관장
최 홍 희

2대 관장
남 태 희

3대 관장
우 종 림

4대 관장
김 석 규

5대 관장
장 태 익

6대 관장
현 종 명

7대 관장
곽 병 오

8대 관장
허 용

9대 관장
백 준 기

10대 관장
진 덕 영

11대 관장
고 동 준

12대 관장
한 명 학

8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87

❍ 시대별 오도관 출신 인사

강용식, 강종만, 고재천, 곽병오, 김봉식, 김석규, 김수기, 김승규, 남태희, 백준기,
1950년대 우종림, 이응삼, 이화섭, 장태익, 정기헌, 정병길, 조태열, 진덕영, 최동희, 한차교,
허용 등

윤점수, 이동식, 전일수, 임세빈, 강연희, 최홍배, 노상일, 정기헌, 강주현, 김형일,
1960년대 고동준, 김연경, 박정길, 정판진, 진덕영, 한명학, 허 송, 김형우, 안재윤, 김귀전,
노현래, 윤덕용, 전일수 등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87


88 ▸ 국기원

나. 주요인물 생애사

최홍희 오도관 창설자

최홍희는 1918년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5남 3녀 중 3남


으로 태어났는데 약한 체질을 타고나 부모가 근심할 정도였다.
그는 공부를 싫어했다. 하지만 한학(漢學)에 주력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
부터 소학(小學)과 명심보감 등의 한문을 익혔다. 최홍희는 여덟 살 때부터 일본을
배척했다. 배일사상(排日思想)이 싹튼 것은 일본인들의 잔악한 만행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소학교 6학년 시절, 월사금(등록금)이 올랐다며 친구들
을 규합해 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최홍희는 1939년 아버지
의 지시로 서도(書道)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익히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
났다. 일본에서 먼저 유학생활을 한 친구들의 권유도 그가 일본에 가기로 결심한 이
유 중의 하나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일본 교토에 정착한 그는 가라테와 운
명적으로 만난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로서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왔다 갔다 하면서
주먹질을 하고 있는데 도무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저
것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그는 가라테라는 것인데 저것만 하면 고향에 가는데 문제가
없다고 하기에 그 때부터 가라테를 배우게 되었다.” <최홍희(2005), 태권도와 나, 도서출판
길모금>
교토에서 가라테를 수련하면서 영어와 수학을 공부한 최홍희는 고등학교 4학년 과
정 입학에 실패하자 더 좋은 기회를 잡기 위해 거처를 도쿄로 옮겼다. 일본 중앙대
학 법학과에 진학한 그는 가라테를 열심히 수련했다. 당시 전봇대는 목재로 만들었는
데, 거리를 다니면서 손이나 발로 전봇대를 때리고 차면서 전봇대의 전선이 흔들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최홍희는 가라테를 수련한 이유에 대해 “나는 내가 호신술
을 몇 가지 배우지 못하고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
는 권투를 배워볼 생각이었는데, 친구인 김현수가 대학에 있는 가라테 교실을 보러
가자고 설득했다. 그 며칠 후 나는 가라테를 수련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에 재학하면서 가라테부에 있던 최홍희는 부원들과 함께 ‘가

8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89

라테의 아버지’로 알려진 후나고시 기친(船越)의 송도관(松濤館·쑈도깡)에서 정식으


로 가라테를 배웠다. 가라테 2단으로 승단한 최홍희는 윤병인과 도쿄 YMCA 건물 옥
상에서 가라테를 지도했다.
하지만 최홍희가 후나고시 기친에게 가라테를 배웠는지 증명하는 사료는 없다. 송
도관을 방문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이지만 누구에게 가라테를 배웠는지 명료하지
않다. 사학자 허인욱은 최홍희가 윤병인과 일본 동경 YMCA 옥상에서 무술을 수련했
다는 기록을 근거로 최홍희가 윤병인에게 무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기한다.
윤병인은 상당한 무예의 경지에 이미 올라 있었으므로 최홍희가 윤병인과 함께 같은
수련생의 입장에서 수련했다고 하는 것은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허인욱
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최홍희가 4292년(1959)에 펴낸 태권도교본을 보면, ‘수도와 수도에 의한 단련’과
‘손목에 의한 단련’ 항목 편에 두 사람이 마주서서 전진후퇴를 하며 수도와 수도를,
안손목과 안손목·바깥손목과 바깥손목을 부딪치는 훈련방법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
훈련방법들은 가라테에서는 보기 힘든 훈련방법으로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권법
부를 창설한 윤병인의 무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허인욱(2008), 관
(館)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 한국학술정보(주)>
최홍희는 1944년 1월, 일본의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간 후 반일봉기를 하자는 데 뜻
을 같이했다가 발각되어 일본 헌병대로부터 고문을 받고 구치소에 이감됐다. ‘평양학
병사건’의 주동자가 된 셈이다. 최홍희의 주장에 따르면, 그곳에서 우연찮은 기회에
동료들과 간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기왓장 8장을 격파하는 가라테 시범을 선보여 박
수를 받았다고 한다.
1945년 6월 재판장에서 징역 7년에 처해진 최홍희는 선고가 바뀌어 사형당할 처지
였으나 8월 15일 일본의 패망하고 해방이 되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 후 최홍
희는 전국 학병을 대표하는 학병단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군사영어학교(국군창설
요원)에 입교했다. 그리고 1946년 1월, 조선 경비대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전남 광주
에서 군복무를 했다. 1947년 대위에서 소령으로 승진한 그는 육군본부로 전속되어
정보참모와 군수참모를 하면서 서울에 있던 미군 헌병들에게 태권도를 소개했다고
주장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최홍희는 1949년 6월부터 서울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선진군대교육을
배우라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최덕신 대령 등과 함께 미국 상급군사훈련학교로 유학
을 갔다. 그러나 한국전쟁(6.25)이 일어나 1950년 7월에 귀국해 신설된 육군종합학교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89


90 ▸ 국기원

부교장을 맡았다. 그리고 1953년 9월, 보병 제29사단을 창설하라는 명령을 받고 제주


도 모슬포로 내려갔다. 당시 육군참모 총장 백선엽의 견제를 받고 있는 그는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로 여기고 전력을 다했다. 29사단장은 그의 태권도 인생
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29사단을 상징하는 사단기를 만드는 데 힘썼다. ‘29’
라는 숫자에서 ‘2’는 분단된 한반도를 상징화했고, ‘9’자는 움켜쥔 주먹을 나타냈다.
한반도 지도에다 주먹을 그린 사단의 마크는 ‘익크 부대’로 통용됐다. 이 시기 최홍희
는 대위 남태희를 부관으로 두고 사단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교육해 오늘날 오도관의
초석을 이뤘다는 증언도 있다. 남태희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최홍희 장군과는 29사단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육군종합학교 다닐 때 최 장군이
부총장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인연이 없었다. 29사단에 근무하면서 화랑무도관을 만들
어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29사단장이던 최 장군이 화랑무도관에 방문해 나보고
형(型)을 해보라고 시켰고, 나는 청도관 이원국 관장님께 배훈 형을 시연했다. 최 장
군은 부사단장이었던 하갑천 장군과 함께 아주 흡족해 했고, 그게 나와 최 장군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지, 2010년 6월호>
최홍희는 남태희를 앞세워 휘하 장병들에게 당수를 가르쳤다. 그는 “내 휘하 장교
들과 당수 교관들에게 매우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당수를 훈련할 때 군대
의 계급과 상관없이 전부 교관들에게 인사를 해야만 했다. 군사 교련과 당수 훈련의
결합은 우리 사단을 한국군의 다른 사단 중에서 유별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최홍희가 이끄는 29사단은 1954년 6월 제주도를 떠나 육군본부직할의 제1군단에
배속됐다. 그 해 9월 제1군단 창설 4주년 기념일이 설악산 오호리 평야에서 열렸는
데, 이 날은 최홍희의 태권도 인생에서 상징적인 일이 벌어졌다. 창설 기념식에서 열
린 당수대회에서 최홍희가 이끄는 사단이 시범을 보인 것이다. 이 광경을 이승만 대
통령은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대통령은 앉지도 않고 줄곧 서서 구경하더니 “저것이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있던
택껸이야!” 한 다음 “이것으로 깨뜨렸지!” 하며 자기 오른 주먹의 사용부분을 손가락
으로 정확하게 가리켰다. 뿐만 아니라 그는 “택껸이 좋아. 이것을 전군에 가르쳐야
해. 그 서양 사람들은 윗동이만 쓰는데, 발로 차면 빙그르르 주저앉을 게 아닌가?”라
며 조크까지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말은 최홍희를 벅차게 만들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당수도 시범을 하기 위해 흰 도복을 입고 장병들 앞에서 나설 때  흰 도복을
처음 본 다른 장병들은 낄낄대고 비웃었다고 했다. 당시 도복의 띠는 흰띠, 자띠(적),

9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91

검은띠 밖에 없었지만 구분이 단순해서 청띠를 만들어서 메고 시연에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15분 당수도 시연을 하는 동안 이승만 대통령 단상에는 이형근 대장을 비롯
당시 최홍희 장군이 자리를 하고 있었으며 예정된 시연이 끝나고 이승만 대통령이 조
금 더 해보라는 명령으로 시연을 위해 연습한 것 외에 즉석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마땅하지 않아서 남태희가 한차교를 불러내어 겨루기 시연을 15분 정도했다고 한다.
당시 남태희는 기왓장 12장을 정권으로 격파하는 시연을 했는데, 멀리 있는 단상
에서 관람한 이대통령이 손으로 가리키며 저것은 무엇으로  격파했는지 묻자, 옆에
있던 최홍희 장군이 정권을 가르치며 이 대통령에게 당수(수도)가 아닌 정권으로 격
파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이 무술에 관심을 보이자 무술을 도외시하던 군 수뇌부들을 설득시킬 명분
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태권도(跆拳道)’를 작명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최홍희가
이끄는 29사단은 설악산 서쪽의 용대리로 옮겨 강원도 동해안을 포함한 일대의 작전
책임을 맡았다. 이 때 그는 체육관을 짓게 하고 그 곳을 오도관(吾道館)이라 이름을
붙였다. 태권도는 남태희가 맡았다. 최홍희는 “오도관의 오도(吾道)는 ‘공자가 나는
오직 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야(吾道一以貫之)’라고 한 말이 나의 성격과 비슷하거
니와 내가 연구하는 태권도를 세계로 뻗치겠다는 포부를 뜻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오도관에는 초대 사범이었던 남태희를 비롯해 백준기, 고재천, 김석규, 우종림,
한차교 등이 활동했다. 이들은 청도관 출신으로 훗날 최홍희가 민간 도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 버팀목이 되어줬다.
1955년은 최홍희에게 잊을 수 없는 해이다. ‘태권도’가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1946년 3월부터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만 9년이 되는
1955년 봄에 이르러 현대적 무도의 기초를 완성하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최홍희는 당수도를 대신할만한 명칭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부관 남태희와 함께 옥
편을 뒤적거리며 연구를 거듭한 끝에 태껸의 ‘태(跆)’자가 뛰고 차고 밟는다는 뜻을
담고 있어 당수, 공수도보다는 주먹권(拳)자를 사용, ‘태권도(跆拳道)’라는 명칭을 만
들었다. 정순천은 “태권도 작명가는 최홍희 총재와 남태희 원로 두 사람이다. 굳이
‘태’자의 발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태권도 작명의 
공로(?) 역시 재조명되어야 한다. ‘태권’의 작명 과정에서 서로의 주장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조합해서 만든 것은 태권도사에 이제라도 올바르게 기록되어야 한다.”고 주
장한다. 여기서 태권도 명칭 창안에 대한 남태희의 증언을 들어보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시범을 보인 날 최홍희 장군이 나와 같이 사단장실로 가자고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91


92 ▸ 국기원

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이 이야기한 태껸을 옥편에서 찾아봤지만 없었다. 계속 옥편


을 찾아보다가 ‘밟은 태(跆)’를 발견했다. 일단 태를 골라 놓고 그 다음 ‘껸’를 찾았지
만 옥편에 없었다. ‘수(手)’자도 고려했지만 당수도, 공수도 등 색채가 진해서 손보다
는 강한 ‘주먹 권(拳)’을 선택했다. 태껸과 태권은 발음도 비슷했다. 최 장군과 나는
태권이라는 명칭이 좋겠다고 결심했고, 명칭제정위원회를 통해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지, 2010년 6월호>
이처럼 각고의 노력 끝에 태권도를 작명했지만 최홍희의 고민은 계속됐다. 태권도
가 당수도와 공수도를 제치고 보편타당성을 확보하려면 공신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군 내부의 모략과 당수도와 공수도, 권법을 사용하고
있는 민간도장의 반발이 걱정되었다. 최홍희는 마음 속에 태권도를 숨겨 놓고 기회를
기다렸다. 궁리 끝에 그는 ‘명칭제정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최홍희는 당시
자신을 지원하던 장군 이형근의 힘을 빌려 국회 부의장 조경구를 비롯한 사회 저명
인사와 언론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급 음식점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는 이날을
1955년 4월 11일이라고 증언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최홍희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
국내 도처에서 같은 무도를 놓고 당수, 공수, 권법 등 제각기 마음대로 명칭으로 하
나로 묶을 수 있는 새로운 이름을 제정하기 위해 모였다”며 이날 모임의 취지를 설
명한 최홍희는 각자 명칭을 기재하여 무기명으로 투표한 다음 토의에 붙여 결정하자
고 제안했다. 하지만 명칭 제정은 최홍희의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개표 수가 거의 5분의 4에 이를 때까지 당수가 아니면 공수도 일색이었다. 그러
다 ‘태권’ 두 글자가 나오니 모두들 처음 듣는 이름이기도 하려니와 좀처럼 드문 ‘태’
자라 ‘이것을 누가 냈는지 설명하시오’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먼저 글자 풀이부터
해야겠기에 ‘태’자는 발로 뛴다, 찬다 또는 밟는다를 의미하며 ‘권’자는 주먹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주먹은 단순히 손을 폈다 쥐었다 하는 주먹이 아니라 여러 형태
의 주먹으로 찌르고, 뚫고 혹은 때리는 무도행위를 뜻하는 주먹입니다’하며 시범했
다.” <최홍희(2005), 태권도와 나, 길모금>
발음이 비슷한 ‘태권’과 ‘택껸’의 역사성도 거론하며 참석자들을 설득하자 최홍희가
갈구한 태권도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최홍희는 이승만을 경호하는 경무대 실력자
들을 고급 술집에서 융숭하게 접대해 ‘택껸’을 고집하는 이승만으로부터 한자로 쓴
‘跆拳道 雩南’ 휘호를 받아냈다며, 이 휘호가 발표됨으로써 태권도는 누구의 모략도
받을 수 없이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연유로 최홍희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4월 11일을 ‘태권도의 날’로 제정해야 한

9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93

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태권도 역사학자 이경명은 이 같은 논리에 다른 의견을 제기


한다. 태권도 명칭제정과 이승만으로부터 태권도 휘호를 받는 과정에 의혹이 많다는
것이다. 이경명은 태권도 명칭 제정은 1955년 4월 11일이 아닌 1955년 12월 19일 대
한당수도 청도관고문회회의에서 최홍희가 제안한 ‘태권’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라고
기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1958년 최홍희에게 호기(好機)가 찾아왔다. 이승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월남
대통령 고딘 디엠이 제29사단의 태권도 시범을 보고 매료돼 태권도 시범단의 월남
파견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국방부의 주도로 최초의 국군태권도시범단이 구성됐다. 단장은 육군
무도부를 창설하여 초대 무도부장이었던 최홍희가 임명됐다. 최홍희는 공군본부에 가
서 비행기를 교섭하고 시범단원과 합동훈련을 계획했으나 시범단원 선발 과정에서
민간도장과 반목이 생기기도 했다. 국군태권도시범단은 △단장 최홍희 △지휘 남태희
△섭외 김홍걸 △경리 김경을 △단원 고재천 백준기 우종림 곽근식 한차교 김복남
김근택 차수용 윤종걸 김만호 이응삼 이회석 김재룡 등 21명으로 구성했다. 당시 시
범단 일원이었던 우종림은 1959년 3월 12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공군 수송기를 타고
역사적인 길에 올랐다고 증언했다. 최홍희는 시범단 파견을 “민족의 장거(長擧)요 쾌
사(快事)”라며 기뻐했다. 공군수송기를 타고 사이공에 도착한 국군태권도시범단은 월
남육군사관학교와 경찰, 학교 등에서 3주간 시범을 했다.
국군태권도시범단을 인솔하고 월남과 대만 등 동남아 순회시범을 마치고 기세당당
하게 귀국한 최홍희는 대한체육회와 동등한 무도회를 별도로 창립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던 중 부득이하게 대한체육회에 가입하는 방법을 택했다. 유도회, 검도회와 함
께 무도회를 창립하려 했으나 두 단체가 대한체육회에 가입하는 바람에 태권도만으
로는 무도회를 만들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태권도가 대한체육회에 가입하려면 해결해야 할 난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
선 유사 무도단체를 통합해 협회를 조직해야 했고, 협회를 대표하는 명칭 통일이 선
행되어야 했다. 최홍희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9년 9월 서울 원효로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지도관 윤쾌병, 송무관 노병직, 창무관 이남석, 무덕관 황기 등
태권도 모체관(母體館·기간도장)의 관장을 초청, 약식 좌담회를 마련했다. 이처럼 그
가 협회조직과 명칭 통일을 위해 좌담회를 주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최홍희가 청
도관과 오도관을 중심으로 ‘태권도회(跆拳道會)’를 조직한 후 군 장성 신분을 십분 활
용했기 때문이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93


94 ▸ 국기원

이날 최홍희가 주재한 간담회는 그의 뜻대로 진행됐다. 특히 협회 명칭을 결정할


때는 그의 의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간담회에 참석한 노병직, 윤쾌병, 이남석
등은 ‘공수도’를 주장했고, 황기는 ‘당수도’가 좋다고 했다. 최홍희가 고집한 ‘태권도’는
50년대 중반부터 오도관과 청도관이 쓰고 있던 터라 다른 관들로부터 견제를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59년 9월 3일, 문교부 체육과장과 대한체육회 이사가 입회한 가운
데 대한체육회 회의실에서 청도관·오도관·송무관·창무관·지도관·무덕관의 대표
들이 모여 총회를 거쳐 대한태권도협회(大韓跆拳道協會)를 창립했다.
최홍희는 훗날 자신이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 되고, ‘태권도’가 협회 명칭으로 된
것은 관 대표들이 육군 소장이라는 자신의 권위에 눌려 순순히 응했다고 술회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한태권도협회를 창설한 최홍희는 자신이 회장을 맡고, 부회장은
노병직과 윤쾌병, 이사장은 황기, 상임이사는 이종우, 현종명, 고재천, 이영섭, 이사는
엄운규, 배영기, 정창영 등으로 집행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대표 심사위원은 노병직
과 윤쾌병, 심사위원은 이남석, 엄운규, 현종명, 정창영 등이 맡았다. 그러나 대한태
권도협회는 무덕관 관장 황기가 탈퇴하고 대한체육회 가입절차를 밟고 있던 중 4.19
가 일어나 제대로 활동도 하지 못하고 와해됐다.
최홍희는 1960년 2월 미국미사일학교로 유학을 다녀온 후 그 해 6월 전남 광주전
투기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이듬해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5.16은 최홍
희의 인생을 뒤바꿔놓았다. 6군단장(소장)이 됐지만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의
압력으로 예편해야만 했다. 최홍희는 섭섭하고 착잡했다. 군사쿠데타에 가담하지 않
았던 그는 박정희와 쿠데타 세력들에게 반감이 많았다.
최홍희는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최덕신의 권유로 말레이시아 대사가 됐다. 한국을
떠나기 전 그는 흐트러진 태권도계를 바로 잡을 요량으로 이남석과 엄운규, 이종우를
자택으로 불렀다. 당시 무술계는 포고령 제6호에 따라 사회단체 재등록이 시행되면서
유사단체 통합을 서둘러야 했다. 최홍희는 통합 명칭을 놓고 고심하고 있는 이들에게
“수(手)는 권(拳)의 아들이라 할 수 있으니 기왕이면 아버지가 되어야지 스스로 아들
노릇할 거야 없지 않은가?”라며 설득했지만 협회 명칭은 대한태수도협회로 결정됐다.
군 체질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외교관에 관심이 없었다. 외교는 참사관과 서기관에
게 맡기고 1959년에 이어 또 태권도교본 출간을 서둘렀다. 3년 동안 최홍희는 태권도
와 가라테를 확연히 구분하기 위해 기술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천지틀과 단군틀을 만
들어 태극형이라는 가라테 형과 대치하게 하고 기존에 있던 화랑, 충무, 계백, 을지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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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관(吾道館) ◂ 95

을 합해 도합 20개 틀을 완성시켰다. 24개 틀 중 나머지 4개는 1966년 완성했다.


1964년 10월 말레이시아 대사직을 그만 두고 귀국한 최홍희는 이남석과 이종우,
엄운규가 주도하고 있는 대한태수도협회에 크게 실망했다. 자신이 만든 태권도가 사
용되지 않은 현실에 낙담했다. 당시 태권도계는 대한태수도협회가 대한체육회에 가맹
되어 이종우, 엄운규, 이남석 등이 실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태권도 명칭을 되찾기
위해선 대한태수도협회를 거머쥐어야 한다는 생각에 설득과 압력을 가해 1965년 1월
대한태수도협회 회장이 된 그는 자신의 말대로 헝클어진 태권도계를 정리하기 위한
작업에 곧바로 돌입했다. 그는 회장이 되자마자 인맥을 활용해 여러 사업을 전개했
다. 그 중 하나가 ‘해외 태권도 순회시범’이었다. 최홍희는 이동원 외무부장관을 만나
유럽과 아프리카를 순회하는 태권도 해외 시범을 적극 요청했다. 그 때 최홍희는 논
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수도’가 아닌 ‘태권도’를 사용했다. 공보부에 제출한 공식
명칭은 ‘국기(國技)태권도친선사절단’이었다. 최홍희는 ‘국기 태권도’에 “공보과장이 의
아스러운 표정을 짓자 “우리나라에 태권도 이외에 국기가 될 만한 것이 또 어디 있
소? 하고 말하고 그대로 각의에 올려 통과됨으로써 우리 민족사에 처음으로 국기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1965년 3월 황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무덕관 고단자들의 동참으로 통합을 일궈낸
최홍희는 1965년 8월 5일 이사회에서 협회 명칭을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수박도회를 구성하고 있던 무덕관의 대변인 역할을 하던 김영택의 역
할이 컸다. 그가 태권도계의 재통합과정에서 “수박도회와 태수도협회의 통합인 이상
어느 한 쪽의 기존 명칭을 쓸 수 없으므로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태권도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최홍희를 신임 회장으로 받아들이는 조건 중의 하나로
‘태수도’라는 명칭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던 이종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최홍희는 1965년 8월, 3년 간의 집필 끝에 영문으로 된 태권도교본(4×6판·364
쪽)을 펴냈다. 당시 그는 태권도의 기술연구를 비롯해 명칭과 용어를 제정하기까지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내가 아니면 태권도에 관한 책 하나 쓸 만한 사람이 없느냐”며 태
권도계의 인재 부족을 탓했다. 최홍희는 이 책이 출간됨으로써 태권도와 가라테의 기
술과 철학이 서로 다른 무도라는 것이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다며 의미 부여를 했다.
최홍희는 1959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국군태권도시범단과 태권도외교사절단을 이
끌고 베트남과 대만, 아프리카, 중동, 유럽 등지에서 시범공연을 하면서 태권도 국제
기구를 창설하는 구상을 해 왔다. 기구의 명칭부터 편제, 규약, 임원 구성 등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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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 국기원

작업이 끝나자 1966년 3월 22일 구 조선호텔 로즈룸에서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


설했다. 창설 임원은 김종필, 김완용, 김용태, 이상희, 조하리 등 최홍희의 군 인맥과
정치인 등이 대부분이었다. 부총재는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인 노병직, 사무총장은 엄
운규, 기술위원장은 이종우로 되어 있지만 엄운규는 사무총장을 맡은 적이 없다고 강
변한다. 가입국은 한국을 비롯해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미국, 서독, 이탈리
아, 터키, 통일아랍공화국 등 9개국이었다.
ITF는 국제기구였지만 내실(內實)은 빈약하지 그지없었다. 정부 지원은 고사하고
재정이 열악해 본부 운영비도 부족했다. ITF 본부는 석탄창고로 사용하던 곳으로 사
무용품도 변변한 곳이 없었다. 최홍희는 “대기대사직까지 집어치운 때라 수입이 한
푼도 없는 나로서는 운영비에 사재를 털어 넣다보니 몇 개월도 지탱할 수 없는 실정
이었다.”고 토로했다.
1968년부터 최홍희는 해외에 태권도를 보급하고 지도할 수 있는 국제사범을 키우
기 위해 힘썼다. ‘임시국제사범양성소’를 설치한 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이었다. 당시
국제사범양성소를 수료한 사람은 조희일, 박정태, 조수세 등으로 동남아를 비롯해 서
유럽, 오세아니아, 남미, 중동, 아프리카, 북미, 동유럽 등에 사범을 파견했다. 이 시
기 최홍희는 미주에서 활동하던 한인 사범들이 자신에게 태권도 교습을 받았다고 주
장한다. 이준구, 조시학, 강명규, 심상규, 전인문, 김일주, 현준선, 이행웅, 잭크 황,
윤덕만, 은상기, 강리, 김병수, 문대원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처럼 최홍희는 재정이 궁핍한 속에서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자신이 창안한 태권
도를 보급했다. 하지만 대한태권도협회도 해외파견 사범에 전력을 기울이자 국제태권
도연맹과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해외사범 파견과 단증 발급의 주도권을 놓고 두
단체가 분규에 휩싸인 것이다.
국제태권도연맹과 대한태권도협회 간의 갈등은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했다.
1968년 4월 최홍희가 문교부 제6회 체육상 연구부문 대상 수상자가 됐는데 대한태권
도협회에서 수상이 온당하지 않다며 반대했다. 최홍희가 저술한 태권도 관련 서적이
가라테 서적을 표절해서 대외적으로 ‘태권 한국’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이는
최홍희의 정통성을 부정한 것인데, 최홍희는 이를 두고 가라테를 고수하던 사람들이
태권도 공로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며 분개했다.
1968년 4월 17일 국제태권도연맹을 탈퇴한 대한태권도협회는 그 해 8월 국제태권
도연맹과 또 충돌했다. 두 단체가 국제군인체육대회(CISM) 집행위원회에 제출하기로
합의한 태권도 경기규정이 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국제태권도연맹 측에서 다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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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관(吾道館) ◂ 97

기규정을 각 회의대표에게 우송했다는 진위를 놓고 혼선을 빚게 되면서 불신이 극에


달했다.
최홍희는 대한태권도협회와 대립각을 세우자 1968년 7월에 태권도진흥회를 결성하
여 독자적인 협회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문교부의 승인 거부와 대한태권도협회에
서 태권도진흥회과 관련된 임원을 제명하자 결성이 좌절되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국
제태권도연맹이 유사단체를 지원하며 파벌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국제태권도
연맹의 해체를 주장하고, 협회 내에 태권도 해외 보급 및 지도자 해외파견 등 대외
관계를 전담할 상설기구인 ‘국제분과위원회’를 신설했다. 최홍희는 즉각 성명서를 내
며 강하게 반발했다.
국제태권도연맹과 대한태권도협회, 최홍희와 김운용 간의 관계가 악화되고 박정희
정권을 비토했던 최홍희는 갈수록 입지가 좁아졌다. 그 이후 최홍희는 1971년부터
암암리에 망명계획을 구체화했다. 해외여행이 통제되는 등 국내 정세가 자신에게 불
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한 그는 이민을 감행했다. 2개월 간의 방랑생활 끝에 캐
나다 토론토에 도착한 것은 1972년 3월이었다. 1개월을 기다려 이민 수속을 밟은 그
는 태권도 덕분에 캐나다에서 노동허가증을 받고 토론토에 정착했다. 이민 수속을 도
와준 사람은 애제자인 박종수였다.
최홍희는 왜 캐나다를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캐나다가 중립국이라 태권
도 이념에 합치되고 조국통일 운동을 하는데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최홍희
의 주장이다.
1973년 어렵게 정식 영주권을 받은 최홍희는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김운용 주도
로 세계태권도연맹(WTF)이 창설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영주권이 발급되고 생활이 안정되자 최홍희는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1973년 볼
리비아태권도협회 창설식에 초청을 받아 참석하고, 국제태권도시범단을 조직해 독
일·스위스·프랑스·이집트·자메이카·콜롬비아 등을 순회하며 시범을 했다.
국제태권도연맹이 주최하는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도 준비했다. 1974년 7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23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대회를 개최했다. 최홍희는 이 대회로
말미암아 세계태권도연맹이 한국의 신문을 통해 국제태권도연맹이 해체되었다고 하는
선전이 허위로 폭로되고 국제태권도연맹 경기규정의 우월성이 증명되었다고 기뻐했
다.
1979년 6월, 동유럽 4개국, 서유럽 10개국이 참여한 통일유럽태권도연맹을 만든
그는 사상과 이념, 그리고 종교를 초월해 동서진영을 한데 묶어놓은 국제기구가 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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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 국기원

도 이외에 어디 있느냐며 ‘역사적인 날’이라고 기뻐했다. 회장에는 이기하, 기술위원


장에는 림원섭이 선출됐다.
태권도가 종교와 사상, 인종을 초월한다고 믿은 최홍희는 1970년대 말부터 북한
방문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그러나 북한체제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일을 준
비하고 추진해야 할 지 막막했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의 평화통일위원장 겸 부주석이
었던 김일이 해외 언론에 해외 인사 10명을 초청하자 이 기회를 활용해 태권도시범
단(15명)을 조직한 후 캐나다 토론토를 떠나 스톡홀름과 모스크바를 거쳐 1979년 북
한에 도착해 34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이듬해 1980년에 태권도 시범단을 결
성해 북한에 갔다. 시범단 일행은 이기하, 박정태, 림원섭, 이석희, 최중화, 김석준
등 10여 명이었다. 최홍희는 북한에 간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북한에 들어가게 된 동기는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는 곳이면 이 세상 어디
든 간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아마 달에서도 태권도를 배울 사람이 있다면 나는
갈 것이다. 북한도 내 조국인데 가지 못할 이유가 뭔가. 북한은 국제태권도연맹 산하
에 있는 가입국의 하나이다.”
북한에 발을 내디딘 최홍희는 그 후 태권도 사범요원 교육을 맡는 등 활동 폭을
넓혀나갔다. 1981년 2월, 최홍희는 북한의 요청을 받아 들여 평양에서 제1기 사범요
원교육을 총괄했다. 보조는 박정태가 했다. 7개월 간의 교육을 마치고 44명의 교육생
중 19명에게는 4단, 나머지는 3단을 줬다. 그는 “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보통 10년
이상 배워야 할 그 많은 동작들을 완전 습득한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고 기뻐했다.
당시 최홍희는 북한을 기점으로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과 제3의 세계에 태권도를 보
급하겠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그는 1980년대 초 친아들 최중화를 가족과 함께 평양
으로 보냈다. 제2기 사범요원교육을 도와주면서 기술을 향상시키라는 권유를 최중화
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최홍희는 1980년 8월, 세계태권도연맹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모스크바 총회에
서 승인을 받자 다급해졌다. 1981년 5월 이기하와 함께 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가 있
는 스위스 로잔에 가서 문제를 제기했다. 태권도의 정통성이 없는 세계태권도연맹의
승인을 취소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승인을 취소할 수 없다며
세계태권도연맹과 국제태권도연맹의 통합을 권유했다. 당시 최홍희는 국제올림픽위원
회 본부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최홍희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ITF의 간부들과 함께 제83차 IOC 회의에서 WTF가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실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도둑이 주인행세를 하듯이 사실상

9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99

스포츠를 빙자한 정지척 도구이며 팔괘(중국무술)니 태극(일본 가라테)이니 태권도와는


전혀 동떨어진 기술을 장려하는 WTF가 감히 태권도의 이름으로 IOC의 인정을 받으려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입니다 (…) 명실공히 세계기구인 ITF가 엄연히 존재
하는 데도 불구하고 WTF만을 일방적으로 인정하였는가 하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 태권도가 사이비 단체에 의해 무자비하게 유린당하며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고 있
음을 차마 볼 수 없는 나의 심정을 이해하시고 태권도의 앞날을 위해 올림픽 정신에
부합되며 태권도 본연의 기술을 간직한 기구만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1980년대 초·중반에 이르자 최홍희를 충직하게 따르는 사범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최홍희는 1985년 집필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태권도 백과사전을 발간했다. 그
는 “태권도는 그 어떤 무도나 무술보다도 기술이 월등하다고 호언장담한 것이 확실히
입증되었으리라 믿는다.”며 기뻐했다. 총 15권의 이 책은 4×6배판으로 한 권당 평균
350쪽에 달했다. 최홍희는 “내가 이 책을 꼭 써야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근본 이유
는 나의 기술과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다 아니다. 이 무도를 창시한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느낀 데 있다”고 말했다.
최홍희는 1980년대 중·후반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86년 6월 북한과 중국이 무술단을 교류할 때 조선태권도시범단을 인솔하고 중국에
갔다.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던 1980년대 초부터 중국 진출에 관심을 기울여온 최
홍희는 중국에서의 시범 공연을 계기로 1987년부터 장춘과 하얼빈 등에서 태권도사
범요원교육을 실시했다. 우즈베키스탄과 헝가리, 소련 등 공산권에도 태권도를 보급
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1987년 5월에는 제5회 ITF 태권도세계선수권대회를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6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는 1988년 4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각각
개최했다.
최홍희는 1991년 북한에 또 갔다. 김일성 79회 생일 축하공연에 간 그는 그 자리
에서 김일성을 만나 자신이 저술한 태권도 백과사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태권도를 하면 건강해지고 자신감이 생기므로 대중화하고 누구든
볼 수 있도록 작은 책자를 만들어 내라”고 당 간부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이를 두
고 최홍희는 “10년간 내가 희망하던대로 이제 2천여 만 명 북한 인민 전체가 태권도
를 하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며 감복했다.
1992년은 최홍희에게 기쁨을 많이 줬다. 1990년 판 기네스북에 이어 브리태니카
대백과사전도 1992년부터 최홍희를 ‘태권도 창시자’로 기록했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을 보면 ‘태권도 창시자인 남한의 최홍희 장군이 1955년 제출한 이름이 채택된 이후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99


100 ▸ 국기원

공인되었다’고 수록되어 있다. 최홍희는 “이것만으로도 태권도가 얼마나 유명하고 빨


리 보급됐는가를 알 수 있겠으니 이 무도를 창시한 나로서는 이 세상에 난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고 감복했다. 하지만 그가 ‘태권도 창시자’라고 하는 것에 대
해서는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최홍희는 2000년 8월 KBS TV <일요스페셜>과 가진 인터뷰에서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태권도 통합을 이루겠다”고 말했다. 최홍희는 WTF와 ITF의 통합에 대해 ‘先
통합-後이해점 타결’을 제안했다. 두 기관이 통합 선언을 한 뒤 통합위원회를 결성해
이해점을 타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홍희의 이 같은 소신은 2001년 11월 남북태권도통합연구팀이 그를 심층 면담한
내용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승훈 경문대학 교수는 남북태권도통합연구팀 소장인 오
노균 충청대학 교수의 주선으로 11월 28일일부터 12월2일까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최홍희를 만나 심층면담을 했다.
최홍희는 WTF와 ITF는 같은 국제기구이니 통합선언을 한 다음 동수위원회를 구성
해 통합문제를 풀어나가자고 했다. 이에 대해 이종우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반대하였
다. 그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인정하고 있는 단체는 WTF지 ITF가 아니다.
WTF가 ITF를 흡수하면 모를까 화해와 통합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ITF는 북한
태권도가 아니라 단지 최홍희 개인의 조직일 뿐이다. ITF를 인정하고 협상의 대상으
로 삼는다면 이행웅씨가 이끌고 있는 미국태권도협회(ATA)도 협상의 대상이 돼야 하
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ITF는 2002년 세력 구도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당시 최홍희는 ITF 총재직
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자 자신과 입장이 달랐던 친아들 최중화(당시 lITF 사무총
장)와 반목이 싹터 2001년 1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ITF 특별총회에서 등을
돌렸다. 이날 총회에서 2003년 7월까지 예정된 최홍희의 총재 임기를 2007년 7월까
지 4년 연장하는 안(案)이 통과되자 최중화 측이 반발했다. 최홍희는 2000년 로마
ITF 회의에서 ‘2년 후 아들을 총재 자리에 앉히겠다’고 공포했는데, 최중화 주변의 사
람들이 마치 새로운 총재를 모시 듯 그를 대하며 설쳐댔다. 이 일로 비엔나 총회에
서 최홍희 묵인 아래 최중화가 제명 처리되었다.
부자(父子) 간의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2년 5월 북한에서 위암 치료를 받고
최홍희가 캐나다 토론토공항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자 최중화는 아버지와 어머니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에게 잘못했다며 용서해 달라고 용서를 빌었다. 평양에
서 위암 수술을 받았지만 최홍희의 병세는 회복되지 않고 더욱 악화됐다.

10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101

북한에서는 최홍희를 받아주겠다고 했으나 한국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혀 왔


다. 독립유공자 인정 여부에 대해서도 ‘국가보훈처에서 심사 중’이라는 회신을 보내왔
다. 최홍희가 갈 곳은 북한 밖에 없었다. 그는 2002년 6월 15일 평양에서 숨을 거두
었다. 타계하기 전 그는 ITF 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민족고유의 무도인 태권도
를 하나로 만들어라 △태권도 보급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ITF 회원들에게 고
맙다 △나는 일평생 태권도 창시와 보급을 위해 힘들게 싸워 왔지만 피곤하지 않고
행복하다 △북한의 장웅 IOC 위원을 나의 후계자로 삼아라 △아들 최중화를 아버지
로서 인정하지만 공적(公的)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는 등의 유언을 남겼다. 최홍
희의 장래식은 장웅과 황봉영을 포함한 14명으로 구성된 장래위원회에 의해 3일장으
로 치러져 평양 열사능에 묻혔다. 최홍희는 생전에 ‘태권도 창시자’라는 비문(碑文)을
원했지만 북한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2년 6월 15일 평양에서 최홍희가 타계하자 미국과 캐나다 지역에서 그의 추모
식이 열렸다. 미국 중서부의 무도인 50여 명은 시카고에서 추도 모임을 갖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국내 태권도인들은 그의 죽음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이념을 떠나 최홍희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나영일 서울대 교수는 2006년 11월 29일 국기원이 주최한 ‘태권도 역사-정신 연구 세
미나’에서 “남한을 배척했다고 해서 최홍희가 사망한 지금까지도 백안시한다는 것은
조금 지나친 처사이다. ‘태권도’라는 이름을 새롭게 만들어낸 최홍희의 공(功)은 크다.
그렇다고 태권도를 그가 홀로 창시했다고 하는 것도 역시 지나치다.”고 밝혔다.

남태희 오도관 2대 관장

9대 관(館) 중 하나인 오도관(吾道館) 창설 멤버 남태희는 태권도 발전과 보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이다. 1946년 17세의 나이에 청도관에서 태권도를 배웠던
그는 대표적인 군 출신 태권도인이다. 어린 나이에도 높은 무술 실력을 갖췄던 그는
청년시절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2010년 한국 방문 당시 “일찌감치 당수도를 배웠으나 태권도를 보급한 사람이 처
음 당수도를 배웠다고 하면 말이 많아질 것 같아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01


102 ▸ 국기원

중요한 것은 남태희가 무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항상 높은 실력을 인정받고 있


었다는 것이다. 또 오도관을 창설해 군 태권도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역
사에 기록될 만하다. 남태희와 오도관을 창설한 최홍희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다.
남태희가 육군종합학교에 소속돼 있을 때 최홍희는 부총장으로 같은 기관에 있었지
만 아쉽게도 이 곳에서 둘의 직접적인 만남은 없었다. 남태희와 최홍희의 만남은 ‘익
크 부대’로 불린 29사단에서 이뤄진다.
29사단에서 남태희가 화랑무도회를 만들어 태권도를 연마하고 있을 당시였다. 부
대장으로 부임한 최 장군이 화랑무도회 수련장을 방문하면서 역사에 남을 태권도계
두 거물이 운명적으로 만났다. 청도관에서 이원국에게 전수받은 남태희의 태권도 시
연을 본 최홍희는 매우 흡족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를 높게 평가해 남태희
로 하여금 태권도 교관을 양성토록 했는데, 이때부터 29사단에 활발한 태권도 보급이
진행됐다.
2010년 한국 방문 당시 대한태권도협회가 출간한 ‘태권도지’와의 인터뷰에서 남태
희는 “3개 연대에서 각 5명, 직할 중대에서 각 1명씩 차출해 태권도를 지도했다. 29
사단 예하 부대를 돌며 가르쳤는데, 제주도의 특성상 바람이 많이 불고 연대가 분산
돼 있어 교육이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남태희의 여러 가지 일화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의 기
왓장 격파시범이다. 29사단 태권도 교관들이 주축으로 보인 대련, 형, 격파를 비롯해
남태희가 기와 13장을 단번에 격파하자 이승만은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당시 대통령의 말 한마디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이승만 대통령이 “저건 당수가
아니다. 저게 태껸이야. 저걸 전 군에 보급시켜야 해!”라고 말한 것이 태권도 군대
보급의 촉매 역할을 하게 됐다.
당시 대통령 이외에도 백선엽 등 대장 출신들이 참석한 자리였다. 이미 최홍희로
부터 중요한 행사니 준비를 잘 해달라는 당부를 받았던 터라 예행까지 꼼꼼하게 마
쳤기에 성공적으로 시범을 보일 수 있었다. 남태희는 평소 15장까지 격파가 가능했
으나, 행여 발생할 실수를 우려해 2장을 빼고 완파했다고 말했다. 그 후에도 6.25 전
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남태희는 필리핀, 월남, 대만 등지를 순회하며 태권도 시범을
펼쳐보였다.
남태희는 태권도 작명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다. 대통령 앞에서 시범을 보였던
1954년까지도 태권도라는 명칭은 없었다. 수박도, 당수도, 공수도, 권법 등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10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103

대통령의 말대로 전군에 보급시키기 위해서는 통일된 고유 명칭이 필요해 장군으


로 보좌하던 최홍희와 함께 논의했다. 남태희는 2010년 한국 방문에서 “태껸의 ‘태’는
밟을 태(跆)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 ‘껸’은 한자로 찾을 수 없었다. 손과 발을 사용한
다는 의미에서 손 ‘수(手)’를 사용하는 것도 고민했으나, 당수도와 공수도와 색체가
겹쳐 피했다. 그래서 손보다 강한 주먹 권(拳)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태권
도가 만들어졌고, 이는 명칭제정위원회의 회의를 거쳐 대통령에 상신, 결국 태권도
휘호까지 받아 완성됐다. 명칭제정위원회는 조경구 국회부의장, 이형구 대장 등을 포
함해 총 18명이었다. 1955년 국일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태권이라는 명칭이 최홍희와
남태희에 의해 제안됐다.
남태희는 최홍희가 1980년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며 친북 성향을 보이면서 소원
해 졌다고 털어놨다. 그는 “최 장군과 나는 군인으로서 6.25 전쟁을 치렀다. 그런데
자신은 북한으로 넘어가겠다면서 같이 갈 사람들은 가자고 제안하더라. 3년 동안 수
많은 중공군, 인민군을 죽이면서 전쟁했는데 어떻게 북으로 갈 수 있겠는가? 고향이
함경도였던 최 장군은 향수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달랐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또 “항상 도복을 입고 장병들을 지도한 것은 나였다. 계급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태권도는 직접 가르친 사람을 따르게 돼 있다. 따라서 제자들은 항상 나를 더 따랐
었다.”며 최홍희와 사이가 소원했다고 에둘러 말했다.
남태희는 미국 시카고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13년 11월 작고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03


104 ▸ 국기원

3. 사료 및 사진자료

가. 개요

○ 사료 총 20점
사진기록 : 20점

나. 세부자료

자료_오도관_1

❏ 1954년 오도관을 창설한 당시의 초대 관장 최홍희. 당시 육군 소장이었다.

10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105

자료_오도관_2

❏ 1962년 제22회 오도관 승급심사

자료_오도관_3

❏ 1968년 오도관 2대 관장 남태희(앞줄 왼쪽)이 말레이시아로 출국하는 김용채 대한


태권도협회 회장을 배웅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05


106 ▸ 국기원

자료_오도관_4

❏ 오도관 2대 관장 남태희가 수련하고 있다.

자료_오도관_5

❏ 1962년 26사단에 설치되어 있는 오도관 태권도장

10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107

자료_오도관_6

❏ 1966년 오도관 휘경지관 승급 승단심사

자료_오도관_7

❏ 1950년대 중반 사단기 받고 있는 최홍희 오도관 창립자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07


108 ▸ 국기원

자료_오도관_8

❏ 1959년 오도관 군 무도 태권도부

자료_오도관_9

❏ 1959년 오도관이 주축이 된 국군 태권도 시범단

10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109

자료_오도관_10

❏ 1959년 최홍희 오도관 창설자와 국군 태권도 시범단

자료_오도관_11

❏ 1971년 오도관 창설자 최홍희와 정도관 창설자 이용우가 각 관에서 선발된 국제


사범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09


110 ▸ 국기원

자료_오도관_12

❏ 1959년 국군태권도시범단 최홍희 단장과 남태희

자료_오도관_13

❏ 오도관이 주축이 된 최초 태권도 해외 시범단 1959년 3월.

11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111

자료_오도관_14

❏ 최홍희 친필 오도관 현판

자료_오도관_15

❏ 태권도와 군(앞줄 좌측부터, 현종명, 노병직, 최홍희, 백준기)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11


112 ▸ 국기원

자료_오도관_16

❏ 1970년대 초 오도관 목포지관 수련생들. 앞줄 맨 오른쪽이 한명학 12대 관장.

자료_오도관_17

❏ 1970년대 초 한명학 관장이 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호신술을 하고 있다.

11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113

자료_오도관_18

❏ 2005년 오도관 12대 관장에 한명학 씨(오른쪽)가 취임하고 있다.

자료_오도관_19

❏ 2012년 오도관이 주최한 전국정통태권도선수권대회 개회식 후 임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13


114 ▸ 국기원

자료_오도관_20

❏ 오도관 심벌마크

11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오도관(吾道館) ◂ 115

4. 수련 관련 사항

가. 관훈

○ 우리들 관원은 무도정신에 입각하여 심신을 단련함. 우리들 관원은 상호 친애


하여 단결을 굳게 함. 우리들 관원은 관칙을 엄수하고 사범 명령에 복종함.

나. 수련정신

○ 오도관의 관훈은 청도관의 수련목표와 같음.


- 관훈은 ‘관원선서’로 사용되기도 함. 관원들이 입관할 때 도장 내 수련과정
에서 위계질서를 바로 잡기위한 의도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임.

○ 오도관의 관원선서는 청도관을 통해 유입된 것임. 이는 오도관이 군이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단결과 복종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추정됨.
- 최홍희가 만든 오도관의 태권도 정신 가운데 예의와 염치는 타인과의 관계
에서, 인내와 극기, 백절불굴은 자신과의 관계로 구분할 수 있음.

다. 수련형태

○ 1954년 창설 후 최홍희 지휘 하에 있는 각 군의 예하부대 장병들을 위주로


수련이 이뤄짐.

○ 전주와 청주 등 예비사단에 도장을 마련해 군인과 민간인들이 함께 수련하도록


함.

○ 한국전쟁 전 청도관에서 무술을 익힌 남태희를 비롯해 백준기·한차교·우종림·


고재천·김석규·곽근식 등이 오도관에서 활발히 활동함.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15


116 ▸ 국기원

○ 1959년 4월 서울 육군체육관과 대구 종합운동장에서 연무시범을 함. 초창기


수련생은 김수기·이응삼·이화섭 등 장병이 차지.

○ 1964년 최홍희가 화랑·충무·계백 등 18개 틀을, 66년에는 4개 틀을 완성해


군을 중심으로 보급함.

○ 오도관은 민간도장에서 태권도를 수련하고 입대한 장병들의 단증 중 청도관


단증만 인정함.
- 나머지 관의 단증은 ‘민간단’이라고 해서 별도의 승단심사를 하도록 함.

○ 최홍희는 “오도관의 ‘형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청도관과의 잦은 교류로 기본


동작과 형의 수련 체계가 같았으나 지도관, 창무관 등 민간도장의 수련체계와
는 달라 군에 맞는 별도의 심사가 필요했다”고 말함.

11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정도관(正道館)
1. 역사 및 개요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3. 사료 및 사진자료
4. 수련 관련 사항
정도관(正道館) ◂ 119

1. 역사 및 개요

○ 청도관 출신인 이용우가 1950년 4월 1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 124번지에 개관함.


정도관 명칭은 친구였던 엄운규의 제안에 따라 청도관에서 점을 하나 빼 정도관
이라 함. ‘바른 길을 걷는다’는 무도정신과 맞아 떨어짐.

○ 관훈은 ‘나는 떳떳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무도인이다.’였음.

○ 관원선서는 1. 우리들 관원은 무도정신에 입각하여 심신을 수련함.


2. 우리들 관원은 상호 친애하여 단결을 굳게 함.
3. 우리들 관원은 관칙을 엄수하고 사범 명령에 복종함.

○ 정도관 창설자 이용우는 청도관과 사이가 원만해 모체관에서 분관한 다른 신흥관과는


달리 모체관인 청도관과 큰 마찰없이 정도관을 발전시켜 나감. 1959년 정도관 불광
지관을 개관하면서 청파동, 원효로, 면목동, 삼각지 등에 지관을 내고, 1960년대
중반부터 마산, 울산, 창원, 목포, 김제 등지에도 지관을 내면서 중앙본관의 기틀을
갖춰 나감.

○ 초장기 수련생은 김종광, 김학배, 박태현, 이원팔, 이종오, 이달중, 김재기, 김기


동, 홍순기, 오부웅, 라영철, 김용수 등이 수련하였고, 1대 이용우 관장에 이어
2007년부터 2대 김기동 관장이 맡고 있음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19


120 ▸ 국기원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가. 계보도

❍ 관장계보

창설자 및 초대 관장

이 용 우

2대 관장

김 기 동

❍ 시대별 정도관 출신 인사

김종광, 김학배, 박대현, 이원팔, 이종오, 김만배, 이달중, 김재기, 김병운, 현원호,
김근배, 이한승, 김영진, 김기동, 엄주찬, 홍순기, 오부웅, 라영철, 김용수, 신광수,
1950년대
정선용, 조광희, 오성훈, 주계문, 조은주, 이학천, 임정원, 정지수, 배주식, 박용탁,
배운규, 하태명, 김동포, 황관선, 김선옥, 최정권.

서한철, 김종수, 서성관, 김학근, 김덕남, 김기일, 신상래, 강성민, 김영수, 서명기,
장용갑, 박경선, 김명환, 심명구, 서광석, 장재성, 고효원, 박종일, 장대길, 정금모,
1960년대 이충근, 정경학, 한용만, 노수길, 정진태, 서한준, 전영근, 전흥수, 이왕배, 안호창,
이호영, 김현성, 김상기, 장기승, 서광휘, 이정돈, 황진기, 유명희, 김정식, 김완선,
서현기, 서영기, 이동림, 박운조, 문윤석, 이현기, 최태권, 김용호, 이태춘, 정상규

12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정도관(正道館) ◂ 121

나. 주요인물 생애사

이용우 정도관 창설자

이용우는 1946년 말 청도관에 입관했다. 당시 청도관의 수련생은 300여 명. 방과


후 5시부터 1·2부로 나누어 태권도 수련을 했다. 그의 바로 위 선배는 손덕성과 엄
운규가 있었다. 후배로는 남태희, 우종림, 고재천 등이 있다. 그 중에 현종명은 이
관장보다는 두 살 많았지만 청도관에 늦게 입관해 선배로 대우했다. 당시의 선후배
위계질서가 얼마나 뚜렷하면서도 선·후배 관계가 돈독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연무시범에서 가장 돋보인 사람은 그와 엄운규였다. 이용우는 다른 수련생에 비해
다리가 길고 발기술이 화려했으며 엄운규는 기술을 구사할 때는 비호처럼 아주 날렵
했다. 이용우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해방 후 개성에서 송무관이 개관할 때 손덕성, 엄운규, 남태희 씨와 함께 연무시
범을 하기도 했고, 무덕관이 용산 철도국에 도장을 차릴 때도 연무시범을 했으며, 당
시 저는 다른 수련생에 비해 다리가 길고 몸의 골격이 커서 발기술을 많이 했지요.
당시 엄운규 씨는 아주 날렵했어요. 기술을 구사할 때는 비호같았으니까요. 태권도
원로 가운데 실력이 가장 뛰어났을 겁니다.”
그 후 연무대회가 경기로 첫 면모를 갖춘 것은 1949년이다. 교통학교 강당에서 최
초의 당수도 연무대회가 개최되었다. 이용우는 도시락 3개를 싸들고 도장에 나갈 정
도로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태권도를 수련했으며, 밤에는 전깃불에 비치는 그림
자를 보고 동작을 다듬으며 맹연습을 했다. 특히 당시 체계화된 기술이 없어 기술을
개발하고 연구하는데도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이렇게 일군 기술체계를 남태희·고재천·우종림이 이어 나갔다. 그는 우종림을
각별하게 생각하여 주먹을 쥐는 법부터 가르쳤다. 그 후 국군 장교가 된 우종림은
그를 깍듯이 예우하며, 그에게 태권도를 배운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는 일반 사병으로 복무를 했지만 뚜렷한 전
쟁 경험 없이 후방에서 소일했다. 우직하고 괄괄한 성품 때문에 군 생활 도중 싸움
판을 벌이기도 했다.
이용우가 제자 양성과 태권도 활성화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시기는 군 제대 후
인 1950년대 중반, 서울 서대문 로타리 부근에 정도관을 개관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21


122 ▸ 국기원

정도관 명칭은 친구 엄운규의 조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용우는 “도장을 개관


하려는데 엄운규에게 어떤 명칭이 좋으냐고 물으니, 청도관에서 ‘점’ 하나만 떼어버리
면 어떠냐구 하더라구. 곰곰이 생각하니 ‘바른 길을 걷는다’는 무도정신과 딱 맞아 떨
어지더라구. 그래서 정도관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당시 정도관의 도장 평수는 1백 여 평. 수련시간은 수련생이 너무 많아 5부(1부에
1백 여 명)로 나누어 밤늦게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수련층은 남자 중심의 청장년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좁은 장소에서도 쉽게 수련을 할 수 있고, 무예로서 우수한 기능을
가졌던 태권도는 어수선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용우는 기본동작을 중시했다. “모름지기 기본이 몸에 매야 한 단계 높은 기술을
연마할 수 있다. 그래서 수련생들은 치켜막기·중단전진·상단전진·상단막기·하단
막기 등을 수없이 반복 수련했다.”고 했다.
1962년 태수도협회가 대한체육회에 가입하면서 태권도의 경기화는 활발하게 이루
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이영섭, 이병로, 남태희, 오세준씨와 함께 태수도협회 상
임이사로 재직하면서 태권도 경기화와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또 상벌분과위원장
으로서 경기장 질서확립과 경기 판정의 공정성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용우는 2006년 타계했다.

12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정도관(正道館) ◂ 123

3. 사료 및 사진자료

가. 개요

○ 사료 총 20점
사진기록 : 16점
기타 문서기록 : 4점

나. 세부자료

자료_정도관_1

❏ 정도관 창설자 이용우.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23


124 ▸ 국기원

자료_정도관_2

❏ 정도관 휘장

자료_정도관_3

❏ 1960년대 초 대한태수도협회 창립에 참여한 이용우(사진 원안)가 협회 임원들과


회식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2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정도관(正道館) ◂ 125

자료_정도관_4

❏ 정도관 창설자 이용우가 1960년대 태권도 경기 심판을 보고 있다.

자료_정도관_5

❏ 1968년 정도관 서대문 중앙도장에서 김종광 수석사범 입대 전 기념사진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25


126 ▸ 국기원

자료_정도관_6

❏ 1971년 발급된 정도관 서명기 5단 단증

자료_정도관_7

❏ 정도관 창설자 이용우와 오도관 최홍희가 각 관에서 선발된 국제 사범들과 기념


촬영

12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정도관(正道館) ◂ 127

자료_정도관_8

❏ 1977년 정도관 서대문 중앙도장에서 열린 총회 후 기념사진

자료_정도관_9

❏ 정도관 관훈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27


128 ▸ 국기원

자료_정도관_10

❏ 정도관 초기 단증발급대장

자료_정도관_11

❏ 1968년 정도관 서대문 중앙도장에서 김종광 수석사범 입대 전 기념사진. 사진 왼쪽에


정도관 관원선서, 오른쪽에 정도관 상징물이 걸려 있다.

12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정도관(正道館) ◂ 129

자료_정도관_12

❏ 1970년 정도관 서울 불광도장 심사기념 사진

자료_정도관_13

❏ 1970년대 후반 정도관 부산본관 재추도장 관계자들의 모습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29


130 ▸ 국기원

자료_정도관_14

❏ 1970년대 후반 정도관 서대문구도장 수련생들이 국기원 정문에 서 있다.

자료_정도관_15

❏ 1974년 김덕남 사범이 대만으로 떠나기 전 정도관 유단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3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정도관(正道館) ◂ 131

자료_정도관_16

❏ 1974년 정도관 출신 김명환, 장용갑, 박경선 사범

자료_정도관_17

❏ 1970년대 후반 정도관 본관에서 열린 심사에서 시범을 하고 있는 박경선 사범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31


132 ▸ 국기원

자료_정도관_18

❏ 1980년 정도관 창원시본관 개관식 시범 행사

자료_정도관_19

❏ 1980년 초 정도관 이종배 관장이 지역행사에서 수련생들과 시범을 하고 있다.

13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정도관(正道館) ◂ 133

자료_정도관_20

❏ 1983년 정도관 경남본관이 주최하고 부산시 본관이 주관하는 경남지역 친선태권도


선수권대회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33


134 ▸ 국기원

4. 수련 관련 사항

가. 관훈 : 나는 떳떳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무도인이다.

○ 관원선서 :
1. 우리들 관원은 무도정신에 입각하여 심신을 수련함.
2. 우리들 관원은 상호 친애하여 단결을 굳게 함.
3. 우리들 관원은 관칙을 엄수하고 사범 명령에 복종함.

나. 수련정신

○ 무예 수련을 통해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자.

다. 수련형태

○ 청도관 출신 이용우는 청도관과 사이가 원만해 다른 신흥관과는 달리 모체관인


청도관과 큰 마찰없이 정도관을 발전시켜 나감. 따라서 청도관 수련체계와
정도관 수련체계는 비슷함. 1959년 정도관 불광지관을 개관하면서 청파동,
원효로, 면목동, 삼각지 등에 지관을 냄. 1960년대 중반부터 마산, 울산, 창원,
목포, 김제 등지에도 지관을 내면서 중앙본관의 기틀을 갖춰 나감.

13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1. 역사 및 개요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3. 사료 및 사진자료
4. 수련 관련 사항
지도관(智道館) ◂ 137

1. 역사 및 개요

○ 1946년 3월 3일 전상섭이 개관함. 전상섭은 학창시절 유도를 배웠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척식대학에서 공부를 한 것으로 알려짐. 일본에서 귀국한 전상섭은
서울 경성전기학교에서 체육교사를 하면서 서울 소공동에 있는 일본 강도관 조선
지부 도장에서 무술을 연마함.

○ 당시 강덕관은 유도를 수련하는 곳으로, 전상섭은 이 곳에서 유도 유단자들에게


가라테를 가르치다가 해방 후 이 곳을 불하(拂下)받은 이경석의 허락을 받아 한
켠에 권법부 간판을 내걸고 관원을 모집한 것이 조선연무관 권법부의 모태가 되
었다는 설이 유력함.

○ 1949년 11월 소공동에서 제8회 권법연무대회를 개최. 1949년 윤쾌병이 전임사범


으로 온 후부터 대외 활동 활발해짐. 윤쾌병은 일본 유학시절 병리학을 전공하면서
가라테를 배운 학구파. 수련은 주로 가라테 기술을 차용한 형(型)과 봉술을 배움.
이교윤은 “윤쾌병이 한 달 동안 봉술을 지도하기도 했다”고 증언.

○ 당시 관원은 10대 후반부터 20세 초반의 학생과 청년들이 많았음. 수련시간은 방과


후 오후 5시부터 3부(1부 1백여 명)로 나누어 1시간씩 이뤄짐. 한국전쟁 전까지
무급에서 8급까지 상-중-하로 나눠 지도함. 관번은 일관일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급(級)도 고려함.

○ 초창기 수련생은 배영기·전일섭·엄기윤·이종우·김복남·서광준·정진봉·박현정·


김수진·정진영·이교윤·이병로·홍찬길·박영근·이경율·장기돈·김광수·이훈영
등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이 많았음. 1946년 7월 1일부터 20일까지 모서수련(冒暑
修鍊)을 마치고 제1회 심사를 함.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중급에 배영기·전일섭·
엄기윤·김복남·서광준·정진봉·이종우가 진급함.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37


138 ▸ 국기원

○ 한국전쟁으로 창설자 전상섭이 행방불명되자 조선연무관 권법부는 재건을 위해


지도관(智道館)으로 개명함. 지도관은 ‘지혜로운 길’을 의미함.

○ 지도관은 1955년 12월 유급-유단자 진급 승단심사와 단체 및 개인대항시합을 한


국체육관에서 개최함. 1956년 2월에는 1개월 동안 한국체육관에서 ‘공수도 호신술
강습회’를 개최하고, 그해 10월 전국정기승단진급심사 및 제3회 중고등대학일반
대항전을 개최함.

○ 지도관의 중앙사무실은 서울 을지로 한국체육관에 있었지만 체계적인 발전은 전북


전주를 중심으로 지관(支館)을 통해 이뤄짐. 조선연무관 공수도부를 창설한 전상섭의
친동생인 전일섭은 1947년 5월 전북 군산에 첫 지관인 군산체육관을 개관함.

○ 지도관은 전북을 중심으로 중흥기를 만듦. 태권도 경기화가 이뤄지던 1960년대 초,


태권도 경기규칙과 호구는 전북 지도관이 만든 것이 주로 반영됨. 1961년 5월 전주공
설운동장에서 일본공수도협회 선수들과 전북 지도관 소속 선수들이 친선경기를 함. 이
때 일본에서 검도를 할 때 착용하던 머리 및 몸통 호구를 입고 경기를 함.

○ 1962년 태권도 경기규칙이 제정되고 그 해 43회 대구 경북 전국체전에서 시범종목이


된 태권도는 1963년 전주에서 열린 44회 전국체전에서 정식종목이 됨. 1960년대
초중반, 국가대표 선수선발에서 이승완을 비롯 조점선, 황대진, 안대섭, 김용준,
최동진, 최영렬, 유기대, 유형환, 박연희 등 지도관 출신들이 많이 선발되면서 초창기
경기화를 주도함.

○ 전일섭은 지도관 전북본관장이 되어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함. 그의 제자들은 전주·


군산·이리·남원·김제·정읍·남원 등 전라북도 지역으로 관세를 확장함.

○ 1960년 11월 지도관 전북본관은 전북체육관과 전북일보사 등의 후원으로 전주시


중앙구장에서 전북공수도대회 및 전북본관 추계심사대회를 개최함. 같은 해 강원
본관에서도 추계승단심사를 개최함.

13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39

○ 1954년 시작된 지도관 전북본관은 초기 전일섭이 관장을 맡고, 유병룡이 전임사범을


맡음. 전북본관은 초기 각 지역에 사범을 둠. 익산에는 장연준, 정읍에는 장남용,
신재섭, 남원에 박인수, 김제 노영현, 원용현, 노병인, 전주 이병하, 군산 최동렬,
만경 박재석 등이 활동함.

○ 지도관은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 통합 과정에서 윤쾌병 관장과 이종우 사범의 견해


차이로 불화를 겪음. 윤쾌병은 황기 등과 통합에 반대한 반면 이종우는 엄운규와
통합에 적극적임.

○ 지도관 단증은 1961년 태권도가 통합될 때까지 윤쾌병 1대 관장 명의로 발급함.


그 후 1986년까지 이종우 2대 관장이 발급하다가 그 이후부터 이승완 3대 관장이
발급함.

○ 지도관 출신 태권도인들은 주로 미주에 건너가 태권도를 보급함. 조시학을 비롯해


이상철, 박연희, 박연환, 김광웅, 안대섭, 박원직, 전병인 등이 대표적. 특히 이상철은
1988년 미국올림픽 태권도대표팀 감독을 맡은 후 1997년부터 2004년까지 미국
태권도협회 회장과 미국올림픽위원회 이사를 역임함.

○ 지도관 역대 본관장, 부관장, 사무국장, 시도본관장은 다음과 같음.


* 창설자 : 전상섭
* 1대 관장 : 윤쾌병(윤이병)
* 2대 관장 : 이종우
* 3대 관장 : 이승완
* 부관장 : 황만년, 서정도, 김주훈, 김영태, 강정구, 이택명, 정길춘, 최영렬, 김정인,
최권열, 최영길, 서성학, 김인수
* 사무국장 : 최석영 김정인 김갑식
* 시도본관장 : 서울 김성배, 부산 박현종·박래순·김우규, 경남 김정철, 경기도
원상욱·강선장·임동본, 인천 원상욱·원교식, 대구 김정훈·정우득,
경북 김정훈·강재곤, 울산 김위수·김정복, 대전 최광복·임연우,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39


140 ▸ 국기원

강원 김천선·유원선·목재균·박병철·김대용, 충남 고윤환, 충북
강정구·유승선, 전남 김영일·박장길, 전북 전상섭·유병룡·문창균·
이영기·임재봉·장한철·황영택·신명수, 광주 김주훈·김민철,
제주 안보길·김권태

14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41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가. 계보도

❍ 관장계보

창설자 및 초대 관장

전 상 섭

1대 관장

윤 쾌 병

2대 관장

이 종 우

3대 관장

이 승 완

❍ 시대별 지도관 출신 인사

김광수, 김기석, 김복남, 김수진, 김천선, 박영근, 박현정, 배영기, 서광준, 엄기윤,
1940년대 원용범, 유명제, 이경울, 이교윤, 이병로, 이종우, 이훈영, 장기돈, 전일섭, 정진봉,
정진용, 홍창길, 황진태 등

김용훈, 김판영, 김혁래, 노용언, 서준용, 양창순, 유병용, 이승완, 임명길, 임병덕,
1950년대
장연진, 장영순, 정우득, 조용태, 조점선, 최영렬, 황대진 등

강봉준, 고인환, 김갑식, 김경일, 김덕진, 김동한, 김세철, 김용길, 김용덕, 김인곤,
김철오, 김충남, 노순명, 박종명, 부영제, 성재준, 안인섭, 양인식, 유 홍, 유학기,
1960년대
윤 길, 윤광석, 윤학기, 이창기, 이천수, 이철주, 이효남, 임 춘, 정선문, 정영득,
최기술, 최동진, 최정도, 최정호, 허인식, 황덕만, 황영택 등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41


142 ▸ 국기원

나. 주요인물 생애사

이종우 지도관 2대 관장

이종우는 1929년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다. 경기도 이천이 고향인 부친은 서울로


이사 와서 천도교 대표로 독립운동을 했던 손병희 선생의 행랑채에 살았다고 한다.
꿈이 많던 청소년 시절, 보이스카우트(소년단)으로 활동한 그는 친구 동생이 하는 ‘18
기’ 무술을 보고 매료돼 조선연무관(朝鮮鍊武館) 공수도부(권법부)에 입관했다. 당시
그의 큰 키(180Cm)를 눈여겨 본 소년단 중구 지대장의 권유도 그가 무술계에 발을
디뎌 놓은 계기가 됐다는 후문이다. 이종우는 조선연무관에 1946년 3월 23일 입관했
다. 이종우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해방 직후였다. 사춘기의 꿈이라고 할까. 17세 무렵 막연하게 무림의 고수를 꿈꾸
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소공동에 가면 18기를 가르치는 곳이 있다고 하잖아. 그래
서 거기를 찾아갔다. 그 곳이 바로 일제시대 유도 도장이었는데, 그때는 조선연무관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유도부와 권법부를 만들었다.
입관비와 월 회비를 내고 무술을 배운 이종우는 1949년 경신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응용미술학과에 진학했지만 이듬해 한국전쟁(6.25 전쟁)이 일어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3단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이종우는 부산 피난 시절, 주위의 도움으로 국제시
장 근처에 있던 건국대 부속 유치원을 빌려 무술을 가르쳤다. 또 당시 학생유도연맹
부위원장이었던 친구 김인화 등과 함께 대한공수도연맹을 결성하는데 앞장서며 그
단체의 사무국장을 맡는 등 무술 단체의 조직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대한공수
도연맹의 주된 업무는 각 관(館)을 관리 감독하고, 공인 단증을 발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50년대 중반 결속력 부족으로 와해됐다.
그 전에 앞서 이종우는 1953년 정전 협정 전에 서울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전쟁
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 있는 어수선한 서울에서 그가 할 일은 없었다. 고심 끝에 자
가용으로 택시 영업을 하는 형의 권유에 따라 보름간 조수로 일했으나 돈벌이는 시
원찮았고 폐결핵에 걸려 피로가 쉽게 찾아왔다. 그는 당시를 상황에 대해 “별의별 손
님을 다 만나는 중노동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서울시청에서 부산 피난 시절 인연을 맺은 사람
(사업가)을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 택시 조수 일을 그만

14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43

둔 그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의기투합, 서울에 백화점을 개점하고 관리부장으로 근


무했다. 그 후 6개월 만에 상무이사가 됐지만, 백화점 업무를 등한시하면서 젊은 혈
기를 탕진한 끝에 백화점은 부도가 나고 말았다. 이제 이종우가 갈 곳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전쟁 중에 전상섭이 북으로 납치되자 조선연무관에서 사범으로 활동했던 윤쾌병에
게 제안해 조선연무관을 ‘지도관(智道館)’으로 개칭한 이종우는 지도관에 복귀했다.
1954년이었다. 당시 별도의 사무실과 수련장이 없었던 지도관은 을지로에 위치한 한
국체육관에 터를 마련하고, 혼란한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당시 한국체육관은 권투·
유도·역도·펜싱 등을 가르치는 종합체육관이었다. 지도관은 왜 그 곳에 가게 됐을
까? 이종우의 후일담. “초창기 조선연무관은 유도가 중심이고 한쪽 구석에 권법부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연무관이 6·25 때 부역을 했다. 조선연무관을 관장하던 이병석
씨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곤란하니까 권법부 사람들이 다른 장소를
구해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을지로 3가에 있던 한국체육관이 지도관 자리였다.” <서
성원(2008), 태권도현대사와 길동무하다, 상아기획>
그 후 이종우는 본격적으로 지도관의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1년에 1∼2회 특별교
육을 통해 호신술과 접골 등을 교육할 정도로 의욕을 보였다. 그리고 대한공수도협
회가 실시한 공인 승단심사에 응심해 손덕성·엄운규·이남석·현종명 등과 함께 4
단을 취득했다. 승단심사는 실기로 했는데, 당시 이종우는 맹장염에 걸려 서류심사만
받았다.
1950년대 후반 국내 무술-무도계에는 공수도·수박도·화수도·권법·태권도 등의
명칭이 난립했다. 그 때 군세(軍勢)를 등에 업고 최홍희가 청도관과 오도관 세력을
결집시켜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했다. 당시 대한체육회 이사들이 참석한 가운
데 열린 창립총회에는 6개 관(館)의 대표가 모여 통합체 구성에 합의했다. 초대 회장
은 청도관 명예회장이자 오도관 관장인 최홍희가 맡았고, 부회장은 송무관 관장인 노
병직과 지도관 대표인 윤쾌병이 맡았다. 당시 이종우는 지도관의 서열상 윤쾌병을 모
시는 위치였지만 현종명, 고재천 등과 함께 상임이사에 선임됐다. 그러나 이종우는
최홍희의 주도로 창립한 대한태권도협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협회 명칭을 결정하
기 전 이종우는 노병직, 윤쾌병과 함께 ‘공수도’를 주장했지만, ‘태권도’를 주장하는
최홍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61년 5월 박정희에 의해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당시 문교부는 국가
재건최고회의의 포고령에 따라 유사단체 통합을 추진했고, 여러 갈래를 퍼져있던 국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43


144 ▸ 국기원

내 무술계도 61년 7월 통합회의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이종우는 껄끄러운 상대였던 최홍희가 말레이시아로 떠나자 행동반경이 한결 자유
로워졌다. 그는 유사단체 통합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자 ‘옵서버’ 자격으로 통합회
의에 참석해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개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지도관 대표는 윤쾌
병이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각 관(館)으로부터 양해를 구해 ‘옵서버’로 참석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민감한 사안은 통합체 명칭이었다.
태권도와 공수도가 팽팽하게 맞서자 윤쾌병은 태권도의 ‘태’와 공수도의 ‘수’를 따
서 태수도(跆手道)로 할 것을 제안했고, 표결에 붙인 결과 6표 중 4표(기권 2표)를
얻어 협회 명칭은 대한태수도협회로 결정됐다. 이런 결과를 이종우는 수용했다. 손을
펴는 것(手)이나 쥐는 것(拳)이나 마찬가지로 본 셈이다.
그 후 1961년 9월 창무관에서 열린 대한태수도협회 제1차 이사회에서 이종우는 9
표를 얻어 5표를 얻은 엄운규와 함께 부회장에 선임됐다. 회장은 대외 인사로 하자
는 결의에 따라 채명신(국군 장성)을 추대했다. 이렇게 해서 대한태수도협회의 골격
이 완성됐다. 이 과정에서 각 관의 이해득실과 노병직, 황기, 윤쾌병 등 1세대들과의
갈등으로 많은 마찰을 빚었지만, 그래도 대한태수도협회가 창설되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은 이종우와 엄운규였다.
특히 이종우는 지도관 대표였던 윤쾌병과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면서 대한태수도협
회를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이를 두고 박철희(강덕원 2대 관장·대한태수도협회 이
사)는 “이종우, 그 양반은 재주꾼”이라며 그의 협상력을 높이 평가했다.
1961년 9월, 우여곡절 끝에 대한태수도협회(大韓跆手道協會)가 창립됐다. 협회 집
행부 명단을 보면 ▷회장 채명신 ▷부회장 이종우·엄운규 ▷상임이사 남태희·이용
우·이영섭·오세준·고흥명 ▷이사 현종명·이교윤·박철희·고재천·송태학 ▷감사
차수룡·이희진 등이었다.
당시 대한태수도협회의 현안은 각 관(館)의 유단자 조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
다. 이를 위해 각 관별로 행해지던 형과 대련, 격파 등의 기술 차이를 없애기 위해
심사대표단을 구성했다. 이때 이종우는 이남석·엄운규·이영섭·박철희 등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회장 채명신(군사혁명위원회 감찰위원장)이 군 내부 문
제로 회장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협회의 실질적인 업무 집행은 부회장이었던
이종우와 엄운규가 맡았다. ‘실세(實勢)’였던 것이다.
대한태수도협회가 창립이 됐어도 내부 갈등은 여전했다. 1962년 7월, 소위 1세대
라고 하는 황기와 윤쾌병 등이 ‘종신제 최고 심사위원’을 요구해 왔다. 협회 구성 과

14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45

정에서 주도권을 제자들에게 빼앗긴 일종의 소외감이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하


루빨리 사태를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인 이종우는 이남석, 엄운규와 수차례 회의를
한 끝에 ‘종신제’ 대신 ‘연한제’로 합의를 보고 이사회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하려고 했
다. 그러나 이사들은 논의할 가치가 없다며 일축해 난항이 거듭됐다.
이에 황기는 1962년 7월 20일, 대한태수도협회 이남석 이사장에게 서한을 보내 협
회 탈퇴를 통보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종우는 황기의 탈퇴 서한을 접하고 그를 만
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통합의 명분을 살리기 위해 황기와 윤쾌병의 탈퇴를 막기 위해 노력하던 이종우는
시간이 지나면서 체념하게 됐다. 1962년 8월 29일, ‘무덕관장 황기-지도관장 윤쾌병’
이라는 명의로 탈퇴서가 협회에 전달되자 그 때부터 같은 지도관 소속이었던 윤쾌병
과 이종우의 갈등은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다. ‘관장 윤쾌병-대표 이종우’라는 비정상
적인 지도관의 체제를 정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종우는
지도관 내분이 해결될 조짐을 보이지 않자 협회 참여를 거부하는 윤쾌병 추종자들을
제외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지도관의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1964년 4월 대한태수도협회 규약을 개정하고 2대 회장으로 박종태(공화당 국회의
원)를 추대하면서 탄탄대로를 걷던 이종우는 64년 후반, 최홍희가 말레이시아 대사를
마치고 귀국하자 제동이 걸렸다. 이종우와 껄끄러운 사이였던 최홍희는 귀국하자마자
자신이 작명한 ‘태권도’가 사라지고 ‘태수도’가 통용되는 현실에 분개했다. 1965년 1
월, 정치-체육계 배경으로 협회장에 취임한 최홍희는 이종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
한태수도협회’를 ‘대한태권도협회’로 바꿨다.
이종우는 1971년 김운용이 제7대 회장으로 취임하자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할
기회를 잡았다. 당시 김운용은 이종우를 각별하게 예우하며 그를 통해 태권도 발전을
위한 청사진을 구상했다.
1972년 이종우가 엮어서 펴낸 태권도교본 품세편(대한태권도협회 발행)은 그가
얼마나 태권도 기술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그는 이 책의 머리
에서 “만 권의 책을 읽기보다 한 권의 책을 만들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토로했다.
이종우는 국기원(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 건립 당시 건설본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국기원 건립 부지에 대해 “당시 국기원 부지는 서울 한남동 삼거리 타워호텔
부근과 연세대 봉원사 부근, 그리고 강남 역삼공원 등이 물망에 올랐다. 그런데 내가
주장했던 타워호텔 부근은 리틀엔젤스가 땅을 확보한 상태라 제외됐다.”고 말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45


146 ▸ 국기원

국기원이 발행한 국기 태권도 교본제작하며 태권도 역사와 철학 등 이론을 정립


하는데 기여한 이종우는 73년 김운용을 보좌해 세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한 공로를 인
정받아 초대 사무총장에 선임됐다. 그 때부터 이종우는 대한태권도협회 집행부 임원
에서 벗어나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으로서 태권도 세계화에 정진하게 됐다. 하지만
그동안 이종우와 호흡을 맞춰 왔던 엄운규는 72년 1월부터 76년 말까지 대한태권도
협회 전무이사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것은 결국 훗날 이종우
와 엄운규가 태권도계 판세를 놓고 ‘라이벌 관계’를 이루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종우는 1977년 8월, 관(館) 통합을 위한 총본관의 부관장을 엄운규와 맡아 이병
로, 강원식과 함께 관 통합을 주도해 나갔다.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전무로 재직하며
관 통합에 앞장섰던 강원식은 평소 “(태권도 발전을 위한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종우
씨가 많은 힘을 보태줬다.”고 평가했다.
1960∼70년대 태권도 발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종우는 1980년대 초 뜻밖의 시
련을 겪는다.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후 사회를 안정시킨다는 명목
으로 사회정화 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 바람이 태권도계에 밀어닥쳤다. 당시 정부
당국은 태권도 제도권을 ‘비리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김운용을 비롯한 행정기관의 임
원과 각 관(館)의 관장들의 사표를 강요했다. 서슬퍼런 군사정권 분위기에서 사표를
거부할 사람은 없었다. 이종우, 엄운규 등도 사표를 내야만 했다. 그 후 김운용은 이
규호 문교부장관에게 건의해 이종우와 엄운규 등 임원들을 복직시켰다.
그렇게 1990년대가 흘러갔다.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태권도에 대한
미련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국내 제도권 어디에도 그가 비집고 들어갈 마
땅한 곳은 없었다. 태권도 발전을 함께 일궈낸 엄운규도 그의 복귀를 원하지 않았다.
외롭고 말벗이 필요할 때면 세계태권도연맹 부총재 자격으로 간혹 세계연맹을 방문,
이금홍(세계연맹 사무총장)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국내 제도권에서 재야 원로로 머물러 있던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 왔다. 1999
년 8월, 그는 국기원 연수원 담당 부원장으로 제도권 진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
정에서 그를 껄끄럽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세대교체 역
행, 인사행정의 일관성 결여 등 비판이 제기됐다.
어쨌든 제도권은 이종우를 주목했다. ‘어떤 배경에 의해 복귀했느냐?’가 중요한 것
이 아니라 ‘복귀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슈로 떠올랐다. 그는 주위의
이러한 시각을 냉철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종우는 ‘태권도 발전을 위한 마지막 봉사’
라며 배수진을 쳤다. 이종우는 태권도 발전을 위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이론 정립

14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47

에 여생을 바치겠다며 태권도의 무도 스포츠적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연구소를 설립


할 것이라고 말했다.
태권도 원로 중 태권도 기술과 이론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던 이종우는 “심판
판정의 부조리가 계속 발생하면 결국 태권도의 힘을 약화시키게 될 것”이라며 판정
시비 해결책으로 전자호구 도입을 주장했다.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할 때부
터 전자호구 개발에 남다른 의지를 보여 온 그는 시드니 올림픽이 끝난 후 김운용의
당부에 따라 전자호구 개발을 서둘렀다. 그의 집무실에는 전자호구 모형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을 만큼 전자호구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한편 이종우는 2015년 8월 타계했다. 그의 영결식은 태권도계 최초로 ‘태권도
장(跆拳道葬)’으로 엄수됐다.

이승완 지도관 3대 관장

이승완은 1940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1학년 때 지도관 전북도본관에


입관해 태권도를 배웠다.
청소년 시절부터 리더십과 강단이 좋은데다 태권도 실력도 출중해 전일섭 전북도
본관장을 비롯한 사람들도 그의 존재감을 인정했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1961년
전주에 체육관을 개관해 전주공업고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박연희, 황대진
사범들이 그 때 제자들이다.
이승완은 윤쾌병 지도사범(1대 관장)에게 1단부터 4단까지 단증을 받은 후 1962년
11월 태권도계가 통합될 무렵 실기 심사를 거쳐 5단증을 취득했다.
1963년 국가대표 선수선발대회(1-3차)에서 최종 선발된 이승완은 선수들의 주장이
되어 일본 공수도 선수들과 친선경기를 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 당시 선수단 감독은
노병직 송무관 관장이었다. 당시 국가대표 선수는 3단 이하는 중기부, 3단 이상은 고
기부로 분류한 뒤 그 안에서 경량급(輕量 級)-중량급(中量級)-중량급(重量級)으로 선
경량 급 중 량 급 중량 급

수를 선발했다.
그 후 이승완은 해병대에 태권도부를 창설하고 초대 감독을 맡았다. 초창기 선수
들은 김인수, 유기대, 최영렬, 최동진 등 지도관 출신들이 많았다. 해병대 태권도부는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47


148 ▸ 국기원

대통령기하사기쟁탈대회를 5연패 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잠시 태권도계를 떠나 있던 이승완은 1986년 이종우 2대 관장의 뒤를 이어 3대
관장에 취임했다. 그 후 태권도 고단자회 일원으로 활동하던 중 1996년 1월 대한태
권도협회 회장선거에 입후보했다.
하지만 회장 선거를 둘러싼 여러 정황으로 삼성이 새 집행부를 맡게 되자 주위의
권유로 부회장을 맡아 태권도 제도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 무렵 ‘국기 태권도신문’
을 창간해 태권도 언로를 개척했다.
그 후 대한태권도협회 상임부회장을 비롯한 제도권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도 이승완은 건재했다.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과 국기원 이사로
활동하면서 태권도 발전을 위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던 2009년 3월 국기원이 정기이
사회를 열어 엄운규 원장의 사의표명 이후 수개월 동안 표류해온 국기원 업무의 정
상화를 위해 정상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이승완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국기원 정상화추진위원회는 서울시태권도협회와의 분규를 조정하고 국기원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는 조정자의 역할은 물론 집행부의 쇄신과 ‘태권도 특별법’에
따른 정관 개정 및 법정법인으로 새 출발을 준비하는 주체였다.
당시 이승완은 정상화추진위원회의 구성과 활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태권도계의 충분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너무 서두르지는 않겠다. 위원 수는
5~6명 정도가 될 것이다. 태권도인 뿐만 아니라, 대학교수, 법조인, 행정전문가 등
현 국기원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해결방안을 내놓을 수 있는 인물로 구성할
계획이다. 활동은 국기원의 정상화가 이루어졌다고 판단될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국기원 정상화를 놓고 문화체육관광부와 시각차를 보였다. 그는 이에 대해
“문체부에서 그 동안 국기원 문제와 관련해 이해 당사자들의 견해를 골고루 들어보았
는지 되묻고 싶다. 국기원의 특정 인물을 통해서만 국기원과 태권도계의 목소리를 들
어온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문체부가 태권도계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 인식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며 거리를 뒀다.
그 해 10월, 국기원 이사회는 이승완 정상화추진위원장을 이사장 겸 원장직무 대
행으로 선출하고 정관개정 작업을 비롯한 법정법인 출범을 위한 준비작업을 추진하
기로 결정했다. 그는 “국기원 정상화의 핵심은 국기원의 운영주체인 이사회가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쟁점으로 떠오른 국기원 법정법인화에 대해
이렇게 소신을 밝혔다.
“나는 원칙적으로 법정법인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국기원의 변화가 정부의 일방

14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49

적인 간섭과 통제 속에서 태권도인들이 무시되거나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다수 태권


도인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채 정관이 수정되고 낙하산 인사가 이루어지지 않도
록 노력하다보니 법정법인을 반대하는 사람처럼 오인되어 적잖은 고초를 겪어야 했
다. 태권도인들 역시 국기원에 바라는 것이 있으면 뜻을 한 군데로 모아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이승완은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국기원 문제를 풀기 위해 그동안 국기원과 소원했
거나 갈등을 빚어온 서울시태권도협회를 비롯한 단체 및 사람들과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섰다.
그러던 그 해 12월, 국기원 이사장이 된 그는 국기원이 앞으로 추진할 5대 역점과
제 및 20대 중점사업을 선정,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국제 경쟁력 강화, 홍보역량 강
화, 연수사업 활성화, 태권도의 가치 극대화를 위한 사업의 명품화, 조직개편 및 인
적 자원의 고도화 등이다. 
그는 “국제 경쟁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국기원은 내년부터 해외지부를 설치해 도장
들이 여기에 등록하도록 하고 교육 및 연수사업을 통해 관리할 계획”이라며 도장 활
성화에도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 “태권도인 중 경기인구는 10%에 불과하다. 무도
로서의 태권도를 수련하는 태권도장 활성화를 위해 도장활성화지원센터를 운영하고
태권도 가치를 홍보하며, 각종 콘텐츠를 개발하여 도장을 지원할 것이다.”며 전국의
주요 도장을 탐방했다.
하지만 그는 국기원 법정법인화를 놓고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와 대립각을 세
웠다. 태권도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주장하며 정부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
으나 역부족이었다.
2010년 6월, 국기원을 떠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퇴임사를 남겼다. 퇴임사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록, 길지 않은 반년의 재임 기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참으로 격랑의 세월이었습
니다. 오늘 저는 비록 떠납니다만, 오로지 국기원과 태권도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는 제 순수성과 진정성을 믿어 주시는 여러분들이 있기에 저는 외
롭지 않습니다 (...) 국기원을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확대, 운영해야 한다는 점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 방안으로 해외지원을 설립한 것입니다. 따라서 국기
원 해외지원은 세계화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 저는 그동안 국기원의 자율성 확
보에 모든 힘을 쏟았습니다. 그 방안으로 국기원은 지난 3월 22일 헌법재판소에 ‘태
권도진흥법 위헌 소송 및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49


150 ▸ 국기원

는 그 결정을 미루고 있고, 특수법인 집행부는 국기원 입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


칫 발생할지도 모를 충돌을 막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국기원장으로서, 또
무도를 수련해온 태권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옳지 못한 법이라고 할지언정 법은
지켜야 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특수법인 집행부 측에 당부 합니다. 국기원은 7천만
태권도 가족의 본부입니다. 정부의 개입과 지나친 간섭은 국기원 발전의 발목을 잡는
행위입니다. 정부의 직무 범위는 국기원을 지원하는 것으로 엄격히 제한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권도인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할 수 없습니다. 태권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국기원이라 할 수 있습니까? (...)”
그 후 이승완은 대한태권도협회 이사 및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며 태권도의 질적 변
화와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6년 지도관 창관 70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
사를 준비하고 있다.

15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51

3. 사료 및 사진자료

가. 개요

○ 사료 총 32점
사진기록 : 32점

나. 세부자료

자료_지도관_1

❏ 1947년 지도관의 전신(前身) 조선연무관 창립 1주년 기념사진. 사진 원안은 창설자


전상섭.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51


152 ▸ 국기원

자료_지도관_2

❏ 1948년 권법 연무대회가 끝난 후 조선연무관과 YMCA 권법부 소속인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원안 왼쪽은 YMCA 권법 창설자 윤병인, 원안 오른쪽은 조선연무관 창
설자 전상섭.

자료_지도관_3

❏ 1950년대 중반 이승완 관장

15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53

자료_지도관_4

❏ 1956년 전주에서 단련대에서 손을 단련하고 있는 지도관 이승완 3대 관장

자료_지도관_5

❏ 1957년 강원도 홍천에서 열린 하계연수 기간 봉사활동을 하러가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53


154 ▸ 국기원

자료_지도관_6

❏ 1950년대 후반 홍수로 도로가 유실되자 지도관 관원들이 피해 복구를 하고 있다.

자료_지도관_7

❏ 1950년대 중반 전주체육관에서 태권도 동작을 하고 있는 지도관 수련생들. 왼쪽에서


세번째가 이승완 3대 관장

15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55

자료_지도관_8

❏ 1959년 지도관 윤쾌병 사범이 발급한 지도관 유단자 증명서

자료_지도관_9

❏ 1960년대 초 전주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연무시범에서 이승완 관장 등 지도관 출신들


이 시연을 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55


156 ▸ 국기원

자료_지도관_10

❏ 1960년대 후반, 지도관 소속 태권도인들이 강원도 홍천에서 동계 수련을 하고 있다.


맨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당시 지도관 총관장이었던 이종우.

자료_지도관_11

❏ 1961년 지도관 이병로 사범과 제자들이 공수도대회에서 입상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5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57

자료_지도관_12

❏ 한국에서 최초로 호구(검도 호구)를 착용하고 1961년 5월 13일 전주공설운동장에


서 지도관 선수들과 일본 공수도 선수들이 친선 경기를 하고 있다. 심판은 전일섭
관장.

자료_지도관_13

❏ 1963년 지도관 이승완 관장이 도장을 개관하고 전주공업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포즈


를 취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57


158 ▸ 국기원

자료_지도관_14

❏ 태권도 경기화가 이뤄지던 1960년대 초 지도관 전일섭 관장의 주도로 만들어진 대나


무 호구. 대나무를 얇게 다듬고 천으로 감싸서 만들었다.

자료_지도관_15

❏ 1963년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지도관 선수들이 대나무 호구를 착


용하고 경기를 하고 있다.

15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59

자료_지도관_16

❏ 1965년 부안에서 지도관 전북본관이 각 지관 사범들을 교육하고 있다.

자료_지도관_17

❏ 지도관 전신인 조선연무관 공수도부를 창설한 전상섭 관장의 친동생인 전일섭 관장


이 전주체육관에서 제자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59


160 ▸ 국기원

자료_지도관_18

❏ 1966년 한-일 친선경기에 참가한 지도관 전북 선수들. 첫번째가 최영렬, 세 번째가


유기대, 다섯번째 최동진, 여섯번째 유형환, 일곱번째 박연희.

자료_지도관_19

❏ 1968년 이승완 관장이 창설한 해병대 태권도부가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후 축하연을


하고 있다. 사진 원안이 초대 이승완 감독.

16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61

자료_지도관_20

❏ 1973년 지도관 중앙본관이었던 서울 을지로 한국체육관.

자료_지도관_21

❏ 1981년 지도관 창설 31주년을 맞아 기념식을 하고 있다. 이종우 총관장이 서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61


162 ▸ 국기원

자료_지도관_22

❏ 공수도지도관 유단자 등록부 사본

자료_지도관_23

❏ 지도관 고단자 발급대장. 총 5권.

16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63

자료_지도관_24

❏ 지도관 유단자 등록부 찾는 목록표

자료_지도관_25

❏ 지도관 입관순서 등록 사본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63


164 ▸ 국기원

자료_지도관_26

❏ 지도관 이병로 원로. 중앙본관 사범과 부관장을 역임했다. 작문 실력이 좋아 총무 등


회의록을 작성했다.

자료_지도관_27

❏ 지도관 앨범. 이종우 관장과 입관 1번 배영기 원로 등이 있다.

16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65

자료_지도관_28

❏ 1947년부터 군산체육관 부관장으로 제자들을 길러낸 김혁래 관장

자료_지도관_29

❏ 지도관 출신으로 미국에 진출해 미국태권도연맹 사무총장과 회장을 역임한 이상철


사범이 제자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65


166 ▸ 국기원

자료_지도관_30

❏ 1980년대 서울 을지로에 있던 한국체육관 지도관 중앙본관 앞에서 이종우 2대 관장


과 이승완 3대 관장이 제자들과 한자리에 모였다.

자료_지도관_31

❏ 1988년 9월 서울에서 지도관 해외주재 사범 환영만찬

16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지도관(智道館) ◂ 167

자료_지도관_32

❏ 2006년 3월 열린 지도관 창관 60주년 기념행사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67


168 ▸ 국기원

4. 수련 관련 사항

가. 관훈 : 나를 위한다. 관을 위한다. 나라를 위한다.

나. 수련정신

○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관에 의무를 다하고, 국가에 총성을 다하라. 8정도


정신(正觀. 正覺, 正思, 正語, 正命, 正奉, 正業, 正行)

다. 수련형태

○ 자유대련과 약속대련를 많이 함. 검도 몸통 호구 및 대나무 호구 사용함


○ 지도관은 다른 관에 비해 대련을 중시함. 1960년대 초 태권도 경기화가 이뤄지자
이승완, 조점선, 황대진, 최영렬 등이 부각을 나타냄.
○ 1956년 2월 1개월간 한국체육관에서 공수도호신술강습회 개최함. 오후 6시
30분부터 25세부터 45세 수련생을 대상으로 밤 8시까지 수련함.
- 평소 1시간 30분∼2시간 수련함.

라. 심사형태

○ 유급자 2∼3개월, 유단자 6개월에 1번씩 함.


○ 서울 중앙도장(을지로 3가 한국체육관)에서 심사를 함.
○ 1955년 12월 유급자-유단자 진급심사를 한국체육관에서 개최함.
○ 음심자격은 6개월 이상 수련한 무급, 유급, 유단자.
○ 심사비 수납은 도장명, 사범명(전임교수), 수련연한(입문일부터 현재까지 무력
기입), 1인당 삼백 환.
○ 1960년 11월 전북공수도 및 전북본관에서 추계심사를 함. 1960년 11월에는
강원본관 추계심사도 열림.

16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창무관(彰武館)
1. 역사 및 개요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3. 사료 및 사진자료
4. 수련 관련 사항
창무관(彰武館) ◂ 171

1. 역사 및 개요

○ YMCA권법부는 해방 후 조선연무관권법부에서 전상섭과 무술을 가르치던 윤


병인이 주위의 권유로 1946년 9월 서울 종로에 위치한 중앙기독교청년회관
(YMCA)에 권법부를 만듦.

○ 윤병인은 개인이 외부에 낸 도장이 아니므로 관장이라고 하지 않고 사범이라는


호칭을 사용함. 권법부가 발급한 단증에는 ‘사범 윤병인’으로 되어 있음.

○ 윤병인은 만주에서 섭렵한 무술과 일본 가라테의 장점을 혼합한 독특한 무술을


제자들의 특성과 체격조건에 맞게 지도. 제자 김순배는 스승 윤병인에 대해
“체구는 왜소했지만 혈기왕성했고 과묵했다. 멋을 부릴 줄 몰라 신발도 큼지
막한 미군 군화를 신고 다녔고, 왼손가락이 여러 개 잘려 나가 더운 여름철
에도 흰 장갑을 끼고 다녔다”고 증언.

○ 수련은 방과 후 오후 4시 30분부터 시작함. 기본 수련은 기본 1절부터 5절까지의


동작을 익히는 것으로 시작함. 기본 동작은 방어와 공격 동작을 연결시킨 ‘공
(工)’자형으로 움직임이 구성됨.

○ 3급 이상부터는 형(型)을 배울 수 있었음. 토조산(공격·방어형), 단권(공격·


방어형), 장권(공격·방어형), 팔기권(공격·방어형), 태조권, 태극권 등을 배움.
또 봉술과 도술 등 무기술도 배움.

○ 초창기 수련생은 광고로 모집해 500명이나 됐지만 윤병인이 강도 높게 가르


치다보니 3개월이 지난 후에는 18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함. 당시 수련생은
이남석·홍정표·박철희·박기태·김주갑·송석주·이주호·김순배 등이었음.

○ 8급에서 5급까지는 하얀띠, 4급부터 1급까지는 파란띠, 유단자는 검은띠를 착용함.


유단자 검은띠 안에는 하얀 줄이 들어 있었으며, 사범인 윤병인은 띠의 윗부분은
붉은색, 가운데는 하얀색, 아랫부분은 파란색의 띠를 착용하여 태극의 민족정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71


172 ▸ 국기원

신 함양을 위해 노력함.

○ 1947년 11월 첫 승단심사를 함. 1950년 1월에는 열흘간 매일 오후 4시부터 6시


까지 모한수련을 함. 1950년 6월 24일 제3회 권법연무대회를 개최함. 당시 박철
희는 ‘도(刀)’ 시범을, 박희태는 ‘봉(棒)’ 시범을 함. 그 때 청도관의 손덕성·엄운
규·이용우 등이 찬조 시범을 함.

○ 윤병인은 YMCA 권법부에 태권도 창무관을 창설하였고, 초대 교사에 이남석


을 임명함. 윤병인이 1946년 9월 1일 중앙기독교청년회인 YMCA 권법부를
설치하면서, 태권도 창무관을 창설하였고 창무관의 이름으로 승단심사를 하고
단증을 발급함. 단기 4281년(현1948년)년에 제3회 창무관 권법 정기심사가 열
렸던 공식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음.

○ 창무관은 영창고등학교의 ‘창’과 무도인의 ‘무’자를 합해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지만 이종우는 한국전쟁 전에 윤병인이 ‘애칭’으로 사용했다고 함. 박철희는
윤병인이 ‘빛날 창(彰)’ 자에 ‘호반 무(武)’자를 써 창무관으로 하는 것이 좋다
고 하셨고, 당시 창무관 이름으로 단증을 발급하셨다고 함.

○ 관원 증가에 따라 1947년 3월 5일 체신부에 권법부를 설치하고 경동중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정치대학 등에 태권도부를 설치하는 등 관세가 계속 확장되어 감.

○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윤병인이 한국전쟁 도중에 북한군의 방해로 북


송되자 창무관을 재건하기 위해 체신부 간부들의 도움으로 1953년 10월 5일
창무관 중앙도장(현 종합청사 자리)을 개관하게 됨. 관장은 이남석, 부관장은
김순배가 맡음.

○ 1955년 6월 문봉준은 이남석의 요청으로 창무관 제주지관을 개관함. 그 해 7월


에는 조선대학의 초청으로 이남석이 광주극장에서 연무대회를 개최함. 또 그 해
8월에는 창무관의 발전과 확장을 위한 간부들의 노력으로 창무관 무덕회가
발족됨.

17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창무관(彰武館) ◂ 173

○ 1956년 1월, 20일간 매일 오후 5시부터 1시간 동안 모한수련과 강습회를


개최함. 1956년 6월에는 창무관 제주지관 창설 1주년 기념 및 제1회 공수도
진급심사를 관덕정 광장에서 시행함.

○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가 창립되는 과정에서 이남석은 이종우, 엄운규와 함께


창립위원 및 정관기초위원으로 적극 동참함. 1986년 이남석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자 김순배가 3대 관장이 됨. 김순배가 2014년 타계한 후 김중영이 4대
관장을 맡음.

○ 창무관은 국내에 700여 개의 지관을 설치하고 해외에 450여 개소의 도장을


개관함. 주요 출신자는 박용직·김도영·유학식·성태경·이우모·김호재·
김중영·이종관·이광희 등임. 1995년 미주에서 발기한 창무관 출신 태권도
인들의 모임인 미주태권도창우회가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73


174 ▸ 국기원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가. 계보도

❍ 관장계보

창설자 및 초대 관장

윤 병 인

2대 관장

이 남 석

3대 관장

김 순 배

4대 관장

김 중 영

❍ 시대별 창무관 출신 인사

김동휘, 김득환, 김선구, 김순배, 김주갑, 문대식, 박규응, 설명희, 송석주, 이남석,
1940년대
이종주, 이주호, 이찬용 등

강상언, 고관호, 고익조, 고중웅, 김덕진, 김덕창, 김도영, 김상권, 김성홍, 김영작,
김영하, 김용섭, 김용전, 김용휘, 김윤환, 김정웅, 김준호, 김중영, 김형곤, 김호재,
노상석, 문무용, 문상오, 문석훈, 문정길, 박노천, 박성관, 백만기, 서영종, 서영준,
1950년대 손경문, 송종원, 서영종, 신현식, 심현덕, 양복용, 양영세, 윤석구, 이규현, 이기용,
이명길, 이문영, 이삼만, 이영호, 이우모, 이일상, 이종영, 이준호, 이진옥, 이홍식,
임동진, 임창수, 임흥수, 전길선, 정건웅, 조석만, 조수준, 조증덕, 진춘배, 최도욱,
한창수, 허상종, 현봉석 등

강석갑, 강세형, 김길주, 김용환, 박광일, 서인종, 윤종욱, 이승국, 이종관, 이철재,
1960년대
전만옥, 전판선, 전순재, 최일섭, 최돈오 등

17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창무관(彰武館) ◂ 175

나. 주요인물 생애사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권법부-창무관 창설자 윤병인

윤병인(尹炳仁)은 1915년 만주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태어나 연변중학교를 다니며


권법을 익혔다. 그가 배운 권법은 단권(短拳)·장권(長拳)·태극권(太極拳)·팔기권(八
騎拳) 등의 형과 봉술(棒術)·도술(刀術)로, 이 권법은 해방 이후 YMCA 권법부의 제
자들에게 전수되었다.
윤병인은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 도쿄에 있는 일본대학교(Nihon Univerversity)
척식농학과에서 유학을 하며 그 대학 가라테 사범으로 있는 도야마 간켄(遠山寛
賢·1888∼1966)과 교류를 통해 가라테 기법을 습득했다.
윤병인은 대학 가라테부에서 사범 생활을 했다. 그 후 윤병인은 고국이 해방되자
경성농업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하면서 전상섭과 친분이 두터워 조선연무관 권법부
에서 무술을 가르쳤다. 이종우는 “윤병인 선생도 일본에서 와서 처음에 우리를 무술
을 가르쳤다. 태극권이다 뭐다 중국에서 배운 것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말했다.
윤병인은 손가락이 절반이나 잘려 평소에 장갑을 끼고 다녔다. 이를 두고 그가 만
주에 있을 때 마적단이 휘두른 장도를 막다가 손가락이 잘린 것이라고 하고, 동상에
걸려 빙초산(화학약품)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빙초산에 손가락을 풍덩 집어넣었다
가 화상을 입었다는 설도 있다.
윤병인은 YMCA권법부를 창설하기 이전에 성균관대학, 경성농업학교 등에서 권법
과 가라테를 지도했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원으로 임명됐으나 어린 시절
오른손의 손가락을 잃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군대식 경례를 할 수 없어 사양했다는
주장도 있다.
1949년 1월 결혼을 한 윤병인은 1950년 6월 24일 연무대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종적을 감췄다. 북한 의용군에 편입된 맏형
윤병두가 1950년 8월 북한 인민군 대위로 윤병인에게 나타나 “너는 형인 나와 함께 가
야한다”고 말하면서, 윤병인을 북한 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 후 윤병인은 거제도 포로수
용소에 제자들 몇 명과 수용됐는데, 아마도 북한군과 관련된 어떤 일로 사로잡혀 포로
가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윤병인은 포로수용소 내에서도 제자들과 수련을 했다.
1951년 7월 북한과 유엔군의 휴전협상이 시작되자 윤병인은 북한군의 방해로 북송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75


176 ▸ 국기원

되었다. 월북 후 윤병인은 1966년 1월부터 1967년 8월까지 북한의 체육위원회 위원


으로 임명되어 평양 모란봉체육단에서 특수부대에게 격술을 지도했다. 이 때 윤병인
은 체육위원회의 주선으로 임정숙과 결혼해 딸과 아들을 낳았다. 1967년 12월 북한
의 국제스포츠위원회에서 격술을 국제경기단체로 만들려고 했으나 윤병인은 격술은
경기가 아니어서 국제스포츠단체를 만들 수 없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아 함경북도 청
진에 있는 시멘트 공장으로 보내졌다. 1982년까지 시멘트 공장에서 노동자로 생활해
온 윤병인은 1983년 4월 3일 폐암으로 일생을 마쳤다.

이남석 창무관 2대 관장

이남석은 1946년 윤병인이 창설한 YMCA 권법부의 초대 교사로 임명되고, 관원이


증가함에 따라 자신이 근무하던 체신부에 1947년 3월 권법부를 두어 창무관 관세 확
장에 앞장섰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윤병인이 월북되자 파괴된 도장을 재건하기 위해 체신
부 간부의 도움으로 1953년 10월 5일 현 종합청사 자리에 창무관 중앙도장을 재개관
하고 창무관 2대 관장으로 취임했다.
1955년 6월 문봉준은 이남석의 요청으로 창무관 제주지관을 개관하였고 그해 7월에
는 조선대학의 초청으로 이남석이 광주극장에서 연무대회를 개최하였다. 또 그 해 8월
에는 창무관의 발전과 확장을 위한 간부들의 노력으로 창무관 무덕회가 발족되었다.
이남석은 1956년 1월, 20일간 매일 오후 5시부터 1시간 동안 모한수련과 강습회를
실시하고, 1956년 6월에는 창무관 제주지관 창설 1주년 기념 및 제1회 공수도 진급
심사를 관덕정 광장에서 시행하였다.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가 창립하는 과정에서 이종우. 엄운규와 함께 창립위원 및
정관 기초위원으로 적극 참여하였다. 1986년 이남석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자
김순배가 3대 관장이 되었다. 이남석은 1980년대 타계했다.

17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창무관(彰武館) ◂ 177

김순배 창무관 3대 관장

김순배가 처음 태권도를 접한 것은 한양공고 1학년(16세) 때인 1947년 3월 YMCA


권법부에 입문하면서부터다. ‘권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이
YMCA 권법부였다. 그는 “외아들이라 책임감을 기르고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친의 반대로 그만둘 뻔했지만
어머님이 아버님 몰래 수련비를 주셨기 때문에 운동을 계속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처음에는 태권도를 한다니까 주위에서 깡패가 되려고 하느냐며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착실히 운용하며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김 관장을 보고 태권도라
는 운동을 다시 보게 됐다는 것이다.
김순배는 YMCA 권법부 3번 회원으로 스승인 윤병인 관장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
아 시범활동 등 각종 행사에서 꼭 불려 다질 정도로 실력을 자랑했다. 특히 큰 키를
활용한 겨루기는 당대의 최고였다는 평가다. 당시 함께 수련한 사람은 이창공, 김주
갑, 송석조, 홍정표, 박철희, 김선주 등이다.
1950년 당시 19세였던 김순배는 2단 승단과 함께 권법부에서 사범생활을 하게 된
다.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서울로 돌아와 권법부 재건을 위해 관원들을 모았다.
그러나 스승인 윤병인이 행방불명되어 권법부가 존폐위기를 맞자 관원들을 모아
이남석과 함께 권법부 부활을 도모했다. 그러던 중 체신부 간부의 도움으로 체신부
자리(현 종합청사)에 ‘창무관’ 중앙도장을 개관하게 됐다.
그 때가 1953년 10월 5일이었다. 이남석이 관장을 맡고 김순배는 부관장으로 후배
들을 가르치며 창무관의 틀을 다지게 된다. 1986년 김순배는 이남석이 미국으로 이
민을 가게 되면서 3대 창무관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초기인 1961년 경기이사를 맡은 이후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2회), 국기원 부원장 및 기술심의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 60년대 태권도 경기
화가 이뤄질 때는 심판원 배정, 경기, 계체 등을 담당하면서 임원의 소임을 다했다.
태권도 품새 개발에도 힘썼다. 1967년 대한태권도협회 품새제정위원으로 활동하며
현대 태권도의 기틀을 다졌다. 당시 각 관별로 다른 품새(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대한태권도협회는 품새의 통일성을 갖추기 위해 품새 제정위원들을 선정하고 8괘 품
새 및 유단자 품새를 제정하게 된다. 그 때 제정위원으로 참여한 이들은 김순배를
비롯해 배영기(지도관), 이영섭(송무관), 한영태(무덕관), 박해만(청도관)이었다. 이종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77


178 ▸ 국기원

우는 위원장이었다.
김순배는“당시 새로 만든 품새 교육은 을지로 입구에 있던 대한체육회 옥상에서
이뤄졌다. 이론 정립이 안 된 상태에서 동작만으로 교육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
다”고 회상했다.
김순배는 2014년 타계했다.

김중영 창무관 4대 관장

창무관 4대 총관장 김중영은 1942년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당차하고 독립심이 강했던 그는 6.25 동란이 끝난 후 1953년 12살 나이에 홀로 상경
해 서울에서 고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처음 창무관에서 지금의 태권도를 접하
게 됐다. 당시 청량리 동아체육관이 그가 무술을 시작한 곳이다.
낙후된 시설이었지만 수련생 규모가 작지 않았고, 체계가 잘 잡혀있었다. 가난한 농촌
소년이었던 그는 도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숙식을 해결하다시피 했다고 회고했다. 도
장을 찾은 이유는 건달 문화가 팽배한 당시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온 그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영특하고 강인한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도장을 찾았다. 창무관 김순배 관장은 57년 청량리에 정식 도장을 개관했다.
당시 창무관의 훈련 강도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실전에서 사용
할 수 있는 대련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수련생 대부분의 격투 실력이 높았다. 유급자
는 흰띠, 청띠, 홍띠로 구분돼 있었다.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관원들도 수련을 시
작하고 2~3년 후에야 승단 심사에 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장에서 묵는 일이 많았던 김중영은 청소년 시절부터 조간부에서 수련생을 지도
하기 시작했다. 김중영과 함께 수련했던 현 세계창무관유단자 회장 심현덕은 주간 교
육을 담당했다.
1961년 창무관 출신 유단자들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직접 가르쳤던 일화가 재미
있다. 청소년 나이로 중정 요원을 지도한 김중영과 심현덕은 이때 일을 뚜렷하게 기
억하고 있었다. 김중영은 “61년부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체육관으로 지프차가
두 대 오면 김순배 관장과 함께 8~9명의 유단자가 차에 올라 이문동 중앙정보부로
향했다. 그리고 수십 명의 요원들과 실전 훈련을 2시간 가량했다”고 말했다.

17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창무관(彰武館) ◂ 179

훈련은 사범들과 중정요원의 1 대 1 실전 겨루기였다.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이 직접 지켜보면서 강도 높은 지도를 지시했다. 김중영이 기억하는 1기 수련생 중
이종찬 전 국정원장도 포함돼 있다.
김중영은 운동과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중학교 나이부터 책 장사를 시작했다. 헌
책을 사고 다시 팔아 수련비와 학비를 마련한 것이다. 책과의 인연으로 그는 출판사
를 개업하기에 이른다. 1966년 9월 9일 서울시문화체육과에서 직접 등록했다. “미혼
의 신분으로는 출판업을 할 수 없어서 형 명의로 개업했다. 연령도 안됐거니와 기혼
자만 출판업 신고가 가능했다. 그래서 형 명의를 빌려 개업했다. 그것이 지금의 오성
출판사다.”
이때 설립한 오성출판사는 향후 태권도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게 된다. 80년대부터 국기원
과 함께 태권도 교본을 만들기 시작했고, 최초의 영문판 태권도 교본을 발간했다. 김중영은
1985년에 태권도계간 6권을 발간하였으며, 국기원 교본편찬위원장을 맡아 엄운규, 이종우, 김
영환, 홍종수, 김순배, 강원식, 이승국, 정찬성, 정찬모 등과 함께 태권도 용어와 품새 등을
정립하고 국기태권도교본을 발간하였다. 이외에도 어린이교본, 겨루기, 품새교본 등을 발간했
고, 이를 토대로 5개 국어로 제작된 고화질 DVD 동영상교본을 제작하는 등 전 세계 태권도
학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고 이에 대한 공로로 자랑스런 태권도인상을 수상하였다. 1990
년대 국기원 고단자심사위원장 역임, 2000년대 서울에 스포츠대학원을 설립하여 최초로 태권
도 석사학위 과정을 신설, 태권도의 학술적 체계 정립 및 우수 인재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김중영은 고교시절 자신이 만든 오성출판사와 창무관을 잇는 태권도장을 지금까지 계속 운영
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79


180 ▸ 국기원

3. 사료 및 사진자료

가. 개요

○ 사료 총 25점
사진기록 : 21점
문서기록 : 4점

나. 세부자료

자료_창무관_1

❏ 창무관 제3회 권법정기심사회(1948년 11월 3일)를 마치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 원안 왼쪽은 초대 관장 윤병인, 오른쪽은 2대 관장 이남석.

18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창무관(彰武館) ◂ 181

자료_창무관_2

❏ 1940년대 후반 창무관 전신(前身)인 YMCA 권법부 수련생들이 서울 종로 YMCA


건물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자료_창무관_3

❏ 1940년대 말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건물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권법부 사범


윤병인(왼쪽)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81


182 ▸ 국기원

자료_창무관_4

❏ 1940년대 후반 YMCA 권법부 수련생들이 사범 윤병인(왼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서울 난지도 인근에서 모서수련을 하고 있다. 김순배(앞줄 왼쪽), 홍정표(앞줄 오
른쪽)가 보인다.

자료_창무관_5

❏ 1948년 체신부 권법부 제1회 심사를 마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윤병인(초대 관장,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과 이남석(초대 사범 및 2대 관장, 앞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이 앉아 있다.

18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창무관(彰武館) ◂ 183

자료_창무관_6

❏ 1950년대 한국전쟁 후, 현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창무관 중앙도장을 재개관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창무관 관계자들. 사진 원안은 창무관 2대 관장 이남석. 앞
줄 왼쪽은 3대 관장 김순배.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박철희.

자료_창무관_7

❏ 1957년 창무관 제14회 정기승단 진급심사를 마치고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83


184 ▸ 국기원

자료_창무관_8

❏ 1954년 창무관 단증발급대장. 창무관 3대관장 김순배는 관번2번의 3단, 박철희는


관번이 3, 홍정표는 관번 6으로 되어 있다.

자료_창무관_9

❏ 1955년 창무관 시공간 연무시범 후 기념사진

18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창무관(彰武館) ◂ 185

자료_창무관_10

❏ 1957년 창무관 제15회 합동 진급심사

자료_창무관_11

❏ 1959년 창무관이 발급한 승급증서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85


186 ▸ 국기원

자료_창무관_12

❏ 1950년대 후반 제주도 창무관 정건웅이 삼사대회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자료_창무관_13

❏ 1961년 창무관 관장 이남석이 김영작에게 수여한 교사 임명장.

18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창무관(彰武館) ◂ 187

자료_창무관_14

❏ 1961년 창무관 단증

자료_창무관_15

❏ 1960년대 창무관 도본관 산하 사범 하계연수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87


188 ▸ 국기원

자료_창무관_16

❏ 1960년대 창무관 전북 금마지관 진급심사

자료_창무관_17

❏ 1960년대 창무관 4대 관장 김중영의 전국대회 우승기념

18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창무관(彰武館) ◂ 189

자료_창무관_18

❏ 1960년대 창무관 하계 모서수련회

자료_창무관_19

❏ 1974년 창무관 제주도 본관 문무용 관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는 이남석(왼


쪽에서 두 번째)관장.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김순배 3대 관장.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89


190 ▸ 국기원

자료_창무관_20

❏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 창무관 환영식. 앞줄 왼쪽이 이남석 2대 관장, 오른쪽이


김순배 3대 관장, 뒷줄 왼쪽 두 번째가 김중영 4대 관장

자료_창무관_21

❏ 1990년대 3대 관장 김순배가 해외 연수교육 중 외국 수련생에게 태권도를 지도하는


모습. 앞쪽 좌측은 윤무용 관장(미국 노스다고타주)

19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창무관(彰武館) ◂ 191

자료_창무관_22

❏ 1980년대 창무관 서울본관 현판식 기념 촬영

자료_창무관_23

❏ 1990년대 창무관 하계 합동수련회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91


192 ▸ 국기원

자료_창무관_24

❏ 2009년 창무관 3대·4대 관장 이·취임식에서 4대 관장 김중영이 3대 관장 김순


배로부터 창무관기를 받고 있는 모습.

자료_창무관_25

❏ 2015년 창무관 70주년 기념 국제대회에서 대회사를 하고 있는 김중영 현 4대 관장

19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창무관(彰武館) ◂ 193

4. 수련 관련 사항

가. 관훈 : 충효 성실 인내

나. 수련정신

○ 정성스럽고 참되게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

다. 수련형태

○ 약속대련(3보대련, 와대련, 좌대련)과 자유대련을 함. 3보 약속대련은 3번 걸으


면서 공격하고 3번 걸으면서 막는 것임. 걸상에서 마주보고 하는 대련, 누워서
하는 와대련이 있었음.

○ 수련 기구는 60년대 들어서 대나무를 쪼개서 태발이로 엮어 호구를 만들어 사용


함. 나무에 짚을 묶어 발차기나 팔굽혀펴기를 함.

○ 기본 1장-5장, 평안 1단∼5단, 나이얀찌 1∼2단, 철기(공산궁, 찐또)


- 1955년 7월 조선대학 초청으로 이남석 인솔로 10여 명이 광주극장에서 연무
대회를 함.
- 1956년 1월 20일 동안 매일 오후 5시 30분부터 6시 50분까지 동계 모한
수련과 강습회 개최함.

라. 심사형태

○ 유급자는 2∼3개월 주기, 유단자는 6개월에 한 번씩 함.

○ 8급 심사는 기본형 1절부터 5절까지 함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93


194 ▸ 국기원

- 격파는 발차기, 수도, 팔굽치기, 등주먹치기, 장애물격파

○ 띠는 백, 청, 홍, 흑띠로 구분함
- 1년에 2회 6개월마다 심사를 함. 3개월마다 중간심사를 함
- 1948년 창무관 제3회 권법승단심사가 초대관장 윤병인과 초대사범 이남석의
주관하에 열림.
- 1948년 체신부 권법부 제1회 심사가 열림. YMCA 권법부 사범 윤병인과 이
남석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됨.

○ 1956년 6월 창무관 제주도지부 창설 1주년 기념 및 제1회 공수도진급심사를


관덕정에서 개최함.

○ 1957년 창무관 제3회 정기 진급심사를 하는 등 5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승급, 승단심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함.

19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1. 역사 및 개요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3. 사료 및 사진자료

4. 수련 관련 사항
청도관(靑濤館) ◂ 197

1. 역사 및 개요

○ 이원국은 일본에서 귀국해 1944년 9월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에 있던 영신학교 강


당을 빌려 무술을 가르침.

○ 이원국은 1946년 2월부터 서울 시천교당(侍天敎堂)에 ‘당수도 청도관’ 간판을 내걸


고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함. 시천교당은 교회 예배당이어서 예배시간을 피해
오후 5시부터 밤늦게까지 수련함.

○ 이원국은 ‘젊은 청년의 꿈과 기개가 파도처럼 퍼져 나가라’는 뜻에서 청도관이라


고 함.
- 청도관의 ‘도(濤)’는 자신이 수련했던 일본 공수도 본관인 ‘송도관(松濤館)’ 의
‘도(濤)’에서 따옴.
- 청도관 초창기 관원이었던 엄운규는 “이원국 관장을 만난 것은 1945년 가을, 지
금의 서대문구 영천인데 서대문 로타리에서 독립문 쪽으로 가다 보면 영천시장
골목길 뒤쪽의 영신학교 강당을 빌려 그곳에서 수련을 했다”고 증언함.

○ 이 시기 청도관에서 입관한 사람은 손덕성·엄운규·현종명·이용우·백준기·최


규식·유응준 등으로, 뒤를 이어 우종림·이상훈·박해만·이준구·김봉식 등이
입관함.
- 안국동으로 청도관을 옮긴 후 연무대회(練武大會)를 개최함. 명동의 시공관(지
금의 대한투자금융 건물)에서 열린 이 연무대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무술대
회로 일컬어짐. 당시 연무대회는 승패를 가르는 것보다 수련의 정도(程度)를 선
보이는 자리였음.

○ 청도관은 송무관과 사이가 좋아 서로 연무시범을 교류함. 1946년 노병직이 고향


인 개성에 정식으로 송무관 간판을 내걸자 이원국은 손덕성, 엄운규 등 제자들을
이끌고 개성에 가서 연무시범을 함.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97


198 ▸ 국기원

○ 청도관 분관(分館)은 이용우의 정도관(正道館), 고재천의 청룡관(靑龍館), 강서종의 국


무관(國武館) 등이 있음. 최홍희의 오도관(吾道館)도 최홍희가 청도관 명예관장을 했고
청도관 출신들이 입대 후 오도관에서 왕성하게 활동했기 때문에 오도관도 청도관의 분
관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음.

○ 1998년 창립한 미주 청도관 총연합회 제2대 임원 및 이사는 다음과 같다.


·고문=남태희 이준구 심현옥 김인묵 강서종 정영택 정재복
·이사장=양유엽
·부이사장=박대진
·회장=김일호
·수석부회장=이관승
·일반부회장=김동훈 한민교 박찬학 신철순 이강원
·사무총장=이강원
·재무부장=정연성
·법률자문=이태희
·일반자문=한민교 이병무 이유선 정석종

19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199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가. 계보도

❍ 관장계보

창설자 및 초대 관장

이 원 국

2대 관장

손 덕 성

3대 관장

엄 운 규

❍ 시대별 청도관 출신 인사

강서종, 고재천, 곽근식, 김석규, 남태희, 민운식, 박해만, 백준기, 손덕성, 엄운규,
1940년대
우종림, 유응준, 이준구, 조성일, 한차교, 현종명 등

강국원, 고학봉, 공영식, 김기륜, 김덕용, 김두호, 김복렬, 김봉식, 김석범, 김성재,
김송형, 김승규, 김원홍, 김유승, 김을회, 김창종, 김태진, 김태하, 문무용, 문승남,
문희남, 박동욱, 소정섭, 손석진, 송충부, 안종웅, 안종홍, 양동훈, 오만언, 오태옥,
1950년대
이규석, 이남수, 이병무, 이사만, 이종기, 이종호, 이준구, 이항수, 이행웅, 이행웅,
인견환, 임덕제, 장기종, 장희승, 전정술, 정갑순, 정금수, 정만순, 정 승, 정제근,
좌봉택, 최기용, 최동희, 한상윤, 현맹호 등

1960년대 신용철, 신택우, 이현부, 정영택 등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199


200 ▸ 국기원

나. 주요인물 생애사

이원국 청도관 창설자

이원국은 1907년 충북 영동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동에서 소학교를 졸업


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일본 동경 중앙대학에서 법학을 전공
했다. 이원국은 운동에 소질이 많았다. 대학시절 권투부에서 활동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가라테에 심취해 일본 가라테의 본관인 송도관(松濤館)에 입문해 후나코시(船
越) 기친(1868∼1957)에게 가라테를 배워 5년 만에 4단을 부여받았다.
그는 송도관에서 훗날 송무관을 개관하는 노병직을 만났다. 노병직은 1998년 8월
부터 9월까지 <태권도신문>이 연재한 ‘태권도 현대사 산증인 인물전 - 이원국 편’을
읽고 자신의 견해를 편지로 밝혀왔다. 다음은 주요 내용.
“청도관 창설자 이원국과는 일본 유학시절 송도관에서 알게 됐다. 그는 나보다 연
령이 많았으나 송도관에 늦게 입관해 나의 후배가 되는 사람이다. 일본에서 이원국씨
의 직업은 동경도청산하 우시고메 구역소에서 병사계 직원으로 근무했다. 참고로 구
역소(區役所)는 우리나라 서울시청 산하의 각 구청에 해당된다. 일본에서 이원국이
거주하는 집은 동경도 우시고메 야마부끼죠에 있는 일본인 집의 2층 단칸방을 세로
얻어서 그의 부인과 함께 살았다. 나와 그는 도장에서 수련을 끝낸 후에 서로 집 방
향이 같아서 그의 제의로 때때로 그의 집에 같이 가곤 했다. 한국에서 이원국을 만
난 것은 1945년 8.15 해방 직후로, 이때 그는 사설치안대에 있었다. 그 당시 사회는
극도로 혼란하고 어수선했다. 서울시내에는 소속 불명의 사설치안대가 수없이 난립하
고 있었는데 그가 있는 치안대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이때 청도관은 있지 않았는데,
이원국이 ‘청도관 제자들을 중심으로 자체 치안대를 결성해 치안대장으로 있었다’ 라
는 것은 거짓이다. 그는 사설치안대에 있을 때 서대문구 옥천동 뒷골목에 있는 영신
학교 강당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학교 측에서 완강하게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그가 내게 말했다.”
이원국은 자신의 저서 태권도교범에서 청도관을 개관해 무술을 가르친 이유에
대해 “가라테를 배우던 당시 오끼나와의 실정과 비교하여 무기가 없는 우리 한국이야
말로 적수공권의 이 무도가 극히 긴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어 보급했
다.”고 밝혔다. 이 같은 말은 가라테를 일본 무술이 아닌 오끼나와 토착무술로 인식

20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01

한 것으로 읽힌다.
한국전쟁은 이원국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주장과 한
국전쟁 전 대통령 이승만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
문을 받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에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는 주장이 혼
재한다. 이원국은 왜 일본에 갔을까? 이원국에 따르면, 5천여 명에 달하는 청도관 관
원들을 자유당에 입당시키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거절해 ‘이 대통령 암살미수’
혐의를 받아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알고 지냈던 육군 중장이
보증을 서 겨우 풀려났다. 그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민 틈에 끼어 부산에 가서
그 때 돈으로 50만 환쯤인가 주고 다대포 앞바다에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
갔다.
하지만 노병직은 이원국의 이 같은 말은 “거짓말”이라고 반박한다. 한국전쟁 때 인
민군에 부여한 사실이 들통이 나서 문초를 받던 중 간신히 풀려나 일본으로 도피했
다는 것이다. 노병직의 증언.
“이원국씨는 1950년 6.25동란 때 서울에서 붉은 완장을 팔에 걸고 청도관으로 쓰
고 있던 시천교당 건물옥상에 북괴인민기를 걸어 자신은 물론 당시 청도관원이었던
여러 제자들을 끌어들여 남침 북괴에 부역을 했다. 9.28 수복 후에는 이런 일이 탄
로되어 서울시 경찰국 정보과에서 이원국씨를 비롯해 청도관원들을 체포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원국씨에게 끌려서 부역한 관원들은 즉시 풀려났지만 이원국씨와
손덕성, 정영택씨 등은 심한 문초를 받고 있던 중에 그 당시 애국협회장이었던 이기
권 선생의 도움으로 1.4후퇴 직전에 간신히 풀려난 후에 이원국씨는 부산에 잠시 머
문 후 일본으로 밀항, 도피했다. 이원국씨가 6.25때 부역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
실이다.”
이원국은 일본에 체류하면서도 청도관 제자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등 사제지간의
인연을 유지했다. 1951년 1.4 후퇴 직후 제자인 손덕성에게 편지를 보내 청도관 제2
대 관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1959년에는 자신 명의로 된 청도관장 임명장을 엄
운규에게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에서 당수도 청도관 심사대회 등 갖는 등 활동
을 계속하다가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귀국한 이원국은 엄운규·이용우·현종
명·남태희·고재천·백준기 등 제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61년 4월이었
다. 하지만 10년간의 공백은 컸다. 제자들을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지만 자신이 세
운 청도관은 부쩍 성장한 제자들과 청도관 명예관장을 지낸 최홍희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었다. 군 장교 출신인 청도관 제자들은 최홍희 휘하로 들어가 오도관의 핵심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01


202 ▸ 국기원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최홍희와 제자들은 귀국 만찬환영회를 성대하게 열어주었지


만 이원국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968년 청도관 제자들의 간청으로 고국에 왔다. 이번에도 잠시 고국을 방문
한 것이다. 엄운규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 해 7월 김포공항에서 ‘청도관 초대관장 이
원국 선생 귀국’이라는 환영 펼침막을 들고 스승을 맞이했다. 그 후 이원국은 1969년
태권도교범(진수당)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태권도의 유래’에 대해 “태권의
기원을 어떤 특정한 인물이 언제쯤 창시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인류가
발생한 이후 오늘날까지는 많은 사람에 의해 연구 첨가되어 계승된 끝에 현대의 태
권으로 발전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원국은 제자 이준구의 요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군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다가
그만 두고 1994년 아내와 함께 귀국해 태권도종주국에 태권도대학이 없는 현실을 개
탄했다. 당시 그의 명함에는 ‘韓國 跆拳道 創始主 / 跆拳道 靑濤館 總裁 李元國’이라
고 씌어 있었다.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던 이원국은 2003년 폐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97세였다. 미
국에 있는 청도관 출신의 태권도인들이 주축이 되어 장례식을 치렀다. 안근아는 “이
원국은 태권도 근대사에서 태권도의 가라테 기원설과 전통성을 주장하는 학자들 사
이에 가장 핵심적인 논의 대상이다. 그가 현재의 태권도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또
는 그가 설립했던 도장(청도관)이 태권도장이었는지, 가라테 도장이었는지를 판가름
하는 것은 태권도 역사를 정립하는 데 주요 사안일 수 있다.”고 밝혔다.

엄운규 3대 관장

엄운규는 1929년 서울 용산구 용운동에서 태어났다. 1946년 청소년 시절이던 17살


때 형의 지인의 권유로 ‘당수도 청도관(唐手道 靑濤館)’에 입관했다.
엄운규는 어릴 적 성미가 급하고 자존심이 강해 친구들과 싸우곤 했다. 이런 모습
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형은 얻어맞고 다니지 말라며 권투를 배우라고 권유했다. 싸움
기술을 배우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엄운규는 권투 글러브로 얼굴을 자주 맞으면 상처가 날까봐 권투를 배우지
않고 유도를 배웠다. 한 열흘쯤 유도를 배웠을까? 체격이 작고 몸이 가벼운 엄운규가

20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03

유도를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몸집이 크고 체중이 무거운 사람들 속에서


체구가 날렵했던 엄운규가 유도를 하는 것은 녹록치 않았다.
고심 끝에 엄운규는 17살 때 유도를 그만 두고 형 지인의 권유로 당수도를 배우기
위해 청도관에 입관했다. 엄운규가 청도관을 입관했을 때 수련장은 영신학교에서 안
국동 시천교회당으로 이전했을 때였다. 시천교회당은 100여 평이었는데 예배 시간을
피해 오후에 빌려 썼다. 예배할 때 앉던 긴 의자를 벽 쪽으로 치워 수련 공간을 만
들어 놓고 100여 명이 수련을 했다.
엄운규가 입관할 당시 청도관에는 4-50명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유응준과 손덕성,
강서종이 그의 선배였다. 그 후 현종명, 이용우, 이준구, 남태희, 민응식, 백준기, 고
재천, 우종림, 김석교, 한차교 등이 입관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무선 통신병과로 입대했다. 복무 시절 대구
등에서 틈틈이 장병들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이 무렵 친구 이용우가 청도관에서 나와
도장을 차리려고 했다. 그 때 엄운규는 관명(館名)을 놓고 고민하는 이용우에게 청도관
에서 ‘점’ 하나만 떼어버리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이용우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
른 길을 걷는다’는 무도정신과 딱 맞아 떨어져 정도관이 탄생했다.
1952년 가을, 육군 제1군 사령부 공병부 소속 대위였던 백준기는 당시 통신부 소
속이었던 엄운규와 주축이 되어 제1군 사령부에서 처음으로 태권도 교육대를 영내에
만들어 양철 재료로 만든 군 막사를 빌려 하루 2시간씩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교육했
다. 1954년 4단을 취득한 엄운규는 제대 후 청도관 재건에 힘을 기울이면서 육군사
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무술을 지도했다.
그 후 엄운규는 이종우와 함께 태권도 통합에 적극 나섰다. 1961년 5, 16 군사쿠
데타 후 유사무술단체 통합 움직임이 일자 엄운규는 이종우와 함께 통합을 주도했다.
그 해 9월 창무관에서 열린 대한태수도협회 제1차 이사회에서 엄운규는 이종우와 함
께 부회장에 선출되면서 실세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각 관의 이해득실과 노병직,
황기, 윤쾌병 등 1세대들과 갈등이 있었지만 엄운규는 이종우, 이남석과 함께 대한체
육회 가입을 실현시키고 경기규칙과 심판규정을 만드는 등 태권도 경기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대한 엄운규의 후일담은 다음과 같다.
“당시 최고회의 부의장이 이주일 장군이었는데, 대한체육회로 하여금 소장파로서
태권도계를 주도하고 있는 나와 이종우를 데리고 회의에 참석하라고 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오라고 하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여서 며칠 후 회의에 참석했더니
이주일 장군이 협회(協會)를 만들라고 했다. 그러면서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협회를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03


204 ▸ 국기원

구성할 때 세력 다툼을 하고 있는 노병직, 황기, 윤쾌병 등 스승과 선배들을 포함시


키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협회를 구성하면 대한체육회에 가입시켜 주겠다고 했
다. 그래서 나와 이종우는 소장 편도 아니고 노장 편도 아닌 창무관 이남석을 끌어
들여 협회 구성을 추진했다. 이남석은 우리보다 서너 살 나이가 많았지만 중립이어서
설득하기 쉬웠다.”
1960년대 후반 최홍희가 창립한 국제태권도연맹(ITF) 사무총장을 했다는 풍문에
대해 엄운규는 이렇게 반박했다.
“ITF 사무총장으로 일한 적이 없다. 1966년 최홍희씨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엉뚱한 일을 해 회장직을 수행한 지 6개월 만에 이사회에서 불신임을 결
의했다. 그 때 이종우씨가 최홍희씨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영어를 잘 하니 국제태
권도기구를 만들면 대한태권도협회에서도 적극 도와주겠다고 권유를 해서 ITF가 생
겨나게 된 것이다. 당시 ITF는 국제기구지만 대한태권도협회에 비해 규모와 상징성
면에서 나은 것이 없었다. ITF 사무총장은 주위의 의견에 따라 돌아가신 이남석씨(창
무관 관장)가 맡는 것이 좋다고 해서 그 분이 맡았다. 당시 나는 대한태권도협회 부
회장이었기 때문에 대한체육회 가맹 경기단체로서 전국체전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했
지 ITF와 관련된 일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 후 대한태권도협회 사무총장과 상근부회장, 국기원 부원장, 세계태권도연맹 부
회장, 서울시태권도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태권도 제도권의 실력자로 40년 동안 활
동했다.
그리고 나서 2004년 김운용의 뒤를 이어 국기원장이 됐다.
2009년 9월 국기원 이사장 겸 원장을 지낸 엄운규의 임기가 만료됐다. 그는 “일부
이사들의 의견 불일치로 국기원 법정법인 추진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된다. 태권도
진흥법이 통과된 만큼 정부에서 국기원과 태권도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국기원의 법
정법인화에 적극 나서줄 것을 촉구한다.”는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국기원을 떠났다.
 그는 생존하고 있는 태권도 현대사의 산 증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20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05

3. 사료 및 사진자료

가. 개요

○ 사료 총 30점
사진기록 : 26점
기타 문서기록 : 4점

나. 세부자료

자료_청도관_1

❏ 해방직후 청도관 창설자 이원국(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이 제자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음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05


206 ▸ 국기원

자료_청도관_2

❏ 1946년 2월부터 서울 시천교당(侍天敎堂)에 ‘당수도 청도관’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


으로 제자들을 양성하는 모습.

자료_청도관_3

❏ 1946년 2월부터 서울 시천교당(侍天敎堂)에 ‘당수도 청도관’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


으로 제자들을 양성하는 모습. 시천교당은 교회 예배당이어서 예배시간을 피해
오후 5시부터 밤늦게까지 수련함.

20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07

자료_청도관_4

❏ 1946년 5월 청도관 제1회 승급시험을 마치고 창설자 이원국(둘째줄 가운데)이 제자


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료_청도관_5

❏ 1960년대 초 청도관 시천교당 중앙본관 기념사진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07


208 ▸ 국기원

자료_청도관_6

❏ 1956년 태권도-당수도 청도관이 발급한 단증. 명예관장은 최홍희, 관장은 손덕성


으로 되어 있어, 그 당시 청도관과 오도관의 돈독한 관계를 알 수 있다. 최홍희는
오도관 창설자이다.

자료_청도관_7

❏ 1972년 청도관 단증

20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09

자료_청도관_8

❏ 1957년 청도관 출신들이 경무대 상무관에서 청도관 글씨가 새겨져 있는 도복을


입고 수련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원안은 엄운규

자료_청도관_9

❏ 1968년 청도관 창설자 이원국이 일본에서 잠시 귀국하자 청도관 제자들이 김포공항에


마중 나와 환영 펼침막을 들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09


210 ▸ 국기원

자료_청도관_10

❏ 청도관 3대 관장 엄운규(가운데)가 1960년대 태권도 행사장에서 정도관 창설자


이용우, 지도관 사범 이병로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료_청도관_11

❏ 고국을 떠난 지 18년 만에 일본에서 귀국한 청도관 창설자 이원국이 대한태권도협회


행사장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1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11

자료_청도관_12

❏ 청도관 창설자 이원국이 1968년 7월 청도관 제자들의 간청으로 18년 만에 고국에


와서 수제자인 엄운규와 겨루기 시범을 하고 있다.

자료_청도관_13

❏ 청도관 2대 관장 손덕성. 1963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11


212 ▸ 국기원

자료_청도관_14

❏ 1960년대 청도관 3대 관장 엄운규가 청도관 출신 제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자료_청도관_15

❏ 1960년대 중반. 대한태권도협회 행사장에 임원들과 앉아 있는 청도관 3대 관장


엄운규(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당시 그는 협회 부회장이었다.

21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13

자료_청도관_16

❏ 청도관 출신 이준구가 미국의 한 해변에서 이소룡에게 태권도 발차기를 선보이고


있다.

자료_청도관_17

❏ 1975년 청도관 관원증. 관장은 엄운규.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13


214 ▸ 국기원

자료_청도관_18

자료_청도관_19

❏ 1998년 미국 애틀란타에서 열린 미국청도관협회 창립총회

21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15

자료_청도관_20

❏ 1968년 청도관 창설자 이원국이 일본에서 귀국하자 청도관 제자들이 환영하는 모습

자료_청도관_21

❏ 1990년대 후반 청도관 창설자 이원국이 겨루기 자세를 취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15


216 ▸ 국기원

자료_청도관_22

❏ 1950년대 후반 청도관 관원들. 오른쪽은 박해만

자료_청도관_23

❏ 1955년 6월 청도관 경기도본관 승급심사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1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17

자료_청도관_24

❏ 1956년 청도관 강화지관 개관식 기념사진

자료_청도관_25

❏ 1960년대 후반 이관영 사범이 청도관 건물 밖에서 발격파를 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17


218 ▸ 국기원

자료_청도관_26

❏ 1967년 이원국 청도관 창설자가 일본에서 귀국하자 엄운규 청도관장이 현황을 설명


하고 있다.

자료_청도관_27

❏ 1968년 청도관 조명원, 이영기가 좌대련 시범을 하고 있다.

21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19

자료_청도관_28

❏ 1967년 9월 경기도 수북중 강단에서 열린 청도관 경기도본관 승급심사

자료_청도관_29

❏ 1967년 9월 청도관 창립자 이원국이 일본에서 귀국해 청도관 경기도 본관을 방문


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19


220 ▸ 국기원

자료_청도관_30

❏ 1980년대 초 서울 강북에 있던 청도관 중앙본관

22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21

4. 수련 관련 사항

가. 관훈 : 성실 창의 노력

나. 수련정신

○ 수련을 통해 정성스럽고 참되게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부지런히 애를 써라.
○ 수련목표
- 우리는 무도정신에 입각하여 심신을 단련한다.
- 우리는 상호간에 친하여 단결을 도모한다.
- 우리는 관칙을 준수하고 사범의 명령에 복종한다.

다. 수련내용

○ 품새, 격파(주먹, 손날, 팔꿈치), 앞차기 1-7단계, 돌려차기, 옆차기, 뒤차기,


송판과 샌드백 사용, 공수도와 당수 품새, 태극 1단-3단, 평안 1-5단, 철기,
발새, 십수, 연비, 관동, 암악, 자은.

○ 초창기 수련층은 10대 후반의 학생들이 많았고, 대학생, 군인, 경찰 등이었음.


주로 방과 후 1, 2부로 구분해 수련함.

○ 매일 반복 수련을 함. 단계별로 수련을 했는데 앞차기 1∼7단계를 통과해야만


다른 것을 할 수 있음. 앞축을 살리고 무릎뻗기 등 기본동작을 엄격하게 함.

○ 격파는 주먹, 손날, 팔꿈치 등 나눠서 함. 송판을 내려놓고 하기도 하고 돌려


차기, 옆차기, 뒤차기를 함.

○ 단련기구는 송판과 샌드백. 샌드백은 통나무에 고무를 감아서 주먹 단련을 함.


모래, 옷 등을 넣고 새끼줄을 묶어 손날 단련도 함.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21


222 ▸ 국기원

라. 심사형태

○ 승급심사는 6개월에 한 번씩 함. 일부는 2개월에 심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음.


심사종목은 형, 겨루기, 격파.

○ 청도관은 기술을 중시해 수련기간에 충분히 기술을 습득한 후 심사에 응심할


수 있었음. 실력이 부족한 수련생은 특별연습을 시켜 응심함.

22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23

첨부 : 당수도 청도관 정관

제1장 총칙

제1조
본관은 당수도청도관이라 칭한다.

제2조
본관의 사무소는 서울특별시, 구, 동에 치(위치)한다. 제각도(전국 각 도)에 지관을
둔다.(서울특별시를 포함한다.)
각 도지관의 규약은 본규약에 준한다.

제2장 목적

제3조
본관은 국민체육향상과 상무정신에 입각한 민족사상통일을 도모하며 민족심리를 혁
신하고 인류문화발전에 기여하는 동시 널리 국내국외에 보급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장 가입 및 조직

제4조
본관은 좌(다음)에 해당한 가입회원으로서 구성한다.
1. 전국 각사회공공단체
2. 남녀청장소년
3. 사도의 지식이 풍부한 인사 또는 본관 목적에 찬동하는 자로서 본관이 입회를
승인한 자

제5조
관원은 별정회비를 납입하여야한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23


224 ▸ 국기원

제6조
가입단체의 조직 및 운영은 본관의 감독 및 통할에 속한다.

제7조
본관원은 좌(다음)의 2종으로 구분한다.
정관원
특별관원(제4조 제3항에 해당한 회원을 말함)

제4장 권리 급(및) 의무

제8조
본관원은 다음의 권리를 갖는다.
1항 본관에 대하여 건설 및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

제9조
본관원의 다음의 의무가 있다.
1항 본관의 정관규정 및 결의사항을 준수하여야한다.
2항 본관에서 분부하는 회비를 납부하여야한다.

제5장 사업(행사)

제10조
본관은 기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의 사업을 행한다.
1항 승단, 진급, 심사실시(매년 춘,추 2회)
2항 필요에 따라 특별심사실시(특별심사는 각종칭호를 말함)
3항 모한모서(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수련실시(매년 1회)
4항 본관 창립 기념 및 수시 연무대회 실시
5항 각 학교 급(및) 도장단체 교류 수련 실시
6항 당수도에 관한 보급 및 선전출판물 간행
7항 국제친선교류연습 및 해외 원정, 대회의 개최와 참가
8항 기타본관의 목적달성에 필요한 사업

22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25

제6장 임원

제11조
1항 고문 약간 명
2항 관장 1명
3항 사범 3명
4항 교사 3명
5항 간사장 1명
6항 간사 약간 명

제12조
본관의 임원은 간부진에서 선임한다. 저교사(모든 교사)와 간사장 및 간사는 사범
회의 및 결의에 의하여 선출하고 최후결재는 관장이 이를 명한다.
고문은 관장 및 간부의 추천에 의하여 위촉한다.
고문은 관장 및 도장의 자문에 응한다.
관장은 도장을 대표하며 이를 통할한다.
간사장은 관장의 지휘 하에 도장사업 급(및) 행사를 처리한다.
간사는 간사장과 합의하여 도장사업에 추진 집행하며 각종회의에 참석하여 의사를
진술할 수 있다.
본 도장 사범 및 교사는 당수도 지도를 저당(모두 담당)하고 심사위원을 겸임한다.

제13조
본관 임원 임기는 2년으로 정한다.

제14조
간사에 결원이 있을 때는 사범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선출하고 최후결재는 관장이
이를 명한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25


226 ▸ 국기원

제7장 기관

제15조
본관에 다음의 기관을 둔다.
정기대의원대회
임시대의원대회
간사회

제8장 대의원대회

제16조
대의원대회 의장은 관장이 겸임한다.
관장 유고시는 회무대리자가 차에 당한다.(최고단자가 할 수 있다.) 저본장제십칠
조저서의 경우에는 의장을 대회에서 선출한다.

제17조
대의원은 각 지관 및 단체에서 2명식(씩) 정식대표로 선출한다.

제18조
대의원대회는 대의원으로 구성하고 본관 최고결의기관이며 정기, 임시 2종으로 나
눈다.
정기대의원대회는 매년 4월 중에 의장이 차를(이를) 소집하며 임시대의원대회는 대의
원 3분의 2이상의 요청이 유할 시 의장이 차를 소집한다. 의장이 소집치 않을 경우
간사장 명의로 소집할 수 있으며 우는(또는) 요청원 연명으로 소집할 수 있다.

제19조
제의원회회의는 재적과반수로 성회하며 출석원과반수로 의결한다. 가부동수인 시는
의장이 차를 결정한다.

제20조
다음 기록 사항은 대의원대회의 결의를 요한다.

22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27

1항 정관의 수정 및 개정
2항 예산 급(및) 결산의 심의 승인
3항 대의원대회의 권한에 속하는 임원의 선출 및 해임 또는 승인
4항 사업계획의 수립 및 승인
5항 기타 중요사항

제21조
대의원대회는 각 기관의 결의에 대한 부인권 및 임원에 대한 불신인권이 있다.
불신인권결의는 출석원 3분의 2이상으로 한다.

제22조
본회의 역인은 대회에 출석하며 모든 질의에 응답하여야하며 의사를 진술할 수 있다.

제23조
간사회는 간사로서 조직하며 본회의 협력기관이 된다.

제24조
간사회는 제반운영에 관한 사항을 사범회의로부터 위촉받아 회무를 집행처리하며
다음의 기능이 유하다.
1항 사업계획안급보급안
2항 예산 급(및) 결산안
3항 정관의 제정 급(및) 개정안
4항 제반시행규정 작성
5항 기타 결의를 요하는 중요한 안

제25조
간사회는 관장의 감독 하에 제반회의에 참석하여 전말을 보고한다.

제9장 재정

제26조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27


228 ▸ 국기원

본관의 재정은 다음의 수입으로 충당한다.


1항 회원 급(및) 가입금
2항 국가 급(및) 사회단체, 일반유지의 찬조금
3항 사업수입금
4항 후원회 조달금
5항 기타 수입금

제27조
본관의 회계연도는 매해 4월 1일에 시작하여 매해 3월 말일에 종한다.

제28조
본관에서 소요되는 예산은 간사회에서 안을 작성하고 고문의 찬동을 얻은 후 관장
의 승인을 요한다.

제10장 부서

제29조
본관에 다음의 부서를 둔다.
1항 총무부
2항 조직부
3항 섭외부
4항 연구부
5항 문화부

제30조
각부에 부장을 두고 부원은 회원으로 구성된다.

제11장 상벌

제31조
본관은 당수도에 유공한 가입단체 급( 및) 회원을 표창하고 비위를 징벌한다.

22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청도관(靑濤館) ◂ 229

제32조
표창의 종류는 그 공적의 정도에 따라 표창장, 감사장, 명예단수여 3종으로 한다.

제33조
징벌의 정도는 비위의 정도에 따라 표책(문책), 정권, 제명의 3종으로 한다. 저상벌
에 대한 규정은 별도 도장간부가 정한다.

부 칙

제34조
본 계약의 미비한 점은 통상관례에 의하여 처리한다.

제35조
본 계약은 대회통과일로부터 발효한다.

첨부 : 심사회 세칙

제1조
당수도(요?)는 유단자는 흑색, 4급 이상자는 적색, 이하는 백색으로 정한다.

제2조
본회 초단 이상자는 전국유단자명부에 등록하며 유단증 및 뱃지를 수여한다.

제3조
3단 이상자 중 특별심사에 합격한 자는 교사의 칭호를 수여한다.

제4조
교사의 칭호를 수한 자는 하처를 막론하고 도장 설치 급(및) 각 학교 단체에서 당
수도 교사를 할 자격을 득하며 8급부터 1급까지의 수여권이 유하며 초단을 추천할
수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29


230 ▸ 국기원

제5조
유단정 및 각 칭호 또는 차에 준하는 제증서는 본관장 및 사범연명으로 차를 발행
한다.

제6조
입관 후 2년 이상 수련자로서 3급 이상의 유급자에 한하여 승단심사를 수할 자격
이 있다.

제7조
승단심사를 수할 자격은 여좌하다.(다음과 같다.)
초단에서 이단은 1년반
2단에서 삼단은 3년
3단에서 4단은 2년반
4단에서 5단은 2년
5단에서 6단은 2년
6단에서 7단은 3년

제8조
명예단수여는 당수도계에 특히 공로가 유한 자에 한한다.

23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한무관(韓武館)
1. 역사 및 개요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3. 사료 및 사진자료
4. 수련 관련 사항
한무관(韓武館) ◂ 233

1. 역사 및 개요

○ 이종우가 주도적으로 조선연무관 공수도부를 재편하자 이에 반발한 이교윤이 이탈해


한무관(韓武館)을 만듦. 1954년 이교윤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 공터에 임시방편으로
천막을 치고 한무관 중앙본관을 창설함.

○ 1960년 7월 시공관에서 연무대회를 개최하는 등 독자적인 활동을 해나간 한무관은


1961년 9월 서울 성동구 상왕십리에 중앙도장을 마련함. 1969년 10월에는 창신동에
중앙도장을 신축하고 개관식을 가짐. 1971년에는 한무관의 독자적인 형을 제정함.

○ 관훈은 자신을 위해 근면한다. 관을 위해 헌신한다. 사회를 위해 봉사한다. 국가를


위해 충성한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33


234 ▸ 국기원

2. 계보도 및 주요인물 생애사

가. 계보도

❍ 관장계보

창설자 및 초대 관장

이 교 윤

❍ 시대별 한무관 출신 인사

1950년대 김명현, 김용태, 김태용, 김한택, 문창남, 양윤석, 이교승, 이교준, 이재욱, 정익진 등

김광철, 김기혁, 김진희, 김철한, 나동식, 노승덕, 박종근, 박흥신, 변동식, 윤성기,
1960년대
이강현, 이강환, 이면형, 장정희, 최수만 등

23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한무관(韓武館) ◂ 235

나. 주요인물 생애사

이교윤 한무관 창설자

이교윤이 처음 태권도를 하게 된 것은 1947년이었다. 몸이 약했던 그는 친구들이 공


수도 도장에 나간다는 것을 알고 친구들과 함께 조선연무관 권법부 도장에 등록했다.
당시 조선무선중학교(현 광운전자공고)에 다니던 그는 허약한 몸을 단련하기 위해
호기심 삼아 연무관(현 조선호텔 근처)에 갔다가 수련 결심을 굳혔다.
초창기 수련생의 연령층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 가장 많은 편이었고, 20대
후반의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즉 청·장년층이 수련생의 주류였던 셈이다. 특히 중
학교(5년제) 학생들의 관심이 높았다.
“첫날 도장에 입관했는데 스승님이 ‘열심히 할 수 있냐?’고 물어 “하는 데까지 하겠
습니다.”라고 대답한 이교윤은 친구들이 수련을 그만둔 후에도 계속 했다.
그의 선배는 이종우를 비롯하여 배영기·홍찬길·김복남이고, 동기생은 김수진·정
진영·이영덕·이병로였다. 특히 이병로와는 막역하게 지냈다.
선·후배간의 위계질서가 철저했던 당시를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 때는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간의 예의를 참 중시했다. 따라서 선배 앞에서
는 감히 담배를 피울 수도 없었으며, 수련 후 몸을 씻을 때도 입관 순서로 씻어야
했다. 특히 새로 입문한 수련생은 초단을 딸 때까지 도장 마루를 매일 닦아야 했다.”
그는 태권도에 푹 빠져 살았다. 하체운동을 하기 위해 집(창신동)에서 도장까지 걸
어다닐 정도였다. 따라서 상황이 어떻든 간에 수련을 빼 먹는다는 것은 자신이 용납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초창기 수련방식은 주로 형(품새)을 많이 했습니다. 무도를 중시했기 때문이죠.
여름과 겨울철에는 방학을 이용하여 모서수련과 모한수련을 하곤 했습니다. 가장 더
울 때와 가장 더울 때를 골라서 했어요.”
해방 직후부터 6.25전까지 지도관의 수련은 오후 5시부터 3부(1부 100명)로 나뉘
어 1시간씩 이루어졌다. 지도관의 창설자 전상섭씨의 동생 전일섭씨는 전라북도 군산
과 전주에 지관을 개관하여, 본격적으로 활동무대를 넓히기 시작했다.
그 당시(1950년 1월) 그는 3급 통신사 면허를 취득하여 서울시경 정보실에서 통신사
로 근무하면서 각 서의 경찰들을 대상으로 아침마다 태권도를 가르쳤다. 이렇게 해서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35


236 ▸ 국기원

태권도를 수련한 경찰들은 명동 소재의 시공간(극장)에서 연무대회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생했다. 공무원으로 소임을 다하면서 태권도에 전념하던
그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당시 그는 갓 20세를 넘어 징병 대상이었으나 서울 시경
에서 통신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군에 차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태권도 수련생
들은 장교 또는 사병으로 입대해야만 했다.
전쟁 후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속에서 각 도장이 온전할 리 없었다. 서울로 돌아
온 이교윤은 스승 전상섭 관장의 행방불명으로 조선연무관을 재건할 사람이 없자, 스
스로 재건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서울시경 정보실에서 통신사로 근무하면서 틈틈이 수련생을 지도했다. 그러
나 대한유도회 이재황과 도장 사용 문제 시비로 휴관을 하게 되자, 한국체육관의 부
관장 겸 관리인인 이상묵이 찾아와 조건 없이 체육관 사용을 허락해 주었다.
당시 한국체육관은 서울 종구 초동 을지로 3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교윤은 이곳
으로 옮겨와 1953년 7월 20일 태권도부를 창설하고 조선연무관의 명맥을 잇게 된다.
한국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이종우와 갈등이 증폭되자, 관리인 이상묵이 쌍방협의를
제안했지만 이교윤은 거절하고 체육관을 휴관했다. 1954년 봄까지 이곳에서 사범생활
을 한 뒤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 있는 강문고등학교 옆 공터에 1954년 9월 7일 한
무관 중앙본관을 창설했다. 24인용 천막에 가마니를 깔고 운동을 하는 열악한 환경
이었다.
초창기 한무관의 수련생은 150여 명. 한국체육관에서 그의 지도를 받은 수련생들
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후 한무관은 300여 명으로 수련생이 증가하여 중앙본관을
왕십리로 이전했다.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임흥순이 그의 인물 됨됨이를 믿고 부지
70평을 임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무관은 날로 번창하여 1950년대 중반부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한무관의
첫 지관은 충북 제천. 그의 제자인 정익진은 고향에 내려가 도장을 개관했던 것이다.
그 후 한무관의 지관은 서울 일원에서부터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자리잡
았다.
그는 직장(서울시경 정보부 통신사)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대한태권도협회의 임원
으로서 태권도 발전과 보급에 소임을 다했다.
“60년대 중반부터 태권도계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기까지는 지금의 원로들
이 많은 일을 했습니다. 저는 1961년 협회 이사를 비롯해서 상벌분과위원장, 파견분
과위원장, 경기분과위원장, 기술심의회 부의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그때는 젊었기 때

23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한무관(韓武館) ◂ 237

문에 협회 직책을 거의 다 해본 것 같습니다.”
1977년에는 제3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때 선수단장으로서 소임을 다해 대한민국
체육훈장 백마장을 수상했다.
이교윤은 태권도교본 집필에 열성이었다. “태권도를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것
은 제대로 된 태권도 교본을 만들어 후배들이 태권도 수련에 참고할 수 있었으면 좋
겠다”는 게 소신이었다. 1965년 ‘백만인의 태권도 교본’, 1970년 ‘알기 쉬운 태권도
교본’, 1987년 ‘태권도 교본’, 1994년 ‘한영 태권도 교본’, 1996년 ‘태권도 길잡이’ 등을
집필했다. 2002년 영한 혼용문으로 발간한 ‘글로벌 태권도’ 상편은 품새 등 태권도의
기술적 측면을 부각해 기술했고, 하편은 태권도 근대사를 중심으로 역사 부분을 서술
했다.
이교윤은 태권도교본 집필을 하는 동안 지난 1979년 대한태권도협회 기술심의회
의장, 1982년 서울시태권도협회 부회장, 1983년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 1984년 남미
순회 태권도친선대회 한국대표 선수단장 등을 역임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37


238 ▸ 국기원

3. 사료 및 사진자료

가. 개요

○ 사료 총 21점
사진기록 : 20점
문서기록 : 1점

나. 세부자료

자료_한무관_1

❏ 한무관 창설자 이교윤이 친하게 지냈던 지도관 이병로. 두 사람은 한국전쟁 전


조선연무관 권법부에서 함께 수련했다.

23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한무관(韓武館) ◂ 239

자료_한무관_2

❏ 1965년 한무관 이천도장 거출 관련 서류. 같은 목적을 위하여 여러 이천도장


출신들이 돈을 나누어 낸 자료.

자료_한무관_3

❏ 한무관 출신 김철환 선수가 입상하자 이교윤 관장을 비롯한 한무관 출신들이 격


려하며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39


240 ▸ 국기원

자료_한무관_4

❏ 1950년대 말 제주 관덕정에서 열린 한무관 연무대회

자료_한무관_5

❏ 1958년 제주 한무관 강정구와 현동협이 모슬포에서 겨루기를 하고 있다.

24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한무관(韓武館) ◂ 241

자료_한무관_6

❏ 1960년 한무관 행사를 마치고. 두 번째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교윤 관장

자료_한무관_7

❏ 1969년 10월 9일 한무관을 신축 개관하고 기념식을 가졌다. 이교윤 관장을 비롯한


당시 한무관 주요 인물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41


242 ▸ 국기원

자료_한무관_8

❏ 이교윤 관장이 한무관에서 태권도를 수련한 미군 중령에게 감사패를 수여하고 있다.


가운데는 한무관 제자 권영민 사범.

자료_한무관_9

❏ 1950년대부터 희극영화배우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백금녀와 이교윤 관장. 이교윤


관장은 뚱뚱한 체격이었지만 열정적으로 태권도를 수련했다고 백금녀 씨를 기억
했다.

24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한무관(韓武館) ◂ 243

자료_한무관_10

❏ 이교윤 관장과 함께 태권도를 수련한 친동생들. 왼쪽부터 이교준, 이교승, 이교윤,


이교헌, 이교방.

자료_한무관_11

❏ 1960년 7월 21일 서울 명동에 소재했던 극장 시공관에서 열린 연무대회 참가자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43


244 ▸ 국기원

자료_한무관_12

❏ 1960년 7월 21일 시공관에서 열린 연무대회에서 당시 초등학교 5학년 최재현이


기와 다섯 장을 격파하고 있다.

자료_한무관_13

❏ 1960년 7월 21일 시공관에서 열린 연무대회에서 참가자가 세워진 벽돌을 손날로


격파하는 장면.

24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한무관(韓武館) ◂ 245

자료_한무관_14

❏ 이교윤 관장과 제48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입상한 한무관 제자 및 지도자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자료_한무관_15

❏ 1969년 5월 열린 제3회 대통령기쟁탈 전국단체대항 태권도대회에서 입상한 한무관


제자들이 상장과 트로피를 들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45


246 ▸ 국기원

자료_한무관_16

❏ 블럭 4장으로 손으로 격파하는 오상훈 사범.

자료_한무관_17

❏ 미국 플로리다에서 태권도를 전파하고 있는 한무관 제자 배원균 사범의 격파 모습.

24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한무관(韓武館) ◂ 247

자료_한무관_18

❏ 월남에서 태권도 교관으로도 활동했던 동순영 사범이 운영하던 종로도장 제자들의


수련 모습.

자료_한무관_19

❏ 이면영 지도교수, 김건호 지도위원, 김상호 반장이 지도했던 홍익대학교 태권도부의


1975년 시범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47


248 ▸ 국기원

자료_한무관_20

❏ 이교윤 관장의 젊은 시절.

자료_한무관_21

❏ 한무관 제자가 운영한 대호 도장에서 태권도를 수련했던 배우 주현

24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한무관(韓武館) ◂ 249

4. 수련 관련 사항

가. 관훈

○ 자기를 위해 근면한다. 관을 위해 헌신한다. 사회를 위해 봉사한다. 국가를


위해 충성한다.

나. 수련정신

○ 자기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며 힘쓰고, 관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고 국가에는 충성을 하라.

○ 이교윤이 주장한 태권도정신 :


- “ (…) 수련의 목적은 어떠한 역경에 부닥치더라도 당황하거나 흥분하지 않
고 당면한 일을 침착히 처리할 수 있도록 안정력을 배양시킴과 아울러 어떠
한 고통이라도 능히 견딜 수 있는 인내력을 기르는 데 있다. 즉 인격완성을
위한 정신도야가 그 목적인 것이다.”

다. 수련형태

○ 1960년 7월 시공관에서 연무대회를 개최하는 등 독자적인 활동을 함.

○ 1961년 9월 서울 성동구 상왕십리에 중앙도장을 마련함.

○ 1969년 10월 창신동에 중앙도장을 신축하고 개관식을 가짐.

○ 1971년 한무관의 독자적인 형을 제정함.

○ 1971년 독자적 형 제정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49


해외 태권도 시장
개척 태권도인
해외 태권도 시장 개척 태권도인 ◂ 253

청도관 이준구

이준구는 1932년 충남 아산군에서 태어했다. 수원 신풍초등학교를 거쳐 서울 동성


중·고등학교 시절인 1947년 9월 이원국이 개관한 청도관에서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
했다.
그 후 당수도부가 있던 동국대학교에 재학 중 6·25가 발발하면서 간부후보생으로
지원해 육군항공대에서 복무하던 중 미국에서 정비훈련을 받고 중위로 제대한 후
1957년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사우스 웨스트 텍사스 스테이트 갈리지에 있는 사범대학에서 수학하며 학비와 생
활비 마련을 위해 YMCA에서 토요일마다 태권도를 가르친 이준구는 1962년 6월 28
일 워싱턴에 준리태권도장을 차리면서 본격적인 태권도 사범의 길에 들어섰다. 훗날
워싱턴주(州)가 매년 ‘준리의 날’(Jhoon Rhee Day)로 선포한 날이기도 하다.
그러던 제임스 클리브랜드 미국 의원이 강도를 당했다는 워싱턴포스트지를 읽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 ‘태권도를 배우면 강도를 당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해 정치인
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준구는 미국 국방부 관리 모임 태권도 지도자, 미국 해병대 백병전 대비 태권도
지도, 전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체육·교육 특별고문, 전 미국 부시 대통령 체육·교
육 특별고문, 미국 정부 ‘Asian American 정책’ 국가위원회 임원, 미국 대통령 ‘아·
태 정책자문원회’ 임원 등을 역임한 경력도 갖고 있으며, 구 소련 옐친 대통령의 교
육고문을 맡기도 하는 등 미국 정계의 인맥을 활용한 민간외교를 활발히 펼쳐 한국
정재계에서도 신망을 높였다.
특히 무하마드 알리에게 일명 ‘액큐 펀치’라고 불리는 주먹 쓰는 법을 가르치고,
무술인이자 영화배우인 이소룡에게 발차기를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소룡과의 인
연으로 1973년 제작된 <태권도가 타격할 때: When Taekwondo Strikes>와 1980년에
제작된 <돌아온 용쟁호투> 등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는 ‘준리’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태권도를 가르쳤고, 또 ‘체덕지 이론’, ‘유토피아
추구’ 등 독특한 철학을 전하기도 했고, 음악에 맞춘 태권도 동작을 고안하기도 했
다. 하지만 모국인 한국에서 이준구에 대한 평가는 인색했다. 출세를 위해 태권도를
활용했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2007년 유엔에서 각국 외교관들에게 태권도 정신을 설파하는 강연을 하고 2009년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53


254 ▸ 국기원

에는 태권도 교육을 통해 미국 주류사회에 한국 전통을 전파하고 수만 명의 제자를


배출, 미국 대통령 자문역으로 동포사회 위상을 제고한 것을 인정받아 한국 정부로부
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2015년 1월에는 미국의 정책연구기관 한미경제연구소(KEI)로부터 ‘미주 한인의
날’ 기념행사에서 ‘자랑스러운 미주 한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청도관 이행웅

이행웅은 1937년 중국 만주에서 태어났다. 마포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53년 청도


관에 입관해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56년 군복무 때는 한국육군첩보부대에서 태
권도 교관으로 활동한 후 경기도 오산에 태권도 도장을 설립해 지도자로서의 첫 발
을 내딛었다.
그러던 중 1962년 육군 첩보부대에서 미군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것이 인연이 되
어 미국의 초청을 받아 오마하에 정착한 이행웅은 낯선 땅에서 태극기를 걸고 태권
도를 가르치게 됐다. 그는 이 당시의 실상을 이렇게 회고했다.
“한국이민사로 볼 때 거의 초창기나 다름없는 이때 낯 설은 이국 땅에서 생활하기
란 무척 어려움이 많았다. 더욱 미국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체구도 작은 사람이 와서 한국 정통무술을 가르친다니 잘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 같
다. 처음에는 먹고 살기 위한 상업적인 방법으로 태권도를 지도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생활에는 여유를 찾을 수 있었으나 정작 무도인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나의
조국 한국을 인식시키며 고유무술을 전파시켜야겠다는 사명감을 저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허탈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행웅은 자신의 인생관이 바꾸었다. 그는 태권도를 지도하고 보급하겠다
는 일념으로 69년 ‘내가 사는 이 지역부터’라는 목표 아래 오마하 시내에 미국태권도협
회(A.T.A)를 주정부에 등록해 창설했다. ‘ATA’의 출범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그는 태권도 지도와 보급을 통해 얻어지는 수익금 중 일부는 지역사회에 환원하며
‘한국’이란 나라와 ‘태권도’란 무술을 미국인에게 점점 인식시켜 나갔다. 1976년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오마하 시장으로부터 ‘행운의 열쇠’를 수여받았고, 77년에
는 사범훈련원을 설립해 매년 200명 이상의 태권도 신인사범을 배출, 이들을 통하여

25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해외 태권도 시장 개척 태권도인 ◂ 255

한국을 알리고 예의범절을 교육시켜 나갔다.


이행웅은 제자들에게 ‘태권도는 경기가 아니라 무도’라고 가르쳤다. “태권도가 한국
의 것으로 오래 살아남으려면 도(道)를 우선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 빼앗기고
만다. 덩치가 크고 팔다리가 긴 서양인들과 경기를 해 보라.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라는 말이 이를 방증한다.
그는 평소 제자들에게 “도(道)의 정신을 지켜나가기 위해 자신 스스로 매우 엄격했
다고 전해진다. 태권도의 도는 동양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자제력과 극기를 기본
으로 한다”며 ▷돈을 탐하지 말라. ▷여자를 멀리하라. ▷행락을 피하라 등 이 세 가
지 신조를 태권도의 도훈(道訓)으로 삼았다. 이처럼 그는 태권도 수련을 일종의 ‘생활
신조’로 삼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행웅의 이 같은 노력은 곧 결실로 나타났다. 1979년 미국연방정부에 정식으로
미국태권도협회를 등록해 점차 늘어나는 태권도 수련생을 조직적으로 관리했고, 81년
에는 미국태권도협회 총본부를 Little Rock Arkansas에 최신식 건물을 신축해 이전했
다. 그의 성실함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1981년에는 한국 태권도 사범 지침서를 발간했고, 83년에는 독자적인 태권도 품새
‘송암형’을 개발해 본격적으로 보급한 끝에 85년에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
루, 파라과이 등 남미에 송암태권도연맹(S.T.F)을 설립했다. 국내에서도 이행웅의 활
약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일간스포츠>는 1986년 11월 27일자 ‘미국에 꽃피우는 태권도 왕국’이라는 제목의 기
사에서 이행웅의 위상과 활약상을 크게 다뤘다. 이행웅은 자신이 창안한 ‘송암태권도’
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정통 무도태권도의 꿈을 실현키 위해 정통 무도 정신을 근본으로 태권도 품새를
83년에서 85년까지 창안했다. 유급자 품새 9개와 유단자 품새 9개를 포함 총 18개의
품새를 송암태권도라 칭하게 되었다. 송암태권도와 다른 무도와의 가장 큰 차이는 교
육자가 피교육자에게 훈련시킬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들이 단계적으로 체계화 되어
있고, 송암태권도의 독창적인 품새 및 훈련시스템이 수립되어 있으며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지도자들을 위한 지속적인 프로그램이 실행된다는 것이다. 송암태권도는 인
격형성을 기초로 한 인성교육과 사회 규범적인 체육활동을 권장하는 정신적 훈련을
교육 이념으로 삼고 있다.”
“나는 태권도 정신으로 임한다. 동료를 아낀다. 선생을 존경한다. (중략) 1천 여
명의 참석자들은 전원기립 박수를 보내며 ‘매스터 리’를 소리 높여 불렀다.” ‘매스터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55


256 ▸ 국기원

리’는 바로 이행웅이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라스베이가스 쇼보텔호텔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ATA 全美승단대
회에는 1천여 명이 참가해 대성황을 이뤘다.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로 불렀다. 유단자
의 20%가 여성인 것도 이채로웠다.
이행웅의 활약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였다.
당시 <일간스포츠>는 ‘한국의 태권도 미국서 폭발적 인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대서특
필했고, <서울신문>은 ‘미국 태권도 사범 옷깃에 계급장이’란 제목으로 그의 왕성한
활동과 미국태권도협회의 조직을 상세히 소개했다.
다음은 <일간스포츠>에 실린 이행웅과 ATA 기사. <86년 11월 27일자>
“12만 명의 문하생을 거느린 미주 태권도 왕, 이행웅씨. 62년 도미한 후 갖은 역경
을 딛고 맨손으로 일군 ‘태권도 백만장자’, 미국태권도협회 행사 때마다 ‘마스터 리’라
는 함성이 울려 퍼진다. 이 회장은 매년 ‘사범 캠프’를 실시, 강도 높은 합숙훈련으로
사범들의 질을 높이고 있다. 처음 도장을 연 도장에서 승급심사가 있으면 이 회장은
꼭 참석, 사범의 권위를 회원들 앞에서 올려준다. 전국 도장 어느 곳에서 문제가 생
기면 이 회장 집무실에 설치돼 있는 수신인부담 전용전화로 전화를 걸어 이 회장에
게 보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
이행웅은 근본적으로 성실하고 꼼꼼한 사람이었다. 그는 제자들이 도장을 개설할
때 현지답사로 입지 조건 등을 분석, 경영 실무를 지도해 주고 각종 서류를 처리해
주는 등 제자의 도장이 성공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이행웅은 90
년까지 회원 수를 30만 명까지 늘릴 계획을 세워 놓았다.
1980년대 말 이행웅의 행보는 지칠 줄 몰랐다. 88년에는 한국 외무부장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수여받았고, 마약퇴치 신체장애자 모금을 3년간 펼쳐 150만 달러를 사회
단체에 기부하기도 했다.
미국사회에서 자신의 기반을 탄탄히 다진 그는 90년대 초반부터 ‘고국 나들이’를
본격화했다. 그의 고국 방문은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듯했다. 그는 91년 3개국에서 모인 20여명의 지도자를 인솔하고 고국을 방문해 충무
공 이순신 장군의 참배식을 가졌으며, 그해 8월에는 미국태권도협회 산하 180명의
지도자들과 함께 충무원에서 극기훈련을 실시했다. 또 92년에는 2m×4m 크기의 자연
석에 ‘죽도록 노력하면 살 것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어록비를 만들어 현
충사에 세웠다.
이행웅이 충무공 이순신과 현충사를 자주 방문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동

25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해외 태권도 시장 개척 태권도인 ◂ 257

양의 신비스러움과 태권도의 정신적 지주를 미국 제자들에게 느낄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위인으로 이순신 장군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자들을 인솔해 현충사를 참
배할 때마다 태권도는 육체적인 무술이 아닌 정신적인 도(道)라고 강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행웅은 이미 자신만의 ‘태권도 왕국’을 건설했다. 그가 설립한 ATA는 1990년대
중반 19개 지부에 700개 지관, 총 회원 15만 명, 사범자격 소지자 3,000명, 유단자
14,000명 등 방대한 조직력을 구축했다. 그해 6월 미국태권도협회 25주년 창설기념식
에는 20,000명이 미국 전역에서 참석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이행웅은 마음 속에 품었던 계획을 하나하나 세상
에 내놓기 시작했다. 95년 세계태권도총본부 및 태권도 박물관을 건립하겠다는 그의
발표는 한국 태권도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또 96년에는 미국태권도협회 태권도 프
랜차이즈를 한국에 출범시키겠다고 공언하는 등 ‘한국 진출’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
였다.
이때부터 일부 태권도인들은 그가 태권도를 상업화한다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
는 ATA에서는 ‘그랜드마스터 리’라고 칭하며 남녀노소 구분 없이 존경심을 나타냈지
만, 그 이외에 세상에서는 그를 ‘태권도를 사조직화 한 사람’ 또는 ‘태권도를 상업적
으로 이용한 사람’ 등 부정적인 이미지도 적지 않았다.
그의 이 같은 이미지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이행웅은 미국올림픽위
원회의 공인단체인 미국태권도연맹(USTU)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미국 내에 존재하
는 두 단체는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미국태권도연맹은 태권도 경기의 발전에 목적을 둔 공조직인 반면, ATA는 무도에
비중을 둔 민간조직이었다. 따라서 미국 내에서의 조직 팽창과 관련해 마찰을 빚지
않을 수 없었다.
이행웅의 행보가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우선 국내 태권도계가 그를 받아주
지 않았다. 대한태권도협회와 국기원 등 행정기관으로부터 외면을 당한 일화는 회자
(膾炙)될 정도였다. 1998년 이행웅이 한국방송(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했지만, 그를
축하해 준 사람은 강원식 등 몇 명뿐이었다.
1990년대 중반, 이행웅이 미국의 선진화된 도장 경영과 지도비법을 한국 도장에
전수해 주겠다며 ‘태권도 프랜차이즈’를 선언하자 태권도를 상업화했다는 비판도 있지
만 주먹구구식의 운영하던 한국 도장계에 수련 프로그램의 체계화와 선진화, 자료화
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57


258 ▸ 국기원

하지만 이행웅은 한국 태권도장을 둘러본 후 “태권도를 업(業)으로 삼고 사는 사범


들은 매일 차를 운전해서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일까지 한다. 왜 종주국에서는 사범
들이 운동도 하고 운전기사 노릇도 하면서 ‘태권도 아저씨’로 천시받는 것일까?”라며
안타까워하면서 한국 태권도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했다.
그가 시도한 ‘태권도 프랜차이즈’의 1990년대 말 ATA코리아 한국지부본부장을 역
임한 이말건은 “이행웅 회장은 사회 위치에 맞는 주택과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다. 미국에서 태권도로 번 돈은 태권도 연구개발에 재투자하기 때문에 돈이 많다
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고 해명했다.
그는 2000년 10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였다. 미주지역 사범들은 그
가 타계하자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특별성명에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
한 무도 지도자 중 한 분인 그랜드마스터 이행웅을 잃었다.”며 “그 슬픔은 이루 헤아
릴 수 없다”고 애도했다.
ATA는 그의 공로를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흉상 제막식을 하고 그와 관련된 자료
와 유품을 모아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2007년 6월, 미국 아칸소 주의 리틀록 시
에서 이행웅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송암(松巖) 무도문’ 준공식이 열렸다.
송암 무도문은 가장 한국적인 형태로 제작되었다. 전통 양식을 살리기 위해 한국
전통 건축가들을 초청해 직접 건설에 참여 하도록 했다. 지붕 또한 한국에서 제작한
기와를 사용했다. 폭은 8m, 높이는 7m 규모로 아칸소 주 컨벤션센터 옆에 세워졌다.
이행웅이 타계한 후 ATA는 몰락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ATA는 건재
하다. 그가 다져 놓은 토대를 바탕으로 동생과 가족들이 잘 이어가고 있다.

송무관 곽기옥

검은 대륙 아프리카 가나의 태권도 보급의 산 증인은 송무관 출신의 곽기옥이다.


곽기옥은 1978년 세계태권도연맹(WTF) 파견 사범으로 26년 동안 가나에서 군대와
경찰, 대통령 경호실, 세관, 사관학교 등에 태권도를 보급했고, 태권도 수련 저변을
확대하며 1979년 가나태권도협회 창설에 이바지했다.
곽기옥이 처음 태권도를 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60 초반으로 송무관에
서 태권도 수련을 시작했다.
그는 “늘 키는 크지만 마음이 약했던 나에게 태권도를 하던 형이 권했다. 초등학

258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해외 태권도 시장 개척 태권도인 ◂ 259

교 6학년 때에 시작하게 되어 1972년 국기원 준공식 때엔 시범단으로 국기원에서 제


1회 시범을 갖기도 했다. 내 주특기는 역수도와 고공격파, 삼방격파였다”고 말했다.
그의 형 곽기영과 곽기범도 송무관 출신이다. 곽기영은 캐나다 애드먼튼에서 도장
을 운영했고, 곽기범은 아프리카 사범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곽기옥이 해외로 파견된 계기는 1974년 제1회 해외파견 사범선발 시험이었다. 이
시험에서 파견 사범으로 뽑혔고, 그 후 국내 심판 활동에 전념하다가 1978년 WTF
추천으로 가나로 향했다.
당시 가나의 태권도 보급 상황에 대해 곽기옥은 “가나에는 이미 가라테가 넓게 전
파되어 있었다. 그래서 각 부대에 있는 체육교관들을 전부 소집해 1차, 2차로 각 2개
월씩 4개월 코스로 정글전투병 훈련을 했다. 훈련이 끝난 체육교관들은 자대로 돌아
가 군인들을 훈련시켰고, 이것이 가나의 태권도 보급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외에
도 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들을 가르쳤고, 국방부 체육관, 경호실 등에서 장교들을 가
르쳤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처음 군대 교관들을 가르치러 갔을 때의 일이다. 그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덩치 크고 힘 좋은 사람들인데다가 거의 국가대표 출신들이 많았다. 그들을 줄 세우
는 것 초자도 힘겨웠다.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내가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바로 급
소 교육이었다. 급소부위, 급소타격방법 등을 실제 선보이며 한 교관을 대상으로 실
험을 하고 나자 그 후부터는 모두 열심히 훈련에 임하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매
일 새벽 4시부터 7시까지,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면서 태권도
는 최고의 무도라는 것을 인식시켰다.”고 설명했다.
그 후 곽기옥은 1987년도엔 정부 파견 사범 생활을 그만두고 가나사관학교와 경호
실에서 귀국할 때까지 꾸준히 태권도를 지도했다. 26년 동안 가나에서 태권도를 보
급한 그에게 기억에 남는 제자가 없을 리 없다.
“1978년 처음 가나에 들어갔을 때 당시 로링스 대통령에게 태권도를 지도했다.
1979년 가나 혁명으로 인해 로링스 대통령에게 태권도를 계속 지도할 수는 없었지만
처음 접하는 태권도에 대한 그의 열정은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경찰총감을 지낸
피터 난포리, 경호실장 패트릭 돈코, 국제심판으로 활동 중인 마이클 아메노 등도 내
게 배운 훌륭한 제자들이다.”
곽기옥은 1979년 12월 31일에 있었던 가나 혁명에 대해 ‘태권도 혁명’이라고 말한
다. 당시 혁명의 주역들이 태권도를 수련한 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태권도는 사관학
교, 경찰학교, 세관, 소방관, 군인신병훈련소 등에서 필수과정으로 되어 있다. 군대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59


260 ▸ 국기원

과정을 마치면 노란띠를 수료하게 되고, 사관학교 과정을 마쳤을 경우는 초단까지 수
려한 것으로 한다. 보통 일부 단체에서 훈련기간이 짧은 태권도 수련과정을 거치면,
보통 노란띠 수료가 된다. 1979년 1월에는 가나태권도협회가 창설되어 민간인들에게
도 태권도를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26년 간 아프리카에서 태권도 지도자로, 그리고 민간 외교관으로 태권도와 국익에
이바지하며 태권도 외길 인생을 걸어온 곽기옥은 귀국한 후 용인시에 태권도장을 열
어 여전히 수련생들을 지도하고, 독일태권도협회 박수남 회장이 주축이 되어 창립한
세계어린이태권도연맹 기술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여전히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도관 김영태

지도관 출신의 김영태는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태권도 보급 및 발전의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27년간 아프리카 오지에서 일군 태권도 보급과정은 한편의 드
라마이다.
1937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김영태는 동국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한국
체육관 태권도부 사범을 시작으로 태권도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이종우로부터 한국
체육관에서 태권도를 수련한 김영태가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코트디브아르에 정착
한 것은 지난 1968년 6월. 정부의 해외 태권도 교관 파견에 따라 민간 사절의 임무
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코트디브아르는 당시 일반인에게 아이보리코스트로 더 알려
져 있었고, 코코아 생산량이 세계 1위였다.
김영태가 처음 코트디브아르에 도착했을 당시 현지에는 유도와 가라테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태권도의 불모지였던 그곳에서 기반을 다지기 위해
현지 프랑스인이 경영하는 체육관에 사범으로 들어갔다. 고용계약은 30개월에 월 3
백 20달러. 그 후, 어느 정도 입지를 구축한 그는 본격적으로 태권도 보급과 홍보에
나서기 시작했다.
“태권도보다 먼저 기반을 잡고 있는 유도나 가라테에 대항하여 세력을 넓히기 위
해선 시범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확신했다. 몸으로 직접 태권도의 위력을 보여주어야
현지인들이 태권도가 어떤 것인지 호기심을 가질 테니까 말이다.”
그의 전략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다섯 장의 벽돌이 일격에 으깨지고 몇 겹의 송

260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해외 태권도 시장 개척 태권도인 ◂ 261

판을 손끝으로 찔러 쪼개버리자, 현지인들은 동양의 귀기(鬼氣)라고 경악했다.


시범이 있은 후 현지 신문들의 대서특필에 힘입어 그는 유명 인물이 되었다. 그때
부터 그에게 행운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태권도 불모지인 탓에 어쩔 수 없이 유도회
에 가입해서 받았던 모진 수모와 괄시를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에게 찾아온 첫 행운은 당시 대통령 의전실장인 조지 위낭씨가 태권도 개인 지
도를 요청한 것. 그 후 위낭씨의 소개의 보안, 공보, 축산, 과학부 장관 등 정부 각
료들이 줄지어 태권도복을 입었다. 이것은 그의 입지를 확고부동하게 해줌은 물론 태
권도 보급의 탄탄대로를 예고하는 셈이었다.
이것을 토대로 그는 태권도를 뿌리내린 지 1년 6개월 만에 국립경찰학교와 보안군
학교에서 태권도를 강의하는 정식 교관(총경)으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하루에 2시간
씩 기본동작과 겨루기를 지도했다.
그러나 먼 이국에서의 생활에는 수많은 어려움도 뒤따랐다. “음식은 아내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큰 불편은 없었다. 하지만 언어소통의 어려움과 열대 기후, 아이들의
교육문제, 그리고 풍토병을 예방하기 위해 매일 약을 먹어야 했다.”
김영태는 자만하지 않고 더욱 고삐를 움켜쥐었다. 그래서 창설한 것이 코트디브아
르 태권도연맹, 1973년 7월 3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명예스러운 일, 그것은 그해
코트디브아르 건국 18주년 기념식에서 300여 명의 수련생을 이끌고 태권도 시범행진
을 한 것. 국가 귀빈으로 대우받는 영광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태권도 강의를 계속하면서 가나, 말리, 모로코, 세네갈, 니제르, 가봉, 베넹
등 중앙아프리카에 태권도 보급에도 나섰다. 그러던 중 뜻밖의 사건을 맞이하게 된
다. 1984년 12월 28일, 그는 베넹태권도연맹 회장의 초청으로 승단심사 및 시범경기
를 하기위해 입국했다가 북한요원의 기습을 받은 것. 그는 지금도 그날의 숨 가빴던
연행과 구금, 그리고 탈출과정을 잊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악몽에도 불구하고 태권도 보급의지를 새롭게 다져 1985년 제
7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코트디브아르 선수를 출전시켜 종합2위를 거머쥐는 쾌
거를 달성했다.
김영태는 코트디부아르의 성공을 발판으로 라이베리아, 카메룬, 중앙아프리카 등지
에도 태권도를 보급했다. <동아일보>는 1986년 9월, 김 사범을 이렇게 소개했다.
“김영태 사범은 코트디브와르 대통령 실에서 지급한 관용차를 타고 다닌다. 현지
정부의 고문으로 진출한 유럽인들을 제외하고 동양인으로서 이 나라 관용차를 타는
사람은 그 뿐이라고 한다. 1980년 8월에는 현지 정부로부터 체육훈장을 받았다. 그의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61


262 ▸ 국기원

인기는 생선시장에서도 입증된다. 그가 경영하는 서울식당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차


를 몰고 시장에 들어서면 흑인 꼬마들이 일제히 몰려온다. ‘매튜(불어로 사범이라는
뜻)’를 연발하며 그의 차를 돌봐주겠다고 야단이다.”
특히 1980년대 후반, 김집 전 체육부 장관이 코트디브아루 공항에서 비자가 만료
되어 입국을 하지 못하고 난처한 상황에 빠져있을 때, 한국 대사관 관계자들도 못하
던 일을 단 한 번에 무사통과를 시켜준 사람이 바로 김영태이다.
이 일화와 관련해 그는 “나는 보안사령관과 대통령 경호실장, 치안본부장, 내무부
장관, IOC 부위원장들을 가르쳐 VIP 대우를 받았다. 한국을 다녀올 때도 그 나라 공
항의 귀빈실을 사용했다. 내가 나타나 어떤 일을 처리하면 대부분 무사통과로 해결됐
다”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 코트디브아르 정부는 체육훈장(81년)을 비롯하여
대통령 표장(85년), 국가공로훈장(95년), 국가최고공로훈장(96년) 등을 수여했다. 지난
2007년에는 코트디브아르 정부가 자국의 체육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의 훈장도 수상했다.
당시 WTF 집행위원이었던 김영태가 받은 상의 정식 명칭은 ‘코망되르 로드르 뒤
메리트 스포르티프 이브와리엥’(Commandeur l'ordre du merite sportif ivoirien)으로
우리말로는 ‘코트디브와르 국가체육 사령관 훈장’ 정도로 바꿀 수 있다.
1995년 영구 귀국한 김영태는 WTF 사무차장(1996-1998), 대한태권도협회(KTA) 이
사(1997-2002) 등을 거치며 태권도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2004년 9월에는
세계태권도연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현재도 국기원 해외심의위원으로 활동하며
태권도 세계화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지도관 이상철

이상철은 전북 김제 만경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무술에 관심이 많아 지도관 전북


도본관 소속의 도장에 들어가 태권도를 수련했다.
태권도 선수생활은 화려했다. 1970년 대한체육회가 제정한 최우수선수상 태권도 부
문을 수상했다. 1971년 고려대를 졸업한 후 1975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1979년부
터 198년까지 다섯 차례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미국대표팀 감독으로 활동했다. 1988

262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해외 태권도 시장 개척 태권도인 ◂ 263

년 서울올림픽 때도 미국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학업과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6년 미국올림픽위원회 dr Jackie Paul과 같
이 ‘국제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시차적응에 대응하는 방법’이라는 연구를 발표하고,
U.S. Olympic academy를 졸업했다.
1992 us open 태권도 대회를 창설한 이상철은 1993년부터 1995년까지 us Olympic
festival 태권도 담당관으로 활동했다.
1997년 미국올림픽위원회 이사와 국제분과 위원이 된 그는 그 해 미국태권도연맹
회장으로 선출되어 7년 동안 미국 태권도 발전을 위해 힘썼다. 2002년 세계태권도연
맹 부총재로 선임된 후 2007년 U.S. taekwondo committe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2007년 12월 국기원이 해마다 주최해온 세계태권도한마당을 미국에서 개최하
는 것과 관련, 반대 여론이 일자 <태권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태권도한마당은 16년
동안 한국에서만 열렸다. 이제는 태권도한마당의 세계화와 태권도의 무도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해외에서 열려야 한다. 미국 개최에 대해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는 단체가
있는데, 왜 반대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비판했다.
이상철은 미국에서 활동했지만 국내 태권도계에 관심이 많았다. 2009년 1월 국기원
엄운규 원장이 사퇴하는 것과 관련,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장수다. 현재 국기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김운용
전 원장이 더 많은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2010년 1월에는 정부 주도의 국기원 법정법인화를 반대하며 국기원 산하 대책위원
장을 맡았다. 그는 국기원이 법정법인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나
친 간섭과 일관성 없는 요구로 국기원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정부 산하에 예속시키려
는 행위에 대해 전 세계 태권도인들에게 부당함을 알렸다.
당시 이상철은 <태권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정부가 교황청을 관리하려
고 하지 않고 그들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 것은 교황청 존재 자체의 의미 때문이
다. 정부가 진흥법에 명시한 국기원의 목적사업 존중과 기존 임원진의 임기 보장 등
국기원의 자율권을 무시했다.”고 지적하고 “정부가 국가공무원법을 내세워 일부 이사
들을 인위적으로 배재하는 등 자율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세계 각국의 태권도인들로
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할 것이다.” 강력하게 시정을 요구했다.
한편 그는 2008년 세계태권도한마당 조직위원장을 맡은 경력과 2009년 us open 태
권도 한마당을 창설한 것과 관련, “U.S. open 태권도 대회는 스포츠 태권도, U.S.
open 태권도 한마당은 무도 태권도를 지향한다. 조만간 각 나라에도 태권도한마당이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63


264 ▸ 국기원

생겨야 된다.”고 말했다.

무덕관 서명수

무덕관 출신으로 50년 가까이 네델란드에서 유럽 태권도 보급 1세대로 일생을 바


쳐온 서명수. 그가 처음 네델란드에 건너간 것은 지난 1969년이다. 그 당시 네델란
드에서 태권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서명수는 어쩔 수 없
이 ‘코리아 가라테’로 수련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지금은 매주 챔피온십, 세미나, 심
사와 같은 태권도 행사가 열릴 정도로 성장했다.
경북 무덕관 대봉도장에서 태권도를 수련한 서명수가 처음 유럽으로 향한 것은
1966년. 독일 아헨공대 전기과서 유학하며 동아리 강당을 빌려 태권도를 가르친 것
이 동기가 되어 사범활동을 시작했다. 중학교 때 시작한 태권도가 해외에서 그렇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서명수는 독일 유학 중 네델란드로 갔다. 네델란드태권도협회의 국가사범으로 초
청된 것이 계기였다. 그 후 네델란드태권도협회 부회장과 기술위원장, 유럽태권도협
회 기술위원장 겸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어려운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태권도
의 우수성을 몸으로 알렸으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해 네덜란드 여왕의 훈장까지 받게
되었다.
특히 네델란드의 승단 심사는 한국보다 더 까다롭다. 서명수는 1996년 귀국해 <태
권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기원에서 하루에 3,700명이 심사를 받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하루에 150명 이상 하는 법이 없다. 심사내용도 품새, 한번겨루기, 호신술,
겨루기, 격파, 이론심사를 모두 본다. 이론 심사 때에도 태권도 용어는 꼭 한국말로
표기하도록 필기시험을 치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련생들은 단을 따고나면 자신
감을 얻는다. 힘들게 번 돈을 가치있게 쓰고 그렇지 않은 돈은 금방 나간다는 평범
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승단심사를 까다롭게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태권도 지도자들에게 서명수가 당부하는 것은 바로 민주적인 지도자의 자세이다.
그는 “태권도계도 이젠 민주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 수련인들 중에는 여러 부류가
있다. 의사도 있고 청소부도 있고 변호사도 있을 수 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 사범
은 도장 안에서만 스승이지 생활 사범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도장에 들어

264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해외 태권도 시장 개척 태권도인 ◂ 265

오면 나에게 당연히 절을 하고 정신통일을 해야 하지만 도장 밖에서는 평등한 관계


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런 것을 자칫 지나치는 사범들이 많은 것 같다. 나를 비롯해
해외 사범들은 더욱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덕관 문대원

멕시코 국민들에게 ‘태권도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문대원. 194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그는 대전중학교 2학년 때 무덕관(武德館)에서 처음 태권도를 접했다. 청소년
시절 학업과 수련을 병행하던 그는 경희대에 진학했고, 2학년 재학 중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됐다.
가족은 휴스턴에 터를 잡았고, 문대원은 텍사스 공대에 입학해 건축학 공부를 했
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참가한 무술대회에서 우승한 것이 인생의 항로를 태권도로
바꿔놓았다.
당시 일본의 가라테가 널리 퍼져있었던 미국에서 태권도를 아는 이들은 없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문대원의 무술대회 우승은 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
분했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가라테와 다소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 한국무술 태권도는
문대원 덕분에 미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문대원은 1965년부터 67년까지 무술대회 3연패라는 기록까지 세웠다. 신장 171cm
에 체중 68kg으로 서양인들과 비교하면 왜소한 체구의 그는 빠르고 강한 태권도 동
작을 잘 활용하는 싸움의 고수였다. 경기장에서 거구들이 맥없이 쓰러졌고 이를 지켜
본 미국인들은 문대원의 무술 실력을 곧 태권도의 위력이라고 받아들였다.
무술대회 우승 사실과 높은 태권도 실력이 무술잡지를 통해 알려지면서 미국을 비
롯한 인접 국가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많은 언론에 문대원과 태권도가 소개됐고, 각
종 무술대회에서 그를 초청했다. 멕시코를 처음 방문한 것도 1969년 열린 무술경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멕시코에도 가라테만 널리 퍼져있었을 뿐 태권도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불모
지가 왠지 문대원의 마음을 이끌었다. 그는 다혈질 성향이 강하면서도 정이 많은 멕
시코인들에게 한국적 매력을 느껴 태권도 지도를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멕시코에 태권도를 전파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본인 가라테 지도자들은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265


266 ▸ 국기원

도복 색깔과 동작이 유사하다며 ‘태권도는 가라테의 아류’라고 비아냥거렸다. 이런 어


려운 현실 속에서 띠를 동여맨 문대원은 묵묵히 실력만으로 승부해야겠다고 생각했
다. 굳게 마음먹은 그는 비열하게 태권도를 폄하하는 일본 가라테 사범과 정식 대련
을 제의해 하나둘씩 쓰러뜨렸다. 이외에도 격파 시범 등 가리지 않고 태권도의 위력
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던 가라테 도장은 문대원의 노력에 하나둘씩 자리를 내어주
기 시작했다. 태권도장을 증설하면서 수련생이 늘어났고, 가라테 제자들이 태권도로
전향해오는 일도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멕시코 내 무도대회에서 문대원의 제자들
이 가라테 수련자들을 제치고 우승해 태권도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지금까지 문대원
의 무덕관을 거쳐 간 멕시코인 제자만 30만 명이 넘고, 지도자도 600명 이상을 배출
했다.
문대원은 30여 년 전부터 멕시코에 자신의 이름을 딴 태권도대회를 만들어 지속해
오고 있다. 엘리트 선수 육성과 태권도 활성화를 함께 이루기 위해 만든 대회였다.
2015년, 33회를 맞은 ‘문대원컵태권도대회’는 멕시코 전역 태권도 수련생들이 팀을 이
뤄 참가하는 대규모 태권도 축제로 전 국민들이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또 2012년부터 세계최초의 태권도 프로 리그 ‘TK-5’를 창설해 운영하고 있다. 멕시코
는 물론 미주까지 케이블 방송을 통해 방영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문대원은 태권도와 함께 한국 알리기에도 앞장섰다. 승단심사에 태권도와 관련된
한국 역사 관련 논문을 제출하게 한 것, 도복에 한글 이름을 수놓게 하는 것 등 할
수 있는 한 태권도를 통해 한국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멕시코에서는
문대원과 문대원의 태권도 무덕관이 곧 한류다.
이렇게 40년이 넘는 그의 태권도 지도와 전파활동은 멕시코 태권도를 강하게 만들
었다. 제2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첫 입상자를 시작으로 꾸준히 국제경쟁력을
향상시킨 멕시코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58kg급 길레르모 페레즈와 여자
+67kg급 마리아 에스피노자가 각각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명실상부한 태권도 강국임
을 입증했다.
멕시코시티에 본가를 꾸리고 있는 그는 멕시코 각지에 450여개 도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태권도 지도와 발전을 위해 투자하고 있다. 세계태권도연맹
기술위원장과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266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해외 태권도 시장 개척 태권도인 ◂ 267

강덕원 박수남

박수남은 1948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건국대를 거치며 태권도를 수련


했다. 그는 15세인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 누나의 적극적인 권유로 강덕원 도장을
찾았다. 그렇게 타의에 의해 시작한 태권도는 후일 그의 삶의 전부가 됐다.
태권도를 통해 열정과 소신을 갖게 됐다는 그는 성인이 된 후 유럽 전역을 돌며
태권도를 전파하고 태권도 제도권에서 봉사했다.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태권도
쫓아 달린 그에게 붙은 칭호는 ‘유럽태권도의 전설’이다.
박수남이 처음 인연을 맺은 유럽 국가는 독일이다. 서울 남산 인근에서 1971년부
터 5년 간 독일 대사관 직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됐다. 대사관 직원
들의 추천으로 1975년 독일 정부로부터 자국 태권도 국가대표팀을 지도해 달라는 부
탁을 받은 것이다.
당시 태권도장을 운영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던 박수남은 고심 끝에 더 넓
은 세상에 태권도를 전파하겠다고 마음먹고 독일 행을 결정했다.
박수남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10년 동안 독일대표팀을 지도했다. 독일은 박수남의
활약으로 2년마다 개최되는 유럽선수권대회 5연패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독일 정부
는 자국 태권도 발전의 주역 박수남에게 1989년 공로훈장을 수여했다. 한국인으로는
첫 훈장 수여자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독일 첫 방문에서 태권도를 한국식 가라테라고 소개한 것을 그는 아직도 가슴에
두고 있다. 자존심 상하고 못마땅했지만 이미 널리 퍼져있는 가라테였기에 울화를 꾹
꾹 눌러 참았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일화다.
10년 동안 맡았던 독일 팀을 제자에게 인계하고 박수남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오스트리아 대표 팀을 지도했다. 2년 남짓한 대표 팀 감독이었지만 그들은 박수남을
자국 태권도 경기력 향상의 일등 공신으로 여겼다. 2006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박수
남을 기리는 마음으로 그의 젊은 시절 얼굴을 담은 우표를 발행했다. 박수남과 태권
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할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인 태권
도 사범이 유럽 국가 국민들이 사용하는 기념우표의 주인공이 됐다는 것이 국내에서
도 큰 이슈가 됐다.
이외에도 영국,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태권도를 보급했
다. 세계 각지에 제자들을 두고 있다는 얘기를 할 정도로 그는 이곳저곳 가리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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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 국기원

고 태권도 전파에 힘을 쏟았다.


현재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박수남은 세계태권도연맹 부총재, 유럽태권도연맹 부총
재, 영국태권도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2012년 독일태권도협회장에 당선됐다. 37
년간 한국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그가 독일인과 경합해 압도적인 표차이로 회장에 선
출된 것만으로도 독일에서 입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2008년에 영산대학교 석좌교수로 임명되었다. 취임식에 김운용 IOC(국제올림
픽위원회) 전 수석부위원장을 비롯한 저명인사 200여 명이 참석해 축하를 아끼지 않
았다.
박수남은 태권도 전파를 통해 민간외교를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태권도는 한국의 가장 큰 관광자원이다. 계절에 관계없이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유럽 태권도 수련생들에게 한국은 성
지와 같은 개념이다. 그 가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라며 태권도의 외교적 기능
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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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태권도 시장 개척 태권도인 ◂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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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보고서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즈 초청 기념사업
- 태권도 9개관 역사 자료집 -
2015년 07월 30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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