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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 영상미학분석 수업자료
2022-2 영상미학분석 수업자료
← 고전영화 규범파과
프랑스 후벨바그
FIX 라이브 ,
2022-2학기 동국대학교 <영상미학분석> 수업교재
1. 영화와 영상문화의 시작
1) 영화의 탄생
암드레 바쟁 인간은 시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이러한 노
'
그림 , 정지된 이미지
사진을 찍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의 주된 관심은 움직임의 순간적인 양상들을 포착하는 데
있었지 영상의 연속적인 투사를 통하여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사진 :
움직이는 이미지
[ 기술 ] 1889년 조지 이스트만(George Eastman)은 구부러질 수 있는 속성을 지닌 필름 베이스인
셀룰로이드를 내놓았다. 이 베이스와 필름을 렌즈 뒤로 통과시켜 빛에 노출될 수 있게 하는
카메라 매커니즘으로 인하여 긴 일련의 프레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영사기는 이
미 수년 전부터 있어왔고 슬라이드나 그림자 놀이를 보여주는 데 이용되어 왔다. 요컨대 촬영
테크닉과 필름 그리고 영사기 같은 토대들이 완성되었다. 남은 것은 움직임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는 기계, 즉 카메라였다.
이 시기는 발명가들의 시대였다. 산업혁명으로 기계장치들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많은
이들이 다양한 물건들을 만들어냈다. 여러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있던 발명가들이 카
메라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가장 중요한 카메라 장치는 미국의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과
루이 뤼미에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Louis Lumière)가 만들어냈다.
에디슨의 조수인 딕슨은 1893년 경 짧은 동영상을 만들었다. 신기한 구경거리로서 상품화
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에디슨은 이것을 자신의 축음기과 결합해 유성 영화를 보여주고자 했
다. 그는 딕슨에게 한 사람씩 영화를 보는 기계,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개발하도록 지
시했다. 그는 영화가 일시적인 유행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영화를 스크린에 투사하는 시
스템을 개발하지 않았다. 그 임무는 뤼미에르 형제에게 남겨졌고, 그들은 독자적으로 촬영과
영사를 겸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 퇴근하는 노동자들 > 영화사에서 최초의 영화 상영은 파리의 카퓌신 거리(Boulevard des Capucines) 14번지에
< 물뿌리는 정원사 > 있는 그랑 카페(Cafè Grand)의 지하 인도 살롱에서 뤼미에르형제가 자신들이 개발한 영화기
1 대중
; 서사성 부여
구인 시네마토그래프(cinèmatographe)로 필름을 상영한 1895년 12월 28일로 인정되고 있다.
.
- 2 . 기술 ( 촬영상영 )
[ 기차의 도착 >
이날의 역사적인 상영에는 뤼미에르 형제가 찍은 11분이 채 안 되는 짤막한 필름 10편이 33 3 유료
; 대각선구도 .
1)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의 원제는 <리용 뤼미에르 공장의 출구>(La sortie del’usine Lumière á
- 1 -
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살롱을 나왔으며, 이 신기한 체험은 곧바로 널리 알려져서 첫 상영 며
칠 후부터는 관객들이 줄을 서서 들어갔다고 한다.
뤼미에르의 발명품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그것이 새로운 세기의 위대한 마법이 될 것이 [ 스토리텔링 )
고
라고 믿은 멜리에스에 의해 발전되기 시작했다. 어트랙션
< 달세계여행 >
1896년에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는 영국의 발명가 로버트 윌리엄 폴(Robert 시네마
William Paul)에게서 영사기를 구입하고, 이어서 그것을 카메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하
L
:
특수화과 ,
오락적 속성
무대미술 ,
였다. 멜리에스의 최초의 영화들은 일상생활을 담은 뤼미에르의 단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 산업
- 2 -
볼거리였으며, 이에 따라 영상물 장사는 자본주의적 기업의 사업 욕구에 의해 확장 일로에 있
었다. 또한 이 시기에 발생한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여러 나라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동시에
할리우드가 세계영화제작에 있어 우세한 산업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⑧
1a o 2 와는 다른, 새로운 언어로서 ‘읽는 문화’대신에 ‘보는 문화’가 나타난 것을 알렸다.
일찍이 영화를 새로운 시각언어로 보았던 사람은 미국의 시인이자 영화비평가인 바첼 린제
이(Vachel Lindsay 1879~1931)였다. 린제이는 초기 미국 무성영화에 대한 저서 <활동사진의
미국 안정적 할리우드
예술>에서 영화를 “그림문자와 상형문자의 새로운 언어”로 보며, 인류 발전에서 거대한 진보
유럽 영화의 예술성고민
를 의미하는 언어로 환영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미국에서 최초의 영화기구인 키네토스코
,
- 3 -
사실주의 고전론의 표현주회 (형식 )
0 f방가르르
다큐멘터리 극영화 실험영화
…
S 기차외로착 > <달세계영행고 막 간>
☞ 더 읽을거리
김호영, 「영화 이미지와 포토제니: 장 엡스탱의 이론을 중심으로」, 『영화연구』 36호, 한국
영화학회, 2008.
로버트 스탬, 『영화이론』, 김병철 역, K-books, 2012. (50~54쪽. ‘영화의 본질’)
윌리엄스
, -
제임스
서사의 연속성과 전개 원리를 이용한 최초의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미국 소방관의 생활 The 편집의 시초 :
세실 헵워스
Life of an American Fireman>(에드윈 포터, 1903)이다. 불타고 있는 집에서 어머니와 아 :
서부영화의 시로
이를 구출해내는 소방관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영화로, 여기에는 몇 가지 고전적 서사요소(소
- 4 -
방관들의 재난 예감, 그 집으로 달러가는 소방차들)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편집적 시
간적 관계들의 논리를 구축하지는 못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어머니와 아이가 구출되는 모
습을 두 번 볼 수 있다. 한 번은 집에서, 한 번은 집 외부에서 말이다. [ 총격전
이후 그는 고전적 미국 영화의 초기 모델이 된 <대열차 강도 The Great Train 271 차위의 싸음
Robbery>(1903)를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사건은 시간, 공간, 그리고 논리적으로 선명한 선형 3 추격전
적 흐름을 가지고 전개된다. 우리는 강도질과 추격, 그리고 강도들을 붙잡은 것으로 이루어진
서사를 따라갈 수 있다.
< 픽앨리의 총잡이 >
1908년, 훗날 미국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이비드 그리피스(D.W. Griffith)가 감독으
:
최초의 갱스터무비
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까지 사용된 기법들을 능숙하게 사용하면서 거기에 서사적
동기를 부여했다. 매끄러운 장면전환을 위해 페이드(Fade in/out)와 이이리스(iris)를, 근접 쇼
ㅡ
[ 불관용> ( 1916 )
하였다. 대표적인 그의 영화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Nation>(1915)은 다른 장소에서 벌 고전적편집다
어지는 이야기를 편집을 통해 이어 붙였고, 배우들은 표정에서 미묘한 변화를 표현하기 시작 : 현적일 시공관에 외래
구분되로 렌집 X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매끄럽게 서사에 동기화되었다. 그의 영화들은 광범위하
C
할리우드 심적으로 연결되는 현집
서사감조
( 내러티브]
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행위 시선의 일되
-
산업 ; 보이지 않는 편립
또한 1910년대 중반에는 오늘날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쇼트/리버스 쇼트
잠르
J
⇒ 연족편집
(shot/reverse shot)의 편집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선의 일치는 1910년대 빈번하게 쓰였 연속편집
,
,
스타시스템
ㅡ 으며, 행위의 일치는 거의 같은 시기에 발전되어 1916년대에는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1920
T : 섬정 ( 롱) 슐
4 허구고가 년대 이르러 연속체계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감독들이 서사구조 내에 구체적인 시간적, 공간적 Y 미디엄닺
권선징안
해피엔링
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거의 자동적으로 사용하는 표준적 기법이 되었다.
;
.
> 클로즈 업
디드마그
이 시기 대표적인 영화 <우리들의 환대 Our Hospitality>(1923)를 살펴보자. 이 영화는 고
몸입 감정이입 ;
몸입과 감정이입유로
전적 영화형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다양한 서사 요소들의 반복적인 등장 및 윌리 맥케이의
,
영화 =
관객
아버지가 결투 중에 죽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윌리가 그 갈등의 해결하는 데 이르기까지의 직
⇒ 사회 일정 이데 올레적
선적인 인과관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편집은 이것을 자연스러운 장면전환으로 이것을 보여준
,
6
5 ,
빠
보제제기. 다.
연속집체계ㆍ
=현일어 제임
무성영화 시대가 끝난 1920년대 후반에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는 정교한 사조로 발전했으며
l
- 5 -
그것을 연출하는 것이다. 연출이 끝나면 편집자가 스튜디오에서 편집을 해서 바로 배급과 상
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철저한 분업 형식으로 영화를 속전속결로 만드는 구조였다.
또한 산업에서는 수직통합의 구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직통합은 대형 스튜디오가 영화
의 기획부터 배급, 상영까지 모두 통제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한국의 CJ E&M의 모습을 떠
올리면 된다. 스튜디오가 영화 아이템을 발굴하여 감독 및 스태프를 고용하고, 영화를 제작하
는 동안 프로젝트를 통제하고, 완성된 영화를 자사 배급 라인을 통해서 배급하고 자사의 극장
에서 개봉하는 구조이다. 사실상 독과점인 이 구조는 당연히 이익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다는
장점이 있다.
3. 영화미학의 형성 2: 순수 영화와 절대 영화
1) 순수 영화와 포토제니
이탈리아의 비평가 리치오토 카누도(Ricciotto Canudo)는 영화를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
에 따르면 예술에는 건축, 조각, 회화라는 세 개의 공간예술과 시, 음악, 무용이라는 세 개의
시간예술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종합한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고 명명했다. 카누도가
제7예술로서 영화를 명명했다고 해서 영화가 곧바로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를 예술
이게 만드는 특정한 성질이 필요했다. 그는 영화를 시(詩)라고 생각했으며 영화 이미지는 무엇
보다도 서정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포토제니(photogénie)의 맹아가 탄
생했다. 루이 델뤽(Louis Delluc)은 카누도의 주장을 이어받아 ‘영화예술’의 조건으로 포토제
니의 개념을 내놓는다. 루이 델뤽은 1920년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영화감독이자 작가, 비평
가이다. 그는 제르멩 뒬락(Germaine Dulac), 장 엡스탱(Jaen Epstein)을 비롯한 소위 시각주
의자(the visualist)로 불렸는데, 이들은 영상 표현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그 의미를 규명하
려고 시도했다.
순수 영화(cinéma pur/the pure cinema)와 절대 영화(der absolute Film/the absolute
film)는 1920년대 예술 영화 운동의 과정에서 생겨난 그룹의 영화를 말하는 것으로 특히 다다
이즘과 초현실주의 화가들에 의해 선도되고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 이들은 자신의 예술적 생
- 6 -
각을 영화 영상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현실 모사나 묘
사가 아니라 비재현적 방식으로 현실이 아닌 세계를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순수 영화와 절대
영화의 기원으로는 자연적 형태를 포기하고 기하학적이고 기술과 관련된 구성을 보여주는 페
르디낭 레제(Ferdinad Léger)가 만든 <기계적 발레 Ballet mécanique, 1924>와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대본을 쓰고 르네 클레르(René Clair)가 감독한 <막간극 Entr’acte, 1924)이 언급
된다. ↳ .
이중인화 2 . 고속촬영 3 신선한
.
앵글
고유한 영화촬영줄 발전
질을 나태내는 용어로 변화시켰다. 이를 통해 델뤽은 영화가 단순한 현실 모사가 아니라 신비 시킬려고 함
로운 영상을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포토제니를 찬양했던 프랑스 이론가들은 카메라가 모든 평범한 사물과 인물들을 빛나고 매
혹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했다. 심지어 카누도와 델뤽을 이어 포토제니 이론을 확
립한 장 엡스탱은 “회화에 색이 있고, 건축에 볼륨이 있다면, 영화에는 포토제니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4) 요컨대 포토제니는 사진이나 영화에서 표출되거나 강화될 수 있는 인물이나
물체의 미묘한 느낌, 분위기, 아우라를 말한다. 시각주의자들은 영화가 단순한 현실 모사가 아
니라 신비로운 영상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포토제니 이론에는 규명하기 힘든 일종의 신비성이 도사리고 있다. 사진이나 영화에
서 빛이 그토록 매혹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설명할 길은 없다. 그것은 인물이나 사
물의 미묘한 느낌이나 분위기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 느낌을 도대체 어떤 말로 설명하
고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그러한 측면은 포토제니가 결코 언어로 의미화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며 여전히 모호하고 투명하게 다가가기 힘든 개념이다. 아마도 규명되
기 어려운 용어일 수도 있고, 차라리 상상 속에 남겨놓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델뤽은 영화의 여러 요소들에서 그 가능성을 보며 무대장치, 조명, 얼굴이 포토제니를 불러
- 7 -
일으키고, 신비로운 영상을 창출할 수 있는 것으로서 묘사의 특별히 영화적인 것을 위해 결정
화된 요인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현실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 해석의
도구라고 본 것이다. 포토제니는 영화 촬영술을 통한 묘사에 의해 살아나는 요소로 보았단 장
엡스탱은 시간, 공간 속에 존재하는 세계와 물체, 정신적인 것의 움직임을 중시하며, 이런 운
동성 속에서 카메라 촬영을 통한 묘사의 정수, 즉 포토제니가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인간> 델뤽의 후계자인 제르멘 뒬락(Germaine Dulac)은 “영화는 삶에 대해 넓게 열려 있는 눈이
며, 우리 눈보다 더 강력하며 우리가 못 보는 것을 보는 눈”이라고 하고, “현실의 생명체와
(어셔가의 몰락>
' 쮑스톤) 사물에서 독특한 것은 오직 영화에 의해 시적인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 나폴레옹>
그러면, 영화에서 포토제니는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가? 델뤽은 영화의 여러 요소들에서 그
( 아벨강의
가능성을 찾았다. 무대장치, 조명, 얼굴이 포토제니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신비한 영상을 창
( 발레메카닉 ) 출할 수 있는 것으로 영화적인 것을 위해 결정화된 것들이라 말하며, 이런 것은 기술적인 현
(페르낭 레제)
실 묘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해석적인 것으로 보았다. 영화촬영술에 의거해서 만들어
< 안달루시아의 개> 지는 것으로 문학이나 연극, 미술의 요소들을 단호히 거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순수
영화는 포토제니가 표현되는 영화로서 일반적인 영화들처럼 스토리나 논리적인 사건 전개가
중요시되지 않는다. 이들은 영상 속에서 물체의 움직임(운동성)과 리듬, 이미지가 중요했고,
묘사 대상에는 현실의 영역을 넘어서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것도 포함된다. 이들은 영화의
창조적인 시각 표현을 중시했으며 영화적 묘사의 고유한 영역을 운동감과 리듬, 편집 등에서
찾았다. 이처럼 비논리적인 진행을 선호, 스토리 전개보다는 상상과 환상에 근거한 시각적 이
미지를 움직임과 리듬으로써 표현하려는 영화를 의미했다. -
) 미국으로 중심축이동
19305
사운드 개발로 인해 포토제니 ↓
2) 절대 영화 ( 유성영화)
⑧
독일에서는 프랑스의 순수 영화 운동에 영향을 받아 1920년대 중반 절대 영화가 생겨났다.
절대 영화는②
“추상 영화의 한 형태로서 전적으로 비재현적 영화이며 이미지로써 형태와 리듬
같은 무형적 개념을 시각화”한다. 현실의 재현적(사실적 묘사) 이미지들을 배격하지 않지만,
특정한 사건이나 드라마 구조를 지닌 스토리를 부정하고 인간과 물체의 움직임을 리듬 속에서
③ ④
표현하는 것을 중시하며 시각적인 요소들을 음악적인 리듬으로써 표착하고 편집으로써 영화의
⑤
속도와 진행을 구성하는 영화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만 레이(Man Ray)의 <야성의 회귀
Retour à la raison, 1923), 독일 영화감독 발터 루트만의 <베를린 대도시의 교향악 Berlin,
Symphonie einer Großstadt, 1927) 등이 있다.
순수 영화나 절대 영화 넓게 보면 모두 실험 영화의 형태들이다. 대신 순수/절대 영화 모두
재현적 이미지를 거부하는 데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절대 영화는 주로 다다이즘 화가들이
가담한 아방가르드 영화운동으로 영화에서 시간성을 형식언어의 축으로 보며 리듬을 강조한
측면이 있다. 절대 영화의 중심 인물인 한스 리히터는 “시간을 새로운 매체의 미학적 토대”로
삼으며 시간적 진행에 따라 인지되는 예술형식인 영화에서는 리듬이 모든 영화적 표현 형식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리듬을 영화예술적 수단이자 영화의 결정적인 구성원칙으로 받아
들였고, 리듬과 편집과의 연관성을 중시했다. 쇼트 길이와 방향, 속도, 크기, 소리 등을 모두
고려해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의 생각을 이어받은 발터 루트만도 리듬을 강조했다. 화
면 속 운동, 곡선 드으이 운동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표현하여 리듬을 중시했다. 그의 영화
<베를린 대도시 교향악>은 절대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특정한 스토리나 사건 내용
이 없이 산업화된 대도시 베를린에서 현대식 빌딩 사이의 도로에서 자동차, 자전거 등의 복잡
한 운행과 많은 행인들의 걸음걸이가 리듬있는 움직임에서 보여지며, 거리의 소음 등 다양한
- 8 -
음향이 삽입된 대도시의 일상 생활이 묘사된다.
순수/절대 영화 모두 영화예술 운동의 일환으로 1920년대에 일어났던 아방가르드 영화의
의의
한 형태로서 간주되며, 실험영화의 선구적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영화역사에서 분명 가치
있는 시도로서 여겨질 수 있지만, 작품적으로 뛰어난 영화는 별로 많지 않다. 그러면, 순수 영
화와 절대 영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가시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현실의 기계적인 재생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
었다. 다시 말해 영상의 표현 가능성 확장이다. 영화는 탄생했던 19세기 후반부터 1920년대까
지 현실 재생의 문제에 대해 힘겹게 싸워야만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전통 예술과는 다
른 ‘영화적 묘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서 영화 고유의 미학과 언어를 발전시킨 것이다.
한계 몇몇 예술가들의 실험에
:
- 9 -
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바로 이것이 훗날 에이젠슈테인 몽타주 미학의
핵심인 갈등과 충돌의 원리이다. 충돌 몽타주
에이젠슈테인은 갈등과 충돌의 원리를 규명하기 위해 표의문자인 중국어를 끌어들인다.
한자(漢子)식으로 읽으면, ‘개’를 뜻하는 ‘견(犬)’과 ‘입’을 뜻하는 ‘구(口)’를 합하면 짖을
‘폐(吠)’자가 된다. 마찬가지로 ‘입’을 뜻하는 ‘구(口)’와 ‘새’를 뜻하는 ‘조(鳥)’를 합하면 ‘운
다’는 의미의 ‘명(鳴)’자가 된다. 이것이 서로 이질적인 것들을 충돌시켜 새로운 의미를 만
들어내는 몽타주의 원리이다. 에이젠슈테인은 예술의 기본원리란 갈등이며 존재의 모순을
밝혀내는 것이 예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관객의 의식에 모순을 환기시켜 올바른 견
해를 형성시키고, 서로 대립하는 것을 충돌시켜 정확한 지적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5)
이제 그의 영화 <파업 Strike>(1925)의 한 장면을 보자. 먼저 칼이 보인다. 육중한 소가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이 다음에 등장한다. 클로즈업으로 잡은 손들이 연결된다. 그러나 이
손의 주인공들은 도살당하는 소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도살 장
소와는 무관한 장소에 있다. 이어서 다시 한 번 소를 무자비하게 도살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어지는 장면은 총을 쏘는 군인들과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는 군중들을 잡은 것이다. 군중들
을 학살하는 군인들과 소를 무자비하게 도축하는 도살자의 병치. 이 두 개의 이미지는 영화
의 내용상 전혀 이질적이고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관객은 연상 작용을 통해 군중들이 학살
당하는 것과 소가 도살당하는 것을 통합시킬 수 있다. 곧, ‘군중들은 소처럼 일만하고 사용
가치가 떨어지자 살해당한다’라는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듯 에이젠슈테인은 쇼트들을 충돌시키고 병치시켜 관객을 자극하고 충격에 빠뜨린다.
우리는 앞서 지가 베르토프를 살펴본 바 있다. 그가 주창한 키노 아이론의 핵심은 인간의
키노 프라우다
눈보다 뛰어난 카메라의 눈을 통해 현실을 진실하게 포착하고 관찰하는 것이었다. 에이젠슈테 .
리얼리즘
인은 베르토프가 민중들의 삶을 관찰만 한다고 비판했다.6) 중요한 것은 관찰이 아니라 관객의
심리를 자극하여 일깨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예술작품이란 “관객의 심리를 경작하는 트
랙터”와 같은 것이었다.7) 이것은 관객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관객
이 연상 작용을 통해 얼마든지 능동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업>에서 민중의 학살과 소의
도살을 결부시키는 것은 관객의 지적 능력에 있다. 그는 영화 <10월 October>(1928)에서 이
것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영화 <10월>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러시아 제정을 타도했던
것은 10월 혁명이 아니라 2월 혁명8)이었다. 에이젠슈테인은 2월 혁명으로 임시정부의 수반이
된 케렌스키(Aleksandr Fyodorovich Kerenskii)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영화 속에서 케렌스
키는 모든 낡은 것들을 복원하려는 권력욕의 화신이다. 유물론자로서 에이젠슈테인은 신을 숭
배하는 우상들을 낡은 것의 상징으로 제시한다. 이어서 국가를 상징하는 훈장과 견장들이 제
시된다. 이어지는 장면은 2월 혁명으로 타도된 모든 것들이 다시 복원되는 것이다. 영화는 촬
영된 필름을 거꾸로 돌림으로써 이것을 보여준다. 부서졌던 황제 동상의 팔다리가 다시 붙여
지는 식이다. 황제의 동상이 완성되고 코르닐로프(Lavr Georgyevich Kornilov) 장군이 나온
다. 그는 2월 혁명의 성과를 분쇄하고자 쿠데타를 일으킨 반동적 인물이다. 그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은 말을 탄 나폴레옹의 모습과 병치된다. 이어서 케렌스키가 팔짱을 낀다. 그리고
- 10 -
팔짱을 낀 나폴레옹의 동상이 이어진다. 에이젠슈테인은 코르닐로프나 케렌스키 모두가 프랑
스혁명의 정신을 배반하고 황제가 되고자 했던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렇게 연
상 작용을 통해 관객의 지적능력에 호소하는 몽타주를 에이젠슈테인은 지적 몽타주라고 불렀
다.
에이젠슈테인은 관객을 자극하고 충격에 빠뜨리는 감각에 호소하면서도 관객의 지적 능력
을 신뢰했다. 그는 관객이 뜨거운 감성과 차가운 이성을 모두 동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스탈린 체제가 공고화되면서 그의 급진적 실험들은 부르주아 형식주의로 매
도당했다. 민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실험만 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스탈린주의 관
제 예술 이데올로기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도래한 이후 그는 더 이상 뛰어난 몽타주 영화들
을 만들 수 없었다.9)
☞ 더 읽을거리
김용수, 『영화에서의 몽타주 이론』, 열화당, 1996. (3부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
더들리 안드류, 『현대영화이론』, 조희문 역, 한길사, 1988 (3장 세르게이 아이젠슈타
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몽타쥬이론』, 이정하 편역, 영화언어, 1990.
1) 루돌프 아른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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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는 영화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재현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어
떻게 예술일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는 예술적 기능이 매체 자체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라
믿었다. 시는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아니라 시어가 중요한 것이다. 회화는 묘사하는 대
상이 아니라 선, 색, 구성 등 형식적 특성들이 우리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다.10)
아른하임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태 심리학(게슈탈트 심리학 Gestalt psychology)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루빈의 술잔’은 익숙한 그림일 것이다. 여기에서 흰 색을 주로
본다면 술잔이 보일 테고 검은 색을 주로 본다면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이 보일 것이다. 동
일한 시각적 정보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형태심리학은 현실의 재현이나 모방이 아닌 변형과 구성을 중요시했다. 우리는 시각적 정보
를 통해 우리 나름대로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을 눕혀놓고 발쪽을 향해
서 사진을 찍는다면 발은 그 사람의 머리보다 크게 사진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발이 사람
보다 작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진에선 발이 더 크게 나타난다. 아른하임에 따르면 사진은
근본적으로 2차원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기술적 한계야말로 사진을 이어받은 영화의
기술적 한계이다. 그러나 아른하임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기술적 한계야말로 영화가 예술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영화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아른하임이 왜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는 형태심리학만 갖고는 설명할 수 없다. 1920년대 유럽 아방가르드 영화의 물결을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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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는 봉건적인 카톨릭 가치관과 부르주아 사회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면서 당시 엄청난 센
세이션을 일으켰는데, 특히 <황금 시대>는 프랑스 거의 전역에서 1980년대까지 상영금지 당
하는 수난을 겪었다.
또한 초현실주의 영화들에 비해 비판의식은 약하나 더욱 치열한 실험 정신들을 지향하는 아
방가르드 영화(avantgarde)이 등장한다. 르네 클레르(Renè Clair)가 감독하고 만 레이(Man
Ray), 에릭 사티(Eric Satie), 프랑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 앙드레 브르통(Andrè
Breton) 등이 제작에 참여한 <막간 L’Entr’acte>(1924)은 아방가르드 영화의 전형으로 남게
되는데, 이 작품은 카메라의 이동과 렌즈의 조작에 따라 영화가 전혀 새로운 이미지와 의미를
창출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밖에도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페르낭 레제
(Fernand Léger), 마르셀 뒤샹(Marchel Duchamp) 등 당대에 각 예술 장르를 이끌던 전위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넘어 영화에 뛰어들면서 독특한 실험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이들
의 영화들은 판독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표현 영역을 넓히는데 공헌하며, 이후 전
위 영화의 계보를 만들어내는데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다.11)
한편, 당시의 실험영화들 중에서도 화면의 미적 표현이나 조형적 구성에 치중했던 영화들은
특별히 인상주의 영화 혹은 탐미주의 영화로 분류되었다. 극중인물의 지각적 경험, 그들의 시
각적 인상을 화면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다. 아벨 강스(Abel Gance)와 마르셀 레르비에
(Marcel L’Herbier)가 그 대표적 감독인데, 특히 아벨 강스는 1923년 작가 블레즈 상드라스
(Blaise Sandras)와 <바퀴 La Roue>를 만들어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1927년에는 영화
사에 남을 명작 <나폴레옹 Napoléon>을 완성해 프랑스 무성 영화의 절정을 이루었다는 평가
를 받기도 했다. 이 두 작품의 시나리오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지만, 눈부신 빛의 조화와 여러
시각적 효과들로 이루어진 영상은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영화의 이
런 전통은 유성영화가 등장하면서 1930년대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 영화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1920년대에 유럽에서 영화를 연출한 사람들이 직업적 영화감독만 있었던 것은 아니
다. 그들은 영화가 시, 회화, 사진의 확장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영화는 객관적인 세계의 묘사
가 아니라 등장인물의 주관적인 감성과 심리 상태에 의해 포착된 현실 이미지들과 무의식적인
욕망 및 꿈의 세계를 이미지로 표현하고자 했다. 현실의 도덕적, 윤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상
상 속의 환상 세계, 비논리적인 시간, 공간 개념으로 진행되는 장면들을 보여주었다. 페르낭
레제의 <기계적 발레 Ballet mécanique>(1924)는 어떠한 내용도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
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간간이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어떠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 움직이는 형상으로서만 존재한다. 사람의 얼굴이 다중노출(multiple exposure)12) 기
법을 통해 여러 형상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13)
아른하임이 말한 기술적 한계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다중노출, 디졸브14), 패스트 모
션, 슬로우 모션, 그리고 우리가 다음에 살펴보게 될 몽타주 등 영화의 거의 모든 기법들을
옹호했다. 그가 기술적 한계라고 불렀던 것은 영화란 현실을 재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11)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런 영화의 흐름들은 당대 예술의 흐름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상업성으로 무장
한 할리우드 영화가 유럽에 힘을 발휘하면서 이 같은 흐름들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50년대 이후
새로운 영화들의 등장으로 조성된 분위기 아래에서 다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12) 여러 가지 영상을 겹쳐 인화하여 새 영상을 만들어내는 특수효과.
13) 초현실주의 영화, 아방가르드 영화, 인상주의 영화의 구분선은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모두
를 통칭해서 아방가르드 영화, 전위영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상 종이 한 장 차이이다.
14) 영상의 이중인화로 인해 앞의 쇼트(shot)가 서서히 사라지고 뒤의 쇼트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 잠시
동안 두 쇼트가 겹쳐져 있게 되며, 흔히 오버랩(overlap)이라 부르기도 한다. 쇼트란 카메라가 찍기
시작한 순간부터 멈출 때까지 연속적으로 기록된 영상으로서 편집되지 않은 필름 조각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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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다. 즉, 영화는 현실을 변형시키고 새로이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른하임이 기술적 한
계로 지적했던 것을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무엇보다도 이 당시가 무성영화, 흑백영화의
시대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선,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영화는 ⓵ 평면적인 스크린
에 영사되기 때문에 완전한 입체감을 표현하기 어렵다. ⓶ 둘째, 색채를 결여하고 있다. 모든
색채는 흑색과 백색, 다양한 회색으로 환원되어 나타난다. ⓷ 셋째, 관객이 스크린에 가까이
혹은 멀리 위치한 정도에 따라 물체가 다르게 보이고 움직임도 다르게 느껴진다. 스크린의 좌
우편에 치우쳐 앉을 때에 물체는 더 왜곡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 밖에도 ⓸ 편집으로 시공간
적인 연속성이 보장되지 않으며, ⓹ 시각을 제외한 청각, 후각과 촉각도 표현할 수 없다.15)
그러나 아른하임은 이것을 “자연으로부터의 고마운 이탈”이라고 말했다.16) 조명의 각도, 명암
대비, 그림자 효과 등 조명기법은 현실을 변형시킬 수 있고,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주관적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
3) 독일 표현주의 영화
아마도 이러한 주관적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들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들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주의(expressionism)는 1910~1920년대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예술계를
풍미한 문예사조로서 기술문명에 대한 비판의식과 실존에 위기감을 느낀 예술가들이 기존의
사실-자연주의 및 인상주의를 배격하고 감정표출과 주관적 표현을 추구했던 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은 회화에서 시작되어 다른 조형예술에 이어 문학, 연극, 영화, 음악에도 폭넓게 확산
되었다.
표현주의 영화들은 예술적 요구가 높은 지식인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당시 미술계를 풍
미하던 표현주의 미술로부터 많은 요소들을 끌어왔다. 영화에서는 장치와 소품, 분장을 비롯
하여 전반적인 미장센에서 표현주의 회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고, 심지어 삐딱하게 쓰인 자막
들에도 표현주의 미술의 영향이 있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 장치에서는 기울어지고 삐죽삐죽한
건축물과 경사진 평면, 휘어진 길과 명암 대비가 뚜렷한 조명 등이 자주 활용되었다. 표현주
의 영화에서는 이러한 시각적 요소들이 전면에 대두되어 특별한 의미를 띠게 된 것이 기존의
영화들과는 다른 점이었다.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영화는 바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The Cabinet of Dr.
Caligari>(1919)이다. 이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려는 의지가 거의 없어 보인다. 인
공적인 세트에서 촬영했으며, 의도적으로 입체감을 축소키셨다. 무성흑백영화이기에 당연히
색채가 결여되어 있으며, 대사도 자막으로만 전달된다. 명암대비가 강한 조명은 흰 색과 검은
색의 공간을 더욱 명징하게 보여준다. 배우들의 과장된 분장이나 몸짓도 그들이 말하려는 것
보다 행동하는 것에 주목을 끌게 한다. 또한 이 영화는 세트에 새로운 역할과 의미를 부여한
다. 이전만 해도 영화의 세트는 단지 배경으로서 사건이 진행되는 장소의 역할만 했으나, 이
영화에서 세트는 영화의 주된 분위기를 말해주며, 영화가 말하려는 전체적 상황, 즉 인물들이
처한 절망과 비극 속에서 출구 없는 상황에 대해 상징성을 띤 조형물로 나타나고 있다. 거의
기하학적으로 보이는 이 영화에서 현실감을 느낄 관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시기의
유럽 무성영화가 모두 이런 식으로 연출되지는 않았다. 이 영화는 한 극단적인 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른하임은 현실감을 결여하고 있는 이런 속성이야말로 영화를 ‘현실의
단순한 복제’에서 구원해주는 길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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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른하임이 아방가르드 예술의 세례를 받은 유럽 무성영화만을 옹호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는 같은 시기 할리우드의 무성영화, 특히 가장 대중적인 찰리 채플린의 영화도 찬양했다. <황
금광시대 The Gold Rush>(1925)의 그 유명한 ‘구두 먹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구두를 게걸
스럽게 먹고 있는 굶주린 사람을 보여주었을 뿐이라면 그것은 그저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장
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채플린은 가난을 묘사하는 데 있어 부자들이 먹는 생선과 닭고기
를 관념적으로 끌어들인다. 생선과 닭고기는 물론 이 장면에 없다. 그러나 닳아빠진 구두는
생선의 가시로, 구두에 박힌 못은 닭의 뼈로, 구두끈은 스파게티를 연상시킨다. 아른하임은 채
플린이 이처럼 형태적인 유사성을 관념적으로 시각화하면서 ‘배고픔 대 안락한 삶’이라는 인
간 주제를 진정으로 영화적인 방법으로 제시했다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이 장면의 위대한
예술성이라고 극찬했다.17) 또한 아른하임은 마지막 장면에서 채플린이 여자와 춤출 때 허리끈
에 묶인 개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행복과 성공의 순간에도 악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이 암
시된다고 본다. 그가 이런 장면들에서 각별히 주목하는 것은 채플린이 영화적 언어를 통해서
분명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른하임은 1920년대의 무성영화야말로 영화예술의 정점이라고 생각했다. 무성영화에 근거
한 그의 영화미학은 유성영화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유성영화를 적의에 찬 시선으로 바
라보았다. 배우들이 말을 하게 됨으로써 주제와 대사에 모든 것이 맞춰지는 것을 비난했다.
다루려는 내용을 더 중요시 여김으로써 영화의 모든 표현성과 조형성이 파괴된다고 주장했다.
영화가 점점 현실을 닮아간다는 것은 ‘현실의 단순한 복사’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라
고 비판했다. 카메라가 점점 더 현실을 기록하는 기계로 전락하는 것을 한탄했다.
영화이론사에서 아른하임은 교과서에 나오는 박제된 이론가로 치부되거나, 영화의 기술적
진보를 부정했던 괴팍한 미학자쯤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영화미
학자가 결코 아니었다. 영화를 단지 현실의 반영이나 기록이 아니라 현실의 창조적 변형이라
고 생각했던 많은 영화 예술가들에게 그는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왕자웨이(왕가위)의 <타
락천사 墮落天使>(1995)는 그 수많은 예들 중 하나일 뿐이다. 왕자웨이는 영화 전편에 걸쳐
형상의 왜곡을 주기 위해 광각 렌즈18)를 사용했으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슬로우 모션과 패
스트 모션이 교차한다. 물 흐르듯 유영하는 왕자웨이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아른하임이라면 옹
호하지 않았을까? 컬러영화와 유성영화의 시대에도 아른하임의 미학적 유산은 무시할 수 없는
한 축으로 남아 있다.
☞ 더 읽을거리
더들리 안드류, 『현대영화이론』, 조희문 역, 한길사, 1988. (제2장 루돌프 아른하임)
루돌프 아른하임, 『예술로서의 영화』, 김방옥 역, 기린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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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화미학의 형성 5: 리얼리즘 영화의 미학
1) 앙드레 바쟁 더형식적
조금
루돌프 아른하임에서 소비에트 몽타주론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형식주의 전통에 서 있다. 앙
드레 바쟁(André Bazin)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는 영화의 소명이 실제 현실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감독의 주관적인 견해는 배제될수록 좋은 것이고,
소재를 작위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최소한으로 제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9) 근본적으로
카메라가 현실의 모습을 담는 한, 영화는 태생적으로 리얼리즘적일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었
다.
앙드레 바쟁은 1918년에 태어나 1958년, 마흔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40년대 초반에서 50년대 후반까지 2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영화에 대한 수많은 글을
썼던 비평가였다. 그가 쓴 글들은 『영화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e cinéma?』라는 네 권
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그는 이 책의 완간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영화의 리얼리즘을 공부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영원한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바쟁이 말하는 리얼리즘은 일반적인 예술의 리얼리즘과는 좀 다르다. 우리는 문학이나 여타
예술에서 형식을 중요시하면 형식주의, 주제나 내용을 중요시하면 사실주의, 즉 리얼리즘이라 미이라 콤를렉스
고 한다. 그러나 바쟁은 주제와 내용을 떠나서 영화는 근본적으로 리얼리즘적 예술이라고 생
각했다. 그 이유는 영화가 사진의 특성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화가는 현실의 인물이
나 사물, 자연을 유사하게 그릴 수는 있다. 그러나 캔버스 앞에 있는 사물이 현실 그대로의
것은 아니다. 바쟁에 따르면 사진의 능력은 현실 세계의 상(像)이 인간의 창조적 개입 없이 자
동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에 있다.20) 사진의 강력한 지표성은 카메라 앞에 ‘사물이 거기 있었음’
을 증명한다.21) 그래서 사진의 객관성은 모든 회화에는 결여되어 있는 신뢰성을 부여한다. 영
화는 여기에 움직임을 더함으로써 사진의 객관성을 시간 속에서 완성한다.22) 시간이 없다면
4 시간적대현
움직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쟁의 이러한 생각은 영화에는 고유한 리얼리즘적 미학이 있다는 사고로 발전한다. 대표적
인 것 두 가지만 들어보자면 롱 테이크(long take)와 딥 포커스(deep focus)이다. 롱 테이크
란 쇼트를 나누지 않고 일정 시간 동안 길게 지속시키는 것이다. 딥 포커스란 포커스를 한 곳
에만 맞추지 않고, 화면의 앞에서 뒤까지 모두 뚜렷하게 맞추는 것이다.
시공간적 리얼리티를 보존하고자 하는 바쟁의 미학은 롱 테이크와 딥 포커스가 결합할 때
최고의 조합을 만들어낸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으로 손꼽히는 <시민 케인 Citizen
Kane>(1940)의 한 장면을 보자. 케인의 양부모가 케인의 재정적 지원을 맡을 대처 씨와 계약
을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화면 전경에 앉아 있는 케인의 어머니와 대처 씨, 중경에 서
있는 케인의 양아버지, 그리고 저 멀리 후경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어린 케인의 모습이
다 뚜렷한 포커스로 맞추어져 있다. 딥 포커스가 쓰인 것이다. 이 장면 역시 쇼트를 나누지
않고 롱 테이크를 활용한다. 바쟁은 쇼트를 잘게 나누는 몽타주는 감독이 관객에게 마땅히 봐
야 할 것을 선택해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어느 한 인물에게만 카메라의
포커스를 맞춘다면 그것은 그 쪽만 보라고 감독이 미리 관객의 시선을 정해주는 것이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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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 장면에서 감독이 선택해 준 대로가 아니라 전경과 중경, 후경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우
리 스스로 선택해서 보게 된다.
바쟁은 영화가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라고 여겼다. 그 창문을 들여다보는 것은 물
론 관객이다. 여기에서 창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두 감독이 정해준다면 관객의 역할은 축
소되고 말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이 그토록 찬미했던 몽타주는 바쟁에게는 감독의 횡포였다.
몽타주는 감독이 미리 제시해주는 의미만을 따라갈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바쟁이 딥 포커
스와 롱 테이크를 중요한 리얼리즘 미학으로 생각한 것은 관객이 그것을 통해 영화에서 찾고
자 하는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바쟁은 이러한 리얼리즘 미학이 관객
의 민주적 사고를 확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쟁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10여 년은 영화기술사에서 일대 도약이 일
어났던 시기였다. 텔레비전의 급속한 보급이 낳은 경쟁 때문에 영화화면은 빠르게 컬러로 바
뀌었다. 스크린의 크기도 더 넓어져서 4:3의 표준화면은 16:9 이상의 와이드 스크린으로 대체
되었다. 이미 1920년대 후반에 도입된 사운드는 이제 원숙한 경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바쟁은
이 모든 기술적 혁신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우리가 보는 현실 세계가 컬러이듯이 영화가 컬러
로 바뀌는 것, 우리가 말을 하고 소리를 듣듯이 영화도 그렇게 하는 것은 바쟁이 그토록 원했
던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배가시키는 것이었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영화의 기술적 한계야말로
영화의 예술성을 보장한다고 말했지만, 바쟁은 반대로 영화의 기술적 확장은 그가 꿈꾸는 리
얼리즘을 실현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바쟁이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흘렀다. 그는 영화가 재현한 대상은 실제와 같은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고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카메라 앞에 ‘사물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바쟁의 신념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통용될 수 있을지는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컴퓨터 그래픽과 디지털 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가상의 이미지와 현실
을 분간하지 못하게 할 정도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바쟁의 사고를 넘어서는 또 다른 리얼리즘
이 필요할 것 같다.
2) 네오 리얼리즘
네오 리얼리즘(Neo Realism)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1940년대 초 이탈리
아 비평가들의 글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이 용어는 이탈리아 영화의 일상적인 관습에서 탈
피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대들의 영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1940년 이전, 그러니까 무솔리니 통
치하의 영화산업은 웅대한 대하 사극물과 감상적인 상류계급 멜로드라마의 제작에 편중되었
다. 그리고 많은 비평가들이 이를 인위적이고 퇴폐적이라고 느꼈다. 새로운 관점의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영화들이 리얼리즘을 지향하도록 즉, 당대의 사회와 습관
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대표적인 영화로는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의 <흔들리는 대지 La Terra Trema>(1949),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담아낸 로베르
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의 <무방비 도시 Roma, città aperta>(1945)23),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의 <구두닦이 Sciuscia>(1946), <자전거 도둑 Ladri di
biciclette>(1948) 등이다.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여건들이 이러한 경향의 영화들을 태어나도록 했다. 새로운 이탈리
23) ‘무방비 도시’라는 의미는 함락이 확실시 되는 도시에서 무의미한 전투 및 학살을 피하기 위해 방어
를 포기 하는 군사용어이다. 즉 로마가 무방비 도시라는 의미인 이 제목은, 2차 대전 당시 무솔리니
가 실각하자 독일군이 점령한 로마의 현실을 드러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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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의 감독들은 이 사조에 기꺼이 참여했고 이들은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들 영화는 점차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2차 대전 이후의 세계의 정서와도 관련이 있다.
이들 영화는 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1945년 로마의 거대 복합 스튜디오인 치네치
타(Cinecittà)가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었기 때문에 세트는 자연스럽게 부족할 수밖에 없었으
며 기자재도 귀한 시절이었다. 때문에 네오 리얼리즘의 영화들은 실제 장소에 의존했고 그들
의 영상은 다큐멘터리처럼 가공되지 않은 거친 경향을 띄게 마들었다. 거리나 개인 건물 내에
서의 촬영은 할리우드 영화와 다른 스타일로 촬영되었고 유명 배우 보다 비직업적적인 배우들
을 자주 기용했다. <자전거 도둑>의 배우는 감독이 한 공장의 노동자를 기용한 것으로 유명하
다. 즉 그가 움직이고 앉는 모습, 훈련된 배우가 아닌 노동하는 사람들의 손짓과 몸짓을 영화
속에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제작의 경향은 연기와 배경에 대한 상당한 즉흥성을 만들어 냈으
며, 이들 영화가 유연해지는데 결정적으로 작동했다.24)
네오 리얼리즘의 경향의 영화들이 갖는 의미는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복잡한 구성
의 영화에 반발하여 감독들은 서사 연결을 느슨하게 했다. 그래서 관습적인 이야기 구성 대신
파격적인 구성이 주를 이루었고 비인과적으로 장면들이 연결되었으며 닫힌 결말 대신 열린 결
말을 선호했다. 인물 행위의 동기들은 주로 경제적, 빈곤, 실업, 착취로 그려지면서 이들 영화
는 2차 대전 전후 황폐해진 패전국의 모습을 용어 그대로 사실적으로 반영하기 적합한 것으로
판단되기 시작했다. 요컨대 자연스럽게 황폐한 국가의 모습과 사회상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
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삶이 아주 혼란스럽고 빈곤과 실업이 만연하며 물가폭등이 통제되지
않는, 패배하고 점령된 나라에서 시작한 네오 리얼리즘의 이런 양식은 이후 다른 유사 나라에
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경제적, 문화적 요인들이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을 유지시키기 시작했지만, 그것들이 이 운
동이 종식되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전후 이탈리아가 다시 번영을 맞기 시작하자 정부는
당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영화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1949년 이후 이탈리아 정부는 검열
과 압력을 가했으며 이런 경향의 영화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방대한 규모의 이탈
리아 영화제작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고 네오 리얼리즘은 더 이상 자유로움을 누릴 수 없었
다. 그리고 유명세를 얻은 이 경향의 감독들은 사회보다 개인적인 관심사로 눈을 돌리기 시작
했다. 로셀리니는 기독교적인 인본주의와 서구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데 시카는 감상
적인 로맨스로, 비스콘티는 상류사회 풍속도로 관심을 바꾸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네오
리얼리즘 운동의 시작과 종말을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에서 데 시카의 <움베르토 D
Umberto D>(1951)로 상정한다. 짧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네오 리얼리즘은 고전적인 할리우
드에 대한 반기였으며 동시에 사회상을 영화가 그대로 반영함으로써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영화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정신은 프랑스의 새로운 감독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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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네오 리얼리즘의 대표적인 감독이라 하면 앞서 언급한 세 명의 감독(루키노 비스콘
티, 로베르토 로셀리니, 비토리오 데 시카)을 언급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 활동했던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 이탈리아 비평가들은 그를 네오 리
얼리즘의 배신자로 공격했지만, 펠리니는 “네오 리얼리즘은 정직한 눈으로 현실을 들여다봄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의 종류는 사회 현실뿐 아니라 정신적 현실, 형이상학적 현실, 사람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때론 현실은 시를 필요로 한다.”라며 방어했다.
분명 그의 영화는 네오 리얼리즘과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대표작인 <길 La
Strada>(1954)을 보면 양식화된 연기와 서정적인 이야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펠리니를 네오 리얼리즘과 이후 이탈리에서 등장하는 영화들과의 다리 역할을 한 감독
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유물론적 관심사에서 정신적인 관심사의 가교로 말이다.
☞ 더 읽을거리
더들리 안드류, 『현대영화이론』, 조희문 역, 한길사, 1988. (6장 앙드레 바쟁)
로버트 스탬, 『영화이론』, 김병철 역, K-books, 2012. (95~106쪽. ‘리얼리즘의 현상학’)
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박상규 역, 시각과 언어,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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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크라카우어의 사회문화적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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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이 아니라, 묘사된 표면적 현실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현실을 매개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근거로 크라카우어는 평범한 대중
영화들의 우습고 환상적인 사건과 이야기들의 전개되는 비현실적 과정 속에서 사실상 현실로
부터 도피하려는 소망들이 드러난다고 본다. 크라카우어가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에 기고한
「작은 여점원이 영화관에 간다」(1927) 에세이 시리즈와 「1928년의 영화」(1928) 등이 이런 생
각하에서 쓰여진 영화비평들이다.
이런 비평을 위해 그가 주목한 것은 ‘평균치 영화들’이다. 그 이유는 대중들이 꿈꾸는 환상
은 수준 높은 예술영화나 사회현실의 문제를 묘사하는 진지한 영화에서가 아니라, 바로 수준
낮은 영화들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크라카우어는 대중적 오락영화 속의 환상적이고 비현
실적인 이야기 속에서 역설적으로 현실도피적인 꿈들이 있다고 보며, 이런 것들이야말로 ‘대
중의 백일몽(daydream)’들로서 영화에서 황당한 이야기나 모험담, 괴담 혹은 코미디를 통해
우회적으로 묘사된다고 본다. 이렇게 영화 속의 현실 묘사에서 표면과 본질의 역설적인 관계
에 대해 크라카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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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크라카우어의 비평은 평범한 오락영화들 속에서 대중의 비현실적 환상과 꿈을 파악
하고, 사회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나 숨겨진 정치적 메시지를 읽어내려고 했다. 이런 비평에 따
라 그는 비평가의 역할에 대해 “평균치 영화들 속에 잠재된 사회적 의도들을 끄집어내어 분석
하고 드러내는 데에 있다”고 본다.
2) 역사영화 비평
백일몽을 보여주는 대중영화들의 오락적 기능 뒤에 숨은 것은 보수적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보수적 이데올로기는 건전한 사회비판을 억압하는 기능이 있고, 후에는 비판기능을 마비시키
게 된다. 크라카우어는 대중영화들이 사회비판성을 띠기 어려운 이유를 무엇보다도 영화가 자
본주의 생산체제의 구조에 철저히 종속된 상품인 점에서 찾는다. 영화는 대중의 꿈에 봉사하
는 오락물로 생산되는 소비상품으로서, 대다수 관객인 소시민 계층과 하층민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서 부유층 및 사회 상류층을 비난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비판이 영화 제작비의
제공자인 자본가의 존재를 위협할 정도까지 가지는 못하는데, 그것은 영화의 제작과 상영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 체제와 그 기본 질서는 손상될 수는 없는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크라카우
어는 영화에서 생산과 사회비판의 한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3) 정신분산의 의식
크라카우어는 대도시의 영화관과 대중관객의 영화 관람행위에 대해서도 문화비평적인 글을
남겼다. 여기서 그가 자주 사용하는 중심 개념은 ‘정신분산’으로 대중의 오락영화 수용방식을
틱징짓는 용어이다. 당시의 에세이 「정신분산의 의식(Kult der Zerstreuung」(1926)에서 크라
26) 역사가 시각적 스펙터클로 재현되어 관객의 시각적 쾌락에만 봉사하고 내용은 빈약하다는 의미.
27) 크라카우어의 이러한 경우의 예로 <전함 포템킨>을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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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어의 표현에 따르면, ‘정신분산’은 우리 세계의 “지배되지 않는 혼돈의 반영”으로 그가
20년대 영화문화를 비판하는 핵심적 키워드이기도 하다.
영화가 20년대에 대중문화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면서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서는 화려하고
요란한 장식이 붙은 대형 영화관들이 생겨 났다. 이런 영화관들은 집단 관람의 형식으로 수용
되는 영화 매체의 특징적 공간이다. 이런 대중 영화관에서 오락영화, 삼류영화들을 보여주며
중산층·노동자 관객에게 매일 밤 싸구려 여흥을 제공하는 현상에 대해 크라카우어는 여기서의
영화들은 집단적 오락물로서 관객의 정신분산에 호소한다고 한다. 이제 이상주의 문화는 유령
처럼 기웃거리기나 하고, 매일의 노동에 지친 소시민·노동자들은 힘든 일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정신분산적인 오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크라카우어에게서 “정신분산은 사회질서 속에
확고하게 정착하지 못한 부류에게 욕구와 사회행위로서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며, 여기서 이
런 부초(浮草)28) 같은 부류는 청소년과 여성·사회의 아웃사이더들, 또 사회의 계급구도에 명백
하게 포함되지 않는 이들을 말한다.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이런 대중의 영화관람 행위를 크라카우어는 ‘정신분산의 의식’이라
고 보며, 이런 현상은 지방에서보다 대도시 베를린의 관객에게서 더욱 심하다고 말한다. 그리
고 이제는 세계 어디서나 유사한 취향을 가진 관객층이 형성되어 사장부터 여점원까지 폭넓게
포함되는 “동질적 세계도시 관객”이 공유되는 틀에 짜인 생각과 지향성에 대해 ‘대중적 취향’
이 생겨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심리적 욕구 해소를 위해 영화 관람을 하는 세계도시 관객들이 관람하는 영화가 상영되는
곳은 주로 대도시의 대형 영화관들이다. 대개 시내 중심지에 있는 이런 영화관 건물들은 화려
하게 장식되어 대중들을 꿈과 환상의 궁전으로 유혹한다. 크라카우어는 이런 영화관 건축물
자체에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과 정신분산적 소비의 연결고리를 보기 때문에 영화관에 이미
‘반동적 경향’이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더구나 이런 극장에서 상영되는 대부분의 대중적 오락
영화들은 ‘현실도피적’인데, 관객이 현실과 대결하게 하지 않고 현실에 대해 눈을 감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와 영화관, 그리고 관객에 대한 사회학적 관찰이라고 할 수 있는 크라카우어의 영화 에
세이들은 20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향의 변화를 추적하고, 대중영화에 내재된 보수적 이데
올로기를 간파하고 있다.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대중 집단의 욕구와 사회 행위가 오락과 소비
를 원하는 점에서 크라카우어에게 영화는 ‘정신분산의 문화’이다. 정신분산을 원하는 이들에게
영화가 당대의 일상 문화로 받아들여지는 현상을 보면서 크라카우어는 그 특징으로 일회적이
고, 소비적이고 반사고적이며, 현실로부터 도피주의 성향이 있음을 본다.
“시대의 진단으로서 영화비평”이라고 보이는 크라카우어의 20년대 영화문화 에세이들은 현
대 자본주의 사회현상에 대한 통찰력과 문화에 대한 폭넓은 안목으로부터 비롯된 선구적인 비
평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문화연구 관점에서는 크라아쿠어의 에세이들에 대해 비판적인 견
해가 있다. 노동이 분업화되고,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는
기계가 된 인간들에게서 정신분산의 심리적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잠시의 현실 망각적인
백일몽이란 점을 근거로 영화의 보수성을 지적하는 크라카우어의 견해 역시 보수적이라는 비
판이 있다. 대규모 조직과 체제 하에서 반복적인 노동을 하는 현대의 대도시인들에게는 현실
로부터의 이탈 욕구와 정신분산적 오락의 필요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로 대중영화의
현실도피적 기능은 전 세계적 현상이고, 할리우드 영화에서 더욱 현저하다.
크라카우어는 20년대 영화 속에 내포된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며 대중의 의식을 파헤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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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는 40년대 후반에 커다란 결실을 맺었다. 히틀러의 등장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뉴욕
현대미술박물관의 연구 위촉을 받아 독일 영화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바이
마르 공화국 시대(1919~32)의 영화들과 주된 관객이었던 중산층의 의식과 심리적 성향을 분
석하여 유명한 영화비평서 『칼리가리부터 히틀러까지 – 독일 영화의 심리학적 연구 1919~3
2』를 1947년에 내놓았다. 이 비평서에서 그는 20년대 성공적인 독일 영화들을 비평하여 정치
적 마비 상태에 빠져 히틀러에게 끌려간 독일 중산층의 의식을 분석한다. 이 책은 영화에 내
재된 이데올로기와 무기력하게 함몰되었던 수용자의 성향을 사회심리학적으로 분석한 훌륭한
실례로 여겨진다.
8. 영화와 발터 벤야민
1) 현대사회와 영상인지
19세기 말에 태어난 영화는 당시의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빠르고 쉴새 없이 돌아가
는 움직임을 통해 연속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영화의 속성은 대도시의 현대인의 생활이나 세
계인식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와 영상 이미지의 관계에 관한 언급은 독일의 사
회철학자 게오르그 짐멜의 비평적 에세이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문화현상학적 관점으로부터 현대사회의 현상들에 관해 예리한 관찰을 남겼던 짐멜은 「대도
시와 정신생활」(1903)에서 대도시인들에게서 두드러지는 근본적인 심리적 상태를 “외적·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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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들의 급박하고 끊임없는 변화로부터 생겨나는 신경활동의 상승”이라고 하며, “교차되는
상(象, image)들의 급박한 쇄도, 한눈에 파악되는 것 속에서의 현저한 간격, 몰려드는 인상들
의 무방비성”이 대도시에서 인지의 구성 요인으로 본다.
일상생활에서 빠른 템포와 가시적 현상들의 변화무쌍한 이미지들은 영화 영상의 특징인 점
에서 영화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대도시 생활의 템포와 인상에 상응하는 매체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저서 <창조적 진화>(1907)에서 인간의 사고과정을 영화와 비교하면서 영화
기술(cinematography)을 물질 인식에 대한 기본 원리로 이해했다. 그는 빠르게 교차되는 이
미지들을 영화의 본질로 보며 “분리된 여러 개별적 이미지들을 조합하고, 기구를 이용해서 움
직임을 재구성하는 영화기술의 방법은 우리 인식의 메커니즘에 상응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사고와 영화적 방식의 유사성에 대해 베르그송은 이렇게 말한다.
인지, 지각, 언어도 일반적으로 그렇게 진행된다. 우리가 생성을 생각하든 혹은 그것을 표현
하든 혹은 그것을 인지할지라도, 우리가 하는 것은 우리 내부에서 일종의 영사기를 돌아가게
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한 것을 요약하자면 우리의 일상적 인식의 메커
니즘은 영화적 성질(cimeantographical kind)을 지닌다고 하겠다.
2)영상의 인지
짐멜과 베르그송이 언급한 현대사회에서 인지 조건과 영상의 인지에 관해 인간 사고의 영화
적이고 만화경적 성격은 벤야민의 영상이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벤야민은 현대사회의
대도시에서 영상은 인지를 ‘충격효과(Chockwirkung)’ 속에서 설명하고 이를 ‘정신분산 속에
서의 수용’으로 이해한다. 그가 영상에 대하 언급하는 곳은 주로 30년대 에세이인 「사진의 소
사」(1931),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5),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1939)에서이다.
이들 에세이에서 벤야민은 집중적으로 영상이론을 전개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설
명하고 있어서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과 영화에 대해
비교적 많이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영상이론에서 심층적인 측면이 드러나는 곳은 「사
진의 소사」와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이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은 산업화 된 현대사회에서 영상의 인지는 ‘충격’
속에서 이루어지며, 인간의 지각과 통각29)에 간과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바로
이것이 짐멜이 대도시 에세이에서 말한 것과 상통하며, 베르그송이 말한 인식의 ‘영화적 방식’
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29) 여기서 말하는 ‘통각(統覺)’은 경험과 인식을 의식화, 통일화하는 의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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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이러한 영상을 보는 사람에게 연상의 흐름은 끊임없는 영상의 변화로 인하여 곧 중
단되어버린다. 모든 충격효과와 마찬가지로 상승된 정신의 현재를 통해서 포착되는 영화의 충
격효과는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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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이렇게 벤야민은 충격효과와 정신분산을 연결시키고 있는데, 본래 영화 수용에서 ‘정신분산’
의 개념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가 1920년대 영화문화 비평에서의 핵심어로, 특히 대중영화
비평을 하는 곳에서 자주 사용하곤 했다. 다만, 벤야민은 크라카우어가 주로 대중의 영화수용
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정신분산 개념을 현대예술의 수용에 대해 폭넓게 사용하면서 그가
모더니티의 특징으로 여기는 통속적인 미적 경험을 설명하는 데에 주력한다.
3) 벤야민의 영상해석
영화 카메라의 표현력은 무엇보다도 카메라의 뛰어난 현실 모사 능력에 근거한다. 그러나
영화 카메라에 의해 만들어지는 영화 영상에서 현실상은 현실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다. 이러
한 주장은 1920년대와 30년대 전반 조형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러시아의 영화감
독이자 이론가인 에이젠슈타인은 영상 조각을 조합하는 몽타주를 통해 새로운 현실상의 창출
이 가능함을 입증했고, 독일의 예술심리학자 루돌프 아른하임은 <예술로서 영화>(1932)에서
기술적 한계로 인해 카메라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영화 영상이 ‘현
실을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에서 영화의 예술적 가치를 보았다. 벤야민은 여기서 한층 더 나
아간다.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카메라의 사물 포착 능력을 높게 인정하며, 영화
의 특징은 “카메라의 힘을 빌려 주변세계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다.”고 한다. 특히 그는 클로
즈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화 카메라의 집중적인 세부 묘사력으로써 사물의 세부도 분석가능
해지면서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주목하는 세계가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통각의 심화”를 말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카메라가 사물 내부를 침투하여 세부 묘사를 할 수 있는 능력,
즉 클로즈업과 공간의 확대 및 시간의 연장을 가져올 수 있는 영화의 능력에 주목했다. 클로
즈업은 평상시에 불분명한 것들을 분명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물질의 새로운 구조를 드러내
어 보여주므로, 공간을 확장 시킬 수 있다. 고속 촬영은 이미 알려진 동작의 원인을 드러내고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동작을 보여줄 수 있으므로, 움직임이 연장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벤야민은 카메라에 의한 현실상은 육안으로 보는 것과 다른 성질의 것이라고 간주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카메라를 통하여 비로소 시각적 무의식 세계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영
화 카메라의 촬영기법과 편집술을 통해 인위적으로 재구성된 시간·공간 속에서 무의식 세계의
매개가 가능함을 설명한다.
여기에 근거하여 벤야민은 영화에서 특별한 요소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현실의 알레고
리적 해석이다. 벤야민은 영화 화면에서 보이는 인물과 주변 요소들의 융합적 역할을 강조하
며 “필름은 어떻게 물질이 인간과 함께 연기하는가를 보여줄 수 있는 최초의 예술수단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유물론적 묘사의 뛰어난 수단일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충격 효과의 알
레고리적 해석을 허락하면서 영화의 모사적 능력은 특별한 기법을 확장시켜주며 현실의 환상
을 창조해내는 복합적이고 고도의 인공적인 방법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영화는 우리가 예술작
품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장치로부터 자유로운 현실의 측면”을 보장해준다고 말한다.
벤야민이 현대 생활의 기술적 매개에 있어서 영화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도 그 때문이
다.
지금처럼 살펴봤듯이 벤야민의 영상이론에는 동시대 영화이론가이자 비평가였던 벨라 발라
즈와 크라카우어의 이론과의 연관성도 발견된다. 특히 국내에서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이 주로 언급되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베르그송과 동시대 이론가들인 발라즈와 크라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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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로부터 영감을 얻고 영향을 받은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의 개념은 명확한 현상
이해에서 출발하면서도 이론 형성에 있어서 다소 모호하고 신비주의적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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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오늘날 블록버스터라는 말은 낯선 외래의 말이 아니다. 매년 여름철 극장가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가 공습경보로 시달린다. 거대한 제작비와 스타 그리고 홍보와 배급의 규
모까지 앞세운 블록버스터 영화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동 세대 영화를 이르는 말이 분명
하다. 여기에 한국영화 산업이 성장하면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말까지 가세했다. 이것
은 할리우드만큼의 물량 공세는 아니지만 한국의 제작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평균 제작
블럭버스터: 문제는 크기다. 비를 상회하는 대규모 영화들을 이르는 말이다. 영화산업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면서 보다
많은 제작비를 투자하여,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블록버스터 영화는 자연스럽게 영화산
크기의 정치경제학 업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블록버스터 영화 역사의 출발은 할리우드였다.
50년대에 시작된 블록버스터 영화의 제작은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의 주류문화로 성장해
왔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같은 신흥영화강국에서도 블록버스터의 제작은 활발하게 이루
어지는 추세이다. 본 장은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블록버스터의 의미와 역사를 살펴보고,
오늘날 한국영화 속에 나타나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모습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블럭버스터
인터넷 무비데이터베이스IMDB는 블록버스터를 ‘큰 흥행 성공을 거둔 영화, 통 제작하기도 했다. 와이드 스크린 블록버스터의 전성기는 1950년대 중반에서 60년
상 북미 지역 흥행수입 1억 달러를 넘긴 영화’라고 정의한다. 반면 ‘단기간에 큰 흥 대 중반까지 이어진다. 대표적인 영화로는 <전쟁과 평화>, <80일간의 세계일주>, <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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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기록한
2. 블록버스터의 상업화
블럭버스터 영화
<죠스>(1975)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스타워즈>(1999)
감독: 조지 루카스
그런 의미에서 제작회사의 로고를 통해 가장 먼저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가능해 만한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서 각색하
진다. 이를테면 회사에 대한 신뢰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뢰도를 잘 쌓아왔던 메이 는 경우도 많다. 일반적으로는 원작자가 시나리오까지 쓰는 경우도 있지만 블록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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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관련 상품
3.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숨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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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한 팍스 아메리카를 요구한 것이다. <아마겟돈>(1998) 감독: 마이클 베이
‘팍스 아메리카나’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를 일컫는 용어로 미국의 지
배에 의해 세계의 평화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이다. ‘팍
스Pax’는 라틴어로 평화를 뜻하는데, 로마 제국이 피정복 민족들을 통치하던 것을
가리켜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하고, 19세기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팍스 브리
태니카Pax Britanica’라고 한 것에서 연유한다.
이 용어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로, 전쟁이 끝나면서 미
국에 의해 세계 평화가 유지될 것이라는 예상에서 시작되었으나, 강력한 라이벌인
소련으로 인해 ‘팍스 러소-아메리카나’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 이후 1989년 소 에게, 가상의 역사와 향수의 원천을 제공한 것이다.
련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막을 내리기까지 이 체제가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하지만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미국중심주의를 쉽게 찾아볼 수
이후 미국의 영향력은 갈수록 증대해 막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자 있게 된 것은 분명 아쉬운 점이다. 마이클 베이의 <아마겟돈>은 전 세계인들이 대통
본주의 체제를 재편하는 등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하였고, 오늘날 이러한 형태는 령 발표나 급박한 외신보도가 아니라 동시 통역되는 미국대통령의 육성으로 혜성
15 블럭버스터: 문제는 크기다. 크기의 정치경제학
미국 문화를 통해 전달된다고 할 수 있다. 돌진의 정보를 접한다. 브루스 윌리스와 ‘미국영웅’들이 인류를 위하여 목숨을 건
조지 루카스는 미국 대중에게 꿈을 주었고, 동시에 자신의 꿈을 이룩했다. <스 투쟁을 벌이는 동안 가슴 조이던 전 세계인들은 혜성 폭파 소식을 접하고는 기쁨의
미국 문화를 통해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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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부흥 아니라, 시나리오와 연기라는 영화적 기본기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싸이렌>, <
광시곡>, <천사몽>과 같은 작품은 서울 관객 10만 명 이하를 동원하며 제작비조차
못 건지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동안 계속된다. 2002년 추석에 개봉한 <성냥팔
이 소녀의 재림>이 제작비 110억 원을 들여 서울 관객동원 7만 명에 그친 것을 비롯
해 <예스터데이> 12만 명, <아 유 레디?> 2만 명, <블루> 6만 명, <튜브> 12만 명, <청풍
명월> 19만 명, <원더풀 데이즈> 14만 명, <천년호> 10만 명 등 블록버스터답지 않은
1996년 강제규가 감독한 <은행나무 침대>는 몰핑 기법을 이용한 특수효과로 관객 관객 동원을 유지해 왔다. 한국영화의 대형화에 대한 비판이 연이어 이어졌다.
의 시선을 일시에 사로잡으며 흥행에 성공하였다. 몰핑 기법은 <구미호>에서 한 차 하지만 2003년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연이어 흥행에 실패했음에도 한
례 사용되긴 했지만, 당시 한국 영화에서 시도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국 영화 점유율은 50%에 근접했다. <살인의 추억>을 시작으로 <스캔들 : 조선남녀
영화자체의 스케일은 크지 않았지만, 특수효과와 서사적 스토리를 잘 결합시킨 상 상열지사>, <올드보이>와 같은 웰메이드 영화들이 각각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업영화라는 점에서 <은행나무 침대>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본격적인 출발이라고 2003년 초에 불어닥친 웰 메이드 영화의 성공은 관객의 안목을 더욱 더 높여놓았다.
할 수 있다. 2003년 12월에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와 2004년 2월에 개봉한 강
15 블럭버스터: 문제는 크기다. 크기의 정치경제학
1998년 여름에 개봉한 <퇴마록>은 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터라는 것을 공공연 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역사를 쓴 영화들
히 홍보하며 제작된 영화였다. 당시 한국영화로는 파격적인 제작비를 들여만든 <퇴 이다. 이 두 영화는 잘 만든 시나리오라기 보다, 관객의 감정에 호소하는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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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기 휘날리며>(2003)
감독: 강제규,
5.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비교와 전망
<실미도>(2003) 감독: 강우석
무대로 형제간 애증을 통해 한국인에게 있어서 가족의 의미를 묻는 작품이고, <실 은 방식으로 큰 것만을 내세우는 규모의 경제학으로 압도하려고 드는 것이다. 이러
미도>는 냉전 제물이 되어야 했던 북파 부대원들의 유사類似 가족적 동료애를 다룸 한 상황에서는 다양한 영화들이나 소규모로 제작되는 영화들이 일반 관객과 만나
한국형 블록버스터
한국이라는 상황을 기반으로 거대한 재작비와 배급력이 뒷받침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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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20세기 말에 등장한 디지털 기술은 영화의 특수효과에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은 단지 영화의 보충물이 아니라 기존의 사진적 영상에 기초한 영화와 다른
새로운 현실, 즉 ‘가상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현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
지 않고도 사실적인 영상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가상현실은 거짓인가, 아니면 또 하나
의 현실인가? 디지털 기술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영상의 진위성에 관한 곤란한 문제
디지털: 원본없는 영화, 를 제기한다. 필름을 대신한 디지털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 영화
를 위기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은 단지 하나의 새로운 기술적 혁신이 아
이미지의 무한 복제 니라 영화를 새롭게 사유하게 만드는 도구이다.
디지털
디지털이란 일반적으로 데이터를 한 자리씩 끊어서 다루는 방식이라 할 수 있으며, 애매모호한 점이 없고,
정밀도를 높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1. 디지털 신기원의 세계 <쥬라기 공원>(1993)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을 꾸듯 긴 잠에 들어있다고 말한다. 흔적을 지니지 않고 있다. 때문에 디지털 영상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의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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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검프>(1994)
감독: 로버트제멕키스
2. 디지털 혁명과 가상현실
예를 들어, <스타워즈 에피소드 1: 보이지 않는 위험>에서 전통적인 세트 촬영은 겨 들은 원래 볼 수 없는 과거에 사멸된 공룡을 ‘진짜’로 보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을
<주라기공원>(1993)
감독:
스티븐스필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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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 스토리>,
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가능세계는 물론 사진적인 영상에 근거한 것이다.
<벅스 라이프>
스필버그가 그려낸 세계는 상상적인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세계’
와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앞서 말했듯이 DNA 유전자 복제가 가능하다면, 그리고
공룡의 유전자가 발견된다면 공룡의 복원도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쥬라기 공원>
은 현실세계에서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쥬라기 공원>과 디즈니 애니메이션 <다이노소어
>는 분명 차이를 갖고 있다. <쥬라기 공원>은 제목처럼 ‘잃어버린 세계’를 디지털로
전자 조작에 의해 공룡이 현대 사회에 되살아난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러니 복원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전에 있었던, 그리고 이제 다시 과학을 통해 가능할 수
까 공룡의 존재는 불가능한 거짓의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는 잠재 도 있는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디즈니의 영화에서 인간화된 공룡은 마치
성의 수준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제든지 유전자 조작의 결과에 따라 공룡 인간처럼 말을 하고, 인간과 유사한 집단을 구성하고, 인간과 유사한 꿈과 희망을
의 존재는 현실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 기술은 완전한 허구의 갖고 있는 공룡들이다. 이러한 세계는 <쥬라기 공원>과 달리 애니메이션의 상상적
영상이 아니라 ‘극 사실주의’ 혹은 ‘사진적 리얼리즘photo realism’의 효과를 만들어낸 인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다이노소어>의 공룡은 아주 오래 전에 이
다 할 수 있다. 미 존재했었던 것이고, 이제 다시 디지털의 힘을 빌어 <쥬라기 공원>에서처럼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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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특징은 또한 최근의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경우 보편적인 것으로 나타나 되었다. 그 때문에 애니메이션의 사실적 영상은 어떤 균열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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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주식회사>에서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테크놀로지 역사상 가장 세련
된 최첨단 기술로 몬스터의 모피의 털과 머리카락의 음영, 그림자를 정교하게 처리
3. 디지털 합성이 제기하는 문제
하여, 피사체가 움직일 때마다 마치 실사의 그것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느낌을 전
달해주었다.
<니모를 찾아서>에서는 이보다 더 앞선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바다의 심연을
투명하게 관통하는 햇빛의 질감, 시계를 흐리는 깊은 바다의 생생한 공포감, 바닷
속의 기포나 해수면의 물결에 반사되는 빛의 파장, 물결의 흔들림을 환상적으로 표 영화제작은 실사로 촬영한 장면에 컴퓨터 그래픽을 입혀 더 사실적인 효과를 만들
현하고 있다. 바닷속 물결의 흐름과 물고기들의 유연한 몸놀림, 산호초 등 해양 생 어낸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의 한 장면에서 화가 장승업이 한양에 입성하는 장
물의 흔들림과 모습이 거의 실제세계처럼 그려내는 데 적지 않게 성공하고 있다. 이 면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장승업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멀리 북한산과 옛
영화에서 물고기들은 지느러미를 퍼덕거리면서, 눈과 입을 씰룩거리면서 각자 자신 한양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장면은 사실 양수리 종합촬영소에서 촬영한 장면에
들의 고유한 감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니모를 찾아서>는 모 북한산과 옛 한양의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합성해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장
든 창조물들의 고유한 드라마를 간직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근접한 애니메이션 면은 그 자체가 거짓이라기보다는 과거의 모습을 사실처럼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
처럼 보인다. 겠다.
16 디지털: 원본없는 영화, 이미지의 무한 복제
디지털 영화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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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디에이터> <할로우 맨>(2000) 감독: 폴 버호벤
(2000)
감독: 리들리스콧
<트로이>에서 그리스 군대가 트로이를 함락시키기 위해 몰려가는 장면들은 디지털 둘째, 영상의 디지털화는 관객의 영화관람에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 디지털은
기술의 도움으로 역사적 리얼리티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제작과정에서는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으로, 후반작업에서는 비선형 디지
이러한 점에서 디지털 기술은 ‘현실’을 변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컴퓨 털 편집과 CG 등의 특수효과로, 그리고 최종단계에서는 디지털 영사기를 이용한
터 디지털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현실세계‘를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복 디지털 상영, DVD, 그리고 인터넷 상영공간의 확대 등과 같은 다양한 변화를 만들
수의 현실성을 지닌 다양한 세계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원래의 현실이 지닌 절대 어냈다. 최종단계에서 디지털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데 있어서 기존과는 다른 방
성은 동요하며 점점 상대화, 복수화 되기에 이른다. 전통적인 영화에서 영상은 렌즈 식의 관람패턴, 즉 ‘랜덤 액세스’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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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피사체를 카메라가 기록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졌다. ‘랜덤 액세스’는 영화를 보는 것이 일종의 ‘흐름flow’의 과정, 즉 처음 시작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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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의 사랑>(1992) <셀러브레이션>(1998)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크
감독: 존 카펜터
우맨>에서 투명인간을 보여주는,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하는 테크 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여기에 디지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카메라의 기능,
닉은 과거 존 카펜터의 <투명인간의 사랑>과 같은 작품에서 이미 보여졌던 것이다. 시선과 대상의 관계가 디지털을 통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다.
<투명인간의 사랑>에서 투명인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몇 가지 마술적인 트릭 이들의 영화에서 디지털 카메라의 시선은 영상에서 벌어지는 일과 바깥 현실
이 있었다. 예를 들어 투명인간은 먼저 보이지 않는다. 텅 빈 장면에 이어 다음 장면 에서 벌어지는 일이 별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가령,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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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투명인간을 실제로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텅 빈 화면을 보여주면 관객은 거기 들>에서 카메라는 마치 또 다른 등장인물처럼 인물들과 아주 자연스럽게 배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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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디지털 혁명은 우리를 가상현실의 세계로 안내한다. 디지털 시대 3 디지털은 그러나 소수자의 창조적인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다. 디
의 도래는 또한 영화의 정체성을 재정의하게 만들어버렸다. 19세기 지털은 규격화된 형식을 파괴하는 경향을 갖고 있으며 소수자가
말에 태동해 20세기 대중예술을 대표한 영화는 그간 큰 기술적 변 영상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런 점에
화를 겪어왔지만 실제의 물리적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을 사진에 서 디지털은 세계와 새롭게 만나는 도구이기도 하다.
기록하는 영상의 존재론적 특징은 유지해 왔었다. 하지만 3차원
애니메이션과 디지털 합성의 시대에 영화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디지털 영화는 한마디로 ‘사진적 영상을 영화의 일부분으로 하는 심화 및 보충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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