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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철학 텍스트들의 내용 분석에 의거한


디지털 지식 자원 구축을 위한 기초적 연구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진 병 운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3
편집위원 : 백종현(위원장)
심재룡
김남두
김영정
허남진
윤선구(주간)
발간사

2002년 8월부터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육성지원 아래 우리 연구


소의 전임연구팀이 수행하고 있는 <철학 텍스트들의 내용 분석에 의거한
디지털 지식 자원 구축을 위한 기초적 연구>의 1차 년도 연구결과 총서를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으로 엮어낸다.
박사 전임연구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의
특별연구팀은 우리 사회 문화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동서양 주요 철학
문헌들의 내용을 근간 개념들과 그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분석하
고 있다. 우리 연구팀은 이 작업의 일차적 성과물로서 이 연구총서를 펴냄
과 아울러, 이것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는 여러 서양어 또는 한문으로 쓰
여진 철학 고전의 텍스트들을 한국어 표준판본이 확보되는 대로 디지털화
하여 상식인에서부터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이를 쉽게 활용할 수 있
도록 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연구 작업은 오늘날의 지식정보 사회에서 철
학이 지식 산업과 지식 경제의 토대가 되는 디지털 지식 자원을 생산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기초 연구라 할 것이다.
우리 연구팀은 장시간의 논의 과정을 거쳐 중요한 동서양의 철학 고전
들을 선정하고 이를 전문 연구가가 나누어 맡아, 우선 각자가 분담한 저
작의 개요를 작성하고 이어서 중심 개념들과 연관 개념들의 관계를 밝혀
개념 지도를 만들고, 그 틀에 맞춰 주요 개념들의 의미를 상술했다. 이
같은 문헌 분석 작업만으로써도 대표적인 철학 저술의 독해 작업은 완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획 사업은 이에서 더 나아가 이 작업
의 성과물을 디지털화된 철학 텍스트들에 접목시켜 누구나 각자의 수준과
필요에 따라 철학 고전의 텍스트에 접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다.
우리가 대표적인 것으로 꼽는 철학 고전들은 모두 외국어나 한문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이를 지식 자원으로서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하
기 위해서는 디지털화에 앞서 현대 한국어로의 번역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나 적절한 한국어 번역이 아직 없는 경우에도 원전의 사상을 이루는
개념 체계를 소상히 안다면 원전에 대한 접근과 이용이 한결 수월해질 것
이다. 우리 연구 작업의 성과는 우선은 이를 위해 활용될 수 있을 것이
고, 더욱이는 장차 한국어 철학 텍스트들이 확보되면 이를 효율적으로 활
용하기 위한 기초가 될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 공동연구 사업의 성과물이 인류 사회 문화의 교류를 증
진시키고 한국 사회 철학 문화 향상에 작으나마 이바지하는 바 있기를 바
란다.

2003년 5월 15일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소장․「철학 텍스트들의 내용 분석에 의거한 디지털


지식 자원 구축을 위한 기초적 연구」 연구책임자

백 종 현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진 병 운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3
머리말

민주주의 이상 때문에 절망의 학창 시절을 보낸 필자가 20년 만에 조국


에 돌아온 것은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지 일 년째 되던 해였다. 나라는 온
통 민주주의 잔치와 축제 분위기였고, 수많은 시민단체가 온갖 정치 프로
세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으며, 그 이듬해 남북 정상회담에 뒤이
어 동아시아와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에 공헌한 것을 인정받아 김
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들어 국민의 정부를
계승하여 출범한 신정부가 스스로를 참여정부로 명명하기로 결정한 것을
보면, 건국과 더불어 시작된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이제 그 뿌리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필자의 감회이기도 하다. 다만 이 뿌리에까지 다다른 민
주화 운동이 북한의 2,500만 동포를 배제한 것 같이 보이는 것은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지만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민주주의 이념을 땅 끝까지 실현해낸 세
계사의 최종적 결과이다. 이 민주주의 역사의 사상적 시조가 다름 아닌
존 로크와 장 자크 루소이다. 양자 공히 천부인권과 주권재민 원칙을 토
대로 정치사회[국가] 이론을 세웠다. 특히 루소는 그의 사후 그의 소책자
ꡔ사회계약론ꡕ을 가지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적 사부가 됨으로써
그의 주권재민 사상의 과격한 역사 추진력을 입증하였다. 이런 까닭에 프
랑스 대혁명을 뿌리로 해서 출발한 근대 사상과 사회 운동 일반에는 대체
로 루소의 영감과 정신이 어려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그의 법치
국가 사상과 주권 이론은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헤겔의
법과 권리의 철학에서 완성을 보게 된다. 그러나 루소의 정신과 저작은
다양하여 법과 주권이라는 이성의 영역을 넘어 19세기 낭만주의 운동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머리로 알기 전에 가슴으로 느끼는 인
간을 아마도 루소보다 강력히 주장하고 입증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을 것
이다. 그러나 느낄 줄 아는, 특히 동정이라는 본능을 가진 인간이 오직
인민이 주권자인 법치국가에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 다재다능
한 저술가의 결론이다.
이방인처럼 고향에 돌아와 민주주의가 정녕 꿈이 아니고 현실이 된 것

i
을 목격하게 된 내가 민주주의의 사상적 시조 중 하나인 루소의 국가 구
상의 골자를 담은 ꡔ사회계약론ꡕ을 해제하는 기회를 부여받은 것은 개인의
영광이요 커다란 복이 아닐 수 없다. 이 현실을 뒷받침한 이론을 재조명
함으로써 이 현실이 그 개념에 충실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나
는 나 자신이 모든 점에서 부족함을 알면서도 감히 하늘이 내린 이 행운
을 부둥켜안고 말았다. 나에게 이 행운의 기회를 마련해 주신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소장 백종현 교수, 한국학술진흥재단, 대한민국에 감사를
드린다.

2003년 5월 15일
관악산 기슭에서 진 병 운

ii
목차

제1부 ꡔ사회계약론ꡕ 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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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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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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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사회계약론의 개념적 체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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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루소와 정치철학 주요개념들과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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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각 장별 개념체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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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ꡔ사회계약론ꡕ 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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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자연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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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상태의 정의(定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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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쟁으로서의 자연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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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소의 방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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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루소의 홉스 비평: 전쟁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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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연적 사회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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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연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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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계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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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사회의 기원과 권위의 정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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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사회의 기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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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치권위의 근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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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치권과 부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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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회계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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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중 계약설: 푸휀도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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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회계약설: 홉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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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회계약설: 루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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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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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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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일러두기

본 작업에서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ꡔ사회계약론ꡕ과 ꡔ인간불평등기원


론ꡕ을 비롯한 루소의 여타 정치학 저술의 판본은 다음과 같다. 원문을 인
용할 경우, 책 제명은 그대로 옮기고 단지 편집자와 출판사의 이름만 약
칭을 사용하였다.

ꡔ사회계약론ꡕ 판본
J.J Rousseau, Du contrat social, Pléiade, Paris, 1964 [PLE]
ꡔ불평등기원론ꡕ, ꡔ정치경제학ꡕ 등 루소의 정치학 저술 일체
C.E. Vaughan, The Political writings of Jean Jacques Rousseau,
Oxford, Blackwell, New York, 1962, 2 vol. [VPW]

푸휀도르프, 쥬리외 등 자연법 학파의 저술 인용은 다음 책에 의거하였다.

R. Derathé, J.-J Rousseau et La Science Politique de son Temps,


Vrin, Paris, 1979.

v
제1부 ꡔ사회계약론ꡕ 개관

1762년 처음 출판된 루소의 ꡔ사회계약론ꡕ(Du Contrat Social)은 ꡔ정


치적 권리의 제 원리ꡕ(Principes du droit politique)라는 또 하나의
제명을 수반하고 있다. 이 저서가 사실 소론의 형태를 취하게 된 연유는
그것이 저자가 베니스 주재 대사관에 근무하던 1741년경부터 구상했던 좀
더 방대한 ꡔ정치제도론ꡕ(Les institutions politiques)의 작업결과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단편들을 발췌하여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모든 정치제도의 기초 원리들만을 집약적으로 제시하는
고도의 추상 작업의 성과이기도 하다.

제1편
사회계약론은 4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편은 제사회의 형성과 사회
계약을 다루고 있다. 사회 질서라는 것은 그 자체가 여타 모든 권리의 기
초가 되는 신성한 권리이다. 이것은 그러나 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
다. 모든 종류의 사회 중에서 가장 원시적이며 가장 자연적인 사회가 가
족이라는 사회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의 가장 자연적인 이 결합체 역시,
물론 후자가 독자적으로 삶을 꾸려나갈 수 없는 기간 중에는 필연적이지
만, 그 이후에는 약속에 의해 유지된다. 인간 중 어떤 사람들은 노예가
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지배를 위해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철학자
들이 있는데, 이들은 실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중
일부가 현재 노예라는 사실이 만일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과거에
자연에 반하여 인간 중 일부가 노예로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사회 질서라
는 것이 결코 힘에 근거할 수 없음이 명백한 것은, 아무리 강한 자라도
그의 힘을 권리로, 또 타인의 복종을 의무로 변경시키지 않는 한, 언제까
지나 그의 주인의 자리를 보지할 수 있을 만큼 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권리는 힘과 함께 자리를 옮긴다. 만일 힘 때문에 복
종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의무 때문에 복종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 또 힘
에 의해 복종하도록 강제당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
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다.
사람들 간에 존재하는 모든 정당한 권위는 동의에 근거한다. 이 사상의
논거를 그로티우스는 한 인민이 자신의 자유를 양도할 수 있는 권리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양도 행위는 주거나 또는 파는 행위이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주어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기껏해야 삶을 꾸
려나가기 위해 자신을 팔 뿐이다. 그러나 한 인민이 자신을 판다면 이것
은 도대체 무엇을 보상으로 받기 위한 행위라는 말인가? 대가 없이 자기
자신을 준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며, 고로 법적 효력이 없다. 더욱이,
설사 한 인간이 자신을 주어 버릴 권리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으
로 태어나 자유 존재인 자신의 아이들을 타인에게 주어 버릴 권리는 결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로티우스는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피정복
자를 살해하거나 또는 살려주되 그의 자유를 탈취하는 정복자의 권리를
원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이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아니다. 그러니까 전쟁은 군인이 무
장을 하고 있는 한에서만 군인을 살해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지, 그들
이 일단 무기를 내려놓으면 그들은 더 이상 군인이 아니고 사람일뿐이며
어느 누구도 그들을 죽일 권리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을 노예로 만
들 권리 역시 아무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노예와 권리라는 두 단어는
양립할 수 없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사회 질서라는 것의 근원을 찾는다면 최초의 약속, 곧 만장일치의
원시적 합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자연 상태에 살던 인간들이
각자가 혼자서 삶의 역경을 처리해 나갈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을 때, 그
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때까지의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게 된
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까지 없던 새로운 힘과 능력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닌 이상, 그들은 각 개인의 힘과 능력을 결합하여 삶에 대한 장애
를 극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개
별 구성원의 재산과 신체를 전체의 공동 힘으로 보호하고 유지할 수 있는
형태의 결합체를 찾아내는 것이다. 또 개인 구성원은 이러한 형태의 결합
체를 통하여 자신을 전체에 결합시키면서도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
고 결합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유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3

다. 이 문제의 해결이 다름 아닌 사회계약이다. 사회계약에 의해서 각자


는 자신의 모든 힘과 존재를 일반 의지의 절대적 지도 하에 전체의 공유
물이 되도록 양도한다. 이 계약 행위로부터 하나의 정신적 집단이 결과하
고, 이 집단은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 수만큼의 구성원으로 구성되어 있
다. 여기서 각자는 자신을 유보 없이, 송두리째 양도하였기 하였기 때문
에, 모든 구성원이 조건에 있어서 평등하며, 따라서 결합 자체가 완벽하
다. 또 각자는 구성원 전체에게 자신을 양도하였기 때문에 구성원 중 어
떠한 누구에게도 자신을 양도한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집단을 국가 또는
주권자라고 명명한다. 구성원들은 하나의 전체로서 인민이라고 부르며,
또한 이와 동시에 주권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시민이며, 법에 종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신민이다. 바로 이 사회계약에 의해서 인간은 자연 상태
에서 시민 사회로 이행하며, 본능으로부터 풀려나 도덕성과 정의의 단계
로 진입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이행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적 자유와 그의
손이 닿는 한의 모든 것에 대한 무제한의 자연적 권리를 상실하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대신에 공공 재산의 일부를 위탁받은 자가 됨으로써
그가 갖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한 공인된 소유권과 시민적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제2편
주권과 입법을 제2편은 주제로서 다루게 된다. 주권, 곧 일반의지는 양
도할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의지라는 것이 넘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
다. 주권은 또한 불가분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상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지가 일반적이다 라고 할 때 그것은 인민 전체의 의
지를 지시하며, 의지가 일반적이 아니다 라고 할 경우 그것은 전체 중 한
분파의 의지를 지시한다. 전자의 의지를 말과 힘으로 옮기는 것이 주권
행위이며, 이때 의지는 법이 된다. 후자의 경우, 의지는 하나의 특수의지
이거나 일개 행정 조치다. 또는 기껏해야 그것은 일개 행정 법령에 지나
지 않는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정치 이론가들은 주권의 원천을 분해할 수 없는 나머
4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지, 주권을 주권이 적용되는 제 방식으로 분해하여 왔다. 즉, 주권을 힘과


의지로, 입법권과 집행권, 조세권과 사법권과 교전권, 내치와 외치 등으로
분해하여 왔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국 이론가들은 주권자를 별개의 부
품들로 구성된 공상적 존재로 만들었다. 마치 한 신체에선 두 눈을 떼어
내고 또 다른 한 신체에서 양 팔을, 또 다른 신체에선 발을 취하여, 이것
모두를 함께 모아 한 사람을 만든 것처럼. 일본에선 요술사들이 어린아이
한 명을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여러 조각들로 잘라 낸 다음, 그 조각들을
한 개씩 공중으로 던지면, 이것들이 떨어지면서 조립되어 그 어린아이가
살아온다고 하는데, 우리 이론가들이 하는 일이 미상불 이런 종류의 요술
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정치 이론가들이 했던 방식에 따라, 주권의 여러
부분들에 의해 행사된다고 생각되었던 권한들은 실재에선 하나의 나눌 수
없는 주권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예외 없이 최고 의지를
예상하고 있으며, 단지 이 의지를 할당된 관할 구역 안에서 집행할 따름이
다.
이상에서 증명된 주권의 성질로부터 일반의지에 관한 세 번째 명제가
자명하게 도출된다. 즉 일반의지는 언제나 올바르며, 공공의 선을 지향한
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인민의 의결들 역시 언제나 바르게
행하여진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 또한 진실이다. 인민은 언제나 선이라는
것을 바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선인가를 언제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민은 결코 타락시킬 수 없으나 종종 속일 수는 있는 법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할 때에만 인민은 무엇인가 옳지 않은 것을 원하는 것처
럼 보인다. 의결이 공공의 선에 따라 행하여지기 위해선 일반의지가 결정
되어지는 과정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이 의결의 안건에 대해 충분
히 숙지하고 있으면서도, 이에 대해 그들 간에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
으면, 일반의지는 결국 다수의 사소한 차이(의 합계)로부터 결정된다. 그
러나 단체들, 곧 전체를 희생시키는 부분들의 결합체들이 생성되기 시작
하면, 이 결합체들 각자의 의지는 그 구성원에 대해 일반적이나, 국가에
대해선 특수의지일 뿐이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의결에 참석한 시민 수만
큼 투표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결합체들의 수가 바로 투표자의 수인 것이
다. 의견 차이의 수는 따라서 적어질 것이며, 결과는 그만큼 덜 일반적이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5

게 된다. 게다가 이런 단체들 중 하나가 매우 강해져서 여타 단체들을 지


배하게 되면, 결과는 사소한 차이들의 합계가 아니고 오직 하나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일반의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배
적인 견해는 다름 아닌 단독의 특수의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의 입증으로부터 공중을 구성하는 사인(私人)들을 하나의 인격체인
공공과는 별개로 고찰해야만 하는 필요성이 확연해진다. 왜냐하면 이 사
인들 각각은 공공 인격체와는 별개의 자신의 독립적 자유와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권자와 시민 각각의 권리를 판별하고, 또 인간으로서
향수해야 할 자연권과, 신민으로서 다해야 할 의무를 구별해야만 하는 것
도 같은 이유에서다. 사회계약 하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힘, 소유, 자유
를 양도하는데, 이 양도는 공동체에 필요한 분량에 한한다. 그러나 공동
체에 필요한 분량을 판단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주권자 밖에 없다. 한
시민이 국가에 대해 지고 있는 모든 의무는 주권자가 요구하면 즉시 수행
하여야 하나, 주권자는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에 불필요한 의무를 신민에
게 부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실, 주권자는 이런 일을 하기를 바랄 수
조차 없다. 자연 법칙이나 이성의 법칙에 의하면 원인 없이 아무것도 발
생할 수 없는 만큼, 공동체인 주권자가 공동체의 필요를 넘어선 그 무엇
을 요구할 원인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제3편
정부와 그 운영이 본편의 주제다. 국가 존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법을 제정하여야 하나, 이로 충분치 않고 제정된 법을 집행하는 것이 또
한 필수적이다. 입법권은 주권자, 곧 일반의지에 속하나, 그렇다고 해서
주권자 자신이 집행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 이를 위해선 주권자는 별도의
대행자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 대행자는 주권자와 신민의 사이에 서는
매개자로서 일반의지의 지도 하에 법을 적용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바
로 정부의 기능이며, 정부는 그러니까 주권자의 관리이지, 주권자 자신은
아닌 것이다. 정부를 구성하는 한 명 또는 수 명의 행정관은 집행권의 수
탁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주권자의 공무원이며, 그들의 직책은 사회
6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계약의 결과가 아니고, 위탁된 책임이다. 행정관은 주권자로부터 명령을


받아 이를 인민에게 전달하며, 주권자는 이들의 권한을 자기 뜻대로 제
한, 수정, 취소할 수 있다.
정부의 세 기본 형태가 있는데, 이는 인민의 전체 내지 최대 다수에 의
한 정부인 민주정체, 소수에 의한 정부인 귀족정체, 한 사람에 의한 정부
인 군주정체이다.
민주정체는 실천 불가능한 정부 형태이다. 이 정체는 전 인민에게 너무
나 힘든 덕목과 조건들을 요구하기 때문에, 신들로 구성된 인민에게나 걸
맞을, 따라서 실제로는 불가능한 정체이다.
귀족정체에는 자연적인 것, 세습적인 것, 선거에 의한 것, 이 세 종류
가 있다. 첫 번째 것은 단순 소박한 원시 민족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두 번째 것은 모든 정부 형태 중 최악의 것이다. 세 번째 것은 통치권이
가장 현명하고 공사를 위한 시간 여유를 여느 사람보다 더 많이 갖고 있
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만큼,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
해서가 아니고 공공의 행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한다는 것만 확실하다면
모든 정부의 형태 중에 가장 자연적이며 최선의 것이다.
군주정에 관해 말한다면, 이보다 더 강력한 정부 형태는 없다. 그러나
이 장점에는 막대한 위험이 수반된다. 목적이 공공의 행복이 아니면, 행
정의 전 에너지의 집중은 국가에 손실을 초래하는 법이다. 그런데 왕이란
자들은 통상 절대자로 군림하기를 꾀하며, 관리들은 음모와 술책으로 치
닫는 성향이 있다.
이론상으로는, 정부는 그 형태가 단순하고 순수한 것이 최선의 정부이
나, 실제로는 여타 형태에서 빌려온 요소들과 조합되고, 이 요소들에 의
해 조정되어야 한다. 사실 모든 나라에 한결같이 적합한 정부 형태는 없
으며, 각 나라의 정부 형태는 그 인민의 성격에 맞추어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동일한 경우, 어떤 나라에 가장 적절한 최선의 정부
형태라 하면, 그것은 이민이나 귀화 등 외적 원인 개입 없이 시민이 증가
하고 번성하는 정부인 것이다. 정부가 월권 내지 주권자의 권리 찬탈을
시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선, 인민의 정기 회합을 법으로 정해야 하
며, 이 회합 기간 중에는 모든 집행권은 중지되며, 모든 권력은 인민의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7

수중에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 회합에서 인민이 결정해야 할 안건은 다


음 두 가지이다. 첫째, 주권자는 현재의 정부 형태를 유지할 것인가의 문
제, 둘째, 인민은 현재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자들을 유임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다. 정부와 주권자 사이에 중계자로서 또 하나의 권력이 있을 수
있는 바, 곧 대의원 내지 대표자의 권력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사항은 일반의지는 양도 불가능한 것처럼 대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대의원은 인민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인민의 사용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최종결정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법도 인민이 비준하지 않은
법은 무효이다. 정부 조직 역시 인민과 행정관 사이에 체결된 계약의 산
물이 아니고, 그 자체가 하나의 법이다. 권력을 장악한 자들은 인민의 공
복이지 인민의 주인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해야 할 것은 인민
을 상대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니고, 인민에 복종하는 것이다. 사실
행정관들은 그들의 직책을 완수함으로써 단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따름이다.

제4편
본 편에선 계속하여 정치에 관한 법과 제도를 다루면서,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하는 방법이 진술되고 있다. 일반의지는 파괴할 수 없는 것이고,
선거를 통하여 표현된다. 다양한 선거 양식이나 호민관, 독재, 감찰 등과
같은 제도의 가치에 관해서는 그리스, 로마, 특히 스파르타 같은 고대의
공화국들의 역사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종교는 국가 창건
의 기초였다. 또 종교는 언제나 인민의 삶에 중대한 자리를 차지하여 왔
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서 상의 기독교는 거룩한 종교이기는
하지만, 기독교는 세상사에 매이지 않고 초연할 것을 가르침으로써 사회
적 결합체의 정신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는 자신의 의
무를 열정 없이 완수하는 인간들을 배출하고, 또 이런 기독교인들은 전쟁
에서는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잘 아는 군인
들이기도 하다. 각 시민이 어떤 특정 종교를 믿고 그 종교의 영향으로 자
신의 의무를 사랑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기독
8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교의 교리는 타인에 대한 의무나 도덕성에 관한 경우를 제외하면 국가 생


활에 대해선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에는 종교가
있기는 있어야만 하나, 주권자가 그것의 기본신조를 종교의 교리로서가
아니라 사회성의 기본 감정으로서 규정해야 할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누구나 국가로부터 추방되어야 할 것이되, 그 죄명은 신앙심의
결여가 아니고 비사회성이다. 또 주권자가 결정한 이 신조를 수락하고서
도 이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사형에 처하도록 해야 할 것이
다. 이 신조는 소수의 명확한 조목들로 짜여져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신
의 존재, 그의 권능, 지혜, 선견지명의 섭리 등과 내세, 의로운 자의 행
복과 사악한 자의 징벌, 사회계약과 법의 신성함 등의 적극적인 교리들이
다. 소극적인 교리는 단지 하나 뿐으로서,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은 없다
고 주장하는 자는 누구나 국가로부터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
이다. 사실 불관용이야말로 우리가 배제해야 할 종교적 종파들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루소 연보
1712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공 이작 루소의 아들로 태어남. 같은 해
어머니 사망.
1723 아버지는 제네바를 떠나 리용에 정착하고 루소는 보셰의 랑베르
시 목사에게 위탁됨.
1724 제네바로 돌아와 견습서기로서 근무함.
1725 조각사 아벨 뒤코맹의 수하에서 5년간 견습공으로 일할 것을 계약.
1728 안느시로 이주. 드 바랑스 부인과 만남. 튀랭의 카톨릭 교리문
답학교에 보내졌고, 카톨릭교로 개종. 베르셀리 부인 및 구봉
자작의 종복으로 일함.
1729 안느시로 되돌아와 드 바랑스 부인 집에 유숙. 그후 뇌샤텔에서
음악교사를 지냄.
1731~1737 샹베리와 샤르메트에서 드 바랑스 부인과 행복한 나날을 보냄.
1740 리용에서 드 마브리 가(家)의 가정교사를 함.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9

1742 파리로 되돌아와 디드로(Diderot)와 사귐. 레오뮈르의 소개로


과학원에서 <음악의 새 기호(記號)에 관한 계획>을 발표.
1743 몽테뉴 대사의 비서로 베니스에 동행.
1744 몽테뉴와의 불화로 파리로 돌아옴.
1745 젊은 하녀 테레즈 르바쇠르와 만남. 오페라 ꡔ우아한 시의 여신
(Muses galantes)ꡕ을 완성.
1746 뒤팽 부인의 비서. 테레즈와의 첫 아들 얻음(고아원에 위탁)
1749 달랑베르의 요청으로 ꡔ백과사전ꡕ 안의 음악 부분을 담당
1750 디종 한림원의 현상응모에 당선(ꡔ학문 및 예술에 관한 논고ꡕ)
1752 오페라 간막극 ꡔ마을의 점장이ꡕ 가 퐁텐느블로에서 공연되어 대
성공을 거둠. 단막극 ꡔ나르시스, 자신의 애인ꡕ 공연.
1754 테레즈를 동반하고 제네바로 돌아감. 그 곳에서 다시 신교(캘비
니즘)로 개종
1755 ꡔ불평등기원론ꡕ발표
1756 ꡔ신 엘로이즈ꡕ 집필 시작
1757 두드토 부인과의 사랑으로 에피네 부인과 결별. 몽모랑시의 몽
루이에 정착
1761 ꡔ신 엘로이즈ꡕ출간. 결석(結石)으로 인한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위기. 한 때 자살의 충동을 느낌.
1762 4월 ꡔ사회계약론ꡕ, 5월 ꡔ에밀ꡕ을 발간. 두 권 다 판금 조치됨.
체포령이 내리자 스위스로 피신.
1766 흄(David Hume)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감. 흄과의 불화.
1767 5월 영국의 우튼을 떠나 프랑스의 아미엥으로 돌아온 후 여러
곳을 전전 ꡔ음악사전ꡕ 발간
1767 리용, 그르노블, 샹베리를 거쳐 부르구엥에 이름. 이 곳에서 테
레즈와 정식 결혼함.
1770 리용을 거쳐 파리로 돌아와 프라트리에르 가(街)(현재의 장 자
크 루소 가)에 정착. 이 무렵 ꡔ고백록ꡕ을 완성한 것으로 보임.
1771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와 교우
1772 ꡔ폴란드 정부에 관한 고찰ꡕ(1782년 출간)
10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1774 독일의 작곡가 그룩크와의 교우로 ꡔ마을의 점장이ꡕ를 위한 새


음악의 작곡.
1776 ꡔ대화 ― 루소의 장 자크 심판ꡕ의 완성. ꡔ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ꡕ
의 집필 시작.
1778 지라르댕 후작의 호의로 에르므농빌에 정착. 7월 2일 뇌일혈로
타계. 일 드 푀프리에 묻힘. 그 후 유해는 1794년 팡테옹으로
이장됨.
1780 ꡔ대화ꡕ첫 권 출간.
1782 ꡔ고백록ꡕ 1~6권. ꡔ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ꡕ, ꡔ대화ꡕ 3권의 출간.
1789 ꡔ고백록ꡕ 7~12권의 출간.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1

제2부 사회계약론의 개념적 체계도

Ⅰ. 루소와 정치철학 주요개념들과 세계사


본 저서의 대강은 자연 상태, 계약론, 주권론 및 정부론, 이 네 가지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각 주제를 그것을 구성하는 개념들로 분해
하여, 이 개념들이 다른 주제들의 구성 개념들과 서로 연관을 지어가며
저자가 의도한 전체 의미를 형성해가는 모양, 곧 개념적 도면을 그리기
전에, 이 주요 주제들이 모두 루소 자신의 저술을 넘어서 서양 근대 정치
철학의 핵심 과제들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간과할 때, 또는 루소 자신처럼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사상해 버릴 때, ꡔ
사회계약론ꡕ은 출판업계에서 당대나 오늘날이나 공전의 인기를 누린 책임
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책이 아닐 수 없다. 이 저작이
제대로 이해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저자가 20여 년간 작업해 오던
방대한 과제, 이른바 ‘정치제도론’에서 가장 중요하고 일반 공중에 제
공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들만을 추상하여 저술한 ꡔ정치적 권리
의 제 원리ꡕ인 만큼, 책 자체는 결국 정치에 관한 일반 원리들만을 다루
는 순수 이론적 사유의 결정(結晶)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하
학적 논증 체계를 갖춘 이 고도의 이론적 추상적 작품이 어떻게 사변 철
학의 영역을 넘어 유럽 전역에 걸친 광범위한 독자층을 발견하고, 급기야
세계를 바꾸는 프랑스 대혁명의 ― 철학자 헤겔에 의하면 ― 사상적 사부
의 저술이 되었을까? 오늘날 정치 사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선 루
소의 이 저술이 1762년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출판된 이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까지 20여 판을 거듭했고, 혁명 전야의 이데올로기에 폭넓
게 배어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1) 사실, 루소 자신이 정치적 권
리의 원리들에 관한 ‘소론’(작은 논문, petit traité)이라고 부른 이

1) Raymond Trousson, Jean-Jacques Rousseau: Le deuil eclatant du


bonheur (Tallandier, Paris, 1989), pp.83-103 및 Bernard Groethuysen,
Phiolosophie de la Revolution francaise (Gallimard, Paris, 1956),
pp.171-233.
1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저술은 광범위한 일반 독자층을 통하여 결국 ꡔ공산당 선언ꡕ처럼 역사의


흐름을 바꾸려는 혁명가들의 소책자 내지 입문서, 심지언 정치 팸플릿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헤겔, 셸링, 피히테, 칸트가 프랑스 대
혁명을 인류사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한 대사건으로 기념하고 그것의 사상
적 바탕을 조성하는데 루소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하더라도, ꡔ사회계약론ꡕ이란 제명을 단 이 소책자의 역사적 사명은 이 혁
명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ꡔ사회계약론ꡕ은 1949년까지 프랑스에선 81종류의 판본이 나와 있으


며, 스페인에선 41종류, 이탈리아에선 22종류, 독일에선 15종류, 영국에
선 14 종류, 미국에선 7종류, 러시아에선 5종류의 판본 숫자를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세계의 주요국 대부분이 하나 내지 세 종류의 판본을 가지
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2)

이 소책자의 이러한 세계적 보급 때문인지, 일본 이와나미 [岩波書店]


1954년 초판 발행 머리말에서 13인의 공동 역자 대표 구와바라다게오 씨
는 “유사 이래, 인간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서 영국 노동당
의 학자 킹크스레이 마틴은 ꡔ성서ꡕ, ꡔ자본론ꡕ, 그리고 ꡔ사회계약론ꡕ, 이
셋을 꼽고 있다”3)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지 않으
면 안 되는 점은, ‘자본론’은 그 이름은 비록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전
세계를 풍미한 책이지만, 그 책을 독파하는 일은 전문 학자조차도 수월한
일이 아니다, 라는 사실이다. 경제학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하였다는 이
책의 입증 절차의 기술적 난해성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방대한 분량을 제
대로 소화해내려면4), 프롤레타리아 같이 물적 생산에 참여하지 않아도,
생계를 보장받아, 오직 책 읽는 일을 업으로 삼는 학자가 되지 않으면 안

2) J.Sénélier, Bibliogrphie générale des oeuvres de J.J. Rousseau


(Paris, 1949).
3) 루소, 社會契約論 , 구와바라다게오 외 12인 공동 번역(岩波書店, 동경,
2001).
4) 구체적이 예를 들면, 김영민, 강신준 양인에 의한 자본론 의 한국어 번역
(이론과 실천, 1990) 자본 은 총 9권으로 전체 쪽수는 2,901쪽수에 달한다.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3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자본론’은 그 저자의 뜻이 무엇이었던지, 그


가 혹평해 마지않던 독일 관념주의 철학처럼 세계를 바꾸는 방향에서 작
용하지 않고, 이 관념철학이 인류 문화유산으로 남긴 위대한 정신적 업적
들, 예를 들면 칸트의 ꡔ순수이성비판ꡕ, ꡔ실천이성비판ꡕ이나 헤겔의 ꡔ정신
현상학ꡕ, ꡔ논리학ꡕ, ꡔ철학요강ꡕ, ꡔ법철학요강ꡕ처럼 관념적 이상 세계의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든지, 그렇지 않으면 공산당 간부양성 아카데미의
필수 교과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그 역사적 사명의 전부였다. 게다가
이 절대 권위를 누렸던 경제학서가 현실사회주의 경제에 무용지물이었다
는 사실은 한 세기에 걸친 사회주의 역사와 현 북한 경제의 참상이 여실
히 증명하고 있다.
‘자본론’이 소수 전문 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 남아있으면서도 ‘인
간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면,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
간 정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바꾼 ꡔ공산당선언ꡕ이라는 소책자가 선행
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를 바꾸지 않고 인간 정신을 바꿀 수 없다
는 것이 마르크스의 지론이었다면, 루소의 ꡔ사회계약론ꡕ에 필적할 수 있
는 책은 따라서 ‘자본론’ 이 아니고 ‘공산당 선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의 운행을 바꾸는 것이, 관조가 업인 선비나 학자의 일일 수 없
고, 활동가 내지 혁명가의 사명일진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방대한 이
론 서적이 결코 아니고 ‘일반 대중’이 이미 자각하고 있는 ‘정치적 권
리의 제 원리’를 실천에 옮기는 간략한 전략 지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고로 ‘사회계약론’과 ‘공산당 선언’이 세계의 진로를 바꿈으로써,
인간 정신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하는 운동의 단초가 되었다고 할 때, 우
리는 왜 마르크스 뿐 아니라 헤겔, 셸링, 피히테, 칸트 등 독일이상주의
자들까지도 한결같이 ‘인간의 진정한 역사’는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시
작되었다고 믿었던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이유인즉 ‘인간의 역
사’에서 처음으로 이 혁명을 통하여 ‘인간 개념의 외연’이 기성의 틀
을 깨고 공전의 지경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이었다. 인간 개념 외연의 이와
같은 혁명적 확대란 다름 아닌 루소 ‘사회계약론’의 중심 사상인 주권
재민(主權在民)을 자각한 혁명가들과 인민(People, Peuple, 일반 대중,
평민 일반, 일반 백성)이 이를 ‘정치적’으로 실현한 결과로서 성취되었
14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던 것이다. 구와바라다게오나 킹크스레이 마틴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


정신’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이 한층 높은 단계로 이행한다는 것
을 함축하는데, 이 이행이 가능하려면 먼저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갖고 있
는 개념의 변천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인민이 주권자(The
Sovereign, Le Souverain)라는 사상을 정치적(political, politic, 국
가적)으로 현실화한 시도인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역사란, 주인-노예, 귀
족-평민, 양반-상놈의 사회 역사로서 후자가 전자를 죽이면 살인자가 되
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으며, 후자가 전자를 모독하면 엄한
벌을 받았으나 전자는 후자를 능멸해도 무탈했던 ‘인간의 비인간적 역
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 또한 마르크스 뿐 아니라, 헤겔을 필두로 독일
이상주의 철학자 대부분이 지목했던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즉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사 이래로 지속되어 온 이런 신분 사회, 계급 사회가 프랑스
혁명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즉 국가적으로 부정되지 않았다면, ‘인간 정
신’을 이성에 의하여 현상계로부터 예지계로 고양하는 저 숭고한 칸트의
‘이성의 자율로서 단정적인 정언적 명령’이 가능이나 하였을까 말이다.
실제로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고 하는 이 정언적 명령을 납득할
수 있기 위해선, 이 명령을 듣는 자가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이면 족한
것이지, 그가 왕이나 주인, 노예나 평민 또는 기독교인이거나 대통령일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만일 칸트의 이 정언적 명령이 숭고한 공염불
로 끝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 명령을 들은 ‘인간 정신’이 인민이 주
권자가 되어 통치자(Prince, 군주, 루소에 있어선 행정부 수반)를 갈아
치운 프랑스 대혁명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양반-
상놈, 주인-노예, 대통령-가신의 사회에서 과연 어떻게 ‘너와 나’ 뿐
아니라 언제 누구에게나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도덕적)명령이 가능하였겠
는가 말이다.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우리는 프랑스 혁명과 같은
‘정치 혁명’을 체험하지 못한 모든 철학과 프랑스 혁명을 기억하고 그
것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은 독일이상주의 철학은,
인간 정신을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나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 있어서
방법과 효과를 달리할 수밖에 없음을 추론할 수 있다. 전자에 대해 후자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5

의 특징은 이미 칸트에서 예시되고 있듯이, 인간 정신의 보편 능력, 곧


이성이 ― 오직 이성만이 ―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진 실천 법칙 및 국법을
제정할 수 있음을 입증한 데에 있다. 하지만 세계사를 돌이켜 보는 우리
눈에는,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이른바 독일관념론의 ‘정치 철학’은
본질적으로 ‘도덕 철학’이나 ‘법철학’ 내지 ‘국가 철학’으로서,
루소 ‘사회계약론’의 중심 사상인 ‘인민주권론’을 정치적으로 ― 국
가적으로 ― 실현한 프랑스 대혁명의 민주주의 정열과 역동성을 결핍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서양에서 정치(politics, politique)란 말이 우리는 도시국가, 루소
는 cité라고 번역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Polis에서 연유하며, 이 말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상태’를 일반적으로 지시함과 동시에 그리스 고
유의 국가 형태를 지칭하였다. 그리고 서양 최초의 정치학(science
politique, political science)은 이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더 정확
히 말하면 수백 개에 달하던 도시국가 중에서 오로지 가장 번영하고 강성
했던 민주 국가 아테네에서 그 곳의 철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런
정치학의 발생 조건으로 인하여, 정치학 본래의 과제 및 목표는 다름 아
닌 인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 국가(polis)가 자기 자신을 성공적으로
지배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제기와 이에 대한 답을 가져오려는
시도로부터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루소는 서양 근대사에서 이
고전 정치학의 본질적인 과제와 목표를 가장 완벽하게 부활시킨 철학자라
고 할 수 있다.
루소에 있어서 인민주권은 국가의 최고 권위일 뿐 아니라, 동시에 국가
구성 원리로서 모든 정치적 권리의 유일한 원천이다. 루소 정치학에서는
따라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국가만이 ‘참된’ 국가인 것
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민이 자기 자신을 직접 지배, 통치하는
것은 아니다. 주권자인 인민은 자신의 일반의지(volonté générale,
general will)의 표현인 법의 제정과 자신의 고유한 이 입법권에 종속시
킨 행정부의 집행권을 통하여서만이 신민(臣民; sujet, subject)인 자신
과 국가를 통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루소에게 있어선 겉보기와
는 달리 직접 민주주의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법이란 일반의지의 표
16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현인 만큼 개별적인 대상을 그 내용이나 목적으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법의 집행도 입법권자인 인민 총회와는 별도의 행정부(gouvernement,
government, 정부)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인민은 주권자로서 법을 제정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제정한 법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신민인 것이다.
이렇게 국가 생활에서 법의 보편적 지배 원칙에 대한 신념과 이 원칙에
의해서만이 시민(citoyen, citizen, 그리스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의 자
유가 보장된다는 사상에 주목할 때, 우리는 루소를 고대 그리스인들의 정
치사상의 후계자이면서 동시에 칸트와 헤겔의 법철학 선구자로서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고전 문명사에 관한 세계적 권위인 모제즈 휜리의 저서 ꡔ
고대그리스인ꡕ에서 인용하여 보기로 하자.

“그리스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정치 공동체인 폴리스를 떠나 살 수 있


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숙명적 삶의 조건에서 필히 제기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폴리스가 만일 인간 삶에 대해 이런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면, 과연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스스로 믿고 있는 것처
럼 자유인들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은 ‘법이 왕이다(nomos
basileus)’라는 간결한 언표 속에 담겨져 있다. 그들에게 자유란 통치
부재의 무질서가 아니고, 모두가 존중하는 법전에 의해 통치되는 공동체
안에서의 정돈된 삶인 것이다. 이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그리스인들은 상
고 시대 이래로, 권력과 명예를 독점한 귀족 계급이나 무제한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폭군들에 대항하여 투쟁해 왔다. 공동체가 법의 유일한 원천이
라는 사실, 그것이 바로 자유의 보증이었다. 이 점은 그리스인들 사이에
이론의 여지가 없는 원칙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문제는 실제로 고전 시대에 들어
와 정치 철학이 맞붙어 해결해야 할 난제 중의 난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후로도 결정적 해결을 보지 못한 문제로 남고 말았다. 공동체는 기존
의 법체계를 변질시킬 자유가 있는가의 문제가 바로 이 고전 시대의 정치
철학에 제기된 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역사적으로 계승된 문제인 것이다.
만일 국가의 법이 어떤 순간에 국가 운영의 조종간을 잡고 있는 일개 파당
이나 소집단에 의해 임의로 변경될 수 있다면, 이는 법이 왕이다, 라는 대
원칙에 함축되어 있는 보장과 안정을 파괴하여 결국 무질서로 귀착하는 것
이 아니겠는가, 하는 말이다.5)

5) Moses I. Finley, Les anciens Grecs, (La Décoverte, Paris, 1984),


pp.55-56.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7

루소 정치학설의 요약을 방불케 하는 위의 인용은, 동시에 어떻게 루소


가 고전 정치학과 독일이상주의 법철학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는가를 추정
케 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루소에게 있어서 법은 인민 전체에 ‘고
유한’ 공통된 ‘일반의지’의 표현인 만큼, 제정된 법이 주어진 국가 안
에서 아무리 보편(普遍)타당(妥當)하고, 무편무당(無偏無黨)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 살아 있는 육체의 필연적 작용인 ― 감성과 주관성의 제약
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법을 만드는 자의 ‘이성적 능력’에
관한 이 문제는 이미 그리스 고전 시대에 플라톤을 필두로 하여 아테네
민주정치를 비판한 모든 정치 이론가들의 핵심 논거로 등장하였을 뿐 아
니라, 오늘날에도 루소 정치학설을 비평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학설
의 한계로서, 또는 루소적 국가의 존재론적 취약성의 원인으로서 지적되
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감성과 주관성이란 육체적 요인이
섞인 기초와 골조로 세워진 국가가 영원할 수가 없을 터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서양 정치철학의 이 고전적인 문제를 물려받은 독일이상주의 철학
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성의 활동을 감성적 의지와 경
험적 주관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이성의 자율성(autonomie)과 이성 본래의
권능인 보편타당한 입법능력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칸트에 의해 정초되고
헤겔에 의해 완성되는 이 ‘이성의 재림’이라고 불러 마땅한 철학적 위
업에는,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주의 철학이나 중세 기독교 철학에서는 찾
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원리가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
다.
서양근대철학을 중세, 고대 철학과 구별하게 하는 이 새로운 원리는 독
일이상주의 철학에는 칸트가 이룩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의해 도
입되었다. 이 전환이란 인식의 중심축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로 인하여 이성의 인식과 실천에 이전의 철학에 없었던 새로운 개념들이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인용할 백종현 지음 ꡔ서양근대철학ꡕ의 서
술은 과연 무엇이 이 새로운 개념들인가를 밝혀줄 것이다. “칸트의 사고
의 전환, 다시 말해, 인식이란 대상을 인식 주관이 모사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식 주관이 자신의 선험적 원리에 따라 대상을 규정하는
것이라는 칸트의 견해,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6) 이렇게
18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인식에 있어서, 대상이 아니고 주관[주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


기에, 칸트 철학을 플라톤 철학과 대비하여 ‘주관적 관념론’ ― 후자는
‘객관적 관념론’ ― 으로 대별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전자는 후에 헤
겔의 주체(Subject)일원론(monism) 및 주체=실체(substance)라는 대명
제에 이르는 초석이기도 하다. 그런데 칸트의 ꡔ순수이성비판ꡕ에 의해 철
학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된 주관[주체]는 그것의 담지자가 인간인 한에 있
어서 인식하는 주관으로서만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또한 의지의 주체인 것이다. 철학사에서 가장 단적으로 이를 확인해 주는
것이 다름 아닌 칸트의 업적을 직접 계승한 쇼펜하우어의 ꡔ의지와 표상으
로서의 세계ꡕ(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이며, 이 대저 자체
가 ‘세계는 나의 의지다’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 두 명제로부
터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쇼펜하우어 철학을 계승한 니체의 주저
중 하나가 ꡔ권력에의 의지ꡕ(Der Wille zur Macht)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의지의 문제가 넓게는 서양근대철학, 좁게는 독일관념론에서
차지한 비중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루소 정치학설의 중
심 사상인 일반의지는 칸트와 독일관념론 전통 이전에 서양근대사를 일반
의지의 ‘정치사’로 규정하는 데 금자탑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칸트 이후의 ‘주체[나]와 의지’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독일 철학
에서는, 루소에서 국가 구성원리로서의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던 의지가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경우처럼 아예 정치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된다거나,
또는 헤겔의 예와 같이 국가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국가 구성적 의미
는 물론 ‘정치적’ 역할 역시 상실하게 된다. 하기야 이 후자에서 주권
은 인민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입헌군주국의 ― 의지 주체임을 스스로 단수
일인칭주어로 지시하는 ― 군주에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루소에 있어서 주권이 양도될 수 없고 그 행사가 오로지 인민에
귀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권이란 본질적으로 일반의지이며, 인민이
자유롭다함은 다름 아닌 인민이, 개인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타자의
의지가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6) 백종현, 서양근대철학 , (철학과 현실사, 2001, 서울) pp.209-210.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9

러한 자유의 정의 때문에 루소에게 있어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자는


곧 인간의 자격을 포기하는 자며, 인민이 자기 자신의 의지인 주권을 양
도하는 행위는 곧 인민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동시에 정
치통일체(corps politique, body politic, 국가)의 해체를 초래하는 행
위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자유는 자신의 의지의 행사에 있기 때문에, 의
지의 행사는 양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나 자신 말고 타인에게 대행
(represent)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헤겔의 판단에 따라 인류에 나타난 모든 종교, 철
학, 이데올로기, 사회 이론, 풍습, 문화 전통, 가치관 등의 최종 심판은
세계사의 심판이라는 것을 받아 드린다면, 우리에게 가장 이성적이지는
않더라도 가장 현실적인 정치철학자 중 하나가 루소인 것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우리가 우리 사회의 현대사를 돌이켜 볼 때, 그것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국가 이념인 자유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실현되어 온 역사 과
정이었다. 이 역사는 민주주의 이념의 핵심인 주권재민 사상이 어떻게 헌
법이 정한 선거 절차에 따라 우리의 ‘현실’이 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벌써 세 번의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대한민국 국민이
자기 자신이 주권자임을 확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또 민주주의 이상의
잣대로 재어보면 용인될 수 없는 선거 운동 전략에도 불구하고, 국민과
선거의 패자가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결정된 선거 결과에 만장일치로 승
복하는 것도 우리 역사는 기록하게 되었다. 이렇게 국민 모두가 선거의
결과에 승복한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이상에서) 현실
이 되었다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바로 이 주권재민의 관점에서 루소는 독
일 관념론 전통을 넘어서 우리 현실에 가장 가까운 정치철학자이다. 따라
서 우리 사회에서 국민이 주권자임을 확신하는 지성인은 누구나 루소의 ꡔ
사회계약론ꡕ을 읽어보지 않아도 뻔한[자명한] 원칙론으로 여길 수도 있
다. 사실 이 소책자는 주권재민 원칙에서 출발한 연역 체계인 만큼 이론
적 추론에 밝은 지성인은 아마도 단숨에 읽어 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
러나 우리 연구자들이 볼 때, 이 소책자가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그 독자를 범세계적으로 확대해온 것은 그 이유가
그 구조의 논리적 투명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원칙을 범세계적으로 실
20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현해온 세계사 그 자체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ꡔ사회계약론ꡕ은 역사와의


관계에서 ꡔ공산당선언ꡕ과 유를 같이 하는 책자이나, 주권재민의 범세계적
실현으로서 세계사의 관점에선 이를 훨씬 능가하는 정치철학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가이념이 실현됨에 따라 루소만이 우리에게 현실
적으로 가까워진 정치철학자는 아니다.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이념이 대한
민국 단독으로 우리의 자력만으로 실현된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자유민
주주의의 법세계화 운동의 일환으로서 시작되었고 성취되었다. 실제로 우
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 질서는 자유민주주의의 법세계화 운동이 이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규정해온 냉전에서 현실사회주의 진영에 대하
여 승리한 결과이고, 따라서 만일 한국의 실현된 민주주의를 이 자유민주
주의가 최종적 세계 질서가 된 역사로부터 분리하면, 우리의 현실은 인식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가 한국을 포함한 세계 현실을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세계사적 실현의 결과로서 직시한다면, 루소의 주권
재민 사상만 가지고는 이 세계화된 민주주의 현실을 기술하고 설명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현재의 세계 정치 질서를 단순한 민주주의가 아니고 자유민주주의로서
정의한다면 영국 경험론의 시조 로크는 루소보다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더
가까운 철학자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치고 대의정
치제(representative system)를 채택하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이는 바
로 로크가 세운 정치 이론의 중추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루소는 자신
의 주권재민 원칙과 대의정치제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이를 철저
히 배격하였기 때문이다. 루소에게서 인민[국민]이 주권자이고 이 주권자
의 고유[양도불가의] 권리가 입법권인데, 로크에게선 입법권이 주권의 배
타적 행사인 점은 루소와 같으나 이 입법권이 대의원들에 의해 행사된다.
물론 로크에게서도 대의원들이 주권자는 아닌 것이 국민들에 의해 ‘선출
되어’ 일정 기간 동안 입법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루소는 영국식 의회제도, 곧 대의원으로 입법부를 구성하는 방
식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혹자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직접 민주주의가
루소 국가 구상의 모델[이상]이었다고 주장하고, 혹자는 영국식 의회민주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21

주의를 형식적 민주주의라고 조롱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대중[인민]민주


주의에 루소의 주권재민 사상을 접근시키기도 한다. 우리가 전자의 주장
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루소 자신이 그의 원칙을
현실에 적용해야 할 때는, 예를 들면 ꡔ폴란드 정부에 관한 고찰ꡕ같은 저
술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고심의 흔적을 도처에 남기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후자의 파악에 관해선 이론적으로 피상적이고 역사적 근거가 없는
주관적 투사, 즉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평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루소의 국가 구상에서 인민주권 원칙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입법권과 행정권[집행권]의 엄격한 구별인데, 이는 마르크스
주의 이론과 역사에 새겨 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및 일당 독재와는 양립
은커녕 서로 상충한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궁극적 목표는 프롤
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국민)국가의 소멸에 있는데 반해 루소 정치학의
목표는 국가(civitas, polis, civil society, state)의 완성에 있는 것
이다. 지난 한 세기에 걸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세계사적 실험이 끝난
지 어언간 10여년이 된 오늘날,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근대 정치철학의
주요 주제 개념들인 천부인권[자연권], 행복[물질적 번영], 주권재민[민
주주의], 국가[정치] 등의 모든 분야에서 완전히 실패한 이데올로기에 지
나지 않음을 마르크스 자신이 과거의 사변철학에 맞서서 자신의 방법론으
로 표방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경험과학에 의거하여 확인할 수 있게 되었
다. 이렇게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에 의해 역사의 쓰레기통에 폐기처분된
것이 더욱 확실한 것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 진영의 붕괴와 더불어 부활한
세계 질서는 다름 아닌 마르크스 자신이 부르주아 문명의 정치적 완성이
라고 규정한 국민-국가 세계체제(universal system of nation-states)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르주아 문명의 정치적 완성기로 회귀하
고 있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서양근대정치철학의 소생(蘇生) 역시 역사
필연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서양근대정치철학사의 완성을 마르크스가 시사하는 것처럼, 국민
국가의 이론적 구상에서 찾는다면, 우리에게 부활해오는 철학자의 순서는
아마도 헤겔, 홉스, 루소, 로크의 순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철학사의
완성을 주권재민[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는 이는 루소, 로크, 헤
2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겔, 홉스의 순서가 될 것이다. 다시 더 나아가 이 철학사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이중 관점에서 고찰할 때, 로크가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확실
하나, 루소의 위치가 불확실한 것은 그의 부르주아 생활 방식에 대한 경
계심과 더불어 스파르타적 공민정신(civisme)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헤
겔의 경우는 자본주의, 주관적[개인의] 권리, 법치는 그의 국가철학의 골
조를 이루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로크가 가장 적절한 개
념적 틀을 제공한다고 해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국가는 무엇
보다도 먼저 권력, 힘 그 자체다. 아무리 정당한 권리, 아무리 이성적인
법도 이 레비아단의 권력에 뒷받침되지 않으면 빈소리, 공허한 형식에 지
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헤겔과 홉스는 로크 및 루소와 함께 현 자유민주
주의 세계 질서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불가결한 철학자들이 아닐 수 없
다.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23

Ⅱ. 각 장별 개념체계도
1. 자연상태

자연상태 > 근대정치철학 (계몽주의)


> 개인주의 국가론
> 평등
> 자족
> 사회
> 시민사회 = 정치사회
> 전쟁상태
> 홉스
> 로크
> 법적 관점
> 심리학적 관점
> 자연적 사회성
> 로크
> 푸휀도르프
> 자연법
> 고대
> 18세기
> 자연법 학파
> 이성
> 본능

2. 계약설

계약설 > 정치권위의 정초


> 정치사회의 기원
> ꡔ불평등 기원론ꡕ
> 개인주의 해석
24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 자연법 학파
> 정치권
> 부권
> 절대주의 테제
> 보스웨
> 람세
> 자연법 학파
> 푸휀도르프
> 쥬리외
> 루소
> 사회계약설
> 결합계약
> 종속계약
> 이중계약설
> 푸휀도르프
> 홉스 사회계약
> 루소 사회계약
> 자유
> 평등
> 법
> 주권자
> 인민
> 일반의지
> 입법권
> 행정권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25

제3부 ꡔ사회계약론ꡕ 분석

Ⅰ. 자연상태
1. 자연상태의 정의(定意)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표어는 오래 전부터 교양인 일반에게 루소


사상을 대변하는 이미지나 표상으로서 통용되어 왔다. 실제로 ꡔ에밀ꡕ, ꡔ
누벨 엘로이즈ꡕ, ꡔ고독한 산책자의 수상ꡕ등을 읽은 독자 중에 루소에 대
한 이 오래된 통념이 마뜩찮은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상식
이 된 듯싶은 루소의 자연예찬이나 자연회귀(自然回歸)사상으로부터 그의
정치학설의 골자가 담긴 ꡔ사회계약론ꡕ에 접근하게 되면, 루소 사상체계의
일관성[통일성] 부재를 탓하거나 이 책 자체를 아예 독해 불가능한 책으
로 치부해버리기 십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책자에는 독자의 영혼에
깊은 공명을 일으키는 그 유명한 자연 묘사가 전무한 것은 말할 것도 없
고, 자연상태에 관한 내용적 언급조차 거의 눈에 띄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 문제가 그렇다고 해서 일반 독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것이, 루소 연
구가들 사이에서도 이는 루소 사상체계 내에서 국가에 대한 이론과 자연
상태에 대한 생각[구상]을 분리시켜 후자를 전자를 위한 전식[오르되브
르]이나 권두(卷頭)화(畵)정도로 하찮게 여기는 데에 단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와 자연이 이렇게 루소에서 각각 별개의 독립적 사상체계
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실은 루소 방법론의 독창성에 그 까닭
이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ꡔ인간 불평등기원론ꡕ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그
정체를 확연히 드러낸다.
“나의 ꡔ사회계약론ꡕ 안의 모든 대담하고 독창적인 것은 이미 벌써 ꡔ불
평등기원론ꡕ에 실려 있었다.” 루소가 그의 ꡔ참회록ꡕ 제9편에서 한 이 말
은 그의 국가론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지시함으로써 앞의 두 저술을
하나로 묶고 있다.

“이제까지 정치사회의 기초를 연구한 철학자들은 모두 자연상태로 거


슬러 올라 갈 필요를 느껴왔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40)
26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생각이 적어도 정치학에 있어선 루소의 전


속물이 아니고, 루소가 그의 정치학 저술에서 언급한 모든 학자들에 공통
된 기본 방법이었다. 사실 자연상태라고 하는 가설은 17세기 중반 이후로
정치철학의 일상적 주제가 되어 있어, 이 주제 하에 홉스, 로크는 말할
것도 없고 푸휀도르프(Pufendorf), 뷔르라마키(Buramaqui), 볼프(Wolf)
그리고 자연법 학파의 전 법학자를 망라할 수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루
소의 독창성이라는 것도 이들 학자들과의 비평적 대화를 통해 변증법적으
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자연상태를 상정하는 방식을 대별하면 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문명화
된 삶과 대조되는 자연상태란 인간이 그의 동포와 떨어져 홀로 사는 상태
를 말한다. 이 문명 이전의 상태에선, 협업, 분업, 교역, 산업 없이 인간
이 홀로 삶을 꾸려가는 만큼, 그의 삶의 조건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다
음은 정치학에서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자연상태를 시민상태(état
civil), 곧 정치사회(société civile, civil society, 시민사회)에 대
립시킨다. 시민사회와 상반된 이 상태에선 사람들은 자연적 동종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단순하고 보편적인 연관 이외의 그 어떠한 도덕적 정
신적 유대도 맺고 있지 않으며, 사람을 사람에 매는 모든 종류의 협약 역
시 부재하는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상정된다. 따라서 이 상태에선
지배관계, 주종관계, 종속관계 따위가 존재할 리가 없을 뿐 아니라, 사람
들 사이에 해를 입히거나 선을 베푸는 일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자연상태의 특징은 그러므로 ‘고립’이나 ‘고독’이라기보다는 ‘독립
[자립]’이다. 이 특징은 창조주 하나님 이외의 모든 존재로부터의 완벽
한 독립이기 때문에 자연상태의 ‘으뜸 권리’ 또는 ‘천부의[자연적인]
자유’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자연으로부터 자유를
부여받은 이상, 어느 누구도 타인에 대하여 주인이나 종, 통치자나 신민
의 자리에 있지 않으며, 그래서 사람은 서로 간에 ‘평등’하다. 이렇게
자연상태를 시민상태에 대비시키는 것은, 결국 홉스를 제외한 당대의 모
든 철학자와 모든 자연법 학자들에게 ‘자연사회’와 협약에 그 기원과
근거를 두고 있는 ‘시민사회’를 대립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자연
사회와 시민사회의 차이는 한 편의 평등성 내지 독립성과 다른 한 편의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27

‘최고 권위에 대한 복종’의 대비에서 드러나는데, 로크는 전자에서 후


자에로의 이행이 결국 정치공동체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인간들 사이의 자연상태를 끝내기 위해선 협약이 필요한 데, 그렇다


고 해서 어떠한 종류의 협약이나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것에 의해서 인간들이 공동체에 들어가 정치체를 형성하기로 서로 함께
약속하는 협약뿐이다.”(ꡔ시민통치론ꡕ, 14절)

‘자연상태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철학자 모두에게 공통된 시도’는,


위에 인용한 로크의 경우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렇게 국가의 역사적 기원
문제뿐만 아니라 동시에 국가 존재의 이론적 근거[정초]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자가 자연상태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의 문제는
그가 어떻게 국가를 구상할 것인가의 문제와 상관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
다. 루소 자신도 그의 국가 구상, 곧 ꡔ사회계약론ꡕ의 독창성은 이미 ꡔ불
평등기원론ꡕ에서 연원한다고 말한 만큼, 그가 여기에서부터 자연상태에
대한 정의 문제를 놓고 다른 철학자들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은 당연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철학자들의 대부분은 자연상태가 실제로
존재했었는지 안했었는지 의문을 품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루소
의 이 지적이 틀리지 않은 것은, 사실 그를 제외한 모든 사상가들의 일반
적인 경향은 자연상태라고 하는 것이 순수한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
하거나 했었다고 믿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이들 역시 과거 어떤
시점에 인류 전체가 자연상태라고 부르는 상황 안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
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인정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지구
상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법도 정부도 없이 야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
역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국가[시민사회, 정치사회]들은 각각 자신의
독립을 보존하려는 데다가 서로 간의 분쟁을 심판해 줄 공동 상위자가 없
기 때문에 일종의 자연상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상태는 순전한
허구가 아니고 시공의 어떤 지점에 존재한다는 이 생각을 로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 걸쳐 있는 다수의 독립적 통치체제의 수장과 군주들


28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이 자연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구상에는 과거에나 미래에


나 항상 자연상태 속에 사는 일정한 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
다.”(ꡔ시민통치론ꡕ, 14절)

그런데 자연상태의 실재성 또는 허구성의 문제에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


는 왜 루소를 포함한 모든 철학자들에 있어서 이 자연상태라는 가설이 국
가존재의 정초를 위한 계약이론으로 예외 없이 이어지는가이다. 자연상태
에 대한 개념 규정에 있어서 철학자들 간의 상이는 그들 각자 국가 이론
의 특수성과 연관이 있으나, 람세(Ramsay), 보스웨(Bossuet)같은 가톨릭
계 사상가들은 아예 자연상태 가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즉 인간은 그
존재의 어떤 시점에서도 독립[자립]상태에 있지 않으며, 상하관계, 종속
관계가 인간의 자연스러운[자연적인] 상태라는 것이 이들의 신조였다. 철
학자들의 자연상태를 전도 내지 부정한 것이 가톨릭계 사상가들의 ‘자연
적인 상태’인 만큼, 이들에게는 인간 중 몇몇은 통치하도록 태어난 반면
에 대다수는 순종하도록 태어났다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들이 이런 통치 질서가 자연적인[하늘의] 질서라고 강변하는 이유는, 이
들 자신이 홉스로부터 루소에 이르는 모든 근대 정치철학이 공유하는 계
약설의 근거가 다름 아닌 자연상태라는 가설에 있다는 사실과 따라서 이
가설이 결국은 통치권의 신적 기원을 지지하는 기독교 이론을 붕괴시키는
데에 이를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가 주목한대로, 자연상태는 본질적으로 각자의 독립 상태이
다. 이를 납득하면 곧 어느 누구도 타자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것
이 자연의 섭리인 것을 시인할 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
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원칙으로 설정하게 된다. 왕권신수설 지지자의
대부분이 부인한 이 원칙은 그러나 자연법 학파의 모든 철학자에게는 공
통된 원칙이었다. 그래서 루소 자신이 인간은 본래[자연적으로] 평등하다
고 언명했을 때, 이는 어떤 새로운 진리가 아니고 철학자들 사이에 상식
으로 통하는 진리를 말하고 있음을 그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듯이 보인
다.

“인간을 구별하게 하는 차이점들이 있는데, 이의 일차적 원인 내지 기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29

원은 체질의 연속적인 변화에서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은 쉽사리 알 수 있


다. 왜냐하면 각 종의 동물들이 어떤 물리적인 원인으로 인하여 현재 우리
가 관찰할 수 있는 바의 다양성이 그들 사이에 나타나기 전에는 평등했던
것처럼 사람들 역시 본래는 서로 간에 평등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
고 있기 때문이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1, 135)

그런데 ‘자연적 평등’이라는 이 원칙의 의미를 오해하는 경우가 빈번


한데, 이는 인간들이 재능과 힘에 있어서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인간은 각자 자연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인
도하기에 충분한 이성을 부여받은 만큼, 누가 지적, 신체적, 정신적 우월
성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이 사실이 그에게 타인을 자신의 권위에 복종시
킨다든가, 또는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강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천부인권이라고 번역하게 될 이 자
연상태에서의 자유와 평등이 철학자들에 의해 사회 질서의 원칙으로서 천
명되었을 때, 이미 시민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
다.

“당신의 이성이 우리의 이성보다 우월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당신의 이성이 우리들의 법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
니다.”(ꡔ산에서 보낸 편지ꡕ, VPW, 3, 126)

그러면 이 천부인권을 침해하지 않고 어떻게 정당한 사회 질서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다름 아닌 확립될 권위에 복종해
야 할 사람의 동의를 전제하는 ‘계약론’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게 태어났기 때문에, 어


느 누구도 그 어떠한 이유 하에서도 다른 사람을 그의 승인 없이 복종시킬
수 없다. 그래서 노예의 자식은 노예로 태어났다고 결정하는 것은 그가 사
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결정하는 것과 매일반이다.”(ꡔ사회계약론ꡕ 제
4편 2장, PLE, p.440)

이상의 인용문은 ꡔ사회계약론ꡕ의 문체상의 특징인 간결한 문장과 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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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조 때문에 저자가 무엇인가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천명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지만, 사실 루소는 여기서 그보다 먼저 ‘자연권과 정
치권’을 연구한 학자들, 즉 로크, 푸휀도르프, 뷔르라마르키 등의 사상
을 답습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군주며 백성, 주인이나 노예,
이런 명칭을 자연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자연이 만든 우
리는 단지 사람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들인 만큼, 그러니까
사람은 모두 평등하며 동등하게 자유롭고 독립적이다. 자연이 우리 모두
에게 마찬가지의 능력을 부여한 이상, 우리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것 역시 자연의 섭리이다. 따라서 이 최초의 자연상태에선 어느 누구라도
타인을 명령하거나 스스로를 군주로 임명하는 천부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자처할 수 없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7)
만일 이렇게 자연[본성]에 의해서 사람이 타인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면, 명령하는 권리, 통치권 또는 지배권은 협정(convention) 내지
계약(contrat)으로부터 밖에 생겨날 수가 없다. 이 계약에 의해서 개인들
은 그들의 자유와 힘을 마음껏 처분할 수 있던 ‘자연권’을 포기하여 이
를 한 인간이나 한 집회에 위탁 내지 양도한다는 말이다. 요컨대, 온갖 권
위 중에서 오직 그 권위에 복종할 자의 동의에 기초한 권위만이 정당하고
합법적인 권위이다. 이러한 동의에 의거하지 않는 모든 권위는 악행이나
강제에 지나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강자의 권리 아니 강자의 법에 다름 아
니다.
이상의 논구로부터 우리는 무릇 계약설은 자연상태라는 가설과 불가분
의 관계에 있으며 그리고 후자는 전자에 필연적으로 귀착한다는 것이 자
명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철학자가 자연적 평등이라
는 원칙에 대해서는 이렇게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지만, 인간의 자연적
조건에 관해선 제가끔 개념을 달리하고 있고, 또 이것이 이유가 되어 제
각기 계약 조항[조건]을 설정하는 방식도 달리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차례가 되었다. 실제로 철학자 각자의 계약이론 내용은 그의 자연상태에
대한 구상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규정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7) J. J. Burlamaqui, Principe du Droit Politique, (Zacharie Chatelain,


Amsterdam. 1755), 5장 3절.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31

우선 홉스의 경우에서도, 그의 사회계약 조항들이 자연상태에 있는 인


간들의 비참한 정황에서 불가피하게 도출되었음은 자명하다. 그에게서 자
연상태는 다름 아닌 전면적 전쟁과 광폭한 혼돈의 상태이기 때문에 사람
들은 예외 없이 그들의 자연적 자유를 유보 없이 양도하여 절대적 권력에
순종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런 계약 조건은 누가 보더라도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보다는 유리할 것이고, 그러니까 삶의 본능, 곧 죽음의
공포뿐 아니라, 이성 역시 모든 수단을 다하여 이 상태에 종지부를 찍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또한 같은 논리에 의해, 로크의 자유주의적 계약론 역시 자연상태에 관
한 그의 사상에 의해 설명된다. 로크에 있어서 자연상태에 살고 있는 인
간들에게는 이미 자연법에 따른 의무 사항들이 있으며, 이로 인해 이 원
시적 인간 조건은 벌써 상호원조와 평화의 상태인 것이다. 바로 이런 배
경 때문에 시민사회에 들어와 제정되는 법의 목적도 자연법을 비준하고
자연법에 따른 의무사항들을 공고히 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크에 있어서 국가의 제 기능이 극단적으로 제한되고 그 역할이 자연법
에 의해 인정된 개인적 제 권리의 보호에 한정되는 것이다. 또 무릇 도덕
성 자체가 시민사회 형성에 선행하는 만큼, 국가는 달리 수행할 도덕적
사명이 없으며, 그 활동은 구성원의 재산, 자유, 생명의 보호에 한한다.
사실 자연상태에 대한 로크의 기술이 거부되면 그의 전 시스템은 그 자리
에서 주저앉고 만다.
그러면 루소의 계약론과 자연상태에 대한 그의 구상은 어떠한 상호관계
에 있는가. ꡔ사회계약론ꡕ의 서설에 해당한다고 보아야만 하는 ꡔ불평등기
원론ꡕ에서 루소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만일 내가 여기서 자연상태라고 하는 이 가설에 대해 너무 상세히 지


루할 정도로 논하였다면, 그 까닭은 고질적인 선입견들이나 오래된 착오
들을 일소할 필요를 절감한 나머지, 문제의 뿌리까지 파고 들어가 참된 자
연상태의 그림을 통하여 불평등이라는 것조차 이 상태에서는 우리 저술가
들이 주장하는 만큼의 실재성이나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보여 주
어야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66)
3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이 원문을 통하여 우리는 루소가 자연상태에 대한 자신의 묘사에 부여


하는 가치와 중요성을 알아 볼 수 있다. 또 루소 자신의 자연상태에 대한
(최종적) 정의는 여타 철학자들의 착오와 편견을 지적하고 교정하는 과정
을 거치면서 드러날 것이다. 사실 루소에게 있어서도, 홉스나 로크의 경
우와 마찬가지로, 자연상태에 대한 사상은 그의 국가론 전체를 조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경우 이성과 도덕성은 국가 생활 덕분
에 비로소 개발되고 실제성을 갖게 되는데, 이는 그 자신이 ꡔ불평등기원
론ꡕ에서 주장한 바대로, 자연인은 이성을 오직 ‘가능태’로서 밖에 갖고
있지 않으며, 그의 동류와는 어떠한 도덕적 관계도 맺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ꡔ불평등기원론ꡕ은 ꡔ사회계약론ꡕ의 서론 구실을
하고 있고 그래서 이것과는 불가분의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2. 전쟁으로서의 자연상태

1) 루소의 방법론
자연적 평등이라는 원칙 자체에 대해서는 철학자 모두가 찬성이라면,
반면 자연상태를 평화 상태와 전쟁 상태 양자 중 어느 쪽으로 규정할 것
인가의 문제를 놓고서는 이들은 서로 갈라진다.
홉스에게는, 자연상태에서 인간들은 제각각의 독립을 누리고 있는데,
이 독립 상태가 모두가 모두에 대한 전면전(全面戰)으로 전락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에 반해 로크, 푸펜도르프 그리고 법학자들 대부분은 자연
상태는 ‘평화와 상호원조’의 상태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상태
에 대한 이런 긍정적인 견해는 사실 “‘자연인’에게 ‘정당과 부당의
관념’이나 ‘사회적 애착’이 있다고 상정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지
적하는 것이 또한 ꡔ불평등기원론ꡕ서문에 나타나는 루소의 입장이다. 만인
은 만인의 적으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홉스에 반해서, 인간은 선천적으
로나 본성상 사회적[사교적]이고 자연법에 따라 산다고 주장하는 로크는
양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자연 상태와 전쟁 상태는 평화, 상호 보존, 원조, 호의의 상태와 상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33

호 파괴, 폭력, 악의, 적개심의 상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르고,


관계가 멀다.”(ꡔ시민통치론ꡕ, 14절)

그런데 한편 자연상태가 평화상태인 것은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 홉


스 이론이나 로크 이론 모두 반박하는 것이 다름 아닌 루소의 입장인 것
이다. 비록 이들의 견해가 상반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방법상’의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루소의 지적이다. 그보다 앞서 모
든 철학자들이 자연상태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완
벽가능성(perfectibilité)이나 사회에서의 삶이 인간 본성(la nature
de l'homme)에 초래한 심오한 변모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 루소 방법
론 비평의 핵심이다. 만일 인간 연구에 있어서 그들이 발생적
(génétique)방법을 따랐다면, 복잡하게 엉킨 인간의 심성이 여러 단계의
변화를 거친 결과임을 풀어 보일 수가 있었을 것인데, 그들의 연구 방법
은 분석적(analytique)이었다. 또 자연이 만든 그대로의 인간을 연구하
는 대신에 그들은 그들의 눈앞에 있는 인간을 관찰하였을 뿐인데, 이는
그들이 그들의 연구 대상인 인간이 수세기에 걸친 문명과 사회적 삶에 의
해 형성되고 변형되어 왔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이 자신처럼 발생적 방법을 따르지 않고 분석적 방법을 취한 결
과 범한 오류를 루소는 다음과 같이 비평하고 있다.

“홉스를 비롯한 철학자들의 잘못은 자연인을 그들의 눈앞에 있는 인간


들과 혼동하고 한 시스템에서나 존속할 수 있는 존재를 다른 시스템으로
이전시킨 데에 있다.”(ꡔ전쟁상태ꡕ, VPW, I, P306)
“로크의 추론 체계는 와해될 수밖에 없다. 이 철학자의 전 변증법조차
그가 홉스와 여타 철학자들이 범한 오류를 다시 범하지 않도록 하는 데 아
무런 보장이 되지 못했다. 그들이 설명해야 할 사태는 다름 아닌 자연상태
인데, 이 상태는 인간들이 ‘저마다 따로따로 떨어져’ 살았던, 그러니까
누가 누구 곁에 남아 있어야 할 동기가 없고 인간들이 함께 모여 서로가
이웃이 되어 살 이유가 없었던 상태인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장구한 세월
이 자연상태와 그들 사이에서 흘러갔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했는데, 사실
이 흘러간 세월 동안 인간들은 항상 서로 가까이 머물러야 할 이유가 있었
고, 한 남자가 한 여자 곁에 거주해야 할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ꡔ불평
등기원론ꡕ, VPW, I,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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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발생적 방법이 아니고 분석적 방법을 따른 철학자들은 모두 문명


인을 야만인으로부터 갈라놓는 역사 작용을 제대로 알아 볼 수가 없는 것
이다. 그러니만치 이들은 원시적 충동과 인위적 정욕, 천부의 것과 사회
적 획득형질 내지 문명의 산물,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과 사회에서 유래하
는 것 등의 차이를 식별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모두가 끊임없이 욕구, 필요, 탐욕, 억압, 욕망, 자만심 등에 관해서


논하면서 실은 그들이 사회상태에서 채취한 관념들을 자연상태에다 옮겨
놓았던 것이다. 야만인, 원시인을 말하면서 실은 문명사회의 인간을 그리
고 있다는 말이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41)

이렇게 그 이전의 학설들을 비평하면서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개시킨다. 자연인 또는 원시인의 삶의 방식과 사고
방식을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여타 철학자와 이렇게 차별화된 루소의 추
론 원칙은 자연인은 홀로 떨어져 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제각기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en dispersion)사는 자연인은 동류인
[그와 유사한] 타 인간들과 아무런 교류도 없고 서로 간의 개인적인 인지
도 없으며, 심지어는 타인들이 그와 같은 종(種)에 속한다는 사실조차 의
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각자가 다른 사람들 보기를 마치 다른 종의 동
물들을 보는 듯하다”는 ꡔ불평등기원론ꡕ의 표현은 자연인은 동종의식, 인
류의식, 연대의식이 없는, 자연과의 관계 이외에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안팎으로 고립된 동물과 같다는 것을 시사한다. 루소 또한 계몽 시대의
대부분의 학자들처럼 ‘야만인’에 관한 이론을 세웠으나, 이런 경우에도
‘자연인’ 연구에 있어서의 그의 추론 원칙을 떠나지 않았다. 그 역시
탐험가들의 진술, 여행가들의 이야기 등을 읽고 이에 실린 ‘사실과 관찰
들’을 참조하였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이차적인 중요성 밖에 없었으며
그것도 오직 그가 거기서 자신의 추론 원칙을 확인하고 또 이로부터 출발
한 자신의 연역을 검증하기 위한 수단을 발견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하였
다. 그도 그럴 것이 루소의 방법론에선 “어떤 문제에 대해 성찰[이론적
사유, réflexion]이 우리에게 알려 준 것은 관찰이 뒤따라와서 이를 확
증하기” 때문이다. 루소의 사유는 ‘사실과 관찰’로부터 출발하는 귀납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35

적 사유가 아닌 만큼, 관찰은 언제나 사유가 이미 ‘이론적’으로 ‘상


정’해 놓은 것의 검증․확인으로서만 개입하게 된다. 그러므로 루소의 자
연인은 야만인에 대한 경험과 관찰에 앞서는 이론적 가설이요 논리적 허
구라 할 수 있다. 자연인과 경험적 사실의 관계에서 전자가 후자에 선행
하기 때문에 루소는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자연인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
려면 우선 사실들을 제쳐놓는 것으로 시작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하늘과 땅 사이에 아무런 연고 없이 저 홀로 사는 자연인, 이 논리적 허
구의 목적은 흔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예찬이나 자연회귀에
있지 않고, 사회적 사실, 역사적 사실의 총체인 문명사회의 비판에 있는
것이다. 이 논리적 허구에 의한 문명사회 비판의 결과가 다름 아닌 루소
의 국가론이다. 다시 말하면 ꡔ사회계약론ꡕ에서 제시된 대담하고 독창적인
모든 것은 이미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2) 루소의 홉스 비평: 전쟁상태


홉스는 자연상태를 전쟁상태로 규정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그에 대
한 루소의 비평은 ꡔ불평등기원론ꡕ 제일 부, ꡔ사회계약론ꡕ 일편 5장의 한
대목, 단편 ꡔ전쟁상태ꡕ에서 행해지고 있다.
홉스의 ‘각자의 모두에 대한 전쟁’ 이론을 공격할 때, 루소는 ‘부
조리하고도 역겨운 사상체계’, ‘끔직하고 소름끼치는 사상’, ‘터무
니없는 학설’, ‘해괴한 이론’ 등의 과격한 언사를 가차 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어법에도 불구하고 루소가 홉스 논증법의 가
치를 모르고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한 것은, 그가 ꡔ제네바 초고ꡕ에서 홉
스 이론과 상반되는 ‘자연인의 사교성’ 이론을 반박할 때 홉스 논증법
으로부터 착상을 얻은 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소 자신도 인
간들이 일단 사교적이고 영악하게 되면 전쟁 내지 적대 상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가 홉스에서 부정하는 것은 전
쟁 상태가 종(種)으로서 인간의 천부의 자연 상태라는 주장이다.

“홉스의 잘못은 전쟁상태를 독립적이고 사교적으로 된 인간들 사이에


확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 상태를 인류의 자연적인 상태로서 상정하고 모든
36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악폐의 원인으로서 설명한 데에 있다. 사실 전쟁상태는 모든 악폐의 원인


이 아니고 결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ꡔ제네바 초고ꡕ 1편 2장, VPW,
I, 453)
“전쟁상태가 인간의 자연 상태라는 주장은 진실로부터 거리가 먼 이야
기다. 전쟁은 사실 평화에서 생겨나거나, 인간들이 지속적인 평화를 확보
하려고 취하는 예비조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ꡔ전쟁상태ꡕ, VPW, I,
305)

이렇게 루소와 홉스의 기본 입장이 상반되는 것은, 후자가 이중의 오류


를 범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자의 지적이다. 즉 홉스는 전쟁상태에 대
한 틀린 관념에 더하여 자만심 내지 오만의 성질에 대한 착오를 범하였다
는 것이 루소의 이중 비평이다. 따라서 루소의 전쟁상태에 대한 비평은
‘법적 관점’과 ‘심리학적 관점’, 이 두 단계를 거쳐 진행되게 된다.

(1) 법적 관점
“만일 전쟁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사람들 사이에서 아니고 오직 국가
들 간에서만 발생한다.”8) 전쟁에 대한 루소의 이런 규범적인 사고는 한
편 국가와 법에 대한 루소의 사상을 함축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 전쟁에
대한 홉스 사상의 모호함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홉스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전면적 전쟁을 논할 때, 그는 이 말을 통속적인 의미로 그냥 사용하
고 있는데, 만일 이 말을 법적인 의미로 취할 경우 개인들 간에 진짜 전
쟁은 자연 상태에서든 정치사회에서든 일어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자연 상태는 ‘독립’ 상태, 곧 공동 상위자도 심판관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누구든 다른 사람의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탈취하려고 폭력을
사용하는 자는 그 상대방과 전쟁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는 것은 루소 이전
의 모든 철학자가 인정했던 점이다. 그런데 자연 상태에선 개인들 간에
전쟁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루소는 이 전통에 대해서 하나의 역
설을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이 역설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이제
알아보기로 하자.
두 사람이 다투고, 치고받고, 심지어 서로 죽이는 일이 있다고 해서,

8) 루소, 전쟁상태 , VPW, 296.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37

이를 가지고 양자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둘은 서로 적이다, 라고 단정


할 수는 없다. 전쟁다운 전쟁이 있으려면, 첫째 적대관계가 일정한 기간
동안 지속되어야 하고, 둘째 서로가 피해에 대한 보상을 얻을 목적으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이 두 조건 중의 어떤 하나도 자연 상태에서는 충족
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한나절 안에 끝나는 양자 또는 다자간의 격투가
진짜 전쟁의 특징을 이루는 장기간의 적대관계와는 다른 것이 자명하다.
“전쟁이란 확고부동한 관계를 전제하는 지속적인 상태다. 이런 관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성립되기가 거의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연 상
태에선 만물이 유전(流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만큼 어떤 다툼 거
리가 생겨나도 그 즉시 사라지게 마련이고, 분쟁은 시작되면 한나절 이상
갈 수가 없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연상태에서 격투와 살인은 있을 수는
있으나, 장기적인 적대관계나 전쟁이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
깝다.”9)
이상의 구별은 그러나 어디까지나 외적 차이에 의거한 구별이다. 루소
는 이 문제를 ꡔ사회계약론ꡕ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어 이 번에는 논거를 더
이상 전쟁의 지속기간에서가 아니라 그 대상[목적, objet]에서 끌어낸다.
사실 전쟁을 아무 분쟁이나 또는 단순한 일개의 복수와 혼동해서는 안 될
일이다. 왜냐하면 거기서의 목적은 결코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그로부터 피해에 대한 보상을 강제로 얻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인이 만물을 공유하는, 그러니까 소유[재산]의 경계가 없는 자연상태에
선 침해(侵害)라는 것 자체, 월권(越權)이라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상태는 소유의 제도화, 곧 정치사회의 수립 이전에
는 개인들 간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루소는 홉스 뿐 아
니라 로크와도 견해를 달리한다. 로크나 푸휀도르프가 자연상태에서도 전
쟁상태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은, 그들은 소유를 정치사회 설립에
선행하는 ‘자연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루소
에게는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그 기초[존재근거]가 ‘사회 질서’에

9) 같은 책, p.294.
38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있는 까닭에, 자연상태에선 피해, 침해, 전쟁 따위는 있을 수 없는 것이


다. 루소는 이 점을 ꡔ사회계약론ꡕ의 한 대목에서 지나치게 간결해서 일종
의 수수께끼 같이 여겨질 수 있는 문장으로 재차 주장하고 있다.

“사람 관계가 아니고 사물 관계가 전쟁을 성립시킨다. 다시 말하면 전


쟁상태는 단순한 개인적 관계로부터는 발생할 수 없고 오직 실재적 관계에
서만 생겨날 수 있는 만큼, 사적 전쟁 또는 개인 대 개인의 전쟁이란, 불
변의 소유권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 상태에서든, 만인이 법의 통치하에 있
는 시민 상태에서든 있을 수 없는 것이다.”(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4장,
PLE, 357)

물론 ꡔ사회계약론ꡕ이 간결하면서 극히 압축된 문장으로 짜여진 ‘소논


문’이라는 사실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루소가 위에 인용한 대목 이상으
로 전쟁에 관한 그의 논증을 전개하지 않은 것은, 이 문제가 철학자 누구
에게나 자명한 원칙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것을 그 스스로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루소 이전에 로크나 푸휀도르프 같은 학자들은 개인들
이 일단 국가의 구성원이 되면 그들 자신의 분쟁 사안에 대해서나 침해자
의 징벌에 관해서 더 이상 심판권이 없으며 그들의 분쟁을 재판관의 중재
에 맡겨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 바 있다.

“자연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전쟁의 경우, 분쟁 당사자들 사이에서


사안을 결단해 줄 공동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하늘밖에 호소할
길이 없거나, 사소한 분쟁이라도 타협 없이 일방적으로 단숨에 종료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회를 형성하고 자연 상태를 떠났
던 것이다. 사실 지상에 하나의 권위, 하나의 권력이 있다면, 사람들은
이것에 호소할 수 있어 전쟁상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분쟁 역시 이
권력을 부여받은 자에 의해서 해결될 것이다.”(ꡔ시민통치론ꡕ 21절)

이렇게 루소 이전의 철학자들에게는 시민사회에서는 개인들 간에 전쟁


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었던 만큼, 루소의 독창적 기여라
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도 철학자들의 만장일치에 반하여, 개인들 간의
전쟁은 자연상태에서도 있을 수 없다고 입증한 점이다. 그러면 이 두 종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39

류의 상태 중 그 어느 쪽에도 전쟁이 있을 수 없다면, 전쟁은 결국 ‘공


적 인격체’(personne publique) 곧 ‘국가’ 간에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루소의 결론이다.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고 국가 대 국가의 관계이기 때문


에, 그 상태에서 개인들이 서로 적이 되는 것은 오직 우연적인 일이며 ,그
것도 인간이나 ‘시민[국민]’으로서가 아니고 병사로서 뿐이다. 즉 개인
들은 조국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고 그 방어자로서만 서로 적이 되는 법이
다.”(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4장, PLE, 357)

(2) 심리학적 관점
“인간 대 인간의 보편적 전쟁은 결코 없으며, 그리고 인간 종은 서로
파괴한 끝에 멸종(滅種)하려고 생겨난 피조물이 아니다.”10) 루소의 이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은 각 개인의 생명 보존이 종의 희생을 대가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자연 본성
이 홉스가 기술한 바대로라면 인류는 존속해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안녕이 자신이 속한 종의 파멸에 결부되어 있다고 믿을 동물이
천지간에 있을 수 있을까. 또 이렇게 해괴하고 가증스러운 종이 과연 두
세대 동안이나마 존속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11) 우리가 루소의
이 통렬한 비평을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은, 종의 창조 목적이 종의 자기
파괴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개인의 보존을
위해서와 마찬가지로 종의 보존을 위해서도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
고 있다. 즉 생의 본능이 전자와 후자의 보존을 동시에 확보해주는 역할
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째서 홉스는 이와 상반되는 견해를 주
장하는 것인가?

“그 자신이 설정한 제 원칙에 입각하여 추론했다면 홉스는 의당 자연


상태는 우리의 생명보존을 위한 배려가 타인의 생명보존을 위한 배려에 해
를 끼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인 만큼, 따라서 평화에 가장 알맞고 인

10) 같은 책, p.294.
11) 같은 책, p.305.
40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간 종의 번식에 가장 유리한 상태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홉스가 말한


것이 이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던 것은, 야만인의 자기보존 본능에 사회생
활의 산물인 잡다한 정욕을 개입시켰으니까 말이다. 더욱이 야만인의 보
존 본능은 자연적으로 충족될 수 있는 반면, 사회인의 다양한 정욕은 그
자체가 법 제정을 필수불가결하게 만들고 있는데도 말이다.”(ꡔ불평등기
원론ꡕ, VPW, I, 159-160)

여기서 우리는 루소 심리학의 핵심 사상 중 하나를 만나게 되는 바, 이


는 루소 사상체계 자체의 근간을 이룰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현대 사회심
리학이나 마르크스-엥겔스 이데올로기 비평에 관해서는 선구자적 역할도
한다. 즉 이 사상에 의하면, 대부분의 욕망[욕심, 정념, 정욕,
passions]은 그 기원이 ‘사회적 삶’에 있을 뿐 아니라, 또 그것은 인
간이 그의 동류와의 계속적인 교류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의 덕분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즉 루소는 스토아 철학자
처럼 한편의 원시적 충동 내지 자연적 성향과 다른 편의 여론[세론,
opnion]에 기인하는 욕망을 구별하고 있고, 또 같은 이유로 “원시인 또
는 야만인은 이렇다할 욕망에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다”고 설파하는 것
이다. 그 기원이 스토아 철학에 있는 이 근본적인 구별로부터 루소는 다
종다양의 사회․문화 현상에 대한 판단을 도출하고 있다. 우선 몇 가지 사
례를 들어보자.

“사랑조차도 다른 모든 정욕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삶에 들어와서야 비


로소 흔히 인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그 격렬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64)
“사회적 인간이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세인의 여론 속에
서 살 줄 밖에 모른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95).
“내가 보니까 잡다한 욕심 가운데서 세론이 자신을 높여 요지부동의
왕좌에 오르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렇게 세론의 왕국의 신민이 된 나머
지 타인의 판단 위에 자신들의 인생을 세우는구나.”(ꡔ에밀ꡕ, VPW, Ⅱ,
185)

그러면 이런 ‘사회적 동물’의 심리와 대조되는 ‘떨어져 홀로 사


는’ 자연인의 심리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원시인[자연인] 심리의 특성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41

을 나타내는 것은 결국 정욕의 고요, 영혼의 평온, 스토아적 현자의 아타


락시아와 유사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영혼을 동요시키는 것이 전무한 만큼, 원시인이 숨쉬며 발산하


는 것이라곤 안온과 자유뿐이다. 즉 그가 원하는 것이라곤 그저 살고 무위
(無爲)상태로 남아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 이외의 다른 모든 대상, 목
적에 대한 그의 무관심에는 스토아 철인의 아타락시아조차 접근할 수 없는
바가 있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95)

게다가 그러면 루소의 자연인은 동양의 은자나 도가의 신선과도 같은


심성을 갖고 있단 말인가? 이런 질문은 물론 우리가 ꡔ불평등기원론ꡕ을 ꡔ
정치적 권리의 제 원리ꡕ로부터 독립시켜 그것만을 읽는다면 그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루소 방법론의 기본 사항 중 하나를 간과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루소의 자연인은 어디까지나 사유하는 이성
의 산물, 즉 논리적 허구요 실험적 가설이니 만큼, 사유하는 이성으로서
루소는 자연인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실체인지 아닌지 단정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루소에게 “그것은 현재 존재하지
도 않고 지금까지 존재한 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그
무엇인 것이다.” (사유하는) 주체와 대상, (사유 내용인)관념과 (대상
의)실재성, 이런 인식론상의 기본적 구별이 동양 고대 사상에는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만일 루소가 상정한 자연인이 천하태평의 성질이라면, 홉스의 자연인은
그의 자만심[허영심, pride]으로 인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동류들과 함께 살면서 사람은 필히 그의 처
지를 그의 동류들의 것과 비교하게 되며, 또 그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이 비교가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때 만이다. 사실, 그의 행복의 실체는
이 비교에서 오는 우월감의 소치다. 그러니까 행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
고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결국 자연 상태에서 전쟁상태가 불가피한 까닭
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환상을 갖고 있고 타인보
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만치 타인이 소유하
고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없으면, 자신이 왜소하게 보이며 허영심이 상처
4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를 받기 마련이다. 이래서 누구나 행복의 추구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경


쟁자요, 적수요, 방해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기초적인 심리적
사실이 바탕이 되어 ‘명예’, ‘부’, ‘권위’를 쟁취하려는 영구적인
경쟁과 끊임없는 투쟁이 일반화되는 것이다.
이런 홉스 이론에 대해 루소가 비평하고자 하는 것은 홉스의 심리학적
통찰 그 자체가 아니고, 단지 그것이 자연상태에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이
다. 전쟁상태의 원인을 ‘자만심’에서 찾아냄으로써 홉스는 사실 심오한
심리학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니, 그의 유일한 잘못이라고 한다면 그
것은 다만 인위적인 정욕, 즉 사회적 삶에서 유래하여 반성적 사고
(réflexion)에 의해 생산된 이차적 정욕을 ‘자연적인 감정’으로 간주
한 점에 있다. 홉스가 그 파괴적인 결과를 적절히 기술하고 있는 자만심
또는 허영심은 사실 그가 믿고 있는 것처럼 원시적 정욕이나 욕망이 아니
며, 또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애’ 내지 ‘보존본능’ 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이 구별은 루소 심리학의 관건을 이루고 있으며, 루소는 ꡔ불평
등기원론ꡕ의 홉스를 겨냥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한 주석에서 이 점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자기애와 자만심을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두 욕망은 그 성질


에 의해서나 그 영향에 있어서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애는 자연적인
감정으로서 모든 동물로 하여금 자기 보존에 주의를 집중케 하며, 게다가
이성에 의해 인도되고 동정[연민]에 의해 조율되면 인류애(humanité)와
덕성을 만들어 낸다. 이에 반해, 자만심은 사회 안에서 생겨난 인위적이
며 상대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각 개인으로 하여금 다른 누구
보다도 자기 자신을 존중케 하며, 또 이것은 명예심의 진정한 원천이면서
도 동시에 인간들 마음에 서로 간에 행할 악의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영감
의 원천이기도 하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217)

만일 홉스가 자만심의 ‘결과’만을 기술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자만


심의 ‘기원’ 내지 발생과정을 추적했다면, 비교에 기초하는 이런 상대
적 감정이 인류 진화가 어떤 특정한 단계에 도달하였을 때만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을 인지하였을 것이다. 사실 이 상대적 감정의 전개와 발전은
인간관계의 정착과 반성적 사고의 사용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으니까 말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43

이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자만심 내지 허영심이 반성적 사고에 선행할


수 없는 것은, 그 자체가 인간들 간의 상호 비교 능력과 동류로서의 동일
[같다는]의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홀로 살아가는 존재
는 본능 이외에 다른 길잡이가 있을 수 없으며, 그러니까 ‘그의 동류도
타류의 동물들 보는 듯이’ 하는 것이다. 이런 존재가 자만심이나 허영심
의 기원이 되는 비교를 자기 자신과 동류에 대해서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므로 자만심이란 자연상태에서 실존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들의 원시 상태, 곧 진정한 자연상태에서는 자만심은 존재


하지 않음을 천명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을 지켜보는
유일한 관찰자며, 천지간에 자신에 관심을 갖는 유일한 존재며, 자신의
행위에 대한 유일한 심판자인 만큼, 동류와의 비교에서 발원하는 자만심
이 그에게 생겨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217)

그리하여 자만심을 자연적 감정의 일종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


다. 자만심은 사교성의 발전 및 이로부터 결과하는 반성적 사고와 결부되
어서만이 나타나니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법적 관점’에서 다
루었던 논증법이 이번의 ‘심리학적 관점’에서도 다시 적용되는 것을 알
아 볼 수가 있다. 지속적인 인간관계의 항구적 정착은 그 자체가 전쟁상
태의 기원이 되면서, 동시에 전쟁상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의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자연상태가 평화 상태일 수밖에 없
는 것은 그것이 고립(isolement)상태이기 때문이다. 반려자도 동반자도
없을 뿐 아니라 그의 동류와 아무런 도덕적 관계가 없는 자연인에게 그의
처지를 그들의 것과 비교할 성향이나 적성이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니만치 자연인은 타자보다 우월하지 못하든가 또는 타자로부터 평가
를 받지 못하든가 하는 이유로 번민할 일이 있을 수 없으며, 하기야 그는
애당초 무엇이 세론의 멍에인지 무엇이 자만의 욕정이니 아예 모르니까
말이다. 이렇게 자신을 만족시키는 데 자신으로 충분한(autarachie)자연
존재에게 우세․압도에 대한 흥미나 근심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자만심이
개입할 때만이 인간들은 서로 경쟁자, 원수가 되는 것이지 물리적 안녕
이외의 행복을 모르는 자연인에게는 정녕코 투쟁이란 있을 수 없다.
44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그의 욕구는 그의 육체적 필요를 넘어가는 법이 없다. 이 우주에서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재화[선]란 음식물과 하나의 암컷과 평안뿐이다.
또 그가 두려워하는 유일한 악이란 고통과 배고픔뿐이다.”(ꡔ불평등기원
론ꡕ, VPW, I, 151)
“원시인은 배불리 먹고 나면 온 자연과 자신을 아우르는 평화 속에 거
하며 그의 동류들의 친구가 된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62)

이러한 루소 비평을 통해 홉스 심리학이 이중 오류를 범하고 있음이 드


러난다. 홉스는 사회에서만 발생하는 인위적이고 상대적인 감정을 자연인
에게 부여하는 오류에다가, 개개인에 있어서 자기애의 작용을 완화시키면
서 종 전체의 상호 보존에 기여하는 자비심의 실존을 인정하지 않는 오류
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홉스는 사회적 삶에서만 나타날 수 있
는 이차적 감정을 원시적 충동으로 착각하였으며, 자연상태에서 이미 인
간에게 존재하는 자비심의 완화 작용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같은
두 잘못이 루소가 심리학적 관점에서 ꡔ레비아탄ꡕ의 저자를 비난한 점이
다. 물론 루소가 홉스의 사상체계를 비판한 첫 번째 학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논법은 그러나 그 시대에 학자들이 보통 홉스의 역설에 반론으로 내
세우는 논법이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ꡔ사회계약론ꡕ저자의 독창성은,
저자 스스로가 주지시키려 한 것처럼, 이미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부터 시작
되고 있는 것이다.

3. 자연적 사회성

자연상태에 관한 홉스 이론에 대해 루소가 한 논박은 사실 선량함을 인


간의 자연적 본성으로 주장하는 이론의 부정적 측면이다. 루소의 홉스 논
박은 일찍부터 학자들 사이에 주지의 사실이었지만, 반면 루소가 홉스의
것과 상반된 이론 역시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간과되어 왔다.
그것도 그럴 것이, 루소 자신이 자연적 사회성[사교성] 이론의 ‘체계적
논파’를 시도한 것은 ꡔ사회계약론 초고ꡕ에서 뿐이었으며, 더욱이 후에 ꡔ
제네바 원고ꡕ라고 명명될 이 초고 자체도 1887년이나 되서야 간행되었으
니까 말이다.12) 그러나 이런 체계적인 논박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저자의 진정한 생각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주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45

는 상당수의 상술된 비평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자연 본성으로서 사회성에 대한 루소의 독특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사상 자체는 이미 고대부터 모든 철학자에 의해 인정된 원
리 중 하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원리를 ‘도덕과 정치’에 관한 그
의 저술 어디에서나 확립하고 있다. “인간은 그와 자연적 유사성을 갖고
있는 자들과의 관계에서 사교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정치사회(polis) 밖
에도 사회와 정의 같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또한 스토아 철학의 원리
에 따라 사유한 키케로 역시 완벽한 고립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공리적 사실로서 정립하였다. 그래서 근대에 들어와
이번에는 그로티우스, 푸휀도르프, 쿰베르란트(Cumberland)등이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을 논했을 때, 이는 사실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나 스토아 학파에 의해 정립된 이론을 다시 계속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중 푸휀도르프는 이 이론의 창안자는 아니면서도 그의 저서
ꡔ자연법과 국제법ꡕ의 제2편에서 이 이론을 매우 명료하게 진술한 장점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제2편이 또한 루소 자신이 가장 주의 깊게 읽은 책
중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여기서 그의 진술을 살펴보는 것이 긴요
하다.
푸휀도르프에 있어서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은 두 종류의 양상으로 대별
되어 기술되고 있다. 우선 자연적 사회성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결합시
키는 자연적 동일성을 의식하고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같은 종(種)에 속하는
동류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돕는 것에서 드러난다. 이런 경우의 사회성은
따라서 비이기적인 감정이요, 일반적인 우정이며, 우리와 온 인류를 잇는
보편적인 온정이다. “자연은 틀림없이 모든 인간 간에 우정 일반을 법으
로 제정하였으니, 인간은 누구든지 엄청난 죄악으로 인해 그 자격을 상실
하지 않는 한 이 우정으로부터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창조자의 섭리에 따
라 자연법은 인간 본성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전자의 준수는 언제
나 인간에게 유익하고 따라서 이 일반적인 우정 역시 그것을 존중하는 모
든 자에게 득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의 근거를 규명하는 문제에

12) 제네바 원고 는 1887년 러시아 모스크에서 ALEXEIEFF에 의해 러시아


어로 처음 간행되었다.
46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있어서, 그 해답은 이로부터 끌어내는 ‘유용성’에서가 아니고 동일한


자연본성의 일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비타산적인 인정[온정]은
사회성 중 상급의 형태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으나, 사회성 중 이해타산적
인 형태의 것도 있다. “우리가 우리의 자연 본성의 명령에 따라 사교적이
라고 해서, 이것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은 아니다. 사회성의 목적은 오히려 이와 반대로 교제를 통한 도움과 봉사
의 교환에 의해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더욱 잘 챙길 수 있는 데에 있다
.”13) 이렇게 정의된 사회성이란 결국 상호이해증진, 서비스의 교환, 즉
이기심이 언제나 무엇인가 이득이 될 것을 꾀하는 교역에 다름 아닌 것이
다. 푸휀도르프가 이렇게 사회성의 두 번째 양상을 강조하는 것이 기이하
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가 여기서 목적하는 바는 홉스를 논박하
는 것이고 또 이런 목적에서 사회성이 이기심[자만심]과 일치함을 제시하
는 것은 매우 훌륭한 논법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연으로부
터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들이 자기 자신들의 생명보존을 위해서라도 서로
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자각한 이상, 서로 해를 끼치는 일보다는
오히려 상부상조를 꾀한다는 것이 당연한 생각이니까 말이다. 좀더 고상한
감정이 부재한다 해도, 이기심이 우리를 사회적인 존재로서 처신하도록 강
요하는 바이다. 게다가 우리가 설사 인간은 본래 자기 자신의 이득만을 꾀
한다는 것을 용인한다 할지라도, ‘자연상태’와 ‘사회적 삶’이 서로
상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루소가 한 일은 자연법의 근거는 이성에 선행하는
두 원리, 즉 자기애와 자비심[동정심]에 있다고 주창함으로써 사회성을
자연법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그친다.

“자연법의 모든 법칙은 사회성 원리를 개입시킬 필요 없이 우리 정신


이 자기애와 자비심, 이 두 원리를 조합하고 결합시킬 수 있는 데서 기원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ꡔ불평등기원론ꡕ, 서문, VPW, I, 138)

13) S. Pufendorf, Le Droit de la Nature et des Gens, Barbeyrac역,


Thourneisen, 1750, 제2편 3장 18절.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47

루소가 이 문제를 좀더 철저히 다루게 되는 것은 ꡔ제네바 초고ꡕ의 제2


장 ‘인류의 일반 사회에 관하여’ 에서다. 이 곳에서 루소가 내리는 결
론이 다름 아닌 인류의 원시상태에서 인간 일반을 아우르는 ‘자연 사
회’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인 만큼, 우리는 이를 통하여 자연적 사회성 이
론에 대한 루소의 논박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루소는 여기서 일찍이
푸휀도르프가 구별했던 두 형태의 사회성에 의거하여 그의 논증을 진행시
키고 있는 바, 이는 결국 사회성의 첫 번째 형태는 거부하고 오직 두 번
째 형태만 유보할 작정에서였다. 루소에 따르면 우리를 우리의 동류(nos
semblables)에 접근시키는 것은 결코 푸휀도르프가 믿는 것처럼 동일한
자연 본성의 일치가 아니고, 우리가 그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고 기대하
는 이득이다. 사실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을 때만
비로소 사회적, 사교적 동물이 되는 법이다. “이러한 타인의 필수적 도
움 때문에 사회 일반의 형성을 위한 최초의 인연이 맺어지며, 또 그것이
보편적 온정의 토대이기도 하다. 물론 이 보편적 온정은 각자가 그것을
함양할 의무는 지지 않고 단지 그것의 열매만을 따먹으려고 하기는 하지
만 말이다. 이 맥락에서 자연적 본성의 동일성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적 동일성은 인간들에게 결합만큼이나 다툼의 소지
가 될 뿐 아니라, 그들 사이에 이해와 합의 못지않게 질투와 경쟁심을 일
으키는 원인이기 때문이다.”14) 루소의 이 고찰에는 한편 그의 홉스에 대
한 이해가 반영되어 있고, 다른 한편 푸휀도르프의 이 틀에 박힌 생각을
반박하려는 명백한 의도가 실려 있다. “인류 보편적 온정이라는 것은 동
일한 자연적 본성의 일치, 즉 인류라는 동일 사실 이외의 그 어떤 동기도
그 어떤 근거도 전제하지 않는다.”15)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루소에게는 사회성의 형태는 둘이 아니고 단 하나
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사회적 유대는 개인적 이해득실 계산에
좌우된다는 형태의 사회성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
적 사회성’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제
의 장(場)에서는 인간들이 수고, 알선, 조력 따위를 교환하여 수많은 욕

14) 제네바 초고 제1편 2장, (VPW, I, 447).


15) 푸휀도르프의 같은 책, 제2편 3장 18절.
48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구를 만족시키는데, 이런 욕구들 자체가 오직 ‘사회적 삶’에서나 생겨


날 수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인간들이 자연상태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
로 살았다고 결론내리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굳이
이런 결론을 내린다면, 이는 ‘자연인’을 ‘우리 눈앞에 있는 인간들’
과 혼동하고, ‘사회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사회 내부에서나’ 발
생할 수 있는 제 필요를 원용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식으로 현재 우리들의 헛된 욕망과 육체적인 필요를 혼동하면서, 이 후자
를 인간 사회의 근거요 기초로 생각한 학자들은 사실 언제나 결과를 원인
으로 착각한 셈이며, 그러니까 그들은 그들의 추론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루소에 따르면, 푸휀도르프, 헬베티우스(Helvetius), 백과사전파 학자
들의 공통된 오류는 단적으로 말하면 육체적 필요는 사실 인간들을 제각
기 따로따로 흩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히려
인간들을 서로 접근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믿은 데에 있었다. 이 지
적은 동시에 루소 독창성의 관건을 이루는 아이디어를 함축하고 있고, 그
래서 또한 루소 자신이 지칠 줄 모르고 강조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루
소의 이 아이디어가 가장 강렬하게 표명된 것은 이때까지 공중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저작, ꡔ제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이 말을 발명한 것은 욕구와 필요를 표현하기 위


해서라는 주장을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 주장은 근거가 없어 방어불가
능이다. 최초의 욕구의 자연적 결과는 인간들을 갈라놓는 것이지 접근시
키는 것이 아니다. 문명 이전의 이 야만 시대야말로 황금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들이 통합되어서가 아니라 서로 분리되어 떨어져 살았
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태초의 상태에선 각자가 스스로를 천하의
주인으로 여겼다고 말한다. 물론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문제의 사태를
좀더 면밀히 고찰한다면, 더 정확한 이야기는 아무도 자기 수중에 있는 것
이외의 것은 알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욕구가 그를 그의
동류들에게 가까워지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동류들로부터 유리시킨
다. 사람들은 조우하게 되면 하기야 서로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였으나,
이런 조우 자체가 매우 드물게 일어났다. 그래서 전쟁상태는 어디에나 존
재했으며 동시에 온 땅은 평화로웠다.”16)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49

이 원문이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루소 독창


성의 원천이 되는 그의 고유한 변증법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
다. 홉스와 푸휀도르프를 동시에 겨냥하고 있는 이 원문은 루소가 하나의
동일 논법을 사용하여 만인의 만인에 대한 자연적 전쟁 이론과 이와 상반
된 자연적 사회성 이론을 일시에 논파하고 있는 것을 역력히 드러내 보이
고 있다. 생명에 필수적인 욕구, 즉 육체적인 욕구는 푸휀도르프가 주장
하는 것처럼 인간들을 서로 가까워지게 하거나, 또는 홉스가 주장하는 것
처럼 인간들을 서로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을 초래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생명보존의 필요성에 몰린 인간들은 서로 멀리 떨어지려고 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는 따라서 전쟁이 일반화된 상태도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 사
교적 상태도 아니고 ‘분산’과 ‘고립’의 상태인 것이다. 원시 상태에
서 인간이 자급자족하는 독자적 [홀로 사는]존재인 것은 그의 욕구란 그
의 육체적 필요에 지나지 않고, 그의 힘은 그의 욕구에 비례하는 만큼 동
류가 가까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배려가 아니고 대지의 과실들이다.” “숲
속을 떠돌아다니며, 일도 언어도 거처도 없는, 전쟁도 인연도 없는, 동류
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해칠 마음이 없는, 아
마도 평생에 어느 누구도 개인적으로 알아본 적이 없는 원시인은 그의 고
독 속에서 행복하지, 그로티우스나 스토아 철학자들이 원시인의 속성이라
고 주장한 사회에 대한 욕구 따위는 있을 리가 없다.”17) 그러므로 사회
성은 자연적 성향이 아니고, 인간들에 의해서 제도로서 설립된 것이다.
이것이 또한 루소가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들에게 인간들이 상호간의 필요로 인해 서로 교제하고 언어


를 사용하게 된 데에 자연이 한 일이라곤 거의 없는 것이 명백해진 이상,
그들의 사회성이 자리를 잡게 된 일이나 그들이 사회적 유대를 확립하는
일에 자연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확실하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58)

16) 루소,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 Gallimard, Paris, 1990, 2장
(67) 및 9장(94).
17) 불평등기원론 , VPW, I, 165/166.
50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그런데 자연은 인간의 사회성이나 언어사용과는 무관하다는 이 결론은


마치 루소 사상에 전환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ꡔ사브야아르 사제의 신앙고
백ꡕ의 한 대목에서 부인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인간이 그 자연 본성
에 의해 사회적이거나, 또는 부여받은 본성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이는 그의 종(種)과 연관된 다른 선
천적 감정들 때문이다. 왜냐하면 오직 육체적 욕구만을 고려한다면, 그것
은 인간들을 접근시키기는커녕, 분산시키니까 말이다.” 이 대목의 난점
은 육체적 욕구에 관해선 일관성이 유지되고 있는 반면, 자연적 사회성에
관해선 종전의 입장과 상충되는 듯 보인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 모순
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인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루소의 사유가
‘완벽가능성’ 내지 ‘잠재적 능력’이란 개념을 매개로 하여 전개되기
때문이다. 루소에게 있어서 이성이 선천적[천부의] 능력인 것처럼, 사회
성 역시 선천적 감정(sentiment inné)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자
연인에게 있어선 오직 ‘가능태’(en puisance)로서만이 존재하는 까닭
에 이것들이 개발되기 위한 조건들은 결국 사회라고 하는 환경만이 제공
하고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선 ‘지
식’은 필수불가결하며, 인간은 이 지식을 오직 그의 동류와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성이란 홀로 떨어
져 살기 때문에 아무런 지식도 획득한 바 없는 존재에게는 그 발전 정도
가 제로일 수밖에 없다. 자연의 품에서 막 태어난 인간은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만을 갖고 있으며, 이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
만 인간 자신이 사회 안에서 삶을 영위한 다음에나 실제[현실]로 변환된
다. 그러니만치 사회성이 인간을 자연상태에서 끌어낸 동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사회가 설립된 이후에나 사회성이 발전하였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사회성이 사회적 삶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요컨대 결과
를 원인으로 착각하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착각의 중심에는 사회성의 본질에 대한 오판이 자리 잡고 있
다. 원시인은 자급자족하는 존재로서 타인의 도움 없이도 살아가는 데 아
무런 지장이 없는 만큼, 사회적 삶에 대한 욕구를 체험할 리도 없으려니
와 그런 삶을 ‘생각해볼’ 능력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서 루소의 ‘원시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51

적 형태’의 사회성은 자비[동정]의 마음으로 귀착된다. 사실 ꡔ에밀ꡕ 제4


편을 참조해보면 우리는 의외에도 루소가 ꡔ불평등기원론ꡕ 제1편에서는
‘사회성’에 대립시켰던 동정심이 여기에서는 사회성을 대신하든가 또는
사회성의 기초가 되든가 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인간은 약하기 때
문에 타인과 어울리는 사회적 존재가 된다. 우리의 공통된 비참함으로 인
해 우리의 가슴은 인정이라는 성향을 갖게 되고 […]. 따라서 우리가 우
리의 동포들에게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의 쾌락이 아니고 그들의 고
통을 함께 느끼는 데서 기인한다. 왜냐하면 고통의 동감에서 우리는 좀더
잘 우리의 ‘자연 본성의 동일성’과 함께 그들의 우리에 대한 애착의 확
실성을 직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공통된 욕구가 우리를 이
기심으로써 결합시킨다면, 우리의 공통된 비참함은 우리를 정으로써 결합
시킨다.” 이 원문에서 루소가 동정심의 인간적 성격을 역설하고 있는 것
은 이 동정심을 통하여 우리 인간은 자연 본성의 동일성을 의식하게 되
고, 이 의식된 동일성이 우리를 다른 인간들과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따
라서 우리는 루소 자신도 결국은 자연 본성의 동일성을 사회성의 참된 기
초로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루소가 ꡔ에밀ꡕ에 와서는 그
가 이전에 부정했던 사상에 다시 가세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루소에게서 우리의 동일한 자연본성(notre nature)이란 감성, 곧
짐승이나 인간에게 공통된 ‘느낄 수 있는 성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루소는 ꡔ불평등기원론ꡕ 제1편에서 우리 인간과 마찬가
지로 감성을 부여받은 동물 역시 자연법에 그 몫이 있으며 따라서 우리
연민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바다. 이와는 달리 푸휀도르
프가 ‘동일한 자연본성의 일치’를 말할 때, 이 용어는 단지 인간의 이
성적인 성질 또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역설한 바 있는 이성의 공동체를 지
시할 뿐이다.
결국 루소가 수용한 형태의 사회성은 오로지 감성이란 동일한 자연본성
에 기초하고 있는 사회성뿐이다. 그러니까 상부상조 없이는 충족시킬 수
없는 인위적인 욕구에서 결과하는 사회성에 대해선 루소는 그것이 결합과
단결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혼돈과 무질서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였
다. 푸휀도르프나 여타 학자들이 이 두 번째 종류의 사회성이 사적 이익
5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추구를 매개로 하여 사회적 유대를 공고히 하는 효험을 갖고 있다고 주장


한 반면, 루소는 이런 사회성이란 ‘상호 의존’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상호의존 상태야말로 모든 악덕의 원천이며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주
장하였다.

“개개인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주종 관계란 인간들을 한 울타리


안에 집결시키는 상호간의 필요와 의존으로부터 생겨날 수밖에 없는 만큼,
한 인간을 미리 타인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황에 넣지 않고는 그를 종속시
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이 존재할 수 없는 자연 상태
에선 인간은 누구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뿐 아니라, 강자의 법이라는 것
도 있을 자리가 없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67/8)

사회적 삶의 결과요 원인인 이 인간 간의 의존과 대칭을 이루는 것이 다


름 아닌 사회 이전의 상태, 곧 자연 상태에서의 사물에 대한 의존이다. 이
후자는 도덕성이라곤 일절 함유하고 있지 않는 만큼 자유를 손상하거나 악
덕을 야기하는 일이 결코 없는 반면, 전자는 무질서와 모든 악덕의 모태일
뿐만 아니라, 주인과 종이 서로를 인간 이하로 타락시키는 바탕이기도 하
다. 만일 사회가 인간들을 변질시키고 타락시킨다면 이는 사회가 자연적
[천부의] 독립성을 인간 상호간의 의존으로 대체하여 결국 모든 사람의 자
유를 박탈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루소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그 안에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의존이 용납되지 않는 정치체
제를 구상하는 데에 경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ꡔ사회계약론ꡕ이 ‘총체적 양
도’를 요구하는 것도, 이것만이 각 시민을 개인적 사적 의존으로부터 보
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 조건하에서만이 인간
은 시민사회 안에서도 자연 상태에서만큼 자유롭고, 또한 시민적 자유의
형태 하에서 그의 자연적 독립성과 대등한 가치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
다.

4. 자연법

앞 장에서 우리는 루소는 자연적 사회성 원리를 배격함을 확인하였다.


이는 곧 루소가 자연법 학파의 공통된 사상과 대치되는 입장을 취하는 것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53

을 의미하는데, 근대 정치철학에서 이 사상을 반박한 최초의 철학자는 홉


스이다. 물론 홉스 자신도 그로티우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사회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가 반박하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천부의[자연적] 적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
한즉 홉스는 인간은 사회에 대한 자연적 성향을 갖고 태어난 정치적 동물
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동의하지 않고, DeCive 1장 2절에서 다
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이 아니고 규율에 입각한
훈련이 인간을 사회에 적합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설사 인간이 사회에
대한 자연적인 욕구를 갖고 있다손 치더라도, 이로부터 인간은 사회 (계
약 체결)에 요구되는 모든 조건을 갖춘 사회적 동물로 태어났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본 장에서 해야 할 일은 루소 역시 보
강(Vaughan)을 위시해 많은 루소 연구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법
이념’을 거부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고찰하는 것이다.
자연법 학설 전체는 국법 일반에 대해선 독립적인,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인간 협약에 선행하는 하나의 보편적 도덕 질서, 정의에 관한 불변의 규
칙, 곧 자연법이 존재하고, 모든 인간은 그의 동종(同種)과의 관계에서
이 법에 따라야 한다는 믿음을 토대로 하여 구축되어 있다. 그 자체가 인
간의 자연 본성에 기초하고 있는 이 법은 영원한 진리 중 하나로서 영구
불변이며, 그것의 권위 자체가 올곧은 이성(droite raison)에서 기인되
는 만큼,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의무로서 부과된다. 바로 이 보편적 구속
력에 의해서 자연법은 실정법 일반과 구별되고 , 또 전자가 후자보다 우
월한 이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특정 사회의 복리 추구를 위해
제정된 실정법은 오직 그 사회의 구성원만을 구속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
니라 실정법은 그것을 제정한 입법자의 의지에 따라 변경 내지 폐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정법은 영구불변하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
다. 따라서 실정법은 자연법에 대해 주절에 대한 종속절의, 상위개념에
대한 하위개념의 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이는 다시 말하면 실정법은 자연
법을 언제나 그 착상의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국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규범에는 그러므로 묵시적으로나마 국
법이 자연법에 역행하는 어떠한 명령도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단서가 붙
54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어 있는 셈이다. 어느 누구도 범죄적 행위 또는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행


위를 지시하는 명령에 따를 의무는 없다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불의를
행하도록 명령을 받았을 때 이를 거부할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마저 갖고
있다. 사람이 국법이나 그의 상위자에 대해 마땅히 지녀야 할 순종의 의
무는 따라서 조건부의 의무인 반면, 자연법의 제 원칙을 준수해야 하는
것은 절대적 의무이다. 어느 누구도 이 의무로부터 면제될 수 없는 것은,
자연법의 권위, 즉 인간과 신에 공통된 올곧은 이성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양 문명과 그 역사를 함께하는 이 자연
법사상과 그 권위에 후세까지 길이 남을 전범적(paradigmatic)표현을 부
여한 인물은 로마의 정치가요 철학자인 키케로다. De
키케로의
Republica 제3편 22절을 인용해보자. “온 천하에 하나의 참된 법이 실
존하는 바, 즉 올곧은 이성으로서 이는 자연과 일치하며, 모든 존재에 내
재하며, 자기와 영원히 동일하다. 바로 이 법이 그 명령을 통하여 우리에
게 우리의 의무를 다하게 하며, 그 금지를 통해 우리에게 악행에 등을 돌
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 법의 명령과 금지는 선한 자에게는 결코 공허한
적이 없으나 악한 자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다. 이 법은 예외나 수정을
수용할 길이 없으며, 그것을 폐기한다는 것은 더 더욱 불가능하다. 그러
므로 원로원이든, 인민이든 그 어느 누구도 이 법에 대한 복종 의무로부
터 우리를 면제시킬 수 있는 권능이 없을 뿐 아니라, 이 법을 설명하거나
해석하기 위해서 섹스투스 아엘리우스와 같은 현자의 지식에 호소할 필요
도 전혀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아테네에서 다르고, 로마에서 다르
며,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법이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아니 이것이 단
일하고 자기 동일한 영구불변의 법으로서 태초부터 모든 시대에 모든 민
족에게서 시행되고 있는 현행법인 것은, 모든 존재자의 최고통치자인 자
기 동일한 유일신이 이것을 만들어 공포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자기 자신을 회피하는 자이고, 또 이
렇게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자연본성을 능멸한 이상 그가 설령 지상에서의
극형은 피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영원한 징벌은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인용문은 근대에 들어와 대부분의 자연법 학자들이 즐겨 원용하
는 고전적 문장인 바, 여기서 키케로는 로마 법률가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55

이미 뿌리박고 있던 스토아 학설을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사에서 스


토아 철인들이 다양한 실정법에 이성과 신으로부터 유래하는 단 하나의
법을 대칭시킨 최초의 철인들은 아니었다. 그리스의 시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프로타고라스와 소피스트에 대항해서
자연법사상의 옹호자들이었다. 고대 세계의 도덕을 지배했던 이 사상은
중세에 들어와선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에 의해 계승되었다. 특
히 후자는 이 사상을 기독교 교리와 조화시킴과 동시에 신적 기원의 성격
을 강조함으로써, 이 사상에 새로운 권위를 부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
리는 서양 문명과 함께 시작한 이 오래된 자연법사상이 기독교 철학자들
의 중계에 의해 고대로부터 근대 자연법학파의 법이론 일반에 전수된 것
을 알 수 있다. 그 자체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 문화유산은 따
라서 17세기, 18세기에는 가장 위대한 고대 철학자들의 권위와 가장 저명
한 교부 신학자들의 권위가 합쳐져 부여되는 대단한 위신을 누리고 있었
다.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이 왜 자연법사상이 람세(Ramsay)같은 가톨릭
계 학자 뿐 아니라 달랑베르 같은 반교회적 학자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
던가를 설명하고 있다. 사실 자연법사상은 계몽시대에 들어와서는 어는
누구도 그 자명성을 부인할 수 없는 정치철학의 공리요 신조며 일상적 주
제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ꡔ불평등기원론ꡕ이 세상에 나오는 데 산파 역할을 디종 아카데미
의 현상 공모(concours)논문 주제가 자연법사상으로 각인되어 있음은 놀
라운 일이 아니다. 즉 내건 주제는 ꡔ과연 무엇이 인간불평등의 기원이며,
또 이는 자연법이 허용하고 있는 것인가?ꡕ이다. 바로 이 제기된 질문 때
문에라도 루소가 자연법사상을 숙고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런데 루소가 자연법사상에 대해 취한 태도 및 이것이 그의 국가론 내
지 ꡔ사회계약론ꡕ에 미친 영향에 관해선 후세 루소 연구가들의 평가와 해석
이 일치를 보기는커녕 분분하기 짝이 없다. 이중에서 최초로 루소의 정치
학 저술만을 모아 편찬하여 루소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한 보강(Vaughan)
의 해석은 가장 두드러진 본보기 중 하나이다. “루소는 여기서 그의 사변
적 천재성과 지적 강직성의 역량을 발휘하여 자연법사상을 결정적으로 기
각하였다. 즉 자연법사상을 백지화하였던 것이다.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선 이
56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사상의 탈락이 눈에 띄는 특징인가하면, ꡔ사회계약론 초고ꡕ에선 이 사상은


완전히 제쳐 놓았다. […] 정치철학사에 루소가 기여한 공헌 중의 하나는
그의 두 번째 담론인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디종 아카데미에는 그렇게나 소
중했던 자연법사상을 송두리째 집어던지고 원시인을 순전히 충동적이고 본
능적인 피조물로 만들어 버린 데에 있다. […] 이 중차대한 점에서 루소의
이 저작은 정치철학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18)
저자에게 이 이상의 찬사가 있을 수 없겠지만 문제는 루소가 과연 ‘이
런’ 찬사를 받아 마땅한가 하는 것이다. 물론 루소가 그의 ꡔ불평등기원
론ꡕ에서 자연법사상을 비판하고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서
문을 시작하자마자 저자는 자연법에 대한 종래의 정의 중 그 어떤 것도
그가 수용하기에 마땅치 않다고 명백히 지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자연법에 대해 우리가 ‘서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정의는 그


것들이 한결같지 않은 결함 이외에도, 인간이 ‘자연스럽게’ 획득한 것
이 아닌 지식들과 자연상태에서 떠난 이후에나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점들
로부터 추론해낸 결함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정의들이 그 통일성의 결여
에도 불구하고 일치하는 점은 대단한 이론가나 심오한 형이상학자가 아니
면 자연법을 이해하고 이에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즉 이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들은 사회 건립 이후에나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만 그것도 상당한 노력을 경주해야만 개발되는 지식을 사회 건립을 위해
적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ꡔ불평등기원론ꡕ서문에서 발췌, VPW,
I, 137)

이상의 원문에서 루소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자나 법률가들이 생


각한 바의 자연법, 키케로나 푸휀도르프가 말하는 바의 올곧은 이성은 자
연상태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것에 한한다. 그런데 이런 비평 후에 독자나
디종 아카데미 위원들은 당연히 루소 자신이 이번엔 자연법에 대한 정의
를 내릴 것을 기대하겠지만, 루소가 취한 수순은 이런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바로 여기가 루소의 천재성이 그 자태를 드러내는 대목인데
우리는 이를 정치학에서, 후에 철학에서 칸트에 의해 이룩된 ‘코페르니

18) C. E. Vaughan, The political writings of J. J. Rousseau,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2, 서문, pp.16-17.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57

쿠스적 전환’에 해당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루소는 자신이 그럴


권한이 없음을 인정하면서 자연법이념으로부터 출발하는 대신에 자신이
그려볼 ‘최초의 인간’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해야 할 것을 선언한다.
“우리가 자연인에 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한, 자연인이 받아들인 법이
나 또는 그의 본성에 가장 합당한 법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모든 시도는
헛된 것이 아닐 수 없다.”19) 이 선언은 철학자들과 법률가들의 사고 대
상인 자연법에 관해 논하기 위해선 이 대상과 켤레를 이루는 자연인을 우
선 알아야 한다는 ‘사고의 전환’을 함축함으로써 디종 아카데미 위원들
에게 정중히 그들의 문제가 잘못 제기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사실 루소의
이 선언은 예민한 심사위원들이 알아보지 못하기에는 너무나 그 뜻이 분
명하였으며 아마도 이 때문에 루소가 아카데미 현상응모에 당선되지 못했
을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루소는 여기서 자연법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 일체를 거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저술가들을 빈정거리기까지 한
다. “자연상태를 연구한 이 저자들은 모두 이 상태에 있는 인간이 정의
와 불의의 관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연인이 이런 관념을 실제로 가질 수 있겠는가 또는 이런 관
념이 도대체 자연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따위의 문제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20) 루소는 이렇게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선 자연인과 자연법
의 인식관계 상정에 대한 회의주의를 천명하면서, 이 논문의 직전 또는
직후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논문 ꡔ정치경제학ꡕ에선 자연법 대신에
“일반의지가 국가의 모든 구성원에게 정의와 불의의 잣대임”21)을 설파
하고 있다. 이 두 원문의 비교로부터 우리가 명백히 끌어낼 수 있는 결론
은 인간은 자연상태에 머물고 있는 한 정의와 불의의 관념은 없고, 시민
이 되고 나서는 정의와 불의의 척도라고는 오직 일반의지, 곧 국가의 의
지뿐이다, 라는 점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도덕성이 정치사회 설립에 선
행하여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정치사회[국가] 내에서는 모든 법의 원천

19) 같은 책, (p.137)
20) 같은 책, (pp.140/141)
21) 루소, Economie politique, VPW, I, 242.
58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인 일반의지보다 더 높은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상체계 안에서는 따라서 국법과 자연법의 전통적인 구별이 더 이상 존
속할 이유가 없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오직 자연상태를 떠난 후에야 비
로소 인간은 법에 종속하게 되고 이 법은 다름 아닌 자신이 그 구성원인
국가의 법이니까 말이다.
이상의 해석은 루소의 정치학설을 자연법사상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이
를 홉스나 헤겔에서와 같이 일종의 국가주의로 환원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우선 루소 사상체계의 구성 요인 중 하나인 양심(conscience)
에 관한 이론과 대립될 뿐 아니라, 루소 스스로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한 발
언과도 상충되는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 보강에 의해 대표되는 이 방향의
해석을 반박하기 위해 루소 연구가들이 흔히 원용하는 문구들을 인용해 보
자.
“우리가 보기에는 루소 씨는 한 특정 국가 내에 주권[최고통치권]보다
상위에 있는 권위 또는 이 최고권으로부터 독립된 권위가 존재한다고 인
정하는 한에서 정치학의 범위 내에서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한 익명의 법률가가 프랑스 마레쇼 법정에 관해 루소가 달랑베르
에게 보낸 공개서한의 한 대목을 집어 비평한 것인데, 우리가 만일 보강
의 해석을 따른다면, 루소의 이 비평에 대한 응답은 마땅히 그는 주권 이
외의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ꡔ루
소 서한집ꡕ 제4권에서 우리는 보강의 이런 해석과는 전혀 방향이 다른 루
소의 항변을 발견하는 바이다. “그렇다, 나는 국가 내에 주권말고도 지
고의 권위가 있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오로지 세 가지 권위만을
인정한다. 첫째는 신의 권위요, 둘째는 사람 본래의 체질에서 연유하는
자연법의 권위, 셋째는 정직한 마음에는 지상의 모든 왕보다 위력이 있는
명예심의 권위, 이 세 가지다. 더욱이 이 세 가지 권위는 국가의 최고권
인 주권에 대해 독립적일 뿐 아니라, 상위에 있기 때문에, 양자간에 충돌
이 있을 경우 양보해야 할 쪽은 당연히 후자 쪽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나의 기본 입장이기 때문에, 이와 정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홉스는 내가
볼 때 신을 모독한 자일 뿐 아니라 소름끼치는 사상가이다.”22) 이상에
인용한 루소 자신의 해명이 만일 루소의 정치학 저술 일반과 아무런 연관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59

이 없는 고립된 발언이라면, 이는 우리가 보강의 해석을 반박하기에는 너


무나 부족한 반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해명이 고립되기는커녕 루소
자신의 ꡔ사회계약론ꡕ의 기본원리에 대한 설명 및 이에 관한 일련의 해설
과 함께 하나의 건실한 맥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루소는 ꡔ산에서 보
낸 편지들ꡕ 중 여섯 번째 편지에서 자신의 정치학설의 기조를 이루는 이
일련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1] “나는 정치통일체[국가]의 기초는 그 구성원들의 합의약속이라는


원칙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나의 원칙과 다른 원칙들은 논박하였다.”
[2] “나의 원칙은 그것의 진실성을 별도로 하더라도, 그것에 의해 확
립된 기초의 건실함으로 여타 원칙을 능가한다. 왜냐하면 인간 간의 의무
가 근거해야 하는 기초 중에서 과연 어떠한 기초가 의무를 지게 되는 당사
자 자신의 ‘자유로운 약속’보다 더 확실한 기초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말
이다. 여타 모든 원칙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수 있겠으나 내가 세운 원칙
의 이 점에 관해서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확언할 수 있다.”
[3] “사실 모든 종류의 약속은 이 자유라는 조건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인간의 법정에서조차 구속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기초
를 성립시킬 협약의 경우에도 그것을 확정하기 위해선 그것의 성질 뿐 아
니라 용도와 목적을 당사자 모두에게 설명해야 하고 당사자 모두가 이를
납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이 협약이 사람들에게 적합하고 자
연법에 위배되는 어떠한 점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개인간의 계약에 의해 실정법을 훼손할 수 없는 것처럼, ‘사
회계약’에 의해 자연법을 위배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모든 약속에 효
력을 부여하는 자유는 다름 아닌 이 자연법에 의해 존재하니까 말이
다.”(ꡔ산에서 보낸 편지들ꡕ중 여섯 번째 편지, VPW, Ⅱ, 200)

결국 우리는 보강의 해석과는 상이하게 루소에게 있어서도 자연법 학파


의 모든 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었던 바의 실정법과 자연법의 구별이 유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에게도 키케로나 푸휀도르프에 못지않게 자연법은
여전히 국법 위에 있는 권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만치 루소는
ꡔ누벨 엘로이즈ꡕ에서 “자연법은 인간이 그것을 범하면 반드시 벌을 받게

22) Correspodance générale de Rousseau, Paris, Colin, 1962, 제4권


Nr559, pp.87/88.
60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되는 신성한 법”이라고 말하고 있고, ꡔ에밀ꡕ 제4편에선 “자연과 질서의


영원한 법이 실제로 존재하며 현자에게는 이 법이 실정법을 대신하는데
현자의 마음에 이 법은 이성과 양심에 의해 아로새겨져 있으며 무릇 자유
롭기 위해선 현자도 이 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파하고 있는
바이다.
더욱이 루소에게 자연법 이념의 유지가 필수불가결한 것은 만일 자연법
이념을 거부하게 되면 이와 동시에 ‘사회계약’으로부터 ‘도덕적 비
준’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협약이란 그것을 체결한 당
사자들이 자신들이 한 약속에 매어 있다고 느끼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
다. 협약이 이런 도덕적 기초를 지니기 위해선 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언약에 대한 경의심을 갖고 있을
것이 전제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푸훼도르프가 지적한대로, 협약이야말
로 모든 정치사회의 정초인 것은 홉스조차도 인정한 사실이지만, 문제는
만일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는 것은 옳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그르다
는 것을 선험적으로 믿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정치사회가 유지될 수 있
겠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협약을 존중해야 할 의무의 유일한 근거는
자연법과 사람은 자신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도리에 있는 것이다. 그런
즉 자연법을 폐기하면 ‘사회계약’은 도덕적 비준을 상실하면서 물리적
힘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보증도 지닐 수 없게 된다. 즉 사회계약은 약속
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는 것을 모르는 자에게는 공허한 형식에 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계약론은 자연법이념의 부정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이
후자야말로 사회 일반을 탄생시키는 협약 일반에 도덕적 기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강에 따르면 루소는 자연법의 논파와 사회계약이념의
수용, 양자 사이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보강은 이 딜레마의 발생 계기로서 ꡔ제네바 초고ꡕ 제1편 2장 ‘인류의 일
반 사회에 관해서’가 최종판인 ꡔ사회계약론ꡕ에선 완전히 삭제된 사실을
지목하면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우리는 루소가
이 장을 철회해버린 이유가 그것이 주제에서 벗어나서가 아니고 오히려
그의 논증에 너무나 잘 적용되기 때문임을 추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61

루소는 자연법사상을 반박하면서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협약을 존중해야


할 의무에 치명타를 가한 것을 자각하였기 때문이고, 또 정치사회의 정초
로서의 사회계약을 대체할 어떠한 다른 원리도 찾아 낼 수 없는 이상 그
로선 어쩔 수 없이 앞서서의 자연법에 대한 모든 반론은 불문에 부치고
사회계약론을 보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 설명이 확실한
것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하더라도 이제까지 이 문제에 대해 시도된 어
떠한 설명보다는 개연성이 높다는 것은 확실하다.”23) 그러나 루소의 이
러한 선택은 보강의 판단으로는 최악의 선택이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루소가 자신의 정치학설 체계 내에 “교란 요소로 자리 잡을 사회
계약 개념”을 제거할 기회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보강 생각으로
는, 루소는 이 위태로운 가설을 절약하고 정치통일체의 정초로서 더 이상
그 구성원들의 협약이 아니고 자신이 ꡔ제네바 초고ꡕ 제1편 5장에서 말한
대로 “공동 이익[공리]”를 제시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
이다. 결국 보강은 현대사에서 지배적인 국가론이 된 자유주의 관점에서
루소 정치학설의 약점을 지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보강의 논증의 강건함을 부인하지 않더라도 그의 논증이
정확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루소를 설명하기 위해서 루소의 자
기모순을 드러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이를 납득
하기 위해선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루소가 자연상태에 대한 철학자들의 견
해를 비평한 대목으로 다시 돌아가 저자의 참뜻을 밝히고 과연 이것이 보
강의 주장처럼 자연법 이념을 와해시키고 있는지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루소는 ꡔ불평등기원론ꡕ서문에서 자연상태에 대한 철학자들의 개념을 대충
훑어본 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어떤 인물들은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이 정의와 불의의 관념을 갖고 있다고 조금도 주저치 않고 상정할 뿐
아니라 이런 관념을 그가 가져야만 하는지 또는 이런 관념이 도대체 그에
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따위의 문제를 해명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
다.” 여기서 루소가 암시하는 것은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론에
대해 자연법사상을 대립시키는 로크나 푸휀도르프 같은 철학자들이다.

23) VPW, I, pp.441/442.


6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푸휀도르프만 하더라도 인간은 자연 본성상 이성을 갖춘 존재인 만큼,


인간들이 이성의 준칙을 고려치 않고 금수처럼 처신하는 상태를 자연상태
로 간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항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맹목적으로 오직 감각적 인상에 따라서만 움직
이는 동물의 상태가 결코 아니고 이성이라는 중심 기관이 여타 기능을 지
도하는 동물의 상태인 것이다. 사실 이성은 자연 상태에서조차 만물의 본
성으로서 확고한 일반 규칙을 갖고 있어 주의하는 모든 정신에게 인간 삶
의 일반적 제 원칙과 자연법의 근본적 제 준칙을 발견하게 한다. […] 이
성의 활용은 이렇게 자연 상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성이 때
때로 우리에게 명하는 제 의무를 그것으로부터 분리할 수도 없고 분리해
서도 안 된다. 따라서 인간이, 적어도 대다수의 인간이 자연이 모든 행위
의 지도자로서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 이 고귀한 기능의 제 준칙을 무시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연상태에 대한 잘못된 기술이 아닐 수 없다.”24)
홉스에 대한 푸휀도르프의 이런 반박이 심대한 성공과 호응을 거두었으
며, 이 주제에 관한 로크의 견해 또한 매일반이다. 이미 앞에서 인용한
바 있듯이, 로크에게는 “자연상태란 상호보존, 원조, 호의, 평화로 특징
지어진 상태이다.”

“자연상태는 이 상태에 질서를 세우는 자연의 법이라는 것을 갖고 있


어, 각개인은 이 법에 순종할 의무를 지고 있다. 이 법은 다름 아닌 이성
인데, 이성은 이성과 상담할 의향이 있는 모든 인간에게 인간은 누구나 평
등하고 독립적인 만큼 어는 누구도 타인의 생명, 건강, 자유, 재산을 해
쳐서는 안 된다는 도리를 가르치고 있다.”(ꡔ시민통치론ꡕ 제6절)

결국 로크나 푸휀도르프에게서 전통적 자연법 이념이 유지되고 있어 자


연상태에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저자는 자연법이 실정법에
우선하고 실정법의 모델 내지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법의 제 원칙, 곧 ‘올곧은 이성’의 제 준
칙은 자연상태에서도 효력을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은 아무리 단

24) Pufendorf, LeDroit de la nature et des gens, Thourneisen, Basle,


1750, 제1편 2장 9절, pp.187/188.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63

순하더라도 올곧은 이성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철학자들에게 만일 자연법이 자연상태에서도 유효하다
면, 이는 이성을 부여받은 모든 피조물에게는 자연법은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자연상태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제시하
기 위해선 ‘올곧은 이성’의 사용을 배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루소
의 논박은 바로 이 두 번째 점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루소에 따르면
자연상태를 제대로 기술하기 위해선 다름 아닌 올곧은 이성의 사용을 배
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원시인은 자연에 의해 오로지 본능의 손에만
넘겨진 채 아무런 지식도 없이 맹목적으로 그의 충동을 따르니까 말이다.
반성할 줄도 숙고할 줄도 모르는 원시인은 언어뿐 아니라 이성도 사용하
지 않는 것이다. 그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이라곤 우둔함과 멍청함뿐이다.
루소는 원시인의 인식능력에 대한 그의 사변을 ꡔ보몽 씨에게 보내는 편지
ꡕ에서 다음과 같이 개진하고 있다. “아무것도 비교한 적이 없고 어떠한
인간관계도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의식이란 없음이나 진배없다.
이 상태에서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이란 자기 밖에 없는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안녕이 어느 누구의 안녕과 대치되거나 일치되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고 생각할 줄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없다는 말
이다. 오로지 육체적 본능에 한정된 그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짐승일
따름이다. 이것이 내가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그려 보여준 바의 자연인이
다.”
그러나 이상의 진술이 인간과 여타 동물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분명히 이성을 부여받은 피조물이며,
이성은 그의 선천적인 기능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렇게 자연으로부
터 부여받은 이성을 단지 ‘가능태’로서만이 소유하고 있는데, 이 가능
태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되기 전에는 현실태로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
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가능적 능력은 그것을 구사할 기회, 즉 살기
위해선 그것을 사용해야만 하는 계기가 주어진 경우만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천부의 능력은 그것이 쓸데가 없는 한, 잠재적인 능력으
로 남을 수밖에 없다. 원시인에게는 그의 이성이 쓸모가 없는 것이 본능
이외에는 다른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회적 삶은
64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인간의 생존 조건을 바꿈으로서 인간에게 다른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그


의 자연적 성향을 따르기에 앞서 그의 이성과 상의하도록 강요하였다.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오로지 본능 하나


에 있었으며, 사회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개발된 이성에 있을
뿐이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59)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성찰하면 성찰할수록, 순수한 감각 작용으로


부터 가장 단순한 지식에 이르는 거리는 확대되어 갈 뿐이다. 실제로 한
인간이 과연 어떻게 의사소통의 조력 없이, 필요성에 의해 내몰리지 않고
혼자만의 힘으로 이 멀고 먼 거리를 뛰어넘을 수 있었을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59)

결국 루소에게 있어서 인간은 사회라고 하는 삶의 틀 안에만이 지식을


획득하고 이성을 함양할 수 있어, 이성과 사회성은 밀접한 상관관계 속에
서만 발전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인간은 홀로 사는 한, 그의
이성은 잠자고 있으며 그의 유일한 인도자는 본능이다. 따라서 이런 자연
상태에 살고 있는 인간이 자신의 이성에 내재하는 지식의 인도만으로 자
연법의 제 원칙을 발견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무지한 원시인을 대단
한 이론가요 심오한 형이상학자로 만들고 태초의 인류에게 인류가 수 세
기의 사회적 삶을 살고 난 후에나 획득한 지식을 부여하는 것에 다름 아
니다.
루소의 이 논증이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자연법사상의 부정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루소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법은 올곧은 이성
의 제 준칙에 담겨져 있다는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연법
은 이런 형태로는 자연상태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것에 한한다. 왜냐하면
이성의 제 준칙이라는 것도 인간이 자신의 이성을 구사할 줄 알기 이전에
는 인식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자연법의 ‘인식’은 따라서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이며, 이를 위해선 사회성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인간에게는 정의에 대한 ‘천부의 감정’, 즉 양심이 있기는 있지
만, 정의와 불의에 대한 최초의 ‘분명한 관념’은 정치사회[국가]의 수
립 이전에는 인간 정신 안에 형성될 수 없는 법이다. 이런 까닭에 루소는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65

ꡔ제네바 초고ꡕ에서 “법이 정의에 선행하는 것이지 정의가 법에 선행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사회
적 훈련과 교육을 받기 전에 자연적 독립 상태에서는 법이란 무엇인지 알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인지하는 최초의 법은 정치사회의 법
(Loi civile)일 수밖에 없는 만큼, 결국 인간들은 이 국법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여 자연법을 구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자연법과 실정법, 자연상태와 정치사회(société civile)의 관계에 대한
루소의 생각을 조사하였는데, 이제는 루소 자신의 말을 통해 이를 요약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사회 질서에 대한 제 관념을 우리 사이


에 확립된 사회 질서 이외의 다른 어떠한 곳에서도 끌어낼 수는 없다. 우
리는 우리들의 개별적 사회들로부터 출발하여 일반적 사회를 구상한다.
소(小)공화국들이 수립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대(大)공화국을 꿈꾸게
만든다. 게다가 우리는 시민이 되고 나서부터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
간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ꡔ제네바 초고ꡕ 제2편 4장, VPW, I, 494)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루소에게서 자연법 또는 이성법이 국법 또는 시민


사회의 법보다 시간적으로 선행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이 자연법이 국법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닌 것이
다. 사실 우리는 보강을 따라 인간은 국가의 틀 안에서만이 그의 지성,
권리와 의무의 의식, 곧 그의 인간성을 이루는 모든 것을 획득한다는 주
장에 동의하지만, 이 주장으로부터 루소에게서 국가는 도덕에 관해서도
최고의 권위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
면 루소 자신이 ꡔ사회계약론ꡕ 제2편 4장의 제명을 ‘국가의 최고권[주권]
의 한계에 관하여’로 정하고 이에 대해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 인격(personne publique)말고도 이제 우리는 공공 인격을 구성


하면서 그 생명과 자유가 자연에 의해서 공공 인격에 달려 있지 않은 사적
(私的) 인격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즉 다수 시민과 단일 주
권자, 각자의 제 권리를 구별하고 또 시민이 신민으로서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를 시민이 인간으로서 향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연권과 구
66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별해야 할 것이다.”(ꡔ사회계약론ꡕ 제2편 4장, PLE, 373)

따라서 우리는 루소가 말하고 있는 국가 최고권의 한계에, 자연권에 대


한 존중이 필연적으로 최고권인 주권에 부과하는 한계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점에 관해서 루소의 결론은 자연법 학파의 결론과
동일선상에 있을 뿐 아니라, 로크나 푸휀도르프와 마찬가지로 그에게서도
역시 국법은 자연법에 위배되는 것은 명령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지금
까지 사람들이 루소의 학설을 이와는 달리 해석해 왔다면 그 이유는 첫째
사람들은 루소가 연속해서 두 개의 상이한 관점에 입각하는 것을 간파하
지 못했고, 둘째 기원의 문제를 가치의 문제와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루소는 자연법 이념을 포기하기는커녕, 그것을 자연 상태로부터
분리하였다가 시민 상태에 다시 도입하였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
연법이 사회계약 체결 뒤에 생겨났다고 하면 전자가 후자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렇게 되면 루소의 정치학설 역
시 국가주의에 속한다는 보강의 주장이 여전히 건재하게 되거나, 또는 이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선 정의에 대한 최초의 생각들이 루소 자신이 ꡔ불
평등기원론ꡕ에서 기술하면서 태어나는 사회(société naissante)라고 명
명했던 오랜 세월의 족장제도(patriarche)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인정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루소는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사회계약 체결 시점
과 순수 자연상태 사이에 중간 기간을 두고서, 이 기간 동안 인간이 조금
씩 “짐승의 어리석음”을 잃어가면서 “상호약속과 이를 지키는 데서 오
는 이득에 대한 투박한 관념을 시나브로 획득해가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 협약에 유일하게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으로서 약속을 지켜야 된다는 의무감은 사회계약 체결에 앞서 생겨났다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자연상태에선 어떠한 척도도 없고, 올곧은 이성의 사
용도 배제되어 있다고 해서 자연법 일체를 배제해야만 옳다는 말인가? 만
일 자연법이란 것이 오로지 이성의 법이라면 이런 결론은 불가피할 것이
다. 그러나 루소에게 문제가 이런 방식으로 제기될 수 없는 까닭은 모든
대상을 분석적 방법이 아니고 발생과정을 따라 파악하는 루소의 독특한 방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67

법론(méthode génétique)때문이다. 즉 자연법에 관해서도 루소는 그것이


자연 상태 또는 정치사회에 적용되는 상이한 두 단계에 따른 두 각도에서
논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자연법의 제 법칙은 “이성에 선
행하는 원리들”에 기초하고 있다가 시민 상태에 들어와서야 올곧은 이성
의 제 준칙이 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자연법은 두 종류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본래의 의미의 자연법, 즉 자연 상태에 적합한 법이고,
두 번째는 추론된 자연법으로 정치사회의 확립 이후에나 나타날 수 있다.
첫 번째는 감성적 존재로서 동물들도 참여하는 자연법이며, 인간의 원
시적 충동, 즉 동정과 보존의 본능에 근거하고 있다. 루소는 이 자연 상
태의 자연법에 관해 ꡔ불평등기원론ꡕ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상술하고 있
다.

“인간 영혼의 최초의 가장 단순한 작용에 관해 숙고해 본 결과, 나는


영혼의 이 단계에서 이성에 선행하는 두 원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포착하였
다. 이 원리 중 하나는 우리들 자신의 안녕과 보존에 대한 치열한 관심이
며, 또 다른 하나는 모든 감성적 존재, 특히 우리의 동류들이 고통을 당하
거나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는 본능적 감정이다. 우리 정신이 이 두
원리로부터, 사회성[사교성]의 원리를 개입시킬 필요 없이, 만들어 내는
조합과 결합에서 자연법의 모든 법칙은 연유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
게 생겨난 자연법의 모든 법칙은, 계속하여 발전한 나머지 자연을 덮어 끄
게 되는 단계에 도달한 이성이 어쩔 수 없이 개입하여 또 다른 토대위에
새로이 정립하게 된다.”(ꡔ불평등기원론ꡕ 서문, VPW, I, 138)

그러므로 우리 내부에는 모든 반성적 사고에 선행하는 자연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래서 이 자연법은 또 인간의 자연적 선함이라 일컬어
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산출해내는 욕망들과 함께 선함 또는
동정으로 된 이 자연적 도덕을 불충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이
자연적 도덕을 합리적 도덕 내지 법의 도덕으로 대체하거나 적어도 이것
을 자연적 도덕에 첨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제 2의 도덕, 곧 법의 도
덕에 대해 루소는 ꡔ제네바 초고ꡕ에서 다음과 같이 상술하고 있다.
68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이 개념에서 결과하는 가장 큰 이점은 이 개념으로 인하여 우리가 자


연법과 정의의 참된 기초를 분명히 알아보게 된 것이다. 사실 최초의 법,
즉 사회계약으로부터 직접 유래하는 유일하고 진정한 기본법은 각자가 만
사에 있어서 모두의 최대 행복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 이 준칙의 적
용 범위를 일반적 사회와 또 이에 대해 우리에게 적절한 관념을 주는 국가
에까지 넓혀 봅시다. 우리가 그 구성원인 국가 또는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회에 의해 보호를 받게 되면, 남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에 대한 우
리의 자연적 혐오감은 남에게 해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리의 두려움에
의해 더 이상 상쇄되지 않기 때문에, 자연과 습관과 이성에 의해 우리는
우리와 같은 국가에 속하는 사람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 대
해서도 착한 마음을 갖고 대하는 성향을 지니게 된다. 추론된 자연법의 원
칙은 바로 이 성향에서 태어난 것이며, 이 자연법이 본래의 의미의 자연법
과 다른 것은 이 후자는 진정한 감정에 근거하고 있으나 이 감정이 매우
막연하면서 흔히 우리들의 자기애[자기사랑]에 의해 진압된다는 점이
다.”(ꡔ제네바 초고ꡕ 제2편 4장, VPW, I, 493/494)

이상의 원문에 의하면 ‘추론된 자연법’은 일반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정치사회의 확립과 법의 제도화에 시간적으로 앞설 수 없음이 자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적 삶이 이성의 발전에 필수조건일 뿐 아니라 정의란
것이 한갓 속임수에 지나지 않아 사악한 인간에게만 득이 되는 것이 아니
라면 반드시 상호적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이성으로부터 발현하고 인간성의 단순한 권리에 기


초하는 보편적 정의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 정의가 수용되기 위해선 상
호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정의의 법규라는 것도 자연적 제재가 없는 한,
인간들 사이에서 아무런 효력이 있을 수 없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정의의 법규는 이런 경우 사악한 자의 이득이 되고 선량한
자의 손해만 되는 것이 후자는 정의의 법규를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지키
려고 하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그와 함께 이 법규를 준수하려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ꡔ제네바 초고ꡕ 제2편 4장, VPW, 491)

따라서 자연 상태에선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일반 사회란 있을 수 없는


것이 누가 정의 또는 올곧은 이성의 준칙을 실천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
역시 이에 응답하여 행동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자연법의 제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69

준칙을 비준하여 이것에 실제적 효력을 부여하는 정치사회의 법만이 인간


들에게 상호성의 보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보장 없이는 인간들은 결코
정의를 실천하려는 확고한 결심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소는 자연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연법은 자연 상태에
선 실존하고(exister) 정치사회에선 존속하는(subsister) 것을 증명하려
고 노력을 경주했던 것이다. 다만 루소 이전의 학자들은 자연법을 단일
개념으로 파악하고 ‘자연의 법’과 ‘이성의 법’이 동일한 것으로 간주
한 반면, 루소는 이성에 선행하는 원시적 자연법과 이성에 의해 재정립된
자연법을 구별하였던 것이다. 즉 자연법은 자연 상태에서 시민 상태로 넘
어가면서 그것이 적용되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탈바꿈을 하게 되는 것이
다. 자연 상태에선 선량함과 본능에 지나지 않았던 자연법이 시민 상태에
선 정의와 이성이 되는 것이다. 루소 연구가들이 루소의 이 근본적인 구
별을 염두에 두지 않을 때, 루소의 정치학설 내에서 자연 상태와 시민 상
태의 관계의 참뜻을 오해하는 위험이 불가피하다.
자연법 학파의 대부분의 사상가들에게는 사회계약은 자연상태의 독립에
종지부를 찍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의 모든 권리를 폐기하는 것
은 아니다. 자연상태에서의 제 권리가 시민사회에서도 존속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들이 후자에서도 전자와 마찬가지의 조건 하에 있다는 것을 의
미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의 차이는 제 권리가 이제는 공동
권위 하에 놓이게 됐다는 것이다. 이 공동 권위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먼
저 자연법의 권리에 실정법의 힘을 부여함으로써 인간들에게 이를 실천하
는 의무를 과하는 것이다. 주권[최고권]은 따라서 자연법의 제 규칙에 위
배되는 어떠한 사항도 명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이 주권에 복
종하는 것도 오로지 자연상태에서 이미 지니고 있던 그들의 개인적 권리
의 평화로운 향유를 좀더 잘 확보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
가는 이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정도 이상의 권력을 소유해서는 안 되
며, 인간의 자연권[천부인권]은 국가 주권의 한계를 성립시키게 된다. 이
사상체계에 있어서 개인의 권리, 즉 사권(私權)은 공권에 선행하는 만큼,
공권은 사권을 존중하고 개개인에게 이것의 자유로운 행사를 법의 보호에
의해 보장하게 된다. 요컨대 자연상태에서 자연법에 결여되었던 비준
70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sanction)을 사회계약이 부여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들이 이렇


게 사회계약에 의해 형성된 정치사회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주요한 이득
은 그들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의 보호다. 그리고 자연상태와 시민상
태의 차이 역시 될 수 있는 한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은 사회생활
에 대한 자연적 적성을 갖고 태어났고 인간의 이성이 인간에게 그의 동류
와 함께 평화롭고 정직한 삶을 살도록 명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
이다. 이런 구상에 가장 명료한 표현을 부여한 것은 로크이며, 그 상당한
부분에 있어서 그로티우스나 푸휀도르프의 학설이기도 하다.

이상의 학설에 대립되는 학설이 홉스의 것이다. 홉스에 있어서 시민상


태가 성립되면서 자연상태와 그것의 모든 권리를 소멸시키는 것은 전자는
후자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자연상태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만
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고 또 자연권, 곧 만물에 대한 권리이다. 전쟁상
태를 끝내는 유일한 수단은 각자가 이 가공할 권리, 곧 만물에 대한 권리
를 단념하고 이를 한 사람 또는 한 회합에 의해 대표되는 공적 인격체에
양도하는 것이다. 사회계약의 효력은 홉스에게 있어서 자연권을 폐지하고
군주나 의회에 전 시민에 대한 절대권을 부여함으로써 전쟁상태를 평화상
태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 정치학설에 있어선 사권은 로크의 경우와는 달
리 주권[최고권]의 한계를 성립시키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권을 확정하는
일 자체가 오직 주권자의 권한에 속할 뿐 아니라 주권자는 자신이 적절하
다고 판단하면 사권을 제한 내지 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홉스
에게 있어선 자연상태와 시민상태 사이에 최소한의 유추(analogie)조차
있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 본성에 대한 홉스의 구상은 로크나
푸휀도르프의 것과는 전혀 다르니까 말이다. 홉스에게 있어서 인간은, 일
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정치적 동물이기는커녕, 인간은 그
의 욕망과 본능으로 인하여 사회적 삶에 부적격자가 아닐 수 없으며, 따
라서 국가가 강제하는 철의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인간은 결코 타인과 평
화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홉스의 주장과 로크의 주장의 대립보다 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이론체
계는 상상해보려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극단적 두 태도에 견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71

주어 볼 때 루소의 태도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첫눈에 루소는 로크보다 홉스에 가까운 것처럼 생각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ꡔ사회계약론ꡕ에서 시민 상태를 순수한 자연 상태로부터 떼어놓는 거
리는 ꡔ레비아탄ꡕ에서 만큼이나 크기 때문이다. 물론 루소에게선 홉스에서
같이 적대적 상황에서 화합을 창출하는 것이 문제는 아님에 틀림없으나,
어쨌든 홀로 살게끔 창조된 존재를 사회적 삶의 제 조건에 적응시키지 않
으면 안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새로운 삶의 조건에 자연인을 적응시
키는 일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기에 기적이라 불릴 만한 이유는
자연 상태로부터 시민 상태로의 이행이 생산해 낸 변화가 진정한 변신이
나 완전한 변형에 상당하기 때문이다. 루소 자신은 인간의 이 변신을 ꡔ사
회계약론ꡕ중 ‘입법자에 관한’ 장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 민족에게 정치제도를 창립하려고 시도하는 자는 자신이 인간 본성


을 바꿀 수 있는 상태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야만 한다. 즉 그
자체로서 하나의 고립된 완전한 전체인 개개인을 하나의 더욱 큰 전체의
부분으로 변형시켜서, 이 개인은 이 커다란 전체로부터 자신의 존재와 생
명을 부여받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 체질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이를
변질시키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독립적이고 물리적인
삶을 부분으로서의 정신적 삶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입법
자는 인간에게서 그의 본래의 힘을 빼앗은 다음 그에게 그의 것이 아닌,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사용할 수 없는 힘을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선
천적인 힘이 소멸되면 될수록 획득하게 되는 힘은 그 만큼 더 커지면서 또
한 정치제도 역시 그 만큼 더 굳건하고 완벽하게 된다.”(ꡔ사회계약론ꡕ
제2편 7장, PLE, 381/382)

그러므로 인간은 새로운 삶, 즉 사회적 삶에 적응하기 위해선 그의 처


신의 제 원칙을 바꾸어야만 하고, 오로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대신에
이성에 호소해야만 하고, 그리고 자연적 선량함에 만족하는 대신에 ‘추
론된 정의’의 제 준칙에 따르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사회의 형성이 요구하는 것은 이것 이상이다.
즉 “각 결성원은 전 공동체에 자신과 함께 자신의 모든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다.” 이 조건을 채울 때만이 결합은 완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7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루소에게서는 사회계약을 통하여 자연상태는 더 이상 존속하지 않게 되고


모든 자연권은 이와 더불어 소멸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역사가들은 루소는 오로지 국가의 그 구성원에 대한 절대권을 확립
하는 일에만 전념한 나머지 정치적 일체성(unité politique)을 위해 개
인의 제 권리를 희생시키는 데 주저치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루소의 진실을 멀리 비켜가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미
루소는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증명해 보인 것처럼, 흔히 노예소유를 정당화
시킬 수 있다고 주장되는 종류의 계약이 원천적으로 무효인 것은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양도할 수 있는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데 ꡔ사회계약론ꡕ의 실질적 내용이 ꡔ불평등기원론ꡕ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
을 인정하지 않는 한, 전자에서의 총체적 양도(aliénatin totale)는 보
강을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이 용어에 부여하는 그런 뜻을 가질 수는 없
다. 이 용어가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적 자유의 양도일 수 없는 것은 “사
회계약 이후의 인간은 사회계약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거나 심지언 이
전보다 더 자유롭기” 때문이다. 또 루소는 ꡔ사회계약론ꡕ 제2편 4장에서
국가의 절대권을 확언하면서 이와 동시에 시민은 그가 인간으로서 향유할
수밖에 없는 자연권을 포기할 수 없는 것과 사회계약 체결 시에 행하여진
양도는 진정한 양도라기보다는 “유익한 교환”이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사실 사회계약에 의해 행하여진 변형은 시민에게 그가 자연상태에서 향유
했던 것을 ‘또 다른 형태’로 복원시켜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총체적 양도’란 사회 안에서 사는 인간을 모든 개인적 종속으로부터
보호하고 그에게 자연상태에 못지않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고안된 장치
(artifice)에 지나지 않는다. 루소에게서 자연인을 시민으로 전환시키는
‘사회계약’의 요체를 데라떼(Derathé)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각 구성원이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모든 권리를 공동체 전체에게 양도함
은 하나의 방법적 가정에 지나지 않는 (국가)건축학적 규칙이다. 이것의
목적과 필요성은 개인의 제 권리가 그의 자연 본성과 분리할 수 없으면
서, 동시에 그가 국가의 한 구성원인 한, 어떻게 국가로부터 형식적으로
다시 부여받아야 할 것인가를 증명하는 데에 있다. 개인의 국가 구성에의
참여가 지니는 근본적인 의의가 바로 이런 종류의 갱신으로 성립되는 것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73

은, 이 갱신에 의해 자연권은 그 실질적 내용은 온전히 보존되면서 시민


적 권리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계약은 이 이상적 전환
(conversion idéale)의 명확한 형식에 다름 아니다.”25)
루소에게서 개인의 제 권리, 즉 자연법은 사회계약에 의해 폐지되는 것
이 아니라 국가 안에서 이성에 의해 재정립 내지 변형되어 다시 존재한다.
물론 자연적 독립과 시민적 자유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후자가
전자와 대등한 가치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리고 루소의 모든
노력은 자연법의 이상에 상응하는 정치체제를 발견하는 데로 경주되고 있
다.

Ⅱ. 계약설
1. 정치사회의 기원과 권위의 정초

자연상태란 정치사회가 설립되기 전에 인간이 처한 상태를 말한다. 따


라서 이 가설을 수용한 학자들 모두가 국가의 기원 문제와 국가의 건립
기초 문제를 분리하지 않았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법 학파
의 사상가들에게는 이 두 문제는 사실 한 문제의 양면에 지나지 않았으
며, 루소 자신도 신중을 다하여 (정치적) 권리문제를 사실 영역과 구별하
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만큼은 정치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제기하기는 하였다. 정치사회를 탄생시키고 동시에 정치적 권위
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다름 아닌 사회계약이다. 그러므로 권위의 근
거[기초] 문제와 국가의 기원 문제는 사실상 합쳐진다. 그런만큼 오늘날
계약설에 대한 비평이론들의 일반적 경향이 계약설을 정치사회 기원의 역
사적 설명으로서 수용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계약설의 반대자들을 대충 두 부류로 나누면, 한 편은 뒤르
케임(Durkeim)처럼 역사상 계약을 그 기원으로 하는 국가의 실례는 한 건
도 찾아 볼 수 없는 만큼, 계약설은 사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
고 있다. 다른 한 편은 계약이란 그것의 이행을 보증할 수 있는 권위[권

25) Robert Derathé, J. J. Rousseau et La Science politique de son


temps, VRIN, PARIS, 1979, p171.
74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력]이 실제로 존재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는 만큼 국가의 기원을 설명하


기 위해서 국가가 이미 수립되어 있는 것을 전제하는 제도로서의 계약을
원용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 편 계약설의 지지자들에게 사실과 권리(le driot, 법),
국가의 기원과 근거[기초]를 혼동하였다고 나무랄 수 있지만, 다른 한 편
그들의 공적으로서 인정해야 할 점도 있다. 이들의 공적은 다름 아닌, 인
간들로 하여금 그들의 자연적 독립을 포기하고 공동 권위에 복종하게 한
‘동기’로부터 이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협약 행위’를 세심한 주
의를 기울여 구별해낸 일이다. 사회계약설에선 문제의 심리학적 측면과
법적 측면을 결코 혼동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푸휀도르
프는 그의 저서 ꡔ자연법과 국제법ꡕ 제7편에서 한 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사회를 형성하게 한 동기들’에 관한 연구에, 또 한 장은 사회계약에
관한 그의 구상에 할당하고 있다. 홉스의 경우, 인간들로 하여금 결합하
게 하는 동기는 횡사에 대한 공포인 반면, 그들의 결합을 성취하는 행위
는 협약[조약]이다. 이러한 관점의 이원성은 루소에게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루소 역시 결합의 동기와, 결합을 법적 차원에서 실현하는 계약을
구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루소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고 정치적 통일체의 기초로서 ‘공동 이익’과 ‘사회계약’을 번갈아
가며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전자는 합일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
학적 기초인 반면, 후자는 정치적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 권위의)
법적 기초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구성원들의 협약을 정치적 통일체
[국가]의 기초로서 설정하였다”고 했을 때, 루소는 법적 관점에 서서 말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식의 표명이 루소가 이번에는 문제의
심리학적 측면, 즉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사회를 형성하게 한 동기를 표명
하고 있는 문장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그들의 공동 이익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결합하여 정치사회를
형성하도록 하였겠는가? 고로 정치사회의 기초는 공동 이익이다.” ꡔ제네
바 초고ꡕ 제1편 5장의 이 문장은 다시 ꡔ사회계약론ꡕ에서 확인되고 완결된
다.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75

“개별적 이해의 대립이 정치사회의 설립을 필요하게 한다면 이 이해의


일치가 정치사회의 설립을 가능하게 한다. 다수의 상이한 이해 안에 공동
의 것, 그것이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기에, 만일 이 모든 이해가 일치하는
점이 없다면 어떠한 사회도 존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만치 오로지 이
공동 이해에 근거해서만이 사회는 통치되지 않으면 안 된다.”(ꡔ사회계약
론ꡕ 제2편 1장, PLE, 368)

그러므로 정치사회 문제는 실제로 사실 차원의 문제와 법 차원의 문제


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심리학적 문제 즉 정치사회의 기
원에 관한 문제요, 후자는 법적 문제 즉 권위의 근거에 관한 문제이다.

1) 정치사회의 기원
자연법 학파의 철학자들이 국가를 인위적으로 구축하려고 했다는 비난
이 비록 정당할지라도, 그들 모두가 정치사회의 형성은 인간이 존속하기
위해선 부득이한 일이었으며 자연상태의 불편과 장애가 실제로 이것의 설
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믿고 있었음을 인정하기 않으면 안 된다. 예
를 들어 홉스에 있어선 인간 종이 살아남으려면 그의 자연 조건을 단념하
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끝내기 위한 인위적 장치를 발견해내지 않
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홉스의 계승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반대자
들까지도 종국엔 정치사회의 기원 문제를 그와 거의 유사한 관점에서 제
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이 점에선 홉스의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언 로크나 푸휀도르프 같이 홉스의 기초 가설
을 거부하고 자연상태를 평화 상태로 간주한 학자들조차도 분쟁, 알력을
중재할 공동 심판관이 없고 만인에게 자연법의 준수를 강제할 수 있는 권
위가 부재하는 상황에선 자연상태의 평화는 확실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들의 자연적 독립도 불가피하게 인간들 사이에 전쟁상태를 초래하고
만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 결국 홉스의 논적들에게도
이 전쟁상태를 끝낼 목적으로 정치사회는 창설되었던 것이다.

“자연상태에선 하늘밖에 호소할 길이 없고 분쟁을 중재할 공동 권위가


부재하는 만큼 사소한 알력만 있어도 전쟁상태가 쉽사리 생겨나기 마련이
76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다. 따라서 이 전쟁상태를 피해보려는 욕구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시민


사회를 형성하고 자연상태를 포기하도록 하는 가장 큰 동기가 아닐 수 없
다.”(로크, ꡔ시민통치론ꡕ 21절)

루소에게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ꡔ불평등기원론ꡕ 제2부에서 루소는


인류의 진화와 인류를 자연상태로부터 정치사회 설립에까지 끌어온 암울
한 진보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순수한 자연상태와 정치사회의 성립
시기 사이에 수많은 세기가 흘러갔으며, 두 중간 단계가 이 기간 안에 자
리 잡고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인류에게서 가장 행복한 시기로서 루소는
‘탄생하는 사회’라고 부르고 있다. 이 시기엔 정치사회는 아직 성립되
지 않았고 법의 지배도 없었으나 사람들은 더 이상 흩어져 살지 않고 무
리를 지어 살면서 상호 약속에 대한 투박한 관념을 획득하고 예의범절의
도리를 알게 되었다. 이것이 또 (현재) 야만 민족들이 사는 방식인 것이
다. 그러나 불평등의 진전과 욕망들의 발전과 더불어 이 황금시대는 사라
지고 가장 끔직한 전쟁상태가 임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부자들의 강점, 빈자들의 강도질, 만인의 광폭한 욕망은


천부의 동정심이나 아직까지 약한 정의의 음성을 질식시켜버리고 끝내는
사람들을 탐욕적이고 야심에 불타는 사악한 존재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최강자의 권리와 최초 점유자의 권리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이 갈등은 오직 전투와 살인에 의해서만 끝장을 보게 된
다. 그래서 탄생하는 사회는 가장 끔직한 전쟁상태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인간 종은 이렇게 황폐와 비참의 지경까지 전락하였으나 더 이상 온 길을
되돌아 갈 수도 없고 그 동안 획득했던 자질도 포기할 수도 없게 되어 자
신의 파멸의 문턱까지 치달아 온 것이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80)
“내가 인간들이 도달했다고 가정하는 단계에선 인간의 자기보존을 해
치는 장애들이 자연상태에서 개개인이 자기보존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힘
을 압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상황에선 인간의 자연상태는 더 이상 존속
할 수 없게 되어, 인간 종은 자신의 존재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멸망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6장, PLE, 360)

결국 루소에게 있어서도 이 전쟁상태가 정치사회의 설립을 불가피하게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77

하고 그것의 이점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부자들의 발의와 주도에 따라


사람들은 협약에 의해 결합하여 공동 권위에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정치사회와 법의 기원이고 기원일 수밖에 없다”고 루
소는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설파하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루소가 어떤 우회적 경로를 거쳐 결국엔 홉스의 최초
입장으로 돌아와서 이번엔 그 자신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를 긍
정하는가를 보았다. 바로 이 우회적 경로 덕분으로 루소는 푸휀도르프나
로크에서와 같은 모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
실 이들은 우선 자연상태는 평화와 상호원조의 상태라고 주장하고 나서는
이를 일종의 전쟁상태로 규정하는 결론에 이르렀으니까 말이다. 이에 반
해 루소에 있어선, 자연상태에서 인간의 존재 방식은 어디까지나 고립인
만큼 인간이 타인과 충돌하게 될 까닭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상태가
나타나고 또 이 전쟁상태를 끝내기 위해 정치사회가 창설되기 위해선 먼
저 인간들은 고립을 떠나 서로 가까워지고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고독하
고 단순한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적이 되는 것은 ‘사회적 동물’이 되고 난 이후의 일인 것이 사회성의
발전과 욕정의 발전은 쌍을 이루어 진행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때만
이 홉스가 말한 전쟁이 일반적인 상태로서 생겨나는데, 홉스가 이런 전쟁
을 자연상태로 간주한 까닭은 전쟁이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 기인하는 것
이 아니고 사회의 내부에서만 발전할 수 있는 욕정에 기인하는 것을 이해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연적 독립이 인간들 사이에 전쟁상태
를 빚어내기 위해선 인간들이 서로 가까워지고 그들의 욕정이 잠에서 깨
어나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홉스 이론은 루소에게 있어서도 계속되나, 이번엔 순서
가 도치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루소에게는 홉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악은 인간들이 함께 모여 사회적 삶을 살게 된 데에서 기인하지만,
전자는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삶이 인간의 자연본성이라고 전제하지는 않
았다. 인간들이 사회적 삶을 살기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의 정욕은
끊임없는 갈등과 알력의 원천이 되는 까닭에, 만일 인간들이 적당한 시기
에 그들의 자연적 독립을 포기해야만 할 필요성을 절감하여 평화롭게 살
78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기 위한 인위적 장치를 상상해내지 못했다면 인간 종은 이 일반화된 전쟁


으로 멸종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인위적 장치란 다름 아닌 정치사회를 탄생시킨 사회계약이다. 여기
서 우리는 루소의 사회계약 개념을 명확히 한정할 필요에 당면하였다. 루
소에게서의 계약이 다수의 특수 사회 설립보다는 인류 차원에서의 일반
사회 창설을 지향하며, 그러므로 계약은 사회와 동시에 국가를 정초하게
된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실제의 루소 사상은 정치사상사 연구자들 사
이에 널리 통용되는 이런 해석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먼저, 루소에 의하면 최초의 사회적 관계는 계약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
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와 반대되는 순서가 루소의 진실인 것은, 인간들
이 정치사회와 법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기 위해선 먼저 그들의 원시
적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전쟁상태가 없었다
면 인간들은 결코 협약에 의한 결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할 생각조차 없었을 터인데, 이 전쟁상태는 다름 아닌 최초의 사
회적 관계에서 연원한다. 그러므로 정치사회의 수립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은 사실 사회성의 발전이며, 또 이 절대 필요성 때문에 동시에 가능하
게 된 것이다.
루소에게선 홉스의 경우와 같이 사회계약은 이성의 작품이다. 다시 말
하면 사회성이 이성을 작동하게 해서 사회성이 초래한 악에 대한 구제책
을 제공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때에 한해서 사회계약은 가능한 것이
다. 그렇지 않다면, 오로지 육체적 본능에 국한되어 언어와 이성의 사용
이 결여된 원시인들이 과연 어떻게 이런 사회계약을 생각해내고 체결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사회계약은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의 발명
과 이성의 개발에 선행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언어의 발명이나 이성의 개발도 사회적 관계의 확립이 선행되었을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사실 루소 자신도 강조하고 있듯이 언어의 발명이라는 것
도 “일종의 사회가 발명가들 사이에 이미 확립되어 있음을 상정”할 때
만이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산림과 숲에 흩어져 사는 인간들에게 의사소통
(communiquer)을 해야 할 필요나 기회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원시적 고립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은 인간은 그의 이성을 함양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79

할 가능성이나 기회가 있을 리가 만무한 만큼, 그의 이성은 ‘잠재적 능


력’으로서 남을 수밖에 없다. 고립된 인간이란 실제로 본능 이외에 다른
어떠한 안내자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자력으로만, 즉 타인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루소에게 있어서 사회성과 이성은 밀접한 상관관계 속에서
발전하기 때문에 사회계약을 생각해내고 체결하기 위해선 인간들은 먼저
사회적 존재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인간들은 어떻게 사회적 존재가 되었으며, 특히 자연상태로부터
최초의 사회로의 이행은 어떻게 실현되었던가? 후에 있을 모든 발전의 조
건이 될 이 최초의 발전에 대해서 루소는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매우 간략
히 취급하고는 있으나, 이 최초의 발전은 그 자체가 인간의 자연 본성으
로부터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었기에 그 만큼 더 뜻밖이다. 자연
인은 자족하는 존재이며, 그와 타인을 결합시켜 줄 자연적 동일성조차 의
식하지 못하고 또 타인의 도움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조건
하에서 어떻게 자연인이 타인에게 접근해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결국 자
연인을 그의 자족하는 고립 상태로부터 나가게 한 원인은 루소에 의하면
‘여러 외적 원인의 우연한 일치’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태초의 자연
조화가 깨어지는, 말하자면 인류 진화의 첫걸음에 대해 루소는 ꡔ불평등기
원론ꡕ에선 이렇게 간략한 지적을 했다가, 후에 ꡔ제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ꡕ 제9장에서 이를 다시 보완하고 있다. 이 장은 사실 제 언어의 기원
뿐만 아니라 제 사회의 기원도 주제로 하고 있는데, 루소의 문제제기 방
식 때문에 문제해결 역시 매우 미묘하게 된다.
루소의 이론에 의하면, 자연상태를 떠나기 전에 인간들은 산재(散在)상
태에서 살고 있었으며, 게다가 어떠한 사회적 성향도 없었을 뿐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접근하여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영원한 봄이 지구상에 있었던 것을 상상해보시오, 도처에 풍부한 물과
가축과 목초가 있었던 봄을. 이런 자연상태에서 태어나 살던 인간들이 도
대체 무슨 이유로 그들의 원시적 자유를 포기하고 그들의 무사태평의 목
가적이며 고적한 삶을 떠나 근로와 노예적 굴욕과 빈궁의 사회상태를 등
에 지게 되었는가는 나의 상상력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일이다.”26)
80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결국 인간들이 고립을 떠나 서로 다가가기 위해선 일련의 외적 상황에


의해서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으니, 인간들이 사회적 동물이 된 것은 먼저
함께 살도록 강제당한 이후의 일인 것이다. 인간들이 집결하기 시작한 것
은 가혹한 기후와 척박한 토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좀더 유
리한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부상조
의 삶에 도달하기 위해선 대홍수나 지진 같은 일련의 재난이 발생하지 않
으면 안 되었다.

“최초의 인간들의 연합은 그 대부분 일련의 자연적 재난의 작품이다.


특별한 대홍수들, 해일들, 화산의 폭발들, 엄청난 지진들, 번개에 의해
점화되어 거대한 산림을 파괴하는 화재들, 이런 모든 재난들은 한 땅의 원
시 주민들을 경악케 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하면, 다음에는 이 흩어진 주민
들로 하여금 집결해서 공동 피해를 협력하여 복원하도록 한다. 고대 세계
에 흔히 있었던 이런 대재앙에 관한 전승들은 신[자연]의 섭리가 어떤 도
구들을 사용하여 인간들을 강제적으로 서로 가까워지도록 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27)

결국 루소는 자연인을 그의 고립 상태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서 신의 섭


리(Providence)를 개입시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설명은 그 아이디
어가 기발한 것은 용인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임의적인 것이지만, 이로부터
우리가 유념할 것은 요컨대 인간들은 주위 상황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함께 모여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사회란 (외부의 강
요에 의해)어쩔 수 없이 모인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
실 상태’를 법적 질서로 변형시키고, 또 사회계약이란 수단에 의해 정치
사회를 탄생시키는 일은 인간에 귀속한다.

2) 정치권위의 근거
이제 ꡔ사회계약론ꡕ의 유일한 주제인 정치권위의 근거를 상론할 차례이
다. 루소에게서 이 권위는 그 근거를 자연이 아니고 합의(convention)에

26) 루소,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 제9장, (Gallimard, 1990), p.93.
27) 루소, 같은 책, p.94.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81

두고 있다.

“사회 질서는 신성한 권리로서 다른 모든 권리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 권리는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합의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1장, PLE, 352)
“자연은 어떠한 인간에게도 타인에 대한 권위를 부여한 적이 없고 또
힘으로부터 어떠한 권리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합의만이 모든 정당
한 권위의 기초로서 남는다.”(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4장, PLE, 355)

이상의 두 원문은 국가의 계약설과 천부의 평등 원리를 결합시키는 연


결고리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만일 인간은 타고나기를 평등하고 자유
롭다면, 어느 누구도 타인을 지배하는 천부의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천부의 재능, 육체적 강건, 지적 우월, 그 어떠한 것도 한 인간에 타인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인간은 힘과 지력에서 불평등하다는 사실
로부터 어떤 인간은 명령하는 권리, 어떤 인간은 복종할 의무를 가진다는
결론은 결코 도출될 수 없다. 이 복종의 의무 역시 그 근거는 의무 주체
의 자유로운 약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조건하에서 결국 자연법에
어긋나지 않고 참주(僭主)적이 아닌 모든 권위는 오로지 그 권위에 복종
할 사람들의 동의에 근거할 뿐이다.

“시민적 결합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자발적인 행위가 있을


수 없는 최고의 자발적인 행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
래 자유롭고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 어떠
한 구실로도 인간을 그의 동의 없이 예속시킬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ꡔ
사회계약론ꡕ 제4편 2장, PLE, 440)

따라서 루소의 국가론은 개인주의 원리에 입각한 국가론인데, 이 점에


서 루소는 로크나 푸휀도르프, 뷔르라마르키를 계승하고 있으며 자연법
전통에 서 있다. 로크의 글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자연에 의해서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고 독립적인 존재인 고


로, 어느 누구도 그의 동의 없이 이 자연 상태로부터 끌어내거나 타인의
정치권력에 예속시킬 수 없다. […] 한 정치사회의 기원이 되는 즉 정치
8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사회 성립의 진정한 기초가 되는 것은 오로지 결합하여 이런 정치사회를


구성해내기 위한 과반수를 형성할 수 있는 일정한 수의 자유인들의 합의뿐
이다. 바로 이것만이 지상에 합법적 정부를 탄생시키고 시킬 수 있다.”
(ꡔ시민정부론ꡕ 95절, 99절)

푸휀도르프 역시 개인주의적 국가 구상에서 토대 역할을 하는 이 원리


를 로크에 못지 않게 명확히 천명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천부의 동등
한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사전에 당사자의 동
의 없이 인간을 예속시키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부당하지 않을 수 없
다.”28) 이 원리로부터 직접 결과하는 명제는 주권자[군주]는 그의 권력
을 오직 협약에 의해서만 소지(所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시 푸휀
도르프를 인용해보자. “군주에게 정당한 권리와 진정한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다름 아닌 이 협약인 것은 협약은 그의 권위를 그의 폭력이 아니고
신민의 자발적인 동의와 순종에 세우기 때문이다.”29) 결국 이상의 인용
문은 루소 자신이 정치적 권위는 자연이 아니라 협약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연법 전통으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그 자신이 이를 완벽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다음과
같이 언표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문제를 토론해온 학자들 중 가장 건전한 편의 뒤를 이어 나 자신


도 정치 통일체의 정초로 그 구성원들의 협약을 원칙으로 설정하였다.”
(ꡔ산에서 보낸 편지들ꡕ 여섯 번째 편지, VPW, Ⅱ, 200)

그러므로 루소에서 독창적인 것은 국가의 정초는 협약에 있다는 사상이


아니고 이 협약의 본성에 관한 루소의 구상에 있다. 사실 루소 이전에 사
회계약을 정치권위의 정초 행위로서 제시한 학자들 대부분은 사회계약을
일종의 복종 협약으로 생각하였다. 즉 이들에게는 사회계약은 어떤 인민
[백성]이 자발적이든, 필요에 의해 강제되었든 군주의 권위에 복종하기로
수락한 협약에 다름 아니었다. “모든 왕들의 합법적인 권력은 예외 없이

28) 푸휀도르프, 같은 책, 제3편 2장 8절, p.366.


29) 푸휀도르프, 같은 책, 제7편 3장 1절, p.408.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83

그들이 다스리는 백성의 동의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동의는 자발적인 것


일 수도 있고 강요된 것일 수도 있다.”30) 후자의 경우, 복종은 정복과
전쟁의 권리에서 결과한다. 전자의 경우, 복종의 동의가 자발적인 것은
한 민족이 무정부적 자연상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왕에게 자신을 양
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협약은 노예 계약을 모델
로 하여 구상되었다. 왜냐하면 한 백성이 왕에게 자신을 주는 (se
donner)행위는 노예가 자신을 주인에게 주는 행위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
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연법 법률가들에게는 군주의 신민에 대한
권력은 주인의 노예에 대한 권력과 동일한 기원과 동일한 근거를 갖는 것
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루소의 자연법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이 부각되기 시작하는 것은 루소가 볼 때 계약 당사자 중 일방에만
이익이 되는 협약은 결코 참된 계약으로 간주할 수 없고 따라서 정당한
권위를 위한 정초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복종 협약은 소위 노예 협약
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에 어긋날 뿐 아니라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다. 이
상이 루소가 ꡔ사회계약론ꡕ의 ‘노예소유권에 관한 장’에서 힘을 경주하
여 입증하려는 점인데, 이 장에서 그가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복종 협약에 대한 비평이다.
그러나 ꡔ사회계약론ꡕ에선 저자는 노예소유권에 관한 비평에 들어가기
전에 부권(父權)에 관한 비평을 선행시키고 있다. 사실 여기서 루소의 주
관심사는 국가 계약설이나 인민주권에 적대적이던 17, 18세기의 왕정주의
사상가들의 주장을 검토해 보는 것이다. 이 사상가들에게 정치권위, 곧
군주의 신민에 대한 권위가 그 근거를 자연에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
던 것은 군주의 권위가 부권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상의 주목적이 왕정의 여타 통치 형태에 대한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
었다면, 이에 병행하여 계약설 자체를 완전히 침몰시키지는 못한다하더라
도 특히 그것의 적용 범위를 제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만일 왕권이 부권에서 나왔고 부권은 자연에 근거하고 있다면, 협약이 합
법적 권위의 유일한 근거도 아닐 뿐 아니라 원칙적 토대도 될 수 없는 것

30) 푸휀도르프, 같은 책, 제7편 7장 2절, Ⅱ, 383.


84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의문시되는 것이 다름 아닌 계약설의


기초 원리이다. 이상의 이유를 배경으로 루소의 정치학 저술 중에서 부권
에 대한 비평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위상이 부각된다.

2. 정치권과 부권

정치철학사에서 왕권을 부권으로부터 도출한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는


1680년에 출판된 ꡔ족장론ꡕ(Patriarca)의 저자 로버트 필머로서, 로크는
필머의 사상을 논파하기 위해 그의 저서 ꡔ시민통치론ꡕ의 제1론(The First
Treatise of Gorvernment)에 “로버트 필머경 및 그 추종자들의 그릇된
원칙과 근거에 대한 지적과 반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다른 한편
대륙에선 보스웨(Bossuet)가 그의 저서 ꡔ정치학ꡕ(1709)에서, 람세
(Ramsay)가 그의 저서 ꡔ시민통치에 대한 철학적 시론ꡕ(1719)에서 영국인
필머를 언급함이 없이 동일한 사상을 주장하였던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상에 언급한 세 학자가 추구한 목적은 사실 홉스의 것과 마찬가지여
서, 이들 역시 왕들은 신민에 대해 합법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고 어떠
한 약속에 의해서도 왕은 신민에 억매일 수 없으며, 또 어떠한 상호간의
협약도 그들의 권한을 제한한다든가 그들에게 의무를 강제하는 계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게다가 만일 절대 통치가 부권에
서 직접 연유한다면 이는 다른 모든 통치 형태에 대해 그 근거를 자연에
갖고 있다는 장점을 주장할 수 있어, 그 제도에는 임의적(arbitraire)성
격이 전무하게 된다. 학자들은 대충 이런 방식으로 절대 군주제의 여타
통치 형태에 대한 우월성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이런 구상에서 무엇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평
등하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자의 권위에 태
어나면서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확립하는 일이다. 천부의 평등을 설파하는
자들은 이들이 보기에 태생이라는 자연 질서에서 연유하는 우월성을 고려
하지 않고 있는데, 실은 모든 협약 이전에 이미 자녀를 부모의 권위에 예
속시키는 필연적인 의존관계, 자연적인 종속관계가 실재한다. 이 아이디
어를 람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 차이가 크든 작든 인간은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85

태어나면서 불평등하다. […] 평등과 독립의 상태, 즉 모든 인간이 심판과


명령에 있어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상태는 생식의 자연 질서
에 반(反)할 뿐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하기야 시인들처럼
인간이 개구리처럼 진흙에서 태어난다거나 까드뮤의 동료들처럼 모두 동시
에 동일한 키에 동일한 힘을 갖고 땅에서 태어난다고 상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신의 섭리와 국가에 의해 확립된 질서에 따라서 모든 아버지
는 그들의 자녀가 이성의 나이에 도달하기 전에 행한 모든 일에 대해 책임
이 있다. 따라서 각 가정의 가장은 모든 계약 이전에 그의 자녀를 다스릴
권리가 있으며, 자녀들은 이성의 나이가 지나고서도 그들의 부친을 그들
태생의 원작자요 그들 교육의 원인자로서 존경해야 할 의무가 있다.”31)
이렇게 일단 일체의 계약과는 무관하게 자연적 권위, 즉 아버지의 자녀
에 대한 권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면, 다음 순서는 부권이
부지불식간에 군주의 권리로 변형되었다는 테제를 내세우는 것이다. “이
렇게 해서 부권은 처음부터 군주의 권위로 전환되었다. 인간들 사이에 우
두머리 권력이 있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자녀를 어려
서부터 다스린 가장이 경험도 없고 천부의 권위도 없는 젊은이보다는 최
고 권위의 수탁자가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된다.”32) 그리고
보스웨 역시 이와 같은 생각을 표명하고 있다: “인간의 권위와 지배에
대한 최초의 생각은 부권에서 유래한다.” 결국 이 사상가들에게는 정치
권위는 부권을 모델로 하여 설립되었고 또 이런 이유로 군주제는 여타 통
치 형태보다 먼저 출현하였던 것이다.
왕권은 제도로서 설립되어도 그 기원의 특징을 보존하려 본질적으로 부
권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래서 왕의 그 백성에 대한 의무는 부친이 그
자녀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의무와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루이 14세 시
대의 왕정주의자들이 애호한 주제들 중 하나로서 특히 보스웨가 이를 발
전시키는 데 선두 역할을 하였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왕
권은 일종의 부권이며, 그것의 고유한 성격은 인자함이다. […] 왕들은

31) 람세, 시민통치에 대한 철학적 시론 제4장, 우리의 인용은 데라떼의 루


소와 당대의 정치학 Vrin, Paris, 1979, pp.183/184에서.
32) 람세, 같은 책(데라떼, 같은 책, p.184에서 인용).
86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인류의 진정한 부친인 신을 대신한다. 또 권력에 대해 인간들이 갖게 된


최초의 관념은 부권에 대한 관념이며 따라서 부친의 모델에 따라 왕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왕을 백성의 어버이라고 일컫는 것은 찬사라
기보다는 그를 그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거나 그를 정의(定義)하는 행위
이며, 이런 까닭에 인자함이야말로 왕들의 천성이 아닐 수 없다.”33)
이런 절대 군주제 옹호자들을 논파하기 위해 루소가 취할 전략은 두 가
지 중 하나이다. 우리가 곧 보게 되듯이 루소 논증의 요체는 왕권이 부권
에서 유래하고 따라서 그 기초를 자연에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에는 양자
사이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루소
는 이와는 달리 푸휀도르프나 쥬리외(Jurieu)의 논법을 따를 수도 있었는
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사상가들은 이미 루소에 앞서 절대
군주제 사상에 대한 논파를 시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이들은 후
에 이 사상의 토대가 되는 원리를 반박하고 부권이 자연에 의해 확립되었
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이들에게는 부권은 일반 원칙에 대한 예외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즉
부권 역시 다른 모든 권력처럼 그 기원은 계약이었다. 우선 쥬리외의 말
을 인용하여 보자: “이 세상에 그것이 묵시적이든 명시적이든 상호간의
협약에 근거하지 않은 관계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상호간
의 협약과 쌍무적 의무를 토대로 하지 않는 주종관계, 부부관계, 부자관
계 따위가 있을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즉 계약 당사자 일방이 이
의무를 폐기하면 타방의 의무 역시 폐기된다. 이 쌍무 원칙은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같은 필연적[자연적] 관계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실제로 부친의 자식에 대한 권리보다 더 신성불가침한 권리는 있을 수 없
으나, 부친이 만일 이 권리의 행사에 있어서 지나쳐 도를 넘게 되면 그
자신도 이 권리를 상실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기독교의 법은 만일 부친
이 자식의 재산, 명예, 생명을 박탈하려고 하면 후자에게 전자에 대한 불
복종뿐만 아니라 저항까지도 허가하고 있는 것이다.”34) 여기서 쥬리외

33) 보스웨, 정치학 제3편 3조(데라떼, 같은 책, p.185에서 인용).


34) 쥬리웨, 목회자의 편지 에서 16번째 편지 1689년 4월 15일자(인용은 데
라떼의 같은 책, p.187).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87

가 부권을 상호간의 협약에 근거시키고 있다면, 그것은 부친은 그 자녀에


대해 무제한의 권한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자녀는 그들대
로 부모에 대한 복종의 의무에 무조건적으로 매여 있는 것이 아니고 정당
한 경우엔 그들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
다. 그러나 이런 형식으로 주장되는 계약설이 수용될 수 없는 것은 자명
한 이치로서, 아이들은 이런 상호간의 협약을 체결하기 전에 이미 부모의
권위에 예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쥬리외는 이런 협약의 가능성이나 불
가피성은 증명하지 않은 채 단지 전제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쥬리외보다 노련한 푸휀도르프는 이 논리적 난점을 우회할 목적으로,
부권의 토대가 되는 협약은 실제로 체결된 협약이 아니고 단지 추정된 협
약 또는 오늘날의 어법을 빌린다면 ‘준계약’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
도하였다. “부모의 권위 역시 자녀로부터 있었다고 추정되는 동의, 즉
일종의 묵시적 협약에 근거하고 있다. 한편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들의 자
녀를 간직하기를 원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자녀들이 그들의 보호 하에
있는 기간 동안 제대로 양육하고 자연이 요구하는 제 의무를 다할 것을
약속하며, 다른 한편 자녀는 비록 아직까지 이성을 사용할 줄 모르고 따
라서 명시적으로 자신을 매는 약속을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부모가 그
들의 의무를 다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들 자신도 명시적인 동의를
한 경우에 못지않은 쌍무적 의무를 지게 된다. 물론 부모에 대한 이 묵시
적 약속은 부모가 그를 위해 행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
해서야 비로소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이성을 사용할 수가 있어 부모의 배려 없이는 자
신을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이 어린 인간 역시 부모
가 자신을 잘 길러 주기만 한다면 자발적으로 부모의 배려와 권위에 복종
하기로 동의할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
서 동의는 합리적 근거 위에서 추정된 만큼 형식을 구비한 동의에 못지않
게 유효하다. 이와 유사한 구체적인 법례를 들어 본다면, 만일 누군가 어
떤 사람을 위하여 그의 부재중 (따라서 그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사업을
대신 처리해 준 경우 후자는 전자가 그의 일을 위해 지출한 경비를 보상
해줄 것을 묵시적으로 약속한 것으로 간주한다.”35)
88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그러나 이런 푸휀도르프의 논법이 매우 기발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루소


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후자는 부권의 근거를 결코
계약에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연법 학파가 일반적으로 수용하던 이론
을 배제하고 나아갔기 때문이다. 루소에게 가정은 협약에 의해 설립된 제
도가 아니고 일종의 자연적 사회이다. 즉 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2장에서 말
하고 있는 것처럼, “가정은 온갖 사회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
라 유일한 자연적 사회이다.” 따라서 루소에게서도 보스웨나 람세의 경
우와 마찬가지로 부권은 그 근거[기초]를 자연에 갖고 있다. 다만 정치권
은 어디까지나 협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부권과 종류를 달리한다는
것이 루소의 지적이다.

“과연 어떻게 국가의 통치가 그 기초가 전혀 다른 가정의 통치와 비슷


할 수 있단 말인가 ? 아버지는 자식들보다 신체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그의
보호와 도움이 이들에게 필요한 기간 동안엔 부권은 자연에 의해 설정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 구성원이 본래 평등한 대가족
에서 순전히 비자연적 제도인 정치 권위는 협약에 기초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행정관도 오로지 법에 의해서만이 남을 명령할 수 있는 것이
다.”(ꡔ정치경제학ꡕ, VPW, 238)

이상의 원문에서 보다시피 어떤 면에선 루소는 쥬리외와 보스웨간의 논


쟁에서 후자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 그 자신이 부권은 자연에 의해 설립
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은 루소가 절대 군
주제 옹호자들에게 허용한 유일한 양보로서 이들 주장의 다른 두 측면은
가차 없이 논박하고 있다. 우선 루소가 보기엔 전제주의의 방조자들이 전
제주의를 정당화하려고 이를 부권에 비유하는 것은 헛된 시도일 따름이
다. 왜냐하면 루소 자신이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명령
하는 자의 유익보다 복종하는 자의 이득을 고려하는 이 자애로운 부권보
다 전제주의의 광폭한 정신과 거리가 먼 것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 말이
다.” 이 대목은 한편 “왕의 권위는 부친의 권위와 같으며 자애로움이야
말로 그것의 고유한 성격이다”라는 보스웨의 언표에 대한 공개적인 반박

35) 푸휀도르프, 같은 책, 제6편 2장 4절(Ⅱ, pp.235/236).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89

이며, 다른 한편 같은 주제에 대한 로크의 생각에 접근한다.

“자녀를 기르고 교육하는 일은 자녀의 행복을 위해 부모가 마땅히 지


어야 할 책임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부모는 이 책임을 완수해야 하는 의
무로부터 이탈할 수 없다. 비록 명령하고 벌주는 권한이 이 책임과 켤레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신은 인간 본성의 제 원리 가운데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자식들에 대한 자애로움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부모가
그들의 권한을 너무 엄격하게 행사할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지나치
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엄격 쪽이 아니고 오히려 자연적 성향에 따라 그
반대쪽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ꡔ시민통치론ꡕ 67절)

루소에게 아버지라는 호칭 이상으로 전제 군주에 부적절한 호칭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은 절대 군주는 자신의 지배 하에 있는 백성에 대해서, 한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에게 기울이는 사랑을 결코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
이다. 따라서 왕권은 그것이 행사되는 방식과 그것의 존재 근거에 의해
부권과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그리고 왕권은 부권에서 나왔고, 후자는 람세가 강변하듯이, 성질상의
아무런 변화 없이 전자로 전환될 수 있고 따라서 제반 정치사회 설립의
원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틀렸다는 것이 루소의 두 번째 지적이다. 비
록 부권은 자연에 의해 확립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자연은 부권
에 그 한계를 명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서 루소는 다시 로크의
선례를 따라 부권의 잠정적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우선 로크를 살펴보
기로 하자.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권위는 단지 잠정적인 것으로서 그들의 인생과


재산에까지 미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아이들의 어린 나이에 기인하는 약
함과 불완전성에 대한 구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필수적인 훈련이기도 하다. 물론 아버지는 자식들이 굶주릴 위험이
없는 한에서 자신의 재산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있
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권한이 자식들의 생명이나 재산을 ― 그들이 스스
로의 노동으로 획득한 재산이든 또는 타인의 증여로 손에 넣게 된 재산이
든 ―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까지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
고 아버지는 자녀들이 자유롭게 처신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하면 그들의
90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자유에 간섭할 권한은 없다. 이때가 되면 아버지의 지배는 그치기 때문에


아버지는 타인의 자유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식의 자유를 더 이상 좌
우할 수 없다. 어쨌든 부권은 항구적이고 절대적인 권한과는 거리가 먼 것
이고, 신은 자식에게 부모를 떠나 자신의 아내와 결합하도록 명령하는 만
큼, 자식은 때가 되면 부권으로부터 벗어날 권리가 있다.”(ꡔ시민통치론ꡕ
65절)

실제로 부권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것은 아이의 약함이며, 부권에 정당


성[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은 부친이 자녀의 교육과 생명보존을 위해 행하
는 봉사이다. 그러나 교육이 일단 끝나면 부권은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
다. 자식이 혼자서 처신하기에 충분한 이성과 힘을 획득하게 되면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고 무엇이 자신의 보존에 적합한가를 판단하는 유
일한 심판관이 된다. 따라서 만일 자식이 부친으로부터 받은 배려와 양육
에 대해 언제까지나 감사와 존경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 도리라면, 그는
부친에 대해 복종의 의무는 없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들을 결합시킨 자연
적 유대가 풀리게 되면 서로 독립적이고 대등한 존재가 된다. 이 점에 있
어서도 루소의 생각은 로크와 다르지 않다.

“공경하고 부양하고 존경과 감사를 표시하는 것은 복종과 절대 종속의


의무를 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도리이기 때문에
군주도 그의 모친을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렇다고 해서 이 의무가
그의 권위를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의 모친의 통치에 복종
해야만 하는 의무를 부과하지도 않는다.”(ꡔ시민통치론ꡕ 66절)
“미성년자의 복종과 더불어 아버지가 갖게 되는 잠정적인 지배권은 물
론 아이가 성년이 되면서 종식된다.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자식의 의무는
부모에게 존경과 효도와 정신적 지지에 대한 영구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것
은 사실이나 […] 사람들이 만일 이 두 종류의 권한을 ― 즉 보호자로서의
아버지가 자식이 미성년인 동안 행사하는 권한과 다른 한편 평생 자식으로
부터 존경받을 수 있는 권한 ― 제대로 구별했다면 이 주제에 대해 그렇게
나 많은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ꡔ시민통치론ꡕ 67절)

“자연법에 따라, 아버지는 그의 도움이 아이에게 필요한 기간 동안에


만 아이의 주인이다. 이 기간을 넘으면 양자는 서로 동등해지고 자식은 아
버지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만큼 아버지에 대한 그의 의무는 복종이 아니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91

고 오로지 존경뿐이다. 왜냐하면 은혜의 인정은 자식의 의무임에 틀림없


으나 타인이 그것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85)

그러므로 자녀의 부친에 대한 의존과 자연적 평등, 이 양자 사이에는


보스웨나 람세가 즐겨 강조한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상가들의 공
통된 오류는 성인을 미성년자에나 알맞은 의존상태에 계속 잡아두려고 한
것이다. 물론 이 의존상태는 필연적이나, 그것도 자연 질서에 의해 어디
까지나 잠정적일 뿐이다. 흔히 말하는 보호적 불평등이라는 것도 아이가
부친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기간을 넘어서까지 연장되지 않으며 피보호자
도 어느 날에는 그 자신이 자유인이 되어 그의 보호자와 동격이 된다.
만일 가정이 이 보호 기간을 넘어서까지 분리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으
면 이 결합은 그 근거가 더 이상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협약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자녀들이 자력으로 생존하고 자신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부모의 권위 하에 남아 있는 경우, 이는 필연
성이 아니고 선택에 의한 것이다. 이런 경우, 아버지는 모든 정치 수장들
처럼 그의 권력을 ― 묵시적이든 명시적이든 ― 협약으로부터 획득하였으
며 따라서 자녀의 동의 하에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부터는 가정
은 더 이상 자연적 사회로서 간주될 수 없으며, 자발적인 자유 연합이 되
어 협약에 근거하는 일반 정치사회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이상에서 소개한 루소의 논법은, 우리가 이미 누차 로크를 인용하여 시
사하였듯이, 로크 ꡔ시민통치론ꡕ의 부권에 관한 비평에서 착상을 얻은 것
이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법이 의미심장한 것은 루소의 독특
한 방법론이 여기서도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자연 상태
에 관한 연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루소는 이전의 이론들을 자
신의 숙고[반성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근본적으로 서로 대립
된 두 종류의 구상을 앞에 놓게 된다. 그런데 이 대립된 구상 중 하나를
택하는 대신에 루소가 제시하는 것은 이 양자의 비평에서 결과하는 제 3
의 길이다. 절대군주제 옹호자의 테제와 자연법 학파의 테제는 서로 대립
되면서도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양자 모두 하나의 동일한 기초가
정치권과 동시에 부권의 적합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인정한 점이다. 바
9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로 이 공통점에서 양자 모두 틀렸던 것이다. 국가와 가정은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사회로서 하나의 동일 범주로 환원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전자는 그 근거를 협약에 두고 있고 후자는 그 근거를 자연에 갖고 있다.
보스웨의 주장처럼 가정이 일종의 자연적 사회라는 것이 진실이라면, 이
자연적 사회는 계약의 개입 없이는 정치사회로 전환될 수도 없고 왕정으
로 변형될 수도 없다. 이 점에서 푸휀도르프와 쥬리에는 옳고 보스웨는
틀렸다. 전자들의 잘못은 자녀가 미성년일 동안에도 부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선 계약이 필요하다고 추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신을 보존
하고 통치하기에는 지성과 육체가 허약한 상태에 있는 한, 그를 부친의
보호와 따라서 부친의 권위 밑에 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의 보호 없이도 생활할 수 있게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
해 나가는 것 역시 자연의 섭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 기간을
넘어서 자녀가 계속해서 부모와 합쳐있고 부모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으
면, 이는 더 이상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고 자유의지의 결과이다. 바로 이
러할 때만이 쥬리외와 푸휀도르프가 말하고 있는 상호간의 약속 내지 묵
시적 협약이 개입하는 것이다. 사실 이들이 말했어야만 했던 것은 부권은
자연에 의해 규정된 한계를 넘어선 오로지 협약에 의해서만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부권은 자녀가 생명보존을 위해 아버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한 자연에 근거하고, 이 기간을 넘어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이들의
동의와 협약이 있어야만 존속한다. 따라서 부권은 성질을 바꾸어야만 정
치권으로 변형될 수 있으며, 이런 한에선 일반 원칙에 대한 예외는 아니
다.

3. 사회계약

모든 계약은 그 내용을 채우는 조항이 어떤 것이든 무엇보다도 먼저 상


호간의 약속으로서 쌍방의 의무를 내포한다. 사회계약 역시 이 원칙에 대
한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실제로 이 점에 관해선 모든 학자가 찬성이다.
그러나 이 상호간의 약속을 하여 상대방에 대해 의무를 지는 주체가, 즉
계약 당사자가 누구인가를 명확히 규정하는 문제에 대해선 학자들 사이에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93

의견은 각양각색이다.
우선 홉스의 구상을 따라 우리는 정치사회는 그것의 구성원이 되기로
동의한 자들 간의 상호 협약에 의해 성립됨을 인정할 수 있다. 이 경우
각인은 다른 모든 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한다는 조건하에 한 사람 또는
한 집단의 권위에 자신을 예속시킬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주권자는 ― 그
것이 하나의 인간이든 하나의 회중이든 관계없이 ― 시민들이 그들 간에
체결한 협약에 의하여 그의 권력을 수령하게 된다. 그러나 주권자는 그의
신민에 대해 어떠한 약속에 의해서도 구속받는 일이 없는 것은 그 자신이
신민들과 협약을 체결한 것도 아니고 따라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약속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만치 주권자는 국가 구성원 전부에 대해 절대
적 권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홉스가 구상한 바의 협약은 본질적으로
(수평적)결합 협약이며 목적은 모두가 하나의 몸(body,corps)또는 단일
한 인격(une seule personne)으로 합일(合一)하는 것이다. 그리고 협약
에 포함된 예속 조항은 이 합일을 실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홉스와 달리 사회협약을 구상한 학자들은 임의의 국가에서 주권
을 부여받은 자는 그 주권을 그가 신민과 체결한 협약으로부터 받은 것이
고 이 협약은 양쪽 모두에게 상대방에 대한 의무를 부과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협약은 주권자[군주]의 신민에 대한 관계를 규정하는데 전자에게
공동체를 통치하는 권리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그의 권력을 오로지 백성의
복지와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만 행사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한다. 이 형
태의 계약설은 통치자와 피치자의 관계 규정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그 목
적은 상호간의 약속을 토대로 각각의 권리와 상호 의무를 확립하는 것이
다. 여기서 문제는 더 이상 (수평적)결합 협약이 아니고 종속 협약 또는
루소의 고유한 용어법에 의하면 “통치 계약”이다.
루소가 활동하던 시대에 종속협약 이론이 전통적이며 대중적인 사상으
로 통하고 있었던 것은 적어도 2세기 동안 이 이론은 정치와 종교 투쟁에
서 온갖 당파의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하나의 ‘학설’이었으며, 그러니만큼 보강처럼 이것이 철학적 사변의 영
역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주장이다. 실
제로 이 학설이 누린 명성과 위세는 자연법 학파의 법률가들이 누린 권위
94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에서 온 것이다. 17세기에는 그로티우스와 푸휀도르프, 18세기에는 토마


지우스와 볼프의 덕분으로 이 학설은 논쟁의 영역을 넘어 대학의 공법 교
육에 확고히 뿌리를 박았다.

1) 이중 계약설: 푸휀도르프
홉스의 (수평적)협약에 반대해서 종속 협약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데 커
다란 공헌을 한 학자가 푸휀도르프이다. 물론 푸휀도르프는 종속 협약이
제반 정치사회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
세기 이상 동안 대학 공법(droit public)교육의 권위로서 군림하던 그의
학설은 국가의 정초로서 두개의 계약과 하나의 법령을 제시한다. 푸휀도
르프에 의하면, 대저 정치사회가 성립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
의 협약이 선행해야 하고, 이 협약에 의해서 국가에 속하기를 원하는 자
는 모두 차후로는 단 하나의 몸[정치체]를 형성하고 그들의 생명보존과
안전에 관한 모든 문제는 합의에 의해 해결한다는 상호간의 약속을 한다
는 것이다. 이때 어느 누구도 이 합일을 위한 협약에 서명토록 강제당하
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동의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나 이렇게 성립되
는 정치사회의 외부에 남아서 자신의 자연적 자유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착상은 루소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전원일치를 요구하는 법이 딱 하나있다. 사회협약이 바로 그것이다.


시민적 합일이란 지상에서 가장 자발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
구나 타고나기를 자유인이고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어떤 구
실로서도 사람을 그의 동의 없이 종속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러
므로 사회계약 체결 시 반대자가 있다고 해서 이 반대의 존재가 사회계약
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단지 반대자들을 계약에 포함시키는 것을 저
지할 뿐이다. 이 반대자들은 이를테면 시민들 사이에 있는 외국인들이다.
국가가 설립되어 있을 때, 동의는 거주에 있다. 즉 국가의 영토에 거주한
다는 사실은 주권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ꡔ사회계약론ꡕ 제4편 2
장, PLE, 440)

그러나 전원일치가 요구되는 푸휀도르프의 첫 번째 협약에서 생겨나는


사회는 아직 국가의 스케치[초벌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일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95

차 협약에 하나의 법령(décret)과 또 하나의 협약이 뒤따라 국가 설계도


를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말이다; 이 법령에 의해 다수결로 정부의
형태를 결정하고, 두 번째 협약에 의해 한 사람이나 여러 사람을 선택하
여 통치권을 부여한 후에 주권을 부여받은 쪽은 공공의 선[행복]을 지키
고 돌볼 것을 약속하고 다른 한쪽은 이들에게 충성과 복종을 약속하는 것
이다. 이상의 절차에서 바로 다수 의지의 합일과 복종이 산출되어 국가
형태를 완성하고 국가를 한 사람[인격]으로 간주해도 좋은 하나의 몸[통
일체]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푸휀도르프는 국가 형성을 두개의 협약과
이 둘 사이에 개입하는 ― 정부의 형태에 관한 ― 하나의 법령으로 설명하
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두 협약을 명료히 구별할 필요가 있
다. 첫 번째 협약은 각인이 모두에 대해서 또 모두가 각인에 대해 약속하
는 일종의 (수평적)결합 협약인 것이 시민들을 결합시키면서 그들에게 상
호 의무를 과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협약이 일종의 종속 협약인 것은 그
것에 의해 시민들은 그들이 선택한 수장들의 권위에 자신들을 종속시킬
것과 이들에게 몇몇 조건하에서 충성과 복종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푸휀도르프에서의 계약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결합 협약이
그의 학설에선 단지 부차적 역할 밖에 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이 협약에 근거해서 그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후에 로크가 하
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해체가 반드시 정치사회의 해체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시민들의 단일 통일체로의 결합이 홉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유일 수장에 대한 복종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 한한다. “ 어떤 자유 인민이 왕을 선택했을 때, (왕의)자연사로 인
해 그 인민이 멸종하는 일은 없다. 일단 왕의 대관식이 행해지고 나면,
주권은 더 이상 모든 인민으로 구성된 총회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민이 그렇다고 해서 서로 간에 아무런 유대가 없는 군중이 되는
것은 아니고, 최초에 정치사회를 형성한 협약과 하나의 동일한 수장에 대
한 종속(약속)에 의해 결합된 단일 통일체로서 존속한다.36) 그런데 이상
의 서술에서 드러나듯이 만일 결합 협약에 의해 시민 전체가 단일 통일체

36) 푸휀도르프, 같은 책, 제7편 2장 12절(Ⅱ, 294).


96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또는 단일 인민을 형성하고, 종속 협약에 의해 이 자격[성질]을 유지한다


면, 푸휀도르프의 이론은 필연적으로 이원론에 귀착하고 만다. 그것도 그
럴 것이 국가의 인격이 결국 인민과 주권자[군주] 사이에 분할되어 있으
니까 말이다. 물론 푸휀도르프는 국가 안에 주권자가 둘 있을 수 없다고
누차 확언하고는 있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출발 원칙들로부터 이탈함으로
써만 왕 일인(一人)안에 국가의 단일성(unité)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
다.
푸휀도르프 정치학설의 비일관성은 그의 주저 ꡔ자연법과 국제법ꡕ 제7편
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데, 여기서 그는 종속 협약의 필연성을 강
변하고 있다. 여기서 푸휀도르프의 주관심사는 홉스에 대항해서, 주권자
[군주]와 그의 신민이 상호간의 약속에 의해 결합되어 있는 것은 이 상호
성이 없으면 합법적인 권위의 문제나 진정한 의무의 문제는 제기조차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있다. 이제 저자 자신의 말을 인
용하여 그 뜻을 살펴보자. “홉스는 일찍이 제반 시민은 증여의 형식으로
그들의 권리를 왕에게 이전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 자신의 원칙들과 일
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증여에서 증여자만 타방에 그의 권리를 넘
기기 때문이다. 그러기는커녕, 왕에게 주권을 부여할 시 권리의 상호적
이양이나 쌍무 약속이 행해지는 것이 진실이다. 시민은 왕에게 복종할 것
을 약속하고 이와 동시에 왕은 국가를 돌볼 것을 약속한다. 만일 이런 약
속이 없다면 쌍방 중 어느 쪽도 상대방에 대한 의무는 없다. […] 따라서
왕의 합법적인 권능과 신민의 의무는 정확히 서로 화답하는 것이기에 왕
이 합법적으로 명령할 수 없는 것은 신민이 합법적으로 복종하기를 거부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왕은 정치사회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어
떠한 것도 합법적으로 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만일 왕이 악의적으
로나 부지불식간에 이 목적에 반하는 것을 명령하면, 그는 이를 권리 없
이 하는 것이다.”37) 이상과 같이 푸휀도르프가 구상한 바의 종속 협약은
주권자[군주]에게 그의 권력을 오직 국가의 이익과 공공의 행복을 위해서
만 행사해야 하는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이를 원칙으로 세웠다 해서

37) 푸휀도르프, 같은 책, 제7편 2장 11절(Ⅱ, 292).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97

정치권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이, 정확히 말해서 취한 조처가


공공의 행복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심판하는 권한이 누구에
게 속하는가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만일 군주 혼자가 이를 심판한다고
인정하게 되면, 이는 군주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신민은 종속 협약 이후에도 주권자가 그의 권력을 공공 목적
에 맞추어 행사하는지 아닌지 심판할 권리를 유지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주권자[군주]는 이름만 주권자이게 된다. 그런데 푸휀도르프는 이 두 해
결책 중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다음에 인용하는 문장
에선 푸휀도르프는 두 번째 해결책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시민들이 그들의 의지와 힘을 군주의 의지에 종속시키지만 그렇
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는 둥치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군주의 수
중에 권력을 넘긴 것은 그가 제반 정치사회의 목적인 공공의 행복을 위해
서만이 그의 권력을 행사한다는 조건 하에서다. 그가 그의 의무를 다했는
지 아닌지를 심판하는 것은 바로 그들 시민들이며, 그가 이 조건을 충족
시키지 못한 경우 시민들은 그들이 주었던 권력을 도로 빼앗는다.”38)
인용한 원문의 마지막 구절은 그 표현의 단호함과 과격성으로 루소의 ꡔ
제네바 초고ꡕ의 한 대목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여기서 추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인민 쪽에서 있었다고 추


정되는 자발적인 종속 약속은 언제나 조건부라는 사실이다. 인민이 자신
을 주는 행위는 군주(PRINCE)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다. 개개인이 유보 없이 복종하기로 약속하는 경우, 이는 오로지
전부의 선[행복]을 위해서다. 이와 같은 경우 군주 역시 인민이 하는 약
속과 같은 종류의 약속을 한다. 따라서 군주가 자신의 선서를 파기하는 순
간 신민 역시 그들이 약속한 의무로부터 벗어난다. 어떤 인민이 매우 어리
석어서 그의 복종의 대가로 그를 지배하는 권리 이외에 어떠한 계약조건도
요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 권리는 여전히 조건부의 권리가 아닐 수 없
다. […] 그러므로 항상 제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또 군주의 의지가 정말
로 일반의지인지 언제나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문제에 관해 유일한
심판자는 인민이다.”(ꡔ제네바 초고ꡕ 제2편 2장, VPW, p479/480)

38) 푸휀도르프, 같은 책, 제7편 6장 13절(Ⅱ, 377).


98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루소의 이 사상에 동의하는 것은 인민은 그가 적절하다고 판단할 때는


하시라도 군주를 폐위시킬 수 있고 왕을 인민의 의지를 집행하는 인민의
일개 수임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과 매일반이다. 다시 말
하면 이런 구상은 필연적으로 인민주권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푸휀도르프는 이번에는 제한 군주제에 있어서조차 왕은 주권의
유일한 수탁자며 국가 의지의 유일한 대표자라고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군주권의 이러한 제한이 군주권에 결함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이런 상황에서 군주권을 부여받은 왕은 절대 군주제에서와 조금도
다름없이 주권에 속하는 모든 권한을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자 사
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에선 군주 단독으로 자신의 판단을 공포하는 반
면, 전자에선 의회가 있어 이 의회가 어떤 국사는 왕과 공동으로 심의하
고 또 의회의 동의가 왕이 이 공동 심의한 국사에 대해 합법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필요조건인 것이다. 하기야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심의 결과로서 신민에게 지시된 법규도 오로지 왕 단독으로부터 그 힘과
권위를 끌어내는 것이지 의회로부터 끌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리고 또 통치권이 제한되어 있는 국가라고 해서 별개의 두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의지는 오직 왕의 의지에 의해서만 작용하
기 때문이다. 다만 약정된 조건이 채워지지 않게 되었을 때 왕은 의지 행
사를 할 수 없거나 혹은 공허한 의지 행사를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왕은 여전히 주권자[군주]이고, 의회는 왕이 그것의 동의를 필요로 하
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군주가 모든 것
을 자기 기분대로만 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가 주권자가 아니라는 결론
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만사
에 있어서 복종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해서 우리가 그보다 높다든가 또는
그와 대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39)
그러면 푸휀도르프는 이러한 제 조건하에서 과연 어떻게 군주가 자신의
의무들을 제대로 완수하고 국가의 이익에 따라 통치하고 있는가를 심판할
권리를 신민에게 부여할 것인가의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39) 푸휀도르프, 같은 책, 제7편 6장 10절(Ⅱ, 371).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99

대목에서 푸휀도르프 학설의 비일관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사실 푸휀도르


프는, 우리가 이미 앞에서 인용하여 보였듯이, 군주의 권력 남용은 신민을
복종의 의무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을 인정해 놓고 나서는, 결국에는 신민
에게 군주를 퇴위시키는 권리만이 아니고 군주에게 저항하는 권리마저 부
정한다. 게다가 저항권을 부인하기 위해 푸휀도르프가 내세우는 논거는 그
의 이중 계약설 자체를 와해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루소의 자연법 학파
에 대한 반박이 첨예화되는 대목도 바로 여기이다. 먼저 푸훼도르프가 어
떻게 자가당착에 빠지는가를 살펴보자: “군주가 그의 신민 중 누구에게
불의를 저질렀다 해도 이것이 여타 신민들을 그에 대한 의무로부터 해방시
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협약체결 시) 개개 시민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
을 위해 군주의 보호와 배려를 약정하였을 뿐이고, 군주가 시민 일반과 동
시에 시민 하나하나를 보편적 정의와 공정에 부합하는 동일한 방식으로 취
급한다는 조건하에 군주의 지배에 자신을 종속시키기로 약속한 것은 아니
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주가 우리 시민들에 대해 차별적인 방식으로 그의
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우려 또한 우리를 복종의 의무로부터 해방시키
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군주로 하여금 그의 신민들 중 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과는 차별적으로 불리한 조처를 취하게 하는 특별한 이유가 항
상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신민의 군주에 대한 의무가 존속하는 한,
신민은 어떠한 구실 하에서도 군주에게 무력으로 저항할 수 없다.”40)
그러면 조만간 인민주권을 유일한 국가 구성원리로서 주창하고 군주를
주권자의 위치로부터 일반의지의 단순한 ‘집행자’로 격하시킬 루소가
형식적으론 인민에게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처럼 하면서 실질적으론
거부하는 자연법 학파의 이 이중계약설을 어떻게 공격하는지 살펴보자.

“팔을 하나 자르거나 사지 중 하나에 심각한 상처를 주면서 그 고통이


머리에까지 전달되지 않는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런즉슨 일반의지가
국가의 한 구성원[수족 중 하나] 이 다른 구성원을 죽이든가 해치는 것에
동의하리라고 믿을 수 없는 이유는 머리[이성]을 사용하는 인간의 손가락

40) 푸휀도르프, 같은 책, 제7편 8장 5절(Ⅱ, 405).


100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이 그의 눈을 후벼 파내리라고 믿을 수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이다. 개개인


의 안전은 공적 결합체의 존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만큼, 단 한 명의 시
민이라도 구출하려면 구출할 수도 있었는데 국가 안에서 죽은 경우, 단 한
명의 시민이라도 부당하게 감옥에 구금된 경우, 한 시민이 명백한 불의로
인해 송사에 패했을 경우 등에는 이 공적 결합체를 탄생시킨 협약은 당연
히 해제된다. […] 실제로 한 몸(Corps)으로서 국민-국가의 의무가 그 구
성원의 마지막 자의 보존을 위해 여타 구성원 모두의 보존을 위한 만큼이
나 배려를 하는 것 말고 무엇이겠는가? 또 한 시민의 복지는 국가 전체의
복지처럼 공동 관심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흔히 사람들은 단 한 명이
모두를 위해서 죽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하기야 만일 내가 이 격
언을 조국을 구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덕과 위엄을
갖춘 애국자의 입에서 직접 듣는다면 나로서는 찬탄을 금할 수 없을 것이
다. 그러나 통치자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한 명의 천진한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 나로선 이 준칙이야말로 폭군이 이제까지 꾸며
낸 가장 추악한 준칙 중 하나이고,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거짓되고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인간 사회의 기본법에 가장 직접적으
로 배치되는 준칙이라고 간주한다.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 죽어야 되기는
커녕, 모두가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걸어 구성원 하나하나를 보호하기로
약속한 것은 개별적인 약함은 항상 공공의 힘에 의해 보호받고 각 구성원
은 국가 전체에 의해 보호받는 것을 실현하기 위함이다.”(ꡔ정치경제학ꡕ
VPW, I, 252/253)

이상의 루소와 푸휀도르프의 대비에서 드러나듯이 종속 협약은 사실 인


민과 그 수장들 사이의 계약이 아니고 신민 개개인과 왕 사이의 계약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민이 단일 집단으로서 왕과 협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각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왕과 개별 협약을 체결한다면, 결합 협
약이 과연 무슨 쓸모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군주의 권세
앞에서 개인적 저항이란 실패하기 마련이며, 인민에게 그 구성원 중 하나
가 당한 불의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들고 일어날 권리를 부정한다는 것은
사실 군주에게 절대 권력을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푸휀도르프는 그의 자유주의적 어투나 제한 군주제에 대한 변
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대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는 자가당착적 절대주
의자였던 것이 그의 제 결론은 그의 학설의 출발 원리들과 일치하지 않았
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는 상호성이며 쌍무적 의무를 말해 놓고서는, 결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01

국은 왕의 명령이 명백히 부당하고 자신이 이미 한 약속과 모순되는 경우


에라도 신민에게는 저항할 수 있는 권리는 부정하면서 왕에게는 신민에게
복종을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야 만다. 따라서 우리는 푸휀도르
프에게선 종속 협약에 대해 두 가지 구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협
약을 상호 의무의 원천으로서 제시한 그가 종국에는 모든 논리를 무시하
고 이 협약을 인민으로부터 그의 모든 권리를 실제로 박탈하는 무조건의
양도, 절대적 종속 협약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푸휀도르프는
홉스에 반대해서 군주의 권력이 반드시 절대 권력은 아님을 증명하기 위
해 수많은 논거를 들이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 권력이 합법적임
을 주장하는 데도 하등의 지장을 느끼지 않았다.

2) 사회계약설: 홉스
사실, 종속 협약은 국가 안에 두 권력을 제정하고 또 이 때문에 주권의
분할 내지 제한에 이르는 필연적인 경향이 있었다. 이런 결과 정부는 상
호간의 약속이나 쌍무적 의무를 토대로 수립된다는 점이 수용된다 해도,
누가 과연 이 계약의 이행에 대한 심판관이 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왕은 자신은 약속을 지켰다고 주장하는데 그
의 신민들은 이에 대해 항변하는 경우, 과연 누가 이 분쟁을 심판할 것인
가? 이런 종류의 갈등을 판정하는 공동의 심판 또는 상위자가 없는 사회
는 매 순간 해체될 위험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배자와 피지배
자 사이에서 심판 역할을 하도록 의회를 제도로서 설립하게 되면, 이 의
회가 최종 심급으로서 심판하게 되고 따라서 최고 권력을 보유하게 된다.
실제의 주권자는 의회가 되고 통치자는 이 의회의 의지를 집행하는 책임
을 맡은 대리인이 된다. 이렇게 되면 통치[종속] 계약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각자가 자기를 위한 심판관이게 되면,
정치사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는 자연상태로 돌아가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홉스는 바로 이 위기 상황을 그의 학설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신민 중 하나나 여럿이 나와 군주가 그의 선출 시 맺은 협약을 어겼


10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다고 주장하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또 이에 맞서서 군주는 군주대로,


그의 신민 중 하나나 여럿의 지지를 받거나 단독으로, 협약을 어긴 일이
없다고 주장하면, 아무도 이 분쟁을 해결할 심판이 될 수 없다. 즉 전쟁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말이다. 또 각자는 자신의 힘으로 자
신을 보호하는 권리를 되찾게 되는데, 이는 결국 정치사회 설립 목적을 부
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협약을 매개로 하여 주권을 부여하는
행위는 헛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사람들이 군주는 협약을 통하여,
즉 조건부로 그의 권력을 얻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제반 협
약은 그 자체로선 빈말이요 허풍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강요하고 강제하
고 억제하고 보호하는 데 필요한 힘은 결국 공권력[공공의 검]으로부터
차용할 수밖에 없는 이 자명한 진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협약이 실효
를 갖기 위해 그로부터 힘을 빌려오지 않으면 안 되는 공공의 검이란 다름
아닌 주권을 소지하고 있는 의회 내지 개인의 무제약적 위력이며, 이 주권
자의 의지는 군주나 의회의 단일 인격으로 통일된 시민 전원의 힘에 의해
집행된다.”(홉스, ꡔ레비아단ꡕ 제18장)

공공의 평화가 확보되고 정치사회가 매 순간 해체의 위험을 당하는 일


없이 생존하기 위해선 결국 주권자의 제반 행위는 모든 항변보다 상위에
있고 그 자체가 국가의 법으로서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주권자
가 신민에 대해서 약속이나 계약에 의해 구속되는 일이 없을 것을 전제한
다. 그러므로 홉스에 따르면 정치사회는 주권자와 신민간의 협약의 매개
없이 수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자연법 학파의 기본 원칙에 충실했던
홉스가 정치 권위는 협약에 근거하고 그것에 복종하는 자의 동의에 의해
서만이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정치사회를 정초하는 협약은 주권자와 그의 신민간의 협약은 아니었고 개
개인이 그들 사이에 맺는 일련의[연속적] 상호 협약 ― mutual covenant
one with another ― 이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끝내기를 원할 수밖에 없게 되자, 사람들은
개별적인 상호간의 합의에 의해 그들이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자기통치
권을 포기하여 한 개인 (또는 의회)에게 양도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제3의 수혜자를 위해 자연권의 상호적 포기, 이것이 홉스의 사회계약의
특징이다. ꡔ레비아단ꡕ에서 홉스는 각별한 배려를 하여 이 계약의 특수성
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03

“이것은 단순한 합의나 협약 그 이상의 무엇이다. 개개인들이 서로 간


에 맺은 일련의 개별적 협약에서 생겨난 이 결합은 실제로 그들 모두를 한
인간[인격]으로 통일시킨다. 마치 개별적 협약 시 개개인이 그 상대방에
게 : 나는 네가 너의 자기통치권을 이 사람 또는 이 의회에 이양한다는 조
건하에서, 나도 나의 자기통치권을 이 사람 또는 이 의회에 양도한다고 말
한 것처럼.”(ꡔ레비아단ꡕ 제17장)

이 협약은 그 정치사회가 포함하게 될 구성원의 수만큼 반복됨으로 종


국에는 시민 전원이 모두 그들의 자연권 일체를 동일한 사람(또는 동일한
의회)에게 양도하게 된다. 그들의 권리 일체의 이러한 포기와 양도의 결
과 시민들은 그들의 협약의 당사자는 아니면서 수혜자인 군주(나 의회)에
대해 의무를 지게 되는 반면, 이 수혜자는 주권의 소지자가 된다.
따라서 주권자와 협약을 체결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그들
사이에 개별적으로 맺은 협약의 결과로서 주권자에게 주권자가 원하는 한
복종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사실 협약은 시민들에게 이중 의무를 부
과하고 있다. 시민들은 서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주권의 소유자에 대해
서도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상호적 의무인 반면, 후자
는 일방적인 의무이다. 이런 방식으로 결국 주권자는 그 자신이 신민과
협약을 체결하지도 않고 따라서 어떠한 상호적 의무도 맺은 일 없이 수립
되었다. 주권자는 이렇게 시민에 대해 어떠한 약속도 한 바가 없기에 그
들에 대해 지켜야 할 약속도 없고 위반할 계약도 없다. 그는 주권을 ― 조
건 없이 ― ‘증여’받았다. 그는 전시민의 의지 행위 결과로 그들의 생
명과 모든 재산에 대해 무제한의 권리를 소지한다. 한마디로 주권자의 권
력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무조건적으로 그들의 천부의 권리를 포기하여 이를 한
개인이나 의회에 증여하기로 동의하고 유일한 절대 권력에 자신들을 종속
시킬 목적으로 자신들의 자연적 독립을 단념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이라도
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홉스에게서 사회계약의 조항들은 전면전의 위험을
공공의 평화로 대체할 능력이 있는 결합체를 수립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
에 의해 결정되었다. 개개인들의 개별적인 힘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길은
이 힘들을 한 사람[인격]의 수중에 통합시키는 길 이외에는 없었다. 즉
104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홉스 자신의 표현대로, “결합체에선 모두의 권리는 단 한 사람에게 이양


되었다.” 다수의 인간이 결합하기 위해선 그들 중 하나하나가 자신의 의
지를 한 인간 또는 단일적 의회의 의지에 종속시킨 결과 모두에게 오직
하나의 의지만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단일 의지의 통솔에
종속됨으로써 시민들의 개별적인 힘들은 통합되어, 과거처럼 끊임없는 쟁
투로 소진되는 대신에, 이제부터는 공동체의 평화와 방위에 종사하게 된
다.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의 의지에 종속시키는 자는 자신이 자신의


힘과 능력에 대해 갖고 있던 권리를 이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자도 그와 마찬가지로 행하는 만큼, 이 모든 권리들을 증여받은 자는
가공할 힘을 소유하게 되어 모든 자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수많
은 개인의 개별적 의지들로부터 단일성과 화합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다.”41)

그러므로 본래 서로 경쟁자요 적이었던 인간들에게 결합이 실현되기 위


해선 반드시 단 하나의 주권자를 세워 이 주권자는 모두의 힘을 자신의
의지대로 통솔하는 권리와 시민 전원의 통합된 힘에 상당하는 권세를 갖
지 않으면 안 된다. 오로지 이 조건 하에서만이 갈라져 있던 다수의 인간
이 결합하여 정치사회로서 성립되어 단 하나의 인격[사람]이 될 수 있다.
홉스 자신의 말을 들어 보자.

“우리에게 국가(CIVITAS)란 단일적 인격(인간)을 의미한다. 그런즉슨


이 단일적 인격의 의지는 수많은 인간의 협약에서 생겨난 만큼 이 모든 인
간의 고유한 의지로서 간주되어야 하고 따라서 이 모든 개별자들의 재원과
힘을 공동체의 방위와 평화 유지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42)

고로 홉스에 따르면 결합은 종속의 수단을 통하여 실현된다. 전원의 한


인간 또는 단일적 의회에 대한 자발적인 종속, 각자의 자신과 함께 자신
의 모든 권리의 양도, 유일한 절대적 권력의 수립 등이 시민들이 정치사

41) 홉스, De Cive, 제5장 8절(인용은 데라떼의 같은 책, p.221).


42) 홉스, 같은 책, 제5장 9절(인용은 데라떼의 같은 책, p.222).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05

회를 성립시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대신에 항구적인 평화의 혜택을


확보하기 위해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조건들이다.

“만일 인간 무리가 그들 각자가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권능에 의해


스스로를 통치할 줄 알았다면, 다시 말하면 그들이 자연법에 따라 아울러
살 줄 알았다면, 그들은 정치사회를 형성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공동의
권위에 종속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43)

3) 사회계약설: 루소
이상에서 살펴본 듯이 홉스와 푸휀도르프는 서로 대립되는 학설을 제시
하고 있는데, 그러면 루소의 이론은 이 두 학설에 대해 어떠한 자리매김
이 가능할 것인가?
우선, 루소는 이중 계약설을 부인하고 있다. ꡔ사회계약론ꡕ 제3편 16장
의 제목 ‘정부[통치부]의 수립은 결코 계약이 아니다’ 자체가 이미 그
의 기본자세를 시사하고 있다. 단 한번의 협약이 정치사회를 탄생시킨다.
즉 ꡔ사회계약론ꡕ의 같은 장에서 천명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라는 범주
에선 단 하나의 계약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동등한 자들 간의) 결합 계
약인 바, 그 이외의 다른 모든 종류는 이 범주에서 배제된다.” 따라서
루소에게선 종속 협약이나 통치 계약 따위는 없고 다만 결합 협약이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선 루소는 홉스에 찬성이다. 그러나 이 유일한 협약의 성
질에 대해선 루소의 생각은 홉스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홉스에게선, 우리가 앞 절에서 이미 밝힌 바대로, 다수의 인간이 일단
결합해서 국가를 형성하기로 결정하고 나면, 각인은 나머지 모든 인간들과
개별적으로 협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결합은 모든 개개인이 모든 개개인을
상대로 한 협약에 의해(by covenant of every man with every man), 그러
므로 일련의 연속적인 상호 협약에 의해 성립된다.
그러나 루소의 경우 개인들이 서로서로 자기들 사이에 협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닌 것이, 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7장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결합 행위는 공적 존재[공중, le public]이 개개인들을 상대로 맺는

43) 홉스, 같은 책, 제6장 13절(인용은 데라떼의 같은 책, p.222).


106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상호 계약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개개인들은 그들이 그


구성원이 될 단체와 상호 계약을 맺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성립 중에 있
는 이 인민 단체(corps,몸)가 계약 당사자의 일방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이 단체가 이미 성립되어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에는 하나의 정신적 인격체(une personne morale)로서 생각
되는 인민 단체, 즉 주권자와 다른 한편에는 다수의 개개인, 즉 신민들이
계약 당사자가 되어 쌍무계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권자로서 인
민이 사회계약 당사자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정된
것, 즉 방법적 허구인데, 이 점에서 홉스는 루소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민주정은 다수의 개개인과 인민, 이 쌍방간에 체결된 협약에 의해 창


설되는 것이 아니고 개개인들이 그들 사이에 개별적으로 맺는 다수의 상호
협약에 의해 수립된다. 협약을 체결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갖춘 인격체
가 사전에 존재하지 않으면 실제로 어떠한 협약도 체결될 수 없는 것은 분
명하다. 그러나 정치사회 수립 이전에는 인민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
던 것은 인민이라는 것은 그 당시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고
개개인들의 집산인 군중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민과 시민들, 이
양자 간에는 어떠한 협약도 맺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44)

그러나 루소가 홉스의 이런 통찰을 간과했던 것은 아닌 듯싶다. 사실


루소 자신도 주권자인 단일적 공중과 다수의 개개인, 이 양자의 상호계약
이 약속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공동 권위가 없으면 영속적인 분쟁과 더
나아가서 정치통일체의 해체까지도 야기할 수 있는 위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문제는 어떻게 계약 이행을 보장하여 계약
이 ‘공허한 형식’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있다. 루소는 실제로
이 문제를 ꡔ에밀ꡕ에서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제기하고 있다.

“계약 당사자 쌍방, 곧 개개인과 단일적 공중은 그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을 심판할 공동 권위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일방이 제 마음
대로 자기의 유불리에 따라 계약을 파기 또는 포기할 수 있는가를 조사해
보아야 할 것이다.”(ꡔ에밀ꡕ, VPW, Ⅱ, 151)

44) 홉스, De Cive, 제7장 7절(인용은 데라떼의 같은 책, p.224).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07

하기는 이러한 일방의 임의적 파기 조항이 실려 있는 협약이 있다면,


그런 협약은 지속적인 정치사회를 탄생시킬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체결되
자마자 파기될 것이 뻔하다. 사실 결합체의 명운을 구성원 각자의 심판에
종속시킨다는 것은 결합체를 약간의 항의만 있어도 해체될 수 있는 위협
아래에 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개개인들에게 그들이 계약상의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믿는 순간 그들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권리를 허
용한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만치 루소로서도 국가를 매
순간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하는 이런 가공할 권리를 개개인에게 허용한
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결국 주권자만을 계약이행 여부의
유일한 심판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국가는 오직 이
런 조건하에서만이 생존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앞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홉스는 이 문제를 주권자와 그 신민 양자간의
계약을 일련의 개개인들이 그들 간에 맺는 일련의 상호 협약으로 대체함
으로써 비교적 쉽사리 해결하였다. 협약 당사자가 아닌 주권자는 다수의
개개인이 그를 위해 그들의 모든 권리를 포기할 것을 상호 협약한 결과
그의 권력을 증여받았기 때문에 이 모든 권리의 상속자이면서 동시에 그
가 어떠한 약속도 계약도 맺은 일이 없는 모든 시민의 심판이며 군주인
것이다.
루소에게서의 문제는 따라서 홉스와는 다른 길을 통해 홉스와 같은 결
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루소의 출발 원리 자체가 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지난하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루소는 단일적 공중과 다
수의 개개인, 이 쌍방간의 상호 계약 이념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과제를
별나게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 나머지 과제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선 정묘
한 변증법의 모든 방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올바른 재판에선
어느 누구도 심판이면서 동시에 소송 당사자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루소는 과연 어떻게 주권자를 계약 당자사로 간주해 놓고서는
다시 이를 계약이행 여부의 유일한 심판관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말인가?
이 난제에 대한 해답은 다른 모든 종류의 계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
회계약의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루소의 절묘한 변증법적 착상의 첫
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08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이와 유사한 제반 문제에 확고한 결말을 짓기 위해선 우리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사회계약은 인민이 자기 자신과 계약을 체결한다는 점에서
그 유가 없는 특수한 성질의 계약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즉 주
권자로서의 인민 단체가 신민으로서의 개개인들과 협약을 체결하는 것이
다. 이것은 정치 기구의 모든 지능과 작동을 만들어 내는 조건이고 동시에
제 협약을 정당하고 사리에 맞게 하는 유일한 조건이기에 이것이 누락되면
제 협약은 부조리하고 전제적이며 또 온갖 남용의 소지를 갖게 될 것이
다.”(ꡔ제네바 초고ꡕ 제1편 3장, VPW, I, 457)

요컨대 루소가 구상한 사회계약의 예외적인 성격은 단일 인격으로서의


집단이 그 구성원 하나하나와 상호 계약을 체결한다는 데에 있다. 이런
계약 구조로 인하여 결국 계약 당사자 중 오직 한쪽만이, 즉 다수의 개개
인만이 그가 타방에 한 약속을 어길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하기야
단일 인격으로서 구상된 집단이 그의 구성원 전부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
할 수 없는 것은, 이는 집단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셈이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단일체인 국가가 그 구성원 중 임의의 하나를 해칠 수 없는 이유
는 구성원 전부를 해칠 수 없는 이유와 동일하다. 이런 역설에 가까운 루
소의 사회계약 구상은 사실 그의 일반의지와 법에 관한 이론과의 연관 속
에서 고찰될 때 그 논리적 일관성이 확인된다. 여기서는 일단 주권자의
의지는 일반의지로서 본래 평등[동등]을 지향하는 성질을 갖고 있고 이
의지의 행위인 제반 법은 시민 전원에게 무차별하게, 즉 누가 누구보다
혜택을 더 받거나 덜 받는 일 없이 적용된다는 점만을 강조하기로 하자.
이러한 보편적 적용의 성질 때문에 법은 시민 중 한 명을 해치면 반드시
시민 전원을 해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사태가 있을 수 없는 것은 국가란
다름 아닌 시민 전원으로 구성된 단일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계약에 따라 주권자는 오로지 공동의


일반적 의지에 의해서만이 움직일 수 있는 만큼, 주권자의 제반 행위는 오
로지 공동의 일반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그
러므로 시민 개인이 주권자에 의해 해를 당할 수 없는 것은 시민 전원이
해를 당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은 이는 주권자가 자기 자신을 해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ꡔ에밀ꡕ, VPW, Ⅱ, 151)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09

이상의 입론이 가능하기 위해선 주권자는 일개인이 아니고 다수의 신민


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하나의 정신적 단체이다, 라는 판단이 전제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국 그의 주권자에 대한 구상과 법 이론을 근거
로 하여 루소는 “사회계약은, 계약 위반은 개개인들 쪽에서밖에 올 수
없기 때문에, 결코 공권력 이외의 다른 어떠한 보증도 필요로 하지 않는
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권자는 그를 구성하는 다수의 개개인에 의해 형성된 단일체이니까


그들의 이해에 반하는 이해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가질 수도 없다. 따라서
주권자의 권력에 대한 신민의 보장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은 단일체가
자신의 전 구성원[기관]에 해를 가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구성원 중 하나를 개별적으로 해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
인 것을 우리는 곧 ― 제2편 4장에서 ― 입증할 것이다.”(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7장, PLE, 363)

실제로 사회계약의 훼손이 계약 당사자 중 주권자 쪽이 아니고 개개인


들 쪽에서 올 수밖에 없는 것은 이들은 시민이 되면서도 여전히 공공의
행복보다 그들의 사적 이익에 집착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
에 주권자는 그들이 시민의 의무를 다하고 일반의지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공동 상위
자가 없는 상태에서 시민들이 공동체에 대해 맺은 약속의 이행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공동체의 힘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계약이 공허한 형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이 계약은


누구라도 일반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전공동체에 의해 복종하도
록 강제당할 것이라는 조항을 묵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또 이 조항만이
다른 모든 약속 조항의 이행에 대한 유일한 보증이기도 하다. 여기서 강제
한다는 의미는 다름 아닌 대상을 강제로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ꡔ사
회계약론ꡕ 제1편 7장, PLE, 364)

그것은 공공의 힘을 어느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권력으로 만들고 개개인


들이 일반의지에 반기를 들 수 있는 동기 일체를 제거하기 위해 루소가 사
110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회계약의 유일한 명시적 조항으로서 요구한 것이 바로 “각 구성원은 자신


의 모든 천부의 권리와 함께 자신을 전공동체에 총체적으로 양도하기다.”

“왜냐하면 개개인들에게 이런 저런 권리가 남아있게 되면 그들과 공중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것이지만 이를 심판할 공동의 상위자가 없는 만큼,
각자는 자기의 이해가 걸려 있는 사안에 있어서 심판이고 조만간 만사에
있어서도 심판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즉 자연 상태는 여전히 존속할 것이
고 결합체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난무하거나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게 될 것
이다.”(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6장, PLE, 361)

이상의 진술들로부터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루소 역시 홉스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주권자는 여전히 계약 이행 여부의 유
일한 심판으로서 공동체의 구성원 전원에 대해 절대적 권력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홉스의 학설과 루소의 학설이 주권자의 역할과 권능에 관해 일
치를 보고 있다면 양자가 추구하는 이상 내지 목적은 상이하다. 한편, ꡔ
레비아단ꡕ의 저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라는 가설에서 출발하
기에, 그의 주관심사는 모든 시민들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고 협약은
본질적으로 시민적 평화(paix civile)를 목적으로 한다. 다른 한편, 루
소가 무엇보다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자유다. 그러므로 그의 주목적은
각인이 모두와 결합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만 복종하여 이
전과 같이 자유로운 상태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결합 형식을 발견하는 것
이다. 우리가 루소의 독창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문제
를 자유의 관점에서 제기하였다는 점이다. 사실 루소 이전의 모든 학자들
이 한결같이 제기한 질문은 어떠한 조건에서 정치 권위는 수립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고 또 이에 대한 해답도 한결같이 자연권으로서의 자
유의 양도였다. 이들에게서 시민 정부[통치]의 창설은 자유를 대가로 지
불할 것을 필요조건으로 하였기에, 이는 마치 각 개인이 자신의 자유의
일부를 희생하여 다른 모든 인간과 힘과 의지의 결합체를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좀더 잘 확보하려는 성향이 있는 것처럼 전제하는 것이었
다. 그러나 루소에게는 공동 안전이 종속관계를 초래해서는 안 되었기에,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11

그에게 문제는 정확히 말해서 어떻게 인간들이 그들의 양도불가의 권리인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 서로 결합하여 정치통일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인
가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명료한 관점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그 해답은 기
상천외한 그 무엇이 아닐 수 없다. 사회협약이 본질적이고 유일한 조항으
로 요구하는 것이 다름 아닌 “각 구성원은 자신의 모든 권리와 함께 자
신을 전공동체에 총체적으로 양도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러한 양도야
말로 국가에 그 구성원 전부에 대한 절대적 권력을 부여하는 것과 다름
아니었기에, 실제로 많은 루소 해설가들이 이를 빌미로 루소는 자신이 주
장했던 것과는 반대로 국가의 전권에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켜 결국은 ꡔ레
비아단ꡕ에 조금도 뒤질 것이 없는 전제주의를 확립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루소에게서 총체적
(total)양도는 개인의 자연권을 폐지하는 데 귀착되지 않고, 자연권을 시
민의 권리로 환원시키기 위한 인위적 장치로서 작용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각 구성원은 그의 천부의 자유를 시
민적 자유와 바꾸고, 만물에 대한 무한하지만 불확실한 권리를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과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니만치 개개인은 사
회계약 이후에도 여전히 자연상태에서같이 자유롭다고 루소가 강변할 수
있는 것은 개개인은 ‘사회적 삶’을 살면서도 더 이상 타인의 지배를 당
할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즉 개개인을 모든 종속관계로부터 보호하는 것
이 바로 사회계약의 목적인 것이다.
시민적 결합의 본질적 목적은 한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을 자신의 의지
에 종속시키려는 기도를 저지하는 것으로서 사회적 불평등의 작용을 제거
함으로써 모든 시민에게 그들이 자연 상태에서 누렸던 독립에 대등한 가
치를 확보하는 데 있다. 물론 자연 상태에서도 일정한 불평등은 존재하나
그것의 영향력은 거의 영[제로]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상태에
선 사람들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앞 장에서 누차
밝혔듯이 원시 상태에서 사는 인간은 자족적인 존재라는 것이 자연 상태
에 대한 루소 성찰의 핵심이다. 따라서 그의 동류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던 원시인이 일단 사회적 동물이 되자 그들이 그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11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그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회라고 하는 시스템의 모든 악과


모든 모순은 바로 이 상호 의존 관계에서 연유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선
각자가 부단히 타인을 희생시켜서까지 자신의 최대 이익을 추구하는데다
가 모두가 존중해야 할 규칙이 없는 까닭에, 결국 제반 인간관계를 지배
하는 것은 ‘자의’밖에 없게 된다. 이 무정부상태를 치유할 수 있는 유
일한 방책이 제반 인간관계가 개인들의 자의적 의지에 좌우되지 않는 정
치사회 형태를 발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이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해법은 직접적인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시민과 법의 관계로 대체하는 것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정의와 불의의 제 원칙을 찾아야 할 곳은 모두의 최대 행복을 대상으


로 하는 보편적인 기본법이지 사람 대 사람의 개별적 관계는 아니다.”(ꡔ
제네바 초고ꡕ 제2편 4장, PLE, I, 495)
“모든 입법체계의 목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전원의 최대 행복이 무엇
으로 성립되어 있는지의 문제를 우리가 규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전원의
최대 행복이 자유와 평등을 기본 대상으로 하는 입법체계로 성립됨을 발견
하게 된다. 자유가 입법의 기본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개인적[사적]
의존관계는 단일체인 국가의 힘을 그만큼 빼앗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평
등에 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자유는 평등 없이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
다.”(ꡔ사회계약론ꡕ 제2편 11장, PLE, 391)

자연 상태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했던 것은 사회적 관계의 부재, 곧


원시인의 고립된 삶이었다. 그러나 사회 상태에 들어와서는, 오로지 국가
의 힘, 주권자의 그 구성원 전원에 대한 절대적 권위, 개별의지의 일반의
지에로의 종속에서만 이 보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독립적인 상태에 남아 있기 위해 시민들은 반드시 주권자에 대한 의존 상
태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주권자는 그들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고 그들을 엄정한 평등 안에 존속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 안에선 보편적 자유의 조건인 평등은 주권자에게 구성원
전부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부여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다름 아닌 사회계약에 기재된 “각 구성원은 자신의 모든 권리
와 함께 자신을 전공동체에 총체적으로 양도한다”는 핵심 조항이다. 하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13

기야 개개인들에게 이런 저런 권리가 남아 있어서 주권자의 허가 없이 이


를 향유할 수 있게 되면 일반의지는 개별의지들에게 굴복하거나 이와 타
협하게 될 것이고 끝내는 자신의 법을 상위자로서 강제할 수 없게 될 것
이다. 이렇게 되면 개별의지들의 대립이 처음의 의도대로 제거되지 않고
계속해서 횡행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반 사회적 불평등에 의
해 야기된 이런 무질서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인간이 한
결같이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권위를 수립하고 자연적 평등을 법에 재
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에 의해 모든 시민을 사적[개인적] 종속으로부터 보호
한다는 것은 그들 모두를 주권자의 지배 하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조건하에서라면 결국 사회계약은 한 형태의 지배를 다른 형태의 지배로
대체하는 데에 불과하지 않은가? 다시 말하면, 온갖 개별적 종속에서 해
방된 시민이 이번에는 공동체에 의한 종속에 사로잡혀 신음해야 하는 것
이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종속 상태에 있다는 것은 아무도 자유
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벵자멩 꽁스땅이
나 에밀 화게 같은 자유주의 옹호자들이 거르지 않고 루소를 공격하고 있
다.
그런데 만일 루소가 사회계약의 목적을 누구나 동등한 종속을 제도화하
고 복종에서 평등을 재확립하는 데 한정했다면, 루소는 결국 홉스의 관점
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고 그에게서도 개개인의 자유는 모두의 안전을 위
해 지불해야 할 값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루소에게서 양도는 그것이 오로지 ‘공동체 전체’를 상대로 행하여지기
때문에 정당하고 합법적인 것이다.

“자신을 전부에게 양도하는 개개인은 자신을 어느 누구에게도 넘겨주


지 않는다.”(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6장, PLE, 361)
“개개 시민을 조국에 양도하면서 그를 제반 사적 종속으로부터 지켜주
는 조건이란 이러한 것이다.”(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7장, PLE, 364)

하지만 이상의 언표가 목표로 하는 것은 각자는 사회계약 이후에는 여


타 개인에 종속되지 않음을 보장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이상은 아닌
114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듯이 보인다. 그러면 과연 이것만이 루소가 뜻한 바였다면, 그가 “각자


는 계약 이전이나 마찬가지로 자유롭다”고 주장하면서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이 미묘한 대목에서 우리는 열렬한 자유주의자(liberal) 에밀
화게의 예리한 비평을 참조해보자: “한 마디로 말해서 루소는 자유가 무
엇인지 알지 못한다. […] 잘 알다시피, 그가 자유라는 말로 뜻하는 바,
그것은 누구엔가 어떤 개인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곧 개별적
종속 상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에 반해 전체에의 종속은 그
것이 아무리 밀접하고 고통스러운 종속일지라도 결코 자유롭지 않은 것은
아니고 자유가 결여된 것도 아니다. 환언하면 자유 그것은 평등이다. 즉
어느 누구가 나보다 강하고 부유하고 능력이 뛰어나도 나를 그에게 종속
시킬 수 없을 때 나는 자유롭다, 바로 이 말이다. 온갖 개인적 종속이 제
거되어 있으면 나는 자유롭다, 바로 이것이다.”45)
물론 위에서 인용한 구절은 루소가 생각했던 바의 자유의 본질적 측면
을 명료히 부각시키고 있다. 사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는 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유롭게 존재하기
위해 충분한 조건인가? 루소 자신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
다. 그에게서 자유인은 자신의 의지 이외의 다른 의지에는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는 어디까지나 자유인들의 사회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사회계
약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 루소 자신이 말하는 대로 ― “각자가 모두와
결합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고 이전과 다름없이 자유로운 결합
형태를 발견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 행위가 국가의 법을 이루는 일반
의지는 개개 시민에게 타자의 의지가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의지이지 않으
면 안 된다. 일반의지는 단일체인 인민 전체의 의지인 것은 틀림없으나,
그것은 또한 ‘개인’으로서가 아니고 주권자의 일원으로서 각 구성원이
갖고 있는 의지이기도 하다. “주권자는 그를 구성하는 다수의 개개인으
로 형성되어 있는 만큼”, 사회계약은 사실 인민의 자기 자신과의 약속으
로 귀착된다. 계약을 체결하면서 구성원들은 자신의 모든 권리와 함께 자
기를 전공동체에 양도하는데, 이 총체적 양도로 그들은 신민이 되면서 동

45) Emile Faguet, Rousseua penseur, Paris S. D, 1963, pp.346/347.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15

시에 주권자의 일원이 된다.


116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각 개인은 이를테면 자기 자신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이중 관계에서


약속을 맺고 있는 것이다 : 첫째 주권자의 일원으로서 다수의 개별자에 대
한 약속, 둘째 국가 구성원으로서 주권자에 대한 약속.”(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7장, PLE, 362)

신민들과 주권자는 동일한 인간들이나 상이한 연관에서 고려되었을 뿐


이다. 이 동일한 인간들이 신민으로서 복종하고, 이 복종은 모두에게 한
결같은 조건인 만큼 이들을 온갖 개인적 사적 종속으로부터 보호한다. 이
동일한 인간들이 주권자의 일원으로서 입법자가 된다. 즉 그들 자신으로
부터 그들이 복종할 권위가 연유한다는 말이다. 각 개인은 결합체의 구성
원이 되면서 천부의 자유를 희생하였지만, 이제 주권자의 일원이 된 그는
이 자연적 자유에 상당한 시민적 자유를 재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유인이
다. 이는 제반 법이 그를 자의적인 개별 의지들로부터 보호해서 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입법자요, 주권자의 의지가 다름 아닌 자기
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계약은 구성원 모두에게 그들이 인간
으로서 갖고 있는 개별의지를 그들이 시민으로서 지녀할 일반의지에 종속
시켜야 할 의무(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무는 자유
를 파괴하거나 제약하기는커녕, 사실 자유의 조건인 것이다. 왜냐하면 ꡔ
사회계약론ꡕ 제1편 8장에서 천명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법에 복종하는 것이 자유인 까닭이다.”

이상에서 우리가 시도한 해석에는 일반의지는 다수의 개별의지의 합성


이 아닐 뿐 아니라 이들 간의 타협의 결과도 아니라는 점이 함축되어 있
다. 그것은 주권자의 일원인 시민 전부의 의지인 것이다. 이런 일반의지
는 시민들이 공동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만일 시민들이
만사에 있어서 의견을 달리 하고 결합의 심리적 토대인 공동 유익도 없다
면 이런 공동 의지조차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의지를 일반화하는 것은 투표자의 수라기보다는 이들을 결합시키는


공동 이해다.”(ꡔ사회계약론ꡕ 제2편 4장, PLE, 373)
“흔히 모두의 의지와 일반의지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후자가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17

대상으로 주의하는 것은 공동 이해인 반면, 전자는 사적 이해를 대상으로


하는데 이는 사실 개별의지들의 합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개별의
지들에서 서로 상쇄하는 상대적 차이들을 제하면, 이 차이들의 합산의 결
과로서 남는 것이 일반의지이다.”(ꡔ사회계약론ꡕ 제2편 3장, PLE, 371)

사실, 인민 총회처럼 수많은 사람이 모인 집회에서 전원일치는 좀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전원일치 대신에 다수결에 만족해야 하
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 성질상 전원의 동의를 요구하는 법이 단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사회계약이다. […] 이 최초의 계약 이외에는 다수결에 의한 결정에
나머지 모두가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 다수결의 원칙 역시 사회계약의 산
물[결과]이다.”(ꡔ사회계약론ꡕ 제4편 2장, PLE,439/440)

그러나 이런 형식을 절대 규칙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루소 자신도


대다수에 의한 결정이 언제나 그리고 모든 경우에 일반의지의 선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삼가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그가 생각한 것은 일
정한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과반수의 견해를 일반의지의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 그 자신은 결코 소수는 다수의 의지에 따라야만 한
다고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정확한 뜻은 시민은 그가 반대했던 법
에 복종하면서도 자유로운데, 이는 오로지 이 법이 일반의지의 표현인 경
우에 한해서인 것이다. 루소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이는 일반의지의 모든 성격이 아직 대다수 안에 있다는 것을 전제한


다. 그러나 그것이 대다수 안에 없다고 하면, 어느 쪽으로 결정하든 거기
에는 더 이상 자유는 없다.”(ꡔ사회계약론ꡕ 제4편 2장, PLE, 441)

따라서 루소는 다수에 의한 소수의 억압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남용을 예방하기 위해 루소가 제안하고 있는 바는 법안을 투
표할 때마다 가능한 전원일치에 접근토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면 기본법들에 대해선 삼분의 이 또는 사분의 삼의 다수결을 규정할 수
도 있다. 더욱이 루소의 국가론은 입법과 행정, 법과 일반 국사를 엄밀히
118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구별하고 있는 만큼, 양자의 결정 과정으로서 투표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일반 국사는 보통 급속히 결정되어야 하는데, 이런 경우 한 표 차
의 과반수조차 충분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법에 관해서는 투표에서 이
길 안건은 전원일치에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루소는 몇 표차로 표결된 조처가 일반의지의 표현이 될 수 있
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제대로 체제를
갖춘 강건한 국가에서는 표결에서 이기는 안건은 반드시 전원일치에 근사
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확신이었다. 사정이 이렇지 않아서 인민 총회에
서 약한 과반수를 얻는 데도 장시간의 토론이 필요하면 그것은 국가가 이
미 사양길에 들어섰다는 증거이다. 여기서 우리는 루소의 민주주의가 얼
마나 현대의 의회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면서 동시에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polis)민주주의를 생생하게 표상하고 있는가를 알아볼 수 있다.

“사회적 유대가 풀어지기 시작하고 국가가 약해지기 시작할 때, 개별


적 이해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다수의 작은 사회들이 정치사회에 영향
력을 행사하기 시작할 때는 공동 이익은 변질되고 반대자들을 만나게 된
다. 즉 전원일치는 더 이상 투표자들을 지배하지 못하며 일반의지는 더 이
상 모두의 의지는 아니다. 반박과 토론은 성행하는 한편, 최선의 안건도
언쟁 없이는 통과되지 않는다.”(ꡔ사회계약론ꡕ 제4편 1장, PLE, 438)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루소가 구상한 민주주의는 언쟁이 없는 고요한 만


장일치가 군림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수의 개별의지의 통
일이 말로서 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라는 말인
가? 사실 루소는 한번도 고대의 민주주의 본가인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나 근대의 민주주의 발원지인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를 찬양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자기의 모델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의 모델은 처음부터 끝까
지 스파르타였다. 그러면 과연 고대 철학자들을 포함해 누가 스파르타를
민주주의 국가로 생각한다는 말인가? 여기에 바로 루소 정치학설의 본질
적 특성이 있다. 루소 자신이 말한 대로 ꡔ사회계약론ꡕ은 ‘추상’의 결과
이다. 실제로 이 저서는 ‘주권자는 인민이다’를 대원칙으로 하여 세워
진 연역 체계로 되어 있다. 그래서 루소의 민주주의 국가는 이상 국가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19

(ideal state)인 것이다. 바로 이 이상 국가의 잣대로 루소가 영국의 대


의민주주의와 수사학과 변증론을 꽃피게 한 아테네 민주주의를 심판한 것
처럼, 루소의 이상 국가는 프랑스 혁명부터 오늘날까지의 모든 현실 민주
주의를 비평할 수 있는 잣대를 제공한다. 하여튼 루소에게서 전원일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벗어나서는 안 되는 원칙이기보다는 가능한 접근해야 할
이상인 것은 확실하다.
국가가 건강한 상태에 있는 한 시민들 간의 의견의 다양한 상이는 별로
느껴지지도 않을뿐더러 또 쉽게 서로 상쇄되기도 한다. 어째든 다양한 의
견의 존재가 일반의지가 본질적으로 전원의 의지가 되는 것에 지장이 되
지는 않는다. 루소가 말한 대로, “일반의지는 모두에서 출발하여 모두에
적용되어야 한다.” 또 “국가 구성원 모두의 지속적인 의지가 일반의지
인 것은 왜냐하면 그것에 의해 그들은 시민이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상
적인 것은 일반의지가 전원의 의지인 것이나 루소에 따르면 제대로 세워
진 국가는 실제로 그렇다. 따라서 일반의지는 시민 아무나의 의지라고 말
해도 루소의 생각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 것은 시민은 누구라도 공동
체 전체에 관계되는 문제를 심의하게 되면 자신의 개인적인 기호나 선입
견을 사상하고 시민 전원의 찬성을 의당히 받을 수 있어 보편타당한 법으
로 세울 수 있는 견해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루소에서 칸트에 이르는 길이 그리 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전 과정은 도덕철학과 법철학에서 가장 심각한 대목 중 하
나이겠으나 여기서는 칸트의 도덕 법칙들의 최고 원칙을 음미해보는 것으
로 만족하기로 하자.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ꡔ실천이성비판ꡕ §7)46)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밝혀 두어야 할 것은 몇몇 사상사 연구가들의 시


도에도 불구하고 루소 자신은 일반의지와 양심간의 유추에 관해 결코 강
조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46) 백종현, 서양근대철학 , p.251에서 인용.


120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또 다른 한편 사상사 연구가들 사이에는 일반의지를 일종의 집단의식으


로 간주하는 경향도 있다. 이런 경우, 개인은 그 때문에 외부로부터 압력
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 그 자체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적
결속을 확보하는 데 있다. 이련 경향의 대표적인 연구가인 보강을 예로
들어 보자. “일반의지는 루소에게서 단순히 자아를 가진 단체(the
corpoate self)의 표현이다. 일반의지가 바로 이 단체인 것은 이 단체가
행동을 지향하고 행동하는 까닭이다. 이는 실재하는 국가가 단체로서 그
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생명과는 별도의 고유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47)
그러나 보강이 해석하는 것과는 달리 루소는 누누이 국가는 인위적인
단체요 정신적 존재이며 오직 사회계약에 의해서만 실존할 수 있다고 말
하고 있다. 그에게는 어떠한 집단이라도 그것은 협약에 의해 결합된 ‘개
인들의 합계’인 것이다.

“국가 또는 도시국가(cité)는 오로지 정신적 인격체(personne


morale)로서 그 생명은 그 구성원들의 합일에 있다.”(ꡔ사회계약론ꡕ 제2
편 4장, PLE, 375)
“무엇이 국가를 하나로 만드는 것인가? 그것은 그 구성원들의 결합이
다. 그러면 이 결합은 어디서 생겨났는가? 그들을 구속하는 의무에서. 모
든 사람이 이에 대해선 찬성이다.”(ꡔ산에서 보낸 편지ꡕ 여섯 번째 편지,
VPW, Ⅱ, 199)

루소 사회계약의 관건은 어떠한 조건하에서 국가 권위에 대한 개인의


복종을 ‘강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의무’로서 확보할 것인가이다.
환언하면 어떤 까닭에 일반의지는 모든 시민을 의무의 주체로 만들고 왜
이들이 그 권위에 반항하는 것은 부당한 것인가의 문제다. 그런데 이 점
에 관해 루소의 생각은 오해의 여지없이 단호하다. 시민이 일반의지에 복
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일반의지가 공동 이익 내지 초개인적 이익을
대변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사회계약의 당사자로서 이에 대한 약속을
하였기 때문이다.

47) VPW, Introduction, p.61.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21

“이미 우리가 앞에서 말한 대로 ‘법’은 일반의지의 엄숙한 공적 행


위이다. 그리고 각자는 근본적인 (사회)계약을 통하여 이 의지에 복종하기
로 약속하였기에 모든 법의 힘은 바로 이 계약에서 유래한다.”(ꡔ제네바
초고ꡕ 제2편 4장, VPW, I, 492)

따라서 일반의지에의 복종은 그 근거가 사회계약, 곧 전원의 약속에 있


다. 주권자의 권위가 정당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자발적으로 수용되었고
시민들이 사회계약을 통하여 일반의지의 통수권 밑에서 행동하기로 약속
하였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우리는 의무의 근거에 대해 루소는 현대 사회학자
대부분과는 생각을 달리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서 의무는 결코 개
인들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권위가 이들에게 존경을 강제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 권위는 그 근거가 개인 그 자신에 즉 그가 맺
은 약소 자체에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약속에 의해 스스로 의무를 지
는 것보다 더 확실한 의무의 근거가 있을 수 있을까?” 루소의 의무에 대
한 구상은 이렇게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의무관이다. 그래서 정치 권위 역
시 개인이 일반의지에의 복종을 약속한 행위 곧 사회계약에 그 근거가 있
는 것이다. 주권의 일차적 근원은 개인 그 자신이다.

물론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일반의지가 가능하기 위해선 공


동 이익이 실제로 있어 구성원들 간에 유대를 맺게 하고 결합의 심리적
토대를 성립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이 공동 이익을 개인적 이익과는 본질
적으로 다른 사회적 집단 특유의 이익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러므로 일반의지를 개인의 이익과 구별되는 집단 이익의 집단적 표상 내
지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루소 학설의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 아
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루소에게선 일반의지는 어디까지나 ‘정의의
척도’로서, 사회적 삶의 제 조건을 의식하는 개인은 자신의 행복, 자신
의 안전, 자기 자유의 보전을 위해서 이를 수용하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
로 루소가 말하고 있는 ‘이익과 정의의 놀라운 일치’인 것이다. 또 이
일치에서 모두를 위한 자유가 결과하는 것은 자연 상태에서와는 달리 시
민 상태에선 자유는 정의로부터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점
122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은 루소 자신이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바로서 여기서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진정 자유로운 의지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저지할 권리가


없는 의지밖에 없다. 공동의 자유에서 아무도 타인의 자유가 그에게 금지
하는 것을 행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참 자유란 결코 자신을 파괴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정의 없는 자유란 진정한 자가 모순이 아닐 수 없
다. 왜냐하면 무질서한 의지의 집행에는 모두가 자유를 잃는다.”(ꡔ산에서
보낸 편지ꡕ, 여덟 번째 편지, VPW, II, 235)

그러니만치 시민의 자유는 자연인의 독립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것이


다. 루소는 결국 몽테스키외처럼 자유를 독립에 대립시키는 데 이른다.
루소가 찬탄해 마지않으면서도 경쟁자로 생각했던 ꡔ법의 정신ꡕ 저자의 말
을 먼저 들어 보고 이를 루소 자신의 말과 비교해보자.

“독립이란 무엇이고 자유란 무엇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권리이다. 만일 어떤 시민이
법이 금하는 것을 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자유의 권리의 소지자가 아닌
것이 다른 시민들 역시 그와 같은 권리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ꡔ법
의 정신ꡕ 제11편 3장)

“사람들은 흔히 독립과 자유를 혼용하고 있는데 이는 근거 없는 짓이


다. 이 두 사태는 너무나 상이해서 서로 배제하는 관계에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각자가 제 마음에 드는 대로 행동하면 이는 언제나 타인의 마음
에 들지 않는 것을 행하는 법이다. 이런 것을 자유라고 일컬을 수 없는 것
은 자명하다.”(ꡔ산에서 보낸 편지ꡕ 여덟 번째 편지, VPW, Ⅱ, 234)

이런 고찰의 대상이 시민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은 시민 상태에서만이


제반 사회적 관계 때문에 법에 의한 정의가 자유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
다. 이에 반해 자연 상태가 자유로운 상태인 것은 정확히 말해서 사람들
은 공동 규칙이 개입할 필요 없이 그들의 독립을 향유하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자연 상태에선 불필요할 뿐 아니라 인식할 수도 없는 정의의 관념
은 인간들의 제반 상호관계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필요하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23

게 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립되어 사는 원시인은 그의 힘과 욕구의


균형으로 인하여 독립적인 존재, 곧 자급자족하는 절대자이니까 말이다.
우리가 앞 장에서 누차 지적한 바 있듯이, 자연인은 여타 자연인과 관계
를 맺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 상호 관계가 발생
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전제 군주권이나 압제 정치 따위를 겁내야 할 이
유도 전무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가 시작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자연 상태에선 절
대적 감정이었던 자기애는 상대적 감정, 즉 그것으로 사람들이 서로 비교
하는 감정이 되고 자만심[허영심]으로 변형되어 인간들 내부에 만족을 모
르는 지배욕을 낳는다. 자연 상태에선 그 영향이 별로 느껴지지 않던 불
평등도 지배적인 성격을 띠게 되어 인간 대 인간 관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런 결과 한편의 독립은 다른 한편의 위험이 되며, 약자는
강자에 의해 지배당할 위험에 노출되고, 가난한 자는 부자의 먹이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자연적 자유의 존속은 최대다수의 피
해를 초래하기 마련이고. 각자의 개별의지가 자기를 주장할 수 있었던 자
연적 독립도 혼돈의 원천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회계약의 목적은
일반의지를 정의의 척도, 즉 이성의 법으로서 제정하여 인간의 자연적 평
등을 법 안에서 재확립하고 모두에게 자유를 보장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오로지 자연적 독립을 포기하고 자신을 법에 종속시킴으로써
만이 사회적 삶을 사는 인간은 자신을 폭정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 그래
서 루소는 “정치통일체의 본질은 자유와 복종의 일치에 있다”고 말하고
있고 이 일치를 실현하는 것이 법 제정이다.

“어떤 놀라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에 인간을 종속시켜서 자유롭게 하


는 수단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 복종하는 자들은 있지만 아무도 지배
하지 않고 섬기는 자들은 있건만 주인은 없는 상태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
하다는 말인가? 게다가 이 상태는 겉보기에는 종속되어 있지만 실은 각자
가 자신의 자유에서 타자의 자유에 폐를 끼칠 부분 이외에는 상실하는 바
가 없기에 그 만큼 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기적이
야말로 다름 아닌 ‘법의 작품’인 것이다. 오로지 법에 의해서만이 인간
은 정의와 자유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전원 의지의 기
관(organe)이 인간의 자연적 평등을 법 안에 재정립하는 것이다. 또 이 천
124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상의 소리가 시민 하나하나에게 공적 이성의 원칙을 명하면서 자기 자신의


판단 준칙에 따라 행동하고 자기 자신과 일치하도록 가르친다.”(ꡔ정치경
제학ꡕ, VPW, I, 245)

시민들이 자유 그리고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들처럼 독립을 누릴 수 있


는 것은 법에의 복종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사회계약 이후의 인간이 시민
적 자유의 형태 하에 그의 자연적 독립과 대등한 가치만을 재발견한 것이
아니다. 이것 이외에도 정의, 도덕성, 덕성이 시민적 상태의 자산에 속한
다. 도덕적 삶은 오직 사회적 삶과 함께 시작하며, 인간의 법에 대한 복
종은 그를 온갖 사적 개인적 종속으로부터 지켜주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이성과 상의하고 자기의 욕정을 지배하고 자신의 성향에 저항하는 권능을
부여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계약에 의해 자연 상태에서 시민 상태로 이행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지적 도덕적 진보를 위한 제 조건을 창조하는 것
이다. 그리하여 그가 홀로 떨어져 살았을 때는 단지 가능태로서밖에 존재
하지 않던 그의 가장 고귀한 기능들, 곧 이성과 양심은 훈련되고 발휘되
는 과정을 거쳐 발전하고, 그의 존재는 좀더 높은 단계의 자유에 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루소가 설파한 사회계약의 참된 존재이유이고 그 정
당성의 근거이다.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25

에필로그

본 저작은 루소 ꡔ사회계약론ꡕ의 토대가 되는 자연상태와 사회계약 이론


을 규명하였다. 루소의 이 소논문을 읽어 본 독자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ꡔ사회계약론ꡕ은 사회계약을 토대로서 전제한 루소의 정치학설[국가론] 요
강이지 사회계약 자체를 그 논구의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다. 바로 이 점
이 이 소책자의 역사적 호소력과 동시에 이론적 난해성의 근원이라는 것
이 필자의 생각이었다. 물론 루소 자신이 ꡔ사회계약론ꡕ의 일러두기와 결
어에서 특기하고 있는 바대로 고도의 추상 결과인 이 소논문에선 사회계
약 개념이 서술되지 않고 간략히 형식적으로 정의된 후 그의 국가론의 출
발 원칙으로서 함축되어 있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연한 사정이 이 소논문의 난해성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역사적 웅변력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ꡔ정치적 권리의 제 원
리ꡕ에선 사회계약 개념은 있어야 할 ― 언제나 소급해야 할 ― ‘최초의
협약’으로서 상정된 후 이 대원칙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끌어낸 명제들뿐
으로, 이 개념에 대한 언급은 루소 전 작품에 산재해 있는 실정이다. 이
소책자의 양립할 수 없는 두 성질, 즉 내적으로는 추상적이고 어려우나
외적으로는 광범위한 독자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오로지 ‘시
대정신’이라는 개념에 의해서만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가 루소
연구로부터 끌어낸 결론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루소가 ꡔ사회계약론 또는
정치적 권리의 제 원리ꡕ라고 명명할 그의 소논문을 집필하면서 전제하였
거나 염두에 둔 것은 자신이 사전에 정립한 사회계약 개념이라기보다는
이 개념이 일반화된 시대정신이었다. 이 시대정신은 넓게는 계몽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으나 정치철학에선 그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영국의 명예혁명
(1688-1689)에 참여했던 ꡔ시민통치론ꡕ의 저자 로크가 이 시대정신의 이
론적 창시자이다.
로크로부터 루소에 이르는 이 시대정신의 특징은 양자의 정치학설이 자
연상태[천부인권론]와 사회계약 이론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사실에 있다.
다른 한편 양자의 정치학설에서의 차이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이성론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인은 양자
126 ꡔ철학사상ꡕ 별책 제2권 제5호

가 처한 역사적 현실의 차이다. 영국에선 이미 17세기에 절대 군주제가


기울면서 시민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기 시작했으나 프랑스에선 18세기
중반까지 절대 왕정은 요지부동이었다. 프랑스의 이러한 정치적 후진성에
도 불구하고 로크의 정치학설과 영국의 정치 현실, 즉 시민들의 정치 참
여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
져 있었을 뿐 아니라 이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로크의 ꡔ시민통치론ꡕ은 경험론자인 저자가 변하고 있는 정치 현실을 안중
에 두고 쓴 책인 반면, ꡔ사회계약론 또는 정치적 권리의 제 원리ꡕ의 저자
는 대륙 이성론 전통에서 이 ‘시대정신’을 현실로서가 아니고 관념[이
상]으로서밖에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루소의 이 소논문이 고도의 추
상과 연역체계로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선 필연이고 동시에 자명한 시대정
신이 된 정치적 권리의 제 원리, 즉 자연권[천부인권]과 사회계약 이상
[관념]을 자신의 국가 구상의 토대로 전제함으로써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
선이 될 광대한 호응을 불러일으킨 것 또한 필연이다.
본 저서의 본래의 목표는 ꡔ사회계약론ꡕ을 그것을 구성하는 자연상태,
사회계약설, 주권론, 정부론 네 개의 주제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이었나,
필자의 역부족과 미숙함으로 전반 두 주제의 분석에 그치고 말았다. 따라
서 본 작업은 홉스, 로크로부터 자연법 학파를 거쳐 루소에 이르는 서양
근대 정치철학의 공통 토대로서의 시대정신을 루소 국가론의 관점에서 분
석, 정리하는 데서 그치고 말은 셈이다. 서울 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가
주관하는 공동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본 작업은 착수되었던 바, 연구원 전
원에게 일괄적으로 부과된 원고 마감 기일을 준수하느라고 필자는 죄송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작업결과를 이렇게 미완성 상태로 제출하게 되
었다. 나머지 작업 부분을 조만간 완성하여 발표할 것을 동 프로젝트 주
관자와 책임자, 공중에 약속드리며, 루소에서 파악된 그 시대정신이 인권
과 민주주의의 개선을 환호하는 우리의 정치 현실을 분석하는 데 기여할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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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3년 5월 25일
발행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소장 백 종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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