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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상흔, 야만의 기억 -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김용덕
한국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

〈사진 1〉 이중으로 된 전기 철조망. 아우슈비츠 수용소.

아우슈비츠인가, 오시비엥침인가
아우슈비츠(Auschwitz)는 폴란드 도시 오시비엥침(Oświęcim)을 독일어로 부르는 명칭이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뒤 점령한 폴란드 도시
의 이름을 독일식으로 바꾼 데에서 유래한다. 한편 아우슈비츠 인근에 있는 제2 수용소인 비
르케나우(Birkenau)는 폴란드어로 브젠진카(Brzezinka), 즉 자작나무(폴란드어로 브조자
brzoza)가 많은 곳이란 뜻이다.
지도를 펼쳐보면 폴란드는 유럽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다시 폴란드의 중심에 있는 도
시가 바로 아우슈비츠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대의 수용소를 아우슈비츠에 세운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럽의 한가운데 위치한 도시, 그리하여 전 유럽의 유대인들
을 한곳으로 실어 오기에 가장 좋은 철로 교통의 요충지가 바로 아우슈비츠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전 유럽에는 1,100만~1,20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며, 이
중 4분의 1에 해당하는 300만 명은 폴란드에 거주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유럽
유대인의 절반인 600만 명이 희생됐으며, 그중 300만 명이 바로 폴란드에 살고 있던 유대인
이었다. 1939년 기준으로 유럽에서 만나는 유대인 4명 중에, 1명이 폴란드 국적을 가졌을 정
도로, 당시만 해도 폴란드는 ‘유대인의 파라다이스(Paradisus Iudaeorum)’라고 불릴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는 살기 좋은 나라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던 도시는 지
금도 그러하듯이 미국의 뉴욕이었으며, 두 번째로 많이 살고 있던 도시가 바로 40여만 명이
거주하던 바르샤바였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바로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인 브와디스와
프 슈필만이었다.
나치 치하 바르샤바에서 숨어 지내던 슈필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일하게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저항한 1943년의 바르샤바 게토 봉기 와중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게다가 폴란드인들이 일으킨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서도 살아남은 천운을 타고난 유대인이
었다. 이 영화를 찍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 또한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에 관한 또 하나의 걸작인 스티븐 스필버그(역시 유대인이다) 감독
의 〈쉰들러 리스트〉의 실제 무대인 크라쿠프가 바로 폴란스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폴
란스키의 모친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어린 폴란스키는 폴란드인들
이 목숨을 걸고 숨겨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왕국의 500년 수도
였던 크라쿠프에서 서쪽 독일 방면으로 70㎞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만약 제2차 세계대
전만 아니었다면 1945년 이후 노벨상을 수상하는 4명 중에, 1명은 폴란드 국적을 가졌을 것
이라는 가정이 있다. 그만큼 전전 유럽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살았던 곳이 폴란드였다. 나
치가 최대 수용소를 독일 본국이 아닌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세운 두 번째 이유다.
세 번째 이유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던 곳이 당시만 해도 폴란드 군대 병영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아우슈비츠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군대 기지가 있던 곳이라 외부로부
터 숨기기에 유리했으며 막사 같은 부속 시설을 짓기도 용이했다. 바로 이 같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나치 독일이 최대의 강제수용소를 지을 장소로 아우슈비츠를 선택한 것이다.

〈사진 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첩보기가 촬영한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수용소.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홀로코스트의 현장
아우슈비츠는 나치 독일이 전쟁을 일으킨 목적 중 하나인 지구상에서 마지막 한 명의 유대
인까지 제거한다는 목적을 실행에 옮긴 장소다. 독일어로 엔트뢰중(Endlösung)​​이라 불리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민족 말살 정책을 주도한 사람은 하인리히 힘러였다. 1939년 9월 1일 제2
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아우슈비츠는 나치 독일에 합병됐다. 1940년 4월 나치 친위대(SS)
와 게슈타포 대장인 하인리히 힘러가 수용소 건립을 결정하며 아우슈비츠 도시 역사에서 일대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 후 힘러는 독일 작센하우젠 수용소 소장이던 루돌프 헤스(Rudolf
Höß)를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했다. 헤스는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아우슈비츠수용소
장으로 근무할 당시 50만 명이 기아로 죽고 자신이 250만 명을 죽였다고 증언했다.
1940년 6월 14일 폴란드 타르누프에 갇혀 있던 폴란드 정치범 728명을 수용하며 문을 연
아우슈비츠는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증축되었다. 그 결과 전쟁 말기가 되면 수용소
전체면적은 대략 40㎢(약 1만 2,000평)로 늘어난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 잡은 포로 1만 2천 명을 수용하기 위해 제2 수용소가 건립됐다. 1943년 10월에 이르면 수
용소는 크게 셋으로 분할된다. 제1 수용소는 최초에 세워진 아우슈비츠이고, 제2 수용소는 비
르케나우, 제3 수용소는 기타 부속 수용소로 구성된다. 1944년 11월 25일 제1, 제2 수용소가
재통합되고 제3 수용소는 독립된다.
1945년 1월 27일 베를린을 향해 진격하던 소련군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해방됐다.
당시 예상치 못하게 소련군이 너무 빨리 진격해오는 바람에 독일군은 수용소 전체를 파괴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가스실만 폭파하고 생존자들을 기차에 싣고 허겁지겁 퇴각했다. 이때
부상이 심해 기차역까지 걸어갈 수 없어 독일군이 버리고 떠난 7천여 명만이 생존할 수 있었
다. 전쟁이 끝난 후 폴란드는 탱크를 앞세운 소련에 의해 소비에트 블록의 일원이 돼버렸다.
나치 히틀러의 독재가 끝나자 스탈린의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폴란드 공산당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서유럽을 대표하는 독일이 저지른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우슈비츠를 박물관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1947년 7월 2일 폴란
드 의회가 제1, 제2 수용소를 박물관으로 만드는 법안을 의결했다. 동서 냉전 덕분에 아우슈
비츠가 보존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79년 유네스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사진 3〉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적힌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니(Arbeit macht frei)


아우슈비츠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나치 독일이 세운 최대 규모의 수용소다. 즉석
해결의 현장으로, 특히나 유대인 절멸 계획을 실행한 장소다. 아우슈비츠에서는 2만 1천 명의
집시를 포함한 20개 민족의 대략 130만 명이 수송되었고, 그중 110만 명이 살상된 것으로 추
정된다. 아우슈비츠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수용소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허구라는 주장부터
무려 600만 명에 달한다는 추정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영원한 역사의 수수께끼
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는 전쟁 초기만 해도 수송 인원을 기록했으나 강제 이송이 대규모로
행해지던 전쟁 막바지에 이르면 숫자도 세지 않은 채 유대인들을 수송해 곧바로 가스실로 보
냈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송 인원의 70% 정도, 즉 1,000명이 수송되는 경우 700명은
곧바로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30만 명의 수송 인원 중 단지 40만 명만이 등록
되었을 뿐이다. 130만 명 수송 인원의 85%, 그리고 희생자 110만 명의 90%는 유대인이었다.
110만 명의 희생자 중에는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가스실로 직행한 유대인이 90만 명에
달한다. 40만 명의 등록된 인원 중 과반수인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 중에는 유대인
10만 명, 폴란드인 6만 4천 명, 집시 2만 1천 명, 소련군 포로 1만 4천 명과 기타 민족 10만
명이 포함되어 있다.

〈표 1〉 아우슈비츠 수송 인원과 희생자 수

수송 인원 중 전체 희생자
민족 수송 인원 희생자 수
희생된 비율 비율
유대인 110만(85%) 100만 90% 91%
폴란드인 14만(10.8%) 7만 46% 5.8%
기타 민족 2만 5천(1.9%) 1만 2천 48% 1%
집시 2만 3천(1.8%) 2만 1천 91.3% 1.7%
소련군 포로 1만 5천(1.2%) 1만 4천 93% 1.3%
합계 130만(100%) 110만 84% 100%
1939년 국경선 기준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의 국적과 인원수는 다
음과 같다. 헝가리 43만 명, 폴란드 30만 명, 프랑스 6만 9천 명, 네덜란드 6만 명, 그리스 5
만 5천 명, 체코 4만 6천 명, 슬로바키아 2만 7천 명, 벨기에 2만 5천 명, 독일과 오스트리아
각각 2만 3천 명, 유고슬라비아 1만 명, 이탈리아 7천 5백 명, 라트비아 1천 명, 노르웨이
690명으로 전부 합치면 110만 명에 달한다. 이외에도 가스실로 직행하지 않고 일정 기간 막
사에 수용된 40만 명의 등록된 사람들의 민족 구성은 다음과 같다. 유대인 20만 명(50%), 폴
란드인 14만 명(35%), 기타 민족 2만 5천 명(6%), 집시 2만 1천 명(5.3%), 소련군 포로 1만
2천 명(4%). 기타 민족 2만 5천 명은 다시 체코인 9천 명, 벨라루스인 6천 명, 독일인 4천
명, 프랑스인 4천 명, 러시아인 1천 5백 명, 유고슬라비아인 8백 명, 우크라이나인 5백 명, 기
타(이탈리아, 벨기에, 덴마크, 스페인, 네덜란드, 그리스,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알바니아, 리
투아니아, 라트비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2백 명(총합 40만 명)이다.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를 합친 최대 수용 인원은 50만 명 정도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이중의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28개 막사로 구성되었으며, 한꺼번에 1만 3천~1만 6천여
명을 수용했으며 통합 40만 명을 수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1 수용소 아우슈비츠의 일부 막사를 전후 전시실로 개조하여 유대인들이 남긴 유품이나
나치 범죄의 증거인 서류 또는 사진과 문서 등을 전시하고 있다. 우선 들어가는 정문부터가
충격적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상단에는 저 유명한 “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복음서 8장 32절인 “진리
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를 차용한 것이다. 1872년 독일 민족주의 작가인 로렌츠 디펜바
흐(Lorenz Diefenbach)가 자신의 소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제목으로 요한
복음서 문구를 패러디한 것이 그 시초다. 이후 나치주의자들이 1930년대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한 선전 구호로 사용하며 이 문구가 인기를 끌었다.
아우슈비츠 정문의 철제 문구를 만든 사람은 1940년에 이곳으로 이송된 대장장이 대가이던
폴란드인 얀 리바츠(Jan Liwacz, 수용소 번호 1010번)다. 리바츠와 함께 이 철제 문구 제작에
참여했던 유대인들은 ‘B’자를 거꾸로 만들어 저항심을 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생존자들
은 이는 단순한 실수일 뿐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아우슈비츠의 상징이 된 이 문구는 그 사연
만큼이나 많은 이야깃거리를 간직하고 있다.
1945년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소련군은 이 철제 문구를 본국으로 후송하기 위해 기차에
실었다. 하지만 에우게니우쉬 노살(Eugeniusz Nosal, 수용소 번호 693번)이라는 폴란드 생존
자와 우연히 기차역 근처에 있던 폴란드 마부가 이 사실을 알고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밀주
보드카로 소련군 기차 보초를 매수하여 이 문구를 돌려받아, 몰래 숨겼다. 전쟁이 끝나고 박
물관이 만들어지면서 이 문구도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사진 4〉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대인들이 남긴 신발들.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제 아우슈비츠 제1 수용소의 내부 전시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용소의 15번


막사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유와 히틀러의 잔악상을 보여준다. 4번 막사는 조직적인 학살
체계와 실행 과정, 그리고 1944년 부다페스트 유대인의 수송 과정을 SS가 촬영한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5번 막사는 재산 약탈과 7천㎏의 머리카락과 치클론 B 독가스통을 전시하고
있다. 나치는 1941년부터 1944년까지 30만 마르크어치의 독가스를 구매해 1942년과 1943년
에 2만㎏을 사용했다. 1천5백 명을 죽이는 데는 5~7㎏의 가스면 충분했다. 독일군은 100m
길이의 가스실에 2천여 여명을 가두고 15~20분 후에 전원이 사망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 환기
를 했다. 그런 후 희생자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금이빨과 반지 그리고 목걸이와 귀걸이 등을
빼낸 후에 소각실로 보냈다.
6번 막사는 수용소 생활과 강제노동을 보여준다. 1,300~1,700㎈에 불과했던 하루 식사는
0.5ℓ 커피의 조식과 1ℓ 국의 중식 그리고 300g의 빵, 20g의 소시지, 30g의 버터와 치즈,
커피 등으로 구성된 석식을 전시하고 있다. 몸무게가 겨우 23~25㎏에 불과한 전시실 사진 속
의 여자는 이곳 생활이 얼마나 처참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7번 막사는 위생 상태 그리고 수용소에 남을 사람과 가스실로 보내질 사람을 선별하는 순
간을 증명하는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11번 막사는 이른바 ‘죽음의 막사’로 정치범과 탈출을
시도하거나 저항하던 사람들을 가두던 곳이다. 이곳에 한 번 들어가면 시체가 되어 나왔다.
11번 막사의 지하 감방은 1941년 9월에 600명의 소련군 포로와 250명의 환자로 치클론 가
스를 최초로 실험한 죽음의 감방, 1941년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를 굶겨 죽인 감방인 18호(가
운데에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영혼을 달래기 위해 바친 커다란 초를 볼 수 있다), 공기 부족으
로 죽이던 암흑 감방인 20호, 수용자들이 남긴 그림을 볼 수 있는 21호, 90㎝ X 90㎝ 크기의
사방이 벽으로 된 암흑 공간에 4명을 세워두던 벌 방인 22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11
번 막사와 10번 막사 사이에는 2만여 명을 총살한 죽음의 벽이 있다. 10번 막사는 생체실험
을 자행했던 막사다. 바로 이곳에서 ‘죽음의 천사’라 불리던 요제프 멩겔레 박사가 어린아이
등을 상대로 잔인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계속해서 13번 막사는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14번 막사는 러시아, 15번 막사는 헝가리,
16번 막사는 체코, 슬로바키아, 17번 막사는 구유고슬라비아 정부가 전후 자국 희생자들을 기
리기 위한 전시실로 개조한 곳이다.
특히 27번 막사는 유대 민족을 위해 이스라엘이 만든 특별 전시실이다. 강제노동에 나가고
들어올 때 숫자를 확인하던 집합장에서는 1940년 7월 6일과 7일에 걸쳐 19시간 동안 세워놓
고 인원 파악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 5〉 요제프 멩겔레 박사의 생체실험에 희생된 집시 여자 어린아이들.

이중의 철조망을 벗어나면 곧바로 가스실로 이어진다. 가스실로 들어가기 전 한편에 고즈넉
이 세워져 있는 교수대를 볼 수 있다. 바로 이 교수대에서 헤스 수용소장이 크라쿠프 법정에
서 재판받은 뒤 1947년 4월 16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헤스는 패전 후 잠적했다가 변장을
한 채 남미로 탈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1946년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
가스실에서는 1941~1942년에 주로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가스실과 연결된 소
각장은 독일군이 퇴각하기 전에 폭파했으나 전후에 소각로 3개를 복구하여 전시하고 있다.
1940~1943년에 독일군은 소각로 하나에 시신 2~3구씩 넣어 소각시켰다. 소각로는 24시간 가
동되었고 하루에 350구의 시신이 처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6〉 유대인들을 수송한 철로와 빈터만 남은 비르케나우 제2 수용소.

제2 수용소인 비르케나우는 아우슈비츠에서 3㎞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비르케나우 수


용소는 175㏊(약 53만 평) 면적에 300개 막사(현재 시멘트 막사 45개, 목제 막사 22개만 남
아 있다)로 이루어져 있다. 왼쪽은 여자와 소련군 포로수용소이고 나머지 막사는 빈터만 남아
있다. 1944년 8월 당시 비르케나우 수용소는 10만 명을 수용했으며, 4개의 가스실과 소각장
에서 한 번에 8천 명을 처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1944년 헝가리 유대인 수송 시 건설
한 철로를 통해 ‘죽음의 대문’을 통과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기차로 실려 온 유대인들은
서류 처리도 없이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졌고, 주로 이곳에서 대부분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아니 하나의 인격체로서,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서, 아우슈비츠박
물관에 갈 때마다 갖가지 생각이 든다. 베토벤과 괴테를 낳은 유럽 최고의 지성 민족인 독일
인들이 왜 그랬는지?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인 슈필만이 영화의 바탕이 된 자신의 생존
기 첫머리에서 했던 말을 똑같이 던져본다. “젊은 시절 나는 베를린에서 2년 동안 음악 공부
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났던 독일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나는 도저
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토록 음악을 사랑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인간은 동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종족이다. 가히 만물의 영장인 것이다. 천상의 소리 같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거나 대문호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의 문학작품을 읽어보라. 로마의 콜
로세움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고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떠올려보라. 과연 지구상 어떤
동물이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인간은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더군다나
자기 종족을 잡아먹는 유일한 종일 것이다. 사자가 사슴을 공격할 때는 배가 고플 때뿐이다.
그리고 사자가 사자를 잡아먹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인간이란 동물은 단지 미워한다는 이유 하
나로,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종족을 죽인다. 이처럼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포
악해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사진 7〉 비르케나우 제2 수용소의 내부 모습.

유대인들은 2000년이 넘는 디아스포라와 그 절정인 아우슈비츠라는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


내 꿈에 그리던 조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나라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겪은 유대인들
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하는 잔혹함을 바라보고 있자면,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지, 과연
역사에 정의란 존재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아우슈비츠의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서면 입구에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
시 살게 될 것이다(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라는 스페인 출신의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의 말이 적혀
있다. 즉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된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잘못된
과거를 반복하지 말라는 경종의 의미로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 없는 민
족이 얼마만큼 참혹함을 겪을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 그리하여 내 나라 내 민
족이 왜 강해져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 그것이 바로 아우슈비츠가 우리에게 던져
주는 교훈이자 화두일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이기는 자의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자들의 것
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의 모토는 ‘Forgive, but never forget!’이다. 즉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것
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나온 현대사를 떠올리자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만의 ‘아우슈비츠’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참고문헌

김용덕, 《이야기 폴란드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2016.


Czech Danuta, “Origins of the Camp, Its Construction and Expansion” (in)
Auschwitz. Nazi Death Camp, Oświęcim, 1996.
Cywiński Piotr, Piotr Setkiewicz, Jacek Lachendro, Auschwitz from A to Z. An
Illustrated History of the Camp, Oświęcim, 2014.
Namysło Aleksandry, Zagłada Żydów na polskich terenach wcielonych do Rzeszy,
Warszawa: Instytut Pamięci Narodowej, 2008.
Smoleń Kazimierz, Oświęcim. przewodnik po Muzeum, Oświęcim, 1961.
Yisrael Gutman and Michael Berenbaum (ed.), Anatomy of the Auschwitz Death
Camp,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1998.

연표
1940년 4월: 독일 나치 정권 아우슈비츠 수용소 건립 결정
1940년 6월 14일: 폴란드 정치범 728명 아우슈비츠 수용소 최초 수용
1941년 6월: 비르케나우 수용소 건립 시작
1941년 9월: 치클론 B 독가스 최초 사용
1942년 1월: 비르케나우 수용소 유대인 대량 학살 시작
1943년 5월: 요제프 멩겔레 인체 실험
1945년 1월 27일: 소련군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1947년 7월 2일: 폴란드 의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 설립 법안 의결
197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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