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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요약) 길에서 만난 세상
(도서요약) 길에서 만난 세상
▣ 저자
박영희 - 1962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다. 1985년 문학무크 <민의(民意)> 3집에 <남악리> 외 10
편의 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조카의 하늘』(1987), 『해 뜨는 검은 땅』(1990), 『팽이는 서고 싶다』
(2001), 『오늘, 오래된 시집을 읽다』(2003), 평전 『김경숙』(2003)을 펴냈다.
오수연 -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4년 <현대문학> 장편 공모에 <난쟁이 나라의 국경일>로
‘새로운 작가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빈집』(1997), 『부엌』(2001)을 펴냈고,
『부엌』에 수록된 중편 <땅 위의 영광>으로 2001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3년 ‘
민족문학작가회의’ 파견작가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다녀왔고, 2004년 그곳에서의 보고문집인 『
아부 알리, 죽지 마』를 펴냈다.
▣ 사진 김윤섭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사진을 찍어 왔다. 평범하거나 소외된 이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 Short Summary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닌 봉제 노동자, 외국인 이주 노동자, 한국 남성과 결혼한
아시아 이주 여성, 거리를 방황하는 도시의 노인, 미성년 비혼모, 탈학교 청소년, 농촌 청소년,
테러리스트로 싸잡아 오해받는 무슬림, 보안관찰처분대상자, 세상의 편견에 갇힌 한센인….
경제가 위기란다. 보수적인 경제 전문가와 정치가들이 주장하는 해법은 ‘성장 우선’, ‘친기업적 환경’
등 1970년대 방식이다. 그런데 기업을 살리고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날 누가 1970년대처럼
토끼장 같은 공장에서 폐병에 걸려가며 하루 열여섯시간씩 노동하겠는가? 그런 해법을 내놓은
당사자들은 아닐 것이다. 그게 문제다.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전순옥 지음)에 인용된 문구를
다시 인용해 본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에는 이렇듯 하루에도 상담을 하고자 찾아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차 안에는 정규직 조합원 2만 4,000명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1만여 명.
그나마 이 수치는 양호한 편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의 2004년 12월 자료에 따르면 임금 노동자
가운데 정규직은 645만 5,000명(44.3%), 비정규직은 813만 명(55.7%)에 이른다. 그러니까 임금
노동자 중 그 절반을 넘는 사람들이 일반 임시직(24.9%)이나 기간제고용(12.5%), 임시 파트(4.9%),
특수 고용(4.8%), 호출 근로(3.8%), 용역 근로(2.8%) 등을 통해 생계를 꾸려 가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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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은 어림없는 일이지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정규직이 파업에 들어가면 일을 못하니
비정규직은 빗자루 들고 청소를 해야 합니다. 문제는 일당에 있습니다. 정규직은 파업을 해도 일당이
나오지만 비정규직은 그렇지 못하거든요. 그래요, 거기까지도 참을 수 있습니다. 더 슬프고 서러운 건
회의실로 모이라고 할 때입니다. 모이라고 해서 회의에 참석하려고 하면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비정규직은 제외라고 말합니다. 아마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이면 살고 싶지 않을 겁니다.”
내친김에 지난 1월 22일 비정규 철폐를 외치며 분신을 기도한 최남선(현대자동차 CKD 대연 근무)
씨를 만나 보기 위해 대구의 한 병실을 찾아갔다. 전신 15%, 2도 화상을 입고 누워 있는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가족들한테조차 내 직업에 대해 말할 수 없을 때 가장 힘들었어요. 이런 제가
무엇을 더 바라겠어요.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런 거 구분 없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아마 이것은
누구한테 물어봐도 다들 원하는 세상일 겁니다. 그래야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 아닌, 한 형제로 봐 줄 줄 아는 각성이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어린 엄마들
전국적으로 비혼모 가운데 십대가 가장 많다고 한다.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우리들의 집’ 이선희
과장은 미성년 비혼모의 비율을 90%퍼센트까지 잡는다. 미성년 비혼모가 많다 보니 출산 후에 대부분
양육을 포기한다. 복지부 ‘2003년 주요 업무 참고 자료’에 따르면 ‘기아 및 미혼모’로 인한 ‘요보호
아동’이 2002년에 4,971명 생겼다고 나와 있는데, 이 수치는 한 해에 5,000명으로 추산되는
비혼모들의 수치와 비슷하다. 말하자면 요보호 아동은 대체로 비혼모들의 아이들이며, 이들은 대개
입양된다. 평균 1,700여 명이 국내 입양, 2,400여 명이 해외 입양, 900여 명은 장애 등 어려움이
있거나 기회가 오지 않아 입양 대기 상태가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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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집에서는 부모가 펄쩍 뛰며 제 아들의 아기를 가진 여성의 도덕성과 실책을 비난하고, 여자
집에서는 통곡이 터지고 팔자 망친 딸의 부모가 쓰러진다. 여자는 인생의 파국에까지 다다르지만,
남자는 흠집도 안 남는다. 그러므로 비혼모들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회복지사들은 친부에게도
책임을 지우거나 강력하게 처벌까지 하도록 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남자들도 연애에
신중해져서 비혼모가 덜 생기고, 그런 일이 일어나도 고생을 분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새벽부터 저녁까지 남편이 운영하는 해장국집에서 설거지 그릇에 파묻혀 지냈고, 밤마다
남편한테 일방적인 잠자리를 강요받았다. 집 문턱을 넘어 볼 새 없어 자기가 살던 동네를 구경하지도
못했다. 롱이 임신했을 때 검진을 받아야 한다며 남편이 산부인과에 데리고 갔으나, 깨어나 보니 임신
중절 수술이 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남편에게는 이미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은, 서른 살도 넘은
아들들이 있었는데, 모두들 어머니 대접은커녕 롱을 대놓고 무시하고 모욕했다. “1억 원을 줘도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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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월 후 롱은 이렇게 되뇌며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우리나라 국적법은 1998년에 대폭 개정되었다. 한국인 남자와 결혼한 외국인 여자에게만 국적 허가를
내주던 이전의 부계혈통주의 법률을 고쳐, 한국인 여자와 결혼한 외국인 남자도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당시 시끄러웠던 중국 동포들의 이른바 ‘위장 결혼’을 방지하자는 취지로, 결혼으로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간이 귀화’의 자격을 강화했다. 국적법 제6조 2항에 따르면, 간이 귀화를
하려면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한 상태로 대한민국에 2년 이상 거주한 주소가 있거나, 혼인 후 3년이
지나고 대한민국에 1년 이상 거주한 주소가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결혼 생활이 이 기간 전에
끝나면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할지라도 외국인 배우자가 국적을 신청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04년 1월 다음과 같이 자격 요건이 완화되었다. 한국인 배우자가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을 경우, 또는 자신의 귀책사유 없이 혼인 생활을 할 수 없었거나, 그 배우자와의 혼인으로
출생한 미성년 자녀를 양육하고 있든지 양육해야만 할 외국인은 정해진 기간 동안 결혼 생활이
유지되지 않았을지라도 간이 귀화를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그 기간만큼 국내에 거주한 후에
신청해야 한다.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들은 한국에 살러 오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정착이다. 그러나
한국의 법은 개정 이후에도 여전히 이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베트남 여성 롱의 경우 그가 계속
한국에 살기를 원했다면, 우선 체류 기간 제한과 곡예를 해야 한다. 이혼 소송을 내어 결혼 거주 비자
(F2)로 1년을 연장하는 등등. 그가 온갖 서류와 절차를 거쳐 간이 귀화 거주 기간을 넘겼다고 치자.
그래도 간이 귀화를 신청할 때는 결혼이 지속되지 못한 게 한국인 남편 탓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남편에게 잘못이 있다고 기록된 이혼 판결문, 남편의 폭행을 고소하여 받은
검찰의 불기소 결정문, 남편한테 맞은 사실이 드러나는 진단서, 남편의 4촌 이내 친척이 남편의
잘못이라고 기록한 확인서 가운데 한 개 이상의 서류가 필요하다. 설사 한국인 여성일지라도 맞아서
팔다리가 부러지지 않는 한 남편의 폭행을 증명하기 어렵고, 카메라와 녹음기를 숨겨 두고 살지
않는다면 남편에게 귀책사유가 있다는 증거를 모을 수가 없다. 남편의 4촌 이내 친척인 시댁 식구들이
자기 아들이나 사촌을 비난하는 확인서를 써 줄지도 의문이다. 평소에도 그들은 외국인 신부 롱을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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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각별한 것이다. 참전용사전우회에서 나온 것으로 점퍼에 단 것과 같은 배지가 달려 있다. 이
배지는 그에게 든든한 배후가 된다. 젊은 세대는 몰라도 전쟁을 체험한 세대인 노인들은 서로 알아봐
준다.
김 씨 할아버지 내외는 10년 전부터 점심식사를 하지 않는다. 부부의 한 달 용돈은 11만 원이다. 참전
명예 수당 6만 원과 딸이 보내 주는 용돈 5만 원이 전부다. 할아버지가 막노동으로 벌고 할머니가
구멍가게를 운영해서 악착같이 1억 원 가까운 돈을 모았지만 아들이 그 돈으로 당구장과
전자오락실을 운영하다 실패하는 바람에 다 날려 버렸다. 이제 수중에 남은 돈은 300만 원이 전부다.
마흔이 넘은 외아들이 장가도 안 가고 함께 살고 있지만 용돈을 받을 형편이 못 된다. “점심 한 끼
먹는 데 라면 한 그릇도 2,000원이야. 못 먹지. 그렇다고 할머니 데리고 줄 서서 무료 급식은 못해.
차라리 굶는 게 나아. 이도 버릇이 들면 편해.”
종묘 공원은 노인들의 어두운 해방구다. 젊은이들을 위해 조성된 거리는 많아도 노인들을 위해 조성된
문화 거리는 없는 실정이고 보면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이 모여 서로 마음 덜 다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긴 한 셈이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거리에서 밀려나 노인정이나 복지관으로 격리된다.
종묘에 모이는 노인들은 여러 가지 사연으로 노인정이나 복지관에 가지 않는다. 노인정에서는 따로 할
일이 없어서 주로 화투를 치는데 그도 소주 한 병 내놓을 만한 쌈짓돈이 있어야 체면을 차리고 다닐 수
있다. 복지관에서는 어학이나 사물놀이, 고전무용, 풍수지리, 컴퓨터 강습 따위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지만 배우려는 의지와 흥미가 없는 노인에게는 그저 답답한 수용시설일 뿐이다. 김
씨 할아버지는 수요일 오후에 종로노인종합복지관에서 무료로 진행하는 풍수지리 강좌를 듣는 때
말고는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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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이라는 나이가 우스운 나이인가? 오래 살기 싫어. 통장에 300만 원이 있는데 1년에 100만 원씩
깨서 쓰면 한 3년은 그럭저럭 지낼 수 있겠지. 그거 다 떨어지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야. 죽으면
호국 용사 묘지에 묻히겠지.”
1998년 3월에 출소하자 주거지가 불안정하고 가족의 생계유지 능력이 없다는 게 갱신사유가 되었다고
한다. 그랬던 갱신 사유는 2년이 지날 때마다 이름을 바꿔 가며 시소게임을 했다. 일본에 너무 자주
들락거린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었고, 최근 들어서는 북한에 친형이 생존해 있다는 것이 검찰 측에서
내세운 갱신 사유였다. 분단 비극의 외통수다. “출소해서는 처량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치
아내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것처럼 이야기하더군요. 물론 그때라고 해서 생활비가 적은 건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150만 원 정도는 벌었으니까요. 남편이 실직하면 부인이 대신 생활비를 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검찰은 부부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형님 문제도 그래요. 북에
있는 형님 문제는 이미 적십자사를 통해 상봉 신청서를 낸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적십자사가
처리해야 할 문제를 갱신 사유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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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간첩단사건으로 18년을 감옥에서 지낸 박동운 씨의 출소 후 일곱 해는 그야말로 폐허 그
자체였다. 세 자식은 아버지를 외면한 지 오래고, 아내와는 출소 후 반 년도 지나지 않아 남남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것이 보안관찰처분대상자로 살아가는 데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보안관찰법은 덫이고 늪이거든. 설사 움직이며 산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은 석 달마다 한 번씩 경찰서를 찾아가 기록으로 남겨야 하거든. 그러니 이런 남편, 이런 아버지를
좋아할 가족이 누가 있겠나.”
농촌 청소년들은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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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만 봤다고 했다. 친구를 만난다 해도 부안읍 버스 터미널 주변을 걸어다니다가, 분식집에서
밥 먹고 하나밖에 없는 24시간 편의점 ‘미니 스톱’에 들어가 한두 가지 물건을 사고, 또 걸어다니는 게
전부라고 했다. 부안에서는 할 일이 걸어다니는 것밖에 없단다. 그래서 아이들은 놀려면 전주로
나가는데, 그것도 돈이 든다고 했다. 차비도 차비려니와 까딱 차를 놓치면 찜질방이나 PC방에서 자야
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부터 아이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고향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한다. 남들은 진작 떠난
고향을 뒤늦게 떠나기까지, 중·고등학교 6년은 공백기나 유예기간이다. 그동안 놀 데도, 갈 데도 없다.
시간은 축축 늘어지고, 아이들은 읍내 터미널 부근을 걷고 또 걷는다. 워낙 숫자가 적으므로 다른
학교나 다른 마을의 아이들끼리도 다 아는데, 그 아이들도 역시 하릴없이 걷기 일쑤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어디를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지 읍내 사람들이 다 안다. 아이들은 숨고 싶고, 제발 특별한
일을 하고 싶다.
고흥반도 남쪽 끝인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1번지에는 직원들이 살고, 2번지에는 한센인들이
사는 소록도(小鹿島)에는 퇴로가 없다. 설사 퇴로가 있다 하더라도 2번지에 사는 한센인들은 그 길을
잊고 산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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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안내소를 지나자 첫째 관문인 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소록도 수용소는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따라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으로 건립 결정이 내려져 이듬해 5월 문을 열었다.
소록도에 들어올 때면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신사에 들러 신고식부터 치러야 했다. 이후 소록도갱생원
(1934년), 중앙나요양소(1949년), 국립나병원(1968년), 국립소록도병원(1982년)으로 현판을 바꿔
다는 동안 수탈의 연혁은 그 연도를 헤아릴 수가 없다. 1942년 6월 20일에는 환자 이춘상 씨가 일본인
원장을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한센인들의 울분과 탄식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35년에 건립한 신사를 지나 제2안내소를
들어서면 노란 표지판이 길을 가로막고 선다. ‘수탄장’을 표시하는 표지판이었다. 표지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곳은 직원 지대와 병사 지대로 나뉘는 경계선으로 병원에서는 전염병을 우려하여
환자 자녀들을 직원 지대에 있는 미감아 보육소에 격리하여 생활하게 하였으며, 병사 지대의 부모와는
이 경계선 도로에서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허용되었다. 이때 미감 아동과 부모는 도로 양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눈으로만 혈육을 만나야 했는데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이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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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친다. 이렇게 떠나보낸 동료들만 해도 소록도가 생겨나고 1만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부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은 외부와 이어지는 통로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센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고흥은 그래도 덜한데 우리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녹동이 문제야.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볼일이 있어서 외출했다가 식당에 가면 밥을 주지 않아. 돈을 주는데도 말이야. 어쩌다
밥을 주는 주인도 있긴 한데 거기는 거기대로 조건이 까다로워. 구석에 가서 밥을 먹어야 하는 조건이
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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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가정의 일반적인 구조다.
경쟁력이 없으면 포기해야 한다고, 부가가치가 낮은 산업은 재빨리 후진국에 넘겨 버려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그러나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 봉제일에 종사해 온
노동자들이 그 후에 무엇을 하고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는지 대책을 제시하는 이들은 없다. 국가가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주거·교육·의료·노후 문제를 해결해 주겠는가? 살아남은 기업들이 세금을 내어
이들을 평생 먹여 살리겠는가? 그리고 그게 과연 효율적인 방식일까? 참터 전순옥 대표는 그렇다고
이제 와서 국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는 창신동 봉제 산업이 경쟁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세계적인 문제는 ‘고용 없는 성장’이고,
어떤 나라나 일자리 창출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FTA 협상 때 자국의 섬유, 의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쿼터제를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의류 제조업이야말로 대표적인 노동 집약 산업이기
때문이지요. 일본도 10년 공황을 겪은 후 봉제 공장들을 다시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이미 늦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됩니다. 세계적으로 동대문시장과 그 주변의 의류 부속품 시장,
창신동 등지의 신속한 생산 체계, 즉 의류 산업의 인프라가 갖추어진 곳은 여기밖에 없어요. 디자인이
나오면 72시간만에 일본 도쿄 쇼핑몰에 우리 옷이 쫙 걸려요. 눈을 감고도 옷을 만들어 내는 우리
노동자들의 기술력은 누구도 못 따라옵니다. 중저가 제품은 중국 등에 넘기더라도 중고가 제품은
우리에게 경쟁력이 있습니다. 봉제 산업은 사양 산업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산업이고, 살려내야 할
대한민국의 자산입니다. 나라더러 큰일을 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음지에 있는 소규모 영세
사업장들을 양성화하고, 공정한 무역이 이루어지도록 덤핑을 규제해 달라는 것이죠.”
참터 연구소 문정열 연구원은, 십 대에는 고향의 가족들을 위해 일했고, 이제는 오로지 자식을 위해
일하는 엄마들에게 ‘희망’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창신동 공부방 ‘참 신나는 학교’
천인숙 교사는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노동의 중요성을 우리 사회는 너무 잊었다고 말했다. “아이들 중
반쯤은 결국 부모가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옷 안 입고 살 수 있느냐, 옷 만드는 일은 중요한
일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하지요. 그러나 수십 년 일해도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온갖 분야에서
교수가 나와도 미싱 일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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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성을 뜻하는 ‘캐슬’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텔레비전 아파트 광고는 귀족,
품격 등 생산 현장과의 거리를 강조한다. 주거와 노동, 생산자와 소비자는 왜 이렇게 멀어졌을까?
소비자가 싼 물건만 찾을수록 내수는 얼어붙고,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인 우리의 삶은 동반
하락한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노동자들은 1970년대 우리 노동자들처럼 욕까지 얻어먹으며
잔업과 야근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70년대처럼 안 하려면 그만 두라’
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참터는 ‘깨끗한 옷 입기’, ‘피와 땀 묻은 옷 안 사기’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노동자를 착취하는 유명 브랜드 옷을 사지말고, 노동자가 제대로 대가를 받고 즐겁게 일해서
만든 제품을 선택하는 의식적 소비로 같이 살자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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