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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를 찾아 -


박영희 · 오수연 · 전성태 지음 / 김윤섭 사진
우리교육 / 2006년 3월 / 287쪽 / 12,000원

▣ 저자
박영희 - 1962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다. 1985년 문학무크 <민의(民意)> 3집에 <남악리> 외 10
편의 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조카의 하늘』(1987), 『해 뜨는 검은 땅』(1990), 『팽이는 서고 싶다』
(2001), 『오늘, 오래된 시집을 읽다』(2003), 평전 『김경숙』(2003)을 펴냈다.

오수연 -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4년 <현대문학> 장편 공모에 <난쟁이 나라의 국경일>로
‘새로운 작가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빈집』(1997), 『부엌』(2001)을 펴냈고,
『부엌』에 수록된 중편 <땅 위의 영광>으로 2001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3년 ‘
민족문학작가회의’ 파견작가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다녀왔고, 2004년 그곳에서의 보고문집인 『
아부 알리, 죽지 마』를 펴냈다.

전성태 -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


실천문학>에 단편 <닭몰이>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등단했으며 ‘신동엽창작상’을 받았다.
소설집으로 『매향(埋香)』(1999), 『국경을 넘는 일』(2005), 『여자 이발사』(2005)를 펴냈다.

▣ 사진 김윤섭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사진을 찍어 왔다. 평범하거나 소외된 이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 Short Summary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닌 봉제 노동자, 외국인 이주 노동자, 한국 남성과 결혼한
아시아 이주 여성, 거리를 방황하는 도시의 노인, 미성년 비혼모, 탈학교 청소년, 농촌 청소년,
테러리스트로 싸잡아 오해받는 무슬림, 보안관찰처분대상자, 세상의 편견에 갇힌 한센인….

2004년 2월 폐광 속에 버려진 광부들의 이야기를 필두로 글쓴이들은 매달 길을 떠나야 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안양을 다녀오기도 했고, 전라도 광주와 부안을 다녀오기도 했고, 울진과 속초,
소록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모두 참으로 아픈 곳들이었고, 눈물 마를 날이 없는 곳들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조금만 더 정직하고 따뜻했으면 하는 마음에 눈물
떨군 적도 여러 번이었다.

경제가 위기란다. 보수적인 경제 전문가와 정치가들이 주장하는 해법은 ‘성장 우선’, ‘친기업적 환경’
등 1970년대 방식이다. 그런데 기업을 살리고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날 누가 1970년대처럼
토끼장 같은 공장에서 폐병에 걸려가며 하루 열여섯시간씩 노동하겠는가? 그런 해법을 내놓은
당사자들은 아닐 것이다. 그게 문제다.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전순옥 지음)에 인용된 문구를
다시 인용해 본다.

“우리 중 누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더럽고 힘든 일을 할 것인가? 만약 그와 같은 일을 한다면 보수는


얼마나 받을 것인가? 그리고 누가 쾌적하고 깨끗한 일을 할 것인가? 얼마의 보수로?” -존 러스킨-
노동은 있으나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

1월 24일 오후 두 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비정규직 담당인 김영섭 씨의 안내로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정문을 통과해 노동조합 사무실로 들어서자 한 노동자가 뒤따라
들어왔다. 자리에 앉기 바쁘게 그는 무엇인가를 까발리듯 그동안 모아 둔 월급봉투와 서류 한 장을
코듀로이 바지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내 참, 하도 기가 막혀서 상담 좀 하러 왔시다.” 노동조합
사무실에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신유기업’ 노동자 강쾌환 씨와는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경상도 특유의 투박한 말투로 말미암아 아귀는 뒤틀려 보이나 전하고자 하는 그의 심사만큼은
절실하게 다가왔다.

‘에쿠스’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강쾌환 씨는 작업 도중 범퍼 모서리에 복부를 찍으며 넘어졌는데 사고


이틀 후 병원을 찾아갔더니 장파열이라고 했다. 거동조차 힘들었던 그는 미용학원에 다니고 있는
큰딸을 시켜 회사에 그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수술을 마치고 회복할 때까지
일언반구도 없었다. “내가 잘못한 기라. 마, 다친 그 날 병원을 찾아갔어야 한 긴데 나는 나대로 그냥
견뎌 보려고 했던 기라.” 그런데 이틀 전, 일을 하기 위해 출근한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을
당했다. 사장과 면담한 결과 자신은 이미 퇴사 처리가 된 상태였고, 자리마저 다른 사람한테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았고, 지난해 9월부터 370원을 인상한 시급 인상분도 아직 받지 못했고, 연말


성과금도 받지 못했다며 하소연하던 비정규직 강쾌환 씨. 입사한 뒤 단 하루도 결근한 적 없다는 그의
월급봉투를 살펴보니 차입 지급 액수가 들쭉날쭉한 것이 제각각이었다. 지난해 8월 급여액은 잔업과
주 월차수당, 교통비를 합하여 112만 8200원이 지급되었으나 10월 분은 187만 4060원으로 되어
있다. 의문이 꼬리를 무는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갑근세나 근로소득세의 공제도 없이, 의료보험료도
10월 분만 달랑 빠져나간 상태였다. “자기들 마음대로 봉급을 줘서 안 그런교. 이 달에 밀리면 다음
달에 보태져서 나오고, 다음 달에 밀린 것은 그 다음다음 달에 나오는 기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에는 이렇듯 하루에도 상담을 하고자 찾아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차 안에는 정규직 조합원 2만 4,000명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1만여 명.
그나마 이 수치는 양호한 편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의 2004년 12월 자료에 따르면 임금 노동자
가운데 정규직은 645만 5,000명(44.3%), 비정규직은 813만 명(55.7%)에 이른다. 그러니까 임금
노동자 중 그 절반을 넘는 사람들이 일반 임시직(24.9%)이나 기간제고용(12.5%), 임시 파트(4.9%),
특수 고용(4.8%), 호출 근로(3.8%), 용역 근로(2.8%) 등을 통해 생계를 꾸려 가고 있는 실정이다.

장소를 마산으로 옮겨 만난 이상호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GM대우 마산 공장에서 일하는 그도 ‘


잘리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비정규직은 입사도 퇴사도 오너 맘대로 아닌가요? 절차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아요. 그런 얘기를 꺼내는 순간 바로 해고거든요.”

중학교를 졸업한 뒤 노동자의 길로 들어선 이상호 씨의 노동 경력은 19년째.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그야말로 몸뚱이 하나에 의지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부당한 세상을 먼저 보아
버렸다. “우리나라 구조는 3개월 계약, 3개월 계약 이런 식이지요. 1년짜리 계약은 퇴직금을 줘야
하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는 1년 계약, 1년 계약이지요.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올려야 하거든요.
그래서 한번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들 중 몇 퍼센트나 산재 처리를
받아 봤을까 하고. 아마 대부분이 비정규직이 산재에 가기 전에 공무 중 부상 처리로 끝났을 겁니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담배를 입에 문 그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분명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아니 그 차별은 도를 넘어섰다고 결론을 내렸다. “정규직은 해마다 임금 인상 투쟁을 합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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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은 어림없는 일이지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정규직이 파업에 들어가면 일을 못하니
비정규직은 빗자루 들고 청소를 해야 합니다. 문제는 일당에 있습니다. 정규직은 파업을 해도 일당이
나오지만 비정규직은 그렇지 못하거든요. 그래요, 거기까지도 참을 수 있습니다. 더 슬프고 서러운 건
회의실로 모이라고 할 때입니다. 모이라고 해서 회의에 참석하려고 하면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비정규직은 제외라고 말합니다. 아마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이면 살고 싶지 않을 겁니다.”

내친김에 지난 1월 22일 비정규 철폐를 외치며 분신을 기도한 최남선(현대자동차 CKD 대연 근무)
씨를 만나 보기 위해 대구의 한 병실을 찾아갔다. 전신 15%, 2도 화상을 입고 누워 있는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가족들한테조차 내 직업에 대해 말할 수 없을 때 가장 힘들었어요. 이런 제가
무엇을 더 바라겠어요.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런 거 구분 없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아마 이것은
누구한테 물어봐도 다들 원하는 세상일 겁니다. 그래야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 아닌, 한 형제로 봐 줄 줄 아는 각성이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어린 엄마들

전국적으로 비혼모 가운데 십대가 가장 많다고 한다.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우리들의 집’ 이선희
과장은 미성년 비혼모의 비율을 90%퍼센트까지 잡는다. 미성년 비혼모가 많다 보니 출산 후에 대부분
양육을 포기한다. 복지부 ‘2003년 주요 업무 참고 자료’에 따르면 ‘기아 및 미혼모’로 인한 ‘요보호
아동’이 2002년에 4,971명 생겼다고 나와 있는데, 이 수치는 한 해에 5,000명으로 추산되는
비혼모들의 수치와 비슷하다. 말하자면 요보호 아동은 대체로 비혼모들의 아이들이며, 이들은 대개
입양된다. 평균 1,700여 명이 국내 입양, 2,400여 명이 해외 입양, 900여 명은 장애 등 어려움이
있거나 기회가 오지 않아 입양 대기 상태가 된다고 한다.

결혼을 전제로 해서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어감을 내포한 ‘미혼모’든, 객관적으로 결혼 상태가 아닌


사실만 표시하겠다는 ‘비혼모’든, 당사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들에게는 모두 마음에 안 드는
명칭이라고 한다. 임신했어도 이들은 결혼과는 한참 거리가 먼, 너무 어린 나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엄마’가 그나마 낫단다. 어린 엄마. 어리다는 건 나이가 어리다는 뜻만이 아니라 엄마로서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 준비 없이 엄마가 되는가. 물론 생명의 잉태와 탄생은 숭고한
일이며, 상황이야 어떻든 생명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이 엄마들의 결심은 고귀하다. 낙태로 엄마가
되는 사태를 방지한 몇 배나 많은 여성들에 비하면, 이 어린 엄마들의 마음은 여리고 순진하다.
처음에는 이 엄마들도 원하지 않은 아기를 인생의 장애물로 여기기도 했지만, 초음파 사진을 보거나
태동을 느끼고서는 도저히 모진 결심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직접 키우지는 못하더라도 아이를
세상에 내보낼 어머니의 권리, 그리고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원망하지 않고 성장할 아이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하고, 우리 사회가 보장해야 할 기본적인 인권이다. 그러나 사회적 과제와는 별도로
어머니와 아기에게 이 경험은 크나큰 고비이고 아픔이다. 어린 엄마들은 입양될 아기의 행복을
빌면서도, 자신도 아기도 고생할 일을 저질렀다고 후회한다. 한 번 실수가 평생의 실수가 되고
말았다고.

“애 낳아서 데리고 와도 내 핏줄이라고 안 한다. 누구 자식인지도 모르는데, 난 요즘 여자들 못 믿어.


함부로 몸 굴리다가는 병 걸린다. 우리 아들한테도 옮기는 거 아니냐? 다 네 잘못이다. 네가 약을
먹든지 했어야지, 남자는 아무 잘못도 없고 아무 흠도 없다. 이런 일이 있었어도 우리 아들은 좋은 데
장가보낼 수 있다. 우리 아들 소문나면 안 되니까, 부디 입 조심해라.” ‘비혼모들의 사는 이야기
(http://cafe.daum.net/mohonmo)'라는 인터넷 카페 상담실 게시판에 올라온 글의 한 대목이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한 여성에게 상대 남자 어머니가 내지르는 잔혹한 일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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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집에서는 부모가 펄쩍 뛰며 제 아들의 아기를 가진 여성의 도덕성과 실책을 비난하고, 여자
집에서는 통곡이 터지고 팔자 망친 딸의 부모가 쓰러진다. 여자는 인생의 파국에까지 다다르지만,
남자는 흠집도 안 남는다. 그러므로 비혼모들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회복지사들은 친부에게도
책임을 지우거나 강력하게 처벌까지 하도록 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남자들도 연애에
신중해져서 비혼모가 덜 생기고, 그런 일이 일어나도 고생을 분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비혼모들의 사는 이야기‘는 자발적으로 비혼모가 된 이들의 모임이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이라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에서 그렇다. ’아이를 선택한 엄마‘,’아이를 지킨 엄마‘들이라고나 할까.
경제적으로 대책 없고, 상대 남자 부모한테서 “애를 낳아 우리 집 앞에 갖다 놓으면 경찰서에 주겠다”
는 막말을 듣고, 자기 가족한테서는 “차라리 같이 죽자”고 시달림 당하고, 친구들한테는 “너 미쳤니?
애한테도 못할 짓이다”라는 비난을 받아 가며, 이들은 이를 악물고 아기를 낳아 자기 품에서 기른다.
이 사이트는 “이제 당당해집시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있는데, 회원이 2,398명(2004년 4월 당시)이다.
우리나라에 당당한 비혼모들이 이렇게나 많다. 더 이상은 예전처럼 죄지은 듯 숨어살지 않는다.

“어느 누가 내가 겪은 슬픔과, 민주 덕에 얻은 기쁨을 알까 싶어요. 아이를 포기하고 비밀을 간직한 채


깨끗한 척하느니, 손가락질을 받아도 내게 찾아온 생명을 책임지기로 했죠. 뭐라도 해서 한 달에 80만
원만 벌면 민주하고 살 수 있지 않겠어요? 겁이 없어졌어요. 이제는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그러나 혼자 아이를 양육하며 생계비도 벌어야 하는 비혼모들을 돕는 제도는 너무나도 미비하다.


국가가 주는 저소득층 생계 보조금과 모자가정 지원금은 너무 적고, 친부에게 양육비를 청구해도
거부하면 받아 낼 길이 없다. 무엇보다 사회적 차별과 냉대가 심각하다. 취업, 진학, 결혼 등 매사에
주민등록등본과 호적등본을 제출해야 하는데, 이럴 때 엄마와 자녀의 성이 같다는 사실이 큰 결함이
된다. 이들이 뭘 잘못했을까! 남과 다른 선택을 했을 뿐, 자신에게 찾아온 생명을 당당하게 책임졌을
뿐이다.

아시아 여성, ‘천국의 계단’ 넘어 지옥에 오다

열아홉 살의 베트남 처녀 롱(가명)은 한국 드라마에 열광했다. 매일 재봉 학원만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


텔레비전을 보았다. <천국의 계단>, <겨울 연가> 같은 드라마에서 한국은 그야말로 천국처럼 보였다.
저런 데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한국 남자와 결혼하라고 말했다. 롱은 비슷한 또래의
처녀들과 호치민 시로 향했고, 어떤 ‘언니의 집’에서 다른 지역에서 온 수십 명과 함께 복닥거리며
한국 신랑감을 기다렸다. 드디어 그들이 왔다. 여러 ‘언니의 집’에서 모인 200명도 넘는 베트남
처녀들이 한국 남자들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갔다. 한국 남자들은 고작 열 명 정도였다. 그들이
안내자와 쌍을 이루어 호텔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베트남 처녀들은 줄지어 방들을 순례했다. 한 방에
들어갔다가 한국 남자가 아무 말 없으면 다음 방으로, 그 다음 방으로 갔다.

한 남자가 롱을 지목했다. 남자들은 대열 중에 일단 눈에 드는 처녀를 다섯 명쯤 골라 방에 앉혀


놓았다가, 나름의 기준으로 그중 한 명을 선택했다. 롱이 뽑혔다. “넌 운이 좋은 거야.” 안내자의
통역에 따르면, 그 남자는 롱에게 처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예순 세 살이었다. 이튿날
남자는 롱의 부모님을 방문하여 허락을 받고, 그 다음날 결혼식을 올렸으며, 롱은 마침내 한국에 왔다.

그동안 새벽부터 저녁까지 남편이 운영하는 해장국집에서 설거지 그릇에 파묻혀 지냈고, 밤마다
남편한테 일방적인 잠자리를 강요받았다. 집 문턱을 넘어 볼 새 없어 자기가 살던 동네를 구경하지도
못했다. 롱이 임신했을 때 검진을 받아야 한다며 남편이 산부인과에 데리고 갔으나, 깨어나 보니 임신
중절 수술이 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남편에게는 이미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은, 서른 살도 넘은
아들들이 있었는데, 모두들 어머니 대접은커녕 롱을 대놓고 무시하고 모욕했다. “1억 원을 줘도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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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월 후 롱은 이렇게 되뇌며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우리나라 국적법은 1998년에 대폭 개정되었다. 한국인 남자와 결혼한 외국인 여자에게만 국적 허가를
내주던 이전의 부계혈통주의 법률을 고쳐, 한국인 여자와 결혼한 외국인 남자도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당시 시끄러웠던 중국 동포들의 이른바 ‘위장 결혼’을 방지하자는 취지로, 결혼으로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간이 귀화’의 자격을 강화했다. 국적법 제6조 2항에 따르면, 간이 귀화를
하려면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한 상태로 대한민국에 2년 이상 거주한 주소가 있거나, 혼인 후 3년이
지나고 대한민국에 1년 이상 거주한 주소가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결혼 생활이 이 기간 전에
끝나면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할지라도 외국인 배우자가 국적을 신청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04년 1월 다음과 같이 자격 요건이 완화되었다. 한국인 배우자가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을 경우, 또는 자신의 귀책사유 없이 혼인 생활을 할 수 없었거나, 그 배우자와의 혼인으로
출생한 미성년 자녀를 양육하고 있든지 양육해야만 할 외국인은 정해진 기간 동안 결혼 생활이
유지되지 않았을지라도 간이 귀화를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그 기간만큼 국내에 거주한 후에
신청해야 한다.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들은 한국에 살러 오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정착이다. 그러나
한국의 법은 개정 이후에도 여전히 이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베트남 여성 롱의 경우 그가 계속
한국에 살기를 원했다면, 우선 체류 기간 제한과 곡예를 해야 한다. 이혼 소송을 내어 결혼 거주 비자
(F2)로 1년을 연장하는 등등. 그가 온갖 서류와 절차를 거쳐 간이 귀화 거주 기간을 넘겼다고 치자.
그래도 간이 귀화를 신청할 때는 결혼이 지속되지 못한 게 한국인 남편 탓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남편에게 잘못이 있다고 기록된 이혼 판결문, 남편의 폭행을 고소하여 받은
검찰의 불기소 결정문, 남편한테 맞은 사실이 드러나는 진단서, 남편의 4촌 이내 친척이 남편의
잘못이라고 기록한 확인서 가운데 한 개 이상의 서류가 필요하다. 설사 한국인 여성일지라도 맞아서
팔다리가 부러지지 않는 한 남편의 폭행을 증명하기 어렵고, 카메라와 녹음기를 숨겨 두고 살지
않는다면 남편에게 귀책사유가 있다는 증거를 모을 수가 없다. 남편의 4촌 이내 친척인 시댁 식구들이
자기 아들이나 사촌을 비난하는 확인서를 써 줄지도 의문이다. 평소에도 그들은 외국인 신부 롱을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말도 통하지 않고, 법도 모르며, 아는 사람도 없는 롱이 이런 증빙 서류들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남편 하나 믿고 한국에 온 외국인 여성들은, 남편이 등을 돌리면 쓰디쓴 배신감을 안고 고향에
돌아가거나 불법 체류자가 되어야 한다. 칼자루는 어디까지나 한국인 남편이 쥐고 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고약한 남편들은 신원 보증을 안 해 주겠다거나 국적을 얻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로
족쇄를 채워, 외국인 아내를 노예처럼 학대하고 노동력을 착취한다.

‘이주여성인권센터’의 최진영 사무국장은 간이 귀화 신청 조건인 거주 기간 요건을 아예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1998년 국적법 개정은 남녀평등 측면에서는 나아졌지만, 외국인의 인권 측면에서는
개악입니다. 과연 그런다고 위장 결혼이 방지되겠습니까? 2004년에 거주 기간 요건이 완화되었지만
명문상 그럴 뿐이지 외국인들이 그 혜택을 보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주와 국제결혼은 거스를 수
없는 추세이므로 우리나라도 자국민 우선주의를 버리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제3의 시민, 도시의 노인들

양천구 신정4동에 사는 김 씨 할아버지는 아침 여덟시 반이면 집을 나선다. 종로로 나서는 그의 외출


준비에는 특별한 게 있다. 방한용 점퍼 옷깃에 금장 별무늬 참전 용사 배지를 다는 일이다. 그는 전쟁
막바지에 입대하여 10년 간 군 복무를 하고 이등 상사로 전역했다. 꼭 챙겨 쓰는 검은 모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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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각별한 것이다. 참전용사전우회에서 나온 것으로 점퍼에 단 것과 같은 배지가 달려 있다. 이
배지는 그에게 든든한 배후가 된다. 젊은 세대는 몰라도 전쟁을 체험한 세대인 노인들은 서로 알아봐
준다.

오늘은 할머니도 함께 길을 나섰다. 겨울비가 내린 뒤끝이라 바깥 공기가 선뜻하다. 이틀 동안 비가


내려 외출을 못했다. 할머니가 자꾸 뒤쳐지자 마음이 급한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느린 걸음걸이가 못내
답답하다. 두 내외는 지하철 목동역 계단을 쉬엄쉬엄 내려가서 매표소 앞에 선다. 표를 끊는 사람들이
조금 뜸해질 때까지 섰다가 할아버지가 다가가 무임승차권 두 장을 받아 온다. 이제는 경로 우대증을
내밀지 않아도 역무원은 알아서 승차권을 내준다.

30분이면 종로3가역에 닿는다. 두 내외의 첫 행선지는 탑골공원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오랜 시간


발이 그렇게 길들었을 뿐이다. 탑골공원은 세 차례나 단장을 하면서 노인들이 오래 머물 수 없는
사적공원으로 거듭났다. 나무 의자를 없애고 돌 의자로 바꾸어서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다. 두 내외는
탑골공원에서 한 시간 남짓 머무른다.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앉은 자리가 불편해지면 공원을
한 바퀴 돌며 유적 안내판을 꼼꼼히 읽는다. 할아버지는 유일하게 끼고 사는 풍수지리서를 들여다보듯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다 욀 지경이다. 탑골공원 북문 뒤 한 사찰에서는 점심 무료 급식을 한다.
급식을 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담장 아래는 신문지를 놓고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는
노인들로 북적였다.

김 씨 할아버지 내외는 10년 전부터 점심식사를 하지 않는다. 부부의 한 달 용돈은 11만 원이다. 참전
명예 수당 6만 원과 딸이 보내 주는 용돈 5만 원이 전부다. 할아버지가 막노동으로 벌고 할머니가
구멍가게를 운영해서 악착같이 1억 원 가까운 돈을 모았지만 아들이 그 돈으로 당구장과
전자오락실을 운영하다 실패하는 바람에 다 날려 버렸다. 이제 수중에 남은 돈은 300만 원이 전부다.
마흔이 넘은 외아들이 장가도 안 가고 함께 살고 있지만 용돈을 받을 형편이 못 된다. “점심 한 끼
먹는 데 라면 한 그릇도 2,000원이야. 못 먹지. 그렇다고 할머니 데리고 줄 서서 무료 급식은 못해.
차라리 굶는 게 나아. 이도 버릇이 들면 편해.”

종묘 공원은 노인들의 어두운 해방구다. 젊은이들을 위해 조성된 거리는 많아도 노인들을 위해 조성된
문화 거리는 없는 실정이고 보면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이 모여 서로 마음 덜 다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긴 한 셈이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거리에서 밀려나 노인정이나 복지관으로 격리된다.
종묘에 모이는 노인들은 여러 가지 사연으로 노인정이나 복지관에 가지 않는다. 노인정에서는 따로 할
일이 없어서 주로 화투를 치는데 그도 소주 한 병 내놓을 만한 쌈짓돈이 있어야 체면을 차리고 다닐 수
있다. 복지관에서는 어학이나 사물놀이, 고전무용, 풍수지리, 컴퓨터 강습 따위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지만 배우려는 의지와 흥미가 없는 노인에게는 그저 답답한 수용시설일 뿐이다. 김
씨 할아버지는 수요일 오후에 종로노인종합복지관에서 무료로 진행하는 풍수지리 강좌를 듣는 때
말고는 가지 않는다.

김 씨 할아버지 내외의 외출은 끊임없이 걷는 일이 전부다. 앉아 있으면 먹는 것 생각나고 심사가


복잡해지니 무릎이 허용하는 한 걷는 수밖에 없다. 두 내외가 걷는 길은 늘 정해져 있다. 경로
우대증이 있으면 모든 고궁이 무료이기 때문에 종묘로 들어가서 창경궁으로 넘어간다. 창경궁을 돌아
종묘공원으로 나오면 정오 무렵이 된다. 발길을 돌려 이번에는 비원이나 경복궁 쪽으로 넘어간다.
서대문 서울역사박물관까지 구경하고 나면 오후 네 시 반쯤 되는데 이때 두 내외는 귀갓길에 오른다.
날이 풀리면 동대문 쪽으로 걸어서 동대문 도매상가와 평화시장을 거쳐 청계천을 따라 마장동까지
걷는다. 김 씨 할아버지는 허기를 잊기 위해 매순간 견뎌야 하는 자신에게 더는 정리할 인생 따위는
없다고 한다. 그는 할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오래 사는 게 수치스럽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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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이라는 나이가 우스운 나이인가? 오래 살기 싫어. 통장에 300만 원이 있는데 1년에 100만 원씩
깨서 쓰면 한 3년은 그럭저럭 지낼 수 있겠지. 그거 다 떨어지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야. 죽으면
호국 용사 묘지에 묻히겠지.”

보안관찰법은 덫이고 늪이거든

3년 이상의 선고를 받고 수감 생활을 마친 뒤 출소했으나 여전히 감시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없고 ‘나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보안관찰처분대상자들이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고,
왜 만났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를 석 달에 한 번씩 보고해야 한다. 그리고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관할 경찰서에 알려야 하며,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보안관찰처분대상자 정기
신고서에 여행 목적과 일정 따위를 상세히 기록해야 한다.

보안관찰법은 이처럼 국가보안법 위반 등 특정 범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형벌 집행 후 법무부 장관이


“재범의 위험성을 예방하고 건전한 사회 복귀를 위하여 보안관찰처분을 내림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사회의 안녕을 유지함”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1975년에 제정된 사회안전법을 폐지,
1989년 대체 입법으로 만든 보안관찰법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출소 전 보안관찰처분대상자 신고서에
가족관계와 교우 관계, 출소 후 거주 예정지 및 도착 예정일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보안관찰법 위반 혐의로 체포당하거나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1995년 4월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구속되어 1998년 3월에 출소한 박창희 씨는 국민학교란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로잡은 인물이다. 당시 외국어대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일제 잔재 청산 문제와
독도사랑운동, 강제징용 노무자 문제 등과 관련하여 활발한 활동을 해 오던 중 북한에 생존해 있다는
친형 문제로 국가보안법과 인연을 맺어야 했다. 그 때문에 보안관찰처분대상자가 된 그는 현재
보안관찰 갱신 처분에 불복, 서울고법에 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나는 국가보안법을
정면으로 반대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재범 우려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뭔가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문제점을 찾아내어 제시하고 심판한다면 그 어떤 법도 달게 받아들이겠는데 현실을 그렇지
못합니다. 출소 후 학교로 돌아갈 수 없어서 번역 작업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1998년 3월에 출소하자 주거지가 불안정하고 가족의 생계유지 능력이 없다는 게 갱신사유가 되었다고
한다. 그랬던 갱신 사유는 2년이 지날 때마다 이름을 바꿔 가며 시소게임을 했다. 일본에 너무 자주
들락거린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었고, 최근 들어서는 북한에 친형이 생존해 있다는 것이 검찰 측에서
내세운 갱신 사유였다. 분단 비극의 외통수다. “출소해서는 처량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치
아내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것처럼 이야기하더군요. 물론 그때라고 해서 생활비가 적은 건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150만 원 정도는 벌었으니까요. 남편이 실직하면 부인이 대신 생활비를 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검찰은 부부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형님 문제도 그래요. 북에
있는 형님 문제는 이미 적십자사를 통해 상봉 신청서를 낸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적십자사가
처리해야 할 문제를 갱신 사유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칠순을 넘긴 나이지만 학자답게 박창희 씨는 논리적이었다. 집에서 들고 나온 쇼핑백을 열자 법원에


제출할 서류와 그동안 번역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동의보감>을 일어로 번역한 <허준(상, 하)>,
<러일전쟁과 세계사>, <지문 날인 거부-내 나라를 찾아서>, 일본인이 쓴 <조선의 어머니> 같은 그의
번역서에는 민족과 애국이 공존한다. “이 나이에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학문을 해 온 사람으로
심경을 고백하자면 너무 힘이 듭니다. 전화가 되지 않을 땐 도청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고, 언제 또 구속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잠도 오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검열하느라
병이 날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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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간첩단사건으로 18년을 감옥에서 지낸 박동운 씨의 출소 후 일곱 해는 그야말로 폐허 그
자체였다. 세 자식은 아버지를 외면한 지 오래고, 아내와는 출소 후 반 년도 지나지 않아 남남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것이 보안관찰처분대상자로 살아가는 데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보안관찰법은 덫이고 늪이거든. 설사 움직이며 산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은 석 달마다 한 번씩 경찰서를 찾아가 기록으로 남겨야 하거든. 그러니 이런 남편, 이런 아버지를
좋아할 가족이 누가 있겠나.”

월 6만 원짜리 셋방에 살며 양봉을 하고 있는 예순의 그는 현재 이혼 수속 중이라고 했다. 그동안 깨진


그릇을 부여안고 남몰래 눈물도 삼켜 보았으나 출소 이후까지 물고 늘어지는 신상 문제와
보안관찰법에 아예 그는 두 손 두 발 다 들어 버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덫이 아니고 늪이
아니라면 고무줄일 거야. 언제든 늘려줬다가 때가 되면 잡아당길 수 있는. 그러니 별수 있겠어. 당기면
따라가야지. 가만 생각해 보면 끔찍해. 암보다 더 무서운 것 같아. 암에 걸리면 치료해 주는 의사라도
곁에 있을 것 아냐!”

우리는 과연 몇 퍼센트의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일까? 박동운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니 누군가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싶어졌다. 진도에서 나는 분단의
비극이라는 말보다 더 처절한 한 인생을 보았다.

농촌 청소년들은 외롭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취재를 다녀와서 농촌 청소년들이 쓸쓸하게 자라더라고 말했더니,


듣는 사람마다 그런 줄 몰랐냐면서 면박을 주었다. 2005년 2월 17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인구에서 농촌 인구는 7.1%밖에 안 되는데 65세 이상 노령 인구의 비중은 점점 높아진다고
한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 열에 하나도 안 되고, 젊은 사람들은 더 없고, 특히 청소년은 극소수다.
90%의 도시인들은 설사 자신이 농촌 출신이고, 농촌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을지언정, 오늘날 농촌에
사는 청소년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않을까? 그들이 떠올리는 농촌 청소년도 과거의 자기 모습이지,
이제는 소외감을 나눌 친구조차 없을 정도로 희귀해져 버린 지금의 아이들이 아닐 것이다.

지난 2월 말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에 갔다. 핵폐기장 반대 운동을 해 온 ‘생명평화모임’의 김영표


사무국장께 신신당부를 해 두었음에도 약속 장소에는 여학생 두 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주희는 A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반으로, 졸업 후에 부산에 있는 전문대학 영상학과에 진학한다고


했다. 2004년 핵폐기장 반대 시위의 일환으로 청소년 영화제가 열렸는데, 그때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본 경험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장차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찍어 세상에
알리는 미디어 운동가가 되고 싶단다. 그러나 그는 매우 특별한 경우다. 같은 반 친구들은 거의 다
이미 경기도나 충청북도 반도체 생산 현장에 가 있다. 2004년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비정규직으로 입사했고, 졸업하면 정규직이 된다. 그 친구들은 크고 뜻 있는 꿈을 가진 주희를
부러워하면서도, 주희가 그런 걸 해서 어떻게 먹고살까 걱정도 많이 했단다.

노동법을 하나도 모른 채 직장을 찾아 고향을 떠난 친구들은 벌써 연락이 끊겼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워낙 멀리 떨어져 사니 그렇게 된다. 사무직은 명절 때라도 고향에 오지만, 생산직은 명절에도
순환 근무를 하기 때문에 2~3년에 한 번밖에 못 오고 그때마저도 서로 어긋나면 그만이다. 졸업만
하면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서, 선후배도 동창도 찾아볼 수 없다.

보라는 3학년이 되므로 이번 겨울방학에 진로에 대해 많이 고민해 봤지만,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일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기에 고민할수록 답답하기만 하다고 했다. 결국 방학 내내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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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만 봤다고 했다. 친구를 만난다 해도 부안읍 버스 터미널 주변을 걸어다니다가, 분식집에서
밥 먹고 하나밖에 없는 24시간 편의점 ‘미니 스톱’에 들어가 한두 가지 물건을 사고, 또 걸어다니는 게
전부라고 했다. 부안에서는 할 일이 걸어다니는 것밖에 없단다. 그래서 아이들은 놀려면 전주로
나가는데, 그것도 돈이 든다고 했다. 차비도 차비려니와 까딱 차를 놓치면 찜질방이나 PC방에서 자야
하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부안군의 인구는 1969년 15만 9,721명에서 2003년 6만 8,066명으로 절반


이상이 줄었는데, 이것도 주민등록상으로만 그렇고 실제 인구는 5만 명 수준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청소년층의 감소가 두드러진다. 농촌에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둥, 10년 만에 아기가
태어났다는 둥 유년층의 감소를 걱정하는 소리가 드높지만, 더 심각하게 감소하는 건 청소년층이다.
최근 5년 단위로 1994년-1999년-2003년의 부안군 인구를 비교해 보면, 유년층 조차 대략 700~800
명씩 줄어드는데 청소년층만 수천 명씩 푹푹 준다. 10~14세 인구는 7,605명-4,185-3,524명으로,
15~19세는 9,884명-6,251명-4,445명으로 줄었다. 2002년에 부안에서 10~19세 인구는 12.4%밖에
되지 않았다. 부안군의 인구구조는 노년층이 많은 역삼각형도 아니고, 가운데가 깎여 들어간
망치형이라고나 할까.

내가 만난 청소년들은 정말 귀하디 귀하신 분들이다. “왜냐고요? 여기는 희망이 없으니까요. 어른들도


농사짓든지 조그만 장사를 하든지, 이것저것 하다 말든지, 제대로 사는 것 같지가 않아요. 우리더러
학교만 마치면 얼른 떠나라고 해요. 여기에 대학이 생긴다고 해도 가고 싶지 않아요. 이런 데서 대학
나와 봤자 뭘 해요? 젊은 사람들한테 나가라, 나가라 하는 데예요.”

중학교 때부터 아이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고향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한다. 남들은 진작 떠난
고향을 뒤늦게 떠나기까지, 중·고등학교 6년은 공백기나 유예기간이다. 그동안 놀 데도, 갈 데도 없다.
시간은 축축 늘어지고, 아이들은 읍내 터미널 부근을 걷고 또 걷는다. 워낙 숫자가 적으므로 다른
학교나 다른 마을의 아이들끼리도 다 아는데, 그 아이들도 역시 하릴없이 걷기 일쑤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어디를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지 읍내 사람들이 다 안다. 아이들은 숨고 싶고, 제발 특별한
일을 하고 싶다.

조그만 ‘매창공원’이나 빈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기도 한다. 도시 아이들이 모처럼 내려와 논의 벼를


보고 “어머나, 새싹이 돋네!”하면서 감탄하거나, “허수아비를 어떻게 만드니?”하고 물으면 확 짜증이
난다. “할머니 댁에서 매일 고구마 구워 먹어 봐요. 죽고 싶지. 우리들은 버림받았어요. 어른들은
계모임이나 술집에 가고, 어린애들은 놀이방과 학원에 가요. 그런데 우리들은 어디에 가죠?
보도블록과 가로등은 왜 그렇게 뜯어고치는지. 그런 거 보면 다 때려부수고 싶어요. 지역 발전이요? 다
헛짓이에요.”

나는 돌아오는 길에야 아이들이 사투리를 단 한마디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나와


얘기하기를 꺼렸던 이유는, 거리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 도시에 나가 만나는 사람 중 열에
아홉은 거리감을 느껴야 할 테니 말이다. 그 아이들은 참 외롭다. 공유할 사람이 너무나 적어서 잊혀져
버릴 그들의 청소년기는 아프다.

여전히 세상의 끝에 있는 섬, 소록도

고흥반도 남쪽 끝인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1번지에는 직원들이 살고, 2번지에는 한센인들이
사는 소록도(小鹿島)에는 퇴로가 없다. 설사 퇴로가 있다 하더라도 2번지에 사는 한센인들은 그 길을
잊고 산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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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안내소를 지나자 첫째 관문인 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소록도 수용소는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따라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으로 건립 결정이 내려져 이듬해 5월 문을 열었다.
소록도에 들어올 때면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신사에 들러 신고식부터 치러야 했다. 이후 소록도갱생원
(1934년), 중앙나요양소(1949년), 국립나병원(1968년), 국립소록도병원(1982년)으로 현판을 바꿔
다는 동안 수탈의 연혁은 그 연도를 헤아릴 수가 없다. 1942년 6월 20일에는 환자 이춘상 씨가 일본인
원장을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한센인들의 울분과 탄식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35년에 건립한 신사를 지나 제2안내소를
들어서면 노란 표지판이 길을 가로막고 선다. ‘수탄장’을 표시하는 표지판이었다. 표지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곳은 직원 지대와 병사 지대로 나뉘는 경계선으로 병원에서는 전염병을 우려하여
환자 자녀들을 직원 지대에 있는 미감아 보육소에 격리하여 생활하게 하였으며, 병사 지대의 부모와는
이 경계선 도로에서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허용되었다. 이때 미감 아동과 부모는 도로 양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눈으로만 혈육을 만나야 했는데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이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이라고 불렀다.”

소록도는 신사에 이어 수탄장, 검시실, 감금실에 이르기까지 단 한 곳도 평화로운 곳이 없다. 내딛는


걸음마다 탄식이 배어든다. 죄명이 문둥이어서 자신의 죄를 변호할 길마저 없고, 문둥이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의 욕이 되고 벌이 된다.

경북 김천이 고향인 김명호 씨는 당시 나병에 대해서도 소록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지은 죄도


없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내쫓긴 그는 아들마저 잃어야 했다. 그나마 아들이 큰형님 호적에
양자로 올라가 있으니 다른 한센인들에 비하면 양호한 편에 속했다. 그만큼 자식을 둔 소록도
한센인들의 마음고생은, 소록도병원 김중원 원장의 몇 마디에서 보이듯 절규 그 자체였다. “이따금씩
자녀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결혼이 임박하면 발길을 뚝 끊어 버리거든요.
부모님 병 때문에 쉬쉬하고들 살아가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나중에라도 부모님의 병을
알게 되면 이혼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할까요. 그래서 자녀들보다는 한센인 본인들이 더 세상에
공개되는 걸 꺼려하는 편입니다.”

소록도의 하루 일과는 새벽 네 시부터 시작된다. 순전히 예배 때문이다. 세상 교회들은 다섯 시에 새벽


예배를 시작하지만 ‘S도’(한센인들은 섬 밖의 사람들이 사는 곳을 ‘사회’라고 하며 자신들이 사는 곳은
소록도의 영문 첫 자를 따서 'S도‘라고 부른다)는 네 시에 새벽 예배를 드린다. 그러고 나면 할 일이
없는지라 아침 식사는 여섯 시, 점심은 열한 시, 저녁 식사는 네 시에 마친다. 더욱이 고령화(평균연령
78세)로 접어들다 보니 소록도는 저녁 여덟 시면 한밤중이다. 소록도에 살고 있는 한센인들 대부분은
예전에 병을 앓았지만 지금은 완치된 사람들로 한센병보다는 노환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더 많다.
그중 건강이 좋은 환자들은 재활 차원에서 잡초 제거와 보수 공사, 관리, 청소를 해주고 월 20~30만
원의 급여를 받기도 하나 소수에 불과하다.

소록도는 현재 부부로 인연을 맺어 살아가는 한센인과 독신으로 살아가는 한센인들이 반반이다. 물론


여기에도 외출증을 끊어야 외출이 가능한 것처럼 지켜야 할 원칙은 있다. 부부로 살다가도 한쪽이
사망하거나 헤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면 독신자 숙소로 옮겨가야 한다. 이처럼 700여 명이
이웃하며 살고있는 소록리 2번지는 작은 정부나 다름없다. 노동조합 성격을 띠고 있는 한센인
자치회는 해야 할 일이 많다. 해마다 50~60명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그것도 자치회의 몫이나
다름없다. 물론 여기에도 자치회를 통해 정한 규칙과 규율은 존재한다. 한센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장례비를 미리 저축해 두는 편인데, 한센인 중 누군가 사망하면 원생자치회는 24시간 이내에 장례를
치러야 하고, 사망자 앞으로 예금되어 있는 돈은 6대 4의 비율로 나눈다. 6은 장례 준비를 하는 데
쓰고 4는 입관자 비용과 목회자, 신부들의 수고비로 지불된다. 그래도 돈이 남을 때는 헌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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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친다. 이렇게 떠나보낸 동료들만 해도 소록도가 생겨나고 1만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부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은 외부와 이어지는 통로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센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고흥은 그래도 덜한데 우리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녹동이 문제야.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볼일이 있어서 외출했다가 식당에 가면 밥을 주지 않아. 돈을 주는데도 말이야. 어쩌다
밥을 주는 주인도 있긴 한데 거기는 거기대로 조건이 까다로워. 구석에 가서 밥을 먹어야 하는 조건이
붙거든.”

1986년으로 기억된다. 이청준과 윤정모의 소설을 읽은 뒤 가출하듯 무작정 소록도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17년 전의 기억을 쫓아 ‘도움의 집’으로 들어서자 17년 전에 두어
날을 함께 보낸 적이 있는 이추 할아버지가 환자용 침대에 누워 있었다. 17년 전, 이추 할아버지가
들려주셨던 말이 생각난다. “여기는 아무라도 사람을 정하고 살아. 엄마를 정하고 아버지를 정하고
누나를 정하고 동생을 정하고 그래. 서로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거든. 그런데도 미쳐 버리는
사람들이 많아.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 사람이고 싶어하다 보니 그럴 거야.”

한센인들에게 세상은 어떤 곳일까? 그들은 손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몽당손에 고무 밴드나 붕대를 칭칭 감아 그 사이에 호미 자루를 끼워 넣어 밭을 매고 씨앗을
뿌리면서, 그들은 그 열매를 혼자 먹지 않는다. 동료들과 나눠 먹고 직원들과 나눠 먹는다. 사람이
그리운 그들은 자신이 사람 대열에 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한테 외면당하는 일처럼 눈물나고 서러운 천형도 없는 것이다.

창신동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1970년의 상징 청계고가도로가 사라졌다. 청계천 ‘토끼장’ 봉제 공장에서 하루 열여섯시간씩 미싱을


돌려 경제를 일으켰던 여성 노동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전태일이 쌍문동 집까지 걸어 다니면서 차비를
아껴 풀빵을 사 주었던 어린 여공들. 20년 혹은 30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일하는 엄마’들이 되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의 40%가 들르며, 하루 유동 인구만 40만이라는 동대문 의류 상가 주변에서,
낮에는 쇼핑센터의 음악 소리가 들리고 밤에는 휘황한 불빛이 비치는 가파른 동네에서, 그들은 여전히
미싱을 밟고 있다.

창신동은 특별하다. 큰길만 벗어나면 차와 사람이 뒤엉키고 연립주택이 빽빽하다는 점에서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겉은 화려하되 속은 그렇지 않은 게 서울이다. 이곳은 길이 굉장히 가파른데,
겨울에 눈이 오면 주민들이 연탄재를 길에 뿌린다. 이 동네에는 연탄 때는 집들이 아직 많다. 물론
그런 데가 여기만은 아니다. 그러나 창신동은 주거지이자 생산지이다. 연립주택 1층이나 반 지하,
차고 등지에 작은 봉제 공장들이 있고, 살림집이면서 작업장인 집들도 많다. ‘동대문봉제인협회’에
따르면, 큰 빌딩 하나 없는 창신동에 2,600개의 봉제 공장이 있다고 한다. 집들과 섞여, 집들 속에,
집이 곧 공장으로. 국내산 의류 제품의 85%가 이 동네에서 만들어진다.

최혜주, 정인현 부부는 10년 전 한 방송국의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던, 말 그대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당시 카메라만 들이대면 울어 취재진을
애먹였던 첫아들이 지금은 중학교 2학년생이 되었고, 아들 둘을 더 두었다. 아내 최 씨와 남편 정 씨는
미싱사와 재단사로 만나 결혼했고,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다. 연립주택 2층, 현관문을 열면 재봉틀
건너편에 앉은 최 씨가 보인다. 천장에 전깃줄이 얼기설기 지나가고, 줄에 원단이나 천 조각이
빈틈없이 걸려 있다. 최 씨 맞은 편, 창가 쪽에 정 씨의 작업대가 붙어 있다. 다림질 때문인지 집안이
후끈했다. 최 씨와 정 씨의 작업대 사이에 부엌이 있고, 그 안쪽 문을 열면 방이다. 방 안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방이 하나 더 있는데, 거기가 아이들 방이다. 방 둘, 부엌, 욕실, 작업장. 하청을 받아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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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가정의 일반적인 구조다.

2004년 11월 창신동에 있는 여성 단체 ‘참여성노동복지터’(이하 참터)가 발표한 ‘동대문 주변 지역


여성 노동자들이 희망하는 여성 단체 활동’이라는 설문 조사 자료집에 따르면, 설문에 답한 여성
노동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월평균 가구 소득이 200만 원 이하다. 대체로 남편이 재단사이고 아내가
미싱사로, 부부가 맞벌이를 하건만 한 달에 200만 원을 채 못 번다.

창신동의 봉제 노동자들은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니다. 비정규직은 계약 기간이라도 보장받지만,


이들은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그만이다. 노동자 자신이 일감을 따다 집에서 일하거나, 공장에
나간다 해도 작업량에 따라 임금을 받는 ‘객공’ 방식이다. 피고용인과 처지가 별로 다르지 않은 영세
사업주는 사업자 등록도 하지 않은 상태이고, 보너스나 휴가, 수당 개념도 없고, 보험과 연금 혜택도
일절 없다. 겨울과 여름철이 비수기이고 작업과 작업 사이의 간격까지 합치면 일 년에 5~6개월은
쉬어야 하므로, 한 달 벌어 두 달을 먹고살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그나마도 여의치 않다.

문을 닫는 공장들이 점점 늘어난다. 의류상들이 임금 수준이 낮은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물건을


생산해서 갖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일한다 해도 봉제 노동자들은 중국과 베트남의
노동자들과 경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작업 단가는 점점 낮아진다. 1980년대 말 점퍼 한 장
박음질하는 공임이 5,000원이었으나, 지금은 4,000원이다. 디자인이 복잡해져 한 장 박는 데 들어가는
시간은 더 늘어났는데도 말이다. 10년 전에 비해 소득은 오히려 낮아졌고, 물가 상승률까지 고려하면
생활수준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경쟁력이 없으면 포기해야 한다고, 부가가치가 낮은 산업은 재빨리 후진국에 넘겨 버려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그러나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 봉제일에 종사해 온
노동자들이 그 후에 무엇을 하고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는지 대책을 제시하는 이들은 없다. 국가가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주거·교육·의료·노후 문제를 해결해 주겠는가? 살아남은 기업들이 세금을 내어
이들을 평생 먹여 살리겠는가? 그리고 그게 과연 효율적인 방식일까? 참터 전순옥 대표는 그렇다고
이제 와서 국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는 창신동 봉제 산업이 경쟁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세계적인 문제는 ‘고용 없는 성장’이고,
어떤 나라나 일자리 창출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FTA 협상 때 자국의 섬유, 의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쿼터제를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의류 제조업이야말로 대표적인 노동 집약 산업이기
때문이지요. 일본도 10년 공황을 겪은 후 봉제 공장들을 다시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이미 늦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됩니다. 세계적으로 동대문시장과 그 주변의 의류 부속품 시장,
창신동 등지의 신속한 생산 체계, 즉 의류 산업의 인프라가 갖추어진 곳은 여기밖에 없어요. 디자인이
나오면 72시간만에 일본 도쿄 쇼핑몰에 우리 옷이 쫙 걸려요. 눈을 감고도 옷을 만들어 내는 우리
노동자들의 기술력은 누구도 못 따라옵니다. 중저가 제품은 중국 등에 넘기더라도 중고가 제품은
우리에게 경쟁력이 있습니다. 봉제 산업은 사양 산업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산업이고, 살려내야 할
대한민국의 자산입니다. 나라더러 큰일을 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음지에 있는 소규모 영세
사업장들을 양성화하고, 공정한 무역이 이루어지도록 덤핑을 규제해 달라는 것이죠.”

참터 연구소 문정열 연구원은, 십 대에는 고향의 가족들을 위해 일했고, 이제는 오로지 자식을 위해
일하는 엄마들에게 ‘희망’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창신동 공부방 ‘참 신나는 학교’
천인숙 교사는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노동의 중요성을 우리 사회는 너무 잊었다고 말했다. “아이들 중
반쯤은 결국 부모가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옷 안 입고 살 수 있느냐, 옷 만드는 일은 중요한
일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하지요. 그러나 수십 년 일해도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온갖 분야에서
교수가 나와도 미싱 일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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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성을 뜻하는 ‘캐슬’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텔레비전 아파트 광고는 귀족,
품격 등 생산 현장과의 거리를 강조한다. 주거와 노동, 생산자와 소비자는 왜 이렇게 멀어졌을까?
소비자가 싼 물건만 찾을수록 내수는 얼어붙고,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인 우리의 삶은 동반
하락한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노동자들은 1970년대 우리 노동자들처럼 욕까지 얻어먹으며
잔업과 야근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70년대처럼 안 하려면 그만 두라’
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참터는 ‘깨끗한 옷 입기’, ‘피와 땀 묻은 옷 안 사기’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노동자를 착취하는 유명 브랜드 옷을 사지말고, 노동자가 제대로 대가를 받고 즐겁게 일해서
만든 제품을 선택하는 의식적 소비로 같이 살자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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