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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내 어머니는 순하디순한 분이셨다. 그 순함이 정도를 지나쳐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그녀를 봤
면 그 생각뿐이었다.
정말 그랬다.
지금 또 하려 한다.
속없는 어머니.
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드시나 싶었다. 다른 걸 시켜드릴까 싶었다. 상차림이 민망해 어머니 얼굴을
참 묘하다.
그 이상은 아니더니,
돌아가시고 나니 그녀가
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걸,
제발 몰라라. 제발 몰라라.
차례
| 작가의 말을 대신하며 |
1
장
2
장
3
장
4
장
5
장
6
장
7
장
“밥 안 줘, 이년! 날 아주 굶겨 죽여라, 이년! 이 빌어먹을 년!”
할머니의 앙칼진 목소리가 이른 아침부터 집 안을 쩌렁쩌렁 울린다. 변
기에 앉아 아랫배를 부여잡고 신음을 뱉어내던 엄마는 할머니의 악다구
니에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아랫배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 때문에 얼
굴엔 이미 식은땀이 흥건하다.
몇 달 전부터 아랫배가 따끔거리더니, 어느 순간부터 오줌소태가 시작
되었다. 일을 보고 화장실을 나오기가 무섭게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야 할
때도 있었다. 불쾌한 느낌은 나아지는 기미 없이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얼마 전부터 엄마는 화장실에 가는 일이 무서워졌다.
어지간한 통증이나 아픔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엄마였다. 천성이 무
던하기도 했거니와, 몸이나 마음에 붙은 아픔을 그저 자신의 일부인 양
달고 사는 데 이력이 난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오줌소태는 아무
리 약을 먹어도 좀처럼 떨어져 나갈 줄 모르고 점점 몸을 옥죄어오는 느
낌이다.
“이 호랑이가 물어갈 년아! 시에미를 굶겨 죽일라고 환장을 했냐!”
할머니의 성화가 이어졌다. 치매 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고 터져 나오는
할머니의 억지와 욕설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엄마는 할머니의 소란
보다 어수선한 기분으로 아침 출근길에 오를 가족들에게 더 마음이 쓰인
다.
“곧 나간다니까! 오줌도 맘 편히 못 눈다, 내가….”
엄마는 아픈 걸 간신히 참으며 할머니를 달래듯 소리쳤다. 결국 소변은
보지도 못한 채 바지춤을 올리고 말았다.
“밥 안 줘? 밥 줘!”
화장실에서 나오는 엄마를 보고 할머니가 득달같이 소리친다.
할머니는 목에 턱받이까지 하고 소파에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
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났는데도 며느리가 도무지 밥 줄 생각을 안
하니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출근할 식구들 밥만 차려놓고 급히 화장
실로 뛰어가야 했던 엄마의 사정을 할머니가 알 리 없다.
“줘요. 좀 기다려. 성화도 부려쌓네.”
종종걸음 쳐 주방으로 가보니 엄마가 우려했던 대로 아버지는 밥그릇
을 반도 비우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식탁 위에 우유팩이 놓여
있는 걸 보니 정수도 밥 대신 우유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운 모양이다. 삼수
까지 하고 얼마 전 의대 시험을 치른 뒤라 정수는 요즘 신경이 꽤나 날카
로워져 있다.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이 얼마나 초조할까 싶어 엄마는 아들
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또 죽 줄 거지? 이 나쁜 년!”
서둘러 죽을 데우는 엄마에게 할머니가 못마땅한 듯 버럭 소리를 질렀
다.
“노친네, 또 억지 부리네. 기껏 밥 싫다고 죽 끓이라며….”
엄마가 웃으며 죽 그릇을 쟁반에 받쳐 거실로 내왔다.
“이년이!”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할머니는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엄마를 노려본
다. 할머니의 억지에도 짜증 한마디 없이 엄마는 늘 하던 대로 숟가락에
죽을 떠서는 호호 불어 내밀었다.
“아이구, 맛나네. 자, 우리 이쁜 어머니, 한번 드셔봐.”
할머니는 여전히 엄마에게 눈을 흘기면서도 떠 넣어주는 죽은 잘도 받
아먹는다.
“저, 가요.”
연수가 현관으로 나가며 건조하게 인사를 했다. 요즘 들어 무슨 걱정이
있는지 얼굴이 해쓱해진 연수를 엄마가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래.”
엄마는 연수에게 대답을 해놓고 문득 안방 쪽을 돌아본다. 그제야 ‘아
차!’ 싶어 죽 그릇을 탁자 위에 놓고 부리나케 안방으로 향했다.
안방 거울 앞에서 출근 준비를 하던 아버지의 미간이 미세하게 흔들렸
다.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한 남자. 깊게 패인 이마 주름과 반쯤
벗겨진 머리칼, 중년을 훌쩍 넘긴 거울 속의 남자는 이젠 어떤 미망이나
열정이 들어설 자리도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
나왔다. 병원에서 젊은 원장과 사이가 좋지 않아 요 며칠 신경을 쓴 탓일
까. 눈에 띄게 늘어난 흰머리 탓에 더 늙고 초라해 보였다.
8년 전, 뜻하지 않은 의료사고로 어렵사리 개업한 병원마저 남의 손에
넘어간 뒤 아버지는 월급쟁이 의사 생활을 하고 있다. 내년이면 정년인
아버지는 요사이 부쩍 자신이 쓰고 버려진 폐물이 되어가는가 싶어 마음
이 언짢다.
“오늘, 수술 있어요?”
어느 결에 안방에 들어온 엄마가 손수건을 건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는 대꾸도 없이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다. 워낙 무뚝뚝한 성격이라
좀처럼 한 번 묻는 말엔 입을 열지 않는 아버지다. 엄마는 으레껏 되묻는
다.
“없어요?”
엄마는 넥타이를 고쳐주는 척하며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왜?”
아버지의 퉁명스러운 대꾸가 날아왔다.
“나 오늘 곗날이거든. 일 보구 당신하고 같이 들어오면 어떨까 싶은
데….”
“뭐하러?”
“오줌소태가 영 안 낫네? 가서 윤 박사도 좀 보구….”
“다른 병원 가.”
아버지는 말꼬리를 자르며 싫은 내색을 했다. 엄마가 병원 얘기만 꺼내
면 아버지는 늘 이렇게 질색부터 한다. 명색이 의사 마누라지만 아프다고
남편 병원에 들락거린 기억이 없는 엄마였다.
“윤 박사가 편한데….”
엄마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건 약 먹어두
나아. 뭐 한다구 병원까지 와.”
더 이상 들을 게 없다는 듯 아버지는 방문을 나선다. 평소 같으면 이 정
도에 단념하고 말았을 엄마지만 오늘은 작정하고 아버지를 따라붙는다.
“낫질 않으니까 그렇지.”
“아버지, 늦어요!”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수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아버지를 부른다.
운전을 못 하는 아버지를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일이 연수의 몫이었다.
엄마는 현관까지 아버지를 배웅하며 안 하던 애교까지 부려본다.
“가요, 나?”
아버지는 끝내 대꾸 한마디 없이 현관을 나섰다. 엄마는 거실 유리창
너머로 아버지의 뒷모습을 서운한 얼굴로 바라본다.
‘속 시원하게 병원에 오라고 해주면 좀 좋아?’
아버지의 주변머리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럴 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밥 안 줘, 이년아? 시에미를 똥둑간의 똥 덩어리만도 못하게 여기는
이년, 이 못된 년!”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할머니가 엄마의 머리채를 낚아채더니 순식간에
엄마를 거실 바닥에 자빠뜨렸다. 한참 맛나게 죽을 삼키던 참이었는데 갑
자기 자리를 떠버린 엄마에게 단단히 화가 났던 것이다. 어디서 그런 힘
이 솟는지 할머니는 쓰러진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마구 휘둘러댔다.
“아이구, 머리야. 노친네, 기운도 좋지. 좀 놔요. 머리카락 다 뜯기네.”
시끄러운 소리에 뒤돌아보던 아버지는 또 저런다 싶어 한숨 한번 내쉬
고는 그대로 대문을 나선다.
“지들만 먹고, 난 밥 안 줘, 이년!”
“아이고 아퍼라, 노친네야!”
목소리는 높아도 엄마에게선 노망든 할머니를 탓하는 기색이 전혀 없
다. 으레 그렇듯, 엄마의 하루 일과가 또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할머니는 몸집이 자그마해도 한 번 성이 났다 하면 당할 장사가 없을
정도로 기운이 펄펄 넘쳤다. 그럴 때마다 머리를 된통 뜯기거나 온몸이
곤죽이 되도록 맞으면서도, 엄마는 불쾌한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할머니가 정신이 온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구박을 다 받
으면서도 늘 사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쪽은 엄마였다. 속이 없는 건지 무
던한 천성 탓인지, 엄마는 어떤 일이건 그러려니 하고 넘기며 살아왔다.
엄마 자신이 그렇다 보니 가족들도 엄마가 당하는 일에 크게 동요하지 않
게 되었다. 아침에 할머니가 일으킨 소동도 가족들에겐 일상의 풍경처럼
익숙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 뒤에야 할머니는 양처럼 순해졌다. 하
지만 엄마는 머리칼이 한 움큼은 빠져버린 것 같았다.
온몸이 옥신거리는 걸 겨우 참고 엄마는 아침 먹은 설거지를 시작했다.
죽 한 그릇을 맛나게 다 비운 할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거실 소파에 앉
아 공을 갖고 놀고 있다. 투명한 상자 안에 가득 담긴 색색의 공을 가지고
기억력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선가 치매 환자 치료에 공놀이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 온 엄마가 틈만 나면 할머니와 공놀이를 한 지도 꽤
되었다.
설거지를 하느라 할머니를 바로 쳐다보지 않으면서도 엄마는 할머니가
빨간 공을 찾으려고 공이 든 상자 안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걸 알고 있다.
“빨간 공, 새색시 볼처럼 빨간 공이 어딨을까요?”
엄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할머니는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천진난만
한 표정으로 상자 안을 살피더니 빨간 공을 들어 보여준다.
“아이고, 잘했네. 이번엔 하얀 공.”
엄마의 칭찬에 할머니는 기분이 좋다. 밝은 얼굴로 다시 상자 안을 들
여다보며, 흰 공을 가려내기 위해 부지런히 눈망울을 굴린다. 하지만 좀
체 찾을 수가 없는지 엄마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핀다. 하지만 엄마가 힌
트를 주지 않자 이 공 저 공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같은 동작만 되풀이한
다.
한참을 고민하던 할머니가 드디어 공 하나를 집어 들고 외친다.
“여기, 흰 공.”
엄마가 돌아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니, 그건, 노란 공이잖아요.”
“아냐, 흰 공 맞어!”
할머니는 노란 공을 들고 흰 공이라 우겨댄다.
“노란 공이라니깐.”
“미친년, 저번엔 이게 흰 공이라더니….”
한사코 우기던 할머니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금세 토라지고 만다.
“내가 언제? 안 그랬어요.”
엄마의 하는 양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 같다.
“안 해.”
약이 바짝 오른 할머니가 냅다 공을 팽개쳐버린다. 잠잠한가 싶던 할머
니의 응석이 또 시작된 것이다.
“왜, 또?”
“… 업구, … 나중에 해.”
“나두 안 해. 싫어.”
엄마도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고개를 내젓는다.
“업어!”
“안 해. 나두 이제 늙어서 허리 아퍼.”
하지만 그건 그저 말일 뿐, 엄마는 서둘러 설거지를 마치더니 할머니를
업고 마당으로 나선다. 잠이 오는지 할머니는 가물가물 눈꺼풀을 내려 감
는다. 할머니는 엄마 등에 업혀 잠드는 걸 제일 좋아한다.
엄마가 자장가 삼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발길을 돌리랴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서지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가슴에 이 가슴에
숨겨진 그 사연이….
아침 밥 꼭 먹을 것!
그의 아내가 써놓은 메모였다. 꼼꼼하고 여성스러운 필체 밑에는 핑크
빛 하트도 그려져 있었다. 연수는 외면하듯 냉장고 문을 다시 열어 주스
병을 꺼냈다. 컵을 가지러 싱크대 쪽으로 가려던 연수의 눈에 또 다른 메
모지가 들어왔다.
전기 압력밥솥 사용법
3. 취사를 누른다.
이 먹을 수 있음.)
북어국 끓이는 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초판 1쇄 발행 2010년 4월 26일
초판 36쇄 발행 2015년 2월 5일
개정판 1쇄 인쇄 2015년 4월 25일
개정판 1쇄 발행 2015년 4월 30일
지은이|노희경
펴낸이|金湞珉
펴낸곳|북로그컴퍼니
편집부|김옥자·태윤미·김현영
디자인|김승은
마케팅|김선규·김승지
경영기획|김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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