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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어(聚語)
취어(聚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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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계속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선왕들의 가르침을 우러러 체험해서
확연히 고치시고, 의복과 음식, 기물과 용기는 오로지 토산품을 애용하
며, 상을 내리고 연회를 베푸는 것도 반드시 옛날 관례대로 따르고, 마땅
히 써야 할 곳도 절용을 생각하고, 소비해야 할 곳도 매번 비용을 살펴
사용한다면 이상한 물건과 기이한 장난감은 자연히 전하의 마음에 들어
오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국가의 재정도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
이 하신다면 아래에서 위를 따르는 것이 마치 바람이 풀을 쓰러뜨리는
것과 같아 조정과 초야(草野)는 모두 도와서 화합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한 전하께서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기강을 세워서 백성의 뜻을 안정시킨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
까? 관자(管子)가 이르기를 “예의염치, 이것이 사유(四維)8)인데, 사유가
널리 퍼지지 않으면 나라는 곧 망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에
따라 “천리(天理)에 따라 적절하게 꾸미는 것이 예(禮)이고, 인심을 따라
억제하는 것이 의(義)이다. 예의라고 하는 것은 기강의 본체이고, 기강은
예의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염(廉)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비
례(非禮)가 나에게 더해지더라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
이고, 치(恥)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잠시 의롭지 못함을 행하면 시장에서
도 매질을 하는 것이니, 염은 예가 쓰이는 것이고, 치는 의리의 단초가
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옛날에 성왕들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반드시 먼저 사유에 힘을 써서
높고 낮음과 위와 아래를 구분하였고, 예로써 품격과 절도를 갖추고, 의
로써 쓰거나 버리는 것에 단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취하고 줄 때에는
우리가 청렴한지를 헤아려서 살피고 저들의 수치심을 보고 그것을 절충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천리의 당연한 법칙이고, 인심(人心)이 어그러질
수 없는 법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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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여러 처방을 쓸 수 없다고 앉아서 그 운명만을 기다리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기운과 운수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다고 하지 마시고, 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과단성 있게 정치를
하여 명확하게 법도와 기강을 펼치고 염치와 예의를 높이고, 옛날의 더
러워진 풍습을 모두 유신(維新)하게 하며 예로써 신하를 대우하고, 멀고
가까움을 구분하지 말고 법대로 일을 처리하며,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
지 말아 사람들을 모두 감복시킨다면, 나라의 법이 세워지고 백성의 마
음이 안정될 것입니다. 이 또한 전하께서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선발하여 군대의 규율을 명확하게 한다
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임금이 장수를 가려 선발하
지 않으면 적국에게 그 나라를 주는 것이고, 장수가 병사를 알지 못하면
적국에게 그 병사를 주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른바 나라의 큰 일이
여기에 달려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문관은 안일에 빠지고 무관은 기강이
해이해 있는데, 병인양요(丙寅洋擾)10)는 수백 년 만에 처음 생긴 사건이
었습니다. 그때는 서울이 텅 빈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하늘의 덕에 힘입
어 저들이 곧 물러가 다행히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정축(丁丑, 1877)11)년
일본인이 쳐들어 왔을 때에도 화친이 이루어져 물러갔기 때문에 오히려
한 번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각 나라가 강화(講和)하여
주둔하면서 통상(通商)을 벌이고 있는데, 만약 이 때에도 병사에게 일이
없다고 하여 장수될 만한 인재를 선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각 군영의 병사들에게 기예(技藝)를 가르치고 있으니 이에서 전하의
뜻이 매우 힘쓰고 있음을 볼 수가 있지만, 장수에 선발되어 직임을 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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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하게 하고 통솔을 엄격하게 하여, 항상 큰 적이 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응하게 합니다. 나라 안에서 뛰어난 인물을
구하는 것은 오직 나라에 큰 복이 될 것입니다. 또한 전하께서 살펴주시
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정도(正道)를 따르고 사설(邪說)을 배척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
니까? 하(夏)・은(殷)・주(周) 3대 이상은 말할 것도 없고,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공자께서는 춘추(春秋) 를 지어 후세의 난신적자(亂臣賊子)를
경계하였으며, 일찍이 이르기를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된다”라고 하였
습니다. 그 후에 양자(楊子)와 묵자(墨子)13)가 온 천하에 두루 퍼지자,
맹자는 말하기를 “양자와 묵자의 도가 끊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두
드러지지 못한다. 내가 어찌 논쟁을 좋아하여 이러하겠는가? 나는 부득
이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무릇 도는 하나일 뿐이다”라고 하
였으니, 옛날 성현들이 후세를 걱정함이 매우 컸습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에 오면 혹은 노장사상, 혹은 불교사상 때문에
1,400년 동안 참된 유학자도 없었고 훌륭한 치자도 없었는데, 송(宋)나라
의 덕이 매우 밝아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14)가 계속 나
와 경전과 끊어진 학문을 전승하여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였고,
주자(朱子)는 여러 성인의 글을 모아 절충한 이후에 도학이 온 천하에
밝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비록 기자(箕子)의 8조의 가르침
이 있었으나, 문헌으로 증명할 수가 없어 거의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성스러운 신령이 서로 계승되어 유현(儒賢)이 배출되
었으니, 이들이 업으로 한 것은 공자와 맹자의 도학이었고, 전한 것은 정
13) 양자와 묵자는 중국 고대 춘추전국시대 사상가인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말한다.
묵적은 겸애설(兼愛說), 양주는 자애설(自愛設)을 주장하였는데 유학자인 맹자는 이
들을 이단으로 몰았다.
14) 주돈이・정호・정이는 초기 성리학의 이론을 정립한 송나라 유학자들이다. 주돈이의
호는 염계(濂溪), 정호의 호는 명도(明道), 정이의 호는 이천(伊川)이었으며 뒤에 나
타난 주희(朱憙)와 함께 성리학을 일으킨 네 현인이라 부른다. 또 그들의 학문을 그
들의 출신지에 따라 염낙관민(濂洛關閩)의 학이라고도 부른다.
취어(聚語)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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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습니다. 지난겨울 포도청 장수를 임명한 이후에 서울의 도적들이 모
두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지방의 화적(火賊) 또한 모두 자취를 감추었으
니, 인재를 얻은 효과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나라를 위하는 것 또한 어
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상소를 의정부에 내려 보내어 모든
조치를 시행하도록 하나같이 신의 말과 같게 하시고, 만약 3년 안에 성
과가 없다면 전하를 속인 죄로 처벌하여 망령된 말을 일삼는 사람을 경
계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절실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천만 번 매우 간절히 기원
합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 상소를 올립니다.
3월 17일 [十七日]
국빈(李國彬)・손병희(孫丙喜)・손사문(孫士文)・강기(姜奇)・신가(申哥)이
며21), 경기도・강원도・충청도・경상도의 접장(接長)은 황하일(黃河一)・서일
해(徐一海)22)이며, 전라도 접장과 운량도감(運糧都監)은 이름을 알 수가
없는 전도사(全都事)23)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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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인이 쓴 방문상 [東學人榜]
3월 23일 [二十三日]
동학인이 내린 명령 [東學人令]
3월 23일 [三月二十三日]
장계의 초고 [狀啓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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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3월 26일 공주영장(公州營將) 이승원(李承遠)과 보은군수(報恩郡守)
이중익(李重益)과 순영의 군관(軍官) 이주덕(李周德)을 데리고 보은군 동쪽
15리 되는 속리면(俗離面) 장내리(帳內里) 앞 냇가의 동학 무리가 모인 곳
에 이르러, 전하의 뜻을 널리 알리고 설득하여 뜻을 따를 것인지 어길 것
인지 그 의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저들은 과연 장황하게 변명만을 늘어
놓다가 끝내는 해산한다고 알려온바, 그들이 보낸 문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저희들의 뜻은 마음을 합쳐 왜와 서양을 배척하여
국가를 위해 충성을 바치려고 한 것이거늘, 감사와 수령이 흉악한 무리
[匪類]로 대하면서 침범하여 약탈하고 학대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지
금 만약 갑자기 스스로 해산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흉악한 무리로 인식하
여 저희들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원하건대 이러한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여 현명한 전하의 뜻을 얻어 같은 백성으로 인정된다면,
삼가 마땅히 해산하여 생업에 힘쓰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머지 무리들을
흩어지게 하고 다시는 모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문서와 문답을 기록한 문안은 모두 올려 보냅니다. 문서는 보여준
후에 그 실상을 취하여 기록하려고 옮겨 베끼지 않고 직접 원래 상태의
제목에 수결하여 올려 보냅니다. 신의 위엄과 명망이 두드러지지 않아
즉시 해산시키지 못한 것이 황공하여 감히 아뢰오니, 오직 삼가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사실을 자세히 아룁니다.
보고문의 초고 문건 [文狀草件]
동학인의 글 [東學人文]
인시 [寅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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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은 내가 모르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장색을 때려 상처를 입혔는데
도 막기가 어려웠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 9시에 장색이 보고한 내용에는 “성주(星州)・선산・김산・상주 등
지의 사람 36명 정도가 나갔고, 장수(長水)의 황병원(黃丙元) 등 130여
명과 영암(靈巖)・무안(務安)・순천(順天)・인동(仁同)・지례(知禮) 등지의 사
람 260여 명이 깃발 세 개를 세웠는데, 한 곳에는 ‘호수부의(湖水赴義)’
라고 글을 쓰고, 한 곳에는 ‘호장대의(湖長大義)’ 라고 쓰고, 다른 한 곳
에는 ‘호남수의(湖南水義)’ 라고 써서 차례대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을 타이르고 설득하자 저들은 도어사가 발급한 통행 증서를 내보이
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러한 이유를 알고 와서 기다리고 있으므로 임
금의 비답이 내려오면 되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 병원(幷院)의 장색이 보고한 내용에는 “공주(公州)・옥천(沃川)・
문의(文義) 등지 사람이 해산한 것이 15명이 되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
은 없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 원암(元巖)의 장색이 보고한 내용에는 “들어온 사람들이 있는 곳
마다 가서 하나 하나 만나 타이르고 설득하니 답하기를, “우리가 몇 백
리를 멀다고 생각하지 않고 왔는데, 어찌 허망하게 곧바로 되돌아가겠습
니까?”라고 하면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밀고 들어와서 장색과 동민(洞
民)의 힘으로는 막기 어려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의 분부 [綸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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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 걸고서, 의(義)를 주창한다고 일컬으면서 글을 써서 방을 붙여 사
람들의 마음을 선동한다. 너희들이 비록 어둡고 몽매하다고 하지만, 어찌
나라의 큰 의리와 조정의 약속을 듣지 아니하면서 감히 핑계를 대고 재
앙을 떠넘겨 사람들의 재산을 탕진하게 하고, 농민에게 농사를 지을 시
기를 놓쳐버리게 하니, 이름은 비록 의를 주창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난
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너희들은 계속 뒤따라 모여든 많은 무리를 믿고 스스로 방자하여 조정
의 명령도 듣지 않으니,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찌 이러한 의리가 또 있었
겠는가? 이것은 모두 나 한 사람이 너희들을 이끌어 편안하게 하지 못
한 탓이며, 또한 여러 고을의 목민관과 수령들이 너희들을 부추겨 벗겨
먹고 곤박하게 괴롭혔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운 장수와 마음이 시커먼 아
전들은 장차 처벌을 할 것이다. 오직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그 백성
들이 스스로 의롭지 못한 것에 빠지는 것을 보며 슬퍼하고 안타깝고 측
은하게 여기거늘 어찌 어둠을 열어 밝은 곳으로 향하게 하는 길을 생각
하지 않겠는가?
이에 알려온 사실을 근거로 하여 너희들의 고충을 모두 알았다. 이에
행호군(行護軍) 어윤중(魚允中)을 선무사(宣撫使)39)로 삼아 나를 대신하
여 달려가서 널리 타이르고 설득하게 한 것인데, 이 또한 먼저 가르치고
뒤에 처벌하는 것이 옳다. 너희들은 부모의 말을 듣는 것과 같이 여겨
반드시 감동하고 서로 알려 해산하도록 하라.
너희들은 모두 양민이니 각각 스스로 물러나 돌아가는 사람은 마땅히
토지와 재산을 되돌려줄 것이므로, 이로 하여금 편안히 생업에 힘쓰게
할 것이니 의심하거나 겁을 먹지 않도록 하라. 이와 같이 설득하는 말을
들은 후에도 너희들이 한결같이 고치지 않고 흩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어윤중이 겸임하였다.
신이 지난 달 26일 저들에게 가서 타이르고 설득한 연유는 이미 아뢴
바 있고, 같은 달 29일 청주진 영장 백남석(白南奭)과 병영 군관 조기명
(趙基命)이 전보로 발송한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도착하여 신이 보은군
에 있으면서 받았으며, 이 달 초 1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쯤에는 신
4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43) 무산(茂山): 원문의 오자인 듯하다. 전라도에는 무산이라는 지명이 없으므로 무장(茂
長)의 오기로 보인다. 당시 무장은 손화중포의 근거지였다.
4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확연할 뿐입니다.
닭은
임금[人主]이 그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는 어찌 그 극(極)을 모두
쓰지 않으리오마는 큰 본원[大本原]과 큰 관계[大關係]에 이르러서는 반
드시 한번 정하여 바꾸지 않는 계획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학문은 반드
시 요순시대를 기대해야 하고, 정치는 반드시 조종을 본받아야 하며, 사
람을 쓸 때에는 반드시 충성과 강직을 장려함을 우선으로 해야 하고, 어
려움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백성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
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꾸지 않은 계획입니다. 그것의 견고함은 금석과
같고, 그 무거움은 산악과 같으며, 움직이지 않음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는 것과 같고, 그것의 명백함과 통달함은 해와 달을 사람들이 모두 우
러러보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이것은 주역(周易) 의 대전(大傳)46)에
이른바, “무릇 하늘[乾道]은 지공무사한 건실함을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
이다”하였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오직 살펴주시옵소서.
신은 작년 여름에 외람되게 승지의 부름을 받고 대면하였습니다. 삼가
성스러운 임금의 말씀을 받들었는데,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의리가 아니다. 그러나 말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위에서 포
용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받들어 깨닫
고 감격하여 물러나 즉시 스스로 “성상이 이미 이끌어주셨다. 오히려 입
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고 은혜를 저버린다면 이는 임금이 분부하신 인
신의 의리가 아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다만 직위가 언론의 책임을 지
지 않아서 자리에 나와서는 탄식만 일삼는 짓을 꾸짖으면서도 지금까지
하루라도 감히 마음에서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말을 한 사
람 또한 많았습니다.
무릇 오늘날의 조정에는 아직도 옛 명성이 있는데, 그 사람의 말을 되
돌아보면 다른 일을 논할 필요가 없이 단지 악공(樂工) 한 항목은 어찌
46) 대전(大傳): 공자가 풀이한 문언(文言)을 말한다. 여기에서 “건은 확연히 사람에게
덕을 보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취어(聚語) 53
49) 찰리사(察理使): 군사의 업무로 지방에 파견하는 3품의 관리에게 붙이는 칭호이다.
여기에서는 실정을 살펴 바로잡는 임금의 사자를 말한다.
취어(聚語) 55
秉式
· )이 탐학한 정황은 대충 조사해 보았는데, 관찰사로 임명된 이후 정
령(政令)이 몹시 가혹하고 끝없이 가렴주구(苛斂誅求)하여 진실로 근래에
는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사방으로 번진(藩鎭)을 살펴보고 마땅히 두
터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다시 충청도 관찰사
에 임명되었으니, 어찌 옛날의 허물을 덮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가문은 충성스럽고 절개가 있으나, 그의 사람됨은 탐욕스럽고 마
음이 더러우며, 그의 벼슬은 현달하지만, 그의 행동은 협박하여 물건을
빼앗으니, 돈을 탐하는 냄새가 세상에 넘쳐 득과 실을 걱정하는 대부(大
夫)가 된 것이 애석합니다. 욕심이 절절 넘치고 땅을 석권하여 거리끼고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처합니다. 그가 내리는 정령을 말하면 당
나라와 주나라의 종이에 쓴 비밀 공문서처럼 귀신도 짐작할 수 없어 다
듬지 않은 모난 나무로 특별히 형장(刑杖)을 만들어 목숨을 곧바로 판결
합니다. 죄인을 상급 관리에게 넘기는 것이 진실로 관례이지만, 재산을
몰수하고 죽이는 것을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것과 같이 하고, 군교(軍
校)와 차인(差人)은 계속 보내 만나는 사람들마다 난리를 당한 것과 같
습니다. 계속 거두어 들이는데 그 근거를 캐보면 공납이 아닙니다.
사람의 좋지 못한 일을 들추어, 불효하고 화목하지 못하고 간음한 것
등 각종 명목으로 죄안(罪案)을 얽어 만드는데, 처음에는 사람을 보내어
겁을 주어 공발협박하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면 끝에는 곧바로 그들의
산업(産業)을 몰수합니다. 잡기(雜技), 송속(松贖)50), 토호(土豪), 임채(任
債), 각 읍 아전들의 경비, 공전(公錢)을 징수하고 남은 것, 옛날에 경채
(京債)를 멋대로 징수한 것, 계를 핑계한 돈[契錢], 송사로 빚진 것 외에
거두어 가로챈 것, 직함을 빌려주고 받은 돈[借㗸錢], 종이의 징수를 지
정한 돈[差紙錢]은 많은 읍이 재정을 늘리는 명목인데, 심하게 거두어 끝
이 없습니다. 폐단을 보충한다고 핑계대면서 혹은 이곳저곳의 장부에 옮
· 합니다.
해야
전 영장 윤영기와 이존필, 공주의 신천서(愼天瑞), 영리(營吏) 고복은
(高福殷)과 서형쾌(徐亨快)는 그의 매와 개가 되어 옥에 가두어 뇌물을 거
두면서, 모든 것을 간섭하고 피해를 백성에게 끼쳤으니, 청컨대 모두 담당
벼슬아치와 관찰사의 죄상을 참작하고 감안하여 처단하시기 바랍니다.
비도들이 이미 해산하여 조사할 안건은 끝났으니 신은 마땅히 다시 갈
길을 가겠습니다. 사신(使臣)이 되어 보잘 것 없음이 사람의 말에 이미
나왔으니 진실로 감히 도성의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물러나 삼가 사
저에서 살려고 합니다. 공손하게 임금의 처벌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연유
를 모조리 장계에 적어 곧바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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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을 파헤쳐 검시하는 일은 장계로 보고하는 것이 중요하니 감히 갑
자기 요청하지 말아야 하지만, 진짜 범인이 이미 스스로 죄를 시인하여 옥
사의 상황은 별도로 의심할 필요 없이 드러났는데, 다시 조사를 거행하여
처분을 기다립니다. 죄를 저지를 적의 흉기는 아귀 모양의 막대기를 사용
한 것을 줄인 것이고54), 주먹으로 쳤다는 것이 중요하여 작용하였다는 것
은 무기를 쓴 것과 다르므로 그림으로 그려 올려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정범 죄인 노석구는 격식을 갖추어 고을의 옥에 엄격하게 가두었고, 그
외에 여러 사람들은 모두 잠시 보호해주어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모두 보고하오니 참작하고 헤아려 시행하십시오.
1893년(癸巳) 8월 초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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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는 말로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다.
이전에 무슨 한 종류의 이상한 귀신이 몰래 여우와 벌레 같은 것들을
끼고 거짓으로 성제(聖帝)의 여인63)이라고 칭하면서 스스로 북묘(北廟)
의 주인이 되어, 요망하고 거짓되며 황망하고 거짓된 불경스러운 말로써
서울과 지방 사람들을 속이고 혹하게 하였고, 스스로 신왕(神王)의 빙의
(憑依)로 영령이 강림하였다고 하였으며, 멋대로 군(君)의 호칭을 칭하고
함부로 임금의 은총을 빙자하여 농간하고 사악함은 거리낌이 없이 멋대
로 부립니다.
또한 사대부로서 염치가 없고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널리 끌어들
여 아우나 자식이라 하면서 부채질하며, 서로 숨을 후하고 내쉬고 눈을
부릅뜨고 보면서, 현란하여 위엄과 복을 만들고 권세를 불러들일 수 있
다고 하였습니다. 간혹 수령과 방백들 또한 그 손에서 많이 나왔고, 심지
어 노예와 천인과 귀신같은 무뢰배 또한 줄을 따라 규합하고 결속하여
존엄한 곳에 출입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 더럽고 더러운 신령들이 종묘
와 사우(祠宇)를 썩은 냄새가 나도록 더럽히니, 어느 것이 이보다 심하다
고 하겠습니까?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론이 분출하여 시끄럽게 들끓고 있
는데, 전하께서는 깊은 구중궁궐에 계셔서 어찌 그 같은 종류의 폐단이
점점 만연하여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관왕의 유령이 있다면 또한 마땅히 어두운 가운데에서 분노하여 그 간
사한 실과 요사한 숨소리가 한 번도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이 일
찍이 한곡영(漢谷永)의 상소를 보았는데, “하늘과 땅의 성질을 밝혀 괴이
한 것에 현혹되지 않고, 만물의 뜻을 알아 저들 같은 무리가 속이지 못
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요사한 것들이 있어서 진실로
신하에게 허물이 돌려져 의로써 전하를 이끌지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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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의 민요를 조사하여 밝힌 글 [淸風民擾 査覈跋辭]
1893년(癸巳) 8월 초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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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납부한 돈을 독려하여 추심하였고, 심지어
불을 지르고 밤을 새웠습니다.
저들은 돈을 환급한 후에 물러간다고 기약하였으니, 이와 같은 변괴는
그전에는 없었습니다. 저 무리들은 마침내 간교한 계책으로 도리어 길
가운데에 머물기를 원하고,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며
칠이 지나지 않아 장두인 이영하(李永夏)와 황정수(黃正秀)의 아들과 조
카는 아버지와 숙부를 위한다는 핑계로 다시 백성들을 불러모아 감옥 문
을 부수고 죄수를 풀어주니, 이것 또한 악습에 관계됩니다. 마을의 풍속
이 어리석고 완악하다고 하지만, 어찌 이러한 지경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6조목의 일은 하나도 백성을 학대하거나 법을 위반하는 일에
가까운 것이 없고, 하물며 일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관가에서
실수한 것이 없고, 아전들이 간악한 무리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스스로 난민(亂民)으로 돌아가고 다시 의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
이며, 이러한 습성이 더욱 증가한다면 관은 관이 될 수가 없고 읍은 읍
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동 이영하・김문호(金文浩)・황정수・신태성(申泰成) 4명은 모두 사리를
알지 못하고 있으며, 읍폐와 백성들의 고통이 어떤 일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길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만을 듣고 함부로 크게 얘기하는 사람들입
니다. 심학수(沈學洙)는 글자를 아는 것이 병이 되어 통문과 소장의 초
안을 써서 주고 통문을 발송하는 것에 대해 참여하여 논의한 사람입니
다. 심능형(沈能衡)은 어리석고 굼벵이 같은 무리로 8개면에 통문을 돌
리자고 논의를 주장한 자로, 옳지 못한 것을 처음으로 만들었고[作俑],
비록 남쪽 가까운 지역 출신이지만 많은 백성들을 모으고 통문을 돌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위의 6명은 똑같이 난민으로 그들 죄의 가볍고 무거움을 구분할 필요
없이 모두 법에 따라 참작하여 처리하였고, 저들이 모여 있는 짓을 그치
지 않을 것이기에 장수와 나졸을 정하여 한꺼번에 해당 부(府)와 겸한
취어(聚語) 75
읍인 제천현(堤川縣)에 옮겨 가두었습니다.
정우용(鄭右用)은 비록 통문을 돌린 장두는 아니지만 그 날 관아의 뜰
에 들어가 말로 관장을 핍박하여 기강이 끝이 없게 한 사람이니, 엄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므로 또한 제천현에 옮겨 가두었습니다.
수향리(首鄕吏) 유재도(劉載道)와 우두머리 아전 유동환(柳東煥) 등은
비록 읍의 일에 대해 간사한 짓을 하지 않았으나, 그 자신이 우두머리
이향(吏鄕)으로 관가로 하여금 이러한 백성들의 소요를 당하게 하였으니,
어찌 감히 모른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공문에 따라 모두 제천현에
옮겨 가두었습니다.
이용구(李龍龜)는 이영하의 아들이고, 황두성(黃斗星)은 황정수의 조카
입니다. 설령 아버지와 숙부를 위해서 사실을 진술하고 호소하여 처분을
기다린 것은 당연한 도리이지만, 주저함이 없이 두 번이나 백성을 모아
옥문을 마음대로 부수고 죄수를 풀어준 것은 크게 폐습(弊習)에 관계되
니 엄히 징계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들의 아버지와 숙부는 이미 옮겨
가두었기 때문에 우선 그곳 부의 옥에 가두고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본부(本府)의 아전 김동조(金東祚)는 환곡을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래 관계된 것이 없지만, 중심을 잡지 못한 망발의 말이 마침 민요의
현장에서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단서가 되었으므로 심문하고 공초를
하였습니다. 원래 그 사정을 따져보면 자기 수령을 보호하고 도리에 어
긋나는 말을 금지하기 위해서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잠시 붙
잡아서 부의 감옥에 가두고 처분을 기다립니다.
이범수(李範洙)는 판곡(板谷)에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8개면에 통문
을 돌릴 때에 논의를 배척하고 스스로 물러났는데, 이미 처음에는 근남
(近南) 6개 마을에 통문을 발송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당장 잡아
조사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도망을 가서 심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갇혀
있는 김익성(金益性)은 그 아우가 팔성(八性)이고, 장두로서 옥문을 부수
는 틈을 이용하여 빠져나간 사람인데, 그대로 도망을 가서 잡을 수가 없
7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
었으므로 잠시 그대로 가둔 형식을 취하고 그로 하여금 관아에 출두하도
록 독촉하였습니다.
해당 부의 불항전(不恒錢)에 용하된 모든 액수는 아주 자세하게 기록
하였고, 호에서 징수한 돈은 구별하여 모두 기록하여 책으로 엮었으며,
갇힌 무리의 이름도 책으로 엮어 모두 수정하여 올려 보냈습니다. 관아
의 창호(窓戶)는 친히 살펴 조사해 보니 과연 찢어지고 부수어져 마치
큰 화로의 주둥이 같은 모양이었으며, 감옥의 자물쇠는 조각조각 부서져
있었습니다. 해당 부의 불항조는 공적인 돈 중에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
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상납하였으나 적체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읍의
형편으로는 만에 하나 모양새를 갖출 수가 없어서 여러 아전 등이 사유
를 갖추어 올려 보냈으므로, 이로 사실을 들어 보고하고 처분을 기다립
니다. 군수는 이로부터 관가로 돌아갔는데, 이러한 사정도 모두 보고하니
참작하고 살펴서 시행해 주십시오.
·
도장을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본래의 수령은 어렵게 피하여 어제 무장
으로 방향을 바꾸어 갔다”고 합니다. 휴가를 얻어 부임하지 않은 도내에
있는 수령을 재촉하여 내려 보낼 일입니다.
·
백성은 도탄에 빠졌는데도 수령들의 탐학은 참으로 그대로이다. 어찌 백
성이 궁핍하고 또 곤궁하지 않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근본이
깎이면 나라는 쇠약해지는데,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책을
생각하지 않고 시골에 저택을 건립하여 오직 혼자만 온전할 방법만을 찾
고, 다만 녹봉과 지위를 훔치니, 어찌 그것이 사리이겠는가?
우리 무리는 비록 시골에 남겨진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살
고 임금의 옷을 입고 있으므로 앉아서 나라가 위태롭게 되는 것을 볼 수
없어, 8도가 마음을 같이하고 수많은 백성이 의논하여 지금 의로운 깃발
을 내걸고 보국안민(輔國安民) 하는 것으로 죽고 사는 것을 맹세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비록 놀라운 것에 속하지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각
각 백성의 생업을 편안하게 하고 태평한 세월이 되도록 함께 기원하며,
모두 임금의 교화에 감화된다면 천만다행이다.
·
흉도 서재필(徐載弼)은 만고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고도 방자하
게 본국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감히 같은 하늘 아래에 살면서 나라의 권
세를 손에 쥐고 마음대로 희롱한다는 말입니까? 또 하물며 스스로 폐하
의 앞에서 외국의 신하라고 말하였으니, 그가 만약 외신(外臣)83)이라면
어찌 조선국의 일에 관여한다는 말입니까? 저 이른바 독립신문(獨立新
聞)이라는 것은 비방하는 것에 불과할 뿐 도무지 의리가 없으니, 이는
나라를 위한 것도 아니며 또한 백성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선왕의
법제를 고쳐서 오로지 본국을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흉
악한 역적을 어떻게 하늘과 땅 사이에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갑오년 6월의 간악한 무리 김가진(金嘉鎭)・안경수(安駉壽) 등은 맨 먼
저 주창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였는데, 나라에는 이와 같은 병폐를 제거
할 사람이 없고, 박정양(朴定陽)・조병직(趙秉稷) 등은 탐관오리로서 의로
움이 없었고, 의로움이 사라져 난을 일으켰으며, 이윤용(李允用)은 만 가
지 죄를 모두 갖추고, 온 집안이 모두 탐관오리였습니다. 이러한 간악한
무리는 권리가 있는 직책을 장악하고, 국외(局外)의 동정과 궁궐 안에서
조종하는 것을 살피지 않은 것이 없어 바로 그날의 흉악한 재앙이 있게
하였으니, 행동거지를 따져 보면 용서하기가 어려운 자가 죄를 저지른
것이 이들입니다.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등은 반역을 꾀한 우두머리로 이미 외
국의 공보(公報)에 나왔으니, 본국의 의리가 있음에도 어찌하여 성토하지
않는 것입니까? 을미년 8월의 대역죄인 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조희연(趙羲淵)・권형진(權瀅鎭)・이두황(李斗璜)・우범선(禹
範善)・이범래(李範來)・이진호(李軫鎬) 등은 먼저는 간악한 무리가 되었
고, 후에는 역적의 무리가 되었는데, 음모와 흉한 계책이 왕망(王莽)84)이
·
대응하듯 서로 호응하면서 빈틈없이 일을 꾸며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김윤식은 8월의 사변 이후에 각 나라의 공사에게 공문을 보내 알리면
서 속일 수 없는 정황을 속여 “이번의 일은 진실로 종묘사직과 백성을
위해서 한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였고, 또 일본공사에게 공문을 보
내 알리면서 “우리 군병이 진실로 이러한 죄를 범하였다”라고 하면서 앞
장서서 담당하여 난리와 역적의 일을 저지른 죄과를 달게 받겠다고 말하
니, 그의 임금도 안중에 없는 부도덕한 모습은 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
이고, 만 사람의 눈을 가릴 수가 어렵습니다.
어윤중은 10월에 임최수(林最洙)・이도철(李道轍)이 거사하였을 당시에
서리군부(署理軍部)로서 힘껏 저들을 쫓아내고 흩어지게 하여 나라의 원
수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흉악한 무리의 편이 되었으며, 또한
탁지부의 은화를 꺼내어 역적의 괴수인 이진호와 이범래 등의 무리에게
상까지 주었으니, 저 무리와 더불어 배와 심장을 서로 대한 것처럼 한
통속임을 환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결국 임금의 대가(大駕)가 이어(移御)하고 관군의 토벌이 한창 행해질
때에 저들이 과연 범죄가 없다면 어찌 변복을 하고 허겁지겁 달아나 숨
었다가, 마침내 백성에게 살해되기에 이르렀겠습니까? 그러한 행적의 원
인을 비록 자신에게 말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해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우두머리 중에는 혹은 죽거나 혹은 달아나기도 하
였는데, 오직 이 두 역적만은 죄명을 더하지 않았으니 이는 형벌의 적용
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빨리 관리에게 명하여 김윤식에게는 극형을 시행하시
고, 어윤중에게는 추가로 죄를 처벌하십시오. 그러한 이후에야 귀신의 분
함을 씻을 수 있고,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내각・내부・군부에 속한 벼슬아치들은 김홍집・유길준・조희연의 심장과 앞
잡이였던 사람들인데, 아직도 이렇게 편안히 보통 사람과 똑같이 관직을
맡고 있다면,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속으로 비웃으면서 “누가 감히 나를
취어(聚語) 89
·
삼가 바라옵건대 특별히 엄격한 칙령을 내리셔서 거듭 깨우치시고, 불
러서 좌우에 두고 자문하는데 대비하도록 하십시오. 폐하께서는 또한 시
원스럽게 결단하여 분발해서 일어나도록 신하들을 꾸짖고 타일러, 그들
로 하여금 옛날의 해이하고 게으르며 쇠미하고 약한 습성을 다시 답습하
지 않도록 함으로써 법과 기강을 바로잡고 명분을 바로 세우십시오. 신
이 미천한 말단 산관(散官)으로서 지위에서 벗어나 함부로 말하였으니
매우 참람합니다.
그러나 송나라 신하인 주희(朱熹)가 말하기를 “국가가 위급할 때 결단
을 내릴 일이 있으면 비록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말하지 않을 수
가 없다”라고 하였으니, 신은 이 때문에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점점 위태로워지는 것을 편안하게 하고, 막힌
운수를 바꾸어 태평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오직 ‘발강강의(發剛强毅)’90)
하는데 달려 있지, 머뭇거리며 구차하게 있는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
직 폐하께서는 판가름하시되, 사람 때문에 말을 폐하지 않으신다면 국가
에 매우 다행이겠으며, 종묘사직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임금의 비답(批答)에 “진실로 그대의 말은 공적인 분노에서 나온 것임
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
애매하니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때 조희연은 위해(威海)93)에서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였는데, 출발하
던 날 밤에 박영효가 여러 재상과 장관을 자기 집에 모아 놓고 같이 밥
을 먹으면서 함께 맹서하고 죽고 살기를 약속했다는 말이 낭자할 뿐만
아니라, 군부는 그에게 속한 관할이 아닌데도 이유 없이 밤에 모여 죽고
사는 것을 약속한 것은 그 흉악한 계책과 반역의 마음이 환하게 드러나
서 가릴 수가 없습니다.
또한 8월의 변란이 일어난 때에 갑자기 대궐 안을 침입하여 멋대로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바로 박영효의 혈당(血黨)인 이주회(李周會)・유혁
로(柳赫魯)・정란교(鄭蘭敎)입니다. 그 음침하고 흉악하며 죄를 꾸미는 속
셈이 마침내 드러나게 되었으니, 저들이 5월에 행하고자 했던 것을 8월
로 미루어 행했다는 것은 확실히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있습니다.
김홍집・조희연・유길준의 무리로 말하자면 박영효와 당파가 비록 다르
지만 흉악한 마음은 박영효와 서로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영효가
달아날 때에 그 당여(黨與)는 한 사람도 죄를 묻지 않고 도리어 더욱 높
이 등용까지 하였으니, 마음을 써주고 배려해 준 것이 이미 오래된 것입
니다. 얼굴을 바꾸고 번갈아 벼슬길에 나오는 행위가 갈수록 더욱 심해
지는 것은 역적을 다스리는 법이 엄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무리가
먼저 역적을 다스리는 법률을 고쳐 말하기를 “국사범(國事犯)94)은 죽이
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주범 이외에는 연좌시키지 않는
다”라고 하였으니, 그 마음먹은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조정안에는 틈을 보고 살필 만한 세력이 없어 저 무리가 노릴
만한 기회가 없을 것이니, 먼저 기강을 바로 잡으면 백성들의 소요는 저
·
비방하고, 밖으로는 잘못된 말을 퍼뜨리도록 선동하고 있습니다. 지방의
민요(民擾)가 안정되지 않은 것 또한 저 무리들의 현혹 때문이 아니라고
는 할 수가 없습니다.
아! 내각 참서관(參書官) 박이양(朴彛陽)과 송영대(宋榮大)는 모두 역
적의 괴수 김홍집과 대대로 친하게 사귀어 오던 집안의 아들이고, 그에
게 소속된 관리가 되어 그의 입만 바라보고 그 풍취와 뜻만을 따랐습니
다. 박이양은 매번 특별한 임금의 뜻이 내려질 때마다 성내는 기색을 겉
으로 드러냈고,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기를 “내전(內殿, 왕비)에 의탁하
여96) 정치를 행하는 것은 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송영
대는 작년 8월 이후 분주하게 동정을 살펴 만일 나라를 염려하여 충성스
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역적 괴수에게 보고하고, 법으로
얽어매어 옥사를 만든 다음 반드시 죽게 하였습니다. 위로는 임금의 힘
을 고립시키고, 아래로는 당여(黨與)를 모으려고 한 실상은 여러 사람이
본 것이므로 가리기가 어렵습니다.
전 경무사(前 警務使) 허진(許璡)은 유길준・조중응(趙重應)과 함께 은
밀한 음모를 빈틈없이 짜내어, 한 명의 무지한 박선(朴銑)을 꾸며 낸 다
음 터무니없는 일에 얽어 옥사를 만들어 크고 큰 징계와 토벌의 일을 대
충 마무리함으로써 저 무리배의 죄악을 덮고 몸을 빼려고 하였습니다.
그 부도덕하고 임금을 무시한 실상은 많은 사람이 지목한 바입니다.
전 내무협판 유세남(劉世南)과 전 위생국장 김인식(金仁植)은 김홍집에
게는 사냥에 쓰이는 매와 개 같은 앞잡이이고, 유길준의 부하로서 멋대
로 법과 제도를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혔습니다. 또한 은밀한 꾀와 비밀
스런 계책은 그와 함께 상의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간악한 속임수와 함
부로 하는 행동은 길가는 사람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 나머지 역적의 괴수가 추천하고 등용한 사람은 오히려 죄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편안히 벼슬에 있으니, 그렇다면 이렇게 하고
96) 내전은 명성황후를 말하는 것으로, 곧 왕비가 정치에 관여하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취어(聚語)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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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저 무리가 알고서도 보고하지 않은 것이라면 이것은 큰 반역이
고, 몰랐기 때문에 보고하지 않은 것이라면 이것은 매우 밝지 못한 것입
니다. 반역과 밝지 못한 것은 가볍고 무거운 차이는 있지만 지은 죄는
한 가지입니다. 그러하니 어찌 오늘의 자취를 덮어 버린 채 공로(功勞)
만 논하고 그 당시에 저지른 범죄를 논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죄
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큰 벼슬과 중요한 직책을 주었으니
이것이 또한 무슨 의리입니까? 맑은 조정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가
이와 같아서는 아니 될 것 같으니, 신은 절실하게 통탄스럽고 한스럽습
니다.
또한 오늘날의 벼슬길을 말할 것 같으면 내직과 외직을 막론하고 모두
구 내각의 역적 신하에 의해 등용된 사람이라면, 비록 아주 작은 잘못이
나 실수가 없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혐의를 피하여 물러나 두려워하고 반
성을 해야만 선비와 군자가 출처(出處)하는 도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런데 지금 안팎을 돌아보면 외직이나 내직에서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예의와 염치가 땅을 쓸듯이
남아있는 흔적이 없으니 어찌 진실로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외직의 관찰
사의 직임과 내직의 협판(協辦)의 직책은 더욱 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중요한 직책이니, 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가려서 뽑는 것이 또한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여러 해 전부터 23부의 관찰사100)와 각 부의 협판은 모두 구 내각의
역신(逆臣)의 손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지금 혹시 결원이 생겨 바뀐 곳이
있지만, 함흥관찰사 김유성(金裕成), 평양관찰사 정경원(鄭敬源), 대구관
찰사 이중하(李重夏), 새로 교체된 군부협판 백성기(白性基) 무리는 모두
역적의 괴수 김홍집의 심복이고 앞잡이입니다. 또한 정병하・유길준・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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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바라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시원스럽게 결단을 내리시어 안경
수・이윤용・권재형・김유성・정경원・이중하가 담당한 직책을 빨리 체직하십
시오. 그리고 국법으로 죄를 논하여 죄에 따라 처벌하여 한편으로는 삼강
과 오상을 지탱하도록 돕고 벼슬길을 맑게 하는 방도로 삼으시고, 한편으
로는 염치를 독려하고 밖으로부터의 재앙을 막는 방편으로 삼으십시오.
그렇게 되면 진실로 조정에는 다행이고 백성에게는 복이 될 것입니다.
만약 신이 아뢴 말이 미치고 망령된 말로 귀결되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신이 비록 용렬하지만 저 무리와 함께 조정의 명부에 이름을
섞어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더구나 은혜롭게 임명된 영천군수는 곧 대
구부(大邱府) 이중하의 관할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저 사람의 통제를 따
르면서 달가운 마음으로 사무를 볼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맡고 있는
직책을 즉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은혜를 내려주셔서 사사로운 분수
를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임금의 비답에 “말한 것이 혹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다 그러
한 것은 아니므로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부임하라”라고 하였다.
조차도 없습니다.
을미년 윤5월 사이에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가 갑자기 국왕에게
아뢰기를 “조정의 인물을 낱낱이 살펴보면 대군주처럼 총명하고 어질고
지혜로운 분이 없습니다. 청하건대 대군주께서는 스스로 나라의 정사를
잡으십시오”라고 하고, 외국의 신하는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고하자,
국왕은 그에게 다른 뜻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고 기뻐하며 그대로 따랐습
니다.
8월 20일 밤에 조선인 우범선(禹範善)과 이두황(李斗璜) 등 10여 명이
저녁 때 일본 교사소(敎師所) 훈련병의 대장으로서 그 휘하의 훈련병 500
명을 거느리고 곧바로 궁궐 문을 침입하였고, 일본 군사가 그 뒤를 따라
갔습니다. 이미 궁궐로 들어가서 우범선과 이두황의 역적 무리와 일본인
4∼5명이 칼을 뽑아 들고 궁궐로 올라갔습니다. 국왕과 왕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하다가 비로소 급하게 뒤편의 누각으로 피했으나, 역적
의 무리가 달려와서 칼로 치기도 하고 찌르기도 하였습니다. 왕비가 땅에
넘어지자 왕비의 머리를 베고 감추어 두었다가 석유를 시신에 붓고 불태
웠는데, 타지 않은 것은 모두 연못가에 흙을 파고 매장하였습니다. 그리
고 모두 소리 높여 말하기를 “왕비가 달아났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총리대신 김홍집, 내부서리 유길준, 탁지부대신 어윤중, 외부대
신 김윤식 등의 무리는 본래 국모를 시해하는 일을 한 주동자들이고, 재
물을 함부로 거두어 자기의 배를 살찌웠으며, 국권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위세와 복을 마음대로 결정하였으며, 임금을 위협하여 제어하고 국모를
참혹하게 죽였습니다.
그 후에 3개월이 지나도 장례의 예가 없었고, 상(喪)을 거행하라는 명
령이 없었으며, 일본인만을 믿고 태산처럼 의지하여 아부하고 아첨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나라의 임금이 없게 되자, 도적이 도성
문 밖에서 벌떼처럼 일어나서 밝은 대낮에 감히 혼자 길을 갈 수가 없게
되었으며, 사농공상이 탄식하고 한숨을 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10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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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지만 분노하여도 감히 분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고, 조선에 있던 서양
의 여러 나라의 사람들도 또한 분격하여 주먹을 쥐지 않는 사람이 없었
습니다. 또한 모두 이웃 나라의 내정이기 때문에 서로 돌아보며 감히 드
러내 놓고 도울 수도 없었습니다.
이에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 10여 명이 그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
여 역적의 무리를 제거하고 약한 왕을 보호할 것을 생각하고, 국왕에게
비밀리에 아뢰어 영지(令旨)를 받았습니다. 드디어 10월 10일 밤 도성
밖의 친위대 900명을 감독하여 거느리고 대궐로 들어갔는데, 예상하지
않았던 역적의 무리가 궁궐 안을 차지하고 앉아 먼저 준비하고 있다가,
궁궐 밖의 군인이 들어오자 창과 포를 마구 발사하여 피가 낭자하였습니
다. 저들의 세력이 대단하여 지탱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모두 해산하였습
니다.
창의(倡義)한 여러 사람이 앞뒤로 생포되었고, 바다를 넘어 도망한 사
람은 몇 사람에 불과하였습니다. 역적의 무리와 일본인을 신문지에 실어
놓고 도리어 대서특필(大書特筆)하여 말하기를 “역적의 무리가 궁궐을
침범하니, 이는 충의와 반역이 서로 어긋난다. 충의와 반역을 명확하게
증명할 것은 곧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독일의 여러 공사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조선의 위급함과 궁박함이 이러한 지극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
약 서양의 여러 나라로 하여금 대신 도모하여 조선국을 보호하고 도와주
지 않는다면, 조선의 국왕은 모두 아침 이슬과 같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