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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현/ 성 토마스의 󰡔신학대전󰡕에 따른 지복직관을 향한 인간 의지의 역할 205

❚❚연구논단❚❚

ISSN(Print) 1225-4924
ISSN(Online) 2508-3104
가톨릭 신학과사상
Vol.84, Summer 2021
http://dx.doi.org/10.21731/ctat.2021.84.205

성 토마스의 󰡔신학대전󰡕에 따른 1)

지복직관을 향한 인간 의지의 역할

윤주현
가르멜수도회, 영성신학 박사

서 론
1. 욕구 능력으로서의 의지
1.1. 인간 행위의 중심으로서의 욕구
1.2. 지성적 욕구로서의 의지
1.3. 모든 욕구들 가운데 제1의 욕구
2. 인간의 여정에 있어서 의지의 중요성
2.1. ‘나그네’ 인간에게 있어 제1의 능력인 지성
2.2. 창조된 지성의 모순과 은총의 필요성
2.3. 지복직관을 향한 여정에서 의지의 우위
3.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을 준비하는 의지의 역할
3.1. ‘영광의 빛’을 준비하는 자연적 태세의 중추
3.2. 인간의 ‘신화’를 준비하는 협력 기관
3.3. ‘참사랑’을 향해 더욱 개방되어야 하는 의지
결 론

서론

성 토마스는 자신의 대작 󰡔신학대전󰡕 전체를 통해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원대한 구원 역사를 제시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하느

1)이 글은 2021년 ‘재단법인 신학과사상’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연구 · 작성된 논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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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으로부터 발원해서 하느님을 향해 회귀하는 모든 피조물의 여정,


특히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지적 피조물인 인간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성 토마스는 이런 인간 존재를 ‘나그네’(viator)
라고 불렀다. 사실, 그의 󰡔신학대전󰡕은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이
라는 최종 목적을 향해 현세 여정을 걷는 ‘나그네’로서 인간의 여
정 전체를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여정’(via)이라고 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느 한 상태
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동을 말하는데, 이러한 인간의 운동은 이를
가능케 하는 그의 역동적 능력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이 능력이
실제로 그가 최종 목적을 향해 나아가도록 작용할 때, 그는 이 목
적을 향해 진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능력이 다름
아닌 ‘의지’(voluntas)이다. 의지는 인간이 현세의 여정을 통해 최종
목적에 이를 수 있도록 그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능력이다. 그가 최
종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그 목적을 궁극적이고 고유한 자신
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의지에 힘입어 점진적으로 자신을 움직이
는 가운데 가능하다.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2부 전체에서 의지
가 수행하는 이러한 역동적 차원을 다양하게 전개하는 가운데, 특
히 덕스러운 행위를 통해 의지가 어떻게 여정의 진보를 위해 공헌
하는지 다루고 있다. 제2부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모든 자
연적, 초자연적 덕들은 인간이 최종 목적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하
는 길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덕들은 인간 편에서
볼 때, 그의 고유한 핵심 능력인 지성과 의지를 바탕으로 발전된다.
특히, 구체적인 인간적 행위와 연관되어 드러나는 중요한 덕들은
모두 의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의지는 단순히 인간적 행위를 담당
하는 중심 기관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의 여정이 진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수단이라는 보다 중요한 신학적 차원을 내포한다.
사실, 덕들은 의지의 자유로운 실행과 결단으로부터 준비되기 때문
이다.
더 나아가, 의지는 인간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
(visio beatifica)에 있어서 중요한 본성적 요소로 작용한다. 하느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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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관상하는 지복직관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


상으로 선사하시는 초자연적 선물이다. 인간은 어떠한 공로를 통해
서도 결코 이를 하느님께 요구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이 지복
직관을 위해 본성적 차원에서 자신을 준비할 수 있다. 하느님에 대
한 지복직관을 가능케 하는,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특별한 은총인
‘영광의 빛’(lumen gloriae)을 수용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을 향한 ‘참사랑’(caritas)을 향해 개방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의지는 하느님을 관상하는 중심 기관인 지성이 초자연적 상태로
고양(elevatio)될 수 있는 ‘자연적 태세’(dispositio naturale)를 마련해준
다. 이런 의미에서 성 토마스는 의지를 지성보다 우위에 있는 능력
으로 보았다.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해 이처럼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
관이라는 최종 목적을 향해 현세의 여정을 걷는 ‘나그네’ 인간의
핵심 능력인 의지의 본성과 역할을 심도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욕구 능력으로서의 의지

1.1. 인간 행위의 중심으로서의 욕구

우리는 인간의 ‘의지’를 고찰하는 데 있어 먼저 ‘욕구’(appetitus)1)


라는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 성 토마스는 인간 존재를 이해함에
있어 기본적으로 이 ‘욕구’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에게는 욕구 능력
이 있다: “욕구적 능력이라는 영혼의 어떤 능력은 필연적으로 인정
되어야 한다.”2) 성 토마스에 따르면, 욕구는 행위의 원리이다.3) 사
실, 욕구 능력은 어떤 의미에서 수동적이다. 왜냐하면, 욕구하는 대
상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욕구하는 대상은 무

1) 참조: 바티스타 몬딘, “욕구”, 󰡔성 토마스 개념사전󰡕, 이재룡외 2인 옮김, 기쁜소


식출판사, 2020, 477~478쪽.
2) 󰡔신학대전󰡕 I, q.80, a.1.
3) 참조: “욕구 능력은 어떤 면에서 수동적이다. 왜냐하면, 욕구 대상으로부터 움직
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행위의 원리이다.”(『󰡔신학대
전󰡕, I-II, q.18, a.2, ad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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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보다도 선(善)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대


상이 지닌 선에 의해 욕구 능력이 움직일 때, 욕구의 주체인 인간
은 이 선을 취하기 위해 대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며 이 운동은
그 대상을 획득하기 전까지 지속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욕구 대상
인 선(善)은 목적의 특징을 띠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일련의 욕구
행위가 드러내는 역동적인 모습에서 우리는 욕구 능력으로부터 목
적을 향한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가 유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욕구는 역동적인 차원을 함축하고 있는 인간의 핵심적인 본질
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러한 욕구 능력을 인간 여정의 전망에서
보면, 우리는 이 능력이 차지하는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능력은 인간을 ‘나그네’로 규정할 수 있게 하는 핵심 능력이면
서 동시에 그의 여정을 진보하게 하는 원동력이다.4)
이처럼 욕구가 갖는 역동적인 차원을 보다 분명히 살펴보기 위
해 우리는 먼저 이에 대한 성 토마스의 정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
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욕구란 어떤 것을 향한
욕구자의 경향성(inclinatio appetentis)에 다름이 아니다.”5) 더 나아가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선은 고
유하게 욕구와 관련된다. 사실, 선은 모든 것이 욕구하는 것이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선은 목적의 이유를 갖는다. 욕구는 사물에 대한
어떤 운동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6) 이제 이러한 토마스의 정의
와 더불어 우리는 욕구가 다름 아닌 원하는 대상을 향한 주체의
‘경향성’(inclinatio) 또는 그 대상을 향한 ‘움직임’(motus)이라고 규정

4) 참조: “자연적 경향들이나 태생적인 경향 자체의 측면들은 […] 존재를 향한 그


리고 최종 목적을 향한 경향이다. 그것은 최고선을 향한 경향이자 고유한 자연적
행복을 향한 경향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향은 구체적인 목적을 향해 방향 지어진
피조물들에게 있으며, 특히 하느님에게서 나와 하느님을 향해 여정을 걷는 순례자
인간에게 있는 고유한 능력이다. 이는 불가피한 필수적 방향성으로서, 이는 그의
본성적 존재 됨을 상실하지 않고서는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근원적 경향이
다”(Molinero J., Elegir a Dios, tarea del hombre, Pamplona: Universidad de Navarra, 1979,
p.45).
5) 󰡔신학대전󰡕 I-II, q.8, a.1.
6) 같은 책 I, q.5, a.4, a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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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 사실, 이 두 어휘는 이미 그 자체로 욕구하는 주체가


원하는 대상을 향해 갖는 움직임 또는 운동을 이미 내포하고 있음
을 보여준다. ‘경향성’은 대상을 향한 주체의 호의적인 성향7)을 의
미하며, 이는 본래 그의 형상(forma)에서 유래한다: “모든 경향성은
어떤 형상을 따르기 때문에 자연적 욕구는 본성 안에 존재하는 형
상을 따른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8)
더 나아가, 욕구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요소들을 분석해 보면 욕
구가 지닌 역동적 본성을 보다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다: “욕구는
두 가지, 곧 목적을 향해 움직일 것과 그 욕구가 사랑을 통해 그 목
적과 하나가 될 것을 요구한다.”9) 우리는 이 정의를 통해 욕구를
구성하는 두 가지 기본 요소를 알 수 있다. 즉, 목적을 향한 ‘움직
임’(motus)과 주체가 사랑을 통해 목적과 ‘하나 되는 것’(conformatio)
이 그것이다. 이 두 요소는 욕구의 대상 안에서 욕구하는 주체를
변모시킨다. 이 정의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성 토마스
가 사용하는 함축적 표현인 ‘목적과 하나 되는 것’(conformatio ad
finem)이다. 여기서 ‘conformatio’는 ‘cum’(~와 더불어)과 ‘formatio’(형
상)의 합성어로, cum은 “~와 함께 있음”을 가리키며, 이는 대상과의
관계, 더 나아가 대상과의 일치, 결합을 의미한다.10) 반면, ‘formatio’
는 forma(형상)에서 파생된 것으로, 형상화(形相化)를 가리킨다.11) 주
지하다시피, 성 토마스의 전망에서 형상은 질료와 더불어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이다. 그러므로 ‘conformatio ad finem’이란 표현은
기본적으로 욕구가 함축하고 있는 욕구 주체와 욕구 대상 사이의
관계를 가리킨다. 그것은 욕구하는 주체의 형상과 욕구의 대상을
규정하는 형상 사이의 함께 있음, 즉 두 형상 사이의 일치를 의미
한다. 다시 말해, 욕구가 그 대상과 지닌 관계의 완성, 즉 일치를 지

7) Cf. Georges/Calonghi., Dizionario della Lingua Latina Vol.I, Torino: Rosenberg & Sellier,
1951, p.1356.
8) 󰡔신학대전󰡕, I-II, q.8, a.1.
9) 같은 책, I-II, q.62, a.3, ad3.
10) Cf. Georges/Calonghi., op.cit., p.713.
11) Cf. Georges/Calonghi., op.cit., p.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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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하는 운동은 욕구의 역동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욕구하는 주


체는 이 운동과 더불어 욕구되는 대상의 형상에 적용하는 가운데
그것과 동화되어 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욕구는 본성상 이미 그 자
체로 욕구의 대상을 향한 주체의 합일 운동을 가능적으로 내포하
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인간에게 있어 욕구가 차지하
는 중요성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선
(善)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을 욕구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의 자유를 하느님이 나그네인 인간을 위해 예정하신
최종 목적을 향한 그의 여정이라는 전망에서 보면, 그에게 선으로
다가오는, 따라서 그의 욕구를 자극하는 모든 것이 전부 최종 목적
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 토마스는 이렇게 언급한다:
“의지의 작용을 비롯해 모든 욕구 능력의 작용은 그 작용의 목적인
사물을 향한 경향성을 통해 이루어진다.”12) 이는 곧 욕구의 대상에
내재된 선(善)의 질(質)이 욕구하는 주체인 인간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욕구하는 인간의 변
모에 있어서 중요하게 드러나는 것은 욕구의 대상이 무엇이며, 그
대상이 지닌 선(善)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욕구의 대상이 지닌
선(善)은 인간이 대상과 더불어 하나 되는 과정에서 변모되는 과정
을 질적으로 규정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을 존재론적
인 차원에서 최고의 상태로 들어 올려 줌으로써 변모될 가능성을
향해 열어주는 선은 다름 아닌 최고선(最高善)이신 하느님이다. 그
러므로 최고선이신 하느님과의 사랑의 합일 또는 지복직관을 향해
예정된 인간에게 요청되는 것은 이 예정 은총을13) 통해 선사된 초
자연적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그는 이 소명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대상을 의지적으로 원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 욕구하
는 것과 더불어 존재론적으로 규정된다. 인간은 자신이 욕구하는

12) 󰡔신학대전󰡕, II-II, q.23, a.6, ad1.


13) 참조: 바티스타 몬딘, “예정”, 앞의 책, 465~4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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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에 따라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2. 지성적 욕구로서의 의지

지금까지의 분석을 토대로 우리는 인간 안에 근원적인 욕구가


있으며 이 욕구는 그의 삶이 지닌 역동성의 원천임을 이해할 수 있
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고찰해야 할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욕구
인가 하는 점이다. 특히, 최종 목적을 향한 인간의 여정에서 이 여
정과 관련된 욕구는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성 토마스에 의하
면, 모든 존재는 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 나아가 모든
형상은 근원적인 경향성을 가지며 그것이 다름 아닌 욕구로서, 이
욕구는 인식에 따라 차별화된다.
인식 능력이 없는 존재들 중에는 그 존재를 결정짓는 형상이 있
으며 이것은 그 존재에게 자연 본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자연적
인 형상은 자연적인 경향성(inclinatio naturalis)을 지니고 있다. 이를
‘자연적 욕구’(appetito naturale)라고 한다. 이 점에 대해 성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인식을 결여하는 것들에 있어서는 다만 각
각의 사물을 그것에 고유한 하나의 존재로 한정하는 형상만이 발
견된다. 그러므로, 이런 자연 본성적 형상에는 ‘자연적 욕구’라고
불리는 자연 본성적 경향이 따른다.”14) 반면, 인식 능력이 주어진
존재자들에게는 보다 상위의 욕구가 있다. 이 존재자들은 자신의
자연 본성적 존재성과 본성적인 형상에 의해 규정되어 있지만, 더
나아가 또 다른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성 토
마스는 인식 능력을 지닌 존재자들 안에서 이 자연 본성적 욕구를
다음 두 가지로 구분했다: 감각적 욕구(appetitus sensitivus), 지성적
욕구(appetitus intellectivus).15) 그런데 성 토마스는 이 둘 중에 지성적

14) 󰡔신학대전󰡕, I, q.80, a.1.


15) “감각은 모든 감각적인 것의 형상들을 받아들이고 지성은 모든 가지적인 것들
의 형상들을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Ibid.). “지성적 욕구는 감각적 욕구와는 다른
능력이라고 하여야 한다. […] 그러므로 지성에 의해 파악되는 것과 감각에 의해 파
악되는 것은 각기 다른 류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성적 욕구도 감각적 욕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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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가 감각적 욕구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성적 욕구에 의해 감각이 파악할 수 없는 비질료적인 선(善), 예
컨대 지식, 덕 등을 욕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16) 또한, 이 선상에서
그는 지성적 욕구를 의지와 동일시했다.17)

1.3. 모든 욕구들 가운데 제1의 욕구

욕구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가능케 하는 원천이다. 우리는 여기


서부터 최종 목적을 향한 그의 운동을 해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
견하게 된다. 그런데 욕구 가운데 지성적 욕구, 즉 의지는 모든 감
각적 욕구보다 우위를 점한다. 따라서 모든 인간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제1의 욕구 능력은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의지는 최종 목적을 향한 인간의 회귀 여정을 가능케 하는 모
든 행위의 기저에 있으며, 더 나아가 이 행위들을 통합해서 하느님
을 향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와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달리
말해, 그의 여정에 있어 진보의 여부는 의지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
는다.
성 토마스는 모든 인간적 행위의 중심에 있는 의지의 본성과 그
역할을 해명하기 위해 “마음을 다 기울이고 모든 영혼과 힘을 다해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18)는 성경 구절에 대한 독특한 해
석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의지의 행위임에 주목해야 한다.
이 의지는 심장(cor)이라는 말로 지칭되고 있다. 마치 육체의 심장
이 육체의 모든 움직임의 중추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의지는 특히
참사랑(caritas)19)의 대상인 최종 목적을 향함에 있어 모든 영적인

는 다른 능력이라는 귀결이 된다”(신학대전 I, q.80, a.2).


16) 같은 책, q.80, a.2, ad2.
17) “의지는 이성적 욕구를 가리킨다”(󰡔신학대전󰡕 I-II, q.6, a.2, ad1). “[…] 또한 다른
욕구는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 욕구하는 주체에 대한 파악에 뒤따른다. 이런 것은
‘의지’라고 일컬어지는 이성적 또는 지성적 욕구이다”(I-II, q.26, a.1). 참조: 󰡔신학대
전󰡕 I, q.19, a.9; q.20, a.1, ad1; q.59, a.4; q.82, a.5; I-II, q.1, a.2, a.5; q.46, a.4, ad1; q.56, a.5,
ad1; q.59, a.4; q.77, a.1; II-II, q.18, a.1; q.58, a.4, ad1; III, q.19, a.2.
18) 참조: 마태 22,37; 마르 12,30; 루카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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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의 중추이다.”20)
살펴본 바와 같이, 성 토마스는 인간의 의지21)를 육체의 심장에
비유했으며, 무엇보다도 최종 목적에 직접 연관된 중추 기관으로
보았다. 이는 곧 의지야말로 최종 목적에 이르기 위한 인간의 여정
에 있어서 중심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즉, 성 토마스는 신명
6,5을 인간학적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인간의 여러 가지 능력들을
육체적인 기관들(정신, 영혼, 힘)과 비교해서 설명했다. 그에 따르
면, 정신은 인간의 지성에 비교될 수 있으며, 영혼은 하위 욕구 능
력에 비교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힘은 외적인 실행 능력을 의미하
는데, 이는 힘 또는 에너지와 동일시된다.22) “의지에 의해 움직여지
는 행위의 원리들은 세 가지이다. 즉, 정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지성
(intellectus), 영혼이라고 일컬어지는 하위 욕구 능력들(vis appetitiva
inferior), 힘이나 능력, 에너지라고 일컫는 외적 실행 능력(vis executiva
exterior)이 그것이다.”23)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성 토마
스가 왜 인간의 의지를 육체의 심장에 비유하는지, 그 근거를 확실
하게 알 수 있다. 의지는 인간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향해 움직이
게 하는 운동에 있어 핵심축이다.

19) 참조: 최근에 한국 성 토마스 연구소는 한국어로 번역·출간 중인 󰡔신학대전󰡕과


최근 출간한 󰡔성 토마스 개념사전󰡕을 통해 성 토마스의 용어들에 대한 새로운 기
준을 제시했다. 그 가운데 caritas에 해당되는 기존의 번역어인 ‘애덕’은 ‘참사랑’으
로 대체되었다.
20) 󰡔신학대전󰡕, II-II, q.44, a.5.
21) 참조: 바티스타 몬딘, “의지”, 앞의 책, 538~542쪽.
22) 참조: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 II-II, q.44, a.4에서 의지를 육체의 모든 움직임의
중심인 심장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마음(cor)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구절이
갖는 의미를 끌어냈다. 더 나아가, 그다음에 이어지는 절에서 “네 모든 영혼과 모
든 힘을 다해 […]”라는 다음 구절을 바로 앞 구절에 대한 해석의 연장 선상에서 인
간학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23)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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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의 여정에 있어서 의지의 중요성

2.1. ‘나그네’ 인간에게 있어 제1의 능력인 지성

성 토마스에 의하면 인간은 다양한 능력의 주체로서, 이 능력들


사이에는 일련의 위계질서가 존재한다.24) 또한, 인간에게는 다양한
욕구 능력이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인간은 감각적 욕구와 지성적
욕구를 갖고 있다.25) 그런데, 욕구 능력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각각의 욕구가 지향하는 대상의 차이 때문이다.26) 성
토마스에 의하면, 인간의 통상적 행위는 지성과 의지가 함께 작용
하는 복합적 행위이지만, 그 과정의 추이를 엄밀히 살펴보건대, 지
성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다.27) 왜냐하면, 대상의 선(善)을 인식하
는 것은 오감(五感)을 통해 들어온 사물의 정보를 통해 그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지성의 몫이기 때문이다. 지성이 사물의 본질을
깨닫게 되고 그 가운데 있는 선(善)을 인식하게 되면 지성은 의지
가 이 선을 취할 수 있도록 행위의 차원으로 밀어붙인다. 즉, 의지
는 지성으로부터 제공된 대상의 선을 실제로 원하고 이를 획득하
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지성이 사물의 본

24) 참조: 󰡔신학대전󰡕 I, q.77, a.4; 소피아 로비기, “생장 능력, 감각 능력, 인식 능력”,
󰡔성 토마스의 철학적 인간학󰡕, 이재룡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5, 115~116쪽.
25) 참조: 󰡔신학대전󰡕 I, q.80, aa.1~2.
26) Ibid., 참조: “감각적 욕구는 선(善)의 공통적 특질에 관련되지 않는다. 그것은 감
각도 보편적인 것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각적 욕구의 부분들은
개별적인 선들의 각기 다른 특질에 따라 구별된다. […] 이와는 달리, 의지는 선의
공통적 특질 아래 선에 관련된다”(󰡔신학대전󰡕 I, q.82, a.5).
27) “‘의지에 대한 지성의 우위.’ 이 명제는 역사적 토미즘의 중심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며 천사적 박사가 자신의 활동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견지했던 원칙 가운데
하나였다. […] ‘지성의 대상은 의지의 대상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더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지성의 대상은 그 자체로 욕구될 만한 선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기관 그 자체를 고려한다면, 즉, 각 기관이 지향하는 고유한 대상을 고려한다면,
‘지성은 훨씬 더 뛰어나다’,고 말해야 한다”(Fabro C., “Orizzontalità e Verticalità della
Libertà”, Ang 48[1971], 317~318); Leo J. Elders, “L’intelletto è più Eminente della Volontà?”,
La Filosofia della Natura di San Tommaso d’Aquino, Città del Vaticano: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6, pp.35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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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현/ 성 토마스의 󰡔신학대전󰡕에 따른 지복직관을 향한 인간 의지의 역할 215

질에 대한 파악과 더불어 그것이 주체 자신에게 좋은 것인지에 대


한 일련의 숙고와 판단을 통해 그것을 획득하기로 결정한 것을 의
지에 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인간적 행위의 과정에서
지성28)은 의지보다 우위에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을 봄’(visio Dei) 또는 ‘지
복직관’은 일차적으로 의지보다는 지성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하
느님을 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 그분의 본질
을 있는 그대로 관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하느님을
봄’은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예정 계획
의 실질적인 내용으로서, 인간은 바로 이 목적을 바탕으로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예정되었으며, 이 예정이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한 첫 단계가 다름 아닌 인간의 창조이다. 따라서, 지
성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예정 계획의 실질적인 주체이자 수혜
자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지성을 통해 하느님을 지복직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복직관’은 원칙적으로 지성에 귀속
된다.29) 이러한 의미에서 지성은 인간이 지닌 여러 기관 가운데 가
장 탁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2.2. 창조된 지성의 모순과 은총의 필요성

성 토마스에 의하면 지복직관은 지성의 고유한 행위로서, 지성이


어떠한 중개도 없이 하느님의 본질을 직접 보게 될 때, 인간은 영
원한 참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을 보는 것’은 육
체의 시각 기관인 눈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30) 그것은 근본적으

28) 참조: 바티스타 몬딘, “지성”, 앞의 책, 686~691쪽.


29) 󰡔신학대전󰡕 I, q.12, a.1.
30) 사실, 성 토마스는 이 현세의 사멸할 육체의 눈이 아닌 부활하게 될 육체, 즉
종말론적인 육체의 눈으로 하느님을 보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육체의 눈으로 하느님을 보는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는 욥 19,26; 42,5과 에페 1,17-18
을 설명하면서 그에 대해 대답했다: “‘나는 내 육 안에 내 구세주 하느님을 볼 것이
다’라고 할 때 그것은 육의 눈으로 하느님을 보리라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
려 부활 후, 육 안에 있으면서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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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 연구논단

로 지성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을 의


미한다. 성 토마스는 이러한 지복직관이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창조된 지성의 능력을 무한히 넘어서는 것으로, 그가 나그네로서
이 현세의 여정을 걷는 동안에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31)
한편, 인간에게는 최종 목적을 향한 그의 여정 가운데 끊임없이
하느님의 구원적 개입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 은총이 하느님으로부
터 가능적으로 주어졌다. 그것은 하느님을 지복직관 하도록 영원으
로부터 인간을 미리 불러주신 하느님의 예정 은총이다. 사실, 인간
을 향한 하느님의 예정은 인간의 현세 여정 가운데 하느님이 그를
섭리적으로 인도하면서 구원하고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의 역
사에 개입하는 근본적 이유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예정된 목적에
이를 수 있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다른 모든 은총이 바로 이 예정
에서 유래한다는 의미에서 예정은 ‘원천적 은총’(gratia fontis)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창조된 자연적 지성은 하느님을 지복직관할 수 없지
만,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지성을 지닌 인간이 하느님을 지복직관
하도록 예정되었다는 사실, 즉 예정 은총의 수혜자라는 사실을 어
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성 토마스의 구
체적이고도 정확한 분석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창조된 지성은, 하느님이 그 은총으로 자신을 그에게 가지적
인 것으로서, 창조된 지성에 결부시키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그 본
질에 의해 볼 수는 없는 것이다.”32) 우선, 토마스는 이 언명을 통해
서 인간의 지성이 하느님을 보는 데 있어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했다. 1) 창조된 지성 편에서의 하느님을 봄에 대한 불가능
성.33) 2) 창조된 지성이 은총과의 관계 하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찬가지로, ‘지금 내 눈이 당신을 보나이다’라고 하는 것도 정신의 눈에 대한 것으


로 이해된다. 그것은 마치 사도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제1장 제17절과 제18
절에서 ‘바라건대 당신들에게 지혜의 영을 주시어 하느님을 인정케 하고 당신들의
마음의 비쳐진 눈을 주시기를’하고 말한 것과도 같다”(󰡔신학대전󰡕 I, q.12, a.3, ad1).
31) 참조: 󰡔신학대전󰡕 I, q.12, a.11.
32) 같은 책.
33) Cf. Spiazzi R., “Il Carattere Perfettivo del Soprannaturale secondo S. Tommaso d’Aqu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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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34) 여기서 창조된 지성의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의 가능성


을 파악하려면, 특히 ‘은총’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이 언명의 후반
부를 주목해야 한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 최종 목적
에 도달하는 것, 즉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은 오직 하느님이 주도
권을 쥐고 인간에게 허락하신 은총에 힘입을 때 비로소 가능하
다.35)
성 토마스는 인간이 지복직관을 가능하도록 허락하는 은총에 대
해 설명하면서, 이 은총을 ‘영광의 빛’(lumen gloriae)으로 언급했다.36)
비록 인간은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예정을 통해 지복직관에 대한
가능성을 갖지만, 이러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실제로 지
복직관을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즉, 인간의 창조된 자연적
지성 그 자체만으로는 지복직관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 지성의
본성적 능력을 무한히 초월하는 이 초자연적 목적에 도달하기 위
해서는, 하느님 편에서 무상(無償)으로 이 지성을 증강 시켜줌으로
써 초자연적 상태로 들어 올려 주어야 한다.37) 성 토마스는 하느님
이 인간의 지성을 증강(增强)시켜주는 것을 ‘지성의 조명’(illuminatio
intellectus)38)으로 불렀다. 이러한 증강은 오직 하느님께서 주도적으

SC 76(1948), 184~186.
34) 참조: Spiazzi R., op.cit., p.205.
35) Cf. Spiazzi R., op.cit., 186~187.
36) 참조: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그 자체로 고양된 현실태를 간직한, 지성의 습
성적 강화에 있는 ‘궁극적 성향’(disposizione ultima)으로, 이것이 인간의 지성으로 하
여금 하느님을 보도록(visio Dei) 그에 적합하게 해준다. […] 이것은 지성의 자연적
빛에 초자연적 강화로 첨가되는 높은 빛(lume superiore)이다”(Spiazzi R., op.cit.,
187~188).
37) “자연적 지성의 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지성의 힘이 신적 은총에 의해
성장해야 한다. 이러한 증강을 지성의 조명이라 부른다. […] 자신의 본성적 힘을
단순히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가지적 실체(可知的 實體)를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본질적으로 초자연적 기관이 주입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럼으로써 지성은
즉시 신적 대상에 적합하게 된다. […] 하느님은 창조된 지성에 당신 자신을 통교하
심으로써 그에게 지복직관에 대한 능력을 부여하는 빛을 부어주시며, 이 지성을
강화시키고 초자연적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그럼으로써 이 지성이 충분히 신적 본
질을 직관할 수 있게 한다”(Spiazzi R., op.cit., 189~190).
38) 참조: “우리는 이와 같은 지성 능력의 증대를 ‘지성의 조명’(illuminatio intelle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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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선사하시는 당신의 은총, 특히 ‘영광의 빛’을 통해서만 가능하


다.39)

2.3. 지복직관을 향한 여정에서 의지의 우위

그러므로 일반적인 차원에서 볼 때, 성 토마스는 의지를 비롯한


모든 기관들에 대해 지성이 우위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어느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전이(轉移)될 경우, 지성보다는 의지가 두드
러지게 드러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의지는 인간적 행위의 중심
기관이기 때문이다.40) 물론, 인간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에 대한 지
복직관은 지성의 고유한 대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자연 본
성적인 지성의 힘만으로는 결코 이 신적 관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성에는 자신으로 하여금 실제로
하느님을 지복직관 하도록 도와주는 또 다른 기관이 필요하다. 최
종 목적을 향한 나그네 인간의 여정을 가능케 하는 실질적인 운동
의 중심은 구체적으로 그의 의지이다. 반면, 지성은 이러한 의지의
도움에 힘입어 최종 목적에 도달함으로써 궁극적 행복인 지복직관
을 향유하게 된다.41)
따라서 지복직관을 향하는 여정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의지는
지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 사실, ‘지성적 욕구’라는 정의는 의지의
본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즉, 의지는 지성에 속한 욕구 능력으로서,
기본적으로 지성이 인식한 대상의 선(善)을 욕구한다. 따라서 의지

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가지적인 것 자체를 광명 혹은 빛이라고 부르는 데 대응하


는 것이다. 요한 묵시록 제21장 제23절에서 ‘하느님의 광휘가 그(하느님을 보는 행
복한 자들의 공동사회를 비출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이런 빛을 말하는 것이다”(󰡔신
학대전󰡕 I, q.12, a.5).
39) 같은 책, I, q.12, a.6.
40) Leo J. Elders, “L’attività della Volontà”, op.cit., p.352.
41) “지성적 인식과 의지의 선택 작용을 바탕으로 한 두 번째 계기에서 인간을 진
보하게 하는 영혼의 상위 두 가지 능력은 지성과 의지이다. […] 지성은 인간의 궁
극적 행복이 하느님께 있음을 인식하며, 의지는 그분을 자신의 최종 목적으로 선
택하게 된다”(Molinero J., op.cit.,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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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독자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언제나 지성과 협력하는 가운데 행


위를 창출해 낸다. 그러나 의지는 단순히 지성에 예속되어 부가적
인 기능만 수행하지 않는다. 특히, 의지는 인간의 최종 목적인 ‘지
복직관’을 향한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즉, 지성으로 하
여금 자신을 비추어 초자연적 상태로 들어 올리는 하느님의 은총
인 ‘영광의 빛’을 더욱 잘 받게 한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 동일한
자연적 지성이라 해도, 하느님의 ‘영광의 빛’을 받는 정도는 서로
다르다. 이것은 의지가 얼마나 참사랑(caritas)을 향해 개방되는가
하는 정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의지는 바로 초자연적 사랑인 참
사랑으로 인간을 개방하게 하는 인간 편에서의 자연적 사랑(amor)
이 생겨나는 중추 기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확실히 의지는
지성보다 우위에 있다. 자연적 지성이 초자연적 상태로 고양(高揚)
되는 정도, 즉 지복직관을 하는 수준은 의지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
에 개방되는 정도에 달려있다. 달리 말해, 하느님을 향한 인간 여정
의 진보 상태는 의지가 얼마나 초자연적 사랑으로 열리는가 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의지가 참사랑을 향해 열리는 정도
에 따라 자연적 지성은 하느님의 본질을 더욱 깊이 관상할 수 있게
하는 ‘영광의 빛’을 받게 될 것이며, 그 수준은 초자연적 질서 세계
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일치를 누리는지 그 일
치의 수준을 좌우하게 된다.
이처럼 자연적 지성이 하느님을 지복직관 하게 될 때까지 일련
의 과정을 고찰해 볼 때, 이를 가능하게 하는 주된 요인은 인간의
지성을 초자연적 질서로 고양하는 하느님의 은총, 즉 ‘영광의 빛’이
다. 그러나 이 은총의 빛을 수용하는 정도를 결정하는 인간적 요소,
즉 그 빛을 더욱 잘 받을 수 있도록 인간의 본성42)을 준비시켜 주
는 능력은 바로 의지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의지는 분명 지성보다
우위에 있다.43) 이와 관련해서, 인간이 원하는 대상의 선(善)이 인

42) 참조: 바티스타 몬딘, “자연/본성”, 앞의 책, 607~611쪽. 본성과 은총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610쪽의 “3. 본성과 은총”을 보라.
43) “선이 내재해 있는 사물이 인식된 개념이 내재해 있는 영혼 자체보다 더 고귀
할 경우 의지는 이런 사물과의 관련으로 인해 지성보다 더 고차적이다” 󰡔신학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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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 연구논단

간 자신보다 훨씬 고상한 것일 때, 의지는 이 선(善)과의 관계에서


지성보다 우위에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지성이 이해한 인식 대상의
종(種)은 인식 주체 안에 있는데 반해, 의지의 행위는 그 대상에 있
는 무엇인가를 향한 경향성을 갖고 이를 획득하기 위해 주체를 움
직이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도 역시 의지는 지성보다 우
위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인간이 최종 목적을 향해 나아가
는 여정에서 의지가 지성보다 더 중요한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3.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을 준비하는 의지의 역할

3.1. ‘영광의 빛’을 준비하는 자연적 태세의 중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의지는 어떤 면에서 지복직관을 준비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여정에 있어 진보를 가능하게 할까? 이 점과 관
련해서, 인간의 본성을 초월하는 초자연적 상태로의 고양을 위해
인간 편에서 준비해야 할 ‘태세’(態勢, dispositio)에 대해 언급한 성
토마스의 다음 구절에 주목하기로 하자: “자기 자연 본성을 넘어가
는 어떤 것으로 고양되는 모든 것은 자기 자연 본성을 넘는 어떤

I, q.82, a.3). 참조: 이와 관련해서 파브로(Fabro C.)는 다양한 근거를 제시하는 가운데
지성에 대한 의지의 우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1) 의지는 선(善)인 대상과 관련
해서 역동적인 차원에서 지성보다 우위에 있다. […] 그러나 지성이 의지를 움직인
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비유일 뿐이다. 지성은 단지 의지에 욕구 가능한 대상을
제시할 뿐이다. […] 대상이 지닌 선을 향한 경향성과 이 경향성을 지배하는 것은
의지와 자유재량의 고유한 특징이다[…] 토마스가 탁월하게 설명하듯이, 의지는 실
천 지성을 움직이는 가운데 (즉, 이 지성을 인도하고 지배하는 가운데) 이러한 지
배를 실제로 수행한다. […] 그러므로 지성이 아니라 의지가 정신의 보다 깊은 활동
을 구성한다. […] 2) 의지는 최종 목적인 하느님이 대상일 때 지성에 비해 존재론
적 우위를 지닌다. […]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한 지성을 바탕으로 의지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그분을 향해 직접 나아갈 때, 의지는 지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참
조: In Sent., IV, d.49, q.2, a.7, ad7). […] 그러므로 지성은 의지에 선행(先行)한다고 말
할 수는 있지만, 의지에 비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는 성 토마스의 사
상에서 드러나는 원칙 가운데 하나이다”(Fabro C., op.cit., 32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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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44) 이 언명에서 드러나는 ‘어떤 태


세’(aliqua dispositio)는 다름 아닌 ‘영광의 빛’으로서, 이 은총이 바로
인간의 자연적 지성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본질을 보도록 준비시켜
준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어떤 태세’는 하느님이 마련하는
‘초자연적 태세’(dispositio supernaturalis)이다.45) 그런데, 인간은 이러
한 초자연적 태세를 수용하기 위해 자연적 준비, 즉 ‘자연적 태
세’(dispositio naturale)를 갖춰야 한다. 인간 편에서 제대로 준비된
‘태세’는 초자연적 태세가 인간 안에서 작용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 편에서의 준비를 ‘자연적 태세’라고 부르
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의 빛’을 수용하는 데 있어 인간이 행사하
는 일종의 협력적 차원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성 토마스는 하느님
의 은총 앞에 선 인간의 고유한 역할을 표현하기 위해 이 ‘자연적
태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영광의 빛을 더 많이 분유하는 지성은 더 완전하게 하느님을 볼 것이


다. 그런데 영광의 빛을 더 많이 분유46)할 자는 참사랑(caritas)을 더 많이
갖는 자이다. 그 이유는 더 큰 참사랑이 있는 곳에 더 큰 갈망(desiderium)
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망은 어떤 모양으로 갈망하는 자로 하여금
갈망된 것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하고 준비되어 있게 한다. 그러므로 더
많은 참사랑을 갖는 자는 더 완전하게 하느님을 보겠으며, 더 많이 행복

44) 󰡔신학대전󰡕 I, q.12, a.5.


45) 그러나 이 초자연적 태세(dispositio supernaturalis)가 초자연적 질서로부터 완전히
폐쇄된 자연적 질서에 첨가되는 어떤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어떤 내밀한 만
남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된 ‘자연적 질서’ 안에 결정적으로 닫혀 있는
인간에게 ‘초자연적 질서’로서 첨가되는 어떤 상부 구조물이 아니다. […] 그것은
신적 진리와 생명의 질서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 본성의 발전과는 무한
히 다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질서 지어진 최고의 목적을 향한 질서에서, 모든
인간적인 반죽을 부풀게 하는 신적 효모처럼, 열렬한 빛으로 인간 본성을 에워싸
고 지극히 효과적인 힘으로 인간 본성을 관통한다”(Spiazzi R., op.cit., 193~194). 스피
아치는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은
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으며 자연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자연을 들어 올리고 완
성한다. 따라서, 가능태가 현실태에 종속되고 완성 가능한 실재가 완전한 현실태에
종속되듯이, 자연은 은총에 종속되어야 한다”(Spiazzi R., op.cit., 214).
46) 참조: 레오 엘더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 박승찬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3, 371~391쪽; 바티스타 몬딘, “참여”, 󰡔성 토마스 개념사전󰡕, 앞의 책, 719~7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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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 연구논단

하게 될 것이다.”47)

더 나아가, 성 토마스는 하느님을 향한 인간 편에서의 사랑(amor)


이 내포된 참사랑(caritas)48)의 역할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면서 이
‘자연적 태세’에 대해 언급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의지와 깊은 관
련을 갖는데, 그것은 사랑이 유래하는 인간의 기관이 다름 아닌 의
지이며 사랑은 선(善)을 원하거나 바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
서 참사랑은 기본적으로 최고선이신 하느님을 원하고 바라는 것을
내포한다. 앞서 인용된 토마스의 진술에는 참사랑과 갈망(desiderium)
이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드러난다. 이 갈망은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인간적인 차원을 함축적으로 내포한다. 즉, 인간이 하느
님을 지복직관할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받을 수 있도록 본성적
인 차원에서 준비시켜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갈망은 어떤 모양
으로 갈망하는 자로 하여금 갈망된 것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하고
준비되어 있게 한다.” 갈망은 욕구하는 주체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
는 것을 받을 수 있기에 합당하도록 준비시켜 준다. 그런데 인간으
로 하여금 ‘초자연적 태세’를 보다 더 잘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자연적 태세’는 다름 아닌 의지로부터 유래하는 ‘사랑’(amor)
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인간의 자연적 태세를 형성시켜 주
는 그의 의지(voluntas)가 갖는 중요성에 주목해야 한다. 즉, 우리는
인간이 하느님을 지복직관하는 과정에서 지복직관의 단계를 결정
하는 핵심 열쇠로서 인간의 의지를 대면하게 된다. 사실, 지성은 하
느님을 지복직관하는 직접적인 인간 영혼의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연적 태세를 결정하는 의지의 역할이 없다면 이를 향유할

47) 󰡔신학대전󰡕 I, q.12, a.6.


48) 성 토마스는 참사랑(caritas)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우정(amicitia)으로 보았다:
“참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우정이다”(󰡔신학대전󰡕 II-II, q.23, a.1). 그런데 우정
은 다양한 사랑의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즉, 우정은 사랑에 속한다: “어떤 방식으
로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 네 가지 이름이 있다. 사랑(amor), 애호(dilectio), 참사랑
(caritas) 그리고 우정(amicitia)이 그것이다”(󰡔신학대전󰡕 I-II, q.26, a.3). 그러므로 하느
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내포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우정으로서 참사랑을
이해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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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다. 인간의 의지는 자연적 지성이 하느님의 ‘영광의 빛’에 의


해 조명됨으로써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상태로 고양됨에 있
어서, 이러한 초자연적 고양 또는 강화를 준비시켜 주는 중요한 인
간 영혼의 기관이다.

3.2. 인간의 ‘신화’를 준비하는 협력 기관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의지가 지닌 보다 깊은 차원을


끌어낼 수 있다. 즉, 의지는 인간 존재가 신화(神化)되는 신적 변모
(transformatio divina)에 있어서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이를 가능케
하는 인간의 주요 능력이다. 그런데 의지는 지성적 욕구로서, 이는
욕구하는 주체가 본성상 욕구하는 대상과 ‘함께 형상화’(con-formatio)
되는, 즉 대상과 일치하려는 경향성을 갖는다. 이는 곧 욕구하는 주
체의 편에서 변모(transformatio)를 지향한다. 욕구하는 주체는 욕구
되는 대상을 향해 움직이는 가운데 그 대상을 획득하고 그 대상과
일치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지는 결국 욕구이므로, 의지는
욕구하는 주체를 변모하는 힘의 근원인 것이다. 즉, 의지는 주체의
형상을 ‘욕구되는 대상’의 형상에 동화시키는 가운데 주체를 변모
시킨다. 특히 의지가 욕구하는 주체인 인간 존재를 무한히 초월하
는 하느님을 원할 경우, 의지는 하느님을 원하는 사람을 신화(神化)
함에 있어, 신화의 제1능동인인 성화 은총(gratia sanctificans)과 더불
어 인간의 신화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사실, 신화(神化)는
하느님의 신성(神性)을 닮아가는 가운데 참여로써 하느님이 되는
것(deus per participationem)이다. 이러한 신화(神化)는 인간 편에서 어
떠한 권리도 요구할 수 없는 하느님 절대적인 은총 작용의 결과이
다. 하지만, 이와 함께 은총에 협력하는 인간 의지의 갈망
(desiderium)을 통해 본성적으로 준비된다. 특히, 이 의지의 갈망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amor)을 통해 표현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의지
의 첫 번째 운동으로서 의지에 속하기 때문이다.49) 한편, 사랑(amor)

49) 참조: “의지에 의해서라고 하는 것은 첫째로는 사랑에 의한 것이다. 이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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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 연구논단

은 합일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서,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


사이를 합일시켜 준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의 대상과 합일되는 한
에서 사랑이 있다.”50) 이러한 전망에서 인간의 의지는 그를 하느님
과 합일시켜 주는 일치적 힘의 원천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하느님
과의 사랑의 합일이 인간의 주도적인 힘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
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이러한 신적 합일 과정을
주도하는 분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초자연적 사랑, 즉 참사랑
(caritas)으로서 이는 이미 그 자체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무상으로
선사하시는 초자연적 덕이기 때문이다.
사실, 의지는 인간을 초자연적 상태로 들어 올림으로써, 하느님
을 지복직관하고 더 나아가 그분과의 초자연적 사랑의 합일로 인
도하는 ‘영광의 빛’을 수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인간 존재의 변모(變貌)에 있어 중심 기관이다. 그런데 지
복직관은 오직 인간의 자연적 지성이 은총을 통해 초자연적 상태
까지 고양될 때만 가능한 일로서, 하느님의 은총이 바로 이 부분에
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지복직관은 인간이 하느님의 신성(神性)에
동화되어 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이 ‘영광의 빛’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에 이를 때,
이는 동시에 어떤 면에서 인간 존재가 초자연적 질서 가운데 변화
되는 것, 즉, ‘참여로서 하느님이 되는 것’(deus per participationem)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적 변모의 주도권을 쥐고 계신 분은 하느님으
로서, 특히 당신 영광의 빛으로 인간 지성을 비추면서 이 변모를
주도하신다. 반면, 여기에는 이 변모에 협력하는 인간의 노력도 그
나름의 역할을 한다. 즉, 의지는 이 변모의 공동 주체로서, 인간 존
재를 하느님의 은총에 개방함으로써 그분의 은총이 충만하게 작용
해서 인간의 신화(deificatio)51)를 실현하도록 인간의 본성을 준비시

은 어떤 것에 대한 의지의 첫 운동이다”(󰡔신학대전󰡕 I-II, q.4, a.3).


50) 󰡔신학대전󰡕 I, q.108, a.6, ad3. 이에 대해 성 토마스는 특히 I-II, q.28, a.1(합일은 사
랑의 결과인가?)에서 구체적으로 다뤘다. 특히 그는 제1절의 재반론에서 디오니시
우스의 권위를 빌어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디오니시우스는 󰡔신명론󰡕, 제4장에서
사랑은 ‘합일적 능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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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현/ 성 토마스의 󰡔신학대전󰡕에 따른 지복직관을 향한 인간 의지의 역할 225

킨다. 이렇듯 의지는 은총과 협력하는 가운데 인간을 지복직관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은총으로 개방되도록 인간을 준비시켜 주는
의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의지가 하느님을 향해 지닌 갈망
(desiderium)과 이 갈망의 구체적 표현인 하느님을 향한 사랑(amor),
더 나아가 하느님과 인간의 초자연적 우정의 관계로 정의되는 참
사랑(caritas)은 그 자체로 이미 하느님이 인간에게 무상(無償)으로
건네는 아가페적 사랑(agape)을 전제로 한다.52) 이러한 맥락에서 보
면, 인간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개방시켜 주는 인간 의지 작용의 기
저(基底)에는 이미 이 의지를 은총으로 개방하도록 미리 준비시켜
주는 근본적인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한다. 그러므
로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과 이에 뒤따르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합일, 그리고 이를 통한 인간의 신화는 모두 하느님의 주도
권 아래 일어나는 하느님 은총의 구체적인 모습들이다. 반면, 인간
의 의지는 이처럼 구체적인 한 인간을 향한 하느님 은총의 현현(顯
現)에 대한 개방과 응답을 주도함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신
화(神化) 계획이 충만하게 실현되는 데 있어 하느님의 협력자로 자
리매김하고 있다.

3.3. ‘참사랑’을 향해 더욱 개방되어야 하는 의지

이러한 맥락에서 성 토마스는 천상에서 지복직관을 누리는 진복


자(眞福者)들 사이에 하느님에 대한 관상의 수준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는 지성을 고양시키는 ‘영광의 빛’에 대해 의
지가 지닌 사랑의 수준차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영광의 빛을 더 많이 분유하는 지성은 더 완전하게 하느님

51) 참조: “은총의 원천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보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보


든, 그 최종 목적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것은 인간의 신화, 곧 인간 마음의 가장 깊
은 열망에 따라(desiderium naturale) 그가 충만하게 실현되는 것이다”(바티스타 몬딘,
“은총”, 앞의 책, 535쪽).
52) Cf. Joohyun Youn, Il Rapporto Tra Volontà e Carità nell’uomo come Viator nella Summa
Teologica di San Tommaso d’Aquino, Roma: Teresianum, 2001, pp.22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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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 연구논단

을 볼 것이다. 그런데 영광의 빛을 더 많이 분유(참여)할 자는 사랑을 더


많이 갖는 자이다. 그 이유는 더 큰 사랑이 있는 곳에 더 큰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망은 어떤 모양으로 갈망하는 자로 하여금 갈망된
것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하고 준비되어 있게 한다.”53)

즉, 더 많은 참사랑(caritas)을 지닌 자가 더 많이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을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본질을 더
깊이 관상하는 이는 의지가 사랑을 통해 더 많이 ‘영광의 빛’을 향
해 개방된 사람이다. 사실, 성 토마스가 󰡔신학대전󰡕에서 인간 존재
의 변모에 대한 분명한 언사를 사용하면서 이 주제를 발전시킨 것
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작품 여러 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인간학적
개념들은 이러한 인간의 변모를 암묵적으로 가리키고 있으며, 이미
그의 전체적인 인간학적 전망에서 전제되고 있다.
우선, 성 토마스는 인간 지성의 지복직관에 대한 가능성을 설명
하면서 이러한 인간 존재의 변모(transformatio)를 추론하게 하는 유
사한 용어를 사용했다. 즉, 지성의 초자연적 질서를 향한 ‘고양’
(elevatio), 하느님께서 선사하는 ‘영광의 빛’에 힘입어 인간이 하느
님을 닮아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하느님의 형상처럼 됨’(deiforme)이
그것이다. “이런 빛에 의해 사람들은 하느님의 형상처럼 되는 것,
즉 하느님과 비슷하게 되는 것이다.”54)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
료형상설을 바탕으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인간에 대해 제시했
다.55) 그에 따르면 영혼은 형상(forma)의 원리이며 육체는 질료
(materia)로서, 인간 존재는 질료인 육체가 영혼에 의해 형상이 부여
됨으로써 이루어진다.56) 즉,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다.57) 또한, 성 토
마스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말해 영혼의 능력들 가운데 가장 우위

53) 󰡔신학대전󰡕 I, q.12, a.6.


54) 같은 책, I, q.12, a.5.
55) 참조: 바티스타 몬딘, “질료형상설”, 앞의 책, 711~712쪽; 소피아 로비기, “영혼과
육체의 결합”, 앞의 책, 71~88쪽.
56) 영혼은 아주 고귀한 형상이다: 󰡔신학대전󰡕 I, q.70, a.3, obj.2; q.91, a.1, obj.2; 영혼
은 인간 존재 구조에 있어서 형상의 원리이다: 󰡔신학대전󰡕 I-II, q.55, a.2; q.94, a.3;
II-II, q.164, a.1, ad1.
57) 소피아 로비기, “형상으로서의 영혼과 실체로서의 영혼”, 앞의 책, 83~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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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차지하는 것은 지성으로서, 이는 영혼을 대표하는 능력이다. 그


러므로 지성의 질적인 변화는, 만일 우리가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인간 존재의 형상적 원리인 영혼의 변모
(trans-formatio)라고 할 수 있다. 지성이 초자연적 질서로 고양(elevatio)
되는 것은 지성의 변모를, 지성의 변모는 영혼의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영혼의 변모는 곧 인간 존재의 변모를 의미한
다. 성 토마스는 이러한 일련의 변모 과정을 단적으로 ‘하느님의 형
상처럼 되는 것’(deiforme)으로 표현했다. 이는 인간의 신화(deificatio)
를 의미한다.
그러나 ‘영광의 빛’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인간의 신화 과
정이 내포한 또 다른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영광의 빛’은 인간의
신화를 위해 그에게 선사 되는 무상의 은총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자연적 지성이 그 수혜자이다. 이로써 자연적 지성은 이 은
총의 빛에 의해 조명을 받아 하느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창조된 어떤 지성이 본질에
의해 하느님을 본다면, 하느님의 본질 자체는 지성의 가지적 형상
(可知的 形相)이 된다. 따라서 지성이 그런 높이로 고양되기 위해서
는 지성에게 어떤 초자연적 태세가 첨가되어야 한다.”58) 이어서 그
는 여기서 언급한 ‘초자연적 태세’를 은총과 동일시했다. “창조된
자연 본성적 지성은 […] 신적 은총에 의해(ex divina gratia) 인식 능
력이 지성에게 한층 더 증강되어야 한다.”59) 그렇다면, 인간 본성에
‘초자연적 태세’를 선사하는 ‘영광의 빛’은 구체적으로 어떤 은총일
까?
성 토마스에 의하면, 은총은 하느님의 의지가 인간을 도와주는
방식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60) 첫째는 인간 영혼이 인식하고 원
하고 무엇인가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 하느님에 의해 움직여지는
은총이다. 이 경우에 무상으로 생겨나는 효과는 어떤 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의 움직임이다. 이 경우와 달리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58) 󰡔신학대전󰡕 I, q.12, a.5.


59) 같은 책.
60) 참조: 󰡔신학대전󰡕 I-II, q.110, 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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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 연구논단

어떤 습성적 은총을 주입하거나 더해주시면, 하느님은 이를 통해서


영혼을 자연 본성적인 행위의 차원에서 움직이실 뿐만 아니라, 나
아가 그에게 행위의 원리가 되는 형상(forma)이나 힘(virtus)을 마련
하심으로써 영혼이 스스로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게 하신다. 성
토마스는 이러한 은총을 영혼 안에 초자연적 형상이나 힘을 주입
하는 은총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하느님의 무상
적 의지에 의해 도움을 받는다. […] 그분은 자연적 질서에 속하는
피조물들을 위해 그들의 자연적 행위들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행
위의 원리들인 형상들(formas)과 힘들(virtus)을 그들에게 선사하는
가운데 그들을 준비하신다.”61) 그리고 I-II, q.110, a.2 마지막에서 “이
은총 선물은 어떤 질(qualitas)이다”62)라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맥락
에서 보면, 결국 인간이 받게 되는 은총은 어떤 초자연적 형상
(forma)이나 질을 의미한다. ‘영광의 빛’은 인간의 영혼, 특히 그의
자연적 지성에 ‘초자연적 형상’(forma soprannaturale)을 주입하는 은
총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영광의 빛’이라는 은총을 통해 지성
에 주입하는 초자연적 경향성은 다름 아닌 지성에 선사하는 ‘초자
연적 형상’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영혼
에 있어 질적 변모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영혼은 인간 존재를 결정
짓는 형상의 원리로서, 은총이 인간의 자연 본성적 형상에 초자연
적 형상을 주입한다는 것은 곧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형상 원리가
변모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이러한 형상의
변모는 곧 인간 존재의 ‘질적 변모’를 유도한다. 달리 말해, 초자연
적인 질적 상태의 특징을 지닌 ‘상존 은총’(gratia habitualis)을 하느
님으로부터 받음으로써, 인간은 신적 형상(forma divina)에 더욱 유사
하게 되면서 변모된다.63) 그런데 성 토마스에 의하면, 이러한 종류

61) “그러므로, 더욱 큰 이유로 그분은 초자연적 선의 획득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


안에 초자연적 형상들이나 질(aliquas formas seu qualitates supernaturales)을 부어주신
다. 그는 이것들을 통해 감미롭고 기민하게 영원한 선들을 획득하기 위해 움직인
다”(같은 책.).
62) 같은 책.
63) 그러므로 성 토마스는 상존 은총(gratia habitualis)을 형상인(causa formalis)이라고
부른다. “질(qualitas)인 한에서 은총은 영혼 안에서 능동인(causa efficiens)의 방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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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은총을 받는 인간 측에서의 기관이 바로 의지이다. 그리고 의지


의 자연적 태세(dispositio naturale)가 어떠한지에 따라 은총의 수용
정도가 결정된다. 이는 곧 인간 존재의 변모 과정을 주도하는 상존
은총이 이를 수용하는 의지의 자연적 준비 상태 그리고 수용하는
밀도(密度)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뜻한다. 이것이 곧 ‘영광의 빛’에
대해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참사랑(caritas)으로 통합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성 토마스의 다음 진술이 내포한 의미이다: “영광의 빛을
더 많이 분유(참여)할 자는 참사랑(caritas)을 더 많이 갖는 자이다.
그 이유는 더 큰 참사랑(caritas)이 있는 곳에 더 큰 갈망이 있기 때
문이다.”64) 사실, 나그네인 인간이 자신의 최종 목적인 지복직관을
향해 걷는 여정은 지금까지 설명한 이 신적 변모(transformatio divina)
가 이루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간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이 신화 과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 특히 ‘영
광의 빛’을 통해 인간 안에 부어주시는 상존 은총이다. 그러나 이에
상응해서 인간이 얼마나 더 하느님을 보고자 열망하는지, 그리고
이를 위해 그가 얼마나 더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개방되어 있는지,
특히 자신을 변모시키려는 하느님의 은총에 얼마나 더 개방적이며,
이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하는지 역시 중요한 요소로
드러난다. 한마디로, 최종 목적을 향한 인간의 현세 여정은 인간을
비추기 위해 먼저 그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더욱 충만하
게 그분을 관상하기 위해 존재론적인 상승의 여정을 열망하는 인
간 사이의 관계의 역사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예정 계획에 따라 영
원으로부터 초대받아 그분과 인격적인 친교를 누리기 위해 부름받
은 그분의 ‘파트너’이다. 그는 하느님과 사랑의 합일을 이루는 가운
데 그분을 지복직관 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이를 열망해야 하며, 그
분을 향한 사랑에 자신을 활짝 열어젖힘으로써 하느님 은총의 빚
에 의해 충분히 조명(照明)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그를 향한

아닌 형상인의 방식으로 작용한다”(󰡔신학대전󰡕, I-II, q.110, a.2, ad1); 버나드 로너간,


“제3장 자력 은총과 조력 은총으로서의 상존 은총”, 󰡔은총과 자유󰡕, 김율 옮김, 가
톨릭출판사, 2005, 77~112쪽.
64) 󰡔신학대전󰡕 I, q.12, a.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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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 연구논단

하느님의 예정 계획이 점진적으로 실현되어 갈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나그네 인간이 지향하는 최종 목적인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에 있어 의지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았다. 무엇보다도
의지는 지성적 욕구로서, 인간이 지닌 제반 욕구 가운데 제1의 욕
구 능력이다. 그러므로 의지는 최종 목적을 향한 인간의 회귀 여정
을 가능케 하는 모든 행위의 바탕으로서, 이 행위들을 통합해서 하
느님을 향해 인도하는 안내자와 같다. 또한, 지성적 욕구인 한에서
의지는 하느님의 모상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모상성은 인간에
게 무상적으로 선사된 선물로 드러난다. 인간은 이를 통해 신적인
품위를 갖게 되며, 무엇보다 지성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대상인,
절대 진리이자 최고선으로서의 하느님을 자유롭게 사랑하도록 개
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의지와 더불어 자신의 질적인 변
모와 상승을 도모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의지와 동일시되는 ‘자유
재량’의 측면에서 그러하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과의 인격적 친
교로 예정하셨고 이를 위해 그를 창조하셨고 부르셨지만, 이러한
그분의 부르심에 사랑으로 응답함으로써 그분과 더불어 이 계획이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에 달려있다. 그러
므로 의지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지이지만,
이와 동시에 현세 여정을 통해 완성시켜 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의지를 선사하신 것은, 그가 이를 통해 자기
존재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께 이를 수 있도록 그를 인도하며 이를
위해 하느님의 은총 작용에 자신을 내어 맡기게 하기 위함이다.
의지는 지성에 속한 욕구 능력으로서, 기본적으로 지성이 인식한
대상의 선(善)을 욕구한다. 따라서 의지는 독자적으로 작용하지 않
고 언제나 지성과 협력하는 가운데 행위를 창출한다. 그러나 의지
는 단순히 지성에 예속되어 부가적인 기능만 수행하지 않는다. 특
히, 의지는 인간의 최종 목적인 ‘지복직관’을 향한 여정에서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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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현/ 성 토마스의 󰡔신학대전󰡕에 따른 지복직관을 향한 인간 의지의 역할 231

역할을 수행한다. 즉, 지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비추어 초자연적 상


태로 들어 올리는 하느님의 은총인 ‘영광의 빛’(lumen gloriae)을 더
욱 잘 받게 한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 동일한 자연적 지성이라 해
도, 하느님의 ‘영광의 빛’을 받는 정도는 서로 다르다. 이것은 의지
가 얼마나 참사랑(caritas)을 향해 개방되는가 하는 정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의지는 바로 초자연적 사랑인 참사랑(caritas)으로 인간을
개방하게 하는 인간 편에서의 자연적 사랑(amor)이 생겨나는 중추
기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확실히 의지는 지성보다 우위에 있다. 자
연적 지성이 초자연적 상태로 고양(高揚)되는 정도, 즉 지복직관을
하는 수준은 의지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개방되는 정도에 달려
있다. 달리 말해, 하느님을 향한 인간 여정의 진보 상태는 의지가
얼마나 초자연적 사랑으로 열리는가 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의지가 참사랑을 향해 열리는 정도에 따라 자연적 지성은 하
느님의 본질을 더욱 깊이 관상할 수 있게 하는 ‘영광의 빛’을 받게
될 것이며, 그 수준은 초자연적 질서 세계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느
님과 깊은 사랑의 일치를 누리는지 그 일치의 수준을 좌우하게 된
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의지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예정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에
서 인간이 이 은총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
인 대화 상대자로서 그분께 응답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그분의 계
획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완성해가는, 어떤 의미에서 공동 창조자
(co-creator)로 부름 받았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이다. 특히, 성 토
마스는 인간의 최종 목적인 지복직관에서 의지가 수행하는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의지는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을 가능케 하는 ‘초
자연적 태세’(dispositio supernaturalis)인 영광의 빛을 수용하기 위한
‘자연적 태세’(dispositio naturale)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
록 전체적인 사상의 맥락에서 성 토마스는 지성을 중요시하는 주
지주의를 견지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는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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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 연구논단

적으로나마 주의주의적(主意主義) 입장을 표방하고 있으며, 최종 목


적을 향한 나그네 인간의 여정에서 ‘의지’를 중추적인 능력으로 자
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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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1. 성 토마스의 󰡔신학대전󰡕 원전 및 번역본

S. Thomae Aquinatis, Summa Theologiae. Ed. Léonine, t. 4-11, testo riproduto


nell’edizione manuale della «Biblioteca de Autores Cristianos» (Vol. 29, 41, 56,
77, 80, 81, 83, 87), Madrid, 1961-1965; trad. ital. a cura della Redazione delle
ESD, La Somma Teologica vol I-VI, Ed. Studio Domenicano, Bologna 1996.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 정의채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85.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2󰡕, 정의채 옮김, 바오로딸출판사, 1993.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3󰡕, 정의채 옮김, 바오로딸출판사, 1994.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9󰡕, 김춘오 옮김, 바오로딸출판사, 2010.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0󰡕, 정의채 옮김, 바오로딸출판사, 2003.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1󰡕, 정의채 옮김, 바오로딸출판사, 2003.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3󰡕, 김율 옮김, 바오로딸출판사, 2008.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4󰡕, 이상섭 옮김, 바오로딸출판사, 2009.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6󰡕, 정의채 옮김, 바오로딸출판사, 2000.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7󰡕, 이상섭 옮김, 바오로딸출판사, 2019.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8󰡕, 이재룡 옮김, 바오로딸출판사, 2019.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9 정념󰡕, 김정국 옮김, 바오로딸출판사, 2020.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21 두려움과 분노󰡕, 채이병 옮김, 바오로딸출
판사, 2020.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23 덕󰡕, 이재룡 옮김, 한국성토마스연구소,
2020.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28󰡕, 이진남 옮김, 바오로딸출판사, 2020.

2. 단행본 및 논문

Elders Leo J., La Filosofia della Natura di San Tommaso d’Aquino, Vatican: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6.
Georges – Calonghi., Dizionario della Lingua Latina Vol.I, Torino: Rosenberg &
Sellier, 1951.
Joohyun Youn, Il Rapporto Tra Volontà e Carità nell’Uomo Come Viator nella
Summa Teologica di San Tommaso d’Aquino, Roma: Teresianum,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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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inero, J. L., Elgir a Dios, Tarea del Hombre. Tránsito del Amor Natural al Amor
Elicito a Dios, según Santo Tomás, Pamplona: Eunsa, 1979.
Spiazzi, R.-M.,“Il Carattere Perfettivo del Soprannaturale Secondo S. Tomma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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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엘더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 박승찬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3.
바티스타 몬딘, 󰡔성 토마스 개념사전󰡕, 이재룡 · 안소근 · 윤주현 옮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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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로너간, 󰡔은총과 자유󰡕, 김율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5.
소피아 로비기, 󰡔성 토마스의 철학적 인간학󰡕, 이재룡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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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현/ 성 토마스의 󰡔신학대전󰡕에 따른 지복직관을 향한 인간 의지의 역할 235

❚국문 초록❚

본 논문은 성 토마스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제시하는 그의 대표


작인 󰡔신학대전󰡕을 통해 인간 의지의 본성과 역할에 대한 고찰을
시도했다. 성 토마스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을 자신의 최종 목적을
향해 현세 여정을 걷는 ‘나그네’(viator)로 보았다. 그가 추구하는 최
종 목적은 하느님의 본질을 관상하는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이자
하느님과의 사랑의 합일로, 이는 하느님께서 그를 위해 영원으로부
터 예정하신 목적이다. 인간은 이 목적에 이르게 될 때 영원한 진
리이자 최고선이신 하느님을 향유(享有)하는 가운데 자기 존재의
충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성 토마스는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의
지가 수행하는 역할에 주목하면서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
다. 의지는 인간이 최종 목적을 향해 실제로 나아가게 해주는 역동
적 능력으로서, 하느님과의 충만한 사랑의 합일에 이르도록 그분과
의 인격적 관계의 성장을 도모하게 하는 핵심 기관이다. 또한, 지성
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빛을 수용하도록 그의 본성을 준비시켜 준
다. 그럼으로써 그가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에 이르게 해준다. 이
런 의미에서 의지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지
이자 선물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 편에서 완수해야 할 요청이자 과
제로 드러난다.
성 토마스는 창조의 핵심적 개념으로 ‘관계’를 들었다. 이 관계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사랑과 호의에 근거해서 피조물을 향해 건네는
하느님의 무상적이고 일방적인 관계를 말한다. 지성적 피조물인 인
간은 현세 여정을 통해 자신의 의지와 더불어 이러한 하느님의 관
계에 응답해 감으로써 이 관계를 완성해 나가도록 초대받았다. 더
나아가, 지복직관으로 이해된 최종 목적을 향한 여정에서 인간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선사하시는 ‘영광의 빛’에 의해 조명된 의지
를 통해 이 초자연적 은총을 수용하는 가운데 인간의 신적 변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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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 연구논단

준비한다. 한 마디로, 의지는 최종 목적을 향해 걷는 ‘나그네’ 인간


이 하느님께 이르도록 그를 인도하며 이를 위해 하느님의 은총 작
용에 자신을 내어 맡기게 한다. 바로 여기에 의지가 ‘나그네’인 인
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본래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의지는 인간
을 향한 하느님의 예정 계획 아래 자신을 충만하게 실현하는 과정
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대화 상대자이자 파트너로 부름받았다는 그
의 신적 품위와 성소를 드러낸다.

▶ 주제어: 의지, 나그네, 최종 목적, 지복직관, 영광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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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thesis attempts to examine the nature and role of human will through
St. Thomas’ representative work Summa Theologiae which comprehensively
presents St. Thomas’ ideas. Through this work, St. Thomas viewed humans
as a ‘traveler’ on his journey to the world toward his final purpose. His final
purpose is to see the nature of God and to unify his love with God, which
is God’s purpose from eternity. When man reaches this end, he will be filled
with his existence while enjoying God, the eternal truth and supreme good.
St. Thomas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will, noting the role played by
human will in this process. Will is a dynamic ability that actually drives man
toward his final purpose, and is a key faculty that promotes the growth of
personal relationships with God to reach the unity of full love with him.
Also, it prepares intelligence for human nature to embrace the light of God.
By doing so, will leads the intelligence to reach the ‘visio beatifica’. In this
sense, will is a sign and a gift that reveals God’s love for man. Also, it
turns out to be a request and task to complete on the part of humans.
St. Thomas mentioned ‘relationship’ as a key concept of creation. This re-
lationship refers to God’s free and one-sided relationship with his creatures
based on his free love and goodwill. An intelligent creature, man was invited
to complete this relationship by responding to God’s will and this relation-
ship with God through the journey of this world. Furthermore, on the journey
to the final purpose, understood as the ‘visio beatifica’, humans prepare for
the divine transformation, accepting the supernatural grace through the will
illuminated by the ‘light of glory’ that God presents him for free. In short,
will leads a ‘traveler’ man to walk toward his final purpose to reach God
and entrusts himself to the work of God’s grace. Here is the original mean-
ing that the will was given as a gift to a man who was a ‘traveler’. There-
fore, will reveals his divine dignity and vocation that man was called G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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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 연구논단

interlocutor and partner in the process of realizing himself fully under God’s
predestination for him.

▶ Key Words: will, traveler, final purpose, visio beatifica, light of glory.

투고(접수)일: 2021.5.2.
심사(수정)일: 2021.5.15.
게재확정일: 202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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