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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04 영어에디팅 후기
07 04 영어에디팅 후기
솔직하게 말해서, 영어로 논문을 쓴다는 것은 참 귀찮은 일이다. 특히 한국의 사례를 연구하는
논문이라면, 더욱 그렇다. 고유명사의 영어 표기 같은 자잘한 문제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국말
로 표현하기도 어려워 죽겠는데 무려 영어로 옮기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압박감은 거의
두려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왜” 굳이 영어로 써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 그 자체
다. 어차피 한국의 사례에 대해서 한국인들이 보도록 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영어로 스스로를 자
학하는가. 사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귀찮음이고 당연한 회의적 반응이다. 이런 저런 글을 좀 더
많이 써본 편이고 현재 미국에 유학까지 나온 상태의 필자라고 할지라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뇌
리 한 켠에 항상 간직하고 있는 침투적 사고다.
3) 형식이란, 중요하다
학문의 초입에서는, 연구 내용이 좋으면 되는 것이지, 논문의 ‘양식’에 맞추는 것은 부차적이라
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형식과 내용은 그렇게 뚜렷하게 떨어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논문
의 형식이란 가장 효율적으로 뚜렷한 비교적 객관적 틀의 논거와 주장을 전개시키기 위해서 특
화된 시스템이다. 문제제기, 기존연구, 방법론 제시, 데이터 분석, 논의, 참조문헌의 순서로 이어
지는 표준화된 전개 과정 속에서 오해와 오독의 여지를 없애도록 되어있고, 상호호환성이 있는
틀 속에 위치시킨다. 그 결과 연구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을 학문적 지식의 네트워크 속에 위치시
키는 것이다. 연구는 소통이고, 소통에는 호환성과 표준양식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특수한
고유명사에 이탤릭체를 적용한다든지, APA 스타일의 문헌 인용 표시라든지 하는 것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레터 용지 Times New Roman 12포인트 줄간격 2배’ 같은 소소해 보이는 것들마저
도.
4) 발명왕을 목표로 하지 말자
현상이 복잡해지고 논지가 꼬일 경우 가장 흔하게 빠지는 유혹은 바로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
것이다. 한번 문민정부 시절의 촌극을 기억해보자. 한창 ‘세계화’라는 표어를 내걸었으나, 진정
한 제도개편을 배제한 시장개방 등 특이한 형태로 진행되었던 바 있다. 그 때 이렇듯
globalization과는 뭔가 다른 세계화를 영어로 무엇이라고 번역하면 좋을까, 라는 질문에 정부
의 공식 답변이란 바로 ‘Segyehwa’였다. 언뜻 보면 기발한 착상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
도 만들어내지 못하거니와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는 엉성한 오판에 불과했다. 새로운 개념을 발
명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개념의 발명은 호환성의 문제를 일으켜서 소
통을 가로막는다. 상대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을 처음부터 이해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데 더 문제는, 종종 새로운 발명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이미 충분히 다른 용어, 다른 개념어
로 충분히 통용되고 있는 경우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발명은 정말로 지금 이미 있는 개념들을
다 소진한 이후에나 하도록 하자. 아니 그 전에, 그냥 현상과 데이터로 설명해도 충분한 것을 자
꾸 거창한 개념화를 시도해서 오히려 이해가 어려워지도록 꼬아놓지 말자. 특히 한국어로 개념
을 발명한 후 그것을 영어로 번역할 때 엉성함은 한층 뚜렷해지기 마련이다. 영어 독자들은 어리
둥절해하고 말이다.
5) 피드백을 두려워하지 말자
벌써 몇 번을 강조하는지 모르겠지만, 연구는 소통이다. 상대가 읽고 비판하고 질문하고 때로는
거의 부술 듯 달려드는 것이 아주 정상적이다. 근거 보충 필요에 대한 코멘트든 논거 자체에 대
한 반론이든, 비판적 피드백을 받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고쳐나가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도, 창
피한 일도 아니다. 스스로의 연구를 더욱 소통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중간과정이다. 수업시
간에 발제를 하는 것도, 학회에서 발표를 하는 것도, 저널에 제출하고는 리뷰를 받는 것도 그 과
정의 사례들이다. 이번에 작업한 영어논문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가상문화 수업 담당 교수님의 피
드백, 영어 논문 프로그램을 지도하는 선생님의 피드백, 유학생 선배들의 피드백, 그리고 현지인
프루프 리더의 피드백까지 여러 단계의 피드백 과정이 있다. 때로는 영어표현에 대한 것, 때로는
연구 논지에 대한 것, 때로는 두 가지가 같이 결합되어 있는 코멘트들이 활발하게 오갔던 것으로
안다. 어떤 페이퍼들은 그 기회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반면에 어떤 페이퍼들은 그런 피드
백을 끌어내고 반영하는 것에 서툴러서 처음 버전이나 마지막 버전이나 엇비슷한 모습을 보여주
기도 했다. 한가지만 항상 기억하자. 연구논문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완성품이 아니다. 학문적
아이디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서로의 소통을 위하여 잠시 고정해 놓은 임시적 덩어리에 불과하
다. 그렇기에, 피드백은 연구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