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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士學位論文
湖南大學校 社會融合大學院
産業디자인學科 産業디자인學專攻
신 미 덕
2019年 2月
碩士學位論文
湖南大學校 社會融合大學院
産業디자인學科 産業디자인學專攻
신 미 덕
2019年 2月
분청자기 귀얄기법을 활용한
현대 다완 작품 연구
指導敎授: 강 성 곤
2018年 11月
湖南大學校 社會融合大學院
産業디자인學科 産業디자인學專攻
신 미 덕
논 문 개 요
提 出 者 신 미 덕
指導敎授 강 성 곤
- i -
기도 하였다. 특히 다완은 말차를 마시기 위한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차(茶)는 차나무(Camellia sinensis (L.) O kuntze)의 어린잎을 재료로 해서
만든 음료 중의 하나이다. 차의 종류로는 녹차, 백차, 청차, 황차, 홍차, 흑차
가 있으며, 그 중 녹차를 이용하여 만든 차로 말차가 있다.
말차(末茶)는 차나무의 새싹이 올라올 무렵 차광막을 설치해 재배한 찻잎을
쩌서 말린 후 맷돌에 미세하게 갈아 만든 가루차이다.
말차는 차의 잎 전체를 마시기 때문에 차에 들어있는 카테킨, 카페인, 테아
닌, 다당류, 비타민 등의 모든 성분을 섭취가능하며, 또한 다완에 넣고 거품을
내어 간단하게 마시는 방법으로, 이는 말차의 장점이기도하다.
말차는 당나라부터 시작되어 송나라까지 이어져 오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졌으
며, 고려시대 성행하다가 조선 중엽이후 쇠퇴했다.
귀얄기법은 풀비와 같은 식물의 줄기 또는 동물의 털 등으로 만든 붓에 백토
를 묻혀 일회적인 손놀림으로 힘 있는 생동감을 표현 할 수 있으며, 넓은 붓을
사용하여 크고 명확한 붓 자국으로 기물과 백토의 색이 대비되는 자연스러운
표현을 할 수 있다. 또한 기물 전체에 또는 일부분에 백토 분장을 하면 겉이
거의 백자와 흡사한 효과를 내기도 한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다양한 붓을 구입하고, 억새풀과
볏짚, 수숫대 등을 사용하여 직접 붓을 제작하여 분청자기 귀얄기법을 활용한
다완을 제작함에 있어서 분청자기 귀얄기법의 다양하고 자유로운 분장으로 현
대 다완을 개성 있게 제작하고자 한다.
귀얄기법의 활용은 다완의 전체 또는 일부분에 백화장토를 분장하고, 화려하
고 아름다운 다완의 제작을 위해 색화장토를 분장하여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이에 말차의 장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중화 되지 않은 말차의 보급을 위
해 말차의 다기인 다완을 연구하여 우리나라 차문화의 부흥과, 분청자기의 부
흥에 조금이나마 일조하기를 바란다.
- ii -
目 次
제Ⅰ장 서 론 ················································································································1
제 1 절 연구 배경 및 목적 ························································································1
제 2 절 연구 범위 및 방법 ························································································1
제Ⅱ장 본 론 ················································································································3
제 2 절 차와 말차의 연구 ······················································································9
1. 차의 기원 ··············································································································9
2. 한국 차문화의 역사적 변천 과정 ··································································10
3. 말차의 발달 배경 ······························································································17
4. 말차의 종류와 차 끓이는 법 ··········································································20
제 4 절 작품 디자인 계획 및 제작 방법 ····························································34
1. 작품 디자인 계획 ····························································································34
2. 제작 방법 ············································································································34
2. 시작품 및 설명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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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Ⅲ장 결 론 ············································································································55
참고 문헌 ····················································································································57
ABSTRACT ························································································································58
- iv -
表 目 次
- v -
그 림 目 次
- vi -
[그림 27] 기자에몬이도다완 ························································································26
[그림 28] 아오이도다완 ································································································27
- vii -
< 시작품 목차 >
[시작품 1] ························································································································39
[시작품 2] ························································································································41
[시작품 3] ························································································································43
[시작품 4] ························································································································45
[시작품 5] ························································································································47
[시작품 6] ························································································································49
[시작품 7] ························································································································51
[시작품 8]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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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Ⅰ장 서 론
제 1 절 연구 배경 및 목적
제 2 절 연구 범위 및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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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였다.
작품제작 방법으로는 물레 성형과 도판 작업을 병행하여 현대 찻자리에 어울
리는 다완, 다화 병, 다식 접시, 차 통, 물 항아리, 큰 다완과 작은 나눔 다
완, 다 판 등으로 구성하여 성형하였다.
다완의 형태는 일자형의 통형과 역삼각형의 형태에 선의 변화를 주어 성형하
고, 다완의 구성은 일인용 다완, 큰 다완과 작은 나눔 다완으로 변화를 주어
구성 하였다.
귀얄문은 물결 문양 ,회오리 문양, 꽃문양, 격자 문양, 등을 자유롭고 다양
하게 표현하였다.
소지는 분청토, 옹기토, 산백토, 갈색 조형토, 등을 사용하여 성형하였고 백
화장토, 시중에 판매중인 도자용 색안료 등을 사용하여 붓, 볏짚, 수숫대, 억
새풀 등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여 귀얄문을 분장하였으며 유약은 투명유, 시노
유 등을 시유하였다.
1차 소성은 0.3루베 전기가마에서 10시간 850℃ 소성하였고, 2차 소성은 0.3
루베 전기 가마와 0.3루베 가스 가마에서 12시간동안 1250℃로 산화염과 환원
염으로 소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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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Ⅱ장 본 론
제 1절 분청자기의 일반적 고찰
1. 분청자기의 시대적 배경
2. 분청자기의 특징 및 종류
- 3 -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7) 분청사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거친 살결에 분을 바르는 화장술은 새 맛으로 승화되어 장식 의장 이
상의 장식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인 데가 없이 자연
스러운 신선미를 자아내어 마치 한산모시나 안동포 같은 자연스러움을 자랑한
다.
둘째. ‘대담한 과장, 대담한 생략, 대담한 왜곡’이 그 특징으로 이것은 근대
미술의 세계와도 상통하고 있다.
셋째는 전체의 생김새로서 ‘예쁘게 생긴 아름다움보다 잘생긴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분청사기의 세계이다. 좌우대칭이나 둥근 맛을 무시하고 되는대로
빚어낸 것들이지만 억지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이 자연스럽다. 다시 말하면
‘못생긴 것이 오히려 잘생긴’ 세계가 분청사기의 세계이다.
넷째는 상상의 날개가 자유스럽게 활개 친 ‘치기’의 아름다움이 곧 분청사기
의 아름다움이다. 또한 무한한 해석이 가능한 추상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또한 비단 분청사기만의 특성은 아니지만 군더더기나 잔재주가 보이지 않는 것
이 그 특색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미술품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분청사기는
특히 가까이 뜯어보는 아름다움보다 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아름다움을 당장
느끼는 아름다움보다는 돌아서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8)
분청사기는 토산공물(土産貢物)로서 중앙에 상납되었기 때문에 관사(官司)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 많은데, 이들은 왕실과 관아에서 사용하였다. 특히
인화분청의 경우는 전국에서 분청사기 가마가 운영되었으며 때로는 소수의 백
자 제작도 겸하고 있었음이 가마터 조사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9) 이처럼 분청
사기는 고려 시대의 사기소 성격을 띤 강진 청자 가마나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
백자 가마처럼 관요 체제로 운영된 것은 아니었다. 광주 충효동과 공주 학봉리
등은 15세기 대표적인 대단위 분청사기 생산 지역으로 100여 년 이상 요업활동
을 했던 곳이며, 공납 대상의 가마로서 운영되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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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동 가마에서 생산한 도자기에는 관사명, 지명(地名), 사기장(沙器匠),
이름, 기타 제작한 시기나 여러 필요에 따른 명칭이나 숫자를 넣어 각각의 용
도를 표시한 다양한 명문(銘文)들이 약 120여 가지가 있는데 이는 국초부터 안
정적인 국가 재정을 위해 특산물이나 물품을 공물로 받아들이는 공납(貢納)과
같은 수취(收取)제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11) 하지만 분청자기 중 귀
얄기법의 분청자기에는 인화분청자기와 달리 명문이 나타나지 않아 서민 중심
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백토를 그릇 표면에 씌우는 백토 분장 기법(白土紛粧技
法)과 분청사기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무늬에 있다.
백토 분장 기법이란 원하는 그릇을 만든 다음에 백토로 표면을 장식하는 것
으로 장식 방법에 따라서 다음의 일곱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상감(象嵅)기법이다. 원하는 무늬를 그린 뒤 무늬 부분만 긁어내고 이
곳에 백토나 자토를 넣고 유약을 바른 뒤 구워내면 백토는 하얀 무늬로, 자토
는 까만 무늬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다른 물질을 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방법
을 상감 기법[그림2]이라고 한다.12)
둘째, 인화(印花)기법이다. 꽃 모양의 도장을 찍는다고 하여 인화라고 했으
나 모두 꽃 모양만을 찍는 것은 아니다. 이 기법은 도장을 찍어 오목하게 들어
간 부분에 주로 백토를 넣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볼 때는 상감 기법의
범주에 속하지만, 나타나는 무늬의 효과는 일정한 도장[그림3]을 반복해서 찍
었기 때문에 추상적인 분위기를 유감없이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13)
셋째, 박지(剝地)기법이다. 백토로 분장을 하고 원하는 무늬를 그린 뒤 무늬
를 제외한 배경의 백토를 긁어내어 백색 무늬와 회색의 배경이 잘 조화된 기법
[그림4]을 말한다.
넷째, 음각(陰刻)기법이다. 또는 조화(彫花)기법이라고도 하는 이 기법은 백
토 분장을 한 후 원하는 무늬를 선으로 조각을 하면 백색 바탕에 회색의 무늬
가[그림5] 선으로 새겨지는데, 이때에 무늬는 추상화된 능숙한 솜씨를 보여 주
11) 국립광주박물관, 『무등산 분청사기』 (광주 충효동 요지(사적 제141호) 발굴조사 50주년
기념 특별전), (출판사 디자인나눔, 2013), p.196.
12) 강경숙, 『분청사기』 (서울 : 발행처 주식회사 대원사, 2005), p.10.
13) 강경숙, 『분청사기』 (서울 : 발행처 주식회사 대원사, 2005),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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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예 가 많다.
다섯째, 철화(鐵畵)기법이다. 백토 분장을 한 후에 철분이 많이 포함된 안료
를 사용하여 붓으로 무늬를 그리[그림6]는 기법이다. 무늬는 도식적인 것, 추
상적인 것, 회화적인 것, 익살스러운 것 등 다양하여 서민들의 생활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여섯째, 귀얄기법이다. 귀얄이란 일종의 풀비와 유사한 것으로 이 도구에 백
토를 묻혀 그릇 표면을 바른다. 그러므로 일회성의 풀비[그림7] 효과는 생동적
인 운동감이 넘친다.
일곱째, 담금(덤벙) 분장기법이다. 백토 물에 그릇을 덤벙 담가 백토 분장하
므로 이 종류의 분청사기를 덤벙[그림8] 분청이라고도 한다. 이 기법은 귀얄과
같은 붓 자국이 없어서 표면이 차분하다. 백토가 두껍게 씌워지면 표면이 거의
백자와 같이 되므로 이 기법의 그릇들은 분청사기 말기에 많이 제작되었으리라
고 본다.14)
이상 일곱 종류의 분장 기법 외에 분청사기의 또 다른 특징은 무늬이다.
무늬는 대범한 모란당초[그림9], 모란, 연꽃, 풀과 꽃, 버드나무[그림10], 물
고기 같은 것이 있고 때로는 이들이 생략되거나 추상화되어 구김살 없는 표현
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표현의 기량은 구애받지 않는 자연스러움, 천진성,
소박한 순수성 등의 제작 태도에 기인하며, 바로 이 점이 분청사기를 만든 우
리 조상의 숨결이 살아 숨쉼을 느끼게 하는 요소이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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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분청자기 귀얄기법의 발달 배경
16) 윤용이, 『우리 옛 도자기』 (서울 : 발행처 주식회사 대원사, 2010), p.69.
17) 귀얄은 식물의 줄기 또는 동물의 털 등으로 만든 붓과 같은 도구이다.
18) 덤벙분장은 백토를 물에 풀고 그릇을 담가서 분장하는 방식이다.
19) 고흥군수 박병종, 『고흥분청문화 박물관』 (컬쳐게이트(주), 2017.10),
p.207.
20) 朴敬子, 『조선 전기 공납용 백자제작에 따른 분청사기 양식변화』『美術史學』24, 한국미
술사교육학회, 2010, p.29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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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21)
귀얄 분청에서 나타난 선의 양상을 살펴보면 곧고 딱딱한 직선보다는 유연한
곡선을, 급격한 변화보다는 완만한 굴곡을 이루고 있으며 미의 절정을 이루기
위해 외형이나 질감에도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22)
귀얄 문양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첫째, 외형에서 오는 우아함과 소박함이며
둘째, 짜임새 있는 문양의 배치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과 조화로움이며 셋
째, 강하지 않으나 민족성을 함축시킨 듯한 부드러운 율동을 지니고 있다는 점
이다.23)
21) 국립광주박물관, 『무등산 분청사기』 (광주 충효동 요지(사적 제141호) 발굴조사 50주년
기념 특별전), (서울 : 출판사 디자인나눔, 2013), p.103.
22) 조성일, “분청 茶碗 제작에 관한 연구 (귀얄기법을 중심으로)”, 석사학위 논문, 경기대학교
조형대학원, 1999, p.8〜9.
23) 류진원, “한국 문양의 율동적 재구성”, 석사학위 논문, 이화여자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1989, p.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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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절 차와 말차 연구
1. 차의 기원
24) 보성군, 『녹차를 마시면 건강이 보인다!』 (전남 : 보성군 녹차산업과, 2013), p.3.
25) 전남도립대학 학교기업 클레이텍, 『도자산업과 다도』 (전남 : 대상 애드, 2009),
p.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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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BC 722〜221)에 한족과 소수민족에 의해 차 재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차가 상품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9년 전한(前漢)시대로 왕포(王
褒)가 쓴 노예매매계약서 「동약(僮約)」에 ‘무양(武陽)에서 차를 사온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사천(四川) 일대의 시장에서 차가 물품으로 거래되었음을 짐
작할 수 있다. 또한 왕포는 차를 사오거나 차를 끓여 손님에게 대접하는 일을
노예의 주요 업무로 기록해 놓았다. 하지만 차는 당(唐)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널리 음용되기 시작했고, 송(宋)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생활필수품이 되어 쌀,
소금과 더불어 없어서는 안 되는 주요 물품들 중 하나가 되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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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에 차를 기호음료로서 마셨으리라는 짐작이 간다.29)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선덕왕(AD 632〜647) 때부터 차가 있었다는 기
록이 있으나, 차의 재배는 신라 흥덕왕 3년(AD 828) 대렴(大廉)이 당의 문종
황제로부터 차를 대접받고 귀국 길에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
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674년에 만들어진 경주 안압지에서 회색토기[그림17]가 출토되었다. ‘언정영
(言貞榮)’ 이라는 찻잔에 작은 글씨로 ‘茶’자가 쓰여 있었다. 이는 차 생활을
통해 ‘말이 바르면 영화를 얻는다.’는 뜻으로 풀이 할 수 있다.30)
〈묵화무늬다완〉겉면에 쓰인 言, 貞, 榮 세 글자가 신라의 차 정신을 뜻한
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신라의 차 정신은 차 문화를 일찍이 정착시킨
중국의 다예(茶藝) 정신과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일본이 만든 다도(茶道) 정신이
성립된 시기와 비교하여 살펴야만 한다.
일본의 차문화는 송나라로 유학을 한 에이사이(榮面) 승려가 1191년 차 종자
를 가져와 심은 것을 그 시작으로 본다. 도원(道元, 1200〜1253)이 조동종을
개창하면서 중국송나라에서 가져온《선원청규》를 토대로 하여 《영평청규永平
淸規》를 지었는데, 여기에 ‘和, 敬, 淸, 寂’을 넣었으나 이는 중국의 차정신
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 때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가 선종 승려들의 선원생활 규범으
로 《선원청규》를 제정함으로써 차와 예절을 세계 최초로 정리했고, 그 후 수
단 선사가 참선과 차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바를 ‘和, 敬, 淸, 寂’이라고 정리
한 뒤로 동양 차 문화의 본질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7세기 문무왕 시대는 차 문화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때라서 토
기 다완에 쓰인 ‘言, 貞, 榮’을 신라인의 차 정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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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시대의 차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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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시대의 차 문화
35) 보성군, 『녹차를 마시면 건강이 보인다!』 (전남 : 보성군 녹차산업과, 2013), p.45.
36) 鄭英善, 『한국 茶文化 』(서울 : 도서출판 너럭바위, 2007), p.173.
37) 보성군, 『녹차를 마시면 건강이 보인다!』 (전남 : 보성군 녹차산업과, 2013),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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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다도정신은 서산대사의 다시와 초의선사의 「동다송」, 「다신
전」 등에서 였볼 수 있다. 우선 서산대사는 그의 시에서 청허(淸虛) ․ 다선
일여(茶禪一如 ) 정신을 차와 연계하였고, 초의선사는 「동다송」29송에서 다
도정신의 중화(中和) ․ 중정(中正)을 말하였다.38)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잡동산이(雜同散
異)」에 의하면 납채문명(納采問名:오늘날 함을 보내는 납폐)때 주부가 점다하
여 사당에 차례를 올리고 혼인하게 된 내용을 사당에 고하였다. 주인은 빈(賓:
주레)을 맞아 당(堂)에 올라가 동서로 서로 향해 읍을 하고 집사가 서함(書函)
을 들고 예물을 뜰에 나열한 후 빈과 주인은 각기 자리에 앉아 차를 받들어 마
셨다. 라고기록 되어 있다.39)
조선시대에는 전반적으로 고려 때보다는 음다풍속이 쇠퇴하였으나 문인들 중
심으로 소박하게 차를 즐기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1000편이 넘는 차에 관한 시
나 글, 또한 민요가 전해오고 있고 대한제국 시대에도 차 팔러 다니는 차장사
나 찻집이 있어 차를 사 마실 수 있었으며, 식후에는 「작살 가져 오너라」고
하여 민가에서도 즐겨 차를 마셨으므로, 우리의 다문화는 대중 속에 뿌리내려
면면히 이어져 왔다.40)
조선시대의 화가 김홍도의 전다한화(煎茶閒話)[그림20], 간송미술관 소장,
이인문 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안중식의 고사방
우[그림21], 개인소장 등의 여러 그림에서도 조선시대의 음다 풍습을 엿볼 수
있다.
38) 보성군, 『녹차를 마시면 건강이 보인다!』 (전남 : 보성군 녹차산업과, 2013), p.53.
39) 안정복(安鼎福), 『잡동산이(雜同散異)』
40) 鄭英善, 『한국 茶文化』 (서울 : 도서출판 너럭바위, 2007),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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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근대의 차문화
41) 혜우 스님, 『혜우 스님의 첫눈에 반한 차茶 이야기』 (경기 : 도서출판 이른아침, 2018),
p.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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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차숟갈, 차솥, 차손님, 찻집, 찻잎, 찻자리 등
③ 차세간 낱낱에 쓰일 때(일반적으로 (다)로 쓰기도 한다)
찻장(茶欌), 차탁(茶托), 차반(茶盤), 차완(茶椀 ), 차합(茶盒), 찻잔, 차상
등
④ 궁중이나 불가의 용어가 아닌 일상적인 일 또는 사람과 관련되어 사용 할
때
차례(茶禮, 사회적인 행사인 다례와 구분), 차사(茶祀), 차인(茶人), 차회
(茶會) 등
(2) (다)로 쓰이는 경우
한자와 어울린 말로서 복합명사가 아닌 때 (다)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격을 높이는 뜻이 있을 때 (다)로 쓴다.
① 차를 다루는 행위 (verb+茶)
팽다(烹茶), 행다(行茶), 헌다(獻茶), 진다(進茶), 끽다(喫茶), 음다(飮茶)
등
② 궁중이나 불가의 용어이거나 국가적, 사회적 용어이거나 격을 높일 때
다방(茶房, 고려시대의 차 관청), 다시(茶時), 시다림(屍茶林, 죽은 이를 위
해 장례 전에 행하는 의식), 다도(茶道), 다담(茶談), 다신계(茶信契) 등
③ 차 이외의 다른 용도로도 쓰이거나 차를 직접 가리키지 않을 때, 옛글 이어
서 한문을 보기 전에는 그 뜻을 알기 어려울 때
다실(茶室), 다정(茶亭), 다천(茶泉), 다로(茶爐), 다려(茶侶, 차벗), 다갈
색, 산다(山茶, 동백나무), 다식(茶食) 등
④ 지명(地名)
다동(茶洞, 서울), 다공리(茶貢理, 경남 거제), 다로동(茶路洞, 경북 청도),
다소리(茶所理, 전남 화순), 다곡리(茶谷理, 전북 장수), 다운동(茶雲洞, 울
산) 등
⑤ 관습에 의해 이미 굳어진 말
다과(茶菓), 다반사(茶飯事), 다기(茶器), 다구(茶具) 등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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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차의 발달 배경
43) 보성군, 『녹차를 마시면 건강이 보인다!』 (전남 : 보성군 녹차산업과, 2013), p.56.
44) 이진수,이진미, 『찻잎 속의 차』 (서울 : 도서출판 이른아침, 2008),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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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하였다. 특히 신라에 융성했던 불교문화와 차의 관계는 충담사와 기파랑,
월명대사 혜소, 진각국사 등 고승의 수도생활에 빼 놓을 수 없는 벗이 되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당시 신라인들이 자주 마시던 차는 말차(沫茶), 즉 잎
차를 가루로 만든 차라고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45)
최치원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지은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 774〜
850)의 비석 글에 의하면, 아래와 같이 생전의 인품을 설명하였는데 여기서 당
시의 음다 풍속을 짐작할 수 있다.
누가 한명(漢茗:중국차)을 주면 찻가루를 내지 않고 돌솥에 넣어 섶나무를
불 때서 삶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떤지를 알고자 하지 않으며
그저 속(배)을 적실뿐이다‘ 라고 했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싫어함이
이와 같았다.
여기서 한명이란 토산차가 아닌 상류층의 외국산 고급 단차로서, 곱게 가루
내어 끓여서 탁한 유다(乳茶)로 마시는 귀한 차인데도, 혜소는 검소하게 그냥
돌솥에 넣어 끓여서 맑은 탕다(湯茶)로 마셨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당시 신라
사회의 차 끓이는 방법은 가루 내어 끓이기와 그냥 끓이기의 두 가지 방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46)
고려 6대 성종때 최승로(崔承老,927〜989)가 올린 상소문에 「왕께서 공덕재
(功德齋)를 올리기 위하여 손수 차를 갈거나 보리를 빻는다 하옵는데 성체(聖
體,왕의 몸)에 지나친 무리가 되니 신은 안타깝습니다」47)라고 하였는데, 공
덕재란 현세와 미래에 좋도록 공덕을 닦기 위해 부처께 공양드리는 것을 말한
다. 위에서 성종은 불전에 올릴 말차(末茶)를 만들기 위해 직접 단차(團茶)를
맷돌[그림23]에 갈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광종(949〜975)때부터 비롯된 것으
로 보면 다른 임금도 직접 차를 갈아 재를 올렸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48)
고려의 융성했던 차문화는 승유억불(僧柔抑佛) 정책을 택한 조선조로 접어들
면서 급격히 쇠퇴하였다. 차가 ‘불교의 상징’처럼 인식되던 시대 분위기와 더
45) 보성군, 『녹차를 마시면 건강이 보인다!』 (전남 : 보성군 녹차산업과, 2013), p.50.
46) 鄭英善, 『한국 茶文化』 (서울 : 도서출판 너럭바위, 2007), p.86〜87.
47) 『동문선』 52권, 奏議,, 〈上時務書〉 최승로는 최치원의 후손으로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
반을 닦은 재상임.
48) 鄭英善, 『한국 茶文化』 (서울 : 도서출판 너럭바위, 2007),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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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 차문화는 당연히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차례(茶禮)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차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제사 의식에서조차 차가
밀려나고, 관혼상제에 쓰이던 차는 모두 술이나 청정수로 대체되기에 이른
다.49) 다유는 가루차(末茶)를 뜨겁게 물에 휘저어 가루와 함께 마시는 탁한
차로 고려시대에 무척 성하였으나, 점차 쇠퇴하여 조선시대에는 문인과 승려들
간에 혹은 가례(家禮)때 드물게 이어져왔다.50)
사원의 승려들과 중국에 유학을 다녀온 유학파 선비들 사이에서는 차를 마시
는 풍습이 여전히 남아 있어 차 겨루기를 하고 차시(茶詩)를 서로 나누는 등
차를 마신 발자취가 지금도 전한다.51) 김시습은〈한적하게 잠을 탐함〉이라는
시에서는 「질화로엔 향기로운 이내가 일어나고, 돌솥에선 다유(茶乳) 끓는 소
리가 나는 구나」52) 라고 하였고 〈질화로〉라는 시에서는 「산방은 맑고 고
요한데 밤은 길기도 하여 / 한가로이 등불 돋우며 흙마루에 누웠네 / 질화로
덕에 나는 더욱 넉넉하고 / 손님이 오면 또 다탕(茶湯)을 끓이네」53) 라고 하
여 조선시대에도 다유(茶乳)와 다탕(茶湯)을 마셨음을 알 수 있다.
다유는 말차의 점다시 나타난 거품의 모양을 설명한 것으로 차 거품이 희고
젖 맛이 난다 하여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젖(乳)이나 눈(雪) 혹은 흰색 꽃에
비유하였다.「설유(雪乳)」「빙설(氷雪)의 빛」「향유(香乳)」「백화(百花)」
「법유(法乳)」라고도 하였다. 초의는 추사가 손수 끓인 뇌협(雷莢)차의 「설
유(雪乳)」를 나눠 마시기도 하였다54).
49) 혜우 스님, 『혜우 스님의 첫눈에 반한 차茶 이야기』 (경기 : 도서출판 이른아침, 2018),
p.50.
50) 鄭英善, 『한국 茶文化』 (서울 : 도서출판 너럭바위, 2007), p.203.
51) 혜우 스님, 『혜우 스님의 첫눈에 반한 차茶 이야기』 (경기 : 도서출판 이른아침, 2018),
p.51.
52) 김시습, 『매월당집』 2권, 〈閑適耽睡〉「互爐起香烟, 石鼎鳴茶乳」
53) 김시습, 『매월당집』 4권, 〈地爐〉
54) 鄭英善, 『한국 茶文化』 (서울 : 도서출판 너럭바위, 2007),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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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말차의 종류와 차 끓이는 법
1) 말차의 종류
2) 말차의 차 끓이는 법
가루차(末茶)의 점다(點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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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루차(말차)[그림24]를 다유(茶乳)로 만드는 점다법은 『다경』에서 볼 수
있듯이 물이 끓는 탕관에 가루차를 넣어 휘저어 끓여 차구기로 떠서 마시는 방
법과, 큰 찻잔(차사발) 속에 가루차를 넣고 탕수를 부은 다음 차 솔로써 휘저
어 마시는 방법이 있다.58)
차사발에 가루차를 넣고 휘저어 마신 경우는 이익(李瀷, 1681〜1763)의 『성
호사설』〈다식〉에서 「차는 애초에 달여서 탕으로 먹었는데 가례(家禮)에서
쓰는 점다는 찻가루(茶末)를 잔속에 넣고 탕수로 적시어 차솔(茶筅:다선)로 휘
젓는 것이다. 지금의 일본차가 모두 이와 같다」라고 하여, 당시에 그러한 음
다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차사발에 점다하는 차솔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16세기의 『귀봉집(龜峰集)』
과 『가례고증(家禮考證)』『가례증해』 등에서 볼 수 있다.59)
차 끓이는 법
(1) 표자로 더운 탕수를 떠서 다완을 예열하고 차선도 부드럽고 깨끗하게 헹궈
준다.
(2) 차통을 들어 뚜껑을 열고 차시[그림25]를 들어 말차를 떠서 다완에 넣는
다. 차시에 묻은 말차는 다완 안쪽 면에 가볍게 턴다.
(3) 표자로 더운 탕수를 떠서 다완에 살며시 따른다.
(4) 차선을 들어 말차덩이를 부수면서 거품을 부드럽게 낸다. 이때 차선을 세
우고 어깨와 팔에 힘을 주지 않고 손목으로 가볍고 빠르게 아래 위 왼쪽과 오
른쪽을 고루 부드럽게 치듯이 휘저어 유화가 잘 일도록 만든다.
(5) 너무 오래 휘저으면 맛과 향이 떨어진다. 유화와 유탕이 고루 되면 차선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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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절 말차 다구와 다완의 고찰
1. 말차 다구의 발달 배경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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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는 다시도 많이 남겼지만 가장 많은 다구들이 나온다. ‘得南人所餉 鐵
甁試茶(득남인소향 철병시차)’ 라는 시에서 전로(塼爐)가 나온다. 塼爐活火試
自煎(전로활화시자전)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철병과 전로 등 2개의 다구가 나
온다.
이어 유다시(孺茶詩)에서는 手點花瓷誇色味(수점화자과색미)라 하여 자기가
언급된다. 이것은 다완을 말한 것이다. 또 같은 시에서 愛廳笙聲號鼎裏(애청생
성호정리)라 해서 다정(茶鼎)이 나온다. 앞에 철병과 다정은 모두 물 끓이는데
쓴 것이다. 사인증다마(謝人贈茶磨)라 해서 시제(詩題)에만 언급된 다구도 있
다.
이인로도 다마(茶磨)라는 시를 남겼으나 시구에는 말이 없다. 이때까지는 다
연(茶碾)이 아닌 다마로 차를 갈았다고 보아진다.
이규보의 방엄사(訪嚴師) 시에 一甌冣一話(일구취일화) 라 하여 다구(茶甌)
라 언급되는데 다완(茶碗)이란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현(李齊賢)도 ‘松廣和尙寄惠新茗(송광화상기혜신명)’ 시에서 眩轉瓷甌乳
花吐(현전자구유화토)라고 다구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숭인(李崇仁)은 香浮石椀洗葷羶(향부석완세훈형) 이라 해서 처음으
로 다완을 노래에 인용하고 있다. 이숭인은 이 밖에 松風和雨出茶甁(송풍화우
출다병)이라 하여 차병(물끓이는 주전자)을 말했으나 이것은 이규보가 철병을
말한 것과 같을 것이다. 송광사의 제2세주 진각 혜심(眞覺 惠諶)은 비잠(鼻箴)
속에서 鐺中煎綠茗(쟁중전녹명)이라고 다쟁을 말했는데, 쟁은 솥이다.
이에 대해 원감(圓鑑)국사는 水一缾茶一銚(수일병다일요) 라 해서 다요(茶銚)
를 말했다. 요는 남비인데 역시 작은 가마솥을 뜻한 듯하다.
다음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다신전」의 기록이 있으므로 이것을 살펴본다.
「다신전」에서는 표(瓢)와 잔(盞) ․ 식잔포(拭盞布) ․ 호(壺) ․ 관(罐)
․ 완(碗) ․ 저수옹(貯水甕) 등이 나온다. 표와 관은 다같이 물 끓이는 기구
다. 호는 차를 우리는 주자(注子)로 보면 되겠다. 식잔포는 행주를 말한다.63)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제자 한재 이목(寒齋 李穆, 1471〜1498)이 지은 우리
나라 유일의 창작 다론 다부(茶賦)에서, 다부의 세 번째 항목인 ‘전다칠수(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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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七修차 달이기와 마시기)’의 첫 문장이다.
搴玉甌而自濯煎石泉而旁觀
搴(건)은 ‘끄집어내다’. ‘빼내다’는 뜻을 지녔다. 玉甌(옥구)는 흰 사발이
다. 甌(구)는 사발, 즉 완(盌)의 이름이다. 그리고 自濯(자탁)은 ‘손수 씻는
다’는 것이다. “흰 사발 꺼내 손수 씻어 놓고 바위틈에서 나온 샘물 끓는 모습
바라보네.”라는 이 구절에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영남 사림학파 선비들은 차를 마시기 위해 차 사발을 손수 씻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차를 마실 때 사발, 즉 완을 썼다는 것이다.64)
1) 다완(茶碗)
다완은 찻사발이라 하며, 말차를 만들어 마실 때 쓰이는 찻그릇으로 도자기
로 된 재질이 가장 많다. 나무, 옥, 철, 돌 등 다양한 재질의 다완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다탕을 마시는 잔과 다유를 마시는 잔의 명칭을 구분하지 않았
다. 단지 완(椀)은 일상적으로 쓰이는 찻잔을 뜻하였고, 구(甌)는 의례용이거
나 소중한 찻잔을 의미하였다.65)
완은 고려 때뿐만 아니라 조선 초엽까지 「椀」이외에는 쓰이지 않았으나 임
진왜란 때인 16세기경부터 간혹「碗」「盌」또는「琬」이 쓰여 외국의 茶문화
를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66)
2) 말차시(末茶匙)
말차를 차 통에서 떠서 다완에 넣을 때 사용하는 찻숟가락이다. 대나무, 나
무, 은, 상아, 옥 등의 재질로 된 제품이 있으며, 대나무 재질의 제품을 가장
많이 사용 한다
3) 차선(茶.筅)
차선은 다완에 말차를 넣고 더운 물을 부어 부드러운 거품을 만드는데 사용
64) 정동주, 『한국 다완의 문양 그 향기로운 상징세계』 (서울 : 상상의숲, 2008), p.149〜
150.
65) 鄭英善, 『한국 茶文化』 (서울 : 도서출판 너럭바위, 2007), p.222.
66) 鄭英善, 『한국 茶文化 』(서울 : 도서출판 너럭바위, 2007),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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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차 솔로 대나무 재질이 많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만드는 것으로, 쪼
개진 선의 수에 따라 60선〜200선까지 다양한 제품이 있다. 보통 80선〜120선
의 제품을 선호한다.
4) 말차 호(末茶壺), 차 통, 차 합
말차를 담는 용기로서 항아리, 통, 합의 형태로 만든 것이 있다. 용기의 재
질은 도자기, 칠기, 은, 주석 등이 있으며, 도자기나 칠기의 제품을 많이 사용
한다.
5) 표자(瓢子)
표자는 물 항아리에서 물을 떠 솥에 붓거나, 물이 끓는 솥에서 물을 떠 다완
에 옮기는데 쓰는 도구이다. 조롱박이나 대나무로 된 제품을 많이 사용 한다
6) 차선꽂이
사용한 차선의 모양이 본래의 모양대로 흐트러지지 않고 잘 마르도록 꽂아두
는 다구이다. 재질은 도자기, 나무 등이 있지만 도자기로 된 제품을 많이 사용
한다.
7) 물 항아리
차 끓일 물을 담아두는 물 항아리이며, 재질은 도자기, 유리, 칠기 등이 있
으며 도자기로 만든 제품을 많이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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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몸통의 절반가량 차지하는 〈토기굽다리완〉이라고 알려져 있다.68)
완의 기본 형태인 통(筒) 모양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이어져 3〜4세기에
제작된 신라의 토기완 모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자통완〉69)
고려시대의 다구는 팔관회, 연등회, 공덕제, 기우제 및 왕과 신하의 회의,
연회, 사신 맞이, 책봉의식을 포함한 왕실의 행사 등의 중대한 국가행사 때에
의례로서 차를 올리거나 마셨으므로 그에 따르는 제반 다구는 어떤 그릇보다도
중요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다구는 최고의 품질과 멋을 지녔고 귀족적이며
몹시 아름다웠다.70)
문인들은 가끔 다구(茶甌)에 차를 담아 마셨다. 김시습은 「맛좋은 햇 차가
옥구(玉甌)에 가득 하네」라 했고, 김종직의 문인인 조위(曺偉, 1454〜1503)는
탕관에 말차(雪乳:눈같은 다유)를 끓여 화구(花甌)에 부어 마시었다. 허균은
구에 반잔(半盞)의 차를 따르고 향 한 대를 피웠으며 은으로 만든 다구(銀甌)
도 썼다. 조선 말엽에는 다산과 신위도 다구(茶甌)를 즐겨 썼는데, 다산은 삼
월 삼짇날 친구들과 대나무밭 속에서 다구에 차를 마셨다.71)
오늘날 일본이 자랑하는 열점의 국보 다완 중에서 한 점은 한국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기자에몬이도다완〉[사진27]이 그것이다. 이것은 오사카에 사는
기자에몬이란 무역업자가 히데요시를 찾아가 바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72)
1578년 10월 15일, 노부나가는 전 일본의 다이묘를 교토의 야부노이치 숲으
로 초대했다. 이른바 ‘야부노이치종화차회’ 에는 센노 리큐73)도 참석했다. 이
차회에서 그는 훌륭한 다완을 몇몇 상징성이 큰 다이묘들에게 선물했으며, 충
성 서약을 받아 냈다. 이날 센노 리규는 그 다완들을 ‘이도다완’ 이란 이름을
붙였고, 그때부터 ‘고려다완’ 으로 총칭되던 다완들과 이도다완은 구별이 되었
다.74)
16세기 중반 조선의 경상도 남쪽 해안지방에서 만들어진 수수께끼의 그릇 수
68) 정동주, 『한국 다완의 문양 그 향기로운 상징세계』 (서울 : 상상의숲, 2008), p.115.
69) 정동주, 『한국 다완의 문양 그 향기로운 상징세계』 (서울 : 상상의숲, 2008), p.115.
70) 김숙희, “정호다완에 관한 연구(우리민족의 茶문화와 정호다완의 연관성에 관해서)”, 석사
학위논문 경희대학교, 2003.
71) 鄭英善, 『한국 茶文化』 (서울 : 도서출판 너럭바위, 2007), p.225.
72) 정동주, 『한국 다완의 문양 그 향기로운 상징세계』 (서울 : 상상의숲, 2008), p.198.
73) 일본에서 다조라 부르며, 일본다도를 정립한 인물
74) 정동주, 『한국 다완의 문양 그 향기로운 상징세계』 (서울 :상상의숲, 2008),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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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점이 있다. 이 그릇들을 일본차인(茶人)들은 ‘이도차완’(井戶茶碗)이라 부
르면서 진귀하게 여겨 일본 제일급 보물로 받들고 있다.
그 중에서 한 점은 현재 교토(京都) 다이도쿠샤(大德寺) 고호안(孤蓬庵)에
모셔져 조선도예품이 지닌 영원불멸의 신비와 명예를 더하고 있다. 이 그릇의
이름은 ‘기자에몬이도’ 다. 일본 차인들은 죽기 전에 이 이도차완을 한번 참배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75) 이도차완을 참배한 세계적인 동양미술학자 야
나기 무네요시(柳悰㤠, 1889〜1961)가 남긴 짧은 글은 이 그릇에 헌정된 최고
의 문장으로 널리 칭송받는다.
이렇듯 극찬 받는 그릇을 우리는 ‘막사발’이라 부른다. 이것을 만든 조선에
서의 쓰임새와 일본에서의 쓰임새가 다른 데서 이름도 달라졌다. 막사발을 ‘이
도차완’[그림28]이라 부른 일본에서 이 그릇에 관한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1900년 이후였다.76)
아름답고 기능이 좋은 다구를 소중하게 쓰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차인은 기
본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만들어진 다구를 볼 수 있는 안목과
선택된 다구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행다77)는 모든 공예의 미(美)를 표현하는 종합예술이고 멋이다. 예술에 아
름다움이 없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진정한 미(美)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모든 기물이 추해서는 안 된다.78)
미(美)가 결여된 다구는 차 생활에 쓰일 수 없고 차인은 좋은 찻그릇을 선택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안으로 깊이 보는 심미안(審美眼)이 있어야 하고 날
카로운 직관으로 아름다움을 찾는 탐구력이 있어야 한다. 다구를 제작하는 장
인들도 그것들에 미를 부여하고 행다의 기능적인 요소가 부합되도록 많은 노력
을 해야 한다.79)
찻사발80)의 조형적 아름다움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아무리 기능이나
색상이 좋다고 해도 조형미가 없으면 찻사발로 쓸 수가 없다. 일반적인 밥그릇
75) 정동주, 『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 (서울 : 한길아트, 2001), p.11.
76) 정동주, 『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 (서울 : 한길아트, 2001), p.11〜12.
77) 차를 우려 마시는 모든 일
78) 신수길, 『茶道具 차생활의 모든 것』 (서울 : 도서출판 솔과학, 2005), p.21.
79) 신수길, 『茶道具 차생활의 모든 것』 (서울 ; 도서출판 솔과학, 2005), p.33〜35.
80) 다완 茶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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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국그릇이 찻사발로 쓰이지 못하는 것도 조형적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이
다.
사발의 조형은 전에서 어깨로 내려오는 선(線)이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게 안정적이어야 하고 배와 허리는 충만한 힘과 멋스러움이 있어야 한다. 그
선은 다시 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굽은 찻사발과 그것의 모든 것을 안전
하게 받혀줄 수 있도록 균형 잡혀 있어야 한다.
또한 찻사발의 허리 아래가 좁으면 내부의 차선(茶筅) 닿는 자리가 좁아져,
가루차를 넣고 차선으로 격불81)을 할 때 불편하며 찻사발의 형태미도 없고 당
당함도 없게 된다. 또 형태미가 있는 것은 두 손으로 잡았을 때도 잡히는 느낌
이 좋고 쓰기에도 대부분 편하다.82)
좋은 찻그릇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찻사발은 조형미가 있어야 하고 손으로
잡았을 때 안정감이 있어야 하며 촉감이 좋아야 한다. 또 적당한 크기로 무겁
지 않아야 하고, 아름다운 색상에 유약이 잘 녹아 있어야 하며, 감상할 수 있
는 포인트가 여러 곳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찻사발은 그 특성에 맞는 흙으로
기능에 맞게 만들어야 하며 조화롭고 안정적인 굽이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두루 갖추었을 때 우리는 좋은 찻사발이라 한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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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분청자기 구름용무늬
[그림1]고려청자
항아리
[그림5]분청자기 음각 어문 [그림6]분청자기 철화 풀
편병 무늬 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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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7]분청자기 귀얄문
[그림8]분청자기 덤벙 접시
다완
[그림9]분청자기 박지 모란 [그림10]분청자기 상감
당초문 병 버드나무 매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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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3]다양한 귀얄 붓 [그림14]분청자기
[그림15]차나무 [그림16]차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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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9]잎 차 [그림20]김홍도 전다한화
[그림23]차 맷돌 [그림24]말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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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6]청자 음각 앵무문
[그림25]말 차 시
다완
[그림27]기자에몬이도다완 [그림28]아오이도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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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절 작품 디자인 계획 및 제작 방법
1. 작품 디자인 계획
2. 제작 방법
1) 태토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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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토, 산백토, 갈색 조형토 등을 사용하였다.
2) 성형
3) 장식
원료명 규석 와목점토 장석 색 안료
조합비(%) 60 35 5 +3
4) 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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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차 소성
6) 시유
원료 장석 규석 석회석 백자점토 도석
조합비(%) 40 20 15 10 15
7) 2차 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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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하였다.
가마는 이틀간 서서히 냉각시켜 200℃ 아래로 내려간 후 가마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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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B
1200
1100
1000
환원
900
A
`800
700
600
500
400
300
200
100
온도(°C)
1 2 3 4 5 6 7 8 9 10 11 12
시간(H)
<표-3> 소성 온도 곡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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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작품 및 설명
<시작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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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품 1. 큰 분청 다완과 나눔 다완 그리고 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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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품 2>
- 41 -
시작품 2. 분청다완
- 42 -
<시작품 3>
- 43 -
시작품 3. 통형 분청 다완과 역삼각형 분청 다완
- 44 -
<시작품 4>
- 45 -
시작품 4. 통형 다완과 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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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품 5>
- 47 -
시작품 5. 분청 다완과 말차 다구 1
- 48 -
<시작품 6>
- 49 -
시작품 6. 분청 다완과 말차 다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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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품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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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품 7. 분청 굵은 선 다완과 다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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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품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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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품 8. 분청 다완과 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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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Ⅲ장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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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차는 차의 잎을 가루 내어 모두 섭취하기 때문에 다른 차보다 카테킨, 카
페인, 미네랄, 비타민, 섬유질 등의 영양소가 풍부하고 기호에 따라 음료에 혼
합 하거나, 요리에 첨가하여 활용하기도 한다. 또한 말차는 다완, 차시, 차선
정도만 있으면 아무 곳에서나 차를 마실 수 있어 간편하고, 차를 마신 후 찻잎
이 남지 않아 버리는 찌꺼기가 없어 간편하게 정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본 연구는 현대인들이 말차에 대해 더욱 흥미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
름답고 사용하기 편한 말차 다완을 분청자기 귀얄기법을 활용하여 제작 하고자
하였다. 또한 여유로운 차문화를 즐기려는 현대인의 감성과 정서를 충족시켜
줄 다양하고 아름다운 다완의 보급에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되며 현대인들이
말차와 다완에 많은 관심을 가져 주고, 많이 음용 하여 줄 것을 바라며, 차문
화의 대중화에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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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 문 헌
1. 국내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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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hin, Mi-Deok
Directed by prof. Kang, Seong-Gon
Dept. of Industrial Design
Graduate School, Honam University
Buncheong-ceramics were appeared at the mid 14th century, and they were
produced to the mid 16th century by 200 years. They were the most naive
and folk artistic things among the ceramics of Korea. They seems good
natured, and has lively patterns which are off the point from delicate
noble sense of Goryeo-celadon has. Also, they are very free, and make the feel
of unhindered liverty. It is the greatest beauty of Bunchung-ceramics that
makes you feel the modern sense while preserving the traditional pattern and
Korean characteristics.
Buncheong-ceramics were started from Goryeo-celadon with sang-gam
technic which was declined already and then developed sang-gam, harmony,
and bakjji-buncheong technics in the first half of the year, finally,
they received heyday in the reign of King Sejong. Inhwa-buncheong was developed
during the period of king Sejo, and from the second half of the 15th century,
when the period of king Sungjong, to the first half of the sixteen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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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the period of king Jungjong, the sang-gam and Inhwa techniques were declined
and the techniques of ironing, guiyal, and immersion became prevalent. They
gradually declined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office kiln of the center of
white porcelain in Gyeonggi-do Gwangju, in the late 15th century, and finally
extincted by absorbed in white porcelain after the mid 16th century.
Buncheong-ceramics were a vessel that were loved throughout from the late
period of the Goryeo Dynasty to the early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but after
the middle of the century, white porcelain had become popular, the
Buncheong-ceramics had settled down as a bowl of common people. They were also
used as a teacup during the period when tea was introduced and prevalented from
China. Especially Dawan was used as a bowl to drink tea.
Tea is one of the beverage made from the young leaf of tea tree (Camellia
sinensis (L.) O kuntze). There are green tea, white tea, blue tea, yellow tea,
black tea, and malcha, among which tea made from green tea.
Malcha is a powdered tea made by finely grinding after drying the steamed tea
leaves with a shade screen at the time when the tea buds come up.
Because when drink malcha, we can drink all the leaves of the tea, so we can
take all kinds of ingredients such as catechin, caffeine, theanine,
polysaccharides and vitamins in tea, and there is also a merit of malcha by drink
easily to putting it in a bowl and bubbling.
Malcha was originated from the Tang Dynasty and continued to the Song Dynasty,
and it was passed down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and it became prevalent at
the period of the goryeo dynasty, and finally declined after middl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The guiyal technique can express the powerful vitality with a one-time hand by
coating white clay into a brush which is made of plant stem such as grass broom,
or animal hair, and using a large brush, by a large and clear brush mark,
contrast can be expressed in a natural way. Also, when white clay is applied to
the whole or part of the object, the effect of surface is almost similar to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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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white porcelain.
Therefore, the researcher will purchase a variety of brushes which are sold on
the market, and make direct brushes using the silver grass, rice straw, and
sorghum, and make the modern dawan with various and free applying of
Buncheong-ceramics guiyal technique in unique way when making the Dawan utilizing
Buncheong-ceramics guiyal technique.
The utilization of the guiyal technique has made a new attempt by dressing the
white engobe in all or part of the dawan, and dressing the colored engobe so as
to make a colorful and beautiful dawan.
Despite the various benefits of malcha, in order to disseminate the
uncommercialized malcha, I would like to study the dawan which is the tea cup of
malcha so I wish to contribute a little to the revival of tea culture and the
revival of Buncheong-ceramics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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