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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덕
한국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
아우슈비츠인가, 오시비엥침인가
아우슈비츠(Auschwitz)는 폴란드 도시 오시비엥침(Oświęcim)을 독일어로 부르는 명칭이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뒤 점령한 폴란드 도시
의 이름을 독일식으로 바꾼 데에서 유래한다. 한편 아우슈비츠 인근에 있는 제2 수용소인 비
르케나우(Birkenau)는 폴란드어로 브젠진카(Brzezinka), 즉 자작나무(폴란드어로 브조자
brzoza)가 많은 곳이란 뜻이다.
지도를 펼쳐보면 폴란드는 유럽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다시 폴란드의 중심에 있는 도
시가 바로 아우슈비츠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대의 수용소를 아우슈비츠에 세운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럽의 한가운데 위치한 도시, 그리하여 전 유럽의 유대인들
을 한곳으로 실어 오기에 가장 좋은 철로 교통의 요충지가 바로 아우슈비츠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전 유럽에는 1,100만~1,20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며, 이
중 4분의 1에 해당하는 300만 명은 폴란드에 거주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유럽
유대인의 절반인 600만 명이 희생됐으며, 그중 300만 명이 바로 폴란드에 살고 있던 유대인
이었다. 1939년 기준으로 유럽에서 만나는 유대인 4명 중에, 1명이 폴란드 국적을 가졌을 정
도로, 당시만 해도 폴란드는 ‘유대인의 파라다이스(Paradisus Iudaeorum)’라고 불릴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는 살기 좋은 나라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던 도시는 지
금도 그러하듯이 미국의 뉴욕이었으며, 두 번째로 많이 살고 있던 도시가 바로 40여만 명이
거주하던 바르샤바였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바로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인 브와디스와
프 슈필만이었다.
나치 치하 바르샤바에서 숨어 지내던 슈필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일하게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저항한 1943년의 바르샤바 게토 봉기 와중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게다가 폴란드인들이 일으킨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서도 살아남은 천운을 타고난 유대인이
었다. 이 영화를 찍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 또한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에 관한 또 하나의 걸작인 스티븐 스필버그(역시 유대인이다) 감독
의 〈쉰들러 리스트〉의 실제 무대인 크라쿠프가 바로 폴란스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폴
란스키의 모친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어린 폴란스키는 폴란드인들
이 목숨을 걸고 숨겨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왕국의 500년 수도
였던 크라쿠프에서 서쪽 독일 방면으로 70㎞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만약 제2차 세계대
전만 아니었다면 1945년 이후 노벨상을 수상하는 4명 중에, 1명은 폴란드 국적을 가졌을 것
이라는 가정이 있다. 그만큼 전전 유럽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살았던 곳이 폴란드였다. 나
치가 최대 수용소를 독일 본국이 아닌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세운 두 번째 이유다.
세 번째 이유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던 곳이 당시만 해도 폴란드 군대 병영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아우슈비츠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군대 기지가 있던 곳이라 외부로부
터 숨기기에 유리했으며 막사 같은 부속 시설을 짓기도 용이했다. 바로 이 같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나치 독일이 최대의 강제수용소를 지을 장소로 아우슈비츠를 선택한 것이다.
수송 인원 중 전체 희생자
민족 수송 인원 희생자 수
희생된 비율 비율
유대인 110만(85%) 100만 90% 91%
폴란드인 14만(10.8%) 7만 46% 5.8%
기타 민족 2만 5천(1.9%) 1만 2천 48% 1%
집시 2만 3천(1.8%) 2만 1천 91.3% 1.7%
소련군 포로 1만 5천(1.2%) 1만 4천 93% 1.3%
합계 130만(100%) 110만 84% 100%
1939년 국경선 기준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의 국적과 인원수는 다
음과 같다. 헝가리 43만 명, 폴란드 30만 명, 프랑스 6만 9천 명, 네덜란드 6만 명, 그리스 5
만 5천 명, 체코 4만 6천 명, 슬로바키아 2만 7천 명, 벨기에 2만 5천 명, 독일과 오스트리아
각각 2만 3천 명, 유고슬라비아 1만 명, 이탈리아 7천 5백 명, 라트비아 1천 명, 노르웨이
690명으로 전부 합치면 110만 명에 달한다. 이외에도 가스실로 직행하지 않고 일정 기간 막
사에 수용된 40만 명의 등록된 사람들의 민족 구성은 다음과 같다. 유대인 20만 명(50%), 폴
란드인 14만 명(35%), 기타 민족 2만 5천 명(6%), 집시 2만 1천 명(5.3%), 소련군 포로 1만
2천 명(4%). 기타 민족 2만 5천 명은 다시 체코인 9천 명, 벨라루스인 6천 명, 독일인 4천
명, 프랑스인 4천 명, 러시아인 1천 5백 명, 유고슬라비아인 8백 명, 우크라이나인 5백 명, 기
타(이탈리아, 벨기에, 덴마크, 스페인, 네덜란드, 그리스,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알바니아, 리
투아니아, 라트비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2백 명(총합 40만 명)이다.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를 합친 최대 수용 인원은 50만 명 정도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이중의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28개 막사로 구성되었으며, 한꺼번에 1만 3천~1만 6천여
명을 수용했으며 통합 40만 명을 수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1 수용소 아우슈비츠의 일부 막사를 전후 전시실로 개조하여 유대인들이 남긴 유품이나
나치 범죄의 증거인 서류 또는 사진과 문서 등을 전시하고 있다. 우선 들어가는 정문부터가
충격적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상단에는 저 유명한 “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복음서 8장 32절인 “진리
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를 차용한 것이다. 1872년 독일 민족주의 작가인 로렌츠 디펜바
흐(Lorenz Diefenbach)가 자신의 소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제목으로 요한
복음서 문구를 패러디한 것이 그 시초다. 이후 나치주의자들이 1930년대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한 선전 구호로 사용하며 이 문구가 인기를 끌었다.
아우슈비츠 정문의 철제 문구를 만든 사람은 1940년에 이곳으로 이송된 대장장이 대가이던
폴란드인 얀 리바츠(Jan Liwacz, 수용소 번호 1010번)다. 리바츠와 함께 이 철제 문구 제작에
참여했던 유대인들은 ‘B’자를 거꾸로 만들어 저항심을 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생존자들
은 이는 단순한 실수일 뿐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아우슈비츠의 상징이 된 이 문구는 그 사연
만큼이나 많은 이야깃거리를 간직하고 있다.
1945년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소련군은 이 철제 문구를 본국으로 후송하기 위해 기차에
실었다. 하지만 에우게니우쉬 노살(Eugeniusz Nosal, 수용소 번호 693번)이라는 폴란드 생존
자와 우연히 기차역 근처에 있던 폴란드 마부가 이 사실을 알고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밀주
보드카로 소련군 기차 보초를 매수하여 이 문구를 돌려받아, 몰래 숨겼다. 전쟁이 끝나고 박
물관이 만들어지면서 이 문구도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사진 4〉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대인들이 남긴 신발들.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중의 철조망을 벗어나면 곧바로 가스실로 이어진다. 가스실로 들어가기 전 한편에 고즈넉
이 세워져 있는 교수대를 볼 수 있다. 바로 이 교수대에서 헤스 수용소장이 크라쿠프 법정에
서 재판받은 뒤 1947년 4월 16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헤스는 패전 후 잠적했다가 변장을
한 채 남미로 탈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1946년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
가스실에서는 1941~1942년에 주로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가스실과 연결된 소
각장은 독일군이 퇴각하기 전에 폭파했으나 전후에 소각로 3개를 복구하여 전시하고 있다.
1940~1943년에 독일군은 소각로 하나에 시신 2~3구씩 넣어 소각시켰다. 소각로는 24시간 가
동되었고 하루에 350구의 시신이 처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6〉 유대인들을 수송한 철로와 빈터만 남은 비르케나우 제2 수용소.
참고문헌
연표
1940년 4월: 독일 나치 정권 아우슈비츠 수용소 건립 결정
1940년 6월 14일: 폴란드 정치범 728명 아우슈비츠 수용소 최초 수용
1941년 6월: 비르케나우 수용소 건립 시작
1941년 9월: 치클론 B 독가스 최초 사용
1942년 1월: 비르케나우 수용소 유대인 대량 학살 시작
1943년 5월: 요제프 멩겔레 인체 실험
1945년 1월 27일: 소련군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1947년 7월 2일: 폴란드 의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 설립 법안 의결
197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