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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논문 정리

릴케의 존재론적 세계관을 이해해야지만 그가 주장하는 ‘사랑과 소유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사랑’과 릴케의 고유한 존재론적 세계관의 관계는 ‘소유’ 라는 개념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다(5p)

-이해 시 필요한 것
릴케는 독자와 작가간의 상호 소통을 지향하고 있음
릴케 스스로의 증언과 설명을 고려해야 함
개별 텍스트의 주제와 형식의 조건에 주의

●보다 인간적인 사랑과 여성과의 관계


보다 인간적인 사랑이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릴케의 작품 속에서 어려움을 받아들인 후 자체 내에 지니고 있는 여성들
의 형상을 볼 필요가 있다

릴케에 의하면, 여성들은 근원적으로 보다 더 성숙한 인간 유형으로 간주하며 남성들보다 더 인


간적인 사람들로 볼 수 있다.(p.6). 여성이라는 사회적 관습을 벗어날 때 비로소 고통과 비하 속에
서 견디어 낸 이런 여성들의 인간다움은 분명해짐

사랑은 여자와 남자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인식되는 것임. 보다 성숙한 여성들
이 수행하는 사랑은 보다 인간적인 사랑인 것이다.

“창작하는 자의 심오한 체험은 여성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받아들여 잉태하는 체험이기 때문이
다. ”

사랑하는 여성들은 자신의 삶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의 내면에서 다른 것, 즉


그들의 실존을 위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된다. 이 새로운 것이 진정한 의미의 소유와 관계 있
다.

●대상 없는 사랑에 대한 비판 시도
가스파라 스탐파를 보고 한나 아랜트는 사랑은 원칙적으로 버림받은 자의 사랑이며, 이것은 곧
대상 없이 사랑 속에 있는 상황으로 간주된다 라고 주장. 연인이 떠났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 없
이 혼자 있음을 의미

‘비지향적 사랑’-연인의 물리적인 부재 상황을 고려하고 있음을 의미


근데 사랑이란 특정한 사랑의 대상에게 향하는 감정인데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수가 있나? 사랑
하는 사람이 죽었어도 의식 속에는 남아있잖아
릴케의 사랑은 항상 대상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릴케의 사랑의 개념을 이해하고자 할
때 사랑하는 대상의 물리적 부재와 의식 속에서의 대상의 부재를 구분해야 한다.
사랑의 대상이 떠났다면 사랑하는 이의 삶의 무게가 더욱 커질 수 있으며 이 무게가 커질수록 사
랑하는 이의 내면에서 잉태되어질 무언인가 새로운 것, 즉 사랑하는 자의 실존을 위한 것은 더욱
의미가 있어진다. 이것이 바로 소유의 대상인 것이다.

(대상이 있는 사랑은 소유하는 사랑?)

●소유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비판 시도
많은 사람들은 떠난 이에 대한 사랑을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유사한 생각을
가진 세 사람의 주장을 들어본 후, 이들을 하나씩 반박한다.

1. 슈바르츠
다른 이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 것이 고유한 사랑
여기서의 소유는 물리적인 대상을 의미
물질적 대상의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려는 것은 고유한 사랑 x

2. 아랜트
소유하지 않는 사랑은 버림받은 자의 사랑과 같음
버림받은 자의 고독한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연인과 물리적인 거리를 유지한 상
태에서의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지평을 가로막는 것. 그러므로 고유한 사랑은 고독
(물리적 거리감) 속에서만 존재

하지만 연인들이 서로의 고독을 보듬어 줄 수도 있고 진정한 사랑은 물리적 거리를 초월하기 때
문에 아랜트의 주장은 반박됨

3. 볼노브
연인을 붙잡지 않기 때문에 연인을 붙잡을 수 있다
 대상을 물리적으론 소유하지 않지만 정신적으론 소유할 수 있다

하지만 릴케가 생각하는 사렝에 의하면 인연은 물리적, 정신적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4. 그럼 릴케는 소유의 개념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데? P.15즈음


사람들은 형상의 앞에 ‘나의’ 라는 표현을 붙여서 그들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
형상들은 영원히 소유물로 간직할 수 없는 것들이며, 또한 우리 마음대로 다룰 수도 없는 것들이
다. 하물며 인간의 소유라니, 가당치도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치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 보다 인간적인 사랑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은 난센
스라 할 수 있다.
릴케에게서 소유의 개념은 사람과 같은 물리적인 대상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 오히
려 소유의 개념은 대상을 사랑함으로써 유발되는 사랑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와 관련하여 고려되
어야 한다.

소유하고자 함은 인간의 근원적 욕구이다.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의식에서 유발되는 결


핍의 충족을 갈망하는 존재이다. 또한 불완전함은 우리가 세계를 통일적으로 인식할 수 없게 하
는 의식의 양극성에서 온다. 따라서 소유하고자 함은 사랑하는 대상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세
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의식과 관계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뭘 소유할 수 있는데?


사랑을 통해서 얻는 빛나는 체험을 소유하는 것
우리는 체험을 소유하기 위해 많은 체험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소유할 수 있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사랑해야만 하는 것
즉, 소유의 대상은 사랑일 통해 얻게 되는 대상에 대한 성숙한 의식이며 동시에 이것을 통해 획
득되는 성숙한 자의식이다

사랑스런 대상과의 만남, 즉 사랑은 우리 모두 배워야만 하는 일종의 능동적인 작업이다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성숙이고 달콤함이며 아름다움이다’


릴케 논문 보고서 예시

릴케에게 있어 진정한 사랑을 위한 필요조건은 존재론적인 소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릴케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과 소유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의미를 확인해보기 위해 우선 이와 대립되는 개

념인 ‘일반적인 의미의 소유’에 대해 다뤄보자.

릴케가 비난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소유란, 자신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마치 자신의 소유물

인 것처럼 여기며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일상에서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의 소유’의 예시를 들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의(My)’

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곤 한다. ‘나의 여인’, ‘나의 아이’ 그리고 ‘나의 친구’와 같은 단어들은 우

리에게 있어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표현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대상을

자신의 소유로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릴케가 비난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소유다.

이때, 릴케가 말하는 소유는 물리적인 대상과 관련 있지는 않다. 이와 반대로 물리적인 대상과 관계

를 가지는 소유의 개념을 말하는 대표적인 학자에는 슈바르츠, 아렌트, 그리고 볼노브가 있다. 슈바

르츠에 의해 ‘고유한 사랑’이라고 표현되는 ‘소유하지 않는 사랑’은 다른 사람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

는 사랑을 말한다. 또한, 아렌트의 ‘버림받은 자의 사랑’은 버림받은 자의 고독한 사랑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볼노브는 ‘소유하지 않고자 하는 사랑’을 진정한 사랑의 유지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생

각했다. 이들 세 학자에 의해 제시된 진정한 사랑에 대한 견해는 각기 표현 방식은 조금씩 다르나

소유를 물리적인 대상과 관련지어 생각했다는 점에서 전제는 모두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런 점에서 소유에 대한 릴케의 견해와 이들 세 학자의 견해가 충돌하는 것이다.

게다가, 릴케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 갖는 소유의 의미는 연인을 정신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릴케에게 있어 연인은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소유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러한 견해를 갖는 릴케에게 슈바르츠의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란 말은 연인을 물리적인 소유의 대

상으로 바라보는 전제를 갖는다는 점에서 모순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릴케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은 무엇을 소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얻는 빛나는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다 인간적인 사랑’, 릴케의 ‘진정

한 사랑’을 위해선 소유할 수 있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사랑하고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릴케는 존재론적인 소유를 위해서는 고독을 지켜줘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즉 릴케의

사랑은 곧 고독인 것이다. 그러나 이 고독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사람과 떨어져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연인이 함께 있으면서도 충분히 고독을 지켜줄 수 있으며 반대로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연인 간에 서로 고독을 지켜주지 못하는 경우가 바로 영화 <THE HOURS>를 통해 잘 나타난다.

<THE HOURS>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세 여인인 ‘버지니아 울프’, ‘로라 브라운’, ‘클라리사’

의 하루를 보여준다. 이 중 첫 번째 여성인 버지니아 울프는 1920년대 영국의 교외인 리치몬드에

사는 여성이다. 그녀는 어렸을 적 받았던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병을 앓고 있으며, 두통을 달고 사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녀를 극진히 아끼던 남편인 레너드는 그녀의 건강을 위해 시골에 내려와

그녀를 감시하고 돌보았으나, 버지니아 울프에게 이는 족쇄일 뿐이었다. 이에 권태감과 회의감을 느

낀 그녀는 런던으로 돌아가기위해 집을 나가나 이후 남편과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녀

는 자신의 인생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박탈감에 결국 그녀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택하

고 만다.

릴케의 관점에서 이를 해석해보자. 남편인 레너드는 자신의 아내를 아꼈지만 그녀를 ‘소유’하려고

한 것이다. ‘자신의’ 아내라고 생각했으며 그렇기에 그녀를 감시했고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족쇄

로써 다가왔으며 그녀에게 ‘고독’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다. 영화 속 버지니아 울프가 남긴 유서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삶의 진면목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마침내 그것을 깨달으며,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하고, 그런 후에야 접는 거예

요. 레너드. 우리가 영원히 함께한 세월을요. 영원히 함께한 세월을요. 영원한 그 사랑을요. 영원한 그 세월을

요.”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영원한 사랑, 세월’은 릴케가 말한 ‘사랑을 통해서 얻는 빛나는 체험’이라고

볼 수 있다. 버지니아는 레너드를 보다 ‘인간적으로’,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연인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던 레너드에 의해 존재론적 소유의 필요조건인 ‘고독’이 지켜지지 못했던 것이다.

영화 속 두 번째 여성은 1950년대를 사는 로라 브라운이다.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그녀 역시

일상에 권태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평범한 아내로써의 삶을 원하지 않았고, 남편의 생일

에 아이를 버리고 도망치려 하였다. 죄책감에 다시 돌아왔지만, 그녀는 떠나기로 결심한 상태였고,

둘째아이를 낳자마자 가족을 떠나게 된다.

현실 도피적이며, 다소 윤리적이지 못하다고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로라는 릴케의 관점에서는 보다

‘인간적인’ 삶을 찾기 위해서 떠났다고 볼 수 있다. 릴케의 관점에서 그녀는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

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로라가 ‘남편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

이다.

영화 속 세 번째 여성은 2000년대 뉴욕에 사는,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클라리사다. 개

방적인 분위기 속에 그녀는 동성의 연인과 한 집에 살며, 옛 연인인 리처드를 돌보는 것이 삶의 의

의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보다 리처드를 돌보는 것을 더 우선순위에 놓는다. 이는 점차

집착에 가까워졌고, 이에 괴로워하던 리차드는 클라리사가 보는 앞에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다.

영화 속에서 리차드는 그녀와 함께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행복했다고 말한다. 릴케의 관점에서 이 말

은 그가 클라리사와 ‘빛나는 추억’을 소유했고,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클

라리사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으로 상대방을 소유하려 했고 이로 인한 ‘고독의 부재’가 결국 리차드

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릴케의 진정한 사랑과 소유라 함은 사랑의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며,

‘사랑을 통해 얻는 빛나는 체험’을 소유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서로간의 충분한 고독을 지켜주는


것이다. 릴케는 이러한 사랑을 보다 인간적인 사랑, 진정한 사랑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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