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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삶과 그녀의 업적>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여러 인물들이 존재한다. 과


학계의 그런 대표적인 여성 인물로는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
1920~1958)이 있다.
프랭클린은 1920년 런던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명문 사립학교인 센트폴여학교를
졸업한 뒤 케임브리지대학에 진학했다. 프랭클린이 공부한 케임브리지대는 1869년까지 여학생
을, 1871년까지는 유대인을 받지 않았다. 프랭클린은 이러한 차별 속에서도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여 우수한 성적(2위)으로 졸업하고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뒤 1947년 파리 소재 프랑스
정부 연구소에 취업했다. 그리고 1951년, 프랭클린은 런던 킹스 칼리지의 생물물리학 연구소
에 연구원으로 합류했다.
프랭클린은 높은 강도의 탄소섬유를 포함하여 탄소화합물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X선 회절기
법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녀가 킹스 칼리지에서 연구를 시작했을 때는 DNA의 화학적 구성이
나 구조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는데, 프랭클린이 촬영한 X선 회절사진은 후에 이중
나선구조를 확신하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그녀는 DNA 이중나선 구조의 진실에 가장 먼
저 다가간 과학자였으나 노벨상의 영광은 얻지 못하였다.
1953년 4월 25일, 생명의 위대한 비밀을 공개한 역사적인 일이 있었다. 바로 미국의 제임스
왓슨(James Dewey Watson, 1928~)과 영국의 프랜시스 크릭(Francis Harry Compton
Crick, 1916~2004)이 과학저널 <네이처>에 20세기 생명과학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DNA
이중나선의 구조도를 게재한 것이다. 본문은 900자 정도에 달하는 짧은 분량이었지만, 20세기
최대의 생물학적 성과로 현재까지 높게 평가되고 있다.
유전정보를 담은 DNA는 생체 안에서 보통 이중나선을 이루고 있는데, 나선의 등뼈는 인산과
당이고, 나선 안쪽으로 4가지 염기(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가 달려 있다. 이 염기의 순
서가 바로 생명체의 유전 정보이다. 한쪽 가닥에 달린 염기가 다른 쪽 가닥에서 나온 염기와
수소결합을 통해 결합하여 염기쌍을 형성한다. DNA 1g에는 염기가 1021개 들어 있는데, 이
를 메모리로 환산하면 10억 테라비트에 해당하는 엄청난 정보량이다. 생명에 대한 모든 정보
는 DNA 속에 담겨 있다.
왓슨과 크릭은 생물학과 물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DNA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DNA 구조를 설
명하기 위해서는 실제 세포의 핵 속에 DNA가 어떤 모양으로 들어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
다. 이를 위해서는 X선으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앞서 언급한 프랭클린이 찍은 DNA의 X선
회절사진은 그들이 이중 나선구조를 확신하는 결정적인 자료가 됐다.
윌킨스는 프랭클린의 사전 허락도 없이 회절사진을 분석했고, 그 X선 회절사진에서 결정적 단
서를 얻은 왓슨과 크릭은 곧 나선형 모형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DNA 이중나선 구조 모형
이다.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공로를 인정받아,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 세
사람은 1962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의 노벨상 수상대에 나란히 섰다. 이때 프랭클린은 암
선고를 받고 1958년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것에는 물론 왓슨과 크릭의 창의적인 직관에서 비롯된 공로가 크다.
그러나 그 직관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던 실험 데이터는 분명히 윌킨스가 사적으로 보여 준
프랭클린의 사진이었다. 왓슨과 크릭은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세
상에서 잊혀질 뻔했던 이 사실은 왓슨이 집필한 <이중나선>을 계기로 밝혀졌다.
이처럼 프랭클린은 DNA 이중나선 발견의 ‘비극적 히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
는 2년에 불과했던 킹스 칼리지에서의 DNA 연구가 과학자로서 프랭클린의 모습 전체를 대변
하는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프랭클린이 석탄 구조 연구에서의 권위자였다는 사
실도,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의 분자 구조를 규명했다는 사실도 잊곤 한다. 2년간의 DNA 연
구가 20년 가까운 그녀 연구 인생 전체를 가려온 것이다. 하지만 DNA 연구라는 단적인 면에
서 벗어나 그녀의 다른 연구 활동들을 살펴보면 프랭클린은 고립되었던 독선적 연구자가 아니
라, 동료 연구자들과의 네트워크 속에서 활발하게 상호작용했던 유능한 결정학자이자 생산적
인 연구자였다. 그녀의 이런 특징이 특히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프랭클린의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 분자 구조 연구이다.
프랭클린의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 연구는 그녀가 킹스 칼리지에서 버크벡 칼리지로 자리를
옮긴 1953년 3월에 시작되었다. 1892년 발견된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는 1898년 처음으로
박테리아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 밝혀져 “바이러스”라는 이름을 얻은 세계 최초의 바이러스
였다.
프랭클린은 X선 회절 사진 촬영과 판독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X선 회절 사진은 물체의 2차원
그림자를 보고 물체의 3차원 형태를 알아내는 것이다. 바이러스와 같은 고분자에 X선을 쏘면
각각의 구성 원자에 부딪혀 반사된 X선들 사이에 다양한 방식으로 간섭이 발생하는데, X선
회절 사진은 바로 이 간섭 패턴을 찍는 것이다. 간섭이 만들어 낸 밝은 무늬와 어두운 무늬의
패턴을 보고 역으로 이 무늬가 나타나려면 내부의 구성 물질들이 어떤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
어야 하는가를 찾아내야 한다.
뚜렷한 X선 회절 패턴을 얻으려면 시료를 다양한 각도로 노출 시켜 선명한 패턴을 얻는 것이
우선이었다. DNA 구조 연구 때부터 그녀는 X선 촬영 카메라를 각도 조절이 가능하도록 직접
제작하고 수소가 채워진 카메라 내부의 습도를 일정하게 조절하는 등 실험 도구를 직접 개량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프랭클린이 DNA의 X선 회절 패턴 분석에 처음으로 패터슨 함수
를 적용했다는 점이다. 프랭클린은 복잡한 패터슨 함수 계산을 적용하여, X선 파장의 진폭을
통해 위상에 대한 정보까지 얻을 수 있었고 이런 데이터에 근거하여 DNA의 3차원 분자 구조
를 누구보다 상세하고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프랭클린의 연구는 연구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
스의 중앙부가 비어 있을 것이라는 카스파의 예측에, 원통형을 이루며 나선형으로 쌓인 단백
질 캡시드 사이에 RNA가 깊숙이 박혀 나선을 그리고 있을 것이라는 프랭클린의 발견이 더해
지면서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의 모형은 서서히 구체화되며 체계를 잡아 나갔다. 1956년 프
랭클린과 클루그, 홈즈가 함께 발표한 논문에서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 모형의 구체적인 모
습이 드러났다. 프랭클린의 선명한 X선 회절 사진과 패터슨 함수를 적용한 계산이 담배 모자
이크 바이러스의 정확한 ‘치수’를 제공했던 것이다.
1958년 4월 17일, 브뤼셀에서 개막된 세계박람회의 국제과학관에는 커다란 원통형 바이러스
모형이 전시되었다. 세계박람회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이 조형물은 바로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의 모형이었다. 이 모형은 럭비공처럼 생긴 흰 타원체를 나선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 높이 1.5m 가량의 조형물이다. 바이러스 모형의 중간 부분에 타원체 3개가 빠진
자리에는 3개의 굵은 선이 노출되어 있는데, 그 선은 타원체와 타원체 사이의 틈을 파고든 채
나선을 그리며 돌았다. 럭비공을 닮은 흰 타원체는 바이러스의 핵산을 감싸는 단백질 캡시드
에 해당했고, 캡시드 사이에 박힌 굵은 선은 RNA를 나타냈다.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는 가
운데가 빈 원통형이었고 럭비공을 닮은 단백질 캡시드로 인해 원통의 내외부 벽면은 올록볼록
했다. RNA는 캡시드에 둘러싸인 채, 원통의 내부에서 나선을 그렸다.
전 세계의 이목이 자신이 완성한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 모형에 집중된 것도 알지 못한 채
프랭클린이 세상을 떠난 후, 카스파와 클루그는 프랭클린을 제1저자로 하여 “X선 회절로 결
정된 바이러스의 구조”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카스파와 클루그는 구형 바이러스
의 구조까지 규명했고, 이 공로로 클루그는 198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수상 기념 강연에
서 클루그는 프랭클린의 삶이 그렇게 짧게 끝나지 않았다면 그녀가 그 자리에 함께 있을 것이
라고 애석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영국 정부는 이 비운의 여성과학자를 기리기 위해 ‘로잘린드 프랭클린 상’을 제정해 해마다
우수하고 업적이 탁월한 여성 과학자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다. 프랭클린은 여성이 과학 분
야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에 대학에서의 차별, 남자 동료들과의 관계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면서도 DNA 구조를 밝혀내는 데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바이러스의 구조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여 구조 바이러스학 분야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
다.
프랭클린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에는 ‘비운의 여성 과학자’라는 타이틀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
각한다. 사실, 나의 경우에도 왓슨과 크릭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보았으나 프랭클린에 대해서
는 들어본 경험이 많지 않았다. 또한, 단순히 그녀를 불운했던 여성 과학자로만 인식하고 있
었다. 그러나 프랭클린을 단순히 ‘비운의 여성 과학자’라고 정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
각한다. 그녀는 자신이 여성이고, 심지어 유대인이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석탄과 탄소, 흑연 연구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의 엄청난 업적은 DNA·RNA 바이러스 구조 분
석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물론 DNA 이중나선 구조도 중요하나, 물리화학자인 프랭클린이 박
사 학위 연구에서 시작하여 일생을 바친 탄소재료 X-선 구조 연구는 풀러렌, 탄소나노튜브,
그래핀 발견까지 이어지게 하는 위대한 연구이며, 가열된 탄소에서 흑연이 형성되어 발생하는
구조적 변화에 대한 그녀의 연구는 현재의 코크스 산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38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만약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1962년 노벨 생리
의학상 수상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이중나선 구조뿐만 아니
라 다른 분야에서도 충분히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랭클린은 여
자에게는 학위를 주지 않았던 시절 대학을 다녔고, 여교수에게 식당 출입을 제한하는 시절 대
학에서 연구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도 그녀는 당당하고 열정적이었다. 인간 생명의 비밀
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우리에게 쥐여주고 간 비운의 천재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 그녀는
노벨상 수상 여부를 떠나 한명의 여성으로서도, 과학자로서도 인류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인물임이 틀림없다는 것엔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이런과학자, 저런기술자 - 불운의 여성 과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


<KISTI의 과학향기> 제824호 - DNA 이중나선에 얽힌 드라마틱한 이야기
Horizon - [과학의 결정적 순간들] 1958년 4월 17일, 프랭클린과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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