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101

❚ 해제

취어(聚語)

본 자료는 1893년부터 1895년 사이의 관계 사실의 글을 수록한


것이다. 1893년의 보은집회 관련의 글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
양호도어사(兩湖都御使)로 임명되어 수습책임을 맡았던 어윤중(魚允
中)이 모은 것으로 보인다.

주요한 내용으로, 보은집회시 동학의 보은관아통고, 창의의 목적


을 밝힌 동학 교단의 방문, 통문 등과 더불어 양호도어사 어윤중의
효유문, 임금의 칙유문(飭諭文) 등을 기록하였다. 또한 어윤중이 조
사한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의 탐학 장계, 청풍민란(淸風民亂)에
대한 탐지 보고서가 수록되어 있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 1차 봉
기의 전개과정과 전주성의 함락 전말, 그리고 무장동학배포고문(茂
長東學輩布告文) 등이 실려 있다. 한편 전 사간(前 司諫) 권봉희(權
鳳熙)와 부호군(副護軍) 이건창(李建昌), 전 정언(前 正言) 안효제(安
孝濟), 진사(進士) 정성우(鄭惺愚), 전 도사(前 都事) 이종렬(李宗烈),
전 교리(前 校理) 이승구(李承九), 영천군수(永川郡守) 허식(許烒)의
상소 등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 정부의 폐정과 동학농민군에 대한
대책을 파악할 수 있다.

본 자료는 1893년 보은집회의 전개상황 및 정부의 대책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다른 지역의
사정도 알려주고 있다. 본 자료의 원본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취어(聚語) 3

취어(聚語)

전 사간 권봉희 상소 [前司諫 權鳳熙 上疏]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재주와 자질이 용렬하고 어리석으며 학식이 얕


고 짧아 신하가 구비해야 할 한 가지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태양이 비
치는 곳에 해바라기는 스스로 기울어지고, 노(魯)나라에 근심이 있으면
별자리도 근심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만 번 죽을 각오로 감히 어리석
더라도 하나의 얻어들을 말씀[一得之愚]1)을 올리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정신을 잠시 머물러 두고 밝게 살펴주시옵소서.
지금 나라의 시세를 돌아보건대 흉년이 거듭되어 백성들이 도탄에 빠
지고, 저축이 고갈되어 경비를 조달하지 못하며, 기강이 해이해져 명분이
전부 사라지고, 바른 도[正道]는 미약하고 희미하여 이단만 횡행하니 마
치 큰 솥에 물을 끓이되 속은 끓고 있으나 바깥쪽은 말라붙으며, 늙은
고목이 벌레에 상하여 속은 비어서 껍데기만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
약 이러한 때에 불을 끄고 회생할 방도를 시행하지 않으면 장차 솥은 끝
내 깨어지고 나무는 마침내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
니까? 삼가 어리석은 생각을 다음과 같이 올립니다.
유학[聖學]에 힘써 영원한 천명을 기원하고, 성실한 마음을 쌓아 어진
인재를 찾아내며, 수령들을 잘 선택하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몸소
절약하고 검소하여 재정을 넉넉하게 하며, 기강을 바로 세워 백성의 뜻

1) 일득지우(一得之愚): 우부우부(愚夫愚婦)라도 천 가지 생각하는 속에 한 가지 얻어 들


을만한 내용이 있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의 말이라도 들어 볼만한 대목이 있다는
뜻으로 원용된다.
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이· 정해지게 하고, 장수가 될 만한 재목을 선발하여 군율을 명확하게 하


며, 바른 도[正道]를 지켜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 뿐입니다.
다음 조목에 따라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잘 읽어보아 주십시오.
이른바 유학에 힘써 천명을 기원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오호라!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여 진실로 그 중용을 잡으라고 한 것은 순(舜)
임금의 학문이고,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아 그 근본이 있으라고 한
것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학문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
께서는 풍취[姿氣]의 순수함과 어진 마음의 융성함이 순임금과 무왕보다
못하지는 않지만, 왕위에 오른 지 30년이 되어도 은택(恩澤)이 아래로 내
려가는 것을 헤아릴 수 없고, 백성들이 다스려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
입니까? 진실로 타고난 지혜의 면모로써 학문에 힘쓸 겨를이 없었으므로
그 이치를 밝혀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 뿐입니다.
대개 제왕의 학문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름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
의 학문은 어려서는 배우고 장성해서 행하고자 하지만, 제왕의 학문은
배우고 행하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 나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옛 경
서를 헤아려 한결같이 정령(政令)을 발동하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거울삼
아 한결같이 혜택을 시행하며,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고[夙
興夜寐]2), 그 덕을 힘쓰고 새롭게 하며, 몸을 삼가하고 학문에 힘써 하
나의 생각이라도 혹여 착오가 없게 하십시오. 시중에 떠도는 말들을 명
확하게 살펴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지 않도록 하고, 자기의 사사
로움을 극복하고 제거하여 한결같이 공정으로서 표준을 만들며, 궁중의
금법(禁法)을 엄숙하고 깨끗하게 하여 오직 바른 선비들을 가까이 하고,
널리 경연(經筵)3)을 열어 선비들을 자주 접촉하십시오. 삼가 방도가 되
는 책을 가까이하여 성현으로써 스승과 벗을 삼아 경서를 강론하고, 진

2) 숙흥야매(夙興夜寐):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임금은 정무


를 보면서 밤낮없이 부지런해야 한다는 뜻이다.
3) 경연(經筵): 임금이 정기로 경전과 정무에 필요한 내용을 공부하는 기구로써 경연관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취어(聚語) 5

실한 마음으로 반드시 몸소 체험하고 인식하며, 날마다 향상되고 달마다


전진하여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고, 그 지위에서 어려움을 극복하
고 천심(天心)을 차지하십시오.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으면 반드시 도리에서 구하고, 사람을 뽑아 선
행을 행하게 하되 반드시 자기를 반성하십시오. 일마다 근본을 세우고
말마다 중심을 잡아 위로는 하늘과 조상들이 위탁한 뜻에 보답하고, 아
래로는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의 엄정한 여망에 부응한다면, 타고난
운명은 스스로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모든 일이 잘 이루어져, 백성은 다
스림을 기약하지 않아도 편안해질 것입니다. 무릇 이와 같으면 많은 양
기(陽氣)들이 모여들고 모든 신들이 서로 도와주어 한 몸은 건강해지고
스스로 하늘이 도와줄 것이니 어찌 저 요망한 것들이 기도(祈禱)하겠습
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확연히 고치고 깨달아 일체 금단하는 것 역시
유학 중의 한 가지가 될 뿐입니다. 삼가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성실한 마음을 쌓아 어진 인재를 찾는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
까? 사전(思傳) 4)에 이르기를 “올바른 정치를 함에는 인재를 얻는데
있다”라고 하였고, 맹자는 이르기를 “어질고 현명한 인재가 없으면 나라
는 텅 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명석하고 의로운 임금은 어진
인재를 구할 때 목마른 것과 같이하여 초빙할 때 폐백을 반드시 드리는
것은 진실로 만기(萬機)의 정무(政務)로서 많은 백성을 혼자 판단하고
혼자 다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어질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뽑아 정치를 맡기고, 뛰어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을 불러 벼슬을 주며, 반
드시 상과 벌을 주는 것을 공평무사하게 하면 다스리는 것이 모두 반드
시 신장되고 백성과 나라가 편안해질 것입니다. 우리 열성조(列聖祖) 임
금들은 이러한 도리를 따랐기 때문에 나라가 오래도록 이어져 오늘에 이
르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선왕들의 법을 거울삼아 오랫동안 다스릴 바를 생각

4) 사전(思傳):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중용을 말한다.


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않으십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인재는 다른 시대에서 빌려오는 것


하지
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조정에는 어질고 뛰어난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며 초야에도 또한 인재가 없는 것은 아니므로 오직 위에서 잘
선발하여 믿고 맡기고, 성심으로 그들을 찾고 불러들이며, 덕망에 맞게
지위를 부여하고, 재주에 맞게 관직을 주며, 널리 밝게 하고 힘써 전하를
돕게 함으로써 모든 법이 바르게 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무
엇 때문에 삼가 밤을 새우고 신하들이 할 일을 직접 하여 하나의 벼슬과
하나의 직무도 몸소 살피고 점검함으로써 3정승과 6조판서가 자리만 지
키면서 녹봉을 먹도록 하십니까?
서경(書經) 에 이르기를 “임금이 좀스럽게 자질구레하면 신망이 있는
신하들이 게을러지고 모든 일들이 무너진다”라고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그와 같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지금부터 결단하여 자신에게서 반성해
서 찾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여러 의견들을 물어 평소 임금의 마음을 기
대고 중하게 여기도록 조정과 시골에서 도울만한 명망가를 신중하게 선
택하여 백관의 윗자리에 앉혀, 분발하고 노력해서 전하를 잘 보좌하고
일을 도와 은혜를 베풀게 하십시오. 또한 마음가짐이 공평하고 사무를
널리 주관할 만한 사람을 가려 뽑아 6부를 맡게 하고, 일을 잘하고 못하
는 것에 따라 승진시키고 벌을 주어 각각 그 아래 사람을 거느리게 하십
시오.
경연(經筵)에는 반드시 도가 있는 선비를 배치하여 마음을 털어놓고
성의껏 인도할 수 있도록 책임을 맡기고, 양사(兩司)5)에는 반드시 강직
한 사람을 선발하여 간곡하게 간하는 도리를 다하게 하며, 그 나머지 각
관사 또한 모두 정성을 다하여 공무(公務)에 힘쓰게 하여 그들 벼슬아치
들이 게으르지 못하게 한다면, 다스리는 도리는 위에서 넘쳐서 자연히

5) 양사(兩司): 언론을 맡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일컫는 별칭이다. 양 기


구에 소속된 언관(言官)들은 임금의 실정을 지적하기도 하고 벼슬아치의 비리를 규탄
하는 소임을 맡았다.
취어(聚語) 7

아래 백성에게 미칠 것입니다. 무릇 이와 같이 한다면 구중궁궐에서 깊


이 팔짱을 끼고 있어도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 서로 명백해지
고 위의가 세워져, 이루고 다스리는 교화는 얼마 걸리지 않아 이루어질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 살펴보시기를 빌겠습니다.
이른바 수령을 가려 뽑아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
까? 서경(書經) 에 이르기를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
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경(詩經) 에 이르기를 “얼굴과 기상이 단아[愷悌]한
군자는 백성의 부모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자애롭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전(書傳) 에 이르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
과 같아서 물은 배에 실릴 수 있고 또 배를 뒤엎을 수 있다”라고 하였으
니, 이 말이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선왕들께서는 사랑할 것과 중요하게 여길 것, 그리고 두려워 할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자식처럼 생각하는 사
람을 잘 선발해 관리로 삼아 생업을 안정시키고, 쌓인 폐단은 줄여주며,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은 따라서 좋아하고,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은 따라
서 싫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스림이 위에서 잘 이루어져 백성들은 아
래에서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수령이 된
사람들은 다만 백성들을 벗겨 자기를 살찌우며,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자신이 잘 살줄을 알지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나라에 보답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니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진실로 승진하는 것을 좋은
일로 여겨 기만하여 뇌물을 바쳐 높은 벼슬로 옮기기 때문입니다.
아! 조정과 백성 사이는 서로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성스러운
왕조의 오백년 동안 은혜를 입은 백성이 거의 모두 탐관오리의 손에서
놀아나도 불쌍한 줄을 모르니, 어찌 <임금이> 백성의 부모가 되겠으며
백성이 오직 나라의 근본이 된다는 뜻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이 듣기
로는 이러한 무리들이 탐욕을 자행하면서 모두 공언(公言)하기를 “몇 차
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례· 진상(進上)6)이 배정되는 날에는 채무가 배분되는데, 모두 전에는 없


던 비용입니다. 나머지는 긴요하고 중요한 뇌물이며, 많은 문서들 또한
어쩔 수 없이 별도로 해야 하니, 적은 고을의 형편과 쇠잔한 경비로써
어떻게 분배하여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의 형편이 측은하고 불쌍
함을 알지 못하지는 않지만, 산더미 같은 채무가 머리를 눌러서 그것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는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인 줄 알아 차
마 백성을 학대하지 못해 한두 번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그의 관직이 보
장되기 어렵고, 그 중에 조금 지각이 있는 사람은 차라리 도랑과 골짜기
에서 굶어 죽을지언정 벼슬아치가 되는 것을 단념한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차마 적자(赤子)를 보호하는 마음으로 반드시 두려워하고
삼가 깊이 생각하시어 진상을 각 읍에 배정하는 것을 모두 없애십시오.
지금의 벼슬아치는 반드시 가려 뽑되 먼저 관찰사를 깨우치게 하여 실상
에 따라 포폄(褒貶)해서 뭇 사람들에게 마음이 공명정대함을 보인다면,
뇌물 또한 함부로 받지 못하고 예물 또한 공공연하게 행해지지 않고, 백
성들이 실제로 혜택을 받고 나라의 근본이 영원히 튼튼해져, 배가 전복
되는 근심을 없앨 수 있고 윗사람을 가깝게 여기는 의리가 생길 터이니,
또한 어찌 오늘날의 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임금께서 살펴주시기
를 바라옵니다.
이른바 몸소 근검절약하여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
까? 옛날에 요임금은 띠로 이은 지붕과 흙으로 섬돌을 만들었으나 길거
리의 아이들은 풍요로움을 노래하였고, 우임금은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
고 거친 의복을 입었는데 공자께서는 거의 자신과 차이가 없다고 칭송하
였습니다.
요임금과 순임금의 일은 높일 만하지만, 우리나라 선조대왕(宣祖大王)
께서도 사치하는 풍속이 점점 흥하는 것을 염려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6) 진상(進上): 지방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치는 물품을 말한다.


취어(聚語) 9

놓고 속옷을 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나의 옷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경


들은 모두 보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하들이 분부를 받들어 우러러
보니 무명옷 6∼7승(升)7)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 정종대왕(正宗大王, 정조)께서도 입은 모시옷을 여러 차례 세탁하
여 실올이 누더기가 되었는데 가까운 신하가 건의를 하자 하교하기를
“내가 어찌 옷 한 벌을 아깝게 생각하겠으며, 내가 다 입어 보지 않은 옷
이 있어야만 다른 사람에게도 권장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위대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몸을 삼갔기 때문에 백
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보전하여 오늘날 훌륭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두 임금의 큰 기반을 받고 두 임금의 큰 공적을 계
승하셨으니 두 임금의 마음 쓰는 법에 어찌 한 치라도 어그러질 수 있겠
습니까? 신은 감히 전하께서 입으신 옷이 과연 두 임금의 무명옷이나
모시옷과 같이 여러 차례 빨아 입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그러
하였는데도 많은 신하들이 사치를 심하게 하였다면, 어찌 법에 따라 통
렬히 금지시키지 않으십니까?
신은 감히 말씀드리건대 전하께서 검소하고 절약하시는 것은 두 임금
의 성덕과 차이가 없으나, 지난 번 경사를 축하하는 날에 신 또한 군대
의 직함으로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하사하신 음식이 매
우 풍성하여 영광스러운 감정이 지극하였고, 계속해서 속으로는 임금께
서 하사하신 것이 비록 한 잔의 술과 한 그릇의 과일이라도 신하가 된
사람으로 누가 황송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군색하게 재정을
꿰어 맞추는 때에 이처럼 사치가 심해 장차 허물이 커질까 걱정하였습니
다. 또한 여자 악공들의 비용으로 헛되게 소비한 것이 너무 지나치다 들
었습니다. 과연 전에도 이러한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절제가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7) 승(升): 승은 옷감의 올을 기준으로 삼는 단위로써 올이 가늘수록 좋은 옷감으로 친


다. 여기에서는 비단옷을 입지 않고 성근 무명옷을 입었다는 뜻이다.
1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삼가 계속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선왕들의 가르침을 우러러 체험해서
확연히 고치시고, 의복과 음식, 기물과 용기는 오로지 토산품을 애용하
며, 상을 내리고 연회를 베푸는 것도 반드시 옛날 관례대로 따르고, 마땅
히 써야 할 곳도 절용을 생각하고, 소비해야 할 곳도 매번 비용을 살펴
사용한다면 이상한 물건과 기이한 장난감은 자연히 전하의 마음에 들어
오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국가의 재정도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
이 하신다면 아래에서 위를 따르는 것이 마치 바람이 풀을 쓰러뜨리는
것과 같아 조정과 초야(草野)는 모두 도와서 화합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한 전하께서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기강을 세워서 백성의 뜻을 안정시킨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
까? 관자(管子)가 이르기를 “예의염치, 이것이 사유(四維)8)인데, 사유가
널리 퍼지지 않으면 나라는 곧 망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에
따라 “천리(天理)에 따라 적절하게 꾸미는 것이 예(禮)이고, 인심을 따라
억제하는 것이 의(義)이다. 예의라고 하는 것은 기강의 본체이고, 기강은
예의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염(廉)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비
례(非禮)가 나에게 더해지더라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
이고, 치(恥)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잠시 의롭지 못함을 행하면 시장에서
도 매질을 하는 것이니, 염은 예가 쓰이는 것이고, 치는 의리의 단초가
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옛날에 성왕들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반드시 먼저 사유에 힘을 써서
높고 낮음과 위와 아래를 구분하였고, 예로써 품격과 절도를 갖추고, 의
로써 쓰거나 버리는 것에 단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취하고 줄 때에는
우리가 청렴한지를 헤아려서 살피고 저들의 수치심을 보고 그것을 절충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천리의 당연한 법칙이고, 인심(人心)이 어그러질
수 없는 법칙입니다.

8) 사유(四維): 예(禮)・의(義)・염(廉)・치(恥)의 네 가지를 말하는데, 도덕의 기초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취어(聚語) 11

그러므로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대하고 신하는 임금을 의로써 섬기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염치로써 대접하면 다른 사람 또한 우리와 같이 대
접할 것입니다. 이것이 미루어 사방에 이르게 되면 모든 백성들에게 두
루 퍼져서 위와 아래가 서로 믿고 교화로 다스리는 것이 점점 융성해져
조정에 있는 사람에게는 겸손하고 양보하는 풍조가 생기고, 시골에 있는
사람에게는 힘쓰려고 하는 기질이 생기며, 노예와 병졸 또한 모두 편안
히 분수에 맞게 스스로 처신하여, 죄를 짓는 것이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찌 사유를 널리 펼쳐서 기강이 서는 것이 아니
겠습니까? 말세에 내려오면 임금은 스스로를 성스러운 마음을 가지지만
간신은 단지 훔치려는 계책을 품게 되어, 법과 기강이 땅에 떨어지고 위
태로움이 극에 달하게 되니, 관자(管子)의 말이 또한 어찌 우리를 속이겠
습니까?
삼가 마음속으로 우리 왕조를 생각해보면 도학(道學)을 존중하고 숭상
하며, 인간의 기강을 세우는 것을 부식하며, 예의가 풍속이 되고 법이 자
세하고 명확해져, 위와 아래 수천 년 동안 함께 법을 만든 적이 없습니
다. 어찌하여 근래에 와서 나라의 기강이 이미 가라앉고 풍속도 아름답
지 못해 조정에 있는 위 사람들은 염치를 숭상하는 것을 볼 수가 없고,
서울에는 분수를 침해하는 습속이 많아졌으며, 쇠약해지고 나태해져 이
상한 일들이 계속 생깁니다. 군대에서는 가둔 죄수를 함부로 탈취하고,
관청의 노비가 관리를 구타하는 것이 매우 심합니다. 마땅히 조금이라도
분수와 의리가 있다면 이러한 무리들이 어찌 거리낌 없이 이와 같이 하
겠습니까?
5백 년 동안의 예의가 이와 같이 무너졌으니, 만약 고의(賈誼)9)가 오
늘의 모습을 보았다면 어찌 다만 한숨을 쉬고 눈물만 흘렸을 뿐이겠습니
까? 오호라! 병이 깊어 고질이 되어 진실로 하루아침에 곧바로 치료하기

9) 고의(賈誼):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의 문신으로 태부(太傅)에 올랐는데, 현실 타개


를 담은 치안책(治安策)과 과진론(過秦論)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1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어렵고 여러 처방을 쓸 수 없다고 앉아서 그 운명만을 기다리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기운과 운수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다고 하지 마시고, 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과단성 있게 정치를
하여 명확하게 법도와 기강을 펼치고 염치와 예의를 높이고, 옛날의 더
러워진 풍습을 모두 유신(維新)하게 하며 예로써 신하를 대우하고, 멀고
가까움을 구분하지 말고 법대로 일을 처리하며,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
지 말아 사람들을 모두 감복시킨다면, 나라의 법이 세워지고 백성의 마
음이 안정될 것입니다. 이 또한 전하께서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선발하여 군대의 규율을 명확하게 한다
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임금이 장수를 가려 선발하
지 않으면 적국에게 그 나라를 주는 것이고, 장수가 병사를 알지 못하면
적국에게 그 병사를 주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른바 나라의 큰 일이
여기에 달려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문관은 안일에 빠지고 무관은 기강이
해이해 있는데, 병인양요(丙寅洋擾)10)는 수백 년 만에 처음 생긴 사건이
었습니다. 그때는 서울이 텅 빈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하늘의 덕에 힘입
어 저들이 곧 물러가 다행히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정축(丁丑, 1877)11)년
일본인이 쳐들어 왔을 때에도 화친이 이루어져 물러갔기 때문에 오히려
한 번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각 나라가 강화(講和)하여
주둔하면서 통상(通商)을 벌이고 있는데, 만약 이 때에도 병사에게 일이
없다고 하여 장수될 만한 인재를 선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각 군영의 병사들에게 기예(技藝)를 가르치고 있으니 이에서 전하의
뜻이 매우 힘쓰고 있음을 볼 수가 있지만, 장수에 선발되어 직임을 맡은

10)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하여 강화 유수부를 점령


하고 외규장각의 문화재를 약탈한 침략행위를 한 사건을 말한다. 흥선대원군은 이
사건 뒤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세력의 배척운동을 벌였다.
11) 정축년(丁丑年):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맺고 난 다음해 일본 상인들과 외교
관들이 몰려와 통상활동과 외교활동을 벌인 일을 말한다.
취어(聚語) 13

사람들이 다만 대대로 무반 가문에서 차례로 천거되어 진출한 사람이므


로, 신은 과연 그들이 무예를 갖추고 병법 등 여러 책에 통달하였는지,
그리고 삶과 죽음, 권도(權道)와 정도(正道), 변화의 이치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군대의 기예는 장수의 통솔에서 비롯되지 않고, 다만
교육하는 군사의 지휘에만 좌우된다고 한다면, 옛날과 지금의 천하에 어
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약 오늘날 장수가 군율을 엄격하게 하여 잘 통솔했다면, 군대가 교
만하게 욕심만 탐하여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 어찌 이처럼 심해졌겠습니
까? 그러므로 신은 “장수는 있으되 병사가 없으면 혹 민정(民丁)으로 적
을 막아낼 방도가 되지만, 병사는 있으되 장수가 적임자가 아니면 스스
로 태워버려지는 폐단을 피할 수 없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오호라! 우리나라에는 장수가 될 만한 인재가 없어진 지 오래되어 장
수의 재목을 선발하는 것이 또한 어렵습니다. 선발하는 방법을 어찌 무신
중에서만 찾겠습니까? 충장공(忠壯公) 권율(權慄)과 충목공(忠穆公) 이정
암(李廷馣)12)은 문음(文蔭) 출신이었으나,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그들을
발탁하여 등용하였으므로 중흥의 대업을 이룩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
날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원래 인재가 넘치는 나
라로 일컬어졌는데, 다만 과거 시험으로만 선발하였기 때문에 재주가 있
는 인사들이 내려오는 습속에 얽매여 충분히 양성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뛰어나게 걸출하여 쓰임에 합당한 사람도 또한 없지 않았
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마음으로 진실하게 찾는다면 꿈속에서도 나타나고
밭을 갈고 낚시질을 하는 사람에서도 만날 수 있으니, 어찌 옛날에만 좋
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많은 신하 중에서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을 잘 선발하
여 군정(軍政)을 오로지 맡도록 하되, 그가 배운 것처럼 기강과 군율을

12) 권율(權慄)과 이정암(李廷馣)은 모두 문관출신으로 임진왜란 시기 도원수 등의 직책


을 맡아 군사활동을 벌이면서 나라에 큰 공로를 세웠다.
1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명확하게 하고 통솔을 엄격하게 하여, 항상 큰 적이 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응하게 합니다. 나라 안에서 뛰어난 인물을
구하는 것은 오직 나라에 큰 복이 될 것입니다. 또한 전하께서 살펴주시
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정도(正道)를 따르고 사설(邪說)을 배척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
니까? 하(夏)・은(殷)・주(周) 3대 이상은 말할 것도 없고,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공자께서는 춘추(春秋) 를 지어 후세의 난신적자(亂臣賊子)를
경계하였으며, 일찍이 이르기를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된다”라고 하였
습니다. 그 후에 양자(楊子)와 묵자(墨子)13)가 온 천하에 두루 퍼지자,
맹자는 말하기를 “양자와 묵자의 도가 끊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두
드러지지 못한다. 내가 어찌 논쟁을 좋아하여 이러하겠는가? 나는 부득
이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무릇 도는 하나일 뿐이다”라고 하
였으니, 옛날 성현들이 후세를 걱정함이 매우 컸습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에 오면 혹은 노장사상, 혹은 불교사상 때문에
1,400년 동안 참된 유학자도 없었고 훌륭한 치자도 없었는데, 송(宋)나라
의 덕이 매우 밝아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14)가 계속 나
와 경전과 끊어진 학문을 전승하여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였고,
주자(朱子)는 여러 성인의 글을 모아 절충한 이후에 도학이 온 천하에
밝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비록 기자(箕子)의 8조의 가르침
이 있었으나, 문헌으로 증명할 수가 없어 거의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성스러운 신령이 서로 계승되어 유현(儒賢)이 배출되
었으니, 이들이 업으로 한 것은 공자와 맹자의 도학이었고, 전한 것은 정
13) 양자와 묵자는 중국 고대 춘추전국시대 사상가인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말한다.
묵적은 겸애설(兼愛說), 양주는 자애설(自愛設)을 주장하였는데 유학자인 맹자는 이
들을 이단으로 몰았다.
14) 주돈이・정호・정이는 초기 성리학의 이론을 정립한 송나라 유학자들이다. 주돈이의
호는 염계(濂溪), 정호의 호는 명도(明道), 정이의 호는 이천(伊川)이었으며 뒤에 나
타난 주희(朱憙)와 함께 성리학을 일으킨 네 현인이라 부른다. 또 그들의 학문을 그
들의 출신지에 따라 염낙관민(濂洛關閩)의 학이라고도 부른다.
취어(聚語) 15

자와 주자의 학문이었습니다.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고 문물이 빛


나 번창하였으니, ‘소중화(小中華)’라는 칭송은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근래 이후에는 세상이 망하고 도가 희미해져 이교(異敎)가 서쪽에서
몰려 들어오고,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 속으로 달려 들어가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지난 해 겨울에
일종의 동학(東學)이 영・호남의 사이에서 일어나 이것이 번성하여 무리
를 이루었고, 그 가르침을 널리 알리니, 관찰사와 장수들이 금단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달에는 그 무리들이 수 십 년 전에 처형을 당한 최제우(崔濟愚)의
일로써 우두머리의 원통함을 풀어준다고 하면서 임금이 가까이 계신 곳
에서 방자하게 상소[伏閤]15)를 올렸습니다. 만약 그 죄를 논한다면 처벌
을 하여도 오히려 가볍지만 한 번 타이르자 모두 물러갔으니, 이것은 성
덕의 교화가 미친 것이며, 이단을 물리치는 방책은 바른 것[道]을 어떻게
지키는지에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유학의 풍토를 크게 떨치고 선비의
기상을 권장하여 교화를 일으키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신은 저 무리들이 날마다 성하고 달마다 번성해진다고 들었는데, 이는
수령들의 탐욕과 학대가 매우 심해 백성들이 살아 갈 수가 없음이며, 그
무리들 속으로 들어가면 돈과 곡식을 주고 너와 내가 없이 행동한다고
합니다. 저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마음이 상한 것을 슬퍼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어찌 백성이 변해서 벌레와 뱀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번 학문을 일으키는 일로써 내리신 열 줄의 조칙은
정녕 거듭 반복되어 임금의 바른 뜻이 있도록 하셨으니, 신은 매우 우러
러 흠모할 따름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진실로 바른 것[道]을 지키는데 힘을 쓰는 것이 단지
문구에만 그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예(禮)로써 산림(山林)의 선비들 속에

15) 박인호 등 동학교도들이 사형 당한 교조 최제우를 신원(伸寃)해달라고 1893년 광화


문 앞에 모여 상소를 올린 사건을 말한다.
1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서· 도를 이끄는 사람을 불러들여 국자감의 임무에 제수하고, 바야흐로


초야에 있는 인재를 선발하여 성균관에 나와 날마다 글과 예를 배우게
함으로써 나아가 마음을 닦았다는 말이 있도록 하며, 날마다 글의 뜻을
강론하여 도학의 근원을 선택하도록 하며, 또한 군현의 향교를 모두 육
성한다면 선비들의 기상을 다시 떨칠 수 있어, 다만 보고 듣기에만 좋은
것이 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또한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뇌물을 탐하는 아전 몇 사람을 팽형(烹
刑)16)시키고 곤장을 치거나 가둠으로써 하나를 벌하여 백 사람에게 권장
하는 방도로[一罰百戒] 삼으시고, 관찰사를 엄하게 훈계하여 공적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내쫓아 백성들을 따르게 하고 보호하여 그들을 편안히 기
거하게 한다면 떠나고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을 수 있고, 이단에 빠졌
던 사람들도 바른 길로 향하게 할 수 있어 백성들의 풍속을 크게 변화시
키는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무릇 이와 같이 한다면 정학(正學)은 날마다
일어나게 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되어 사설은 자연스럽게 깨닫지 못하
는 사이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전하께서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상의 7가지 조항은 알기 쉽지만 뜻은 원대하고, 말은 간단하더라도
이치는 매우 지극하니, 사람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버리지 마시고, 반드시
스스로 전하의 마음을 단호하게 결심하여 몸소 먼저 그것들을 행하시고
시행하는 조치들이 뜻대로 된다면 실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서울 각 관청과 각 도・읍이 백성의 폐막을 취사선택하여 그대로 두
거나 없애는 것은 주관하는 신하의 일과 관련되므로, 그 누가 감히 왕명
을 잘 받들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100무(畝)의 토지와 10칸의 집을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게 물려받았다면, 그 자손이 된 사람은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우며, 검소하

16) 팽형(烹刑): 중국 고대에서는 뇌물을 받은 부정한 관리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큰


길에 솥을 걸어 넣고 삶아 죽이는 형벌을 가했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흉내 내 삶아
죽이는 시늉을 하고 탐관오리를 경계하는 의식을 치렀다.
취어(聚語) 17

게 먹고 절제가 있도록 사용하여, 항상 혹시라도 선대의 업적을 땅에 떨


어뜨릴까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우리 전하께서는 5백년 종묘사직과 3천
리 강토로 선왕들의 간절하고 큰 업적에 부응하신다면,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신성하고 아름다운 성심을 맞이하고 이어가는 것이 어떠하겠
습니까?
하물며 성상께서는 총명하시고 특별히 통달하고 뛰어나시어서 큰 뜻을
분발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도모하여 이룰 수 있는데, 지금 나라의 형세
가 계속 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진실로 성상의 마음이 크고
공평하지 못하시고, 보필하고 도와주는 인재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
다. 신은 그득히 절통합니다.
옛날에 이윤(伊尹)17)이 태갑(太甲)18)에게 말하기를 “오직 하늘은 친하
게 하는 것이 없고, 잘 공경하는 것에만 오직 친하며, 백성의 나라에는
항상 마음속에 품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어진 것이 있어야 품을 수 있으
며, 귀신은 항상 음향하지 않는데 능히 걱정스럽게 음향하게 하여야만
하니, 하늘과 같은 자리는 어려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도 이 태갑과 같이 하루아침에 뉘우치고 깨달아서 능히
공경하고 능히 어질며 능히 정성스럽게 한다면, 하늘이 친하지 않고 백
성이 따르지 않으며 귀신이 음향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이 친하게 하고
백성이 따르고 귀신이 음향한다면, 또한 어찌 억만 년 동안 끝없는 아름
다움을 걱정하겠습니까? 만약 바로 눈앞의 국가 계책으로도 손을 쓸 수
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근래에 모르는 사이 생겨난 근심거리가 도시와 시골이 모두 같은데,
칙서와 교서가 여러 차례 내려갔는데도 징계하여 그치지 않은 것이 오래

17) 이윤(伊尹): 은나라 전설상의 인물로 탕왕을 도와 하나라의 걸왕을 멸망시키고 선정


을 베푼 인물이다.
18) 태갑(太甲): 은나라 2대 임금 태종의 이름으로 그는 즉위하여 3년 동안 포악하고 방
탕하여 이윤에게 추방되었다가, 3년 후 개과천선하여 다시 돌아와 선정을 베풀었다
고 한다.
1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되었습니다. 지난겨울 포도청 장수를 임명한 이후에 서울의 도적들이 모
두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지방의 화적(火賊) 또한 모두 자취를 감추었으
니, 인재를 얻은 효과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나라를 위하는 것 또한 어
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상소를 의정부에 내려 보내어 모든
조치를 시행하도록 하나같이 신의 말과 같게 하시고, 만약 3년 안에 성
과가 없다면 전하를 속인 죄로 처벌하여 망령된 말을 일삼는 사람을 경
계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절실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천만 번 매우 간절히 기원
합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 상소를 올립니다.

보은 관아에 통고 [報恩官衙 通告]

1893년(癸巳) 3월 11일 동학인이 삼문 밖에 방문을 세움

대개 사람의 일에는 3가지 어려운 것이 있는데, 절개를 세워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신하로서 어려운 일이고, 힘을 다해 정성
으로 효도하여 어버이를 섬기다가 죽는 것은 자식으로서 어려운 일이며,
정절을 지켜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은 아내로서 어려
운 일입니다.
태어나고 죽음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당연한 것이고, 일이 있고 없는
것은 때[時]가 정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일이 없이 편안한 때에 살면서
충성과 효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일이 생겨 재앙과 어지
러운 때에 살면서 충성과 효도를 다하다가 죽는 것은 바로 신하와 자식
으로서 어려우면서도 쉬우며 쉽고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삶의 즐거움만
을 생각하는 사람은 임금과 부모의 어려운 일로 죽으려 하지 않고, 죽을
마음이 있는 사람은 임금과 부모의 어려운 일에 죽기를 즐거워할 것이
니, 죽음을 주저하는 사람은 신하와 자식의 의리를 이룰 수 없고, 죽기를
취어(聚語) 19

즐겁게 여기는 사람은 충성과 효도의 절개를 세울 수 있습니다.


지금 왜(倭)와 서양이라는 적이 마음속에 들어와 큰 혼란이 극에 달하
였습니다. 진실로 오늘날 나라의 도읍지를 살펴보면 마침내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어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임진왜란의 원수와 병인양요의
수치를 어찌 차마 말할 수가 있으며, 어찌 차마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동방 삼천리강토는 모두 짐승의 자취로 가득하고, 5백년 종
묘사직은 장차 기장밭19)이 될 것이니, 인(仁)・의(義)・예(禮)・지(智)와 효
(孝)・제(悌)・충(忠)・신(信)은 지금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하물며 왜적은
도리어 원한의 마음을 품고 재앙이 될 빌미를 숨겼다가 그 독기를 뿜어
내고 있어, 위급함이 아침저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태연하
게 생각하여 편안하다고 말하니, 지금의 형세는 어찌 불이 붙은 장작더
미 위에 앉아 있는 것과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저희들은 비록 초야에 있는 어리석은 백성이지만, 그래도 선왕의 법을
따르면서 임금의 땅을 경작하고 부모를 봉양하며 살고 있으니, 신하와
백성을 구분하여 귀하고 천한 것에는 비록 차이가 있더라도 어찌 충성하
고 효도하는 것에 다름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미약한 충성이나마 나라에
바치고자 하나 위에 알릴 길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임금께서는 세력이 있는 집안의 훌륭한 인재로서 길
이 국록(國祿)을 보전하여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근심이 임금을 사랑하
고 나라에 충성하는 정성에 있다는 것은 저희들과 비교할 수가 없을 것
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큰 집이 장차 기울어지면 하나의 기둥으로는 지탱할
수 없고, 큰 풍랑이 장차 일어나면 하나의 조각배로 맞서기 어렵다”라고
하였으니, 저희들 수만 명은 함께 죽기를 맹세하여 왜와 서양을 제거하
고 격파하여 큰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를 다하고자 합니다. 삼가 원하건

19) 서직(黍稷) 또는 서리지탄(黍離之歎): 나라가 망하고 종묘와 궁전이 없어져 그 터가


모두 기장밭이 된다는 탄식으로 곧 세상의 영고성쇠가 무상하다는 것을 말한다.
2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대· 각하께서는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충의정신이 있는 선비와 관리


를 모집하여 함께 국가의 소원을 돕도록 하십시오. 천번 만번 기원하고
간절히 바랍니다.
1893년 2월 초 10일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동학창의유생(東學倡
義儒生) 등이 여러 번 절하고 글을 올립니다.

1893년 3월 12일 [癸巳 三月十二日]

순영(巡營, 감영)과 병영에 매일 보고하는 문서[巡兵營 課日 報牒章]

동학의 무리들이 괘서(掛書) 한 것을 즉시 보고합니다.

3월 13일 탐지하여 14일 보고함 [十三日探知 十四日發報]

이날부터 여러 지역의 동학인(東學人)들이 보은군(報恩郡) 속리면(俗離


面) 장내리(帳內里) 지역에 모여, 낮에는 마을 뒤쪽 냇가에 진을 치고,
밤에는 마을 민가와 부근 마을에 머무르면서 숙박을 하였는데, 날마다
모여드는 사람들이 계속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3월 15일 탐지하여 16일 보고함 [十五日探知 十六日發報]

여러 날 계속 머물면서 끝내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니 참으로 놀랍습


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공형(公兄) 등을 보내어 묻게 하였습니다. 공형이
묻기를 “지금 이렇게 모인 일은 모두 괘서(掛書)에 쓰인 글로서 알겠는
데, 어찌하여 이같이 작은 읍의 쇠잔한 마을에 모이게 되었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이 마을에는 옛날부터 사람들이 통행하는 길이 있어 각 지
역의 동학의 무리들이 모이기에 편리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취어(聚語) 21

또한 “어찌하여 이토록 여러 날을 머무는가? 산골의 어리석은 백성들


이 소문을 듣고 서로 이동하니 농사일이 시작되는 계절이어서 참으로 걱
정스럽고, 흉년으로 봄의 기근이 심해 곡식의 가격이 매우 비싸게 오르
게 되어, 지난 달 25일 장날 이후 시장의 곡식이 귀하여 돈이 있어도 구
입할 수가 없어 백성들이 황급해하고, 수령[官司主]이 밤낮으로 걱정하여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불안한 때에 이 같은 집회 때문에
약간의 곡식마저 모두 이곳에 수송되어 처음부터 시장에는 나오지 않게
하였으니, 백성들의 마음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마을로 말한다
면 저들이 폐를 끼쳐 심하게 논밭을 짓밟은 지경에 이르렀고, 본 읍이
그 피해를 매우 많이 입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어느 날에 이들이 흩어
지고 돌아가 백성들의 마음을 편하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습니다.
대답하기를 “각 도의 유생들이 일제히 모이지 못하고 계속 끊임없이
오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각자 흩어져 돌아갈 날짜를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모두 모이는 것을 기다렸다가 돌려보내야 할 것인
데, 먼저 본 읍에 알려 이렇게 자세히 보고합니다. 백성들의 사정은 도회
소(都會所)20)로부터 경내 각 마을에 통문으로 타일러 그들이 편안하게 살
면서 농사를 짓도록 하겠고, 곡식 또한 시장에 내다 팔게 할 것입니다. 다
시는 염려하지 마시고, 다만 다음 장날에 살펴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3월 17일 [十七日]

하루 종일 비가 내렸는데, 비가 오는 것을 무릅쓰고 사람을 보내어 탐


문해 보니, 각각 거주하는 마을에는 별도로 탐문하여 보고할 사항이 없
으므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20) 도회소(都會所): 동학교도들이 대규모의 집회를 벌이는 곳을 부르는 호칭으로, 포접


(包接)의 조직 단위와는 구분된다.
2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18일 탐지하여 19일 보고함 [十八日探知 十九日發報]


3월

별도로 사람들을 보내어 계속 동정을 살펴보았는데, 매일 2・300여 명


이 계속 끊임없이 모여들어 모인 전체 수를 알 수 없습니다. 산 아래의
평지에 돌로 성을 쌓았는데, 길이는 100여 보(步)에 넓이도 100여 보이
며, 높이는 다섯 자 정도가 됩니다. 사방으로 문을 만들어 낮에는 그 안
에서 거처하면서 깃발을 세우고 행오(行伍)를 정돈하였고, 밤에는 장내리
와 부근의 각 마을에 나가서 잠을 자곤 하였습니다. 돌아갈 날이 언제인
지 알 수 없어 매우 괴이하고 의아스러워 보고합니다.

3월 20일 탐지하여 21일 보고함 [二十探知 十一日發報]

계속 별도로 사람을 보내 자세히 탐문하니, 또한 각각 깃발마다 칭호


가 있는데, 큰 깃발은 “왜와 서양을 물리치기 위해 창의하였다[斥倭洋倡
義]”라고 하였고, 다섯 가지 색깔의 깃발을 각각 다섯 방위에 세웠으며,
깃발의 모양은 작습니다. 중앙에 세운 깃발에는 충의(忠義)・선의(善義)・
상공(尙功)・청의(淸義)・수의(水義)・광의(廣義)・홍경(洪慶)・청의(靑義)・광
의(光義)・경의(慶義)・함의(咸義)・죽의(竹義)・진의(振義)・옥의(沃義)・무경
(茂慶)・용의(龍義)・양의(楊義)・황풍(黃豊)・금의(金義)・충암(忠岩)・강경(江
慶)이라고 썼고, 그 나머지 작은 깃발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돌로 쌓은 담장은 그전 모양과 같고, 사람의 수는 약 2만여 명을 헤아
리는데, 성 안에 있는 사람은 1만여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사람마다 한 푼의 돈을 거두는데 합해서 230여 냥이 된다”라고 하
는데, 믿을 수 없습니다. 저들의 통문(通文)에는 “혹시 창의소(倡義所)를
빙자하여 부민(富民)들에게 돈이나 곡식을 빼앗는 사람은 마을에서 결박
하여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전라도의 도회(都會)가 이번 달 22일에 도착한다”라고 합니다. 우두머
리는 최시영(崔時榮)이고, 다음 순위의 지도자[次座]는 서병학(徐丙學)・이
취어(聚語) 23

국빈(李國彬)・손병희(孫丙喜)・손사문(孫士文)・강기(姜奇)・신가(申哥)이
며21), 경기도・강원도・충청도・경상도의 접장(接長)은 황하일(黃河一)・서일
해(徐一海)22)이며, 전라도 접장과 운량도감(運糧都監)은 이름을 알 수가
없는 전도사(全都事)23)입니다.

3월 22일 탐지하여 23일 보고함 [二十二日探知 二十三日發報]

군수(郡守)께서 동학인들이 주둔한 진영에 가서 질문하기를 “이번 이


도회소(都會所)를 창의(倡義)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동학을 금지하고 단속하라는 일을 조정의 칙령과 감영의
공문으로 여러 차례 엄중하게 보냈는데, 일제히 돌려보내지 않고 무리들
을 불러 모아 이러한 도회를 거행한 것은 진실로 조정의 칙서를 완강하
게 거부하는 것이고, 큰 변괴와 관련된 것이니, 각각 뉘우치고 깨달아 즉
시 해산하여 스스로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대답하기를 “창의한 것은 결코 다른 이유는 없고, 오로지 왜와
서양을 배척하기 위한 의리이니, 비록 순영(巡營)의 칙령과 주관(主官, 보
은수령)의 설득이 있어도 중단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동학은 처음부터
사술(邪術)이 아니며, 설령 사술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임금이 치욕을
당하여 신하가 죽어야 하는 자리라면 충절과 의리는 하나이니, 각지의 유
생들이 같은 마음과 뜻으로 죽기를 맹세하고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21) 최시영은 최시형(崔時亨)을 말하며 서병학의 학은 학(鶴), 손병희의 병(丙)은 병(秉),


희(喜)는 희(熙)인데, 이즈음 관변에서는 이들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
하였기 때문에 이름 글자를 오기하고 있었다.
22) 서일해(徐一海): 최시형과 쌍벽을 이룬다는 교단 지도자인 서장옥(徐璋玉)의 별호이
다. 서장옥은 뒤에 남접의 전봉준 등을 지도하였다고 전한다.
23) 전도사(全都事): 도사는 관직이름으로 보아야 하므로 도사 직함을 가진 전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사람을 두고 전봉준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2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동학인이 쓴 방문상 [東學人榜]

무릇 왜와 서양이 짐승같이 천하다는 것은 우리나라 삼천리에서는 비록


작은 어린아이라도 그것을 모르지 않아 경계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어
찌하여 순상(巡相, 감사)과 같이 나이가 많고 성숙하며 명석하게 살피는
분이 도리어 왜(倭)와 서양을 배척하는 우리들을 사악한 무리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들이 짐승같이 천한 자들에게 굴복하는 것이 바른 무리이겠
는가? 왜와 서양을 공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두어 처벌한다면 화의를 주
장하고[主和] 나라를 팔아먹는 자들은 높이 상을 주어야 하는가?
오호라. 애통하도다! 운명인가? 천명인가? 어찌 우리 순상과 같은 명
석함으로도 이같이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함이 심한가? 이 통문을 거리에
게시하는 것은 혹시 미혹된 자들이 왜와 서양에 신하노릇 하면서 관(官)
의 명령에 순종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3월 23일 [二十三日]

군수께서 도회소에 달려가서 질문하기를 “의(義)를 주창한다고 이름을


내세우면서 조정의 칙령이 여러 차례 엄중하게 내려졌는데도 한결같이
돌아가지 않고 무리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이렇게 하고도 의를 주창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흉년으로 봄 기근이 심한 때에 민심을 선동하
여 서울과 지방에서 소동을 일으켜 임금께 걱정을 끼치니, 신하와 백성
의 도리에 어찌 황공하고 비통하지 않겠는가? ‘의(義)’라는 한 글자는 과
연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황공하고 비통함이 매우
큰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마음을 위로 전할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이 거사는 오로지 왜와 서양을 공격하여 충성을
다해 나라를 돕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묻기를 “너희들은 어떠한 재능이 있어서 왜와 서양을 물리칠 수
취어(聚語) 25

있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우리의 도(道)는 바로 궁을(弓乙)24)의 도(道)


인데, 보통 사람들은 알 수가 없으니, 어찌 긴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
말 할 것 없이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므로 이와 같이 모인 것입니
다. 우리의 도중(道中)에는 작은 어린아이도 왜와 서양을 배척한다는 말
을 들으면 흔쾌히 따르지 않음이 없습니다. 8도에서 우리 도에 들어온
사람이 몇 백만 명인지 모릅니다. 그 중에서 사대부의 집도 몇 만 명이
되고, 관리들 또한 몇 천 명이 됩니다.
순영(巡營)의 칙령과 주관의 설득도 그것을 사악한 술수로 몰아붙이지
만, 설령 사악한 술수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임금을 모욕하여 신하가 죽어
야 하는 자리라면 충절과 의리는 하나입니다. 각지의 유생들이 같은 마음
과 뜻으로 죽기를 맹세하고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어찌 감영의 칙령과
주관의 설득으로 중단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백성들이 모두 수렁에 떨
어지게 된 것은 관찰사와 수령들의 탐욕과 학대가 무도(無道)하고, 권세
가와 부호들이 무력으로 억압하여 절제가 없어 도탄의 지경에 이르게 되
었습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깨끗하게 소탕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에 나라
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3월 24일 보고함 [二十四日發報]

성담[城堞]과 깃발의 호칭[旗號]은 그전과 같지만, 사람의 수는 22일에


비하여 300여 명이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망기(望旗)25)는 북산(北山)과
남산(南山)에 있고, 한 층 아래에도 망기(望旗)를 설치하였으며, 깃발 아

24) 궁을(弓乙): 동학・천도교에서 영부(靈符)의 모양을 형상화 한 것으로 동학의 본질인


천심(天心)의 심(心)자를 표현한 것이다. 영부의 모양이 태극 같기도 하고, 활 궁(弓)
자를 나란하게 놓은 것 같기도 한데서 유래하였다.
25) 망기(望旗): 적의 동정을 살펴 알려주는 깃발로써 높은 곳이나 요충지에서 초병이
여러 색깔의 신호기를 들고 적이 가까이 오는 거리와 규모를 알려준다.
2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있는 사람이 거의 40∼50명 정도가 되는데, 각각 동학의 주문을 외


래에
우면서 성안으로 몰려 들어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청산(靑山)에서
온 동학 무리들이 북쪽 성 바깥쪽 몇 십 보의 자리에 배치되었고, 장난
치던 사람들도 전보다 배나 엄격하게 차단하며, 두목이 아침저녁으로 머
물던 집과 성의 땅을 출입할 때에는 무리들을 좌우에 나열시켜 에워싼
채 왕래하고 있습니다.

동학인이 내린 명령 [東學人令]

1893년 3월 16일 [癸巳 三月十六日]

지금 이렇듯 왜와 서양을 배척하는 의리는 충성과 의기가 있는 선비와


백성[士民]이라면 누가 감히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비록 충성과 의리는
같더라도 도인(道人)과 속인(俗人)은 아주 달라 뒤섞여 함께 앉아 있을
수 없으니, 각각 좌석을 나누어서 활발하게 거사할 것을 의논해야 하며,
그밖에 우매하고 지각없이 다만 농사일을 하는 사람은 농업에 힘쓰는 것
이 옳다. 오로지 놀면서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다가 갑자기 큰일을 포기
하겠는가? 이와 같이 삼갈 것을 명령한 이후에도 한결같이 따르지 않는
사람은 마땅히 군율로 다스리고, 게시한 글을 명확히 살펴 시행하는 것
을 위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통문을 보내는 것은 무릇 사람의 도(道)가 중(中)에 위치하여 천시
(天時)를 받들고 땅의 이치에 순응함으로써 위를 섬기고 아래를 기르라
는 것이다. 자식 된 사람은 힘을 다해 어버이를 섬기고, 신하가 된 사람
은 절개를 세워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야말로 인륜(人倫)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
무릇 우리 동방(東方)은 비록 바닷가 한쪽에 치우쳐 있지만 천하의 동
쪽인지라. 단군이 나라를 세운 때부터 기자(箕子)가 제후에 봉해질 때까
지 천시(天時)의 정함과 인륜의 순서가 스스로 바꾸지 못할 규범이 있었
취어(聚語) 27

다. 성스러운 임금과 현명한 신하들이 사이사이 이어져 나와 전장(典章)・


법도(法道)・예악(禮樂)・교화(敎化)가 빛나고 밝음이 천하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인륜이 가장 밝게 더욱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중년 이래 천하가 크게 어지럽게 되어 기강이 무너져 해이해
지고, 법이 문란해져 오랑캐들이 중국을 침범하여 능욕하며, 우리 동방까
지 침범하여 두루 멋대로 횡행하여도 그것을 태연하게 듣고 항상 있는
일인 것처럼 여겨 그 끝이 국가에 미칠 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성인
(聖人)이 이를 걱정하여 큰 도리를 가르침에 우리 도인(道人)이 한 마음
으로 지킨 것이 여러 해가 되었다.
충과 효를 행할 곳에 뜻을 세워 죽기로 맹세한 것이 변하지 않고, 가정
을 정돈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으로 책무에 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다. 하물며 왜적은 해와 달을 함께 할 수 없고 하늘과 땅을 함
께 일 수 없는 원수인데, 짐승과 같은 무리에게 심한 모욕을 당하고 있으
니 또한 차마 무슨 말을 하겠는가? 바야흐로 지금 나라의 형편은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은 위급한 상황인데 아직도 그 해법을 모르고 있으니 나
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비록 시골에 있는 백성이지만 선왕의 녹봉을 물려받아 선조들
을 보전하고, 임금의 토지를 경작하여 부모를 봉양하고 있으니 신하와 백
성이 구분되어 직업은 비록 다르지만 의리는 한 가지이다. 어찌 뜻을 같
이하여 죽음을 맹세하는 의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지금 하늘[皇天]이 진
실로 더러운 기운을 싫어하여 끝없는 조화를 부리시니, 참으로 뜻이 있는
선비와 사나이들이 절개를 세우고 의리를 세울 때이다.
조생(祖生)26)이 노를 두드리고 범공(范公)27)이 말의 고삐를 잡던 일에
는 장엄한 뜻이 있었고, 문산(文山)28)이 하늘을 떠받치고 육부(陸夫)29)가

26) 남조 때의 조적(祖逖)을 가리킨다.


27) 한나라의 범방(范滂)을 말한다.
28) 송나라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을 말한다.
2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받드는 것은 풍치와 품격이 이미 뛰어난 것이며, 양공(襄公)의 원한


해를
과 연(燕)나라 소왕(昭王)의 수치심을 보복하는 것은 한정(限定)이 있으니,
때가 왔네[時乎時乎]! 때가 왔어[時哉時哉]!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순수한
덕과 인자한 너그러움으로 모든 사무를 살펴보시는데, 안으로는 현명하고
어질게 보좌하는 신하가 없고, 밖으로는 뛰어나고 용감한 장수가 없어, 밖
으로 적들이 틈을 타서 기회를 엿보며 아침저녁으로 위협하고 있다.
삼가 원하건대 여러 도인과 선비들은 한 마음으로 뜻을 같이하여 요망
한 기운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종묘사직을 극복하여 다시 빛나는 해와
달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어찌 선비와 군자들이 충성을 하고 효도를
하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어질다[仁]는 것은 낳아서 기르는 봄날과 같고,
의롭다[義]는 것은 거두어서 저장하는 가을과 같다. 지혜롭고 어진 것[智
仁]이 비록 좋은 덕이기는 하지만 용기가 아니면 도달할 수 없으니, 삼
가 원하건대 여러 군자들은 본연의 의리와 기개에 힘써 이 나라에 큰 충
성과 큰 공적을 세운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양호도어사 어윤중이 보낸 효유문 [兩湖都御史 魚允中 曉諭文]

3월 23일 [三月二十三日]

뜻밖에 양호(兩湖)에서 동학의 무리들이 집회를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것을 걱정하여 혹시 백성들이 선동하는 유언비어에 빠질 것을 염려하
여 특별히 미련한 나를 파견하여 도어사(都御史)로 삼아 어루만지고 위
로하도록 하였다. 오호라! 우리 온 나라의 백성들은 누구인들 조종(祖宗)
의 백성이 아니며,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대대로 배출한 문벌이 아니
어서 지금 이러한 거사를 하겠는가? 이미 의리를 주창한다고 했으면 당
연히 의리가 있어야 할 곳을 알아야 하는데, 이와 같이 거사한 것은 과

29) 송나라의 충신인 육수부(陸秀夫)를 말한다.


취어(聚語) 29

연 어떠한 의리에 근거한 것인가? 마땅히 몸소 직접 설득해야겠지만 먼


저 이렇게 타일러 훈계하는 글을 게시하니, 모든 동학의 무리를 따르는
몰지각한 자들을 먼저 즉시 해산시켜 돌려보내 저마다 생업을 안정시키
고, 그 중에서도 두령(頭領)이 되어 조금이라도 사리를 헤아릴 줄 아는
자는 진실로 사정과 이유를 갖춰 직접 나를 만나 깨우치도록 하라.

3월 24일 탐지하여 25일 보고함 [二十四日探知 二十五日發報]

3월 24일에 비가 많이 내려 성 안에는 처음으로 진을 설치하지 못하


였다. 몰래 동정을 살펴보았는데, 도회소에서는 성찰(省察) 등을 시켜 각
접(接)의 무리들에게 널리 알리기를 “내일 읍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
어온다고 하니, 만약 놀라고 겁이 나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돌아가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그대로 있도록 하라. 비록 천만 명의 군대가 무기를
가지고 오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방어할 수 있는 계책이 있으니, 각 접은
이를 잘 알도록 하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각 접(接)에는 몽둥이를
만들어 쌓아놓았다는 말이 있는데, 도소(都所)가 엄하게 질책하여 금지시
켰다고 합니다.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고 한 것은 저들이 스스로 의심하
여 유언비어를 만든 것입니다. 그 날 전주(全州) 사람 30여 명이 또 도
착하였다고 합니다.

3월 26일 도어사와 함께 직접 가서 효유하고 같은 날 보고함 [二十六日


與都御史親徃曉諭 同日 發報]

도어사가 여러 동학의 무리들을 불러 의리로 타이르고 화복으로 깨우


치니, 저들이 모두 감동하여 답하기를 “합하(閤下)께서 직접 임금님의 말
씀을 알리시니 어찌 감히 이를 받들어 시행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만약 감
3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히· 화를 즐겨 의리를 취하지 않음을 개진하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


는 의로움을 임금께 알려주셔서 마땅히 명확한 임금의 뜻을 받아본 후에
흩어져 고향 마을로 돌아가겠습니다. 오직 원컨대 합하께서는 글을 잘
작성하여 임금께 아뢰시어 수만 명의 생명을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고 합니다. 이러한 뜻으로 장계를 다듬어 즉시 발송합니다. 읍에서 아뢴
초본(草本) 및 문서와 제사(題辭)를 베껴 쓴 후에 빨리 보고하였습니다.

칙서로 타이르고 깨우치는 글 [飭諭文]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근래 이른바 동학의 무리들이 서로 불러 모으


고 선동하여 속이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니, 지난 번 방자하게 궁궐
앞에서 소리치며 소란을 피운 것도 이미 거리낌 없는 행동이었는데, 배
운 것은 어떤 글이고 모인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설령 충성스러운 마
음을 드러내어 억울함을 풀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각각 목사와 수령과
관찰사가 있는데, 어찌 사실에 근거하여 이유를 조정에 보고하지 아니하
고, 이같이 사람들을 부르고 유인하여 무리를 지어 온 마을에 서로 선동
하여 시끄럽게 거짓말을 퍼뜨리는가? 지난 번 타이르고 설득한 후에는
경계하여 삼가하고 두려워하여 움츠리는 것이 당연한데도, 오히려 다시
가끔씩 호서와 호남의 사이 지역에 주둔하여 행적이 이치에 어긋나고 위
세를 헛되이 펼치고 있으니, 만약 사악한 무리가 재앙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우매한 백성의 몰지각한 짓이다.
왕법이 있으니 어찌 조치하여 없애는 것이 어렵겠는가마는 모두 우리
의 적자이므로 그들을 교화한 다음에 처벌하는 것이 또한 어진 정치가
우선해야 하는 것이다. 경(卿)을 호서・호남의 도어사(都御史)에 임명하니,
오로지 그들이 모인 곳에 가서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의리
를 깨우쳐주어 각각 돌아가서 편안하게 생업에 힘쓰게 하라. 혹시 따르
지 않으면 이는 임금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경은 즉시 장계를 다듬어
취어(聚語) 31

마땅히 처리하여 조치를 취하는 방도가 있도록 하라. 경에게 마패 하나


를 내려줄 것이니, 이것은 오로지 바로잡으라는 뜻이다. 모두 잘 헤아리
도록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장계의 초고 [狀啓草]

3월 26일 [三月 二十六日]

신은 3월 18일 궁중에서 내려주신 봉서(封書)를 삼가 받았습니다. 봉


서에 이르기를 “이른바 동학의 무리들이 서로 불러 모으고 선동하여 속
이는 말로 현혹시켜 사람들을 부르고 유인하여 무리를 이루고, 온 마을
에 서로 선동하여 시끄럽게 거짓말을 퍼뜨리며, 아직도 다시 가끔씩 호
서와 호남의 사이에 주둔하여 행적이 상도(常道)에 어긋나고 성세를 헛
되이 벌이고 있다. 왕법이 있으니 어찌 조치하여 없애는 것이 어렵겠는
가마는 모두 우리의 적자이므로 교화한 다음에 처벌하는 것이 어진 정치
가 우선해야 하는 것이다. 경을 호서・호남의 도어사에 임명하니, 오로지
그들이 모인 곳에 가서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의리를 깨우
쳐주어 각각 돌아가서 편안하게 생업에 힘쓰게 하고, 혹시라도 따르지
않으면 이는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경은 즉시 장계를 다듬어
마땅히 처치하는 방도가 있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위대하시다. 임금의 말씀이여! 동물들도 감동시키고 나무와 돌도 알아
듣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 무리와 백성들이 어찌 공경하여 따
르지 않겠습니까? 신은 그날로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서 먼저 충청도 보
은군에 이르렀는데, 길에서 살피고 탐문하여 동학 무리의 소굴을 캐어보
니, 이 무리들이 뻗은 것은 이미 몇 해가 되었고, 이미 전국에 두루 번
져서 무리가 거의 수만 명이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오랑캐를 물리친다고
핑계하지만 속으로는 반란을 생각하는데, 실정이 괴이하고 비밀스러우며
무리들이 서로 거짓 선동의 말을 합니다.
3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신은 3월 26일 공주영장(公州營將) 이승원(李承遠)과 보은군수(報恩郡守)
이중익(李重益)과 순영의 군관(軍官) 이주덕(李周德)을 데리고 보은군 동쪽
15리 되는 속리면(俗離面) 장내리(帳內里) 앞 냇가의 동학 무리가 모인 곳
에 이르러, 전하의 뜻을 널리 알리고 설득하여 뜻을 따를 것인지 어길 것
인지 그 의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저들은 과연 장황하게 변명만을 늘어
놓다가 끝내는 해산한다고 알려온바, 그들이 보낸 문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저희들의 뜻은 마음을 합쳐 왜와 서양을 배척하여
국가를 위해 충성을 바치려고 한 것이거늘, 감사와 수령이 흉악한 무리
[匪類]로 대하면서 침범하여 약탈하고 학대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지
금 만약 갑자기 스스로 해산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흉악한 무리로 인식하
여 저희들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원하건대 이러한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여 현명한 전하의 뜻을 얻어 같은 백성으로 인정된다면,
삼가 마땅히 해산하여 생업에 힘쓰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머지 무리들을
흩어지게 하고 다시는 모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문서와 문답을 기록한 문안은 모두 올려 보냅니다. 문서는 보여준
후에 그 실상을 취하여 기록하려고 옮겨 베끼지 않고 직접 원래 상태의
제목에 수결하여 올려 보냅니다. 신의 위엄과 명망이 두드러지지 않아
즉시 해산시키지 못한 것이 황공하여 감히 아뢰오니, 오직 삼가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사실을 자세히 아룁니다.

보고문의 초고 문건 [文狀草件]

동학인의 글 [東學人文]

황공하오니 보아주십시오. 삼가 생각하건대 저희들은 선대 왕조부터


교화되고 길러진 백성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허물없는 창생이 도를
닦아 삼강오륜을 분명하게 알았고, 마음속에는 중화와 오랑캐를 분별하
였기에 왜와 서양이 짐승과 같다는 것은 비록 작은 어린아이라도 더불어
취어(聚語) 33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역사책에 이르기를 “오랑캐가 오랑캐를


공격하게 함은 중국의 장기(長技)이다”라고 했는데, 지금 조선 사람이 조
선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왜와 서양의 장기이니, 통곡하고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합하의 명석한 판단으로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그러한 즉 창의를 주창하여 왜와 서양을 배척하는 것이 무슨 큰 죄가
되기에 한편으로는 잡아 가두고 한편으로는 제거하려고 하십니까? 천지
와 귀신이라도 거울로 삼지 않을 수 없고, 길거리의 아이와 달리는 병졸
이라도 또한 옳고 그름을 알 것입니다. 순상은 미워하심이 너무 심하여
죄 없는 백성을 모두 도탄 속에 빠뜨리려고 하시니, 한 곳에서 함께 태
어나 어찌 이와 같이 잔인합니까? 또한 왜와 서양이 우리 임금을 협박
함이 끝이 없는데도 조정에서는 한 사람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니, 임금이 모욕을 당하면 신하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의리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어사이신 합하께서는 태산북두와 같은 명망으로 성스러운 임금의 명령
을 받들어 각 도의 선비들을 깨우쳐 설득하시니, 수만 명의 선비들이 모
두 목을 길게 빼고 바라는 것이 마치 큰 가뭄에 먹구름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일은 끝이 없고 의리를 보기는 어려운데, 단지 강하고
약한 형세로는 공격하기 어렵다고 말한다면, 천하의 오랜 세월에 누가
생명을 버리고 의리의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저희들은 비록 시골의 미천
한 자들이지만, 어찌 왜와 서양이 강한 도적이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여러 왕조에서 유학을 숭상하는 교화를 입었으므로 모두 말하기를 “왜와
서양을 공격하다가 죽는다면 죽는 것이 오히려 사는 것보다 현명하다”라
고 하였으니, 이것은 국가가 축하해야 할 일이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합하께서는 명석한 판단으로 이끌어 어리석고 충성스
러운 무리들이 의리를 구분하도록 깨우칠 수 있음을 임금께 아뢰어, 우
리 임금님이 밤늦도록 정사를 걱정하지 않도록 하고, 임금께서 답하신
것을 널리 알려 저희들이 의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열어주신다면,
3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감히 각각 돌아가서 편안하게 생업에 힘쓰지 않겠습니까? 함께 소


어찌
리 내어 합하께 하소연 하니 굽어 살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간절히 바
라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창의유생 허연(許延)・이중창(李重昌)・서병학(徐丙學)・이희인(李熙人)・송
병조(宋秉凞)・조재하(趙在夏)・이근풍(李根豊).

제(題):30) 너희 무리가 모인 뜻이 오랑캐를 물리치는데 있다고 하였는


데, 온 나라가 함께 할 의리이건만 어찌 스스로 하나의 깃발을 따로 세
우는가? 그러나 소장(訴狀) 중에서 위협한다고 운운한 것은 유언비어를
전해들은 것이니, 이미 깨우쳐주고 설득한 적이 있다. 마땅히 이런 사연
을 말한 연유를 갖추어 임금께 아뢰어 달라고 하면 위로 전달할 방도가
있을 것이니, 너희들은 또한 물러가서 편안하게 생업에 힘쓰겠다고 알리
도록 하라. 이와 같이 한다면 서로 편안하여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1893년(癸巳) 3월 26일 장내리에서

2월 복합상소 때 사알31)로 하여금 입으로 전함 [二月伏閤時 使司謁


口傳]

전교하신 내용 중에 “너희들이 스스로 물러가 있으면 당연히 편안하게


살도록 하겠다는 처분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감히 전하의 명
령을 어기지 못하고 다만 물러나 돌아가서 우리 임금의 훌륭한 덕이 크

30) 제(題): 제사(題辭)의 준말로 관청에서 공문서나 백성의 소장(訴狀) 청원서 등에 답


변할 때 끝 부분에 쓰는 말이다.
31) 사알(司謁): 복합 상소는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임금이 있는 궁궐 앞에 엎드려 소문
(疏文)을 직접 올리는 형식을 말한다. 소문을 올리는 사람이 때로는 임금의 마음을
거슬렸다면 도끼로 내리쳐달라는 뜻으로 멍석을 깔고 도끼를 들고서 호소하기도 한
다. 1893년 동학교도들은 경복궁이 있는 광화문 앞에서 상소운동을 벌였는데 임금의
사자인 사알이 연락을 맡아 전달하였다.
취어(聚語) 35

다는 것을 다시 볼 수 있어 서로 기뻐하였는데,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왜와 서양은 저희들이 화친을 배척한다는[斥和] 이유로 임금을 협박하여
동학인들을 소탕하도록 강제로 요청한다고 합니다. 창생이 도탄 속에서
통곡함은 오히려 애석함이 없지만, 신하와 백성의 잘못 때문에 오랑캐의
침략과 능멸을 당하게 되었는데, 임금께서 능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의리가 있으니, 어찌 감히 살고자 하여 의리를 저버리겠습니까?
이렇듯 대의를 주창하는 이유는 기어코 나쁜 기운을 제거하고자 함인
데, 각박한 풍속으로 모함을 하는 자들이 유언비어로 서로 선동하여 신하
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까지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것은 반드시 나라
안에서 서학(西學)을 하는 무리들이 만들어낸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위에서 비추어 주기 때문에 태양의 빛은 엎어놓은 그릇
아래에도 비출 수 있는 것입니다. 호서・호남에 도어사를 파견하여 사방에
서 모여든 의로운 선비들이 물러가도록 하겠다는 뜻을 널리 타일러 주십
시오. 저희들이 만약 오늘 임금의 명령으로 즉시 물러간다면 유언비어가
사실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가 원하건대
다시 의를 주창한 이유를 임금께 아뢰어 삼가 회답을 기다려서, 다시 저
희들이 몸을 보전할 수 있는 혜택[曲全之澤]32)을 입게 한다면, 비록 척화
하려는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감히 왕명에 항거하
여 물러가지 않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천만 번 간절하게 기원합니다.

3월 27일 탐지하여 즉시 보고함 [二十七日探知 卽發報]

즉시 도어사의 지시를 받아 아전을 보내어 타이르고 설득하면서 묻기


를 “이미 명령을 받들어 해산한다고 알려 놓고 어찌하여 물러가지 않으

32) 곡전지택(曲全之澤): 굽어서 아주 소용이 없는 나무는 어떤 사람도 베어가지 않아


온전할 수 있다는 뜻으로, 자기를 굽힘으로써 자기의 몸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다
는 노자(老子)의 가르침이다.
3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며·, 어찌하여 깃발을 뽑아버리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두는가?”하였더니,


대답하기를 “깃발은 마땅히 없애야 하겠지만 그 수가 많고 각 접들이 비
록 해산하여 돌아가더라도 표준을 세워 식별할 수 없으니, 마땅히 다시
등호(燈號)를 만든 후에 깃발의 번호를 제거하겠습니다. 오늘 우선 나머
지 무리 중에서 늙고 어린 사람부터 돌아가도록 하였음에도 각 고을에서
군사를 보내 가는 것을 막는 폐단이 있어 다시 돌아와 모여들고 있으니,
장차 임금의 회답을 기다려 모두 함께 돌아가겠다”라고 하였습니다.
3월 26일 술시(戌時, 오후 7∼9시) 쯤에 수원(水原)・용인(龍仁) 등의
지역에서 300여 명이 추후에 도착하였고, 27일 아침에는 호남의 영광(靈
光) 등의 지역에서 100여 명이 또한 도착하였는데, 전에 비해 그 수가
더해졌지 줄지 않았습니다.

28일 탐지하여 29일 보고함 [二十八日探知 二十九日發報]

3월 28일은 저 무리들이 이른바 휴식하는 날입니다. 처음에는 진을 치


거나 깃발을 세우지 않고 늙고 어린 사람들이 흩어져 돌아가다가 길이
막혀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저들의 무리 수백 명이 마을 뒷산에 올라
주위의 동태를 살펴보는 듯하다가 곧바로 내려왔습니다. 또한 수원접(水
原接)에 속한다는 사람은 겉으로는 1,000여 명이라 하지만, 사실은 600
∼700명에 불과하였는데, 즉시 장내리에서 3마장(馬場) 정도의 거리에
있는 장재들[壯才坪]에 가서 깃발을 세우고 진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3월 29일 탐지하여 30일 보고함 [二十九日探知 三十日發報]

인시 [寅時]

상주(尙州)와 선산(善山) 사람 100여 명과 태안(泰安) 사람 수십 명이


취어(聚語) 37

들어왔다고 합니다. 전과 같이 진을 설치한 후에 진중 안에 있는 아이와


노약자를 모두 내보내어 여러 곳의 집에 분산시켰고, 깃발은 모두 제거
하고서 왜와 서양을 배척한다는 글귀의 깃발만 세워 놓았지만, 달아맨
등불만 간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제 들어온 수원접의 사람들은 장재들
에서 장내리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 쯤에 광주(廣州) 사람 수 백 명이 돈
[錢] 네 바리를 실어 왔고, 또한 혹은 천안(天安)이라고도 하고, 혹은 직
산(稷山)과 덕산(德山)이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각각 돈을 수 십 냥씩을
지거나 메고 장내리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길가에는 쌀을 사는 사람들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3월 30일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보은군 장내리에 모여 있는 동학
인들을 정탐하였고, 여러 지역에서 장색(將色, 파수를 보는 담당군교)들
이 은밀하게 알려온 것을 모아 기록하여 보고합니다.
하나, 장내리를 정탐한 아전이 보고한 내용에는 “30일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비가 많이 내려 하천과 도랑이 넘쳤는데, 저들은 처음에는 진
을 치지 못하고 집에 흩어져 머물면서 다만 경(經)을 암송하고, 혹은 두
세 사람 혹은 서너 사람씩 밖으로 나갔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모두 기록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 적암(赤巖)에서 지키는 집강(執綱)33)과 장색(將色)이 보고한 내
용에는 “상주 강화일(姜化一)의 접 6명, 충청도・경상도의 접 3명, 공성
(公城)34)의 김맹현(金孟鉉) 등 7명, 김산(金山)35)의 김상수(金尙水)・최봉
비(崔鳳飛) 등이 차례대로 물러갔는데, 뜻밖에 안동접(安東接) 소속 40여
명이 흩어지던 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물러가라는

33) 집강(執綱): 여기에서의 집강은 동학농민군 조직의 집강 소임이 아니라 전통적 지방


조직으로 면리(面里)에 두고 마을의 교화와 풍속을 맡게 한 직책을 말한다.
34) 충청남도 공주(公州)를 가리킨다.
35) 경상북도 김천(金泉)을 가리킨다.
3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전령은 내가 모르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장색을 때려 상처를 입혔는데
도 막기가 어려웠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 9시에 장색이 보고한 내용에는 “성주(星州)・선산・김산・상주 등
지의 사람 36명 정도가 나갔고, 장수(長水)의 황병원(黃丙元) 등 130여
명과 영암(靈巖)・무안(務安)・순천(順天)・인동(仁同)・지례(知禮) 등지의 사
람 260여 명이 깃발 세 개를 세웠는데, 한 곳에는 ‘호수부의(湖水赴義)’
라고 글을 쓰고, 한 곳에는 ‘호장대의(湖長大義)’ 라고 쓰고, 다른 한 곳
에는 ‘호남수의(湖南水義)’ 라고 써서 차례대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을 타이르고 설득하자 저들은 도어사가 발급한 통행 증서를 내보이
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러한 이유를 알고 와서 기다리고 있으므로 임
금의 비답이 내려오면 되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 병원(幷院)의 장색이 보고한 내용에는 “공주(公州)・옥천(沃川)・
문의(文義) 등지 사람이 해산한 것이 15명이 되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
은 없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 원암(元巖)의 장색이 보고한 내용에는 “들어온 사람들이 있는 곳
마다 가서 하나 하나 만나 타이르고 설득하니 답하기를, “우리가 몇 백
리를 멀다고 생각하지 않고 왔는데, 어찌 허망하게 곧바로 되돌아가겠습
니까?”라고 하면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밀고 들어와서 장색과 동민(洞
民)의 힘으로는 막기 어려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4월 초 1일 신시 [四月 初一日 申時]

보은군 장내리에 동학인들이 집회를 개최한 일에 대하여 지난 달 28


일 해시(亥時, 오후 9∼11시) 쯤에 청주진(淸州鎭)36) 영장(營將)은 병영

36) 청주진(淸州鎭): 청주에는 충청병영을 두고 군사를 주둔시켜 충청도 일대의 방어임


무를 맡겼다. 1893년 새로 친군병인 진남영(鎭南營)을 전주의 무남영(武南營)과 함
께 설치하고 민요에 대비케 하였다. 청주진은 진남영, 병영은 충청병영을 말한다.
취어(聚語) 39

(兵營)의 군관과 함께 임금이 전보로 보낸 말씀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이 달 초 1일에는 도어사가 임금의 말씀을 받들고 청주진의 영장과 병영
의 군관, 그리고 보은군수를 데리고 달려와서 타이르고 설득하여 흩어지
게 하였으므로, 저들의 무리가 모두 감복하여 명령에 따라 3일 안에 물
러가겠다는 뜻으로 기한을 정해 보고하였습니다. 장계를 작성하여 차례
대로 베껴 보고할 것이며, 우선 임금의 윤음을 한 번 돌려보고 나서 베
껴 놓은 후에 보고합니다.

임금의 분부 [綸音]

임금께서 분부하시기를 “불쌍타, 많은 무리들아! 모두 나 한 사람의


말을 듣도록 하라. 우리 여러 선왕들의 성스러운 신령이 서로 이어져 큰
계획과 가르침이 매우 밝아서 윤리를 밝혀 사람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정학을 숭상하여 나라의 풍속을 오로지 바르게 하시니, 집집마다 수사
(洙泗)37)의 가르침을 따르고, 사람마다 낙민(洛閩)38)의 글을 암송하며,
충효와 정렬(貞烈)을 대대로 전하고, 사・농・공・상으로 각각 생업을 편안
하게 안정시켜 온 것이 지금까지 500여 년이 넘었도다.
나처럼 우매한 사람이 대를 이어 왕위에 올라 아침저녁으로 다만 두려
워하면서 돈독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베푼 것이 오직 이 뿐이다. 무릇 어
찌 세상의 풍속이 땅에 떨어져 변하고, 망령되고 거짓된 무리들이 우리
의 세상을 속여 미혹하게 하며, 우리의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
를 매우 빨리 하면서 깨우쳐주지를 않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물며 또한 너희들은 감히 돌을 쌓아 진영을 만들고, 당간에 깃발을

37) 수사(洙泗):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라는 강의 이름인데, 공자가 이 근처에서 제자들


에게 도를 가르쳤으므로 공자의 문하라는 뜻이다.
38) 낙민(洛閩):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는 낙양(洛陽) 사람이고, 주희는 민중(閩中)이므
로 이 두 학파인 정주(程朱)의 학문을 말한다.
4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만들어 걸고서, 의(義)를 주창한다고 일컬으면서 글을 써서 방을 붙여 사
람들의 마음을 선동한다. 너희들이 비록 어둡고 몽매하다고 하지만, 어찌
나라의 큰 의리와 조정의 약속을 듣지 아니하면서 감히 핑계를 대고 재
앙을 떠넘겨 사람들의 재산을 탕진하게 하고, 농민에게 농사를 지을 시
기를 놓쳐버리게 하니, 이름은 비록 의를 주창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난
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너희들은 계속 뒤따라 모여든 많은 무리를 믿고 스스로 방자하여 조정
의 명령도 듣지 않으니,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찌 이러한 의리가 또 있었
겠는가? 이것은 모두 나 한 사람이 너희들을 이끌어 편안하게 하지 못
한 탓이며, 또한 여러 고을의 목민관과 수령들이 너희들을 부추겨 벗겨
먹고 곤박하게 괴롭혔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운 장수와 마음이 시커먼 아
전들은 장차 처벌을 할 것이다. 오직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그 백성
들이 스스로 의롭지 못한 것에 빠지는 것을 보며 슬퍼하고 안타깝고 측
은하게 여기거늘 어찌 어둠을 열어 밝은 곳으로 향하게 하는 길을 생각
하지 않겠는가?
이에 알려온 사실을 근거로 하여 너희들의 고충을 모두 알았다. 이에
행호군(行護軍) 어윤중(魚允中)을 선무사(宣撫使)39)로 삼아 나를 대신하
여 달려가서 널리 타이르고 설득하게 한 것인데, 이 또한 먼저 가르치고
뒤에 처벌하는 것이 옳다. 너희들은 부모의 말을 듣는 것과 같이 여겨
반드시 감동하고 서로 알려 해산하도록 하라.
너희들은 모두 양민이니 각각 스스로 물러나 돌아가는 사람은 마땅히
토지와 재산을 되돌려줄 것이므로, 이로 하여금 편안히 생업에 힘쓰게
할 것이니 의심하거나 겁을 먹지 않도록 하라. 이와 같이 설득하는 말을
들은 후에도 너희들이 한결같이 고치지 않고 흩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39) 선무사(宣撫使): 임금이 백성을 타이르고 위무하는 임무를 주어 보내는 사자를 말한


다. 순변사 전운사 등 사(使)가 붙은 임시직은 모두 임금이 임명함을 뜻한다. 당시
어윤중은 양호도어사의 직함을 받고 겸임으로 선무사의 역할을 하였다.
취어(聚語) 41

당연히 큰 처분을 내릴 것이다. 어찌 너희들로 하여금 다시 같은 하늘을


덮고 살 수 있도록 용납하겠는가? 너희들은 시원하게 마음을 고쳐먹고
나라의 법을 어기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초 2일 묘시에 보은군 장내리에 동학인들이 집회를 한 일에 대해 방
어하고 지키기 위해 병영의 군대 100명이 대관(隊官)을 정해 호위하게
하고, 이달 초 1일 유시 쯤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이 머무르는 곳과 음
식을 제공하는 절차는 보은군에서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고, 군사들은 보
은군 읍내에서 머무르고 접대하도록 먼저 보고하였는데, 많은 군사들에
게 제공할 양식은 고을의 힘이 적고 약해 마련할 수 없다고 보고하기에
이를 참작하여 시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초 3일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에 보은군 장내리에 모인 동학
인들이 이 달 초 1일에 도어사가 왕명을 널리 알리고 타이를 때에 3일
안에 물러가 해산할 것이라고 하여 이를 받아들인 연유는 이미 보고한
바 있습니다. 저들이 물러가는 상황은 계속해서 정탐해 보니 그 두령인
최도주(崔道主)와 서병학(徐丙鶴) 등은 초 2일에 밤을 이용해서 도주하
였고, 그 무리 수 만 명은 모두 흩어졌으며, 나머지 있던 사람들은 단지
병들어 눕고 식사한 빚[食債] 때문에 잡혀있는 사람 몇 명뿐이어서 또한
돌아가도록 했다는 사정을 보고하오며, 장계의 초본은 또한 베껴 놓은
후에 보고합니다.

선무사가 다시 장계함 [宣撫使 再次狀啓]

어윤중이 겸임하였다.
신이 지난 달 26일 저들에게 가서 타이르고 설득한 연유는 이미 아뢴
바 있고, 같은 달 29일 청주진 영장 백남석(白南奭)과 병영 군관 조기명
(趙基命)이 전보로 발송한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도착하여 신이 보은군
에 있으면서 받았으며, 이 달 초 1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쯤에는 신
4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이· 청주 영장 백남석과 보은군수 이중익(李重益)과 병영 군관 조기명을


데리고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무리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가 반복하여 타
이르고 깨우쳐 조정의 너그러운 은혜를 보여주니, 저들 중에는 매우 감
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비로소 장계의 회답이 내려오는 것을 기다려 물러가기로
약속한바 지금 그것을 빙자하여 구실을 삼으려 하기에 신이 사리에 근거
하여 꾸짖고 타이르기를 “이것은 바로 장계를 올려 보낸 후에 회답한 임
금의 분부이니 의정부에서 아뢴 것보다 일의 형편이 더욱 무겁다. 열 줄
이나 되는 임금의 분부에는 마음이 편안하여 매우 어질고 성스러운 덕이
있는데, 너희들이 비록 우매하더라도 어찌 감히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말을 만들어 스스로 왕명을 어기는 죄를 범하는가?”라고 하니, 처음에도
5일을 기한으로 흩어지겠다고 말을 하여 신이 다시 3일을 기한으로 정하
였습니다.
저 무리를 따라 온 사람들은 스스로 모인 이후 날마다 수 천 개의 계
획이 마치 물이 계곡에 넘치고, 불이 언덕을 태우는 것과 같이 쏟아져
나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부적과 주문을 가지고 무리를 현
혹시키고, 도참설을 전파하여 세상을 속이니 마침내 재주와 기상을 믿었
다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랐고, 탐욕이 멋대로 행
해지는 것에 대해 분개하여 백성을 위해 생명을 내놓은 자들이 그들을
따랐으며, 바깥 오랑캐들이 우리의 이익의 원천을 빼앗는 것을 분하게
여겨 함부로 큰 소리 치던 자들이 그들을 따랐고, 탐욕스러운 장수와 속
이 검은 아전에게 학대를 당하여도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었던 자들도
그들을 따랐습니다. 서울과 시골에서 무단(武斷)으로 협박과 통제를 받아
스스로 보전할 수 없었던 자들이 그들을 따랐고, 서울 밖으로 죄를 짓고
도망한 자들이 그들을 따랐으며, 감영과 고을에 의지할 수 없어 흩어져
살던 자들이 그들을 따랐고, 농사를 지어도 곡식을 남기지 못하고 장사
를 하여도 이익을 남기지 못한 자들이 그들을 따랐으며, 어리석고 우매
취어(聚語) 43

하여 소문만 듣고 동학에 들어간 것을 즐겁게 여기던 자들이 그들을 따


랐고, 빚을 져 독촉을 이겨내지 못하던 자들이 그들을 따랐으며, 상민과
천민이 귀하게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그들을 따랐습니다.
온 나라에 불평의 기운이 가득한 것을 모두 모아 하나의 단체와 마을
을 만들어 놓고 팔을 걷어 부치며 호언장담을 하고, 눈으로는 죽음을 단
지 그냥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며, 선비의 의관과 복장을 하여 비록 무기
를 지니지 않은 듯하지만 성에 깃발을 꽂고 망을 보고 살피는 것은 자못
전쟁하는 진영의 기상이 있습니다. 부서가 서로 이미 정해져 행동거지가
어긋남이 없어 글을 하는 사람이 오면 글로써 접대하고, 무술을 하는 사
람이 오면 무술로써 접대하여 스스로 판단하는 방법이 있으니, 함부로
무력을 사용해서는 아니 됩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저들의 악한 마음을 변화시켜 충성과 의리의 마음
이 되게 하기 위해 많은 말과 기운을 쓰고 은혜와 믿음을 힘써 베풀어
조정이 백성을 위해 성의를 보여주는 것을 알도록 하였더니, 그 중에서
사족(士族)으로 무리에 들어와 몇몇 우두머리가 된 자는 스스로 감동하
여 눈물을 흘리고 명령을 받들어 흩어지겠다고 청원하면서 “저들이 오랑
캐를 물리친다고 명분을 삼은 오랑캐들이 국도에 섞여 살면서 우리의 재
물의 원천을 소모시키니, 이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온 나
라의 의병과 함께 힘을 합쳐 물리치려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은 말하기를 “이러한 일은 이미 정부가 타협하여 상의한 것으로, 중
국이 이미 출병하여 용산(龍山)에 주둔40)한 것은, 이를 증명할 문서가 있
는데도 어찌하여 너희들은 자꾸 구별하여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는가?”
라고 하였고, 또 “탐관오리의 횡포는 외국과 교류한 이후 더욱 거리낌이
없고, 많은 사악한 것이 뒤섞여 밀려 들어와 백성을 박해하는 것을 일삼

40) 청국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군대를 더욱 강화해 파견하여 일본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는데, 원세개(袁世凱)가 통상사의라는 직함을 가지고 지휘하였다. 그들 주둔지는
서울 외곽에 있는 용산에 두었다.
4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고·있는데, 비록 이를 징계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실상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라고 하니, 저들은 “위로 조정에 아뢰어 탐관오리를 쫓아내고자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는 조정이 해야 할 처분인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고, 또 “저희들의 이 집회는
조그마한 무기도 가지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민회(民會)41)입니다. 일찍
이 여러 나라에도 민회가 있다고 들었고, 조정의 정령(政令)이 백성과 나
라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모여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근래의 일입니
다. 어찌 저희들을 도적의 무리[匪類]라고 지적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너희들이 만약 아래의 사정을 아뢸 것이 있으면 글을 작성하여
오라. 마땅히 그것을 전달해 줄 것이다. 너희들은 절대로 서울로 올라가서
서울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니, 또 말하기를 “전(前) 충청
감사는 전 영장(前 營將) 윤영기(尹泳璣)와 함께 서로 협조하여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멋대로 백성의 재산을 수탈한 것이 매우 많아
집회를 열게 되었고, 여러 무리들에게 모두 흩어지라고 하여도 모두 부모
와 집안에 대한 연민이 없다고 하면서, 이미 모두 토지와 재산을 매각하여
죽기를 기약하고 왔으니 지금 돌아가라고 한다면 어찌 돌아가겠습니까?
또한 고을의 토호들이 즐겁게 맞이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여기에 있으면서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이 같은 사정은 내가 마땅히 알아서 처리하
겠다. 호서와 호남에는 이미 공문을 보냈고, 다른 도에도 공문을 보내 시
행하겠으며, 은혜로운 임금의 분부 중에 이미 편안하게 생업에 힘쓰라고
하였으니, 관찰사와 수령이 된 사람들이 누가 감히 어기고 학대하겠는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스스로 이름을 말하면서 “내가
바로 서병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인데, 불행하게도 동학에 들어와서

41) 민회(民會): 동학교도들의 평화집회를 서양의 정치집회로 보아 이 표현을 썼는데 때


로는 민당(民黨)이라고도 하였다. 어윤중이 처음 이 용어를 빌어 사용하자 척화파 유
림들이 비도라 지칭하지 않았다 하여 공격하였다.
취어(聚語) 45

남들에게 지목을 받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마땅히 모이게 된 내력을


자세하게 말하겠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호남에 모인 무리들은 겉으로
보면 비록 같지만 종류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문을 만들어 걸어
놓은 것은 모두 그들이 한 것이고, 형편이 매우 다르니, 원하건대 공께서
는 자세하게 살펴 처리하고 우리 무리와 혼동하지 말고 옥석을 구별하십
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말을 구분하여 기록하여 올려 보냅니다. 널리 타이른 후에 비
록 흩어지겠다고 했지만 3일을 기다려서야 흩어지는 형편이 되어 지금
장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무리를 모으게 된 정황은 이미 매우 헤
아리기 어려워 조사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무리들이 이미 많아서 자
세하게 조사하여 따르게 하기는 어려우니, 다만 각각 편안하게 생업에
힘쓰라는 효유문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세하게 조사한 항목은 거
론하지 않겠습니다. 전(前)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의 탐학과 불법
적인 정황은 신이 아직 조사하지 못하였습니다. 무리들이 고발한 내용의
대강을 보면 이 동학 무리들을 불러 모으게 한 것은 바로 이 사람 때문
입니다. 진실로 이것은 재앙과 환란의 근원인데, 또한 무리가 모인 초기
에 군현에서 그대로 두고 즉시 보고하지 않아 거의 만연되어 어찌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으니, 이미 교체되었다고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보은군수 이중익이 동학의 무리들을 모이게 한 것은 비록 지방의 정치
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책임지고 설득하여 해산시키지 못했
고, 또한 사정을 물은 것도 여러 날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으니 경고하
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 고을이 새롭게 동학 무리들의 소란을 겪
어 공적・사적인 접촉과 판단을 생소한 사람에게 맡길 수 없으므로 처벌
을 청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호남의 동학 무리들을 설득하여 흩어지게 하
는 것은 한시라도 걱정이 그치지 않으므로 신은 여기에서 직접 전라도로
향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모두 보고하고 차례대로 설명 드리오니 잘
시행하시옵소서.
4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3일 묘시에 도어사가 백성의 무리들이 물러나고 흩어지는 형세로써



장계를 보낸 후에, 지금 초 3일 신시 쯤에 보은군을 출발하여 전라도 땅
으로 곧바로 향하였고, 청주 영장은 초 4일 묘시에 병사를 거느리고 본
진으로 돌아가 형세를 보고하였습니다.
4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보은군 장내리에 모였던 동학 무리
수 만 명이 초 2일부터 모두 흩어지고, 우두머리들이 밤을 이용하여 도
주한 이유를 초 3일에 이미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흩어져 돌아간 사람
들이 어느 지역으로 갔는지 몇 명이나 되는지를 각처에 있는 장리(將吏)
들을 시켜 지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탐문하여 오도록 하여 그것을 베낀
후에 다시 보고합니다.
하나, 북면(北面) 구치(九峙)의 장리들이 기록하여 보고한 내용에는 이
달 초 2일 신시부터 초 3일 사시까지 동학의 무리로서 돌아간 사람은
경기 수원접(水原接) 840여 명, 용인접(龍仁接) 200여 명, 양주(楊州)와
여주(驪州) 등 지역 사람이 270여 명, 안산접(安山接) 150여 명, 송파접
(松坡接) 100여 명, 이천접(利川接) 400여 명, 안성접(安城接) 300여 명,
죽산접(竹山接) 400여 명, 강원도의 원주접(原州接) 200여 명, 충청도 도
내의 청안접(淸安接) 100여 명, 진천접(鎭川接) 50여 명, 청주접(淸州接)
290여 명, 목천접(木川接) 100여 명, 중간 사잇길로 원평(院坪)42)으로부
터 충주(忠州)로 향한 사람이 1,000여 명인데, 이들이 사는 지방은 탐문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 남면(南面) 원암(元巖)의 장리들이 기록하여 보고한 내용에는 이
달 초 3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학의 무리들로 돌아간 사람들은 전라도
한 도에서 빠진 고을이 거의 없어 이를 합하면 5,600여 명이 됩니다. 도
내에는 옥천접(沃川接)이 150여 명, 청산접(靑山接)이 30여 명, 비인접

42) 원평(院坪): 원이 있는 들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지명. 보은의 동남쪽에 있는 들판.


금구현의 금산사 입구에는 원평이 있다. 이곳에서 보은집회와 때를 같이해 대대적
집회를 가졌는데 보은 원평과 금구 원평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취어(聚語) 47

(庇仁接)이 8명, 연산접(連山接)이 13명, 진잠접(鎭岑接)이 30여 명, 공주


접(公州接)이 5명, 영남의 김산(金山) 사람이 2명이라고 합니다.
하나, 동면(東面) 관리(官里)의 장리들이 기록하여 보고한 내용에는 초
2일에 돌아간 사람은 전라도에는 함평(咸平)・남원(南原)・순창(淳昌)・무산
(茂山)43)・태인(泰仁)・영광(靈光) 등의 지역 사람이 200여 명이고, 경상도
에는 성주접(星州接)이 30여 명, 선산접(善山接)이 30여 명, 상주접(尙州
接)이 90여 명이고, 충청도 도내에는 옥천접이 30여 명, 영동접(永同接)
이 50여 명입니다. 초 3일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돌아간 사람은 전라도에
는 장수접(長水接)이 230여 명, 영암접(靈巖接)이 40여 명, 나주접(羅州
接)이 70여 명, 무안접(務安接)이 80여 명, 순천접(順天接)이 50여 명이
고, 영남에는 하동접(河東接)이 50여 명, 상주접이 20여 명, 선산접이 60
여 명, 김산접(金山接)이 18명, 진주접(晉州接)이 60여 명, 인동접(仁同
接)이 40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하나, 서면(西面) 무서(畝西)의 장리들이 보고한 내용에는 옥천접이
800여 명인데, 초 2일 오후에 지나갔다고 합니다.
하나, 동면 적암(赤岩)의 장리들이 보고한 내용에는 초 2일 오후에 상
주의 공성접(公城接) 소속 50여 명이 물러갔고, 금산과 선산 등의 지역
사람 100여 명과 안동접(安東接)의 40여 명이 물러갔다고 합니다.
하나, 이외에 샛길로 밤을 이용하여 몰래 도주한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부호군 이건창의 상소 [副護軍 李建昌 上疏]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우연히 잔병에 걸려 손과 발이 오그라들어 시골


집으로 돌아가 삼가 신음하고 잠꼬대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근래 호서

43) 무산(茂山): 원문의 오자인 듯하다. 전라도에는 무산이라는 지명이 없으므로 무장(茂
長)의 오기로 보인다. 당시 무장은 손화중포의 근거지였다.
4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와· 호남의 사악한 동학 무리가 함부로 창궐하여 어사를 파견하고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놀라고 분하여 짐을 들고 성문으
로 들어갔습니다.
삼가 보건대 얼마 전 임금의 윤음을 보고 간절하고 측은한 마음이 거
듭 생겨, 새를 춤추게 하는 덕망과 법망을 기쁘게 하는 인자함에 만 가
지도 이기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어사의 보고를 보니 깨우치고 설득함
으로써 물러가도록 하려는 뜻이 있어서,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
는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우매하고 소견이 얕아 앞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도적
을 결박하여 편안하게 하는 것은 비록 한때의 임시적인 편의를 위함이
고, 위로를 받고 후에 배반하는 사람은 그 근심을 더욱 말할 수 없으니
경계해야 합니다. 또 신은 백성이 무리를 만들면 국법이 반드시 죽이는
것은 주례(周禮)에서부터 이미 그러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수천 명의
백성이 서로 모여 소요를 벌이면, 반드시 난민이라고 말하면서 죽이고
나서야 그칠 뿐인데, 하물며 이 수만 명이 모여 주둔하여 깃발을 세우고
성을 쌓는 적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근래 외국에는 민당(民黨)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러한
사악한 말은 임금이 없기 때문이니, 그 피해가 홍수와 맹수에게 당한 것
보다 심합니다. 어찌 우리 예의의 나라에 또한 민당이라는 이름이 있겠
습니까? 그들이 사악한 것을 선동하였으니 그들을 사악한 무리라고 부르
는 것이 옳습니다. 그들이 난을 도모하였으니 그들을 난을 일으키는 무
리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어찌 민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명분
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따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미 널리 깨우치는 성스러운 임금의 분부가 있어 “모두 나의 백
성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호라! 저 비도(匪徒)가 감히 조정에 아뢰기를
원한다고 칭하여 임금의 명확한 뜻을 듣고 백성으로 인식되어 삼가 마땅
히 물러가 해산하였는데, 무릇 이미 임금의 명확한 뜻을 듣고, 또 명확한
취어(聚語) 49

뜻을 듣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백성으로 인식되고 또 백성으로


인식되기를 원하는 것이니, 이것은 그들이 임금에게 위[上]가 없게 요구
하는 것이고, 조정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어찌 죽도록 싸우고
크게 성내는 것을 견디고서, 들은 것에 따라 장계를 전하겠습니까? 비록
몸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더라도 어찌 그들을 토벌하도록 청하는 말
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어리석게도 죽을 죄를 지어 이것 때문에
아뢰려고 한 것입니다.
크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매우 엄격하고 매우 무거워 저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까 두려워 곧바로 널리 알려주었으니, 하물며 탐학하
고 속이 검은 사람을 징계하는 것은 어느 시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
까? 지금 일이 있을 때에 더욱 마땅히 형정(刑政)을 엄숙하게 하여, 진
실로 몇 명의 백성이 곤란을 당한 사람의 심정을 고하는 일이 없기를 원
합니다. 다만 이 때문에 난을 일으키고 반역을 하는 무리를 위로하고 어
루만져 더욱 교만하게 함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무릇 성스러운 임금은 하늘과 같이 어질기 때문에 까닭 없이 하나의
벌레와 개미를 죽이는데도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는데, 하물며 백성의
목숨은 매우 소중하여 큰 죽임에 빠뜨리려고 하는데 어찌 슬프고 애석하
여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시기에는 느리고 급한
것이 있고 일에는 앞과 뒤가 있으니, 먼저 가르치고 후에 형벌을 가하는
것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정치이고, 먼저 토벌하고 후에 어루만지
는 것이 난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가르치지 않고 형벌을 가하는 것은 폭
력에 가깝고, 토벌하지 않고 어루만지는 것은 약한 것에 가까우니, 그것
이 불가능하다면 이 두 가지를 균등하게 해야 합니다.
저들은 본래 흉악하고 사악하여 법망에서 빠진 무리인데, 감히 <우두
머리의> 억울함을 풀고 변명한다고 말하면서 방자하게 대궐문에서 소리
쳤으니, 즉시 마땅히 국문(鞠問)하여 목을 베 매달아 경계시켜 나라의 체
통[國體]을 소중하게 해야 하는데, 그 때의 조치는 이미 실책을 면치 못
5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그대로 지금에 이르러서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하여
그러나 지금도 오히려 늦지 않았습니다. 전하의 깨우침이 이미 그 우
두머리를 사로잡아 바치게 하였는데, 과연 당일 사로잡아 바친 놈은 오
히려 위협으로 따른 자에게 다스릴 수 없는 법을 쓴 것이고, 그렇지 않
다면 이놈은 모두 악을 믿고 교화를 거부한 부류이니, 나라의 백성이 아
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반드시 사로잡아 바칠 사
리가 없으니, 즉시 군대에 명하여 정토(征討)하고 기필코 모두 남김없이
제거하여 땅에 떨어진 기강을 보전하고, 곧 다가올 재앙을 그치게 하여
결코 다시 느슨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른바 그 학문에 이르러서는 비록 어떤 학문인지 모르겠으나 터무니
없는 말로 속이고 부적과 주술로 참언을 견강부회하였고, 설령 그러한 술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도깨비에게 의탁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며, 설령 그
러한 차력의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묘약을 빌린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한 종류의 요망하고 사악하며 비천하고 더러운 무리이며,
매우 심하게 지식이 없고 윤리가 없는 것이 매우 심한 자들일 뿐입니다.
지난 번 여러 상소를 배척하실 것을 청하였는데, 혹시라도 이들을 양
묵(楊墨)44)에 비교하는 것인지, 이미 가까이하지 않고 저들에게 묻기를,
“그렇다면 또한 요・순과 공자・맹자의 도인가?”라고 하니, 저들은 이에
“그렇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애석합니다. 이 어사의 말은 신중해야 했
습니다. 설령 저들이 장차 해산하여 공공연하게 행동하면서 나라 안에서
떠들기를 “우리의 학문은 조정에서 그르다고 하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어리석은 남자와 부인이 이를 보고서 또한 어찌 그것이 바른 것인지 사
악한 것인지, 충성스러운 것인지 반역인지 분별하겠습니까?
또한 신이 듣기로는 사방에서 나라를 안전하게 통제함에는 전제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장군의 임무 또한 그러합니다. 지금 오고 간 전보

44) 양묵(楊墨):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말하는데, 양주는 위아설(爲我說)・이기주의를


주장하였고, 묵자는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하였다.
취어(聚語) 51

를 문득 묻고 의논하여 같고 다른 사정을 반드시 번거롭게 아뢰어 재가


하게 하였는데, 이것 또한 난을 당하여 이겨내는 방법은 아닙니다. 이 모
두는 비록 신이 성문 안으로 들어가 듣고 본 것이지만, 말하는 바는 자
세하지 않은 것이어서, 감히 추측하여 말할 수가 없습니다마는 오직 저
비류(匪類)의 사정은 더욱 헤아릴 수 없으니, 시일을 헛되이 보내 오래
끌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글을 의정부에 내려 보
내 즉시 나아가 토벌하는 계획을 결정하게 하소서.
또한 지방의 친위 군대는 교만하고 나태한 것이 버릇이 되어, 상을 주
는 것만을 보았고 벌을 주는 것은 보지 못하였으며, 은혜만 알고 법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출진하여 길에 있을 적에 방자하게 멋대로 하는
것이 매우 심하니, 전투에 임하여 명령을 쓰지 않은 것 또한 반드시 있
을 것입니다. 오장(伍長)이 그 휘하 병사의 목을 베고, 십장(什長)이 그
휘하 병사의 목을 베는 것은 군대가 생긴 이래 행해져 온 것으로 이를
군대의 규율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 장수를 돌아보건대 모
든 일체의 법을 사용하면서 작은 사고라도 용서하지 말도록 하며, 엄한
법을 쓸 적에 어렵게 천단하지 못하게 하여 한번 새롭게 빛나 모두 과단
성 있고 의연하게 해야 합니다.
신은 어리석게도 죽을죄를 지었지만, 신이 그윽히 생각하건대 모름지
기 우리 전하께서는 지극한 인자함과 지극한 총명함을 가지셨고, 크게
업적을 이룰 도량을 가지셨으면서, 성학에 식견이 높고 명석하여 이미
옛날과 지금의 난을 다스리는 요체를 잘 알고 계시니, 지금 위에서 더욱
하나의 ‘확(確)’ 자(字)에 힘써야 합니다. 무릇 ‘확’ 자는 하늘의 도[乾道]
로45), 4계절이 여기에 행해지며, 모든 물건이 이에서 이루어지게 하니,
진실로 한번 그치는 불운이 없어야 하지만, 그것이 이를 이룩하게 된 까

45) 확자(確字)와 건도(乾道): 주역 건괘는 순양(純陽)이므로 지선(至善)하다고 하였다.


건도의 출발은 “확호불발”(確乎不拔)에 있다. 확은 지공무사(至公無私)를 뜻하는데
“지공무사하여 뽑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건도는 사욕이 없는 덕을 말
한다.
5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확연할 뿐입니다.
닭은
임금[人主]이 그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는 어찌 그 극(極)을 모두
쓰지 않으리오마는 큰 본원[大本原]과 큰 관계[大關係]에 이르러서는 반
드시 한번 정하여 바꾸지 않는 계획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학문은 반드
시 요순시대를 기대해야 하고, 정치는 반드시 조종을 본받아야 하며, 사
람을 쓸 때에는 반드시 충성과 강직을 장려함을 우선으로 해야 하고, 어
려움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백성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
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꾸지 않은 계획입니다. 그것의 견고함은 금석과
같고, 그 무거움은 산악과 같으며, 움직이지 않음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는 것과 같고, 그것의 명백함과 통달함은 해와 달을 사람들이 모두 우
러러보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이것은 주역(周易) 의 대전(大傳)46)에
이른바, “무릇 하늘[乾道]은 지공무사한 건실함을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
이다”하였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오직 살펴주시옵소서.
신은 작년 여름에 외람되게 승지의 부름을 받고 대면하였습니다. 삼가
성스러운 임금의 말씀을 받들었는데,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의리가 아니다. 그러나 말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위에서 포
용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받들어 깨닫
고 감격하여 물러나 즉시 스스로 “성상이 이미 이끌어주셨다. 오히려 입
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고 은혜를 저버린다면 이는 임금이 분부하신 인
신의 의리가 아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다만 직위가 언론의 책임을 지
지 않아서 자리에 나와서는 탄식만 일삼는 짓을 꾸짖으면서도 지금까지
하루라도 감히 마음에서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말을 한 사
람 또한 많았습니다.
무릇 오늘날의 조정에는 아직도 옛 명성이 있는데, 그 사람의 말을 되
돌아보면 다른 일을 논할 필요가 없이 단지 악공(樂工) 한 항목은 어찌

46) 대전(大傳): 공자가 풀이한 문언(文言)을 말한다. 여기에서 “건은 확연히 사람에게
덕을 보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취어(聚語) 53

절제해 달라는 진언이 없었겠습니까? 지금 잔치의 예식을 보니 이미 지


나칠 정도이고, 여자 악공은 그만 없애야 합니다. 신은 전하께서 삼가 경
계하여 힘쓰시고, 법의 의식이 지나치다는 것을 깊이 살피시고, 작은 것
에 힘쓰다가 큰 잘못을 쌓게 된다는 경계의 말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
다. 종과 북소리가 끊어진 후에 충성스러운 말이 올라오고 광대47)가 쓸
모없어진 이후에 무비(武備)를 정비하게 되니, 비록 전국시대의 패자(覇
者)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오늘날의 신하와 일반 백성이 기대하고 바라
는 것에야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급하지 않는 업무와 급하지 않는 용도는 모두 마땅히 하나같이
절약하시고, 상을 줄 때에는 더욱 신중하게 해야 하며, 나라의 재용에 있
어서는 비록 내탕(內帑)과 외사(外司)48)가 다르지만, 그 근본은 모두 백
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어찌 지나치게 거두어 비용을 낭비할 수가 있
겠습니까? 명목이 없는 은혜가 이미 수습되어 갚을 마음이 사라졌고, 그
것을 받더라도 다시 감격스러운 마음을 알지 못하는데, 오직 그 반열에
함께 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평소 차있어야 할 창고가 비어있는 것처럼
곁눈질로만 서로 탄식해도 듣지를 못하니, 이것은 은혜를 허비하여 원망
을 사는 것입니다. 하물며 군대의 일은 공로가 있으면 상을 주는 것이
옳은데, 명확하게 평상시보다 더 상을 주지 않아, 만약 이것이 미치지 못
한다면 장사의 마음이라고 어떠하겠습니까?
무릇 임금[人主]은 사사로운 재물이 없으므로 사사로운 은혜가 없는
것이고, 사사로운 은혜가 없으므로 사사로운 신하가 없는 것입니다. 한번
균등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으면 나라가 그 병을 받게 되고, 백성은 반드
시 불안하게 됩니다. 주자(朱子)가 송나라 효종(孝宗)에게 고하기를 “안

47) 당시 고종과 왕비는 궁중에 판소리와 같은 음악과 연희를 베풀고 밤을 새워 놀이를


즐겼으며, 또한 무당을 불러들여 자주 굿판을 벌였다.
48) 내탕(內帑)과 외사(外司): 내탕은 궁중의 비용으로 쓰는 돈인데 내탕고에서 관리한
다. 외사는 내탕고 이외의 내수사(內需司) 등 관아를 말한다. 즉, 궁중과 관아를 가
릴 것 없이 국가재물을 절약하라는 뜻이다.
5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경비가 들어오는 것이 줄어들면, 밖으로 나머지의 수를 납부하게


으로
하여 천하의 온갖 일의 폐단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전하께서는 밝고 명확하여 그 도를 오랫동안 지녔기에, 크고 작
은 신하와 관료들이 일의 본말(本末)과 장단(長短)을 밝히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간혹 효과가 없는 사람을 오히려 시험하였고, 이미 실패한 사
람을 다시 써서 결국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여 지식이 있는
사람이 탄식하니, 진실로 그것이 어찌하여 그러한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
다. 더욱이 근래의 일로 말하자면 경상도 관찰사[嶺東]를 제수한 일로 여
론이 더욱 떠들썩하였는데, 비록 그 사람이 어찌하여 이러한 소리를 듣
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겠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당하여 여론을 거슬러
한 지방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옳지 않으니 살펴주십시오.
또한 무릇 오래된 진(鎭)에 사는 백성들이 달아나 숨은 적이 있는데
수령을 뽑아 파견한다면 이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제주(濟州)
와 함흥(咸興)의 백성들이 일찍이 소요를 일으켰는데 찰리사(察理使)49)
와 감사를 가려 뽑아 파견한다면 소요가 일어난 것이 다시 안정될 것입
니다. 이것은 모두 한번 지위를 옮긴 동안의 일일 뿐입니다. 이것을 증명
해보면 정치를 하는데 무엇이든지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의 그 요체는 높
은 의논과 특이한 묘책이 없이, 굽은 것을 바로 펴서 백성을 감복시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 언로가 막힌 것은 근래와 같은 적이 없습니다. 몸의 보전을 도모
하는 사람은 가르쳐주어야 알게 되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은 눈으로
보고 일을 벌이기 좋아합니다. 기세와 절개가 꺾이고 풍속이 천하고 더
러워졌고,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어 서로 바로잡지 않아 예부터 이와
같이 무사안일에 빠진 적이 없을 것입니다. 태양이 아주 밝게 빛나면 무

49) 찰리사(察理使): 군사의 업무로 지방에 파견하는 3품의 관리에게 붙이는 칭호이다.
여기에서는 실정을 살펴 바로잡는 임금의 사자를 말한다.
취어(聚語) 55

지개는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원기가 혹시 허하게 되면 옴과 좀


이 모두 심한 질환이 될 수 있습니다. 신은 그러므로 지금의 혼란은 걱
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되면 걱정이
되는데, 또한 징계하여 삼가지 않는다면 비록 좋은 계획이 있다고 하더
라도 장차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성스러운 뜻을 힘껏 분발하여 일마다 엄
격하게 반성하고 어둠을 밝게 하여 여러 공부에 힘써야 합니다. 날마다
근심을 논의할 신하를 접견하여 보필을 받으시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오랑캐를 소탕할 방책을 강구하시옵소서. 더욱이 위의 항목에서 아뢴 바
의 용도를 절약하고 수령을 가려 뽑는 일 등은 마음에 새겨 받아들여 눈
앞에 닥친 급한 업무로 생각하신다면, 백성과 나라에 큰 다행이겠습니다.

선무사가 조병식의 탐학을 조사하여 장계를 올림 [宣撫使採探 趙秉式 貪


虐狀聞]

의정부에 도착한 공문서와 하교이다. 곧 양호선무사 어윤중의 장계를


보니, 임금의 윤음(稐音)을 널리 선포한 후에 보은의 비도들이 이미 모
두 귀화하여 해산하였으나, 충청도 전 관찰사는 질서를 바로잡고자 지역
을 조사하여 책임을 묻기를 더욱 각별하게 하였는데, 무리들이 모인 이
유를 아뢴 장계를 잃어버렸고, 이미 올린 어사의 의견은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으니, 잠시 먼저 붓으로 지워버리는 법[形削之典]을 시행하십
시오. 탐학과 불법에 이르러서는 이미 말하기를 “찾아 조사하지 못했다”
라고 하니, 다시 선무사로 하여금 실상에 따라 특별히 조사하게 하여 장
계로 아뢰게 해야 합니다.
비답(批答)하여 윤허한 전교(傳敎)입니다. 전교한 내용의 말뜻을 받들
어 살펴 시행할 일입니다.
신은 이 달 초 9일에 공주목에 도착하여 전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
5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秉式
· )이 탐학한 정황은 대충 조사해 보았는데, 관찰사로 임명된 이후 정
령(政令)이 몹시 가혹하고 끝없이 가렴주구(苛斂誅求)하여 진실로 근래에
는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사방으로 번진(藩鎭)을 살펴보고 마땅히 두
터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다시 충청도 관찰사
에 임명되었으니, 어찌 옛날의 허물을 덮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가문은 충성스럽고 절개가 있으나, 그의 사람됨은 탐욕스럽고 마
음이 더러우며, 그의 벼슬은 현달하지만, 그의 행동은 협박하여 물건을
빼앗으니, 돈을 탐하는 냄새가 세상에 넘쳐 득과 실을 걱정하는 대부(大
夫)가 된 것이 애석합니다. 욕심이 절절 넘치고 땅을 석권하여 거리끼고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처합니다. 그가 내리는 정령을 말하면 당
나라와 주나라의 종이에 쓴 비밀 공문서처럼 귀신도 짐작할 수 없어 다
듬지 않은 모난 나무로 특별히 형장(刑杖)을 만들어 목숨을 곧바로 판결
합니다. 죄인을 상급 관리에게 넘기는 것이 진실로 관례이지만, 재산을
몰수하고 죽이는 것을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것과 같이 하고, 군교(軍
校)와 차인(差人)은 계속 보내 만나는 사람들마다 난리를 당한 것과 같
습니다. 계속 거두어 들이는데 그 근거를 캐보면 공납이 아닙니다.
사람의 좋지 못한 일을 들추어, 불효하고 화목하지 못하고 간음한 것
등 각종 명목으로 죄안(罪案)을 얽어 만드는데, 처음에는 사람을 보내어
겁을 주어 공발협박하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면 끝에는 곧바로 그들의
산업(産業)을 몰수합니다. 잡기(雜技), 송속(松贖)50), 토호(土豪), 임채(任
債), 각 읍 아전들의 경비, 공전(公錢)을 징수하고 남은 것, 옛날에 경채
(京債)를 멋대로 징수한 것, 계를 핑계한 돈[契錢], 송사로 빚진 것 외에
거두어 가로챈 것, 직함을 빌려주고 받은 돈[借㗸錢], 종이의 징수를 지
정한 돈[差紙錢]은 많은 읍이 재정을 늘리는 명목인데, 심하게 거두어 끝
이 없습니다. 폐단을 보충한다고 핑계대면서 혹은 이곳저곳의 장부에 옮

50) 송속(松贖): 금송절목(金松節目)에 따라 소나무를 벌목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를 베


고 그 대가로 속전(贖錢)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취어(聚語) 57

겨 적고, 사람의 귀와 눈을 가려 그 재물이 머물 곳을 궁리하였는데 모


두 개인주머니를 채운 후에 그만둡니다.
그것을 조사하여 찾아낼 때에는 슬픈 저 무고한 사람들은 죄인의 발과
목에 채우는 쇠사슬 사이에서 구르면서 하느님을 부르고 아버지를 부르
지만 막막하여 구제될 수가 없고, 죽으려 하여도 또한 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 모두 대대로 임금이 남긴 백성인데, 이를 참지 않으면 어느 것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이 그들의 산업에 애착을 갖고 지키려는 것
은 목숨보다 심함이 있으니, 이것이 있으면 살아갈 수가 있고 이것을 잃
어버리면 죽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천금의 자본과 백 무(畝)의 토지
를 이리의 입에 집어넣고 그들 처자를 이끌고 길거리를 헤매면서 돌아갈
곳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동학을 금지하고 단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말은 비록 이단을 배척한다
고 하면서 생각은 모두 재물을 훔치려는 것입니다. 전 영장 윤영기(尹泳
璣)는 귀신과 같은 거간꾼이 되어 그 사이를 조종하였고, 전 공주진 영
장 이존필(李存馝)은 손가락질하며 사주하고 멋대로 불러들여 그로 하여
금 그 무리들을 끌어들이도록 하여, 돈이 있는 사람은 재산을 탕진하고
서 다행히 달아나게 무사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혹은 죽고 혹은 유배
시킵니다. 또한 백성이 조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는 사람은
동학의 이름에 멋대로 집어넣어 모두 없는 죄를 교묘하게 꾸밉니다. 이
에 그 무리들이 혹시 참지 못하여 그 무리를 불러 모아 같은 소리로 진
영 아래에 운집하여 복수하려고 합니다. 이 관찰사의 속마음은 겁을 주
려고 하면서 다시 침학하지 않는다는 뜻을 각 읍에 글로 써서 보내었고,
그 후에는 묵인하여 허락하였다고 핑계대면서 더욱 거리낌이 없게 되었
는데, 올 봄이 가장 심하였습니다.
영진(營鎭)의 공문서를 구해 살펴보고, 읍과 마을에서 전해들은 소문을
조사하여 대개 갖게 된 것입니다. 남몰래 주고받은 것으로, 몰래 수갑을
채워 빼앗은 것, 서울 사람이 지방의 읍에서 어렵게 채방(採訪)한 것, 영
5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속·(營屬)들이 같은 악한 무리와 짜고 서울 집에 숨겨놓은 것은 신이 진


실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공문서의 전한 소식에 의거하여 명백
한 것을 서로 참작하여 모아 수를 집계하니, 이것은 열 개 중에 두세 개
에 불과합니다.
각 읍의 진휼을 보충하기 위한 돈 61,600냥은 전부 진휼에 사용하지
않고, 온궁(溫宮)51)의 수리비라고 한 40,000냥이며, 산성을 수축하는 비
용이라 한 20,000냥은 계산하여 마감하였는데, 온궁의 수리비는 온양군
(溫陽郡)이 보고한 실제 수는 8,000냥에 불과한데 이 또한 징수한 돈을
조사하여 옮긴 것이며, 산성의 공사는 이미 각종 명목으로 함부로 징수
하여 기록된 돈은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사실입니다. 보은군의 대동전
(大同錢)은 3,400냥이고, 옛날의 경채(京債)라고 칭한 것은 향리(鄕吏)를
잡아 가두고 빼앗았으나 공납을 충당하기 어려웠고, 태안(泰安)의 기속전
(技贖錢)은 66,000냥인데, 탐학한 수령을 풀어주고 멋대로 징수하여 한
읍이 거의 텅 비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가장 애통하고 분한 것은 공주의 백성 오덕근(吳德根) 등의 마을 터를
빼앗고자 별입(別業, 별장)을 운영하면서 간음하였다고 꾸미고 진영에 여
러 오씨(吳氏)를 붙잡아 가두고 위협해 죽이고 그 가산을 몰수했으며, 군
대를 보내 징소리를 울리면서 춥고 눈 오는 겨울밤에 그 남자의 부인을
내쫓았는데, 죽은 늙은이와 어린이가 5∼6명이며 촌락이 텅 비게 되어
풀과 나무들도 서로 불쌍하게 여깁니다.
공주의 김현익(金顯益)・박태순(朴台淳)・고성룡(高成龍), 은진(恩津)의
최성숙(崔成叔), 홍주(洪州)의 박계화(朴桂和), 홍산(鴻山)의 김팔서(金八
瑞) 등은 혹은 집안에 간음한 사람이 있다고 칭하고 혹은 직함을 빌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아산(牙山)의 김상준(金相俊)은 죄수로 만
들어 공주 진영에 옮기고 수 만 냥을 내도록 책임지우고, 형구로 신문하

51) 온궁(溫宮): 온양에 있는 이궁(離宮)으로써 그곳 온천에 임금이 행차하여 온천욕을


할 때 거처하던 임시 궁궐을 말한다.
취어(聚語) 59

고 주리를 틀었는데 그 백성이 이행하지 못한 것 같아 참지 못하고 스스


로 목을 끊었습니다.
연산(連山)의 전 감역(前 監役) 이익제(李益濟)는 그 아들과 이웃 여자
가 간통했다고 꾸며 이웃 여자를 죽게 하고, 우선 빼앗은 뇌물이 1만 냥
이며, 진잠현감 이시우(李時宇)를 시켜 이웃 여자의 시체를 파서 검사하
고 옥에 가둔다고 협박하여 연산과 은진의 좋은 논 20여 석락(石落)을
빼앗아 재산을 탕진하게 하였습니다. 지방의 읍에 공문을 보내 각각 양
안(量案)을 작성하여 해당 민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밖에 백성의 토지와 보(洑)를 함부로 빼앗아 자기 소유로 한 것이
있으며, 개인의 빚을 일가에게 징수하고, 화를 인척에게 연좌시키는 것도
있으며, 뜻대로 사람의 무덤을 파서 다른 사람의 입장(入葬)을 허용하였
으며, 이미 무덤을 파고는 그로 하여금 다시 장례를 치르도록 한 것도
있었습니다. 교체되어 돌아간 후에도 남은 위력이 아직도 두렵게 하여,
예산의 부잣집은 가격을 지급하지 않고 강제로 차지하였으며, 천안의 옛
무덤은 표시를 하여 모두 파냈습니다. 또한 뇌물을 받은 범죄가 탄로날
까봐 두려워하여 김제홍(金濟弘)을 죽이고, 그 마을을 협박하여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으니, 비록 그가 선하지 못한 것을 가리고자 하여
도 더욱 그 계획이 날마다 옹졸하였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도내 공사전
(公私錢)을 훔치고 빼앗은 당백전(當百錢)이 644,391냥이고, 엽전은 10
8,390냥 정도인데, 인명(人名)에 따른 돈의 액수는 특별히 모두 책으로
엮어 올려 보냅니다.
이 관찰사는 고관대작의 이름난 문벌 출신으로 몸은 덕으로 교화하는
지위를 계승하여 진실로 임금의 은혜를 갚으려고 하여 먼저 백성을 보호
해야 하거늘, 오직 가렴주구를 일로 삼아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 백성
의 원망을 샀으니, 그 죄상은 의정부가 아뢰어 처리할 것을 청합니다. 이
관찰사가 불법을 자행한 것은 한 영(營)에서 저지른 것으로, 백성들에게
서로 간악하고 찾아내서 한 도(道)를 시끄럽게 하였으니 징계하여 경계
6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합니다.
해야
전 영장 윤영기와 이존필, 공주의 신천서(愼天瑞), 영리(營吏) 고복은
(高福殷)과 서형쾌(徐亨快)는 그의 매와 개가 되어 옥에 가두어 뇌물을 거
두면서, 모든 것을 간섭하고 피해를 백성에게 끼쳤으니, 청컨대 모두 담당
벼슬아치와 관찰사의 죄상을 참작하고 감안하여 처단하시기 바랍니다.
비도들이 이미 해산하여 조사할 안건은 끝났으니 신은 마땅히 다시 갈
길을 가겠습니다. 사신(使臣)이 되어 보잘 것 없음이 사람의 말에 이미
나왔으니 진실로 감히 도성의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물러나 삼가 사
저에서 살려고 합니다. 공손하게 임금의 처벌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연유
를 모조리 장계에 적어 곧바로 올립니다.

보은군 산외면 암동의 노석구 옥사에 대한 발문 [報恩山外面巖洞盧錫九獄


事跋辭]

이 모두는 여러 사람들이 진술한 것입니다. 이번 옥사는 한밤중에 뜻


밖에 사고가 생겨 죽은 한 쌍의 몸을 떼어 즉시 염하여 매장한 일인데,
시신의 친척들은 자취를 감추고 다른 참관자는 없었습니다. 아들과 부인
은 몰래 스스로 짜고 있고, 죽은 이의 생질과 친족은 집과 벽을 허물어
버리자 더욱 더 틈이 생겨 전하는 이야기가 낭자한데 염탐하고서야 사실
을 밝혔습니다. 옥사를 조사하는 방법은 증거를 살피는 것이 중요한데,
가볍게 먼저 무덤을 파내어 조사하지 않고 별도로 조사하여 공초(供招)
를 꾸몄습니다.
대개 이 마을에는 살고 있는 사람이 매우 적어 단지 노씨와 서씨 두
성씨가 살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도피하여 다만 죽은 사람의 친
척의 공초에 의거하여 “두들겨 맞는 상황은 노석구(盧錫九)의 며느리에
게 들었다”라고 하였는데, 단지 혐의를 증명하는데 장애가 있을 뿐만 아
니라 이미 죽었으므로 질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말하기를 “울타리
취어(聚語) 61

를 사이에 두고 몰래 들은 김순오(金順五)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으나


도망쳐 붙잡지 못했습니다.
옥사의 사정은 자세하지 못하고 일의 이치가 맹랑하며, 의심스럽고 확
연하지 않은 것이 많아 자세하게 살필 수가 없었는데, 마침내 하늘의 도
가 매우 밝아 신령스러운 영감을 숨길 수 없게 되어, 뜻하지 않게 도망
한 노석구는 추후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스스로 그 죄를 알게 되어 버티
지 못하고 차례대로 그 공초를 받아들였습니다. 죽은 사람의 친척과 함
께 차이를 고하게 하였는데, 죽은 사람의 친척이 처음에는 가슴에 상처
를 입은 흔적을 보지 못하였지만, 저놈들은 “한 차례 발로 찼다”라고 하
였고, 죽은 사람의 친척이 “발로 목의 위를 밟았다”라고 하자, 저놈은
“주먹으로 그를 쳤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번 돌아가면서 엄하게 질문하니 하나같이 모순이 있었습니다. 공
초에서 발로 목을 밟았다고 한 것은 죽은 사람의 친척 서계문(徐啓文)이
전하여 들은 것이고, 서계문은 노석구의 며느리에게 들었다고 말하였는데,
죽은 사람에게 물을 수가 없어 증거에 의거하여 뒤집기가 어렵습니다.
발로 가슴을 차고 주먹으로 목 위를 쳤다는 것은 범인이 스스로 시인
한 것이지만, 대개 그것은 매우 분한 마음이 격한 것입니다. 발을 들어
가슴을 찰 적에 나 죽는다고 외친 소리는 뜻밖의 상태에서 놀라 ‘악’ 소
리를 막기 위해 입에서 나온 것이고, 계속 독한 주먹으로 목을 두 차례
쳐서 호흡이 끊어졌다고 하였으니, 이 약한 여자의 몸을 보면 어찌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친척이 발로 밟았다고 한 진술은 이미 신빙성이
없고, 노석구가 차고 쳤다고 한 진술은 저절로 판단이 서는데, 차고 쳤다
고 하는 것 중에서 마땅히 경중을 구별하여 실제 죽은 원인을 정하였습
니다. 주먹으로 치기 전에 먼저 발로 찼다는 것은 찬 것이 더 가벼워 가
슴에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발로 차기 전에 먼저 주먹으로 쳤
다는 것은 친 것이 더 무거워 목 위에 깊고 심한 상처가 생긴 것이니,
6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죽은 원인은 친 것이 맞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실제
지금 이 옥사는 이미 검시를 하지 않아 격식을 갖출 수는 없지만, 조
사하여 문서를 작성함에 사망의 실제의 원인과 범인을 구별할 수 없습니
다. 그러므로 실제의 원인은 맞아 죽게 되었다고 기록하였으며, 노석구는
그 처와 혼인한 지 수십여 년 동안 4명의 아들과 딸을 낳아 양육하여,
부부의 윤리가 무겁고 은혜로운 정이 깊었습니다. 다른 여자와 몰래 간
음하여 지금 재앙을 가져오는 실마리가 되었는데, 갑자기 질투와 시기를
당하였으니 석불(石佛)이 등지고 앉은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고, 말이
많이 공손하지 못하여 사람의 입을 다물도록 경계하기는 어려웠으며, 뜻
은 제어하려고 하여도 더욱 여러 차례 격렬하게 되어 분한 생각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한 번 차고 두 번 친 것을 귀신이 시킨 것이라고
한 것은 타고난 성질을 갑자기 가려서 후회하는 마음을 곧바로 생기게
하였으니 탄식해봐야 어쩔 수 없습니다.
스스로 “3척”이 장차 두루칠 것이라고 생각해보고 즉시 한 몸을 먼저
숨겼다고 판단됩니다. 지금 붙잡아 한결같이 질문하여 사실대로 고하게
하였는데, 원래 그 정실은 그가 고의범이 아니고, 자취를 보아도 이미 잘
못을 저질러서 달아났다고 하기 어려우므로 진짜 범인은 노석구라고 기
록하였습니다.
옥사의 전말은 오로지 간증(看證)이 있어야 하는데, 눈으로 직접 보았
다는 노석구의 며느리의 말은 법으로 입증할 수 없고, 몰래 들었다는 김
순오는 두들겨 맞은 현장에서 나 죽는다고 한 소리를 직접 들었다고 하
였습니다. 여러 공초는 저들에게 들은 것이 아닌 것이 없지만, 비록 이미
도주하여 공초를 작성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가 직접 들었다고 한 것
은 직접 본 것과 차이가 없어 마땅히 증거로 삼을 만하므로 증거로 삼는
다고 기록[開錄]52)하였습니다. 안이중(安二仲)은 그 마을의 존경받는 어
른이고, 서여행(徐汝行)은 죽은 사람의 먼 친척이지만 모두 가까운 이웃

52) 개록(開錄):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의 끝에 여러 의견을 적는 것을 말한다.


취어(聚語) 63

이므로 절친한 이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노성원(盧聖元)과 노도원(盧道元)은 모두 노석구의 친척이지만, 당시
현장에 있지 않았으며 다음날 아침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시신을
지키게 되었으므로 사연을 적었습니다. 윤선량(尹善良)은 이미 장인과 사
위 관계의 의리가 있고, 또한 직접 보지 못하였다고 하므로 명목을 세울
수가 없어 한 차례 질문하고 그만두었습니다. 우가(禹哥)의 처는 다만
이 옥사로 화가 생기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그 여자의 간음 때문에 생긴
것이며, 풍속을 바로잡고 독려하는 방법에 있어서 힘을 합쳐 엄하게 죄
상을 신문해야 하였으나, 그 남편과 함께 즉시 도주하여 간 곳을 알 수
가 없어 따라가서 붙잡지 못하였습니다.
서계문은 동기(同氣)53)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생각을 잊고, 마을의 무
사에만 얽매여, 사사로이 매장하고 관에 신고하지 않았는데, 도리어 그의
친족들을 거느리고 노석구의 가산을 파산하여 버린 것은 후의 폐단이 크
게 생길 것이니, 죽은 사람의 친척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듯합니다. 서여
행과 서사용(徐士用) 등은 비록 먼 친척이라고 하지만 모두 나이가 많은
사람이면서 마음대로 엄호하고 흔적을 없애버렸고, 가산을 깨뜨려 버렸
는데 나이 어린 사람들의 행위라고 돌리면서 감히 간섭하지 말라고 한
것 또한 놀라워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면임(面任) 유성업(劉性業)은 면 안에서 뜻밖에 사고가 생겼으므로 마
땅히 즉시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를 올려야 하지만, 지금 관에서 조사할
때에 오히려 지적하는 공초 없이 헤아려 거행하려 한 것이 매우 놀라우
니, 또한 합하여 엄격하게 징계해야 합니다. 이춘명(李春明)의 어머니는
발로 목 위를 밟고 한차례 다리를 때렸다고 말하였는데 김순오의 처와
사사로이 말을 한 것이고, 서여행의 공초에도 나온 것이므로 마땅히 중
요한 증거가 되며, 뿐만 아니라 양반의 부인도 이미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갔으니, 돌려서 질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53) 동기(同氣): 형제・자매를 총칭하는 말이다.


6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시신을 파헤쳐 검시하는 일은 장계로 보고하는 것이 중요하니 감히 갑
자기 요청하지 말아야 하지만, 진짜 범인이 이미 스스로 죄를 시인하여 옥
사의 상황은 별도로 의심할 필요 없이 드러났는데, 다시 조사를 거행하여
처분을 기다립니다. 죄를 저지를 적의 흉기는 아귀 모양의 막대기를 사용
한 것을 줄인 것이고54), 주먹으로 쳤다는 것이 중요하여 작용하였다는 것
은 무기를 쓴 것과 다르므로 그림으로 그려 올려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정범 죄인 노석구는 격식을 갖추어 고을의 옥에 엄격하게 가두었고, 그
외에 여러 사람들은 모두 잠시 보호해주어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모두 보고하오니 참작하고 헤아려 시행하십시오.

노석구의 옥사에 대한 검안의 결정문 [盧錫九獄事 檢案題辭]

1893년(癸巳) 8월 초 9일

조사한 문서를 받아 보았다. 이 옥사가 뜻밖에 발생하여 공초는 증거


로 삼을 수가 없다. 대개 그 4년 동안 쌓인 분노가 한 순간에 갑자기 서
로 덤벼들어 말다툼 할 때에 헐뜯는 말이 드디어 생기고, 집안에서 서로
나누던 말이 오리를 두들겨 패는 화55)를 일으키고, 갑자기 날아가는 나
방을 치는 것이 일어났지만, 그동안의 자취는 맑은 물을 건너는 것처럼
증거가 없어서 실정이 진실로 참혹하고 측은하였다.
정범 노석구는 이웃 노파가 실정을 말로 옮겨 미혹하게 하고 원래대로
되돌리지 않아 집안사람들이 반목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귀에 거슬리
는 말을 듣는 것을 싫어하여 갑자기 손뼉을 치는 자중지란(自中之亂)의

54) 헐후(歇後): 어떤 단어의 끝부분을 생략하고 그 윗부분만으로 전부의 뜻을 갖게 하


는 일종의 은어(隱語)를 말한다.
55) 타압지화(打鴨之禍): 타압경원앙(打鴨驚鴛鴦)의 준말로 하찮은 물오리를 잡으려고 하
다가 아름다운 원앙을 놀라게 하여 달아나게 한다는 것으로, 한 사람을 잘못 처벌하
여 다른 사람들을 전전긍긍하게 한다는 뜻이다.
취어(聚語) 65

행동을 일으켰는데 비록 결발(結髮)56)의 의가 있어도 불과 같은 성질을


억누르지 못해 주먹과 다리로 구타하는 것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구
분하지 못하여, 마치 약질을 당장 죽게 하였으니, 그 참혹하고 독한 것을
이미 말을 할 수가 없다.
무릇 부부 사이는 조금 어긋나고 발끈 화를 내는 일이 있으면 다투는
데, 다투는 것이 심하면 간혹 주먹으로 치거나 발로 차서 스스로 업신여
기는 것이 보통 있는 습관이다. 하물며 그들이 함께 산 것이 수십여 년
이고, 4명의 자녀를 두었으니 부부의 정이 좋았고 부부의 의리가 깊었을
것입니다. 설령 조그마한 실수가 있더라도 저들이 조금 지각이 있었더라
면 어찌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비록 반드시 죽일 마음이 없
었다고 하더라도 일이 망령되고 어그러져도 이같이 심하게 되지는 말았
어야 하는데, 지금 조서를 작성하는 마당에서 후회하는 마음이 즉시 생
겨나도 진정할 수가 없고, 가산 또한 파산하여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
것에서 그 진정을 볼 수가 있다.
무릇 살인을 저지른 옥사에서 목숨을 보상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위로
하여 쌓인 원망을 씻어주는 것이고, 죽는 이가 알더라도 반드시 그 남편
이 살아남을 다행으로 여길 터인데, 어찌 사형을 달갑게 여기겠는가? 또
한 그 부인이 이미 죽고 남편 또한 죽는다면 무고한 자녀는 어디에 의지
할지가 눈을 감지 못하는 한이 될 것이고, 도리어 몸을 죽이는 원한이
심할 것이다. 정조조(正祖朝)의 판결[判付]57)이 있었다. 매번 부부와 관
련된 옥사 때마다 문득 부생(傅生)58)하려는 가벼운 법만 사용하였으니,
성인(聖人)이 법을 사용하는 것 또한 여기에 뜻이 있었다.

56) 결발(結髮): 머리를 맺어 부부가 되는 것을 말한다. 혼인할 적에 남자는 머리를 맺


어 상투를 틀고 간을 쓰며 여자는 머리를 묶어 비녀를 꽂는다. 처음 혼인한 부부를
결발부부라 부른다.
57) 판부(判付): 보고를 올린 형사사건에 대해 임금이 재가한 사항을 말한다.
58) 부생(傅生): 생명을 베푼다는 뜻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의심나는 부분이 있을
때 감형하는 것을 말한다.
6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노석구는 잠시 먼저 엄하게 한 차례 곤장을 쳐 곧 가둘 것이며, 노



성원과 노도원 등은 비록 이불로 가릴 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없더라도
숨기고 보호한 사정과 흔적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안이중과 유성업 등은
모두 면임의 이름으로 옥사의 지중함을 생각하지 않고 전적으로 일을 숨
기려고 조치한 것은 풍속을 교화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위의 4명은
각각 엄하게 곤장 20대를 때릴 것이다. 윤선량은 절반은 사실대로 이야
기하고 절반은 숨겨서 자못 수상함에 걸리지만, 이미 사위의 이름이 있
으니 부인의 부모는 고르게 같은데, 누구를 도와주고 누구를 억제하여
그들이 감히 말하리오. 사정을 참작하고 이치를 궁리해보면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서여행은 별도로 궁리할 단서가 없고, 서계문과 서사용은 마땅히 해야
할 보고를 하지 않고 도리어 부당하게 재산을 파산시켰으며, 지금 일이
지난 후에는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 하였다고 핑계하였으니 매우 놀랍고
통탄스러워 모두 엄하게 곤장 30대로 처벌한다. 서계문은 그가 동기의 정
의를 가지고 있어, 마음은 비록 절박하였어도 생질의 정리를 생각하여 어
쩔 수 없이 염하여 매장하였다고 말한 것은 진실된 사정을 말한 것이다.
이 같은 뜻으로 깨우치고 타일러서 엄하게 삼가도록 하고, 모든 위의
여러 죄인들은 모두 풀어주어 돌려보내, 그 외의 이웃 등 여러 사람들은
이미 보호하고 있다고 하니 그들은 삼가도록 하고 풀어주되 옥사의 사정
은 이미 의혹이 없으니 다시 조사할 일은 그대로 두라. 거행한 상황은
빨리 보고하라.

전 정언 안효제의 상소 [前正言 安孝濟 上疏]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시골의 미천한 출신으로 분에 넘치게 과거에 급


제하고 대각(臺閣)59)에 출입하였고, 여러 차례 임금의 특별한 은혜를 입
어 가슴이 벅차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니 슬픈 감정이 간절하게 몰려옵니
취어(聚語) 67

다. 진실로 임금의 총명을 더욱 열어 다스리고 교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면, 비록 죽음을 당해 간과 뇌가 땅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
을 것입니다. 신은 목독의 벌을 피하지 않고 감히 미쳐서 도리를 모르는
언설을 올리오니, 삼가 바라건대 자세하게 살펴주십시오.
신이 삼가 듣기로는 옛날 선조조(宣祖朝)의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장
수가 관왕(關王)60)의 현명한 영령이 조선을 도와주라고 한 일이 있다고
말하여, 비로소 서울의 남쪽과 동쪽에 두개의 사당을 건립하였다고 합니
다. 대개 관왕의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해와 별과 같이 빛나고 가을 서
리와 같이 늠름하며,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으면서도 하늘과
땅을 활짝 트고 운한(雲漢, 은하)을 엷게 하여 끝없는 세월에 걸치고 백
세 동안 떨쳐 바꾸지 않는다고 하니, 오직 사람마다 그를 존숭하여 받들
고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열성조께서는
봄과 가을에 삼가 향을 피워 축문을 올리고 해마다 제사[中祀]61)를 드렸
으니, 실로 그를 숭상하고 표창하는 아름다운 의리이며, 오로지 제사를
지내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베푸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전하께서 북묘(北廟)62)를 증설하신 것 또한 모두 열성조의 성대
한 뜻을 본받은 것입니다. 어찌하여 최근에는 풍속이 거짓되고 경박한
것을 숭상하고, 무당에게 굿을 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집집마다 당당
히 제향을 드리는 곳에 각종 사당과 성황당을 지어 재앙을 물리치기 위
해 기도하는 지경이 되었습니까? 선비집 여자들도 앞을 다투어 달려가
고, 이를 따르는 습속에 익숙해졌으며, 김이 오르고 기름을 부은 것과 같
은 기운이 한 나라에 퍼졌고, 요망하고 재앙을 가져오는 물건이 만 가지

59) 대각(臺閣): 언관의 소임을 맡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별칭이다.


60) 관왕(關王): 촉한 유비의 신하였던 관우(關羽)의 별칭으로 관우는 왕이 아니었으나
높여 왕자를 붙여 불렀다.
61) 중사(中祀): 나라 제사의 하나로 대사(大祀)보다 의식이 조금 간단하다.
62) 북묘(北廟): 고종은 나라의 안녕을 위해 북쪽에 관왕을 제사지내는 묘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후 동대문 바깥에 동묘를 설치하여 관왕을 받든 관례를 따른 것이다.
6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터무니없는 말로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다.
이전에 무슨 한 종류의 이상한 귀신이 몰래 여우와 벌레 같은 것들을
끼고 거짓으로 성제(聖帝)의 여인63)이라고 칭하면서 스스로 북묘(北廟)
의 주인이 되어, 요망하고 거짓되며 황망하고 거짓된 불경스러운 말로써
서울과 지방 사람들을 속이고 혹하게 하였고, 스스로 신왕(神王)의 빙의
(憑依)로 영령이 강림하였다고 하였으며, 멋대로 군(君)의 호칭을 칭하고
함부로 임금의 은총을 빙자하여 농간하고 사악함은 거리낌이 없이 멋대
로 부립니다.
또한 사대부로서 염치가 없고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널리 끌어들
여 아우나 자식이라 하면서 부채질하며, 서로 숨을 후하고 내쉬고 눈을
부릅뜨고 보면서, 현란하여 위엄과 복을 만들고 권세를 불러들일 수 있
다고 하였습니다. 간혹 수령과 방백들 또한 그 손에서 많이 나왔고, 심지
어 노예와 천인과 귀신같은 무뢰배 또한 줄을 따라 규합하고 결속하여
존엄한 곳에 출입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 더럽고 더러운 신령들이 종묘
와 사우(祠宇)를 썩은 냄새가 나도록 더럽히니, 어느 것이 이보다 심하다
고 하겠습니까?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론이 분출하여 시끄럽게 들끓고 있
는데, 전하께서는 깊은 구중궁궐에 계셔서 어찌 그 같은 종류의 폐단이
점점 만연하여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관왕의 유령이 있다면 또한 마땅히 어두운 가운데에서 분노하여 그 간
사한 실과 요사한 숨소리가 한 번도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이 일
찍이 한곡영(漢谷永)의 상소를 보았는데, “하늘과 땅의 성질을 밝혀 괴이
한 것에 현혹되지 않고, 만물의 뜻을 알아 저들 같은 무리가 속이지 못
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요사한 것들이 있어서 진실로
신하에게 허물이 돌려져 의로써 전하를 이끌지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63) 성제의 여인: 명성황후는 궁중에 무당을 끌어들여 굿을 곧잘 벌이고 왕세자의 건강


을 비는 따위의 행사를 치렀다. 한 무당을 총애해 무령군(武靈君)이라는 봉호를 주
었다. 조선 역사에서 무당에게 봉호, 특히 군을 붙인 첫 사례이다.
취어(聚語) 69

주례(周禮) 에 이르기를 “나라에는 큰 사유로 일어난 하늘의 재앙이


있어 사직단에 제사를 지낸다”라고 하였고, 사기(史記) 에 이르기를 “성
왕(成王)과 탕왕(湯王)64)은 매우 심한 한재(旱災)를 당하여 뽕나무 숲에
기도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큰 사유로 일어난 하늘의 재앙 때문
에 기도하는 것은 사직단에 일상으로 제사하고 그치는데 지나지 않고, 7
년 동안의 가뭄 때문에 기도하는 것은 뽕나무 숲에 제사하고 그만두는
것에 불과한데, 하물며 지금 나라에 큰 이유가 없이 하늘의 재앙이라는
변고가 없고, 또한 성왕과 탕왕 때와 같은 큰 가뭄이 없는데도 기도하는
일이 어찌하여 자주 있습니까?
그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만 사직단에 일상으로 제사하고 그만두는 것
뿐 만이 아니라 밖으로는 많은 사당과 성황당과 불교의 제단과 무당의
방울에 이르기까지 거의 빈 날이 없이 걸핏하면 수만 냥을 허비하고, 궁
문 안에서 목욕재개하고 금기를 일삼아, 마치 불사를 짓는 것처럼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소경인 판수와 무당은 이 때문에 횡행하고, 승니(僧尼)의 요상한 도는
이 때문에 멋대로 방자하였으며, 거짓된 도와 비류(非類)는 이 때문에 들
끓고 있고, 사당패와 광대는 이 때문에 시끄러우며, 창고의 재물은 이 때
문에 궁핍하게 되었고, 관청의 인사는 이 때문에 어지럽게 되었으며, 궁
궐은 이 때문에 정숙하지 못하게 되었고, 형벌과 포상은 이 때문에 명확
하지 않게 되었으며, 조정의 정치는 이 때문에 쓰러지고 무너졌으며, 백
성은 이 때문에 곤궁하여 고달프게 되었으니, 그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
기도하고 제사를 지낸 것 때문입니다.
오호라! 전례(典禮)를 명확하게 하고 신명(神明)을 섬기는 것을 밝혀
실제로 도움이 되게 한 것은 요왕(堯王)・순왕(舜王)・우왕(禹王)・탕왕(湯
王)・문왕(文王)・무왕(武王)의 성스러운 정치입니다. 더러운 신을 좋아하

64) 성왕(成王)과 탕왕(湯王): 성왕은 주나라 임금으로 숙부 주공의 도움을 받아 정치를


잘한 임금이다. 탕왕은 은나라를 세운 군주로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7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고· 숭상함으로써 복을 구하고 도리어 어그러지게 하는 것은 난신의 도입


니다. 앞의 역사를 하나하나 살펴 거울로 삼고 아주 명확하게 해야 하는
데, 신은 감히 지금의 기도와 제사가 과연 모두 전례에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진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과 땅의
큼과 해와 달의 밝음으로 요왕・순왕・우왕・탕왕・문왕・무왕의 자태처럼 뛰
어나고, 요왕・순왕・우왕・탕왕・문왕・무왕의 도를 본받았는데, 좌우의 여러
신하들은 요왕・순왕・우왕・탕왕・문왕・무왕의 도를 섬기지 않고 전하를 섬
기니, 신은 그것이 애통합니다. 소경인 판수와 무당은 그 말이 얕아서 황
망하고 거짓된 것에 가까우니, 진실로 영험한 실제 이치가 아닙니다.
비록 여염의 사이에 조금 사리를 이해하는 사람도 오히려 이 같은 무
리에게 현혹되지 않는데, 하물며 전하는 진실로 총명한데도 오히려 그것
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아! 저 요망하고 거짓된 말은 반드시 “마땅히 이
와 같은 이후에야 성스러운 전하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고, 복과 좋은
일이 올 것이며, 나라의 경사가 길어질 것이고, 백성들이 편안해질 수 있
다”라고 말하지만, 신은 결코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무릇 편안하게 수명을 누리시는 우리 전하께서 우리의 나라와 집안을 도
우시는 것이 어찌 우리의 조종이 하늘에 올라가고 인간에게 내려오는 영
혼과 같음이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제사 지내는 것을 넉넉하고 정결하게 하여 종묘사직
을 받드는 정성이 극진하다면 성스러운 수명은 스스로 연장될 것이고,
복과 좋은 일이 스스로 올 것이며, 나라의 경사가 스스로 길어질 것이고,
백성들이 스스로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다시 기도하고 빌
겠습니까?
예기(禮記) 에 이르기를 “옳지 않은 도를 고집하여 정치를 혼란하게
하는 사람은 죽인다”라고 하였고, 가어(家語) 65)에 이르기를 “필부가제

65) 가어(家語): 공자의 가르침을 적은 책으로 위서라고도 한다.


취어(聚語) 71

후(諸侯)를 현혹시키면 마땅히 죽인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요망한


무당이 군(君)을 칭하여 법을 썩게 하니 어찌 옳지 않은 도를 고집하여
현혹시킬 뿐이겠습니까? 안으로는 모든 관리들이, 밖으로는 군대와 백성
이 수많은 입으로 하나같이 이야기하지만, 누구도 이 같은 여자를 수레
로 끌어 찢고, 크게 요사스러운 기운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으리오마는
마음으로 무서움을 품어 죽이라고 입을 열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조정
이 한심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또한 떳떳한 성품에 격동되어 한번 이 같은 여자를 보고 손으로
그의 머리를 쳐서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노하
였고, 단지 작게나마 나라에 보답하는 정성이 간절하여, 이에 감히 존엄
을 업신여기는 것을 무릅쓰고 지위에서 벗어난 경계를 범하여[出位之
戒]66) 삼가 전하께 다음과 같이 비옵니다.
과단성 있는 정치를 바로 행하여 빨리 이러한 여자를 거두시어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으십시오. 여러 연줄에 의지하여 붙은 사람들은 모두 그
소굴의 근원을 조사하여 모조리 마땅한 법으로 처벌하십시오. 기도하여
이익이 없는 일은 모두 혁파하여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고, 임금의
법을 떨치게 하며, 여론을 시원하게 하소서. 모두 큰 성인이 하신 것이
편상의 만만부당(萬萬不當)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면 진실로 종묘사직의
큰 다행이고 전하의 성대한 덕이십니다. 만약 소신의 말을 미치고 망령
된 것이라고 생각하여 소신을 법을 맡은 관리에게 명하여 국문하신다면,
신은 마땅히 하나하나의 조문을 들어 변석하여 대답할 것입니다. 비록
엎드려 도끼를 지고 죽더라도 남은 후회가 없을 것이니, 신은 끝없이 피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간절하게 기원하옵니다.

66) 출위지계(出位之戒): 정사의 의견을 내는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건의를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곧 언관이나 현직에 있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정치를 개진하
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7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청풍의 민요를 조사하여 밝힌 글 [淸風民擾 査覈跋辭]

1893년(癸巳) 8월 초 9일

모두 각 사람들의 공초하는 말이다. 지금 백성들이 시끄럽게 소요를 일


으킨 것은 곧 통문에 실린 6조건의 일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이번에 집집마다 세금을 징수한 일.
하나, 충주참의 선전(船錢)을 더 징수한 일.
하나, 호포목(戶布木)의 대전(代錢)을 지나치게 징수한 일.
하나, 방어영(防禦營)을 혁파하고 더 징수한 것을 마땅히 감할 일.
하나, 환곡미에 많이 농간을 부린 일.
하나, 불항조(不恒條)67)를 이미 이자를 불리는 돈으로 삼아 해마다 더
욱 징수한 일
각 조목을 좇아 엄하게 조사하고 문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불항조에
대한 용하(用下)68)는 혹시 경사(京司)의 척문(尺文)69)과 도착했다는 표
지(表紙)가 있거나 혹은 경영(京營)의 공문과 회답이 있을 것입니다. 이
것은 다른 읍과 비교하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그 수효를 따져보아
도 또한 지나치게 기록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두(狀頭)인 여러 사람에게 질문하였는데, 사실을 주워 모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무지하여 함부로 조작하였다고 자수하였습니다.
경내의 각 마을의 일을 아는 백성을 불러서 문서를 내 보여주면서 조목
조목 깨우치도록 타이르자, 모두 말하기를 “본관의 사또가 명확하게 살
피고 백성을 사랑한다고 하였는데, 아! 저 패륜을 저지른 백성들이 처음
부터 일을 알지 못하고, 중심이 없이 의심이 생겨 온 읍에 시끄러운 소
요가 일어났는데, 관가에서는 여러 백성들을 실망케 돌려보내니 탄식하

67) 불항조(不恒條): 임시로 쓰이는 비용의 조목을 말한다.


68) 용하(用下): 비용으로 내려주는 돈으로 용하전이라고도 한다.
69) 척문(尺文): 지방 관청에서 호조에 조세를 바치고 맡은 영수증이다.
취어(聚語) 73

고 애석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하여 유림(儒林)들의 소장[單子]의 말을 접하니 또한 일을 아는 백
성이 보고한 것과 같아 해당 고을의 수령이 하자가 없는 것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대개 이 읍은 처음에는 민고(民庫)라는 것이
없었고, 변통하여 처리할 돈이 없어 백성에게 거두어 조처하기를 해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적이 없어 문득 관례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 같은 거행이 있었던 것은 임진년(壬辰, 1892년) 5월부터 계사
년(癸巳, 1893년) 3월까지 용하한 조목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 호(戶)에
서 징수하면서 중간에 임진년 8월일(月日)에 진상할 곳에서 책정한 물건
값 400냥은 즉시 그때 먼저 별도로 거두었기 때문에, 지금 호에 징수하
는 것에는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한 임진년 5월부터 계
사년 3월까지의 조목은 속을 자세히 따져보니 비록 혼동하여 기록한 것
은 없으나, 겉만을 살펴보면 거듭 징수한 듯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
되지 않으니, 나머지도 모두 의심스럽습니다.
이 때문에 3개 마을에서 소장을 올린 것이 있어서 회답을 내려 보낸
이후에 조사하여 의심을 풀려 하였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이 관아의 회답
을 따르지 않고 함부로 통문을 발송하여 먼저 6개 마을에 모여 8개 면
에 통문을 돌렸는데, 혹은 곡절을 알지 못하고 오거나 혹은 풍문에 민심
이 요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 3,0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 통문을 돌린 우두머리는 겉으로는 익명을 칭탁하고, 속으로는 못된
습성을 품어 백성을 모아 몰려 들어가면서 조금도 거리끼거나 두려워하
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관아의 회답을 제시하여도 물러가지 않았고, 하나
하나 깨우치고 타일러도 듣지 않았으며, 언사가 많이 급박하고 얼굴빛이
매우 난폭하였습니다. 아전들을 발로 짓밟았다고 핑계하면서 감히 관장
(官長)을 협박하였으며 마침내 고함과 소리를 지르고 뛰어들어, 관아의
창과 문을 찢고 부수었습니다. 계속하여 백성들과 아전의 집을 허물고
부수었으나, 이 때 관에서는 명령을 시행할 길이 없었고, 아전들은 적을
7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저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납부한 돈을 독려하여 추심하였고, 심지어
불을 지르고 밤을 새웠습니다.
저들은 돈을 환급한 후에 물러간다고 기약하였으니, 이와 같은 변괴는
그전에는 없었습니다. 저 무리들은 마침내 간교한 계책으로 도리어 길
가운데에 머물기를 원하고,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며
칠이 지나지 않아 장두인 이영하(李永夏)와 황정수(黃正秀)의 아들과 조
카는 아버지와 숙부를 위한다는 핑계로 다시 백성들을 불러모아 감옥 문
을 부수고 죄수를 풀어주니, 이것 또한 악습에 관계됩니다. 마을의 풍속
이 어리석고 완악하다고 하지만, 어찌 이러한 지경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6조목의 일은 하나도 백성을 학대하거나 법을 위반하는 일에
가까운 것이 없고, 하물며 일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관가에서
실수한 것이 없고, 아전들이 간악한 무리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스스로 난민(亂民)으로 돌아가고 다시 의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
이며, 이러한 습성이 더욱 증가한다면 관은 관이 될 수가 없고 읍은 읍
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동 이영하・김문호(金文浩)・황정수・신태성(申泰成) 4명은 모두 사리를
알지 못하고 있으며, 읍폐와 백성들의 고통이 어떤 일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길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만을 듣고 함부로 크게 얘기하는 사람들입
니다. 심학수(沈學洙)는 글자를 아는 것이 병이 되어 통문과 소장의 초
안을 써서 주고 통문을 발송하는 것에 대해 참여하여 논의한 사람입니
다. 심능형(沈能衡)은 어리석고 굼벵이 같은 무리로 8개면에 통문을 돌
리자고 논의를 주장한 자로, 옳지 못한 것을 처음으로 만들었고[作俑],
비록 남쪽 가까운 지역 출신이지만 많은 백성들을 모으고 통문을 돌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위의 6명은 똑같이 난민으로 그들 죄의 가볍고 무거움을 구분할 필요
없이 모두 법에 따라 참작하여 처리하였고, 저들이 모여 있는 짓을 그치
지 않을 것이기에 장수와 나졸을 정하여 한꺼번에 해당 부(府)와 겸한
취어(聚語) 75

읍인 제천현(堤川縣)에 옮겨 가두었습니다.
정우용(鄭右用)은 비록 통문을 돌린 장두는 아니지만 그 날 관아의 뜰
에 들어가 말로 관장을 핍박하여 기강이 끝이 없게 한 사람이니, 엄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므로 또한 제천현에 옮겨 가두었습니다.
수향리(首鄕吏) 유재도(劉載道)와 우두머리 아전 유동환(柳東煥) 등은
비록 읍의 일에 대해 간사한 짓을 하지 않았으나, 그 자신이 우두머리
이향(吏鄕)으로 관가로 하여금 이러한 백성들의 소요를 당하게 하였으니,
어찌 감히 모른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공문에 따라 모두 제천현에
옮겨 가두었습니다.
이용구(李龍龜)는 이영하의 아들이고, 황두성(黃斗星)은 황정수의 조카
입니다. 설령 아버지와 숙부를 위해서 사실을 진술하고 호소하여 처분을
기다린 것은 당연한 도리이지만, 주저함이 없이 두 번이나 백성을 모아
옥문을 마음대로 부수고 죄수를 풀어준 것은 크게 폐습(弊習)에 관계되
니 엄히 징계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들의 아버지와 숙부는 이미 옮겨
가두었기 때문에 우선 그곳 부의 옥에 가두고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본부(本府)의 아전 김동조(金東祚)는 환곡을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래 관계된 것이 없지만, 중심을 잡지 못한 망발의 말이 마침 민요의
현장에서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단서가 되었으므로 심문하고 공초를
하였습니다. 원래 그 사정을 따져보면 자기 수령을 보호하고 도리에 어
긋나는 말을 금지하기 위해서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잠시 붙
잡아서 부의 감옥에 가두고 처분을 기다립니다.
이범수(李範洙)는 판곡(板谷)에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8개면에 통문
을 돌릴 때에 논의를 배척하고 스스로 물러났는데, 이미 처음에는 근남
(近南) 6개 마을에 통문을 발송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당장 잡아
조사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도망을 가서 심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갇혀
있는 김익성(金益性)은 그 아우가 팔성(八性)이고, 장두로서 옥문을 부수
는 틈을 이용하여 빠져나간 사람인데, 그대로 도망을 가서 잡을 수가 없
7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었으므로 잠시 그대로 가둔 형식을 취하고 그로 하여금 관아에 출두하도
록 독촉하였습니다.
해당 부의 불항전(不恒錢)에 용하된 모든 액수는 아주 자세하게 기록
하였고, 호에서 징수한 돈은 구별하여 모두 기록하여 책으로 엮었으며,
갇힌 무리의 이름도 책으로 엮어 모두 수정하여 올려 보냈습니다. 관아
의 창호(窓戶)는 친히 살펴 조사해 보니 과연 찢어지고 부수어져 마치
큰 화로의 주둥이 같은 모양이었으며, 감옥의 자물쇠는 조각조각 부서져
있었습니다. 해당 부의 불항조는 공적인 돈 중에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
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상납하였으나 적체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읍의
형편으로는 만에 하나 모양새를 갖출 수가 없어서 여러 아전 등이 사유
를 갖추어 올려 보냈으므로, 이로 사실을 들어 보고하고 처분을 기다립
니다. 군수는 이로부터 관가로 돌아갔는데, 이러한 사정도 모두 보고하니
참작하고 살펴서 시행해 주십시오.

1894년 4월 초 2일 [甲午 四月 初二日]

내무부의 초기(草記)70)에 계속 전라도 감영의 전보를 보니, 동학 무리


의 동정이 더욱 헤아릴 수 없어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
에 임명하여 내려 보내고 해당 부서로 하여금 입으로 전하여 비답을 내
리게 하였는데, “장위영(壯衛營)의 군대 몇 부대는 임시로 여쭈어, 윤선
(輪船)을 통솔하여 이끌고 즉시 내려 보내어 진압하고 토벌하는 것이 어
떠하겠습니까?”라고 하여,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셨다.
전라병사는 교체되어 정령관(正領官)의 임무를 맡게 하였고, 전라병사
대신으로는 전(前) 병사 이문영(李文永)이 다시 제수되었다. 병조가 입으
로 전하는 정사로 양호초토사의 단자는 홍계훈, 내금위장의 단자는 이유

70) 초기(草記): 중앙의 각 관아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항을 요약해 임금에게 올리


는 문서를 말한다.
취어(聚語) 77

태(李裕泰), 공주영장의 단자는 이기태(李基泰), 청주영장의 단자는 조희


문(趙羲聞)이고, 전교하기를 “양호초토사의 비밀 병부(兵符)를 전해 주
라”고 하였고 사알(司謁)이 입으로 전한 하교는 “초토사는 현지에서 절
제할 적에 올리는 모든 공문서의 절차를 선무사의 예에 따라 하고, 마패
와 도장[印符]은 관례에 따라 전하여 주라”하였다.

4월 초 10일 전라감영의 전보 [初十日 完電]

지금 태인(泰仁)에서 보고한 것을 보았는데, 어제 유시에 도착한 정읍


(井邑) 공형의 문서에는 동도(東徒)가 오참에 흥덕(興德)에 주둔하였다가
고창(高敞)과 무장(茂長) 등지로 향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정탐한 보
고를 보니 동도가 어제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로 향해 갔다고 하였습니
다. 그러므로 초토사와 함께 공동으로 공문으로 타일러서 체포하여 붙잡
을 뜻을 가지고 엄하게 단속할 것이라고 기약하였습니다.

4월 11일 전라감영의 전보 [十一日 完電]

지금 흥덕의 겸관(兼官)이 보고한 것을 보니, 저 무리가 다시 그저께


읍 안에 곧바로 들어가 무기를 탈취하였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고창으
로 곧바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고창 아전의 문서내용을 들어 보니,
“그저께 술시(戌時, 오후 7∼9시)에 동도 수천 명이 흥덕에서부터 본 읍
에 곧바로 들어왔고, 옥을 부수어 갇혀있던 동학 무리 7명을 석방해 내
보냈으며, 곧 동부(東部)로 향하여 은대정(殷大靜)71)의 집을 부수고 재산
을 파산시키고 불을 질렀으며, 무기를 탈취하고 각종 공문서를 수색하고,

71) 은대정(殷大靜): 은씨 성을 가진 대정현감을 지낸 사람으로, 곧 고창출신으로 제주의


대정현감을 지낸 은수룡(殷壽龍)을 말한다.
7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도장을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본래의 수령은 어렵게 피하여 어제 무장
으로 방향을 바꾸어 갔다”고 합니다. 휴가를 얻어 부임하지 않은 도내에
있는 수령을 재촉하여 내려 보낼 일입니다.

4월 11일 충청감영의 전보 [十一日 錦電]

회덕(懷德)에 진을 친 동도를 토벌하고 붙잡는 일은 출병하여 주둔한


초토영의 군관 및 청주병영의 소속 대관(隊官)에게 엄하게 지시하였습니
다. 즉시 군관이 손으로 쓴 보고서를 보니, 어젯밤에 저 무리들 중에서
귀화하여 해산하고 돌아간 사람이 천여 명이었습니다. 연달아 보내온 대
관의 보고서를 보니 옥천에서 출발하여 회덕에 도착하였는데 저 무리가
모여 있으므로 총을 쏘고 곧바로 돌입하였는데, 저들 무리가 그전에 빼
앗았던 무기를 내버리고 도주할 때에 두놈을 사로잡아 진영 가운데에 굳
게 가두었고, 총 44자루, 창 41개, 환도(環刀) 60자루, 연환(鉛丸), 악수
궁(握手弓) 3장, 화살 300부(斧), 악철추(握鐵椎) 5개를 회수하여 해당
군현에 임시로 보관해 두었다고 합니다. 군기를 원위치로 추심할지 여부
는 자세하게 알지 못하겠고, 저 무리를 붙잡는 것은 다행입니다. 다시 엄
하게 지시하여 추가로 붙잡게 하십시오.
바야흐로 지금 장계로 보고하건대 서울에 올라간 수령은 즉 청산(靑
山)・아산(牙山)・회덕(懷德)・홍주(洪州)・연원(連原)・평신(平薪)의 수령이니
빨리 재촉하여 내려 보내십시오. 공주와 옥천 진영의 영장이 아직까지
부임하지 않았으니 곧바로 부임할 수 있기를 삼가 바라옵니다.

무장 동학 무리의 포고문 [茂長 東學輩 布告文]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취어(聚語) 79

인륜 중에서 큰 것인데,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강직하며, 어버이가 인자


하고 자식이 효도를 한 이후에 나라가 이루어지고 끝이 없는 복이 올 수
가 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셨으며, 신통력 있는 명확함과 성스러운 명석함을 지니셨다.
현명하고 어질며 바르고 강직한 신하가 주위에서 명석하도록 도와주면
요순(堯舜)의 교화와 문경(文景)72)의 통치를 가히 지정하고 반드시 이루
어질 것이라고 바랄 수가 있다.
지금 신하라는 자들은 나라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녹봉과
지위를 훔치며, 전하의 총명을 가려서 아부하고 뜻만 맞추면서 충성스럽
게 간언(諫言)을 하는 선비에게는 요망한 말을 한다고 하고, 정직한 사람
을 비도라고 부른다. 안으로는 나라에 보답하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학대하는 관리가 많아, 백성들의 마음은 날마다 더욱 변하여 가
정에 들어가서는 생업을 즐겁게 하는 일이 없고, 밖에 나와서는 몸을 보
호할 방법이 없으며, 학정이 날마다 심하여 ‘악’하는 소리가 서로 계속되
고 있고, 임금과 신하의 의리와 부모와 자식의 윤리, 위와 아래의 분별이
반대로 무너지고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관자(管子)는 말하기를 “사유(四維)가 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멸망한
다”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 심각하다. 정승 이하부터
방백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
신을 살찌우고 가문을 윤택하게 할 계획에만 마음이 간절하고, 인사를
하고 관리를 선발하는 통로는 재물을 생기게 하는 길로 생각하고 있으
며, 과거시험 장소는 물건을 교역하는 시장과 같게 되었고, 많은 재물과
뇌물이 왕실 창고에 납부되지 않고 도리어 개인 창고를 채워 나라에는
채무가 쌓였다.
나라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란하고 멋대
로 놀아 두려워하고 거리끼는 것이 없으니, 전국은 어육(魚肉)이 되고 만

72) 문경(文景): 중국 한나라의 제왕인 문제와 경제를 말한다.


8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백성은 도탄에 빠졌는데도 수령들의 탐학은 참으로 그대로이다. 어찌 백
성이 궁핍하고 또 곤궁하지 않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근본이
깎이면 나라는 쇠약해지는데,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책을
생각하지 않고 시골에 저택을 건립하여 오직 혼자만 온전할 방법만을 찾
고, 다만 녹봉과 지위를 훔치니, 어찌 그것이 사리이겠는가?
우리 무리는 비록 시골에 남겨진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살
고 임금의 옷을 입고 있으므로 앉아서 나라가 위태롭게 되는 것을 볼 수
없어, 8도가 마음을 같이하고 수많은 백성이 의논하여 지금 의로운 깃발
을 내걸고 보국안민(輔國安民) 하는 것으로 죽고 사는 것을 맹세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비록 놀라운 것에 속하지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각
각 백성의 생업을 편안하게 하고 태평한 세월이 되도록 함께 기원하며,
모두 임금의 교화에 감화된다면 천만다행이다.

4월 11일 오후 5~7시 전라감영의 전보 [十一日 酉刻 完電]

지금 무장에서 초 10일 보고한 것을 보니, 해당 수령이 부임할 때에


유향소(留鄕所)에서 올린 글에, “감영의 지시에 군사를 모집하여 출동시
켜 동도 44명을 붙잡아 가두었습니다. 초 9일 사시에 동도 1만여 명이
혹은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각각 총과 창을 휴대하여 동헌과 각 관청에
곧바로 들어가 한결같이 모두 허물고 깨뜨렸으며, 붙잡혀 갇힌 동학 무
리를 풀어주고 읍 안의 민가에 불을 질렀는데, 본관의 수령은 아직 부임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저들 무리가 간 방향이 어느 곳인지 불같이
빨리 보고하도록 지시문으로 보냈는데, 저 무리를 붙잡아 가둔 곳을 매
번 이와 같이 독을 드러냅니다. 그들의 흉악한 마음을 알아보니, 더욱 분
하고 한탄스러움이 극에 달합니다.
취어(聚語) 81

5월 초 2일 서울에서 전해 온 기별 [五月 初二日 京奇]

호남의 소요는 날마다 더욱 창궐하고 있습니다. 초토사 홍계훈의 처음


이름은 재희(在羲)인데, 행군한 지가 이미 1개월이 넘었어도 아직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지난 27일 동적(東賊)이 전주성(全州城)에 갑자기
뛰어 들어와 총을 쏘고 불을 지르자 전 감사 김문현(金文鉉)은 미복을
입고 황급히 공주로 피하였고, 전주 관아에서 받들던 조경묘(肇慶廟)73)
와 경기전(慶基殿)74)의 위판과 영정은 전주부의 30리 거리에 있는 위봉
산성(威鳳山城)으로 옮겼습니다. 28일에 초토사가 이끄는 군대가 추격해
와서 전주부 아래에서 전투를 펼쳐 저들 무리 중에 갑옷과 투구를 쓰고
총을 쏘는 자 30여 명을 죽였고, 또한 목을 벤 것이 수백 명이었으며,
이후 저들 무리는 성책을 견고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 뒤의 소식은 잠시 듣지 못하였는데 선전관(宣傳官)75) 및 하인 2명
과 임금의 말씀을 알리는 초토사의 종사관 2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
습니다. 새로 부임한 감사 김학진(金鶴鎭)76)은 그믐날 여산(礪山)에 도착
하였고, 순변사(巡邊使)77) 이원회(李元會)는 서영(西營)의 군사 5초(哨)
를 거느리고 그저께 출발하였습니다. 염찰사(廉察使) 엄세영(嚴世永)은
28일에 출발하여 옛 전주감사에게 병부(兵符)나 인신(印信)을 넘겨받기
도 전에 멋대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 그가 성을 지키지 못한 일로 임금

73) 조경묘(肇慶廟): 이성계 조상인 도조・익조・목조・환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올


리는 곳으로, 경기전 안에 두었다.
74) 경기전(慶基殿):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전주
가 이성계 조상의 터전이므로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하여 1442년 이곳에 경기전을
창설하였다.
75) 선전관(宣傳官):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띤 벼슬아치를 말한다.
76) 김문현의 후임으로 전라감사에 임명되었으나, 전주의 선화당으로 들어와 부임하지
못하고 전주 입구인 삼례에 머물면서 관망하고 있었다. 이후 전주성을 수복한 뒤에
부임한다.
77)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해 군사를 딸려 현지로 보낸 뒤 다시 순변사라는 이름으로
현지의 사정을 살피게 하는 임무를 주어 이원회를 보냈다.
8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의· 전교에 따라 잡아오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대간(臺諫)의 계문


(啓聞)이 쏟아져 청국에 구원을 요청하여서 청나라의 군선이 며칠 후에
인천에 도착하여 정박(碇泊)한다고 하였습니다.
옛 방백은 혼자 충청감영으로 도주하였고, 전주부의 판관은 정령을 어질
고 착하게 한 탓으로 하여 의리로 보아주어 욕을 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탐지하여 보고하는 군사를 죽이고 전기선을 끊고 진산(珍山)과 금산(錦山)
으로 향한다고 하여, 그곳에 거주하던 백성이 황급하게 흩어졌습니다.

5월 초 9일 순변사 이원회가 청산에 보낸 전령 [初九日 巡邊使 李元會


傳令于靑山]

즉시 초토사의 전보를 보니 오늘 초 3일 신시 경에 전라감영에 주둔


한 동학의 무리 500여 명과 괴수 김순명(金順明), 장사(壯士)인 14세 아
이 이복롱(李福弄)78)이 모두 참살되었고, 총과 칼 300여 자루를 획득하
였으며, 적도(賊徒) 중에서 도주하는 자는 전주부의 백성이 하나하나 붙
잡아 들였는데, 얼마 안 되어 성을 되찾을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이같이
토벌하고 체포하여 거의 제거하여 평정하였으니 매우 다행이다.

진사 정성우의 상소 [進士 鄭惺愚 疏]

삼가 아뢰옵니다.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은 우주의 기둥이고 백성의


주춧돌이 되는데, 사람이 되어 이것이 없으면 의관을 갖추었다고 하더라
도 짐승에 불과하며, 나라에는 이것이 없으면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여
도 귀신과 여우에 불과합니다. 대체로 무릇 천하국가의 신하된 사람이
진실로 사람의 마음이 있고 나라를 향한 정성이 있다면, 어찌 짐승과 귀

78) 이복롱(李福弄): 이복룡(李福龍)의 오기이다.


취어(聚語) 83

신과 여우가 되는 지경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아! 이른바 개화(開化)의 무리들이 외국에서 활동하다가 곧 본국으로
돌아와서 모양을 바꾸어 이상한 차림새를 하고 다른 나라의 말을 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면서, 겉으로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겠다는 말을 핑계로
삼고, 속으로는 윤리를 모르는 마음을 품고79), 뱀처럼 서리고 지렁이처
럼 얽혀서 외국인을 선동하고 얽어매어 만고에도 없을 변란[갑신정변]80)
을 일으켰으니, 옛날과 지금의 역사에 어찌 이러한 역적이 있었으며, 천
하만국에 어찌 이러한 변란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역적의 무리가 혹은 도망가서 아직 붙잡지 못하였고, 혹은 죽어
서 형을 집행하지 못하였으며, 혹은 살아 있어도 아직 죽이지를 못하였
고, 혹은 벼슬을 하면서 정치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오직 우리 열성조께
서 수백 년 동안 이룩한 법도가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난신역도에 의해
중지되고 없어지게 되었단 말입니까? 이 역적은 단지 폐하의 역적만이
아니라 바로 선왕들의 역적도 되는데,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살려주는 것
을 좋아하는 덕만을 가지고 지금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십니까?
아! 애통합니다. 갑신년(甲午, 1884년) 10월에 법망을 피해 도망한 역적
의 무리가 해외로 자취를 숨겼다가 곧 갑오년 6월의 난81)을 일으켰고, 을
미년(乙未, 1895년) 8월의 큰 역적82)이 되었습니다. 이를 살펴보건대 앞뒤
에 걸쳐 반역을 도모한 사람들을 모두 소탕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화근이
될 것이 틀림없으니, 어찌 진정으로 애통하고 절박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
니까?
79) 효경(梟獍): 효(梟)는 어미를 잡아먹는 새이고, 경(獍)은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인데,
흉악하여 윤기(倫紀)를 모르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80)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을 말한다. 당시 김옥균 등 개화파들이 일본공사관을 끼
고 정변을 단행했으나 3일 만에 실패하였다.
81) 일본군이 경복궁 강점을 단행하여 고종을 유폐하고 갑오개화정권을 출범시킨 사건을
말한다.
82) 일본 낭인들이 주축이 되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말하며,
이 사건에 일부 친일파들이 협조하였다.
8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흉도 서재필(徐載弼)은 만고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고도 방자하
게 본국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감히 같은 하늘 아래에 살면서 나라의 권
세를 손에 쥐고 마음대로 희롱한다는 말입니까? 또 하물며 스스로 폐하
의 앞에서 외국의 신하라고 말하였으니, 그가 만약 외신(外臣)83)이라면
어찌 조선국의 일에 관여한다는 말입니까? 저 이른바 독립신문(獨立新
聞)이라는 것은 비방하는 것에 불과할 뿐 도무지 의리가 없으니, 이는
나라를 위한 것도 아니며 또한 백성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선왕의
법제를 고쳐서 오로지 본국을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흉
악한 역적을 어떻게 하늘과 땅 사이에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갑오년 6월의 간악한 무리 김가진(金嘉鎭)・안경수(安駉壽) 등은 맨 먼
저 주창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였는데, 나라에는 이와 같은 병폐를 제거
할 사람이 없고, 박정양(朴定陽)・조병직(趙秉稷) 등은 탐관오리로서 의로
움이 없었고, 의로움이 사라져 난을 일으켰으며, 이윤용(李允用)은 만 가
지 죄를 모두 갖추고, 온 집안이 모두 탐관오리였습니다. 이러한 간악한
무리는 권리가 있는 직책을 장악하고, 국외(局外)의 동정과 궁궐 안에서
조종하는 것을 살피지 않은 것이 없어 바로 그날의 흉악한 재앙이 있게
하였으니, 행동거지를 따져 보면 용서하기가 어려운 자가 죄를 저지른
것이 이들입니다.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등은 반역을 꾀한 우두머리로 이미 외
국의 공보(公報)에 나왔으니, 본국의 의리가 있음에도 어찌하여 성토하지
않는 것입니까? 을미년 8월의 대역죄인 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조희연(趙羲淵)・권형진(權瀅鎭)・이두황(李斗璜)・우범선(禹
範善)・이범래(李範來)・이진호(李軫鎬) 등은 먼저는 간악한 무리가 되었
고, 후에는 역적의 무리가 되었는데, 음모와 흉한 계책이 왕망(王莽)84)이

83) 외신(外臣): 서재필은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귀국하


였다. 그는 고종을 배알할 때에 미국 시민이라고 하여 자신을 외교관들이 사용하는
용어인 외신이라고 불렀다고 하여 비난을 샀다.
84) 왕망(王莽): 전한(前漢) 말의 권신(權臣)으로서 임금을 죽이고 나라까지 빼앗아서 황
취어(聚語) 85

나 동탁(董卓)보다 더 심하였으며, 이괄(李适)이나 신치운(申致雲)85)보다


심하였습니다.
김윤식・어윤중으로 말하자면 죄를 성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
니다. 삼가 원하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시원스럽게 결단하십시오. 흉도
서재필은 그대로 둘 수 없는 자입니다. 지금 만약 머뭇거려 그대로 둔다
면 훗날 다시 갑신년과 같은 일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알겠습
니까? 죄를 면하여 내려준 은전을 다시 거두어서 빨리 나라의 법도를
바로잡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갑오년의 간악한 무리에게도 또한 나라의 법을 시행하는 것이 옳습니
다. 을미년의 대역죄인 중에서 죽은 사람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벌을
내리는 것이 옳고, 도망간 사람은 잡아서 사형을 시키는 것이 옳으며, 살
아있는 사람에게는 빨리 나라의 법을 시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은
다만 그 자신만을 죽여서는 아니 되고, 모두 연좌의 법률을 적용하여 국
가에서 호랑이를 키운 후환을 막아, 신하와 백성의 뼈에 사무친 원통함
을 씻어 주십시오. 이와 같이 제거하고 다스린 후에야 재앙과 난리의 싹
이 감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폐하께서는 누구를 꺼려하
여 오래도록 이 일을 시행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지금 난을 바로잡고 태평하게 다스리고자 한다면, 김홍집과 유길준이
천거한 여러 관리는 바로 대역 죄인이 천거한 자들로, 내외의 관직에 그
대로 두어서는 아니 되니, 즉시 대관 이하로부터 모두 제거하여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고 맑게 하십시오. 그리고 흉도가 정한 신식 관제와 품계
등의 여러 건의 문자(文字)에서 갑오년 6월 21일 이후의 것은 모두 시행
하지 마시고, 빨리 선조(先朝) 때의 옛 제도를 회복시키며 빨리 여러 군
과 지방의 장병을 두어서 팔도의 소요를 평정하시고, 안팎의 병권(兵權)

제(皇帝)라고 일컬었으며, 신(新)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85) 신치운(申致雲): 자는 공망(公望), 호(號)는 삼지당(三之堂)이고, 송시열(宋時烈)·송
준길(宋浚吉)·권상하(權尙夏)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흥해(興海)에 유배되었다
가 처형되었다.
8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을· 전하께서 총괄하여 살피옵소서.


무릇 제왕의 어좌(御座)는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그 곳에 있는 것과 같
아 잠시도 다른 곳으로 어가를 옮길 수가 없으니[播遷]86), 즉시 궁궐로
돌아오셔서 안팎의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간절한 소원을 펼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빨리 국장(國葬)87)을 시행하여 왕태자 전하의 효성을
펴도록 하십시오.
또한 태학(太學)인 성균관은 어진 이를 육성하고 착한 것을 닦는 장소이
며, 500년 동안 제사를 지내던 자리인데, 하루아침에 기예를 닦는 장소가
되었으니 성현을 높이는 도리가 이로부터 없어질 것이며, 유학을 숭상하는
기풍이 이로부터 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폐단을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
는다면, 앞서 성왕(聖王)이 남긴 교훈이 지금에 이르러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오직 사람을 얻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지
금 조정을 바로잡고 만민을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
겠습니까? 원임(原任) 대신 이하부터 문무관리(文武官吏)와 사대부와 평
민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가려서 거두어 등용하시되, 조정에 줄지어 세워
좌우를 보필하게 하시고, 각 삼군(三軍)의 일을 맡겨 안으로 닦고 밖으로
방어하게 하시며, 날마다 함께 나라의 일을 논해 명확하게 하여 위로는
종사를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전 도사 이종렬의 상소 [前都事 李宗烈 疏]

삼가 아뢰옵니다. 삼강(三綱)에는 군위신강(君爲臣綱)이 삼강 중에서


으뜸이고, 오륜에는 군신유의(君臣有義)가 오륜 중에 으뜸이니, 이것은

86)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를 겪고 나서 러시아 접근정책을 쓰면서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


사관으로 파천(播遷)하였다가 다시 경운궁으로 옮겼다.
87) 국장(國葬): 고종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경운궁에 두고 빈전도감을 설치하고도 국장
을 치르지 않았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대내외에 알리려는 의지에 따른 것이다.
취어(聚語) 87

천지의 떳떳한 법이고, 옛날과 지금에도 통하는 의리입니다. 진실로 사람


의 신하가 되어 이것을 범하는 사람은 죽이고 용서하지 않았으니, 이것
은 단지 그 악행을 미워한 것일 뿐만 아니라 기강을 유지하고 교화를 돕
고 지탱하기 위해 엄정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이 정치를 논하여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로 세워야 한
다”라고 하였으니, 명분이 바르게 서면 만사가 다스려지고, 명분이 문란
하게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 갑오년 6월 이후부터 입헌정치(立憲政治)88)에 대한 논의가 멋대로
행해져 난을 일으키는 역적의 무리가 뒤를 이어 일어났고, 작년 8월 20
일에 이르러 윤리와 상식이 무너지고 하늘과 땅이 뒤집혀 바뀌었으니, 이
는 진실로 만고에 없던 변란입니다. 이 달 23일에 이르러서는 저 무리들
의 흉악하고 반역을 꾀하려는 마음이 더욱 더 방자해지고 더욱 확장되어,
거만하게 서명을 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마음이 없으니, 천
지신명을 속이고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킬 수 있다고 말할 만합니다.
관직을 버리고 돌아가 의리를 붙잡은 탁지부대신 심상훈(沈相薰)과 관
직이 해임되면서까지 참여하지 않고 우뚝 자신의 의지를 세운 내부대신
박정양(朴定陽)의 이름을 뒤섞어 쓰고, 한 세상을 몰아 모두 나쁜 세상으
로 만들려고 하였으니, 그들이 먹은 마음과 계획이 아! 또한 교묘하였습
니다.
더구나 전(前) 외부대신 김윤식과 전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모두 높은
벼슬을 한 세족(世族)으로서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입어 분수에 넘게 재
상의 반열에 올랐는데, 그렇다면 감격스러움과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
는 마음이 마땅히 다른 사람보다 뒤지지 않아야 하거늘 김홍집・유길준의
무리와 함께 뱀처럼 서리고 지렁이처럼 얽혀서 올빼미가 울면 부엉이가

88) 입헌정치(立憲政治): 만민공동회와 갑오개혁 시기 전제군주제의 정체를 영국식 입헌


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논의를 말한다.
8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대응하듯 서로 호응하면서 빈틈없이 일을 꾸며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김윤식은 8월의 사변 이후에 각 나라의 공사에게 공문을 보내 알리면
서 속일 수 없는 정황을 속여 “이번의 일은 진실로 종묘사직과 백성을
위해서 한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였고, 또 일본공사에게 공문을 보
내 알리면서 “우리 군병이 진실로 이러한 죄를 범하였다”라고 하면서 앞
장서서 담당하여 난리와 역적의 일을 저지른 죄과를 달게 받겠다고 말하
니, 그의 임금도 안중에 없는 부도덕한 모습은 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
이고, 만 사람의 눈을 가릴 수가 어렵습니다.
어윤중은 10월에 임최수(林最洙)・이도철(李道轍)이 거사하였을 당시에
서리군부(署理軍部)로서 힘껏 저들을 쫓아내고 흩어지게 하여 나라의 원
수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흉악한 무리의 편이 되었으며, 또한
탁지부의 은화를 꺼내어 역적의 괴수인 이진호와 이범래 등의 무리에게
상까지 주었으니, 저 무리와 더불어 배와 심장을 서로 대한 것처럼 한
통속임을 환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결국 임금의 대가(大駕)가 이어(移御)하고 관군의 토벌이 한창 행해질
때에 저들이 과연 범죄가 없다면 어찌 변복을 하고 허겁지겁 달아나 숨
었다가, 마침내 백성에게 살해되기에 이르렀겠습니까? 그러한 행적의 원
인을 비록 자신에게 말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해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우두머리 중에는 혹은 죽거나 혹은 달아나기도 하
였는데, 오직 이 두 역적만은 죄명을 더하지 않았으니 이는 형벌의 적용
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빨리 관리에게 명하여 김윤식에게는 극형을 시행하시
고, 어윤중에게는 추가로 죄를 처벌하십시오. 그러한 이후에야 귀신의 분
함을 씻을 수 있고,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내각・내부・군부에 속한 벼슬아치들은 김홍집・유길준・조희연의 심장과 앞
잡이였던 사람들인데, 아직도 이렇게 편안히 보통 사람과 똑같이 관직을
맡고 있다면,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속으로 비웃으면서 “누가 감히 나를
취어(聚語) 89

어찌하랴?”라고 말할 것이니, 이로부터 이후에는 요사스럽고 음흉한 무


리가 더욱 꺼리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또한 형벌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빨리 관리에게 명하여 하나하나 조사하여 판단한 다음 마땅한
법으로 다스려서, 법과 기강을 바로잡고 명분을 바르게 잡으십시오.
아!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은 모두 환어(還御)가 아직도 지체되고 있
는 것과 국장의 기일을 선택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떠들썩하게 의심하고
두려워하지만, 신은 역적을 토벌하는 일이 이것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합
니다. 왜냐하면 춘추(春秋) 의 의리에는 나라의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
으면 장례에 대한 기사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89)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국장을 미처 거행하지 못한 것은 예기(禮記) 에 또한 근거할 만한 것이
있고, 환어 또한 반드시 만전을 기대한 후에야 거행하여도 늦지 않을 것
입니다.
오직 역적을 징계하고 토벌하는 이 한 건은 빨리 시행하지 않으면 아
니 됩니다. 그런데 몇 달을 귀 기울여 들어보아도 이에 대한 대대적인
조치나 시행이 있을 것이라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으니, 신은 그것이
이상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나라의 형세[國勢]는 두렵기가 마치 매
달린 깃발의 술[旒]처럼 위태롭고 백성의 심정은 들판에 타들어 가는 불
길보다 위급한데, 성상께서는 임시로 거처하고 계시니 이는 진실로 신하
들이 정성과 힘을 다해야 할 때입니다.
고위 관직의 신하와 대대로 벼슬해 온 신하들이 대부분 고향에 있으면
서 달려와 잠시 문안한 후 곧 각자 집으로 돌아가, 막연히 마치 조정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한 가지 꾀를 내거나 하나의 계
책을 꾀하면서 국가의 근심을 자신의 근심으로 생각하지 않으니, 분수와
도리에 있어서 대단히 개탄스럽습니다.

89) 임금이 시해를 당했을 경우 그 범죄자를 토벌하지 못하면 장례에 대한 기사를 남기


지 않는다(君弑 賊不討 不書葬) 라는 말이 「公羊傳」에 있는데, 이것은 시해를 당한
은공(隱公)의 장례에 대한 기사가 춘추 에 없다는 뜻이다.
9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삼가 바라옵건대 특별히 엄격한 칙령을 내리셔서 거듭 깨우치시고, 불
러서 좌우에 두고 자문하는데 대비하도록 하십시오. 폐하께서는 또한 시
원스럽게 결단하여 분발해서 일어나도록 신하들을 꾸짖고 타일러, 그들
로 하여금 옛날의 해이하고 게으르며 쇠미하고 약한 습성을 다시 답습하
지 않도록 함으로써 법과 기강을 바로잡고 명분을 바로 세우십시오. 신
이 미천한 말단 산관(散官)으로서 지위에서 벗어나 함부로 말하였으니
매우 참람합니다.
그러나 송나라 신하인 주희(朱熹)가 말하기를 “국가가 위급할 때 결단
을 내릴 일이 있으면 비록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말하지 않을 수
가 없다”라고 하였으니, 신은 이 때문에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점점 위태로워지는 것을 편안하게 하고, 막힌
운수를 바꾸어 태평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오직 ‘발강강의(發剛强毅)’90)
하는데 달려 있지, 머뭇거리며 구차하게 있는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
직 폐하께서는 판가름하시되, 사람 때문에 말을 폐하지 않으신다면 국가
에 매우 다행이겠으며, 종묘사직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임금의 비답(批答)에 “진실로 그대의 말은 공적인 분노에서 나온 것임
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전 교리 이승구의 상소 [前校理 李承九 疏]91)

삼가 아뢰옵니다. 신이 듣건대 주역(周易) 에 이르기를 “서리를 밟으


면 굳은 얼음이 된다”92) 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작은 악이 아직 경미할

90) 중용 의 “唯天下之聖, 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寬裕溫柔, 足以有容也. 發强剛毅,


足以有執也. 齊莊中正, 足以有敬也”에서 따온 말로 분발해서 용기를 내고, 강하고 꿋
꿋하게 한다는 뜻이다.
91) 원문에는 머리글이 빠져 있다. 원래 없는 것인지 누락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92) 주역 곤괘(坤卦) 초육(初六) 효사(爻辭)에 나오는 말로 서리를 밟으면 점점 굳어져
취어(聚語) 91

때 방지하여 점점 커지는 것을 막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


다. 하물며 지금 경미하던 것이 다시 드러나고, 점차로 늘어나던 것이 더
욱 왕성하게 자라나서 막는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장차 큰 세력으로 활
활 타오르고 계속 늘어나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야 그칠 것이
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호라! 작년 8월 20일의 일을 차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진실
로 천지를 다하고 만고에 뻗쳐도 알지 못한 변란이거늘 이들을 징계하고
토벌하는데 아직까지 관군의 토벌을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신은 청하건
대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고 그 흐름을 궁리하여 하나하나 낱낱이 말
씀드릴 것이니, 폐하께서는 맑게 살펴 주십시오.
아! 임오년(壬午, 1882년) 이후부터 나라의 운명이 침체되고 변란이 거
듭하여 일어났는데, 항상 미봉책과 잠시의 편안한 것으로 계책을 썼기
때문에, 작년 8월과 같은 변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풀
을 뽑는 사람은 반드시 뿌리까지 뽑아버리고, 물길을 막는 사람은 반드
시 물의 근원까지 막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뿌
리를 뽑고 근원을 막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박영효(朴泳孝)는 미국에서 일본 땅으로 돌아와서 유길준・조희연
의 무리와 함께 빈틈없이 서로 모의하여 난을 일으킬 틈을 타고자 기약
하였고, 지방에서 민요(民擾)가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나는데 편안하고
맑게 할 기약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황급하고 황급한 때입니다.
박영효가 갑신년의 변란에 기회를 보고 흉계를 쓴 실상은 성상께서 남
김없이 환하게 아시는 바이니 다시 군더더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작년의 일로 말씀드리자면 흉악한 모의가 또 발각되자 마침
내 몸을 빼어 멀리 도주하였는데, 그를 위해 말해주는 사람은 “이것은

얼음이 되듯이 조그마한 악이 점점 확대되는 것을 뜻한다. 곤괘 문언(文言)에서 해


석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죽이며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것은 하루아침 하루저녁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래가 점차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9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애매하니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때 조희연은 위해(威海)93)에서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였는데, 출발하
던 날 밤에 박영효가 여러 재상과 장관을 자기 집에 모아 놓고 같이 밥
을 먹으면서 함께 맹서하고 죽고 살기를 약속했다는 말이 낭자할 뿐만
아니라, 군부는 그에게 속한 관할이 아닌데도 이유 없이 밤에 모여 죽고
사는 것을 약속한 것은 그 흉악한 계책과 반역의 마음이 환하게 드러나
서 가릴 수가 없습니다.
또한 8월의 변란이 일어난 때에 갑자기 대궐 안을 침입하여 멋대로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바로 박영효의 혈당(血黨)인 이주회(李周會)・유혁
로(柳赫魯)・정란교(鄭蘭敎)입니다. 그 음침하고 흉악하며 죄를 꾸미는 속
셈이 마침내 드러나게 되었으니, 저들이 5월에 행하고자 했던 것을 8월
로 미루어 행했다는 것은 확실히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있습니다.
김홍집・조희연・유길준의 무리로 말하자면 박영효와 당파가 비록 다르
지만 흉악한 마음은 박영효와 서로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영효가
달아날 때에 그 당여(黨與)는 한 사람도 죄를 묻지 않고 도리어 더욱 높
이 등용까지 하였으니, 마음을 써주고 배려해 준 것이 이미 오래된 것입
니다. 얼굴을 바꾸고 번갈아 벼슬길에 나오는 행위가 갈수록 더욱 심해
지는 것은 역적을 다스리는 법이 엄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무리가
먼저 역적을 다스리는 법률을 고쳐 말하기를 “국사범(國事犯)94)은 죽이
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주범 이외에는 연좌시키지 않는
다”라고 하였으니, 그 마음먹은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조정안에는 틈을 보고 살필 만한 세력이 없어 저 무리가 노릴
만한 기회가 없을 것이니, 먼저 기강을 바로 잡으면 백성들의 소요는 저

93) 위해(威海): 중국 산둥반도에 있는 항구로, 청일전쟁 시기 일본군이 요동반도를 넘어


위해 앞바다에 있는 유공도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94) 국사범(國事犯): 을미개혁 시기, 종전의 역적에 적용하는 율을 고쳐 사형을 면하게
할 수 있는 조항을 두었고 연좌율을 폐지하였다. 또 주요 범죄에 복심제(覆審制)를
두었다. 전봉준을 국사범이라 하여 사형을 면하게 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취어(聚語) 93

절로 편안해질 것입니다. 국가가 편안해지고 위태로워지는 기틀은 오직


징계와 토벌을 엄하게 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니, 다음과 같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 작년 8월 22일 서명한 대신들은 죽이지 않을 수가 없고, 저 무
리에 의해 서명한 것으로 위조된 사람은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 그때 역적의 괴수 김홍집의 풍취와 뜻을 이어받아 종묘에 고하
는 글을 지어 올림으로써 조종을 속인 문임(文任)95)과 허겁지겁 어찌할
바를 모르던 때에 왕비의 간택령을 빨리 내리도록 청한 예관은 처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 내각과 각 부서에 역적 괴수의 심복이며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
은 징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 그때 군대를 거느리고 대궐을 침입한 장관(將官)은 죽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네 가지 조목을 거행하지 않으면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가 법이 없으면서 변란이 생기지 않기를 바
란다면, 이것은 문득 뒷걸음질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 오늘을 논하는 사람은 모두 말하기를 “작년 8월 이후 역적 괴수의
추천으로 등용된 사람은 모두 처벌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신
의 생각으로는 저들은 특별히 염치없는 비루한 사내일 뿐이니, 어찌 하
나하나 죄를 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 혈당(血黨)만은 제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미루어서 너그럽고 인자한
정치를 베푸시더라도, 저 무리의 흉악하고 반역을 꾀하는 마음은 이미
굳어져 버렸기 때문에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더욱
방자하고 흉악하여 “나 말고 누가 있느냐?”라고 하면서 안으로는 조정을

95) 홍문관(弘文館)ㆍ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으로 임금의 교문이나 대외적인 문서를


맡아보던 벼슬이다.
9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비방하고, 밖으로는 잘못된 말을 퍼뜨리도록 선동하고 있습니다. 지방의
민요(民擾)가 안정되지 않은 것 또한 저 무리들의 현혹 때문이 아니라고
는 할 수가 없습니다.
아! 내각 참서관(參書官) 박이양(朴彛陽)과 송영대(宋榮大)는 모두 역
적의 괴수 김홍집과 대대로 친하게 사귀어 오던 집안의 아들이고, 그에
게 소속된 관리가 되어 그의 입만 바라보고 그 풍취와 뜻만을 따랐습니
다. 박이양은 매번 특별한 임금의 뜻이 내려질 때마다 성내는 기색을 겉
으로 드러냈고,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기를 “내전(內殿, 왕비)에 의탁하
여96) 정치를 행하는 것은 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송영
대는 작년 8월 이후 분주하게 동정을 살펴 만일 나라를 염려하여 충성스
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역적 괴수에게 보고하고, 법으로
얽어매어 옥사를 만든 다음 반드시 죽게 하였습니다. 위로는 임금의 힘
을 고립시키고, 아래로는 당여(黨與)를 모으려고 한 실상은 여러 사람이
본 것이므로 가리기가 어렵습니다.
전 경무사(前 警務使) 허진(許璡)은 유길준・조중응(趙重應)과 함께 은
밀한 음모를 빈틈없이 짜내어, 한 명의 무지한 박선(朴銑)을 꾸며 낸 다
음 터무니없는 일에 얽어 옥사를 만들어 크고 큰 징계와 토벌의 일을 대
충 마무리함으로써 저 무리배의 죄악을 덮고 몸을 빼려고 하였습니다.
그 부도덕하고 임금을 무시한 실상은 많은 사람이 지목한 바입니다.
전 내무협판 유세남(劉世南)과 전 위생국장 김인식(金仁植)은 김홍집에
게는 사냥에 쓰이는 매와 개 같은 앞잡이이고, 유길준의 부하로서 멋대
로 법과 제도를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혔습니다. 또한 은밀한 꾀와 비밀
스런 계책은 그와 함께 상의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간악한 속임수와 함
부로 하는 행동은 길가는 사람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 나머지 역적의 괴수가 추천하고 등용한 사람은 오히려 죄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편안히 벼슬에 있으니, 그렇다면 이렇게 하고

96) 내전은 명성황후를 말하는 것으로, 곧 왕비가 정치에 관여하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취어(聚語) 95

서 어떻게 흉악하고 반역을 꾀하려는 마음이 싹트는 것을 막을 수가 있


겠습니까?
조정의 대신도 반드시 생각이 이에 미쳤을 것인데, 몇 달 동안 들어보
았으나 침묵하기만 할 뿐 성토하는 일이 없다고 하니, 이는 진실로 아직
까지 환어하지 않으시고 국장을 치를 경황이 없어, 지금까지 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징계하고 토벌하는 일을
먼저 시행한 후에야 모든 일의 실마리가 제대로 풀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내 일이 제대로 풀릴 날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급선무가 아니
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신 한 사람의 말이 아니오라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이 똑같이
분노하고 똑같이 부끄러워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책임 있는
벼슬자리에 있지 않으면서 본분을 벗어나 망령된 말씀을 드리오니 황공
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갑오년 가을에 역적의 무리가 멋
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상소하여 죄를 논하였으나 비답을 받지 못하였
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신의 말이 불행하게도 적중하였습니다. 삼가 바
라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시원스럽게 결단을 내리시어 빨리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고 명분을 바르게 잡으신다면 국가에 천만다행이겠습
니다.
임금의 비답에 “소장을 살펴보고 잘 알았다. 공적인 분노가 격해졌으
니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하였다.

영천군수 허식의 상소 [永川郡守 許火式 上疏]

삼가 아뢰옵니다. 작년 8월 20일의 변란을 차마 말할 수가 있겠습니


까? 차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천지를 다하고 만고에 뻗쳐도 듣
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신은 그때 3일을 통곡하며 충성스러운 분
노를 이기지 못하였고, 복위(復位)와 복수하는 일로써 피눈물로 글을 지
9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어· 친히 내각에 바쳤으나, 비답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구(舊)


내각의 역적의 신하들이 중간에서 엄폐하여 임금께 글이 보고되지 않았
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은 재주가 없고 배움이 얕아 시의(時宜)에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소장을 올리던 날에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이미 세웠는데, 처
음에는 다만 비답이 내려오지 않은 이유 때문에, 이어서는 폐하께서 외
국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신 일 때문에 신의 마음이 황공하고 위축되어
감히 물러가지 못하고 차가운 등불이 있는 여관에서 아직 우물쭈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달 5일 영천군수로 제수하는 명령이 갑자기 신에
게 내려졌습니다. 가만히 삼가 생각하건대, 일월처럼 밝으신 폐하께서는
신과 같이 어리석고 용렬한 사람은 감히 이 책임을 감당할 수가 없음을
환하게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을 비유하자면 마치 하늘의 비와 이슬
같은데, 가죽나무와 상수리나무처럼 쓸모가 없는 재목에게 그 은혜로운
혜택을 베풀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두 손을 잡고 영광스러움에 감사
하는 한편, 이어서 송구하고 두려운 마음이 생기니, 앞으로 어떻게 그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구구하게 한
마디 우러러 아뢸 말씀이 있는데, 지금 조정에 하직 인사를 드리는 날에
분수를 넘는 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충정을 말씀드리오니, 오직 밝
으신 성상께서는 유념하여 살펴 주시옵소서.
아! 8월의 극악한 변란이 있은 이후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은 억울한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 쌓여 죽으려고 하여도 죽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
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지 한 두 명의 조정의 신하가 외국공사관에 피
해 있으면서 힘써 충성을 바치다가, 같은 해 12월 28일에 이르러 의로운
소리97)로 한 번 일어나 저 우두머리를 죽였으니98), 천지신명이 누구인

97) 1895년 단발령이 공포되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유인석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를 1차 의병이라 부른다.
취어(聚語) 97

들 흔쾌하게 기뻐하지 않겠으며, 시골이 신하와 백성이 누구인들 춤추고


발을 구르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한스러운 것은 그 나머지 역적
들이 법망을 빠져나가 해외로 도망쳤으니, 이것은 마치 풀을 뽑는데 그
뿌리를 제거하지 못한 것과 같아, 훗날 화를 빚어낼 단서가 끝이 없게
될까봐 염려가 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유념하시고
또 유념하십시오.
사람의 죄를 논하는 법은 공로는 공로이고 죄는 죄인데, 지금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99) 안경수는 작년 10월 의거에 참여한 공로 때문에,
군부대신 이윤용은 작년 12월 역적을 토벌하는 일에 참여한 공로 때문
에, 진실로 조금이나마 그들의 죄를 속죄하였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또한 그렇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8월의 변란은 군부 훈련대의 난병(亂
兵) 가운데에서 나왔는데, 그때 대신이 바로 안경수이며, 협판은 바로 권
재형(權在衡)이었습니다. 손에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조종하는 것이 자
신에게 있었고 그 군인이 난을 일으켰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가 있겠습
니까? 또한 과연 몰라서 보고하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알고서도 보고하
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또한 그 당시의 경무사(警務使) 이윤용으로 말하면 정탐과 기찰을 담
당한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사소한 일이나 예사로운 자취라
도 철저하게 살펴서 막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더구나 흉악한 무리가
꾸민 음모는 하루저녁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므로, 과연 몰
랐기 때문에 보고하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알고서도 보고하지 않은 것이
었겠습니까?

98) 갑오・을미개혁을 주도하였던 내각총리 김홍집(金弘集)을 가리킨다. 김홍집은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단행된 뒤 광화문에 모인 군중을 설득하려고 나갔다가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다.
99)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1895년 종전의 군국기무처 회의체를 폐지하고 중추원으로
대체해 의관을 두고 중대사를 논의하였다. 식민지시기 조선총독부에서 중추원을 두
고 친일파들에게 명예직을 준 시기와 구분된다.
9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만약 저 무리가 알고서도 보고하지 않은 것이라면 이것은 큰 반역이
고, 몰랐기 때문에 보고하지 않은 것이라면 이것은 매우 밝지 못한 것입
니다. 반역과 밝지 못한 것은 가볍고 무거운 차이는 있지만 지은 죄는
한 가지입니다. 그러하니 어찌 오늘의 자취를 덮어 버린 채 공로(功勞)
만 논하고 그 당시에 저지른 범죄를 논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죄
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큰 벼슬과 중요한 직책을 주었으니
이것이 또한 무슨 의리입니까? 맑은 조정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가
이와 같아서는 아니 될 것 같으니, 신은 절실하게 통탄스럽고 한스럽습
니다.
또한 오늘날의 벼슬길을 말할 것 같으면 내직과 외직을 막론하고 모두
구 내각의 역적 신하에 의해 등용된 사람이라면, 비록 아주 작은 잘못이
나 실수가 없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혐의를 피하여 물러나 두려워하고 반
성을 해야만 선비와 군자가 출처(出處)하는 도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런데 지금 안팎을 돌아보면 외직이나 내직에서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예의와 염치가 땅을 쓸듯이
남아있는 흔적이 없으니 어찌 진실로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외직의 관찰
사의 직임과 내직의 협판(協辦)의 직책은 더욱 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중요한 직책이니, 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가려서 뽑는 것이 또한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여러 해 전부터 23부의 관찰사100)와 각 부의 협판은 모두 구 내각의
역신(逆臣)의 손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지금 혹시 결원이 생겨 바뀐 곳이
있지만, 함흥관찰사 김유성(金裕成), 평양관찰사 정경원(鄭敬源), 대구관
찰사 이중하(李重夏), 새로 교체된 군부협판 백성기(白性基) 무리는 모두
역적의 괴수 김홍집의 심복이고 앞잡이입니다. 또한 정병하・유길준・조희

100) 23부의 관찰사: 1895년 전국의 지방행정과 경찰제도를 개혁하여 종전의 8도 감영


(감사)제도와 포도청을 폐지하고 서울의 한성관찰부를 비롯해 23부의 관찰부를 설
치하고 관찰부마다 관찰사를 두었다.
취어(聚語) 99

연・권형진・어윤중・김윤식 등의 무리들과 배와 심장이 서로 이어져 있듯


이 한 통속이 되어 매우 긴밀하게 일을 꾸며온 사람들입니다. 이는 단지
소신만이 아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신하 모두가 알고 온 나라가 모두 알
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수많은 사람이 보고 있
어 가리기가 어렵습니다.
근래에 들으니 근처의 지방에서 소요를 일으킨 백성들이 그것을 핑계
대고 말을 퍼뜨려 말하기를 “아무개 관찰사와 아무개 협판은 모두 역신
의 심복과 앞잡이다”라고 하는데, 조정에서 이들을 끝내 제거하지 않고
여전히 관직을 위임하고, 병권이 저들의 손아귀에서 좌지우지되며, 화폐
가 저들의 부서에서 풀리기도 하고 묶이기도 하니, 나라의 재정이 어찌
위태롭지 않겠으며, 백성이 무엇을 의지하고 믿겠습니까? 이와 같은 말
들이 한 번 전해지고 두 번 전해지면서 와전되어 서로 동요를 일으키니,
옛 사람들이 이른바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이 넘치는 것을 막는
것보다 어렵다”라고 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아! 저들 무리는 모두 대대로 나라의 녹봉을 먹은 신하이고 높은 벼슬
을 해 온 족속입니다. 진실로 하나의 절반이라도 염치가 있다면 당장 벼
슬을 그만두고 문을 닫아걸어 스스로 자책하는 것이 아마 잘못을 고치고
스스로 새롭게 되는 도리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크고 좋은 집에 누워 좋은 음식을 실컷 먹으면서 날이 갈수록 점
점 더 욕심이 많고 악독하여, 은연중에 “누가 감히 나를 어찌하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속마음을 따져보면 하는 짓을 헤아릴 수가 없는데, 하물며 법망을
빠져나가 도망친 도적이 나라에 흩어져 있으니, 어찌 몰래 서로 내통하
여 안으로 호응하고 음모를 꾸며 화를 초래할 염려가 없을 것이라고 장
담하겠습니까? 주역 에 이르기를 “재앙은 밖에 있으니 나로부터 도적을
부르는 것이다. 공경하고 삼가면 패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오늘날에 거울로 삼고 경계해야 할 말입니다.
10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삼가 바라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시원스럽게 결단을 내리시어 안경
수・이윤용・권재형・김유성・정경원・이중하가 담당한 직책을 빨리 체직하십
시오. 그리고 국법으로 죄를 논하여 죄에 따라 처벌하여 한편으로는 삼강
과 오상을 지탱하도록 돕고 벼슬길을 맑게 하는 방도로 삼으시고, 한편으
로는 염치를 독려하고 밖으로부터의 재앙을 막는 방편으로 삼으십시오.
그렇게 되면 진실로 조정에는 다행이고 백성에게는 복이 될 것입니다.
만약 신이 아뢴 말이 미치고 망령된 말로 귀결되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신이 비록 용렬하지만 저 무리와 함께 조정의 명부에 이름을
섞어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더구나 은혜롭게 임명된 영천군수는 곧 대
구부(大邱府) 이중하의 관할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저 사람의 통제를 따
르면서 달가운 마음으로 사무를 볼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맡고 있는
직책을 즉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은혜를 내려주셔서 사사로운 분수
를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임금의 비답에 “말한 것이 혹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다 그러
한 것은 아니므로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부임하라”라고 하였다.

여러 나라가 시비를 분별한 말 [萬國辦說]

만국공보회가 시비를 분별한 말 [萬國公報會 辨說話]

조선의 의로운 신하가 본관(本館)에 글을 전합니다. 대략 말씀을 올린


다면 갑오년 6월 이후부터 일본인이 조선의 내정을 대신 다스렸는데, 조
선의 신하 중에서 명성과 위세가 뛰어난 사람은 모두 일본에 아부한 사
람들입니다. 또한 각 부의 고문관은 모두 일본인이 허락한 사람이며, 돈
과 곡식과 군대와 세금 등의 중요한 책임은 그들의 규찰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조선의 국왕은 권리를 모두 잃고 신주의 자리[尸位]101)

101) 시위(尸位): 제사를 지낼 때에 신주(神主) 대신 시동(尸童)을 앉히던 자리를 말한다.


취어(聚語) 101

조차도 없습니다.
을미년 윤5월 사이에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가 갑자기 국왕에게
아뢰기를 “조정의 인물을 낱낱이 살펴보면 대군주처럼 총명하고 어질고
지혜로운 분이 없습니다. 청하건대 대군주께서는 스스로 나라의 정사를
잡으십시오”라고 하고, 외국의 신하는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고하자,
국왕은 그에게 다른 뜻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고 기뻐하며 그대로 따랐습
니다.
8월 20일 밤에 조선인 우범선(禹範善)과 이두황(李斗璜) 등 10여 명이
저녁 때 일본 교사소(敎師所) 훈련병의 대장으로서 그 휘하의 훈련병 500
명을 거느리고 곧바로 궁궐 문을 침입하였고, 일본 군사가 그 뒤를 따라
갔습니다. 이미 궁궐로 들어가서 우범선과 이두황의 역적 무리와 일본인
4∼5명이 칼을 뽑아 들고 궁궐로 올라갔습니다. 국왕과 왕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하다가 비로소 급하게 뒤편의 누각으로 피했으나, 역적
의 무리가 달려와서 칼로 치기도 하고 찌르기도 하였습니다. 왕비가 땅에
넘어지자 왕비의 머리를 베고 감추어 두었다가 석유를 시신에 붓고 불태
웠는데, 타지 않은 것은 모두 연못가에 흙을 파고 매장하였습니다. 그리
고 모두 소리 높여 말하기를 “왕비가 달아났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총리대신 김홍집, 내부서리 유길준, 탁지부대신 어윤중, 외부대
신 김윤식 등의 무리는 본래 국모를 시해하는 일을 한 주동자들이고, 재
물을 함부로 거두어 자기의 배를 살찌웠으며, 국권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위세와 복을 마음대로 결정하였으며, 임금을 위협하여 제어하고 국모를
참혹하게 죽였습니다.
그 후에 3개월이 지나도 장례의 예가 없었고, 상(喪)을 거행하라는 명
령이 없었으며, 일본인만을 믿고 태산처럼 의지하여 아부하고 아첨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나라의 임금이 없게 되자, 도적이 도성
문 밖에서 벌떼처럼 일어나서 밝은 대낮에 감히 혼자 길을 갈 수가 없게
되었으며, 사농공상이 탄식하고 한숨을 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10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렇지만 분노하여도 감히 분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고, 조선에 있던 서양
의 여러 나라의 사람들도 또한 분격하여 주먹을 쥐지 않는 사람이 없었
습니다. 또한 모두 이웃 나라의 내정이기 때문에 서로 돌아보며 감히 드
러내 놓고 도울 수도 없었습니다.
이에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 10여 명이 그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
여 역적의 무리를 제거하고 약한 왕을 보호할 것을 생각하고, 국왕에게
비밀리에 아뢰어 영지(令旨)를 받았습니다. 드디어 10월 10일 밤 도성
밖의 친위대 900명을 감독하여 거느리고 대궐로 들어갔는데, 예상하지
않았던 역적의 무리가 궁궐 안을 차지하고 앉아 먼저 준비하고 있다가,
궁궐 밖의 군인이 들어오자 창과 포를 마구 발사하여 피가 낭자하였습니
다. 저들의 세력이 대단하여 지탱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모두 해산하였습
니다.
창의(倡義)한 여러 사람이 앞뒤로 생포되었고, 바다를 넘어 도망한 사
람은 몇 사람에 불과하였습니다. 역적의 무리와 일본인을 신문지에 실어
놓고 도리어 대서특필(大書特筆)하여 말하기를 “역적의 무리가 궁궐을
침범하니, 이는 충의와 반역이 서로 어긋난다. 충의와 반역을 명확하게
증명할 것은 곧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독일의 여러 공사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조선의 위급함과 궁박함이 이러한 지극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
약 서양의 여러 나라로 하여금 대신 도모하여 조선국을 보호하고 도와주
지 않는다면, 조선의 국왕은 모두 아침 이슬과 같게 될 것입니다.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