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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논문

정치적 프레임을 배제한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사상에 대한 연구

Research on Shostakovich's Artistic Ideas Excluding

Political Frames

상명대학교 대학원

뉴미디어음악학과 뉴미디어음악학전공

라 상 율

2021년 2월
정치적 프레임을 배제한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사상에 대한 연구

Research on Shostakovich's Artistic Ideas Excluding

Political Frames

지도교수 정 순 도

본 논문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상명대학교 대학원

뉴미디어음악학과 뉴미디어음악학전공

라 상 율

2021년 2월
라 상 율의
박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심사위원장 장 민 호

심사위원 정 순 도

심사위원 정 승 재

심사위원 신 창 섭

심사위원 오 구 일

상명대학교 대학원

2021년 2월
차 례

표 차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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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그림 차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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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악보 차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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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국문초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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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Ⅰ. 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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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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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 방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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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구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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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행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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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본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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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쇼스타코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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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쇼스타코비치의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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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사회적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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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2.1. 20세기 러시아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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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2.2. 소비에트 연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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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스탈린의 사후 “해빙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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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쇼스타코비치의 시기별 주요 작품 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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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 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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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스탈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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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볼셰비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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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마르크스 레닌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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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협회(RAP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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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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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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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반(反)수정주의 해석에 의한 쇼스타코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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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3.1. Shostakovich Symphony No.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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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Shostakovich Symphony No.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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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3.3. 쇼스타코비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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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4. Shostakovich Symphony No.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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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3.5. Shostakovich Symphony No.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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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3.6. Shostakovich Symphony No.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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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로렐라이 E. 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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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3.7.1. 로렐라이 E. 페이“A-Life”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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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 “A-Life”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성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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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4. 반공주의 해석에 의한 쇼스타코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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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4.1. Shostakovich Symphony No.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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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4.2. Shostakovich Symphony No.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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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솔로몬 볼코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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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솔로몬 볼코프 “증언” 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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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 “증언”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성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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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5. 수정주의 해석에 의한 쇼스타코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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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5.1. 엘리자베스 윌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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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 엘리자베스 윌슨“A-Life Remembered” 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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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5.1.2. “A-Life Remembered”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성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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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6. 정치적 프레임에 의한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심리 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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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7. 정치적 프레임을 배제한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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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7.1. Shostakovich Symphony No.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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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7.2.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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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7.2.1. 검은 옷의 수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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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 체호프의 음악적 형식의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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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7.3. 미하일 조셴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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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안나 아흐마토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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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쇼스타코비치의 환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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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7.5.1.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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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7.6.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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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7.6.1. 레닌그라드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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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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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7.7. 쇼스타코비치의 작곡 성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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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7.7.1 쇼스타코비치의 DSCH 음악적 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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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7.7.2. 쇼스타코비치의 의사소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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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7.8. 전기와 회고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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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7.8.1 동일한 주장에 의한 예술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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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 상이한 주장에 의한 예술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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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8. 자율주의에 따른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형이상학적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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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결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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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본 연구의 한계 및 향후 연구 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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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Ⅳ.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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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Ⅴ. 참고 웹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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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ABSTRAC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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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차 례

<표 1> 시기별 주요 작품 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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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 자극적인 단일성 프레임에 대한 정책선호 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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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 경쟁적 프레임 경험시 선호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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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표 4> 각 문헌에서 나타난 모순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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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표 5> 각 문헌간의 동일한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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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6> 각 문헌간의 상이한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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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
그 림 차 례

<그림1> 프라우다(Pravda)의 맥베스 부인 관련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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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림2> <제7번 교향곡> 소개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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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니콜라이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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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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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림5> 1937년의 이오시프 스탈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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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로렐라이 E. 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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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7> 솔로몬 볼코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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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8> 엘리자베스 윌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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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9> 경쟁적인 프레임과 집단의 일체감에 따른 선호 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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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그림10> 경쟁적인 프레임과 이념원칙의 부합에 따른 선호 차이 140
<그림11> 경쟁적인 프레임과 이해관계성에 따른 선호 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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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2>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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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3> 미하일 조셴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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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그림14> 안나 아흐마토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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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5> 레닌그라드 포위전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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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6> 포격 당한 레닌그라드 시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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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7> 아사한 시체를 묻는 레닌그라드 시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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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그림18> 라도가 호수를 통한 보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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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그림19> 소방관으로 근무했던 쇼스타코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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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
악 보 차 례

<악보1> 쇼스타코비치의 DSCH 모티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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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2> 독일식 모티브 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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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
국 문 초 록

정치적 프레임을 배제한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사상에 대한 연구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작품에 내재된 예술적 사상에 대한 평가는


그의 정치적 성향과 당시 여러 정치적 배경과 맞물리며 현재까지도 논쟁
이 진행되고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의 구현자로 혹은 냉전 기간 중 희생
된 비극의 음악가로도 일컬어지기도 하였으며 1991년 구 소련 붕괴 이후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는 당국에 비판을 표현한 반체제 음악
가라고 불려지기도 하였으나 단순히 당체제를 통한 기회주의자 혹은 체제
협력자라는 주장 등 여러 가지 평가가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적 성향은 여러 회고록에서 상반되게 표현되기
도 하였다. 1979년 미국에서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가 쓴 “증
언”이라는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이 출판되었을 때 아들인 막심이 볼코
프(Maxime Volkov)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야기로 날조되었다는 입장
을 표명했으나 1981년 망명 이후에는 자신의 기억에 의한 정황적 증거에
따른 서술을 통해 어느 정도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고도 했다. 또한 그의

딸인 갈리야는 책에 나오는 문체가 쇼스타코비치의 평소 말투와 비슷하다


고 한 바도 있다.

하지만 “Shostakovich: A Life”의 저자 로렐 E. 페이(Laurel E. Fay)

는 “증언”의 8개의 챕터 중 7개의 챕터가 이전에 출판된 쇼스타코비치


의 몇몇 에세이에서 일부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하였으며 엘리자베스 윌슨

(Elizabeth Wilson)은 특정 내용이 생략되거나 일부 오류가 있다는 내용의

설명과 함께 반론을 제기한 바도 있다.

- IV -
본 논문은 스타코비치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킨 핵심적 저작으로 평가

되는 로렐 E. 페이의 “Shostakovich: A Life”, 엘리자베스 윌슨의


“Shostakovich: A Life Remembered”, 아직까지도 진위 여부 논란이 있

지만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가 저술한 “증언”을 비교 분석하였

으며 일부 모순되거나 상이한 점, 그리고 학자들이 주장하는 수정론자,


반(反)수정론자, 반공주의자라는 상이한 평가에 대해서는 동일 내용을 다

소 정치적 해석으로 서술하는 부분에서 비롯된 것이며, 쇼스타코비치가


시대적 상황에 따른 특정 정치적 성향을 내세우는 음악가가 아닌 ‘시대
적 상황에 따른 예술적 표현을 하는 음악가’라는 주장에 포커스를 두었
다. 또한 지인들의 회상과 쇼스타코비치가 지인들과 의사소통한 편지, 그
리고 각 문헌에서 동일한 내용이나 상이한 내용들에 대해서 분석하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예술가로써가 아닌 정치적 프레임에 따라 정치 성향의 작
곡가로 평가가 되는 실정에서 정치적 프레임을 배제하기 위해 정치적 프
레임에 관한 정치심리학의 결과를 대입하여 객관화시켰다. 아울러 그가
생전 가장 존경하였던 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작품과 쇼스타
코비치의 연결점들을 분석하고 도출하였으며 그의 예술 성향과 쇼스타코
비치에게 영향을 준 미하일 조셴코, 안나 아흐마토바와의 사상과 영향을
분석하고 <교향곡 제7번>의 시대적 배경이 된 레닌그라드의 전투와 그에
따른 사건들을 분석하기 위해 그의 작품과 문헌들을 반(反)수정주의, 반공
주의, 수정주의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그가 당에서 억압받았던 시절인 스
탈린 시대와 사상을 연구하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어떻게 그의

작품 성향에 영향을 주었는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적 암호인 DSCH 기법


과 함께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그의 성향을 반영하는 자료들과
각 문헌의 동일한 부분과 상이한 부분들에 대해서 정치적 관점에서만이

아닌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함께 연구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쇼

- V -
스타코비치의 인성 성품 면에서 명예욕이 없다는 점과 남몰래 선행하는

그의 도덕적인 모습, 예술을 생각하는 그의 열정에 따른 역사적 사실과


행보 등을 토대로 쇼스타코비치는 숭고한 예술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특정 정치관에 편협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이후 나타난 쇼스타코비치의 성향을 토대로하여 그의 예술 사상


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하는 방법으로 음악론적 관점에서 프레임을 배제

시키기 위해 미국 철학자 노엘 캐롤의 예술론에 나타난 자율주의를 대입


하여 외부 프레임을 배제시키고 그의 사상을 연구해보니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사상이 쇼펜하우어의 음악 형이상학과 근접하다는 결론에 도출하였
다.

- VI -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기존에 쇼스타코비치에 관한 연구와 논의가 많이 진행되어 왔지만,

뚜렷하게 하나의 의견으로 좁혀진 적이 없다. 실제로 쇼스타코비치 본인


도 자신의 성향이나 작품 해석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거나 아주 두루뭉술
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다양
한 의견이 존재하는 상태이다. 초창기 그에 대해 4가지의 의견이 있었다.
1) 쇼스타코비치는 충실한 이데올로기의 구현자로써 보는 의견, 2) 냉전의
기간 중 희생된 비극의 주인공으로 보는 의견, 3) 1991년 구 소련의 붕괴
이후 억압이 풀어진 상태에서 음악을 통해 당국에 비판을 표현해온 반체
제 음악가로 다시금 재조명해야 된다는 의견, 4) 기회주의자 혹은 체제협
력자라는 의견이다. 이렇게 나뉘다가 현재에 이르러 2가지 의견으로 좁혀
진 상황이다. 기존 체제의 변화를 원하는 수정론자와 기존 체제를 순응하
였다는 반수정론자로 의견이 대립되는 상황에서 문헌에서 나오는 사실들
이나 학자들이 서술한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증언의 내용으로 판단컨대,
실제로 뚜렷하게 정치색을 본인의 입으로 내비친 적이 없었던 쇼스타코비
치를 굉장히 또렷하게 정치색이 있다는 프레임을 씌워 확정적인 정치 성

향의 음악가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과연 쇼스타코비치는 어떤 정치관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넘어서 당 시대 사람의 신념, 이념, 사상


등의 역사적 사실을 현재에 대입하여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에게

정치란 무엇이며, 정치색에 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정

치 색을 본인은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본다고 가정해본다면,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답변이 나올 것이다. 현재 자신이 속한 국가의 정치

- 1 -
방향에 순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체제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

이며,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기본적인 전제로 깔


리는 부분들이 있다. 사람이 해당 국가에 태어나고 성인으로 커가면서 살

아온 기간에 몸에 베인 해당 문화, 사회사상에 대한 이해도와 감정의 이

입이 쉬울 수 있단 점이다. 물론 여기서도 해당 국가의 사회사상에 순응


하는 사람 중에서도 특정 부분의 불만이 있을 수도 있는 다양성이 존재하

기 때문에 특정 사회사상에 따른 정치 성향의 분석은 이분법으로 구분되


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 부분을 고려하여 연구를 진
행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쇼스타코비치가 사회주의 사상에 어느 정도 생각
이 베인 인물이었는지, 그렇다면 그 사회사상에 따라 삶을 살아가면서 불
만이 없었는지 고찰하고, 쇼스타코비치라는 인물이 음악을 정치에 이용한
권력욕에 빠진 인물인지, 아니면 예술을 사랑하고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
에 갈망한 음악가인지에 포커스를 두고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였
다. 이 연구를 통해서 이전 혹은 앞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예술가의
예술정신이나 음악의 평가가 왜곡되어 폄하되지 않아야 된다는 목적에 의
의를 두고 해당 연구를 하게 되었다.

2. 연구 방법
기존 학자들은 문헌과 그에 입증할 만한 지인들의 증언 및 쇼스타코
비치의 편지의 내용, 역사적 사실과 소련 당국이 발표한 성명 등의 자료
로 쇼스타코비치의 정치관에 관해 주장을 펼쳐왔다. 필자는 포커스를 달

리 두어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심장발작으로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사실과 문헌에 언급되어있는 그의 집안 내력 및 분위기, 그리고 친척들의
회상내용, 지인들이 말하는 쇼스타코비치의 성격 및 언급된 증언의 내용

등을 통해 그의 성격과 이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배경을 조사할 것이

- 2 -
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공식적인 문헌에선 언급되지 않았지만, 다른

문헌에서 언급되는 내용도 조사할 것이며, 쇼스타코비치를 소재로 나온


논픽션의 에세이라고 평가 되고 있는 미국 작가 매튜 토빈 앤더슨

(Matthew Tobin Anderson)이 쓴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제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의 초연을 다룬 논픽션 서


적으로 작가가 Solomon Volkov의 “Testimony”, Laurel E. Fay의

“A-Life”, Elizabeth Wilson의 “A-Life Remembered”이 3개의 서적에


서 나오는 지인들의 증언 담을 논란이 되지 않게 꼼꼼하게 비교 분석하여
출처로 사용했다고 하여, 그 안에서 나타나는 내용들에서 신뢰할만한 역
사적 사실들을 조사하였다. 마지막으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논의를 진
전시켰다고 평가되는 대표적인 쇼스타코비치의 전기책인 미국 저술가
Laurel E. Fay가 저술한 “A-Life”와 첼로 연주자인 Elizabeth Wilson의
“A-Life Remembered”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쇼스타코비치는 반공주의
자라는 의견이 들어간 Solomon Volkov의 “Testimony”, 이 3권에서 나타
나는 주장의 재확인 및 주장하는 의견과 상이한 내용을 문헌안에서 내포
하고 있는지와 정치적 역사 사실과 및 쇼스타코비치의 이념, 생각 등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지 체크하고, 각 문헌과 동일 내용의 부분에서 상이
한 내용이 있는지에 대해 조사 분석하였으며 이 결과를 토대로 정치적 프
레임에 대한 심리분석 결과를 대입하여 객관화하였다. 또한 최종 연구 결
과를 토대로 그의 특정한 정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예술정신에 따른
비정치적 음악가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 3 -
3. 연구 문제
사람의 성격, 심리 등을 판단한다는 것은 심리학자들도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지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나타났던 쇼스타코비치의 성격이나 그

가 행했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쇼스타코비치라는 인물이


고찰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는 쇼스타코비치 관련자

료의 일부분에 의존하여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왜곡될 소지가 상당히 많

았다. 실제로 쇼스타코비치를 연구했던 학자들은 그동안 공개되었던 자료


보관소의 자료와 지인들의 편지, 당국에서 발표한 공개 자료들로 연구를
진행했지만, 아직까지도 공개되지 않은 자료가 많다고 언급했다. 특히 쇼
스타코비치는 음악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거나 지인들에게 속마음과
자신의 행적을 편지라는 매체로 전달하였다. 음악적 표현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어렵다는 점과 그는 해당 음악의 주제를 표현할 때 다소 모
호하게 표현함으로써 무엇보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음악 외에 중요한
자료로써 평가되는 공개되지 않았던 지인이나 친인척들과의 많은 편지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더욱이 쇼스타코비치를 소재로 한 에세이나
서적들이 무수하게 많으며 개인적인 사건까지 언급된 부분들을 다 포함해
서 판단하면 객관성이 결여될 여지가 있으며 정보의 양이 굉장히 방대하
기 때문에 모든 내용의 진실을 판단하기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
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나온 관련 문헌 중 논의를 진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은 대표적인 서적과 자료를 토대로 비교 분석하였기 때문에 해
당 서적의 진실 여부에 관해서 완벽하게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

다.

- 4 -
4. 선행 연구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사상과 정치와 연관된 선행 연구는 아직 많이 이

루어지지 않는 상태이며, 이에 연관된 논의에 대한 선행 연구는 다음과

같다.
2019년 한양대학교 평화연구소의 학술지인 20세기의 역사적 사건들과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 음악과 정치의 관계에 관한 소고(小考)에서 음악과

정치는 서로 연결된 중요한 요소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행위 중 하


나이며 음악에서의 정치적 중요성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음악을 정치적인 행위에
활용했다는 사실과 이후 정치 행위자들은 음악이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
다는 인식과 함께, 쇼스타코비치 시기인 20세기 시대에도 더욱 이러한 중
요성은 부각되었으며 스탈린의 대숙청, 2차 세계대전, 냉전시대에서 나타
난 정치와 음악의 의미적 상관관계가 연구되었다. 그 연구에서 쇼스타코
비치의 생애에서 있었던 극단적인 영욕을 겪은 논란이 그의 사후에도 이
루어졌으며, 이 논문에서 솔로몬 볼코프가 자서전이라고 주장하며 발표한
“증언”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에 대해 언급하였고, 쇼스타코비치는
저항 작곡가도 어용 작곡가도 아닌 극단적으로 억압된 시대적 배경하에서
예술에 대한 의지를 지키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한 예술가이며 정치적
성향을 띤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였다.
앞선 선행 연구에서 나타난 주장에 대한 객관적 관점에 필요한 쇼스
타코비치의 정치적 성향이 나타난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의 진위 여부

확인을 위해서 쇼스타코비치라는 인물의 대한 많은 정보들에서 내용이 사


실적인 부분이 맞는지에 대한 여러 측면에서의 심도 깊은 연구가 요구되
는 가운데, 쇼스타코비치의 대표 전기 및 회고록이자 각기 다른 시각에서

서술된 “증언”,“A-Life”,“A-Life Remembered”로부터 얻은 정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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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분석을 통하여 쇼스타코비치의 정보에 대한 진위 여부와 선행 연구

에서 주장한 정치적 프레임을 배제한 자신의 표현방식을 고수한 예술가라


는 주장에 대한 연구가 다각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다. 또한 각 학

파에서 쇼스타코비치에게 강제적인 정치적 프레임을 씌워 무조건 정치적

음악가로 보는 주장에 대해서 보다 심도 깊은 연구가 요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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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본론

1. 쇼스타코비치

1.1. 쇼스타코비치의 생애
쇼스타코비치는 정치적인 논란으로 현대에 이르러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은 작곡가이자 음악가이다.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서 공학자이자 아버지인 드미트리 볼레슬라보비치(Dmitri Boleslavovich)
와 음악을 전공했던 어머니 소피야 바실레이예프나 코쿨리나(Sofiya
Vasilievna Kokoulina)의 아들로 태어났다. 쇼스타코비치는 위로 1903년에
태어난 마리야 쇼스타코비치(Mariya Shostakovich)와 1908년에 태어난 동
생 조야 쇼스타코비치(Zoya Shostakovich)이 있었다. 쇼스타코비치의 누이
였던 마리야는 어머니 소피야에게 피아노를 배웠었는데, 7살이던 쇼스타
코비치는 소피야의 하드한 레슨으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음악공부를
하길 꺼려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 본인 자신과 지인들의 회상에서는
음악을 듣는 것은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일화로 쇼스타코비치는 음악
을 들었을 때, 잠이 왔다고도 하고, 음악을 몰래 듣기 위에 어머니를 따
라 1913년에 9월에 열린 국내 콘서트의 연주자들이 7살의 쇼스타코비치를
“피아노 아래”라고 칭할 정도로 음악 듣는 것을 노력해서 들을 정도로

좋아했다.1) 9살이 된 쇼스타코비치는 처음으로 간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


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s)의 <Tale of Tsar Saltan>를 보러 뮤지컬
극장을 간 이후로 없던 음악 공부의 열의가 생겼다. 쇼스타코비치는 어머
니인 소피아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919년 13세의 쇼스

1)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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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코비치는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하여 니콜라이예프(Leonid

Nikolayev)에게 피아노를 사사하였고, 작곡은 막시밀리안 스타인버그


(Maximilian Steinberg)에게 사사하였다. 쇼스타코비치의 천재성을 눈여겨

본 음악원의 음악 감독이였던 글라주노프(Alexander Glazunov)는 적극적

으로 그를 지원하였고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에 엄청난 열의를 바탕으로 음


악 공부를 이어나갔다. 1922년 2월 중순 쇼스타코비치의 아버지인 드미트

리 볼레슬라보비치는 페렴으로 인해 사망하여 가족들에게 슬픔을 안겨주


게 되었고 이후 집안의 생활비와 쇼스타코비치의 남매들의 교육비를 위해
소피야는 여러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쇼스타코비치는 소피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의 부양을 위해 영화관 피아니스트로 일하며 생
계를 이어나갔다. 1925년 졸업 작품으로 <제1번 교향곡>을 작곡하였고,
1926년 레닌그라드에서 초연하였다. 이후 각국에 널리 그의 음악이 퍼져
나가 러시아 천재 음악가로 불리우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27년 <제2번 교향곡>의 시작으로 그의 자유로운 창작 방식에 제동이 걸
리기 시작했다. <제2번 교향곡>을 쓸 당시, 프롤레타리아 러시아 음악가
협회(RAPM)아 현대음악협회(ASM)이 혁명 전통의 계승을 이유로 대립하는
상태였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던 쇼스타코비치는 당시 양측의 비판
을 받고 있었고 서구의 혁신적인 기법들의 관심과 혁명 이념의 대립에 고
민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그해 3월 말 봄에 소련 국립 출
판소 소속 음악국 선전부에서 혁명 10주년 기념작을 위촉받아 <제2번 교
향곡>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시인 알레산드르 베즈미엔스키(Alexander

Bezimensky)가 쓴 시 구절을 토대로 한 합창 작품을 원한다는 구체적인


오더를 받게 되었고, 쇼스타코비치는 이 가사가 너무 선동적이라 불만을
표했지만 큰 수정 없이 곡에 도입되어 완성되었고 서구의 혁신적인 기법

적용과 선동성을 접목한 새로운 시도로 호평받았다. 1930년 1월 21일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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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산드르 가우크(Alexander Gauk)의 지휘로 <제3번 교향곡>이 초연되었으

며, 전작과 같은 합창이 들어갔지만, 가사는 전작과는 다르게 직접적인


선동성 가사로 되어있지 않았고, 노동과 혁명을 주제로 하여 호평받았다.

이후 1930년 그가 작곡한 첫 오페라 “코”의 초연을 시작으로 러시아 오

페라 걸작이라 불리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1934년에 말리 극장에


서 초연하였다. 초연된 이후 5달 동안에 36번이나 공연되었으며, 모스크

바에서는 두 시즌 동안 36번이나 공연되었다. 또한 서구 각국에 공연되었


으며, 로진스키(Artur Rodzinski)가 지휘한 미국 초연은 굉장한 호평과 평
가가 이루어 졌다. 자국내의 시민들의 반응도 굉장히 호평이였으나, 이후
스탈린이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러 왔다가 화가나 극장을 떠
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1936년 1월 28일 스탈린의 주도하에 당 기관지
인 프라우다(Pravda)에서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음악이 아닌 혼
돈”이라는 내용으로 기사가 실렸다.

<그림 1> 프라우다(Pravda)의 맥베스 부인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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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 1분 동안, 이 오페라는 두드러진 불협화음과 혼란스러운 플루트 음색, 파


편화된 멜로디 탓에 듣는 이를 아연실색케 한다. … 끊임없이 쿵쾅거리는 폭음
과 날카로운 비명 속에 음악은 조각조각 찢어지고 가라앉으며 … 작곡가가
사용한 시도는 임의적으로 하나의 단순하고 명료한 멜로디들의 진로를 방해하
고, 그렇게 해서 그는 때때로 불협화음을 통하여 음악의 혼돈이라는 미궁 속에
빠져들기를 고대하고 있다.』2)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발레극이였던 <맑은 시내>도 프라우다(Pravda)


는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이 당시 1936년은 스탈린의 공포정치
로 인한 대숙청이 치러지고 있던 시기였고, 졸지에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한동한 음악 활동을 금지당했다. 활동을 금지당하면서 <제4번 교향곡>은
발표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 1937년 11월 21일 발표한 <제5번 교향
곡>이 스탈린과 소련 당국의 극찬을 받으면서 그는 대숙청에서 피해갈 수
있었다. 이 교향곡은 부제가 없는데 이후 쇼스타코비치가 부제에 대한 설
명으로 당국의 비판에 대한 자신의 답변이라고 언급한 바가 있다는 각각
다른 문헌적 자료가 있다. 명예를 되찾은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원 교수로

임명되고, 1939년 11월 5일에는 <제6번 교향곡>을 초연하게 되었으며


1940년에 작곡한 <피아노 5중주 G단조 Op.57>을 통해 제1회 스탈린상을
받게 되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1942년 전쟁 교향곡이라

불리는 <제7번 교향곡>을 통해서 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이 곡은 반 나


치즘이라는 명목과 주제로 연합국 내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 곡의 소개
영상자료가 남아있는데, 본인의 실질적 해석에 따른 작곡을 토대로 말을

한 것인지, 당의 압력에 의해 말을 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2) 베로니카 베치, 『음악과 권력』, 노승림 역, (컬쳐북스, 2012), 5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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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제7번 교향곡> 소개 영상3)

이후 1943년 11월 4일에 초연된 전쟁 교향곡이라 불리우는 <제8번 교


향곡>과 1945년 11월 3일에 초연된 <제9번 교향곡>을 통해 전쟁에 대한
자신의 표현을 음악으로 나타내었다. 이 당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승전한 후 발표한 작품이라 스탈린은 베토벤의 <제9번 합창교향곡>과 비
슷한 내용과 상징성의 곡을 원했지만 기대와 달리 귀엽고 발랄하기만 하
다는 평을 통해 한번 더 쇼스타코비치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다시 한번
형식주의자로 몰리면서 4)즈다노프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음

3)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9efTQ6rSO0s&t=1s, 유튜브 채널 “클래식

의 향연” - 자신의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의 일부를 연주하는 쇼스타코비치


4) 즈다노프의 비판 : 스탈린 민족주의 노선을 문인들과 예술인에게 강요했던 의도에

맞춰 ‘건전한 사회주의 예술은 어떠한 종류의 비관주의든 반혁명주의든 모두 단호

히 배격해야한다’라고 주장하며, 이것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하나의 예술 이념

으로 만들었다. 이후 다양한 문화 영역에 있는 예술가들과 쇼스타코비치의 지인인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와 풍자 작가 미하일 조셴코를 반체제적 문인으로 공개 비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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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원의 교수직을 내놓고 스탈린이 사망한 해인 1953년까지 교향곡을 작곡

하지 않게 되었으며, 전쟁을 소재로 한 스탈린 선전용 영화음악을 작곡하


거나 다시 한번 스탈린상을 받게 했던 <숲의 노래>같은 스탈린 정책을 찬

양하는 음악을 발표하기도 하면서 소신적 행동에 따른 후폭풍을 피하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창작 활동에 큰 제약을 받지 않아 사회

주의 리얼리즘 스타일의 작곡 형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작곡을 하기도 하


였다. 그 해에 8년 만에 <제10번 교향곡>을 발표하였으며 1905년과 1917
년에 있었던 혁명을 부제로 붙인 <제11번 교향곡>과 <제12번 교향곡>을
1957년 10월 30일과 1961년 10월 1일에 각각 초연하였다. 이 당시 혁명에
대한 부제를 붙인 사건으로 서구에선 소련 정권의 기회주의자로 비판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1960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적이 있는데, 이
일도 기회주의자라는 수식어의 의견을 증폭시키는 사건이였다. 입당한 사
실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의에 의한 입당인지 타의에 의한 강제 입당이
였는지는 밝혀진바가 없다. 1962년 12월 18일 <제13번 교향곡> 바이 야르
가 초연되었는데, 이 곡의 초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돌려 말하는 대
목들이 많아 직접적인 위험은 다소 적었으나, 반유대주의를 비판한다는
은연중에 모두가 알만한 반골 정신의 간접적인 체제 비판 대목에서 연주
자나 합창단의 섭외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초연 당시 정부 고위층의 초대
석은 텅 비어 있었으며, 이는 당에서 분명하게 불쾌한 심기를 드러낸 사
건이였다. 이후 추가 공연 때 1악장 초반부의 가사가 바뀌었고 이를 통해

정부 쪽에서 공격이 들어갔다고 모두가 생각하였다. 1969년 9월 29일에


초연된 <제14번 교향곡>도 마찬가지로 소련 정부가 좋아할만한 작품은 아
니였다. 죽음을 주제로 쓰여진 시를 가사로 채용하고 젊은 시절 정부에서

는 등 동맹에서 제명시켜 예술활동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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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했던 서구의 현대음악 기법을 사용하는 등의 정부에게 도전적인 면모

를 보여주는 작품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국


제적 명성이 소련 정부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 전처럼 대놓고

불쾌감을 표시하기보다 무시하고 방관하였다. 1970년에 이르러 쇼스타코

비치는 폐렴에 심근경색이 발병하여 건강이 굉장히 좋지 않은 상황이였


다. 쇼스타코비치는 지속적인 치료를 받으면서 요양 생활을 하는 중 1971

년에 <제15번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이 곡은 1972년 1월 8일에 아들인


막심 쇼스타코비치(Maxim Shostakovich)에 의해 초연 되었으며, <비올라
소나타, Op. 147>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긴 후 1975년 8월 9일에 급작스런
심장 발작으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2.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사회적 배경

1.2.1. 20세기 러시아 제국


마르크스 주의를 따르던 사회민주노동당은 도시의 노동자들에 의한
혁명을 통해 새 세상을 건설하고 싶어하였다. 1903년, 사회민주노동당 회
의에서 당은 급진파인 볼셰비키와 온건파인 멘셰비키로 갈라졌다. 멘셰비
키는 내부 종파주의가 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의 통솔권을 확실하게 쥐
고 있는 실질적인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는 반면에 볼셰비키는 레닌의 지

휘하에 규율 잡힌 혁명가들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당시 러일 전쟁의 패배로 시작된 여파로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이 굉장히 피폐해져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당시

러시아 제국과 제국의 황제인 차르(Tsar)5)에게 대항하는 혁명을 일으켰다.

5) 차르(Tasr) : 러시아 황제인 리콜라이 2세(NicholasⅡ,1894〜1917)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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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니콜라이 2세

노동자와 농민들은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하고자 평화행진을 시작했


다. 이들이 들고 가는 청원서는 이런 문구로 시작됐다.

『폐하! 저희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주민들, 저희 처자식과 늙은 부모들은 정의


와 보호를 구하여 당신께 갑니다. 저희는 가난 속에 억눌리고 힘든 노동 속에 모
욕당하면서도 비참한 운명을 묵묵히 참아내며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저희의 인내는 이제 고갈됐습니다. 고통을 견뎌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저희는 일을 멈추고 고용주에게 최소한의 생존권만이라도
보장해달라고 간절히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구는 거절됐습니다.』

청원서는 이어,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합당한 표준임금 제정 및 8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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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제 등 여러 가지의 권리를 요구하는 내용이 나오고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폐하, 인민들을 저버리지 마시옵소서. 당신과 당신의 신민을 가르는 벽을 깨부수십


시오. 저희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시면 러시아는 행복해질 것입니다. 만약 저
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저희는 바로 이 자리, 궁전 앞 광장에서 죽어버리겠
습니다. 저희에게는 오로지 두 갈래 길 밖에 없습니다.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이
냐, 무덤으로 가는 길이냐.』6)

시내 곳곳에서 행진을 시작한 사람들은 궁전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


다. 하지만 이후 그들을 기다리던 것은 바리케이트와 무장을 하고 있는

군인들이었다. 이들의 행진을 막기 위해 총을 쏘기 시작했고, 광장은 피


가 난무했다. 도망가는 노동자와 시민들을 기마대가 쫓아가며 총칼을 휘
두르며 무차비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1월 9일 하루 동안 페테르부르크에

서 1,000여 명이 사망하고 3,000여 명이 부상을 입게 되었으며, 이후 이


사건을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1905년, 러시아 제1
차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혁명에 가담한 농민과 노동자들은 1907년

까지 전국적 규모로 파업에 가담하였다.


1905년 10월 17일 러시아 제1혁명이 전국적으로 고조됨에 따라 각 도
시들에서 자체적으로 농민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기구

인 소비에트(Soviet)를 형성하여 권력을 잡고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했으


며, 이로 인해 니콜라이 2세는 반강제적으로 ‘10월 선언’7)을 발표하게
되었고, 새로운 반의회 기구인 두마(Duma)8)가 설립되었다.

6) 이무열,『한권으로보는러시아사100장면』(서울가람기획1994),p.282
7) 10월 선언 : 제1혁명을 수습하기 위한 니콜라이 2세가 발포한 사상, 집회, 결사의 자

유, 입법권을 가진 의회의 개설 및 투표권의 확장을 약속한 칙령이다.


8) 정식 명칭은 ‘Gosudarstvennaya duma’이다. 1905년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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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2015년에 이르러 전쟁의 여

파로 인해 러시아는 국내에서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나 경제가 무너지고


있었으며 그 여파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이후 국정이 엉망

으로 변해버렸으며, 결국 1917년 2월 볼셰비키 당은 더이상 니콜라스 2세

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판단하에 2월 혁명을 일으켰고, 니콜라이 2


세와 그 가족들을 유폐시킨 후 볼셰비키당은 임시정부를 세웠으며, 1918

년 7월 볼셰비키는 니콜라이 2세를 암살하게 되면서 러시아 제국은 사라


지고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2.2. 소비에트 연방
1917년 2월 혁명에 이어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Vladimir Ilyich
Lenin)의 주도 아래 볼셰비키들은 10월 혁명을 일으켜 세계 최초의 공산
주의 체제를 이루어냈다. 이후 이전 체제 지지자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후원을 통한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여파로 자본가들이 해외로 자
본을 유출시키는 등의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결국 내전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시장경제의 위기를 인지한 레닌은 신 경제정책(New

‘10월선언’에 의해 개설(開設)이 약속되어, 1906년 5월 6일 개정기본법에 의하여 정식

으로 설치되었다. 긴급입법권(緊急立法權), 법률의 최종결정권, 대신(大臣)의 임면, 국

회의 소집 ·해산 등 중요한 권한은 거의 황제에게 유보(留保)되고, 예산심의까지 제

한되었다. 국회의원 선거권도 25세 이상의 지주 ·중산시민 ·농민 ·공장 노동자 등 네

계층에만 부여된 데다 각 계층별로 대표권에 차이가 있었다(지주는 2,000명, 중산시

민은 7,000명, 농민은 3만 명, 노동자는 9만 명에 대하여 1명꼴). 1917년의 3월혁명

때까지 모두 네 차례의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제1(1906.4~7월) ·제2두마(1907.2~6월)

는 야당이 우세하여 해산되었고, 스톨리핀의 비입헌적(非立憲的) 선거법 개정에 의해

제3두마(1907~1912)에서 비로소 여당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제4두마(1912~1917)는 국

내의 혁명적 풍조를 반영, 재차 반정부적인 색채를 띠어 정부와 대립하다가 제정 러

시아의 붕괴와 함께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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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c Policy)9)를 통해 경제를 복구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NEP도

입으로 전반적으로 안정을 되찾았으며, 이후 민족적 호칭인 ‘러시아’대


신 소비에트 연방을 줄인 말인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림 4>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1922년 레닌이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 틈을 타 이오시프

9) 신 경제정책(NEP) : 레닌이 실시한 경제정책으로, 전시공산주의 체제하의 식량징발

제(食糧徵發制)를 중지하고 식량세제(食糧稅制)로 바꾸는 한편, 잉여농산물의 자유판

매, 사적 소경영(私的小經營)의 영리활동의 허용, 국영기업의 부흥, 외국자본의 도입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정책으로 말미암아 소련 경제는 1925년에 이르러 대체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수준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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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Iosif Stalin)은 4월부터 공산당 서기장이 되어 레프 트로츠키(Lev

Davidovich Trotsky)를 견제하였다. 레닌은 스탈린의 해임을 촉구하는 서


한을 작성하였으나 건강상의 빌미로 스탈린은 레닌의 서한을 배제하면서

당내에서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후 1924년 1월, 레닌이 병으로 사

망하게 되면서 스탈린은 최대 정적이였던 좌익 반대파의 수장인 레프 트


로츠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트로츠키가 권력의 핵심에서 점점 소

외되면서 스탈린은 당에서 트로츠키를 완전히 배제시켰고, 이후 스탈린의


개인 숭배 현상이 시작되었으며, 찬양과 함께 스탈린을 지도자라고 불렀
다.
스탈린은 소련의 경제 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공업화 계획으로 국민경
제 5개년 계획을 실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인 1939년 이전까지
제1차(1928년), 제2차(1933년), 제3차(1938년)에 실시하였으며, 새로운 경제
정책으로 인하여 공업화의 진행이 빠르게 이루어졌고, 공업 총생산량이
미국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국가로 발전하였다. 스탈린은 이러한
발전 과정속에서 러시아인들의 인권을 억압하였다. 1923년 390만 명 정도
였던 고용수가 1937년에 이르러 790만 명에 달하게 되었고, 실질 임금을
삭감하여 대량 고용을 이끌어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실업률은 제로에 가
까웠으나 노동자들의 노동량이 엄청나게 높았었고 이 5개년 계획 기간 동
안 12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후 스탈린
은 1928년 11월 경제 5개년 계획을 통해 발전된 사회가 자본주의로 썩어
간다고 주장하여 농업 집단화를 통해 사회주의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스탈린은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반대파벌을 지속


적으로 배제시키려 하였다. 1934년 세르게이 키로프(Sergei ironovich
Kirov)의 숙청을 시작으로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의 제거를 위

해 암살, 강제노역 등의 폭넓은 방법을 통해 학살을 일삼았고 이것이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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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스탈린의 대숙청(1934년-1941년)이라 불리었다. 이 당시 당원 뿐만 아

니라 학계, 군대, 그리고 문화계까지 전 분야 전반에 걸쳐서 숙청하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 독일군의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이 당

시 소련군은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장교층이 대거 교체된 상태였기 때문에

지휘체계가 자리잡히지 않아 군사적으로 낭패를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위대한 대조국 전쟁”10)이라 칭하면서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시켰다.

이때 독일군은 1941년 겨울에 쾌속 진격하여 모스크바의 근교에 다다랐으


나 스탈린이 자극시킨 애국심으로 인해 소련군의 저항이 굉장히 거셌으
며, 당시 식량과 보급 보충의 어려움 등으로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게
되었고, 이후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스탈린그라드 전투11)에서 처
음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되며, 점차 소련에게 유리한 전세가 만들어
졌다. 이후 쿠르스크 전투12)를 통해 소련군은 대승을 하게 되었으며 1945
년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전시기간 동안 스탈린은 군인
들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반역죄로 숙청하였고, 독일군은 후퇴하면서
민간인 거주 구역을 불사지르고 공산 갱도를 매우거나 철도선을 끊고 공

10) 위대한 대조국 전쟁 : 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이라고 칭했고, 독일과 소련과의 전

쟁이라하여 독소전쟁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한 전선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전쟁이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대규모로 침공한 바르바로사 작전이 펼쳐지면서 발

발했다. 독일군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불과 30km 앞둔 힘키까지 진격했다.

베를린에서 모스크바 까지의 거리는 무려 1,500km에 육박하므로 독일군은 정말로

지척까지 갔던 셈이다. 이 전쟁은 1945년 5월 9일 소련이 베를린을 함락시킬 때까

지 약 4년간 지속되었다.
11) 스탈린그라드 전투 : 1942년 8월 21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스탈린그라드(현재

이름은 볼고그라드) 시내와 근방에서 소련군과 추축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12) 쿠르스크 전투 : 1943년 7월 4일부터 1943년 8월 23일까지 동부 전선에서 일어난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전이었으며, 이 전투로 인해 독일군 전력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두 번 다시 공세로 전환하지 못하게 되었다.

- 19 -
장을 폭파하는 등 소련에게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에 따라 1945년 여

름 제4차 5개년 계획을 실시하였다. 스탈린은 전쟁기간 당시 국민들에게


흘러들어온 서구사상으로 인해 국민들의 이데올로기 변화를 우려하여 모

든 서방세계를 끊고 공산주의적 문화를 양성하여 사회주의에 맞게 개조하

려 하였다. 이때 이 뜻을 동조한 안드레이 즈다노프(Andrei Alexandrovich


Zdhanov)는 유미주의(唯美主義)가 부르주아 퇴폐주의(décadent) 및 개인주

의에 기초한 반혁명 쓰레기 사조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였고, 이에 “즈다


노프의 비판” 혹은 즈다노프쉬나(Zhdnovschina)라고 불리우는 문화 숙청
이 시작되었다. 이 당시 숙청당했던 예술가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포함하여 안나 아흐마토마, 미하일 조셴코, 니콜라이 먀스콥스키, 세르게
이 프로코피예프 등이 숙청의 당사자였다.

1.2.3. 스탈린의 사후 “해빙기”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니키타 흐루시초프(Nikita Sergeevich
Khrushchyov)는 농업개혁정책을 제시하면서 당 지도부의 핵심 인물이 되
어,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면서 기존의 독재 정책을 크게 누그러뜨리는
데 일조하였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의 쇼스타코비치를 포함한 예술가들
은 문화적으로 억압을 받고 작품 활동을 못하거나 당에 순응하는 작품을
써낸 반면, 해빙기 이후 기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상관없는 작품들을 뽑
아내기 시작했다. 소련의 중앙유럽 점령 이후 중앙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1955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13)

13) 바르샤바 조약 기구 : 제2차 세계대전 후 심각한 동서대립 속에서 서독의 재무장과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항하기 위해 소

련을 비롯한 동구권 8개국의 총리가 1955년 5월 11∼14일 폴란드 바르샤바에 모여

체결한 군사동맹조약기구이다. 조약체결국은 소련·폴란드·동독·헝가리·루마니아·불

가리아·알바니아·체코슬로바키아의 8개국이었으나, 알바니아는 소련과 의견을 달리

- 20 -
를 결성하였고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에 맞서려고 하였다. 이때 미국과

의 직접적인 전쟁이 일어나진 않았으나,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베를린 봉


쇄, 베트남 전쟁 등의 대규모 국가의 대리전쟁 형태로 진행되면서 ‘냉

전’14)이라 불리는 대립 관계가 되었다.

1.3. 쇼스타코비치의 시기별 주요 작품 분류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은 소련의 정치·사회적인 영향에 따라 스타일이
변화가 심했던 음악가였다. 위촉받아서 <제2번 교향곡>과 같이 선동적인
가사를 도입하거나 의도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초하여 곡을 썼다고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에 맞춰 정치적인 영향을
통해 곡을 쓰였는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시대적 배경을 통해 나타
난 정치적인 기준으로 분류해 그의 작품의 변천사를 파악하고 시기별로
작품을 나눠야 한다.
작품 시기의 분류는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 쇼스타코비치에게 정치적
으로 억압하기 시작했던 시기인 1927년 이전을 제1기, 1927년부터 스탈린
이 사망하기 직전 쇼스타코비치가 억압받았던 1953년까지를 제2기, 스탈
린이 사망한 후인 1953년 이후부터 쇼스타코비치가 생을 마감한 1975년까
지를 제3기로 나누었다.
작품을 정치적 영향을 토대로 변화된 작품 연보를 1-3기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하여 1968년 9월에 탈퇴하였다.


14) 냉전 :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전쟁으로, 냉전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평론가 W.리프

먼이 저술한 <냉전 The Cold War>(1947)이라는 논문에서 비롯되었고, 미국의 재

정전문가이며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버나드 바루크가 1947년 의회토론에서 이 용어

를 처음 사용하였다.

- 21 -
<표 1> 시기별 주요 작품 분류

시기 번호 작 품 작곡년도
1 Scherzo in F sharp minor 1919

제1기 10 Symphony No.1 in F minor 1924-1925

12 Piano Sonata No.1 1926

13 "Aphorisms", ten pieces 1927

14 Symphony No.2 in B major


“To October” 1927

15 The Nose, opera in 3 acts


after Nikolai Gogol 1927-1928

20 Symphony No. 3 in E flat


major “The First of May” 1929

22 The Golden Age, ballet in 3acts 1929-1930


27 The Bolt, ballet in 3 acts 1930-1931
Lady Macbeth of the Mtsensk
29 District, opera in 4acts 1930-1932
after Nikolai Leskov

30 Golden Mountains
제2기 (film music) 1931

32 Hamlet (Suite)
by William Shakespeare 1931-1932

34 24 Preludes 1932-1933
35 Piano Concerto No.1 1933
39 The Limpid Stream, ballet in 3 acts 1934-1935

43 Symphony No.4 in C minor 1936

47 Symphony No.5 in D minor 1937

54 Symphony No.6 in B minor 1939

57 Piano Quintet in G minor 1940

- 22 -
60 Symphony No.7 in C major 1941
“Leningrad”
65 Symphony No.8 in Cminor 1943

67 Piano Trio No.2 in Eminor 1944

70 Symphony No.9 in E-flat major 1945


제2기 74 Poem of the Motherland, Cantata 1947

77 Violin Concerto No.1 in Aminor 1947-1948

81 Song of the Forests, oratorio


after Yevgeniy Dolmatovsky 1949

87 24 Preludes and Fugues 1950-1951

91 4 Monologues on Verses
by Aleksandr Pushkin 1952

93 Symphony No.10 in E minor 1953


94 Piano Concertino in A minor 1953
102 Piano Concerto No.2 in F major 1957

103 Symphony No.11 in G


minor The Year 1905 1957

105 Moscow, Cheryomushki, operetta


in 3 acts 1958

107 Cello Concerto No.1 in E flat major 1959


제3기 Symphony No.12 in D minor
112 1961
“The Year 1917”

113 Symphony No.13 in B flat minor 1962


“Babi-Yar”
135 Symphony No. 14 1969
141 Symphony No.15 in A major 1971

146 4 Verses of Captain Lebyadkin, 1975


texts by Dostoevsky
147 Sonata for Viola and Piano 1975

- 23 -
2.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 정부

2.1. 스탈린
이오시프 스탈린은 1878년 12월 18일에 구두 제화공과 신기료 장사를

하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와 재봉사였던 에카테리네 겔라제의 셋


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부터 불같은 성격이었던 스탈린의 아버지는 장
사가 잘되지 않아 알콜 중독에 걸렸고, 가족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스탈
린도 어린 시절 아버지 밑에서 무자비한 구타와 폭행을 겪으며 자랐다.
기억력이 좋고 영민했던 스탈린은 독서와 역사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으
나, 주변 환경에 의해 부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게 된 스탈린은 주변 친구
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하였다. 그의 어머니인 에카테리네 겔라제는 러
시아 정교회의 독실한 신자였는데 아들도 신실한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9살에 스탈린을 교회 소학교로 보냈다. 당시 조지아 민족들에게
러시아인이 되는 교육을 강요했었고, 강요하는 교육 과정과 수업내용, 강
요 교육을 하는 교사, 이런 부조리한 교육을 하는 제도에 대해 굉장한 반
발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최고 성적으로 교회 소학교를 졸업하고 15
살에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게된 스탈린은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영민
한 두뇌로 폭넓은 교육 과정을 소화하였고 성적도 우수하였다. 1학년 재

학 중에 지역 신문에 시를 발표하였는데, 이 시의 주제는 대지와 자연 그

리고 민족정신이였다. 조지아를 지배하고 있는 러시아에 반감을 가진 스


탈린은 민족주의에 굉장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서적을 접하게 되면서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쏠리게 되었다.

마르크스 주의를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던 스탈린은 항상 혁명을 꿈꾸


게 되었고,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바랬던 어머니 에카테리네 겔라제의

- 24 -
소망을 저버리고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의 서

적을 폭넓게 읽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를 꿈꾸며 1900년 21세 나이로 지


하 정치 운동에 가담하였다. 스탈린은 이후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노

동자의 입장에 서서 캅카스 지방의 주요 공단 지대에서 뛰어난 언변으로

노동자를 앞세워서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나서서 노


동 운동을 벌이지 않고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는 식의 방식을 주로 채택하

여 많은 혁명가에게 반감을 사기도 했다. 이후 1903년 당시 레닌이 이끌


던 볼셰비키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는데 스탈린은 사회민주노동당에서 정
책회의에 꾸준히 참석해서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나 주목받지 못하였다.
스탈린은 인쇄물, 홍보 팜플렛, 강연과 연설 등을 하면서 볼셰비키가
민중을 구하기 위한 집단임을 선동하는 방법으로 볼셰비키 조직을 확장하
려고 노력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누어지고 난 뒤 볼셰비키를 이
끌던 블라디미르 레닌의 제2인자 겸 이후 실권자가 된 스탈린은 1917년에
2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제국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며 임시정부가
출범하게 되는 시기에 혁명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를 접수하고 정부를 세
우자고 주장했으나 블라디미르 레닌은 급작스러운 장악보다 서서히 장악
하자고 스탈린을 만류하였다. 레닌의 서적을 읽고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
던 스탈린이 처음으로 레닌과 마찰을 빚은 때이다. 이후 레닌이 투병 생
활을 시작하자 레닌을 질병의 사유로 당에서 배제시키도록 만들게 되었고
레닌을 실각하게 만들면서 1924년부터 1953년까지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
겸 독재자가 되었다.15)

15)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8%A4%EC%8B%9C%ED%94

%84_%EC%8A%A4%ED%83%88%EB%A6%B0, 이오시프 스탈린, 위키백과

- 25 -
<그림5> 1937년의 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은 레닌이 주도한 신 경제정책을 자본주의의 산물로 여기면서


다시 사회주의로 국가 고치려는 계획을 짜게 된다. 그 계획들 중 집단노
동화로 농업생산의 성장을 소망했으나 성과없는 생산률에 따라 전역에 대
기근이 발생하여 식량 사정을 악화시키기 시작했다. 이에 스탈린은 기근
지역에 급송해서 식량을 배급해줘야되는 의무를 저버리고 지속적으로 국
외로 수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본 당 관료들과 군대 내에서 스탈

린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반대파들이 생겨나게되고, 스탈린은 자신의 정


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이 주도한 숙청은 세르
게이 키로프의 암살이 시작이였다. 이 암살사건을 트로츠키의 음모라고

선동하였고, 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뿌리 뽑겠다는 명분하에 스탈린의 정


책에 반대하는 반대파의 인물들을 차례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각

- 26 -
업무에서 활동하던 전문가들도 숙청했기 때문에, 이후 독일이 레닌그라드

를 침공했을 때 낭패를 보기도 했다. 스탈린은 1953년 3월 1일 공산당 정


치국원 4명과 만찬을 하는 도중에 쓰러졌고 4일 뒤에 뇌졸중으로 사망했

다고 공식 발표되었다.

2.2. 볼셰비키
볼셰비키와 쇼스타코비치의 관계는 그의 음악가로 활동했던 모든 기
간에 연관이 되어있다. 1903년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yich Lenin)이
이끌던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당시 러시아 제국은 봉건사회였으나 2월 혁명

등의 사건 이후 국정 악화로 인해 자본주의적 구조를 도입하면서부터 당


내에서 의견이 나뉘기 시작했다. 이에 합법적인 임금 투쟁과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을 하자는 의견으로 둘로 나뉘었고, 여기서 온건적인 투쟁을
원했던 분파가 멘셰비키, 급진적인 수단을 선택한 분파가 볼셰비키였다.
볼셰비키는 중앙집권에 의한 조직 통제와 노동계급 지도에서 혁명가의 확
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경제주의 및 기계주의 해석 타파, 노동자와 농
민의 동맹 등을 주장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제일 억압의 영향을 받았던 볼셰비키 집권 당시 시기
중 스탈린 정권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스탈린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의 공연에 참관하고 난 후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서 프라우다
(Pravda)를 통해 비판하거나 즈다노프의 법령을 통한 작품활동 정지 등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가 활동 당시에 작품에 영향을 끼친 당이다.

2.3. 마르크스 레닌주의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주도하에 경제·사회·정
치·철학을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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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Engels)와 함께 만든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섞어 정립한

이론인 공산주의 사상이다. 1920년대에 스탈린은 이 이론의 이데올로기적


정설을 세우고 1935년에 다른 고위 볼셰비키 관료들과 공동 저술을 통해

이론의 종합 작업을 간명화 하였다. 이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볼셰비즘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장한 신 경제정책을 통한 자본주


의적 정책을 배제하고 철통같은 국가주도형 사회주의를 강조했다. 이는

사실상 기존에 나타났던 절대군주제와 같은 독재 시스템에 불과했다. 마


르크스 레닌주의의 특징은 국가 총력태세의 유지와 그에 따른 철권통치,
국가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산업개발과 재화의 분배, 인민은 국가의 영도
를 받고, 국가는 국가를 이끌고 있는 당의 영도를 받고, 그 이끌고 있는
당은 당의 중앙집권의 영도를 받는다는 전형적 공산주의 특징과 스탈린이
제기한 일국사회주의론이 그 특징이다. 일국사회주의론이란 세계적인 공
산주의 혁명이 없어도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이론이
다.16) 오늘날에 마르크스 레닌주의 의미에 대한 정의는 스탈린 집권 시기
에 행해진 세부적인 정책으로 레닌주의를 올바르게 해석한 스탈린주의라
고도 하는 것과 스탈린 사후에 이루어진 수정주의에 대한 흐름까지 포함
하여 마르크스 레닌주의라는 의미, 레닌주의를 왜곡하여 인용하였다는 의
미로 이 사상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장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스탈린주
의는 같은 사상이라는 의미 이렇게 3가지로 정의된다.

2.4.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협회(RAPM)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협회(RAPM)은 1923년에 설립된 조직이다.
이 RAPM은 국가의 선전을 위해 고용된 레프 슐리긴, 다비드 체르노모르

1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6525&cid=40942&ca

tegoryId=31645, 일국사회주의론, 네이버 지식백과

- 28 -
디코프, 알렉세이 게르게예프에 의해 설립되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협회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 협회’와 같은 강령을 가졌는데,


3가지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전통적인 주지주의17)를 가진 지도

자들과 ‘비프롤레타리아’ 요소들에 대해 강력하게 개혁해야 한다. 두

번째, 외국에 반대하며, 세 번째, 문학 활동은 소련 사회의 전체이익에 종


속되어야 한다.18)

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협회(RAPM)의 목적은 정부의 활동을 음


악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선전, 선동하는 것이며, 음악 부문에서 프롤레타
리아트19)의 주도권을 굳게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름에 걸맞게 노
동자들의 위한 주장들을 펼쳤는데, 노동계급을 위한 표현을 지향하는 것
과 모든 문화적 요소들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
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협회(RAPM)은 1929년까지는 현대음악협회
(ASM)에 밀려 이렇다 할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으나 1929년부터
1940년 사이 쇼스타코비치는 <황금시대>, <볼트> 등의 극작품을 썼던 기
간 당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협회(RAPM)의 혹독한 비평을 받았었
다. 이러한 비판속에 극장과 영화관과 그에 따른 음악에 지나친 간섭을
일삼았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는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세력을 확장한 RAPM은 1932년까지 스탈린 정권에 힘입어 음악가에
게 점진적으로 적대적이며 과격한 행보를 보였다. 당시 미하일 소콜로브

17) 주지주의 : 인간의 마음은 지(知) ·정(情) ·의(意)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이 중에서

지적인 것, 즉 지성 ·이성 ·오성(悟性)이 지니는 기능을 감정이나 의지의 기능보다

도 상위에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18) 1920년대 소련음악에 나타난 다양성, 대중성, 창조성, 한국노어노문학회, 채혜연,

2008
19) 프롤레타리아 : 노동자 계급을 뜻하는 용어, 자기 자신의 생산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아 살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사회적으로 하위 계급을 통칭하는 말이

다.

- 29 -
스키(Mikhail Sokolovsky)가 설립한 TRAM에 소속되 있어 RAPM에 가입하

지 않았고 혁신적인 서구의 현대기법에 관심이 많았던 쇼스타코비치로써


는 이러한 시기에 음악 작품을 자신의 학구열 및 예술정신만으로 작품 활

동하기에는 버거웠을 것이다. 그 당시 RAPM에서는 서구 음악을 반대하였

고 프롤레타리아에게 반하는 작곡가로 베토벤, 바흐, 리스트 등을 정하여


연주를 금지시켰다. 이후 집단화 정책으로 인한 농민들의 생활 수준이 급

격함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문화예술 조직의 재


건에 관한 당령”을 제정했다. 이후 모든 예술단체의 해체 발표에 의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협회(RAPM)은 해체되었고 이는 음악가들에게
창작의 자유를 선사할 것이라는 기대심을 품게 했다.

2.5.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협회(RAPM)이 해
체되면서 모스크바에서 레닌그라드, 그리고 전국으로 확대되어 1932년 소
비에트 작곡가 동맹이 창립되었다.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의 창립은 많은
음악가와 쇼스타코비치에게도 창작의 자유를 기대했지만, ‘볼셰비키 자
기비판’으로 알려진 공개비판에서 자신의 작품이 토론되거나 비판받을
때, 무조건적으로 참석을 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고, 이 토론의 참석을
거부할 시 비건설적인 태도로 간주하는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상징으로 비
판받았다. 이러한 공개토론회는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기대했던 음악가들

에게 사실상 더욱 강해진 억압으로 기대심에 배반하는 행위에 불과했다.

이 당시 제2차 5개년 계획을 통한 경제개혁을 실시하는 기간이였고, 농민


집단화를 실행하는 등 전반적인 사회가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

와 사회 부문을 공고화 시키는 일이 추진되었으며, 1932년부터 1934년까

지 기나긴 토론 끝에 1934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1차 소비에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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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혁명적인 발전에서 현실성을

묘사하는 문학의 방법론이 선포되었다. 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사회주의


이상을 향한 혁명의 근간을 둔 발전속에서 사실성을 보여줘야하며, 예술

을 위한 공상적인 예술을 거부하였으며, 자율미학의 예술적 표현은 형식

주의라 분류되었다.20)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중요한 쟁점인 당성, 민중성,


사상성으로 예술가들은 작품을 만들어대던 시기였고 쇼스타코비치는 자신

에게 처해진 비판에 따른 위험을 각고의 노력 끝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새롭고 참신한 기법을 더해 만들어진 대표적 작품이라 평가되는 <제5번
교향곡>을 완성했다.

2.6.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만든 <제1번 교향곡>이 1926년
초연된 이후 작곡가로써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발표하는 곡마다 성공을
거두게 된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정권이 확립된 이후에 위험한 순간들을
지속해서 겪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의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므첸스크 맥베스 부
인>의 공연을 꼽을 수가 있다. 당시 <므첸스크의 맥베스>란 작품은 주인
공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탐욕이 주된 스토리로, 인간 내면의 본성을 치부
까지도 발가벗긴다는 특징을 보이는 작품이였다. 또한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살해의 장면들도 나오면서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렸고, 또한 표현주
의적 기법을 통해 기괴한 음악을 선보였다는 이유로 공연 도중에 스탈린

은 자리를 박차고 떠난 사건이였다. 이 사건을 통해 스탈린의 눈 밖에 나


면서 당 정책에 따른 혁명과 사상의 통일을 기반으로 기사를 썼던 일간

20) 1930년대 소련음악 :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어노문학, 채혜

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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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지인 프라우다(Pravda)에서 그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쇼스타코

비치의 음악 활동은 크게 위축되게 된다. 자신도 숙청에 희생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쇼스타코비치는 <제5번 교향곡>을 발표하면서

당국은 이 곡을 굉장히 만족하였고, “당국의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

가의 창조적인 답변21)”이라 답하면서 쇼스타코비치는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제7번 교향곡>을

시작으로 <제9번 교향곡>까지 전쟁 교향곡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뽑아내게


되었는데,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나온 작품은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과 같은 혁명과 숭고한 이념을 나타내는 스타일
의 곡을 원했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고 간결
하고 가벼운 느낌의 곡을 썼다. 이에 스탈린은 굉장히 분노하였고, 스탈
린주의에 추종자였던 즈다노프는 이 사건을 계기로 즈다노프 법령을 선포
하여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르지 않고 서구의 예
술을 추종했다는 이유로 형식주의자라는 비판을 하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런 위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맥베스 부인 때는
<제5번 교향곡>을 써서 무마시키는가 하면 <제9번 교향곡>때는 오라토리
오 <숲의 노래>를 통해 무마시키는 등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방식을 통
해 자신의 예술정신을 통한 작품을 써 내려가고 싶다는 욕심을 충족시켜
나갔다.
이러한 아슬하게 피해 가는 방식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지금도 내가 오페라 <고요한 돈 강>을 언제 완성할 것인지 묻는다. 그


오페라는 한 번도 시작한 적이 없으니까 언제까지나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정말
후회스러운 일이지만 그냥 힘든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작곡한다고 둘러댄 것뿐

21) 이 발언에 대한 출처에 대한 논란이 있다. 쇼스타코비치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언

급했다는 주장과 언급한적 없다는 상이한 주장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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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것은 소련에만 있는 특수한 자기 방어술이다. 이러저러한 작품, 어마어마하
고 죽여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당신에게 돌을 던지지 않는다. 그동안 당신은 혼자서 조용하게 만족할 수 있는 작
품, 4중주 같은 것을 쓴다. 그러나 당국에는 오페라<칼 맑스>나 <소년 근위대>같은
작품을 쓰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4중주를 발표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사
람들은 당신을 내버려 둔다. 그런 '창작 계획'의 강력한 보호막이 있으면 한두 해
평화롭게 살 수 있다.』22)

이러한 아슬하게 피해 가는 방식으로 살아남은 쇼스타코비치는 당에


서 건드릴 수 없을 만큼의 명성을 천천히 쌓아 올렸으며, 이 명성의 가치

는 당에서도 국제적인 명성을 토대로 국가적으로 이용하기에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쇼스타코비치를 소유하겠다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그에 따
라 스탈린도 쇼스타코비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쇼스타코비치가 비

판과 당의 명령에 의해 작품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기가 내린 지시


가 아니라고 하거나 그의 의중을 떠보거나 하는 등의 탁월한 언변으로 유
유히 자신은 빠져나가면서 쇼스타코비치를 자신의 의도대로 이용하려 했

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를 알면서도 체제를 피해 갈 수 없다는 판단하에


따라야 할 때는 따랐으나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 이후로는 사회주의 리
얼리즘에 기초하지 않은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3. 반(反)수정주의 해석에 의한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에게 씌여진 정치적 프레임 중 하나인 쇼스타코비치가

반(反)수정주의자라는 해석은 공산주의의 개인에게 부여하는 강제성과 스

22)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5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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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린 시대에서 나타난 예술가들의 억압을 통한 쇼스타코비치 자신과 가족

들의 생명의 위협 속에서 당에 순응하는 행태를 보인 그에게 당연시하게


제기된 정치적 해석이다. 1979년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의 “증

언”이 출판되자 그에 따른 스탈린 체제를 저항한 반공주의자라는 주장이

이후 제기되었으나,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논문을 쓰고 있던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가 연구에 도움을 받고자 솔로몬 볼코프를 찾아갔다가

그가 펴낸 “증언”이 조만간 출간한다는 소식과 이후 “증언”을 읽고


해당 내용의 진위 여부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으며, 3년간 러시아에서 쇼
스타코비치의 문헌들을 살펴보며 낸 결론으로 “증언”은 위조된 자서전
이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페이가 펴낸 “A-Life”를 기점으로 쇼스타
코비치는 반(反수)정주의자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성향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당의 억압을 받지 않은 청년시절
의 작품, 당의 억압과 그 영향에 있었던 시기, 1953년 스탈린이 죽고 크
나큰 명성을 통해 당에서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던 해빙기 시절의 쇼스타
코비치 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의 반(反)수정주의자라는 주장에 의거
한 당의 억압과 영향하에 있던 작품에서 시대적인 배경과 작곡 당시 사
건, 곡의 특성들을 분석하고 작품과 비교하여 돌출된 특징들과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가 펴낸 “A-Life”의 분석을 통해서 쇼스타코비치
에게 반(反)수정주의적 정치관을 갖고 있는지 혹은 특정한 정치관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정치적인 해석을 해보고자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억압받던 당시 예술에 회의감을 느껴 교향곡을 오랜


기간 쓰지 않거나 음악 활동을 중단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예
술에 대한 회의감은 어린 시절 극장에서 일했을 때부터 느끼게 되었다.

당시엔 가난했던 쇼스타코비치에게는 돈을 배제하고 살아갈 선택지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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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챙기는 모습들이 오늘날에 정치적인 논쟁

거리로 프레임이 씌워져 쇼스타코비치의 끝나지 않는 논의가 결정되었을


지도 모른다.

『볼린스키는 깔보듯 나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내게 물었다. “젊은이, 자네는 예술을 사랑하는가?
위대하고 고상한 불멸의 예술을 말이야?
그의 설명에 따르면, 월급을 달라는 내 행동은 예술을 조야함과 인색함과 탐욕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는 것이었다. 예술은 위험에 처했으며, 내가 불손한 요구를 계
속 밀고 나간다면 예술은 사라질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예술이 혐오스러워졌다.』23)

이렇듯 쇼스타코비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떠앉고 있었고, 스탈린과


당국으로 인한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도 어쩔 수 없는 쇼스타코비치 행동

으로 인해 정치적 프레임으로 씌워져 버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당에 영향 아래에 있던 시기의 작품들은 무수히 많지만, 그중 주로
언급되는 주요 작품 중 <제2번 교향곡>, <제3번 교향곡>은 당의 작품 제

작 의뢰를 받은 역사적 사실이나 가사에서 나타나는 작품 내용이 선동성


이 포함된 작품이고, <므첸스크 맥베스 부인>은 스탈린이 공연장을 떠나
는 사건을 통해 프라우다(Pravda)에게 크나큰 비판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한 작품이였으며, <제5번 교향곡>은 오페라 맥베스 부인을 통해


위기였던 쇼스타코비치를 당의 호평으로 인해 명예를 회복시켜준 작품이
다. 이후 독소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레닌그라드 전투를 통해 나온 <제7번

교향곡>으로 호평과 동시에 당의 전쟁에 음악을 이용하는 사건에 의해 인


민들에게 사기를 올려주는 작품이였으며, 이후 전쟁이 끝나고 쓴 <제9번

23)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86-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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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을 스탈린과 당 관료들이 원했던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과

같은 숭고한 느낌을 원했던 그들의 입맛대로 쓰지 않아 다시 매도되는 등


정치적인 부분과 역사적인 부분에서 파란만장했던 시기이다.

3.1. Shostakovich Symphony No. 2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영향이 들어온 작품인 <제2번 교향곡>은 <제1번
교향곡>의 성공으로 인해 명성이 높아진 쇼스타코비치에게 당국에서 오더
가 들어온 작품으로 앞선 <제1번 교향곡>과 대조해봤을 때 작곡 스타일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제2번 교향곡>의
성악 파트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행진하고 일과 빵을 구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고뇌의 악에 사로 잡혔습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공장 굴뚝 손처럼 주먹을 쥐는 힘도 없다.
우리 족쇄의 이름은 끔찍했습니다. 침묵, 고통, 억압.

그러나 총격보다 더 큰 소리는 우리의 고통의 말, 우리의 고통의 말을 침묵으로


파열시켰다 .오, 레닌! 당신은 고통을 통해 자유를 만들어 냈고 수고로 단련된
우리의 손에서 자유를 만들어 냈습니다. 레닌은 우리의 운명이
투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노력! 당신은 우리를 마지막 전투로 이끌었습니다.


노력! 당신은 우리에게 노동의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억압과 어둠에 대한이 승리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투쟁의 모든 사람이 젊고 대담해지도록 하십시오. 이 승리의 이름은 10월입니다!

10월! 기다린 새벽의 메신저.


10월! 반항적인 시대의 자유.

- 36 -
10월! 노동, 기쁨, 노래.
10월! 들판과 작업대에서의 행복,
이것이 슬로건이고 이것은 살아있는 세대의 이름입니다 :
10월, 코뮌, 레닌.

이 10월 혁명은 당시 볼셰비키의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도

아래 볼셰비키 관료들과 이룬 혁명인데 가사에 직접적인 레닌을 언급하면


서 볼셰비키가 행한 투쟁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가사가 이루어져 있다. 소
련 국립 출판소 소속 음악국 선전부에서 혁명 10주년 기념작을 위촉받아
만든 이 <제2번 교향곡>은 시인 알레산드르 베즈미엔스키(Alexander
Bezimensky)가 쓴 시의 구절을 바탕으로 한 합창 작품을 당에서 원하고
있다는 오더를 받게 되었고, 곡을 만들 당시에 쇼스타코비치는 이 가사가
너무 선동적이라 불만을 표했다고 하며, 훗날에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
을 굉장히 후회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당의 직
접적인 오더에 따른 이 작품으로 쇼스타코비치는 서구의 혁신적인 기법
적용과 선동성을 접목한 참신한 시도로 호평받았다. 서구의 혁신적인 기
법에 관심이 많았던 쇼스타코비치는 훗날에도 <제9번 교향곡>이나 <제14
번 교향곡>에서도 서구의 기법을 차용하여 썼지만 형식주의자로 매도당하
는 등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 당에서의 판단은 시시각각 바뀌어왔으며, 이
를 통해서 순응주의라는 특정 정치색을 띄웠다기보단 쇼스타코비치는 새

로운 것을 시도하는 예술정신을 발휘하려고 노력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3.2. Shostakovich Symphony No. 3


위촉을 받고 만든 전작 <제2번 교향곡>과 달리 이 곡은 특별히 정부

의 위촉 없이 쓰여졌다. 이번에도 단 악장 구성과 끝부분에 합창이 들어

- 37 -
가는 구성을 갖고 있고, 노동절인 5월 1일이라는 교향곡 부제와 마지막에

나오는 합창의 가사가 세묜 키르사노프의 시로, 혁명을 찬양하는 내용으


로 되어있긴 하지만, 이전 작과 달리 직접적인 투쟁과 선동의 가사가 없

이 무난하게 작사되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5월 1일("5월 1일" 러시아어) 횃불이 과거로 던져졌다.


불꽃이 불 속으로 자라나면서 그리고 불꽃이 숲을 감쌌다.

축 늘어진 전나무 귀로 숲이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와 소음에 맞추어 새로운 메이데이 퍼레이드 중 하나야.

우리 5월 날.
비탄의 총알의 휘파람 속에서 총검과 총을 움켜쥐고 차르의 궁전은 빼앗겼다.

쓰러진 차르의 궁전: 오늘은 5월의 새벽이었다.


전진하고, 슬픔의 깃발에 비추어

우리의 5월 날: 미래에는 돛이 있을 것이다.


옥수수의 바다 위로 나뒹굴지 않은 군단의 떠들썩한 발걸음도

새로운 군단, 5월의 새로운 계급


미래를 내다보는 불 같은 그들의 눈 공장과 노동자 5월 1일 퍼레이드로 행진하다

우리는 땅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우리의 때가 왔다.


노동자들아, 우리 공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옛것을 불태우려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야 한다.

태양처럼 솟아오르는 현수막, 행진하라, 발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라.


매 5월 날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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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행진곡이다. 무장 광부들 중 한 명이요
광장으로, 혁명으로, 100만 피트를 가지고 행진하다!

직접적인 정치적 표현을 꺼려했던 쇼스타코비치로써 <제3번 교향곡>


에 그의 성격이 드러나 있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에서 마르크스 주의를

통한 혁명에 숭고한 이념이 있다는 문화를 보고 자라온 쇼스타코비치로써

이러한 인민들을 위한 도덕적인 윤리관을 통해 혁명적 주제에 관심이 많


았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도 쇼스타코비치가 당에 순응하면서 그들이 원
하는 곡을 자신의 의지로 써주는 음악을 정치에 이용한 정치적인 행보에
는 관심이 없고 특정 정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3. 쇼스타코비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니콜라이 레스코프(Nikolai Leskov)의 원작 소설에 힌트를 얻어 오페
라로 만든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란 작품은 스토리부터 당 정책에
심기를 건드릴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바로 비극으로 치닫는 내용의 이
야기를 보여주는 작품이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품을 사회주의 국가에서
28년 동안 쭉 살았던 쇼스타코비치가 심기를 건드릴 거라는 사실을 몰랐
을 리가 없다. 이에 따른 증거는 1931년 그의 발레곡 <The Bolt>가 흥행
에 실패한 당시의 시점이자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를 쓰고 있던 기
간에 대한 설명이 있는 문헌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 극장에서 셰익스피어 특히 <햄릿>이나 <맥베스>를 공연하려면 대개 말


썽이 생겼다. 스탈린은 이런 연극은 그 어떤 것도 견딜 수 없어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뻔하다. 범죄를 저지른 왕이라는 주제, 그런 주제가 어떻게 지도자이신 스승
님24)의 마음에 들 수 있겠는가?』25)

24) 지도자이신 스승님이란 호칭은 스탈린의 생애 동안 그에게 붙여졌던 별명이었다.

- 39 -
스탈린이 이러한 예술들을 모두 싫어한 건 아니였으나, 부정적 주제
를 나타내는 공연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을 집어 넣을지 몰라 불

안했기 때문이다. 특히 비극의 원인이 되는 3가지의 요소들만 봐도 혁명

과 낙관주의를 강조하는 사회주의에 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극의


원인 3요소는 첫 번째로 19세기 유럽의 무서운 시골 생활, 두 번째로는

불륜, 세 번째로는 주인공 여성의 살인이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 카테리나는 부잣집에 시집온 무식한 여인이었다. 남편은 무


기력하고 시아버지는 폭력적이고 위협적이며 비도덕적인 인물이었다. 심
지어 남편은 그녀 자신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 카테리나와 남편사이에
는 애가 없었는데, 시집와서 애도 못 낳냐면서 핍박하고 구박하던 중에
남편이 멀리 파견 근무를 가게 된다. 남편의 사랑도 못받고 애를 못 낳아
구박받던 카테리나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다 우연하게 세르게이라는 평판이
안 좋은 일꾼을 만나게 된다. 이후 밤에 카테리나가 있는 방에 찾아와 겁
탈을 당하게되고 이후 세르게이에게 매달리는 형국이 된다. 시아버지는
카테리나의 방을 엿보다 세르게이와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게 되고 세르게
이를 매질한 후 남편에게 다 일러바치겠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카테리나
는 시아버지 식사에 쥐약을 넣어 살해한다. 천역덕스럽게 장례를 치른 뒤
세르게이와 지속적인 애정행각을 벌이는데 파견 근무를 갔던 남편이 일찍
돌아오면서 불륜 사실을 알게 되고 카테리나를 비난하면서 폭력을 휘두르

게 된다. 이에 맞서서 카테리나는 세르게이와 함께 남편을 살해하고 그


시체를 창고에 유기한 뒤 세르게이와 결혼을 하러 간다. 우연찮게 창고의

25)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2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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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훔치러 간 도둑에 의해 시체가 발견되고 이를 경찰에 신고한다. 결

국 세르게이와 카테리나는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고 이후 지속


적으로 세르게이에게 애정을 갈구하지만 세르게이는 소냐라는 다른 여자

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소냐는 세르게이를 거절하지만 ‘울 스

타킹 한 벌을 주면 만나주겠다’는 늬앙스의 발언을 한다. 이에 세르게이


는 카테리나를 속여 스타킹을 빼앗아 건네주게 되는데 이 사실을 안 카테

리나는 분노하고, 다리 위에서 소냐를 끌어당겨 함께 투신자살한다.』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는 여러 시점에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욕망의 시점, 시골 생활의 파괴적인 삶, 여성 내면의 심리, 사
랑의 따른 심리 시점 등 당 국에서는 어느 것 하나도 심기를 건들지 않을
부분들이 없었다. 이 내용은 기존 소설의 내용을 살짝 각색한 것인데, 쇼
스타코비치는 희생당한 사랑에 빠진 가련한 여성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언
급했지만 지독히 어둡고 잔인한 내면의 심리를 지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었다. 이 내용을 보고 스탈린이 공연장을 나가게 된 사건은 쇼스타코비치
가 당의 심기를 건들 것이라는 생각을 간과하고 몰랐던 것이 아니라 단순
히 예술적인 표현의 욕심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4. Shostakovich Symphony No. 5


쇼스타코비치의 최대 걸작 중 하나인 <교향곡 제5번>은 쇼스타코비치

가 31세 때인 1937년에 작곡하였다. 1937년 11월 21일 소비에트 혁명 20


주년 기념일에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므라빈스키(1903-1988)의

지휘를 통해 초연되었고,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으로 당국에 의해 소련 공산당 기관지인 프


라우다(Pravda)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입지가 좁아진 쇼스타코비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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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를 회복시켜 복권하게 만든 작품이다. 이 당시 스탈린의 대숙청이 절

정에 이르던 시기였기 때문에 자신의 지인들이 옆에서 하나둘씩 마구잡이


로 끌려가 처형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으며, 쇼스타코비치 본

인도 1937년에 소련 비밀경찰 NKVD26)에 의해 취조를 받는 등 생명의 위

협을 느끼고 있었고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제4번 교향곡>의 초연을 포기


해야만 했다. 쇼스타코비치 본인도 <제4번 교향곡>이 당국에 타락한 음

악, 형식주의 음악 등의 비판을 받을 걸 예상했기 때문이다. 쇼스타코비


치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1937년 4월부터 7월까지 자신의 위험을 벗어나
기 위해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제5번 교향곡>을 만들어냈다. 이전 작
품들은 당의 영향이 조금은 있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기본 사상과 예술적
욕심인 전위적인 실험성을 많이 추구하고 보여주던 쇼스타코비치가 이 곡
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녹여낸 노선으로 변경하였다.
이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로만 판단하는 것은 쇼스타코비치가 당국의
순응주의를 가지고 있다거나 반공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이 <제5번 교향곡>은 소련의 한 평론가에 의하면 “제1악장은 <자문(自
問)...또는 어렸을 때의 회상>이며, 제2악장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과거에
의 비꼬는 미소>, 제3악장은 <눈물의 고뇌에 넘치고>, 마지막 4악장은
<지금까지의 여러 악장에 파헤친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이라고 하였
다.”27) 다행히도 당은 이 작품에 대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충실하게 간
결함과 명확함, 진실성이 담겨 있다고 판단하였다.28) 또한 당의 관료들이

26) NKVD : 내무인민위원회라 불리는 이조직은 1934년부터 1946년까지 소비에트 연방

의 내무부, 정보기관, 경찰을 통합한 부서로 스탈린의 대숙청기간의 정치경찰로써

악명이 높았으며, 반대파 총살, 소수민족 강제 이주,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교화소로

불리우는 수용소 관리등으로 무자비한 활동을 많이한 조직이다.


27) 편집부, 최신 명곡해설전집: 교향곡 III, (세광음악출판사, 1986), pp. 308-309.
28) 김미연, D. Shostakovich <교향곡 제5번>에 반영된 사회주의 리얼리즘 연구, 「충

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2016), 30p,

- 42 -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에 이름을 붙였는데, “낙관적인 비극”이

라는 이름으로 당에서 낙관주의에 강조와 강요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당에서는 “비판에 대한 지식인의 실천적이고 정당한 응답”이라며

당에 대한 항복으로 생각하였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지인인 아흐마토바는

반대로 국민의 고통과 운명을 대변하는 곡이라 느꼈던지“청동기마상 교


향곡(Bronze Horseman Symphony)라고 평가 했다.29)

『소련에서 죽음은 예술에는 부적절한 주제였고 죽음에 대해 쓴다는 것은 대중 앞에


서 소매로 코를 닦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행동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낙관적인
비극’ 따위의 제목이 생겨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제목이기하는 하지만 말이
다. 비극은 그냥 비극일 뿐이지 낙관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비록 비극에까지
‘낙관주의적’이라는 형용사를 달아야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
만,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님 다른 사람들도 그 문제에 관심
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항상 들었다.』30)

『내 음악의 최고 해석자라고 자처하는 어떤 사람31)이 내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너무나 놀랐다. 내가 <교향곡 제5번>과 <교향곡 제7번>에서 활기
차고 환희에 넘치는 피날레를 작곡하고 싶어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슨 기뻐 날뛸 일이 있다고 환희에 찬 피날레를 작곡한다는 걸까? 내가 그런 걸
꿈도 꾸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이 사람에게는 전혀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32)

이처럼 쇼스타코비치가 정치적인 사상을 먼저 고려하면서 곡에 그에

29)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418p


30)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418p


31) 여기서 말하는 ‘어떤 사람’이란 므라빈스키이다.
32)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423p

- 43 -
따른 생각을 녹여 예술을 표현한다기보다 본인 내면에서 원하는, 즉 자신

이 현재 생각하고 있고 표현하고 싶은 그 시간 속에서의 쇼스타코비치 본


인의 예술사상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5. Shostakovich Symphony No. 7


<제7번 교향곡>은 1941년에 독소전쟁으로 인해 세상에 태어났다. 쇼

스타코비치는 부제를 넣진 않았지만, 당시에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겪던


중에 썼던 것과 이후 유명해진 탓에 ‘레닌그라드’라는 부제를 암묵적으
로 통용되서 쓰고 있다. 이 <제7번 교향곡>은 1942년 3월 5일에 초연되었
는데, 이 공연은 소련 전역에 라디오로 공연 실황이 생중계되었다. 알렉
세이 톨스토이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의 초연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향곡 제7번>은 러시아 인민의 양심에서 솟아 나왔다. 러시아 인민은 악의 세


력과의 도덕적 투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였다.”』33)

초연에 대한 관객들의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 없었다. 이 교향곡은 2


차 세계대전 와중에 작곡되고 연주되었으며, 당시 레닌그라드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어머니의 땅34)을 저버리고 갈 수 없다는 인민들의 투
쟁심을 통해 많은 이들이 레닌그라드를 떠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공연에
대한 이러한 반응은 사람들에게 새삼 놀랍지 않았고 <제7번 교향곡>을 통
해 전쟁을 대하는 인민들은 단합될 수 있었다.
소련에서는 쇼스타코비치를 국가적 상징의 위치로 격상하였다. 물론

33)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334p


34) 어머니의 땅 : 러시아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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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징의 위치를 둔 건 당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이용하여 많은 인

민들의 사기를 올릴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였기 때문이었다. 초연 이후


수많은 전쟁영화와 전쟁을 주제로 한 연극에서도 이 곡의 접할 수 있었는

데, 미국에서의 라디오 방송 초연은 토스카니니에 의해 1942년 7월 19일

에 NBC 교향악단을 통해 진행되었고, 미국 전역을 통해 방송되었다. 음악


사에서 교향곡 하나가 그렇게 큰 정치적 역할을 했던 곡이였고, 처음으로

쇼스타코비치 본인의 의지로 좋은 의도로써 정치 목적으로 사용되길 원했


다. 물론 이 정치적 목적이 스탈린 정권의 지지 목적이 아닌 전쟁에서 인
민들의 사기진작과 애국심의 규합이 목적이였다. 쇼스타코비치는 방송에
서 마이크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시간 전에 최근에 작업하고 있는 대규모 관현악 곡의 2악장을


마무리 했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써나간다면, 3악장과 4악장을 완성한
다면, 그것은 나의 일곱번째 교향곡이 될겁니다…… 내가 왜 이 사실
을 여러분에게 말할까요? 그것은 지금 라디오를 듣고 있는 레닌그라드
인민들이 우리의 도시에서 삶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
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군사적 긴장에 놓여 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
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는 레닌그라드 토박이로서 나는 지금 이런 상
황의 긴장감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낍니다. 나의 삶과 작품은 레닌그
라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35)

쇼스타코비치는 독소전쟁으로 생긴 희생자들의 고통과 이를 바라보는

애환에 깊이 공감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의 의지를 숭고하게 생각하고 다


급한 전쟁통 속에서 본인이 할 일에 대해 상기시키면서 곡을 완성했을 것

35) M.T Anderson, 「죽은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장호연 옮김, (돌베개, 2018),

301-302p - 출처 : Skrjabina, Elena. Siege and Survival : The Odyssey of a

Leningrader, Translated by Norman Luxenburg. Carbondale :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71. 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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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가 고통과 희생에 공감했던 것은 그저 애국심과 슬픔을 바로 옆

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남은 이들과의 감정교류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도 고통을 느낀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고통을 느낀다.
아마 전쟁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36)

어머니의 땅을 지키자는 일념 하나로 그들은 이런 고통을 감수하고


함께 위기를 대처해 나갔다.

초연 당시엔 전쟁이라는 요소 덕분에 당국에서도 호평을 받았던 <제7


번 교향곡>과 전쟁이 끝난 이후에 만들고 발표하였다가 스탈린과 당의 입
맛에 맞지 않은 스타일이라는 <제9번 교향곡>의 비판과 함께 형식주의 작

품이라고 날조하는 작품 리스트에 올라갔으며, 현재까지도 <교향곡 제7


번>의 정치적 반향이 학자들에게서 쇼스타코비치라는 인물의 해석에 대한
논리의 대립으로 이어져 이 곡의 음악적 탁월성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방

해하고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내가 <교향곡 제5번> 이후에 회생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내가 되살아난 것은 <교향곡 제7번> 이후다. 이제는 사람들과 이야기
할 수 있다. 아직 어렵기는 하지만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다. 전쟁 기간이 예술을
위해 생산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37)

내가 되살아났다는 표현은, 당의 억압으로 억지로 쥐어짜낸 작품이

36)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95p
37)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3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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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쓴 자율성과 당의 목

적과 부합하여 숙청이라는 칼날을 피했으며, 이는 자유로운 창작과 추구


했던 표현의 정확한 전달성을 만족시킨 사례로써의 감정 표현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7번>을 통해서도 당을 지지하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작곡을 한 것이 아닌 단순히 시대적인 상황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성이라는 틀 안에 담고 싶어 했다. 그로 인해 전쟁

상황에서 음악 활동을 할 수 없는 보편적인 서양의 역사 속과는 다르게


단순히 음악을 통한 예술이라는 우선적인 목적과 애국심으로 음악을 만든
것이고 정치적인 목적을 고려하는 성향이 아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7번 교향곡>은 오늘날 여러 가지 이유에서 세계에서 대중적 관심사가
되었다. 역사적인 의미와 독소전쟁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의미 등으
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3.6. Shostakovich Symphony No. 9


<제9번 교향곡>은 흔히들 전쟁 교향곡이라 불린다. 앞선 독소전쟁이
라는 시대적 배경을 통해 <제7번 교향곡>부터 시작한 전쟁이라는 소재로
부터 종전 직후에 만들어진 교향곡이기 때문이다.
1945년 독소전쟁이 끝난 직후에 이 교향곡은 태어났다. 당시 독소전
쟁의 승리자는 소련이였고, 국가적 경사와 겹쳤기 때문에 당국에선 쇼스
타코비치의 작품에 굉장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위 관료들은 쇼스
타코비치가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처럼 편성의 규모가 크고 숭고한 이

념을 나타내는 스타일의 곡을 써주길 바랬으나, <제1번 교향곡>처럼 규모


가 가벼웠고, 당국이 원하던 스타일과 전혀 다른 간결한 곡이었다. 이에
분노한 스탈린과 소련 당국은 1948년 검열 당국을 통해 <제9번 교향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하였고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이어 두 번째로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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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게 되었다. 이 곡은 당시 스탈린주의를 지지하던 즈다노프가 실행한

법령을 통해서 쇼스타코비치의 지인 아흐마토바를 시작으로 미하일 죠센


코 등 예술가들이 반공주의자로 낙인찍히며 작품활동을 금지당했고, 쇼스

타코비치도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 소련의 예술계 전반이 크게 경직되면

서 창의성, 개성, 예술성들이 쇠퇴하고 당의 체제와 노선에만 찬양을 하


는 선동성 작품들이 줄줄이 나오는 예술 암흑기의 시기였다. 당시 쇼스타

코비치는 친구였던 유리 레비틴(Yuri Abramovich Levitin)의 회상에 따르


면 쇼스타코비치는 이 즈다노프의 비판으로 인해 부인이었던 니나가 옆에
서 울음을 터트릴 정도의 굉장한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고 한다.38)
쇼스타코비치는 <제2번 교향곡>, <제7번 교향곡>, <제9번 교향곡>,
<제11번 교향곡>, <제12번 교향곡>, <제13번 교향곡>과 같이 역사적 사실
에 기초한 작품들을 주로 써냈다. 쇼스타코비치는 의사소통의 방식을 음
악으로 표현하던 예술의 깊이를 아는 진정한 음악가였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나 의미를 음악으로 보여주고 싶어했다.

3.7. 로렐라이 E. 페이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는 1949년에 태어난 미국 저술가 및
교수로 1971년부터 러시아를 여행하고 공부해 온 러시아와 소련 음악에
관해 널리 출판된 작가이다. 그녀는 현재 뉴욕의 Staten Island에 살고 있
으며 코넬 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러시아 및 소비에트 음

악 전문가인 그녀는 오하이오 주립 대학, Wellesley 대학 및 뉴욕 대학에

서 교수로 출강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지난 18년 동안 음반 출판사 G.


Schirmer, Inc.의 러시아 음악 컨설턴트로 근무했다. 또한 New York

38) Allen Ho & Dmitri Feofanov, Shostakovich Reconsidered, Toccata Press, 1988,

7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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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s, Musical America, Opera News 및 많은 학술 출판물에도 실렸으며

The New Grove Dictionary of Opera의 편집자였다.

<그림6> 로렐라이 E. 페이

2000년에 Fay는 “Shostakovich : A Life”라는 쇼스타코비치의 전기


를 출판했다. 이 책을 조사하는 동안 그녀는 러시아에서 3년 동안 돌아다
니며 러시아 기록 보관소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책을 출판하였다. Laurel

E. Fay는 대학원생 시절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에 관한 논문을 쓰던


중에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가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을 출판한
다는 소식을 듣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가는 등 학자로써 긍정적인 교

류를 해왔지만,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의 회고록을 보고 그녀는


자신이 이전에 읽었던 서적들의 내용들과 굉장히 많이 익숙하다는 것을
토대로 학술지를 통해 표절했다는 증거를 제시하며 비판하였다. 이후 당
시엔 쇼스타코비치가 솔로몬 볼코프의 영향으로 반공주의자라는 주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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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자들이 많았었고,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의 반공주의자가

아니라는 주장에 서로 많은 논쟁이 있었으며, 아직까지도 쇼스타코비치의


정치관에 대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3.7.1. 로렐라이 E. 페이“A-Life”분석


쇼스타코비치의 전기를 대표하는 책은 3권인데, 미국 저술가인 로렐

라이 E. 페이(Laurel E. Fay)가 저술한 A-Life와 첼로 연주자인 엘리자베


스 윌슨(Elizabeth Wilson)이 저술한 A-Life Remembered, 그리고 제일 논
란이 되었던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의 Testimony가 대표하는 책
들이다. 이 책들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성향이 상이하게 달라 많은 쇼스타
코비치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 어느 성향이 진정한 쇼스타코비치의 성
향인가에 대해 의견 대립이 진행되어왔다.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가 저술한 “A-Life”와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이 저술한
“A-Life Remembered”는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적 사상이 반(反)수정주의
와 수정주의 성향의 내용을 서술한 책들이며,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의 “Testimony”는 반공주의 성향의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이렇
게 상이하게 정치적인 이념이나 사상 등이 판이하게 다르게 대립중이며,
이를 통해서 쇼스타코비치가 정말로 어떠한 사상과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
가에 대해 깊이 연구해볼 필요가 있고, 그 이전에 각각의 문헌들에서 나
타나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성향들을 비교 혹은 분석하여 의견을 뒷받침

하는 내용과 의견에 맞지 않는 의견이 있는지 찾아볼 필요가 있다.


1999년에 발매한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가 저술한
“A-Life”는 쇼스타코비치의 전기를 진전시킨 것으로 평가되는 책이며,

그의 어린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의 세부적인 쇼스타코비치의 생애가 서


술되어 있다. 쇼스타코비치를 설명하는 지인 혹은 가족의 의견이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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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자주 쓰던 쇼스타코비치가 보낸 편지의 내용, 시대적 배경에 따른

쇼스타코비치의 생각, 작품의 초연 때 나타난 그의 행동에 따른 역사 등


이 서술되어 있다. 필자가 이 문헌을 연구하면서 느낀 점은 쇼스타코비치

가 정말로 정치적인 사상을 가지고 뚜렷한 행보를 보였는가였다. 그는 사

회주의가 만연했던 나라와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 단지 맞춰 살아갔을 뿐


이고, 사상의 분별을 통해서 생각하였을 때, 그는 음악과 예술에만 열정

을 쏟아낸 예술가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점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Laurel E. Fay가 이 문헌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이를 증명하는 문구가 나
타나있다.

『What do we know of his life? Shostakovich made a point of speaking through

his music, not about it.』39)

: 그의 삶에 대해 우리가 뭘 알까?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 말하는 것


이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쇼스타코비치에게 음악이란 그의 생각의 대변인이자 자신의 감

정 표현의 수단들 중 하나였다. 그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예술성을

내보이는 천상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렇듯 예술


적 의미전달에 따른 의사소통에 굉장한 강박을 가지고 있다거나 혹

은 그런 중요성을 일찍이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As private a person as he was, Shostakovich was an indefatigable


letterwriter. (Legend has it that he answered every letter sent to him.)』40)

39)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p


40)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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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으로서도 쇼스타코비치는 끈질기게 편지를 쓰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보낸 모든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물론 냉전과 스탈린의 강력한 억압 등의 시대적인 배경으로 인한 의


사소통의 제한으로 인한 소통의 탈출구로써의 선택으로 음악과 편지라는
매개체를 애정있게 사용하였으나 문헌들에서 나오는 쇼스타코비치의 성향

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굉장히 꼼꼼하고 완벽주의자에 삶을 살아가는데에


있어서 지나치게 정석을 따지며, 체계적인 인물이라고 판단되어 진다.

『he destroyed the letters he received and counseled his correspondents to do the
same. It is a testament to the early recognition of his artistic genius and probable
historic stature that very few of them elected to heed his advice.』41)

: 그는 그가 받은 편지들을 찢어버리고 그에게 편지를 쓴 사람들에게 똑같이 하라고


충고했다. 그의 충고를 귀 기울인 사람들은 극소수만이 그의 예술적 천재성과 개연
성 있는 역사적 위상을 일찍이 인정했다는 증거다.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 역시 “A-Life”에서 쇼스타코비치


의 깐깐하고 체계적인 성격을 알아본 사실에 근거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

서적은 시대별로 나온 신문과 녹취록, 편지 혹은 다이어리, 콘서트 프로


그램과 리뷰 등의 그의 생애를 나타내는 증거들로 취합하여 서술하였고,
모스크바와 세인트에 있는 주요자료 보관소에 있는 자료 일부를 통해서

정보를 수집하였다고 서술하였으나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는 쇼


스타코비치의 크나큰 정보가 될 수 있는 개인적 유산들은 상당 부분 지인
혹은 가족들 개인의 손에 남아 있고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조금 더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필자는 생각한다. 회고록이 현재처럼

41)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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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서적으로 나와 있는 경우에 해당 사실들이 정말로 진실인지를 판단

하기도 어렵고, 누군가의 추억에서도 그 사람이 정말로 바라본대로의 사


람이 아닌 경우도 인간관계에선 흔하게들 드러난다. 또한 인간들이 가지

고 있는 망각의 축복을 통한 기억의 소실, 과장된 이야기, 긍정적인 사고

혹은 부정적인 사고를 통해 나온 이야기도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 고로


극도로 주의하여 연구되어야 한다. 많은 러시아 학자들이나 쇼스타코비치

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자신의 객관성을 믿고 인터뷰, 문헌 등을 통해 역


사의 사실을 확인하고 회고록을 작성해왔다. 필자는 그런 시중에 나온 회
고록 중 쇼스타코비치의 논의를 진전시킨 대표 문헌으로 비교하여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A-Life” 문헌에 나온 쇼스타코비치
의 사상과 받은 영향들이 드러나는 문장들을 선별하고 분석하였다.

쇼스타코비치의 1세부터 14세까지의 기록 중에서 이 구간에서는 쇼스


타코비치의 출생 및 친지 가족들의 역사를 나열하면서 쇼스타코비치의 태
생에 관련된 역사와 영향을 준 기록들을 나열하였는데 쇼스타코비치의 집
안에서 작곡과 연주, 즉 음악은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중요한 위치에 있
었다. 아버지인 드미트리 볼래슬라보비치(Dmitriy Boleslavovich
Shostakovich)는 평생동안 집시 음악에 애정을 품었으며 아내인 소피아 바
실리브나 코쿨리나(Sofya Vasilievna Kokoulina)가 반주를 해주면 노래를
부르는 등, 쇼스타코비치의 집 분위기가 이미 음악이라는 색채로 집안 곳
곳 칠해져 있었다.

『Music-making assumed an important place in the Shostakovich household. It was


music—above and beyond their common Siberian heritage— that had brought
Shostakovich's parents together in the first place. Dmitriy Boleslavovich had a
pleasant tenor voice and enjoyed singing popular romances and opera arias to his

- 53 -
wife's accompaniment. His renditions of gypsy romances made an indelible
impression on his son, who cherished a special fondness for gypsy music the rest
of his life. Sofya was regularly joined by colleagues from her Conservatory days
for informal musicales, Chaikovsky, Beethoven, and Rachmaninoff numbered among
their favorite composers.』42)

: 음악 제작은 쇼스타코비치 집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쇼스타코비치의


부모님을 애초에 한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음악이었다. 드미트리 볼레슬라보비치
는 유쾌한 테너 목소리를 가졌고 아내의 반주에 맞춰 대중적인 로맨스와 오페라
아리아를 즐겨 불렀다. 그의 집시 로맨스 의 연주는 평생 집시 음악에 대한 특별
한 애정을 소중히 여겼던 아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소피아는 음악
원 시절의 동료들과 정기적으로 함께 비공식 뮤지컬을 하였는데, 차이코프스키, 베
토벤, 라흐마니노프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공학자이자 아버지인 볼레슬라보비치의 학자의 진중함, 체계적 성향


등의 쇼스타코비치의 성향만을 물려받은 것이 아닌 볼레슬라보비치의 집
시 음악에 대한 애정과 음악을 했었던 어머니 소피아를 통해서 쇼스타코
비치에게 음악적인 감성과 예술에 대한 영향을 부모님을 통해서 직접적으
로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였다. 이러한 특별한 환경 탓에 쇼스타코비치
는 어린 나이에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특별한 환
경에도 불구하고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적인 재능이라든가, 음악 공부에 흥
미가 있다거나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 이에 대한 이유로 쇼스타코비
치는 악보에 대한 두려움과 어머니인 소피아가 쇼스타코비치의 누나인 마

리아 쇼스타코비치(Maria Shostakovich)에게 음악 레슨을 하였었는데, 종


종 레슨 때문에 누나가 눈물 짓고 있었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것으로
합리화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의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은 뗄레

42)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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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I didn't sneak to the door at the age of three in order to listen to music, and
when I did listen to it, I slept afterward just as soundly as the night before."』/

: "음악을 듣기 위해 세 살 때 문으로 몰래 들어간 것이 아니고, 음악을 듣고 나서


전날 밤처럼 푹 잤다.“

『But others recalled that he seemed to love listening to music. His mother
preserved the program from a domestic concert that took place in September
1913, where, among the performers, seven-year-old Mitya was inscribed in jest
as "under the piano," that is, he had concealed himself in a dark corner so as
to remain past his bedtime and hear the music. Getting him to bed on a night
when their musician friends were visiting amounted to high drama in itself. When
reminiscing about the formative musical experiences of his youth, Shostakovich
would often recall the chamber music soirees organized in the next-door
apartment by engineer and ardent cellist Boris Sass-Tisovsky, son-in-law of
Mitya's godmother and close family friend, the popular children's writer Klavdiya
Lukashevich. Through the wall, Mitya would listen for hours to the trios and
quartets of Mozart, Haydn, Beethoven, Borodin, and Chaikovsky.』43)

: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가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의 어


머니는 1913년 9월에 열린 국내 콘서트에서 이 프로그램을 보존했는데, 그 공연자
들 사이에서 7살 된 44)Mitya가 "피아노 아래"라고 농담으로 새겨져 있었다. 즉, 그
는 취침 시간을 넘기고 음악을 듣기 위해 어두운 구석에 몸을 숨겼다. 그들의 음
악가 친구들이 방문하던 밤에 그를 재우게 한 것은 그 자체로 높은 극적인 사건에
해당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젊은 시절의 조형적인 음악적 경험을 회상할 때, 미타의
대모의 사위이자 인기 아동 작가 클라비디야 루카셰비치의 절친한 가족 친구인 엔

43)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9p


44) Mitya : Dmitriy를 칭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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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어 겸 열렬한 첼리스트인 보리스 사스-티소프스키가 옆집에 조직한 실내악 소
이어를 종종 떠올리곤 했다. 벽을 통해 미티는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보로딘,
차이코프스키의 삼중창과 사중창에 몇 시간 동안 귀를 기울이곤 했다.

당시에는 음악적인 활동을 한다거나 공부를 하지 않았으나 쇼스타코


비치 본인 스스로 음악 청취에 대한 흥미가 제대로 음악 공부를 하기 전
부터 굉장히 높았었고, 집안 환경 및 주변 환경에서 나오는 음악들로 인

해 훗날 그의 재능은 꽃피울 수가 있었다. 음악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쇼


스타코비치가 단순 청취가 아닌 음악 공부의 흥미를 가지게 된 계기가 생
겼다. 1915년 봄에 쇼스타코비치는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Rimsky-Korsakov)의 <Tale of Tsar Saltan> 오페라를 보기 위해 뮤지컬
극장에 끌려갔던 적이 있는데, 이 공연을 본 후 쇼스타코비치는 음악 공
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었다.

『In the spring of 1915, Mitya was taken to the musical theater for the first time,
to see Rimsky-Korsakov's Tale of Tsar Saltan. As much as he enjoyed the
opera, it did not budge him from his indisposition to study music.』45)

: 1915년 봄, 미티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차르 살탄 이야기를 보기 위해 처음으로 뮤


지컬 극장에 끌려갔다. 오페라를 즐긴 만큼 음악 공부를 하고 싶은 그의 마음가짐
도 꺾이지 않았다.

위 내용을 토대로 판단할 수 있는 점은, 쇼스타코비치는 그 이전에

음악을 듣는 것 외에는 음악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표현하고자 하는 무언가의 이야기가 있거나 이야기를 통한 의도 전달 등
의 음악적 의사소통에 그의 예술정신이 자극되고 그에게 굉장한 흥미가

45)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9p

- 56 -
유발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의 소개란

에 나온 내용을 상기시켜보면, 편지를 끊임없이 썼다는 부분을 통해서 의


사소통의 중요성이 나타나 있는데, 쇼스타코비치는 의사소통이라는 한 매

개체가 그 자신의 예술정신에 굉장한 중요도를 담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그의 처음으로 음악의 흥미를 유발한 부분도 음악적 의사소


통이 있고, 이후 편지를 끊임없이 답장하는 그의 모습도 무언가의 의사소

통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예술정신은 곧 후에 편지를 끊임없이 답장


하는 ‘간접적 공유’라는 하나의 성향의 뿌리를 토대로 바탕 되어 자라
온 것일 것이다.

『To further his ambition, she recommended that he receive special instruction, so
in the spring and summer of 1919 he took lessons from Georgiy Bruni, who
promoted improvisation as a means of stimulating the creative imagination.』46)

: 그의 의욕을 더 키우기 위해 그녀는 그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받을 것을 권고했고,


그래서 1919년 봄과 여름에 그는 창조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즉흥연주를
장려한 게오르기 브루니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그의 예술사상의 영향을 주었던 여러 인물들이 있지만, 성장


기에 가장 영향을 많이 주거나 많이 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은 쇼

스타코비치의 어머니인 소피아 바실리브나 코쿨리나(Sofya Vasilievna


Kokoulina)일 것이다. 그녀는 항상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적으로 어떻게 하
면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개선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 노력

중에서 그의 창의성을 키울수 있는 즉흥연주 수업은 그가 만들었던 작품


의 예술성에 많은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장기의 쇼스타코비치
에게 영향을 준 인물 중 러시아 화가인 보리스 쿠스토디예프(Boris

46)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4p

- 57 -
Mikhailovich Kustodiev)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쇼스타코비치의 비평과

연주를 듣곤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on one occasion, when the other children were complaining that Mitya's
improvisations were too difficult for them to dance to, and even his rendition of a
foxtrot came out spiked with unexpected rhythms and intonations, Boris counseled,
"Don't pay any attention to them, Mitya, just play your own thing." Shostakovich
was invited to play at an exhibition of Kustodiyev's paintings on 8 May 1920,
where he performed his music in public for the first time.』47)

: 언젠가 다른 아이들이 Mitya의 즉흥연주가 너무 어려워서 춤을 출 수 없다고 불평


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의 48)폭스트롯 연주조차도 예상치 못한 리듬과 억양으로
치솟아 나왔을 때, Boris는 "그들에게 신경 쓰지 마, Mitya, 그냥 네 마음대로 해"
라고 충고했다. 쇼스타코비치는 1920년 5월 8일 Kustodiyev의 그림 전시회에 초대
되어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자신의 음악을 공연하였다.

이 문헌을 토대로 쇼스타코비치는 Boris의 영향을 받고, 사회와 주변


의 시선 등 여러 자극에 의해 예술의 자유성을 잃을 수도 있는 환경에서
도 그는 자신의 예술정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쇼스타코
비치는 이후 13세가 되던 해, 그의 아버지가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알
렉산더 질로티(Alexander Siloti)에게 자신의 아들, 쇼스타코비치의 연주를
들어달라고 요청을 했었다. 이 당시 질로티는 어머니인 소피야에게 쇼스
타코비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The youngster won't make himself a career. He has no musical abilities. But of
course, if he's got the desire, why... no harm in letting him study."』

47)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3p


48) Foxtrot : 폭스트롯(사교댄스의 일종, 또는 춤곡)

- 58 -
: "젊은 놈이 스스로 출세하지는 않을 거야. 그는 음악적 재능이 없어. 하지만 물론
욕망이 있다면 왜... 공부를 시켜도 해가 되지 않을거야.”

이 말을 들은 쇼스타코비치는 그 당시 밤새도록 굉장히 많이 울었다

고 한다. 이 일은 쇼스타코비치 본인 자신은 음악에 굉장한 애정과 자긍


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로 해석된다. 쇼스타코비치는 항상 변함

없는 사람이였고 그는 어렸을 적부터 음악과 예술에 자긍심을 가진 그가


정치라는 외부 요소를 접목시켜 자신의 예술이 왜곡되고 난자당하는 행동
을 본인 스스로 관객들에게 전달하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A-Life”에서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가 주장하는 쇼스타
코비치의 정치적 견해는 대체로 반(反)수정주의이다.

『Most available information points to the conclusion that, as a youth, Shostakovich


was not especially active politically, although he followed current events and was
innately patriotic and civic-spirited.』49)

: 대부분의 이용 가능한 정보는 쇼스타코비치가 젊었을 때 시사점을 따랐고 선천적으


로 애국심과 시민정신이 강했지만 정치적으로 특별히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결론을지
적한다.

타냐 글리벤코에게 보낸 서한에서 나타난 공산주의에 대해 지지한다


는 입장과 신경제정책(NEP)의 결실에 대한 자본주의적 행태에 경멸감을
드러냈다는 다각적 각도가 아닌 단편적인 분석을 통한 주장이였다. 러시

아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에 의해 나타난 마르크스 주의에서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2차 전당대회에서 분열됨으로써 나타난 볼셰비키

49)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36p

- 59 -
와 멘셰비키, 그리고 1920년부터 레닌주의, 이후 스탈린에 의해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정치 이념이 변화하면서 급변하는 역사 속에 있던 국가였다.


급변하는 역사 속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친지 가족들 모두 자신만의 생각과

신념을 가지고 행동을 하였다. “A-Life”에서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는 쇼스타코비치 집안의 정치적 성향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


다.

『Involvement in radical politics, it is true, was to be found on both sides of


Shostakovich's family tree. His paternal grandfather had been a political exile.
More recently, in 1907 one of his maternal aunts had married a member of the
Social Revolutionary Party in prison as he awaited trial for the murder of a
policeman during a police raid. (Sofya helped to galvanize support for his defense,
and in the end he was acquitted.) Another aunt joined the Social-Democratic
(Bolshevik) Party in the wake of the bloody events of 1905 and for a time
duplicated illicit literature while living on the Shostakovich premises, placing them
all in peril. Dmitriy and Sofya Shostakovich welcomed guests with a broad
spectrum of beliefs—political, religious, and otherwise—into their home, without
themselves engaging in extremist politics. There is little question that the
Shostakovich children were exposed to a diversity of backgrounds and opinions.
Nonetheless, like the majority of the liberal intelligentsia, the Shostakovich family
was in fundamental sympathy with the February Revolution of 1917; Zoya recalled
her father coming home at the time shouting, "Children, Freedom!"』50)

: 급진적 정치에 대한 참여는 쇼스타코비치의 가계도 양쪽에서 발견된 것이 사실이


다. 그의 친할아버지는 정치적 망명자였다. 보다 최근에는 1907년 그의 외숙모 중
한 명이 경찰 급습 중 경찰관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기다리던 중 교도소에서 사
회혁명당원과 결혼했다. (소프야는 자신의 방어를 위한 지지를 활성화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결국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또 다른 이모는 1905년의 유혈사태를 계기

50)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2p

- 60 -
로 사민당(볼셰비키)에 입당했고, 쇼스타코비치 구내에 살면서 한동안 불법 문헌을
복제해 모두 위험에 빠뜨렸다. 드미트리 부부와 소피아 쇼스타코비치는 극단주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정치적, 종교적, 그 밖의 다양한 신념으로, 자신들의 집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쇼스타코비치 아이들이 다양한 배경과 의견에 노출되었다는 것
은 거의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처럼
쇼스타코비치 가문은 1917년 2월 혁명에 근본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조야는 당시
"아이들에게 자유를!"라고 외치며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떠올렸다.

여기서 언급된 내용들 중 이모가 1905년 유혈사태 계기로 인해 볼셰


비키에 입당했다는 사실과 불법 문헌 복제를 하여 혁명과업을 하려 했다
는 점과 쇼스타코비치 가문이 혁명에 근본적으로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의 “A-Life Remembered”에 서술된
조야 쇼스타코비치(Zoya Shostakovich)가 본 아버지의 정치적 발언에 대한
언급은 정작 쇼스타코비치가 어떠한 정치적 성향을 가졌을 것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운 내용이다. 물론 쇼스타코비치의 부모님이 정치적, 종교적
등의 성향을 띈 모임이나 손님들을 초대한 부분을 통해서 쇼스타코비치가
어떠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는 점은 수긍한다. 1917년 이 당시 시대
적 배경은 많은 이들이 혁명을 노래를 부를 정도로 당시 상황들이 사회주
의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가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는 점
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현실적으로 공산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과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를 지
속적으로 겪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겪지 못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순응

하며 살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겪은 사람들은 공


산주의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공감하지 못하고 어떠한지조차 체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쇼스타코비치도 예외는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

어나 살아온 사람으로서, 사회주의라는 틀에서 자라왔을 것이다. 그렇다

고 사회주의를 순응한다거나 반공주의를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어느 체

- 61 -
제든 사람이 살아가면서 체제에 불만을 가질 때도 있고, 좋은 부분이 있

다고 생각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쇼스타코비치는 반(反)수정주


의자들의 말처럼 과연 소련의 체제에 불만이 정말 없었을까, 수정주의자

들의 말처럼 혁명과 체제에 정치적인 해석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활동을

했을까에 대한 의문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어느 인터뷰를 봐도 쇼스타


코비치가 ‘저는 한쪽을 지지하고 있다고 하거나 저의 정치적인 신념이

이렇기 때문에 곡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라고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이에 따른 예시로 쇼스타코비치의 <제11번 교향곡>에 대한 작곡의 모티브
를 “A-Life”에서 서술한 내용을 들여다보자.

『One image that was vividly etched in the memories of both Shosta kovich's
mother and his aunt Nadezhda was the solemn funeral procession through the
streets of Petrograd, on 23 March (5 April) 1917, to lay 184 victims of the
February Revolution to rest in a common grave. The Shostakovich family was
among the nearly 1 million mourners who made their way to the Field of Mars,
singing the revolutionary funeral march, "You Fell a Victim." When they returned
home that evening, young Mitya played "You Fell a Victim" on the piano (in later
years he would utilize this classic revolutionary tune in film scores and, most
conspicuously, in the third movement of his Eleventh Symphony, <The Year 1905>,
op. 103). Under its influence, he composed his own "Funeral March in Memory of
the Victims of the Revolution.”』51)

: 쇼스타코비치의 어머니와 Nadezhda 숙모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 한 가


지의 기억은 1917년 3월 23일 (4월 5일) 페트로그라드의 거리를 누비며 2월 혁명의
184명 희생자를 공동묘지에 안장하기 위한 엄숙한 장례 행렬이었다. 쇼스타코비치
일가는 거의 100만 명에 가까운 조문객들 가운데 하나로, 혁명적인 장례 행진곡 '너
는 희생자가 되었다'를 불렀다." 그 날 저녁 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젊은 Mitya
는 피아노로 "너는 희생양이 되었다"를 연주했다(나중에 그는 이 고전적인 혁명적인

51)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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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조를 영화 악보에, 그리고 가장 두드러지게는 그의 11번 교향곡 <The Year 1905>,
op. 103의 제3악장에 활용했다). 그 영향 아래, 그는 "혁명 희생자들을 기리는 야만
적인 행진곡"을 작곡했다.

이 문헌의 내용을 보고 정치적 판별의 논의를 하는 학자들은 그가 정


치적인 생각을 가지고 2월 혁명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곡을 썼다고 할
것이다. 이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나이는 고작 12살이였다. 뚜렷한 정치

신념을 가지고 활동하려고 마음먹었다고 보기엔 어려운 점들이 많다. 당


시 사회 풍토상 이러한 사건이 나타난 경우에 시민들은 자신의 정치 신념
을 토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물론 있었겠지만, 고작 12살의 나이에 정치
이론과 역사를 꿰뚫듯 알 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
내용에서 볼 수 있는 점은, 정치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쇼스타코비치가
단순히 장례 행렬과 슬퍼하는 이들의 감정이 쇼스타코비치의 예술혼에 영
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You Fell a Victim(너
는 희생자가 되었다)”를 받은 감성적 영향을 토대로 집에 돌아와 연주를
하였던 것이고, 기억력이 좋았던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인생에 이 일이 기
억에 남아 스탈린의 억압이 풀린 이후 시점에 피의 일요일 사건을 추모하
는 장송곡 <교향곡 제11번> 3악장인 <영원한 기억>을 작곡했다. 그의 예
술정신에 정치적 이론을 접목시킬 것이 아니라 음악가에겐 예술론으로만
보는 시각적 접근을 해야 한다.
쇼스타코비치에게 1919년에서 1926년 사이의 시기는 굉장히 어렵고

고난했던 시절 중에 하나였다. 1922년 2월 24일 쇼스타코비치의 아버지인


드미트리 볼레슬라보비치(Dmitri Boleslavovich)가 폐렴으로 사망하여 쇼스
타코비치의 집안에서 가족 모두 슬픔에 빠지게 되었고, 당장에 수입원이

끊겨 일에 대한 경력도 없던 어머니 소피야는 자신이 취업이 가능한 어떤

일이든 찾아 돈을 벌어야 했다. 쇼스타코비치가의 음악 공부도 순탄치 않

- 63 -
았는데, 1919년과 1920년에 겨울 내내 한파로 인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에 음악원은 난방이 되지 않아 음악원 강사, 학생 모두 음악


원에서 수업을 건너뛰거나 하는 상황이 초래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이런 악조건에서도 슬픔과 고통을 참고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식게 두

진 않았다. 출석을 착실히 하며 교내에서 근면함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니콜라이 소콜로프(Nikolai Sokolov)의 음악적 전문지식을 얻기 위해 그의

집에 찾아가 자신을 가르쳐 달라고 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애정이 강했


다. 또한 그는 모든 악조건에서 진중함과 인내력이 발휘되는 강한 사람이
였다.

『Hardships notwithstanding, he looked back on the period with nostalgia: "Despite


all the difficulties, I remember that time with a warm feeling. We listened to a
great deal of fine music and played much of it ourselves. My Conservatory
companions loved to make music. In order to hear or to play an unknown
composition, we were ready to cover at least ten kilometers on foot, at times
even to skip supper.”』52)

: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향수를 느끼며 그 시기를 되돌아보았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때를 따뜻한 느낌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좋은 음악을 많이 듣고 직접
많이 연주했다. 나의 음악원 동료들은 음악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듣거나 알 수
없는 작곡을 하기 위해 우리는 적어도 걸어서 10km를 가릴 준비가 되어 있었고, 때
로는 저녁 식사를 거를 때도 있었다."

또한 이러한 악조건이란 상황을 통해서 형성된 성향에서 쇼스타코비

치는 소통이란 매개채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 음악가이다. 물론 그의 성


격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사회적인 풍토가 어쩔 수 없이 모든 이들을 그
렇게 만들었고 쇼스타코비치도 예외는 아니였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52)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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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1917년에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었지만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의 협상국인 대부분의 나라들이 침략하는 등,


내전이 큰 규모로 심화 되었고 나라 전체의 분위기나 재정상태 등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고난과 고통뿐인 삶을 처해 있던 쇼스

타코비치의 인내심과 감정의 소통의 성향이 내비치는 구절이 있다. 쇼스


타코비치의 아버지 드미트리 볼레슬라보비치(Dmitri Boleslavovich)가 폐렴

으로 사망한 직후, 그의 감정적 대처와 그의 소통방법이 서술되어 있다.

『Fifteen-year-old Dmitriy bore his grief stoically. An observer at the fu neral in


the Alexander Nevsky Monastery recalled that "Zoya's distraught little face was
wet with tears and her coat was unfastened. Dmitriy stood, his cap crushed under
his arm, slowly wiping his spectacles. His eyes looked es pecially defenseless
without them, but his entire face was filled with inward concentration and
composure. No need to go to him with condolences!'” Dmitriy's mourning was
expressed in music. In March, he completed a Suite for Two Pianos, op. 6, which
he dedicated to the memory of his father. The four-movement work, a memorial
of affecting dignity and solemnity, was designed to be performed with his sister
Mariya.』53)

: 열다섯 살의 드미트리 씨는 가차없이 슬픔을 참았다. Alexander Nevsky 수도원의


장례식에 온 참관인은 "조야의 정신이 나간 작은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었고 외투
가 풀렸다"고 회상했다. 드미트리는 모자를 겨드랑이에 짓눌린 채 서서 천천히 안
경을 닦고 있었다. 그 눈빛이 없으면 특히 무방비해 보였지만 얼굴 전체가 내면의
집중력과 여유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에게 애도를 표할 필요는 없어!'라고 한
드미트리의 애도는 음악으로 표현되었다. 3월에 그는 아버지의 기억을 위해 헌신한
2대의 피아노 스위트(Suit for Two Pianos, op. 6)를 완성했다. 존엄성과 엄숙함을 기
리기 위한 4악장 작품은 여동생 Mariya와 함께 공연하도록 기획되었다.

53)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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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의 소통방식은 음악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었

다. 애도하는 마음, 슬픔 등의 감정과 해당 대상에 자신의 생각과 신념,


그리고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 아닌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신

의 속마음을 내비치는 방법이였다. 이는 앞서 말한 진중함과 인내심이라

는 성향이 도화제가되어 그의 예술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적인 행보에 대해서도 로렐라이 E. 페이는 이전

에 서술한 내용에서 스탈린 시대 때도 당체제에 순응했다고 서술했지만


니키타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ev)의 비밀 연설과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편지를 엮어서 나온 스탈린 사후 정치적 변환점에서도 당체
제에 순응하여 행동했다고 서술했다.

『When, in December 1955, Shostakovich saw cause to invoke a phrase from one
of Anton Chekhov’s letters—“It is the duty of writers not to accuse, not to
prosecute, but to champion even the guilty once they have been condemned and
are enduring punishment.... Great writers and artists ought to take part in politics
only so far as they have to protect themselves from politics. There are plenty of
accusers, prosecutors and gendarmes without them.”—he was almost certainly
articulating it as a position of principle.』54)

: 1955년 12월 쇼스타코비치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서신에서 한 구절을


언급하는 명분을 보았다. “작가들의 의무는 고발하지 않고, 기소하지 않고; 누군가
일단 유죄를 선고받고 형벌을 견디면 그들을 옹호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작가와
예술가는 정치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데까지는,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
들 없이 많은 고발자, 검사 및 헌병이 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그것을 거의
확실히 원칙의 입장으로서 분명히 표현했다.

54) Letter to A. S. Suvorin, 6 February 1898; quoted in Anton Chekhov, Letters on

the Short Story, the Drama, and Other Literary Topics (New York, 1966), 256.

58. I. Glikman, "Kazn' Ledi Makbet," Sovetsk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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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le this event marks a turning point in political history, the slow process of
releasing prisoners from labor camps and rehabilitating victims of the Stalinist
terror had actually been under way for some time. Shostakovich participated
actively in this endeavor, agitating persistently on behalf of the most varied
victims, including old family friends from Leningrad, Genrietta Dombrovskaya and
her sons.』55)

: 이 사건은 정치 역사의 전환점이지만, 수감자들을 노동 수용소에서 석방하고 스탈


린주의 테러의 희생자들을 명예회복시키는 느린 과정이 실제로 한동안 진행되어 왔
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레닌그라드의 오랜 가족 친구,
겐리에따 돔브로프스카야(Genrietta Dombrovskaya) 및 그녀의 아들을 포함하여 가
장 다양한 희생자를 대신해서 지속적으로 (변화를) 주장했다.

쇼스타코비치를 반(反)수정주의자로 표현하려는 의도로써 정치에 참


여하여 당체제에 흐름에 따라 주장을 펼쳤다는 주장의 내용이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이삭 글리크만(Isaak Glikman)과 플로라 리트비노바(Flora


Litvinova)의 회상에 따르면 쇼스타코비치의 성향은 나서서 의견을 펼치는
행동 대신 과묵하고 침묵하는 성향과 거절을 잘 못하는 것, 심성이 착해

주변 사람들을 잘 도와준다는 점을 꼽을 수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쇼스


타코비치는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당정치에 개입하여 확고한 주장을 펼
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체호프의 편지는 출처가 분명하지만 이 주장을

펼쳤다는 데에는 증거 자료가 없고 지인들의 회상들과 상이한 모습들이


보여 이질감이 보인다. 게다가 이전에 나왔던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내에
많은 의미를 내포시켜 이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려 했던 성향과도 맞지가

않는 모습이다. 아마도 로렐라이. E. 페이는 이 체호프의 편지에 대한 출


처를 통해 쇼스타코비치가 체호프에게 영향을 받고 반(反)수정주의의 정

55)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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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쇼스타코비치가 체호프를 좋아했

던 이유는 작가로써의 문학이란 예술을 통한 요소적인 면모의 체호프이


며, 체호프는 소설로써 진실, 삶의 죽음에 의미를 전달하려한 작가로 그

의 문학적 의미에 공감했기 때문이었으므로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아 행동

했다고 보기엔 어렵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유대인 민속시로부터>의


작품에 대해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은 로렐라이 E. 페이

(Laurel E. Fay)가 반(反)수정주의적 주장을 하였다고 언급한 내용이 있다.

『There existed a paradox not only between the texts and music of the cycle, but
in the very circumstances of its creation. Objectively From Jewish Poetry
answered the criteria of socialist realism: the songs were tuneful, and used
genuine folklore. And in the autumn of 1948 the Soviet Union announced its
intention to recognize the new State of Israel, thereby becoming the first
government of importance to do so, ahead of the United States. But Shostakovich
was fully aware of Stalin’s hypocrisy and double standards; from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the rising tide of anti-Semitism manifested itself in
many areas of life, intensifying in the latter part of 1948, when a campaign
against Yiddish culture kd to sweeping arrests, including those of Dobrushin and
Yiditsky, the compilers of the book that provided the texts used by
Shostakovich. Under the circumstances it is not surprising that Shostakovich’s
attempt to have From Jewish Poetry approved by the Union of Composers in
January 1949 came to nothing.』56)

: 가사와 음악집 사이뿐만 아니라 그 작곡 상황에서도 역설이 존재했다. 객관적으로


<유대인 민속시로부터>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준에 대한 답변이었다. 노래는 선
율이 아름다웠고 전통 민속 문화를 사용했다. 1948년 가을에 소비에트 연방은 이스
라엘의 새 국가를 인정한다는 내용을 발표했고 이로써 미국보다 먼저 이스라엘을
인정한 중요한 첫 번째 정부가 되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의 위선과 이

56)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245-246p

- 68 -
중 잣대를 잘 알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부터 반유대정책의 파도가 삶
의 여러 방면에서 드러났다. 1948년 말에 이디시어 문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쇼스
타코비치가 사용했던 가사를 제공한 책의 편집자였던 도브루신과 이디츠키를 비롯
한 인사들의 전면적인 체포로 이어지며 강화되었다.38 이러한 상황에서 1949년 1월
에 <유대인 민속시로부터>를 작곡가 협회에서 승인받기 위한 쇼스타코비치는 시도가
아무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위 내용의 출처로써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996년 4월 14일 뉴욕타임즈의 기사 ‘작곡가는 용감했지만 신화에 나오는 것만큼


은 아니었다’에서 로렐 페이는 쇼스타코비치가 <유대인 민속시로부터>를 작곡하기
로 한 결정은 부분적으로 기회주의적이었으며 소비에트가 이스라엘을 인정하면서
정치적 경향을 따르려고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녀가 2000년 OUP에서 출
간된 실질적인 쇼스타코비치 전기를 썼을 무렵 그녀는 이 관점을 재고했다.』

또한 1957년 3월 28일부터 4월 4일까지 열린 제2차 소련 작곡가 총회


에서 소련 음악의 이념, 문체적 순수성 평가, 복지와 그에 따른 잠재적

위협을 근절하기 위한 방법론 대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조적인 방법들


과 당국의 건전한 지도력에 대한 충성을 음악가들에게서 확인하려는 다소
비합리적인 회의를 진행했었는데, 4월 1일날 열린 총회에서 쇼스타코비치

는 스탈린 주의의 잔재를 없애자는 다소 과격한 언행으로 정치에 개입했


다는 다니엘 지토미르스키(Daniel Zhitomirsky)의 증언이 있었다.

『His comments to the Congress delivered on 1 April (for which Daniel Zhitomirsky
later claimed authorship) were plainspoken and self-assured. His call to eliminate a
surviving remnant of the “cult of personality,” the practice of stifling
constructive creative discussion by means of ideological discreditation, was greeted

- 69 -
with applause.』57)

: 4월 1일 총회에서의 쇼스타코비치의 발언(다니엘 지토미르스키가 나중에 자신이 저


자라고 주장함)은 평범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이데올로기적 망신주기(discreditation)
을 통해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토론을 억누르는 관행인 '개인 숭배'의 살아남은 잔재
를 제거하자는 그의 요청은 박수를 받았다.

다니엘 지토미르스키(Daniel Zhitomirsky)는 음악학자로 쇼스타코비치


를 당국의 ‘비 순응적인 태도’라는 기사를 쓴 보수적인 사상과 당 지지

자인 인물로써 쇼스타코비치를 진실성 있게 증거를 내놓지는 않았을 것이


다. 그리고 1958년 니키타 후르시초프(Nikita Khrushchev)와 공산당 중앙
위원회 위원들은 크렘린 궁전으로 과학 및 문학 등 소련의 지식인 계층인
인텔리겐치아들 중 저명한 인물들을 초대하여 모임을 가졌다.

『The privilege of the answering toast on behalf of Soviet musicians was bestowed
on Shostakovich. Stressing the marvelous creative conditions enjoyed by Soviet
musicians and the paternal, sensitive, and considerate guidance given them by
Party and government, Shostakovich raised his glass “to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and its Leninist Central Committee, to our own Soviet
government, to the great Soviet people.”』58)

쇼스타코비치에게는 소련 음악가를 대신하여 건배사를 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


다. 소련 음악가들이 누리는 놀라운 창작 조건과 당과 정부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부계적이고 민감하고 사려 깊은 지도를 강조하며, 쇼스타코비치는 "소련의 공산당
과 레닌주의 중앙위원회, 우리 자신의 소련 정부, 위대한 소련 국민을 위하여!"라고
외치며 유리잔을 높이 들었다.

57)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200-201p


58)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2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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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보여지는 쇼스타코비치는 당에 순응하고 지지하는 인물로 그

려져 있는데, 당시 스탈린 사후 강력한 권력을 얻은 니키타 흐루시초프


(Nikita Khrushchev)는 쇼스타코비치라는 인물의 명성과 음악을 당에 이용

가치가 있다는 판단에 대한 계산이 이미 끝난 이후였다. 당시 위 내용은

공산당 대표 기관지인 프라우다(Pravda)에 실린 기사 내용으로 당국이 원


하는 이미지대로 각색하여 기사로 내보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신빙성 있

는 자료로 인정하긴 어렵다.

3.7.2. “A-Life”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성향


로렐라이. E. 페이가 서술한 “A-Life”에서 나타나는 쇼스타코비치
는 유년시절부터 집안에서 듣고 보고 자라온 영향으로 형성된 사회주의적
성향과 체제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반(反)수정주의라는 주장이다. 로렐라
이. E. 페이는 러시아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자료를 수집하면서 굉장히 섬
세하게 쇼스타코비치의 전기를 표현해냈다. 전체적인 내용들이 역사적으
로 들어난 사실들과 크게 다른 부분들이 없고 쇼스타코비치를 정치적 프
레임으로 씌우게 되면 생기는 이질감도 크게 없다. 하지만 자료 수집한
내용들을 보면 체호프의 편지를 인용하여 이를 쇼스타코비치가 영향을 받
았을거라 단정짓는 문제와 공산당이 원하는 색채대로 기사를 냈던 프라우
다(Pravda)의 기사들을 당국에 의해 각색됐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배
제한채 이를 확정된 사실로써 여겨 ‘A-Life’에 인용하는 등 전기로써

허점들이 조금씩 보였다. 하지만 다행이도 반(反)수정주의적 성향의 증거

자료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인용하고 이와 관련된 증거 자료가 없을 경우


에도 관련 내용을 적은 다음에 증거가 없다는 주장과 함께 객관성을 높이

려고 하였다. 이러한 허점을 배제하고 그가 주장하는 쇼스타코비치의 정

치관을 들여다보면 <제2번 교향곡>을 작곡하는 기점으로 당국이 원하는

- 71 -
음악을 작곡하는 것과 그와 동일한 이데올로기 사상과 사회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고, 스탈린 체제 당시 상황에서 솔로몬 볼코프의 “Testimony”


에서 보여주는 과격한 반공주의적 성향이 아닌 단순한 불안과 소심한 부

분들을 부각하여 쇼스타코비치 자신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른 작품의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고 시인하는 등의 순응주의적 내용이 서술되어 있으


며, 스탈린이 사망하고 난 후인 1953년에 서기장으로 지내면서 당의 권력

을 잡은 니키타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ev)가 시행한 억압되어왔던 예


술계통의 해빙을 시행할 당시 있었던 모임이나 회의에서 쇼스타코비치는
당의 체제와 사회주의에 순응하는 모습들을 서술하면서 쇼스타코비치의
정치관을 반(反)수정주의적 사상을 가진 변화된 당체제에 순응하는 인물
로써 그려내었다.

4. 반공주의 해석에 의한 쇼스타코비치

1979년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가 펴낸 “Testimony”이후 제


기된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적 해석에 의한 주장이다. 당시 이 문헌에 의해
쇼스타코비치는 반공주의자라는 해석의 지지자들이 굉장히 많았으며, 이
문헌이 나오기전엔 이데올로기 구현자 혹은 냉전주의에 희생된 비극의 인
물로 보는 다소 입장이 애매한 사회적 풍토에서 획일적으로 나타난 회고

록이라는 주장을 통해 그의 정치적 해석에 새로운 입장이 나타나게 되었

다. 이 “Testimony”를 기점으로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적 해석에 대한 여


러 입장들이 새롭게 나타나게 되었다. “Testimoy”에서는 직접적인 항쟁

의 참여와 같은 내용의 역사적 사실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여러 시대적

배경에서 나타난 사건들에서 다소 과격한 언어들로 그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 이 반공주의적 정치 입장에 대해 나타난 그의 작품 성향과

- 72 -
“Testimony”의 분석을 통해 쇼스타코비치가 반공주의적 예술가였는지

혹은 특정한 정치관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정치적인 해석을 해보고자


한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문화예술에 대한 규제가 점진적으로 풀리

기 시작하였다. 해빙기 초기 작품인 <제10번 교향곡> 같은 경우는 <제9번


교향곡>의 비판으로 인해 심각한 위협을 느낀 쇼스타코비치가 당국의 비

위를 맞춰줘야 하는 상황에서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를 통해 당국의 위


협에서 가까스로 피하게 되고 이 <제10번 교향곡>을 통해 명성을 되찾게
되었던 아직 당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긴 하지만, 스탈린의 사후와 맞물려
음악의 변화가 시작된 부분과 당국의 옹호와 비판의 양립적 대립의 애매
한 구도를 가지기 시작한 작품이었다. 당시에 음악가 동맹을 통해 이 논
쟁에 대한 공개 토론회까지 열 정도였지만 비판을 하던 반대파를 지지해
주던 지도자가 사라짐으로써 그들의 힘이 많이 감소한 영향으로 이 작품
은 당국에 비판을 받았지만 연주 금지나 작품활동 정지 없이 공연된 쇼스
타코비치에게 정치적 영향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곡이기도 했다. 쇼스타
코비치의 곡의 완성도가 점진적으로 높아진 후기 작품들 중에서 이러한
변화가 절정에 이른 작품이 바로 역대 작품들 중 가장 파격적이고 전위적
인 성향을 띈 <제14번 교향곡>이였다.

4.1. Shostakovich Symphony No. 13


쇼스타코비치는 <제11번 교향곡>과 <제12번 교향곡>의 혁명이라는 주

제 때문에 당국에 충성하는 음악가로 평가되어왔다가 이 곡을 통해서 사


람들에게 혼란을 야기했다. 이 <제13번 교향곡> “Babi-Yar”는 1962년
작곡 되었고, 1962년 12월 18일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대강당에

서 초연되었다. 이 “Babi-Yar”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근처의 협

- 73 -
곡에 있는 마을 이름인 ‘바비 야르’에서 따온 것으로, 독소전쟁 중이였

던 1941년부터 1943년 사이에 독일군은 이 장소에서 3만여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집단 학살한 장소이며 이 일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나치의 최대

규모 대학살로 인류애적으로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범죄적 역사의 기록으

로 남겨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옙투셴코(yevgeny yevtushenko)가 쓴 반(反)


유대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쓴 시인 “바비 야르”를 읽고 곡을 구상하였

다. 쇼스타코비치는 인종차별적 사상과 사건을 굉장히 혐오했는데, 그래


서 나치들이 대학살을 벌인 사건과 소련 당국에서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 생애에 최초로 저항을 나타내는 반유대주의
란 주제로 “바비 야르”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플로라 리트비노바
(Flora Litvinova)의 회상에 따르면 그가 인종차별을 왜 혐오했는지에 대해
언급하였다.

『‘Cosmopolitans,Jews, so they are responsible, and we are slaves. Antisemitism


is a struggle against reason and culture. In reality, it is an admission that we are
stupider, worse, and less well brought-up than the Jews,’ he said.』59)

“세계주의자들, 유대인들. 그래서 그들은 책임감이 있고 우리는 노예입니다. 반유


대주의는 사유와 문화에 대한 싸움이에요. 실제로 반유대주의는 우리가 유대인들보
다 더 멍청하고, 별 볼 일 없고, 교육을 못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그
가 말했다

쇼스타코비치는 굉장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일에 반하는 일들에 대


해 굉장히 싫어하고 예민했다. 그리고 소련 국민으로써 애국심과 자긍심
이 남달랐기 때문에 이러한 인종차별주의를 굉장히 꺼려했으며, 이러한

비극적인 학살의 역사가 다신 일어나지 않길 바랬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59)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2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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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에서 옙투셴코의 시를 통해 창작욕이 샘솟게 된 것이다. 초연 당시

유대인의 대한 옹호와 관료주의에 대한 조롱이 담긴 작품이라는 이유로


당국에서 심기가 불편함을 내비쳤는데, 당시 상황에서 박해주의자들은 쇼

스타코비치를 비판하였고, 흐루쇼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도 옙

투셴코의 시에 굉장한 분노를 표출했으나, 명성 때문인지 아니면 흐루쇼


프가 내세운 스탈린 체제의 수정주의적 행보에 의한 이유였던 것인지 불

분명하나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만은 건들지 않았기에 프라우다(Pravda)에


서 이전처럼 장문의 비판 기사가 아닌 <제13번 교향곡>이 연주되었다는
단 한 줄의 기사로 끝나면서 공연을 진행할 수 있었다. 원래는 합창이 가
미된 단악장의 교향시로 구상을 했었으나 첫 악장을 작곡한 뒤 쇼스타코
비치는 여러 악장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겨 옙투센코에게 시를
새로 더 써달라고 요청하였고 이후 <제13번 교향곡>은 5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이 되었다. “바비 야르”에 대한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악장 Babi Yar

(합창)
바비 야르 위에는 아무런 묘비가 없네.
비탈은 커다란 묘석 같구나.
두렵다, 오늘 난 유대인만큼 오래된 것 같다.
나는 마치... 그래 유대인인 듯 느낀다.

(독창)
그래, 고대 이집트를 떠도는 듯,
그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듯,
그리고 아직도 못 자국을 지닌다.
그래... 드레퓌스, 그건 바로 나다.
천한 부르주아가

- 75 -
나를 고발하고 나를 심판하다니!

철창 뒤에 포위하고는,
나를 박해하고, 야유를 퍼붓고, 중상모략한다.
싸구려 패물을 걸친 아름다운 부인들은
시시덕거리며 우산으로 내 얼굴을 찌르네.
나는 마치...
그래, 비엘로스토크에 사는 소년인 듯하다.

(합창)
피가 흐른다. 바닥이 얼룩진다.
술집 선동자들이 행동으로 옮긴다.
그 입에서는 보드카와 양파 냄새가 진동하는구나.

(독창)
구둣발이 나를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탈진한 채,
유대인 박해자들에게 헛되이 은총을 구한다.

(합창)
그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유대인들을 죽여라! 러시아
만세!
곡물 상인이 우리 어머니를 때리네.

(독창)
아, 내 러시아 민중이여, 나는 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넌 국제주의자라는 걸,
하지만 손이 더러운 유대인 박해자들이
자꾸 네 명성을 더럽히는구나.
내 조국이 선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 무슨 치욕인가, 반유대주의자들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선언하다니,

- 76 -
(독창과 합창 다같이)
« 러시아 민중 연합».

(독창)
그래... 나는 안네 프랑크,
4 월에 피는 봄처럼 투명하구나.
말이 필요 없이, 서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좋고 그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작기만 하구나!
나뭇잎과 하늘은 더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아직 많은 것을 할 수 있지:
이 어두운 방 안에서
서로에게 달콤하게 입 맞출 수 있다!

(합창)
« 누가 온다! »

(독창)
- 겁내지 마.
막 다가온 봄이
소곤거리는 소리일 뿐이야.
나에게 와, 내게 입 맞춰, 어서! »

(합창)
- « 문을 부수잖아! »

(독창)
- « 아니야! 얼음이 깨지는 소리야! »

(합창)

- 77 -
바비 야르 위에는 쇠뜨기 소리가 메아리치고
불길한 나무들은 재판관을 닮았구나.
여기, 조용히, 모든 것이 울부짖고,
그리고 나를 발견한 나는
천천히 머리가 세는 것을 느끼네.

(독창)
그리고 매장당한 수천 명 위에서
나는 조용한
긴 외침이 된다.
난 여기에서 총살당한 모든 늙은이고,
난 여기에서 총살당한 모든 아이이며,
내 안에 어떤 것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합창)
지구 위 마지막 반유대주의자를
영원히 땅에 묻을 때
국제 노동자 연맹의 소리가 울려 퍼지길.

(독창)
내 안에는 유대인 피가 흐르지 않지만,
내가 마치 유대인인 양 모든 반유대주의자를
향한 추한 증오가 나를 짓누른다.

(독창과 합창 다함께)
보라, 그래서 난 진정한 러시아 사람이다!

2악장 Humour

(독창)
차르, 왕, 황제,

- 78 -
온 세상 절대 권력자들,
퍼레이드를 명령하였지만
재치, 그것은 명령할 수 없다.
훌륭한 분들이 사는 궁전,
그분들이 편히 쉬며 시간을 보내는 곳에

(독창과 합창 다함께)
떠돌이 이솝이 들어가자,
그들은 부랑자처럼 보였다.

(독창)
한 위선자가 작고 비천한 발로
더럽힌 저택 안,

(독창과 합창 다함께)
나스레딘60) 선생님이 던진 농담이 체스판 같은 바닥을 청소하였네...

(독창)
고귀한 분들은 풍자를 죽이고 싶었으나

(합창)
풍자는 그이들을 비웃는구나!

(독창)
풍자와 싸우는 건 어려운 일이지.
높은 분들은 종종 풍자에게 사형을 내렸고

(합창)
잘려나간 머리는 군인이 가진
창 끝에 꽂았네.

60) 나스레딘: 13 세기 현자. 재미있는 민담과 일화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 79 -
(독창)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마자,
풍자는 크게 외쳤다: «나 여기 있다!»

(독창과 합창 다함께)
그러고는 경쾌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독창)
작고 초라한 외투를 입고,
쇠약하고 다시 교수형 당한 듯한 모습으로
사람들은 그이, 정치 사범이,
교수형 집행장에 가는 것을 보았네.
풍자는 순종하는 듯,
저 세상에 갈 준비를 마친 듯하더니,
갑자기 외투에서 빠져나가며
손을 흔들고는

(독창과 합창 다함께)
안녕!

(독창)
높은 분들은 풍자를 지하 감옥에 처넣었지만,
악마는 그이를 가둬두지 못했겠지.

(독창과 합창 다함께)
쇠창살이나 돌로 쌓아올린 높은 벽도
풍자는 모두 넘어간다.
마른기침하며, 추위에 기침하며,
졸병처럼,

- 80 -
통속 노래를 부르네
총을 들고 겨울 궁전 위를 걸으며.

(독창)
그이는 자주 사악한 눈빛에 익숙하다,
높은 분들은 그이를 전혀 막지 못한다;
그리고 가끔, 풍자는 풍자로 자신을 바라본다.

(독창과 합창 다함께)
풍자는 영원하다... 영원해!
풍자는 교활하다... 교활해!
그리고 빠르다... 그리고 빨라!

(독창)
풍자는 모든 이를, 모든 것을 피해간다.

(독창과 합창 다함께)
자, 풍자에게 영광을!
용감한 녀석일세!

3악장 V magazinye

(독창)
어떤 이들은 숄을 덮고, 다른 이들은 스카프를 덮고,
영웅 같은 행동을 하기 전처럼, 일터에서처럼
가게 안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조용히 부인들이 들어오네.

(합창)
아, 그들이 떠는 수다 소리,
병과 냄비 달그락거리는 소리!

- 81 -
양파 냄새, 오이 냄새,
'카불' 소스 냄새.

(독창)
계산대 앞에 줄을 서서 난 오들오들 떠는데,
내 차례는 느릿느릿 오고,
그 많은 부인이 내뿜는 입김이
온 가게를 따뜻하게 데우네.

(독창과 합창 다함께)
부인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가족을 지키는 천사들,
힘들게 번 돈을
손에 꽉 쥔 채로.

(독창)
이들이 러시아 여성들일세.
이들이 우리 영광, 우리 양심.
이들이 콘크리트를 섞었고,
땅을 갈았고 수확하였고...

(독창과 합창 다함께)
그들은 늘 견디어왔고
그리고 늘 모든 것을 견디어낼 것이다.

(독창)
그들에겐 세상 모든 것이 가능하네,
그들 안에는 그만한 힘이 있지!

(독창과 합창 다함께)
거스름돈을 속이다니: 수치스럽구나!

- 82 -
무게를 속이다니: 죄악이다!

(독창)
속을 꽉 채운 펠메니61)를 주머니에 넣으며,
생각에 빠진 눈빛으로 바라보네,
그들이 든 장바구니와
성스러운 손을.

4악장 Strakhi

(합창)
러시아에서는 두려움이
옛 유령처럼 죽어간다.
노파처럼 교회 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여전히 여기저기 빵을 구걸한다.

(독창)
의기양양한 거짓의 왕궁에서
두려움이 엄청난 힘을 가지던 시절을 떠올린다.
두려움은 그림자처럼 아무 데서나 슬며시 나타나,
바닥 곳곳에 스며들었다.
슬그머니 사람들을 지배했고
모든 이에게 두려움의 흔적을 남겼다.
우리가 입을 다물어야 했을 때,
두려움은 우리에게 외침을,
우리가 소리쳐야 했을 때에는
침묵을 가르쳤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이 먼 옛일인 듯하다.


기억하는 일조차 이상해 보인다.

61) 펠메니(Pelmeni) : 러시아 만두

- 83 -
이름 없는 밀고에서 느끼는
은밀한 두려움,
누군가 문을 두드릴까 은밀한 두려움.
그리고 이방인에게
말을 거는 두려움?
낯선 사람에게 -
당신 부인에게조차?
그래, 행진이 끝난 뒤
침묵과 단둘이 남았을 때 느끼는
이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은?

(합창)
눈보라 속에서 건물을 짓는 것도,
포탄 아래 전투에 나가는 것도,
우리는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말하는 것, 혼잣말하는 것도
죽을 것 같이 두려웠다.
우리는 허물어지지도 부패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기 두려움을 이겨낸 러시아가
지금 적들에게 엄청난 두려움을 안겨주는 건
저절로 얻은 게 아니다.

(독창)
나는 새로운 두려움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나라에 충성하지 않는 것이 두렵고,
명백한 진실인
사상을 비난하는 것이 두렵고,
지나치게 허세 부리는 것이 두렵고,
앵무새 노릇을 하는 것이 두렵고,
불신으로 다른 이에게 창피 주는 것이 두렵고,
그리고 심한 자신감이 두렵다.

- 84 -
(합창)
러시아에서는 두려움이 죽어간다.

(독창)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때로는 나도 모르게 급한 마음에,
온 힘을 다해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유일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글을 쓴다.

5악장 Karyeta

(독창)
신부들은 되풀이했다,
갈릴레오는 위험한 미치광이라고.

(합창)
(갈릴레오는 미쳤다...)

(독창)
하지만 시간이 보여주듯이,

(독창과 합창 다함께)
미친 사람이 가장 현명했구나!

(독창)
갈릴레오와 같은 시절을 살던 어떤 학자는

(독창과 합창 다함께)
갈릴레오보다 멍청하진 않았다

- 85 -
(독창)
그이는 지구가 돈다는 걸 알았지만,

(독창과 합창)
그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독창)
배신을 저지른 후
부인과 마차에 오르면서,
출셋길을 앞당겼다고 생각했지만,

(독창과 합창 다함께)
사실, 그이 경력은 끝장났네.

(독창)
우리 지구를 다룬 자기주장을 지키려고
갈릴레오는 홀로 위험을 무릅썼고

(독창과 합창 다함께)
정말 위대한 사람이 되었네.

(독창)
봐라,

(독창과 합창 다함께)
내 눈에는 이것이 바로 '경력주의자'!

(합창)
자, 모든 출세에 박수를,
셰익스피어나 파스퇴르,
뉴턴이나 톨스토이가 이룬 것 같은

- 86 -
출세라면.
그리고 톨스토이...

(독창)
레프...?

(합창)
레프!
왜 그들을 비방했을까?
재능, 누가 뭐래도 그건 재능이다.

(독창)
아무도 비난하던 자들을 기억하지 않아.

(합창)
그러나 비난받은 이들은 기억하지.

(독창)
성층권을 목표로 삼던 모든 이,
콜레라로 죽은 의사들,
바로 그들이 출세한 이들이지!

(독창과 합창 다함께)
그들 경력을 내 본보기로 삼으리라!

(독창)
그들이 가지던 신성한 믿음을 믿는다.
그들이 지킨 믿음이 내게 용기를 주는구나.
내가 출세하는 방법은
출세하지 않는 것!

- 87 -
‘증언’의 내용에서 작품 발표 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생각을 이와

같은 내용으로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옙투셴코의 시가 발표되기 전부터 바비 야르를 알고 있지만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렇지만 시를 읽는 순간 침묵은 깨졌다. 예술은 침
묵을 파괴하는 법이다”』

쇼스타코비치는 굉장한 애국심과, 인민들을 생각하는 마음과 사람 간


의 윤리관을 통한 휴머니즘을 갖고 있었다. 이는 레닌그라드 전투 당시
음악가로써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의 행보를 통해 보면 알 수 있다.
스탈린의 사망과 흐루쇼프로 인해 이루어진 해빙기 당시 쇼스타코비치가
만들기 원했던 소재들 중‘역사적인 사실 전달’의 욕구로 인해 이 곡은
세상에 나올 수 있었으며, 당국의 성향을 알고 있는 쇼스타코비치가 비판
받을 소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사상인 ‘예
술을 통한 의미전달’로 자신의 예술가로써의 도리를 다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보들이 반공주의처럼 보여질 수 있으나, 단

지 인류애적인 감정과 작곡가에 대한 책무라는 생각과 합쳐진 결과물로써


정치관을 논할 것이 아닌 그의 예술적 성향을 논해야 할 것이다. 즈다노
프가 말한 우아한 음악을 써야 하고 음악적인 문제만 신경 써야 된다는

말을 따르지 않았던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역사적인 참상의 소재도 예술


로써의 가치를 판단했기 때문이다.

4.2. Shostakovich Symphony No. 14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중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해빙기 작품들은 쇼스
타코비치 개인의 성향이 두드러지는 모습과 그의 내면을 다루고 있는데,

- 88 -
이전에는 당의 억압 때문에 ‘죽음’이라는 소재로 예술 활동을 하는 것

이 절대 불가였으나 이 당시는 쇼스타코비치의 자유로운 예술정신이 폭발


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제14번 교향곡>은 여태껏 쇼스타코비치가 쓴

작품들 중 가장 전위적인 성향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의 예술사상에 동감하고 감정 이입했던 쇼스타코비치


로는 이 <제14번 교향곡>은 언젠간 쇼스타코비치의 손에서 나올 수밖에

없던 소재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이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사상에 대


한 연구를 진행한다면, 이 <제14번 교향곡>은 꼭 연구해야될 교향곡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제14번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가 무소르그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의“죽음과 노래와 춤”에 영향을 받아 쓴 곡으로
악장이 무려 11악장이나 구성 되어있다. 이 11악장 모두 11편의 시의 구
절을 인용하였다. 1-2악장은 스페인의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Federico García Lorca)의 시“De profundis”와 “Malagueña”, 3-8악장
은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시 “La
Loreley”, “Le Suicidé”, “Les Attentives 1·2”, “À la Santé”,
“Réponse des Cosaques Zaporogues au Sultan de Constantinople”, 9악
장은 러시아 시인 빌헬름 퀴헬베커(Wilhelm Ludwig von Küchelbecker)의
시 “O Delvig, Delvig!”, 10-11악장은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의 시 “Der Tod des Dichters”, “Schluss-Stück”를
인용하였다. 죽음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 <제14번 교향곡>의 가사는 다음

과 같다.

1악장 “De profundis”

뜨겁게 사랑에 빠진 100인의 무심한 땅속에서 영원히 잠들었네.

- 89 -
붉은 모래는 안다루시야의 도로위에 덮여있고, 푸른 올리브 나뭇가지는
코르도바를 가리었네.
이곳에 사람들이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십자가를 세울 것이다.
뜨겁게 사랑에 빠진 100인이 영원히 잠들었네.

2악장 “Malagueña”

죽음은 당도했네!
그리고 술집에서 떠났네.
죽음은 술집에서 들어왔다 떠났네.
검은 말과 음혐한 사람이 기타리아의 계곡에서 거닐고 있네.
신경의 미약한 파상 흔들림으로 인해, 총상화서62)에서 뜨거운 피와
소금 냄새가 나네.
죽음은 줄 곳 나갔다 들어오고, 나갔다 들어오네.
줄 곳 떠나고 들어오네!
죽음은 줄 곳 떠나면서 줄 곳 술집에서 떠나지 않네.

3악장 “Loreley”

라인강 연안 지방에서 금발의 요술쟁이에게로 남정네들이 사랑으로 인해


애타워하며 무더기로 왔네.
그러자 주교는 속으로 그녀의 아름다움을 용서하면서
재판소로 그녀를 소환하라고 명령했네.
“로렐라이, 자, 말해보렴.
내 눈이 너무나도 이른데 누가 너에게 이렇듯이 위험한 매력을 불어 넣었느냐?”
“주교님, 삶이 저에게 부담이 되는군요. 저의 시선은 저주 받았습니다.
누가 저를 보기만 하면 선고를 받습니다.
오! 주교님, 제 눈에는 화제의 불길이
있어요. 그러니 이같이 두려운 매력을 불에 던져주세요”

62) 총상화서 : 무한화서의 하나. 긴 화축(花軸)에 화경(花莖)이 있는 여러 개의 꽃이 어

긋나게 붙어서 밑에서부터 피기 시작하여 끝까지 피는 것

- 90 -
“ 로렐라이 너의 불길은 너무 강하구나
나 자신조차도 너의 마술에 걸려 너의
심판관이 되지 못하겠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주교님 기도해주시고 믿어 주세요
이것은 저의 죽음을 원하는 신의 의지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떠났고,
먼 나라에 있답니다.
이제 제게는 만사가 혐오스럽고,
만사가 제 관심 밖이예요.
제 가슴은 너무 고통스러워 저는 죽어야만 해요.
제 모습조차도 저에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불어넣고 있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떠났고,
그때부터 제게 무엇도 즐거운 것이 없고,
제 마음은 깜깜한 밤이예요.
“그러자 주교는 3명의 기사를 소리쳐 불렀다.”
가능한 한 빨리 로렐라이를 한적한 수도원으로 데려가라.
멀리 가거라.
강렬한 로르. 눈이 큰 로르!
3명의 기사가 그 처녀를 데리고 수도원으로 가는 중이다.
그녀는 과수병들에게 우울하면서도 준엄하게 말한다. :
“ 당신들의 엄격한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에
제가 다시 한번 성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제가 다시 한번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게 저 높은 낭떠러지에 잠깐 서 있게 해주세요”
바람은 권발63)을 날리고 그녀의 시선은 타오르네,
무익하게 파수병은 그녀에게 소리친다. :
“ 로렐라이 돌아와 돌아와”
“ 라인강 만곡부에 배 가 떠오르고, 거기에 내가
사랑하는 이가 앉아서 나를 부르네.
내 마음은 너무나 가볍고 물결은 너무나 투명하네.....”
높은 낭떠러지에서 라인강으로 그녀는 몸을 던졌다 수면에 비친

63) 권발 : 털이 곱슬곱슬한 머리, 고수머리라고도 한다.

- 91 -
자기의 라인 강 눈과 태양빛 권발을 보고서.

4악장 “Le Suicidé”

세 송이 백합화, 세 송이 백합화.... 백합화 세 송이가 십자가도 없는


내 무덤 위에 있네.
세 송이 백합화, 나의 도금을 찬 바람이 불어날리고, 비를 쏟아내서 검은 하늘은
때떄로 세 송이 백합화를 씻어주네.
준엄한 왕홀64) 옆에 있듯이 세 송이 백합화의 아름다움은 엄숙하네.
한 송이 백합화는 상처에서 자라고 있어 일몰이 불타기 시작하자마자
그 비애에 젖은 백합화는 피투성이 된 것 같이 보였다.
세 송이 백합화, 세 송이 백합화.... 백합화 세 송이가 십자가도 없는
내 무덤 위에 있네.
세 송이 백합화, 나의 도금을 찬 바람이 불어 날리네.
또 한 송이는 나의 심장에서 자라고 있네.
그래서 벌레 먹은 잠자리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네.
세 번째 송이는 뿌리로 나의 입을 파열시키네.
내 무덤 위에서 그 꽃송이들은 외롭게 자라고 그 주위의 땅은 비어 있네.
내 삶처럼 그들의 아름다움은 저주 받았네.
세 송이 백합화, 세 송이 백합화.... 백합화 세 송이가 십자가도 없는
내 무덤 위에 있네.

5악장 “Les Attentives Ⅰ”

참호 속에서 그는 밤이 오기 전에 죽을 것이다.
오! 나의 얼니 병사.
그의 지친 시선은 언제나 계속 승리를 추구했다.
이미 날아오르기를 원치 않는 승리를..
오늘 그는 밤이 오기 전에 죽을 것이다. 오! 나의 어린 병사,
나의 연인이요, 형제.

64)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표상.

- 92 -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아름답게 되길 원한다.
작열하는 횃불로 나의 가슴을 불붙게 하시오.
나의 시선이 눈 덮인 발을 그을리게 하시오.
무덤의 띠로 나의 몸통이 감기게 하시오.
피의 분규와 죽음 속에서 죽게 될 사람을 위해서 나는 아름답게 되길 원한다.
일몰은 왕관처럼 노호하고65) 장미는 불타는데 나의 시선은 푸른 새
에 매료되어 있네.
때로는 사랑과 무서운 열병의 시간이 다가왔고, 때로는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다.
돌이킬 방법은 없다. 오늘 그는 밤이 오기 전에 죽을 것이다.
오! 나의 어린 병사, 나의 연인이요 형제.

6악장 “Les Attentives Ⅱ, Madam, Look!”

마담, 보세요! 당신은 무엇인가 잃었군요....


아! 대수롭지 않아요! 이것은 나의 사랑이예요.
더 빨리 사랑을 선택하세요.
들려주기를 원합니다. 사랑을 다시 가져가기를 원합니다. 믿어 주세요
나는 웃고 있네. 웃고 있네. 웃고 있네. 웃고 있네.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하하. 하. 하. 하. 하.
나는 죽음에 의해 기울어진 사랑을 비웃고 있네.

7악장 “À la Santé”

감방으로 들어가기전 나의 옷을 홀랑 벗겼다.


운명에 의해 구석으로부터 맞아 꼬꾸라져서, 나는 어둠 속으로
내던져 졌네.
잘 있거라. 즐거운 윤무(輪舞)여 잘 있거라 처녀의 웃음소리여
여기 내 위에 무덤이 있으며, 여기서 나는 만인을 위해 죽었다.
지금 나는 죄인이고 희망이 없다.
어떤 감옥 속에서 곰처럼 이리저리 걸어 다닌다.

65) 노호하다 : 성내어 소리지르다.

- 93 -
아 하늘! 보이지 않는게 더 좋다.
여기서 나는 하늘에 대해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
어떤 감옥 속에서 곰처럼 이리저리 걸어 다닌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슬픔을 가져다 주었습니까?
전능한 신이여 말해 주십시오.
오!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내 눈에 눈물은 말랐고, 얼굴은 마스크를 닮았네.
감방의 원천정 아래 얼마나 많은 가엾은 심장들이
뛰고 있는지를 당신은 보고 계십니까? 제게서 가시관을 벗겨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가시관은 제 뇌 속으로 파고 들겁니다.
하루 해는 저물었다.
머리 위에 있는 램프가 켜지고 어둠에 의해 둘러싸인 만물은 조용하다.
우리 방에는 단둘이 있다.; 나와 나의 이성

8악장 “Réponse des Cosaques Zaporogues au Sultan de Constantinople”

너는 백베나 바르나바66) 보다 더 나쁜 사람이다.


마왕과 이웃에 살면서 너는 가장 추악한 죄에 빠졌다. 어려서부터 부정
에 의해 양육됐음을 아느냐; 너는 안식일을 우리 없이 거행한다.
부패를 말하는 가재. 살로니까67)의 쓰레기. 이야기할 수 없는 나쁜 꿈.
한쪽 눈이 멀고, 악취가 나며 코가 없는 너는 네 어머니가 설사의 경련
속에서 몸을 뒤틀 때 태어났다.
뽀들리아68)의 흉악한 형리, 보라: 너는 온통 상처, 궤양, 딱지 투성이다.
암말의 엉덩이, 돼지의 삐죽한 코, 이 모든 약을 내가 너의 종기를 치료
하기 위해서 사도록 해주마!

9악장 “O Delvig, Delvig!”

66) 바르나바 : 성경에서 위로의 아들이란 뜻


67) 살로니카 : 동남유럽 회랍북부 살로니카만 안에 있는 도시
68) 뽀들리아 : 우르라이나의 지방명

- 94 -
오 델비그, 델비그! 고상한 일과 시의 보답은 무엇 이요?
재능은 무엇에 쓰고 악인과 우인들 사이에 위안은 어디 있소?
준엄한 유배날69)의 손에는 악인들을 향한 무서운 채찍이 번쩍이며
그들의 뺨으로부터 흉조를 빼앗으며, 폭군의 권력은 두려워 떨기 시작하는구려.
오 델비그, 델비그! 박해란 무엇 이요? 불멸이란 영감을 받은 용감한 일과
유쾌한 성가의 운명과 갈구려.
그러니 자유롭고, 기쁘며, 자부심에 찬 우리들의 결합도 죽지 않을 것이요!
행복 속에서도, 불행 속에서도 영원한 뮤즈의 사랑받는 자들의 결
합은 굳건하리!

10악장 “Der Tod des Dichters”

시인은 죽었다. 그의 얼굴은 줄곧 창백하고 무엇인가를 거부했다.


그의 얼굴은 한때 세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았으나 이 지식은 소멸되었다.
그리고 냉담한 세월로 되돌아갔다.
이 길이 얼마나 귀중한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
오! 세상과 그는 모든 것이 너무나 일체였고, 호수, 골짜기, 평원이
그의 얼굴의 본질을 이루었다. 그의 얼굴은 광활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향해 공허하게 포옹한다. 그러나 부패할 예정인 부드러운 과일처럼
시선에 노출된 두려운듯한 이 마스크는 죽을 것이다.

11악장 “Schluss-Stück”

죽음은 전능하다. 죽음은 경호 위에 있으며 행복의 시간 속에 있다.


최상의 삶의 순간에 죽음은 우리들 속에서 괴로워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갈망하며, 우리들 속에서 울고 있다.
죽음은 전능하다. 죽음은 경호 위에 있으며 행복의 시간 속에 있다.
최상의 삶의 순간에 죽음은 우리들 속에서 괴로워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갈망하며, 우리들 속에서 울고 있다.70)

69) 유베날 : 로마의 풍자시인


70) 최영선, “D. Shostakovich의 Symphony No. 14에 관한 연구「숙명여자대학교, 석사

- 95 -
11악장이나 되는 큰 규모로 구성된 <제14번 교향곡>은 각각 악장마다
다양한 죽음에 관한 주제를 갖고 있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

한 것이라고 생각한 쇼스타코비치는 죽음 뒤에 아무것도 아닌 것에 따른

삶과 죽는 그 순간의 다양한 종류와 의미에 중요성을 알고 있다. 이는 평


소 독서를 좋아했던 쇼스타코비치가 체호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예술적

의미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통을 두려워하며 죽음이 그리 멋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71)

또한 공감 할 수밖에 없던 이유로는 쇼스타코비치의 건강에 있다. 당


시 쇼스타코비치는 1965년에 ‘회백질척수염’이라는 소아마비 진단을 받
고 연주를 할 때나 작곡을 할 때 팬을 집는 행위 등에 어려움을 겪었으
며, 1966년에는 심근경색을 앓고 죽음을 가깝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곡의 구상 시기는 1960년대 초에 구상했는데, 1960년은 쇼스타코
비치가 입당했던 시기이다. 입당을 한 사실에 대해 ‘순응주의자다’,
‘당의 강제에 의해 입당한 것이다’ 등의 여러 설과 논쟁이 많고 이 작
품들에게서 수정주의 혹은 반공주의로 상반된 정치해석의 논란이 있다.
곡의 대한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에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을
대입하였을 때 쇼스타코비치가 순응주의자였으면 입당하고서 이러한 ‘죽
음’의 주제를 가지고 곡을 쓰진 않았을 것이고, 반공주의자였다면 입당
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서 정치 프레임을 배제하여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쇼스타코비치는 음악과 문학이란 예술을 사랑하고

학위논문」, (2000), 46-60p


71)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95p

- 96 -
예술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던 예술가에 불가할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

다.

4.3. 솔로몬 볼코프

<그림7> 솔로몬 볼코프

러시아 저널리스트인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는 1944년 4월


17일에 타지키스탄 공화국의 북서부에 있는 현재는 후잔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레니나바드에서 태어났다. 볼코프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바이올

린 공부를 했으며, 음악학 석사를 나왔으며, 러시아 저널리스트이자 음악


학자로 활동한 그는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가 콜롬비아 대학의 러시아 연
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의 전문 분야는 러시아와 소비에트 음악

- 97 -
의 역사에 대한 역사적·미학적 연구, 음악 이해와 연주에 대한 심리학을

연구했다.
솔로몬 볼코프가 작성한 1979년 10월에 출판된 “증언(Testimony)”

은 진위성과 정확성에 대해 논란이 많은 책이다. 서술된 내용의 출처가

객관성을 판단하기에 부족하거나 없었던 점과 쇼스타코비치의 가족들 중


그의 아들 막심 쇼스타코비치(Maxim Shostakovich)가 “증언”에 대해 사

실이 아니라고 비판하다가 다시 이 내용에서 나오는 사람은 저희 아버지


가 맞다고 증언하는 등의 번복했던 사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 삶의 후기
에 결혼생활을 한 이리나 수핀스카야(Irina Supinskaya) 쇼스타코비치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증언”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4.3.1. 솔로몬 볼코프 “증언” 분석


솔로몬 볼코프가 쓴 “증언”은 아직까지도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는
책이다. 로렐 E. 페이의 “Shostakovich: A Life”와 엘리자베스 윌슨의
“Shostakovich: A Life Remembered”는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논의를 진
전시킨 핵심적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었고, 해당 문헌에선 “반체제 사회
주의자” 혹은 “이상적 사회주의자”정도의 정치 성향을 서술한 반면에
“증언”에서는 ‘스탈린은 독재자다’혹은 ‘구역질이 난다’등의 표현
을 통해“반공주의자”로 서술하고 있다.72) 쇼스타코비치의 생각에 대한
진실들이 양면성을 띄고 있으니, 해당 문헌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조심스

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라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의 사상 및 “증언”에서 말하는 쇼스타코비치의 입장을 세


부적으로 따져야 한다.

72) ‘증언’에서 스탈린의 일화들이 나올 때, 쇼스타코비치의 입장에서 서술된 내용들은

독재자들의 뻔한 행위를 서술하거나 ‘거짓말이다’, ‘믿지 않는다’, ‘구역질이 난다’

등의 거친 표현을 썼다.

- 98 -
‘증언’은 전기처럼 그의 생애를 차례대로 나눠서 서술한 서적이 아

닌 기존 회고록의 뜻 그대로의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의 생애에서


교류했었던 지인들의 회상들을 읆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있었던 사건들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되어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스승이였던 글라주노프와의

있었던 일이나, 스탈린과 연관되었던 사건과 대화, 쇼스타코비치와 교류


가 있었던 예술가 지인들과의 대화 내용과 역사적 사실들도 같이 서술되

어 있고, 그에 따른 입장을 쇼스타코비치 시점에서 주장하고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내적 요인, 즉 정신적인 상태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지인이자 작가였던 미하일 조셴코는 자신의 정신상태를 통한 쇼스타코비
치와의 내적 교류를 형성하여 정신적인 교감과 위안을 삼을려고 하였다.

『조셴코와 나는 자미야틴의 집에서 자주 만나곤 했다. 조셴코는 자기 성찰이라는


문제를 놓고 계속 이야기하면서 왜 자기가 우울한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한편 끝없
는 자기 분석에 빠지는 버릇을 극복할 복잡한 방법을 내게 털어놓곤 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73)“그냥 보드카를 좀 적게 마셔요”』

『이렇게 조셴코는 자신의 정신적인 아픔과 자기 자신의 삶의 성찰을 쇼스타코비치


와 대화를 통해 교감하고 나누면서 쇼스타코비치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주고 있
다.』

『조셴코도 내 우울증을 없애주려고 끝없이 나를 들들 볶았다. 그는 말한다. “왜


그렇게 우울해하는가? 이유를 설명해줄까? 이유를 알고 나면 기분이 금방 나아질
거야.“ 그러면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그러지 말고 우리 포커나 한판 합시다.』“74)

73) 보드카를 좀 덜 마시라는 말은, 체호프가 자아성찰을 하다보면 견디기 힘들다는 친

구에게 조언식으로 했던 말을 쇼스타코비치가 인용하여 쓴 말이다.


74)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414-415p

- 99 -
:“증언”에서의 조셴코가 바라본 쇼스타코비치의 상태는 우울증이
있다고 판단한다. 쟈미야틴과 같이 작업한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1936년도이고 이 작품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형식주의적 작품이라

는 비판을 받았으며, 직후 스탈린의 대숙청이 일어났으니, 여기서 말하는


쇼스타코비치의 상태가 자신의 작품에 비판을 받고 대숙청이 휩쓸고 간

직후의 문헌으로 보여지고, 이 역사적 사건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를 통해


정신적으로 평소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 것으로 확인된다. 실상 그의 친지
들은 “증언”이 쇼스타코비치의 평소 모습보다 지나치게 우울한 편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 장난을 좋아하고 인생을 유쾌하게
즐기는 스타일이라고 지인들은 말한다. 쇼스타코비치가 가진 사상과 그의
성향들이 지인들이 바라보는 시점에서 그를 정의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쇼스타코비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두고 네 가지 입장으로
써 나뉜다.

첫 번째, “증언”이 발표되기 이전까지 쇼스타코비치는 충실한 이데


올로기의 구현자로써 보는 입장이었다.

두 번째, “증언”이 발표되고 나서 ‘냉전의 기간 중 희생된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입장이다.

세 번째, 1991년, 구 소련의 붕괴 이후 억압이 풀어진 상태의 사람들

의 증언을 통해 다시금 재조명해야 된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음악


을 통해 당국에 비판을 표현해온 반체제 음악가라는 입장이다.

- 100 -
네 번째, “증언”의 내용이 진실이 아니고, 쇼스타코비치는 기회주

의자 혹은 체제협력자라는 입장이다.

현재의 음악계의 동향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입장의 지지자는 힘을

내지 못하는 입장이며, 세 번째와 네 번째 즉, 수정론자와 반(反)수정론자


의 입장으로 나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쇼스타코비치가 위의 4부류의

입장 속에 속해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에 쇼스타코비치의 관련 문헌들을


살펴보니 의구심이 든다.
볼코프의 ‘증언’에서 나온 그의 아슬하게 피해가는 방식을 ‘쇼스
타코비치와 스탈린’챕터에서 거론했지만, 이에 역사적 문헌에 통해 확인
된 사실과 그의 음악적 행보 등을 통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볼
코프 ‘증언’에서 서술한 <제7번 교향곡>에 대한 내용은 몇 가지 문제점
들이 있는데, 볼코프가 주장하는 부분은 <제7번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이 독일군이 침공하기 훨씬 전부터 갈수록
변주되어가는 해당 주제를 이미 연주하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를 통해서 레닌그라드 전투에서의 독일군 침공이라기보다 모든 것을 파괴
했던 스탈린을 암호화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교향곡 제7번>은 전쟁이 나기 전에 구상되었다. 그런 만큼 그 곡을 히틀러의 침


입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소위 ‘침공’ 주제는 독일군의 침
입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 주제를 쓰고 있을 때 나는 인간성에 대한 또 다른 적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교향곡 제7번>을 <레닌그라드>교향곡이라 부르는 데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
렇지만 그 곡은 포위된 레닌그라드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곡은 스탈린이
이미 파괴해놓았고 히틀러는 그냥 마무리만 하면 되었던 레닌그라드에 관한 음악이
다.』

- 101 -
하지만 이 내용은 본인이 쓴 책에서 모순이 있다. 이러한 주장과 반

대되는 내용으로 레닌그라드 전투 당시의 상황을 서술하는 내용이 나온다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를 아주 빠르게 썼다.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온 세상

이 전쟁판이었다. 나는 인민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전쟁을 겪는 우리나라의 이미

지를 그려내고 싶었으며 그걸 음악으로 포착하고 싶었다.』75)

이것은 해석에 따라 여러 가지 의견으로 나올 수 있는 내용이지만,


앞선 방송을 통해 발표한 확인된 문헌적 사실을 함께 적용하면 쇼스타코
비치가 인민들의 전쟁에 따른 위로, 규합에 따른 목적성이 있다는 객관적
인 답을 알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제2번 교향곡>, <제7번 교향곡>,
<제9번 교향곡>, <제11번 교향곡>, <제12번 교향곡>, <제13번 교향곡>에서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전부 혁명과 전쟁의 주제를 가
지고 있는 작품들이다. 볼코프의 ‘증언’에서도 역사적 사실과 그에 따
른 의미를 작품에 녹이려고 했다는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이때 코사크병사가 검으로 소년을 찔러 죽였다.


나는 그 소년을 잊지 못했다.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 일에 관해 여러번 음악을 쓰려고 했었다.76)

이 비극의 참상을 목격했다는 주장은 여러 문헌에도 나와 있어 사실


에 관해 신빙성이 높다. 하지만 ‘증언’에서 그 나온 다음 문장에선 모
순이 존재한다.

75)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369-370p


76)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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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나는 <혁명의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장송 행진곡>이라는
제목의 피아노 소품을 하나 쓴 적이 있다. <교향곡 제2번>과 <교향곡
제12번>도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여기서 나온 <제2번 교향곡>은 10월 혁명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희

생자를 기념하는 주제가 아니라 당시 혁명의 주도자였던 레닌과 볼셰비키


관료들의 투쟁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당국에 오더를 받고 제작한 사실과
시인 알레산드르 베즈미엔스키(Alexander Bezimensky)의 시 구절을 통해
가사를 적었으며, 가사 자체 내용도 레닌을 업적과 볼세비키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있으니 10월 혁명 희생자를 위한 주제가 절대 아니다. 이는
쇼스타코비치를 반공주의자로 전달하기 위해 생긴 모순이라고 예상된다.
쇼스타코비치가 <제7번 교향곡>을 구상하고 작곡할 당시의 성향과 이후
그의 행보를 통해서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주제를 채용하여 쓰고 싶어 했
다는 점과 국가적 위기, 인민들의 희생을 통한 애환과 애국심등의 의미전
달의 성향은 앞선 연구를 통해서 알 수 있어서 이 글에 신빙성을 더해주
는 듯 보일 수도 있으나, 곡의 가사의 내용부터 볼코프가 서술한 내용과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이 내용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기엔 어려움이 있어
역사적 사실과 의미전달이라는 포커스로 시점을 바라봐야 하고, 이 시점
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정치관이 아닌 그의 예술사상이다. 또 쇼스타코비
치의 정치 성향에 대해 언급한 문구가 있는데, 이 문구에서도 모순을 발

견할 수 있다.

『결코 내 음악을 통하여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려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또 결코


그들과 ‘애정 관계’에 빠지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죄목을 걸어 나를
비난했지만, 나는 절대로 그들의 총애를 받은 적이 없다. 내가 권력에 너무 가까이
갔다고 말하지만, 그건 착시다 아닌 건 아닌거다.

- 103 -
가장 간단하게 해명하려면 사실을 보아야 한다. 이건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레닌은 내 음악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77)

여기서 말하고 있는 주장은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은 당시 당국에 협력

한 적이 없고, 당국에서도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제2번 교향곡>이나 <제5번 교향곡>, 오라토리아 <숲의

노래> 등의 당의 비위를 맞춘 작품들을 통해 이 주장은 거짓이다라고 말


할 수도 있지만, 쇼스타코비치 내면에서 자신은 체제에 협력하려고 할 생
각이 없었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아직도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점에서 확실한 것이 없어 모순이 아닌 단순
한 주장으로 보이지만, 그다음 문구로 인해서 여기서 나오는 이 주장은
모순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말하는 레닌은 스탈린 정권이 들어서기 전 볼

셰비키를 이끌던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1924년


1월 21일에 사망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예시로
설정한 것은 오류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역사적 문헌에서 나온 정보를 토

대로 작곡을 시작한 시기를 언급하자면 1917년부터로 나와 있다. 하지만


당시 볼셰비키 최고 권력자였던 레닌이 그의 음악을 알려면 레닌이 생존
해 있을 시기인 1924년 1월 21일 이전에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이 명성이

높아져서 유명해져야 들을 수 있었을 거라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쇼스


타코비치가 제대로 음악가로써 서막을 알린 것은 그의 음악원 졸업 작품
으로 나온 <제1번 교향곡>이며, 이 교향곡은 1926년에 말코의 지휘를 통

해 초연되었다. 게다가 이에 대한 증거로 볼셰비키에서 레닌과 함께 당을

이끌었던 루나차르스키(Anatoly Lunacharsky)의 레닌은 음악을 들으면 우

77)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255p

- 104 -
울해진다는 회상 증거를 내놓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도 앞서 말한 시기로

인해 적절하지 않다. 한편으로 이 내용도 볼코프가 주장한 반공주의자라


는 주장에 힘을 주려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으나 한편으론 그냥 단순히

‘권력에 관심이 없다’로만 이해할 수 있는 문구이며, 뒤에 증거들을 통

해 이 문구의 객관성이 매우 떨어지긴 했으나 이 주장을 피력하려면‘정


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닌 예술만을 생각하는 예술가’라는 주장에도

반박을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반공주의자로 표현하기엔 전체적인 주장


을 통한 이미지들이 다소 약한 부분들이 많이 있다. 특히 <맥베스 부인>
발표 직후의 비판의 상황이나, 대숙청, 즈다노프의 비판의 사건들에서 생
명의 위협을 받아 겁먹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을 많이 그리고 있다.
학자들이 ‘증언’은 쇼스타코비치를 반공주의자로 표현되고 있다는 주장
들이 이 회고록 내용 안에서 간혹 나오는 글귀로 그렇게 판단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특정한 정치관을 씌울 때, 그 정치관의 스타일에 대해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반공주의자는 뜻과 마찬가지로 해당 체제에
굉장히 극단적인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된다. 하지만 이
‘증언’에서 나타나는 모습들에서 ‘극단적인 반감’이라는 모습들이 간
간히 나오긴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훑어보고 이 쇼스타코비치라는 인물
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한 흐름을 읽어야 한다. 이 ‘증언’이라
는 서적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다 보니 모순이 있다는 것을 여러 가지 발
견했다. 다음 문구에서도 쇼스타코비치가 반공주의자라는 내용이 서술되
어 있다.

『그러므로 나의 저항은 나에게 치명적인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다.』78)

78)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3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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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제9번 교향곡> 당시의 쇼스타코비치의 회상에 대한 내용

이다. 스탈린이 원했던 베토벤 <제9번 교향곡>같은 곡을 쓰지 않았기 때


문에 분노를 사게 되어 생명의 위협을 초래했었다. ‘증언’에서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을 찬양하는 음악은 쓸 수 없었다고

하며, 이유는 그냥 쓸 수 없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 내용에서는 단순히


예술가들의 예술적 감성에 의해서만 관련된 해당 소재의 작곡을 가능한지

혹은 불가능한지를 내면에서 고민했다가 하지 못했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소지가 있는 부분인데, 다음 장에 나오는 저 ‘저항’이라는 단어는 쇼스
타코비치가 마치 스탈린에게 극심한 반공주의를 통해서 곡을 쓰지 않았다
는 느낌으로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서 본 쇼스타코비치의
성향은 책임감이 뛰어난 모습, 유머러스한 모습과 풍자하는 모습, 음악에
지나친 열정을 가지고 있는 모습, 비극에 대한 표현, 고통과 애환 그리고
애국을 위한 예술적 표현 등으로 보여지고 있는데, 저 표현은 다소 극단
적이다. 이렇듯 ‘증언’에서는 내용의 흐름이 갑자기 깨지는 곳들이 종
종 보여진다. 정치적으로 얕은 내용이 나올 때는 굉장히 예술가적 마인드
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정치적으로 깊은 내용이 나올 때는 지나친 반공주
의로 나온다. 이러한 괴리감 때문에 사실적 모순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에서 어색한 부분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즈다노프의 비판을 받았을 당시인 1949년에 쇼스타코비치는 뉴욕에서 열
리는 세계평화를 위한 문화와 과학 위원회에 참석에 따른 미국 여행을 준
비하라는 명령을 당에서 받았으며, 이를 거절했다가 스탈린이 직접 쇼스

타코비치에게 연락해왔다는 내용이다. 그 내용 들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자


신과 동료들의 음악이 연주되지 않고 이를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이 이에
대한 이유를 물을 텐데 뭐라고 대답해야 하냐고 직접적인 질문을 한 태도

와 스탈린이 모르는척하며 그 연주를 하지 말라는 지시는 누가 내렸냐는

- 106 -
질문에 대놓고 지도자 동지들 가운데 한사람이지 않겠냐며 말하는 내용과

스탈린이 쇼스타코비치에게 건강은 어떠한지 묻자, 구역질을 한다는 간접


적인 의미전달을 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데 글에서 보여지는 쇼스타

코비치가 스탈린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공격적인 태도, 즉 반공주의적

행동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앞선 1948년부터 즈다노프 비판 이후의 서술


한 내용과 이에 따른 다른 문헌의 출처들에 따르면 쇼스타코비치는 굉장

히 자살 충동이 심할 정도로 심각한 시기였었으며, 동일하게 굉장한 공포


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다른 여러 문헌이 있었으며, 볼코프의 글에
서도 심각한 상황에 공포감과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이러한 공격적인 태도는 앞 뒤가 맞지가 않아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느낄
정도로 어색하다. 또한 바라보는 시점을 통해서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는
문구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쇼스타코비치가 즈다노프의 법령을 통해
발표된 즈다노프의 발언에서 음악이란 어떤 것이여야 하는지에 대해 서술
한 내용에 자신의 생각을 서술한 내용이 있다. 당시 즈다노프가 주장한
음악론은 “음악은 아름답고 우아해야되고, 항상 고상해야 한다. 이 조건
을 충족하지 못하면 존재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더 이상 음악이라
말할 수 없다.”라는 것인데, 이러한 고급 예술을 지지하는 자들을 쇼스
타코비치는 탐미주의자라 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런 관점을 언제나 격렬하게 반대해왔으며 그것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


가려고 노력했다. 나는 언제나 음악이 적극적인 세력이 되기를 희망한다.』79)

음악을 탐미주의적80)이여야 된다고 주장하는 당국 체계에서 격렬히

79)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378-379p


80) 탐미주의 : 미(美)가 인생에 있어 가장 높은 단계의 것이라 하여 미를 위한 미, 예

- 107 -
반대하는 반공주의적 성향으로 묘사되고 있다. 1948년 이전의 작품들에서

쇼스타코비치가 보여준 행보를 통해 그가 자신의 예술사상에 반하는 상황


과 문화에서 자신의 예술사상을 피력한 작품들을 많이 뽑아냈기 때문에

이 내용에 부정할 순 없긴 하지만, 해석 포인트가 다르게 보여질 수 있다

고 판단된다. 음악이 적극적인 세력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것은 정치적으


로 판단하기보다 단지 자유로운 창작 활동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위해 아

무도 건드릴 수 없는, 음악이라는 문화적인 형태로 힘이 되고 권력이 되


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쇼스타코비치의 내면에서는 특정한
정치관보다 예술적 가치관이 우선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과 함께
앞선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 성향의 변화를 통해 단순히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예술을 이루고자 억압받게 된 원인인 정책이나 당의 시선 등을 통해
변명하듯이 행동하거나 혹은 그때 당시 시대적 배경을 통해 느낀 바를 단
순히 예술이라는 항목하에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시당초
쇼스타코비치의 가족들이 정치적 주제로 열광하여 토론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였고81) 쇼스타코비치 집안에 다양한 정치관을 가진 사람들
이 손님으로 놀러와 잡담을 나누는 모습을 유년시절 쇼스타코비치가 지켜
보며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곤 하지 못하겠지만, 쇼스타코비치 집안이
정치적인게 얽혀있는 집안이였다면 아버지였던 볼레슬라보비치가 사망한
이후에, 집안이 심각한 가난에 시달리지 않았을뿐더러 어머니였던 소피아
가 그렇게 지독하게 일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쇼스타코비치가 돈을 벌기
위해 극장에 취직하는 등의 음악을 생활고의 수단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

다. 솔로몬 볼코프의 “Testimony”를 탐독하고 분석해보니 전체적으로


볼코프 자신이 인터뷰하고 직접 본 것들을 썼다는 주장하에 출처가 별로

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입장.


81)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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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고 사실 여부에 대한 증명이 없다. 게다가 역사적인 사건들이나 쇼스타

코비치의 생애와 생각, 이에 따른 고견을 서술함에 있어 사건들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지 않고 생략된 부분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게다가 책

안에서의 반공주의자라는 주장에 힘을 실리게 하기 위해 반공주의적 성향

에 포커스를 맞춰서 서술하다보니 굉장히 과격한 단어 선택들도 보였고,


간간히 여러 모순점도 보여 생각의 객관성이 결여되어 문제의 소지가 있

으나 그러한 모순 부분들을 도려내고 연구해보니 쇼스타코비치의 전반적


인 성향은 착한 심성에 인간으로써 필수 덕목이라 하는 도덕적 윤리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에 크게 관심 있어 보이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관심있게 몰두하고 모든 힘을 소진한 분야는 음악이였으며, 음악에
대한 배움에 대한 열정, 창작욕에 대한 열정을 눈여겨 볼 수 있었다. 또
한 역사적인 사실과 그에 따른 의미를 전달하려는 예술가적 책무와 창작
에 관련된 그의 사상이 예술정신에 의거하여 행해졌다는 내용들이
“Testimony“의 쇼스타코비치의 회상을 서술한 부분과 지인들의 회상에
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4.3.2. “증언”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성향


‘증언’에서 주장하는 쇼스타코비치의 성향을 알려줄 수 있는 대표
작은 칸타타 <라요크>이다. <라요크>는 즈다노프 비판과 당국의 반형식주
의 캠페인, 그리고 그 캠페인을 조직한 사람들을 조롱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작품이다.82) 작곡 시기는 1948년, 1957년, 1960년 세 개의 시기 중

언제 작곡한 것인지 아직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이 <라요크> 하나로만


봐도 굉장한 반공주의자로 판단된다. 하지만 ‘증언’내에서 서술하고 있

82)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3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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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제7번 교향곡> 작곡, 초연 당시 상황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사실적 전

달의 중요성과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에서의 사실적 전달이 본인의 책무라


고 서술되어 있으며, 이후 역사적인 사건들을 음악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

려 했다는 점, 예를 들면 <제12번 교향곡>의 1917년 레닌을 그리려했다가

실패했다는 내용 등을 통해 쇼스타코비치는 역사적 사건을 사실적으로 보


여줘야 된다는 리얼리즘 예술을 고려했다는 점, 여기서 <제10번 교향곡>

이 스탈린과 스탈린시대를 표현한 것이다라는 볼코프가 주장한 내용은 악


랄한 스탈린의 체제를 비난하기 위해 <제10번 교향곡>의 의미를 본인의
주장과 섞어 넣었다는 주장83)도 Laurel E. Fay는 이에 따른 증거가 없다
고 반박하였지만 이 모순점을 사실로써 판단하였을 경우에 체제비난용 의
미인 반공주의자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역사적 사실 전달에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어 리얼리즘 예술에 대한 고려성을 배제 못하는 점
과 또한 정치적으로 연관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행동과 그에 따른 성
향으로 설명된 <제9번 교향곡>등을 통해 ‘증언’에서 보여지는 쇼스타코
비치는 정치적인 해석을 통해 특정한 정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엔 어
려우며, 예술적인 시점으로 작품 구상과 사건을 다가가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5. 수정주의 해석에 의한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를 수정주의자로 보는 시각은 앞선 “Testimony”에 의


해 나타난 반공주의적 해석에 의한 입장과 이후 이에 반론하여 나타난 반
(反)수정주의적 해석에 의한 입장 이후에 일부 의견에 반론하여 나타난

83) Laurel E. Fay는 <제10번 교향곡>이 스탈린과 스탈린시대를 표현했다는 것에 어떠

한 문헌적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 110 -
새로운 정치해석이다. 앞서 그의 대표작품인 <제13번 교향곡>과 <제14번

교향곡>와 함께 이 시기와 회고록 상 스탈린과 당국에 관해 굉장히 과격


한 그의 내면의 표출을 하였다는 문구에 의해 반공주의적 해석을 한 것에

반해 이전 스탈린 체제에서 비롯된 억압된 현실에서 회피성 행동, 그리고

당에 순응했다는 점과 쇼스타코비치가 정치적으로 혹은 그의 내면에서 과


격한 언행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토대로 주장되었다. 수정주의적 해석

의 작품은 앞선 반공주의적 해석의 논란의 여지와 함께 서술하였으므로


이 파트에선 생략하였다. 쇼스타코비치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 대표 권위
자인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이 펴낸 “A-Life Remembered”
를 통해서 쇼스타코비치가 수정주의적 예술가였는지 혹은 특정한 정치관
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정치적인 해석을 해보고자 한다.

5.1. 엘리자베스 윌슨

<그림8> 엘리자베스 윌슨

- 111 -
캠브릿지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 석사를 나오고 영국의 외교관이였

던 던컨 윌슨(Duncan Wilson)과 엘리자베스 플레밍(Elizabeth Fleming) 두

부모에게서 1947년에 런던에서 태어났다. 엘리자베스 윌슨은 영국, 중국,


미국의 학교에 다녔고,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

비치(Mstislav Rostropovich)와 함께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첼로를 공부했

다. 이후 루마니아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Radu Lupu)와 결혼했었으며,


그녀는 영국과 유럽 등에서 저명한 팀들과 함께 연주자로써 활동하고 교
사로써도 경력을 쌓았다. 다양한 러시아 주제를 통한 라디오와 콘서트를
고안하여 발표하였으며, 이러한 활동과 함께 음악학자로서 Shostakovich의
전기를 저술했다. 그녀는 최근에 2007년 4월 Faber에서 Mstislav
Rostropovich : Cellist, Teacher, Legend를 출판하였으며, 그녀는 쇼스타코
비치 학자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고,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정치관을
수정주의자라고 주장하며 반(反)수정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과 의견대립
중에 있다.

5.1.1. 엘리자베스 윌슨“A-Life Remembered” 분석


“A-Life Remembered”는 1994년 발매된 책으로, 쇼스타코비치를 연
구하는 학자들 중 최고 권위자라고 평가받는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이 쓴 서적이다. 수정주의자 입장에서 주장을 펼치고 있는 엘리자

베스 윌슨은 Solomon Volkov의 ‘Testimony’를 통한 반공주의자와 가장


대립적인 입장에 있으며, “A-Life Remembered”에서도 ‘Testimony’의
반공주의적 내용에 따른 주장을 비판하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고 쇼스타코

비치의 동시대 사람들의 회상과 그에 따른 성찰을 바탕으로 내용이 진행


된다. 방대한 자료수집에 따른 쇼스타코비치의 가족들과 지인들의 회상을

- 112 -
역사적 사건과 엮어서 그 내용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로렐라이. E. 페이와 솔로몬 볼코프는 그들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하여 돌출된 쇼스타코비치의 성향이란 결과물을 정치적인 이

분법에 적용하여 주장하고 있지만, 엘리자베스 윌슨은 쇼스타코비치의 성

향을 단순한 정치관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도덕적인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천성적으로 여리고 순수했으

며, 자신의 주변인들과 소련 국민들이 차례차례 죽어 나가는 광경을 통해


서 슬픔과 애환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방식으로 인내하며
이를 음악이라는 매개체로 의미를 전달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 노력
하였다. 엘리자베스 윌슨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의 성향과 정치관
은 무엇인지 분석해보았다.

당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책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던 샤기냔은


작가 미하일 조쉬첸코에게 쇼스타코비치의 성격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부
탁했다. 조쉬첸코의 답변은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You say that he is ‘frail, fragile, withdrawn, yet infinitely direct, pure as a
child’. That is so; but if that was all, then one would never achieve great art.
He is exactly as you say, plus something else - he is tough, ascerbic, extremely
intelligent, strong, perhaps, and not altogether good-natured (although his mind is
good-natured). [...] Great contradictions are at play within him. One quality
obliterates another. It is conflict of the highest degree [...] almost to the point of
catastrophe.』

: 당신은 그가 ‘연약하고, 부서질 것만 같고, 안으로 침잠해 있지만, 대단히 직설적


이고, 아이처럼 순수하다’고 말하죠. 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면, 위
대한 예술을 절대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는 당신이 말한 그대로에다가, 또 다른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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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강인하고, 신랄하고, 극도로 지성적이며, 강하고, 어쩌
면 완전히 좋은 천성의 사람만은 아닐 겁니다 (그의 마음은 좋은 천성을 가졌지만
요). [...] 그의 내면에는 엄청난 모순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한 특성이 다른 특성을
지워버립니다. 거의 재앙 수준에 이르는 [...] 최고 수준의 갈등이에요.

특정 사람의 성향이나 심리를 딱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운 편이며, 어

떤 사람이든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쇼스타코비치도 마찬가지였는


데, 유년시절 본인이 가지고 있던 도덕적 윤리관을 형성시킨 여리고 순수

한 성향과 이후 자라면서 시대적인 사건과 환경들을 통해 형성된 참고 인


내하며 생긴 강인한 성향, 음악이라는 창작의 고통에 따른 예민한 성격이
나 섬세한 성향과 문학 서적을 통해 형성된 지적인 성향 등이 그러하다.

『'Dmitri Dmitriyevich, please consider letting the orchestra take over the first
eight bars in the Finale so as to give me a break, then at least I can wipe the
sweat off my brow.’』

: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피날레에서 첫 번째 여덟 마디 동안 오케스트라가 연


주하도록 고려해주세요. 그래서 최소한 제가 이마에 땀을 닦을 휴식 시간을 갖게
해주세요.”

『Immediately Dmitri Dmitriyevich said, ‘Of course, of course, why didn’t I think
of it?’ By the next day he had made the necessary correction by giving the first
statement of the theme in the Finale to the orchestra. The violin soloist comes in
with the passage work afterwards. Dmitri Dmitriyevich was able to make this small
but significant alteration without in any way changing the form and structure of
the music.』

: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는 바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물론이죠.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다음날까지 드미트리는 피날레에서 오케스트라에 첫 번째 주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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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를 넘겨 필요한 수정을 했다. 바이올린 독주자는 패시지 워크 후에 연주를 시
작했다.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는 어떤 방식으로도 음악의 양식과(221p)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이 작지만 엄청난 수정을 할 수 있었다.

『In such cases of detail, Shostakovich was never obstinate, and he liked to take
into consideration any valid objection from a performer. On the other hand, he
always refused to make any correction that would affect the overall shape or
structure of a work. If he didn’t like something, his motto was ‘I’ll correct it
in my next composition’. He certainly never cut a single bar out of any of his
symphonies.』84)

: 이러한 상세한 부분에 대해서 쇼스타코비치는 절대 고집부리지 않고 연주자의 타


당한 이의를 고려하려고 했다. 반면에 그는 작품의 전체적인 형태나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그 어떠한 수정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것을 원치 않으면 그의
모토는 ‘내 다음 작품에서 고치겠다.’였다. 그는 그의 교향곡에서 결코 한 마디도
잘라내지 않았다.

특히 여기서 눈여겨볼 그의 성향은 순하고 좋은 천성을 지녔다는 것


이다. 이러한 착한 성향에 대한 증거는 플로라 리트비노바(Flora

Litvinova)의 회상에서도 나타나 있다.

『Dmitri Dmitriyevich by nature was completely incapable of saying ‘No’ to


anybody. He did indeed help a lot of people, but he also fell victim to many
unscrupulous and brazen types.』85)

: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는 천성적으로 그 누구에게도 ‘안 돼’라고 말할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많은 사람들을 도운 것도 사실이지만, 양심 없고 뻔뻔
한 유형들의 먹이가 되기도 했다.

84)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221-222p


85)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1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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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told us that he had met Zoshchenko on the street after the publication of
the Decree. Zoshchenko complained that he was starving. Shostakovich gave him
material support, without of course ever broadcasting this fact.』

: 그는 자신이 칙령 발포 후 길에서 조시첸코를 만났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조시첸코


는 그가 굶주리고 있다며 불평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
리지 않고 조시첸코에게 물질적 지원을 했다.

지휘자 토마스 샌더링(thomas sanderling)은 타인들이 쇼스타코비치를


바라보는 모습을 자신이 보고 평가할 때 그의 올바른 도덕성, 인품, 명예

욕이 없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Shostakovich didn’t try to promote his own career or reputation. He didn’t go


in for heroic deeds, but nevertheless he knew that his reputation as a great
composer could be put to use to help people quietly and practically. This was a
necessity to him.』

: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경력이나 명예를 홍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영웅적인


행동을 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작곡가로서 자신의 명예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조용히 현실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He did so unobtrusively, behind the scenes. Indeed, in those times the only real
and practical way of helping people was through personal intervention, as public
or open protest got you nowhere.』86)

: 그는 드러나지 않게 은밀히 사람들을 도왔다. 공적이거나 공개적인 항의는 아무런

86)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2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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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되지 않았으므로 실제로 그 시대에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하고
현실적인 방법은 사적인 개입을 통한 것이었다.

또한 이삭 슈와르츠(isaak schwartz)의 회상에도 그의 성품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Years later, at the premiere of my ballet, On the Eve, at the Maly Opera, Pavel
Serebryakov, the director of the Conservatoire, congratulated me and exclaimed,
‘You see it wasn’t for nothing that Shostakovich paid for your education!’ I
was stunned. Only then did Serebryakov remember that Dmitri Dmitriyevich had
pleaded that his charity be kept a strict secret.』87)

: 수년 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있었던 말리 오페라의 내 발레 초연에서 예술학교 교


장이었던 파벨 세레브랴코프는 축하하며 이렇게 외쳤다. “쇼스타코비치가 당신의
교육비를 지불한 것이 헛되지 않았군요!” 나는 몹시 놀랐다. 그때서야 세레브랴코
프는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가 자신의 자선을 엄격하게 비밀로 해줄 것을 간청했
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쇼스타코비치는 타인의 아픔과 고난, 희생, 비극 이러한 감정에 교감


하는 것을 잘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품성은 남이 힘들 때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으로 더욱 빛을 발했고 특히 음악 문화의 발전을 위해 지식 제공
등을 통해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하는 인물이었다. 이 이삭 슈와르츠(Isaak
schwartz)라는 작곡가도 사실상 쇼스타코비치의 직계제자가 아니였으나,
그의 음악적 재능과 열정을 보고 스탈린 시대를 통해 형식주의자로 찍혀
가족들도 뿔뿔히 흩어지고 금전적으로도 집안 사정이 좋지 않던 그를 도
와주기로 정했던 것이였다. 이러한 쇼스타코비치의 성정에 감동을 받은
이삭 슈와르츠(Isaak schwartz)는 쇼스타코비치를 굉장히 많이 따랐으며,

87)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233p

- 117 -
그 마음에 쇼스타코비치도 항상 보답을 했다.

『The secretary of the Party Organization of the Composers’ Faculty, A.


Ostrovsky, invited me to come to his office one day. He suggested, or to be more
accurate, ordered me to make a public statement denouncing Shostakovich as a
bad teacher. He tried hard to convince me; in his opinion, as a ‘formalist’ I
had nothing to lose. Psychologically this was a very difficult situation for me; I
was a marked man, in so far as my father was an ‘enemy of the People’,and
my mother remained exiled. I lived in constant fear for my own family.
Nevertheless, I answered Ostrovsky ingenuously, saying that I didn’t understand
what he was(233p) getting at, that, on the contrary, Shostakovich was an excellent
teacher. It was unthinkable for me to betray him. I decided that, rather than
stoop so low, I would prefer to be thrown out of the Conservatoire.』

당 조직의 작곡가 교수단 총무였던 A. 오스트로프스키는 어느 날 나를 자신의 사


무실로 초대했다. 그는 내게 제안했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명령했는데 쇼스타
코비치가 불량한 선생이라고 고발하는 공개 진술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열심히
나를 설득했다. 그의 생각에 ‘형식주의자’로 내가 잃을 것은 없었다. 정신적으로
이는 내게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다. 내 아버지는 ‘인민의 적’이었고 내 어머니는
아직 추방되어 있는 한 나는 꼬리표가 붙은 사람이었다. 나는 내 가족에 대한 지속
적인 두려움 속에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스트로프스키에게 솔직하게
대답하며,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반대로 쇼스타코비치는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를 배신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주 납작 엎드리는 대신 예술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Later Shostakovich came up to me and gave me a ticking off: ‘I am most


displeased by your behaviour. You had no right to act like that. You have a
family, a wife, small children. You should think about them, and not about me. If
I am criticized, then let them criticize me - that’s my affair.’ But I saw in his
eyes such a penetrating look of sympathy and affection for me, and such
compassion! I think that it was something Shostakovich never forgot; after all 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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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ponse was completely spontaneous and heart-felt.』88)

: 훗날 쇼스타코비치는 나를 찾아와서 꾸중했다. “나는 네 행동에 가장 화가 난다.


너는 그렇게 행동할 권리가 없다. 너에게는 가족, 부인, 어린 자녀가 있다. 내가 아
니라 그들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비판을 당하면, 그냥 내가 비판 당하도록 두어라.
그건 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에서 나에 대한 동정과 애정이 섞인 꿰뚫어
보는 눈길, 굉장한 연민을 알아챘다. 나는 이것이 쇼스타코비치가 절대 잊지 못할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의 반응은 완전히 자발적이고 진심 어린 것이었다.

이러한 성격을 통해서 시대적으로 나타났던 좋은 시절의 일들도 있지


만, 좋은 않은 일들, 가령 그가 사랑한 ‘어머니의 땅’이라 불리는 소련

의 인민들이 희생됐다거나 하는 슬프고 안타까운 일들을 통해 그의 음악


가로써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더욱 강하게 느끼면서 한편으로 슬픔과
애환을 참으며 이와 관련된 혁명적 사건과 전쟁, 죽음 등의 애환이 스며

든 역사적 사실들을 전달하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일들


을 통해 음악가인 자신의 책무를 강하게 느낀 쇼스타코비치의 눈여겨볼
역사적 사실들 중 그의 책임감이란 내적 감정에 의해 생긴 사건은 이사크

글리크만(Isaak Glikman)의 회상속에서도 나타난다.

『Shostakovich invited a group of composer friends to his home on 17 September


to hear what he had written. Just as Shostakovich had finished playing the first
movement, sirens started screaming. The composer excused himself to accompany
his wife and children into the air-raid shelter, but suggested he would return
immediately so as to continue the session. Valerian Bogdanov- Berezovsky recalled
the extraordinary experience of hearing Shostakovich playing the Scherzo and
showing them the third movement sketches against the dull thud of falling bomb
s:』

88)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233-2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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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스타코비치는 9월 17일 자신의 집에 작곡가 친구들을 초대하여 자신이 작곡한
것을 들려주었다. 쇼스타코비치가 1악장 연주를 끝내자마자,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공습 대피소로 데려다주기 위해 잠

시 나갔다 오겠다고 했고, 음악을 계속 연주하기 위해 곧바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발레린 보그다노프-베레조프스키는 폭탄이 떨어지는 둔중한 소음 속에서 쇼스타코

비치가 <스케르초>를 연주하고 3악장 스케치를 들려준 놀라운 경험을 회상했다:89)

이러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가로써의 일의 책무를 생각하는 성향은


작가인 에브게니 추코브스키(Evgeni Chukovsky)가 언급한 쇼스타코비치

가족의 모습과 회상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Maxim once asked him, 'Papa, why are you writing out the parts when
the score is there? Anyone who knows how to read and write music could
do it for you.’』

한번은 맥심이 물었다. “아버지, 악보가 있는데 왜 오케스트라 파트를 작곡


합니까? 음악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버지를 위해 해줄 수
있을 텐데요.”

『Dmitri Dmitriyevich replied, ‘Everyone should do his own work from


beginning to end.’』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는 대답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일을 처음부


터 끝까지 해야 한다.”90)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쇼

스타코비치의 내면은 더욱 단단해졌다. 공습사이렌이 울리고 폭격이 떨어

89)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164-165p


90)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164-1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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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위기의 상황인 이 와중에도 그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강하게 느낀

쇼스타코비치는 독일로 인해 생긴 인민들의 희생과 애환으로 굳은 결심을


다지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전달과 희생자들의 깊은 애도를 기리는 것

에 대한 그의 신념을 토대로 폭격의 위험 속에서도 그는 작곡을 멈추지

않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제7번 교향곡>을 통해서 음악이란 매개체로 굳


은 의지를 다지고 ‘어머니의 땅’의 모든 인민들과 그 외 세계에 모든

이들에게 전달하려 했다. 또한 그의 천성인 착한 마음과 타인을 생각하는


배려심 깊은 성격들은 자신이 어떠한 평을 받게 되더라도 이를 인내하고
감수할 강한 의지를 통해 항상 쇼스타코비치의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었
다. 이사크 글리크만(Isaak Glikman)의 회상에서 쇼스타코비치는 <맥베스
부인>에 대한 프라우다의 비판과 레닌그라드 음악협회의 논의에서 나온
비판을 글리크만이 스크랩하여 보내주었고, 이를 같이 보는 날에 짜증과
낙담을 보인 글리크만과 다르게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침묵과 침착함
으로 그의 자존심을 지켰다.

『According to Isaak Glikman, Shostakovich had told Sollertinsky that he should vote
for ‘any resolutions’ if the pressure on him became too great. He no doubt
realized that Sollertinsky would be victimized for his enthusiastic support of his
music, and in particular of Lady Macbeth.』91)

: 이사크 글리크만에 따르면, 쇼스타코비치는 솔레르친스키에게 그에 대한 압력이 너


무 세지면 ‘어떤 결의안’에라도 찬성 투표를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솔레르친스키가 그의 음악에 대한, 특히 <레이디 멕베스>에 대한 열정적인 지지 때
문에 희생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쇼스타코비치의 착한 심성의 성향이 나타나는 대목이다. 쇼스타코비

91)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1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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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는 본인 자신이 이러한 당국의 억압에 따른 여파에 희생될 수도 있다는

점과 자신의 소중한 작품이 매도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면서도 지인인


솔레르친스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이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

를 통해서 쇼스타코비치의 정치관을 논할 때, 정말로 이 어떤 결의안이라

도 찬성 투표를 던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순응주의로 단순하게 볼 문제인


지 의구심이 든다. 이것은 그의 도덕적 신념도 같이 고려하여 생각해 볼

문제이다. 게다가 이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점은 특정한 정치색을 띈 생각


들이 쇼스타코비치 본인에게 있지 않고, 또한 이 사건은 단순히 예술의
창작 욕구로 인해 발생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 당시의 쇼스타코비치는
당국의 성향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였으며, 그가 만든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스토리에 나오는 잔학성과 비극이 당국의 심기를 건드릴 가능성
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겐 단순히 이 소재로 작
품을 만들고 싶다는 창작욕 하나 뿐이였다.

『... And life seethed around the young Shostakovich, sucking him into its vortex.
Anyone who did not experience those years together with Shostakovich must find
it difficult to imagine the intensity of this whirlpool, which threw up an explosion
of creative energy and provided the strongest impulse to increased artistic
endeavour and innovation.』92)

: . . . 그리고 어린 쇼스타코비치 주변에서 삶이 스며들어 그를 소용돌이에 빠뜨렸


다. 그 당시 쇼스타코비치와 함께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소용돌이의
강도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소용돌이는 폭발적인 창의적
에너지를 일으켜 예술적 끈기와 혁신을 증가시키는 가장 강한 충격을 제공했다.

단순하게 소설이나 문학을 읽고 문학을 통해서 나온 소재들로 공감하

92)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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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 자신의 내면을 일깨워주거나 하는 일반적인 창작욕 말고도 쇼스타코

비치는 1917년 10월 혁명과 1934년 키로프 암살 사건 이후 반혁명분자 색


출이라는 명분으로 1936년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대숙청, 1941년 독일의

침공으로 인한 독소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등 자신이 직접 눈 앞에서 겪

은 크나큰 사건과 이를 통해 생긴 생명의 위협과 강하게 길러진 음악가로


써의 책임감으로 인해 생긴 창작욕으로 작품을 써내려 갔다. 특히 예술가

들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굉장히 많기 때문


에 사랑을 경험하고 이에 영감을 받으면 사랑 노래를 쓰고, 인생에 대한
깨달음으로 영감을 받고 인생 노래를 쓰기도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사회
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영향을 받으며, 각종 학살과 혁명, 전쟁을 통해
학살의 소재로는 유대인의 대학살이 주제인 <제13번 교향곡> “바비 야
르”, 또한 학살의 경험을 토대로 그의 내면에서 회두된 죽음이란 의미와
체호프 소설의 영향으로 파생되어 죽음이란 주제로 작곡한 <제14번 교향
곡>, 혁명의 순간들을 지켜보고 느끼면서 작곡한 <제2번 교향곡>“10월
혁명에 바침”, <제12번 교향곡> 그리고 혁명의 순간을 목격하진 않았지
만 그 여파로 인해 가족들과 지인들을 통해 영향받아 창작욕을 일깨우게
되어 당시 혁명에 대해 공부하고 쓴 <제11번 교향곡> “1905년”, 독소전
쟁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겪은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와 전쟁 희생자들에
게서 느낀 깊은 슬픔과 애환등을 통해 쓰게된 <제7번 교향곡> 등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의 생애에는 많은 크나큰 사건들이 있었고, 이러한 큰 폭풍
같은 사건들은 쇼스타코비치의 창작욕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와 에너지로써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음악을 창작하기 위해 태어난사람인 것 마냥 굉


장히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그의 머릿속에는 항상 음악이 흘러 나왔으
며, 지인들이 요청하는 음악 관련 일에 대해 거절한 적도 없다고 할 정도

로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는 증언들이 그의 지인들의 회상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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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와 편지들을 통해서 나온 사실적 증거들이 굉장히 많으며, 그는 항

상 음악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의 두뇌는 피곤함 없이 과도하게 작동한다.』93)

그의 근면 성실한 성향은 학창 시절부터 유명했다. 한파에 의해 음악

원 전체가 난방도 되지 않고 대중교통도 잘 돌아다니지 않았을 그 시기에


그는 가난했었던 탓도 있지만, 꼬박 10킬로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학교를
다녔으며, 시간 엄수를 굉장히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서 항상
누구보다 빠르게 교실에 와서 기다리거나 한파 때문에 교수도 수업을 잘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나와서 공부를 못하는 시간에도 기다리는 동안 피
아노를 연주하거나 같이 온 학생들과 음악적 토론을 나누는 등 그의 음악
에 대한 영역에서는 두뇌가 멈추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활동했다.

『Several years went by before we were able to give the first public performance
of From Jewish Poetry in Leningrad.39 By that time Zara Dolukhanova had taken
over the mezzo part, so she, rather than Yanko, had the honour of giving the
first official performance. Thereafter we gave several performances in Moscow,
Leningrad and in the Baltic Republics. Dmitri Dmitriyevich always played the piano
part; while he was able to perform he never let anybody else play it. Richter
wanted to accompany us in in this cycle, but Dmitri Dmitriyevich insisted on
playing all the concerts himself; he obviously enjoyed them!』

레닌그라드에서 <유대인 민속시로부터>의 첫 공연을 할 수 있기까지는 여러 해가


지났다. 그즈음 얀코 대신 자라 둘루하노바는 메조 부분을 넘겨받았기 때문에 그녀

93)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43p – 출처 : Anatoly

Lunacharsky에게 보내는 편지,1921년 8월 16일 (N. S. Zelov, 'Grant Recipients

of the Commissariat of Enlightenment', pp. 101-10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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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첫 공식 공연을 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 후에 우리는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그리
고 발트3국에서 여러 회 공연을 했다.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는 항상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자신이 공연할 수 있는 동안에는 다른 누구에게도 연주하게 하지 않았
다. 리히터는 우리와 함께 이 공연에 참여하고 싶어 했지만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
치는 모든 콘서트를 자신이 연주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는 명백히 공연을 즐기고 있
었다!

『Shostakovich really loved his own works, and got a real pleasure from listening
to them. You only had to see him at a rehearsal or concert; his state of agitation
was painfully evident. I remember Dmitri Dmitriyevich saying how much he liked
Richter’s recording of six of his Preludes and Fugues made in Czechoslovakia:
‘I listen to this record over and over again.’ Generally, listening to good
performances of his work made him very happy. I remember his joy on the
occasion of the first performance of the Violin Sonata given by Richter and
Oistrakh at the Grand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ire. Despite the fact that by
then he was ill and could hardly walk, he insisted on coming out on stage with
them to acknowledge the applause and to thank them. He told them, ‘Today I am
a really happy man.’』94)

쇼스타코비치는 정말로 자신의 작품을 사랑했고, 이를 듣는 데서 진정한 기쁨을 느


꼈다. 그는 리허설이나 콘서트에서만 봐야 했는데, 그는 극도로 명백하게 불안한 상
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작성된 자신
의 전주곡과 푸가 여섯 곡에 대한 리히터의 녹음본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말한 일을
기억한다. “저는 이 녹음을 계속 반복해서 듣습니다.”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에 대
한 훌륭한 연주를 듣는 것은 그를 아주 행복하게 했다. 나는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그랜드 홀에서 리히터와 오이스트라흐가 연주한 <바이올린 소나타>의 첫 공연에 대
한 그의 기쁨을 기억한다. 그때 그가 아프고 거의 걷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대 위에 올라 이들과 함께 박수를 받고 감사를 표현하겠다고 고집했다. 쇼스타코
비치는 그들에게 “오늘 나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94)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247p

- 125 -
쇼스타코비치의 시간 엄수의 철칙과 근면 성실한 성향, 음악에 대한

영역에서의 두뇌가 쉬지 않고 움직이는 이유는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때


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연주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항상

연주하기를 굉장히 좋아하였으며, 악기를 통해서 곡을 쓰는 것이 아닌 머

리 속에 먼저 곡을 구상하고 악보에 구상한 것을 수기로 옮겨 적어 작곡


을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있었다. 그의 이 작곡 방식은 자신이 지인들

을 불러 꼭 새로운 음악을 소개하고 들려주는 행동을 하였는데, 그가 소


개 당시 직접 연주하여 비공개든 공개적이든 공연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
의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The authorities were, on the whole, willing to accept the Symphony as


Shostakovich’s offering to the shrine of socialist-realism. As such, the Fifth
Symphony was immediately widely performed, and the composer’s pardon
appeared to be secured. Incidentally, the Symphony’s subtitle, ‘a Soviet
artist’s creative reply to just criticism’, was coined by a journalist, and it was
first used for the Moscow premiere in January 1938. Shostakovich never officially
accepted it, although at the time he probably allowed it to remain in programmes
as a seemingly expedient afterthought, which could be interpreted as an admission
of his errors and gesture of repentance.』

: 당국은 전반적으로 이 교향곡을 쇼스타코비치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신전에 바치


는 제물로 수용할 용의가 있었다. 따라서 5번 교향곡은 즉각적으로 널리 공연되었
으며, 작곡가의 사면이 확실한 듯이 보였다. 또한, 이 교향곡에는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련 예술가의 창의적 답변’이라는 부제가 한 저널리스트에 의해 달렸고,
1938년 1월 모스크바 초연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한 번도 공식
적으로 이를 승인한 적이 없으나, 아마도 자신의 오류에 대한 인정과 회개의 제스
처로 해석될 수 있는 편리한 수단으로 프로그램에 남겨두었을 것이다. 95)

95)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145p

- 126 -
“A-Life Remembered”에서 나오는 엘리자베스 윌슨이 주장하는 쇼
스타코비치의 정치관이다. 즉, 쇼스타코비치는 이 상황을 통해서 정치적

으로 당국에 순응주의자로 판별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했다는 것이며 이

는 쇼스타코비치를 수정주의자로 주장하는 엘리자베스 윌슨이 반(反)수정


주의자나 반공주의자가 아니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로렐라이 E. 페이는 1938년 1월 25일에 실린 베체르나야


모스크바(Vechernyaya Moskva)언론사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인터뷰를
했으며, 쇼스타코비치의 서명을 통해 발표했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는
내용으로 그녀가 주장한 반(反)수정주의를 토대로 서술되어 있다.96) 그리
고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에선 단순히 당국에서 발표했다는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어 당국이 강제로 이 기사를 냈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그가 주
장하는 쇼스타코비치는 반공주의자라는 것과 같게 서술되어 있다. 이처럼
3개의 서적들에서 상이한 주장들이 나왔다. 모든 서적들이 출처가 신빙성
이 높지 않거나 없기 때문에 이 내용을 토대로 쇼스타코비치가 정치관이
있다고 판별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또한 플로라 리트비노바(Flora
Litvinova)의 회상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스탈린주의 시기에 억압받았던 것
을 당에 누를 끼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던 인물이 아니였다는
내용이 있다.

『With Stalin’s death in March 1953,1 noticed Dmitri Dmitriyevich’s sense of


relief. Although the enormous pressure that weighed on him throughout life was
somewhat eased, he felt no sense of euphoria.』97)

96)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02p – 출처 : D.

Shostakovich, "Moy tvorcheskiy otvet,"Vechernyaya Moskva, 1월 25일


97)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274p

- 127 -
: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나는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가 안도감을 느끼
는 것을 알아챘다. 평생 그를 짓누르던 엄청난 압박감이 다소 해소되었지만 그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처럼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시대와 공산당을 통한 억압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이는 1960년 이후 입당
당시 시기에 레브레베딘스키(Lebedinsky)의 쇼스타코비치의 입당을 둘러

싼 회상과 이후 당 모임과 회의에 참여한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을 떠올린


코렌니코프의 회상에서 나타난 사건과 그의 행위에서도 동일한 스트레스
와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는 증언이 나타나 있다.

『It was only then that it dawned on me what had happened. Shostakovich had
never heeded my warnings that certain invitations issued by certain friends
brought him into the society of licensed officials, and were nothing short of a
trap. On one such occasion some bureaucratic trickster put a prepared text in
front of him. No doubt Dmitri Dmitriyevich had been plied with drink, and was
under its influence when he signed the ‘request’ to be admitted to the Part
y.』98)

: 그때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어떤 친구들이 보


낸 어떤 초대장이 그를 관료 사회로 데려왔으며 덫이나 마찬가지라는 나의 경고
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경우에 어떤 관료적인 사기꾼은 준비된
문장을 그의 앞에 늘어놓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누군가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
치에게 술을 계속 권했고, 당에 입당한다는 '요청서'에 서명했을 때 술에 취해 있
었다.

『The tragi-comedy of admitting Shostakovich to the Party was played out a(335p)
few months later.98 He became an exemplary and obedient Party member.

98)

- 128 -
Without fail he attended every possible ridiculous meeting of the Supreme Soviet,
every plenary session, every political gathering, and even took part in the
agitprop car rally. In other words, he eagerly took part in events which he
himself described as ‘torture by boredom’. He sat there like a puppet, his
thoughts wandering far away, applauding when the others applauded. Once I
remember him clapping eagerly after Khrennikov had made a speech in which he
had made some offensive remarks about Shostakovich. ‘Why did you clap when
you were being criticized?’ I asked. He hadn’t even noticed!』

: 쇼스타코비치를 입당시키는 희비극은(335p) 몇 달 후에 공연되었다.98 그는 모범적


이고 순종적인 당원이 되었다. 그는 최고 소비에트의 모든 우스꽝스러운 회의, 모든
본회의, 모든 정치 모임에 참석했고 심지어 선동적인 자동차 집회에 참여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지루한 고문’이라고 묘사한 일들에 열심이었다. 그는 꼭두각
시처럼 앉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동안 그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
다. 한번은 그가 코렌니코프가 쇼스타코비치에 대해 불쾌한 발언을 한 연설을 한
후 열심히 박수를 치던 일을 기억한다. “왜 비난을 받았을 때 박수를 쳤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이는 쇼스타코비치가 정치적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반(反)수정


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수정주의

자라고 생각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 수정론자라고 주장하는 엘리자베


스 윌슨(Elizabeth Wilson)가 쓴 “A-Life Remembered”내에서 주장하는
것들이 모두 일관성 있게 맞지는 않았기 때문이며, 위 내용을 토대로 쇼

스타코비치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점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에 나타나는 내용은 수정론자로 주장하는 주장 중 일관성이 없었다는
모순점 들 중 하나이다.

『The fact that Shostakovich wrote music celebrating revolutionary events (notably
the Piano Sonata and the Second and Third Symphonies) was probably prompted

- 129 -
as much by a desire to be seen as artistically `progressive' as to prove himself
politically in tune with the ideals of the Revolution.』 99)

: 쇼스타코비치가 혁명적 사건(특히 피아노 소나타 와 제 2, 3 교향곡)을 기념하는


음악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혁명의 이상과 정치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예술에서 ‘진보적’으로 보이려는 열망에 의해 촉진되었을 것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작품과 예술이라는 것에 ‘진보적’으로 보일


려는 열망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쇼스타코
비치는 항상 굉장히 혁신적인 기법을 사용하길 추구했고 표현에 있어서
항상 그의 개성이 넘쳐났으며, 그의 음악을 듣고 관객들과 지인들은 가끔
불쾌하다는 평을 주거나 신랄하고 기괴하다는 표현과 공연장을 뛰쳐나간
사건 등을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평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여동생인 조야 쇼스타코비치(Zoya Shostakovich)의 회상에 따르면 쇼스타
코비치의 작품 <The Nose>공연에서 그의 스승인 스테인버그는 약간의 짜
증이 있었다는 것과 당시의 평가에서 젊은 첼리스트인 보리스 도브로호토

브(Boris Dobrokhotov)도 이 특이하고 혁신적인 기법을 사용한 아이디어에


대해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과 특이한 각도와 표현주의적 음악
언어에 놀랐으며, 이 당시 14개의 타악기가 있는 마지막 씬에서 깜짝 놀

란 청중은 홀 밖으로 나갔으며, 보리스 도브로호토브도 관객과 마찬가지


로 자신의 고막에 손상이 올까 두려워 뛰쳐나갔다고 한다.100) 하지만 여
기서 나타나는 주장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9)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84p


100) In B. Dobrokhotv's `Reminiscences of Shostakovich' in Bobykina, Shostakovich

in Letters and Documents (Glinka Museum, Moscow, 2000), p. 514. 8o Review

in Krasnaya Gazeta, no. 17,20 January 1930.

- 130 -
『In `To October' Shostakovich set verses by the poet Alexander Bezymensky which
he heartily disliked, frequently referring to them as disgusting.』101)

: 'To October’에서 쇼스타코비치는 그가 진정으로 싫어하고 종종 역겨운 것으로


언급되어 왔던 시인 Alexander Bezymensky의 구절을 설정하였다.

문헌의 76페이지에서 서술한 알렉산더 베즈미엔스키(Alexander

Bezymensky) 시의 구절을 통해서 굉장히 선동성이 강한 가사를 사용한다


는 것에 굉장히 불쾌감을 표현했던 쇼스타코비치였고 이를 혁명과 정치적
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기엔 어렵다. 이 두 문장을 합치고 해석
해서 봤을 때, 선전선동부의 의뢰로 어쩔 수 없이 진행했다는 점과 혁명
의 관한 내용을 작품으로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고 이를 위해 관련 기
사나 서적 등을 통해서 공부했다는 내용이 “A-Life Remembered”과 그
외 문헌들에서도 나오는 내용이며, 그 외 작품들에서 나타난 역사적 사실
전달에 따른 책임감이 완벽히 형성되기 전이였긴 했으나 이는 천성에 의

해 나타난 특성이므로 이 당시에 아예 그런 욕구가 없었다고 말할 순 없


다. 한참 음악가로서의 책임감과 자신의 행동에 여파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여부를 알아가는 시점이였기 때문에 이는 정치적인 해석을 한 것이

아닌 단순한 혁명이라는 역사적인 소재에 대한 작품을 쓰고 싶었던 욕구


와 당의 요구에 거절하기 힘들었던 부분,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집안의 가
세가 많이 기울어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의거해

이는 현실 상황과 예술가적 숭고한 정신이념의 조화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 전달에 가사가 선동성이 넘쳐서 문제가 있긴 했지만,
선동성을 빼면 사실적인 내용들이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타협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적 행보에는 전부 예술정신에 따

101)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76p

- 131 -
른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의미전달의 책임감을 느끼고 그 의미를 음악 안

에 내포하여 표현하려 했다.


플로라 리트비노바(Flora Litvinova)의 회상에 따르면, 쇼스타코비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미전달 목적으로써 음악을 매개체로 하여 표현을

한다는 사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We drank tea, and the talk again revolved naturally around the Symphony. Dmitri
Dmitriyevich said pensively, ‘Of course - Fascism. But music, real music, can
never be literally tied to a theme. National Socialism is not the only form of
Fascism; this music is about all forms of terror, slavery, the bondage of the
spirit.’ Later on, when Dmitri Dmitriyevich got used to me and started to trust
me, he told me straight out that the Seventh Symphony, and for that matter the
Fifth as well, were not just about Fascism, but about our system, or any form of
totalitarian regime.』

: 우리는 차를 마셨고, 대화는 다시 한번 교향곡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드미트리 드


미트리예비치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물론 파시즘도 맞죠. 하지만 음악은, 진짜 음
악은, 하나의 주제와 엄밀하게 묶일 수 없어요. 국가 사회주의만 파시즘이 아니에요.
이 곡은 모든 종류의 공포, 노예 제도, 영혼의 속박에 관한 거예요.’ 후에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가 나에게 익숙해지고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나에게 직설
적으로 7번 교향곡은, 그리고 그 문제에 있어선 5번도 마찬가지인데, 그저 파시즘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시스템, 또는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102) 정권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내용은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독일군의 레닌그라드의 침공을 통해


공습사이렌을 매일 들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쇼스타코비치가 쓴 <제
7번 교향곡>에 대한 쇼스타코비치 본인이 설명한 작품의 내포된 의미에

102) 전체주의 :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을 근거로 강력

한 국가권력이 국민생활을 간섭·통제하는 사상 및 그 체제.

- 132 -
대한 서술인데 음악은 하나의 주제로만 끝나지 않고 여러 의미를 내포한

다는 것이다. 단어란 직관적으로 바로 해석 가능한 하나의 뜻도 있지만


하나의 뜻 안에 여러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당시 시

대 상황에 대해 쇼스타코비치고 보고 느낀 부분들은 전쟁으로 인한 죽음

에 의한 공포, 적국의 유린, 정치적 이념 등 여러 좋지 않은 상황들을 느


꼈으며,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인민들에게 전달과 위로의 목적으로 이 곡

을 만들었으며 이건 어떠한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쇼스타코비치는 정치적으로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성향의 인물이였으며,
자신이 최대한 엮이는걸 피할 수 있으면 당의 지시를 최대한 피하려 노력
했다.

『The Union of Composers called its first All-Union Congress, which took place
between 19 and 25 April. Whereas in 1936 Shostakovich had not publicly recanted
his views, now he was pressurized into public repentance. After it had been noted
that none of the accused composers (apart from Muradeli) had spoken at the
Congress, towards the end of sessions, on 24 April, Shostakovich made a speech
promising to follow Party directives and to write melodic music for ‘the
People’.』103)

: 작곡가 협회는 4월 19일~25일 사이에 협회의 첫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반면


1936년 쇼스타코비치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고 이제 그는
공개적인 입장 철회를 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고발당한 작곡가(무라델리 외) 중
아무도 회의에서 발언을 하지 않은 것이 알려진 후 4월 24일 회의의 마지막 무렵에
쇼스타코비치는 당의 지시를 따르고, ‘인민’을 위한 선율의 음악을 작곡하겠다고
약속하며 연설했다.

정치적으로 엮이고 싶지 않던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예술정신과 신

103)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223p

- 133 -
념에 위배되는 지시에 따르고 싶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으나, 지속적인 지시와 그에 따른 위협에 가족


의 안위를 생각하던 쇼스타코비치는 고민하다 어쩔 수 없이 당의 지시를

따르게 되었고, 이러한 변칙적인 행보로 인해 오늘날 쇼스타코비치의 정

치적 성향에 대해 논쟁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 내용을 토대로 당체제에


순응하는 인물은 아니였으며, 당시 이 사건의 시발점으로 소비에트 음악

거장들의 억압과 국가적 예술 지원에 연루된 사건이기 때문에 입장 철회


나 순응하는 태도에서 정치적인 시점을 바라볼 것이 아닌 예술의 복지나
윤리적 사고로 인한 행보라고 판단 할 수 있으며, 이는 쇼스타코비치가
특정 정치관을 내비친 것이 아닌 예술사상에 의거한 음악가의 숭고한 신
념을 내비친 것이라 판단 할 수 있다.

5.1.2. “A-Life Remembered”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성향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은 쇼스타코비치가 소비에트 환경
의 정신에 영향을 받았고, 시민의 의무와 도덕적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
며, 그의 성향과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에 따른 인물로써 상정하여 정치관을 따져봐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윤리관과 예술정신에 의한 행동들로 인해 순응과 반체제를 통한 여러
입장의 모습을 보여 이제껏 논쟁이 된 것이며, 엘리자베스 윌슨의 해석은
수정론자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녀가 수집한 자료들로 반공주의자

로 판단할 수도 있었지만, 솔로몬 볼코프의 “Testimony”를 분석한 그녀

는 이 문헌에서 여러 가지의 오류와 생략된 점을 통해 ‘이 회고록은 거


짓이다’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의 전기인 “A-Life

Remembered”에서 마샬 투카체브스키를 매도하려 했던 NKVD(비밀경찰)

이 쇼스타코비치에게 생명의 위협을 주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

- 134 -
던 사실 등을 예시로 언급하며 그녀는 여러 이유들 중에서 거짓이라 주장

하였다. 그리고 여러 사건들과 지인들의 회상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인자한


성품과 힘든 이들을 몰래 도와주려는 착한 심성 등이 언급되어있고 체제

에 가족들의 안위나 지인들의 안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당의 지시에 순

응하거나 이후 해빙기를 거치면서 쇼스타코비치가 하고 싶은 주제를 창작


해 공연에 올리는 행보에 대한 자료를 근거로 그녀는 쇼스타코비치가 수

정론자라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쇼스타코비치가 굉장히 도덕적인 면모들


을 보여줬으며,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판단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며 윤
리관을 통해 각 시대 상황속에서 자신의 책무와 의미 전달하려 노력했다
는 점. 다만 그 윤리관이 정치적인 색으로 연결되면 안되고, 예술가로써
의 책무를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판단해야 된다고 생각
한다.

6. 정치적 프레임에 의한 쇼스타코비치의 정치

심리 분석

각 학파에서 주장하는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적 성향이 무엇인지에 대


한 논란 속에서 무조건적으로 그의 성향에 정치적인 입장이 있다는 프레

임을 씌움으로써 그의 예술사상과 작품들이 정치적인 행보로 평가가 변질


되어왔다. 이에 따라 쇼스타코비치가 또렷하게 선호하는 정치적 행보를
가지고 있는지 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심리적인 부분들을 통해 기존에

나와 있는 여러 정치 심리 연구 내용과 결과를 토대로 반론하고자 한다.


2010년 류태건이 발표한 정치효능·정치 신뢰·정치참여의 이론과 현
실에 대한 연구에서 정치 신뢰와 정치참여 관계가 독재체제하에서는 정부

- 135 -
기관에 대한 부정적 정보를 획득하는 기회가 생기므로 낮은 정부 신뢰도

와 낮은 정치 참여도를 보인다는 연구결과가 있다.104) 이 연구 결과를 통


해 쇼스타코비치는 부정적 프레임을 통한 여러 억압으로 당국에 낮은 신

뢰도를 가졌다는 문헌적 내용들과 그러한 그의 성향들을 통해서 낮은 정

치 참여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쇼스타코비치를 정치


적 프레임을 씌워서 그의 예술사상을 평가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2009년에 이재신, 이영수가 발표한 정치정보 습득, 관여도, 정치


적 불만과 정치참여 유형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도 정치적 불만이 정치
관여도를 통해 정치참여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를
결론에서 내놓았다.

『오프라인 전통적참여=-.32 × .44=-.1408, 오프라인 비전통적 참여=-.32 × .39


=-.1248, 온라인 전통적 참여=-.32 ×.32=-.1024, 온라인 비전통적 참여=-.32 ×
.35=-.112. 즉, 정치적 불만은 정치 관여도 감소를 통해 유형별로 최소 .112에서 최대
.1408 만큼의 정치참여를 감소시키는 것이다.』105)

그리고 2016년 박영환은 프레임들의 경쟁이 정치 선택에 미치는 영향


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이론적 추론으로 종합적이고 균형적인 정보를 제
공하는 상황에서 경쟁적인 프레임에 노출되었을 때, 인간은 그들의 정책

선호에 기초하여 올바른 정책의견을 가질 수 있으나 특정 이슈만 강조하


는 일방적인 프레임에 노출되었을 때에 인간은 정책선호에 대해 왜곡이

이루어져 정책의견이 올바르지 않게 형성된다고 주장하였다.106) 이 주장

104) 류태건, 정치효능·정치신뢰·정치참여의 이론과 현실, 「지방정부연구, 학술지」,

(2010), 251p
105) 이재신, 이영수, 정치정보 습득, 관여도, 정치적 불만과 정치참여 유형의 관계,

「한국언론학보, 학술지」, (2009), 200p, 6번 각주


106) 박영환, 프레임들의 경쟁이 정치선택에 미치는 영향, 「한국정당학회보, 학술지」,

- 136 -
을 쇼스타코비치라는 인물과 시대적 배경 정보에 대입하자면 여기서 특정

이슈만 강조하는 프레임 즉, 공산주의로 볼수 있으며, 당시 스탈린 한사


람에 의한 단일화된 스탈린주의의 정책과도 일맥상통하며, 왜곡으로 인해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정치적 내면에서 올바르지않은 정책의견이 형성되었

다는 추론을 해볼 수 있다.
두 번째 가설로써 인간은 경쟁적인 프레임에 노출되었을 때, 정당에

대한 선호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정치적 정보


들이 개인들의 태도를 구성하는 이해관계, 특정집단에 대한 일체감, 정치
적 이념원칙에 어떻게 부합하는지의 여부가 개인들의 정책판단에 대한 프
레임들의 영향에 끼친다는 것이다.107) 당시의 쇼스타코비치의 예술가로써
의 활동시기에 당국의 정책에 이해관계가 결여되있는 점, 억압받아왔던
현실과 입당 당시 크렌니코프의 회상에서 꼭두각시처럼 끌려다녔다는 증
언과 함께 당국과의 일체감의 결여성과 당의 정책에 부합하지않은 작품들
을 통해 억압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정당에 대한 선호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을 추론해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가설에서는 정책에 대한 경쟁적인 프레임들에 노출되
었을 때에 인간의 태도에서 기인한 개별성이 특정 측면의 정보에 부합되
면서 정당에 대한 선호가 잘 드러날 것이며, 이러한 효과는 선호도가 약
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가진 인간에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
다는 이론적 추론이다. 이에 따르면 쇼스타코비치는 정치에 관해 관심도
가 낮았던 부분과 경쟁적인 프레임에 노출된 것이 아닌 단일화된 프레임

에 노출되었으므로 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선호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


이라는 걸 추론해볼 수 있다. 이 세가지 가설을 토대로 프레임들의 경쟁

(2012), 165p
107) 박영환, 프레임들의 경쟁이 정치선택에 미치는 영향, 「한국정당학회보, 학술지」,

(2012), 166p

- 137 -
이 정치 선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에서 박영환은 서울, 영남, 호남

지역에 위치한 국민대, 조선대, 영남대 대학생들을 토대로 총 235명을 모


집하여 실시한 복지 프레임, 세금부담 프레임, 두 프레임을 동시에 담고

있는 설문, 이 세 가지 설문을 통해 가설에 대한 연구 결과를 서술하였

다. 여기서 첫 번째 가설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의 상황을 대입하기 위해


단일성의 자극적인 프레임에 따른 결과로 판단하고자 한다.

<표 2> 자극적인 단일성 프레임에 대한 정책선호 여부108)

낮은 수준의 정치적 지식 높은 수준의 정치적 지식


진보 중도 보수 진보 중도 보수
동의 45% 23% 58% 41% 100% 67%
잘 모름 9% 46% 0% 16% 0% 0%
반대 45% 31% 42% 43% 0% 33%
총계 100% 100% 100% 100% 100% 100%

독재체제하에서 정보의 제한에 의해 쇼스타코비치를 낮은 정치적 정


보력에 해당된다는 점을 토대로 <표 2>에 따르면 잘 모른다는 부문에
46%라는 높은 수치가 나왔다. 진보적인 성향과 보수적인 성향에서도 동의
와 반대가 대략 반반의 비율로써 왜곡 여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쇼스타코비치가 각각의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더라는 가정을 했을
때 왜곡으로 인한 정책 선호도가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서 말

한 정치적 불만이 정치 참여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와 일


맥상통하다. 그리고 두 번째 가설에 의한 경쟁적 프레임인 새누리당, 민
주통합당으로 적용하고 해당 두 분류로 나뉘어 경쟁적 프레임을 짠 후에

나온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108) 박영환, 프레임들의 경쟁이 정치선택에 미치는 영향, 「한국정당학회보, 학술지」,

(2012), 172p

- 138 -
<표 3> 경쟁적 프레임 경험시 선호도109)

낮은 수준의 정치적 지식 높은 수준의 정치적 지식


진보 중도 보수 진보 중도 보수
동의 82% 86% 91% 86% 100% 75%
잘 모름 5% 14% 5% 7% 0% 0%
반대 13% 0% 5% 7% 0% 25%
총계 100% 100% 100% 100% 100% 100%

<표 3>에 나타나듯이 경쟁적 프레임을 경험했을 시에 정당에 뚜렷하


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며, 이는 쇼스타코비치는 경쟁적 프레
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정당에 대한 선호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는 가설에 힘을 싣는다. 그리고 정치적 정보들이 개인들의 태도를 구성하
는 이해관계, 특정집단에 대한 일체감, 정치적 이념원칙에 어떻게 부합하
는지의 여부가 영향을 준다는 것에 대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그림9> 경쟁적인 프레임과 집단의 일체감에 따른 선호 차이110)

109) 박영환, 프레임들의 경쟁이 정치선택에 미치는 영향, 「한국정당학회보, 학술지」,

(2012), 172p
110) 박영환, 프레임들의 경쟁이 정치선택에 미치는 영향, 「한국정당학회보, 학술지」,

(2012), 178p

- 139 -
<그림10> 경쟁적인 프레임과 이념원칙의 부합에 따른 선호차이111)

<그림11> 경쟁적인 프레임과 이해관계성에 따른 선호차이112)

111) 박영환, 프레임들의 경쟁이 정치선택에 미치는 영향, 「한국정당학회보, 학술지」,

(2012), 178p
112) 박영환, 프레임들의 경쟁이 정치선택에 미치는 영향, 「한국정당학회보, 학술지」,

(2012), 179p

- 140 -
한계효과의 선 위아래로 그어진 95% 신뢰구간이 “0”을 포함하고 있

지 않을 때 그 한계효과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것으로 위 세 가지


연구를 통해서 집단의 일체감, 정치적 이념원칙, 이해관계가 정치 선호도

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에 따른 앞선 쇼스타코비치의 상황

에 따라 정치 선호도에 뚜렷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세


번째 가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쇼스타코비치는 단일성 체제인 공산주의 상황과 경쟁적 프


레임이 아닌 자극적인 단일성 프레임 영향 하에 있던 상황을 통해 정치
선호도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고, 이는 그의 심리 상태에도 적용하여 정
치 신뢰와 참여 연관성과 선호도를 통해 그가 정치에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7. 정치적 프레임을 배제한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사상

앞선 문헌 분석과 심리적 분석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에게 정치적 프레


임을 배제하여 판단하였고 이제 그의 작품 성향과 예술사상 그리고 앞선
문헌 분석에서 나타난 동일한 주장과 상이한 주장을 통해 쇼스타코비치가

특정한 정치관을 가진 인물인지 살펴보았다.


먼저 작품 성향으로 쇼스타코비치가 당국에 아직 영향을 받지 않았을
시기 당시의 배경을 살펴 보았다. 이 시기에는 쇼스타코비치가 가난한 삶

속에서 음악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스타인버그 등의 여러 스승들에게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던 순수한 상태였다. 당의 영향을 받지 않던
1927년 이전의 주요 작품들은 Scherzo in F sharp minor Op.1, Symphony

- 141 -
No.1 in F minor Op.10, Piano Sonata No.1 Op.12 등이 있다. 이 중 정치

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성실히 공부해왔던 쇼스타


코비치가 본인이 가지고 있던 지식을 예술에 대한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썼던 시기인 음악원 졸업 후에 작곡한 <제1번 교향곡>을 분석해보고자 한

다.

7.1. Shostakovich Symphony No. 1


<제1번 교향곡>은 1924년-1925년 사이에 작곡하여 1926년 초연되었
다. 현대음악협회에 소속되어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이후 현대음악협회에
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전통에 충실한 보수적 작곡가와 일부 음악원 교
수들 때문에 알렉산드르 카멘스키, 블라디미르 데세보프, 미하일 드루스
킨과 함께 이 협회에서 탈퇴하였고, 이후 새로운 음악 서클로 이동하였으
며, 이 ‘서클’은 1926년 ‘중앙음악기술학교’로 확장되었다. <제1번
교향곡>의 초연 당시 협회 소속이였던 말코가 지휘를 맡게 되어, 현대음
악협회에서 후원을 받았다. <제1번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가 생각해낸
새로운 아이디어가 사용된 흔적들이 있다. 악장의 단절이 보편화였던 당
시 3악장과 4악장을 중단하지 않고 연주하는 방식을 사용하거나, 피아노
를 관현악의 악기 구성으로 편입시켜 사용하는 등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차용했다. 또한 2악장에서 갑작스러운 단절을 통한 정적을 줘서 충격적인
느낌을 주는 부분도 한 몫 했다. 이 <제1번 교향곡>은 가볍지만 쇼스타코

비치의 개성이 굉장히 많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통한 실험정신, 쇼스타코비치에게 영향을 준 구스
타프 말러나 바그너 등의 기법들을 단순하게 사용하지 않고 발전시키는

점 등의 성향은 그가 굉장히 예술에 자존심과 숭고한 이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정한 사건이 없고 당 정책에 휘둘리지 않았던 이 작

- 142 -
품을 통해 그의 예술 사상은 정치적인 사상이 없고, 우선적인 것은 예술

사상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2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체호프는 1860년 1월 29일에 러시아 제국 타간로크에서 태어난 의사

이자 단편소설 극작가이다. 단편소설의 위상을 끌어올렸다고 하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갈매기>, <바냐 삼촌>, <세 자매>, <벚나무 동산>,
<검은 옷의 수도사>, <제6병동>, <사할린 섬> 등이 있다.

<그림12>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 143 -
쇼스타코비치 인생에서 체호프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억압

받던 시대를 사는 쇼스타코비치로써는 억압된 감정의 탈출구였다. 체호프


의 글은 사실적 묘사를 통한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표현하는 것과 글을 단

순하게 쓰는 것을 굉장히 중시했는데, 이는 당시에 글의 새로운 형태의

방식이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억압된 시대의 삶에서 하지 못할 직설적이고


담백한 사실주의적 표현을 체호프를 통해 자기 자신과 연결하여 감정의

교두보 역할을 하려 했다.

『“체호프에게 위선의 냄새가 없는 점도 아주 좋다.”』113)

위선의 냄새가 없어서 좋다는 표현은, 살면서 느낀 정치적인 시대적


배경으로 인한 억압으로 인한 표현의 거짓, 스탈린이 주로 써먹은 행동으

로, 자신의 지혜와 총명함을 과시하기 위해 그에 따른 제물로 삶고 핍박


하는 행동들을 봐왔던 쇼스타코비치로써는 체호프의 글에 자신의 감정과
갈망을 녹여서 보았기 때문에 나타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체호프의 글에서 쇼스타코비치는 감정의 동화, 갈망의 해


소 등 여러 이유로 체호프의 글을 굉장히 좋아했었고, 체호프의 작품을
통해서 곡을 쓰기를 항상 갈망했었으나 작품의 완성도나 체호프의 작품에

걸맞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하여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제대로 완성한 작


품이 없을 정도로 체호프의 예술에 감화되어있었다. 쇼스타코비치가 좋아
하고 감명 깊게 봤던 여러 작품 중에 검은 옷의 수도사를 들여다보자.

113)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416p

- 144 -
7.2.1. 검은 옷의 수도사
1894년에 체호프가 발표한 <검은 옷의 수도사>는 체호프에 대해 평생

강한 애정을 품었던 쇼스타코비치로써 생애 말년에 작곡을 시도했던 작품

이었다. 물론 완성되진 않았지만, 완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쇼스타코비


치가 체호프를 정말로 좋아했는지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예시로써, 쇼스타코비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의 주제를 가지고 작곡을

하고 싶다는 열망은 전부터 가지고 있었으나, 작품의 애정 때문에 ‘두렵


다’‘감히’라는 생각에 다루지 못하다 생애 마지막에 <레비야드킨 대위
의 시에 붙인 노래>를 통해 겨우 작품을 완성하였다. 이에 따라 쇼스타코
비치는 자신이 애정하는 작품을 소중하게 그리고 진중한 마음으로 자아
성찰을 통해 작품을 다룰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항상 고려해왔다. 체
호프의 검은 옷의 수도사도 마찬가지이다. 앞선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로
작품을 완성하는데 수십년의 고민을 했는데, 평생 강한 애정을 품고 있던
체호프의 작품을 손쉽게 다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결국 생애 마지막 자신
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검은 옷의 수도사>의 작곡을
시도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삶과 죽음을 통해 생애 마지막이 돼서야
체호프 작품에 쇼스타코비치 내면에 자신이 납득할만한 영혼의 교감을 느
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쇼스타코비치는 생애 마지막이 돼서야 검은 옷의 수도사
를 시도했을까에 대한 것은 <검은 옷의 수도사> 소설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검은 옷의 수도사>의 주요인물은 3명이다. 철학박자 ‘코브린’, 시


골에서 큰 과수원을 운영하는 ‘페소츠키’, 페소츠키의 딸 ‘타냐’를
중심으로,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페소츠키 부녀가 코브린을 거두어 길러

주었다는 설정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

- 145 -
다.

신경쇠약에 시달린 코브린은 시골에서 쉬라는 친구의 말에 페소츠키


의 과수원으로 내려간다. 똑똑하고 지적인 사람으로 인식하여 코브린을

좋아하는 페소츠키와 연모하는 타냐와의 한적한 시골생활에서 어느날 검

은 수사를 환각으로 보게되고, 검은 수사는 코브린에게 말한다.

『“자네는 신이 선택한 자라 불러도 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니까. 자네는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하지. 자네의 생각, 의도, 놀라운 학문, 그리고 삶 전체에 신
성한 하늘의 봉인이 찍혀 있네. 그 모든 것이 지적이고 아름다운 것, 다시 말해 영
원한 것들을 향하고 있으니 말일세.”』

『“자네는 왜 온 세상이 신뢰하는 천재들이 환영을 본 적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요즘은 학자들도 천재성은 광기와 유사한 거라고 하지 않나.”』

『“건강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군중에게로 가게.”』114)

이후 타냐랑 결혼한 코브린은 같은 침대에서 잠들던 타샤가 밤중에


코브린이 헛소리하면서 환각을 보는 모습을 보고 강제적으로 약을 먹이고
일을 못하게 하면서 코브린은 검은 수사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된다. 코
브린은 몸이 건강해지는 과정에서 우울감, 무력감, 패배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그는 페소츠키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인삼고 타샤를 불행에 빠트리며
이혼을 하게된다. 이후 새로운 여인과 결혼한 코브린은 새벽에 오랜만에
검은 수사가 나타나며 코브린에게 말한다.

114) Anton Pavlovich Chekhov, About Love and other stories, 「사랑에 관하여」,

(펭 귄 클래식 코리아, 2015), 102p

- 146 -
『“자넨 왜 나를 믿지 않았지?, 그때 자네가 천재라는 내 말을 믿었더라면 지난 2
년을 그토록 슬프고 고통스럽게 보내지는 않았을 걸세.”』

『“당신은 천재이며 나약한 육체가 이미 균형을 잃어 더 이상 천재를 위한 의복의


역할을 할 수 없기에 죽어가고 있을 따름이라 속삭였다.”』115)

이후 코브린은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행복감이 그의 온 존재를 감싸


는 느낌을 받으며, 목구멍에서 피가 솟구쳐 흐르며 쓰러지고, 새로운 여
인을 타냐라고 부르면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쇼스타코비치는 과거 자신의 예술적인 신념과 사상, 그에 따른 시대
적으로 억압된 상황, 폐결핵을 걸렸을 때 회상과 정신적으로 우울감을 이
겨 낼려는 의지 등을 통해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
었고, 체호프의 글을 통해 자신과 빗대어 보면서 내적 사상의 성찰을 야
기하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자아 성찰을 통해 나온 생각들을 자신의 예술
에 담고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7.2.2. 체호프의 음악적 형식의 틀

『체호프는 더 심오한 의미에서 음악적이다. 그의 작품은 음악이 작곡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음악적 구성이 원래 일반 법칙을 더 많이 반
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16)

쇼스타코비치는 소설이나 시를 읽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애정하

115) Anton Pavlovich Chekhov, About Love and other stories, 「사랑에 관하여」,

(펭 귄 클래식 코리아, 2015), 124p


116)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496p

- 147 -
는 작가 중 체호프의 작품을 좋아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서 체호프의 글은 ‘음악적이다’라는 생각 때문이였다.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여러 작품을 읽고 음악이 작곡이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되어있다

고 해석했다. 실질적으로 체호프가 의식적으로 음악의 형식처럼 글을 쓰

진 않았을 것이다. 음악의 형식도 일반적인 법칙을 따르는 것도 있고 글


도 마찬가지인데, 쇼스타코비치 본인이 음악가인 탓에 이입하여 해석한

부분도 있다. 실질적으로 쇼스타코비치가 언급한 “검은 옷의 수도사”는


음악으로 대입해봤을 때,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검은 옷의 수도사”는 도입부, 제1주제와 제2주제의 제시부, 발전부 등
으로 되어있다고 언급하였다.117) 특히 체호프는 삶과 죽음을 굉장히 강조
했던 작가였고, 쇼스타코비치도 죽음에 관한 뚜렷한 철학관을 가지고 있
었다.

『사람들은 <교향곡 제 14번>에서 이런 메세지를 읽는다. "죽음은 전능하다." 친구


들은 피날레에서 위안을 얻고 싶어 했는데 그래야 죽음이 새로운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은 시작이 아니고 진정한 종말이며 그
뒤에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게 된다.』118)

체호프의 죽음의 관한 이념에 영향을 받고 동일한 생각을 가지게 된


쇼스타코비치는 무소르그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의“죽음과 노

래와 춤”에 영향을 받고 <제14번 교향곡>을 만들었다. 이 곡은 무려 11


악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는데, 대부분의 악장이 죽음에 연관된 주제를 가
지고 있다. 또한 <제15번 교향곡>도 <검은 옷의 수도사>의 내용을 모티브

117)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496p


118)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420p

- 148 -
로 따온 주제에 의한 변주곡으로 쇼스타코비치는 체호프의 주제를 가지고

많은 작곡을 해보고 싶어했다. 러시아 제국부터 스탈린이 이끌던 소련의


억압받던 시대를 살던 국민들은 혁명에 큰 의미 부여를 하고, 문학, 음악,

철학, 혹은 작은 소문 등 이러한 외부 요소를 통한 감정적 위로를 얻길

바랬다. 소련에서 낙관주의와 반대되는 죽음이라는 소재는 예술에서 써먹


기엔 공격받기 좋은 소재였고, 당에서는 낙관주의를 강조하는 사회주의를

국민들에게 심어주기 바빴다.

『소련에서 죽음은 예술에는 부적절한 주제였고 죽음에 대해 쓴다는 것은 대중 앞에


서 소매로 코를 닦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행동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낙관적인 비
극’119) 따위의 제목이 생겨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제목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비극은 그냥 비극일 뿐이지 낙관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비록 비극에까지 ‘낙
관주의적’이라는 형용사를 달아야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죽
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며 다른 사람들도 그 문제에 관심을 갖
고 있다는 생각이 항상 들었다.』120)

여기서 쇼스타코비치와 체호프의 예술적 교류를 통해 발현된 죽음에


관한 가치관은 죽음 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블랙홀과 같은, 공허한
암흑공간에 빠진 것처럼 아무것도 없고 죽음이 가까운 사회주의 국가에서
강조하는 낙관주의적 사고를 통한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미래를 살아가
야 하는 것이 아닌 당장에 처한 자신의 삶과 위기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
해보며 현재를 의미 있게 살아야 된다는 점과 죽음을 혁명 같은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 여기면서 가벼워지지 않길 바라는 의도도 숨어져
있다.

119) 당 관료들이 쇼스타코비치의 <제5번 교향곡>에 붙인 제목


120)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418p

- 149 -
6.3. 미하일 조셴코

<그림13> 미하일 조셴코

미하일 조셴코는 1894년 8월 9일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

어났다. 조셴코는 풍자 작가이자 희곡 작가이며 쇼스타코비치의 절친한


친구였다. 2차대전 이후 1946년부터 스탈린의 명령을 통해 코스모폴리타
니즘(Cosmo-Politanism)121)과 서방세계에 대한 아부 행위를 비난하는 캠페

인이 일어났다. 이는 전쟁을 통하여 다른 세계와 생활 방식, 자기주장을


행사하는 방법을 배운 시민들을 다시 러시아 민족주의라는 틀 안에 가둬
두기 위해 실시한 것인데, 이때 불운하게도 서적, 연극, 영화 등 예술가들

의 타겟이 되면서 ‘즈다노프의 폭풍’122)이라 불리는 문학의 규제 강화

121)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 : 인종이나 민족, 국민이나 국가에 관계없이,

전 인류를 그 본성에서 혹은 신의 아래에서는 모두 동포라고 보는 입장이나 태도.

- 150 -
의 첫 희생자로써 아흐마토바와 조셴코가 비난을 받았으며 당에서는 조셴

코의 글을 소련 문학에서 추방하기로 했고 이후 그는 가난하게 살았다.


조셴코의 글의 스타일은 그의 발언에 따르면, 123)“나는 간결하게 쓴다.

내 문장은 짧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다. 아마 그래서 내 독자

가 그렇게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문학 스타일은 아무도 시


도하지 않은 독창적인 스타일로써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자기표현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메이예르홀트는 그녀를 광적으로 사랑했다. 그런 사랑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런 사랑이 우리 시대에도 존재한다는 상상은 하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거기
에는 무언가 불길한 요소가 잇었고 결국 불행한 종말을 맞았다.』124)

1938년 메이예르홀트의 아내가 살해 당한채 발견된 사건과 죠셴코에


게 영향받은 쇼스타코비치의 표현방식은 몇가지가 있는데, 풍자 작가로써
의 죠셴코는 매사에 장난끼가 많았던 인물이며,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말
투를 자주 모방했다. 바로 반어법과 이중화법이 그 방식이다. 쇼스타코비
치는 오히려 사랑하고 애정하는 것들은 쉽게 빨리 사라져버리지만 반어법
적으로 소중한 것들을 대해야지만 그것들을 오래 볼 수 있다 믿었다. 이
내용은 지나친 애정은 집착으로 변질하여 점차 불길한 요소들이 쌓여가고
이후 불행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으니 오히려 충격을 줄이기위해 왜곡
하거나 모순적이게 표현하는 이중화법을 쓰거나 반어법으로 무관심한 듯

122) 1946년 문화부 장관에 임명된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국가 정책에 어긋나는 작품은

연주를 금지하고 예술가들을 억압하고 규제했다.


123)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84p


124) Solomon M. Volkov, St. Peterburg : A Cultural History, The Free Press, 1997,

379-380p

- 151 -
해야 오래 관계를 유지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6.4. 안나 아흐마토바

<그림14> 안나 아흐마토바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우크라이나 안에 있는 오데사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흐마토바는 필명이며, 본명은 안나 안드레옙나 고렌코이다.


아흐마토바가 가장 선호했던 대화나 글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반영된 특정 대상의 표현하는 스타일을 선호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대상을 이야기하다 자기 자신이 투영되어 반사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으


로 간접적인 자신을 표현하곤 했다. 안나 아흐마토바도 마찬가지로 조셴
코와 쇼스타코비치랑 같이‘즈다노프의 폭풍’의 피해자로써 작가조합에
서 축출되고 생계수단을 모조리 박탈당하고 수없이 많은 악랄한 비판들을

- 152 -
받았다. 즉 쇼스타코비치와 죠셴코, 아흐마토바의 예술사상이 어느 정도

공통된 부분들이 있었고, 이 사상 자체가 당의 심기를 건들였던게 분명했


기 때문에 그들은 ‘즈다노프의 폭풍’을 피할 수 없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아흐마토바의 예술성에 항상 그녀를 경애했다. 그것

은 서로 성격이 맞거나 대화가 잘 통한다는 것이 아닌 그의 사상과 예술


성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아흐마토바의 대표 시인 <레퀴엠>과 <주인공 없

는 시>는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모든 이들을 추도하는 글이다. 아흐마


토바가 똑같이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사상을 존중하고 경애했던 증명으로
아흐마토바는 <주인공 없는 시>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을 언
급했다. 이는 <교향곡 제7번>이 그녀의 당시 시대적인 배경에 대한 생각
과 내적 사상의 교감을 그녀 자신은 느꼈기 때문이다. 쇼스타코비치도 아
흐마토바의 <레퀴엠>을 굉장히 높게 평가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아흐마토
바랑 같은 도시에 태어났고, 그 도시를 좋아했으며, 같은 세계관, 공통의
지인을 통해 정신적인 동질의 내적 교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와 예술사
상과 생각의 동질감을 느끼고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아흐마토바는 시의 형태로 <레퀴엠>을 썼지만,


나의 레퀴엠은 <교향곡 제7번>과 <교향곡 제8번>이다.』125)

아흐마토바의 인생은 회색빛의 나날이었다. 첫 번째 남편이였던 구밀

료프는 총살당하고, 아들인 레프는 장기형을 선고받고 수용소로 끌려갔


고, 세 번째 남편이였던 푸닌도 수용소에서 죽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인생
도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

다.

125)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334p

- 153 -
『“내 인생에는 특별히 행복했던 순간도, 크게 기뻐했던 순간도 없었다.
내 인생은 지루한 회색의 나날이였고, 그 생각을 하면 슬퍼진다.”』

쇼스타코비치는 아흐마토바와의 나날들에서 그녀의 사상과의 동질감

을 느끼며, 자아 성찰을 통해 자신의 내적 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


는 계기가 되었다.

6.5. 쇼스타코비치의 환청
지인들의 증언에서 나타난 쇼스타코비치의 모습 중에서 그가 작곡을
할 당시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작곡을 하였다는 증언과 끊임없이 수기로
기존 곡을 새롭게 편곡하고 버리는 등의 모습을 보았다는 증언 등을 토대

로 그의 두뇌는 쉴새 없이 음악만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로 평가되어 있


다. 이에 따른 일부 관련된 사실이 있었다는 증언을 올리버 색스가 의학
적 경험을 토대로 펴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찾아볼 수 있

었다.

6.5.1.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쇼스타코비치는 말한다.

『“나는 항상 머릿속에 멜로디가 있고, 오케스트레이션이 그려져 있다.”』

19세의 어린 나이로 교향곡 제1번을 발표하여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러시아제국부터 소련의 역사에 나타난 천재 작곡가이다. 단순히
모든 이들이, 쇼스타코비치는 재능을 타고나서 천재인 케이스로 생각할

것이다. 물론, 재능을 타고난 천재도 맞지만 여러 부가적인 부분들이 그


가 음악의 천재가 되는 것에 한 몫 했다.

- 154 -
쇼스타코비치가 천재적인 음악가가 되는데 한 몫 했던 여러 가지 요

인들 중에 건강 부분이 빠질 수가 없다. 모든 예술가들의 예술성이 나타


나는 것은 단순하게 자신의 분야에서만 영향을 받아 발현되는 것이 아닌

내적 부분인 정신적 요인과 외적 부분인 신체적·환경적 요인에 따라 예

술성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올리버 색스는 영국 런던에서 출신으로, 신경의학자 겸 작가이다. 올


리버 색스가 낸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의학 연구서이기도
하고, 임상 보고서이기도 하며, 자신이 겪었던, 혹은 동료 의사들의 임상
을 이야기로 푼 책이다. 해당 책에서는 단지 소문만 무성하여, 맞다 아니
다로 의견이 갈리었던 쇼스타코비치의 병에 관련된 사실적 내용이 나온
다.

“내가 M부인을 진찰한 다음 날, <뉴욕타임스>에 <쇼스타코비치의


비밀>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중국인 신경과 의사인 다줴 왕에 따르
면, 쇼스타코비치의 비밀이란 그의 왼쪽 뇌실(腦室) 관자뿔 부분에
금속 파편인 탄환 부스러기가 있다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그것
을 제거하는 것을 몹시 꺼렸던 것 같다.”

『파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면 반드시 음악이 들려


왔다고 그는 말했다. 그때마다 새로운 선율이 머릿속에 가득차 그것을 작곡
에 이용한 듯하다.』

뢴트겐 검사 결과 쇼스타코비치의 머리가 움직이면 파편이 움직여서

관자엽의 음악 영역을 압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몸을 기


울이면 선율이 무한하게 흘렀고, 천재 쇼스타코비치는 그것을 작곡에 이

- 155 -
용할 수 있었다.126)

이 내용은 올리버 색스가 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언


급한 내용인데, 이에 대한 실질적인 내용은 다줴 왕이 작성한

“Shostakovich : Music On the Brain?”의 347페이지에서도 언급하고 있

다. 1950년대에 병원에 찾아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증언에 대한 학자


들의 판단은 당시에 병원에 갈 시간이 없었다라고 하는 것과 쇼스타코비

치의 딸 갈리아의 회상에서 아버지가 부상당했다는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


였다.127) 이 레닌그라드 전투 당시 쇼스타코비치가 음악 작업과 소방수
업무, 이후 붉은 군대에 편입되는 등 가족과 항상 같이 있을 수 없었던
부분과 언급한 내용에서 병원에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뒤에 방문했다는 점
과 상담으로 끝날만큼 큰 부상이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갈리나가 회상하
는 전쟁의 시점은 그의 나이가 5~9살 사이인 굉장히 어린 나이였다는 점
등을 토대로 어느 정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다. 여러 문헌에
서도 쇼스타코비치가 <제7번 교향곡>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작업을 완성
했다는 문헌적 사실들이 굉장히 많다는 점을 토대로 가능성을 염두하고
좀 더 자료를 습득, 연구하여 논의를 할 필요성이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제자였던 에디손 데니소프(Edison Denisov)의 회상에
따르면, 쇼스타코비치는 항상 악보에 무언가를 계속해서 쉬지 않고 끄적
였다. 그렇게 작업을 다 끝내고 나면 그 악보를 찢는 등 남들이 봤을 때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을 했다.128) 그가 찢는 모습을 본 데니소프는 왜그
러냐고 묻자 쇼스타코비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26) Oliver Sacks, 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 조석현 옮김, 「아내

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알마, 2016), 240p


127) M.T Anderson, 「죽은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장호연 옮김, (돌베개, 2018),

305-307p
128)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301-302p

- 156 -
『“작곡은 도무지 되지 않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기는 불
편하다네. 그래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로망스 전곡을 오케스트레이션 하기로 작정
했지. 로망스 전집을 갖다 놓고 한 곡씩 편곡해 나가면서 다 되기만 하면 찢어버리
곤 한다네.”』

이 행동들은 쇼스타코비치의 습관 같은 행동인데 작곡이 자기가 떠올


린 것처럼 잘 나오지 않았을 때, 그는 쉬지 않고 악보에 끄적였다. 다른
음악가의 작품의 전집을 골라 차례차례 편곡하고 찢는 행위를 반복함으로
써 그의 창작에 대한 구상을 쉬지 않고 했으며, 게다가 작곡의 감각이 떨
어지지 않는 의도도 있었다. 그리고 매우 자주 자기 생각에 빠져있는 모
습을 바라본 지인들은 항상 자기 머릿속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 것처럼 보
였다고 한다. 정말로 청각기관에 문제가 생겨 진짜 소리가 들린 것이 아
닐 것이다. 작곡가들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소리를 인지하고 들린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작곡에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위 내용도 이러한 인지의
한 종류일 것이다. 그러한 능력적인 모습을 본 쇼스타코비치와 가깝게 교
류했던 플로라 리트비노바(Flora Litvinova)의 회상에 이와 관련된 내용도
있다.

『I should add that once Dmitri Dmitriyevich said that no single performance of his
works sounded as perfectly as it did in his own head.』129)

: 한번은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가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공연 중 어떤 것도 자신


의 머릿속에서 연주된 것처럼 완벽하게 들린 것은 없다고도 말했다는 점도 덧붙여
야겠다.

129)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179p

- 157 -
쇼스타코비치에게 절망, 좌절, 아픔, 슬픔, 삶과 죽음의 의미를 주었

던 레닌그라드에서의 전쟁은, 시대적인 배경을 통한 그에 따른 예술정신


의 발전에 기여한 정신적인 영향과 뇌에 탄환 부스러기로 인한 신체적인

영향을 통해 공교롭게도 단순한 마이너스적 정신질환이 아닌 음악적인 환

청을 그에게 안겨 주었고, 쇼스타코비치의 작곡 활동으로 이어져 그의 예


술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6.6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


쇼스타코비치의 생애와 그의 작품의 정치적 해석, 예술사상들에 대해
찾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제7번 교향곡>이다. 이 <제7번 교
향곡>은 당시의 쇼스타코비치가 독소전쟁 발발의 시작이였던 레닌그라드
를 기점으로 전쟁을 겪은 상황에서 그의 내면과 역사적 사실로써 찾아볼
수 있는 행보 등을 토대로 그의 성향과 예술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자신의 고향이였던 레닌그라드와 어머니의 땅이라 불린 조국을 위해 전쟁
에 참전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미 유명하게 사실로써 알려져 있다. 전쟁
중에 <제7번 교향곡>을 작곡하게 되면서 이 작품이 인민들에게 어떠한 의
미를 품게 되었는지, 그리고 인민들이 이 음악이라는 매개체로 어떻게 전
쟁을 겪었는지, 또한 정치적으로 당국에 이용당한 사실과 세계에선 어떠
한 평가를 받았는지,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심정 등을 통해 사상에 어떠
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았다.

6.6.1. 레닌그라드 전투
레닌그라드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동부 전선에서 상트페테르부르
크의 옛 이름이었던 레닌그라드에서 발발한 전투이다. 소련과 독일은 불
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같이 침공하여 나눠 가지는 등 좋은 관계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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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 보이는 듯 했으나, 히틀러는 대숙청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약

해진 소련을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림15> 레닌그라드 포위전 지도

이때, 제18군 참모장 에리히 마르크스(Erich Marcks)는 소련의 빈약한


도로망을 염두하고 작전 초안을 상부에 보고하였다. 이후 이 작전은 소련
을 침공하는 전략의 최초 디딤돌이 되었고, 이후 이 작전을 붉은수염이라
뜻하는 바바로사 계획(Operation Barbarossa)라고 불렸다. 이 바바로사 계

획의 목표 중 레닌그라드가 선택된 이유는 당시 전략적 가치로, 소련의


수도로써 정치적 중심지이자, 러시아 혁명의 상징적 장소였으며, 무기 공
장과 산업 시설이 모여있던 대도시에다가 소련의 ‘발트 함대’의 주요

거점으로 군사적 가치가 높은 도시였다.130) 이어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

- 159 -
드로 진격해나갔다. 공습과 장거리 포격으로 인해 많은 수의 생활 기반

및 사회 기반 시설이 파괴되었고, 연결선의 차단으로 인해 레닌그라드에


필요한 모든 보급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그림16> 포격 당한 레닌그라드 시가지

이 당시 872일 전투기간 동안 레닌그라드 전역에 심각한 기근을 몰고


오게되어 전투와 기근으로 사망한 인원이 군인은 150만 명, 민간인 140만
명 이상이나 되었고, 기근으로 인해 지독한 굶주림을 겪고 있던 사람들은

인육을 파는 상점까지 나타나게 되어, 식인단속 기동타격대가 만들어지기


이르렀다.

130)

https://ko.wikipedia.org/wiki/%EB%A0%88%EB%8B%8C%EA%B7%B8%EB%9D%

BC%EB%93%9C_%ED%8F%AC%EC%9C%84%EC%A0%84, 레닌그라드 포위전,

나무위키

- 160 -
<그림17> 아사한 시체를 묻는 레닌그라드 시민들

1942년 레닌그라드로 통하는 철도 요충지였던 류반을 탈환하기위해


제2충격군은 작전에 따라 전투에 임했으나 거의 전멸하게 되면서 보급의
희망은 날아가게되었다. 이후 레닌 그라드에서 남동쪽으로 50km 떨어진

넵스키 퍄타초크(Nevsky Pyatachok)에서 소련의 제48군과 제55군이 독일


과의 장기전에 들어갔지만 서로 사상자만 남기고 끝나게 되었는데, 이러
한 전투 중 고난했던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희망적인 일이 생겼다. 레닌

그라드의 동북쪽에 있는 추위로 인해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를 통해 식량,


무기, 탄약 등의 보급물자가 보내졌고, 레닌그라드의 남아있는 사람들에
게 사기를 복돋아주게 되었다.

- 161 -
<그림18> 라도가 호수를 통한 보급

이후 여러 작전과 전투로 성공적인 공세를 보여주던 소련은 1944년


독일을 상대로 맹공격을 퍼부었고 1944년 1월 독일은 소련의 공세에 밀려
레닌그라드의 모든 포위망이 사라지면서 소련은 승리하였고 그해 2월 소
련군이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여 공식적으로 레닌그라드가 해
방되었다.131) 레닌그라드에서의 전투는 쇼스타코비치에게 많은 작곡의 소
재와 애환, 음악가의 책임과 자존심을 일깨워주는 사건이었으며, 이를 통
해서 <제7번 교향곡>, <제8번 교향곡>, <제9번 교향곡> 전쟁 교향곡이라
불리는 3곡을 만들게 만든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131) https://namu.wiki/w/%EB%A0%88%EB%8B%8C%EA%B7%B

8%EB%9D%BC%EB

%93%9C%20%EA%B3%B5%EB%B0%A9%EC%A0%84, 레닌그라드 공방전, 나무

위키

- 162 -
6.6.2.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미국 작가 M. T. 앤더슨이 쓴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은 쇼

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의 초연을 다룬 논픽션 서적

이다. 전쟁상태에서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탈출한 작곡가가 작품을 완성


하고 초연하기까지의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서적으

로써,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의 악보가 이란에서 이집트 그리고

브라질을 거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과정과 투스카니니 지휘로 라디오 방


송을 통해 방송되어지고, 세계적으로 이 곡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
지에 대한 것, 또한 해당 교향곡이 소비에트 연방 국민들에게 어떠한 영
향을 끼쳤는지, <교향곡 제5번>, 스탈린 사후에 연주된 <교향곡 제4번>,
스탈린을 주제로 삼은 <교향곡 제10번> 등의 곡들을 서술했다. 전쟁을 통
해 인간의 잔혹성, 바뀌는 정세에 따른 극심하게 변화하는 대중들의 시선
등을 통해 철저하게 본심을 숨기면서도 교묘하게 자신의 신념을 내비치는
내용들을 담았다.
이 책의 저자인 매튜 토빈 앤더슨(M.T.Anderson)은 이 책을 작성하면
서 논란이 많은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에 신중하게 접근하였고, 로렐
E. 페이의 “Shostakovich: A Life”내용과 엘리자베스 윌슨의
“Shostakovich: A Life Remembered”에서 나타나는 주변 사람들의 회상
과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비교하여 논란이 되지 않다고 판단되는
부분들을 출처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이 책에서 나타나는 쇼스타코비치의
신념과 사상 등이 로렐 E. 페이, 엘리자베스 윌슨, 솔로몬 볼코프의 서적

의 사실적 내용을 제외한 논픽션 부분을 드러낸다면 학문적으로 유용한


부분들이 있다고 판단된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레닌그라드를 침공한 독일을 상대로 전쟁 선포를

선언하는 확성기의 내용을 듣고 있었다. 확성기의 소리가 나오기전까진

- 163 -
평화로웠던 레닌그라드에서 급작스런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에 아수라장

이 된 도시에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자원병으로 나섰으며, 쇼스타코비치


도 이런 흐름에 플레이시만과 함께 자원병에 지원했다. 이 당시 쇼스타코

비치가 인민지원군에 지원한 것이 아닌 단순한 지원한다는 의사표명을 했

을 뿐이였는데, 이때는 군 조직이 아직 설립 전이였기 때문에 인민지원군


에서 거절당했다. 담당자는 쇼스타코비치에게 당신은 필요하게되면 소집

할 것이라고 말했다.132) 거절의 사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들은 시력이


나쁘다는 이유를 들먹였으나, 유명세 때문에 거절당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스탈린과 당국은 음악이 인민들의 사기와 이끄는데 굉장한 보탬
이 된다는 것을 충분히 그간의 행동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7월
2일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군에 지원하러 갔다. 이 당시는 인민지원군에
자신의 의지로 지원하였다. 하지만 한번 더 거절을 당한 쇼스타코비치는
그에게 주어진 소방수 의무를 통해 인민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였
다.

<그림19> 소방관으로 근무했던 쇼스타코비치

132) Seroff, Victor Ilyich, with Nadejda Galli-Shohat. Dmitri Shostakovich : The Life

and Background of a Soviet Composer, New York : Knopf, 1943. 236p

- 164 -
인민지원군에 있던 쇼스타코비치의 제자 플레이시만은 루가 방어선
근처 전투에서 죽게 되었다. 이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수차례 스탈린과 그

의 정권에 의해 음악 활동의 핍박을 여러번 겪은 뒤의 일이다. 그러한 일

을 겪은 쇼스타코비치는 정말로 당 정책에 순응하는 음악가였기 때문에


군대에 지원을 했을까에 대한 의문과 시민들도 같은 마음이였을까에 대한

대답은 1941년 9월 미국 대사 해리먼(Averell Harriman)의 스탈린과의 인


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우리 병사들의 전투의지에 대해 그 어떤 환상도 품지


않았다. 그들은 어머니 러시아를 위해 싸우고 있다.”』133)

이에 대한 M. T. 앤더슨이 그가 찾은 문헌에도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에서 다음과 같이 동일한 내용으로 나타나있다.

『인민들은 우리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러시아를 위해 싸우는 것이오.』134)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은 시민들뿐만 아니라 쇼스타코비치도 특


정한 정치적 색깔을 가진 것이 아닌 단순히 굉장한 조국애를 가지고 있다
는 것을 스탈린 본인 자신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쇼스타코비치
는 당에 의해 핍박을 받을 당시, 그의 예술가 지인들이 차례대로 망명해
나갔을 때에도 끝끝내 망명하지 않고 제 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쇼스타코

133) 자연발생적인 탈-스탈린화 : 러시아인들이 되돌아 본 대조국전쟁의 한 단면, 황동

하, 서울대학교 러시아 연구소, 2005, 476p


134) Gleason, Abbott, ed. A Companion to Russion History. Malden, MA: Wiley-Black
well, 2009. 398p

- 165 -
비치의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은 전쟁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정치적

으로 특정 정치적 사상이나 당에 지지한 것이 아니라 애국심이라는 기본


마인드와 애국심에 따른 소시민들의 아픔과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나타

난 대의에 그의 마음은 움직였다. 그는 이러한 심적 경험들을 자신의 감

정에 이입하며, 예술로 승화시키길 원했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영웅적 행위를 보면서 존경심과 자부심을 느낀다. 공습경보


가 자주 울렸음에도 모두가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자신의 맡은 바 일을 한다. 사람
들은 차분하고 삶은 정사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공장과 사무실은 급한 주문을 성
공적으로 처리한다. 극장은 평소처럼 활발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전방위적으로
힘을 불어 넣는다. 모두가 공동의 대의에 함께하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한

다… 아이들조차도 레닌그라드의 방어에 힘을 보탰다.』135)

물론 쇼스타코비치 본인도 자신의 음악이 시민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쇼스타코비치 본인이 작곡할 때 그리

의도하지 않아도 자신의 음악으로 인해 시민들의 애국심에 불을 붙이게


되어, 그것이 희생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건 눈에 보기에도 뻔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소신으로 남은 모든 소시민들을 위해 쇼스타코비

치는 자신이 할 일을 잊지 않았다. 남들이 모두 레닌그라드를 떠나 피신


해야된다고 할 때 쇼스타코비치는 남아있는 것을 선택하였다. 훗날 그의
아내 니나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쇼스타코비치는 가급적이면 고향에 남아 있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

135) M.T Anderson, 「죽은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장호연 옮김, (돌베개, 2018),

248-249p - 출처 : Seroff, Victor Ilyich, with Nadejda Galli-Shohat. Dmitri


Shostakovich : The Lifeand Background of a Soviet Composer, New York :

Knopf, 1943. 238p

- 166 -
는 방법이었다. 그는 이사하느라 작곡에 지장을 받느니 그곳에 머
물면서 교향곡 작곡에 매진하고 싶다고 주장했던 모양이다.』

『오랫동안 남편은 레닌그라드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어요.』136)

쇼스타코비치는 진정한 예술인이었다. 전쟁통에 인민들이 죽어 나가


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과 함께 전쟁을 겪으며, 이 비참한 현실을 음악이
라는 매개체로 남기고 싶어했다. 그 음악이 자신의 조국을 좋지 않게 표
현될지언정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 노력했다. 그게 지금 처한 전쟁이란 독
이 생활과 목숨을 침범하게 된 암담한 현실을 해쳐나갈 수 있는 힘을 모
두에게 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이 전쟁이었다. 나는 인민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궁지에 몰린 조국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음악에 새기고 싶었다.』137)

위 내용은 Laurel E. Fay가 쓴 “A-Life”의 124쪽과 Solomon Volkov


가 쓴 “TESTIMONY”의 154쪽의 자료를 교차 비교하여 나온 증거 자료
이다. 이 내용을 통해서도 쇼스타코비치는 특정 정치색이 있다기보다 예
술정신이 투철한 진정한 음악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자기 작품의 초연때는 굉장히 떨고 불안해하고 경직되어있다고들 말했다.

136) M.T Anderson, 「죽은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장호연 옮김, (돌베개, 2018),

262-263p - 출처 : Siegmeister, Elie. The Music Lover’s Handbook. 1943.


http://www.unz.org/Pub/SiegmeisterElie-1943. 623p
137) M.T Anderson, 「죽은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장호연 옮김, (돌베개, 2018),

274-275p – 출처 :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24p

- 167 -
이를 본 관계자들은 쇼스타코비치가 소심하고 예민한 사람이라고들 칭했

지만, 그와 정말 친하게 교류했던 지인들은 쇼스타코비치는 쾌활한 성격


이였다고 한다. 당의 평가 때문에 두려운 것도 추후에 생각했겠지만 모든

음악가가 그러하든 쇼스타코비치도 자신의 작품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과한 책임감으로 인한 예술정신에 비롯된 몸의 반응이였다.

6.7. 쇼스타코비치의 작곡 성향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사상이 어떠한지를 알아볼 때 그의 작곡 성향을
빼놓을 수 없다. 쇼스타코비치는 평상시 억압된 상황속에서 그의 내면 표
출을 편지의 교류와 음악에 담았던 특징이 있었고, 이러한 영향에 따라
자신이 겪었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듣거나 서적 등으로 배운 역사적 사건
에 대한 사실과 그에 따른 의미 전달을 위한 작곡을 굉장히 많이 하였다.
그의 곡 들에서 많은 역사적 사건의 이름을 표제로 쓴 곡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제2번 교향곡> “10월 혁명에 바침”, <제11번 교향곡>
“1905”. <제12번 교향곡> “1917”, <제13번 교향곡> “바비 야르” 등
이 있다. 먼저 그의 작곡 성향 중 대표적인 DSCH 음악적 암호기법에 대
해 살펴보았다.

6.7.1. 쇼스타코비치의 DSCH 음악적 암호


쇼스타코비치가 사용한 모티브는 네 개의 음으로 구성된다.

D-Eb-C-B로 진행되는 모티브로써, 독일식 이름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영


어 이름은‘Dmitri Shostakovich’이지만 독일식으로는 Dmitri
Schostakowitsch이다.138)

138) 양인용, 예술 평론 : 쇼스타코비치와 DSCH 모티브 : 음악적 암호에 대하여, 「한

국정치평론학회, 학술지」, (2011)

- 168 -
<악보1> 쇼스타코비치의 DSCH 모티브

‘드미트리(Dmtriy)’의 첫 번째 알파벳 D와 쇼스타코비치를 첫 세


개 알파벳인 S, C, H에 각각 해당하는 음들이다. D-S-C-H에서 S는 Eb이
Es로 해석되고 Es의 발음은 영어의 S와 일치한다. H는 독일에서는 ‘시’
가 B가 아닌 H이다.

<악보2> 독일식 모티브 표기

1953년 발표된 <교향곡 제10번>에서 DSCH 모티브가 처음으로 드러


났는데, 이 작품의 발표 시기와 DSCH 모티브의 관계는 쇼스타코비치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1942년에 발표된 <교향곡 제7번>과 1943년
에 발표된 <교향곡 제8번>은 ‘대조국 전쟁’의 선전도구로 이용당하고,
1945년 <교향곡 제9번>은 당국에 의해 ‘형편없는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고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9번> 이후 8년간 교향곡을 가


까이하지 않은 것은 내적 갈등과 회의감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8년이

지난 후에 1953년 <교향곡 제10번>이 발표되었고, 이 당시 3월에 스탈린

이 사망했고, 말렌코프 정권 아래 예술에 대한 당국의 통제가 긴장 완화


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또한 이 작품을 작곡할 때 쇼스타코비치가 뮤즈라

고 칭한 엘미라 나시로바(Elmira Nazirova)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었는데

- 169 -
엘미라에게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이 꿈에서 3악장의 멜로디를 들었고 이를

곡에 넣을 것이라는 편지를 썼다.139) 이에 3악장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여


러 학자들이 주장한 DSCH기법과 동일한 방식으로 엘미라를 나타내는 동

기를 넣었다. ‘E-La-Mi-Re-A’독일어와 프랑스어 식으로 혼합하여 그녀

의 이름을 표기하는 등 쇼스타코비치가 사용한 DSCH기법으로 작품의 의


미를 해석하는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부분이며 학자들은 이것을 쇼

스타코비치도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것처럼 음표


로 서명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2악장은 스탈린의 음악적 초상화라고
솔로몬 볼코프의 ‘Testimony’에서 서술하였는데, 이는 아들인 막심 쇼
스타코비치(Maxim Shostakovich)에 따르면,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는 증언 내용과 함께 DSCH 모티브 사용이 어떠한 정치적 의
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DSCH 모티브가 사용되었던 작품들은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첼로 협주곡 1번>, <현악 사중주 8번>, <교향곡
제15번>들이 있는데,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의 완성된 해가 1948년이고
이는 스탈린을 통한 당국의 억압이 유지되고 있던 시절이므로 그에 따른
쇼스타코비치가 원하는 표현과 속내에 따른 이야기를 음악을 통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6.7.2. 쇼스타코비치의 의사소통


쇼스타코비치가 깊숙한 내면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표현을 할 때
쓰는 방법은 흔하게 다들 하는 대화보다 비밀스럽게 전달 될 수 있는 편

지와 음악이였다. 음악에서도 직접적인 표현의 전달은 굉장히 꺼렸다. 그


의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도 한 몫 했지만, 당시 사회 풍토에서 직접
적인 표현 전달은 당의 판단에 의해 그의 목숨줄을 당기는 일이었기도 했

139) Kravets, "Noviy vzglyad," 233.

- 170 -
다. 쇼스타코비치가 이런 방식을 시작한 것에는 계기가 있다. 그가 공연

을 준비할 때면 완벽주의적 성격 탓에 그가 만족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


면 연주자에게 불같이 화를 내 마찰을 자주 빚었다. 이는 쇼스타코비치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와 연주자와의 해석의 불일치로써 이루어진 것이였

기 때문이였다. 세월이 흘러 쇼스타코비치는 조금씩 방식을 바꿔나갔다.


연주자에게 나긋히 대하면서 자신의 표현을 따라와 주길 바라는 방식이

아닌 오히려 담백하게 살짝의 힌트를 주는 방식이였다.

『예전에 나는 내 말을 인정받기 위해 극단적인 태도를 취해야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살짝 힌트만 주어도 음악가들이 내 의도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음악가들과 대화를 나누기가 더 쉬워졌다. 그러나 동시에 더 어려워진 면도 있다.
왜 더 어려워졌느냐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더 많은 무게가 실리게 되면 그만큼
충격이 더 커지기 때문이지.』140)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음악에 부제를 넣을 때도 직접적인 단어 같으면


서도 여러 시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했다. <제7번 교향곡>의 붙여
졌었던 부제들은 삭제하긴 했지만 ‘전쟁’, ‘추억’, ‘조국의 광할
함’, ‘승리’라는 당시 시대적 배경의 따른 직접적인 부제를 붙였었는
데, 초연 당시 당의 정책과 작전에도 부합하여 칭찬했던 곡을, 직접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후 즈다노프 법령을 통해 ‘음악이 이해하기 어렵
다’는 노동자들의 날조된 편지를 신문에 실어서 보도하는가 하면, 쇼스
타코비치의 친구였던 흐레니코프도 그의 교향곡은 ‘암호로 된 이상한 작
품’으로 공격받는 등 매도되기 십상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곡으로 써, 예술적 표현을 하려고 했으나 그

140)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111p

- 171 -
의 곡을 통해 쓴 논문, 기사, 분석한 평론 등에서 자신의 해석과 다른 분

석을 보곤 굉장히 분개했다. 그래도 쇼스타코비치는 이 표현방식을 버리


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으로 자기 작품들이 얽히는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 표현방식은 쇼스타코비치에겐 2가지의 쟁점이 있었다. 첫 번째로 쇼스

타코비치가 전쟁과 즈다노프의 법령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한 경우에 평


론가, 시민들, 당 관료들의 평가가 상이하게 나올 수 있다는 랜덤성 때문

에 숙청을 피해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작곡가로써 예술의


만족도이다. 자신이 표현한 것과 같은 평가를 받았을 때의 뿌듯함과 여러
가지의 다른 평가가 나왔을 때의 각 평가의 흥미와 자신의 작품의 부족한
부분이나 장점들을 속속히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는 이 방식
을 좋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편으로 자기가 원했던 표현과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을 때에는 가곡이라는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사’라는 형태에 굉장히 호의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제14번 교향
곡>에서 죽음이라는 소재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가사를 집어넣는
성악곡을 채택했다. 그는 항상 예술적 표현에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왔을
것이고, <제2번 교향곡>과 같이 누군가의 외부요소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작품이 자기 커리어에 들어가길 처음에는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주변
예술가들과 그 외 분야에서 활약했던 친구 및 지인들이 차례차례 망명하
여 어머니의 땅인 러시아를 떠나거나 어머니의 땅에서 소리 소문없이 사
라지는 모습들을 바로 옆에서 느끼고 보아온 쇼스타코비치는 언젠가 자신
의 예술가로써의 자유로운 표현을 담은 작품을 내고 싶어 했을 것이고 이

에 대한 소망은 스탈린이 사망한 그의 생애 후기 작품들에서 나올 수 있


었다.

- 172 -
6.8. 전기와 회고록
앞선 연구에서 각 문헌인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가 펴낸 쇼

스타코비치 회고록 “Testimony”,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가 펴

낸 쇼스타코비치 전기 “A-Life”,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가


펴낸 쇼스타코비치 전기 “A-Life Remembered”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의 동일한 주장과 상이한 주장을 통해 다시 한번 정치적 프레임을 배제하

고 그의 성향과 예술사상을 살펴보았다.

6.8.1. 동일한 주장에 의한 예술사상


문헌에 나온 내용들 중 유년시절과 음악가로써 활동했던 역사적 사건
들에 대한 것들은 대부분 동일하다. 여기서 쇼스타코비치의 성향과 정치
관이 두드러질 수 있는 내용들을 추려보았다.
첫 번째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성향에 대한 것은 각각의 문헌에서도
동일하게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이 성향이 부각된 대표적 작품은 <므첸스
크 맥베스 부인>이다. 이 작품으로 쇼스타코비치는 당 기관지 프라우다
(Pravda)를 통해 형식주의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당국의 비판을 받았다. 쇼
스타코비치 작품들에서 학자들의 판단과 당시 작품을 감상했던 지인들의
평가에서도 동일한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이 성향은 단순 작품 성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쇼스타코비치의 기본 성향에도 나타나있다. 솔로몬

볼코프의 “Testimony”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성향에 대해 다음과 같


이 말했다. “쇼스타코비치 음악의 주된 요소가 비극과 풍자라고 본다
.”141) 그리고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의 “A-Life

Remembered”에서도 쇼스타코비치 작품의 해석에서 도출된 그의 음악

141)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278p

- 173 -
성향은 볼코프와 동일한 평가로 서술하고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

서 가장 중요한 두 측면은 이것이다. 유머와 드높은 정신, 풍자, 활력, 삶


에 대한 열정이 한 측면이고 비극의 개념을 표현하는 재능이 다른 한 측

면이다“142) 마지막으로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는 쇼스타코비치

의 음악 성향을 1932년 10월 중순, 그는 작업을 진행중이였던 <므첸스크


맥베스 부인>을 공개 발표하여 Leskov의 문학 원작과 그의 비전의 차이

점을 설명했던 내용과 네미로비치 단첸코(Vladimir Ivanovich Nemirovich


Danchenko)의 회상을 통해 서술하였다.

『I resolve the opera in a tragic vein.』143)

: 나는 비극적인 기분으로 오페라를 해결한다.

『—polemicizing "with Shostakovich's narrow understanding of Shostakovich himself


for the true Shostakovich”—one that emphasized the tragedy and soft-pedaled
the satire.』144)

: 쇼스타코비치가 진정한 쇼스타코비치를 위해 자신을 좁게 이해했다는 점에서 극


적으로 묘사된 것으로, 이 오페라는 비극을 강조하고 풍자를 부드럽게 표현했다.

쇼스타코비치는 낙관주의적 사고를 강요하는 시대적 배경에서 비극이


라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삶과 감정을 표현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풍자라는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러스한 소

142)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41p, 156-158p
143)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69p – 1932년 10월

중순에 쇼스타코비치의 공개 발표 내용
144)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75p

- 174 -
재에 당연시하게 나타나는 낙관적인 사고에서도 우울함과 짙은 슬픔적 풍

자를 그려내려는 그의 예술적 성향으로 인해 그의 작품의 예술성은 더욱


빛을 바랬으며, 당시엔 당국이 원하는 성향과는 정반대의 주제로 정치적

인 비판을 받아 작품이 폄하되었지만, 음악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이러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성향에서 그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맥베스 부인> 공연 당시 스탈린이 3막 후에 공연장을 나

간 사실과 그에 따른 3막 이전과 3막 후 둘 다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동일한데, 비극적이고 잔학한 소재로 쇼스타코비치는 당에서 원하지
않는 작품인줄 미리 아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의 예술적 욕구로 작품을 만
들었으며, 자신의 예술적 욕구 충족과 맞바꾼 위기였기 때문에 그는 생명
의 위협과 가족의 안위로부터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의 성격 자
체가 항상 불안했던 부분들도 있고 또한 자신의 음악에 대해서 굉장히 신
중하고 침착하면서 과묵한 자세를 가지고 있고 음악가의 자존심을 태연하
게 유지하기 위해 생긴 이러한 위기감이 불러온 불안은 처음부터 정치적
인 성향이 있으면서 그 정치론을 피력할려는 의도가 아닌 단순한 예술성
에 의거한 그의 욕구였다.
세 번째로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 산문과 시에 대한 사랑으로 지식의
폭이 굉장히 넓었으며, 이를 통해 타고난 유머와 풍부한 어휘로 언어를
구사하는데 굉장히 창의적이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많은 작품에서
작가들의 산문과 시를 통해 작곡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으며, 자신이
공감하거나 시대적 상황에 맞물리는 그러한 소재를 발견하면 예술욕에 의

해 해당 주제가 당국에 비판받을 수 있다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만


들어 내곤 했기 때문에 뚜렷한 정치적인 성향을 가진 예술가라기보다 그
의 내면에서 나오는 예술정신과 창작욕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네 번째로 <제2번 교향곡>을 선전선동부를 통한 의뢰를 받아서 작업

- 175 -
했지만, 알렉산더 베즈미엔스키(Alexander Bezimensky) 시의 구절을 쓰는

것에 굉장히 불쾌해했다. 이 <제2번 교향곡>의 가사가 레닌을 찬양하는


지나치게 직접적인 선동적인 가사였기 때문에 평소에 간접적이고 여러 의

미를 내포시킨 작품을 썼던 성향으로, 그와 반대되는 상황을 겪자 불쾌감

을 호소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프레임을 씌워 불쾌감을 토로했기 때문


에 그가 자신의 작품이 예술성으로 평가받길 원하고 정치적인 가사로 평

가받길 원하는 건 아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섯 번째로 조야 미트리예브나 쇼스타코비치(Zoya Dmitriyevna
Shostakovich)의 회상에 따르면 부모님이 집에서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했
던 기억이 없다고 145) 엘리자베스 윌슨의 “A-Life Remembered”에선
언급하였고, 솔로몬 볼코프의 “Testimony”에서도 쇼스타코비치 가족들
은 모두 정치적 주제에 열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으며, 쇼스타
코비치의 부모님은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 다양한 정치적 사상을 가진 지
인들이여도 언제나 손님으로 환영하듯이 대접하였고, 누구에게나 도움을
주었다고 서술했으며, 이는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이 주장하는
그의 도덕적 관점을 부모님의 영향으로 생긴 성향으로 바라봐야 된다는
주장을 통해서 당국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였다는 점을 토대로 반
공주의로 그려 넣었다는 주장에 반박할 부분이며, 부모들이 정치적 영향
을 주지 않도록 교육하고 신경썼던 것과 다양한 정치적 사고를 지닌 지인
들이 손님으로 왔기에 특정한 정치관이 있다고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리
고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의 ”A-Life“에도 어머니가 극단주의

정치에 관여하진 않았다고만 하며, 각종 정치관을 가진 손님들이 놀러 왔


던 걸로 정치적 영향에 노출이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부분에도 동
일하게 특정 정치관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145)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7p

- 176 -
여섯 번째로 즈다노프 비판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자살 충동이 심했다

는 각 문헌의 동일한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A-Life>

『The full measure of the anguish and misery Shostakovich experienced


during this period can only be guessed. There are indications that he
contemplated suicide.』146)

: 쇼스타코비치가 이 기간 동안 겪은 고뇌와 불행의 전적인 척도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가 자살을 고려했다는 징후가 있다.

<A-Life Remembered>
『‘You cannot imagine our position. Mitya is on the verge of suicide.’』147)

: “당신들은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상상도 못 할 거에요. 미트야는 자살하기


직전이에요.”

<Testimony>
『쇼스타코비치가 자살 충동에 시달린 것은 1936년의 위기 때보다 1948년 1월
이후의 즈다노프 폭풍 때가 더 심했던 것 같다. 그의 친구였던 유대인 배우
미헬스가 살해당한 것이 1948년 1월이었는데, 쇼스타코비치는 이때도 죽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친구인 레비틴의 회상에 따르면, 부인 니
나가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쇼스타코비치의 상황이 심각했다고 한다.』148)

146)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64p


147)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255p
148)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299p – 출

처 : Allen Ho & Dmitri Feofanov, Shostakovich Reconsidered, Toccata Press,

1988, 7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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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가 즈다노프 법령에 의해 비판과 작품 활동금지 등의 고

난과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사건은 그가 자기도 모르게 당의 지시나 성향


에 맞지 않게 행동하여 낙심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공주의적 해석으

로 판단했을 때 체제에 불만을 가져서 자살 충동이 일어났다고 보기엔 어

렵다. 체제에 불만을 가졌으면 자살이 아닌 어떠한 정치적 행보나 제스쳐


를 취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는 가족들의 생계 피해, 안위에 따른 걱정,

음악가로써 자신의 작품의 폄하에 따른 낙담과 작품 활동금지를 통한 회


의감 등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정치관이 있다고 볼 수 없고
가족애와 예술정신의 분야로 파악할 수 있다.
일곱 번째로 반(反)유대주의를 당국에서 강요하는 상황에서 쇼스타코
비치는 이러한 인종차별주의를 굉장히 싫어했다는 내용이다.

<A-Life Remembered>
『Shostakovich, who abhorred all forms of injustice and racism, had to be silent in
public, but in his music and in his private actions he showed his moral fibre. His
immediate response was to aid the repressed, irrespective of race or creed. To do
so required enormous selflessness and courage.』149)

: 모든 형태의 부정과 인종차별주의를 혐오한 쇼스타코비치는 공개적으로 침묵해야


했지만 그의 음악과 개인적인 활동에서 그는 자신의 도덕적 강단을 보여줬다. 그의
즉각적인 대응은 인종이나 교리와 관계없이 억압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이타심과 용기가 필요했다.

<A-Life>
『the insistence of the announcer in explaining that the Siberian exile alluded to in
the “Lullaby” took place in tsarist times evoked titters from the audience. The
immediacy and dramatic intensity of the scenes led critics to fantasize about what

149)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2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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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ht rightfully be expected from another opera by Shostakovich. Initial reactions
to this opus, however, were not uniformly constructive. Shostakovich was very
upset, in early February, by two anonymous letters he received and what he
perceived as an anti-Semitic campaign targeted against the cycle.』

: “자장가(Lullaby)”에서 언급된 시베리아 망명이 러시아 황제 시대에 일어났다고


설명하는 아나운서의 주장은 청중의 킥킥거림(titters)을 유발했다. 이 작품의 장면에
서의 즉흥성과 극적인 강렬함으로 인해 비평가들은 쇼스타코비치의 또 하나의 오페
라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
에 대한 초기 반응은 일관되게 건설적이지는 않았다. 쇼스타코비치는 2월 초에 그
가 받은 두 개의 익명의 편지와 그가 사이클(cycle)에 반대하는 반유대주의적 캠페
인으로 인식한 것에 매우 화가 났다.

<Testimony>
『그때도 나는 반유대주의적 분위기에 결코 관대해질 수 없었고 당시 유행하던 반유
대주의적 농담을 절대 따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악질적 현상에 대한 그때의
내 태도는 지금에 비하면 훨씬 더 온건한 것이었다. 나중에 나는 반유대주의적 경
향이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절교했다.』

당국의 강요와 의도를 반대하는 반공주의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러


기엔 반공주의를 주장한 솔로몬 볼코프의 “Testimony”에서 인텔리겐치

아들이 반(反)유대주의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150) 하였으므로


반공주의적 사상이라기보다 당시 모든 러시아인들에 공통된 인류애적 생
각이였으며, 쇼스타코비치도 마찬가지였다.

여덟 번째로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세계평화를 위한 문화와 과


학 위원회에 참석하라고 한 스탈린과의 통화내용이 동일하다. 쇼스타코비
치는 즈다노프의 비판의 영향으로 음악 활동이 금지되고 그 여파로 자살

150)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375-37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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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까지 일으키던 시절에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때 스탈린에게

전화가 와서 세계평화를 위한 문화와 과학 위원회에 참석하라는 지시와


자신이 건강문제로 인해 상태가 좋지 않아 참가를 거절한다는 쇼스타코비

치의 대답으로 통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에 미국은 제 작품이 연주되

고 있지만 자국에선 금지되어 있는데 자신이 어떻게 가서 행동을 하겠냐


고 쇼스타코비치는 대답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누가 금지했느냐 물었으

며, 검열청에서 금지했다는 쇼스타코비치의 말에 그것은 실수이고 바로


잡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후 실제로 검열청을 불법 명령 발표라는 명목
으로 문책하여 금지가 풀리게 된다. 이는 기관이 공식적으로 문책을 받은
유일한 때였다고 평가되어지고 있다.151) 이 대화 내용에서 거진 동일한
내용이긴 하나 한 부분이 약간 다르게 설명되고 있다. 이는 수집한 자료
의 해석의 차이일 수도 있으니 동일 선상에 놓고 언급하여 판단하는 것과
그 차이점을 보고 해석하여 판단한 후 상이한 주장 및 서술내용 챕터에서
다루고자 한다.

6.8.2. 상이한 주장에 의한 예술사상


문헌에 나온 내용들 중 유년시절과 음악가로써 활동했던 역사적 사건
들에 대한 것들은 대부분 동일하나 세부적인 성향에 대한 내용, 정치적인
분석으로 빠질 수 있는 소재들은 의도한 것인지 몰라도 조금씩 다르거나

내용이 빠져있었다. 이는 사회주의국가에서 흔히 나올 수 있는 역사적 사

실에서 당국 체제의 반하는 사실에 대한 내용을 비공개로 한다든지 사실


을 왜곡하여 당국의 입맛에 맞게끔 발표하기도 하여 이를 인용하는 경우

가 많았기 때문이다. 각 문헌들에서 나오는 내용들을 교차비교하여 도출

해낸 서로 다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151)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256-227p

- 180 -
첫 번째로 쇼스타코비치는 1937년에 NKVD(비밀경찰)본부인 ‘큰 집’

에서 정해준 시간과 장소에 오라는 명령을 받고 무슨일로 소환되는지 몰


랐으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과 발레극 <림피드 스트림>의

비난 기사 때문에 부른 것일 거라 판단하고 자신은 끝났다고 체념하며 정

해준 시간에 정해준 장소로 갔다. 거기서 잔체브스키 조사관이 마샬 투카


체브스키랑 아는 사이 인지 묻고, 함께 만났을 때 정치적인 얘기를 한게

있는지, 스탈린 암살 음모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는지에 대해 물었으나


쇼스타코비치는 끝까지 모른다고 부인했으며, 잔체브스키 조사관은 쇼스
타코비치에게 기억을 왜곡하지 말고 마샬 투카체브스키가 언급한 스탈린
동지 암살 음모에 대해 시간을 줄테니 말해야 될거라고 협박하였다. 이후
남은 시간 동안 쇼스타코비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서류 등 정리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고 NKVD(비밀경찰) 본부로 찾아갔으나 입구에 군인에게
잔제브스키 조사관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으나 오늘 나오지 않았으니 돌아
가라고 하였는데 알고보니 남은 시간동안 잔제브스키가 잡혀가면서 쇼스
타코비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 솔로몬 볼코프의 ”Testimony
“에선 그와 관련된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이 회고록이 거짓이라고 판명한

일이다.152) 이는 쇼스타코비치가 겪은 역사상 생명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겪은 내용으로써 회고록에 무조건적으로 있어야 되는 내용이라 주장했다.
두 번째로는 <제5번 교향곡>에 대한 주제로 쇼스타코비치가 언급했
다고 하는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련 예술가의 창의적 답변’이라는 작품
과 정치적으로 얽힌 내용이다. 이에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이

”A-Life Remembered“에서 주장한 내용은 저널리스트가 이러한 제목으로

기사를 냈으며, 이에 대해 쇼스타코비치는 자기가 승인한 적이 없다고 주


장했는데, 솔로몬 볼코프의 ”Testimony“에서 주장한 내용은 당국에서 직

152)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142p

- 181 -
접 이 제목을 채택하여 발표했다고 짤막하게 서술되어있고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그리고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가 주장한 내용


은 1938년 1월 25일에 베체르나야 모스크바(Vechernyaya Moskva)언론사

에서 쇼스타코비치와 직접적으로 인터뷰를 했고 쇼스타코비치의 서명을

통해 이러한 제목으로 발표했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한 여러 증거 자료가


나와있지만 너무도 산발적이라 객관성이 부족하나, 각각의 입장에서 분석

하여 추론해보면 당국에서 직접 발표했다는 것과 베체르나야 모스크바


(Vechernyaya Moskva)언론사와 엮어서 해석해볼 수 있다. 당국이 이 베
체르나야 모스크바(Vechernyaya Moskva)언론사에게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련 예술가의 창의적 답변’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라고 지시하여 쇼
스타코비치의 동의와 인터뷰 없이 왜곡되어 이루어진 일이거나 쇼스타코
비치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당국의 지시를 받고 언론사에서 발표되었을 거
라는 경우와 각 문헌을 연구해본 결과를 토대로 본 쇼스타코비치의 성향
에 따라 창의적 답변이라는 부분에서 숨겨진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고 판
단 할 수 있는 세 가지 방향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첫 번째 경우인 인터
뷰와 동의를 구한 케이스의 경우 당의 억압이 없다고 단정지을 수 없고
단순히 인터뷰를 진행하고 제목은 본인들 입맛대로 진행했을 가능성도 있
으며, 두 번째 케이스의 경우는 동의없이 한 케이스이기 때문에 두 가지
경우 모두 쇼스타코비치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엔 어려우
며, 세 번째의 숨겨진 의도의 경우도 정치적 발언의 의도보단 기사 제목
을 토대로 작품을 통해 일어난 사건의 단순한 예술가의 입장으로의 답변

일 가능성이 있으니 이것도 정치적 발언이라 보기 어렵다.


세 번째로는 2월 혁명 직후 쇼스타코비치 아버지인 드미트리 볼레슬
라보비치(Dmitri Boleslavovich)가 집에 와 가족들 앞에서 ‘아이들에게 자

유를!’이라고 외친 정치적인 발언에 대한 내용은 로렐라이 E. 페이(Laurel

- 182 -
E. Fay)의 ”A-Life“와 동일하나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의

”A-Life Remembered“에선 어머니인 소피아 바실리브나 코쿨리나(Sofia


Vasilievna Kokoulina)가 이러한 정치적 발언을 가족들 앞에서 한 남편에

게 화를 냈다는 문구가 있다.153) 이 화냈다는 내용 하나의 진실로 쇼스타

코비치의 유년시절에 정치적 방향성에 대한 영향이 어떠하였는지 판가름


할 수 있다. 그러나 출처의 여부를 통해서 사실적 내용을 판가름하긴 어

려우나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의 ”A-Life“에서 이 내용의 출


처가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의 ”A-Life Remembered“이므로
화를 냈다는 부분에 더욱 신빙성이 쏠린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추론
은 쇼스타코비치의 어머니 소피아 바실리브나 코쿨리나(Sofia Vasilievna
Kokoulina)는 특정한 정치적인 발언을 꺼려하거나 싫어했던 것으로 보여
지고 그러한 어머니 밑에서 음악교육을 받아온 쇼스타코비치로써는 특정
정치적 영향을 받았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에 뚜렷한 정치적인 사상을 갖
고 있다고 생각 할 수 없다.
네 번째로 레닌이 1917년 4월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을 때 젊은 쇼스
타코비치는 핀란드 역에 있었으며 이 사건은 젊은 작곡가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되는 점이다.154) 엘리자베스 윌슨의 ”A-Life
Rememberd“에서 이 내용에 주장하는 것은 ‘그런 위험한 시국에 어린
애를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반대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로렐라
이 E. 페이(Laurel E. Fay)도 반대주장을 펼쳤는데 레닌이 핀란드역에 도
착했을 때의 시간이 11시였고 저녁시간이기 때문에 부모가 못나가게 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반대 주장을 내세웠다.155) 특히 엘리자베스 윌슨이 이

153)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14p


154)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34p


155)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2-13p

- 183 -
내용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또다른 이유는 솔로몬 볼코프가 쇼스타코비

치 시점에서 이 내용을 언급할 때 레닌이 핀란드역에 왔을 당시 쇼스타코


비치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을 하였으며, 로렐라이 E. 페이도 동일한 주장을 펼쳤

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섯 번째로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세계평화를 위한 문화와 과

학 위원회에 참석하라고 한 스탈린과의 통화내용에서 이 대화 내용에서


거진 동일한 내용이나 쇼스타코비치의 대응의 한 부분이 약간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내용에서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에게 건강이 어떠한
지 물었고,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의 “A-Life”에선 단순히 아
프다는 말로 언급156)되어있어 판단할 수 없고, 나머지 두 문헌에선 아픈
곳을 약간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의
“A-Life Remembered”에서는 복통을 앓고 있다고 서술되어있는 것에
반해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의 “Testimony”에서는 구역질을 한
다는 미묘한 의미를 가진 듯한 말을 했다고 서술되어 있다.157) 여기서 보
여지는 내용을 정치적인 성향으로 해석해볼 때, “Testimony”에서는 반
공주의적 성향의 조롱이 담긴 대답이였고, “A-Life Remembered”에서는
단순히 아파서 거절한 것과 자국에서의 자신의 작품 활동금지의 낙담하게
된 비관주의 상태였던 부분과 미국에서 이와 같은 정보를 토대로 질문이
들어올 경우 난처할 수 있다는 점을 토대로 다소 순화하여 대화하였으며,
반공주의를 주장하는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의 과격한 어휘와 반

(反)수정주의를 주장하는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의 “A-Life”에


서 나타나는 내용과 출처를 엮어서 해석하였을 때, “A-Life”에서는 반

156)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71-172p


157) Solomon M. Volkov, TESTIMONY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김병

화 옮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온다프레스, 2019), 354-355p

- 184 -
(反)수정주의적인 특별한 감정선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는 정치

적인 성향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단순히 즈다노프


비판을 통해서 나타난 그의 비관주의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예술적

욕구로 인한 발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추가로 이 통화내용을 옆에서 들

을 수 있었던 인물에 대해서는 아들인 막심 쇼스타코비치(Maxim


Shostakovich)의 증언과 다른 문헌을 통해 나온 인물 이 두 부류로 의견이

나뉘어지고 있다.
여섯 번째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가의 의문점에 각각 다른 주장이 나
왔다. 이 내용은 쇼스타코비치가 현체제를 지지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사
실관계와 함께 정치적으로 엮이는걸 싫어했던 성향을 엮어서 분석했을 경
우에 가설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중요한 맹점이다.

<A-Life>
『In letters to Tanya Glivenko, he revealed a supportive stance toward communism,
as well as a disdain not uncommon among the intelligentsia for the fruits of the
New Economic Policy (NEP).』158)

: 그는 타냐 글리벤코에게 보낸 서한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고, 신경


제정책(NEP)의 결실을 두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드물지 않은 경멸감을 드러냈다.

위 내용을 통해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의 “A-Life”에서

주장하는 쇼스타코비치는 여지껏 나온 이용가능한 정보를 토대로 그는 정


치적으로 특별히 적극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지적하며 타냐 글리벤코
(Tanya Glivenko)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

다는 자료로써 쇼스타코비치를 반(反)수정론자로 판단했다. 하지만 엘리자


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의 “A-Life Remembered”에서는 완전 반대

158) Laurel E. Fay,「A-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36p

- 185 -
의 주장이 나온다.

<A-Life Remembered>
『“And you, too, Dmitri Dmitriyevich, “are for the ideas of communism.”』159)

: “그리고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당신 또한 공산주의 사상에 찬성하지


않습니까.”

『'He answered, “No, communism is impossible.』

: 그는 대답했다. “아니요. 공산주의는 불가능합니다.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의 “A-Life Remembered”내용 중


플로라 리트비노바(Flora Litvinova)가 회상한 내용에서 피카소 전시회를
통해 논쟁을 벌였는데, 이때 쇼스타코비치가 이 논쟁에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했고 같이 있던 지인들과 리트비노바는 이를 피카소가 공산주의 개념
을 지지했을 것이라는 반박을 내놓으면서 당신도 지지하지 않느냐는 질문
에 쇼스타코비치는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수정론자라는 주장에
힘을 실은 대답이 나왔다고 언급했다. 솔로몬 볼코프의 “Testimony”에
선 이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쇼스타코비치가 당국의 지시나 체제에 과격
한 언사 등을 언급하여 반공주의자라는 주장이 있는 문헌이므로 같은 공

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정치적으로 엮이기 싫


어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성향과 엮어서 해석했을 때, 이 공산주의를 지지
하지 않는다는 가설에 힘이 쏠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쇼스타코

비치는 1928년 소련 중앙위원회에서 시행하여 도입된 농업 집단화의 폐해


를 겪은 사람으로써, 공산주의의 불합리성과 국가적 경제 하락에 따른 피

159) Elizabeth wilson,「A-Life Remembered」, (London, 1994), 284p

- 186 -
폐함을 직접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강압적인 국가

운영을 토대로 자신이 작품 활동에 억압을 받고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


문에 지지하지 않았을테고, 또한 그가 정말로 정치적으로 공산주의를 지

지했다면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제14번 교향곡>, <라요크> 등 당의

심기를 건드는 작품들을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러한 심기를 건드는 작품을 발표한 부분과 지인의 회상을 토대로 도출해

낼 수 있는 결론은 그는 정치적으로 엮이는걸 싫어하는 예술정신에 숭고


함과 책무를 아는 진정한 음악가로 판단되어 진다.

8. 자율주의에 따른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형이상학적 사상

앞서 정치적 프레임을 배제시키고 나타난 그의 예술사상은 음악을 통


해 언어로써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이를 전달하는 숭고한 예술정신과 정치
적 혹은 비도덕적으로 평가받는 <제7번 교향곡>·<제11번 교향곡>·<제12
번 교향곡>·<제13번 교향곡>등의 그의 작품들과 평가가 상반되는 일상생
활에서의 문헌과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나타난 도덕적인 면모들을 엿볼
수가 있었는데, 일부 학자들에게서 이 논문의 의제인 예술작품을 정치적
프레임과 같은 예술적 평가가 아닌 외적 평가로써 예술가를 판단하는 부

분들에 대해 미국 철학자 노엘 캐롤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예술작품들에 관해서 도덕적 평가와 미적 평가는


항상 필연적으로 독립적이다.』160)

160) Carroll, Noël. (2000), “Art and Ethical Criticism: An Overview of Recent

Directions of Research”, Ethics, Vol.110. No.2.(2000, January), The

- 187 -
이러한 주장에 따라 예술은 자신의 영역에서 가치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독자적인 평가 기준을 가진다고 판단할 수 있고 음악 외적 요소

를 적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앞선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을 자율주의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판단할 수 있


다. 이 주장을 오충환의 “예술작품에서의 도덕적 가치와 미적 가치의 관

계 연구”에서도 동일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자율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예술의 가치가 인간의 다양한 실천적 영역-도덕


적 국면을 포함해서 정치적, 사회적 영역-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161)

이러한 자율주의적 해석으로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사상을 바라보면서


그의 음악에 대해 평가를 내려야 하며, 앞서 프레임을 배제한 후의 해석

을 통해 나타난 그의 예술사상은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예술 분야에서의


음악 형이상학에 가장 근접하다.
쇼펜하우어의 음악론에서 언급되어지는 음악 형이상학이란, “음악은

의지 자체의 모상(模像)이며 이념도 의지의 객관성에 불과한 것이므로 음


악은 여타 다른 예술 분야와는 다르게 눈으로 보여지는 사물로써가 아닌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며, 의지로 표현 되어지는 것이 음악이
다162). 즉, 음악은 의지의 직접적 표현이다.”163)라는 형이상학적 해석으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 374


161) 오충환, 예술작품에서의 도덕적 가치와 미적 가치의 관계 연구, 「한국외국어대학

교, 박사학위 논문」, 2012, 49p


162) 쇼펜하우저, 곽복록 옮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을유문화사, 1994),

325p
163) 박종문,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적 음악관에 대하여」, (민음사, 1988),

267p

- 188 -
로 음악에 대한 철학적 관점에서의 음악론을 주장을 하였다.164) 또한 음

악은 다른 예술 분야들처럼 내부가 아닌 외부 대상을 모방하고 나타난 것


을 통해 내면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닌 시각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그 외에 요소를 허용하지 않는 의지를 모사하고 있기 때문에 좁은 의미를

나타내는 보편적인 모방과는 다른 내면의 표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165)


그리고 2018년도에 윤동주가 서술한 학술지인 :“쇼펜하우어의 음악 형이

상학 –인간 현존재의 존재이해로서의 음악-”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대입하여 음악의 형이상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
『음악이 일상적·과학적 언어와 종적으로 구별되는 형이상학적 언어
라면, 그것은 침묵의 언어이다. 이에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인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서는 음악을 울려야 한다”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66)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음악은 사람들이 어느 곳에서나 이해할 수 있는
참다운 보편적 언어이며, 유일하게 의지의 실재에 언급하면서 결코 사물
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선율, 화음 등의 음악적 요소에 의해 의지 자체를
객관화 시키기 때문에 음악은 세계를 텍스트로 삼는 선율이라 하였는데,
이 말은 즉 음악이 의지의 객관화로써 세계를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는 것이다.167) 이러한 음악론을 통해서 나타난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사상
에 빗대어 보았을 때, 외압에 의한 강제적 침묵으로 인해 그가 사용한 표

164) 유유미, 미학적 개념으로 본 바그너의 음악 사상 –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

을 중심으로 -, 「대구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3, 17p


165) 홍사현, 쇼펜하우어의 음악철학 – 감정미학과 절대음악 사이 -, 「대한철학회, 학

술지」, (2016), 275p


166) 윤동주, 쇼펜하우어의 음악 형이상학 – 인간 현존재의 존재이해로서의 음악 -,

「중앙대학교 중앙철학연구소, 학술지」, (2018), 46p


167) 이안희, 쇼펜하우어의 음악철학에 관한 연구, 「상명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학

술지」, (1997), 447p

- 189 -
현 방식인 음악을 통한 내적 표현과 그에 따른 사실 전달과 일맥상통 하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쇼스타코비치 본인의 삶에서 나타난 다양한


예술적 사상들이 자율주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 형이상학적 사상을 통해

자신의 원념과 의지의 전달과 그에 따른 사상의 구축을 염원하면서 당시

시대적 사실에 따른 내용전달과 내적 사상의 표현을 하는 예술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190 -
Ⅲ. 결론

쇼스타코비치의 삶에서의 음악이란 곧 그의 생애이며, 러시아의 역사


이다. 쇼스타코비치가 만든 작품은 147개로써 작품이 만들어졌을 때의 역

사적 사건들과 시대적인 분위기를 통해서 만든 곡과 그에 따른 음과 음색

이 긴장되고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예술적인 표현력, 표현을 위한 다양한


리듬의 사용 등을 통해 그의 음악 안에 쇼스타코비치가 하고 싶었던 말들
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정작 쇼스타코비치의
작품활동에서 정치 성향이나 정치활동에 대해 학자들이 포커스를 두고 의
견이 분분한 상태에서, 수정론자와 반(反)수정론자중에 정치적 행보를 보
이고 있다고 하지만 작곡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당시에 일어나 지인
들과의 회상, 역사적 사건 등의 문헌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의 성향 파악
도구로써, 정치적 성향에 먼저 포커스를 두는 것은 어딘가 모순이 많아
보인다. 이러한 모순들 때문에 더욱더 학자들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
정치적 색채를 부여 할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음악을 추구하던 음악가로써,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과 예술성


을 포커스를 두고 접근해보니 그의 음악과 행보에서 정치적인 통일된 소
신이 있기보다 그의 음악에 통일된 소신이 있었다. 통일된 소신들에서는

전쟁을 통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당의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 당시 암담했던 소시민들의 모습, 예술가들의 핍박과 순응


적인 태도 등의 모습과 그에 따른 예술성의 부족함을 문학이라는 매개체

로 채워가며 이를 음악으로 표현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당의

영향 하에 있던 그가 쓴 작품들과 역사적 사건에서 당국이 추구하는 낙관

- 191 -
적이고 형식주의를 비판하는 문화적 성향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 경험한 모든 것들을 최대한 기회가 되는대로 작품에 녹이려고 했기 때


문에 당국의 억압과 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Pravda)를 통한 비판으로 많

은 이들에게 비판의 칼날과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이 판단하는 것과 남들이 판단할 때와 동일하게 좋지 않은 음악이여


도 그 의미가 있으며, 이는 자기 생후에 공개될 자신이 쓴 자서전에 남겨

놓을거라는 언급도 있었다. 또한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각 문헌의 모순점


과 공통된 주장, 그리고 상이한 주장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순점으로는 “Testimony”에서 첫 번째로 <제7번 교향곡>의 작곡


시기와 작품의 의미이다. 본인이 쓴 책 안에서 전쟁 전에 썼다는 부분과
전쟁중에 썼다는 것, 그리고 작품의 의미로 전쟁의 의미가 없다는 점과
전쟁을 겪는 소련의 이미지를 넣고 싶었다는 문구를 찾을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제2번 교향곡>을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주제라고 주장하였으나,
가사에서 레닌의 업적과 볼셰비키를 찬양하는 내용이므로 의미가 맞지 않
는 모순을 발견하였다. 세 번째로 자신은 당시 당국에 협력한 적이 없고,
당국에서도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적이 없다는 주장에 예시로 레닌이 자
신의 음악을 듣지 않았다는 주장을 더한 부분이다. 당시 볼셰비키 최고
권력자인 레닌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인지하고 들으려면 레닌이 생존
해 있을 시기인 1924년 1월 21일 이전에 그의 작품이 명성이 높아져서 유
명해져야 들을 수 있었을 거라 판단할 수 있었고, 쇼스타코비치가 유명해
진 시기는 1926년이므로 이 내용이 모순임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로 “A-Life”에서는 큰 모순점들은 없었지만 로렐라이 E. 페


이(Laurel E. Fay)가 직접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취급하여 서술하였고 그
중에 출처를 통해서 당국의 발표나 당의 지지자의 문헌, 당의 기관지인

- 192 -
프라우다(Pravda)의 기사마저도 당의 입맛대로 왜곡됐을지도 모른다는 의

심을 배제하고 과감하게 인용하여 확인된 사실인 것처럼 서술한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가 제2차 소련 작곡가 총회에서 스탈린주의

의 잔재를 없애자는 과격한 발언을 했다고 음악학자인 다니엘 지토미르스

키(Daniel Zhitomirsky)는 증언을 했는데, 지토미르스키는 이전에 쇼스타코


비치를 순응적이지 않다는 기사를 통해 매도 한적도 있는 인물이며, 당

지지자이자 보수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로써 이전에 돌출된 쇼스타코비치


의 성향과 맞지 않아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부분들과 1958
년 후르시초프(Nikita Khrushchev)와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관료들과 함께
모인 모임에서 공산당과 레닌주의를 찬양하는 제스쳐를 취했다는 프라우
다(Pravda)의 실린 기사를 왜곡됐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없이 그대로 인용
한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세 번째로 “A-Life Remembered”에선 발견한 모순점은 <제2번 교
향곡>을 당에서 오더받고 만들 당시 알렉산더 베즈미엔스키(Alexander
Bezymensky) 시의 구절을 써달라는 피드백을 받고 굉장히 선동적인 가사
를 사용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낀 쇼스타코비치로 언급하다가 그 뒤에 혁
명적 사건을 기념하는 곡을 만들었다는 예시로 <제2번 교향곡>을 언급하
면서 혁명의 이상과 정치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쇼스타코비치가 진보적으로 보이려는 열망에 기념하는 음악을 썼다
는 모순된 주장을 발견하였다.

- 193 -
<표 4> 각 문헌에서 나타난 모순점

Testimony에서 나타난 모순점

1 <제7번 교향곡>의 작곡시기와 작품의 의미

2 <제2번 교향곡>의 주제의 의미

당국을 위한 협력 및 당국에게 받은 호의
3
(레닌과의 일화를 든 예시가 모순)

A-Life에서 나타난 모순점

다니엘 지토미르스키의 증언

1 쇼스타코비치가 스탈린의 잔재를 없애자는 과격한 정치적 언행


(지토미르스키는 당 지지자로써 왜곡과 성향의 불일치)
프라우다의 기사

2 1958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관료들이 모인 모임에서 공산당과


레닌주의를 찬양했다는 내용 (성향의 불일치)

A-Life Remembered에서 나타난 모순점

<제2번 교향곡>의 선동적 가사에 불쾌감을 표했다는 사건

1 - 혁명의 이상과 정치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쇼스타코비치가 진보적으로 보이려는 열망이라는 주장

- 194 -
이후 각 문헌 간의 주된 동일 내용이 8가지, 상이한 내용이 6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동일한 내용 8가지 중 첫 번째로 쇼스타코비치의 주된 음악 재능은

비극과 풍자라는 주장이다. 이 내용은 플로라 리트비노바(Flora Litvinova)


와 네미로비치 단첸코(Vladimir Ivanovich Nemirovich Danchenko)의 회상

에도 나타나 있다.
두 번째로 <맥베스 부인> 공연 당시 스탈린이 3막 후에 공연장을 나
간 사실과 그에 따른 3막 이전과 3막 후 둘 다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동일하다. 그의 원래 성격에서 불안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공연 초
연 때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정신에 의해 만든 자신의 작품이 비판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언제 자신과 가족의 안위가 위험할지
몰라 불안했었으며, <림피드 스트림>부터 시작된 비판으로 점차 불안증은
심해져갔다.
세 번째로는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 산문과 시에 대한 애정으로 많은
독서를 하였고 이 때문에 지식의 폭이 굉장히 넓었으며, 이를 통해 타고
난 유머와 풍부한 어휘로 언어를 구사하는데 굉장히 창의적인 모습을 보
였다. 산문과 시를 소재로 작곡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곡마다 굉장히 참신
한 아이디어가 적용된 기법들을 많이 선보였다.
네 번째로는 <제2번 교향곡>을 선전선동부를 통한 의뢰를 받아서 곡
작업을 하게 되었고 합창을 원한다는 당국의 지시와 그 가사를 알렉산더

베즈미엔스키(Alexander Bezimensky) 시의 구절을 쓰게 되었는데 이 구절


을 쓰는 것에 굉장히 불쾌해했다는 것이 동일하고 이는 정치적인 그의 성
향이 드러나 있음을 확인하였다.

다섯 번째로 쇼스타코비치의 부모님이 집에서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 195 -
했던 기억이 없고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아니였으며, 대신 여러 정

치관을 가진 손님들이 굉장히 많이 집에 손님으로 왔다는 내용이 동일하


다. 여기서 로렐라이 E. Fay(Laurel E. Fay)는 다양한 정치관을 가진 손님

들로 인해 정치적 영향을 받았을거라는 추측의 주장도 있었다.

여섯 번째로는 쇼스타코비치가 즈다노프 비판을 받은 이후에 자살 충


동이 굉장히 심해졌다는 동일한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정치적으로

엮이는 걸 싫어하는 부분과 가족의 안위가 위험해진 부분, 자신의 작품이


매도되는 예술가 입장에서 굉장한 스트레스로 인해 생겨 났을것으로 판단
된다.
일곱 번째로 반(反)유대주의를 당국에서 강요하는 상황에서 쇼스타코
비치는 이러한 인종차별주의를 굉장히 싫어했다는 동일한 내용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이는 당국의 성향을 반대하는 반공주의, 수정주의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각 문헌의 내용들에서 그의 도덕적인 성품과 인류애, 시민
정신들을 찾아 볼 수 있었고, 이 인종차별은 단순한 그의 도덕적 성향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여덟 번째로 쇼스타코비치에게 세계평화를 위한 문화와 과학
위원회에 참석하라고 한 스탈린과의 통화내용이 동일하다. 이 통화내용은
전체적인 문맥이나 내용들은 동일하나, 각 문헌에서 주장하는 정치관의
성향에 맞게 반체제 성향의 다소 과격하게 나오는 차이점이 있었다.
상이한 내용 6가지로는 첫 번째, 쇼스타코비치가 1937년 NKVD(비밀
경찰)의 본부에 갔다가 운 좋게 살아남은 내용이 엘리자베스 윌슨

(Elizabeth Wilson)이 솔로몬 볼코프의 “Testimony”에서 없었고 무조건


이 내용이 있어야 된다는 주장을 통해 확인하였으나 이 내용이 전혀 없었
다는 점을 찾을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제5번 교향곡>에 대한 주제로 쇼스타코비치가 언급했다

- 196 -
고 하는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련 예술가의 창의적 답변’이라는 작품

과 정치적으로 얽힌 내용이다.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이


”A-Life Remembered“에서는 저널리스트가 기사를 냈고 쇼스타코비치

가 승인한 적이 없다는 주장이였으며, 솔로몬 볼코프의 “Testimony”에

서는 당국에서 직접 이 제목을 채택하여 발표했다고 짤막하게 서술되어있


고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그리고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가 주장한 내용은 1938년 1월 25일에 베체르나야 모스크바


(Vechernyaya Moskva)언론사에서 쇼스타코비치와 직접적으로 인터뷰를
했고 쇼스타코비치의 서명을 통해 이러한 제목으로 발표했다는 내용으로
정치적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부분들이고 이 세 내용을 엮어서 해석하면
쇼스타코비치가 이 사건에서 정치적인 의도와 입장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번째로는 2월 혁명 직후 쇼스타코비치 아버지인 드미트리 볼레슬
라보비치(Dmitri Boleslavovich)가 집에 와서 가족들 앞에서 ‘아이들에게
자유를!’이라고 외친 정치적인 발언에 대한 내용의 차이점을 확인하였는
데,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의 ”A-Life“와 동일하나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의 ”A-Life Remembered“에선 어머니인 소피아
바실리브나 코쿨리나(Sofia Vasilievna Kokoulina)가 이러한 정치적 발언을
가족들 앞에서 한 남편에게 화를 냈다는 문구가 추가로 있어 그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는 유년시절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적 영향이 있었
는지 없었는지의 여부로 분석할 수 있는 내용이였다.

네 번째로는 레닌이 1917년 4월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을 때 젊은 쇼


스타코비치는 핀란드 역에 있었으며 이 사건은 젊은 작곡가의 성격 형성
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 내용이다. 이 내용은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의 주장이며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ison)과 로렐라이 E. 페

- 197 -
이(Laurel E. Fay)는 그 시국에 혹은 그 야심한 시각에 어린 쇼스타코비치

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을거라고 반박하였다.


다섯 번째로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세계평화를 위한 문화와 과

학 위원회에 참석하라고 한 스탈린과의 통화내용에서 이 대화 내용에서

거진 동일한 내용이나 쇼스타코비치의 대응의 한 부분이 약간 다르다는


것 차이점이 있었다.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의 “A-Life”에선

상세한 내용이 없고 전체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있어 제외했고, 쇼스타코


비치의 아픈 부위가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의 “A-Life
Remembered” 복통과 예의 바른 언사로 서술되어있고 솔로몬 볼코프
(Solomon Volkov)의 “Testimony”에서는 구역질과 조롱이 담긴 언사로
서술된 점이 달랐다.
마지막 여섯 번째로는 쇼스타코비치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가에 대한
의문점에 각각 다른 주장이 나왔다. 로렐라이 E. 페이(Laurel E. Fay)는
“A-Life”를 통해 쇼스타코비치가 타냐 글리벤코(Tanya Glivenko)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공산주의를 지지한다 주장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는 “A-Life Remembered”에서 플로라 리트비노바
(Flora Litvinova)의 회상을 통해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
고, 솔로몬 볼코프의 “Testimony”는 이 두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문헌
전체의 분석을 통해 반공주의적 인물로 그려내고 있어 지지하지 않는다는
부분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 198 -
<표 5> 각 문헌간의 동일한 내용

각 문헌간의 동일내용

1 쇼스타코비치의 주된 음악 재능은 비극과 풍자

<맥베스 부인> 당시 3막 후 스탈린이 공연장을 떠났다는 사건


2
- 공연 전과 후에 불안감을 갖고 있었던 사실

3 러시아 산문과 시에 대한 애정으로 인한 예술 성향

<제2번 교향곡> 작곡 당시 당국 오더를 통한


4
선동적인 가사 적용에 따른 불쾌감 표명

5 쇼스타코비치의 정치관 형성 영향에 가족력이 없었다는 증언

6 즈다노프 비판 이후 자살 충동이 심해졌다는 증언

7 반(反)유대주의같은 인종차별주의를 싫어했다는 증언

세계평화를 위한 문화와 과학위원회에 참석하라고 한


8
스탈린과의 통화내용

<표 6> 각 문헌간의 상이한 내용

각 문헌간의 상이한 내용

1 1937년 NKVD의 본부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일화의 여부

<제5번 교향곡> 주제인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련 예술가의


2
창의적 답변”의 출처의 진위 여부
드미트리 볼레슬라보비치가 집에 돌아와
3
‘아이들에게 자유를!’ 이라고 발언한 내용의 차이
1917년 쇼스타코비치가 핀란드역에서 레닌을 봤으며 이는 성격
4
형성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의 진위 여부
세계평화를 위한 문화와 과학 위원회 참석을 위한 스탈린
5
통화내용에서 복통, 구역질이라는 상반된 병명과 정치 성향

6 공산주의를 지지하는지에 대한 상반된 주장

- 199 -
쇼스타코비치의 성향은 성실함, 예민함, 소심함, 쾌활함, 장난스러운

성향, 도덕적인 성품, 예술정신과 예술정신에 의거한 역사의 사실적 의미


전달의 책무, 인종차별주의 혐오, 애국심, 인류애, 음악에 대한 열정, 명예

욕이 없는 성향, 남들 몰래하는 선행, 시민 정신, 정치적으로 엮이는걸 꺼

려하는 성향 등을 찾을 수 있었으며, 이에 따른 시대적 배경과 쇼스타코


비치의 역사적 상황들을 기존에 도출한 세 가지 가설을 통해 나온 정치적

프레임에 관한 정치심리학 결과인 자극적인 단일성 프레임에 왜곡이 이루


어져 정치 참여도가 낮다는 점과, 경쟁적 프레임을 통해 뚜렷한 정치 선
호도가 높아진다는 결과와 이에 따른 경쟁적 프레임을 겪지 않았을 때 정
당에 대한 선호도가 뚜렷해지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세 번째 가설에도
적용할 수 있던 두 번째 가설안에서 나온 주장으로 이해관계, 특정집단에
대한 일체감, 정치적 이념원칙의 부합 여부에 따라 정치 선호도에 영향이
있다는 결론을 토대로 단일성 체제였던 공산주의 상황과 단일성 프레임과
맞물려 정치 선호도가 드러나지 않아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
해낼 수 있었다.
또한 각 문헌의 모순점과 동일한 내용, 상이한 내용을 교차 분석하고
연구하여 도출해낸 것은 선행 연구였던 <20세기 역사적 사건들과 쇼스타
코비치의 음악 – 음악과 정치에 관계에 대한 소고>의 “어용 작곡가도아
닌, 저항 작곡가도 아닌 예술을 향한 의지를 위한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
한 작곡가”라는 주장에 힘을 싣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이 결과
는 동일하게 단순히 쇼스타코비치는 수정론자 혹은 반(反)수정론자·반공

주의자라고 이분법적으로 적용할 인물이 아닌 것과 정치적인 행보를 보여


주는 특정한 정치관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는 부분, 그리고 정치적 프레임
을 배제한 모습에서 음악가로써 그의 책임감과 그에 따른 책무, 음악과

예술이라는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의 추구라는 기본의 틀을 지키려고 노력

- 200 -
한 음악가였다는 결과로 도출할 수 있었다. 이 도출된 결과에 대해 미국

철학자 노엘 캐롤이 주장한 자율주의적 사상을 통해 정치적 프레임 같은


음악 외적 요소를 적용하는 것에 대해 예술은 해당 분야마다 가치의 자율

성을 통해 독자적인 평가 기준을 가지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적

용하여 자율주의적 사상을 통해 사상론에 의한 외적 평가를 배제를 한 후


연구를 통해 나타난 그의 예술사상에 가장 근접한 의지에 따른 내면의 표

현이라는 근접한 쇼펜하우어의 음악 형이상학을 대입하여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사상을 정의하였다.
본 논문의 내용과 같이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예술가에게 정치적 프레임을 씌워 평가가 왜곡되는 현실은 국내에서도 예
외일 수 없다. 예를 들어 박정희 시대인 유신 시절 당시 예술 심의를 강
화시킨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하면서 금지된 곡들을 보면 대체로 ‘불신을
조장한다’ 혹은 ‘퇴폐적이고 저속하다’, ‘체제 비판적이다’등의 이
유로 국민들은 정치적 프레임 없이 듣던 노래들이 프레임이 씌워지면서
40년이나 흐른 지금 까지도 광장에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예술
적 평가가 아닌 정치적 프레임에 갇혀 왜곡되어왔다. 이 논문의 결론을
통해 기존의 정치적 프레임이 씌워진 혹은 앞으로 씌워질 예술들을 정치
프레임을 벗겨내고 예술적 평가를 해야 된다는 본 논문의 요지에 맞는 인
식에 대한 변화를 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본 연구의 한계 및 향후 연구 제안
해당 논문을 통해서 제시한 새로운 입장인 단순한 예술론자라는 주장
이 다른 여타 입장과 동일하게 정확한 입장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제한이

있었다. 이 주장은 현재 공개적으로 나와 있는 자료 중 일부를 토대로 나

온 결론인 것과, 사람의 내면을 파악하는게 어렵다는 점을 토대로 연구의

- 201 -
한계를 느끼게 되었으며,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성향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는 각 문헌의 심리분석과 모든 에세이를 제외한 사실적 정보를 주장하는


모든 문헌의 분석과 각 문헌에서 서술하고 있는 회상자료의 당사자 인터

뷰와 같이 심리분석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며, 쇼스타코비치

가 직접 쓰고 지인들과 교류한 편지자료도 다시 한번 심리적인 분석을 통


해 그의 정치성향 값을 구해야 할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를 현재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과 앞으로 연구할 학자들이 더욱 연구하여 위대한 러시아 음


악가인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에서 표현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의 성
향과 정치적인 정체성을 더욱 더 연구해야 될 것이다.

- 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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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EB%93%9C_%ED%8F%AC%EC%9C%84%EC%A0%84, 레닌그라드 포위
전, 나무위키

https://www.youtube.com/watch?v=9efTQ6rSO0s&t=1s, 유튜브 채널 “클래


식의 향연” - 자신의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의 일부를 연주하는

쇼스타코비치

- 209 -
ABSTRACT

Research on Shostakovich's Artistic Ideas

Aside from Political Frames

Rah, Sang Yul

Dept. of New Media Music

The Graduate School

Sangmyung University

The assessment of the artistic ideas inherent in Dmitri Shostakovich's


works in aspect of his political orientation and various political
backgrounds at that time is still controversial issue. He was also referred
to as the establisher of ideology or a tragic musician sacrificed during
the Cold War, and was known as a dissident musician who criticized the
authorities after he was free from oppression resulted from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in 1991, but there were various opinions such as an
opportunist or a collaborator on the party system.
Shostakovich's political orientation has been conflictingly expressed in
several memoirs. When Shostakovich's memoir, "The Proof" written by
Solomon Volkov was published in the United States in 1979, his son,
Maxime Volkov maintained that it was fabricated into a story being not

- 210 -
based on the facts. However, after his asylum in 1981, he changed his
tune there were partially true through his statement based on
circumstantial evidence in his memory. His daughter, Galliya, also said
the styles expressed in the book were similar to Shostakovich's usual
way of talking.
But Laurel E. Fay, author of "Shostakovich: A Life," said that seven
of the eight chapters of "The Proof" were some verbatim records of
some of Shostakovich's previously published essays, while Elizabeth
Wilson also raised the counterargument that particular contents were
omitted or partially erroneous.
This dissertation compares and analyzes the "Evidence" written by
Laurel E. Pay, which has been highly regarded as a core book moving
forward on the discussions about Shostakovich, Elizabeth Wilson's
"Shostakovich: A Life Remained," and Solomon Volkov’s “Proof”.
which has still controversy over the authenticity of the book. There
has been some things to be inconsistent and different. For instance,
what his identity, such as a revisionist, anti-revisionist and
anticommunist, has been the subject of debate by scholars. Their
different assessments of the same person is due to the interpretation
based on the political criterion. Accordingly, it is focused that
Shostakovich is a musician for real artistic expression without showing
some particular political preference in accordance with historical
background, Here, the recollection of acquaintances, that Shostakovich’s
communication letters with acquaintances and the same or different
contents in various literatures are utilized. The results obtained by
applying the theory of political psychology on political frame work to
them for excluding the effects of political frame are analyzed and
materialized. In addition, in the work of Anton Paviovich Chekhov wh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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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stakovich admired most in his life, the things relative to Shostakovich
are reviewed and analyzed. And, the ideas of Mikhail Joshenko and
Anna Ahmatova, who influenced on Shostakovich are also studied. In
order to analyze the battles of Leningrad and resultant events, which
were the backdrop of the era of Symphony No. 7, his pieces of music
and literatures are classified into three categories as revisionism,
anti-revisionism and anti-communism according to thoughts. Stalin's
Russia and ideas at that time being oppressed by the party are studied
and the research on the musical code of Shostakovich, DSCH, to
understand how these historical events influenced on his compositional
techniques is conducted. It is found to need to study deep into some
materials for understanding his inclination and the same and different
parts in the literatures from a moral perspective as well as from a
political perspective. Shostakovich had moral appearance for good deed
in secret as well as his passion for art and even no desire for fame in
his personality. Through this study, it is found that Shostakovich had
noble artistic ideas and not prejudice against any political views.
As a result of applying the autonomy theory used in the essay on art
of American philosopher, Noel Carol, to eliminate external frame in
musical point of view, it has come to a conclusion that Shostakovich's
artistic idea comes close to Showfanhaire metaphysical musical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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