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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억9620만원

사례로 이해하는 학습 심리
저자 이재경 / 이코치닷컴 대표
엘리트 학습코칭 전문가 이코치로 활동 중이다.
1983년 서울 공릉동에서 태어났다.
1997년 중학교 중간고사 전 날 시험공부를 하던 중
경찰이 아버지를 잡아가는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했고
중학교 내내 전교 200등에 머물렀다. 이 사건 이후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지 매달렸다. 치열
한 고민과 실험의 결과 중학교 입학 때 알파벳도 제
대로 못 외웠던 아이가 수능시험 때 전국 0.03% 안
에 들게 되었다.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고 졸
업했다.
2015년 현재 이코치닷컴 대표로 있다. 단순한 교육
이 아닌, 한국식 엘리트 학습 분야를 연구하고 경험
했다. 청소년 상담, 학습심리학, 신경가소성, 이상심
리학, 정신분석적 발달이론에 근거한 엘리트 학습코
칭의 체계를 확립했고 현재 엘리트 학습 코치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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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결국에는 전쟁에 이길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화약을 얼마나 가지고 있


는지, 철과 우라늄 광산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 병사들의 신장과 체중
은 얼마이고, 석유비축량이 얼마인지 설명해봤자 소용없다.

“그래요. 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 전쟁을 이길 수 있단 말이오?


백만 대군이 어떻게 싸우는지는 묘사할 필요가 없소. 그대가 할 수 있는지
만 대답해 주시오.”

대한민국 입시는 전쟁과 한 푼도 다를 것이 없다.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남들과는 전혀 다르게 탁월한 실력을 취하고
양민들을 학살해 나가는 과정이다. 필자는 위의 질문에

“예 전쟁에서 반드시 이깁니다.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하기 위해 투쟁을 해왔다. 하루에 몇 문제를 풀고, 어떤 강


의를 하고, 어떻게 영어를 읽는지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을 비우고 처음부터 접근한다면 구체적인 공부방법론이란 모조리 허구임
을 알아챌 수 있다. 문제는 결국에는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지
에 달려있다.
공부방법론의 설명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은 학생들의 의지와 욕구는 자기
알 바 아니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는 결국 전쟁에서 이길
지는 내 책임이 아니라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나는 백만 대군을 투입했
고, 수천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만하면 됐는데 어쩌란 말이냐.”라고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삼류의 것이다. 책임감을 가지고 전쟁에서
승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프로페셔널이 취해서는 안 될 입장인 것이다.
이해와 암기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학습동기를 배제한 것이라는 점에서
쓸모가 없다. 피험자들이 전부 같은 학습동기를 가진 상태를 가졌다는 가
정은 현실에서 성립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학습이론에 있어서 학습에 대한
동기가 가지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며, 세세한 과목별 이해 및 암기의 방법
은 이 학습동기를 형성, 유지하는 데 철저하게 종속되어야 한다. 이는 삐쩍
마른 사람의 체질을 바꾸기 위해서는 먹는 방법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식
탐을 손에 쥐어 줘야 한다는 진리와 유사한 것이다. 식탐이나 식욕이 없다
면 어떤 갈비씨라도 뚱뚱해 질 수는 없다. 학습동기라는 것은 공부에 대한
탐욕이다. 따라서 모든 공부방법의 지향점은 학습동기로 모아지며, 그 특성
은 필연적으로 단순하게 되면서 또한 역설적으로 개별적이게 된다. 그렇다
면 규격화되고 화려하게 보이는 과목별 학습시스템은 그것의 근거가 학원
이든 과외방이든 학습컨설턴트이든 상관없이 소비자인 학생들의 학습 성취
관점에서는 하등의 영양가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 철저하
게 과학적으로 보이는 학습시스템은 오직 수익창출구조라는 이상 안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고 제몫을 해낸다. 소비자인 학생을 위한다면 교육공급자
의 행색은 겉보기에 단출하고 별 것 없어 보이며 심지어 할 일이 없어 따
분해 보여야 한다. 그렇다 그들은 실제로 할 일이 별로 없다. 공부는 어차
피 학생이 할 테니까.
23억 9620만원이라는 책 제목은 대한민국의 엄혹한 입시현실을 상징적으
로 보여주는 숫자이다. 십여 년 전 연세대학교에서 자체적으로 기여입학제
에 대한 조사를 한 적이 있다. 이 때 20억이라는 금액을 설정하였는데, 상
당한 호응이 있었다. 쌀 시세를 기준으로 현재의 금액으로 환산한 것이 23
억 9620만원이다. 이 책이 당신에게 주는 최소한의 가치이다.
차례

1. 공부방법론은 학습동기의 노예에 불과하다. 6


효과적인 공부기술은?
왜 밀어붙이지 않는가?
자기애성 인격
몇 가지 문제점
심리상담에 있어서 '진단'의 사회적 의미
인격장애의 기원은 어디인가?
A학생의 경우
'공부방법론'은 '자아'와 결부되어 있다
부정적 감정과 평가절하
'자기결정감'의 훼손위험
그렇다면 최선의 공부 방법을 버릴 것인가?

2. 성난 황소가 되어라, 자기효능감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30


B씨는 고등학교 때 어떻게 공부를 열심히 했던 걸까?
전교1등은 고생을 하지 않는다.
동감하지 못한다면 곤란하다.
정주영이나 스티브잡스는 고생 별로 안 해봤다.
자기효능감이 높은 사람
B씨의 경우
'의지박약자'는 억울하다.
자아감(자존감)의 형성 - 암시/모방/인정
잦은 성공경험
부모의 칭찬이 필요한 이유
문제는 낮아진 자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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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타인수용감 - 성적과 부모사랑은 관계없다. 49
아주 어려운 케이스
임계(臨界)치를 넘겨라!
집중력이 일정 수준을 넘지 않으면 효과가 영(zero)인 이유
C군의 경우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타인수용감'이 부족하다는 것의 본질적 의미
부모님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스마트폰이나 게임에 중독된 것은 어떻게 할까?
게임중독자들도 서울대 잘만 간다.
코칭과정에서 여러 골치 아픈 점들

4. 코치의 자기효능감도 중요하다. 65


과외선생님의 카리스마는 어디서 얻어지는가?
진짜 고객은 누구인가?
코치의 자기효능감
학생을 질투하고 있지 않나요?
교수방법의 문제
공부라는 것은 사실 한 개의 과목이다.

5. 학생이 죽도록 밉다. - 전이(transference)와 역전이


(counter transference) 그리고 편집증(paranoid) 75
느낌이라는 것은 얼마나 정확한가?
아이들에게 조금 더 가혹하다.
편집증적 경향의 형성
사회 전체의 문제
D씨도 한국인이다.
D씨의 의심이 사실일 경우
전이 - 부정적 감정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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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를 피해라
역전이 - 선생님도 사람이다.
마구잡이로 발생하는 전이현상
'전이'와 '역전이'를 인정해라

6. 찔끔찔끔 공부하지 말고 홍수 난 듯 퍼부어라! 89


코치가 해야 할 질문
가. "밤에 잠은 잘 자니?"
강박신경증의 인지행동치료
F의 경우
나. "아버지는 뭐하시는 분인지 물어봐도 될까?"
재미있는 심리상태
심리적 뿌리
고치기가 쉽지 않다.
주지화(intellectualization) - 나는 로봇입니다.
다. "초등학생 시절 책을 많이 읽었는지?"
초등 논술교육을 받는 순간 끝장이다.
구속유도(constraint-induced) 요법
수능이 코앞에 닥친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할까?
라. "내신 대비로 영어 교과서를 암기하는지?"
영어암기로 고민하는 학생
"엥? 무슨 소리에요?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요?"
수능 영어 1등급을 받는 학생들의 공통점
수능 영어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마. "보통 하루에 몇 과목을 공부하지?"
쪼개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 이유
길면 길수록 좋다.
너무 길면 집중력이 떨어지는데요?
항상 시간을 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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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개념 챙기다 백발노인 된다. 훈련부터 해라! 110
수능은 역량을 요구한다.
개념이 부족한 것 같아요.
먼저 점수를 드러내라
개념 공부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학원? 당장 때려쳐라!
그럴 거면 학교는 왜 다니는가?

8. 당신은 슬럼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119


슬럼프 판별하기
슬럼프의 본질
첫 번째 트랙 - 인지적 문제
엘리트 학습 코칭의 실재
두 번째 트랙 - 신경가소성(神經可塑性, neuroplasticity)
'지금 슬럼프구나'
실천적 방법

9. 바보들아 수학은 예제만 풀어라! 139


수학의 정석으로 실패하는 이유
개념서는 예제만 푸는 것이 정답이다.
수학을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수학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
누구든 수학을 재미있게 할 수 있다.
개념과 예제공부가 끝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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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해답을 펼치는 것에 죄책감이 드나요? 149
중2병의 실체
가. 조현병(정신분열증, schizophrenia)
나. 분열성 인격장애(Schizoid personality disorder)
다. 아버지 동일화 실패
라. 중2병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H군의 경우
수학은 해답을 적극적으로 이용해라.
코치는 고집을 버려야 한다.
전략적 유연성이 가장 중요하다.
해답지를 이용하는 법
설득하기
학생을 존중해라
학생을 이해해라.
이기게 해주어라.

11. 국어 풀이기법은 허구이다. 173


국어를 못하는 이유
학교내신 중심의 입시는 문제가 있다.
강박증의 원인
강박증이 국어에 주는 영향
K군과 같은 학생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
1. 풀이기법에 집착한다.
2. 글에 표시를 계속하면서 읽는다.
3. 중얼거리면서 읽는다.
4. 읽었던 부분을 다시 돌아가 읽는다.
5. 시간이 부족하다.
속독과 정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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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울대 가면 차를 사주겠다고? 개소리 하지 마라! 187
할렘가 문제아들을 공부시키는 방법
미국과 한국의 차이
학습동기의 내발성과 외발성
포상을 조건으로 걸 경우 발생하는 사태
무기력한 학생들에 대하여
물질적 조건만 조건이 아니다.

13. 퇴행 - 다시 아기로 돌아갈래! 197


퇴행 - 나 다시 돌아갈래~~
퇴행현상을 견뎌내는 방법
암기과목을 못하는 것은 꽤 심각한 문제이다.
1. 학습동기가 건강하지 못하다.
2.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못한다.
3. 강인한 공부를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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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부방법론은 학습동기의 노예에 불과하다.

사례 1.
A학생(남)은 고등학교 3학년을 막 시작하였고, 주변 사람으로부터
모범생으로 평가받는다. 점수는 내신은 주요과목 기준으로 2~3등
급, 모의고사는 국어 3~4등급 수학 3등급, 영어 1~2등급이다. 아
버지(전문직으로 중산층 이상, 자수성가형이고 경쟁적인 성향) 어머
니(주부, A학생을 믿고 공부에 관한 모든 것을 맡기는 성향)와의
관계는 아주 좋은 편이며, 학생의 성격도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다.
코치는 초반 6주간 학생과의 관계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형성하였으
며, A학생의 존경과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A학생에게는 남모
를 고민이 있었는데, 자신이 따르고 좋아하는 코치가 적극적으로
공부 방향을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저번 주 월요일에는,

학생A : "선생님! 이번 주는 7시에서 10시까지 공부할 시간이 있


는데, 어떻게 할까요? 일단 제 생각에는 세 교시로 나누어서 국어/
영어/사탐 순으로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코치 : "그래? 그것 상당히 괜찮은 생각인데? 만약 집중을 제대
로 한다면 상당히 효과적인 공부가 될 수도 있겠어, 물론 집중해서
3시간 공부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A같은 경우
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로 본다. 그런데 혹시 두 시간 반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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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만 쉬지 않고 공부한 후 30분 휴식을 취하면 어떤 느낌일 듯


하니?"
학생 A : "글쎄요, 영어만 공부하면 국어 사탐이 불안하지 않을까
요? 2학년 때 이런 식으로 쪼개서 공부했는데 영어랑 한국사 내신
1등급 나왔거든요."
이코치 : "그래 그것도 좋을 수가 있겠다. 일단 이번 주는 A가 생
각한대로 밀고 나가자."

라는 대화가 있었다. 학생 A의 생각에는 코치가 속으로는 영어만


공부하기를 원하면서 겉으로는 본인의 의견에 따른 것이 아닌가 하
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혹시 본인의 성공에 의심을 가졌고 나중에
면피를 하기 위해서 코치가 발을 빼는 게 아닐까 하는 불경한 생각
도 해봤지만, 평소 좋아하는 선생님이기 때문에 금방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모범생다운 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효과적인 공부기술은?

일단 대화의 내용만 놓고 보았을 때, 코치는 공부시간을 쪼개지


않고 합해서 한 과목을 공부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하루 3시간의
공부시간이 주어졌을 경우 '한 시간씩 나누어서 각기 다른 공부를
하는 것'과, '합해서 한 과목만 공부하는 것' 중 어떤 것이 효과가
좋은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구체적인 이론적 근거는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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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설명할 것이나, 결론만 말하자면 대부분의 상황에서 후자가


월등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쪼개서 여러 과목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이미 한 과목을 장시간 공부할 수 없
는 심리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전속력으로 400미터를 뛸
수 있는 주자와 100미터가 최고 한계인 주자는 이미 그 역량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100미터가 한계인 주자는 그
한계치를 자꾸 늘여나가는 연습을 해야 하지, 100미터 달리기 연습
후 공 던지기 연습을 계획해서는 안 된다는 이치를 생각하면 이해
가 쉽다.

100미터에서 핵핵거리는 뚱보
400미터 질주하는 근육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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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밀어붙이지 않는가?

위 사례에서 정말 코치는 발뺌을 하고 싶은 것일까? 학생의 성공


에 의문을 가진 나머지 예상되는 실패에 대비해서 적극적인 관여를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이 의문이 사실이라면 코치로서 실
격이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도 최대한 코치에 대한 존경심을 유지
한 A학생의 성품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 의문이 합당한지 결판을
내기 전에 A학생을 조금 더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애성 인격

사실 코치는 첫 만남에서부터 학생 A의 성격적 취약점을 엿보았


다. 처음에는 특정한 성격적 취약점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
발하였으나, 코칭을 진행하며 그 증거들을 수집하였고, 부모님과의
2회의 짧은 면담을 통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학생 A의 성격적
취약점은 '자기애성 인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의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점이었다.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갖는 사람의 인지적 특징은 과장된 자아상
을 토대로 세계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구조(인지도식, cognitive-
schema)를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안정적이지 못하고 갈등이 많은
(비적응적인) 대인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적응적인 대
인관계는 '자기애성 인격장애' 원인이 되는 요소들을 촉발하거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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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하기 때문에 자체로 성격장애의 치유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인격장애 환자나 그 경향이 충분한 사람에게는 특유의 인상이 있
다. 인격적 문제를 판단해 낼 수 있는 몇 가지 실용적 지표가 있는
다.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경우 환자가 실제로 외모가 뛰어나거나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한 경우가 많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지
위가 높은 사람과 대면해도 목소리가 크고 당당한 편이다. 본인의
녹음된 목소리나 영상, 사진을 보더라도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부끄
러움을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이거 봐 얼마나 멋있어? 하지만 나
는 예의가 바르기 때문에 겸양의 태도를 보여주겠어.'라는 표정을
짓는다. 또한 타인의 어떤 행위나 진술이 조금이라도 본인의 인격
에 상처를 준다고 판단할 경우 그 행동이나 진술이 채 끝나기도 전
에(아주 재빨리) 공격적으로 맞받아치는 언행을 보인다. 구체적인 '

자기애성 인격 장애'의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DSM-IV-TR)

지나치게 과장된 자존감, 칭찬에 대한 욕구, 그리고 감정이입의 결여와 같은 광


범위한 양상이 초기 성인기에 시작되어 다양한 상황에서 다음 중 5개 이상의 항
목으로 나타난다.

1.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된 자존감이 있음 (예 : 자신의 성취나


재능을 과장함, 뒷받침될만한 성취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뛰어남을 인정받고자
함)

2. 끝없는 성공, 권력, 탁월성, 아름다움,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공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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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신이 특별하고 독특해서 다른 특별하거나 상류층인 사람 또는 기관만이 자


신을 이해할 수 있거나, 그런 사람들과만 어울려야 한다고 믿는다.

4. 과도한 찬사를 요구한다.

5. 특권의식 즉 특별대우를 받을 것에 대한 불합리한 기대감이나, 그럴만한 이유


가 없는데도 특별대우나 복종을 바라는 불합리한 기대감을 가진다.

6. 대인관계가 착취적이다. 즉,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


한다.

7.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즉 타인의 감정이나 욕구를 인정하거나 자신의


감정 또는 욕구와 같은 선상에서 보려 하지 않는다.

8. 종종 타인들을 시기하거나, 타인들이 자신을 시기하고 있다고 믿는다.

9. 거만하고 방자한 행동이나 태도를 보인다.

어떤 독자는 위 진단기준을 읽고 조금 놀랐을 수도 있다. 인정하


고 싶지는 않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고 얼굴이 벌게지지 않는가? 필
자는 여러 인격장애에 관한 'DSM-IV-TR 진단기준'들을 처음 접
했을 때 이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인격장애자'가 아
닐 수 있는 증거를 찾기 위해 같은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하지만 위 기준 중 몇 가지에 해당될 것이라는 의심 정도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실 필자가 만나본 사람들, 특히 공부를 잘하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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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 중에는 위 진단기준에서 항목 하나 정도라도 해당하지 않는 경


우는 거의 없었다.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성향이 있다는 것은 오히
려 공부에서 성공할 가능성을 높여줄 수도 있다. '자기애'의 수준은
곧 '자아상(自我像)'의 그것을 의미하고, 충분히 높은 '자아상'을 가
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현실을 인지했을 때 이상적인 수준
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경향이 있다. 이 욕구가 학습
에서 기능을 할 경우 우리는 그것을 '학습동기'라고 부른다. '학습동
기'는 특정인의 학습 성취를 예측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인
(變因, variable)이다.

몇 가지 문제점

사례에서 미성년자인 내담자(상담을 받는 사람)를 대상으로 6주에


걸친 면담과 관찰만으로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성향을 판단하였는
데, 이것이 적합한 것인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설사 코치가 '인격
장애' 진단을 할 충분한 이론적 지식으로 무장되어 있고, 임상적 경
험이 충분하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6주(12회)에 이르는 '엘리트
학습 코칭'으로 피상적(皮相的)인 인상 이외에 얼마나 깊은 인격
전반의 관찰을 했을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청소년인 학생을
대상으로 그런 판단을 (물론 발설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했지만)
하는 것이 가혹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일반적으로 'DSM-IV-TR'의 인격장애 진단기준을 사용할 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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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제한사항이 있는데, 첫 번째는 미성년자에게서는 인격장애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어떤 환자가 '인격장애'의
상태에 있는지는 충분한 관찰에 의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두 가지 제한 모두 한편으로 납득할 만
하지만(정신과 진단과 치료현장에서 주로 약물치료에 의존한다는
현실), 실재적/이론적 측면에서 상당한 모순과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심리상담에 있어서 '진단'의 사회적 의미

대부분의 학문적, 기술적 성취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권에 의


해 주도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신의학, 심리학, 상담과
심리검사에 관한 여러 기술의 핵심적인 사항은 대부분 미국에서 개
발된 것이다. 'DSM-IV-TR'의 진단기준 또한 마찬가지이다. 서구
권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다양성에 대한 포용성은 다양한 학문
의 발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이는 동양권 심리학자
들, 특히 임상가들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심리학이라는 학문
분과는 매우 민감한 영역이다. 어떤 사람의 심리에 대한 과학적 해
석은 그 사람의 자아와 자유의지로 표상(表象)되는 인격의 여러 측
면들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또한 심리검사에서 '
정상'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진단은 더욱 난처한 상황을 만
든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면 이미 수습하기가 쉽지 않다. 이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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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서구문명의 엄정한 자연과학적 이론에 대한 경외감과 그 교조주


의(敎條主義)적 힘은 강력한 극복수단이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격장애의 진단에 있어서는 서구권의 학문적
문화도 충분히 포용적이고 자유롭지 않은 것 같다. 한명의 소화기
내과 전문의가 있다. 환자의 CT사진에서 대장에 일단(一團)의 융
기(隆起)가 보인다. 경험상 이 융기는 곧 악성 종양이 되어서, 즉
대장암이 되어서 환자의 인생을 파탄을 낼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공인된 진단기준에는 아직 충분히 크지 않은 융기형태에 대해서는
질병으로 판단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이 전문의는 환자에게 "당
신은 정상입니다."라고 진술했다. 이 공인된 진단기준은 매우 인권
친화적이다. 어떤 사람을 쉽게 환자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치게 가
혹하다는 사상 아래에서 만들어졌다.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자기애성 인격장애'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은 "당신은 '대장암 환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사뭇 다른 인상
을 준다. 폐쇄적이고 편견이 가득한 풍토 아래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 지점에서 서구권의 문화 환경도 충분히 개방되어 있지 않다. '대
장암'을 판단하는 사람은 과학자로서 이야기 하지만, '인격장애'를
판단하는 사람은 반 정도는 '판사'의 입장에서 이야기한다.
'DSM-IV-TR'의 진단기준에 대한 학자들의 제한사항들은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인권 친화적이게도 환자를 쉽게 환자로 부
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더 이상 자연과학적 판단이 아니다. 오

히려 규범 영역에서의 가치판단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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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장애의 기원은 어디인가?

위대한 심리학자 프로이트 휘하(麾下)의 정신역동적 분석이론은


아직도 유효하다. 신경생리학과 뇌과학, 뇌 진단기술의 발달에 의해
명백히 오류인 몇 가지 이론들이 밝혀졌지만, 그 정신분석 개념들
과 발달이론은 현대심리학에서 여전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프로
이트 사상의 두 축인 '성(sex)'과 '인생초기사건의 나비효과'는 이상
심리학에서 아주 큰 밑받침이 되어 있다. 특히 인생초기의 사건과
조건들이 그 사람의 주요 도구 또는 지렛대가 되어 그 이후의 인격
형성과 심리학적 사건발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생각은, 성
인기의 이상심리도 그 근원적 원인은 더 어린 연령에서 발생했을
것을 말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본 장에서 사례로 나온 '
자기애성 인격장애'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 부모에 의한) 과도한 칭
찬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웅대해진 자아상의 형성이 그 씨앗으로 여
겨진다. 아니면 지나친 방임과 평가절하에 의한 부족한 자아상의
반작용으로 이상심리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편집성
인격장애는 어린 시절의 학대의 반작용으로 분노와 현실인정이 융
합되고, 비정상적인 망상구조의 확립으로 이어지는 정신역동적 분
석이 잘 들어맞는다. 실상 이상심리에 있어서 이론적 설명은 생리
학적 실험과 관찰보다는 정신역동적 분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병리상태의 근원은 더 어린나이에 발생했다. 따라서 더 어린나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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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적 개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은 비교적 명백해 보인다.

A학생의 경우

A학생의 경우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될 자질이 풍부했다. 물론 주


로 아버지에 의해서 유도된 과도한 자아상의 상승이 비적응적인 면
을 보여주기는 했다. 예를 들자면 자신이 이룬 것, 특히 공부 방법에
대한 자신감과, 현재 이루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게 커
서 그 결과물들을 가리는 증거들을 지우고 싶어 하는 것이 있었다.
특히 공부에 있어서 거짓보고를 많이 했는데,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
다. 미성년자 상담에서 아주 흔히 나타나는 자기를 보호하는 수단들
(방어기제, defense mechanism)의 하나로 '거짓말하기'가 있다.
학생들은 대부분 거짓말을 한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성인들과는 달리 미
성년자가 거짓말을 할 경우 어른인 상담가나 부모는 그것을 판단하
고 응징할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거짓말은 아이들이 피난
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이다. 거짓말을 했다면 그 부분에 있어서
는 코너에 몰렸고 제발 살려달라는 마음을 갖은 것이다. 코치는 이
를 수용하고, 더 깊은 전략으로 거짓보고의 빈도를 줄이는 것이 최
선이다.
사례에서 코치가 직면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A학생이 가
지고 있는 '공부방법론'을 공격할 경우 나올 수 있는 매우 위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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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들에 주목한 것이다. 예상되는 사태 중 하나는 학습동기의 하


위항목으로서 중요한 '자기결정감(self-determination)'을 훼손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경향으로 웅대하게 키
워진 자아에 결부되어 있는 '공부방법론'을 공격함으로써 자존감에
손상을 주고,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비적응적인 요소들을 강화해서
코치에 대한 학생의 부정적 감정과, 극단적인 평가절하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공부방법론'은 '자아'와 결부되어 있다

'자아(ego)'라는 관념은 추상적이다. 많은 철학자들과 뇌과학자들이


'자아'의 실체성에 대해 연구를 하고, 논쟁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현대 임상심리학에서 '자아'를 언급할 때는 추상적인 도구적 개념으
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언급하려는 '자아'도 심리학을 이
해하고 분석하기 위한 도구적,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그것이다. 여기
서 '자아'는 사람의 인지와 정서에 주로 관련된 것이면서 그것이 침
해되었을 경우 그 주체에게 심리적 불쾌감을 주는 영역을 일컫는
것에 가깝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어떤 사람의 '공부방법론'은
'자아'와 흔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명제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자. 실제 사례를 충분히 깊게 들여다볼 기
회를 많이 접할수록, 그 사례에 대한 일반인들의 예측이나 판단이
틀린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경향이 있다. 필자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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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학습의 성취 측면에서 절망적이라고 볼 수 있는 많은 사례


를 만나보았다. 필수적으로 아주 저조한 성적을 보여주며, 부모, 선
생님 등 성인 일반에 대한 적개심, 정숙하지 못함, 산만함, 게임중
독, 연예인 또는 스포츠선수에 대한 과장된 동경을 동반하고 있는
사례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학생의 경우, 공부보다는 특정 영
역, 예를 들면 운동이나 방송활동, 기술 분야에 관심이 있을 것이
라고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강요하기 보다는 다른 분야
로 일찌감치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일반적인 생각은 대
부분 옳지만 최소한 하나의 지점에서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위와 같은 사례에서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사실 공부를 잘하고
싶어 한다. 다만 그 생각을 표현하거나 심지어 의식화 하는 것이
사실상 금지당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위의 학생들이 "사실은 나
전교1등하고 서울대학교 가면 멋있을 것 같아. 그렇게 하고 싶어."
라고 진술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적어도 두 가지 결과가 나올
것은 확실하다. 맹렬한 조롱을 동반한 부정적 예측,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금욕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
이 당연하다."는 슬로건의 등장이 그것이다. 두 가지 결과 모두 위
의 학생들에게는 사실상의 장애물로 작용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런
아이들도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마음속으로는 모두 공부를 잘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설명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나라로 생각을 한정해보자.
실제 현실이 어떻든 간에 공부를 잘 하고 명문대학교 졸업장을 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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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은 적어도 미성년자들에게는 '가장 성공한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들의 주관적 사고 안에서는 모든 직업적 영역의 가
치가 '사회적 성공'으로 표현되는 '번식의 유리함'이라는 이득으로
사실상 환원이 가능하고, 이 기준에 따를 경우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성적(性的)
으로 매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크고 날씬하고 윤기 있게 보일 것이
라고 일반적으로 예상하면서, 성적(成績)이 나쁘고 춤을 잘 추는
학생들은 서울대학교 가는 것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이
중의 인식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갖고 있거나 그 경향이 있는 학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자아'에서 '공부를 잘하는 것'은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사람의 '공부방법론'이 잘못되었다는 진술은
그 사람의 '공부를 잘하는 것' 분야가 형편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부정적 감정과 평가절하

사례에서 A학생은 코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


다. 사실 코치는 A학생과 관계를 형성하면서 긍정적 관계를 형성하
는 방략(方略)에 대해 매우 세밀하고 신중한 접근을 하였다. 일반
적인 아마추어 대학생 과외교사의 경우, 자기애 경향이 있는 학생
을 맡았을 때 맞닥뜨릴 위험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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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단계 : 자기애적 경향의 상호자극

일반적으로 대학생 과외교사는 명문대학에 입학한 경우가 많고,


어릴 적부터 공부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나라처럼 '공부를 잘하는 것', '명문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의 가치가
극단적으로 높게 평가되는 문화적 풍토에서는 이런 '우등생'들은 항
상 고무되어 있다. 부모님께 항상 칭찬받고, 동네 아주머니들의 질
투의 대상이 되며, 친구들과 학교 선생님들의 입에 자랑스럽게 오
르내린다. 특히 부모님의 칭찬과 인정은 아이들이 맛볼 수 있는 가
장 달콤한 열매이다. 이 열매는 보통은 나무의 꼭대기 가지에 위태
롭게 달려있는 것이라 좀처럼 맛보기 쉽지 않지만, '우등생'들은 최
소한 하루에 한번 이상 이 열매를 받아먹을 수 있는 귀족들이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우등생'들을 배웅하고, 맞이하면서 보여주는 부
모들의 감격에 찬 표정을 떠올려보라. 이 표정 하나하나조차도 아
이들에게는 매우 달콤한 과실인 것이다. 이 '귀족'들은 어떤 전장에
서도 살아남는다. 학교든 학원이든 놀이터에서든 게임방이든, 열매
비슷한 맛을 찾아 서성이는 굶주린 또래들 사이에서 배부른 '귀족'
들은 급할 것이 없다. 차분하고 의젓하지만 용맹하게 전투를 치룬
뒤 전리품을 잔뜩 취해서 집으로 돌아간다.
자기애 성향이 강한 학생들은 이런 '우등생' 선생님들을 만날 때,
그들을 쉽게 우상으로 설정할 수 있다. 자신만만하고 입시에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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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한 과외교사들은 이런 아이들의 우상이 되기 아주 적합하다. 아


이들은 과외교사의 멋진 측면들을 잘 포착하고, 즉시 표현할 것이
다. 자기애 경향이 강한 과외교사 역시 이 표현에 매우 고취될 것
이고, 반대급부로 아이들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하사할 것이다. 이
관계는 매우 빠르고 극적이게 형성될 것이며, 관계의 초반에는 최
소한 겉에서 보기에는 매우 건전하고 훌륭해 보이기도 할 수 있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은 실제 현실이 모래위에 세운 누각일 뿐이라
는 사실을 무의식상으로나마 감지하고 있다. 그들은 항상 속으로는
불안에 떨고 있으며, 자신의 높은 자아상이 실제 현실일 것이라는
증거를 수집하고 싶어 한다. 이 증거를 제공해주는 사람은 가장 훌
륭한 존재이다. 그렇지 못한 대상과는 수준을 달리한다. 모든 찬사
와 즐거움을 제공하고 싶어진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서로를 자극
하고 만족시켜준다.

두 번째 단계 : 더 이상 실패를 숨길 수 없는 상태.

인간이라는 종은 원래 거짓말을 흔하게 한다. 심지어 대부분의 인


간관계를 내 감정과 의사를 상대에게 속이려는 의지와, 그것에 속
지 않으려는 상대방의 노력으로 환원시키려는 연구도 있다. 그만큼
거짓말은 인류의 발달과정에서 어찌 보면 아주 적응적인 역할을 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 설명한 상태에 빠진 학생들은 거짓말을
더 자주한다. 이것은 결국 과외교사와의 관계를 파탄내고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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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할 것이라는 점에서 비적응적이다. 자신은 항상 이상적인 상태


에 있다는 것을 과외교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과외교사는 몇
번은 실제로 속거나, 속는 척 해줄 수 있다. 그러나 채 3주가 지나
기도 전에 큰 갈등에 부딪힐 것이다.

세 번째 단계 : 과외교사의 불안과 그 해소.

과외를 한다는 것은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매우 고난이도의 일이


다. 아무리 저렴한 과외라도 시간당 2만 원 이상은 받을 것이다.
젊은 대학생이 이정도의 시급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이 막중
한 자리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아마추어 과외선생님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과외에 뛰어들었다가 큰 낭패를 보고 떨어져 나간다. '엘리
트 학습 코칭' 분야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임을 자부하는 필자도 사
실 학생들을 지도할 때마다 등골이 오싹하고 남몰래 식은땀을 흘리
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다른 사람의 공부를 책임진다
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아마추어 과외교사들은 중고등학교 공부에서 매우 성공
적이었기 때문에 일반 학생들이 학습계획을 실제로는 거의 해내지
못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서서히 학생들의 거짓말 뒤에
숨어있는 실태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고, 이번 중간고사나 모의고
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는 글렀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예상되는
실패가 실현되었을 경우 쏟아지는 비난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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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뒤집어쓰기에는 너무 가혹하다. 대부분 과외교사들은 충분히


똑똑하다. 이럴 때는 가장 약한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뒤집어씌우
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 번째 단계 : 어떻게 뒤집어씌울 것인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심리적 진의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현대 심리학과 신경생리학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어떤 행위를 한 이유가 그 사람의 의식에 있는 ‘그
것’때문은 아니라는 점에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현대 자연과학의
이해 아래에서는 어떤 사람이 의식적으로는 분명히 "학생이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는 더 근면해야 하는데, 이 학생은 그렇지 않구나.
마음은 안타깝지만 과외교사로서 내가 할 일은 더 다그치고, 따라
오지 못하면 혼도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야."라고 생각할지라도, 심
리학적 진의는 '내 두려움과 나에 대한 비난 가능성을 덮기 위한
학생에 대한 책임전가를 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런 식의
평가가 현대 심리학과 신경생리학의 주류라는 것은 확실해 보이지
만, 과연 일반 언어로 표현할 때 올바른 것인지 불분명할 뿐 만 아
니라, 심지어 현대철학에서는 어느 쪽이 맞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
할 정도로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필자는 자연과학
적 이해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위
에 묘사된 과외교사나 학생 모두 '악당'을 표현한 것이 절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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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점이다. 자연과학적 이해 아래에서는 모든 사람의 심리적 진의


는 이런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 사람의 심리적 진의가 들춰
질 때 '악당'처럼 묘사될 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을 비난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쉽게 파악되는 숨은 진의
는 그 주체가 선량함과 보통스러움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음을 상징
하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표현하는 과외교사도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선량한 인재일
것이다. 다만 아직 여러 측면에서 미숙할 뿐이다. 과외교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략은 '실행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많은 숙제
를 내주고, 미수행된 부분에 대한 비난과 함께, 이 전체과정을 부
모님에게 보고하기'이다. 구체적인 전술에서 여러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인 틀은 이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섯 번째 단계 : 관계의 종료.

이런 상황이 일단 발생하면, 가장 편한 결말은 '학생과 부모님이,


학생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선생님께 사과하면서 과외를 그만두는
것.'이다. 이는 셋 모두에게 큰 상처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최소한
그 분기에서 학생이 큰 우울증에 빠지고 또한 저조한 성적을 기록
하는 것만 감수하면 된다. 그 우울감 아래에서 학생은 현실을 조금
더 정확하게(정확하게 말하면 비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자기애
적 경향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많은 시간과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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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소비한 뒤에야 결과를 얻을 것이다. 조금 더 불편한 결말은 '학


생과 과외교사가 서로 격렬히 비난하면서 서로의 불법행위를 학부
모에게 모조리 일러바치고 난 뒤 관계가 파탄 나는 것.'이다. 이는
셋 모두에게 상처가 된다.

'엘리트 학습 코칭'에서 숙련된 코치는 사례에서 이런 가능성을 염


두에 두고 학생을 매우 신중하게 대했다. A학생의 경우 '자기애성
인격'의 경향이 농후하기 때문에, 칭찬과 비난 모두 신중하게 제거
되어야 했다. 말과 태도로 코치를 모두 지지하고 존경했지만, 쉽게
고양된 표정을 보여주지 않고, 계속 긍정적이면서 중립적인 정서를
보여주어야 했다. 또한 A학생의 자아의 주요 영역을 훼손해서 그
반작용으로 코치에 대한 부정적 정서와 극단적 평가절하가 발생하
는 것도 예방해야 하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A학생처럼 학교 내
신에서 일정정도의 성취를 거두었고 자기애가 강하거나 혹은 '강박
성 인격장애'나 강박신경증의 경향이 있는 경우에는 '공부방법론' 자
체가 자아의 중요 영역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이런 학생의
'공부방법론'을 공격할 경우 보복으로 여러 가지 관계의 문제가 파
생될 수 있다. 이 보복은 너무 교모해서 학생의 의식에서도 잘 알
아차리지 못한다.

'자기결정감'의 훼손위험

학생A의 공부방법론을 공격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다른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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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문제는 학생의 '자기결정감'을 훼손함으로써 학습동기의 수준을


낮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결정감'이라는 것은 학습의 모
든 장면에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을 내리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주관적 인지상태와 감정을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학습 분야에 뛰어들지 여부에서부터, 장/단기의 목표설정, 전략과
계획수립, 구체적인 장소와 방법은 물론이고, 이 시각 현재 공부를
할지 말지의 여부에까지 모든 측면과 장면에서 결정권이 본인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주관적 믿음'이다. 이는 교육심리학에서 '학습동기'
를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교육심리학에서 '자기결정감'의 효용성과 중요성에 대한 지지는 상
당히 확고한 편이다. 주로 통계적 연구에서 '자기결정감'이 다른 '학
습동기' 구성요소인 '자기효능감', '자아감', '타인수용감' 등을 매개하
는 주요 변인이며, 최종적으로 학습 성취를 예측하는 강력한 요소
가 될 수 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육현장에서 '자기결
정감'이 높은 학생의 학습 성취 또한 높은 경향이 뚜렷하다는 경험
적 인상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주요 근거가 된 것도 사실이다. 물
론 '자기결정감'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당히 복합적인 요소들을 내포
하고 있고,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자기결정감'으로 연결된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선후관계와 인과관계가 불분명할 수 있다는 점
에서 약간의 의문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자기결정감'
자체를 단일요소로 보고 앞뒤를 구성할 경우 무언가 명쾌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이는 '자기결정감'이라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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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의 문제는 아니다. 주로 정신의학으로서의 심리학 분야에서는 '신


경생리학'과 '발달심리학에 근거한 정신역동적 분석'으로 설명하려는
습관이 있다. 그 심리학적 설명의 뿌리는 현대물리학의 영역에서부
터 나오므로 매우 치밀하고, 또한 치료적 견해가 항상 동반되고 그
에 따른 치료의 효과를 분석함으로써 사후평가도 용이한 측면이 있
다. 이에 반해 교육심리학이나 사회심리학 등의 소위 인문심리학에
서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현상을 묘사하는 습관이 있다. 심리학적
현상이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이것을 범주화 한 뒤, 일반
언어로 그 뿌리를 설명한다. 전자의 습관이 익숙한 경우 후자의 경
우 비과학적이고 엄정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그러나 후
자의 습관들이 실제 현장에서 오히려 효용이 있는 경우가 많다. '자
기결정감'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설명하기에 매우
용이하면서도 그 자체로 아주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다. 이
는 A학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자기결정감'이라는 요소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훼손하면서까지 공부를 밀어붙이
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최선의 공부 방법을 버릴 것인가?

위의 논의를 요약해보면, 2시간 반을 쉬지 않고 영어만 공부하게


함으로써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론적 이득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비효율적이더라도 학생의 의견을 따름으로써 최선의 방법론적 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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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버리는 대신 '학습동기'라는 심리적 요소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가 사례의 핵심이 된다. 물론 본 사례에서의 정답은 후자
이다.
사실 수험의 성패는 시험 직전까지 최대한 슬럼프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많이 공부할 수 있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기존에 연구된 학
습이론들과, 시중에 나와 있는 공부 고수들의 공부방법론들이 설사
맞는다고 하더라도 실제 현장에서는 그 방법론들은 매우 제한적인
역할만을 수행할 수 있다. 하루에 4시간만을 집중해서 7번을 빠른
속도로 공부한다던가, 수업시간 직전에 예습을 하고 수업시간 안에
선생님의 말씀을 모두 외워버리기, 잠은 충분히 자고 아침밥을 든
든히 먹은 뒤 연습장에 맹렬히 쓰면서 외우고 또 외우는 공부법 등
그럴듯해 보이는 많은 방법론이 나와 있고, 또 상당히 일리가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비만으로 고생하는 J씨가 있다. 학창시절에 날씬하고 아름다운 미
모로 인기가 많았지만, 고3수험생활을 하면서 먹는데 취미가 생겼
고, 대학교에 입학해서 술을 배우면서 점점 살이 붙기 시작하더니
20대 후반인 지금은 누가 보더라도 비만인 몸매를 보유하게 되었
다. 10여 년간 온갖 다이어트 비법을 연구하고 시도해 보았지만 하
나같이 실패를 맛보았는데 최근 5주 만에 24킬로그램을 쫙 빼면서
전성기의 미모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녀의 학창시절 친구 K씨는 페
이스북에서 우연히 J씨의 사진을 발견한 후 놀라 오랜만에 연락을
취해 보았다. 궁금하기도 하고 배가 아프기도 하여 J씨를 불러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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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법을 물어보기로 했다. J씨는 육진을 개척한 개선장군의 표정으


로 그 비법을 2시간에 걸쳐 설명해주었다. 레몬디톡스와 요가는 기
본이고, 고구마와 닭가슴살로만 구성된 엄격한 식단관리까지 듣기
는 들었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방법들이다. 그런데 커피 값을 계
산하고 나오면서 주인공 J씨가 한마디를 추가했다. "아 맞다. 그리
고 나 다음 달 첫째 주 일요일 결혼식인데, 와줄 거지? 이번 봄에
날짜 잡았어~"
다이어트를 원하는 아가씨에게는 레몬과 고구마를 선물할 필요가
없다. 3주 후로 결혼식 날짜를 잡아주면 끝이다. 최대한 적게 먹고
운동하고 이 과정을 오래 끌고 갈 수 있는지가 다이어트의 성패를
절대적으로 좌우한다. 다이어트에 대한 의욕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결혼식은 그 강력한 동기가 된다.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2. 성난 황소가 되어라, 자기효능감이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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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배한다.

사례2
B씨(32세/남)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엘리트이다. 지방
일반 고등학교에서 줄곧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고3때 치룬 수
능시험에서 상위 0.4%의 고득점으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군대
전역 후 토익은 900점을 기록하고, 졸업 때 학점은 4.5 만점에 3.2
를 받았다. 27살에 재계서열 20위권에 해당하는 기업에 취업하였지
만,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진
학을 결심했고, 이를 위해 법학적성시험(LEET)을 준비하던 중 오
랜 지기이자 선배인 코치를 찾아와서 고민과 불안을 토로하였다.
"선배님 요즘 왜 이렇게 공부가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고3때까지
만 해도 진짜 열심히 공부했는데……. 사실 대학교 들어와서부터
완전히 망가진 거 같아요. 학교 수업을 끝까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것 같아요. 군대 전역하고 정신 안 차렸으면 학점 3점도 안됐
을 거예요. 요즘 리트공부를 하는데 인터넷 강의를 들어도 한 시간
이상 못 앉아 있겠어요. 어제 기출문제를 풀어봤는데 한 100점 나
올 것 같더라구요. 제가 원하는데 가려면 125는 되어야 할 거 같은
데 걱정이에요. 이렇게 억지로 공부하다가 설사 로스쿨에 입학하더
라도 그 어려운 법학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솔직히 저는 완
전한 '의지박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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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씨는 고등학교 때 어떻게 공부를 열심히 했던 걸까?

'엘리트 학습'은 수능시험 준비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처럼


획일화되고 경쟁적인 사회문화에서는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항상 경
쟁압박에 노출되어 있고, 그 경쟁중 상당부분이 '엘리트 학습'의 영
역에 속해있다.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에게서도 심심치 않게 상담
을 요청받는데, 특히 왕년에 공부깨나 해봤다는 사람들이 공부가
안된다며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왕년에 공부를 잘 했던 우등생들이 왜 '의지박약자'가 되는 것인
가? 학창시절 전교 1등 했던 친구들을 떠올려보면 좀처럼 믿어지
지 않는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영어단어를 외우고, 학교 수업 때
절대 졸지 않으며, 선생님 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그 얼굴들을 떠올
려보라. 괴롭게 공부하지 않으면서도 기말고사와 모의고사에서 어
마어마한 점수를 획득해내는 그들의 모습을 보다보면 경쟁의지가
팍 꺾였을 것이다. 그들의 점수는 항상 백점에 본드를 붙여놓은 모
양새다. 간혹 조금 떨어져서 96점을 맞을 때도 있지만 끈적끈적한
접착제가 더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질척거리며 붙잡고 있다. 이들
은 완전히 다른 종자이며 대단한 '의지충만자'들로 보인다.

전교1등은 고생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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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공부를 잘하는 것은 대개 상당한 보상을 받게 되어 있


다. 서울대학교나 연고대에 입학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도저히 대체
할 수 없을 만큼 큰 보상이다. 심리적 만족감은 물론이고 졸업 후
좋은 기업으로의 취업, 높은 연봉 상승률, 결혼시장에서의 메리트까
지 전부 따 놓은 당상이다. 학벌에 뒤따르는 후광효과가 사회적 불
의, 불합리와 비효율을 양산하고 있다는 비판이 이는 것도 당연하
다. 만 20세가 되기도 전에 받은 수학능력시험 성적이 인생 전반을
좌우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가혹한 일이다. 혹자는 이에 대하여 "
당신들이 즐겁게 놀고 있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를
악물며 열심히 노력을 했다. 만약 양자를 같이 평가한다면 오히려
불평등한 것이 아닌가?"라는 냉소적인 비판을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옳다고 하며 개인의 분발을 외치고, 어떤 사람은 사회 구
조적 현실을 외면한 논리라며 영 개운치 않은 입맛을 다시기도 한
다. 역시 이런 일에 대해 논평하기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필자는 조금 다른 문제가 걸리
적거린다. "전교1등들은 고생 하나도 안하는데……. 오히려 학창시절
에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줄창 고생하고 정작 우등생들은 정말 쉽게
학교생활 하는데……."라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전교1등들
이 노력을 했다는 것은 맞는 말이겠지만, 그들이 이를 악물고 고생했
다는 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당신은 이 생각에 동감할 수 있는가?

동감하지 못한다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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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중고생 아이를 가지고 있고, 위 생각에 동감하지 못


한다면 문제가 조금 심각하다. 아마 이런 생각일 수 있겠다. "공부
를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서울대 가는 애들은 최대한
부모가 통제하고 압박해서 몰아붙여줘야지 해내는 것이지. 영 현실
을 모르는구먼."이라거나, "물론 전교1등같이 공부에 미친 애들은
그런 별종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공부 잘하고 명문대 입학하는
애들은 그렇지가 않아. 우리 아이도 그런 별종은 아니니 고생 좀
해야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공부를 즐기면서 한다는 것을 이해
하지 못하는 부모는 아이를 통제하고 싶어 한다.

정주영이나 스티브잡스는 고생 별로 안 해봤다.

방학을 맞아 하루 종일 스키보드를 타고 놀다 온 아이가 있다. 밥


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하루 종일 열과 성을 다해 스키보드를
탔으니 소비한 열량도 대략 3천 칼로리는 되는 것 같다. 몸에서 열
이 나고 알이 베기지 않은 곳이 없다고 호소를 하면서도 얼굴은 벌
게져서 싱글벙글하다. 대단한 활동을 보여주었지만, 우리는 이런 상
황을 두고 고생했다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정주영이나 스티브잡스
같은 전설적인 기업가들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중간 중간에 죽을
만큼 힘든 고난을 겪어봤겠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평생 신나
게 스키보드를 타다 간 것과 다름없다.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주고,
어마어마한 생산력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이 고생을 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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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한 평생 재미있게 놀기만 한 것에 가깝다. 진짜 고생은 꽤


괜찮은 월급을 꼬박꼬박 받으며 하루 9시간 앉아서 전화 몇 통 받
은 비서실 K씨가 한 것이다. 아무 할일도 없는데 퇴근시간만 기다
리며 하루를 보내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것도 없다.

콧김을 뿜어대는 황소

자기효능감이 높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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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김을 뿜어대면서 황소처럼 일에 돌진하는 사람들, 하루 4시간만


자고도 아침에 일 나가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 수
학 모의고사를 쉬지 않고 4회를 해치운 후에 동경대 본고사 기출
문제를 뽑아서 시간을 때우는 전교1등들, 이들은 도대체 왜 이런
걸까?
대략 30여 년 전 반두라(Bandura)라는 심리학자가 '자기효능감
(self-efficacy)'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뻔한 개념 같지만, 아주 핵
심적인, 특히 교육심리학 분야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
자기효능감'은 쉽게 말하면 '자신감'과 유사한 것으로, 어떤 영역에
서 자신이 상대적으로 높은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주관적 믿
음과 그 주관적 믿음에 따라 파생되는 여러 심리적 상태들을 일컫
는 개념이다. '자기효능감'이 높은 학생들의 심리적 특징은, 높은 목
표에 더 강하게 반응하고, 좌절을 겪었을 때 더 용이하게 복구하
며, 우울감에 빠질 가능성이 적고, 계획의 형성과 실행에서 더 주
도적이다는 것 등이 있다. 학생들의 '자기효능감'은 '자아감'과 '잦은
성취', 동반되는 '칭찬'이 그 촉발 및 상승요소이다.
'자기효능감'의 본질이 무엇인지 더 파해쳐봐야겠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왜 '자기효능감'이라는 심리적 구조를 장착하고 있는 것일
까? 왜 어떤 조건에서는 '자기효능감'이 저하되고, 다른 조건에서는
그것이 상승되는가? 그냥 처음부터 모든 사람의 '자기효능감'이 높
으면 좋지 않은가? 자연 상태에서 지나친 자신감은 매우 위험한 사
태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학교나 시험이라는 것은 존재조차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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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던 시절, 사람들의 도전 대상은 매머드나 들개들, 절벽이나 홍수


로 불어난 하천이었다. 매머드를 한 마리 잡으면 동네 사람들이 일
주일간 고기파티를 벌일 수 있지만, 실패하는 날에는 역으로 매머
드 발에 짓밟혀 다져진 고기가 될 것이다. 섣불리 나서기 보다는
멧돼지나 산토끼부터 잡아먹는 게 낫다. 멧돼지 성공에 연속 다섯
번쯤 성공한 녀석들이 있다면 이제는 매머드에 도전해 볼만 하다.
충분히 근력이 세졌고, 기술이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자기효능감'은
이런 경우에만 발휘되어야 한다. 산토끼도 쫓지 못하는 녀석들은 '
자기효능감'이 저하되어 사냥을 아예 포기하게 하는 게 낫다. 차라
리 나무를 하거나 야자수를 따는 게 제격일 수 있다. '자기효능감'
은 자연 상태에서는 아주 적응적인 심리구조이다. 학교와 시험이
발명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B씨의 경우

B씨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자기효능감'이 아주 높은 학생이었


다. 개교 이래로 서울대학교에 2~3명의 입학생을 보내본 경험밖에
없는 지방 일반 고등학교에서 줄곧 전교1등을 놓치지 않았고, 항상
부모님과 선생님의 인정과 칭찬에 도취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었다. 매일의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적극적으로 질문도 해가며 학교
생활을 즐겨왔다. 모의고사에서 항상 압도적인 차이로 전교1등을
기록해 전교 순위가 인쇄된 공지문이 교실 뒤쪽에 걸릴 때면,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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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중학교 때 수


학 학원 잠깐 다닌 것을 제외하면 학원 과외도 없이 여기까지 왔으
니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문제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발생했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같
이 입학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외국어 고등학교를 나왔거나, 강남 8
학군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아이들도 역사
가 깊은 우수한 고등학교 출신들이었고, 본인처럼 지방의 이름 없
는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겉으로 내색하
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친구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영어로 된 강의들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데,
동기들은 외국 생활 경험이 많아서 유창한 발음으로 교수들과 이야
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 더 위축되었다. 게다가 B씨의 집은 돈 만원
에 벌벌 떠는 서민층인데 비해, 친구들은 전부 강남에 살고 방학만
되면 유럽을 외갓집처럼 들락날락거렸다.

'의지박약자'는 억울하다.

'의지박약'은 어떤 개인의 영구한 속성인가? 상당수의 부모들이 자


식들을 '의지박약자'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는 의지가 너무 약해
서 그냥 놔두면 안돼요. 주위에서 강하게 통제를 해줘야지 연고대
가는 '의지충만'한 친구들과 경쟁을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미
안한 말이지만 '의지박약'의 상태로는 어떤 통제를 해줘도 공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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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할 수 없다. 연고대가 아니라 인서울 근처도 갈 수 없다고 단정


적으로 말하고 싶다. 유일한 해결책은 '의지박약자'를 '의지충만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의지박약자'는 '자기효능감이 저조한 사람'의 다른 말이다. '자기효
능감'에서 선천적인 요소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후천적인 요소가 그것을 덮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말할 수
는 있다. '의지박약'은 어떤 개체의 영구한 속성이 아니다. 미성년자
'자기효능감'의 구성요소인 '자아감(자존감)', '잦은 성공경험', '적절한
칭찬'을 잘 활용하면 충분히 '의지박약' 속성을 제거할 수 있다.

자아감(자존감)의 형성 - 암시/모방/인정

1. '암시'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되는 것만 못하다."


조선의 19세기 후반을 오롯이 살다간 한 사내가 버릇처럼 내뱉던
말이다. 말의 힘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일까. 나이 40을 겨우 넘긴
해에 그는 반역의 죄를 쓰고 교수형을 당했다. 형제들도 연좌제에
걸려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의 후처는 노비로 삼아졌고 후손들은
화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어릴 때부터 비범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겨우 160도 되지 않는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지만, 몰
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며 구질하게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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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는 삶을 살았지만, 아무도 무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부리부리한


눈에서는 빛이 나왔고, 고생으로 생긴 주름살도 그의 하얗고 귀한
얼굴빛을 가리지 못하였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서울 진공을 목전에 두고 무슨 생각을 했을
까? 자기 휘하의 인원만 헤아려 봐도 무려 12만이다. 능양군은 불
과 1400명으로 광해군을 폐위시켰고, 수양대군은 30여명의 장사들
을 동원해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았다.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12만 농민혁명군의 수장이 된 것은 당나라 때 안록산이 50만의 반
란군으로 중원을 유린한 것에 못하지 않다. 여태까지 없었던 농민
이라는 뿌리로부터 시작된 대규모 혁명이었다. 이것은 진정한 충심
의 발현이다. 안록산 따위의 난신(亂臣)과는 비교될 수 없으리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찢어지도록 가난하고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 사내에게 이렇게
큰 위업을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구전에 따르면, 부친 전
창혁이 소요산 암자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꿈에 소요산 마장봉이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전봉준이 태어났다고 한다.”(오지영
이 지은 ‘동학사’에서 발췌함) 당나라를 실질적으로 건국한 태종 이
세민은 용꿈으로 태어났다. 삼한을 통일한 김유신의 부친은 밤하늘
을 쳐다보고 있는데 커다란 별 하나가 마당에 쿵하고 떨어지는 꿈
을 꾸었고, 모친 만명 부인은 하늘에서 금빛 갑옷을 입은 어린아이
가 집으로 구름을 타고 내려와 자신의 품에 안기는 태몽을 꾸었다.
역사상 위인들이 비범한 태몽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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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사후에 꾸며 넣은 설화적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일까?


어떤 아이가 비범한 태몽을 달고 태어났을 때, 부모는 그 아이가
비범한 인생을 살 운명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 부모가
동아시아의 전근대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 경향은 더 강해질 것이
다. 일단 한번 그런 생각이 든 뒤에는, 아이의 표정과 행동 하나하
나가 비범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아무리 참을성 많은 부모더
라도, 이런 식의 생각에 사로잡힌 후에는 아이한테 그 비범성을 표
현하는데 게을러지기 힘들다. 최대한 아껴서 아이한테 일주일에 한
번만 그런 '암시'를 주게 된다 하더라도 일 년이면 50번이 넘는다.
제법 머리가 굵어지고 사람구실을 하게 될 즘이면 최소한 1000번
은 그런 '암시'를 받게 된다. 200번의 암시를 받은 5살짜리 비범한
아이 전봉준은, 이미 남들보다 '암시'를 많이 받은 매우 고무된 아
이였다. 또래 친구들보다 스스로 비범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
한다. 이런 방식으로 부모의 '암시' 이외에 추가로 주변 어른들과
친구들로부터 또 다른 암시를 받는다.
자아감(자아존중감)을 형성하는 심리적 메커니즘 중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암시'이다. 용이 나타난 태몽이 되었건, 마음에 쏙 드는
표정이 되었건, 쾌활한 옹알이가 되었건, 일단 아이의 긍정적 특성
이 부모에게 포착되고 나면 일은 쉬워진다. 부모는 아낌없는 표현
으로 아이에게 비범성의 '암시'를 주게 되고 그 보상으로 아이들은
부모에게 더 긍정적인 표정과 행동을 보여줄 것이다. 이 과정은 끊
임없이 되풀이되고 나중에 부모는 이런 진술을 하게 된다.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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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어릴 때부터 기특했어요. 똑똑해서 공부를 잘하고 이쁜 짓만


하니 칭찬을 해주지 않을 수가 없지요."

2. '모방'

일단 태어나서 세상을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비옥


한 토양을 소유하고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성실하게 논과 밭을 일
구는 농사꾼이 최고로 여겨지는 사회일 수도 있다. 여름에는 말을
타고 양을 몰면서 목축을 하고 가을이 되면 이웃 농경부족들을 약
탈해서 먹고사는 동네일 수도 있다. 글을 읽고 철학을 탐구하며 사
변적인 논쟁으로 경쟁하는 조선의 양반사회일 수도 있다. 태어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살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이 경우 태어나지
않은 씨앗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전략은 무엇인가? 말을 타는
운동능력과 마음껏 약탈할 수 있는 포악함인가? 근면한 성격과 하
루 종일 노동을 할 수 있을만한 지구력인가? 아니면 뛰어난 논리력
과 독해력을 포함한 지적능력일까? 어떤 가치가 중요시되는지 확정
이 안 된 상태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 전략을 취하는 게
가장 현명하다.

'일단 태어난 뒤 그 동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열렬히 따


라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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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교육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가 지적한 것처럼 '당근과 채


찍이론'은 한 물 갔다. 아이들은 당나귀가 아니다. 손에 '우상' 한
명만 쥐어주면 그 아이는 알아서 자랄 것이다. 가정이라는 작은 사
회에서 부모는 필연적으로 '우상'이 된다. "나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
어요." 혹은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아이를 보았을 때, 감동을 느끼지 않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상태이며, 틀림없이 공부도 잘하게 된다. 아이
들은 모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 탁월함은 아이를 활기차게 만
드는 원동력이다. 따라서 모방할 대상이 없는 아이들은 항상 무기
력하다. 자아감도 마찬가지이다. 부모와의 관계가 건전할 때 일반적
으로 걱정이 많은 어머니의 딸은 소심하다. 열렬한 활동가인 아버
지를 둔 아들은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다. 자아감은 동성의 부모를
모방하는 경향이 있다.

3. '인정'

사춘기가 막 시작된 중학생 H양이 있다.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얌전하고 부모 말을 잘 듣는 아이었는데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부
터 말수가 적어지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도대체 방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 들어가 보면 버럭 화를 내거나 짜
증을 낸다. 자기 물건을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하고, 텔레비전을
보려고 소파에 앉아도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버릇없는 행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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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의 관계는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다.


H양의 이상행동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실 H양은 위와 같
이 짜증내기와 버릇없이 굴기를 함으로써 부모님을 보호하려는 노
력을 하고 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충분히 억압되어 있던 어떤 욕
망들이 사춘기의 2차 성징을 거치면서 튀어나오려 하고 있기 때문
이다. 정신분석적 발달이론에서 일반적으로 '오이디푸스기'로 부르는
만 3~6세 사이에 아이들은 이성 부모에 대해서 오이디푸스적 욕망
을 형성한다. 이성부모를 차지하고 있는 동성부모에게 피할 수 없
는 경쟁심을 느끼지만, 동성부모의 강력함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
다. 이렇게 억압된 욕망은 초등학생 기간(잠복기)에는 문제없이 가
려졌었지만, 2차 성징이 나타나면서 자꾸 들고 일어나려고 한다. H
양은 의식의 아래에서 떠오르는 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부모님을
떼어놓으려 한다. 떼어놓기를 함으로써 부모님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 사례는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 한 부
분만 살펴보고자 한다. 시계를 뒤로 돌려서 H양이 초등학생이 되
기 이전, 오이디푸스기일 때로 돌아가 보자. 어머니와의 경쟁에서
무참히 무릎을 꿇을 운명을 가졌지만, 아버지는 괜찮은 선물을 줄
수 있다. ‘무한한 사랑과 인정.’ 어린 여자아이에 있어서 아버지로
부터의 인정과 유보 없는 사랑은 가장 멋있는 남자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준다. 이 구조는 인생 전반에 걸쳐 H양의 인
격을 형성할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와 과업실행에 자신감을 갖고
임할 것이다. 명문대에 입학하고 사업에서 성공할 것이다. 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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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부터 심리적 방임을 겪는다면 낮은 자존감과 우울증, 불안


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잦은 성공경험

공부에 있어서 성공경험이라고 말한다면, 시험 성적을 떠올리기


쉽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고3이 되어서 모의고사를 활용한다고 하
더라도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의 경험을 갖게 된다. 고2 이하의
학생들은 일 년에 4번의 지필고사의 기회만이 있을 뿐이다. '자기효
능감'이 한껏 떨어져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을 다음 기말고사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그럴 필요는 없다. 성공경험은 반드시 거창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영어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잠깐 모르는
단어를 살펴봄으로써 선생님이 불시에 해석연습을 시켰을 때를 대
비한다면, 학생은 충분히 학습장면에서 성공을 경험한 것이다. 한국
사 시간에 선생님이 그려준 도표를 바짝 주의를 집중하며 필기를
하고 최대한 외우려고 노력했다면, 충분히 성공으로 받아들일 만하
다. 요컨대 성공경험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낙천적인 아이들
은 많은 것을 성공으로 받아들인다. 불안하고 부정적인 아이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최소한 이 부분에서는 낙천성이 상당한 역할
을 한다.

부모의 칭찬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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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과 앤더슨이라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다. 마이클은 앤더슨


에게 화가 단단히 나 있는 상태다. 어젯밤 무리와 함께 물소 한 마
리를 힘들게 사냥해 놓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앤더슨이 물소의 배
를 헤집더니 염통을 잽싸게 물고 가서 먹는 게 아닌가. 새끼 때부
터 둘도 없는 친구로 자랐다. 마이클이 염통을 좋아한다는 것을 앤
더슨만큼 잘 아는 늑대도 없을 터였다. 돌이켜보면 매번 그러했다.
저번에는 마이클이 마음속에 둔 암컷에게 치근댄 적도 있었다. 물
론 치근덕댄 것으로 끝나서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서 생
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앤더슨에게 보복을 해주고 싶었다. 이
때까지 앤더슨이 해온 파렴치한 짓을 모조리 성토하여 그의 비열한
성품을 알려준 뒤, 복수의 의미로 못생긴 얼굴과 빈약한 울음소리
를 꼬집으며 놀려줄 생각이다. 곧장 앤더슨한테 가서 짖고 으르렁
거리고 할퀴고 물었다. 앤더슨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랐다. 무슨
일인지 이해해보려 했지만 어려웠다. 마이클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까지였다. 그 이상의 의도는 앤더슨한테 전해지지 않았다.
인간의 언어능력은 매우 큰 역할을 한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부
분은 아주 구체적으로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늑대인 마이클은 앤더슨에 상처를 주기 위해 비언어적 행위를 사용
했다. 이는 간접적인 인상을 줄 뿐이다. 앤더슨이 유난히 뛰어난
지능을 보유하였고, 마이클이 끈덕지게 표현하려고 용을 썼다고 가

마이클과 앤더슨(늑대)이 으르렁거리며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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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도 앤더슨은 '내 얼굴이 못생겨서 나를 무시하는 것일지도 모


르겠다.'는 정도의 추측을 할 뿐이다. 이에 반해서 사람은 매우 짧
은 시간에 상대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다. "너는 못생기고 뱃살이
늘어져서 어떤 암컷들도 좋아하지 않을 거야. 살아가는 것이 큰 의
미가 없어 보이는데, 조만간 영동대교에서 뛰어내리는 게 어떨까?"
불과 5초가 지나가기 전에 언어로 상대의 인격을 망가뜨릴 수 있
다. 늑대 세계에서는 이정도의 상처를 주려면 영겁(永劫)의 세월로
도 부족할 것이다.
언어가 없을 때 수많은 경험을 통하여 얻을 수 있던 인식이나 느
낌이, 언어가 발명됨으로써 순식간에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다.
이 능력을 좋은 쪽으로 써보면 어떨까? 부모는 매우 적은 시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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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으로도 아이의 마음을 조형(造形)할 수 있다. 오늘 아침 긍정


적으로 한마디 했을 뿐인데, 어제 까지만 해도 부정적이던 아이가
낙천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떤 작은 성공이 지나갈 때 아이는
걱정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진짜 성공일까?'라고 생각하며 슬며시
부모의 눈치를 살핀다. 내심으로는 부모가 "그거 진짜 대단한 거야
잘했어."라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현명한 부모가 그런 식으로
대답해 주었다면, 아이는 날개를 달았다. 앞으로 그 기준으로 자신
의 행위를 바라볼 것이다. 모든 것이 긍정적인 성취로 보인다. 항
상 즐겁고 신난다. 자기효능감이 높아져 간다. 전교1등처럼 생글생
글 거리는 표정으로 학교 수업을 듣는다.

문제는 낮아진 자아감

다시 B씨의 사례로 넘어가보자. 그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지나치


게 위축되었다. 모든 행위에 소극적이었다. '최대한 소극적으로 행
하기', 이것이 가장 좋은 전략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항상 1등만
하던 아이가 두려운 산을 만났을 때 취하기 쉬운 행위였다. 안타깝
게도 실패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실패를 피해보려 하였
지만, 오히려 진정한 실패로 빠져들고 있었다. 20살이 넘어서 누구
나 겪을법한 실패의 경험이다. 잘 지나갈 경우 자기발전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B씨는 그러지 못했다. 32살이 될 때까지
회피만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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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B씨의 경우도 저번 장에서 설명한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일


종으로 설명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전형적인 '자기애성 인
격장애'를 '외현적' '자기애성 인격장애'로 분류하고, 비전형적이고
드러나지 않는 것을 '내현적' '자기애성 인격장애'로 칭한다. 후자는
일종의 '회피성 인격장애'와 유사한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자기애성
인격장애'와 유사한 심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는 특징이 있다. 이런 인격적 특성으로 그간
의 회피와 실패와 무력감이 설명된다.
코치는 B씨에 대해 최대한 공감적 태도를 취했다. 어떤 실패도 바
보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했다.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들
도 항상 실패와 더불어 산다는 것을 실증해 보여야 했다. 실패가 B
씨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것을 납득시켜서 자꾸 시도를 하
게 해야 했다. 문제집을 자꾸 풀게 하고, 모의고사를 자꾸 보게 하
고, 스터디그룹도 짜보게 하고, 그 사이에 많은 실패를 경험하겠지
만, 그것이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도록 하
여야 했다. B씨같이 똑똑한 친구들은 이끌어가기 쉽다. 이것이 된
다면 알아서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
과 성과를 끌어낼 수 있다.

3. 타인수용감 - 성적과 부모사랑은 관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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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3
삼수생 C군은 고민이 많다. 수능준비만 벌써 3년째이다. 재수할
때는 전체적으로 2~3등급을 맞았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는데 마
땅히 만족할 만한 대학진학이 어려웠다. 이번에 떨어지면 군대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낮에는 학원 강의를 엄청나게 듣고 저녁에는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온다. 그런데 막상 집에 가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부모님께서 돈도 많이 들여서 삼수까지 시켜주셨는데,
집에 들어가서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
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하루 종일 공부를 하다가 왔는데, 집
에서는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나 오락프로그램을 보면서 쉬고 싶었
다. 저번 주 일요일에는 오랜만에 쉰다고 생각하고 거실 소파에 누
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니, 아버지의 "공부 안하냐!"는 타박이
들려왔다. 안 그래도 그 프로그램만 보고 인터넷 강의 들으러 가려
고 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을 잡쳤다. 짜증과 화가 몰려왔
지만 아버지 말씀이 틀리지 않으니 꾹 참고 공부하러 나갔다. 일단
망친 기분은 풀리지 않아서 독서실에 앉아 멍하니 스마트폰만 만지
면서 시간을 때웠다.

아주 어려운 케이스

C군과 같은 경우는 아주 흔하지만, 또 아주 해결하기 어려운 케


이스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번 시험도 작년과 똑같은 결과를 맞
을 것이다. 점수 자체가 낮게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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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앞으로 등급을 끌어 올려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하는 것 같으나 무언가 힘이 없다. 맹렬히 공부를 하지 못한다. 집
중을 제대로 해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어느 정도 나오는 점수
는 자신의 과거 공부습관을 합리화할 것이다. 지금부터 점수를 올
리려면 전부다 바꿔야 하는데, 그것을 설득시키기가 쉽지 않다. 또
한 이런 것들이 다 해결된다 하더라도 부모님과의 관계가 아주 위
태롭다. 정말 머리가 아픈 케이스이다.

임계(臨界)치를 넘겨라!

찬혁이라는 학생이 있다. 아주 개구쟁이이고 친구와 노는 것을 좋


아한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학원도 다녀보고 과외도 받아보고
공부를 조금 해보려고 했는데, 고등학생이 되니 영 힘이 들었다.
수업시간에는 다 포기하고 무협지만 읽어댔다. 주혁이라는 학생이
있다. 어릴 때부터 어른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이었다. 중학교 때
까지는 전교 10 위 이내에 꼬박 들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성
적이 주춤했지만 여전히 행실 바른 학생이었다. 두 학생이 모두 고
3이 되어서 첫 모의고사를 치르게 되었는데, 국어점수를 확인해보
니 찬혁이는 높은 2등급이었고, 주혁이는 4등급에 불과했다.
수학능력시험은 요물(妖物)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밤늦도록 공부
만 한 찬혁이를 버리고 pc방이나 들락거리며 수업 때 무협지로 시
간을 때운 녀석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다.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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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 있다 보면 수도 없이 만나보는 흔한 케이스다. 주혁이는 충격


을 받았다. 화가 났다. 세상의 이치가 어찌 이리도 불공평하단 말
인가. 주혁이 어머니는 혼란스러웠다. 주혁이는 열심히 했는데…….
본인도 90점 이상 가는 엄마노릇 잘 했는데……. 순간 아찔했다.
다음 주 있을 학부모회에 갈 걱정이 된다. 11월에 있을 수능시험에
서도 똑같이 망할 것 같다. 패배감에 절어있을 아들 얼굴이 떠오르
더니 불안감에 휩싸였다. 현실을 부정해보려고 해보았다가도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수백만 년 이상 '불안'이라는 감정은 인류를 지탱해 왔다. 위험에
맞닥뜨린 순간 '불안'은 힘을 발휘했다. 다른 짓을 멈추도록 하고
사태에만 집중하게 한다. 불안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수단
을 동원하도록 만든다. 이때 이용되는 행동은 강박적 특성을 갖고
있다. 끊임없이 울타리를 점검하고, 불을 밝혀 사방을 샅샅이 살핀
다. 처음 보는 것들은 되도록 멀리하고, 대중과 대세를 따라 움직
이고 싶어 한다. 주혁이 어머니도 이 '불안'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
할 것이다. 주혁이의 스마트폰과 아이패드를 압수하고 스케줄을 철
저히 통제한다. 학원숙제를 했는지 항상 의심하며, 다른 짓을 하지
못하도록 과외선생을 붙여 감시할 것이다.
주혁이의 문제는 집중력의 임계치를 넘지 못했다는 점이다. 겉에
서 보이는 양적 측면에 매몰된 나머지 강력한 공부를 하지 못하였
다. 새벽 두시까지 근면하게 앉아있기 위해서는 강렬함은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많은 학부모들이 이쯤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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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우리 아이는 집중력이 약한 편이에요. 다른 애들이 80의 집


중력을 갖고 있다고 하면, 우리 애는 60정도지요. 그렇다면 다른
아이가 4시간 공부할 때 우리 아이는 6시간은 해야 하지 않을까
요?" 그럴듯한 논리다. 다른 아이가 80 곱하기 4로 320만큼 한 것
이고, 우리 아이는 60 곱하기 6으로 360만큼 한 것이니 이 전략이
먹힌 것 같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 산수는 틀렸다. 일정한 임계치
를 넘지 않는 수준의 집중력은 효과가 영(zero)이다. 즉, 320대 0으
로 다른 애들의 완벽한 승리이다. 주혁이는 공부시간은 생각하지
말고 집중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생각해야 한다.

집중력 X 공부시간 = 산출량

60 X 6 = 360

80 X 4 = 320

집중력이 일정 수준을 넘지 않으면 효과가 영(zero)인 이유

'학습'이라는 것은 뉴런과 시냅스가 배선, 강화, 생성, 소멸되는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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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통하여 일정한 사고/인지과정과 정서/신체적 반응, 기억이 생


성되거나 그 효율성이 증가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컴퓨터처럼
하드웨어가 변형 없이 그대로 있고 정보가 저장되는 것이 아니다.
뇌를 구성하는 뉴런과 뉴런의 연결인 시냅스 자체가 변하면서 학습
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뉴런과 시냅스의 변화라는 것이
쉬운 절차가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말을 빨리 배운다. 말뿐 아니라 뭐든지 보자마자
익히고 듣자마자 외운다. 마치 뇌가 스펀지처럼 지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일정 나이(임계기)가 되면 이 능력이 닫힌다. 이 능력이
닫히는 대신 가지치기를 한다. 중요한 것만 남기고 제거를 해서 뇌
가 효율적으로 일하도록 도와준다. 각자의 연령대에 따라 필요한
과정을 밟는 것이니, 아이들을 부러워 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대
한민국에서 입시공부를 할 때는 이 임계기가 한참 지난 후라는 것
이다. 공부해야 할 양은 엄청 많은데 머리가 닫혀 있으니 뉴런과
시냅스가 잘 변하지 않는다.
일정 나이, 즉 임계기가 지나서 학습을 하는 방법은 없을까? 다시
말하면 아기들처럼 스펀지 뇌가 아니더라도 뉴런과 시냅스를 변화
시키는 기능이 인류에게는 없을까? 물론 있다. 특수한 상황인 경우
이런 변화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두고 있다. '마이네르트 기저핵'
은 이 특별한 길을 여는 역할을 한다. 이 부분은 각성된 상태, 바
짝 긴장한 상태에서 작용하는데, 이 때 임계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효과가 생긴다. 아주 집중한 상태에서는 고3들의 머리도 아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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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펀지 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뉴런, 시냅스, 뇌

C군의 경우

C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긴장을 하지 않은 상태로 공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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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착되어 있다. 지나치게 많은 공부시간이 원인이다. 근본적으로


C군의 부모님이 잘못된 전략을 취한 것이 문제였다. 많은 학부모들
이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데, 최대한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게 하
면 성공한 줄로 착각한다. 오래 앉아 있으면 열심히 한 것으로 생
각하는 부모도 있다. 이런 훈육전략은 아이들이 오래 앉아 있는 것
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겉으로 공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행위'를 얼마나 적나라하게 부모님께 노출시킬
지에 골몰하게 한다. 자신의 실력 향상과 점수 상승에 집중하지 못
하고 책임지지도 못한다. "평소에 새벽 2시까지 책상에 앉아 있었
으니 열심히 했죠? 물론 점수는 하나도 안 올랐지요. 그래도 열심
히 하니까 잘했죠?"라고 말하는 꼴이다. 부모님들은 이 질문에 화
답해서는 안 된다.
열심히 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식당에 하루짜리 아르바
이트를 하러 온 사람은 식당 일에 책임이 없다. 일이 어떻게 되든
지 밤 10시가 되면 일당을 받아서 집으로 갈 수 있다. 테이블을 치
우고 닦는 일도 한 번에 한 개씩 한다. 화장실을 갔다 오면서 쓰레
기를 치울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어떤가? 10시이든 11시든 아니면 밤을 새든 가게를 정부 청소하지
않으면 일이 끝나지 않는다. 테이블을 청소해도 최대한 동선을 고
려해서 한 번에 여러 개를 청소하려고 노력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오는 김에 당장 부족한 비품을 산다. 최대한 시간을 아끼고
어떻게 하면 빠르고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할지 골몰한다. 앞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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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바이트처럼 하는 것보다 주인처럼 하는 일이 세 배 정도는 효과


적이다.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어떤 행위가
공부라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내 실력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점수가 오를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면 위기의
식을 느끼고 무언가 바꾸어야 한다. 여기서는 몇 시간 했는지가 문
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얼마큼 향상되었는지가 문제이다. 이것이
주인이 하는 공부이다.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집중을 하지 못하고 오래 앉아 있는 것에 골몰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오래 앉아 있는 것에 골몰하는 상태’는 대부분 부
모님에 의해 유도된 것이다. 그 유도를 하는 과정에서, 부모는 열
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사랑해주지 않겠다는 암시를 하
게 된다. 따라서 반드시 학습동기의 하위구성요소인 '타인수용감'의
결여가 동반된다. 학습 분야에 있어서 '타인수용감'은 자신이 공부
를 잘 하든 말든 관계없이 타인에게 정서적으로 수용될 수 있으리
라는 주관적 믿음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타인수용감'이 높은 학생
은 뒤에 든든한 응원군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실패의 두려움을
쉽게 이겨내고 더 높은 학습 성취를 이루어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
다. '타인수용감'이 다른 학습동기 구성요소인 '자기효능감', '자아감'
등을 매개하는 중요 개념으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그 본질적 기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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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는 충분히 연구되어 있지는 않다.


'타인수용감'의 '타인'은 누구나 될 수 있다. 부모님, 학교선생님, 과
외선생님, 친구, 형제, 심지어 옆집 아주머니나 외삼촌이 될 수도 있
다. 가장 중요한 대상은 부모님이다. 선생님이 밀접한 관계를 형성할
경우 부모님이라는 심리적 대상이 선생님으로 쉽게 전이될 수 있으
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선생님의 '타인수용감'도 매우 중요할 수 있다.

'타인수용감'이 부족하다는 것의 본질적 의미

부모님과 같은 중요 심리적 대상에 대하여 '타인수용감'이 없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간다는 뜻인가? 다시 말하면
부모님이 학생 본인의 성적하락이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상태
에 부정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고,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표출한다
는 것이다. 이런 부모님들의 핵심 속성은 '불안'이다. 여기의 '불안'
에는 두 가지 관념이 들어있다. 자식의 성적과 사회적 성공이 부모
자신의 그것인 것과 같다는 사고방식, 그리고 그 성취가능성의 확
신 부족이다. 모든 부모님들이 이 두 가지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
다. 문제는 정도가 지나쳐서 본인을 통제하지 못하고 비적응적인
훈육방법을 습관화 하는 지경까지 가는 경우이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불안한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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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기 자식의 성공가능성에 회의적일까? 왜 아이를 믿지 못할


까? 자식은 작은 자기이다. 나와 배우자의 얼굴을 닮아있고, 걸음
걸이나 말투도 비슷하며, 사고방식도 비슷하다. 왠지 이 녀석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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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겪은 어려움을 겪을 것 같다. 내가 뚫어내지 못한 장애물을 과


연 이 녀석이 돌파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는 그 어려움을 결국
못 넘었다. 숨거나 돌아왔고, 그 결과가 지금의 '나'이다. 그리고 지
금의 '나'에 상당히 불만이다. 그 불만을 그럴듯한 직함과 명품 백,
대형 세단으로 채우고 있기는 하지만, 누구에게 들킬까 항상 두려
워하고 있다. 자기 자식에 대한 불안과 우려의 뒷면을 훔쳐볼 기회
가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본인의 자신감 부족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명문대학교는커녕 중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본인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살아왔다면 자신감이 있다. 이런 사람은 본인
의 자식이 공부로든 뭐든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뭐
든지 제대로 해서 본인의 인생을 날것 그대로 맛볼 수 있는 인생이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간고사 성적에 일희일비 할 이유가
없다. 아이는 항상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다. 이럴 경우 본격적으로
공부에 맛을 들였을 때 극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

부모님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입시에서 명문대 진학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군인이 죽기를 각
오해야 한다. 출동할 때마다 '죽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으로는
올바르게 조준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다. 장수가 전투에서 패배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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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다 군주가 그 목을 친다고 생각해보자. 전장에 나가는 장수들


은 목이 달아날 두려움에 아무 짓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부모님들이 스스로 많은 인생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고3
자식을 두려면 적어도 40대 중반이 넘어야 하니 적지 않은 삶을
살았다. 조선시대였으면 어르신 대접을 받을 나이이다. 그런데 자신
이 믿고 있는 그 세계관, 인생경험으로 형성된 사고방식이 어떤 역
사를 거쳤는지 알 필요가 있다.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갖게 되면
남자든 여자든 뉴런과 시냅스가 급격하게 변화한다. 여자라면 사족
을 못 쓰던 남자도 아빠가 되면 갑자기 가정적이 된다. 여자는 엄
마가 되는 순간 아이가 어떻게 될지 걱정에 눈이 충혈된 아줌마가
된다. 가정을 이루기 전의 처녀, 총각은 없어지고 새로운 사람이
태어난다. 28에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았다면, 그 다음부터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이다. 45가 넘어 자식이 고3이 되었다면
한평생 아이와 배우자의 안녕과 즐거움을 위해 매진한 18살짜리
소년 소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소년 소녀들은 인류를 받들고
있는 거대한 기둥이다. 본인을 희생하며 인류를 지탱하고 있다. 하
지만 안타깝게도 시야가 좁고 생각도 비슷하다.
당신의 자녀는 수능만 치고 나면 성인이 된다. 그리고 나면 자녀
들은 그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60년 이상을 살 것이다. 조금 더 넓고 멀리 본다면, 부모로서 자녀
의 인생에 해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아이들을
놓아주자. 그들은 현재와 미래에서 숨 쉬고 있다. 새로 올 세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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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를 우리들보다 더 잘 맡고 있다. 그들에게 온전히 맡기고 믿어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서포트이다.

옥시토신 호르몬 연구결과

스마트폰이나 게임에 중독된 것은 어떻게 할까?

현실적인 문제를 조금 더 이야기 해봐야겠다. C군의 경우 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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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스마트폰 게임을 즐겨했는데, 이에 대한 어머니의 심각한


걱정이 있었다. 스마트폰을 너무 하는 통에 밤늦게까지 잠도 안자
고 아침에 일어나려면 힘에 겨웠다. 일단 스마트폰 게임에 중독된
상태임은 분명해 보인다.
게임은 즉각적인 보상을 준다. 적을 때리거나 죽이면 바로 점수나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이번 판이 마음에 안 들면 리셋해서 새롭
게 시작할 수 있다.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에 몰려 있는 아이에게
게임은 굉장히 큰 도피처가 될 수 있다. 현실에서는 항상 구박만
받고 패배만 맛보지만, 게임에서는 나도 싸움 잘하는 덩치가 될 수
있고, 양민을 학살하는 장군이 될 수도 있다. 사실 게임은 현실의
대체물이다. 우리는 이건희 회장이 부루마블 게임을 하는 것을 쉽
게 상상할 수 없다. 어마어마한 재력과 영향력으로 세계 각지에 실
제로 건물을 사고 팔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부루마블 게임으로
그 기분을 맛볼 필요가 없지 않을까? 내가 메시처럼 축구를 잘한다
면 피파게임을 하는 대신에 운동장에 나가겠다. 마찬가지로 공부를
잘해서 모의고사를 1등급 맞고 서울대를 갈 수 있다면 굳이 게임
으로 대리만족을 할 필요가 없다.
물리적인 압박으로 게임이나 스마트폰 중독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항상 실패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망침으로써 돌아오지 못
할 강을 건너기도 한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이 게임중독 때문에
공부를 안 하는 줄로 아는데 대단한 착각이다. 설사 게임을 하지
못하도록 물리적으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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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서 벽을 쳐다보는 것이 공부하는 것보다 백배는 재미있


다고 생각할 것이다. 게임을 금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역효과가
난다는 점, 설사 금지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공부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고 나면 결론은 쉽게 나온다. 그냥 게임하게

놔둬라.

게임중독자들도 서울대 잘만 간다.

게임중독에 대한 통계적 연구에서 아버지의 학력이 높을수록 중독


성향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에 대한 해석으로 아버지의 높은
학력은 집안에서 공부에 대한 더 높은 압박으로 이어지고 수반되는
스트레스의 해소를 위해 게임에 골몰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또한
명문대 입학생들의 게임중독도 상당한 편이라는 점도 지적되고 있
다. 필자는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후 의외로 동기들 중 스타
크래프트 고수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실력이 하도 약해서 깍두기 노릇을 했었는데 대학교 진학 후에는
깍두기로도 잘 끼워주지 않았다. 이는 실제로 게임이 공부 스트레
스를 해소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게임중독이 아니라 공부를 안 하는 상태 자체이


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나 못하는 학생이나 쉬는 시간에 게임하
는 것은 똑같다. 다만 우등생들은 공부를 더 열심히 오래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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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뿐이다. 결국 게임을 통제하기 보다는 공부에 대한 재미를 조절

해야 한다.

코칭과정에서 여러 골치 아픈 점들

필자가 굵직한 것들로만 단순화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엘리트 학


습 코칭이라는 것은 보통 민감한 작업이 아니다. C군의 경우 공부
방향에 있어서 대폭의 전략변경이 필요했는데, 이를 관철하려면 최
대한 많은 권한을 얻어 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행
위가 필요한데, 우선 코치 스스로 학생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겠
다는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 다음으로 학생과 부모님 양자
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 있다. 두 가지 모두
매우 어렵고 두려운 작업이다. 구체적인 설명은 뒤에 나오는 사례
들에서 설명하겠다.

4. 코치의 자기효능감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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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4
D씨(35세, 남)는 전문과외교사이다. 한양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했
고, 10여 년 간 중고등학생 수학 전문 강사를 해왔다. 수능수학풀
이는 어느 누구보다 자신 있었고, 아이들에게 쉽게 설명하는 것도
아주 자신이 있었다. D씨는 겉으로 보기에는 씩씩하고 잘나가는
과외 교사이지만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다. 얼마 전 코치를 찾아와
서 속내를 털어놓았다.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공부라는 게 내가 아무리 가르쳐도 학생


들이 안하면 꽝이라니깐. 누가 가르쳐서 애들이 점수가 오르긴 하
는 건지 모르겠어요. 열심히 하는 애들은 가르치는 재미가 있는데,
무기력한 애들은 과외시간이 지옥이에요. 이러니까 과외시간이 재
미도 없고,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아요. 오래할 직업은 아닌
가 봐요."

D씨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과외교습과 학


생들의 성적향상이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직업으로
서 재미가 떨어지고 우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이 사례는 생
각보다 많은 문제점을 담고 있었다.

과외선생님의 카리스마는 어디서 얻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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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과외선생님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비싼 돈을 받고 과


외를 시키는데, 옆집 누나가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야 하지 않겠
는가? 학생 수학 등급이 1등급도 넘나든다는데, 책잡히지 않기 위
해서는 정말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겠다."라고 생각한다. 본
인이 학생보다 압도적인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카리
스마를 얻는 방법으로 아주 대단한 수학풀이 실력을 보여주어야 한
다는 압박을 느낀다.
어떤 프로축구단에 새로 코치가 부임했다. 왕년에는 국가대표에도
뽑혀보고 잘나가던 선수였지만 마흔이 넘어가고 체력과 기술이 하
락해서 어쩔 수 없이 은퇴를 하게 되었다. 1년 정도 쉬고 있는데,
고교 선배였던 수도권 프로축구단 감독이 집에서 노느니 코치라도
하라며 불러주었다. 감독님 배려가 고마워서라도 열심히 해봐야겠
다고 생각했다. 젊은 선수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선수들을 불러놓고 자체 청백전을 열었다. 본인도 선수들 사이에
끼어서 연습을 시작했다. 시합이 시작한지 10분여가 지나자 코치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이대로 계속 뛰다가는 당장이
라도 쓰러질 수 있겠다 싶었다. 시합을 끝내고 나서 코치는 주눅이
들었다. 선수들은 노인네가 왜 무리를 하셨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본인은 자격지심으로 우울해졌다. '이제 젊은 녀석들이 나를 무시하
겠지? 나 같은 놈의 지도를 받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
니 앞이 깜깜해졌다.
과외선생이 수학풀이실력에서 카리스마를 획득하려는 생각을 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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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부터 일은 틀어지기 시작한다. 학생, 학부모, 과외선생님 셋 모두


수학풀이 퍼포먼스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궁극적인 목표인 학생의
입시 성공, 점수 상승, 실력 향상은 뒷전이다. 얼마나 수학을 잘 푸
는지, 설명을 잘 해 주는지에 몰두하게 된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
라도 해답을 보지 않고 풀어내는 것이 당연하게 되고, 어쩌다가 한
지점에서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과외선생님의 얼굴이 빨개진다. 그
리고 학생은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열심히 가르치는 과외선생과 졸고 있는 학생

더 근본적인 문제를 얘기해 보자. 도대체 과외선생님의 풀이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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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설명능력이 학생의 성적과 한 푼이라도 연결되어 있는가? 필자


는 세계적인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의 플레이를 수도 없이 재생해
보았지만, 막상 실전에서 레이업 슛 한 개를 제대로 해내기도 벅차
다. 결국 학생이 직접 무언가 해보기 전까지는 모든 행위가 단순한
퍼포먼스에 불과하다. 미안하지만 D씨가 열심히 문제를 설명하고
있을 때 학생들은 졸고 있거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조금 철이
든 학생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아 피곤하네, 이따
과외 끝나고 다시 한 번 풀어봐야겠다.'

진짜 고객은 누구인가?

과외가 시작되면, 학생-학부모-과외교사로 이어지는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셋은 저마다의 생각과 욕심을 가지고 있다. 비싼 과외비
를 받는 과외교사로서는 일단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
우 학부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노력한다. 대부분 학생보다 학
부모의 발언권이 크고, 실제로 비용 지불도 어른들이 하기 때문이
다. 학부모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은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
는 것을 뜻한다.
학생과 학부모는 같은 편이 아니다. 학부모는 최대한 학생을 통제
하고 억압하고 싶어 한다. 반면에 학생은 공부를 잘하고 싶다고 생
각은 하면서도, 자기의 영역을 보장받으려는 욕망이 있다. 학부모의
관점으로는 중고등학생 시절은 어른이 되기 위해 거쳐 가는 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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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과 같다. 시절을 즐겨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구간


이다. 47살이 되어서 동창회에 나갔을 때 수다를 떨며 잠깐 즐길
추억거리에 불과하다. '이 녀석들아 그 수다를 진짜 즐기려면 동창
회에 벤츠를 끌고 나가야 한단다. 중고생시절은 그 결과를 위해 소
비하면 되는 시간이야.'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학생은 중고생시절인
지금이 영원히 연속되는 시간의 한복판이다. 우리는 이번 세기가
지나기 전에 모두 죽을 것을 알고 있지만, 마치 평생 존재할 것처
럼 살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의 전략 아래에서 중고생시절이 종료한다는 것
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기 때문에 자기 영역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고생시절만이라도 자기영역을 포기하라
는 말은 평생 그렇게 살라는 것과 똑같이 여겨진다.
학생의 욕구보다 학부모의 욕망을 우선으로 생각할 때 과외교사들
은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학생의 개인 시간을 최대한 빼
앗고, 공부 시간으로 채워 넣는다. 숙제를 못 해오거나 거짓말을
하면 곧바로 학부모에게 일러바친다. 학부모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최대한 학생을 압박한다. 이는 과외교사가 식견이 얕을 때 하는 행
동이다. 실제 주인공이 학생이고 결정권자도 학생이라는 것을 모르
기 때문이다.
압박을 받은 학생은 드디어 결심했다. "과외선생을 잘라버리자."
과외선생님이 오는 날이면 어머니한테 짜증을 내고, 교사의 수학실
력을 의심하는 말을 한다. 성격이 이상한 것 같다고 주장하고, 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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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전에는 입에서 술 냄새가 나더라는 말까지 한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왜 이러는지 알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짜증을 또 부리는구
나 생각한다. 하지만 알면서도 결국 과외교사를 자를 수밖에 없다.
지어낸 말인 것을 알면서도 일단 험담을 들으면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문다. 말의 힘은 이렇게 강력한 것이다.

코치의 자기효능감

앞서 학생 자신의 자기효능감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더 최근의 연


구에서는 코치의 자기효능감도 주목을 받고 있다. 코치 자신이 학
생을 지도해서 성공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감을 뜻한다. 일반
적으로 자기효능감이 높은 코치는 수업에서 더 다양하고 효과 있는
도구를 개발하려는 욕구가 많고, 포부수준이 높아서 학생을 더 강
하게 이끌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학생이 공부를 잘 하는지 못하는지는 아주 큰 문제이다. 일반적으
로 그 학생의 대입성적은 인생을 좌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
서 선생님이 학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바로 이끌려면 매우 큰 용
기를 필요로 한다. 어떤 학생의 공부 방법에서 큰 문제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대폭의 생활습관 변경이 반드시 뒤따
라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아주 큰 권한을 얻어내야 한다. 권한
에는 책임이 따라온다. 자기효능감이 낮은 코치는 이 책임을 감당
할 수 없다. 따라서 기존의 습관을 변경시키자는 말을 꺼내지도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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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분야와는 달리 학습에 있어서는 코치의 자기효능감의 수준이
높기가 대단히 어려운 측면이 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공부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학습동기'라는 요소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으며,
설사 일부 현명한 선생님들이 동기적 측면에 주목하더라도 그것을
자극시킬 심리적 도구에 대해 거의 알고 있지 않고, 이에 따라 관
련 기술을 익힐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또한 역량평가의 특성을
가지는 현행 수학능력시험의 대비로 과거 얕은 수준의 단순암기 공
부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 풍토도 문제이다. 강의식 교수법과 개념
암기식 방법으로는 역량의 훈련이 필요한 수학능력시험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술적인 측면 이외에도 한국 사회에서 시험성적의 무게가 지나치
게 무겁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더라
도 시험이 가까워 오면 긴장이 되고 혹시 실패할까 두려움을 느끼
게 된다. 더욱이 그 시험을 치루는 주체가 본인이 아니고 다른 사
람이라면 그 두려움의 강도는 차원을 달리한다. 앞의 것이 무거운
아령을 맨손으로 들고 있는 무게라면, 뒤의 것은 그 아령을 긴 막
대기 끝에 달아놓고 반대편 끝을 손으로 들고 있는 무게이다. 만약
막대기가 취약해 보인다면, 즉 학생이 변변치 못해 보인다면 그 심
리적 무게감은 훨씬 묵직해질 것이다.

학생을 질투하고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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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조한 코치의 자기효능감이 묘한 지점에서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


우가 종종 발생한다. 대체로 코치 본인이 학창시절 스스로의 공부
에 충분한 성취를 못했다고 느끼는 경우가 문제된다. 여기서 충분
한 성취를 못했다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인식의 문제이다. 설사 명
문대학교를 나오지 못하였더라도 스스로 최선을 다했고 충분히 성
취하였다고 느낀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학창시절 성취에 대해 불만족을 가지고 있을 경우 학생에
게 이상행위를 할 수 있다. 아주 쉽게 말하면 학생을 질투하는 것
인데, 일정 성취 이상을 목표로 하는 학생을 만났을 경우 부적응적
인 정서에 휩싸여 좋지 않은 교수방법을 취할 수 있다. 대부분 가
혹한 수준의 공부 량을 제시하고 그에 미치지 못할 경우 높은 목표
설정 자체를 공격하는 방식이다. 학생을 질투하는 것이 코치의 자
기효능감 영역에 포함되는지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넓은 의미의
자기효능감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 부분은 앞으로 더 연구
가 필요하다.

교수방법의 문제

D씨의 경우 강의식 교수방법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적어도 '엘리


트 학습코칭'의 영역에서는 삼류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서 이런 식의 교수방법으로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을 잘하게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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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다는 것이다. 기본기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고,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상당히 있는 학생을 맡을 경우 그 중의 일부가 성공을 맛볼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아이들은 과외 안 해줘도 어차피 공부 잘할
예정이었다. 오히려 과외를 해서 속도가 더 느려졌을 수도 있다.
잘 할 애들은 무슨 짓을 해도 잘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D씨가
하고 있는 과외라는 것은 무엇인가? 필자는 이것을 일종의 예능이
라고 생각한다. 학생과 학부모에게 공부라는 분야에서 심리적 만족
을 주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다.

공부라는 것은 사실 한 개의 과목이다.

수학 과외 교사를 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수학이라는 과목이 어렵


고 다른 과목에 비해 특별히 점수가 낮아서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해
보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 시즌을 온전히 수학에 투입할 마음
이 있을 경우 괜찮은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
순하지 않다. 대부분 과외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지필고사 전
날까지 수학 과외에 의존하게 되는데, 지필고사에는 국어, 영어, 과
학도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초반에 비교적 성공적인 관계를 형성
했다 하더라도, 수학 과외 선생은 오로지 수학 점수로만 평가받을
것이고, 따라서 수학공부에 매진하라고 학생을 압박하게 될 것이다.
특정 과목만의 과외는 대부분 다른 과목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 프
로 권투선수가 있다. 시합이 한 달 남았는데 훅이 약한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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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코치를 고용했다. 이 권투선수는 시합 전날까지 훅만 연습했다.


체중조절도 해야 하고 심폐지구력도 키워야 하고, 상대도 분석해야
하는데 오로지 훅만 연습했다. 얼마나 우스운 사례인가? 과외를 구
하려면 공부 전체를 지도하는 선생을 구해야 한다.

5. 학생이 죽도록 밉다. - 전이(trans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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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역전이(counter transference) 그리고 편


집증(paranoid)

사례5
전문과외교사 D씨가 개과천선했다. 강의식 교수방법을 완전히 버
리고 '엘리트 학습코칭'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최근에 E(고2,여)학생
을 맡았는데, 성적도 중상위권이고 공부도 곧 잘 따라온다고 했다.
학부모님도 D씨를 어렵게 생각하고 대우도 잘해줘서 다 좋은데,
학생E가 D씨를 무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
다.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런 느낌을 받고 매우
불쾌하다고 했다. 수업을 하다가도 책상을 엎어버리고 그만두겠다
는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요즘 너무 예민해져서 상담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도 종종 든다고
한다.

느낌이라는 것은 얼마나 정확한가?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세살 어린 동생과 운동장에서


놀고 있었다. 한참 테니스공을 던지고 받으며 놀고 있는데, 뒤로
빠진 공을 줍겠다고 동생이 도로 쪽으로 갑자기 뛰어나갔다. 정문
과 후문 주차장을 잇는 통로로 운동장 옆에 작은 도로가 나 있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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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오토바이나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곳이었다. 때마침 오토바이


하나가 막 지나가고 있었는데 필자는 놀래서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조심하라고 소리쳤다. 당연히 필자의 얼굴은 구겨졌고, 다행히 오토
바이가 동생을 비껴가자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동생을 쳐다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에서 불이 났다. 오토바이를 타던 그 아저
씨가 자기한테 짜증을 낸 줄 알고 달려와서 내 뺨을 후려갈긴 것이
었다. 학교 앞 슈퍼마켓 주인 아저씨였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짜증을 내기는커녕 동생이 위험한 상황을 연출한 바람에 아저씨한
테 죄송하다고 말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1만년 경 지금의 강원도 지역 산기슭에 한명의 구석기 여
성이 산책을 하고 있다. 족장의 둘째 아들이, 직접 사냥해온 꿩을
몰래 집 뒤에 놓고 갔다. 이 꿩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꿩을 토
막 내지 않고 화덕에 그을려 먹으면 일품이다. 덥석 받아먹고 싶지
만, 그럴 경우 족장의 아들한테 쉽게 보일 수 있다. 고작 꿩 한 마
리에 마음을 주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한참 고민을 하면서
산기슭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삼십보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본
능적으로 몸을 돌려 정체를 확인했다. 하얀 얼굴에 눈이 작고 수염
이 듬성듬성 난 남자가 보였다. 처음 보는 종족이다. 1만 2천년이
나 지난 지금에 와서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상대의 의도는 알기 어
렵다. 특산물을 교환하러 온 선량한 친구일 수도 있고, 대변을 보
러 들어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부끄러움 많은 사람일 수도 있다. 물
론 이 지역을 침입하기 전에 몰래 염탐하러 온 것 일수도 있고,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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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산책 다니는 여자를 덮치려는 변태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이


여성이 취할 행동은 어떤 방식이어야 좋을까? 처음 보는 종족의 의
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관찰하고 더 깊이 생각하는 방식이
좋은가? 아니면 혹시 모를 억울함을 방지하기 위해 다가가서 "당신
도대체 무슨 의도로 온 거예요?"라고 물어 보는 게 최선일까? 아니
면 어느 쪽이 맞는 판단일지 되뇌며 관념적 유희를 즐기는 것은 어
떤가? 물론 답은 즉시 소리를 지르면서 반대 방향으로 힘껏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삼십 보라면 상대가 강한 남자이더라도 쉽게 쫓
아오지 못할 것이다.
이런 방식의 행동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 뇌는 정확하지만 느린
판단보다는 오류 가능성이 있더라도 빠른 판단을 내리는 인지구조
를 택했다. 뇌에서 그 상황이 적대적이고 위험하다는 신호를 재빨
리 흘려주어 몸이 격렬한 반응으로 도망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착각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오히려 최대한 착각과 편견이라
는 효율적이고 빠른 인지구조를 이용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자
연 상태일 때 많은 경우에서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목숨을 구해줄
것이다. 착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은 인류에게 매우 적응적
인 도구이다.
당신은 자신의 육감을 얼마나 믿는가? 이번에 회사에 들어온 신입
의 관상을 보고, 뻣뻣하고 저만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가 몰래 웃
으며 건네는 커피 한잔에 마음이 풀린 기억이 있는가? 이것저것 귀
찮게 물어보며 매일 용돈을 조르는 게임중독 막내아들이 조잡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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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된 향수를 생일선물로 들고 온 날도 당신의 육감은 제대로 작


동을 하였는가?

아이들에게 조금 더 가혹하다.

요즈음 유아원에서의 아동학대에 말이 많았다. 덩치 큰 성인여자


가 어린 아이를 힘껏 후려 패는 영상이 공개되었는데,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
이다. 적어도 최근 상당한 기간, 한국사회에서는 아이에게 막 대하
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인정할 수 있다. 지금 성인
이 된 사람들 중 학창시절 뺨 한 대 안 맞아 본 사람이 있을까?
필자의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은 화가 날 때마다 학생
한 명을 잡고 교실을 왕복하며 격렬하게 폭력을 쏟아 부었다. 그
선생님은 촌지 요구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짐작이지만 대개는 촌지
를 내지 못한 아이가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다. 유독 한 여자아이만
그렇게 때렸다. 우리는 양복 마이를 던지는 것을 신호로 시작되는
그 폭력을 '필살기'라고 불렀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런 행위를 용인하는 문화 아래서 '학대'의 대상은 어린아이에 한
정되지 않는다. 대학교 신입생이나, 갓 입사한 직원, 새로 전입 온
이등병까지 전부 피해자가 된다. 이 피해자들은 그 '학대'를 견뎌낸
대가로 같은 행위를 할 수 있는 가해자의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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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 풍습은 대물림 될 것이다. 약한 사람에 대한 '학대'가 만연한


한국의 풍조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편집증'적 경향이 강하기 때문
이라고 설명한다.

편집증적 경향의 형성

0. 편집증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 피학적인 망상이 습관화된 상태를 말


하는 것으로, 정도에 따라 편집증적 경향이 있는 정도, 편집증적
인격장애, 정신병적 편집증으로 나뉠 수 있다. 편집증적 경향의 냄
새, 즉 실용적 지표는 다음과 같다.
- 욱하면서 화를 터뜨리기를 잘한다.
- 권위적인 인물에게 복종하면서 속으로는 많은 반발심을 숨기고
있다.
-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두리번거린다.
- 여성이나 노인 어린이에 가혹하다. 특히, 어린이를 작은 성인처
럼 대하려고 한다.
- 화를 낼 거리를 찾고 싶어 한다.
- 별 것 아닌 행위에서 공격적인 의도를 해석해낸다.

1. 프로이트적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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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학대'행위를 할 경우, 약한 사람은 반


드시 적대적 정서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이 '학대'행위가 고착된
경우 피학에 관련된 정서가 축적되어 체계화 되는데, 이 때 피해자
인 약한 사람은 부정적인 정서와 더불어 '피학적인 성적 쾌감'을 느
끼게 된다고 한다. 부정적 정서와 절묘하게 버무려진 피학적인 성
적 쾌감은 피학상황에 몰입하게 만들고, 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상대의 공격의도를 과장되게 인식한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망상하
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은근히 상대의 부아를 돋우어 결국 자기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맞았다는 증거를 수집한다. 이런 식으
로 즐거운 피학상황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가히 성(sex)의 대가다운 프로이트적 설명이다. 프로이트는 이밖에
편집증이 동성애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99%의 학자들이 동의하
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 신경생리학의 발달로 프로이트적 설명은
무시되기 쉽고, 필자 또한 많은 부분에서 납득하기 어렵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통상 편집증적 경향을 갖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상
대를 자극하여, 결국 피학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
에 대한 설명은 꽤 주목해 볼만하다. 이 경향이 피학적 이상성욕과
연관되어 있는지는 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2. 진화심리학적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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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상태에서 한 개체가 어떤 성격적 특징을 가지는지는 그 처해


진 환경에 따라 결정되는 편이 좋다. 처해진 환경이 적대적일 경우
의심이 많고 공격적인 성격, 즉 편집증적인 성격을 갖게 되어야 한
다. 이웃 간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면,
이웃사람이 떡을 선물할 때 독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일반적인 사회였다면, 이런 인식구조는 정신병이나 이상심리
로 치부될 것이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아주 적응적인 성격이 될
것이다. 학대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의 경우 피해망상을 동반한
편집증적 인격이 되는 구조로 우리 마음은 진화되었다는 설명이다.

3. 정신역동적 설명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으로 학대를 받고 있는 철수를 생각해보자.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못 이겨 몇 년 전 가출을 했고, 두 살
터울 동생의 밥을 챙기며 힘들게 살고 있는 아이이다. 아버지는 돈
은 잘 벌어오지만, 화가 나면 발작을 일으키며 매를 들었다. 철수
가 조그만 실수라도 하면 욕을 하고 뺨을 후려 갈겼다. 아이는 지
속적인 학대를 받으며 매우 큰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도망갈
곳은 없다. 피할 수 없는 학대상황에서 철수가 취할 수 있는 방법
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행동을 주의해야 하고, 조그마한 실수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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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라도 어른에게 혼이 나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고 올바른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재 상황을 합리화하고 받아들인다. 이 합리화된 사


고체계는 학대를 받으며 받은 분노와 결합되어 견고하게 완성된다.
그리고 두 살 터울의 동생에게 같은 방식의 세계관을 강요하기 시
작한다. 동생이 조그만 실수를 할 때마다 때리고 혼내기 시작한다.
이 때 느끼는 분노는 아이의 머리에서는 아주 정당하다. 이러한 사
고체계로 형성된 세계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의 문제

어젯밤 무고한 민간인 30여명을 죽인 남자가 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버지와 친구들을 모아놓고 어제의 무용담을 자랑했
다. 사람들이 죽을 때 얼마나 괴로운 표정을 짓는지 설명하고, 실
제 찔러보니 칼로 한번 베는 걸로는 좀처럼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말도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떠들었다. 2015년의 대한민국이었다면,
끔찍한 살인마로 싸이코패스 취급을 받아야 마땅하다. 일단 당장
체포해서 정신감정부터 받게 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11세기 외몽
골 지역의 유력한 유목민족 전사였다면 어떨까? 다른 평가를 받아
야 마땅한가? 이 남자가 그 이후로 그 지역의 일등 신랑감이 되었
다는 사실이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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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성격적으로 비정상인지


판단을 함에 있어서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적 경향이 중요한
잣대로 여겨진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허용되는 어떤 행동이 미국에
서는 절대 통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소파에 누워있는 며느리를 보
고 설거지 하던 시어머니가 분노를 표출한다고 했을 때 한국에서와
미국에서의 반응은 아주 다를 것이다. 어떤 행동과 사고가 정상의
범주에 들어오는지 아니면 선을 넘는지의 판단은 일률적으로 행할
수 없고, 그 행동과 사고가 벌어진 곳의 공간적 시간적 배경을 사
회문화적으로 포착한 다음에야 확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전체가 편집증적 경향이 팽배하다면 어떨까? 여기서 정답을
말 할 수는 없다. 한국사회가 전체적으로 약한 사람에게 엄격하고
나도 그 중 하나이기 때문에 별 문제 없다는 주장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석연치 않음이 해소되지 않는 것 또한 분명하다. 필자는 이
석연치 않음을 드러내고 싶다.

D씨도 한국인이다.

D씨는 완고한 가부장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고, 학창시절을


한국에서 보냈다. 26개월간 군복무를 했고, 대학교 생활도 잘 해냈
다. 그런 만큼 편집증적 영향에도 충분히 적시어질 기회가 많았다.
미성년자이자 여자인 E학생의 작은 실수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을
수 있다. 사람의 느낌이란 것은 편견과 착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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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어린 E학생의 언행은 정제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는 D씨가 느끼는 불쾌감이 앞서 설명한 배경들에서 출발하지 않았
을까 검토해봐야 하는 것이다. 이는 선생과 학생 간 발생하는 문제
들에서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D씨의 의심이 사실일 경우

물론 D씨의 의심이 사실일 가능성도 높다. 학생 E는 과외교사 D


씨에 대하여 부정적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 부정적 감정
은 의식적일 수도, 무의식적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부정적 감
정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표현이 되었을 것이다. 이
미묘한 낌새를 D씨는 여지없이 포착한 것이다. 그런데 E학생은 왜
부정적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일까?

전이 - 부정적 감정의 형성

버스 기사가 버럭 화를 냈다. 승객 연주씨가 하차 벨을 누르지 않


았기 때문이다. 연주씨는 평소 자가용차를 몰고 다녔기 때문에 버
스 승하차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았다. 다음 역이 내릴 곳인지 아닌
지 헷갈리기도 하고, '띠-또' 하고 명랑하게 울리는 벨소리로 승객
들의 적막을 깨는 게 멋쩍기도 했다. 쭈뼛하게 서서는 정류장을 막
지나가는 버스기사에게 무턱대고 하차를 요구한 것이다. 따지고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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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서비스업의 손님인데, 잘 몰라서 실수 한 번 한 것 가지고 버스


기사가 버럭 화를 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대꾸도
하지 못하고 놀래서 거칠게 열어준 뒷문을 도망치듯 내려 달렸다.
버스 기사 최씨는 자식 둘을 둔 집안의 가장이다. 평생 가족을 위
해서 일만 해왔고, 술담배를 입에 대지도 않는다. 웃어른을 공경하
고 아이들에게 자상했다. 버스 승차를 하는 고객을 볼 때마다 고맙
게 느껴졌다. 평소 사람이란 실수는 한번 쯤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고약한 승객을 만났다. 아무
도 하차 벨을 누르지 않아서 정류장을 슬쩍 지나치는데 뒷문 앞에
서있던 한 아주머니가 불같이 화를 내며 문을 열라고 소리를 쳤다.
불쾌했지만 고객이므로 참고 문을 열었는데, 이 아주머니의 비난이
이어졌다. 기사라는 직업마저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행패에 대해 화
를 참지 못하고 언쟁을 했다. 그 이후로 며칠간 화병이 났다. 그런
데 오늘 똑같은 여자가 나타났다. 바로 연주씨다. 또 하차 벨을 누
르지 않고 하차를 요구한다. 연주씨의 얼굴에 며칠 전 그 진상고객
의 얼굴이 겹쳤다. 화를 참지 못하고 질러댈 수밖에 없었다.
버스기사 최씨는 며칠 전 진상고객에게 가지고 있던 정서를 연주
씨에게 전이했다. 통상 성장과정에서 있었던 특정한 심리적 대상물
이 이후에 다른 대상에 옮겨질 때 이를 심리학적으로 '전이(轉移,
transference)'라고 부른다. 반드시 성장과정에만 국한할 필요는 없
고, 시간적 공간적으로 다른 대상에 이전의 심리적 형성물이 이전
될 때 '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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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학생 E는 아버지로부터 훈계를 많이 받았다. 늦잠을 자


거나 반찬투정을 하면 바로 기나긴 훈계가 이어졌다. 자연히 아버지
와의 관계에 적대적인 면이 있었다. 중학교를 넘어서부터 공부를 잘
하는 E에게 아버지의 잔소리가 줄어 갈등이 준 상태이다. 그런데 갑
자기 과외교사 D가 나타났다. 체격과 목소리도 비슷하고 사고방식도
비슷하다. 바로 학생 E의 아버지와 말이다. E학생의 마음속에서는
부정적 정서가 피어올랐다. 아버지에 대한 심리가 과외교사로 전이
된 것이다. 이 심리는 E학생이 통제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전이를 피해라

상담과정에서 특히 남성 상담가는 '전이'현상에 주의해야 한다. 함


부로 고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부분의 아이
들은 어린 시절 성인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그 성인은 보
통 부모님일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과외교사나 학교 선생님
이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면 매우 쉽게 '전이'현상이 일어난다.
상담가들은 어른이라고 해서 아이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 선생과 학생은 완전히 동등하고, 특별히
우열관계가 있지 않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많은 불상사를 예방
할 수 있다.

역전이 - 선생님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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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는 내담자(학생)가 상담가(선생)에 대하여만 느끼는 것은 아


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능한데, 거꾸로 상담가가 내담자로부터
'전이'감정을 느끼는 경우도 흔하다. 이를 '역전이(逆轉移, counter
transference)'라고 부른다. 보통 '역전이'는 학생의 선생님에 대한 '
전이' 이후 부작용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상담심리학에서는 '
역전이'를 따로 한 챕터를 할애하여 설명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긴
다. 긴밀한 상담이 일어날 경우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과거 프로이트 시대에는 이 '역전이'를 최대한 제거해야 하는 것으
로 생각했지만, 현재는 피할 수 없는 현상으로 보고 '역전이' 상황
아래에서 오히려 더 정확한 심리분석을 하는 방향으로 이용하려고
한다. 따라서 상담가들은 미리 본인 자신의 심리분석이 확실히 되
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역전이'를 효과적으로 돌파할 수 있다.

마구잡이로 발생하는 전이현상

'전이'현상의 발생은 반드시 학생과 선생 사이에만 한정되지 않는


다. 학부모와 선생님 사이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과외교사
는 평가를 받는 입장이고 '어머님', '아버님'으로 불리는 학부모를 자
신의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 느낄 수 있다. 학부모가 문자나 전화
를 해서 공부 상황을 물어볼 때면 어린 시절 나를 감시하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를 수 있다. 반감이 생기고 적대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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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학부모도 과외교사를 어려워 할 수 있다. '선생님'으로 불리


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다. 나한테 조언도 해주니 어린 시절 무
서웠던 '아버지'나 '담임선생님'이 떠오른다. 실제로 과외교사를 굉장
히 어렵게 생각하는 학부모가 의외로 많다.

'전이'와 '역전이'를 인정해라

매우 흔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 자체로 인간관계를 구성하


는 주요 요소이다. 피할 수 없고, '전이'현상을 인정해야 한다. '전이
'나 '역전이'가 발생할 때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전이' 등의 현상이 발생한 것을 어떻게 눈치 챌 수
있을까? 매우 간단하다.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다
면 '전이'나 '역전이'가 일어났다는 아주 강력한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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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찔끔찔끔 공부하지 말고 홍수 난
듯 퍼부어라!

사레6
F학생(고2,남)은 대단한 우등생이다. 2학년 1학기까지 전 과목 내
신 평균등급이 1.2 이내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과목에서 1등급(상
위 4%)을 받고, 소수의 과목에서 2등급을 얻어야 나올 수 있는 점
수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을 기준으로 하면 전교 1등에 해당한
다고 한다. 매우 우수한 내신점수로 서울대학교에 충분히 갈 수 있
지만, 서울대 의대가 목표이므로 아직 불안하다. 수능점수가 받쳐줘
야 하는데, 이상하게 모의고사 점수는 형편없다. 영어는 3등급, 수
학은 1등급 국어는 3~4등급이다.

코치가 해야 할 질문

이런 학생을 만날 경우 코치가 반드시 물어봐야 할 질문이 있다.


가. 밤에 잠을 잘 자는지?
나. 아버지의 직업과 성격, 훈육습관은 어떠한지?
다. 초등학생 시절 책을 많이 읽었는지?
라. 내신 대비로 영어 교과서를 암기하는지?
마. 보통 하루에 몇 과목을 공부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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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밤에 잠은 잘 자니?"

학생이 밤에 잘 자는지 물어보는 이유는 강박신경증(강박장애,


obsessive compulsive disorder)의 증세가 있는지를 판별하기 위해
서다. 강박신경증은 되풀이되는 부정적 생각이나 감정이 의식에 떠
오르는 심리상태가 습관화 되어 있는 경우 발생하는 심리/행위 상
태를 말한다. 문을 잠그고 나서 제대로 잠겼는지 의심이 생겨 문고
리를 수도 없이 돌려본다든가, 칫솔에 때가 묻었는지 확인하기 위
해서 헹구고 관찰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강박신경증은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불균형이 주요 원인이다.
선천적으로 세로토닌이 부족하거나, 후천적으로는 강한 스트레스
상황이 촉발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강박신경증에 관계하는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은 하나같이 우울증과 불안장애의 원인이 되
기도 한다. 따라서 강박신경증이 있는 경우 우울증이나 불안장애가
동반할 가능성이 높은데, 불면증이 이 장애들을 표현하는 가장 대
표적인 증상이 된다. 불면증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 외에, 책에 필
기를 할 때 지나치게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지, 글
을 읽을 때 정확히 읽기 위해 밑줄을 치고 계속 앞으로 돌아가 다
시 읽는 버릇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
강박신경증과 불안증, 우울증이 심할 경우 약물치료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실제 사례에서 이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고, 아직 심한 정도
가 아닌 경우 행동/인지치료로도 교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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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신경증의 인지행동치료

강박신경증이 정도가 지나쳐 병적인 수준이 된 경우 기존의 치료


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약물치료나 기존의 인지행동치료로는 약간
의 진전밖에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상 강박증은 불치병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 UCLA 정신과 연구교수 제프리
M. 슈워츠가 개발한 4단계 치료법이 상당히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고 있다. (아래 내용은 제프리 M. 슈워츠의 ‘사로
잡힌 뇌 강박에 빠진 사람들’에서 발췌함.)

1단계 - 딱지 붙이기 : "이건 내가 아니야"

강박사고나 강박행동이 시작될 경우 재빨리 포착해 내는 것이 중


요하다. 평소 심한 강박증을 앓고 있는 경우 강박사고가 시작되자
마자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느끼면서 강박증세가 또 나왔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정도가 심하지 않은 경우, 예를 들면 문제
집을 푸는데 종이가 책상과 평행을 유지하고 있는지 계속 확인한다
든가, 독해지문을 읽는데 내용의 흐름과는 아무 상관없는 단어지만
혹시 놓쳤을까봐 계속 앞으로 돌아가는 경우 등에는 스스로 강박증
세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증세가 계속되더라도 문
제를 느끼지 못하고 계속 나쁜 습관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또한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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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증임을 알고 있더라도 증상 자체를 객관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


다. 강박사고나 강박행동이 나타났을 경우 재빨리 “이것이 강박증
세이고, 본인 자신과 동떨어진 어떤 무엇이다.”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증세 자체를 자아와 분리함으로써 스스로 그 문제 자체를
바라보는 관객이 되어야 한다.

2단계 - 전가(轉嫁)하기 : "뇌를 해방시키자"

강박증세가 나타나는 것은 내 탓이 아니다. 내가 부족하고 괴상하


거나 열등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뇌에서 일어난
여러 물질들의 불균형이다. 모든 사람의 신경계에 동일하게 존재하
는 여러 물질들이 나한테서는 조금 불균형하게 나타났을 뿐이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났고, 내 책임이 아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거
나 괴로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단지 어리석게 불균형을 나타내고
있는 물질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3단계 - 전환(轉換)하기 : "절대로 하지 않겠다."

2단계까지 진행했다면 증세가 어느 정도 객관화 되었다. 이제는


그 증세를 지울 차례이다. 강박증세를 내려놓고 최소 15분 이상의
긍정적인 행동을 적극적으로 한다. 방문을 열어젖히고 음악을 틀어
놓고 청소를 한다든지, 강박적으로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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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연습을 해도 좋다. 필자는 주로 학생들에게 잠시 공부를 내려


놓고 어깨를 편 상태로 씩씩하게 산책을 하라고 한다. 수험생이 취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전환행위이고, 사람의 뇌는 씩씩하게 걸을
때 변화할 준비를 더 잘 하기 때문이다.

미소지으며 씩씩하게 걷는 사람

4단계 - 재평가하기 : "강박의 교훈"

여기까지 왔다면 훌륭히 해낸 것이다. 오늘 한 행동을 돌이켜보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모든 단계를 거치면서 짜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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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거나 우울해지면 안 된다.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오늘 해낸 것에 자부심을 갖도록 한다.

F의 경우

F의 경우 강박신경증이 어느 정도 있었다. 이 강박증적 증상은 공


부를 특정한 방법으로만 모조리 끝내야 심리적 안정을 허락했다.
내신점수를 받는 측면에서 상당한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단점
이 더 많았다. 특히, 역량평가로서의 수능시험에서는 주로 빠른 독
해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강박적으로 글을 되새김질하는 습관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나. "아버지는 뭐하시는 분인지 물어봐도 될까?"

대수능 모의고사 점수가 비교적 저조함에도 불구하고 학교 내신


점수는 매우 훌륭하다. 어마어마한 노력을 했다는 얘기인데, 안타깝
게도 수능식의 역량 향상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본인의 역량보
다 훨씬 높은 노력을 억지로 퍼붓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과한 노력은 어떤 심리에 기반하고 있는가? 이런 경우 십중팔
구 '강박성 인격장애(obsessive-compulsive personality disorder)'에
해당한다. 이 유형의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으면 매우 권위적이고
꽉 막힌 인상을 주며, 특정 목표를 위해서 다른 모든 인간관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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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된다. '강박성


인격장애'는 신경증으로서의 '강박증'과는 아주 다른 개념이다. '강박
신경증'은 증세를 발현하면서 본인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굉장히
괴로워하는 반면에 '강박성 인격장애'는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어떤
행동을 하든 당당하다. '강박성 인격장애'를 판별할 수 있는 실용적
지표는 다음과 같다.
- 권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권위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고 아
랫사람에게 가혹하다.
- 가벼운 행동을 아주 혐오한다.
- 행동이나 패션 등에 대해 매우 적절함을 기하려고 한다. 패션이
나 장신구, 자동차 등급이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아야 한다
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배우자나 자식들도 그 도구로 사용한다.
- 사회적으로 성공한 경우가 많다. 판사, 검사, 변호사, 교수, 의
사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 아버지 또한 그런 성격이고 비슷
한 직업이다.
-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것은 모두 희생할 수 있다는 사
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 오늘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관념.

재미있는 심리상태

젊은 시절 공부를 아주 잘 한 것으로 유명한 정치인이 있다. 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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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를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어린 나이에 합


격을 했고, 유학을 해서도 기계처럼 공부를 해냈다. 화려한 이력으
로 인지도를 쌓아 정계(政界)에 입문을 했는데, 매우 특이한 습벽
이 있다고 한다. 기자들과 저녁식사를 하다가도 9시만 되면 한 시
간 동안 어디를 갔다가 온다고 하는 것이다. 정치인으로서는 기자
들에게 잘 보이고 싶을 것이 당연한데, 기자들은 이런 행위를 보고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을 기다리게 하고 나타난 주인공
에게 도대체 무엇을 하다가 왔는지 물어봤는데 대답이 재미있었다.
"하루에 한 시간씩 공부하기로 결정해서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특유의 선량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대답을 하니 기자들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무슨 큰 일이 난 것 아니었나
추궁을 할만도 하지만, 이 사람은 다르다. 무언가 확실히 기이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진작부터 했지만 이정도
일 줄은 몰랐다.
통상 '강박성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위 '기가 막힌 행
위'를 멀쩡한 표정으로 저지른다. 여자 친구의 생일인 것을 뻔히 알
면서도, 다음날의 쪽지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데이트 날짜를 뒤로
미룬 대학생을 상상해보자. 고작 쪽지시험을 위해 여자 친구인 자
신의 생일을 미루어 버린 애인의 행태에 분노하고 있을 여자 측과,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무엇이 문제지?”라는 표정을 짓는 남자
측을 대비해보면 재미있다. '기가 막힌 행위'가 이들에게는 당연한
행위이다. 학교성적은 목표지향적인 것으로 본인의 출세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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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주 중요하다. 고작 여자 친구의 생일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강박성 인격장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과장된 목표지향성'이
다. 이런 측면에서는 일반인들과는 공감을 형성하지 못한다.

'시험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친구와의 커피약속 따위가 무


슨 소용인가?'
'검사가 되기 위해 사법시험 대비 학원 강의를 듣고 있다. 같은 학
과 선배가 옆에 있는데 어쩌라는 것인가? 신경 쓰이게 인사할 필요
가 있는가? 마침 지우개가 필요한데 그 선배한테 하나가 있다. 물
어볼 시간도 없다. 그냥 쓰고 도로 가져다 놓으면 된다.'

이런 성격은 다른 사람을 충격으로 빠뜨릴 수 있지만, 반대로 사


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해 매
우 엄격하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근면한 공부과정이 필요한 법률가
나 교수, 의사집단에서 많이 발견된다.

심리적 뿌리

평범한 초등학생 아이가 있다고 가정하자. 어른이 보기에는 편하


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상팔자'로 보이겠지만, 의외
로 본인은 빡빡하고 할 일이 많다고 느낀다. 긴 학교수업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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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면, 다음날 책가방 준비도 해야 하고, 미술시간에 쓸 찰흙도 준


비해야 한다. 그것을 마치고 나면 일기쓰기 숙제도 해야 되고, 영
어학원도 가야한다. 영어 학원을 마치면 숙제가 또 생긴다. 숙제를
다 마치고 자려고 하니 샤워도 하고 칫솔질도 해야 한단다. 대략
세어 보아도 오늘 할 과업이 6가지나 된다.
어떤 집에서는 한두 가지 과업만 해도 칭찬을 해주는 집이 있는
반면에 6가지를 모두 해야 칭찬하는 집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
강박성 인격장애'를 키우는 집에서는 6가지 모두 다 하더라도 칭찬
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1가지라도 해내지 못할 경우 혹독한 비판
이 가해진다. 아무리 어린 아이이더라도 주어진 과제는 모두 다 해
내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설사 그 과업을
다 해냈더라도 칭찬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의 집안에서 아이가 순응을 할 경우 강박성 인격이 되기 쉽다. 자
신이 못하는 것이 있는지 계속 확인을 해야 하고, 혹시라도 제대로
못한 것이 있는지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한다. 주어진 과업 이외의
것은 모두 무시할 만한 것이다. 엄격한 아버지로부터 느낀 분노는
억압되어 완고하고 권위적인 성격의 씨앗이 된다.

고치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강박성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회적 성공


을 이룬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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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 많다. 따라서 치료현장으로 나오는 경우가 드문데, 본 사례처


럼 공부 자체에 방해가 되는 경우 교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종
래의 견해는 환자의 상황을 수용적으로 접근하고, 억압된 분노를
서서히 끄집어내어 해소해주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시도하기에 여간 어려운 방법이 아니다. 통상 강박성 인격은 강박
신경증과 편집증적 경향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은데, 역으로 강박증,
편집증을 먼저 치료하면서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본다.

주지화(intellectualization) - 나는 로봇입니다.

인격장애 경향이 있는 사람이 주로 쓰는 자기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 중 '주지화'라는 것이 있다. 사람 사이의 대화라는 것
이 다분히 정서를 고려하여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쓸데없는 감
정 따위는 대화와 인간관계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무표정으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정서적 반응이라도
자신은 전혀 느껴본 적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민감한 질문으로
옮겨갈수록, 전혀 중요하지 않은 숫자나 논리의 오류를 계속 지적
함으로써 대화가 진행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는 상담가를 질려버리
게 만드는 결정타가 되기 쉽다. 미리 주지화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
지 않은 상담가는 화를 터뜨리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주로 편집
증, 강박성 인격장애, 분열성 인격장애 경향이 있는 경우 주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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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다. "초등학생 시절 책을 많이 읽었는지?"

중학교 국어점수가 가장 중요하다.

필자가 어떤 고등학생을 맡게 되었을 때 그 학생에 대해서 가장


먼저 알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중학교 시절의 국어점수이다. 사
실 중학교 국어점수가 높은 학생은 다른 점수들이 모두 낮더라도
아주 손쉽게 수능점수를 끌어올릴 수 있다. 역으로 영어 수학을 아
무리 잘해도 국어를 못하면 매우 애를 먹는다. 국어를 잘한다는 것
은 언어능력이 우수하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상위 5%의 국어
모의고사 점수를 획득하는 학생은 상위 30%의 국어점수를 보여주
는 학생보다 하루에 3배 정도 공부를 많이 할 수 있다. 앞의 학생
이 250문제를 풀 때 뒤의 학생은 80문제를 풀면 나가떨어진다. 열
흘이면 2500 대 800이 된다. 무려 1700문제 차이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공부재료의 대부분이
언어로 구성되어 있고, 언어능력이 높으면 자연히 이 재료들을 흡
수하는 능력도 강해진다.

초등 논술교육을 받는 순간 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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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사람의 언어능력은 만 13세가 되면 완성이 되는데, 그 이전


에 독서를 즐겨 했는지 못했는지가 그 사람의 언어능력의 수준을
결정지을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요즈음 이것이 널리 알려지고 있어
서 독서교육 열풍이 불고 있다. 사람들이 독서의 중요성에 눈을 뜨
는 것은 좋은데 취하는 방법이 답답하다.
올해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간 철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이다.
역사나 무협지를 참 좋아하는데, 요즘에는 어린이용 삼국지 책에
푹 빠져있다. 철수 엄마는 이런 아이가 기특하기도 했지만 불안하
기도 했다. 너무 소설책만 보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 동네
독서논술 학원에 데려가 보았다. 원장님의 커리큘럼 설명을 듣다보
니, 독서논술 학원에서는 동서양의 고전문학과 위인전기, 문호들의
수필과 과학서적, 어린이용 철학책까지 다양하게 가르치고 있었다.
철수 엄마는 이거다 싶어 당장 학원에 등록했는데, 학원에 다닌지
한 달 만에 철수는 책에서 관심을 딱 끊어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
이 일어난 것일까?
철수는 학원 첫째 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배정받았다. 장비가 장
판파 전투에서 조조군을 크게 무찌른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느
닷없이 서양 고전이 등장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음 시간까지 셰
익스피어의 햄릿을 다 읽어오라는 숙제가 내려졌다. 일주일간 우격
다짐으로 햄릿을 다 읽어 간 철수 앞에는 더 큰 난관이 닥쳐져 있
었다. 200자 원고지 5페이지 분량의 독후감을 반드시 제출해야 한
다는 것이다. 철수는 깨달았다. '책읽기는 가장 재미없는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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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숙제로 읽기 시작하는 순간 게임오버이다. 아이들이 컴퓨터


와 게임에 능통한 이유는 그것을 철저히 취미로 익히기 때문이다.
숙제로 게임을 하는 순간 능통할 수가 없다. 아무리 강제를 해도
능통은커녕 입문단계 근처에서 맴돌다 올 뿐이다. 독서논술학원도
마찬가지이다.

구속유도(constraint-induced) 요법

그러면 어떻게 독서를 취미로 만들까? 취미의 본질은 편식이다.


영양섭취를 위해서라면 피자를 치즈에서 도우까지 전부 다 먹어야
하지만, 철저히 즐기는 아이는 소시지만 골라서 파먹을 것이다. 독
서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이 남았을 때 즐겁게 때울 수 있는 재료만
골라 보면 된다. 판타지 소설을 골라도 좋다. 소설 중 도입부만 읽
고 던져버려도 상관없다. 철저한 편식이 대가가 되기 위한 초석이
된다. 축구에만 미쳐있는 아이와 엄마 손에 이끌려 헬스장에 온 아
이의 미래를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이미 책 읽는 재미를 알고 있다면 좋겠지만, 도저히 그 재미를 모
른다면? 미국에서 뇌졸중으로 반신 마비된 환자를 치료하는 기법으
로 개발된 '구속유도법'을 이용한다. 기존에는 환자의 왼쪽이 마비
되었을 경우 왼손과 발을 억지로 운동하게 해서 치료를 했는데, 효
과가 한정적이었다. 건강한 오른쪽이 멀쩡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신경계에서 왼쪽으로 아예 통로조차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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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오른쪽 팔과 다리를 완전히 묶게 하고 생활하면 저절로 왼쪽의


신경계가 열려서 특별히 훈련시키지 않더라도 재활이 용이하다. 아
이들의 독서도 마찬가지이다. 토요일이나 방과 후 특정시간을 정해
서 핸드폰, 친구, 부모님, 강아지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로 도서관에
서 시간을 때우게 한다. 시간을 때우는 과정에서는 책을 이용하게
되어 있다. 이 때 책을 어떻게 이용해서 시간을 때울지는 철저히
본인이 알아서 할 과정이다. 물론 이 과정 전체는 강요로 이루어져
서는 안 된다. 아이와 충분히 공감하고 스스로 해보겠다는 말이 나
올 때 까지 수용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
이다.

수능이 코앞에 닥친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할까?

F학생의 국어 모의고사 점수는 저조했다. 학교 내신은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지만, 높은 수준의 독해력을 요구하는 수능형식의 문제
에서는 고전을 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독서습관을 형성하기는 쉽
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시간이 부족해서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이
럴 경우 모든 공부를 놓고 국어 독해 문제를 집중해서 풀게 해야
한다. 하루에 50지문 200문제를 목표로 퍼붓듯이 공부를 시켜야
한다. 국어공부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관련되는 곳에서 더 자세
히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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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내신 대비로 영어 교과서를 암기하는지?"

영어암기로 고민하는 학생

수연이는 갑자기 스트레스가 엄습함을 느꼈다. 겨우 모의고사를


마치고 달력을 봤는데, 중간고사가 2주 앞으로 다가온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제 한 숨 돌리나 싶었는데 날벼락을 맞은 듯 했다. 아무
리 생각해봐도 견적이 안 나왔다. 시험범위로 수능 기출문제 20문
제와, EBS 수능특강 55문제, 교과서 1단원이었다. 이 지문들을 언
제 다 외울 것인가? 도대체 몇 천 문장이란 말인가? 매일 두 시간
씩은 꼬박 해도 버거울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통에 공감
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엥? 무슨 소리에요?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요?"

몇 년 전 어떤 학생에게서 실제로 들었던 비명이다. 중간고사를


대비해서 영어 교과서를 외워야 한다는 필자의 말에 그 학생은 눈
이 휘둥그레지며 반문을 했던 것이다. 영어 지문을 다 외운다니 처
음 듣는 말이라고 한다. 경악스러운 표정에는 선생님인 필자가 자
기를 괴롭히거나 놀리려고 지어낸 말이겠지 하는 생각이 쓰여 있었
다. 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이 해준 필기를 조금 외우고 문제집을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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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기출문제로 마무리하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한 듯하다. 교과


서를 외운다니, 여태 안 외웠어도 90은 맞았는데, 나이만 먹은 선
생이 구태의 공부 방법을 전수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불쑥 튀어 나
왔다.

수능 영어 1등급을 받는 학생들의 공통점

수학능력시험이나 모의고사 외국어영역에서 1등급을 맞는 것은 여


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외국에서 1~2년 어학연수를 받고
온 학생들도 2등급 문턱에서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비행기
도 한 번 안타본 순수 국내파들이 100점을 묵묵히 받아내는 사례
도 많다. 이런 아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전부 중학교 때부터 고
등학교 때까지 시험 때 마다 영어 교과서를 꼬박꼬박, 달달 외웠다
는 점이다.

수능 영어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앞서 영어교과서를 외우라는 필자의 요구에 경악을 금치 못한 학


생의 사례를 말했다. 그 학생은 필자가 "나이만 들어서 구태의 공부
방법을 요구하는 변변치 못한 선생"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사실은 정 반대이다. 이 학생처럼 구문과 단어 필기를 외우고
문제풀이로 확인하는 쪽이 오히려 옛날 스타일의 시험에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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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시험이 도입되기 이전의 영어시험은 주로 얼마나 정확하게 영


어를 구사하는지 물어보았다. 문법의 오류를 최소화하고, 가장 알맞
은 단어를 구사하여 우리말을 영어로 번역해 낼 수 있다면 100점
을 얻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그러나 수능시험은 그렇지 않다.
막대한 양의 독해지문을 제시하고 그 대강의 논지를 빠른 시간 안
에 파악해 낼 수 있는지를 물어보고 있다. 조금 틀리더라도 빨리
말하고, 듣고, 읽어낼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 문
장을 보자마자 저절로 이해해야 한다. 천천히 구문을 분석할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구문의 암기만이 살 길이다. 그냥
외워서는 안 되고 '달달' 외워야 한다. 요컨대 현행 수능 영어는 '정
확성'이 아니라 '유창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마. "보통 하루에 몇 과목을 공부하지?"

이 책의 첫 번째 사례에서 3시간이 주어졌을 경우 국어/영어/사탐


으로 나누어 공부하는 것보다 영어 한 과목만 이어서 하는 것이 효
과적이라는 주장을 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F학생은 30분 단위로
쪼개서 과목을 바꾸어 가며 공부를 했다. 그래야 집중이 되고 여러
과목을 공부할 수 있어서 안심이 된다고 했다. 이렇게 잘게 쪼개서
공부하는 방식의 근본적 문제는 무엇인가?

쪼개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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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잘게 쪼개서 공부하는 것은 그것을 공부법으로 택했기 때문


이 아니다. 어떤 학생이 1시간 이하로 쪼개서 여러 과목을 공부한
다는 것은 1과목을 쉬지 않고 오랜 시간 공부하지 못하기 때문이
다. 다시 말해서 오랫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지
구력이 부족한 것이다. 단순히 그 이유다. 물론 그 습관이 계속 되
면서 쪼개서 공부하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
다. 사람의 뇌는 합리화에 굉장히 능하기 때문이다.
숨을 2분 이상 참고 잠수할 수 있는 제주 해녀들은 20m가 넘는
바다를 내려가서 유유자적하게 해물들을 채취해 올 수 있다. 고작
30초가 한계인 사람들은 3m 깊이 수영장이라도 두려움을 느낀다.
사람 키만큼 살짝 들어갔다가 나온 다음 잠수 한 번 제대로 해봤다
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행위를 쉬지 않고 오래 할 수 있다
는 것은 그 행위의 깊이 또한 자연히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3시간
이상 수학공부를 계속 한 학생은 그만큼 수학에 깊게 들어갔다가
나왔다. 30분이나 1시간을 겨우 채우고 공부를 끝내면 기름종이마
냥 얕은 깊이를 느꼈을 뿐이다.

길면 길수록 좋다.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거나 부모님 몰래 좋아하는 게임을 하고 있


었던 때를 떠올려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서 즐기다 고
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가 있지 않은가? 길게 빠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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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은 그만큼 제대로 좋아하면서 집중을 했다는 의미이다. 일


단 그렇게 푹 빠졌다 나오면 기이한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마음
속이 고요해지면서, 자욱하고 상서로운 안개 속에 신선처럼 빠져있
는 기분이 생긴다. 그 느낌은 철저하게 머릿속에서 느끼는 것이다.
머릿속에 있던 산만한 시냅스 배선들이 정리된 것이다. 마치 뉴런
과 시냅스들이 이렇게 외치는 것과 같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쏟아
붓는구먼, 도저히 버틸 수 없겠어, 새로 들어오는 이 정보와 패턴
들에게 완전히 항복하자고, 다른 잡념들 모조리 포기하고 이것들만
처리하도록 하자. 그렇게 할게 완전히 그 방식으로 다시 태어날게."
공부는 쏟아 부어야 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아무리 길어
도 지나치지 않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정보와 기겁하는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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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면 집중력이 떨어지는데요?

여기까지 들었을 때 의욕 있고 똑똑한 학생들은 이런 질문을 많이


한다. 예전에 수학이 부족해서 토요일 하루를 마음잡고 수학의 정
석만 풀어 제끼자고 계획을 짰는데, 실패를 했다고 한다. 하루 종
일 공부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풀어지고 자꾸 핸드폰만 보게 된다
는 것이다. 이 학생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항상 시간을 재라

사실 이 학생이 실패한 이유는 수학 공부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하루 종일 10시간 수학공부를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미리 얼마큼 해야 하는지 계산을 했어야 한다. 그냥 10시간 공부한
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것은 1시간이나 30분을 계획하더라
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1분에 몇 줄을 공부하는지, 한 문제에 얼
마나 걸리는지 평소에 알고 있어야 한다. 만약 10분에 3페이지를
할 수 있다면, 한 시간에 18페이지이다. 그렇다면 하루 종일 180페
이지를 해내야 한다. 오늘 180페이지를 해내지 못하면 10시간 공
부가 아무 의미 없다. 분과 초를 의식하면서 맹렬하게 180페이지를
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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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개념 챙기다 백발노인 된다. 훈련부터 해


라!

사례7
D학생(고3, 남)은 수학 때문에 고민이 많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
지 수학 내신점수는 줄곧 1~2등급을 유지했다. 대수능 모의고사도
2등급 정도 나오고 가끔 1등급도 나온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
은데, 스스로 아직도 개념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코치에게 찾아와서
개념을 위해 인터넷 강의를 더 들었으면 좋겠는데 어떠냐고 물어보
았다.

수능은 역량을 요구한다.

앞서 찬혁이와 주혁이의 사례를 언급했다. 찬혁이는 고등학교 올


라와서 공부는 포기하고 무협지만 줄곧 읽어댔지만 모의고사에서
높은 2등급을 맞았고, 주혁이는 책은 안 읽었어도 학원, 과외를 하
며 착실하게 공부를 했는데도 4등급을 받았다. 수능시험은 찬혁이
를 선택했다. 주혁이는 마냥 억울하게 생각할게 아니라 이유를 살
펴야 한다. 수능시험은 역량을 요구한다.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주혁이는 많은 지식을 쌓았지만 역량은 기르지 못했다. 찬혁이는
지식은 거의 없었지만, 무협지로 글과 씨름을 했다. 씨름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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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근육이 커졌다.
어떤 말라깽이가 헬스장에 갔다. 아무리 키가 커도 멸치스타일은
요즘 좀처럼 취급을 해주지 않는다. 이번 여름방학에 제대로 근육
을 키워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헬스장에 가서 트레이너
를 찾았다. 트레이너는 간단한 음식섭취 요령을 일러준 뒤 무슨 운
동을 어떤 자세로 하라고 하며 아령을 건넸다. 이 말라깽이는 아령
을 몇 개 들더니 지쳤다. 조금 더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싶다고 하
며 트레이너를 귀찮게 했다. 트레이너는 고객이라 어쩔 수 없이 헬
스의 기본이론에 대해서 하루 종일 설명해 주었다. 다음날도 그 다
음날도 말라깽이는 트레이너의 강의를 들었다. 두 달 후 여름방학
이 끝날 때쯤 말라깽이는 엄청난 지식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도 10킬로그램짜리 아령을 진짜로 들 수는 없다.
20여 년 전에 도입된 수학능력시험은 '대입시험'의 개념을 완전히
바꿨다. 이전에는 철저한 암기와 정확한 지식에 초점이 맞추어진
학력고사가 있었지만, 이제는 지식은 기본적인 것만 있으면 충분하
다. 대신 뇌의 근육이 얼마나 센지 물어보고 있다. 지식만 있어서
는 점수를 얻을 수 없다. 지식이 없더라도 사고능력이 강하면 된
다. 난생 처음 접한 제시문을 보고 무슨 의도인지 파악할 수 있다
면 만점이 가능하다. 이 상황에서 학원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존재
하는가? 학원에서 지식 이외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역기를 어떻
게 드는지 강사가 아무리 설명하고 시연해도 학생이 직접 들어보지
않는다면 근육맨이 될 수 없다. 주혁이는 지식만 잔뜩 가진 말라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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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였다.

개념이 부족한 것 같아요.

필자는 무수한 학생을 만나봤지만, 개념에 자신 있다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수학 모의고사를 매번 만점 받는 이과 학
생조차도, 개념이 많이 부족하지만 아슬아슬하게 풀어낸다고 속내
를 털어 놓는다. 결론만 말하자면, 개념이 충분하다는 주관적 인식
은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기 때문에 무리가
생긴다.
수학 과목을 예로 들어보자. 개념이 확실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교과서 한 번을 전체적으로 쓰면서 공부한 것인가? 교과
서에 나오는 공식을 다 암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공식과 그 도출법
까지 다 알아야 하는 것인가? 수학의 정석에 나오는 유형들을 전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설사 공식과, 유형 그 도출법까지 전부
알고 수학적 함의까지 꿰뚫었다 하더라도 부족한 부분이 보일 것이
다. 학생들이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개념의 정립 이후에 실전
능력의 향상이 있을 것이라는 선후관계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다.
공식과 도출법을 외웠더라도 4점짜리를 풀 능력이 안 되면, 그 공
식을 잘 모르는 것이다. 공식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그 응용문제에
대한 풀이가 가능해지면서 동시에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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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점수를 드러내라

개념공부만을 아무리 해도 수능점수는 1점도 오르지 않는다. 실제


전장에 나와서 경험을 쌓고 전투력을 높여야 한다. 국어든 수학이
든 모의고사 점수가 2~3등급에 정체되어 있는 학생이라면, 먼저
인터넷 강의로 개념을 확실히 하고 싶어 한다. 확실한 전투력이 없
는데, 불안하기는 하고 그 이유가 개념 부족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
문이다. 이 경우 먼저 점수를 드러낼 수 있도록 훈련을 서둘러 시
킨다. 하루에 모의고사 3개 이상을 소화하는 일정으로 2주 정도 수
행한 뒤에, 부족한 부분을 중심으로 개념공부를 하자고 설득을 하
는 편이 좋다. 똑똑한 친구들은 이 과정에서 1등급을 넘어 100점에
이른다. 막상 100점을 맞고 나면 개념공부가 별로 필요 없다. 그다
음 영어나 사회를 공부해야 하지 않는가? 수능시험 공부의 궁극은
100점에 있다. 개념을 확실히 외워서 누구한테 자랑하려고 하는가?
공식만 외운 3등급 학생이 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개념 공부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본적인 개념 공부는 좋은 비료가 될 수 있다. 아예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선후와 경중을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미적분과 통계
기본의 기본 공식을 공부한다고 하면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가?
강의를 듣는 것은 가장 하책(下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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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공부를 하면서도 역량의 상승을 도모할 수 있다. 교과서나 개


념서를 한 줄 한 줄 직접 쓰고 그려서 이해하면 된다. 이 방법 이
외에는 없다. 사실 강의를 듣더라도 이 과정이 어차피 뒤따라야 한
다. 학습동기가 충분한 경우 강의나 독학 모두 가능하다. 그런데 독
학이 훨씬 빠르고 강력하다. 어차피 수능은 제시문을 독파해내는 능
력을 평가한다. 미리 개념공부를 할 때부터 그 연습을 강력하게 하
면 아득히 멀리 앞서갈 수 있다. 학습동기가 부족할 때 강의를 들
으면 어떻게 되는가? 소귀에 경을 읽는 것과 같다. 머리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고 공부 스트레스만 쌓인다. 그냥 노는 것보다 못하다.

학원? 당장 때려쳐라!

필자는 중학생 시절 방학만 되면 고민이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한창 방학을 즐기며 놀고 있으면 반드시 소집일이 찾아오는데, 반
학생들이 학교에 소집되어 출석을 부르고 청소를 시키는 바로 그
날이다. 방학 도중에 학교에 가는 것만큼 짜증이 나는 일도 없지
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 날 도대체 교복을 입고 갈 것인가?
사복을 입을 것인가? 규정 자체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실하지도
않고, 담임선생님은 그런 일에는 관심도 없으니 미리 일러주지도
않았다. 필자의 걱정은 다른 친구들이 전부 교복을 입고 왔는데,
필자만 사복을 입고 간다든가, 아니면 반대로 나머지는 전부 사복
을 입고 필자만 교복을 입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왜 사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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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고 왔냐며 선생님의 꾸지람을 듣는 것은 별 문제가 안 되었다.


다수의 무리 사이에서 나만 다른 행동을 하는 것, 그것에 큰 공포
를 느끼는 것이었다. 물론 미리 친한 친구들한테 전화를 해서 무엇
을 입고 갈지 합의를 보는 것이 가장 훌륭한 해결책이었다.
영국의 심리학자들이 긴꼬리원숭이를 대상으로 재미난 실험을 했
다. 긴꼬리원숭이들은 바나나 껍질을 효과적으로 벗기는 방법을 터
득하지 못해서 느리게 바나나를 먹을 수밖에 없는데, 무리들 중 일
부에게 빠르게 껍질을 벗기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 녀석들
은 방법을 배운 이후로 자기들끼리 있는 동안에는 새 방법을 즐기
며 바나나를 먹었다. 그런데 원래 무리로 다시 돌려보내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명백히 효율적인 방법을 버리고, 다수의 긴꼬리원
숭이들이 하는 방식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이런 '동조현상(conformity)'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가설
이 있을 수 있다. 다수와 다른 행동을 하는 녀석들은 따돌림을 당
할 수 있다. 기존의 대중이 하던 습관과 다른 행동은 눈에 쉽게 띈
다. 특별한 행동을 했다는 것은 더 이상 공산주의적 분배에 만족하
지 않고, 남들과 다르게 도약하겠다는 선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원시공산사회에서 어떤 녀석이 집을 2층으로 짓고 더 화려하게 문
신을 하고 색다른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른 녀석들은 심사가 뒤틀
린다. 저 녀석이 내 마누라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생긴다.
갑자기 화가 나고 그 녀석을 따돌리고 싶어진다. 강가에서 물고기
를 잡지 못하게 하고, 물도 길어먹지 못하게 한다. 그 녀석은 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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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따돌림을 당한 것이 아니다. 죽음으로 내몰린 것이다. 자연 상


태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것은 곧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
라서 무리생활을 하는 모든 개체들은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행동을 하기를 꺼려
하는 성격이 그것이다. 굳이 따돌림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자연
상태에서 다수의 행동을 따르는 것이 확률적으로 생존과 번식확률
을 높일 수 있으리라는 점을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단
체적으로 동일한 행동을 하는 집단은 그만큼 강하고 적응력이 높을
수 있다. 무리 전체의 적응과 보전을 위해 유전자는 뇌에 '동조현상
'을 이끌 감정들을 숨겨놨을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전 국민이 유사한 생활패턴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
을 경우 이 '동조현상'은 더욱 극대화된다. 아무리 궁벽한 지방이더
라도 한 버스정류장에 두 개 이상의 노선이 지나간다면, 그 근처에
서 학원 하나쯤을 찾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 옆 카페에서는 오후
1시만 되면, 여지없이 주부들이 모여서 아이들 시험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이 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걸어서는 슈퍼마켓에
갈 수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한다. 천편일률적인 사고방식이
작용하는 이 세계의 교육에서는 학원이 군림하고 있다. 이 상황에
서 어머니들은 학원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 생존하기 위한 인류의
본능이다. 이 본능에 반하는 행동을 할라치면 손이 바들바들 떨린
다. 더 이상 합리적인 의사결정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필자는 이런 종류의 생존을 위한 메커니즘을 존중하는 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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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필자 또한 그 지붕 아래에서 살고 있고, 보호를 받고 있다. 문


제는 교육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교육이란 낙오하지 않고 다수를 따라가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입시에서 교육적 성공이란 대중을 학살하고 그 위에 오르는 것
을 의미한다. 설사 수능시험에서 상위 1% 안에 들더라도 연고대
입시원서를 쓰려면 치열한 눈치작전을 펼쳐야 한다. 그 아래의 점
수라면 아예 기회조차 없다. 다시 말해서 대중에 속한다면 그것은
낙오된 것이다. 오히려 그 우중(愚衆)의 흐름에서 적극적으로 빠져
나와야 한다.

그럴 거면 학교는 왜 다니는가?

우영이의 일과표를 살펴보자. 우영이는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세면과 아침 식사를 하고 7시 50분까지 등교를 한다. 9시까지 아침
자율학습을 하고 오후 4시 30분까지 수업을 듣는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수학 보충수업을 5시 50분까지 듣
고, 저녁을 6시 40분까지 먹는다. 잠깐 쉬었다가 7시에 학원에 가
서 10시까지 강의를 듣는다. 참으로 빡빡한 일정이다. 만약 직장인
에게 이런 일과를 강요한다면 얼마 가지 않아 노동쟁의가 일어날
것이다.
코치는 3주 남은 모의고사에 대비하기 위해서 학원을 끊도록 설
득하고 영어만 공부하도록 유도했다.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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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스케줄이다. 그렇게 3주간 공부를 시


켰더니 영어에서 상당한 상승이 있었다. 그런데 모의고사 날짜가
다가오면서 우영이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왜 그런지 물어봤더니
수학 공부를 하나도 못해서 불안하다고 하는 것이다. 코치는 궁금
했다. 그러면 학교에서 일주일에 열 시간 이상 공부하는 수학시간
은 무엇이지?
학생의 머릿속에서 학교 수업시간은 공부로 여겨지지 않는다. 실
제로도 수업시간에 거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학교 수
업시간에는 공부가 안되고 학원 수업시간은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저녁 7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학원에 가야지만 공부를
시작하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학교를 충실하게 보낸 학생과 경쟁
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학원에 중독된 학생들은 학교에서 집중하지 못한다. 어차피 방과
후에 학원에서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고 비슷한 것을 배울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쉬엄쉬엄 해야 한다. 강의 듣는 것 자체를 느
긋하게 한다. 아주 비효율적인 공부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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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당신은 슬럼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사례8
H군(고2, 남)은 매일 밤만 되면 짜증이 났다. 오늘 하루는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게임으로 시간을 낭비했다. 게임이 특별히
재미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기만 하면
자동으로 컴퓨터에 손이 갔다. 찝찝한 기분으로 컴퓨터 게임을 했
다. 어제는 큰마음을 먹고 도서관에 갔지만, 앉자마자 다시 일어났
다. 잠깐만 쉬고 시작하자고 마음먹었지만 허사였다. 휴게실에 앉아
서 특별히 흥미가 있지도 않은 뉴스를 검색했다. 한 시간 가량 그
렇게 시간을 보내고, 겨우 책상에 앉았는데 십오 분을 버티지 못했
다. 마음이 공허하고 뒤가 간지러웠다. 문제집을 푸는둥마는둥 하고
일어나서 가방을 쌌다.

슬럼프 판별하기

H군과 같은 사례는 코칭하기 어려운 스타일은 아니다. 이 학생은


자신이 슬럼프 상황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 공부가 잘
되는 상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다만, 현재 공부가 잘 안 될 뿐
이다. 어떤 아이들은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책상에 앉아서 잡념
에 빠졌다가 휴게실에 가서 스마트폰을 하고, 학원에서 시간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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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가 피씨방에 들려서 집에 오면 그냥 하루 일과를 그럭저럭 끝


냈다고 생각한다. 더 심한 경우는 독서실에서 공부 비슷한 행위를
끼적거리다가 새벽2시에 집에 간다. 본인도 부모님도 전부 다 열심
히 했다고 착각한다. 이럴 경우 교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자신이 슬럼프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쉽게 알 수 있
을까? 공부가 잘 된다는 것의 기준을 조금 더 끌어 올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엘리트 학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슬럼가에서
마약하는 아이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치고는 성공했다고 느낄 수 있
는 미국처럼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대한민국 입시는 전쟁이다. 낙
오는 죽음과 같다. 무조건 꼭대기에 올라가야 한다. 이러한 수준에
서 보았을 때, '엘리트 학습'에 있어서 슬럼프에 빠졌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 주관적 지표는 다음과 같다.

- 공부를 하고 나도 뿌듯하지가 않다.


- 중간고사 수학시험 때의 집중도를 100점으로 놓았을 때 지금
하고 있는 공부의 집중력이 90점도 되지 않는다.
- 시간이 잘 흐르지 않는다. 시계를 자꾸 쳐다보게 되고, 자리에
서 일어나고 싶다.
-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다. 그 스트레스
때문에 독서실에 출석하는 것 자체가 고통으로 느껴진다.
- 잠이 잘 오지 않고, 불안하다. 지속적인 우울감을 느낀다.
- 공부와 관련되어서 이유 없는 죄책감이 들고, 주위 눈치를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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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열거된 지표 중 하나만 충족하더라도 슬럼프로 판단할 수 있


다. 어떤 사람은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고 반문 할 수 있다. 누구
나 위에 나온 문제점은 느낄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이다. 누구나 위에 나열한 문제점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공부
한번 쯤 해본 사람 치고 이 느낌들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
다. 위 지표들을 경험한다고 해서 서울대학교에 못 붙는 것은 아니
다. 전교 1등들도 게임에 중독되어 보기도 하고, 학원에서 도망치
고 싶을 때가 많았다. 문제는 위의 지표에 해당하는 상황이 왔을
때 그것을 문제의식으로 느끼는가이다. '지금 이 상황이 슬럼프고
문제 상황이다. 그러므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주관적 판단을 빨

리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슬럼프의 본질

슬럼프에 빠졌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지금 공부가 잘 안 된다 것


인데, 지금 공부가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두 가지 트랙으
로 설명된다. 첫 번째 트랙은 지금 당장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궁
극적 목표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한 심리학적 상태이다.
두 번째 트랙은 뉴런과 시냅스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상태의
관성에서 벗어난 신경생리학적 상태이다.

첫 번째 트랙 - 인지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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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금요일이다. 11월 17일 목요일이 수능시험일이다. 공부


할 수 있는 시간이 7달 남았다. 대략 210일 정도 된다. 착한 학생
이라면, "210일이면 코앞이네요. 일분일초도 낭비할 수 없겠는걸요.
지금 당장 책상 앞으로 달려가야겠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슬럼
프에 빠진 H군도 잘 알고 있다. 분명히 알고는 있지만, 사실은 알
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약삭빠른 무의식이란 놈이 눈치를 챘기
때문이다.

"210일이나 남았잖아, 하루쯤 논다고 해서 대세가 바뀌는가? 하루


쯤 빠져도 아무 문제 없어, 백번 양보해서 오늘 공부해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쳐보자. 이따가 밥 먹고 공부 시작해도 되잖아?
뭐 하러 벌써부터 준비를 하냐 이 멍청한 녀석아."

이제 솔직하게 얘기해 볼 때가 되었다. 무의식이라는 놈이 한 말


에 오류가 있는가? 209일 공부한 것과 210일 공부한 것이 차이가
있을까? 아마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오늘 하루
쯤 놀더라도 내일부터 열심히 할 수 있다면, 큰 무리 없이 서울대
에 붙을 수 있다. 다만 오늘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내일도 열심히 못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무의식이 하는 말의 문제
점을 성토(聲討)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반박을 해
보아도 무의식이란 녀석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팔짱을 낀
채로 "웃기고 있네."라고 대답할 것이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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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현명한 방법은 지금 당장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무의식을 속이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
황이라고 인지상태를 바꿔서 슬럼프를 벗어나야 한다. 구체적인 방
향은 다시 두개의 가지(branch)로 나뉜다. 첫 번째 가지는 시간의
촉박함이고, 두 번째 가지는 목표의 높이이다. 물론 이 두개의 가
지의 통제는 실제 상담현실에서 한꺼번에 진행된다.

엘리트 학습 코칭의 실재

코치 : "동엽아, 동엽이는 평소에 어느 대학을 갔으면 좋겠다는 생


각을 해봤니?"
동엽 : "글쎄요……."(입을 쭈뼛거린다.)
코치 : "아니면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다는 목표는?"
동엽 : "음……. 공대 쪽으로 가면 취업이 잘된다고 하더라구요. 근
데 수학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일단 대학교 들어간 다음
에 공무원 쪽으로도 한 번 생각해 보려구요."
코치 : "만약 공무원이 된다면 스스로 멋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가?"
동엽 : "멋있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직업이 멋있는 거랑 무
슨……."
코치 : "그러면 다시 접근해보자. 아버지 어머니를 포함해서 이 세
상에서 누가 가장 멋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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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엽 : "아빠도 어릴 때는 멋있었어요……. 지금은 지드래곤이 멋있


던데?"(겸연쩍게 웃음)
코치 : "지드래곤? 음악을 하거나 연예인을 하는 것은 어떨까?"(진
지하고 긍정적인 표정)
동엽 : "아 절대요. 멋은 있지만 직업으로는 절대 아니에요."
코치 : "그러면 아버지는? 아버지는 건설사에 계시다고 했지? 큰
건설사에 들어가서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는 것은?"
동엽 : "그것도 괜찮은데……. 아 맞다. 손석희요. 아나운서 손석희
가 멋있는 거 같아요. 물론 이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겠죠?"
코치 : "그렇네. 그것 참 멋있겠다. 이 세상에 못하는 것은 없어.
가장 강한 집중력을 발휘하면 뭐든지 될 수 있지. 만약에 동엽이가
공부를 아주 잘 할 수 있다면 손석희같은 언론인이 되는 것도 괜찮
겠네."
동엽 : "장난이 아니죠. 그런데 아나운서나 기자 되려면 기본 연고
대는 나와야 한다던데, 영어도 프리토킹 해야 한대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코치 : "물론이지. 일단 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해. 전교1등과 동엽
이는 종이 한 장 차이야. 선생님(코치)도 그런 생각 많이 해봤단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아주 잘 하고 나면 별 볼일 없더라구. 밑에 있
을 때랑 별 다른 것은 없어. 단지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을 뿐이지.
만약 수능을 만점 받아서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손석희가 되기 위
해서 어느 대학교를 가면 좋을까? 서울대학교를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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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엽 : "아니요. 저는 서울대는 별로에요. 고려대학교 가고 싶어요.


국문학과 쪽으로 가면 딱일 것 같아요."
코치 : "좋아 우리는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무조건 붙을 거야. 할
수 있어. 만약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정시에서 안정적으로 붙으려면
수능 누적백분위로 0.5% 안에 들어야 겠다. 그러려면 11월 12일
수능일 국어는 97점 수학은 94점 영어는 98점 사탐은 두 과목 백
점을 맞아야 겠는걸?"
동엽 : "그렇죠. 푸훗"(눈이 동그래지며 부끄러워하는 표정)
코치 : "좋아 그렇다면, 다가오는 6월 4일 모의고사에서는 몇 점을
맞아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한 번 연습장에다 써보자."
동엽 : "음……. 지금 국어가 3등급이니까, 일단 2등급으로 올리고
그러려면 88점. 영어는 2등급인데 여름방학 때까지는 유지하고
……. 수학이 2등급인데 1등급으로 올리면 될 것 같아요. 그러려면
83점이면 되겠네요."
코치 ; "그럴듯한데? 지금 한 달 정도 남았으니까 일단 수학에 집
중을 하면 좋을 것 같아. 국어는 세컨드로 가는 거지. 수학을 아예
90점 이상 맞는 거야. 국어는 감을 유지하면서 약한 부분만 하고."
동엽 : "그것 괜찮은데요."
코치 : "만약 6월 모의고사에서 국어 88점을 맞고 수학을 92점 맞
으면 기분이 아주 좋을까?"
동엽 : "와 엄청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수학 갑자기 올리려면 어
떻게 해야 하죠?"(매우 고무된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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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 : "하루에 5시간 이상 쏟아 붓듯이 하면 돼. 하루에 기출문제


100개 이상 하면 괜찮을 것 같네. 물론 쉽지 않을 거야. 빨리한다
면 130문제도 가능해. 그러면 점수는 급격히 상승한단다."
동엽 :(눈을 부릅뜨며)"한 번 해볼래요!"

위 사례는 코칭의 초반에 거의 항상 일어나는 상담 대본이다. 너


무 자주 접하다보니, 이제는 눈감고도 줄줄 외울 정도이다. 위 사
례에서 코치는 그냥 상담을 진행하지 않았다. 철저히 학습동기이론
에 맞추어 대화를 유도하였다. 몸짓과 표정, 숨소리 하나하나 어긋
나서는 안 된다. 잘못된 메시지가 나오는 순간 동엽이는 바로 우울
해질 것이다. '이 선생님이 나를 무시하는 구나. 나란 놈이 그렇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큰 실책을 범한 것이다. 완벽한 상담을 위해서
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이론을 섭렵하고 대화에서 계산된 행동
을 하면 될까?
인간관계는 '절대로' 계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코치라
면, 연기를 해서는 안 된다. 위에 나와 있는 모든 대사를 진심으로
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다. 코치는 동엽이가 손석희같은 전설적인
방송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너무 믿은 나머지 속으로 동엽이한
테 미리 잘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한 것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도록 만들고자 할 때 경험이 부족한 선생이 하
는 가장 큰 실수는, 겁을 주고 윽박질러서 상태를 인위적으로 유도
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공포의 반작용으로 나온 인간의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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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지속력이 약하다. 그 위협으로부터 살짝만 피하기만 하면 안심


이 된다. 만약 과외교사가 "너 지금 이 성적으로는 어림없어,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연고대는커녕 인서울도 어림없어."라고 말한
다면, 학생은 조금의 걱정과 함께 과외교사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
을 형성할 것이다. 지금 당장 공부를 시작하게 할 수는 있지만, 과
외교사가 퇴근한 순간부터 학생은 안심을 할 것이다. 책상에서 일
어나 침대에 몸을 던지며 이런 생각을 한다. '난 안되는 게 맞나봐.'
사실 이 과외교사의 위협은 스스로의 공포에서 나온 것이다. 선생
스스로가 자기효능감이 부족했고, 따라서 걱정이 많았다. 학생이 이
런 식으로 계속 가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하다 보니, 문뜩 화가 났
다. 걱정과 적절히 뭉쳐진 화난 감정이 과외교사에게 섣부른 대사
를 내뱉도록 한 것이다. 여기서 공부는 끝이 났다.

두 번째 트랙 - 신경가소성(神經可塑性, neuroplasticity)

슬럼프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다면, 1류 코치가 될


자격이 있다. 공부에 도가 튼 사람들도 공부가 잘 안 되는 슬럼프
현상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는 경우가 많다.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은 슬럼프의 촉발요소와 유지요소가 같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지난 토요일까지 분명히 공부가 아주 잘 되었다. 월요일부터는 시
간을 아끼기 위해서 장소를 바꿔보기로 했다. 학교 열람실에서 집
앞 독서실로 바꾸었다. 독서실에 등록을 하고 자리로 들어가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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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휴게실에 들어가


30분 정도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수다를 떨고 자리로 돌아가 공부
를 시작했는데, 하루 종일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슬럼프구나'

똑똑한 학생이라 금방 눈치를 챘다. 괜히 장소를 바꿨다고 생각했


다. 우연히 친구를 만나기도 했고, 쓸데없이 수다를 떨어서 산만해
졌다. 독서실에 간 것이 실수라고 생각했다. 목요일이 되자 바로
학교로 장소를 바꾸었다. 슬럼프 촉발요소를 제거한 것이다. 그런
데, 여전히 공부가 안 된다. 시계를 계속 의식하고, 엉덩이가 들썩
거린다. 무엇이 잘못일까?
독서실로 장소를 바꾼 것, 바뀐 장소에서 수다를 떤 것 모두 슬럼
프의 촉발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월요일 공부가 되지 않은 것은
그것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화요일, 수요일 연속으로 공부가 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독서실이 슬럼프를 촉발시켰지만, 그것
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슬럼프가 계속된 이유는 그 전 날 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독서실이라는 요소는 아무 효력이
없다. 둘째 날부터는 슬럼프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화요일 공부가
안된 것은 월요일 집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요일에도 안 된
것은 월요일과 화요일 공부를 망쳤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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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따라서 목요일도


슬럼프가 계속된다. 독서실이라는 촉발요소를 지웠지만, 유지요소인 '
어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무공처럼 되돌아가는 뇌
찰흙처럼 빚어지는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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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학생이 오늘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어제


집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당신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공
부가 안될 때 계속 장소 탓을 한다. 장소를 바꿔서 안 되면 필기구
탓을 한다. 심지어 아침에 짠 국물을 먹어서 공부가 잘 안된 거라
고 주장하는 학생도 있었다.
이쯤에서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에 대해 언급해야 하겠다.
신경가소성은 자기효능감과 더불어 학습심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가
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 엄밀성을 취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례
와 장에서 신경가소성과 자기효능감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
서는 실용서이지 학술서가 아니다. 경험상 슬럼프의 뇌를 설명할
때 신경가소성을 이용하면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하므로 이제야 언
급을 하게 되었다.
신경가소성은 주로 뇌로 대표되는 우리 몸의 신경계 자체가 자유
자재로 물리량과 구조, 화학적 상태를 바꿀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가소성의 ‘소(塑)’자는 흙을 빚는다는 뜻이
다. 탄성이 있는 고무공처럼 주물러도 이전상태로 되돌아오지 않고,
찰흙처럼 주무르는 대로 모양이 바뀌고 그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다. 1990년대에 와서야 주류 학설로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그 이
전까지는 임계기가 지난 성인의 뇌는 좀처럼 변하지 않고 퇴보만
한다는 '국재론(localization)'이 널리 인정받았다. 가소성의 원리를
모를 때 이런 오해를 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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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같은 것이고, 책은 소프트웨어이다. 소


프트웨어를 이용해서 용량과 형태가 정해져 있는 하드웨어에 정보
를 저장하는 것이 학습이다."

컴퓨터 회로
뇌와 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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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컴퓨터와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뇌가 학습을 하는 방법은


정해져 있는 뇌 조직에 정보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다. 학습된 그대
로 뇌 자체가 변형되어야만 한다. 물리적, 화학적 상태가 고스란히
변한 만큼 그 개체는 학습을 한 것이 된다. 뇌가 어떤 측면에서라
도 변하지 않았다면, 어떤 기억도 저장되지 않았고, 어떤 능력도
습득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학습을 하려면 뇌 자체가 변할 수
있어야 한다. 가소성의 원리가 인정되지 않던 시절에는 일정한 나
이가 되면 머리가 닫혀서 더 이상의 지능계발이나 치유는 어렵다고
보았다. 이 고전적인 생각을 국재론이라고 한다.
20세기의 백년이 꼬박 지나는 동안 눈치 채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뇌의 절반만을 가지고 태어난 여자가 대부분
의 기능을 해내는 사례를 발견했다. 뇌졸중으로 상당한 신경세포가
파괴된 사람도 훈련을 거치면 온전한 직업인이 될 수 있었다. 뇌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각성된 상태에서 자극을 줄 경우 영구적인 시
냅스의 변화가 일어났다. 수학을 많이 공부하면 해당 뇌조직의 질
량이 증가하였다. 이 사례들은 도저히 국재론으로 설명할 수는 없
는 것이었다. 90년대가 되자 국면은 뒤집혔다. 국재론을 주장하던
학자들은 견해를 변경하거나 뒷방늙은이가 되거나 둘 중 하나를 택
해야만 했다. 신경가소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뇌세포, 즉 뉴런을 포함한 신경계가 가소적이라는 것은 굉장히 충
격적인 사상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훈련을 통해서 뇌는
계속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했다. 중학교 때 측정한 아이큐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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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 점수를 받아보고 실망할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는 아이큐가


90이지만 집중적인 훈련을 하면 140이 될 수도 있다. 역으로 나쁜
습관도 뇌를 변화시킬 수 있다. 항상 산만하고 무기력하게 산다면,
뇌신경체계는 그런 식으로 훈련이 된다. 무기력한 태도를 표현하는
신경계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고 나머지는 도태된다. 뇌에서 어떤
시스템이 주류가 된다는 것은 그 개체가 그 시스템을 이용하기 편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기력을 주 시스템으로 삼기 시작하면 무
기력하게 사는 것이 훨씬 편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무기력한 행동
을 이어간다. 이 무기력한 행동은 자체로 그 근거가 되는 시스템을
훈련시킨다. 악순환의 반복이 된다.

나태한 뇌
근면한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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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이는 17살이 되기까지 나태하게 살았다. 학교에 항상 지각을


하고, 숙제를 제 때 해가는 법이 없으며, 방 청소를 제대로 해보지
도 않았다. 주영이의 머리를 들여다 본다면 '나태함'에 관련된 뇌세
포가 굉장히 활발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수년간 반복되어 온
나태한 행동들은 이 뇌세포와 관련된 시스템을 끊임없이 자극해 왔
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토요일 아침에 눈을 떠보니 7시다. 정말
오랜만에 스스로 일찍 눈을 떴다. 평소의 주영이였다면 나태하게
한숨 더 자거나, 별 재미도 없는 스마트폰 게임에 강박적으로 몰두
하며 소파 위에서 뒹굴게 틀림없다. 그러나 신경가소성의 대원리
(大原理)를 이해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토요일 하루만 나태함
이라는 시스템을 끄고 근면함 시스템을 작동시킨다면 뇌는 극적으
로 바뀌기 시작한다. 물론 근면함 시스템은 오랜 시간 잠자고 있었
기 때문에 시동을 걸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뇌에서 군림하고 있
는 나태함 시스템 옆에서 근면함 시스템을 비집고 활동하게 하려면
어마어마한 고통이 뒤따른다. 이 새로운 시스템은 효율적이지도 않
고 혈액 공급량도 많지 않다. 집중을 하고 용을 써야만 일으킬 수
있다. 이 용을 쓰게 하는 힘의 근원은 '동기'이다. 강력한 동기만이
지렛대가 될 수 있다. 다행히도 신경가소성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
만으로도 강한 동기가 될 수 있다. 하루나 이틀만의 노력으로 나태
함 시스템을 죽이고 근면함 시스템을 주류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 것인가. 주영이는 용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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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 견디면 된다. 하루만 고통을 이겨내고 근면함 시스템을 사


용하면 이 시스템은 효율성을 얻을 것이다. 다음날은 한결 효율적
이 된 근면함 시스템이 나를 더 쉽게 받아드릴 것이다. 그 다음날
은 적극적으로 나를 유혹하며 끌어안을 것이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나태한 시스템은 도태된다. 더 이상 지배적 지위와 효율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 자체가 정신적으로 부담
이 될 것이다. 따라서 더 사용하지 않게 된다. 이 선순환은 반복될
것이다. 모든 과정이 종료된 후 새로운 주영이가 태어난다. 수능에
서 1등급을 받고 날씬한 몸매를 갖은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주영
이가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고통에 몸부림치며 오늘 하루 근면함 시스템을


작동시키기 위한 용틀임을 했다.

실천적 방법

사례로 돌아가 보자. H학생이 신경가소성의 관점에서 슬럼프를


극복하려면 어떤 방법의 취해야 할까? 공부가 안 되는 상태의 관성
을 강제로 끊고 새로운 관성을 만들어 내야 한다. 처음 시동을 걸
때는 조금 거친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1단계 : 공부할 교재를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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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선택하는 교재는 쓰면서 공부하기에 적합해야 한다. 영어나


수학의 교과서가 알맞다. 요약이 되어 있는 참고서는 지나치게 축
약이 되어 있어서 쓰는 맛이 떨어진다. 문제집 종류도 생각하고 푸
는 과정을 거쳐야 되기 때문에 연습장에 쓰면서 하는 공부에 부적
합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기호이다. 알맞지 않
은 교재라도 이 부분을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택하는 것이 훨씬 낫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의 주관적 학습동기
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관적 동기가 뒷전이 된다면 모든
작업은 물거품이 된다. 학생에게 강제로 특정한 교재를 사용하기
요구한다면 '자기결정감'이 결정적으로 훼손될 수 있다.

2단계 : 10분간 할 수 있는 최대량을 측정한다.

교재를 결정했으면 책과 연습장을 펴고 스탑워치를 준비한다. 책


을 연습장에 그대로 베껴 적는데 가장 빠른 속도로 한다. 아주 격
렬하게 쓰면서 10분간 몇 페이지를 할 수 있는지 측정한다. 이 때
머릿속으로 공부가 되는지 안 되는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2~3
일 후 몸이 만들어지면 그 때부터 제대로 공부하면 된다. 지금은
최대한 긴장하고 팔과 손을 많이 움직여서 뇌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공부와 관련된 행위에 몰두하게 해야 한다. 명심해라 지금 H
학생은 완전히 망가진 슬럼프 상태이다. 욕심을 내지 않고 슬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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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벗어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3단계 : 몇 시간을 공부할지 결정한다.

첫 날부터 2시간 30분 이상을 해냈다면 아주 성공적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해내는 학생은 많지 않다. 지금 슬럼프
에 빠져 있다면 겁이 앞설 것이다. 또 나한테 여러 시간 공부를 시
키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의욕이 아주 떨어진 학생이라면 첫
날은 30분부터 시작하고, 일주일 안에 2시간 이상으로 목표를 상향
하도록 계획을 잡자.

4단계 : 쉬지 않고 맹렬히 쓴다.

2시간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면 2시간 동안 절대 쉬지 않고, 한


숨도 돌리지 않고, 맹렬히 집중해서 쓰기 공부를 해야 한다. 2단계
에서 10분간 할 수 있는 최대량을 측정했다. 10분간 2페이지를 썼
다면 2시간은 24페이지이다. 맹렬히 측정했던 10분간과 같은 페이
스로 24페이지를 2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 중간 중간 엉덩이를 일
으키고 싶은 욕망이 솟구칠 것이다. 이것을 참아내는 게 그날의 임
무이다. 아주 단순하다. 신경가소적 관성을 만들기 위해서 무조건
참고 맹렬히 써 제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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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단계 : 3일간 실시한다.

첫날 성공했다면 둘째 날은 훨씬 수월하다. 첫째 날 엉덩이를 5번


일으키고 싶었다면 둘째 날은 한두 번에 불과하다. 셋째날은 살짝
한 번 정도의 위기만이 찾아올 것이고, 그것을 참는 인내력 또한
훨씬 강해질 것이다. 4일째가 되면 당신은 슈퍼맨이 되어 있다. 2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앉아서 재미있게 쓰고 일어나면 두 시
간이 훌쩍 지나간다. 이제 공부할 몸이 만들어졌다. 제대로 된 공
부를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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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바보들아 수학은 예제만 풀어라!

사례9
J학생(남, 고3)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어릴 적부터 주위에서 똑
똑하다는 칭찬을 많이 받아 왔다. 초등학생 때 책도 즐겨 읽고, 중
고등생 때도 학교 수업을 집중해서 들었다. 내신 성적도 2.6 정도
로 나쁘지 않았는데, 모의고사만 보면 힘을 못 썼다. 국어와 영어
는 2등급 이내로 들어왔지만, 수학만큼은 항상 4~5등급이다. 2학년
지필고사에서는 항상 88~92점 정도를 유지했지만, 전체적인 윤곽
이 잘 잡히지 않는 느낌이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만 끝나면 머
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당연히 전 범위를 평가하는 대수능 모의고
사에서는 아주 쉬운 2점짜리 문제 몇 개 빼놓고는 전부 찍어야만
했다. 이제 고3이 되었다. 반드시 명문대학교를 들어가리라 마음먹
고 수학 점수부터 올리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유명한 수학의 정석
을 사서 개념 공부부터 하기로 시작했다. 한 달간 수학의정석과 씨
름을 한 결과 수1의 3분의1도 끝마치지 못한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깊은 좌절감과 슬럼프에 빠져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학의 정석으로 실패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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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이 되어서 기본 개념을 한 번 정리하고 지나가려는 시도는 괜


찮았다. 개념서로 수학의 정석을 선택한 것도 나쁘지 않다. 시중에
나온 수학 개념서라면 어떤 것이든 괜찮다. 특별히 우열이 있는 것
은 절대로 아니다. J학생은 수학의 정석을 펼쳐 보았을 것이다. 개
념을 연습장에 써보고, 예제를 풀고 아래에 있는 유제를 푼다. 그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 연습문제가 나온다. 겨우겨우 연습문제
의 산을 넘으면 기출문제가 있다. 이 지루한 과정을 겪어내야만 비
로소 한 단원이 끝난다. 앞으로 23단원이 남았다. 첫 번째 행렬단
원을 버겁게 끝낸 J는 좌절을 했다. 이만큼의 양을 23번 반복하면
비로소 수학 개념을 1번 공부한 것이 된다. J가 '차라리 기술을 배
우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수학의정석과 같은 개념서를 사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풀어내려
고 마음 먹는 순간 당신은 실패를 예정한 것과 같다. 먼저 이 말부
터 들어보는 것이 어떤가? "수학의 정석 한 번 공부했다고 해서 수
학 점수가 오르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단지 수능공부를 하기 위한
기본 개념을 공부했을 뿐이다. 내신수학과 수능수학은 매우 다르다.
수학의 정석을 공부했다 하더라도 대략 1500개에 달하는 기출문제
를 필수적으로 반복해서 공부해야만 한다. 만약 수학의 정석을 공
부해서 수학 1등급이 나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렇지 않
은 것을 안 상태에서 그만한 인내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그 정
도의 끈기와 인내력이 있는 성격적 특성을 보유하였다면, 그 사람
은 강박성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강박신경증을 가지고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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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록 고3이 되었지만, 개념서를 선택했다는 것은 아직 수학 전반
의 공식이 가물가물하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문과 학생이 엄청난
끈기를 가지고 있어서 수학의 정석을 처음부터 끝까지 꼬박 풀어내
었다고 가정해 보자. 미적분과 통계기본의 확률 단원 즈음 왔을 때
면 이런 생각이 든다. '행렬과 로그를 공부한 지가 벌써 세 달이 넘
었군, 정말 아득해. 그러고 보니 무한등비급수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고……. 저번 달에 공부한 미분도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은데.' 확
률과 통계를 묵묵히 끝내고 나서 이 학생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남
았을까?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수
학 모의고사 점수가 단 1점도 오르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 과정을 끝내고 나서 이 학생은 입시에서 수학
을 반영하지 않는 대학교를 찾아내는 데에 열을 올리게 될 것이다.

개념서는 예제만 푸는 것이 정답이다.

개념서를 공부한 다음에 수능형 문제를 대량으로 풀어야 한다. 수


학의 정석과 같은 개념서는 그 단계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
하다. 최대한 빨리 돌파를 해서 성취감을 느끼게 하고 처음부분인
행렬과 마지막인 통계까지 한꺼번에 기억이 나는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수학의 정석 중 개념부분의 공식과 도출법을 쓰고 그리며 익
힌 다음 예제만 풀고, 유제, 연습문제, 실전문제, 기출문제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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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뛴다. 이런 방식으로 하면 5배는 빨리 진도를 나갈 수 있다.


EBS 수능특강을 개념서로 삼을 경우 수1과 미적분과 통계기본 개
념만 공부하는데 12~20시간이 걸린다. 동기유발을 충분히 했을 경
우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다. 그 어렵다는 대한민국 고등학교 수학
교육과정을 하루 만에 끝낸다? 불가능한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해낸 학생이 있다. 이 학생은 그것이 불가능해 보인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통사람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냈을 때 주관적으로 느끼는 성취감은 말로 풀어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다.
개념서를 공부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수학의 정석을 공부
하면서 개념을 완벽히 하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앞에서도 언
급했지만, 개념을 완벽히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수능 100점을
맞더라도 부족한 것이 개념이다. 개념공부는 점수를 올리기 위한
비료로만 생각해야 한다. 빨리 전 범위를 일별(一瞥)하고 실전 문
제를 풀면서 다시 개념을 곱씹어야 한다.

수학을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아주 적은 숫자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수학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


하고 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여서, 수학 얘기만 나오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많다. 수학이라는 과목에 대한 깊은 반감은 자연히 현행
교육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대개는 지나치게 주입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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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거나, 수학교재가 불친절하고, 스토리텔링형의 실용성으로 나아가


야 한다는 지적과 주장이 제기된다. 이는 마치 육군을 만기전역한
남성들이 군대에 대하여 갖는 감정과도 유사하다. 군 미필의 남성
들은 어릴 적부터 하도 많은 불평들을 접해왔기 때문에 어떻게 하
면 군대를 조금 더 편하게 다녀올지 궁리하게 된다. 운전병으로 다
녀오거나, 연예사병이나 체육병사가 되면 형편이 조금 나을 것이라
고 생각을 할 것이다. 어떤 친구들은 복무기간이 3개월이나 긴 단
점이 있지만, 휴가와 외박이 많고, 편의시설이 완비된 공군에 입대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기도 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단언컨대 이
것은 최악의 판단이다. 군대는 군대일 뿐 편하고 즐거운 것이란 없
다. 이 친구들은 단순하게 3개월의 더 긴 지옥을 경험할 뿐이다.
수학도 마찬가지이다. 수학 자체를 조작해서 더 재미있게 만드는
방법은 없다. 요새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스토리텔링형 수학문제를
도입하려고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시도이다. 스토리텔링 수학은
기존의 기호로 된 수학을 말로 푼 것인데, 그만큼 읽어야 할 길이
가 늘어난다. 수학이 스토리가 된다고 재미있어 지는 것은 아니다.
길어진 만큼 고통이 늘어난 것에 불과하다. 교장선생님께서 의욕을
가지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그냥 끝내도 되는 시간인데 재미
있게 훈화를 하려고 시간을 길게 끌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난감
하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재미없어도 되니까 제발
빨리 끝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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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

필자는 수험생 때 수학을 아주 좋아했었다. 그냥 재미있는 수준이


아니라, 열광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정도였다. 저녁식사 후
수학을 풀기 시작하고 일어나 시계를 보면 어김없이 새벽 2시가
다가왔다. 그 사이에는 화장실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필자뿐
만이 아니다. 코칭을 하다보면 수학을 재미있어 하는 학생들이 의
외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학생들의 공통점은 모두 수학을
잘한다는 것이다. 수학공부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대부분
수학을 잘한다는 사실을 관찰할 때 보통사람들은 그들은 특별한 자
질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에 반대할 것
이다. 피나는 노력만 있다면 누구든지 수학을 잘 할 수 있다고 주
장할 것이다.
건전한 논쟁이란 실재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최소한 학문의 영역
에서는 주관과 감정, 편견을 배제하고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논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안타깝지만, 견해의 대립이 극심한
부분으로 갈수록, 건전한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런 격렬한 논쟁들을 잘 살펴보면 그것이
덜 격렬할 때부터 이미 비합리적인 성격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쉽
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상황은 회의론(懷疑論)에 힘을 보태
준다. 그러나 회의주의는 허무주의와는 다르다. 필자는 이 회의적
상황을 충분히 음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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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떤 성취를 이룰 때 타고난 천성이 중요한 것인지, 교육


과 같은 환경이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소위 결정론자
들은 입양으로 인해 완전히 환경이 다른 곳에서 자란 일란성쌍둥이
에 대한 통계적 연구를 통해 환경보다는 유전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환경이 중요하다면 동일한 유전자를 공유한 일란성
쌍둥이라 하더라도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반대의 결과
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대로 환경론자들은 통상 쌍둥이들
은 유아기부터 유사한 반응을 보여주고, 그에 반응하여 다른 환경의
양부모들일지라도 비슷한 양육경향을 보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쪽이 밉상인 얼굴이라면 다른 쪽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에 대해
양부모의 부정적인 피드백이 똑같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생
후의 문제이기에 결정론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덧붙여 쌍
둥이연구는 입양부모들이 대부분 비슷한 계층이나 성격의 사람들일
수도 있다는 점을 검토하지 못한 결함이 있다고도 주장한다.
교육심리학에 있어서 결정론과 환경론의 대립은 도가 지나칠 때가
많다. 감정이 격해졌을 때 환경론자들은 적들인 결정론자들이 우생
학을 신봉하는 나치의 후예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니면 대부분
저명한 교수들인 결정론자들이 스스로 똑똑하고 사회적으로 뛰어난
이유가 귀족혈통으로부터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임을 내세
워서 뽐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일부 흥분한 결정
론자들은 환경론자들이 스스로 진보적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한 나
머지 눈에 뻔히 보이는 진실을 왜곡하려는 정치꾼일 뿐이라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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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도 한다.
같은 통계자료를 보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차피 정답은 결정론적 요소와 환경론적 요소가 혼재(混在)한다는
것 아닌가? 마치 손오공이 "사과는 참 달다."고 말하니 사오정이 "
아니다 사과는 시큼하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물론 사과는 시
기도 할고 달기도 하다. 여기서 옳은 것은 없다. 이 점에서 회의주
의는 모습을 드러낸다. 다만 유용성만이 있을 뿐이다. 사과를 식초
로 만들려고 할 때는 사오정의 말이 유용하다. 사과를 잼으로 만들
고자 한다면 손오공의 말이 유용할 것이다.
수학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과연 타고난 것일까를 묻는 상황에
서는 어느 쪽의 해석이 유용할까? '엘리트 학습코칭'의 관점에서는
환경론이 절대적으로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결정론자들의 통계에
는 교육적 개입이라는 요소가 들어있지 않다. 다만 유전적인 요소
가 개체의 특성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는 현실만을 말할 뿐이다.
이 현실에는 적절한 개입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더 쉽게 결정론자들의 통계를 분석해보자. 이 통계는 다음을
말한다고 한다. A라는 유전자를 보유했을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A'라는 성격을 갖게 된다. -B라는 유전적 요인을 물려받은 사람은
B'라는 성취를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는 -B를 가
진 사람들에게 어떠한 환경적 조건이 주어져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적어도 엘리트 학습코칭의 국면에서는 세상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어떠한 환경적 조건'에 '적절한 개입'이 포함되어 있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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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그들이 조사한 통계에 등장한 환


경적 다양성은 몇 가지로 유형화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뻔 한 시
나리오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수많은 임상가들이 '적절한 개입'에
따라 급격하게 변하는 사람들에 익숙해져 있다. 이들에게는 결정론
자들의 주장은 유용해 보이지 않는다. 필자도 이들 중 하나이다.

누구든 수학을 재미있게 할 수 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수학이 재미있는 이유는 그것을 잘하기 때


문이다. 조금 더 적확하게 표현한다면, 수학 공부와 관련된 어느
장면에서 개인이 주관적으로 잘한다는 인식을 가졌을 때 수학영역
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3등급의 학생이
더라도 어떤 학생은 수학을 좋아하고 어떤 학생은 그렇지 않은 이
유가 이것이다. 같은 점수이더라도 수학을 재미있어 하는 학생은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고, 싫어하는 학생은 못한다고 생각할 가능
성이 높다. 어떤 독자는 이 부분이 '자기효능감'에 대해 말하고 있
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 어떤 사람이 공부에 관한 재
미를 논할 때는 반드시 자기효능감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효능감의 세 가지 요소는 '자아감', '잦은 성공경험', '부모의 적
절한 칭찬'이다. 여기서 부모의 적절한 칭찬은 잦은 성공경험을 보
충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진짜 성공경험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데 부모의 적절한 칭찬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수학 예제만 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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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주관적 성공경험을 느끼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


보다 수월하고 빠르게 수학 개념공부를 끝냈다는 주관적 경험은 아
주 쉽게 자기효능감을 끌어올리게 한다. 일단 자기효능감이 올라가
면 그 다음부터는 쉽다. 학생이 보다 주도적으로 수학에 몰입할 것
이다. 스스로 몸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개념과 예제공부가 끝난 뒤

개념공부가 끝났다면 곧바로 전 범위가 얽혀있는 실전 기출문제를


풀어야 한다. 아직 2점 수준도 되지 않는 예제밖에 안 풀어 봤는
데, 갑자기 실전 문제를 풀 수 있을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2점짜
리를 풀고 충분히 연습이 된 후에 3점짜리를 공부하는 것이 순서
가 아닌지 물어보는 학생이 많다. 그러나 수학은 어려운 문제를 풀
면 쉬운 문제는 자연히 해결이 된다. 4점짜리 문제에는 2점과 3점
짜리의 개념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다. 4점짜리를 공부하면서 자
연히 기본문제들이 해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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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해답을 펼치는 것에 죄책감이 드나요?

사례10
한 어머니가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코치를 찾아왔다. H군은 중학
교 3학년 학생으로 지난주에 중간고사를 마쳤다. 현재 어머니와의
사이는 상당히 안 좋은 상태이고 수학점수도 많이 떨어졌다고 한
다. 어머니는 아이가 요즘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
이 된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일베라는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하는
것을 두고 아버지와 H군이 심하게 다투었다고 했다. 중2병이라 그
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한다. 수학문제집을 사고서도 몇 페이
지 풀지를 못하고 더 이상 진행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1학년 때만
하더라도 수학 100점도 맞아오는 수학우등생이었는데 왜 이런지
답을 구하고 싶다고 물었다. 코치는 짚이는 것이 있어 몇 가지 질
문을 던졌다. 대화과정에서 어머니는 배제하였다.

코치 : H야 수학문제집을 왜 안 풀었지?
H군 : 수학 별로 필요 없지 않나요? 요새는 공무원 하는 게 최고
인데, 수학 필요 없잖아요.
코치 : 공무원이 꿈이구나? 공무원이 왜 좋은지 얘기해볼 수 있을까?
H군 : 꿈이라기보다 그게 제일 안정적이에요. 대학교 갈 필요 없
어요. 고등학교 때 자퇴하고 공무원시험이나 볼까 생각중이에요.
코치 : 음……. 대학교는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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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군 : 서울대 가봤자 취직도 안 되잖아요. 그리고 서울대 고려대


나온 사람들 찐따같애요. 가려면 연세대 가는 게 나은데……. 귀찮
아요. 그냥 빨리 공무원 되고 월급으로 주식투자 하는 게 최고에
요. 아 근데 선생님 군대 가면 진짜 때려요? 군대 가기 존나 싫은
데……. 영석이네 형이 축구하다가 무릎이 다쳐서 군대 면제 됐대
요. 그래서 저도 축구 열심히 하려구요.

...(중략)...

코치 : 1학년 때는 수학을 잘했는데. 수학이 언제부터 재미없었니?


H군 : 수학은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수학
문제 풀려면 짜증나요. 저번에 답지 베끼다 걸려서 엄마가 답지 뺐
어갔어요. 아 짜증나. 나중에 돈 별면 엄마 아빠 얼굴 안보고 살거
에요.

중2병의 실체

중학교 2학년을 전후한 남자 아이들이 괴이한 세계관을 갖고 이


상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보통 중2병 걸렸다고 말을 한다. H군처
럼 세상을 다 안 사람처럼 생각을 하고 삐딱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도가 심한 아이들은 외계인이나 음모론을 신봉하
고, 본인이나 주변인이 특이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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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 현상은 4가지 단계로 분석될 수 있다.

가. 조현병(정신분열증, schizophrenia)

과거 정신분열증으로 불렸던 조현병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조현


병 환자는 현악기의 줄이 정상적으로 조율되지 못한 것처럼 사고체
계가 와해되어 있으며, 망상과 환각을 주기적으로 보인다. 망상은
피해망상, 과대망상, 신체적 망상 등이 나타나는데, 편집증적 망상
장애와는 달리 체계적이지 못하고 겉에서 보는 사람에게 괴이한 느
낌을 주는 특징이 있다. 환각은 주로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같은 환청의 형태를 보인다. 조현병은 유전적 요인이 크고 약물치
료가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하는 아주 어려운 병이다. 이 증상이
경미한 경우 분열형 성격장애(아래에서 설명할 분열성 인격장애와
는 다름)로 분류되기도 한다.

나. 분열성 인격장애(Schizoid personality disorder)

분열성 인격장애는 사회적 관계에 대해 극도로 관심이 없는 성격


적 특성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 장애를 가지고 있을 경우, 정서
표출(정동, affects)이 매우 제한적이 되고,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기
술을 습득하는데 심각한 장애를 가지게 된다. 본인에게는 대인관계
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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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약속을 어기기도 쉽다. 그러나 이것은 일부러 상대를 골탕 먹


이기 위함은 아니다. 또한 단순히 부끄러움을 타는 것도 아니다.
대인관계와, 사회관계에 매력을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애정관
계의 형성이나 사회적 성취에도 거의 관심이 없다. 성욕은 존재하
지만 대인관계를 불편하게 느끼기 때문에 결혼과 이성교제에도 무
관심하다. 결혼을 한다면 단순히 부모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는 크게 문제의식을 못 느끼기 때문에 치료
현장에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조현병과의 연관성이 제기되
기도 하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분열형 인격장애의 사례를 잘못 진
단했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유전적으로 타고난 성격일 수는 있지
만 사고체계의 붕괴는 없으며, 인지능력이나 판단능력도 매우 정상
이다.
분열성 인격장애에 대한 유명한 치료사례로는 우울증을 동반한 환
자의 경우가 거의 유일하며, 실제 좋은 결과를 내놓았는지도 의문
이다. 사실상 현재 밝혀진 치료방법은 없다고 보는 편이 맞다. 더
나아가 과연 치료 대상인지도 의문이다. 그 자체로서 특유한 성격
적 특질이라고 주장할 경우 반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엘리트
학습의 관점에서 상담적 관계를 적절히 형성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개인적 공간을 충분히 지켜준다는 일관적 인상을 주는 게 가장 중
요하다.
주로 어린 시절부터 발병을 하고, 어머니와의 정서적으로 단절된
관계가 그 원인으로 여겨진다. 유전적 소인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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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 심각한 심리적 갈등사태를 직면한 어린 인격이 방어의 수단


으로서 분열성 인격을 가장(假裝)할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이 점
에 주의하여 상담을 진행해야 한다.

다. 아버지 동일화 실패

남자아이들이 긍정적으로 성장하려면 아버지의 내면적 동일화가


필수적인 과정으로 등장해야 한다. 만3세에서 만 6세에 걸쳐 어머
니에 대해 오이디푸스적 욕망이 일어나는데, 신체적으로 강한 아버
지에게 자연스럽게 그 욕망이 억압된다. 이 억압되는 과정이 자연
스럽고 긍정적이었다면 오이디푸스적 욕망 성취를 위해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 과정을 내면적 동일화로 부를
수 있다. 어머니같은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를 얻기 위해서는 아버
지처럼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가 생기는 것이다. 운동선
수는 아들을 운동선수로 키우고, 노동자는 아들을 노동자로 키운다
는 말이 이 이치를 담고 있다.
아버지 동일화에 실패하는 경우 아이의 인격적 성장에 상당한 문
제가 일어난다. 아버지 스스로가 본인의 인생에 자신이 없는 모습
을 보여주거나, 아이에 대해서 지나치게 억압적으로 대할 경우(본
인의 인생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그 불만과 불안을 자식에게 투영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조건이 모두 나타나는 경우가 많
다.)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동일화를 거부하게 된다. 이 때 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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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 헤맬 것이다.


동일화에 실패한 아이가 자신의 우상이 될 아버지의 대용품을 찾
을 때 눈앞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애니메이션, 만
화책, 게임, 소설, 드라마. 이 매체들에 등장하는 멋있어 보이는 어
떤 것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하필이면 판타지 만화에 등장하는
잘생긴 검투사를 우상으로 삼는다면, 이 아이는 중2병에 빠질 가능
성이 높다. 이 검투사는 술집의 집기를 부수고, 예의 따위는 개의
치 않으며, 스스로의 강인함에만 몰두한다. 연약한 남자 아이었지만
알고 보니 어마어마한 검술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스
타일의 우상을 현실에 투영하였을 때 중2병은 현실화 된다.

라. 중2병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제 밤에 자려고 하는데 빗자루 귀신이 창문에 나타났어요. 엄


마한테 뛰어가서 일렀는데, 엄마가 와가지고 마법으로 물리쳤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김치 버리면 귀신이 나타난대요. 그래서 내일부터
김치 열심히 먹을 거예요!"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8살짜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말이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귀여운 아이가 하는 귀신 얘기를 듣고 걱
정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토닥여주면서 김치 먹겠다
는 대견한 용기에 칭찬을 해주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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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은퇴하기 전에 일본에 집을 지어 놓을 생각이야. 10년 이내에


한국에는 전쟁이 나게 되어 있다니까. 그리고 그 전쟁은 굉장히 길
게 갈 거야. 지금 달러 유통이 형편없거든. 프리메이슨이 가만두지
않을걸. 미국에 있는 유대인 놈들이 마음만 먹으면 한국에서 전쟁
이 일어나는 것은 일도 아니야."

올해 대기업 부장 진급을 노리는 40대 남성의 진지한 말이다. 사


람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그럴 수도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거나
'조금 이상하거나 재미있는 사람이군.'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닫고 미
소를 지을 것이다. 사람구실 제대로 하고 있는 40대 아저씨가 하는
얘기인데 굳이 토를 달아서 거슬리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중2병이라는 말이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특히 유행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한국과 일본 아이들만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일까? 어
떤 사람은 일본에서 유행하는 못된 오타쿠 문화가 한국에 전파되어
서 그럴 거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일본과 한국은 매우 권위적인 문화로 유명하다. 아랫사람과 윗사
람의 구분이 명확하다. 어린 아이는 함부로 어른의 말을 반박해서
는 안 되고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자기표현을 하는 것은 버릇없는
행위로 금기시된다. 물론 요즘은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80년대에
태어난 사람은 자유롭다. 90년대 태어난 학생들은 더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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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태어난 아이들은 권위주의에 반감을 갖는다.


과거에 중2병이 문제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 또래 아이들이 입을
닫았기 때문이다. 8살 어린이가 빗자루 귀신을 얘기하는 것보다는
나아졌지만, 아직 40살 어른이 음모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세련된
세계관을 갖지는 못했다. 14살 15살짜리 청소년들은 한정된 경험을
가지고 세계를 구성해야만 한다. 자연히 왜곡되고 기이한 세계관을
갖게 된다. 40살짜리 대기업 차장도 이상한 구석이 있는데 하물며
중학교 2학년 학생은 어떠하겠는가? 다만 과거에는 그 세계관을
감히 주장하지 못했다. 오늘 담임선생님께 매를 맞지 않으려면 어
떤 식으로 대답을 할지만 생각했다. 중2병을 갖고 있어도 들킬 기
회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학교에서도 자유롭게 주장을
하기를 권한다. 집에 와서 컴퓨터를 키면 어른들과도 키보드로 논
쟁을 벌일 수 있다. 미성숙한 세계관을 자유롭게 표현할 기회를 갖
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이들이 중2병을 갖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이런 현상을 처음 보았다.
자연히 걱정이 되고 호들갑을 떨고 싶어진다. 중2병이라는 단어를
만들어서 어떻게든 치료를 하거나 통제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H군의 경우

H군은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많이 겪었다. 아버지를 긍정


적으로 내면적 우상으로 삼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아직도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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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찾아 헤매는 중이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 대상을 찾아보는


중이다. 이 아이의 전두엽이 제 기능을 다하려면 10년은 훌쩍 지나
야 한다. 정확한 세계관을 형성하기 위한 재료인 세상경험을 얻으
려면 그 이상이 필요하다. 서둘러서 될 상황이 아니다. 부모와 자
식 간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의 갈등은 대물림된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한테 어떤 감정을 가지
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아버지를 죽도록 싫어하는 수많은
아들들이 사실은 그 아버지를 얼마나 빼닮았는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좋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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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해답을 적극적으로 이용해라.

"수학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해답을 쉽게 이용해서는 안 된다.


최대한 혼자 풀어보고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야 백점을 얻을 수 있
다."

많은 사람들이 위와 같이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수학 해답을 최대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 공부에 매우 큰 걸
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풀어보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답
을 보고 바로 공부를 시켜도 점수 상승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다. 필자는 고2때 수학 모의고사를 보면 반타작에 불과했지만 문제
를 보고 바로 해답을 공부하는 식으로 해서 나중에는 수능문제는
너무 쉬운 나머지 연습재료로 삼을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필자가 지도한 많은 학생들이 이 방법으로 급격한 점수 상승
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위와 같은 생각은 왜 유행하게 된
것일까?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큰 갈등에 직면하게 된다. 스스로의 행동
을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태생적 욕망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부모
의 훈육 사이에서 아이들은 사회화가 되고 교육을 받는 것이다. 물
을 엎지를 때마다 가해지는 어머니의 훈계는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머릿속에 각인될 것이다. 여러 가지의 금지와 허용이 규칙적으로
행해짐에 따라 머릿속에는 하나의 체계화된 규범이 발생한다.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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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듣기 시작할 때 즈음이면 어머니나 아버지가 옆에 없더라도 할


수 있는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구분할 수 있다. 아이의 머
리 안에 가상의 부모님이 들어 앉아 통제를 하는 것이다. 이 가상
의 존재를 '초자아(superego)'라고 부른다. 이 초자아는 자아의 행동
을 통제하는 최고규범기관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기제이다. 초
자아는 처음에는 부모님의 직접적인 통제로 구성되지만, 성장을 함
에 따라 선생님과 매체에서 접하게 되는 사회규범도 흡수하게 된
다. 무단횡단을 하거나 쓰레기투기를 하면 안 된다 잘 알려진 규범
도 당연히 흡수될 것이다. 살인을 하면 안 된다거나, 근면 성실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상도 갖
게 된다. 물론 비교적 덜 중요해 보이는 것도 들어간다. 예를 들면,
횡단보도를 건널 때 손을 들어야 한다는 규칙, 음식을 입에 넣었을
때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소소한 예의도 포함된다. 구체적인
공부 방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어릴 때는 볼펜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연필을 써야 한다거나, 숙제를 할 때는 문제를 찍지 말고
진짜로 푼다는 것 등이 있을 수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아이들은 수학문제 풀기를 숙제로 받기 시작한
다. 수학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똑똑한 녀석들은 뒤에 있는 해답을
그대로 베끼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것이다.
물론 아주 뻔한 수법이다. 한 수 위에 있는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들
은 수학 문제집의 해답을 빼앗고, 이렇게 말한다. "해답을 보고 수
학을 푸는 것은 나쁜 행동이야." 위에서 제시한 금언의 뿌리는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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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 있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특히 수학문제를 풀 때 해답을


참고하는 것을 나쁜 행위로 배우며 자랐다. 부모님 말씀을 잘 따르
고 사회규범에 순응하는 착실한 아이들은 어려운 수학문제도 최대
한 혼자 고민하며 푸는 방식의 습관을 익혔고, 대입에서 성공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제로 이 방식이 옳은지 검토가 이루어진 것
은 아니다. 해답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아이들의 수가
희박했기 때문이다.
설사 아직 수학고수가 되기 전에 해답지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학
생이더라도, 일단 고수의 경지에 이르고 나면 그 과정을 잊을 수
있다. 고수가 된 이후에는 어떤 방법으로 공부하더라도 상관이 없
다. 오히려 해답지 없이 끙끙 앓으면서 수학문제와 씨름 하는 게
더 즐거울 수 있다. 이 즐거운 기억이 승리자가 된 이후에 강한 인
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들은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 이 기억을
꺼내고 싶을 것이다.

코치는 고집을 버려야 한다.

현장을 경험하지 못한 이론가들은 매우 큰 어려움에 맞닥뜨릴 수


있다. 실제 현실은 단순하지 않다. 현상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다
보면 처음에는 큰 숲이 보인다. 그 숲들을 파헤쳐 탐구하면 거대하
고 뒤얽힌 회로들이 나타난다. 회로를 정렬하고 분류한 뒤 다시 살
펴보면, 그 아래에는 광대한 우주가 펼쳐져 있다. 우주가 끝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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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 너머에는 인식론이 버티고 있다. 실상 사람들이 정립했다


고 하는 이론들은 임시방편적인 수단이다. 대부분의 이론들이 터를
잡고 있는 토양에는 수백 년이나 수천 년에 걸친 경험과 현상의 관
찰, 그에 대한 분석들이 섞여 있다. 그 경험과 분석들의 많은 부분
은 자연과학에서 지난 1~2세기 간 발견된 혁명적 사건들을 겪지
못했다. 뉴턴의 고전역학이 불완전하다는 것이 폭로된 지는 겨우 1
세기가 지났고, 양자역학적 불확정성과 확률론적 존재론이 제기된
지는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백 년 전에 정립된 정신역동이론은
너무 많이 반박된 나머지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이다. 또한
뇌신경체계가 매우 가소적이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지는 겨우 20
년이 되었을 뿐이다. 이론가들은 이런 오염되고 불안정인 토양에서
자란 자연과학적 이론들을 대략 10년에 걸쳐 힘들게 익힌다. 심지
어 난해한 이론들을 머리에 쏟아 넣는 과정에서도 왜곡이 일어난
다. 당장 A학점을 받아야 하고 논문이 통과되어야 하는데, 임시방
편적 불완전성을 음미할 만한 여유가 있을 리 없다. 현장을 처음
접했을 때 본인이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던 이론적 체계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고 실제이
다. 이론이라는 것은 현실을 임시방편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에 불
과하다. 진짜 현실을 목도했다면, 적극적으로 기존 체계를 재검토하
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내 머릿속에 있던 체계를 거리낌 없이 버
릴 수 있는 용기가 습관화 되었을 때 비로소 유연해진 것이다. 이
것이 가능하다면 진정한 문제해결 전문가로 불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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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유연성이 가장 중요하다.

대학입시를 전쟁으로 보았을 때, "수학은 해답을 보지 않고 혼자


고민하며 풀어야만 한다."는 원칙은 일종의 야전교범에 비유될 수
있다. 이 교범은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세워졌다. 아둔한 병사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숙제를 하는 척만 하지 않도록 하는 효율
적인 통제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문제점
이 생기기 시작했다. 해답지를 숨겨놓고 공부를 하려니 너무 더딘
것이다. 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며칠 몇 주가 걸릴 때도 많았
다. 해답지를 이용했다면 하루에 100문제를 할 수도 있는데, 이 야
전교범을 지켜야만 하는 순간부터는 하루에 10문제 하기도 버거웠
다. 진도가 느리니 자기효능감도 떨어졌다. 자기효능감이 떨어졌다
는 것은 공부에 흥미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수학을 멀리하고, "나
는 수학이 약한 사람이야."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1등급을 안정적으로 받지 못하는 일반적인 학생들이 해답지 참고
하기를 최대한 뒤로 늦추려는 생각을 가졌을 때는 다음과 같은 결
과가 발생하기 쉽다.

1. 대부분의 어려운 문제에서 끝내 해결해 내지 못했다는 주관적


경험이 쌓이면서 본인의 능력에 의문이 생기고 좌절하게 된다.
2. 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한 나머지 한 권의
문제집을 처음부터 일별하는데 매우 긴 시간이 걸리게 된다.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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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된 수험기간 안에서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고, 수험생활을


잘 해낼 것이라는 자신감을 잃게 한다.
3. 공부시간의 많은 부분을 아직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혼자
만의 풀이방식에 매진하게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올바른 해결과정을
머릿속에 그려 넣는 시간을 박탈하게 한다.

수험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전술적, 전략적으로 경직되는 것


이다. 문제는 대학입시라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전투에서 승
리하기 위해 전쟁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특정한 전투에서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야전교범들이 나중에 발목을 잡게
해서는 안 된다.

해답지를 이용하는 법

1. 문제를 요약해서 연습장에 쓰고 바로 해답지를 보고 쓰면서 공


부하는 방법.
2. 문제를 일단 풀기 시작하다가 막히면 바로 해답지를 보는 방
법.
3. 문제를 풀고 충분히 생각해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을 때 해
답지를 활용.

위 세 가지 모두 가능하다. 심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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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제를 풀다가 아무리 막혀도 해답지를 보지 않고 다음 기회로


미루는 방법.

도 사용할 수 있다. 방금 전까지 해답지를 활용하라고 해놓고 갑


자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학생이 해답지를 보는 것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 강요하면 안 된다 뜻이다. 엘리트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의 주관적 학습동기이다. 학생의
심리적 요소를 헤아리지 않고 강요를 하게 되면 자존감과 타인수용
감에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은 치명적인 상황이므로 다른 모
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방지해야 한다. 여기서 전략적 유연성의 진
정한 의미를 엿 볼 수 있다.
위 4가지 방법 중(물론 또 다른 방법이 발명될 수도 있다.) 학생
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직접 눈앞에서 공부
를 시켜보고 주관적인 감상을 설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물론 해
답지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공부하는 방법이 가장 좋다. 만약 학
생이 해답지를 이용하기를 거부한다면 4번으로 공부하기 전에 설득
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설득하기

설득에 실패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강요하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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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강요라는 수단을 쓰는 것만큼 확실하게 설득과정을 파탄 내는


방법도 없다. 일단 강요가 한 번 행해지면, 그 효과는 너무 커서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만약 강요를 해서 사람을 설
득할 수 있다면 필자는 빌게이츠보다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만
나는 사람마다 내 물건은 사주세요라고 강요하면 되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을 포함해서 대다수의 어른들이 이 부분에서 착각을 한다.

"아이들의 행동은 훈계로 교정될 수 있다."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다. 일단 초등학교만 졸업하게 되면 절대 훈


계와 같은 강요의 방법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인간관계의 속고 속임에 관련된 기술에 이미 정통한 전문
가이다. 강요하는 어른들의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현명한지 아
주 잘 알고 있다. 2차 성징이 시작된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
는 것은 어른들의 그것을 바꾸는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당신이 자동차 영업사원이라고 가정했을 때 고객에게 차를 사
도록 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할까? 상상만으로도 끔찍
하게 고되고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학생에게 해답지를 적극 활용
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작업도 이와 다르지 않다. 관계의 초기부터
아주 적절한 위치를 선점하고 밀고 당기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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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을 존중해라

생각보다 오래 전부터 인간은 성별에 따른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알려져 있다. 자연 상태에서 조차도 남자는 강하고 부유하며 좋은
뒷배경을 가지고 사냥과 전쟁에서 승리를 해야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다. 여자는 성적 매력, 뛰어난 인간관계와 감수성이 풍부한
모성애, 근면한 품성을 바탕으로 채집과 돌보기를 잘 해야 종족보
전의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런 과정이 아무리 적
게 잡아도 수백만 년 이상 이어져 왔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자연
히 다른 심리적 메커니즘을 갖게 된다. 따라서 현대 심리학도 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주목하였고, 주로 서구에서 연구된 교육심리
학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르면 청소년 상담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남학생은 능력을 인정해주고, 여학생은 상황을 이해해줘
라."이다. 이는 상당히 유용한 원칙이지만 엘리트 학습의 국면에서
는 불완전해 보인다.
필자가 코칭 현장에서 느낀 충격 중 하나는 실제로 남녀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일렬종대로 줄을 서 있는 입시전쟁
을 수행하는 엘리트 학습에서는 그러했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
면 엘리트 학습 국면에서 여자는 없다. 모든 여자 아이들이 진심으
로 입시에 몰입하는 순간에는 남자가 된다. 실제 현장에서는 우선
여학생들(그리고 상당수의 부드러운 남학생들)을 권좌(權座)를 호시
탐탐 노리는 야심가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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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여학생들은 더 근면하고 꾸준한 반면에 남학생들은 덜렁거리


고 게으름을 피우지만 큰 야망을 바탕으로 급격히 치고 오르는 힘
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여자 아이들은 수학과 과학을 못하고, 남자
아이들은 국어와 영어에서 약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물론 그런 경
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남성과 여성의 본질적 속성에
서 기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다. 비단 여학생 중에
서 어마어마한 야망과 수학적 능력을 가진 경우를 접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의 본질적 능력과 성향은 거의 차이가 없다.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코칭 전략을 구분하는 것은 큰 효용이 없었다. 오
히려 그렇게 나누는 편견이 일을 그르치는 수가 있다. 이에 관해서
는 앞으로 더 깊고 복합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하튼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그들의 고유한 잠재력과 능력을 인
정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상대에
게는 마음을 열고 싶어진다. 이 세상의 모든 주장들에는 각각의 그
럴듯한 이유가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이다.
어떤 주장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지는 그 논리성에 달려있지 않
은 것이 현실이다. 어떤 사람이 특정 주장을 믿는다면, 그것이 마
음에 들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어린 학생들의 경우는 그 경향
이 더욱 커진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선생님의 말이 더 논리
적이고 정확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설득에
서 상대를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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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을 이해해라.

진수는 학교수업에 흥미가 없다. 학교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지


만, 내신은 3~4등급은 나왔고 모의고사도 2~3등급이 나왔다. 중학
교 2학년부터 벌써 4년째 이어온 습관이기 때문에 고치기 쉽지 않
았다. 방과 후에 수능공부를 한다고 고군분투를 하고 있으나, 전체
적으로 저조한 학습동기로 고전을 하고 있다. 코치는 학교 지필고
사에서 1~2등급의 높은 점수를 획득하게 함으로써 자신감을 높여
야 장기적이고 효과적인 공부전략의 수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학
교 중간/기말고사에서 고득점을 하려면 학교수업에 집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무턱대고 학교수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설교를 하기 시
작하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질 것이다.

코치 : 학교 수업은 잘 듣는 편이니?
진수 : 수학이랑 지구과학은 듣는 편이에요. 그런데 다른 과목은
거의 자요.
코치 : 남들은 수업시간에 집중하는데, 혼자 공부 안하면 뒤쳐지
지 않을까?
진수 : 솔직히 강의력이 너무 떨어져요. 영어는 제 친구 토플 공
부하는 애 있는데, 걔보다 훨씬 못하는 것 같아요. 차라리 그 시간
에 자고 나머지 인강 듣는 게 나은 거 같아요.
코치 : 그렇다 하더라도 내신등급 잘 받으려면 학교수업 집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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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 : 강의력도 떨어지고, 선생님 성격도 짜증나요. 특히 윤리선


생님. 그리고 입시에서 내신보다 수능이 훨씬 중요하잖아요. 내신
그냥 대충 3~4등급 맞고 수능에서 잘 보면, 논술전형이나 정시로
갈 수 있어요.

위 대화에서 진수는 상당히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 같


다. 평소에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는 것을 두고 부모님이나 담임선
생님과 논쟁을 벌여왔을 가능성이 높다. 진수가 위에서 말한 대로
실제로 생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속마음은 다를 확률
이 높다. 코치가 성급히 '수업 열심히 듣기'라는 교리를 설파하려
하였기 때문에, 진수가 방어적으로 나온 것이다. 진수는 이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서 그럴듯한 이유들을 만들어 놓고 있다. 처음에는
이 이유들이 방어의 수단일 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또 위와
같은 잘못된 상담이 진행되면서 스스로도 그 이유들이 정당하다고
믿기 시작할 것이다. 코치는 설교를 하기 전에 진수의 속마음부터
이해해고 그것을 보여줘야 한다.

코치 : 요즘 잠은 잘 자니? 몇 시에 일어나지?
진수 : 6시 반이요. 새벽 1시 반에 자서 6시 반에 일어나면 밥 먹
고 학교가면 딱 맞아요.
코치 : 5시간밖에 못자네. 엄청 피곤하겠는데? 이정도 등급이면
방과 후에 공부도 열심히 하는 편인데, 아무래도 수업시간에 좀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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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줘야겠는걸?
진수 : 사실은 주로 아침시간에는 조는 편이에요. 영어시간이
랑…….
코치 : 그래 그러지 않으면 나 같아도 못 버티겠다. 학교 끝나고도
집에 와서 또 공부해야 되는데, 장난이 아니겠다. 그리고 요즘 분위
기가 학교에서 잠 안자고 열심히 들으면 범생이라고 놀림 받고 그
러지 않아? 선생님(코치)도 옛날에 그런 거 신경 많이 쓰이더라구.
진수 : 놀림 받고 그러지는 않는데……. 아무래도 애들이 떠들고
자니까 혼자 집중하기 어려워요.
코치 : 그럼 다음 기말고사까지는 아예 확실하게 쉬고 갈 수업을
정해보자. 일단 1교시랑 영어시간은 잠을 조금 자고 다른 과목은
뭐가 있을까?
진수 : 그런데 학교시험 잘 보려면 수업 들어야 하지 않아요? 영
어에서 수업시간에 얘기 한 거 다 나왔대요. 제 친구 100점 맞은
애도 시험 전날에 피씨방 갔는데 평소에 수업필기는 잘 하거든요.

이번 대화에서는 진수의 입으로부터 수업집중에 관한 단초(端初)


를 끌어내었다. 코치가 진수의 속마음에 대해 공감적인 태도를 취
함으로써 진수의 방어 자세를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코치와 학생
간 공격 방어구도가 해소되고, 진정한 문제해결을 위한 생산적 대
화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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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게 해주어라.

위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미영이는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이다. 중학교 3학년 1학기 기말고사부터 점수가 급격히
하락하였고, 부모님과의 사이도 상당히 틀어졌다. 학원에 갈 시간만
되면 짜증을 내고, 무단으로 강의에 빠지는 경우도 잦았다. 지난겨울
중학교 마지막 성적표를 두고 크게 싸운 이후로는 서로 대화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이다. 6개월 넘게 대화가 단절이 된 상태가 이
어졌고, 부모님은 자포자기 심정이 되었지만, 미영이는 이제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조바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부를 하려 해도 잘
되지가 않았다. 마음먹고 집중을 하려고 해도, 책상 앞에만 앉으면
표현하기 어려운 우울감과 무기력감에 빠지는 것이었다. 이 처참한
감정과 상황은 종종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미영이가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영이를 집중하게
하려면 어떤 식의 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가? 미영이에게는 절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자."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미영이한테는 '공부
열심히 하기'가 옳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 어머니와의 대
결에서 지는 것이 된다. 어머니와의 오랜 다툼에서 스스로 백기를
드는 것이다. 이는 아이에게 인정하기 매우 어려운 '비상사태'에 가
깝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스스로의 자아실현을 꾀하는 것보다, 어
머니와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 받아들이기 더 어려운 것이다. 이 때
문에 미영이는 책상에 앉기만 하면, 자기 안에서 공부로 성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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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하는 욕망과 어머니에게 이기고 싶은 욕망이 대립되었다. 두 가


지 강렬하지만 정면으로 모순되는 욕구가 들어섰을 때 미영이가 취
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다. 자연히 우울감과 무기력감에 빠지게 되
는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혹은 '공부 열심히 하기'가 옳다고 인정하면
곧 어머니에게 진다는 사고방식(인지도식, Cognition Scheme)으로
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뇌가 습관을 들인 것, 장악된 것으로부
터 벗어나는 과정을 '탈학습(脫學習, unlearning)'이라고 한다. 이 '
탈학습'기간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강요가 있어서는 안 된다.
충분한 탈학습 과정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외치게 될 때까지 참아야 한다. 그
기간은 최소한 6개월 이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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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국어 풀이기법은 허구이다.

사례11
학생 K는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이다. 내신등급은 전 과목 1~3등
급으로 평균 2등급 이내에 들고 있다. 모의고사에서 수학 영어는 1
등급을 유지하는 아주 우수한 학생이다. 그런데 국어는 아주 잘해
봐야 3등급 후반대고 대부분 4등급에서 머문다고 한다. 어렸을 때
책을 즐겨 읽지는 않았지만 독서는 주기적으로 했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중학교 내신에서도 국어점수는 좋지 않았다.

한국에 유학을 온 한국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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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를 못하는 이유

수험생이 국어를 못하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국어를 못하면 언어


감각이 부족하므로 영어점수도 저조하다. 사회나 과학은 우리말로
쓰여 있기 때문에 이 과목들에서 또한 부진하게 된다. 수학도 기호
간의 논리적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언어와 관련이 있다.
다른 과목을 못하더라도 국어를 잘하는 학생은 고3때 바짝 공부하
면 전 과목이 순식간에 오른다. 하지만 다른 과목을 어느 정도 해
도 국어를 못하는 학생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계속 정체된 상태에
있게 된다. 한국어로 된 교재를 공부하는데 국어를 못한다는 것은
마치 외국에 유학 와서 공부하는 것과 비슷한 꼴이다.
어떤 학생이 국어 점수가 저조할 때 그 이유는 매우 복합적일 수
밖에 없다. 먼저 언어적 발달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통상 남자보다 여자가 언어능력이 좋고, 성격이 외향적이면 언어를
더 잘 배운다. 유아기 때 어머니의 어휘 구사 수준도 큰 영향을 미
친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만 3세가 되면 언어능력이 좋
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사이의 어휘 구사량이 대략 10배(25개-250
개) 가까이 차이가 나게 된다. 이 때 벌어진 차이는 자라면서 아주
큰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설사 유아기 때 적절한 언어적 자극을
받았다 하더라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독서를 충분히 즐겨야
한다. 통상 만 13세가 되기 전에 사람의 언어능력은 완성되는 것으
로 보기 때문에, 그 이전에 충분히 독서에 노출되어야 한다. 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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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로 독서교육을 해서는 좋은 점이 거의 없다. 책을 읽는 것을


취미로 만들어야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도 적절한 발달이 있었고, 주위에서
똑똑한 아이라고 평가받고, 심지어 중고등학교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고 있는데도 국어를 못한다면 조금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바로 강박증의 문제이다.

학교내신 중심의 입시는 문제가 있다.

조금 다른 문제지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교육제도의 구성은 보


통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조선시대에 교육은 철저히 과거시험에
맞춰져 있었다. 역사와 문학 철학으로 이루어진 매우 어려운 텍스
트들을 완벽하게 익혀야 하는 것이었다.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유
사한 역사관, 철학관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아주 많은 양의 글을
완벽하게 외우도록 요구받는다. 이들은 사회의 지배층이 되었다. 비
슷한 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공부 방법을 익히도록 강요
받았다. 천성적으로 그 공부 방법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은 도
태되고, 그렇지 않고 적응한 사람은 대단한 명예와 권력, 막대한
영향력을 쟁취하게 된다. 이 승리자들은 조선에 영향을 준다. 자기
사고방식과 천성을 강요한다. 이 과정이 조선을 형성했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중요도와 상관없이, 완벽하게 암기하는 공
부 방식은 보통사람들이 쉽게 해낼 만한 것은 아니다. 교과서에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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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님의 말과 판서를 빼곡하게 받아 적고, 시험 직전까지 반복해서


깨알 같은 글씨들을 쓰고 줄치고 읽으며 외우는 것은 사람이 하는
정상적인 행동의 범주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의 교육을 접
해보지 않은 외부인이 본다면, 필시 이상한 행동이라고 여길 것이
다. 샅샅이 공부하고 빠짐없고 완벽하게 외우는 것은 강박적인 행
동의 전형이다. 일반적으로는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행동에 지나치
게 집착을 하고 끝임 없이 강박적 행동을 하고난 뒤에만 심리적 평
안함을 얻는 강박적 사람들은 이런 식의 공부를 기어코 해낸다. 현
재의 내신이라고 불리는 학교 지필고사가 이런 방식이다. 대학입시
에서 무결점의 내신점수를 요구한다면, 강박적인 사람이 사회 지배
층이 되기 쉽다. 현행 대입수시전형의 상당수가 아주 높은 내신등
급을 요구하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국어시험에서
80점밖에 맞지 못한 학생이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서울대학교
지역균형 전형을 포기해야 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나머지 과목
은 100점에 가까웠다.

강박증의 원인

강박증과 같은 신경증의 경우에는 유전적인 요인이 매우 중요하다.


세로토닌, 도파민, 코티졸과 같은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분비량
과, 수용기의 민감도와 효율성, 물질의 재흡수와 제거에 사용되는 기
제들의 상당부분이 천성적인 특성을 담고 있는 유전자에 의해 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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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사람이 태내(胎內)에 있을 때 임산부의 심리적, 영양적 상태도


상당히 영향을 줄 수 있고, 유아기의 심리적 환경과 부모의 행동양
상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뒤의 것을 후생유전(epigenetics)이라고 하
고, 선천적 천성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정신역동적 관점에서 후천적 요인
도 많이 거론된다. 초자아(super-ego)가 지나치게 강한 사람은 강
박적 경향이 강하다고 여겨진다. 초자아는 주로 어떤 행동, 사고를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존재한다. 이 가상의 존
재의 힘이 강하다면,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심해
질 수밖에 없다. 해야 할 일을 안했는지 항상 불안하기 때문에 강
박적으로 살피게 된다. 허용되지 않는 상상을 할까봐 두려움에 빠
진 나머지 역으로 그것을 계속 떠올리게 되고, 나쁜 행동과 상상을
제거하는 의미에서 그에 반대되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게 된다.
정신분석적 발달이론에서 주장하는 재미있는 개념으로 '항문기 고
착(anal fixation)'이라는 것이 있다. 생후 12~18개월까지 입에 신
경과 쾌감이 집중되는 구순기(oral stage)가 진행되고, 이후 36개월
까지 괄약근의 조절이 가능함에 따라 감각이 집중되는 '항문기(anal
stage)'가 펼쳐진다고 한다. 이 항문기에 아이의 괄약근 조절능력이
미성숙한 경우가 있는데, 부모가 지나치게 엄격한 배변교육을 할
경우 심리적으로 부적절한 문제가 발생하여, 정서적으로 이 시기에
고착된다. 아이는 대변을 보고 싶을 때마다 자유롭게 싸버리고 싶
어 하는 천성적 욕구가 있다. 부모가 강력하게 이를 저지하고 나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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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이라고 규정하면, 마음 안에서 큰 갈등이 일어난다. 대변은 더


러운 것이고 이를 함부로 배출해서는 안 된다. 나오려는 욕구를 꾹
꾹 눌러서 몸 안에 가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의 바람에
반대되는 것이다. 아이는 이 욕구가 함부로 준동하지 못하도록 더
러운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못한다. 대변이 의미하는 더러운 것들
은 항상 치워져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렇
지 않으면 본인의 욕구를 통제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고착된 심
리 안에서 자라는 아이는 깨끗하고 완전한 상태에 골몰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강박증은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항문기에 고착된 사람
의 성격은 강박증, 불안증, 양가감정, 적대적 사고 등의 특성을 보
인다고 하고, 일부 학자는 항문기 고착된 성격이 강박증 일반을 설
명한다고 보기도 한다.

강박증이 국어에 주는 영향

단순히 강박적 행위를 반복하였기 때문에 강박증적 성향이 유발될


수도 있다. 이것이 신경가소성의 숨은 뜻이다. "사용하면 강화되고
사용하지 않으면 약화된다." 강박증적 행동을 계속하면 그 성향이
강화될 것이다.
학생 K는 학창시절 내내 우등생이었다. 내신점수를 평균 2등급으
로 유지하려면 대부분의 과목에서 90점을 훌쩍 넘기는 점수를 받
아야 한다. 학교 지필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지엽적인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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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을 놓치면 안 되었다. 한국사를 공부하면서도, 유물의 이름과 주


요사건의 발생년도 등을 빠짐없이 암기하고 지나가야 한다. 국어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저명한 문필가의 수필이 나오더라도 작
품 전체를 음미할 여유는 없다. 단어와 어구의 정확한 뜻과 문단별
요지, 주제문장을 줄을 치고 연습장에 적어가면서 꼼꼼하게 외워야
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모든 글을 읽을 때마다 지엽적인 부분에 강
박적으로 집착하게 될 수 있다.
고3학생의 방에 어머니가 들어왔다. 이 어머니는 매우 사려 깊고
교육이 잘된 사람이다. 자식의 자존감을 해치지 않고 인격을 존중
해주면서 인생전반에 대한 조언을 해 주었다. 착한 아들은 주기적
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결국 요즘 공부를 너무
안 한다는 이야기구만.' 이 학생은 어머니의 속마음을 아주 잘 간파
하였다. 어머니의 설교가 제시문으로 나온 국어문제를 받아보았다
면 만점을 받았을 것이다. 국어는 결국 언어, 즉 말이다. 말의 역할
은 단순한 지시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차원적인 범위에
속하는 말은 대부분 화자(話者)의 의도가 존재한다. 그 말을 하는
사람, 그 글을 쓰는 사람의 의도와 숨은 뜻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는 그 언어를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문장 자체를 해석하는
것은 여기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 글을 쓰는 사람이 좌파
인지, 우파인지, 복고주의자인지, 남성우월주의자인지, 공명심에 들
뜬 사람인지, 걱정이 많은 사람인지 파악하지 않았다면 읽는 행위
는 모두 허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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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군처럼 지엽적인 의미와 해석에 골몰하고 집착하면 글쓴이의 참


된 의도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이것이 강박적 경향이 국어점수에
악영향을 끼치는 이유이다. 공부를 잘 하는데도 국어가 형편없다면
이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K군과 같은 학생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

1. 풀이기법에 집착한다.

국어영역을 아주 잘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문제를 푼다.

"제시문을 탐독하고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한다. -> 문제를 읽는


다. -> 보기를 읽으면서 이상한 것에 답을 체크한다."

쉽게 말해서 그냥 읽고 감으로 문제를 푼다. 1번부터 45번까지 전


부 다 그렇게 푼다. 이렇게 풀었을 경우 정상적이라면 100점이 나
와야 옳다. 그러나 독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쉽지 않다. 독해력
이 떨어지는 학생은 시간에 쫓겨 글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설
사 시간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글을 읽을 때 지엽적인 문의(文意)의
해석에만 골몰하는 경우가 많다. 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였으니
문제를 풀만한 '감'이 형성되지 않음은 당연하다. 이렇게 감이 형성
되지 않는 학생은 무언가 확실한 기준을 갖고 싶어 한다. 제시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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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나 문제의 유형에 따라 수학공식처럼 정리된 어떤 풀이공식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풀이공식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
더라도 무용하다. 이것이 큰 비극이다.
일치문제가 나왔을 경우 보기를 먼저 보고 제시문을 읽으면서 확
인한다거나, 서술상의 특징을 묻는 문제에서는 어떤 수사법(修辭
法)이 나왔는지 확인하고, 논설문에서는 첫 번째 문장과 마지막 문
장을 주목하고, 현대시에서는 객관적 상관물이 나왔는지 확인하고,
그것이 시상의 흐름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확인한다……. 등등.
이런 식으로 모두 분석하려면 엄청난 국어과 지식과 시간이 필요하
다. 풀이공식을 원하는 학생들은 국어를 못해서 그러는 것인데 더
어려운 것을 대책으로 내놓은 꼴이다. 걸음마를 배우는 사람에게
팔꿈치의 흔듦과 턱의 각도, 머리의 위치, 무릎이 올라오는 높이를
가르치려는 것과 같은 꼴이다. 그냥 걸으면 된다. 글도 마찬가지이
다. 그냥 읽어라. 재미있게.

2. 글에 표시를 계속하면서 읽는다.

텍스트를 공부할 때 밑줄을 치고, 동그라미와 엑스, 세모 표시를


하면서 읽는 것은 상당히 널리 알려진 방법 중 하나이다. 학생이
텍스트에 주도적으로 집중하게 하고, 감각의 분산을 방지함으로써
효율적인 공부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이는 텍스트 자체가 양이
방대하고, 그것을 읽는데 드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더욱 빛을 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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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방법이 된다. 그러나 순수하게 글을 읽을 때 가장 좋은 방법


인지에는 아직 의문이 있다.
국어영역의 제시문처럼 짧은 글을 읽을 때는 순수하게 눈으로만
읽는 것이 경험적으로 가장 효율이 높다. 손의 움직임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길이가 짧기 때문
이다. 밑줄과 동그라미, 엑스 표시를 이용하다 보면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것보다, 더 지엽적인 것에 골몰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어떤
방법도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빠르지는 않다. 국어영역을 공부하는
학생은 궁극적 목표를 눈으로만 집중해서 읽는 것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눈으로만 읽는 방법을 취하기는 쉽지 않다. 아직
5% 정도에 들지 않는 학생들은 중간 중간 표시를 해가면서 읽는
것이 집중력을 유지하는데 훨씬 낫다. 이때에도 절대 밑줄을 치면
서 읽으면 안 된다. 밑줄을 치는 속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나게 느리다. 마치 암벽등반가가 정을 찍으면서 절벽을 올라가
듯 글을 읽는 중간에 펜으로 브이표시나 사선표시를 의미 없이 하
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3. 중얼거리면서 읽는다.

중얼거리면서 글을 읽는 것은 최악의 방법이다. 그 자체로 독해에


상당한 장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역시 눈으로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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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보다 훨씬 속도가 느리다. 글로 되어 있는 언어에 익숙하지 않


은 학생이 익숙한 음성언어로 바꾸려는 심리적 욕구가 가장 큰 원인
이다. 학생이 글을 조금이라도 따라 읽으면서 독해를 할 때는 반드
시 제지를 해야 한다. 입으로 따라 읽으면서 글을 보게 되면 발음의
재현 자체에만 집중하게 되고 독해능력의 발전이 없을 것이다.

4. 읽었던 부분을 다시 돌아가 읽는다.

소가 여물을 먹고 되새김질을 하는 것처럼, 한 줄을 읽고 다음 줄


로 넘어갔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읽는다. 강박증적 읽기의 전
형적인 부작용이다. 자신이 어떤 단어를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어린 아이가
보도블록을 걸어가다가 금을 밟은 것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가서 그
부분부터 걷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때는 제시문 읽기만 연
습을 해야 한다. 2분 30초를 부여하고 일정 구간마다 사선을 긋게
하고 앞으로만 진행해야 한다. 일단 사선을 그었다면 그 이전은 읽
을 수 없는 부분이라는 규칙을 정해 놓고 훈련을 반복한다.

5. 시간이 부족하다.

현행 수학능력시험 국어영역은 45문제를 80분 안에 풀도록 되어


있다. 국어점수가 저조한 학생들의 대부분이 80분은 너무 촉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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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호소한다. 단순히 문제만 푸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길고 어려


운 제시문을 읽고 문제를 푸는데 한 문항 당 2분도 주어지지 않는
것은 너무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학생들은 시간의 촉박함을 이기기
위해 제시문을 최대한 빨리 읽으려는 전략을 취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제시문은 아무리 정독을 하더라도 늦지 않다. 사
실 시간이 부족한 학생들은 시간의 대부분을 3번과 5번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것에 쏟아 붓는다. 자신만 그것을 모를 뿐이다. 제
시문을 재미있게 탐독을 하고 나더라도 3분을 넘어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3번과 5번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사이에 5분을 써 버린
다. 헷갈리는 보기에서 갈팡질팡하는데 써버리는 시간이 가장 아깝
다. 그 시간에 아무리 고민을 해도 정답률이 올라가지는 않는다.
애초에 제시문을 제대로 읽었어야 한다.

속독과 정독

속독(速讀)이나 정독(精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정의하


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 간 독해능력의 수준이 제각각이고, 글을
읽을 때 느끼는 주관적 느낌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
이 인정할 수 있을 만한 개념적 요소를 말한다면, 속독은 부실하더
라도 빨리 읽고, 정독은 조금 늦더라도 제대로 읽는다고 할 수 있
겠다.
많은 학생들이 수능 시험 국어영역에서는 속독능력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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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 수능 국어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긴장과 집중을 하며


읽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여유 있게 글을 음미할 만한 시간은
없다. 학생들이 속독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독해능력과는 별개로 빨리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
각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빨리 읽지 못하는 이유는 독해능
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속독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시간을
충분히 주고 문제를 풀어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고득점을 하지는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국어는 우리말인데 차근히 읽어보면 이해하기는 하겠죠. 다만 시


간이 부족해요. 저는 속독만 늘리면 될 것 같아요."

안된 말이지만, 우리말이라고 읽어서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문


어체에 익숙하지 않고, 고도로 발달된 논리를 접해보지 않았으며,
어휘수준이 부족하다면 수능 제시문에 나오는 글들을 거의 이해하
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요컨대 속독을 못한다는 것은 정독도 못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독해력 자체가 떨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학생들은 속독을 한답시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글자들을 읽
어내려 가기도 한다. 3등급밖에 안 나오는 학생이 어떻게 그렇게 빨
리 읽을 수 있나 의문이 들 정도이다. 이 학생들은 사실 글자를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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릿속으로 인식만 하고 가면 읽었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것은 '독(읽


기)' 자체가 아니다. 속독을 이런 개념으로 이해했다면, 속독 자체를
포기하라고 해야 한다. 정독을 빠르게 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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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울대 가면 차를 사주겠다고? 개소리 하


지 마라!

사례12
L양은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다. 학교 성적은 중상위권이다. 밖에
나가서는 어른들 말씀을 잘 듣고 인사성도 밝지만, 집에만 들어오
면 부모님께 칭얼대고, 떼를 쓰고 싶어 한다. 요즘에는 지난달에
새로 출시한 아이폰을 사달라고 조르는 중이다. L양의 어머니는 버
릇이 나빠질까봐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는데, 최근 좋은 아
이디어가 떠올랐다. 다가오는 기말고사에서 수학 100점을 맞으면
아이폰을 사준다는 약속을 하면 어떨까? 어차피 계속 떼를 쓰면 결
국에는 사줘야 할 것 같고, 아이가 아이폰을 너무 갖고 싶어 하므
로 수학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유인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L양
의 어머니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행동에 나서기 전에 이 아이디어
를 평가해달라고 코치를 찾아왔다.

할렘가 문제아들을 공부시키는 방법

미국에서 경제학자들의 관심을 끈 실험적 교육정책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 일정 성적을 거두었을 경우 금전적 보상을 하는 시도
를 해보았는데, 생각보다 훌륭한 결과를 얻게 되었다. 공부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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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꼽만큼도 해보지 않았던 학생들이 용돈을 받기 위해서 갑자기 시


험 준비를 하고 꽤 괜찮은 점수를 받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기 시
작한다면 범죄와 마약, 음주에 빠질 기회가 줄어들 것이다. 자연히
교육당국과 학부모들에 의한 찬사가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교육에
금전적 보상을 결부시키는 것은 비교육적인 처사라고 믿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현실을 발견하고는 경제학자들을 들뜨게 만
들기도 했다. 그 경제학자들은 노벨상 수상자들이었다. 이 사례를
접한 한국의 학부모들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
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나라 현실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사례이
다. 게다가 교육심리학적으로는 이미 충분히 예견되어 있는 결론이
었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

위의 사례에서 아이들이 보여주었다는 꽤 괜찮은 점수의 실체를


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 비해 훨씬 쉬운 시험문제를 출제해 놓고,
60점 이상을 얻은 것이 고작이다. 한국식 시험문제를 주었다면 낙
제에 해당하는 40점도 넘기 힘든 수준이다. 미국에서 금전적 보상
을 준 학생의 대부분은 원래는 학습의욕이 전혀 없는 바닥 수준의
아이들이었다. 금전적 보상은 이런 바닥의 아이들을 조금 끌어올리
는 데에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학부모들의 걱정은 왜 80점을 못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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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냐는 것이다. 조금 처지가 좋은 학부모들은 왜 1등급을 유지하지


못하는지 걱정한다. 기본적으로 점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차이가
나고, 문제의식의 차원 자체가 다르다. 우리나라 교육은 상위권을
최상위권으로 만드는데 관심이 있다. 인서울 대학에만 가려고 하더
라도 상위 10퍼센트로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무기력 외발성 내발성

무기력 외발성(자석) 내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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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동기의 내발성과 외발성

학습심리학에서는 학습동기가 학생의 내부에서 유래하는지, 아니


면 외부적 조건에 근거를 두는지를 그 건전성과 수준을 평가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르면 학습동
기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에서 출발하여 외발적인 상태, 내발적
상태의 순서로 더 좋게 평가된다.
수영이는 꿈이 크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국제변
호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법을 배울 수 있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하고 싶다고 하고, 고1인 지금부터 텝
스와 수능공부를 병행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할 생각이라고 한
다. 국제변호사가 된다면 우리나라와 각국의 무역협정 분쟁 전문가
가 되어서 이름을 날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국제변호사는 어
릴 때부터 되고 싶던 멋있는 직업이라고 했다. 중간고사 4주 전 수
영이는 지난 생일 부모님께 선물 받은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다시
반납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수능 끝날 때까지 달라고
해도 절대로 주지 마세요."
민영이는 중간고사 4주를 앞둔 시점에서 고민에 빠졌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책상에만 앉으면 엉덩이는 들썩거리고 핸드폰으로 손
이 갔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므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스마트폰이 공부에 방해가 되니 걱정인데, 막상
없애려고 하니 자신이 없다고 한다. 코치는 민영이에게 공부를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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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민영이는 대답했다. "


시험 못 보면 엄마한테 뒤지게 혼나거든요."
어떤 상태에 있을 때 학습동기가 내발적인지, 어떤 조건이 결부되
어 있을 때 외발적인지 판단하는 것은 명확하게 분별되는 문제는
아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아들이 되고 싶어서 공부를 한다."고
하면 양쪽 모두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외부인이
조건으로 걸려 있으므로 외발적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버지를 내
재화하여 우상으로 삼는 남자아이 본래의 욕망을 표현한 측면을 강
조한다면 내발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바로 위에 제시된 사
례에서 수영이와 민영이는 각각 학습동기가 내부에 있는 상태와,
외부에서 유래한 상태로 비교적 명확히 갈리는 것으로 보인다.
민영이와 같이 공부를 하는 이유가 외부에 있을 경우 그 외부적
조건이 제거될 가능성이 엿보이기만 하면 학습동기가 급격히 하락
하거나 소멸한다.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아주 고된 작업이기 때문
에 중간 중간에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고된
공부를 할 바에는 시험을 망쳐버린 후 엄마한테 화내지 말라고 비
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수영이처럼 이상적 자아
의 실현을 목표로 둔 학습동기의 경우에는 쉽사리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 중간고사를 잘 보고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는 것, 더
나아가서 모든 어려운 과정을 남들보다 뛰어나게 마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지금 열심히 공부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를 발
견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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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동기의 내발성과 외발성의 문제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공부와 같은 고되지만 생산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 그와
관련된 행위나 심리의 방향은 모두 궁극적으로 번식의 용이성(쉽게
말하면 좋은 배우자를 얻는 능력)으로 향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때 용돈 20만원을 받는다거나, 아이폰을 얻게 된다는 외부적 조건
들은 일정부분 번식의 용이성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매우 미미
한 영향을 줄 뿐이다. 반면에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
로 다른 모든 조건을 배제하더라도 완전한 목표 달성과 다르지 않
다.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젊은 시기를 포기하
면서까지 목표를 향해 매진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더 알기 쉽다.
고시생들은 주관적으로 사법시험을 합격하는 것이 가장 멋있고 훌
륭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설사 이건희가 된다고 하더라도 고
시를 붙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된
공부를 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

포상을 조건으로 걸 경우 발생하는 사태

학생에게 일정성적의 성취에 대한 보상으로 조건을 내걸 경우 어


떤 결과가 발생할까? 마치 자석으로 끌어당기듯이 외발적 학습동기
의 상태로 강력히 유도된다. 학생이 아주 무기력한 상태에 있었다
면 그보다 나은 외부에서 유래된 동기를 가진 상태가 될 것이고,
외발적 학습동기를 가지고 있다면 더욱 현 상태에 고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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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상황은 내발적 학습동기가 충분했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


의 요소를 가지고 있던 아이 마저 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외발성 영
역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공부에 있어서 학습의욕이 전혀 없어서 아주 무기력한 상태
에 있는 학생에게 중간단계로 가는 도구로 외부적 조건을 붙여주는
것은 어떨까? 이에 대하여는 충분히 연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다. 설사 무기력한 학생에
게 외발적 학습동기라도 구축하였다 하더라도 그 정도로는 한국 교
육에서 성과를 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게다가 외발적 학습동기가 이
미 습관화 되었을 경우 그것을 내발성으로 바꾸는데 상당한 어려움
을 겪게 될 것이 뻔하다. 외부적으로 유래한 의욕과 내부에서 발생
한 욕구는 대부분의 경우에 매우 상이한 기제를 가지고 있는 경향
이 있기 때문이다. 외발성 학습동기를 내발성 학습동기로 바꾸기
위해서는 앞의 것에 대한 탈학습이라는 어렵고 긴 작업이 선행되어
야 한다. 또한, 무기력한 학생을 바꾸는 도구로서 외부적 조건을
이용하는 것이 그의 내부적 자아성취욕을 자극하는 것보다 더 쉽다
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무기력한 학생들에 대하여

심지어 공부에 대한 무기력한 반응을 넘어, 인생 전반에 대해 무


기력한 태도를 보이는 학생일 지라도, 본인 내부에서는 엄청난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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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폭풍처럼 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인관계와 자신감, 행동력에


대하여 아주 큰 공포를 가지고 있지만 그 맞은편에는 역으로 그것
들에 대한 통제 불가능한 욕망이 요동치고 있다. 이 달콤한 욕망은
무기력한 표정지음과 때를 같이하여 한낮의 몽상 속에서 노닐고 있
을 것이다. 코치로서는 자신감과 끈기를 가지고 갈등을 형성하고 있
는 욕망 중 한 갈래를 잘 끄집어내는 노력을 펼치면 의외로 쉽게
실마리가 풀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학생들은 특별히 학습동기와 공
부 방법에 관해 나쁜 습관과 학습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오
히려 그것을 제거하는데 드는 노력과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다.
무기력한 학생들을 코칭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표정
과 태도이다. 이 아이들은 항상 불안하고 겁에 질려 있다. 다른 사
람들, 특히 선생님과 코치와 같이 상담을 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고 판단할지에 겁을 내고 있다. 아주 깊
은 곳에서는 가능성과 능력을 인정받고 싶으면서도, 그보다 조금
덜 깊은 내면에서는 또다시 거절당하고 평가절하 당할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혼란한 상황 그 자체조차도 그
들에게는 좀처럼 이기기 힘든 짐짝이다. 그래서 빨리 평가를 받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최대한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표정과 태도를 보
이면서, 혹시 자기를 고평가하는 실수를 하여 불확정적인 혼란 속
에 방치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들의 표정과 태도는 빨리 본인을 포
기하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정반대의 욕망
이 들끓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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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가는 이들의 전략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엘리트 학습 분야


의 코치는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자신 없는 표정과 초점을 잃은 눈
빛을 보이고 있는 학생을 1등급을 만들라니, 벌써부터 걱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 학생의 얄팍한 술수에
넘어간 것이다. 더 깊이 숨어있는 욕망을 자극해 볼 기회조차 버리
는 상황이 된다.

물질적 조건만 조건이 아니다.

학생의 학습 성취에 대해 외부적 조건을 걸지 말라고 했다. 여기


에서 말하는 외부적 조건은 아이폰이나 용돈과 같은 물질적인 것만
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이나, 통금시간, 주
말에는 화장을 할 수 있다는 등의 약속도 모두 조건이 될 수 있다.
명시적으로 그러한 약속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말과 행동을 하지
는 않았어도 그런 조건이 개입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도 안 된
다. 시험을 잘 봤을 때는 컴퓨터를 해도 혼내지 않다가, 시험을 못
보니 눈치를 주기 시작한다는 등의 교육습관도 이에 포함된다. 생
활교육은 학교성적과는 전혀 별개의 것인 것처럼 접근해야 한다.
이것은 결국 자기결정감이나 타인수용감과도 연결된다. 내부에서
생성된 에너지를 학습 동기화하여 목표를 향해 밀고 나가는 학생이
란 자기결정감이 충만한 학생을 묘사하는 것과 다른 것이 없다. 또
한, 보통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외부적 조건이라는 것도 외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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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부모님에 대한 수용감을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학습심리


학적 하위항목간의 이러한 상호연관성은 실제 현실에서 어떤 일정
한 요소만 특별히 높거나, 반대로 결여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가지 요소, 예를 들어 자아감의 수준이 높지 않은 학생이 있다면,
타인수용감이나, 학습동기의 내발성 외발성 요소에도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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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퇴행 - 다시 아기로 돌아갈래!

사례13
앞서 개과천선했다는 과외교사 D씨가 다시 찾아왔다. 몇 달 전부
터 가르치고 있는 학생이 있는데 도통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멀어
지는 것이 정말 힘들다고 호소했다.
J양은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다. 영어랑 수학은 중상위권을 유지하
고 있다. 그러나 국어점수가 약간 떨어지고, 사회나 한문과 같은 암
기과목에 취약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과 과외를 많이 다녔다. 대
부분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간 것이었고 본인이 나서서 공부를 해
보겠다는 의지는 부족했다.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한 것이 있으니 영
어나 수학은 80~90점이 나왔는데, 학교 지필고사 대비로 시험공부
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서 사회나 한문은 40~70점이 고작이었다.
과외교사 D씨는 어중간한 수준에 있는 학습동기를 끌어올리기 위
해 노력을 했는데 어떤 날은 호응을 하면서 열심히 하겠다는 의욕
을 보여주는데, 다음 시간에 가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저번 주만 해도 재잘거리며 열심히 계
획을 설명하던 아이가, 이번 주에는 소심하고 수동적인 여학생이
되어 입을 닫아버린다고 한다. 화가 났지만, 개과천선한 D씨는 꾹
참고 학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
라오는 실망감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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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 - 나 다시 돌아갈래~~

자신감 넘치고 긍정적인 성격의 젊은 남성 L씨가 있다. L씨는 본


인이 가르치는 어떤 학생을 위해 적절한 문제집 한권 골라서 추천
해주고 싶은 생각으로 서점에 들렀다. 양이 많지 않으면서도, 편집
과 디자인이 세련되고, 요즘 시험 경향을 적절하게 파악하고 있는
영어 문제집을 고르기 위해서 부단히 살펴보고 있는데, 영 괜찮다
싶은 것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보던 책을 집어넣고 다른 책을 살
피고 이런 작업을 몰입해서 하다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다
리는 저려오고 허리는 뻐근해 왔다. 2시간째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
다는 허무함이 잠깐 스쳐지나가는 찰나, L씨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
운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우울감은 이 30대 남성을 무척이나 손쉽
게 무너뜨렸다. L씨는 서점에서 도망쳐 나왔다. 빠르게 뛰듯이 걸
으며 바보 같은 우울감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썼다. 아니다. 사실
그는 우울증을 떨쳐버리고 싶다는 의지마저도 빼앗겼다. 우울감에
달라붙어 그 바보 같지만 달콤한 감정을 음미하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10살이 된 L군은 책을 참 좋아한다. 자기를 몹시
도 사랑하는 아빠와 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하고 사오는 것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이다. 그런데 오늘은 책방에 혼자 왔다. 판타지 소설
과, 역사 소설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던 L군은 이내 원하는 대로 책
을 사줄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빠는 잡지회사를 부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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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고 빚쟁이들과 경찰을 피해서 숨어있다. 몸을 드러내서 L과 함께


책방에 나올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이번만이 아니다. 어쩌면 앞으
로 영원히 그 취미생활은 재현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때 10살
짜리 L군이 느낄 기분을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위의 L씨와 아래 L군은 동일인물이다.(그리고 사실은 필자 본인의
실제 이야기이기도하다.) 위의 사례에서 L씨는 왜 갑자기 우울감을
느꼈을까? 고작 두 시간 동안 문제집 고르는 일을 허탕 쳤기 때문
에 그런 감정을 느꼈을 것 같지는 않다. 젊고 건강하고 밝은 성격
의 L씨가 다리 저림과 허리통증 때문에 울보가 될 리는 없을 것이
다. 결론부터 말하면 L씨는 서점 안에서 서성거리며 문제에 부딪히
는 순간 10살짜리 L군으로 '퇴행'하였다.
어떤 사람의 인격이 특정 사건에 의해서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후퇴하는 것을 '퇴행(regression)'이라고 한다. 이 때 문제되는 특정
사건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종류의 것이다. 인격의 후퇴가 일어난
과거의 어느 시점에는 이 특정사건과 유사한 스트레스가 있었다.
과거의, 어린 시절의 인격이 겪은 스트레스 사건에서 그 어린 아이
는 스트레스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어떤 기제를 형성했다.
수동성, 불안함, 우울함, 공격성, 의존성 등. 성인이 된 이 사람의
마음에서는 같은 종류의 사건을 접했을 때 곧바로 그것으로부터 보
호하기 위한 심리적 기제들이 발동했을 것이다.
어젯밤에 어머니상을 당한 중년 남성을 떠올려보자. 이 남자는 어
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울음소리를 냈다. 언어적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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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으로 슬픔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비언어적인 울


음보를 터뜨리는 행위로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마치 전화를 받으
러 방을 잠시 나간 엄마의 뒷모습을 본 젖먹이처럼 슬프게 울었다.
이는 본질적으로는 적응적인 과정이다. 인격을 효과적으로 보호하
기 위한 기제들을 손쉽게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퇴행'은 실제 현
실에서 비적응적인 부작용들을 일으킬 것이다. 멀쩡한 성인이나 고
등학생이, 갑자기 울보 겁쟁이 어린아이가 되는 것만큼 난처한 일
은 없다.

퇴행현상을 견뎌내는 방법

사례에서 J양은 인격의 성장과 퇴행을 거듭했다. 의욕적인 과외교


사 D씨를 만나 상담을 하다보면 신이 났다. 자기를 이해해주고 능
력을 인정해줬다. 암기과목에 대한 공부 방법을 제시하고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었다. 아이는 과외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의견도 피력하고 계획도 신나게 짰다. 계획
한대로 공부를 해냈다 싶으면 바로 문자로 D씨에게 자랑을 했다.
그러나 항상 좋을 때만 있을 수는 없다. 공부를 계획보다 늦게 시
작한 날도 있을 수 있다. 숙제를 재미없게 억지로 한 날도 있을 수
있고,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보다가 엄마한테 눈치를 보인 날도 있
을 것이다. 이런 실책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 소소했지만, J양에
게는 큰 사건이었다. 곧바로 인격이 과거로 소급했다. 몰래 학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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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먹고 친구들과 놀다가 엄마한테 크게 혼났을 때의 소심했던 인격


으로 퇴행했다. 학원숙제를 억지로 하다가 새까맣게 채워져 있는
일주일 스케줄을 떠올리고 좌절을 느낀 우울한 어린이로 퇴행했다.
청소년들을 상담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퇴행'현상은 상담가를 질
리게 하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다. 한 오라기의 의욕도 걸치지 않
은 아이들을 사력을 다하여 자극해 놓았는데, 1주 만에 다시 이전
으로 되돌아간다. 이런 현상을 보면 웬만한 사람은 기진맥진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본인의 능력과 상담업무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 회의감과 불안감, 자책은 곧바로 내담자인 아이에게
쏟아진다. 아이의 행동에 비난을 하고, 능력에 평가절하를 시작하게
된다. 앞에서 설명한 일종의 역전이 현상이다.
상담가는 처음부터 퇴행을 예상해야 한다. 퇴행을 거치지 않는 인
격의 성장은 처음부터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 퇴행이 없는 전진만
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건강하지 못한 상태이리라. 건전하고 공
고한 인격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퇴행을 반드시 거쳐야 한
다. 설사 이번 주차에 심한 퇴행을 보였더라도, 다시 처음부터 시
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입을 다물고 적개감을 보
이고는 있지만, 아이는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되새김질을 하고 있
다. 아직 불안하고 확실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상담가의 진
의가 무엇인지 더 시험해보고 싶어 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도 굳
건하고 긍정적인 표정을 보여준다면, 확실한 득점을 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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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과목을 못하는 것은 꽤 심각한 문제이다.

보통 부모님들은 아이가 암기과목을 잘 못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


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깟 사회과목 시험 전 날에 밤새워서
외우면 100점 맞는 것 아닌가? 오히려 수학이나 영어는 평소에 내
공이 쌓여야 고득점이 가능하지. 우리 아들은 사회는 형편없지만
수학은 그런대로 하니 괜찮다고 볼 수 있지.”라고 말하고 싶을 것
이다. 그러나 통상 사회과목을 못하는 학생은 입시에서 실패할 가
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크게 보아 세 가지이다.

1. 학습동기가 건강하지 못하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과정이다. 그 과정을 견뎌내고


남들보다 우수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아주 강력한 학습동기를 가
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이 강력한 학습동기가 교과목 전반에 골고
루 펼쳐져 있어야 한다. 수학을 잘하지만 사회를 못하는 학생은 바
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학습동기를 형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단
순히 수학이 재미있어서 공부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수학은 더
우월한 과목이고 사회는 더 하찮은 과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대입에서 수학은 중요한 반면에 사회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생각보다 공고하게 형성되는 경
향이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불호가 과목간의 편재를 불러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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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점수 구조가 반복되면서, 학생은 이를 건


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합리화하게 된다.

‘암기과목이라는 것은 후진적인 분야다. 사회에 나가서 쓸모가 있


지도 않지. 고차원적인 생각을 필요로 하는 수학을 잘 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사회 따위의 무식한 암기만 하는 과목은 앞으로도 하
지 않을 생각이다.’

어떤 분야든 일정 정도의 실력이 쌓이지 않은 때에는 모방이 최고


의 수련방법이 된다. 이 학생은 미쳐 알지 못하였지만, 사실 수학
이라는 것도 비슷한 유형의 수없는 반복을 바탕으로 실력을 쌓기
이전에는 웬만한 점수를 얻기 힘들다. 그 점에서 수학이나 사회는
크게 다른 분야가 아닌 것이다.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모방
이 필요하다. 어마어마한 모방행위의 끄트머리에서 천재적인 새로
운 발상이 나온다. 우리말을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
름다운 시나 수필을 쓸 수 있을까? 중고등학생 때 교육과정에서 요
구하는 것은 전부 이런 과정이다. 여러 분야에 골고루 흥미를 가지
고 뚫고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단련하는 것이야 말로 대학입시에서
원하는 과정일 것이다.

2.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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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집중을 잘 한 학생이 암기과목에서 부진하기는 어렵


다. 영어 수학에서는 괜찮은 성적을 보이지만 나머지 과목을 잘 못
하는 학생들은 십중팔구 학원에 메여있는 아이들이다. 학교 수업에
서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따라서 집중을 하지도 못한다. 선
생님이 수업시간에 제시하는 시험 가이드라인에 주목하지 못할 것
이다. 막상 시험기간이 다가와서 책을 보고 외우려고 하려고 하면,
어마어마한 양에 기겁을 하게 된다.

3. 강인하게 공부하지 못한다.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다. 시험 전날에 목숨을 걸고


외워버리면 그만이다. 강력한 학습동기를 가지고 백점을 맞겠다는
각오로 강인한 공부를 하면 되는데, 이 학생들은 그것을 못한다.
지금은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여 국영수는 그런대로 따라가고 있
지만, 고3이 되면 버텨내지 못한다. 시험 전날에 하는 강인한 공부
를 매일매일 이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쉬엄쉬엄하는 공부밖에 수행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여기서 낙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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