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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삶 (슬로리딩)

강경구, 김도희, 안장혁, 유창민 지음


머리말

문학, 참 모르겠습니다. 교육의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다 보면 무언가 알 수 있게 되리라


기대되던 그것은 여전히 저 알 수 없는 미답의 영역에서 규정할 수 없는 무엇으로 모양을 바
꿔가며 우리에게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외면하자니 가로로 붙어있는 두 눈과 같고, 세로로
세워져 있는 코와 같아 떨어져 본 적이 없습니다. 분명하게 잡아보려니 사막의 신기루처럼 그
것은 저만큼 멀어져 있습니다.
삶, 역시 모르겠습니다. 경험의 이력이 켜를 더해가다 보면 깔끔하게 정리되리라 생각되던
그것은 매순간 사랑과 미움, 기억과 기대가 뒤섞인 혼돈의 연속일 뿐으로 우리를 망연하게 합
니다. 생각 없이 살자니 거기에는 해가 지면 달이 뜨듯 숭고한 원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알
고 이해해 보려니 그것은 앎과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 있습니다.
문학과 삶, 차라리 그것은 오를 수 없는 순은의 태산, 뚫을 수 없는 강철의 절벽〔銀山鐵壁〕
과도 같아 절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저 산의 위와 저 절벽의 뒤에 있는 알 수 없는
무엇이 우리를 끝없이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교육하고 학습하고자 합니다. 규정할
수도 없고 개념 지을 수도 없는 이것을 교육하고 학습하겠다는 것은 모름에 모름을 더하는
일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학과 삶>의 교재를 집필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워보았습니다.
첫째, 이 교재에서는 분명한 무엇을 답으로 제시하려는 시도를 내려놓고자 합니다. 그저 시
대의 앞과 뒤, 바다의 동과 서에 걸쳐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루어진 길 찾기의 흔적들이 아로
새겨진 숲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교육자의 입장에서나 학습자의 입장에서나 이 숲에 뛰어들어
혹은 누군가 걸었던 길을 따라, 혹은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며 캄캄한 모름 속을 걸어보자는
것입니다.
둘째, 좀 천천히, 슬로우하게 걸어보고자 합니다. 서두르나 해찰하나 그저 모를 뿐이라는 자
리에 도착할 거라면 좀 천천히 걷는다 해서 문제될 것은 없어 보입니다. 오직 앞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 지금까지의 삶이었다면 천천히 숲의 풍경에 녹아들고 새소리에 공명하며
문학과 삶의 소풍을 즐기는 길을 하나쯤 선택해보자는 것입니다.
셋째,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활동하는 콜라보의 숲을 가꿔보고자 합니다. 문학
과 삶에 정답이 없기는 하지만 그것은 나와 타인들, 나와 주위의 환경이 날줄 씨줄을 이루어
짜나가는 하나의 직조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숲이 깊으면 다양한 새가 깃들이듯 콜라보의 숲에
서 다양한 모양과 소리의 협업을 이루어보자는 것입니다.
넷째, 문학을 배우기보다 ‘문학하기’를 실천하는 길을 걸어보고자 합니다. 인문학의 위기가
논의된 지 오래되지만 그 핵심은 인문학의 거래되는 양에 있지 않습니다. 문학을 포함한 인문
학은 우리의 삶에 녹아들어 있을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 점에서 직접 써보고 직접
주인공으로 활동해보는 길을 걸어보자는 것입니다.
다섯째, <문학과 삶>의 학습이 우리 대학 교육이 지향하는 핵심 역량에 대한 이해와 연결될
수 있는 길을 걸어보고자 합니다. 차례를 구성하면서 이것이 과하거나 어울리지 않는 욕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작품을 선정하고, 활동 방식을 고안하
면서 문학의 학습과 핵심 역량의 발굴 및 개발이 너무나 어울리는 조합을 이룬다는 것을 확
인할 수 있었습니다. 교육 일반이 그러한 것처럼 핵심 역량의 배양이라는 것도 결국 나에게
본래 내재된 것을 발굴하고 개발하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문학을 통해 삶에 대한 깊은 이해
와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내재된 핵심 역량에 눈뜨는 일이기도 한 것입
니다. 그러므로 학습 계획을 수립하는 단계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 대학의 6대 핵심 역량에 대
해 개관해보는 일은 대단히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영역 구분 역량 하위 교육목표 의미

자신의 강점, 약점을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이 속한


자기주도 학습을
자기경영 역량 사회나 직장에서 요구되는 역량을 파악하며 이를
실용지성 통한 전문성 계발
자기주도적 학습을 통해 계발함.
(전문인)
전문지식을 통한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 가치관을 배양하고 이를
글로컬 역량
지역과 세계에 기여 지역과 세계 발전을 위해 적절히 활용함.

관용과 배려를 통한 타인에 대한 관용, 배려, 사랑을 바탕으로 타인과


나눔 역량
협력인성 자발적 나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발적으로 봉사함.
(세계시민) 이성과 감성을 통한 합리적 이성과 공감적 감성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소통 역량
공동체 소통 민주적으로 소통함.

다원적 사고를 통한 주어진 문제에 대하여 다원적으로 사고하고 융합을


융합 역량
문제 해결 통한 창의적 문제 해결 방법을 창안함.
창의실천
(지도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한
능동적 실천을 통한
도전성취 역량 편 자신의 역할과 위상을 능동적으로 계발하고 실
미래 개척
천함.

[동의대학교 6대 핵심 역량]

이상에서 말한 원칙들은 모두 교재의 구성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우선 전체 여섯 개의 장 제목과 내용을 우리 대학의 6대 핵심 역량으로 설정하였습니다. 학
습자들은 각 장을 학습하면서 자기에게 내재하는 역량을 이해하고 발견하는 길을 걸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각 장에는 그 주제에 어울리는 4개의 문학텍스트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선정
에 특별한 원칙이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선정된 작품은 한국 → 외국, 현대 → 고전, 소설 → 기
타 문학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학습자들에게 어울리는 작품, 학습자들이 선호하는 작
품을 적절하게 골라 학습의 내용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문학작품을 읽는 일이 말하기와 쓰기를 동반하는 일이라는 점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을 마련하고 각 장의 주제와 작품에 어울리는 활동 문항들을 제시
하였습니다. 제시된 문항에 따라 토론과 글쓰기를 진행하여도 좋을 것이고, 또 교수자와 학습
자가 협의하여 새로운 문항을 개발하여 활동에 임해도 좋을 것입니다.
넷째, 능동적인 학습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질문의 숲’을 마련하여 학습자들이 워크시
트에 도전적인 질문을 채워나가며 함께 토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
하는 지문이 있기는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현장에서 질문을 일으키는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므로 질문에 특별한 제한을 둘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 문학 공부는 삶과 유리된 대상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장에 눈뜨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직접 문학이라는 행위를 하도록 인도하는 ‘체험의 숲’을 마련하였습
니다. 개인별, 팀별로 활동하기에 적절한 항목을 제시하고자 하였지만 제시된 항목 외에 교수
자와 학습자가 토의하여 다양한 활동을 기획·실천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째, 각 장의 마지막에는 깊은 문학성과 넓은 대중성을 함께 갖춘 시를 한 편씩 제시하
여 두었습니다. 우리가 문학과 삶에 대한 이해를 말하고, 우리에게 내재된 역량에 대한 발굴
과 개발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는 매 순간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 앞에 침묵합니다. 한 편의 시를 가만히 읽으며 이전의 수다스러움을 잠시 내려
놓고 침묵으로 마침표를 찍는 시간을 가져 보았으면 합니다.
일곱째, 이상의 다양한 활동은 적절한 문제 제기로 인해 가능합니다. 간혹 각 작품별로 제
시된 문항이 학생들의 활발한 활동을 이끌어내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문제은행’을 마련하
였습니다. 이 문항들은 비교적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필요에 따라
적절히 선택하여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동의지천교양대학의 문학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교수들 간의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만남과 토론을 통해 구상되고 집필되었습니다. 교재 집필의 책임을 맡은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
발전을 위해 투자되어야 할 소중한 시간을 빼앗은 감이 없지 않아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
럼에도 집필 기간 동안 보여준 교수님들의 문학에 대한 조예와 교육에 대한 열정은 큰 감동
과 행복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 책에 충분히 담겨있다고 믿습니다.

2020. 2. 2.
저자들을 대표하여 동의지천교양대학 학장 강경구
차 례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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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도현의 <연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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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톤 체호프의 <나의 인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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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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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마천의 <백이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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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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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은영의 <씬짜오, 씬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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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범신의 <나마스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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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황석영의 <바리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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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사의 <타국 인재 추방령에 대해 올리는 의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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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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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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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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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영희의 <눈먼 소년이 어떻게 돕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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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맹자의 <양혜왕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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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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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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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태준의 <복덕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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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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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굴원의 <어부 이야기>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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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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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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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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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융의 <소오강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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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재천의 통섭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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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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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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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2.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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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3. 이어령의 『젊음의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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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4. 사마천의 <인상여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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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3

제 장 1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좌표를 찾아야 하는 문제는 오늘날의 청


춘들에게 절박한 과제가 되고 있다. 정체성은 나의 신념과 가치관을 형성하고 현재의 내 모습
은 물론 미래의 내 삶까지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자기경영 역량이란 이러한 정체성 확립
을 통해 자아실현의 길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려는 자기 주도적 진로 설계 능력을 의미한다. 자
기경영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능력과 성격과 욕
망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자문해 보고, 자신만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인식한
후 그에 맞는 삶의 지향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청춘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찾지 못하고, 자신의 재능을 발
견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경영의 의미와 가치를 도외시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
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타인의 취향과 욕망을 무비판적으로 따라하려는 이른바 모
방 욕망에 휘둘리고 있는 탓이 클 것이다. 오늘날 너나 할 것 없이 명품이나 획일화된 스펙을
추구하는 사회적 현상, 외모지상주의라는 집단 주술에 빠져 있는 병리 현상도 바로 이 모방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바라볼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Maslow)는 ‘욕구 발전 5단계론’에서 진정한 자아실현은 타인의
욕망과 사회적 요구를 뛰어넘을 때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라 조언한다. 모방 욕망의 유혹과 외
부의 가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곳에서 자아경영의 길은 시작된다고 일러준다.
삶의 행복과 의미는 참다운 자아 발견에서 시작된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보편적 진리
라 할 수 있다. 자아 발견 혹은 자기경영의 첫걸음은 현재 자신이 어떤 환경과 조건에 놓여
있고, 어떤 이상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타인들과의 관계는 어떤지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
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장에서 소개할 네 개의 문학 텍스트인 안도현의 <연어>, 안톤 체호프의 <나의 인생>, 로
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사마천의 <백이열전>은 우리를 자기경영의
숲으로 데려다 줄 산책 길이 되어 줄 것이다.
어떤 길은 자아 발견과 자아실현의 가치를 환기시켜 줄 것이고, 어떤 길은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기경영의 잠재력을 품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 줄 것이며, 어떤 길은 젊은 날의
고뇌와 아픔, 반항과 방황, 혼란과 불안, 갈등과 격정 등이 참된 자아를 만나는 여정에서 감내
해야 할 소중한 경험임을 일깨워 줄 것이다.
4 문학과 삶(슬로리딩)

1 안도현의 <연어>

1961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한 시인 안도현. 그는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암시하는 것처럼 정통성 없는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의식과 소외 계층을 향한
사랑이 그의 초기 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등단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의 시에서 변함없
이 남아 있는 특징은 세상의 모순과 폐단을 비판하면서도 세상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나아가 그는 서민들의 고단한 일상에 대한 연민과 자연친화적 세계에 대한 동경
을 특유의 서정적 문체로 녹여내면서 한국 시단에서 중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
히 그의 시 <너에게 묻는다>에서 울려 퍼지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자기성찰의 물음은 점점 더 각박해지는 세상 속에서
이타적 손길의 불꽃을 살려 내려는 시적 화두가 되었다.
<연어>는 시인 안도현의 섬세한 시적 감수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작품이다. 연어의 모천회
귀라는 존재 방식에 따른 성장의 고통과 아프고 간절한 사랑을 작가는 깊은 시선으로 담아내
고 있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 한 마리 연어가 나고 자라면서 삶의 최
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현대인의 삶을 온전히 재현해 낸다. 주인공 은빛연어가 폭포
를 거슬러 오르며 성장해 가는 여정은 자기경영과 자아실현의 가치를 오롯이 품고 있다. 은빛
연어는 생명이 아름다운 것은 자기를 보전하고 후대를 이으려는 강한 의지에 있다는 사실을,
연어가 아름다운 것은 떼를 지어 거슬러 오를 줄 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 처절한 생존 투
쟁의 공간을 통해 깨닫게 된다.
바다에서 시작해 초록강, 폭포, 그리고 탄생 공간 순으로 이어지는 은빛연어의 여정은 다양
한 모험과 만남으로 채워져 있다. 은빛연어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쉬운 길이 아닌 연어만의
길, 즉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험난한 길을 택한다.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등장하는 포식자
물수리,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마주치는 숱한 오염 물질과 불곰 등과 같은 위험 요소 속에서
은빛연어는 자기경영의 가치와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그에게 바다와 강은 증오와 애정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누나의 죽음을 계기로 무력감과 상실감을 안겨 준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존재의 의미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워 준 삶의 터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멘토와도 같은 초록강에게서 듣게 된 아버지 은빛연어에 관한 이야기는 은빛연어가
삶의 방향을 정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로 작용한다. 아버지도 은빛연어와
같이 등이 은색이었고 연어 무리의 존경을 받은 훌륭한 지도자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
다. 은빛연어는 아버지가 선택했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쉽고 평탄한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는 험난한 길이다. 그 길은 폭포와 하나가 됨으로써 그것을 뛰어넘는 자
기경영의 길이자 자기성장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5

【읽기의 숲】

은빛연어는 눈맑은 연어에게 말했다.


“우리가 강을 거슬러 오르는 이유가 오직 알을 낳기 위해서일까? 알을 낳기 위해 사
랑을 하는 것, 그게 우리 삶의 전부라고 너는 생각하니? 아닐 거야. 연어에게는 연어만의
독특한 삶의 이유가 있을 거야. 우리가 아직 그것을 찾지 못했을 뿐이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하면 우리 삶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글쎄, 네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겠어. 어쨌든…… 나는…… 알을 낳아야 해. 그
누구도 아닌, 너와 나의 알을 말이야.”
눈맑은연어는 은빛연어에게 부풀어 오른 하얀 배를 보여주고 싶었다. 은빛연어에게 마
음의 눈으로 알을 한 번 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상류로 가서 뱃속에 있는 알을 낳는
일, 그 중요한 일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은빛연어가 자꾸 안쓰럽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나뭇잎들은 왜 강 아래로 내려가지요?”
은빛연어가 신기해하면서 묻자,
“그건 거슬러 오를 줄 모르기 때문이야.”
하고 초록강이 말했다.
“거슬러 오른다는 건 또 뭐죠?”
다시 은빛연어가 묻자, 초록강은 물살을 약하게 조절하면서 웃는다. 그때 강은 마치 흐
름을 멈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흐름을 멈춘 강이란 이 세상에 없다. 강물은 쉬지 않고
흐른다. 속이 깊은 강일수록 흐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거슬러 오른다는 건 뭐죠?”
초록강은 여전히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는다. 초록강은 대답 대신에,
“은빛연어야, 너는 너 혼자의 힘으로 강을 거슬러 오른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하고 말했다.
“그럼요?”
“혼자라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연어 무리는 특히 그렇지. 연어가 아름다운 것은 떼를
지어 거슬러 오를 줄 알기 때문이야.”
“왜 우리는 거슬러 오르는 거지요?”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간다는 뜻이지. 꿈이랄까, 희망 같은
거 말이야. 힘겹지만 아름다운 일이란다.”
은빛연어는 초록강의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듣겠다는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귀를
기울인다.
“강물이 왜 하류로 흐르는지, 너는 아니?”
“그건 거슬러 오를 줄 모르기 때문인가요?”
“하하하하.”
6 문학과 삶(슬로리딩)

초록강이 큰 소리로 웃었다. 강이 크게 웃으면 강가에 철썩철썩 물살이 이는데, 강가의


갈대밭 전체가 흔들릴 정도다. 은빛연어는 초록강의 말을 너무 쉽게 받아 넘겼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강이 하류로 흐르는 건 연어들을 거슬러 오르게 하기 위해서야.”
“그럼 우리는 강물 때문에 거슬러 오르는 것이군요.”
“그래. 강물은 아래로 흐르면서 연어들을 가르친단다.”
“가르친다고요?”
초록강이 천천히 말을 잇는다.
“강물은 아래로 흐르면서 자신의 물살과 체온을 연어들에게 가르친단다. 그리고 길을
가르쳐주지. 연어들이 반드시 강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는 것을, 또한 거슬러 올라야 하는
이유를 말이야.”
은빛연어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다. 아닌 게 아니라 강은 자신의 몸 전체로 연어들의
길을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이다.
“거슬러 오르는 것은 희망을 찾아가는 거라 하셨죠?”
“그렇단다.”
“그럼 희망이란 알을 낳는 것인가요?”
은빛연어는 실망한 듯 묻는다.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아저씨! 그런 대답이 어디 있나요.”
은빛연어가 투정하듯 대들자 강이 말한다.
“그러면 은빛연어야, 너의 희망은 뭐니?”
초록강의 갑작스런 물음에 은빛연어는 막바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은빛연어는 너무 많
은 희망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희망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희망이란 정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은빛연어는 생각한다.
속 깊은 아저씨같이 고요하고 푸른 강물. 그 따뜻함 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강이 고
여 있는 것인지, 흐르고 있는 것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늑하다.
“은빛연어야, 너는 바다를 보았겠구나.”
초록강은 바다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강은 아직 바다에 닿지 못한 것이다.
“네가 본 바다에 대해서 나한테 이야기해줄 수 있겠니?”
은빛연어는 바다 이야기라면 자신이 있다.
“바다는 끝이 없어요.”
“얼마나 넓기에 끝이 없다는 거지?”
“넓이가 아니라 싸움이 끝날 날이 없다는 거예요. 서로 물고 뜯고 죽이는 싸움 말이에
요. 그 싸움 때문에 거친 파도가 잘 날이 없어요.”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7

…… (중략) ……

“아저씨는 왜 바다로 가고 싶은 거예요?”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걸.”
강이 시치미를 떼면서 말한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지금도 쉬지 않고 흐르고 있잖아요.”
“물론 그건 맞아. 그렇지만 바다로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야.”
은빛연어는 강이 엉뚱한 구석이 좀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 없는 삶이 있을까요?”
“네 말대로 이유 없는 삶이란 없지.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럼 아저씨의 삶의 이유는 뭔가요?”
“그건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그 자체야.”
“존재한다는 게 삶의 이유라구요?”
“그래,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나 아닌 것들의 배경이 된다는 뜻이지.”
은빛연어는 배경, 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언젠가, 나의 배경은 턱큰연어야, 라면서
거들먹거리던 연어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툭하면 남의 먹이를 빼앗았고, 힘자랑
을 일삼았다. 그들은 연어 무리의 작은 법률이라도 되는 듯 행세했던 것이다. 그래서 배
경, 이란 늘 무섭고 어두운 거라고 그는 생각해 왔던 것이다.
“배경이란 뭐죠?”
“내가 지금 여기서 너를 감싸고 있는 것, 나는 여기 있음으로 해서 너의 배경이 되는
거야.”
“아하!”
똑같은 단어도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엄청나게 의미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은빛연어는 알았다.
예를 들면 상처, 라는 말도 그렇다. 눈맑은연어의 등지느러미에는 불곰의 공격 때문에
입은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상처는 찢어진 헝겊 조각처럼 너덜거린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연어들은 보기 흉하다며 고개를 돌리기 일쑤다. 그들은 상처, 라는 말을 보기
싫은 흉터로 이해한다. 하지만 은빛연어는 그 상처를 자신의 상처로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고 있는 것이다. 다만, 네가 아플 것 같아서 나는 아프지 않을 거야, 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 뿐.
“이제 조금 알겠니?”
“네. 별이 빛나는 것은 어둠이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죠?”
“그렇지.”
“그리고 꽃이 아름다운 것은 땅이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고요?”
“그렇지.”
8 문학과 삶(슬로리딩)

“그러면 연어 떼가 아름다운 것은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인가요?”


“그래, 그렇고말고.”
강은 은빛연어가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은빛연어는 물속뿐만 아니라 하늘과 대지의 이
치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생각 깊은 연어인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이치를 안
다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자연의 일부임을 안다는 뜻이다. 다만,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
연을 얕보는 지상의 인간들만이 그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강은 그것을 언
제나 안타까워했다.
“그럼 나도 누구의 배경이 될 수 있겠네요?”
“네가?”
“왜요? 내가 너무 작아서 안 되나요?”
“아니야.”
“그러면요?”
“네가 기특해서 그런 거란다. 몸집이 커야 배경이 되는 게 아니거든. 우리는 누구나 우
리 아닌 것의 배경이 될 수 있어.”

- 안도현, <연어>, 문학동네, 1996.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9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간다는 뜻이지. 꿈이랄까, 희망 같은 거


말이야. 힘겹지만 아름다운 일이란다.”라는 대목과 관련하여 내가 살아가면서 거슬러 올라
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 보자.

2 은빛연어는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오르는 이유가 오로지 알을 낳기 위해서”라는 주장에 거


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보자.

3 은빛연어가 깨달은 ‘연어의 길’이란 무엇인지 자기경영의 차원에서 말해 보자.

4 초록강은 인간을 ‘낚싯대를 가진 인간’과 ‘카메라를 가진 인간’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두


유형의 인간에게 어떤 가치관의 차이가 있을지 비교하여 서술해 보자.

5 어떤 존재든지 타인의 배경이 되어 줄 수 있다. 또한 배경 없이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나의


소중한 배경은 무엇이며, 내가 타인의 배경이 될 수 있는 실천적인 방식은 무엇인지에 대
해 서술해 보자.
10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은빛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성장의 과정


이기도 하다. 저마다 추구하는 ‘자기성장과 자기경영의 길’이 무엇인지 질문을 통해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서로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11

【체험의 숲】

자기경영 역량이란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나 직장에서 요
구하는 역할과 활동을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자
기경영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개인적 차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내가 처해 있는 사회적·환
경적 요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자기경영의 길’이라는 주제로 기본적으로
준비해야 할 사항, 예상되는 장애 요소, 극복 방안, 만나고 싶은 조력자(멘토) 등에 대해 작성
해 보자.

항목 자기경영의 길
만나고 싶은
조력자(멘토)

예상되는
장애 요소

장애 요소
극복 방안

기본적인
준비 사항

실현 가능성(%)

조력자(멘토)와의
인터뷰

느낀 점
12 문학과 삶(슬로리딩)

2 안톤 체호프의 <나의 인생>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삶에 대한 통찰과 인간적인 성숙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물음들이다. 특히 대학 시절은 타자에 대한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인생의 본
질적인 물음들에 조금씩 눈을 떠가는 시기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좌표를 찾아가는 중요
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자아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시
행착오, 주변과의 불협화음으로 인한 고뇌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한
청년의 삶의 여정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안톤 체호프의 <나의 인생>은 오늘날의 청춘들
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다.
19세기 말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자이자 단편소설의 거장(巨匠)으로 불리는 안톤 체
호프(1860~1904)는 러시아 남부 타간로크(Taganrog)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 식료품 잡화
상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파산함에 따라 고학으로 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879년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한 후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신문, 잡지 등에 글을 기고하면서 어렵게 생활
을 이어갔다. 1884년 의사 자격을 얻고 졸업한 그는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의사였던 동시에,
인간사의 어두운 면을 희극적으로 표현한 사실주의 작가로서도 점차 명성을 얻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은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인간
의 운명을 예술적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묘사한 작가’, ‘살아 숨 쉬는 인간상을 정치적 메시지
나 문학적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그려낸 작가’라는 등의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시인 김억에 의해 1920년대에 자연주의 작가로 소개되었으며, 그의 작품 경향은 당시
우리 문단의 대표 작가였던 현진건, 이태준 등의 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편소설 <나의 인생>은 엄격한 부친과의 대립 및 저항, 학창 시절부터 가장 역할을 하며
절감했을 노동의 신성한 가치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여러 직
장을 전전하다가 아홉 번째 직장에서도 해고를 당한 주인공 미사일 폴로즈네프는 가문의 품위
를 강조하며 엄하게 다그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도장공 레지카의 조수가 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스스로 일해 빵을 벌겠다는 평소의 신념을 실행에 옮기자 귀
족 사회는 물론, 하층 계급으로부터도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만다.
당시 귀족 사회에서부터 평민 사회까지 깊이 만연된 뇌물, 위선, 부정의 관습은 미사일 폴
로즈네프가 원하는 삶을 실현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수한 육체
노동으로 살아가겠다는 자신의 인생관을 관철시키고자 고군분투한다. 주인공은 시련을 거치면
서 오히려 점점 더 자유를 느끼고 자신이 선택한 삶과 그 세계에 안착하게 된다. 작가는 신분
이 제공하는 기득권을 버리고 양심을 지키면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삶의 여정을 담담
하게 그리는 가운데 당시 사회에 만연한 위선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주인공의 삶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는 이와 같은 메시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청춘들에게도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진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 줄 것이다.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13

【읽기의 숲】

국장이 말했다. “내가 자네를 데리고 있는 것은 순전히 자네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 때


문이야. 안 그랬으면 자넨 벌써 날아갔다고.” 나는 그에게 대답해주었다. “저에게 날아다
니라니요. 너무 과대평가하시네요.” 곧이어 국장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 작자를 데리고
가. 보고 있으니 골이 다 지끈거리는군.”
이틀 후 나는 해고당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어른 대접을 받은 이후로, 건축가인 아버
지를 실망시키면서 아홉 번째 직장에서 짐을 싸야 했다. 여러 관청을 전전했지만, 내가
했던 일들은 한결같이 똑같았다. 꼼짝없이 앉아서 뭔가를 쓰고, 온갖 엉터리 같은 말과
무례한 호통을 참아내면서 해고될 날만을 기다렸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안락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아 있었다. 비쩍 마른 아버지의 얼굴에는
면도자국이 파랬고(그는 영락없이 성당의 늙은 오르간 연주가 같았다.) 표정은 부드러우
면서도 체념한 듯했다. 안부를 묻는 나의 말에 아버지는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만약 나의 아내이자 네 어미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넌 어미에게 끊임없이 고통만을
주었을 거다. 네 엄마가 그렇게 빨리 죽은 것도 이제 보니 하느님의 뜻이었나 보구나. 이
불쌍한 녀석아.” 아버지는 눈을 뜨고 말을 이어갔다. “도대체 널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가
르쳐다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사람들은 날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나에게 군대에 지원해보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약국에 취업해보라고 했으며, 또 누구는
전보국에서 일해보라고도 했다. 하지만 스물다섯 살이 넘고, 정수리에 희끗희끗한 새치도
나고, 군대와 약국과 전보국에서도 쫓겨난 지금, 나는 이 세상의 온갖 것을 다 경험해 본
것 같았다. 아무도 내게 충고하려 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만 가로저을 따름이었다.
“넌 네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버지가 말했다. “네 나이의 다른 젊은이
들은 벌써 든든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는데, 네 자신을 한 번 봐라! 프롤레타리아, 비
렁뱅이. 아직도 아비에게 얹혀살다니!”
아버지는 곧, 요즘 젊은이들은 신앙심도 없고 물질주의와 쓸데없는 자만으로 자멸하고
있으며, 아마추어 연극 같은 것은 젊은이들을 책임감과 신성한 종교에서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에 당장 중지시켜야 한다는 둥, 늘 하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일 나와 같이 가서 국장님께 잘못을 빌고 성실히 근무하겠다고 약속드려라. 단 하루
도 사회적 지위 없이 빈둥거려서는 안 된다.”
“아버지,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말해봤자 별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암담한
기분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사회적 지위라는 건 결국 돈과 교
육의 혜택 같은 것 아닙니까.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육체노동으로 빵을 벌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왜 예외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는 늘 육체노동 운운하는데, 네 말은 엉터리고 속물스럽다!” 아버지는 짜증을 내며
14 문학과 삶(슬로리딩)

말했다. “이 멍청한 놈아. 꼭 육체적 힘이 아니더라도, 네 안에는 너를 당나귀나 다른 잡


스러운 것들과 구별시키고, 신과 가깝게 만드는 신성(神性)과 성화(聖火)가 깃들어 있다.
이 성스런 불꽃은 수천 년 동안 가장 뛰어난 사람들만이 획득해온 것이란 말이다. 너의
증조부이신 폴로즈네프 장군님은 보로딘에서 전투하셨고, 네 할아버지는 시인이자 연사이
고 궁중관리였다. 네 숙부는 교육자였고, 그리고 네 아비인 나는 건축가다! 모든 폴로즈
네프 가문 사람들이 이 성스러운 불꽃을 보존해왔는데, 네가 그것을 꺼트리겠단 말이냐!”
“공정하게 생각해보세요. 수백만의 사람이 육체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라고 하지! 그것 말고 다른 일은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잖느냐. 육체노동이란 멍텅
구리나 범죄자도 할 수 있는 게다. 노예와 야만인의 특성이란 말이다. 그러나 성스러운
불꽃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대화를 계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숭배하고 있었고, 오직 자기만
옳은 것이다. 게다가 노동에 대한 아버지의 경멸은 성스러운 불꽃 따위 때문이 아니라,
결국 그의 아들인 내가 노동자로 전락해 온 도시의 화젯거리가 되는 게 은근히 두려워서
이다. 내 동갑내기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으며, 국장의 아들은
벌써 8등 문관이 되었는데, 아버지의 외아들인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
대화를 계속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불쾌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나를 이해해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미미하게나마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있었다. 결국 모든 문
제의 초점은 내가 어떻게 내 빵을 버느냐는 것인데, 모두들 보로딘이니 성화니 한때 저
속한 시를 썼던 잊혀진 시인과 교육자였던 숙부를 들먹여가며 듣기 좋게 빙 둘러 말하거
나, 아예 대놓고 밥통이라고 욕했다. 아, 나는 얼마나 이해받기를 원했던가! 그럼에도 나
는 아버지와 누이를 사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매사를 그들과 의논했고 나의 그런 습관은
결코 고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잘못할 때도 있고 옳을 때도 있었지만, 식구들을 실망시킬
까 봐 늘 두려웠다. 흥분으로 인해 아버지의 가는 목이 붉어지면, 충격을 받지나 않을지
겁이 덜컥 났다.
“후텁지근한 방에 앉아서 타이프라이터하고 씨름하는 것은, 제 나이 또래에게는 모욕적
인 일입니다. 이것이 성스러운 불꽃과 무슨 상관인가요?”
“그래도 그건 지적인 노동이다. 좋다. 이 이야기는 그만두자꾸나. 경고하는데, 만약 네
가 직장에 가지 않고 그 경멸스러운 사상을 고집한다면, 나와 네 누이는 너에 대한 사랑
을 거두어버릴 것이다. 너에게 유산을 남기지도 않겠다. 신께 맹세컨대!”
나는 온 인생을 바쳐 지향하는 나의 열정이 얼마나 순수한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서, 불쑥 이렇게 말했다. “유산은 제게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유산을 포기
하겠습니다.”
뜻밖에도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아버지의 가느다란 금속성 목
소리가 크게 울렸다.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고!” 그리고 익숙한 동작으로 순식간에 내 목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15

을 두 번 연이어 때렸다. “이놈 제정신이 아니구나!”


어린 시절 아버지가 때릴 때마다 나는 차려 자세로 똑바로 서서 아버지를 바라보아야
했다. 지금도 아버지가 손을 들라치면, 나는 정신이 아득해져서 마치 아직까지 유년 시절
이 계속되는 것처럼, 빳빳하게 굳은 채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늙었고 대단히 여
위었지만, 그의 가는 근육은 가죽 끈처럼 단단해서 맞을 때마다 몹시 아팠다.
나는 현관으로 뒷걸음질쳤지만, 아버지는 우산을 집어들고 몇 번씩이나 머리와 어깨를
후려쳤다. 이때 누이가 웬 소동인가 싶어 거실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금세 놀라움과 연민으로 일그러졌지만, 내 역성을 들어주는 말 한마디 못한 채 돌아섰다.
노동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할 것
인지 정하는 것만 남았다. 그러나 이것도 그리 복잡할 것 같지는 않았다. 튼튼한 체력과
지구력으로 어떤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앞에는 배고프고 냄새나고 거
칠며 항상 돈과 빵 걱정을 해야 하는 단순 노동자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볼샤
야 드보랸스카야 거리를 걸어 일터에서 돌아올 때, 소위 지적인 노동으로 살아가는 돌쥐
코프 기사를 부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미래의 번민을 예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나도 한때 선생이나 의사, 작가를 꿈꾸며 정신적인 노동을 해볼 생
각도 있었지만, 꿈은 그저 꿈으로 남았다. 지적인 쾌락에 대한 나의 선호는 열정적이기까
지 했지만, 과연 지적인 노동에 재능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학교 다닐 때 나는 지독하게
도 그리스어가 싫었다. 그래서 결국 4학년에서 유급되고 말았지만, 가정교사들을 불러가
며 5학년으로 진급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여러 관청에서 근무
했지만, 대부분 허송세월만 했다.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지적인 노동이라고 말했지만, 내
가 했던 공부와 직장은 정신적인 긴장이나 재능, 개인적인 능력, 창조적인 영감하고는 거
리가 멀었다. 그것은 그저 기계적인 일일 뿐이었다. 나는 소위 그러한 지적인 노동은 육
체노동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경멸한다. 그런 일은 사기나 무위도식과 다를 바 없으므
로, 그런 일로 잠시라도 시간을 무익하게 쓰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아마 난 진
정한 의미의 지적인 노동은 아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저녁이 되었다. 우리는 시에서 가장 큰 거리인 볼샤야 드보랸스카야에서 살고 있었다.
제대로 된 시립공원이 없었기 때문에, 저녁마다 보몽드*가 산책하는 장소였다. 이 아름다
운 거리의 양편으로는 비 온 뒤 특히 향기가 좋은 미루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담장과 울
타리 뒤로는 아카시아, 라일락, 벚꽃, 사과나무가 있었다. 그래서 거리라기보다는 공원 같
은 곳이었다. 5월의 노을, 연하고 어린 풀 그늘, 라일락 향기, 딱정벌레가 날아다니는 소
리, 고요함, 따스한 온기, 아, 봄은 매년 오는데도 이 모든 것들이 해마다 얼마나 새롭고
신선한지! 나는 정자 옆에 서서 산책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과 함께 뛰놀며
자랐지만, 초라하고 유행에 뒤진 지금의 행색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그들은 당황할 것이
다. 내 좁은 바지와 크고 보기 흉한 장화를 보고 그들은 숙덕이곤 했다. 게다가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이 싸구려 주막에서 당구를 치며, 무고하게 두 번이나 헌병에게 끌려간
16 문학과 삶(슬로리딩)

일을 두고 시내에서는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맞은편 돌쥐코프 기사의 큰 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고 어둑어둑해진 하늘에 별들
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사람들의 인사에 응답하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는 위로 말린 넓은 챙이 달린 오래된 실크해트를 쓰고, 누이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좀 보려무나!” 아버지는 일전에 나를 때렸던 그 우산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하늘을
봐라! 아주 작은 별들까지도 모두 하나의 세상이다. 이 우주 속의 인간은 얼마나 왜소한
존재란 말이냐.”
그는 마치 자신이 왜소한 존재라는 사실이 매우 즐겁고 유쾌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버
지는 얼마나 무능한 사람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곳에서 유일한 건축가였으며, 최근
십오 년에서 이십 년 사이 내 기억에 이곳에는 단 한 채의 그럴싸한 집도 지어진 적이
없었다. 설계 의뢰를 받으면, 아버지는 항상 홀과 거실부터 설계했다. 마치 예전에 여학
교 학생들이 늘 난로 주변에서부터 댄스를 시작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예술적 구상이란
늘 홀과 거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홀과 거실에 덧붙여 식당, 아이들 방, 서재를 만들었
고, 방에 문을 붙이고, 그러고 나면 이 모든 공간들이 꼭 하나로 연결되어 한 방에 필요
없는 문이 두세 개씩이나 되곤 했다. 아버지의 예술적 구상이란 불분명하고 극도로 혼란
스러우며 불완전한 것이었다. 매번 아버지는 무언가 모자란다고 느끼고는 여러 가지 별채
들을 하나씩 더해갔다. 나는 지금도 좁은 현관과 비좁은 복도 그리고 층계참으로 향하는
비뚤어진 층계를 선명히 기억한다. 층계참은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는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천장이 낮았으며, 욕실의 선반 같은 커다란 판자조각 세 장이 깔려 있을 뿐이었
다. 부엌에는 반드시 아치가 있었으며, 마루는 벽돌로 깔려 있었다. 집은 고집스럽고 딱
딱한 느낌이 들고, 선은 메마르고 어색했으며, 지붕은 너무 낮아서 납작하게 눌러놓은 것
같았다. 뭉툭하고 두꺼운 굴뚝에 있는 철사로 만든 덮개에는 반드시 검고 삐걱대는 풍향
기가 달려 있었다. 아버지가 설계한 집들은 모두 비슷해서, 아버지의 실크해트와 윤기 없
고 고집스러운 뒤통수를 연상시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아버지의 서툰 솜씨에 익
숙해졌고, 마침내 그것은 우리 도시의 스타일이 되고 말았다.
바로 그 스타일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내 누이의 삶에도 강요했다. 누이를 클레오파트라
라고 부르는 것부터 그런 식이다. (나를 미사일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누이의 소녀 시절,
아버지는 온갖 별과 고대의 현자, 우리 조상에 대한 이야기로 누이를 겁주었고, 인생과
의무가 무엇인지 지루하게 설명하곤 했다. 아직도 아버지는 26세나 된 누이가 오직 당신
의 팔만 붙잡고 다니게 했으며, 조만간 당신에 대한 존경심으로 딸에게 청혼할 근사한
젊은이가 나타날 거라고 상상했다. 누이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두려워했으며 그의 비상한
재능을 믿었다.
완전히 날이 저물었다. 거리에는 사람들 수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맞은편 집에
서 들리던 음악이 멈추었다. 대문이 활짝 열리고, 방울을 울리며 트로이카가 달려 나왔
다. 그 안에는 돌쥐코프 씨와 그의 딸이 타고 있었다. 자, 이제 잘 때가 되었다!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17

집에는 내 방이 따로 있었지만, 나는 벽돌 창고를 겸한 뜰의 오두막에 혼자 살고 있다.


옛날에 마구(馬具)를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벽에는 갖가지 선반이 달려 있지만
지금은 쓸모없어졌다. 또한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반 년치씩 신문을 묶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벌써 삼십 년간이나 보관하고 있었다. 그곳에 살면서는 아버지나 아버
지의 친구들 눈에 덜 띌 수 있었다. 내 방이 아닌 다른 곳에 지내면서 집 안으로 밥 먹
으러 가는 걸 가끔 거른다면, 아버지 신세를 지고 산다는 말이 그렇게 못 견디게 들리지
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모르게 내게 빵 한 조각과 차가운 송아지 고기 한 점
을 저녁식사로 가져다주었다. 우리 집에서는 “돈은 계산을 좋아한다”, “코페이카는 루블
을 절약한다”는** 식의 말을 자주했다. 누이는 이런 저속한 말에 짓눌려서 조금이라도 지
출을 줄여보고자 애썼으며, 그 때문에 우리의 식단은 늘 궁색했다. 누이는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고 내 침대에 앉아서 울었다.
“미사일, 너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니?” 누이가 손으로 얼굴을 닦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눈물은 가슴과 손으로 흘러내렸고 표정은 구슬펐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너 또 직장을 그만두었구나……. 정말 너무했어!”
“누나, 나를 이해해줘요.” 누나의 흐느낌으로 나는 심한 절망에 빠졌다.
마침 그때 램프의 석유가 다 닳았다. 램프는 곧 꺼지려는 듯이 그을음을 냈다. 벽에 붙
은 선반들은 무시무시하게 보였고, 그림자는 흔들렸다.
“우리를 가엾게 여겨주렴!” 누이는 일어서며 말했다. “아버지는 무척 슬퍼하고 계셔.
나는 미칠 것 같아. 네게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녀는 울면서 내게 팔을 내밀었다.
“부탁할게. 돌아가신 어머님의 이름을 걸고 애원할게. 제발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렴!”
“그럴 수 없어요. 클레오파트라!” 말은 이렇게 했지만, 누이가 계속 매달리면 항복하고
말 것 같았다. “그럴 수 없다니까요!”
“왜 안 된다는 거니? 왜? 만약 윗사람하고 사이가 좋지 못하면, 다른 일을 찾아보렴.
철도청에서 일해도 좋지 않을까? 얼마 전에 아뉴타 블라고보 양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아가씨는 철도청에서 너를 받아줄 거라고 확신하더라. 너를 도와주겠다는 약속까지 했
는걸. 제발, 미사일, 생각 좀 해봐. 부탁이야!”
조금 더 이야기한 후 마침내 나는 항복했다. 철도건설 현장에서 일할 생각은 여태껏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한번 시도해 볼 생각은 있노라고 말해버렸다.
누이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나 곧
다시 울기 시작했다.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석유를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

- 안톤 체호프 지음, 남혜현 옮김, <나의 인생>, 작가정신, 2013.

*보몽드 : 상류층
**100코페이카는 1루블
18 문학과 삶(슬로리딩)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안톤 체호프의 <나의 인생>에서 아버지가 주인공에게 “너는 늘 육체노동 운운하는데, 네


말은 엉터리고 속물스럽다!”라고 언급한 말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자.

2 이 소설의 주인공 미사일 폴로즈네프의 직업관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고,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해 보자.

3 직업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에는 무엇이 있는지 제시해 보자.

4 가족과의 불협화음을 경험한 사례를 기억해 보고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서술해 보자.
(경험한 사례가 없다면 그와 같은 상황을 예측해 보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하여
서술해 보자.)

5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 편지를 써 보자.(예: 공감, 위로, 조언, 충고 등)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19

【질문의 숲】

안톤 체호프의 <나의 인생>을 읽고, 자유롭게 질문을 만들어 보자. 각자가 만든 질문을 바
탕으로 팀원들과 토의·토론을 진행한 후 그 내용을 정리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20 문학과 삶(슬로리딩)

【체험의 숲】

타인이 바라는 나의 직업과 내가 원하는 나의 직업을 제시하고, 각각의 직업이 갖는 장단점을


비롯하여 준비 사항과 실현 가능성, 비전 등에 대하여 작성해 보자.

항목 타인이 원하는 나의 삶 내가 원하는 나의 삶

직업

장점

단점

준비 사항

실현 가능성(%)

20년 후
나의 모습

느낀 점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21

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1886년 발간한 소설로 인간의 자아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매우 흥미 있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이후 연극, 뮤지컬, 영화 등의 다
양한 장르로 각색되어 대중들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특히 이 소설은 분열된 자아, 다양한 자
아를 어떤 식으로 봐야 하는지와 같은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 의미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모방 욕망에 휘둘리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줄거리는 매우 간단한 편이다. 지킬 박사는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나 속마음은
올바르지 못한 쾌락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지킬 박사는 어떤 약을 손에 넣었고 그 약으로
인해 하이드로 변하여 루커 경을 죽이고, 어린 여자 아이를 잔인하게 짓밟았으며 온갖 나쁜
짓을 일삼았다. 그러다가도 다시 약을 먹으면 지킬 박사로 변하였다. 지킬 박사는 하이드로
사는 것에 재미를 느끼게 되며 그럴수록 하이드는 점점 키가 커졌다. 반면에 애초에는 하이드
보다 훨씬 컸던 지킬 박사는 점점 작아졌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지킬 박사는 자신의 착한 면
을 선택해서 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약이 다 떨어져서 처음에 약을 샀던 곳에서 약을 주문
해 마셔보지만 지킬로 변하지를 않았다. 지킬 박사는 처음 주문한 그 약에 이물질이 들어있어
서 자신의 실험이 성공한 거라 믿고 계속 주문해 보지만 여전히 하이드의 모습이었다. 결국
마지막 남은 약 한 방울을 마시고 지킬 박사는 유서를 쓰고 죽게 된다. 이러한 사건의 전모는
친구이자 변호사인 어트슨을 통해 밝혀지게 되었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자아 혹은 인간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 집중 조명되어 왔다. 지킬 박사
가 두 개의 자아를 분리한 실험은 인간은 애초에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나의 몸 안에 있는 여러 면들은 상호 작용을 한다.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조화를 이
루며 하나의 인격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도덕적인 관점에서 지킬 박사는 지향되어야 하고
하이드는 지양되어야 했다. 우리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도덕적이거나 선한 면, 강
한 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도덕적인 면과 쾌락적인 면이 상호 작용을 하며 우리
의 정체성은 적절하게 유지되곤 한다. 이 소설에서도 지킬 박사가 하이드에 비해 더 크고 강
하고 지적인 존재였기에 지킬의 정체성이 조화롭게 유지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욕망과 쾌락
을 상징하는 하이드는 지킬 박사보다 왜소하고 약하며 원초적인 상태로 그려져 있다. 하이드
의 그러한 욕망이 지킬의 면모와 분리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지킬 박사는 스스로의 판
단으로 두 자아를 떼어 놓았다. 쾌락에 맛을 본 사람이 중독이 되듯 지킬은 점점 쇠약해지고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쾌락적 욕망의 힘은 절제되지 못하고 하이드를 통해 더욱 강해지게
된다.
지킬 박사처럼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아를 분리하는 행위는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거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타인
의 욕망과 기호를 따라가며 획일화된 몇 가지 모습만을 목표로 삼고 그것에 자신의 정체성을
맞추어가다 보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
22 문학과 삶(슬로리딩)

인지, 나는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나의 가치관은 무엇인지를 우선 파악해야 이후 자신만


의 고유한 특성을 개발하여 삶의 목표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내가 갖고 있
는 다양한 욕망의 실체를 파악해 보고 그러한 욕망을 억누르기만 하다 보면 그것은 때로는
병이 되기도 하며 폭력이나 범죄가 되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읽기의 숲】

마지막 밤
브래드쇼가 자리를 뜨자 변호사는 시계를 보았다.
“자, 풀, 우리도 가세.”
그리고는 부지깽이를 겨드랑이에 끼고 앞장서서 마당으로 나섰다. 구름이 휙휙 지나가
며 달을 가리는 바람에 사방이 캄캄했다. 안마당까지 바람이 들어와 걸을 때마다 촛불이
들까불댔다. 어터슨과 집사는 계단식 강의실로 들어가서는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런던
시내의 소음이 사방에서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하지만 바로 지척은 고요하기만 했다. 정
적을 깨는 게 있다면 서재 바닥을 서성대는 발소리뿐이었다.
“저렇게 하루 종일 서성댄답니다. 변호사님.” 풀이 낮게 속삭였다. “밤에도 마찬가집니
다. 새 약품 견본이 도착할 때만 잠시 멈출 뿐이지요.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게 바로 양
심이 병들었다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아, 저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피가 뚝뚝 흐르는 듯합
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주의를 기울여 다시 잘 들어보십시오. 변호사님. 그리고 박
사님 발소리가 맞는지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통통 뛰는 듯하면서 가볍고 기이한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매우 느렸다. 어쨌든 헨리 지
킬의 무겁게 내딛는 발걸음과는 완전히 달랐다. 어터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또 다른 건 없나?”
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딱 한 번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울었다고? 어떻게 말인가?” 변호사는 갑자기 오싹한 공포를 느끼면서 물었다.
“아녀자처럼, 아니 지옥에 떨어진 영혼처럼 울더군요. 그 소리에 저까지 마음이 무거워
져서 울 것 같아 그만 돌아와 버렸습니다.”
이제 10분이 거의 다 지났다. 풀이 짐을 포장하는 데 쓰는 밀짚 더미 아래서 도끼를
꺼냈다. 촛불은 공격할 때 앞이 잘 보이도록 가장 가까운 탁자에 올려놓았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밤의 정적 속에서 여전히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는 발소리가 나는 곳으
로 다가갔다.
“지킬” 어터슨이 큰 소리로 불렀다. “자넬 꼭 봐야겠네.”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자네에게 미리 말해두는데, 아무래도 의심스러워서 자넬 꼭, 기필코 봐야겠네.”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23

그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당한 방법으로 안 된다면 부당한 방법으로라도, 자네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들어가야겠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터슨, 제발 그러지 말게!”
“아니, 저건 지킬의 목소리가 아니잖아, 하이드야!” 어터슨이 소리쳤다.
“문을 부수게, 풀!”
풀이 어깨 위로 도끼를 쳐들어 세게 내리쳤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면서 붉은 나사천을
씌운 문이 번쩍 들린다 싶더니 잠금쇠와 경칩에 철컥 걸렸다. 서재 안에서 겁에 질린 짐
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비명이 울려나왔다. 다시 도끼로 내리치자 널빤지가
부서지면서 문짝이 다시 튀어 올랐다. 이렇게 네 번이나 내리쳤지만 문짝에 사용된 나무
는 너무 단단했다. 잠금쇠도 대단한 장인이 만들었는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다섯 번
째로 도끼질을 하고서야 잠금쇠가 부서지면서 문짝이 방 안 양탄자 위로 쓰러졌다.
어터슨과 풀은 자기들이 벌인 소동과 뒤이어 찾아온 정적에 움찔 놀라서 뒤로 조금 물
러나 안을 들여다보았다. 차분한 등잔 불빛 속에서 서재가 두 사람의 눈앞에 모습을 드
러냈다. 벽난로에서 타닥거리며 불이 환하게 타오르는 가운데 주전자가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서랍이 한두 개 열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종이들이 가지런히 정리
되어 있었다. 난로 가까이에는 차 마시는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방이
었다. 약품이 빼곡히 들어찬 유리장만 없었다면 그날 밤 런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방
이었다.
그 방 한 가운데 한 남자가 엎어져 있었다. 온몸이 뒤틀린 채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었
다. 두 사람이 까치발로 다가가 남자를 반듯이 누이자 에드워드 하이드의 얼굴이 드러났
다. 그는 체구에 비해 너무 큰 옷을 입고 있었다. 지킬 박사의 몸에나 맞을 법한 옷이었
다. 얼굴의 힘줄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여전히 실룩이고 있었지만 숨은 이미 끊어진 상
태였다. 손에 들린 깨진 약병과 공기를 짓누르는 강한 아몬드 냄새로 어터슨은 그가 자
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너무 늦게 왔어.” 어터슨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구하기에도, 벌을 주기에도
너무 늦었어. 하이드는 죽었네, 이제 자네 주인의 시체를 찾는 일만 남았군.”
그 건물의 대부분은 강의실이었다. 1층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강의실은 천장에서 빛
이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강의실 한쪽 귀퉁이 위로 안마당이 내려다 보이는 서재를 올
렸고, 복도가 강의실과 골목길로 난 문을 연결했다. 이 문을 통해서도 2층 서재로 드나들
수 있었다. 이밖에 음침한 골방 몇 개와 널찍한 지하실이 있었다. 두 사람은 이 모든 곳
을 샅샅이 조사했다. 골방은 한 번만 쓱 훑어보면 되었다. 하나같이 텅텅 비어 있었기 때
문이다. 문을 열자 먼지가 부슬부슬 떨어져 내리는 점으로 보아 오랫동안 닫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지하실은 온갖 잡동사니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부분 전 주인인 외과 의
사가 이 집에 살던 시절부터 있던 물건이었다. 그래도 문을 열어보았더니 오랜 세월 입
24 문학과 삶(슬로리딩)

구를 막고 있으면서 엉길 대로 엉겨 붙은 거미줄 덩어리가 툭 떨어져 내렸다. 더 살펴봐


야 헛수고일 뿐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헨리 지킬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헨리 지킬의 최후 진술
나는 18xx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네. 게다가 뛰어난 신체를 타고났고 천성이 부지
런한 데다 현명하고 선량한 성격의 사람들과 어울렸지. 짐작하겠지만 그런 만큼 전도유망
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네.
그런데 나의 가장 큰 단점은 쾌락을 밝히는 기질이었네. 그러한 기질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잘난
척하고 싶어 하는 오만한 욕망을 지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네. 그
리하여 나는 그런 성향을 숨기게 되었고, 지나온 세월을 반성하는 연배에 이르러 내 주
변을 돌아다보며 세상에서의 나의 성취와 지위를 가늠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미 이중
생활에 깊이 빠져 있었네.
개중에는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이런 난잡한 행실을 자랑인 양 떠벌리는 사람도
많을 걸세. 하지만 나는 스스로 정해놓은 고결한 가치관의 기준으로 판단했고, 그때마다
거의 병적인 수치감에 사로잡혀 나의 치부를 숨겼네. 나를 지금과 같이 만든 요인, 다시
말해 인간이 지니는 이중성을 갈라놓기도 하고 화해시키기도 하는 선과 악이라는 영역
사이의 골이 내 경우에 다른 사람들보다 유달리 깊이 파인 채 각기 따로 놀게 된 요인은
내게 특별히 나쁜 결점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지향하는 목표가 가차 없이 엄
격했기 때문일세. 사정이 이렇다보니 종교의 근간이기도 하면서 무수한 고통의 원천 중
하나이기도 한 이 엄혹한 삶의 법칙을 뿌리 깊이 파고들지 않을 수 없었네.
나는 철저히 이중생활을 하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위선자는 결코 아니었네. 나의 두
가지 모습 모두 진실했다는 얘길세. 자제심을 밀쳐놓고 부끄러운 짓에 빠져들 때의 나
또한, 환한 대낮에 지식의 증진이나 슬픔과 고통의 경감에 힘쓸 때의 나처럼 나의 본모
습이었네.
그런 가운데 전적으로 불가사의하고 초월적인 방향으로 흐르던 나의 과학 연구가 마침
성과를 거두어 나의 동료 인간들이 겪는 이 끝없는 전쟁에 대한 통찰력에 크나큰 빛을
던져주었지 뭔가. 덕분에 나는 내 지성의 두 측면을 이루는 도덕과 이지를 통해 하루가
다르게 진리에 가까기 다가갈 수 있었네. 그리고 전체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한 그 발견,
인간은 진정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그 발견 때문에 나는 무시무시한 파멸을 맞이하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던 걸세. 내가 둘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현재 나의 지식 수준으로는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일세. 이 점과 관련해 나를 따르는 사람들도 있을테고,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나를 앞서는 사람들도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리하여 인간은 결
국 다양하고 모순된 인자가 각기 따로 모여 형성된 총합에 불과하다는 점이 알려지지 않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25

을까 하고 감히 추론해본다네.
나의 경우 내 삶은 성격상 한 방향으로만,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나아갔네. 도덕의 측
면에서. 그리고 나라는 인간을 통해 나는 철저하게도 타고난 인간의 이중성을 인식하게
되었네. 나의 의식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두 가지 본성 중 어느 쪽도 모두 나라는 생
각이 들더군. 비록 그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게 옳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했던 이
유는 나는 본디 그 둘 다이기 때문이었지.
일찍부터, 그러니까 나의 과학 연구가 비로소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여 어쩌면 그런 기
적 같은 일이 정말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주목하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공상 삼
아 이 두 가지 요소를 분리하는 생각에 빠져들곤 했네. 만약 이 두 요소를 각기 다른 실
체에 담아 분리해낼 수 있다면 인간은 참기 힘든 그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듯했
지. 부조리한 반쪽은 좀 더 고결한 반쪽의 드높은 포부와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 제 갈
길을 가면 될 터였고, 올바른 반쪽은 서로 완전히 다른 이 악한 본성이 저지르는 수치스
러운 짓에 더 이상 괴로워할 필요 없이 기쁘게 선행을 베풀며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흔들림 없이 착실하게 걸어가면 되지 않을까 싶었네.

…… (중략) ……

이제 이 둘 중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할 때가 온 듯했네. 나의 두 본성은 기억력에만 공


유하고 있을 뿐 나머지 능력은 모두 판이했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지킬은 무척 예민하
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탐욕스러운 취향도 가지고 있어, 이를 하이드의
쾌락과 모험 속에 투사시켜 그와 함께 나누었네. 반면 하이드는 지킬에게 무관심했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산적이 추격을 피해 몸을 숨기곤 하는 동굴을 기억하는 정도로만 그를
기억했지. 지킬이 아버지 이상으로 관심을 보였다면 하이드는 아들 이상으로 냉담했네.
지킬과 운명을 같이하려면 오랫동안 남몰래 탐닉해오다 최근 들어서야 비로소 한껏 채
우기 시작한 나의 욕망을 모두 포기해야 했네. 하이드와 운명을 같이하려면 수많은 관심
과 열망을 접고 하루아침에, 그리고 영원히 세상의 비웃음을 사면서 친구 하나 없이 살
아야 했네. 불공평한 거래처럼 보일걸세. 하지만 여기에는 고려해야 할 사항이 또 하나
있었네. 다름 아니라 지킬은 절제의 고통에 몸부림쳐야 할 테지만 하이드는 자신이 무엇
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네. 내가 처한 상황이 기묘하기는 하
지만 사실 이런 논쟁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고 진부한 것일세. 이와 똑같은 유혹
과 불안이 시험에 빠져 떨고 있는 죄인 앞에 주사위를 던지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
지 않은가. 내 앞에 주사위가 던져졌을 때 나의 동료 인간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더 나은
쪽을 선택했지만 나 또한 인간이기에 그것을 지켜나갈 힘이 부족했네.
그렇다네. 나는 비록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정
직한 희망을 소중히 여기는 노년의 의사 쪽을 택했네. 그러고 하이드의 모습으로 변신해
26 문학과 삶(슬로리딩)

즐겼던 자유와 젊음, 경쾌한 걸음걸이, 고동치는 맥박과 은밀한 쾌락에 단호히 작별을 고
했네.
그런데 이런 선택을 했으면서도 의식하지 못했을 뿐 은연중에는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 같으이. 소호의 집도 그냥 놔두었고, 에드워드 하이드의 옷도 없애지 않고 여전히 서
재에 보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두 달 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한 다짐을 충실하게 지
켰네. 그 어느 때보다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 양심이 내리는 상을 기꺼이 받아들였지. 하
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경계심은 희미해지고 양심의 칭찬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
했네. 결국 나는 고통과 갈망에 시달리기 시작했네. 마치 내 안에 하이드가 자유를 달라
고 몸부림치고 있는 듯했네. 그리고 마침내 정신력이 약해진 어느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변신의 약을 조제해 삼키고 말았지 뭔가.
술주정뱅이가 자신의 나쁜 버릇을 두고 이런저런 핑계를 댈 때, 술에 취해 난폭하고
무신경해진 육체가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을 고려하는 법은 거의 없지. 나 역시 그
랬네. 나의 상황을 모르는 바도 아니면서 에드워드 하이드의 주된 성격인 도덕 불감증과
비정한 마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던 게지. 내가 벌을 받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
네. 오랫동안 내 안에 갇혀 있던 악마가 으르렁대며 뛰쳐나왔네. 약을 마시는 순간에도
나는 더한층 흉포하고 맹렬해진 마성을 의식할 수 있었지. 그런 사악한 충동이 내 영혼
을 휘젓고 있었기에 나의 불행한 희생자가 정중하게 말을 걸었을 때 참지 못하고 분노를
폭발시켰다고 밖에는 볼 수 없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네.
하느님께 맹세코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자극에 그런 잔인무도
한 범죄를 저지를 리가 없지 않은가. 아픈 아이가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장난감을 부숴
버리듯 나 역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지팡이를 휘둘렀던 걸세. 인간에게는 균형을 잡
으려는 본능이 있기에 제아무리 악인 중의 악인이라고 해도 유혹 앞에서 웬만큼은 꿋꿋
하게 견디기 마련일세. 하지만 나는 스스로 그런 본능을 남김없이 벗어버렸네. 그랬기에
아무리 사소한 경우라 할지라도 유혹을 받으면 받는 대로 그냥 빠질 수밖에 없었네.
순식간에 지옥의 악령이 내 안에서 깨어나 날뛰었네. 나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아
무 저항도 못하는 사람을 후려쳤고, 한 대 한 대 때릴 때마다 쾌재를 불렀지. 그런 광란
상태가 한동안 이어졌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지치기 시작하면서 그제야 차가운 공
포의 전율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네. 안개가 걷히면서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는 그 즉시 범죄 현장에서 도망쳤네. 한편으로는 사악한 욕망을 채워 기고만장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살고 싶다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해지면서 두렵기도 했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강미경 역,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문학동네, 2009.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27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이런 선택을 했으면서도 의식하지 못했을 뿐 은연중에는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 같으이.


소호의 집도 그냥 놔두었고, 에드워드 하이드의 옷도 없애지 않고 여전히 서재에 보관하고
있었으니까”에서 지킬 박사가 하이드로의 변신을 그만두기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
드의 거처와 옷을 그대로 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2 “어터슨, 제발 그러지 말게!”


“아니, 저건 지킬의 목소리가 아니잖아, 하이드야!” 어터슨이 소리쳤다. “문을 부수게, 풀!”
이처럼 혼란에 빠진 지킬 박사가 서재에 있는 상황에서 친구이자 변호사인 어터슨이 문을
부수고 들어간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보고 나만의 공간이나 영역을 가까운 사람이 침범한 경
험이 있다면 이야기해 보자.

3 “만약 이 두 요소를 각기 다른 실체에 담아 분리해 낼 수 있다면 인간은 참기 힘든 그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듯했지. 부조리한 반쪽은 좀 더 고결한 반쪽의 드높은 포부와 양
심의 가책에서 벗어나 제 갈 길을 가면 될 터였고, 올바른 반쪽은 서로 완전히 다른 이 악
한 본성이 저지르는 수치스러운 짓에 더 이상 괴로워할 필요 없이 기쁘게 선행을 베풀며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흔들림 없이 착실하게 걸어가면 되지 않을까 싶었네.” 이처
럼 두 가지 본성을 분리하기로 한 지킬의 계획과 결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보자.

4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 ― 어터슨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장면, 지킬이 자살하는 장면 등 ― 을


내가 원하는 다른 방식으로 고쳐 써 보자.

5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와 유사한 정체성의 혼란을 다룬 작품을 예술 및 대중문화 전 영역


에서 찾아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해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며 써 보자.
(예: 영화, 뮤지컬, 소설 등)
28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지킬 박사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에 관한 편지에서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질문을 만들고, 팀원들과 토론 활동을 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29

【체험의 숲】

다음 단계별 물음에 답해 가면서 자아 정체성을 확인해 보고 그것을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마련해 보자.

<1단계: 정체성 찾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나만의 독특한 면은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자.
(예: 내면세계, 숨겨진 욕망, 정체성, 다양한 면모 등)

<2단계: 정체성 혼란 경험>


나의 내면세계와 외면의 모습 사이에서, 혹은 다양한 모습으로 인해 혼란을 느낀 경험을 찾아보
자.(예: 주변인과의 갈등, 나 혼자만의 갈등, 세계와의 갈등)

<3단계: 정체성의 조화로운 유지 방법>


내면과 외면의 조화를 이루어 내면서 나만의 개성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을 마련해 보자.
30 문학과 삶(슬로리딩)

4 사마천의 <백이열전>

사마천(司馬遷)은 서한(西漢)의 역사가이자 문학가로서 『사기(史記)』를 저술하여 중국역사학


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부친의 대를 이어 역사 기록관인 태사령(太史令)을 맡아 역사서의
기술에 힘썼는데, 한때 조정의 뜻에 반하는 글을 쓴 죄로 궁형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황제를 시종하는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지만 그것은 환관이 담당하는 직책으로서 사마천의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울 것이 없는 자리였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분발하여 전부터 쓰고 있
던 역사서의 저술에 매진하였는데 이를 위해 유적지를 탐방하고 다양한 풍속을 연구하였으며
전래되는 이야기들을 두루 채집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 역사서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기전체통
사(紀傳體通史)의 전형인 『사기』가 완성된다. 이 책은 상고의 전설 속의 황제(黃帝)로부터 한
무제(漢武帝)에 이르는 3천여 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후 각 왕조의 역사를
기술한 ‘이십오사(二十五史)’의 모델이 된다.
<백이열전(伯夷列傳)>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두 인물의 전기로서 『사기』 열전의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사마천은 다양한 자료와 공자의 명구들을 빌려 그들의 생애를
조망하고 있다. 백이와 숙제는 군주의 자리를 서로 양보하다가 함께 도피하여 은거생활을 하
게 되는데,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주(紂) 임금을 토벌할 때 말고삐를 잡고 말리는 의기를
발휘한다. 아무리 폭군이 옳지 못하다 해도 그것을 토벌하는 일 역시 폭력에 기대는 일이므로
이렇게 해서는 세상이 좋아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무왕의 혁명이 성공하여 전국
이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드는 국면이 되자 그들은 수양산에 은거하여 고사리 뿌리를 캐 식
량으로 먹고 살다가 결국 굶어죽게 된다.
사마천은 그들이 숭고한 덕행과 인격을 갖추었음에도 불우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
실에 큰 동정을 표현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고결하고 어진 사람들이 불행하게 살다가 일찍 세
상을 떠나는 일이 많은 반면 도척(盜跖)과 같은 불의한 사람들이 부귀와 장수를 누리게 되는
모순된 상황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렇다고 불의한 삶을 살 것인가? 여기에 사마천은
‘후세에 남는 이름’이라는 주제어를 제시한다. 행복한 삶을 거부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
의하게 사는 일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의로운 삶과 불행, 불의한 삶과 행복이 자주
짝을 이루는 세상에서 스스로 억울해 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며 당당한 삶을 살아갈 길은 무엇
인가? 길게 보면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힘써 실천하여 그 자체로 보상을 받는 삶이 있다. 이
것이 ‘후세에 남는 이름’을 세우는 삶이다.
이 작품의 전체 내용은 4단락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백이·숙제 형제가 군주 자리를
서로 양보한 일이 요순의 그것과 같다는 점을 강조하는 문단, 여러 전적의 기록을 인용하여
백이·숙제의 삶을 조명하는 문단, 안회(顔回)와 도척이라는 선악이 극명하게 갈리는 두 인물
을 대비시켜 백이와 숙제의 사람됨을 드러내는 문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천의 길이 다르면
함께 일하지 않는다〔道不同, 不相爲謀〕’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옳고 그름에 대한 진정한 구
분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문단이 그것이다.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31

<백이열전>은 궁형을 당하는 등 치욕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중국 역사서의 최고봉인 『사기』를


완성하기까지 좌절하는 일 없이 그 뜻을 키워온 사마천이 스스로 자신에게 헌정하는 위로의
글이기도 하다.

【읽기의 숲】

공부하는 사람들이 읽는 책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육경(六經)’에서 신빙성 있는 근


거를 찾곤 한다. 『시경』과 『서경』이 완전하게 전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虞) 시대와 하
(夏) 시대의 사실들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요(堯) 임금이 제위에서 물러나면서 순(舜)에게 양위를 하고,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양위를 할 때에 전국의 제후들과 수령들의 일치된 추천을 받아 자기를 대신하여 통치를
해보도록 하였다. 그렇게 20년 동안 시험과 관찰을 하며 모든 영역에서 뛰어난 업적을
내는 것을 보고 제위를 물려주었다. 임금의 자리가 귀중한 것임을 모두가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고, 왕위를 전수하는 일과 국가를 물려주는 일이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요 임금이 허유(許由)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는데 허유가 받아들이지 않고, 또 이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하여 기산(箕山) 자락으로 도
피하여 숨어살았다고 한다. 또 하나라 시대의 변수(卞隨)와 무광(務光)이라는 두 사람에게
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전에 기산에 올라가본 적이 있는데 산 위에 허유의 무
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공자는 고대의 어진 사람들〔仁人〕, 위대한 사람들〔聖人〕, 현명
한 사람들〔賢人〕을 평론하면서 오태백(吳泰伯)이나 백이(伯夷)와 같은 사람들을 상세하게
다루었다. 그런데 허유나 무광 등의 행동이 바르고 대단히 고상하였다고들 말하는데 어째
서 그에 대한 개략적인 기록조차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
공자는 ‘백이와 숙제가 사람들의 지난 잘못을 기억하지 않았고, 그들을 원망하는 사람
들도 드물었다.’고 하였고, 또 ‘어진 덕을 구해서 그것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했겠는
가?’라고도 하였다. 나는 백이의 뜻에 공감하는데 기록에 실리지 않은 시를 읽고 경이로
움을 느꼈다.
기록을 보면 백이와 숙제는 고죽(孤竹)이라는 작은 나라 군주의 두 아들이었는데 부친
은 숙제를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 하였다. 부친이 세상을 뜨자 숙제가 백이에게 군주의
자리를 양보하였다. 백이는 ‘아버님의 명령이었다’고 하며 달아났고, 숙제도 군주의 자리
에 오르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고죽국에서는 그 중간의 아들을 세웠다. 이후 백이와 숙
제는 서백창〔西伯昌〕이 노인들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 볼 만하다’고 하였
다. 이들이 도착하였을 때 서백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무왕(武王)이 서백창을 문왕(文
王)으로 높여 부르면서 나무위패를 만들어 전차에 싣고 동쪽으로 주(紂) 임금의 정벌에
나섰다. 백이와 숙제가 무왕이 탄 말의 고삐를 잡고 이렇게 달랬다. ‘부친이 돌아가셨는
32 문학과 삶(슬로리딩)

데 장례를 치르지도 않고 군사를 동원하셨는데 이것을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


로서 나라의 임금을 죽이려 하시는데 이것을 어질다〔仁〕 할 수 있겠습니까?’ 무왕의 신
하들이 둘을 죽이려 하자 왕의 스승이었던 여상(呂尙)이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라고
하며 부축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무왕이 은나라를 어지럽게 한 주(紂) 임금을 평정한 뒤 천하는 주(周) 왕조를 종주국으
로 받들었다. 그렇지만 백이와 숙제는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의를 지키며 주나라의 곡
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며 고사리 뿌리를 캐어 식량을 대신하였다. 나중
에 굶어서 죽게 되었는데 이런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저기 서산에 올라, 고사리 뿌리를 캐네. 폭력으로 폭력을 뒤엎고도, 그것이 잘못임을
알지 못하네. 신농(神農)의 시대, 순임금의 시대, 우임금의 시대는 이제 없을 모양이다.
우리가 갈 곳은 어디일까? 아아! 죽음일 뿐, 우리의 삶이 이렇게 시드는구나.’

그리고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어버렸다. 이 시를 가지고 보자면 그들은 원망을 했던 것


일까? 원망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늘은 편애하는
일이 없이, 오로지 좋은 사람을 사랑할 뿐이다.’ 백이와 숙제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해야
할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해야 할까? 그들은 그토록 두터운 인덕을 쌓고 고결한 품
행을 완전하게 닦았지만 결국 나중에는 굶어죽고 말았다. 뿐이랴? 공자의 70명 뛰어난
제자 중에 오로지 안연(顏淵)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높이 평가받았지만 그는 결국 곤궁
함에 빠져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해 결국엔 요절하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
에게 복을 주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도척(盜跖)은 매일 사람들
을 죽이고, 사람의 고기를 요리해 먹었다. 흉폭하고 잔인하여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천
하를 어지럽게 휘저었지만 결국 끝까지 천수를 누렸다. 무슨 덕행이 있어서 그리된 것일
까? 이것들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이다. 요즘에도 품행이 단정치 못하고 규범과
도리를 서슴없이 어기는 사람들이 오히려 평생 편안하고 즐겁게, 그리고 대를 이어가며
부귀를 누리는 일들이 있다. 그런데 바른 곳만 찾아다니고, 적절할 때에만 말을 하며, 길
을 가는데도 샛길을 가지 않고, 공정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나서지 않는 사람들이 재앙
을 만나는 경우 또한 셀 수 없이 많다. 당혹스러운 일이다. 이것이 하늘의 이치라면 옳다
고 해야 할까? 틀렸다 해야 할까?
공자는 ‘실천의 길이 다르면 함께 일하지 않는다〔道不同, 不相爲謀〕’고 했다. 그러니까
각자 그 뜻을 추구할 뿐인 것이다. 또 ‘부귀를 구해서 얻을 수 있다면 남의 수레를 모는
일이라도 하겠지만,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富貴
如可求,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고 했고, ‘세월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
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고 했다. 온 세상이 혼탁할
때 맑고 높은 사람이 드러나는 법이다. 도척이 장수하고 품행이 옳지 못한 사람들이 행
복했다고 해서 그것을 따를 수 있겠는가? 안연이 요절하고 바른 일에 투신한 사람들이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33

불행했다 해서 그것을 버릴 수 있겠는가?


‘어진 사람은 자기가 죽은 후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을 한스럽게 여길 뿐
이다.’고 했다. 가의(賈誼)도 ‘욕심이 있는 사람은 재물에 목숨을 걸고, 뜨거운 영웅은 명
예에 목숨을 걸며, 잘난 척하는 사람은 권세에 목숨을 걸고, 일반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같은 밝기라야 서로를 비추고, 같은 종류의 사물들
이라야 서로 느끼고 반응하는 법이다. 구름은 용의 비상을 따라 피어나고, 바람은 호랑이
의 울음을 따라 일어난다. 성인이 그 뜻을 펼치면 만물이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
다. 백이와 숙제는 현명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공자가 있었기에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
안연이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천리마의 꼬리에 붙듯 공자를 따랐기에 더욱 뛰어
날 수 있었다. 야인으로 숨어 사는 사람들은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알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그 이름이 희미해져 세월이 지나면 잊히고 만다.
슬픈 일이다. 세상의 일반 사람들이 품행을 닦아 이름을 세우려 해도 덕망이 높은 이
를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후세에 그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 사마천 지음, 강경구 옮김, 『사기』, <백이열전>


34 문학과 삶(슬로리딩)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공자는 ‘부귀를 구해서 얻을 수 있다면 남의 수레를 모는 일도 하겠지만,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富貴如可求,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
求, 從吾所好〕’고 했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정리하고 이야기해 보자.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통일되는 체험에 대해 말해 보자. 무엇이 자기를 능력 있게 만
드는 길이며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일인지 정리하여 이야기해 보자.

〇 하고 싶은 일:
〇 해야 하는 일:
〇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통일:

2 ‘구름은 용의 비상을 따라 피어나고, 바람은 호랑이의 울음을 따라 일어난다. 성인이 그 뜻을


펼침에 만물이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고 했다. 또 노신(魯迅)은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고 했다. 남이 가지 않는 길
이라 해도 신념을 갖고 걷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역사적 모델이 될 수 있다. 뜻이 높으면
높은 일이 함께 하는 법이다. 한국 사회에서 새 길을 개척하는 모델이 되고 있는 사람, 혹
은 단체가 있다면 이야기해 보자.

3 중국의 옛 현인인 가의(賈誼)는 ‘욕심이 있는 사람은 재물에 목숨을 걸고, 뜨거운 영웅은
명예에 목숨을 걸며, 잘난 척하는 사람은 권세에 목숨을 걸고, 일반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각자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3가지를 추려 이야
기해 보자.

4 ‘욕심이 있는 사람은 재물에 목숨을 걸고, 뜨거운 영웅은 명예에 목숨을 걸며, 잘난 척하는
사람은 권세에 목숨을 걸고, 일반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각자 자신이 목숨을 걸 정도로 관심을 두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써 보자.

5 넘치는 악행으로 도둑의 대명사가 된 도척은 살인 방화를 일삼았음에도 천수를 누리며 행복


하게 살았다. 오늘날에도 정직하지 못한 마음과 부덕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를 누리며 사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예를 들어보고 그들
의 부덕함에 대한 보답으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지 글로 표현해 보자.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35

【질문의 숲】

위 글의 저자인 사마천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옳은 삶,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면서 백이·숙제의 삶을 정리하고 의미화한다. 오늘날 옳은 삶이란 어
떤 것이라야 할까? 이 글과 관련하여 각자 다음의 표를 참조하여 질문을 만들고 토론을 통해
정리된 질문을 팀 단위에서 제시하고 토론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36 문학과 삶(슬로리딩)

【체험의 숲】

백이(伯夷), 숙제(叔齊)나 안회(顔回)와 같이 선량하고 뛰어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불우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주변의 사람들 중에서 이런 이를 찾아 그 ‘사람됨 →
사회적으로 불우한 처지 → 현재의 상황 → 그에 대한 자신의 소감’의 순서로 글을 써 보자.

구분 내용

사람됨과 능력

사회적 처지

현재 상황

그 삶에 대한 자신의
소감과 평가
제1장 문학과 자기경영 역량 37

【감상의 숲】

너의 하늘을 보아

 박노해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 오늘은 다르게, 해냄 1999.


38 문학과 삶(슬로리딩)

【문제 은행】

1 <연어>에서 은빛연어는 연어답게 살기 위해서 쉬운 길보다 어려운 길을 택한다.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데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가고
자 하는 ‘나의 길’은 무엇인지에 대해 써 보자.

2 <연어>에서 은빛연어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순례의


여정이기도 하다. 은빛연어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존재에 대해 써
보자.

3 <연어>에서 연어 공동체는 특이하게 생긴 은빛연어를 보호하고자 많은 배려를 하지만 은빛


연어는 오히려 심한 소외감을 느낀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 말해 보자.

4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Maslow)는 ‘욕구 발전 5단계론’에서 진정한 자기경영과 자아실


현은 타인의 욕망과 사회적 요구를 뛰어넘을 때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타인의 욕망과 사회적 요구란 어떤 것일지 예를 들어 말해 보자.

5 피터 드러커는 『자기경영노트』에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 관리와 자신의 장점을


키워나가는 자기 개발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자기경영으로 보고 있다.
나의 최대 강점과 단점이 무엇인지 말해 보자.

6 자기경영이란 생활 속의 작은 습관부터 바꾸는 데서 시작되는 것일 수도 있다. 나의 어떤


습관을 바꾸고 싶은지 말해 보자.

7 내가 좋아 하는 것들에 대해 나열해 보자(예: 음악, 책, 취미, 스포츠 등)

8 내가 좋아하는 것 가운데 평생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것 하나를 골라 그 이유에 대해 말해


보자.

9 부산 지역의 프로야구팀인 롯데자이언츠를 응원하는 것은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는가? 만약


내가 타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면 응원팀을 바꿀지 말해 보자.

10 자기를 경영하기 위하여 필요한 전략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서술해 보자.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41

제 장2
문학과 글로컬 역량

우리 사회는 지금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민족, 다문화 사회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여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는 세계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서는 국제 사회의 일원이라는 시각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이
에 우리 대학에서는 지역과 세계의 발전을 위한 기여에 필수적인 능력인 ‘글로컬 역량’을 6대
핵심 역량 중의 하나로 설정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지성인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글로컬(glocal)’이란 세계화와 지역화의 융합적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는 글로벌(global)
과 로컬(local)의 합성어로, 서구와 선진국 중심으로 진행된 세계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화의
지역적 정체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세계화의 흐름을 의미한다. 세계는 지금 기존에 강조되어
왔던 중심과 주변,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 보편성과 개별성 등의 이원화된 구도를 벗어나,
세계적인 동시에 지역적인 의미로 거듭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
기 속에서는 자국의 지역적 정체성과 로컬 문화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비로소 타
문화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글로컬을 지향하는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호문화능력’이 필수적으로 요
구된다. 현대사회는 적극적인 문화 소통 방식을 추구하는 국제 교류의 시대이자 협력의 시대
이기 때문이다. 낯설고 이질적인 타 문화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 상호 대화를 통해 이해를 증
진시키는 능력을 의미하는 이 상호문화능력은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 사람들 간의 교류에 있
어서 가장 절실하면서도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문화 간 대화 능력을 말한다.
상호문화능력은 ‘문화 리터러시’를 기반으로 길러질 수 있다. 문화 리터러시란 문화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이해하며 적용하는 능력이다. 여기에는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 문화의
상호 비교를 통한 가치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는 태도 등이 두루 포함
된다. 이러한 능력을 함양하는 것은 여러 혼종 문화 현상들을 비교·분석하고 해석하는 역량
을 길러줄 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문화 간에 발생하는 불평등을 해소하고 당면 문제를 해결하
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전 세계가 다양한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는 시대가 됨에 따
라 상호 간의 의존도는 점점 심화되고 있으나, 갈등 또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 현실
이다. 국가 간 부의 불평등 문제를 비롯하여 민족이나 종교로 인한 분쟁, 환경오염과 기후 변
화, 전염병 등 세계가 함께 대처하지 않을 수 없는 여러 사안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것
42 문학과 삶(슬로리딩)

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로 인해 인종이나 성별, 국적, 종교에 상관없이 지구촌 사회의 구


성원이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실천하는 세계 시민으로서의 윤리성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세계시민교육이 강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시민교육에서는 국제 사회
의 일원이라는 시각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한다. 또한 타인과 협동
하고 사회적 역할과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 비판적 사고 능력, 타 문화에 대한 이해 및
수용 능력, 환경 보존을 위해 소비 습관이나 생활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고 있다.
이 장에서 소개할 4개의 텍스트인 최은영의 <씬짜오, 씬짜오>, 박범신의 <나마스테>, 황석
영의 <바리데기>, 이사의 <타국 인재 추방령에 대해 올리는 의견서>는 국제사회의 주역이 될
20대들에게 세계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핵심 덕목들을 일깨워 주고, 이성적이고 감성적이며
창의적인 문화 리터러시를 함양하게 하는 디딤돌이 되어 줄 것이다. 나아가 이 시대의 청춘들
로 하여금 타자에 대한 관용, 연대와 협력, 배려를 통한 공존과 상생의 중요성을 성찰하는 소
중한 경험을 제공해 줄 것이다.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43

1 최은영의 <씬짜오, 씬짜오>

최은영은 2013년 겨울 『작가세계』 신인상에 중편소설 <쇼코의 미소>가 당선되어 등단했으


며 2018년 『내게 무해한 사람』이 주목받게 되면서 앞으로 한국 문단을 이끌 대표적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허균문학 작가상, 김준성 문학상, 이해조 소설문학상, 한국일보 문학상, 젊은
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서로 다른 국적과 언어를 가진 두 인물이 만나 성장의 문턱을 통과해
가는 과정을 그려낸 표제작 <쇼코의 미소>는 우리에게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과연 무
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언어 장벽에서 오는 소통 문제,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 다
양한 인간관계에서 비롯한 감정 문제 등을 보편적 인류애와 글로벌한 연대감의 시각에서 조명
한다.
<씬짜오, 씬짜오>는‘만남과 헤어짐의 인사말’인 베트남어‘씬짜오’를 매개로 환대와 불편함
이 공존했던20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과거와 조우하는 작품이다.13세였던 작중 화자가 독
일에서 엄마의 유일한 말동무였던 응웬 아줌마와의 기억을 더듬는 가운데, 베트남 전쟁의 상
처를 지닌 존재들을 환기하며 한국과 베트남의 비극적 역사를 돌이켜봄으로써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방법에 대해 그려 낸다.
1995년 독일로 해외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구동독의 황량한 소도시에 떨어진 ‘나’의
가족은 베트남 전쟁의 보트 피플 출신인 ‘응웬 아줌마’와 ‘호 아저씨’의 집에서 더없이 따뜻한
환대를 경험한다.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가족이 한국군에게 몰살당한 아픔이 있는데도, 이 낯
선 한국인 가족에게 스스럼없이 곁을 내주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환대해 준다. 하지만 이런 행
복의 시간은 ‘나’의 치기 어린 실수로 인해 중단되고 만다. 같은 이방인끼리 깊은 우정을 나누
던 이 두 가족은 베트남 전쟁의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새삼스레 확인하게 되고, 결
국에는 진심으로 화해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만다.
결국 이 소설은 한국이 베트남에 어떻게 사죄하고 보상할 수 있을까 하는 역사적이고 국가
적 차원의 문제를, 개개인의 차원에서 우리가 어떻게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로 풀어간다. 하지만 선량하고 어린 화자는
이런 문제를 풀어나가기엔 너무 미숙하다. 물론 ‘아무것도 몰랐다’는 말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어린 ‘나’는 한국이 가해자인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고, 어머니는 ‘응웬 아줌마’네
가족이 한국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안다고 한들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
까. 베트남 전쟁의 배경은 무엇이었고 전쟁이 미국에게 어떤 득실을 가져다줬는지 정도는 알
고 있지만, 2차 대전 이후 ‘다행히도 대량 살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독일
학교 선생님도 전쟁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냉전이 끝난 독일에서 또 다른 냉전국가였던 한국과 베트남의 가족이 겪는 갈등의 서사 위
에 인간의 보편적 선의와 연대감에 대한 믿음을 섬세하게 포개어 놓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할 수 있다.
44 문학과 삶(슬로리딩)

【읽기의 숲】

“독일에 처음 왔을 때,” 아줌마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추웠어요. 아무리 껴입어


도 벌벌 떨리는 거야. 아직도 그래요. 투이야 여기서 태어났으니까 아무렇지 않겠지만 난
이상하게 아직도 여기 겨울이 적응 안 돼. 난생처음 눈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너무
예뻐서 춥다 춥다 하면서도 손이 다 얼도록 눈을 만지고 놀았어요.”
엄마는 웃으며 말하는 응웬 아줌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같이 웃어야 하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아 당황하던 엄마의 얼굴을 기억한다. 아줌마는 살며 고생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과장되게 웃으면서 말했고 그럴 때면 엄마는 애써 같이 웃으려 노력했다.
아줌마는 엄마가 사랑이 많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해 주는 능력을 타고났다고 말
했다. 세상에는 엄마처럼 섬세한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면서, 엄마는 아파하지 못하
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아파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엄마와 함께 있을 때도 아줌마는 엄마에 대한 칭찬을 잘했다. 웃는 모습이 예뻐서 함
께 있으면 방이 다 환해지는 것 같다, 두상이 동그라니 예쁘다, 걸음걸이가 사뿐하다, 옷
맵시가 좋다, 앞니가 귀엽다, 듣기에 참 좋은 목소리다…… 아줌마는 이런 이야기를 망설
이지 않고 했고 그럴 때면 엄마는 얼굴을 붉혔다. 아줌마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몰
랐던 엄마의 좋은 부분이 눈에 들어왔고 엄마가 내 엄마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졌다. 아
줌마와 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의 집을 오갔다. 엄마는 김을 좋아하는 아줌마를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김을 구워 갖다 줬고, 아줌마는 단 음식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쌀
푸딩을 만들어줬다.
플라우엔에서 맞은 두 번째 겨울에 나는 거의 매일 투이네 집에 들렀다. 우리 집은 오
래된 라디에이터 때문에 언제나 냉골이었지만 투이네 집은 온몸이 노곤해질 정도로 기분
좋게 따뜻했고, 투이네 식구들과 함께 지내는 쪽이 집에 있는 것보다 편해서였다.
응웬 아줌마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봤다. 한국에서 다니던 학교는 어땠는지, 베를
린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는지, 바다를 가보았는지, 한국의 바다는 어떤 색인지, 가장
좋아하는 독일 음식은 무엇인지. 아줌마의 질문은 공부는 잘하냐, 왜 이렇게 키가 작냐,
커서 뭐할 거냐 물어대는 다른 어른들의 것과는 달랐다. 진심 어린 관심을 받고 있다는
기쁨에 나는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아줌마 앞에서 떠들어댔다.
“이름 한자로 써볼래?” 내가 이름을 한자로 쓰자 아줌마는 웃으며 말했다. “이럴 줄 알
았지. 나랑 같은 성씨구나.” 아줌마는 ‘나라이름 원阮’ 자를 쓰고는 ‘응웬’이라고 읽었다.
호 아저씨의 ‘호’는 ‘되 호胡’ 자였고, ‘투이’라는 이름은 ‘푸를 취翠’ 자를 썼다. “넌 내
어릴 적 친구를 많이 닮았다. 그 애 성씨도 응웬이었지. 같은 마을에 살았던 친구였다.”
아줌마는 슬프게 웃어 보였다. 무척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는 그런 표
정을 짓곤 했다. 세 살이 된 내 동생 다연이를 볼 때도 그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표
정은 나를 아프게 했는데, 아줌마의 행복이라는 것이 슬픔과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것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45

처럼 보여서였다.
언젠가 아줌마에게 어린 시절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
었다. “다 잃어버렸지. 한 장이라도 남아 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이유를 묻자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사진만 잃어버린 게 아니었단다.” 그녀는 내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 말을 하는 아줌마의
떨리는 마음이 내게도 그대로 전해져 두려워졌다.
투이네 집에서 유일하게 접근이 어려웠던 곳은 서재였다. 누가 그러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문이 항상 닫혀 있어 들어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서재 문이 활짝
열려 있던 날, 나는 끌리듯이 그 방으로 들어갔다. 문 바로 옆으로 작은 제단이 보였다.
제단은 나무 장식장 위에 꾸며져 있었다. 기둥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집 모양의 조형물
아래로 다섯 개의 액자와 모래와 재가 든 향로가 보였다. 액자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흑백사진이 들어 있었고 향로에는 끝까지 타버리거나 중간에 꺼진 보라색 향들이 몇 개
꽂혀 있었다. 향로 옆으로 종이에 싸인 향과 작은 성냥갑이 보였다. 그런 향로는 이전에
도 봤었지만, 향로 뒤에 죽은 사람 사진을 둔 것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겁이
나 사진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뒤돌아섰다.
사진 속 다섯 사람은 가족처럼 보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노인은 한 명밖에 없었고
내 또래의 여자아이, 다연이 또래의 아기 사진도 있었다. 힐끗 훑어봤을 뿐이지만 그 사
람들의 얼굴이 내 등뒤에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신경이 쓰였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무슨 까닭으로 투이네 집 제단에 안치돼 있는지 알고 싶었다.
왜 응웬 아줌마나 투이가 나에게 제단을 보여주지 않았는지도 궁금했지만,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누구에게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에 대해 배우던 시간에 나는 투이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을학


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다행히 2차 대전 이후로 이처럼 대규모의 살상이 일어난 전쟁은 없었단다.” 투이가 손
을 들어 선생님의 말을 끊었다. “아닌데요.” 그게 투이의 첫마디였다.
“뭐가 아니라는 거지?”
“베트남에서 전쟁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요.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이모, 삼
촌 모두 다 죽었대요. 군인들이 와서 그냥 죽였대요. 아이들도 다 죽였다고. 마을이 없어
졌다고 했어요. 저희 엄마가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투이가 말했다.
“그래. 투이 말이 맞다. 베트남전쟁에 대해 너희는 들어 본 적 없을 거야. 투이가 더
얘기해볼래?” 선생님은 투이가 자기 의견을 말했다는 것에 만족해했지만, 그 애는 반사적
으로 말한 것처럼 보였다. 투이의 얼굴이 곧 울 것처럼 붉어졌기 때문이다. 그 애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투이, 더 말해봐. 우리들도 모두 알아야 하잖아.” 그애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모든
46 문학과 삶(슬로리딩)

상황이 부당하게 느껴졌지만 당시에는 그 감정의 이유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때 반장


잉가가 손을 들었다. “베트남은 전쟁으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예요. 미군만 육만 명
이 죽었고 군인 아닌 베트남 사람도 이백만 명 죽었대요.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미군이
비행기로 폭탄을 떨어뜨리고 나무를 죽이는 약도 뿌렸고요.” 반장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투이의 작은 귀를 바라봤다.
선생님은 반장의 말이 정확하다고 칭찬하고는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배경과 전쟁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 일이 미국 정부의 실책이었고, 미국으로서는 아무런 득
도 보지 못한 전쟁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투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었으리
라고, 그 애를 앞에 두고 그런 식의 설명을 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지
만 어쩐지 입을 열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투이는 분명 교실에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곳에 없는 사람으로 취급된 것 같았다. 나는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는 그애의 뒷모습
을 바라봤다. 너희들은 투이의 마음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겠지, 독일 애들에게 희미한
분노마저 느꼈던 기억도.

그날 저녁 우리는 투이네 집 식탁에 모여 호 아저씨가 만든 국수와 만두를 먹고 있었


다. 이야기가 어떻게 그쪽으로 흘러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예쁘지도 않았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하나 없는 열세 살짜리 여자애였다. 열한
살 때 동생이 태어난 이후로는 무슨 일을 하든 애처럼 굴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존재감
이 없는 아이들이 보통 그렇듯 어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컸다.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어른들의 말에 동요한 것은 그런 이유
에서였다. 드디어 나도 한마디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역사에 대해
서라면 투이네 식구들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까, 아는 척을 한다면 엄마 아빠가 꽤나 뿌듯
하게 생각해줄 것 같았다.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어요.” 나는 그 말을 하고 동의를 구하기 위해 엄마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는 아무 얘기도 못 들었다는 듯이 내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고,
엄마는 조용히 하라는 투의 눈빛을 보냈다. “국물이 짜지는 않은지 모르겠네.” 호 아저씨
가 말을 돌렸다. 모두들 내 말을 무시하는 것 같아 서운했다. “정말이에요. 우린 정말 아
무도 해치지 않았어요.” 내가 말했다. 한국은 선한 나라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었고, 어른
들의 대화에 자연스레 참여해서 칭찬받고 싶었다. 난 맞은편에 앉은 아빠에게 인정을 구
하는 눈빛을 보냈다.
“넌 어른들 말하는 데 끼어들지 마. 네가 대체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아빠가 한국어
로 소리쳤다. 모두들 젓가락질을 멈추고 나를 봤다. 투이네 식구들 앞에서 아빠에게 그런
식으로 야단맞은 것이 부끄럽고 억울해서 귀가 먹먹해지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서 독일어로 말했다. “한국에서 그렇게 배웠는데.
우린 아무에게도 잘못한 게 없다고. 우린 당하기만 했다고.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는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47

데…….”
“한국 군인들이 죽였다고 했어.” 투이가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식탁의 분위기를
얼려버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이 엄마 가족 모두를 다 죽였다고 했어. 할머니도, 아기
였던 이모까지도 그냥 다 죽였다고 했어. 엄마 고향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있대.”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힐난하는 말투였지만 나는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
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투이 넌 함부로 말하지 마라.” 그 말을 하고 아줌마는 나를 봤다. “넌 신경 쓸 것 없
어.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응웬 아줌마의 말은 투이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정말로 신경쓸 일 아니야.” 어린 마음에 혹여 상처를 입었을까 걱정하는
아줌마의 두 눈, 내가 결코 잊지 못할 얼굴. 투이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나는 응웬 아줌
마의 그 얼굴을 보고 이해했다. 그때 내가 상처를 받았다면 그건 응웬 아줌마의 상처에
대한 가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야.” 아줌마가 속삭였다.
“저는 정말 몰랐어요.” 엄마가 말했다. “응웬 씨가 겪었던 일, 저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도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죄송합니다.” 엄마는 호 아저씨와 응웬 아줌마에
게 고개 숙였다.
“저는 모든 걸 제 눈으로 다 봤답니다. 투이 나이 때였죠.” 그렇게 말하고 호 아저씨는
붉어진 눈시울로 애써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 아저씨는
거기까지 말하고 힘껏 웃어 보였다. 응웬 아줌마는 호 아저씨에게 베트남어로 속삭이듯이
이야기했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분명 마음을 다독이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 말의 진동
이 내 마음까지 위로하는 것 같았으니까.
아빠는 엄마와 호 아저씨의 대화를 못 들은 것처럼 맥주만 마시고 있었다.
“당신도 무슨 말 좀 해봐.” 엄마가 한국어로 아빠에게 말했다.
“내가 무슨 얘길 해? 그럼,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해야 돼? 왜 당신이 나서서 미안하다
고 말해? 당신이 뭔데?” 아빠가 한국어로 받아쳤다.
“당신은 항상 이런 식이야.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못해, 안 해.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내가 응웬 씨였으면 처음부터 우리 가족 만나지도 않았을 거야.”
아빠는 식탁 의자에 걸친 카디건에 팔을 넣었다. “저녁 잘 먹었습니다.” 아빠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희 형도 그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그때 형 나이 스물이었죠.
용병일 뿐이었어요.” 아빠는 누구의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바닥을 보면서 말했다.
“그들은 아기와 노인들을 죽였어요.” 응웬 아줌마가 말했다.
“누가 베트콩인지 누가 민간인인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겠죠.” 아빠는 여전히 응웬
아줌마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태어난 지 고작 일주일 된 아기도 베트콩으로 보였을까요. 거동도 못하는 노인도 베트
콩으로 보였을까요.”
“전쟁이었습니다.”
48 문학과 삶(슬로리딩)

“전쟁이요? 그건 그저 구역질나는 학살일 뿐이었어요.” 응웬 아줌마가 말했다. 어떤 감


정도 담기지 않은 사무적인 말투였다.
“그래서 제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저도 형을 잃었다구요. 이미 끝난 일
아닙니까?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당신 제정신이야?” 엄마가 말했다.
응웬 아줌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서재로 걸어들어갔다. 조심히 닫히던 문소리.
나는 겁에 질렸지만 차마 서재로 따라 들어가지는 못했다. 엄마는 동생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죄송합니다.” 엄마는 호 아저씨에게 고개를 숙였다. “투이야, 미안하다.”
엄마는 그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기저귀 가방과 카디건을 들고 엄마를 따라 나
갔다.
‘그건 그저 구역질나는 학살일 뿐이었어요.’ 그 말을 하던 응웬 아줌마의 웃음기 없는
얼굴이 자려고 누운 내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 말을 할 때 아줌마는 우리와 다른 곳에
있었다. 내가 아무리 상상하려고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장소와 시간에 아줌마는 내몰려
있었다. 그녀의 말은 아빠를 설득하려는 말도 아니었고, 자신을 방어하고자 하는 말도 아
니었다. 그 말은 아빠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간, 그 일을 겪은 이후로 애써 살아온 응웬
아줌마 자신에 대한 쓴웃음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아빠의 태도에 실망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라는 마음이 그날 밤, 아줌마와 우리 사
이를 안전하게 갈라놓았다. 그건 서로를 미워하고 싶지도, 서로로 인해 더는 다치고 싶지
도 않은 어른들의 평범한 선택이었다.
엄마는 투이네 식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열세 살이었던 나조차도 투이
네 가족과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고 직감했지만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몇 번이나 응웬 아줌마를 찾아갔다. 겉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아줌
마는 우리들에게 차와 간식을 내놓았고 우리는 예전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데도 나는 어쩐지 아줌마가 그 시간을 그저 견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는 어색
함을 이겨내려는 듯이 평소보다 더 많은 말을 했다. 그럴 때 엄마의 부정확한 독일어는
자주 부서졌고 당황한 엄마의 문장은 어떤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서로 연결되지 못
하는 단어들은 부유했고 시제와 성性, 수數가 일치하지 않는 문장은 꾸며낸 유머처럼 들
리기까지 했다. 엄마의 말을 듣는 아줌마는 지쳐 보였다. 아무리 아줌마가 마음을 감추려
고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눈치 챌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겨울 코트를 입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엄마는 아줌마를 찾아가지도, 아줌마에 관한 이야
기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늘 투이네 식구와 함께했던 토요일 저녁시간은 우리 가족끼
리 어색하게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으로 변했다. 그즈음에는 해도 짧아져서 여섯 시
만 돼도 사위가 컴컴해졌고 여덟 시면 나는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나는 가만히 누워 엄마가 식탁 의자를 끄는 소리, 한국의 누군가에게 속삭이듯
전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새벽에 화장실을 가려고 밖에 나갔을 때 식탁 의자에 앉아 멍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49

하니 벽을 보고 있던 엄마의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내가 나와 있는 줄도 모르고 무언


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다 나를 보고 깜짝 놀라던, 그리고 안심하라는 듯이 눈가를 떨며
애써 웃던 그 얼굴을.
엄마는 반쯤 쓴 립스틱과 파운데이션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고, 아끼던 투피스와 원피
스를 의류수거함에 버렸다. 일요일이면 어떻게든 짐을 싸서 근처 숲으로, 벼룩시장으로,
꽃시장으로 나들이 다니던 사람이 동생 방에서 벽만 보고 누워 있었다. 전에는 아빠의
말과 행동을 지적하면서 싸움을 걸거나 아빠의 말을 맞받아쳤을 상황에서 엄마는 그저
침묵했다. 밥을 몰아 먹었고 손끝이 빨개지도록 뜨개질을 했다.
그즈음 나는 엄마가 깊이 잘 때 동생 방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 속에는 사진들이 찢긴
채 버려져 있었다. 아직 아기인 나를 안고 있는 엄마와 그 곁에서 웃고 있는 아빠의 사
진, 만삭인 엄마의 배를 내가 만져보는 사진…… 테이프로 붙여보지도 못할 만큼 잘게
찢긴 사진 조각들. 나는 다연이 옆에 누워 잠을 자는 엄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엄
마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 더 멀리 가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엄마는 내게 정사각형 모양의 선물 박스를 건넸다. 투이네 식구를 위한 선물이니, 투이


에게 박스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박스를 부엌 창틀 위에 올려놓았다. 박스는 초
록과 노랑의 체크무늬 포장지에 빨간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몇 안 되는 가구가 빠져나가고, 대부분의 세간을 우편으로 부친 탓에 우리들은 빈집에
몰래 들어와 사는 사람들처럼 지냈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샌드위치를 먹고 밤에는
침낭에 들어가 잤다. 이 년 새에 키가 많이 자라 독일에서 입던 옷은 모두 수거함에 버
려졌다. 독일에 계속 머무르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
다. 한 달이 지나면 나는 한국에서 중학생이 될 터였다. 귀밑 삼 센티미터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교복을 입고 조회 시간에 열을 맞춰 운동장에 서 있는 내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
았다. 그건 분명 두려운 변화였지만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체념
에 가까웠다.

- 최은영, <씬짜오, 씬짜오>,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6.


50 문학과 삶(슬로리딩)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다음은 응웬 아줌마와 주인공의 아빠 간의 대화이다. 이 대화를 토대로 과거사를 논할 때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 그리고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후대들의 태도 등에 대해 말해 보자.
(예: 일제 강점기, 인정과 용서, 관계 회복 등)

“그들은 아기와 노인들을 죽였어요.” 응웬 아줌마가 말했다.


“누가 베트콩인지 누가 민간인인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겠죠.” 아빠는 여전히
응웬 아줌마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태어난 지 고작 일주일 된 아기도 베트콩으로 보였을까요. 거동도 못하는 노인도
베트콩으로 보였을까요.”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이요? 그건 그저 구역질나는 학살일 뿐이었어요.” 응웬 아줌마가 말했다.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사무적인 말투였다.
“그래서 제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저도 형을 잃었다구요. 이미 끝난
일 아닙니까?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2 ‘투이’가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서 독일 선생님이 추가 설명을 요청했을 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이유를 추측해서 말해 보자.

3 이 소설은 독일을 배경으로 한국과 베트남 가족의 만남과 이별을 다루고 있다. 작가가 이 세
나라를 소설의 주요 소재로 삼은 이유에 대해 ‘글로컬’ 차원에서 말해 보자.

4 이 작품은 ‘글로벌 차원의 문제 인식 공유와 치유’라는 세계시민교육의 목표와도 부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쟁의 상호파괴성,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중성 등에 대해 세계 시민성
차원에서 자신의 의견을 글로 표현해 보자.(예: 역지사지, 소통과 공감 등)

5 글로컬은 강자의 논리가 아니라 동반 성장의 논리이다. 글로컬 마인드를 갖추기 위해 필요한
덕목과 가치관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서술해 보자.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51

【질문의 숲】

글로컬 역량의 핵심은 지역적 뿌리를 가지면서도 전 인류에 어필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아우르는 것이다. 자신의 전공과 관련해서 글로컬 역량을 키우기 위한 방안에는 어떤 것이 있
을지 질문지를 만들어 함께 토론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52 문학과 삶(슬로리딩)

【체험의 숲】

앞의 【질문의 숲】에서 글로컬 역량을 키우기 위한 방안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았다. 이번


【체험의 숲】에서는 일차적으로 나의 글로컬 역량을 SWOT 분석을 통해 점검해 보고, 교내·
외 차원에서의 실천을 통해 글로컬 역량을 키워 보자.

항목 글로컬 역량, 어떻게 키울 것인가?

교내 외국인
유학생(교환학생)과의
상호 멘토링해 보기

국내 이주민(다문화 가정,
이주 노동자, 난민 등)과
인터뷰하기

내 지역의 특색 있는
문화 콘텐츠를
브랜드화하여 세계적으로
지역성을 알릴 수 있는
방안 제시하기

나의 ‘글로컬 역량’에
대한 SWOT 분석해 보기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53

2 박범신의 <나마스테>

박범신은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으며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


선되어 등단했다. 그는 주로 70년대 소외된 계층을 다루어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작가
의 문제의식을 작품에 투영하곤 하였다. 소설 <나마스테>는 그러한 작가 의식이 더욱 확대되
어 한국인과 한국을 넘어선 범위까지 조망하고 있다. 특히 이 소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
국인들의 차별과 좌절이 한국으로 이주한 네팔 노동자의 고통, 죽음과 교차하고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소설 <나마스테>는 집 뒤뜰에 갑자기 나타난 네팔 남자 카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부
천시 춘의동 희망로 7번지에 살고 있는 신우에게 카밀과 그의 여자 친구 사비나가 막무가내
로 방을 달라고 청하면서 셋은 함께 살게 된다. 신우는 미국의 LA 흑인폭동사건 때 아버지와
막내 오빠를 잃은 뒤 미국을 떠나 작은오빠 가족과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살고 있었다. 지병
을 앓던 어머니는 신우와 같이 한국에 왔다가 다시 미국에 남아 있는 큰오빠의 집으로 돌아
간 뒤였다.
카밀과 네팔에서 연인이었던 사비나가 돈을 벌러 한국에 온 후 연락이 되지 않아 카밀은
한국으로 사비나를 찾아온 것이다. 카밀은 의정부 공장에서 일하다가 영업 부장의 폭력에 대
항하다가 도망쳐 부천으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사비나가 카밀의 돈을 가지고 도망을 가고,
그 충격의 후유증으로 아파하는 카밀을 신우가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면서 둘은 급격히 가까
워진다. 손재주가 좋은 카밀은 청소는 물론 뒤뜰의 버려진 나무로 의자와 그네 등을 만들기도
하고 신우를 위해 네팔 음식, 한국 음식을 정성스레 만들기도 한다.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고
신우와 카밀, 딸 애린은 함께 살아간다.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법 발효로 말미암아 카밀은 농
성에 참여하였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분신하게 된다. 신우 역시 건물에서 떨어지는 카밀을
받으려 하다 부상을 당해 딸 애린이 열 살 되던 해에 죽게 된다. 이후 스무 살이 된 애린이
아버지의 나라 네팔을 찾는 여정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결혼 이주 여성, 이주 노동자 등 한국 사회의 이방
인들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새롭게 등장함으로써 다문화 사회의 징후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
런데 이주자들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주자들은 경제, 제도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로부터 받게 되는 차별과 냉대로 편치 않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이 소설 <나마스테>에서 카밀의 경험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카밀이
한국에 오자마자 돈을 빼앗기는 장면, 수도권 변방에서 한국인들에게 당하는 폭력 장면을 통
해 우리에게 내재된 폭력과 차별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
각해 보게 된다.
글로컬 역량은 세계화를 향해 가기 위한 역량을 의미한다. 더불어 우리 내부에 있는 다양하
고 이질적인 요소들과도 협력하여 상생하는 역량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다문
화성과 그것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몰이해는 차별과 폭력
54 문학과 삶(슬로리딩)

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이질적 요소를 이해하고 그것과 공존하는 일은 단일민족이라
는 신화를 믿어온 한국인이 쉽게 해결할 수는 없는 요소이다. 하지만 세계의 문턱이 낮아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민족적·국가적 범위를 확장해야 할 필요성은 분명히 있다. <나마스테>는
주인공 신우의 타자들을 향한 행동과 애린(愛隣)이라는 주인공의 2세의 이름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할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읽기의 숲】

누나한테 올 때만 해도 그래요.
나, 사고 쳤어요. 사고 치고 도망온 건데요. 나, 카밀 때문에 난 사고, 아니었어요. 청바
지 만드는 그 공장에 외국인 노동자들 열여섯 명이나 있었어요. 네팔 사람, 방글라데시
사람, 스리랑카 사람, 필리핀 사람, 카자흐스탄 사람, 그리고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온
흑인 두 명, 이렇게요. 영업 부장님 차 몰고 들어오는데 나이지리아에서 온 마리오가 청
바지 박스 메고 오다가 차 갑자기 들이닥치니까 당황해서 넘어졌던가 봐요. 영업 부장님,
특히 마리오 미워해요. 아니 얼굴 검은 사람 미워해요. 흑인 제일 미워하고 아시아 사람
도 얼굴 검은 순서대로 미워하는 사람이에요. 이유는 없어요. 깜둥이만 보면 무조건 패고
싶다고 영업 부장님, 직접 말하는 거 들은 일도 있어요. 다른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요, 영업 부장님 군대에서 미군 장교 돕는, 그래요, 카투사, 그거였었대요. 흑인 장교 밑에
있어서 그 흑인 장교한테 복수할 거 있을 거라고, 한국 직원이 말해주었어요.
너, 이 새끼, 일부러 넘어졌지?
영업 부장님 소리치는 소리 들렸어요. 내가 고개 내밀고 봤을 땐 마리오, 벌써 무릎 꿇
고 있었는데요, 다짜고짜 발길이 마리오 배로 날아가는 것이었어요.
이 깜둥이 새끼, 내 찬 줄 알고 그랬지?
영업 부장님, 엎어진 마리오 머리통 구둣발로 짓이겼어요. 자기를 욕보이려고 일부러 넘
어졌다 그건데, 마리오는 그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바보같이 착한 애였다구요. 마리오가
흑인이고 착해서 만날 영업 부장한테 걸리는 것, 우리 모두 알고 있었어요. 밖에서 기분
나쁜 일 있었는지 영업 부장님 화는 그러고도 멈추질 않았어요.
아주 죽여버려야지, 이 깜둥이 새끼.
영업 부장님, 근처에 있는 끊어진 철봉대 들고 왔어요. 무릎 꿇고 있던 마리오는 철봉
대 주워드는 영업 부장님 보고 납작 엎드렸어요. 우리들은 일손을 놓고 있었지요.
일이 벌어진 건 쿠샤 때문이었어요.
쿠샤는 스리랑카 청년이었는데,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한국 실정 아직 잘 몰랐지
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 힘은 셌으나 순한 친구였어요. 영업 부장이 철봉대로 무릎 꿇
고 앉은 마리오를 후려치려는 순간 근처에 있던 쿠샤가 달려들어 영업 부장을 뒤에서 껴
안았어요. 그저 마리오를 때리지 못하게 하려던 것뿐이었지요. 그렇지만 거구의 쿠샤가 뒤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55

에서 자기를 껴안자 영업 부장, 자신을 치려는 줄 알고 겁을 먹었던가 봐요.


이 새끼가 사람 친다야!
영업 부장은 버둥거리며 소리쳤어요.
아, 아이구, 나 죽네. 이 새끼…… 이 새끼들, 사람 죽는다야. 뭣들 해. 한…… 한국 직
원들 다 나와!
한국 사람, 직원들 달려왔어요.
영업 부장은 한국 직원들도 다 무서워했거든요. 사장님 처남이래요. 한국 직원들이 수십
명 달려나와 마리오, 쿠샤는 물론 우리들, 외국인 노동자들, 마구 패기 시작했어요. 순식
간에 패, 패싸움이 된 거지요. 아니 패싸움이라기보다 일방적으로, 집단적으로 구타 시작
된 거예요. 난 공포감 느꼈어요. 그대로 맞다간 우리 중 누구 한 사람, 죽을 것 같더라구
요. 난 그때 작업 중이었으니까 당연히 샌드기 들고 있었어요. 난 무서워서 샌드기를 휘
둘렀어요. 내 옆에서 같이 작업하던 필리핀 사람도 그랬구요. 그렇다고 사람을 향해서 똑
바로 샌드기를 쏘진 못했어요. 그냥 위협만 할 생각이었는데요. 그래도 그 중의 어떤 사
람들은 팔다리에 모래를 맞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어요. 누나 처음 만나던 날 내 팔의 상
처도 옆에 있던 동료의 샌드기 모래를 빗맞아 그렇게 된 거예요.
일이 커지고 만 거지요.
먼 데서 경찰 사이렌 소리 들리고, 한국 직원들 둥그랗게 우리를 에워싸고,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나면서 이제 감옥 가겠구나, 사비나도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니까 살 길은
당연히 도망갈 길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다른 사람은 혹 용서받더라도 샌드기 휘
두른 우리 두 사람은 사람을 다치게 했으니 갈 길 뻔하잖아요.
그렇게 된 거예요. 누나.
샌드기로 사람들 위협하다가 죽어라 도망쳐 나와 근처 숲으로 들어갔어요. 물론 사비나
는 시흥 박스 공장 다닐 때 이미 만났고, 그래서 서로 소식은 주고받고 있었어요. 사비나
의 주소만 들고 산으로 산으로 해서 밤새 예까지 오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 (중략) ……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다.


당신이 자유와 평등의 이상적 법치국가라고 믿었던 미국이 정작 당신 자신이 위험에 처
했을 때 보호자가 되어주지 않았던 사실을 아버지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오히
려 흑인들을 두둔하면서 한국인들을 부정적으로 몰아치는 데 급급했다. 흑인들의 돌팔매
가 백인들에게 날아올까봐 본능적으로 아시안계 한국인들을 방패막이 삼고자 했던 것이었
다. 아버지가 총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눈을 감은 것도 알고 보면 당신이 미국에 믿
었던 미국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 해 가을에 죽었다.
56 문학과 삶(슬로리딩)

총상을 입고 주로 병원에서 보낸 6개월 사이 아버지는 40킬로그램까지 몸무게가 빠졌


고, 시력을 잃었으며, 하회탈처럼 주름살투성이로 급격히 늙었다. 더욱 억울하고 분한 것
은 막내오빠의 죽음까지도 폭동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이유로 단순 강도 사망
사건으로 처리된 것이었다. 작은오빠가 총격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진술하고 억울함을 호
소했지만 인명 피해 규모를 되도록 줄일 필요가 있었던 경찰은 작은오빠의 진술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 가족의 고통은 그것으로 더욱더 깊어졌다.
무섭다. 한국으로 가자.
병원에서 깨어난 아버지가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악몽 같았던 약탈과 방화와 총격이 난무할 때 강력한 미국 경찰은 밤새 코빼기조차 보
이지 않았다. 도대체 경찰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많은 사람들은 울부짖었다. 아시안계 이
민자들의 용도는 미국 백인주류사회에서 볼 때 흑인과 백인 사이의 중간 방화벽 같은 존
재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가령, 한국인들의 주 업종인 소매업과 서비스업은
유통구조의 마지막 단계로 흑인과 라틴계 고객을 최종적으로 상대해야 되기 때문에 갈등
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제조업이나 도매업에 종사하는 백인과 최저층 흑인 사이에
쳐진 방화벽, 혹은 방패 같은 역할을 바로 한국인을 비롯한 소수이민자들이 감당하고 있
는 셈이었다. 미국이 자유와 평등의 나라여서 동양계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건
단순한 논리였다. 폭동의 현장에 밤새 경찰이 투입되지 않은 것만 봐도 그랬다. 어차피
흑인들은 분풀이를 해야 되니까 어느 정도 분이 풀릴 때까지 내버려두자. 그렇지 않으면
백인을 공격해올지도 모르니까. 미국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백인 고위그룹은 그런 계산
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병상에서 보낸 마지막 6개월 동안 아버지가 느낀 공포와 회
한은 바로 그런 구조를 비로소 보고 인식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언제 가냐, 서울에.
임종에 가까워지면서 아버지는 더욱더 간절하게 묻곤 했다. 흑인도 백인도 무섭고 특히
거대 미국이 무서워 한시도 여기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백인 간호사의 간호까지 아버지는
거부했다. 살아남은 가족은 아버지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전무했다.
돈도 잃었고 희망도 잃었고 사랑도 잃었다. 아버지는 40킬로그램 이하의 몸무게로, 당
신 목숨이 짊어진 모든 것을 스스로 밀어내고 죽었다. 아버지로선 모든 걸 잃었으니 죽을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그렇다고 우리 잘못이 없었다는 건 아냐.”
나는 소주잔을 연거푸 비우고 말했다.
“우리가 잘못한 것도 많거든. 솔직히 말해 우리나라 사람들, 흑인과 남미 계통 사람들
무시한 건 사실이야. 그 사람들하고 친구가 되려곤 안 했어. 깜둥이들, 열에 여섯 명은 도
둑놈이야. 그들이 가게에 들어올 땐 절대 한눈 팔면 안 된다. 도무지 훔치는 일이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게 그놈들이거든. 아버지도 생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미국 이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57

민 간 우리나라 사람들 다들 고학력자야. 흑인보다 많이 배웠고 또 부지런해. 흑인이나


멕시칸들, 사는 태도를 보면 저절로 한심하단 생각이 들 수밖에. 그러니 자연히 빨리빨리
돈 벌어 게으르고 더러운 저것들 바닥을 떠나야지 하고 생각하는 거야.”
“그 부지런하다는 거 말인데요.”
카밀이 내 말에 토를 달았다.
“물론 여기 와 한국 사람들 부지런한 것, 많이 배웠지만요, 안 부지런한 한국 사람도
많아요.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요, 한국 직원들, 사장님, 부장님, 과장님 있을 땐 부지런한
데요, 높은 사람 없으면 그냥 노는 사람도 있는데요, 그런 사람들조차 외국인 노동자들은
무조건 게으르다, 더럽다 생각하니 미쳐요. 빠른 거하고 부지런한 거하고 꼭 같은 건 아
니라고 봐요. 한국 사람들은 세상에서 부지런한 것은 자기들밖에 없는 줄 알아요.”
“그래. 우린 단일민족이니까. 배달민족, 백의민족이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 매일 아침
조회 시간에 듣는 소리가 그거야. 단일민족의 우수성. 내가 지금 하려고 했던 말이 바로
그거라고.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사는 교포들까지 무의식 속에 배달민족, 단일민족 박혀 있
으니까, 흑인, 멕시칸, 무시하게 돼. 여러 민족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 모르는
거야. 우리 가족이 겪은 비극도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업자득인 면도 있어. 도대체 다르
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거든. 백인들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존중하면서
말야. 카밀도 그런 말 했잖아, 왜? 미국인, 영국인 대하는 것과 네팔 사람, 방글라데시 사
람 대하는 것, 천지 차이라구. 그 말 나도 알아. 미국에 살면서도 수없이 보고 느껴온 게
그거니깐.”
“아버지 돌아가시고 곧 한국에 돌아왔나요?”
“우리 가족은 …… 뿔뿔이 흩어졌어.”
갑자기 내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비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번개가 번쩍할 때 멀리 종합운동장과 레포츠 공원 쪽 건물
들의 실루엣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지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밤 지대가 낮은
어떤 동네는 기어코 물에 잠기고 말 것 같았다.

…… (중략) ……

크리스마스와 신년 대목을 겨냥해서 성급한 상인들은 가게마다 네온 불빛을 장식하거나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내놨다.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는데도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이
넘쳐흘렀고 자동차는 물밀 듯 흘러갔다. 나 또한 어쨌든 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미라와
함께 쇼윈도에 놓을 크리스마스 트리를 색종이와 종과 별과 산타 할아버지로 장식했다.
옆 가게에선 벌써부터 하루 종일 크리스마스 캐럴 송을 틀어놓고 있었다.
오빠가 주문한 물건을 직접 가져왔다.
크리스마스와 신년 대목에 잘 나갈 만한 선물용 셔츠와 바지, 그리고 특별히 구해온 선
58 문학과 삶(슬로리딩)

물용 지갑세트와 혁대 등이었다. 오빠는 물건들을 들여 놓고 나서 다시 차로 가더니 곧


눈처럼 하얀 색상의 앙증맞은 파카형 오버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칼라에 밍크가 덧대진
아주 고급스러운 어린이용 오버였다.
“오빠도 참. 애린이 너무 어려서 이런 거 못 입어요.”
“두었다가 내년에 입히면 되지 뭐.”
“다른 것 좀 부탁할게, 오빠. 나무라지 말고 꼭 구해줘. 땡장수라고 있잖아, 왜? 청계천
에서 마지막으로 팔아넘기는 옷들. 땡장사한테 오리털 파카 사려면 얼마쯤 할까. 따뜻하기
만 하면 돼. 스타일은 좀 구식이래도 좋고.”
“글쎄, 땡장사 옷이야 싸니까…….”
“한 벌 필요한 게 아냐. 돈은 현찰로 지불할게. 싸게 사줘. 한 팔십 벌쯤…… 필요해.
귀도 덮이는 따뜻한 모자하고. 이것저것 묻지 말고 이번만 내 말대로 해줘요. 오빠.”
“애린 애비놈, 농성하고 있는 건 안다.”
“그냥 겨울 보내다간 모두 골병들 거야. 그 사람들, 좀 잘 살아 보자고 여기 와서, 그
꼴이 뭐야, 도대체? 그 사람들, 자꾸자꾸 자살하고 그러는 거 오빠도 알겠지. 미국놈이라
고 오빠가 욕할 때 생각 나. 우리가 미국놈보다 나은 게 없어. 더하면 더했지. 더구나 애
린이 아빠, 어쨌든 오빠한테 매제가 돼, 가족이야.”
“그놈, 가족으로 받아들인 적 없다.”
“돈은 내가 부담해. 구해만 줘.”
오빠는 내 말에 가타부타 뚜렷한 대답을 안 하고 부르릉, 차를 몰고 가게 앞을 떠났다.
그 정도의 반응이라면 오빠는 아마 옷을 구해오긴 할 것이었다. 농성을 얼마나 더 계속해
야 할는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찬바람 부는 가로에 서서 멀리 사라지고
있는 오빠의 차를 아득하게 바라보았다.

- 박범신, <나마스테>, 한겨레신문사, 2005.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59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사는 교포들까지 무의식 속에 배달민족, 단일민족 박혀 있으니까, 흑인,


멕시칸, 무시하게 돼. 여러 민족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 모르는 거야. 우리 가
족이 겪은 비극도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업자득인 면도 있어. 도대체 다르다는 걸 인정하
지 않으려고 하거든.”이라는 주인공 신우의 말 속에 나타난 ‘단일민족’에 대해 자유롭게 이
야기 나누어 보자.

2 “영업 부장님, 근처에 있는 끊어진 철봉대 들고 왔어요. 무릎 꿇고 있던 마리오는 철봉대


주워 드는 영업 부장님 보고 납작 엎드렸어요.”와 같은 이주 노동자에 대한 폭력적 장면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이야기해 보자.

3 학교 내에서 유학생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들의 수업 시간, 시험 시간, 학내 생활 등을


살펴보고 그들의 전반적인 일상을 그려 보자.

4 한국 사회 안의 외국인 이주자와의 소통 경험이 있다면 이 소설과 비교하여 이야기해 보자.

5 이 소설의 내용과 유사한 다른 이야기나 대중 콘텐츠가 있다면 찾아보고 비교하여 글로 작성


해 보자.
60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외국인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TV나 기타 매체의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우


리의 모습에 대해 의문 나는 점은 없는지 서로 질문해 보고 답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61

【체험의 숲】

지역 다문화 센터를 조사해 보고 그 현황을 파악해 본 후 한국에서 외국인이 차지하는 인


구 비율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외국인과 함께 살아갈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보자.

체험 항목 활동 내용

우리 지역 다문화 센터 및
다문화 관련 공공기관 조사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

외국인과 공존하는
삶의 방식
62 문학과 삶(슬로리딩)

3 황석영의 <바리데기>

<객지>, <삼포가는 길>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소설가 황석영은 한국전쟁과 분단, 냉전 체
제와 독재,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깊이 있게 천착한 한국을 대표하는 리얼리즘 작가
이다. 1989년 방북으로 인해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오랜 망명 생활을 이어간 그는 귀국하자
마자 한동안 옥고를 치른다. 그 후 방북과 해외 체류 과정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래된 정
원>,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등을 발표한다. 이 중 장편소설 <바리데기>는
작가가 이 시기에 발표한 여러 소설 가운데서도 문학적으로 큰 성과를 얻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바리데기>는 동북아시아 샤먼의 전통을 잇는, 죽은 이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황천무가(黃泉
巫歌) ‘바리공주 설화’를 차용하고 있는 소설이다. 오귀대왕의 일곱째 딸로 태어난 바리공주는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져 궁 밖에서 자라지만 병든 부모와 해후한 뒤 부모를 구하고자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고생한 끝에 생명수를 구한다. 황석영 작가는 이러한 바리공주 설화를 21세
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이 직면한 현실 문제로 실감나게 재현해 낸다. 소설은 인간 세계
와 동물 세계, 영혼 세계 등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전개되는 독특한 서사 구조를
취한다.
큰무당이었던 조상의 능력을 물려받아 영혼, 귀신, 동물 등과도 소통하는 영험함을 지닌 주
인공 바리는 가난과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북한을 탈출한다. 가족들과도 헤어지고 혼자 남
게 된 그녀는 중국 연길을 거쳐 다롄으로 이주하지만 결국 그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한다. 밀항
선을 타고 영국으로 건너간 바리는 파키스탄 사람 알리를 만나 결혼하게 되나 그 이후에도
그녀의 험난한 삶은 계속 이어진다. 설화의 바리공주가 생명수를 구하러 서역에 간 것처럼 소
설 속의 바리는 21세기 자본의 그늘 아래 있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생명수를 찾아 나선다.
작가는 바리의 이와 같은 행보를 통해 초국가적이고 탈경계적인 인물들의 해외 이주 과정과
그 후의 적응 문제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탈북, 전쟁, 기아, 테러 등으로 고통받
는 사람들의 힘겨운 삶의 여정으로 구체화된다. 작가는 기근과 재해로 죽어가는 사람들, 가난
과 억압의 장소에서 탈출하는 난민들, 밀항선에 올라 폭력과 학대를 당하는 사람들의 수난사
는 물론, 9·11 테러, 아프가니스탄 전쟁, 런던 지하철 테러들을 통해 폭력적인 세계 현실의
참상을 실감나게 드러낸다.
소설에서 바리가 새로운 생명수를 찾아 서천으로 가는 긴 여정을 통해 작가는 오늘을 살아
가는 독자들이 문화와 종교, 빈부 차이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세계 시민으로서 다원적 조화를
추구할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서 바리가 찾는 생명수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작가가 던지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라 하겠다.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63

【읽기의 숲】

우리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지던 때에 나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어려서는 청진에 살았다. 우리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의 단독주택에 살았다.
봄이면 마을 빈터의 마른 잡초들 사이에서 한 무리의 진달래들이 이 묶음 저 묶음 다투
어 피어나 아침저녁 노을에 더욱 붉게 타오르고 드높은 동편 하늘가에 아직도 눈을 하얗
게 얹은 관모산이 아랫도리를 안개 속에 감추고 떠 있었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크고
둔해 보이는 철선들이 정박해 있었고 그 주위로 작은 고깃배가 아련하게 통탕대는 발동
소리를 내면서 느릿느릿 헤엄쳐 다녔다. 그리고 갈매기들이 생선비늘처럼 반짝이는 바닷
물결 위의 햇빛을 사방으로 흐트러뜨리며 역광 속으로 힘차게 날아갔다. 나는 항구의 사
무실에서 돌아올 아버지를 기다리거나 장에 간 어머니를 기다렸다. 길을 벗어나 제법 가
파른 언덕의 끝까지 나아가 쪼그려앉아 있던 것은 두 사람을 기다릴 겸하여 그냥 바다를
내다보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우리 식구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 위로 언니들이 여섯이나 있었다. 그러
니까 우리 엄마는 거의 십오 년 동안이나 배가 불러 있었고 몸을 풀자마자 곧 뒤이어 다
시 아기를 가졌다는 뜻이다. 우리 자매들은 거의가 한두 살 터울로 태어났는데, 큰언니와
둘째언니는 엄마가 애를 낳던 날의 두려움을 차례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엄마가 애를 낳을 적마다 곁에서 산파 노릇을 해줄 할머니가 있어서 다행이었
다. 셋째까지는 아버지도 방문 앞이나 마당에서 줄담배를 붙여 물고 서성댔지만 그다음부
터는 엄마가 아기를 낳을 기미가 보이면 그날은 사무실에서 퇴근하지 않고 아예 숙직을
자청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참고 참던 화통을 터뜨린 것은 다섯째 숙이 언니를 낳을 때
부터였다. 안방에서 할머니와 엄마가 물을 데워다 방금 낳은 아기를 함지 안에 잠그고
씻겨주고 있는데 아침에 아버지가 숙직실에서 돌아왔다나. 아버지는 방문을 열고 들어서
자마자 “이 까짓 거는 또 낳아 멀 하니.” 하면서 숙이 언니를 채뜨려서는 물에다 푹 담
갔다. 할머니가 질겁을 하여 아기를 얼른 물속에서 건져올렸는데 갓난쟁이가 물을 들이켜
고 한동안 숨이 막혔는지 울지도 못하고 캑캑거렸다. 여섯째 현이 언니 때는 화풀이로
아침밥상을 마당으로 집어던지는 바람에 뒷간에 다녀오던 큰언니가 김치보시기를 뒤집어
썼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태어났을 때는 어땠을까. “우린 모두 뒤켠 아이들 방에 몰려서
숨을 죽이구 있댔다.”라고 첫째인 진이 언니가 말했다. 태어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 뒤
에 둘째 선이 언니가 동정을 살피러 갔다가 돌아와서는 비죽비죽 울면서 그랬다고 한다.
흐응, 난 몰라, 또 딸이래.
큰 언니가 모두에게 주의를 주었다고.
이제부터 찍짹 소리 없이 아버지 돌아올 때까지 밖으로 나갈 생각 말라.
나를 받아낸 할머니는 그냥 핏덩이째로 옷가지에 둘둘 싸놓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미
역국 끓일 생각도 못하고 부엌 봉당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엄마는 소리죽여 울고 앉았
64 문학과 삶(슬로리딩)

다가 나를 그대로 안고 집 밖으로 나가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인적 없는 숲에까지 갔다.


엄마는 소나무숲 마른 덤불 사이에 나를 던지고는 옷자락을 얼굴에 덮어버렸다고 했다.
숨이 막혀 죽든지 찬 새벽바람에 얼어 죽든지 하라고 그랬을 게다.
아버지가 돌아와서는 아무 말 없이 안방문을 열었다. 엄마는 이불자락을 얼굴 위까지
덮어쓰고 아무 대꾸가 없고 할머니는 부엌에서 가끔씩 마른기침만 하지, 아버지는 집안
분위기로 벌써 아들 보기는 영영 그른 줄 알고 다시 휭하니 나가버렸다. 해가 중천에 높
이 뜰 때까지 엄마와 할머니는 각각 안방과 부엌에서 그렇게 맥을 놓고 앉았다가 할머니
가 들어오면서 물었다.
거 핏뎅이는 어디루 갔네?
몰라요, 저 혼자 게나갔나.
아니 이런 베락 맞아 죽을 간나. 앨 내다버렸구나!
할머니가 나를 찾아서 집 안과 바깥을 돌아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못 찾겠더라고 했
다. 할머니는 하늘의 벌을 받을까봐 겁도 나고 에미도 불쌍하고 손녀들도 가엾어서 찬물
을 사기그릇에 한 사발 떠다 소반에 받쳐서는 뒤꼍에 앉아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치성
을 드렸다.
천지신명님, 그저 이 집안에 액이 없게 하시고, 아기를 별탈 없이 찾게 하여주시고, 속
상한 에미 맘 돌리게 해주시고, 애비의 분도 가라앉히시고, 그저 모두덜 무사하게 지켜줍
소서.
할머니가 기도를 마치고 다시 집 안팎이며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허탕을 치고 들
어와서는 맥을 놓고 툇마루에 앉았는데, 흰둥이가 개집 구멍에서 목을 죽 빼고 할머니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래 가만 살피니까 아기를 쌌던 옷자락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할머니가 혹시나 해서 달려가 보니 흰둥이가 나를 제 다리 사이에 감싸고 누워 있었다고
한다. 나는 눈감고 쌔근대며 잘도 자고 있었다고. 흰둥이는 엄마가 나를 버리러 집을 나
설 때 멀찌감치서 어슬렁어슬렁 따라가 냄새를 맡아보고 주위도 맴돌아보고 하다가 나를
물고 집으로 돌아왔을 게다.
아이고, 우리 흰둥이 기특도 험세. 야는 하늘이 내려주신 아가 분명쿠나.
그래서였는지 어릴 적부터 나와 친했던 것은 할머니와 흰둥이였다. 흰둥이는 털빛이 하
얀 풍산개라서 그냥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지만, 나는 사람구실이 시작된다는 백일이 넘을
때까지 이름이 없었다. 아무도 이름 지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우리
식구가 뿔뿔이 흩어진 뒤 두만강 건너 그 움집에 살 적에 할머니가 아주 옛날에 증조할
머니에게서 들었다는 바리공주 얘기를 몇 번이나 해주었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끝내고 나
면 나에게 노래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던져라 던지데기 바려라 바리데기, 그러니까 너 이름이 바리가 된다.

…… (중략) ……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65

알리와 나는 아래층의 나이지리아 부부가 살던 방에 들어가 살림을 시작했지만 취사는


언제든지 위층의 할아버지 부엌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야 한 가족으로 매일 식사를 함
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에 직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오후에 할아버지가 우리의 메모
대로 장을 보아온 것들을 추려서 요리를 했는데 보통은 할아버지와 단둘이서 식사를 할
때가 많았다. 일이 많은 주말을 피하여 주중에는 이틀 정도 알리가 저녁을 함께 먹고 늦
게 밤일을 나가는 날도 있었다.
압둘 할아버지와 나는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서 전보다 더 자주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아버지가 내게 해준 얘기들은 가족과 조상 들에 대한 얘기와 우주에 하나밖
에 없는 알라신에 대하여 그리고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일화들이었다. 나는 꾸란을 읽
지는 못했지만 이를테면 ‘라 일라하 일랄라 무함마드 라술룰라’ 하는 고백기도의 첫 구절
은 저절로 외우게 되었다.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라는 뜻이라
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천지만물을 주관하는 하늘님이 계시다는 할머니의 말
을 기억하고 있어서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들었다면 또 미신이라고 윽박질렀을
테지만, 할머니가 말해주던 그분이나 압둘 할아버지가 말한 이분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
고 생각했다. 이들은 난이나 차파티를 먹고 우리는 쌀밥을 먹는 차이가 있다고나 할까.
나는 압둘 할아버지에게 할머니 얘기를 가끔씩 해드렸다. 압둘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그분은 착하게 살다 죽어서 지금은 물이 흐르고 꽃이 만발한 낙원에서 천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가끔씩 보는 무지개다리가 걸린 강 건너 풀밭 어디쯤에 그런 분들이 어우
러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통킹 살롱의 탄 아저씨는 불교를 믿었고 루 아저씨는 요리를 끝내고 쉴 때면 뭔가 주
문 비슷한 기도를 끝없이 외우곤 했는데 차이나타운의 많은 사람들이 도교 사원에 나가
향불을 피우고 기원을 올렸다. 루나 언니와 사라 아줌마는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 사람이
었지만 영국에서 태어나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었다. 그래도 이들은 서로의 풍습에 따
라서 예법과 격식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압둘 할아버지가 나의 이런 설명에 만족
한 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가야, 우리 옷과 음식이 서로 조금씩 다르듯이 그건 살아온 방식이 다를 뿐이다. 우
주의 섭리는 하나로 모인단다.
나는 무슬림에 대하여 거의 몰랐지만 알리와 가족들의 풍습이 특히 불편한 것은 없었다.
다만 나중에 라마단 기간을 거치면서 조금 불편하기는 했다. 그러나 단식기간이 끝나면
다시 대하는 일상의 음식과 가족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압둘 할아버지에게 우리 할머니가 해주었던 바리공주 얘기를 하며 내 이름이 바
리가 된 연유도 말했더니 할아버지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전설 속의 바리와 같은 운명이라면, 이제부터 생명의 물을 찾아야 되겠구나.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할아버지. 다만 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살다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그랬어요.
66 문학과 삶(슬로리딩)

…… (중략) ……

천장이 열리면서 나는 어둠속에 가볍게 떠오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하얀 길이 보인


다. 길 위로 미끄러지듯 나아가자 칠성이가 꼬리를 한들거리며 기다리고 섰다. 나는 무너
지듯이 칠성이에게로 주저앉으며 끌어안으려고 한다. 그런데 어느 틈에 살짝 비켜난 칠성
이가 바로 그만큼의 거리로 물러나서 꼬리를 흔들고 있다.
나는 슬퍼서 살 수가 없어. 제발 나를 위로해줘.
바리야, 괜찮아, 너는 잘해낼 거야.
칠성이는 그렇게 마음의 말을 남기고 앞장서서 뛰어간다. 나도 그 뒤를 따라 하얀 길
을 미끄러지듯 간다. 모래가 하얗게 깔리고 드문드문 큰 바위들이 섰는 바닷가에 당도한
다. 바다를 등지고 흰옷 차림의 할머니가 서 있다. 바람에 옷자락이 한들한들 나부끼고
있다. 그전처럼 할머니에게 달려가 쓰러지듯 안긴다. 할머니는 가뿐하게 나를 안아준다.
할마니, 나 가족두 잃구 이젠 남편두 딸두 몽땅 잃었시오.
내가 울음을 터뜨리며 말하자 할머니가 등을 토닥여준다.
저 세상을 보라. 길거리에 스쳐지나던 사람들두 그 순간이 지나문 자리에 없어. 어제
또 조금 아까 만난 사람을 생각해보라. 없지, 말두 안 들리구 형체두 없어졌지. 네 딸 순
이는 여게 와 있다.
하면서 할머니가 내 어깨를 잡아 돌려세운다. 내 등뒤에 순이가 와서 서 있다. 순이는
할머니와 똑같이 인형처럼 작은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칠성이와 나란히 서있다. 나는 순
이를 안으려고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는데 그애는 칠성이처럼 뒤로 물러난다. 나는 허우
적거리며 다가서지만 순이는 바로 그만큼 뒤로 물러난다. 할머니가 말한다.
애쓰지 말라. 세상에 간직한 네 몸은 네가 아니야. 네 넋에 집이지. 몸을 버리구 떠나
오문 너두 우리처럼 된다. 슬픈 거나 기쁜 거나 다아 세상에 속해 있지.
기러문 나두 떠나올래.
아니, 할 일이 좀 남아 있지 않네? 너 가구 오는 길에 질문하는 사람덜 많이 만난다구.
응, 옛말에 바리공주두 저승 가서 알아가주고 오갔다구 기랬대서.
오오, 기랬다. 글카구 생명수두 찾아내야지비.
할머니가 바다를 향하여 돌아서자 나무로 만든 조선배 한 척이 나타난다. 배는 내 키
의 다섯 배 열 배만큼 컸는데 황포돛대가 두 개나 달렸고 위로 오를 수 있도록 구름다리
가 내려와 있다. 할머니가 내 등을 밀어준다.
타라!
칠성이가 먼저 계단으로 깡충깡충 뛰어올라간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오른다. 뒤를 돌아
보니 해변은 사라지고 캄캄한 어둠 가운데 배가 떠오른다. 배는 물 위를 흘러가는 게 아
니라 하늘로 둥실 떠올라서 간다. 우리는 배의 판옥 망루에 서 있다. 칠성이가 나에게 일
러준다.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67

맨 처음에는 불바다, 그다음에 피바다, 마지막으로 기러기 깃털도 가라앉는 모래바다를


지나면 무쇠성이 나온다.
거기가 어디야?
서천의 끝.

어둠을 지나니 불길이 이글대며 올라오는 불바다가 시작된다. 배가 지나가는 좌우의 허


공으로 불길이 치솟고 매운내 나는 연기가 검게 올라와 구름처럼 앞뒤를 감싼다. 불속에
서는 아무런 형상도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려온다. 폭탄 터지는 굉음과 총 쏘는 소리와
총탄이 나는 소리, 비행기 헬리콥터 탱크와 장갑차가 날아다니고 달리고 구르며 쏘고 터
지는 소리, 엄청난 무리의 군중이 내지르는 아우성과 여자와 아이들의 비명소리. 외마디
의 고함소리들.
진격 앞으로!
손 들어, 꼼짝 마라.
악의 무리를 전멸시켜라.
신의 영광을 위하여!
쏘고 죽이고 부수고 모조리 쓸어버려.
우리가 이겼다, 만세 만세!
불길과 연기가 사라지며 배는 다시 한동안 어둠 속을 떠간다. 시끄럽던 소리도 잠잠해
진다. 나는 귀를 막아도 머리가 터질 것처럼 요란하던 소리가 그친 걸 알고 두 귀에서
손을 뗀다.
아아, 끔찍해.
칠성이가 마음속으로 말한다.
저건 너희가 세상에 지어놓은 지옥이야. 그래서 여기에두 똑같이 있단다.
하늘이 늦저녁 무렵처럼 차츰 불그레한 박명으로 가득 차면서 아래편에는 검붉은 피의
물결이 보인다. 배가 피바다 위를 지난다. 저 아득하게 먼 앞쪽에 도시의 하늘처럼 거뭇
거뭇한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칠성이에게 묻는다.
저건 어느 도시야?
저승의 배들이야. 피바다 위에 머물고 있다.
가까이 가자 서로 다른 모양의 회색 배들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게 보인다. 희미한 등
불이 켜진 갑판 위에 벌거벗거나 찢어진 옷을 걸친 남녀와 아이들이 보인다. 그 안에는
내가 부령 무산 사이의 산골마을과 길에서 만났던 굶어 죽은 사람들도 보이고 어쩌면 현
이 언니나 내 식구들도 보일 것만 같아서 머리를 돌리며 샅샅이 훑어본다.
그 틈에서 나는 이제야 내 가족들을 본다. 엄마와 함께 부령으로 소환되어간 정이 숙
이 언니도 거기 있고 산에서 얼어 죽은 현이 언니도 함께 있다. 아아, 그들은 모두 죽었
구나. 꿈을 꾸면서 이게 꿈인 줄 알듯이 이곳이 이승이 아닌 타승의 환상이라는 걸 나는
68 문학과 삶(슬로리딩)

알고 있다. 나는 큰 소리로 그들을 부른다.


오마니, 언니야, 현이야!
하지만 그들은 나를 못 본 것처럼 정면을 향하여 늘어서 있을 뿐이다.
가차없이 장면이 바뀌면서 배 안의 이곳저곳이 자세하게 비친다. 흑인들 백인들 황인들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배 안에 타고 있다.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시달리다 죽고, 일하다
죽고, 맞아 죽고, 터져 죽고, 불에 타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애달아 죽은 온 세상의 넋
들이 타고 있는 배. 바로 앞쪽에서 누군가가 몸을 밖으로 길게 빼고 외친다.
얼른 대답해다오. 우리가 받은 고통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왜 여기 있는지.
나는 외치는 이가 베키라는 걸 알아보고 되묻는다.
이런 광경은 뭐예요, 당신들은 왜 거기 함께 있나요?
이건 네 마음속의 장면이야. 내 질문을 잊지 마라.
나는 차츰 엇갈려 흘러가는 맞은편의 배를 향하여 얼결에 외친다.
돌아올 때 알려주겠어요.
또 다른 배가 지나간다. 일렁이는 횃불을 고물과 이물과 갑판의 사방에 켜놓은 붉은
배가 천천히 흘러온다.
배 안에는 창 든 사람, 활 든 사람, 칼 든 사람, 총 든 사람이 열지어 섰고, 머리 풀어
산발하고, 팔 떨어지고, 다리 떨어지고, 목 떨어지고, 피묻은 군복 입고, 붕대를 매고, 의
족 짚고, 눈을 가리고, 허우적거리는 사람들도 타고 있다.
그 안에서 나는 에밀리 부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보고 미국 영국군도 보이고 내 남
편의 동생 우스만을 다시 본다. 희고 동그란 모자에 턱수염을 기른 우스만이 나에게 외
친다.
바리, 어째서 악한 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지 알려줘요. 우리가 왜 여기서 적들과 함께
있는지도.
나는 우스만에게 마주 외친다.
돌아올 때 가르쳐줄게요.
내가 탄 배는 천천히 미끄러져 피바다 위를 지나간다. 저만큼에서 떠도는 배가 다시
가까워진다. 돛에서 뱃전까지 모두 시커먼 검은 배가 떠내려온다.
그 안에는 가슴과 배에 주렁주렁 폭약을 매단 남녀가 입을 꾹 다물고 서 있다. 파편과
화상에 온몸이 일그러진 벌거숭이의 사내와 아예 형체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던 육신이
파리 떼처럼 허공에 모여서 사람의 형체를 이룬 것들도 있다.
수염 기른 완고한 표정의 늙고 젊은 남자들, 히잡을 쓰고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의 여자
들, 얼굴은 불타버린 듯이 일그러지고 태형을 받은 온몸이 붉은 상처와 멍으로 가득 찬
여자들, 온몸에 치렁치렁한 옷을 감고 얼굴을 가리는 부르카를 뒤집어 쓴 여자들. 폭약을
가슴에 매달고 있는 낯선 남자가 주먹을 쥐고 혼들어 보이며 묻는다.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보라!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69

옆에 섰던 부르카를 쓴 여인이 헝겊 안에서 웅얼웅얼 말한다.


내 죽음의 의미도 알려주어요.
나는 그 질문의 의미조차 알지 못한 채 대답한다.
돌아올 때 말하겠어요.
또 한 배가 흘러온다. 그 배는 불도 없고 빛도 없고 임자도 없는지 쥐죽은 듯 고요하
게 미동도 없이 다가온다. 어둠속에서 희끄무레한 형체만 보일 뿐이다.
조용한 가운데 음산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낄낄낄 히히히. 아버지를 데리러 왔던
관리들, 우리를 집에서 내쫓던 남자들, 혼자서 두만강을 건너간 미이 언니를 팔아먹고 괴
롭히던 사내들도 있고, 따롄의 돈놀이꾼들이며, 밀항선에서 보았던 사내들이 타고 있다.
우리를 컨테이너에 밀어넣던 뱀단 사내들, 선박 어둠 속에서 강간하던 사내들, 내 앙상한
가슴을 보며 킬킬거리던 뚱뚱보 포주 아줌마도 거기에 있다.
아아, 그 누구보다도 저 끔찍하도록 무섭고 미운 샹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나를 노려
본다. 그녀가 지나치는 뱃전에서 나를 향하여 외친다.
여긴 네가 가장 미워하는 것들이 타고 있는 배다. 우리는 언제 풀려나게 될까?
나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마주 외친다.
영원히 풀어주지 않을 거야.
우리는 언제나 너에게서 풀려나게 될까?
나는 진저리가 나서 얼결에 대답해버린다.
돌아올 때 알려줄 거야.
배는 피바다를 지나 다시 어둠에 둘러싸인다. 하늘이 밝아오는데 마치 안개가 낀 것처
럼 공중에는 모래먼지가 부옇게 떠다닌다. 배의 아래로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끝간 데 없
는 모래의 허허벌판이다. 아득한 지평선 끝까지 모래뿐이다. 칠성이가 내게 이른다.
이제부터 기러기 깃털도 가라앉는 모래바다야.
여긴 어떤 세상일까.
글쎄 뭐든지 몽땅 삼켜버린다니까.
나는 겉으로는 평화롭게 씻은 듯이 깨끗한 백사장을 넘겨다본다. 저편에 뭔가 움직이는
게 보인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복장을 하고 경전을 쳐들고 있다. 검은 정장에 넥타이를
맨 개신교 목사, 검고 긴 가운을 걸친 가톨릭 사제, 흰 천을 감고 어깨를 드러낸 힌두의
바라문, 장옷에 머리에는 흰 모자를 얹은 무슬림 이맘, 노란 가사를 걸치고 머리를 박박
깎은 불승, 턱수염에 검고 둥근 키파 모자를 쓴 유대교 랍비, 그들은 모래 위에 가까스로
서서 제각기 알 수 없는 소리로 떠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세상 도처에서 율법의 판관이
란 판관은 모두 모아놓았는지 가발과 모자와 가운과 검정색 흰색에 이르기까지 모양도
어슷비슷하다. 각자가 다른 말과 내용을 얘기하기 때문에 괴상망측한 주문으로 들린다.
그들은 목청껏 떠들지만 서로가 남의 말을 삼켜버리고 더욱 큰 소리를 내기 때문에 뒤
섞여서 아무런 의미도 전하지 못한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눈을 부릅뜨고 한손에는 경
70 문학과 삶(슬로리딩)

전을 쳐들고 한손으로 하늘과 땅을 가리키느라고 연방 휘젓는다. 그러나 모랫바닥이 그들


을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다. 그들은 허우적거리며 발목에서부터 차츰 아래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허리 그리고 가슴 목에까지 빠지다가 머리가 사라지고 허우적거리는 팔이 보이
다가 완전히 모래만 남고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고 나면 어느결에 다시 솟아오른
육신들이 나타나 끊임없이 다투고 떠든다. 다시 아래로 스멀스멀 빠지기 시작한다. 이 단
조롭고 시끄럽고 우스꽝스러운 기러기 깃털도 가라앉는 모래바다 위로 배는 조용히 흘러
간다.

- 황석영, <바리데기>, 창비, 2007.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71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네가 전설 속의 바리와 같은 운명이라면, 이제부터 생명의 물을 찾아야 되겠구나. 저는 아무


것도 몰라요, 할아버지. 다만 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살다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그랬어
요.”에서 할머니가 말씀하신 ‘살다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한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말해 보자.

2 소설 <바리데기>에서 주인공 바리의 최종 정착지를 ‘런던’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런던이라는 장소의 상징성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3 본문에서 원혼들이 바리에게 했던 여러 질문들에 대하여 바리는 어떻게 대답했을지 말해


보자.

4 주인공 바리가 구한 생명수는 무엇인지 서술해 보자.

5 이 소설에 나오는 9·11 테러, 아프가니스탄 전쟁, 런던 지하철 테러 등의 국제적 분쟁과


사건에 대하여 조사해 보자.
72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읽고 자유롭게 질문을 만들어 보자. 그 질문을 바탕으로 팀원들과


토의·토론을 진행한 후 내용을 정리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73

【체험의 숲】

글로컬 다문화 사회를 살아가는 세계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을 제시하고,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 보자.

세계 시민으로서 갖출 자질 생활 속 실천 방안 기타
74 문학과 삶(슬로리딩)

4 이사의 <타국 인재 추방령에 대해 올리는 의견서>

이사(李斯)는 진(秦)나라의 정치가, 군사가, 문학가, 문자학자, 서예가로서 천 년에 한 번 나


온 재상〔千古一相〕으로 불릴 정도로 중국 역사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순경(荀
卿)에게 제왕의 학술을 배워 천하의 추세를 읽는 눈을 갖추었다고 하는데, 전국시대의 혼란한
국면을 마감할 새로운 통일왕조시대가 올 것임을 예견하고 그 희망을 진나라에 걸었다. 그리
하여 34세가 되던 해 진나라의 실권자였던 여불위(呂不韋)에게 발탁되어 진나라를 중심으로
한 천하통일의 구상을 구체화시키는 실천에 들어간다.
그런데 당시 지역국가 중 하나였던 한(韓)나라에서 진나라의 국력을 소모시킬 계획으로 수
리기술자를 파견하여 대규모 운하공사에 착수할 것을 설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계획을
진나라의 대신들이 눈치 채고 타국 출신의 인재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
계획을 무산시키고 모든 기술자들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해 버린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진나라
의 종실과 대신들이 타국 출신의 인재들을 모두 쫓아내 버리자는 논의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
사 역시 그 축출의 명단에 있었다. 이에 이사는 다음에 읽을 의견서를 제출하여 그것이 국가
의 역량을 키우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근시안적 정책임을 밝힌다. 이사는 이 의견서를
훗날 진시황이 되는 진왕 영정(嬴政)에게 직접 올린다. 진왕은 이사가 제안하는 정책을 적극
수용하면서 그를 타국 출신의 재상〔客卿〕으로 임명한다. 그런 점에서 이 의견서는 이사의 출
세의 계기가 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당시 진왕은 지나치게 비대해진 여불위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사의 중용 시기와 여불위의 실각 시기가 묘하게 겹친다. 그래서 타국 출신
의 인재들을 다수 거느리고 있던 여불위의 실각에 이사가 일정 정도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찌 되었든 진왕은 이사의 의견서를 읽고 <타국 인재 추방령〔逐客令〕>을 철회하고, 이사를
도로 불러들여 ‘제후들을 소멸시키고, 황제의 업적을 성취하여, 천하를 하나로 통일한다’는 정
책을 수립하게 된다. 그 결과 이사가 60세 되던 해 진나라는 6국을 통일하고 진왕은 진시황
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니까 진시황의 천하통일이 이사의 이 글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75

【읽기의 숲】

관리들이 타국 출신의 인재들을 추방하자는 논의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리는데 저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진목공(秦穆公)은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재들을 공개 모집하여, 서쪽으로는 서융
(西戎) 지역에서 유여(由余)를 얻었고, 동쪽으로는 완(宛) 지역에서 백리해(百里奚)를 얻었
으며, 또 송(宋)나라에서 건숙(蹇叔)을 영입하고, 또 진(晉)나라에서 비표(邳豹)와 공손지
(公孫支)를 초빙해 왔습니다. 이 다섯 명의 능력 있는 현인들은 우리 진(秦)나라에서 태어
나지는 않았지만 진목공은 그들을 중용하여 20여 개의 지역 국가를 병합함으로써 서쪽
지역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진효공(秦孝公)은 위(衛)나라 상앙(商鞅)의 법률개혁안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부유하고 흥성하게 함으로써 국가를 부강으로 이끌었습니다. 백성들은 기꺼이
명령을 따랐고, 주변 국가들은 친선과 복종의 정책으로 다가왔습니다. 초(楚)나라와 위(魏)
나라의 군대를 포로로 잡았으며 천 리가 넘는 강토를 개척하여 현재의 질서 있고 강성한
국가를 남겨주었습니다.
진혜왕(秦惠王)은 위(魏)나라 장의(張儀)의 연합정책을 채용하여 황하(黃河), 낙수(雒水),
이수(伊水)의 중원지역을 점령하고 서쪽으로 파촉(巴蜀) 땅을 병합하였으며, 북쪽으로 상
군(上郡) 땅을 거두고, 남쪽으로 한중(漢中) 땅을 차지하고, 초나라에 속해 있던 소수민족
인 구이(九夷)의 각 부족을 점령하고, 초나라의 수도 지역인 언(鄢)과 영(郢)을 통제 하에
둘 수 있었습니다. 또한 동쪽으로는 험준한 성고(成皐)를 근거지로 하여 비옥한 땅을 점
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진(秦)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되었던 여섯
제후국의 종적 연합을 해산시켜 버리고, 서쪽의 우리 진(秦)나라를 섬기도록 하여 그 공
로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진소왕(秦昭王)은 위(魏)나라 범저(范雎)를 얻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양후(穰侯)와 화양
(華陽)을 축출하여 왕실의 힘을 강화하고 사적 권력을 막았으며, 제후들을 잠식하여 진나
라의 제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네 군주는 모두 타국 출신의 초빙 인재들의 능력을 채용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초빙 인재들이 진나라에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당시 네 군주께서 초빙
인재들을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고 재능 있는 사람을 멀리하여 채용하지 않았다면 나라
가 이처럼 부유해지는 실속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며, 강한 국가 진(秦)나라라는 명예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곤륜산에서 나는 옥을 두루 갖고 계시고, 수후(隨候)와 화씨(和氏)의
옥을 소유하고 계시며, 명월(明月)의 구슬을 조정에 달아놓고 계십니다. 또 명검 태아검
(太阿劍)을 허리에 차고, 준마 섬리(纖離)를 타시며, 취봉(翠鳳)의 깃발을 세우고, 영타(靈
鼉)의 북을 쓰고 계십니다. 이 많은 보물들은 모두 진나라에서 생산된 것이 아닙니다. 그
76 문학과 삶(슬로리딩)

럼에도 이것들을 좋아하시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만약 진나라에서 생산된 것만을


쓸 수 있다고 한다면 야광주와 보석들이 조정을 장식할 수 없을 것이며, 물소 뼈와 상아
로 된 기구들이 노리개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정(鄭)나라와 위(魏)나라 출신의 여
인들이 후궁으로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며, 준마들이 궁궐 밖의 마구간을 채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강남에서 생산되는 금과 주석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며, 서촉(西蜀) 지역에서
나는 단청의 물감을 채색용으로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후궁을 장식하는 것들과, 궁궐 내부를 채우는 것들과,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들과,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 모두 진나라에서 나온 것이라야 한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구
슬장식의 비녀나 옥을 상감한 귀고리, 동아(東阿) 지역 특산물인 흰 비단옷, 비단에 자수를
넣은 의복들이 폐하의 앞에 바쳐질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새로운 시대감각을 지니고 남달
리 우아하며, 용모가 뛰어나고, 자태가 아름다운 조(趙)나라의 여인들이 폐하를 주위에서
모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저 도기로 제작된 물 단지 악기나 두드리고, 기와로 된 북이나 치며, 대나무 아쟁〔竹
箏〕을 연주하고, 허벅지를 두드리면서, ‘워! 워!’ 하며 노래하는 소리로써 귀를 즐겁게 하
는 것만이 진정한 진나라의 음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鄭)과 위(衛) 지역의 민간
가요, 순(舜)임금의 소우(韶虞), 주왕조의 무상(武象) 같은 아악들은 다른 나라의 음악이
아닙니까? 그런데 폐하께서는 지금 물 단지 악기를 두드리기를 멈추고 정(鄭)과 위(衛)의
음악을 선택하셨고, 아쟁연주를 버리고 소우(韶虞)와 무상(武象)을 택하셨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하신 것일까요? 보기에 즐겁고 감상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인재를 임용하시는 데 있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재능의 우열을 평가하거
나 품행과 덕성의 좋고 나쁨을 논하는 일 없이 그저 진나라 사람이 아니라면 퇴출시켜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초빙 인재가 축출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여색과 음악과 진주와 보석은 중요하게 여기시면서 사람과 백성들은 가볍게 보신다는 뜻
이 됩니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하고 제후들을 지배하는 데 좋은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땅이 크면 곡식이 많이 나고, 국가가 크면 백성이 많으며, 군대가 강대하면 병사들이
용감하다고 합니다. 태산은 작은 흙덩이 하나도 버리지 않음으로써 그 크고 높음을 성취
할 수 있습니다〔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황하와 바다는 작은 시냇물이라 해서 버리지
않으므로 그 깊이를 이룰 수 있습니다〔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위대한 왕들은 뭇 대중
들을 물리치지 않아 그 덕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역에 있어서 동서남북을 가리
지 않고, 사람에 있어서 본국과 외국을 가리지 않을 때 국가는 수시로 충실하고 완전해지
며 신들도 복을 내려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삼황오제가 천하무적이 될 수 있었던 까닭
입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백성들을 내치셔서 적국을 돕게 하시며, 타국 출신의 인재들을
퇴출시켜 그들이 다른 제후들을 도와 업적을 세우도록 하고 계십니다. 천하의 뛰어난 인
재들이 서쪽으로 와서 진나라에 헌신할 용기를 내지 못해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는 진나라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77

의 땅을 밟지 못하도록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야말로 무기를 빌려 적에게 내어주는 일이며, 도적에게 양식을 지원하는 일이 아
닐 수 없습니다. 진나라에서 생산된 물품이 아니라 해도 진귀한 가치를 갖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진나라 출신 인재가 아니라 해도 진나라에 헌신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타국 출신 인재들을 쫓아내어 적국을 돕게 하신다면 백성들을 덜어내어
적국의 힘으로 보태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자기의 내부를 비우고, 밖으로 제후들과 원수
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국가에 위기가 없기를 바라신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 이사 지음, 강경구 옮김, <타국 인재 추방령에 대해 올리는 의견서>


78 문학과 삶(슬로리딩)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오늘날 세계는 한편으로는 세계화가 보편화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대국들의 자국이


기주의가 노골화되고 있다. 외국 인재의 광범위한 등용을 주장했던 이 글을 참고하여 한
국가나 사회가 강해지기 위해 갖추어야 할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2 위의 글에 보이는 것처럼 외국의 것이면서 우리에게 들어와 한국화된 것들이나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3 지역이 중앙과 차별화된 독자성을 갖출 때 더 큰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 부산·경남


지역에서 독자성을 갖고 세계에 진출하고 있는 것들과 인물에 대해, 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4 글로컬 역량은 외적 확산 능력과 내적 수용 능력의 적절한 조화에서 온다. 개인적 인격의


측면에서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을 자신 있게 드러내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거부감 없이 수
용할 필요가 있다. 각자 자기의 것을 드러내어 전에 없던 자신감을 얻었던 체험, 자신에게
없던 것을 수용하여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던 체험에 대해 글로 표현해 보자.

5 국뽕이라 불리는 국가주의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약자의 자기기만이자 슬픈 정신승리법이다.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과도한 국가주의의 예를 들고 그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 보자.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79

【질문의 숲】

이사는 인재의 임용 조건으로 재능, 품행, 덕성을 꼽았다. 현대사회는 글로컬 역량을 중요한
능력으로 요구하는 시대이다. 글로컬 역량의 배양과 관련하여 질문을 만들어 보고 이에 대해
토론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80 문학과 삶(슬로리딩)

【체험의 숲】

태산은 작은 흙덩이 하나도 버리지 않음으로써 그 크고 높음을 성취할 수 있고〔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황하와 바다는 작은 시냇물이라 해서 버리지 않으므로 그 깊이를 이룰 수 있다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는 구절은 천여 년을 내려오는 명구이다. 동일한 구조의 명구를 만
들어 보고 구절에 대해 느낀 점을 서로 이야기해 보자.

항목 글로컬

내적 수용의 측면

외적 확산의 측면

느낀 점
제2장 문학과 글로컬 역량 81

【감상의 숲】

제국(諸國 또는 帝國)의 공장 – 갠지스강

하종오
중국에서 철수하여 인도에 세운
어패럴공장에 근무하는
그는 토요일 오후에는
갠지스 강가로 나가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인생을 생각한다

초등학생 때 사회과목에서 읽었던


영국이 지배하던 인도에 와서
영국인이 부리던 인도인을 부리게 되리라곤
전혀 짐작하지 못한 일이 생시에 생겼는데
인도인들이 죄를 씻으려고 모여들어
바글바글 목욕하는 갠지스 강가에 오면
그는 꿈을 꾸는 것 같다

노동자들의 인건비가 한국에서 비싸지니


중국으로 옮겼다가 중국에서도 비싸지니
인도로 옮긴 어패럴공장의 관리책임자인 그는
다음엔 더 가난한 나라로 옮겨갈 걸 알고 있어
평생 넘을 국경을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정착할 나라가 어딜지 짚어보면 막막하다

인근 화장터에서 시신 타는 냄새가 풀풀풀풀 날린다


갠지스 강에서 강물은 어두워지며 일렁일렁 흐른다
내일 한국으로 보낼 신상품 재고량을 점검하러
그는 어패럴공장으로 터벅터벅 돌아간다

- 『제국』, 문학동네, 2011.


82 문학과 삶(슬로리딩)

【문제 은행】

1 <씬짜오, 씬짜오>의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무엇이라 생각


하는가?

2 <바리공주설화>와 <바리데기>에서 볼 수 있는 ‘경계 허물기’의 요소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3 외국인을 가족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또 그러한 일이 쉬운 일인지 생각해 보자.

4 글로컬 역량을 키우고자 할 때 글로벌화 후 로컬화하는 것과 로컬화 후 글로벌화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말해 보자.

5 베트남 전쟁 관련 언론 자료를 찾아 분석해 보자.

6 국내 이주민, 다문화 가정, 난민 문제 등과 관련한 다양한 기사를 찾아 참고한 후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보자.

7 내 주변에 살고 있는 국내 이주민을 만나 인터뷰를 해보자.

8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최근의 이슈를 찾아서 이야기해 보자.

9 국내에 들어오는 ‘난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토론해 보자.

10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라는 말이 함축하는 의미는 무엇인지 서술해


보자.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85

3
제 장

문학과 나눔 역량

상호 간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타인에 대한 관용과 배려는 중요한


역량의 하나가 된다. 공자는 ‘부족함을 걱정하지 말고, 골고루 나누지 못함을 걱정하라〔不患寡
而患不均〕’고 했거니와 예나 지금이나 나눔이 개인의 성취와 사회의 안정에 중요한 역량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대학은 정의에 공감하는 세계시민의 육성을 교육목표의 하나로 수립하고 이를 성취하
기 위하여 관용과 배려를 통한 자발적 나눔을 내용으로 하는 나눔 역량의 배양을 하위 교육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타인에 대한 관용과 배려, 사랑을 바탕으로 행해지는 자발적 봉사가
곧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첩경이라는 점을 직접 깨닫고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공감이란 타인의 입장에 서보고, 타인의 느낌과 가치관을 이해하며, 그 이해를 나의 행동에
직접 반영하려는 적극적 의지를 이르는 말이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로써 현대인이 겪고 있는 삭막한 삶의 풍경을 압축적으
로 보여주었다. 돌이켜보면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의 정서를 대변하던 시절이 있었
다. 타인의 삶을 이루는 켜와 결을 존중해줄 때 우리의 삶 또한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이
공고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분명한 ‘축복’이었다. 더불어 나눔을 실
천하는 삶 속에서 환대의 미덕과 공감의 감수성을 키워냈던 진정한 나눔 사회가 우리에게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적 가치가 개인주의적 삶의 논리에 의해 밀려나면서 타인을 불편한 존재로 여
기는 경향이 자리 잡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낯선 이방인으로, 혹은 잠재적 경쟁자로 여기게
된 것이 현대가 걸어온 길이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나눔과 공감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혐오
와 배제의 사회로 떨어지고 말았다. 세대·계층·이념·성별 간의 신뢰관계가 깨지고 공공선
(公共善)이 무너진 현실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집단이기주의적 행태가 범
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사회가 이러한 개인주의와 배타적 이기주의를 용납해줄 것 같
지는 않다. 상호 간의 관계가 광대한 인드라망에 의해 연결되어 있음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
는 시대가 도래했고, 미래사회는 더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 또한 혐오와 배제의
사회에서 관용과 배려와 포용을 실천하는 나눔 사회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개인과
사회는 새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고 말 것이다.
이 장에서는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86 문학과 삶(슬로리딩)

장영희의 <눈먼 소년이 어떻게 돕는가?>, 맹자의 <양혜왕장>을 텍스트로 하여 관용, 배려, 포
용, 사랑, 행복, 봉사, 공유, 공존 등의 나눔 요소 들을 짚어보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나눔과
배려의 미덕, 포용과 상생의 가치를 이해하고 체득함으로써 우리 학교의 핵심 인재상인 ‘공
유·공명·공감’의 가치관을 구현해 내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모자라는 인물로 취급받는 황만근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이를 통해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인간다움’은 무엇인가에 대
한 성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을 통해서는 가장 강
력한 나눔의 방법인 사랑의 본래적 의미를 사유하고 토론하게 될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아름
다운 사랑의 나눔과 실천이야말로 우리가 우선적으로 가꾸어야 할 역량임에 틀림없다. <독일
인의 사랑>을 통해 사랑하는 법과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장영희의
<눈먼 소년이 어떻게 돕는가?>는 스스로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이를 형벌이 아니라 하늘이
준 혜택으로 여기며 살아온 작가의 너그럽고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 견디기 힘
든 아픔들을 건강하고 당당하게 전환시킬 줄 아는 삶의 자세에서 부족함이 또 다른 희망을
낳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맹자의 <양혜왕장>은 맹자의 사상과 인간적
풍모를 잘 보여주는 명편이다. 맹자는 부국강병을 통해 천하통일을 지향하던 양혜왕을 만나
어진 덕〔仁〕과 그것의 바른 실천〔義〕이야말로 진정한 부국강병의 길이자 천하통일의 첩경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읽기를 통해 맹자가 말하는 어진 덕과 바른 실천의 핵심이 타
인에 대한 공감, 공유, 나눔의 정신과 실천에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87

1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1986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성석제(1961~ )는 1995년 『문학동


네』 여름호에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길을
걸었다. 뛰어난 언어 감각의 소유자로 정평이 나 있는 그는 익살스러운 문장으로 해학적인 인
물을 창조하여 오늘날 우리 소설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2000년 『동서문학』에 발표된 단편소설로, 그 이듬해 제33회
동인문학상과 제2회 이효석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한 작품이다. IMF 이후 경제 위기에 처한 우
리 농촌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문학적 성취도가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
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90년대는 한국 사회 전체가 경제적으로 큰 위기를 겪었던 시기로,
작가는 사회 취약 계층인 농민들을 중심으로 농촌 현실의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다.
신대리에 사는 가난한 농부 황만근은 조금 모자라게 태어나 평생 동안 남에게 멸시 받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염습(殮襲)과 산역(山役), 가축 도살 등 마을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한다. 그는 비록 마을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비웃음을 당하는 어수룩한 사람이지
만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고 나눔을 직접 실천하는 이타적인 인물이다.
그런 황만근이 어느 날 사라졌다. 군청에서 ‘농가부채 탕감촉구 전국농민 총궐기대회’가 열
리던 날, 버스나 트럭, 승용차를 타고 간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이장의 지시대로 경운기를 끌
고 나갔다. 백 리나 되는 먼 길을 달려 그가 현장에 도착하자 대회는 이미 끝난 상태였고, 돌
아오는 길의 악천후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다가 사고를 당하고 만다. 그 후 황만근은 없어진
지 일주일 만에 유골로 돌아온다.
남의 비웃음과 모멸에 구애받지 않고 평생 자신의 일을 묵묵히 다하며 이웃을 돌보다가 갑
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황만근. 그의 행적은 자신의 진정성을 유일하게 알아보는 외지인 민씨
에 의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황만근의 일생을 민씨가 쓴 묘비명을 통해 담아내고,
그것으로 황만근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의 진면목을 밝혀 나간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산문인 ‘전(傳)’ 양식을 현대소설에 접목시킨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
다. 또한 모자라는 인물로 취급받는 황만근의 일대기를 통하여 각종 부채로 얼룩진 오늘날 우
리 농촌의 현실과 메말라가는 인정을 풍자하고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을 다시금 하게 만
드는 데서 이 소설의 참다운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황만근의 일생을 통해 작가는 경쟁
과 배제의 이데올로기가 만연한 이 시대에 공동체의 구성원이 상생하기 위해서는 ‘배려’와 ‘존
중’, ‘나눔’과 ‘희생’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덕목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88 문학과 삶(슬로리딩)

【읽기의 숲】

황만근이 없어졌다. 새벽에 혼자 경운기를 타고 집을 나간 황만근은 늘 들일을 나가면


돌아오는 시각인 저물녘에 돌아오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취하더라도 열두 시가 될락말락
한 한밤이면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평생 단 하루 외박한 뒤 돌아왔던 그 시각,
횃대의 닭이 울음을 그치는 아침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회관 앞, 황만근이 직접
심어놓은 등나무 덩굴 아래, 직접 짠 평상에 사람들이 모였다. 먼저 이장이 입을 열었다.
“만그인지 반그인지 그 바보자석 하나 따문에 소여물도 못하러 가고 이기 뭐라. 스무
바리나 되는 소가 한꺼분에 밥 굶는 기 중요한가, 바보자석 하나가 어데 가서 술 처먹고
집에 안 오는 기 중요한가, 써그랄.”
마을에서 연장자 축에 들고 가장 학식이 높아 해마다 한 번씩 지내는 용왕제(龍王祭)에
축(祝)을 초(草)하는 황재석 씨가 받았다.
“그래도 질래 있던 사람이 없어지마 필시 연유가 있는 기라. 사람이 바늘이라, 모래라.
기양 없어지는 기 어디 있어. 암만 그래도 우리 동네 사람 아이라. 반그이, 아이다, 만그
이가 여게서 나서 사는 동안 한 분도 밖에서 안 들어온 적이 없는데 말이라.”
“아이지요, 어르신. 가가 군대 간다 캤을 때 여운지 토깨인지하고 밤새도록 싸우니라고
하루는 안 들어왔심다.”
용왕제에서 집사 역을 하는 황동수가 우스개처럼 말을 이었다. 아침밥을 먹기도 전 황
만근의 아들이 찾아와 황만근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길래 얼결에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게 된 민씨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생각하고 참견을 했다.
“어제 궐기대회 한다 하고 간 사람이 누구누구십니까. 황만근 씨하고 같이 간 사람은
요? 궐기대회 하는 동안 본 사람은 없나요?”
자리에 모인 대여섯 명의 황씨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더니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이라고 및 밍이나 되나. 군 전체 사람이 모도 모있다는 기 백 밍이 될라나 말라
나 한데 반그이는 돼지고기 반근만해서 그런지 안 보이더라칸께.”
이장은 계속 빈정거리듯 말을 이었다. 민씨는 이장이 궐기대회 전날 황만근을 따로 불
러 무슨 말을 건네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제 밤에 내일 궐기대회 한다고 사람들 모였을 때 이장님이 황만근 씨에게 뭐라고
하셨죠. 모임 끝난 뒤에.”
이장은 민씨를 흘기듯 노려보았다.
“왜, 농민보고 농민궐기대회 꼭 나오라 캤는데, 뭐가 잘못됐나.”
민씨는 자신도 모르게 따지는 어조가 되었다.
“군 전체가 모두 모여도 몇 명 안 되었다면서요. 그런 자리에 황만근 씨가 꼭 가야 합
니까. 아니, 황만근 씨만 가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따로 황만근 씨한테 부탁을 할 정
도로.”
“이 사람이 뭐라 카는 기라. 이장이 동민한테 농가부채 탕감촉구 전국농민 총궐기대회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89

가 있다, 꼭 참석해서 우리의 입장을 밝히자 카는데 뭐가 잘못됐다 말이라.”


“잘못이라는 게 아니고요,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왔는데 왜 황만근 씨만 못 오고 있나
하는 겁니다.”
“내가 아나. 읍에 가보이 장날이더라고. 보나마나 어데서 술 처먹고 주질러 앉았을 끼
라. 백릿길을 깅운기를 끌고 갔으이 시간도 마이 걸릴 끼고.”
다른 사람들은 말이 없었고 민씨와 이장만이 공을 주고받는 꼴이 되어버렸다.
“글쎄, 그 자리에 꼭 황만근 씨만 경운기를 끌고 갔어야 했느냐 이말입니다. 그것도 고
장난 경운기를.”
“깅운기를 끌고 오라는 기 내 말이라? 투쟁 방침이 그렇다카이. 깅운기도 그렇지. 고장
은 무신 고장, 만그이가 그걸 하루이틀 몰았나. 남들이 못 몬다뿌이지.”
“그럼 이장님은 왜 경운기를 안 타고 가고 트럭을 타고 가셨나요. 이장님부터 솔선수범
을 해야지 다른 동민들이 따라할 텐데, 지금 거꾸로 되었잖습니까.”
“내사 민사무소에서 인원 점검 하고 다른 이장들하고 의논도 해야 되고 울매나 바쁜
사람인데 깅운기를 타고 언제 가고 말고 자빠졌나. 다른 동네 이장들도 민소 앞에 모이
가이고 트럭 타고 갔는 거를. 진짜로 깅운기를 끌고 갔으마 군 대회에는 늦어도 한참 늦
었지. 군청에 갔는데 비가 와가이고 온 사람도 및 없더마. 소리마 및 분 지르고 왔지. 군
청까지 깅운기를 타고 갈 수나 있던가. 국도에 차들이 미치괘이 맨구로 쌩쌩 달리는데
받치만 우얘라고. 다른 동네서는 자가용으로 간 사람도 쌨어.”
“그러니까 국도를 갈 때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경운기를 여러 대 끌고 가자는 거였
잖습니까. 시위도 하고 의지도 보여준다면서요. 허허, 나 참.”
“아침부터 바쁜 사람 불러내놓더이, 사람 말을 알아듣도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해싸.
누구맨구로 반동가리가 났나.”
기어이 민씨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반편은 누가 반편입니까. 이장이니 지도자니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방침을 정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양복 입고 자가용 타고 간 사람은 오고, 방침대로 경운기 타고 간 사람은
오지도 않고, 이게 무슨 경우냐구요.”
“이 자슥이 뉘 앞에서 눈까리를 똑바로 뜨고 소리를 빽빽 질러쌓노. 도시에서 쫄딱 망
해가이고 귀농을 했시모 얌전하게 납작 엎드려 있어도 동네 사람 시키줄까 말까 한데,
뭐라꼬? 내가 만그이 이미냐, 애비냐, 나이 오십 다 된 기 어데를 가든동 오든동 지가 알
아서 해야지, 목사리 끌고 따라다니까?”

…… (중략) ……

동네에서 이따금 잡는 소나 돼지, 개, 닭, 오리, 토끼 같은 가축 모두 숨을 끊는 것에서


부터 내장을 손질하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포정(庖丁)의 업(業)에는 황만근이 반드시
필요했다.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오래도록 자주 하다 보니 어느새 전문가가 된 것이었다.
90 문학과 삶(슬로리딩)

그는 그런 일을 해주고 얻어온 고기를 뜨고 굽고 찌고 데치고 삶고 끓이는 데도 이골이


났다. 어쩌다 그가 만든 음식에 숟가락을 대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감탄을 하게 마련이
었다. 그러고 나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희한할세, 바보가” 하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만들어져 있는 조미료를 몰랐지만 재료가 가지고 있는 맛을 흠뻑 우
려내어 조화를 시킬 줄 알았다.
황만근은 또한 책에 나오는 예(禮)는 몰라도 염습과 산역(山役)같이 남이 꺼리는 일에
는 누구보다 앞장을 섰고 동네 사람들도 서슴없이 그에게 그런 일을 맡겼다. 똥구덩이를
파고 우리를 짓고 벽돌을 찍는 일 또한 황만근이 동네 사람 누구보다 많이 했다. 마을길
풀 깎기, 도랑 청소, 공동우물 청소…… 용왕제에 쓸 돼지를 산 채로 묶어서 내다가 싫다
고 요동질하는 돼지에게 때때옷을 입히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일에는 그가 최고의
전문가였다. 동네의 일, 남의 일, 궂은일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런 일에 대한 대가는
없거나(동네일인 경우), 반값이거나(다른 사람의 농사일을 하는 경우), 제값이면(경운기와
함께 하는 경우) 공치사가 따랐다.
“반근아, 너는 우리 동네 아이고 어데 인정 없는 대처 읍내 같은 데 갔으마 진작에 굶
어죽어도 죽었다. 암만 바보라도 고마워할 줄 알아야 사람이다. 아나 어른이나 너한테는
다 고마운 사람인께 상 찡그리지 말고 인사 잘하고 다니라. 아이?”
황만근은 황재석 씨의 이런 긴 사설을 들을 때조차 벙글거렸다. 일이 끝나면 굽신굽신
인사를 했다. 춤을 추듯이, 흥겹게.
그의 집에는 그가 수십 년 동안 만져온 연장이 그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순서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 연장들 역시 그의 집이나 어머니나 아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매일
돌보는 덕분에 윤기가 흘렀다. 그는 집에 있는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잘 알고 있어서
대부분의 고장은 스스로 고쳤다. 특히 경운기는 초기에 나온 모델로 지금은 부품도 제대
로 없는 고물 중의 고물이었지만 자주 망가지는 수레만 열 번 넘게 갈았을 뿐, 엔진이
달려 있는 앞부분은 계속 고쳐 썼다. 그의 경운기는 구식인데다 하도 고친 데가 많아서
그가 아니면 운전은커녕 시동조차 걸 수 없었다.

…… (중략) ……

“농사꾼은 빚을 지마 안 된다 카이.”
(한 번 빚을 지면 그 빚을 갚으려고 무리하게 일을 벌인다. 동네 곳곳에 텅 빈 우사(牛
舍), 마른똥만 뒹구는 축사, 잡초만 무성한 비닐하우스를 보라. 농어민 복지, 소득 향상,
생활 개선? 다 좋다. 그걸 제 돈으로 해야 한다. 제 돈으로 하지 않으면 그건 노름이나
다를 바 없다. 빚은 만근산의 눈덩이, 처마의 고드름처럼 자꾸 커진다.)
“기계화 영농 카더이마 집집마다 바퀴 달린 기계가 및이나 되나. 깅운기, 트랙터, 콤바
인, 이앙기, 거다 탈곡기, 건조기에…… 다 빚으로 산 기라. 농사 지봐야 그 빚 갚느라고
정신없다.”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91

(한 집에서 일 년에 한 번 쓰는 이앙기를 들여놓으면 그게 일 년 내내 돌아가던가. 놀


때는 다른 집에 빌려주면 된다. 옛날에는 소를 그렇게 썼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서로 도와가면서 농사짓던 건 옛날 말이다. 한 집에서 기계를 놀리면서도 안 빌
려주면 옆집에서는 화가 나서라도 산다. 어차피 빚으로 사는데 사기가 어려울까. 기계에
들어가는 기름은 면세유(免稅油)다. 면세유 가지고 기계를 다 돌리기는 힘들다. 옆집에는
경운기가 두 댄데 면세유는 한 대분밖에 나오지 않는다. 경운기가 왜 두 대씩 필요할까.
한 사람이 한꺼번에 두 대를 모는 것도 아닌데.)
“그런 기 다 쌀값에 언차진다.(얹어진다). 언차져야 하는데 사실로는 수매하마 먹고살기
간당간당한 돈을 준다. 그 대신에 빚을 준다. 자금을 대준다 카는데 둘 다 안 했으마 좋
겠다. 둘 다 농사꾼을 바보 멍텅구리로 만든다.”
(따라서 제대로 된 농사꾼이 점점 없어진다.)
“지 입에 들어갈 양석(양식), 곡석을 짓는 사람이 그 고마운 곡석, 양석한테 장난치겠
나. 저도 남도 해로운 농약 뿌리고 비싸고 나쁜 비료 쳐서 보기만 좋은 열매를 뺏으마
그마이가?”
(모두 빚을 갚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그러므로 빚을 제 주머니에서 아들 용돈 주듯이
내주는 사람, 기관은 다 농사꾼을 나쁘게 만든다. 정책자금, 선심자금, 농어촌구조 개선자
금, 주택 개량자금, 무슨무슨 자금 해서 빌려줄 때는 인심 좋게 빌려주는 척하더니 이제
와서 그 자금이 상환 능력도 없는 사람들을 파산지경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제 와서 그
빚을 못 갚겠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내가 왜 빚을 안 졌니야고. 아무도 나한테 빚 준다고 안 캐. 바보라고 아무도 보증 서
라는 이야기도 안 했다. 나는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민서 안 망하고 백 년을 살 끼라.”

일주일 뒤에 황만근은 돌아왔다. 그의 아들이 그를 안고 돌아왔다. 한 항아리밖에 안


되는 그의 뼈를 담고 돌아왔다. 경운기도 돌아왔다. 수레는 떼어내고 머리 부분만 트럭에
실려 돌아왔다. 황만근 아니면 그 누구도 작동시킬 수 없는 그 머리가. 바보처럼 주인을
태우지 않고 돌아왔다.

황만근, 황 선생은 어리석게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해가 가며 차츰 신지(神智)가 돌아


왔다. 하늘이 착한 사람을 따뜻이 덮어주고 땅이 은혜롭게 부리를 대어 알껍질을 까주었
다. 그리하여 후년에는 그 누구보다 지혜로웠다. 그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듯 그
지혜로 어떤 수고로운 가르침도 함부로 남기지 않았다. 스스로 땅의 자손을 자처하여 늘
부지런하고 근면하였다. 사람들이 빚만 남는 농사에 공연히 뼈를 상한다고 하였으나 개의
치 아니하였다. 사람 사이에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나 함께하였고 공에는 자신보다 남을
내세워 뒷사람을 놀라게 했다. 하늘이 내린 효자로서 평생 어머니 봉양을 극진히 했다.
아들에게는 따뜻하고 이해심 많은 아버지였고 훈육을 할 때는 알아듣기 쉽게 하여 마음
92 문학과 삶(슬로리딩)

으로 감복시켰다.
선생은 천성이 술을 좋아하였는데 사람들은 선생이 가난한 것은 술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은 어느 농사꾼보다 부지런했고 농사일에도 익어 있었다. 문중 땅과 나이가 들어 농
사가 힘에 부친 사람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짓되 땅에서 억지로 빼앗지 않
고 남으면 술을 빚어 가벼운 기운은 하늘에 바치고 무거운 기운은 땅에 돌려주었다. 그
러므로 선생은 술로써 망한 것이 아니라 술의 물감으로 인생을 그려나간 것이다. 선생이
마시는 막걸리는 밥이면서 사직(社稷)의 신에게 바치는 헌주였다. 힘의 근원이고 낙천(樂
天)의 뼈였다.
전일에, 선생은 경운기를 끌고 면 소재지로 갔지만 경운기를 타고 온 사람이 없어 같
이 갈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선생은 다시 경운기를 끌고 백릿길을 달려 약속 장소인 군
청까지 갔다. 가는 동안 선생은 여러 번 차에 부딪힐 뻔했다. 마른 봄바람에 섞인 먼지가
눈을 괴롭혔다. 날은 흐렸고 추웠다. 이윽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경운기에는 비를 피
할 만한 덮개가 없어서 선생은 뼛속까지 젖어드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선생이 군청 앞
까지 갔을 때 이미 대회는 끝나고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에게 가져다줄 생선을 사고 몸
을 녹인 선생은 날이 어두워 오는 줄도 모르고 경운기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경운기에
는 빠르게 달리는 차량의 주의를 끌 만한 표지가 없어서 선생은 몇 번이나 사고를 당할
뻔했다. 그때마다 멈추었다가 다시 출발하는 바람에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어두워지면서
경운기는 길옆의 논으로 떨어졌고 수레는 부서졌다. 결국 선생은 그 밤 안으로 집에 돌
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선생은 경운기에 실려 있는 땅의 젖에 취하여 경운기 옆에
앉아 경운기를 지켰다. 그러나 경운기는 선생을 지켜주지 않았다. 추위와 졸음으로부터
선생을 지켜주지 못했다. 아아, 선생이 좀 더 살았더라면 난세의 혹염에 그늘의 덕을 널
리 베푸는 큰 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아니하고 감탄하지 않는 삶이었지만 선생은 깊고 그윽한 경지를
이루었다. 보라. 남의 비웃음을 받으며 살면서도 비루하지 아니하고 홀로 할 바를 이루어
초지를 일관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낸 사람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 어찌 하늘이 내고
땅이 일으켜 세운 사람이 아니랴.

단기 사천삼백삼십년 오월 스무날

본디 묘지에나 쓰일 것[墓碑銘]이지만 천지를 대영혼의 집으로 삼은 선생인지라 아무


쓸모도 없는 이 글을, 새터말로 귀농하였다가 이룬 것 없이 다시 도시로 흘러가며, 남해
인(南海人) 민순정(閔順晶)이 엎디어 쓰다.

- 성석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창작과비평사, 2002.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93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이장이 황만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마을회관 밖. 어둠속에서 오줌을 누던 민 씨는 우연히 이장이 황만근을 붙들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 보게 되었다.
“내 이러키까지 말을 해도 소양이 없어. 보나마나 내일, 융자받아서 다방이나 댕기민
서 학수겉이 겉농사 짓는 놈들이나 및 올까. 만그이 자네겉이 똑부러지기 농사짓는 사
람은 하나도 안 올 끼라. 자네가 앞장을 서야 되네. 자네 깅운기 겉은 헌 깅운기에다
농사짓는 놈 다 직이라고 써붙이 달고 가야 된께…….”

2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주인공 황만근은 이 소설을 통해서 무슨 말을 하려 한 것인지


이야기해 보자.

3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황만근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까?’, 또한 ‘황만근의 죽음을 과


연 사회적 타살로 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하여 토론해 보자.

4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표현해 보고, 우리 일상 또는 영화, 드라마, 소설 등 각종


콘텐츠에서 이와 비슷한 인물 유형을 찾아서 제시해 보자.

등장인물 성격 유사한 인물
황만근

민씨

이장

마을 사람들

5 황만근처럼 가족과 이웃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는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서술해 보자.
94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자유롭게 질문을 만들어 보자. 그 질문을 바탕


으로 팀원들과 토의·토론을 진행한 후 내용을 정리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95

【체험의 숲】

‘소셜 픽션’이란 미래를 상상하는 활동을 통하여 어려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
를 찾는 사회 혁신 기획을 의미한다. 아래 표를 이용하여 ‘나눔’과 관련된 이상적인 미래 사회
를 그려보는 소셜 픽션을 구성해 보자.

소셜 픽션

소셜 픽션 주제

주제 선정 이유

실천 가능한
활동 예시

실천 계획
96 문학과 삶(슬로리딩)

2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비교문학자이다.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기 위해


옥스퍼드로 거처를 옮기고 옥스퍼드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비교 언어학과 종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저서로는 신비주의학, 종교의 기원과 생성 등이 있다. 그가 1866년 발표한 <독일
인의 사랑>은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이자 종교에 대한 학문적 배경 또한 살펴볼
수 있는 소설이다. 또한 이 소설은 막스 뮐러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실제로 작가인 막스
뮐러는 영국으로 이주한 후 겪게 되었던 사랑과 좌절을 이 책에 반영하고 있다. 이 소설은 주
인공 ‘나’의 회상으로 서술되고 있다. 첫 번째 회상부터 마지막 회상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의
순수한 마음과 주변에 대한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 주인공 ‘나’와 ‘마리아’가 신분
과 죽음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핵심 장면이다.
<독일인의 사랑>은 총 8개의 회상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회상은 어
린 시절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일과 관계에 대한 순수한 아이의 관점이 제시되어 있다.
후작부인에게 인사할 때 갖추어야 하는 예의와 그것을 지키지 않아 생기게 된 아버지의 노여
움에 대한 아이의 생각이 나타나 있다. 세 번째 회상에서는 후작 부인의 딸인 마리아가 등장
한다. 그녀가 작별인사를 겸해 동생들과 ‘나’에게 반지를 나누는 장면이 제시된다. 이 장면에
서 ‘나’는 반지라는 물질의 나눔이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주고받는 행위 속에서
세계는 혼자가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 보조를 맞추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네 번째
회상과 다섯 번째 회상에서는 어른이 된 ‘나’와 여전히 아픈 몸으로 성에서 생활하고 있는 마
리아가 다시 만나게 되어 종교와 문학에 관한 서로의 생각을 교류하며 점차적으로 사랑을 키
워나가게 된다. 하지만 여섯 번째 회상에서 궁중 주치의를 통해 마리아의 병세가 심각하기에
‘나’가 마리아 곁을 떠났으면 하는 요청을 받게 된다. 일곱 번째 회상 장면에서 ‘나’는 시골로
여행을 떠나며 ‘마리아’를 잊으려 하지만 강렬한 사랑의 힘에 이끌려 시골 별장에 기거하고
있는 마리아와 재회하게 된다. 마지막 회상은 ‘마리아’의 죽음과 궁중 주치의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이 소설이 이야기하는 사랑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이 마지막 회상에 나타난 사랑의
방식을 통해 <독일인의 사랑>은 사랑에 있어서 명실상부한 고전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나눔 역량은 나와 타인이 서로 나눔을 통해 타인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역량을 의미한다. 나
눔은 나의 부족함을 타인을 통해 채우고 반대로 타인에게 내가 가진 것을 베푸는 의미도 있
다. 자발적 나눔 과정에서 배려와 행복, 관용의 세부적인 가치들이 실현되어 갈 수 있다. 이처
럼 나눔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과 내가 서로의 이질적인
부분을 확인하고 보완해 가는 가장 강력한 나눔의 대표적인 실천 방법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각박한 세상에서 자신만을 생각하다보니 타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타인과 사랑을 나누는 행
위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랑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제약들이 여
전히 한국의 젊은이들을 억압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인간관계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강
렬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나눔과 실천이야말로 이 시대의 청년들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가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97

치라고 생각한다. 나누고 희생하고 기다리는 <독일인의 사랑>은 한국의 청년들에게 사랑에 대
한 방법과 사랑의 소중함,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한국인의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
지 그 방향과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나눔이라고 하면 봉사, 기부, 공유의 실천을 우선적으
로 고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쉬운 나눔의 실천 방법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한 사
랑의 실천이 하나하나 모이다보면 나눔 역량은 자연스럽게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읽기의 숲】

일곱 번째 회상
생각들을 교환한 후에 인간들의 마음이 흡족함을 느끼고 침묵을 하면, 사람들은 천사가
방 안을 날고 있다고 곧잘 말들을 한다. 나는 마치 평화와 사랑의 천사가 우리들 위에서
나지막이 날갯짓 하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나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무르는 동안, 그
녀의 사랑스런 자태도 여름밤의 어스름 빛 속에 성스럽게 변용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
고 다만 내 손에 잡혀 있는 그녀의 손만이 나에게 그녀의 실제적인 현실의 느낌을 주
었다.
그때 그녀의 얼굴 위로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쳤다. 그녀도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눈을
뜨더니 의아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반쯤 감긴 속눈썹이 베일처럼 덮고 있는 그녀의 신비
스런 안광이 번개처럼 번쩍 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내 나는 만월이 두 언덕
사이로 성채를 마주 보며 천연히 떠올라 호수의 온 마을을 다정한 미소로 비추는 것을
보았다. 그토록 아름다운 자연, 그토록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
었다. 나에게 그렇게 성스러운 평안이 영혼을 통해 흐른 적이 없었다.
“마리아” 하고 나는 말했다. “이처럼 내 마음이 깨끗해진 이 순간에 나의 모든 사랑을
그대에게 고백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지상을 초월한 가까움을 그렇게 강하게 느끼고
있는 곳에서, 우리를 다시는 떼어 놓지 않을 영혼의 맺음을 하게 해 주십시오. 사랑이 어
떤 것이든 간에, 마리아,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마리아, 당신은 나의 것
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회상
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했다.
“이렇게까지 된 것이, 그리고 내가 직접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는 편이 차라리 잘된
일인지 몰라요. 친구여, 우리가 보는 것은 오늘로 마지막이에요. 불평이나 노여움 없이 편
안한 마음으로 우리 헤어지도록 해요. 나는 많은 죄를 지었어요. 그리고 나는 그것을 느
껴요. 하나의 나지막한 숨소리라도 자주 꽃잎을 떨어뜨린다는 생각도 없이 내가 너무 당
신의 삶에 깊이 들어간 거예요. 나는 세상을 그렇게 조금밖에 몰라요. 나와 같은 한 가련
하고 병든 인간이 당신에게 동정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어요.
98 문학과 삶(슬로리딩)

나는 당신에게 친절하고 열린 마음으로 다가갔지요.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그토록 오랫


동안 알고 지냈고, 내가 당신 곁에 있으면 아주 편안하게 느껴졌으니까요. 왜 내가 그러
한 사실을 모두 말하지 않아야 했는지요? 내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세상은
이 사랑을 이해하지 않았고 용납하지 않았지요. 궁정 주치의 선생님이 내게 눈을 뜨게 해
주셨어요. 도시 전체가 우리에 관해서 말들을 하고 있어요. 영주인 내 동생은 후작님께
편지를 올렸고, 후작님은 내가 당신을 다시는 만나지 말라고 요구하셨어요. 나는 당신에게
이러한 아픔을 준비하라고 하는 것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있어요. 당신은 나에게 미안하
다고 말해 주세요. 그러한 다음 우리는 친구로서 헤어지는 거예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눈물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눈
을 감았다. “마리아” 하고 나는 말했다. “나에게는 오직 당신과 함께한 하나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역시 당신의 것인 오로지 하나의 뜻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요. 나는 사
랑의 모든 열기를 가지고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자
격이 없다는 것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은 귀족으로, 기품으로, 순결함으로 내 위에 높이
서 계십니다. 당신을 나의 아내라고 부른다는 생각을 나는 감히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
만 우리가 인생을 통해 함께 거닐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마리아, 당신은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나는 어떠한 희생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거대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으시면, 우리는 그렇게 다시 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
나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당신이 내게 속해 있음을 느끼신다면 ― 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세상과 그들의 차가운 판단을 잊게 해 주십시오. 나의 팔 위에 당신을 모셔 제단으로 운
반하겠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당신의 것이 되겠다고 당신께
맹세하겠습니다.”
“친구여”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해서는 안 돼요. 그러한 결
합이 이러한 생활에서 우리에게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신의 의지였다면, 그는 왜 내게 나
를 능력 없게 만드는 이런 병고를 보내었으며, 더욱이 할 일 없는 어린아이에게 하셨을까
요? 우리가 삶에서 운명 상황 관계라고 부르는 것들은 정말로 오로지 섭리의 작품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것을 거역하여 반대하는 것은 선을 거역하여 반대하는 것이지요. 그
것은 조잡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방자하다는 말은 붙일 수 있을 거예요.
인간들은 여기 지상에서 하늘에 있는 별처럼 산보를 하지요. 신은 그들에게 궤도를 그
려 주셨고, 그 위에서 그들은 만나고, 헤어져야 할 운명이면 헤어져야 하지요. 그들의 저
항은 소용도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 저항은 세계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게 될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믿을 수는 있어요. 당신을 향한 나의 애정이 왜 부당
한 것이었는지, 나 스스로도 정말 이해하지 못해요. 아니, 부당한 것을 나는 할 수 있어
요. 그것을 나는 그렇게 부르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그럴 수는 없어요. 그래서도
안 되는 거예요. 친구여, 이것으로 충분해요. 우리는 순종과 믿음 속에서 따라야만 해요.”
차분함의 고집 속에 그녀는 말을 이어 갔지만, 얼마나 깊이 그녀가 괴로워하는지를 나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99

는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과의 투쟁을 그렇게 빨리 포기하는 것이 내게는 부당하


게 여겨졌다. 그래서 괴로움의 어떠한 단어도 그녀의 고통을 배가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
여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것이 마지막이라면, 우리는 이 희생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를 분명히 보아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의 사랑이 어떤 높은 법칙에 상처를 입혔다면, 나
도 당신처럼 겸손하게 허리를 굽히겠습니다. 하나의 높은 의지에 대립된다는 것은 신을
잊는 것일 테지요. 인간은 때때로 신을 기만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허황된 짓이지요. 이러한 거인과의 싸움을 시작한 인간은 분쇄되고 파괴되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사랑에 대립된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험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
다. 나는 인간 사회의 법칙을 존중합니다. 우리의 시대처럼 법칙이 기교를 부리고, 법칙이
헝클어진 곳에서조차도 나는 법을 존중합니다. 병자에겐 조제된 약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우리가 코웃음 치는 사회의 제한, 사회의 배려, 사회의 선입견 없이 오늘날의 인류를 결
합시킨다거나 지상에서의 공동생활에 대한 목표를 성취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들에게 많은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아테네 사람들처럼 소년과
소녀를 가득 실은 배를 매년 우리 사회의 미궁을 지배하는 그 어떤 괴물에게 조공으로
보내야 합니다.
상처를 입지 않은 심장은 하나도 없습니다. 안정을 찾기 이전에 사회라는 새장 속에서
자신의 날개를 꺾지 않아야만 하는 진실한 감정을 지닌 사람은 어느 하나도 없습니다. 그
래야 되고,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당신은 인생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오로지 내 친구
만을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여러 전집에 해당하는 비극을 이야기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한 남자가 한 소녀를 사랑했고, 소녀는 사랑에 응답했답니다. 그러나 남자는 가난했고,
소녀는 부자였지요. 부모와 친척들은 티격태격 싸우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두 마음
은 상처를 입었지요. 왜냐고요? 한 여인이 누에고치에서 뽑은 중국산 명주옷이 아니라 미
국산 목면 옷을 걸치고 있으면, 세상은 그녀가 불행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한 사람이 소녀를 사랑했고, 소녀는 사랑에 응답했답니다. 그러나 남자는 신교
였고, 소녀는 카톨릭이었지요. 어머니들과 성직자들은 적대관계가 되었고, 이로 인해 두
마음은 상처를 입었지요. 왜냐고요? 3백 년 전 카를 5세, 프란츠 1세, 하인리히 8세가 서
로 간에 벌였던 정치적 장기놀음 때문이지요.
세 번째 친구는 한 소녀를 사랑했고, 소녀는 사랑에 응답했답니다. 그러나 남자는 귀족
이었고, 소녀는 평민이었지요. 자매들은 시기하고 질투했지요. 그래서 두 마음은 상처를
입었지요. 왜냐고요? 백 년 전 전쟁터에서 왕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을 한 병사가 죽였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공은 그에게 칭호와 명예를 주었지요. 그런데 그의 증손이 당시 흘린
피의 대가를 망쳐진 인생으로 보상한 것이지요.
통계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은 매 시간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고 합니다. 나는 그
것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왜 그렇지요? 세상 어디에서나 타인 간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
100 문학과 삶(슬로리딩)

기 때문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요. 두 소녀가 똑같이 한 남자를 사랑한


다면, 한 소녀는 희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남자가 똑같이 한 소녀를 사랑한다면, 한
남자 혹은 두 남자는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고요? 도대체 결혼하려 하지 않고는
어떠한 소녀도 사랑할 수 없는 걸까요?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고 탐하지 않고 어떠한 기
혼 여성도 바라볼 수 없는 걸까요?
당신은 눈을 감아 버리는군요. 내가 너무 많이 말을 한 것 같군요. 세상은 삶에서 주는
가장 성스러운 것을 가장 천박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충분합니다!
우리가 그들 속에서 그들과 더불어 말하고 행동해야 된다면 세상의 언어로 우리도 우리에
게 말을 하게 해야지요.
그러나 저 바깥세상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개의치 말고 두 마음이 마음의 순수한 언어를
말할 수 있는 곳에서 우리만의 성전을 지키도록 합시다. 세상 스스로도 그들이 옳다는 의
식 속에 사물의 평범한 흐름에 맞서는 이 은둔의 상태를 이 용기 있는 항거를, 숭고한 마
음을 존중합니다.
세상의 배려, 세상의 온당함, 세상의 선입견은 마친 담쟁이덩굴과도 같은 것이지요. 초
록색 담쟁이덩굴이 그의 수많은 줄기와 뿌리를 가지고 견고한 성벽을 장식하는 것은 아름
답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너무 무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돼요. 그렇
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구조의 모든 틈 사이로 밀고 들어와, 내부에서 우리 스스로를 지
탱하는 집합체를 파괴할 테니까요.
마리아, 나의 것이 되어 주십시오. 당신 심장의 소리를 따르십시오. 지금 당신 입술에
떠도는 말은 영원히 당신과 나의 삶은, 당신과 나의 행복을 결정할 것입니다.”
나는 침묵했다. 나의 손에 쥐어진 그녀의 손이 마음의 따뜻한 악수에 응답하고 있었다.
그녀 안에서는 파도가 일고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지금 막 구름과 구름을 폭풍우가 지
나가며 걷어내듯이 내 앞에 놓인 그 푸른 하늘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을 수 없어 보였다.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라고 결정의 순간을 영원히 미루려는 듯 그녀는 나지막하
게 물었다.
“왜라니요?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꽃에게 왜 피었느냐
고 물어보십시오.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
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 (중략) ……

마리아,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최선의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좋고, 그래


서 당신은 나에게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당신 안에 살
고 있는 말을 하십시오. 당신은 나의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당신의 가장 깊은 감정을 부
인하지 마십시오.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101

신은 당신에게 병고의 삶을 선물하셨습니다. 신은 당신에게 당신과 함께 아파하라고 나


를 보냈습니다. 당신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어야만 합니다. 한 척의 배가 무거운 돛들을
운반하듯이, 인생의 폭풍을 헤치고 마침내 안전한 항구로 안내해 줄 그 아픔을 우리는 같
이 짊어지려고 합니다.”
그녀의 마음속은 잔잔해지고 또 잔잔해졌다. 고요한 저녁노을처럼 홍조가 그녀의 뺨에
비쳤다. 그때 그녀는 눈을 넓게 떴다. 태양이 경이로운 빛으로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나는 당신 것이에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신의 뜻입니다. 이대로의 나를 받아주세요.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당신 것입니다. 신은 우리를 아름다운 삶 안에서 다시 같이하게
하시고 당신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가슴과 가슴을 맞대었다. 나의 입술은 지금 막 내 삶의 은총을 읊조린 그녀의
입술을 부드러운 키스로 닫았다. 시간은 우리를 위해 정지해 있었고, 우리 주변의 세계도
사라졌다. 그때 하나의 깊은 한숨이 그녀의 가슴으로부터 새어 나왔다.
“하느님, 나에게 이 축복을 용납해 주소서.”라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제 나를 혼자
있게 해주세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안녕, 나의 친구여, 나의 애인이여, 나의 구세
주여!”
이것이 내가 그녀에게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
아왔고 가슴 조이는 꿈을 꾸며 잠을 자고 있었다. 궁정 주치의가 내 방에 들어왔을 때는
자정이 지난 후였다. “우리의 천사는 천국에 있다네.”라고 그는 말했다. “이것이 그녀가
자네한테 보낸 마지막 인사라네.” 이 말과 함께 그는 나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편지 속에는 그 옛날 그녀가 나에게 그리고 또한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신의 뜻대로’
라는 말이 새겨진 반지가 들어 있었다. 그 종이 위에는 내가 어린아이일 때 그녀에게 한
말을 언젠가 그녀가 한 번 써넣은 “당신의 것, 그것은 나의 것입니다. 당신의 마리아”라는
말이 있었다.
시간이 넘도록 한마디 말도 없이 우리 둘은 같이 앉아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짊어지기
에는 너무나 큰 고통의 짐이 될 때 하늘이 보내는 일종의 정신적 무기력 상태였다. 마침
내 그 늙으신 분은 일어서며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가 보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일세. 왜냐하면 자네는 여기를 떠나야 하고, 내가 살아
갈 날도 숫자로 세어지니 말일세. 내가 자네에게 해야 할 말이 꼭 한 가지 있네. ― 한평
생 가슴속에 품고 아무에게도 고백하지 않은 비밀일세. 나는 그것을 한 사람에게 고백하
기를 동경해 왔다네. 잘 들어 주게. 우리를 떠나간 그 영혼은 하나의 아름다운 영혼, 하나
의 찬란하고 순결한 정신, 하나의 깊고 고귀한 마음이었네. 나는 그녀와 같이 그렇게 아
름다운 한 영혼을 알았었네. ― 더 아름다운 영혼을!
그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다네. 나는 그녀의 어머니를 사랑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나를
사랑했었네. 우리 두 사람은 가난했고, 나는 나와 그녀에게 세상에서 존경받을 만한 위치
를 얻으려고 생활과 싸움을 했었네. 젊은 후작이 나의 신부를 보고는 그녀를 사랑했네.
102 문학과 삶(슬로리딩)

그는 내가 모시던 제후였고, 그는 그녀를 내심으로 사랑했다네.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희생을 치를, 그리고 가난한 고아인 그녀를 후작 부인으로 등극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네.
나는 나의 행복을,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을 희생할 만큼 그녀를 그렇게 사랑했다네. 나
는 고향을 떠났고,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을 되돌려 보낸다고 편지를 썼다네. 그녀가 임종
하기 이전에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네. 그녀는 첫째 딸을 분만하다
죽고 말았네.
이제 자네도 알았을 걸세. 왜 내가 자네의 마리아를 사랑했고, 그녀의 삶을 하루 하루
라도 더 연장시키려고 했는지를. 그녀는 내 마음을 정말로 이러한 삶에 사슬로 묶어놓은
유일한 존재였다네. 내가 짊어졌던 것처럼 자네도 삶을 짊어지게. 공허한 슬픔에 하루라도
잃지 말게. 자네가 아는 곳에서 인간들을 도와주게. 그들을 사랑하게. 세상에서 그녀와도
같은 그러한 성품의 인간을 보았고, 알고 지냈고, 사랑했다는 사실을 신에게 감사하게. 그
리고 잃은 것까지도.”
“신의 뜻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이별을 했다.

그러고 며칠이, 그리고 몇 주일이, 그리고 몇 달이, 그리고 몇 년이 흘러 지나갔다. 고


향은 나에게 타향이 되었고, 타향은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나에게 남아
있다. 바다로 떨어지는 한 눈물처럼, 그렇게 그녀에 대한 사랑은 인류의 생동하는 바다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어린 시절부터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이방인 인간들’의 백만
명을 ― 백만 명을 뚫고 들어가고 그리고 포옹한다.
다만 오늘처럼 고요한 여름날에는, 저 바깥에 아직도 인간들이 있는지 아닌지, 아니면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 살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홀로 자연의 푸른 숲 속 품에
눕는 곳에서는, 회상의 묘지 위에서는 활기가 차고, 죽어 버린 생각들이 되살아나고, 사랑
의 모든 전능이 마음속으로 되돌아오고, 그의 깊고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다시 바라보
는 저 아름다운 존재를 향해 흘러간다. 그러면 이것은 마치 수백만을 향한 사랑이 하나를
향한 이 사랑 안으로 ― 나의 수호천사에게로 ― 사라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나의 생각들
은 사랑의 유한하고 무한한 탐구할 수 없는 수수께끼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다.

- 막스 밀러, 서장원 역, <독일인의 사랑>, 고려대출판부, 2011.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103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도시 전체가 우리에 관해서 말들을 하고 있어요. 영주인 내 동생은 후작님께 편지를 올렸고,
후작님은 내가 당신을 다시는 만나지 말라고 요구하셨어요. 나는 당신에게 이러한 아픔을
준비하라고 하는 것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있어요. 당신은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주세요.
그러한 다음 우리는 친구로서 헤어지는 거예요.”에서 마리아는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이별 선언을 하는데 우리 시대에도 이처럼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로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그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보자.

2 “나는 나의 행복을,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을 희생할 만큼 그녀를 그렇게 사랑했다네. 나는


고향을 떠났고,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을 되돌려 보낸다고 편지를 썼다네. 그녀가 임종하기
이전에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네.”에서 알 수 있듯이 궁중 주치의는
마리아의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젊은 후작과 결혼시키고 그녀 곁을 떠나는 결심을
하였다. 이러한 궁중 주치의의 사랑 방식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3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사랑을 고백하고 감정을 나누었지만 마리아의 죽음으로 비극적
으로 끝나게 된다. 왜 그러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야기 나누어 보자.

4 “그토록 아름다운 자연, 그토록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그렇게 성스러운 평안이 영혼을 통해 흐른 적이 없었다.” 이와 같은 사랑의 장면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면 한 편의 수필 같은 아름다운 글로 작성해 보자.

5 <독일인의 사랑>이 순수한 사랑과 기다림의 사랑이라면 현재 한국인의 사랑은 어떠한지 자


신의 경험담 혹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작성해 보자.
104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독일인의 사랑>을 읽고, 사랑의 방식 혹은 사랑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을 만들어 보자. 각


자가 만든 질문을 바탕으로 팀원들과 토의·토론을 진행한 후 그 내용을 정리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105

【체험의 숲】

여러 가지 사랑 이야기를 찾아 다른 친구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


인지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 정리해 보자.

체험 항목 활동 내용

내가 아는
사랑 이야기

남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106 문학과 삶(슬로리딩)

3 장영희의 <눈먼 소년이 어떻게 돕는가?>

장영희 교수는 번역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등 일명 ‘문학 전도사’로서 왕성한 활동을 한 인


물이다. 첫돌이 지나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목발을 짚었으나 신체적 한계에 굴하지 않고 문학
의 아름다움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올해의 문장상’을 수상한 『내 생애 단 한번』을 비롯
해 『문학의 숲을 거닐다』,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다시, 봄』,
『사랑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Crazy Quilt』 등의 에세이를 펴냈다. 『슬픈 카페의 노
래』,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 『종이시계』, 『스칼렛』, 『톰 쏘여의 모험』, 『피터 팬』, 『살아있는
갈대』, 『바너비 스토리』 등 2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생전에 그녀는 자신이 ‘암 환자 장영희’로 비춰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천형
(天刑) 같은 삶’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녀는 도리어 자신의 삶은 누가 뭐래도 ‘천혜(天惠)
의 삶’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 생애 단 한번』에는 저자 개인의 경험을 넘어 우리네 삶의 체
취와 감상들이 반듯하고 따뜻하게 녹아 있다. ‘나눔과 배려’, ‘관용과 포용’, ‘생명의 소중함’,
‘희망’, ‘신뢰’ 등을 주요 테마로 삼아 삶의 곳곳에서 마주치는 편린들을 통해 우리가 결코 잊
어서는 안 될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감동적으로 엮어내고 있다. 글 사이사이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는 정의로움과 작은 것들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이 켜켜이 담
겨 있다. 가난한 할머니를 도와준 제자에게 과감히 A+를 준 이야기, 부모의 한없는 사랑과 믿
음에 대한 존경, 장애인으로서 겪은 남다른 체험들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사회 편견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까지, 모두 특유의 유머와 위트로 승화시켜 다채롭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하
여 행간마다 눈물과 웃음이 묻어 있다. 이는 그녀만이 갖는 문학적 재능과 여유, 그녀의 글이
가진 독특한 색깔이자 아름다움이다.
차분한 자기 성찰뿐 아니라 삶과 죽음의 의미도 따뜻하게 승화시키는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
다 보면 곳곳에서 맑은 빛깔과 소리의 파장이 마음속을 파고든다. 부족함을 불평하기 좋아하
고, 팍팍한 일상에 매몰된 채 자신마저 잊고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반성과 성찰에 대한 질문
을 던지면서 잊고 있던 혹은 간과했던 소중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필이면 왜 나만 불행하
고 운이 없나’라는 불평 대신 ‘하필이면 왜 내게 이런 기쁨이 주어졌을까’ 하고 감사하는 마음
이 일면서 ‘무미건조하고 습관화된 삶’이 ‘아름다운 삶’으로 느껴진다.
견디기 힘든 아픔들을 건강하고 당당하게 전환시킬 줄 아는 삶의 자세에서 독자들은 부족함
이 또 다른 희망을 낳는 디딤돌이 됨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삶을 지탱하는 진정한 가치와
진실로 인간답기 위한 미덕들이 잔잔하게 녹아있는 이 글에서 잘 숙성된 저자의 문학적 향취
와 함께 마음의 고향에 찾아든 듯한 평화와 기쁨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107

【읽기의 숲】

아이로니컬한 말이지만 영어 회화 과목을 가르치면서 가끔 학생들이 우리말보다 영어로


말할 때가 자기 마음을 더 잘 표현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문법도 많이 틀리고 어휘도 많이 부족하지만, 오히려 모자라는 언어 실력이 솔직
한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말로 말할 때는 어휘도 풍부하고 언어 기술도 좋으니까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그럴
듯하게, 장황하고 멋있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로 하자면 머릿속에서 마땅한 단어 찾
고 주어 동사 맞추자니 너무 번거로워서 꼭 해야 할 말만 가장 간략한 형태로 단도직입
적으로 하게 마련이다.
즉 언어 구사력이 좋다는 말은 그만큼 ‘위장술’이 좋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결국 언어 ‘기술’을 습득한다는 뜻이므로, 나는 회화 시간
에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말을 많이 하도록 만드는가에 대해 항상 고민한다.
그런데 동기 유발이 잘 되도록 재미있고, 생각과 토론의 소지가 많은 상황을 제시하기
란 여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오늘 학생들에게 준 토론 주제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곧 핵전쟁이 일어나고,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핵폭발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동굴이 하나 있고, 아래 있는 열 사람이 그 동굴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동굴에는 꼭 여섯 명밖에는 들어 갈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죽을 것이
므로 생존자들이 완전히 새로운 한국, 아니 새로운 아시아를 건설할 것을 감안하여, 다음
열 사람 중에서 여섯 명을 선택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

수녀 (종신 서원을 했으므로 결혼할 수 없는 상태)


의사 (공산주의자)
눈먼 소년
교사 (일본인)
갱생한 창녀 (그러나 언제라도 이전 생활로 돌아갈 소지가 큰 상태)
여가수 (품행이 나쁘기로 소문남)
정치가
여류 핵물리학자
농부 (청각 장애자)
나 자신 (아무런 기술도, 능력도 없는 백수 상태)

사람마다 하나씩 조건이 있어 학생들이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게끔
만들어진 문제였다. 그래도 토론을 시작하자마자 학생들이 별 의견 교환 없이 간단히 제
108 문학과 삶(슬로리딩)

외시킨 인물은 정치가였다. 이유로는 ‘워낙 기회주의자인데다가 여섯 명을 가지고도 당을


만들어 서로 헐뜯고 싸우면서 새로운 한국의 분열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또 거의 만장일치로 살려야 한다는 인물은 ‘나 자신’이었는데, 학생들이 말하는 재미있
는 이유는, 여섯 명이라는 숫자로 시작하는 나라이니만큼 우선 인구를 늘리는 것이 필수
적인데, 아무런 기술이 없더라도 생산과 인구 증식에는 공헌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학생들이 의견의 일치를 본 인물은 청각 장애자 농부로, 모든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보급할 수 있으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여섯 그룹으로 나누어 두 그룹씩
앞으로 나와 토론하고, 좀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그룹을 투표하여 뽑는 토너먼트 식으
로 운영했는데, 나중에는 가장 많은 득표를 한 A와 B그룹이 결승전을 벌였다. 물론 막히
는 단어도 많았고, 문법이나 발음에 있어 실수도 많았지만, 토론을 진행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들 가운데 일본인 교사와 눈먼 소년에 관한 토론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대충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나중에 토론 자료로 삼기 위해 조교가 비디오를 찍었으므로 중간중간
생략한 부분을 빼고는 학생들이 말한 거의 그대로를 옮긴 것이다).

먼저 일본인 교사에 관한 토론이다.


A: 우리 그룹은 이 사람을 제외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인이지 않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박해 받은 36년을 생각한다면 우리나라 사람을 죽이고 일본 사람을 살
릴 수는 없습니다.
B: 우리 그룹은 이 사람을 살리기로 했습니다. 물론 우리 조상들이 겪은 아픔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입니다. 우리는 앞을 보고 살아야지, 뒤를 보고 살아
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비극보다는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미래의 사회를
좀 더 강하고 미래 지향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동지입니다.
A: 물론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준 아픔은 너무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
다. 사할린 동포들을 보십시오. 왜 그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의 전쟁을 위해 이용하고는 전쟁에서 패하자 자기 민족만 데려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곳에 버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마루타 이야기 아시죠? 전쟁 동안 한국 사
람들을 ― 선생님, ‘생체 실험’이 영어로 뭐예요? ― 생체 실험용으로 썼습니다. 한마디
로 일본 사람들은 너무 비인간적이고 비양심적입니다.
B: 그건 비단 일본 사람들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땐 전쟁 중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그저 잔인한 동물입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인지도 모릅
니다. 따라서 이 사람이 단지 일본 사람이라는 이유로 죽게 한다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A: 작년에 우리 대통령이 일본에 갔을 때에도 ― 선생님, ‘정신대’가 영어로 뭐예요? 감사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109

합니다 ― 정신대 문제에 대해 그들은 한마디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 젊


은이들 대부분은 자기네 조상들이 우리나라를 그렇게 박해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B: 우리 토론이 본론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건 일
반적인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상황에서는 국적이 중요한 것이 아
니라 ― 선생님, ‘유전자’가 영어로 뭐예요? 아, 맞아, 그거지 ― 유전자를 생각해야 합
니다. 일본인이라는 것 외에 이 사람은 새로운 사회의 일원이 되기에 가장 좋은 조건
을 갖춘 사람입니다. 지적이고, 도덕적으로 문제없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을 세우
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A: 바로 그겁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의 한국인을 가르칠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이들에게 우리말 대신 일본말을 가르치고 일본 문화만 가르칠 겁니다. 즉 미래의 한
국이 일본이 될 거라는 말입니다. 그래도 좋겠습니까?
이 말이 결정적이었다. A그룹이 더 많은 찬성표를 얻은 것은 물론, B그룹까지도 미래의
한국이나 아시아가 일본이 된다는 것에는 반대였다.

눈먼 소년에 관해서도 두 그룹은 의견이 엇갈렸다. A그룹이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면을


강조한 반면, B그룹은 인도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A: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고, 여섯 명 모두 어떤 형
태로든 공헌해야 합니다. 그런데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B: 눈이 멀었든 안 멀었든 간에, 그는 아직 어린 소년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무조건 어린이를 먼
저 구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A: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택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누가 얼마나 오
래 사는가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위해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소년의
경우는 너무 어리고, 따라서 육체적으로도 약하고, 아무런 경험이나 지식도 없는데다
가 볼 수조차 없는데, 어떻게 나라 세우는 일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B: 그러니, 결국 눈이 멀어서 안 되겠다는 말 아닙니까?
A: 그게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하겠죠. 소년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각자 맡은
일에 아주 바쁠 겁니다. 누가 소년을 돌본단 말입니까?
B: 그러나 눈이 멀었기 때문에, 유용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 가혹
합니다. 인간은 가끔 잔인한 동물과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약한 자를 동
정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 아닙니까?
A: 물론 우리도 소년을 동정합니다. 하지만 감상적이 되면 안 됩니다. 좀 더 현실적이어
야 합니다. 이건 실제 상황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여섯 명이 힘을 합해
110 문학과 삶(슬로리딩)

강하고 살기 좋은 한국을 건설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자기 의무


를 소홀히 한다면, 새로운 사회는 시작하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 겁니다. 그런데 눈먼
소년이 어떻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될 뿐만 아니라 사
회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B그룹은 마땅하게 논박할 이유를 들지 못했다. ‘동정과 인간애’에 대해 몇
명이 거들었으나, A그룹의 실리적인 측면을 꺾을 만큼 설득력을 갖지는 못했다. 분위기로
보아 A그룹의 논지가 많은 학생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B그룹에 속
해 있던 진기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나는 내심 놀랐는데, 진기는 심하게 말을 더듬기 때
문에 보통 토론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는 것에 심한
압박감을 느끼는지, 말없이 그냥 한구석에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나 다른
학생들은 진기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진기는 말을 더듬으며 천천히, 그리고 힘겹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소년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커다란 공헌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에서는 여러분이 이미 언급했듯이, 모든 사
람이 각자 자기 일을 하느라 아주 바쁠 겁니다. 좋은 나라,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신없을 겁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그 사회에도 경쟁이 생기고, 질투와 미움에 사로잡
혀 권력을 놓고 싸울 겁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이 눈먼 소년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
람이 있으면 모두 자기 시간을 쪼개 그를 도와야 할 겁니다. 그러면 남을 돕고, 남을 위
해 나의 작은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배려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교실이 조용해졌다. 진기가 말하는 것을 끝까지 듣는 것은 많은 인내심을 요했지
만, 말더듬 증상 때문에 그가 어렵사리 하는 말은 어쩐지 더욱 진지하고 진실되게 들렸
다. 잠시 쉬었다가 진기는 다시 입을 열어 결론을 지었다.
“그렇게 남을 돕고 함께 나눌 줄 모르는 나라라면, 그런 데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 장영희, <눈먼 소년이 어떻게 돕는가?>, 내 생애 단 한번, 샘터, 2000.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111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서 동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섯 명의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 이유를 말해 보자.(예: 효용성, 인간성, 스펙 등)

2 자신이 새로운 조직(국가, 사회, 정당, 시민단체)을 만든다고 가정할 때 함께하고 싶은 존재를
5명 이상 제시하고 그 이유에 대해 말해 보자.(예: 인공지능, 군인, 개그맨, 임신한 여성,
역사가, 특정 장애인, 애완동물 등)

3 글에 제시된 인물들이 저마다 ‘나눔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할 때, 그 나눔이 어떤 방


식이 될지 써 보자.

수녀:
의사:
눈먼 소년:
교사:
갱생한 창녀:
여가수:
정치가:
여류 핵물리학자:
농부:
나 자신:

4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가진 자의 나눔 혹은 베풂을 의미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들에 대해 서술해 보자.

5 우리 주위에 소외되어 있는 계층들의 삶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구체적이면서 현실적인 방


안에 대해 써 보자.
112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자본·자원·노동 등에 있어서 ‘소유’에서 ‘공유’로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소유적 삶과 공유적 삶에 각각 어떤 장단점이 있을지 질문지를 작성해 보고, 그
것을 토대로 진정한 ‘나눔’의 가치에 대해 토론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113

【체험의 숲】

나눔과 배려는 더불어 사는 삶의 바탕이 되는 핵심 가치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했


던,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싶은 ‘나눔과 배려’의 미덕을 바탕으로 나만의 ‘나눔
메뉴판’을 만들어 보자.

나만의 ‘나눔 메뉴판’


항목 비고
나눔 실천: ‘내’가 주체 나눔(배려) 받음: ‘타인’이 주체
과거 나눔을 실천했던 경험 배려를 받았던 경험

현재 지금 당장 나눌 수 있는 것 지금 당장 배려 받고 싶은 것
※물질적·
정신적·
재능 차원

미래 앞으로 나누고 싶은 것 앞으로 배려 받고 싶은 것

시기별로 구체적으로 실천 가능한 나눔 메뉴판을 만들어 보자.


(1년/3년/5년/10년/20년/30년)
114 문학과 삶(슬로리딩)

4 맹자의 <양혜왕장>

맹자는 전국시대의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로서 공자의 학설을 계승한 유학의 중요한 인물이
다. 어린 시절 부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으나 공자의 문인인 자사(子思)에게 공부하
여 사상을 성숙시킨다. 그래서인지 그의 학문은 공자의 학설을 계승한 제자들 중 자사와 친연
성을 갖는다. 이 점에 착안하여 순자는 자사와 맹자를 한 계열로 분류하였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이후 유학에서 ‘자사와 맹자학파〔思孟學派〕’로 불리게 된다.
그의 성장에는 모친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특히 교육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맹자
의 어머니가 3번 이사한 이야기〔孟母三遷〕’가 널리 이야기된다. 그는 학문을 완성한 뒤 관직
없는 일반 지식인〔士〕의 신분으로 양(梁), 제(齊), 송(宋), 등(滕), 노(魯)나라 등의 제후국을
순방하면서 그 주된 정치사상인 어짊에 바탕한 정치〔仁政〕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강대국들이 부국강병에 치중하여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던 상황
에서 맹자의 정치적 주장은 이상론으로 치부되곤 하였다. 다만 일시적으로 제나라 군주인 제
선왕(齊宣王)에게 채용되어 ‘초빙 재상〔客卿〕’의 역할을 수행한 일이 있다. 이후 그는 고향으
로 돌아가 후학의 양성에 힘쓰게 되는데 그 주된 사상은 『맹자』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는 이
후 유학의 정통을 잇는 주된 사상으로 인정되어 유학을 대표하는 사대 명저〔四書〕에 꼽히게
된다.
『맹자』에 수록된 <양혜왕장(梁惠王章)>은 맹자의 사상과 인간적 풍모를 드러내어 보여주는
명편이다. 전국시대의 정치풍토를 걱정한 맹자는 부국강병을 통한 천하통일을 지향하던 양혜
왕을 만나 어진 덕〔仁〕과 그것의 바른 실천〔義〕이야말로 진정한 통일국가를 성취하는 첩경임
을 강조한다.
특히 양혜왕과의 대화에서 맹자는 이익보다는 인의(仁義), 백성들과 행복을 함께 나누는 국
가〔與民同樂〕, 어짊에 바탕한 국가의 통치〔仁政〕, 하늘의 도리를 정치에 실천하는 왕도(王道)
정치 등 후세 정치에 금과옥조가 되는 주장들을 피력한다. 이러한 정치적 사상을 주장하고 전
파하는 데 있어서 맹자가 보여주는 도도한 정치적 웅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은 이
<양혜왕장>이 천고의 명작으로 꼽혀온 이유가 된다.
양혜왕은 위(魏)나라의 전성 시기에 즉위한 군주로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위혜왕(魏惠王)이지
만 당시의 수도가 양(梁) 땅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별칭으로 불리게 된 이름이다. 그는 자신의
재위 시기에 국력의 쇠퇴를 맛본 군주로서 이러한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에 맹
자를 만나 정치적 방책을 문의하게 되는데 그것이 ‘읽기의 숲’에 제시된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115

【읽기의 숲】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자 왕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는데 우리


나라에 이익이 될 일이 있겠지요?” 맹자가 말하였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로움에 대해
말씀하십니까? 어짊〔仁〕과 의로움〔義〕이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우리나라를 어떻게 이롭
게 할 것인가를 말씀하시면, 고관들은 우리 가문을 어떻게 이롭게 할 것인가를 말할 것이
며, 지식인들이나 서민들은 나의 한 몸을 어떻게 이롭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말할 것입
니다. 그리하여 위나 아래나 이익을 다투어 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전차 1만 대를
소유하고 있는 큰 나라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언제나 전차 1천 대를 소유한 가문
이 됩니다. 전차 1천 대를 소유한 중소국가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언제나 전차 1
백 대를 소유한 가문이 됩니다. 1만 대 중에서 1천 대를 소유하고, 1천 대 중에서 1백 대
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적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로움을 뒷전으
로 하고 이익을 우선시한다면 모든 것을 빼앗을 때까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짊〔仁〕을 지향하는 사람이 부모를 버리는 경우가 없고, 의로움을 지향하는 사람이 군
주를 무시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어짊〔仁〕과 의로움〔義〕만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이로움에 대해 말씀하셔서 되겠습니까?”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는데 왕이 연못가에서 기러기와 고라니와 사슴을 감상하고 있다가


말하였다. “현명〔賢〕한 덕이 있는 사람도 이런 것을 즐깁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현명한
덕이 있는 이라야 이런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현명한 덕이 없는 사람은 이런 것이 있어
도 즐기지 못합니다. 『시경』의 노래가 있습니다.”

영대(靈臺)를 세우기로 계획하여


설계하고 계획하자
백성들이 모두 와서
며칠 만에 완성됐네.

누대 세우는 일 서둔 적 없건만
서민들이 스스로 왔네
왕께서 동물원에 가시니
암사슴이 풀밭에 앉아있네.

암사슴은 살이 찌고 털빛은 윤택하며


백조는 정결하고 털이 풍성하네
왕께서 영소(靈沼)에 가시니
116 문학과 삶(슬로리딩)

호수에는 온통 물고기들 펄떡이네.1)

문왕(文王)은 백성들의 힘으로 누대를 만들고 호수를 조성하였지만 백성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그 누대를 ‘신령스러운 누대’, 그 호수를 ‘신령스러운 호수’라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그곳에 고라니와 사슴과 물고기와 자라 등의 동물들이 노니는 것을 즐거워하였
습니다. 옛날의 뛰어난 통치자들은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였기 때문에〔與民同樂〕 진
정으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반면 『탕서(湯誓)』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태양은 언제쯤이면 소멸할까?
내 차라리 너와 함께 망해버렸으면 좋겠네.2)

이렇게 백성들은 그 폭군과 함께 망하기를 원하였으니 높은 누대와 깊은 호수에 동물과


새들이 있다 한들 그것을 어떻게 홀로 즐길 수 있었겠습니까?”

양혜왕이 말하였다. “나는 정치를 할 때 전심전력을 다합니다. 하남(河南) 지역에 흉년


이 들면 그곳의 이재민들을 하동(河東) 지역으로 이주시키며 하동의 식량을 하남으로 날
라줍니다. 하동에 흉년이 들어도 마찬가지로 합니다. 이웃나라의 군주들이 정치를 하는 것
을 보면 나처럼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웃나라의 백성들이 줄어
들지 않고 우리나라의 백성들이 늘어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맹자가 말하였다.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을 가지고 비유하겠습니다. 북이 둥둥
울려 교전이 일어났다가 패배하게 되면 투구와 갑옷을 벗어던지고 무기를 끌고 달아나는
데 어떤 이는 100보를 달아나서 멈추고 어떤 이는 50보를 달아나서 멈춥니다. 그런데 50
보를 달아난 이가 100보를 달아난 이를 비웃는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양혜왕이 말하였다. “안 될 말입니다. 100보가 아닐 뿐이지 역시 달아난 일이기 때문입
니다.”
맹자가 말하였다. “왕께서 이런 도리를 아신다면 그 백성이 이웃나라에 비해 많아지기
를 바라시면 안 됩니다. 농사지을 시기를 어기지 않으면 양식이 먹고도 남게 될 것입니
다. 호수와 연못에 촘촘한 그물을 쓰지 않으면 고기와 자라를 먹고도 남게 될 것입니다.
일정한 때를 정해놓고 나무를 벌목하게 한다면 목재가 쓰고도 남게 될 것입니다. 양식과
물고기들이 먹고 남고, 목재를 쓰고도 남게 된다면 백성들은 행복하게 잘 살고 유감없이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게 잘 살고 유감없이 죽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왕도
(王道)의 시작입니다.
5무(畝)3) 되는 텃밭에 뽕나무를 심으면 50세 넘는 이들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게 될
것이며, 닭이나 돼지, 개 등을 때를 놓치지 않고 번식시키면 70세 넘는 이들이 고기를 먹
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각 집에 배정되는 100무(畝) 밭에 농사 시기를 빼앗지 않으면
여러 식구를 거느린 한 집안이 굶주리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며, 각 지역 학교의 교육에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117

힘을 기울여 효도와 공손함의 도리를 가르친다면 머리 희끗한 이들이 거리에서 이고 지는


힘든 일을 할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70세 넘은 이들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 백성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하는 경우는 결코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개와 돼지가 사람이 먹을 것을 먹고 있는데도 제지하지 않고, 길에 아사한 사람
들이 있는데도 곡식을 풀어줄 줄 모르면서, 사람이 죽게 되면 도리어 ‘내 잘못이 아니라
흉년이 그런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찔러서 죽게 해놓고 ‘내 잘못이 아니
라 칼이 그런 것’이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왕께서 흉년 탓을 하지 않는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왕에게 몰려올 것입니다.
양혜왕이 말하였다. “제가 기꺼이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맹자가 대답하였다. “몽둥
이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양혜왕이 말하였
다. “차이가 없습니다.”
맹자가 말하였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정치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 차이가 있겠습
니까?” 양혜왕이 말하였다. “차이가 없습니다.”
맹자가 말하였다. “주방에 기름진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 살찐 말들이 있는데, 백성들의
얼굴에 굶주린 기색이 보이고, 들판에 아사한 시체들이 널려 있다면 이것은 통치자가 야
수들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잡아먹는 일입니다.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조차 사람들은
혐오합니다. 그런데 백성의 부모로서 정치를 하면서 야수들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잡아먹
는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면 어떻게 백성들의 부모가 될 수 있겠습니까? 공자는 ‘가장 먼
저 흙이나 나무로 인형을 만들어 부장품으로 넣은 사람은 후손이 끊어졌을 것’이라고 했
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백성들을 굶주리게 하여 아사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양혜왕이 말하였다. “우리나라가 일찍이 천하에 가장 강력하였다는 사실을 선생님께서


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시대에 이르러 동쪽으로는 제나라에 패배하였고 나의 큰
아들까지 전사하고 말았으며, 서쪽으로는 진나라에 700리나 되는 땅을 빼앗겼고, 남쪽으
로는 초나라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너무나 수치스럽습니다. 그래
서 모든 죽은 사람들의 원한을 갚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가능하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하였다. “사방 100리 되는 땅만 있으면 천하를 귀순시키고 굴복시킬 수 있
습니다. 왕께서 만약 백성들에게 어진 정치를 시행하시고, 형벌을 간소화하시고, 세금을
경감시키고, 정성껏 밭을 갈고 때에 맞게 풀을 맬 수 있도록 해보십시오. 그리하여 젊은
이들이 시간을 내어 효행, 겸손, 충성, 신의〔孝悌忠信〕의 덕을 닦아 안으로는 그 어버이와
형님들을 섬기게 하고 밖으로는 선배와 어른들을 존경하게 해보십시오. 그렇게만 한다면
나무 몽둥이만 쥐어줘도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칼로 무장한 진나라나 초나라의 군대들
을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들에서는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할 시간을
빼앗아 정성껏 밭을 갈고 때에 맞게 풀을 매어 그 부모를 섬길 수 없도록 하는 나라들이
118 문학과 삶(슬로리딩)

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얼어 죽고 형제와 처자가 흩어져 이산가족이 되도록 하여 백성들


을 깊은 연못에 빠뜨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때 왕이 가셔서 정벌하신다면 그 어느 누가
왕의 적수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어진 사람에게는 적수가 없다〔仁者無敵〕’고 했습니다.
왕께서는 이에 대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맹자 지음, 강경구 옮김, 『맹자』, <양혜왕장>

1) 『詩經·大雅·靈臺』
2) 『尙書·湯誓』 탕(湯) 임금이 하(夏)의 폭군 걸(桀)을 토벌할 때 나온 말이다.
3) 약 100m×30m 가량의 넓이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119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맹자는 이익의 다툼이 국가와 사회를 경쟁과 투쟁의 소용돌이에 빠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
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어짊〔仁〕과 의로움〔義〕이라는 지향점을 제시하였다. 맹자가 지적
한 것처럼 이기적 이익의 다툼은 전체적 불평등과 결핍감, 나아가 세계적 혼란을 불러오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이기적 이익 다툼을 대신하여 사회적 공감을 얻을 수 있으며 행복감을
선물하는 미덕으로 어떠한 것들이 있을지 말해 보자.

2 맹자는 통치자들이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일〔與民同樂〕을 진정한 즐거움으로 규정하


였다. 재화의 이기적 독점으로 느끼는 작은 행복이 있고, 함께 공유하고 함께 향유함으로
느끼는 큰 행복이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다양한 행복의 조건들과 그 의의에 대해 말해 보자.

3 맹자는 부국강병의 정치를 살인에 비유하면서 사람들이 행복과 안정을 느끼도록 해주는 민본
주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현대의 정치적 상황에서도 국민소득과 행복지수의 비연관성이 나
타나는 경우가 있다. 국민의 행복을 지향하는 정치와 국가의 부강을 지향하는 정치의 차이
에 대해 토론해 보자.

4 맹자는 효행, 겸손, 충성, 신의〔孝悌忠信〕에 대한 개인적·사회적 실천에 바탕한 정치를


한다면 국가적 경쟁에서 무조건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仁者無敵〕는 이상론을 피력했다.
권모술수와 약육강식이 지배논리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정치적 현장에서 맹자와 같은 인
문학적 이상이 힘을 발휘하는 일로 어떤 것들이 있을지 조사하고 그 의의에 대해 글로 표
현해 보자.

5 우리 사회에서 나눔의 정신으로 공동체를 경영하고 있는 경우를 찾아보고 그 의미에 대해


글로 표현해 보자.
120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맹자는 일국의 군주를 앞에 두고 날카로운 질문을 통해 정치의 본질을 깨닫게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정치인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을 만들어 보고, 그에 대해 토론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121

【체험의 숲】

맹자는 사방 100리(50km) 되는 작은 땅을 가진 소국이라도 국민들을 힘들게 하지 않으며


상호 존중하는 미덕〔孝悌忠信〕을 길러준다면 다른 국가를 능가하는 최고의 국가가 될 수 있다
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여 나눔 정신을 지향하는 사회 조직이나 공동체, 또는 이
상국가를 조직할 방안을 구상해 보자.

공동체 내용

공동체, 또는
이상국가의 명칭

공동체, 또는
이상국가의 상징

공동체, 또는
이상국가의 지향점

1.

2.

3.
공동체, 또는
이상국가의 조건

4.

5.
122 문학과 삶(슬로리딩)

【감상의 숲】

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어떤개인날, 중앙문화사, 1961.


제3장 문학과 나눔 역량 123

【문제 은행】

1 <독일인의 사랑>과 유사한 순수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면 찾아보고 비교해 보자.

2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에 대해 각자 기준을


정해 분류해 보자.

3 사랑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자.

4 대학 캠퍼스 내에서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는지 제시해 보자.

5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가진 자의 ‘의무’인지 생각해 보자.

6 사적 나눔과 공적 분배,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 기업의 사회공헌 등에 대해 토론해 보자.

7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로 현대인이 겪고 있는 삭막한 삶의 풍경을 압축적으로


묘사하였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타인을 지옥으로 만드는 요소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말해
보자.

8 집단이기주의란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9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은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라고 할 수 있다. 비즈니스 관계는


물론이고, 지인과의 관계, 심지어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다양한 인간관계 속
에서 상대에게 어떤 것을 줄 수 있는지 서술해 보자.

10 인간이 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토론해 보자.(혹은, 인간 간의 나눔 행


위와 동물들 간의 나눔 행위를 비교해서 서술해 보자.)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25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27

4
제 장

문학과 소통 역량

우리 대학은 협력 인성을 갖춘 세계시민을 양성한다는 교육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소통 역량을 강화하는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소통 역량은 우리 대학이 교육을 통해 배양
하고자 하는 주된 핵심 역량의 하나이다. 이성적 이해와 감성적 공감을 통해 공동체 속에서 민
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역량이야말로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핵심 역량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원래 공동체(community)는 소통(communication)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건강성은 구성원들 간의 민주적 의사소통을 전제로 유지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마틴 부버
는 ‘대화를 통해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이 친밀한 소통을 쌓아갈 때 진정한 상호관계와 사회
적 관계가 형성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공감과 소통의 의지가 오히려 개입과 간섭으로 해석되는 사회를 살고 있다.
이 사회에서 낯선 타인은 그 자체로 불신의 대상이 되어 상호 간에 불통의 장벽이 세워진다.
직장, 학교, 지하철, 엘리베이터 등 일상의 모든 공간들이 부드러운 ‘바라봄’의 공간에서 날카
로운 ‘노려봄’의 공간으로 바뀐 지 오래다. 소통을 본질로 하는 공동체 사회가 경계와 배제의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눈과 귀를 닫아버린다. 이 ‘비통합적’ 사회에서 개인
의 고립감과 소외감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고립된 개인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은 자
명하다. 오로지 다양한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을 통해 자기 존재감과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 우
리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통은 공동체적 삶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고 이
를 통해 자기 가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역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로, 홀로’
보다는 ‘같이’하는 가치를 지향하며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역량이야말로 미래를 준비하는 젊음
이 갖춰야 할 미덕 중의 미덕이다. 오늘날은 뛰어난 한 개인의 역량보다는 구성원 간의 팀워
크나 상호 소통성이 핵심적인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 시대이다. 집단 지성이나 집단 창의성
이 주목받는 시대에 영웅호걸식 리더십이나 독불장군식 주장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
더러 오히려 허다한 문제를 일으키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집단 지성
의 가치와 민주적 소통이 보편화되어야 한다.
소통 역량은 특히 직장 공동체에서 적극적이고 원만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하
도록 한다. 윗사람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설득력, 자신감, 솔직성, 논리성, 경청, 예의, 의도
파악 등의 능력을 발휘하고, 동료나 아랫사람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배려, 유머, 명확성, 감정
조절, 겸손, 경청 등의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는 모두에게 환영받는 인재가 될 것이고, 무엇보
128 문학과 삶(슬로리딩)

다도 공동체의 발전에 공헌하는 인재가 될 것이다.


본 장에서는 소통 능력의 이해와 토론에 적절한 4개의 텍스트와 학습 활동을 제시한다. 첫
번째 작품은 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단절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학습 활동을 통해 소통에 대한 본질적 오
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작품은 이태준의 <복덕방>이다.
근대와 현대는 물론 고대 시대에도 세대 간 단절과 몰이해는 중요한 키워드 중의 하나였다.
이 작품에 대한 학습 활동을 통해 가까운 사이로서 잘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관계일수록
더 깊은 단절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작품은 초현실주의 작
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다. 주인공은 흉측한 벌레로 변해 의사소통이 단절된 채 방안에
틀어박혀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에 대한 읽기와 학습 활동을 통해 소통과 단절의 의
미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작품은 굴원의 <어부 이야기> 등 중국의
짧은 산문 2편과 시 2편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일이 진정한 소통에 이르는 첩경이라는
점, 원리에 맡겨두는 것이 인위적 노력보다 더 나은 소통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에 대해
말해 보고, 써 보고, 체험해 보는 학습 활동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29

1 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

김애란은 2002년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여 『창작과비평』에 작품이 실려 등단했다.


2010년대 <침묵의 미래>, <바깥은 여름>, <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같은 작품이 독자들의 사
랑을 받는 동시에 작품성도 인정받아 문단의 핵심 작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김애란 소설의
특징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일상을 현장감 있게 전달하는 데 있다. 특히 다양한 인물들이 겪
는 도시 생활의 힘겨움을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유머 감각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김애란의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는 <나는 편의점에 간다> 이외에도 현대사회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회 현상을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포착해 낸 작품들이 실려 있다. 작가는 미니홈피와 같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소통, 공동 주택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현실과 소통 단절, 은행 잔고와
언제 화장지가 떨어질지를 걱정하는 현대인의 생활 그 자체를 세밀하게 포착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현실과 그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어 내고 있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큰 거리뿐만 아니라 골목까지 다양한 브랜드의 편의점이 차지하고
있는 현대 도시의 모습을 공간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다. 편의점은 현대 사회를 응축해 놓은
일상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품목이 체계적으로 비치되어 있는 편의점을 현대인은
매일 반복적으로 드나든다. 무엇보다 편의점은 혼자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할 수 있으며 시간
에 구애받지 않고 생필품도 쉽게 구할 수 있어 바쁜 현대인들이 편하게 즐겨 찾는 장소이다.
이 소설에서는 총 세 개의 편의점과 한 개의 포장마차가 등장한다. 소설의 내용은 편의점을
자주 이용하는 한 대학생이 편의점 업주나 종업원과 나누는 간단한 대화를 통해 전개되고 있
다. 대학생인 ‘나’는 물건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오고 가는 대화에 항상 부담을 느끼곤 한다.
주인공은 거짓으로 대답을 하거나 둘러대다가 결국 몇몇의 편의점과 포장마차에 발길을 끊게
되었다. 마침내 주인공은 ‘큐마트’라는 편의점을 단골로 정하게 되었다. 이유인즉 ‘큐마트’의
점원은 간단한 인사와 물건의 가격을 이야기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기 때문
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최소한의 관심을 편하게 느끼며 어느 정도 단절된 관계에 익숙해진 인물이
다. 그러한 주인공의 소통 방식에 작가는 두 가지 사건을 추가하여 의문을 던진다. 첫 번째는
상경한 동생에게 방 열쇠를 전달하기 위해 편의점 점원에게 부탁해 보지만 주인공의 생각과
달리 자주 이용하던 ‘큐마트’ 점원은 주인공을 전혀 기억해 내지 못하는 장면이다. “손님, 죄
송하지만 삼다수나 디스는 어느 분이나 사가시는데요.”라는 아르바이트생의 대답 속에는 현대
인의 무심함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두 번째는 편의점에서 한 여고생이 물건을 훔치고 도망
가다 차에 치였지만 사고 후 길거리에 방치된 여고생에게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 장면이다. 이
두 사건을 통해 다른 이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민낯 그 자체를 보여줌으로써 작
가는 단절된 채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한 현대의 소통 방식에 대해 독자들에게 의문을 품어
보게 하였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소통 방식이 공존하고 있다. 대면 소통이 주를 이루는 관계가 있는가
130 문학과 삶(슬로리딩)

하면 직접적 만남 없이 문자나 영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다양한 소통 방식이


있으면 오히려 소통이 잘 되어야 하지만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일방
향적이거나 꽉 막혀버렸다든가 아예 교류가 없기까지 하다. 소통은 막힘이 없어야 한다. 인간
관계에서 막힘이 없이 이야기가 오고갈 때 그 관계는 비교적 매끄럽게 유지될 수 있다. 그런
관계들로 구성된 조직이나 사회는 막힘없이 발전해 나갈 것이다.
편의점이 온 동네를 차지하기 이전 동네 어귀에 자리 잡고 있는 가게에서 주인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 이상의 측면이 있었다. 상품과 돈을 주고받
는 과정에서 대화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길의 역할을 한다. 그 길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
하는 것은 문제없지만 그 길이 막혀버리게 된다면 현대인의 삶은 점차 고립되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의 소통의 현실을 보여주는 소설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앞으로 우리
가 어떤 방식으로 소통의 길을 열며 현대 사회를 살아가야 할지를 한 번쯤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읽기의 숲】

이곳은 대학가 근처의 주택단지이다. 이곳에는 모두 세 개의 편의점이 있다. 세 개의


편의점은 주택단지를 중심으로 서로 삼십 미터가 안 되는 거리에 삼각형 모양으로 배치
되어 있다. 엘지25시는 주택단지 근처에, 바로 맞은편에 패밀리마트가, 그리고 패밀리마
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븐일레븐이 있다. 주택단지로부터 엘지25시는 일직선, 패밀리
마트는 니은자 모양, 세븐일레븐은 디귿자 모양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세 편의점이 언제부터 이곳에 생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곳은 쉴새 없이 무언가
생겼다 사라졌고, 생긴 게 또다시 생기곤 했다. 여관, 피씨방, 테이크아웃 커피점, 호프집,
교회…… 편의점은 언제부턴가 그것들 틈에 말쑥한 차림의 전입생처럼 앉아 있었다.

내가 자주 갔던 편의점은 세븐일레븐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저 그곳이 귀갓길,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편의점이기 때문이었다. 도로 위로 퇴근 차량들이 긴 트리를 만들
며 깜빡이는 시간, 나는 반드시 편의점에 들렀다. 집으로 가는 길, 그곳 어딘가 환하게
간판을 밝히며 서 있는 세븐일레븐.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다는 듯 투명유리 사이로 훤
히 내장을 드러내고 있는 그곳. 나는 세븐일레븐을 지나며 ‘설마 저렇게 많은 물건 중 내
게 필요한 게 한 가지도 없을까’ 의심하게 된다. 그러면 세븐일레븐은 틀린 답을 고쳐주
며 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 선생님처럼, 내 손에 무언가를 들려 보낸다.
나는 집에 화장지가 있지만 화장지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므로 화장지를 산다. 나는 집
에 밥이 없지만 밥은 언제나 해먹어야 되는 것이므로 참치캔을 산다. 나는 참치캔을 샀
으니 밥을 해먹을 것이고, 밥을 해먹으면 입가심을 하고 싶을 것이므로 요쿠르트를 산다.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31

어느 날 초록색 조끼를 입은 세븐일레븐의 사장이 내게 말을 건다.


“안녕하세요?”
엉겁결에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손에 들린 리더기가 잽싸게 컵라면의 바코드를
읽어낸다.
“여기 사세요?”
구리색 피부에 살집이 좋다. 나는 컵라면 값 650원과 함께 네,라는 말을 지불하며 세
븐일레븐을 황급히 나온다. 그런데 그 후로 세븐일레븐에 갈 때마다 그 남자는 내가 물
건을 사는 족족 말을 걸기 시작한다.
“학생이에요?”
“네”
“3학년?”
“네.”
“혼자 살아요?”
“네.”
“여기 k대학?”
“아니요.”
“그럼 어느 학교 다녀요?”
나는 대충 학교 이름을 얼버무린다. 그러곤 다음 질문이 설마 ‘전공이 뭐예요?’는 아니
겠지 생각한다. 그가 묻는다.
“전공이 뭐예요?”
아마 내가 문학을 전공한다고 하면 그는 자신의 문학관에 대해 열변할 것이고, 미술을
전공한다고 하면 개중 유명한 미술작가를 들먹일 것이며, 이벤트학이나 국제관계학을 전
공하고 있다고 말하면, 또 ‘그게 뭐 하는 과냐’ ‘언제 생겼냐’ ‘그거 졸업하면 뭐 하게 되
냐’ 등의 질문을 퍼부을 것이다. 그러고는 나중에 그는 나를 ‘안다’라고 말하겠지.
나는 그에게 거짓말을 한다. 식품공학. 그는 “어유, 그럼 살림 잘하시겠네”라고 농담을
건다. “그럼 언제 졸업……”이라고 남자가 다음 말을 이으려 한다. 그때 만일, 전자레인
지가 삐―소리를 내지 않았고, 잘 익은 햇반이 내게 무사히 건네지지 않았다면, 그는 내
게 ‘좋아하는 체위는 뭐냐’고까지 물어봤을지 모른다. 내가 세븐일레븐 로고가 새겨진 반
투명 비닐봉지를 들고 황급히 나가려 했을 때, 그는 내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한
여고생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언니 잘 있어요? 그 시립대 다닌다는……”
나는 그 후로 세븐일레븐에 가지 않는다.

엘지25시와 주택단지 골목 사이에 이동식 포장마차가 한대 들어섰다. 떡볶이와 순대,


어묵 등을 파는 곳으로, 노모와 젊은 아들이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포장마차는 편의점의
132 문학과 삶(슬로리딩)

인스턴트 밤참에 싫증이 난 손님들로 항상 붐볐다. 새벽에 배가 고플 때, 나 역시 그곳을


이용했다. 나는 그곳에서 못난이만두를 섞은 떡볶이를 꼭 이천 원어치 샀다. 그들 모자는
내게 전공을 물어오지는 않았지만, 내가 떡볶이를 살 때면 못난이만두나 고구마튀김을 한
개씩 더 얹어주었다. 포장마차의 할머니는 덤을 주기 위해 가판대 너머의 내게 항상 상
체를 기울이곤 했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떡볶이를 사러 포장마차에 갔다. 그날은 노모의 아들이 혼자


가게를 보고 있었다. 아들은 이십대 후반으로, 해사하게 생겼으나 말투는 조금 촌스러운
사람이었다. 못난이만두에 떡볶이 국물을 묻히던 그는, 내게 과거 세븐일레븐의 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저것을 어눌하게 물어왔다. 나는 그의 질문들에 대해 건성으로 대답했
다. 그는 그의 노모가 그러는 것처럼 내게 덤을 주기 위해 잠시 상체를 내 앞으로 기울
였다. 나는 그의 상체가 제자리로 갈 때까지 잠시 숨을 멎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전공을
물어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국문과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국문과를 나오면 뭐가 되
느냐고 진심으로 궁금해 하며 물었다. 나는 대충 생각해 내어 “뭐 그냥 학자가 되기도
하고, 기자가 되기도 하고, 선생님이 되기도 한다”며 둘러댔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성은
없었으나, 악의도 없는 그런 말투였다. 그런데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그의 얼굴
이 잔뜩 흐려져 있었다. 내 앞에서 긴 국자로 어묵 국물을 휘이휘이 젓던 그는 잠시 뭔
가 생각하더니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대학 나왔어요. 그냥 편하게 살려고 이런 거 하는 거예요.”
그와 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 후로 그 포장마차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갑자기 그들 모자, 특히 그 아들과 인사를 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의 문제


가 생겼다. 인사를 하자니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그 통로에서 번번이 귀찮을 것 같고,
그렇다고 안하자니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걱정되었다. 그곳을 지날 때면 몇 미터 전
부터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그곳을 지나쳤다. 그것이 내게는 더 익숙하고
편한 방법이었다. 모자와 나는 서로를 발견하면 약속한 듯 시선을 피하고 딴청을 부렸다.

…… (중략) ……

큐마트에 다니면서 내가 한 가장 큰 착각은 푸른 조끼의 청년과 사적인 말을 하지 않


으므로 내 사생활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데 있었다. 내가 아는 한 큐마
트는 ‘어서 오세요’와 ‘감사합니다’의 세계였다. 그의 관심은 그가 파는 물건에, 나의 관
심은 내가 사는 물건에 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큐마트를 오래 다니다보니 나는 뜻밖에
의도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내 정보들이 매일매일 그가 들고 있는 바코드 검색기에 찍혀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33

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컨대 그는 나의 식성을 안다. 대여섯 종류의 생수 중 내


가 어떤 물을 가장 좋아하는지, 자주 사가는 요쿠르트가 딸기맛인지 사과맛인지, 흑미밥
과 쌀밥 중 무엇을 더 선호하는지 등을 말이다. 원한다면 그는 내 방의 크기도 추측할
수 있다. 쓰레기봉투를 매번 10리터를 사가는 나는 결코 큰 방에 살고 있을 리 없다. 그
는 나의 가족관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새벽마다 와서 햇반을 사가는 여자, 필수품을 스
스로 사는 어린 여자, 젓가락은 한 개만 가져가는 그 여자는 독신이리라. 그는 나의 고향
을 안다. 편의점에 겨울옷을 정리한 택배를 부치러 갔을 때, 그는 수수료를 받으며 내 주
소를 확인했다. 그는 나의 생리주기를 안다. 그는 정기적으로 생리대를 사가는 나를 본
다. 그는 콘돔갑을 뒤집어 계산대에 올려놓는 나를 본다. 그는 나의 식생활에서 성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고’ 있다. 왜냐하면 편의점이란 모든 걸 파는 곳이기 때문이다. 큐마
트는 나의 가장 오랜 단골이 된 덕에, 청년은 내게 단 한마디의 사적인 대화를 걸지 않
고도, 나에 대해 그 어떤 편의점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도 모르는 나의 습
관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 전공을 묻지 않는다. 나는 내 전공을 그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쓰레기봉투나
사가는 여자와 구별될 것이다. 내가 그와 사랑을 하고 싶어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내 사생활을 아는 그가 못마땅해졌을 뿐이다. 알면서도 침묵하는, 그의 무심함이 뻔뻔스
럽게 느껴졌을 뿐이다. 전자레인지에서 햇반이 돌아가는 일분 삼십초 동안, 혹은 서울우
유가 돌아가는 이십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가 나는 궁금해졌다. 나는 네 앞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내장을 꺼내놓듯 내가 먹고 싸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데 너는 언제나
푸른 제복을 입은 채 무심하다. 나는 너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세븐일레븐에서는
식품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포장마차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패밀리마트
에선 콘돔을 샀던 미성년자 같은 성년으로 모두 다르게 알고 있는 동네에서 그는 최소한
의 진실을 알고 있을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나는 상상한다. 어느 날 세 개의 편의점이 마주보고 있는 도로 한가운데서 여자가 차


에 치여 죽는다. 세 편의점의 모든 주인 즉 증인들은 그녀를 ‘안다’고 증언하고 나섰으나
저마다 진술이 달랐다. 편의점의 주인들은 어긋나는 진술 속에서 자신들의 기억을 의심하
며, 이번엔 다시 그녀를 ‘모른다’고 부정하고 나선다. 그러면 세 번의 부정 속에서 여자는
그때 어떻게 되며, 누가 되는가, 그것은 계산대를 등진 채 누군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
내고 있는 저 편의점 청년의 마음의 수신자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것과 같다. 그것이
궁금하여 누군가 당장 도로로 뛰어든다 하더라도, 그 답은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
로 나는 도로 한가운데로 가지 않고 편의점에 간다.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서울의 거리가 꽝꽝 얼어붙은 날. 거리는 한산했고, 모두가 번


화가로 몰려간 탓에 변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모 보험회사에서는 가을부터 올해 크리스
134 문학과 삶(슬로리딩)

마스에 눈이 내리면 가입자에게 돈을 준다고 광고를 내세웠다. 그날은 아침부터 눈이 내


렸고, 얼마 전 수능을 마친 동생이 재수학원을 알아보러 상경하기로 되어 있었다. 동생은
우선 내 방에 들러 하루를 묵고, 노량진에서 입시학원을 알아본 뒤 고향에 내려갈 계획
이었다. 이미 전화로 동생이 올라온다는 말을 전해들은 나는 집 근처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피씨방과 식당을 오갔다. 그런데 열시 즈음, 동생이 막차로 막 서울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한 친구의 위급한 전화를 받았다. 그
녀는 복통을 호소하며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와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대충 급한
대로 현금카드와 휴대폰만을 챙긴 채 집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순간 나는 당황했다. 동생
에게 내 방 열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두 시간이라면 피씨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해도
될 일이었지만, 응급실에서 몇 시간을 있어야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동생은 서
울 지리를 잘 몰랐다. 단골 가게에 열쇠를 맡기자니, 시간이 너무 늦은데다 크리스마스까
지 겹쳐 문 닫은 집이 많았다. 그렇다고 아무데나 부탁하자니 낯선 이에게 열쇠를 맡긴
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문 앞에서 망설였다. 그리고 그때
한 사람이 생각났다. 바로 큐마트의 푸른 조끼를 입은 청년이었다. 그는 이 동네에서 나
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나는 그 길로 큐마트를 향했다.

내가 큐마트에 도착했을 때, 큐마트에는 청년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큐마트의 청


년은 도시락세트에 스캐너를 댄 뒤 자기 주머니에서 도시락 값을 꺼내 캐시박스에 집어
넣고 있었다. 청년은 한가한 틈을 타 식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숨을 헉헉대며 계
산대 앞에 서자, 청년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에게
웅얼거리듯 말했다.
“저 죄송하지만 부탁이 있는데요.”
청년은 이제 막 먹으려 했던 도시락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네?”
나는 열쇠 이야기를 꺼내기 전, 먼저 우리의 친밀함을 그에게 설명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시죠?”
그는 도시락을 쥔 채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이 근처 사는…… 항상 제주 삼다수랑, 디스플러스랑 사갔었는데……”
청년이 계속 모를 듯한 표정을 짓자, 나는 조바심이 났다.
“깨끗한나라 화장지랑, 쓰레기봉투는 꼭 10리터짜리만 사가고, 햇반은 흑미밥만 샀는
데…… 모르시겠어요?”
그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마치 취중에 함께 하룻밤을 보낸 여자를 기억해내려는 듯 난
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삼다수나 디스는 어느 분이나 사가시는데요.”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35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는 여전히 나를 말갛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 주머니 속에는 건


네지 못한 열쇠가 들어 있었다. 열쇠를 쥔 손바닥에선 땀이 났다.
그즈음. 포장마차가 없어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다른 동네에 크게 가게를 냈다고도
하고, 편의점 주인들이 신고를 했다고도, 노모가 아픈가 보다라고도 했다. 나는 그들의
안부가 조금 궁금했다. 그러나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겪었던 수고로움을 덜하게 될 것이
라는 안도를 느꼈다.

…… (중략) ……

누군가 큐마트 안으로 들어왔다. 파란색 야구모자를 눌러쓴 이십대 후반의 남자였다.
남자는 철제 선반 사이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도로에서 갑자기 끼익 ―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큐마트 청년과 야구모자
를 쓴 사내는 동시에 창밖을 쳐다보았다. 편의점 유리창 밖에서 한 여고생이 눈앞에서
붕 ― 하고 떠올랐다 도로 위로 떨어져나갔다. 횡단보도 앞, 은색 쏘나타 한 대가 놀란 듯
멈추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쏘나타는 당황했는지 갑자기 전속력을 내며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큐마트 청년은 밖으로 곧장 뛰어나갔다. 나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
다.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게 보였다. 그중에는 패밀리마트의 주인여자도 있
었다. 사람들은 각기 휴대폰을 들고 경찰서, 애인, 가족에게 전화하는 듯했다. 여고생은
머리가 박살난 채, 뒤집어진 교복 치마 사이로 희멀건 하체를 드러 내놓고 있었다. 사람
들은 현장에 둥그렇게 모여 있었으나, 끔찍했던 탓인지 아무도 여고생 곁에 다가가지 않
고 있었다.
나는 계산대 앞으로 갔다. 그런데 그때, 파란색 야구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계산대 앞의
복권을 한 뭉치 집어 자신의 앞가슴에 넣고 있었다. 나는 간이 가판대 쪽으로 황급히 몸
을 돌렸다. 동시에 아르바이트 청년의 휴대폰에서 문자메씨지의 도착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렸다. 순간, 파란 야구모자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내가 한
번 더 시선을 피하려는데 전자레인지가 땡 ― 하는 소리를 내며 작동을 멈췄다. 그와 나
의 팽팽한 시선 사이에서 그 소리는 아교를 잘 먹인 현악기의 줄처럼 정말 가볍게 튀어
올랐다. 내 눈과 마주친 작고 깊은 눈, 모든 것이 싱싱한 이곳에서 그의 눈은 왠지 몹시
상해 보였다. 그리고 …… 낯이 익었다. 나는 태연한 척하며, 그의 얼굴을 어디에서 봤는
지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어디에서였더라? 패밀리마트에서 봤던가? 엘지25시에서 봤던
가? 어디에서였지? 그러나 나는 그를 기억해낼 수 없다. 다만 어쩌면 그도 나처럼 편의
점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곧이
어 청년이 헉헉대며 큐마트 안으로 들어왔다. 나와 파란 야구모자 사내는 얌전하게 계산
대 앞에 서 있었다.
“봤어요? 팬티가 훤히 다 드러났어요.”
136 문학과 삶(슬로리딩)

큐마트 청년의 흥분에 대꾸할 것도 없이 파란 야구모자 사내는 껌 한통을 계산한 뒤


황급히 나가버렸다. 나는 편의점 청년 앞에서, 얼굴이 하얘진 채, 한동안 꿈쩍 않고 서
있었다.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편의점 총각은 갑자기 생각난 듯 전자레인지 앞으로
갔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가 건네는 포장만두를 받아들었다. 볼일이 끝난 뒤에도 내가 편의점 청년 앞에
꿈쩍 않고 서 있자, 청년은 나를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나는 그에게 뭔가 얘기하지 않으
면 안될 것 같았다. 그런데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한
참을 망설였다. 어물쩍 한마디 내뱉고는 큐마트를 나왔다.
“문자 왔어요.”

- 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37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그즈음. 포장마차가 없어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다른 동네에 크게 가게를 냈다고도 하고,


편의점 주인들이 신고를 했다고도, 노모가 아픈가 보다라고도 했다. 나는 그들의 안부가 조
금 궁금했다. 그러나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겪었던 수고로움을 덜하게 될 것이라는 안도를
느꼈다.”에서 포장마차가 사라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주인공이 느낀 ‘안부’와
‘안도감’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2 “나는 열쇠 이야기를 꺼내기 전, 먼저 우리의 친밀함을 그에게 설명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


는 생각이 들었다.”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밀함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지 이야기
해 보자.

3 “아마 내가 문학을 전공한다고 하면 그는 자신의 문학관에 대해 열변할 것이고, 미술을 전


공한다고 하면 개중 유명한 미술작가를 들먹일 것이며, 이벤트학이나 국제관계학을 전공하
고 있다고 말하면, 또 ‘그게 뭐 하는 과냐’, ‘언제 생겼냐’, ‘그거 졸업하면 뭐 하게 되냐’
등의 질문을 퍼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불편함을 느낀 경험이 있었다면 글로 작성해 보자.

4 주인공이 ‘큐마트’ 점원을 이 동네에서 나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지 글로 작성해 보자.

5 미래의 내 직무 분야나 내 전공에서 필요한 소통 전략은 무엇인지 글로 작성해 보자.


138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이 소설에서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대화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찾아


질문해 보고 팀원들과 함께 그 문제를 풀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39

【체험의 숲】

다음은 달려라, 아비에 수록된 김애란의 또 다른 소설 <노크하지 않는 집>의 한 장면이


다. 대도시의 한 고시원의 냉랭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도 각자 자신의 집, 기숙사, 자
취방의 풍경을 소통의 측면을 고려하여 묘사해 보자.

이 집에는 서로 얼굴을 모르는 다섯 여자가 산다. 그중에는 대학생도 있고 직장인


도 있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그런 것 같다. 아마도 그녀들은 모두 이십대 초반일 것
이다. 그녀들이 무슨 일을 하고 살며,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나, 이
집이 가정집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매일 아침 얼굴을 모르는 다섯 여자는 같은 변기를 쓴다. 나는 가끔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물을 안 내리고 간 흔적을 본다. 혹은 그녀들의 빨래를 보고, 그녀들이 먹는
음식 냄새를 맡는다.
다섯 명의 여자 중 네 명은 다른 한 명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기척이 난 뒤에도 그
여자가 자기 방에 들어가 문 닫는 소리를 낼 때까지 모두 기다린다. 그 소리가 나지
않는 이상 네 명의 여자는 절대 먼저 문을 열지 않는다. 약속이라도 한 듯 다섯 명의
소설
여자는 문 닫는 소리에 따라 움직이며, 가끔 타이밍을 놓쳤을 땐 서로의 얼굴을 보고
배경
이상하리만치 화들짝 놀라 얼른 문을 닫아버린다. 그럴 때 보는 서로의 얼굴이란, 반
쪽 혹은 삼분의 일쯤으로 조각난 것이다.
그녀들이 언제부터 각자의 방에 살게 됐는지는 모른다. 나는 삼 개월 전에 이 방으
로 이사 왔다. 그때 나는 휴학 중이었고, 편의점에 시급 이천오백 원짜리 아르바이트
를 나가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공동의 문제에
대해 효율적으로 이야기도 나눌 겸 해서 반상회 비슷한 모임을 주선해보려고 했다. 그
러나 이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것 없이도 평화스럽게 잘 굴러가는 것 같았고, 새
로 온 사람이 너무 나대는 것도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지 않아 나는 그 일을 곧 포기
하고 말았다.
- 김애란, <노크하지 않는 집> 중에서

내가
사는
장소
140 문학과 삶(슬로리딩)

2 이태준의 <복덕방>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이태준은 1925년 조선문단에 <오몽녀>가 당선되면서부


터 문인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3년 ‘구인회’를 결성한 그는 당시 문단에서
촉망받는 작가였던 이상, 박태원, 김유정,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세계를 펼쳐나갔으며, 일제
말기에는 문장지의 편집을 맡으며 당대 한국 문단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감각적인 문장과 치밀한 구성, 생생한 인물 묘사 등 단편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그는
현재 한국 문학사에서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태준이 남긴 <달밤>, <가마
귀>, <복덕방>과 같은 작품들은 단편소설의 형식적 완성도를 높이고 예술적 가치를 확립한 대
표적인 예로 손꼽힌다. 그밖에도 <사상의 월야>, <왕자호동>, <황진이> 등 다수의 장편소설을
남기고 있으며, 문장 작법 교본 문장강화나 산문집 무서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스테디셀
러로 자리 잡은 명저들이다.
그런 그가 해방 이후 돌연 월북(越北)을 감행함으로써 우리 문단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월북 이후 한때 북에서 ‘조선의 모파상’으로 불리면서 작품 활동을 해오던 이태준은 한국전쟁
당시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오기도 하였으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정파 투
쟁에 휘말려 숙청당하고 만다.
1937년 조광에 발표된 단편소설 <복덕방>은 1930년대 경성 외곽의 복덕방을 배경으로
하여 땅 투기로 인해 파멸하는 한 노인의 삶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구한말 무관이었으나
지금은 복덕방을 운영하는 서 참의, 재판소에 다니는 조카를 빌미로 대서업을 하려는 박희완,
사업 실패로 재기를 꿈꾸고 있는 안 초시, 이 세 노인은 복덕방에서 주로 소일한다. 평소에
늘 재기를 꿈꾸어 오던 안 초시는 딸과 상의하여 부동산 투기에 손을 대지만 나중에 그것이
사기극이었음이 밝혀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러나 안 초시의 딸은 아버지의 죽음 앞
에서도 오직 자신의 명예가 훼손될 것만을 염려하고,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조차 진정한
애도를 하지 않는다. 이를 지켜본 서 참의, 박희완 두 노인은 가슴 아파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복덕방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
인들의 소외를 형상화하고 있다. 복덕방은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소통 공간이다. 그
러나 이 소설에서 복덕방은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하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들이 소일
하는 공간으로, 안 초시 개인에게는 비극적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작가는 변화된 근대사회
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외된 세 노인을 통해 가족 간의 대화와 세대 간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가까운 존재일수록 상대방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가까운 사람일수록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존중해야 하며, 자연스러운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41

【읽기의 숲】

딸이 평양으로 대구로 다니며 지방 순회까지 하여서 제법 돈냥이나 걷힌 것 같으나 연


구소를 내노라고 집을 뜯어고친다, 유성기를 사들인다, 교제를 하러 돌아다닌다 하노라고,
더구나 귀찮게만 아는 이 애비를 위해 쓸 돈은 예산에부터 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얘? 낡은 솜이 돼 그런지, 삯바느질이 돼 그런지. 바지 솜이 모두 치어서 어떤 덴 홑
옷이야. 암만 해두 사쓸 한 벌 사 입어야겠다.”
하고 딸의 눈치만 보아오다 한 번은 입을 열었더니,
“어련히 인제 사들릴라구요.”
하고 딸은 대답은 선선하였으나 사쓰는 그해 겨울이 다 지나도록 구경도 못하였다. 사
쓰는커녕 안경다리를 고치겠다고 돈 일 원만 달래도 일 원짜리를 굳이 바꿔다가 오십 전
한 닢만 주었다. 안경은 돈을 좀 주무르던 시절에 장만한 것이라 테만 오륙 원 먹은 것이
어서 오십 전만으로 그런 다리는 어림도 없었다. 오십 전짜리 다리도 있지만 살 바에는
조촐한 것을 택하던 초시의 성미라, 더구나 면상에서 짝짝이로 드러나는 것을 사기가 싫
었다. 차라리 종이노끈인 채 쓰기로 하고 오십 전은 담뱃값으로 나가고 말았다.
“왜 안경다린 안 고치셨어요?”
딸이 그날 저녁으로 물었다.
“흥……”
초시는 말은 하지 않았다. 딸은 며칠 뒤에 또 오십 전을 주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들으
라고 하는 소리인지.
“아버지 보험료만 해두 한 달에 삼 원 팔십 전씩 나가요.”
하였다. 보험료나 타먹게 어서 죽어달라는 소리로도 들리었다.
“그게 내게 상관있니?”
“아버지 위해 들었지 누구 위해 들었게요, 그럼?”
초시는 “정말 날 위해 하는 거문 살아서 한 푼이라두 다우. 죽은 뒤에 내가 알게 뭐
냐.” 소리가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오십 전이문 왜 안경다릴 못 고치세요?”
초시는 설명하지 않았다.
“지금 아버지가 좋고 낮은 걸 가리실 처지예요?”
그러나 오십 전은 또 마코 값으로 다 나갔다. 이러기를 아마 서너 번째다.
“자식도 소용없어. 더구나 딸자식…… 그저 내 수중에 돈이 있어야……”
초시는 돈의 긴요성을 날로날로 더욱 심각하게 느끼었다.
“돈만 가지면야 좀 좋은 세상인가!”
심심해서 운동 삼아 좀 나다녀보면 거리마다 짓느니 고층건축들이요. 동네마다 느느니
142 문학과 삶(슬로리딩)

그림 같은 문화주택들이다. 조금만 정신을 놓아도 물에서 갓 튀어나온 미어기처럼 미낀미


낀한 자동차가 등덜미에서 소리를 꽥 지른다. 돌아다보면 운전수는 눈을 부르떴고 그 뒤
에는 금시계줄이 번쩍거리는, 살진 중년신사가 빙그레 웃고 앉았는 것이었다.
“예순이 낼모레…… 젠-장할 것.”
초시는 늙어가는 것이 원통하였다. 어떻게 해서나 더 늙기 전에 적게 돈 만 원이라도
붙들어가지고 내 손으로 다시 한 번 이 세상과 교섭해 보고 싶었다. 지금 이 꼴로서야 문
화주택이 암만 서기로 내게 무슨 상관이며 자동차, 비행기가 개미 떼나 파리 떼처럼 퍼지
기로 나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이냐. 세상과 자기와는 자기 손에서 돈이 떨어진, 그 즉시
로 인연이 끊어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면 송장이나 다름없지 뭔가?”
초시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 지가 이미 오래였다.
“무슨 수가 없을까?”
또,
“무슨 그루터기가 있어야 비비지!”
그러다가도,
“그래도 돈냥이나 엎질러 본 녀석이 벌기도 하는 게지.”
하고 그야말로 무슨 그루터기만 만나면 꼭 벌기는 할 자신이었다.

그러다가 박희완 영감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관변에 있는 모 유력자를 통해 비밀리에


나온 말인데 황해 연안에 제이의 나진(羅津)이 생긴다는 말이었다. 지금은 관청에서만 알
뿐이나 축항용지(築港用地)는 비밀리에 매수되었음으로 불원하여 당국자로부터 공표(公表)
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럼 거기가 황무진가? 전답들인가?”
초시는 눈이 뻘개 물었다.
“밭이라대.”
“밭? 그럼 매 평 얼마나 간다나?”
“좀 올랐대. 관청에서 사는 바람에 아무리 시굴 사람들이기루 그만 눈치 없겠나. 그래두
무슨 일루 관청서 사는진 모르거든……”
“그래?”
“그래 그리 오르진 않았대…… 아마 평당 이십오륙 전씩이면 살 수 있다나보데. 그러니
화중지병이지 뭘 허나 우리가……”
“음……”
초시는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정말이기만 하면 한 시각이라도 먼저 덤비는 놈이 더
먹는 판이다. 나진도 오륙 전 하던 땅이 한 번 개항된다는 소문이 나자 당년으로 오륙 전
의 백 배 이상이 올랐고 삼사 년 뒤에는, 땅 나름이지만 어떤 요지(要地)는 천 배 이상이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43

오른 데가 많다.
“다 산 나이에 오래 끌건 뭐 있나. 당년으로 넘겨두 최소한도 오 환씩야 무려할 테
지……”
혼자 생각한 초시는
“대관절 어디란 말야 거기가?”
하고 나앉으며 물었다.
“그걸 낸들 아나?”
“그럼”
“그 모씨라는 이만 알지. 그리게 날더러 단 만 원이라도 자본을 운동하면 자기는 거기
서도 어디어디가 요지라는 걸 설계도를 복사해낸 사람이니까 그 요지만 산단 말이지. 그
리구 많이두 바라지 않어. 비용 죄다 제치구 순이익의 이할만 달라는 거야.”
“그럴 테지…… 누가 그런 자국을 일러주구 구경만 하쟈겠나…… 이할이라…… 이
할……”
초시는 생각할수록 이것이 훌륭한, 그 무슨 그루터기가 될 것 같았다. 나진의 선례도
있거니와 박희완 영감 말이 만주국이 되는 바람에 중국과의 관계가 미묘해짐으로 황해 연
안에도 으레 나진과 같은 사명을 갖는 큰 항구가 필요할 것은 우리 상식으로도 추측할
바이라 하였다. 초시의 상식에도 그것을 믿을 수 있었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피존’을 사서, 거기서 아주 한 대를 피워 물고 왔다. 어째 박희완


영감이 종일 보이지 않는다. 다른 데로 자금운동을 다니나보다 하였다. 서 참의는 점심
전에 나간 사람이 어디서 흥정이 한 자리 떨어지노라고인지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안 초
시는 미닫이틀 위에서 다 낡은 화투를 꺼내었다.
“허, 이거 봐라!”
여간해선 잘 떨어지지 않던 거북패가 단번에 똑 떨어진다. 누가 옆에 있어 좀 보아줬으
면 싶었다.
“아무래두 이게 심상치 않어…… 이제 재수가 티나부다!”
초시는 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행길로 내어던졌다. 출출하던 판에 담배만 몇 대를 피고
나니 목이 컬컬해진다. 앞집 수채에는 뜨물에 떠내려가다 막힌 녹두껍질이 그저 누렇게
보인다.
“오냐, 내년 추석엔……”
초시는 이날 저녁에 박희완 영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딸에게 하였다. 실패는 했을지라
도 그래도 십수 년을 상업계에서 논 안 초시라 출자(出資)를 권유하는 수작만은 딸이 듣
기에도 딴사람인 듯 놀라웠다. 딸은 즉석에서는 가부를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머릿속에
서도 이내 잊혀지지는 않았던지 다음날 아침에는 딸편이 먼저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었
고, 초시가 박희완 영감에게 묻던 이상으로 지지콜콜이 캐어물었다. 그러면 초시는 또 박
144 문학과 삶(슬로리딩)

희완 영감 이상으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소상히 설명하였고 일 년 안에 청장을 하더라


도 최소한도로 오십 배 이상의 순이익이 날 것이라 장담장담 하였다.
딸은 솔깃했다. 사흘 안에 연구소 집을 어느 신탁회사(信託會社)에 넣고 삼천 원을 돌리
기로 하였다. 초시는 금시 발복이나 된 듯 뛰고 싶게 기뻤다.
“서참의 이놈, 날 은근히 멸시했겄다. 내 굳이 널 시켜 네 집보다 난 집을 살 테다. 네
깟 놈이 천생 가쾌지 별 거냐……”
그러나 신탁회사에서 돈이 되는 날은 웬, 처음 보는 청년 하나가 초시의 앞을 가리며
나타났다. 그는 딸의 청년이었다. 딸은 아버지의 손에 단 일 전도 넣지 않았고 꼭 그 청
년이 나서 돈을 쓰며 처리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팩 나오는 노여움을 참을 수가 없었으나
며칠 밤을 지내고 나니, 적어도 삼천 원의 순이익이 오륙만 원은 될 것이라 만 원 하나야
어디로 가랴 하는 타협이 생겨서 안 초시는 으실으실 그, 이를테면 사위 녀석 격인 청년
의 뒤를 따라 나섰다.

일 년이 지났다.
모두 꿈이었다. 꿈이라도 너무 악한 꿈이었다. 삼천 원어치 땅을 사 놓고 날마다 신문
을 훑어보며 수소문을 하여도 거기는 축항이 된단 말이 신문에도, 소문에도 나지 않았다.
용당포(龍塘浦)와 다사도(多獅島)에는 땅값이 삼십 배가 올랐느니 오십 배가 올랐느니 하
고 졸부들이 생겼다는 소문이 있어도 여기는 감감소식일 뿐 아니라 나중에 역시, 이것도
박희완 영감을 통해 알고 보니 그 관변 모씨에게 박희완 영감부터 속아 떨어진 것이었다.
축항 후보지로 측량까지 하기는 하였으나 무슨 결점으로인지 중지되고 마는 바람에 너무
기민하게 거기다 땅을 샀던, 그 모씨가 그 땅 처치에 곤란하여 꾸민 연극이었다.
돈을 쓸 때는 일 원짜리 한 장 만져도 못 봤지만 벼락은 초시에게 떨어졌다. 서너 끼씩
굶어도 밥 먹을 정신이 나지도 않았거니와 밥을 먹으러 들어갈 수도 없었다.
“재물이란 친자 간의 의리도 배추 밑 도리듯 하는 건가?”
탄식할 뿐이었다. 밥보다는 술과 담배가 그리웠다. 물론 안경다리는 그저 못 고쳤다. 그
러나 이제는 오십 전짜리는커녕 단 십 전짜리도 얻어 볼 길이 없다.
추석 가까운 날씨는 해마다의 그때와 같이 맑았다. 하늘은 천리같이 티였는데 조각구름
들이 여기저기 널리었다. 어떤 구름은 깨끗이 바래 말린 옥양목처럼 흰 빛이 눈이 부시
다. 안 초시는 이번에도 자기의 때 묻은 적삼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매 끝을
불거나 떨지는 않았다. 고요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 더러운 소매로 닦았을 뿐이다.

여름이 극성스럽게 더웁더니, 추위도 그럴 징조인지 예년보다 무서리가 일찍 내렸다. 서


참의가 늘 지나다니는 식은관사(殖銀官舍)에들 울타리가 넘게 피었던 코스모스들이 끓는
물에 데쳐낸 것처럼 시커멓게 무르녹고 말았다.
참의는 머리가 띵―하였다. 요즘 와서 울기 잘하는 안 초시를 한 번 위로해주려 엊저녁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45

에는 데리고 나와 청요리집으로, 추탕집으로 새로 두 점을 치도록 돌아다닌 때문 같았다.


조반이라고 몇 술 뜨기는 했으나 해도 그냥 뻑뻑하다. 안 초시도 그럴 것이니까 해는 벌
써 오정 때지만 끌고 나와 해장술이나 먹으리라 하고 부지런히 내려와 보니, 웬일인지 복
덕방이라고 쓴 베발이 아직 내어 걸리지 않았다.
“이 사람아 봐아…… 어느 땐 줄 알구 코만 고누……”
그러나 코고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미닫이를 밀어제친 서 참의는 정신이 번쩍 났다.
안 초시의 입에는 피, 얼굴은 잿빛이다. 방안은 움 속처럼 음습한 바람이 휭―끼친다.
“아니……?”
참의는 우선 미닫이를 닫고 눈을 비비고 초시를 들여다보았다. 안 초시는 벌써 아니요,
안 초시의 시체일 뿐 둘러보니 무슨 약병인 듯한 것 하나가 굴러져 있었다.
참의는 한참만에야 이 일이 슬픈 일인 것을 깨달았다.

- 이태준, <복덕방>. 이태준전집 2, 깊은샘, 1988.


146 문학과 삶(슬로리딩)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복덕방>에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을 말해 보자.

2 내가 만약 안 초시의 딸 안경화였다면 아버지와 함께한 부동산 투기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대처했을지 말해 보자.

3 가족 간 소통의 어려움을 느꼈던 경험 사례를 제시하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이야


기해 보자.

4 안 초시를 죽음에 이르게 한 요인은 무엇인지 서술해 보자.

5 세대 차이로 인한 소통의 단절의 예를 제시하고, 그것의 극복 방안을 서술해 보자.

소통 단절의 예시 극복 방안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47

【질문의 숲】

이태준의 <복덕방>을 읽고 자유롭게 질문을 만들어 보자. 그 질문을 바탕으로 팀원들과 토


의·토론한 내용을 정리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148 문학과 삶(슬로리딩)

【체험의 숲】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소통 방식의 변천 과정을 제시하고, 시대별 소통 방식이 지니는


장점과 단점, 단점 극복 방안을 각각 서술해 보자.

항목 소통 방식 장점 단점 단점 극복 방안

과거

현재

미래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49

3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체코 프라하에서 유대계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사


용하는 유대인 사회에서 성장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낮에는 보험회사 직원으로,
밤에는 글을 쓰는 소설가의 삶을 살았다. 카프카는 인간 간의 소통 부재와 고독, 소외와 좌절,
불안과 부조리 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로 20세기 최고의 문제적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1912년에 <아메리카>, <변신>을 쓰기 시작했고, 1914년에는 <유형지에서>와 <소송> 집필
에 들어갔다. 1916년에는 단편집 『시골 의사』를 탈고했다. 1917년에 폐결핵이 발병하여 여러
곳으로 요양을 다니게 되고, 1922년에 <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결국 폐결핵으로 1924년에
빈 교외의 키어링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카프카는 평생 불행한 삶을 살았다. 독선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와의 관계도 원만하
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조차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야 했기에 그는 줄곧 남의 손에 키
워졌다. 그의 나이 두 살, 네 살 때 동생인 게오르크와 하인리히가 태어났지만 곧 죽었고, 이
후 그의 나이 여섯 살 때인 1889년에 여동생 엘리가, 또 1년 뒤에는 발리가, 그 2년 뒤에는
오틀라가 태어나지만, 이 세 자매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의 광기에 희생당하고 만다. 아버지와
의 불화와 동생들의 잇단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는 불안정한 유년기를 보낸다. 성인이 되어서
도 카프카는 프라하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에게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유대
인들로부터는 시온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척받았다. 생전에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세
상에 내놓기를 꺼렸으며, 발표된 작품들도 대중의 몰이해 속에 거의 팔리지도 않았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보낸 유서에서 자신의 모든 작품을 불태워줄 것을 간곡
히 부탁했지만, 오히려 그 눈밝은 친구를 통해 세계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독창
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20세기 문학의 신화라 불린다. 그 이전까지 서양소설사에서 굳건
하게 버티고 있던 리얼리즘의 성채는 <변신> 이후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균열을 일으키기 시
작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현대인의 삶,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삶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불안한 의식과 구원에의 꿈 등을 <변신>에서 카프카는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고 단순한 언어
로, 기이하고도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다.
초현실주의 작가 카프카가 서술하는 소설 속 세상은 현실이면서 현실 같지 않다. 우리가 경
험하고 사고하는 세상과는 다른 비정상적 현실이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난해하고 몽환적이
다. 그러나 그 희뿌연 안개 뒤에는 사실 우리가 눈감고 있어 보지 못했을 뿐인 실재의 현실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비현실적인 세상에서 가장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는 실존주의 리얼
리즘 작가이기도 하다.
카프카는 인간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감옥’이나 ‘철창’ 같은 현실 세계를 관찰하고 탐구하고
인식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그 배후의 불가해한 내적 세계를 수수께끼 같은 비유적인 문학 작
품으로 표출해 내고자 노력했다.
150 문학과 삶(슬로리딩)

기괴하고 수수께끼 같은 작품으로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곤 하는 카프카의 문학 세계는 세기


를 달리한 지금도 여전히 끊임없는 분석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읽기의 숲】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


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대고 누워있었다. 머리를 조금 들어 올리면 활 모양의 단단한 껍질들로 나누어진 갈색
둥근 배가 보였다. 이불은 금방이라도 주르륵 미끄러져내릴 듯 둥그런 언덕 같은 배 위
에 가까스로 덮여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은 애처롭게 버
둥거리며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그는 생각했다. 꿈은 아니었다. 방은 좀 작기는 하지만
사람이 사는 평범한 방으로 틀림없는 자신의 방이었고, 사방은 낯익은 벽들로 둘러져 있
었다. 탁자 위에는 옷감 견본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고 ― 잠자는 외판원이었다 ―
그 위쪽 벽에는 그가 얼마 전 화보잡지에서 오려내어 멋진 금박액자 속에 넣은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것은 어떤 부인을 묘사한 것으로, 그녀는 모피 모자와 모피 목도리를 두르
고 똑바른 자세로 앉아서 팔을 모두 감싼 두터운 모피 토시를 보는 이를 향해 쳐들어 보
이고 있었다.
그레고르의 시선은 창문으로 향했다. 우중충한 날씨가 그를 몹시 우울하게 만들었다.
빗방울이 후둑후둑 창문의 함석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을 조금 더 자서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잊는 게 좋겠지.’ 하고 그는 생각했으나
그건 결코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자는 습관이
있었는데,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그런 자세를 취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오른쪽으로 돌
아누우려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그 때마다 몸이 흔들려서 등을 대고 똑바로 누운 자세로
되돌아와 버렸다. 그는 그런 시도를 족히 백 번쯤은 했으며, 버둥거리는 다리들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지만, 옆구리에서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가볍고 둔한 통증을 느끼
기 시작하자 그 시도를 포기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빌어먹을! 나는 어째서 이런 고된 직업을 택했을까! 날이면 날마
다 출장이니. 회사 안에서 내근하는 것보다 외판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훨씬 더 크다. 게
다가 힘겨운 출장은 내게 기차 연결시간에 대한 걱정, 불규칙하고 부실한 식사, 상대가
계속 바뀌어 오래 갈 수도 없고 진실하게 이루어질 수도 없는 사람들과의 교제 등 온갖
어려움까지 안겨준다. 이 모든 걸 악마가 쓸어가 버리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배 위쪽이
약간 가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를 좀더 쳐들어 더 잘 볼 수 있도록 그는 등으로 몸
을 밀어 천천히 침대 다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마침내 가려운 곳을 발견했는데 그
곳은 온통, 뭐라고 판단하기 어려운 깨알같이 작고 흰 반점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다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51

리 하나로 그 부분을 건드려보려 했으나 곧 다리를 거둬들였는데, 그 부위에 다리가 닿


자마자 오싹하고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미끄러져 이전의 자세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너무 일찍 일어나면 사람이 멍청해지는 법이지. 사람은 잘 만큼 자야 하는데.
다른 외판원들은 규방부인들처럼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자면 도착한 주문서들을 기록
해 두기 위해 내가 오전 중에 숙소로 돌아와 보면 그 사람들은 그제야 아침 식사를 하지
않던가. 만약 내가 사장 앞에서 그렇게 하려고 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쫓겨날 걸. 그런데
쫓겨나는 편이 차라리 내게 더 잘 된 일일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부모를 생각해서 꾹 참고 지내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않다면 나는 오
래 전에 일을 그만 두었을 거고, 사장 앞으로 다가가 그의 면전에 대고 평소에 품고 있
던 내 생각을 속 시원히 내뱉어주었을 텐데. 그러면 사장은 틀림없이 놀라서 책상 아래
로 굴러 떨어졌을 거야! 책상 위에 앉아 위에서 내려다보며 종업원과 얘기하는 사장의
버릇이라니, 참 별나기도 하지. 게다가 그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우리 직원들은 그의 곁
으로 바싹 다가가야만 하지. 하지만 아직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야. 부모님이 그
에게 진 빚을 다 갚을 만큼 돈을 모으기만 하면 ― 그러려면 오륙년은 더 걸릴 테지만 ―
꼭 그렇게 해주고야 말겠어. 그러면 내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마련되겠지. 그건 그렇고
지금 당장은 일어나야만 해. 다섯시면 기차가 떠나니까.’
그러고는 그는 장식장 위에서 째깍거리는 탁상시계를 바라보고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어이구 큰일 났네!’ 여섯시 반이었다. 시곗바늘은 계속 조용히 앞으로 움직여가서 삼십분
을 지나 어느새 사십오분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자명종이 울리지 않았단 말인가? 침
대에서 보니 자명종은 정각 네시에 정확하게 맞춰져 있었다. 시계는 틀림없이 울리긴 울
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요란하게 울려대는 종소리에도 깨지 않고 편안히 잠을 잔
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글쎄, 편히 자지는 못했더라도, 어쨌든 그만큼 더 깊
이 잠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다음 기차는 일곱시에 있다.
그걸 타려면 정신없이 서둘러야만 하는데, 아직 견본들을 꾸려놓지도 못했고, 몸이 전혀
개운하지도 가뿐하지도 않았다. 설사 그 기차를 탄다 해도 사장의 불호령은 피할 수 없
을 것이었는데, 사환 아이가 기차 시간에 맞추어 다섯시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그 기차에 타지 않은 사실을 일찌감치 보고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줏대도
분별력도 없는 사장의 꼭두각시였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몸이 아프다고 연락하는 건 어떨
까?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궁색하고도 수상쩍은 변명이 될 것이다. 그는 지난 오년 동안
근무하면서 단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사장은 의료보험조합 소
속의 의사를 데리고 올 것이며, 태만한 아들을 두었다고 부모님께 비난을 퍼부어댈 것이
고 의사의 말을 빌려 어떤 이의도 묵살해 버릴 것이다. 의사가 보기에는 건강한데도 일
하기 싫어 아픈 척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 경우 사장의
처사가 무조건 잘못됐다고만 할 수 있을까? 실제로 그레고르는 오래 자고 나서도 군더더
152 문학과 삶(슬로리딩)

기처럼 남아 있는 졸린 기운 말고는 컨디션도 썩 괜찮은 편이고 강렬한 식욕까지도 느끼


고 있었다.
그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야할 것인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그의 머릿속에서 이 모든
생각들이 휙휙 지나가고 있을 때 ― 그때 시계는 막 여섯시 사십오분을 가리켰다 ― 누군
가가 침대 머리맡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고르, 여섯시 사십오
분이다. 출근해야 되지 않니?” 어머니였다.
저 부드러운 목소리! 그레고르는 이에 답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것
은 틀림없이 지금까지의 자신의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목구멍 아래쪽에서 울려오는 짓
눌린 듯한, 가늘고 고통스런 고음의 소리가 섞여있었다. 피잇피잇거리는 그 소리 때문에
그의 말들은 처음 순간에만 분명하게 들리다가 곧 뒤의 울림에 묻혀버렸으므로 그가 무
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레고르는 상세하게 대답하여 모
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그저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예, 예,
고마워요, 어머니. 벌써 일어났어요.”
나무로 된 문이어서 밖에서는 그레고르의 목소리가 변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나보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그의 말에 안심을 한 듯 신발을 질질 끌며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러
나 이 짤막한 대화에 의해 다른 가족들도 그레고르가 뜻밖에도 아직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새 아버지는 쪽문을 가볍게 주먹으로 두드리며 외쳤다.
“그레고르야, 그레고르야,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그리고 잠시 후 아버지는 좀 더 굵은 목소리로 “그레고르야! 그레고르야!” 하고 부르며
대답을 재촉했다. 다른 쪽 쪽문에서는 여동생이 작은 소리로 호소하듯 말했다.
“오빠, 몸이 안 좋아요? 무슨 일 있어요?”
그레고르는 양쪽을 향해 대답했다.
“이제 준비 다 되었어요.”
그는 발음에 아주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 긴 간격을 두어 자신
의 목소리에서 이상한 점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버지는 아침식사를 하려고 돌아
갔으나 여동생은 계속해서 이렇게 속삭였다.
“오빠, 문 좀 열어요. 제발.”
그러나 그레고르는 문을 열어줄 생각을 전혀 않고, 오히려 여행 다니면서 익힌 습관대
로 집에서도 밤에는 문을 모두 닫아거는 자신의 조심성을 다행으로 여겼다.
처음에 그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가만히 일어나 옷을 입고 무엇보다도 먼저 아침
식사부터 하고 싶었다. 그 다음 일은 그때 가서 찬찬히 생각해보려고 했다. 침대에 누워
서는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적절한 결론에 이르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전에도 종종 침대에서 자다가 잘못된 자세에서 비롯되었을 가벼운 통증을 느꼈으나 일어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시곤 했던 일을 떠올리고, 오늘 이 이상한 현상들도 점차 풀리
게 될 것을 한껏 기대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변한 것은 외판원들의 직업병인 심한 감기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53

의 징후일 뿐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불을 걷어내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배를 조금만 부풀려 올리기만 하면 이불은 저절
로 흘러내려갔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가 어려웠다. 몸이 너무 많이 옆으로 퍼져 있어서
더욱 어려움이 컸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면 팔과 손을 써야하는데, 이젠 그런 것 대신 가
는 다리들만 수없이 많이 있을 뿐이었다. 그 다리들은 제각각 쉬지 않고 움직였고 그의
뜻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다리 하나를 구부리려고 하면 오히려 그 다리가 먼저 쭉 펴
지는 식이었다. 마침내 힘겹게 그 다리로 그가 원하는 동작을 해내는 데 성공했다 하더
라도, 그 사이에 다른 다리들은 마치 구속에서 풀려나기라도 한 듯 흥분 상태가 극에 달
해 안달하며 법석을 떠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냥 침대에만 있다가는 아무 일도 안 되겠
다.’ 그레고르는 혼잣말을 했다.
우선 그는 몸의 아랫부분부터 침대 밖으로 끌어내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눈
으로 보지도 못했으며, 정확하게 어떤 모습인지 상상할 수도 없는 그 하반신을 움직이기
란 매우 어려웠다. 그 일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격분하여 있는 힘
을 다해 무작정 앞으로 몸을 밀어댔더니, 그만 방향을 잘못 잡아 아래쪽 침대 다리에 심
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곧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고, 그 통증은 변해버린 자신의 몸에
서 가장 예민한 부분이 지금으로선 바로 하반신임을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그는 이번에는 상체를 먼저 침대 밖으로 끌어내려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침대
가장자리로 돌렸다. 이 동작은 쉽게 성공하였다. 몸뚱이는 널찍하고 무거웠지만 결국 머
리가 돌아가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마침내 머리를 침대 밖 허공 속으
로 내놓게 되었을 때, 그는 이런 식으로 계속 앞으로 밀고 나가기가 두려워졌다. 그런 식
으로 몸을 밀어 바닥에 떨어지게 될 경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머리를 다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의식만큼은 잃어서는 안 되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고 싶었다.

…… (중략) ……

그레고르가 문틈으로 내다보자 거실에는 가스등이 켜져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이 시


간쯤엔 아버지가 석간신문을 어머니에게, 때로는 여동생에게도 큰 소리로 읽어주곤 했었
는데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동생이 그에게 항상 얘기해 주고, 편지로도
알려주었던 이 신문낭독도 이제는 뜸해진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집안이 텅 비어 있지
는 않을 텐데 주위가 너무나도 조용했다. ‘식구들이 어쩌면 이다지도 조용하게 지낼 수
있담.’ 그레고르는 혼잣말을 하고는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부모님과 여동생에
게 이런 멋진 집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커다란 자부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이 모든 평온과 행복과 만족이 끔찍스러운 결말을 맞는다면 어찌
할 것인가? 그레고르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이고 방 안을 이리저리 기어
154 문학과 삶(슬로리딩)

다녔다.
긴 저녁시간 동안 한 번은 한쪽 옆문이, 또 한 번은 다른 쪽 옆문이 빠끔히 열렸다가
재빨리 닫혔다. 누군가가 들어오려고 하다가 선뜻 들어오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그레고르는 그 주저하는 방문자를 어떻게든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거나 적어도 그가 누구
인지를 알아내기로 작정하고 거실로 나가는 문 바로 옆에 가만히 엎드렸다. 그러나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허사였다. 문들이 잠겨있던 아침에는 모두가 들
어오려고 하더니, 문이 모두 열려 있는 지금은 ― 아침의 소란 때 그가 하나를 열었고, 그
후 그가 자는 사이 다른 문들도 누군가 분명 열어 두었으나 ― 아무도 그의 방에 들어오
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젠 열쇠들도 모두 문 바깥쪽에 꽂혀 있었다.
밤늦게야 거실의 불이 꺼졌다. 부모님과 여동생은 그렇게 밤늦도록 자지 않고 있었던
것임에 분명했다. 세 사람 모두 발끝으로 살금살금 멀어져가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기 때
문이다. 이제 다음날 아침까지는 아무도 그레고르에게 들어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따
라서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새로이 정리해 나갈 것인지를 혼자서 방해받지 않고
숙고해 볼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속절없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어야 하
는 이 높고 텅 빈 방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영문을 통 알 수가 없었다. 이 방은 그가 오
년 동안 지내온 자신의 방이 아니던가. 여하튼 그는 알 수 없는 가벼운 수치심을 느끼며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홱 돌려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등이 약간 눌렸고 고개도
쳐들 수 없었지만 금방 마음이 편안해졌다. 단지 몸뚱이가 너무 넓적하여 소파 밑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밤새도록 소파 밑에 머물렀다. 가끔 졸다가 배가 고파 여러 번 깨기도 하고, 걱정
과 막연한 희망 속에 하염없이 생각에 잠기기도 했지만, 그로부터 얻게 된 결론은 우선
은 침착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상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게 될 불쾌한 일들을, 가족들이 인내심과 최대한의 배려심을 가지고 참아낼 수 있
도록 해야 한다고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그레고르는 자기가 했던 결심을 시험해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거실로부터 여동생이 옷을 거의 다 차려입은 채로 다가와 문을 열
고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방안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금방 그를 찾아내지는 못
했지만 그가 소파 밑에 있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 나 참, 분명 어딘가에 있을 텐데,
그냥 날아가버렸을 리는 없을 테고 ― 너무 놀란 나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밖에서 다
시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는지 금방 문을 다시 열
고는 중환자나 낯선 사람에게 다가오기라도 하듯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방안으로 들어
왔다. 그레고르는 소파의 가장자리까지 머리를 내밀고 그녀를 관찰했다. 그가 우유를 마
시지 않고 내버려둔 것이 배가 고프지 않아서가 아니란 걸 그녀는 알아차릴까? 그리하여
그녀는 그의 구미에 더 맞는 다른 음식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그는 여동생이 스스로 알
아서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도록 그녀를 깨우쳐주기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는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55

게 나으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레고르는 소파 밑에서 당장 뛰쳐나가 여동생의 발치에


몸을 던져 무언가 맛있는 것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여동생은 주변에 우유가 약간 흘러 있을 뿐 여전히 대접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더니 의
아해하면서도 이내 그 그릇을 집어들고는 ― 맨손이 아니라 걸레로 싸서 ―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레고르는 그녀가 그 대신 무엇을 가져오게 될 것인지 몹시 궁금해
하며 별별 생각을 다해보았다. 그러나 마음씨 착한 여동생이 실제로 무엇을 갖다줄지 알
아맞힐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의 입맛을 시험해보기 위해 골라먹을 수 있는 온갖 음식
을 한꺼번에 가져와 낡은 신문지 위에 펼쳐 놓았던 것이다. 그것들은 반쯤 썩은 오래된
야채에, 저녁식사 때 먹다 남은 뼈다귀도 있었는데 거기엔 딱딱하게 굳어 버린 흰 소스
가 엉겨붙어 있었다. 건포도와 아몬드 몇 알, 그레고르가 이틀 전에 맛이 없어 먹을 수
없다고 불평했던 치즈 한 덩이, 아무 것도 바르지 않은 빵, 버터 바른 빵, 버터를 바르고
소금을 뿌린 빵도 있었다.

-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변신>, 문학동네, 2005.


156 문학과 삶(슬로리딩)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한 인간이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의 몸이 거대한 갑충으로 변해 있더라는 소설의


첫 문장은 독자를 곧장 충격적인 환상과 미스터리의 세계로 데려간다. 만일 내가 동물로
변신한다면 어떤 동물이 되고 싶으며 그 이유에 대해 말해 보자.

2 주인공 그레고르는 흉측한 벌레로 변한 후 의사소통이 단절된 채 방 안에 틀어박힌다. 벌


레가 되어 그가 외치는 소리를 가족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의 말은 인간이 아닌 벌레의
언어로 바뀌었기에 예전과 같은 의사소통은 전혀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 경우 여러분은 어
떤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하겠는지 말해 보자.

3 그레고르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도태된 인간이자 가장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레고르의 가족에게는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갑충보다는 자신들의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돈줄이 막히게 된 것이 더 두려운 것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저마다의 생각을 말해 보자.
(예: 물질만능주의, 성과주의, 도구적 이성 등)

4 ‘변신’은 신화나 동화에도 자주 나오는 모티프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동화에서는 동물로 변


했던 왕자나 공주 등이 원래의 모습을 찾는 해피엔딩임에 반해, 카프카의 변신은 끝내 벌
레의 몸을 벗어나지 못하고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게 되는 새드엔딩이다. 신화나 동화와 카
프카의 <변신>에 담긴 각각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비교해서 자유로운 글쓰기를 해 보자.(예:
우리의 조상 단군도 웅녀와 환웅이 각각 변신하여 결합한 결과이다.)

5 변신과 관련해서 다른 장르의 작품이나 현상을 찾아보고 그에 대해 서술해 보자.


(예: 영화 <어벤져스>의 헐크, 스파이더맨, <트랜스포머> 등)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57

【질문의 숲】

인터넷을 이용한 의사소통, 즉 온라인 의사소통은 오프라인과는 다른 몇 가지 특성을 갖는


데, 이를테면 익명성, 전파성, 쌍방성 및 실시간성 등이다. 이러한 특성은 익명성과 빠른 전파
성으로 인해 가짜뉴스 유포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키기도 하지만 의사소통의 실효성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한 다양한 질문을 만들어 봄으로써 온라인 소통
(SNS)의 장단점에 대해 분석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158 문학과 삶(슬로리딩)

【체험의 숲】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유형의 소통을 하며 살아간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나만의
‘소통 메뉴판’을 만들어 보자.

소통 일지 쓰기
항목 - 유형별 ‘소통 경험 메뉴판’
만족스러운 경험(사례) 불만족스러운 경험(사례)

개인 간 의사소통:
통화, 채팅, 면담,
상담, 조언 등

개인과 다수 간의
의사소통:
연설, 발표, 프레젠
테이션 등

다수와 다수 간의
의사소통:
토론, 토의, 단톡 등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59

4-1 굴원의 <어부 이야기>

굴원(屈原)은 중국 전국시대의 시인이자 정치가이다. 넓은 지식과 높은 뜻을 갖추고 있던


그는 처음에 초회왕(楚懷王)의 신임을 받으며 내외적으로 다양한 관직을 맡아 국왕을 충실히
보필하며 탁월한 업적을 쌓는다. 특히 대내적으로 인재의 고른 등용과 법률의 정비에 힘쓰고,
대외적으로 제(齊)나라와 연계하여 진(秦)나라의 통일전략을 저지하는 데 있어서 주도적 역할
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후 귀족들의 배척과 비방을 받아 완강(沅江)과 상강(湘江) 유역으로 내
쳐지고 마는데, 이에 굴원은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초나라의 수도가 진나라에 점령되자 멱
라강(汨羅江)에 투신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민중들은 그가 순국한 날을 기리는 행
사를 하였는데 이것이 단오절의 기원이 된다.
굴원의 <어부 이야기〔漁夫〕>는 그가 정치적 박해를 받아 쫓겨난 후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
로를 위로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곧은 지향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집필한 작품에 해당한
다. 이 작품에서 굴원은 문답의 형식으로 자연에 은둔하여 살아가는 어부와 고상한 충절을 지
키려는 자신의 형상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두 가지의 가능한 삶의 길 중 자신은 충절
을 지키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4-2 장자의 <명인 백정의 소 해체하는 이야기>

장자(莊子)는 중국 전국시대 철학자이지 문학가이다. 그는 노자(老子)를 계승한 도가학파의


대표적 인물로서 노자와 함께 노장(老莊)으로 불리게 된 위대한 자연주의 사상가이다. 일찍이
초위왕(楚威王)이 그를 초빙했으나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한때 송(宋)나라의 작은 지
방관리〔漆園吏〕를 맡아 그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지방 관리의 모델로 불리며 높은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글은 넘치는 상상력, 자유로운 언어, 풍부한 철학성으로 인해 ‘문
학적 철학, 철학적 문학’으로 높이 평가되며 널리 읽혀왔다.
<명인 백정의 소 해체하는 이야기〔庖丁解牛〕>는 <장자>에 실린 에피소드로서 순리에 맞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잘 사는 길이라는 장자의 자연주의적 인생관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
다. 사회는 근육과 골격이 복잡하게 결합되어 있는 소의 몸체와 같다. 이러한 사회에서의 삶
을 제대로 살아가려면 사람과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원리, 조직과 조직들이 결합되고 작동
하는 원리를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이치를 따라 역할을 다하되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조
화로운 삶, 자유로운 삶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160 문학과 삶(슬로리딩)

4-3 진자앙의 <유주의 누대에 올라>

진자앙(陳子昂)은 당나라의 시인으로서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정치적 식견으로 측천무후에


게 중용되었지만 직언을 서슴지 않다가 중앙에서 쫓겨나 변방의 한직에 머물게 되고 결국에는
반대파의 모함에 빠져 옥사하고 만다. 그의 시, <유주의 누대에 올라〔登幽州臺歌〕>는 생명의
짧음을 한탄하는 비가로서 유주의 누대에 올라 공간의 앞과 뒤를 조망하면서 시간의 앞과 뒤
를 노래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주의 누대는 연소왕(燕昭王)이 당시 천하의 현인으로
추앙받던 곽외(郭隗)의 제언을 받아 건립한 누대로서 널리 인재들을 맞아들이는 의식을 베푼
곳이었다. 그래서 유주의 누대는 ‘현인을 초빙하는 누대〔招賢臺〕’라 불리기도 하였다. 진자앙
이 그리워한 것은 이렇게 인재를 알아주던 연소왕과 같은 위대한 군주였다.

4-4 퇴계 이황의 <고인도 날 못 보고>

퇴계 이황(李滉)은 조선조 최고의 학자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한 적도 있으나 주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위인이다. 이황의 <고인도 날 못 보
고>는 <도산십이곡> 12수 중 후6곡의 세 번째 작품이다. 원래 이황은 이 12수의 연시조를 구
상하면서 전6곡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사는 삶을 그리고자 하였고, 후6곡은 학문의 세계를 그
리고자 하였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고인은 학문의 대상인 옛 성현이다. 우리는 옛 성
현과 직접 만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성현이 실천한 길과 남겨준 가르침을 통해 진정한 만남
과 소통을 성취할 수 있다. 이러한 만남과 소통이야말로 학문의 큰 길이자 진정한 기쁨이라는
것이 퇴계 이황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61

【읽기의 숲】

1. 굴원의 <어부 이야기>


굴원이 쫓겨난 뒤에 완강(沅江) 가에서 일없이 다니면서 물길을 따라 걸으며 혼자 노래
를 하곤 하였는데 안색이 초췌하고 마른 몸은 나뭇가지와 같았다.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선생님은 삼려대부1)가 아니십니까? 어쩌다가 이 꼴이 되셨
습니까?”
굴원이 대답하였다. “온 세상이 더러운데 나 혼자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취해 있는데
나 혼자 깨어 있다 보니 그래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어부가 말하였다. “진리와 하나 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고정된 방식으로 사물을 대하지
않아 세상의 변화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더럽다면 그 진흙탕을 휘저
어 파도를 일으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취해있다면 그 찌꺼기라도
먹고 막걸리 술이라도 시원하게 들이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고하게 행동하여 스스로 쫓겨나게 된 것입니까?”
굴원이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막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튕긴다고 하며, 방
금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고 합니다. 어떻게 깨끗하고 순수한 몸을 가지고
세속의 더러움에 물들겠습니까? 차라리 상수(湘水)의 물속에 뛰어들어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투명하도록 깨끗한 흰색을 가지고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쓰겠습니까?”
어부가 빙그레 웃고는 노를 두드리며 가면서 노래하였다. “창랑(滄浪)의 물이 맑다면 내
갓끈을 씻으면 되겠고, 창랑의 물이 더럽다면 내 말을 씻으면 되겠네.”
그렇게 가버리고 다시 말을 하지 않았다.

- 굴원 지음, 강경구 번역, <어부 이야기>

2. 장자의 <명인 백정의 소 해체하는 이야기>


어느 백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았다. 소를 해체하는데 손을 대고, 어깨를
받치고, 발을 디디고, 무릎을 꿇고 할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살과 뼈가 떨어졌다.
칼이 빠르게 움직일 때의 ‘싹싹!’ 하는 소리는 하나같이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과 같아 춤
곡 상림(桑林)의 리듬을 타는 듯했으며, 요(堯) 임금의 명곡 경수(經首)의 악률에 맞아떨
어지는 듯했다.
문혜군이 말했다. “와! 굉장하구나. 어떻게 기술이 이렇게 높은 차원에 도달할 수 있는
건가?”
백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하였다. “저는 사물의 법칙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초월적 기
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소를 해체할 때에는 소가 하나의 덩어리로 보였지만
3년이 지난 후부터 소가 덩어리로 보이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정신으로 소를 상
대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의 지각작용이 멈추고 정신만이 영활하
162 문학과 삶(슬로리딩)

게 움직입니다. 소의 몸체가 갖고 있는 이치를 보면 근육과 골격의 사이에 큰 빈틈이 있


습니다. 이 큰 빈틈으로 칼을 지나게 하여 소의 몸체가 지닌 본래 구조에 따라 갈라나가
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힘줄이 지나는 곳이나 뼈와 살이 밀착되어 있는 곳을 한 번도 건
드려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큰 뼈를 건드려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좋은 백정은 한 해에 한 번 칼을 바꿉니다. 살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백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꿉니다. 뼈를 끊어내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 칼은 19년이 되었고, 그
간 해체한 소가 천 마리도 넘습니다. 그런데도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소의
골격이나 각 부위의 사이에는 큰 빈틈이 있지만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칼날을 가지고 큰 빈틈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칼날이 노닐 곳이 넓고 넓어서 여유롭습니
다. 그래서 19년을 썼지만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소의 골격과 각 부위가 조밀하게 만난 지점을 만날 때마다 저는 조심스러워하
며 특별히 마음을 쓰고 경계를 합니다. 시선을 집중하고 동작을 천천히 하며 칼의 움직임
을 작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소의 살점들이 척척 갈라지는 것이 마치 진흙이 땅에 떨어
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뒤 저는 칼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그 모든 것을 돌아보며 긴장
을 풀고 흡족해하며 칼을 닦아 간직합니다.”
문혜군이 말하였다. “굉장하다. 이 백정의 말을 듣고 나는 삶을 섭리에 맞게 살아야 한
다는 도리를 깨달았다.”

- 장자 지음, 강경구 번역, 『장자』, <명인 백정의 소 해체하는 이야기>

3. 진자앙의 <유주의 누대에 올라>


앞으로는 옛 현군을 만날 수 없고〔前不見古人〕,
뒤로는 미래에 올지 모를 현군을 만날 수 없네〔後不見來者〕.
변함없는 하늘과 땅의 영원함을 생각하니〔念天地之悠悠〕,
서글퍼라, 홀로 외롭게 흘리는 눈물〔獨愴然而涕下〕.

- 진자앙 지음, 강경구 번역, <유주의 누대에 올라>

4. 이황의 <고인도 날 못 보고>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古人) 못 뵈
고인(古人)을 못 뵈도 녀던2) 길 앞에 있네
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녀고 어쩔고

- 이황, <고인도 날 못 보고>

1) 삼려대부는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고 굴(屈), 경(景), 소(昭)의 3대 족벌가 자제들의 교육을 관리하는 관직으
로서 그것이 세 가문(三閭)을 관리하는 일이었으므로 갖게 된 벼슬명칭이다.
2) ‘녀다’는 가다의 고어로서 ‘녀던 길’은 성현들이 실천한 길과 남겨놓은 가르침을 뜻한다.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63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어부 이야기>에 그려진 어부와 굴원은 상반된 인생관과 처세관을 가지고 있다. 각자 어느
편을 선호하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야기해 보자.

2 장자의 명인 백정은 상대와 부딪치지 않고 상호 간의 관계를 이루는 사이를 공략하는 방법을


지혜로운 삶의 길로 제시한다. 상대의 고유성을 침해하지 않고 대화한 경험에 대해 말해
보자.

3 퇴계 이황은 옛 성현을 만날 수 없지만 그들이 남긴 실천의 행적과 가르침을 통해 진정한


만남과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노래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개인적 수고로움을
감내하면서 가치 있는 일을 수행하고자 하는 개인과 단체가 많이 있다. 어떤 사람, 어떤 단
체에 대해 공감을 느꼈는지 말해 보자.

4 굴원의 작품에는 자연주의와 인문주의, 순응과 저항, 타협과 절개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상


반된 인생관과 가치관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정작 상반된 가치관을 가진 어부와 굴원은
논쟁하지 않는다.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내려놓지도 않는다.
서로 다름의 평화로운 공존과 조화를 공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표현했다. 그 반대는
자신의 자신다움을 내려놓고 조화하는 척하는 ‘동이불화(同而不和)’이다. 자신다움을 부정하
면 필연적으로 상대에게도 진실할 수 없다. 각자 현실 속에서 화이부동과 동이불화의 경우
를 찾아서 예시하고 진정한 소통의 길에 대해 글로 표현해 보자.

5 진자앙은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원망하고, 퇴계 이황은 시대와 상관없이 넓게


열린 실천의 길에 대한 믿음을 노래한다. 각자의 삶의 이력에서 진자앙식 원망과 퇴계식
믿음을 체험한 일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소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로 표현해 보자.
164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에 대해 그 본질을 뒤흔드는 질문을 만들어 보고 이에 대해 토론


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65

【체험의 숲】

굴원의 가치관에 동조하는 입장, 어부의 태도에 공감하는 입장으로 나누어 다음 표의 방식


으로 서로의 다름을 확인해 보자. 각각의 항목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밝히고 상대되는
입장의 것과 비교해 보자.

항목 입장(굴원-어부) 이유

정치

경제적 분배

교육

세대 갈등

남북관계

퇴직 후 삶
166 문학과 삶(슬로리딩)

【감상의 숲】


강은교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 『빈자일기』, 민음사, 1977.


제4장 문학과 소통 역량 167

【문제 은행】

1 <변신>에서 그레고르는 벌레의 시각으로 인간들이 보지 못한 인간의 세계를 바라본다. 다른


생물의 입장에서 인간의 세상을 비판적으로 서술해 보자.

2 오늘날 가족 간의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에 대해 서술해 보자.

3 취업용 자기소개서의 필수 항목인 소통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한 계획을 수립해 보자.

4 나의 소통 방식을 개선하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 생각해 보자.

5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의 소통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6 물건을 살 때 덤으로 하나를 더 받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그리고 그 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7 각각의 구체적 현장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운동, 사람관계, 공부, 일 등
어떤 영역에서 다양한 현상들을 하나로 꿰는 원리를 발견하고 자유를 획득한 경험이 있다
면 이에 대해 글로 표현해 보자.

8 각자 자신의 능력과 진실성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자.

9 자신의 주위에서 달인에 가까운 사람들을 찾아 어떤 노력과 어떤 체험을 통해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인터뷰하고 글로 정리해 보자.

10 서로 다름과 그것의 공존과 그에 기반한 상호 간의 소통을 주제로 한 이야기, 시, 산문을


직접 창작해 보자.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69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71

5
제 장

문학과 융합 역량

현대 사회는 새로운 지식 생산 모델로서 학문 간의 ‘융합’이나 ‘통섭’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시대이다. 융합은 과학, 기술 및 인문사회과학 등 세분화된 학문들의 결합, 통합 및 응용을 통
해 만들어진 새로운 지식체계를 말한다. 현대 사회는 복잡하고 다양하며 다층적인 사회로 변
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를 이해하는 데 영역과 경계를 넘나드는 통합적 이해 없이는 비전을
찾는 일도, 미래를 전망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를 반영하여 최근의 학문적 패러다임은 콜라보 교육, 인접 학문과 네트워크 구성, 다원
적·다각적 사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시너지 효과,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조화, 퓨전과 하이
브리드와 같은 융합 개념에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우리 대학 역시 창의 실천 지도자
를 양성하기 위해 융합 역량을 6대 핵심 역량 가운데 하나로 설정해 놓았다. 융합형 인재의
특성으로는 사고의 유연성, 다른 분야에 대한 호기심, 경계를 넘는 용기와 도전적 태도, 소통
에 대한 열린 자세 등을 꼽을 수 있다.
융합을 핵심 가치로 삼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다
양한 분야와 접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점점 ‘한 우물을 깊게 파야한다’는 패
러다임에 머물지 않고 ‘우물을 깊이 파기 위해서는 우선 넓게 파야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을 단순히 결합했다고 해서 융합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융합의 목표는 다원적 사고를 기반으로 창의적 문제해결 방법을 창안하는 것에 있
기 때문이다. 따라서 융합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학문 간, 분야 간의 새로운 조합과 효율
적인 재구성을 통해 미래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문제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 진융의 <소
오강호>, 최재천의 통섭 이야기를 텍스트로 하여 다양한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경계를 넘나드
는 삶의 태도를 짚어볼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장에서 소개할 4개의 작품은 융합과 창의를 화
두로 하는 21세기의 시대정신에 걸맞게 삶의 문제들을 다각적이고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프리
즘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들 작품은 공통적으로 융합의 의미와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융합은
경계에 대한 재인식에서 비롯된다. 폐쇄적이고 제한적인 경계를 넘어섰을 때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세계는 보다 확장될 것이며 새로울 것이다. 더불어 이들 작품은 미래 사회에 이질적
인 것과의 융합의 문제에 대해서 미리 생각해 보게끔 하고 있다. 근대 이후 인간을 중심에 놓
고 보는 사고의 경계를 넘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 눈을 돌려 그들과의 융합 방식을 이
172 문학과 삶(슬로리딩)

장에서 미리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는 새로운 인류의 출현과 그들을 바라보는 현생 인류의 태
도가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다양한 연구 주제 가운데 여성성과 소형화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결합하여 새로운 인류를 출현시킨 작가의 상상력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을 통해서는 미래 사회의 삶의 형태의 변화를 예측해 볼 수 있을 것
이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결합이 어떤 방식이 될지, 어떤 문제를 야기할지에 대한 각자
의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융의 <소오강호>는 화산파 영호충이 무술과 인격을
연마해 발전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의 삶을 관찰함으로써 융합의 정신과 실천
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재천의 통섭 이야기에서는 지식 간의
경계를 허물고 상호 교류를 통해 좀 더 깊고 넓은 지식을 창출할 필요성에 대해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장에 제시된 작품을 천천히 읽어가면서 이질적인 것들과 공존할 수 있는 융합의 방향에
대한 가치관을 학습자들은 정립했으면 한다. 더불어 새로운 시각으로 혁신적인 문제 해결 방
법을 찾아 융합형 인재로 나아가는 초석을 마련했으면 한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은 저마다 다
르지만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해서는 틀에 묶이지 않은 사고의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묶
여 있지 않음이 융합을 위한 첫 번째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73

1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헤르만 헤세 등과 함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 작가로 선정된 바 있는 소설가이다. 1991년 <개미>를 발표하면서 세계문단의 일약 스타
로 떠오른 베르베르는 2002년 <뇌>, 2005년 단편집 『나무』에 이어 2007년 <파피용>을 펴냈
으며 <개미>와 같은 미시적인 세계, <천사들의 제국>과 같은 영적인 세계를 넘어 광대한 우
주로 눈을 돌리고 있다. 2008년엔 베르베르식 우주관의 완성판이자 최대 히트작인 <신>을,
2009년에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의 증보판과 미래를 볼 수 있는 소녀의
이야기 <카산드라의 거울>을 펴냈다. 2011년에는 한 코미디언의 죽음을 통해 웃음의 역사를
탐색하는 <웃음>을 썼고, 2013년에 <제3인류>라는 인류의 역사와 미래를 담은 책을 냈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문학적 지향점은 ‘다른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기’이다. 인간 중심
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눈높이, 이를테면 ‘개미’의 낮은 눈높이에서 인간의 세상을
바라보도록 한다든지, ‘천사’와 같은 지극히 높은 시선으로 인간을 관찰하는 식이다. 베르베르
는 한 인터뷰에서 인류는 이미 ‘과학 소설과 같은 환경’으로 진입했기에 그에 상응하는 새로
운 윤리가 요구된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예컨대 사이보그나 인공지능처럼 신인류의 등
장이 본격화된다고 할 때 이들과 인간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이며,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윤리를 필요로 할 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제3인류>에서 절정을 이룬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신화와 과학, 철학이 만나 신(新) 창세기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작품에서 베르베르는, 미래과학은 결국 인간의 혹독한 자기 성찰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
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인류가 지금처럼 지구의 생태 가치를 파괴하는 생활 방식을 고수하
는 한, 디스토피아의 도래를 피할 수 없다는 준엄한 경고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융합적 사유를 표방하는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베르
베르는 기존의 거대이론들과 유명 저서들을 넘나들면서 미래 과학의 세계에 인문학적 상상력
을 불어넣는다. 이를테면 지구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보는 관점은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을 호출한다. 또한 8천여 년 전 지구에 ‘거인족’의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는 가설은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과 맞닿아 있다.
<제3인류>에서 베르베르는 지구, 즉 가이아를 자의식을 가진 인격화된 존재로 형상화하고,
인간중심주의와 도구적 자연관에 고통받는 지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이아는 탄
생부터 현재까지 지구의 상황을 때로는 두려움에 가득한 목소리로 때로는 성난 목소리로 독백
한다. 지금껏 숱한 소행성들과의 충돌로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며 자전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를 들려주는가 하면, 생명체들이 어떤 진화의 과정을 밟아 왔으며 한때 자신과 교감
하고 소통하던 인간들이 지금은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보복하고 있는지를 세세
히 알려준다. 인간이 지구를 난개발하면서 자연을 훼손하고 지구의 피부 깊숙이까지 상처를
주는 데 분노해 해일, 전염병, 화산 폭발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지만 인
174 문학과 삶(슬로리딩)

간은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성토한다. 이를 통해 베르베르는 우리가 ‘진화’라고


불러온 과정들이 과연 온당했는지,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할 진화의 방향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 근본적이고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읽기의 숲】

다비드 웰즈는 연단 쪽으로 나아간다.


양옆의 높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 60명쯤 되는 젊은이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대개는 무릎 위에 놓인 서류를 꼭 쥐고 있고, 오른쪽에 앉은 세 젊은이는 심사위원
들 앞으로 나갈 차례를 기다리며 열에 들뜬 모습으로 자기들의 메모를 다시 읽고 있다.
“다음 참가자 나오세요!”
크리스틴 메르시에가 외치는 소리다.
“참가번호 67번, 프랜시스 프리드만 박사. 프로젝트 제목: 안드로이드, 인공 의식을 가
진 로봇.”
다비드 웰즈는 따로 떨어져 앉은 세 참가자 옆으로 가만가만 다가가서 자리를 잡고 발
표에 주의를 기울인다. 프랜시스 프리드만은 허여멀건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난 젊은이
다. 두꺼운 안경을 끼고 고무창이 달린 신발을 신었다. 그는 자신의 이력과 포부를 간단
히 설명하는 것으로 말문을 연다. 자기는 몽펠리에 대학의 로봇공학과 출신이며, 자기가
경연의 우승자로 선정된다면 기계들이 ‘자아’의 관념을 지각하게 함으로써 로봇 공학의
신기원을 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신기원이란, 한낱 계산 능력을 의미하는 ‘인공지능’의 단계에서 개체와
개체 밖의 세계를 구별하는 능력인 ‘인공 의식’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안드로이드 로봇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면, 스스로 주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노
동자, 완벽한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로봇들이 값싸고 수가 많은 프롤레타리
아 계급을 형성하게 되면,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의 상당수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로봇들을 제대로 프로그래밍한다면 반항이나 파업의 의지가 전혀 생겨나
지 않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아’에 관한 의식이 있기 때문에 창의
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면서도 그것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점만 있고 단점은 없는 일꾼들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만약 그 로봇들이 정신착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죠?” 한 심사위원이 물었다.
“자아의식이 생기면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현상을 통제
하기 위해서는 로봇들에게 적합한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창안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경연의 상금을 받아 논문을 쓰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서울에 있는 하이테크놀로지센터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세대 인공지능 로봇들에 관해서 연구하고 그 로봇들이 인공
의식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서울에 간다고요?”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75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한 로봇들이 있습니다. 한국인


들은 반도체 칩, 디스플레이, 로봇공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단연 앞서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그저 잠들어 있는 심사위원의 코고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다른
심사위원들은 서로 의견을 묻고, 간단한 심사평이 적힌 종이를 바인더에서 떼어 내어 서로
주고받는다. 이윽고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가 참가자 명단이 적힌 종이를 다시 집어 든다.
“수고하셨어요. 프리드만 박사. 다음 참가자 나오세요. 참가번호 68번, 오로르 카메러
박사. 프로젝트 제목: 아마존, 여성 호르몬에 의한 면역 체계 강화.”
호명된 젊은 여자는 아주 우아한 자태로 일어나서 아홉 심사위원들 앞에 자리를 잡는
다. 연한 갈색 머리를 짧게 자른 데다, 노란 재킷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그 아래에 다
시 검은 바지를 입고 있어서 남자 같은 느낌을 준다. 노랑과 검정으로 된 꿀벌 모양의
브로치를 달고 있기는 해도 그런 인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저는 툴르즈 의과대학에서 공부했고, 전공은 내분비학입니다. 저는 터키 남동부, 이란
접경 지역에 아마존족의 마지막 후예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 여자들은
스스로를 ‘꿀벌족’이라 부르며 꿀벌에 대한 숭배의식을 거행합니다. 그 여자들은 꿀과 로
열제리와 밀랍을 이용해서 독창적인 약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의 발병률이
평균을 훨씬 밑도는 것으로 보아, 그 약들은 효능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여자들의 호르몬은 우리의 것과 다릅니다. 마치 돌연변이가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차이를 보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꿀벌의 여성호르몬을 많이 섭취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그 여인족은 현재 터키와 이란에서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사라진다면, 그들
의 지식도 잊히고 말 것입니다. 저는 현지에 가서 그들을 연구할 생각입니다. 그들의 혈
액을 분석해 보고 유기 화학 분야에 관한 그들의 지식을 전해 받을까 합니다.”
머리를 틀어 올린 심사위원은 무언가를 적으려 하다가 펜이 잘 나오지 않자 그것을 아
래위로 흔든다. 그러더니 결국엔 옆 사람의 펜을 빌린다.
“수고하셨어요. 카메러 박사. 이제 마지막 참가자 나오세요. 참가번호 69번, 다비드 웰
즈 박사. 프로젝트 제목: 피그미, 소형화를 통한 진화.”
호명 받은 젊은이는 앞으로 나가서 심사위원들을 마주하고 자리를 잡는다.
“저는 파리 생명과학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환경이 인간과 동물의 생리에 미치
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전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 프로젝트는 크기가 작아지고 있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동물과 식물을 막론하고 숱한 종들이 소형화하
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공룡은 도마뱀으로 변했고 매머드는 코끼리로 변했습니다.
옛날에 잠자리들은 날개폭이 1.5미터에 달했지만 이제는 가장 큰 것도 15센티미터가 넘
지 않습니다. 우리와 더 가까운 동물들을 보자면, 늑대는 요크셔테리어처럼 작은 개로 변
했고, 호랑이는 고양이로 변했습니다.”
키가 아주 작은 심사위원은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야말로 그 주제에 가장
176 문학과 삶(슬로리딩)

큰 관심을 보일 법한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식물 세계에서도 소형화의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비드의 발표가 이어
진다.
“옛날에 어떤 세쿼이아는 그 높이가 백 미터에 달했습니다. 오늘날의 세쿼이아는 평균
높이 10미터의 교목입니다. 곤충의 사례도 있습니다. 최근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바퀴벌
레들은 현대 건물의 배관에 적응하기 위해, 다시 말해 파이프 속을 돌아다니기 쉽도록
몸집을 줄이는 쪽으로 진화했습니다. 끝으로 물건의 영역에서도 소형화의 경향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자동차들은 도시의 교통체증에 적응하기 위해 갈수록 작아지고, 컴퓨터들
역시 소형화의 경향을 보입니다. 아파트의 평균 면적도 대도시의 인구 과잉 때문에 점점
축소되고 있습니다.”
“그게 주제인가요?”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가 그렇게 묻고 나서 말끝을 단다.
“세계를 축소하고 싶은 건가요?” 몇몇 심사위원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는다.
“저는 논문 대신 현장 보고서를 작성해 볼까 합니다. 아프리카, 더 정확히 말하면 콩고
공화국에 가서 최후의 피그미들을 탐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알려진 가
장 오래된 인종의 후예라는 이유로 마치 미개인들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낸 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뎅기열과 치쿤구니아열을 감염시키는 모기들에게 물려
도 끄떡없을 만큼 불가해한 저항력을 키워 왔습니다.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은 말라리아,
아프리카 수면병, 이질 등을 훨씬 잘 견뎌 냅니다. 앞서 발표한 참가자와 마찬가지로 저
는 현지에 가서 그들의 혈액을 분석해 보고 싶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이른바 ‘문명
인’보다 면역성이 강한 이유를 밝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는 그들이 과거의 종
족인지 아니면 오히려 미래의 인류에 속하는 사람들인지도 알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 (중략) ……

“다섯 번째는 유전 공학의 길입니다. 이것 역시 소르본 대학의 한 연구자가 제안한 프


로젝트입니다. 그 연구자는 제라드 살드맹 박사입니다. 그의 아이디어는 염색체의 말단에
있는 DNA 부위, 즉 텔로미어를 조작함으로써 노화와 죽음을 막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도 있다는 거요?”
“우리 몸은 반드시 죽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지만, 만약 그 프로그래밍을 지우는 게 가
능하다면, 천년만년 살 수도 있겠지요. 그 연구자는 자기 프로젝트에 ‘청춘의 샘’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베르사유 정원의 잉어들이나 바다거북 같은 동물들이 장수하는 게 텔
로미어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런 프로젝트를 구상한 모양입니다. 그는 줄기
세포를 이식하여 손상된 장기를 대체하는 방법도 함께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식을 하더라도 거부 반응이 없어야 하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지?”
“클론 은행을 만들어서 새 장기가 필요할 때마다 복제 인간의 장기를 빼내어 이식하겠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77

다는 것입니다. 마치 기계의 낡은 부품을 완벽한 호환성을 지닌 새 부품으로 갈아 끼우


듯이 말입니다.”
“그 프로젝트의 단점은?”
“만약 모두가 죽지 않고 천년만년 살게 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도 자
식을 낳으려 하지 않는 늙은이들의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세대교체나 혁신은 사라지
고, 그저 특권을 가진 인간들만 계속 삶을 연장해 가겠지요.”
“어쨌거나 그들은 무병장수를 누리겠구먼. 다음 프로젝트는 뭐지?”
“여섯 번째는 여성화의 길입니다. 이것 역시 소르본 대학의 ‘진화’ 연구 분과에 소속된
한 연구원이 제안한 프로젝트입니다. 제안자는 오로르 카메러 박사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 인간 사회가 여성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남성의 정자 수가
감소할 뿐만 아니라 정자들이 약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X염색체를 지닌 정자가 Y염
색체를 지닌 정자보다 저항력이 강하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따
라서 인류가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진화한다면, 당연히 여성이 남성보다 수적으로 우
월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진화의 길은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전통의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초음파 검사를 이용하면 태아의 성별을 알아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기
가 딸일 때 어떤 아버지들은 어머니들에게 낙태를 강요한다고 합니다.”
“아들을 얻을 때까지 그런 짓을 하지요. 그래요. 텔레비전 뉴스에서 봤소.”
“사정이 그러하기 때문에 남자들이 더 많은 겁니다. 남성의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어
요. 전통이 자연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지요.”
대통령은 자기 애인들의 사진이 저장되어 있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여성성이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다는 거요?”
“오로르 카메러 박사는 인류가 여성화하면 개개인의 저항력, 특히 방사능에 대한 저항
력이 강해진다고 주장합니다. 터키에 아마존들의 후예를 자처하는 부족이 있답니다. 그들
은 핵폐기물 처리장 근처에 살고 있는데, 방사능에 대한 저항력이 아주 강한 모양입니다.
어떻게 그런 저항력이 생겼는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원전사고가 일어나거나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경우에…….”
“그런 여자들이라면 보통 사람들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는 것이죠.”
“흠…… 한 사회가 여자들로만 이루어진다면 좋을 게 뭐가 있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자연은 이미 그런 선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로르
카메러가 자기 프로젝트를 발표할 때 말한 것처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을 때, 살아남은 동물 종은 벌과 개미뿐입니다. 이 사회성 곤충들의 내부 구성을
보면 개체의 90퍼센트가 암컷입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 이세욱 역, <제3인류>, 열린책들, 2013.


178 문학과 삶(슬로리딩)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제3인류>에는 인류의 진화 연구를 위한 학술경연대회가 펼쳐진다(인공 의식을 가진 로봇,


유전공학을 통한 영생화, 소형화, 여성화 등). 이 중 여러분이 옹호하고 싶은 진화 방식은
무엇이며 그 이유에 대해 말해 보자.

2 “만약 모두가 죽지 않고 천년만년 살게 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도 자식을


낳으려 하지 않는 늙은이들의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세대교체나 혁신은 사라지고, 그저
특권을 가진 인간들만 계속 삶을 연장해 가겠지요.” 하는 대목에서 드러나는 가치관에 대
해 말해 보자.

3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이른바 ‘파괴적 창조’ 혹은 ‘창조적 파괴’의 시대라 일컬어진다. 여러분
이라면 무엇을 파괴하고 무엇을 창조하고 싶은지 말해 보자.

4 융합과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무엇이고, 이런 인간증강 기술로 인해 야기될 문제점은 무엇이며, 인간다움을
정의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해 글로 표현해 보자.

5 한국고용정보원은 2017년 3월 24일 인공지능과 로봇기술 등을 활용한 자동화에 따른 주요


직업군 400여 개의 직무 대체 확률을 분석해 발표한 바 있다. 이 분석 기준을 보면 크게
‘지각 및 조작’, ‘창의적 지능’, ‘사회적 지능’이 필요한 직무는 인공지능 로봇이 대체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단된다. 인공지능으로 직무가 대체될 확률이 낮은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보
고 그 이유를 써 보자.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79

【질문의 숲】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간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무엇이며 이들 영역 간의 융합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성과)가 무엇일지에 대해 분석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180 문학과 삶(슬로리딩)

【체험의 숲】

오늘날 경제·사회·문화·예술 등 분야를 막론하고 융합과 협업이 대세가 되고 있다. 자신


의 전공이나 관심 분야와 관련해서 알고 있는 융합 사례와 그 효과에 대해 정리해 보자.

내가 경험한, 내가 기대하는 현실 속의 융합
항목 참고
사례 효과

정치·경제 빅데이터

유비쿼터스 헬스
자연·과학
케어, 보행 보조
·기술(의생명)
로봇, 분자 요리

스마트 복지
사회
(독거노인 간병)

문화·예술 테크노아트

진화심리학,
교육
진화경제학

스포츠 E-스포츠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81

2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

아이작 아시모프는 1920년에 출생한 미국의 과학자이자 SF소설가이다. 그는 대학의 생화학


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그는 최우수 과학소설을 뽑는 휴고상에 수
차례 수상한 SF계의 거장으로 우리 주변에 가까이 다가온 로봇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만들어
냈다. 그의 소설은 익숙하고 일상적이며 친근한 로봇을 그려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다가올
미래 사회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시모프는 로봇이 인간과 함
께 살게 되었을 때 발생하게 될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일찍이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로봇 3
원칙이라는 대명제를 만들어 내었고 지금도 수많은 영화와 공상과학소설에 그 구절이 인용되
고 있다.
<아이, 로봇>은 1940년대 과학소설잡지에 발표하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1950년에
모은 단편집이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몇 개의 작품을 공간을 기준으로 구분해 보면 다음
과 같다. 첫 번째로 육아 보조 로봇, 도시의 시장이 된 로봇 등 우리 일상 주변에서 가깝게
지내는 로봇에 대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 경우 가족이나 친구 같은 로봇을 대하는 인간의
방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두 번째로 우주 개척의 시대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로
봇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야기가 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이 경우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을 대신함으로써 로봇이 인간에 협조하는 장면도 제시되지만 인간의 명령에 오류를 일으키는
장면 또한 동시에 그려지고 있다.
<아이, 로봇>에 수록된 대부분의 이야기는 로봇의 정체성 자각이라는 문제가 밑바탕에 공통
적으로 깔려 있다. 인간의 자의식 문제만큼이나 로봇의 자의식 문제 역시 쉽게 처리할 수 없
을 만큼 복잡하다. 만약 로봇에게 자의식이 생기게 되었을 때 그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
하는 게 올바른 방향인지 미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장에서 함께 살펴
볼 이야기는 ‘바이어리’라는 주인공이 도시의 시장이 되는 에피소드이다. 간단한 이야기의 흐
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로봇 제조 회사인 U.S 로봇틱스에 프랜시스 퀸이라는 정치인이 찾아온다. 그는 바
이어리라는 법조인이 시장에 출마할 거라고 하며 정치적으로 바이어리를 견제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퀸은 바이이어리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바이어리가 로봇임을
증명해달라고 로봇제조 회사에 강요 섞인 문의를 하게 되었다. U.S 로봇틱스의 래닝 박사는
고심하다 로봇공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수잔 캘빈 박사와 상의를 하게 되었다. 바이어리가 로봇
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물리적인 증거로는 그를 해부하거나 엑스레이를 찍는 방법이 있
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엑스레이를 찍어도 보지만 바이어리가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있어서
확인할 수 없었으며 법조인인 바이어리의 자기 방어 논리는 완벽했고 치밀했다. 정치인 퀸이
바이어리와 관련한 결정적 증거를 입수하여 바이어리를 압박해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남은
것은 심리적인 증거를 활용하는 것뿐이었다. 모든 로봇에는 로봇공학 3원칙이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에 로봇이라면 그 원칙을 어길 수 없었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 공개 유세장에서
182 문학과 삶(슬로리딩)

한 시민이 바이어리에게 자신을 때려 보라고 한다. 로봇공학의 3원칙에 따르면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바이어리는 머뭇거리다가 그 시민을 때린다. 시민을 때린 이 행위로
인해 바이어리는 로봇이라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시장에 당선되었다.
이 이야기는 시장에 당선된 로봇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
는 이미 로봇이나 컴퓨터, 기계가 인간과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또한 인간과 로봇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 미래가 곧 도래할 가능성도 있다. 이 소설은 로봇이 인간의 영역에서 많은 부
분을 차지할 것이며 그러한 로봇과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특히
인간의 직업을 대신하거나 완벽하게 수행하는 로봇의 출현에 인간들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
지를 미리 보여 주고 있다. 이 소설을 읽어보면 수잔 캘리 박사가 로봇에 대응하는 방식에 의
견이 엇갈릴 것이다. 그녀는 로봇이라는 이질적인 존재에 프로그래밍된 사고가 윤리를 지향하
는 인간의 사고에서 기인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인간보다 더 윤리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로봇이 오히려 인간보다 나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융합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것을 합쳐 창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인간과
로봇이라는 서로 다른 존재가 합쳐지는 것, 인간과 로봇이 함께 살아가는 것도 미래 사회 융
합의 핵심 문제이니 만큼 꼭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인간과 로봇의 창조적인 융합이 가
깝게는 나의 직업 선택의 폭을 넓힐 것이며 어쩌면 나아가서는 인류의 지속적인 미래를 보장
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83

【읽기의 숲】

수잔 캘빈은 차분하게 래닝 박사를 바라보다가 퀸을 노려보았다.


“바이어리 씨가 로봇이라는 걸 구체적으로 입증할 방법은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선
생. 지금까지 선생은 정황 증거만 제시했지 확실한 증거는 하나도 못 댔습니다. 그리고
바이어리 씨는 아주 똑똑하기 때문에 그런 공격에 아주 잘 대처할 겁니다. 선생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증거에는 물리적인 증
거와 심리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물리적인 증거를 대려면 그 사람을 해부하거나 엑스레이
를 찍어 봐야 합니다. 그건 선생이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심리적인 증거를 대려면 그 사
람의 언행을 연구해야 하는데, 만일 그 사람이 양전자 로봇이라면 로봇공학 3원칙에 따라
야 합니다. 양전자 두뇌는 세 가지 원칙 없이는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원칙
에 대해선 알고 있겠죠, 퀸 선생?”
수잔 캘빈이 묻자 퀸이 가볍게 대답했다.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심리학자는 쌀쌀맞은 말투로 계속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잘 이해하겠군요. 세 가지 원칙 가운데 하나만 어겨도 바이어리
씨는 로봇이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한쪽 주장이 옳다는 의미니까요. 하지만 그가 세 가지
원칙에 합당하게 행동하면 어느 쪽 주장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퀸이 눈썹을 슬며시 치켜올렸다.
“그건 또 왜 그런가요, 박사님?”
“로봇의 세 가지 원칙은 인간 세상의 윤리 기준에 합당한 기본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보호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로봇에게 이것은 제3원칙입니다.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의식과 책임감을 지닌 ‘좋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합당한 권위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의사나 직장 상사, 정부 기관, 심리 상담원과 동료의 말을 존중하고, 법을 지키
고, 규칙을 따르고, 전통에 순응할 것입니다. 설사 그것 때문에 자신의 안위와 평안이 손
상되더라도 말입니다. 로봇에게 이것은 제2원칙입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라면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를 보호하며, 타인을 구하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할 것입니다. 로봇에게
이것은 제1원칙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만일 바이어리 씨가 로봇의 세 가지 원칙을
모두 따를 경우에 그는 로봇일 수도 있고, 아주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퀸이 반박했다.
“그렇다면 그가 로봇이라는 사실을 결코 증명할 수 없다는 겁니까?”
“그가 로봇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내가 바라는 증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원하는 증거를 직접 찾아보세요. 그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선생밖에 없으니까.”
184 문학과 삶(슬로리딩)

…… (중략) ……

선거 유세장에 설치한 저지선 건너편에는 군중이 가득했다. 군중으로 대규모 토대를 만


들고, 그 위에 많은 나무와 건물을 세운 것 같았다. 그리고 전 세계가 극초단파 생중계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방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전체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바이어리는 이런 상황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군중 자체를 보면 그렇게 웃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가 로봇임을 비난하는
온갖 플래카드와 깃발과 고함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군중들은 점점 더 호전적이 되어 가
고 있었다.
애당초 연설은 아무 성과도 없었다. 폭도들이 무분별하게 외쳐대는 고함과, 폭도 한가운
데서 더 심한 폭도 역할을 하는 근본주의자 집단이 규칙적으로 외쳐대는 소리에 파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이어리는 침착하게 연설을 계속했다.
건물 안에서는 렌톤이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신음했다. 그는 곧 일어날 유혈 사태를 기
다리고 있었다.
맨 앞줄에서 다급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깡마른 시민 한 명이 앞으로 튀어 나왔다. 경
찰이 그를 잡기 위해 달려갔으나 바이어리가 황급히 손을 흔들어 경찰을 제지했다.
깡마른 남자가 발코니 바로 밑까지 나아가 큰 소리로 외쳤지만 군중의 함성에 묻혀 버
렸다.
바이어리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는 “뭐라고 하셨나요? 합법적인 질문을 하신다면 대답
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한 다음 옆에 있는 경호원에게 말했다.
“저분을 이리 모셔 오세요.”
군중 사이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조용히 해!” 하는 소리가 미친
듯이 일다가 사라졌다. 깡마른 남자는 벌게진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바이어리를 마주 보
았다.
바이어리가 물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까?”
깡마른 남자는 바이어리를 노려보더니 쉰 목소리로 외쳤다.
“나를 때려 봐!”
그러고는 갑자기 턱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나를 때려 보라고! 로봇이 아니란 걸 어서 증명해 보이란 말야. 당신은 인간을 못 때
려, 이 괴물아!”
순간적으로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바이어리의 목소리가 침묵에 마침표를 찍었다.
“당신을 때릴 이유가 없습니다.”
깡마른 남자가 큰 소리로 웃었다.
“네놈은 날 때릴 수 없어. 절대 불가능하지. 네놈은 인간이 아니야, 인간처럼 보이는 괴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85

물이지!”
그러자 바이어리는 입술을 꼭 깨물고는 군중 수만 명이 쳐다보고 있고, 영상을 통해 전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주먹을 뒤로 빼더니 남자의 턱을 제대로 때렸다. 남자는 뒤로 물
러나며 푹 쓰러졌다. 어이없어하는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바이어리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분을 잘 보살펴 드리세요. 연설이 끝나고 나면 이분하고 이야기를 나누
고 싶습니다.”
수잔 캘빈 박사는 예약석에서 일어나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충격에서 겨우 벗어난 기
자 한 명이 그녀를 뒤쫓아가며 들리지 않는 질문을 외쳐댔다. 수잔 캘빈은 어깨너머로 소
리쳤다.
“그는 인간이에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바이어리의 나머지 연설은 ‘말은 해도 들리지 않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수잔 캘빈 박사와 스테판 바이어리가 다시 만났다. 바이어리가 시장에 취임하기 일주일
전, 자정이 지난 늦은 시각이었다.
수잔 캘빈 박사가 말했다.
“피곤해 보이지 않는군요.”
시장 당선자가 빙그레 웃었다.
“오랫동안 안 자도 괜찮아요. 퀸에겐 말하지 마세요.”
“그럴게요. 하지만 얘기를 꺼냈으니 말인데, 퀸이 재미있는 말을 했다더군요. 제 입으로
흘리기가 좀 뭐한데, 무슨 내용인지 알고 계시죠?”
“조금은 알아요.”
“‘정말 극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원래 스테판 바이어리는 젊은 법조인에 강력한 연설가
이자 위대한 이상주의자였다……. 그리고 생물물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로봇공학에
관심 있으세요, 바이어리 씨?”
“합법적인 측면에 한해서는 관심이 있지요.”
“‘스테판 바이어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동차 사고가 일어났다. 바이어리 부인은
사망하고, 바이어리 자신은 중상을 입었다. 두 다리를 잃고, 얼굴도 잃고, 목소리도 잃었다.
마음의 일부도 뒤틀려 버렸다. 외과 수술은 안 받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결국 그는 자리
에서 물러났고, 법적인 경력도 사라졌다. 머리에 든 지식과 두 손만 남았다. 그는 어떤 방
법을 통해 지금까지 개발된 것 가운데 기능이 가장 뛰어난 두뇌, 특히 윤리적인 문제를
제대로 판단할 만큼 아주 뛰어난 능력을 지닌 복잡한 양전자 두뇌를 구할 수 있었다. 그
는 이 두뇌를 집어넣을 몸체를 개발했다. 그런 다음 자신이 예전에 하던, 하지만 이제는
하지 못하게 된 모든 것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스테판 바이어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
보낸 다음 자신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늙은 장애인 선생이 되어 뒤를 받쳐 주었다.’”
186 문학과 삶(슬로리딩)

시장 당선자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람을 때려서 모든 걸 망쳤어요. 신문에서도 제가 인간일 경우에
공식적으로 저지른 최초의 범죄라고 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요? 말해주지 않을래요? 분명 우연은 아닐 텐데요.”
“완전한 우연은 아니에요. 작업은 대부분 퀸이 한 셈이에요. 저는 제가 사람을 때린 적
이 한 번도 없고 아무리 화를 돋워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조용히 퍼뜨렸어요. 그게 바
로 제가 로봇이라는 구체적인 증거임을 덧붙여서요. 그래서 일부러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서 군중 앞에 서서 연설을 하려고 준비한 겁니다. 온갖 고함이 터져 나와 결국에는 어떤
바보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말예요. 이런 것을 책략이라고 하지요. 인위적
으로 조성한 분위기에 의해 모든 일이 스스로 진행되도록 하는 것, 그래서 의도한 대로
급격한 여론의 변화에 힘입어 선거에서 이기는 것.”
로봇심리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정치인들처럼 당신도 내 전문 영역을 침범하는군요. 하지만 그렇게 돼서 참 안타
까워요. 물론 난 로봇이 좋아요. 인간보다 훨씬 좋아하지요. 만일 로봇이 공직 생활을 해
도 된다면 정말 훌륭한 공직자가 될 거예요. 로봇의 기본 원칙 때문에 인간에게 해를 끼
칠 수 없고, 독재나 부정부패는 물론이고 멍청한 편견도 갖지 않을 테니까요. 임기를 훌
륭하게 채운 다음에는 공직에서 물러나면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불멸의 존재나 로봇이
자신들을 통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상처를 받으면 안 되니까요.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라
고 할 수 있죠.”
“선천적으로 두뇌가 우수하지 못해서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만 빼면 말입니다. 양전자
두뇌는 인간의 복잡한 두뇌를 결코 쫓아갈 수 없으니까요.”
“그 부분은 조언자가 있으면 되겠지요.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누군가의 도움은 받아야
하니까요.”
바이어리는 수잔 캘빈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웃으시는 거예요. 수잔 캘빈 박사님?”
“퀸 씨가 미처 생각 못한 게 있어서요.”
“그 사람이 주장한 것 말고 다른 내용이 있다는 뜻이군요.”
“아마도. 퀸 씨가 말한 그 스테판 바이어리는, 장애가 심한 이 사람은 투표가 시작되기
3개월 전에 아주 비밀스러운 이유 때문에 지방으로 내려갔어요. 그러고는 당신이 그 유명한
연설을 할 즈음 때맞춰 돌아왔지요. 이 장애인은 예전에 이런 작업을 해 본 적이 있으니
까 두 번째도 쉽게 할 수 있었죠. 두 번째 작업은 첫 번째에 비해 더 간단했을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수잔 캘빈 박사가 일어나 옷자락을 똑바로 폈다. 떠날 준비를 하는 게 분명했다.
“로봇이 제1원칙을 깨뜨리지 않고 인간을 때릴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는 뜻이에
요. 딱 하나.”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87

“그게 뭔데요?”
수잔 캘빈 박사가 문께로 걸어가다가 불쑥 말했다.
“매를 맞는 상대도 로봇일 경우겠죠.”
활짝 웃는 수잔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그럼 잘 있어요. 바이어리 씨. 5년 후에 또 당신에게 투표할 수 있기를 바라요. 지역
조정자 선거에서 말예요.”
“너무 무리한 요구인데요.”
수잔 캘빈은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 아이작 아시모프, 김옥수 옮김, <아이, 로봇>, 우리교육, 2008.


188 문학과 삶(슬로리딩)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그럼 잘 있어요. 바이어리 씨. 5년 후에 또 당신에게 투표할 수 있기를 바라요. 지역 조정자


선거에서 말예요.”에서 수잔 캘리 박사가 바이어리가 계속해서 정치인이기를 원하는 이유
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2 “그가 로봇임을 비난하는 온갖 플래카드와 깃발과 고함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군중들은 점점


더 호전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애당초 연설은 아무 성과도 없었다. 폭도들이 무분별하게
외쳐대는 고함과, 폭도 한가운데서 더 심한 폭도 역할을 하는 근본주의자 집단이 규칙적으
로 외쳐대는 소리에 파묻혀 버렸기 때문이다.”에서처럼 로봇을 대하는 사람들의 방식에 대
해서 생각해 보고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는 부분은 없는지 이야기 나누어 보자.

3 로봇공학 제1원칙 “로봇은 인간을 해쳐서도 인간이 해를 입게 방치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로봇은 첫 번째 법칙과 상충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로봇은
첫 번째, 두 번째 법칙과 상충하지 않는 한 스스로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자.

4 “그는 이 두뇌를 집어넣을 몸체를 개발했다. 그런 다음 자신이 예전에 하던, 하지만 이제는
하지 못하게 된 모든 것을 훈련시켰다.”처럼 인간이었던 바이어리 씨가 교통사고 후 자신을
대체할 만한 로봇을 만들어 낸 행동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는지 글로 작성해 보자.

5 우리 일상 주변에 가까이 다가 온 로봇, 인공지능, 복제 연구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분야는


어떤 것인지, 내가 그러한 것들로 인해 얻게 되는 이익, 받게 되는 불이익에는 무엇이 있는
지를 찾아 글로 작성해 보자.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89

【질문의 숲】

<아이, 로봇>을 읽고 이해가 가지 않는 인물의 행동 방식이나 장면이 있다면 찾아 질문해


보고 팀원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190 문학과 삶(슬로리딩)

【체험의 숲】

융합 능력 개발을 위해 나의 전공이나 영역을 진단해 보고 현재의 나를 보완할 수 있는 융


합 항목을 설정한 후 구체적 계획을 수립해 보자.

활동 내용
나의 전공과 영역

나의 영역 진단 부족한 점

융합 항목

나의 전공이나 취미,
진로와 이질적인 것을
보완 방법 및 계획
선택해 이를 현재의
나에게 융합하기 위한
보완 방법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91

3 진융의 <소오강호>

작가 진융(金庸)은 홍콩에서 활동한 중국 무협소설의 대표 작가로서 구룽(古龍), 량위성(梁


羽生), 원루이안(溫瑞安)과 함께 중국 무협소설의 4대종사로 불린다. 본명이 차량융(查良鏞)인
그는 1950년대부터 진융이라는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사조영웅전(射雕英雄传)>,
<신조협려(神鵰俠侶)>,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천룡팔부(天龍八部)>, <소오강호(笑傲江湖)>,
<녹정기(鹿鼎記)> 등 중국문학사에 빛나는 작품들을 발표한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빠짐없이
TV 드라마나 영화 등으로 제작되었고, 특히 몇몇 작품들은 대략 10년을 주기로 새로 제작되
기를 거듭하고 있어 중국의 드라마와 영화는 진융의 무협소설을 빼놓고 논의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세계의 모든 중국인들이 애호하는바 중국인이 있는 곳에 진융의 무협소설이 있
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는 신문 『명보(明報)』를 창간하는 등 홍콩을 대표하는 언론인이
기도 하였고, 1980년대에는 정계에 발을 들여 홍콩기본법 기초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가 기초위원으로 참여한 홍콩기본법은 중국중앙인민정부에 의해 약간의 수정이 가
해지기는 하였지만 현재까지 기본틀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그는 중국 정계와도 우호적 관계
를 유지하여 1981년과 1984년에 중국을 방문하여 덩샤오핑과 단독 회견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는 덩샤오핑과 단독 회견한 최초의 홍콩인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1994년에 자신의 고향인 쟈싱(嘉興)에 ‘진융도서관’을 건립하고, 시후(西湖)에 ‘윈
숭서사(雲松書舍)’를 설립하여 모두 지방정부에 헌납하였다. 그가 거금을 들여 건립한 도서관
과 윈숭서사에는 그의 작품과 장서는 물론 다양한 서예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관광명소가 되
고 있다. 2018년 9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으며 시진핑 등 중국의 영도자들이 모두 조의를 표
했고, 그의 장례식에는 유명 작가, 학자, 정치인, 기업가들이 참여하였는데 여기에는 알리바바
그룹의 대표인 마윈(馬雲)도 들어 있었다.
특히 마윈은 작품 <소오강호>에 피력된 진융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작중
인물 풍청양(風淸揚)을 자신의 호로 삼았고, 고수들의 최후 대결이 벌어지는 마교의 본부인
광명정(光明頂)을 자기 집무실의 이름으로 삼았으며, 알리바바의 가치체계를 독고구검(獨孤九
劍)과 육맥신검(六脈神劍)으로 명명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자신의 기업적 상상력이 진융의 소
설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수시로 밝히기도 하였는데 실제로 ‘진융 선생이 없었다면 알리바바
가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작품 <소오강호>는 화산파 영호충이 무술과 인격을 연마하며 발전해가는 과정과 각 무림고
수들의 절세무공에 대한 집착을 날줄 씨줄로 하여 스토리가 전개되는 무협소설이다. 영화로
유명한 동방불패도 이 소설의 주된 인물 중 하나에 속한다. <소오강호>는 특히 마윈이 가장
애독한 작품의 하나로도 유명한데 마윈의 호인 ‘풍청양’과 집무실인 ‘광명정’, 기업의 가치체계
인 ‘독고구검’ 등의 이름과 이념이 모두 이 작품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을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소오강호>의 어떤 부분이 중국 IT기업의 선구자인 마윈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던 것
192 문학과 삶(슬로리딩)

일까? 그것이 읽기의 숲에 자료로 제시된 ‘검법전수’의 장에 잘 드러나 있거니와 우리는 이에


대한 천천히 읽기를 통해 진정한 융합의 정신과 실천에 대해 흥미로운 방식으로 접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읽기의 숲】

그 30개의 검술 초식〔招式: 무술의 구성 요소가 되는 동작〕은 모두 영호충이 배운 것


들이었다. 그러나 검을 쓰거나 발을 딛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해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
노인이 말했다. “뭘 꾸물거리나? 으흠! 지금의 네 수준으로는 30개의 초식을 하나의 기
운으로 녹여내기가 확실히 쉽지는 않겠네. 그래도 한번 해 보거라.” 그의 목소리는 나지
막하고 표정은 쓸쓸하여 마치 큰 상심에 빠져 있는 듯했지만 어투에는 한 가닥 위엄이
서려 있었다. 영호충이 생각했다. “그 말대로 못 해볼 것도 없겠지.” 그러고는 바로 ‘백홍
관일’의 초식을 구사하여 칼끝을 하늘로 향하게 했는데 두 번째 초식 ‘유봉래의’를 쓸 방
법이 없어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멈추어 버렸다. 노인이 말하였다. “아, 멍청하다, 멍청
해. 악불군의 제자가 그렇지. 틀에 갇혀서 변화융통을 모르는구나. 검술의 도는 떠가는
구름과 같고 흐르는 물과 같아야 해. 뜻이 가는 대로 맡겨둬야 해. ‘백홍관일’의 초식을
구사하면 칼끝이 하늘을 향하겠지. 그렇다고 기세를 따라 끌어내리지 못한다는 거냐? 검
술의 초식에 그런 자세는 없기는 하지. 그렇지만 생각을 전환해서 상황에 따라 쓸 수 있
는 거잖아.” 영호충은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나아가던 장검을 당기듯 멈추었다. 그러
자 자연스럽게 ‘유봉래의’의 초식이 나오더니 검의 초식에 힘이 빠지기 전에 ‘금안횡공’으
로 전환되었다. 장검을 머리 위로 지나게 하여 한 번 구부리고 한 번 치켜 올리자 가볍
게 ‘절수식’으로 변했는데 모든 전환이 천의무봉하여 마음이 상쾌해졌다. 당장 노인이 말
한 대로 하나하나 초식을 구사해 나가다가 ‘종고제명’에 이르러 검을 멈추니 더도 덜도
아닌 딱 30초식이 되었다. 순간 말로 형언하지 못할 환희가 일어났다.
노인은 얼굴에 인정해주는 기색이 없이 말하였다. “맞기는 하다만 인위적 흔적이 너무
드러나. 너무 둔하기도 하고. 고수와 시합을 한다면 영 아니겠지만 저 젊은 녀석을 상대
하기에는 그런대로 쓸 만하겠네. 가서 한번 해 보거라!”
영호충은 여전히 그가 자신의 태사숙〔작은 할아버지뻘 되는 스승〕이라는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가 무술의 고수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하여 즉시 장검을 아래로
내리고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후 몸을 돌려 전백광에게 말하였다. “전형! 해봅시다.” 전
백광이 말하였다. “자네가 이 30개 초식을 쓰는 것을 이미 봤어. 또 겨뤄보자니 뭘 겨루
자는 거야?” 영호충이 말하였다. “전형께서 손을 쓰기 싫다면 그거야 좋지요. 편할 대로
하세요. 아우는 이 노선배님께 가르침을 더 청할 생각이라 전형을 상대할 여가가 없습니
다.” 전백광이 외쳤다. “무슨 말 하는 거야? 나랑 산을 내려가지 않을 거야? 자네 때문에
내 목숨을 헛되이 버리라는 거야 뭐야?” 그러고는 몸을 돌려 노인에게 말하였다. “풍 노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93

선배님! 이 전백광은 어린 후배라 어르신을 상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손을 쓰


신다면 그것은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일 겁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하고
는 큰 돌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앉았다. 전백광은 크게 안심하고는 “칼 받아라!” 하고 외
치며 영호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영호충은 몸을 기울여 피하며 장검을 돌려 찔렀다.
방금 그 노인이 말한 4번째 초식인 ‘절검식’을 구사한 것이다. 그의 검이 한 번 나가자
뒤의 초식들이 물이 쏟아지듯 이어졌다. 검법이 가볍고 자유로워 어떤 초식은 그 노인이
조언해준 것과 같았지만 어떤 초식은 30개의 초식과 전혀 달랐다. 영호충은 ‘떠가는 구름
과 같고 흐르는 물과 같이, 뜻 가는 대로 맡겨두는’ 이치를 깨닫고 나서 검술이 갑자기
진보하여 넘실넘실 연속해서 전백광과 100여 초식을 교환하였다. 전백광이 갑자기 큰 고
함을 치며 칼을 들어 곧바로 내리쳤다. 영호충은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되어 손을 튕겨
그의 가슴으로 장검을 향했다. 전백광이 칼을 돌려 검을 쳐냈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쾌도와 장검이 부딪쳤다. 그는 영호충이 검을 세우기 전에 쾌도를 놓고 몸을 솟구쳐 두
손으로 영호충의 목을 쥐었다. 순간 영호충은 숨이 막혀 장검을 떨구었다. 전백광이 말하
였다. “네가 나를 따라 산을 내려가지 않는다면 이 어르신이 목을 졸라 죽여 버리겠다.”
원래 그는 영호충을 동생으로 부르면서 어투가 상당히 부드러웠다. 그러나 이렇게 100여
초식을 험하게 한바탕 겨루다 보니 성질이 솟구쳐 상대의 목을 힘껏 죄면서 스스로 ‘어
르신’이라 자칭한 것이다. 영호충은 온 얼굴이 검붉게 팽창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전백광
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일백 초식이든, 이백 초식이든 이 어르신이 이기기만 하면 너는
나를 따라 산을 내려가야 하는 거야. 니기미! 30초식 안에 이기겠다고 했던 약속, 신경도
안 써!” 영호충은 하하! 웃어주고 싶었지만 그의 열 손가락이 목을 조르고 있어서 어떻
게 해도 웃음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때 문득 노인의 말이 들려왔다. “멍청하구나! 손가락이 곧 칼인 것을! ‘금옥만당’ 초
식을 꼭 칼을 가지고 해야만 하나?” 영호충의 머리에 번갯불이 지나가며 오른손 다섯 손
가락을 빠르게 찔렀다. 바로 ‘금옥만당’의 초식으로서 중지와 식지가 전백광 가슴의 ‘전중
혈’을 찔렀다. 전백광이 숨이 막혀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무너졌다. 영호충
의 목을 조르던 손가락이 갑자기 풀어졌다.
영호충은 되는 대로 찌른 자신의 손가락으로 강호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만리독행’ 전
백광을 가볍게 찍어 바닥에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다. 그는 전백광에게
졸려 극심한 고통을 느꼈던 목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여색을 좋아하던 음적은 땅바닥에
서 몸을 쪼그리고 가볍게 경련하면서 두 눈을 희게 뒤집으며 기절해 버렸다. 이것을 보
고 있자니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갑자기 노인에 대한 존경심이 솟아올라 앞으
로 나아가 땅바닥에 엎어지며 절을 하였다. “태사숙님! 손자 제자의 무례했던 일을 용서
해주십시오.” 그러면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노인이 가볍게 웃으며 말하였다. “이제 내
가 되는 대로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겠지?” 영호충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절대 아닙니다. 다행히도 같은 문파의 선배님이신 태사숙님을 뵐 수 있게 되니 너무나
194 문학과 삶(슬로리딩)

기쁠 뿐입니다.”
풍청양 노인이 말했다. “일어나거라.” 영호충은 공손히 세 번 머리를 조아린 뒤 일어났
다. 노인은 얼굴에 온통 병색이 완연하고 초췌한 기색이었다. “태사숙님! 시장하시지요?
제가 지내고 있는 동굴에 마른 식량이 좀 있습니다.” 영호충이 말하면서 가지러 가려 하
자 풍청양이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태양을 바라보더니 가볍
게 말하였다. “햇볕이 따뜻하구나. 정말 오래간만에 햇볕을 쬐어보는구나.” 영호충은 이상
한 생각이 들었지만 직접 묻지는 못하였다. 풍청양은 땅바닥에 쪼그려 누워있는 전백광을
한 번 보더니 말하였다. “너에게 전중혈을 찍혔으니 그의 공력으로 한 시진(2시간)쯤 뒤
에 깨어나겠다. 그러면 또 너를 잡고 괴롭히겠지. 네가 다시 그를 패퇴시키면 순순히 내
려갈 수밖에 없을 거야. 그를 제압하고 나면 꼭 맹서를 시켜라. 나에 관한 일은 절대 누
설하지 말라고 말이야.” 영호충이 말하였다. “제가 방금 이긴 것은 얼떨결에 요행으로 성
공했던 것입니다. 검법으로 보자면 저는 그 적수가 못됩니다. 그를 제압하라시니…… 어
떻게 제압하라는……” 풍청양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원래는 네가 악불군의 제자라
서 너에게 무공을 전수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옛날 그때…… 그때…… 한 맹세가 있
구나. 살아있는 동안 결코 남들과 진짜 대결을 하지 않겠다고 말이지. 그날 저녁 네 검법
을 시험해본 것은 그저 화산파의 ‘옥녀19검’을 제대로만 쓰면 남들과의 대결에서 손에 쥔
칼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라는 점을 너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지. 네 손을 빌리지 않
으면 이 전백광에게 비밀을 지키도록 맹세를 시키기 어려울 것 같으니 나를 따라 들어오
너라.” 그렇게 말하면서 동굴로 들어가더니 그 구멍을 통해 뒤쪽의 동굴로 들어갔다. 영
호충이 따라 들어가니 풍청양이 석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석벽 위의 이 화산파 검법의
도형은 이미 대충 익혔겠지만 이것을 직접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일 것이다. 아아!” 그
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여기에서 내가 도형들을 본 일을 태
사숙님이 보고 계셨구나. 내가 넋을 놓고 이 도형들을 볼 때마다 동굴에 다른 사람이 있
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데, 만약…… 만약에 태사숙님이 적이었다면…… 아니
지, 만약 적이었다면 내가 알아차렸다 해도 목숨을 구할 수 없었겠지.” 그러고는 풍청양
의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악불군, 그 어린 녀석은 정말로 개똥도 몰라. 너처럼 정말로
좋은 재목이 그 녀석의 가르침 때문에 멍청한 소나 굼뜬 말처럼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영호충은 그가 스승을 욕하는 것을 듣자 분한 마음이 일어나 즉시 고개를 들고 말하였
다. “태사숙님! 저는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나가서 전백광에게 태사숙님의 일을 누
설하지 말라고 맹서하고 끝내지요.” 풍청양이 멈칫하다가 그 이유를 알고는 가만히 말했
다. “저자가 듣지 않으면? 저자를 바로 죽이기라도 할 거냐?” 영호충은 머뭇거리며 대답
을 못하였다. 전백광이 수차례 이겼으면서도 끝내 자신을 죽이지 않았는데 한 번 이겼다
고 바로 그를 죽일 수 있겠는가? 풍청양이 말하였다. “내가 네 사부를 욕하는 것이 싫다
는 거지? 좋다! 앞으로 그 말을 안 하면 될 거 아니냐. 그 애가 나를 사숙이라 부르니까
내가 그 애를 ‘어린 애’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겠지?” 영호충이 말하였다. “태사숙님께서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95

사부님 욕만 하지 않으시면 공손하게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풍청양이 가볍게 웃으며 말


하였다. “어째 내가 가르침을 받아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다?” 영호충이 허리를 굽히며 말
하였다. “아닙니다. 태사숙님! 실례를 용서해주십시오.”
풍청양이 석벽에 있는 화산파 검법의 도형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초식들은 분명히
우리 화산파 검법의 절묘한 초식들이다. 그 중 태반은 이미 실전되고 말았지. 악 뭐시
기…… 악 뭐시기도…… 흠흠…… 너의 사부조차도 모르는 거란다. 다만 절묘한 초식들
이기는 하지만 각각의 초식을 떼어내서 구사한다면 결국 사람들에게 간파되어 깨지게 될
것이고……”
영호충이 듣다가 마음이 꿈틀거리며 은연중 검술의 깊은 이치를 깨달아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걷잡을 수 없는 환희의 기색이 나타났다. 풍청양이 말하였다. “뭔가 알게 된 모양
이지? 한 번 들어보자.” 영호충이 말하였다. “태사숙님! 만약 여러 초식을 한군데 섞으면
적이 그것을 깨뜨릴 방법이 없다는 말씀이시지요?” 풍청양이 크게 기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내 원래 너의 바탕이 괜찮다고 생각했더니 과연 깨닫는 본성이 아주 높구나.
이 마교의 장로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석벽 위의 곤봉을 쓰는 사람의 형상을 가리켰
다. 영호충이 말하였다. “이들이 마교의 장로들이라구요?” 풍청양이 말하였다. “한 시진만
더 지나면 전백광이 바로 깨어날 텐데 지나간 옛날 얘기들을 묻고 있구나. 그러다 언제
무공을 배울 시간이나 있겠느냐?” 영호충이 말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태사숙님의 가르
침을 듣겠습니다.” 풍청양이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이 마교 장로들은 정말 너무나 총명
하고 재주와 지혜가 있는 사람들이었구나. 오악검파의 높은 초식들을 이렇게 철저하고도
깔끔하게 깨뜨렸다니 말이다. 다만 저들이 몰랐던 게 있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초식은
무공에 있지 않고 어두운 곳에서 꾸미는 음모와 함정 장치들이라는 걸 말이다. 교묘하게
설치한 함정에 빠져 버리면 어떤 높은 무공초식도 전혀 쓸 길이 없다는 거지……” 그렇
게 말하면서 고개를 드는데 아득한 눈빛이 마치 무수한 옛일을 회상하는 듯하였다.
영호충은 그가 씁쓸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분개하는 마음이 크게 일었으나 바로 반박
하지 못하였다. 그는 생각했다. “설마 오악검파가 무술로 이기지 못하자 비겁한 수단으로
사람을 해쳤다는 것일까? 풍태사숙님은 오악검파의 일원이면서 그 비겁하고 야비한 수단
이 영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구나. 그렇지만 마교의 사람들을 상대하는데 남몰래 음모
를 꾸민다 해서 크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닐까?” 풍청양이 계속 말하였다. “무
술을 가지고 논한다면 이 마교의 장로들 역시 상승무학의 입구조차 들여다보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그들은 몰랐어. 초식은 죽은 것이고, 그 초식을 쓰는 사람은 살아 있다는
것을. 죽어있는 초식이 아무리 절묘하다 해도 살아있는 초식을 만나면 손발을 묶이고 쉽
게 도륙되고 마는 거지. ‘살아있다’는 말을 잘 기억하거라. 초식을 배울 때 살아서 배워야
하고, 초식을 구사할 때 살아서 구사해야 하는 거다. 만약 틀에 묶여 변화를 모른다면 천
가지 만 가지의 절묘한 초식을 수련해도 진짜 고수를 만나면 결국 남김없이 깨지게 되는
거란다.” 영호충은 큰 환희심을 느꼈다. 그는 천성이 틀에 묶이는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196 문학과 삶(슬로리딩)

풍청양의 이 말들이 정말로 그의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서 연신 “예, 맞습니다! 살아서


배우고, 살아서 구사해야 합니다.”
풍청양이 말하였다. “오악검파의 무수한 멍청이들은 사부가 전수해준 검법의 초식들을
정밀하게 숙련하기만 하면 저절로 고수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흥! 당시 300수를
숙독만 하고 시를 지을 줄은 모르면서 죽어라 읊어대 봐라. 취미삼아 저속한 시 몇 편이
야 지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만의 시적 원천을 갖지 못한다면 큰 시인이 될 수 있겠느
냐고.” 그의 이 욕설 속에는 당연히 악불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영호충은 그것
이 완전히 맞는 말인데다 악불군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으므로 항변하지 않았다.
풍청양이 말하였다. “살아서 배우고 살아서 구사한다 해도 그것은 첫걸음에 불과해. 초
식이 없는 공격을 할 수 있어야 진짜 고수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거지. 네가 ‘각각의 초식
을 하나로 뒤섞으면 그것을 깨뜨릴 방법이 없다’고 말하더라만 그 말은 반쯤만 맞다고
해야 해. ‘하나로 뒤섞는 것’이 아니라 아예 초식이 없어야 해. 하나로 뒤섞여 있다 해도
초식의 흔적을 찾을 수만 있다면 적이 들어올 틈이 생기는 거라구. 만약 아예 초식이 없
다면 그것을 어떻게 깨뜨리겠느냐?” 영호충은 가슴이 마구 뛰고 손바닥이 후끈해지며 중
얼거렸다. “아예 초식이 없으면 어떻게 깨뜨리겠느냐? 아예 초식이 없으면 어떻게 깨뜨리
겠느냐?” 갑자기 그의 눈앞에 평생 본 적도 없고,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신천
지가 나타났다. 풍청양이 말했다. “고기를 자르려면 자를 고기가 있어야 하고, 나무를 쪼
개려면 쪼갤 나무가 있어야 하듯, 검술의 초식을 깨뜨리려면 깨어질 초식이 있어야 하는
거야. 무공을 배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 검을 들고 마구 휘두르며 날뛴다면 아무리 견문
이 넓다 해도 그 다음 번의 검이 어디를 찌르고 어떤 것을 찍을지 짐작할 수 없을 거다.
그래서 검술에 깊은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 초식을 깨뜨릴 수 없는 거야. 초식이
없으니 ‘초식을 깨뜨린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거다. 다만 무공을 배우지 않은 사
람은 초식이 없기는 하지만 쉽게 당하지. 진짜 상승 검술은 남을 제압할 뿐 제압당하지
는 않는단다.” 그는 죽은 사람의 정강이뼈를 하나 주워들고 아무렇게나 그 한 끝을 영호
충에게 겨누었다. “이 초식을 어떻게 깨뜨리겠니?”
영호충은 그 다음에 어떤 초식이 나올지 알 수 없어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이건 초
식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깨뜨릴 수 없습니다.”
풍청양이 가볍게 웃으며 말하였다. “바로 그렇지. 무술을 배우는 사람은 병기를 쓰든,
주먹과 발을 쓰든, 어쨌든 초식이 있게 되지. 그것을 깨뜨리는 방법을 알기만 하면 손을
쓰자마자 초식을 깨뜨리고 적을 제압하게 되는 거다.” 영호충이 말하였다. “만약 적에게
초식이 없다면요?” 풍청양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고수 중의 고수겠지. 그런
두 사람이 겨룬다면 막상막하의 싸움이 될 거야.” 한숨을 쉬고는 말하였다. “지금 세상에
그런 고수는 정말 찾기 어려워. 다행이 한두 사람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필생의 행운인
거지. 나도 평생에 겨우 세 사람을 만나봤지.” 영호충이 말하였다. “어떤 세 사람인가
요?” 풍청양이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미소 지으며 말하였다. “악불군의 제자 중에 이렇게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97

많은 일에 관심을 가지면서 검술수련에 전심을 기울이지 않는 어린 녀석이 있었네. 좋구


나, 아주 좋아!” 영호충이 얼굴을 붉히고 얼른 허리를 굽히며 말하였다. “제가 잘못했습
니다.” 풍청양이 미소 지으며 말하였다. “괜찮다, 괜찮아! 어린 너의 마음과 생각이 활발
한 것이 내 비위에 딱 맞아. 다만 지금 시간이 부족하니 이 화산파의 3~40개 초식들을
융합하고 관통하여 하나로 꿰어 보도록 해라. 그러고 나서 그걸 전부 잊어버리는 거야.
완전히 깨끗하게 잊는 거지, 하나의 초식도 마음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그렇게 어떤 초
식에도 화산검법이 없게 만든 뒤에 전백광과 겨뤄 보거라.” 영호충은 놀랍고도 기뻐서
“예!” 하고 대답하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석벽 위의 도형들을 살펴보았다. 지난 몇 달 동
안 이미 석벽 위의 화산검법을 익숙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초식을 배우는 데 다시 시
간을 쓸 필요는 없었다. 오직 전혀 이어지지 않는 검법 초식들을 하나로 꿸 방법만 찾으
면 되는 것이었다. 풍청양이 말하였다. “모든 것을 자연스러움에 맡겨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하는 곳으로 움직이고, 어쩔 수 없이 멈춰야 하는 곳에서 멈춰라. 하나로 꿸
수 없다면 그대로 둬라. 어쨌거나 조금의 억지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영호충이 대답하고는 오로지 자연스러움에 맡기니 너무나 쉬워졌다. 교묘하게 꿰어져도
그만, 서툴러도 그만이었다. 그렇게 3~40개 화산파의 절묘한 초식이 순식간에 하나로 이
어졌다. 그러나 융합하여 하나가 되려면 그 사이에 시작과 끝과 전환에 흔적이 없어야
하는데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장검을 들고 좌우로 베고 쪼개면서 석벽 위
도형의 검법초식들을 아예 마음에 두지 않았다. 비슷해도 그만, 비슷하지 않아도 그만,
그저 뜻 가는 대로 자유롭게 구속되는 일이 없을 뿐이었다. 가끔 순조롭고 매끈한 곳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마음에 흡족해 하였다.
스승을 따라 검법을 수련한 지 10여 년, 검법 수련에 있어서 그는 항상 전심전력 정신
을 차려 추호의 태만과 소홀함도 없었다. 악불군의 수업은 극히 엄격하여 제자들이 권법
을 수련하고 검을 쓰는 데 발동작 하나, 손동작 하나라도 위치를 벗어나거나 형식을 벗
어나면 곧바로 교정하곤 하였다. 모든 초식이 완전해져서 조금의 오차도 없을 때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을 해주는 것이었다. 영호충은 그 문하에 들어간 첫째 제자였고 천
성으로 승부욕이 남달라 사부와 사모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초식연습에 있어서 남보다
두 배로 자기를 엄격히 단속하였다.
그런데 풍청양의 가르침은 완전히 상반되어 마음 가는 대로 할수록 더욱 좋다고 하니
그의 마음에 딱 들어맞았다. 검을 쓸 때에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시원하여 수십 년 된 좋
은 술을 마음껏 마시는 것처럼 그 맛이 무궁하였다. 그렇게 정신없는 듯 취해 있는데 문
득 밖에서 전백광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영호형! 나와 보게. 우리 다시 겨뤄 보자구.”
영호충이 놀라 칼을 거두고 서서 풍청양에게 말하였다. “태사숙님! 이렇게 되는 대로 휘
두르고 베는 검법으로 저 사람의 쾌도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풍청양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막을 수 없어. 아직 멀었거든!” 영호충이 놀라 말하였다. “막을 수 없다구요?”
풍청양이 말하였다. “막으려 하면 당연히 막을 수 없지, 그렇지만 뭐 하러 막으려구?”
198 문학과 삶(슬로리딩)

영호충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깨달아 크게 기뻐하였다. “맞습니다. 저 사람이 저에게


산을 내려가자고 부탁하러 온 것이니 저를 죽이지는 못할 겁니다. 저 사람이 무슨 쾌도
의 초식을 쓰든 상관없이 그냥 제 공격만 하면 되겠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검을 들고
동굴을 나섰다.
전백광이 칼을 가로로 들고 서 있다가 말하였다. “영호형! 자네가 풍 노선배의 가르침
을 받고 나서 검법이 크게 발전했다는 것은 인정하네. 그렇지만 방금 자네에게 혈도를
찍혀 쓰러진 것은 잠시 방심했기 때문이라 나는 승복할 수 없네. 우리 다시 겨뤄 보자
구.” 영호충이 “좋습니다.” 말하고는 검을 뻗어 비스듬히 찌르는데 칼날이 흔들거리면서
힘이 전혀 없어보였다. 전백광이 놀라면서 말하였다. “이게 무슨 초식인가?” 영호충의 장
검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칼을 휘둘러 막으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영호충이 오른손을
뒤로 거둬 빈 곳을 향해 아무렇게나 찌르더니 뒤이어 칼자루를 급히 거두는데 그것이 스
스로의 가슴을 칠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목을 반대로 뒤집어 오른편 빈 곳을 공
격하였다. 전백광은 갈수록 기괴하게 생각하면서 그를 향해 가볍게 칼을 휘둘러보았다.
영호충은 피하는 일 없이 칼끝을 내밀어 상대의 아랫배를 찔렀다. 전백광이 “괴이하다!”
외치고는 칼을 돌려 거꾸로 막았다.
두 사람이 몇 번의 초식을 교환하는 동안 영호충은 석벽 위의 수십 개 화산검법의 초
식을 구사했는데 공격만 하고 수비를 하지 않는 것이 마치 혼자 검술 수련을 하는 듯했
다. 전백광은 그에게 몰려 손발이 어지러워지자 외쳤다. “나의 이 칼을 또 막지 않는다면
자네의 어깨가 베어져 나갈 걸세. 날 원망하지 말라구!” 영호충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
게 쉽지는 않을 거요.” 그리고는 ‘휙! 휙! 휙!’ 검을 세 번 쓰는데 모두 듣도 보도 못한
괴상한 방위에서 자르고 찔러 들어가는 것이었다. 전백광은 눈이 밝고 손이 빨라 하나하
나 막아내고는 반격을 하려 하는데 영호충이 갑자기 장검을 하늘로 던져버렸다. 전백광이
고개를 들어 검을 바라보는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먹이 코를 세게 때렸다. 갑자기
코피가 흘러나왔다 전백광이 놀라는 사이 영호충이 칼 대신 손을 써서 빠르게 뻗어 또
다시 전중혈을 찍었다. 전백광의 몸이 천천히 무너지면서 얼굴에 형언키 어려운 경악과
분노의 표정을 드러냈다. 영호충이 몸을 돌리자 풍청양이 그를 동굴로 불러들여 말하였
다. “또 한 시진 반쯤 검술 연마할 시간을 벌었구나. 저자가 이번에는 충격을 크게 받아
서 아까처럼 일찍 깨어나지 못할 거다. 그렇지만 다음에 겨룰 때는 아마 목숨을 걸고 덤
빌 게다. 양보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번엔 가서 형산파의 검술
을 익혀보자.”
영호충은 풍청양의 지도를 받고 난 뒤라 검법에 초식이 있으나 초식이 없는 듯하였다.
초식을 구사하는 의도가 있기는 하였지만 초식의 형태는 없었다. 원래 형산파의 절세 초
식은 변화막측하여 귀신같고 도깨비 같은 경향이 있는데다가 이렇게 되고 보니 눈에 보
이는 흔적이 전혀 없게 되었다. 전백광이 깨어나 7~80번의 초식을 겨룬 뒤 또 영호충에
게 쓰러지고 말았다.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199

날이 어두워진 후라 육대유가 밥을 날라 왔다. 영호충은 전백광의 혈도를 짚어 바위


뒤에 놓아두고 풍청양은 뒤의 동굴에서 나오지 않았다. 영호충이 말하였다. “요 며칠 식
욕이 늘었네. 여섯째 아우께서는 내일 올 때 밥이랑 채소를 좀 많이 가져다주게.” 육대유
는 큰 사형이 기운이 넘치는 것이 몇 달간 울적해하던 상황과 전혀 다른 것을 보고 기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윗저고리가 모두 땀에 젖어 있었다. 육대유는 사형이 검
법을 열심히 수련한다고 생각하고는 말하였다. “예! 내일 큰 통에 밥을 담아 오겠습니
다.”
육대유가 언덕에서 내려간 뒤 영호충은 전백광의 혈도를 풀어준 뒤 셋이 함께 식사를
하였다. 풍청양은 반 사발이 채 안 되게 먹고 배부르다 물러나고, 전백광은 분한 마음에
마음이 불편하여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저 밥을 뒤적이면서 욕을 할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왼손에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퍽!’ 하고 질그릇 사발이 10여 조각으로
깨져버렸다. 그릇조각과 밥알들이 몸이며 바닥에 온통 튕겨졌다. 영호충이 ‘하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전형! 밥그릇하고 싸울 건 뭡니까?” 전백광이 화를 내며 말했다. “니기
미! 나는 자네에게 화가 난 거라구. 자네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네가 공격만
하고 수비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긴 거 아니냐구! 말해 보라구, 이게 공평한 거야?
만약 내가 자네에게 양보를 하지 않는다면 30초식 안에 그 목을 따버릴 거라구. 흥! 흥!
니기미! 그 젊은 비구니…… 젊은 비구니……” 그는 분명히 젊은 비구니 의림을 욕할 생
각인 것 같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말이 입가에 맴돌기만 할 뿐 욕을 뱉지 못하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칼을 뽑아들고는 외쳤다. “영호충! 남자라면 다시 겨뤄보자.” 영호충이
말하였다. “좋습니다!” 칼을 치켜세우고 나아갔다.
영호충은 또 앞에 그랬던 것처럼 전백광의 쾌도를 상대하지 않고 교묘한 초식으로 그
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뜻밖에도 전백광이 험악하게 공격을 하였다. 20여 번의
초식을 막아낸 후 ‘휙휙!’ 하며 두 번 칼을 휘둘러 한 번의 칼은 영호충의 허벅지에, 다
른 한 번의 칼은 영호충의 어깨에 상처를 냈다. 다만 아무래도 칼에 사정을 두었기 때문
에 큰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 영호충은 놀라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여 검법이 어지러워지
면서 몇 개의 초식 이후에 전백광의 발에 맞아 쓰러졌다.
전백광이 칼날을 그의 목에 대고 말하였다. “또 싸울 테냐? 다시 싸운다면 너의 몸에
칼자국이 더 날거야. 죽이지는 않겠지만 팔다리가 떨어지고 피가 철철 흐를 거다.” 영호
충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싸워야지요! 이 영호충이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설마 우리
풍 태사숙님이 수수방관하겠습니까? 그냥 하시는 대로 두고 보겠느냐구요.” 전백광이 말
하였다. “그분은 선배고수라 나와 싸울 리가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 쾌도를 거두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영호충을 다치게 했다가 풍청양이 노하여 손을 쓰면
어쩌나 싶었다. 사람이 노인이기는 하지만 전혀 노쇠한 기색이 없고 정신과 기운이 안으
로 갈무리되어 있는데다가 눈동자에 영기가 은은한 것이 내공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검
술의 수준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더구나 칼을 써서 자신을 죽일 필요도 없이 그냥
200 문학과 삶(슬로리딩)

화산 아래로 쫓아내기만 해도 엉망이 되는 상황이었다.


영호충이 옷자락을 찢어 두 곳의 상처를 싸맨 뒤 동굴로 들어가 고개를 흔들며 쓴 웃
음을 지으며 말했다. “태사숙님! 저자가 책략을 바꿔 정말로 죽일 듯 공격합니다. 만약
저자에게 오른쪽 팔을 찍혀 칼을 쓸 수 없게 되면 이길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풍청양
이 말하였다. “다행히 날이 어두워졌으니 저자와 내일 아침 다시 겨루자고 말하거라. 오
늘 저녁 밤을 새워 하룻밤을 잘 써보자. 내가 너에게 세 개의 초식을 가르쳐주마.” 영호
충이 말하였다. “세 개의 초식이라구요?” 단지 세 개의 초식을 배우는 데 하룻밤의 시간
을 다 쓰면서 가르칠 게 있느냐는 생각이었다.
풍청양이 말하였다. “네가 그런대로 총명해보이기는 한다마는 진짜 총명인지 가짜 총명
인지 모르겠구나. 만약 진짜 총명하다면 오늘 밤에 그 세 개의 초식을 배울 수 있을 거
고, 자질이 부족하고 깨닫는 마음이 그저 그렇다면, 그러면…… 그러면…… 내일 아침
저자와 다시 싸워볼 것도 없이 그냥 패배를 인정하고 깨끗하게 저자를 따라 산을 내려가
거라.” 영호충은 태사숙의 말을 듣고는 그 세 초식의 검법이 특별하여 배우기가 아주 어
려운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 고개를 쳐
들고 말하였다. “태사숙님! 제가 만약 오늘 밤 사이에 그 세 개의 초식을 익히지 못한다면
저자의 한 칼에 죽을지언정 졌다고 항복하여 그를 따라 산을 내려가지는 않을 겁니다.”
풍청양이 웃으며 “그건 좋구나.”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한참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하였
다. “하룻밤 사이에 세 개의 초식을 배운다는 것은 너무 몰아붙이는 일이 될 수도 있겠
네. 두 번째 초식은 우선 당장은 쓸 일이 없으니 첫 번째 초식과 세 번째 초식만 우선
배우기로 하자. 그렇지만…… 그렇지만…… 세 번째 초식의 무수한 변화들이 두 번째 초
식에서 오는 것들인데 어떡하나? 좋아! 그러면 연결된 변화는 생략하고 쓸 만한 것만 익
히도록 해보자.” 그렇게 혼자 소리를 하면서 중얼거리다가 또 고개를 흔들기도 하였다.
영호충은 그가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는 부쩍 호기심이 일었다. 무공은
배우기 어려운 것일수록 위력이 더 강한 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풍청양이 혼잣말하듯
말하였다. “첫 번째 초식의 360가지 변화에서 한 가지라도 잊어버리면 세 번째 초식이
틀려질 수도 있는데 그것도 문제구나.” 영호충은 첫 번째 초식에만 360가지 변화가 있다
는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풍청양이 손가락을 꼽으며 하나하나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매(歸妹)는 무망(無妄)으로 나아가고, 무망은 동인(同人)으로 나아가며, 동인
은 대유(大有)로 나아간다. 갑(甲)에서 병(丙)으로 전환하고, 병(丙)은 경(庚)으로, 경(庚)
은 계(癸)로 전환한다. 자축(子丑)으로 넘어가고, 진사(辰巳)로 넘어가고, 오미(午未)로 넘
어간다. 풍뢰(風雷)로 한 번 변하고, 산택(山澤)으로 한 번, 수화(水火)로 한 번 변한다.
건곤(乾坤)의 괘가 서로 부딪치고, 진태(震兌)가 서로 부딪치며, 이손(離巽)이 서로 부딪
친다. 셋이 늘어나 다섯이 되고, 다섯이 늘어나 아홉이 된다…….”
그렇게 짚어나가면서 걱정하는 기색이 깊어지다가 말하였다. “얘야! 옛날 내가 이 한
개의 초식을 배울 때 세 달이 걸렸단다. 너에게 하룻저녁에 두 개의 초식을 익히라는 것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201

은 말도 안 되는 거지. 생각해봐라. 귀매가 무망으로 나아가고…….” 그렇게 말하다가 갑


자기 말을 멈추고는 넋을 잃은 듯 한참을 있다가 물었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더
라?” 영호충이 말하였다. “태사숙님! 방금 귀매는 무망으로 나아가고, 무망은 동인으로
나아가며, 동인은 대유나 나아간다고 하셨습니다.” 풍청양이 두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하
였다. “기억력이 괜찮구나. 그 뒤는 어떻게 되지?” 영호충이 말하였다. “태사숙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갑에서 병으로 전환하고, 병은 경으로, 경은 계로 전환한다…….”
그렇게 쭉 외워나가서 절반쯤 외다가 그 뒤가 기억나지 않았다. 풍청양이 신기해하며 말
하였다. “이 독고구검의 총론을 익힌 적이 있더냐?” 영호충이 말하였다. “배운 적이 없습
니다. 이걸 독고구검이라 하는 모양이죠?” 풍청양이 물었다. “배운 적이 없다면 어떻게
외울 수 있는 거냐?” 영호충이 말하였다. “방금 태사숙님께서 그렇게 외시는 것을 들었잖
아요.”
풍청양이 얼굴 가득 기쁜 빛을 띠고 허벅지를 치며 말하였다. “그러면 방법이 있다. 하
룻밤에 완전히 배우지는 못해도 억지로 기억할 수만 있다면 첫 번째 초식을 배우지 않아
도 된다. 세 번째 초식에서 절반의 초식만 배워도 되겠다. 기억해라. 귀매는 무망으로 나
아가고, 무망은 동인으로 나아가며, 동인은 대유로 나아간다…….” 그렇게 쭉 외워서 거
의 300자 넘게 외고는 말하였다. “한번 외워 봐라.” 영호충은 정신을 집중하여 기억했다
가 그대로 외웠는데 10여 개의 글자만 틀렸을 뿐이었다. 풍청양이 이것을 고쳐주자 두
번째 욀 때는 7글자, 세 번째에는 틀리지 않았다. 풍청양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좋
다, 정말 좋다.” 그리고는 다시 300여 글자의 원리를 전수해주고 영호충이 기억한 뒤 또
다시 300여 글자의 원리를 전수하였다. 그 ‘독고구검’의 총론은 거의 3천여 글자였고 내
용도 서로 연관되는 점이 없었다. 다만 영호충의 기억력이 특별히 좋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뒤를 기억하면 앞을 까먹곤 했는데 한 시진 남짓 계속하면서 풍청양이
거듭 짚어주자 비로소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풍청양은 처음부터 끝까
지 외워보라고 세 번이나 시켜 그가 전부 기억하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이 총론은 독
고구검의 근본 열쇠이다. 네가 지금 기억을 했지만 오로지 그것은 속성을 위해 억지로
암기한 것이지 그 가운데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후 잊어버리기 쉬우니
오늘부터 아침저녁으로 염송하도록 해라.” 영호충이 말하였다. “예!”
풍청양이 말하였다. “독고구검의 첫 번째 초식은 ‘총결식’이다. 다양한 변화가 들어 있
으므로 이 총결식을 몸으로 직접 연습해야 하지만 지금은 익히지 않아도 되겠다. 두 번
째 초식은 ‘파검식’이다. 온 세상 각 문파의 검법을 깨뜨릴 수 있다. 이것도 지금은 익히
지 않아도 된다. 세 번째 초식은 ‘파도식’이다. 단도, 쌍도, 유엽도, 귀두도, 대감도, 절마
도 등 각종 도법을 깨뜨릴 수 있다. 전백광이 쓰는 것은 한 칼로 하는 쾌도법이니까 오
늘 밤에는 저자의 쾌도법을 상대하는 부분만 익히도록 하자.”
영호충은 독고구검의 두 번째 초식이 온 세상 모든 문파의 검법을 깨뜨릴 수 있고, 세
번째 초식으로 모든 도법을 깨뜨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하였다.
202 문학과 삶(슬로리딩)

“독고구검이 그렇게 신통하고 오묘하다니 저는 정말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흥분하여


목소리까지 떨려나왔다.
풍청양이 말하였다. “독고구검의 검법은 너의 사부도 본 적이 없을 테지만 검법의 이름
은 들어봤을 거다. 그러나 너희들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았을 거야.” 영호충이 이상해하며
물었다. “왜 그랬을까요?” 풍청양이 대답 없이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 번째 초식인 파
도식은 가벼움으로 무거움을 제압하고, 빠름으로 느림을 제압함을 추구한다. 전백광 저
녀석의 쾌도가 정말 빠른데 너는 저자보다 더 빨라야 한다. 네가 젊기 때문에 저자보다
빠른 것이 가능하기는 하겠지만 나을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반드
시 이긴다는 보장은 못하는 거지. 그렇지만 나같이 이렇게 노쇠한 늙은이는 저자보다 빨
라야 하는데 유일한 방법은 먼저 초식을 내는 것이다. 상대가 어떤 초식을 낼지 짐작해
서 그 앞을 선점하는 거지. 상대가 손을 쓰기도 전에 이쪽의 장검이 그 급소를 향하게
된다면 적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상대가 안 되는 거지.”
영호충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상대의 행동을 짐작하여
기선을 잡으라는 가르침이군요.” 풍청양이 박수를 치며 칭찬하였다. “맞다, 맞아! 어린 녀
석이 가르칠 만하구나. 상대의 행동을 짐작하여 기선을 잡는 것이 바로 이 검법의 특징
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초식을 내기 전에 최소한의 징조가 있게 마련이지. 만약 상대의
왼쪽 팔을 공격할 생각이라면 그 눈빛이 반드시 그 왼쪽 팔을 보게 되겠지. 그때 만약
그 칼이 오른쪽 아래쪽에 있었다면 그것을 들어 올릴 거다. 이때 반원을 그리면서 위에
서 아래로 내리찍는 거지.” 이렇게 세 번째 초식 중에 쾌도법을 깨뜨리는 다양한 변화들
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분석해주었다. 영호충은 들을수록 마음이 트이고 정신이 상쾌해졌
다. 어린 시골아이가 갑자기 황궁의 내원에 들어간 것과 같아 보고 듣는 모든 것이 하나
같이 신기하였다. 이 세 번째 초식의 변화가 워낙 복잡하여 영호충은 짧은 시간에 그저
10분의 2, 3쯤만 알만하고 나머지는 그냥 기억해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애써 가르치
고 그렇게 집중하여 배우느라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백광이 동굴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영호형! 날이 밝았네. 깨어나기는 했는가?”
영호충이 놀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이구야! 날이 밝았구나.” 풍청양이 탄식하였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구나. 그렇지만 네가 배우는 속도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
구나. 지금 바로 나가 저자랑 싸워 보거라.” 영호충이 “예!” 하고 대답하고 눈을 감고 지
난 밤 동안 배운 것들의 대강을 가만히 한 번 생각해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눈을 뜨고
말하였다. “태사숙님! 한 가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어째서 모든 변화가
모두 공격하는 초식인 건가요? 공격만 하고 수비는 하지 않는 겁니까?” 풍청양이 말하였
다. “독고구검은 나아감만 있을 뿐 물러남이 없다. 한 초식, 한 초식이 모두 나아가 공격
하는 것이다. 상대가 수비하지 않을 수 없도록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수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검법을 창안한 독고구검 선배님은 스스로의 이름을 ‘구패’〔求敗:
패배하기를 구한다〕라고 지었다. 그분은 평생 패배를 구하였지만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203

이 검법을 쓰면 천하무적이라 수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약 그분이 칼을 거두어 수


비를 하도록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분은 정말 기쁨이 솟아 그것을 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호충이 혼잣말하듯 말하였다. “독고구패, 독고구패!” 옛날 한 선배가
칼 한 자루로 강호를 다님에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었던 일을 상상하였다. 칼을 돌려
수비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니 정말 놀랍고도 탄복할 일이었다.
전백광이 다시 외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나오라구. 내 다시 두어 군데 칼질을
해줄 테니까.” 영호충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갑니다!” 풍청양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하
였다. “지금 나가서 저자와 겨룬다면 아주 위험한 일이 하나 있다. 그가 만약 시작하자마
자 너의 오른쪽 어깨나 손목을 찍어버린다면 죽이고 살리는 것이 그의 마음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 전혀 반항할 힘이 없게 되는 거지. 이 일이 그저 걱정이구나.”
영호충이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들고 말하였다. “전력을 기울여보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밤새도록 전심전력 가르쳐주신 태사숙님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는
칼을 들고 동굴을 나섰다. 그러고는 바로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며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고 눈을 비비며 말하였다. “전형! 일찍도 일어나셨소. 어제저녁 잘 못 주무신 모양입니
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내가 지금 이 난관을 벗어나 몇 시진만 더 배운다
면 영원히 저 사람을 두려워할 일이 없으리라.” 전백광이 쾌도를 들어 올리며 말하였다.
“영호형! 정말로 나는 자네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네. 그렇지만 나를 따라 산을 내려가
지 않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피우니 어쩌겠나. 이렇게 싸우다가는 열 번, 스무 번 칼질을
받아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테니 정말 자네에게 못할 짓이 되겠네.” 영호충이 번쩍
아이디어가 솟아났다. “열 번 스무 번 칼질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냥 내 오른쪽 어
깨나 팔목을 한 번만 찍어 검을 쓰지 못하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나를 죽
이든 생포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백광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냥
자네의 항복만 바라는 건데 오른손, 오른 어깨를 상하게 할 일이 뭐 있겠나?” 영호충은
속으로 기쁘면서도 얼굴에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급하게
되면 결국 그런 야만스럽고 악독한 초식을 쓸 거잖아요?” 전백광이 말하였다. “말로 사람
을 몰아붙이지 말라구. 이 전백광은 첫째, 자네에게 원한이 없고, 둘째, 자네가 기개 있는
사내라는 것을 존중하네. 또 셋째, 정말 내가 자네를 크게 다치게 한다면 누군가 나에게
따지는 사람이 나올 걸세. 자! 시작하자구.” 영호충이 말하였다. “좋습니다. 전형이 시작
하시지요.”
전백광이 칼을 한 번 휘두르고는 이어서 비스듬히 쪼개면서 공격하였다. 쾌도가 햇빛에
빛나면서 기세가 정말로 사납고 험악하였다. 영호충은 ‘독고구검’ 중의 세 번째 변형초식
을 써서 그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런데 전백광의 도법은 정말로 너무 빨랐다. 칼을 내려
하면 상대의 도법이 이미 변화한 뒤라 결국 한 걸음 늦게 되었다. 영호충은 초조한 마음
이 들어 속으로 생각하였다. “망했구나, 망했어! 새로 배운 검법을 전혀 쓸 수가 없어.
태사숙님이 나를 멍청이라고 욕하고 계실 거야.” 다시 몇 개의 초식을 상대하고 나니 이
204 문학과 삶(슬로리딩)

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영호충은 몰랐지만 전백광도 영호충의 검법이 너무나 날


카롭고 사나워서 모든 초식이 자기 도법의 상극임을 보고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는 생
각하였다. “이 몇 차례의 검법은 틀림없이 나를 꺾을 수 있었는데 왜 일부러 한 걸음씩
늦추는 걸까? 아, 그렇구나! 사정을 봐주고 있는 거야. 내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려는 거지. 그런데 안 된다는 것은 내 알겠는데 스스로 물러날 수 있는 상황
이 아니니 별 수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갈 수밖에 없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쾌도를 휘
두를 때 힘을 충분히 쓰기가 꺼려졌다.
두 사람이 서로 꺼리는 게 있어서 모두 조심조심 상대를 해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겨
루노라니 전백광의 도법이 점점 빨라지고, 영호충의 독고검법 세 번째 변화초식도 점점
익숙해져서 쾌도와 장검이 번갯불을 튕기며 겨루는 솜씨가 갈수록 빨라졌다. 그때 문득
전백광이 큰소리로 외치면서 오른발을 날려 영호충의 배를 걷어찼다. 영호충은 비틀거리
며 뒤로 물러나며 생각을 번개처럼 굴렸다. “하룻낮, 하룻밤만 더 지나 내일 이때가 되면
틀림없이 저자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 그러고는 바로 칼을 떨구고 두 눈을 꼭 감으며
호흡을 멈추어 기절한 척하였다. 전백광은 그가 기절하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영호충이
꾀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몸을 굽혀 살펴볼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갑자기 일
어나며 습격하여 패배한 척하면서 승리를 꾀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칼을 가로로
하여 몸을 막고 몇 걸음 다가서며 말하였다. “영호형! 어떻게 된 건가?” 몇 번을 부르자
영호충이 천천히 깨어났다. 약한 숨결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우리…… 우리 시합
을 계속해야지요.”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하다가 왼쪽 다리를 휘청하며 다시 바닥에 쓰러
지고 말았다. 전백광이 말했다. “안 되겠네. 하루 쉬고 내일 나를 따라 산을 내려가도록
하세.” 영호충은 가타부타 대답 없이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하면서 계속 헐떡거렸
다. 전백광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그의 오른쪽 어깨를 잡고 부축하여
일으켰다. 그런데 그렇게 나아가면서 일부러 그랬는지 무의식중에 그런 것인지 영호충이
떨어뜨린 장검을 발로 밟고, 오른손으로는 쾌도로 몸을 보호하면서, 왼손으로는 영호충의
오른팔 혈도를 잡았다. 영호충이 수단을 쓰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영호충은 전신의 급
소를 그의 왼손에 잡혀 전혀 힘을 쓸 수 없게 되자 분노하여 혼잣말로 욕을 하였다. “누
가 너더러 도와 달래? 니기미!” 영호충은 절룩대며 동굴로 돌아갔다.
풍청양이 가볍게 웃으며 말하였다. “큰 힘도 쓰지 않고 이렇게 하룻낮 하룻밤을 벌었구
나. 조금 야비하고 후안무치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영호충이 웃으며 말하였다. “야비하고
후안무치한 작자를 상대하는 데는 아무래도 야비하고 후안무치한 수단이 최곱니다.” 풍청
양이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반듯한 군자를 상대할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영호충이 말
하였다. “설사 진짜 반듯한 군자라 해도 만약 저를 죽이려 한다면 순순히 죽임을 당할
수는 없겠지요. 별 수 없을 때에는 야비하고 후안무치한 수단도 조금 써야지요.” 풍청양
이 크게 기뻐하여 낭랑하게 말하였다. “좋다, 좋아! 그 말만 가지고도 위선적인 가짜 군
자들과는 다르구나. 대장부가 일을 하는데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거지. 흘러가는 구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205

름, 흐르는 물처럼 뜻 가는 대로 그렇게 하는 거지. 무슨 무림의 규칙이니 문파의 가르침


이니 하는 것들은 전부 니기미 개똥이라 해라!”
영호충이 가볍게 웃었다. 풍청양의 말이 정말로 그의 마음에 쏙 들어와 듣기만 해도
말할 수 없는 통쾌함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평소 사부에게 목숨을 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문파의 규칙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거나 무림의 법도를 어겨 화산파의 명예를 더
럽히지 말라는 당부를 누차 들어온 터라 태사숙의 이 말에 대놓고 찬성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위선적인 가짜 군자들’ 어쩌고 하는 말이 ‘군자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부를
비꼬는 것 같기도 하여 그냥 가볍게 웃으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풍청양이 바짝 마른 손가락을 뻗어 영호충의 머리를 쓰다듬고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악불군의 문하에 너 같은 인재가 있었다니 그 애송이가 사람 보는 안목은 있어서 아예
맹물은 아니었구나.” 그가 말하는 ‘그 애송이’는 당연히 악불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는 영호충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린 녀석이 딱 내 마음에 든다. 자자! 우리 독고
대협의 첫 번째 검법과 세 번째 검법을 다시 좀 익혀보자.” 그러고는 곧장 독고구검 첫
번째 검법의 대강을 설명하였다. 영호충이 그것을 이해하고 나서 다시 세 번째 검법 속
의 변화에 대해 설명과 시범을 함께 하며 자세하게 지도하였다. 뒤쪽 동굴에는 장검이
많이 널려 있었는데 두 사람은 화산파의 장검을 가지고 대련하며 초식을 연습하였다. 영
호충은 열심히 기억하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은 바로 묻곤 하였다.
이때는 시간이 충분하여 검을 배워도 전날 밤처럼 그렇게 바쁘지 않아 하나의 초식마
다 설명과 시범이 자세하고 충분하였다. 저녁밥을 먹고 난 뒤 영호충은 두 시진을 자고
나서 다시 초식을 공부하였다. 다음날 아침 전백광은 영호충이 전날 입은 상처가 가볍지
않다고 생각하여 소리를 질러 싸움을 걸지 않았다. 영호충은 기뻐하며 뒤의 동굴에서 계
속 검술을 익혔다. 정오가 조금 지나 독고구검의 세 번째 검법의 다양한 변화를 모두 완
전하게 익힐 수 있었다. 풍청양이 말하였다. “오늘 만약 저자를 이기지 못한다 해도 걱정
말거라. 하룻낮, 하룻밤만 더 익히면 어떤 경우라도 내일이 되면 필승일 것이다.” 영호충
이 대답하고는 화산파 선배가 떨궈놓은 장검을 하나 거꾸로 들고 천천히 동굴 밖으로 나
섰다. 전백광이 절벽 쪽에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어라? 전
형! 어째 아직 안 가셨소?” 전백광이 말했다. “영호형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어제
는 미안했는데 이제 좀 괜찮으신가?” 영호충이 말했다. “여전합니다. 전형에게 찔린 허벅
지가 아파 죽겠어요.” 전백광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때 형양에서 싸울 때 영호형의 상처
는 오늘보다 훨씬 컸는데 한마디도 약함을 보이는 말을 하지 않았었지. 내 자네가 꾀가
많아 일부러 꾀병을 부리며 약한 척하는 거 잘 알고 있네. 내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서 나를 공격하려는 생각이겠지. 속을 내가 아니라구.”
영호충이 웃으며 말하였다. “벌써 속으셨습니다. 지금 눈치 채도 이미 늦었습니다. 전
형! 받아요.”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검이 나아가 그 가슴을 찌르려 했다. 전백광이 얼른
칼을 들어 급히 막으려다가 허공을 치고 말았다. 영호충의 두 번째 검이 벌써 찔러 들어
206 문학과 삶(슬로리딩)

왔다. 전백광이 “정말 빠르구나!” 감탄을 하며 쾌도를 가로 눕혀 그것을 막았다. 영호충


이 세 번째 네 번째 검을 뻗으며 말했다. “더 빠른 것 나갑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검이 이어서 뻗어나갔다. 공세가 시작되고 나니 검에 검이 이어지면서 갈수록 더욱 빠른
검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정말로 독고구검의 정수를 배워 나아감만 있을 뿐 물러남이 없
었다. 모든 검이 하나같이 최고의 초식이었다. 10여 번의 검이 지나가고 나니 전백광은
간담이 서늘해져 어떻게 막아야 좋을지 알 길이 없었다. 영호충이 한 번 찌를 때마다 한
걸음씩 물러나다 보니 열 번 가량의 초식에 절벽 가까이로 밀려나갔다.
영호충은 공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쉭쉭쉭쉭!’ 연달아 네 번을 뻗었는데 하나같이
그의 급소를 겨누는 것들이었다. 전백광은 힘을 다해 두 번의 검을 막았지만 세 번째 검
은 아무리 해도 막을 길이 없어 왼쪽 발을 뒤로 후퇴하고 보니 공중을 밟았다. 그는 자
신의 뒤에 천길 깊은 계곡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떨어지면 몸이 박살나고
뼈가 쪼개질 판이었다. 그 위험천만 아찔한 순간에 쾌도로 강하게 땅을 찍으며 그 기세
를 타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때 영호충의 네 번째 검이 그의 목에 이르렀다. 전백광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영호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검의 끝은 시종 그의 목젖을 떠나
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전백광이 노하여 말하였다. “죽이려면 바로 죽일 것이지, 우물쭈
물 뭐하는 거냐?” 영호충이 오른손을 거둬들이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전형께
서 잠깐 방심하다가 이 동생에게 기선을 뺏긴 것이라서 제대로 된 승부가 아닙니다. 우
리 다시 해봅시다.” 전백광이 ‘얍!’ 하는 소리와 함께 쾌도를 휘두르며 광풍처럼 폭우처럼
공격해 들어가며 말했다. “이번엔 내가 먼저 공격해서 자네가 이득을 보지 못하게 하겠
네.” 영호충은 그의 강철 칼이 사납게 쪼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장검을 비스듬히 올려
곧바로 그의 배를 공격하면서 자신의 상체를 한쪽으로 비켜 전백광의 칼끝을 피했다. 전
백광은 그의 칼이 험하고 빠르게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쾌도를 돌려 그 검을 내리
쳤다. 자기의 힘을 생각해볼 때 도검이 서로 부딪치기만 하면 그의 장검을 쳐서 날려버
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영호충의 검이 한 번 기선을 잡자 두 번째 세 번째의 검이 끝
없이 펼쳐졌다. 모든 칼이 사나우면서도 정확하여 검 끝이 상대의 급소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전백광은 막을 도리가 없어서 다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0여 번의 초식
이 지나가자 전에 그랬던 것처럼 절벽 쪽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영호충이 장검을 아래로
깎아내리자 전백광은 하는 수 없이 칼을 들어 하반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영호충이
다섯 손가락에 힘을 빼고 왼손을 뻗어 그 틈을 뚫고 들어갔다. 다섯 손가락의 손끝이 전
백광의 가슴 전중혈에서 두 치도 안 되는 지점에 이르렀지만 손가락을 멈추어 혈도를 찍
지 않았다. 전백광은 두 번이나 그의 손가락에 전중혈을 찍힌 적이 있었다. 이번에 만약
다시 혈도를 찍히게 된다면 몸이 쓰러지는 곳이 땅바닥이 아니라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
질 판이었다. 그런데 그가 손가락에 힘을 빼고 멈추는 것이 봐주는 뜻이 분명하였다. 두
사람은 한참을 대치하다가 영호충이 다시 뒤로 뛰어 물러났다. 전백광은 돌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정신을 차리다가 돌연 고함을 지르면서 칼을 휘둘러 선공을 펼쳤다. 위에서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207

아래로 내리찍는 강철 쾌도의 위력이 맹렬하였다. 전백광은 이번에는 방향을 잡아 산을


등지고 섰다. 설사 영호충에게 밀려 뒤로 물러나더라도 산의 동굴에 밀려들어가게 될 것
이라 생각하고 한번 결사적으로 싸워볼 셈이었다.
영호충은 그가 구사하는 쾌도의 초식이 부리는 모든 변화를 이미 다 환하게 알게 되었
다. 그의 쾌도가 공격해 들어오자 오른쪽으로 몸을 비키고는 장검을 들어 그의 왼쪽 어
깨를 베었다. 전백광이 쾌도를 돌려 막으려 하는데 영호충의 장검은 이미 세력을 거두어
그의 왼쪽 허리를 찔러왔다. 전백광의 왼쪽 어깨와 왼쪽 허리는 불과 한 자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쾌도를 돌려 막는 초식에 수비 가운데 공격을 담아 반격을 할 생
각이었기 때문에 힘이 강하게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칼이 곧바로 떨쳐 나가는 형국이었
으므로 급박하게 칼을 거두어 허리를 보호할 길이 없었다. 전백광은 별 수 없이 오른쪽
으로 반 걸음 비켜났다. 영호충이 장검을 올리며 그의 왼쪽 뺨을 공격하였다. 전백광이
칼을 들어 막으려 하자 검의 끝이 갑자기 왼쪽 허벅지를 향해 나아갔다. 전백광은 막을
도리가 없어 다시 오른쪽으로 한 걸음 뛰어 피하였다. 영호충의 검이 계속 쏟아지는데
한결같이 그의 왼쪽을 공격하여 한 걸음씩 오른쪽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십여
걸음을 피하고 보니 어느 새 오른쪽 절벽의 끝으로 밀려나있었다. 그곳에 큰 석벽이 퇴
로를 막고 있어서 전백광은 암석을 등지고 예닐곱 개의 칼 꽃을 만들며 영호충의 장검이
어떻게 공격하든 상관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런데 ‘찌직!’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왼손의
소매와 왼쪽 옷자락과 왼 다리의 바지통이 장검에 여섯 곳이나 찢겨나갔다. 여섯 번의
검이 옷만 찢었을 뿐 살을 건드리지 않았지만 전백광은 분명히 깨달았다. 이 여섯 번의
검은 모두 자기의 어깨를 베고, 다리를 자르고, 배를 쪼개고, 가슴을 가를 수 있었다. 이
런 상황이 되자 삽시간에 모든 생각이 다 사라져 버렸다. 전백광은 ‘왁!’ 하는 소리와 함
께 입을 벌려 선혈을 쏟아냈다. 영호충은 세 번이나 연속하여 그를 죽음의 문턱으로 몰
고 갔던 것이다.
며칠 전만 해도 이자의 무공은 자신이 따라갈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생
사여탈의 모든 권한이 자기 손에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이기는 것도 아주 쉬워 힘이 남
아돌고 힘든 느낌이 전혀 없었다. 영호충은 미칠 듯한 환희를 느꼈다. 그런데 전백광이
크게 패배한 뒤 선혈을 내뿜은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말하였다. “전형! 이기고
지고는 언제나 있는 일인데 굳이 이러실 거 있습니까? 이전에 저도 형에게 몇 번이나 꺾
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전백광이 쾌도를 던지고 고개를 흔들며 말하였다. “풍 노선배의
검술은 신의 경지라 지금 세상에 아무도 대적할 사람이 없네. 나는 영원히 자네의 상대
가 될 수 없게 되었네.”
영호충이 그의 쾌도를 주워 두 손으로 건네며 말하였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제가 요
행히 이긴 것은 오로지 풍태사숙님의 지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풍태사숙님이 전형께 한
가지 부탁을 하셨습니다.” 전백광이 칼을 받지 않고 비통하게 말하였다. “나의 목숨은 오
로지 자네의 손에 달려 있는데 무슨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가?” 영호충이 말하였다. “풍태
208 문학과 삶(슬로리딩)

사숙님은 오랫동안 은거하시면서 세상사에 간여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번거롭게 하


는 것도 싫어하시구요. 전형께서 산을 내려가신 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어르신에 관한
말씀을 말아 주신다면 더할 수 없는 감격이겠습니다.” 전백광이 차갑게 말하였다. “그냥
칼을 한 번 휘둘러 나를 죽여 입을 막는 것이 더 깔끔하지 않겠나?” 영호충이 두 걸음
물러나 검을 칼집에 넣고 말하였다. “전에 전형께서 저보다 무예가 훨씬 높을 때에 만약
한 칼에 저를 죽였다면 어떻게 지금과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전형에게 풍태사숙님에 관
한 일을 누설치 말아달라는 것은 부탁을 드리는 것이지 협박하려는 뜻은 추호도 없습니
다.” 전백광이 말하였다. “좋네! 그렇게 하겠네.” 영호충이 크게 허리를 굽히며 말하였다.
“전형! 감사드립니다.” 전백광이 말하였다. “자네를 데리고 산을 내려오라는 명령을 받아
서 온 거였는데 이 일은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네. 그렇지만 이게 끝은 아닐세.
싸움으로 치자면 앞으로 평생 내가 자네를 이길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이것으로 끝나지
는 않을 걸세. 나의 목숨이 걸려있는 일이니 끝까지 엉길 수밖에! 내 하는 일이 사내답지
못하다고 욕하지는 말게. 영호형! 나중에 보세.” 그렇게 주먹을 감싸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떠나갔다.

…… (중략) ……

풍청양이 말하였다. “그렇다고 스스로 자기비하를 하지는 말거라. 독고대협은 최고로


총명했던 분이셨다. 그분의 검법을 배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다. 절
대 곧이곧대로 외거나 억지로 기억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이 독고구검을 훤히 통하게
되면 모든 것이 그것이 될 것이다. 그때는 모든 변화를 전부 잊어버리고 내버려둬야 한
다. 적을 상대할 때는 특히 철저하게 깨끗이 잊고 원래의 검법에 구속되지 않을수록 좋
다. 너는 자질이 아주 뛰어나서 이 검법을 배우고 수련하기에 좋은 재목이다. 더구나 지
금 세상에 정말로 굉장한 영웅이 꼭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이지. 앞으로 힘써 노력하도
록 해라. 나는 갈란다.”
영호충이 크게 놀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태사숙님! 어디…… 어디로 가시려구
요?” 풍청양이 말하였다. “나는 원래 이 산의 뒤에 살고 있었는데 벌써 수십 년이 되었
구나. 이제 일시적으로 흥이 일어 동굴을 나와 너에게 이 검법을 전수했다. 오직 독고선
배의 절세무공이 소멸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제 돌아가지 않고 뭐하겠느
냐?” 영호충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원래 태사숙님께서는 뒷산에 살고 계셨군요. 너무 잘
되었습니다. 제가 조석으로 시봉하면서 태사숙님의 외로움을 풀어드리겠습니다.” 풍청양
이 날카롭게 말하였다. “앞으로 나는 화산파 문하의 어떤 사람도 보지 않겠다. 너도 예외
가 아니다.” 영호충의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표정을 보고는 따뜻한 어투로 말하였다. “얘
야! 나와 너는 인연도 있고 뜻도 잘 맞는구나. 늘그막에 너 같은 좋은 청년에게 검법을
전수할 수 있어서 이 늙은이의 가슴이 정말 후련하다. 네가 만약 이 태사숙을 이해한다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209

면 앞으로 나를 찾아오지 말거라. 그것은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이니까!” 영호충이 시큰하


고 쓸쓸한 마음에 이렇게 말하였다. “태사숙님! 그건 왜 그렇습니까?” 풍청양이 고개를
흔들며 말하였다. “나를 만난 일에 대해서는 너의 사부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영호충
이 눈물이 글썽하여 말하였다. “알겠습니다. 당연히 태사숙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풍
청양이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다, 착해!” 그리고는 몸을 돌려 언
덕을 내려갔다. 영호충은 절벽 끝까지 나아가 그의 수척한 뒷모습이 표표히 언덕을 내려
가 뒷산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슬픔이 솟아올랐다.
풍청양이 영호충과 열흘 넘게 같이 지내는 동안 그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검법뿐이었
지만 그 말이나 품격이 존경스럽고 감탄스러웠으며 너무나 친근하여 형언키 어려운 의기
투합의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풍청양은 자신보다 두 세대가 높은 태사숙이었다. 그렇지
만 영호충의 마음에는 자신과 동시대의 지기를 만나 이제야 만나게 되었다고 탄식하게
되는 우의가 은근히 솟아났다. 스승 악불군보다 더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영호충은 생각
했다. “태사숙님이 젊었을 때는 성격이 나랑 비슷하셨을 거야. 천지에 두려운 것 없이 성
품이 가는 대로 일을 처리하는 성격이셨을 거야. 나에게 검법을 가르칠 때마다 항상 ‘사
람이 검법을 쓰는 것이지, 검법이 사람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고 하셨지. 그러면서 ‘사람
은 산 것이고, 검은 죽은 것이므로 산 사람이 죽은 검법에 구속되면 안 된다고 하셨지.’
정말 진실하고 틀림없는 진리인데 어째서 사부님은 이에 대해 말씀이 없으셨던 것일까?”
그는 잠시 중얼거리다가 생각하였다. “그런 이치를 사부님이 모르셨을 리는 없어. 다만
사부님은 내가 하도 제멋대로인 성격이라서 나에게 그 이치를 말했다가 내가 옳다구나
함부로 굴면서 검법수련의 법도와 격식을 벗어날까봐 걱정이 되어 그러셨던 거겠지. 내가
검술에 얼마간 성취를 하고나면 자세하게 설명해줄 생각이셨을 거야. 사제나 사매들은 무
공의 바탕이 부족하니 당연히 이러한 상승의 검술도리를 설명해줄 수 없었을 테고. 말해
봤지 소용없었을 테니까.” 이런 생각도 하였다. “태사숙님의 검술은 신의 경지에 들어섰
는데 안타깝게도 그 솜씨를 볼 수가 없었구나. 안목이 크게 열릴 수 있었을 텐데. 사부님
에 비해 태사숙님의 검법은 당연히 한 수 높은 것일 테고.” 그러다가 풍청양이 얼굴에
병색을 띠고 있던 것을 기억하며 생각하였다. “이 십여 일 동안 그분께서는 가볍게 탄식
을 하시곤 했는데 무슨 큰 상심되는 일이 있으셨던 것일까? 무슨 일이셨을까?” 탄식을
하고 동굴 밖으로 나와 검술을 연마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한동안 수련을 하다가 무심코 검을 쓰는데 뜻밖에도 그것은 화산검법의 ‘유봉래
의’였다. 그는 멍하니 놀라다가 머리를 흔들고 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아니
다!” 그리고는 계속 검법을 수련하는데 얼마 안 있어 무심코 검을 뻗는데 또 ‘유봉래의’
였다. 그는 고민에 빠져 생각하였다. “화산파의 검법을 익숙하게 수련해서 그것이 마음에
도장처럼 뿌리 깊게 찍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검을 쓸 때 약간만 삐끗하면 숙련된 화
산파 검법의 초식이 섞여 나와 독고검법이 아니게 되는 거야.” 그러다가 갑자기 이런 생
각이 들었다. “태사숙님의 말씀에 검을 쓸 때는 마음에 걸리는 일 없이 자연스러움에 맡
210 문학과 삶(슬로리딩)

기라 하셨지. 그렇다면 우리 화산파의 검법을 쓰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어? 또 형산파,


태산파의 검법이나 마교 10장로의 무공이 섞여있다고 안 될 게 뭐 있겠어? 만약 억지로
한계를 정해놓고 어떤 검법은 써도 되고, 어떤 검법은 쓰면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구속되고 막히는 거지.” 그런 뒤로는 뜻이 가는 대로 초식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때그때 적절하게 화산파의 검법이나 석벽에 새겨진 이런저런 초식을 결합해 보니 갑자
기 무궁한 맛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오악검파의 검법이 워낙에 서로 다르고, 특히나 마교
10장로의 무술은 6~7개의 서로 다른 문파에서 나온 것이라서 이렇게 서로 다른 무술들
을 하나로 융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보였다. 그는 오랜 시간을 연마했지만 아
무리 해도 융합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로 융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게 왜 어때서? 굳이 억지로 추구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고는 당장 그
것이 어떤 초식인지 구분하는 일 없이 생각나고 뜻 가는 대로 독고구검 속에 섞어 넣었
다. 다만 무수한 검법을 구사하는 중에 항상 ‘유봉래의’를 쓰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영호
충은 생각했다. “만약 내가 ‘유봉래의’의 초식을 이렇게 쓰는 것을 사매가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 진융 지음, 강경구 번역, <소오강호>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211

【말하기와 쓰기의 숲】

1 영호충이 적의 손에 목이 잡혀 꼼짝하지 못할 때 풍청양이 손가락을 칼 대신 쓸 수 있다는


암시를 하여 대결에서 승리하도록 한다. 틀에 묶이지 않는 이러한 사고의 전환이야말로 융
합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각자 사고의 전환을 통해 잘 풀리지 않던 삶의 문제, 현실의 문제
를 해결한 경우를 말해 보자.

2 이 소설에 의하면 융합에는 서로 다른 무술을 뒤섞는 물리적 융합, 다른 무술들이 서로 만나


녹아서 전혀 다른 무술이 되는 화학적 융합, 각각의 무술초식이 고유한 특징을 유지하면서
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는 진화적 융합 등이 있을 수 있다. 우리의 환경을 이루는
과학, 기술, 체육, 미술, 노래, 문학, 사상,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융합의 예를 찾아보고 그
것이 위에서 말한 융합 중 어떤 경우에 속하는지 말해 보자.

3 이 소설의 풍청양이 말한 대로 사람이 살아있어야 검법이 살아난다. 그것이 과학이든, 기술


이든, 체육, 미술, 노래, 문학, 사상, 종교이든 상관없이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야 그것이
살아날 수 있다. 각각의 영역에서 남다른 추구와 성취를 보여준 인물을 찾아 그들이 어떻
게 생생한 살아있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개척할 수 있었는지 토론해 보자.

4 풍청양은 정해진 초식이 없는 검법은 이길 수가 없다고 말한다. 정해진 초식, 정해진 규범은
우리의 기술과 삶을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는 있지만 새로운 세계를 열지 못한다. 그
럼에도 먼저 정해진 규범을 배우고 나서야 그것의 깨뜨림이 가능하다. 규범은 인큐베이터와
같아 우리를 어느 수준까지 키워주지만 그것에 머물러 있는 한 진정한 성장과 발전은 불가
능하다. 우리를 키워주는 동시에 우리를 구속하는 다양한 규범들에 대해 찾아보고 그것의
타파를 통해 어떤 새로운 발전이 가능한지 글로 표현해 보자.

5 풍청양은 검술 겨루기에서 이기려면 상대가 공격하려는 징조를 먼저 읽고 기선을 잡아야 한


다고 말한다. 지금은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서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새 시대의 징
조를 만나고 있다. 공상과학 만화에나 나옴직한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AI 시대의
징조가 될 만한 일들을 예로 들어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글로 표현해 보자.
212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융합 역량은 기존의 틀에 묶이지 않는 태도와 질문에서 싹이 튼다. 기존의 틀이나 관념에


묶이지 않고 ‘왜 ~하면 안 되는가’의 방식으로 질문을 만들고 서로 토론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213

【체험의 숲】

알리바바를 창업한 마윈은 천하의 고수들이 모여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는 마교의 본부 광


명정을 자기 집무실의 이름으로 삼았다. 각자 자신이 체험한 최고의 고수들을 자신의 세계에
불러들일 수 있다면 누구를 불러들이고 싶은가? 왜 그 사람을 불러들이고 싶은지, 그리고 기
대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말해 보자.

초빙 고수 초빙 이유 초빙 결과
214 문학과 삶(슬로리딩)

4 최재천의 통섭 이야기

최재천 교수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우리 시


대의 대표적인 통섭학자이다. 1953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학교 동물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생태학부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 생물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
부 석좌교수, 이화여대 에코과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9년 미국 곤충학회 젊은과
학자상, 2000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그밖에 국제환경상, 올해의 여성운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생물학자에서 출발한 최재천 교수는 사회생물학, 생태학, 진화심리학 등으로 학문의 범위를
점차 확장해 나가고 있으며, 현재 학문 간 교류와 소통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과학자의 서재,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통섭의
식탁, 생각의 탐험 등 지금까지 30권 이상의 저서와 번역서를 남기고 있는 그는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통섭이라는 제목으로 번
역·출간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최재천 교수에 의해 보편화된 이 ‘통섭(統攝)’이라는 용어는 ‘전체를 도맡아 다스린다’는 뜻
을 지니고 있는, 불교 용어에서 차용한 말이다. 이는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는 학문의 영역도 이와 같은 관점으로 파악하였다. 개
별 학문의 영역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서로 소통이 가능하도록 장벽을 낮춘다면 학문간 융합
(convergence)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융합 또는 통섭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대학에서는 학제간 연구를
통한 융합 학문이 유행하고 있고, 기업에서는 통섭형 인재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
다. 복잡하고 다양한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느 특정 분야의 전문적 지식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의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관점에서일 것이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통섭은 융합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통섭과 융합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용어이다. 통섭은 녹아서 새로 태어나는 ‘생물학적
합침’을 의미한다면 융합은 ‘화학적 합침’에 가까운 개념이다. 결국 통섭이든 융합이든 경계
허물기를 핵심으로 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 나갈 지혜를 찾기 위해 이제는 하나의 학문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가 에세이에서 강조하듯 우물
을 깊게 파려면 넓게 팔 줄 알아야 한다. 여럿이 함께 우물을 파기 시작하면 훨씬 더 깊게 팔
수 있듯이 지식 간의 경계를 허물고 상호 협력한다면 좀 더 깊고 넓은 지식을 창출할 수 있
을 것이다.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215

【읽기의 숲】

학문과 학문 사이에 비자는 필요 없어


세상은 학문의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마구 넘나드는 인재들이
이끌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등 유명
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네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철학자이자 과학자
였고, 작가였지요. 그리고 어느 한 분야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만능인들
이었습니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지식이 그리 대단하지 않
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래서 이것저것을 폭넓게 배울 수 있었고, 금세 해당 분야에 대해
섭렵할 수 있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정조 임금을 도와 수원 화성을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세계적으로 소위
신도시 건축이 유행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워싱턴 D.C.가 만들어지고,
러시아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건설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정조 임금이 그러한
세계적 흐름을 간파한 것이지요. 수원에 화성을 건축하자는 정조의 제안에 정약용 선생은
무어라 대답했을까요? 적어도 “제가 MIT에 가서 토목공학 박사 학위를 따서 돌아오겠습
니다.”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중국에 가서 성 짓는 법에 대한 공부를 하
고, 책 몇 권 보고 돌아왔겠지요. 그것만으로도 당시 조선 팔도에서는 최고의 토목 공학
자 노릇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로써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고, 여러모로 참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하며 학문의 깊이가 달라졌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인간의 과학과 문화는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축적한 지식의 총량을 가
늠하면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개인이 여러 학문에 통달하는 것은 불가
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배우려면 좁고 깊게 파고들어야 하는데 이것을 바로
‘전공’이라고 합니다. 여러 학문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주위에서는 다들 ‘한우물만 파라’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오지랖이 넓어 이것도 저것도 궁금해 했는데 그 때문에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늘 야
단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같은 시대에는 오히려 저처럼 오지랖 넓은 사람이 필요합
니다. 학문과 학문을 넘나들며 오지랖 넓게 참견하는 사람들이 인기 있어졌죠. 학문들이
각기 엄청나게 깊은 지식이 쌓여 있는데 이것을 서로 연결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학문들끼리 서로 사귀려 들지도 않습니다.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로 유명한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중에 <멘딩 월(Mending Wall)>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담을 고치며’라는
말 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제목처럼 이 시는 프로스트가 겨울에 무너진 낮은 돌담을
이웃과 함께 고치며 쓴 시입니다. 여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216 문학과 삶(슬로리딩)

만든다.’
담이 없으면 이웃이 아니라 한집안 식구입니다. 그런데 이웃과 식구처럼 지내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때로 적절한 경계가 있어야 개인 공간도 확보하면서 돈독한 사이
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왜 물리학과 생물학, 공학이 따로 있겠어요? 다 그럴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학문 역시 돌담을 사이에 둔 이웃처럼 따로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웃과 담이 너무 높으면 왕래가 불가능합니다. 서로 소통할 수 있을 만큼 담을
조금 낮춰야 합니다. 저는 통섭이라는 책의 우리말 서문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학문의
국경을 넘나들 때 비자 검사 좀 하지 말자.’
학문과 학문 사이에 비자는 필요 없습니다. 요즘 세계 여러 나라에서 대한민국 사람들
에게는 따로 비자를 만들 필요 없이 여권만 있으면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허가
해 준다고 합니다. 학문에서도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담은 존재하지만 쉽게 넘나들며
교류할 수 있도록 경계의 비자를 없애자는 거지요.
물론 그렇다고 한 가지도 제대로 못 하면서 아무 데나 기웃거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자
기 우물 하나는 확실하게 팔 줄 알아야지요. 그러면서 옆에서 다른 우물을 파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서로 우물 파는 방법이나 협력할 방법 등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우물을 제대로 파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
습니다.
이 방대한 지식의 세계에서 홀로 넓은 우물을 판다고 생각해봅시다. 평생을 파도 지구
표면 하나 다 못 긁어보고 죽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학문 세계가 그렇습니다. 천재가
아닌 이상에야 예전처럼 한 사람이 여러 학문을 두루 깊이 배우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
었습니다. 천재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닐 테고요. 그래서 나온 개념이 바로 통섭입니다. 개
인이 여러 분야에 통달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전문가가 한데 모여서 문제를 풀어나가자
는 거지요. 서로의 식견을 바탕으로 토론을 하고, 생각을 하다 보면 예전과는 비할 수 없
는 굉장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질 것입니다.

한 우물만 파서는 살아갈 수 없어


‘열두 가지 재주에 저녁거리가 간데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한 우물을 파야 한다
는 뜻이지요. 그런데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다양한 기술을 조합하는 것이 중요해졌
지요. 그러다 보니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한 우물을 파되, 그 외
에 다른 우물도 넓게 팔 줄 아는 사람을 원하고 있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여러 분야의 경
계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지식과 가치를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통섭(統攝)이라는 말은 원효대사의 말에서 빌려온 단어로,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책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단어의 뜻은 줄기 ‘통
(統)’과 잡다 ‘섭(攝)’이라는 한자를 합쳐 큰 줄기를 잡다하게 다루는 것, 즉 ‘전체를 도맡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217

아 다스리다’는 뜻이 됩니다. 이제 통섭은 바람직한 미래 학문 형태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회과학이 각자의 지식을 융합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
지요.
세상은 자꾸만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도 그만
큼 어려워지고 있지요. 한 사람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성격이 간단하지도 않습니
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접근하려면 결국 통섭형 인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통섭형
인재는 이것저것 조금씩 잘하는 팔방미인이 아닙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 하나가 확
실하게 있되, 다른 전문 분야에도 충분한 소양을 갖춰 그들과 공동 연구를 할 수 있는 인
재를 말합니다.
『뉴욕타임스』에서는 이제 20세기를 풍미했던 경영학 석사(MBA)의 시대가 저물고 ‘전
문 이학 계열 석사(PSM, Professional Science Master)’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습
니다.
PSM은 과학, 수학, 경영, 법학 등 실용 학문을 함께 가르치는 석사 과정입니다. 이 프
로그램에서는 이공계 사람들에게는 인문·사회과학 지식을, 반대로 인문·사회계 사람들
에게는 과학 지식을 가르쳐 기업에 필요한 융합형 인재를 양성합니다. 아무리 유능한
CEO라도 과학을 모르면 경영이 힘들고, 실력 좋은 엔지니어라 해도 인문학을 모르면 경
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대학들이 먼저 이 분야를 선도하고 있고, 영
국과 호주 대학들에서도 속속 PSM 과정을 개설하고 있습니다.
미국 인사 관리 전문 컨설턴트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래에는 레이저 빔처럼
어느 한 곳만 비추는 인재가 아니라, 시계처럼 360도 자유자재로 돌아가는 전구형 인재가
필요하다.’ 이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통섭형 인재에 대해서는 학계를 넘어 재계에서
까지 화두가 되고 있지요.
이 복잡 무변의 시대를 헤쳐 나가려면 하나의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볼 줄 알아
야 합니다. 그렇기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보며 합
의를 도출해야 합니다. 인지과학은 인간의 두뇌를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두
뇌는 한 가지 잣대로만 잴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분야에는 심리학, 철학,
컴퓨터 공학, 기계공학 같은 부모 학문들이 통섭하여 새로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통섭의 시대라고 해서 각자의 정체성이 흐려지도록 마구 섞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통섭
의 핵심은 합병이 아니라 경계 완화입니다. 인문학은 인문학대로 있고, 자연과학은 자연과
학대로 있으되 서로 무엇을 하는지 들여다보며 뭔가 가능한 것을 찾아가자는 것이지요.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인간의 수명이 점점 늘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고령화 시대를
넘어 초고령화 시대라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정년은 없어질 겁니다.
사람들은 일생 동안 약 70여 년 가까이 일을 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한
가지 직업으로는 버티기 힘들게 되는 것이지요.
현재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직장 생활을 하게 될 때가 되면 아마 직업을 다섯 번
218 문학과 삶(슬로리딩)

이상 바꾸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습니다. 첫 직장을 다니다 40대에 퇴사를 하고도 다음


일을 찾아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새 직장이 꼭 이전 직장과 비슷하리란 보장은 없습니
다. 그래서 이들은 본인의 전공이나 경력과 무관한 직종이라도 얼마든지 적응할 수 있어
야 합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때문에라도 통섭형 인재는 중요합니다. 한 분야에 갇히지
말고 계속해서 넘나들기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이런 소양을 갖추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지도 모릅니다.

당장 돈을 못 벌면 써먹을 수 없는 공부일까?
저는 그동안 여러 글을 써 왔습니다. 그리고 그 글들의 주제는 하나같이 ‘자연에서 배
워라’입니다. 동물들은 생각보다 대단한 존재라서 인간이 배울 점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들은 자연을 적극적으로 들여다보며 동·식물에게서 배울 점을 얻어야 합니다.
10여 년쯤 전에 저는 의생학(擬生學)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구상했었습니다. 인문
학과 자연과학을 공학의 실로 꿰어보자는 취지였지요. 의생학의 ‘의’라는 글자는 헤아릴
‘의(擬)’자를 쓰는데, 다르게 말하면 흉내 낸다는 뜻이 있습니다. 의태어 또는 의성어라는
단어에도 같은 한자가 쓰입니다.
의생학을 활용한 쉬운 예로는 우리 가방이나 옷, 신발 등에 많이 사용하는 벨크로
(Velcro)의 발명이 있습니다. 편한 말로 찍찍이라고도 하지요. 이것은 스위스 사람인 조르
주드 메르스탈(Geroge de Mestral)이 산우엉의 씨를 보고 이를 모방하여 만든 것입니다.
메르스탈이 어느 날 숲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왔더니 옷에 산우엉 씨가 가득 붙어있었다
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뗴어내려 하는데, 생각보다 잘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지요. 이에
의문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씨에 작은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갈고리를
이용해 동물의 털에 달라붙어서 먼 곳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진화한 것입니다. 메르스탈
은 이를 응용하여 찍찍이라고 하는 벨크로를 만들었고, 현재 이것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유용하게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의류나 잡화 등에는 물론이요, 인공 심장의 심실을 접합
하는 데까지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우리 생활에는 자연을 모방하여 만든 것들이 많습니다. 거미줄을 모방하여
만든 강철 섬유, 광합성을 하는 식물의 잎을 모방한 태양 전지 등 참으로 다양한 종류가
있지요. 이렇게 공학과 생물학의 아름다운 통섭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인문학의 향
기를 더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겠지요. 이러한 취지를 살리고자 저는 몇 년 전부터 의생
학연구센터(The Center for Biomimicry and Ecololgic)를 만들어 자연의 아이디어를 배
우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궁극적으로 자연계의 섭리를 배워야 합니다. 동물
들은 어떻게 사는지 그들의 사회가 어떤지를 연구하는 것은 인간 사회 발전에도 큰 도움
이 됩니다. 즉 알고 보면 써먹을 데가 많은 학문이란 이야기입니다.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219

기초학문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당장 눈으로 보기에는 재미나 있어 보이지 먹고사는 데


아무런 쓸모없이 여겨지지만,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는 학문의 뒤를 잘 살펴보면 기초학
문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기초학문에서 무언가를 응용하는 경우도 많습니
다. 그래서 학문은 고르게 발달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지금도 저는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 최재천, 『생각의 탐험』, 움직이는서재, 2016.


220 문학과 삶(슬로리딩)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통섭형 인재’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 설명해 보자.

2 자연을 모방하여 무언가를 개발하는 것은 어떤 장점이 있을지 이야기해 보자.

3 융합의 기본은 경계를 허무는 일이므로 소통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


에서 분야와 분야 간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하는 제도적·문화적 장애 요소에는 어떤 것들
이 있는지 말해 보자.

4 저자가 본문에서 인용한 로버스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멘딩 월(Mending Wall)>에서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는 구절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서술해 보자.

5 의생학이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공학의 실로 꿰어보자는 취지로 최재천 교수가 만들어낸


새로운 학문 영역을 일컫는 말이다. 의생학 분야에서 개발된 제품의 예를 찾아서 제시해
보자.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221

【질문의 숲】

본문을 읽고 자유롭게 질문을 만들어 보자. 그 질문을 바탕으로 팀원들과 토의·토론한 내용


을 정리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222 문학과 삶(슬로리딩)

【체험의 숲】

1 주변에서 융합 제품이나 융합 콘텐츠를 찾아보고, 어떤 요소들이 결합되었는지 분석해 보자.


그리고 그 제품 또는 콘텐츠가 지니는 장단점을 제시해 보자.

융합 성과물

융합 제품 또는
융합 콘텐츠

융합 요소

장점

단점

2 나의 전공 분야와 다른 영역을 융합하여 새롭게 창출할 수 있는 ‘융합 상품 개발 아이디어’를


제시해 보자.(예: 제품 + 제품, 제품 + 디자인, 제품 + 서비스, 서비스 + 서비스 등)

융합 상품 개발 아이디어

융합 요소

아이디어의 원천

기대 효과
제5장 문학과 융합 역량 223

【감상의 숲】

E=mc2

신형식
소싯적 그믐날 초저녁
작은누나랑 보건소 가는 길에
신작로를 지나가는 불 작대기 보았다
이튿날 그 불이 아랫동네 죽은 노인의
혼불임을 알았다

그렇다
빛(c) 항상 무언가(m)의 소멸로 비롯되므로
빛 뒤엔 무(無)

빛이 비치는 공간에
에너지(E)는 보존돼야 하므로

무언가 소멸된 빛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또 한 장의 빛이 필요함을
일석 공(公)은 백 년 전 알아채서
세상을 밝혔고

나는 그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 『쓸쓸하게 화창한 오후』, 모악, 2019.


224 문학과 삶(슬로리딩)

【문제 은행】

1 감성 로봇의 궁극적 형태로 꼽히는 휴머노이드(humanoid)와 사이보그의 존재는 지금으로


서는 양날의 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인공지능 로봇의 빛과 그림자를 생명윤리, 행복지
수, 일자리 문제, 정의(正義), 젠더 갈등, 인공 장기 등의 관점에서 서술해 보자.

2 진화는 항상 발전적인지에 대해 말해 보자.


(※예: 생물학적 진화와 사회적 진화의 차이 비교)

3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연결과 융합에 있다. 이 두 요소를 통해 창조의 방정식을 풀어나가


겠다는 것이고, 사람과 기계 사이의 인터페이스, 즉 ‘사이’를 가급적으로 좋게 만들어 이 둘의
공진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의도이다. 공진화는 한 집단이 진화하면 관련된 다른 집단도 함께
진화한다는 의미인데, 인간이라는 아날로그적 존재와 기계라는 디지털적 존재가 힘을 합쳐
상승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어령 선생님이 말한 디지로
그(Digilog) 개념이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디지로그의 경우에 대해 서술해 보자.

4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 토론해 보자.

5 아이작 아시모프는 나중에 로봇공학의 0원칙 “로봇은 인류가 위험에 처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를 추가한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6 내가 본 로봇 관련 영화나 소설 가운데 <바이어리>와 유사한 이야기를 하나 골라 비교해 보자.

7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자의식을 얻게 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을 때를 가정해서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8 로봇이나 기계가 나의 신체의 일부를 대체하게 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예: 애니메이션, 영화 <공각기동대>와 비교)

9 아무리 변신하고 융합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무엇보다도 사랑, 우정, 호의, 이해,
공존과 같은 인문적 가치가 그렇다. 각자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환경이 몰라볼 수준으로
변했다고 가정하고 자신에게 변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는 것, 혹은 남기고 싶은 것으로
무엇이 있을지 글로 표현해 보자.

10 통섭, 통합, 융합은 조금씩 의미의 차이가 있는 단어들이다. 그 뜻을 엄밀히 구분한다면 통


섭은 생물학적 합침, 통합은 물리적 합침, 융합은 화학적 합침을 뜻한다. 일상에서 통섭,
통합, 융합의 예를 찾아서 제시해 보자.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25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27

6
제 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오늘날 혼란과 방황 속에서 생존의 치열함과 경쟁의 냉혹함을 견뎌내야 하는 20대들에게


절망감은 하나의 집단 정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개인의 절망은 개인적인 아픔에 그치지만,
한 세대의 절망은 공동체 전체의 위기를 초래한다. 우리 시대의 청춘들은 새로운 가치관을 형
성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찾기보다는 기성세대가 정해놓은 성공의 법칙을 따를 것을 강
요받는다. 사회적 관습과 기성세대가 제시하는 좌표를 거부할 경우 낙오자나 일탈자로 낙인
찍히는 사회에서 ‘청춘 예찬’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도전과 모험에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사회는 경직된 사회이고, 열정과 패기를 외면하는 사
회는 ‘닫힌 사회’이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어떠한 창의적 사유도, 건강한 비판정신도 쉽사리
휘발되고 만다. 자아실현을 지향하는 청춘의 도전정신, 그것은 그들의 자유를 부정하는 기존
체계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품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자아실현의 여정은 때론 도전과 모험을 필요로 한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
전하다. 그러나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라는 괴테의 말을 음미해 보자. 세상이라는
바다로 출항하는 것에는 항상 위험이 뒤따르는 법이다. 그렇다고 항해라는 배의 존재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큰 위험은 전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
른다. 익숙한 것이 편하다고 해서 마냥 그것에 안주해 있다면, 바로 그 익숙한 것들이 도리어
나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도전에서 오는 위험과 모험에서 오는 두려움을 가능
한 한 최소화하려고만 하면 결국 최소화된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3포 세대’를 넘어 ‘7포 세대’라는 말로 호명되고 있는 게 우리 시대 청춘의 쓰라린 현실이
다. 취업, 결혼, 출산에 이어 연애, 인간관계, 꿈, 그리고 희망까지 포기하기에 이르렀기 때문
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의 삶을 자포자기의 무기력함에 빠져들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그
들을 모험과 도전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았는가?
이 장에서 소개할 네 편의 문학텍스트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헨리크 입센의 <인
형의 집>, 이어령의 젊음의 탄생』, 사마천의 <인상여 이야기>는 이 시점에서 우리 시대 청춘
들에게 도전의 가치를 환기시켜 줄 친절한 길라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이들 텍스트는 기존의
질서를 따라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기보다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 해야만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도전하는 자세야말로 진정한 자아 발견과 자아실현의 방식이 될 것
이라는 점을 일깨워 줄 것이다. 아울러 도전성취 역량은 타인의 음성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
에 귀 기울일 때 길러지는 것인 만큼 무엇보다 자기긍정감과 자기효능감을 높일 필요가 있다
228 문학과 삶(슬로리딩)

고 조언해 줄 것이다. 그렇게 우리 안의 낡은 서사와의 건강한 이별을 통해 과거의 나를 죽이


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29

1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갈매기의 꿈>은 비행사 출신의 리처드 바크(1936~ )가 자신의 비행 경험과 갈매기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1970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따라서 이 책에 등장하는 갈매기들의 갖가지 비
행 모습은 바로 지은이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갈매기의 꿈>은 비행에 대한 꿈과 신념을 실현하고자 끝없이 노력하는 갈매기 조나단 리
빙스턴 시걸의 일생을 통해 모든 존재의 초월적 능력을 일깨운 우화형식의 신비주의 소설이라
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출간 당시 성직자들로부터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오만한 소설이라는 비
난을 받기도 했지만 출판되자마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판매 기록을 뛰어넘는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외의 작품으로 <우연은 없다>, <환상>, <영원을 건너는 다리>, <인간의 꿈>, <하나>,
<영혼의 동반자> 등 다수가 있으며 대부분 국내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 리처드 바크가 그의
작품들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삶의 숭고한 목적을 찾으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인간이 가진 무한한 힘에 대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국내 번역소설 중 최근작에 속하는 <영혼의 동반자>는 신비주의적 색채를 띤 장편 연애소
설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한 왕자의 사랑 찾기를 통해 사랑과 환상이 부재하는 현대인의
가슴에 훈훈한 연가(戀歌)를 들려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소
설로, 배우 출신의 아내 레슬리 패리쉬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작품 전체에 깔려 있음을 느끼
게 한다.
<갈매기의 꿈>은 자유의 참의미를 깨닫기 위해 비상을 꿈꾸는 한 마리 갈매기를 통해 인간
삶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그린 감동적인 소설이다. 특히 갈매기들의 따돌림에도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자신의 꿈에 도전하는 갈매기 조나단의 인상적인 모습에서 우리는 자기완성의 소중
함을 깨닫게 된다. 자아실현은 몇몇 선택된 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가능
성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작가는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라는 삶의 진리를 일깨우며, 우리 인간들에게
눈앞에 보이는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멀리 앞날을 내다보며 저마다 마음속에 자신만의 꿈과
이상을 간직하며 살아가라고 이야기해준다. ‘높고, 멀리’를 추구하는 마음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 자아실현의 꿈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여기에는 도전 정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주인공 갈매기인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다른 갈매기들과 사뭇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은 단순한 비상(飛翔) 이상의 것에는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
는다. 해변을 기웃거리며 먹이를 구해오는 것 이상의 기술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
나단은 다르다. 단순한 ‘먹이사냥’보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 그 자체를 삶의 목적으로 삼는
다. 가장 낮은 단계의 욕구인 ‘생존’이 아니라 가장 이상적인 욕망이라 할 수 있는 자아실현의
꿈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나단의 꿈과 욕망은 갈등의 시발점이 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부모가 기대하는 삶, 다
230 문학과 삶(슬로리딩)

른 갈매기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와 다르다는 사실은 주인공의 내적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그


과정에서 조나단은 기존의 권위와 가치체계를 무비판적으로 공급받기를 거부한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조나단에게 전통과 관습은 벽이 되지 못한다. 날개가
찢어지는 각고의 노력 끝에 조나단은 마침내 수직 급강하와 초고속 비상에 성공한다. 다른 갈
매기들은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도전이었다.

【읽기의 숲】

갈매기들은, 알다시피 결코 비틀거리지 않으며, 중심을 잃고 속도를 늦추는 법도 없다.


공중에서 비틀거린다는 것은 갈매기들에게는 수치이며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조나
단 리빙스턴 시걸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몸이 떨리는 그 힘든 선회를 하기 위해
다시금 날개를 뻗었다. 천천히, 천천히, 그러다가 또다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는
결코 평범한 갈매기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은 비행의 가장 단순한 사실, 즉 먹이
를 찾아 해변을 떠났다가 되돌아오는 방법 이상의 것을 배우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
다. 대부분의 갈매기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갈매
기에게는 먹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나는 것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다른 갈매기들과 친하게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님을 그는 알게 되었다. 그의 부모조차도 조나단이 하루 종일 혼자서 저
공활공을 수백 번씩 시도하며 보내자 당황해했다. 이를테면 그는 자신이 수면에서부터 날
개 길이의 반도 안 되는 높이로 날 때는 왜 다른 때처럼 힘을 덜 들이고 좀더 오래 공중
에 머물 수 없는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른 갈매기들이 흔히 하듯 공
중에서 두발을 내려 바다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체에 단단히 붙
인 두 발이 수면에 닿으면서 길고도 일정한 자국을 남기며 착륙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런 식으로 미끄러지듯 해변에 착륙해서는 자기가 활강한 길이만큼 모래 위를 걸어 그 거
리를 재어 보기도 했다. 그의 부모님은 그런 그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몹시 당황했다.
“왜 그러니, 조나단?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그의 어머니가 물었다. “왜 넌 다른 갈
매기들처럼 되는 게 그렇게 힘든 거니? 저공비행 따윈 펠리컨이나 알바트로스에게 맡겨
두면 되잖니? 그리고 넌 왜 통 뭘 먹질 않니? 바짝 말라 뼈와 깃털뿐이잖아!”
“뼈와 깃털뿐이라도 괜찮아요, 엄마. 저는 다만 제가 공중에서 무얼 할 수 있고, 무얼
할 수 없는가를 알고 싶을 뿐이에요. 그게 전부예요.”
“내 말을 들어 봐라, 조나단” 그의 아버지가 타이르듯 말했다.
“머지않아 겨울이 닥쳐온다. 그렇게 되면 어선도 적어질 것이고, 수면에서 놀던 물고기
들도 점점 깊이 헤엄쳐 들어갈 것이다. 만약 네가 꼭 배우고자 한다면, 먼저 먹이를 구하
는 법부터 배우거라. 물론 네가 원하는 그 비행술인가 하는 것도 좋지만, 나는 것만으론
먹고살 수가 없다는 걸 너도 잘 알 것이다. 우리가 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먹기 위해서
라는 걸 잊지 말아야한다.”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31

조나단은 반항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후 며칠 동안 그는 정말로 다른


갈매기들처럼 행동해 보려고 노력했다. 선창가와 어선 주위에서 다른 갈매기 떼와 함께
꽥꽥 소리 지르고 다투기도 하고, 빵 조각과 물고기를 향해 급강하해 보기도 했다. 그는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그렇게 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 무의미한 짓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애써 잡은 멸치를 자기를 뒤쫓아 오는
굶주린 늙은 갈매기에게 일부러 떨어뜨려 주었다. 이런 시간을 모두 나는 연습을 하는
데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배울 것이 너무도 많은데!
조나단은 다시금 갈매기 떼를 떠났다. 혼자서 바다 멀리 나가 굶주리면서도 행복한 마
음으로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당면한 과제는 스피드였다. 1주일 남짓한 연습으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나는 그 어떤 갈매기보다도 스피드에 관해서 더 많은 것을 터득하
게 되었다.
그는 300미터 상공에서 있는 힘을 다해 격렬히 날갯짓 하면서 파도를 향해 눈이 아찔
할 정도로 급강하를 했다. 그 결과 어째서 보통 갈매기들이 이처럼 강렬한 속도로 급강
하를 못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급강하를 하면 불과 6초 만에 시속 110킬로미터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 정도의 스피드
는 날개를 위로 쳐들리게 해 금방 중심을 잃게 되는 것이다.
몇 번을 다시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했지만, 매번 고속에서는 균형을 잃었다. 먼저 300미터까지 날아오른다. 그리고 처음
에는 전력을 다해 수평으로 직진하다가, 이내 날개를 치면서 수직으로 급강하한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왼쪽 날개가 위로 젖혀지면서 속도를 잃고 왼쪽으로 격렬하게 회전하곤
했다. 그래서 오른쪽 날개도 위로 치켜 올려 균형을 잡으려하면, 번개처럼 몸이 격렬히
요동치며 마구 공중제비를 돌며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날개가 위로 쳐들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열 번을 시
도했지만, 열 번 모두 시속 110킬로미터를 넘어선 순간, 깃털이 엉망으로 휘감겨 버리고
결국 바다 속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물에 흠뻑 젖은 채 마침내 그는 생각했다. 열쇠는 고속 강하하는 동안에 날개를 움직
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시속 80킬로미터까지는 날개를 치더라도 그 이상이 되
었을 때는 날개를 편 채로 가만히 놓아두면 된다!
600미터 상공에서 그는 다시 시도해 보았다. 부리를 곧장 아래로 향한 채 급강하를 하
다가, 시속 80킬로미터를 돌파하는 순간 날개를 완전히 펼친 채 가만히 두는 것이다. 이
렇게 하기에는 굉장한 힘이 필요했지만, 효과는 만점이었다. 10초 안에 시속 140킬로미
터라는 눈부신 속도로 날 수가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조나단 리빙스턴은 갈매기의 세계
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승리는 한 순간에 불과했다. 급강하한 후 수면과 평행으로 날기 위해 양쪽
날개의 각도를 바꾸는 순간 지난번과 같은 그 위험한 조종불능의 상황에 빠져든 것이다.
232 문학과 삶(슬로리딩)

그것은 시속 140킬로미터라는 스피드 속에서 흡사 다이너마이트 같은 충격을 그에게 안


겨 주었다. 그리하여 조나단은 공중 한가운데서 폭발해 벽돌처럼 단단한 해면에 세차게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그는 달빛을 받으며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었다. 찢어진 날개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실패의 중압감이 더
욱 무겁게 등을 내리눌렀다.
그는 좌절된 심정으로 “차라리 그 무게가 자기를 바다 밑까지 부드럽게 끌어내려 그것
으로 만사가 끝나게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가 물에 잠겨 떠다니고
있을 때, 낯설고 공허한 어떤 목소리가 그의 안에서 울려왔다. 어쩔 도리가 없다. 난 한
마리의 갈매기일 뿐이다. 난 나의 본성에 의해 한계를 지니고 있다. 만약 내가 나는 일에
그토록 많은 걸 배우도록 태어났다면, 눈을 감고도 정확히 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더욱 빨리 날 수 있도록 타고났다면, 매 같은 짧은 날개를 갖고 물고기 대신 쥐를 먹고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이 어리석음을 잊어야 한다. 갈매기 떼가 있는 곳
으로 돌아가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만족해야 한다. 능력에 한계가 있는 불쌍한 갈매기
로서의 자신에게 말이다.
그 목소리는 점차 흐려져 갔지만, 조나단은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밤에 갈매기에게 어울리는 곳은 해변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평범한 갈매기가 되
어 보겠다. 이렇게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것이 모두를 더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어두운 수면으로부터 간신히 날아올라 육지로 향했다. 힘들이지 않고 낮게 나는
법을 배워 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곧 그는 “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
을 고쳐먹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인연을 끊어야 해. 지금까지 배워둔 비행법
과도 작별을 해야 해. 이제 나는 다른 갈매기들과 똑같은 갈매기이고, 그들처럼 날아야
만 해.
그래서 그는 고통을 견디며 30미터 상공까지 올라갔고, 다시 세차게 날개를 파닥이며
해변으로 향했다.
갈매기 떼 중의 평범한 한 마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해 버리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제부터는 자신을 비행 연습에로 몰아붙인 그 맹목적 충동으로부터도 해방되고, 두 번
다시 한계에 도전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또한 생각에서 해방된다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해변 너머의 불빛들을 향해 어둠
속으로 날아가자 몹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둠!’ 그때 공허한 목소리가 경고하듯 들려 왔다. ‘보통 갈매기는 결코 어둠 속을 날
지 않는다!’ 조나단은 멍해져서 그 목소리에 주위를 기울이지 않았다. 정말 기분 좋은데,
하고 그는 생각하며 황홀해져 있었다.
달빛과 불빛들이 물 위에서 반짝이며 흔들리며, 등대가 어둔 밤 속으로 희미한 빛줄기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33

를 던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고요했다.
‘내려가라!’ 또다시 공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매기는 결코 어둠 속을 날지 않는다!
만약 네가 어둠 속을 날도록 타고났다면, 올빼미 같은 눈을 가졌을 것이다! 눈을 감고도
정확히 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매의 짧은 날개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곳, 한밤중 30미터 상공에서 조나단은 갑자기 눈을 깜빡거렸다. 조금 전까지의 고통
과 결심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짧은 날개, ‘매의 짧은 날개!’ 그것이 해답이다! 아,
난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내게 필요한 것은 짧은 날개뿐이다. 날개의 대부분을 접고, 오
직 날개 끝으로만 나는 것이다! ‘짧은 날개!’
그는 어두운 바다 위를 단숨에 600미터 상공까지 날아올랐다.
그리고 실패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앞날개를 몸에 착 붙이고는 오로지
칼날처럼 좁고 굽은 날개 끝만을 바람 속에 펼친 채 수직으로 급강하를 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괴물처럼 으르렁거리며 그의 머리에 부딪쳐 왔다.
시속 110킬로미터, 140킬로미터, 190킬로미터……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이윽고
시속이 220킬로미터까지 달했지만 날개의 긴장은 시속 110킬로미터로 날 때만큼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날개 끝을 아주 조금만 틀어서도 쉽게 하강 속도를 늦춰서 달빛
아래 회색 대포알처럼 파도 속에 내리 꽂히지 않을 수 있었다. 조나단은 눈을 가늘게 뜨
고 바람에 맞서면서 기쁨에 겨워 온 몸을 떨었다. 시속 224킬로미터! 그것도 훌륭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만약 600미터가 아니라 1,500미터 상공에서 하강한다면 과연 얼마나
빠른 속도가 될 것인가!
조금 전에 했던 맹세는 잊혀졌다. 그것은 세찬 바람결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
고 자신이 스스로 한 약속을 깨트리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한 약
속은 오직 평범한 삶을 받아들이는 갈매기들을 위한 것이다. 배움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
에 오른 자에겐 그런 약속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태양이 떠오를 무렵, 갈매기 조나단은 다시금 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1,500미터 높이
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고기잡이배들은 파란 수면 위에 박힌 작은 점에 불과했고, 아침
먹이를 찾아 날아드는 갈매기 떼도 자욱하게 맴도는 희미한 먼지 구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었고, 환희에 약간 몸을 떨면서 자신이 두려움을 이겨낸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 다음 격식을 차리지 않고 자신의 앞날개를 꼭 껴안은 채 짧고 굽은 날개
끝만을 펼친 채 바다를 향해 수직으로 곧장 내리꽂혔다. 1,200미터 상공을 날 때쯤 그는
이미 한계 속도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바람이 단단한 소리의 벽이 되어 그의 얼굴을 때
려 더 이상 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시속 340킬로미터로 수직 낙하 비행을
하고 있었다. 만일 이 같은 속도에서 날개가 펼쳐진다면 자신의 몸뚱이가 수천 개의 파
편으로 산산조각 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낙하를 감행했다.
그에게 있어서 속도는 힘이었고, 속도는 환희였으며, 속도는 순수한 아름다움이었다.
234 문학과 삶(슬로리딩)

300미터 높이까지 내려왔을 때 그는 수평 비행으로 전환했다. 날개 끝은 강한 바람 속


에서 격렬하게 떨며 형체가 흐릿해지고, 고기잡이배와 갈매기 무리들이 비스듬히 기울어
지며 유성처럼 빠르게 그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속도에서
어떻게 방향을 바꾸는지조차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른 갈매기와 충돌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하여 그날 아침, 태양이 떠오른
직후,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눈을 감은 채 바람이 날개깃에 부딪쳐 윙윙거리며 금속성
울음을 우는 가운데 시속 340킬로미터의 속도로 ‘아침먹이를 찾아다니는 갈매기 떼’ 한
가운데로 곧장 내리꽂혔다. 이번만은 ‘운명을 주관하는 갈매기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보냈고, 그래서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가 부리를 하늘로 향하고 수직으로 날아오를 때쯤
그는 아직도 시속 250킬로미터로 맹렬히 날고 있었다. 사속 30킬로미터까지 속도를 줄이
고 마침내 날개를 다시 폈을 때, 고기잡이배는 1,200미터 아래의 바다 위에 한 조각 빵
부스러기처럼 떠 있었다.
그의 생각은 승리감 그 자체였다. 한계속도! ‘시속 340킬로미터’로 나는 갈매기! 그것
은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었고, 갈매기 떼의 역사에서 단 한 번밖에 없는 가장 위대한 순
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갈매기 조나단에게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다시금 자신의 외로운 연습장으로 날아가 2,400미터 상공에서 급강하를 시도하기 위해
날개를 접으면서 조나단은 당장에 회전하는 법을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단 하나의 날개 끝 깃털을 아주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속도에서 매우 유연
하고 완벽하게 방향전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을 알기 전
에 그는 그가 온 속도에서 하나 이상의 깃털을 움직이면 몸이 총알처럼 핑핑 돌게 된다
는 것을 먼저 경험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조나단은 지상의 어떤 갈매기보다도 먼저 곡예
비행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날 그는 다른 갈매기들과 잡담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해가 저문 뒤에도 계속
해서 나는 연습을 했다. 그는 공중회전, 저속 회전, 바람개비 돌기, 몸을 뒤집으며 회전하
기, 순간 방향 바꾸기, 회전하며 낙하하기 등을 터득했다.
조나단 시걸이 해변의 갈매기 떼에게로 돌아 왔을 때는 밤 깊은 시각이었다. 그는 머
리가 어지럽고 몹시 피곤했다. 그럼에도 그는 기쁨에 넘쳐 둥글게 원을 그리며 착륙을
하면서 땅에 닿기 직전에는 한 바퀴 공중회전을 했다. 다른 갈매기들이 그의 한계 돌파
에 대해 듣는다면 모두들 기뻐서 날뛸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삶에는 얼마나 많
은 의미가 있게 되었는가! 하찮은 먹이를 얻기 위해 끝없이 고기잡이배와 해변 사이를
단조롭게 오가는 대신, 삶의 이유를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무지에서 벗어
날 수가 있다. 우리 자신이 탁월하고 지성적이며 뛰어난 재능을 지닌 존재임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나는 법을 배울 수가 있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희망으로 빛나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조나단이 해변에 도착했을 때, 갈매기들은 회의를 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그렇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35

게 한참 동안 모여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사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한가운데로 나와 서라!”
연장자 갈매기의 목소리가 의식을 행할 때처럼 형식적으로 울려 퍼졌다. 갈매기 사회에
서 한가운데 나와 선다는 것은 오직 중대한 잘못, 또는 크나큰 명예를 의미했다. 명예롭게
한가운데 서는 것은 갈매기들의 최고 지도자를 임명할 때의 방식이었다. 조나단은 생각했
다. 물론 오늘 아침 먹이를 찾으러 나왔을 때 그들은 나의 한계 돌파를 목격했겠지. 하지
만 난 명예 같은 건 바라지 않아. 지도자가 되고 싶지도 않아. 난 오직 내가 발견한 것을
나눠 주고 싶을 뿐이야. 우리 모두 앞에 펼쳐져 있는 무한한 수평선을 보여주고 싶어.
조나단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조나단 리빙스턴!” 연장자 갈매기가 말했다.
“한가운데로 나와 그대의 동료 갈매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명예롭지 못한 심판을 받
으리라.”
조나단은 마치 널빤지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무릎에 힘이 빠지고, 깃털이 축
늘어지고, 귀속에선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판을 받기 위해 가운데로 나오라고? 있
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놀라운 한계돌파를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단 말인가! 그들은 틀렸
어! 그들은 잘못한 거야!
“무책임하고도 무모한 행동을 하여…….”
근엄한 목소리가 선고문을 낭독하듯 말했다.
“그대는 갈매기 족의 존엄성과 전통을 파괴하였으며…….”
명예롭지 못한 일로 한가운데 나와 선다는 것은 갈매기 사회에서 추방되어 ‘멀리 떨어
진 절벽’에서 고독하게 살아야 함을 의미했다.
“조나단 리빙스턴, 어느 날엔가 그대는 무책임한 행동은 보상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
우게 될 것이다. 삶은 미지의 것이며, 또한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먹기 위해 이
세상에 던져졌으며, 가능한 한 오래 생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단 한 마리의 갈매기도 이 부족 회의의 결정에 항의하지 않았다. 조나단의 목소리만이
높게 울려 퍼졌다.
“무책임이라니요? 나의 형제들이여!” 그는 크게 외쳤다.
“삶의 의미와 더 차원 높은 목적을 추구하고 따르는 자보다 더 책임 있는 갈매기가 대
체 누구란 말입니까? 우리는 수천 년 동안 물고기 대가리나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이
제 우리는 삶의 이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배우고, 발견하고, 자유로워지는 것! 저에게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발견한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갈매기들은 모두 돌이 되어 버린 듯했다.
“형제 관계는 이제 깨어졌다.” 갈매기들은 다 함께 선언했다. 그리고는 일제히 엄숙하
게 귀를 막으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 리처드 바크 지음, 류시화 옮김, <갈매기의 꿈>, 현문미디어, 2003.


236 문학과 삶(슬로리딩)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갈매기의 꿈>의 명언으로 꼽히는 구절이다. 한편


‘낮게 나는 새가 자세히 본다.’라는 말도 있다. 각각의 논리와 가치관을 비교하며 이야기해
보자.

2 주인공 조나단이 처해 있는 입장을 ‘개인의 욕망과 공동체의 규칙’이라는 관점에서 말해


보자.

3 주인공 조나단은 훌륭한 멘토이자 성실한 멘티의 역할도 수행한다. 진정한 멘토와 바람직한
멘티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 보자.

4 조나단이 완벽한 비행 기술을 터득하기까지 많은 난관들이 존재했다. 지금까지 나의 삶에


어떤 장애물들이 있었는지 떠올려보고 이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서술해 보자.

5 창의적 발상과 열린 사고는 기존의 시스템과 시각을 거스르는 도전정신에서 시작된다. 기


존의 고정관념, 상식, 관행 등을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모두를 위한 정답이 아니라
‘나만의 정답’을 찾아내려는 모험심과 건강한 일탈이 필요하다. 내가 벗어나고 싶은 기존의
관행 혹은 고정관념은 무엇인지 서술해 보자.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37

【질문의 숲】

<갈매기의 꿈>에서는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와 비행이라는 도전성취의 문제가 충돌하고 있


다. 삶의 여정이란 어떤 삶이 좋은 삶이고 의미 있는 삶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
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긴 여정에서 우리는 생존(survival)과 생활(live)이라는 갈림길의 이정표
를 만나게 되고, 그때마다 현실과 이상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유혹의 손짓을 해오는 상황이
발생한다. ‘생존과 생활, 혹은 현실과 이상’이라는 주제로 각자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
질의응답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238 문학과 삶(슬로리딩)

【체험의 숲】

<갈매기의 꿈>에서 주인공 조나단은 갈매기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불굴의 도전정신과


성취 역량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였다. 이처럼 여러분이 지금까지 도전해서 성취했던 경험이나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일에 대한 ‘도전 메뉴판’을 만들어 보자.

나만의 〈도전 메뉴판〉 만들기


항목
도전 경험 성취 경험

공모전

자격증

학업

대외 활동

취미, 취향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39

2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헨리크 입센은 1828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입센은 어렸을 적 유복한
생활을 했으나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한 이후 어린 나이에 약제사의 조수가 되어 생계를 유지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입센은 글쓰기에 관심과 소질이 있었고 스무 살 무렵에 희곡 <카탈
리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그는 <인형의 집>, <유령>, <민
중의 적>과 같은 개인의 해방을 목표로 하며 동시에 사회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실
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처럼 현대 사실주의 극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입센은 현대극의 아버지로 불리우기도 한다.
<인형의 집>은 그가 51세인 1879년 발표되었다. 이 희곡은 전체 3막으로, 은행 총재가 된
헬메르와 그의 부인 노라를 주인공으로 하여 새로운 시대의 여성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희곡은 기존 사회 인식에서 벗어나 여성의 삶과 행복의 조건을 살펴본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여성이 집을 뛰쳐나온다는
마지막 장면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어서 연극으로 공연되지 못할
정도로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인형의 집>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새해가 되면 한 저축은행의 총재가 될 헬메르와 그의
부인 노라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노라는 천진난만하게 마
카롱을 좋아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모른 척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 친구인 린데 부인이 찾아온다. 린데 부인은 남편이 죽자 일찍부터 독립적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다. 노라는 남편에게 린데 부인의 일자리를 부탁하고 헬메르는 그것을 수락
하였다. 하지만 린데 부인의 일자리는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 크로그스타드의 자리였다. 크로
그스타드 역시 노라를 찾아 자신의 일자리가 보존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부탁한다. 노라는
이를 거절하지만 크로그스타드는 노라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 과거 노라의 남편 헬메르가 중
병에 걸려 돈이 필요했을 때 노라는 크로그스타드에게 돈을 빌렸었다. 헬메르는 그 돈이 장인
이 빌려준 것으로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돈을 빌리기 위해 노라는 자신의 아버지의 보증을
받기로 했지만 아버지마저 갑자기 죽게 되자 노라는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해 돈을 빌렸었다.
노라는 오랫동안 늦은 시간까지 바느질을 하고 자신이 쓸 수 있는 돈을 아껴 빌린 돈을 갚아
나가고 있었다. 크로그스타드는 위조사실을 빌미로 노라를 협박했다. 노라는 이 사실이 알려
지게 되면 남편의 앞날에 해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결국 헬메르가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노라에게 화를 내고 몰아세우게 되었다. 린데 부인에 의해 마음을 고쳐먹은 크로
그스타드가 노라의 차용증을 돌려주자 헬메르는 다시 이전처럼 노라를 다정하게 대한다. 이러
한 헬메르의 행동을 보고 노라는 집을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 희곡은 여성의 자아 정체성 찾기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누구나’에 여성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
던 것은 아니다. 여성이 남성과 대등하게 한 명의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 오
240 문학과 삶(슬로리딩)

래 되지 않았다. <인형의 집>의 노라 역시 대부분의 여성과 마찬가지였다. 노라는 ‘인형’으로


때로는 ‘종달새’로 불리우며 남성의 울타리에서 보호를 받는 것에 행복한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삶을 구속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익숙한 것에 안주하다보면 그 익숙한 것이
나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노라 역시 그 익숙함에 길들여져 있
었다. 하지만 가정을 지키려고 했던 자신의 행동이 오히려 비난으로 돌아오자 노라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의구심을 품는다.
이 희곡의 마지막 장면은 노라의 의구심과 결심을 통해 문제 해결의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
고 있다. 집을 뛰쳐나가는 것을 단순히 치기어린 반항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도전을 하는 것
이 때로는 위험하기도 하다. 노라의 경우도 이전까지 누렸던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결혼하기
이전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녀에게 닥칠 미래가 안정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서는 도전과 모험이 필요하다. 여성 해방이라는 관점을 넘어 불합리한
패러다임에 구속되어 있는 존재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노라의 결정은 존중받아야 한다. 왜냐
하면 삶의 방법으로 배제해선 안 되는 도전정신을 노라가 구현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도전에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사회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경직된 사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노
라의 행동을 통해 우리 삶의 벽은 무엇이며 그 벽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과 도전정신이 있는
지 각자 점검해 봐야 하겠다.

【읽기의 숲】

노라 (자기 시계를 본다.) 아직 별로 늦지 않았군요. 토르발, 여기 앉아요.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아요. (노라는 탁자의 한편에 앉는다.)
헬메르 노라, 이게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얼굴이 굳어진 거야?
노라 앉아요. ― 오래 걸릴 거예요. 나는 할 말이 많아요.
헬메르 (탁자에서 그녀의 맞은편에 앉는다.) 노라, 그렇게 하니 겁이 나네. 이해가 되지
않는군.
노라 예, 그게 문제예요. 당신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요. 그리고 나도 당신을 이해한
적이 없었어요. 오늘 저녁까지는 그랬어요. 아니, 내 말을 끊지 말아 줘요. 당신
은 내가 하는 말을 그냥 들어요. 지금 우리는 밀린 계산을 하는 거예요.
헬메르 그게 무슨 뜻이오?
노라 (잠시 침묵한 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는데, 뭐 생각나는 게 없나요?
헬메르 대체 뭐?
노라 우리가 결혼한 지 팔 년이 되었어요. 그런데 당신과 나, 남편과 아내, 우리 둘
이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게 지금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헬메르 진지하게 ― 그게 무슨 말이지?
노라 팔 년이 다 지나가도록, 예, 팔 년이 넘도록, 우리가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41

우리는 한 번도 진지한 문제에 관해 진지한 대화를 한 적이 없어요.


헬메르 나보고 당신에게 끊임없이 걱정거리를 이야기하란 말인가? 당신은 나에게 하나
도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노라 걱정거리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우리가 한 번도 진지하게 앉아서 무언가
를 근본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헬메르 하지만 사랑하는 노라, 그게 당신에게 적당한 일이었을까?
노라 그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에요. 당신은 나를 이해한 적이 없어요. 토르발, 나는
부당한 일을 많이 당했어요. 먼저는 아버지에게서, 그다음엔 당신에게서.
헬메르 뭐라고!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한 우리 둘에게서라고?
노라 (머리를 흔든다.) 당신들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당신들은 나에 대해 애정
을 갖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헬메르 하지만 노라,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노라 예, 토르발, 이런 거예요. 내가 아빠 집에 있었을 때는 아빠가 내게 당신의 생
각을 말씀하셨고, 그럼 나도 똑같이 그렇게 생각했죠. 그리고 내 생각이 달랐을
때는 나는 그 생각을 숨겼어요. 아버지가 좋아하지 않았을테니까요. 아버지는
나를 인형 아기라고 불렀고, 내가 인형을 갖고 놀듯이 나를 가지고 노셨어요.
그리고 내가 당신 집에 왔을 때…….
헬메르 지금 결혼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건가?
노라 (상관하지 않고) 내 말은, 나는 그렇게 아빠 손에서 당신 손으로 넘어갔다는 거
예요. 당신은 모든 것을 당신 취향대로 꾸몄고, 그래서 나는 당신의 취향을 내
것으로 만들게 됐죠. 아니면 그런 척했던 것이었거나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두
가지 모두였던 것 같아요. 이랬다저랬다 했지요. 알고 보니 나는 여기서 가난하
게 살았던 것 같네요. 그날 벌어 그날 사는 거죠. 토르발, 나는 당신에게 재주
를 부리는 것으로 먹고살았던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원했던 거죠. 당신
과 아버지는 내게 큰 잘못을 했어요. 당신들은 내가 아무것도 되지 못한 데 대
해 책임이 있어요.
헬메르 노라, 말도 안 돼. 당신은 감사할 줄도 모르는군, 당신은 이곳에서 행복하지 않
았나?
노라 아니요.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행복한 줄 알았죠. 하지만 한 번도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헬메르 아니라고! 행복하지 않았다고!
노라 그래요. 재미있었을 뿐이죠.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어요. 하지만 우
리 집은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
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내 인
형들이었죠. 나는 당신이 나를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
242 문학과 삶(슬로리딩)

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


리의 결혼이었어요.
헬메르 당신 말도 일리가 있어. 과장되고 무리가 있긴 하지만 말이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거야. 놀이는 끝난 것으로 하지. 이제는 교육이 시작되는 거야.
노라 무슨 교육이요? 아이들의 교육인가요?
헬메르 사랑하는 노라, 당신의 교육과 아이들의 교육 모두를 말하는 거야.
노라 아, 토르발, 나를 당신에게 어울리는 아내로 교육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에요.
헬메르 무슨 말인가?
노라 그리고 나는, 내가 어떻게 아이들을 교육할 준비가 되어 있겠어요?
헬메르 노라!
노라 당신이 바로 한 시간 전에 말하지 않았나요? 내게 그 일을 맡길 수 없다고요?
헬메르 흥분해서 한 말이었지! 어떻게 당신은 그 말에 귀를 기울여?
노라 아니요, 그 말은 옳은 말이었어요. 나는 그 일을 책임질 수 없어요. 먼저 해결
해야 하는 다른 과제가 있어요. 나는 나 자신부터 교육해야 해요. 그런데 당신
은 그 일을 도와줄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혼자 해야 해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떠날 거예요.
헬메르 (펄쩍 뛴다.) 당신 그게 무슨 말이야?
노라 나는 나 자신과 바깥일을 모두 깨우치기 위해 온전히 독립해야 해요. 그래서 더
이상 당신 집에 있을 수가 없어요.
헬메르 노라, 노라!
노라 지금 당장 떠나겠어요. 오늘 밤은 크리스티네가 나를 받아 줄 거예요.
헬메르 당신 미쳤군!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내가 그것을 금지할 거야!
노라 이제는 내게 무엇을 금지해도 소용없어요. 내 물건은 내가 가지고 갈 거예요.
지금이나 나중에나, 당신 것은 아무것도 받지 않겠어요.
헬메르 세상에 이 무슨 미친 짓인가!
노라 내일은 집으로 갈 거예요. 그러니까, 친정으로 갈 거예요. 무언가 시작하기에는
거기가 제일 쉬울 거예요.
헬메르 아, 눈이 멀고 경험도 없는 당신!
노라 토르발, 이제 경험을 쌓아야죠.
헬메르 집과 남편과 가정을 버리다니! 그리고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는 생각도 안 하다니!
노라 그것까지 고려할 수는 없어요. 나는 이렇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에요.
헬메르 저런, 기가 막히는군, 그렇게 당신의 거룩한 의무를 저버릴 수 있다니.
노라 나의 거룩한 의무가 뭔가요?
헬메르 그걸 내가 말해야 하나?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아닌가!
노라 내게는 다른, 그만큼이나 거룩한 의무도 있어요.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43

헬메르 아니, 없어, 대체 무슨 의무지?


노라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에요.
헬메르 당신은 우선적으로 아내이며 어머니야.
노라 그 말은 더 이상 믿지 않아요. 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라고 믿어요.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토르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이 옳다고 할 거예요. 그리고 책에도 그런 비슷한 말들이 있죠. 하지만 나
는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로 만족할 수 없고 책에 쓰여 있는 것으
로 만족할 수 없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헬메르 당신은 이 집에서의 당신의 위치에 대해 설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질
문에 대한 확실한 인도자도 없잖아? 당신의 종교는?
노라 아, 토르발, 나는 종교가 뭔지도 제대로 모르겠어요.
헬메르 그게 무슨 말이오?
노라 나는 내 견신례 때 한센 목사님이 말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목사님
은 종교가 이런이런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내가 이 모든 것을 떠나 혼자가
되면, 그럼 나는 그것도 알아볼 거예요. 나는, 한센 목사님의 말씀이 옳았는지,
아니면 적어도 그것이 내게 옳은 것인지 알아볼 거예요.
헬메르 아, 젊은 여자가 이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종교도 당신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럼 당신의 양심에 호소하겠소. 도덕적인 감각은 있겠지? 아니면, 그것도 없
나? 대답해요!
노라 예, 토르발, 그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아요. 나는 모르니까요. 나는 그런 것
들을 하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건, 나는 그런 일들에 대해 당신과 생각이
아주 다르다는 거예요. 법률도 듣고 보니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더군요. 하지
만 법률이 옳다는 건 도저히 머리로 이해가 안 되네요. 여자는 죽음에 임박한
아버지의 고통을 덜어 드려도 안 되고 남편을 구해도 안 되다니요! 믿을 수 없
어요.
헬메르 당신은 아이처럼 말하는군. 당신은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이해하지 못해.
노라 그래요. 이해하지 못해요. 하지만 나는 시작할 거예요. 나는 사회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밝힐 거예요.
헬메르 노라, 당신은 정상이 아니야. 열이 있군. 당신은 이성도 정신도 없는 것 같군.
노라 나는 오늘 밤처럼 분명하고 자신 있어 본 적이 없어요.
헬메르 남편과 자식을 버릴 만큼 분명하고 자신 있나?
노라 예, 그래요.
헬메르 그럼 가능한 설명은 한 가지뿐이군.
노라 뭔데요?
244 문학과 삶(슬로리딩)

헬메르 당신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지.


노라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헬메르 노라! 대체 무슨 일이오!
노라 아, 토르발, 정말 미안해요. 당신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헬메르 (억지로 정신을 수습해서) 그것도 분명하고 자신 있는 신념인가?
노라 예, 분명하고 자신 있어요. 그래서 여기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거예요.
헬메르 그럼 내가 당신의 사랑을 왜 잃었는지 설명은 해 줄 수 있겠소?
노라 예, 그건 할 수 있어요. 오늘 저녁,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때 일이에요.
그때 나는, 당신이 내가 지금까지 생각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헬메르 자세하게 설명해 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노라 나는 팔 년 동안 참을성 있게 기다렸어요. 왜냐하면, 아, 놀라운 일이 그렇게
아무 때나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 불행이 나
에게 닥쳐왔어요.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확신했어요. 이제는 놀라운
일이 생기겠구나. 크로그스타드의 편지가 저 밖에 있었을 때, 나는 당신이 그
사람의 마음대로 의지를 꺾을 리는 없다고 확신했어요. 그리고 나는 당신이 그
에게 이 일을 온 세상에 알리라고 말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일이 벌어지
자…….
헬메르 그랬더니? 내 아내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둔다면…….
노라 당신이 아주 확실하게 모든 책임을 지고 “모두 내 잘못입니다.”라고 말할 줄 알
았어요.
헬메르 노라!
노라 당신은, 내가 당신의 그런 제안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라고 말할 거죠?
그래요. 물론이죠. 하지만 내 약속이 당신 약속 앞에서 무슨 힘이 있겠어요? 내
가 궁금해 하면서 기대한 놀라운 일은 바로 그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일을 막기
위해서라면 나는 내 생명도 바칠 수 있었어요.
헬메르 나는 기꺼이 밤낮으로 당신을 위해 일하겠어. 노라, 당신을 위해 걱정하고 염려
할 거야. 하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명예를 희생하는 사람은 없어.
노라 수십만 명의 여자가 그렇게 했어요.
헬메르 아, 당신은 생각도 말도 철없는 어린애처럼 하는군.
노라 마음대로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남자처럼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아요. 두려운 일이 ― 내게 덮친 일이 아니라 당신에게 닥친 일이 ―
사라지고 나자, 그리고 모든 위험이 없어지자, 당신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어요. 나는 다시 당신의 노래하는 종달새, 당신의 인형이
되었고, 이제 당신은 나를 두 배로 더 조심스럽게 받들고 다니겠죠. 그만큼 약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45

하고 힘이 없으니까요. (일어난다.) 토르발, 나는 내가 지난 팔 년 동안 여기서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산 것 같은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그리고 나는 아이 셋
을 낳았죠. 아, 그 생각을 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나는 나 자신을 갈가
리 찢고 부술 수 있을 것 같아요!
헬메르 (무겁게) 내가 봐도 그렇군. 정말 그래. 우리 둘 사이에는 심연이 생긴 것 같군.
하지만 노라, 그 심연을 채울 수는 없을까?
노라 지금 같은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아내가 아니에요.
헬메르 나는 변할 수 있어.
노라 그럴지도 모르지요. 인형을 빼앗기면 말이에요.
헬메르 당신과, 당신과 헤어지다니! 안 돼. 노라, 안 돼,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어.
노라 (오른쪽으로 간다.) 그만큼 더 분명하게 그 일이 벌어질 거예요. (외투와 여행
가방을 가지고 와서 탁자 옆 의자 위에 놓는다.)
헬메르 노라, 노라, 지금은 안 돼! 내일까지 기다려요!
노라 (외투를 입는다.) 낯선 남자의 방에서 밤새 누워 있을 수는 없어요.
헬메르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남매처럼 살 수는 없을까?
노라 (모자 끈을 조인다.) 그게 오래가지 않을 거란 건 당신도 잘 알죠. (숄을 걸친
다.) 토르발, 잘 있어요. 아이들은 보지 않겠어요.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잘 돌
봐 줄 거예요. 내가 이렇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에게 아무 도움이 안 돼요.
헬메르 하지만 노라, 언젠가는, 노라, 언젠가는……?
노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나도 내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데요.
헬메르 하지만 당신은 지금 모습으로도, 나중의 모습으로도 나의 아내야.
노라 토르발, 잘 들어요. 내가 지금 하는 것처럼 아내가 남편의 집을 떠나면 남편에
게는 그 여자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들었어요. 어쨌건 나는 당신을 모든
책임에서 풀어 줄게요. 아무 데에도 매여 있다고 느낄 필요 없어요. 내가 아무
데에도 매이지 않은 것처럼 말이에요. 양쪽 모두가 온전히 자유로워야 해요. 봐
요, 여기 당신 반지가 있어요. 내 반지를 줘요.
헬메르 이것까지?
노라 그것까지요.
헬메르 여기 있소.
노라 좋아요. 이제 다 끝났어요. 여기 열쇠를 놓아두겠어요. 집안일은 하녀들이 잘 알
아요. 나보다 더 잘 알죠. 내가 떠난 다음, 내일 아침에 크리스티네가 와서, 친
정에서 내가 가지고 온 내 물건을 챙길 거예요. 그건 내게 보내 주었으면 해요.
헬메르 끝났어! 끝났다고! 노라, 다시는 내 생각을 하지 않을거요?
노라 물론 자주 당신과 아이들과 이 집 생각을 하겠죠.
헬메르 내가 편지를 써도 될까?
246 문학과 삶(슬로리딩)

노라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허락할 수 없어요.


헬메르 하지만 대신…….
노라 안 돼요. 아무것도 안 돼요.
헬메르 필요한 건 무엇이나 가지고 가요.
노라 아니라고 했어요. 나는 낯선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을 거예요.
헬메르 노라, 나는 당신에게 영원히 낯선 사람 이상이 될 수 없나?
노라 (여행 가방을 든다.) 아, 토르발, 그러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야 해요.
헬메르 어떤 놀라운 일인지 말해 봐!
노라 당신과 나 모두가 변해서……. 아, 토르발, 나는 더 이상 기적을 믿지 않아요.
헬메르 하지만 나는 믿고 싶어. 말을 해요! 우리가 어떻게 변하면 될까?
노라 우리가 함께 사는 생활이 진정한 결혼이 될 수 있다면 되겠죠. 잘 있어요. (현
관문으로 나간다.)
헬메르 (문 옆의 의자에 주저앉아 머리를 손으로 감싼다.) 노라! 노라! (주위를 둘러보
고 일어난다.) 아무도 없군. 그녀는 이제 없어. (희망이 그의 안에서 생겨난다.)
기적이라고? (아래에서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 헨리크 입센, 안미란 옮김, <인형의 집>, 민음사, 2010.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47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나보고 당신에게 끊임없이 걱정거리를 이야기하란 말인가? 당신은 나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에서처럼 진지한 자세로 아내와 대화를 하지 않는 헬메르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2 “노라 내게는 다른, 그만큼이나 거룩한 의무도 있어요. 헬메르 아니, 없어, 대체 무슨 의무지?
노라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에요.”의 대화에서 노라가 이야기하는 ‘나 자신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러한 의무와 책임을 지키려는 노라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보자.

3 “어쨌건 나는 당신을 모든 책임에서 풀어 줄게요. 아무 데에도 매여 있다고 느낄 필요 없


어요. 내가 아무 데에도 매이지 않은 것처럼 말이에요. 양쪽 모두가 온전히 자유로워야 해
요.”의 대사에서 노라가 이야기하는 ‘매여 있다는 것’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보자.

4 노라의 남편 헬메르는 노라를 부를 때 ‘종달새’, ‘다람쥐’로 불렀는데 그러한 태도가 노라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고 살면서 이와 유사한 경험이 있다면 글로 작성해 보자.

5 헬메르는 노라가 집을 나서려는 결심을 하자 “당신은 아이처럼 말하는군, 당신은 당신이 살


고 있는 사회를 이해하지 못해.”라고 말하였다. 도전을 시도하려 할 때 누군가 사회와 안
전, 보호를 이야기하며 도전 시도를 무마시키려 한 경험이 있다면 글로 작성해 보자.
248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노라가 생각하는 진정한 결혼 생활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것을 위해 집을 떠나는 행동에


대해 의문 나는 점은 없는지 팀원들과 질문과 대답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49

【체험의 숲】

노라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패러다임을 넘어서서라도 도전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실현 가


능한 것부터 제시해 보고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도전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작성해 보자.(예: 1단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 2단계: 간단한 준
비, 단기간에 준비할 수 있는 일, 3단계: 구체적 준비, 장기간 준비를 요하는 일, 4단계: 패러
다임을 넘어선 혁신적인 일)

1단계 :

2단계 :
단계별
도전 탐색
3단계 :

4단계 :

구체적
도전성취
전략
250 문학과 삶(슬로리딩)

3 이어령의 『젊음의 탄생』

1934년 충남 아산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이어령은 소설가이


자 문학평론가, 에세이스트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간 196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이
다.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여 당시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등장한 그는 1972년
『문학사상』을 창간하여 한국문학의 버팀목이 되는 문학잡지로 성장시켰다. 20대 시절부터 한
국일보를 필두로 서울신문,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면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논객으로 활약하였다.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한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는 개·폐회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문화 기획자로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초대 문화부장관
을 역임한 바 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만해대상, 한민족문화예술대상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장편소설 <장군의 수염>을 비롯하여 문학 이론서 『공간의 기호학』, 평론집 『저항의 문
학』과 함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지성의 오솔길』, 『축소 지향의 일본인』, 『젊음의 탄생』,
『디지로그』, 『이어령의 80초 생각 나누기』 등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있다. 이 중 1963년부터
경향신문에 연재한 원고를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 문화를 최
초로 분석해 낸 기념비 같은 저서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진기록을 세
웠다. 또한 『축소 지향의 일본인』은 일본의 문화 현상을 중심으로 시대를 초월한 통찰을 제공
함으로써 일본 사회에 이어령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 소개할 에세이는 젊음의 탄생에 수록된 산문들이다. 저자는 에세이집 전체를
통해 아홉 개의 창조 아이콘을 제시하면서 그것에 대한 분석과 함께 젊음을 받아들이는 방식
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젊음이란 나이로 정의되는 인생의 특정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끝없는 열정, 지치지 않는 탐색, 미지에 대한 호기심, 희망, 아름다움
등이야말로 젊음을 결정짓는 요소라고 언급한다. 특히 대학 캠퍼스는 젊은이들의 거침없는 상
상력이 뜨고 날고 춤출 수 있는 창조적 지성의 인큐베이터로, 높이 날기 위해서는 지식과 상
상력, 용기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배운 지식과 알고 있는 모든 사물들에 물음
표를 달고 느낌표를 찾아가는 모험의 여정이야말로 대학생이 추구할 좌표이자 궁극적으로 세
상을 바꾸는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수많은 청춘들은 획일화된 스펙 쌓기와 과도한 경쟁에 몰두하고 있는 것
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기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
닫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아 발견과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는 새로운 시각과 창조적 사고를 바탕으로 과감하게 실천할 수 있는 열정이 필요하다. 당연한
것에 의문을 품고 스스로의 능력과 한계에 도전하는 자세야말로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저자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51

【읽기의 숲】

지적 호기심에서 미래가 핀다
묻는 말에 잘 대답한 덕분에, 그러니까 시험을 잘 치른 덕분에 여러분은 대학 입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잘 들으세요.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물을 차례입니다. 그래야 참된
대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던 본질적인 문제를 찾아내어 물
음을 던지는 것. 이것이 대학생활과 그 연구의 성패를 가를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 것. 그래서 기성관념에 본질적인 의문을 던
지는 것. 이것이 대학생의 시작이며 젊은이의 모든 지적 활동의 출발점입니다.
그렇습니다. Quaestiō라고 말해 보세요. 내가 지금까지 배운 지식, 알고 있는 모든 사
물들에게 물음표를 달아보세요. 그러면 세상을 덮고 있던 먼지와 때가 벗겨지면서 낯설게
보일 것입니다. 물음표는 요술 지팡이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닿는 곳마다 천지가 창
조되던 태초의 아침처럼 눈부시게 빛날 것입니다. 구구단을 외우느라 잃어버렸던 것들,
역사책의 연표를 외우다가 상실한 시간들이 푸성귀 같은 초록빛 냄새를 풍기며 되돌아올
것입니다.
더러는 물음표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겠지요. 탈레스가 하늘을 보고 생각에 잠겨 걷다
가 수챗구멍에 빠졌던 것처럼, 때때로 우리를 비웃는 이오니아의 시민들이 있을지도 모릅
니다. 하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릎을 다치며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걸음마를 배웠
던 것처럼, 멍이 든 나의 젊음을 새롭게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지적 호기심의 물음
표입니다.
이런 때에는 물음표가 요술지팡이가 아니라 발목을 걸어 쓰러뜨리는 갈고리처럼 보일
것입니다. 젊음을 멈춰 서게 하는 그 갈고리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사과가 떨어지는 광
경을 보고서도 뉴턴은 만유인력을 발견합니다. 아닙니다. 뉴턴처럼 되지 않아도 좋습니
다. 그냥 넘어져 무릎을 깨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겁내지 말아요. 과학은 물음에 대한 확
실한 대답을 요구하지만 질문만 있고 영원히 해답이 없는 것에서도 값진 창조가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요 예술입니다. 물음의 상처에서 흐르는 그 내출혈이 값진 보석으로 결
정(結晶)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지요.

시는 해답 없는 물음이다
해답을 구하지 않고 그냥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술가
라고 부릅니다. 누가 그랬지요.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요, 예술은 설
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고, 종교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
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깐깐한 유학자들이었던 우리 조상들도 시를 쓸 때만은 “나도 몰라 하노라”
252 문학과 삶(슬로리딩)

라고 탄식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받지 않았습니까. 또 단지 “취해라”라는 해답밖에 주지


않은 샤를 보들레르의 아름다운 물음들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 위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 위에서, 혹은 당신 방의 음울


한 고독 가운데서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버리거든, 물어보아
라. 바람이든, 물결이든, 별이든, 새든, 시계든, 지나가는 모든 것, 슬퍼하는 모든 것, 달
려가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지금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
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취해라! 술이든, 시든, 덕이든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
- 샤를 보들레르, 윤영애 역, <취해라>에서

지금 몇 시냐고 묻는 시인의 말에 “취할 시간”이라는 것은 대답이 아니지요. 취한다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 시간을 뛰어넘는 것이니까. 물음은 물음 자체
로 메아리 없이 술에서 깨어날 때까지 지속되어갈 것입니다. 반드시 취하는 시간이 아니
어도, 시인의 시간이 아니어도, 우리는 물음을 통해서 일상의 시간에서 벗어나 어린 시절
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요, 어렸을 때처럼 꽃에게 바다에게 그리고 멈추지 않는 구름에게 다시 물어보세요.
똑같은 해가 똑같이 동쪽에서 떠올라도 질문 속에서는 처음 보는 해처럼 빛날 겁니다.
어째서 어둠 속에 번져가는 새벽노을이 그토록 가슴을 뜨겁게 물들이는지, 왜 저녁놀은
똑같은 빛인데도 그렇게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를 물어보는 것이지요.
베토벤의 심포니 9번, 마지막 악장의 <합창>처럼 태양이 함성을 지르며 솟아오를 때
여러분은 대학생이 되어 있었고, 시인이 되어 있었고, 인문학자와 과학자가 되어 있었음
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의문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눈부신 초원의 빛이 여러분을 기
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음표의 마지막에는 느낌표가 번득입니다.

고갱의 세 가지 물음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의
대작을 놓고 다시 생각해 보세요. 고갱이 서구문명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절망 끝에 찾
은 곳이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이었지요. 문명에 때묻지 않은 자연에서 삶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 불행한 화가는 그곳에서도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얻
은 것은 질병과 가난뿐 낙원은 아무데도 없었지요.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오지만 이미 문명세계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가족은 그
를 외면하고 화단은 그의 그림을 혹평하고, 숙부의 유산으로 화실을 차렸지만 그림은 팔
리지 않습니다. 타히티 섬으로 돌아온 그는 죽음을 결심하고 그림으로 자신의 유서를 남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53

기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의
그림이지요. ‘어디에서 왔는가’는 인간의 탄생에 대해서 묻는 것이고, ‘우리는 누구인가’는
지금 여기에 있는 현존하는 삶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물음은 인간은 ‘어디
로 가는가’의 죽음에 대한 물음이었던 것이지요.
과학의 힘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우주의 끝, 우주
의 수수께끼에 대해서 해답을 준 아인슈타인이나 호킹도 고갱의 그 질문에 대해서는 답
하지 못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죽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만 “아름다운 모차르트의 음악
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왜 사느냐면 웃지요. 시인 김상용처럼
웃음으로 혹은 눈물로 답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고갱은 말로는, 과학으로는 결코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 고갱은
그림으로 자살로 죽음으로 그것에 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기억하지요? 갈루아가 5차방
정식에는 근을 구하는 공식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처럼, 단지 고갱은 그림을 통해서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삶의 물음표를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황진이의 이별처럼 그의
자살은 유서만 남긴 채 실패하고 말지만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서 물음에 대한 양식과
그에 답하고자 하는 행동에 따라서 다채로운 삶의 문양이 전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
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물음표와 느낌표가 포옹하여 한몸이 된 이 지상에서 가장 거대
하고 아름다운 인테러뱅의 부호라는 것도 느끼게 됩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누구도 고갱처럼 무익한 질문, 손해나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젊은이들은 알게 모르게 끝없이 질문을
하고 그에 답하려고 행동합니다. 그 물음의 성격과 답을 구하는 행동 양식에 따라서 대
학생활의 진로가 결정되고 그 전공이 다르게 선택된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겠
지요.

최초의 펭귄
젊은이들은 혈기가 왕성하기 때문에 미지근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화끈한 것, 불
타는 것에 쏠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진짜 용기와 열정은 회의하면서도 불확실한 회색
지대로 뛰어 드는 ‘최초의 펭귄’이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어권에는 ‘최초의 펭귄(First Penguin)’이라는 관용어가 있습니다. 펭귄들
은 뒤뚱뒤뚱 떼를 지어 우르르 바다로 모여들지만 정작 바다에 뛰어들기 직전에는 일제
히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머뭇거립니다. 왜냐하면 바다 속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먹잇감도
있지만 동시에 물개나 바다표범 같은 위험한 천적들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머뭇거리고 있는 펭귄의 무리 가운데 그 불확실한 바다를 향해 맨 먼저 뛰어드
는 용감한 펭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머뭇거리고 있던 펭귄들도 일제히 그
254 문학과 삶(슬로리딩)

뒤를 따라 바다로 뛰어듭니다.
Just do it! 불확실하지만 일단 무언가 저지르는 것. 끝없이 회의하다가도 순간적인 직
관이나 느낌으로 판단하고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것. 이것이 의문과 감동이 한몸이 된 ‘물
음느낌표’의 상징적 의미입니다. 말콤 그래드웰이라는 비평가는 최초의 펭귄과 같은 행동을
‘블링크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합리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2초 동안의
순간적인 감(그것을 제1감이라고도 합니다)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결정한다는 겁니다.
만화가들이 머리에 전등불을 그려놓는 것 같은 그 번득임의 순간이지요. 인간은 수만
년 동안 살아오면서 축적해온 생명 정보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짓는 감을 얻었던 것
입니다.

그래드웰의 ‘블링크 이론’


누군가를 처음 만나게 되는 경우 대개는 그래드웰의 ‘블링크 이론’처럼 2초 동안에 좋
다 싫다가 결판납니다. 그래서 한국말에는 첫눈에 반한다는 정형어도 생겨났지요. 줄리어
스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널 때 말한 것처럼, 우리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순간순간 주
사위를 던지면서 삶의 갈림길을 선택해 갑니다. 그러나 그 2초 동안의 블링크 속에서 얻
어지는 결과물은 아무렇게나 기분에 내맡기는 도박의 주사위와는 다릅니다. 무수한 의문
과 주저 그리고 지적 분석이 자신도 모르게 번득이는 블링크의 진동 속에 간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노인은 의구심이 많아 머뭇거리고 아이들은 철이 없어 덤벼듭니다. 진정한 젊은이는 의
심하고 행동하는 최초의 펭귄인 거지요.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젊음이란 한 마리
가 영문도 모르고 놀라 뛰면 덮어놓고 따라 뛰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스프링복이 아
닙니다. 젊음은 목숨을 걸고 남보다 앞서 불확실한 모험의 바다로 뛰어드는 최초의 펭귄
인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실리콘 밸리에 모여드는 벤처리스트의 젊은이들, 그
리고 빌 게이츠도 스티브 잡스도 구들의 창시자들도 그리고 요즘 한창 뜨고 있는 미국판
싸이월드인 ‘페이스북(Facebook)’을 만든 하버드 대학생 마크 주커버그 ― 그 모두가 20
대의 ‘최초의 펭귄’들이었지요.
실리콘 밸리만이 아니라 그러한 물음느낌표를 가슴에 단 펭귄 같은 젊은이들이 있기에
오늘의 문화와 사회가 바뀌고 새 역사들이 쓰였습니다.
자, 준비가 다 되었으면 불확실한 바다로 용감히 뛰어드세요. 젊음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납니다. 젊음은 그렇게 탄생합니다.

- 이어령, 『젊음의 탄생』, 마로니에북스, 2014.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55

【이야기의 숲과 쓰기의 숲】

1 본문에 인용된 샤를 보들레르의 시 <취해라>를 읽고, 이 시가 의미하는 바를 이야기해 보자.

2 ‘최초의 펭귄(First Penguin)’의 의미를 설명하고, 나의 전공 분야와 관련 있는 최초의 펭귄


사례를 조사하여 말해 보자.

3 ‘블링크 이론’이란 무의식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적인 판단이 신중하게 내린 결정 못지


않게 훌륭할 수 있다는 말콤 그래드웰(Malcolm Gladwell)의 학설이다. 이 이론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자.

4 미국의 광고회사 사장인 마틴 스펙터(Martin K. Specter)는 물음표와 느낌표를 한데 합쳐


흔히 ‘물음느낌표’라 일컫는 ‘인테러뱅(Interrobang)’이라는 부호를 만들었다. 의심으로 시작
해 놀라운 성과로 끝나는 인테러뱅은 오늘날 아이디어 창출과 혁신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과학, 예술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인테러뱅으로 혁신을 일으킨 경우의 예를
조사해 보자.

5 우리 주변에서 실패 경험을 토대로 성공 신화를 창조한 사람의 예를 찾아서 제시해 보자.


256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본문을 읽고 자유롭게 질문을 만들어 보자. 그 질문을 바탕으로 팀원들과 토의·토론한 내용을
정리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57

【체험의 숲】

1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실패와 성공 경험 사례를 각각 제시해 보자. 제시한 사례별로


원인을 분석해 보고, 그것이 나에게 미친 영향을 서술해 보자.

도전 경험
실패 성공

사례 사례

원인 원인

영향 영향

2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일을 제시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워 보자.

도전 계획

도전 목표

추진 계획

기대 효과
258 문학과 삶(슬로리딩)

4 사마천의 <인상여 이야기>

인상여는 그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 언제 죽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후손은 누구인지가 전


혀 밝혀져 있지 않은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보잘 것 없는 신분이었다는 점,
그래서 환관의 문객으로 기숙하는 사람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전국시대는 그의 후원자였던 환
관 무현(繆賢)과 같이 권세와 돈이 있는 고관대작들이 능력과 지혜를 갖춘 문객들을 키우던
시대였다. 한편 그를 등용한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인재 등용에 힘쓰고 내치와 외교에
힘써 국가를 부흥으로 이끈 군주였다. 그가 등용한 악의(樂毅), 평원군(平原君), 인상여(藺相
如), 염파(廉頗), 조사(趙奢) 등이 모두 일세를 주름잡은 명신들이었다.
인상여가 살았던 시기는 전국시대 말로서 진(秦)나라가 압도적 힘을 갖추어 천하통일을 꿈
꾸면서 원교근공의 정책을 통해 적극적 확장 정책을 펴고 있던 시기였다. 이에 비해 인상여가
섬기던 조(趙)나라는 진나라의 침탈에 고통받던 상대적으로 허약한 국력의 나라였다. 인상여는
현격한 힘의 차이를 갖고 있는 두 나라 사이에서 약소국인 조나라를 대표하여 외교전에서 뜻
깊은 승리를 거둔다. 강대국과 약소국 간에 평등한 외교가 있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약소국
또한 엄연한 하나의 국가이므로 최소한 갖추어야 할 위엄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인상여
는 약소국 외교의 한 모범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인상여 이야기>는 우리가 자주 쓰는 고사성어들의 출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가치가
높은 것을 표현하는 ‘연성(連城)’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진나라 왕이 자기의 15개 성읍과
화씨의 옥을 바꾸자는 제안에서 나온 말이다. 연성(連城)이란 여러 개의 성이라는 뜻이다. ‘완
벽하다’, ‘하자가 있다’는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완벽(完璧)은 인상여가 화씨의 옥을 가지고
진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조나라 왕에게 한 약속에 나오는 말이다. 화씨의 옥〔璧〕을 완전하게
〔完〕 보호해서 돌아오겠다는 말이 그것이다. 하자(瑕疵)는 옥에 흠〔瑕〕과 균질하지 않은 점
〔疵〕이 있다는 뜻으로서 인상여가 진나라 왕의 궁전에서 화씨의 옥을 돌려받기 위해 꾸며댔던
말에 출전을 두고 있다. 한편 인상여가 진나라 왕을 꾸짖을 때 분노하여 머리칼이 곤두서서
갓을 밀어냈다고 묘사되는데 여기에서 ‘노발충관(怒髮衝冠)’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염파가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인상여를 욕하고 다니다가 대의를 위해 소아를 희생하는 인상여의
덕행에 감동하여 가시덤불을 지고 찾아가 사죄를 한 일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부형청죄(負荊請罪)’라는 말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대의를 위한 충정으로 가득한 두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상대에게 맡길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에서 ‘문경
지교(刎頸之交)’라는 말이 나왔다. 목〔頸〕을 베라고〔刎〕 내밀 정도의 깊은 이해와 사귐〔交〕이
라는 뜻이다.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59

【읽기의 숲】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 때에 초(楚)나라의 화씨(和氏) 옥을 얻었다. 진(秦)나라 소왕


(昭王)이 이것을 듣고 사람을 시켜 조나라 왕에게 사신을 보냈다. 15개의 성읍과 이 옥을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조나라 왕은 대장군 염파(廉頗)와 여러 대신들과 상의하였다. 옥을
진나라에 내어주려니 진나라에서 약속한 성읍을 줄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주지 않으
려니 진나라의 강력한 군사들이 공격해올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해결책이 없는 중에 진나라에 답신을 가져갈 사신이라도 급히 구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임무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환관의 우두머리였던 무현(繆賢)이 말하였다. “저의 집에 참모로 있는 인상여(藺
相如)라는 사람을 보낼 만합니다.”
조나라 왕이 물었다. “그 사람이 괜찮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무현이 대답하였다. “제가 일찍이 죄를 지어 연(燕)나라로 몰래 도망갈 계획을 한 적이
있었는데 집안의 참모였던 인상여가 저를 막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연나라 왕을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제가 그 사람에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일찍이 임금님을 모시고
국경에서 연나라 왕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연나라 왕이 은근히 나의 손을 잡으면서 「그
대와 친구로 사귀고 싶소.」라 말한 적이 있네. 그래서 그를 알게 된 거고 이번에 거기로
갈 생각을 한 걸세.’ 그러자 인상여가 말하였습니다. ‘조나라는 강대국이고, 연나라는 약
소국입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 조나라 임금님의 총애를 받고 계시니 연나라 임금이 어르
신과 사귀려했던 것입니다. 이제 조나라를 버리고 연나라로 가신다고 칩시다. 연나라는
조나라를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연나라 임금은 틀림없이 어르신을 받아
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심지어 어르신을 체포하여 조나라로 송환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상의를 벗어 어깨와 등을 드러내고 형장의 도끼와 칼날 아래 엎드려 벌을
자청하도록 하십시오. 어쩌면 요행히 사면을 받으실 수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제가
그 사람의 의견을 따랐더니 임금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저를 사면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이 용감하고 지모가 있어 이번의 사신으로 그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나라 왕은 즉시 인상여를 불러들여 그에게 물었다. “진나라 왕이 15개의
성읍과 나의 화씨 옥을 바꾸자고 한다. 그에게 이것을 줘야 할까?”
인상여가 말하였다. “진나라는 강하고 우리 조나라는 약합니다. 거절할 수 없습니다.”
조나라 왕이 말하였다. “나의 옥만 받고 성읍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상여가 말하였다. “진나라가 성읍과 옥을 바꾸자고 제안하는데 조나라에서 거절하면
조나라가 도리에 있어서 밀립니다. 그런데 조나라에서 옥을 주었는데도 진나라에서 우리
조나라에 성읍을 주지 않는다면 진나라가 도리에 있어서 밀리게 됩니다. 두 가지 대책을
비교해보면 그쪽에 응낙을 하는 것이 낫습니다. 진나라가 이치적으로 밀리는 책임을 지게
260 문학과 삶(슬로리딩)

하는 것입니다.”
조나라 왕이 말하였다. “어떤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면 좋겠는가?”
인상여가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만약 파견할 사람이 없다면 제가 옥을 받들고 사신으
로 갔으면 합니다. 성읍을 우리나라에 떼어주면 옥을 진나라에 바칠 것이고, 성읍을 주지
않으면 제가 화씨의 옥을 완벽하게 지켜 조나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조나라 왕은 인상여에게 화씨의 옥을 주어 서쪽 진나라로 들어가게 하였다.
진나라 왕이 장대(章臺)에서 앉아 인상여를 접견하였는데 인상여가 옥을 받들어 진나라
왕에게 바쳤다. 진나라 왕이 크게 기뻐하며 옥을 처첩들과 곁의 시종들에게 돌리며 구경
시키니 모시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외쳤다.
인상여는 진나라 왕이 성읍을 그 대가로 내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앞으로 나아
가 말하였다. “옥에 작은 하자가 하나 있는데 제가 대왕님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진나라
왕이 옥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인상여가 옥을 들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몸을 기둥에 기
대고 서는데 분노에 머리칼이 일어나 관이 밀려 올라갔다.
인상여가 진나라 왕에게 말하였다. “대왕께서 옥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셔서 사람을 시
켜 조나라 임금님께 서찰을 보내셨습니다. 조나라 임금님께서는 전체 대신들을 소집하여
상의하셨는데 대신들이 모두 말하였습니다. ‘진나라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갖고 있
습니다. 그 강대함을 믿고 옥을 공짜로 얻을 생각이라 우리에게 주겠다는 성읍은 아마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상의한 결과 옥을 진나라에게 주지 않기로 하였습니
다. 저는 평민백성들의 교류에 있어서도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큰 나라는 더구나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의 옥 때문에 강대한 진나라를 불쾌하게 하는 일
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조나라 임금님께서는 5일간 목욕재계를
하시고 저에게 옥을 전달하도록 하면서 궁전의 전당에서 공경스럽게 국서를 배송하셨습
니다. 어째서 그러셨던 것일까요? 강대국의 위엄을 존중하여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자 했
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귀국에 와보니 대왕께서는 평범한 누대에서 너무나 오만한 의
전으로 저를 접견하셨습니다. 옥을 받으신 뒤에는 희첩들에게 돌려 구경시키시며 저를 모
욕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대왕께서는 조나라에 15개의 성읍을 내어줄 의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옥을 회수한 것입니다. 대왕께서 만약 저를 핍박하신다면 오늘 저의 머리와
옥은 함께 기둥에 부딪쳐 박살이 날 것입니다.”
인상여가 손에 옥을 들고 궁정의 기둥을 곁눈으로 보는 것이 금방이라도 기둥에 부딪
치려는 기세였다. 진나라 왕은 그가 정말로 옥을 깨뜨릴까 걱정하여 그에게 사과를 하면
서 절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러고는 주관하는 관원을 불러 지도를 살펴보
면서 어느 곳, 어느 곳의 15개 성읍을 조나라에 쪼개 주겠다고 가리켜보였다. 인상여는
진나라 왕이 여전히 속임수로 성읍을 내어주는 척할 뿐이며, 실제로는 조나라가 그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하였다.
그리하여 진나라 왕에게 말하였다. “화씨의 옥은 천하에서 공인하는 보물이지만 조나라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61

임금님께서는 귀국을 두려워하여 감히 바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나라 임금님께서 옥


을 보낼 때 5일간 재계를 하셨습니다. 이제 대왕께서도 5일 동안 재계를 하시고 궁궐의
전당에서 제후를 맞이하는 의식을 거행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구슬을 바치도록 하겠
습니다.”
진나라 왕은 어떻게 해도 옥을 억지로 뺏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5일
동안 재계를 약속하고는 인상여를 광성(廣成)의 영빈관에 묵도록 하였다. 인상여는 진나
라 왕이 재계를 약속하였지만 그럼에도 성읍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절단의 한 사람에게 거친 베옷을 입혀 옥을 품고 샛길로 도망가 옥을 조나라
에 돌려주도록 하였다.
진나라 왕이 5일간 재계를 한 뒤에 전당에서 제후를 맞는 의식을 거행하며 조나라 사
자 인상여를 청하였다. 인상여가 도착하여 진나라 왕에게 말하였다. “진나라의 목공(穆公)
이후 20여 분의 군주 중 맹약을 지키신 군주가 한 분도 없습니다. 저는 진실로 대왕께
속아 조나라 임금님께 미안한 일을 하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옥을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는데 작은 길을 따라 이미 조나라에 도착하였습니다. 사실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하기 때문에 대왕께서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시기만 하면 조나라에서
는 즉시 옥을 보낼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진나라는 강대하므로 먼저 15개의 성읍을 조
나라에 떼어주신다면 조나라에서 어떻게 감히 옥을 지키기 위해 대왕께 죄를 짓겠습니
까? 제가 대왕을 속인 죄는 사형을 당해 마땅합니다. 저를 끓는 솥에 던져 주시기를 청
하오니 대왕께서 군신들과 이를 숙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진나라 왕과 군신들이 서로 바라보면서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어떤 신하는 인상여를
끌고 가려 하였다. 이에 진나라 왕이 말하였다. “지금 인상여를 죽인다면 끝내 옥은 얻지
도 못하고 진나라와 조나라의 우호관계만 끊기게 될 것이다. 그러느니 저자를 후하게 대
접하고 조나라에 돌려보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조나라 왕이 어떻게 옥 하나 때문에 우
리 진나라를 기만하겠느냐!” 그러고는 마침내 궁정에서 인상여를 회견하고는 예를 다하
여 돌려보냈다.
인상여가 돌아오자 조나라 왕은 능력 있는 대부 한 사람이 사신으로 나아가 제후들의
기만과 모욕을 받지 않았다고 인정하고는 인상여를 상대부(上大夫)로 책봉하였다. 진나라
는 성읍을 조나라에 주지 않았고, 조나라도 결국 화씨의 옥을 진나라에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인상여는 큰 공으로 상경(上卿)에 봉해졌는데 그것은 염파(廉頗) 대장군보다 상급의 지
위였다. 염파가 말하였다. “나는 조나라의 대장군으로서 성을 공격하고 전선에서 싸워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인상여는 단지 언변을 가지고 약간의 공을 세웠을 뿐인데 그의 지
위가 나보다 높다. 더구나 인상여는 본래 비천한 사람이기까지 하다. 나는 이것이 수치스
럽다. 그의 아래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그러면서 공개적으로 말하였다. “만약 인상
여를 만난다면 반드시 그에게 모욕을 주리라.”
262 문학과 삶(슬로리딩)

인상여가 이 말을 듣고는 그와 만나기를 피했다. 인상여는 매번 조정에 회의가 있을


때마다 병을 핑계로 하면서 염파와 그 서는 위치를 다투고 싶지 않아 하였다. 얼마 뒤
인상여가 밖으로 출타했다가 멀리 염파가 보이자 수레를 돌려 그를 피하였다. 인상여의
참모들이 모두 참지 못하고 말하였다. “저희들이 가족을 떠나 대감을 모시는 것은 대감의
고상한 절개와 의리를 우러러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감과 염파의 지위가 같은데도 염파
영감께서는 험한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감께서는 그분을 두려워하며 회피
하는 것이 지나치게 겁을 내시는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조차 이것을 수치스러워하는데
재상의 신분에 있는 분께서 그래서 되겠습니까? 저희들은 별 쓸모가 없으니 물러나고자
합니다.”
인상여가 그들을 굳게 만류하며 말하였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 염파 장군과 진나
라 왕 중 누가 무섭습니까?” 참모들이 대답하였다. “염파 장군이 진나라 왕보다 못합니
다.” 인상여가 말하였다. “진나라 왕의 위엄과 기세에도 나는 그들의 조정에서 그를 꾸짖
고 그 군신들을 욕보였습니다. 나 인상여가 비록 무능하지만 설마 염파 장군을 무서워하
겠습니까?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강력한 진나라가 감히 우리나라에 전쟁을 걸지 못하는
것은 나와 염파 장군 두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와 염 장군,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게 된다면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인내하며 양보하는 것은 국
가의 위급한 상황이 우선이고, 개인의 사사로운 원한은 나중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염파가 이 말을 듣고 상의를 벗어 상반신을 드러낸 채 가시덤불을 등에 지고 참모들에
게 이끌도록 하여 인상여의 문 앞에 이르러 사죄하였다. 그가 말하였다. “저는 거칠고 야
만스러우며 비천한 사람이라 재상께서 이렇게 관대하고 후덕하실 줄 생각도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 기쁨을 함께 하며 생사를 함께 하는 좋은 벗이 되었다.

- 사마천 지음, 강경구 번역, 『사기』, <인상여 이야기>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63

【말하기와 쓰기의 숲】

1 인상여는 국가의 이익과 위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외교 현장에서의 주도권을


지켰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고 성취를 거두기 위해서는 인상여와 같이 자기의 전
존재를 걸어야 할 경우가 많다. 각자 자기의 전 존재를 걸고 그 성취를 위해 노력하였던
일이 있다면 말해 보자.

2 인상여는 이해득실을 사적 차원과 공적 차원으로 구분하여 보면서 그것이 상호 충돌할 경우


철저하게 공적 차원의 편을 들었다. 각자 공적 차원을 우선하여 일처리에 임했던 일이 있
다면 이에 대해 말해 보자.

3 인상여는 진나라 왕과의 외교전에서 속임수에 대해 속임수로 응수했다. 도전과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착한 거짓말이 있을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지 토론
해 보자.

4 의미 있는 일에 도전하고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상여가 염파에게 그랬던 것처럼 불편한


사람을 끌어안는 일이 필요하다. 각자 보다 큰일을 위해 불편한 사람을 끌어안은 경험이
있다면 이에 대해 글로 표현해 보자.

5 진정한 도전성취는 항상 현재의 자기를 허무는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계란이 깨져야


병아리가 되는 일과 같다. 각자 도전성취의 과정, 성장의 과정에서 자기세계의 무너짐을 경
험한 일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글로 표현해 보자.
264 문학과 삶(슬로리딩)

【질문의 숲】

사회적 상식과 전통적 관습에 대해 ‘왜 ~하면 안 되는가’의 방식으로 도전적인 질문을 만들


어보고 토론해 보자.

질문과 대답
수업 일자 학과(부)

학번 이름

질문 만들기(개인 활동)

질문에 대한 토의 및 토론(팀 활동)

느낀 점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65

【체험의 숲】

도전성취를 위해서는 인상여와 염파가 서로 좋은 짝을 이루었던 것처럼 사람 간의 연합이


필요하다. 자신의 성장과정, 도전성취의 과정에서 만났던 좋은 짝을 제시하고 그와 함께 하기
위해 극복해야 했던 일과 이를 통해 성장하고 성취했던 점을 정리해 보자.

구분 내용

도전의 주제

좋은 짝

극복해야 했던 일

성장하고 성취한 점
266 문학과 삶(슬로리딩)

【감상의 숲】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담쟁이』, 시인생각, 2012.


제6장 문학과 도전성취 역량 267

【문제 은행】

1 사람들은 도전정신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소중한 관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도전성취란 무엇인지 말해 보자.

2 모험과 도전정신을 통해 남다른 업적을 일궈낸 역사적 인물을 떠올려보고 그 시사점에 대해


써 보자.

3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많은 학교나 도서관에서 권장도서로 <인형의 집>을 선정해 놓고 있다.


또한 2001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입센의 자필 서명이 있는 <인형의 집> 원고가
선정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4 역사상 여성의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예를 찾아서 이야기해 보자.

5 우리 사회에서 도전을 방해하는 요소에는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6 도전과 성취의 바퀴가 잘 맞물려진 사회가 있다면 찾아보고 그러한 시스템을 적용한 대한
민국의 미래를 구상해 보자.

7 오늘날 대학생들에게 도전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토론해 보자.

8 ‘도전성취’로 4행시를 지어 보자.

9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High risk high return(고위험 고소득)’은 ‘벤처 정신’의 핵심 모토라
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벤처기업을 설립한다고 한다면 어떤 분야의 사업에 도전하고
싶은지 말해 보자.

10 내게 남은 삶의 시간이 1년뿐이라면 어떤 일에 도전하고 싶은지 말해 보자.


문학과 삶(슬로리딩)
인쇄일 2020년 2월 20일
발행일 2020년 2월 20일

저 자 강경구, 김도희, 안장혁, 유창민


발행인 전승우
발행처 도서출판 지누
부산광역시 연제구 반송로 68, 2층 206호
Tel. 051-852-1694 Fax. 051-852-1695
등록일자 2006년 1월 12일
등록번호 제14-56호
비매품

이 저서는 교육부의 대학혁신지원사업 사업비를 지원받아 집필한 저서임

※ 이 교재의 내용을 사전 허가 없이 전재하거나 복제할 경우 법적인 제재를 받게 됨을 알려드립니다.


※ 자료 게재를 허락해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미처 연락이 닿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연락이 닿는 대로 소정의 절차를 밟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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