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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탈리아 네오 리얼리름 -

← 고전영화 규범파과
프랑스 후벨바그

FIX 라이브 ,
2022-2학기 동국대학교 <영상미학분석> 수업교재

화요일 2.0~4.5(10:00 ~ 12:50), K460 담당강사 : 백태현

※ 이 자료는 <영화와 이론>(이상면, 북코리아, 2010)와 <영화예술>(데이비드 보드웰, 크리


스틴 톰슨 저 주진숙 이용관 역, 지필미디어, 2010) 등에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편집한
것입니다.

1. 영화와 영상문화의 시작

1) 영화의 탄생
암드레 바쟁 인간은 시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이러한 노
'

력은 18세기 사진의 발전을 통해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초기 사진은 하나의 상을 담아내는


"
미이라 콤플렉스
] 에각옥망 데 긴 노출 시간을 필요로 하였고, 그러다가 1878년 미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
(Eadweard Muybridge)가 빠른 노출력을 지닌 일렬의 사진기들을 이용해 달리는 말의 연속

그림 , 정지된 이미지
사진을 찍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의 주된 관심은 움직임의 순간적인 양상들을 포착하는 데
있었지 영상의 연속적인 투사를 통하여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사진 :
움직이는 이미지
[ 기술 ] 1889년 조지 이스트만(George Eastman)은 구부러질 수 있는 속성을 지닌 필름 베이스인
셀룰로이드를 내놓았다. 이 베이스와 필름을 렌즈 뒤로 통과시켜 빛에 노출될 수 있게 하는
카메라 매커니즘으로 인하여 긴 일련의 프레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영사기는 이
미 수년 전부터 있어왔고 슬라이드나 그림자 놀이를 보여주는 데 이용되어 왔다. 요컨대 촬영
테크닉과 필름 그리고 영사기 같은 토대들이 완성되었다. 남은 것은 움직임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는 기계, 즉 카메라였다.
이 시기는 발명가들의 시대였다. 산업혁명으로 기계장치들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많은
이들이 다양한 물건들을 만들어냈다. 여러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있던 발명가들이 카
메라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가장 중요한 카메라 장치는 미국의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과
루이 뤼미에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Louis Lumière)가 만들어냈다.
에디슨의 조수인 딕슨은 1893년 경 짧은 동영상을 만들었다. 신기한 구경거리로서 상품화
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에디슨은 이것을 자신의 축음기과 결합해 유성 영화를 보여주고자 했
다. 그는 딕슨에게 한 사람씩 영화를 보는 기계,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개발하도록 지
시했다. 그는 영화가 일시적인 유행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영화를 스크린에 투사하는 시
스템을 개발하지 않았다. 그 임무는 뤼미에르 형제에게 남겨졌고, 그들은 독자적으로 촬영과
영사를 겸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 퇴근하는 노동자들 > 영화사에서 최초의 영화 상영은 파리의 카퓌신 거리(Boulevard des Capucines) 14번지에
< 물뿌리는 정원사 > 있는 그랑 카페(Cafè Grand)의 지하 인도 살롱에서 뤼미에르형제가 자신들이 개발한 영화기
1 대중
; 서사성 부여
구인 시네마토그래프(cinèmatographe)로 필름을 상영한 1895년 12월 28일로 인정되고 있다.
.

- 2 . 기술 ( 촬영상영 )
[ 기차의 도착 >
이날의 역사적인 상영에는 뤼미에르 형제가 찍은 11분이 채 안 되는 짤막한 필름 10편이 33 3 유료
; 대각선구도 .

명의 유료 관객 앞에서 20분 가량 상영되었다.


[ 벽의 해체 )
흔히 ‘뤼미에르 필름’으로 불리는 상영 프로그램에는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 <정원사>,
; 시간 역행
<아기의 식사> 등이 있었다.1) 당시 프랑스 신문에 의하면, 상영이 끝나자 관객들은 어리둥절

1)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의 원제는 <리용 뤼미에르 공장의 출구>(La sortie del’usine Lumière á

- 1 -
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살롱을 나왔으며, 이 신기한 체험은 곧바로 널리 알려져서 첫 상영 며
칠 후부터는 관객들이 줄을 서서 들어갔다고 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신기한 발명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어제 저녁 많은 화제 속에서 대


중에게 공개되었다. 카퓌신가 14번지에 모인 교수, 지식인, 사진기사들은 연속사진으로 잡은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보았다. ... 저 멀리 푸른 하늘과 집과 거리과 그것들이 어우러진 광활한
풍경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은 착각 속에서 또력하게 다시
볼 수 있었다. <르 라디칼>, 1895. 12. 30
; 대각선 구도
정거장에 들어오는 기차의 모습이 관객을 놀라게 했다는 필름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
차>는 다음 달인 1896년 1월 25일에 추가되었다. 이때 관객들은 기차가 자신들을 향해 돌진
해오는 줄 알고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서 관객들은 처음으로 ‘현
실세계의 재현’을 본 것이며, 이로써 그들에게는 19세기까지의 환상이 사라지고 ‘사실적 현실’
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것이 영화의 탄생이며, 새로운 시각 문화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19세기 말의 새로운 발명품으로서 영화, 당시의 용어로 말하자면 활동사진은 ‘현실의 재현
과 움직이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매채’로서 세인들의 경이로운 관심을 끌 만하였다. ‘뤼미에르
필름들’은 첫 상영 이후 넉달 반 동안 5만여 명의 관객이 관람하였고, 그랑 카페에서는 1901
년까지 6년 동안 매일 상영되었다. 뤼미에르는 카메라 기사들을 전 세계에 파견하여 자신들의
영화를 상영하고 아울러 중요한 사건들과 이국적 풍물들을 촬영하도록 했다. 1896년 2월에는
런던, 4월에는 베를린, 5월과 6월에는 러시아, 6월에는 뉴욕 그리고 1898년에는 일본, 1899
년에는 중국에서도 성공적으로 상영되었다. 20세기가 개막되기 직전의 시점에서 영화는 세계
도처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처음 몇 년 동안 엄청난 수의 영화를 제작한 뒤, 뤼미에르 형제 뤼미에르
는 제작편수를 축소하였으며, 1905년에 그들은 영화제작을 완전히 중단하였다. 이후 영화는
) 시각
멜리에도 본다는 것

뤼미에르의 발명품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그것이 새로운 세기의 위대한 마법이 될 것이 [ 스토리텔링 )


라고 믿은 멜리에스에 의해 발전되기 시작했다. 어트랙션
< 달세계여행 >
1896년에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는 영국의 발명가 로버트 윌리엄 폴(Robert 시네마

William Paul)에게서 영사기를 구입하고, 이어서 그것을 카메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하
L
:
특수화과 ,
오락적 속성
무대미술 ,
였다. 멜리에스의 최초의 영화들은 일상생활을 담은 뤼미에르의 단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 산업

의상 다. 멜리에스는 마술사이기도 하여 그는 간단한 특수효과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1897년 멜


⇒ 첫 미장셴 리에스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세워 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마술적인 형태를
⇒ 이야기의 사발점 이용해 환상적인 세계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정교한 배경장치들을 이용해 한 두 개의 마술을
보이는 모습을 단순히 영화에 담는 것부터 시작해 멜리에스는 이야기가 포함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04년경부터 영화산업에서 극영화는 가장 우세한 영화제작의 유형이 되었으며 영화의 세
계적 인기도 지속적으로 성장해갔다. 또한 영화는 카메라의 기본이 되는 과학기술과 통신, 교
통의 발달로 인해 개인과 세계 간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개인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가 확장되
어 시각적 지평이 넓어진 시대의 산물이었다. 이 시기는 인간의 시각적 욕망과 더불어 제국주
의적 정복심과 자본주의적 팽창욕이 팽배한 시대였으며, 영화기계들도 이런 시대관과 시대의
식이 반영된 영상기구였다. 영상기구가 보여주었던 이국적 풍물과 풍경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Lyon>로서 1894년 4월에 촬영되었으며, 그 후로 영화 탄생일까지 최소한 세 번 더 촬영되어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프로이트 ' 프랑크 푸르트학
[ 마르코스론의의 대충일화↓ )

- 2 -
볼거리였으며, 이에 따라 영상물 장사는 자본주의적 기업의 사업 욕구에 의해 확장 일로에 있
었다. 또한 이 시기에 발생한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여러 나라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동시에
할리우드가 세계영화제작에 있어 우세한 산업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2) 영화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라


무성영화, 당시 용어로 활동사진(kinematograph)2)은 새로운 시각문화의 시작을 알렸다. 필
름을 통해 움직임을 영상에 보여주었던 활동사진은 보는 재미를 실현시켜준 매체였다. 1930년
대 초반 유성영화의 출현까지 소리가 없던 무성영화는 음악이 동반되기는 했지만, 주로 배우
초현실주의 영화 의 신체동작과 영상 같은 시각적 언어를 통해 전달되었다. 이런 시각적 언어는 책의 문자언어


1a o 2 와는 다른, 새로운 언어로서 ‘읽는 문화’대신에 ‘보는 문화’가 나타난 것을 알렸다.
일찍이 영화를 새로운 시각언어로 보았던 사람은 미국의 시인이자 영화비평가인 바첼 린제
이(Vachel Lindsay 1879~1931)였다. 린제이는 초기 미국 무성영화에 대한 저서 <활동사진의
미국 안정적 할리우드
예술>에서 영화를 “그림문자와 상형문자의 새로운 언어”로 보며, 인류 발전에서 거대한 진보
유럽 영화의 예술성고민
를 의미하는 언어로 환영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미국에서 최초의 영화기구인 키네토스코
,

프를 발명한 토마스 에디슨을 ‘새로운 구텐베르크’로 간주하고 영화가 민주적인 예술로서 미


국의 대표적인 대중문화로서 새로운 지배적인 문화가 될 것으로 보았다. 할리우드에 영화산업
이 정착되기 전인 1910년대 중반에 나온 그의 예견은 10년도 채 지나기 전에 현실이 되었다.
유럽에서는 1920년대 빈과 베를린에서 활동한 영화이론가이자 비평가인 벨라 발라즈(Béla
Balázs 1884~1949)가 영화를 새로운 시각언어로 보았다. 그는 ‘보는 매체’로서 영화의 출현과
확산을O환영하고 본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 이유는 영화에서 보는 것은 책을
읽는 것보다 생생한 체험이 될 수 있으며, 쉽고 직접적으로 다가온다는 데에 기인한다. 인쇄 Iq 3Os
매체를 통해 접하는 문자문화로 인해 현대인의 문화는 추상적이 되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보
발터 벤야민
는 것’을 통해 직접적인 대상 체험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영화는 “우
: 쇼트의 충돌
리의 관념적 문화를 시각적 문화로 전환시켜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발라즈는 말한다.

:
시각적 촉각
발라즈가 시각문화로서 영화를 보는 특별한 의미는 자연과 현실의 오묘한 모습이 재현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얼굴과 모습과 몸짓 같은 신체 언어와 감정, 정신 또 영혼 마저도 가시
화되는 데에 있다. 이제 영화 화면에서 “어떤 말도 필요로 하지 않고, 눈을 통해 모든 형태의
인간운명, 성격, 감정, 그리고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이제 인간의 내면과 정
신, 영혼도 볼 수 있게 된다는 데에 특별한 의미가 있고, 이제까지 다른 예술매체가 할 수 없
던 것을 영화가 성취하는 힘이 있다고 발라즈는 설명한다. 더 나아가 발라즈는 영화를 그동안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활자문화에서 영상문화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매체로 보았다.
발라즈는 매체의 변화를 일어내고 영상매체로서 영화가 지식, 정보의 전달에서도 문자매체

인 책, 잡지보다 열등하지 않다고 본다. 그 이유는 영상을 보는 과정을 통해서 화면에 표현되
는 얼굴 표정과 신체언어를 통해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인간 심리와 정신을 인식할 수 있고,
또 사건 진행에 따라 묘사되는 영상 코드들을 통해 지적인 차원의 메시지도 인식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유해성을 내세우는 주장에 대해 “책도 유해하고 잘못된 내용을
담은 것들이 많다”고 반박한다.

2) 초기 무성영화는 확정된 명칭 없이 여러 가지로 불렸다. 유럽대륙과 영국에서는 cinematographe,


kinematograph, kinema로, 독어권에서는 키네마토그라프, 킨톱(kintopp), 영상극 등으로 불렸고 미
국에서는 pohotoplay, motion picture 등으로 불렸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활동사진이나 키네마토그
라프란 명칭이 흔히 사용되었다.

- 3 -
사실주의 고전론의 표현주회 (형식 )

0 f방가르르
다큐멘터리 극영화 실험영화


S 기차외로착 > <달세계영행고 막 간>

더 나아가 영상매체는 대다수 민중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갔다. 언어를 통해 전달되던 의견


과 사상은 민중들에게 무거운 표현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대다수 민중들은 영상이
있는 극장에 유혹되고 있었다. 사회적 권력을 지닌 지식인 계층에서는 언어가 주된 전달수단
이지만, 힘없고 고등 교육을 받지 않은 민중들에게는 언어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리
고 이젠 언어가 아닌, 쉬운 표현 수단으로서 영상이 등장했으므로, 민중들이 영화관으로 간다
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문자에서 시각언어로의 ‘매체 전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통적 수
단이었던 문자매체가 그 역할을 수행했던 지식전달이 영상매체인 영화로도 가능해진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처음부터 예술이 아니었다. 초기의 관객들과 비평가들은 영화를 그저 하나의
대중적인 오락거리, 시각적인 볼거리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는 예술가들이 창조
한 것이 아니라 괴팍한 발명가들의 창조물이었다. 거기에 마술사, 흥행업자 등 영화를 통해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이 볼거리로서의 오락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기존의 고매한 예술비평
가들은 영화를 천시했다. 영화란 교육받지 못한 하층민들의 여흥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
니었다.

☞ 더 읽을거리
김호영, 「영화 이미지와 포토제니: 장 엡스탱의 이론을 중심으로」, 『영화연구』 36호, 한국
영화학회, 2008.
로버트 스탬, 『영화이론』, 김병철 역, K-books, 2012. (50~54쪽. ‘영화의 본질’)

2. 영화미학의 형성 1: 영화와 모더니티

에디슨은 경쟁관계에 있는 회사들을 특허권 위반으로 제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른 회사


들은 에디슨의 카메라와 다른 형태의 카메라를 고안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08년 에디
슨은 영화특허권회사(Motion Picture Patents Company: MPPC)를 결성하여 자신의 권리를
더 강화하기 시작했다. 열 개의 회사로 구성된 MPPC는 주로 시카고, 뉴욕, 뉴저지를 근거로
하였다.
하지만 MPPC는 경쟁사들을 완전히 없애는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MPPC의 방해에도 불구하
고 많은 영화사들이 설립되었고 이들은 1910년 경부터 동부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영화사들이 모여 단위를 이루기 시작했고 언젠가 이곳을 할리우드라고 부르
기 시작했다.3) 할리우드는 촬영이 연중 가능한 좋은 기후와 현장촬영에 유리한 자연환경(산,
바다, 사막, 도시)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가하면서 많은 영화사(studio)
들이 할리우드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소규모 회사들은 서로 통합하면서 대기업화 되었다. 또
한 영화 제작에 있어 효율성을 강조하는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1920년대 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MGM, 폭스(20th Fox),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 유니버설
(Universal), 파라마운트(Paramount)가 출연하게 되었다. 이들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브라이튼 학화
시장 공급을 혼자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협조도 했다.
; 근지 엘버트 스미스 대량 생산 스튜디오 체제에서 미국 영화는 확실한 서사 형식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들 중 h 교과

윌리엄스
, -

제임스
서사의 연속성과 전개 원리를 이용한 최초의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미국 소방관의 생활 The 편집의 시초 :

세실 헵워스
Life of an American Fireman>(에드윈 포터, 1903)이다. 불타고 있는 집에서 어머니와 아 :
서부영화의 시로
이를 구출해내는 소방관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영화로, 여기에는 몇 가지 고전적 서사요소(소

3) 어떤 역사가들은 에디슨을 피해서 간 것이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 4 -
방관들의 재난 예감, 그 집으로 달러가는 소방차들)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편집적 시
간적 관계들의 논리를 구축하지는 못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어머니와 아이가 구출되는 모
습을 두 번 볼 수 있다. 한 번은 집에서, 한 번은 집 외부에서 말이다. [ 총격전
이후 그는 고전적 미국 영화의 초기 모델이 된 <대열차 강도 The Great Train 271 차위의 싸음

Robbery>(1903)를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사건은 시간, 공간, 그리고 논리적으로 선명한 선형 3 추격전

적 흐름을 가지고 전개된다. 우리는 강도질과 추격, 그리고 강도들을 붙잡은 것으로 이루어진
서사를 따라갈 수 있다.
< 픽앨리의 총잡이 >
1908년, 훗날 미국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이비드 그리피스(D.W. Griffith)가 감독으
:
최초의 갱스터무비
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까지 사용된 기법들을 능숙하게 사용하면서 거기에 서사적
동기를 부여했다. 매끄러운 장면전환을 위해 페이드(Fade in/out)와 이이리스(iris)를, 근접 쇼

트(close up)를 삽입하는 편집 기법을 사용했다. 이전의 영화들이 한 장면에 한 쇼트만 사용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진보적인 전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 기법들을 발전시키고 대중화

[ 불관용> ( 1916 )
하였다. 대표적인 그의 영화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Nation>(1915)은 다른 장소에서 벌 고전적편집다
어지는 이야기를 편집을 통해 이어 붙였고, 배우들은 표정에서 미묘한 변화를 표현하기 시작 : 현적일 시공관에 외래

구분되로 렌집 X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매끄럽게 서사에 동기화되었다. 그의 영화들은 광범위하
C
할리우드 심적으로 연결되는 현집
서사감조
( 내러티브]
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행위 시선의 일되
-

서사에 동기화된 편집 방식은 이 시기 많은 감독들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

산업 ; 보이지 않는 편립
또한 1910년대 중반에는 오늘날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쇼트/리버스 쇼트
잠르

J
⇒ 연족편집
(shot/reverse shot)의 편집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선의 일치는 1910년대 빈번하게 쓰였 연속편집
,
,

스타시스템
ㅡ 으며, 행위의 일치는 거의 같은 시기에 발전되어 1916년대에는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1920
T : 섬정 ( 롱) 슐
4 허구고가 년대 이르러 연속체계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감독들이 서사구조 내에 구체적인 시간적, 공간적 Y 미디엄닺
권선징안
해피엔링
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거의 자동적으로 사용하는 표준적 기법이 되었다.
;
.

> 클로즈 업
디드마그
이 시기 대표적인 영화 <우리들의 환대 Our Hospitality>(1923)를 살펴보자. 이 영화는 고
몸입 감정이입 ;
몸입과 감정이입유로
전적 영화형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다양한 서사 요소들의 반복적인 등장 및 윌리 맥케이의
,

영화 =
관객
아버지가 결투 중에 죽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윌리가 그 갈등의 해결하는 데 이르기까지의 직
⇒ 사회 일정 이데 올레적
선적인 인과관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편집은 이것을 자연스러운 장면전환으로 이것을 보여준
,

6
5 ,

보제제기. 다.
연속집체계ㆍ
=현일어 제임
무성영화 시대가 끝난 1920년대 후반에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는 정교한 사조로 발전했으며
l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놀라울 정도로 표준화되어 1930년대에 영화적/산업적 형식이 완성되었


장린 분류기준
다. 모든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엇비슷하게 작업 부서를 나누어 동일한 제작 시스템을 가동하
; 루재ㆍ재,
등장인물의 성격 ,
였으며, 스타 및 스타 감독들을 고용하여 점차 몸집을 불려 나갔다. 이처럼 할리우드는 영화
세간력 배경
의 예술적인 측면보다 산업적인 측면에 방점을 찍으면서 영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OQ
관습 이불댐 할리우드 영화와 다른 형태를 가진 영화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 만들어
졌다.

☞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Hollywood Studio System) :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스튜디


오는 엄청난 수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대량으로 영화를 공급할 필요성을 느꼈다. 영화를 대량
으로 만들기 위한 제작 관행이 출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형태는 전체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프로듀서(제작자)가 있고 노동분업을 통해 영화를 대량생산(대개 흥행이
보장되는 정형화된 영화의 형식과 제작 관행)하게 되었다. 프로듀서가 영화를 기획하면 스튜
디오에 소속된 시나리오 작가가 그것을 영화대본으로 만들고 스튜디오 소속의 배우와 감독이

- 5 -
그것을 연출하는 것이다. 연출이 끝나면 편집자가 스튜디오에서 편집을 해서 바로 배급과 상
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철저한 분업 형식으로 영화를 속전속결로 만드는 구조였다.
또한 산업에서는 수직통합의 구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직통합은 대형 스튜디오가 영화
의 기획부터 배급, 상영까지 모두 통제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한국의 CJ E&M의 모습을 떠
올리면 된다. 스튜디오가 영화 아이템을 발굴하여 감독 및 스태프를 고용하고, 영화를 제작하
는 동안 프로젝트를 통제하고, 완성된 영화를 자사 배급 라인을 통해서 배급하고 자사의 극장
에서 개봉하는 구조이다. 사실상 독과점인 이 구조는 당연히 이익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다는
장점이 있다.

☞ 연속편집(Continuity Editing) : 이야기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영화의 실제적 전략 가운


데 하나이다. 영화는 수많은 장면들로 이뤄져 있는데 이것은 이음매가 없는 듯이 일관성을 가
지고 있다. 이것을 통해 이야기를 관객에게 매끄럽게 전달하며 일관성 있는 하나의 세계를 만
들어 간다. 이 방법은 누군가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니라 산업에서 자체적으로 등장한 것이었
다. 이야기의 연속성을 강조해서 연속편집이라고 부르고 또 고전적 할리우드 시기에 완성되었
기 때문에 고전적 편집(classical editing)이라고 부른다. 또 이음매를 감추는 방법이므로 보이
지 않는 편집(invisible editing)이라고도 부른다.

☞ 최초의 유성영화 : 1927년 영화는 주로 오케스트라 연주나 혹은 피아노 연주자의 반주


가 곁들어졌다. 영화에 사운드가 등장한 것은 1927년 워너 브라더스가 만든 <재즈 싱어 Jazz
Singer>이다. 워너는 다른 4대 메이저 회사(20th Fox, Paramount, MGM, Universal)와 경
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그리고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술적 시도를 한 것이었
고 그것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사운드의 도입 결과는 대사가 등장함에 따라 등장인물의 심리
를 그대로 관객에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3. 영화미학의 형성 2: 순수 영화와 절대 영화

1) 순수 영화와 포토제니
이탈리아의 비평가 리치오토 카누도(Ricciotto Canudo)는 영화를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
에 따르면 예술에는 건축, 조각, 회화라는 세 개의 공간예술과 시, 음악, 무용이라는 세 개의
시간예술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종합한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고 명명했다. 카누도가
제7예술로서 영화를 명명했다고 해서 영화가 곧바로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를 예술
이게 만드는 특정한 성질이 필요했다. 그는 영화를 시(詩)라고 생각했으며 영화 이미지는 무엇
보다도 서정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포토제니(photogénie)의 맹아가 탄
생했다. 루이 델뤽(Louis Delluc)은 카누도의 주장을 이어받아 ‘영화예술’의 조건으로 포토제
니의 개념을 내놓는다. 루이 델뤽은 1920년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영화감독이자 작가, 비평
가이다. 그는 제르멩 뒬락(Germaine Dulac), 장 엡스탱(Jaen Epstein)을 비롯한 소위 시각주
의자(the visualist)로 불렸는데, 이들은 영상 표현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그 의미를 규명하
려고 시도했다.
순수 영화(cinéma pur/the pure cinema)와 절대 영화(der absolute Film/the absolute
film)는 1920년대 예술 영화 운동의 과정에서 생겨난 그룹의 영화를 말하는 것으로 특히 다다
이즘과 초현실주의 화가들에 의해 선도되고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 이들은 자신의 예술적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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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을 영화 영상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현실 모사나 묘
사가 아니라 비재현적 방식으로 현실이 아닌 세계를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순수 영화와 절대
영화의 기원으로는 자연적 형태를 포기하고 기하학적이고 기술과 관련된 구성을 보여주는 페
르디낭 레제(Ferdinad Léger)가 만든 <기계적 발레 Ballet mécanique, 1924>와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대본을 쓰고 르네 클레르(René Clair)가 감독한 <막간극 Entr’acte, 1924)이 언급
된다. ↳ .
이중인화 2 . 고속촬영 3 신선한
.
앵글

순수 영화는 프랑스 시각주의파(the visualists)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들은 영화의 창조


적인 시각 표현을 중시하며 포토제니(photogénie) 요소를 강조했다. 20년대에는 이들과 유사
한 초현실주의 영화와 아방가르드 영화가 있는데, 모두 실험영화의 형태로 간주되기도 하며
서로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현실재현적 묘사를 배제하고 리듬과 몽타쥬를 중시
했다. 절대 영화는 실험 영화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순수/절대 영화의 작품들은 그 자체
로서 성공적인 것은 적었지만, 당시 20년대 영화 영상의 표현 영역과 방법을 확장하고 새로운
영화 영상의 세계를 열어놓았다는 데에 의미가 있고, 이런 부분은 후대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
쳤다는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토제니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소 모호한 개념이다. 우선, 어원을 살
펴보자. 포토(photo)란 사진을 가리키고 제니(génie)란 프랑스어로 정령, 영혼을 가리킨다. 이
것을 그대로 이어받으면 포토제니란 사진적 영혼이란 뜻이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①포토(사진)
② 영화 고유의 특성 강조
와 제니(정령, 정수) 사이의 신비로운 결합을 찾는 것으로, “사진적 재현에서 표출되거나 강화
③ 문학의 후원에서 벗어나
될 수 있는 인물이나 물체의 미묘한 느낌, 분위기, 아우라”를 말한다. 포토제니는 원래 “빛이
이미지 강조
만들어내는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델뤽이 사진의 특질을 나타내는 용어를, 영화적 특 ,

고유한 영화촬영줄 발전
질을 나태내는 용어로 변화시켰다. 이를 통해 델뤽은 영화가 단순한 현실 모사가 아니라 신비 시킬려고 함
로운 영상을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포토제니를 찬양했던 프랑스 이론가들은 카메라가 모든 평범한 사물과 인물들을 빛나고 매
혹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했다. 심지어 카누도와 델뤽을 이어 포토제니 이론을 확
립한 장 엡스탱은 “회화에 색이 있고, 건축에 볼륨이 있다면, 영화에는 포토제니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4) 요컨대 포토제니는 사진이나 영화에서 표출되거나 강화될 수 있는 인물이나
물체의 미묘한 느낌, 분위기, 아우라를 말한다. 시각주의자들은 영화가 단순한 현실 모사가 아
니라 신비로운 영상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았다.

영화는 점차로, 또 결국 오직 영화 촬영술적으로 되기를 시도해야 한다. 즉, 오로지 포토제


니적인 요소들만을 사용해야 한다. 포토제니는 영화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다. - J. Epstein

물론, 포토제니 이론에는 규명하기 힘든 일종의 신비성이 도사리고 있다. 사진이나 영화에
서 빛이 그토록 매혹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설명할 길은 없다. 그것은 인물이나 사
물의 미묘한 느낌이나 분위기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 느낌을 도대체 어떤 말로 설명하
고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그러한 측면은 포토제니가 결코 언어로 의미화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며 여전히 모호하고 투명하게 다가가기 힘든 개념이다. 아마도 규명되
기 어려운 용어일 수도 있고, 차라리 상상 속에 남겨놓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델뤽은 영화의 여러 요소들에서 그 가능성을 보며 무대장치, 조명, 얼굴이 포토제니를 불러

4) 김호영,「영화 이미지와 포토제니: 장 엡스탱의 이론을 중심으로」,『영화연구』36호, 한국영화학회,


2008,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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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으키고, 신비로운 영상을 창출할 수 있는 것으로서 묘사의 특별히 영화적인 것을 위해 결정
화된 요인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현실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 해석의
도구라고 본 것이다. 포토제니는 영화 촬영술을 통한 묘사에 의해 살아나는 요소로 보았단 장
엡스탱은 시간, 공간 속에 존재하는 세계와 물체, 정신적인 것의 움직임을 중시하며, 이런 운
동성 속에서 카메라 촬영을 통한 묘사의 정수, 즉 포토제니가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인간> 델뤽의 후계자인 제르멘 뒬락(Germaine Dulac)은 “영화는 삶에 대해 넓게 열려 있는 눈이
며, 우리 눈보다 더 강력하며 우리가 못 보는 것을 보는 눈”이라고 하고, “현실의 생명체와
(어셔가의 몰락>
' 쮑스톤) 사물에서 독특한 것은 오직 영화에 의해 시적인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 나폴레옹>
그러면, 영화에서 포토제니는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가? 델뤽은 영화의 여러 요소들에서 그
( 아벨강의
가능성을 찾았다. 무대장치, 조명, 얼굴이 포토제니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신비한 영상을 창
( 발레메카닉 ) 출할 수 있는 것으로 영화적인 것을 위해 결정화된 것들이라 말하며, 이런 것은 기술적인 현
(페르낭 레제)
실 묘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해석적인 것으로 보았다. 영화촬영술에 의거해서 만들어
< 안달루시아의 개> 지는 것으로 문학이나 연극, 미술의 요소들을 단호히 거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순수
영화는 포토제니가 표현되는 영화로서 일반적인 영화들처럼 스토리나 논리적인 사건 전개가
중요시되지 않는다. 이들은 영상 속에서 물체의 움직임(운동성)과 리듬, 이미지가 중요했고,
묘사 대상에는 현실의 영역을 넘어서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것도 포함된다. 이들은 영화의
창조적인 시각 표현을 중시했으며 영화적 묘사의 고유한 영역을 운동감과 리듬, 편집 등에서
찾았다. 이처럼 비논리적인 진행을 선호, 스토리 전개보다는 상상과 환상에 근거한 시각적 이
미지를 움직임과 리듬으로써 표현하려는 영화를 의미했다. -

) 미국으로 중심축이동
19305
사운드 개발로 인해 포토제니 ↓
2) 절대 영화 ( 유성영화)

독일에서는 프랑스의 순수 영화 운동에 영향을 받아 1920년대 중반 절대 영화가 생겨났다.
절대 영화는②
“추상 영화의 한 형태로서 전적으로 비재현적 영화이며 이미지로써 형태와 리듬
같은 무형적 개념을 시각화”한다. 현실의 재현적(사실적 묘사) 이미지들을 배격하지 않지만,
특정한 사건이나 드라마 구조를 지닌 스토리를 부정하고 인간과 물체의 움직임을 리듬 속에서
③ ④
표현하는 것을 중시하며 시각적인 요소들을 음악적인 리듬으로써 표착하고 편집으로써 영화의

속도와 진행을 구성하는 영화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만 레이(Man Ray)의 <야성의 회귀
Retour à la raison, 1923), 독일 영화감독 발터 루트만의 <베를린 대도시의 교향악 Berlin,
Symphonie einer Großstadt, 1927) 등이 있다.
순수 영화나 절대 영화 넓게 보면 모두 실험 영화의 형태들이다. 대신 순수/절대 영화 모두
재현적 이미지를 거부하는 데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절대 영화는 주로 다다이즘 화가들이
가담한 아방가르드 영화운동으로 영화에서 시간성을 형식언어의 축으로 보며 리듬을 강조한
측면이 있다. 절대 영화의 중심 인물인 한스 리히터는 “시간을 새로운 매체의 미학적 토대”로
삼으며 시간적 진행에 따라 인지되는 예술형식인 영화에서는 리듬이 모든 영화적 표현 형식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리듬을 영화예술적 수단이자 영화의 결정적인 구성원칙으로 받아
들였고, 리듬과 편집과의 연관성을 중시했다. 쇼트 길이와 방향, 속도, 크기, 소리 등을 모두
고려해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의 생각을 이어받은 발터 루트만도 리듬을 강조했다. 화
면 속 운동, 곡선 드으이 운동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표현하여 리듬을 중시했다. 그의 영화
<베를린 대도시 교향악>은 절대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특정한 스토리나 사건 내용
이 없이 산업화된 대도시 베를린에서 현대식 빌딩 사이의 도로에서 자동차, 자전거 등의 복잡
한 운행과 많은 행인들의 걸음걸이가 리듬있는 움직임에서 보여지며, 거리의 소음 등 다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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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향이 삽입된 대도시의 일상 생활이 묘사된다.
순수/절대 영화 모두 영화예술 운동의 일환으로 1920년대에 일어났던 아방가르드 영화의
의의
한 형태로서 간주되며, 실험영화의 선구적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영화역사에서 분명 가치
있는 시도로서 여겨질 수 있지만, 작품적으로 뛰어난 영화는 별로 많지 않다. 그러면, 순수 영
화와 절대 영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가시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현실의 기계적인 재생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
었다. 다시 말해 영상의 표현 가능성 확장이다. 영화는 탄생했던 19세기 후반부터 1920년대까
지 현실 재생의 문제에 대해 힘겹게 싸워야만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전통 예술과는 다
른 ‘영화적 묘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서 영화 고유의 미학과 언어를 발전시킨 것이다.
한계 몇몇 예술가들의 실험에
:

4. 영화미학의 형성 3: 러시아 몽타주 미학 찜 ( 대중성 확보 실패)

볼세비키 사회주의 혁명(1917년 10월 25일) 이전의 제정시대 러시아의 영화산업은 미국



짧은 시간에 많은 많은
이나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낙후된 상태였다. 영화제작사와 극장도 많지 않았고, 입장료가
계몽할수 있는 도구 필요
i 영화
비싸서 일반 대중과 노동자 계급은 영화관에 가기 어려웠다. 게다가 필름과 기술 장비들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수입되었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1918~19년에도 영화는 발전을 이루지

영화는 모든 예술에서
못했다. 그 이유는 경제적으로 어려운데다가 사회 상황은 피폐했으며, 영화산업 대부분이 파
가장 중요 괴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 관객들은 미국과 프랑스, 독일에서 수입된 영화들을 선호

미장센보다 쇼트와 쇼트의 했으므로 소수에 불과한 러시아 영화는 외면당했다.
연결 , 형식을 통해 혁명 후 러시아의 정치 사회적 상황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여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데는 1918년부터 22년까지 무려 5년 가랑 걸렸다. 이런 가운데 영화 산업은 모두 국유화되
탄생한 제3의 의미
었고 새로운 영화인 양성을 위해 모스크바 영화전문학교(세계 최대이자 가장 오래된 영화학
교)가 설립되었다. 이때부터 영화제작과 배급 체계는 국가의 통제로 이루어졌다. 그 당시 소
비에트 러시아의 지도자였던 레닌은 영화가 민중계몽을 위해 가장 강력한 교육수단임을 인
식하고 영화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모든 예술 가운데 우리에게는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

소비에트 몽타주하면 금방 떠오르는 사람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M. 쿨데쇼트 실험


Eisenstein)일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은 영화감독이자 영화이론가였다. 대단히 박학다식하고
학구적이었던 그는 영화를 찍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입증하려는 데에도
온 힘을 경주(傾注)했다. 그는 다빈치에서 디킨스, 바그너까지 다양한 예술가들을 즐겨 인
용했다. 또한 아프리카 조각에서 일본의 가부키, 중국의 가면극에서 폴리네시아의 전통 풍
습까지 모든 것을 다 가져왔다. 아마도 에이젠슈테인은 영화창작과 영화이론의 역사에서 예
술의 이론이 창작의 원리와 완벽하게 공존했던 행복한 예가 될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은 영화에 입문하기 전에 연극연출가이자 세트 디자이너였다. 이 당시 그는
자신이 평생의 스승이라고 생각했던 연극연출가 프세볼로드 메이어홀트(Vsevolod
Meyerholt)를 만나게 된다. 메이어홀트는 러시아 구성주의 연극의 대가였다. 구성주의 연극
은 당시 러시아 연극을 지배하고 있던 사실주의 연극을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감정보다는 기
하학적 세트를 활용한 조형적 움직임을 중요시했다. 오늘날의 연극에서 세트 하나가 침실,
발코니, 방앗간 등 원하는 공간으로 변형되는 방식은 구성주의 세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구
성주의 연극은 배우의 연기에서도 심리적인 것보다는 신체적인 것을 강조했다. 한 인물의
슬픔을 표현할 때도 내면연기보다는 부자연스럽고 기계적인 동작을 중요시했다. 구성주의
연극은 무엇보다도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 관객을 자극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충돌시켜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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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바로 이것이 훗날 에이젠슈테인 몽타주 미학의
핵심인 갈등과 충돌의 원리이다. 충돌 몽타주
에이젠슈테인은 갈등과 충돌의 원리를 규명하기 위해 표의문자인 중국어를 끌어들인다.
한자(漢子)식으로 읽으면, ‘개’를 뜻하는 ‘견(犬)’과 ‘입’을 뜻하는 ‘구(口)’를 합하면 짖을
‘폐(吠)’자가 된다. 마찬가지로 ‘입’을 뜻하는 ‘구(口)’와 ‘새’를 뜻하는 ‘조(鳥)’를 합하면 ‘운
다’는 의미의 ‘명(鳴)’자가 된다. 이것이 서로 이질적인 것들을 충돌시켜 새로운 의미를 만
들어내는 몽타주의 원리이다. 에이젠슈테인은 예술의 기본원리란 갈등이며 존재의 모순을
밝혀내는 것이 예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관객의 의식에 모순을 환기시켜 올바른 견
해를 형성시키고, 서로 대립하는 것을 충돌시켜 정확한 지적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5)
이제 그의 영화 <파업 Strike>(1925)의 한 장면을 보자. 먼저 칼이 보인다. 육중한 소가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이 다음에 등장한다. 클로즈업으로 잡은 손들이 연결된다. 그러나 이
손의 주인공들은 도살당하는 소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도살 장
소와는 무관한 장소에 있다. 이어서 다시 한 번 소를 무자비하게 도살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어지는 장면은 총을 쏘는 군인들과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는 군중들을 잡은 것이다. 군중들
을 학살하는 군인들과 소를 무자비하게 도축하는 도살자의 병치. 이 두 개의 이미지는 영화
의 내용상 전혀 이질적이고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관객은 연상 작용을 통해 군중들이 학살
당하는 것과 소가 도살당하는 것을 통합시킬 수 있다. 곧, ‘군중들은 소처럼 일만하고 사용
가치가 떨어지자 살해당한다’라는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듯 에이젠슈테인은 쇼트들을 충돌시키고 병치시켜 관객을 자극하고 충격에 빠뜨린다.
우리는 앞서 지가 베르토프를 살펴본 바 있다. 그가 주창한 키노 아이론의 핵심은 인간의
키노 프라우다
눈보다 뛰어난 카메라의 눈을 통해 현실을 진실하게 포착하고 관찰하는 것이었다. 에이젠슈테 .
리얼리즘
인은 베르토프가 민중들의 삶을 관찰만 한다고 비판했다.6) 중요한 것은 관찰이 아니라 관객의
심리를 자극하여 일깨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예술작품이란 “관객의 심리를 경작하는 트
랙터”와 같은 것이었다.7) 이것은 관객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관객
이 연상 작용을 통해 얼마든지 능동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업>에서 민중의 학살과 소의
도살을 결부시키는 것은 관객의 지적 능력에 있다. 그는 영화 <10월 October>(1928)에서 이
것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영화 <10월>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러시아 제정을 타도했던
것은 10월 혁명이 아니라 2월 혁명8)이었다. 에이젠슈테인은 2월 혁명으로 임시정부의 수반이
된 케렌스키(Aleksandr Fyodorovich Kerenskii)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영화 속에서 케렌스
키는 모든 낡은 것들을 복원하려는 권력욕의 화신이다. 유물론자로서 에이젠슈테인은 신을 숭
배하는 우상들을 낡은 것의 상징으로 제시한다. 이어서 국가를 상징하는 훈장과 견장들이 제
시된다. 이어지는 장면은 2월 혁명으로 타도된 모든 것들이 다시 복원되는 것이다. 영화는 촬
영된 필름을 거꾸로 돌림으로써 이것을 보여준다. 부서졌던 황제 동상의 팔다리가 다시 붙여
지는 식이다. 황제의 동상이 완성되고 코르닐로프(Lavr Georgyevich Kornilov) 장군이 나온
다. 그는 2월 혁명의 성과를 분쇄하고자 쿠데타를 일으킨 반동적 인물이다. 그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은 말을 탄 나폴레옹의 모습과 병치된다. 이어서 케렌스키가 팔짱을 낀다. 그리고

5)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몽타쥬이론』, 이정하 편역, 영화언어, 1990, 175쪽.


6)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앞의 책, 163쪽.
7) 위의 책, 161쪽.
8) 1917년 2월 러시아 제정을 타도한 혁명.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입헌민주주의를 표방한 임시정부를 세
웠으나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10월 혁명에 의해 타도되고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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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짱을 낀 나폴레옹의 동상이 이어진다. 에이젠슈테인은 코르닐로프나 케렌스키 모두가 프랑
스혁명의 정신을 배반하고 황제가 되고자 했던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렇게 연
상 작용을 통해 관객의 지적능력에 호소하는 몽타주를 에이젠슈테인은 지적 몽타주라고 불렀
다.
에이젠슈테인은 관객을 자극하고 충격에 빠뜨리는 감각에 호소하면서도 관객의 지적 능력
을 신뢰했다. 그는 관객이 뜨거운 감성과 차가운 이성을 모두 동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스탈린 체제가 공고화되면서 그의 급진적 실험들은 부르주아 형식주의로 매
도당했다. 민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실험만 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스탈린주의 관
제 예술 이데올로기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도래한 이후 그는 더 이상 뛰어난 몽타주 영화들
을 만들 수 없었다.9)

☞ 더 읽을거리
김용수, 『영화에서의 몽타주 이론』, 열화당, 1996. (3부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
더들리 안드류, 『현대영화이론』, 조희문 역, 한길사, 1988 (3장 세르게이 아이젠슈타
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몽타쥬이론』, 이정하 편역, 영화언어, 1990.

5. 영화미학의 형성 4: 아른하임과 형식주의 미학

1) 루돌프 아른하임

루돌프 아른하임(Rodolf Arnheim) : 독일 베를린 출신의 심리학자이자 미술이론가. 베를린


대학의 심리학 연구소에서 형태주의 학파(Gestalt school)의 막스 베르트하이머(Max
Wertheimer)와 볼프강 쾰러(Wolfgang Köhler) 교수 밑에서 수학했다. 영화에도 관심이 많아
1920년대 중반부터 1933년까지 잡지 『슈타헬슈바인』(Das Stachelschwein)과 예술비평 전문
지 『세계무대』(Die Weltbühne)에 영화비평을 기고하고 편집을 맡았으며, 영상의 시각적 인지
측면에서 무성영화의 미학을 이론화한 《예술로서 영화》(Film als Kunst, 1932)를 출간한 후에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33~34년에 로마와 런던을 거쳐 1940년에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에서는 뉴욕의 사라 로렌스 대학(Sarah Lawrence College)과 하버드 대학, 미시간 대
학에서 교수를 하며 예술심리학 이론에만 집중하여 《시각적 사고》(Visual Thinking, 1969),
《예술과 시각적 인지 : 창조적 눈의 심리학》(Art and Visual Perception: a psychology of
creative eye, 1974) 등의 저서를 남겼다. 독일에서는 1977년에 그의 20~30년대 영화비평을
모은 저서 《영화비평과 이론》(Kritiken und Aufsätze zum Film, 1977)이 출간되었고 《예술
로서의 영화》도 2002년에 재출간 되었다. 현재 독일 함부르크에는 그를 기념하는 루돌프 아른
하임 연구소(Rudolf Arnheim Institute)가 있다.

어떤 이들은 영화가 현실의 모사 혹은 반영이라고 말한다. 회화보다는 사진이, 사진보다는


영화가 현실에 더 근접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영화는 현실 이상의 그 무
엇이라고 말하며 영화가 갖고 있는 형식적 미학을 더 중요시한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명백하

9) 소비에트 몽타주의 짧은 전성기가 끝나자 러시아 영화는 스탈린이 통제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철


의 장막 아래 가려지기 시작했다. 스탈린 사후, 즉 1950년대부터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러시아 영화
와 50년대 영화가 서방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시기 러시아 영화를 해빙기 영화라고 부
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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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는 영화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재현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어
떻게 예술일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는 예술적 기능이 매체 자체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라
믿었다. 시는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아니라 시어가 중요한 것이다. 회화는 묘사하는 대
상이 아니라 선, 색, 구성 등 형식적 특성들이 우리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다.10)
아른하임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태 심리학(게슈탈트 심리학 Gestalt psychology)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루빈의 술잔’은 익숙한 그림일 것이다. 여기에서 흰 색을 주로
본다면 술잔이 보일 테고 검은 색을 주로 본다면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이 보일 것이다. 동
일한 시각적 정보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형태심리학은 현실의 재현이나 모방이 아닌 변형과 구성을 중요시했다. 우리는 시각적 정보
를 통해 우리 나름대로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을 눕혀놓고 발쪽을 향해
서 사진을 찍는다면 발은 그 사람의 머리보다 크게 사진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발이 사람
보다 작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진에선 발이 더 크게 나타난다. 아른하임에 따르면 사진은
근본적으로 2차원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기술적 한계야말로 사진을 이어받은 영화의
기술적 한계이다. 그러나 아른하임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기술적 한계야말로 영화가 예술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영화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아른하임이 왜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는 형태심리학만 갖고는 설명할 수 없다. 1920년대 유럽 아방가르드 영화의 물결을
살펴봐야 한다.

2)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인상주의 영화


1920년대 들어 유럽 전역에서는, 세계 영화시장의 패권을 쥐고 있던 미국의 고전주의 영화
에 대한 수용과 전복의 시도가 동시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을 통해
시작된 미국의 고전주의 영화가 세계 영화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리피스의 작품들은 광대한 파노라마 화면, 매끄러운 스토리 전개, 세심한 카메라 움직임 등
그전까지의 영화와는 확연하게 차별되는 특징들을 보여주면서 영화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정
착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리피스의 새로운 연출기법과 다양한 제작 테크닉을 신속
히 수용하고 학습한 유럽 영화계는 점차 미국의 고전주의 영화에 대한 극복과 전복의 시도를
전개해간다. 러시아에서는 쿨레쇼프(L.V.Kuleshov)로부터 에이젠슈테인(S.M.Eisenstein)에 이
르는 몽타주 이론을 중심으로 미국 영화의 모범적인 편집양식에 대한 연구와 반성이 이루어지
고, 독일에서는 보편적인 영화 형식과 표현들을 거부하며 이미지의 변형과 화면의 조형적 구
성으로 의미를 전달하려는 표현주의 영화 운동이 일어났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도 역시 미국 영화식의 모범답안을 거부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형성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무엇보다 1920년대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폭발한 다양한 실험적 예
술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는데, 당시 문학, 미술, 음악, 사진 등 각 분야의 예술가들은 한결 같
이 영화라는 신생 장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그들의 진보적인 예술 정신을 영화에 접목
시키려 했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새로운 영화운동은 충격적인 효과를 통한 전통적 가치의 전복이
라는 초현실주의 정신을 영화작품 안에서 충실히 이행한 초현실주의 영화들이 있다. 가장 대
표적인 인물은 스페인 출신의 루이스 브뉘엘(Louis Buñuel)이 만든 <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1928,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공동 연출)와 <황금 시대 L’Age d’or>(1930)
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정점을 이루면서 동시에 막을 내린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브뉘엘의

10) 더들리 안드류, 『현대영화이론』, 조희문 역, 한길사, 1988,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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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는 봉건적인 카톨릭 가치관과 부르주아 사회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면서 당시 엄청난 센
세이션을 일으켰는데, 특히 <황금 시대>는 프랑스 거의 전역에서 1980년대까지 상영금지 당
하는 수난을 겪었다.
또한 초현실주의 영화들에 비해 비판의식은 약하나 더욱 치열한 실험 정신들을 지향하는 아
방가르드 영화(avantgarde)이 등장한다. 르네 클레르(Renè Clair)가 감독하고 만 레이(Man
Ray), 에릭 사티(Eric Satie), 프랑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 앙드레 브르통(Andrè
Breton) 등이 제작에 참여한 <막간 L’Entr’acte>(1924)은 아방가르드 영화의 전형으로 남게
되는데, 이 작품은 카메라의 이동과 렌즈의 조작에 따라 영화가 전혀 새로운 이미지와 의미를
창출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밖에도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페르낭 레제
(Fernand Léger), 마르셀 뒤샹(Marchel Duchamp) 등 당대에 각 예술 장르를 이끌던 전위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넘어 영화에 뛰어들면서 독특한 실험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이들
의 영화들은 판독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표현 영역을 넓히는데 공헌하며, 이후 전
위 영화의 계보를 만들어내는데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다.11)
한편, 당시의 실험영화들 중에서도 화면의 미적 표현이나 조형적 구성에 치중했던 영화들은
특별히 인상주의 영화 혹은 탐미주의 영화로 분류되었다. 극중인물의 지각적 경험, 그들의 시
각적 인상을 화면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다. 아벨 강스(Abel Gance)와 마르셀 레르비에
(Marcel L’Herbier)가 그 대표적 감독인데, 특히 아벨 강스는 1923년 작가 블레즈 상드라스
(Blaise Sandras)와 <바퀴 La Roue>를 만들어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1927년에는 영화
사에 남을 명작 <나폴레옹 Napoléon>을 완성해 프랑스 무성 영화의 절정을 이루었다는 평가
를 받기도 했다. 이 두 작품의 시나리오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지만, 눈부신 빛의 조화와 여러
시각적 효과들로 이루어진 영상은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영화의 이
런 전통은 유성영화가 등장하면서 1930년대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 영화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1920년대에 유럽에서 영화를 연출한 사람들이 직업적 영화감독만 있었던 것은 아니
다. 그들은 영화가 시, 회화, 사진의 확장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영화는 객관적인 세계의 묘사
가 아니라 등장인물의 주관적인 감성과 심리 상태에 의해 포착된 현실 이미지들과 무의식적인
욕망 및 꿈의 세계를 이미지로 표현하고자 했다. 현실의 도덕적, 윤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상
상 속의 환상 세계, 비논리적인 시간, 공간 개념으로 진행되는 장면들을 보여주었다. 페르낭
레제의 <기계적 발레 Ballet mécanique>(1924)는 어떠한 내용도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
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간간이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어떠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 움직이는 형상으로서만 존재한다. 사람의 얼굴이 다중노출(multiple exposure)12) 기
법을 통해 여러 형상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13)
아른하임이 말한 기술적 한계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다중노출, 디졸브14), 패스트 모
션, 슬로우 모션, 그리고 우리가 다음에 살펴보게 될 몽타주 등 영화의 거의 모든 기법들을
옹호했다. 그가 기술적 한계라고 불렀던 것은 영화란 현실을 재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11)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런 영화의 흐름들은 당대 예술의 흐름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상업성으로 무장
한 할리우드 영화가 유럽에 힘을 발휘하면서 이 같은 흐름들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50년대 이후
새로운 영화들의 등장으로 조성된 분위기 아래에서 다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12) 여러 가지 영상을 겹쳐 인화하여 새 영상을 만들어내는 특수효과.
13) 초현실주의 영화, 아방가르드 영화, 인상주의 영화의 구분선은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모두
를 통칭해서 아방가르드 영화, 전위영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상 종이 한 장 차이이다.
14) 영상의 이중인화로 인해 앞의 쇼트(shot)가 서서히 사라지고 뒤의 쇼트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 잠시
동안 두 쇼트가 겹쳐져 있게 되며, 흔히 오버랩(overlap)이라 부르기도 한다. 쇼트란 카메라가 찍기
시작한 순간부터 멈출 때까지 연속적으로 기록된 영상으로서 편집되지 않은 필름 조각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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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다. 즉, 영화는 현실을 변형시키고 새로이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른하임이 기술적 한
계로 지적했던 것을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무엇보다도 이 당시가 무성영화, 흑백영화의
시대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선,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영화는 ⓵ 평면적인 스크린
에 영사되기 때문에 완전한 입체감을 표현하기 어렵다. ⓶ 둘째, 색채를 결여하고 있다. 모든
색채는 흑색과 백색, 다양한 회색으로 환원되어 나타난다. ⓷ 셋째, 관객이 스크린에 가까이
혹은 멀리 위치한 정도에 따라 물체가 다르게 보이고 움직임도 다르게 느껴진다. 스크린의 좌
우편에 치우쳐 앉을 때에 물체는 더 왜곡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 밖에도 ⓸ 편집으로 시공간
적인 연속성이 보장되지 않으며, ⓹ 시각을 제외한 청각, 후각과 촉각도 표현할 수 없다.15)
그러나 아른하임은 이것을 “자연으로부터의 고마운 이탈”이라고 말했다.16) 조명의 각도, 명암
대비, 그림자 효과 등 조명기법은 현실을 변형시킬 수 있고,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주관적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

3) 독일 표현주의 영화
아마도 이러한 주관적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들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들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주의(expressionism)는 1910~1920년대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예술계를
풍미한 문예사조로서 기술문명에 대한 비판의식과 실존에 위기감을 느낀 예술가들이 기존의
사실-자연주의 및 인상주의를 배격하고 감정표출과 주관적 표현을 추구했던 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은 회화에서 시작되어 다른 조형예술에 이어 문학, 연극, 영화, 음악에도 폭넓게 확산
되었다.
표현주의 영화들은 예술적 요구가 높은 지식인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당시 미술계를 풍
미하던 표현주의 미술로부터 많은 요소들을 끌어왔다. 영화에서는 장치와 소품, 분장을 비롯
하여 전반적인 미장센에서 표현주의 회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고, 심지어 삐딱하게 쓰인 자막
들에도 표현주의 미술의 영향이 있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 장치에서는 기울어지고 삐죽삐죽한
건축물과 경사진 평면, 휘어진 길과 명암 대비가 뚜렷한 조명 등이 자주 활용되었다. 표현주
의 영화에서는 이러한 시각적 요소들이 전면에 대두되어 특별한 의미를 띠게 된 것이 기존의
영화들과는 다른 점이었다.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영화는 바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The Cabinet of Dr.
Caligari>(1919)이다. 이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려는 의지가 거의 없어 보인다. 인
공적인 세트에서 촬영했으며, 의도적으로 입체감을 축소키셨다. 무성흑백영화이기에 당연히
색채가 결여되어 있으며, 대사도 자막으로만 전달된다. 명암대비가 강한 조명은 흰 색과 검은
색의 공간을 더욱 명징하게 보여준다. 배우들의 과장된 분장이나 몸짓도 그들이 말하려는 것
보다 행동하는 것에 주목을 끌게 한다. 또한 이 영화는 세트에 새로운 역할과 의미를 부여한
다. 이전만 해도 영화의 세트는 단지 배경으로서 사건이 진행되는 장소의 역할만 했으나, 이
영화에서 세트는 영화의 주된 분위기를 말해주며, 영화가 말하려는 전체적 상황, 즉 인물들이
처한 절망과 비극 속에서 출구 없는 상황에 대해 상징성을 띤 조형물로 나타나고 있다. 거의
기하학적으로 보이는 이 영화에서 현실감을 느낄 관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시기의
유럽 무성영화가 모두 이런 식으로 연출되지는 않았다. 이 영화는 한 극단적인 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른하임은 현실감을 결여하고 있는 이런 속성이야말로 영화를 ‘현실의
단순한 복제’에서 구원해주는 길이라 믿었다.

15) 이상면,『영화와 영상문화: 영화와 영상이론 ․ 예술 ․ 교육』, 북코리아, 2010, 123~124쪽.


16) 위의 책,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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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른하임이 아방가르드 예술의 세례를 받은 유럽 무성영화만을 옹호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는 같은 시기 할리우드의 무성영화, 특히 가장 대중적인 찰리 채플린의 영화도 찬양했다. <황
금광시대 The Gold Rush>(1925)의 그 유명한 ‘구두 먹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구두를 게걸
스럽게 먹고 있는 굶주린 사람을 보여주었을 뿐이라면 그것은 그저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장
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채플린은 가난을 묘사하는 데 있어 부자들이 먹는 생선과 닭고기
를 관념적으로 끌어들인다. 생선과 닭고기는 물론 이 장면에 없다. 그러나 닳아빠진 구두는
생선의 가시로, 구두에 박힌 못은 닭의 뼈로, 구두끈은 스파게티를 연상시킨다. 아른하임은 채
플린이 이처럼 형태적인 유사성을 관념적으로 시각화하면서 ‘배고픔 대 안락한 삶’이라는 인
간 주제를 진정으로 영화적인 방법으로 제시했다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이 장면의 위대한
예술성이라고 극찬했다.17) 또한 아른하임은 마지막 장면에서 채플린이 여자와 춤출 때 허리끈
에 묶인 개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행복과 성공의 순간에도 악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이 암
시된다고 본다. 그가 이런 장면들에서 각별히 주목하는 것은 채플린이 영화적 언어를 통해서
분명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른하임은 1920년대의 무성영화야말로 영화예술의 정점이라고 생각했다. 무성영화에 근거
한 그의 영화미학은 유성영화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유성영화를 적의에 찬 시선으로 바
라보았다. 배우들이 말을 하게 됨으로써 주제와 대사에 모든 것이 맞춰지는 것을 비난했다.
다루려는 내용을 더 중요시 여김으로써 영화의 모든 표현성과 조형성이 파괴된다고 주장했다.
영화가 점점 현실을 닮아간다는 것은 ‘현실의 단순한 복사’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라
고 비판했다. 카메라가 점점 더 현실을 기록하는 기계로 전락하는 것을 한탄했다.
영화이론사에서 아른하임은 교과서에 나오는 박제된 이론가로 치부되거나, 영화의 기술적
진보를 부정했던 괴팍한 미학자쯤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영화미
학자가 결코 아니었다. 영화를 단지 현실의 반영이나 기록이 아니라 현실의 창조적 변형이라
고 생각했던 많은 영화 예술가들에게 그는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왕자웨이(왕가위)의 <타
락천사 墮落天使>(1995)는 그 수많은 예들 중 하나일 뿐이다. 왕자웨이는 영화 전편에 걸쳐
형상의 왜곡을 주기 위해 광각 렌즈18)를 사용했으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슬로우 모션과 패
스트 모션이 교차한다. 물 흐르듯 유영하는 왕자웨이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아른하임이라면 옹
호하지 않았을까? 컬러영화와 유성영화의 시대에도 아른하임의 미학적 유산은 무시할 수 없는
한 축으로 남아 있다.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과 함께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그리고 영화사에서 영향력을 행사


한 영화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프리츠 랑 Fritz Lang, 1927)를 찾아서 살펴보자.

☞ 더 읽을거리
더들리 안드류, 『현대영화이론』, 조희문 역, 한길사, 1988. (제2장 루돌프 아른하임)
루돌프 아른하임, 『예술로서의 영화』, 김방옥 역, 기린원, 1990.

17) 루돌프 아른하임, 『예술로서의 영화』, 김방옥 역, 기린원, 1990, 146쪽.


18) 일반적인 표준렌즈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 렌즈. 원근감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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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화미학의 형성 5: 리얼리즘 영화의 미학

1) 앙드레 바쟁 더형식적
조금
루돌프 아른하임에서 소비에트 몽타주론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형식주의 전통에 서 있다. 앙
드레 바쟁(André Bazin)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는 영화의 소명이 실제 현실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감독의 주관적인 견해는 배제될수록 좋은 것이고,
소재를 작위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최소한으로 제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9) 근본적으로
카메라가 현실의 모습을 담는 한, 영화는 태생적으로 리얼리즘적일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었
다.
앙드레 바쟁은 1918년에 태어나 1958년, 마흔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40년대 초반에서 50년대 후반까지 2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영화에 대한 수많은 글을
썼던 비평가였다. 그가 쓴 글들은 『영화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e cinéma?』라는 네 권
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그는 이 책의 완간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영화의 리얼리즘을 공부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영원한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바쟁이 말하는 리얼리즘은 일반적인 예술의 리얼리즘과는 좀 다르다. 우리는 문학이나 여타
예술에서 형식을 중요시하면 형식주의, 주제나 내용을 중요시하면 사실주의, 즉 리얼리즘이라 미이라 콤를렉스
고 한다. 그러나 바쟁은 주제와 내용을 떠나서 영화는 근본적으로 리얼리즘적 예술이라고 생
각했다. 그 이유는 영화가 사진의 특성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화가는 현실의 인물이
나 사물, 자연을 유사하게 그릴 수는 있다. 그러나 캔버스 앞에 있는 사물이 현실 그대로의
것은 아니다. 바쟁에 따르면 사진의 능력은 현실 세계의 상(像)이 인간의 창조적 개입 없이 자
동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에 있다.20) 사진의 강력한 지표성은 카메라 앞에 ‘사물이 거기 있었음’
을 증명한다.21) 그래서 사진의 객관성은 모든 회화에는 결여되어 있는 신뢰성을 부여한다. 영
화는 여기에 움직임을 더함으로써 사진의 객관성을 시간 속에서 완성한다.22) 시간이 없다면
4 시간적대현
움직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쟁의 이러한 생각은 영화에는 고유한 리얼리즘적 미학이 있다는 사고로 발전한다. 대표적
인 것 두 가지만 들어보자면 롱 테이크(long take)와 딥 포커스(deep focus)이다. 롱 테이크
란 쇼트를 나누지 않고 일정 시간 동안 길게 지속시키는 것이다. 딥 포커스란 포커스를 한 곳
에만 맞추지 않고, 화면의 앞에서 뒤까지 모두 뚜렷하게 맞추는 것이다.
시공간적 리얼리티를 보존하고자 하는 바쟁의 미학은 롱 테이크와 딥 포커스가 결합할 때
최고의 조합을 만들어낸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으로 손꼽히는 <시민 케인 Citizen
Kane>(1940)의 한 장면을 보자. 케인의 양부모가 케인의 재정적 지원을 맡을 대처 씨와 계약
을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화면 전경에 앉아 있는 케인의 어머니와 대처 씨, 중경에 서
있는 케인의 양아버지, 그리고 저 멀리 후경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어린 케인의 모습이
다 뚜렷한 포커스로 맞추어져 있다. 딥 포커스가 쓰인 것이다. 이 장면 역시 쇼트를 나누지
않고 롱 테이크를 활용한다. 바쟁은 쇼트를 잘게 나누는 몽타주는 감독이 관객에게 마땅히 봐
야 할 것을 선택해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어느 한 인물에게만 카메라의
포커스를 맞춘다면 그것은 그 쪽만 보라고 감독이 미리 관객의 시선을 정해주는 것이다. 우리

19) 더들리 안드류, 『현대영화이론』, 조희문 역, 한길사, 1988, 204쪽.


20) 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박상규 역, 시각과 언어, 1998, 19쪽.
21) 로버트 스탬, 『영화이론』, 김병철 역, K-books, 2012, 97쪽.
22) 앙드레 바쟁, 앞의 책,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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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 장면에서 감독이 선택해 준 대로가 아니라 전경과 중경, 후경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우
리 스스로 선택해서 보게 된다.
바쟁은 영화가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라고 여겼다. 그 창문을 들여다보는 것은 물
론 관객이다. 여기에서 창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두 감독이 정해준다면 관객의 역할은 축
소되고 말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이 그토록 찬미했던 몽타주는 바쟁에게는 감독의 횡포였다.
몽타주는 감독이 미리 제시해주는 의미만을 따라갈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바쟁이 딥 포커
스와 롱 테이크를 중요한 리얼리즘 미학으로 생각한 것은 관객이 그것을 통해 영화에서 찾고
자 하는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바쟁은 이러한 리얼리즘 미학이 관객
의 민주적 사고를 확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쟁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10여 년은 영화기술사에서 일대 도약이 일
어났던 시기였다. 텔레비전의 급속한 보급이 낳은 경쟁 때문에 영화화면은 빠르게 컬러로 바
뀌었다. 스크린의 크기도 더 넓어져서 4:3의 표준화면은 16:9 이상의 와이드 스크린으로 대체
되었다. 이미 1920년대 후반에 도입된 사운드는 이제 원숙한 경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바쟁은
이 모든 기술적 혁신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우리가 보는 현실 세계가 컬러이듯이 영화가 컬러
로 바뀌는 것, 우리가 말을 하고 소리를 듣듯이 영화도 그렇게 하는 것은 바쟁이 그토록 원했
던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배가시키는 것이었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영화의 기술적 한계야말로
영화의 예술성을 보장한다고 말했지만, 바쟁은 반대로 영화의 기술적 확장은 그가 꿈꾸는 리
얼리즘을 실현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바쟁이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흘렀다. 그는 영화가 재현한 대상은 실제와 같은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고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카메라 앞에 ‘사물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바쟁의 신념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통용될 수 있을지는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컴퓨터 그래픽과 디지털 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가상의 이미지와 현실
을 분간하지 못하게 할 정도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바쟁의 사고를 넘어서는 또 다른 리얼리즘
이 필요할 것 같다.

2) 네오 리얼리즘
네오 리얼리즘(Neo Realism)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1940년대 초 이탈리
아 비평가들의 글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이 용어는 이탈리아 영화의 일상적인 관습에서 탈
피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대들의 영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1940년 이전, 그러니까 무솔리니 통
치하의 영화산업은 웅대한 대하 사극물과 감상적인 상류계급 멜로드라마의 제작에 편중되었
다. 그리고 많은 비평가들이 이를 인위적이고 퇴폐적이라고 느꼈다. 새로운 관점의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영화들이 리얼리즘을 지향하도록 즉, 당대의 사회와 습관
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대표적인 영화로는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의 <흔들리는 대지 La Terra Trema>(1949),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담아낸 로베르
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의 <무방비 도시 Roma, città aperta>(1945)23),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의 <구두닦이 Sciuscia>(1946), <자전거 도둑 Ladri di
biciclette>(1948) 등이다.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여건들이 이러한 경향의 영화들을 태어나도록 했다. 새로운 이탈리

23) ‘무방비 도시’라는 의미는 함락이 확실시 되는 도시에서 무의미한 전투 및 학살을 피하기 위해 방어
를 포기 하는 군사용어이다. 즉 로마가 무방비 도시라는 의미인 이 제목은, 2차 대전 당시 무솔리니
가 실각하자 독일군이 점령한 로마의 현실을 드러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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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의 감독들은 이 사조에 기꺼이 참여했고 이들은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들 영화는 점차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2차 대전 이후의 세계의 정서와도 관련이 있다.
이들 영화는 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1945년 로마의 거대 복합 스튜디오인 치네치
타(Cinecittà)가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었기 때문에 세트는 자연스럽게 부족할 수밖에 없었으
며 기자재도 귀한 시절이었다. 때문에 네오 리얼리즘의 영화들은 실제 장소에 의존했고 그들
의 영상은 다큐멘터리처럼 가공되지 않은 거친 경향을 띄게 마들었다. 거리나 개인 건물 내에
서의 촬영은 할리우드 영화와 다른 스타일로 촬영되었고 유명 배우 보다 비직업적적인 배우들
을 자주 기용했다. <자전거 도둑>의 배우는 감독이 한 공장의 노동자를 기용한 것으로 유명하
다. 즉 그가 움직이고 앉는 모습, 훈련된 배우가 아닌 노동하는 사람들의 손짓과 몸짓을 영화
속에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제작의 경향은 연기와 배경에 대한 상당한 즉흥성을 만들어 냈으
며, 이들 영화가 유연해지는데 결정적으로 작동했다.24)
네오 리얼리즘의 경향의 영화들이 갖는 의미는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복잡한 구성
의 영화에 반발하여 감독들은 서사 연결을 느슨하게 했다. 그래서 관습적인 이야기 구성 대신
파격적인 구성이 주를 이루었고 비인과적으로 장면들이 연결되었으며 닫힌 결말 대신 열린 결
말을 선호했다. 인물 행위의 동기들은 주로 경제적, 빈곤, 실업, 착취로 그려지면서 이들 영화
는 2차 대전 전후 황폐해진 패전국의 모습을 용어 그대로 사실적으로 반영하기 적합한 것으로
판단되기 시작했다. 요컨대 자연스럽게 황폐한 국가의 모습과 사회상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
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삶이 아주 혼란스럽고 빈곤과 실업이 만연하며 물가폭등이 통제되지
않는, 패배하고 점령된 나라에서 시작한 네오 리얼리즘의 이런 양식은 이후 다른 유사 나라에
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경제적, 문화적 요인들이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을 유지시키기 시작했지만, 그것들이 이 운
동이 종식되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전후 이탈리아가 다시 번영을 맞기 시작하자 정부는
당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영화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1949년 이후 이탈리아 정부는 검열
과 압력을 가했으며 이런 경향의 영화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방대한 규모의 이탈
리아 영화제작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고 네오 리얼리즘은 더 이상 자유로움을 누릴 수 없었
다. 그리고 유명세를 얻은 이 경향의 감독들은 사회보다 개인적인 관심사로 눈을 돌리기 시작
했다. 로셀리니는 기독교적인 인본주의와 서구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데 시카는 감상
적인 로맨스로, 비스콘티는 상류사회 풍속도로 관심을 바꾸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네오
리얼리즘 운동의 시작과 종말을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에서 데 시카의 <움베르토 D
Umberto D>(1951)로 상정한다. 짧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네오 리얼리즘은 고전적인 할리우
드에 대한 반기였으며 동시에 사회상을 영화가 그대로 반영함으로써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영화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정신은 프랑스의 새로운 감독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 그래서 바쟁은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영화를 전적으로 옹호했다. 이들이 몽타주를


배격하고 스펙터클적인 현실을 자제하고 현실의 연속성이 강조될 수 있는 롱쇼트-롱테이크 단
일쇼트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바쟁은 자신의 이론과 딱 맞아떨어지는 진정한 실례가 바
로 네오 리얼리즘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로셀리니의 영화와 데 시카의 <자전거 도
둑>을 극찬했으며, 두 영화픞 “스펙터클한 장면을 자제하고 스크린을 현실의 연속성으로 전환
시키는 것을 감행”했다고 평가했다.

24) 그래서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을 반 다큐멘터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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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네오 리얼리즘의 대표적인 감독이라 하면 앞서 언급한 세 명의 감독(루키노 비스콘
티, 로베르토 로셀리니, 비토리오 데 시카)을 언급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 활동했던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 이탈리아 비평가들은 그를 네오 리
얼리즘의 배신자로 공격했지만, 펠리니는 “네오 리얼리즘은 정직한 눈으로 현실을 들여다봄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의 종류는 사회 현실뿐 아니라 정신적 현실, 형이상학적 현실, 사람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때론 현실은 시를 필요로 한다.”라며 방어했다.
분명 그의 영화는 네오 리얼리즘과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대표작인 <길 La
Strada>(1954)을 보면 양식화된 연기와 서정적인 이야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펠리니를 네오 리얼리즘과 이후 이탈리에서 등장하는 영화들과의 다리 역할을 한 감독
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유물론적 관심사에서 정신적인 관심사의 가교로 말이다.

☞ 오늘날 리얼리즘(사실주의)라는 용어는 예술에서 등장한 개념과 문학의 개념 등이 서로


혼재된 채로 사용되고 있다. 무분별한 개념의 오용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그
개념은 뚜렷한 구분선이 없고 복합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어 혼란스러운 면이 있긴 하다. 여기
서는 최소한 영화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의 기본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주지하다시피 영화는 대부분 허구적 요소에 근거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영화에서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허구가 어떻게 묘사되느냐에 따라 영화의 리얼리즘 형태가 나누어진
다. 리얼리즘의 두 가지 형태는 고전적 리얼리즘(classical realism)과 유럽 등지에서 전개된
리얼리즘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고전적 리얼리즘은 허구적 세계를 마치 현실에 존재하는 것처
럼 보여주는 것이 특징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이들 영화는 오락적인 성격으로 스토리 진행이
틈새 없이 보이게 하는 연속편집을 지향하여 환상과 허구의 모습이 마치 실제인 것처럼 묘사
극고전적편집
하는데 주력한다.
유럽에서 발전한 리얼리즘은 가공을 최소화하여 실제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고자 하는 방법
으로 제작된 영화들이다. 네오 리얼리즘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한 마디로 사회의 거울로서의
영화이며, 가능한 인위적 기법을 절제하여 현실의 모습을 취사선택하는 감독의 능력을 중요시
여긴다. 더구나 사회의 어두운 측면이나 모순, 문제들을 드러내는 자세를 가진 시각을 취할
대 영화는 사회비판적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이렇게 현실 묘사를 넘어서 현실 폭로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영화를 사회적 리얼리즘(social realism)이라고 한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
는 대표적인 영화감독으로는 영국의 켄 로치(Ken Loach)가 있다. 하지만 현실을 묘사하는 방
법에 이르기까지 많은 편차가 있고 그대로 재현하는 행위에 윤리적인 판단이 개입되므로 복잡
하고 다양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리얼리즘은 미학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보
수-진보적 입장의 것도 포함한 용어이다. 크게 위의 두 가지 경향으로 구분되지만 실상 그 속
에서 명확히 분류되지 않는 영화들도 있다. 어떤 영화가 리얼리즘이고 리얼리즘이 아닌가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 더 읽을거리
더들리 안드류, 『현대영화이론』, 조희문 역, 한길사, 1988. (6장 앙드레 바쟁)
로버트 스탬, 『영화이론』, 김병철 역, K-books, 2012. (95~106쪽. ‘리얼리즘의 현상학’)
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박상규 역, 시각과 언어,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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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크라카우어의 사회문화적 비평

독일의 영화이론가이자 비평가인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유명한 영화비평서 『칼리가리부


터 히틀러까지(From Caligari to Hitler)』(1947)와 리얼리즘 영화이론을 정립한 이론서 『영화
의 이론(Theory of Film)』(1960)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영화비평의 금자탑 같은 업적
으로 여겨지는 『칼리가리부터 히틀러까지』는 저자가 1920년대 독일에서 성공한 영화들을 비
평하며 대중의 집단적 무의식과 심리 성향을 분석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후대의 영화비평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대락 1921년부터 1933년까지 주로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에서 비평활동을 하며 유력
일간지였던 「프랑크푸르터차이퉁(Frankfurter Zeitung)」에 기고했으며, 영화와 영화관, 관객
에 대해 그리고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한 폭넓은 비평을 보여주었다. 특히 20년대 후반 그
의 영화비평들은 대중들의 영화문화를 주의 깊게 관찰한 것으로서 현대사회의 대중문화에 대
한 사회학적 비평에 가까우며, 오늘날 ‘문화사회학적 비평’이라고 여겨진다. 여기서는 영화비
평을 통해 사회문화 비평을 시도한 크라카우어의 관점과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크라카우어의 영화문화 비평들은 독일 영화사에서 중요시되는 20년대의 영화와 사회문화에
대한 예리한 관찰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고, 또 문화사회학적 비평의 선구적인 시도인 점
에서 오늘날에도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의 저술이 높은 가치를 갖고 있으면서도 전공자들과
후학들에게 쉽게 읽히지 않는 점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문학이나 예술이론을 근거로 문필
활동을 하는 일반적인 비평가들과는 달리 상당히 복합적이고 깊이 있는 사상적 배경을 갖고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25)
그는 1923년 경부터 영화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문학과 철학, 사회학과 건축
학 지식에 근거하며 사회의 시대 경향과 역사 진행을 관찰하려는 데에 주된 목적이 있었다.
그는 1920년대 독일 사회의 ‘표면 현상’을 관찰하며, 영화라는 매체가 사회에 내재된 이데올
로기와 구성원의 의식을 매개하는 속성에 주목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사회의 표피적 현상’
에는 사진과 영화, 영화관과 더불어 패션, 유행음악 같은 대중문화 현상들이 포함된다. 크라카
우어는 대중문화 현상들에서 드러난 사회의 표피적 현상들을 관찰하면서 이들 속에 내재된 의
미를 보려고 하기 때문에 아도르노는 크라카우어가 “사회적 경향들의 암호로서 영화”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즉, 크라카우어는 사회문화 현상을 읽어내고 비평하기 위한 대상으로 영화를
택한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크라카우어의 영화비평은 포괄적인 영화문화 비평이자, 비평을
통해 사회의 내부를 읽어내려는 ‘문화사회학적’ 비평 혹은 ‘사회비평적 에세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1) 사회문화 비평적 관점의 영화비평


근본적으로 그는 카메라의 현실-재현능력에 근거하는 영화의 현실 묘사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재현된 현실의 진실성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영화적 현실이 시대의식
과 사회상을 우회적·비유적으로 드러낸다고 보며 영화 속에 묘사된 현실과 당대 사회와의 연
관성을 찾는다. 그래서 “영화는 현존하는 사회의 거울이다”라는 크라카우어의 단언은 영화가

25) 그는 칸트와 헤겔 같은 형이상학적 고전 미학적 사유뿐만 아니라 짐멜에게서 영향받은 문화현상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교류를 하였고 발터 벤야민과도 친분이 있었다.
이들 중 그는 특히 아도르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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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이 아니라, 묘사된 표면적 현실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현실을 매개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근거로 크라카우어는 평범한 대중
영화들의 우습고 환상적인 사건과 이야기들의 전개되는 비현실적 과정 속에서 사실상 현실로
부터 도피하려는 소망들이 드러난다고 본다. 크라카우어가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에 기고한
「작은 여점원이 영화관에 간다」(1927) 에세이 시리즈와 「1928년의 영화」(1928) 등이 이런 생
각하에서 쓰여진 영화비평들이다.
이런 비평을 위해 그가 주목한 것은 ‘평균치 영화들’이다. 그 이유는 대중들이 꿈꾸는 환상
은 수준 높은 예술영화나 사회현실의 문제를 묘사하는 진지한 영화에서가 아니라, 바로 수준
낮은 영화들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크라카우어는 대중적 오락영화 속의 환상적이고 비현
실적인 이야기 속에서 역설적으로 현실도피적인 꿈들이 있다고 보며, 이런 것들이야말로 ‘대
중의 백일몽(daydream)’들로서 영화에서 황당한 이야기나 모험담, 괴담 혹은 코미디를 통해
우회적으로 묘사된다고 본다. 이렇게 영화 속의 현실 묘사에서 표면과 본질의 역설적인 관계
에 대해 크라카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오늘날 영화들이 비현실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논박해서는 안 된다. 그


들은 가장 검은 장치들을 붉게 칠하고 빨강색을 덧붙여 장식한다. 그 때문에 그들이 사회를 반
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이 표면을 올바르지 않게 묘사할수록 그들은 더
올바르게 묘사하게 되고, 그 속에서 사회의 은밀한 메커니즘이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크라카우어는 오히려 삼류 영화들이 보여주는 가난하고 권력 없는 사람들의 백


일몽들 속에서 하층민의 꿈과 희망, 즉 그 ‘사회의 억압된 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그는 “유치하고 비현실적인 영화의 환상들도 그 ‘사회의 백일몽’이고, 이 속에서 그 사회의 실
질적 현실이 나타나고, 게다가 그 사회의 억압된 소망들이 형상화된다.”고 보았다.
환상과 비현실을 보여주는 영화들은 소시민의 백일몽들을 드러내며, 이들의 근본은 사회 전
복을 목표로 하지 않는 위험하지 않은 짧은 꿈들로서, 사회의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들이다. 더
구나 실제 현실과 유리된 모험담이나 범죄물·로맨스 등이 보이는 평균치 작품들, 대중적 상업
영화들은 사회현실의 문제들을 회피하고 있고 짤막한 꿈을 제공하는 점에서 크라카우어는 ‘도
주의 시도’라고 여기며 도피주의 경향을 본다. 그래서 현실 묘사와 문제들을 의도적으로 회피
하고 치장하여 나타나는 오락영화들에서 대중의 짤막한 꿈을 해석하려는 크라카우어의 시도,
즉 영화 속에 숨겨진 의미 내지 “영화의 진정한 발언을 읽어내려는 크라카우어의 영화비평은
일종의 번역작업을 필요”로 했다.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제작방식에 따른 대중영화들을 비평한 실폐는 「1928년의 영화」(1928)
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글에서 크라카우어는 대중의 취향에 맞춰 제작되는 ‘영화의 전형화’
혹은 ‘영화의 표준화’ 경향을 비판하며, 영화 속의 주제와 모티브, 이데올로기, 사회적 메커니
즘 등을 분석한다. 여기서 그가 특히 유심히 관찰하는 것은 ‘전형적 모티프들’인데, 영화 스토
리에서 자주 나오는 모티프들은 결국 그 사회가 희구(希求)하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며, 그래
서 그는 “영화 모티브들의 본질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총합이며, 이 모티프의 해석을 통해서
사회적 이데올로기들은 마법에서 풀린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이국적 자연과 문화, 풍습 등을
보여주는 ‘문화영화(Kulturfilm)’들에서도 크라카우어는 내포된 이데올로기를 간파한다. 이런
영화들은 현실의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외부세계의 진풍경으로 시민의 눈을 돌리게 하여 사회
의 문제들을 피하게 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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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크라카우어의 비평은 평범한 오락영화들 속에서 대중의 비현실적 환상과 꿈을 파악
하고, 사회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나 숨겨진 정치적 메시지를 읽어내려고 했다. 이런 비평에 따
라 그는 비평가의 역할에 대해 “평균치 영화들 속에 잠재된 사회적 의도들을 끄집어내어 분석
하고 드러내는 데에 있다”고 본다.

2) 역사영화 비평
백일몽을 보여주는 대중영화들의 오락적 기능 뒤에 숨은 것은 보수적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보수적 이데올로기는 건전한 사회비판을 억압하는 기능이 있고, 후에는 비판기능을 마비시키
게 된다. 크라카우어는 대중영화들이 사회비판성을 띠기 어려운 이유를 무엇보다도 영화가 자
본주의 생산체제의 구조에 철저히 종속된 상품인 점에서 찾는다. 영화는 대중의 꿈에 봉사하
는 오락물로 생산되는 소비상품으로서, 대다수 관객인 소시민 계층과 하층민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서 부유층 및 사회 상류층을 비난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비판이 영화 제작비의
제공자인 자본가의 존재를 위협할 정도까지 가지는 못하는데, 그것은 영화의 제작과 상영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 체제와 그 기본 질서는 손상될 수는 없는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크라카우
어는 영화에서 생산과 사회비판의 한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관객은 분명히 상층 부류들의 상태에 대해 불평하는 노동자들과 소시민들로 구성되어 있고,


제작자는 소비자들의 사회비판적인 욕구들을 충족시켜야 사업 이익이 발생 된다. 그러나 결코
제작자는 사회의 토대를 아주 미미한 것에서도 공격하는 묘사들로까지 유혹되지는 않을 것이
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본주의적 기업가로서 자신의 실존을 망가뜨릴 것이다.

대자본가의 돈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그들을 심하게 공격하여 지배계급의 밑둥까지 흔들


어놓는 비판은 가능하지 않으므로 영화에서는 약간의 비판만 허락될 분이다. 이렇게 회피할
수 없는 영화의 체제 긍정적인 속성으로 인해 크라카우어는 수많은 독일과 미국의 오락영화들
을 생산 구조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매체로 본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역
사영화를 볼 때에 보수성은 명백하게 파악된다. 그는 역사영화에서 ‘역사적 의미의 현재화’가
중요시된다고 생각하지만,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이러한 의미가 결여된 채
과거 사건을 눈요깃거리로 전환하여 제공할 뿐이다. 이런 경향은 혁명적 사건을 다루는 영화
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영화들은 과거의 시간·공간으로 돌아가서 인물들이 역사적 의상을
입고 혁명의 승리를 보여줄지라도, 자유의 투쟁은 관객에게 이론상의 정의감을 만족시킬뿐이
고, 과거로의 단순한 회귀가 되어 혁명적 사건의 의미가 과거에만 갇혀 있는 경우가 되어버리
기 때문이다.26) 중요한 것은 역사적 소재를 통해 현재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27) 그래서
그는 대형장치와 화려한 의상과 같은 스펙타클보다 역사적인 진행과정을 찬찬히 보게 만드는
<잔 다르크의 수난>(La Passion de Jeanne d’Arc, 1932)을 옹호한다.

3) 정신분산의 의식
크라카우어는 대도시의 영화관과 대중관객의 영화 관람행위에 대해서도 문화비평적인 글을
남겼다. 여기서 그가 자주 사용하는 중심 개념은 ‘정신분산’으로 대중의 오락영화 수용방식을
틱징짓는 용어이다. 당시의 에세이 「정신분산의 의식(Kult der Zerstreuung」(1926)에서 크라

26) 역사가 시각적 스펙터클로 재현되어 관객의 시각적 쾌락에만 봉사하고 내용은 빈약하다는 의미.
27) 크라카우어의 이러한 경우의 예로 <전함 포템킨>을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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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어의 표현에 따르면, ‘정신분산’은 우리 세계의 “지배되지 않는 혼돈의 반영”으로 그가
20년대 영화문화를 비판하는 핵심적 키워드이기도 하다.
영화가 20년대에 대중문화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면서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서는 화려하고
요란한 장식이 붙은 대형 영화관들이 생겨 났다. 이런 영화관들은 집단 관람의 형식으로 수용
되는 영화 매체의 특징적 공간이다. 이런 대중 영화관에서 오락영화, 삼류영화들을 보여주며
중산층·노동자 관객에게 매일 밤 싸구려 여흥을 제공하는 현상에 대해 크라카우어는 여기서의
영화들은 집단적 오락물로서 관객의 정신분산에 호소한다고 한다. 이제 이상주의 문화는 유령
처럼 기웃거리기나 하고, 매일의 노동에 지친 소시민·노동자들은 힘든 일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정신분산적인 오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크라카우어에게서 “정신분산은 사회질서 속에
확고하게 정착하지 못한 부류에게 욕구와 사회행위로서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며, 여기서 이
런 부초(浮草)28) 같은 부류는 청소년과 여성·사회의 아웃사이더들, 또 사회의 계급구도에 명백
하게 포함되지 않는 이들을 말한다.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이런 대중의 영화관람 행위를 크라카우어는 ‘정신분산의 의식’이라
고 보며, 이런 현상은 지방에서보다 대도시 베를린의 관객에게서 더욱 심하다고 말한다. 그리
고 이제는 세계 어디서나 유사한 취향을 가진 관객층이 형성되어 사장부터 여점원까지 폭넓게
포함되는 “동질적 세계도시 관객”이 공유되는 틀에 짜인 생각과 지향성에 대해 ‘대중적 취향’
이 생겨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심리적 욕구 해소를 위해 영화 관람을 하는 세계도시 관객들이 관람하는 영화가 상영되는
곳은 주로 대도시의 대형 영화관들이다. 대개 시내 중심지에 있는 이런 영화관 건물들은 화려
하게 장식되어 대중들을 꿈과 환상의 궁전으로 유혹한다. 크라카우어는 이런 영화관 건축물
자체에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과 정신분산적 소비의 연결고리를 보기 때문에 영화관에 이미
‘반동적 경향’이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더구나 이런 극장에서 상영되는 대부분의 대중적 오락
영화들은 ‘현실도피적’인데, 관객이 현실과 대결하게 하지 않고 현실에 대해 눈을 감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와 영화관, 그리고 관객에 대한 사회학적 관찰이라고 할 수 있는 크라카우어의 영화 에
세이들은 20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향의 변화를 추적하고, 대중영화에 내재된 보수적 이데
올로기를 간파하고 있다.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대중 집단의 욕구와 사회 행위가 오락과 소비
를 원하는 점에서 크라카우어에게 영화는 ‘정신분산의 문화’이다. 정신분산을 원하는 이들에게
영화가 당대의 일상 문화로 받아들여지는 현상을 보면서 크라카우어는 그 특징으로 일회적이
고, 소비적이고 반사고적이며, 현실로부터 도피주의 성향이 있음을 본다.
“시대의 진단으로서 영화비평”이라고 보이는 크라카우어의 20년대 영화문화 에세이들은 현
대 자본주의 사회현상에 대한 통찰력과 문화에 대한 폭넓은 안목으로부터 비롯된 선구적인 비
평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문화연구 관점에서는 크라아쿠어의 에세이들에 대해 비판적인 견
해가 있다. 노동이 분업화되고,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는
기계가 된 인간들에게서 정신분산의 심리적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잠시의 현실 망각적인
백일몽이란 점을 근거로 영화의 보수성을 지적하는 크라카우어의 견해 역시 보수적이라는 비
판이 있다. 대규모 조직과 체제 하에서 반복적인 노동을 하는 현대의 대도시인들에게는 현실
로부터의 이탈 욕구와 정신분산적 오락의 필요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로 대중영화의
현실도피적 기능은 전 세계적 현상이고, 할리우드 영화에서 더욱 현저하다.
크라카우어는 20년대 영화 속에 내포된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며 대중의 의식을 파헤치려는

28) 물 위를 부유하는 풀.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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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는 40년대 후반에 커다란 결실을 맺었다. 히틀러의 등장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뉴욕
현대미술박물관의 연구 위촉을 받아 독일 영화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바이
마르 공화국 시대(1919~32)의 영화들과 주된 관객이었던 중산층의 의식과 심리적 성향을 분
석하여 유명한 영화비평서 『칼리가리부터 히틀러까지 – 독일 영화의 심리학적 연구 1919~3
2』를 1947년에 내놓았다. 이 비평서에서 그는 20년대 성공적인 독일 영화들을 비평하여 정치
적 마비 상태에 빠져 히틀러에게 끌려간 독일 중산층의 의식을 분석한다. 이 책은 영화에 내
재된 이데올로기와 무기력하게 함몰되었던 수용자의 성향을 사회심리학적으로 분석한 훌륭한
실례로 여겨진다.

8. 영화와 발터 벤야민

예술은 아름다움을 시간의 심연으로부터 불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기술적 재생산 시대


에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현대의 문학과 예술에 관해 탁월한 통찰력으로 유명한 20세기 전반의 문예이론가 발터 벤


야민(Walter Benjamin)은 영상에 대해서도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그의 영상이론에 관련한
저술은 사진 에세이 한 편을 제외하고는 다른 주제의 글 속에 포함되어 있고, 여기저기 산재
해 있는 데다가 그 내용에서도 복합적인 의미가 중첩되어 있어 명료하게 읽히지는 않는다.
동시대 한국에서 벤야민의 영상철학적 이론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심도 있게 연구되지 않고
있다. 오직 유명한 에세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을 근거로 그의 영상이론이 자주
거론되지만, 충분하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거론된 벤야민의 영상이론은 다른
에시이들에서 서술된 영사잉론과 서로 연관성 속에서 설명되어야 하고, 또 그 이전에 벤야민
에게 영향을 끼친 철학자들과 동시대의 다른 문예이론가와의 영향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
지만, 그렇게 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할 정도로 벤야민의 영상이론은 다른 학자·빞여
가들의 이론들과의 연관성과 맥락이 없이 독자적으로만 이해되고 있다.
벤야민의 1920~30년대 영화이론과 미학은 20세기 전반의 철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과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이 두 철학자
들은 현대사회와 영사의 특성에 대한 글을 남겼으며, 벤야민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영향은 그
의 여러 에세이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벤야민은 동시대의 문예이론가이자 비
평가였던 벨라 발라즈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에게서도 영향받은 부분이 있다. 벤야민에게서
이런 사상적 배경과 맥락을 파악하면 그의 난해하고 복합적인 영상이론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1) 현대사회와 영상인지
19세기 말에 태어난 영화는 당시의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빠르고 쉴새 없이 돌아가
는 움직임을 통해 연속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영화의 속성은 대도시의 현대인의 생활이나 세
계인식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와 영상 이미지의 관계에 관한 언급은 독일의 사
회철학자 게오르그 짐멜의 비평적 에세이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문화현상학적 관점으로부터 현대사회의 현상들에 관해 예리한 관찰을 남겼던 짐멜은 「대도
시와 정신생활」(1903)에서 대도시인들에게서 두드러지는 근본적인 심리적 상태를 “외적·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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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들의 급박하고 끊임없는 변화로부터 생겨나는 신경활동의 상승”이라고 하며, “교차되는
상(象, image)들의 급박한 쇄도, 한눈에 파악되는 것 속에서의 현저한 간격, 몰려드는 인상들
의 무방비성”이 대도시에서 인지의 구성 요인으로 본다.
일상생활에서 빠른 템포와 가시적 현상들의 변화무쌍한 이미지들은 영화 영상의 특징인 점
에서 영화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대도시 생활의 템포와 인상에 상응하는 매체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저서 <창조적 진화>(1907)에서 인간의 사고과정을 영화와 비교하면서 영화
기술(cinematography)을 물질 인식에 대한 기본 원리로 이해했다. 그는 빠르게 교차되는 이
미지들을 영화의 본질로 보며 “분리된 여러 개별적 이미지들을 조합하고, 기구를 이용해서 움
직임을 재구성하는 영화기술의 방법은 우리 인식의 메커니즘에 상응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사고와 영화적 방식의 유사성에 대해 베르그송은 이렇게 말한다.

인지, 지각, 언어도 일반적으로 그렇게 진행된다. 우리가 생성을 생각하든 혹은 그것을 표현
하든 혹은 그것을 인지할지라도, 우리가 하는 것은 우리 내부에서 일종의 영사기를 돌아가게
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한 것을 요약하자면 우리의 일상적 인식의 메커
니즘은 영화적 성질(cimeantographical kind)을 지닌다고 하겠다.

베르그송은 움직임을 통해 연속적인 이미지를 보게 하는 영화의 속성에서 현대인의 사고방


식을 보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베르그송은 영화에서 빠르게 변화되는 이미지를 현란한 만
화경과 비교한다. 그는 유리 조각을 짜 맞추어 다채로운 그림이 보이는 만화경을 구성하는 배
열과 비교하며 “우리가 사물들을 인식하는 영화적 특성은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적응하는 만
화경적 성격에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필름의 빠른 회전에 따라 수많은 이미지가 지나가며 실
재와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고, 항상 새로운 이미지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찾은 것이
다.

2)영상의 인지
짐멜과 베르그송이 언급한 현대사회에서 인지 조건과 영상의 인지에 관해 인간 사고의 영화
적이고 만화경적 성격은 벤야민의 영상이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벤야민은 현대사회의
대도시에서 영상은 인지를 ‘충격효과(Chockwirkung)’ 속에서 설명하고 이를 ‘정신분산 속에
서의 수용’으로 이해한다. 그가 영상에 대하 언급하는 곳은 주로 30년대 에세이인 「사진의 소
사」(1931),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5),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1939)에서이다.
이들 에세이에서 벤야민은 집중적으로 영상이론을 전개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설
명하고 있어서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과 영화에 대해
비교적 많이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영상이론에서 심층적인 측면이 드러나는 곳은 「사
진의 소사」와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이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은 산업화 된 현대사회에서 영상의 인지는 ‘충격’
속에서 이루어지며, 인간의 지각과 통각29)에 간과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바로
이것이 짐멜이 대도시 에세이에서 말한 것과 상통하며, 베르그송이 말한 인식의 ‘영화적 방식’
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영화의 장면은 눈에 들어오자마자 곧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버린다. 그것은 고정될 수 없다.

29) 여기서 말하는 ‘통각(統覺)’은 경험과 인식을 의식화, 통일화하는 의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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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이러한 영상을 보는 사람에게 연상의 흐름은 끊임없는 영상의 변화로 인하여 곧 중
단되어버린다. 모든 충격효과와 마찬가지로 상승된 정신의 현재를 통해서 포착되는 영화의 충
격효과는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벤야민은 충격 속에서의 인지는 영화에서 아주 잘 실현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벤야민은


이처럼 현대생활에서의 특징이 영화의 수용원칙이 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현대사회에서 인지 상황과 영상의 인지에 대한 설명은 영화의 존재론까지 확장된다. 그러면
벤야민이 자주 사용하는 ‘충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벤야민에게 충격은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 이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그는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 에서 “정신분석학
이론에서는 정신적 상처(trauma)를 주는 충격의 본질을 자극에 대한 방어의 분쇄로 이해하고
자 한다”고 말한다. 즉, 벤야민은 충격 현상을 외부적 자극에 대해 방어선이 붕괴되는 상황으
로 이해하고 있다.
벤야민이 영상의 인지에 관해 보도 심도 있게 설명하는 곳은 널리 알려진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4년 뒤에 쓴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이다. 흔히 ‘대도시 미학’으로
간주되는 이 글에서 벤야민은 대 사회에서 영상 인지의 상황을 대도시의 복잡한 교통 속에서
보행자가 주변 상황을 인식하는 것과 비유하면서 충격의 경험과 영상의 수용을 ‘도시 보행
자’(flâneur)가 보는 도시 이미지와 관련시킨다.

대도시의 교통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개개인에게 충격과 충돌의 연속을 의미한다. 위험한


교차로에서는 신경의 자극들이 마치 건전지에서 나오는 에너지처럼 급속하게 몸속을 관통한다.
... 새롭고 급박하게 다가오는 자극을 원하는 욕구에 영화가 부응하는 날이 온 것이다. 영화에
서는 충격 형태의 인지가 형식상의 원칙으로 유효된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생산 리듬을 결정짓
는 것이 영화에서는 수용원칙의 토대가 되고 있다.

벤야민은 영화 영상의 인지를 대도시의 교차로에 서 있는 사람, 즉 도시 보행자가 보는 어


지러운 광경에 비유하며 충격의 경험이 영화 매체에서 실현되고 수용형식이 되고 있다고 말한
다. 그리고 벤야민은 이 도시 보행자가 체험하는 ‘충격의 경험’을 달리 표현해서 “의식적으로
오인된 만화경”이라고 하는데, 혼란스러운 대도시 이미지를 만화경에 비유하는 것은 베르그송
의 현대인의 사물 인식에서 만화경적 성격을 보았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처럼 인간의 사고
과정과 대도시의 이미지를 만화경의 현란한 이미지에 비유하는 것은 변화무쌍하고, 연속성이
없이 단절적이고 파편적으로 진행되는 현대 대도시인의 사고 형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충격 속에서의 영상을 인지하는 것은 전통예술과는 다른 수용상황을 발생시키며, 벤
야민은 이를 저인분산(Zerstreuung) 상태에서의 수용으로 여기며 영화의 또 다른 특징으로
본다.

정신분산에서의 수용은 모든 분야의 예술에서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으며, 통각


(Apperzeption)에 있어서 심오한 변화의 징후인데, 영화에서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진정한
도구를 발견한다. 자신의 충격효과 속에서 영화는 이런 수용형식에 부응한다.

영화 영상의 속성도 끊임없는 연속 속에서 망각과 정신분산적 기능을 갖고 있는 점에서 벤


야민이 말하는 충격 속에서의 영상 인지와 정신분산 상태에서의 수용은 현대생활의 유사한 측
면을 말한다. 요컨대 영화야말로 현대성(modernity)을 스스로 내포한 현대적인 매체라고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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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이렇게 벤야민은 충격효과와 정신분산을 연결시키고 있는데, 본래 영화 수용에서 ‘정신분산’
의 개념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가 1920년대 영화문화 비평에서의 핵심어로, 특히 대중영화
비평을 하는 곳에서 자주 사용하곤 했다. 다만, 벤야민은 크라카우어가 주로 대중의 영화수용
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정신분산 개념을 현대예술의 수용에 대해 폭넓게 사용하면서 그가
모더니티의 특징으로 여기는 통속적인 미적 경험을 설명하는 데에 주력한다.

3) 벤야민의 영상해석
영화 카메라의 표현력은 무엇보다도 카메라의 뛰어난 현실 모사 능력에 근거한다. 그러나
영화 카메라에 의해 만들어지는 영화 영상에서 현실상은 현실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다. 이러
한 주장은 1920년대와 30년대 전반 조형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러시아의 영화감
독이자 이론가인 에이젠슈타인은 영상 조각을 조합하는 몽타주를 통해 새로운 현실상의 창출
이 가능함을 입증했고, 독일의 예술심리학자 루돌프 아른하임은 <예술로서 영화>(1932)에서
기술적 한계로 인해 카메라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영화 영상이 ‘현
실을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에서 영화의 예술적 가치를 보았다. 벤야민은 여기서 한층 더 나
아간다.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카메라의 사물 포착 능력을 높게 인정하며, 영화
의 특징은 “카메라의 힘을 빌려 주변세계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다.”고 한다. 특히 그는 클로
즈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화 카메라의 집중적인 세부 묘사력으로써 사물의 세부도 분석가능
해지면서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주목하는 세계가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통각의 심화”를 말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카메라가 사물 내부를 침투하여 세부 묘사를 할 수 있는 능력,
즉 클로즈업과 공간의 확대 및 시간의 연장을 가져올 수 있는 영화의 능력에 주목했다. 클로
즈업은 평상시에 불분명한 것들을 분명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물질의 새로운 구조를 드러내
어 보여주므로, 공간을 확장 시킬 수 있다. 고속 촬영은 이미 알려진 동작의 원인을 드러내고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동작을 보여줄 수 있으므로, 움직임이 연장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벤야민은 카메라에 의한 현실상은 육안으로 보는 것과 다른 성질의 것이라고 간주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카메라를 통하여 비로소 시각적 무의식 세계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영
화 카메라의 촬영기법과 편집술을 통해 인위적으로 재구성된 시간·공간 속에서 무의식 세계의
매개가 가능함을 설명한다.
여기에 근거하여 벤야민은 영화에서 특별한 요소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현실의 알레고
리적 해석이다. 벤야민은 영화 화면에서 보이는 인물과 주변 요소들의 융합적 역할을 강조하
며 “필름은 어떻게 물질이 인간과 함께 연기하는가를 보여줄 수 있는 최초의 예술수단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유물론적 묘사의 뛰어난 수단일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충격 효과의 알
레고리적 해석을 허락하면서 영화의 모사적 능력은 특별한 기법을 확장시켜주며 현실의 환상
을 창조해내는 복합적이고 고도의 인공적인 방법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영화는 우리가 예술작
품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장치로부터 자유로운 현실의 측면”을 보장해준다고 말한다.
벤야민이 현대 생활의 기술적 매개에 있어서 영화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도 그 때문이
다.
지금처럼 살펴봤듯이 벤야민의 영상이론에는 동시대 영화이론가이자 비평가였던 벨라 발라
즈와 크라카우어의 이론과의 연관성도 발견된다. 특히 국내에서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이 주로 언급되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베르그송과 동시대 이론가들인 발라즈와 크라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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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로부터 영감을 얻고 영향을 받은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의 개념은 명확한 현상
이해에서 출발하면서도 이론 형성에 있어서 다소 모호하고 신비주의적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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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오늘날 블록버스터라는 말은 낯선 외래의 말이 아니다. 매년 여름철 극장가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가 공습경보로 시달린다. 거대한 제작비와 스타 그리고 홍보와 배급의 규
모까지 앞세운 블록버스터 영화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동 세대 영화를 이르는 말이 분명
하다. 여기에 한국영화 산업이 성장하면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말까지 가세했다. 이것
은 할리우드만큼의 물량 공세는 아니지만 한국의 제작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평균 제작
블럭버스터: 문제는 크기다. 비를 상회하는 대규모 영화들을 이르는 말이다. 영화산업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면서 보다
많은 제작비를 투자하여,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블록버스터 영화는 자연스럽게 영화산
크기의 정치경제학 업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블록버스터 영화 역사의 출발은 할리우드였다.
50년대에 시작된 블록버스터 영화의 제작은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의 주류문화로 성장해
왔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같은 신흥영화강국에서도 블록버스터의 제작은 활발하게 이루
어지는 추세이다. 본 장은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블록버스터의 의미와 역사를 살펴보고,
오늘날 한국영화 속에 나타나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모습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목표 the main subject 소주제 the sub title

1 블록버스터의 특성과 배경을 살펴본다. 1 블록버스터의 정의와 시작


2 블록버스터의 변천사와 주목할 만한 사례를 2 블록버스터의 상업화
알아본다. 3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숨은 의미
3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특징과 현재를 살펴본다. 4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부흥
5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비교와 전망

블럭버스터

블럭버스터blockbuster란 흥행에서 대 성공을 한 영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블럭이란 말은 대도시에서 사방 도로에 의


해 경계 지어지는 한 구역을 단위로 부를 때 쓰는 말인데 이 전체 구역block을 날려 버릴bust 정도로 큰 폭탄이 원래
blockbuster 인데 이 정도로 대단한 파워를 가진 영화라는 뜻.
1. 블록버스터의 정의와 시작 그보다 1950년대 미국 문화의 다양한 변화가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전
쟁 후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주 5일제 근무의 도입이었다. 당시 한 잡지의 조사
에 의하면 50년대 정원 가꾸기를 취미로 삼는 사람이 3천 만 명 이상이나 되었고,
집수리 비용이 700퍼센트나 증가되었다.
주거 환경의 변화도 크다. 도시를 중심으로 살던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주민들
이 도시 주변에 새로 세워진 교외로 이사하기 시작했다. 여유도 즐기면서 자연을 누
‘블록버스터’는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쓰인 폭탄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 리는 다양한 삶의 추구가 전후 미국 사회에서 일어난 것이다. 당시 미국의 영화관은
다. 전쟁 당시 영국 공군이 사용한 4.5 톤 짜리 폭탄이었던 블록버스터는 한 구역을 대도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1946년과 1953년 사이에는 5000개 이상의 영
송두리째 날려버릴 정도로 당시에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녔다고 해서 블록버스 화관이 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터blockbuster라고 불리었다. 폭탄이라는 말의 유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블록버스터 이를 위해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 대형화 프로젝
는 흥행이나 유행에 있어서 대단한 파급력을 지닌 영화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통용 트를 수행했다. 잃어버린 관객을 찾으려는 할리우드의 노력은 와이드 스크린과 블
되어 왔다. 록버스터 영화 제작의 관행을 만들어 내었다. 일부에서는 3차원 입체영상 영화를
15 블럭버스터: 문제는 크기다. 크기의 정치경제학

인터넷 무비데이터베이스IMDB는 블록버스터를 ‘큰 흥행 성공을 거둔 영화, 통 제작하기도 했다. 와이드 스크린 블록버스터의 전성기는 1950년대 중반에서 60년
상 북미 지역 흥행수입 1억 달러를 넘긴 영화’라고 정의한다. 반면 ‘단기간에 큰 흥 대 중반까지 이어진다. 대표적인 영화로는 <전쟁과 평화>, <80일간의 세계일주>, <십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행수입을 올리리라 기대하고 만든 대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할리우드가 이러한 블 계>, <남태평양>, <벤허>, <엑소더스>, <아라비아의 로렌스>, <사운드 오브 뮤직>과 같
록버스터를 제작하게 된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미국 사회에 텔레비전이 보급 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내지는 성서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대종을 이루었다.
되면서 여가 문화의 패턴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역사에서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을 사용
1929년에 9천 5백만에 달했던 주당 영화 관객 수는 전쟁 기간 동안에도 평균 하게 된 것은 1975년 제작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조스Jaws>를
8천 5백만을 유지하다가 전쟁 직후인 1945년과 1948년 사이에는 9천만으로 올랐 통해서이다.
다. 그러나 관객 수는 이후 급격한 하락을 겪었다. 1950년에는 주당 6천만 정도의 여름 시즌에 개봉한 이 영화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당시 1억 달러를 넘는
수준이었고, 1953년에는 4천 6백만으로 떨어졌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흥행 실적을 거두었다. 뒤를 이어 조지 루카스George Lucas의 <스타 워즈Star Wars>가
반에는 2천만 이하로 떨어졌다. 할리우드는 불과 20년 사이에 전체 관객의 4분의 3 1억 8천만 달러라는, 당시로는 기록적인 흥행수입을 올렸다. 그리고 이 영화들의 후
을 잃었다. 50년대부터 미국의 영화관람은 아주 일상적이었던 생활의 양식이 아니 속작도 잇달아 대성공을 거두면서 1980년대에 할리우드는 본격적인 블록버스터
라 가끔씩 기분 전환하는 행위로 전락했다. 영화 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 중 가장 많이 꼽는 것은 미국 가정 내의 텔레비전의 보급 블록버스터 영화는 철저한 기획을 거쳐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한 후, 1억 달러
을 꼽는다. 하지만 통계 숫자는 반드시 텔레비전 보급에 의해서만 미국영화산업이 가 넘는 흥행실적을 거두게 되는 영화를 이르는 말로 바뀌기 시작했다. 70년대 블
위축을 받았다고 단정지을 수 없게 만든다. 50년대 말에 미국 가정의 90퍼센트가 록버스터의 특징은 들인 비용 이상으로 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영화
텔레비전을 가정에 보유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50년대 초기에는 그다지 많은 숫 의 브랜드화를 가져왔다. 블록버스터 급의 영화에서 가장 처음 등장하는 화면은 메
자가 아니었다. 주당 6천만 정도의 관객을 동원한 원인을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직 이저 영화사들의 거대로고가 장식한다. 마케팅의 측면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더라
결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숫자다. 도 CI Corperate Identity(기업의 그들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는 상품의 판

241 242
1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기록한
2. 블록버스터의 상업화
블럭버스터 영화

<죠스>(1975)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스타워즈>(1999)
감독: 조지 루카스

메이저 영화사들이 만들어내는 일반적인 블록버스터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쉬운 장면들이 많고, 특수효과가 뛰어난 SF영화나 액션영화 등으로 장르가 한정
되고, 사람들을 끌기 쉬운 여름방학이나 크리스마스 등의 흥행시즌에 개봉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전작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을 경우 속편이 뒤따르는 공
매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전 세계를 시장으로 하는 통점을 지닌다.
세계상품의 경우 그것은 꼭 필요한 부분이다. 블록버스터의 흥행을 성공시키기 위해 관객들의 대중적인 관심을 집중 시킬
15 블럭버스터: 문제는 크기다. 크기의 정치경제학

그런 의미에서 제작회사의 로고를 통해 가장 먼저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가능해 만한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서 각색하
진다. 이를테면 회사에 대한 신뢰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뢰도를 잘 쌓아왔던 메이 는 경우도 많다. 일반적으로는 원작자가 시나리오까지 쓰는 경우도 있지만 블록버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저 영화사들에 대한 관객의 호의는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블록버스터 스터의 영화는 대부분 판권을 사들이는 형식으로 영화화된다. 현재 가장 개런티가
영화에 출연하는 스타들과 연출하는 감독들 역시 브랜드화 되기 시작했다. <터미네 높은 흥행원작자로는 존 그리샴과 마이클 크라이튼을 들 수 있다. 존 그리삼의 경
이터> 시리즈의 아놀드 슈왈츠 제너거나 블록버스터 전문감독인 마이클 베이를 빼 우 <야망의 함정>, <의뢰인>, <펠리컨 브리프>, <타임 투 킬>을 비롯해 많은 작품들이
놓고 동세대 불록버스터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블록버스터 영화로 제작되어왔다. <쥬라기 공원>으로 최고 작가로 떠오른 마이클
크라이튼의 작품은 가장 영화적인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쥬라기 공원>을 비롯하여 <콩고>, <트위스터> 등 주로 특수 효과를 기반으로
삼은 대작영화의 시나리오로 할리우드와 친밀한 교분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작가
들의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최신의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집약된 특수시각효과와 음
향효과를 구현해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자극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위력이 가장 대중적으로 빨리 인식된 것은 전반적인 작
업에서의 특수효과 분야라고 할 수 있으며, 가장 발전의 성과가 탁월한 분야이기도
하다. 촬영이 끝난 후 필름을 디지털로 처리하게 되면 이전의 아날로그 방식과는 달
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강점이 생긴다.
블록버스터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영화가 개봉하기 몇 달 전부터 대단위의
마케팅 전략에 들어간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영화’ 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
화 관련 캐릭터, 팬시 상품과 유니버셜 스튜디오 같은 영화 촬영장의 관광화 등 영

243 244
<스타워즈> 관련 상품
3.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숨은 의미

<스타워즈>가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영화를 통


화의 바깥에서도, 영화의 순수 흥행 실적에 못지 않게 많은 수입을 거두는 것 또한 해 미국인들의 이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 영화가 대중적인 이유는, 내가 사람
특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입장 수입의 본격적인 효시는 <스타워 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라는 조지 루카스의 말처럼, 그의
즈> 일 것이다. 이 작품은 제작비가 예상을 넘어서게 되자 새로운 대책을 강구한다. 영화에는 평균적인 미국인들의 윤리감각과 생활감각이 배어 있다. 조지 루카스의
조지 루카스는 제작사였던 20세기 폭스와 새로운 계약을 맺는다. 연출료 일부를 좌우명은 “열심히 일해라. 너 자신을 믿고 인내하라”이다. 그것이 진짜 미국인이다.
포기하는 대신 <스타워즈>의 캐릭터 상품과 속편의 권리를 따낸 것이다. 조지 루카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힘든 일과 자기희생, 우정, 충성과 고상한 목적을 이루어
15 블럭버스터: 문제는 크기다. 크기의 정치경제학

스의 생각은 간단했다. SF영화팬들은 우주선 모형이나 로고가 새겨진 T셔츠도 모 내야 한다.


으니까, 어느 정도 부수입을 올릴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그것은 바로 제다이가 되기 위해 먼길에 나선 루크와 아나킨이 겪어야 했던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1977년 <스타워즈>가 완성된 이래 관련 상품의 수익은 45억 달러를 넘었고, 일들이다. 평론가들이 <스타워즈> 시리즈를 “혐오스러운 할리우드영화를 있게 한
새로운 시리즈의 출발인 <보이지 않는 위험>도 펩시사, 장난감회사 헤즈브로, 레고 주범”이라고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중이 열광적으로 <스타워즈>를 소비
등에 이미 30억 달러 이상의 판권료를 영화를 완성하기 전부터 받아내었다. 블록 한 것은, 이혼율이 급증하고 사회의 모든 가치가 무너졌던 70년대에 환멸을 느꼈
버스터를 만들어 바람몰이를 하고, 관련상품을 팔아먹는 할리우드의 불가사리 전 기 때문이다. 미국 대중은 현실 대신 꿈과 피난처를 택했고, 자유와 평등 대신 강
략은 조지 루카스의 작은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할리우드는 <스타워즈>의 공식을 따라갔다. 본격적인 블록버스터의 시 조지 루카스 감독

대가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 예술보다 산업과 경영을 중심에 놓았고, 영화 자체보다


마케팅과 관련상품에 열정을 쏟게 되는 계기가 시작되었다. 할리우드의 주요 타깃
은 10대와 20대 초반으로 낮춰졌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이야기구조와
볼거리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바람몰이를 하고, 관련상품을 팔아먹는 할리우드의 불가사리 전략

예술보다 산업과 경영을 중심에 놓았고,


영화 자체보다 마케팅과 관련상품에 열정을 쏟게 되는 계기가 시작

245 246
력한 팍스 아메리카를 요구한 것이다. <아마겟돈>(1998) 감독: 마이클 베이
‘팍스 아메리카나’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를 일컫는 용어로 미국의 지
배에 의해 세계의 평화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이다. ‘팍
스Pax’는 라틴어로 평화를 뜻하는데, 로마 제국이 피정복 민족들을 통치하던 것을
가리켜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하고, 19세기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팍스 브리
태니카Pax Britanica’라고 한 것에서 연유한다.
이 용어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로, 전쟁이 끝나면서 미
국에 의해 세계 평화가 유지될 것이라는 예상에서 시작되었으나, 강력한 라이벌인
소련으로 인해 ‘팍스 러소-아메리카나’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 이후 1989년 소 에게, 가상의 역사와 향수의 원천을 제공한 것이다.
련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막을 내리기까지 이 체제가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하지만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미국중심주의를 쉽게 찾아볼 수
이후 미국의 영향력은 갈수록 증대해 막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자 있게 된 것은 분명 아쉬운 점이다. 마이클 베이의 <아마겟돈>은 전 세계인들이 대통
본주의 체제를 재편하는 등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하였고, 오늘날 이러한 형태는 령 발표나 급박한 외신보도가 아니라 동시 통역되는 미국대통령의 육성으로 혜성
15 블럭버스터: 문제는 크기다. 크기의 정치경제학

미국 문화를 통해 전달된다고 할 수 있다. 돌진의 정보를 접한다. 브루스 윌리스와 ‘미국영웅’들이 인류를 위하여 목숨을 건
조지 루카스는 미국 대중에게 꿈을 주었고, 동시에 자신의 꿈을 이룩했다. <스 투쟁을 벌이는 동안 가슴 조이던 전 세계인들은 혜성 폭파 소식을 접하고는 기쁨의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타워즈>의 세계는 어쩔 수 없는 공상이다. 조지 루카스는 과거의 이상향, 청교도들 눈물을 흘린다.
이 신대륙에 건너와 꿈꾸었던 그런 세계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역사가 없는 미국인 이런 방식의 미국식 영웅주의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자주 취하는 틀이다. 여름
철 블록버스터를 보는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미국식 영웅주의를 자신의 영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전략이 ‘팍스-아메리카나’를 부추
‘팍스 아메리카나’
기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꼭 정치적 구호나 선전으로 이
미국의 지배에 의해 세계의 평화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 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된다는 점에서 무섭다.

'팍스 러소-아메리카나'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

미국의 영향력은 갈수록 증대


막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재편하는 등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

미국 문화를 통해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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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부흥 아니라, 시나리오와 연기라는 영화적 기본기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싸이렌>, <
광시곡>, <천사몽>과 같은 작품은 서울 관객 10만 명 이하를 동원하며 제작비조차
못 건지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동안 계속된다. 2002년 추석에 개봉한 <성냥팔
이 소녀의 재림>이 제작비 110억 원을 들여 서울 관객동원 7만 명에 그친 것을 비롯
해 <예스터데이> 12만 명, <아 유 레디?> 2만 명, <블루> 6만 명, <튜브> 12만 명, <청풍
명월> 19만 명, <원더풀 데이즈> 14만 명, <천년호> 10만 명 등 블록버스터답지 않은
1996년 강제규가 감독한 <은행나무 침대>는 몰핑 기법을 이용한 특수효과로 관객 관객 동원을 유지해 왔다. 한국영화의 대형화에 대한 비판이 연이어 이어졌다.
의 시선을 일시에 사로잡으며 흥행에 성공하였다. 몰핑 기법은 <구미호>에서 한 차 하지만 2003년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연이어 흥행에 실패했음에도 한
례 사용되긴 했지만, 당시 한국 영화에서 시도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국 영화 점유율은 50%에 근접했다. <살인의 추억>을 시작으로 <스캔들 : 조선남녀
영화자체의 스케일은 크지 않았지만, 특수효과와 서사적 스토리를 잘 결합시킨 상 상열지사>, <올드보이>와 같은 웰메이드 영화들이 각각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업영화라는 점에서 <은행나무 침대>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본격적인 출발이라고 2003년 초에 불어닥친 웰 메이드 영화의 성공은 관객의 안목을 더욱 더 높여놓았다.
할 수 있다. 2003년 12월에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와 2004년 2월에 개봉한 강
15 블럭버스터: 문제는 크기다. 크기의 정치경제학

1998년 여름에 개봉한 <퇴마록>은 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터라는 것을 공공연 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역사를 쓴 영화들
히 홍보하며 제작된 영화였다. 당시 한국영화로는 파격적인 제작비를 들여만든 <퇴 이다. 이 두 영화는 잘 만든 시나리오라기 보다, 관객의 감정에 호소하는 시나리오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마록>은 사용된 특수효과들이 장면별로 분석이 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보다 본 와 그에 어울리는 규모로 블록버스터 영화의 성공시대를 열었다. 이 두 영화는 블
격적인 가능성은 <은행나무 침대>에 이어 1999년 설 연휴에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록버스터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쉬리>를 통해서 본격화된다. 이 작품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 두 영화의 흥행 성공은 먼저 개봉 전부터 제작과정과 영화의 내용 등을 사회적인
표적인 예이다. 27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쉬리>는 할리우드의 테러영화의 공식 이슈로 부각시켜 자연스럽게 관객의 흥미를 유발시켰는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가
에 남북분단이라는 한국적 특수성을 결합시키고, 연인에서 적으로 마주치는 비극 사회적 이슈를 건드렸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다른 점도 두드러진다. <실미도>가 지
적 연인의 이야기를 멜로드라마의 요소로 첨가하였다. 니고 있는 투박함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전형적인 화려함에서 비켜나 있는 반면에 <
<쉬리>의 액션 장면 연출은 다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장면에서 많이 태극기 휘날리며>는 화려한 카메라 테크닉과 화끈한 물량공세로 정통 블록버스터
인용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강제규 감독은 각 액션장면의 리듬을 다르게 가면서
관객에게 지루함을 안겨주지 않았고, 영화 시나리오에도 상당한 공을 들여서 관객의
감정을 절정으로 이끌어냈다. <쉬리>는 서울 244만, 전국 620만 이라는 경이적인 흥
행을 달성하며, 1998년 개봉한 <타이타닉>이 가지고 있던 모든 흥행기록을 갱신했고,
이것은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항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
여준 결과가 되었다.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쉬리> 이후에 선보인 블록버스터 영화는 외형만을 지나치게 부풀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단적비연수>, <리베라 메>, <비천무>의 흥행 부진은 한국형 블록버
스터에 많은 것을 던져주었다.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무조건 특수효과에 기댈 것이

249 250
<태국기 휘날리며>(2003)
감독: 강제규,
5.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비교와 전망
<실미도>(2003) 감독: 강우석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할리우드에 대한 대항의식을 내세우면서


미국 영화를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하지만 영화를 제작하는 방식이나 소
비구조의 차원에서는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모방했다. 과도한 자본의 투여, 마케팅 중
에 가까이 가 있다. 이 두 영화는 한국영화계에 전국 관객 천만 명 시대를 열었다. 심의 물량 공세, 대규모 개봉을 통한 전략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동일한 것이다.
두 영화는 모두 한국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역사와 그것은 교묘한 역설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미국영화에 대한 차별을 내세
가족, 그리고 상처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민족 최대 비극을 야기했던 한국전쟁을 울 수 있지만 유럽의 예술영화나 제3세계 영화에 대해서는 할리우드 영화와 똑같
15 블럭버스터: 문제는 크기다. 크기의 정치경제학

무대로 형제간 애증을 통해 한국인에게 있어서 가족의 의미를 묻는 작품이고, <실 은 방식으로 큰 것만을 내세우는 규모의 경제학으로 압도하려고 드는 것이다. 이러
미도>는 냉전 제물이 되어야 했던 북파 부대원들의 유사類似 가족적 동료애를 다룸 한 상황에서는 다양한 영화들이나 소규모로 제작되는 영화들이 일반 관객과 만나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으로써 우리 역사의 그 많은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드리는 작품이다. 그리고 아 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모습은 작은 영화
직껏 한국인들 가슴속에 시퍼런 멍으로 남아 있는 상처를 보듬는 두 영화의 휴머니 들을 억압하는 팍스-아메리카나의 변형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영화
즘적 시선은 슬픔도 에너지로 전화시키는 한국인 특유의 낙천성을 증명한다. 를 생산하고, 수용하는 일은 한국영화의 건강성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물론 ‘한국
형 블록버스터’라는 명칭을 부여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영화들 역시 한국의 민족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민족영화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그 생산과 소비의 구조가 중심부의 영화와 유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영웅주의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국형 블록버스터에는 반영웅주의적인 인물이 많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여전히 한국이라는 상황을 기반으로 한 특수한 영화
라는 것을 증명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앞세우는 보편성과는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글: 이상용(영화평론가)

한국형 블록버스터
한국이라는 상황을 기반으로 거대한 재작비와 배급력이 뒷받침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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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20세기 말에 등장한 디지털 기술은 영화의 특수효과에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은 단지 영화의 보충물이 아니라 기존의 사진적 영상에 기초한 영화와 다른
새로운 현실, 즉 ‘가상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현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
지 않고도 사실적인 영상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가상현실은 거짓인가, 아니면 또 하나
의 현실인가? 디지털 기술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영상의 진위성에 관한 곤란한 문제
디지털: 원본없는 영화, 를 제기한다. 필름을 대신한 디지털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 영화
를 위기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은 단지 하나의 새로운 기술적 혁신이 아
이미지의 무한 복제 니라 영화를 새롭게 사유하게 만드는 도구이다.

소주제 the sub title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1 디지털 기술의 핵심적 내용은 무엇인가?
디지털 기술이 영화에 활용되면서 발생한
가상현실과 이미지 합성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살펴본다.
2 디지털 시대에 영화는 무엇인가, 그리고
디지털은 영화의 어떤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디지털

디지털이란 일반적으로 데이터를 한 자리씩 끊어서 다루는 방식이라 할 수 있으며, 애매모호한 점이 없고,
정밀도를 높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1. 디지털 신기원의 세계 <쥬라기 공원>(1993)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세기말인 1999년에 <매트릭스>가 대중들에게 첫 선을 보인 이래로 3부작으로 구성


된 ‘매트릭스 시리즈’는 21세기의 영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영화가 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매트릭스>는 홍콩의 무술액션과 일본의 애니메 이션으로 컴퓨터에서 직접 영화 같은 장면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이션을 혼합해 가상현실에 대한 범상치 않은 주제를 영화에 담아내었고 특수효과 둘째, 디지털 영화제작에서 영상은 이제 기존의 사진적 영상이 현실과 맺는
를 활용한 장면으로 대중의 눈을 매혹시켰다. 특별한 지시적 관계를 상실한다. 가령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에서 우리
무엇보다 이 영화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실제세계가 아니라 철저하 는 공룡을 보게 되지만, 이 공룡의 영상은 직접적으로 현실의 공룡을 사진적 영상
게 조작되고 통제된 가상현실의 세계이며, 인간은 이런 허구적인 세계에서 단지 꿈 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된 공룡의 영상은 아무런 현실의
16 디지털: 원본없는 영화, 이미지의 무한 복제

을 꾸듯 긴 잠에 들어있다고 말한다. 흔적을 지니지 않고 있다. 때문에 디지털 영상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의 진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지금의 현실을 고려할 때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세계는 사실 더 이상 거짓만 실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든다. 디지털 시대에 우리 앞에 놓여진 영상은 그 자체
은 아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힘든 디지털의 시대에 우리는 ‘진짜’ 가짜인 영 만으로는 그것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인지 확언할 수 없게 만든다.
상과 매번 만나며 달콤한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디지털 영화제작에 있어서전통적인 영화제작에서 촬영한 필름은 그 자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가상현실의 세계는 영화가 ‘디지털 혁명’이 도래한 이 체 완결된 것이 아니라, 이제 디지털 합성, 애니메이션, 모핑 등의 부가작업을 위한
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영화 기초 자료로만 활용될 뿐이다. 가령 미래의 세계를 표현한 <내츄럴 시티>의 경우 디
의 정체성을 재정의하게 만들어버렸다. 가령, 19세기말에 태동해 20세기 대중예술 지털 작업은 35mm 필름으로 촬영된 소스를 100% 디지털로 바꿔 후반작업을 해
을 대표한 영화는 그간 큰 기술적 변화를 겪어왔지만, 실제의 물리적 공간에서 일 냈다. 즉, 편집이 끝난 필름을 전부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시킨 뒤 색보정 등 기타 후
어난 사건을 사진에 기록하는 영상의 존재론적 특징은 유지해 왔었다. 영화는 카메 반작업을 해서 디지털 데이터를 필름으로 출력시켜 완성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라 앞의 대상을 수정되지 않은 사진에 기록하는 매체였다. 이런 디지털 영화제작의 결과 필름은 영화의 시각적 사실주의를 유지하면서
하지만 3차원 애니메이션과 디지털 합성의 시대에 영화는 큰 변화를 겪고 있 도 과거 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만 가능한 변형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예를 들어 <
다. 3차원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이용해 전적으로 컴퓨터에서 사실적인 장면을 만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에서 우리는 하나의 깃털이 극히 섬세하게, 또 유난히 오
들어내거나, 디지털 페인트 프로그램을 이용해 카메라로 촬영되지 않은 영상을 만 랫동안 날아가는 것을 따라가며 지켜볼 수 있다. 이 장면은 실제의 깃털을 블루스
들어냄으로써 디지털 영화는 사진적 기록에 근거한 이전의 영화와는 사뭇 다른 것 크린 앞 여러 위치에서 여러 번 촬영하며 애니메이션 작업을 거쳐 만들어졌다. 그
이 되었다. 1990년대 이래로 등장한 디지털 기술은 현재 영화가 전통적인 방식과는 결과 실제로 일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로운 종류의 사실적인 영상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 영화제작은 완
첫째, 디지털 영화제작은 물리적 현실을 사진으로 찍지 않고도 컴퓨터 애니메 전한 허구가 아니라 ‘사진적 리얼리즘’에 근거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렇듯, 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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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검프>(1994)
감독: 로버트제멕키스
2. 디지털 혁명과 가상현실

디지털 기술이 영화에 활용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문제는 영화의 영상이 지시하


는 ‘현실’의 지위와 관련한 곤란함이다. 그 대표적인 논의가 ‘가상현실’이라 할 수 있
털 영화제작에서 촬영과 편집의 관계는 기존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할 수 있겠다. 겠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이 보여주는 세계는 그 자체, 완벽한 가짜의
가령 전통적으로 영화는 사진에 근거한 촬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영 세계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특수효과는 단순하게 영화의 스
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카메라 앞의 현실을 필름에 기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디 펙터클을 창조하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도 있을 가능한 세계를 만
지털 영화에서 촬영필름은 최종 생산물이 아니며 단지 컴퓨터에서 앞으로 조작될 들어내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결코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공룡을 볼 수 없을
일차적인 원료에 불과하다. 달리 말하자면 촬영은 편집의 첫 단계에 불과할 뿐이다. 것이지만, 혁신적인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우리는 공룡의 현실성을 보게 된다. 관객
16 디지털: 원본없는 영화, 이미지의 무한 복제

예를 들어, <스타워즈 에피소드 1: 보이지 않는 위험>에서 전통적인 세트 촬영은 겨 들은 원래 볼 수 없는 과거에 사멸된 공룡을 ‘진짜’로 보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을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우 65일간 진행되었던 반면에 영화의 편집작업은 대략 2년이 걸렸다. 이는 영화의 것이다.
95%가 컴퓨터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쥬라기 공원>에서 스크린을 통해 우리가 보는 공룡은 거짓이 아니라 하나의
이러한 디지털 영화 제작원칙을 고려할 때, 디지털 영화는 한마디로 ‘사진적 ‘현실’이다. 여기서 실제로 공룡을 본 적이 있는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종
영상을 영화의 일부분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의 일종’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 점 래의 공룡영화와 비교할 때 <쥬라기 공원>은 다른 현실성을 부여하는데, 이는 디지
에서 디지털의 시대에 영화는 애니메이션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털 기술이 허구(픽션)에 대단히 높은 수준의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쥬라기 공원>의 이야기의 수준에서도 나타나는데, 가령 이 영화는 유

<주라기공원>(1993)
감독:
스티븐스필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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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 스토리>,
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가능세계는 물론 사진적인 영상에 근거한 것이다.
<벅스 라이프>
스필버그가 그려낸 세계는 상상적인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세계’
와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앞서 말했듯이 DNA 유전자 복제가 가능하다면, 그리고
공룡의 유전자가 발견된다면 공룡의 복원도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쥬라기 공원>
은 현실세계에서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쥬라기 공원>과 디즈니 애니메이션 <다이노소어
>는 분명 차이를 갖고 있다. <쥬라기 공원>은 제목처럼 ‘잃어버린 세계’를 디지털로
전자 조작에 의해 공룡이 현대 사회에 되살아난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러니 복원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전에 있었던, 그리고 이제 다시 과학을 통해 가능할 수
까 공룡의 존재는 불가능한 거짓의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는 잠재 도 있는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디즈니의 영화에서 인간화된 공룡은 마치
성의 수준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제든지 유전자 조작의 결과에 따라 공룡 인간처럼 말을 하고, 인간과 유사한 집단을 구성하고, 인간과 유사한 꿈과 희망을
의 존재는 현실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 기술은 완전한 허구의 갖고 있는 공룡들이다. 이러한 세계는 <쥬라기 공원>과 달리 애니메이션의 상상적
영상이 아니라 ‘극 사실주의’ 혹은 ‘사진적 리얼리즘photo realism’의 효과를 만들어낸 인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다이노소어>의 공룡은 아주 오래 전에 이
다 할 수 있다. 미 존재했었던 것이고, 이제 다시 디지털의 힘을 빌어 <쥬라기 공원>에서처럼 복원
16 디지털: 원본없는 영화, 이미지의 무한 복제

이런 특징은 또한 최근의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경우 보편적인 것으로 나타나 되었다. 그 때문에 애니메이션의 사실적 영상은 어떤 균열을 내포하고 있다.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고 있다. 점점 영화가 애니메이션처럼 보이고, 애니메이션이 영화처럼 보이는 역설적 사진적인 사실성을 추구하면서 애니메이션의 상상적인 세계는 점점 꿈을 잃
인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실제세계와는 다른 상 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다이너소어>에서 디즈니는 ‘잃어버린 세계’혹은 ‘가능한
상적인 세계에 속하고, 이 상상적인 세계는 허구와 나란히 뻗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를 만들어냈지만 그 결과로 상상적 세계와 꿈을 상실해 버릴지도 모르는 것이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과 영화는 부분적으로는 허구라는 공통의 운명을 지 다. 그래서 디지털을 활용한 애니메이션의 상상적 세계는 <토이 스토리> <벅스 라이
니는 동일한 계보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통상 영화라고 부르는 프>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가 재현하는 세계에 보다 적합해 보인다. 이
것을 사진적인 영상에 근거한, 그래서 사실적인 것으로 본다면 애니메이션과 영화 들 애니메이션은 수 만번의 공정을 거쳐 움직이는 이미지animated image를 사실적으
는 분명 ‘사진/그림’이라는 경계선을 갖게 된다. 로 만들어내면서도 시각성과 판타지, 스펙터클을 강조하기보다는 마치 실사 영화
아이들의 그림이 사진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게 아니듯이 애니메이션은 사진 처럼 캐릭터와 이야기에 승부를 걸고 있다.
적인 영상에 근거하지 않는다. 하지만 점점 애니메이션은 ‘사진처럼 혹은 실제처럼
보이는’ 영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말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나 ‘사진’과 ‘실제’라기 <몬스터주식회사>
(2001)
보다는 ‘-처럼 보인다’라는 말이다. 가령,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다이너소어>의 공룡 감독: 피터 닥터,
데이빗 실버맨, 리운
은 진짜처럼 보이고, 자연적인 풍경은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같은 잡지의 풍경 크리치

사진처럼 보인다. 이는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스필버그는 <쥬라기 공원>에 대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공상과학이 아니라,
있을법한 과학’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스필버그의 이 주장은 그가 ‘허구적인 세계’
에 관심을 갖는 것만이 아니라 ‘있을 법한 세계’, 즉 ‘가능세계’에 관심을 갖고 있다

259 260
<몬스터 주식회사>에서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테크놀로지 역사상 가장 세련
된 최첨단 기술로 몬스터의 모피의 털과 머리카락의 음영, 그림자를 정교하게 처리
3. 디지털 합성이 제기하는 문제
하여, 피사체가 움직일 때마다 마치 실사의 그것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느낌을 전
달해주었다.
<니모를 찾아서>에서는 이보다 더 앞선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바다의 심연을
투명하게 관통하는 햇빛의 질감, 시계를 흐리는 깊은 바다의 생생한 공포감, 바닷
속의 기포나 해수면의 물결에 반사되는 빛의 파장, 물결의 흔들림을 환상적으로 표 영화제작은 실사로 촬영한 장면에 컴퓨터 그래픽을 입혀 더 사실적인 효과를 만들
현하고 있다. 바닷속 물결의 흐름과 물고기들의 유연한 몸놀림, 산호초 등 해양 생 어낸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의 한 장면에서 화가 장승업이 한양에 입성하는 장
물의 흔들림과 모습이 거의 실제세계처럼 그려내는 데 적지 않게 성공하고 있다. 이 면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장승업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멀리 북한산과 옛
영화에서 물고기들은 지느러미를 퍼덕거리면서, 눈과 입을 씰룩거리면서 각자 자신 한양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장면은 사실 양수리 종합촬영소에서 촬영한 장면에
들의 고유한 감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니모를 찾아서>는 모 북한산과 옛 한양의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합성해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장
든 창조물들의 고유한 드라마를 간직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근접한 애니메이션 면은 그 자체가 거짓이라기보다는 과거의 모습을 사실처럼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
처럼 보인다. 겠다.
16 디지털: 원본없는 영화, 이미지의 무한 복제

곽경택 감독의 <챔피언>에서 라스베이거스 특설링에서 김득구가 마지막 경기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를 치르는 모습은 4백 명의 보조 출연자를 동원해 장면을 찍고 여기에 컴퓨터 그래
픽으로 8천 명의 관객을 합성한 것이며,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중
공군의 인해전술을 보여주는 장면도 마찬가지로 2백명의 사람들이 동원된 장면에
수천 명의 사람을 디지털로 복제해 합성한 것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과거 역사의 한 장면을 나름대로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과는 사뭇 다른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은 이렇듯 <터미네이터 2>나 <내츄럴 시티>와 같은 가상의 세계,
혹은 미래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미 지나가 버
린 과거의 순간을 영화에서 사실적으로 재현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
글레디에이터>에서 고대 로마시대의 콜롯세움에서 벌어지는 검투사들의 싸움이나,

디지털 영화제작

실사로 촬영한 장면에 컴퓨터 그래픽을 입혀 더한 사실성을 만들어내는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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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디에이터> <할로우 맨>(2000) 감독: 폴 버호벤
(2000)
감독: 리들리스콧

<트로이>에서 그리스 군대가 트로이를 함락시키기 위해 몰려가는 장면들은 디지털 둘째, 영상의 디지털화는 관객의 영화관람에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 디지털은
기술의 도움으로 역사적 리얼리티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제작과정에서는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으로, 후반작업에서는 비선형 디지
이러한 점에서 디지털 기술은 ‘현실’을 변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컴퓨 털 편집과 CG 등의 특수효과로, 그리고 최종단계에서는 디지털 영사기를 이용한
터 디지털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현실세계‘를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복 디지털 상영, DVD, 그리고 인터넷 상영공간의 확대 등과 같은 다양한 변화를 만들
수의 현실성을 지닌 다양한 세계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원래의 현실이 지닌 절대 어냈다. 최종단계에서 디지털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데 있어서 기존과는 다른 방
성은 동요하며 점점 상대화, 복수화 되기에 이른다. 전통적인 영화에서 영상은 렌즈 식의 관람패턴, 즉 ‘랜덤 액세스’를 가져왔다.
16 디지털: 원본없는 영화, 이미지의 무한 복제

앞의 피사체를 카메라가 기록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졌다. ‘랜덤 액세스’는 영화를 보는 것이 일종의 ‘흐름flow’의 과정, 즉 처음 시작하면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특수효과는 이러한 사진적 영상에 외부적인 ‘효과’를 주는 것에 불과했다. 하 중단 없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영상의 흐름을 보는 것과 달리 언제든지 자유롭게
지만 디지털 기술은 카메라의 외부가 아니라 영상의 안에서, 즉 피사체가 전혀 존 영상의 일부에 접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영상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언제든지 원
재하지 않는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기에 이제 더 이상 피사체의 존재를 기준으로 하는 부분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은 관객의 ‘비선형적’ 시청을 가능케
영상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이러한 ‘랜덤 액세스’가 가능한 것은 디지털 시대에 영상이 ‘정보화’되었기 때
이 때문에 디지털은 불가피하게 곤란한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영상을 찍고 문이다.
만들고, 영사하는 단계에서 조작 가능성이 있기에 영상의 사실성, 물질성의 관념이 셋째, 디지털은 불가피하게 인간의 정체성의 혼란을 만들어낸다. 대상과 영상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영상은 사실 무한하게 있을 수 있는 잠정적인 의 지시관계가 파괴되면서, 그리고 언제든지 인물을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형
버전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미지의 합성이 가능해지면서 우리는 어떤 영상을 보더 상화 해낼 수 있게 되면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파괴되기에 이른다.
라도 그것이 사실인지를 판단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가령 폴 버호벤의 <할로우맨>은 이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영화의 첫 장면은
디지털 정보는 또한 간단하게 온 세계를 날아다닐 수 있다. 일부러 필름을 운 대단히 인상적이다. 마치 유전자 배열을 조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사실 영
송하거나 옮길 필요가 없다. 필름은 출처가 뚜렷해, 배급, 그리고 영사의 경로가 보 어 알파벳의 배열과 조합을 시물레이션한 것이다. 시물레이션 공간에 흩어져 있는
이기 쉽다. 반면 디지털 영상은 그야말로 네트워크화 된 인터넷을 통해 무한하게 유 알파벳들이 결합되면서 하나의 이름이 만들어진다. 인간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이
포될 수 있기에 영상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그 원천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없 름은 단지 텅 빈 장소에서, 제한된 알파벳들이 일정한 배열에 따라 조합된 것의 결
게 된다. 때문에 디지털 시대에 영상은 절대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해석’으로서만 과처럼 보인다. 아마도 영화제목 ‘Hollow Man’의 ‘hollow’가 암시하는 것이 이것일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인터넷을 통한 ‘몰래카메라 영상’의 무한한 유포는 디지털 시 것이다. 이 장면은 텅 빈 존재인 투명 인간의 정체성을 질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의 곤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투명인간에 관한 영화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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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의 사랑>(1992) <셀러브레이션>(1998)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크
감독: 존 카펜터

우맨>에서 투명인간을 보여주는,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하는 테크 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여기에 디지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카메라의 기능,
닉은 과거 존 카펜터의 <투명인간의 사랑>과 같은 작품에서 이미 보여졌던 것이다. 시선과 대상의 관계가 디지털을 통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다.
<투명인간의 사랑>에서 투명인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몇 가지 마술적인 트릭 이들의 영화에서 디지털 카메라의 시선은 영상에서 벌어지는 일과 바깥 현실
이 있었다. 예를 들어 투명인간은 먼저 보이지 않는다. 텅 빈 장면에 이어 다음 장면 에서 벌어지는 일이 별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가령,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
16 디지털: 원본없는 영화, 이미지의 무한 복제

에서 투명인간을 실제로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텅 빈 화면을 보여주면 관객은 거기 들>에서 카메라는 마치 또 다른 등장인물처럼 인물들과 아주 자연스럽게 배치되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에 투명인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테크닉은 사물을 활용하는 것이다. 마치 어 있다. 마치 이야기에 참여한 증인과도 같은 이러한 시선 덕분에 관객들은 현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파이프나 담배가 공중에 떠 있고, 마술적인 개그 의 문제를 보다 극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처럼 보이는 이 장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종종 거울이 소품으로 등장한다. 디지털은 또한 규격화된 형식을 파괴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디지털이 소수자의
이러한 테크닉은 <할로우맨>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할로우맨>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그마 집단이 디지털 영화를 통해 보
에서 가장 혁신적인 테크닉은 투명인간으로 변하는 과정과 투명인간에서 가시적인 여준 파격은 단지 영화의 형식과 규칙을 위반하고 재구성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를 다시 현실세계로 향하게 하는 것, 세계로 다시 눈을 돌리게 한다는 점에서 중
이러한 장면은 영화의 내용상에서 보자면 특별한 주사와 유전자의 배열 조 요하다. 디지털 영화는 달리 말하자면 세계와 새롭게 만나는 도구일 수 있는 것이다.
작을 통해 누구든 투명인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디지털 시대에 토마스 빈터베르그가 디지털 비디오로 만든 <셀레브레이션>(1999)은 인습적
대단히 상징적인 것으로 가령, CG를 통해 우리는 영화상에서 인물을 지워버릴 수 인 가부장제 대가족, 인종차별주의자로 유아 학대자인 부친, 그 부친에 대한 자식들
도 있고, 또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을 창조할 수도 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영상 각각의 반항과 화해 등의 곤란한 문제를 디지털을 빌어 표현한다. 그에게 디지털 비
에서 인간은 어쩌면 이렇게 손쉽게 지워질 수 있는 존재이자 텅 빈 존재가 될 수 있 디오카메라는 주변적인 집단에게 부여된 사회적인 문제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
는 것이다. 영화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냈을
그러나 최종적으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곤경에도 불구하고 디지 뿐만 아니라, 새롭게 영화를 사유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디지털이 무엇인가, 디지털
털은 다른 한편 소수자의 창조적인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다. 라스 폰 트리에, 토마 영화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사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디지털 시대
스 빈터베르크을 주축으로 한 ‘도그마 집단’은 일찌감치 이런 디지털의 역설을 활 에 영화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디지털은 그런 점에서 영
용해 독특한 미학을 만들어냈다. 도그마 집단은 일상성, 자연주의적인 현실성을 표 화의 ‘카인’이자 ‘아벨’이기도 하다. 글: 김성욱(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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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디지털 혁명은 우리를 가상현실의 세계로 안내한다. 디지털 시대 3 디지털은 그러나 소수자의 창조적인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다. 디
의 도래는 또한 영화의 정체성을 재정의하게 만들어버렸다. 19세기 지털은 규격화된 형식을 파괴하는 경향을 갖고 있으며 소수자가
말에 태동해 20세기 대중예술을 대표한 영화는 그간 큰 기술적 변 영상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런 점에
화를 겪어왔지만 실제의 물리적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을 사진에 서 디지털은 세계와 새롭게 만나는 도구이기도 하다.
기록하는 영상의 존재론적 특징은 유지해 왔었다. 하지만 3차원
애니메이션과 디지털 합성의 시대에 영화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디지털 영화는 한마디로 ‘사진적 영상을 영화의 일부분으로 하는 심화 및 보충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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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수 저, <디지털 영화의 미학>, 문화과학사, 2005년 04월


애니메이션의 일종’이라 말할 수 있다. <디지털 필름메이킹 토마스 오헤니언 등저>, 책과길, 1999년 12월
케이 호프만 엮음/김성욱 등역, <디지털 시대의 영화 토마스 엘새서>, 한나래, 2002년

제1권 영화보기의 첫걸음


레프 마노비치 저/서정신 역, <뉴미디어의 언어>, 생각의나무, 2004년 01월
2 디지털 기술은 ‘현실’을 변용시킨다. 디지털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현실세계’를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복수의 현실성을 지
닌 다양한 세계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원래의 현실이 지닌 절대성
은 동요하며 점점 상대화, 복수화 되기에 이른다.
또한 영상을 찍고 만들고, 영사하는 단계에서 조작 가능성이 있기에
디지털 시대에 영상의 사실성, 물질성의 관념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디지털은 관객의 ‘랜덤 액세스’를 증가시킨다. 관객은 언제든지 자
유롭게 영상의 일부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디지털은 또한 불가
피하게 인간의 정체성의 혼란을 만들어낸다. 대상과 영상의 지시관
계가 파괴되면서, 그리고 언제든지 인물을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
해 형상화해낼 수 있게 되면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파괴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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