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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역사문화총서 65

譯註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일러두기

1. 본 역주의 대상은 강화향교 소장의『학궁의례』이다

2. 본문 가운데 보이지 않는 부분은 ■로 표시하였다.

3. 보이지 않으나 추정이 가능한 것은 ( )로 표시하였다.

4. 성묘설위도, 석채진설도, 종향위진설도는 판독 불가능한 부분이


많으나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행한『향교석전』을 참고하여
기록하였다.

5. 본 역주에서 인물에 대한 소개는‘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


템’의 자료를 참조하였고, 용어 또는 관직의 설명은『민족문
화대백과사전』,『고법전 용어집』(법제처,1979),『고문헌용어
해례』(조선왕조편, 김제득편저, 1983)등의 자료를 참조하였
다. 별도의 자료를 이용하였을 경우에는 참고문헌을 기재하였
으며, 참고문헌 내용상의 오류는 역주자들이 수정하였다.

※ 본문 자료는 강화향교 소장본임을 밝힙니다.


목 차

1. 학궁의례 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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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궁의례 원문 역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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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 학궁전도(學宮全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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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 성묘설위도(聖廟設位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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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3. 석채진설도(釋菜陳設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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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4. 종향위진설도(從享位 陳設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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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宮儀例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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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궁의례 권상(學宮義例 卷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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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치연혁(建置沿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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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석채의(釋菜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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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축문식(祝文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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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집사분정기(諸執事分定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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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유제의(告由祭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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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축문식(祝文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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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집사분정기(諸執事分定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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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분향의(焚香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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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관알성의(新官謁聖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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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신은알성의(新恩謁聖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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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궁의례 권하(學宮義例 卷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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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도(生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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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부(文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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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기(祭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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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복(祭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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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사(校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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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교위(校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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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노비(奴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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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재직(齋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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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복호(復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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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몽학(蒙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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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향수(享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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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고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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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도지 향교(江都志 鄕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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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속수증보강도지 강화향교(續修增補江都志 江華鄕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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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수이공안눌창건명륜당비(留守李公安訥創建明倫堂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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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수이공용희문묘중수기적비(留守李公容熙文廟重修紀績碑) ·
· 195
5) 대전회통 호전 양전(大典會通 戶典 量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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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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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궁의례 해제
1. 학궁의례 해제

1) 향교의 연혁
우리나라 학교제도의 시작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하겠다.1) 당시 삼
국에 만들어진 학교의 특징은 수도에 설립된 국가 주도의 관립학교
였으며, 이후 통일신라기를 거쳐 고려에 와서는 중앙에는 국자감, 지
방에는 향교가 설립되었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의 집권적 정치구조 안에서 설립된 것으로 군
현제(郡縣制)와 함께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으로,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 그리고 학궁
(學宮)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 및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를 제향(祭享)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향교는 지방의 민풍(民風)을 순화하고 인재를 배양함이 그 목적이
었으며, 중앙에 있는 성균관의 축소형으로 지방 각지에 설립되었다.
고려를 이어 성립된 조선은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서 성리학
적 질서를 체계화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따라서 성
리학은 지배층만의 정치적 수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반 민중에
게도 강상(綱常)의 유교 이념을 보급시키는 것이어야 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유교 교육의 강화가 요청되었고 아울러 강화된 기구가

1) 이는『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소수림왕 2년 6월에 大學


을 세우고 子弟를 교육하였다”(『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6, 소수림왕),“6
월에 國學[太學]을 세웠는데, 卿[太學長] 1명을 두고, 또 工匠府監 1명과 彩典監
1명을 두었다.”(『삼국사기』권8, 신라본기 8, 신문왕), "백제는 開國 이래 아직
文字로 事實을 기록함이 없더니, 이에 이르러 博士 高興을 얻어 비로소『書記』
를 가지게 되었다"(『삼국사기』권 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1. 학궁의례 해제 9
지방군현에 세워진 향교였다. 즉 향교는 일반 민중에게 유교이념을
인식시켜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방편으로 작용한 교육의
장이었기에, 향교를 통한 당시 민중에 대한 교육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2) 향교의 기능
향교는 강학(講學) 외에 향사(享祀)의 기능을 가졌다. 특히 향사는
봄과 가을 두 번이며 이를 석전제(釋奠祭)라고 하였다. 향교 건립 초
기에는 대성전에 공자 1인의 위패를 모시고 석전제를 지냈으나 시간
이 지나면서 공자뿐만 아니라 4성(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공문
10철, 송나라 6현, 그리고 공자의 문하 72현, 한·당·송·원나라의
22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 등 총 133위의 신위를 함께 모시게 되
었다. 이는 성균관의 규칙이며, 당시 지방에 설립된 향교도 이를 따
랐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향교는 읍격(邑格)에 따라 규모나 크기 교생의
수가 달랐다. 특히 읍격에 따라 대설위(大設位), 중설위(中設位), 소
설위(小設位)로 구분하여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수에 차이가 있었다.
대설위는 주로 부(府)2), 목(牧)3) 대도호부(大都護府)4)에 세워졌던 향

2)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에서 주로 옛 국가의 수도였던 곳에 설치하였다. 고구려의


수도 였던 평양부,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부, 이성계
선조의 활동지인 영흥부-뒤에 함흥으로 옮김-가 있다. 이곳의 수령인 부윤은 종
2품으로 관찰사와 같은 직급이었다.
3) 관찰사 밑에서 중요한 읍을 맡아 다스리는 외관직 정3품 고을이다. 예를 들면 경
기도의 양주, 광주, 여주, 충청도의 충주, 청주와 같이 주로‘州’가 붙는다.
4) 목과 같은 위격이나, 목이 행정적으로 중요한 곳에 설치된 것과 비교하면 군사적
으로 중요한 곳에 설치되었다. 예를 들면 강릉대도호부, 영변대도호부 등이 있다.

10 역주 학궁의례
교에서 설행되었다. 중설위는 부, 목, 도호부 등에 소설위는 군이나
현 등의 작은 읍치에서 설행하였다.

3)『학궁의례』
강화 유수 이안눌 명륜당 창건비에 인조 경오(1630)년에“우리 선
조 동악(東岳) 선생이 이 땅(강화)에 명륜당과 신학사(新學舍) 48칸을
건립하고 학궁(學宮)으로 이름을 고쳐(생략)”에서 1630년에 강화 향
교의 명칭이 학궁으로 바뀌어 졌음을 알 수 있다.『학궁의례』의 서
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서명 :『 學宮儀例 』
■ 저자 : 강화 향교
■ 간행년대 : 1799년 5) ~ 1883년 6)(추정 )
■ 현대어 서명 :『 학궁의례 』
■ 책수 : 1책 (62장 )
■ 사이즈 : 가로 22.8cm 세로 33.0cm
■ 행칸 ; 12 행 , 28~33칸으로 다양
■ 체제 : 4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 표지이하 부분 4쪽 , 목록 5·6
쪽 , 권상 7~22쪽 , 권하 23~62 쪽

5)『학궁의례』내용 중 마지막으로 표기된 연도는, 학궁영속 항목에“가경 기미


(1799)에 볼음도 위답 뒤 발초의 어장에 연결된 땅을 장순태의 아들에게 주었다”
라는 기록이 보이므로 1799년 이후로 추정하였다.
6)『학궁의례』에는 배향인물에 김인후가 보이는데 김인후의 배향 연도는 1796년이
다. 이후 문묘에 배향된 인물인 조헌과 김집이『학궁의례』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
로 보아 조헌과 김집이 배향된 1883년 이전에『학궁의례』가 만들어진 듯 하다.

1. 학궁의례 해제 11
학궁의례는 상·하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체제는 먼저‘권상목록
(卷上目錄)’이라고 쓴 다음 건치연혁(建置沿革), 석채의(釋菜儀), 축문
식(祝文式), 제집사분정기(諸執事分定記), 고유제의(告由祭儀), 제집사
분정기(諸執事分定記), 분향의(焚香儀), 신관알 성의(新官謁 聖儀), 신
은알 성의(新恩謁 聖儀)로 이루어져 있다. 이후‘권하목록’글자는 원
문에서 보이지 않으나 본문에 의하여 생도(生徒) 앞에 쓰여져 있었음
을 확인할 수 있다. 권하목록은 생도(生徒), 문부(文簿), 제기(祭器),
제복(祭服), 교사(校舍), 교위(校位), 노비(奴婢), 재직(齋直), 복호(復
戶), 몽학(蒙學), 향수(享需)로 되어 있다.
권상의 내용은 크게 넷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강화향교의 건치연
혁과 석전제에 대한 의식절차이며, 두 번째 부분은 고유제로서 석전
제 실행 후의 절차, 세 번째는 삭망(매월 1일, 15일)때의 의식절차,
마지막으로는 강화에 부임한 관원과 과거에 합격한 인물이 향교에서
치르는 의식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건치연혁과 석전제 부분의 목록은‘건치연혁’,‘석채의’,‘축
문식’,‘제집사분정기’이다. 이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건치연혁’에
서는 향교가 처음 위치한 자리와 몽골 침략 후 볼음도로 위판을 옮
겼다는 고려시대의 이건(移建)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였고, 조선시
대 인조 갑자년(1624)부터 영조 42년(1766)사이의 향교 이건 과정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다음‘석채의’에 대한 내용이다. 석채의는 석전제(釋奠祭)·석채(釋
菜)·상정(上丁)·정제(丁祭)라고도 하며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
丁日 : 그 달에 있어 10간 중의‘丁’이 처음 들어가는 날)에 거행한
다. 석채의는 넷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는 문묘 제사의 사전 준
비 과정으로 봉향(奉香)의식과 제물인 소의 규격 등 희생물에 대한

12 역주 학궁의례
내용, 본 제사를 드리기 전 여러 집사와 헌관의 의식을 기록하였다.
두번째 부분은‘찬자홀기(贊者笏記)’로 제사의 의식 진행순서를 낭독
하는 내용이다.‘찬자’는 제사때‘홀기’를 맡아 보던 임시 벼슬이며,
내용은 전폐례(奠幣禮 : 폐백을 올리는 례), 아헌례(亞獻禮 : 제사
때 둘째번으로 잔을 올리는 례), 종헌례(終獻禮 : 제사 때 세째번으
로 잔을 올리는 례), 음복수조(飮福受胙 : 제사 후 제관들이 제물을
나누어 먹고, 제사 때 사용한 고기를 나누어 받는 것)의 진행 과정을
찬자가 홀기를 사회 보는 것이다. 세번째는‘알자행전폐례홀기(謁者
行奠幣禮笏記)’이다.‘알자’는 제관을 인도하는 집사 가운데 한 사람
이다.‘알자행전폐례홀기’는 공자 문선왕, 안자 복성공, 증자 종성공,
자사 술성공, 맹자 아성공의 신위 앞에서 행하는 전폐례의 진행 내용
의 홀기를 알자가 사회를 보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알자행초헌례
홀기(謁者行初獻禮笏記)’이다. 이는 알자가 초헌례의 홀기를 사회 보
는 것으로, 내용은 초헌관이 문선왕, 복성공, 종성공, 술성공, 아성
공 신위 앞에서 초헌례를 행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술
성공 신위 앞에서의‘홀을 꽂으시오’ 이후 2행을 판독할 수 없으며
특히 아성공 신위 앞에서의 홀기는 보이지 않는다. 추정하건데 문선
왕이나 타 신위 앞에서의 홀기와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알자
행초헌례홀기’ 끝부분에는“아헌례와 종헌례는 초헌례와 같으나 단지
전폐와 소퇴, 궤, 독축, 부복흥평신이 없을 뿐이다”라고 하여 아헌례
와 종헌례에 대한 홀기는 기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축문식’은 성균관의 석전제나 타 향교의 석전제 거행시의 축문과
같다고 하겠다. 축문은 초헌(初獻)을 행하며 술을 잔에 부어 올리고
나면 읽는데, 백지(白紙)에 붓으로 써서 사용하며, 제사를 마치고 나
면 불사르거나 또는 보관하였다가 다음 제사에 다시 쓰기도 한다.

1. 학궁의례 해제 13
‘축문식’은 우선 대성지성문선왕에 대한 축문을 기록하고 있으며,
다음‘배위축문(配位祝文)’에서는 선사 연국 복성공, 선사 성국 종성
공, 선사 기국 술성공, 선사 추국 아성공에 대한 축문을 적어 놓았다.
‘제집사분정기’는‘석채의’에 참가한 헌관과 여러 집사의 맡은 임무
에 대한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헌관으로부터 예차(특별한
사무를 맡기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하는 관직)까지 11명은 모두 강화
부에서 뽑아 보내고 석채의가 끝난 다음날 아침이면 예차 사명은 모
두 관아로 돌아간다. 아헌관으로부터 봉촉(등불을 맡아 보는 집사)까
지 25명은 모두 동재에서 제사를 준비하고, 장생(제사때 쓰이는 희생
을 맡은 집사)이하 학생까지는 모두 서재에서 제사를 준비한다는 것
이다.
권상의 두번째 부분은 석전제 실행 후의 고유제에 대한 것이다.
구성은‘고유제의’,‘제집사분정기’,‘분향의’로 되어 있다.‘고유제
의’는 고유제7) 절차에 관한 내용으로, 제의를 행하는 절차는 석전제
와 같으나 다만 단헌제8)가 끝난 후 먼저 봉향한 공자의 위패를 담는
궤와 배위, 종향된 (동,서)무에 차례로 봉안된 궤, 제집사가 봉안한
교의, 탁상, 향안을 모두 명륜당에 옮겨 봉안한다는 것이다. 또한
‘고유제의’의‘축문식’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고, 내용은“조선 국왕
이 신하 ○○를 보내어 대성지성문선왕에게 고합니다”로 되어 있다.
‘제집사분정기’에서는 고유제의 여러 집사는 석채의와 같다는 것과
각 배위의 차비(임시로 임명한 직)는 합하여 170인 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7) 중대(重大)한 일을 치르고자 할 때나 치른 뒤에 그 까닭을 사당(祠堂)이나 신명에


게 고하는 제사(祭祀).
8) 제사 때 3번 올릴 술잔을 한 번에 그치는 것.

14 역주 학궁의례
권상의 세번째 부분은‘분향의’이다.‘분향의’는 삭망때 분향하는 의
식 절차로‘석채의’에 비해 매우 간략하게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권상의 네번째 부분은 강화에 새롭게 부임하는 관원이 향교에서
인사를 하는‘신관알 성의’와 과거 합격자가 인사하는‘신은알 성의’
이다.‘신관알 성의’는‘분향의’의 절차와 같고,‘신은알 성의’에서는
과거 합격자가 향교의 묘정에 들어와 4배 한다고만 되어 있다.
권하의 목차의 처음은‘생도’로 강화 향교 생도 수의 변화를 적고
있다. 처음에는 생도수가 2,700인 이었으나, 신유년(1741)에 액내교
생(정해진 교생)과 액외 교생(정한 외의 교생)으로 나눈 후에는 오히
려 7, 8백인이 안되었고, 을축년(1745)에 170인으로 교생 액수를 정
하였으나, 기해년(1779)에 교생 중 80인을 군대에 속하게 하여 90인
이 되었다. 계묘년(1783)에 액외로 60인을 더 두었고, 아울러 장의
별안으로 70인과 동몽 150인을 두어 모두 370인이 되었음이 보인
다. 을묘년(1783) 원안에 의하면 동몽을 각기 300인으로 하였다.
문부(文簿)는 강화 향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과 장부, 문권(文券
: 땅이나 집 또는 그 밖의 권리를 양도하는 문서) 등의 제목이 총
26종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책과 장부가 23종 전답문권이 3장이
다. 책과 장부를 분류하면 지(誌)가 2종 2권, 절목(節目 : 규칙의 조
목)류가 7종 7권, 동·서재 청금록(靑衿錄 : 향교 학생명부)이 2종-
권 수는 표시하고 있지 않다-, 등록(登錄)9)류가『교관선생안(敎官先
生案)』을 비롯한 7종 9권,『의주(儀注 : 禮式)』가 1종 4권, 국왕이
하사 한『內賜御定全韻』1권과『內賜五倫行實』(권 수는 보이지 않는
다)『內賜鄕禮合編』2권, 그리고『河西金先生』(권 수는 없다)이다.

9) 권리, 신분 관계 등을 증명하기 위하여 관청의 장부에 기록한 것.

1. 학궁의례 해제 15
제기(祭器)와 제복(制服)에서는 강화 향교에서 석전제나 삭망례를
거행할 때 필요한 제사 그릇과 제관이나 집사의 의복의 보유 건수를
기록하고 있다.
교사(校舍)에서는 강화 향교 전체 공간 구조를 기록하고 있다. 우
선 배향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와 신문, 그리고 교생의 기숙공간
인 동재·서재의 규모가 적시되었고, 기미년(1799년 인 듯하다)에
동협문과 서협문이 중수(重修)되었음이 나타난다. 또한 같은 해에 전
사청 수복방 등의 보조 건물과 강학 공간인 강당과 명륜당, 그리고
중문과 외삼문 등이 신설되어 도합 88칸 반의 규모였음이 보인다.
또한 향교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의 규모와 담장이 무너졌을 때
보수하는 내용인 장위(墻圍)를 교사에 붙이었다. 이에 따르면 강화
향교 전체 담장의 둘레는 320파(把)10)이며, 담장이 무너지면 강화의
12동 백성으로 하여금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위(校位)조는 강
화 향교에서 향사(享祀)에 쓰려고 마련한 위토전(位土田)에 대한 내용
으로『학궁의례』에서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향교 남쪽
담 밖에 있는 토지(校宮南墻外)는‘우자제(宇字第)’라는 지번(地番)
이 붙어 있다. 그런데‘우자제’토지는‘비칠매매납(婢七梅買納)’즉
‘향교 여자 종 칠매가 사서 납부’하였다는 부제가 있다. 그 내용
은 관노(官奴) 욱손이 강화유수부에 소지(所志 : 진정서)한 것에 대한
강화유수부의 명령으로, 조선 후기 노비 매매의 한 사례를 보여 주고
있다. 좀 더 살펴 보면, 관노 욱손이 강화 향교의 노비로 있던 동생
칠매를 양반의 시정비로 보내기 위하여, 양반에게 전경춘이 소유하고

10) 1把는 영조척(營造尺)으로 5척이다. 그런데 영조척 1척은 일반적으로 30㎝가


되므로 1파는 150㎝이다. 그러므로 강화 향교 담장의 전체 둘레는 320×150
㎝=48,000㎝ 즉 480m 정도일 것으로 생각된다.

16 역주 학궁의례
있던 토지를 매입할 수 있는 돈을 받아서 전경춘의 땅을 매입하여
강화향교에 납부하려 하였다. 그러나 양반이 욱손에게 토지 대금을
지급하지 않아 욱손 또한 전경춘에게 땅을 매입한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욱손이 전경춘의 다른 토지에서 국가에 받쳐야
할 세금을 자원 대납한 것이 20년 이었다. 하지만 욱손이 개걸(丐乞
: 빌어 먹음) 지경에 이르러 전경춘의 세금을 대납할 수 없게 되자,
욱손이 강화유수부에 진정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강화유수부는 욱손
이 사서 납부한 전경춘의 땅을 다시 전경춘에게 돌려주라고 강화 향
교 도유사에게 하첩(下帖 : 상관이 7품 이하에게 내리는 공문서)한
것이다.
다음으로‘동문 밖 예전 향교 터의 위전(東門外舊校基位田)’에서는
건륭 32년(1767년, 영조 42)에 양전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교궁장
외 좌우신기가전(校宮墻外 左右新起加田)’은 향교 담장 밖 좌우로 새
롭게 경작하는 토지에 내용이 주를 이룬다. 특히 향교 주변의 각 동
의 가경전과 향교에서 매득한 논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학궁영속(學宮永屬)에서는 1711년 신묘년에 양전한 향교의 전답에 관
한 내용과 어장과 고깃배, 소금 가마 등을 소유하고 있었음이 보인다.
노비에서는 향교에 딸린 노비를 기록하여 노비의 출생 간지, 생사
여부, 속량된 예, 비의 남편 이름 등이 기록되었다. 재직은 향교 임
원에 관한 것이나 재직 절목은 훼손이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한 것이
많다.
복호는 향교의 요역을 면제해 주는 대가로 복호미를 수취하는 내
용이다. 여기서는 원래 향교의 복호는 40호 이었는데 1771년에 20
호로 삭감되었으며, 강화부 예방 장부에는 복호 20명에게 쌀 4말과
들깨 1말을 수취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1. 학궁의례 해제 17
몽학은 원래 그 수가 300명이었으나 1723년 150명으로 삭감되었
다가, 1735년 다시 300명으로 환원되었음이 보인다.
향수는 제사에 쓰이는 제수의 종류와 사용되는 초, 종이 등의 물
품이 기록되었다. 공사는 향교 제사때 동원되는 수복이 하는 일, 그
리고 식모와 심지어 나무꾼이 준비해야 할 것들이 기록되었다. 향교
장외가경전은 판독이 불가한 것이 많다. 교궁 1년응입례와 교궁 1년
응하례는 향교의 경상비 수입과 지출에 관한 내용이다.
이상『학궁의례』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러나『학궁의
례』의 기록 중 판독 불가능한 부분이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
지만 이 책은 강화 향교 운영의 세세한 면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특히 많은 부분이 양전에 관한 것으로서 이를 통하여 19세기 양전
방법과 기록의 특징을 알아 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끝으로 관계된 더 많은 자료를 찾아 비교하여 역주의 완성도를 높
이지 못한 면이 있었음은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18 역주 학궁의례
2. 학궁의례(원문 역주)
▶ 圖1. 學宮全圖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21


11)
▶ 圖2. 聖廟■■■[設位圖]

11)

22 역주 학궁의례
大成至聖文宣王
(대성지성문성왕)
西從享 郕國 宗聖公 曾子 兗國 復聖公 顔子 東從享
(서종향) (성국 종성공 증자) (연국 복성공 안자) (동종향)

鄆公 冉耕 鄒國 亞聖公 孟子 沂國 述聖公 子思 費公 閔損
(운공 염경) (추국 아성공 맹자) (기국 술성공 자사) (비공 민손)

齊公 宰予 薛公 冉壅
(제공 재여) (설공 염옹)

徐公 冉求 黎公 端木賜
(서공 염구) (서공 목단사)

吳公 言偃 衛公 仲由
(오공 언언) (위공 중유)

穎川侯 顓孫師 魏公 卜商
(영천후 전손사) (위공 복상)

豫國公 程顥 道國公 周敦頤


(예국공 정호) (도국공 주돈이)

11) 향교의 기능은 강학과 선현 봉사의 기능을 가진 기관으로 제향공간을 별도로


두고 공자를 비롯한 공적, 국가적 기준에 의해 인물을 선정하여 배향한다. 향교
건립 초기에는 대성전에 공자 1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나 후에 공자
의 제자 4성(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공문십철, 송조육현, 동국십팔현을 배향
하게 되었다. 이들 중 중국 관련 인물들은 향교가 건립되는 초기부터 대성전과
동무·서무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관련된 동국십팔현은 배향 시기
가 인물별로 차이를 보인다. 그 배향 시기는 아래의 표와 같다.
배향시기 배향 인물
1020년(고려 현종 11) 문창후 최치원
1022년(고려 현종 13) 홍유후 설총
1319년(충숙왕 6) 문성공 안유
1517년(중종 12) 문충공 정몽주
문경공 김굉필, 문헌공 정여창, 문정공 조광조, 문원공 이언적,
1610년(광해군 2)
문순공 이황
1681년(숙종 7) 문성공 이이, 문간공 성혼
1688년(숙종 14) 문원공 김장생
1756년(영조 32) 문정공 송시열, 문정공 송준길
1765년(영조 41) 문순공 박세채
1796년(정조 20) 문정공 김인후
1883년(고종 20) 문열공 조헌, 문경공 김집

그런데『학궁의례』에는 동·서무 배향인물 중 문열공 조헌과 문경공 김집이 보이


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문정공 김인후가 배향되는 1796년(정조 20) 이후 그리고 조
헌과 김집이 배향된 1883년(고종 20) 이전을 이 책의 제작 연대로 볼 수 있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23


新安伯 邵壅 洛國公 程頤
(신안백 소옹) (낙국공 정이)

徽國公 朱熹 郿伯 張載
(휘국공 주희) (미백 장재)

西廡 東廡
(서무) (동무)

文昌侯 崔致遠 弘儒侯 薛聰


(문창공 최치원) (홍유후 설총)

文忠公 鄭夢周 文宣公 安裕


(문충공 정몽주) (문선공 안유)

文獻公 鄭汝昌 文敬公 金宏弼


(문헌공 정여창) (문경공 김굉필)

文元公 李彦迪 文正公 趙光祖


(문원공 이언적) (문정공 조광조)

文正公 金麟厚 文純公 李滉


(문정공 김인후) (문순공 이황)

文簡公 成渾 文成公 李珥
(문간공 성혼) (문성공 이이)

文正公 宋時烈 文元公 金長生


(문정공 송시열) (문원공 김장생)

文純公 朴世采 文正公 宋浚吉


(문순공 박세채) (문정공 송준길)

24 역주 학궁의례
▶圖3. 釋菜陳設圖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25


석채진설도

神位
신위

魚醢 芹菹 醓醢 簋黍 簠稻 魚脯 榛子 鹿脯
어해 근저 탐해 궤서 보도 어포 진자 녹포

筍菹 鹿醢 簋稷 簠梁 栗黃 芡仁
순저 녹해 궤직 보량 율황 검인

兎醢 靑菹 韭菹 幣篚 形鹽 乾棗 菱仁
토해 청저 구저 폐비 형염 건조 능인

豕頭 牛頭
燭 시두 香爐 우두 燭
촉 俎 향로 俎 촉
조 조

爵 爵 爵
작 작 작

初獻 亞獻 終獻
尊此 尊此 尊此
초헌 아헌 아헌
존차 존차 존차

祝床
축상

26 역주 학궁의례
▶圖4. 從享位 陳設圖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27


종향위 진설도

神位
신위

醢 簋黍 簠稻 脯
해 궤서 보도 포

豕牛
菹 시우 果
저 俎 과

燭 爵 燭
촉 작 촉

28 역주 학궁의례
學宮儀例

卷上目錄

建置沿革 釋菜儀 祝文式 諸執事分定記 告由祭儀 諸執事分定記


焚香儀 新官謁 聖儀 新恩謁 聖儀 生徒 文簿 祭器 祭服 校舍
校位 奴婢 齋直 復戶 蒙學 享需

학궁의례

권상목록12)

건치연혁 석채의 축문식 제집사분정기 고유제의 제집사분정기


분향의 신관알성의 신은알성의 생도 문부 제기 제복 교사
교위 노비 재직 복호 몽학 향수

12) 학궁의례의 목록에는 권상에 건치연혁 이하 20개 항목을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


로는 생도(生徒) 이후 11개 항목은‘학궁의례 권하’에 수록되어 있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29


1) 학궁의례 권상
(學宮儀例 卷上)

(1) 建置沿革

文廟初在府城東一里. 高麗高宗遷都 蒙古撤城時 移奉位版於乶音島.


仁祖甲子建于小東門外, 制度不備. 丁卯留守李安訥 始奉位版而建明倫
堂. 顯宗癸丑留守閔蓍重 移建城內南山下. 英宗 辛亥留守兪拓基 以爲
衙居俯臨 非所以致崇敬也. 就此[卽黑寺洞]移建齋宇庖廚, 自是秩然. 丙
戌留守李溵重修增餙之, 又移竪紀事碑于校門外而改刻閣之.

건치연혁

문묘는 처음에 (강화)부의 성 동쪽으로 1리 되는 곳에 있었다.13)


고려의 고종이 (몽골의 침입때 강화도로)천도14)하고, (고려 원종 때
몽골과 강화하면서) 몽골이 (강화)성을 없애버릴 때 (향교 문묘의) 위
판을 볼음도로 옮겨 봉안하였다.15) 인조 갑자년(1624)에 (향교를 성

13) 1932년 박헌용이 찬한 속수증보『강도지』에 보이는 강화향교의 설립과 이건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서기력 왕 력 시대 연혁
1127년 인종 5년 고려산 기슭 내가면 고천리에 창립함
1232년 고종 19년 고려 강화읍 갑곶리 墨寺洞으로 이건함
1259년 고종 46년 서도면 볼음도로 이전함
1624년 인조 2년 유수(留守) 심열(沈悅)이 송악산 기슭으로 이건함
1630년 인조 8년 유수 이안눌(李安訥)이 명륜당 건립함
조선
1673년 현종 14년 유수 민시중(閔蓍重)이 남산골로 이건함
1731년 영조 7년 유수 유척기(兪拓基)가 강화읍 관청리로 이건함

14) 고려 왕조는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 최씨 무신집정자 최우가 개경에서 강


화로 천도를 하였다. 1232년(고종 19년)~1270년(원종 11) 39년간 강화는 고
려의 수도 역할을 수행하였다.

30 역주 학궁의례
의) 소동문 밖에 건립하였으나 (이때는 향교의)제도가 갖추어지지 않
았다.
정묘년(1627)16)에 유수17) 이안눌18)이 비로소 위판을 봉안하면서

15)『경기읍지』(규NO. 12177) 강화부지 학교 문묘에‘…相傳蒙古撤城時 移奉位版


於甫乙音島 雖爲文獻之可據 舊墟位田 皆在島中想當然矣…’라하여 위판을 볼음도
로 옮긴 문헌의 근거는 없으나 그 위전(位田)이 볼음도에 있었으므로 이를 생각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16) 박헌용 찬 속수증보『강도지』향교조에는‘仁祖二年甲子에 … 越七年庚午에 …
建明侖堂’라고 하여 1630년(인조 8)에 명륜당이 건립되었다고 하였다.
17) 고려·조선시대에 옛 도읍, 행궁 소재지, 군사 요지에 두었던 유수부의 책임자
이다.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에 수도인 개경,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를
동경(東京), 고구려 도읍지인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하여 유수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문종 대에 이르러 양광도(현 경기도)의 양주에 남경을 설치하고 유수부
를 두어 개경을 제외한 동경·서경·남경을 삼경으로 하여 유수를 두었고 3품
이상의 외관직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수를 처음 둔 곳은 조선 태조
의 어향(御鄕)인 전주와 고려의 옛 도읍지인 개성이었다. 초기에는 유수를 유후
(留後)라고 했으며 관아를 유후사(留後司)라 하였다. 개경은 태조가 즉위한 곳
이며, 고려의 옛 도읍지인 동시에 중국 사신이 머무르는 곳으로 활용되어 더욱
중시되었다. 개성유후는 정2품직으로 한성부와 마찬가지로 경관(京官)을 임명하
였다. 개성유후사는 1438년(세종 20) 10월에 개성부로 개칭되고 유후도 유수
로 개칭되어『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2인의 유수를 두되 1인은 경기관찰
사가 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행정 및 군사 업무는 전임(專任) 유수
가 담당하였다. 유수제는 조선 후기부터 더욱 확대되었다. 1627년(인조 5) 정
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로 피신했다가 환도한 뒤 이곳에 유수를 두었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수어청(守禦廳) 체제를 강화하면서
경기도 광주에 유수를 두었다. 그리고 1793(정조 17) 정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고 도성(都城) 중심의 내영(內營)과 화성(華城 :
水原) 중심의 외영을 설치하면서 수원에도 유수를 두게 되었다. 이상에서 조선
초기에는 국왕의 행궁 등에 유수를 파견했으나 조선 후기에 가서는 유수부가
수도의 외곽을 방어하는 기능이 더욱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수원유수는 총
리영(摠理營)의 사(使)를 겸했으며, 광주유수(廣州留守)는 몇 차례의 변동이 있
은 뒤에 남한산성의 수어청사(守禦廳使)를 겸하였다. 또 개성유수는 관리영사
(管理營使)를 겸하고 강화유수는 진무영사(鎭撫營使)를 맡아 수도의 외곽 방어
에 책임을 졌다.
18) 1571년(선조 4)∼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
함을 받자,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다. 동년배인 권필(權鞸)과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31


명륜당19)을 건립하였다. 현종 계축년(1673)에 유수 민시중20)이 성
안의 남산 아래로 옮겨 건립하였다. 영조 신해년(1731)에 유수 유척
기21)가 관아에 거처 하면서 (향교를) 내려다보는 것은 (공자를)공경

선배인 윤근수(尹根壽)·이호민(李好民) 등과 교우를 맺어 동악시단(東岳詩壇)이


라 불리웠다. 19세 때 다시 과거에 나아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언관직(言
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다가 160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
라에 다녀온 뒤,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인조반정 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
나 사직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방관하였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강화유수에 임명되었다. 1631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예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을 거쳐 충청도 도순찰사에
제수되었다. 조정에서 청렴 근면한 관리를 뽑는 데 들게 되어 숭정대부(崇政大
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형조판서 겸 홍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중의 몸을 이끌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가
환도한 뒤에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홍문관 대제
학·예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면천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저서로는『동악집』26권이 있다.
19) 서울의 성균관이나 지방의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강학당(講學堂)으로 성균관
이나 향교의 유생들이 글을 배우고 익히는 장소이다. 1398년(태조 7)에 성균관
대성전(大成殿) 북쪽에 건립한 것이 시초이다.
20) 1625년(인조 3)∼1677년(숙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공서(公瑞), 호는 인재(認齋)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며, 1650년(효종 1)
생원시에 장원하고, 1664년(현종 5)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 회시에서 장원급제
하여 전적(典籍)이 된 뒤 이조의 좌랑과 교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670년 경
상도관찰사가 되었는데, 그곳 전결(田結)의 등급을 하향조정할 것을 건의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많은 치적을 올렸다. 그 뒤 예조참의·호조참판·
강화부유수가 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 대사헌 재직 중 현종의 죽음에 따른
시호와 승습(承襲)을 청하기 위한 고부청시승습 겸 사은부사(告訃請諡承襲兼謝
恩副使)로 청에 다녀왔다. 학행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조정에서는 충후하였다는
평을 들었는데, 뒷날 그의 후손들이 노론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21) 1691년(숙종 17)∼1767년(영조 4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
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아버지는 명악(命岳)이며, 어머니는 이두
악(李斗岳)의 딸이다. 김창집(金昌集)의 문인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 문과
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이 된 후 정언·수찬·이조정랑·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세제(世弟)인 연잉군(뒤의 영조)을 책립하자 책봉주청사(冊封奏
請使)의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왔다. 다음해 신임사화 때 소론의 언관 이거원(李
巨源)의 탄핵을 받고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
로 풀려나서 이조참의·대사간을 역임하고 다음해 승지로 참찬관을 겸하다가

32 역주 학궁의례
하여 높이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 이곳에 [즉 흑사동22)] 재우(齋宇)
와 포주(庖廚)23)를 옮겨 세워 이로부터 질서가 정연하게 되었다. 병
술년(1766)에 유수 이은24)이 중수하여 치장을 더 하였고, 기사비25)
를 향교문밖에 옮겨 세우면서 비각을 다시 고쳐 새겼다.

경상도관찰사·양주목사·함경도관찰사·도승지·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세자
시강원빈객(世子侍講院賓客)·평안도관찰사·호조판서 등을 두루 지냈다. 그러
나 신임사화 중심 인물의 죄를 공정히 다스릴 것을 주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
하고 사직하였다. 후에 영조에 의해 중용되어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다. 1760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고, 이어서 봉조하(奉朝賀)를 받고 기로소(耆老
所))에 들어갔다. 당대의 명필가로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이기도 하였다. 글씨
로는 경주의「신라시조왕비(新羅始祖王碑)」, 청주의「만동묘비(萬東廟碑)」등
을 남겼고, 저서로는『지수재집』15권이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22) 본서의 건치연혁과 교위에는 흑사동(黑寺洞)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1783년 편찬
된『강화부지』권상 방리조‘장령리의 동’ 1789년 편찬된『호구총수』, 1871
년 편찬된『강화부지』등에는 묵사동(墨寺洞)으로 기록되어있다
23) 향교는 대성전, 동무, 서무의 배향 공간, 명륜당, 동재, 서재의 강학 공간, 그리
고 전사청, 부엌 등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진 교직공간으로 구성된다. 재우와 포
주는 이를 아우르는 것이다.
24) 1722년(경종 2)∼1781년(정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 병조판서 주진(周鎭)의 아들이다. 1740년(영조
1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남평현감을 지냈으며, 1759년 정시문과
에 을과로 급제한 뒤 교리가 되고 1764년에 사직이 하였다. 그 이듬해 대사헌
으로 한후락(韓後樂)을 신구(伸救)하려다가 왕의 분노를 사 강화유수로 전직되
었다. 1767년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나 강화유수로 있을 때 백성들을 괴롭혔
다는 탄핵을 받아 삭령군수로 좌천되었으며, 뒤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1772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나, 대사헌 정광충(鄭光忠), 대사간 이담(李潭)
등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1775년에 판중추부사로 왕
세손에게 국정을 대행시키는 문제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지지파인 서명선(徐命
善)을 도운 공으로 정조가 국정을 대리하게 되면서 좌의정이 되었다. 1777년에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나라에 가서『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5,020권을 구득하여왔다. 그 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
다시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좌의정으로 있다가 1780년에
사직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25) 1630년 이안눌이 명륜당을 창건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이중명(李重溟)이 찬하
고 한수검(韓守儉)이 쓴‘유수이공안눌창건명륜당비(留守李公安訥創建明倫堂碑)’
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33


(2) 釋菜儀

前一日平明, 初獻官 典祀官 奉香 三員率守僕, 來詣客舍. 典祀官 執


祭物■■ (祭器)照點, 奉祭物載架子. 奉香引初獻官, 詣殿牌前跪, 奉香
受香封於卓上, 跪傳于獻官. 獻官跪受, 仍爲傳授奉香. 先祭物架子, 次
典祀官 次奉香 次■■■■(獻官照點)布政門. 奉香傳授香奉於禮吏, 禮
吏陪香騎馬, 仍詣鄕校. ■■■■■■■■受香封, 禮吏傳授於奉香入
門. ■■■■■■■■禮吏於明倫堂■■■■■■■. 明倫堂正廳奉安
香 封香室. 初獻官入明倫堂, 亞獻官於神門外庭照點祭物置 殿內. 同日
午時, 諸執事[廟內方有事者勿出]立神門外庭, 贊引引初獻官入神門外庭
道東南向. 掌牲者牽牲[戒下人牽之]就位. 掌牲者與守僕, 巡牲一匝擧手
曰 腯. 大祝與守僕, 巡牲一匝擧手曰 充. 守僕以晝鍮尺量, 長一尺五
寸, 廣一尺則告準尺. 獻官西向立, 置牲於工床上. 匠人執刀立, 掌牲者
扶匠人執刀之手, 守僕告殺猪之處. 下入牽牲詣廚授匠. 贊引引獻官歸明
倫堂, 大祝入東廡, 書祝文 來鑑于獻官後, 入置香室
牛隻則純色, 千斤 大牛 ○牛脯則長晝尺二尺四寸, 廣三尺五分.
日初昏, 典祀官與陳設七員入殿內, 設饌【圖見上】.
三更量, 守僕告起寢, 於初獻以下諸執事 ○學生及諸執事, 四更一點,
就神門外位 ○守僕告諸執事外位設, 及讀分定記之由於獻官前 ○守僕於
神門外唱, 諸執事外位設, 三聲 ○都執禮讀分定記 ○冠緣者詣獻官前
告, 獻官着祭服 ○贊引與奉香大祝到獻官前, 引詣香室立, 奉香奉香封,
大祝奉祝床, 引詣神門內. 初獻官跪搢笏, 奉香傳香, 奉祝傳祝執笏, 俯
伏興平身 ○仍詣獻官位, 俱北向行跪後行立, 守僕告司樽, 上 ○守僕告
亞獻官, 祭物點視, 引降復位 ○守僕告獻官曰, 贊謁者先入四拜.

34 역주 학궁의례
석채의26)

(제사)하루전날 새벽에 초헌관27), 전사관28), 봉향29) 삼원이 수


복30)을 거느리고 객사31)로 나아간다. 전사관은 제물과 ■■(제기)를
점검하고 제물을 받들어 가자32)에 싣는다. 봉향은 초헌관을 인도하

26) 석전제(釋奠祭)·석채(釋菜)·상정(上丁)·정제(丁祭)라고도 하며 음력 2월과 8


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한다. 전통 사회에서 산천(山川)·묘사(廟社)에 올리
던 제사, 또는 학교에서 선성선사(先聖先師)를 추모하기 위하여 올리는 의식이
다. 소나 양 따위의 희생을 사용하지 않고 소채(蔬菜)로 간소하게 지낸다. 그러
나 여기서는 석전제를 대신하여 석채의로 표현하였다.
27) 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임시로 임명되는 제관으로 일반적으로는 제사를 지낼
때 제관을 대표해 잔을 올리는 사람을 말한다. 술잔을 올리는 순서에 따라 초
헌관(初獻官)·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으로 나뉘어지며 초헌관은 그 제
사에서 대표격인 사람이 맡도록 되어 있다.『주례』와『가례』에 의하면 제사
는 필히 삼헌(三獻)을 하도록 되어 있고, 반드시 축문을 아뢰어 제사를 주관하
는 자와 제사를 받는 대상과 제사의 성격을 알리도록 되어 있다. 국가에서 행
하는 제사에 왕이 친제(親祭)하는 경우에는 왕이 초헌관이 된다.『국조오례의』
에 의하면 왕이 친제하는 경우는 사직(社稷)·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문소
전(文昭殿)·선농단(先農壇)·문묘(文廟) 등으로 국한되어 있다. 부득이 왕이 친
제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왕세자나 대신 가운데서 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왕이
주제자로 초헌관이 될 때는 아헌관과 종헌관은 정1품 이상이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사직에서는 영의정이 아헌을 하고 종묘에서는 종친 가운데서 대군이 아
헌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왕명으로 지내는 제사에는 당상관
인 정3품 이상이 제관이 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필요에 따라서는 정부의
대신을 파견해 치제(致祭)함을 원칙으로 삼았다. 지방에 있는 전대의 시조 묘나
공신 묘 등에 대해서는 정부가 향과 축문을 하사하고 나라에 끼친 공로의 경중
에 따라 지방 수령이 헌관을 대행하게 하거나, 자손 가운데 벼슬이 있는 자를
지명해 치제하기도 하였다. 서원·정사·향교·강당 등에서는 유림 자체에서
향사했으며 서원이나 향교의 임원들이 헌관이 되었다.
28) 제사 때에 제단 안팎의 청소, 제기(祭器)·제물(祭物)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임시 관직.
29) 헌관이 분향할 때 그 오른쪽 옆에서 향합(香盒)과 향로를 받드는 집사(執事).
30) 묘(廟), 사(社), 능(陵), 원(園), 서원(書院), 향교의 문묘 등의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인물.
31) 지방의 각 고을마다 궐패(闕牌)나 전패(殿牌)를 모셔 두고, 왕명으로 파견되는
관원을 접대하거나 머물게 하는 관사.
32) 편경과 편종, 특경과 특종을 매다는 틀을 가자(架子)라고 한다. 종의 틀은 받침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35


여 전패33)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봉향은 향을 받아 탁상위에 올
리고 무릎을 꿇고 헌관에게 전한다. 헌관은 무릎을 꿇고 받고 다시
봉향에게 전하여 준다. 앞서의 제물과 가자를 차례로 전사관이, 다음
에는 봉향이, 다음에는 헌관이 포정문34)에서 점검한다. 봉향은 향을
예리35)에게 전달하여 올리고, 예리는 향을 받들어 말을 타고 향교에
나아간다. ■■■■■■■■향을 받아 올리고, 예리는 봉향에게 전
달하고 문으로 들어간다. ■■■■■■■■예리는 명륜당에서■■
■■■■■, 명륜당 정청에 향을 봉안하고 향실을 봉한다. 초헌관은
명륜당에 들어가고 아헌관36)은 신문 밖의 마당에서 제물을 살피어
점검하고 대성전 안에 둔다. 동일 오시37)에 여러 집사는[문묘 안에
서 무릇 일을 맡은 자는 나오지 않는다] 신문(神門)38) 밖 마당에 선
다. 찬인39)은 초헌관을 인도하여 신문 밖 마당의 길 동쪽에서 남쪽
을 향하여 선다. 희생을 담당하는 자는 희생을 이끌고[하인이 이끌고
가도록 한다]자리에 나아간다. 희생을 담당하는 자는 수복과 함께 희
생을 한 바퀴 돌며 손을 들고 (희생이)“살이 쪘다”고 말한다. 대

대 구실을 하는 나무상자와 나무상자 위의 장식물(사자나 호랑이 또는 오리나


기러기), 양쪽의 받침대 위에 세우는 기둥(설주), 종을 걸기 위해 가로놓인 두
단의 횡목(橫木), 공작(孔雀)·용두(龍頭)·봉두(鳳頭)와 같은 횡목 주변의 장식
물 등으로 구성되며, 가자를 이루는 각 부분은 각각 따로 만들어 채색하여 조
립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는 제물을 올려두는 시렁을 말한다.
33) 지방의 객사 안에 국왕을 상징하는‘殿’자를 새겨 세운 나무 패. 매월 1일과
15일에 지방의 관원 모두가 모여 배례(拜禮)하고, 지방 출장의 관원 역시 배례
하였다. 전패를 훼손, 모독하면 불경(不敬)죄로 처벌되어 본인은 물론, 수령, 그
마을까지 처벌받았다.
34) 강화유수부의 정문을 이르는 듯 하다.
35) 각 지방관아의 예방(禮房) 서리(胥吏).
36) 제향 때 2번째로 잔을 올리는 헌관.
37) 낮 11시부터 1시 사이.
38)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39) 집례, 대축, 여러 집사를 인도하는 제관.

36 역주 학궁의례
축40)은 수복과 함께 희생을 한 바퀴 돌며 손을 들고“충분하다”고
말한다. 수복은 유척41)으로써 (희생을) 재는데 길이가 1자 5치, 넓이
가 1자이면“규격에 맞는다”고 말한다. 헌관은 서향하고 서서 희생을
공상42)위에 올린다. 장인이 칼을 잡고 서고 희생을 담당하는 자가
장인의 칼을 든 손을 떠받치면, 수복은 희생을 베는 곳(殺猪之處)을
고한다. 하인이 희생을 이끌고 부엌에 이르러 장인에게 전달하여 준
다. 찬인은 헌관을 이끌고 명륜당으로 돌아간다. 대축은 동무43)에
들어가 축문을 작성하고 와서 헌관에게 살피게 한 후 (축문을) 향실
에 들여 둔다.
소는 순색이고 천근의 큰소이다. ○소고기 포는 길이가 2척 4촌이
고, 넓이는 3척 5푼이다.해가지고 어두워질 때 전사관과 더불어 진
설44) 7인은 대성전 안에 들어가 상을 차린다.【상 차림 도면은 위에
보인다】.
삼경45) 즈음에 수복은 초헌관 이하 여러 집사에게 일어날 것을 고
한다 ○학생 및 여러 집사는 사경 일점46)에 신문 밖 정해진 자리에
나아간다. ○수복은 여러 집사에게 (신문)밖 자리에 설 것을 고하고

40) 축문을 읽는 제관.


41) 길이 246mm, 폭 12mm, 높이 15mm의 4각 기둥 형태이다. 4면 중 한 면에
는 예기척과 주척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면에는 포백척, 영조척, 황종척 등이
반자 씩 사용례와 함께 음각되어 있다. 이 자는 현대의 칠삼황동에 가까워 형
상, 치수, 눈금표시, 표면유지 등 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계, 금속학적 요건
을 고루 갖춘 것으로 판명되었다. 지방수령이나 암행어사가 검시(檢屍)때에 주
로 썼다.
42) 희생을 올리는 상.
43) 조선시대 때 여러 유현(儒賢)들의 위패(位牌)를 둔 문묘(文廟) 동쪽의 행각(行
閣).
44) 제물을 제사상에 진열하는 집사.
45)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
46) 새벽 1시 20분 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37


분정기47)(에 기록되어 있는 각자의 맡은 소임)의 이유를 헌관 앞에
서 읽는다 ○수복은 신문 밖에서“여러 집사는 바깥 자리에 서시오”
라고 세 번 소리친다 ○도집례48)는 분정기를 읽는다. ○관연은 헌관
앞에 이르러 제복을 입을 것을 고한다. ○찬인과 함께 봉향, 대축은
헌관 앞에 이르러 (헌관을)향실로 인도하여 이르러 서고, 봉향이 향
을 받들어 올리고, 대축은 축상을 받들어 신문 안에 이른다. 초헌관
은 무릎을 꿇고 손에 들었던 홀을 띠에 꽂는다. (초헌관은) 향을 받
들어 향을 전하고 축문을 받들어 축문을 전하고 홀을 손으로 잡아서
가슴에 댄다.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 몸을 바르게 한다. ○(헌관이)
헌관의 정해진 자리에 이르면 (여러 집사와 헌관은) 함께 북쪽을 향
해 먼저 궤하고 선다. 수복은 사준49)에게 (제주를) 올리라고 고한다.
○수복은 아헌관에게 제물을 점검하여 보고 자리고 돌아가라고 고한
다. ○수복은 헌관에게 고하여“찬자50)와 알자51)가 먼저 들어가 사
배하시오”라고 말한다.

47) 제사를 거행할 때 직무를 맡은 사람들의 이름을 게시한 것.


48) 홀기나 분정기를 읽으면서 제사 의식을 진행시키는 제관.
49) 준소에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제관.
50) 제관을 인도하는 제관.
51) 헌관을 인도하는 제관.

38 역주 학궁의례
贊者笏記52)

贊引引學生入就拜位 ○贊引引祝及諸執事入就拜位 ○祝以下皆四拜,


平身 ○諸執事詣盥洗位, 諸執事各就位 ○贊引各引分獻官入就拜位 ○
獻官皆四拜 ○鞠躬 ○拜 ○拜 ○拜 ○拜 ○平身 ○行奠幣禮 ○贊引
引初獻官詣盥洗位 ○贊引引初獻官詣大成至聖文宣王神位前【謁者行奠
弊禮笏記】○引降復位 ○行初獻禮 ○贊引引初獻官詣大成之聖文宣王
樽所 ○引詣神位前[■■次] ○詣配位樽所, 引詣神位前 ○引降復位 ○
行亞獻禮 ○■■■■■■ ■■(贊引引亞獻官 詣盥)洗位 ○贊引引亞
獻官, 詣文宣王樽所 ○詣神位前 ○詣配位■■(樽所)引■■■■(詣神
位前) ■(引)降復位 ○行終獻禮 ○贊引引終獻官詣盥洗位 ○贊引引終
獻官詣文宣王樽所 ○引詣神位前 ○詣配位樽所 ○引詣神位前 ○引降
復位 ○贊引各引分獻官詣東從享樽所 ○分詣神位前 ○贊引各引分獻官,
降復位 ○飮福受胙 ○贊引引初獻官陞詣飮福位, 跪, 搢笏, 受爵仍傳執

52) 대중의 집회·제례 등 의식에서 그 진행 순서를 적어서 낭독하게 하는 기록.


홀(笏)은 중국에서는 이미 주대(周代)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에는
국왕에게 보고할 사항이나 건의할 사항을 간단히 적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대
비하는 것이었다. 신분에 따라 규격과 색채와 질이 정해져서 중국에서는 옥·
상아·서각(犀角 : 물소의 뿔) 등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홀은 한 자
정도의 길이에 두 치 정도의 너비로 얇은 것이며, 1품에서 4품까지는 상아로
만들고 5품 이하는 나무로 만들어 쓰게 하였다. 홀기는 크게는 국가의 조참(朝
參 : 국왕에게 문안 드리고 정사를 아뢰는 일)과 상참(常參 : 국왕에게 매일 각
관아가 차례대로 업무를 비롯한 일을 아뢰는 것)에서부터 종묘·사직·배릉(拜
陵 : 능 제사) 등의 의식에 이용되고, 작게는 입학(入學)·석전(釋奠)·전시(殿
試 : 과거의 3차 시험으로 국왕 앞에서 치른다. 과거 합격의 등급을 나누기 위
한 시험)·방방(放榜: 과거 합격자에게 합격 증서를 나누어 주는 것으로, 대과
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홍패를 소과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백패를 줌)을 비롯해
양로연(養老宴) 등에도 이용되었다. 민가에서는 서원의 유회, 향회(鄕會)를 비롯
해 향음주례(鄕飮酒禮)·강학례(講學禮) 등에도 이용되고 심지어 혼례·관례·
제례 등 사가(私家의) 행사나 의식에까지도 이용되었다. 홀기는 절차를 미리 정
해 그대로 시행함으로써 절차의 오류를 막고 시비의 근원을 방지하는 장점이
있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39


事, 執笏, 俯伏興, 平身 ○引降復位 ○在位者及學生皆四拜 ○鞠躬 ○
拜 ○拜 ○拜 ○拜 ○平身撤籩豆 ○在位者及學生皆四拜 ○鞠躬 ○
拜 ○拜 ○拜 ○拜 ○平身, 贊引引初獻官, 陞詣望燎位 ○可燎 ○贊
引引初獻官, 降復位 ○遂引初獻官以下出 ○祝及諸執事, 俱復拜位 ○
祝以下皆四拜 ○鞠躬 ○拜 ○拜 ○拜 ○拜 ○平身 ○禮畢以次出 ○
贊謁者俱復四拜

찬자홀기

찬인은 (향교의)학생을 인도하여 절하는 자리에 나아가시오. ○찬


인은 (대)축과 여러 집사를 인도하여 절하는 자리에 나아가시오. ○
(대)축 이하 모두 네 번 절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 여러 집사는
관세위53)에 나아가서(손을 씻은 후), 여러 집사는 각자 위치에 서시
오. ○찬인은 각각 분헌관들을 인도하여 절하는 위치에 서시오. ○헌
관은 모두 네 번 절하시오. ○몸을 굽히시오. ○절하시오. ○절하시
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몸을 바르게 하시오. ○전폐례를 행
합니다. ○찬인은 초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로 나아가시오. ○찬인은
초헌관을 인도하여 대성지성문선왕54)의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알
자가 전폐례 홀기를 행한다.】○인도하여 내려와 자리로 돌아오시오.
○초헌례를 행합니다. ○찬인은 초헌관을 인도하여 대성지성문선왕

53) 석전제를 올릴 때 손을 씻는 자리로 명륜당의 동쪽 계단의 동남쪽에 북향하여


자리한다.
54) 공자(B.C551~479)에게 추시(追諡)한 것은 처음 당(唐) 현종(玄宗)때이다. 이때
는 공자를‘문선왕(文宣王)’이라 하였다. 송(宋) 진종(眞宗)때에는‘현성문선왕
(玄聖文宣王)’과‘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바뀌었고, 원(元) 성종(成宗)때에
이르러‘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 되었는데, 명(明) 세종(世宗)때 다시
‘지성선사(至聖先師)’로 바뀌었다.

40 역주 학궁의례
(공자)의 준소55)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次] ○배위 준소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신위 앞에 나아가시
오. ○인도하여 내려와 자리로 돌아오시오. ○아헌례를 행합니다. ○
찬인은 아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로 나아가시오. ○찬인은 아헌관을
인도하여 문선왕 준소에 나아가시오.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배
위준소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내려와 자리로 돌아오시오. ○종헌례를 행합니다. ○찬인은 종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로 나아가시오. ○찬인은 종헌관을 인도하여 문선왕
준소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신위 앞으로 나아가시오. ○배위의
준소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인도하여
내려와 자리로 돌아오시오. ○찬인은 각각 분헌관을 인도하여 동종향
준소에 나아가시오. ○나누어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 찬인은 각각
분헌관을 인도하여 내려와 자리로 돌아가시오. ○음복하고 수조56)하
시오. ○찬인은 초헌관을 인도하여 음복위로 올라 나아가 무릎을 꿇
고 진홀57)하고, 술잔을 받아 집사에게 전하고 집홀58)하시오. 엎드리
시오, 펴시오, 일어나시오. ○인도하여 내려와 자리로 돌아오시오.
○자리에 있는 사람과 학생은 모두 네 번 절하시오. ○몸을 굽히시
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몸을 바르
게 펴시오. 변과 두를 거두어 들이시오 ○자리에 있는 사람과 학생
은 모두 네 번 절하시오. ○몸을 굽히시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몸을 바르게 펴시오. 찬인은 초헌관을 인
도하여 망료위59)로 올라 나아가시오. ○신위를 태우시오. ○찬인은

55) 제향 때 술 단지가 놓여 있는 곳.
56) 제사 후에 번육(膰肉 : 제사 때 쓰인 고기)을 나누어 받는 예(禮).
57) 손에 들었던 홀을 제복(祭服)의 허리띠에 꽃는 의식.
58) 의식(儀式) 때에 홀(笏)을 손으로 잡아서 가슴에 대는 의식.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41


초헌관을 인도하여 내려서 자리로 돌아가시오. ○(제를) 마치었으니
초헌관 이하를 인도하여 나가시오. ○(대)축과 제집사는 모두 다시
배위에 나아가시오. ○(대)축 이하 모두 사배하시오. ○몸을 굽히시
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절하시오. ○몸을 바르
게 하시오. ○예가 끝났으니 차례대로 나가시오. ○찬인과 알자는 모
두 다시 네 번 절하시오.

謁者行奠幣禮笏記60)

贊引引初獻官入就拜位 ○左白有事謹具請行事 ○贊引引初獻官詣盥


洗位 ○搢笏 ○盥洗訖 ○執笏[初獻官詣文宣王神位前]○跪 ○搢笏 ○
三上香 ○獻幣 ○奠幣 ○執笏 ○俯伏興平身 ○詣復聖公神位前 ○跪
○搢笏 ○三上香 ○獻幣 ○奠幣 ○執笏 ○俯伏興平身 ○詣宗聖公神
位前 ○跪 ○搢笏 ○三上香 ○獻幣 ○奠幣 ○執笏 ○俯伏興平身 ○
詣述聖公神位前 ○跪 ○搢笏 ○三上香 ○獻幣 ○奠幣 ○執笏 ○俯
伏興平身 ○詣亞聖公神位前 ○跪 ○搢笏 ○三上香 ○獻幣 ○奠幣
○執笏 ○俯伏興平身

알자가 행하는 전폐례 홀기

찬인은 초헌관을 인도하여 배위에 나아가시오. ○좌백유사는 삼가


갖추어 전폐례를 행할 것을 청하시오. ○찬인은 초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에 나아가시오. ○홀을 꽂으시오. ○관세를 마치시오. ○홀을

59) 제향 봉행 후 축문과 페백(幣帛) 그리고 서직(黍稷)을 태우는 곳이다.


60) 폐백을 드리는 예로서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안자 신위, 증자 신위, 자사자 신
위, 맹자 신위 순으로 세 번 분향하고 폐백을 드린 뒤 자기 위치로 돌아온다.
이때 당상악(堂上樂)을 연주하고 문무를 춘다.

42 역주 학궁의례
집으시오.[초헌관은 문선왕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무릎을 꿇으시
오. ○홀을 꽂으시오. ○향을 세 번 올리시오. ○헌폐하시오. ○전
폐61)하시오. ○홀을 집으시오. ○엎드려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
시오. ○복성공62)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무릎을 꿇으시오. ○홀
을 꽂으시오. ○향을 세 번 올리시오. ○헌폐하시오. ○전폐하시오.
○홀을 집으시오. ○엎드려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종성
공63)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무릎을 꿇으시오. ○홀을 꽂으시오.
○향을 세 번 올리시오. ○헌폐하시오. ○전폐하시오. ○홀을 집으시
오. ○엎드려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술성공64) 신위 앞에

61) 제례(祭禮)에서 헌관(獻官)이 세 번 향을 올리고 신주(神主) 앞에 폐백을 드리던


예로 초헌관이 공자신위, 다음에는 차례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신위 순으로
분향하고 폐백을 드린 뒤 자기 위치로 돌아온다.
62) 안자. 자(字)는 연(淵). 공자가 가장 신임하였던 제자이며, 공자보다 30세 연소
(年少)이나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학문과 덕이 특히 높아서, 공자도 그를 가리
켜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칭송하였고, 또 가난한 생활을 이겨내고 도(道)
를 즐긴 것을 칭찬하였다. 은군자적(隱君子的)인 성격 때문인지 그는“자기를
누르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든가,“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
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지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장자(莊子)와 같은 도가(道家)에게서도 높이 평가되
었다.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저술(著述)이나 업적은 남기지 못했으나『논어(論
語)』에 <안연편(顔淵篇)>이 있고, 그 외에 몇몇 서적에도 그를 현자(賢者)와
호학자(好學者)로서 덕행(德行)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전하는 구절이 보인다.
63) 증자. 이름은 삼(參). 자 자여(子輿). 공자(孔子)의 고제(高弟)로 효심이 두텁고
내성궁행(內省躬行)에 힘썼으며, 노(魯)나라 지방에서 제자들의 교육에 주력하였
다.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나의 도는 하나로써 일관한다(吾道一以貫之)”
고 말했을 때 다른 제자들은 그 말의 참뜻을 몰라 생각에 잠겼으나, 증자는 선
뜻‘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뿐’이라고 해설하여 다른 제자들을 놀라게 하
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효경(孝經)』의 작자라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현재 전하는『효경』은 진한시대(秦漢時代)에 개수한 것이라는 설도 있
다. 증자의 사상은『증자(曾子)』18편(篇)가운데 10편이『대대례기(大戴禮記)』
에 남아 전하는데, 효(孝)와 신(信)을 도덕행위의 근본으로 한다. 그는 공자의
도(道)를 계승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를 거쳐 맹자(孟
子)에게 전해져 유교사상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43


나아가시오. ○무릎을 꿇으시오. ○홀을 꽂으시오 ○향을 세 번 올
리시오. ○헌폐하시오. ○전폐하시오. ○홀을 집으시오. ○엎드려 절
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아성공 65)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
무릎을 꿇으시오. ○홀을 꽂으시오. ○향을 세 번 올리시오. ○헌폐
하시오. ○전폐하시오. ○홀을 집으시오. ○엎드려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謁者行初獻禮笏記

贊引引初獻官詣[文宣王神位前]○跪 ○搢笏 ○封爵奠爵 ○執笏 ○


俯伏興平身 ○少退 ○跪 ○讀祝 ○俯伏興平身 ○詣復聖公神位前 ○
跪 ○搢笏 ○封爵奠爵 ○執笏 ○俯伏興平身 ○少退 ○跪 ○讀祝 ○
俯伏興平身 ○詣宗聖公神位前 ○跪 ○搢笏 ○封爵奠爵 ○執笏 ○俯
伏興平身 ○少退 ○跪 ○讀祝 ○俯伏興平身○詣述聖公神位前 ○跪

64) 자사. 이름은 급(伋). 공자의 손자이며, 4서의 하나인『중용(中庸)』의 저자로


전한다. 전 생애를 주로 고향인 노나라에 살면서 증자(曾子)의 학(學)을 배워
유학의 전승에 힘썼다. 맹자는 그의 제자의 제자이며,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이 학통(學統)은 송학(宋學)에서 특히 존중된다. 자사학파의 사상을
전하는 책으로『자사자(子思子)』가 있다.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중용을 지향
하는 실천적인 일상 윤리가 그의 사상의 중심이다.
65) 맹자. 이름은 맹가(孟軻)이다.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 하지만 확실
하지 않다. 중국의 산동성 추(趨)에서 출생하였다.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어릴 때 현모(賢母)의 손에서 자라
났으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유명한 고사이다. 제후가 유능한 인재들
을 찾는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맹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
택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제후가 찾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외
교적 책모(策謀)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王道)였으며, 따
라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기 때문이었다. 만년에는
제자교육에 전념하였고, 저술도 하였다.『맹자』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후세
의 편찬물로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으로『논어』『대학』『중용』과 더
불어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다.

44 역주 학궁의례
○搢笏 이하는 보이지 않으나 다음과 같다 ○封爵奠爵 ○執笏 ○俯
伏興平身 ○少退 ○跪 ○讀祝 ○俯伏興平身 ○詣亞聖公神位前 ○跪
○搢笏 ○封爵奠爵 ○執笏 ○俯伏興平身 ○少退 ○跪 ○讀祝 ○俯
伏興平身
亞獻禮 終獻禮 一如初獻禮 而只無奠幣 少退 跪 讀祝 俯伏興平身

알자가 행하는 초헌례 홀기

찬인은 초헌관을 인도하여 [문선왕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무릎


을 꿇으시오 ○홀을 꽂으시오. ○잔을 받아 올리시오. ○홀을 집으
시오. ○몸을 숙여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뒤로 조금 물
러나시오. ○무릎을 꿇으시오. ○축문을 읽으시오. ○몸을 숙여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복성공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무릎을
꿇으시오. ○홀을 꽂으시오. ○잔을 받아 올리시오. ○홀을 집으시
오. ○몸을 숙여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뒤로 조금 물러
나시오. ○무릎을 꿇으시오. ○축문을 읽으시오. ○몸을 숙여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종성공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무릎을
꿇으시오. ○홀을 꽂으시오. ○잔을 받아 올리시오. ○홀을 집으시
오. ○몸을 숙여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뒤로 조금 물러
나시오. ○무릎을 꿇으시오. ○축문을 읽으시오. ○몸을 숙여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술성공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무릎을
꿇으시오. ○홀을 꽂으시오. ○잔을 받아 올리시오. ○홀을 집으시
오. ○몸을 숙여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뒤로 조금 물러
나시오. ○무릎을 꿇으시오. ○축문을 읽으시오. ○몸을 숙여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아성공 신위 앞에 나아가시오. ○무릎을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45


꿇으시오. ○홀을 꽂으시오. ○잔을 받아 올리시오. ○홀을 집으시
오. ○몸을 숙여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뒤로 조금 물러
나시오. ○무릎을 꿇으시오. ○축문을 읽으시오. ○몸을 숙여 절을
하고 몸을 바르게 하시오.
아헌례와 종헌례는 초헌례와 같으나 단지 전폐와 소퇴, 궤, 독축,
부복흥평신이 없을 뿐이다.

(3) 祝文式66)

維歲次 干支 某月 干支朔 某日干支 職姓名 敢昭告于


[若値二八月初■■(朔日) 則只書干支朔■(日)]
先聖大成至聖文宣王, 伏以
道冠百王, 萬世之師, 玆値上丁, 精禋是宜. 謹以, 牲幣, 醴齋, 粢盛,
庶品, 式陳明薦, 以先師 兗國復聖公顔氏, 郕國宗聖公曾氏, 沂國述聖
公孔氏, 鄒國亞聖公孟氏, 配 尙

축문식

유 세차 간지, 모월(某月)의 간지, 모삭(某朔) 모일(某日)의 간지


(무슨) 관직 (누구가) 성명이 감히 밝게 고합니다. [만약 이월과 팔월
의 초■■(삭일)을 당하면 즉 단지 삭일의 간지를 쓴다]

66) 축문. 단순히 축(祝)이라고도 한다. 제사의 대상과 종류에 따라 문장이 달라지
기는 하나, 격식 ·문구 등이 거의 고정되어 있다. 주인이 초헌(初獻)을 행하며
술을 잔에 부어 올리고 나면 축문을 읽는데, 축문을 읽는 이를 축관(祝官) 또는
대축(大祝)이라고 한다. 축문은 백지(白紙)에 붓으로 써서 사용하며, 제사를 마
치고 나면 불사르거나 정히 보관하였다가 다음 제사에 다시 쓰기도 한다.『사
례편람(四禮便覽)』에 각종 제사와 이에 따른 축문 서식이 상세히 나와 있다.

46 역주 학궁의례
앞선 성인 대성지성 문선왕, 엎드려 생각하건데
도(道)가 백왕에 으뜸하니
만세의 스승이십니다.
이달의 상정67)일을 당하여
정하게 제향을 올림이 마땅합니다.
삼가 생폐68), 예재69), 자성70), 서품71)을 법에 맞게 진설하고 밝
게 올려 선사이신 연국 복성공 안씨, 성국 종성공 노씨, 기국 술성공
공씨, 추국 아성공 맹씨를 배향합니다. 가상히 여겨 흠향하소서.

配位祝文

先師兗國復聖公, 伏以
材蘊爲邦,
仁全克己, 萬世景仰, 是禋是祀. 伏以, 牲幣, 醴齋, 粢盛, 庶品, 式
陳明薦 尙

배위축문

선사 연국 복성공, 엎드려 생각하건데


재주는 나라를 위하여 쌓았고

67) 그 달의 첫째 정일(丁日). 대개 이 날에 국가나 개인의 집에서 연제(練祭) 또는


담제(禫祭) 등의 제사를 지낸다. 2월과 8월의 이날에 공자를 제사지내는 석전
제가 거행된다.
68) 희생(소, 양, 돼지)과 폐백을 말한다.
69) 술이 다 되어 술과 찌꺼기가 서로 어우러진 술. 희준(犧樽 : 제사 때 쓰는 술
항아리로 소의 모양이다)에 담으며 초헌관이 올린다.
70) 큰 제사(祭祀)에 쓰는 기장과 피.
71) 여러 제수를 말한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47


인(仁)은 사욕(私慾)을 이겨 온전하니
만세토록 덕을 사모하고 우러러 존경하며
이에 정결하게 제사함이 옳습니다.
삼가 생폐, 예재, 자성, 서품으로 법에 맞게 진설하고 밝게 올리니
가상히 여기고 흠향 하소서

先師郕國宗聖公, 伏以
三省功加,
一貫道傳, 時祀無斁, 彌億萬年. 謹以, 牲幣, 醴齋, 粢盛, 庶品, 式
陳明薦 尙

선사 성국 종성공, 엎드려 생각하건데


삼성(三省)의 공을 더하고
일관(一貫)의 도(道)를 전하니,
때로 제사함을 폐함이 없이
억만년을 오래 지속할 것입니다.
삼가 생폐, 예재, 자성, 서품으로 법에 맞게 진설하고 밝게 올리니
가상히 여기고 흠향 하소서

先師沂國述聖公, 伏以
克承
先聖, 允得其宗, 其從與享, 百代是崇. 謹以, 牲幣, 醴齋, 粢盛, 庶

48 역주 학궁의례
品, 式陳明薦 尙

선사 기국 술성공, 엎드려 생각하건데


능히 선성(先聖)을 계승하여
진실로 그 종지(宗旨)를 얻었으니
그 배향(配享)하여 종사(從祀)함은
오랜 먼 후대(後代)까지 존숭함입니다.
삼가 생폐, 예재, 자성, 서품으로 법에 맞게 진설하고 밝게 올리니
가상히 여기고 흠향 하소서

先師鄒國亞聖公, 伏以
敎明七篇,
道承
三聖, 廟食于配, 享祀益永. 謹以, 牲幣, 醴齋, 粢盛, 庶品, 式陳明
薦 尙

선사 추국 아성공, 엎드려 생각하건데


가르침은 7편(七篇)72)에 밝혔고
도(道)는 3성(三聖)73)을 이었으니
문묘에 배향(配享)하여

72) 맹자 칠편을 이름.


73) 공자, 증자, 자사를 이름.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49


향사함이 더욱 영원합니다.
삼가 생폐, 예재, 자성, 서품으로 법에 맞게 진설하고 밝게 올리니
가상히 여기고 흠향 하소서

(4) 諸執事分定記

五聖位 初獻官 一員 [本府留守不參則經歷替行]


亞獻官 一員 [分敎官例差]
終獻官 一員
預差 一員
東從享獻官 一員
西從享獻官 一員
東廡獻官 一員
西廡獻官 一員
預差 一員
都預差 一員
大祝 一員
預差 一員 [自亞獻官, 至此合十一員, 皆官供, 而罷齋之朝, 則預差四
員, 並輟供]
典祀官 一員
奉香 一員
奉爐 一員
都執禮 一員
都陳設 一員
都司樽 一員

50 역주 학궁의례
奉爵 一員
奠爵 一員
奉燭 一員
配位奉香 一員
奉爐 一員
奉爵 一員
奠爵 一員
奉燭 一員 [自亞獻官, 至此合二十五員, 皆以東齋塡差]
掌牲 一員 [自此以下, 西齋差備]
飯色 一員
酒色 一員
贊者 一員
通謁 一員
贊引 七員
大聖位 司樽 二員
配位 司樽 一員
陳設 一員
冠緣 一員
東從享司樽 一員
陳設 一員
奉香 一員
奉爐 一員
奉爵 一員
奠爵 一員
奉燭 一員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51


贊引 一員
冠緣 一員
西從享司樽 一員
陳設 一員
奉香 一員
奉爐 一員
奉爵 一員
奠爵 一員
奉燭 一員
贊引 一員
冠緣 一員
東廡司樽 一員
陳設 一員
奉香 一員
奉爐 一員
奉爵 一員
奠爵 一員
奉燭 一員
贊引 一員
冠緣 一員
西廡司樽 一員
陳設 一員
奉香 一員
奉爐 一員
奉爵 一員

52 역주 학궁의례
奠爵 一員
奉燭 一員
贊引 一員
冠緣 一員
獻官盥洗位 一員
諸執事盥洗位 一員
學生

제집사분정기

오성위 초헌관 일명 [본부(강화부)의 유수가 불참할 시는 경력74)이


대신한다.]
아헌관 일명 [교관을 나누어 정례에 따라 보낸다.]
종헌관 일명
예차75) 일명
동종향 헌관 일명
서종향 헌관 일명
동무헌관 일명
서무헌관 일명
예차 일명
동종향 헌관 일명
서종향 헌관 일명

74) 조선시대 충훈부, 의빈부, 의금부, 한성부, 중추부, 도총부에서 실제 사무를 맡


아 보는 종4품 관직. 조선 초기에는 한때 각도 관찰사의 지방 행정보좌관으로
중앙에서 파견되었으나 1465년(세조 11) 유수부를 제외하고는 폐지하였다.
75) 특별한 사무를 맡기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하는 관직인 듯 하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53


동무 헌관 일명
서무 헌관 일명
예차 일명
도예차 일명
대축 일명
예차 일명 [아헌관으로부터 여기까지 도합 십삼명은 모두 관에서
보내고 재(齋 : 석채의--필자 역주)가 끝난 아침이면
예차 사명은 모두 관아로 돌아간다.]
전사관 일명
봉향 일명
봉로76) 일명
도집사 일명
도진설77) 일명
도사준78) 일명
봉작79) 일명
전작80) 일명
봉촉 일명
배위 봉향 일명
봉로 일명
봉작 일명
전작 일명

76) 향로를 받드는 제관.


77) 제물을 제사상에 진열하는 집사.
78) 준소에서 술잔에 술을 떠주는 제관.
79) 술잔을 받들어 헌관께 드리는 제관.
80) 헌관으로부터 술잔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는 제관.

54 역주 학궁의례
봉촉 일명 [아헌관으로부터 여기까지(배위 봉촉) 도합 이십오명은
모두 동재에서(제사를) 준비한다.]
장생81) 일명 [장생 이하부터는 서재에서 (제사를) 준비한다.]
반색82) 일명
주색83) 일명
찬자 일명
통알 일명
찬인 칠명
대성위 사준 이명
배위 사준 일명
진설 일명
관연 일명
동종향 사준 일명
진설 일명
봉향 일명
봉로 일명
봉작 일명
전작 일명
봉촉 일명
찬인 일명
관연 일명
서종향 사준 일명

81) 제사때 쓰이는 희생을 맡은 집사.


82) 뫼(제사 때 올리는 밥)를 맡아보는 집사.
83) 제사때 쓰일 술을 책임지는 집사.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55


진설 일명
봉향 일명
봉로 일명
봉작 일명
전작 일명
봉촉 일명
찬인 일명
관연 일명
동무 사준 일명
진설 일명
봉향 일명
봉로 일명
봉작 일명
전작 일명
봉촉 일명
찬인 일명
관연 일명
서무 사준 일명
진설 일명
봉향 일명
봉로 일명
봉작 일명
전작 일명
봉촉 일명
찬인 일명

56 역주 학궁의례
관연 일명
헌관 관세위 일명
제집사 관세위 일명
학생

(5) 告由祭儀84)

行祭儀節, 與大享同, 而但單獻祭罷後, 先奉大聖位櫝配位, 從享廡以


次奉櫝, 諸執事奉交倚, 卓床, 香案, 一齊移安于明倫堂 [還安時亦同]

고유제의

제의를 행하는 절차는 대향85)과 같으나 다만 단헌제86)가 끝난 후


먼저 봉향한 공자의 위패를 담는 궤와 배위, 종향된 (동,서)무에 차
례로 봉안된 궤, 제집사가 봉안한 교의, 탁상, 향안을 모두 명륜당에
옮겨 봉안한다.[환안시도 역시 같다.]

(6) 祝文式

維年號幾年歲次干支幾月干支朔幾日干支
朝鮮國王姓諱

84) 중대(重大)한 일을 치르고자 할 때나 치른 뒤에 그 까닭을 사당(祠堂)이나 신명


에게 고하는 제사(祭祀)로 국가나 개인의 집에서 중대한 일을 치른 후에 또는
장차 치르고자 할 때에 종묘(宗廟)나 가묘(家廟) 등에 그 사유를 고(告)하는 제
사. 고유제는 사례(四禮), 즉 관혼상제 가운데 제례의 사당봉사의식(祠堂奉祀儀
式)에 속하는 것으로, 그 내용에 따라 출입고제(出入告祭)와 유사고제(有事告祭)
로 나눌 수 있다.
85) 석전제를 말한다.
86) 제사 때 3번 올릴 술잔을 한 번에 그치는 것.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57


謹遣臣某官某敢昭告于 先聖大成至聖文宣王伏以 [措辭○以下與享祝同]

축문식

년호 몇 년 다음 간지 몇월 간지 삭 몇일 간지
조선국왕 성 휘
삼가 신하 모 관직 모 를 보내어 감히 밝게 선성 대성지성문선왕
께 고하여 행하오니 엎드려 생각하건데 [조사(措辭)87)○이하는 향사
의 축문과 같다.]

(7) 諸執事分定記

大聖位獻官只一員, 而諸執事與釋菜同. 又有各位 奉櫝, 奉交倚, 奉


卓床, 奉香床差備, 合一百七十人

제집사분정기

대성위 헌관은 단지 일명이며, 제집사는 석채의와 같다. 또 각 배


위의 봉독, 봉교의, 봉탁상, 봉향상의 차비는 합하여 일백칠십인이
다.

(8) 焚香儀

朔望昧爽, 謁者引焚香官, 入神門東夾就位立. 贊者唱詣盥洗位 ○因


(引)88)詣香所 [由東階上] ○跪 ○三上香 ○俯伏興平身 ○仍(引)89)降

87) 언어를 구사하는 것, 시가(詩歌)나 문장을 구성함에 있어서 문자의 용법과 문구


의 배치 등을 일컫음.
88) 원전에는 因으로 되어 있으나 引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58 역주 학궁의례
復位[從西階降] ○鞠躬拜 ○興 ○拜 ○興 ○拜 ○興 ○拜 ○興 ○平
身 ○禮畢 ○以次出[傳香則入拜]

분향의

삭망90) 새벽에 알자는 분향관을 인도하여 신문의 동쪽으로 와서


나아가 자리에 서고, 찬자는“관세위에 나아가시오”라고 한다. ○향
을 올리는 자리에 나아간다. [동쪽 계단으로 올라간다.] ○무릎을 꿇
으시오. ○향을 세 번 올리시오. ○몸을 숙여 절을 하고 몸을 바르
게 하시오. ○인도하여 내려서 자리로 돌아가시오.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시오.] ○국궁91)하시오. ○몸을 일으키시오. ○절하시오. ○몸
을 일으키시오. ○절하시오. ○몸을 일으키시오. ○절하시오. ○몸을
일으키시오. ○몸을 바르게 하시오. ○예가 끝났습니다. ○차례대로
나가시오. [향을 전하고 들어와 절하시오]

(9) 新官謁聖儀92)

與焚香儀同

신관알 성의

분향의와 더불어 같다

89) 원전에는 仍으로 되어 있으나 引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90) 음력으로 매달 1일과 15일.
91) 극진히 공경하여 몸을 굽혀 절을 하는 것을 말함. 조선 시대에는 임금의 행차
(行次)가 있을 때나 혹은 의례(儀禮)에서 사배례(四拜禮)의 예비 동작으로 반드
시 국궁(鞠躬)의 절차가 있었음.
92) 새로 부임하는 관리가 향교에서 지내는 의식.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59


(10) 新恩謁 聖儀93)

入庭四拜

신은알성의

뜰에 들어와 네 번 절한다

2) 학궁의례 권하(學宮儀例 卷下)

(1) 生徒

校生元額 本是二千七百人 而辛酉分二之後 額數太減 猶不下七八百人


乙丑以一百七十人恒定 而當宁己亥 以八十人派屬舟師 癸卯加置額外六
十 以備守直執事之員 並掌議別案七十人 及童蒙一百五十人 合爲三百七
十人 乙卯元案童蒙 各充三百之額

생도

교생의 원액94)은 본래 이천칠백인이었으나 신유년에 둘로 나누어

93) 과거에 급제한 자가 향교에서 지내는 의식.


94) 조선시대 각 고을의 향교에 등록된 학생. 이에 대해 서원(書院)에 등록된 학생
을 원생(院生)이라 하였고, 합쳐서 교원생(校院生)이라 불렀다. 고을의 크기에
따라 정원이 정해져 있었는데, 부·대도호부·목에는 각기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에는 50명, 현에는 30명으로 제한하였다. 그러나 16세 이하는 증광생
(增廣生)이라는 이름으로 청강이 허용되었고, 후기에는 액외교생(額外校生)이라
하여 정원 외의 학생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향교에서 유학을 학습
하고 문묘의 제사를 받드는 기능을 맡아 국가로부터 군역을 면제받는 등의 혜
택을 입었으나, 중기 이후 향교 교육이 유명무실해지고 교수·훈도 등의 교관
이 파견되지 않게 되면서, 양반자제들은 입학을 기피하고 상민·천민들이 군역

60 역주 학궁의례
진 후 원액의 수가 현저히 줄어 오히려 칠, 팔백인이 안되었다. 을축
년에 일백칠십인으로 항정되었고 당저95) 기해년(1779, 정조3)에 팔
십인이 파견되어 주사로 속하였다. 계묘년(1783, 정조7)에는 액외
육십명을 수직 집사로 갖추어 인원으로 더하여 두었고 아울러 장
의96) 별안으로 칠십인 및 동몽 일백오십인, 합하여 삼백칠십인이 되
었다. 을묘년(1795, 정조 19)원안에는 동몽 삼백인이 정액으로 충원
되었다.

(2) 文簿

學宮誌一卷
學宮移建誌一卷
癸卯齋憲一卷
丁丑節目一卷
壬戌節目一卷 [栢洞金等]
乙丑節目一卷 [三山李等]
丙子節目一卷 [玄石趙等]

을 피하기 위해 대량으로 몰려들어 사회문제화 되기도 하였다.


95) 현재 재위 중인 임금을 말함.
96) 성균관과 향교 유생들의 자치기구인 재회(齋會)의 임원. 동재(東齋)와 서재(西
齋)에 각 1인씩 있었는데, 선출방법은 현임의 장의가 후임 장의를 천거하도록
하되 전임 장의들의 완전 합의가 있어야만 가능하였다. 특히 성균관의 장의로
선출될 수 있는 자격은 영조 전까지는 문벌의 출중함이 제1의 요건이었으나 영
조 때에는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자제는 천거하지 못하게 하고, 향유(鄕儒) 중
에서 4조(祖) 동안 현관(顯官)을 지내지 않은 집안의 유생을 선출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조 때 고제(古制)를 복구하여 경화사족의 자제로 천거하게 하되 동재
의 장의는 소론(少論), 서재의 장의는 노론(老論)으로 각각 선출하게 함으로써
다른 당파는 이에 참여하지도 못하였다. 재회를 소집하였으며, 재회에서의 역할
과 권한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61


癸卯節目一卷
東齋靑衿錄 卷
西齋靑衿錄 卷
敎官先生案一卷
史閣參奉案二卷
堂長案一卷
司馬案一卷
儀注四卷
齋直案二卷
東門外改量田案一卷
東門外改量後節目一卷
位良位田畓量案二卷內一卷
內賜御定全韻一卷
內賜五倫行實
內賜鄕禮合編二卷
田畓文券
田畓傳音文書一丈
禀目題辭一丈
七梅買納畓事下帖一丈
河西金先生

문부

학궁지 일권
학궁이건지 일권

62 역주 학궁의례
계묘재헌 일권
정축절목 일권
임술절목 일권 [백동 김 등]
을축절목 일권 [삼산 이 등]
병자절목 일권 [현석 조 등]
계묘절목 일권
동재청금록 권
서재청금록 권
교관선생안 일권
사각참봉안 이권
당장안 일권
사마안 일권
의주 사권
재직안 이권
동문외개량전안 일권
동문외개량후절목 일권
위량위전답양안 이권내 일권
내사어정전운 일권
내사오륜행실
내사향례합편 이권
전답문권
전답전음문서 일장
품목제사 일장
칠매매납답사하첩 일장
하서김선생(문집)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63


(3) 祭器

鍮樽 柒坐 明水樽並
鍮香爐 玖坐 內壹坐 新備
鍮香盒 玖坐 內柒坐 新備
鍮龍勺 捌坐 內壹坐 改備
鍮燭臺 伍雙
木燭臺 柒雙 內肆雙 新備
鍮爵 伍拾坐 內肆坐 改備
鍮爵臺 貳拾坐
木爵臺 貳拾陸坐
鍮簠簋 伍拾貳坐
沙簠簋 貳拾柒坐 內肆坐 破不用
牲俎 肆拾柒坐 內貳坐 破不用
木豆
竹籩
祝板 伍坐
祝硯 具匣
幣篚 伍坐

제기

유기 준97) 7개(좌 : 坐)98) 명수99) 항아리가 같이 있다.

97) 제향 때 사용하는 유기로 만든 술항아리이다.『예서(禮書)』에는 초헌용으로 예


제(醴齊)를 담는 희준(犠樽 : 소 모양), 아헌용으로 앙제(盎齊)를 담는 상준(象
樽 : 코끼리 모양), 종헌용으로 청주(淸酒)를 담는 산뢰(山罍 : 산과 구름 모양
을 새긴 항아리) 등으로 구분된다.

64 역주 학궁의례
유기 향로 9개 내에 1개는 새로 마련한 것이다.
유기 향합 9개 내에 7개는 새로 마련한 것이다.
유기 용작100) 8개 내에 1개는 고쳐 마련한 것이다.
유기 촛대 5쌍.
나무 촛대 7쌍 내에 4쌍은 새로 마련한 것이다.
유기 술잔101) 50개 내에 4개는 고쳐 마련한 것이다.
유기 작대102) 20개.
나무 작대 26개.
유기 보궤103) 25개.
사기 보궤 27개 중 4개는 깨져서 사용할 수 없다.
생조104) 47개 중 2개는 깨져서 사용할 수 없다.
목두105).
죽변106).

98) 좌(坐)는 앉거나 누울 수 있도록 만든 물건 혹은 다리가 달려있어 세워놓을 수


있는 물건을 셀 때 사용하는 단위어로 사용되었다.
99) 제례때 사용하는 물
100) 제향 때 사용하는 국자, 헌작(獻爵)이나 관세(盥洗)에서 술이나 물을 뜨는 기
구 손잡이에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101) 제향 때 사용하는 술잔으로 위로는 2개의 기둥이 있고, 아래에는 3개의 발이
달려 있다.『시례기도설(時禮器圖說)』에‘마시는 그릇으로 한 되를 담을 만
하고 위의 두 기둥은 마셔도 다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나침을 경계한 것’이
라 하였다.
102) 제향 때 술잔이나 축판을 놓아두기 위하여 만든 사각형의 평평한 받침으로 점
(坫)이라고도 한다.
103) 보(簠)는 제향 때 도(稻 : 벼)와 량(粱 : 기장, 조)을 담는 제기로 밖은 네모지
고 안은 둥글다. 궤(簋)는 서(黍 : 수수)와 직(稷 : 피쌀)을 담는 제기로 안과
밖 모두 둥글다.
104) 제향 때 소·돼지·양 등의 희생(犧牲)을 담는 제기로 도마 모양의 목기이다.
양쪽 끝은 붉은 빛으로 칠하고, 가운데는 검은 빛으로 칠한다.
105) 제향 때 소채류나 고기장조림(醢) 등 젖은 제수를 담는 그릇을 두(豆)라 하는
데 나무로 만들기에 목두(木豆)라고도 한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65


축문을 놓는 판 5개.
축문을 쓰는 벼루 9개.
폐비107) 5개.

(4) 祭服

祭冠 簪具 七件
笏 七件
帶 七件
白衫 七件
黑衫 七件
蔽膝 七件
襪 七件
祭鞋 七件

제복

제관 잠구108) 7건.
홀 7건.
대109) 7건.

106) 제향 때에 마른 음식이나 과일 등을 담는 굽이 높은 그릇을 변(籩)이라 하는데


대나무로 만들기에 죽변(竹籩)이라고도 한다.
107) 제향 때 신위에게 드리는 예물인 페백을 담는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이다.
108) 관모(冠帽)로 품계에 따라 1품관은 5량(梁), 2품관은 4량, 3품관은 3량, 4
품~6품 2량, 7품 이하 1량으로 구분하였다. 모두 뿔로 비녀를 만들었다.
109) 대에는 허리에 두루는 각이진 혁대(革帶)와 붉은색 비단과 흰색 비단을 합쳐
꿰맨 대대(大帶)가 있다. 혁대는 1품은 물소 뿔, 2품 이상은 금, 3품에서 4품
은 은, 5품 이하는 동으로 장식한다.

66 역주 학궁의례
백삼110) 7건.
흑삼 7건.
폐슬111) 7건.
말112) 7건.
제혜113) 7건.

(5) 校舍

大成殿十二間半 正堂十間退二間半
東廡四間
西廡四間
神門三間
東齋六間退三間
西齋六間退三間
己未重修
東陜門一間
西陜門一間
己未新設
典祀廳六間 [癸丑重修 若當公需間 挾窄之弊 則使各浦口 草芚來結幕]
守僕房六間
酒房三間退一間半
講堂十間半 [東上室二間西上室二間退半間大廳四間退一間廚一間]

110) 겉에 입는 제복으로 의(衣)라고도 하며 원래는 청라로 만들었다.


111) 무릎 가리개로 붉은 비단으로 만든다.
112) 버선을 뜻하며 백포(白布)로 만든다.
113) 제화(祭靴 : 신)로서 흑피(黑皮)로 만들며 이(履)라고도 한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67


明倫堂十四間 [東上室一間半西上室一間半大廳七間半退三間半]
中門一間
外三門三間
祭器庫一間
庖廚一間
都合八十八間半

교사

대성전 십이칸반 정당 십간 툇마루 두칸 반


동무 네칸
서무 네칸
신문 세칸
동재 여섯칸 툇마루 세칸
서재 여섯칸 툇마루 세칸 [(동재와 서재는)기미년에 중수하였다.]
동협문 한칸
서협문 한칸 [(동협문과 서협문은) 기미년에 신설하였다.]
전사청 여섯칸 [계축년 중수하였다. 만일 공수간이 좁아지는 폐를
당하면 각 포구로 하여 초둔114)을 가져오게 하여
임시로 막을 친다.]
수복방 여섯칸
주방 세간 툇마루 한칸 반
강당 열칸 반 [동상실 두칸, 서상실 두칸, 툇마루 반칸, 대청 네
칸, 툇마루 한칸, 주방 한칸]

114) 뜸, 띠부들 같은 풀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물건, 비올 때에 물건을 덮거나 볕


을 가리는 데에 사용한다.

68 역주 학궁의례
명륜당 열네칸 [동상실 한칸 반, 서상실 한칸 반, 대청 일곱칸 반,
툇마루 세칸 반]
중문 한칸
외삼문 세칸
제기고 한칸
포주 한칸
도합 팔십팔칸 반

墻圍

四面各八十把 合三百二十把 ○丁亥改築之後 太半崩頹 甲寅春 依丁


丑節目 使十二洞民 分定把數 一齊改築 自外三門東爲始十五把 東門洞
所掌 南東角十五把 稤庫洞所掌 東邊十五把 紅門洞所掌 又十五把 鐘
閣洞所掌 東北角十五把 舊村洞所掌 北邊十五把 新村洞所掌 又十五把
南山洞所掌 北西角十五把 官廳下洞所掌 西邊十五把府司後洞所掌 又十
五把西門洞所掌 西南角十把唐州洞所掌 南邊十把 國淨洞所掌 各其字內
隨毁隨築次

장위

사면은 각 팔십파이고 합이 삼백 이십파이다. ○정해년에 고쳐 지


은 후 태반이 무너지고 퇴락되어 갑인년 봄 정축절목에 의해 열 두
동민으로 하여금 파수를 나누어 정하여 일제히 고쳐 지었다. 외삼문
동쪽으로부터 시작하여 십오파는 동문동이 맡고, 남동쪽의 모서리 십
오파는 수고동이 맡고, 동쪽 변 십오파는 홍문동이 맡고, 나머지 십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69


오파는 종각동이 맡고, 동북쪽 모서리 십오파는 구촌동이 맡고, 북쪽
변 십오파는 신촌동이 맡고, 나머지 십오파는 남산동이 맡고, 북서쪽
모서리 십오파는 관청하동이 맡고, 서쪽 변 십오파는 부사후동이 맡
고, 나머지 십오파는 서문동이 맡고, 서남쪽 모서리 십파는 당주동이
맡고, 남쪽 변 십파는 국정동이 맡고, 각 그 자(字)내에서 훼손될 때
마다 축조하였다.

(6) 校位115)

校宮南墻外
宇字第
婢七梅買納
宇字第
府爲知委事 官奴旭孫呈上 營所志內 乙酉年間 因官分付其矣 同生妹
七梅以侍丁婢 欲爲免賤 田慶春畓 六斗落庫乙 買納鄕校 而賣買以後 姑
未給價 每年田哥之他田畓結卜 一結五十卜稅穀 自願代納者 米爲一石三
斗 租爲一石 自乙酉至今 將至二十年 徵稅之數 乃爲四十餘石穀 且其同
生妹 物故已久 而到今奴矣身形勢 未免丐乞之境 畓價與結卜間實無當納
之路云云 査禀題辭內 旭孫妹 率去之兩班 不給畓價 使旭孫狼狽 公納
二十年 一結五十卜之稅 今則貧窮 至於無奈何之境 則旭孫所納 田哥之
稅 自今年徵推 於田哥事理當然是遣 至於本畓六斗落 則每年所出 必如
旭孫 所納稅之數 故自初以此數代納 若無旭孫買取之納 則二十年間 田
哥渠自耕食渠畓 今以二十年納稅之 故使田哥公然失畓不成事理 此畓在
鄕校 眞所謂元非我土 還給田哥之意 分付爲有置狀 奴旭孫所納之畓 卽

115) 향교의 위전으로 향사 등의 일정한 목적에 쓰기 위한 토지이다.

70 역주 학궁의례
爲還給於本主田慶春處 更無稱寃之地宜當 甲辰十月十四日 下帖于都有

교위

교궁 남쪽 담장 밖
우자 지번
비 칠매가 매납함
(강화유수)부에서 지위116)하는 일이다. 관노 욱손이 관에 올린 소
지117)의 내용에 대하여 을유년(1705년 ; 숙종 31, 1765년 ; 영조
41)에 관(강화유수부)에서 내린 분부에 의하면“욱손이 여동생 칠매
를 시정118)비로 (향교의) 천역을 면하게 하고자 하여, 전경춘의 논 6

116) 통지나 고시 등의 형식으로 명령을 내려 알려주는 것.


117) 관부(官府)에 올리는 소장(訴狀)·청원서·진정서, 발괄〔白活〕이라고도 한다.
소지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일어난 일 중에서 관의 결정과 도움을 필
요로 하는 모든 종류의 민원에 관한 문서이므로 그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또
한 소지는 소지를 올린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직결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 가문
에서 소중히 보관하여 현존하는 고문서 가운데 토지문기(土地文記) 다음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소지 문서에는 등장(等狀)·단자(單子)·원정(原
情)·상서(上書)·의송(議送) 등이 있으며, 그 서식에는 각각 차이가 있다. 등
장은 여러 사람이 연명해 관부에 올리는 소장·청원서·진정서의 성격을 가진
문서이고, 단자는 대개 사대부가 직접 관부(관찰사·수령)에 올리는 소장이나
진정서의 성격을 가진 문서이다. 상서도 소장이나 진정서의 성격을 가진 문서
이다. 그 내용으로는 산송과 효행, 탁행(卓行) 등을 표창하기 위한 것이 대부
분이며, 등장의 경우와 같이 연명(連名)해 관부에 올린다. 의송은 관찰사에게
올리는 문서로서, 양반(관원)이 자기 집 종의 이름으로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최승희,『韓國古文書硏究』, 知識産業社, 1989)
118) 조선시대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군역(軍役)을 면제받은 장정. 시정이 되는
경우는 부모가 독질(篤疾)·폐질(廢疾)이 있거나 70세 이상일 때는 한 아들,
90세 이상의 부모가 있을 때는 모든 아들, 그리고 위와 같으면서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손자 1인이 시정의 특혜를 받았다. 만약 친손자가 없으면 외손자 1
인이 받을 수 있었다. 또 다섯 아들 이상이 군역에 복무하는 경우이면 부모가
70세 미만이라도 시정의 혜택이 있었는데, 부모가 80세 이상이면 두 아들에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71


두락(마지기)이 되는 곳을 사서 향교에 납부하였으나 (욱손이)아직
(전경춘의 논)에 대한 값을 지급하지 않아서, (욱손이) 매년 전경춘
집안의 다른 전답 1결 50복 결복(면적)의 세곡(국가에 세금으로 내는
곡식)을, 욱손이 (전경춘에게 매입한 6두락의 값을 지급하지 않아)
자원 대납한 것이 쌀 한섬(10말) 세말과 벼 1섬이다. (그러므로) 을
유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20년 동안 (욱손에게)징세한 수는
곧 40여 섬의 곡식이 된다. 또한 (욱손의) 여동생은 죽은 지 이미 오
래되었고, 지금 관노 (욱손)의 형세는 빌어 먹는 거지를 면하지 못할
지경이다. (그러므로) 욱손은 (전경춘에게 매입한)“논의 대금과 자원
대납 하는 결복을 실로 마땅히 납부할 길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사하여 내린 제사(題辭)119) 안에는“욱손의 여동생을 데리
고 간 양반이 (욱손의 여동생을 데리고 가는 댓가로 욱손에게 지급
할) 논 (6두락) 값을 지급하지 않아, 욱손을 낭패하게 하였다. (욱손
이) 공히 납부한 20년 동안의 1결 50복의 세는, 현재 (욱손이) 빈궁
하여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 즉, 욱손이 납부해야할 전경춘

게, 90세 이상이면 아들 모두가 면제되었다. 관노(官奴)에게도 이와 같은 시


정제가 실시되었다. 시정으로서 군역을 면제받는 자는 매년 1회의 점열(點閱
: 자세히 사열함)을 받아야 하고, 3년마다 병조로부터 시정입안(侍丁立案)을
새로이 발급받아야 하였으며, 시정의 임무가 끝나면 곧 바로 군역을 져야 하
였다. 그러나 여기서의 시정은 군역을 면제 받기 위한 것이 아닌 관노인 욱손
의 동생 칠매를 향교에서의 천역을 면하게 하는 의미로 사용된 듯 하다.
119) 조선시대 관부에 올린 민원서인 소지(所志)의 여백에 쓰는 관부의 판결문 또는
처결문. 뎨김〔題音〕은 수령에게 올린 민원서에 쓴 처분(處分)이고, 제사는
관찰사에게 올린 민원서인 의송(議送)의 하단 여백에 쓰는 처분이다. 제사를
쓴 뒤 의송을 제출한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은 뎨김의 경우와 같다. 의송 중에
는 수령으로부터 해결을 보지 못한 민원이 상당수 있다. 제사를 받은 의송은
소송자료로, 또는 권리나 특전의 증거자료로서 소중히 간직되는 것이다. 의송
의 제사가 길어지는 경우에는 의송의 뒷면 또는 별지에 계속하여 쓴다. 현재
전하여지고 있는 의송은 거의 모두 제사를 받은 것이며, 제사가 없는 것은 관
부에 올리지 않은 문서이다.(최승희, 위의 책)

72 역주 학궁의례
의 세는 금년부터는 전경춘에게 징추하는 것이 사리에 마땅한 것이
고, (전경춘의) 본래의 논 6마지기에 이르러서는 매년 소출한 것이
필히 욱손이 납세한 수와 같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대납한) 수로
써 (욱손이 전경춘의 6마지기 논의 값을 지급하지 않아 전경춘이 납
부해야할 세곡을 욱손이) 대납하였기 때문에 욱손이 (전경춘의 논을)
매취한 약조는 없는 것과 같은 즉 전경춘이 스스로 경작하여 먹을
저 논이 이십년 동안 (국가에)납세한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전경춘
으로 하여금 공연히 논을 잃게 한 것은 일을 이루는 이치가 아니다.
이 논이 향교에 있어 진실로 이른바‘원래 내 땅이 아닌 것은 전경
춘에게 돌려준다'는 뜻으로 분부하고 문서를 만들어 있게 한다. 욱손
이 납부한 (전경춘의) 논은 즉시 본래의 주인인 전경춘에게 돌려주고
다시는‘억울한 땅(寃之地)’이라고 칭하지 않음이 마땅하다. 갑진년
(1724, 1784)년 10월 14일 도유사에게 하첩120)한다.

東門外 舊校基 位田

동문밖 옛 향교터의 위전121)

120) 조선시대 7품 이하의 관원에게, 또는 관부의 장(長)이 관속에게 내리는 문서로


서, 차정(差定 : 임명)·물침(勿侵 : 허가) 또는 훈령(訓令) 등에 첩을 내린다.
차정하는 첩은 차정첩(差定帖)이라 하고, 물금하는 첩은 물금첩(勿禁帖)이라 한
다. 수령이 향리나 제관(祭官)을 임명할 때에도 차첩을 쓴다.(최승희, 위의 책)
121) 우리 나라 중세 사회에서 역(役)을 지는 자에 대한 대가로서, 또는 관청의 경
비나 관청에 소속된 사람의 생활 보장 등의 명목으로 지급된 토지. 고려시대
의 전시과체제와 조선 초기의 과전법체제까지도 국가 재정의 운용을 통일적으
로 수납하고 통일적으로 지출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 용도에 따라 토지
를 분속시켜 사용하였다. 그 가운데 관청의 경비나 관청에 소속된 자 등에 대
해 지급되는 토지를 모두 위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73


乾隆三十二年 丁亥 五月 日 李等時改量査推.
건륭 32(1767, 영조 43)년 정해 5월 일 이○○ 등이 다시 양전
하여 추록하였다.

爲字 加田 五斗落.[庚辰 八月 初一日 金賢壽 朴子顕 兩人處相換 故


永爲爻周.]
위자122) 가(경)전123)은 5두락124)이다. [경진년(1760, 영조36) 8
월 초1일 김현수와 박자현 양인이 땅을 서로 교환하였으므로 영구히
효주(爻周)125)하였다.]

122) 자호(字號)는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5결의 토지마다 하나의 자호를 부과한다.


군내의 토지가 5,000결이 넘으면, 자호는 다시 천자(千字)부터 부여되는데,
이 경우 '재천'(再千) 또는 '삼천'(三千) 등으로 표기된다. 조선 전기에는 이 자
호의 부과를 '작정'(作丁)이라고 했으며, 답험(踏驗)과 면세 또는 징세의 단위
로서 의미가 있었다.
123) 조선시대 한번도 경작되지 않은 무주한광지(無主閑曠地)를 농지로 이용할 수
있도록 개간한 토지. 크게 평지가경전(平地加耕田)과 해택가경전(海澤加耕田)
이 있었다. 한광지로 있을 때는 토지대장에 등재되지 않다가 개간이 완료되면
등록되었으므로 양외가경전(量外加耕田)이라고도 불렀다. 미경작 토지라는 점
에서 진전(陳田)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진전은 한번이라도 경작된 적
이 있고 가경전은 그렇지 않다는 데 차이가 있다. 개발된 가경전을 토지 대장
에 등재할 때에는 기존의 경작지와 구별하기 위해,‘가전(가답) [加田(加畓)]
등으로 기재하였다.
124) 논과 밭의 면적을 재는 단위로 한 말[斗]의 씨를 뿌리는 데 적합한 토지의 면
적을 말하며, 우리말로는 마지기라 한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공식적인 면적
의 단위로 결부제(結負制)를 썼는데, 대부분의 농민들은 '마지기'를 더 많이 썼
다. 주로 논의 면적을 말하며, 평지·산지 또는 토지의 비옥도 등에 따라 그
면적이 달랐다. 대체로 논은 150~300평, 밭은 100~400평을 1마지기로 했
다. 결부법은 1906년 일제에 의해 척관법(尺貫法)으로 개정되었다가, 해방 후
인 1961년에 제정된 계량법에 의해 미터법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농지에 관한 한 농민들은 공식적인 미터법보다는 마지기를 널리 쓰고 있다.
125) 사실 조사에서 이상이 없음을 나타내는‘X’의 표시를 이르는 말로 효(爻)는
'X'를, 주(周)는 전체를 뜻한다.

74 역주 학궁의례
爲字 第四十 南犯126). 六等 續 直田. 長四十七尺 廣三十二尺. 二卜
六束. 量校坐地. 時作 張世道.
위자 제40지번127)은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128) 속129)·
직전130)이다. 길이는 47척, 폭은 32척이다. 넓이는 2부 6속이다. 교

126) 양범(量犯)은 양전시 측량의 방향을 표시한 것인데, 가령 '南犯'이면 남쪽을 보


면서 측량했다는 뜻이다.
127) 지번(地番)을 나타내는 것으로 매 자호마다 1번으로 시작하여 필지별로 순서를
매긴 것이다. 자호와 지번으로 토지의 소재를 확인할 수 있다. 토지를 매매·
증여할 경우 이 두가지를 반드시 명시했다.
128) 1444년(세종 26)에 확정된 공법(貢法)에 의하면 매년 농사의 풍흉과 토지의
등급을 합산하여 수세액을 정했다. 이중 토지의 등급을 비옥도에 따라 1~6등
전으로 나눈 것을 전분6등법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토지면적의 기본단위인 결
(結)은 절대면적이 아니라 미(米) 300두(斗)라는 생산량을 단위로 한 것이기
때문에, 각 등급에 따라 토지를 측정하는 척(尺)의 길이가 달랐다. 즉 주척(周
尺)을 기준으로 1등전은 4.775척, 2등전은 5.179척, 3등전은 5.703척, 4등
전은 6.434척, 5등전은 7.55척, 6등전은 9.55척을 기본단위로 하여 6종의
양전척(量田尺)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에 따라서 1등전 1결은 2,753.1평, 2등
전은 3,246.7평, 3등전은 3,931.9평, 4등전은 4,723.5평, 5등전은 6,897.4
평, 6등전은 1만 1,035.5평이 된다. 산전(山田)은 5~6등전으로 일괄 편입시
켰으며, 휴경전인 속전(續田)은 경작했을 때만 수세하되 6등전 이하로 작황에
따라 답험하여 세를 받게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까지도 토지는 하등급의 토
지가 많았으며, 실제로 등급을 정하는 데는 타당성이 분명하지 않아 많은 문
제가 야기되었다. 1653년(효종 4)에는 모든 양전척을 1등전척으로 통일하고,
결부수는 환산표를 만들어 수세액을 산정했다.
129) 조선시대 농경지 가운데 혹 경작하기도 하고 혹 묵히기도 하던 토지. 해마다
경작하는 것을 일컫는 정전(正田)과 대칭되는 뜻으로 쓰였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볼 때, 고려시대에는 휴한경(休閑耕)이 보편적이어서 1년간
휴한의 것을 일역전(一易田), 2년간 휴한의 것을 재역전(再易田)이라 칭하였
다. 조선시대에 와서 농법 수준은 대체적으로 상경(常耕)의 연작농업(連作農
業)이 보편화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개국 초부터 상경 농지의 진황(陳荒)은
금하는 한편, 무고하게 계속 진황시키는 경우 그 농지를 타인에게 개급(改給)
한다는 원칙을 지켜오고 있었다. 그 같은 생산력 수준을 바탕으로 세종 때 공
법(貢法)수세제를 마련해 가는 과정에서, 정전을 전안(田案)에다 등재한 뒤,
혹 경작하며 혹 묵히기도 하는 것을 거기에 잇대어 속록(續錄)한다는 뜻으로
속전이란 용어를 쓰게 되었다.
130) 전(田)과 답(畓)의 구분과 생김새를 표시한 것이다. 양전의 효과적 수행을 위해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75


좌지를 양전하였다. 경작자는 장세도이다.

內南 二作 四等續直田 長七十一尺 廣四十三尺 十六卜八束 量校坐


地 時作 金道輝.
40번지 내 남쪽 두 번째 경작지는 4등 속·직전이다. 길이가 71
척, 폭이 43척이다. 넓이는 16부 8속이다. 교좌지를 양전하였다. 경
작자는 김도휘이다.

內南 三作 四等續直田 長六十七尺 廣六十尺 二十二卜一束 量校坐


地 時作 文得中 鄭廣福.
40번지 내에 남쪽 세 번째 경작지는 4등 속·직전이다. 길이가
67척, 폭은 60척이다. 넓이는 22부 1속이다. 교좌지를 양전하였다.
경작자는 문득중과 정광복이다.

第四十一 東犯 四等直田 長一百尺 廣五十三尺 二十九卜一束 量校


位 時作 金百鍊.
[處有相換代土經官文跡 故不爲還推.]
41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직전이다. 길이는 100척
폭은 53척이다. 넓이는 29부 1속이다. 교좌지를 양전하였다. 경작자

여러 모양의 전답을 단순화 시킬 필요에 의해 5가지 전형(田形)을 정형화 하였


다. 그 유형은 방전(方田 : 정사각형)·직전(直田 : 직사각형)·구고전(勾股田
: 삼각형)·제전(梯田 : 사다리꼴)·규전(圭田 : 이등변삼각형) 등이 있다.

76 역주 학궁의례
는 김백련이다. [이 땅은 김백련이 다른 땅과 서로 바꿔 경작한다는
것이 관청문서에 남아있으므로 그대로 경작하게 한다.]

第四十二 東犯 四等續直田 長八十八尺 廣七十尺 三十三卜九束 量


校坐地 時作 首僕奴德承 金益鍊.
42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속·직전이다. 길이는
88척, 폭은 70척이다. 넓이는 33부 9속이다. 교좌지를 양전하였다.
경작자는 수복의 종인 덕승과 김익련이다.

第四十三 東犯 四等直田 長五十六尺 廣三十一尺 九卜六束 量校位


時作 金益鍊.
43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직전이다. 길이는 56척
이고 폭은 31척이다. 넓이는 9부 6속이다. 교위(전)을 양전하였다.
경작자는 김익련이다.

第四十四 北犯 四等直田 長三十二尺 廣十三尺 二卜三束 量校位 時


作 鄭益尙.
44번지는 북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직전이다. 길이는 32척
폭은 13척이다. 넓이는 2부 3속이다. 교위(전)을 양전하였다. 경작자
는 정익상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77


第四十五 西犯 四等直田 長三十三尺 廣十六尺 二卜九束 量校位 時
作 崔起必.
45번지는 서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직전이다 길이는 33척
폭은 16척이다. 넓이는 2부 9속이다. 교위(전)을 양전하였다. 경작자
는 최기필이다.

第四十六 北犯 五等 直田 長七十八尺 廣十九尺 五卜九束 量校位


時作 金■■.
46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5등 직전이다. 길이는 78척 폭
은 19척이다. 넓이는 5부 9속이다. 교위(전)을 양전하였다. 경작자는
김■■이다.

第四十七 東犯 五等 直田 長二十六尺 廣二十尺 二卜一束 量校位


時作 金圭贊 墓陳.
47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5등 직전이다. 길이는 26척
폭은 20척이다. 넓이는 2부 1속이다. 교위전을 양전하였다. 경작자
는 김규찬이다. 묘진131)이다.

[此兩庫 丁亥六月 日 因羅德圭呈狀 取考本文及量案 則以秋字田相換


分明 而秋字田 自校宮卽令次知收稅的實 故還爲出給後爻周.]
[이 두 곳은 정해년(1767) 6월 일에 나덕규의 정장으로 인해 그
본문과 양안을 취하여 살펴 보면, 추자전으로써 서로 바꾼 것이 분명

131) 묘지에 소속시킴으로써 조세를 면제받은 토지.

78 역주 학궁의례
하다. 그러나 추자전은 교궁에서 차지132)로 하여금 세금을 걷은 것
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돌려준 후에 효주(爻周)하였다.]

第四十八 東犯 五等直田 長七十七尺 廣四十三尺 十三卜二束 量校


位 時作 田貴得.
48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5등 직전이다. 길이는 77척 폭
은 43척이다. 넓이는 13부 2속이다. 교위전을 양전하였다. 경작자는
전귀득이다.

第四十九 東犯 五等直田 長四十尺 廣二十五尺 四卜 量校位 時作


申永宅.
49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5등 직전이다. 길이는 40척 폭
은 25척이다. 넓이는 4부이다. 교위전을 양전하였다. 경작자는 신영
택이다.

官字 第四十五 南犯 四等梯畓 二夜未 長一百一尺 大頭四十二尺 小


頭三十八尺 二十一卜七束 量首奴尙業 時作 尹師彦.

132) 조선 후기 각 궁방(宮房)의 재정관리 총책임자. 보통‘대차지’라고도 하였다.


주로 궁방전(宮房田)에서 징수되는 소작료 관리 및 회계, 물품조달 등의 사무
를 총괄하였다. 그 예하에 궁방의 내부업무를 담당하는 장무(掌務)·서원(書
員)·중사(中使) 등의 인원과, 외부업무 즉 궁방전의 감독·간평·수세를 담당
하는 도장(導掌)·궁차(宮次)·감관(監官)·마름〔舍音〕 등의 관리인을 두고
있었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79


관자 제45번지는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의 제답이다. 두
구획이다. 길이는 101척이고 큰 폭은 42척, 작은 폭은 38척이다. 넓
이는 21부 7속이다. 수노(首奴) 상업이 양전하였다. 경작자는 윤사언
이다.

[丁亥六月 日 因尹師彦呈狀 取考本文書 則當初自校宮買得徑斜於漢


城府的實 故還爲出給後爻周云. 而李相公遞歸在於五月十三日 則尹哥之
乘上菅遞易之時啚出爻周 文跡之狀 明若觀火 此則當査推次.]
[정해년(1767) 6월 일에 윤사언의 정장으로 인하여 본 문서를 취
하여 살펴보면 당초에 (윤사언)이 교궁으로부터 비탈진 곳을 사들인
것을 한성부에서 확인하여 (윤사언에게) 내어준 후 효주하였다고 말
하였다. 그러나 이상공이 5월 30일 교체되어 돌아와 있은 즉 윤가
(윤사언)가 윗글을 이어서 (이상공이 관직에서 교체되어 왔을때) 도로
주었음을 효주하였다. 문서의 내용이 명약관화하니 이러한 즉 마땅히
조사하여 추록하였다.]

已上 田畓一結六十六卜三束.
이상 전답의 넓이는 1결 60부 3속이다.

校宮墻外 左右新起加田

향교 담장 밖 좌우의 새로 경작한 토지

80 역주 학궁의례
東邊 貳斗落.
동쪽 담가 2두락.

東邊 伍斗落 上下二庫.
동쪽 담가 5두락 상하 2곳.

東邊 壹斗落.
동쪽 담가 1두락.

西邊 福娘買納 玖斗落田.
서쪽 담가 복랑이 사서 납부한 밭 9두락.

西邊 宋景寊買納 貳斗落畓 八夜未.


서쪽 담가 송경정이 사서 납부한 2두락 논 8배미133).

碑閣後田 壹斗落.
비각 뒤 밭 1두락.

133) 배미는 논두렁으로 된 구획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음차하여 한자로‘야미(夜


未, 夜味)’라 표기한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81


紅箭門外田 壹斗落.
홍살문 밖에 밭 1두락.

西邊 梁九音釗起耕田 二庫 捌斗落.
서쪽 담가 양구음리의 기경전 2곳 8두락.

朴雲成 起耕田 三庫 肆斗落.


박운성의 기경전134) 3곳 4두락.

梁夏瑞 起耕田 一庫 貳斗落.


양하서의 기경전 1곳 2두락.

金成淡 起耕田 一庫 貳斗落.


김성담의 기경전 1곳 2두락.

柿林後田 二庫 捌斗落.
감나무숲 뒤쪽 밭 2곳 8두락.

134) 경작되지 않는 땅을 개간한 논밭.

82 역주 학궁의례
黑寺洞

흑사동

宇字第十二田 五卜.
우자 제12번지 밭 5부.

加田 二卜.
가전 2부.

第十三田 六卜八束.
제13번지 밭 6부 8속.

加田 二卜五束.
가전 2부 5속.

第十四田 四卜六束.
제14번지 밭 4부 6속.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83


加田 二卜五束.
가전 2부 5속

量校坐地.
교좌지를 양전하였다.

加田 二卜.
가전 2부.

第十五田 四卜五束.
제15번지 밭 4부 5속.

第十六田 六卜.
제16번지 밭 6부.

第十九畓 八卜四束.
제19번지 논 8부 4속.

84 역주 학궁의례
宇字 第十二 北犯 五等直田 長五十尺 廣二十五尺 五卜 東西同人田
南崔尙俊田 北山 ■ 量陳舊鄭占化.
우자 제12번지는 북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5등의 직전이다. 길
이가 50척, 폭이 25척이다. 넓이는 5부이다. 동서쪽은 같은 사람
밭, 남쪽은 최상준의 밭, 북쪽은 산이다. 진전을 양전하였다. 예전에
는 정점화 소유였다.

[乾隆丁卯正月 南山洞校位三斗落 與金振章宇字田六斗落 呈禀相換


以西齋齋任劉遇珎名 成文以給.]
[건륭 정묘(1747)년 정월에 남산동에 있는 교위전 3두락과 김진장
의 우자전 6두락을 관청에 아뢰어서 상환한 것을 서재의 재임135) 유
우진의 이름으로 문서를 만들어 주었다.]

加田 二卜.
가전 2부이다.

第十三 東犯 五等直田 長六十五尺 廣二十六尺 六卜八束 東朴之先


田 南山 西同人陳田 北曹貴田 起 舊鄭占化.
제13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5등 직전이다. 길이는 15척,
폭은 26척이다. 넓이는 6부 8속이다. 동쪽은 박지선의 밭, 남쪽은
산, 서쪽은 같은 사람의 진전, 북쪽은 조귀의 밭이다. 예전 정점화의

135) 성균관이나 향교 따위에서 숙식하는 유생으로서 그 안의 일을 맡아보던 임원.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85


땅을 기경하였다.

加田 二卜五束.
가전 2부 5속.

第十六 北犯 六等梯田 長六十五尺 大頭五十尺 小頭二十四尺 六卜


三方山 北文仇叱同田 起 朴孝先.
제16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6등 제전이다. 길이는 65척,
큰 폭은 50척이고 작은 폭은 24척이다. 넓이는 6부이다. 세 방향은
산, 북쪽은 문구질동의 밭이다. 기경자는 박효선이다.

第十七 東犯 六等直田 長七十四尺廣二十二尺 四卜一束 東朴文中田


南同人畓 西朴孝允田 北山 陳 文仇叱同.
제17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직전이다. 길이는 74
척, 폭은 22척이다. 넓이는 4부 1속이다. 동쪽은 박문중의 밭, 남쪽은
박문중의 논, 서쪽은 박효윤의 논, 북쪽은 산이다. 진전으로 문구질동
의 것이다.

宇字第 畓 六卜四束 二斗落 八夜未.


우자 제 논 6부 4속 2두락 8배미이다.

86 역주 학궁의례
神堂洞

신당동

制字 第十二 南犯 五等梯畓 七夜未 長六十六尺 大頭三十六尺 小頭


二十五尺 八卜 東崔豆畓 南奴從南畓 西李士介畓 北奴莫生畓 起 奴尙
業.
제자 제12번지는 남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5등 제답으로 7배미이
다. 길이는 66척이고 큰 폭은 36척이고 작은 폭은 25척이다. 넓이는
8부이다. 동쪽은 최두의 논, 남쪽은 노비 종남의 논, 서쪽은 이사개
의 논, 북쪽은 노비 막생의 논이다. 기경자는 노비 상업이다.

內南二作 五等勾畓 連夜未 長三十九尺 活三十一尺 二卜四束.


번지 내 남쪽 두 번째 경작지. 5등의 구답이다. 배미가 이어져 있
다. 길이는 39척이며 활136)은 31척이다. 실제 면적은 2부 4속이다.

上道

상도

造字 第三十畓 十四卜九束 九斗落.

136) 구답(勾畓)이나 구전(勾田)의 꼭지점에서부터 아래 변까지의 길이.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87


조자 제30번지 논 14부 9속 9두락.

仙源巨末洞

선원거말동

知字 加畓 九卜二束 六斗落.
지자 지번은 가경논 9부 2속 6두락.

府內 南山洞 鄕校舊基 位田畓


강화부 내 남산동 향교 옛터 위전답

學宮移建誌云 卜校基於南山洞 申坐寅向之地 卽壽進宮庫基云云.


『학궁이건지』에 이르기를 남산동에 있는 향교 터를 상고해보면
신좌인향(申坐寅向)의 땅으로 곧 수진궁137) 창고 터라 운운하였다.

137) 조선시대 한성의 중부 수진방(壽進坊 : 종로구 수송동 부근)에 위치했던 궁.


조선시대 명례궁(明禮宮)·어의궁(於義宮)·용동궁(龍洞宮) 등과 함께 중요한
궁의 하나이다. 수진궁의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조선 예종의 둘
째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저택이었다 한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봉작
(封爵)을 받기 전에 사망한 대군·왕자와 출가하기 전에 사망한 공주·옹주들
을 합사(合祀 : 합동으로 제사를 모심)하는 사우(祠宇)로 변하였다. 수진방은
현재의 종로구 수송동 일대로 이 지역은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의
사택이 있었던 곳이며,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이곳에 제용감
(濟用監)·사복시(司僕寺) 등의 관서와 대군의 저택을 지은 듯하다.

88 역주 학궁의례
秋字 第二十內田 一卜 時作 金興■.
추자 제20번지 안에 있는 밭 1부이며 시작은 김흥■이다.

同加田 二卜 七斗落.
같은 지번 가전 2부 7두락.

同加田 三卜.
같은 지번 가전 3부.

第二十七 (이하 판독 불가)


제27번지

第二十八 (이하 판독 불가)


제28번지

第三十一 南犯 五等 圭田 長八十二尺 活三十九尺 六卜四束 東南路


西大君房倉 北川 起主 趙守興.
제31번지는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5등 규전이다. 길이는 82
척 활은 39척이이다. 넓이는 6부4속이다. 동쪽과 남쪽은 길, 서쪽은
대군방의 창고, 북쪽은 내이다. 기주는 조수흥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89


第三十二 (이하 판독 불가)
제32번지

第三十三 北犯 六等 圭田 長四十三尺 活八尺 四束 二方川 南倉基


西路 起主 奴順卜.
제33번지는 북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규전이다. 길이는 43
척이며 활은 8척이다. 넓이는 4속이다. 동쪽과 북쪽은 내, 남쪽은 창
고 터, 서쪽은 길이다. 기주는 노비 순복이다.

第三十七 北犯 五等 梯田 長五十二尺 大頭十八尺 小頭十五尺 三卜


二束 東婢士香田 南順卜田 西香男田 北山 起主 奴順卜.
제37번지는 북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5등 제전이다. 길이는 52
척, 큰 폭은 18척 작은 폭은 15척이다. 넓이는 3부 2속이다. 동쪽은
비 사향의 밭, 남쪽은 순복의 밭, 서쪽은 향남의 밭, 북쪽은 산이다.
기주는 노비 순복이다.

第三十九 西犯 六等 梯田 長六十九尺 大頭二十九尺 小頭十九尺 四


卜一束 東李香南田 二方川 北山 起主 林孝允.
제39번지는 서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제전이다. 길이는 69
척, 큰 폭은 29척, 작은 폭은 19척이다. 넓이는 4부 1속이다. 동쪽
은 이향남 밭, 남쪽과 서쪽은 내, 북쪽은 산이다. 기주는 임효윤이
다.

90 역주 학궁의례
第四十 南犯 六等 勾田 長一百二十四尺 活七十四尺 十一卜五束 東
洪叔只田 南愛珎田 西奴順卜田 北川 起主 朴民.
제40번지는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구전이다. 길이는 124
척이고 활은 74척이다. 넓이는 11부 5속이다. 동쪽은 홍숙지의 밭,
남쪽은 애진의 밭, 서쪽은 노비 순복의 밭, 북쪽은 내이다. 기주는
박민이다.

第四十 (이하 판독 불가)


제40번지

第六十三 南犯 六等 勾田 長四十六尺 活四十二尺 二卜四束 東羅愛


珎田 三方山 起主 羅業民.
제67번지는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구전이다. 길이는 46
척이고, 활이 42척이다. 넓이는 2부4속이다. 동쪽은 나애진의 밭, 세
방향은 산이다. 기주는 나업민이다.

第六十四 南犯 六等 勾田 長六十五尺 活十四尺 一卜一束 三方山


北同人田 起主 同人.
제64번지는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구전이다. 길이는 65
척이고, 활은 14척이다. 넓이는 1부 1속이다. 세방향은 산, 북쪽은
동인(나업민)의 밭이다. 기주는 동인(나업민)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91


第六十五 南犯 六等 直田 長三十尺 廣七尺 五束 四方山 起主 同人.
제65번지는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직전이다. 길이는 30척
폭은 7척이다. 넓이는 5속이다. 네 방향은 산이다. 기주는 동인(나업
민)이다.

第六十六 北犯 六等 直田 長三十尺 廣三尺 二束 四方山 起主 同人.


제66번지는 북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직전이다. 길이가 30
척이고, 폭은 3척이다. 네방향이 산이다. 기주는 동인(나업민)이다.

第六十七 北犯 六等 直田 長四十七尺 廣十六尺 一卜九束 東朴民田


三方羅業民田 起主 羅愛珎.
제67번지는 북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직전이다. 길이는 47
척, 폭이 16척이다. 면적은 1부 9속이다. 동쪽은 박민의 밭, 세방향
은 나업민의 밭이다. 기주는 나애진이다.

第六十八 北犯 六等 直田 長十九尺 廣十一尺 五束 東南同人田 西


羅業民田 北朴民田 起主 高春吉.
제68번지는 북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직전이다. 길이는 9
척, 폭은 11척이다. 넓이는 5속이다. 동쪽과 남쪽은 같은 사람의 밭,
서쪽은 나업민의 밭, 북쪽은 박민의 밭이다. 기주는 고춘길이다.

92 역주 학궁의례
第七十 東犯 六等 直田 長四十尺 廣二十九尺 二卜九束 東堰 南路
二方朴民田 起主 婢唜代.
제70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직전이다. 길이는 40
척이고 폭은 29척이다. 넓이는 2부 9속이다. 동쪽은 제언, 남쪽은
길, 두 방향은 박민의 밭이다. 기주는 노비 말대이다.

第七十一 南犯 五等 直田 長七十五尺 廣十三尺 三卜九束 東南婢貴


業田 三方堰厓 起主 朴民.
제71번지는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5등 직전이다. 길이는 75
척, 넓이는 13척이다. 넓이는 3부 9속이다. 동쪽과 남쪽은 비 귀업
의 밭, 세 방향은 제언이다. 기주는 박민이다.

第七十四 東犯 四等 直畓 五夜未 長四十一尺 廣十三尺 二卜九束


東李斤蘭畓 南貴業田 二方堤厓 起主 姜石民.
제74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직답이다. 5배미이다.
길이는 41척이고, 폭은 13척이다. 넓이는 2부 9속이며 동쪽은 이근
란의 논과, 남쪽은 귀업의 밭과 인접해 있다, 나머지 두 방향은 제언
이다. 기주는 강석민이다.

第七十五 東犯 五等 勾田 長三十八尺 活五尺 四束 南東川二方路


起主 李業實.
제75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5등 구전이다. 길이는 38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93


척이고, 활은 5척이다. 넓이는 4속이다. 남쪽과 동쪽은 내, 두방향은
길이다. 기주는 이업실이다.

第七十九 西犯 五等 勾田 長六十三尺 活三十三尺 四卜一束 東守興


畓 南崔士立田 北同人畓 西貴業田 起主 李根蘭.
제79번지는 서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5등 구전이다. 길이는 63
척이고 활은 33척, 넓이는 4부 1속이다. 동쪽은 수흥의 논, 남쪽은
최사립의 밭, 북쪽은 같은 사람 논, 서쪽은 귀업의 밭이다. 기주는
이근란이다.

甫音島位畓

볼음도 위답

栗木洞

율목동

粮字 第一 東犯 三等梯畓 六夜未 長七十三尺 大頭四十四尺 小頭三


十二尺 十九卜四束 東路 二方白民田畓 北崔應龍田 起 李萬益.
양자 제1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3등 제답이다. 6배미
이다. 길이는 73척이고, 큰 폭은 44척이고, 작은 폭은 33척이다. 넓

94 역주 학궁의례
이는 19부 4속다. 동쪽은 길, 두 방향은 박민전의 논, 북쪽은 최응
룡의 밭이다. 기는 이만익이다.

鄕校洞

향교동

續字 第三十 東犯 四等直畓 一夜未 長一百五十五尺 廣二十尺 十七


卜一束 東南位畓 西劉禮民畓 北田守龍田 起 梁萬雄 田永達.
속자 지번 제30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직답이다.
1배미이다. 길이는 155척, 폭은 20척이다. 넓이는 17부 1속이다. 동
쪽과 남쪽은 교위답, 서쪽은 유예민의 논, 북쪽은 전수룡의 밭이다.
기는 양만웅과 전영달이다.

第三十一 東犯 四等直畓 一夜未 長一百五十一尺 廣十尺 六卜六束


西位畓 北田次男田 東南位畓 起 梁萬雄
제31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직답이다. 1배미이다.
길이는 151척이고, 폭은 10척이다. 넓이는 6부 6속이다. 서쪽은 교
위답, 북쪽은 전차만의 밭, 동쪽과 남쪽은 교위답이다. 기는 양만웅
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95


第三十二 東犯 四等直畓 一夜未 長一百五十尺 廣十八尺 十卜六束
東南位畓 西北位畓 校位陳畓.
제32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직답이다. 1배미이다.
길이는 150척, 폭은 80척이다. 동쪽과 남쪽은 교위답, 서쪽과 북쪽
도 교위답이다. 교위 진답이다.

第三十三 北犯 三等梯畓 二夜未 役民畓 起 田次萬.


제33번지는 북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3등 제답이다. 2배미이다.
백성을 동원하여 경작하는 논이다. 기는 전차만이다

第三十四 東犯 五等直畓 四夜未 長五十八尺 廣三十七尺 十二卜一


束 東南位畓 西田次萬畓 北田有丁陳田 起 田仁建 田永達.
제34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5등 직답이다. 4배미이다.
길이는 58척이고, 폭은 37척이다. 동쪽과 남쪽은 교위답, 서쪽은 전
차만의 논, 북쪽은 전유정의 진전이다. 기는 전인건과 전영달이다.

第三十五 東犯 三等勾畓 五夜未 長一百五十一尺 活七十六尺 四十


卜二束 東南位畓 西北民陳田 起 田仁建.
제35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3등 구전이다. 5배미이다.
길이는 151척이고, 활은 76척이다. 넓이는 40부 2속이다. 동쪽과 남
쪽은 교위답, 서쪽과 북쪽은 백성들의 진전이다. 기는 전인건이다.

96 역주 학궁의례
內南二作 三等直畓 一夜未 長八十尺 廣四十七尺 二十六卜四束 三
方位畓 北崔玉山田 起 田厚日.
(제35번지)내 남쪽 두 번째 경작지는 3등 직답이다. 1배미이다.
길이는 80척, 폭은 47척이다. 넓이는 26부 4속이다. 세 방향은 교위
답, 북쪽은 최옥산의 밭이다. 기는 전후일이다.

內南三作 三等直畓 一夜未 長一百二十三尺 廣十一尺 九卜五束 四


方位畓 起 田有丁 田業從 田尙益.
(제35번지)내 남쪽 세 번째 경작지는 3등 직답이다. 1배미이다.
길이는 123척, 폭은 11척이다. 넓이는 9부 5속이다. 네 방향에 모두
교위답이다. 기는 전유정, 전업종, 전상익이다.

第三十六 南犯 四等直畓 二夜未 長一百六十七尺 廣三十五尺 三十


二卜二束 二方校山 西劉禮民陳田 北位畓 起 田尙男 田尙彦
제36번지는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직답이다. 2배미이다.
길이는 167척, 폭은 35척이다. 넓이는 32부 2속이다. 두 방향은 교
산, 서쪽은 유예민의 진전, 북쪽은 교위답이다. 기는 전상남과 전상
언이다.

第三十七 北犯 三等梯畓 長二百三十尺 大頭一百十七尺 小頭一百一


尺 一結七十五卜八束 東校山 南位畓 西北位畓 起 田尙男 田尙彦.
제37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3등 제답이다. 길이는 230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97


척, 큰 폭은 177척이다. 작은 폭은 101척이다. 넓이는 1결 75부 8
속이다. 동쪽은 교산, 남쪽은 교위답, 서쪽과 북쪽은 교위답이다. 기
는 전상남과 전상언이다.

紡字畓 丁餘 三卜六束.
방자 논은 정여138)이며 3부 6속이다.

內北 二作 三等梯畓 三夜未 長九十一尺 大頭六十六尺 小頭五十二


尺 三十七卜六束 東南校山 西位畓 北田應卜畓 起 禹行得 田士萬.
방자 지번 내 북쪽에 두 번 째 경작지는 3등 제답이다. 3배미이
다. 길이는 91척, 큰 폭은 66척, 작은 폭은 52척이다. 넓이는 37부
6속이다. 동쪽과 남쪽은 교산, 서쪽은 교위답, 북쪽은 전응복의 논이
다. 기는 우행득과 전사만이다.

紡字 第一 西犯 四等直畓 一夜未 長七十四尺 廣二十六尺 十卜六束


東南位畓 西田景仁畓 北田景寅畓 起 金鶴天.
방자 제1번지는 서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직답이다. 1배미
이다. 길이는 74척, 폭은 26척이다. 넓이는 10부 6속이다. 동쪽과
남쪽은 교위답, 서쪽은 전경인의 논, 북쪽은 전경인의 논이다. 기는
김학천이다.

138)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98 역주 학궁의례
第二 東犯 四等方畓 二夜未 長五十尺 廣五十尺 十三卜七束 東田應
卜畓 二方位畓 北金永益畓 起 崔玉立.
제2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방답이다. 2배미이다.
길이는 50척, 폭은 50척이다. 넓이는 13부 7속이다. 동쪽은 전응복
의 논, 두 방향은 교위답, 북쪽은 김영익의 논이다. 기는 최옥립이다.

勿巖串 買得畓

물암곳의 매득한 논

侍字 第九 南犯 六等梯畓 二夜未 長一百三尺 大頭三十六尺 小頭二


十三尺 七卜六束 東梁 南朴起春畓 西小路 北田■同畓 起 田士萬.
시자 제9번지는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6등 제답이다. 2배미
이다. 길이는 103척이며 큰 폭은 36척, 작은 폭은 23척이다. 넓이는
7부 6속이다. 동쪽에는 제언, 남쪽은 박기춘의 논, 서쪽은 작은 길,
북쪽에는 전■동의 논이다. 기는 전사만이다.

注簿洞 買得畓

주부동의 매득한 논

少字 第十四 東犯 梁越 四等梯畓 五夜未 長七十五尺 大頭四十七尺


小頭二十二尺 十四卜二束 東田尙益畓 西梁 南山 北田同叱金田 起田尙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99


益 二夜未 二卜二束陳 起 十二卜.
소자 제14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4등 제답이다. 5배미
이다. 길이는 75척, 큰 폭은 75척, 작은 폭은 22척이다. 넓이는 14
부 2속이다. 동쪽은 전상익의 논, 서쪽은 제언, 남쪽은 산, 북쪽은
전동질금의 밭이다. 기는 전상익이다. 두 번째 배미 2부2속은 진답
이고 기경은 12부이다.

已上 畓 四結三十三卜六束內
位畓 四結十一卜八束內 陳十卜六束 起四結一卜二束.
鄕校買得畓 二十一卜八束 陳二卜二束 起十九卜六束.
이상 논의 총 면적은 4결 33부 6속이고 이중
교위답 4결 11부 8속 내에 진답이 10부 6속, 기경이 4결 1부 2
속이다.
향교 매입 논 21부 8속 내에 진답이 2부 2속, 기경이 19부 6속이다.

學宮永屬[辛卯量付]

학궁에 영구히 속는 것[신묘(1711)년에 조사하여 붙였다.]

檢島鴟坪結箭處. [東東檢島 南乬島 西北海.]


검도 치평의 결전처. [동쪽으로는 동검도, 남쪽은 걸도, 서쪽과 북
쪽은 바다이다.]

100 역주 학궁의례
甫音島位畓後 潑草 結箭處. [三面大海 逢授崔戒雲 ○嘉慶己未 改逢
授於張順太子 出處每年收稅大民漁十二尾.]
볼음도의 위답 뒤 발초의 결전처. [3면이 큰 바다이고 최계운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였다. ○가경 기미(1799)년에는 고쳐 장순태의 아
들에게 맡겼다. 매년 큰 민어 12마리를 세금으로 거둔다.]

釣魚船 一隻 甫音島崔貴山處逢授 雜役勿侵.


고깃배 1척은 볼음도의 최귀산에게 맡겨 잡역을 지우지 못하게 하
였다.

釣魚船 一隻 下道金占述處逢授.
고깃배 1척은 하도의 김점술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였다.

小中船 一隻 上道朴順金名付.
소중선 1척은 상도의 박순금에게 명의를 주었다.

下道甕巖鹽盆一坐. [時尹萬生名付.]
하도 옹암 소금 가마 1좌 [윤만생에게 명의를 주었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01


上道 甕逸鹽盆一坐. [時金日隱金名付.]
상도 옹일 소금 가마 1좌 [김일은금에게 명의를 주었다.]

乾隆五十八年 癸丑 五月 日 位良面 乾坪洞 鄕校位畓 打量成冊

乾坪位畓 本是康凞二年 癸卯 十月 改量後 翌年甲辰 自本府防浦. 又


明年乙巳 賜牌校位之地 而當初劃給時 不過浦口 分派四面 散入於民田
之傍者也. 待其泥生民人輩 私自起墾三年耕食之後 則自校宮收稅者 已
是定例. 故自乙巳至辛卯 四十七年之間 漸次起墾者 爲五石落. 自壬辰
至壬戌 三十一年之間 又爲起墾者 三石十三斗五升落 合爲八石十三斗五
升落. 則防浦之內 隨處泥生之寸地尺土 莫非校位之所屬 而多有混入於
民人啚占之中 或稱 癸卯量前私築 或稱 泥生處起墾者爲主 而瞞告營府
則 在
案. 故今番改量時 車億才爲名者 倡率愚氓 以癸卯量前 私築橫侵之說
至有呈狀之境. 故自本校詰問 以若是癸卯量前私築 則何不入於癸卯量
案. 癸卯量田在於十月 明錄於量案末張 本府防浦在於甲辰春初 則雖欲
私築 其果鑿水於至臘之間 而築堰也. 況其畓庫■入於本校量付 自億才
之父贊澄 車尙億之父贊世 金大輝之祖弼成 韓命周之叔必達 而己爲作人
載在本校量案 則有何稱寃之端乎. 渠輩始乃語屈 現納其畓庫 其外姜仁
周 金大允 金弘徵 兪應圭 等 畓庫 亦皆混入於民田. 故今盡量推 而尾
附數條 以備日後之參考.

一 當初劃給時 自小橋下量給 而橋下校位 盡入於民人啚占. 故皆嫌小


橋之有標 移其橋石於一弓外地 所謂小橋今無. 橋石初見者無 處憑驗原

102 역주 학궁의례
■■知 而不官不知小橋 則橋下之畓 亦無以査出 後人欲知小橋之地. 則
丙■(字)二十八畓 堰下■■川 此其地也 以此憑考是齊.

一 辛卯量今已年久 田形四標牴牾不合 則無可憑信. 當以乙卯壬戌


(이하판독불가) 而壬量第次太錯 且乙量所載 第十八 二十二 二十四 二
十五 二十七 二十八 二十九 合玖庫皆漏不錄 未知.其故. 今番 則新加
耕外 不書加字 並舊加耕 而盡書第次 且書舊案 第次於紙頭 以爲考據
之地是齊.

건륭 58년(1793, 정조 17) 계축 5월 일 위량면 건평동 향교위답


양전 성책

건평동의 위답은 본래 강희 2년(1663, 현종 4)인 계묘년 10월 다


시 양전한 이후 다음해인 갑진(1664)년 본부(강화 유수부)에서 포구
를 막았다. 또 그 다음해인 을사년에는 포구를 막은 땅을 교위전으로
하사하였는데, 처음 그 땅을 구분해서 나누어 줄 때에는 포구가 사면
으로 나누어져 있어 인근 백성들의 땅에 산입되는 것에 불과하였다.
(이 땅은)갯벌에 살아가는 백성들이 사사롭게 스스로 개간을 하고
3년을 경작하여 먹은 것을 기다려 향교가 세금을 걷는 것이 이미 정
례가 되었다. 그리하여 을사년부터 신묘년에 이르기까지 47년 동안
개간한 땅의 면적은 5석이 되었다. 또 임진년에서 임술년까지 31년
동안 개간한 땅은 3석 13두 5승락이 되어 도합 8석 13두 5승락이었
다. 곧 포구를 막은 땅의 안에 있는 개펄을 경작하여 먹고 사는 백
성들의 손가락마디만한 땅과 한척의 흙은 향교 땅에 속하지 않는 곳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03


이 거의 없게 되었지만 백성들이 잘 모르고 향교 땅에 들어와 자기
들 땅이라고 하여 섞인 곳이 많아지게 되었다.
(백성들은) 혹은 계묘양전 전에 사사롭게 축조한 것이라 칭하고,
혹은 개펄을 개간한 자들이 주인이라고 하여 속여 해당 관청에 신고
하니, 전에 있었던 관청에서는 (건평)동의 간사하고 허위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엄격하게 처리할 수가 없었으니 이는 땅을
분급하였다는 문건이 불에 타버린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리하여 이
제 양전을 다시 할 때 차억재라는 자가 어리석은 백성들을 이끌고
와서 계묘양전 전에 사사로이 축조하고 횡침하였다는 말로 관청에
정장을 올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본 향교에서는 차억재에게 이와 같이 힐문하였다. 만약
이것이 계묘양전 이전에 사사롭게 개간한 땅이면 어찌 계묘양안에는
들어가 있지 아니한가? 계묘양전은 10월에 있었고 작성한 양안 끝
부분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듯이, 즉 본부가 포구를 막은 것은 갑진
년 봄 초에 있었는데 비록 사사롭게 땅을 개간하고자 하였더라도 동
지섣달에 과연 물을 퍼내고 둑을 쌓을 수가 있었겠는가? 하물며 그
논에 향교에서 양전하여 맡긴 차억재의 아비인 찬징으로부터 차상억
의 아비인 찬세, 김대휘의 조부인 필성, 한명주의 숙부인 필달이 작
인(作人)이라는 것이 양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억
울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들이 비로소 말을 공손히 하고 그
자리에서 논을 반납하기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강인주, 김대윤, 김홍
징, 유응규 등의 논 역시도 백성들 땅에 섞여 들어가 있는 상태이므
로, 이제 양전을 마침에 있어 작성한 양안 말미에 몇 가지 사항들을
붙여 후일 참고에 대비하고자 한다.

104 역주 학궁의례
하나, 처음 향교 땅을 줄때에 소교 아래로부터 양전하여 주었지만,
소교 아래의 교위전은 모두 백성들이 몰래 점유한 곳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소교 표지가 있는 것을 싫어해서 소교의 돌
을 먼 곳으로 옮겨 소위 소교는 지금은 없다. 처음 교석을 본 사람
들이 없고 원래 그 땅의 (유래를) 아는 자도 없고, 관에서도 소교를
알지 못하는즉 소교 아래 논 역시 관에서 나와 조사하지도 않았고,
이후 사람들도 소교의 땅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곧 병■(字) 28번
논 둑 아래 ■■천이 그 땅이다. 이에 근거하여 바로잡는다.

하나, 신묘년에 양전한 이래 시기가 오래되어 땅 모양과 사방의


경계가 불합리하게 되어 (땅의 모양과 경계가) 믿을 만한 근거가 없
어졌다. 을묘년과 임술년에 (이하 판독불가) 그리고 임술양안은 양전
의 지번 순서가 크게 어긋나 있고 또 을묘양안에 실려있는 제18,
22, 24, 25, 27, 28, 29번지 등 아홉 곳139)의 내역이 모두 기록되
어 있지 않았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이번에 새롭게 경작되는
땅 외에는 (천자호)글자를 쓰지 않고 모두 차례로 쓴다. 또한 지두
(紙頭)에 옛 양안의 차례를 기록하여 증거로 삼아 바로 잡으려 한다.

鄕校坪祠位東

향교 평사위 동쪽

139) 을묘양안에 기록되지 않은 번지는 18, 22, 24, 25, 27, 28, 29번지 등 7곳
인데 9곳이라 한 것은 오기인듯 하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05


第一 東犯 勾田 一夜未 長五十八尺 活四十二尺 三卜 東南浦 西祠
位 北校位 二斗五升落.
제1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구전 1배미이다. 길이는 58
척, 활은 12척이다. 넓이는 3부이다. 동쪽과 남쪽은 포구, 서쪽에는
사위전140), 북쪽은 향교위전이다. 2두 5승락이다.

第二 北犯 反直畓 一夜未 長三十八尺 廣二十一尺 一卜三束 西祠位


三方校位 一斗三升落 時 張世輝.
제2번지는 북쪽에서 양전하였다. 번141)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38척, 폭은 21척이다. 넓이는 1부 3속이다. 서쪽은 사위전, 세 방향
은 교위전이다. 1두 3승락이다. 시142)는 장세휘이다.

第三 北犯 直畓 一夜未 長三十尺 廣九尺 七束 西祠位 三方校位 七

140) 향교의 봄 제사에 쓰기 위해 마련한 전답.


141) 조선 후기 이래 수도농법(水稻農法)의 발달로 원래의 밭을 논으로 바꾸어 경작
하는 행위 또는 그 토지. 18세기 이후 농민들은 이앙법의 보급 등으로 생산력
이 발달한 논농사를 밭농사보다 유리한 것으로 판단함에 따라 번답의 풍조가
성행했다. 그러나 이앙법에 의한 논농사는 수리시설의 설치가 필수적인 것이
었는데, 번답의 경우 대개는 수리시설을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무분별하게 이
앙을 행해서 한재(旱災)를 당하는 때가 잦았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피
해를 줄이는 대책으로, 수리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번답을 모두 밭으로 환작
(還作)시키고 환작이 어려운 경우에는 가뭄에 강한 작물을 재배할 것을 권했
고, 이모작이 보급되지 않았던 금강 이북의 지역에서는 밭에서의 소득이 논농
사에 뒤지지 않으므로 번답은 철저히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생산
력의 발달뿐만 아니라, 밭작물에 비해서 미곡의 가격이 비쌌으므로 번답은 널
리 성행했다.
142) 현재의 경작자를 의미하는 듯하다.

106 역주 학궁의례
升落 陳.
제3번지는 북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30
척, 폭은 9척이다. 넓이는 7속이다. 서쪽에는 사위전, 세 방향은 교
위전이다. 7승락이다. 지금은 묵혀있다.

[旧第三] 第四 北犯 直田 長一百二十尺 廣二十七尺 六卜九束 西浦


北趙世雄田 二方校位 七斗落內 [三斗落 壬子 起 兪光國 四斗落陳]
[구 제3번지] 제4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전이다. 길이
는 20척, 폭은 27척이다. 넓이는 6부 9속이다. 서쪽은 포구, 북쪽은
조세웅의 밭, 두 방향은 교위전이다. 7두락 내 [3두락은 임자년에 유
광국이 기경하였다. 4두락은 진전이다.]

[旧加] 第五 西犯 直畓 一夜未 長二十四尺 廣四尺 三束 西浦 東校


田 南北祠位畓 三升落 時車億年.
[옛 가전] 제5번지는 서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24척, 폭은 4척이다. 넓이는 3속이다. 서쪽은 포구, 동쪽은
향교전, 남쪽과 북쪽은 사위전이다. 3승락이다. 시는 차억년이다.

[旧第三] 第六 越校田 東犯 直畓 一夜未 長一百尺 廣二十一尺 三卜


八束 東浦 三方校位 四斗落 陳.
[옛 제3번지] 제6번지는 교전너머에서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
답 1배미이다. 길이는 100척, 폭은 21척이다. 넓이는 3부 8속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07


동쪽은 포구, 방향은 교위전이다. 4두락이다. 지금은 묵혀있다.

[旧第一] 第七 東犯 直畓 一夜未 長三十二尺 廣八尺 八束 南浦 三


方校位 八升落 時 兪成得.
[옛 제1번지] 제7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32척, 폭은 8척이다. 넓이는 8속이다. 남쪽은 포구, 세 방향
은 교위전이다. 8승락이다. 시는 유성득이다.

[旧第二] 第八 東犯 方田 長廣三十三尺[比前長廣皆縮一尺] 八束 北
朱世華田 三方校位 三斗五升落 [比旧縮五升] 陳.
[옛 제2번지] 제8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방전이다. 길이
와 폭 모두 33척이다.[이전에 비해 길이와 폭 모두 1척 축소되었다].
넓이는 8속이다. 북쪽은 주세화의 밭, 세 방향은 교위전이다. 3두 5
승락이다. [이전에 비해 5승락이 축소되었다]. 지금은 묵혀 있다.

[旧加] 第九 南犯 直畓 一夜未 長五十尺 廣四尺[比前剩十七尺] 四


束 東西北校位 南浦 一斗落 [比前剩六升] 時 兪成得.
[옛 가전] 제9번지는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50척, 폭은 4척이다. [이전에 비해 17척이 늘어났다.] 넓이는
4속이다. 동쪽, 서쪽, 북쪽은 교위답, 남쪽은 포구이다. 1두락이다.
[이전에 비해 6승락이 늘어났다.] 시는 유성득이다.

108 역주 학궁의례
[旧第三] 第十 東犯 勾田 長五十五尺 活二十八尺 一卜九束 北朱世
華田 南浦 二方校位 一斗九升落 陳.
[옛 제3번지] 제10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전이다. 길이
는 55척, 활은 28척이다. 넓이는 1부 9속이다. 북쪽은 주세화의 밭,
남쪽은 포구, 동·서쪽은 교위전이다. 1두 9승락이다. 지금은 묵혀
있다.

[旧第四] 第十一 東犯 直畓 一夜未 長二十七尺 廣十尺 四束 南浦


三方校位 四升落 時 兪成得.
[옛 제4번지] 제11번지는 동쪽을 보며 측량하였다. 직답 1배미이
다. 길이는 27척, 폭은 10척이다. 넓이는 4속이다. 남쪽은 포구, 세
방향은 교위전이다. 4승락이다. 시는 유성득이다.

[旧第五] 第十二 東犯 直田 長二十尺 廣六尺 四束 南浦 三方校位


四升落 陳.
[옛 제5번지] 제12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답이다. 길이
는 20척, 폭은 6척이다. 넓이는 4속이다. 남쪽은 포구, 세 방향은
교위전이다. 4승락이다. 지금은 묵혀있다.

[旧第六] 第十三 北犯 直畓 一夜未 長三十尺四 廣二十七尺[比前剩


七尺] 六束 四方校位 三斗落[比旧剩二斗落] 時 李元彬.
[옛 제6번지] 제13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답 1배미이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09


다. 길이는 30척, 폭은 27척이다. [이전에 비해 7척이 늘어났다.] 넓
이는 6속이다. 사방이 교위전이다. 3두락이다. [이전에 비해 2두락
늘어났다.] 시는 이원빈이다.

[旧加] 第十四 東犯 梯畓 一夜未 長十九尺[比前剩九尺] 大頭八尺


小頭四尺 三束 四方校位 二斗五升落[比旧剩斗四升] 時 李元彬.
[옛 가전] 제14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제답 1배미이다.
길이는 19척, [이전에 비해 9척이 늘어났다], 큰 폭은 8척, 작은 폭
은 4척이다. 넓이는 3속이다. 네 방향이 교위전이다. 2두 5승락이
다. [이전에 비해 1두 4승락이 늘어났다.] 시는 이원빈이다.

[旧加] 第十五 北犯 勾畓 一夜未 長四十八尺 活三十尺 一卜三束 東


北浦(이하 판독 불가) 陳.
[옛 가전] 제15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1배미이다.
길이는 48척, 활은 30척이다. 넓이는 1부 3속이다. 동쪽과 북쪽은
포구, (이하 판독 불가) 지금은 묵혀있다.

[旧第七] 第十六 西犯 直田 長二十四尺 廣九尺 九 (이하 판독 불가)


[옛 제7번지] 제16번지는 서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전이다. 길이
는 24척, 폭은 9척이다. 넓이는 9

110 역주 학궁의례
[旧第八] 第十七 南犯 梯畓 一夜未 長三十六尺 大頭■■■尺小頭
(이하 판독 불가).
[옛 제8번지] 제17번지는 남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제답 1배미이
다. 길이는 36척, 큰 폭은 -■■척, 작은 폭은

[旧第九] 第十八 東犯 直畓 一夜未 長六十■尺 廣十八尺 (이하 판


독 불가)
[옛 제9번지] 제18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답 1배미이
다. 길이는 6■척, 폭은 18척이다.

[旧第十] 第十九 西犯 勾改直畓 一夜未 長■■■■ 廣■■■■(이


하 판독 불가)
[옛 제10번지] 제19번지는 서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을 고쳐
직답으로 하였고 1배미이다. 길이는 ■■■척, 폭은■■■척이다.

[旧十一] 第二十 西犯 勾畓 一夜未 長■■■■ 活二■■■(이하


판독 불가)
[옛 11번지] 제20번지는 서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1배미이
다. 길이는 ■■■척, 폭은 ■■■척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11


[旧十二] 第二十一 北犯 梯田 長一百■■■■■■■八尺(이하 판
독 불가)
[옛 12번지] 제21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제전이다. 길이
는 1■■척, ■■■■■■8척이다.

旧十三 第二十二 北犯 圭田 長八十尺 活四十(이하 판독 불가) 陳.


[옛 13번지] 제22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규전이다. 길이
는 80척, 활은 40척이다. (이하 판독 불가) 지금은 묵혀있다.

[旧十四] 第二十三 北犯 直田 長四十七尺 廣三十尺 三卜八束 西祠


位 三方校位 三斗落 陳.
[옛 14번지] 제23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전이다. 길이
는 47척, 폭은 30척이다. 넓이는 3부 8속이다. 서쪽은 사위전, 세
방향은 교위전이다. 3두락이다. 지금은 묵혀있다.

[旧十五] 第二十四 北犯 直田 長五十尺 廣二十尺 二卜五束 西北祠


位 東南校位 二斗五升落 陳.
[옛 15번지] 제24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전이다. 길이
는 50척, 폭은 20척이다. 넓이는 2부 5속이다. 서쪽과 북쪽은 사위
전, 동쪽과 남쪽은 교위전이다. 2두 5승락이다. 지금은 묵혀있다.

112 역주 학궁의례
[旧十六] 第二十五 東犯 勾畓 二夜未 長八十二尺 活五十四尺 五卜
六束 東浦 北祠位 西南校位 七斗落內一斗落 時作人 金弘徵 處還推
時 姜啓元.
[옛 16번지] 제25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2배미이
다. 길이는 82척, 활은 54척이다. 넓이는 5부 6속이다. 동쪽은 포
구, 북쪽은 사위전, 서쪽과 남쪽은 교위전이다. 7두 락 안에 1두락의
시는 김홍징인데, (이 땅은) 바꾸어서 지금의 시는 강계원이다.

[旧加] 第二十六 東犯 勾畓 一夜未 長五十尺[比前剩十五尺] 活二十


七尺[比前縮一尺] 一卜二束 東南浦 北路 西校位畓 二斗落 [比旧剩八
升] 舍音私耕.
[옛 가전] 제26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50척, [이전에 비해 15척이 늘어났다.] 활은 27척이다. [이전
에 비해 1척이 줄었다.] 넓이는 1부 2속이다. 동쪽과 남쪽은 포구,
북쪽은 길, 서쪽은 교위전이다. 2두락이다. [이전에 비해 8승락이 늘
었다.] 마름이 경작한다.

[旧加] 第二十七 南犯 勾畓 一夜未 長四十七尺 活二十一尺 一卜一


束 東北浦 西南校位 一斗一升落 時 姜啓元.
[옛 가전] 제27번지는 남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1배미이다.
길이는 47척, 활은 21척이다. 넓이는 1부 1속이다. 동쪽과 북쪽은
포구, 서쪽과 남쪽은 교위전이다. 1두 1승이다. 시는 강계원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13


[旧十七] 第二十八 浦越 東犯 勾畓 一夜未 長十七尺 活十四 尺 三
束 北路 三方浦 三升落 舍音私耕.
[옛 17번지] 제28번지는 포구 너머에서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1배미이다. 길이는 17척, 활은 14척이다. 넓이는 3속이다. 북
쪽은 길, 나머지 세 방향은 포구이다. 3두락이다. 마름이 경작한다.

[乙卯案十八] 第二十九 路越犯 直畓 夜未 長五十二尺 廣二十五尺


三卜一束 北李時厚畓 東路 二方浦 二斗落 旧尹就成 時 兪光周.
[을묘양안 18번지] 제29번지는 길 너머에서 양전하였다. 직답이다.
배미의 길이는 52척, 폭은 25척이다. 넓이는 3부 1속이다. 북쪽은
이시후의 논, 동쪽은 길, 나머지 두 방향은 포구이다. 2두락이다. 전
에는 윤취성이 경작하였으나 시는 유광주이다.

[旧 十九] 第三十 路越東犯 直畓 二夜未 長八十一尺 廣二十一尺 三


卜三束 [乙案作五束] [壬案作一束] 二方浦 二方路 三斗落 兪光周.
[옛 19번지] 제30번지는 길 건너에서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
답 2배미이다. 길이는 81척, 폭은 21척이다. 실제 면적은 3부 3속이
다. [을묘 양안에는 5속] [임술 양안에는 1속] 두 방향은 포구, 두
방향은 길이다. 3두락이다. 시는 유광주이다.

[旧加] 第三十一 加北犯 直改勾畓 一夜未 長三十一尺[比前剩二十


尺] 活二十八尺[比前剩二十五尺] 三束 東北浦 西路 南校位 三升落[比

114 역주 학궁의례
旧剩二升] 舍音私耕.
[옛 가전] 제31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답을 고친 구답
1배미이다. 길이는 31척, [전에 비해 20척 늘었다.] 활은 28척이다.
[전에 비해 25척 늘었다.] 넓이는 1부 3속이다. 동쪽과 북쪽은 포
구, 서쪽은 길, 남쪽은 교위전이다. 3승락이다. [이전에 비해 2승락
늘었다.] 마름이 경작한다.

浦越漢石橋東

포구 건너 있는 한석교 동쪽

[旧二十] 第三十二 東犯 直改圭畓 一夜未 長二十五尺 活十四尺 五


束 東路 三方浦 六升落 舍音私耕.
[옛 20번지] 제32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답을 고친 규
답 1배미이다. 길이는 25척, 활은 14척이다. 넓이는 5속이다. 동쪽
은 길, 나머지 세 방향은 포구이다. 6승락이다. 마름이 경작한다.

[旧加] 第三十三 加南橋越 直畓 一夜未 長三十八尺[比前剩十四尺]


廣十尺[比前剩七尺] 二束 西北浦 東山 南校位 五升落[比旧剩三升] 時
高以秋.
[옛 가전] 제33번지는 가남교 너머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38척,
[전에 비해 14척이 늘어났다.] 폭은 10척이다. [전에 비해 7척이 늘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15


어났다.] 넓이는 2속이다. 서쪽과 북쪽은 포구, 동쪽은 산, 남쪽은
교위전이다. 5승락이다. [전에 비해 3승락 늘어났다.] 시는 고이추다.

[旧二十一] 第三十四 南犯 勾畓 一夜未 長四十八尺 活四十五尺 一


卜四束 東山西浦南北校位 一斗五升落 兪光周.
[옛 21번지] 제34번지는 남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1배미이
다. 길이는 48척, 활은 45척이다. 넓이는 1부 4속이다. 동쪽은 산,
서쪽은 포구, 남쪽과 북쪽은 교위전이다. 1두 5승락이다. 시는 유광
주이다.

[乙卯案 二十二 旧加] 第三十五 南犯 直改勾畓 五夜未 長一百五十


尺 活十八尺 三卜 東北山西南浦 三斗落 [乙案以三卜三斗落 明白載錄
而壬案只二四束 四升落入錄加怪 今依改量盡推 壬案漏今推] 時 韓命周
乙案作人必達之姪.
[을묘년 양안 22번지 구 가전] 제35번지는 남쪽을 보며 양전하였
다. 직답을 고친 구답 5배미이다. 길이는 150척, 활은 18척이다. 넓
이는 3부이다. 동쪽과 북쪽은 산, 서쪽과 남쪽은 포구이다. 3두락이
다. [을묘양안에는 3부 3두락으로 명백히 실려 기록되어 있으나 임술
양안에는 단지 넓이가 23속, 4승락으로 기록되어 있어 괴이함이 더
해졌으나, 지금 다시 양전에 의해 임술양안에는 누락된 것을 다시 추
록한다.] 시는 한명주이다. 을묘양안의 작인은 필달의 조카이다

116 역주 학궁의례
乙巳量付小橋下浦越

을사년 양안에 있는 소교 아래 포구 너머

[旧二十二] 第三十六 西犯 反直畓[加田 連幅並二夜未] 長五十尺 廣


二十三尺 二卜八束 四方校位 (이하 판독 불가).
[옛 22번지] 제36번지는 서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번 직답이다.
[가전으로 연이어 나란히 붙어 있는 2배미이다.] 길이는 50척, 폭은
23척이다. 넓이는 2부 8속이다. 네 방향 교위답이다.

[旧二十三] 第三十七 北犯 勾畓 二夜未 長五十九尺 活二十九尺 一


卜一束 三方浦 南(이하 판독 불가).
[옛 23번지] 제17번지는 북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구답 2배미이
다. 길이는 59척, 활은 29척이다. 넓이는 1부 1속이다. 세 방향은
포구, 남쪽은.

[此二庫 今番改量則合爲直畓一庫 而長一百五尺 廣二十二尺.


[이 두 곳은 이번 양전을 다시 할 때 합쳐 직답 한 곳이 되었다.
그리고 길이는 105척, 폭은 22척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17


[乙卯案二十四] 第三十八南犯 勾畓 夜未 長五十四尺 活三十八尺 二
卜一束 北■■■田(이하 판독 불가).
[을묘양안 24번지] 제38번지는 남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구답으
로 배미가 있다. 길이는 54척, 활은 38척이다. 넓이는 21부 1속이
다. 북쪽은 ■■■의 밭.

[四標則東川西南防築北車億才畓]
[사표는 곧 동쪽은 내, 서쪽과 남쪽은 방축, 북쪽은 차억재의 논이다.]

[乙卯案二十五] 第三十九 東犯 勾畓 夜未 長三十尺 活十九尺 七(이


하 판독 불가)
[을묘양안 29번지] 제38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구답
배미가 있다. 길이는 30척, 활은 19척이다.

[已上兩庫 今合爲直畓.]
[이상의 두 곳은 이제 합하여 직답이 되었다.]

[旧加] 第四十 東犯 直畓 一夜未 長三十一尺廣十二尺 (이하 판독


불가)
[옛 가전] 제40번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31척, 폭은 12척이다.

118 역주 학궁의례
[旧加] 第四十一 西犯 越校田 勾畓 一 (이하 판독 불가)
[옛 가전] 제41번지는 서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교위전 너머에
있으며 구답이다.

[旧二十六] 第四十二 南犯 浦越梯畓 一夜未 (이하 판독 불가)


[옛 26번지] 제42번지는 남쪽에서 양전하였다. 포구 너머에 있는
제답 1배미이다.

[乙卯案二十七] 第四十三東犯 浦越直畓 一夜未 長五十九尺廣十五尺


(이하 판독 불가)
[을묘양안 27번지] 제43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포구 너
머에 있는 직답으로 1배미이다. 길이는 59척, 폭은 15척이다.

[今番改量 則二庫合爲一夜未] (이하 판독 불가).


[이번 양전을 다시 할 때 두 곳이 합쳐저 1배미가 되었다.]

[乙卯案二十八] 第四十四 北犯 勾畓 一夜未 長三十■■ 活十八尺


(이하 판독 불가) [比前長剩四尺活縮三尺.]
[을묘양안 28번지] 제44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1배
미이다. 길이는 3■척, 활은 18척이다. (이하 판독 불가) [이전에 비
해 길이는 4척이 늘어났고, 활은 3척이 줄어들었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19


[乙卯案二十九] 第四十五 東越 勾改圭畓 一夜未 長二十四尺 活二十
九尺 一卜九束 東■■■畓 北川 西南校位 二斗落. [壬案漏今推.] (이
하 판독 불가)
[을묘양안 29번지] 제45번지는 동쪽 너머 구답을 고친 규답 1배미
이다. 길이는 24척, 활은 29척이다. 넓이는 1부 9속니다. 동쪽은 ■
■■의 논, 북쪽은 내, 서쪽과 남쪽은 교위전이다. 2두락이다. [임술
양안에는 누락되어 지금 추록한다.]

[乙卯案三十] 第四十六南犯 勾畓 一夜未 長五十二尺 活三十四尺 二


卜一束 東南防築 西北校位 二斗落 [壬案漏今推.] 時(이하판독불가)
[을묘양안 30번지] 제46번지는 남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1배
미이다. 길이는 52척, 활은 34척이다. 넓이는 2부 1속이다. 동쪽과
남쪽은 방축, 서쪽과 북쪽은 교위전이다. 2두락이다. [임술양안에는
누락되어 지금 추록한다.] 시는 ■■■이다. (이하 판독 불가)

[旧三十一] 第四十七 南越 勾畓 一夜未 長十九尺廣十七尺 八束 西


浦 東丁守完田 北車贊澄田 南張江承畓 一斗落 時 高雲■.
[옛 31번지] 제47번지는 남쪽 너머 구답 1배미이다. 길이는 19척,
폭은 17척이다. 실제 면적은 8속이다. 서쪽은 포구, 동쪽은 정수완
의 밭, 북쪽은 차찬징의 밭, 남쪽은 장강승의 논이다. 1두락이다. 시
는 고운■이다.

120 역주 학궁의례
[旧加] 第四十八 東越 勾改梯畓 一夜未 長四十九尺 大頭十七尺 小
頭十一尺 一卜 東南兪石望畓 西車尙俊畓 北川 一斗四升落 [比旧剩四
升] 舍音私耕.
[옛 가전] 제48번지는 동쪽 너머 구답을 고친 제답 1배미이다. 길
이는 49척, 큰 폭은 17척, 작은 폭은11척이다. 넓이는 1부이다. 동
쪽과 남쪽은 유석망의 논, 서쪽은 차상준의 논, 북쪽은 내이다. 1두
4승락이다. [이전에 비해 4승락이 늘어났다]. 마름이 경작한다.

[旧加] 第四十九 北川越 梯畓 一夜未 長三十九尺 [比前剩四尺] 大


頭二十尺[剩三尺] 小頭九尺[縮一尺] 一卜二束 南西川 北全柒華畓 東金
戒徵畓 一斗落[比旧縮二升] 舍音私耕.
[옛 가전] 제49번지는 북쪽 내 너머 제답 1배미이다. 길이는 39
척, [이전에 비해 4척이 늘어났다.] 큰 폭은 29척, [3척이 늘어났다.]
작은 폭은 9척이다. [1척이 줄어들었다.] 넓이는 1부 2속이다. 남쪽
과 서쪽은 내, 북쪽은 전칠화의 논, 동쪽은 김계징의 논이다. 1두락
이다. [전에 비해서 2승락이 줄었다.] 마름이 경작한다.

[新加] 第五十 西犯 圭畓 二夜未 長三十尺 活六尺 二束 二方川 二


方校位 二升落 時姜仁輝
[신 가전] 제50번지는 서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규답 2배미이다.
길이는 30척, 활은 6척이다. 넓이는 2속이다. 두 방향은 내, 두 방
향은 교위전이다. 2승락이다. 시는 강인휘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21


[旧三十二] 第五十一西 浦越 勾畓 一夜未[此二夜未今合爲一夜未]
長十九尺 活十三尺 四束 北浦 三方姜成時畓 四升落 時 姜仁曄.
[옛 32번지] 제51번지는 포구 너머 구답 1배미이다. [이곳은 2배
미였는데 지금은 합해져서 1배미가 되었다.] 길이는 19척, 활은 13
척이다. 넓이는 4속이다. 북쪽은 포구, 세방향은 강성시의 논이다. 4
승락이다. 시는 강인엽이다.

[旧三十四] 第五十二 西犯 梯畓 一夜未 長六十尺 大頭三十尺 小頭


十五尺 三卜四束 三方浦 東鄭位達畓 四升落 時 同人.
[옛 30번지] 제52번지는 서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제답 1배미이
다. 길이는 60척, 큰 폭은 30척, 작은 폭은 15척이다. 넓이는 3부 4
속이다. 세 방향은 포구, 동쪽은 정위달의 논이다. 4승락이다. 시는
강인엽이다.

[旧三十五] 第五十三 南越 直畓 一夜未 長四十尺 廣十七尺 [比前剩


十尺] 七束 三方浦 西梁取澄畓 三斗五升落[比旧剩一斗五升] 時 同人.
[옛 35번지] 제53번지는 남쪽 너머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40척,
폭은17척이다. [전에 비해 19척이 늘어났다.] 넓이는 7속이다. 세방
향은 포구, 서쪽은 양취징의 논이다. 3두 5승락이다. [옛날에 비해 1
두 5승락이 늘어 났다.] 시는 강인엽이다.

122 역주 학궁의례
第五十四 北浦越 直畓 一夜未 長三十尺 廣七尺 三束 四方浦 三升
落 陳.
제54번지는 북쪽 포구 너머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30척, 폭은 7
척이다. 넓이는 3속이다. 사방이 포구이다. 3승락이다. 지금은 묵혀
있다.

第五十五 西犯 梯畓 一夜未 長六十尺 大頭二十五尺 小頭二十尺 三卜


二束 南朴有良畓 東北浦 西姜成老畓 三斗落 時起 一斗五升落 金龍蕃.
제55번지는 서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제답 1배미이다. 길이는 60
척, 큰 폭은 25척, 작은 폭은 20척이다. 넓이는 3부 2속이다. 남쪽
은 박유량의 논, 동쪽과 북쪽은 포구, 서쪽은 강성노의 논이다. 3두
락은 시기(현재 경작하고 있는 토지)인데 1두 5승락이며 시는 김용번
이다.

二作 東犯 直畓 一夜未 長十五尺 廣六尺 二束 西浦 南梁河靑田 東


朴太萬田 北校位 二升落 時 金世允.
두 번째 경작지는 동쪽을 보면서 양전하였다. 직답 1배미이다. 길
이는 15척, 폭은 6척이다. 넓이는 2속이다. 서쪽은 포구, 남쪽은 양
하청의 밭, 동쪽은 박태만의 밭, 북쪽은 교위전이다. 3두락이다. 시는
김세윤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23


三作北犯 直畓 一夜未 長十八尺 廣九尺 四束 北奴云伊畓 西浦 東
南校位 一升落 [比旧縮三升] 時 同人.
세 번째 경작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답 1배미이다. 길이
는 18척, 폭은 9척이다. 넓이는 4속이다. 북쪽은 노비 운이의 논이
고, 서쪽은 포구, 동쪽과 남쪽은 교위전이다. 1두락이다. [이전에 비
해 3승락이 줄었다.] 시는 김세윤이다.

壬案 第四 東越防築 長一百二十尺 廣三十尺 九卜 九斗落內 時起幷


已上三作爲一斗八升落 餘陳爲七斗二升落.
임술양안에 의하면 제4번지는 동쪽 너머 방축이다. 길이는 120척,
폭은 30척이다. 넓이는 9부이다. 9마지기 안에 현재 경작하고 있는
토지는 이상 세 경작지를 합하면 1두 8승락이며, 나머지 묵혀있는
땅은 7두 2승락이다.

[舊第六] 貳拾柒卜 壹石拾壹斗落內[長一百二十尺 活九十尺] 起四卜


二束 四斗落 此四斗落 卽五十七八金大■姜仁周所作二 陳二十二卜八束
一石七斗落.
[옛 제6번지] 넓이는 이십칠부이다. 2섬 11두락 가운데[길이 120
척, 활은 90척] 경작하고 있는 땅은 4부 2속으로 4두락이며, 이 4두
락은 곧 57·8번지를 김대■ 강인주가 경작하고 있으며, 진전은 22
부 8속으로 1석 7두락이다.

124 역주 학궁의례
[旧第一] 第五十六 乙巳量付 小橋下浦越南犯 圭改直畓 一夜未 長六
十尺 廣四十八尺 [比前剩十八尺] 四卜五束 二方浦 南車萬戒田 北康順
道畓 五斗落 今推於康順道 舍■■■(音私耕).
[옛 제1번지] 제56번지는 을사(1725)년 양전 장부에는 소교 아래
포구 너머에서 남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규답을 고친 직답 1배미이
다. 길이는 60척 폭은 48척이다. [이전에 비해 18척이 늘어났다.]
넓이는 4부 5속이다. 두 방향은 포구, 남쪽에는 차만성의 밭, 북쪽에
는 강순도의 논이다. 5두락이다. 지금 강순도에게서 돌려받아 마름이
경작한다..

[旧第六] 第五十七 乙巳量付 辛卯乙卯改量時漏落 壬戌所推 南犯 路


越 直畓 一夜未 長二十六尺 廣二十一尺 ■■二束 東金東宅畓 南金大
允畓 西校位 北防築 一斗五升落 時同人. [今依壬案量推.]
[옛 제6번지] 제57번지는 을사년 양전 장부에는 신묘(1711)년과
을묘(1735)년 다시 양전할 때 누락되었다. 임술(1742)년에 추록하였
다. 남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길 건너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26척,
폭은 21척이다. 넓이는 ■부 2속이다. 동쪽은 김동택의 밭, 남쪽은
김대윤의 밭, 서쪽에는 교위전, 북쪽으로는 방축이다. 1두 5승락이
다. 시는 같은 사람이다. [이 내용은 임술년 양안에 의거하였다.]

第五十八 西犯 直畓 一夜未 長五十八尺 廣三十 (이하 판독 불가) .


제 58번지는 서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58
척이며 폭은 30.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25


老姑山下毛 (이하 판독 불가)

노고산 아래 모

[旧三十] 第五十九 西浦越 梯畓 一夜未. (이하 판독 불가)


[옛 30번지] 제59번지는 서쪽 포구 너머 제답 1배미이다.

[旧三十八] 第六十 北犯 直畓 二夜未. (이하 판독 불가)


[옛 38번지] 제60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답 2배미이다.

[旧三十九] 第六十一北犯 勾畓 二夜未. (이하 판독 불가)


[옛 39번지] 제61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2배미이다.

[旧四十] 第六十二 北犯 浦越 勾畓 二夜未 長四十二尺 活三十八尺


■■■■ 二斗五升落 舍音私耕.
[옛 40번지] 제62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포구 너머 구답
2배미이다. 길이는 42척, 활은 38척이다. 넓이는 ■■■■이다. 2두
5승락이다. 마름이 경작한다.

126 역주 학궁의례
[新加] 第六十三 北犯 勾畓 一夜未 長三十一尺 活二十尺 (이하 판
독 불가) 東浦 三方校位 一斗落 時 朴險■.
[신 가전] 제63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1배미이다.
길이는 31척, 활은 20척이다. (이하 판독 불가) 동쪽은 포구, 나머지
세 방향은 교위전이다. 1두락이다. 시는 박험■이다.

[旧四十一] 第六十四 北犯 勾畓 一夜未 長四十五尺[比前剩五尺] 活


二十一尺[比前剩一尺} 六束 三方校位 西兪萬興畓 一斗落[比旧剩四升]
時 同人.
[옛 41번지] 제64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1배미이
다. 길이는 45척, [이전에 비해 5척이 늘어났다.] 활은 21척이다.
[이전에 비해 1척이 늘어났다.] 넓이는 6속이다. 세 방향은 교위전,
서쪽은 유만흥의 논이다. 1두락이다. [이전에 비해 4승락이 늘어났
다.] 시는 같은 사람이다.

[旧四十二] 第六十五 北犯 勾畓 一夜未 長三十八尺 活二十二尺 一


卜七束 三方校位東浦 一斗七升落 時 同人.
[옛 42번지] 제65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1배이다.
길이는 38척, 활은 22척이다. 넓이는 1부 7속이다. 세 방향은 교위
전, 동쪽은 포구이다. 1두 7승락이다. 시는 같은 사람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27


[旧四十三] 第六十六 東犯 直畓 一夜未 長十八尺[比前剩二尺] 廣十
七尺 五束 四方校位 二斗落[比旧剩一斗五升] 時起 五升落 同人.
[옛 42번지] 제66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18척, [전에 비해 2척이 늘어났다] 폭은 17척이다. 넓이는 5
속이다. 네 방향 모두 교위답이다. 2두락이다. [전에 비해 1두 5승락
이 늘어났다.] 현재 경작지는 5승락이며 경작자는 같은 사람이다.

[旧四十四] 第六十七 東犯 勾畓 一夜未 長五十尺 活二十八尺 一卜


八束 三方浦西校位 三斗落[比旧剩一斗] 時 同人
[옛 44번지] 제67번지는 동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1배미이
다. 길이는 50척, 활은 28척이다. 넓이는 1부 8속이다. 세 방향은
포구, 서쪽은 교위전이다. 3두락이다. [전에 비해 1두락이 늘어났다.]
시는 같은 사람이다.

[旧四十五] 第六十八 西犯 方畓 一夜未 長二十一尺[比前縮九尺] 廣


三十四尺[比前縮八尺] 二卜三束 三方校位 北浦 一斗落[比旧縮二斗] 梁
雲瑞.
[옛 45번지] 제68번지는 서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방답 1배미이다.
길이는 21척, [전에 비해 9척이 줄었다.] 폭이 34척이다. [전에 비해
8척이 줄었다.] 넓이는 2부 3속이다. 세 방향은 교위전, 북쪽은 포구
이다. 1두락이다. [전에 비해 2승락이 줄었다.] (시는) 양운서이다.

128 역주 학궁의례
[旧四十六] 第六十九 北犯 梯改勾畓 一夜未 長五十尺 活十五尺 一
卜三束 二方浦 二方校位 一斗三升落 陳.
[옛 46번지] 제69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제답을 고친 구
답 1배미이다. 길이는 50척, 활은 15척이다. 넓이는 1부 3속이다.
두 방향은 포구, 두 방향은 교위전이다. 1두 3승락이다. 지금은 묵혀
있다.

[旧四十七] 第七十 西犯 勾畓 一夜未 長四十四尺[比前縮四尺] 活十


七尺[比前三尺] 一卜 三方校位 北浦 一斗三升落[比旧剩三升] 時 同人.
[옛 47번지] 제70번지는 서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구답 1배미이
다. 길이는 44척, [전에 비해 4척이 줄었다.] 활은 17척이다. [전에
비해 3척이 줄었다.] 넓이는 1부이다. 세 방향은 교위전, 북쪽은 포
구이다. 1두 3승락이다. [전에 비해 3승락이 늘었다.] 시는 같은 사
람이다.

[旧四十八] 第七十一南犯 直改勾畓 一夜未 長六十七尺[比前剩十七尺]


活二十八尺[比前剩十六尺] 一卜五束 四方校位 二斗落[比旧剩三升] 時
同人.
[옛 48번지] 제71번지는 남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직답을 고친 구
답 1배미이다. 길이는 67척, [전에 비해 17척이 늘었다.] 활은 28척
이다. [전에 비해 16척이 늘었다.] 넓이는 1부 5속으로 사방이 모두
교위전이다. 2두락이다. [전에 비해 3승락이 늘었다.] 시는 같은 사
람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29


[旧四十九] 第七十二南犯 方畓 一夜未 長廣二十尺 一卜 三方校位
南兪萬興畓 一斗落 時 李時夏.
[옛 49번지] 제72번지는 남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방답 1배미이
다. 길이와 폭 모두 20척이다. 넓이는 2부이다. 세 방향은 교위전,
남쪽은 유만흥의 논이다. 1두락이다. 시는 이시하이다.

[旧五十] 第七十三西犯 梯畓 一夜未 長五十尺 大頭二十六尺 小頭二十


一尺 三卜一束 北浦二方校位南兪萬興畓 三斗落 時起 一斗三升落 同人.
[옛 50번지] 제73번지는 서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제답 1배미이
다. 길이는 50척, 큰 폭은 62척, 작은 폭은 21척이다. 넓이는 3부 1
속이다. 북쪽은 포구, 동쪽과 서쪽은 교위전, 남쪽은 유만흥의 논이
다. 3두락이다. 현재 경작은 1두 3승락이며 이시하가 경작한다.

[旧五十一] 第七十四西犯 圭畓 一夜未 長十七尺 活十二尺 三束 二


方浦二方校位 三升落 時 車仁采.
[옛 51번지] 제74번지는 서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규답 1배미이
다. 길이는 17척, 활은 12척이다. 넓이는 3속이다. 두 방향은 포구,
두 방향은 교위전이다. 3두락이다. 시는 차인채이다.

乙卯案所付 第七十五 小橋下北犯 丙字二十八 六等 勾畓 一夜未 長


五十尺 活二十尺 一卜三束 三方川 東兪贊海畓 一斗三升落 [壬案漏今
推] 時 兪應圭.

130 역주 학궁의례
을묘양안에 기록되어 있는 제75번지는 소교 밑에서 북쪽을 보며 양
전하였다. 병자 28번지이다. 6등 구답 1배미이다. 길이는 50척, 활은
20척이다. 넓이는 1부 3속이다. 세 방향은 내, 동쪽은 유찬해의 논이
다. 1두 3승락이다. [임술양안에는 누락되어 이제 추록한다.] 시는 유
응규이다.

[新加] 第七十六 北犯 越校位 直畓 三夜未 長二十五尺 廣六尺 五束


東山南校位二方浦 五升落 時 李元彬.
[신 가전] 제76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교위전 너머 직답
3배미이다. 길이는 25척, 폭은 6척이다. 넓이는 5속이다. 동쪽은 산,
남쪽은 교위전, 두 방행은 포구이다. 5승락이다. 시는 이원빈이다.

[新加] 第七十七西犯 越漢石橋 席字加 六等直畓 一夜未 長二十四尺


廣二十一尺 五束 東南校位 西車仁■畓 北同人畓 五升落 時 韓光宅.
[신 가전] 제77번지는 서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한석교 너머 석자
지번에 추가된 6등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24척, 폭은 21척이다.
넓이는 5속이다. 동쪽과 남쪽은 교위전, 서쪽은 차인■의 논, 북쪽은
같은 사람의 논이다. 5승락이다. 시는 한광택이다.

[新加] 七十八 越校位涉川西犯 席字加六等直畓 一夜未 長四十四尺


廣十五尺 二卜 東川西車仁■畓西車興曄田 (이하 판독 불가).
[신 가전] 제78번지는 교위답을 지나고 개천을 건너 서쪽을 보며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31


양전하였다. 석자 지번에 추가된 6등 직답 1배미이다. 길이는 44척,
폭은 15척이다. 넓이는 2속이다. 동쪽은 내, 서쪽은 차인■의 논, 서
쪽은 차흥엽의 밭이다.

[新加] 第七十九 北犯 飛字加 六等圭畓 一夜未 長八十一尺 活十一


尺 一卜 東川 西 (이하 판독 불가).
[신 가전] 제79번지는 북쪽을 보며 양전하였다. 비자 지번에 추가
된 6등 규답 1배미이다. 길이는 81척, 활은 11척이다. 넓이는 1부이
다. 동쪽은 내, 서쪽은.

已上陳起田畓 幷壹結陸拾 (이하 판독 불가).


이상 묵거나 경작하고 있는 전답은 아울러 1결 육십.

(7) 奴婢

[每月朔望都有司 (이하 판독 불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도유사]

婢今禮年庚午 夫崔叟 (이하 판독 불가)


一所生奴仁得年■■
二所生婢仁禮■■■
三所生婢大了阿只年■■

132 역주 학궁의례
四所生婢者斤阿只年■■
五所生婢足今阿只年■■
六所生婢養丹年壬子
七所生婢於如叱非年乙卯
婢仁禮一所生奴大觀年戊午 故
婢大了阿只一所生婢 年己未 故
婢可望年 夫鄭德孫許給侍丁
奴春得年癸酉 故
奴仁福年甲午 故
奴時同年甲午 故
奴興石年丁酉 故
奴興■年癸卯 故
奴再祿年甲辰
奴龍祿年丁未
奴季祿年庚戌 以家贖 奴爲子孫 因朝官許良
婢大了阿只一所生婢明心 年戊午 夫金富成
二所生婢行心年壬戌夫金故
明心二所生婢者斤阿只年庚子 夫南老積
[丙辰八月初二日]

노비

여자 종 금례는 경오년에 태어났다. 남편 최수


첫째 소생은 사내종 인득은 ■■년생이다.
둘째 소생은 계집종 인례는 ■■년생이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33


셋째 소생은 계집종 큰아지는 ■■년생이다.
넷째 소생은 계집종 작은아지는 ■■년생이다.
다섯째 소생은 계집종 조금아지는 ■■년생이다.
여섯째 소생은 계집종 양단은 임자년생이다.
일곱째 소생은 계집종 어여비는 을묘년생이다.
여자 종 인례의 소생 사내종 대관은 무오년생이나 죽었다.
여자 종 큰아지의 소생 계집종은 기미년생이나 죽었다.
여자 종 가망은 ■■년생이다. 남편 정덕손은 시정(侍丁)을 허락
받았다.
여자 종 춘득은 계유년생이나 죽었다.
남자 종 인복은 갑오년생이나 죽었다.
남자 종 시동은 갑오년생이나 죽었다.
남자 종 흥석은 정유년생이나 죽었다.
남자 종 흥■은 계묘년생이나 죽었다.
남자 종 재록은 갑진년생이다.
남자 종 용록은 정미년생이다.
남자 종 계록은 경술년생이다.
(이상 3인은) 집안에서 노 속전을 바치고 자손으로 삼았기 때문에
관에서 양인으로 허락하였다.
여자종 큰아지의 첫째 소생인 계집종 명심은 무오년생이다. 남편은
김부성이다.
둘째 소생인 계집종 행심은 임술년생이며 남편 김씨이나 죽었다.
명심의 둘째 소생인 계집종 작은아지는 경자년생이며 남편은 남로적
이다.[병진년 8월 초2일]

134 역주 학궁의례
(8) 齋直

齋直額數本校 旣無文獻之可考 未詳 古例之如何 而癸卯案只錄二十名


戊子案錄三十名 今因之.

재직

본 향교의 재직일을 맡은 수는 살필 수 있는 문헌이 없어 옛 규례


가 어떠한 지는 상세하지 않다. 그러나 계묘안에는 단지 20명으로 기
록되어 있으며, 무자안에는 30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지금은 무자
안을 따른다.

齋直蠲役節目

재직견역절목

本校入屬齋直等輪回入番 (이하 판독 불가)


專責此輩其役難 (이하 판독 불가)
時亦爲勿侵之意 (이하 판독 불가)
係雜役間或侵責 (이하 판독 불가)
宮大始重修之役役告 (이하 판독 불가)
優恤之道是如校奴齋 (이하 판독 불가)
爲永久遵行之地
이상은 원전의 훼손이 심하여 내용을 알 수 없음.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35


(9) 復戶143)

復戶例捧五斗米於每戶 故篤以四十戶自營門劃給 本校俾爲補用於享


祀焚香時 支供之需. 而辛卯[兪等時]減削二十戶 代給錢文一百兩 以爲
殖利補助之地 而錢文今無留儲 尙在禮房掌簿中 復戶二十名則各捧米四
斗水荏一斗

복호

복호는 예에 따라 매 호마다 쌀 5말을 바친다. 그리하여 관에서


나누어준 40호를 본 향교에서는 향사와 분향 때 지출하는 물품의 대
가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신묘년(1771) [유■■ 등 때에] 복호가 20
호 삭감되었으며, 대신 돈 100량으로 재물을 늘리어 토지에서 나오
는 것을 보조하라 하였다. 그러나 이 돈은 지금 남아있는 것이 없고,
오히려 강화부 예방이 가진 장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복
호 20명은 각각 쌀 4말와 들깨 1말 씩을 바친다.

(10) 蒙學

蒙學元額本是三百 除喪人 各捧米二斗與復戶米一體補用 而己亥減額


癸卯以一百五十人定式 乙卯還充三百之數

몽학

몽학의 원래 정수는 300명이다. 양인 중 거상(居喪) 중에 있는 사


람을 제외하고 각각 쌀 2되와 복호미 전체를 바쳐 몽학의 비용에 보

143) 호역을 면제하여 줌

136 역주 학궁의례
태 쓰게한다. 기해(1719)년에 몽학의 정수가 줄어들었다가 계묘
(1723)년에 150명으로 정하였다. 이어 을묘(1735)년에 다시 300명
으로 충당되었다.

(11) 享需 [自官封進]

향수 [관에서 올린다]

五聖位

稻米 一斗七升五合
粱米 一斗七升五合
黍米 一斗七升五合
稷米 一斗七升五合
鹿脯代牛脯 二十五
乾棗一斗
芡仁一斗
榛子一斗
麥仁一斗
栗黃一斗
魚脯代乾 (이하 훼손)
黃筆 一柄
眞墨 一丁
燭 五雙
着油 一升
酒米三斗 [本校酒母○十五鐥]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37


三升曲 四圓
豕牲 一口
羊牲 一口 代牛■(牲) (이하 판독 불가)
炭 二斗
香 四封

오성위

도미(멥쌀) 1말 7되 5홉
양미(기장조) 1말 7되 5홉
서미(수수) 1말 7되 5홉
직미(피쌀) 1말 7되 5홉
사슴고기 포 대신 소고기 포 25조
건조(마른 대추) 1말
검인(가시연밥 열매, 호두) 1말
진자(개암나무 열매, 잣) 1말
능인(은행) 1말
율황(밤) 1말
어포 대신 건■
황필(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붓) 1자루
참먹 1개
초 5쌍
기름 1되
술을 빗기 위한 곡식 3되 [본 향교에서는 밑술로 15그릇을 쓴다.]
3되 짜리 누룩 4개

138 역주 학궁의례
희생으로 쓸 돼지 1마리
희생으로 쓸 양 1마리 대신 소(1마리 )
숯 2되
향 4묶음

配位三十二位

稻米 九 (이하 판독 불가)
黍米 九斗六 (이하 판독 불가)
醓醢代猪醢 (이하 판독 불가)
芹葅 一斗 (이하 판독 불가)
菁葅 一斗五 (이하 판독 불가)
筍葅代苽葅 (이하 판독 불가)
兎醢代鷄醢 一斗 (이하 판독 불가)
魚醢代蘓魚 一斗五升
鹿醢代牛醢 一斗五升
韭葅 一斗
形塩 一斗
幣帛 九十尺 用造禮器尺每位十八尺
刺燭白紙 五張
祝文壯紙 二張
乾棗 六斗四升
鹿醢代牛醢 (이하 판독 불가)
菁葅 六斗四升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39


燭四雙 [又二雙自癸丑 (이하 판독 불가)]
刺燭白紙 一張
着油 二升
酒米 九斗四升 [本校酒母○三十二鐥]
三升曲 九圓
窓戶壯紙 三卷十張
眞末 一升
柴 二十五束 [十束蒸飯十束蒸酒飯五束享牛去毛]

배위삼십이위

도미 9(되)
서미 9되 6(홉)
탐해 대신 저해
근저(미나리) 1말
청저(무) 1말 5(되)
순저(죽순) 대신 고저
토해(토끼고기 젓) 대신 계해(닭고기 젓) 1말
어해(조기 젓) 대신 소어(밴댕이) 1말 5되
녹해(사슴고기 젓) 대신 우해(소고기 젓) 1말 5되
구저(부추) 1말
형염(소금) 1말
폐백 90척 [조례기척(造禮器尺)144)을 사용하여 매 신위마다 18척

144) 예기(禮器)와 제물(祭物)을 법규에 맞게 만들기 위한 기준으로 태종 때 허조(許


稠)에 의하여 제청되어 사용되어왔다.『경국대전』공전 도량형에는 조례기척
1척의 길이가 0.823 황종척(黃鐘尺)으로 되어 있고,『증보문헌비고』악고(樂

140 역주 학궁의례
이다.]
초를 바른 백지 5장
축문에 쓸 두꺼운 종이 2장
녹포 대신 우포
건조 6말 4되
녹해 대신 우해
청저 6말 4되
초 4쌍. [또 2쌍을 준비한다. 계축년 이래 ….]
초를 바른 백지 1장
기름 2되
술을 빚기 위한 곡식 9말 4되 [본 향교에서는 밑술로 15그릇을 쓴
다.]
3되 짜리 누룩 9개
출입구 문에 쓸 두꺼운 종이 3권 10장
밀가루 1되
땔나무 25 묶음 [10묶음은 음식 조리용이고 10묶음은 술을 만드
는데 쓰며 5묶음은 제사 소를 삶고 털을 제거하는 데 쓴다.]

供士

享祀時 獻官六員 預差四員 大祝一員 依例官供諸執事六十六員 學生

考)‘도량형조’에는 0.825 황종척 또는 1.38주척(周尺), 영조 때는 1.1 황종


척에 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척도는『세종실록』오례(五禮)에 푼
(分)·이(釐) 단위까지 눈금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세종
때의 그 길이는 28.621㎝에 해당된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41


三員 合六十九員 自前三日夕至當日朝每員每時料米一升點心七合甘醬一
合 自本府上下
合白米二石二斗四升三合
甘醬三斗四升五合
已上官料雖爲供士之糧而至於供士之酒米■■■■供接之需初不入於
其中且三日 (이하 판독 불가) 錢而徵斂於諸生此是太 (이하 판독 불가)
非待士之道故酒 (이하 판독 불가) 壁而所斂米錢之 (이하 판독 불가)
磨鍊定式而近 (이하 판독 불가) ■位田之稅蒙米之 (이하 판독 불가)
於生徒一以貽羞於 (이하 판독 불가)
糧米春秋各三十 (이하 판독 불가)
酒米春秋各十斗 (이하 판독 불가)
饌牛春秋享時各六兩春 (이하 판독 불가)

공사(제사를 담당하는 사람)

제사를 지낼 때는 헌관 6명, 예차 4명, 대축 1명, 관례에 따라 여


러 일을 맡아 보는 집사 66명, 학생 3명 등 모두 69명이 참여한다.
이들은 제사지내기 3일 전 저녁부터 제사 당일 아침까지 각 인원 당
매 식사 때마다 쌀 1되와 점심으로 7홉 그리고 간장 1홉을 준다. 본
강화부에서 지출한다.
합하여 백미는 모두 2섬 2말 4되 3홉이다.
간장은 3말 4되 5홉이다.

◆‘已上官料’~ 饌牛春秋享時各六兩春 (이하 판독 불가) 까지는


중간에 보이지 않는 글자가 많아 번역하지 않았다.

142 역주 학궁의례
民魚
白蝦醢
[此二種以乶音箭稅 民魚十二尾 春秋各以六尾出給守僕 使之擔當需用
○見上乶音島學宮永屬■]
민어
백하젓
[여기 두 종류는 볼음도 어장의 세금으로 충당한다. 민어 12마리
는 봄과 가을 각각 6마리씩 나누어 수복에게 담당하게 한다. ○위
의 볼음도 학궁영속을 보아라.]

蔬菜
況菜
[以校宮墻外加耕田稅十八兩 及東門外田稅二兩 合二十兩 各以十兩定
給守僕使之備此二菜與曲子南草等物]
소채(채소)
황채
[학궁 담 바깥의 가경전의 세금 18냥과 동문 바깥 밭에서 얻는 세
금 2냥 등 모두 20냥은 두 물품 비용으로 각 10냥씩 정하여 수복
에게 주어 이 두 채소와 누룩, 담배 등의 물품을 갖추게 한다.]

曲子
[上酒所釀 官家封上之不足 及齋酒所釀毋論所入之多寡 以田稅三兩定
給]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43


곡자(누룩)
[상주소(上酒所)의 술과 재주소의 술이 강화부에서 올리는 것이 부
족하면, 들어갈 양의 많고 적음을 논하지 않고, 전세 3냥을 정하
여 지불한다.]

南草
春秋各以三兩恒定
남초
[봄 가을에 각각 3냥씩 내는 것으로 늘 정해져있다.]


已有官府上下
간장
[이미 관부에서 지급한 것이 있다.]

沙器
[校婢旣無身役 享祀時食婢三名 各備十五床 所入用後 還下]
사기
[향교 소속의 여자 종은 신역이 없다. 그러므로 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음식을 담당하는 식모 3명은 각기 15상을 준비하여 제사
에 사용하게 한 다음에는 원래대로 돌려보낸다.]

144 역주 학궁의례

[齋酒所漉之篩不過一時之用 酒母自備用後 還下]
체(가루를 치는 기구)
[재주소 체는 일시적으로 쓰는 것이므로 주모가 스스로 마련해서
사용한 다음 돌려보낸다.]


[墻後之柴旣至參拾餘駄 則收稅其三之一. 猶爲十駄春秋各以五駄 進
排之意 定式行會於掌刈之人.]
땔감
[향교 담장 뒤쪽에 있는 땔감이 30여 바리 정도가 되었으면, 그 중
3분의 1을 세금으로 징수한다. 다만, 10바리가 되면 봄과 가을 각
기 5바리씩 진상한다는 뜻을 일정하게 정하여 관아에서 나무꾼들
에게 알려준다.]


貳拾坐 又貳拾坐 癸丑新備
쟁반
이십개. 여기에 또 이십개가 추가 되었다. 계축(1733)년에 새롭게
갖추었다.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45


茵席
二十經 三立
[酒房蒸飯滌器各一立 ○己未秋享新備 每過四享後改備次 價文六戔]
二十四經 二立
[東齋上一房所鋪 每年改備 一立價文三戔]
인석(왕골돗자리)
20경 3립
[술방에서 찌고 먹고 삶는 그릇을 각 1립으로 한다. ○기미(1739)
년 가을 제사 때 새롭게 갖춘 것으로, 제사를 4번 지낸 후 다음을
위해 다시 갖추는데, 이에 드는 비용은 6전이다.]
24경 2립
[향교의 동재 위 쪽에 있는 점포에서 매년 다시 준비한다. 1립 가
격은 3전이다.]

校宮墻外 加耕田

東邊四庫 合七斗落
西邊福娘買納田 九 (이하 판독 불가)
西邊宋景寊買 (이하 판독 불가)
碑閣後田一斗 (이하 판독 불가)
紅箭門外田 (이하 판독 불가)
已上定稅九兩又以東門外田稅 (이하 판독 불가)
西邊梁九音於 (이하 판독 불가)

146 역주 학궁의례
朴雲成起 (이하 판독 불가)
梁夏瑞起耕 (이하 판독 불가)
金成淡起耕田一 (이하 판독 불가)
柿林後田二庫八斗落
此一半當年 (이하 판독 불가)

향교 담 밖 가경전

동변 4곳은 합하여 7두락이다.


서변 복랑이 사서 납부한 밭이 9 ….
서변 송경정이 사서 ….
비각 뒤 밭 1두락 ….
홍살문 밖 밭 ….
이상은 9냥을 전세로 정하고 또 동문 밖의 전세는 ….
서변 양구음 ….
박운성이 기경 ….
양하서가 기경 ….
김성담이 기경한 밭 1….
감나무 숲 뒤 밭 2곳 8두락 ….
이것은 당년에 ….

校宮一年應入例

位良賭地租十六石十五斗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47


乶音賭地租十五石十斗
先原賭地租一石十斗
上道賭地租十七斗
東門外賭地錢十五兩
南山洞賭地錢七兩四戔
墻外加耕田賭地十八兩
復戶米 五石五斗

교궁(향교)의 1년 경상 수입 조목

위량땅에서 나오는 소작료 16섬 15말


볼음도에사 나오는 소작료 15섬 10말
선원땅에서 나오는 소작료 1말 15되
상도땅에서 나오는 소작료 17말
동문밖 땅에서 나오는 소작료 15냥
남산동에서 나오는 소작료 7냥 4전
향교 담 밖에 있는 추가로 지급받은 밭의 소작료 18냥 등이다
복호미 5말 5되.

神堂洞打租 145)以守僕紅衣次例下

신당동에서 거둔 소작료는 수복의 홍의에 지출한다.

145) 타조(타조, 타조법)는 조선시대 수확량의 비율을 정하여 놓고 소작료를 거두어


들이던 소작 제도이다.

148 역주 학궁의례
蒙學米

三百額數之例納 當爲六百斗 而每年多有喪頉及稱托之 故實數之捧


未滿三百斗 此則未可以畫一之法 納定要之 倘可爲二十石之數耳

몽학미

(몽학 정원인) 300명에 맞게 납입되면 당연히 쌀 600말이 된다.


그렇지만 매년 상을 당하거나 청탁에 의해 빠지는 액수가 너무 많다.
그런 까닭으로 실제 받는 액수는 300말 미만이다. 이는 곧게 한 획
을 긋듯이 바르게 지켜야 할 법146)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
하여 정해진 액수를 납부한다는 것은 다만 20섬일 뿐이다.

校宮一年應下例

焚香執事七員 十二朔 料米二石三斗八升


饌錢 十一兩四分
春秋享祀時 雜費 二十兩
春秋享祀時 粮酒米 伍石伍斗
春秋供士 饌牛 十二兩
朔紙 文書紙 十二朔 合四兩八戔 (이하 판독 불가)
沉醬鹽價 二兩 (이하 판독 불가)
沈菜鹽

146) 획일지법(劃一之法) : 한혜제(漢惠帝) 때 상국(相國)인 조참(曹參)이 소하(蕭何)


를 이어 정치를 잘하니 백성들이 노래하기를,“소하가 법을 만들되 바르기가
일자(一字)를 그린 듯하더니[畫一] 조참이 이어서 실수 없이 지켜 맑게 행하므
로[淸淨] 백성들이 편안하고 한결같다[寧一].”라고 했다.《史記 曹相國世家》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49


■■ (이하 판독 불가)
茵席一立 [二十五錢]
春享時各房 (이하 판독 불가)
秋享時各房 (이하 판독 불가)
租九石 守僕 十二朔料(이하 판독 불가)
已上應入租 參拾肆石拾貳斗■■■■■■■(이하 판독 불가)
米 貳拾伍石伍斗■■■■下柒石■■(이하 판독 불가)
拾壹斗貳升
錢四拾兩

교궁(향교)의 1년 경상 지출 조목

분향 때 일을 맡은 7명에게 주는 한 해 임금 쌀 2섬 3말 8되.
음식에 소용되는 11냥 4푼.
봄 가을 제사 때 드는 잡비 20냥.
봄 가을 제사 때 드는 양조용 쌀 5섬 5되.
본 가을 제사 때 관계자에게 제공되는 반찬에 쓸 소고기 값 12냥.
향교 관계 사람들에게 주는 종이 값과 글씨 쓰는 종이와 향교와
관련된 기록을 남기는데 쓰는 종이값 1년치 4냥 8전
장 담그는 소금 값 2냥
김치 담그는 소금
돗자리 1립[25전]
봄 석전제 때 각방 …
가을 석전 때 각방 …
벼 9섬은 수복의 12달 급료 …

150 역주 학궁의례
이상 응당 들어 올 벼 34섬 12두■■■■■■■ …
쌀 25섬 5두■■■■ 7섬은 내려 보낸다■■ …
11두 이승 …
돈 40냥 …

校宮日用排■例

應下餘租貳拾伍石拾貳斗[伍百拾貳斗] 應下餘米拾柒石拾壹斗貳升 並
焚香料米貳石參斗捌升則合爲貳拾石[三百斗]
每月[租貳石貳斗陸升陸合陸夕 ○閏朔之年則每朔參拾玖斗貳升捌合肆
夕, 米壹石拾斗○閏朔之年則每朔壹石捌斗柒拾零.

교궁 일용 배■례

응당 지출하고 남은 벼 25섬 12두[512두], 응당 지출하고 남은 쌀


17섬 11두 2승과 분향할 때 지불한 쌀 2섬 3두 8승을 합하면 20섬
이 된다[300두].
매월[벼 2섬 2두 6승 6홉 6작 ○ 윤달이 있는 해에는 매월 39두
2승 8합 4작, 쌀 1섬 10두 ○ 윤달이 있는 해에는 1섬 8두 70영]

2. 학궁의례 (원문 역주) 151


3. 참고자료
1) 강도지1) 향교 (江都志 鄕校)

【原文】

鄕校
舊在東門外 松岳山東麓. 今上 甲子年 開基于南山 北洞. 乙丑春 始
役 其冬畢役. 庚午年 移安. 正位 大成至聖文宣王 [居中向北] 配位 兗
國復聖公顔子 沂國述聖公子思 [在于正位西北 東向南上] 郕國宗聖公曾
子 鄒國亞聖公孟子 [在于正位東北 西向南上] 殿內 從享 費公閔損 薛
公冉雍 黎公端木賜 衛公仲由 魏公卜商 [在于西壁東向南上] 鄆公冉耕
齊公宰予 徐公冉求 吳公言偃 穎川侯顓孫師[在于東壁 西向南上] 兩廡
從享 預國公程顥 弘儒侯薛聰 文成公安裕 文敬公金宏弼 文正公趙光祖
文純公李滉 文成公李珥 [在于西廡 東向南上] 道國公周敦頤 洛國公程
頤 徽國公朱熹 文昌公崔致遠 文忠公鄭夢周 文獻公鄭汝昌 文元公李彦
迪 文簡公成渾 [在于東廡 東向南上]. 校中 東齋靑衿錄 七十一人 西齋
校生 一千三百人. 東齋所任 都有司一人 掌議二人 色掌二人. 西齋所任
掌議二人 有司三人 奴七口 婢九口 募入二十名. 位田 一結四十四卜 位

1) 1694(숙종 20)∼1696년 사이에 이형상(李衡祥)이 저술한 경기도 강화부 읍지로


2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채색지도가 첨부된 필사본으로 병자호란을 겪은 지
50여 년이 지난 당시 북쪽 오랑캐의 재침 징조가 농후해지자 요충지인 강화도의
수어방략(守禦方略)에 중점을 두어 숙종에게 올리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책으로
당시의 강화의 군비와 국방책이 세밀히 기록되어 있다. 기술 방식은 각 조마다
현황을 기록하고 그 다음에는 사목(事目)을 설정하여 관제를 기록함으로써 현황
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를 실어 놓았다. 사목 다음에는 ○표를 한 뒤 저자 자신
의 의견을 상세히 개진하였다. 이러한 서술 양식은 임금에게 상달할 목적으로 하
였기 때문이며, 따라서 강화의 방어 방략이 종횡무진으로 전개되어 있다. 이 책
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방대한 강화 읍지로서 큰 의의를 지닐 뿐만 아니라, 그
내용과 체재가 다른 읍지에 비해 상세함과 정확성을 지니고 있다. 보물 제
652-4호로 지정되어 있다.

3. 참고자료 155
畓 五結七卜 鹽盆二處 中船一隻 [我顯宗 癸卯 全羅道生員 安國宰等
上疏 大槪州府郡縣 各有定制. 州府郡則聖殿內 從享十哲 東西廡 東国
儒賢. 縣則無廡 故殿內奉安 宋朝四賢 東國九賢 云云. 禮曹議大臣儒臣
回啓內 州府之竝祀 我東九賢八路同 然而縣邑不遵定制 任意奉安 似無
其理 我東九賢 縣學或祀 或否. 郡學應祀殿上十位 而或祀或否. 界首官
州學所祀 亦有與太學不同 八路州縣 一倂査問 詳加釐正事 覆啓行會.

其時留守兪撤査啓內 東廡 道國公周敦頤 洛國公程頤 弘儒侯薛聰 文


成公安珦 文純公李滉 文正公趙光祖 文敬公金宏弼 西廡 預國公程顥
徽國公朱熹 文忠公鄭夢周 文昌公崔致遠 文獻公鄭汝昌 文元公李彦迪
云云. 今上壬戌年 李䎘狀啓內 東廡 薛聰·安珦 連坐於濂溪·伊川之
下 西廡 崔致遠·鄭夢周 連坐於明道·晦庵之下 而崔致遠反坐於鄭夢
周之下 退溪始於東廡折隅向北坐於東邊 而靜庵·寒暄堂反在於其西 晦
齋始於西廡折隅向北坐於西邊 而一蠹反在於其東 與攷事撮要相左 云云
則禮曹回啓內 依太學釐正 而且江都 凡事與松都 少無異同 而獨鄕校與
州郡同享 依松都竝祀七十子 及漢唐諸賢事 蒙允行會 故癸亥年 趙師錫狀
啓 禮曹覆啓內 待年豐加設兩廡事 蒙允甲子年開基 乙丑年移建後 李翊啓
聞 備局覆啓內 江都雖以保障陞爲留守 儒生本來數少 有難悉備 文敎不必
援 引松都之例 一依舊校云云 丙寅年 本府儒生上疏 禮曹防啓 申晸狀啓
內 漢唐諸賢 仍備局防啓 雖不得依松都配享宋朝四賢 依各道界首官禮 幷
享何如 禮曹覆啓內 界首牧官 一如太學之例 而府郡則 宋朝四賢別無添配
之 擧依前日 備局覆啓 施行之意 蒙允行會 元來祀典 自有國制州府郡縣
各有定禮 各道之俱 有異同 宋儒之抄出 添配極涉無謂 本府前後啓聞 旣
未蒙允 則庚午年 移安時當依朝令奉行 而宋朝四賢 因爲添配 我東諸賢位
次亦與國制不同 非但文敎之蕪沒 而已其在事體 亦甚未安]

156 역주 학궁의례
【번역】

향교
옛날에는 동문 밖 송악산 동쪽 기슭에 있었다. 지금의 임금 갑자
년(1684, 숙종 10)에 터를 남산의 북동에 열었다. 을축년(1685, 숙
종 11) 봄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그해 겨울에 역을 마치었다. 경
오년(1690, 숙종 16)에 (위패를) 이안하였다. 정위에 대성지성문선왕
(大成至聖文宣王)[중앙에 위치하여 북쪽을 향함], 배위에는 연국 복성
공 안자, 기국 술성공 자사, [정위의 서북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향하
고 남상에 있다.] 성국 종성공 증자, 추국 아성공 맹자, [정위의 동
북에 위치하여 서쪽으로 향하고 남상에 있다.] 이다. 전내 종향에는
비공 민손, 설공 염옹, 여공 단목사, 위공 중유, 위공 복상, [서벽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향하고 남상에 있다.] 운공 염경, 제공 재여, 서
공 염구, 오공 언언, 영천후 전손사 [동벽에 위치하여 서쪽으로 향하
고 남상에 있다.] 가 있다. 양무의 종향에는 예국공 정호, 홍유후 설
총, 문성공 안유, 문경공 김굉필, 문정공 조광조, 문순공 이황, 문성
공 이이, [서무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향하고 남상에 있다.] 도국공
주돈이, 낙국공 정이, 휘국공 주희, 문창공 최치원, 문충공 정몽주,
문헌공 정여창, 문원공 이언적, 문간공 성혼[동무에 위치하여 동쪽으
로 향하고 남상에 있다.] 교중 동재 청금록 유생은 71인이요, 서재
교생이 1천 3백인이다. 동재의 소임에는 도유사 1인, 장의 2인, 색
장 2인이다. 서재의 소임에는 장의 2인, 유사 3인, 노 7구, 비 9구,
모입 20인이다. 위전은 1결 44복, 위답은 5결 7복, 염분은 2처, 중
선이 1척이다.
[현종 계묘년(1663, 현종 4)에 전라도의 생원 안국재 등이 상소하

3. 참고자료 157
기를“대개 주, 부, 군, 현에는 각각 정해진 제도가 있습니다. 주,
부, 군에는 성전 내에 10철을 종향하고, 동무와 서무에는 우리나라
의 유현을 종향하며, 현에는 동무와 서무가 없기 때문에 전내에 송조
사현과 동국구현을 봉안합니다.”고 하니 예조가 대신과 유신과 의논
하여 회계한 내용에“주, 부가 모두 동국구현을 제사함에는 8도가
다 같으나, 현과 읍에서는 정해진 규제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봉안하
니 이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동국 9현에 대해서는 현의 학교가
혹 제사하는 곳도 있고 혹 제사하지 않는 곳도 있으며, 군의 학교는
응당 전상의 10위를 제사하게 되었으나 혹은 제사하고 혹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계수관이 있는 주의 학교도 제사하는 것이 또한
태학과 같지 않은 곳이 있으니 8도의 주현을 일제히 조사하여 묻고
상세히 시정할 것을 복계 행회하라?”하였다. 당시 유수 유철2)의 사
계 내에“동무에는 도국공 주돈이, 낙국공 정이, 홍유후 설총, 문선
공 안향, 문순공 이황, 문정공 조광조, 문경공 김굉필, 서무에는 에
국공 정호, 휘국공 주희, 문충공 정몽주, 문창공 최치원, 문원공 이

2) 1606년(선조 39)∼1671년(현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방숙(方叔), 호는 취옹(醉翁), 대의(大儀)의 손자로, 예조참의 성증(省曾)의 아들이
며, 어머니는 구준(具濬)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3년 식년문
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사간으로 재직 중“명나라를 피하고 청나라에 사
대(事大)의 예를 닦는 것이 마땅하다.”고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636년 병
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 죽음을 당한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
漢) 등 삼학사의 가족들에게 은휼(恩恤)이 없음을 논술하여 가납을 받았고, 또 북
방편의(北方便宜) 7사를 축조, 진술하여 모두 시행하게 하였다. 1652년(효종 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655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어전에서 승지 유도삼(柳道三)이 인평대군(麟坪大
君)에게 신(臣)이라 칭한 것은 아무 뜻 없는 망발이나, 사사로이 대군을 만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파직을 청하였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진도에 위
리안치되었다. 그러나 윤집·권시(權諰) 등 여러 대신들의 힘으로 한달 만에 방환
(放還)되었다. 현종 초에 다시 복관되어 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을 지내고 죽었
다. 저서로는《취옹집》이 있다.

158 역주 학궁의례
언적입니다.”라고 하였다. 금상 임술년(1682)에 올린 이숙3)의 장계
내에는“동무에는 설총, 안향을 염계, 이천의 밑에 연달아 앉히고,
서무에는 최치원, 정몽주를 명도, 회암의 밑에 연달아 앉혔는데, 최
치원이 도리어 정몽주의 밑에 앉았으며, 퇴계가 동무에서 시작하여
꺽어져 돌아 북쪽을 향하여 동변에 앉고, 정암과 한훤당이 도리어 그
서쪽에 있으며, 회재가 서무에 시작하여 꺽어져 돌아 북쪽을 향하여
서변에 앉고, 일두가 도리어 그 동쪽에 앉아『고사촬요(攷事撮要)』
와 서로 도우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예조의 회계내에“태학에 의해 바로 잡거니와 강도는 모든 것이
송도와 조금도 다른 것이 없으되, 유독 향교만 주군과 같이 향사하고
있으니 송도에 의하여 칠십제자 및 한, 당의 모든 현인을 아울러 향
사하게 하소서”라 하였는데 윤허를 받아 시달하였다. 그리하여 계해
년(1683, 숙종 9) 조사석이 장계를 올리자 예조의 복계 안에“풍년
이 들기를 기다려서 양무를 개설할 것입니다.”하였는데 임금의 윤허

3) 1626년(인조 4)∼1688년(숙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중우(仲羽), 호는 일휴정(逸休亭). 아버지는 참의 유겸(有謙)이며, 어머니는 윤홍유
(尹弘裕)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
어나 11세의 어린 나이로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에 갔다가 사신으로 간 이덕인
(李德仁)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1648년 진사가 되고, 1655년(효종 6) 춘당대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수찬·응교 등을 거쳤다. 1667년(현종 8) 집의로 있을
때 청나라 조정이 청나라 도피인을 돌려 보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조선에 책임을
물어 당시의 재상들을 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지탄을 받은 영의정 정
태화(鄭太和), 좌의정 홍명하(洪命夏), 진주사(陳奏使) 허적(許積) 등이 그 책임을
오히려 왕에게 돌리자, 그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 맞서야 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크게 꾸짖고 처벌하도록 청하였다. 그는 당시에 이들을 파
직시키기를 청하였던 김징(金澄) 등 7인과 함께 8간신(諫臣)으로 불렸다.1669년
광주 부윤(廣州府尹)을 거쳐 1672년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1675년(숙종 1) 서인이 실각하자 한때 물러났으나 뒤에 재등용되어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1687년 우의정에 올랐다. 대구의 상덕사(尙德祠)에 제향되었으
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3. 참고자료 159
를 받았다. 갑자년(1684)에 터전을 잡고 을축년(1685)에 옮겨 짓게
되었다.
뒤에 이익이 계문하자 비국의 복계안에“강도를 비록 보장이라 하
여 유수로 승격하였으나 유생의 수가 원래 적어 문교를 다 갖추기
어려우니 반드시 송도의 예에 준할 필요가 없고 그대로 구교를 따르
게 하소서”라 하였다.
병인년(1686)에 본부의 유생이 상소하자 예조가 방계하였다. 신정
의 장계 안에
“한당의 제현을 비국의 방계로 인해 비록 송도의 예에 의해 배향
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송조사현은 각도 계수관의 예에 의하여 배향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예조의 복계안에“계수목관은
한결같이 태학의 예처럼 하나, 부·군은 송조사현을 더 배향하는 일
이 별로 없으니 전일 비국의 복계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는 뜻을
윤허받아 행회하였다. 원래 사전에는 나라에서 정한 제도가 있다. 그
러므로 주·부·군·현이 각각 정한 예가 있어 각도가 각각 다르며,
송유를 뽑아 더 배향함은 더욱 부당한 것이다. 본부에서는 전후 계문
하여 이미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경오년(1690, 숙종 16)에 옮겨
봉안할 때는 의당 조령에 의해 봉행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송조
사현은 그대로 더배향하고 우리나라 제현들의 위차 또한 나라에서
정한 제도와 다르니 문교에만 무몰(蕪沒)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체에 있어서도 몹시 미안하다.

160 역주 학궁의례
【원전】

3. 참고자료 161
162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63
2) 속수증보강도지(續修增補江都志)1)

향교

살피건대 여러 주에 있는 향교는 고려 인종때 창립한 것이다. [인


종 5년(1127) 정미 3월, 여러 주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화를 넓히라
는 조서를 내렸으니 군읍에 향교가 세워진 것은 이로부터 비롯된 것
이다.] 이때 본군의 향교는 고려산 남쪽의 옛 읍이 틀림없다. [지금
고읍성에는 산전(山田)이 널려있는데, 본토 사람들이 전하기를 그 땅
은 향교 터가 있던 땅이라 한다.] 이후 고종이 강도에 들어와 왕성을
옮긴 후에는 묵사동[지금의 갑곳리]에 향교 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몽고 군대가 성을 훼철할 때 향교는 볼음도[옛 향교 터와 함께 이
섬에 학전(學田)이 지금도 있다]로 옮겨갔다. 이후 성 안으로 다시
옮겨간 경위에 대해서는 기록에 전하는 것이 없어 연대조차 알 수가
없다.
조선 인조 2년(1624) 갑자에 강화유수 심열이 소동문 밖 송악산
측면에 건물을 지었는데 옛 열무당 동북쪽 언덕 훈련하던 땅이다. 향
교에 대한 여러 제도가 초창기라 준비가 미흡하다가, 7년이 지난 경
오년(1630) 유수 이안눌이 비로소 위판을 봉안하고 명륜당을 건립하
니 교(校)로 승격하여 학(學)이 되었고, 명칭을 고쳐 학궁(學宮)이라
하였다. 이는 개경에 있는 향교를 신관(新館)으로 승격시킨 까닭으로
강화에 있는 학교 역시 이름을 올려 학궁이라 한 것이다. [이때 동악

1) 朴憲用 編述 ; 黃範周, 李得季, 黃明熙 校閱,『續修增補 江都誌. 上, 下』(江華,


崔喜冕方, 1932).

164 역주 학궁의례
(이안눌)이 시를 써서 학궁을 표시하고, 판관 이중명이 돌에 새겨 그
사적을 기록하였다.]
현종 계축년(1673)에는 유수 민시중이 학궁을 남산 골로 옮겨 세
웠고, 영조 신해년(1731)에는 유수 유척기가 관아에 있으면서 내려
다보는 광경이 높이 존경하고 숭모하는 자세가 아니라하여 곧 옮겨
세우니, [지금의 향교이다.] 학궁의 재우(齋宇)와 포주(庖廚) 등의 건
물들은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 영조 무술년(1766)에는 이안눌의 5대
손인 이은이 유수가 되어 낡은 건물들을 수리하고 장식을 새롭게 하
였다. 또한 동소문 밖 옛 터에 있던 향교의 기사비(記事碑)를 삼문
밖에 옮겨 세우니 곧 전 판관 이중명이 찬술한 명륜당창건비명이다.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하 중략)2)

대성전[10칸이다. 5성위를 봉안하고 그 동쪽과 서쪽에는 여러 현


자들의 위패를 나란히 배향한다.] ○동쪽에 배향하는 위패는 비공 민
읍, 설공 연옹, 여공 단목사, 위공(衛公) 중유, 위공(魏公) 복상, 도
국공 주돈이, 낙국공 정이, 등백 장재 등 8위이다. 서쪽에 놓인 위
패는 등국공 염경, 제안공 재여, 서공 염구, 오공 언언, 현천후 유손
사, 예국공 정호, 신안백 소옹, 미국공 주희 등 8위이다].

동서무[각 4칸이다.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유학자를 배향한


다.] ○지금의 나라에 대한 정신으로 살펴보면, 동서무에 여러 (우리
나라의)현자들을 배향하는 것은 옛날 때에 있었던 동방에 대한 차별
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동무에는 홍유후 설총, 문성공 안유, 문경

2) 이 부분은 이 책의 3. 참고자료, 3)유수 이공안눌 창건 명륜당비(留守李公安訥創


建明倫堂碑)와 동일한 내용이라 번역하지 않았다.

3. 참고자료 165
공 김굉필, 문정공 조광조, 문순공 이황, 문성공 이이, 문원공 김장
생, 문정공 송준길 등 8위가 배향되어 있다. 서무에는 문창후 최치
원, 문충공 정몽주, 문헌공 정여창, 문원공 이언적, 문정공 김인후,
문간공 성혼, 문정공 송시열, 문순공 박세채 등 8위가 배향되어 있다.

제기고[대성전 동쪽에 있다. 제기로는 유제기(鍮祭器)와 보궤(簠簋)


각 48좌, 용작(龍爵) 8좌, 작(爵,) 46좌, 작대(爵臺) 20좌, 향합(香
盒) 4좌, 향로(香爐) 9좌, 준(墫) 7좌, 촉대(燭臺) 6쌍, 사제기보궤
(砂祭器簠簋) 28좌, 목두(木豆) 98, 뉴변(杻籩) 5, 목촉대 4쌍, 목작
대(木爵臺) 26, 축판(祝板) 5, 향상(香床) 9, 축상(祝床) 5, 조상(俎
床) 34, 관세상(盥洗床 1, 폐광(幣筐) 4, 가자보(架子褓) 4, 부(釜) 1
개 등이 있다. 그 밖에 식정(食鼎) 몇 개, 제복(祭服) 및 유건(儒巾)
이 각각 몇 벌씩 있다].

석전(釋奠)[매년 본 가을 두 번째 달 첫 번째 정(丁)의 날에 석전
제를 지낸다. 이때 5성위에는 쌀, 수수, 기장, 피, 소를 대신한 희생
양 1마리, 희생 돼지 1두, 비단과 모시 각 18척이 소용된다. 그리고
배향위에는 피와 기장만 쓰이고 비단과 모시는 없다.]

재산(財産)[부동산 중에서 전답은 향교 부근과 건평리와 망도에 산


재해 있으며, 대지와 임야는 향교의 앞과 뒤쪽에 있다. 논은 69,282
평인데 소작으로 받는 도조가 123섬 28되이다. 밭은 15,426평이며
소작으로 받는 도조가 8섬 35되이다. 대지는 1,782평인데 임대를 통
해 얻는 도조는 2섬 37되이며, 임야는 707평인데 임대를 해준 면적
은 302평으로 여기서 나오는 도조는 2말이다. 그밖에 부동산은 번거

166 역주 학궁의례
로워 다 기록하지 않는다.]

명륜당[동재와 서재 방 면적은 각 6칸이며 앞마루는 6칸, 대청은


10칸인데, 각기 문설주를 나누어 세웠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 사이에
낀 방이 각 2칸이며, 그 앞마루는 7칸이다. 중문 1칸은 동재와 서재
출입문인데, 이러한 설계는 이안눌이 건물을 세울 때 만든 것이다].

예방(禮房)
전사청(典祀廳)
공수소(供需所)[지금은 제사일을 맡은 구실아치가 거주하고 있다].

안연재(安燕齋)[강당이다. 옛날 교관들이 나누어 거처하던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인 고종 계사년(1893)에 유수 민응식이 다시
수리한 후, 그에 관한 기(記)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심도의 지세는 산을 지고 바다를 감고 있다. 삼도를 조정하는 요충에
있으면서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중요한 위치이다. 그리하여 성을 쌓
고 연못을 파며 군사를 기르고 갑옷을 수선하는 일이 옛날부터 자연
스레 있어왔다. 이에 근일에 이르러서도 군사적 위용을 더욱 갖추어
경 계

3. 참고자료 167
밝히는 가르침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리하여 향교는 임금을 높이고
윗사람을 친밀하게 하는 풍속을 이끌었으며, 서민에게는 충신예의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알게 되었던 이유였으니 어찌 위아래 모
두가 인화(人和)로 같이 가게 되었던 이유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올해 봄, 나는 총재의 임무를 받아 강도(江都)에 근무하라는 명을 받
았다. 강도 부임 초에 먼저 공부자 사당을 배알하고 향교 건물을 돌
아보았다. 사당 동쪽에는 소위 안연재라는 건물이 있는데 수리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기둥은 낡고 마루대는 휘어져 건물 전체가 허약하
였다. 나는 한탄하여“이 건물은 육도와 육예를 강습하는 장소인데도
이와같이 무너져 내리고 있으니 이를 어찌 어진 사람들을 기르는 도
리라 하겠는가?”하였다. 그래서 내 월급에서 얼마를 떼고, 고을 사
람들도 즐거이 힘을 보태라 하여, 그 모은 돈으로 수리 비용을 대어
중수(重修)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6개월이 지난 후 완공을 보아 수
리를 모두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향교 유생이 나에게 와 말하
였다.“이 안연재는 시가를 노래하고 교제하며 쉬는 곳인데 , 무너진
것을 수리하고 황폐해진 것을 흥기시켜 다시 옛 모습을 보게 되었으
니 이는 실로 공의 힘입니다. 이로부터 문풍(文風)이 크게 떨치고.
그리하여 훌륭한 인물들이 만들어지고, 예의충신(禮義忠信)이 방패와
갑주와 같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공의 힘입니다. 또 학당의 완
성은 수재(민응식)께서 기록하시는 것에서 비롯되니, 원컨대 글로써
기술해 주십시오.”하였다. 나는 응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무너진 것을 세우고 황폐해진 것을 다시 복구한 것은 모두
여러 사람들의 성의로 된 것이다. 후일 좋은 인재가 여기서 나온다면
그 또한 여러 사람들의 성의로 된 것이니 내가 무슨 힘을 썼겠는
가?”옛 사람이 문자로 기술한 일을 돌아보건케 감히 사양하지 않았

168 역주 학궁의례
으니 이에 기술한다.
○고종 기사년(1869)에 유수 이용희가 학궁을 중수(重修)하고 다음
과 같이 기록하였다. 지난 병인년(1866)에 서양 오랑캐가 심도(沁都)
를 침략하였다. 이때 용희는 순무사 직을 명 받고 한 달 동안 군사
를 내어 싸웠으나 외적을 박멸하지 못하니, 산천초목이 오히려 분노
로 휘감겨 남아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 임금님은 그 직분을 다하
지 못한 죄를 용서하셨으며, 3년이 지나 다시 진무절도사직을 맡기
셨다. 그리하여 다시 강화부에 와서 보니, 강화부의 관아 건물과 미
곡 창고 등이 화재 피해를 입어, 비록 빠르게 수리한다고 해도 그
건물들 중 옛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10에 2, 3뿐이었다. 대원
위(대원군) 합하는 백성들이 외적의 침략으로 당한 상처가 깊어 힘이
없음을 보고, 공사비가 많이 들거나 목재나 기와 등 재료 구할 일이
긴박한 것 등에 대해서는“나라 일을 경영하는 것과 같이 엄격하게
구분을 해서 수선하고 고치는 일을 진행하라 하고”용희를 질책하셨
다. 비록 용희가 재주가 없지만 이미 한 번 질책을 받음에 있어 무
슨 말이 있겠는가. 삼가 대원위 합하께 엎드려 말하기를“바다 오랑
캐의 사악함을 막고 성리학을 숭상하는 것으로 그 직무를 다하여 그
결과 맹자가 양묵(楊墨)을 물리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대원위
말씀은 영원히 천하에 남겨 만세에 이르도록 할 것이라”하였다. 이
제 건물을 수리하는데 있어 그 규모를 정하고 제도를 갖추어 모두
재가를 받게 되었다. 먼저 학교는 백성을 교화시키는 근본이 되는 곳
이니 마땅히 공부자(孔夫子) 사당을 복구하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대
체로 여기 학교의 모습은 이리저리 흩어져 한 고을의 기내(畿內)가
마치 무덤과 같이 황폐하였다. 다만 공자 사당만이 불에 타는 것을
겨우 면하여 홀로 우뚝서있을 뿐이니, 어찌 사악함을 막는 방패라 하

3. 참고자료 169
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 오래되어 그 마룻대는
휘고 기와는 썩어있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길일을 택해 공사를 시
작하여 4개월에 걸쳐 수리를 하여 완공을 고하였으니, 썩은 기둥을
바꾸고 무너진 지붕을 이었으며, 단청을 새롭게 칠하고 계단을 만들
었다. 또한 사당의 집기와 위패를 마련하고, 동무와 서무를 세우고
곳집을 마련하며 회랑을 아름답게 꾸미니 새롭게 바뀌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삼가 부지(府誌)를 살펴보니, 인조 무진년
(1628) 이공(李公)안눌이 시작한 이래, 민공(閔公)기중, 유공(兪公)척
기가 서로 이어가면서 학궁을 옮겨 지었는데, 동악 이안눌 이후 140
년이 지나 동악의 5대손인 담재(膽齋) 상국(相國) 은(溵)이 또 거듭
수리하고 장식을 새롭게 하였다. 이후 103년여 후에 용희가 그 공사
를 이었으니 지금에 와서 보면 5번이나 중수(重修)한 것이다. 동악공
과 나 용희는 뿌리는 같지만 가지는 다르다. 그러나 243년을 이어오
는 동안 나의 근본은 실로 학궁으로 시종하였으니, 사실은 우연한 것
이 아니라 역시 교궁(校宮)을 전고(典故)로 삼았기 때문인 것이다. 오
호라, 글방은 상서(庠序)에서 모방하였으니 예로부터 내려온 제도이
다. 문행충신(文行忠信)은 공부자의 네 가지 가르침이다. 덕을 행하
고 정사를 보며 말을 조리있게 하고 문장에 힘쓰는 것은 공부자 제
자들이 해야 할 네 가지 과목이니, 참으로 이 밖에 도(道)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내가 비록 도를 행하지 않더라도 여러 군
자들이 마땅히 이 네 가지 가르침과 네 가지 과목을 수행하여 그 도
를 본받으면, 공부자의 3천 제자들과 같이 공부자의 말씀을 들은 것
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게 되면 갓을 바르게 쓰고 띠를 바르게
차며 사람사이에서 겸손함을 갖게 되고, 남아(南雅)3)를 읊으며 태평

3) 詩經에서 周南과 小南, 大雅와 小雅를 이른다.

170 역주 학궁의례
을 노래하여 찬양하게 될 것이니, 바로 우리 임금님이 행하시는 문
(文)을 숭상하는 다스림(右文之治)에 부담을 주지 않게 될 것이며, 이
는 또한 대원위 합하의 오늘날 뜻이기도 하다. 옛날 우임금이 세상을
다스릴 때, 묘족 백성들이 천명을 거스르자 백익(伯益)이 우임금을
도와 군사를 모아 위세를 떨쳐 문덕(文德)을 펼쳤으니, 백익이 무무
(武舞)와 문무(文舞)를 70일간 행하여 묘족에게 격식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그리하여 묘족이 비록 미혹하여 공손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문(文)의 힘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대체로 덕(德)
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서부터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니 이는 고금에 피차 다름이 없는 것이지만, 여기 한구석 바다
오랑캐가 어찌 우임금이 있어 묘족의 일과 같은 것이 있음을 알겠는
가. 용희는 일찍이 전쟁을 겪었고 사당을 고쳐도 보았으니, 가만히
보면 한번은 실패하고 한번은 성공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각기
그에 따른 마땅한 결과를 얻었다고 하겠으며, 실제로는 영광스럽고
다행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단지 사당이 허물어진 것을 바로잡아 사
람들의 이목을 끈 것일 뿐이니, 감히 위로는 나의 임금에게 바치고
아래로는 여러 군자를 위하여 그들을 격려한 것이라 하겠다. 만약 용
희의 말을 가지고 옛 것을 공경하지 않고 그 뜻을 굽히는 것이라 한
다면 단연코 아니다. 대개 이 사당을 건립한 공사의 주역은 정성을
다하여 감독을 하였던 도유사 정봉한이다. 그 사람이 책임을 갖고 굳
건하게 일을 진행하였으며 또한 학문이 넒고 지식이 풍부하였다. 이
처럼 정도를 굳게 지키고 또한 옛 사적을 면밀하게 조사하였으니 어
찌 일이 잘 진행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사당 건립에 관한 전
반 내용을 제시하고 기록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그 전말을 알리
는 것이다.

3. 참고자료 171
동악 이안눌의 명륜당 시 1편을 붙이니, 이에 이르기를 “군과 읍
의 윤리를 밝게 하는 법식은 강당에 있는데, 강화도의 묘우만이 황량
하게 홀로 있구나. 재산을 내어 재물 씀을 좋아 하였으니, 그 제도는
선비를 기르는 방책이다. 예 악 시 서는 사술(선생이 가르친 네 가지
도)을 따르고,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삼강을 세웠다.
백발의 연로한 스승이 경영하는 뜻이니, 청금(유생)과 더불어 기뻐하
고 혹 잊혀짐을 돕는구나.

부 교동문묘

대성전 [열두 칸이니 오성위 봉향과 십육현 동서종향과 춘추석전의


의례와 절차가 강화문묘와 더불어 원래 차이가 없다.]

동서무 [각 아홉 칸이요 배향 십육위의 유현이 위와(강화문묘와)


같다.]

명륜당 [동서의 재실이 각 네 칸이요, 여섯 칸의 대청마루에 문이


나누어 있고 동서 협방이 각 두 칸이요 앞의 기둥이 네 칸이요, 내
삼문과 외삼문이 각 세 칸이요 전사청, 공수소, 수복실이 있다.]

제기고 [대성전 동쪽에 있으니 그 제기는 유기 보궤 각 18좌 용작


4좌, 준 3좌, 촉대 22쌍, 목두 75, 변 98, 향상 9, 가마솥 1, 식정
제복 및 유건이 조금 있다.]

172 역주 학궁의례
○교동지에 말하길 고려시대에 문선왕 및 제자 회상을 원으로부터
가져와 배봉하고 바다를 돌아 본 읍에 도달하여 문묘를 세우고 봉안
한 후에 경성 및 각 읍이 이로부터 비롯하여 (문묘를) 세우기 시작하
였다. 여러 주에 설립된 학교를 살펴보면 고려 인종 5년 즉 송(宋)
휘종(徽宗) 선화(宣化) 년간이니 이때에 우리 동방이 금과 더불어 관
계가 있어 서로 간에 왕래하니 금의 전성시대였다. 오호라 북원(北
元)의 건국은 고려 원종 때에 비롯되었으니 그러한즉 인종 5년으로부
터 북원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130년 후이다. 이미 말하기를 성상(공
자의 초상)을 원으로부터 배봉하였다 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동방의
으뜸의 향교라 하니 이는 반드시 전하는 자의 잘못이다. 그리고 동사
지지(東史地誌)에 특히 쓰여져 있기를 교동 화개산 밑 소나무 숲에
공자의 사당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를 보면 성상의 봉안한 일은 반드
시 고려 원종 이후이고 초상을 봉안하고 사당을 세운 것은 이로부터
여러 군읍에 있지 않음이라 교동에 홀로 있었다는 것은 대개 가히
알 수 있다. ○조선 중엽에 지부(知府) 조원신이 화개산 북으로부터
성의 북쪽인 화개산 남쪽으로 이건하였다.

3. 참고자료 173
174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75
176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77
178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79
180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81
182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83
184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85
186 역주 학궁의례
3. 참고자료 187
3) 유수 이안눌 창건 명륜당비(留守李公安訥創建明倫堂碑)

【원문】

留守 李公安訥 創建 明倫堂碑
■■■官 李重溟 撰
進 士 韓守儉 書
今 上 卽位之五年丁卯 大駕幸江都 有士人沈諔等陳疏 以本府府尹李
公安訥 爲府尹時 其律身也廉 其惠民也博 其莅事也幹 其作事也勤爲辭
上頗嘉納焉 是時 本府以保障重地 陞府尹爲留守 故前留守遞任後 廟議
方難其人擬 以李公首薦 而未蒙收敍爲啓 上曰 李安訥 前有聲續 予其嘉
之 今其再任可矣 公乃齋祓視事曰 上眷甚重 其敢不力一日 嘗謁夫子廟
退而進諸生曰 府而陞號 而孔廟無明倫堂 吾懼人材放失 儒敎濶疎也 迺
營廟之南 命儒生安宗道等董其役 殿堂室房 各得其度 鳥革翬飛 美而不
侈 生師有舍 庖廩有次 凡爲間架 四十有八堂成飮而落之 士有執爵而言
者曰 自生民以來 未有盛於夫子 則仰夫子遺風 其不在玆乎 況營建 不費
官財 不借民力 縮節裝飾 多方措辦 非公幹敏 何以致此 完山 李重溟言
于衆曰 今代遭聖明 此府得我公俾多士由此堂 踐五典之敎 明三綱之道
世治則譚禮樂 以陶吾民 不幸則子死孝 而臣死忠 嗟我多士 盍亦自勗
皆再拜稽首曰 然嗚乎 聖上之擇賢授能 我公之建堂立敎 皆己無間 則多
士之爲公豎碑者 爲聖上也 爲夫子也 多士愛公之誠 吁亦可尙也已 公德
水人 爲人廉潔有持操 餘事文章 老健蒼勁 作人興敎 尤平日所蓄積也 系
之以銘 銘曰

188 역주 학궁의례
有覺其楹 君子攸營 吁嗟乎公
有噦其冥 多士攸寧 吁嗟乎公
於斯琢磨 於斯絃歌 吁嗟乎公
顧名思義 作我多士 吁嗟乎公

沁之學 舊稱鄕校 制度未備. 仁廟庚午 我先祖 東岳先生之尹玆土也


建明倫堂 新學舍 四十八楹 更名以學宮 儒化大興. 沁之士 樂其絃誦之
有所 立碑記之 至今屹然如峴山之片石. 其後斯學也 屢移而若堂室廨宇
一遵先生之舊制 碑獨未遷 盖未遑也. 今不肖 來守是府 謁先聖之日 見
堂宇 年久頹圯 感先生之遺躅 招諸生而議之. 損廩鳩材 先自明倫堂始
諸生咸曰 是役也 不可不謨移舊碑 竪之於此 故移其碑 而識其下如此
嗚呼 其敢曰肯構 聊以追先生之志事云
丙戌仲冬 東岳先生 五代孫 溵 謹識
大匡輔國 崇祿大夫 行判中樞府事 金相福 書

■ ■ ■宗道
李夢良
朴 珣
金禹鼎
齋 任 崔宗壽
安善道
姜履■
金大■
立碑有■ ■■■

3. 참고자료 189
色 吏 朴應命
■■■
■■■

【번역】

유수 이공안눌 창건 명륜당비1)

■■■관 이중명 짓다.


진사 한수검 쓰다.

금상이 즉위하신지 5년 정묘년(1627, 인조 5)에 임금께서 강도에


행차하시니 선비 심숙 등이 하소연하되‘본부의 부윤 이공 안눌이
부윤이 되었을 때에, 몸가짐이 청렴하고 백성에게 은혜로움이 많았
고, 직무에 임하심이 분명했고 일을 처리함이 부지런하셨다.’하니 임

1) 이안눌이 1630년 강화 유수로 부임하여 명륜당을 창건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


운 비석으로 마모가 심하여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
러나『강화금석문집(江華金石文集)』(강화문화원, 2006년)에 비문이 1986년 강
화향교에서 간행한『강화향교지(江華鄕校誌)』의 각종기적문헌류(各種紀績文獻類)
에 있으며 이를 참고 하였다고 하여 이를 전재하였다. 비의 내용은 앞면은 이안
눌이 명륜당을 창건한 인조대에 이중명이 비문을 짓고 진사 한수겸이 썼으며, 이
안눌이 유수로 부임하여 문묘를 배향하고‘강화부가 유수부로 격상하였으나 공자
의 사당에 명륜당이 없으니 인재를 잃어 유교가 소홀해질까 두렵다.’하고는 이에
유생 안종도 등에게 사당의 남쪽에 48칸 규모의 명륜당과 부속건물을 지은 내용
이 있다. 그리고 측면은 이안눌의 5대손인 이은이 강화유수로 부임하여 학궁이
여러 번 옮기면서 옛 제도를 준수했으나 유독 비석만을 옮기지 못한 이유와 학
당이나 집들이 년수가 오래되어서 이미 무너진 것을 보고 이안눌의 뜻을 추모하
여 중수하게된 내력을 적고 있다. 이은이 짓고, 김상복이 썼다. 후면에는 비의
건립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190 역주 학궁의례
금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이때에 본 강화부가 국가의 방어에 중
요한 땅이라 하여 부윤을 격상하여 유수로 삼았다. 전 유수가 체임한
뒤로 조정의 논의가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어렵다 하여 이공을 으뜸
으로 추천하나 아직 서용이 윤허되지 못했다고 계청하니 임금이 말
씀하되‘이안눌이 전에도 소문난 치적이 있어 내가 아름다이 여겼으
니 지금 다시 임용함이 옳다.’고 하셨다. 공이 목욕재계하고 일을 살
피면서 이르되,‘임금의 사랑이 중한데 감히 힘쓰지 않으랴’하다. 하
루는 공자의 사당을 알현하고 물러나 모든 생도에게 가서 이르되
‘강화부는 이름을 격상했는데 공자의 사당에는 명륜당이 없으니 나
는 인재를 잃어 유교가 소홀해질까 두렵다.’하고는 이에 사당의 남쪽
에 짓기로 하고 유생 안종도 등에게 일을 독려하게 하여 전당과 방
사가 각기 법도를 얻으니 전당이 격식을 갖추어 아름다우나 사치스
럽지 않았다. 학생과 선생에게 방이 있고, 주방과 창고가 차서가 있
어 모든 칸의 수가 48칸이다. 당이 이루어지자 술을 마시며 즐거워
하니 어느 선비가 술잔을 들고 이르되‘인류가 있은 이후로 공자의
시대보다 융성한 때가 없은즉 공자의 끼친 풍교를 우러름이 이에 있
지 아니한가. 더구나 건축을 경영함에 있어 관가의 재정을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의 힘을 아껴 절차를 줄여 꾸미면서 여러 방면을 주선하
니 공의 민첩한 처사가 아니면 어떻게 이에 이르겠는가’하였다.
완산 이중명이 대중에게 이르기를‘오늘의 세대가 성명한 군주를
만났고, 이 강화부는 우리 공을 만나 모든 선비가 이 명륜당으로부터
오륜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삼강의 진리를 밝혀 세상이 태평하면 예
와 악을 배워 우리 민생을 풍족히 하고 국가가 불행할 때는 아들은
효도로 죽고 신하는 충성으로 죽으리니 오! 우리 많은 선비들이여 어
찌 스스로 힘쓰지 않겠나’하니 모두가 재배하며 머리를 조아려‘그렇

3. 참고자료 191
다’한다.
오! 성상께서 현명한 이를 선택하고 유능한 이에게 맡겨 우리 공이
당을 새로 짓고 가르침을 세웠음이 모두가 간격이 없는 일이다. 그렇
다면 모든 선비들이 공을 위해 비를 세움은 성상을 위함이고 공자를
위함이다. 여러 선비들이 공을 위한 정성도 오! 가상한 일이로다.
공은 덕수 이씨이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지조가 있으며, 여가의 일
로 문장을 하니 늙을수록 건장 강경하여 사람들을 위해 교육을 일으
킴은 더구나 평소에 쌓여진 포부이다. 명을 짓되

그 기둥이 높고 큼이 있어 군자가 경영하는 바여 오! 감탄한다. 공


이여
그 아득함에 밝음이 있어 많은 선비가 평안한 바여 오! 감탄한다.
공이여
이에 갈고 다듬고 이에 현을 타고 노래하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이름을 회고하고 우리 많은 선비를 기르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강화의 학궁을 옛날에는 향교라 칭하였는데 제도가 갖추어 지지


않았다. 인조 경오년(1630)에 우리 선조 동악선생께서 이땅의 부윤
이 되어 명륜당을 세우고 새로운 학사 48칸을 지어 학궁이라 이름을
다시하여 유교의 교화가 크게 일었다. 강화의 선비들이 거문고를 타
며 노래하는 것이 있는 바를 즐거워 하여 비석을 세워 기록하여 지
금까지 홀연하기가 현산(峴山)의 조그마한 돌 같다. 그 후 이 학궁이
여러 번 옮기면서 당실(堂室)과 해우(廨宇)가 한결같이 선생의 옛 제
도를 준수함과 같았으나 유독 비석만을 옮기지 못한 것은 아직 겨를
이 없어서였다. 지금 불초 소생이 이 고을에 유수로 와서 옛 성인을

192 역주 학궁의례
알현하던 날에 학당이나 집들을 보니 년수가 오래되어서 이미 무너
져 선생의 남긴 자취를 느껴 여러 유생을 불러 상의하였다. 창고를
덜어 재물을 모아 먼저 명륜당부터 시작하니 여러 유생이 모두 이르
기를‘이 역사는 옛 비석을 옮겨 여기에 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하기
에 비석을 옮기고 그 밑에 이렇게 쓴다. 오호라! 어찌 감히 다시 짓
는다 하리오 애오라지 선생의 뜻을 추모하는 일이다.
병술년(1766, 영조 42) 동짓달 동악선생의 5대손 은(溵)이 삼가
짓다.
대광보국숭록대부2) 행3)중추원부사4) 김상복5)은 쓰다.

2) 조선시대 정1품 상계(上階) 문관의 품계. 1392년(태조 1) 7월 관제를 새로 정할


때 고려시대의 특진보국삼중대광(特進輔國三重大匡)을 계승, 개편하여 특진보국숭
록대부라 하였던 것을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개칭하였다.
3) 행수법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에 문·무 관료들에게 적용된 인사법규의 하나아다.
새로 보임된 관직(官職 : 實職)의 품계가 전에 받았던 품계보다 낮은 경우에는 '
행'이라고 하며 그 직은 '행직'(行職)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보임된 관직이 전
에 받았던 품계보다 높은 경우에는 '수' 라고 하며 그 직은 '수직'(守職)이라고 한
다. 품계는 관직세계의 위계로서 모든 관리들에게 광범하게 주어지는 데 반해 관
직은 일정한 수가 제한되어 있고 관리들의 역량에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양자
는 관직제의 운영상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품계와 관직의 불일치를 보완하기 위
해 행수법을 실시했다. 한편 행수법에서 직함을 쓸 때 행·수는 품계 뒤, 관사명
앞에 썼는데, 직함을 표시할 때 먼저 품계를, 다음에 행·수를, 그뒤에 관사와
직사를 쓰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종친·의빈과 충훈부 당상관은 관사명을 쓰지
않았으며, 영사·판사·지사·첨사 등은 영·판·지·첨 자(字)를 관사명 앞에
썼다.
4)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에 두었던 정1품 관직. 정원은 1인이다. 중추부의 영사
(領事), 즉 최고책임자로서‘영중추 또는 영부사’로 약칭되기도 하였다. 이는
1466년(세조 12) 종래의 중추원을 중추부로 개편하면서 처음 두었고, 1894년(고
종 31) 갑오경장에 의한 관제개혁으로 폐지되었다. 고려시대의 중추원은 국가기
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적 관부였으나, 조선시대의 중추부는 형식상
서반(西班)의 최고관부로 편제되어 있었을 뿐 일정한 소관사무가 없는 유명무실
한 기구였다. 따라서, 영중추부사·판중추부사·지중추부사 등은 관직도 맡은 일
이 없는 명목상의 직위에 지나지 않았다. 보통은 의정부나 육조의 고위직에서 물
러난 문관들을 예우하여 계속 녹봉을 주기 위한 일종의 명예직으로 활용되었다.

3. 참고자료 193
■ ■ ■종도
이몽양
박 순
김우정
재 임 최종수
안선도
강이■
김대■
입비유■ ■■■
색 리 박응명
■■■
■■■

영중추부사는 의정(議政)을 역임한 원로 대신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원이 1인뿐이


었으므로, 의정 역임자가 많을 경우에는 서열에 따라 1인만 영중추부사에 임명하
고 나머지는 모두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중추부에서
는 직무가 없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비변사 도제조(備邊司都提調)를 겸직하
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국가의 중요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5) 1714년(숙종 40)∼1782년(정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수
(仲受), 호는 직하(稷下) 또는 자연(自然). 사계 김장생(長生)의 후손으로 한성판
윤 원택(元澤)의 아들이며 인조의 외손이다. 어머니는 심정보(沈廷輔)의 딸이다.
1740년(영조 16) 알성시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곧 한림(翰林)에 피선되어 문장으
로 이름이 있었으며, 삼사를 두루 거치고 이조·호조·예조·병조의 참의를 거
쳐 1760년에는 예문관제학·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호조판서·예조판서·한성판
윤·홍문관제학을 지냈다. 1763년 11월에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1772년에 영의
정까지 오르는 등 14년간 정승을 지냈다. 그는 홍봉한(洪鳳漢)과 정치적 동지로
서 이른바 북당(北黨)에 속하였다.『어제수덕전편(御製樹德全編)』을 편찬하였고,
저서로『통색문답(通塞問答)』1책,「백암당대선사비명(柏庵堂大禪師碑銘)」등이 전
하고 있다.

194 역주 학궁의례
4) 유수 이공용희 문묘중수 기적비(留守李公容熙文廟重修
紀績碑)

【원문】

留守李公容熙重修文廟紀績碑

州必有學 學所以崇正道 宣風敎也. 我鄕僻處海隅 文廟儀樣 依倣京


師. 初修於東岳先生駐節之日 繼而兩次重建 前在笠洞相國按節之時 後
在驪江尙書鎭營之會 皆因德水李氏故家 而有光於 文廟 一都人士之感慕
謳吟 厥惟久矣 近因歲月秒多 風雨浸磨 瓦桷之重修者 覆壓之階礎之平
衍者 傾則之謀所改建 時日斯急 事巨力錦 不遑遽議 時五年戊辰春 聖上
命我公鎭撫西都 公平夷正直 溫良樂易 治人事神 無間表襮 到營之初祗
謁 先師 退謂諸生曰 郡邑之有 文廟 所以明倫 而明倫亦自觀瞻始 今
廟貌若是慌凉 盍營葺之是圖 於是 殫竭誠力一新更張 凡三閱月而功告
訖 數仞宮牆 三門師表 赫赫然照人耳目 公宣化中首先之績也 盖公而德
水之家 繼德水三世修 廟之功 又有此盛擧 人事之湊合 誠有不偶而然者
從此秋禮冬詩之化 可洽於齊人 古人所謂宣風觀俗之規 實歸於上宰者 亶
不然乎 相與頌公之德 仍伐石而識之 銘曰

以鄕觀鄕 赫赫文廟 仍舊改建 公來何暮 誠力攸曁 銘此短碑


文治足徵 山斗典型 以待後人 殿宇一新 可感神明 以告無疆
庚午 三月 日 立
幼學 南宮浚 撰
柳恒鎭 書

3. 참고자료 195
營建有司 李秉春
營造番生 李東浩
前碑營建有司 金禹鼎 五代孫 宗模
六代孫 鉉璟 等錢三十兩扶役

【번역】

유수 이용희1) 문묘중수 기적비2)

고을에는 반드시 학교가 있어야 하는데, 학교란 정도(正道)를 숭상


하고 풍속교화를 베푸는 곳이다. 우리 고을은 바다 한쪽 궁벽진 곳에
있지만 문묘의 의례과 형식은 서울의 그것을 본떴다. 동악 선생이 유

1) 1811년(순조 11)∼미상. 조선 말기의 무신. 자는 공습(公習), 호는 기원(淇園).


본관은 덕수(德水). 첨정 명권(命權)의 아들이다. 1861년(철종 12) 전라우도수군
절도사를 거쳐 1863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선봉이 되어 로즈(Roze, P. G.)제독이 이끄는 프랑스함대를 물리쳤다.
어영중군 재임중 양화진(楊花津)에 프랑스전함 2척이 출현하였을 때 훈련도감의
군인을 징발하여 서강(西江)을 경계하였고, 프랑스군이 강화부와 통진부를 습격
하여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자 기보연해순무사중군(畿輔沿海巡撫使中軍)에 임명되
어 2,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통진부에 진입하였다. 이어 별무사(別武
士)지홍관(池弘寬)을 파견하여 기보연해순무영에서 작성한 프랑스함대의 침공을
공박하고, 토벌을 기약하는 격문을 보내어 철군을 촉구하였다. 프랑스군이 정족
산성(鼎足山城)을 정찰하고 전등사(傳燈寺)를 약탈하자 천총(千摠)양헌수(梁憲洙)
를 보내어 정족산성에 잠복시키고, 프랑스군 6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려 프랑스
함대가 퇴각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 공적으로 특별히 형조판서에 발탁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총융사·어영대장을 역임하였다. 1868년 주사대장(舟師大
將)을 거쳐 이듬해 진무사(鎭撫使)가 되었고, 1871년 다시 어영대장에 임명되었
다가 1873년 훈련대장, 1875년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에는 김병학(金炳學)·홍순목(洪淳穆)·양헌수 등과 함께 조정에서 개국을 반
대하는 보수적 쇄국척화론을 고수하였다. 시호는 정의(靖毅)이다.
2) 강화유수 이용희가 1869년 강화의 문묘를 중수한 공적을 기려 강화의 유생들이
세운 것이다. 비의 내용은 문묘의 건립과 중건의 연혁, 당시의 중건 내용 비, 문
묘 중수와 비의 건립에 기여한 사람의 소개 등이 실려 있다.

196 역주 학궁의례
수로 있을 때 처음 세워졌으며, 이어서 두 번 중건하였는데, 먼저 번
은 입동(笠洞) 상국(相國)이 안절할 때요, 두 번째는 여강(驪江) 상서
(尙書)가 진영할 때이다. 두 번 모두 덕수 이씨로 인하여 문묘가 빛
을 보게 되었으니 온 고을 인사들이 사모하여 칭송한지 이미 오래되
었다.
근년에 세월이 오래되고 풍우에 씻기어 기와가 서까래 중수한 것
을 눌러 뒤집어졌으며, 반듯하던 계단도 이미 기울어져 고쳐 세울 것
을 도모하였으나, 시일은 급하며 일은 크고 힘은 모자라 의논조차 못
하고 있었다. 마침 금상 5년 무진년 봄에 성상께서 우리 공으로 서
도(西都)를 진무하라 명하였다.
공이 평이(平夷) 정직하고 온량(溫良) 낙이(樂易)하여 사람을 다스
리고 귀신을 섬김에 두루 원만하였다. 부임하던 길로 선사(先師)를
배향하고 제생에게 이르길‘고을에 문묘가 있는 것은 윤리와 기강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요, 윤리를 밝히는 데에는 보고 듣는 것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인데, 이제 문묘의 형태가 이와 같이 황량한데 어찌 경영
하고 수리할 것을 도모하지 않으리오’하였다. 이에 정성과 힘을 다하
여 모든 부분을 일신하니 3개월이 걸려 일이 끝났다. 몇길의 담장과
삼문의 사표가 혁혁하게 사람들의 이목을 비치니 공의 선양하고 교
화한 공적 중에 가장 으뜸가는 사업이었다.
공은 덕수 이씨로 3대 조상이 문묘를 보수하던 공을 이어서 또 이
런 성사를 이룩하였으니, 사람과 하신일의 어울림이 참으로 우연이
아니면서도 우연처럼 되는 경우도 있는가 보다. 이로부터 가을제례와
겨울 공부의 교화가 되는 사람에게 흠뻑 젖어들게 될 것이니 옛 사
람이 이른바 풍교를 선양하고 풍속을 보는 규모가 모두 관리의 수장
에게 달렸다는 말이 참말로 그렇지 않은가. 서로의 공을 기리고 겸하

3. 참고자료 197
여 돌로 다듬어 기록하는 바이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마을을 마을로 보려면 문명의 치적이 족히 징빙이나


혁혁히 빛나는 문묘가 태산북두같은 전형이지
옛 규모따라 개축 건설함을 뒷사람에게 기대하였더니
공의 오심이 어찌 늦었던가마는 전각 사우가 일신해졌도다
정성스러운 힘 미치는 바이니 천지 신명도 감동하셨네
이작은 비석에 새겨서 무궁토록 알리노라

유학 남궁준이 글을 짓고
유항진이 글을 쓰다
영건 유사는 이병춘이고, 영조 번생은 이동호이다.
전비 영건 유사 김우정의 5대손 김종모와 육대손 김현경 등이 전
30량으로 역을 도왔다.

198 역주 학궁의례
5) 대전회통1) 호전 양전(大典會通 戶典 量田)

【원문】

戶典 / 量田

【번역】

호전/양전

[原] 凡田分六等, 每二十年, 改量成籍, 藏於本曹·本道·本邑. [一


等田尺長準周尺 四尺七寸七分五釐, 二等 五尺一寸七分九釐, 三等 五
尺七寸三釐, 四等 六尺四寸三分四釐, 五等 七尺五寸五分, 六等 九尺
五寸五分. 實積一尺爲把, 十把爲束, 十束爲負, 百負爲結. 一等田一結
準三十八畝, 二等田 四十四畝七分, 三等田 五十四畝二分, 四等田 六
十九畝, 五等田 九十五畝, 六等田 一百五十二畝. ○各等田 十四負 準
中朝田一畝. ○常耕者稱正田, 或耕或陳者稱續田. 其稱正田而地品瘠

1) 1865년(고종 2)에『대전통편(大典通編)』체제 이후 80년간의 수교(受敎), 각종


조례(條例)등을 보첨, 정리한 조선시대 최후의 통일 법전으로 6권 5책, 목판본이
다. 1865년 왕명에 따라 영의정 조두순(趙斗淳), 좌의정 김병학(金炳學)등이『대
전통편』이후 80년간 반포, 실시된 왕의 교명과 규칙 및 격식 등을『대전통편』
아래 추보한 뒤 교서관(校書館)에서 출판하였다.『대전회통(大典會通)』,『경국대
전』,『속대전』,『대전통편』등을 보완하는 입장에서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이
들 법전의 내용을 그대로 모두 수록하였다.『경국대전』에 수록된 내용은 원
(原) 으로 표시하고『속대전』에서 처음 나타나거나『경국대전』의 내용이 바뀐
것은 속(續) 으로 표시하였다. 또『대전통편』에 처음 등장하거나『경국대
전』․『속대전』의 내용이 바뀐것은 증(增) 로 표기했으며『대전회통』에 와서
처음 나타나거나 기존의 법전 내용이 바뀐것은 보(補) 로 표기하여, 하나의 제
도가 조선 전반에 걸쳐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3. 참고자료 199
薄, 禾穀不隧者, 續田而土性肥膏, 所出倍多者, 守令置簿, 報觀察使,
式年改正.]
[원] 모든 토지는 6등으로 나누며 20년마다 한 번씩 토지를 다시
측량하여 지적(地籍)을 만들어 호조·본도·본읍에 갖추어 둔다. [1
등전 척(尺)의 길이는 주척(周尺)에 준하여 4척 7촌 7푼 5리이고, 2
등은 5척 1촌 7푼 9리, 3등은 5척 7촌 3리, 4등은 6척 4촌 3푼 4
리, 5등은 7척 5촌 5푼, 6등은 9척 5촌 5푼이다. 실면적 1척을 파
(把)라 하고 10파를 속(束)이라 하고 10속을 부(負)라 하며 100부를
결(結)이라 한다. 1등전 1결은 38묘(畝)에 준하고, 2등전은 44묘 칠
푼, 3등전은 54묘 2푼, 4등전은 69묘, 5등전은 95묘, 6등전은 152
묘에 준한다. ○각등전 14부는 중국 명율(明律)에 의하면 전(田) 1묘
에 해당한다. ○항상 계속하여 경작되고 있는 토지는 정전(正田)이라
칭하고, 때로는 경작하고 때로는 휴경하는 토지는 속전(續田)이라 칭
한다. 토지대장에 정전으로 기록되었으나 토질이 좋지 못하여 곡물이
잘 되지 않는 토지라든가 혹은 속전으로 기록되었어도 지질이 비옥
하며 소출이 많은 경우에는 수령은 이를 장부에 적어두고 관찰사에
게 보고하여 다음 식년(式年)2)에 이를 개정한다.]

[續]凡田並用 一等尺打量. [二等以下尺度在原典, 而今不用.] 各等遞


降, 解作結負. [一等一負, 以二等八五, 三等單七, 四等五五, 五等單
四, 六等二五解之. 每等一負, 減一束五把. 一等尺實積爲十負 則二等

2) 자(子)·묘(卯)·오(午)·유(酉)의 지(支)가 포함된 간지(干支)의 해로 3년에 1번


씩 돌아온다. 조선시대에는 이해에 과거를 실시하거나 호적을 정리했다. 이때 시
행하던 과거를 식년시(式年試)라고 한다

200 역주 학궁의례
田爲八負五束 至六等田爲二負五束. 餘等倣此. 一等尺 滿一結則 以二
等八五空一, 三等七空一一, 四等五五空七乘之, 自合原典各等尺數. 把
未滿六則棄之]
[속] 모든 토지는 1등척으로 측량한다. [2등 이하의 척도는 원전에
는 있으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각 토지의 등수를 체강할 때에
는 결부의 실면적에 차이를 둠으로써 이를 표시한다. [1등전 1부는
2등전 8푼 5리, 3등전 7푼, 4등전 5푼 5리, 5등전 4푼, 6등전 2푼
5리로써 이에 대등시킨다. 그러니 매등 1부에 1속 5파를 감하는 셈
이다. 1등전 척으로 실면적이 10부가 되는 땅은 2등전인 즉 8부 5
속으로 되고 6등전에 이르면 2부 5속으로 된다. 기타 다른 각등전도
이에 준하여 면적을 정한다. 그러니 1등척으로 1결이 되는 토지는 2
등전이라면 0.8501(八五空一), 삼등전은 0.7011(七空一一), 4등전은
0.5507(五五空七)로 이를 곱하면 경국대전(原典)의 각등 척수에 합치
된다. 파는 6에 달하지 않으면 이를 버린다.]

毋論陳起, 滿五結則用一字號標之 [用千字文第次, 字內以一·二·三


爲第次. ○田形不明處以方田·直田, 裁作打量, 斜缺處, 別作田形打
量.]
진전(陳田), 기경전(起耕田)을 막론하고 5결이 되면 일자호(一字號)
로써 지번의 순을 표시한다. [천자문의 글자를 순차대로 사용하며 각
자(字)내에 다시 1·2·3으로써 그 순차를 삼는다. ○전형(田形)이
명백하지 않은 곳은 방전(方田)과 직전(直田)을 만들어 이를 측량하며
경사지어 떨어진 전지는 별도로 전형을 만들어서 측량한다.]
凡田四標及主名, 懸錄量案. [相訟田地已決者, 以決得人懸主, 未決訟

3. 참고자료 201
者, 姑以時執懸主, 而追後査卞, 勿以量名爲拘. ○陳田亦皆懸主, 無主
處以無主懸錄, 無文籍僞稱己物懸主者, 杖一百遠地定配. ○不干之人乘
其本主在遠, 暗錄己名於他人田地者, 杖一百流三千里.]
모든 전지는 사방의 표식과 전주(田主)의 이름을 양안에 기록하여
둔다. [서로 분쟁 중의 토지가 판결이 난 경우에는 소송에 이긴 자로
써 전주를 삼으나, 미결인 경우에는 임시로 전주로 기록해 두었다가
추후에 조사하여 판별이 나면 토지대장의 명의에 구애되지 않고 정
정한다. ○ 진전도 역시 전주를 기록해 두며 주인이 없는 토지는 무
주(無主)라고 기록해 둔다. 문적도 없이 자기의 소유라 거짓 칭하고
전주라고 기록하는 자는 장(杖)100에 처한 후 원지(遠地)에 정배한
다. ○ 아무 관계도 없는 자가 전주가 먼 곳에 거주함을 기화로 타
인의 전지를 자기의 명의로 허위기록한 자는 장 100에 처한 후 삼천
리 밖으로 유형(流刑)한다.]

○續田·加耕田已作常耕者, 並依正田分等, 火田並置六等. [等數陞


降之際, 守令之不從實者, 拿問定罪 ○ 北道量田後新起, 勿爲添入於元
結, 皆以續田施行, 隨起收稅. ○火田, 二十五日耕爲一結, 別件成冊.
不排字號, 只書地名, 使不與元田混雜.]
○속전 및 가경전으로 기록된 토지라도 이미 상시 경작되고 있는
경우에는 모두 정전에 따라 등급을 정한다. 화전(火田)은 모두 6등으
로 나눈다. [전지의 등수를 승강할 때에 수령이 실지와 맞지 않게 승
강하면 수령을 구속 사문(査問)하고 처벌한다. ○북관(北關)의 여러
도에서는 양전을 필한 후에 새로 기경한 토지가 있을 때는 원결에
첨입하지 않고 모두 속전으로써 이를 시행하며 기경함에 따라 조세

202 역주 학궁의례
를 징수한다. ○화전은 25일경(日耕)으로써 1결을 삼고 별도로 성책
한다. 자호(字號)를 배정하지 않고 다만 지명만 적어서 원전과 혼동
되지 않도록 한다.]

○畿甸水田四等作首, 旱田並置六等. [各樣位田及官屯田, 旣有先定


等數, 並勿陞降, 諸道同.]
○기전(畿甸)의 수전(水田)은 4등전을 수위로 삼고 한전(旱田)은 모
두 6등으로 삼는다. [각종 위전(位田) 및 관둔전(官屯田)은 위전·관
둔전에 편입되기 전에 이미 등수가 정하여 있으면 승강하지 않는다.
다른 여러 도에서도 이와 한가지로 처리한다.]

○均田使論勘該道守令, 通訓以下自斷, 通政以上啓聞. [都監官以下


刑推, 若係朝官則申聞, 應爲照律者, 發配後申聞. ○改量時, 監官等以
起爲陳, 以陳爲起, 田形失實, 循私落漏, 用意妄冒者, 每一負笞一十,
至杖一百而止. 通計滿一結者, 杖一百 流三千里. 土豪·佃夫之符同用
奸者, 勿論朝官, 一體定罪, 其田之全庫落漏者屬公. ○各邑成冊末端,
必書解負人姓名, 追後叩籌, 如有差錯, 依監官落漏妄冒者律論. 無情者,
減等論. ○都監官·監官以士夫擇差, 厭避者以圖避差役律論 ○土豪欺
隱結負, 而圖免其罪, 以奴名爲佃夫者, 勿論朝官, 杖一百徒三年 ○量
田時所管人, <書員·指示人之類> 橫斂民間者 <如托以供饋責辦酒肉之
類> 以隱結律論. ○凡量田犯罪人 勿論輕重勿揀赦前, 守令罷職者, 經
五年乃敘.]
○균전사(均田使)가 그 도의 수령의 범죄를 논할 때는 통훈대부(通

3. 참고자료 203
訓大夫) 이하는 스스로 결정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의 경우에
는 왕에게 보고하여 처단을 묻는다. [도감관(都監官) 이하는 처형 또
는 견책하되 만일 조정의 관리가 이에 연루했을 경우에는 상부에 보
고한다. 응당 법률에 저촉되는 자는 유배한 후에 보고한다. ○전지를
다시 측량할 때에 감관(監官) 등이 기경지를 진전으로 하고 진전를
기경지로 하거나 또는 전형이 그 사실과 맞지 않거나 사(私)를 위하
여 함부로 누락시키거나 고의로 사실과 어긋나게 하는 자는 매 1부
에 대하여 태(笞) 10을 벌하며 장 100에서 벌을 그친다. 도합 1결에
달한 자는 장 100을 벌한 후에 3,000리 밖으로 유배형을 보낸다.
토호 및 전부(佃夫)가 부동하여 간계를 꾸민 자는 조정 관리를 막론
하고 한가지로 논죄하고 전지의 전부가 누락된 것은 국가에 속히게
한다. ○각 읍의 토지대장이 완성되었을 때에는 그 말단에 반드시
해부인(解負人)3)의 성명을 기록해 둘 것이며 추후에 조사하여 착오
가 있는 경우에는 감관은 낙루망모자률(落漏妄冒者律)로써 논죄한다.
만일 과실로서 착오가 생긴 경우에는 형을 감등하여 논죄한다. ○도
감관 및 감관은 사대부로써 택차한다. 이 경우에 이를 꺼리어 피하는
자는 도피차역률(圖避差役律)로써 논죄한다. ○토호가 전지의 결부수
를 속이고 그 죄를 면할 것을 꾀하여 노비의 명의로 전부(佃夫)를 삼
는 자는 조관을 막론하고 장 100에 3년 도형(徒刑)에 처한다. ○토
지를 측량할 때에 소관인 <서원(書員) 및 지시인(指示人) 등> 이 민
간을 함부로 착취 <공궤(供饋)를 칭탁하여 술과 고기를 징구하는 종
류> 하는 자는 은결률(隱結律)로써 논죄한다. ○모든 양전시의 범죄
인은 그 경중을 물론하고 사면을 아니한다. 수령으로서 파직된 자는
5년이 경과하여야만 서용될 수 있다.]

3) 산학전문인(算學專門人)으로 토지의 결부를 계산하는 사람이다.

204 역주 학궁의례
4. 원전

4. 학궁의례 원전 205
4. 학궁의례 원전 207
208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09
210 역주 학궁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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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역주 학궁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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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15
216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17
218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19
220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21
222 역주 학궁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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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25
226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27
228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29
230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31
232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33
234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35
236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37
238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39
240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41
242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43
244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45
246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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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궁의례 원전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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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궁의례 원전 251
252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53
254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55
256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57
258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59
260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61
262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63
264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65
266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67
268 역주 학궁의례
4. 학궁의례 원전 269
270 역주 학궁의례
《인천역사문화총서》1~69호(2003~2011)

■ 2003년 간행(1~5호 ) 37.『譯註 倂合後의 仁川』


1.『인천의 역사와 문화』 38.『인천역사 4호-인천민속의 재발견-』
2.『인천의 역사와 문화』(영어) 39.『Chemulpo, Jinsen 그리고 인천』
3.『인천의 역사와 문화』(중국어)
4.『인천의 역사와 문화』(일어) ■ 2008년 간행 (40~48호 )
․ ․
5.『인천사자료집-三國史記高麗史朝鮮王朝實錄 40.『인천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仁川記事-』 41.『譯註 最近의 仁川』
42.『譯註 永宗鎭 戶籍資料』
■ 2004년 간행(6~14호 ) 43.『英譯 근대문화로 보는 한국최초 인천최고』
6.『인천의 섬』 44.『인천역사 5호-인천근대건축의 재발견』
7.『옛날 옛적에 인천은』 45.『바다와 섬, 인천에서의 삶』
8.『美軍政期의 인천자료』 46.『인천사진자료집성』(CD)
9.『譯註 仁川府邑誌』 47.『譯註 仁川의 史話와 史蹟』
10.『인천역사 1호-인천사의 재조명-』 48.『譯註 仁川米豆取引所沿革』
11.『譯註 仁川事情』(靑山好惠)
12.『譯註 仁川開港25年史』(信夫淳平) ■ 2009년 간행 (49~55호 )
13.『譯註 仁川開港25年史』(加瀨和三郞) 49.『譯註 현대 한국의 마을』
14.『近代의 移民과 仁川』 50.『譯註 仁川港關草(上)』
51.『英譯 인천개항장역사기행』
■ 2005년 간행(15~23호 ) 52.『건축으로 보는 도시 인천』
15.『인천의 산과 하천』 53.『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6.『근대문화로 보는 한국최초 인천최고』 54.『譯註 仁川과 仁川港』
17.『高宗時代 인천자료』 55.『인천의 갯벌과 간척』
18.『譯註 富平郡邑誌』
19.『인천역사 2호-인천 문학의 재조명-』 ■ 2010년 간행 (56~62호 )
20.『譯註 仁川港』 56.『譯註 仁川港關草(下)』
21.『譯註 仁川鄕土誌』 57.『譯註 江都古今詩選(前集)』
22.『멕시코 이민 100년의 회상』 58.『英譯 인천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23.『인천축항사진도록』 59.『지역 연구 현황과 시사편찬의 방향』
60.『인천역사 7호-인천 地理의 재발견』
■ 2006년 간행(24~31호 ) 61.『仁川常識問答』
24.『인천의 길과 시장』 62.『譯註 仁川島嶼地域의 地誌資料』
25.『인천개항장풍경』

26.『조선시대 인천지역의 생원진사시 합격자들』 ■ 2011년 간행 (63~69호 )
27.『譯註 喬桐郡邑誌』 63.『譯註 덕적도 고문서 자료집』
28.『譯註 先祖江華先生日記』 64.『譯註 江都古今詩選(後集)』
29.『譯註 韓國二大港實勢』 65.『譯註 學宮儀例』
30.『인천역사 3호-인천 경제의 재조명-』 66.『역사와 문화지리로 보는 인천』
31.『동북아 한인공동체와 삶』 67.『인천역사 8호-인천 향토사의 재검토』
68.『譯註 仁川府勢一班』
■ 2007년 간행(32~39호 ) 69.『인천의 전통사찰과 불교미술』
32.『인천개항장 역사기행』
33.『譯註 江華府誌』
34.『譯註 외국인의 기록으로 보는 인천 근대』
35.『譯註 邵城續錄』
36.『譯註 邵城陣中日誌』
인천역사문화총서65

譯註 學宮義例
기획 ․총괄 강덕우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강옥엽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번역 ․역주 남달우 (인하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양윤모 (인하대 강사 )
오정윤 (인하대 박물관 연구원 )

발행일 : 2011년 12월


발 행 : 인천광역시
발행처 :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 39번길 74(송학동 1가 2-2번지 )
☎ 032) 440-8382~8383
ISBN : 978-89-93590-65-4 9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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譯註 學宮儀例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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