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23

르누아르, 빛과 색채의 화가

인상주의 등장 배경

개인주의 영향으로 사물을 주관적으로 관찰하기 시작

19세기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시기


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활동하게 활동하기 시작하는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역시 그러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주의 역시 발달하기 시작한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유로워지면 개인주의가 발달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주관적으로 자유로운 시각에서 그림을 그리는 경향이 늘


어난 것이다. 예전에는 똑같은 사물을 비슷하게 그렸지만, 이제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 것이다.

휴대할 수 있는 물감 등장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물감은 분말과 덩어리로 판매되었다. 화가는 공들여 물감을 갈


아 오일 등을 섞어 물감을 즉석에서 만들어야만 했다. 이렇게 만든 물감은 곧 딱딱해지
므로 화가들은 매일 물감을 만들어 그때 그때 사용해야만 했다. 팔레트에 물감을 넣어
화구 박스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림은 실내에서만 그
리는 것이 가능했다. 풍경화를 그릴 때도 스케치 외에는 화실 안에서 그림을 완성해야
만 했다.

1
그런데 물감을 담아 휴대할 수 있는 튜브가 1830년대에 발명된 것이다. 이 발명품 덕
분에 화가는 야외에서 직접 풍경화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햇볕이 비치는 야외에서 자
연을 직접 보면서 색칠을 하는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에야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기의 발명

19세기 초에 사진기가 발명되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보통의 화가들은 모델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담기 위해 노력했다. 화가의 주관적인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
치 사진기처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 했다.

그러다가 사진기가 발명되자 이는 곧 미술활동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가장 중


요한 변화가 초상화 작업에서 이루어졌다. 초상화를 주문하는 고객들은 이제 화가 대신
사진사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으로 그리려면 몇 시간 힘들게 앉아 있어야 하고 비
용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으려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화가들은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작품활동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진


기의 발명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화실을 떠나 야외로 나가게 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프리즘의 발명

프리즘의 발명으로 태양 광선은 단순히 흰색이 아니라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등의


색의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사용하
는 물감의 색깔이 무척 제한적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색은 그 사
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색이 아니라 광선이 만들어낸 색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색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색을 혼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


양한 혼합방식으로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은 다양한 색채를 사용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과거의 화가들이 유채색으로 칠하지 않는 부분들도 다양한 색을 칠


하기 시작했다. 옛날 같으면 그림자의 경우 회색이나 갈색을 항상 칠했는데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주색과 녹색을 칠하기도 한 것이다. 캔버스를 온통 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한

2
것이다.

인상주의 회화의 특징

자연의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젤과 튜브 물감을 가지고 햇볕 아래서


때로는 바람을 맞으며 그림을 그렸다. 화가가 이젤을 들고 밖으로 나가 그림을 그린다
는 것은 혁명이었고 이 혁명을 인상주의 화가들이 만들어냈다.

자연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관심을 끄는 주제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특히 자연의 순간


적이거나 시시각각 변하는 다양한 모습에 특히 끌렸다. 예를 들면 출렁이는 바다와 수
평선, 하늘과 둥둥 떠다니는 구름, 태양의 빛과 그 빛이 비춰지면서 나타나는 생동감 있
는 모습, 연기와 수증기 따위다.

예전의 화가들은 야외에서 스케치를 하더라도 그림은 화실에서 본격적으로 그렸고 화


실에서 완성했다. 그러나 인상주의 화가들은 야외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림을 완성했
다. 쉬지 않고 변하는 자연의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는 것이 관심이었기에 될 수 있는
대로 신속하게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전 화가들은 그들만큼 생생하게 살아있는 빛으로 가득찬 자연을 그려내지 못했다. 그


들은 빛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을 볼 수 있는 예민한 눈을 가졌다. 모네(1840~1926)
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하루낮 동안 한 장소에 앉아 동일한 사물을 여러 작품으로
그려냈다. 자연의 빛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을 그대로 캔퍼스에 담으려 했던 것이
다.

즉석화 기법을 개발했다

빛의 느낌을 그리려 했기 때문에 인상주의 화가들은 즉석화 기법을 개발하지 않을 수

3
없었다. 물론 즉석화 방식으로 그린 것은 그들이 처음이 아니다. 순간의 빛의 색을 포착
하는 데 즉석화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형태를 그린 것이 아니라 빛을 그렸다

전통의 화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릴 대상의 형태였다. 빛은 그 형태를 얼마나


돋보이게 하느냐의 수단이었다. 따라서 모델이나 꽃 등 그림을 그릴 대상에게 적당한
빛만 비췄다. 적당한 빛 외에는 빛을 차단했다. 그래서 그림자를 적당하게 만들었다. 빛
과 그림자는 그림을 그리는 대상의 형태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인상주의 화가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눈이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눈의 감각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리고 형태가 아니라 빛을 그렸
다.

예전의 화가들은 그림자는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었으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그림자조차도 하나의 빛이었다. 예전의 화가들에게는 그림자는 물체에 딸린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그림자도 물체만큼이나 중요했다. 물체나 그
림자나 동등하게 중요하게 생각했다. 모든 것은 빛을 나름대로 나타내는 것이므로 캔버
스 구석구석 모든 부분들을 동등하게 중요하게 생각했다.

크기와 형태가 거의 같은 브러쉬 스트로크(Brush Stroke)를 사용했다

전통 화가들은 화면 구도와 원근법을 중요시했다. 그래서 그림을 보면 화면 어디에 중


점을 두고 있는지 경중을 느낄 수 있었다. 붓 터치나 명암, 원근법 등을 이용해서 중요
하지 않은 것과 중요한 것을 구분한 것이다.

그러나 인상주의 화가들은 달랐다. 그림의 어느 한 지점에만 긴장감을 집중시키지 않았


다. 크기와 형태가 거의 같은 브러쉬 스트로크를 사용해서 일정한 패턴을 유지한 것이
다.

전통 화가들에게 물체의 가장자리는 중요했다. 브러쉬 스트로크로는 가장자리를 잘 나


타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붓의 흔적을 감추는 채색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인상

4
주의 화가들은 달랐다. 악센트가 없는 고른 연속적인 스트로크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빛의 순간을 재현해 내는데 이만한 기법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주의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관심 주제는 자연 외에도 주로 도심에 있었다. 파리 시민들의 여가


생활, 휴일 근교로 나가서 즐기는 그들의 레저생활이나 도시 속에서 벌어지는 문화 공
간들이 화가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래서 공원, 야외 휴양지, ㅗㅇ페라 하우스, 카
페, 술집 등이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실제 주변 환경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내는 점에서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실주의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상주의 회화에 대한 비판

그림의 주제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다

인상주의 회화를 비판하는 소리 중 하나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림의 주제의식이 부족


했다는 점이었다. 전통 화가들에게 있어서 주제는 중요했다. 고상한 인물이나 교훈적인
도덕적 장면, 신화, 그리고 위대한 역사적 사건 등과 같은 주제를 중요시했다.

그러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그런 주제는 크게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물을 그


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반사하는 빛의 색을 그리기 때문에 사물이나 주제는 크게 중
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 ‘정신적 깊이’가 없다는 비판이 있기도 했다.

원근법을 무시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순간적인 빛을 포착하려 했기 때문에 브러쉬 스트로크와 같은 기법


을 사용했고, 그러다보니 화면에서 입체감이 사라졌다. 모든 화면의 내용 곳곳이 똑같

5
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원근법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들어야만 했다.

드로잉이나 선을 무시하고 있다

르네상스시대 이후 미술계의 논쟁 중 하나는 ‘선’과 ‘색’을 어느 것을 중요시하느냐는


논쟁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당연히 ‘선’ 보다는 ‘색’을 중요시여겼다. 인상주의 화
가들에게 있어서 원칙적으로 선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껏해야 ‘색을 띤 면’과
또 다른 ‘색을 띤 면 간’에 만나는 경계라는 의미를 지닐 뿐이었다. 이에 따라 인상주의
화가들은 뎃생조차도 모르는 화가라는 비평을 듣기도 했다.

인상주의 화가들

피사로 (1830~1903)

마네 (1832~1883)

드가 (1834~1917)

시슬레 (1839~1899)

세잔 (1839~1906)

모네 (1840~1926)

르누아르 (1841~1919)

고갱 (1848~1903)

고흐 (1853~1890)

6
쇠라 (1859~1891)

르누아르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1841년 2월 프랑스의 리모주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


어났다. 아버지는 재봉사였고, 어머니는 양재사였다.

그들은 아들이 13세(1854년)가 되자 한 도자기 화공에게 견습공으로 맡겼다. 1860년


(19세)까지 르누아르는 갖가지 장식품과 그림 부채, 차양, 옷장 등을 재료로 하여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렸다.

르누아르가 정식으로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한 것은 21세(1862년) 때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재능을 키워나간 곳은 학교가 아니라 글레르 화실이었다.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
기 전인 1861년(20세) 르누아르는 스위스 화가인 글레르의 화실에서 공부하기 시작했
다. 글레르는 자신의 화풍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고 편견없는 교수방식으로 많
은 학생들을 끌어모았다. 그 곳에서 같이 공부한 유명한 화가들이 많았다. 모네, 시슬레
등 후에 인상주의를 이끈 대표적인 화가들이 그들이었다.

살롱전, 입선이냐? 낙선이냐?

당시 성공한 화가의 기준은 살롱전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했으냐였다. 해마다 파리에서


열리는 살롱전에 통과한 화가들은 공식 인정을 받았고, 그들의 작품은 대단한 명예를
누렸다. 그러나 그 살롱전에 작품을 선정하는 영향력 있는 세력들은 새로운 경향에 대
해서 무조건 흥분하며 조롱했다. 이런 비평가들에게 길들여진 대중은 심사위원들의 선
택이 절대적인 것인양 받아들였다. 이러한 예술 패권주의에 반대를 하며 독자적인 전시
회를 열자는 움직임이 일부에서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르누아르는 1864년 처음 살롱전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해보았다. 르누아르가 공식적으


로 화가로서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리고 1865년에 드디어 두 점이 살롱전에 입선했
다. 이때만 해도 르누아르는 어두운 색조를 많이 사용했다. 살롱전에 입선했지만 그는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1866년, 1867년 연거푸 살롱전에 낙선을 한 르누아르는 1868

7
년, 1869년, 1870년 살롱전에 당선되면서 약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때 당시의
그림에서 그는 생기 넘치는 색조에 색상 대비를 강조했다.

모네와 더불어 인상파 화가가 되다

1869년 르누아르와 모네는 가깝게 지냈다. 당시 르누아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


다. "우린 매일 먹진 않아. 하지만 난 늘 행복하다네. 모네는 좋은 그림 동료거든.", "물
감이 다 떨어져 난 작업을 거의 못하고 있다네", "나는 결코 투사적 기질이 없어서 내
좋은 친구 모네가 없었다면 수없이 포기했을 것이다. 그는 투사적 기질을 갖고 있어서
나를 밀어주었다"

르누아르가 야외에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면서 인상주의 화풍을 발전시킨 시기는


이 시기다. 르누아르와 모네는 센강에 설치된 식당 딸린 수영장 '라 그르누예르'에서 나
란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그의 그림에 변화가 나타났다. 사용하는 색상이 밝아지
고 붓놀림도 활발해지고, 좀 더 작은 단위로 끊어 칠하는 기법이 도입되었다.

1870년 모네가 아르장퇴유로 이사했을 당시에도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등


인상주의 화가들은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지며 자주 어울렸다. 이 당시 르누아르에게 모
네의 영향은 지배적이었다. 모네는 르누아르를 설득해 야외에 이젤을 들고 나가 그림을
그렸다.

1874년,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뜻 깊은 해였다. 살롱전이 새로운 흐름을 인정하지 않


자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처음 개최한 것이다. 르누아르, 모네를 비롯해 드가, 피사로,
시슬레, 세잔 등이 이 전시회에 참여했다. 이 집단에 대해 한 비평가가 조롱하는 뜻으로
모네의 그림 <인상, 해돋이>란 그림 제목을 빗대어 '인상파'란 이름을 갖다 붙였는데,
그 명칭이 그대로 쓰이게 되었다.

1876년에는 제2회 인상파전이 열렸다. 르누아르도 살롱전 대신 여기에 참여했다. 비


평가들은 인상파 화가들이 데생 기법도 부족한 서투른 미완의 작품을 대중에게 내보이
고 있다고 신랄하게 공격했다.

르누아르 역시 그 공격의 대상이었지만, 다른 인상파 화가보다는 야유를 덜 받은 편이


었다. 그에 대해서는 "자신만의 무지개 효과, 자신만의 빛, 영롱한 색조 속에서 즐거워
한다. 그의 데생은 훨씬 더 안정적이다"라고 비평하기도 했다.

아래의 그림들은 당시의 그림들이다.

8
습작. 토르소, 빛의 효과
1875~6 년, 캔버스에 유화, 81x65㎝, 오르세미술관 소장

‘햇살 속의 누드’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한 이 그림


은 르누아르가 1876년 제2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것이다. 오후의 변화무쌍한 햇빛이 나뭇잎에 여과
된 모습이 여인의 살결 위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힘찬 터치로 자유롭게 표현된 푸른 배경 속의 이
름 모를 모델은 마치 자연의 일부분인 듯하다.

이 작품은 하나의 오브제를 불변하는 것으로 한정


시키지 않고 주변 환경이나 빛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화가의 감각과 결합시켜 표현하고자 했던
인상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

발표 당시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혹독했다. 르 피가로 지는 “완전히 부패한 상태의 시


체에서 나타나는 녹색과 보라색 점으로 뒤덮인 살덩어리”라고 썼다. 그러나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평가는 180도 달라졌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옥타브 미르보는
“여성의 피부가 지닌 신선함, 빛, 삶, 설득력을 놀랍도록 훌륭하게 포착해낸, 가장 아름
다운 현대미술의 걸작”이라고 평했다.

그네
1876 년, 캔버스에 유화, 92x73㎝,
오르세미술관 소장

나무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인물들의 얼굴과 옷


위에서 눈부시게 부서진다. 빛은 그림자에까지
색을 입혔다. 그네를 타는 여인과 그녀를 향해
이야기하는 남자, 나무 뒤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또 다른 남자, 그리고 두 손을 모은 채 어른들의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이. 마치 영화처럼 그
림 속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 같다.

1877년 제3회 인상파전에 출품된 이 작품은 몽마르트에 있던 르누아르의 화실 정원에

9
모인 친구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이 그림의 장면을 소설 ‘사랑
의 한 페이지’에 삽입했다. “불꽃을 닮은 자줏빛 실크 소재의 리본이 눈부시에 하얀 드
레스 위에서 반짝였다. 그녀 주위에서 봄 기운이 기지개를 켰다.”

앙리오 부인
1876 년, 캔버스에 유화, 65x50㎝, 워싱턴내셔널갤러리 소장

르누아르가 "하늘에서 온 천사 같았다"고 찬


사를 보낸 이 여인은 당시 파리 연극계 최고
스타였던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의 배우 앙리
오 부인이다. 여러 차례 앙리오 부인을 화폭에
담았던 르누아르는 이 그림에서는 섬세한 붓
터치와 디테일을 배제시킨 단순한 표현으로
창백한 피부와 풍만한 몸매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아름다움은 화염 속에 사라


져버리고 만다. 극장에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
났을 때 강아지를 찾으려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이다. 르누아르의 아들 장은 회고록에
서 "아버지는 40년 후에도 앙리오 부인의 죽
음을 떠올리며 '그 망할 놈의 중국산 강아지
토토 때문에!'라고 한탄하곤 했다"고 썼다.

후원자, 뒤랑 뤼엘

인상주의 화가들이 대해 비평가들이 싸늘하게 비평한다는 것은 곧 그들의 그림이 팔리


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평가들의 영향력은 매우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상주
의 화가들의 생활은 무척이나 곤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기법에 대해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멀리 내다보면서 그들의 그림을 사들이며 후원하는 일부 극소수의 사
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0
그 대표적인 사람이 뒤랑 뤼엘이다. 뒤랑 뤼엘은 1860년대부터 마네, 모네, 피사로 등
의 그림을 사들였다. 뒤랑 뤼엘이 르노아르 그림을 처음 사들인 것은 1872년이었다.
뒤랑 뤼엘은 미술상의 아들로, 남보다 앞서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 내는 능력이 중요하
다는 걸 알고 있었다.

1870년대 르누아르 최대의 야심작, <물랭 드 라 갈레트>

<물랭 드 라 갈레트>(1876,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아님)는 대부분을
유원지 현장에서 그렸다. "이 그림은
전적으로 현장에서 제작한, 자연광선
을 중시하는 화법의 걸작"이라는 평
을 받기도 했다.

이 그림에서 르누아르는 윤관석을 중


요하게 여기지 않고 색상을 통해서
형체를 만들어내는 유연한 기법을 사
용했다. 심지어는 그림자조차도 색채
로 나타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인상파를 공격하는 비평가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폭풍우 치는


하늘에 검게 드리운 자줏빛 푸르스름한 구름 같은 바닥 위에서 춤추고 있는 사람들"이
라거나, 모든 원근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난했다. 반면 친구들은 "무지개 같은
찬란한 반사광"을 그의 그림에서 보았다고 격찬했다.

이 작품은 제3회 인상파전(1877년)에 출품되었다.

르누아르는 인상파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르누아르는 자신이 '인상파' 혹은 '비타협주의자들'의 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을 특별


히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만일 살롱전에서 내 그림들이 낙선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림을 계속 출품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1878년 살롱전으로 복귀했고, 1879년 제4회 인상파전이 열릴 때에도 인


상파전에는 한 점도 출품하지 않고 살롱전에 네 점의 초상화를 냈다.

11
이 때 당시의 대표작이 1879년 살롱전에 냈던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1878년)
이다. 이에 대해 비평가들은 이렇게 비평했다. "이제 르누아르씨와의 불화는 끝내기로
하자. 그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의 귀환을 환영하자. 그림의 구도는 논외로 하고
색상에 대해서만 얘기하기로 하자". 르누아르는 천부적인 컬러리스트인 동시에 대단한
데생가라는 데 대체적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뒤랑 뤼엘은 1881년부터 정기적으로 르누아르의 그림을 샀다. 이로 인해 르누아르는


경제적으로 다소 안정을 찾았다. 그 의미는 초상화 주문을 받아 주문자의 의도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여행을 다니면서 다양한 작업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뱃놀이 일행의 오찬>

이 당시 그린 <뱃놀이 일행의 오찬>


(1880~1881, 이전 전시회에 전
시되지 않음)은 르누아르의 걸작
중 걸작이다.

이 그림은 5년 전의 <물랭 드 라
갈레트>와 여러모로 비교된다. 그
림도 큰 규모로 그렸고, 모두 야외
의 군중을 주제로 삼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
다.

이 그림은 멀리 있는 원경을 단순화하고 특히 각 인물의 특징을 분명히 하기 위해 색상


대조법을 구사해 색상이 보다 밝고, 구도도 좀 더 자신감있게 느껴진다. 르누아르가 윤
곽선을 분명하게 그리려 애쓴 것은 비평가들이 인상파는 물체를 흐릿하게 대강대강 그
리고 만다며 싸잡아 공격하는 데 대한 대응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초상화를 많
이 그린 탓에 인물의 개성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을 통한 변화, 고전주의의 영향

1881년 르누아르는 알제리, 이탈리아 등 여러 곳으로 몇 차례에 걸쳐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태양과 이국 정서, 그리고 과거의 명작들을 찾아나선 것이다. 이 여행중 세잔
의 영향을 받아 작품의 구도에 좀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여행 중 고전주의 화가

12
인 앵그르(1780~1867)의 영향 또한 많이 받았다. 앵그르는 초상화가로서 천재적인
소묘력으로 유명했다. 초상화, 역사화, 특히 그리스 조각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나체화
를 특히 잘 그렸다.

이탈리아 여행 후 르누아르는 세 점의 대형작을 그리기 시작해 1883년 봄에 마무리지


었는데, <부지발의 무도회> 및 한 쌍의 그림인 <도시의 무도회>와 <시골의 무도회>
가 그것이다.

바느질하는 마리 테레즈 뒤랑 뤼엘
1882 년, 캔버스에 유화, 81.2x66㎝, 클락아트인스티튜트 소장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자연 속에서, 살짝 입술을


벌린 채 바느질하는 손 끝에 온통 신경을 모으고 있는
소녀의 표정이 더없이 온화하다. 그야말로 아무런 걱
정 없는 평온한 인생의 행복이 찬란한 색채를 통해 드
러나는 그림이다.

이 아름다운 소녀는 르누아르와 오랜 우정을 나눴던


화상 폴 뒤랑 뤼엘의 첫째딸 마리 테레즈. 르누아르는
마리 테레즈뿐 아니라 뒤랑 뤼엘 가족의 초상화를 여
러 점 그렸다.

그런데 같은 해 그려진 다른 초상화들이 모두 고정된


자세로 정면을 보고 있는 전형적인 형태인 데 비해,
유독 마리 테레즈의 그림만 이렇게 다르다. 꽃보다 더
돋보이는 이 소녀의 미모가 르누아르에게 새로운 영
감을 준 것일까.

샤를르와 주르주 뒤랑-뤼엘

1882년, 65 x81cm 캔버스에 유화, 뒤랑-뤼엘, 파리

13
1883년 4월 뒤랑 뤼엘의 화랑에서 르누
아르 최초의 개인적이 열렸다. 화랑주의
아들인 샤를르와 조르주 역시 곧 르누아
르의 파트너가 되었다.

시골 무도회
1883 년, 캔버스에 유화, 180x90㎝, 오르세미술관 소장

젊은 남자의 팔에 안겨 춤을 추고 있는 여인의 은근
한 시선이 마치 관람객을 바라보는 듯하다. 여인의
발그레한 뺨, 바닥에 떨어진 남자의 모자에서 시골
무도회의 흥취가 느껴진다. 이 여인은 훗날 르누아
르의 아내가 된 '알린느 샤리고', 남자는 르누아르의
친구로 기자이자 작가였던 폴 로트이다.

1870년대 말 인상주의에 회의를 느끼던 르누아르


는 1881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라파엘로의 작품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새로운 회화 기법을 시도한다.
‘시골무도회’의 뚜렷한 윤곽선과 인물 형상에서는
그 영향이 보인다.

르누아르는 1883년 ‘시골무도회’와 ‘도시무도회’, ‘


부지발의 무도회’ 등 춤을 소재로 한 그림을 잇따라
그렸다. 그 중 ‘시골무도회’와 ‘도시무도회’는 똑같
은 크기로 제작됐지만, 분위기는 정반대다. 차갑고
우아한 느낌의 ‘도시무도회’에 비해 ‘시골무도회’는
따뜻하고 활기찬 서민적 분위기를 한껏 뿜어낸다.

풍경 속 여인의 누드

14
1883년, 65X55cm, 캔버스에 유화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르누아르의 앵그르풍 시대

르누아르의 앵그르풍의 시대, 혹은 건조한 시대로 일컬어지는 이 시절은 1887년 대작


<목욕하는 여인들>로 절정에 달했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면서 화실작업을 중시하게
여겼다. 르누아르는 이 그림에서 유독 '선'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뒤랑 뤼엘은 그에게
새 길에서 돌아서라고 거듭 말했다.

전원에서 작업하면서 좀 더 유연한 양식으로 되돌아오다

1880년대말 르누아르는 전원에서 작업하면서 좀 더 유연한 양식으로 되돌아왔다.


1890년대 초 르누아르는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이나 피아노를 치고 책을 읽고 잡담하
고 꽃을 꺾는 도회풍의 젊은 여인들을 그렸다. 한편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테마인 누드
를 계속 그렸다.

보니에르 부인
1889 년, 캔버스에 유화, 117x89㎝, 프티팔레 소장

그림 속 여인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풍


만하고 부드러운 르누아르의 다른 그림 속 여인들
과 너무 다른, 깡마르고 창백한 모습이기 때문이
다. 실제로 르누아르는 이 그림을 그릴 때 "밀랍인
형처럼 창백한 모델 때문에 물감이며 붓이며 전부
창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다"고 했다.

15
이 그림은 르누아르가 파리 부유층의 초상화 주문
을 잇달아 받으며 성공가도를 달리던 시절, 소설
가이자 비평가였던 로베르 드 보니에르의 주문으
로 그린 그의 부인의 초상화다.

그녀는 당시 유행을 따라 좀 더 창백하게 보이기


위해 작업 전에 찬물에 두 손을 담그기까지 해 르
누아르를 화나게 했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여인의 푸른 드레스와 붉은 배경을 멋지게 조화시킴으로써 자신이


불평했던 모델의 얼굴빛을 상쇄시키고도 남는 매력적인 작품을 완성했다.

미술관에 입성한 르누아르 작품들

1890년대에 르누아르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대중적으로 인정


받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초기 인상파 시절처럼 격한 배척은 당하지 않았다. 1892
년 국가는 처음으로 르누아르 그림을 매입했다. 인상파 화가로는 시슬레에 이어 두번째
였다. 1914년부터 르노아르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

1892, 116X81cm, 캔버스에 유화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16
바위에 앉아 있는 욕녀(浴女 )
1892 년, 캔버스에 유화, 80.5×64.5㎝, 개인소장

수줍은 표정을 한 채 관객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있는 이 여인의 누드는 전혀 에로틱하거나 유혹적
이지 않다. 섬세하게 표현된 피부결이 오히려 여인
의 순수함을 부각시킨다. 이 그림은 야외가 아닌 실
내 화실에서 제작된 것으로, 르누아르는 방의 창문
에 베일을 드리워 햇빛이 모델의 몸 위로 자연스럽
게 스며들도록 했다.

자연 속에서 목욕하는 여인들과 누드는 르누아르


작품의 대표적 소재다.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고전주의 미술에 감동을 받은 르누아르는 특히 말년에


누드화에 많은 열정을 쏟았다. 그의 그림 속 욕녀들은 일상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낙
원 세계에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한다.

해변가의 어린 소녀들
1894 년, 캔버스에 유화, 65x54㎝, 개인소장

풀밭에 몸을 기댄 두 소녀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


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 위로 배 몇 척이 지
나가고, 해변에서는 여인들이 꽃을 꺾고 있다. 소녀
들은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 있지만 충분히 그들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너무나 부드럽고 평화
로운 풍경이다. 분홍색 리본이 달린 모자를 쓴 소녀
들의 모습까지도 마치 자연의 일부분처럼 느껴진다.

17
이 그림은 자연과 인간이 융화되어 살아가는 이상적 세계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
에서 르누아르의 예술철학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르누아르는 두 소녀가 피아노를 치거
나 책을 읽거나 목욕을 하는 등,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그렸다. 그에게
그 소녀들은 현실 자체이기보다는 행복의 상징이었다.

가브리엘, 장 르누아르와 어린 여자아이

1895~1896년, 54.5X74cm 파스텔

베르넴-젼느 갤러리, 파리

피아노 치는 이본느와 크리스틴느 르롤


1897 년, 캔버스에 유화, 73x92㎝, 오랑주리미술관 소장

19세기말 파리 부르주아 가정의 필수품이었


던 피아노 앞에 함께 앉아 있는 두 여성은 화
가이자 컬렉터였던 앙리 르롤의 딸들이다. 자
매의 은은한 미소, 서로 대비되는 옷의 색깔,
그리고 벽에 걸린 드가의 그림까지, 완벽한 조
화를 이루면서 평온한 일상의 한때를 보여준
다. 르누아르는 르롤이 주최한 예술인들의 파
티에 단골로 참석하며 친분을 쌓았고 르롤 가
족의 그림을 여러 점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이 그림을 자신의 아파트 거실에 걸어놓았다.
마네의 조카딸인 줄리 마네는 이 그림을 보고
"아저씨네 집 거실에는 예쁜 것들이 너무 많
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18
줄리 마네의 초상

1898년, 55X46cm 캔버스에 유화

마르모땅 모네 미술관, 파리

장 르누아르의 초상
1899 년, 캔버스에 유화, 32.5×24㎝, 개인소장

긴 다갈색 머리에 리본을 꽂은 이 볼이 통통한 아이,


여자아이가 아니라 르누아르의 둘째아들 장 르누아르
(1894~1979)이다. 당시에는 어린 남자아이를 여자
아이처럼 꾸미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따스한 색채
와 부드러운 붓의 터치가 르누아르의 부성애를 느끼
게 한다.

장은 아버지의 모델 앙드레 외슐렝과 결혼해 도예가가 되지만, 자신의 작업보다는 '르


누아르'라는 이름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회의를 느끼고 영화계로 뛰어든다. 결과
적으로 장 르누아르는 '게임의 규칙' '위대한 환상' 등의 작품으로 프랑스 영화의 시적
리얼리즘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거장 감독이 된다.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시적인
자연주의가 공존하는 그의 영화는 아버지의 작품세계와도 깊이 연결돼 있었다.

책 읽는 여인
1900 년, 캔버스에 유화, 56x46㎝, 도쿄후지미술관 소장

19
르누아르는 가족과 친구들의 일상 생활을 주의
깊게 관찰했고, 그 속에서 포착한 장면들을 화폭
에 많이 담았다. 특히 책을 읽는 여인은 르누아
르가 가장 좋아한 소재 중 하나였다.

이 그림도 그 중 하나다. 그림 속 여인은 돌아앉


아 책을 읽는 데 몰두해있다. 자연스레 흘러내린
흰 블라우스 사이로 드러난 목과 어깨, 그리고
소파 위에서 부드럽게 휘어진 몸의 곡선이 여성
적 아름다움을 물씬 풍긴다. 관객을 바라보지 않
고 책에 빠져있는 이 여인은 현실 세계와는 다른
곳에 있다.

늙어가는 르누아르

뒤랑 뤼엘 등의 덕분에 르누아르는 1900년 이전에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제 르누아르도 안락하게 살 만한 돈이 생겼지만 그의 취미는 여전히 소박해서 금욕에


가까울 정도의 생활을 유지했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르누아르는 1912년경 그림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산책까지


중단했다. 손떨림을 막기 위해 움츠러드는 손에 붕대를 감고 붓을 잡을 정도였다.

르누아르는 1919년(78세) 12월 레콜레트에서 숨을 거두었다. 폐병으로 앓아 누워 있


던 중이었다. 아들 말에 따르면 숨지기 몇 시간 전 르누아르는 꽃을 그리려고 하니 팔레
트와 붓을 가져오라고 했단다. 그것들을 다시 간병인에게 건네주고 나서 그가 중얼거렸
다. "이제야 이걸 좀 이해하기 시작했어"

레 꼴레트

1908년, 캔버스에 유화, 39×54 cm, 라 쇼드퐁 미술관(스위스)

20
르누아르는 1907년 니스 가까운 까뉴라
는 전원 마을에 있는 레 꼴레트라는 이름
의 토지를 사들여 현대식 집을 지었다.
그 둘레에는 수백 년 된 올리브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이때부터 올리브 나무는
그의 작품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유화 ‘레 꼴레트’의 주인공은 햇빛이 쏟


아지는 언덕 위에 서 있는 올리브 나무들
다.

사람들은 자연에 그대로 동화된 상태이다. 이렇듯 서로 엉키고 비틀어진 올리브 나무, 오
래된 마을과 언덕의 파노라마, 농가 등은 그가 화폭에 되살리고자 했던 지상 낙원의 모습
이다. 이 그림은 언뜻 17 세기 프랑스 화가들의 풍경화를 떠올리게 한다.

르누아르는 자신이 직접 지은 저택을 단 한 번도 그


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마치 자신의 그림
을 현대 세계로부터 보호고 싶어서였을까.

광대 복장을 한 코코

1909년, 캔버스에 유화, 120×77 cm,


오랑주리미술관(파리) 소장

르누아르는 어린이들에게 오랜 시간 포즈를 취하게


하기 보다는 주로 순간을 잡아내 그림으로 남기는 것
을 좋아했다. 이 그림에도 빛나는 금발 머리와 새하얀
얼굴에 복숭아빛 뺨을 가진 귀여운 아이가 등장한다.

하얀 타이즈를 신고, 검정색 빵모자를 쓰고, 풍선 모양의 원피스 같은 광대 옷을 입은


이 어린이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언뜻 구별이 가지 않는다. 배경은 어딘지 알 수 없고,
다만 두 개의 기둥이 형식적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붉은색의 옷은 사각 기둥
의 분홍색, 그리고 오른쪽 대리석 기둥의 분홍색 줄무늬와 잘 어울린다. 그림의 주인공
은 '코코'라고 불렸던 르누아르의 셋째 아들 클로드이다. 르누아르는 이 작품 외에도 사

21
랑했던 가족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흰 모자를 쓴 자화상
1910 년, 캔버스에 유화, 42x33㎝, 개인 소장

아무런 장식 없는 녹색 배경에, 헐렁한 모자를 쓴 69


세 노화가의 옆모습이 왠지 쓸쓸하다. 이 자화상을 그
릴 당시 르누아르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
고,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해외 미술관들이 잇
따라 그림을 사들이는 등 이미 부와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자화상 속의 그는 그저 초라한 노인일 뿐, 옆
으로 돌아앉은 모습에서는 내성적이고 겸손한 내면이
읽힌다.

르누아르는 이때 류머티즘으로 팔과 다리가 마비된


상태였다. 휠체어에 앉아 뒤틀어진 손 사이에 붓을 끼
우고 그림을 그렸다.

시인 아폴리네르는 그를 만난 후 이렇게 썼다. "르누아르는 계속 위대해지고 있다. 최


근작들이 가장 아름답다. 또한 가장 젊기도 하다."

장미를 든 가브리엘
1911 년, 캔버스에 유화, 55.5x47㎝,
오르세미술관 소장

붉은 장미와 여인의 발그스레한 볼, 그리고 목걸이


와 배경의 녹색이 서로 조화와 대비를 이룬다. 제한
된 색을 사용해 작품에 따뜻한 느낌을 부여하는 것
은 르누아르 그림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다.

어깨에 걸친 블라우스가 과감한 터치로 표현된 반면, 그 사이로 드러난 살결은 더없이
세밀하다. 활짝 핀 꽃을 풍만하고 탐스러운 여성미의 상징으로 여긴 르누아르는 여인과
꽃을 늘 함께 그리곤 했다. 이 검은 머리 여인은 르누아르의 아내 알린느 샤리고의 친척
인 가브리엘 르나르이다.

22
르누아르 아이들의 유모이자 하녀였던 그녀는 1894년부터 20여년 간 르누아르 가족
과 함께 살면서 르누아르의 그림 속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뮤즈가 되었다.

23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