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譯註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일러두기
1. 학궁의례 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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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궁의례 원문 역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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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 학궁전도(學宮全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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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 성묘설위도(聖廟設位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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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3. 석채진설도(釋菜陳設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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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4. 종향위진설도(從享位 陳設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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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宮儀例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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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고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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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도지 향교(江都志 鄕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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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속수증보강도지 강화향교(續修增補江都志 江華鄕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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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수이공안눌창건명륜당비(留守李公安訥創建明倫堂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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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수이공용희문묘중수기적비(留守李公容熙文廟重修紀績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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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전회통 호전 양전(大典會通 戶典 量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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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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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궁의례 해제
1. 학궁의례 해제
1) 향교의 연혁
우리나라 학교제도의 시작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하겠다.1) 당시 삼
국에 만들어진 학교의 특징은 수도에 설립된 국가 주도의 관립학교
였으며, 이후 통일신라기를 거쳐 고려에 와서는 중앙에는 국자감, 지
방에는 향교가 설립되었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의 집권적 정치구조 안에서 설립된 것으로 군
현제(郡縣制)와 함께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으로,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 그리고 학궁
(學宮)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 및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를 제향(祭享)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향교는 지방의 민풍(民風)을 순화하고 인재를 배양함이 그 목적이
었으며, 중앙에 있는 성균관의 축소형으로 지방 각지에 설립되었다.
고려를 이어 성립된 조선은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서 성리학
적 질서를 체계화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따라서 성
리학은 지배층만의 정치적 수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반 민중에
게도 강상(綱常)의 유교 이념을 보급시키는 것이어야 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유교 교육의 강화가 요청되었고 아울러 강화된 기구가
1. 학궁의례 해제 9
지방군현에 세워진 향교였다. 즉 향교는 일반 민중에게 유교이념을
인식시켜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방편으로 작용한 교육의
장이었기에, 향교를 통한 당시 민중에 대한 교육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2) 향교의 기능
향교는 강학(講學) 외에 향사(享祀)의 기능을 가졌다. 특히 향사는
봄과 가을 두 번이며 이를 석전제(釋奠祭)라고 하였다. 향교 건립 초
기에는 대성전에 공자 1인의 위패를 모시고 석전제를 지냈으나 시간
이 지나면서 공자뿐만 아니라 4성(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공문
10철, 송나라 6현, 그리고 공자의 문하 72현, 한·당·송·원나라의
22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 등 총 133위의 신위를 함께 모시게 되
었다. 이는 성균관의 규칙이며, 당시 지방에 설립된 향교도 이를 따
랐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향교는 읍격(邑格)에 따라 규모나 크기 교생의
수가 달랐다. 특히 읍격에 따라 대설위(大設位), 중설위(中設位), 소
설위(小設位)로 구분하여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수에 차이가 있었다.
대설위는 주로 부(府)2), 목(牧)3) 대도호부(大都護府)4)에 세워졌던 향
10 역주 학궁의례
교에서 설행되었다. 중설위는 부, 목, 도호부 등에 소설위는 군이나
현 등의 작은 읍치에서 설행하였다.
3)『학궁의례』
강화 유수 이안눌 명륜당 창건비에 인조 경오(1630)년에“우리 선
조 동악(東岳) 선생이 이 땅(강화)에 명륜당과 신학사(新學舍) 48칸을
건립하고 학궁(學宮)으로 이름을 고쳐(생략)”에서 1630년에 강화 향
교의 명칭이 학궁으로 바뀌어 졌음을 알 수 있다.『학궁의례』의 서
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서명 :『 學宮儀例 』
■ 저자 : 강화 향교
■ 간행년대 : 1799년 5) ~ 1883년 6)(추정 )
■ 현대어 서명 :『 학궁의례 』
■ 책수 : 1책 (62장 )
■ 사이즈 : 가로 22.8cm 세로 33.0cm
■ 행칸 ; 12 행 , 28~33칸으로 다양
■ 체제 : 4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 표지이하 부분 4쪽 , 목록 5·6
쪽 , 권상 7~22쪽 , 권하 23~62 쪽
1. 학궁의례 해제 11
학궁의례는 상·하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체제는 먼저‘권상목록
(卷上目錄)’이라고 쓴 다음 건치연혁(建置沿革), 석채의(釋菜儀), 축문
식(祝文式), 제집사분정기(諸執事分定記), 고유제의(告由祭儀), 제집사
분정기(諸執事分定記), 분향의(焚香儀), 신관알 성의(新官謁 聖儀), 신
은알 성의(新恩謁 聖儀)로 이루어져 있다. 이후‘권하목록’글자는 원
문에서 보이지 않으나 본문에 의하여 생도(生徒) 앞에 쓰여져 있었음
을 확인할 수 있다. 권하목록은 생도(生徒), 문부(文簿), 제기(祭器),
제복(祭服), 교사(校舍), 교위(校位), 노비(奴婢), 재직(齋直), 복호(復
戶), 몽학(蒙學), 향수(享需)로 되어 있다.
권상의 내용은 크게 넷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강화향교의 건치연
혁과 석전제에 대한 의식절차이며, 두 번째 부분은 고유제로서 석전
제 실행 후의 절차, 세 번째는 삭망(매월 1일, 15일)때의 의식절차,
마지막으로는 강화에 부임한 관원과 과거에 합격한 인물이 향교에서
치르는 의식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건치연혁과 석전제 부분의 목록은‘건치연혁’,‘석채의’,‘축
문식’,‘제집사분정기’이다. 이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건치연혁’에
서는 향교가 처음 위치한 자리와 몽골 침략 후 볼음도로 위판을 옮
겼다는 고려시대의 이건(移建)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였고, 조선시
대 인조 갑자년(1624)부터 영조 42년(1766)사이의 향교 이건 과정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다음‘석채의’에 대한 내용이다. 석채의는 석전제(釋奠祭)·석채(釋
菜)·상정(上丁)·정제(丁祭)라고도 하며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
丁日 : 그 달에 있어 10간 중의‘丁’이 처음 들어가는 날)에 거행한
다. 석채의는 넷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는 문묘 제사의 사전 준
비 과정으로 봉향(奉香)의식과 제물인 소의 규격 등 희생물에 대한
12 역주 학궁의례
내용, 본 제사를 드리기 전 여러 집사와 헌관의 의식을 기록하였다.
두번째 부분은‘찬자홀기(贊者笏記)’로 제사의 의식 진행순서를 낭독
하는 내용이다.‘찬자’는 제사때‘홀기’를 맡아 보던 임시 벼슬이며,
내용은 전폐례(奠幣禮 : 폐백을 올리는 례), 아헌례(亞獻禮 : 제사
때 둘째번으로 잔을 올리는 례), 종헌례(終獻禮 : 제사 때 세째번으
로 잔을 올리는 례), 음복수조(飮福受胙 : 제사 후 제관들이 제물을
나누어 먹고, 제사 때 사용한 고기를 나누어 받는 것)의 진행 과정을
찬자가 홀기를 사회 보는 것이다. 세번째는‘알자행전폐례홀기(謁者
行奠幣禮笏記)’이다.‘알자’는 제관을 인도하는 집사 가운데 한 사람
이다.‘알자행전폐례홀기’는 공자 문선왕, 안자 복성공, 증자 종성공,
자사 술성공, 맹자 아성공의 신위 앞에서 행하는 전폐례의 진행 내용
의 홀기를 알자가 사회를 보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알자행초헌례
홀기(謁者行初獻禮笏記)’이다. 이는 알자가 초헌례의 홀기를 사회 보
는 것으로, 내용은 초헌관이 문선왕, 복성공, 종성공, 술성공, 아성
공 신위 앞에서 초헌례를 행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술
성공 신위 앞에서의‘홀을 꽂으시오’ 이후 2행을 판독할 수 없으며
특히 아성공 신위 앞에서의 홀기는 보이지 않는다. 추정하건데 문선
왕이나 타 신위 앞에서의 홀기와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알자
행초헌례홀기’ 끝부분에는“아헌례와 종헌례는 초헌례와 같으나 단지
전폐와 소퇴, 궤, 독축, 부복흥평신이 없을 뿐이다”라고 하여 아헌례
와 종헌례에 대한 홀기는 기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축문식’은 성균관의 석전제나 타 향교의 석전제 거행시의 축문과
같다고 하겠다. 축문은 초헌(初獻)을 행하며 술을 잔에 부어 올리고
나면 읽는데, 백지(白紙)에 붓으로 써서 사용하며, 제사를 마치고 나
면 불사르거나 또는 보관하였다가 다음 제사에 다시 쓰기도 한다.
1. 학궁의례 해제 13
‘축문식’은 우선 대성지성문선왕에 대한 축문을 기록하고 있으며,
다음‘배위축문(配位祝文)’에서는 선사 연국 복성공, 선사 성국 종성
공, 선사 기국 술성공, 선사 추국 아성공에 대한 축문을 적어 놓았다.
‘제집사분정기’는‘석채의’에 참가한 헌관과 여러 집사의 맡은 임무
에 대한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헌관으로부터 예차(특별한
사무를 맡기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하는 관직)까지 11명은 모두 강화
부에서 뽑아 보내고 석채의가 끝난 다음날 아침이면 예차 사명은 모
두 관아로 돌아간다. 아헌관으로부터 봉촉(등불을 맡아 보는 집사)까
지 25명은 모두 동재에서 제사를 준비하고, 장생(제사때 쓰이는 희생
을 맡은 집사)이하 학생까지는 모두 서재에서 제사를 준비한다는 것
이다.
권상의 두번째 부분은 석전제 실행 후의 고유제에 대한 것이다.
구성은‘고유제의’,‘제집사분정기’,‘분향의’로 되어 있다.‘고유제
의’는 고유제7) 절차에 관한 내용으로, 제의를 행하는 절차는 석전제
와 같으나 다만 단헌제8)가 끝난 후 먼저 봉향한 공자의 위패를 담는
궤와 배위, 종향된 (동,서)무에 차례로 봉안된 궤, 제집사가 봉안한
교의, 탁상, 향안을 모두 명륜당에 옮겨 봉안한다는 것이다. 또한
‘고유제의’의‘축문식’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고, 내용은“조선 국왕
이 신하 ○○를 보내어 대성지성문선왕에게 고합니다”로 되어 있다.
‘제집사분정기’에서는 고유제의 여러 집사는 석채의와 같다는 것과
각 배위의 차비(임시로 임명한 직)는 합하여 170인 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14 역주 학궁의례
권상의 세번째 부분은‘분향의’이다.‘분향의’는 삭망때 분향하는 의
식 절차로‘석채의’에 비해 매우 간략하게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권상의 네번째 부분은 강화에 새롭게 부임하는 관원이 향교에서
인사를 하는‘신관알 성의’와 과거 합격자가 인사하는‘신은알 성의’
이다.‘신관알 성의’는‘분향의’의 절차와 같고,‘신은알 성의’에서는
과거 합격자가 향교의 묘정에 들어와 4배 한다고만 되어 있다.
권하의 목차의 처음은‘생도’로 강화 향교 생도 수의 변화를 적고
있다. 처음에는 생도수가 2,700인 이었으나, 신유년(1741)에 액내교
생(정해진 교생)과 액외 교생(정한 외의 교생)으로 나눈 후에는 오히
려 7, 8백인이 안되었고, 을축년(1745)에 170인으로 교생 액수를 정
하였으나, 기해년(1779)에 교생 중 80인을 군대에 속하게 하여 90인
이 되었다. 계묘년(1783)에 액외로 60인을 더 두었고, 아울러 장의
별안으로 70인과 동몽 150인을 두어 모두 370인이 되었음이 보인
다. 을묘년(1783) 원안에 의하면 동몽을 각기 300인으로 하였다.
문부(文簿)는 강화 향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과 장부, 문권(文券
: 땅이나 집 또는 그 밖의 권리를 양도하는 문서) 등의 제목이 총
26종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책과 장부가 23종 전답문권이 3장이
다. 책과 장부를 분류하면 지(誌)가 2종 2권, 절목(節目 : 규칙의 조
목)류가 7종 7권, 동·서재 청금록(靑衿錄 : 향교 학생명부)이 2종-
권 수는 표시하고 있지 않다-, 등록(登錄)9)류가『교관선생안(敎官先
生案)』을 비롯한 7종 9권,『의주(儀注 : 禮式)』가 1종 4권, 국왕이
하사 한『內賜御定全韻』1권과『內賜五倫行實』(권 수는 보이지 않는
다)『內賜鄕禮合編』2권, 그리고『河西金先生』(권 수는 없다)이다.
1. 학궁의례 해제 15
제기(祭器)와 제복(制服)에서는 강화 향교에서 석전제나 삭망례를
거행할 때 필요한 제사 그릇과 제관이나 집사의 의복의 보유 건수를
기록하고 있다.
교사(校舍)에서는 강화 향교 전체 공간 구조를 기록하고 있다. 우
선 배향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와 신문, 그리고 교생의 기숙공간
인 동재·서재의 규모가 적시되었고, 기미년(1799년 인 듯하다)에
동협문과 서협문이 중수(重修)되었음이 나타난다. 또한 같은 해에 전
사청 수복방 등의 보조 건물과 강학 공간인 강당과 명륜당, 그리고
중문과 외삼문 등이 신설되어 도합 88칸 반의 규모였음이 보인다.
또한 향교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의 규모와 담장이 무너졌을 때
보수하는 내용인 장위(墻圍)를 교사에 붙이었다. 이에 따르면 강화
향교 전체 담장의 둘레는 320파(把)10)이며, 담장이 무너지면 강화의
12동 백성으로 하여금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위(校位)조는 강
화 향교에서 향사(享祀)에 쓰려고 마련한 위토전(位土田)에 대한 내용
으로『학궁의례』에서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향교 남쪽
담 밖에 있는 토지(校宮南墻外)는‘우자제(宇字第)’라는 지번(地番)
이 붙어 있다. 그런데‘우자제’토지는‘비칠매매납(婢七梅買納)’즉
‘향교 여자 종 칠매가 사서 납부’하였다는 부제가 있다. 그 내용
은 관노(官奴) 욱손이 강화유수부에 소지(所志 : 진정서)한 것에 대한
강화유수부의 명령으로, 조선 후기 노비 매매의 한 사례를 보여 주고
있다. 좀 더 살펴 보면, 관노 욱손이 강화 향교의 노비로 있던 동생
칠매를 양반의 시정비로 보내기 위하여, 양반에게 전경춘이 소유하고
16 역주 학궁의례
있던 토지를 매입할 수 있는 돈을 받아서 전경춘의 땅을 매입하여
강화향교에 납부하려 하였다. 그러나 양반이 욱손에게 토지 대금을
지급하지 않아 욱손 또한 전경춘에게 땅을 매입한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욱손이 전경춘의 다른 토지에서 국가에 받쳐야
할 세금을 자원 대납한 것이 20년 이었다. 하지만 욱손이 개걸(丐乞
: 빌어 먹음) 지경에 이르러 전경춘의 세금을 대납할 수 없게 되자,
욱손이 강화유수부에 진정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강화유수부는 욱손
이 사서 납부한 전경춘의 땅을 다시 전경춘에게 돌려주라고 강화 향
교 도유사에게 하첩(下帖 : 상관이 7품 이하에게 내리는 공문서)한
것이다.
다음으로‘동문 밖 예전 향교 터의 위전(東門外舊校基位田)’에서는
건륭 32년(1767년, 영조 42)에 양전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교궁장
외 좌우신기가전(校宮墻外 左右新起加田)’은 향교 담장 밖 좌우로 새
롭게 경작하는 토지에 내용이 주를 이룬다. 특히 향교 주변의 각 동
의 가경전과 향교에서 매득한 논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학궁영속(學宮永屬)에서는 1711년 신묘년에 양전한 향교의 전답에 관
한 내용과 어장과 고깃배, 소금 가마 등을 소유하고 있었음이 보인다.
노비에서는 향교에 딸린 노비를 기록하여 노비의 출생 간지, 생사
여부, 속량된 예, 비의 남편 이름 등이 기록되었다. 재직은 향교 임
원에 관한 것이나 재직 절목은 훼손이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한 것이
많다.
복호는 향교의 요역을 면제해 주는 대가로 복호미를 수취하는 내
용이다. 여기서는 원래 향교의 복호는 40호 이었는데 1771년에 20
호로 삭감되었으며, 강화부 예방 장부에는 복호 20명에게 쌀 4말과
들깨 1말을 수취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1. 학궁의례 해제 17
몽학은 원래 그 수가 300명이었으나 1723년 150명으로 삭감되었
다가, 1735년 다시 300명으로 환원되었음이 보인다.
향수는 제사에 쓰이는 제수의 종류와 사용되는 초, 종이 등의 물
품이 기록되었다. 공사는 향교 제사때 동원되는 수복이 하는 일, 그
리고 식모와 심지어 나무꾼이 준비해야 할 것들이 기록되었다. 향교
장외가경전은 판독이 불가한 것이 많다. 교궁 1년응입례와 교궁 1년
응하례는 향교의 경상비 수입과 지출에 관한 내용이다.
이상『학궁의례』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러나『학궁의
례』의 기록 중 판독 불가능한 부분이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
지만 이 책은 강화 향교 운영의 세세한 면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특히 많은 부분이 양전에 관한 것으로서 이를 통하여 19세기 양전
방법과 기록의 특징을 알아 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끝으로 관계된 더 많은 자료를 찾아 비교하여 역주의 완성도를 높
이지 못한 면이 있었음은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18 역주 학궁의례
2. 학궁의례(원문 역주)
▶ 圖1. 學宮全圖
11)
22 역주 학궁의례
大成至聖文宣王
(대성지성문성왕)
西從享 郕國 宗聖公 曾子 兗國 復聖公 顔子 東從享
(서종향) (성국 종성공 증자) (연국 복성공 안자) (동종향)
鄆公 冉耕 鄒國 亞聖公 孟子 沂國 述聖公 子思 費公 閔損
(운공 염경) (추국 아성공 맹자) (기국 술성공 자사) (비공 민손)
齊公 宰予 薛公 冉壅
(제공 재여) (설공 염옹)
徐公 冉求 黎公 端木賜
(서공 염구) (서공 목단사)
吳公 言偃 衛公 仲由
(오공 언언) (위공 중유)
穎川侯 顓孫師 魏公 卜商
(영천후 전손사) (위공 복상)
徽國公 朱熹 郿伯 張載
(휘국공 주희) (미백 장재)
西廡 東廡
(서무) (동무)
文簡公 成渾 文成公 李珥
(문간공 성혼) (문성공 이이)
24 역주 학궁의례
▶圖3. 釋菜陳設圖
神位
신위
魚醢 芹菹 醓醢 簋黍 簠稻 魚脯 榛子 鹿脯
어해 근저 탐해 궤서 보도 어포 진자 녹포
筍菹 鹿醢 簋稷 簠梁 栗黃 芡仁
순저 녹해 궤직 보량 율황 검인
兎醢 靑菹 韭菹 幣篚 形鹽 乾棗 菱仁
토해 청저 구저 폐비 형염 건조 능인
豕頭 牛頭
燭 시두 香爐 우두 燭
촉 俎 향로 俎 촉
조 조
爵 爵 爵
작 작 작
初獻 亞獻 終獻
尊此 尊此 尊此
초헌 아헌 아헌
존차 존차 존차
祝床
축상
26 역주 학궁의례
▶圖4. 從享位 陳設圖
神位
신위
醢 簋黍 簠稻 脯
해 궤서 보도 포
豕牛
菹 시우 果
저 俎 과
조
燭 爵 燭
촉 작 촉
28 역주 학궁의례
學宮儀例
卷上目錄
학궁의례
권상목록12)
(1) 建置沿革
건치연혁
30 역주 학궁의례
의) 소동문 밖에 건립하였으나 (이때는 향교의)제도가 갖추어지지 않
았다.
정묘년(1627)16)에 유수17) 이안눌18)이 비로소 위판을 봉안하면서
32 역주 학궁의례
하여 높이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 이곳에 [즉 흑사동22)] 재우(齋宇)
와 포주(庖廚)23)를 옮겨 세워 이로부터 질서가 정연하게 되었다. 병
술년(1766)에 유수 이은24)이 중수하여 치장을 더 하였고, 기사비25)
를 향교문밖에 옮겨 세우면서 비각을 다시 고쳐 새겼다.
경상도관찰사·양주목사·함경도관찰사·도승지·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세자
시강원빈객(世子侍講院賓客)·평안도관찰사·호조판서 등을 두루 지냈다. 그러
나 신임사화 중심 인물의 죄를 공정히 다스릴 것을 주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
하고 사직하였다. 후에 영조에 의해 중용되어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다. 1760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고, 이어서 봉조하(奉朝賀)를 받고 기로소(耆老
所))에 들어갔다. 당대의 명필가로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이기도 하였다. 글씨
로는 경주의「신라시조왕비(新羅始祖王碑)」, 청주의「만동묘비(萬東廟碑)」등
을 남겼고, 저서로는『지수재집』15권이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22) 본서의 건치연혁과 교위에는 흑사동(黑寺洞)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1783년 편찬
된『강화부지』권상 방리조‘장령리의 동’ 1789년 편찬된『호구총수』, 1871
년 편찬된『강화부지』등에는 묵사동(墨寺洞)으로 기록되어있다
23) 향교는 대성전, 동무, 서무의 배향 공간, 명륜당, 동재, 서재의 강학 공간, 그리
고 전사청, 부엌 등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진 교직공간으로 구성된다. 재우와 포
주는 이를 아우르는 것이다.
24) 1722년(경종 2)∼1781년(정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 병조판서 주진(周鎭)의 아들이다. 1740년(영조
1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남평현감을 지냈으며, 1759년 정시문과
에 을과로 급제한 뒤 교리가 되고 1764년에 사직이 하였다. 그 이듬해 대사헌
으로 한후락(韓後樂)을 신구(伸救)하려다가 왕의 분노를 사 강화유수로 전직되
었다. 1767년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나 강화유수로 있을 때 백성들을 괴롭혔
다는 탄핵을 받아 삭령군수로 좌천되었으며, 뒤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1772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나, 대사헌 정광충(鄭光忠), 대사간 이담(李潭)
등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1775년에 판중추부사로 왕
세손에게 국정을 대행시키는 문제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지지파인 서명선(徐命
善)을 도운 공으로 정조가 국정을 대리하게 되면서 좌의정이 되었다. 1777년에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나라에 가서『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5,020권을 구득하여왔다. 그 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
다시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좌의정으로 있다가 1780년에
사직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25) 1630년 이안눌이 명륜당을 창건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이중명(李重溟)이 찬하
고 한수검(韓守儉)이 쓴‘유수이공안눌창건명륜당비(留守李公安訥創建明倫堂碑)’
이다.
34 역주 학궁의례
석채의26)
36 역주 학궁의례
축40)은 수복과 함께 희생을 한 바퀴 돌며 손을 들고“충분하다”고
말한다. 수복은 유척41)으로써 (희생을) 재는데 길이가 1자 5치, 넓이
가 1자이면“규격에 맞는다”고 말한다. 헌관은 서향하고 서서 희생을
공상42)위에 올린다. 장인이 칼을 잡고 서고 희생을 담당하는 자가
장인의 칼을 든 손을 떠받치면, 수복은 희생을 베는 곳(殺猪之處)을
고한다. 하인이 희생을 이끌고 부엌에 이르러 장인에게 전달하여 준
다. 찬인은 헌관을 이끌고 명륜당으로 돌아간다. 대축은 동무43)에
들어가 축문을 작성하고 와서 헌관에게 살피게 한 후 (축문을) 향실
에 들여 둔다.
소는 순색이고 천근의 큰소이다. ○소고기 포는 길이가 2척 4촌이
고, 넓이는 3척 5푼이다.해가지고 어두워질 때 전사관과 더불어 진
설44) 7인은 대성전 안에 들어가 상을 차린다.【상 차림 도면은 위에
보인다】.
삼경45) 즈음에 수복은 초헌관 이하 여러 집사에게 일어날 것을 고
한다 ○학생 및 여러 집사는 사경 일점46)에 신문 밖 정해진 자리에
나아간다. ○수복은 여러 집사에게 (신문)밖 자리에 설 것을 고하고
38 역주 학궁의례
贊者笏記52)
찬자홀기
40 역주 학궁의례
(공자)의 준소55)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次] ○배위 준소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신위 앞에 나아가시
오. ○인도하여 내려와 자리로 돌아오시오. ○아헌례를 행합니다. ○
찬인은 아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로 나아가시오. ○찬인은 아헌관을
인도하여 문선왕 준소에 나아가시오.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배
위준소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내려와 자리로 돌아오시오. ○종헌례를 행합니다. ○찬인은 종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로 나아가시오. ○찬인은 종헌관을 인도하여 문선왕
준소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신위 앞으로 나아가시오. ○배위의
준소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내려와 자리로 돌아오시오. ○찬인은 각각 분헌관을 인도하여 동종향
준소에 나아가시오. ○나누어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 찬인은 각각
분헌관을 인도하여 내려와 자리로 돌아가시오. ○음복하고 수조56)하
시오. ○찬인은 초헌관을 인도하여 음복위로 올라 나아가 무릎을 꿇
고 진홀57)하고, 술잔을 받아 집사에게 전하고 집홀58)하시오. 엎드리
시오, 펴시오, 일어나시오. ○인도하여 내려와 자리로 돌아오시오.
○자리에 있는 사람과 학생은 모두 네 번 절하시오. ○몸을 굽히시
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몸을 바르
게 펴시오. 변과 두를 거두어 들이시오 ○자리에 있는 사람과 학생
은 모두 네 번 절하시오. ○몸을 굽히시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몸을 바르게 펴시오. 찬인은 초헌관을 인
도하여 망료위59)로 올라 나아가시오. ○신위를 태우시오. ○찬인은
55) 제향 때 술 단지가 놓여 있는 곳.
56) 제사 후에 번육(膰肉 : 제사 때 쓰인 고기)을 나누어 받는 예(禮).
57) 손에 들었던 홀을 제복(祭服)의 허리띠에 꽃는 의식.
58) 의식(儀式) 때에 홀(笏)을 손으로 잡아서 가슴에 대는 의식.
謁者行奠幣禮笏記60)
42 역주 학궁의례
집으시오.[초헌관은 문선왕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무릎을 꿇으시
오. ○홀을 꽂으시오. ○향을 세 번 올리시오. ○헌폐하시오. ○전
폐61)하시오. ○홀을 집으시오. ○엎드려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
시오. ○복성공62)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무릎을 꿇으시오. ○홀
을 꽂으시오. ○향을 세 번 올리시오. ○헌폐하시오. ○전폐하시오.
○홀을 집으시오. ○엎드려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종성
공63)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무릎을 꿇으시오. ○홀을 꽂으시오.
○향을 세 번 올리시오. ○헌폐하시오. ○전폐하시오. ○홀을 집으시
오. ○엎드려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술성공64) 신위 앞에
謁者行初獻禮笏記
44 역주 학궁의례
○搢笏 이하는 보이지 않으나 다음과 같다 ○封爵奠爵 ○執笏 ○俯
伏興平身 ○少退 ○跪 ○讀祝 ○俯伏興平身 ○詣亞聖公神位前 ○跪
○搢笏 ○封爵奠爵 ○執笏 ○俯伏興平身 ○少退 ○跪 ○讀祝 ○俯
伏興平身
亞獻禮 終獻禮 一如初獻禮 而只無奠幣 少退 跪 讀祝 俯伏興平身
(3) 祝文式66)
축문식
66) 축문. 단순히 축(祝)이라고도 한다. 제사의 대상과 종류에 따라 문장이 달라지
기는 하나, 격식 ·문구 등이 거의 고정되어 있다. 주인이 초헌(初獻)을 행하며
술을 잔에 부어 올리고 나면 축문을 읽는데, 축문을 읽는 이를 축관(祝官) 또는
대축(大祝)이라고 한다. 축문은 백지(白紙)에 붓으로 써서 사용하며, 제사를 마
치고 나면 불사르거나 정히 보관하였다가 다음 제사에 다시 쓰기도 한다.『사
례편람(四禮便覽)』에 각종 제사와 이에 따른 축문 서식이 상세히 나와 있다.
46 역주 학궁의례
앞선 성인 대성지성 문선왕, 엎드려 생각하건데
도(道)가 백왕에 으뜸하니
만세의 스승이십니다.
이달의 상정67)일을 당하여
정하게 제향을 올림이 마땅합니다.
삼가 생폐68), 예재69), 자성70), 서품71)을 법에 맞게 진설하고 밝
게 올려 선사이신 연국 복성공 안씨, 성국 종성공 노씨, 기국 술성공
공씨, 추국 아성공 맹씨를 배향합니다. 가상히 여겨 흠향하소서.
配位祝文
先師兗國復聖公, 伏以
材蘊爲邦,
仁全克己, 萬世景仰, 是禋是祀. 伏以, 牲幣, 醴齋, 粢盛, 庶品, 式
陳明薦 尙
饗
배위축문
先師郕國宗聖公, 伏以
三省功加,
一貫道傳, 時祀無斁, 彌億萬年. 謹以, 牲幣, 醴齋, 粢盛, 庶品, 式
陳明薦 尙
饗
先師沂國述聖公, 伏以
克承
先聖, 允得其宗, 其從與享, 百代是崇. 謹以, 牲幣, 醴齋, 粢盛, 庶
48 역주 학궁의례
品, 式陳明薦 尙
饗
先師鄒國亞聖公, 伏以
敎明七篇,
道承
三聖, 廟食于配, 享祀益永. 謹以, 牲幣, 醴齋, 粢盛, 庶品, 式陳明
薦 尙
饗
(4) 諸執事分定記
50 역주 학궁의례
奉爵 一員
奠爵 一員
奉燭 一員
配位奉香 一員
奉爐 一員
奉爵 一員
奠爵 一員
奉燭 一員 [自亞獻官, 至此合二十五員, 皆以東齋塡差]
掌牲 一員 [自此以下, 西齋差備]
飯色 一員
酒色 一員
贊者 一員
通謁 一員
贊引 七員
大聖位 司樽 二員
配位 司樽 一員
陳設 一員
冠緣 一員
東從享司樽 一員
陳設 一員
奉香 一員
奉爐 一員
奉爵 一員
奠爵 一員
奉燭 一員
52 역주 학궁의례
奠爵 一員
奉燭 一員
贊引 一員
冠緣 一員
獻官盥洗位 一員
諸執事盥洗位 一員
學生
제집사분정기
54 역주 학궁의례
봉촉 일명 [아헌관으로부터 여기까지(배위 봉촉) 도합 이십오명은
모두 동재에서(제사를) 준비한다.]
장생81) 일명 [장생 이하부터는 서재에서 (제사를) 준비한다.]
반색82) 일명
주색83) 일명
찬자 일명
통알 일명
찬인 칠명
대성위 사준 이명
배위 사준 일명
진설 일명
관연 일명
동종향 사준 일명
진설 일명
봉향 일명
봉로 일명
봉작 일명
전작 일명
봉촉 일명
찬인 일명
관연 일명
서종향 사준 일명
56 역주 학궁의례
관연 일명
헌관 관세위 일명
제집사 관세위 일명
학생
(5) 告由祭儀84)
고유제의
(6) 祝文式
維年號幾年歲次干支幾月干支朔幾日干支
朝鮮國王姓諱
축문식
년호 몇 년 다음 간지 몇월 간지 삭 몇일 간지
조선국왕 성 휘
삼가 신하 모 관직 모 를 보내어 감히 밝게 선성 대성지성문선왕
께 고하여 행하오니 엎드려 생각하건데 [조사(措辭)87)○이하는 향사
의 축문과 같다.]
(7) 諸執事分定記
제집사분정기
(8) 焚香儀
58 역주 학궁의례
復位[從西階降] ○鞠躬拜 ○興 ○拜 ○興 ○拜 ○興 ○拜 ○興 ○平
身 ○禮畢 ○以次出[傳香則入拜]
분향의
(9) 新官謁聖儀92)
與焚香儀同
신관알 성의
분향의와 더불어 같다
入庭四拜
신은알성의
뜰에 들어와 네 번 절한다
(1) 生徒
생도
60 역주 학궁의례
진 후 원액의 수가 현저히 줄어 오히려 칠, 팔백인이 안되었다. 을축
년에 일백칠십인으로 항정되었고 당저95) 기해년(1779, 정조3)에 팔
십인이 파견되어 주사로 속하였다. 계묘년(1783, 정조7)에는 액외
육십명을 수직 집사로 갖추어 인원으로 더하여 두었고 아울러 장
의96) 별안으로 칠십인 및 동몽 일백오십인, 합하여 삼백칠십인이 되
었다. 을묘년(1795, 정조 19)원안에는 동몽 삼백인이 정액으로 충원
되었다.
(2) 文簿
學宮誌一卷
學宮移建誌一卷
癸卯齋憲一卷
丁丑節目一卷
壬戌節目一卷 [栢洞金等]
乙丑節目一卷 [三山李等]
丙子節目一卷 [玄石趙等]
문부
학궁지 일권
학궁이건지 일권
62 역주 학궁의례
계묘재헌 일권
정축절목 일권
임술절목 일권 [백동 김 등]
을축절목 일권 [삼산 이 등]
병자절목 일권 [현석 조 등]
계묘절목 일권
동재청금록 권
서재청금록 권
교관선생안 일권
사각참봉안 이권
당장안 일권
사마안 일권
의주 사권
재직안 이권
동문외개량전안 일권
동문외개량후절목 일권
위량위전답양안 이권내 일권
내사어정전운 일권
내사오륜행실
내사향례합편 이권
전답문권
전답전음문서 일장
품목제사 일장
칠매매납답사하첩 일장
하서김선생(문집)
鍮樽 柒坐 明水樽並
鍮香爐 玖坐 內壹坐 新備
鍮香盒 玖坐 內柒坐 新備
鍮龍勺 捌坐 內壹坐 改備
鍮燭臺 伍雙
木燭臺 柒雙 內肆雙 新備
鍮爵 伍拾坐 內肆坐 改備
鍮爵臺 貳拾坐
木爵臺 貳拾陸坐
鍮簠簋 伍拾貳坐
沙簠簋 貳拾柒坐 內肆坐 破不用
牲俎 肆拾柒坐 內貳坐 破不用
木豆
竹籩
祝板 伍坐
祝硯 具匣
幣篚 伍坐
제기
64 역주 학궁의례
유기 향로 9개 내에 1개는 새로 마련한 것이다.
유기 향합 9개 내에 7개는 새로 마련한 것이다.
유기 용작100) 8개 내에 1개는 고쳐 마련한 것이다.
유기 촛대 5쌍.
나무 촛대 7쌍 내에 4쌍은 새로 마련한 것이다.
유기 술잔101) 50개 내에 4개는 고쳐 마련한 것이다.
유기 작대102) 20개.
나무 작대 26개.
유기 보궤103) 25개.
사기 보궤 27개 중 4개는 깨져서 사용할 수 없다.
생조104) 47개 중 2개는 깨져서 사용할 수 없다.
목두105).
죽변106).
(4) 祭服
祭冠 簪具 七件
笏 七件
帶 七件
白衫 七件
黑衫 七件
蔽膝 七件
襪 七件
祭鞋 七件
제복
제관 잠구108) 7건.
홀 7건.
대109) 7건.
66 역주 학궁의례
백삼110) 7건.
흑삼 7건.
폐슬111) 7건.
말112) 7건.
제혜113) 7건.
(5) 校舍
大成殿十二間半 正堂十間退二間半
東廡四間
西廡四間
神門三間
東齋六間退三間
西齋六間退三間
己未重修
東陜門一間
西陜門一間
己未新設
典祀廳六間 [癸丑重修 若當公需間 挾窄之弊 則使各浦口 草芚來結幕]
守僕房六間
酒房三間退一間半
講堂十間半 [東上室二間西上室二間退半間大廳四間退一間廚一間]
교사
68 역주 학궁의례
명륜당 열네칸 [동상실 한칸 반, 서상실 한칸 반, 대청 일곱칸 반,
툇마루 세칸 반]
중문 한칸
외삼문 세칸
제기고 한칸
포주 한칸
도합 팔십팔칸 반
墻圍
장위
(6) 校位115)
校宮南墻外
宇字第
婢七梅買納
宇字第
府爲知委事 官奴旭孫呈上 營所志內 乙酉年間 因官分付其矣 同生妹
七梅以侍丁婢 欲爲免賤 田慶春畓 六斗落庫乙 買納鄕校 而賣買以後 姑
未給價 每年田哥之他田畓結卜 一結五十卜稅穀 自願代納者 米爲一石三
斗 租爲一石 自乙酉至今 將至二十年 徵稅之數 乃爲四十餘石穀 且其同
生妹 物故已久 而到今奴矣身形勢 未免丐乞之境 畓價與結卜間實無當納
之路云云 査禀題辭內 旭孫妹 率去之兩班 不給畓價 使旭孫狼狽 公納
二十年 一結五十卜之稅 今則貧窮 至於無奈何之境 則旭孫所納 田哥之
稅 自今年徵推 於田哥事理當然是遣 至於本畓六斗落 則每年所出 必如
旭孫 所納稅之數 故自初以此數代納 若無旭孫買取之納 則二十年間 田
哥渠自耕食渠畓 今以二十年納稅之 故使田哥公然失畓不成事理 此畓在
鄕校 眞所謂元非我土 還給田哥之意 分付爲有置狀 奴旭孫所納之畓 卽
70 역주 학궁의례
爲還給於本主田慶春處 更無稱寃之地宜當 甲辰十月十四日 下帖于都有
司
교위
교궁 남쪽 담장 밖
우자 지번
비 칠매가 매납함
(강화유수)부에서 지위116)하는 일이다. 관노 욱손이 관에 올린 소
지117)의 내용에 대하여 을유년(1705년 ; 숙종 31, 1765년 ; 영조
41)에 관(강화유수부)에서 내린 분부에 의하면“욱손이 여동생 칠매
를 시정118)비로 (향교의) 천역을 면하게 하고자 하여, 전경춘의 논 6
72 역주 학궁의례
의 세는 금년부터는 전경춘에게 징추하는 것이 사리에 마땅한 것이
고, (전경춘의) 본래의 논 6마지기에 이르러서는 매년 소출한 것이
필히 욱손이 납세한 수와 같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대납한) 수로
써 (욱손이 전경춘의 6마지기 논의 값을 지급하지 않아 전경춘이 납
부해야할 세곡을 욱손이) 대납하였기 때문에 욱손이 (전경춘의 논을)
매취한 약조는 없는 것과 같은 즉 전경춘이 스스로 경작하여 먹을
저 논이 이십년 동안 (국가에)납세한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전경춘
으로 하여금 공연히 논을 잃게 한 것은 일을 이루는 이치가 아니다.
이 논이 향교에 있어 진실로 이른바‘원래 내 땅이 아닌 것은 전경
춘에게 돌려준다'는 뜻으로 분부하고 문서를 만들어 있게 한다. 욱손
이 납부한 (전경춘의) 논은 즉시 본래의 주인인 전경춘에게 돌려주고
다시는‘억울한 땅(寃之地)’이라고 칭하지 않음이 마땅하다. 갑진년
(1724, 1784)년 10월 14일 도유사에게 하첩120)한다.
東門外 舊校基 位田
74 역주 학궁의례
爲字 第四十 南犯126). 六等 續 直田. 長四十七尺 廣三十二尺. 二卜
六束. 量校坐地. 時作 張世道.
위자 제40지번127)은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128) 속129)·
직전130)이다. 길이는 47척, 폭은 32척이다. 넓이는 2부 6속이다. 교
76 역주 학궁의례
는 김백련이다. [이 땅은 김백련이 다른 땅과 서로 바꿔 경작한다는
것이 관청문서에 남아있으므로 그대로 경작하게 한다.]
78 역주 학궁의례
하다. 그러나 추자전은 교궁에서 차지132)로 하여금 세금을 걷은 것
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돌려준 후에 효주(爻周)하였다.]
已上 田畓一結六十六卜三束.
이상 전답의 넓이는 1결 60부 3속이다.
校宮墻外 左右新起加田
향교 담장 밖 좌우의 새로 경작한 토지
80 역주 학궁의례
東邊 貳斗落.
동쪽 담가 2두락.
東邊 伍斗落 上下二庫.
동쪽 담가 5두락 상하 2곳.
東邊 壹斗落.
동쪽 담가 1두락.
西邊 福娘買納 玖斗落田.
서쪽 담가 복랑이 사서 납부한 밭 9두락.
碑閣後田 壹斗落.
비각 뒤 밭 1두락.
西邊 梁九音釗起耕田 二庫 捌斗落.
서쪽 담가 양구음리의 기경전 2곳 8두락.
柿林後田 二庫 捌斗落.
감나무숲 뒤쪽 밭 2곳 8두락.
82 역주 학궁의례
黑寺洞
흑사동
宇字第十二田 五卜.
우자 제12번지 밭 5부.
加田 二卜.
가전 2부.
第十三田 六卜八束.
제13번지 밭 6부 8속.
加田 二卜五束.
가전 2부 5속.
第十四田 四卜六束.
제14번지 밭 4부 6속.
量校坐地.
교좌지를 양전하였다.
加田 二卜.
가전 2부.
第十五田 四卜五束.
제15번지 밭 4부 5속.
第十六田 六卜.
제16번지 밭 6부.
第十九畓 八卜四束.
제19번지 논 8부 4속.
84 역주 학궁의례
宇字 第十二 北犯 五等直田 長五十尺 廣二十五尺 五卜 東西同人田
南崔尙俊田 北山 ■ 量陳舊鄭占化.
우자 제12번지는 북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5등의 직전이다. 길
이가 50척, 폭이 25척이다. 넓이는 5부이다. 동서쪽은 같은 사람
밭, 남쪽은 최상준의 밭, 북쪽은 산이다. 진전을 양전하였다. 예전에
는 정점화 소유였다.
加田 二卜.
가전 2부이다.
加田 二卜五束.
가전 2부 5속.
86 역주 학궁의례
神堂洞
신당동
上道
상도
仙源巨末洞
선원거말동
知字 加畓 九卜二束 六斗落.
지자 지번은 가경논 9부 2속 6두락.
88 역주 학궁의례
秋字 第二十內田 一卜 時作 金興■.
추자 제20번지 안에 있는 밭 1부이며 시작은 김흥■이다.
同加田 二卜 七斗落.
같은 지번 가전 2부 7두락.
同加田 三卜.
같은 지번 가전 3부.
90 역주 학궁의례
第四十 南犯 六等 勾田 長一百二十四尺 活七十四尺 十一卜五束 東
洪叔只田 南愛珎田 西奴順卜田 北川 起主 朴民.
제40번지는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구전이다. 길이는 124
척이고 활은 74척이다. 넓이는 11부 5속이다. 동쪽은 홍숙지의 밭,
남쪽은 애진의 밭, 서쪽은 노비 순복의 밭, 북쪽은 내이다. 기주는
박민이다.
92 역주 학궁의례
第七十 東犯 六等 直田 長四十尺 廣二十九尺 二卜九束 東堰 南路
二方朴民田 起主 婢唜代.
제70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직전이다. 길이는 40
척이고 폭은 29척이다. 넓이는 2부 9속이다. 동쪽은 제언, 남쪽은
길, 두 방향은 박민의 밭이다. 기주는 노비 말대이다.
甫音島位畓
볼음도 위답
栗木洞
율목동
94 역주 학궁의례
이는 19부 4속다. 동쪽은 길, 두 방향은 박민전의 논, 북쪽은 최응
룡의 밭이다. 기는 이만익이다.
鄕校洞
향교동
96 역주 학궁의례
內南二作 三等直畓 一夜未 長八十尺 廣四十七尺 二十六卜四束 三
方位畓 北崔玉山田 起 田厚日.
(제35번지)내 남쪽 두 번째 경작지는 3등 직답이다. 1배미이다.
길이는 80척, 폭은 47척이다. 넓이는 26부 4속이다. 세 방향은 교위
답, 북쪽은 최옥산의 밭이다. 기는 전후일이다.
紡字畓 丁餘 三卜六束.
방자 논은 정여138)이며 3부 6속이다.
98 역주 학궁의례
第二 東犯 四等方畓 二夜未 長五十尺 廣五十尺 十三卜七束 東田應
卜畓 二方位畓 北金永益畓 起 崔玉立.
제2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방답이다. 2배미이다.
길이는 50척, 폭은 50척이다. 넓이는 13부 7속이다. 동쪽은 전응복
의 논, 두 방향은 교위답, 북쪽은 김영익의 논이다. 기는 최옥립이다.
勿巖串 買得畓
물암곳의 매득한 논
注簿洞 買得畓
주부동의 매득한 논
已上 畓 四結三十三卜六束內
位畓 四結十一卜八束內 陳十卜六束 起四結一卜二束.
鄕校買得畓 二十一卜八束 陳二卜二束 起十九卜六束.
이상 논의 총 면적은 4결 33부 6속이고 이중
교위답 4결 11부 8속 내에 진답이 10부 6속, 기경이 4결 1부 2
속이다.
향교 매입 논 21부 8속 내에 진답이 2부 2속, 기경이 19부 6속이다.
學宮永屬[辛卯量付]
100 역주 학궁의례
甫音島位畓後 潑草 結箭處. [三面大海 逢授崔戒雲 ○嘉慶己未 改逢
授於張順太子 出處每年收稅大民漁十二尾.]
볼음도의 위답 뒤 발초의 결전처. [3면이 큰 바다이고 최계운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였다. ○가경 기미(1799)년에는 고쳐 장순태의 아
들에게 맡겼다. 매년 큰 민어 12마리를 세금으로 거둔다.]
釣魚船 一隻 下道金占述處逢授.
고깃배 1척은 하도의 김점술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였다.
小中船 一隻 上道朴順金名付.
소중선 1척은 상도의 박순금에게 명의를 주었다.
下道甕巖鹽盆一坐. [時尹萬生名付.]
하도 옹암 소금 가마 1좌 [윤만생에게 명의를 주었다.]
102 역주 학궁의례
■■知 而不官不知小橋 則橋下之畓 亦無以査出 後人欲知小橋之地. 則
丙■(字)二十八畓 堰下■■川 此其地也 以此憑考是齊.
104 역주 학궁의례
하나, 처음 향교 땅을 줄때에 소교 아래로부터 양전하여 주었지만,
소교 아래의 교위전은 모두 백성들이 몰래 점유한 곳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소교 표지가 있는 것을 싫어해서 소교의 돌
을 먼 곳으로 옮겨 소위 소교는 지금은 없다. 처음 교석을 본 사람
들이 없고 원래 그 땅의 (유래를) 아는 자도 없고, 관에서도 소교를
알지 못하는즉 소교 아래 논 역시 관에서 나와 조사하지도 않았고,
이후 사람들도 소교의 땅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곧 병■(字) 28번
논 둑 아래 ■■천이 그 땅이다. 이에 근거하여 바로잡는다.
鄕校坪祠位東
향교 평사위 동쪽
139) 을묘양안에 기록되지 않은 번지는 18, 22, 24, 25, 27, 28, 29번지 등 7곳
인데 9곳이라 한 것은 오기인듯 하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106 역주 학궁의례
升落 陳.
제3번지는 북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30
척, 폭은 9척이다. 넓이는 7속이다. 서쪽에는 사위전, 세 방향은 교
위전이다. 7승락이다. 지금은 묵혀있다.
[旧第二] 第八 東犯 方田 長廣三十三尺[比前長廣皆縮一尺] 八束 北
朱世華田 三方校位 三斗五升落 [比旧縮五升] 陳.
[옛 제2번지] 제8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방전이다. 길이
와 폭 모두 33척이다.[이전에 비해 길이와 폭 모두 1척 축소되었다].
넓이는 8속이다. 북쪽은 주세화의 밭, 세 방향은 교위전이다. 3두 5
승락이다. [이전에 비해 5승락이 축소되었다]. 지금은 묵혀 있다.
108 역주 학궁의례
[旧第三] 第十 東犯 勾田 長五十五尺 活二十八尺 一卜九束 北朱世
華田 南浦 二方校位 一斗九升落 陳.
[옛 제3번지] 제10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전이다. 길이
는 55척, 활은 28척이다. 넓이는 1부 9속이다. 북쪽은 주세화의 밭,
남쪽은 포구, 동·서쪽은 교위전이다. 1두 9승락이다. 지금은 묵혀
있다.
110 역주 학궁의례
[旧第八] 第十七 南犯 梯畓 一夜未 長三十六尺 大頭■■■尺小頭
(이하 판독 불가).
[옛 제8번지] 제17번지는 남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제답 1배미이
다. 길이는 36척, 큰 폭은 -■■척, 작은 폭은
112 역주 학궁의례
[旧十六] 第二十五 東犯 勾畓 二夜未 長八十二尺 活五十四尺 五卜
六束 東浦 北祠位 西南校位 七斗落內一斗落 時作人 金弘徵 處還推
時 姜啓元.
[옛 16번지] 제25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2배미이
다. 길이는 82척, 활은 54척이다. 넓이는 5부 6속이다. 동쪽은 포
구, 북쪽은 사위전, 서쪽과 남쪽은 교위전이다. 7두 락 안에 1두락의
시는 김홍징인데, (이 땅은) 바꾸어서 지금의 시는 강계원이다.
114 역주 학궁의례
旧剩二升] 舍音私耕.
[옛 가전] 제31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답을 고친 구답
1배미이다. 길이는 31척, [전에 비해 20척 늘었다.] 활은 28척이다.
[전에 비해 25척 늘었다.] 넓이는 1부 3속이다. 동쪽과 북쪽은 포
구, 서쪽은 길, 남쪽은 교위전이다. 3승락이다. [이전에 비해 2승락
늘었다.] 마름이 경작한다.
浦越漢石橋東
포구 건너 있는 한석교 동쪽
116 역주 학궁의례
乙巳量付小橋下浦越
을사년 양안에 있는 소교 아래 포구 너머
[四標則東川西南防築北車億才畓]
[사표는 곧 동쪽은 내, 서쪽과 남쪽은 방축, 북쪽은 차억재의 논이다.]
[已上兩庫 今合爲直畓.]
[이상의 두 곳은 이제 합하여 직답이 되었다.]
118 역주 학궁의례
[旧加] 第四十一 西犯 越校田 勾畓 一 (이하 판독 불가)
[옛 가전] 제41번지는 서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교위전 너머에
있으며 구답이다.
120 역주 학궁의례
[旧加] 第四十八 東越 勾改梯畓 一夜未 長四十九尺 大頭十七尺 小
頭十一尺 一卜 東南兪石望畓 西車尙俊畓 北川 一斗四升落 [比旧剩四
升] 舍音私耕.
[옛 가전] 제48번지는 동쪽 너머 구답을 고친 제답 1배미이다. 길
이는 49척, 큰 폭은 17척, 작은 폭은11척이다. 넓이는 1부이다. 동
쪽과 남쪽은 유석망의 논, 서쪽은 차상준의 논, 북쪽은 내이다. 1두
4승락이다. [이전에 비해 4승락이 늘어났다]. 마름이 경작한다.
122 역주 학궁의례
第五十四 北浦越 直畓 一夜未 長三十尺 廣七尺 三束 四方浦 三升
落 陳.
제54번지는 북쪽 포구 너머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30척, 폭은 7
척이다. 넓이는 3속이다. 사방이 포구이다. 3승락이다. 지금은 묵혀
있다.
124 역주 학궁의례
[旧第一] 第五十六 乙巳量付 小橋下浦越南犯 圭改直畓 一夜未 長六
十尺 廣四十八尺 [比前剩十八尺] 四卜五束 二方浦 南車萬戒田 北康順
道畓 五斗落 今推於康順道 舍■■■(音私耕).
[옛 제1번지] 제56번지는 을사(1725)년 양전 장부에는 소교 아래
포구 너머에서 남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규답을 고친 직답 1배미이
다. 길이는 60척 폭은 48척이다. [이전에 비해 18척이 늘어났다.]
넓이는 4부 5속이다. 두 방향은 포구, 남쪽에는 차만성의 밭, 북쪽에
는 강순도의 논이다. 5두락이다. 지금 강순도에게서 돌려받아 마름이
경작한다..
노고산 아래 모
126 역주 학궁의례
[新加] 第六十三 北犯 勾畓 一夜未 長三十一尺 活二十尺 (이하 판
독 불가) 東浦 三方校位 一斗落 時 朴險■.
[신 가전] 제63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1배미이다.
길이는 31척, 활은 20척이다. (이하 판독 불가) 동쪽은 포구, 나머지
세 방향은 교위전이다. 1두락이다. 시는 박험■이다.
128 역주 학궁의례
[旧四十六] 第六十九 北犯 梯改勾畓 一夜未 長五十尺 活十五尺 一
卜三束 二方浦 二方校位 一斗三升落 陳.
[옛 46번지] 제69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제답을 고친 구
답 1배미이다. 길이는 50척, 활은 15척이다. 넓이는 1부 3속이다.
두 방향은 포구, 두 방향은 교위전이다. 1두 3승락이다. 지금은 묵혀
있다.
130 역주 학궁의례
을묘양안에 기록되어 있는 제75번지는 소교 밑에서 북쪽을 보며 양
전하였다. 병자 28번지이다. 6등 구답 1배미이다. 길이는 50척, 활은
20척이다. 넓이는 1부 3속이다. 세 방향은 내, 동쪽은 유찬해의 논이
다. 1두 3승락이다. [임술양안에는 누락되어 이제 추록한다.] 시는 유
응규이다.
(7) 奴婢
132 역주 학궁의례
四所生婢者斤阿只年■■
五所生婢足今阿只年■■
六所生婢養丹年壬子
七所生婢於如叱非年乙卯
婢仁禮一所生奴大觀年戊午 故
婢大了阿只一所生婢 年己未 故
婢可望年 夫鄭德孫許給侍丁
奴春得年癸酉 故
奴仁福年甲午 故
奴時同年甲午 故
奴興石年丁酉 故
奴興■年癸卯 故
奴再祿年甲辰
奴龍祿年丁未
奴季祿年庚戌 以家贖 奴爲子孫 因朝官許良
婢大了阿只一所生婢明心 年戊午 夫金富成
二所生婢行心年壬戌夫金故
明心二所生婢者斤阿只年庚子 夫南老積
[丙辰八月初二日]
노비
134 역주 학궁의례
(8) 齋直
재직
齋直蠲役節目
재직견역절목
복호
(10) 蒙學
몽학
136 역주 학궁의례
태 쓰게한다. 기해(1719)년에 몽학의 정수가 줄어들었다가 계묘
(1723)년에 150명으로 정하였다. 이어 을묘(1735)년에 다시 300명
으로 충당되었다.
(11) 享需 [自官封進]
향수 [관에서 올린다]
五聖位
稻米 一斗七升五合
粱米 一斗七升五合
黍米 一斗七升五合
稷米 一斗七升五合
鹿脯代牛脯 二十五
乾棗一斗
芡仁一斗
榛子一斗
麥仁一斗
栗黃一斗
魚脯代乾 (이하 훼손)
黃筆 一柄
眞墨 一丁
燭 五雙
着油 一升
酒米三斗 [本校酒母○十五鐥]
오성위
도미(멥쌀) 1말 7되 5홉
양미(기장조) 1말 7되 5홉
서미(수수) 1말 7되 5홉
직미(피쌀) 1말 7되 5홉
사슴고기 포 대신 소고기 포 25조
건조(마른 대추) 1말
검인(가시연밥 열매, 호두) 1말
진자(개암나무 열매, 잣) 1말
능인(은행) 1말
율황(밤) 1말
어포 대신 건■
황필(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붓) 1자루
참먹 1개
초 5쌍
기름 1되
술을 빗기 위한 곡식 3되 [본 향교에서는 밑술로 15그릇을 쓴다.]
3되 짜리 누룩 4개
138 역주 학궁의례
희생으로 쓸 돼지 1마리
희생으로 쓸 양 1마리 대신 소(1마리 )
숯 2되
향 4묶음
配位三十二位
稻米 九 (이하 판독 불가)
黍米 九斗六 (이하 판독 불가)
醓醢代猪醢 (이하 판독 불가)
芹葅 一斗 (이하 판독 불가)
菁葅 一斗五 (이하 판독 불가)
筍葅代苽葅 (이하 판독 불가)
兎醢代鷄醢 一斗 (이하 판독 불가)
魚醢代蘓魚 一斗五升
鹿醢代牛醢 一斗五升
韭葅 一斗
形塩 一斗
幣帛 九十尺 用造禮器尺每位十八尺
刺燭白紙 五張
祝文壯紙 二張
乾棗 六斗四升
鹿醢代牛醢 (이하 판독 불가)
菁葅 六斗四升
배위삼십이위
도미 9(되)
서미 9되 6(홉)
탐해 대신 저해
근저(미나리) 1말
청저(무) 1말 5(되)
순저(죽순) 대신 고저
토해(토끼고기 젓) 대신 계해(닭고기 젓) 1말
어해(조기 젓) 대신 소어(밴댕이) 1말 5되
녹해(사슴고기 젓) 대신 우해(소고기 젓) 1말 5되
구저(부추) 1말
형염(소금) 1말
폐백 90척 [조례기척(造禮器尺)144)을 사용하여 매 신위마다 18척
140 역주 학궁의례
이다.]
초를 바른 백지 5장
축문에 쓸 두꺼운 종이 2장
녹포 대신 우포
건조 6말 4되
녹해 대신 우해
청저 6말 4되
초 4쌍. [또 2쌍을 준비한다. 계축년 이래 ….]
초를 바른 백지 1장
기름 2되
술을 빚기 위한 곡식 9말 4되 [본 향교에서는 밑술로 15그릇을 쓴
다.]
3되 짜리 누룩 9개
출입구 문에 쓸 두꺼운 종이 3권 10장
밀가루 1되
땔나무 25 묶음 [10묶음은 음식 조리용이고 10묶음은 술을 만드
는데 쓰며 5묶음은 제사 소를 삶고 털을 제거하는 데 쓴다.]
供士
142 역주 학궁의례
民魚
白蝦醢
[此二種以乶音箭稅 民魚十二尾 春秋各以六尾出給守僕 使之擔當需用
○見上乶音島學宮永屬■]
민어
백하젓
[여기 두 종류는 볼음도 어장의 세금으로 충당한다. 민어 12마리
는 봄과 가을 각각 6마리씩 나누어 수복에게 담당하게 한다. ○위
의 볼음도 학궁영속을 보아라.]
蔬菜
況菜
[以校宮墻外加耕田稅十八兩 及東門外田稅二兩 合二十兩 各以十兩定
給守僕使之備此二菜與曲子南草等物]
소채(채소)
황채
[학궁 담 바깥의 가경전의 세금 18냥과 동문 바깥 밭에서 얻는 세
금 2냥 등 모두 20냥은 두 물품 비용으로 각 10냥씩 정하여 수복
에게 주어 이 두 채소와 누룩, 담배 등의 물품을 갖추게 한다.]
曲子
[上酒所釀 官家封上之不足 及齋酒所釀毋論所入之多寡 以田稅三兩定
給]
南草
春秋各以三兩恒定
남초
[봄 가을에 각각 3냥씩 내는 것으로 늘 정해져있다.]
醬
已有官府上下
간장
[이미 관부에서 지급한 것이 있다.]
沙器
[校婢旣無身役 享祀時食婢三名 各備十五床 所入用後 還下]
사기
[향교 소속의 여자 종은 신역이 없다. 그러므로 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음식을 담당하는 식모 3명은 각기 15상을 준비하여 제사
에 사용하게 한 다음에는 원래대로 돌려보낸다.]
144 역주 학궁의례
篩
[齋酒所漉之篩不過一時之用 酒母自備用後 還下]
체(가루를 치는 기구)
[재주소 체는 일시적으로 쓰는 것이므로 주모가 스스로 마련해서
사용한 다음 돌려보낸다.]
柴
[墻後之柴旣至參拾餘駄 則收稅其三之一. 猶爲十駄春秋各以五駄 進
排之意 定式行會於掌刈之人.]
땔감
[향교 담장 뒤쪽에 있는 땔감이 30여 바리 정도가 되었으면, 그 중
3분의 1을 세금으로 징수한다. 다만, 10바리가 되면 봄과 가을 각
기 5바리씩 진상한다는 뜻을 일정하게 정하여 관아에서 나무꾼들
에게 알려준다.]
盤
貳拾坐 又貳拾坐 癸丑新備
쟁반
이십개. 여기에 또 이십개가 추가 되었다. 계축(1733)년에 새롭게
갖추었다.
校宮墻外 加耕田
東邊四庫 合七斗落
西邊福娘買納田 九 (이하 판독 불가)
西邊宋景寊買 (이하 판독 불가)
碑閣後田一斗 (이하 판독 불가)
紅箭門外田 (이하 판독 불가)
已上定稅九兩又以東門外田稅 (이하 판독 불가)
西邊梁九音於 (이하 판독 불가)
146 역주 학궁의례
朴雲成起 (이하 판독 불가)
梁夏瑞起耕 (이하 판독 불가)
金成淡起耕田一 (이하 판독 불가)
柿林後田二庫八斗落
此一半當年 (이하 판독 불가)
향교 담 밖 가경전
校宮一年應入例
位良賭地租十六石十五斗
교궁(향교)의 1년 경상 수입 조목
神堂洞打租 145)以守僕紅衣次例下
148 역주 학궁의례
蒙學米
몽학미
校宮一年應下例
교궁(향교)의 1년 경상 지출 조목
분향 때 일을 맡은 7명에게 주는 한 해 임금 쌀 2섬 3말 8되.
음식에 소용되는 11냥 4푼.
봄 가을 제사 때 드는 잡비 20냥.
봄 가을 제사 때 드는 양조용 쌀 5섬 5되.
본 가을 제사 때 관계자에게 제공되는 반찬에 쓸 소고기 값 12냥.
향교 관계 사람들에게 주는 종이 값과 글씨 쓰는 종이와 향교와
관련된 기록을 남기는데 쓰는 종이값 1년치 4냥 8전
장 담그는 소금 값 2냥
김치 담그는 소금
돗자리 1립[25전]
봄 석전제 때 각방 …
가을 석전 때 각방 …
벼 9섬은 수복의 12달 급료 …
150 역주 학궁의례
이상 응당 들어 올 벼 34섬 12두■■■■■■■ …
쌀 25섬 5두■■■■ 7섬은 내려 보낸다■■ …
11두 이승 …
돈 40냥 …
校宮日用排■例
應下餘租貳拾伍石拾貳斗[伍百拾貳斗] 應下餘米拾柒石拾壹斗貳升 並
焚香料米貳石參斗捌升則合爲貳拾石[三百斗]
每月[租貳石貳斗陸升陸合陸夕 ○閏朔之年則每朔參拾玖斗貳升捌合肆
夕, 米壹石拾斗○閏朔之年則每朔壹石捌斗柒拾零.
교궁 일용 배■례
【原文】
鄕校
舊在東門外 松岳山東麓. 今上 甲子年 開基于南山 北洞. 乙丑春 始
役 其冬畢役. 庚午年 移安. 正位 大成至聖文宣王 [居中向北] 配位 兗
國復聖公顔子 沂國述聖公子思 [在于正位西北 東向南上] 郕國宗聖公曾
子 鄒國亞聖公孟子 [在于正位東北 西向南上] 殿內 從享 費公閔損 薛
公冉雍 黎公端木賜 衛公仲由 魏公卜商 [在于西壁東向南上] 鄆公冉耕
齊公宰予 徐公冉求 吳公言偃 穎川侯顓孫師[在于東壁 西向南上] 兩廡
從享 預國公程顥 弘儒侯薛聰 文成公安裕 文敬公金宏弼 文正公趙光祖
文純公李滉 文成公李珥 [在于西廡 東向南上] 道國公周敦頤 洛國公程
頤 徽國公朱熹 文昌公崔致遠 文忠公鄭夢周 文獻公鄭汝昌 文元公李彦
迪 文簡公成渾 [在于東廡 東向南上]. 校中 東齋靑衿錄 七十一人 西齋
校生 一千三百人. 東齋所任 都有司一人 掌議二人 色掌二人. 西齋所任
掌議二人 有司三人 奴七口 婢九口 募入二十名. 位田 一結四十四卜 位
3. 참고자료 155
畓 五結七卜 鹽盆二處 中船一隻 [我顯宗 癸卯 全羅道生員 安國宰等
上疏 大槪州府郡縣 各有定制. 州府郡則聖殿內 從享十哲 東西廡 東国
儒賢. 縣則無廡 故殿內奉安 宋朝四賢 東國九賢 云云. 禮曹議大臣儒臣
回啓內 州府之竝祀 我東九賢八路同 然而縣邑不遵定制 任意奉安 似無
其理 我東九賢 縣學或祀 或否. 郡學應祀殿上十位 而或祀或否. 界首官
州學所祀 亦有與太學不同 八路州縣 一倂査問 詳加釐正事 覆啓行會.
156 역주 학궁의례
【번역】
향교
옛날에는 동문 밖 송악산 동쪽 기슭에 있었다. 지금의 임금 갑자
년(1684, 숙종 10)에 터를 남산의 북동에 열었다. 을축년(1685, 숙
종 11) 봄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그해 겨울에 역을 마치었다. 경
오년(1690, 숙종 16)에 (위패를) 이안하였다. 정위에 대성지성문선왕
(大成至聖文宣王)[중앙에 위치하여 북쪽을 향함], 배위에는 연국 복성
공 안자, 기국 술성공 자사, [정위의 서북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향하
고 남상에 있다.] 성국 종성공 증자, 추국 아성공 맹자, [정위의 동
북에 위치하여 서쪽으로 향하고 남상에 있다.] 이다. 전내 종향에는
비공 민손, 설공 염옹, 여공 단목사, 위공 중유, 위공 복상, [서벽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향하고 남상에 있다.] 운공 염경, 제공 재여, 서
공 염구, 오공 언언, 영천후 전손사 [동벽에 위치하여 서쪽으로 향하
고 남상에 있다.] 가 있다. 양무의 종향에는 예국공 정호, 홍유후 설
총, 문성공 안유, 문경공 김굉필, 문정공 조광조, 문순공 이황, 문성
공 이이, [서무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향하고 남상에 있다.] 도국공
주돈이, 낙국공 정이, 휘국공 주희, 문창공 최치원, 문충공 정몽주,
문헌공 정여창, 문원공 이언적, 문간공 성혼[동무에 위치하여 동쪽으
로 향하고 남상에 있다.] 교중 동재 청금록 유생은 71인이요, 서재
교생이 1천 3백인이다. 동재의 소임에는 도유사 1인, 장의 2인, 색
장 2인이다. 서재의 소임에는 장의 2인, 유사 3인, 노 7구, 비 9구,
모입 20인이다. 위전은 1결 44복, 위답은 5결 7복, 염분은 2처, 중
선이 1척이다.
[현종 계묘년(1663, 현종 4)에 전라도의 생원 안국재 등이 상소하
3. 참고자료 157
기를“대개 주, 부, 군, 현에는 각각 정해진 제도가 있습니다. 주,
부, 군에는 성전 내에 10철을 종향하고, 동무와 서무에는 우리나라
의 유현을 종향하며, 현에는 동무와 서무가 없기 때문에 전내에 송조
사현과 동국구현을 봉안합니다.”고 하니 예조가 대신과 유신과 의논
하여 회계한 내용에“주, 부가 모두 동국구현을 제사함에는 8도가
다 같으나, 현과 읍에서는 정해진 규제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봉안하
니 이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동국 9현에 대해서는 현의 학교가
혹 제사하는 곳도 있고 혹 제사하지 않는 곳도 있으며, 군의 학교는
응당 전상의 10위를 제사하게 되었으나 혹은 제사하고 혹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계수관이 있는 주의 학교도 제사하는 것이 또한
태학과 같지 않은 곳이 있으니 8도의 주현을 일제히 조사하여 묻고
상세히 시정할 것을 복계 행회하라?”하였다. 당시 유수 유철2)의 사
계 내에“동무에는 도국공 주돈이, 낙국공 정이, 홍유후 설총, 문선
공 안향, 문순공 이황, 문정공 조광조, 문경공 김굉필, 서무에는 에
국공 정호, 휘국공 주희, 문충공 정몽주, 문창공 최치원, 문원공 이
158 역주 학궁의례
언적입니다.”라고 하였다. 금상 임술년(1682)에 올린 이숙3)의 장계
내에는“동무에는 설총, 안향을 염계, 이천의 밑에 연달아 앉히고,
서무에는 최치원, 정몽주를 명도, 회암의 밑에 연달아 앉혔는데, 최
치원이 도리어 정몽주의 밑에 앉았으며, 퇴계가 동무에서 시작하여
꺽어져 돌아 북쪽을 향하여 동변에 앉고, 정암과 한훤당이 도리어 그
서쪽에 있으며, 회재가 서무에 시작하여 꺽어져 돌아 북쪽을 향하여
서변에 앉고, 일두가 도리어 그 동쪽에 앉아『고사촬요(攷事撮要)』
와 서로 도우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예조의 회계내에“태학에 의해 바로 잡거니와 강도는 모든 것이
송도와 조금도 다른 것이 없으되, 유독 향교만 주군과 같이 향사하고
있으니 송도에 의하여 칠십제자 및 한, 당의 모든 현인을 아울러 향
사하게 하소서”라 하였는데 윤허를 받아 시달하였다. 그리하여 계해
년(1683, 숙종 9) 조사석이 장계를 올리자 예조의 복계 안에“풍년
이 들기를 기다려서 양무를 개설할 것입니다.”하였는데 임금의 윤허
3. 참고자료 159
를 받았다. 갑자년(1684)에 터전을 잡고 을축년(1685)에 옮겨 짓게
되었다.
뒤에 이익이 계문하자 비국의 복계안에“강도를 비록 보장이라 하
여 유수로 승격하였으나 유생의 수가 원래 적어 문교를 다 갖추기
어려우니 반드시 송도의 예에 준할 필요가 없고 그대로 구교를 따르
게 하소서”라 하였다.
병인년(1686)에 본부의 유생이 상소하자 예조가 방계하였다. 신정
의 장계 안에
“한당의 제현을 비국의 방계로 인해 비록 송도의 예에 의해 배향
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송조사현은 각도 계수관의 예에 의하여 배향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예조의 복계안에“계수목관은
한결같이 태학의 예처럼 하나, 부·군은 송조사현을 더 배향하는 일
이 별로 없으니 전일 비국의 복계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는 뜻을
윤허받아 행회하였다. 원래 사전에는 나라에서 정한 제도가 있다. 그
러므로 주·부·군·현이 각각 정한 예가 있어 각도가 각각 다르며,
송유를 뽑아 더 배향함은 더욱 부당한 것이다. 본부에서는 전후 계문
하여 이미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경오년(1690, 숙종 16)에 옮겨
봉안할 때는 의당 조령에 의해 봉행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송조
사현은 그대로 더배향하고 우리나라 제현들의 위차 또한 나라에서
정한 제도와 다르니 문교에만 무몰(蕪沒)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체에 있어서도 몹시 미안하다.
160 역주 학궁의례
【원전】
3. 참고자료 161
162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63
2) 속수증보강도지(續修增補江都志)1)
향교
164 역주 학궁의례
(이안눌)이 시를 써서 학궁을 표시하고, 판관 이중명이 돌에 새겨 그
사적을 기록하였다.]
현종 계축년(1673)에는 유수 민시중이 학궁을 남산 골로 옮겨 세
웠고, 영조 신해년(1731)에는 유수 유척기가 관아에 있으면서 내려
다보는 광경이 높이 존경하고 숭모하는 자세가 아니라하여 곧 옮겨
세우니, [지금의 향교이다.] 학궁의 재우(齋宇)와 포주(庖廚) 등의 건
물들은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 영조 무술년(1766)에는 이안눌의 5대
손인 이은이 유수가 되어 낡은 건물들을 수리하고 장식을 새롭게 하
였다. 또한 동소문 밖 옛 터에 있던 향교의 기사비(記事碑)를 삼문
밖에 옮겨 세우니 곧 전 판관 이중명이 찬술한 명륜당창건비명이다.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하 중략)2)
3. 참고자료 165
공 김굉필, 문정공 조광조, 문순공 이황, 문성공 이이, 문원공 김장
생, 문정공 송준길 등 8위가 배향되어 있다. 서무에는 문창후 최치
원, 문충공 정몽주, 문헌공 정여창, 문원공 이언적, 문정공 김인후,
문간공 성혼, 문정공 송시열, 문순공 박세채 등 8위가 배향되어 있다.
석전(釋奠)[매년 본 가을 두 번째 달 첫 번째 정(丁)의 날에 석전
제를 지낸다. 이때 5성위에는 쌀, 수수, 기장, 피, 소를 대신한 희생
양 1마리, 희생 돼지 1두, 비단과 모시 각 18척이 소용된다. 그리고
배향위에는 피와 기장만 쓰이고 비단과 모시는 없다.]
166 역주 학궁의례
로워 다 기록하지 않는다.]
예방(禮房)
전사청(典祀廳)
공수소(供需所)[지금은 제사일을 맡은 구실아치가 거주하고 있다].
3. 참고자료 167
밝히는 가르침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리하여 향교는 임금을 높이고
윗사람을 친밀하게 하는 풍속을 이끌었으며, 서민에게는 충신예의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알게 되었던 이유였으니 어찌 위아래 모
두가 인화(人和)로 같이 가게 되었던 이유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올해 봄, 나는 총재의 임무를 받아 강도(江都)에 근무하라는 명을 받
았다. 강도 부임 초에 먼저 공부자 사당을 배알하고 향교 건물을 돌
아보았다. 사당 동쪽에는 소위 안연재라는 건물이 있는데 수리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기둥은 낡고 마루대는 휘어져 건물 전체가 허약하
였다. 나는 한탄하여“이 건물은 육도와 육예를 강습하는 장소인데도
이와같이 무너져 내리고 있으니 이를 어찌 어진 사람들을 기르는 도
리라 하겠는가?”하였다. 그래서 내 월급에서 얼마를 떼고, 고을 사
람들도 즐거이 힘을 보태라 하여, 그 모은 돈으로 수리 비용을 대어
중수(重修)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6개월이 지난 후 완공을 보아 수
리를 모두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향교 유생이 나에게 와 말하
였다.“이 안연재는 시가를 노래하고 교제하며 쉬는 곳인데 , 무너진
것을 수리하고 황폐해진 것을 흥기시켜 다시 옛 모습을 보게 되었으
니 이는 실로 공의 힘입니다. 이로부터 문풍(文風)이 크게 떨치고.
그리하여 훌륭한 인물들이 만들어지고, 예의충신(禮義忠信)이 방패와
갑주와 같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공의 힘입니다. 또 학당의 완
성은 수재(민응식)께서 기록하시는 것에서 비롯되니, 원컨대 글로써
기술해 주십시오.”하였다. 나는 응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무너진 것을 세우고 황폐해진 것을 다시 복구한 것은 모두
여러 사람들의 성의로 된 것이다. 후일 좋은 인재가 여기서 나온다면
그 또한 여러 사람들의 성의로 된 것이니 내가 무슨 힘을 썼겠는
가?”옛 사람이 문자로 기술한 일을 돌아보건케 감히 사양하지 않았
168 역주 학궁의례
으니 이에 기술한다.
○고종 기사년(1869)에 유수 이용희가 학궁을 중수(重修)하고 다음
과 같이 기록하였다. 지난 병인년(1866)에 서양 오랑캐가 심도(沁都)
를 침략하였다. 이때 용희는 순무사 직을 명 받고 한 달 동안 군사
를 내어 싸웠으나 외적을 박멸하지 못하니, 산천초목이 오히려 분노
로 휘감겨 남아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 임금님은 그 직분을 다하
지 못한 죄를 용서하셨으며, 3년이 지나 다시 진무절도사직을 맡기
셨다. 그리하여 다시 강화부에 와서 보니, 강화부의 관아 건물과 미
곡 창고 등이 화재 피해를 입어, 비록 빠르게 수리한다고 해도 그
건물들 중 옛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10에 2, 3뿐이었다. 대원
위(대원군) 합하는 백성들이 외적의 침략으로 당한 상처가 깊어 힘이
없음을 보고, 공사비가 많이 들거나 목재나 기와 등 재료 구할 일이
긴박한 것 등에 대해서는“나라 일을 경영하는 것과 같이 엄격하게
구분을 해서 수선하고 고치는 일을 진행하라 하고”용희를 질책하셨
다. 비록 용희가 재주가 없지만 이미 한 번 질책을 받음에 있어 무
슨 말이 있겠는가. 삼가 대원위 합하께 엎드려 말하기를“바다 오랑
캐의 사악함을 막고 성리학을 숭상하는 것으로 그 직무를 다하여 그
결과 맹자가 양묵(楊墨)을 물리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대원위
말씀은 영원히 천하에 남겨 만세에 이르도록 할 것이라”하였다. 이
제 건물을 수리하는데 있어 그 규모를 정하고 제도를 갖추어 모두
재가를 받게 되었다. 먼저 학교는 백성을 교화시키는 근본이 되는 곳
이니 마땅히 공부자(孔夫子) 사당을 복구하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대
체로 여기 학교의 모습은 이리저리 흩어져 한 고을의 기내(畿內)가
마치 무덤과 같이 황폐하였다. 다만 공자 사당만이 불에 타는 것을
겨우 면하여 홀로 우뚝서있을 뿐이니, 어찌 사악함을 막는 방패라 하
3. 참고자료 169
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 오래되어 그 마룻대는
휘고 기와는 썩어있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길일을 택해 공사를 시
작하여 4개월에 걸쳐 수리를 하여 완공을 고하였으니, 썩은 기둥을
바꾸고 무너진 지붕을 이었으며, 단청을 새롭게 칠하고 계단을 만들
었다. 또한 사당의 집기와 위패를 마련하고, 동무와 서무를 세우고
곳집을 마련하며 회랑을 아름답게 꾸미니 새롭게 바뀌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삼가 부지(府誌)를 살펴보니, 인조 무진년
(1628) 이공(李公)안눌이 시작한 이래, 민공(閔公)기중, 유공(兪公)척
기가 서로 이어가면서 학궁을 옮겨 지었는데, 동악 이안눌 이후 140
년이 지나 동악의 5대손인 담재(膽齋) 상국(相國) 은(溵)이 또 거듭
수리하고 장식을 새롭게 하였다. 이후 103년여 후에 용희가 그 공사
를 이었으니 지금에 와서 보면 5번이나 중수(重修)한 것이다. 동악공
과 나 용희는 뿌리는 같지만 가지는 다르다. 그러나 243년을 이어오
는 동안 나의 근본은 실로 학궁으로 시종하였으니, 사실은 우연한 것
이 아니라 역시 교궁(校宮)을 전고(典故)로 삼았기 때문인 것이다. 오
호라, 글방은 상서(庠序)에서 모방하였으니 예로부터 내려온 제도이
다. 문행충신(文行忠信)은 공부자의 네 가지 가르침이다. 덕을 행하
고 정사를 보며 말을 조리있게 하고 문장에 힘쓰는 것은 공부자 제
자들이 해야 할 네 가지 과목이니, 참으로 이 밖에 도(道)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내가 비록 도를 행하지 않더라도 여러 군
자들이 마땅히 이 네 가지 가르침과 네 가지 과목을 수행하여 그 도
를 본받으면, 공부자의 3천 제자들과 같이 공부자의 말씀을 들은 것
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게 되면 갓을 바르게 쓰고 띠를 바르게
차며 사람사이에서 겸손함을 갖게 되고, 남아(南雅)3)를 읊으며 태평
170 역주 학궁의례
을 노래하여 찬양하게 될 것이니, 바로 우리 임금님이 행하시는 문
(文)을 숭상하는 다스림(右文之治)에 부담을 주지 않게 될 것이며, 이
는 또한 대원위 합하의 오늘날 뜻이기도 하다. 옛날 우임금이 세상을
다스릴 때, 묘족 백성들이 천명을 거스르자 백익(伯益)이 우임금을
도와 군사를 모아 위세를 떨쳐 문덕(文德)을 펼쳤으니, 백익이 무무
(武舞)와 문무(文舞)를 70일간 행하여 묘족에게 격식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그리하여 묘족이 비록 미혹하여 공손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문(文)의 힘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대체로 덕(德)
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서부터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니 이는 고금에 피차 다름이 없는 것이지만, 여기 한구석 바다
오랑캐가 어찌 우임금이 있어 묘족의 일과 같은 것이 있음을 알겠는
가. 용희는 일찍이 전쟁을 겪었고 사당을 고쳐도 보았으니, 가만히
보면 한번은 실패하고 한번은 성공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각기
그에 따른 마땅한 결과를 얻었다고 하겠으며, 실제로는 영광스럽고
다행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단지 사당이 허물어진 것을 바로잡아 사
람들의 이목을 끈 것일 뿐이니, 감히 위로는 나의 임금에게 바치고
아래로는 여러 군자를 위하여 그들을 격려한 것이라 하겠다. 만약 용
희의 말을 가지고 옛 것을 공경하지 않고 그 뜻을 굽히는 것이라 한
다면 단연코 아니다. 대개 이 사당을 건립한 공사의 주역은 정성을
다하여 감독을 하였던 도유사 정봉한이다. 그 사람이 책임을 갖고 굳
건하게 일을 진행하였으며 또한 학문이 넒고 지식이 풍부하였다. 이
처럼 정도를 굳게 지키고 또한 옛 사적을 면밀하게 조사하였으니 어
찌 일이 잘 진행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사당 건립에 관한 전
반 내용을 제시하고 기록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그 전말을 알리
는 것이다.
3. 참고자료 171
동악 이안눌의 명륜당 시 1편을 붙이니, 이에 이르기를 “군과 읍
의 윤리를 밝게 하는 법식은 강당에 있는데, 강화도의 묘우만이 황량
하게 홀로 있구나. 재산을 내어 재물 씀을 좋아 하였으니, 그 제도는
선비를 기르는 방책이다. 예 악 시 서는 사술(선생이 가르친 네 가지
도)을 따르고,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삼강을 세웠다.
백발의 연로한 스승이 경영하는 뜻이니, 청금(유생)과 더불어 기뻐하
고 혹 잊혀짐을 돕는구나.
부 교동문묘
172 역주 학궁의례
○교동지에 말하길 고려시대에 문선왕 및 제자 회상을 원으로부터
가져와 배봉하고 바다를 돌아 본 읍에 도달하여 문묘를 세우고 봉안
한 후에 경성 및 각 읍이 이로부터 비롯하여 (문묘를) 세우기 시작하
였다. 여러 주에 설립된 학교를 살펴보면 고려 인종 5년 즉 송(宋)
휘종(徽宗) 선화(宣化) 년간이니 이때에 우리 동방이 금과 더불어 관
계가 있어 서로 간에 왕래하니 금의 전성시대였다. 오호라 북원(北
元)의 건국은 고려 원종 때에 비롯되었으니 그러한즉 인종 5년으로부
터 북원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130년 후이다. 이미 말하기를 성상(공
자의 초상)을 원으로부터 배봉하였다 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동방의
으뜸의 향교라 하니 이는 반드시 전하는 자의 잘못이다. 그리고 동사
지지(東史地誌)에 특히 쓰여져 있기를 교동 화개산 밑 소나무 숲에
공자의 사당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를 보면 성상의 봉안한 일은 반드
시 고려 원종 이후이고 초상을 봉안하고 사당을 세운 것은 이로부터
여러 군읍에 있지 않음이라 교동에 홀로 있었다는 것은 대개 가히
알 수 있다. ○조선 중엽에 지부(知府) 조원신이 화개산 북으로부터
성의 북쪽인 화개산 남쪽으로 이건하였다.
3. 참고자료 173
174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75
176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77
178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79
180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81
182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83
184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85
186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87
3) 유수 이안눌 창건 명륜당비(留守李公安訥創建明倫堂碑)
【원문】
留守 李公安訥 創建 明倫堂碑
■■■官 李重溟 撰
進 士 韓守儉 書
今 上 卽位之五年丁卯 大駕幸江都 有士人沈諔等陳疏 以本府府尹李
公安訥 爲府尹時 其律身也廉 其惠民也博 其莅事也幹 其作事也勤爲辭
上頗嘉納焉 是時 本府以保障重地 陞府尹爲留守 故前留守遞任後 廟議
方難其人擬 以李公首薦 而未蒙收敍爲啓 上曰 李安訥 前有聲續 予其嘉
之 今其再任可矣 公乃齋祓視事曰 上眷甚重 其敢不力一日 嘗謁夫子廟
退而進諸生曰 府而陞號 而孔廟無明倫堂 吾懼人材放失 儒敎濶疎也 迺
營廟之南 命儒生安宗道等董其役 殿堂室房 各得其度 鳥革翬飛 美而不
侈 生師有舍 庖廩有次 凡爲間架 四十有八堂成飮而落之 士有執爵而言
者曰 自生民以來 未有盛於夫子 則仰夫子遺風 其不在玆乎 況營建 不費
官財 不借民力 縮節裝飾 多方措辦 非公幹敏 何以致此 完山 李重溟言
于衆曰 今代遭聖明 此府得我公俾多士由此堂 踐五典之敎 明三綱之道
世治則譚禮樂 以陶吾民 不幸則子死孝 而臣死忠 嗟我多士 盍亦自勗
皆再拜稽首曰 然嗚乎 聖上之擇賢授能 我公之建堂立敎 皆己無間 則多
士之爲公豎碑者 爲聖上也 爲夫子也 多士愛公之誠 吁亦可尙也已 公德
水人 爲人廉潔有持操 餘事文章 老健蒼勁 作人興敎 尤平日所蓄積也 系
之以銘 銘曰
188 역주 학궁의례
有覺其楹 君子攸營 吁嗟乎公
有噦其冥 多士攸寧 吁嗟乎公
於斯琢磨 於斯絃歌 吁嗟乎公
顧名思義 作我多士 吁嗟乎公
■ ■ ■宗道
李夢良
朴 珣
金禹鼎
齋 任 崔宗壽
安善道
姜履■
金大■
立碑有■ ■■■
3. 참고자료 189
色 吏 朴應命
■■■
■■■
【번역】
유수 이공안눌 창건 명륜당비1)
190 역주 학궁의례
금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이때에 본 강화부가 국가의 방어에 중
요한 땅이라 하여 부윤을 격상하여 유수로 삼았다. 전 유수가 체임한
뒤로 조정의 논의가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어렵다 하여 이공을 으뜸
으로 추천하나 아직 서용이 윤허되지 못했다고 계청하니 임금이 말
씀하되‘이안눌이 전에도 소문난 치적이 있어 내가 아름다이 여겼으
니 지금 다시 임용함이 옳다.’고 하셨다. 공이 목욕재계하고 일을 살
피면서 이르되,‘임금의 사랑이 중한데 감히 힘쓰지 않으랴’하다. 하
루는 공자의 사당을 알현하고 물러나 모든 생도에게 가서 이르되
‘강화부는 이름을 격상했는데 공자의 사당에는 명륜당이 없으니 나
는 인재를 잃어 유교가 소홀해질까 두렵다.’하고는 이에 사당의 남쪽
에 짓기로 하고 유생 안종도 등에게 일을 독려하게 하여 전당과 방
사가 각기 법도를 얻으니 전당이 격식을 갖추어 아름다우나 사치스
럽지 않았다. 학생과 선생에게 방이 있고, 주방과 창고가 차서가 있
어 모든 칸의 수가 48칸이다. 당이 이루어지자 술을 마시며 즐거워
하니 어느 선비가 술잔을 들고 이르되‘인류가 있은 이후로 공자의
시대보다 융성한 때가 없은즉 공자의 끼친 풍교를 우러름이 이에 있
지 아니한가. 더구나 건축을 경영함에 있어 관가의 재정을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의 힘을 아껴 절차를 줄여 꾸미면서 여러 방면을 주선하
니 공의 민첩한 처사가 아니면 어떻게 이에 이르겠는가’하였다.
완산 이중명이 대중에게 이르기를‘오늘의 세대가 성명한 군주를
만났고, 이 강화부는 우리 공을 만나 모든 선비가 이 명륜당으로부터
오륜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삼강의 진리를 밝혀 세상이 태평하면 예
와 악을 배워 우리 민생을 풍족히 하고 국가가 불행할 때는 아들은
효도로 죽고 신하는 충성으로 죽으리니 오! 우리 많은 선비들이여 어
찌 스스로 힘쓰지 않겠나’하니 모두가 재배하며 머리를 조아려‘그렇
3. 참고자료 191
다’한다.
오! 성상께서 현명한 이를 선택하고 유능한 이에게 맡겨 우리 공이
당을 새로 짓고 가르침을 세웠음이 모두가 간격이 없는 일이다. 그렇
다면 모든 선비들이 공을 위해 비를 세움은 성상을 위함이고 공자를
위함이다. 여러 선비들이 공을 위한 정성도 오! 가상한 일이로다.
공은 덕수 이씨이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지조가 있으며, 여가의 일
로 문장을 하니 늙을수록 건장 강경하여 사람들을 위해 교육을 일으
킴은 더구나 평소에 쌓여진 포부이다. 명을 짓되
192 역주 학궁의례
알현하던 날에 학당이나 집들을 보니 년수가 오래되어서 이미 무너
져 선생의 남긴 자취를 느껴 여러 유생을 불러 상의하였다. 창고를
덜어 재물을 모아 먼저 명륜당부터 시작하니 여러 유생이 모두 이르
기를‘이 역사는 옛 비석을 옮겨 여기에 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하기
에 비석을 옮기고 그 밑에 이렇게 쓴다. 오호라! 어찌 감히 다시 짓
는다 하리오 애오라지 선생의 뜻을 추모하는 일이다.
병술년(1766, 영조 42) 동짓달 동악선생의 5대손 은(溵)이 삼가
짓다.
대광보국숭록대부2) 행3)중추원부사4) 김상복5)은 쓰다.
3. 참고자료 193
■ ■ ■종도
이몽양
박 순
김우정
재 임 최종수
안선도
강이■
김대■
입비유■ ■■■
색 리 박응명
■■■
■■■
194 역주 학궁의례
4) 유수 이공용희 문묘중수 기적비(留守李公容熙文廟重修
紀績碑)
【원문】
留守李公容熙重修文廟紀績碑
3. 참고자료 195
營建有司 李秉春
營造番生 李東浩
前碑營建有司 金禹鼎 五代孫 宗模
六代孫 鉉璟 等錢三十兩扶役
【번역】
196 역주 학궁의례
수로 있을 때 처음 세워졌으며, 이어서 두 번 중건하였는데, 먼저 번
은 입동(笠洞) 상국(相國)이 안절할 때요, 두 번째는 여강(驪江) 상서
(尙書)가 진영할 때이다. 두 번 모두 덕수 이씨로 인하여 문묘가 빛
을 보게 되었으니 온 고을 인사들이 사모하여 칭송한지 이미 오래되
었다.
근년에 세월이 오래되고 풍우에 씻기어 기와가 서까래 중수한 것
을 눌러 뒤집어졌으며, 반듯하던 계단도 이미 기울어져 고쳐 세울 것
을 도모하였으나, 시일은 급하며 일은 크고 힘은 모자라 의논조차 못
하고 있었다. 마침 금상 5년 무진년 봄에 성상께서 우리 공으로 서
도(西都)를 진무하라 명하였다.
공이 평이(平夷) 정직하고 온량(溫良) 낙이(樂易)하여 사람을 다스
리고 귀신을 섬김에 두루 원만하였다. 부임하던 길로 선사(先師)를
배향하고 제생에게 이르길‘고을에 문묘가 있는 것은 윤리와 기강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요, 윤리를 밝히는 데에는 보고 듣는 것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인데, 이제 문묘의 형태가 이와 같이 황량한데 어찌 경영
하고 수리할 것을 도모하지 않으리오’하였다. 이에 정성과 힘을 다하
여 모든 부분을 일신하니 3개월이 걸려 일이 끝났다. 몇길의 담장과
삼문의 사표가 혁혁하게 사람들의 이목을 비치니 공의 선양하고 교
화한 공적 중에 가장 으뜸가는 사업이었다.
공은 덕수 이씨로 3대 조상이 문묘를 보수하던 공을 이어서 또 이
런 성사를 이룩하였으니, 사람과 하신일의 어울림이 참으로 우연이
아니면서도 우연처럼 되는 경우도 있는가 보다. 이로부터 가을제례와
겨울 공부의 교화가 되는 사람에게 흠뻑 젖어들게 될 것이니 옛 사
람이 이른바 풍교를 선양하고 풍속을 보는 규모가 모두 관리의 수장
에게 달렸다는 말이 참말로 그렇지 않은가. 서로의 공을 기리고 겸하
3. 참고자료 197
여 돌로 다듬어 기록하는 바이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유학 남궁준이 글을 짓고
유항진이 글을 쓰다
영건 유사는 이병춘이고, 영조 번생은 이동호이다.
전비 영건 유사 김우정의 5대손 김종모와 육대손 김현경 등이 전
30량으로 역을 도왔다.
198 역주 학궁의례
5) 대전회통1) 호전 양전(大典會通 戶典 量田)
【원문】
戶典 / 量田
【번역】
호전/양전
3. 참고자료 199
薄, 禾穀不隧者, 續田而土性肥膏, 所出倍多者, 守令置簿, 報觀察使,
式年改正.]
[원] 모든 토지는 6등으로 나누며 20년마다 한 번씩 토지를 다시
측량하여 지적(地籍)을 만들어 호조·본도·본읍에 갖추어 둔다. [1
등전 척(尺)의 길이는 주척(周尺)에 준하여 4척 7촌 7푼 5리이고, 2
등은 5척 1촌 7푼 9리, 3등은 5척 7촌 3리, 4등은 6척 4촌 3푼 4
리, 5등은 7척 5촌 5푼, 6등은 9척 5촌 5푼이다. 실면적 1척을 파
(把)라 하고 10파를 속(束)이라 하고 10속을 부(負)라 하며 100부를
결(結)이라 한다. 1등전 1결은 38묘(畝)에 준하고, 2등전은 44묘 칠
푼, 3등전은 54묘 2푼, 4등전은 69묘, 5등전은 95묘, 6등전은 152
묘에 준한다. ○각등전 14부는 중국 명율(明律)에 의하면 전(田) 1묘
에 해당한다. ○항상 계속하여 경작되고 있는 토지는 정전(正田)이라
칭하고, 때로는 경작하고 때로는 휴경하는 토지는 속전(續田)이라 칭
한다. 토지대장에 정전으로 기록되었으나 토질이 좋지 못하여 곡물이
잘 되지 않는 토지라든가 혹은 속전으로 기록되었어도 지질이 비옥
하며 소출이 많은 경우에는 수령은 이를 장부에 적어두고 관찰사에
게 보고하여 다음 식년(式年)2)에 이를 개정한다.]
200 역주 학궁의례
田爲八負五束 至六等田爲二負五束. 餘等倣此. 一等尺 滿一結則 以二
等八五空一, 三等七空一一, 四等五五空七乘之, 自合原典各等尺數. 把
未滿六則棄之]
[속] 모든 토지는 1등척으로 측량한다. [2등 이하의 척도는 원전에
는 있으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각 토지의 등수를 체강할 때에
는 결부의 실면적에 차이를 둠으로써 이를 표시한다. [1등전 1부는
2등전 8푼 5리, 3등전 7푼, 4등전 5푼 5리, 5등전 4푼, 6등전 2푼
5리로써 이에 대등시킨다. 그러니 매등 1부에 1속 5파를 감하는 셈
이다. 1등전 척으로 실면적이 10부가 되는 땅은 2등전인 즉 8부 5
속으로 되고 6등전에 이르면 2부 5속으로 된다. 기타 다른 각등전도
이에 준하여 면적을 정한다. 그러니 1등척으로 1결이 되는 토지는 2
등전이라면 0.8501(八五空一), 삼등전은 0.7011(七空一一), 4등전은
0.5507(五五空七)로 이를 곱하면 경국대전(原典)의 각등 척수에 합치
된다. 파는 6에 달하지 않으면 이를 버린다.]
3. 참고자료 201
者, 姑以時執懸主, 而追後査卞, 勿以量名爲拘. ○陳田亦皆懸主, 無主
處以無主懸錄, 無文籍僞稱己物懸主者, 杖一百遠地定配. ○不干之人乘
其本主在遠, 暗錄己名於他人田地者, 杖一百流三千里.]
모든 전지는 사방의 표식과 전주(田主)의 이름을 양안에 기록하여
둔다. [서로 분쟁 중의 토지가 판결이 난 경우에는 소송에 이긴 자로
써 전주를 삼으나, 미결인 경우에는 임시로 전주로 기록해 두었다가
추후에 조사하여 판별이 나면 토지대장의 명의에 구애되지 않고 정
정한다. ○ 진전도 역시 전주를 기록해 두며 주인이 없는 토지는 무
주(無主)라고 기록해 둔다. 문적도 없이 자기의 소유라 거짓 칭하고
전주라고 기록하는 자는 장(杖)100에 처한 후 원지(遠地)에 정배한
다. ○ 아무 관계도 없는 자가 전주가 먼 곳에 거주함을 기화로 타
인의 전지를 자기의 명의로 허위기록한 자는 장 100에 처한 후 삼천
리 밖으로 유형(流刑)한다.]
202 역주 학궁의례
를 징수한다. ○화전은 25일경(日耕)으로써 1결을 삼고 별도로 성책
한다. 자호(字號)를 배정하지 않고 다만 지명만 적어서 원전과 혼동
되지 않도록 한다.]
3. 참고자료 203
訓大夫) 이하는 스스로 결정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의 경우에
는 왕에게 보고하여 처단을 묻는다. [도감관(都監官) 이하는 처형 또
는 견책하되 만일 조정의 관리가 이에 연루했을 경우에는 상부에 보
고한다. 응당 법률에 저촉되는 자는 유배한 후에 보고한다. ○전지를
다시 측량할 때에 감관(監官) 등이 기경지를 진전으로 하고 진전를
기경지로 하거나 또는 전형이 그 사실과 맞지 않거나 사(私)를 위하
여 함부로 누락시키거나 고의로 사실과 어긋나게 하는 자는 매 1부
에 대하여 태(笞) 10을 벌하며 장 100에서 벌을 그친다. 도합 1결에
달한 자는 장 100을 벌한 후에 3,000리 밖으로 유배형을 보낸다.
토호 및 전부(佃夫)가 부동하여 간계를 꾸민 자는 조정 관리를 막론
하고 한가지로 논죄하고 전지의 전부가 누락된 것은 국가에 속히게
한다. ○각 읍의 토지대장이 완성되었을 때에는 그 말단에 반드시
해부인(解負人)3)의 성명을 기록해 둘 것이며 추후에 조사하여 착오
가 있는 경우에는 감관은 낙루망모자률(落漏妄冒者律)로써 논죄한다.
만일 과실로서 착오가 생긴 경우에는 형을 감등하여 논죄한다. ○도
감관 및 감관은 사대부로써 택차한다. 이 경우에 이를 꺼리어 피하는
자는 도피차역률(圖避差役律)로써 논죄한다. ○토호가 전지의 결부수
를 속이고 그 죄를 면할 것을 꾀하여 노비의 명의로 전부(佃夫)를 삼
는 자는 조관을 막론하고 장 100에 3년 도형(徒刑)에 처한다. ○토
지를 측량할 때에 소관인 <서원(書員) 및 지시인(指示人) 등> 이 민
간을 함부로 착취 <공궤(供饋)를 칭탁하여 술과 고기를 징구하는 종
류> 하는 자는 은결률(隱結律)로써 논죄한다. ○모든 양전시의 범죄
인은 그 경중을 물론하고 사면을 아니한다. 수령으로서 파직된 자는
5년이 경과하여야만 서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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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역사문화총서》1~69호(2003~2011)
譯註 學宮義例
기획 ․총괄 강덕우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강옥엽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인천역사문화총서 65
譯註 學宮儀例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