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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 200908
르누아르 200908
인상주의 등장 배경
휴대할 수 있는 물감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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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물감을 담아 휴대할 수 있는 튜브가 1830년대에 발명된 것이다. 이 발명품 덕
분에 화가는 야외에서 직접 풍경화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햇볕이 비치는 야외에서 자
연을 직접 보면서 색칠을 하는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에야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기의 발명
프리즘의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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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인상주의 회화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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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물론 즉석화 방식으로 그린 것은 그들이 처음이 아니다. 순간의 빛의 색을 포착
하는 데 즉석화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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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화가들은 달랐다. 악센트가 없는 고른 연속적인 스트로크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빛의 순간을 재현해 내는데 이만한 기법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주의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상주의 회화에 대한 비판
원근법을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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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원근법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들어야만 했다.
드로잉이나 선을 무시하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
피사로 (1830~1903)
마네 (1832~1883)
드가 (1834~1917)
시슬레 (1839~1899)
세잔 (1839~1906)
모네 (1840~1926)
르누아르 (1841~1919)
고갱 (1848~1903)
고흐 (1853~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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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라 (1859~1891)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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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1869년, 1870년 살롱전에 당선되면서 약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때 당시의
그림에서 그는 생기 넘치는 색조에 색상 대비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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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토르소, 빛의 효과
1875~6 년, 캔버스에 유화, 81x65㎝, 오르세미술관 소장
그네
1876 년, 캔버스에 유화, 92x73㎝,
오르세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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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인 친구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이 그림의 장면을 소설 ‘사랑
의 한 페이지’에 삽입했다. “불꽃을 닮은 자줏빛 실크 소재의 리본이 눈부시에 하얀 드
레스 위에서 반짝였다. 그녀 주위에서 봄 기운이 기지개를 켰다.”
앙리오 부인
1876 년, 캔버스에 유화, 65x50㎝, 워싱턴내셔널갤러리 소장
후원자, 뒤랑 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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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표적인 사람이 뒤랑 뤼엘이다. 뒤랑 뤼엘은 1860년대부터 마네, 모네, 피사로 등
의 그림을 사들였다. 뒤랑 뤼엘이 르노아르 그림을 처음 사들인 것은 1872년이었다.
뒤랑 뤼엘은 미술상의 아들로, 남보다 앞서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 내는 능력이 중요하
다는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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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당시의 대표작이 1879년 살롱전에 냈던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1878년)
이다. 이에 대해 비평가들은 이렇게 비평했다. "이제 르누아르씨와의 불화는 끝내기로
하자. 그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의 귀환을 환영하자. 그림의 구도는 논외로 하고
색상에 대해서만 얘기하기로 하자". 르누아르는 천부적인 컬러리스트인 동시에 대단한
데생가라는 데 대체적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 그림은 5년 전의 <물랭 드 라
갈레트>와 여러모로 비교된다. 그
림도 큰 규모로 그렸고, 모두 야외
의 군중을 주제로 삼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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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앵그르(1780~1867)의 영향 또한 많이 받았다. 앵그르는 초상화가로서 천재적인
소묘력으로 유명했다. 초상화, 역사화, 특히 그리스 조각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나체화
를 특히 잘 그렸다.
바느질하는 마리 테레즈 뒤랑 뤼엘
1882 년, 캔버스에 유화, 81.2x66㎝, 클락아트인스티튜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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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4월 뒤랑 뤼엘의 화랑에서 르누
아르 최초의 개인적이 열렸다. 화랑주의
아들인 샤를르와 조르주 역시 곧 르누아
르의 파트너가 되었다.
시골 무도회
1883 년, 캔버스에 유화, 180x90㎝, 오르세미술관 소장
젊은 남자의 팔에 안겨 춤을 추고 있는 여인의 은근
한 시선이 마치 관람객을 바라보는 듯하다. 여인의
발그레한 뺨, 바닥에 떨어진 남자의 모자에서 시골
무도회의 흥취가 느껴진다. 이 여인은 훗날 르누아
르의 아내가 된 '알린느 샤리고', 남자는 르누아르의
친구로 기자이자 작가였던 폴 로트이다.
풍경 속 여인의 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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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65X55cm, 캔버스에 유화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르누아르의 앵그르풍 시대
보니에르 부인
1889 년, 캔버스에 유화, 117x89㎝, 프티팔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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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르누아르가 파리 부유층의 초상화 주문
을 잇달아 받으며 성공가도를 달리던 시절, 소설
가이자 비평가였던 로베르 드 보니에르의 주문으
로 그린 그의 부인의 초상화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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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앉아 있는 욕녀(浴女 )
1892 년, 캔버스에 유화, 80.5×64.5㎝, 개인소장
해변가의 어린 소녀들
1894 년, 캔버스에 유화, 65x54㎝,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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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자연과 인간이 융화되어 살아가는 이상적 세계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
에서 르누아르의 예술철학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르누아르는 두 소녀가 피아노를 치거
나 책을 읽거나 목욕을 하는 등,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그렸다. 그에게
그 소녀들은 현실 자체이기보다는 행복의 상징이었다.
베르넴-젼느 갤러리,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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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 마네의 초상
마르모땅 모네 미술관, 파리
장 르누아르의 초상
1899 년, 캔버스에 유화, 32.5×24㎝, 개인소장
책 읽는 여인
1900 년, 캔버스에 유화, 56x46㎝, 도쿄후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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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는 가족과 친구들의 일상 생활을 주의
깊게 관찰했고, 그 속에서 포착한 장면들을 화폭
에 많이 담았다. 특히 책을 읽는 여인은 르누아
르가 가장 좋아한 소재 중 하나였다.
늙어가는 르누아르
레 꼴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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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는 1907년 니스 가까운 까뉴라
는 전원 마을에 있는 레 꼴레트라는 이름
의 토지를 사들여 현대식 집을 지었다.
그 둘레에는 수백 년 된 올리브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이때부터 올리브 나무는
그의 작품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사람들은 자연에 그대로 동화된 상태이다. 이렇듯 서로 엉키고 비틀어진 올리브 나무, 오
래된 마을과 언덕의 파노라마, 농가 등은 그가 화폭에 되살리고자 했던 지상 낙원의 모습
이다. 이 그림은 언뜻 17 세기 프랑스 화가들의 풍경화를 떠올리게 한다.
광대 복장을 한 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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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했던 가족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흰 모자를 쓴 자화상
1910 년, 캔버스에 유화, 42x33㎝, 개인 소장
장미를 든 가브리엘
1911 년, 캔버스에 유화, 55.5x47㎝,
오르세미술관 소장
어깨에 걸친 블라우스가 과감한 터치로 표현된 반면, 그 사이로 드러난 살결은 더없이
세밀하다. 활짝 핀 꽃을 풍만하고 탐스러운 여성미의 상징으로 여긴 르누아르는 여인과
꽃을 늘 함께 그리곤 했다. 이 검은 머리 여인은 르누아르의 아내 알린느 샤리고의 친척
인 가브리엘 르나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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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 아이들의 유모이자 하녀였던 그녀는 1894년부터 20여년 간 르누아르 가족
과 함께 살면서 르누아르의 그림 속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뮤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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