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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1960~1969년 대중음악] 제도와 음악환경의 변화로 한


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이 형성된 대전환의 시대 (대중음
악SOUND 3호)

사운드네트워크 2022.07.15 22:47

[04. 1960~1969년]

제도와 음악환경의 변화로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이 형성된 대전환의 시대 (대중음
악SOUND 3호)
- 새로운 방송 매체와 음반 포맷, 음악 이익단체, 검열단
체의 탄생

대중음악계와 방송계 또한 혁명적인 전환기를 맞으며 유


례가 없는 르네상스 시기를 맞이했다. 민간라디오방송이
전성시대를 구가했던 당시, 민관 3개 TV방송까지 개국
되며 영상시대가 개막되었다. 전후 개체수가 일천했던
음반사들도 창업 러시를 이루면서 획기적인 기술적 발전
이 이뤄졌다. 앞뒤 면에 각각 6곡 이상을 수록 가능한
12인치 LP와 스테레오 음반 제작은 사운드의 혁명을 불
러왔다. 또한 시대를 선도하는 다양한 장르 음악들의 공
존을 통해 1960년대 대중음악계는 그 어느 때 보다 풍
성하고 자유로운 성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최규성 | 대중문화평론가

다양한 장르 음악이 공존한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


시대

해방 이후 이 땅에 주둔하기 시작한 미군을 통해 서구의


음악장르 유입은 급물살을 탔다. 주한미군의 향수를 달
래주기 위한 AFKN 방송은 그 일차적 통로였다. 한국전
쟁이 끝난 1955년 7월 26일. 일본에 있던 미8군 사령부
가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미8군 무대’의 역사는 본격화되
었다. 미국 본토에서 공수된 USO공연단으로는 전국의
미군기지에 생겨난 200여개 클럽 쇼 무대의 수요를 감
당하기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1957년 한국 연
예인들의 공급을 관리하는 ‘화양흥업’, ‘유니버설’, ‘삼진’,
‘공영’, ‘대영’ 등 미8군 쇼 용역단체가 탄생했고 엄격한
오디션을 통해 국내 가수와 연주인들이 미8군 무대로 대
거 유입되었다. 소위 미8군 무대가 공식적으로 탄생했던
것. 1960년대는 서구의 다양한 대중음악장르가 일반대
중에게 수혈되며 당시로서는 뉴 웨이브라 할 수 있는 스
탠더드 팝, 재즈, 록, 포크 등 다양한 음악 장르가 토착
장르인 트로트와 공존하며 대중음악의 부흥기를 구현했
다.

60년대는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경제와 국가재건이 지


상 최대의 과제였다. 당시 온 나라는 전쟁의 잿더미에서
벗어나려는 재건의지가 탱천했다. 4.19의거와 5.16혁
명의 격변 속에 탄생한 군사정권의 불도저식 재건 수행
과정은 짧은 시간에 각종 사회적 인프라의 토대를 마련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산업화, 도시화에 가속이 붙었던
이 시기의 분위기는 일단 밝고 희망찼다. 이에 너나 할
것 없이 출세와 성공을 찾아 시골을 떠나 도시로 향한 이
농향도의 물결이 거셌다. 가난을 탈출하고자 대거 상경
러시를 이루면서 서울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급팽창
했다. 1950년대까지 시골지향적인 칙칙했던 노래들도
60년대 들어 자연스럽게 욕망이 넘쳐나는 밝고 경쾌한
도회풍의 노래가 양산되는 반전의 틀이 마련되었다.

대중음악계와 방송계 또한 혁명적인 전환기를 맞으며 유


례가 없는 르네상스 시기를 맞이했다. 민간라디오방송이
전성시대를 구가했던 당시, 민관 3개 TV방송까지 개국
되며 영상시대가 개막되었다. 전후 개체수가 일천했던
음반사들도 창업 러시를 이루면서 획기적인 기술적 발전
이 이뤄졌다. 앞뒤 면에 각각 6곡 이상을 수록 가능한
12인치 LP와 스테레오 음반 제작은 사운드의 혁명을 불
러왔다. 또한 시대를 선도하는 다양한 장르 음악들의 공
존을 통해 60년대 대중음악계는 그 어느 때 보다 풍성하
고 자유로운 성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경제에 어느 정도 회복의 기운이


감돌자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당대 대중은 새로운 문화와
유행에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시 곳곳에 젊은이들
을 위한 음악 감상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 결과물
이다. 기존의 극장 쇼 역시 일반대중의 문화적 갈증을 해
갈시키는 대중적 공간으로 정착되며 최대 전성기를 구가
했던 것도 60년대다.

1961년 하춘화가 어린이 가수로는 최초로 독집 앨범을


발표하며 새 장을 열었고, 1966년 귀국한 윤복희는 미
니스커트로 패션문화를 주도하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1968년 ‘음반법’시행 이후 일정 시설을 갖춰
야 음반사로 등록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은 당시 50여 개
에 달하던 소규모 음반제작자들을 프로덕션 형태의 회사
를 만들어 대명제작 혹은 독자적인 음반 기획자로 변신
하게 했다. 킹 레코드의 킹박, 그랜드 레코드의 황우루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1969년 전남 목포의 유달산에는
국내 최초로 ‘목포의 눈물’ 노래비까지 탄생했다. 이처럼
60년대는 새로운 방송 매체와 음반 포맷, 이익단체(한국
연예협회), 검열단체(한국방송윤리위원회, 한국예술윤
리위원회)라는 제도와 음악환경의 변화로 한국대중음악
의 새로운 흐름이 형성된 대전환의 시대였다.

국가 재건의 기운을 불어넣은 화사한 색감의 노래

196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특징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


난 파급력을 구현한 비틀즈의 영향과 미국의 팝송을 비
롯한 다양한 장르의 서구 대중음악이 젊은 층에 파고든
점에 있다. 미8군 무대에서 내공을 닫은 가수들은 본격
적으로 일반무대에 진출하며 대중음악의 발전을 주도했
다. 또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 진행으로 온 나
라는 칙칙한 회색에서 화사한 컬러로 채색되기 시작했
다. 그 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북돋은 밝은 색감이 두드러
진 경쾌하고 리듬감 넘치는 노래들은 분위기 전환은 물
론 패션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61년 미8군
가수 출신으로 일반무대 진출의 신호탄 역할을 했던 한
명숙의 <노란 샤스의 사나이>는 노란색 열풍을 불러와
남성들의 패션을 주도했고 이어 남일해가 <빨간 구두 아
가씨>로 빨간 색 열풍을 일으켜 여성들의 구두를 화사하
게 덧칠했다.

민간 라디오 방송 시대 개막

KBS와 AFKN 밖에 없었던 국내 방송계는 1954년 CBS


기독교, 1959년 부산 MBC를 시작으로 1961년 MBC
문화방송, 1963년 DBS 동아방송, 1964년 TBC 동양방
송 등이 연이어 개국하면서 본격적인 민간 라디오방송시
대가 시작되었다. 특히 1961년부터 진공관 라디오에 비
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소형화된 트랜지스터 라
디오의 대량생산이 본격화되면서 라디오 수신기 보급이
급증해 라디오 방송 전성기가 도래했다. 1962년 7월 군
사정권에 의해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까지 전개되
었다. 당시 전국 시골마을 이장집마다 라디오 수신기가
갖춰지고 스피커를 통해 중계되는 라디오 방송에서 <새
마을 노래>와 <잘살아 보세>가 울려 퍼졌다.

민간방송의 개국으로 대중음악계는 전파매체 혜택의 최


대 수혜자가 되었다. 신인가수의 등용에서부터 인기가수
들의 순위가 방송출연 빈도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시대
가 되었다. 방송의 영향력에 힘입어 방송을 탄 노래들은
레코드의 매출을 증가시켰다. 이에 청취율 경쟁을 의식
한 가요 프로그램들이 양산되면서 청취자가 전화로 신청
한 음악을 DJ가 진행하는 음악 프로그램 시대가 본격화
되었다. TBC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MBC의 ‘별이 빛나
는 밤에’, DBS의 ‘0시의 다이얼’은 청취자의 사연과 신청
곡을 띄워주는 당대의 인기 라디오 음악프로그램들이다.
청취자의 전화 리퀘스트를 처음 시작한 것은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진행한 CBS의 ‘다이얼 Y를 돌려라’이지만 DBS
의 ‘탑튠쇼’와 ‘3시의 다이얼’의 팝PD였던 최동욱은 음악
전문 DJ 1호로 기록되어 있다. 민방 개국 뒤 음악 감상실
의 인기 DJ들이 대거 방송으로 진출하면서 라디오를 통
한 음악의 대량전파 시대로 변화했다.

TV 방송의 개막

1961년 개국한 KBS TV가 1966년 전국 방송을 개시했


고, 1964년 TBC TV, 1969년 MBC TV의 개국으로 본
격적인 민관 이원 체제의 TV 3사 시대가 열렸다. 영상시
대를 대변하는 TV 방송의 개막은 한국 방송역사는 물론
이고 대중문화에도 콘텐츠의 양적 팽창은 물론이고 내용
면에서도 급속한 발전을 몰고 왔다. 대중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당시 인기 높았던 TV 쇼 프로그램 ‘KBS 그랜드
쇼’, MBC의 ‘OB그랜드 쇼’, TBC의 ‘쇼쇼쇼’는 매주 토요
일 저녁마다 안방에서 일대 결전을 벌이며 뜨거운 경쟁
열기를 내뿜었다. 쉽게 접하기 힘든 인기 가수들의 열창
을 안방에 앉아 이곳저곳으로 채널을 돌려가며 시청이
가능하게 된 기적 같은 풍경은 당시로서는 하나의 사건
이었다.

TV 쇼 등장 이전까지 활동무대가 협소했던 가수들은 엄


청난 인기를 획득하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당시 블루벨
스, 봉봉사중창단, 쟈니브러더즈, 이시스터즈등 보컬그
룹들이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고 1968년에 등장한 <커
피 한잔>의 펄시스터즈는 화려한 외모, 경쾌한 율동과
달콤한 화음으로 정적인 오디오시대를 마감시키며 화려
한 비디오 시대를 만개시켰다. 볼거리 들을 거리가 턱없
이 부족했던 1960년대 대중의 문화적 갈증을 해갈시켜
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던 TV 가요 프로그램들은 지금까
지도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미디어로 막강 권력을 발휘하
고 있다. 특히 TBC의 ‘쇼쇼쇼’는 언론 통폐합으로 KBS에
흡수되기까지 7백86회의 장수 기록을 남기며 한국 TV
쇼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각인되어있다.

12인치 LP, 스테레오 레코드의 등장

1948년 미국 콜럼비아 레코드사에 의해 세계 최초로 LP


판 개발된 이래 국내에서는 1956년 LP시대가 열었다.
당시 가수를 출연시키지 않고도 방송이 가능하도록 KBS
에서 10인치 LP를 제작했던 것. 1962년 앞뒷면에 각각
6곡 이상을 수록 가능한 여성듀엣 김치켓(Kimchi Kats)
의 12인치 LP가 등장했다. 김치캣은 1959년 아시아 최
초로 미국 라스베가스에 진출한 김씨스터즈에 이어
1963년 일본, 홍콩, 필리핀, 대만을 거쳐 미국 본토에
진출한 국내 2호 여성보컬그룹이다.

해외 진출을 앞두고 발표했던 김치켓의 1962년 독집음


반 [검은 상처의 부루스]의 가치는 국내 최초의 12인치
LP라는 사실로 더욱 빛난다. 12인치 LP는 대중이 널리
인식하고 있는 LP의 사이즈가 맞다. 12인치 LP의 등장
은 이후 모노에서 더욱 선명하고 입체적인 스테레오 음
반으로 기술적 발전이 이어지며 사운드의 혁명이 이뤄졌
다.

다양한 장르음악 공존과 파격적 표현 양식 등장

1961년 작곡가 손석우가 창설한 뷔너스 레코드는 팝과


재즈 음악을 일반대중에게 전파하는 첨병 역할을 했다.
<노란 샤스의 사나이>를 발표한 한명숙은 미8군 출신
가수로 첫 히트곡을 낸 주인공이다. 미8군 가수들의 일
반무대 진출이 본격화 되면서 기존의 트로트에 스탠더드
팝, 록, 포크와 더불어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각기 대
중가요의 지분을 확보했다.

1964년은 음악 장르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다. 허스키


보컬 전성시대를 연 한명숙, 최희준, 현미, 이금희, 패티
김, 블루벨즈 등 미8군 가수들의 스탠더드 팝 앨범과 더
불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트로트의 아성을 유지시킨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양강 체제를 구축한 가운데,
국내 최초로 밴드앨범을 발표한 ‘키보이스’와 창작 록 앨
범을 발표한 ‘에드훠’ 그리고 최초로 통기타 앨범을 발표
한 서수남, 하청일이 주도한 남성 4인조 컨트리 포크 그
룹 ‘아리랑 브라더스’가 가세하며 다양한 장르 앨범이 같
은 해에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했다.

196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유주용의 누나인 미8군 출


신 가수 모니카 유의 번안곡 <일요일은 참으세요>는 국
내 대중가요로는 최초로 ‘키스’라는 노골적인 사랑의 표
현을 담았던 파격적인 노래다. 사실 미군문화의 영향이
지대했던 60년대의 대중문화는 지금보다 더 오히려 노
골적이고 파격적인 면이 있었다.

건전가요 장려한 검열의 시대

민관 TV 3사 시대가 열린 1960년대는 대중오락매체로


서 방송의 역할이 막중해지며 대중적 파급력이 급증했
다. 이에 군사정권은 1962년 6월 14일 프로그램 제작
관계자에 대한 인사제재 권한까지 부여한 ‘한국방송윤리
위원회’를 신설해 통제에 들어갔다. 방윤 탄생 후 장발족
의 방송 출연 금지와 함께 쇼 프로그램에서 요란한 고고
리듬과 사이키 무대 조명, 주체성 없는 외국 풍 노래, 퇴
폐적이고 비관적인 노래, 왜색 가요 등이 ‘자율 규제’라는
명분을 달고 사라졌다. TV 쇼 무대에서 반짝이는 점멸등
이 철거되고 당시 인기 정상을 달리던 남자 가수의 야외
촬영 중 장발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방송되어 KBS
의 담당 PD가 파면되기도 했다.

대중음악은 태생적으로 그 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


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라이벌 레코드사들의 시
기와 질투 속에 당시 한일회담의 역작용으로 <동백아가
씨>가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1966년 한국방송윤리위의
‘가요심의전문위원회’에 의해 방송금지 처분이 내려졌
다. 사회적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미자는 대중음악을 정
치적으로 이용했던 시대의 희생양이 되었다. 금지곡이
되었지만 <동백아가씨>는 한일 공식 우호석상에서 버젓
이 불리어졌고 박대통령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대중음악에 대한 군사 정권의 이중 잣대를 실감나게 한
다. 당시 금지를 당한 노래들의 사유는 황당하다. 김상국
의 <껌 씹는 아가씨>는 “껌을 짝짝 씹는 여자의 모습이
퇴페적이다”라는 이유로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김>은
단신인 박정희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였
고 <사노라면>의 원곡인 쟈니리의 <내일은 해가 뜬다>
는 “왜 해가 오늘 뜨지 않고 내일 뜨냐. 현실부정적이다”
라는 이유로 금지를 당했다.

군사정권은 사회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밝고 경쾌하게 이


끌었다. 그래서 등장한 노래가 소위 ‘홈 송’이다. 이때부
터 건전가요가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장려되었다. 작곡가
손석우와 미8군 출신 고학력 학사가수들인 최희준, 위키
리, 유주용, 박형준은 최초의 노래동아리 ‘포클로버스’를
결성해 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노래가사에서 표현되는
공간도 자연스럽게 시골에서 도시로 옮겨졌고 도시의 구
체적 인물과 공간을 본격적으로 주제로 삼은 사랑노래들
이 호응을 얻었다. 김상희의 <대머리 총각>처럼 ‘8시 통
근 길’에 가끔 마주치거나 다방에서 남녀가 음악을 듣는
척 하며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렌 경험을
노래하는 노래가 등장했다. 봉봉이 노래한 <꽃집의 아가
씨>도 출퇴근하는 직장 여성 같은 도시의 아가씨들이었
다.

남성사중창단 전성시대

남성사중창단들은 도회풍의 밝은 노랫말을 경쾌한 가락


에 얹어 경제 재건의 의욕을 불태우는 60년대 대중에게
즐거움을 안겨 준 주역들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주자 블
루벨즈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내들이 군가나 명곡을 불
러야지 유행가를 합창으로 불러도 괜찮은 것이냐?”, “멀
쩡한 사내 넷이 줄을 서서 유행가를 합창을 하다니 말도
안 된다”며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1960년 3월, 블루
벨즈는 데뷔무대인 국도극장 쇼 무대에 올라 검정 턱시
도를 입고 잔뜩 긴장한 채로 노래를 불렀다. 이색적인 광
경에 장내는 술렁거렸지만 이내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남성사중창단 전성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순간이다. 블루
벨즈는 <즐거운 잔칫날>, <열 두 냥짜리 인생> 등 발표
하는 곡마다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블루벨즈’와 ‘멜로톤 쿼텟’에 이어 3번째로 ‘쟈니브라더


스’가 탄생했다. 팀 멤버들은 아름다운 하모니의 4성 화
음뿐만 아니라 무용수 뺨치는 율동까지 곁들인 만능 엔
터테이너들이었다. 1962년 MBC가 주최한 동대문운동
장의 ‘5ㆍ16혁명 1주년 기념 콩쿠르대회’는 쟈니브라더
스의 첫 무대. <황화의 골짜기>와 흑인 영가를 부른 이
들은 대상의 영예를 차지했고, 연이어 1963년 동아방송
중창콩쿠르에서도 최우수상의 영예를 획득했다. 이후 라
디오 연속극 주제가 <마포 사는 황부자>에 이어 영화주
제가 <빨간 마후라>가 공전의 히트를 하며 1967년까지
황금기를 누렸다. 4번째로 등장한 ‘봉봉’을 정상으로 이
끌었던 빅 히트곡은 1967년 밝고 경쾌한 멜로디로 도시
젊은이의 밝은 삶을 노래한 <꽃집의 아가씨>,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 등. 대부분 힘차고 코믹했던 봉봉의 노
래들은 가난과 전쟁의 잿더미에서 우울했던 당시 사회에
밝고 흥겨운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봉봉사중창단은 상복까지 많았고 노래뿐 아니라 직접 연
주하는 보컬그룹으로 활약했다. 맏형격인 블루벨즈와 쟈
니브라더스 그리고 막내격인 봉봉사중창단의 인기경쟁
은 치열했다.

1963년 결성한 ‘아리랑 브라더스’도 있다. 이들은 1964


년 최초로 한국어 포크송을 발표하며 랩의 초기 형태인
만요 식의 재밌고 경쾌한 리듬을 이 땅에 들여온 숨겨진
선구자들이다. 재밌고 경쾌한 이들의 <동물농장>, <웃
어주세요(도미니크)>가 인기를 끌었다. 1967년 국내 최
초의 고교생 포크 사중창단 ‘마일스톤’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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