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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6. 다시 피어나는 백합 (2)

7. 희게 피어난 백합

에필로그. 안개와 속박

외전. 녹음의 균열

6. 다시 피어나는 백합 (2)

이네트는 지크프리트가 데려온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허수아비처럼 키가 크고 말랐으며, 붉은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 코에는 주근깨가 가득 있는 순하고 귀여운 인상의 남자였다. 남자는 이네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에 띄게 동요하더니 입술을 벌렸다.

“로, 로버트 자작 가문의 가주, 일리야 로버트라고 합니다.”

일리야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이네트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멀리서 볼 때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 미모가 실로 남달랐다. 이네트는 그의 인사에도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는데, 그조차도 도도한 매력으로 느껴졌다.

일리야의 뺨이 그의 머리 색처럼 붉게 물들자 옆에 있던 지크프리트가 눈을 찌푸렸다.

“누이, 로버트 가문은 수도에서 대대로 질 좋은 포도주와 포도잼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해. 복숭아도
재배하고 있지.”

“네, 그렇군요.”

이네트가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성의 없이 대답했다. 둘 사이의 대화가 끊기자 일리야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듣던 대로 저,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황녀님.”


“……고마워요.”

“저, 저희 가문에서 생산한 포도를 드셔보신 적 있습니까? 무, 무척이나 단데 다음에 꼭 황녀님께


선물해드리고 싶군요.”

지크프리트는 꼭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더듬거리는 일리야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퍽이나 들떠 있었다. 들뜬 눈동자를 손으로 잡아 빼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그녀가
싫다는 의사를 표하지 않았음에도 당장 이 자리를 뒤엎고 싶었다.

그가 아직도 주절거리고 있는 남자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자작, 잠시 나 좀 보지.”

“아아. 네, 네. 전하.”

그제야 일리야가 눈치를 채고는 지크프리트가 끌어가는 대로 끌려갔다. 끌려가면서도 일리야는


이네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네트는 가타부타 제게 설명도 없이 자리를 비우는 그들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지크프리트는 방문을 닫고, 이네트의 방에서 멀리 떨어진 다음에서야 일리야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작,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네, 전하. 전하가 말씀하셨던 대로 부, 분명 황녀님껜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자작의 말이 맞았다. 지크프리트는 자작에게 그녀가 설령 원한다 해도 그녀에게 절대로 손대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럼에도 지크프리트는 불쾌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첫눈에 반한 게 눈에 뻔히 보이는 모습이
거슬렸다.

“됐다. 없던 일로 해.”

“네, 네? 하, 하지만…….”

“오갔던 거래는 건들지 않을 테니 없던 일로 하잔 말이다.”

지크프리트가 매서운 얼굴로 얘기했다. 숫제 명령과 다름없었기에 일리야가 금붕어처럼 눈만 끔뻑거리고는


수초가 흘러서야 목이 졸린 사람처럼 예, 하고 겨우 대답했다.

자작을 먼저 보내고 나서야 지크프리트는 다시 이네트의 방 안으로 돌아왔다. 이네트는 혼자 돌아온 그를


보고서도 입을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누이, 그자는 돌려보냈어. 누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무표정을 고수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크, 어차피 내 의사 따위 중요한 게 아니었잖아요.”

“누이.”

그가 유감스럽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결코 아니라는 부정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네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됐어요. 듣나 안 듣나 똑같으니 듣지 않을래요.”


그리고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지크프리트가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누이, 내 진심을 몰라주는 거야? 난 정말로 누이를 위해서…….”

“네. 알아요. 알겠어요. 그러니까 마음대로 하란 말이에요.”

“……누이, 왜 그래.”

그가 상처받은 아이처럼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이네트는 그것을 보고서도 무표정했다. 그는 전보다 마른
그녀의 팔을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누이, 너무 말랐어……. 내가 누이에게 힘이 되지 못하는 거야?”

“…….”

“식사라도 제대로 해줘. 응?”

이네트가 입을 다물었다. 지크프리트는 전과 달리 삐걱거리는 대화에 초조해졌다. 저를 보고 곧잘


웃어주었던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차가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마주할 때면 심장이
덜컹거렸다.

정말로, 누이를 위해서인데…….

그는 마른 그녀의 몸을 소중하다는 듯 쓰다듬으며 그녀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내가 어떻게 해야 식사를 제대로 할래?”

“나가요. 나가면 먹을게요.”

“……정말이야? 내가 나가면, 식사 제대로 할 거야?”

매번 함께 식사를 할 때마다 깨작거리다 결국 얼마 안 가 수저를 놓는 그녀였다.

“네. 제대로 할 테니까 나가줘요. 혼자 있고 싶어요.”

“알겠어…….”

지크프리트가 아쉬움을 숨기지 않고 이네트의 뺨에 작별 키스를 남겼다. 이네트는 인사에 화답하지 않았다.

* * *

지크프리트는 자작을 그렇게 돌려보내고, 생각보다 이네트에게 어울릴 만한 남편감을 찾지 못했다.


난관이었다. 누이를 붙잡아 두려면 수도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남자로 골라야 했고, 작위를 이어받았으며
그녀와 또래의 남자여야 했다. 이 조건이 맞으면 외모가 너무 흉하거나, 이미 결혼을 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지크프리트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옆에 있는 제롬을 향해 물었다.


“제롬, 누이의 남편감으로 누가 적합할까?”

“……황녀님과 결혼하기에 적합한 미혼의 남자는, 디에드반 공작이 라고 생각합니다만.”

카시엘 디에드반. 지크프리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자는 페르닌드 디에드반과 함께 누이를 지하실에
가둔 자였다. 그래서 아예 명단에서 제외한 자이기도 했다.

“카시엘 디에드반?”

“네. 그자가 제일 낫지 않습니까? 페르닌드 디에드반과의 일도 있으니, 어떻게 보면 괜찮은 패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 자는…….”

지크프리트가 말을 끊고 흐음,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카시엘 디에드반. 디에드반 공작 가문은 일리아드
제국이 세워질 때부터 대대로 황가에 충성을 맹세한 개국공신 가문이었다. 황가와 인연이 깊었다.

사생아인 이네트가 그에게 과분한 상대라고 말이 나올 만큼, 디에드반 가문이 가진 힘과 명예는 드높았다.

“사생아라는 점이 걸리시는 겁니까?”

“아니, 그보다 더 걸리는 점이 있어서 그래.”

사생아라 한들 황족이었다. 이리저리 떠드는 자는 있을지언정, 황실에서 강력히 밀고 나가면 못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황실과 디에드반 공작 가문의 결합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이득이었다. 다만…….

지크프리트는 카시엘을 경멸하던 누이의 눈동자를 떠올랐다. 누이는 그 자와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싫어


바로 시선을 돌릴 만큼 그자를 혐오했다.

누이는 공작을 혐오한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동요할 만큼 확실하게. 그런 자를 누이에게 남편감으로


붙이는 건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만큼 적합한 자는 없었다.

왜냐면, 누이가 그자를 혐오하니까.

죽을 때까지 그자는 누이의 사랑을 얻을 수 없을 테니까.

명쾌한 해답이었다. 누이가 혐오하기에 더더욱 디에드반 공작만큼 그녀와 결혼 상대로 어울리는 자는 없다.

지크프리트는 결론을 지었다.

“디에드반 공작과 만나야겠군.”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어차피 디에드반 공작은 황궁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니, 그가 이곳으로 직접


방문하는 게 더 빠르겠군요.”

“그렇게 해.”

지크프리트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이 알겠노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지크프리트는


나가지 않고 아직 자리를 지키는 제롬에게 흘긋 눈짓을 했다.

“뭐해? 안 나가고.”

잠시 말을 고르던 제롬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 황녀님을 너무 속박하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빙글거리며 웃고 있던 지크프리트의 웃음이 깨졌다. 그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혔다.

“약혼녀를 두고 방종하게 아랫도리를 휘두르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닌지라 제롬이 입꼬리를 올렸다. 변명할 거리야 많았지만, 제롬은 구태여 변명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계속 그분의 건강을 걱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집무를 보시면서도 황녀님 걱정을 하시고.”

지크프리트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걸 제롬은 몇 번 보았다. 혼잣말의 대부분은 다


이네트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밖을 돌아다니게 한다든가, 조금쯤 풀어주는 게 좋으실 겁니다. 그러면 알아서 회복하실 테니까요.”

“…….”

“다 전하를 위한 말입니다. 전 전하의 충실한 심복이니까요.”

지크프리트는 입을 다물었다. 제롬은 그럼, 하고 다시 인사를 하고는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지크프리트는 제롬이 나간 자리를 노려보다가 후,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 * *

「페르닌드! 페르닌드!」

어린 이네트가 활짝 웃으며 페르닌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보다 좀 더 작은 페르닌드 또한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이네트는 품에 안기는 페르닌드를 껴안으며 행복한 듯 미소 지었다.

「그렇게 뛰어오지 말라니까. 다쳐.」

「싫어. 이넷 보고 싶었단 말이야.」

페르닌드가 이네트의 품 안에서 뺨을 비비며 그녀의 등에 손을 둘렀다. 자연스럽게 서로 껴안고 둘은


이야기를 나눴다. 카시엘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허나 평화로운 광경은 잠시였다.

「저 애 때문에 내가 죽었어!」

이네트와 페르닌드의 모습은 사라지고, 푸석푸석한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트린 여자가 등장했다.

하얗게 질린 피부와 건조하게 부르튼 입술, 아래에서 흐르는 피……. 어머니의 죽기 직전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

「카시엘, 저 애를 사랑하니? 왜? 벌써 어미를 잊은 거니?」

어머니가 성난 얼굴을 하고서는 높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카시엘은 동요했다.


「어머니, 저는…….」

「넌 그 애와 함께할 자격이 없어!」

어머니가 마치 사자후처럼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빛났다. 꿈인 걸 알면서도


카시엘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죽은 어머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미를 잊었구나, 아들아. 어미가 왜 죽었는지 잊었니? 그 여자 때문에 죽었단다. 정녕 잊어버렸어?


네 아버지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잖니.」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이 꿈속에서 깨어났다. 일부러 머릿속에 묻어놓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 평생 죽은 것처럼 살다가 어느 날 약을 먹었다.

건장한 기사였던 아버지는 독한 약을 먹고도 한 번에 죽지 못하고 얼마간 사경을 헤매다 죽었다.


페르닌드조차 모르고, 카시엘만 아는 사실이었다.

「카시엘, 네가 제일 잘 알잖니. 어미가 죽은 것도, 네 아비가 죽은 것도 전부 그 여자 때문이라는 걸…


…. 그런데 그 여자의 딸을 사랑한다고? 감히 네가?」

분노하는 어머니 앞에서 카시엘은 죄인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말도 모두…… 이네트를


사랑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다.

그 애를 사랑하면 안 돼.

아냐.

어머니와 아버지를 잊었나? 알면서도 어떻게 그 애를 사랑할 수 있지?

아니, 아니야…….

혼란 속에서 어머니는 카시엘을 향해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분노로 타오르고 있는 어머니의 눈을


마지막으로 그는 꿈에서 깼다.

“헉!”

카시엘은 눈을 뜨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사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던 그가 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고요함 속에서 낮은 숨소리만 또렷이 들렸다. 현실처럼 또렷한 꿈이었다. 그가 시트를 꽉 쥐며 턱에 힘을


주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야윈 얼굴을 비추었다.

카시엘이 눈을 감으며 어제 있던 일을 회상했다.

‘그대에겐 좋은 기회일 텐데. 그렇지 않아? 나와 그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걸 떠나서 말이야.’

황태자의 부름은 예상했다. 허나 맞닥뜨린 제안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난데없는 제안에


카시엘은 눈을 좁혔다. 농담이라면 지나쳤다.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디에드반 공작. 귀가 안 좋나? 이네트 누이와 결혼하라고 했어.’

지크프리트는 늘 그랬던 것처럼 화사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농담이 아니었나,
설마?

‘왜. 겁이라도 나는 거야? 누이가 그대를 혐오해서?’

카시엘이 입을 다물고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지크프리트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아냐는 눈빛으로 쳐다보네. 누이가 그대를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겠던걸.’

‘이런 제안을 하려고 저를 부르신 겁니까.’

‘응. 싫어?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다른 이를 구하는 수밖에.’

그가 가늠하듯 여유로운 눈으로 물었다. 뻔히 보이는 던지는 말에도 얼굴에 희미한 균열이 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그 균열을 기민하게 알아챈 지크프리트가 재차 물었다.

‘어때.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 아닌가?’

카시엘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눈을 휘었다.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결국 카시엘은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생각할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황태자의 말대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허나, 만약 자신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네트는…….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던 그녀 앞에 결혼 상대로 나타나게 된다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때처럼 경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까, 아니면 질렸다는 얼굴로 쳐다볼까. 어떤 것을 상상하든 그
방향은 모두 그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향해 있었다.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다른 이를 구하는 수밖에.’

‘벌써 어미를 잊은 거니?’

‘그냥 내 앞에서 사라져주면 돼요.’

연달아 떠오르는 음성. 그러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은 어떻게든 이네트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 * *

이네트는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제 앞에 있는 지크프리트에게 다시 물었다.

“누구랑 결혼한다고요……?”

“카시엘 디에드반.”

그가 명료한 목소리로 답했다. 쿵, 사형 선고라도 떨어진 것처럼 둔한 충격이 일었다.


그녀가 넋을 잃고 수조 속의 금붕어처럼 눈만 깜빡거렸다. 그리고는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카시엘 디에드반이 저와 결혼해요?”

깜빡거리는 눈에 점점 탁한 빛이 돌았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어 제 손등을 꼬집었다. 이게


지독한 악몽인지, 아니면 악몽보다 더한 현실인지 판가름하기 위함이었다.

손등에 퍼지는 아픔에 그녀는 이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깨닫자마자 정신이 통째로 흔들렸다. 그녀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지크프리트, 당신 뜻이에요?”

목이 졸린 사람처럼 꽉 막힌 소리로 물었다. 지크프리트는 그녀의 넋 나간 얼굴에 눈동자를 굴리다가 결국


응, 하고 대답했다. 이네트가 입을 벌렸다.

“아…….”

벌어진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크프리트, 그는 믿을 수 없게도 자신을 에일이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시키려고 하는 걸로도 모자라 제가


증오해 마지않는 카시엘 디에드반과 결혼시키려 했다. 제가 그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면서도.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그녀의 몸이 충격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지크프리트, 어떻게 당신이 내게…….”

지나친 처사였다. 그녀는 그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는가 싶어 그간 있었던 일을 더듬었다.

설마 그날 있었던 실수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넘기자고 해서? 그 일 때문에 제게 앙심을 품은 걸까?


아니면 그간 그를 너무 편하게 대해서?

이네트는 미친 듯이 이유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고작 그런 이유들로 제게 이런 지독한 처사를


취하는 건 지나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다른 누구도 아닌 카시엘을 제게 들이밀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떤 상의도 없이.

“누이. 공작 정도면 누이의 결혼 상대로 손색없어.”

카시엘 디에드반이 이때껏 결혼하지도 않고, 심지어 약혼조차 하지 않은 미혼의 남자라는 건 제국에 있는
모든 귀족 영애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와 어떻게든 가까워지기 위해 애를 쓰는 영애들도 굉장히 많았다.

실제로 황실에서 열리는 사냥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영애들에게 받는 선물들로 마차 하나를 채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 어떤 영애와 염문설이 난 적 없었고,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인 적 없었다. 담백하다
못해 철벽이라 해도 무방한 태도는 그가 남색가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힘을 싣기도 했다.

“지크프리트…… 아니죠? 장난이죠? 진심이 아니잖아요. 그렇죠?”

지크프리트가 저와 카시엘의 사이가 나쁘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디에드반 공작 형제가 제게 한 짓에


대해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감금당한 사실은 말했으니까. 뿐만 아니라 그는 제가 카시엘 디에드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일찌감치 눈치채고 넌지시 묻기도 했다.
이네트는 지금이라도 그가 농담이라며, 누이를 놀라게 하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봤다며 너스레를
떨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 어떤 번복도 하지 않았다.

뒤흔들리는 정신이 한계에 몰렸다. 이네트는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숨조차 쉬지 않고 멍하니 굳었다.


가슴에 뻐근한 통증이 퍼지고, 숨이 막혀 정신이 흐려질 때 즈음이 돼서야 몸이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
억지로 숨을 삼켰다.

“누이.”

가냘프게 마른 이네트의 몸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심각함을 감지한 지크프리트가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누이!”

“흐으……!”

닿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듯 그녀가 작게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고개를 푹 꺾으며 정신을 잃었다.

* * *

이네트가 다시 눈을 뜬 건 그로부터 반나절이 지나서였다. 그녀는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는


얼굴에 다시 눈을 감았다.

“누이.”

지크프리트가 하얗게 질린 이네트의 뺨에 손등을 대었다.

“정신이 들어? 괜찮아?”

“…….”

“다시 자려고?”

그녀는 고집스레 눈과 입술을 다물고 열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 그가 하는 말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누이와 공작의 결혼식은 앞으로 50 일 뒤야. 넉넉하게 준비하고 싶지만, 되도록 빠르게 식을 올리려고.”

“지크프리트. 당신, 정말, 미쳤군요….”

들끓는 분노로 인해 한 음절, 한 음절 끊겼다. 화를 누르고 쏟아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힘이 들었다.

“일리아드 제국에 공작 가문은 두 가문밖에 없어. 디에드반 공작 가문의 충정과 명예는 제국 내에서도
유명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누이?”

이네트가 경악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소리를 높이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 떼지 말아요. 내가 그를 싫어한다는 걸 알잖아요! 카시엘 디에드반과


페르닌드 디에드반이 나를 지하실에 가뒀다고 말했는데, 왜……!”
“누이. 나야말로 전에 말했잖아. 결혼에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 결혼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궤변 늘어놓지 말아요! 그자와 결혼한다는 건 그자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
끔찍한 저택으로 돌아간다는 소리고!”

“누이, 걱정하지 마. 누이가 황족인 게 밝혀진 이상 디에드반 공작도 누이에게 함부로 못 할 거야.”

이네트는 제 감정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지크프리트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가 이런 자였던가? 이다지도 다른 이의 감정에 무지하고, 기만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으며,


자기중심적인 자였단 말인가? 나는 이런 자에게 잠깐이나마 따듯함을 느끼고 의지했단 말인가?

구역질이 밀려왔다. 이네트는 밀려오는 토기를 삼키기 위해 시트를 꽉 거머쥐었다.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지나친 분노로 인해 오히려 침착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쾌하고 친절하다고 생각했던 남동생은 어찌 되었든 태어날 때부터 최정상의 자리에서 나고 자란


황태자였던 것이다. 이복누이조차 정치의 말로 삼는, 철저한 황실의 사람.

이네트가 반쯤 포기하고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으니…… 그 사람은 안 돼요.”

지크프리트가 으음,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자 말고 다른 사람 중에 누이에게 적합한 자는 없는데.”

‘적합’이라니. 기만하다 못해 철저하게 저를 체스말로 만드는 단어였다.

겨우 뱉어낸 말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정신이 멍해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화되었다. 더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떨군 이네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위로하듯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누이. 결혼식은 성대하게 열릴 거야. 황실과 디에드반 공작가의 결합이니까. 그날 누이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신부가 될 거고.”

“…….”

“디에드반 공작과는 언제 만날래? 식전에 보기는 해야 할 텐데. 드레스와 연미복, 목걸이랑 반지,
귀걸이도 맞춰야 하고. 누이부터 먼저 정하고 누이가 정한 거에 공작이 맞추게 할까?”

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무어라 떠들든 저 멀리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작게


들렸다.

이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 * *
이네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식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됐다. 지크프리트가 손수 의상 디자이너와
주얼리 디자이너를 그녀의 방에 데려왔다. 디자이너들은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는 이네트를 관찰하며
지크프리트를 향해 무어라 연신 떠들어댔다. 실상 드레스와 각종 장신구는 그녀의 의사 없이, 그들
뜻대로 정해졌다.

이네트와 카시엘 디에드반의 결혼 소식으로 제국은 큰 소란이 일었다. 그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황족이라 할지라도 사생아인데, 그런 반쪽짜리 핏줄이 과연 디에드반 공작과
어울리느니 마느니 저들끼리 입방아를 찧느라 바빴다.

“그 반쪽짜리 황녀가 가진 게 뭐가 있어서? 얼굴밖에 없는 거 아닌가?”

“디에드반 공작도 결국 여자 외모에 넘어가는 남자였나 보네요!”

클럽에선 남녀 가릴 것 없이 반쪽짜리 황녀에 대한 이야기가 득실거렸다.

“그런데 그…… 황태자 전하와 모종의 사이라는 소문이 있었지 않나? 그걸 덮으려고 결혼식을 급히
강행하는 거라는 소리가 들려서 말이오.”

“그래, 나도 들었네. 그 둘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이긴 하던데……. 설마, 반쪽이라도 피가 섞인


남매끼리 그러겠소?”

추측만이 난무하는 소문이지만, 부정한 소문인지라 이네트의 이미지에 악영향만 주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잠깐 안줏거리로 삼기 용이한 화젯거리였다는 점이다.

지크프리트는 귀족들이 찧어대는 입방아에 대해서 알면서도 묵인했고, 그 어떤 타격도 받지 않았다. 다만


그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는 이네트 때문에 애가 타들어 갔다.

“누이. 나 좀 봐줘. 응?”

그가 아무리 애원해도 그녀는 눈조차 맞춰주지 않았다. 카시엘 디에드반과의 결혼을 이야기한 이후부터
그녀는 입에 아교라도 붙인 듯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조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시녀에게조차도.

식사도 거를 때가 많았다. 그가 억지로 먹이려고 애를 써도 먹지 않았다. 겨울나무의 가지처럼 마른 몸을


볼 때면 속이 상했다.

“누이…… 그때 분명히 내가 없으면 식사할 거라고 했잖아. 근데 왜 먹질 않아? 응?”

“…….”

“오늘도 억지로 먹이고 싶진 않아. 이러다가 쓰러지겠어.”

이네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러다 쓰러져 일어나지 않고 싶다고. 차라리 죽고 싶다고.

“레오가 보고 싶지 않아? 누이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래, 내가 레오를 여기 데려올게.”

지크프리트는 대답 없는 이네트를 향해 연신 재잘거렸다. 그는 제롬이 해주었던 조언을 떠올리며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결혼식 전에 잠깐 여행이라도 갔다 오는 거 어때?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몰이 유명한 마을이


하나 있거든. 호텔의 조식도 유명하고.”

그가 아무리 들뜬 목소리로 밝게 말해도 그녀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더


말을 이었다.

“아니면 온천은? 그때 온천 이야기하면서 즐거워했잖아. 에벨루넨 대륙의 온천만큼은 아니어도, 일리아드


제국에도 온천으로 유명한 로스왈드란 마을이 있어. 수도에서 좀 멀긴 하지만 하루 이틀 정도 다녀오는 건
문제 없을 거야.”

“…….”

허공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이윽고 뺨을 타고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끊임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누이, 미안해. 누이를 울리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그는 그녀가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사과부터 했다.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 닦으며 그가 연신


사과했다.

“미안해. 응? 그러니까 울지 마…….”

그가 아무리 위로하고 도닥여도 그녀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그의 위로가 그녀의 마음에 와 닿지


않으니 그 어떤 말도 통할 리 없었다.

그렇게 울다가 쇠약해진 그녀가 정신을 잃었다.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쉬며 의사를 불렀다. 의사를 데려와
고치라고 한 것도 수십 번이었으나 의사는 마음의 병이라는 헛소리만 지껄일 뿐, 별다른 소득을 내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지크프리트가 혀를 찼다.

제롬의 조언대로 나가게 해주겠다고 해도 그녀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녀가
나아질까? 그는 좀처럼 답을 찾지 못했다.

의사가 도착해서 진료를 보았다. 의사는 늘 그랬듯이 했던 말만 반복했다.

“너무 쇠약해지셨습니다. 식사를 통해 영양 섭취를 하시고, 충분한 휴식과 정신적인 안정을 취하시는 게
…….”

“지겹군. 그대는 앵무새인가? 매번 똑같은 말만 하는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몸의 병이라기보다는 마음의 병에서 비롯된 문제라 저도 어쩔 수가…….”

마음의 병. 지크프리트가 얼굴을 구겼다. 카시엘 디에드반과 그리 결혼하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몇 번


싫은 티를 내다가 이내 그의 뜻을 알아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고집스러운 누이가 이해되지 않았다.
결혼은 형식적인 거라고 몇 번이고 설명을 해주었는데도 말이다.

결혼을 하고서도 별거를 하는 귀족도 몇 있었다. 다른 귀족과 불륜을 저지르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고,


황족의 정부로 사는 부인도 있었다. 지금 황제부터가 황후를 두고서도 웬 평민 여자를 황후가 죽은
지금까지도 정부로 두지 않았나. 귀족들의 결혼 생활이란 으레 그런 것이었다.

디에드반 공작 저택의 별관에서 오랜 시간 갇혀 살다시피 했다고 했으니 모를 만도 했다. 그러니 알려주는


것인데 누이가 이해해주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어서 누이가 정신을 차리고 깨달으면 좋을 텐데.

지크프리트는 의사를 보내고 나서도 오랜 시간 그녀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네트가 저를 향해


다시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누이, 언제 다시 내게 웃어줄래?”
“…….”

“누이의 웃는 얼굴이 그리워.”

이제 디에드반 공작은 누이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누이에겐 황태자라는 뒷배가 있으니까.
언제나 자신이 지켜줄 것인데, 왜 누이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걸까? 안타까웠다.

그가 그녀의 야윈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이네트는 미동도 없었다. 매일매일 그녀의 옆에 있고 싶었지만,


이제 슬슬 집무실로 돌아가 봐야 했다. 누이의 결혼식을 거의 제가 주관하고 있다 보아도 무관하므로,
업무뿐만 아니라 누이의 결혼식 준비도 어서 빨리 끝마쳐야 했다.

황궁의 널따란 온실 정원에서 이루어질 누이의 결혼식이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크프리트가 인상을 찡그리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누이와
단둘이 있을 땐 방해하지 말라고 일렀는데.

“전하, 제롬 르왈드입니다.”

허나 들리는 목소리에 그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가 들어와, 하고 말하자 문이 열리며 제롬 르왈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에로드 데반이 도주했습니다.”

“……뭐?”

지크프리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히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했잖아.”

“저도 그렇게 기사들에게 일렀습니다만, 에로드 데반의 상태가 좋지 않아 기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졌던
모양입니다.”

“다 나으려면 멀었다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도망쳤지?”

“기사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도주했다고 합니다.”

“도주하면서 남긴 흔적은?”

“치밀하게도 핏자국을 다 지우며 이동했다고 합니다. 아마 상태가 좋지 않아 얼마 가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 추적하고 있습니다만…….”

하, 지크프리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능하군.”

언제나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점 때문에 제롬 르왈드를 제 오른팔로 둔 것이었다. 무능한 부하 따위는


필요 없었다.

지크프리트의 눈이 싸늘하게 일변하자 제롬 르왈드가 알아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손을 내려 제롬의 턱을 들어 올렸다. 제롬이 눈을 감았다. 제롬이 예상한 대로 손이 날아들었다.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제롬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며 피가 터졌다. 제롬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이때껏 그대가 보인 능력을 아니까 이 정도로 끝내겠어. 누이와 관련된 실수는 다시 용납하지 않겠다,
제롬.”

제롬은 예, 대답하며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 그리고는 칼같이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꼭 추적하여 잡겠습니다.”

“그래. 추적하면 내게 바로 보고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제롬이 왔을 때처럼 갈 때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지크프리트는 좋지 않은 상황에 찌푸린 미간을 피지


않았다. 분명히 도주한 그 자는 어떻게든 누이에게 접근할 게 분명했다.

그는 생각에 잠겨, 시트 속에서 움찔 떨리고 있는 이네트의 손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감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크프리트가 그것을 발견하고선 그녀의 눈 밑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누이, 안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거야?”

“…….”

“앞으로 내가 누이를 지켜줄게.”

이네트는 눈을 뜨지 않았다.

* * *

카시엘 디에드반은 일과를 마치고 저택으로 퇴근하기 전, 저를 뒤쫓아 온 신입 기사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기사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을 고르다가 이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단장님, 황녀님과 결혼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래. 기사까지 난 걸로 아는데.”

하루에도 몇 번 이런 질문을 곧잘 받았으므로 카시엘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예, 봤는데도 믿기지 않아서……. 원래 황녀님과 아는 사이셨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고 아직 풋내기 같은 신입 기사를 흘긋 내려다보고 말았다. 기사가 오해 말라는 듯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 단장님께선 이때까지 여인에게 관심이 없으셨잖습니까. 그래서…….”

“그대도 황녀에게 반한 자 중 한 명인가?”

카시엘이 무덤덤한 어조로 묻자 기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결혼을 예상하지 못했다며 말을 거는 남자 중 대다수는 이네트의 외모에 홀려 반한 자가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불쾌했으나, 이젠 덤덤해졌다.

그래, 이네트는 지나치게 아름다웠으니까. 한번 보아도 그 요사스러운 외모에 홀릴 만큼. 그러니 자신


또한…….

늘어놓는 변명은 기사의 목소리로 끊겼다.

“아, 아닙니다. 이제 곧 결혼하실 분에게 감히 그런……. 결혼 축하드립니다, 단장님. 결혼식 때


멀리서라도 보겠습니다!”

“그래.”

카시엘이 짧게 대답하고 등을 돌렸다. 마차로 곧장 향한 그는 마차에 타자마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제 결혼식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이네트를 만날 날도 머지않았다는 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과, 그녀가 보일 혐오가 무서워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며 서로
부딪혔다.

설상가상으로 페르닌드의 상태는 점차 악화되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이네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동생의 죽음보다도 이네트가 보일 거부가 두려운 자신은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리고 만 것이
틀림없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이어 동생까지 모조리 죽어도 자신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감정은 지독한 늪과 같았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수렁 속에 잠겨간다는 걸 알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끝까지 부정하고 빠져나오려 해도 그럴 수 없도록 감정은 몸을 불려 이성까지
잡아먹고 말았다. 카시엘은 스스로를 패륜아라고 칭하면서도 느껴지지 않는 죄책감에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하…….”

더는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어쩌면 예전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 * *

이네트가 천천히 손을 뻗어 스푼을 쥐었다. 오래간만에 쥐어서 그런지 손이 잘게 떨렸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수프를 떴다. 허나 얼마 안 가 손에 힘이 빠져 스푼을 놓쳤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스푼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광경에 지크프리트가 안타깝다는 듯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트렸다.
“누이, 내가 먹여줄게.”

그건 죽기보다 싫었던 이네트는 시녀가 새 스푼을 가져오자마자 자신에게 달라는 듯 시녀에게 손을 뻗었다.
스스로 스푼을 쥐고선 수프를 한 입 떴다. 뜨고 나서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가에 가져다 댔다.
오랜만에 들어온 음식물에 위장이 먼저 반응했다. 메스꺼움이 일었다.

“우욱…….”

“괜찮아?”

이네트는 메스꺼움을 내리누르며 다시 스푼으로 수프를 떴다. 꾸역꾸역 삼키자 결국 받아들이지 못한


위장이 음식물을 위로 올려 보냈다.

“욱.”

그녀가 그대로 시트에 토를 했다. 위액과 함께 올라온 음식물 때문에 목구멍이 따끔따끔했다.

“오래간만에 먹어서 그런 거야. 괜찮아질 거야.”

지크프리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네트를 위로했다. 그는 시녀에게 시트를 치우라 명하고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좀 더 묽은 수프를 준비하라 이를게. 차라도 마실래?”

“…….”

이네트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종을 울려 다른 사용인을 불러 따듯한 차를 가져오라 일렀다.

지크프리트는 그녀가 오래간만에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누이. 어서 기운 차려. 누이가 좋아하는 디저트 가게에서 새로운 디저트도 나왔어.”

“…….”

그가 계속해서 조잘거렸다. 조잘거리는 동안 사용인이 차를 가지고 왔다. 독 검사를 위해 은 스푼을 한


번 담그고는, 이상이 없음을 보자마자 그가 차를 후후 불어 식혔다.

이네트는 그가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자 그제야 마지못해 입술을 열었다. 목구멍 안으로 뜨거운 차가
흘러들어 가자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잠잠해졌다.

지크프리트가 마른 이네트의 뺨을 조심스레 훑었다.

“누이. 이제 정신이 차릴 맘이 든 거야?”

“…….”

“다 누이를 위해서 한 행동이니까, 부디 내 진심을 알아주고 날 미워하지 말아줘. 난 누이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일자로 다물려있던 이네트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심연으로 가라앉아버린 내면도,
깊이 드리워진 체념조차 잠시나마 잊게 할 만큼 치가 떨리는 말이었다.

시녀가 새로 바뀐 시트를 들고 왔다. 그녀는 아무 말 않고 새로 바뀐 시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늘도 늘 그랬듯이 지크프리트는 제가 하고 싶은 말만 조잘거리고는 자리를 떠났다. 떠나기 전 아쉽다는
듯 그가 볼에 입을 맞추었을 때, 이네트는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네트는 아무도 없는 적막한 방에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가겠습니다, 황녀님.”

지크프리트가 아님에 그녀는 안심하며 다시 허공을 응시했다. 들어온 사용인은 방 안을 정리하고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네트는 청소를 하든 말든 사용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정리하는 소리가 멈추었는데도 나가지 않자, 그제야 이네트의 시선이 사용인에게 닿았다. 사용인은
이네트와 눈이 마주치자 품에서 쪽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어느 분께서 이걸 황녀님께 전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확인하시면 태우시거나 삼키시라고 하였어요.”

이네트가 쪽지를 받아들었다. 그녀가 쪽지를 받자 기다렸다는 듯 사용인이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쪽지를 천천히 펼쳤다.

『아가씨께.

도라입니다. 매일 오후 2 시, 리에른 디저트 가게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도라……. 데반 백작저에서 자주 올라타고 교감하였던 말의 이름이었다.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며 쪽지 속의 내용을 읽고 또 읽었다. 자신이 미쳐서 만든 환상인가 싶어 다시 한번


또 보고 또 보았다. 쪽지는 환상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제야 이네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흐르는 눈물이 쪽지에 후드득 떨어졌다. 이네트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다가 이내 쪽지를 잘게 찢었다.
잘게 찢긴 종이를 입 안에 넣어 삼켰다.

오후 2 시, 리에른 디저트 가게…….

이네트는 속으로 읊조리며 바닥에 점점이 떨어지는 눈물을 보았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제 안에서


사라져버렸다고 믿었는데, 채 사라지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눈물이 멎었다. 이네트는 말라붙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웠다.

이제 결혼식까지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녀는 방금 나간 사용인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가, 이내


지웠다. 어차피 기억해봤자…… 다시는 보지 못할 테니까.

무기력하게 누워 있던 그녀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자신이 진심으로 아끼거나


사랑하는 이는 결국 제 곁에 남지 못했다.

로잔도, 에일도…… 모두…….

이네트는 로잔이 저의 치욕스러운 꼴을 보고 쫓겨난 뒤 어떻게 됐는지 아직도 알지 못했다. 카시엘


디에드반, 과연 그자가 로잔을 살려 보냈을까? 생각하기 싫어 이때껏 회피하다가 드디어 마주하자 이미
텅 빈 마음에 또다시 균열이 일었다.

아가씨, 라고 저를 부르는 에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제가 잠든 줄 모르고 제롬 르왈드와 함께


에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지크프리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추적하면 내게 바로 보고하도록 해.’

지크프리트가 저를 밖으로 내보낼 때 자신 혼자 보낼 리 없었다. 방 안에 있는 지금마저도 밖에는 저를


감시하는 기사가 여럿 서 있었다.

약해진 자신의 건강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순 궤변이었다. 감시의 목적인 게 뻔하면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위하는 척 굴었다. 뻔뻔스럽고, 아무렇지 않게 저를 기만하는 자……. 이네트가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결혼식 전에 혼자서 탈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오랜 시간 살아온 디에드반 저택이나,


승마를 통해 여러 번 쏘다닌 데반 저택과는 달리 황궁은 드넓고 광활했다. 그녀는 아직도 황궁의 지리를
다 알지 못했다.

탈출 시도를 했다가 붙잡힌다면…….

“끄윽…… 흑…….”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카시엘 디에드반과 결혼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은 이후, 자신은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에일은 그렇지 않았다. 이때까지 그가 자신을 위해 한 행동을 알았다. 그마저
잘못된다면 자신은 아마…….

이네트가 아이처럼 오열했다. 작게나마 마음속에 남아 있던 편린이 가슴을 미친 듯이 뒤흔들었다. 에일을


잃어버리는 건,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무언가를 잃는 것과 같았다.

오랜 시간 울던 이네트는 노크 소리도 없이 벌컥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고는 얼굴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한 달 넘게 다물었던 그녀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 * *

에일은 집요하리만큼 따라붙는 추적을 피해 다녔다. 혹시라도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 백작 저택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이미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집사의 가족을 통해 간간이 저택에 연락만 취했다.
그마저도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웠다.

황태자와 연관되어 있음을 넌지시 알리자 에이든은 굉장히 당혹스러워했다. 에이든은 에일에게 살아만
있으라며 혼자 지낼 수 있을 만한 금전을 넉넉히 주었다. 여차 하면 상황이 잠잠해질 때까지 다른 지방에
갔다 오라고 하며.

에일은 추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염색까지 감행했다. 먹물처럼 짙은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일부러 허름한
로브를 입은 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으로 쏘다녔다. 기사들로 보이는 자들이 있으면 인파 속에
숨었다.

추적을 피해 리에른 디저트 가게의 뒤편에 숨어 가게에 오는 귀족 영애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벌써


아가씨를 기다린 지 일주일 째였다. 나오기가 쉽지 않은지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사에 따르면 그녀의 결혼식도 머지않았다. 그 생각에 미치자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카시엘 디에드반과 결혼이라니, 그녀의 의사일 리 만무했다. 분명히 지크프리트, 그 미친 황태자가


주선한 것이 틀림없었다.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이쯤 되면 그녀의 건강 상태조차 걱정스러웠다.
분명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황태자는 도대체 누이에게 어떤 억하심정이 있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는 거란 말인가? 그로서는


황태자의 미친 행각이 머리로 이해되지 않았다.

앞으로 결혼식까지 남은 기간은 3 일이었다. 촉박한 기간에 에일은 초조해졌다. 어쩌면 아가씨가 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은색 머리카락을 보면 혹여나 아가씨일까 싶어 돌아보기를 수차례. 멀리서 보이는 은색 머리카락에 에일은


긴가민가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설마, 하는 예감은 적중했다.

아가씨였다.

에일은 그녀 뒤에 따라붙은 여러 기사와 사용인들을 바라보고는 침을 삼켰다. 그녀가 드넓은 황궁에서


탈출하여 혼자 올 것이라는 희망적인 생각은 산산조각 났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뒤따라 온 황궁 사용인과 기사의 수가 많았다. 그녀와 단둘이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것은 녹록지 않아 보였다.

에일은 고민하다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천천히 가게 뒤편의 골목에서 나왔다. 그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본 것처럼, 그녀 또한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비록 머리를 검게 염색했어도, 허름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이네트가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는 기사들과 시녀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이네트의 눈짓에도 뒤로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네트는 그들의 불복에도 예상했다는 듯 무표정했다.

“에일…….”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에일은 가까이 다가온 이네트의 모습에 경악했다.

그녀는 지금 당장 쓰러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냘팠다. 전에 봤을 때보다 확연하게 마른 얼굴에


에일이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아가씨, 도대체…… 얼굴이…… 이게 무슨…….”

에일이 더듬거리며 천천히, 그녀에게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큰 충격 때문에 그는 제 걸음걸이가


이상하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왜, 왜 이렇게 된 겁니까…… 도대체 누가 아가씨를 이렇게…….”

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가슴이 아팠다. 누가 제 가슴을 갈기갈기 찢기라도 하는 듯 선연한


통증이었다. 그가 차마 바싹 마른 이네트의 뺨을 만지지도 못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째서 이렇게 마르신 겁니까. 혹 아가씨를 굶긴 겁니까?”

입 밖에 내뱉는 것만으로도 그자를 죽이고 싶은 살의가 솟구쳤다.

“아니. 내가…… 입맛이 없어서…….”

그녀의 목소리가 오랜 가뭄으로 말라붙은 땅처럼 갈라졌다. 그 목소리에 에일의 마음이 더욱 미어졌다.

“오래…… 이야기는 못 해. 미안해.”


“아가씨께서 제게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야 할 건 저입니다. ……그간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때 아가씨의 시선을 피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네트는 그가 두서없이 늘어놓는 말을 잠자코 듣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알아. 무슨 오해를 했는지…….”

“제가, 밉지 않으십니까…?”

“밉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괜찮아. 왜 그랬는지 이제는 아니까. 하지만…….”

그녀가 말을 끊고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허공을 바라보는 양 눈빛에 초점이 없었다. 에일이


아가씨, 라고 부르는 순간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 이윽고 홍수처럼 흐르는 눈물에 그가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에일이 나뭇가지처럼 마른 이네트의 팔을 붙잡았다. 지나치게 얇은 팔뚝에 그가 놀라 곧바로 손을 뗐다.

이때껏 알던 아가씨가 아닌 것 같았다. 희게 부풀어 올랐던 두 뺨도, 그 뺨에 올라와 있던 복숭앗빛


홍조도, 힘든 상황이 닥쳐도 희망을 놓지 않고 푸르게 빛나던 눈의 불꽃도 차게 식어버리고 없었다.

앙상하게 마른 몸과 죽어버린 두 눈, 텅 빈 눈으로 흘리는 눈물과 공허한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아가씨께서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그의 가슴이 쿵, 아래로 내려앉았다.

“아가씨.”

에일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네트를 불렀다. 그녀가 듣지 못한 듯 멍하니 있다가 잠시 후에야 대답했다.

“응, 아…… 에일. 머리 염색했구나. 잘 어울려.”

“…….”

“사과해야 할 건 네가 아냐. 네가 사과하면 안 돼…….”

이네트가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까지도 그녀의 눈에서는 쉴 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다


못한 에일이 그녀의 젖은 뺨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발갛게 짓무른 눈가를 보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사실은…… 다시는, 보지 말자고…… 말하려고 나왔어.”

“……네?”

에일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네게 피해만 줘서 미안해. 계속 날 도와주고, 그곳에서 벗어나게 해준 건 너인데…… 그런데 난…….”

가느다란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네게 도움이 되지 못해. 널 다치게 해. 널, 도저히 너를…… 잃고 싶지 않아.”

그녀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히끅거리는 울음소리가 귓가에 아프게 박혀 들었다. 그녀의 어깨가
가파르게 들썩거렸다. 에일이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
“아가씨 없이 저보고 어떻게 살라는 말씀입니까? 전 아가씨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마세요, 제발…….”

그녀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 나는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가줘. 부탁이야.”

에일이 싫다고 말하며 이네트의 몸을 꽉 껴안자 뒤에 있던 기사와 사용인들이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황녀님을 놓아주십시오.”

기사의 목소리에 에일의 품 안에 있던 이네트가 바르작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에일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앙상한 꼴을 하고 있는데도 그녀를 곧바로 데려가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왜 하필 황태자란 말인가? 권력 앞에서 무용한 신세에 한탄이 터졌다. 그렇기에 더욱 황태자가


원망스러웠다. 권력을 이용하여 한 사람의 인생을 짓밟고, 무너트리고, 협박하고. 비열하고 저열했으며
끔찍할 만큼 역겨웠다. 그 풍파를 모조리 맞고 서 있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마지막으로 껴안겠습니다.”

에일이 그리 말하며 이네트를 다시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그녀만 들리도록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가씨, 기다리십시오. 제가 꼭 데리러 가겠습니다.”

품이 멀어지고, 에일은 흔들리는 그녀의 동공을 바라보며 눈을 휘었다. 그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이네트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등을 돌렸다. 그는 서서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 * *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이네트는 지크프리트의 예상과는 달리 그 어떤 반항이나 패악 없이 조용했다.


결혼식을 앞둔 신부답지 않게 덤덤했다.

이네트는 결혼식 당일, 이른 오전부터 시녀와 사용인들이 달라붙어 치장을 시키는데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지크프리트는 얌전한 그녀의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희게 질린 뺨에 분홍빛 파우더가 발리고, 입술에도 그와 비슷한 색의 립스틱이 발렸다.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는 화려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청순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냘프리만큼 마른 몸 때문에 그 분위기는
더욱 극대화되었다.

“어쩜……. 황녀님께선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우신데, 꾸미니 더 눈을 사로잡을 만큼 어여쁘세요!”

“너무 아름다우세요.”

주변 사람들 모두가 앞다투어 그녀를 칭찬했다. 그녀는 저를 두고 하는 말들에도 초연했다. 아무 반응


없이 거울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결혼식이 열리는 온실 정원으로 가야 할 때였다. 지크프리트가 이네트를 옆에서 가까이 에스코트하며


그녀에게 온실 정원에 대해 설명했다.

“누이, 온실 정원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지? 누이의 결혼식 때문에 처음으로 황족이 아닌 이들에게도


개방하는 거야. 원래는 황후께서 자주 드나드셨던 곳인데. 이제 돌아가시고 없으니까.”

“…….”

“넓긴 하지만, 그래도 가까운 이들로만 초대했어. 복작거리는 것보단 그게 낫잖아. 누이도 그렇지?”

그녀는 대답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걸을 때마다 가슴까지 오는 은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굽이치고,


내리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누이를 생각해서 디에드반 공작과 결혼식 전까지 만나지 않게 했고, 결혼식은 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이에게 걸맞게 아주 화려하게 준비했어.”

지크프리트가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이네트는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제가 고마워하리라 여긴 걸까?
우스울 따름이었다.

온실로 가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이네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눈과 입을 닫았다.

팔짱을 낀 탓에 그의 숨소리와 목소리가 더 가까이 들렸다.

“누이. 약속, 지킬 거지?”

“…….”

“지킬 거라 믿어.”

이네트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실 정원은 바깥의 외관부터가 무척이나 화려했다. 둥그런 모양의 표면 모두가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여러 색으로 반짝거리며 빛났고, 문 위에 그려진 그림은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고, 그 주변에는 꽃들이 가득한 그림이었다.

“14 대 선황제 폐하께서 황후께서 아이를 가지신 것에 감복하여 황후께 선물한 정원이야.”

이네트의 시선이 그림에 머물자 지크프리트가 말했다. 이네트는 대답 없이 그림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림


속 여인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과 달리 행복해 보였다. 이네트는 그 그림을 슬픈 얼굴로
올려다보면서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온실 정원은 무척이나 다채로웠다. 들어설 때부터 풍기는 꽃향기에 정신이 아찔했다.

바닥에 깔린 두터운 은색 융단 주변에는 갖가지 색의 꽃들이 심어져 있었고, 천장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된
줄들이 매달려 있었다.

온실 정원 가장 깊숙한 곳에는 백합으로 꾸며진 흰색 단과 함께, 양옆으로 붉은 백합이 한 아름 있었다.


그리고, 한때 그녀의 오라비였던 카시엘 디에드반이 서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하객들은 이네트와 카시엘을 번갈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쩜, 미남과 미녀의 만남이네요.”


“곧 태어날 아이의 외모는 또 어떨지 기대되는군요.”

“근데 두 분 다 전보다 더 마르신 듯한데…….”

드문드문 들리는 말들에 내리깐 이네트의 눈이 위로 들렸다. 그러자 곧 카시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름답게 치장한 이네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크프리트는 아쉽다는 듯 눈을 내려트리며 끼고 있던 팔짱을 뺐다.

“누이, 너무 긴장하지 마. 알겠지?”

타이르듯 지크프리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얼렀다.

그가 뒤로 물러나고, 이네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천천히, 흰색 단 앞으로 나아갔다. 지옥 불을


향해 스스로 걸어가는 것 같았다.

걸을 때마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단에 가까워지기 전, 이네트는 스스로를 몇 번이고 도닥였다. 난


괜찮아, 괜찮아, 견딜 수 있어……. 머릿속이 어지럽게 흔들렸지만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마침내 앞에 도달한 순간, 카시엘이 이네트의 손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이네트는 미동도 없었다.

“이네트.”

“…….”

“많이, 말랐구나.”

머리 색과 똑같은 검은색 연미복을 입은 카시엘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찬사를 내뱉게 할 만큼 외모가


훤칠했다. 벌어진 어깨와 넓은 등, 크고 아름다운 손까지 외적으로 완벽한 남자였다.

곧 부인이 될 여인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다정함과 애틋함이 한데 섞여 반짝거렸다. 그 눈빛을 본 다른


여인들이 부럽다는 듯 이네트를 바라보았다. 이네트는 눈을 내리깔고 있어 눈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

이네트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카시엘을 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주례를 맡은 신부가 주례사를 읊으며 결혼식을 이어나갔다. 이네트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결혼식이 이어지는 내내 카시엘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이따금 그의 시선이
닿는 걸 느낄 때마다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괜찮아. 견딜 수 있어. 괜찮을 거야. 나만, 조금만 견디면……그러면 에일은 괜찮을 테니까…….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

이네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지크프리트가 부디 약속을 지켜주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에로드 데반을 살려주세요. 그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누이가 바라는 건 그것 하나뿐이야?’

‘네.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에로드 데반만 살려주세요.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정말?’
‘네.’

‘그럼, 내가 나중에 누이에게 무얼 요구하든 다 들어주는 거다?’

‘네.’

쪽지를 건네주었던 사용인의 머리채를 붙잡고 들어온 그를 보고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저 에일을


살려달라는 애원밖에 없었다. 이미 쪽지의 내용까지 알고서 여유로운 얼굴을 한 그에게 제가 그것 말고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떠올리자마자 눈물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남편과 부인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평생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주례가 물었고, 카시엘은 얼마 있지 않아 바로 “네.”하고 대답했다. 이네트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평생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은 인생에서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는데…….

“…네.”

눈물을 삼키며 그녀가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군가 질문하면 틀에 박힌 대답을 하고, 누군가 부르면 멍하니 바라보고, 그것의 반복이었다. 결혼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마차에 올라탈 때가 되어서야 이네트가 눈을 여러 번 끔뻑거리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이네트.”

옆에 앉은 카시엘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의 금색 눈이 슬프게 젖어 있었다.

“결혼식 내내, 고개를 들지 않더군.”

“…….”

“넌…… 나와 결혼하는 게 끔찍하겠지?”

대답을 바라고서 한 말이 아닌 듯 그가 기다리지 않고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는데 나타나서. 그렇지만…….”

“…….”

“옆에만 있어 줘.”

이네트는 제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카시엘 디에드반은


이렇지 않았다. 이런 눈빛으로, 저런 얼굴로 비는 남자가 아니었다. 자신을 왜 사랑하지 않냐는 듯,
일그러진 눈으로 왜 자신은 안 되냐고 묻는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마치 제게 애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크프리트에게 제발 에일만 살려달라고 빌었던 자신처럼, 그것만 들어주어도 상관없다는 듯 애처로운


얼굴로.
이상했다. 이네트는 멀거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빌어도, 무어라 말해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끔찍하게 싫어하며 증오해 마지않던
남자였는데, 그 모든 감정이 재가 되어 사라진 것처럼 그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빈 깡통 같았다.

“피곤해 보이는군…….”

“…….”

“결혼식 전에 만날 수 없던 탓에 신혼여행지를 고르지 못했어. 이네트,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나?”

이네트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혼자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선 네가 온천을 좋아한다고 하더군. 에벨루넨 대륙으로 갈까? 멀긴 하지만 그리 나쁘진…….”

말을 잇던 카시엘이 이네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말을 끊었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가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건가?”

“…….”

“미안하다. 그곳으로는 가지 않을 테니 울지 마…….”

그의 손이 허공에서 정처 없이 방황했다. 껴안을지 말지 계속해서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그가 좀 더 용기를 내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잘못했어…….”

이네트는 카시엘의 품에서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이내 눈을 감았다. 이대로 쓰러지듯 잠들고 싶었다.

그녀의 바람대로 그녀는 얼마 가지 않아 그의 품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그는 마른 그녀의 몸을 꽉


껴안으며 턱에 힘을 주었다.

너는 평생 나를 사랑할 수 없겠지.

하지만 괜찮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그저 네가 곁에 있다면 난 그걸로…….

* * *

이네트는 다음 날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이네트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그 방이었다. 다시 이곳에 잡혀 들어오고 나서 지냈던, 누가 보아도 안주인을 위해 꾸며놓았다고


생각했던 그 방.
그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바닥에 깔린 짙은 색의 융단도, 아름다운 수가 놓여 있는 금사로 장식된
태피스트리도, 화장대와 벽지, 벽에 걸린 그림까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 방에 있는 자신뿐이었다. 분노하며 몸을 떨던 예전의 자신은 없었다. 멍하니 누워


죽은 듯 숨을 쉬는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

차라리…… 이곳의 생활에 만족하고 안주하여야 했을까? 황궁에 가지 않았더라면 괜찮았을까?

뒤늦은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으나 이미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기침하셨습니까, 주인마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여자 한 명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것이 보였다.

“마님의 전속 시녀를 맡게 된 마를린이라고 합니다.”

이네트는 멍하니 마를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등을 돌렸다.

“목욕하시겠습니까? 뜨거운 물을 받을까요?”

이네트는 황궁에서 그랬듯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마를린은 당황한 듯 재차 물었다.

“아니면 식사를 하시겠어요?”

“…….”

“마님.”

서서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듯 쭈뼛거리던 마를린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이네트에게서 대답이 나오지


않자 한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곧이어 뜨거운 물을 받는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물을 다 받고, 시녀가 나가자 그제야 이네트가 몸을
일으켰다. 오랜 시간 잔 것 때문인지 몸이 결렸다.

자는 동안 옷을 갈아입혀 주었는지 얇은 슬립 하나만 입은 상태였다. 이네트는 슬립을 훌렁 벗은 뒤


욕실로 가 김이 올라오고 있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스했다. 허나 그게 다였다. 목욕을 하면서 콧노래를 불렀던 게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데, 기력이 없었다.
비누칠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콧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마음도, 그 어떤 의욕도 나지 않았다.

물에 몸을 담근 채 가만히 있자 식사를 들고 온 마를린이 그녀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마님? 욕실에 계신가요?”

“…….”

“들어가겠습니다.”

욕실 문이 열리고, 마를린이 들어왔다. 마를린은 가만히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욕조 근처로 다가왔다.

“몸을 씻겨드릴까요?”
“…….”

“씻겨드리겠습니다.”

마를린은 이제 이네트에게서 대답이 없어도 개의치 않은 듯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네트는


마를린이 제 머리를 감겨주고, 뜨거운 물에 입욕제를 풀어 씻겨도 아무 말 없이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았다.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이세요?”

마를린이 그녀의 몸에 비누칠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전부터 마님께서 아름다우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줄곧 마님을 뵙고 싶었어요. 듣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우세요. 피부도 정말 고우시고…….”

그 말에 일자로 다물려 있던 이네트의 입가가 비틀렸다.

아름다움은 그녀에게 독과 마찬가지였다. 별관에서 지내다 본관으로 왔을 때, 그녀는 저를 바라보는 남자


사용인들의 시선이 어떠했는지 알고 있었다. 은근히 훑어보는 눈빛, 호의를 위장한 음험한 손길,
겉모습을 판단하는 탐색적인 눈길,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겐 끔찍했다.

카시엘도, 페르닌드도, 지크프리트도…… 모두 자신을 이용하거나 탐하려고만 했지,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것을 원하는지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그들의 소유물처럼 농락당하다 서서히 망가지고 무너졌다.

이네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느 순간부터 제어를 잃은 눈물샘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려댔다.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도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마, 마님…….”

마를린이 몹시 당황하며 비누칠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네트를 바라보았다. 이네트는 선한


얼굴을 한 마를린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준 사람은 결국 끝까지 제 곁에 남지 못했다. 그 사람들이 사라지고 난 뒤 밀려오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노라.

이네트의 눈물이 멎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저라도 괜찮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말씀해보세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마를린이 침울한 눈으로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비누칠을 시작했다.

목욕을 다 끝내고, 머리카락과 몸을 말렸을 땐 이미 식사가 차게 식어있었다.

“따듯한 음식으로 다시 들고 오겠습니다.”

그 말에 이네트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를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식사를 드시지 않으시려고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를린이 중얼거렸다.

“배고프실 텐데…….”
그러더니 이내 깨달았다는 듯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갑자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마님!”

마를린이 밝은 표정으로 방 밖으로 나갔다. 이네트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화장대 앞에 앉았다.

이네트가 넋 나간 얼굴로 화장품을 내려다보았다. 다양한 제품들이 놓여 있었다. 제품의 뚜껑을 열자


화장품 냄새가 콧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던 이네트는 다시 침대에 가서 앉았다.

카시엘과 페르닌드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그들은 나를 사랑하는 걸까? 그들이 하는 그게……
사랑인가?

이네트는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냈다. 해가 질 때 즈음이


되어서야 카시엘이 그녀의 방을 방문했다.

“이네트.”

카시엘이 들어오자 마를린이 곧바로 허리를 숙이더니 자리를 피했다. 그는 그녀가 앉아 있는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섬세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없나?”

“…….”

“언제쯤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오늘도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그가 손을 내려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전보다 옅어지긴 했으나, 목에


불그스름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녀 스스로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만년필로 목을 긁어내렸던 그
끔찍한 상처. 목숨을 걸면서까지 기어코 빠져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원래라면 어젯밤 초야를 치렀어야 했어. 네가 잠이 든 바람에 치르지 못했지만. 결혼의 증거를 마땅히
남겨야 해.”

카시엘은 이미 얇은 슬립 안의 여체를 잘 알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그는 그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발정한 상태였다. 지금도 아래에 피가 몰린 상태였다. 가까스로 당장 덮쳐 누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가 물었다.

“내가…… 너를 안아도 되겠나?”

그 말에 그녀의 초점이 그에게로 향했다. 새삼스레 왜 묻느냐는 듯 그녀의 눈에 의아함과 불쾌함이 한데


섞여 있었다.

“네가 싫다면 내가 피를 내어 시트를 적시겠어.”

말없이 카시엘을 바라보던 이네트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면…… 그 대신, 부탁 하나만 하겠다.”

이네트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쉽사리 제게 맞춰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잠시 그 사실을 잊은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입을 맞추게 해줘.”


“…….”

“다른 건 바라지 않아. 입술만…….”

섹스 대신 입맞춤이라. 몇 번이고 살결을 몸을 맞대고 겹쳤는데, 키스 따위가 대수이랴. 적어도 키스가


섹스보단 나았다. 이네트가 수긍의 의미로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가 얼굴을 내렸다.

숨이 점점 가까워졌다. 카시엘은 마치 첫 키스를 하는 소년처럼 입을 맞추기 전,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잠깐 망설였다. 그가 뜸을 들이더니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느낌에 감겨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위로 들렸다. 의아함을 담은 눈빛에도 그는 반대편 눈가에


입을 맞췄다. 이윽고 입술은 콧등으로 향했다.

이마, 눈가, 콧등, 뺨, 턱에 연거푸 이어지던 입맞춤은 마지막이 되어서야 입술로 향했다. 녹아내린
분위기 속에서 부드럽게 입술이 겹쳤다.

이네트의 아랫입술을 오래도록 빨던 카시엘이 허락을 구하듯 혀끝으로 입술 사이를 눌렀다. 입술이
벌어지자 그제야 혀가 입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그의 혀가 천천히 그녀의 입 안을 유영했다. 치열을
훑었다가, 말랑한 점막을 스치고, 입천장을 긁어내렸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받쳤다. 다른 한 손은 허리를 두른 채, 움직이지 않았다. 키스는 점점


짙어져 서로의 상체가 가까이 달라붙었다. 그녀는 기립한 그의 것을 느끼고는 감았던 눈을 가늘게 떴다.
눈을 뜨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음….”

그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혀가 혀 밑의 살을 꾹 눌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얕은 신음을 흘렸다.

“네 목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신음은, 들을 수 있군.”

카시엘이 키스를 하면서 입술이 살짝 떨어질 때마다 중얼거렸다. 이네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기분
좋은 듯 눈을 휜 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신음이라도 좋아.”

그는 또 한 번 그녀의 신음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이 키스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으읍…!”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이네트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고개를 내젓자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가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수초 간 응시하다가 눈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들었어. ……같이 하겠어?”

“…….”

“같이 내려가지. 한 끼도 먹지 않아 시장할 테니.”

이네트는 카시엘이 제 손을 붙잡고 일으키는 대로 일어났다. 그가 자연스레 팔짱을 끼고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방 밖을 나서고 복도를 걷는 내내 낯선 사용인들의 시선이 닿았다. 그녀의 시선이 사용인들에게 닿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전에 있던 사용인들은 전부 해고하고 새로 뽑았다.”

“…….”

“이네트. 페르닌드에 대해 궁금하지 않아?”

그제야 이네트는 이때껏 페르닌드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결혼식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그때조차 페르닌드의 목소리 한 번 들은 적 없었다. 결혼식에도 오지 않은 듯했다.

앞만 보고 걷던 이네트가 고개를 돌려 카시엘을 바라보았다. 그가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열었다.

“페르닌드는 지금 본인의 방에서 치료 중이다. 의사 말로는 가망이 없다고 하더군. 많이, 다친 상태야.”

“…….”

“왜 다친 건지 묻지 않아?”

그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궁금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는 침울한 눈동자로
그 어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그녀의 목을 바라보았다.

신음만으로 괜찮다고 했지만, 실은 아니었다. 무슨 말이든 좋으니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싶었으나


그녀는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황태자가 스쳐 지나가듯 누이의 말수가
줄어들었다고 했지만, 이 정도로 한마디도 하지 않을 줄 몰랐다.

이전에 보였던 생기 넘치던 뺨도, 타오르던 눈빛도 한 줌의 재가 된 듯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꿋꿋하게 버티던 생명력 넘치는 그녀는 이제 없었다.

카시엘의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네트가 옆에 있기만 하다면 뭐든


상관없다고 호언장담했던 것이 자신인데…… 말라비틀어진 고목나무처럼 생기 없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불쾌함이 온몸을 잠식했다.

한때는 망아지처럼 날뛰던 그녀가, 이렇게 얌전한 인형처럼 변한 이유에 자신도 포함되는 걸, 그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까.

이전에 저지른 추악한 죄와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깊은 내면에 묻어두었던 죄책감과 혼란에 불씨가
지펴졌다. 어머니와 이네트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이네트에게 눈길이 간 그 순간? 이복누이라 생각했던 그녀에게 그릇된 욕정을
품은 순간? 잠든 그녀에게 손을 뻗은 순간? 지하실로 끌어들인 순간? 싫다고 소리치고 나가게 해달라고
외치는 그녀의 외침을 무시한 순간?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직한 탄식과 함께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밀려왔다.

비록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한들, 그녀가 실은 황제의 사생아라 한들…… 그녀는 한때나마,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 이복누이였다.

그럼에도 욕망하고, 욕정하고, 그릇되게 탐했다. 제 욕망을 그녀의 잘못이라 떠넘기며 제대로 마주
보지도 않았다.

이제라도 그녀와 평범한 연인처럼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호소한다면…….

다시는 네게 그러지 않겠다, 그러니까 나를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면…….

이네트가 옆에 있는 것으로도 족하다고 했던 것조차 스스로를 향한 거짓이었다. 그녀와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본심이 튀어나와 제 존재를 과시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사실은 그 남자를 보고 웃어주었던 것처럼 제게 웃어주길 바랐다.

그 남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저를 바라봐주길 바랐다.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랐다.

너저분하고 역겨운 본심이었다.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났다. 사냥터에 숨겨둔 오두막처럼 그의 본심도
숨겨야 마땅한 것인데, 시도 때도 없이 본심이 튀어나와 그녀더러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소리 없는 외침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네트, 네가 많이 보고 싶었다.”

“…….”

“너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나는…… 하루도 널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어.”

온도가 다름을 알기에 혹시나, 하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다. 그가 품을 수 있는 희망이라고는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 그때 즈음엔 그녀가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미움과 체념이 가득하더라도 그 속에 애정
한 스푼쯤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정도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 네 미움도 점차 희석되어 내 사랑을 조금 너그러이 받아주지 않을까. 너는


네게 잘해주는 조그맣고 착한 이들에게 약했으니까.

내가 너에게 몸을 낮추고 엎드리면, 너는 그 남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에 나를 안아주지


않을까.

이네트는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그가 바라는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공작 부부가 식당에 도착하자 주방장과 사용인들이 큰 소리로 공작 부부에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멋들어지게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제일 안쪽 자리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요즘 식사를 잘하지 못한다고 들어서 묽은 수프를 준비해 달라 일렀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도 준비했다.”

그의 말대로 식탁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그 중 딸기케이크를 본 순간, 그녀의


입매가 굳었다.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그가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딸기케이크를 가장 좋아하는 걸로 아는데…… 이젠 좋아하지 않나?”

이네트의 굳은 입매가 풀릴 줄 모르자 카시엘이 주방장에게 당장 딸기케이크를 치우라 명했다.

그가 먼저 스푼을 들고 그녀에게 눈짓했다. 그녀의 손은 허벅지 위에 놓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식사가 마음에 안 들어? 다른 걸 준비하라 이를까?”

그 말에 주방장과 사용인들이 긴장한 눈으로 공작 부부를 살폈다. 디에드반 공작 또한 식사에 예민하여 매


식사 때마다 토를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나이프와 포크를 쓰는 손짓은 더할 나위 없이
귀족적이었으나, 일순 힘이 풀린 듯 몇 번이고 식기를 떨어트리는 일도 잦았다. 그 때문에 사용인들은
여분의 식기와 토를 치울 수건을 미리 준비하고는 했다.

이네트는 잔뜩 긴장한 사용인들의 눈빛을 알아차리고는 마지못해 스푼을 쥐었다. 수프를 한 입 떠먹자
그제야 카시엘이 안도한 표정으로 그 또한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는 아주 조용히 이루어졌다. 사용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또 공작이 식기를 떨어트리거나 토를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요 근래 들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겨우 수프만 다 먹은 이네트가 스푼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녀가 식사를


끝냈음을 안 카시엘 또한 식기를 내려놓았다.

“갈까?”

카시엘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이네트 또한 기다렸다는 듯 일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공작저에서


오랫동안 지냈기 때문에 저택의 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앞서거니 걷자 그가 그 뒤를
졸졸 쫓아갔다.

“식사는 괜찮았나? 너무 말라서 더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그가 그녀의 마른 팔을 훑어보며 물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그가 다시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밤엔 어디서 지내는 게 낫겠어? 내 방, 아니면 네 방?”

“…….”

“대답하지 않으면 내가 네 방에서 지내도록 하지.”

입을 다물고 잠자코 카시엘이 떠드는 걸 듣고 있던 이네트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나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제오늘 들어 처음으로 그녀가 제게


입을 연 것이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바로 말을 잇지 못하더니 그답지 않게 더듬거리며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네, 네가 말을 하지 않으니까 어떻게든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시끄럽다는 말이에요.”

“……알겠다. 조용히 하도록 하지.”

카시엘이 입을 다물자 고요가 찾아왔다. 이네트는 제 방까지 따라 들어온 그를 흘긋 보더니 이내 침대로


향했다. 그는 그녀가 기대 앉아 있는 침대와 테이블 앞의 의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의자에 가
앉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카시엘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이네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미동도 없었다.

“늘 그렇게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는 건가?”

“…….”

“내가 계속 쳐다봐도…… 괜찮나?”

이네트가 버석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익숙해요.”

짧은 대답이지만 뼈가 있었다. 카시엘은 눈을 내리깔았다. 어릴 때부터 진득하게 그녀를 지켜보았던 제


습관은 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눈으로 담는 걸로도 모자라 그 순간마저 놓치고 싶지 않아 종이에 그려 담았다. 이 순간조차도 그는


건조한 그녀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고 싶다는 생각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이곳을 떠나기 전, 오두막에 들어갔다고 들었어.”

“…….”

“내가 끔찍한가?”

그가 물어놓고는 우습다는 듯 하, 짧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실언이야. 당연히 끔찍하겠지. 그것 말고도 내가 네게 한 짓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그가 말끝을 흐리며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스스로 죄악을 읊기엔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금도 날 그리고 싶나요?”

음울한 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지나치게 담백한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걷혔다.

“난 널 한시도 그리고 싶지 않았던 적 없어.”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사라져 버리지 않는 기록 같은 게 필요했으니까.”

기억하고 눈에 담는 것으로는 모자랐다. 그 때문에 엉성하게나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림에
대한 열망으로 기인한 것이 아닌, 그녀를 오롯이 기억하고 놓치고 싶지 않다는 기이한 열망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기괴하다고, 혐오스럽다고 그녀가 경멸하여도 할 말이 없었다. 그가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허나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에게선 그 어떤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다만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몇십 분이 흘러도 열리지
않았다.

고립된 섬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그는 성대조차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느꼈다.

“저는 이제 당신을 봐도 아무렇지 않아요.”

이네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때는 당신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버거웠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안 들어요.”

어쩌면 그와 결혼해야 한다는 통보를 들었을 때부터 자신은 무너져 내린 것과 다름없었는지도 모른다.
자조적인 생각이 스쳤으나 이네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왜 살아가는지 근본적인 의미부터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의미를 잃어버린 삶은


매우 얄팍했고, 알맹이가 없었다. 그러니 큰 감정조차 생기지 않았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가는 건, 자신이 버티는 것만으로도 에일이 살 수 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가느다란 실 하나로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당신 마음대로 해요. 난 상관하지 말고. 늘 그랬듯이.”

카시엘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화는 맥없이 끊겼다.

밤이 무르익어 자정이 됐을 무렵, 침묵을 지키던 카시엘이 단도를 꺼내 제 팔뚝을 길게 그었다. 얇은


자상에서 피가 순식간에 솟았다. 그는 후드득 떨어지는 피를 시트에 흩뿌렸다.

“이것으로 정사의 증거는 끝이야.”

“…….”

“싫겠지만, 신혼부터 각방을 쓸 순 없어…….”

카시엘은 합리화하듯 중얼거리며 침대에 발을 들였다. 이네트는 피로 젖은 시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네트가 거절하지 않음에 안심하면서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신경
쓰지 말고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오히려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였다. 그녀의 눈치가
보였다.

카시엘이 이네트를 흘긋 보았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 싶었다. 뺨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시트 위에 덩그러니 놓인 손을 움켜쥐고 싶었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체취를 흠뻑 빨아들이고
싶었다. 허나 상상에 그칠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옆에서 유순한 초식동물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축축한 피가 건조하게 말라붙을 때 즈음, 그녀가 침대 옆의 취침등을 껐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네트가 등을 돌려 누웠다. 카시엘은 돌아선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녀를 등


뒤에서 껴안는데도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이네트, 잘 자.”

예상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 * *

신혼으로 한 달 간의 휴가를 받은 카시엘은 황궁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그는 이네트와 충분히 상의하여


신혼여행지를 고를 생각이었다. 느긋하게 상의할 작정이었던 하루의 계획은 난데없이 찾아온 불청객으로
인해 깨졌다.

“공작, 얼굴이 폈네?”

황태자였다. 서신도 없이 방문한 것치곤 미안함이 섞이지 않은 천연덕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네트는


지크프리트를 보자마자 얼굴색이 창백해지더니 미약하게 손끝을 떨었다. 지크프리트는 그것이 보이지도
않는지 누이를 봐서 기쁘다며 저 혼자 빙긋 웃었다.

“신혼여행지는 정했나?”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네트와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이었습니다.”

“으음…….”

지크프리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이는 에벨루넨 대륙을 좋아한다고 내가 말했었잖아? 왜 그곳으로 가지 않고?”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여행지로 골라야 할듯합니다.”

“그래? 흐음. 누이, 어디로 가고 싶어?”

망부석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던 이네트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조그맣게 말했다.

“바스타드…… 왕국이요.”

“으음? 그곳은 왜?”

지크프리트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바다를 보고 싶어서요.”

온천만 아니면 상관없기에 알고 있는 나라 중 하나를 말했을 뿐이었다. 이네트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굳이 내뱉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새로운 사실을 안 기쁨에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누이, 바다를 좋아했구나? 그래. 좋아. 바스타드 왕국의 해변은 참 아름답지. 아 참, 그때 이야기했던
것 기억나? 드네아라는 특산물이 맛있다고 했었는데.”

“…네.”

“누이는 달달한 걸 좋아하니까 입맛에 맞을 거야. 드네아 말고도 바스타드 왕국에는 당도가 높은 과일이
많고.”

“…….”

“하지만 여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거야. 이곳에서 배를 타고 2 주나 걸리는 곳에 있으니까.”

이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겠어? 지크프리트가 되물었고, 이네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지가 정해지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지크프리트와 카시엘이 바스타드 왕국에 대해 이야기하며


계획의 틀을 잡기 시작했다.

“바스타드 왕국은 지금 왕위 다툼이 치열하다던데.”

“네, 그렇습니다. 그곳은 처첩을 거느릴 수 있으니까요.”

“왕비에게서 난 자식만 다섯이라지?”

“첩에게서 본 자식은 열다섯 명이고요. 그중 여섯이 죽긴 했습니다만.”

“많이도 낳았군.”

지크프리트가 웃음을 흘렸다. 카시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웃음기가 사라진
지크프리트는 이내 걱정스럽다는 듯 눈을 좁히며 턱 밑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왕국에 서신을 보내긴 할 테지만, 치안이 조금 걱정스럽군.”

“……별일 없을 겁니다.”

“그러길 바라야지.”

일리아드 제국, 아니 제국의 수도에서도 벗어나 본 적 없는 이네트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녀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을뿐더러 대화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최대한 수도에서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게 좋겠군. 로넨 해변이 낫겠어.”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곳의 에브룬 호텔에서 묵으면 되겠군요.”

“좋아. 공작, 그대의 휴가일은 특별히 늘려달라고 폐하께 말씀드려보지.”

가는 데만 2 주였다. 교통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에 지크프리트는 특별히 카시엘의 휴가일을 늘려주기로


했다. 카시엘이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누이, 일주일은 편안히 묵고 와. 그곳은 기후가 따스하고 햇볕이 쨍쨍해서 가면 기분 좋을 거야.”

“……네.”

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가는 것임에도 그녀의 눈은 죽은 생선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이네트는 그 이후로도 카시엘과 지크프리트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가 지크프리트가 떠나기 전,
볼에 입술을 맞추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누이, 건강히 잘 갔다 와. 기다리고 있을게.”

이네트가 눈을 내리깔며 지크프리트의 입술이 스쳐 지나간 볼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지크프리트가 떠나자, 카시엘이 멍하니 서 있는 이네트를 향해 물었다.

“이네트. 정말 바스타드 왕국에 가고 싶은 게 맞나?”

“…….”

“표정이 좋지 않아.”

이네트가 그의 물음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나간다는 말도 없이 방 밖으로 훌쩍 나갔다. 카시엘이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 이내 아, 하고 탄식을 내뱉더니 곧바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사용인들은 오리가 어미를 따르듯, 공작부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공작의 모습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주인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는 그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제 부인의 뒤를 쫓는 광경은 굉장히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그와 달리 공작부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고, 그가 제 뒤를 쫓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네트는 방에 들어가기 전에야 자신을 쫓아온 카시엘에게 흘긋 시선을 던졌다.

“아직 밤이 되지도 않았는데 여기까지 쫓아올 작정인가요?”


“……그러면 안 되나?”

“네. 당신 방으로 돌아가세요.”

단호한 대답과 함께 문이 닫혔다. 그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침울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어쩔 수


없이 제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황궁에 출근하지 않는다뿐이지, 해야 할 일은 많았다. 가신들이 도맡아 하는 일이 비리 없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봐야 했으며, 수도에서 떨어진 영지 상황은 어떤지 보고를 받고 살펴보아야 했다.
필요하다면 순찰도 나가야 했다.

허나 그런 일보다 지금 당장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카시엘은 오래도록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도저히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 *

여행 일정은 빠르게 잡혔다. 이네트는 짐을 싸는 게 귀찮아 여행과 관련된 일은 모두 카시엘에게 떠넘겼다.


그는 군말 않고 여행에 관련된 일은 물론이고 그녀의 짐까지 쌌다. 어차피 집사와 사용인과 함께 하면
되는 일이었으므로 그에겐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이네트. 떠나기 전에 페르닌드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지 않겠어?”

카시엘은 누워 있는 동생이 맘에 걸렸다. 사경을 헤매면서도 이네트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게 안쓰러웠다.


지금은 사이가 멀어졌지만, 어렸을 땐 우애가 깊었던 탓에 아파서 누워 있는 동생을 쉽사리 무시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행을 다녀온 사이, 죽음의 문턱을 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떠나기 전에 이네트의 얼굴이라도
보여주어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카시엘의 물음에도 이네트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후우, 한숨을 쉬며 포기하려는 찰나 그녀가 대답했다.

“볼게요.”

“…괜찮겠어?”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둘은 함께 페르닌드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씁쓸한 약 냄새가 훅 풍겼다. 이네트는


죽은 듯 누워 있는 페르닌드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은 모습은 퍽이나 유순하고 천사 같았다.

신이 내려주었다고 일컬어지는 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 기다란 속눈썹, 높고 곧게 뻗은 코, 얇은


입술까지. 그는 거친 성격과 신랄한 입과는 극명하게 대비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허나 지금 그 외모는 생명력을 잃어 지나치게 창백했다.

“네 이름을 계속 부르더군.”
“…….”

“떠나기 전에 한 번쯤은 네 얼굴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았어.”

이네트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황궁의 연회장에서 페르닌드가 울면서 가지 말라고 빌었던 모습이
겹쳐서 떠올랐다. 후회하게 될 거라고 했는데, 이러려고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스스로 찌른 건가요?”

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페르닌드는…….”

말을 잇던 그가 순간 멈칫하더니 말을 끊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자 그가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나 너를 찾더니, 막상 오니 아무 반응이 없군.”

그의 말대로 페르닌드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숨을 쉬느라 오르내리는 상체만 아니었어도 죽은 줄


알 정도로 몰골이 시체 같았다. 늘 분홍빛을 띠고 있던 입술은 혈색 없이 창백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페르닌드가 죽는다고?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일어나 “이넷, 어서 다리


벌려.”라고 말할 것 같았다. 이네트는 울렁거리는 심장에 등을 돌리고 문으로 향했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카시엘은 떠나는 이네트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누워 있는 얼굴에 침을 뱉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페르닌드와 자신은, 그녀에게 죽음으로도 용서될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까.

* * *

떠나기 전날, 이네트는 묽은 수프를 떠먹으며 카시엘이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내일 이른 오전에 배를 타고 출발할 거야. 2 주라는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배에서 가장 좋은


선실에서 지내게 될 테니 지내는 데 크게 무리는 없을 거다.”

“…네.”

그녀는 의무적으로 입 안에 들어온 음식을 삼키고, 영혼 없는 인형처럼 짤막하게 대답했다.

“바스타드 왕국에 도착하면 곧바로 그곳의 왕과 인사를 나누기로 했어.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일리아드
제국과 바스타드 왕국의 사이는 나쁘지 않으니까. 그들이 호위 또한 붙여주기로 했다.”

이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철저했다. 지크프리트, 그 작자는 만약의 가능성이라도 철저히
막아두고 싶은 듯했다.

‘아가씨, 기다리십시오. 제가 꼭 데리러 가겠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배를 타고 떠나야 하는데, 에일은 아직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므로 실망도 없었다.

이네트가 식기를 놓고 일어서자 카시엘도 따라 일어섰다. 그가 그녀의 뒤를 쫓으며 조그맣게 말했다.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오늘은 이르게 잠자리에 들도록 하지.”

방까지 따라오겠단 소리였다. 이네트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 * *

이네트는 제 어깨를 잡고 흔드는 손길에 부스스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금색 눈동자가 먼저 보였다.

“이네트, 이제 슬슬 일어나서 준비해야 한다.”

이네트가 졸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그러자 그가 정신 차리라는 듯 그녀의 손을 붙잡고선


상체를 일으켰다.

“목욕물은 내가 받아놨어. 갈아입을 옷도 앞에 준비해뒀다. 식사는 이곳으로 가져다줄까? 아니면 배


안에서 먹어도 돼.”

“……가서 먹을게요.”

“그래.”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맛이 없었다.

이네트가 욕실로 향하자 그가 당연하다는 듯 뒤따라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는 그에게 뭐 하는


짓이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그가 그녀의 굳은 얼굴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목욕 시중을 들어주려고.”

“필요 없어요. 나가요.”

그녀가 단호하게 욕실 문을 쾅, 닫았다.

이네트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채 목욕을 했다. 목욕을 다 끝낸 뒤 수건으로 몸을 닦은 다음,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카시엘이 이네트에게서 수건을 빼앗듯 가져가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주며
말리기 시작했다.

하지 말라는 소리도 이젠 귀찮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머리를 다 말리자 이제는


빗으로 머리까지 빗겨주었다. 빗으로 빗기고, 손으로도 빗기면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사뭇
불쾌한 감각이었지만 이네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그가 옷매무새를 정돈해주고, 동백나무 수액에서 추출한 화장수를 솜에 적시고는 피부 결을


정돈해주었다. 손길은 그리 능숙하지 않았고 서툴렀다.

“……이제 갈까?”
이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 밖으로 나서고 쭉 걷던 중,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요.”

“어디? 왜?”

“도망치려는 거 아니니까 상관 마요.”

그가 할 말이 많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그녀는 무시하고 그를 지나쳐 갔다. 잠들기 직전에도,


일어나고 나서도, 목욕을 하면서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었다.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혼란에 휩싸였다. 스스로에 대한 환멸에 치를 떨면서도 그곳으로 가는 발걸음은


막을 수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막상 들어가려니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이네트는 심호흡을 몇 번 하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조용했다. 며칠 전에 맡았던 약 냄새는 여전했다. 이네트는 그때와 다를 바 없이 죽은 듯 누워


있는 페르닌드에게 다가갔다.

“네가 말한 게 이거야?”

“…….”

“죽어서 나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거였어?”

개 같은 새끼. 빌어먹을 놈. 이네트가 잘 하지도 못하는 욕을 뇌까리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어린 시절엔


제게 희망이라는 동아줄을 내려주더니, 커서는 창녀라며 경멸하고 저를 지하실에 가둔 놈이었다.

이제는 전처럼 격렬한 증오도, 미움도 없다. 그저 멍했다. 꼭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저 흘러가는 대로, 떠밀리는 대로 떠밀리고, 하라는 대로 하고…….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던 악귀가 죽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조금 예상 외일 뿐이다. 슬프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넷.”

흐려진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네트가 눈을 깜빡거리며 페르닌드를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눈을 뜬 채로,


그가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이넷…….”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희미하긴 하지만 페르닌드가 눈을 뜨고, 입을 열고 말하고 있었다. 이네트가


몸을 굳혔다.

누군가를 불러와야 했다. 고민은 짧았다. 등을 돌리는 순간, 페르닌드가 말했다.

“가지 마…….”

“…….”

“가지… 마, 제발….”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페르닌드가 이네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실 달린 인형처럼 휘청거리며 부들거리던
손은 이내 다시 시트에 풀썩, 쓰러졌다.

“다시… 돌아온 거야?”

“…….”

“이거, 꿈 아니지…?”

페르닌드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네가, 여기 있을 리 없는데….”

그의 질문에 이네트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도저히 카시엘 디에드반과 결혼하게 되어 공작부인으로
이곳에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기엔 수치스러운 사실이었다.

“이, 넷, 나…….”

페르닌드가 말을 잇다 돌연 목이 아픈지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들썩거리는 몸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끙끙거리며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이네트가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사람 불러올게.”

그녀가 등을 돌리자마자 그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싫어! 가지 마. 가서는 다신 안 올 거잖아.”

페르닌드가 눈꼬리를 일그러트렸다. 이네트는 기침으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올 거야.”

“정말로?”

“응. 그러니까 다시 누워.”

어정쩡하게 상체를 일으킨 페르닌드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서서히 몸을 뉘었다.

“정말… 다시 올 거지?”

“그래.”

어차피 이곳으로 와야만 했다. 이곳 말고 달리 갈 곳도 없었을뿐더러, 자신은 묶인 것과 다름없는


몸이었다.

“정말로?”

그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물기에 번들거리는 눈이 약속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녀의 얼굴에


체념과 한숨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응.”

“이넷, 꼭 돌아와야 해…….”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까지 페르닌드는 확인받고, 또 확인받으려 애썼다. 이네트가 문을 닫고 고개를 든


순간, 낯익은 얼굴에 움직임을 멈췄다.

카시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쥐고 있던 문고리를 놓으며 그를 지나치려 했다. 허나 그가 팔목을


붙잡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네트.”

그가 닫힌 문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왜 저기서 나오지?”

“……떠나기 전에 한 번 보고 가야 할 것 같았어요. 괜히 마음 찝찝해지는 거 싫으니까요.”

이네트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자 카시엘의 얼굴에 복잡한 상념이 내려앉았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이어 물었다.

“말소리가 들리던데. 페르닌드가 깨어났나?”

“네.”

카시엘은 안도한 듯, 그러면서도 무어라 형연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근처에 있던 사용인에게
주치의를 불러 페르닌드를 돌보라 지시했다.

“더 늦기 전에 이만 떠나지.”

그가 팔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려 그녀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그가 흘긋,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동 없이 잔잔하자 그가 손가락 모두를 그녀의 손가락에 얽었다.

이네트는 쇠사슬처럼 얽힌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가 걷는 대로 따라 걸었다. 맞잡은 손은 컸고,


이전처럼 강제로 끄는 힘은 없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자 화려한 마차 뒤로 두 대의 마차가 보였다. 짐을 실은 마차였다. 마부는 이미 출발


준비를 끝냈는지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이네트는 카시엘이 이끄는 대로 화려한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올라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출발했다. 저택 앞에 일렬로 서 있던 사용인들이 공작 부부의 여행을 축하하며,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앞다투어 전했다.

수도에 자리한 디에드반 공작저에서 검문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네트는 처음으로 검문소를
통과했다. 맥이 빠질 정도로 쉬웠다. 기사들이 진을 치고 막고 있는 검문소는 디에드반 공작 가문의
마차라는 소리에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마차를 수도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수도 밖으로 나가는 과정이 이리도 쉬운 것이었나. 이네트는 씁쓸해졌다.

잘 닦인 도로와 푸르른 나무들이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갔다. 이따금 마차가 덜컹거릴 때면 카시엘이


이네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속이 울렁거리지는 않아?”

“…….”

“배가 고프면 말해. 간단하게 먹을 것도 들고 왔으니까.”

이네트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창밖의 풍경에 집중했다. 그렇게나 벗어나고 싶었는데, 막상 수도를
벗어나니 느끼고 싶은 해방감은커녕 속이 막힌 듯 답답하기만 했다. 목 밑까지 물이 차오른 듯했다.

수도 밖도 별거 없구나. 감상은 시들했다.

마차는 두 시간을 달려서야 항구에 도착했다. 이네트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코끝을 스치는 바다 냄새에
숨을 들이켰다. 처음 맡는 바다 냄새였다. 짜고 비리면서도 시원하고 습했다. 난생처음으로 느껴보는
향기에 그녀의 마음이 덜컹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의 모습 또한 그녀의 마음을 더욱 덜컹거리게 했다. 푸르고 드넓었다. 바다는 끝도
없이 넓었다. 끊어질 기미 없이 죽 이어진 바다는 두려워질 만큼 광활했다. 순식간에 바다에 압도당할
만큼.

책에서 글자로 보던 바다였다. 이때껏 자신이 보았던 설명은 바다의 위용을 다 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스스로 낯설 정도로 오래간만에 느끼는 들뜬 감정이었다.

전과 달리 이네트의 표정에 생기가 돌자 옆에 있던 카시엘이 희미한 미소를 띠고 물었다.

“이네트, 바다를 처음 보나?”

그녀에게서 대답이 없어도 그는 그녀가 바다를 처음 보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배에 오를 때조차 그녀는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혹여나 배를 오를 때 그녀가 넘어질까 싶어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그녀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발밑을 조심해.”

아무 탈 없이 배 안으로 들어온 다음, 그는 곧장 예약한 선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따라온 사용인들 중 한


명에게 선실로 음식을 가져오라 시켰다.

배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겁먹은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겁 안 먹어도 돼. 원래 출발할 땐 덜컹거려.”

배를 몇 차례 타본 경험이 있는 그가 안심하라는 듯 그녀를 도닥였다. 그녀는 여전히 낯선 배 안의 풍경을


겁먹은 눈동자로 둘러보며 그와 함께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에서 지내던 방과 다를 바 없이 선실 안은 고급스럽고 있을 만한 게 다 갖추어져 있었다. 선실 내부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 사용인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카시엘은 음식을 받아들고는 이네트가 앉아 있는
침대 맡 옆에 앉았다. 먹기 좋게 잘린 팬케이크를 포크로 집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직도 입맛이 없어?”

“…….”

“아, 아직 팬케이크는 무리인가?”

이네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입 안으로 달달한 메이플 시럽이 퍼졌다. 달고 맛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이네트는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고 삼켰다.

팬케이크를 다 먹자 그가 연이어 샐러드를 먹였다. 반쯤 먹었을 때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에 음식물이 차자 움직이고 싶었다. 선실 밖으로 나서자 카시엘 또한 따라 나왔다.

이네트는 여객선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갔다. 옥상 위의 갑판에


서서 멍하니 바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카시엘은 바다를 머금고 있는 이네트의 푸른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저 눈에 홀린 듯
사로잡혔다. 바다를 바라보는 푸른 눈은 빛이 나는 것 같기도 했고, 물기를 머금은 듯 번들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네트, 혹시 후회하고 있나?”

그 말에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했다.

“후회라면…… 이미 진즉에 했어요.”

많은 뜻이 함축된 말이었다. 카시엘은 더 묻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결국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만 그녀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그녀는 느리게 물결치는 파도보다 잠잠했다.

* * *

2 주 동안의 여정 동안 이네트는 여객실에서 멍하니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거나, 갑판에 나가 바다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선실에 죽은 듯 누워 있을 때도 있었다. 카시엘은 인형처럼 누워 있는
그녀보다 적어도 사람을 바라보거나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더 좋았다. 속마음은 알 수
없을지언정, 적어도 그녀가 살아있는 것 같아서.

여정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카시엘은 그녀가 어디론가 나갈 때 함께 따라 나가도 그녀가
저지하지 않아 좋았고, 좁은 선실 안에서 이네트와 단둘이 붙어 있는 상황이 좋았다. 정작 이네트의
마음은 알 수 없었으나.

2 주 동안 바다 위를 달리던 배가 드디어 육지에 상륙했다. 배가 완벽히 멈춰서고 나서야 카시엘은


이네트와 함께 배 밖으로 나갔다. 이곳까지 따라온 사용인들이 짐을 챙겨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이미 항구에는 바스타드 왕국에서 보낸 수하들이 카시엘과 이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일리아드
제국에서 이곳까지 머나먼 여정을 마치고 여행 온 디에드반 공작 부부를 환영했다.

이네트는 일리아드 제국과 달리 습하고 머리가 뜨거울 정도로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 햇빛 때문인지 피부가 구릿빛이었고, 옷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짧고 노출이
심했다. 일리아드 제국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국의 남다른 분위기에 곧바로 적응하지 못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들이 준비한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곧장 바스타드 왕국의 수도, 레아난으로 향했다. 이네트는 마차 밖으로 보이는 야자수와 아무렇지
않게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들개들을 바라보다가 지나친 햇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자 카시엘이
손을 뻗어 햇빛을 가려주었다.

항구에서 수도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 편이었다. 가는 도중에 해가 지자, 결국 중간에 어느 마을에서


하룻밤 묵을 수밖에 없었다. 카시엘은 그 마을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방을 잡았으면서도, 혹시나
이네트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싶어 그녀의 의중을 살폈다.

“이네트, 이 호텔로 괜찮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마을의 호텔로 가도 돼.”

“상관없어요.”
그녀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허름한 여관이든, 호화로운 호텔이든 어디든 간에 상관없었다.

바스타드 왕국에서 붙여준 수하들과 카시엘이 데려온 사용인들이 많아 주변이 북적거렸다. 생소한
게르단어도 귀에 박혔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자들 모두 즐거워 보였다. 심지어
잡일을 하기 위해 따라온 사용인들마저도 즐거운 듯 얼굴에 웃음기가 스며있었다.

카시엘은 현지인인 호텔 지배인과 능숙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네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대화하고
있는 그의 옆에 멀거니 서서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네트, 올라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카시엘이 이네트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위층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 좋은 방으로 잡았어. 이 방이 이 호텔에서 제일 좋다더군.”

그가 그렇게 말하며 방문을 열었다. 연 순간, 불쾌한 광경이 펼쳐졌다. 호텔 측에서 신혼부부라고
스위트룸으로 잡아준 것인지 침대 모양이 하트 모양인 데다 침대 위 천장은 거울로 되어있었다.

욕실은 투명한 창으로 되어있었고, 욕조도 하나였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안이 훤히 보이는 욕실을
흘긋 보았다. 목욕하는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카시엘 또한 이러한 사실은 몰랐는지 당황한 얼굴로 이네트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목욕할 동안 나가 있어요.”

“…그래.”

카시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밖으로 나갔다. 그가 밖에 나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이네트는 목욕을


시작했다. 호텔 측에서 구비해둔 배스 밤을 욕조에 풀고, 느긋하게 목욕했다.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알기에 더 오래도록 목욕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목욕을 끝내고, 몸을 닦은 다음 준비된 가운을 걸치고 나갔다. 문을 열자 벽에 기댄 채


기다리고 있던 카시엘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 들어가도 되나?”

“네.”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그가 그녀의 덜 마른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말했다.

“이네트, 대충 말리면 감기 걸려. 제대로 말려.”

이네트가 귀찮다는 듯 눈을 피해도 카시엘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지 기어코 그녀의 머리를 다 말려준
다음에야 그도 목욕을 하러 들어갔다. 그녀는 굳이 그가 나가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보고 싶지 않아
밖으로 나갔다.

방문 근처에서 쭉 기다리다가, 이제 됐겠지 싶을 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닫고 고개를 든 순간,


이네트는 헐벗다시피 한 카시엘과 눈이 마주쳤다.

“아.”

언제나 어두컴컴했던 지하실, 혹은 밤늦게 그와 몸을 섞은 적이 대부분이었기에 조명이 있는 밝은 곳에서


그의 몸을 적나라하게 살펴본 것은 처음이었다. 벌어진 어깨와 부푼 가슴, 그리고 탄탄하게 자리 잡은
근육과 함께 옆구리에 희미한 흉터가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그곳에 오래 머무르자 그가 말했다.

“별거 아니다. 대련을 하다가 방심한 사이 베여서….”

“걱정한 거 아니에요.”

“…알아. 그냥, 궁금한 거 같아서.”

대화가 어색하게 끊겼다. 그가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로 위에 가운을 꿰입었다. 채 닦지 않고 입은 탓에


가운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네트는 침대로 가 그가 보이지 않도록 벽을 보고 누웠다. 그는 제게서 등을 돌린 채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멀뚱히 서서는 머리를 말렸다. 머리를 다 말린 다음, 그가 그녀의 등을 향해 물었다.

“식사는? 룸서비스로 부를까?”

“아뇨. 안 먹을래요.”

그녀가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카시엘은 어쩔 수 없이 혼자 호텔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그의 사용인들이 주인을 보자마자 일어나 인사했다.

“공작님, 왜 마님과 함께 오시지 않고…….”

“먹지 않겠다고 하더군.”

그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식당의 음식들을 쭉 둘러보았다. 바스타드 왕국의 음식은 일리아드 제국의
음식과 달리 익힌 과일과 생선 요리가 많았고, 간이 센 편이었다. 그는 음식 중에서 덜 달고 덜 기름진
것을 골라 식사를 시작했다.

한 입 먹자마자 이상하게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도 모르게 포크를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가 포크를


바닥에 떨어트리자 근처에 있던 사용인이 다가와 그에게 새 포크를 갖다 주었다.

“공작님, 괜찮으세요?”

사용인이 조마조마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녀님과 결혼한 이후로는 토를 하거나 식기를 떨어트리는
일이 없다시피 했기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카시엘이 다시 포크를 쥐었다. 포크를 쥔 손끝이 미약하게나마 떨리는 걸 본 그가 눈을 좁혔다. 그는


결국 몇 입 먹지 못하고 식사를 중단했다.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지만 뒤처리 좀 부탁하지.”

그리고는 곧바로 호텔 밖으로 뛰쳐나갔다. 인적 없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우욱, 헛구역질이 밀려오며 입


밖으로 방금 먹은 음식물이 쏟아졌다. 위액까지 역류한 탓에 목이 따끔따끔했다. 카시엘이 짧게 기침했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단 말인가.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더부룩하고 불쾌했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호텔 1 층에 있는 화장실에서 가서 입을 닦고 깨끗하게 헹군 뒤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 불 꺼진


방 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이네트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카시엘은 잠든 이네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 옆으로 다가갔다. 잠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자고 있어서 거부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그는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는 없었다.

* * *

다음 날, 잠에서 깬 이네트는 카시엘과 함께 식당에 내려가서 식사를 했다. 그녀는 일리아드 제국과 달리
고기와 익힌 과일이 가득한 식당의 음식들을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았다.

그녀가 달고 기름진 음식들을 골라서 집자 카시엘이 피식 웃었다. 그녀의 눈이 왜 웃냐는 듯 날카롭게


변하자 그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변명했다.

“그게 아니라, 네가 좋아하겠다 싶은 걸 고르기에 신기해서 웃은 거다.”

이네트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마저 음식을 골랐다.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제 입맛은 단순했다.


달고, 기름지고, 자극적인 걸 좋아했다. 그런 그녀의 입맛에 바스타드 왕국의 음식은 딱 맞았다.

예상대로 한 입 먹자마자 맛있어서 눈이 뜨였다. 벌건 소스에 버무려진 폭립 바비큐는 자극적이면서도


달달했고 또 감칠맛이 났다. 뿐만 아니라 생선구이 또한 간이 세서 맛있었다. 익힌 과일은 차가운 과일과
달리 식감이 부드러워 삼키는 맛이 좋았다.

고른 음식 모두 입맛에 다 맞았다. 그간 식욕이 없어 지지부진하게 식사를 했던 것과 달리 이네트는


순식간에 음식을 먹어치웠다.

“맛있나?”

보면 알 텐데 왜 굳이 묻는 거지? 이네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레몬 에이드를 쭉 들이켰다. 조금 느끼했던


속이 뻥 뚫리며 시원해졌다.

“제국으로 돌아가면 바스타드 왕국 출신의 주방장을 데려와야겠군.”

그가 눈을 휘며 말했다. 이네트는 순간 멈칫했다.

카시엘 디에드반이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그의 낯선 얼굴이었다.

왜 웃고 있지? 왜 저 사람이 행복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치고 간 것처럼 둔한 충격이 오갔다. 이네트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에이드


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카시엘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네트?”

이네트가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떠나자 그가 급하게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았다.

“이네트!”
그가 곧바로 그녀를 뒤쫓으며 그녀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 *

점심 쯤 돼서야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이네트는 어제보다 더 심해진 햇빛에 차창 구경을 포기하고 마차에
몸을 기댔다. 덥고 습해서 잠은 오지 않았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카시엘이 손수건으로 이네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바스타드 왕국은 원래 덥고 습한 편이다. 많이 찝찝할 테지만 조금만 참으면 곧 도착할 거야.”

안 그래도 더워서 불쾌한데 그가 옆에서 말을 붙이니 더 기분이 나빴다. 이네트가 땀을 닦아주는 그의


손을 거세게 쳐내고는 눈을 감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손수건이 마차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순간, 덜컹거린 마차 때문에 손수건이


이네트의 신발에 밟혔다.

그가 더러워진 손수건을 보고선 몸을 굳혔다. 고요가 마차 안을 메웠다.

수 초가 흘러서야 카시엘이 몸을 굽혀 떨어진 손수건을 주웠다. 마차 바닥에 쓸리고 이네트의 신발에


짓밟힌 손수건은 이미 가장자리에 수놓아진 검과 장미에 때가 타 있었다. 그의 눈이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렀다.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이네트의 바람대로 카시엘은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 * *

마차는 수도에 도착한 다음, 곧바로 바스타드 왕궁으로 향했다. 아치형으로 된 거대한 궁은 색채가
무척이나 화려했으며 기둥과 높은 천장에 보석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바스타드 왕국의 부를 뽐내는
것처럼 으리으리했다.

조각상으로 된 분수대에서 힘 있게 물이 뿜어져 나오는 건 처음 봐서 이네트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 뜨일


정도였다. 그녀의 시선이 이색적이면서도 화려한 건축물 이곳저곳에 진하게 닿았다.

마차는 계속해서 달려 왕이 있는 궁에 도착했다. 다른 궁도 화려하지만, 왕이 기거하는 궁은 그 화려함이


극치였다. 이네트는 수하들이 이끄는 대로 걸으면서도 눈을 굴려 화려한 조각상과 건축물을 구경했다.

넓은 왕궁의 복도를 쭉 걷자 이어 황금색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와 그 남자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카시엘과 이네트와 눈이 마주친 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스타드의 왕은 노환으로 얼굴에 검버섯이
군데군데 피어있었는데, 그럼에도 눈빛과 꼿꼿이 선 자세가 젊은 사람 못지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그는
제 나라에 여행 온 카시엘과 이네트를 진심으로 반겼다.

“바스타드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귀인이여.”

“바스타드의 찬란한 태양을 뵙습니다.”

카시엘이 고개 숙여 인사했고, 이네트도 그를 따라 똑같이 인사했다. 타국의 왕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그녀는 조금 긴장했다. 하지만 그 긴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인사치레만 나눈 뒤, 얼마 되지 않아 왕과의
조우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아까 마차에서의 일 이후 줄곧 침묵을 지키던 카시엘이 왕궁의 복도에서 조심스레 이네트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그와 손을 잡은 채 다시 마차로 돌아갔다.

왕궁을 벗어날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바스타드 왕국의 시장에는 신기하고 진귀한 물건이 많다더군. 떠나기 전에 한번 들러보겠나?”

“네.”

이네트가 그를 바라보지 않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카시엘이 마부를 향해 시장에 들리라 지시하였고, 곧


마차는 수도의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에 도착한 카시엘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사용인과 바스타드 왕국의 수하들에게 일렀다.

“나와 이네트 단둘이서 돌아다니겠다. 모두들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좋으니 한 시간 뒤 복귀하도록.”

사용인들과 수하들이 환호하며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곧 카시엘이 이네트의 손을 움켜쥔 채,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이 많으니까 놓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손을 놓아선 안 된다.”

그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윽고 그와 그녀가 손을 잡은 채 시장의 입구를 넘어서 많은 인파 속으로


밀려들어 갔다.

이네트는 북적거리고 시끄러운 주변을 힐끔힐끔 둘러보았다. 생김새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달라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북적거리고 웅성거리는 분위기가 그리 싫진 않았다.

“거기 귀족 나으리! 에벨루넨 대륙에서 온 산호 장식 머리끈을 부인께 선물하시는 것 어떠십니까? 보고


가세요!”

“이 실반지 어떻소? 금으로 된 반지도 좋지만 이런 반지도 이색적이라 좋다오!“

상인들이 딱 보아도 외국의 귀족으로 보이는 카시엘과 이네트를 향해 손을 흔들며 영업을 해댔다.

바스타드 왕국의 바다에서 난 커다란 진주 목걸이, 드네아 주스, 양꼬치, 사파이어 팔찌 등등 그들이
호기롭게 들이미는 물건들은 확실히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이 많았다. 그중 이네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녹색 비취였다. 별다른 세공을 하지 않은 직각 모양의 비취였다.

그녀가 오래도록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그것을 움켜쥐더니 상인에게 내밀었다.

“이것, 얼마지?”
“5000 데르한이라지요, 나으리.”

지나치게 비싼 값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군소리 없이 대금을 치렀다. 외국인이라 값을 두 배로 높게


불렀는데도 별다른 일 없이 큰 대금이 주어지자 상인의 눈이 기쁨으로 번뜩거렸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카시엘은 손에 들어온 녹색 비취를 이네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녀가 손 위의 비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쁜 눈빛은 아니었다.

“……갖고 싶던 것 아니었나?”

갖고 싶었나? 이네트는 멍하니 반들거리는 녹색을 바라보았다. 그저 보자마자 에일의 눈동자 색과


닮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에일의 눈동자는 이 비취처럼 진한 녹색에 투명하고 매끄러웠다. 그 눈이 저를 담고 웃고, 휘어지고,


어느 때는 격정을 담아 바라보곤 했는데…….

기억이 이어지자 그녀의 입술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눈물샘이 고장 났다. 그녀는 울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이네트.”

그녀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그가 실수했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또 네게 실수한 건가? 내가 또 네 기분을… 상하게 한 건가?”

카시엘이 옆에서 연신 고개 숙인 그녀를 살펴보며 물었지만, 그녀에겐 그 물음들이 귀에 와 닿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자 그가 낮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걸음에 맞춰 걸었다.

“이네트.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

“알려다오, 제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

“말을 거는 것조차 싫어?”

비척거리던 이네트의 걸음이 뚝, 멈췄다. 인파 속에서 걸음을 멈춘 탓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녀의 몸을


치고 가는데도 그녀는 아랑곳 않고 우뚝 선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던 눈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이채가 돌고, 이내 분노로 타올랐다.

죽어버렸다 생각한 분노와 심장에 드리운 체념, 심연에 가라앉아 버린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갑작스레
타올랐다. 그동안 오랜 무기력에 쇠약해진 육체가 한계를 넘어선 감정에 사시나무처럼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자식.”

이네트의 입에서 나온 신랄한 욕설에 그녀의 손을 쥐고 있던 카시엘이 몸을 굳혔다.

“내가 그때,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었지.”


“…….”

“그럼에도 부득불 나타나 결국 나와 결혼까지 한 주제에, 날 그렇게 괴롭게 한 주제에 감히 행복하다는 듯


웃다니. 어떻게든 내게 말을 붙이려 안달을 내고, 날 자극하고…….”

“…….”

“내가 당신을 좋아하게 될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설령 이보다 고통스럽게 죽는다 하더라도.”

카시엘의 얼굴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 났다. 이네트의 손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가 숨을 멈추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허공을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목덜미에 오래도록
머무르다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눈에서 코로, 코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목덜미로, 쇄골로, 가슴으로, 결국엔 배로…….

“그렇게 한복판에 서 있으면 통행에 방해되잖아!”

누군가 크게 외치고 지나갔다. 카시엘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붙박인 것 마냥 서 있기만 했다.
이네트가 손을 탁, 쳐내자 그의 손이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손이 떨어져 나갔는데도 카시엘은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이네트가 그를 노려보다 등을


돌렸다. 그제야 그가 더디게 고개를 들었다.

“이네트….”

그가 조그맣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타오르는 분노에 잠식되어 그에게서 벗어나는 것만 생각했다.
그녀가 겁 없이 인파 속으로 헤쳐 들어가자 초점 없이 흐려져 있던 그의 눈이 순식간에 빛을 되찾고 번뜩
뜨였다.

“이네트!”

소리 높여 불렀으나 이네트를 막을 순 없었다. 그녀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카시엘이 제길,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가 사라진 쪽으로 뛰어 들어갔으나 이상하게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이네트!”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그에게도 들릴 정도로 거셌다.


불안과 초조함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물살에 휩쓸린 사람처럼 그가 답지 않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가 선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발을 딛고 선 땅이 무너지고, 하늘이 일그러졌다. 보이지 않는 칼의


비가 그의 온몸에 쏟아졌다.

“아…….”

고통을 이겨내고 사람들을 헤집는 그의 손이 정처 없이 떨렸다. 이네트, 부르짖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또 사라졌나? 또 내게서 도망쳤나? 다시는 볼 수 없나? 또 그때처럼…….

그의 이성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인파를 헤치며 이네트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던 그가 돌연 등을


돌리고 마차를 세워 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장을 구경하지 않고 마차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기사가 몇 명 있었다. 카시엘이 바스타드 출신


기사들에게 게르단어로 외쳤다.

“내 아내가 사라졌다. 방금 놓쳤으니 얼마 가지 못했을 거야. 당장 찾아!”

그의 절박한 외침에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 대답하고는 시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순식간에 북적거리던


시장은 기사들의 추격과 난입으로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이네트!”

카시엘 또한 시장 여기저기를 헤집으며 이네트를 쫓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
발견할 수 없었다. 은색 머리카락은 이곳에서 흔하지 않았고,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는 이곳의 복식과
달라 눈에 띌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점철된 가슴이 그네를 타듯 오르내렸다. 또다시 그의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

카시엘이 구역질을 했다. 허나 이곳에 오기 전 몇 번이나 속을 게워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고는


위액밖에 없었다. 그가 타들어 가는 가슴을 쥐어뜯듯 움켜쥐었다. 심장이 불에 지져진 것처럼 아팠다.

이네트, 넌 그토록…….

그의 입에서 앓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죽은 생선처럼 죽어버린 눈이 쑥대밭이 된 시장을 멀거니 둘러볼


뿐이었다.

7. 희게 피어난 백합

이네트는 제 입가를 틀어막고 빠르게 어두운 뒷골목으로 내달리는 남자의 품에서 발버둥 치다가, 이내
낯익은 품과 익숙한 냄새에 반항을 멈췄다.

“으, 으읍.”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입이 막혀 있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알았는지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워 마지않았던 이의 목소리가 맞았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네트의 눈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속절없이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입을 막은 그의 손이 흠뻑 젖어 들었다.

뒤에서 안고 있던 에일이 자세를 고치고, 그녀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았다. 그제야 이네트는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전보다 마르긴 하지만 에일이 맞았다. 색이 조금 빠지긴 했지만 검은색으로 염색한 머리도 여전하였고,
무엇보다 따스한 녹색 눈동자가 그라는 것을 증명했다.

다시 보게 되었다는 기쁨과 그리움은 잠시, 곧이어 공포와 불안이 밀려왔다. 이네트의 몸이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지크프리트, 그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카시엘 그자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레 사라졌으니 더욱더


찾으려 애를 쓸 것이다. 이곳이 아무리 타국이라 해도,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못 찾을 것도 없었다.
지크프리트의 전언으로 바스타드의 왕이 수하들까지 붙여주었기에 어쩌면 나라 간의 갈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쨌거나 자신은 비록 반쪽짜리일지라도 황녀였다.

“에일,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돌아가자. 그러면 지크프리트가 용서해줄지도 몰라.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그녀의 목소리가 곧 시들 꽃처럼 나약하게 떨렸다. 새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내가, 내가 어떻게든 잘 말해 볼게. 그러면 괜찮을 거야. 지금이라도 가면 아무 일도,”

“아가씨.”

에일이 이네트의 뺨을 쓸었다.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던 그녀의 말소리가 끊겼다. 아직도 그녀의 눈에서는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시체처럼 죽은 얼굴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아가씨를 두고 제가 어떻게 혼자 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씀 마십시오.”

그가 품에 있는 이네트를 꽉 안은 채 속도를 더 빨리했다. 한시가 급했다. 공작은 상황 판단이 빨랐다.


금세 눈치채고 추격에 박차를 가할 게 뻔했다. 공작에 이어 황태자까지 개입하게 된다면 더욱 상황이
악화될 게 자명했다. 그러니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빠르게 피신해 몸을 숨겨야 했다.

오래도록 이 기회를 기다렸다. 바스타드 왕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신이
내려주신 선물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바스타드 왕국은 지금 왕위 다툼으로 인해 내정이 엉망이었다.
가뜩이나 나라의 관리들은 부패해 돈만 조금 쥐여 주면 수도의 문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벌컥벌컥
열어주었다. 철저히 자본 중심적인 나라였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가능했다.

이미 수도 검문소를 지키는 기사와 문지기를 매수해둔 상태였고, 이곳을 떠날 준비는 마친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곳까지 안전하게 가는 것이었다.

에일은 매수해둔 짐 마차에 올라탄 뒤, 그녀를 짐 뒤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어 몸을 숨기게끔 했다.

“아가씨. 걱정 마시고 절 믿어주세요.”

아직도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는 이네트를 에일이 꽉 부둥켜안았다. 그녀의 두려움은 충분히 실체가 있는


것이었다. 지크프리트의 힘은 실로 강력했다. 허나 그 강력한 힘은 어디까지나 일리아드 제국과 로아드
대륙에 국한된 것이었다.

목적지는 하나였다. 게르단 대륙보다 훨씬 멀고,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곳.

에벨루넨 대륙에 있는 갈로아 공국이었다.

“우리는 갈로아 공국으로 갈 겁니다.”

“……갈로아 공국?”
“생소하시겠지요. 에벨루넨 대륙에 있는 작은 공국입니다. 그곳이라면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두려움을 차마 다 뿌리치지 못한 이네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에일의 옷깃을 거머쥐었다. 그는


안심하라는 듯 입꼬리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비록 작위를 받지 못한 일개 귀족에 불과하지만, 금전적으로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이미 금전은


확보해두었고, 형과 누이에게도 미리 말해놓았습니다. 그곳으로 갈 배도 미리 매수해두었고요.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좀 돌아서 갈 생각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 내가 뭐라고, 왜 나 때문에 네 모든 걸 포기하면서…….”

“때로 사람은 사소한 것에 크게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소한 것이 아닌 크고 소중한 것에는 더욱


크게 흔들리지요.”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바람처럼, 그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아가씨를 사랑합니다. 무척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아가씨는 제게 있어 제 모든 것을


버려도 상관없고, 오히려 버리고서라도 함께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네트의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에일은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혀로 핥아먹었다.

“그러니…… 부디 저와 함께해 주세요.”

그가 애타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그녀의 고개가 꺾인 꽃처럼 아래로 툭, 떨어졌다. 옷깃을 거머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리 죽여 울던 이네트가 천천히 에일의 가슴팍에 뺨을 댔다. 계속해서 솟아나는 눈물로 가슴팍이 눈물로
젖어 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부둥켜안은 연인은 오래도록 눈물이 가득한 재회를
만끽했다.

* * *

카시엘은 이네트가 없어진 이후, 식사는커녕 잠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바스타드 왕국을
샅샅이 뒤져도 이네트를 찾을 수 없었다.

일부 목격자들의 진술이 있었으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심장이 타들어 갔다.

이 소식은 황태자의 귀에도 들어갔다. 황태자는 소식을 듣자마자 직접 바스타드 왕국에 행차했다.
바스타드 왕이 붙여준 수하들이 있는데도 황녀가 사라졌다. 황녀의 안위에 문제가 있을 시, 자칫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부패한 관리와 내정 문제에 더 시급한 왕실 등, 뿌리부터 썩어있었기에 추격은 맥을 추리지 못했다.


심지어 수도 검문소의 기사와 문지기 모두 돈만 주면 누구에게나 수도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나라 안의 사정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크프리트는 처음에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허나 시간이 흘러도
이네트를 찾지 못하자 여유로움은 어느새 분노로 변모했다.

“공작,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를 가졌기에 누이를 놓친 거지? 누이는 네 부인이기 전에 황녀일 텐데?”

“면목 없습니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거듭되는 구역질과 불면증으로 인해 초췌해진 카시엘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랬다. 제 잘못이 맞았다. 이네트를 놓친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이네트를 자극했던 것인가? 사라지기 전날부터 이네트의 상태가 이상하긴 했다. 갑자기 식사를
하다가 도중에 자리를 뛰쳐나가고는, 그날부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짓밟은 손수건을 떠올리자 마음
한편이 욱신거렸다.

비취를 선물하자 눈물을 흘리던 이네트……. 그조차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았다.

어떻게 했어야 했지? 내가 어떻게 해야, 도대체…… 이네트가 나를…….

부들거리며 떨리는 몸은 좀처럼 떨림이 멎지 않았다. 황태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몸이
제어되지 않았다. 카시엘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지크프리트가 제길, 욕설을 뇌까리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잔이 산산조각 났다.

“일단 왕국을 샅샅이 다 뒤져. 우선 나는 제국으로 돌아간다. 공작, 어떻게 해서든 찾아. 그대가
죽더라도. 알겠나?”

“알겠습니다.”

“우선 그 빌어먹을 데반 백작가부터 털어버려야겠어.”

지크프리트가 삐뚤게 입매를 올렸다. 검을 고쳐 쥔 그가 몸을 돌렸다. 망토가 펄럭이며 그의 등을 감쌌다.

황태자가 탄 마차가 떠나자마자 카시엘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식은땀이 손바닥에 흥건히
묻어났다. 아랫입술을 깨물자 부르트고 창백하게 질린 입술에서 피가 터졌다. 그는 씁쓰레하게 감도는 피
맛을 느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고통스러웠다. 이대로 죽는다 해도 믿어질 정도로.

“흐으…….”

억눌린 신음이 잇새 사이로 흘러나왔다. 부들거리는 몸은 결국 힘을 잃고 바닥에 허물어졌다. 무릎이


바닥과 닿았다.

“이네트…….”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울컥, 무언가 차올랐다. 카시엘은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상체를 느끼며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뜸과 동시에 고여 있던 것이 후드득, 떨어졌다. 시야가 흐릿했다.

내가 울고 있는 건가?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운 적 없는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눈가를 쓸었다. 눈물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후드득, 눈물은 계속해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아무리 눈물을 참으려 애써도, 눈을 감아도 둑이 터지듯
넘쳐버린 감정은 속절없이 그를 침몰시키고, 무너트렸다.

“으윽, 흐….”

억눌린 울음은 오래도록 멈추지 않았다. 이네트, 그가 어미를 찾는 아이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흐느끼는 신음과 억눌린 울음소리만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 * *

게르단 대륙에서 에벨루넨 대륙까지의 여정은 길고도 길었다. 여정이 길어져 날씨가 안 좋거나 파도가
심하게 치는 날엔 근처에 있는 아무도 없는 섬에서 표류하는 날도 제법 있었다.

에일과 함께 하는 여정이 길어질수록 이네트의 표정은 점점 생기를 찾아갔다. 두려움과 초조함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이전의 싱그럽고 올곧은 모습이 점점 더 드러났다. 사라진 미소도 점차 모습을 보였다.

이네트는 멀리서 저들끼리 떠들면서 생선을 구워 먹고 있는 선원과 선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야?”

“보르비아 제국의 선원들입니다.”

“…괜찮아? 혹시 모르잖아.”

“많은 돈을 지불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입 뻥긋하지 않고 함구하는 조건으로요. 그리고 저들은 바스타드


왕국의 사람이 아니니 괜찮을 겁니다.”

“그래? 그러면…… 괜찮겠지.”

이네트가 생선을 뜯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스레 살을 뜯어 먹는 모습에 에일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공국에 가면 꼭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난 이것도 좋은데?”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그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들었다.

“그래도 가시에 목이 찔릴까 걱정됩니다. 저 주세요.”

“아냐, 나 가시 발라 먹을 줄 알아.”
그가 못 말리겠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며 작살에 꽂혀 있는 생선을 빼더니, 정성스레 가시를 바르기
시작했다. 살에 촘촘히 박혀 있는 가시를 세심하게 다 빼고 나서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왜? 너 먹어.”

“전 배가 불러서 더 못 먹어요.”

그가 그녀의 손에 작살을 쥐여 주기까지 하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부드러운 살점을 입 안에 넣었다.


간이 되지 않아 밍밍했지만 에일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라 맛있게 느껴졌다. 그동안 가시방석에 앉은 듯
구역질 나던 식사를 언제 했었냐는 듯 심적으로도 한층 안정이 되었다.

식사를 마친 뒤, 에일과 이네트는 만들어 놓은 나무집 밑에 크고 두터운 천을 깔고선 몸을 뉘었다. 서로


마주 보고 누운 채 의미 없는 미소를 지으며 키득거렸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들 얼굴이 전부 쓰레기 범벅이 되었죠. 그중에는 누가 먹다 버린 토스트가 얼굴 정중앙에 맞아서 꼴이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자리를 피할 수 있었어요.”

지금이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당시엔 아찔한 상황일 것이다. 그럼에도 에일은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저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그가 안쓰러워
이네트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미안해, 에일…….”

“아가씨께서 제게 죄송할 것 없어요. 앞으로 제가 서툴러 죄송할 일이 더 많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녀가 말없이 다정한 에일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비취를 품에서 꺼냈다.

“이거, 바스타드 왕국에서 샀던 거야. 보자마자 네 눈동자가 떠올랐어.”

녹색 비취는 투박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그 빛만큼은 영롱하고 투명했다. 에일의 다정한 눈동자가
절로 생각날 만큼 따스한 빛이었다.

그가 비취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이내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아가씨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후부터…… 저는 제 성을 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에로드라는 이름도


버렸습니다. 아가씨께서 제게 주신 에일이라는 이름으로만 살아가겠습니다.”

달빛을 머금은 비취에서 빛이 났다. 그 빛에 비치는 에일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진중했고 사려 깊었다.
그 진심을 알기에 이네트의 심장이 쿵, 쿵, 가파르게 맥동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버린 에일을 향한 죄책감과 에이든과 에밀리를 향한 미안함, 그간 겪었던 일로 인해


생긴 무력감, 혹시나 또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한데 섞여 부딪혔지만, 이내 그러한
복잡한 생각과 이성은 모래처럼 부스스 허물어졌다. 이네트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갈로아 공국으로 가려면 보르비아 제국을 거쳐 가야만 했다. 이네트와 에일은 보르비아 제국에
도착하자마자 제국을 느긋하게 구경할 새도 없이 바로 말을 한 필 구매했다. 누군가의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것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부부 행색을 했다. 에벨루넨어(*에벨루넨 대륙의 공용어)를 할


줄 모르는 이네트는 수줍음이 많은 여인으로 둔갑했다.

에벨루넨 대륙은 몹시 추웠다. 무척이나 습하고 더웠던 바스타드 왕국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네트는
차라리 더운 것보단 추운 것이 낫다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럼에도 이가 다닥다닥 소리를 내며 부딪혔고,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이네트가 몸을 떨자 에일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고 두른 천을 더욱 꼼꼼하게 여몄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근처 마을에서 잠시 숙박을 하고, 날이 밝으면 밝는 대로 곧바로 출발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이네트는 좋았다.

“에벨루넨 대륙으로 너와 신혼여행을 오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 바람이 이루어지게 돼서 기뻐.”

옅은 미소를 띤 이네트의 뺨은 추위로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에일이 두 손을 비벼 열을 만들고는


뺨에 손바닥을 댔다. 이렇게나마 그녀의 추위가 가시기를 바라며.

“생활이 좀 안정화 되면…… 그때 꼭 온천 여행을 가요.”

에일이 눈을 휘며 말했고, 이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말을 타고 족히 일주일은 걸려 갈로아 공국에 도착했다. 갈로아 공국 또한 보르비아 제국만큼 춥고


삭막했다. 이곳은 공국민들 대부분이 추운 지방에서 비교적 잘 자라는 밀과 보리를 재배하거나, 언 땅을
캐고, 가축을 사육하거나 어류를 양식하며 살았다.

에일은 에벨루넨어를 할 줄 알아 공국민들에게 보르비아 제국에서 이민 온 보르비아 제국민 행세를 했다.


아내는 수줍음이 많아 말이 적다며, 멀뚱멀뚱 서 있는 이네트를 변호했다.

사람 좋은 인상의 에일이 살갑게 굴어도, 공국민들은 이민자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워낙 춥고


척박한 곳인 데다, 작은 공국인지라 이민자에게 배타적인 경향이 강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적응하는 수밖에. 우선 아가씨께서 에벨루넨어를 배우는 게 우선이겠군요.”

“응. 그런데 에일, 이제 나를 아가씨라고 부를 필요 없지 않아?”

“아, 그렇죠. ……네?”

부드럽게 이네트의 말에 수긍하던 에일이 돌연 화들짝 놀라며 크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제 이곳에서 부부잖아? 그러니까…… 아가씨라는 호칭 말고 다른 호칭으로 불러야지.”

“그, 그렇지만…….”

그가 몹시 당황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 반응이 재밌어 이네트가 피식 웃었다. 그는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수줍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부, 부인….”

속삭이듯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웃음기가 서려 있던 이네트의 입가가 당황한 듯 살짝 굳었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그녀가 이어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이 호칭은 별로신가요? 그럼 여…보?”

이네트는 아예 고개를 푹 숙였다. 호칭을 달리하자고 말을 꺼낸 것은 그녀 자신이었지만, 막상 다른


호칭을 들으니 낯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아, 아무거로나 불러…….”

이네트 또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고, 에일은 고민하다가 “네, …부인.”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구부러지는 손가락을 주먹을 쥐어 숨기고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들었다.

“에일, 우리는 이제 그럼 어떻게 먹고 사는 거야?”

“으음,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가축을 사육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제가 잠시나마 마구간에서 일한 적도


있고요. 말이나 양을 키우는 게 어떨까 합니다.”

말과 양이라……. 이네트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럼 말이 어때? 난 말을 좋아하고, 넌 말을 키워본 적이 있으니까.”

“좋습니다. 우선 말을 키울 마구간부터 짓는 게 우선이겠군요. 다행히 이곳엔 전나무가 빽빽할 정도로


많아 재료에 부족함은 없을 듯합니다. 부, 부인.”

부인이라고 말할 때 에일이 다시 얼굴을 붉혔다. 이네트 또한 어색한 듯 눈을 흘기다가 시간이 흐른 뒤


대답했다.

“좋아.”

“그리고 밀을 재배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농사를 지어 본 적은 없어… 서툴지는 몰라도요.”

“그것도 괜찮아. 일단 뭐든 해보자.”

낯선 이국에서 새로운 일을 하며 지내게 되었지만, 이네트는 호기롭게 다 괜찮노라 대답했다.

몸이 힘들지라도, 에일과 함께라면 뭐든 좋았다.

* * *
에일과 함께하며 상처가 조금씩 아물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크게 벌어진 상처는 채 아물지 못한 듯 터지고
아픔을 호소했다. 조금이라도 불안감을 느끼거나, 그때 일을 회상하기라도 하면 악몽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악몽은 언제나 망령과도 같은 공작가의 형제들이 등장하면서 시작했다.

「마치 기생충 같군. 언제까지고 이곳에 붙어 있는 걸 보면 말이야.」

「창녀. 매춘부의 딸.」

「벌레 같은 것.」

차가운 눈동자로 식사 자리에서 대놓고 경멸을 내뱉던 형제와 아무 말 없이 무심한 얼굴로 식사를
이어가던 공작. 다시 생각해도 숨 막히는 식사 시간이었다.

저를 혐오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던 카시엘과 페르닌드도 미웠지만, 공작 또한 미웠다. 아무 말


않는 모습이 그들과 같은 생각임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말려주지 않아서…….

저택에 제 편이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는 것도 예쁘지만, 이네트. 소용없으니 닥치는 게 좋아.」

「이넷, 다리 벌려.」

장면이 지하실로 뒤바뀌었다. 반항하는 자신을 제압하며 억지로 지하실로 끌고 간 카시엘과 욕망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다리를 벌리라고 명령하는 페르닌드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두 남자는 어느새 뱀처럼 몸을 감싸고 억지로 다리를 열어젖혔다. 아무리 싫다고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포기한 채 늘어져도 그들의 탐욕스러운 눈동자는 여전했다.

그러다 두 남자의 인영은 사라지고, 다른 남자의 인영이 나타났다. 싱긋 웃는 얼굴, 즐거운 듯 빛나는
회색 눈동자…….

「나도 아버지와 취향이 비슷한가 봐.」

드넓은 황궁에 유일한 제 편이라고 생각한 지크프리트, 제국의 황태자였다.

「누이, 난 누이를 해치지 않아. 누이를 진심으로 아껴. 이건 정말이야.」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이런 자를 이복동생이라고 믿었다. 진실하게 누이라고 아끼는 줄


알았다.

아무렇지 않게 거짓을 속삭이며, 해치지 않는다고 말해놓고선 제 정신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누이, 괜찮아?」

그래놓고선 악의가 없다는 듯, 진심으로 위한다는 듯…….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격정이 휘몰아쳤다. 이네트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지크프리트의 모습을 한 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선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누이, 왜 그래? 다 누이를 위한 거라고 했잖아.」


아니야, 아니야…… 아냐!

“…인!”

그건 나를 위한 게 아냐!

“…부인!”

“흐읍!”

굳게 감겨 있던 이네트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녀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누군가 쫓아와 급하게


달아나기라도 한 사람처럼 온몸이 가파르게 들썩거리고 공포로 몸이 떨렸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에일이 이네트의 어깨를 조심스레 붙잡으며 시선을 맞췄다. 허공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던 눈이 초점을
되찾고 에일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녹색 눈동자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가 식은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며 천천히 물었다.

“또 안 좋은 꿈을 꾸신 건가요?”

“…….”

에일을 바라보던 이네트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독하기 짝이 없었다.
벗어나고 나서도 기어코 자신을 놔주지 않는 사특한 망령들이 아직까지도 저를 괴롭히고 목을 졸랐다.

아니, 어쩌면…… 다시 또 붙잡힐 걸 알기에 불안을 떨칠 수 없는 걸까? 황궁에 있을 땐 사라졌던 악몽이


이곳에 오자마자 곧바로 나타났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기억은 떠올라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일시적으로나마 기억을 희석시켜주는 방법을 떠올린 이네트가 눈앞에 있는 에일을 꽉 껴안았다. 넓은 품에


파고들며 입술을 부딪히자 그자 놀란 듯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간절하게 찾던 오아시스의 샘물을 찾은 방랑자처럼 하염없이 그의 입술을 핥고 빨았다. 혀끝이 서로 스칠


때마다 그는 몸을 움찔 떨며 입술을 더 넓게 벌렸다. 그러다 그녀의 혀가 입 안으로 침범한 순간, 그가
억지로 그녀의 몸을 품에서 떼어냈다.

“진정해요, 부인.”

에일이 한 손으로는 이네트의 등을 연신 쓰다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의 노력 덕분인지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그녀의 상체가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이네트는 익숙한 데자뷔에 헛웃음을 흘렸다. 마치 과거, 에일의 저택에서 불안감에 떨던 제 모습과
지나치게 흡사했다. 그때도 악몽에 시달리고, 이렇게 에일에게 매달려 위로받고…….

스스로가 한심해서 눈물이 고였다. 에일의 도움을 받아 겨우 도망치고 나서도 다시 잡혀 들어가고,


그곳에서 또 다시 도망쳐 간 황궁에선 바보같이 지크프리트를 진심으로 믿었다. 아직도 상처에
허우적거리며 벗어나지도 못한 채 지금도 에일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한심해서 미칠 거 같아….”

“부인.”

“왜 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지금도 네게 도움만 받고…… 난, 아직도…….”


“부인의 잘못이 아니에요.”

에일이 이네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벗어나려 애쓰지 말아요. 시간이 지나면 점점 괜찮아질 거예요. 이제 그들은 부인을 해치지 못해요.”

입술이 젖은 눈가로 향했다. 눈두덩이 위에 입술이 내려앉자, 이네트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 눈을


감았다.

“이젠 제가 항상 곁에 있을 거예요.”

“응…….”

이네트가 눈물 한 줄기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지겠지. 스스로를 속였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 * *

이네트는 에일과 함께 말을 기르고, 에벨루넨어를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직까지 갈로아 공국민들의
배타적인 시선은 여전했지만, 처음보단 다소 누그러진 상태였다.

다만 생활하는 데 있어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음식이 그녀의 입맛에 너무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짜고 달달한 음식을 좋아하는 이네트의 입맛엔 갈로아 공국의 음식은 지나치게 싱거웠다.

게다가 이곳에서 주로 먹는 말고기나 양고기도 그녀의 입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먹지 않을 순 없으니


억지로 먹으며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네트는 코를 막으면서까지 질긴 말고기를 꾸역꾸역 삼켰다.

엉성하던 에벨루넨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문장의 형태가 잡혔다. 짧지만 문장 구사가 가능해졌다.
추워, 배고파, 가자, 와 같은 짧은 문장이었지만 에일은 이네트의 실력이 많이 늘었다며 기뻐했다.

“부인, 우리 같이 시장에 나가도 되겠어요.”

“시장……?”

이네트는 제가 할 수 있는 에벨루넨어를 떠올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아이가


자신보다 더 잘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갔다가 괜한 의심을 받으면 어떡해. 가뜩이나 사람들 시선도 곱지 않은데…….”

“네, 아뇨 같은 단순한 대답만 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부인께서 무서우시다면 다음에 나가도록


해요.”

“조금만 더 익히고. 괜찮아지면 그때 같이 나가볼래.”

“알겠습니다.”
에일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네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에벨루넨어가 서툴러서 그렇다는 말은
사실 핑계에 가까웠다. 아직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불신은 마음속
깊이 뿌리박혀 뽑히지 못했다.

드넓은 황궁에서 저를 챙겨준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피로 이어진 이복동생이었기에 믿었는데…… 그가


그토록 잔인하게 제 마음을 짓밟을 줄 몰랐다.

스스로를 향한 혐오와 자기비하는 끝도 없이 커졌다.

모두 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건 아닐까?

애초에 태어났으면 안 됐어……. 차라리 디에드반 공작 저택에 혼자 남겨진 날, 그때 죽었더라면…….

이어지는 생각은 에일의 부름에 끊겼다.

“부인, 부인?”

“……아.”

정신을 차린 이네트가 파드득 고개를 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이만 마구간에 가보겠습니다. 부인은 공부하고 계세요.”

“응…….”

오두막의 문이 탁, 닫혔다. 이네트는 홀로 남은 오두막 안에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오두막은 좁았지만 내내 불을 때고 있어 나름 안락했다. 그럼에도 몰아내지 못한 추위 때문에 양털로 된


코트를 입고 목도리까지 둘러메고 있었지만 이네트는 크게 불편하다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물끄러미 에일이 떠준 양털 목도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때껏 검을 휘두르며 산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으로 뜨개질을 척척 잘했다. 수를 놓거나
옷을 만드는 일도 그녀보다 훨씬 솜씨가 좋았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목도리도 전부 그가 해준
것이었다.

분명히 에일과 함께 있으니까 행복해야 하는데…… 왜…….

이네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에일과 함께 살면 일상이 편안하고 행복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행복이 깨질까 봐 두려웠고, 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몸을 떨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문을 열고 지크프리트가 이곳에 쳐들어올 것 같았다.

그는 단칼에 에일을 죽일 수 있는 남자였다. 여태껏 카시엘과 페르닌드를 증오하면서도 겁내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에일을 죽이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다시 저택에 잡혀
들어간 이후부터, 자신이 애원하거나 부탁하면 들어먹기라도 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달랐다. 그는…… 애원이 통하지 않았다. 말 자체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상황이 눈에 선해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깜깜한 미로 속에 갇힌 것 같아서.

지크프리트, 그가 진심으로 두려웠다…….

자신이 잘한 게 맞을까? 차라리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됐을까.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에일의 목숨만큼은…….
이네트는 떨리는 손으로 목도리를 움켜쥐었다. 두려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밭은 숨을
내쉬다가 이내 침대에 누웠다. 베개가 흐르는 눈물을 흡수했다.

에일이 이런 자신을 알지 못했으면 했다. 그의 마음을 괜히 흔들고 싶지 않았다. 이네트는 눈을 꼭 감고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몸에 힘을 주었다. 얼마 안 가 눈물은 그쳤으나, 짙은 우울이 몸 위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뉘었던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비척비척 책상 앞으로 향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순 없었다…… 힘을 내서, 노력해야만 했다. 이네트는 가물거리는 눈으로


에벨루넨어를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다.

* * *

이네트는 천천히 에벨루넨어를 배워갔다. 간단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고 상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발전했다. 발음이 엉성한 것만 빼면 에일이
보기에 준수한 수준이었다.

“부인, 정말로 밖에 나가볼 생각 없어요? 부인이 걱정돼서 그래요. 계속 집에만 있으면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질 텐데……. 날씨가 추워서 더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걱정됩니다.”

에일은 최대한 그녀를 배려하여 돌려 말했다. 그녀와 대화를 하다가도 그녀가 넋을 놓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대화를 하지 않을 땐 그녀는 늘어진 풀잎처럼 침대에 누워 있거나, 의자에 앉아 공부를 했다.
공부를 할 때만큼은 그녀의 상태가 괜찮아 보이다가도, 그렇지 않을 땐 걱정스러울 정도로 무기력하고
우울해 보였다.

그는 어떻게든 그녀의 기운을 복 돋아주고 싶었다.

“부인,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얼음 광산이 있어요. 부인이 보면 좋아할 거 같아요. 함께 가고


싶습니다.”

“얼음 광산?”

“네. 얼음으로 이루어진 광산이라고 합니다. 무척 아름다울 것 같은데……. 가보실 생각 없습니까?”

이네트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내리깐 속눈썹이 약하게 떨린다 싶더니, 이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은 다소 놀랐다. 제안하면서도 그녀가 거절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말요? 괜찮습니까?”

“응. 한 번쯤은…… 괜찮겠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 장갑 끼고 신발 신고 올게.”

“부인,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요.”


“아냐. 괜찮아.”

이네트가 장갑을 찾아 손에 끼웠다. 에일이 만들어 주고 난 직후 말고는 처음 껴보는 것이었다. 털로 된


어그 부츠까지 신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놀란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허둥지둥 그도 따라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 얼음 광산은 이곳에서 걸어서 30 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습니다. 제가 몇 번 마을을 걸어봐서 길은


대충 알고 있고요.”

“응.”

그가 오두막 문을 열고, 그녀가 따라 나갔다. 매서운 바람이 뺨을 훅, 스쳐 지나갔다. 살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픈 추위였다. 에일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앞으로 걸었다.

“혹시라도 중간에 다시 돌아오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부인.”

이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둘은 매서운 한파를 느끼며 얼음 광산으로 향했다. 그녀는 걷는 내내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손과 발이 바들바들 떨리고 이가 절로 다닥다닥 부딪혔다. 익숙해지지 않는 추위였다.

더운 것보다 추운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이제는 덥고 습한 날씨가 그리울 정도였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괜찮아요, 부인?”

“…응. 괜찮아.”

이네트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의 말대로 고개를 들자 시선 너머로 얼음 광산이 보였다.

얼음 광산과 가까워지자, 그곳 앞에 서 있는 소년 한 명이 보였다. 두터운 털옷을 꽉 껴입었으나


그럼에도 깡말랐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소년의 뺨은 홀쭉했다. 소년은 이네트와 에일을 보자마자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여긴 왜 왔어요?”

소년의 물음에 에일이 대답했다.

“이곳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어서 구경하러 왔어.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나?”

“…들어가는 건 자유예요. 나갈 땐 모르겠지만요.”

소년이 무신경하게 툭 내뱉듯 대답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이네트와 에일을 훑어보는 눈초리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말에도 가시가 박혀 있었다.

이네트가 침을 삼키며 에일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가 그에게 무언가 잘못됐다는 듯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예감이 썩 좋지 못했다.

“알겠어.”

그녀의 보낸 무언의 눈빛을 알아차린 에일이 소년에게 그리 대답하고는 이네트의 손을 잡고 광산에서 등을


돌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소년이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지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외지인에게 너무나도 배타적이군요. 무언가 낌새가 좋지 않습니다.”

“……응. 뭔가, 예감이 안 좋아.”


얼음 광산을 마주할 때와, 집으로 돌아갈 때 느꼈던 예감은 적중했다. 비록 그리 넓지는 않지만 아늑한
보금자리는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다녀간 것이 명백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문이 부서진 것은 물론이고, 바닥에 찍힌 발자국과 여기저기 헤집어 놓아 쑥대밭이 된 집 안의 모습에


에일이 제길, 욕설을 뇌까렸다.

마구간도 마찬가지였다. 정성스레 풀을 먹여 기른 말 모두 사라져 있었다.

“……부인. 아무래도 거처를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에 맞닥뜨리자 그는 난처한 기색으로 이마를 짚었다. 조그마한 공국이다 보니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건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행스러운 건, 깊숙이 숨겨 놓은 돈과 각종 장신구는 찾지 못한 듯 훔쳐 가지 않은 것이었다.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보르비아 제국으로 가고 싶지만, 그곳은 조금 위험합니다. 보르비아 제국은 일리아드 제국과 사이가
긴밀한 편이라 황태자가 개입하기 훨씬 수월해요.”

“그럼 다른 마을로 옮기기만 할까?”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곳과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어요.”

이네트가 인상을 썼다. 앞이 막막했다.

“차라리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떠돌다 분위기가


괜찮은 마을에 정착하는 게 어떨까요?”

“그래, 그게 좋겠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쯧, 혀를 찼다.

“아쉽게 됐습니다. 짧지만 정이 들었는데 말이죠. 직접 마구간도 지었고요……. 말도 한 마리도 빼놓지


않고 다 훔쳐 갔군요. 다시 구매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 또한 그처럼 혀를 차면서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했다. 훔쳐 간 이가 누군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되돌려달라고 해봤자 시치미를 떼며 돌려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리고 괜히 분란을 일으켰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의 말대로 이곳을 떠나는 게 답이었다.

그곳을 떠나 에일과 함께한다고 해도 그리 행복한 생활이 펼쳐지는 건 아니구나……. 이네트는 짐을 싸며


씁쓸히 자조했다.

* * *

이네트와 에일은 말을 두 필 구매하여, 각자 말 위에 올라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시작했다.


날씨가 추워 고삐를 쥔 손이 계속해서 떨렸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서서히 추위에 적응해
이전만큼 심하게 떨리진 않았다.

여러 마을을 떠돌면서 이네트와 에일은 그 얼음광산이 사실은 날카로운 서리가 가득하고, 길이 위험천만해
들어가면 다신 나올 수 없다고 악명이 자자한 곳이란 걸 알게 됐다. 일부러 에일에겐 아름다운 곳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광산이 있던 마을처럼, 다른 마을도 사정은 별 다를 바 없었다. 대부분 외지인에게 호의적이지 못했다.


특히 에벨루넨 대륙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옅은 머리칼 색과 옅은 눈동자 색이 아닌, 진한 녹색 눈과 푸른
눈을 가지고 있어 더욱이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결국 보르비아 제국에서 온 제국민이라는 말 대신, 다른 대륙에서 여행 온 여행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편이 의심을 덜어내는 길이었다. 물론, 왜 보르비아 제국이 아닌 이 조그마한 공국에 왔느냐며 더욱
날을 세우는 이도 있었다.

그 의심은 일리가 있었다. 갈로아 공국은 온천으로 유명한 보르비아 제국과 달리 영토가 좁은데다 온천을
가진 마을이 단 한 곳뿐이라 관광 오기에 적합한 나라가 아니었다.

“…이제 마지막 한 마을 남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마지막 마을을 남겨두고 있었다. 온천을 가진 마을, 두란카 마을뿐이었다. 여태껏
정착할 마을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 마을에 모든 희망을 걸어야 했다.

“이번에는 괜찮을 겁니다.”

에일이 부러 희망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네트는 손끝을 오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갑을 끼고
있지만 장갑까지 뚫은 추위에 손등은 물론이고 손가락 마디마디 전부 빨갛게 부르터 손이 따끔따끔했다.

어서 빨리 실내로 들어갔으면 했다. 허름한 여관이래도 상관없었다. 차게 식은 몸을 따듯하게 데우고,


뜨거운 물 안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말 또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겨우 두란카 마을에 도착했을 땐, 그저 도착한 것만으로 기뻐서 안도의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우선 여관부터 찾아보죠.”

“좋아.”

에일 또한 실내에 들어가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였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여관부터 찾았다.

두란카 마을은 여태껏 지내왔던 다른 마을들보다 마을의 규모가 컸다. 갈로아 공국에서 유일하게 온천이
있는 마을답게 호텔과 여관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는 그중 제일 작은 여관을 가리켰다.

“저곳에 갈까요?”

이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몰라 그들은 규모가 큰 여관이나 호텔은 가급적 피했다. 그 탓에 벌레가
들끓거나 침대가 너무 낡아 자다가 중간에 부서지는 경우도 있었다. 떠도는 생활이 길어질수록 그저
문제없이 씻고, 먹고, 잘 수만 있다면 나름대로 만족하게 됐다.

이번 여관은 제발 침대가 부서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고, 벌레가 나오지 않으며, 물이 멀쩡히 나오기를


바랐다. 수압은 바라지도 않았다.

여관에 들어서자 늙은 여자가 나와 그들을 반겼다. 여관 안은 난로 덕분에 훈훈했다. 따스한 곳에


들어오자 몸이 사르르 풀렸다. 이네트는 당장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손등이 붉게 부르트고
손가락마저 빳빳하게 얼어 손가락 마디마디 움직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후후, 입김을 불고 난로
앞에다 손을 가져다 대자 꽁꽁 얼어붙었던 손이 조금씩 녹았다.
“오, 신혼부부인가?”

인상 좋은 여관 주인이 추위에 몸을 녹이는 이네트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많이 춥지? 그래, 얼마나 묵고 갈 건가?”

보통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이 뒤따라 왔는데, 주인은 그런 것은 묻지 않았다.

이네트보다 에벨루넨어가 능숙한 에일이 주인의 물음에 대답했다.

“얼마나 묵을지는 모르겠지만, 일주일 정도 방을 잡겠습니다.”

“그래그래, 무슨 방을 줄까?”

“제일 좋은 방으로 주십시오.”

“좋아! 아, 우리 여관도 온천수를 써. 물이 아주 좋아.”

주인이 자랑하듯 눈을 찡긋거리며 방의 열쇠를 주었다. 그는 일주일 치 숙박비를 미리 결제했다.

열쇠를 받아들고 비용을 결제하자마자 에일과 이네트는 곧장 계단을 올랐다. 3 층 방문을 열자, 제법
괜찮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로가 두 개나 있었으며, 침대 또한 겉보기에 썩 튼튼해 보였다. 마련된
가운과 각종 위생용품도 질이 나쁘지 않았다. 겉은 허름할지라도 속은 괜찮은 여관이었다.

“부인께서 먼저 씻겠어요?”

그는 이제 익숙하게 그녀를 부인이라 칭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허물을
벗는 뱀처럼 두텁게 껴입은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털옷인지라 옷들이 무거웠다. 벗을 때마다 몸이
가벼워지고 상쾌해졌다.

그녀는 알몸으로 욕실 안에서 덜덜 떨면서 물을 틀었다. 수압이 다행히도 셌다. 이네트가 가슴을 쓸면서
안심했다. 이전에 수압이 약한 걸로도 모자라 목욕 도중에 물이 나오지 않아 고생했던 적이 한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후로는 물이 나오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안심하게 됐다.

이네트는 욕실에 있는 욕조를 흘끔 보았다. 생각보다 욕조가 넓어서 두 명이 들어가도 넉넉할 것 같았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물을 끄고 욕실의 문을 열었다.

“에일, 욕조가 있는데 같이 쓸래?”

그녀의 물음에 방 안에 있던 에일이 욕실로 왔다. 그는 이미 방 안에서 두껍게 껴입은 옷을 벗어 간단하게


셔츠와 바지만 입은 차림이었다. 그는 알몸인 이네트의 몸을 보고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바로 욕조로 시선을 옮겼다.

생각보다 넉넉한 욕조의 크기에 그가 고민하는 듯 으음, 턱 밑에 손을 받쳤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가 입고 있던 셔츠와 바지를 속옷과 함께 벗었다. 그는 벗을 때와 달리 막상 알몸이 되자 부끄러운 듯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는 욕조로 다가갔다.

“물을 받겠습니다.”

그리고는 욕조에 있는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었다. 다행히도 욕조의 수도꼭지에서도 물은 콸콸 시원하게


쏟아졌다. 다만 뜨거운 물은 바로 나오지 않아 맞추는데 꽤나 애를 먹었다. 인내심을 갖고 몇 분 기다린
후에야 뜨거운 물이 나왔다.

욕조의 물이 반 이상 차오르자, 에일이 욕조 안으로 발을 들이고는 이네트를 향해 손짓했다.

“들어오세요, 부인.”

여전히 그는 그녀의 몸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어색한 눈빛에 의아해하면서도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그의 가슴팍에 등을 맞대고 몸을 축, 늘이자 따스한 물에 감싸인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기분이
좋았다.

“아, 좋아…….”

그녀가 오래간만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며 뼈가 시린 추위와 질


떨어지는 생활에 알게 모르게 몸에 피로감이 그득 쌓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그니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여관 주인의 말대로 온천수가 맞는지 물이 좋았다. 마치 젤리나 푸딩의 표면처럼 매끈매끈했다. 그


촉감이 좋아 이네트는 작게 물장구를 여러 번 쳤다.

“에일, 물이 신기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천수를 경험해보는 이네트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녀가 소리 내어 웃자 그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동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그녀의 미소와 웃음소리를 듣자 뭉클한
감정이 피어났다.

그간 우울해하거나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그 또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녀가 고생하는
게 다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우울을 볼 때면, 에벨루넨 대륙에 숨어 사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흔들렸다.


그랬기에 그녀의 웃음이 지금 그 무엇보다 중했다. 그가 그녀의 가슴 밑으로 손을 둘러 품에 껴안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에일, 아직도 내 몸을 제대로 못 보겠어?”

“…네?”

“내 벗은 몸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에.”

에일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오, 오래간만에 보니,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도 명색이 부부라고 부인이라고 부르면서, 부인 알몸조차 바로 보지 못하다니. 이네트가 핀잔하듯


고개를 돌려 그를 흘겨보았다.

“몇 번 몸을 섞어봤잖아?”

“네, 그렇죠.”

그가 붉어진 얼굴을 감추듯 손으로 코와 입가를 가렸다. 살짝 내리깐 속눈썹이 작게 떨렸다. 그는 그녀의
핀잔을 들은 후, 조금 고민하는 듯 손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그녀의 가슴 밑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마치
소중한 것을 깨지지 않게 어루만지듯 손길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가슴 밑을 오래도록 쓰다듬던 그가 천천히 넓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큰 손에도 가슴은 다


잡히지 않아 손가락 사이로 살이 삐져나왔다. 그는 오래간만에 느끼는 말캉한 감촉에 어색한 듯 더디게
움직이면서도 손을 떼지 않았다.

이네트는 점점 곧추서는 그의 아래를 느끼며 슬며시 몸을 틀었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에일이 눈을 들고서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가슴을 움켜쥐고 주물거리는 손 움직임은 여전했다.

그녀가 먼저 고개를 내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서로의 입술이 갈퀴처럼 맞물렸다. 그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다.

“응….”

오래간만의 키스였다. 같은 집에서 부대끼고, 오랜 시간 온갖 마을을 떠돌며 여관에서 함께 숙박해도


암묵적으로 스킨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일은 우울해 보이는 그녀에게 차마 손을 뻗을 수 없었고,
이네트 또한 그와의 스킨십이 그다지 떠오르지 않았다.

허나…… 그녀의 웃음을 본 순간, 우습게도 그는 아래가 먼저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몇 번 몸을


섞었다고 말하며 핀잔하듯 흘기는 눈에 우습게도 발정했다.

에일은 이네트의 잇새 사이로 혀를 짓쳐 넣으며 그녀의 혀를 제 혀로 휘감았다. 타액이 섞이고 혀가


난잡하게 뒤엉켰다. 그가 짙은 숨을 내쉬었다.

“부인…….”

가슴을 주무르는 손이 좀 더 우악스러워졌다. 어느새 두 사람은 욕조 안에서 몸을 얽고 서로를 꽉


껴안았다. 그녀의 한쪽 가슴이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눌려 뭉개졌다.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곤두선
유두가 그의 가슴팍에 쓸렸다. 그조차 자극이 되어 이네트가 으응, 신음했다. 그가 제 가슴팍에 쓸리는
그녀의 유두를 바라보더니, 그녀의 몸을 위로 끌어당긴 다음 유두를 입에 머금었다.

“아응!”

이네트가 고개를 살짝 젖히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유두를 부드럽게 혀로 핥던 그가 이어 입술로 유두를


빨고, 이내 이를 세워 약하게 깨물었다. 그의 품에서 바르르 떨던 그녀가 몸을 허물어트렸다. 기다란
은색 머리카락이 축 늘어져 물에 잠겼다.

에일은 거의 이네트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힌 채 아이가 어미의 젖을 빨 듯 그녀의 가슴을 빨았다. 츕,
츄웁……. 젖은 소리가 욕실을 메웠다.

“흐읏, 응… 아….”

그녀가 그의 머리를 꽉 껴안았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그의 머리카락이 삐져나왔다. 그가 유두를 조금


세게 씹는 순간, 그녀가 헉 숨을 들이켜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이네트의 알몸을 보고 부끄러워했던 게 언제였냐는 마냥, 에일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출렁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벽에 붙었다. 그가 뒤에서 그녀를 껴안으며 등줄기를 손가락으로
스윽 훑어 내렸다.

“흑….”

그녀가 작게 신음하며 움찔 떨었다. 그의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엉덩이에 도달했다. 동그랗게


솟아오른 엉덩이 살을 꽉 한 번 움켜쥐고는, 이어 엉덩이를 양옆으로 벌렸다. 순식간에 아래가 드러난
그녀가 다급하게 손을 내렸다.
“에일, 거긴….”

그녀의 만류에도 그는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그녀의 음순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그곳을 가리려 하자 그가 그녀의 두 손을 한 손으로 잡아채었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 오므린
살점을 어루만졌다.

“으응!”

에일의 가슴팍에 눌려 완전히 벽에 붙은 이네트가 벌린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가 아래를 어루만질


때마다 떨림은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심해졌다. 저도 모르게 달뜬 숨이 흘러나왔다.

살점을 벌린 그의 손이 젖은 속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벽에 뺨을


문질렀다. 아래는 이미 젖어 있었다. 그가 구태여 만지지 않아도, 이미 가슴이 빨릴 때부터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오래간만의 섹스라 해도 몸은 쾌락을 잊지 않았다. 어서 빨리 들어오라는 듯 비어 있는 질이 계속해서


수축했다. 이네트가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몸을 섞는 상대가 에일이라지만, 몸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부끄러웠다.

수치심과 더불어 약간의 죄책감 또한 들었다. 기억에 비록 없다 해도, 술에 취해 지크프리트와 몸을 섞지


않았던가. 그 사실만 떠올리면 에일에 대한 미안함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지크프리트에 대한 원망이
밀려왔다.

그가 뒤에서 성기로 둔덕부터 회음부까지 미끄러지듯 비벼댔다. 귀두에 묻은 쿠퍼액과 질에서 흘러나온
애액이 서로 마찰하며 쿨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에일은 벌름거리는 질에다 성기를 조준하고는 천천히, 제일 두터운 귀두부터 넣었다. 이네트가 느껴지는
압박감에 눈을 가늘게 뜨며 벽을 짚은 손에 힘을 줬다.

“으응….”

그는 귀두를 넣은 것만으로도 강하게 수축하는 안을 느끼며 눈을 좁혔다. 천천히 성기를 밀어 넣자 아래로


피가 몰렸다. 오래간만의 삽입이라 그런지 금방 사정할 것처럼 사정감이 밀려왔다. 그는 순간 자신이
조루인가 의심했다.

“후우…….”

그녀의 안은 미친 듯이 따스하고 기분 좋았다. 사정감을 몰아내지 않았더라면 자제하지 못하고 안에 쌌을


게 분명했다. 그는 고환이 닿을 만큼 깊은 삽입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깊숙이 넣은 채로
그녀의 뒷목에 입술을 댔다. 그녀가 벽에 얼굴을 붙인 채로 할딱거렸다.

“에, 일….”

이네트가 흐느끼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 부인.”

평소보다 낮지만, 여전히 다정함을 머금은 목소리였다. 그녀가 고민하다가 작게 움직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나직한 한숨을 쉬더니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이가 약하게 살점에
박히자마자, 그의 허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탓에 접합부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더 야릇하게 울렸다. 젖은 살끼리 마찰하는 소리와
살갗과 살갗이 부딪혔다 떨어지는 소리가 지나치게 외설적이었다. 그녀는 그가 안 깊숙한 곳을 뭉근하게
찌를 때마다 허리를 바르르 떨며 들어온 것을 꽉 조였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크읏.”

에일이 작게 신음하며 한 손으로 이네트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유두를 거칠게 문지르고 가슴을 소젖
짜듯 세게 주물러댔다. 그녀는 아픔과 쾌락을 동시에 느끼며 앓는 신음을 흘렸다.

“흐응, 흐… 아!”

허리의 움직임 또한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퍽, 퍽, 퍽. 거칠게 짓쳐 올리는 허릿짓에 그녀의 몸이 앞으로


더욱 쏠리며 허리가 그의 움직임에 맞춰 튕겼다.

“부, 인… 헉. 흐으.”

“아앙! 아, 흣!”

다정하게 부르면서도, 아래의 움직임은 다정함과 거리가 멀었다. 에일이 콰득, 목덜미를 한 번 세게 깨문
뒤 벽에 붙은 그녀의 상체를 제게로 끌어당기며 앞으로 숙이게 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아래로 내려간
그녀가 숨을 들이켜며 흔들리는 욕조의 물살을 바라보았다.

그가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물이 출렁이고, 뺄 때는 몸의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아릿해졌다. 벽을 짚고


있던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자 그가 그녀의 손을 뒤로 잡아채 꽉 붙잡았다.

“앗, 잠시, 흣, 아…!”

그에게 팔이 붙잡힌 채로 뒤에서 처박혔다. 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그녀가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파르르 떨며 허리를 활처럼 휘었다. 욕조를 딛고 선 다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욕조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

그 위험천만한 느낌과 아래를 헤집고 긁는 쾌락, 질 안을 꽉 채우는 압박감이 뒤섞여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었다.

안쪽을 짓누르듯 눌렀다가, 나갈 땐 마치 돌기처럼 질 안의 살을 긁듯이 빠져나갔다. 이네트는 수치와


죄책감마저 모두 잊고 정신없이 신음했다.

“하앙, 아, 아아! 좋아, 아!”

좋았다. 지나친 쾌락에 정신을 놓고 싶었다. 어쩌면…… 이걸 바랐을지도 몰랐다. 끝없는 불안과 좀먹는
초조를 피해 일시적으로나마 제정신을 앗아 줄 쾌락을…….

가늘게 뜨인 푸른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정신없이 신음하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이상했다.
좋으면서도, 슬퍼서 눈물이 났다.

언제까지고 그들에게 꺾이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자신이 그들에 의해 망가진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서글픔을 물릴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제어를 잃은 눈물샘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려댔고,
불안은 어느 순간이고 간에 늘 찾아왔다. 에일과 몸을 섞는 와중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더, 더 해줘…….”

이네트가 애원하듯 흐느꼈다.

“더, 더…… 아응, 아… 더, 미칠, 흣, 만큼…….”

모든 걸 다 잊을 수 있게, 더…… 몰아세워 줘. 이네트가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뒤에서 처박는


에일은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서 그녀의 말에 따라 허릿짓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가 마침내 절정에 다다라 그녀의 안에 파정했을 때, 그녀 또한 절정에 이르러 질을 수축하며 다리를


파르르 떨었다. 절정에 다다르며 이네트는 울면서 웃었다.

따듯했던 욕조의 물은 차게 식었다. 에일은 이네트의 몸을 돌려세우더니, 이어 바로 붉게 물든 그녀의


눈가를 발견하고는 몸을 굳혔다.

“부인. ……울었어요?”

묻는 어조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우면서도, 약간의 불안이 섞여 있었다.

“죄송합니다. 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가 성급하게…….”

그는 그녀가 운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준비되지 않은 그녀에게 손을 뻗어서, 거칠게 해서


그녀가 울었으리라 짐작하고는 눈꼬리를 내려트리며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냐, 그런 거 아냐.”

이네트가 손등으로 눈가를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다정한 사람이 곁에서 저를 위로해주는데도…… 왜 제 마음은 황량한 바다에 잠긴 것처럼 서글프고


우울한 것인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어서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좋아서…… 좋아서 울었어.”

“정말입니까?”

그가 완전히 믿지 못하는 눈으로 물었다.

“응. 정말이야. 오래간만에 너와 하니까 너무 좋아서…….”

그녀가 재차 그렇게 대답하며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등에 팔을 두르고선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푸른 눈에 어린 우울은
숨기기엔 깊고 짙었다.

그는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존중했다. 그렇기에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언젠가는 그녀의 마음이 풀리고, 자신에게 다 털어놓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식은 물 안에서 오래도록 부둥켜안고 있었다. 무인도에 단둘이 남겨진 방랑자처럼.

* * *

이네트는 욕조에서의 섹스 이후, 에일에게 자주 섹스를 요구했다. 에일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위로 방식이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응할 수 있었다.
침대 시트가 축축하게 젖지 않는 날이 없었고, 아래에서 흐르는 액이 마를 새도 없었다. 수없이 몸을
섞고, 섞고, 또 섞었다. 안에 싸지른 정액이 너무 많아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기다랗게 흐를 정도였다.

둘은 방 안에서 알몸으로 생활하며, 식사를 하러 나갈 때만 옷을 갖춰 입었다. 에일은 이제 더는


이네트의 알몸을 보고 당황하지 않았고, 얼굴을 붉히거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에일…….”

이네트가 제 가슴을 빨고 있는 에일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그의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그가 가슴을 빨며


대답했다.

“네, 부인.”

“우리 그럼 여기에…… 정착하는 거야?”

그녀의 물음에 그가 고민하는 듯 유두를 빠는 입술의 움직임이 더뎌졌다. 수초가 흘러서야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곳 말고는 달리 정착할 곳이 없습니다.”

“…….”

“……죄송합니다. 언제나 당신께 고생을 시키는 것 같아 면구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아…….”

그녀가 중얼거리며 그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생각이 복잡해지기 전에 몸을 내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녹색 눈은 여러 감정에 뒤섞여 평소와 달리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뺨을
쓰다듬다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을 맞댄 채로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반쯤 내리깐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검은색으로 염색했던 그의 머리카락은 점점 본래의 머리색을 되찾고 있었다. 빛이 바랜 듯, 회색빛 섞인


갈색 머리카락은 아스라하면서도 애틋했다. 그녀가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겨주었다.

“조금만 기다려 줄래…?”

이네트가 속삭이며 그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그녀가 애써 눈을 휘었다. 초승달처럼 휜 눈이 아프도록 시렸다. 그는 지끈거리는 고통을 느끼면서 그


또한 애써 미소 지었다.

“부인. 전 언제든 기다릴 수 있어요.”

“…….”

“그러니…… 부담 갖지 말아요.”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아빠가 자식에게 하듯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이었다.

이네트는 그 손길을 어색하게 받아들이다가,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껏 그 누구도 제 머리를


이토록 따스하게 쓰다듬어 준 적 없다는 것을.
그 사실과 마주하자 불현듯 눈물이 울컥, 솟았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이렇게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 괜찮다고 달래주지 않았다. 넌 잘못한
게 없다고 감싸주지 않았다. 모두가 손가락질했다.

네가 근본 없는 사생아라서. 네가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네가 멍청해서.

전부 다 너 때문이야.

네 잘못이야.

“에일, 정말 내 잘못이야?”

봇물 터지듯 그 물음이 터졌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온 질문에 물음을 꺼낸 이네트 스스로가 당황하며
입가를 가렸다. 입가를 가린 손이 잘게 떨렸다.

에일은 떨리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는 그녀가 갑작스레 내뱉은 질문에도 당황한 기색을
일절 비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어요.”

“……정말?”

되묻는 목소리가 축축했다.

“네. 부인은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어요.”

“정말?”

“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흐으. 그녀가 작은 흐느낌을 내뱉었다. 솟아올라 흐르는 눈물은 어느새 폭포수가 되어 그녀의 뺨을 흠뻑
적셨다. 히끅, 이네트가 딸꾹질을 하며 몸을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나, 나는…… 다…… 내 잘못인 거 같아서…….”

“아닙니다.”

“내가…… 내가 멍청해서, 내가 잘못해서…… 나 때문에, 전부 다 내가…….”

“그렇지 않아요.”

에일은 들썩거리는 이네트의 몸을 품에 껴안고 쉼 없이 입술을 내렸다. 머리카락, 이마, 눈가, 코, 뺨,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의 입술에 그녀의 눈물이 스며들었다. 그는 그 짠맛조차도 기꺼웠다.

차라리…… 이렇게 감정을 토해내는 그녀가 좋았다. 마음속에 묻으면 묻을수록 깊이 묻어둔 감정은
썩어가기 마련이었다. 허나 우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쓰라렸다.

이네트는 이때껏 묻어왔던 감정의 둑을 터트리기라도 하듯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 앞에서는 죽은 듯


눈물을 흘리던 그녀가…… 처음으로 오열했다.
그 울음소리에 그는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녀를 안고서 부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되뇌고, 또 되뇌는 것밖에 없었다. 에일은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으로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탈진하기 직전까지 눈물을 흘린 이네트가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에일은 빨갛게 짓무른 그녀의 눈가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눌렀다. 젖은 뺨에는 연신 입을 맞추었다.

에일이 잠든 그녀의 몸을 뜨거운 물로 적신 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았다. 그녀의 몸 곳곳에는 그가 남긴


붉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특히 가슴은 더했다. 울긋불긋하다 못해 흔적으로 빼곡했다. 그는 잠든 그녀의
몸을 껴안고, 그녀의 쇄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체취…… 숨소리…… 살결…… 오르내리는 몸…… 모든 게 생생하게 그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 * *

이네트와 에일은 한 달 내내 같은 여관에서 머물렀다. 그는 이제 슬슬 한방에서 머무르며 배가 고플


때마다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생활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여관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지만,
어디까지 여관이기에 불안정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간 한 달 동안 지내면서 봐온 두란카 마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때껏 지나쳐 온 다른 마을들에


비하면 매우 좋은 편이었다.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없는 편은 아니지만, 다른 마을과 비교하면 없다시피
했다. 길을 걷다 보면 여행자로 보이는 무리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관광으로 먹고 사는 마을답게 시장이 발달되어 있었으며, 이따금 하늘에 불꽃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여러
마을을 지나치며 느꼈던 삭막하고 건조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그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에일은 가만히 서서 창밖을 바라보는 이네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눈으로 좇고 있는 것을 그도 따라


보았다.

“어린아이네요.”

어린아이 여럿이 우와아, 소리를 지르며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아이들이 펄쩍 뛰었다가,
우다다다 달렸다가 소리 지르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고 아기자기했다. 그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귀여워라.”

그의 말에 대답하듯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울 텐데도 잘 노는군요. 아, 넘어졌다. 저런.”

에일이 혀를 쯧, 차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뛰어놀던 아이 중 한 아이가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바닥에 엎어진 것이다. 넘어지자마자 요란한 울음소리가 터졌다. 여관 안에 있는데도 크게 들릴 정도로
울음소리가 우렁찼다.
어어어엉엉, 아이가 들으란 듯이 크게 울기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까지 다가가
아이를 일으켜주고 위로해주었다.

어른들이 안아주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아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을 뚝 그쳤다. 에일이
그 모습을 보고 훈훈한 미소를 띠었다.

“다행히 눈물을 그쳤네요, 부인. 아이가…….”

말을 잇던 그가 도중에 말을 멈추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네트는 넘어진 아이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초점 나간 눈동자로, 넋이 나간 듯이.

“부인?”

“아…… 응?”

부름에 정신을 차린 것인지 이네트의 눈이 초점을 되찾았다. 그녀가 아이에게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그가 걱정스레 눈을 좁혔다. 그간 그녀의 상태가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걸까?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두 뺨을 그러쥐었다.

“왜 그러십니까?”

“옛날…… 옛날 생각이 나서.”

이네트가 속삭이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떠오른 기억을 반추하는 듯 그를 바라보던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내리깐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예전에, 어렸을 때…… 내가 저렇게 넘어진 적이 있었어.”

“…….”

“앞으로 벌러덩 넘어져서… 너무 아팠어. 아파서 엉엉 울었는데…… 아무도 날 일으켜주지 않았어.”

이네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 평이하기까지 했다. 에일은 잠자코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가 넘어진 날 바라보기만 했어. 그게, 너무 서러워서 어린 마음에 계속 울었던 거 같아. 아프고,
서럽고, 원망스럽고…….”

허나 애써 올린 입꼬리는 그렇지 않았다. 입꼬리 끝이 파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근데…… 그때 날 일으켜준 사람이 누군지 알아?”

그가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페르닌드 디에드반이야.”

푸른 눈동자가 흐릿해지더니 이내 조각난 유리 조각처럼 잘게 부서졌다.

“그리고…… 날 짓밟은 것도 페르닌드 디에드반이지.”

부서진 눈동자가 이내 감겼다. 그녀는 생각을 지우는 듯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하더니 이어 천천히 눈을


떴다.

“에일. 오늘은 시장에 가볼까?”

아까와는 달리 이네트의 표정이 밝아졌다. 에일은 확연히 달라진 그녀의 얼굴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은 것 맞아요? 굳이 억지로 나가지 않아도…….”

“응. 괜찮아.”

그녀가 그의 말을 중간에 끊고는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두터운 양털로 된


긴 니트 원피스를 입고, 무릎까지 오는 어그 부츠를 신었다. 모자와 장갑, 목도리까지 주섬주섬 갖춰
입었다. 목도리에 얼굴이 파묻히다시피 한 그녀가 멀뚱히 서 있는 에일을 향해 싱긋 웃었다.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그녀처럼 나갈 준비를 했다.

* * *

밖은 여전히 춥고 삭막했다. 건조하고 매서운 바람이 뺨을 스칠 때마다 아릿한 고통이 남았다.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입술이 건조해지고 뺨에 불그스름한 홍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네트와 에일은
최대한 몸을 가까이 붙인 채 앞을 향해 걸었다.

여관에서 시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길을 걸을 때마다 어린아이의 고함과도 같은 함성과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이네트는 이제 다는 아니더라도 그들이 하는 말을 얼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날씨가 그래도 좀 괜찮아졌군. 어제보다 따듯한데?”

“그러게 말이야. 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을 텐데.”

그녀는 어느 남녀 두 명이 지나가며 하는 소리를 듣고는 허, 헛바람을 들이켰다. 태어날 때부터 추운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이 정도 추위쯤은 거뜬한 듯했다.

이상하게도 에벨루넨 대륙은 생각했던 것만큼 아련하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상상 속의 에벨루넨 대륙은
온천 때문인지 따스하고, 습기가 찬 이미지였으나 막상 땅을 밟고 보니 습하기는커녕 건조하다 못해
삭막하고, 춥고, 거칠었다.

차라리…… 그때 상상처럼 신혼여행으로 짧게 에일과 여행 왔더라면 이곳은 좋은 기억으로 남았을까?

이네트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콧속으로 들어오는 고기 냄새에 정신을 차렸다.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에일 또한 배가 고픈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눈길을 주었다.

“부인, 뭐 먹고 싶은 것 있어요?”

이네트는 그의 질문에 음식을 파는 노점상을 하나 둘 바라보았다. 양고기 꼬치를 파는 곳과 말고기 양념


볶음을 파는 곳, 그리고 과일을 얼려서 설탕을 바른 과일 설탕 과자를 파는 곳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말고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양고기 꼬치를 파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꼬치 먹을까?”

“좋아요.”

그들은 곧장 양고기 꼬치를 파는 곳으로 갔다. 양고기와 두껍게 썬 파와 양파를 하나씩 교차해서 넣은
양꼬치에서는 달짝지근한 냄새가 풍겼다. 우선 이네트와 에일은 한 사람당 하나씩 꼬치를 주문했다.

두란카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음식 값이 비싸긴 하지만, 대신 음식의 종류가 다양하고 맛있으며, 다른


마을에서 맛볼 수 없는 음식이 많았다.

양꼬치는 기대했던 대로 맛있었다. 소금 간은 적절했고, 파와 양파는 오래 구워 쓰지 않고 오히려 달달한


맛이 났다. 에일은 순식간에 꼬치를 하나 다 먹은 이네트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바스타드 왕국을 떠날 때만 해도 마른 편이었던 그녀는 날이 갈수록 살이 붙어 지금은 흰 볼살을 계속


만지고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랑스러워졌다. 그는 그녀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손가락으로
훔치며 물었다.

“더 먹을래요?”

“응.”

하나둘, 꼬치를 먹기 시작해 그들은 어느새 각자 꼬치를 여섯 개를 먹어치웠다. 에일은 배부른 듯 작게


미소 짓고 있는 이네트를 내려다보며 작게 물었다.

“…이제 기분은 좀 괜찮습니까?”

그가 작게 로아드어로 물었다. 그녀는 잠깐 몸을 굳히더니 보란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과일 설탕 과자를 가리켰다.

“나 저거도 먹을래!”

“…네, 부인.”

에벨루넨어로 이야기하는 이네트를 따라 그 또한 에벨루넨어로 대답하며 그녀와 함께 설탕 과자를 파는


곳으로 향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이네트는 일렬로 늘어진 설탕 과자를 호기심에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래


고민하다가 결국 딸기와 귤, 두 개를 골랐다. 이네트가 에일에게도 먹길 권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깨물었을 때 와삭, 설탕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입 안으로 들어오는 과즙의 시원한 맛을 느끼며
으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거 맛있어.”

“그래요? 부인께선 단 거를 좋아하니 입맛에 맞을 것 같군요.”

설탕 과자는 지나치게 달았고, 그래서 더 좋았다. 단맛을 느낄 땐 그 맛에 심취되어 복잡한 상념은


날아가고 기분 좋은 달콤함만 감돌았다.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그 기묘한 도취가 좋아 단 것을 찾게 됐다.

설탕을 입힌 귤 과자 또한 맛있었다. 딸기보다 더 달면서도 시큼한 맛이 퍼졌다.

이네트는 입 안에 기분 좋게 감도는 단맛을 느끼며 시장 곳곳을 둘러보았다. 길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상과


더불어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도 보였다. 그 중,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인형을 파는 노점상도 있었다.
이네트의 시선이 그곳에 오래 닿았다.

“인형을 좋아합니까, 부인?”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단지 예전에, 카시엘과 페르닌드가 던져준 곰 인형이 떠올라 그런 것이었다. 그녀가 말꼬리를 흐리자
에일이 부드럽게 물었다.

“인형을 만들어 줄까요?”

“……인형을?”

“네.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잘됐습니다. 옷을 만드는 걸 넘어서, 인형도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군요.”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잡화점으로 이끌었다.

잡화점에 들어서자 희미한 나무 냄새와 함께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무 바닥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건물 자체는 허름했지만 향기 때문인지 그것조차 묘한 감상을 일으켰다.

가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가게 제일 안쪽에서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휘장을 걷어내며 나왔다.


이네트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그녀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잡화점엔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많았다. 에일이 찾는 실과 바늘, 솜뿐만 아니라 펠트지 또한 다양하게
있었다. 곰, 병아리, 양, 말 등 여러 동물 모양의 펠트지가 있었고, 꽃과 건물 모양의 펠트지도 있었다.

“뭐가 마음에 듭니까, 부인?”

그의 물음에도 이네트는 시선을 굴리기만 할뿐, 곧바로 고르지 못했다. 말을 좋아하긴 해도, 말 인형을
갖고 싶진 않았다. 가장 무난한 것은 곰 모양의 펠트지였으나, 곰 인형은…….

이네트가 고민하자 에일이 넌지시 물었다.

“못 고르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만들어 드릴까요?”

“응.”

결국 고르지 못한 이네트 대신, 에일이 알아서 펠트지를 여러 장 골랐다. 그에 그치지 않고 에일이


오르골이 모여 있는 쪽으로 갔다. 그중 하나의 태엽을 감자, 슬픈 음률이 흘러나왔다. 이네트가 멍하니
오르골 소리를 들었다.

“이것도 하나 살까요?”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엽을 얼마 감지 않았기 때문에 오르골 소리는 얼마 안 가 멈췄다.

잡화점에서 나온 에일과 이네트는 시장을 좀 더 둘러보다가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몰린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늘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을 보아 불꽃놀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불꽃놀이를 하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공중으로 쏘아 올린


폭죽이 하늘에서 가지각색의 색으로 꽃을 피웠다. 이네트는 그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여관 창을 통해 바라보긴 했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부인께서도 불꽃을 터트려 볼래요?”

에일이 그리 물었고, 이네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근처에서 폭죽을 파는 상인한테 폭죽


세 개를 구매했다. 그가 그녀에게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폭죽에다 불을 붙이고 위로 쏘아 올리면 됩니다. 자, 이렇게요.”

그가 폭죽에 불을 붙인 다음, 위로 세게 쏘아 올리자 하늘 위에서 폭죽이 터지며 그의 눈 색과 닮은 녹색


꽃이 피어났다. 이네트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예뻐.”

“부인도 한번 해보세요.”

이네트가 에일이 했던 대로 따라 했다. 처음 하는 것이라 조금 엉성했기 때문인지, 그녀의 눈 색과 닮은


푸른색의 불꽃은 피어오르다가 그만 다 피지 못하고 불씨가 수그러들었다. 이네트가 낙심한 듯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이런, 몇 개 더 사오겠습니다.”

에일이 곧바로 폭죽을 두 개 더 사 왔다. 이네트가 호기롭게 다시 한번 도전했으나, 또다시 푸른색의


불꽃은 완벽하게 피어오르지 못했다. 남은 폭죽으로 또 불꽃을 틔워보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불씨가 수그러들기를 반복했다.

연이은 실패에 이네트가 실망한 듯 눈꼬리를 내려트렸다. 에일이 다시 한번만 도전해보라며 준 마지막
폭죽은 이전까지의 실패를 만회하듯 힘 있게 하늘에서 예쁜 흰색 꽃을 피워냈다.

“됐다!”

이네트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어느새 실망한 기색은 사라지고 없었다. 흰색 불꽃은 크고 아름다웠다.
이네트는 그 불꽃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하늘에서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에일은 오래간만에 보는 그녀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그 또한 활짝
웃었다.

시장 근처를 좀 더 산책한 다음, 여관으로 돌아왔다. 에일은 잡화점에서 산 것들을 정리하며 이네트에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부인, 혹시…… 이곳을 떠나 집을 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 떠난다고?”

이네트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아, 나직한 간투사를 내뱉었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지낼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가지고 있는 금전이 많다 해도, 언젠가는 동나기 마련이었다. 완전히 정착한 다음, 일을 해야
했다.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그럼 집을 구하자. 그리고…… 이번에도 말을 키울까?”

“좋습니다. 안 그래도 이곳은 경마장이 활발히 운영되더군요. 수입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좋을


듯합니다.”
“응, 좋아.”

깔끔한 결론이 내어졌다. 에일은 마음이 한 시름 놓인 듯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남은 건 집을 구하고,


말을 키울 마구간까지 짓는 것이었다. 일련의 경험이 있기에 더 이상의 막막함은 없었다.

에일과 이네트는 늘 그림자처럼 뒤따랐던 불안은 잠시 억누르고, 앞으로 일어날 꿈과 같은 희망에 젖어


들었다. 눈앞에 나쁘지 않은 그림이 펼쳐졌다. 그녀는 평화로운 생활을 상상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이네트와 에일은 마을 외곽에 있는, 넓은 마당이 딸린 큰 집을 구매했다. 젊은 신혼부부가 크고 비싼


집을 구매하자 근처에 사는 이웃 주민들이 호기심을 갖고 그들에게 접근했다.

“어디서 왔는감? 설마, 보르비아 제국에서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거여? 귀족인가?”

“아닙니다.”

신분까지 버리고 이곳에 왔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귀족이 아닌 평민이었다. 이네트가 미안한 듯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에일은 적절히 이웃 주민들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그녀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화려한


태피스트리나 값비싼 장식 없이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가득했다. 전적으로 그녀의 취향에 따라 집을 꾸민
것이었다. 집을 인테리어 하면서, 그는 그녀가 아기자기하고 조그마한 인형이나 소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크고 화려한 장식보다는 단출한 장식을, 화려함보다는 담백함을 선호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됐다.


탁자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동물 모양의 인형이 여러 마리 놓였다. 대부분 그가 직접 바느질한
인형이었다.

이네트는 에일이 직접 바느질해준 인형 중 양 모양 인형을 가장 좋아했다. 잠을 잘 때 옆에 두고 잘


정도였다. 그 옆에는 이전에 잡화점에서 산 오르골도 함께였다. 그는 언제나 자기 전에, 그녀가 오르골의
태엽을 감는 소리와 이윽고 들려오는 오르골의 슬픈 음률을 자장가로 삼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림자 같던 불안은 점점 희석되어, 언제나 우울한 기색을 드리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은 전과 달리 많이 밝아졌다. 시간이 약이었다.

요즈음 이네트는 에일과 함께 바느질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실이 꼬이는 거야?”

이네트가 엉킨 실을 풀며 불만을 터트렸다. 에일이 알려주는 대로 따라 해도, 이상하게도 실이 엉키고


바느질이 삐뚤삐뚤하게 됐다. 펠트지가 있는데도 그랬다.

“나는 영 손재주가 없나 봐.”

그녀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에일이 부드럽게 웃었다.


“손재주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만드는 건 제가 하면 됩니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아요. 재미있으면
그만입니다, 부인.”

“못하니까 재미없단 말이야. 잘해야 재미있지.”

그 말에 그가 하하,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맞는 말이라 웃는 것 말고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네트는 삐뚤빼뚤한 바느질 실력으로 고군분투하여 결국 여우 인형 하나를 완성시켰다. 완벽한 형태로


만들어진 에일의 인형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솜이 터질 것처럼 불완전한 형태의 인형이긴 했지만.

에일이 그녀를 북돋아 주었다.

“처음치고는 잘 만드신 겁니다. 소질 있으신데요?”

“에일, 빈말은 하지 마.”

그녀가 입술을 내밀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눈, 코, 입이 중구난방에 바느질이 얼기설기 뒤죽박죽이라


곧 장렬히 솜을 터트리며 숨을 꺼트릴 게 뻔히 보이긴 했으나, 그래도 제가 처음으로 완성시킨 것이라
나름의 뿌듯함이 있었다.

“나 얘한테 이름 붙여줄 거야. 못난이라고.”

“왜 못난이라고 지어줍니까? 예쁜이라고 불러줘요.”

“아냐. 못난이가 좋아.”

말은 짓궂게 하면서도 그녀는 제가 만든 인형을 소중하다는 듯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양 인형 옆에 못난이 인형을 두었다. 양과 여우, 왜인지 오묘한 조합이었으나 그녀는 썩 마음에 들었다.
에일이 만든 인형과, 자신이 만든 인형.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음번엔 더 잘 만들어야지. 이네트가 다짐했다.

* * *

다음날, 이네트는 일어나서 씻고 밥을 먹자마자 전투적으로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부인, 조심하면서 해요. 그러다 바늘에 찔릴까 무섭습니다.”

“걱정 마. 찔려도 크게 안 다쳐.”

“바늘에 찔리는 조그마한 상처일지라도 혹시 모를 병에 걸릴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조심하면서


해야 해요.”

에일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허나 이네트는 에일의 걱정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부인은 생각보다 덜렁거려요. 이전에 부엌에서도 함께 요리를 하다가 냄비를…….”


그가 계속해서 무어라 잔소리하였지만 바느질에 집중한 그녀의 귓가에는 그의 말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수준도 되지 못했다.

결국 에일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마구간으로 향했다.

바느질에 열중하던 이네트가 엇, 소리를 내며 움직임을 멈췄다. 갈색 실이 다 떨어진 것이었다. 하필이면


갈색 강아지 인형을 만들고 있던 중이었기에, 갈색 실이 가장 중요했다.

집중하고 있을 때 흐름이 끊기다니. 그녀가 혀를 쯧, 짧게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일이 직접 만든 양털 원피스와 양털 모자, 목도리, 장갑까지 갖춰 입었다. 그래도 몸이 적응을 했는지


추워서 덜덜 떨리긴 하지만 예전처럼 심하게 떨리진 않았다.

혼자서 나가도 아무 문제 없겠지?

이네트는 자신의 에벨루넨어 실력을 떠올려 보았다. 잡화점에 가서 갈색 실을 고르고 사 오는 것 정도야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었다. 갈색 실을 고른 다음, 계산만 하면
되니까.

에일과 함께 시장을 다니고 마을을 산책했기 때문에 길은 알고 있었다. 설마 길을 잃을까? 그녀는


반신반의하면서 문을 열었다.

“에일, 나 실 사고 올게!”

그녀의 외침에 마구간에 있던 에일이 급하게 마구간 밖으로 뛰쳐나왔다.

“혼자서요?”

“응. 잡화점에 가서 실 좀 사려고.”

“길은 아십니까? 괜찮겠어요?”

그가 그녀의 앞에 한달음에 달려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였다.

“응. 고작 실을 사러 갔다 오는 거잖아. 그리고…… 언제까지나 네게 의지할 수만은 없고.”

결연한 그녀의 표정에 그가 끄응, 낮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좁혔다.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그녀가 말을
무르지 않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별 탈 없이 다녀오세요. 길을 모르겠으면 시장 입구 쪽에 있으세요. 제가 그리로 갈 테니까요.”

“응. 얼마 안 걸릴 거야. 고작 실 하나 사 오는 건데 뭘.”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부인.”

“응!”

이네트가 싱긋 웃으며 외쳤다. 그녀의 밝은 모습에 에일 또한 결국 못 이기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고작 실을 사러 잡화점에 가는 것뿐인데……. 에일은 제 불안증이 심각한 수준이라 생각하며, 집
밖을 나서는 이네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은색 머리카락이 걸을 때마다 흔들거렸다. 추운 듯 종종걸음으로 걷는 것조차 귀여웠다. 그는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쭉 바라보다가 이내 마구간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네트는 에일과 함께 걸었던 길을 혼자 걸으며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대화 없이 혼자 걸으니
사사로운 주변 모습이 더 눈에 잘 들어왔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나는 집과,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이 몇 보였다. 부부로 보이는 이는 물론이고 친구끼리 대화하며 걷는 사람도 많았다. 그녀처럼 혼자
걷는 이도 제법 있었다.

그녀는 몸이 기억하는 대로 시장으로 향했다. 집이 마을 외곽에 위치해, 시장까지 거리는 그리 가까운


편은 아니었다. 걸어서 20 분 정도 걸렸다.

계속 걷다 보니 추위가 점점 가셨다. 이네트는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시장 입구에 들어설 땐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이네트는 심호흡을 하고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에
사람들이 왁자지껄했다. 이네트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목도리를 올려 눈만 빼고 얼굴을 전부 가렸다.

잡화점에 도착하고, 문을 열자 그때 맡았던 희미한 나무 냄새와 꽃향기가 똑같이 났다. 이네트는 기분


좋게 코끝을 스미는 향기를 맡으며 실이 있는 쪽으로 갔다.

실은 가지각색으로 다양했다. 원래 갈색 실만 살 생각이었지만, 보다 보니 다른 실도 눈에 띄었다.


보라색 실도 살까 하다가, 보라색으로 만들 수 있는 게 바로 떠오르지 않아 망설였다.

몇 번 더듬거리고서야 가지 인형을 떠올렸지만,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저어 상상을 지웠다. 굳이 보라색


실을 쓰기 위해 가지 인형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결국 원래 사기로 했던 갈색 실 하나만 골랐다. 갈색 실로는 만들 수 있는 게 많았다. 말도 있고, 곰도


있고, 강아지도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갈색 실 꾸러미만 3 개나 샀다. 뭐 많이 사도, 언젠가는 다 쓸
테니까.

이네트는 실을 담은 종이 가방을 가볍게 흔들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갈색 강아지 인형은 처음부터


에일에게 주기 위해 뜨기 시작한 거였다. 회색빛 섞인 갈색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인상의 그를 볼 때면
언제나 커다란 강아지가 떠오르고는 했다.

그녀는 동물이면 뭐든 좋았다. 말을 가장 좋아하긴 했지만, 강아지도 말 못지않게 좋았다. 그만 좋다면


강아지 한 마리를 넓은 마당에 풀어 키우고 싶었다.

한 생명을 들이고, 함께 한다는 건 신중한 선택을 요했다. 그녀는 한순간의 충동으로 생명을 들이고 싶진
않았다. 그와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고민 끝에 데리고 오고 싶었다.

계속해서 걷자 저 멀리 집이 보였다. 이네트는 가까워지는 집을 바라보며 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어서


빨리 아까 만들던 인형을 완성한 다음, 에일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다. 아마 선물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받으면 기뻐할까? 이네트는 에일의 웃는 얼굴을 상상하면서 대문을 열고 넓은 마당에 들어섰다.

“에일!”

마당을 가로지르며 마구간을 바라보았다. 대답이 없어 마구간 안을 슬쩍 보았다. 그는 없었다.

집에 들어갔나? 이네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이상하게도 집 안은 무척 조용했다. 꼭…


… 누군가 기척을 숨긴 것처럼. 이네트가 종이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에일? 어디 있어? 장난치지 말고 얼른 나와.”

어디 간 걸까? 왜 없지? 그녀는 걸을 때마다 들리는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에 마른 침을 삼켰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설마 길을 잃은 줄 알고 시장으로 간 건가? 그러고 보니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가느라 평소보다 좀


오래 걸린 것 같기도 했다.

엇갈렸나 보다. 그녀는 그럴 것이라 굳게 믿으며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이네트의
몸이 뒤로 확, 끌려갔다.

“쉬이.”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속삭임과 함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몸이 석상처럼 굳은


이네트가 눈을 크게 홉떴다.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아…….”

가느다란 흐느낌과 함께 그녀의 몸이 주체 없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억눌린 숨과 신음이


그녀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이넷. 왜 이렇게 떨어.”

희미한 약초 냄새와 익숙한 체향.

“겨우 다시 만났는데.”

잇새 사이로는 그 어떤 언어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흐읍, 흐…….”

“너 때문에 온갖 곳을 미친놈처럼 다 쑤시고 다녔잖아….”

페르닌드가 떨리는 이네트의 몸을 뒤에서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숨이 막혔다가 급하게 들이마시는 사람처럼 그가 갈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페르닌드 디에드반이 왜 여기 있지? 아파서 누워 있던 게 아니었나? 도대체 어떻게?

그녀의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얗게 물들었다. 석관 인형처럼 굳은 몸은 제어를 잃고 잘게 떨렸으며,


홉뜬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나왔다. 두려움이 온몸을 잠식했다.

또다시 악몽이 도래하리라는 미지의 공포가 그녀의 깊숙한 내면까지 엉망으로 뒤흔들었다.

이윽고 기다렸다는 듯 닫힌 문이 끼이이, 고막을 긁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났다.

“누이.”

지크프리트는 마치 짐을 끌 듯이 에일의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어 집 안으로 옮겼다. 에일의 얼굴은


피로 물들어 엉망이었다. 몸싸움을 한 흔적이 여실했다. 이네트는 피에 젖은 그의 옷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차마 오래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부인… 전 괜찮, 윽.”

지크프리트가 자비 없이 에일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 반동으로 에일의 몸이 튕기며 카시엘의 다리와


부딪혔다. 카시엘이 제 발치에서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에일을 내려다보았다.

“부인?”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물었다. 내려다보는 눈빛에 살의가 일렁거렸다. 지크프리트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소꿉놀이라도 한 모양이야.”

허나 웃음과 가벼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 또한 에일을 바라보는 눈빛에 짙은 혐오와 경멸이 깔려있었다.


카시엘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조그마한 나라에 숨어들 줄은 몰랐어, 누이. 누이가 이 변방 공국을 알았을 린 없고……. 이 새끼
생각이지?”

지크프리트의 눈에 어려 있던 경멸이 한층 더 짙어졌다. 혀를 짧게 찬 그가 에일의 머리통을 세게 발로


갈겼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에일이 숨을 헐떡거렸다.

“역시 죽여 버릴 걸 그랬어. 지금이라도 죽여 버릴까?”

“안 돼! 싫어, 안 돼!”

억눌린 신음을 흘리던 이네트가 발작하듯 토해냈다. 말과 말 사이에 섞인 비명이 애처로웠으나 그뿐이었다.
지크프리트는 눈물을 비처럼 쏟아내는 이네트의 눈가를 흘긋 바라보고는 다시 에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누이, 우리 약속했잖아. 이 새끼만 살면 된다며?”

“지, 지크프리트, 제발…….”

“근데 왜 도망을 쳐? 약속을 깨트린 건 누이야.”

“미아, 미안, 미안…… 미안해요……. 다, 다신 아, 안 그럴게요…….”

뒤에서 그녀를 껴안고 있던 페르닌드가 안고 있던 손을 풀더니 흠뻑 젖은 이네트의 눈가와 뺨을 훔쳤다.


지탱하는 힘이 사라지자 그녀가 실이 끊긴 인형처럼 맥없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쏟아지는 눈물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이네트가 손을 달달 떨며 바닥에 쓰러진 채로 빌었다.

“그, 그러지 말아요. 제발, 제, 제발…….”

그녀가 더듬거리면서도 간곡히 애원했다. 지크프리트는 에일을 자비 없이 죽일 수 있다. 가차 없는


발길질과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이 그것을 증명했다. 이네트가 심연과도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사, 살려만 주세요…….”

피투성이가 되어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에일을 보며 이네트가 꺽꺽거리며 오열했다. 내팽개친


종이가방에서 갈색 실이 데구르르 굴렀다.

어쩌면,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던 거 같아…….

“부인, 전 괜찮…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에일이 말했으나 이네트는 눈을 감고 천천히 길가의 거지가 구걸하듯 두 손을 모았다.

“이네트!”
언제나 아가씨, 부인이라는 호칭으로만 그녀를 부르던 에일이 처음으로 이네트의 이름을 외쳤다. 그녀의
감긴 눈이 움찔 떨렸다.

“넌 닥치고 있어.”

지크프리트가 에일의 복부를 걷어찼다. 이때껏 신음 한 번 흘리지 않던 에일이 으윽, 작게 신음하며 몸을


웅크렸다.

이네트의 늘어진 어깨가 가파르게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헐떡거리며 매달리듯 모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눈을 살짝 뜨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쏟아졌다.

어쩌면 이렇게 될 줄 알았기에 계속 회피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이제 괜찮아질 거라고 말도 안 되는 희망을 가지고…….

겨우 돋아난 희망은 환상처럼 사라졌고, 구둣발에 짓밟힌 개미처럼 밟혀 죽었다. 하루살이처럼 덧없었다.

이네트는 어쩐지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 이렇게 될 거였어. 오래 버티면서 내가 말도 안 되는 희망을 가진 거였지. 그래, 그런 거야.


이곳에서 에일과 영원히 평화로이 지낼 리가 없었는데…….

비워진 마음에 그때처럼 체념이 그득 들어찼다. 이네트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무신경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지크프리트와 카시엘, 페르닌드가 텅 비어버린 이네트의 눈을 바라보았다. 공허한 푸른 눈동자조차


아름다웠다. 도망친 것에 대한 분노는 어느덧 그녀의 서글픈 아름다움에 묻혀 사라지고, 곧 넘쳐흐르는
애정으로 변모했다. 그저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곁에 두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들이 서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엎드린 에일이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며 비틀거렸다.

“부인, 안 돼…요. 도망쳐요….”

에일이 바닥에 주저앉은 이네트를 보며 말했으나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그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그녀에게 다가가는 세 남자를 저지하였으나 그조차 바람 앞의 등불처럼 하등 소용이 없었다.
페르닌드가 귀찮다는 듯 세게 쳐낸 손길에 폭행으로 한계에 다다른 몸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으니까.

“부인, 안 돼요. 아가씨…… 제발…….”

에일은 쓰러진 와중에도 이네트를 향해 애원했다. 이네트는 그 목소리에 흔들리면서도 지크프리트가 내민


손을 결국 맞잡았다. 지크프리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누이, 그래도 잘 먹으며 지낸 모양이야. 전보다 살이 붙어 더 보기 좋아.”

“…….”

부풀어 오른 뺨에 언제나 불그스름하게 감돌던 혈색은 공포에 스러져 하얗게 질려있었으나, 그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럽게 보일 따름이었다. 이네트가 비틀거리자 옆에서 카시엘과 페르닌드가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어깨에는 페르닌드의 팔이, 허리에는 카시엘의 팔이 둘러졌다.

“부인!”
난 아무것도 안 들려.

이네트는 멍하니 그들의 부축을 받고 걸으며 눈을 굴려 집을 둘러보았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겠지. 그녀가 멍하니 생각하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아까 만들다 만 인형을 보고선 걸음을 멈칫했다.

“잠시…….”

“…….”

“떠나기 전에 짐을 챙기게 해줘요…….”

가냘픈 음성에 그들이 일제히 이네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별거 없어요… 부탁이에요.”

고개를 돌리고 선 지크프리트가 으음, 고민하는 듯 턱을 쓸었다. 그리고는 말해보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떤 건데?”

“인형…이랑 오르골이에요….”

에일이 만들어 준 양 인형과 자신이 만든 여우 인형…… 그리고 자기 전 매일 들었던 오르골은 놓고 가고


싶지 않았다. 다른 것들 모두를 포기하더라도 그것들만큼은…… 절대로…….

이네트가 손을 덜덜 떨면서 지크프리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애처로이 붙잡자, 그가 놀란 듯


말을 잊고서 눈을 깜빡거렸다.

“지크, 부탁이에요….”

가냘픈 음성이 또 한 번 그를 흔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프리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이네트가 곧바로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챙겨야 했다. 카시엘과 페르닌드는 당연하다는 듯 그 뒤를 따랐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양 인형과 여우 인형을 챙기고, 침대 옆 탁자 위에 있는 오르골을 함께 챙겼다.


챙기면서도 넘치는 슬픔은 멈추지 않아 오르골과 인형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곳에서 에일과 함께…… 수많은 밤을 지새우고, 함께 했는데…….

그간의 짧은 추억과 평화가 아스라이 스쳐 지나갔다. 한 줌의 재처럼 사라져버린 짧디 짧은 기억이라지만


…… 평생 잊을 수 없겠지.

이네트가 멍하니 못 박힌 듯 서 있기만 하자, 기다리던 페르닌드가 재촉하듯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끌려 나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침실의 풍경을 되새기듯 눈 속에 담고, 또 담았다.

밖으로 나가자 지크프리트가 에일의 머리통을 밟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네트가 비명을 질렀다.

“아, 누이. 귀 아프잖아. 죽이려는 게 아니고 잠깐 밟고 있는 것뿐이야.”

그가 능청스럽게 발을 치우며 말했다. 에일은 이미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오르내리는 상체만


아니었어도 그가 죽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네트는 곧 숨이 멎을 사람처럼 애걸했다.

“살려줘요…….”
“으음.”

“이제 다시는 도망치지 않을게요…. 그러니 살려만 줘요.”

“정말? 약속하는 거야?”

“네. 야, 약속할게요. 다신, 다시는… 도망치지 않을게요.”

에일이 죽으면 더는 버티질 못한다. 그녀는 직감했다. 이 이상 아프고 싶지 않았다. 더 아팠다가는…….

이네트는 저를 앞으로 이끄는 카시엘과 페르닌드에게 몸을 맡기고 에일을 지나쳤다. 눈물이 칼처럼 날이
서려 아팠다. 눈물이 흐르는 살결 하나하나에 생채기가 생겼다.

나의 마음과, 나의 의사는 묵살당하고…… 내 유일한 사랑마저 이곳에 버려진 채 결국…….

양옆으로 저를 감싸 안은 이들의 속박을 느끼며, 이네트가 울면서 웃었다.

* * *

그들은 지체 없이 이네트를 데리고 일리아드 제국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배에 올라탔다.
그들은 저들끼리 누가 그녀의 방에서 지낼 것이냐로 의논했다. 이네트는 그들이 저를 옆에 두고 떠들어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누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누이와 한방에서 지내기로 했어.”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지크프리트와 단둘이 방에 남겨져 있었다. 그의 목소리엔 설렘과 기대가 가득했다.

“누이와 같이 자는 건 처음이야.”

그가 마치 수줍은 소년처럼 눈을 내리깔며 볼을 살짝 붉혔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여전히 시선을


허공에 고정한 채 입을 다물었다.

“누이를 만나려고 제국의 일은 다 팽개치고 여기까지 왔어. 누이를 만나면 화를 내야지, 했는데…… 역시
난 누이에게 화낼 수 없나 봐.”

“…….”

“누이는 내가 미워?”

정신을 반쯤 놓고 있던 이네트가 고개를 돌려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잘못을 하고 혼이 날까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처럼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스웠다.

“누이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데…… 누이는 이미 날 미워하는 것 같아.”

아. 그는 고작 미움을 받느냐, 안 받느냐를 생각하고 있구나. 제 고통의 근원을 모르고 그저 미움과


애정에만 연연하고 있구나. 이네트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 경멸이 서리자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누이가 내 진심을 알아주고 이해해줄 거라 믿어. 정말로, 누이를 해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니까.”

“왜 그랬어요, 지크프리트?”

이때까지 조용하던 그녀가 높낮이 없는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눈을 휘었다.

“왜 그랬냐니. 다 누이를 아껴서 그런 거라고 얘기했잖아.”

“왜 그랬어요? 왜 내가 싫어하다 못해 마주치는 것조차 끔찍이 여기는 남자와 억지로 결혼시키고, 왜


에일을 가지고 나를 협박했어요? 왜 나를 아프게 해요?”

“…….”

“차라리 사실대로 이야기해요. 정치적인 목적이었노라고. 고작 반쪽짜리 황녀가 당신 말대로 하지 않아서


기분이 나빴다고. 날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다고.”

지크프리트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빠져나갔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이 이어질수록 그녀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웃음기가 싹 가신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제게 저런 표정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이네트는 잊고 있던 공포감을 다시 느꼈다. 밀려오는 불안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누이. 내가 무서워?”

“…….”

“왜 내가 누이를 이용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그럼 왜 그런 건데요? 도대체 왜…….”

“왜냐니? 누이를 사랑하니까.”

이네트의 얼굴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 났다.

“……뭐라고요?”

“누이를 사랑해.”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 벌어진 입술에서 밭은 숨이 새어 나왔다.

“응…… 맞아. 난 누이를 사랑해. 사랑하는 것 같아.”

그가 말하면서도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그래, 난 누이를
사랑해……. 그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녀는 경악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그게 어떻게 사랑이에요?”

이네트가 비명처럼 외쳤다. 그리고는 떠오른 기시감에 순간 몸을 멈칫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눈으로
외치던 카시엘 디에드반과, 사랑을 말하며 버리지 말라 빌었던 페르닌드 디에드반…….

그들 모두 이런 눈을 하고 있었다.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면 뭐야?”

이네트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사랑 말고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지?”

그의 회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가 그녀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누이를 만난 뒤 그 어떤 여인과도 몸을 섞은 적 없어. 그럴 생각도 안 나고, 서지도 않던데.”

“…….”

“혼자 할 땐 누이를 생각하니까 서더라. 누이를 상상하며 몇 번이나 혼자 뺐어.”

이네트는 다가오는 지크프리트의 얼굴을 마주 보며 턱을 덜덜 떨었다. 그가 가볍게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봐. 누이랑 아주 잠깐 입 한 번 맞췄다고 서잖아.”

그가 보란 듯이 제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굳은 채 고개를 움직이지 않자 그녀의 턱을


붙잡아 강제로 아래로 내렸다. 그녀가 부푼 앞섶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끔찍했다.

“누이, 걱정하지 마. 누이가 원하지도 않는데 강제로 할 생각 없어.”

설탕을 바른 듯 부드러운 어조로 지크프리트가 말을 이었다.

“누이가 원하면, 그때 할 거야. 기다릴 수 있어.”

정말로…… 이 자가 나와 피가 반이나 섞인 이복동생이 맞는 건가? 이네트는 차오르는 경멸을 참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구역질이 밀려왔다.

“이런. 배가 많이 흔들리네. 누이, 배 멀미가 심한 편이야?”

지크프리트는 헛구역질을 하는 이네트를 보고선 배 멀미 운운하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이네트는 더욱


혐오를 금할 수 없었다.

그가 언제부터 자신을 이복누이가 아닌 여자로 보았는가.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결코 정상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밤이 늦었다며 그녀에게 깊은 잠이 들기를 종용했다. 그녀는 무기력하게 몸을 뉘었다.

이제 더는 익숙해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할 수도, 다 괜찮을 거라는 희망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불이 꺼지고 암흑이 찾아왔다. 지크프리트는 당연하다는 듯 이네트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녀는 제


허리를 감싸는 그의 팔을 느끼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누이.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다시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누이가 도망갈 걸 대비해서 기사단을 데리고
왔으니까.”

“…….”

“만약 죽으려고 한다면 어떻게든 그 남자를 잡아 와서 아주 고통스럽게 죽일 거야. 알겠지?”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협박했다. 이네트는 송장처럼 얕은 숨을 쉬었다.

* * *

이네트가 배에서 할 일이라고는 시간을 죽이는 일밖에 없었다. 이곳에서는 에일과 함께 지낼 때처럼
산책을 한다든가, 말에게 여물을 먹인다거나, 인형을 만들 수 없었다.

밖은 이미 지크프리트의 기사로 가득했다. 답답한 공기에 못 이겨 딱 한 번, 스스로 문을 연 적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답답하고 기분이 불쾌해졌다.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시선과 수십 쌍의 눈……. 눈동자를 굴려 바라본 복도에는 수십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기사가 일렬로 기립하고 서 있었다.

문밖으로 발을 한 발자국 내딛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집중되는 이목에 나가고 싶은 마음은 흩날리는
눈발보다 못하게 사라져버렸다.

감시하는 이들의 눈은 지나치게 집요했다. 조그마한 움직임조차 시선이 따라붙었다. 지독하기 짝이


없었다.

방에 있으면 그것대로 지옥이었다.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는 이들이 날마다


돌아가며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느끼지 않는 척 모른 척하고 죽은 듯 누워 있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식사를 하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배를 돌려 그 남자를 죽여 버리겠다는 지크프리트의 으름장에, 이네트는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했다. 수프를 한 스푼 떠먹을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고, 감자는 모래 알갱이처럼 입
안에서 바스러졌지만 억지로 목울대를 움직여 삼켰다. 음식을 삼킬 때마다 메스꺼워 식사를 마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억겁 같은 식사 시간이 끝나면, 다시 무기력한 시간이 도래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이네트.”

등 뒤로 오라비였던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지 않겠나?”

침묵으로 대화하지 않겠음을 표현해도, 그는 기어코 말문을 트기 위해 애를 썼다. 이네트는 이번에도


대답 없이 몸을 웅크렸다.

카시엘은 답하지 않는 이네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인기척이 가까워지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바위처럼 굳건했다.

“……이네트.”

그가 그녀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닿기 직전 손을 거두었다. 망설이듯 위를 서성이던 손이 결국은


시트를 의미 없이 거머쥐었다.
길게 늘어진 은색 머리카락과 처진 어깨가 여리고 가냘팠다. 카시엘은 그녀를 따듯하게 위로해주고
싶다가도, 불현듯 제게서 돌린 등을 껴안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구쳤다.

카시엘이 떨리는 손가락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날 좀 봐줘.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그의 입속에서 맴돌았다. 완전히 닫힌 맘을 보여주듯 아예 등을 돌리고서 그를


쳐다보지도 않는 그녀의 벽은 너무나도 두텁고 견고했다.

이네트는 그때처럼 카시엘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그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불러도 반응하지 않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따금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황태자와 이야기를
나눌 때뿐이었다. 그조차 빌어먹을 간자 새끼를 두고 하는 협박 때문에 겨우 내뱉는 대답이었다.

시장을 홀로 가면서 기쁜 듯 방긋방긋 웃던 미소와 발그레하게 떠오른 홍조가 눈앞에서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그와 있을 땐 결코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에일, 그자의 목소리를 부르던 행복한 목소리 또한 환청처럼 어른거렸다. 그녀가 보이는 웃음과 밝은
목소리, 애정을 품은 눈빛 모두 제 것이 아닌 그 남자의 것이었다.

자신은 그녀의 행복을 훔쳐보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그조차 빼앗고, 짓밟아 없애버리고서…….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나를 뒤돌아 봐줘.

카시엘이 이네트의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마 소리 내어 바랄 수조차 없었다.

‘에일!’

또다시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카시엘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에 휩싸였다. 지금이라도 이네트를 보내주어야 할지, 아니면…… 그녀의
아픔을 모른 척하고 끝까지 곁에 둘지.

껍데기라도 좋아.

그의 마음은 그리 외쳤고, 이성은 그녀를 놓아주라 외쳤다. 이상하게도 그의 이성은 그녀 앞에선


무용지물과 다를 바 없었다. 오롯이 본능과 감정만이 앞서 작용했다.

허나 숨만 쉴 뿐, 점점 죽어가는 그녀를 볼 때면 그의 이성이 삐거덕거리며 그에게 단호하게 을렀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놓아주라고…….

카시엘의 입술이 하염없이 달싹거렸다. 차오른 목소리가 기어코 그의 목을 졸랐다. 그가 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자에게 가도 좋다고 하면…… 그러면 나를 한 번이라도 돌아봐 줄 건가?”

그의 물음에 미동 없던 이네트의 등이 움찔, 떨렸다.

“한 번이라도 내게…… 진심으로 웃어줄 건가?”

금방 재가 되어 사라질 것처럼 아스라한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늦었어요.”
“…….”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요, 카시엘.”

카시엘이 멍하니 이네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아무리 기다려도, 그 옆에 몸을 뉘어도 그녀는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이넷. 오늘 파도가 진짜 좋아. 한번 보기라도 하자, 응?”

“…….”

“속이 안 좋아? 아직도 누워 있고 싶어? 그러지 말고 햇빛이라도 봐.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 걱정돼서


그래.”

페르닌드가 이네트의 팔을 붙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반응 없는 그녀에게서 어떻게든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그가 안간힘을 다했다.

“망루에라도 가보자. 너 여기서 나간 적 없잖아. 아직 바람이 차갑기는 하지만 참을 만해. 갈수록 햇볕도
뜨거워지고.”

“…….”

“이넷.”

팔을 흔들어도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어깨를 흔들었다. 그녀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몸이 이리저리


흔들려도 입에 아교라도 붙인 양 대답하지 않았다. 흔들리던 그녀가 눈을 아예 감아버렸다.

“이네트 디에드반!”

페르닌드가 고함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고막이 울리는 큰 목소리에도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분한
듯 씩씩거리던 페르닌드가 젠장, 욕설을 중얼거리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거, 그 새끼 집을 떠나기 전에 들고 온 거 맞지?”

그가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눈이 그제야 뜨였다.

“대답하지 않으면 부숴버릴 거야. 응, 이라고 대답해.”

“……응.”

그녀의 목에서 꽉 막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그마한 목소리임에도 알아들은 페르닌드가 후우,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가늘게 뜨인 눈 속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같이 나가. 이대로는 네가 잘못될 거 같아서 그래.”


“…….”

“네 발로 안 나갈 거면, 내가 들어서 나가.”

그가 오르골을 내팽개치듯 침대에 던지며 그녀의 몸을 안아서 들어 올렸다. 그녀는 높아진 시야에 눈을
깜빡거리다 이내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는 눈을 감았다.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기라도 하듯 숨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페르닌드는 이네트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린 채 문을 열어젖혔다. 수십이나 되는 기사들의 눈이


그들에게 향했다.

“뭘 봐. 눈 깔아.”

그가 기사들을 향해 뇌까리며 서슴없이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이네트는 차오르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몸을 부르르 떨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이넷, 눈 떠봐. 파도가 정말 예뻐. 네 눈 색과 닮았어.”

“…….”

“파도에서 희게 반짝거리는 포말이 꼭 너 같아.”

페르닌드가 대답하지 않는 그녀를 두고서 계속 중얼거렸다.

“너도 저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잖아.”

햇빛에 반사된 파도가 반짝거리며 빛나더니, 이내 사라졌다. 잠잠하게 가라앉았던 수면에서 이윽고
또다시 파도가 넘실거렸다. 그때마다 포말 또한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잡아도 잡은 거 같지 않고…….”

“…….”

“또 사라져 버릴까 봐 무서워.”

페르닌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파도가 그녀 대신 응답하듯 철썩 소리를 내며 넘실거렸다. 눈을 감고 있던


이네트가 스르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바스타드 왕국에서 보르비아 제국으로 넘어갈 때, 바다는 지겨울 정도로 숱하게 보았다. 파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에일이 옆에 있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나눠 가졌다. 그와 있으면 그저 바람결에 흔들리는 닻만 보아도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불안한 마음이
컸으나, 그와 당장 함께 있는 순간이 즐거웠으니까.

허나 지금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나와도, 그 어떤 풍경이 눈앞에 드리워도 캄캄한 암흑 속에 홀로 갇힌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푸른 바다도, 반사되며 반짝거리는 빛도, 굽이치는 물결도 모두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차라리 시름시름 앓다 이대로 죽었으면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에일을 죽여 버린다고 했으니,
차라리 앓다 죽어버린다면…….

“이넷.”

페르닌드가 제 뺨을 이네트의 뺨에 천천히 문질렀다. 반쯤 뜨여 있던 그녀의 눈이 도로 감겼다.

“이제 괜찮냐고 안 물어봐?”


“…….”

“나, 많이 다쳤었는데.”

이네트는 고개조차 젓지 않았다. 게르단 대륙으로 떠나기 전만 해도 다쳤다는 페르닌드가 궁금해 얼굴을
보러 가기라도 했건만, 지금은 그런 마음 따위 언제 있었냐는 듯 일말의 걱정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그대로 죽어버리지, 왜 살아선.

“널 두고 내가 어떻게 가겠어.”

페르닌드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제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아직도 배가 욱신거리면서 아플 때가 있어.”

“…….”

“……그때처럼 걱정해줘.”

그가 웃음기 없는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처럼? 이네트는 기억을 더듬거리다가 이내 미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어 어이가 없었다.

페르닌드는 지금, 어릴 적 감기로 크게 앓았던 그를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했던 이전의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까마득한 옛날, 더럽혀지지 않은 어린 시절에 일어났던 일을.

잡히지도 않는 옛 시절을 이야기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었다. 순수했던 기억과 행복했던 추억을 더럽힌 건
바로 그였다.

이네트는 눈을 감은 채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속으로 바랐다. 적어도 제국으로 돌아가면 이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지금보다는 늘어날 테고, 지크프리트는 황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든 게 사라지고
없는 지금,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바람이었다.

* * *

몸 상태는 갈수록 나빠지면 나빠졌지, 더 좋아지진 않았다. 햇빛을 쐬지 않자 희게 질린 피부는 더


창백하게 변했고, 지지부진한 식사 때문에 몸도 바짝 말라 갔다.

“우욱.”

식사 또한 이전만 못 했다. 무엇이든 먹기만 하면 위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음식을 게워냈다. 헛구역질은


식사 때마다 따라붙었다.

“누이, 못 먹겠어?”

지크프리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네트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는 그럴수록 구역질이 더 인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요새 통 못 먹네……. 단 음식도 못 먹겠어?”

그녀가 입술을 꾹 물었다. 제대로 식사하지 않으면 에일을 죽여 버리겠다는 그의 협박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게 식사가 되지 않았다. 먹고 싶어도 몸이 음식을 받아주지 않고 속을 게워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몸의 반응이었다. 그가 당장이라도 배를 돌린다고 할까 두려워졌다.

“머, 먹을게요.”

이네트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말하며 다시 포크를 쥐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 허나 입에


넣고 우물거리자 또다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욱,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자마자 지크프리트가 젖은
수건을 그녀의 입가에 대주었다.

“누이, 무리하면서 먹지는 마. 마음 아프게 왜 그래.”

지크프리트가 잦은 헛구역질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이네트의 눈가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겨우 다시 음식을 삼키며 어떻게든 토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심호흡을 했다. 여전히 속이
울렁거리는 건 매한가지였다.

“누이 몸이 계속 안 좋아지네. 의원을 데리고 타진 않았는데……. 어디에 정박이라도 해야 하나?”

이네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정박하면 다른 곳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 제국으로 돌아갈 날이 더
늦춰진다.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제국으로 돌아가면…, 그때 의원을 볼게요. 그러니까 그냥 계속 가요.”

“괜찮겠어? 누이가 힘들지 않겠어?”

“괜찮아요.”

왜 위하는 척하는 거지. 이네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지크프리트가 가증스러웠으나 애써 그 기색을


눌러 삼키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못 참겠으면 말해야 해. 알겠지?”

“……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껴안으며 입가를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녀가 고개를 홱 뒤로 젖혔으나 그가 괜찮다는
듯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난 누이 토사물을 손으로도 받을 수 있는 데 뭘.”

지크프리트와 달리 이네트는 정색한 채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자 그가 서서히 웃음을 그쳤다.

“……내가 뒷정리를 할 테니까 얼른 자. 안색이 안 좋아.”

그는 그녀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빼더니 그녀의 몸을 침대에 천천히 눕혀주었다. 그녀는 그의


손길에 따라 몸을 누이면서도 메슥거리는 속에 식은땀을 흘렸다.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이네트는 그리 생각하며 눈을 꾹 감고 그저 잠이 들어 이 메슥거림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 * *

이상한 징후를 가장 먼저 느낀 건 이네트였다.

“욱.”

식사를 제대로 하는 날이 없다시피 했다. 식사 때마다 어김없이 몇 번이고 먹었던 것을 게워냈다.


지크프리트와 카시엘, 페르닌드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당연하다는 듯 수건으로 토를 받아주고,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는 나날이 일상처럼 자리매김했다.

오늘은 카시엘과 함께 있는 날이었다. 이네트는 늘 그랬듯이 음식을 먹자마자 올라오는 음식물에 입을


틀어막았다.

“흐으…….”

앓는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카시엘은 안쓰럽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품에서 검과 장미가 새겨진


손수건을 꺼내었다.

“오늘도 도저히 안 넘어가나?”

그가 그녀의 입가를 부드럽게 닦으며 물었다. 그녀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카시엘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갈수록 더 말라가는군…….”

팔다리를 훑는 눈길이 퍽이나 조심스러웠으나 그녀는 그 시선조차 진절머리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시선을 사선으로 피한 그녀가 제 팔다리를 흘긋 보았다. 그의 말대로 이전보다 더 팔다리가 가느다랬다.
그러다 배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상하게도…… 비쩍 마른 팔다리와 다르게 배는 납작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좀 더 부른 것처럼


보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흐릿하던 정신이 불이 켜진 것처럼 번뜩 뜨였다.

아니겠지…….

이네트는 부정부터 했다.

아니어야 했다. 만약, 생각하는 그게 맞다면 그들이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곳에 온 뒤, 그들과
한 번도 관계를 가진 적 없으니까…….

세 남자는 뜻을 같이해 손을 잡았음에도 서로를 믿지 못해 이곳에서만큼은 이네트에게 성적인 스킨십은


일절 하지 말자고 결론지었다. 겉으로는 이네트를 위한 일이라며 포장했으나, 실은 저열한 소유욕과
질투에서 우러나온 일에 불과했다.

이네트의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임신이 맞다면…… 그들과 최근 관계를 맺은 적 없으니 그들의


아이가 아닌 에일의 아이가 분명했다. 이네트는 차오르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몸에 힘을 주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아이를 바라보는 에일의 눈동자는 언제나 따스했다. 산책을 할 때마다 아이가 보이면 늘 ‘귀엽군요.’
라고 말하며 눈을 휘었다. 그의 다정한 눈빛을 떠올리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이곳으로 잡혀 들어오지 않고, 그와 함께 지낼 때 이 사실을 알렸으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행복했을까?

이네트가 피식 웃었다. 부질없는 상상이었다.

아이는 그와 저의 결합으로 생긴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제 몸에 남긴 흔적이기도 했다. 결코 없애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

이네트는 어떻게 해야 그들에게 들키지 않을지 생각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직 배가 많이 부르지


않았지만 결국엔 들키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배가 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들키지 말아야 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톱과 손톱 근처의 살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이네트, 피가 나잖아.”

카시엘이 혀를 쯧, 차며 이네트의 손을 움켜쥐고는 아래로 내렸다. 그는 검지에 맺힌 피를 흘긋 보더니


망설임 없이 입술로 그 피를 쓰읍 빨아들였다. 이네트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는 혹시나 그가 눈치챌까 싶어 시트를 끌어 올려 배를 가렸다.

“이네트.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그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의 검지가 그녀의 뺨에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는 검지에 남은


감촉의 여운을 느끼기라도 하듯 검지를 엄지로 쓰다듬었다.

“내가 항상 네 편이 되어주겠다.”

“…….”

“그러니, 나를 이용해.”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던 이네트가 눈을 위로 치떴다. 카시엘이 진중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눈을 피하지 않고 그와 시선을 오래 마주했다. 그는 눈빛만 나눌 뿐, 침묵을
지킨 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네트 또한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먼저 눈을 피한 건 이네트였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카시엘 또한 눈을 굴려 그녀의 시선이 닿고 있는


허공에 눈길을 주었다.

이미 늦었다 해도, 지금이라도 네가 원하는 걸 주고 싶다.

카시엘이 이네트의 내리깐 속눈썹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못 할 게 없으리라고.

* * *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제국에 도착하기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네트는 그다지 부르지 않은 배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른 팔다리에 비해 배가 납작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이상할 정도로
부른 것은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이네트는 그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식사를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많이 먹어서 배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길 바랐다. 여전히 헛구역질은 계속되었지만 의지 때문인지 식사는 전보다 수월해졌다.

“누이, 이제 식사를 제법 잘하네?”

지크프리트가 대견하다는 듯 싱긋 웃으며 이네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저를 아이 취급하는 그가


불쾌했지만 티 내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근데 왜 살이 안 찔까? 이상하네.”

그가 그녀의 가느다란 팔뚝을 만지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러다 말라 죽을까 봐 걱정돼.”

그는 걱정을 숨기지 않고 가득 드러냈다. 몸을 훑어보는 눈길엔 걱정스러움이 가득했으나, 이네트는 그저


조마조마할 뿐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눈치챌까 봐 배에 힘을 주고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애썼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정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식사를 잘하는데도 살이 찌지 않는 건 역시 몸에


문제가 생긴 거야.”

“괘, 괜찮아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아냐. 아무래도 의원에게 보여야겠어. 안 그래도 르완 왕국을 지나치는 중이었으니 그 섬나라에라도


정박하는 게 좋을 듯해.”

이네트가 고개를 퍼뜩 저었으나 지크프리트는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그가


성큼성큼 걸어 문밖으로 나갔다.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네트가 망연자실하게 지크프리트가 나간 방문을 바라보았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녀가 감전된


사람처럼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가 복도를 미친 듯이 질주하자, 복도에 기립하고 서 있던 수십 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지크프리트!”

이네트가 지크프리트의 이름을 소리 높여 외쳤다. 간절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지크!”

이내 이제는 부르지 않는 그의 애칭까지 부를 정도로 그녀의 마음이 궁지에 몰렸다. 아무리 뛰어다니며
불러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허탈한 표정으로 우뚝 선 채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안 돼…….”

그가 절대로 알아선 안 돼…….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고개를 들자, 주변을 빙 둘러싼 기사들이 보였다. 기사들이 제각기 다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옷과 검으로 무장한 기사들의 모습에 이네트가 겁을 질린 얼굴로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온몸의 피가 아래로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저 멀리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한 명, 아니 두 명…… 세 명. 이네트가
멍하니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이!”

지크프리트의 목소리였다. 저 멀리서 그가 카시엘과 페르닌드와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들이 오자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뭐야, 왜 애를 몰아세우고 그래!”

페르닌드가 기사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말 한마디에 기사들 모두 그들 시야에서 서둘러


사라졌다. 이네트는 기사들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서서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크프리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누이, 왜 그래?”

“아, 아…….”

이네트는 가물거리는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여전히 넋을 잃은 모습에 지크프리트가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예전에는 그의 손에 말랑한 볼살이 다 들어찼는데, 이젠 말라서 다 채워지지
않았다. 그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 찼다.

“역시 하루라도 빨리 정박해야겠어.”

“아, 안 돼요….”

그것만은 안 된다는 듯, 멍하니 굳어 있던 이네트가 빠르게 말하며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가 눈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누이?”

그녀의 가슴이 불안정한 맥동으로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그녀는 크게 뛰는 제 심장 소리를


들으며 벌벌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이제 곧 있으면 제국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도착하려면 일주일 정도 남았잖아. 그사이에 더 안 좋아지면 어쩌려고.”

지크프리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그럼에도 이네트가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녜요. 그럴 필요 없어요. 하루라도 빨리 제국에 도착하고 싶어요. 중간에 정박하지 말아요.”

계속되는 그녀의 간곡한 거부에 지크프리트가 의아한 듯 턱을 문질렀다.

“왜 그렇게 싫어하지?”

그가 눈을 휘었다.

“뭐가 두려운 거야, 누이?”

휘어진 회색 눈이 반짝 빛났다. 웃음기가 서려 있지만 위험한 빛으로 반짝이는 눈빛에 이네트가 흐읍,
숨을 들이켜며 시선을 피했다. 지크프리트는 나직한 숨을 내쉬며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애써
눈을 내리깔고 있지만 동요가 엿보였다.

“이곳에 와서 누이가 이토록 간절하게 내 이름을 부른 적 없었잖아.”

이네트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체득된 공포가 그녀의 몸을 잠식했다. 지크프리트는 겁에 질린 그녀를 보고


확신했다는 듯 미소 지었다.

“뭐 숨기는 게 있구나, 그렇지?”

“그런 거… 없어요.”

그녀가 겨우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더 묻지 말라는 듯 간절한 어조였으나 지크프리트는 그만두지 않고 또


한 번 물었다.

“정말?”

“……없어요.”

미소 지은 지크프리트의 입꼬리가 굳었다. 그가 손을 뻗어 배를 가리고 있는 이네트의 두 손을 위로 틀어


올렸다. 그녀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시 가리기 위해 손을 아래로 뻗으려고 했으나, 그의 힘이
너무나 셌다.

혼란에 휩싸인 그녀가 몸을 웅크렸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녀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누이. 정말 숨기는 것 없어?”

그가 다시 한번, 아까 했던 질문을 반복했다. 몸을 웅크린 채 애써 힘을 주어 떨림을 참고 있던 그녀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긴장이 풀린 몸이 정처 없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지크프리트가 허물어지려는 이네트의 몸을 한 손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누이, 왜 그렇게 떨어?”

그가 떨리는 이네트의 입술을 한 손으로 훔치며 물었다. 겁에 질린 이네트의 동공이 고양이처럼 커졌다.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던 카시엘과 페르닌드조차 이네트의 변화를 알아차릴 정도였다. 카시엘이
조심스레 그들 곁으로 다가와 지크프리트의 손을 이네트에게서 떨어트렸다. 지크프리트가 카시엘을 째릿
노려보았다.

“이네트.”

카시엘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도닥였다. 어깨를 마사지하듯 주무르자 그녀의
몸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사람을 궁지로 모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황태자와 가까이 지내는 자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카시엘은 이네트가 무엇을 숨기든 그녀가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들추고 싶지 않았다. 허나
황태자는 달랐다. 그는 억지로라도 들추고 마는 이였다.

카시엘이 이네트의 손을 잡고 가까이 끌자 그녀가 저항감 없이 그의 곁에 섰다.

지크프리트는 관찰하는 시선으로 카시엘 옆에 서 있는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누이.”

그리고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포식자를 앞에 둔 초식동물처럼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깜빡였다.

“임신했지?”

이네트는 숨을 멈췄다. 지크프리트는 예상했다는 듯 후우, 작게 한숨을 쉬었다가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고, 페르닌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카시엘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뭐야, 임신?”

여태껏 뚱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던 페르닌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임신이라고?”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선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이네트에게 손대지 않기로 합의 본 거 아니었습니까? 근데 왜 이네트가 임신해요?”

페르닌드가 따지듯 지크프리트에게 물었다. 지크프리트는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만약 우리 중에 손댄 사람이 없다면, 여기 있는 사람의 아이가 아니라는 거겠지.”

그 말에 페르닌드가 표정을 굳혔다. 이네트는 겨우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방황했다.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제국에 도착하려면 일주일은 더 남았는데…… 일주일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참아왔는데
…….

결국, 들키고 말았다. 그녀가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처럼 잔뜩 움츠린 채 고개를 떨구었다.

“이넷. 그 새끼 애야?”

이네트가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긍정을 하든, 부정을 하든 결과는


똑같을 것이었다.

“그 새끼 애냐고!”

고함과도 같은 포효였다. 이네트가 놀라 몸을 움찔거리자 카시엘이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카시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시선을 내려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이네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내 아이다.”

“……뭐?”

카시엘의 말에 페르닌드가 눈을 홉떴다. 지크프리트 또한 예상치 못한 듯 눈을 일그러트렸다.

“뭐라고, 공작?”

“제 아이입니다. 전하.”
이네트가 아, 나직한 탄성을 내뱉었다. 카시엘이 떨리는 그녀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녀는 부드럽게
파고드는 손가락에 미약한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거부하지 못했다.

“약속을 깬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만, 이네트와 저는 부부입니다. 아이가 생겨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카시엘의 말이 맞았다. 허나 지크프리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누이가 그대의 아이를?”

그가 부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우습다는 듯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누이가 디에드반 공작을 얼마나
혐오하고 경멸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누이가 디에드반 공작의 아이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잖아. 그대와 자발적으로 몸을 섞을 리가. 그대가 강제로 누이를
취한 게 아니라면 말이야.”

웃고 있던 지크프리트가 돌연 웃음을 뚝, 멈췄다.

“설마, 누이를 강제로 취한 건가, 공작?”

“그건 결코 아닙니다.”

카시엘이 강력히 부정하자 지크프리트가 후후, 한숨과도 같은 웃음을 흘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아이가 아닌 에로드 데반의 아이인 게 확실하군. 그렇지, 누이? 내게 더는 거짓말해선
안 돼.”

질문의 화살이 이네트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차마, 제 입으로
카시엘의 아이라고 말하긴 힘들었다. 꼭…… 아이의 진짜 아버지인 에일을 배신하는 것 같아서…….

입속에서 내뱉지 못할 말이 모래 알갱이처럼 굴러다녔다. 카시엘이 그녀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신호를


주듯 그녀의 손등을 미약하게 긁었다.

“디에드반 공작. 그대가 누이를 감싸기 위해 거짓말한 마음은 기껍지만… 주제를 넘었군.”

“…….”

“누이, 에로드 데반의 아이면 낳을 필요가 하등 없잖아. 그렇지?”

지크프리트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의 입술이 뒷말을 잇기 위해 열리는 순간, 이네트가 득달같이


말을 가로챘다.

“카시엘의 아이예요!”

그녀의 말에 지크프리트가 하던 말을 뚝, 끊었다. 올라간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뭐?”

“카, 카시엘의 아이가 맞아요…….”

이네트가 달달 떨면서도 애써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카시엘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 제가 먼저 유혹했어요.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지크프리트, 당신이 미워서…….”

지크프리트가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로 이네트를 직시했다.


“내게 남편이 된 카시엘과 몸을 섞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공작의 아이를 가졌다?”

지크프리트가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네트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를 아는 몸이 위험을 감지하고 아까보다 더욱 떨리기 시작하자, 카시엘이 안심하라는 듯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 광경을 본 지크프리트의 입매가 비틀렸다.

“후.”

지크프리트가 가볍게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리고는 이내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 돋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이네트가 불안한 듯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지크프리트의 웃음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공기가 완전히 가라앉을 때서야 그가 웃음을 그치고 눈가를
훔쳤다.

언제 그렇게 크게 웃었냐는 듯, 웃음기가 빠진 얼굴은 아까보다 더 냉기가 어려 차갑기 그지없었다.

“흐으…….”

이네트가 앓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공포, 두려움, 서글픔이 봇물 터지듯 심장을
뒤흔들었다. 동요를 보이지 않으려 해도 속이 턱, 막혀와 상체가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에일의 머리통을 밟고 있던 지크프리트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밟고 있던


그의 천연덕스러운 얼굴이…… 저를 보자마자 능청스럽게 발을 치우며 싱긋 웃던 그의 표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이네트가 곧 숨이 멎을 사람처럼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는 카시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숨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대고 숨을 연거푸 들이마시자 카시엘의 단단한
가슴팍이 움찔 떨렸다.

“누이.”

지크프리트가 고저 없는 어조로 이네트를 불렀다.

“내가 미워서?”

지나치게 단조로워 오히려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을 두렵게 하는 목소리였다.

“내가 미워서 그랬다고?”

“…….”

“내가 누이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안다면…… 그런 소리는 못 할 텐데.”

그가 눈을 휘었다. 그러나 입가는 웃고 있지 않았다. 이보다 가라앉을 수 없을 정도로 적막에 휩싸였다.

현악기의 현이 팽팽하게 당겨진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날카로운 공기가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지나친
긴장과 오랜 적막을 깬 것은 페르닌드였다.

“……형의 아이를 가졌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페르닌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거짓말이야. 넌, 넌 그 새끼를 좋아하잖아….”

“…….”

“말도 안 돼.”

페르닌드의 말이 맞았다. 허나 이네트는 이 순간만큼은 진실을 구태여 이야기하지 않고, 거짓이 진실로
굳어지기를 택했다. 페르닌드는 멍한 표정으로 카시엘의 품에 얼굴을 묻은 이네트와, 그녀와 손깍지를
끼고 있는 제 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페르닌드의 시선이 그들의 깍지 낀 손가락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어떻게 보면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아이야 제국으로 돌아간 다음 만들어도 늦지 않았을 텐데, 공작.”

지크프리트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지크프리트와 카시엘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저와 이네트는 부부입니다. 이네트와 저를 결혼시킨 것은 전하시고요. 아닙니까?”

되묻는 어조가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지크프리트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하…… 그대. 왜 이렇게 기어오르지? 죽고 싶나?”

“절 죽이고 싶다 해서 함부로 죽이실 수 없을 텐데요.”

카시엘이 오만한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지크프리트가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눈을 좁혔다.

“못할 것 없지.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과연 그럴까요? 저 또한 호락호락하게 당하고 있지 않을 겁니다만.”

분위기가 잔뜩 날이 선 채 달아오르자 카시엘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이네트가 고개를 들고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지크프리트가 잠시 동요하더니, 이내 날 선 눈매를 죽이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억지로 내려트린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누이. 이리 와.”

“…….”

“어서. 이리 와. 누이에게 화내고 싶지 않아.”

카시엘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이네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것을 알아차린 카시엘이 가지 말라는
듯 눈빛으로 그녀를 말렸으나, 그녀는 천천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누이는 내가 뭘 하든 밉지?”

“…….”

“내가 누이를 아무리 사랑하고 아껴도, 미움받지 않기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 누이에게 미움받을 거라면…
….”

지크프리트가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렇다면 이제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누이를 취해도 되겠네. 그렇지?”

“전하!”

페르닌드가 경악했다. 카시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네트는 예상했다는 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 뿐이었다.

“누이, 내게 키스해.”

지크프리트가 화사하게 웃으며 명령했다.

“얼른.”

깨문 입술에 피가 맺혔다. 지크프리트는 말뚝처럼 서 있는 이네트에게 다가가 그녀의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 그의 손가락에 벌건 핏방울이 맺혔다.

그가 피 맺힌 벌어진 입술을 바라보더니, 그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읏…….”

이네트가 미약한 신음을 내며 눈을 찌푸렸다. 손가락이 입속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입천장을 긁고, 혀
밑을 세게 훑었다. 아픔과 희미한 쾌락이 뒤섞인 와중에도 그녀는 저를 바라보는 카시엘과 페르닌드의
시선에 수치심을 느꼈다. 지크프리트는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겹쳤다.

“시, 싫어….”

누군가 보는 앞에서 이런 식으로…… 피 섞인 이복동생과 입을 맞추다니…….

지크프리트의 혀가 이네트의 혀를 휘감았다. 단단한 혀가 그녀의 혀를 꽉 조이자 그녀의 허리가


움찔거렸다.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혀끝으로 그녀의 혀를 문질렀다.

“으흑…….”

그녀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수치스럽게도 쾌락에 길들여진 몸은 이런 순간에도 아래를


적시고 몸을 섞을 준비를 마쳤다.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이 이상 참을 수 없어진 이네트가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밀어내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세게 밀어내고


입속으로 싫다고 말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겨우 고개를 옆으로 틀어 피하자 그제야 그가
입술을 뗐다.

그녀가 황급히 입술을 닦았다. 붉어진 얼굴로 주변을 살피자 굳은 얼굴로 지크프리트를 노려보고 있는
카시엘의 옆모습이 보였다. 페르닌드 또한 형형한 기세로 지크프리트를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저를 노려보는 두 남자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왜, 누이. 나랑은 도저히 못 하겠어? 역겨워 마지않던 공작과 하는 건 괜찮고?”

카시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지크프리트는 도발하듯 더 말을 이었다.

“누이는 이미 이전에 나랑 입을 맞춘 적 있잖아. 기억나지 않는 척은 하지 마.”

이네트가 젖은 입술을 손등에 묻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날의 실수를 이곳에서 언급하는 그의
저의가 눈에 뻔했다. 그녀의 자존심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카시엘과 페르닌드를 도발하기
위한 수작질이었다.
페르닌드는 그 도발에 보기 좋게 넘어갔다. 분노한 듯 살기 띤 눈으로 지크프리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지크프리트는 늘 그렇듯 미소를 매달았다.

“누이, 부디 날 미워하지 마.”

“…….”

“이번 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알겠지?”

이네트가 순간 말을 잊고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회색빛 눈동자가 눈을 맞춘 그녀에게 다정히 눈을


휘었다.

……미워하지 말라니, 그건 그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미워할 수밖에 행동한 것은 그였다.
괴롭게 하고,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고……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그였다. 선택지조차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제 말이 당연하다는 듯, 부탁을 가장한 협박을 하며 웃었다. 그악한 위선이자 기만이었다.


철저히 그다워서 이네트는 이제 그에게 더는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부터가 한 줌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거짓을 이야기하는데…… 나라고 못 할 것 있을까.

이네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라는 게 제 사랑이라면,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겠다. 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 * *

배가 오랜 여정을 마치고 일리아드 제국에 도착했다. 지크프리트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이네트 옆에 선 다음 에스코트했다. 그녀가 바라지도 않았던 에스코트였다.

공식적으로 남편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카시엘은 그런 지크프리트를 차갑게 흘긋 바라보더니 이어


이네트의 반대쪽 팔에 팔짱을 꼈다. 그에 질세라 페르닌드도 다가와 어떻게든 그녀의 옆에 섰다.

졸지에 이네트는 두 남자 사이에 끼어 동시에 에스코트를 받는 걸로도 모자라 세 남자에게 둘러싸였다.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뒤를 따르고, 세 남자의 둘러싸임을 받으며 마차를 향해 걸으니 주변 이목이


집중되었다.

“납치되셨던 황녀님께서 돌아오셨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야.”

“전보다 마르셨긴 하지만 역시나 소문대로 아름다우시군.”

제국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쑥덕거리고 떠들었다. 이네트는 언뜻 들리는 납치라는 단어에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세간에서는 자신이 납치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납치라니…… 그건 지금 이자들이 한
짓인데.

걷고 싶지 않은 몸에서 점차 힘이 빠졌으나, 팔을 받치고 앞으로 이끄는 그들의 힘 때문에 끌려가듯 몸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몸 안에 있는 마음은 텅 비어 유리알과 다를 바 없었다.

“이네트, 괜찮나?”

카시엘이 질질 끌려가듯 힘이 빠진 그녀의 다리와 창백한 안색을 번갈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네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넓은 마차에 네 명이나 올라탔다. 지크프리트가 이네트를 마차 의자에 앉히고는,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카시엘 또한 마찬가지로 옆자리를 차지했다. 페르닌드는 이네트의 앞에 무릎 꿇고 그녀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었다.

지크프리트는 이네트의 손을 쥐고서 가벼운 손장난을 쳤고, 카시엘은 묵묵히 팔짱을 낀 채 그녀의 손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멍하니 페르닌드의 정수리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둘러 싼 이들의 체온
때문에 잠이 슬슬 몰려왔다.

까무룩 잠이 든 이네트가 시간이 지난 뒤 눈을 떴을 땐 이미 사위가 어둑했다. 그녀는 가물거리는 눈을


연거푸 깜빡이며 무게가 느껴지는 어깨를 흘긋 보았다. 카시엘과 지크프리트 둘 다 잠이 들어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고개를 내리자 페르닌드 또한 순진무구한 소년처럼 잠들어 있었다. 언제 보아도 눈을 감은 페르닌드는


강림한 천사처럼 순수하고 천진난만해 보였다.

금색 머리카락과 기다란 속눈썹, 곧게 뻗은 코, 다문 분홍빛 입술 모두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외모를 깎아내리는 건 그의 저질스러운 단어 선택과 난폭한 행동이었다.

언젠가는…… 네 아름다운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 행복한 추억이 더럽혀지기 전엔


말이야…… 네게 창녀라는 소리를 듣고 나서도 아주 조금은 그 희망을 놓지 않았었어.

이네트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나간 감정을 덧그려 보아도 이상하게도 그 시절 느꼈던 깨끗한 감정은
죽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텅 비어버린 제 감정에 위화감을 느꼈다.

이제 더는 페르닌드를 보아도 전과 같은 증오와 불타는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희미한 불쾌와 진절머리,
성가심……. 그런 자질구레한 티끌 같은 감정만 남았다.

그를 향한 증오와 경멸조차 식어버린 걸까. 아니면 지나친 배신감 때문에 그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져 버린
걸까.

“……이넷?”

어느새 잠이 깬 페르닌드가 고개를 부스스 일으켰다. 아직 채 졸음이 가시지 않은 푸른 눈동자가 졸음을


머금어 몽롱했다. 그녀는 말없이 그 눈동자를 바라보다 시선을 피했다.

“나 보고 있었어?”

페르닌드가 물었으나 이네트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다시 그녀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 어리광부리듯 뺨을 비볐다.

마차는 계속해서 잘 닦인 도로를 내달렸다. 덜컹거릴 때도 있었으나, 어깨에 기댄 두 남자의 체온은


여전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오직 페르닌드와 이네트만이 잠에서 깬 채로 이따금 시선을 교환했다.

“……미안해.”
페르닌드가 지나가는 바람결처럼 읊조렸다.

“미안해, 이넷.”

“…….”

“미안…….”

이제 와서. 이네트는 비웃음조차 머금지 않았다. 그저 감정이 사라져 버린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줘.”

“…….”

“욕이라도 해. 그때처럼 때려도 좋아.”

이네트는 철저히 무시했다.

절대로 그들이 바라는 걸 주지 않겠노라. 페르닌드는 어떻게든 반응을 이끌어 내고자 이전부터 노력해왔다.
그가 원하는 것이 제 반응이라면 결코 줄 생각이 없었다.

페르닌드는 반응 없는 이네트를 올려다보다 이내 얼굴을 와락 찌푸리더니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눈가가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억눌린 숨을 내쉬었다. 숨소리가 점점 가파르게 달아오른다 싶더니, 그가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윽…….”

이네트가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리는 페르닌드의 눈동자를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아무 말이라도 해줘…….”

“…….”

“왜 나한테는 대답도 안 해주는 거야…….”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에 아롱아롱 맺혀 있다가 그녀의 옷에 후드득 떨어졌다. 이네트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페르닌드는 오래도록 숨죽여 울었다. 그녀는 그 울음이 멈출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마차가 드디어 황궁 앞에 도착했다. 마차가 끼익, 멈춰 서자 카시엘과 지크프리트의


눈이 뜨였다. 지크프리트는 더 있고 싶다는 듯 끄응, 한숨을 쉬며 이네트의 쇄골에 입술을 문질렀다.

“누이랑 헤어지기 싫은데…….”

이제 막 잠에서 깬 탓에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는 저와 다른 마음으로 보이는 이네트를 흘긋 보더니


원망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누이, 언제든 공작 저택에서 지내기 지겨워지면 황궁으로 와. 별거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거든.”

이네트가 이번에도 무시하자 기어코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궁을 너무 오래 비워서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

“누이, 언제든 좋으니 찾아와 줘. 기다리고 있을게.”

지크프리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 밖으로 나가기 직전,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대답 없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너무 오래 안 찾아오면 내가 찾아갈 거야.”

그가 싱긋 웃었다.

“누이의 나날에 행복이 가득하길.”

그는 가증스러운 작별 인사와 함께 마차 문을 닫았다. 마차 안에 있는 셋 모두 굳이 마차 밖으로 나가


그를 배웅하지 않았다. 카시엘은 지크프리트가 닫고 나간 마차 문을 불쾌한 눈초리로 흘긋 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지크프리트가 떠나자 페르닌드가 기다렸다는 듯 이네트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품에 뺨을 묻었다.

카시엘은 아까처럼 이네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는 눈치를 보듯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이네트는 그가 제게 기대든 말든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저 시간이 가기만을
바라는 사람처럼. 인형 같은 모습에 카시엘이 더는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디에드반 공작 저택에 도착했다. 이네트는 익숙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정말로 일리아드 제국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이곳은 에벨루넨 대륙의 살얼음 같은 추위도 없고, 숨을 내쉬면 나는 허연 입김도 없었다. 그리고……
에일이 없었다.

이네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에일이 없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솟구치는 슬픔을 그녀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 카시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울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손가락으로
그녀의 젖은 뺨을 쓸어내렸다.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페르닌드 또한 고개를 들고 그녀의 우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의 눈물을 핥고 훔쳐 눈물이 남기는 흔적을 지울


뿐이었다.

* * *

공작 저택의 사용인들이 돌아온 안주인을 기쁜 얼굴로 맞이했다. 이네트는 연신 다행이라고 말하며 반갑게
맞이하는 그들을 보며 의구심을 품었다. 그렇게 잘해주지도 않았는데 왜 저렇게 기쁜 얼굴로 맞이할까
싶어서.
페르닌드가 부득불 이네트가 지내는 방까지 따라 들어오려 했으나, 카시엘이 완강히 저지했다. 그녀는
그들이 무어라 다투든 짐을 든 사용인과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을 열자 익숙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침대, 화장대, 서랍장…… 모두 변한 게 없었다. 꼭 박제라도


한 듯이 떠나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사용인은 구석에 짐을 내려놓고는 곧바로 허리를 숙인 다음 자리를 피했다. 피곤한 안주인의 기색을 눈치
빠르게 파악한 것이었다.

사용인이 나가고, 이네트는 홀로 남아 침대에 무기력하게 몸을 뉘었다. 씻을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허나


눈을 감아도 아까 마차에서 선잠을 잔 탓인지 잠은 오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있자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가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네트.”

“…….”

“욕조에 물을 받아줄까?”

이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시엘은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다, 이내 혼자서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물을 받는 소리가 들렸다. 이네트는 등 너머로 들리는 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들려고 애썼다.
노력에도 잠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에일과 매일 밤마다 들었던 오르골 소리를 들으면 잘 수 있을까? 이네트가 아까 사용인이 가져다준 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짐을 풀자 에일이 만든 양 인형과 제가 만든 여우 인형이 보였다. 또다시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그녀는


양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소중한 것을 쓰다듬듯 조심스럽게 인형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낡은 오르골의 태엽을 감자 늘 에일과 함께 들었던 슬픈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처음 들었을 때도 슬프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들으니 더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 왔다.

인형과 오르골을 들고 침대로 향했다. 머리맡에 인형과 오르골을 두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겨우 이런 것이라도 그가 남긴 흔적이 있다는 것이 행복해서…….

오르골 소리가 끝나기 전에 욕실에 들어갔던 카시엘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씻은 건 아닌지 머리카락이
젖어 있지 않았다. 그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오르골과 침대 맡에 놓인 인형을 흘긋 보더니 이네트의 이름을
불렀다.

“이네트.”

천장을 보고 있던 이네트가 등을 돌렸다. 카시엘이 제게서 등을 돌린 이네트를 아픈 눈동자로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는 상처받은 가슴을 대충 갈무리하고선 등을 보이고 누워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이 가까워지자


그녀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그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뺨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손은 이내 아래로 거두어지더니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로 향했다. 그가 정성스레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고 정리해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번에는 손이 옷자락으로 향했다. 그제야 미동 없던 그녀가 미약하게 눈을 찌푸렸다. 허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원피스를 벗기는 그의 손길엔 성적인 의도가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담백한 손길이었다.

카시엘이 이네트가 입고 있는 속옷까지 전부 다 벗겼다. 알몸이 된 이네트가 마른 제 몸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왜 벗긴 걸까. 멍하니 생각하는 중에 그가 그녀의 가슴 밑으로 손을 둘렀다.

몸이 위로 들린다 싶더니, 이어 그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단단히 받쳤다. 시야가 높아진


이네트가 당황한 듯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카시엘은 그녀를 안은 채로 욕실로 향했다.

욕실 안은 뿌연 김으로 가득했다. 그는 알몸이 된 그녀를 아주 조심스럽게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욕조


안에 담갔다. 이네트가 몸을 움찔, 떨었다.

“물 온도는 괜찮나?”

“…….”

그녀가 배스 밤을 풀어 기분 좋은 향기와 피어오르고 은근한 거품이 인 수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일과 함께 지내던 여관의 온천물은 이보다 더 점성이 있었는데……. 손가락으로 물속을 휘저어도 그때
느꼈던 점성은 느낄 수 없었다.

멍하니 물속에 잠겨 있자 카시엘이 그녀의 뒤통수를 그러쥐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줘.”

이네트가 무시했다. 결국 그가 직접 그녀의 목을 뒤로 젖힌 다음 손바닥으로 받쳤다.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두피를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시작했다. 그녀는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얼마간 마사지를 하던 그가 머리에 비누칠을 했다. 그녀가 가만히 있자 비누칠한 머리카락을 따스한 물로
헹구어 주었다.

“…….”

침묵 속에서 목욕이 이루어졌다. 그는 옷을 입은 상태로 욕조 근처에 서서, 허리를 숙인 채 그녀의 목욕


시중을 들었다. 무릎께가 젖어 들고, 셔츠가 물에 흠뻑 젖어 팔에 달라붙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카시엘이 뜨거운 물에 적신 부드러운 천으로 이네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으나 눈빛만큼은 섬세하고 신중했다.

얼마간 그녀의 얼굴을 천으로 꼼꼼히 닦아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페르닌드를 레브론으로 파견시킬까 한다.”

“…….”

“복속당한 갈리아 왕국의 남은 세력이 날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어.”

이네트가 잠자코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잔존 세력을 이전부터 뿌리 뽑으려고 유망한 기사들을 여럿 파견했지만 생각보다 성과가 없어, 그들의
거점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페르닌드를 보내야 될 듯해. 아마 가게 된다면…… 적어도 3 년은 그곳에 있을
거다.”

그렇구나. 이네트가 별 감흥 없이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겠나?”

굳이 제게 물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묻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물론 페르닌드를 보내면 성가신 일이


줄어들기야 할 테지만, 굳이 자신이 싫다고 하면 보내지 않을 것처럼 구는 거시적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페르닌드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었잖아.”

“…….”

“너만 괜찮다면, 내가…….”

이네트가 속으로 실소를 내뱉었다. 카시엘이 대답을 바라듯 그녀를 계속해서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물이
차게 식어버릴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입을 열지 않았다.

차가워진 물에 체온이 점점 떨어졌다. 그녀가 욕조 밖으로 빠져나왔다. 벽에 기대어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그가 곧바로 준비해 놓았던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닦아주었다.

“몸이 차가워, 이네트.”

“…….”

“장작을 피울까?”

“…….”

“피우겠다.”

카시엘이 본인이 입고 있는 젖은 셔츠와 바지를 바라보고는 짧게 혀를 찼다. 이윽고 그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옷은 쉽사리 벗겨지지 않았다. 이네트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가 들고
있는 수건을 낚아채 갔다.

“……이네트?”

그녀가 젖은 머리를 스스로 털어서 닦으며 욕실 밖으로 나갔다.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를 두고 나가는
이네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네트가 침대에 앉아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자, 젖은 옷을 다 벗은 그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머리를


말리고 있는 그녀를 보더니, 이윽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 방은 어쨌거나 그녀의 방인데, 왜 그의
옷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리 줘. 말려줄 테니.”

카시엘이 다가와 수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낚아채기 직전, 이네트가 몸을 뒤로 물렸다. 그가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이네트가 그의 손을 피했다.

“왜…….”

이네트가 몸을 돌리며 들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웠다.

카시엘이 내동댕이쳐진 수건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차 없이 버려진 것이 꼭, 제 마음 같았다.

“아직 다 마르지 않았어. 내가 말려주겠다.”


그가 바닥에 버려진 수건을 주워든 다음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오는 그의 팔을 세게 쳤다.

쳐냄과 동시에 짝, 소리가 들리며 그의 손등에 발간 자국이 남았다. 그는 돌아선 그녀의 등과 발갛게
달아오른 제 손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네트, 그가 이제는 입 밖으로 소리 내지도 못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게도 몸이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얼어붙은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은 와중에도
화끈거리는 손등의 통증은 선명했다.

“그래봤자 달라지는 거 없어요.”

이네트가 오래간만에 입을 열었다. 그는 그녀가 한 말이 무엇이든, 제게 대답해주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넘쳐흐르는 감정 때문에 대답이 목구멍에 걸려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알아.”

카시엘이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래도…… 괜찮다.”

그녀의 어깨 근처에서 망설이던 손이 오랜 망설임 끝에 그녀의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가 그의 손바닥을 적다. 그는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이어
그녀의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대었다.

희고 기다란 목은 한 손으로도 다 잡힐 것처럼 가늘었다. 카시엘은 그 목덜미에 천천히 뺨을 묻으며,


그녀의 여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껍데기라도 좋아.

그래, 그래도 좋아. 이 체온을 느낄 수 있다면.

네가 나를 평생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 괜찮을 거다.

그는 늘 그랬듯이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그녀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갈급했던 갈증이


가라앉았다.

언젠가는, 한 번쯤 뒤돌아 봐 주겠지. 단 한 번일지라도…….

희망을 덧그리던 그가 이내 떠오른 기시감에 입매를 와락 일그러트렸다.

* * *

“뭐? 레브론으로 가라고?”

카시엘이 방을 찾아올 때부터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던 페르닌드가 인상을 확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카시엘은 예상했다는 듯 덤덤한 얼굴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거긴 하디랑 세드릭, 로울이 가 있잖아? 왜 이제야 날 보내려는 건데?”

“너도 알고 있겠지만 세력을 뿌리 뽑기가 쉽지 않아. 아직까지도 큰 성과가 없으니 부단장인 네가 가야


옳다.”

“개소리하지 마! 그냥 나를 그곳으로 치워버리고 싶은 거잖아!”

카시엘은 부정하지 않았다. 분노하는 페르닌드의 눈동자를 본 그가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런 걸지도 모르지.”

“왜? 형이 뭔데! 이네트를 먼저 좋아한 건 나야! 내가 먼저 탐내고 손댔어! 내가, 내가 먼저라고! 근데


왜 형이 가로채 가?”

페르닌드가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가 분을 참지 못하고 탁자 위에 놓인 책을 카시엘에게


던졌다. 카시엘이 고개를 움직여 날아오는 책을 피했다. 카시엘 대신 책 모서리에 찍힌 벽이 움푹,
들어가 흠집이 생겼다.

“형이 뭔데 나를 이네트에게서 떼어 놓아? 그때 한 번이면 족하잖아! 형도 나랑 다를 바 없는 주제에!”

“이네트가 널 보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까.”

“하, 그 말을 믿어? 형한테는 그렇게 말해놓고 나한테 와서는 내가 보고 싶다고 했어. 이미 알면서 왜
그래?”

페르닌드의 말대로 카시엘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제 동생을 직접 레브론으로 보내려는 이유는…


… 제 동생이 이네트에게 달라붙어 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고작 그런 이유로 같은 부모를 둔 친동생을 사지로 보내려는 것이었다. 결국, 치기 어린 독점욕에서


비롯된 유치한 짓이었다. 그 스스로도 잘 알았다. 허나 결정을 무르고 싶지 않았다.

“형, 나 나은 지 얼마 안 된 거 알잖아? 거기에 나를 보낸다는 건, 날 죽이겠다는 소리야.”

“…….”

“하, 그래! 결국 내가 죽는다 해도 이네트에게서 날 떼어놓겠단 거네?”

카시엘은 씁쓸하게 지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지하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유령이 되어 돌아와 저를 괴롭힌다 해도 괜찮았다. 이네트를 사랑한 그


순간부터, 그들의 용서를 받지 못할 게 뻔했으니까.

기어코 나락으로 간대도…… 그녀를 사랑하고 싶었다.

페르닌드가 정신이 나간 듯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더니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허리까지 수그리며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웃던 그가 돌연 표정을 굳혔다. 눈이 위험한 빛으로 반짝이더니, 이어 품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냈다.

“그렇다면 죽어 버려, 형.”

단도였다. 페르닌드가 단도의 날집을 바닥에다 팽개치고는 단도를 꽉 쥐었다. 은색 날이 날카롭게 빛났다.
비록 짧지만 충분히 사람을 죽이는 게 가능한 무기였다.

페르닌드의 눈이 살의로 새파랗게 빛났다. 카시엘이 그제야 미소를 지웠다.


“죽어!”

페르닌드가 단도를 들고 빠르게 카시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시엘 또한 품에 호신용 단도를 지니고


다녔으나, 차마 그것을 동생에게 꺼내들 순 없었다. 그는 망설이다 결국 공격하지 않고 피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진정해라, 페르닌드!”

“형은 다 가졌잖아! 검 실력도, 단장의 자리도, 작위도! 다 가진 주제에 내게서 이네트까지 빼앗아
가려고?”

페르닌드가 미친 듯이 카시엘을 향해 날을 휘둘렀다. 카시엘이 민첩한 몸짓으로 공격을 피했으나,


페르닌드도 그에 지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형도 결국 나랑 똑같아. 나를 치운다고 이네트가 형을 사랑할 줄 알아?”

휙, 날이 카시엘의 어깨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카시엘이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페르닌드는


지금 이성을 잃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카시엘은 결국 공격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지우고 맨주먹으로 페르닌드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날을 피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윽.”

턱을 스치듯 맞은 페르닌드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분한 듯 눈을 불태웠다.

“제기랄!”

신랄한 욕설을 내뱉은 그가 더 타오르는 기세로 카시엘에게 달려들었다.

어릴 때부터 늘 서로가 대련 상대였다. 숱하게 대련해 왔기에 카시엘은 페르닌드가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련과 다른 점이라면, 목검과 진검이 아닌 단도라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동작이 더욱 날쌔서 대련 때보다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카시엘은 페르닌드의 약점과
빈틈을 파고들어 그의 손목을 세게 퍽, 쳐냈다.

“악!”

오른쪽 손목을 가격당한 페르닌드가 신음과 함께 단도를 놓쳤다. 챙, 소리와 함께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페르닌드가 분한 듯 씩씩거리더니 이내 다시 단도를 쥐기 위해 몸을 수그렸다. 허나 카시엘이
좀 더 빨랐다.

“페르닌드, 그만해.”

단도를 발로 저 멀리 쳐낸 카시엘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페르닌드가 이를 악물었다.

“그만할 건 형이지, 내가 아니라. 내게서 이네트를 빼앗아 가려고 하지 마.”

수그린 몸을 일으킨 페르닌드가 카시엘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카시엘은 그 시선을 마주하다, 짧은 한숨과
함께 눈을 허공으로 돌렸다.

그 순간,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이네트?”
모습이 다 보이지 않아도 카시엘은 그 인영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문틈 사이에 있는 이의 이름을 부르자,
페르닌드가 숨을 헉, 들이키며 눈을 크게 키웠다.

살짝 열려 있는 문틈이 완전히 열렸다. 이네트가 방 안으로 발을 들이며 바닥에 떨어진 단도와 카시엘,
그리고 페르닌드를 천천히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 언제부터…….”

페르닌드가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살의를 띄고 이글거리던 눈은


어느새 순한 양처럼 유순한 빛으로 변모해, 날카로운 기색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형제와 단도를 몇 번이고 번갈아 바라보던 이네트가 단도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시선이 그곳에 오래
머물자 페르닌드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넷, 그러니까 이건…… 오해하지 마. 별일 아니야.”

페르닌드가 황급히 단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단도를 주워 쥐고선 재빨리 칼집에 단도의 날을 숨겼다.
그리고는 또다시 기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봤어……? 다 본 거야?”

이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나 눈빛이 답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 봤노라고.

페르닌드의 동공이 정처 없이 떨렸다. 그가 아, 나직한 탄식을 내뱉더니 단도를 품 안에 넣었다.


카시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넷, 형이, 형이 나를 네게서 떼어놓으려고 해.”

“…….”

“날 레브론으로 보내겠대. 거기 가면 여기로 못 돌아올지도 몰라.”

페르닌드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호소하듯 이야기했다. 이네트는 이 방에 처음 발을 들일 때부터 지금까지


쭉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다.

“나, 나는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쭉 너, 너랑 있고 싶은데…….”

일렁이던 눈에 기어코 눈물이 차올랐다. 페르닌드가 물에 빠진 사람처럼 손을 허우적거리며 이네트에게


다가갔다.

“이넷, 나 보내지 마. 나 버리지 마…….”

그가 그녀 앞에 무릎 꿇더니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앓는 듯한 신음은 점점


격정적인 울음소리로 변해갔다.

“가지 말라고 해줘. 형한테 나 보내지 말라고 해줘. 응?”

“……내가 왜?”

“어……?”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페르닌드가 넋이 나간 얼굴로 이네트를 바라보았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의 입술이 연신


달싹거렸다.

“왜, 왜…….”

“…….”

“그때, 가둬서 미안해……. 네게 함부로 굴어서 미안해. 다신, 다신 안 그럴게…….”

그가 두려운 듯 이네트의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연신 중얼거렸다.

“한 번만 용서해줘. 용서해줘, 제발.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제발…….”

몇 번이나 듣는 사과인 걸까. 이네트는 애처로운 목소리를 들어도 그 어떤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그저


옷자락을 잡은 손이 성가시고 귀찮았다.

“그럼 그때 왜 날 찾아왔어? 왜 누워 있는 날 보러 왔어…….”

쓸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써 남은 것이 없는 그가 짧았던 그 방문이라도 동아줄로 삼았다.

“널 위해 보러 간 게 아니야.”

이네트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제는 네가 죽는다 해도 상관없어.”

“…….”

“페르닌드. 널 조금이나마 아꼈던 내 마음은 죽어버렸어. 난 죽었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어.”

잊히지 않는 지하실의 기억, 억압하는 그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제
마음…….

결국엔 다시 붙잡혀 와, 그저 에일을 살려달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

자신은 살아 숨 쉬는 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이네트는 조금 솟아오른 제 배를 매만졌다. 아이가 에일의 아이만 아니었어도 당장 죽여 버렸을 것이다.


제 아이인데도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네트는 자신이 낯설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지하실에서 강간당한 순간? 카시엘과의 결혼이 정해진 순간? 피투성이가
된 에일을 본 순간? 에일과 함께할 수 있었던 행복이 짓밟히고, 협박으로 제국으로 향하는 배에 탄 순간?

그녀는 자신이 망가지고 짓밟힌 순간을 떠올렸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꼭 제 것 같지 않았다.
그 속의 자신은 언제나 울면서 빌고, 왜 그러는 거냐고 울부짖고 있었다. 울부짖음은 모두 묵살 당했다.

‘사랑해.’

자신을 강제한 셋 모두 사랑을 말했다. 사랑……. 이네트는 입속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사랑
…….

주저앉은 페르닌드가 고개를 들고서 텅 빈 이네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결코 꺾이지 않았던 푸른


불꽃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야 유리알처럼 속이 빈 눈동자가 보였다.

강인한 생명력조차 한 줌 남아있지 않았다. 싱그러운 미소도 더는 없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꼿꼿했던


자존심도 사라지고 없었다. 왜 이러는 거냐며 소리치던 감정 어린 호소도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
너무, 뒤늦게 알아버렸다. 그의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울면서 빌 때, 그때 내 말을 한 번이라도 들어주지 그랬어.”

“…….”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어.”

내가 죽인 거구나. 내가…….

이네트의 옷자락을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낯빛이 초라하게 시들며, 페르닌드의 새파란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잃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네트는 그가 놓친 옷자락을 휙, 잡아 빼며 등을 돌렸다. 페르닌드가 꺽꺽거리며 무릎 꿇은 채로 땅을


짚었다. 그가 몸을 한층 낮춘 자세로 길가의 거지처럼 빌었다.

“요, 용서해줘…….”

“…….”

“용서, 해줘…… 내가, 하으, 흐… 잘못, 했어…….”

페르닌드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용서를 빌었다. 이네트는 뒤돌아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페르닌드가 엉금엉금 기면서 계속해서 용서를 빌었다.

“내가, 잘못… 했어… 흐, 으, 으흐윽, 아….”

문이 닫혔다. 페르닌드가 닫힌 문을 향해 손을 뻗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용서해줘, 용서해줘. 닫힌


문을 향해 수없이 되뇌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던 카시엘이 뒤늦게 이네트를 뒤쫓았다. 뒤쫓는 동안 카시엘은 수렁과도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전의 이네트는 이렇지 않았다. 원망을 드러내고, 원하는 것을 호소했다. 허나 이젠 그렇지 않았다.
모서리부터 차츰차츰 닳기 시작해 결국 모두 닳아 없어진 사람처럼…… 그녀가 희미해 보였다. 그것이
그를 무척 두렵게 만들었다.

카시엘은 차마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무어라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무 말도, 그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방 안에 들어올 때까지 입술만 달싹일 뿐,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창밖의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고, 방 안에 그 어둠이 스며들었을 때가 돼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이네트, 난 두려워.”

“…….”

“죽어버린 네가…… 두렵다.”

괴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그가 눈을 일그러트렸다.

“지금이라도 되돌리겠다. 내 모든 것을 걸고 그 남자를 찾아 네게 돌려주겠어. 그 남자와 떠날 수 있게


해줄게. 그러니까 이제…….”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이네트는 잠자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물끄러미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카시엘. 왜 이 아이가 당신 아이라고 했어요?”

그가 하는 말의 대답이 아닌 다소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그는 멈칫하면서도 솔직히 대답했다.

“……네 아이는 내 아이이기도 하니까.”

“알잖아요. 당신 아이 아닌 거.”

카시엘이 느릿한 숨을 쉬었다. 그도 알았다. 이네트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에로드 데반의 아이라는 걸.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녀의 아이라면 아버지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는 친부가 아니더라도 좋은
아버지가 될 자신이 있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아뇨, 중요해요. 난…….”

말을 이으려던 이네트가 돌연 말을 멈췄다. 그녀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허공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옅은 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 부질없어.”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침대로 다가가 여느 때처럼 무기력하게 몸을 뉘었다. 카시엘은 다시


죽어버린 그녀의 모습을 보고선 또다시 무력감에 휩싸였다.

차라리, 전처럼 저를 이용하던 때가 나았다. 지금처럼 죽어버린 게 아니라…….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요, 카시엘.’

허나 그녀의 말대로 너무 늦어버렸다. 그가 선 채로 눈을 감았다.

* * *

페르닌드 디에드반이 레브론으로 떠났다. 이네트는 창문 밖으로도 떠나는 그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 매일


찾아와 용서를 빌던 페르닌드는 떠나기 직전까지 이네트의 방문을 두드리며 용서를 빌었으나, 그녀는
끝까지 문을 열지 않았다.

페르닌드는 허무하게 제게서 사라졌다. 고작 카시엘의 결정 하나로, 너무나도 허무하고도 쉽게.

이네트는 그가 완전히 떠나고서야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온몸의 피가


아래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매 순간순간이 추락이었다.

죽어버린 숨이 잇새 사이로 새어나갔다. 그녀가 힘이 빠진 갈댓잎처럼 흔들리듯 걸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용인들이 이네트에게 인사했으나, 그녀는 그 인사에 한 번도 답하지 않았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던 그녀가 1 층 중앙계단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한 초상화에 닿았다.

“주인님께서 직접 그리신 마님의 초상화입니다.”

“…….”

“저는 화가가 그린 줄 알았지, 주인님께서 그리셨을 줄 꿈에도 몰랐지 뭡니까.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검 실력뿐만 아니라 그림 실력까지 뛰어나시다니. 대단하신 분입니다.”

집사가 다가와 흐뭇한 얼굴로 떠들었다.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데도 이네트의 시선은 초상화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행복한 듯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이었다. 길게 늘어진 은색 머리카락과 반짝거리며


빛나는 푸른 눈동자……. 언제 보고 그렸는지도 모를 모습이었다.

저게 나인가?

이네트가 멍하니 초상화를 바라보며 의구심을 품었다. 난, 저렇게 웃은 적이……

있었다.

에일과 함께 데반 백작 저택에서 지냈을 때, 에일과 함께 말을 타고 너른 땅 위를 달렸을 때, 에일이


따듯하게 데운 우유와 육포를 건네주었을 때, 에일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을 때, 에일과 함께 춤을
추었을 때, 에일과 함께 인형을 만들었을 때, 에일과 함께 산책했을 때…….

에일과 함께 있어서가 아닌, 본연의 자신으로 있었던 그때.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었던 그때.

우뚝 서 있던 이네트의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아…….”

“마님?”

그녀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자 집사가 화들짝 놀라 입을 벌렸다.

“마님,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아프신 겁니까?”

“흐으…… 흐…….”

이네트가 소리죽여 오열했다. 가슴을 쥐어뜯던 그녀가 몸을 허물어뜨리곤 손톱으로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읏, 하…… 아…….”

계속해서 추락하여, 결국 밑바닥에 도착했다.

괴로웠다. 고통스러웠다.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을 잃은 것이 미치도록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죽었어. 난 이제 없어…… 나는 이 이상…… 난…….

마음속의 무언가 완전히 죽었다. 다시는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없다. 설령 카시엘의 말대로 에일이 제게
돌아온다 해도 죽어버린 마음은 회생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정신이 뿌리째 흔들렸다.

바닥에 무너진 채 하염없이 울던 그녀가 주춤 일어나 초상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건 내가 아니야.


그녀가 중얼거리며 초상화를 바닥에 던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초상화를 감싸고 있던 유리가 잘게
깨졌다.
“마님!”

집사가 소리쳤다. 이네트는 그에 그치지 않고 초상화를 찢기 위해 손을 뻗었다. 보다 못한 집사가 그녀를


뜯어말렸다.

“마님, 안 됩니다. 손을 다치십니다!”

“저건 내가 아냐, 내가 아냐.”

난 죽었어, 이제 나는 없어. 그녀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어떻게든 초상화를 찢기 위해 손을


휘적거렸다. 어느새 집사뿐만이 아닌 다른 사용인들도 그녀의 몸에 달라붙었다.

“놔, 놔…… 저건 내가 아냐, 찢어버려야 해!”

그녀가 없던 힘까지 짜내어 발악했다. 결국 남자 사용인들이 무례를 무릅쓰고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놓아줘, 찢어야 한다고!”

이네트가 자신을 들어 올린 사용인의 몸을 세게 두들겼다. 그럼에도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아이처럼 울었다.

“아아…… 아…….”

그녀의 유리알 눈에서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계속해서 울던 그녀는 결국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마님께서 미치셨다.

이네트가 길길이 날뛰던 광경을 본 사용인들이 모두 그리 떠들었고, 저택으로 돌아온 카시엘 디에드반은
일을 전해 듣자마자 일부를 제외한 사용인 대부분을 해고했다.

* * *

이네트의 배는 날이 갈수록 솟아올랐다. 그녀는 매일 멍하니 창문 밖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방


밖으로 나설 때도 있는데, 카시엘이 억지로 손을 잡고 이끌 때나, 혹은 반쯤 정신이 나갔을 때뿐이었다.

“누이.”

지크프리트가 하얀 백합 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희게 피어난 백합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으나, 그녀는 꽃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저 품 안에 인형 두 개를 소중히 감싸 안은 채 창밖 풍경에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무엇을 그리 유심하게 보고 있나 해서 보아도 별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누이. 꽃 안 받아줄 거야?”

“…….”

“대답해줘. 이제 내가 밉지도 않아?”

숱한 물음에도 답이 없자 지크프리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짧게 혀를 차며 남색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다.

“공작. 듣기로는 초상화를 본 다음부터 이리 되었다던데……. 뭘 그렸기에 그래?”

카시엘이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네트가 웃고 있는…… 초상화였습니다.”

“으음. 왜 그걸 보고 누이가 정신을 놓아버렸을까?”

그래도 누이가 내게 대답은 해줬었는데. 지크프리트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누이가 미치길 바라서 다시 데려온 건 아니었다. 계획이 이런 식으로 틀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가 바랐던 결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배 안에서도 그렇고, 일리아드 제국으로 막 도착했을 때도 그렇고 멀쩡해 보이던 누이가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졌으니, 그는 이 모든 게 공작의 탓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미쳐버린 부인과 이혼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돌보는 공작을 애처가라고 칭송했다. 지크프리트는
그 사실이 몹시도 못마땅했다.

“누이가 공작과 결혼하기 싫다고 울었을 때, 그때 누이 말을 들어줄 걸 그랬어.”

그가 누이와 관련해서 유일하게 후회하는 점이 그것이었다. 허나 후회해봤자 늦었다.

창밖을 보고 있던 이네트가 고개를 돌려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마주한 시선에 지크프리트가 놀라


그녀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누이, 정신이 들어?”

그녀의 눈에 어린 희미한 경멸을 본 그가 눈을 빛냈다. 그토록 미움받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미움마저 반가웠다.

“아예 미친 건 아니구나, 그렇지?”

“…….”

“그냥 무시하는 것뿐이지?”

이네트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지크프리트는 아쉬움에 입술을 내밀었다.

“조금만 더 봐주지…….”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누이에게 애원하는가 싶다가도, 누이이기에 가능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누이니까 괜찮아.

그가 그녀의 뺨에 짧게 입 맞추고는, 그녀의 무릎 위에 백합 다발을 놓았다.

“또 올게. 이제 슬슬 누이의 출산이 다가오니까.”

은색 머리카락과 하얀 백합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으나, 지나치게 창백한 흰 얼굴과 빛을 잃은 눈동자


때문에 그녀는 곧 시들어 버릴 꽃처럼 보였다. 허나 그조차 지크프리트의 눈엔 아름다웠다.

그가 나가고, 카시엘과 이네트, 단둘이 남았다. 그는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흰 백합 다발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사용인에게 물이 담긴 화병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사용인이 화병을 가져오자 그는 화병과 흰 백합을 들고서 그의 방으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는 그가 이네트에게 선물하려고 사놓은 붉은 백합 다발이 있었다. 황태자가 선물하기 전에


사놓은 것이었다. 설마 황태자가 흰 백합을 가져올 줄이야.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직접 화병에 백합을 꽂았다. 희게 피어난 백합과 붉게 피어난 백합 모두…….

백합을 꽂은 화병을 들고서 이네트의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녀는 제 방 창가에 놓이는 흰 백합과 붉은
백합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제…… 마침 네 생각이 나 붉은 백합을 샀었어. 전하께서 흰 백합을 가지고 오실 줄은 몰랐지만…….”

“…….”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꽃을 주겠다.”

이네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꽃을 바라보던 그녀가 서서히 침대에 몸을 뉘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죽은 듯이 숨만 쉬었다.

카시엘이 축 내려앉은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다 몸을 숙이고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부른 배가


팔뚝에 닿았다. 그는 동그랗게 솟은 배를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가냘픈 몸과 대비되는 부른
배는 어딘지 위험하고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는 애써 안 좋은 생각을 지웠다.

* * *

“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이네트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흐릿한 정신이 단박에 차려질 정도로 예리한
통증이 배에서 느껴졌다. 그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평소에도 이런 아픔은 종종 있었기에, 그녀는 얼마 안 가 아픔이 멎으리라고 생각했다.

“흐읏…….”

허나 고통은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졌다. 누군가 칼로 배를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으으흑…….”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던 그녀가 상체를 고꾸라트렸다. 입에서 앓는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몸이 뒤집힌


벌레처럼 손을 꿈틀거리면서도 그녀는 줄을 흔들지 않았다. 그저 새우처럼 몸을 둥글게 만 채 숨을
헐떡거릴 뿐이었다.

예상했던 출산일보다 빠르게 찾아온 진통이었다. 그녀는 예고 없는 통증에 괴로운 신음을 냈다.

지나친 고통에 눈앞이 흐려졌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시트를 쥐어뜯고 몸을 이리저리 구부려
보아도 고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파, 아파…….”

그녀가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다리 사이의 무언가 펑,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미지근한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네트가 겨우 고개를 내려 젖은 허벅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줄줄 새고 있었다.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허나 그래도 줄을 흔들지 않았다.

이대로…… 아이를 낳다가 죽었으면 좋겠어.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와중에도 이네트는 미묘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심해지는 고통에 이네트가 숨을 헐떡거렸다. 이미 시트는 액과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정신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이네트!”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의식이 가물거렸다.

“정신 차려!”

카시엘이구나. 이네트가 멍하니 생각했다. 그가 몸을 잡고 흔들어서 시야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힘없이


흔들리는 와중에 아래에서 또 무언가 터졌다. 허벅지가 또다시 젖어 들었다. 카시엘이 시트를 적신 피와
다리 사이에서 흐르는 피 섞인 양수를 보고는 울부짖었다.

“안 돼, 이네트! 이네트, 정신 차려!”

그가 울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와 눈물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상했다.

“왜… 울어…요?”

이네트가 통증과 신음을 삼키며 물었다. 카시엘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어깨가 눈물로 젖어 들었다.

이네트가 한층 더 심해진 진통에 헉,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손톱이 카시엘의 등을 마구잡이로 긁어댔다.


그녀의 숨이 더욱 가파르게 변했다. 카시엘이 안 돼, 안 돼,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그녀를 꽉
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리고 의원과 산파가 뛰어 들어왔다. 최대한 늦게 와주길 바랐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그녀가 고통에도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산파와 의원이 헐레벌떡 피에 젖은 원피스를 들쳐 올리고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이런, 양수와 피가 함께 터지시다니! 피 양이 상당합니다.”

“예상했던 날보다 일주일 이른 데다, 산모분 몸이 많이 쇠약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산모도 아이도 둘 다


위험해요.”

산파와 의원이 번갈아 외쳤다. 카시엘이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괴로워했다.
“뭐가 됐든 산모부터 살려. 아이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의원이 손을 질 속으로 쑥, 넣었다. 앓는 신음만 흘리던 이네트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조금만 참으십시오. 자궁 입구는 열려 있습니다!”

“힘을 주세요, 부인!”

지나친 통증에 차라리 의식을 잃고 싶었다. 힘을 주세요, 조금만 더, 산파와 의원의 목소리가 뒤죽박죽
섞였다. 그 사이로 카시엘이 흐느끼며 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시엘은 피에 젖은 시트와 원피스, 그리고 곧 숨을 멎을 것처럼 희게 질린 이네트의 얼굴을 보며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어렸을 적, 아이를 낳다 죽은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지나치게 이른 출산으로 어머니는


아이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아이는 죽은 채 나왔다. 어른의 손바닥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조그마한 여자아이였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 흐느끼며 오열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카시엘은 어머니를


끌어안고 우는 아버지 대신 죽은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눈 색을 알고 싶었으나, 눈을 꼭 감고 있어 알 수
없었다. 페르닌드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천진난만한 얼굴로 형의 옷자락을 쥐고 흔들었다.

‘형. 아버지가 울어.’

‘…….’

‘형도 울어? 왜 울어?’

‘…….’

‘형, 어머니 죽은 거야?’

아. 안 돼. 이네트, 너만은…….

카시엘이 짐승처럼 오열했다. 이성도, 귀족으로서의 품위도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모든 걸


내려놓고서 심장의 맨 안쪽을 여실히 드러내며 울었다. 그가 숨을 가파르게 몰아쉬며 갈구하듯 이네트의
심장에 귀를 댔다. 아직 죽지 않았어. 아직 죽지 않았어…….

지옥과도 같은 억겁의 시간이 흘러갔다. 산파가 마침내 외쳤다.

“아이가 나왔습니다! 딸입니다!”

아이가 으아앙,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뛰고 있는 심장 맥동에 집착하고 있던


카시엘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는 우선 이네트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널브러진 은색 머리카락과 옅지만
새어 나오는 숨소리.

죽지 않았다…….

카시엘이 젖은 얼굴로 웃었다.


“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합니다만, 산모께서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웃음은 곧바로 흩어졌다. 그가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이네트의 뺨을 거머쥐었다. 이네트의 눈이 느리게


뜨였다가 감겼다.

의원이 서둘러 지혈 작업을 시작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산파가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아이를
이네트와 카시엘에게 보였다.

“예쁜 따님이십니다.”

“……안 죽었어요?”

아이가 나온 후, 줄곧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네트가 입을 열었다. 산파가 당황하며 “예?” 되물었다.

“아, 아이는 건강합니다, 부인.”

“아이 말고 나 말이에요…. 왜 안 죽었지?”

“이네트!”

카시엘이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네트가 눈물이 말라붙은 카시엘의 뺨을 흘긋
보았다가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작님, 간혹 임신과 출산 때문에 우울해지는 부인도 있습니다. 크게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아이를


안아보세요.”

산파가 별거 아니란 듯이 말하며 카시엘을 향해 아이를 건네주었다. 그제야 그가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죽은 채 나왔던 제 여동생보다 크고 울긋불긋했다.

아이는 그의 품에 안기자 으아앙, 방이 떠나가라 내지르던 울음을 뚝 그쳤다. 그의 가슴이 술렁거렸다.

“정말 어여쁜 따님입니다. 아이의 눈 색은 녹색……이군요, 공작님.”

카시엘의 눈 색은 금색이었고, 이네트의 눈 색은 푸른색이었다. 아이는 부부의 눈 색을 물려받지 못했다.


산파는 종종 그런 일이 있다는 점을 상기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쭈글쭈글하셔서 모르시겠지만, 아주 예쁜 편이시랍니다. 장차 미인으로 자라시겠어요.”

카시엘이 아이를 안은 채로 이네트를 바라보았다. 이네트는 아이를 보더니 작게 눈을 찌푸렸다.

“이네트, 우리 딸이야.”

“…….”

“아이를 한 번 안아줘.”

그녀가 듣기 싫다는 듯 눈을 감았다. 분명 아이를 낳겠다고 한 것은 그녀였고, 아이를 잃지 않기 위해


그의 아이가 맞노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그녀였다.

허나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아이에게 따스한 눈길 한 번 건네지 않고, 오히려 아이를


보자마자 눈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안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냉담한 반응이었다.

카시엘은 당황한 마음을 애써 숨기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네트, 우선 다른 방으로 옮기도록 하지. 산방이 아닌 네 방에서 출산을 했으니……. 이봐, 아이를
유모에게 주도록 해.”

그가 아이를 산파에게 건넸다. 산파는 아이를 안아 들고선 아연한 얼굴로 우뚝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원과 함께 방 밖으로 나섰다.

카시엘이 축 늘어져 있는 이네트의 몸을 들어 올렸다. 지혈을 하고 묻은 피를 전부 다 닦아냈다고는 하나,


그의 팔뚝과 옷이 불그스름한 피로 물들었다. 그는 개의치 않고 새 원피스를 그녀에게 갈아입혀 주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그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힌 뒤, 따스한 물로 적신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몸을 닦아주었다.


그녀가 멍하니 그 손길을 받아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고 싶어요, 카시엘.”

어느 때고 스스로 생명을 포기한 적 없던 이네트가 처음으로 생의 끝을 입에 담았다. 그것도 무척이나


덤덤한 목소리로…….

“죽게 해줘요.”

금색 눈동자와 빛을 잃은 푸른 눈동자가 서로 마주했다. 그가 공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나도 따라가겠다.”

“…….”

“네가 없으면… 나도 더는 살 이유가 없어.”

이네트가 피식 웃었다. 자조적인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번졌다. 어차피 죽고 싶어도 자신은 죽지 못한다.
스스로 죽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겁쟁이니까.

그러니까 누군가 날 죽여줬으면.

그녀는 서서히 흐려지는 의식에 눈을 감았다.

* * *

아이가 태어난 다음 날, 지크프리트가 급하게 공작저로 찾아왔다.

“누이!”

누이의 예정보다 이른 출산에 그는 몹시도 놀란 기색이었다. 입고 있는 코트를 벗지도 않고 쏜살같이


달려가 이네트를 껴안았다.

“누이, 피를 많이 흘렸다며? 괜찮은 거야? 지금은 아프지 않아?”

그의 눈이 살피듯 이네트의 몸 곳곳에 닿았다. 그러다 마른 팔다리와 푹 꺼진 배를 보고는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누이가 아이를 낳을 때 꼭 같이 있고 싶었는데…… 미안해, 누이.”

그가 걱정이 그득 담긴 눈빛으로 그녀의 초췌한 뺨을 바라보았다. 안타깝다는 듯,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더없이 자상했다.

“얼굴이 많이 상했잖아. 식사는 제대로 했어?”

“입맛이 없다고 해서 묽은 죽과 야채를 갈아낸 주스 한 잔만 먹였습니다.”

이네트 대신 카시엘이 대답했다. 지크프리트가 눈을 샐쭉하게 떴다.

“공작에게 물은 건 아닌데 말이야. 아, 그보다 아이는?”

지크프리트의 물음에 여태껏 얌전히 있던 이네트가 몸을 움찔 떨며 반응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던


지크프리트가 으음? 하며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왜 그래, 누이?”

“…….”

“내가 아이를 죽일까 봐 겁나서 그래?”

그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겁먹지 마. 공작의 아이라며? 설마 내가 죽일 리가. 나라도 그런 짓은 못 해.”

정말이라는 듯, 그가 무해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이네트는 그를 보는 것조차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갖은 핑계로 아이를 보여주기 꺼려 했던 카시엘은 지크프리트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사용인에게 아이를 데려오라 명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유모가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지크프리트는 아이를 보자마자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조그마하군. 누이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신기하다는 듯 아이의 손가락을 톡, 건드렸다. 아이가 반사적으로 그의 손가락을 꽉 쥐었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신기해. 누이를 닮아서 그런가? 아이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공작?”

“에반젤린입니다, 전하.”

“누이가 지은 이름이야?”

“아뇨, 제가 지었습니다.”

카시엘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반젤린 디에드반. 아이에 관심 없는 이네트를 대신해 카시엘이
지은 이름이었다. 이네트는 아이의 이름이 에반젤린이라는 말을 들어도 듣지 못한 척 반응하지 않았다.
알겠노라는 대답도 없었다.

“그대가 지었다고? 흐음. 왜 누이가 안 짓고?”

“……이네트가 제게 지으라고 해서요.”


“그래? 에반젤린, 삼촌 품에 안겨볼래?”

지크프리트가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에반젤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반젤린이 손가락만 꼼지락거릴 뿐


유모의 품에서 가만히 있자 그가 에반젤린을 직접 가져가 품에 안았다. 낯선 품이 어색한 듯 에반젤린이
작게 칭얼거렸다.

“아, 예쁘다. 누이를 닮아서 예쁜 거 같아. 근데 눈 색이 그 새끼랑 같은 녹색이네?”

그 말에 이네트와 카시엘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지크프리트가 싱긋 웃었다.

“근데 눈 색이야 뭐, 다르게 태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더라. 아직 얼굴에 그 새끼가 아닌 누이의


얼굴만 보여서 참 다행이야. 그렇지, 누이?”

부드러운 어조에 그렇지 않은 신랄한 언어였다. 이네트는 시선을 내리깔며 시트를 거머쥐었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뒤흔드는 저자가 그저 끔찍했다.

지크프리트가 아이를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에반젤린은 언제 낯을 가렸냐는 듯 제게 빙긋빙긋


웃는 삼촌을 향해 고사리 같은 손을 뻗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에반젤린은 내가 좋은가 봐.”

후후, 그가 산들바람 같은 미소를 흩뿌리며 즐거워했다. 그가 떠나기 전까지, 카시엘과 이네트는 얼굴에
내려앉은 그늘을 지우지 못했다.

* * *

에반젤린은 태어난 날부터 2 주가 흐른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유모나 카시엘과 함께 보냈다. 그가


아무리 이네트에게 아이를 한 번이라도 봐 달라 애원해도, 그녀는 결코 아이에게 시선 한 톨 주지 않았다.

이네트는 아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볼 때마다 휩싸이는 이상한 감정을 또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 조그마한 아이를 보면, 꼭…….

“이네트, 아이가 싫어?”

카시엘이 물었다. 이네트는 대답 없이 시선을 사선으로 비꼈다. 싫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중에서 딱 하나 확실한 건, 아이를 보고 싶지 않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아이의 머리 색은 그녀를 닮아 반짝이는 은색이었다. 눈 색만 녹색일 뿐, 그 외의 모든 이목구비는 제


어미와 빼다 닮았다. 카시엘은 그 사실에 기뻐했으나, 이네트는 그렇지 않았다.

왜 하필 날 닮았을까? 차라리 에일을 닮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에반젤린이 어미의 품을 그리워해.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이를 품에 안아줘.”


카시엘은 일을 할 때나 이네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에게 할애했다. 아이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주는 것 모두 그가 직접 했다. 에반젤린은 카시엘을 아비라 여기고 무척이나 잘
따랐다. 그가 오면 방긋방긋 웃으며 기뻐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카시엘은 아이에게 어미의 사랑을 알려주고 싶었다. 아이에겐…… 죄가 없었다.
죄인이라면 그였다. 죄 없는 아이가 미움의 대상이 되는 건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미워할 거면…… 나만 미워해 줘, 이네트.”

카시엘이 애처로이 중얼거리며 이네트에게 아이를 건넸다. 그녀는 고집스레 시선을 주지 않다가, 스치듯
아이의 녹색 눈을 보고선 잠깐 숨을 멈췄다.

에일의 눈 색과 똑같았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부푼 뺨과 흰 얼굴에 자리 잡은 커다란 녹색 눈이 꼭,


에일에게 선물해줬던 비취를 떠오르게 했다. 그녀의 유리알 눈동자에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

그녀가 천천히,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망설이던 그녀가 마침내 눈물을 주륵 흘리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 껴안은 두 손이 잘게 떨렸다. 아이는 어미의 품에 안기자 잠든 듯이 조용해졌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아이의 뺨에 뚝, 떨어졌다.

“……이네트.”

카시엘이 다가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는 그녀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이를 안으니 뒤늦게 모정이 살아나서? 아니면, 그 남자와의 아이라는 사실이 상기되어서? 그녀에게
묻지 않는 이상 정확한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 아팠다. 더는 그녀가 멍하니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전처럼 생명력 넘치는 푸른 눈과, 혈색 있게 달아오른 불그스름한 뺨을 다시 보고 싶었다. 괴로운 듯


눈을 일그러트리다가도 이내 감정을 토해내며 울던 모습이 그리웠다.

“아이가 크면, 셋이서 함께 산책을 나가자.”

그가 부러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가도 좋아. 네가 좋다면 어디든 괜찮다.”

애써 올린 그의 입꼬리가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아이가 기어 다니고, 걷고, 말을 하는 게 상상되지 않나? 분명히 널 닮아서 아이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울
거야.”

결국,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는 차오른 숨을 겨우 내뱉으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가 작게


흐느꼈다.

언제나 고아했던 남자가 어느 때보다 초라한 모습으로 허물어졌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쳤다.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다.

“이네트, 제발…….”

“…….”

“어떻게 해야, 도대체 너를…….”


카시엘이 곧 부러질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가 이네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며
애원했다. 이전의 너로 제발 돌아와 달라고…….

제발, 그 어절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녀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아이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눈물이 흐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듯, 그녀의 눈빛엔 영혼이 없었다.

하나둘, 하나둘, 차츰차츰 잃다가 마지막 보루마저 잃고 적진에 홀로 남겨진 패잔병처럼 짙은 허무가
내려앉은 얼굴이었다.

이네트는 이제야 비로소 벨라를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지…… 왜 사랑할


수 없었는지.

그녀가 아이를 향해 부서진 미소를 지었다.

―넌 내게 보루가 되지 못하는구나.

에일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은 그녀에게 희망이 되기는커녕 또 다른 속박이 되어 그녀를 옭아맸다.

보이지 않는 안개가 두 눈을 가리고, 보이지 않는 사슬이 속박하여…… 결국……

에필로그. 안개와 속박

에반젤린 디에드반은 올해로 여덟 살이 되었다. 빛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은색 머리카락과 잎처럼 무르익은


녹색 눈은 무척이나 싱그럽고 화사했다. 시든 꽃같이 죽은 아름다움을 보이는 어미와 달리, 에반젤린은
녹음 같은 생명력과 피어나는 꽃 같은 아름다움을 가졌다.

에반젤린은 여덟이 된 지금도 우울하고 어두워 보이는 어머니가 어려웠다.

“아버지, 전 어머니가 어려워요.”

에반젤린이 속상한 듯 평소답지 않은 어두운 얼굴로 이야기했다. 카시엘이 위로하듯 딸을 품에 안았다.

“이브, 속상해하지 마라. 어머니는 표현하지 않을 뿐, 널 많이 사랑하시니까.”

그가 딸의 볼에 깃털 같은 입맞춤을 했다. 에반젤린은 저를 아이 취급하듯 아껴주는 아버지의 행동이


이제는 낯간지럽다가도, 비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보질 못했는걸요……. 절 봐도 보기 싫은지 고개를 돌리시고…


….”
“이브.”

에반젤린이 아버지의 품에 파고들며 속상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니는 제가 싫으신 거죠? 제가 미운 거죠?”

“그렇지 않아.”

카시엘이 난처한 표정으로 딸을 달랬다. 그는 고민하듯 흐음, 낮게 신음하더니 이어 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네트에게 이브 너와 셋이서 놀러 가자고 말해 볼 테니 속상한 마음 풀어. 예전부터 경마장에 놀러 가고


싶어 했잖아.”

“정말요?!”

에반젤린이 와! 감탄사를 내뱉으며 질끈 감았던 눈을 부릅떴다. 아버지의 품에서 빠져나온 에반젤린이


흥분을 감추지 않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기쁨을 표출했다.

“경마장 가고 싶어요! 달리는 말을 보고 싶어요!”

“그래, 이브. 어머니께 말해 볼 테니 뛰지 마. 위험해.”

“하지만 좋아서 참을 수 없는걸요!”

결국 보다 못한 카시엘이 날뛰는 에반젤린을 다시 품에 안았다.

“이브, 대신 공부도 열심히 해줬으면 좋겠구나.”

“…….”

에반젤린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가 후우, 한숨을 쉬었다.

“또 숙제를 하지 않았다며? 선생님을 골탕 먹이고.”

“선생님이 숙제를 너무 많이 내주신단 말이에요. 난 숙제하기 싫은데…….”

“에반젤린 디에드반.”

카시엘이 짐짓 엄한 어조로 딸의 이름을 성까지 붙여 말했다. 에반젤린이 그제야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웬만해서는 잘 화내지 않는 아버지였지만, 혼낼 땐 많이 무서웠다.

“알겠어요. 숙제할게요, 아버지.”

“그래.”

에반젤린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걷는데, 저 멀리 삼촌이 보였다.

“지크프리트 삼촌!”

에반젤린이 망아지처럼 헐레벌떡 지크프리트를 향해 뛰어갔다. 그가 달려오는 조카를 보며 활짝 웃었다.

“우리 조카. 잘 있었어?”

“응! 삼촌!”
그가 자연스럽게 에반젤린을 품에 안아 들었다. 에반젤린이 방긋방긋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 보고 싶었어?”

“응! 엄청, 엄청 보고 싶었어!”

“미안해. 요즘 일이 바빠서 자주 못 왔네. 나도 보고 싶었어, 조카야.”

에반젤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아버지가 삼촌이 황제가 되었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삼촌은 황제가 된 후로 저택 방문이 뜸해졌다.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언제나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니까.

“삼촌. 다카르가 보고 싶은데… 언제 다카르를 볼 수 있어요?”

다카르는 아나스타시아 이모의 아들이었다. 에반젤린보다 2 살 어린 사촌동생 다카르는 무척이나 예쁘게


생겨서 에반젤린은 그를 몹시나 아끼고 좋아했다.

아나스타시아 이모는 왠지 모르겠지만 이모부랑 같이 살지 않고 황궁에서 다카르와 함께 살았는데, 그


때문에 다카르를 보려면 황궁에 가야 했다.

하지만 가더라도 다카르를 자주 볼 순 없었다. 아나스타시아 이모가 지크프리트 삼촌과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자신까지 모두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음. 우리 조카가 황궁에 놀러 오면 되는데.”

“그렇지만 아버지한테 아무리 졸라도 안 된다고 해요.”

“그래? 뭐, 공작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삼촌도 조카 둘끼리 만나게 하고 싶긴 한데 쉽지


않네.”

에반젤린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왜 아나스타시아 이모가 모두를 미워하는 건지,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왜 제게 설명해 주지 않는 걸까? 비밀이라고 말해주면 될 텐데. 나는 이제 더는 아기가
아닌데!

에반젤린이 흥, 하고 콧바람을 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데 조카야, 삼촌이 네 아버지랑 할 이야기가 있거든. 조금만 혼자 있어 줄래?”

에반젤린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응…… 알겠어, 삼촌.”

“착하네.”

지크프리트가 에반젤린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고는 바닥에 내려주었다. 에반젤린은 아쉬운 듯 삼촌을


흘긋 보았지만, 무어라 조르진 않았다.

에반젤린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제 방이 있는 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랑 삼촌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둘 사이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아서 더 궁금했다.

이야기를 엿듣는 건 나쁜 짓이라고 유모가 그랬지만, 에반젤린은 궁금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고민은
짧았다. 에반젤린이 다시 아버지와 삼촌이 있는 층으로 후다닥 올라갔다.
방문이 가까워질수록 나쁜 짓을 한다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문에 귀를 댔다.

“…아…도 그 남자…….”

“어쩔 수…… 이…트는…….”

목소리가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에반젤린은 끄응, 하며 더 자세히 듣기 위해 문을 살짝 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아버지와 삼촌이 저를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둘 모두 표정이 날카로웠다. 처음 보는 표정에 에반젤린은 순간 겁을 집어먹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하아. 누이의 상태가 괜찮아지긴 하는 거야?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아주 조금이지만, 전보다 나아지긴 했습니다. 식사도 곧잘 하고요. 말도 아주 가끔은 합니다.”

“그러면 뭐 해. 나한텐 한마디 대답도 안 하는데. 그 남자를 죽이겠다고 협박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니까.”

카시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에로드 데반, 그자는 어떻게 된 겁니까? 추적을 하지 않으셨을 리는 없고.”

“응? 죽였는데.”

지크프리트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카시엘이 순간 알아듣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요?”

“죽였다고.”

마치 오늘 점심은 무얼 먹었노라 말하는 듯 여상한 어조였다. 카시엘은 경악했다. 지크프리트는 카시엘의


표정을 보고도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태연자약한 반응에 카시엘은 더욱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엄청 놀라네. 눈치챘을 줄 알았는데.”

“언제 죽이신 겁니까?”

“꽤 됐는데. 8 년 됐나……? 에벨루넨 대륙을 떠나기 전에 죽였지. 확실하게. 불까지 질러서 집도 다


태우고.”

카시엘은 말을 잃고 희게 질린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마를 짚고 허, 짧은 한숨을 터트리듯


내쉬었다.

에반젤린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에 눈만 깜빡이다가,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다가가 위로하고 싶었지만,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중이라 차마 문을
활짝 열고 다가갈 수 없었다.

에반젤린은 고민하다가 결국 등을 돌리고 다시 제 방으로 뛰어 내려갔다.


* * *

에반젤린은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머릿속으로 다리가 백 개 달린 벌레를 상상했다. 그럼에도


그 상상은 지워지고, 설렘과 기대가 다시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드디어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경마장에 가기로 한 것이다. 에반젤린은 뛸 듯이


기뻤다. 아버지께서 얌전히 방에서 기다리라고 하였기에, 에반젤린은 제 방 침대에 걸터앉아 마구 다리를
흔들어댔다.

“유모, 유모. 나 어머니랑 처음으로 밖에 나가봐!”

“기쁘시겠어요, 공녀님.”

“응! 정말 좋아!”

어머니가 어색하고 어렵긴 했지만, 에반젤린은 여전히 어머니가 좋았다. 이따금 어머니가 가끔 다정한
눈으로 바라볼 때도 있었던 것이다. 그 눈빛이 어딘지 슬퍼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에반젤린은 그런
눈빛으로라도 자신을 바라봐주는 게 좋았다. 어머니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

“어머니랑 친해지고 싶어. 어머니가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마님께서도 언젠가는 공녀님을 사랑해주실 거예요. 이리 사랑스러우시고 어여쁘신걸요.”

“그래? 그렇겠지?”

에반젤린은 조금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사랑해주시겠지? 에반젤린은 더없이


어머니가 자신을 향해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카시엘이 보이자 에반젤린이 “아버지!”하고 크게


외치면서 그에게 뛰어들었다.

“이브. 어머니께 인사해야지.”

카시엘이 에반젤린을 품에 안아 들며 이네트를 향해 몸을 살짝 틀었다. 그제야 에반젤린이 아버지 뒤에 서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는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니…….”

어머니는 대답 없이 에반젤린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눈이 에반젤린을 탐색하듯 오목조목 뜯어보았다.


그 시선이 조금 무서워서, 에반젤린은 저도 모르게 아버지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쭉 훑어보던 어머니의 시선이 에반젤린의 녹색 눈에 딱 고정되었다. 무감정하던 어머니의 푸른 눈동자에


슬픈 빛이 섞여들었다. 에반젤린은 언제 두려움을 느꼈냐는 듯 그 시선에 호기심을 느꼈다.

어머니가 왜 갑자기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볼까?

예전부터 어머니가 가끔씩 저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볼 때가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궁금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왜 저를 슬픈 눈으로 바라봐요?”


어머니는 이번에도 또 대답하지 않았다. 에반젤린이 상처받은 얼굴로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아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두 번이나 무시당했다. 에반젤린이 “힝.” 하고 작게 칭얼거리며, 카시엘의 가슴에 뺨을 비볐다. 그가


위로하듯 딸의 등을 토닥였다.

“어머니께서 피곤하셔서 그렇다. 그래도 이브 널 생각해서 함께 나가기로 했으니, 괘념치 말아.”

“네…….”

카시엘이 에반젤린을 안은 채 앞으로 걸었다. 이네트는 관성처럼 그 뒤를 따랐다.

마차에 올라탈 때가 되자, 카시엘이 에반젤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에반젤린이 의아해하며 아버지를
올려다보자, 아버지가 마치 풋맨처럼 마차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반젤린이 놀라 숨을 헉,
들이켰다.

“이네트, 마차에 먼저 타.”

아버지가 언제나 어머니를 아껴준다는 건 알았으나, 지금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순 없었다. 어머니는


무표정하게 꿇은 무릎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무릎을 밟고 마차 안에 올라탔다. 그다음에야 에반젤린은
아버지의 품에 다시 안길 수 있었다.

마차는 곧바로 번화가로 향했다. 그동안 마차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에반젤린이 이따금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화가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쉿. 어머니께서 눈을 감고 계시잖아, 이브. 조용히 하거라.”

“……네.”

에반젤린은 결국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마차가 경마장 앞에 멈췄다. 에반젤린은 참지 못하고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에반젤린!”

카시엘이 꾸짖듯 낮은 목소리로 불렀으나, 에반젤린은 주변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왁자지껄한
주변과 저 멀리 보이는 말의 모습이 에반젤린의 가슴을 뛰게 했다.

카시엘은 한숨을 후우, 쉬며 우선 이네트를 부축하여 마차 밖으로 내리게 했다. 그리고는 에반젤린이
마음대로 뛰어다니기 전에 품에 단단히 껴안았다.

“악, 아버지!”

에반젤린이 품 안에서 바동거렸으나 카시엘은 놓아주지 않았다. 이네트는 무감한 표정으로 경마장 주변을
빙 둘러볼 뿐이었다.

에반젤린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경마장 안으로 들어섰다. 에반젤린은 원형 경기장에 앉아 저 멀리


경마용 말과 그 위에 올라탄 선수를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의 눈에는 그저 모든 것이 멋져 보였다.

그중 에반젤린의 눈을 사로잡은 선수가 있었다. 다카르와 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다카르보다는 좀 더 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시선을 앗아간 건 단순히 흔한 갈색 머리라서가 아니었다.

긴 다리와 곧은 허리, 멀리서 봐도 알 수 있는 유려한 외모 때문이었다. 경마와는 어울리지 않는 곱상한


외모 때문인지 에반젤린뿐만 아니라 다른 여인들의 시선도 그 남자에게 집중되었다.
에반젤린이 저 선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에반젤린은 놀라서 아,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어머니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무표정하게 그저 눈물만…….

“이네트. 미안해.”

아버지가 돌연 어머니께 사과했다. 에반젤린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그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아버지가 어머니를 껴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안해, 이네트…… 내가 잘못했어.”

아버지가 우는 어머니에게 사과했다. 왜 사과하는 거지? 에반젤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아껴주고 저를 사랑해주는 건 아버지고, 아버지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지 않는 건 어머니인데…


… 왜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어머니께 사과하는 걸까?

에반젤린은 더는 부모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경마장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 선수가 이곳을


보고 있었다. 멀리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선수의 시선은 또렷했다.

“아버지, 저 남자는 누구예요?”

에반젤린이 선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어머니를 꼭 끌어안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즐거우리라고 예상했던 경마장 나들이는 결국 우중충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에반젤린은 속상했다.


어머니와 가까워지기는커녕 더 멀어진 것 같았다.

어머니는 경마장에서 왜 그리 슬피 울었던 걸까?

에반젤린은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외전. 녹음의 균열

에반젤린 디에드반은 저를 둘러싼 꽃밭 속에서 행복하게 자랐다. 모두가 활달하고 아름다운 그녀를
사랑스럽게 여겼다. 무도회에 참석할 때도 그녀는 뭇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때문에 성인식을 치른 이후, 지금까지도 혼담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었다. 두어 차례 거절하여도


끈질기게 구혼하는 남자가 여럿 있을 정도였다.

에반젤린은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하기 시작하자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그녀는 약혼조차


치르지 않은 것이다. 전부 아버지의 과보호 때문이었다.

“아버지, 이제 약혼 정도는 치러도 되지 않을까요?”


“안 돼. 괜찮은 놈이 없어.”

“아버지 눈에 차는 사람이 있긴 해요?”

이놈은 이래서 안 된다, 저놈은 저래서 안 된다, 안 되는 이유가 너무 많았다. 그 이유도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게 그냥 싫은 거 아니에요? 제가 이 집을 안 떠났으면 좋겠죠?”

카시엘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 없이 단호하게 고개만 한 번 가로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반젤린이 “아버지!”하고 크게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저러고 또 어머니한테 가시겠지.

에반젤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뭐가 좋다고 저렇게 어머니만 바라보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아무리 표현하고 애정을 쏟아부어도 애정에 보답하기는커녕 싸늘할 때가 더
많은데. 물론 어렸을 때보다야 나아졌다지만, 에반젤린 눈에는 어머니가 여전히 차가워보였다.

친구들에게서 다정한 어머니에 대해 듣고 있으면 부럽다가도, 저를 사랑해주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불쑥 치밀었다. 어릴 때야 어머니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먼저 다가간 적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돌아오는 게 없으니 자연스레 사이는 더욱 멀어졌고, 그 간극만큼 원망이
생겼다.

휴, 에반젤린이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브. 들어가도 돼?”

“들어와요, 삼촌.”

페르닌드 삼촌이었다. 열다섯이 되던 해, 레브론에서 저택으로 돌아온 페르닌드 삼촌은 에반젤린이


스물이 된 지금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삼촌이 저택으로 처음 돌아왔을 때, 삼촌은 눈물까지
흘리며 돌아온 것에 기뻐했다. 특히나 어머니와 저를 보고서 오열하기에, 페르닌드 삼촌의 첫사랑이
어머니였던 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 추측은 사실이었다.

‘페르닌드 삼촌, 삼촌 첫사랑이 혹시 어머니예요?’

‘맞아. 삼촌의 첫사랑은 이넷이야.’

첫사랑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이건 착각일까? 어머니께서 삼촌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해도, 삼촌이 어머니를 애타게 바라보는 눈빛만 보아도 삼촌이 어머니께 가진 감정이 형수에게 가질
만한 감정이 아니란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삼촌은 아직까지도 미혼이었다.

조심스레 아버지께 운을 띄워도 보았다.

‘아버지. 페르닌드 삼촌 있잖아요……. 어머니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알고 계세요?’

‘그래. 알고 있어.’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게 에반젤린을 더욱 놀라게 했다. 아버지는 그 어떤 타격도


없어 보였다.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커서인지, 아니면 반대로 삼촌에 대한 믿음이 커서인지 알 수
없었으나 여하튼 흔한 일이 아니란 건 분명했다.

아버지도 그렇고, 지크프리트 삼촌도 그렇고, 페르닌드 삼촌도 그렇고…… 왜 그렇게 어머니를 좋아할까?
에반젤린은 마냥 차갑기만 한 어머니를 좋아하는 세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크프리트 삼촌은
어머니와 남매 사이니까 아끼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와 페르닌드 삼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방적인 애정을 그렇게 쏟아붓는 게 지치지도 않는지, 참…….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궁금해서 주변에 이리저리 물어도 “그런 일은 없습니다, 공녀님.” 하고 다들 짜 맞춘 대답만 늘어놓았다.

아나스타시아 이모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게 확실한데…… 사이가 좋지 않아 이모를 찾아가기는 조금


어려웠다. 차라리 다카르에게 물어볼까 싶다가도, 그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에반젤린은 방 안으로 들어온 페르닌드 삼촌을 흘긋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삼촌?”

“그냥. 안부 인사 하려고 왔지.”

“매일 보면서 무슨 소리예요.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거면서.”

“그래… 맞아.”

사실 어머니를 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기에 어머니를 닮은 저를 보러 오는 거겠지. 에반젤린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아직까지도 화해하지 못한 걸 봐서, 페르닌드 삼촌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
같은데, 아무리 물어도 페르닌드 삼촌은 입이 잠기기라도 한 것 마냥 말을 하지 않으니…….

“자, 얼굴 봤으니 됐죠? 곧 저녁 식사 때 봐요, 삼촌.”

“응. 그때 봐.”

페르닌드 삼촌이 나갔다. 에반젤린은 침대 맡에 걸터앉아 조금 고민하다가, 이윽고 책상에 앉아


다카르에게 보낼 저택 초대장을 작성했다.

* * *

초대장에 대한 답장은 기다렸다는 듯 금방 왔다. 이른 오후에 바로 방문하겠노라고.

그 답장대로 다카르가 이른 오후에 저택으로 찾아왔다. 때마침 점심을 먹고 난 직후라 티타임을 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에반젤린은 아끼는 사촌동생을 격하게 환영해주었다.

“다카르! 어서 와!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저도요, 이브. 잘 지냈어요? 이브가 언제 저를 또 초대해줄까 강아지처럼 기다렸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강아지가 있다고?”

“네. 전 이브만을 기다리는 강아지잖아요.”

다카르가 피어난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어렸을 때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었는데, 자랄수록 아버지인


르왈드 후작을 닮아 붉은 적발로 바뀌었다. 갈색 머리카락도 좋았지만, 타는 듯한 적발도 나쁘지 않았다.
적색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붉은 눈동자도 좋았다.

강렬하고 정열적인 색과 다르게 유순한 미소는 조금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브는 웬만해서는 황궁에 잘 오지 않으니까요.”

“나도 가고 싶은데, 아나스타시아 이모께서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

“어머니 눈치 따윈 보지 말아요. 어머니는 이브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지크프리트 삼촌을 좋아하는


이브를 미워하는 거니까.”

“그게 그거지.”

“조금 달라요.”

다카르가 고개를 저었다.

“삼촌이 사라지면 이브에 대한 미움도 사라진단 소리예요.”

“그런가……? 그렇지만 삼촌이 사라질 일은 없으니, 이모와 내가 사이좋아질 일은 없겠네…….”

다카르가 대답 없이 찻잔에 입술을 대었다. 그가 대는 척만 하고 마시지 않자, 에반젤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차가 입맛에 안 맞아?”

“이브, 알잖아요. 전 늘 마시는 것만 마시는 거.”

“아…….”

그랬다. 다카르는 강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본인이 마시던 것만 마시고, 지나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에반젤린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다음부턴 네가 마시는 걸 준비해달라고 할게.”

“아니에요, 이브. 당신이 좋아하는 차잖아요. 전 괜찮아요. 마시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응….”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저 혼자만 마시긴 뭣했다. 에반젤린은 다음부터는 다카르가 마시는 차로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카르. 사실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혹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어?”

“공작부인 말하는 건가요?”

“응. 무슨 일이 있는 건 확실한데, 아무도 내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다카르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물어주네요. 어머니께서는 그 물음만 기다렸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브는 저희에게


묻질 않더라고요.”

“그건…….”
에반젤린이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의 말대로 어쩌면 정답을 바로 알려줄 이들에게 물으러 가지 않았다.
무슨 감정에서 기인한 건지 모를 두려움과 회피가 용기를 어그러트렸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그 물음에 답을 내려줄 수 있을 거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요, 이브.”

“왜? 바로 말해주면 안 될 내용이야?”

“네. 조금 있다가 말해주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응. 상관은 없지만…….”

왜 굳이 나중에 말해주는 걸까? 나름 이유가 있겠지, 싶으면서도 찝찝한 마음은 어쩔 수 없이 피어났다.


그는 에반젤린의 언짢은 표정을 보고서도 희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이브. 곧 국경일인 거 알고 있죠?”

“응. 당연히 알고 있지. 왜?”

“건국제에 참석하실 거죠?”

“그럴 생각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이번 건국제는 참여하지 말라고 하셨어.”

나라가 건국된 날을 기념하여 열리는 연회였다. 건국제는 모든 황궁 연회를 통틀어 가장 성대하게 열렸다.
허나 아버지께선 이번 년만큼은 절대로 참석하지 말라 일렀다. 이유를 물어도 답해주지 않고, 절대로
참석하지 말라고 강조하기만 했다. 괜히 청개구리 심보만 치솟았다.

“그렇지만 이브, 꼭 참석해줘요. 이브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비밀 장소라도 알아냈어?”

“으음, 그런 건 아니지만…… 보면 깜짝 놀랄 거예요.”

에반젤린이 솔깃했다. 안 그래도 청개구리처럼 괜히 아버지께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는데,


다카르가 마침 보여줄 게 있다고 하니 더욱 건국제에 참석하고 싶었다.

“그래? 기대된다. 꼭 갈게!”

“기대해도 좋아요.”

다카르가 아까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건국제는 성대하게 열렸다. 이날은 황궁에서 열리는 건국제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귀족이고 평민이고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축제를 즐겼다.

에반젤린은 건국제도 좋았지만, 한 번쯤은 평민들의 축제에도 참여하고 싶었다. 친구 릴리엔이 말하기를,
평민들의 건국제 축제는 귀족들이 참여하는 그것과는 사뭇 분위기도 다르고 훨씬 즐겁다고 했다. 남녀가
길거리로 나와 신나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에반젤린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축제가 좋았다. 귀족들이 품위니 명예니 따지며 리르넷과 에데이아를 추는
게 어쩔 땐 가식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품위 따윈 잠시 던져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손을 잡고 경쾌하게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격식 없는 춤을


추고 싶었다. 물론, 아버지가 절대 허락해줄 리 없지만…….

에반젤린은 흘긋,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오늘도 어머니를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머니가 스푼을 들고 수프를 떠먹기만 해도 감격한 듯 바라보곤 했다. 에반젤린이 생각하기에
아버지는 좀 중증이었다.

“이네트, 아까 속이 좋지 않다고 했잖아. 지금은 괜찮은 건가?”

“…네.”

아버지의 눈이 어머니의 얼굴과 몸 이곳저곳에 닿았다. 눈빛엔 걱정과 염려가 가득 묻어났다. 아무래도
과보호는 아버지의 천성인 듯했다. 저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저리 심한 걸 보면.

함께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꼭 주변과 유리된 듯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두 분 다 마흔이 넘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고,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마치 첫사랑에 푹 빠진 소년처럼
열렬하고 뜨거웠다. 언제쯤 저 열정이 식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에반젤린이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브.”

아버지께서 대답하고는 다시 어머니의 상태를 살폈다. 에휴, 에반젤린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식당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건국제 날이었다. 이미 아버지 몰래 빠져나가려고 마차까지 밖에 미리 준비해둔 상태였다.


에반젤린은 아주 조심스럽게 1 층 밖으로 나갔다. 마침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식사 중이시라 1 층은
사용인이 얼마 없어 조용했다. 지금이 딱 도망가기 좋은 때였다.

미리 준비해둔 마차로 향했다.

“어서 출발해!”

마부에게 돈을 한 움큼 쥐어주며 외쳤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마부가 기다렸다는 듯 출발했다.

역시 하지 말라고 하는 걸 하는 게 제일 기분 좋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숙제하라고 하면 괜히 더


하기 싫었고, 당근을 잘 먹으라고 하면 더 먹기 싫었다.

아, 기분 좋아! 에반젤린이 유쾌한 미소를 터트리며 마차에 준비해두었던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몰래


참여하는 건국제는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 다카르가 보여주겠다고 한 것도 기대가 되었다.

에반젤린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빠르게 황궁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 안은 기대대로 화려했고,


사람도 무척이나 많았다. 넓은 연회장을 죽 둘러보았다. 저 멀리 친한 무리가 보였다.

그들에게 가기 전, 에반젤린이 떠오른 생각에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분명히 건국제 때, 다카르가 제게


무언가를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다카르와 만나야 했는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지크프리트 삼촌이나 아나스타시아 이모와 함께 있나 싶어 보아도, 제일 위 단상 위에 앉아 있는
지크프리트 삼촌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크프리트 삼촌은 이제 마흔에 점점 가까워지는데도 아직 황후를 두지 않았다. 총애하는 정부도 없었다.


성년식을 치르기도 전엔 숱하게 여인들과 염문설을 뿌렸다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 어떤 여인과
염문설도 없으니 참 이상했다. 누군가는 황제 폐하가 남색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는 아나스타시아 이모였다. 허나 아나스타시아 이모와 지크프리트 삼촌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거론되는 또 다른 후보는 바로 에반젤린, 그녀였다.

지크프리트 삼촌이 농담처럼 의회에서 늘 “차기 황제는 에반젤린 디에드반이야.”라고 떠들어댔던 것이다.
농담도 한두 번이어야 농담이지, 그 말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모두들 황제 폐하께서 차기 황제로 에반젤린
디에드반 공녀를 생각하고 있노라 쑥덕거렸다.

하지만 에반젤린이 황제가 되기엔 정통성에 큰 문제가 있었다. 에반젤린의 어미, 이네트 디에드반이
선황제의 사생아라는 점 때문이었다. 비천한 평민의 피를 반이나 가졌으니, 반쪽짜리 황족이라는 좋지
않은 별칭까지 쉬쉬 돌았다.

애초에 에반젤린은 황제 자리 따위 원하지도 않았다. 황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평범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제가 황제가 될 리가. 에반젤린은 황제가 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차라리 농사짓고
사는 평민이 되는 게 더 나았다.

하지만 지크프리트 삼촌은 진심인지 “다음 황제는 너야, 조카야.” 하고 에반젤린에게도 헛소리를
지껄였다. 정말이지 농담으로라도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아직 지크프리트 삼촌은 젊으니까…… 언젠가는 후계자를 직접 보겠지.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루빨리 삼촌이 결혼했으면.

“꺄아아아아악!”

어디선가 큰 비명소리가 들렸다. 에반젤린이 눈을 토끼처럼 크게 뜨며 비명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인 것은…… 피였다.

아주, 붉은 피. 사람의 몸에서 나는 신선한 피.

에반젤린은 멍하니 다른 이의 가슴에 박힌 검을 바라보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나라의 경사인 건국제


날에 왜 피가 보이는 걸까? 그것도 지크프리트 삼촌의 몸에서……? 믿을 수 없었다.

삼촌이 쿨럭, 피를 토해내더니 몸을 꿈틀거렸다. 삼촌을 검으로 찌른 기사가 지체 없이 삼촌의 목을


갈랐다. 쏴아아, 엄청난 양의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아, 아, 아아아악!”

그제야 에반젤린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녀의 몸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아, 아, 아니야, 아니야! 그녀가 중얼거리며 두 손을 입으로 틀어막았다.

곧이어 학살이 시작되었다. 비명소리, 사람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 누군가 부리나케 도망치는 소리,
그러다 다시 잡혀 검에 베이는 소리, 소리, 소리…… 수많은 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점령했다.
에반젤린은 이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그 어떤 사고도 되지 않았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바위처럼 굳어서는 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크프리트 삼촌이 죽었어…….

“이브. 뭐 하고 있어요? 가만히 서서.”

몸이 얼어붙은 때,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뻣뻣하게 굳은 목이 천천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갔다. 다카르였다.

에반젤린이 참았던 숨을 크게 내뱉으며 허겁지겁 다카르의 옷자락을 거머쥐었다.

“다, 다카르. 삼, 삼촌이…… 삼촌이 주, 죽었어.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왜 다들…….”

“일단 여기서 벗어나요, 이브. 많이 힘들어 보여요.”

다카르가 손을 내밀었다. 에반젤린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가 맞잡은 손을 보고선


싱긋 웃더니 그녀를 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도 피가 가득했다. 죽어 있는 시체도 여기저기 쌓여있었다. 쿵, 가슴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다카르의 손에 붙잡혀 질질 끌려가듯이 걷는 도중에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다카르…….”

에반젤린이 다카르의 이름을 힘없이 부르며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옷 곳곳에 피가 흥건히


묻어있었다. 그의 머리색과 같은 붉은 정복 때문에 피가 잘 보이지 않아 이제야 발견했다.

“다카르, 옷에 피가 가득해……. 괜찮은 거야?”

“네. 괜찮아요. 제 피가 아닌걸요.”

목소리가 지나치게 담백했다. 그제야 에반젤린이 이상을 감지했다. 이상할 만큼 그는 침착했다. 꼭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다카르. 너, 왜 그래……?”

“뭐가요, 이브?”

“사, 삼촌이 죽었다니까? 왜 놀라지 않아? 왜 아무렇지 않아? 아무리 삼촌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도……
그래도 가족이 죽었잖아.”

다카르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브, 제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그랬잖아요.”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혹시…….”

설마, 아니겠지. 에반젤린은 부정하고 싶었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십여 년 넘게 보아온 사랑스러운


사촌이 그럴 리 없어.

“맞아요.”

합리화는 5 초도 가지 못하고 파편처럼 부서졌다.

“이브에게 황제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다카르가 수줍게 고백하듯 이야기했다. 에반젤린은 본능적으로 맞잡고 있던 손을 거칠게 털어냈다. 몸이
절로 뒷걸음질 쳤다.

“왜냐면, 어머니께서 그러라고 하셨거든요. 그리고 황제가 죽은 건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것도


어머니의 뜻이니까. 전 어머니의 충실한 사냥개거든요.”

에반젤린은 이대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지크프리트 삼촌이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아나스타시아 이모께서 그러라고 시켰다고?

왜?

“다카르, 어째서…….”

“이브. 전 어머니를 거역할 수 없었어요. 어머니께서 제게 약속하셨거든요. 제가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무조건 들어주겠노라고. 그래서 전 그 대가로 이브, 당신을 요구했어요.”

에반젤린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그가 한 말을 다시금 되새겼다. 나를 요구했다고? 에반젤린이


경악했다.

“다카르, 너 정말 미쳤어? 그게 무슨 개소리야?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지금!”

“이브, 그거 알아요? 제국의 황족은 사촌끼리 결혼이 가능해요. 8 대 황제도 사촌누이를 황후로
맞이한걸요.”

에반젤린이 분을 참지 못하고 다카르의 가슴을 마구잡이로 치기 시작했다. 미친놈, 미친놈! 개자식!


그녀가 아무리 그의 가슴과 어깨를 쳐대도 그는 아프지도 않는지, 오히려 즐겁다는 듯 하하 웃었다.

“이브는 정말 순수해요. 자유롭고, 생명력 넘치고, 사랑스럽고. 그래서 어리석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문장 속에 담긴 뜻과는 다르게 말투가 나긋나긋했다. 꼭 “이브, 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던 것처럼.

“공작과 공작부인은 무사히 집에 계시니 안심해요. 아마 이브가 없어진 걸 알고서 찾으러 오시겠지만.”

그가 그녀의 분을 다 받아내면서도 안심하라는 듯 덧붙였다. 그리고는 에반젤린의 팔을 붙잡아 앞으로


이끌었다.

“이브, 공작이 찾아오기 전에 어서 가요. 어머니가 기다려요.”

“싫어, 싫어!”

“싫어도 어쩔 수 없어요. 어머니께서 이브를 데려오라고 했으니까.”

에반젤린이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싫다고 했잖아, 싫어. 집에 갈래. 더는 여기 있기 싫어.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긴 복도를 가로지르고, 마침내 화려한 문 앞에 섰다.

다카르가 문을 열자, 기사 두 명과 아나스타시아 이모의 모습이 드러났다. 원래라면 황제의 집무실로,


황제가 앉아있어야 할 큰 의자에는 원래 제 자리였다는 것처럼 아나스타시아가 여유로운 얼굴로
앉아있었다.

에반젤린은 갑옷을 무장한 기사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고 침을 삼켰다. 방 안에 피 냄새가 가득했다.


“에반젤린 디에드반. 왔구나.”

늘 그렇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에반젤린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생쥐처럼 겁을 먹었네. 꼭 네 어미가 날 처음 봤을 때처럼.”

“아…….”

에반젤린이 처음 맞닥뜨리는 참혹한 상황에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네가 네 어미를 쏙 빼닮아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지크프리트는 널 죽여 버렸을 거야. 정말 그러고도


남을 놈이거든.”

삼촌이 날 죽인다고? 에반젤린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버지 다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준 것이


삼촌이었다. 어릴 때부터 품에 안고 다니며, 언제나 다정한 입맞춤을 해주었다. 사랑하는 조카야. 그게
삼촌의 입버릇이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말도 안 돼, 삼촌이 그럴 리가…….

“가족끼리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가서 문 앞을 지켜주겠나?”

아나스타시아가 곁을 지키고 선 기사 둘에게 명했다. 그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문밖으로 나갔다.


에반젤린은 그들이 입은 황실 기사단의 정복을 보고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황실 기사단이면서, 황제를
배신하였다고……?

그럼 아버지는? 황실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아버지와, 기사단 소속인 페르닌드 삼촌은?

“공작은 이미 상황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게 병력을 지원해주었다. 나와 손을 잡았거든.”

에반젤린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몸을 비틀거렸다. 무너지려는 그녀의 몸을 다카르가 단단히 붙잡았다.

“그래, 너. 네 아비가 네 어미에게 한 짓은 알고 있나? 네 아비가 동생과 함께 네 어미를 감금하고,


납치하고, 강간한 사실 말이야. 그런 네 아비와 어미를 강제로 결혼시킨 게 지크프리트, 그 빌어먹을
놈이고.”

에반젤린이 녹색 눈이 빛을 잃고 뿌옇게 흐려졌다. 아나스타시아가 피식 웃었다.

“너는 그런 놈들을 아버지, 삼촌, 방긋방긋 웃으며 따르더군. 네 어미가 좀 불쌍하고 네가 좀


가증스러워야지.”

“…….”

“물론 불쌍한 네 어미의 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중요한 건. 지크프리트 그놈이 내 사람을


건드렸다는 점이다.”

아나스타시아의 눈이 빛을 잃은 에반젤린과 다르게 분노로 푸르게 타올랐다.

“난 그놈 때문에 20 년 동안 칼을 갈았어. 역겨운 의회 놈들과 손을 잡고, 그놈의 뒤통수를 후려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놈이 에밀리만 건드리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야.”

다카르가 에반젤린의 몸을 고쳐 안으며 속삭이듯 괜찮냐고 물었다. 에반젤린은 멍하니 금붕어처럼 입술만
빠끔거렸다.

“네게 지크프리트가 죽는 모습을 보인 건, 단순히 네 가증스러움이 역겨워서야. 차라리 내게 묻기라도


했더라면 알려줬을 텐데. 넌 기어코 물어보지 않더구나. 나는 물론이고 네 어미에게도 물어보지 않았겠지.
너는 네 행복에 급급했을 테니 말이다.”

에반젤린의 턱이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야 어릴 때부터 느꼈던 의문점들이 퍼즐을 맞추어갔다.


제게 다정한 애정 따위 주지 않던 어머니, 어머니께 전전긍긍하며 언제나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아버지,
지크프리트 삼촌을 볼 때마다 겁에 질려 있던 어머니, 페르닌드 삼촌이 돌아오자마자 기뻐하기는커녕
싫어하던 어머니, 유모와 집사, 사용인들의 모호한 말들…….

에반젤린은 그래도 믿고 싶지 않았다. 아나스타시아 이모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껏 쌓아 왔던 모든


추억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아버지와 삼촌과 형성한 관계 모두 사라져 버린다.

오늘 보았던 피바다에도…… 정당성이 부여된다.

“이제 꽃밭에서 벗어나렴, 안타까운 조카야.”

에반젤린의 녹음에 기어코 균열이 일었다.

* * *

새 황제의 즉위식이 열렸다. 아나스타시아 마르델 아르비스, 황녀의 즉위였다. 친동생을 죽인 황제, 피로
물든 여제, 온갖 부정한 수식어가 따라붙었으나 아무도 그녀의 즉위를 무르지 못했다.

죽은 전황제와 현황제의 아버지인 선대 황제조차 그녀의 즉위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끼고 살았던 정부와 평화로운 곳에서 노후를 즐기기도 바쁘다며 이번 즉위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나스타시아 마르델 아르비스가 즉위를 하자마자 바로 한 일은 멸문당했던 데반 백작가를 원상복구


시키는 일이었다. 평민으로 강등당했던 에이든과 에밀리 모두 작위와 성을 돌려받고 귀족으로
승격하였으며, 죽은 전황제가 몰수한 광산과 영지 역시 돌려받았다. 자그마치 20 년 만의 일이었다.

아나스타시아는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제롬 르왈드 후작과 이혼했다. 그녀에게는 이미 장성한 건강한


아들이 있었으므로, 그녀는 이 이상 후계에 관한 이야기는 듣지 않겠노라 잘랐다.

그리고 그녀의 침실엔 언제나 그녀의 연인, 에밀리가 함께했다.

즉위식이 치러지고 얼마 있지 않아 황제의 후계자 다카르 마르델 아르비스의 결혼 발표가 이어졌다.


상대는 사촌누이 에반젤린 디에드반이었다.

* * *
에반젤린 디에드반은 이제 더는 예전처럼 어머니와 아버지를 바라볼 수 없었다. 더는 아버지가 아버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 너. 네 아비가 네 어미에게 한 짓은 알고 있나? 네 아비가 동생과 함께 네 어미를 감금하고,


납치하고, 강간한 사실 말이야. 그런 네 아비와 어미를 강제로 결혼시킨 게 지크프리트, 그 빌어먹을
놈이고.’

정말? 아버지와 삼촌이 그랬다고?

‘너는 그런 놈들을 아버지, 삼촌, 방긋방긋 웃으며 따르더군. 네 어미가 좀 불쌍하고 네가 좀


가증스러워야지.’

나는 그런 남자를 어머니 앞에서 아버지, 라고 부르며 따른 것이라고?

아냐, 아버지가 그랬을 리 없어. 하지만…….

에반젤린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때껏 아버지! 하고 외칠 때마다 보였던 어머니의 싸늘한 표정,
가끔씩 저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슬픈 눈동자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겁에 질린 어머니, 울고 있는 어머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어머니, 아버지가 애타게 바라보아도 품


안의 인형만 바라보던 어머니, 죽지 못해 살아가는 어머니…….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건, 나였다.

아나스타시아 이모의 말대로였다.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결코 열의를 다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모의 말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영원히 꽃밭에서 살고 싶었다.

이때까지 어머니의 고통을 모른 척하며 제 행복에만 급급했던 것의 벌을 받는 걸까…….

에반젤린은 눈을 꾹 감았다. 아버지는 다카르와의 결혼을 무척이나 반대했다. 절대로 허락할 수 없노라고
아버지답지 않게 크게 화를 냈다. 허나 그녀는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에도 뜻을 무르지 않았다.

‘아버지, 다카르와 결혼할게요. 전 괜찮아요.’

그렇게 몇 번이고 말해도 뜻을 굽히지 않던 아버지는, 제가 이제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고 털어놓자 그제야 반대를 멈췄다.

‘언제…… 알게 된 거지? 그날?’

‘네. 그러니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어쩌면 다카르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 하더라도, 저택을 떠나기 위해 청혼을 수락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 해요, 이브?”

정신을 차리고 정면을 보자, 거울에 비친 제 모습과 다가온 다카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뒤에서 껴안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아끼는 동생으로 여겨왔기에, 다카르의 스킨십이 불편하고 어색했으나…… 이젠 그렇지
않았다.

그가 가슴 밑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이어 가슴을 한 손에 쥐고 세게 꽉 움켜쥐었다.

“읏….”
아프게 주무르는 손길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자 뒤통수가 그의 배와 부딪혔다.
그가 다른 손으로 젖혀진 그녀의 턱을 쓰다듬었다. 꼭 강아지를 예뻐하듯이. 이젠 이런 손길도 익숙했다.

가슴을 주무르던 손이 이윽고 리본을 풀고 천 사이를 파고들었다. 에반젤린은 다카르의 요구대로 벗기


편한 옷을 입고,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았다. 다카르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듯 밝게 웃었다.

“잘했어요, 나의 이브. 제 부탁을 들어주었네요.”

“으응, 아….”

“그럼, 다리를 넓게 벌려주실 수도 있겠네요.”

그가 옷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완전히 드러난 알몸에 에반젤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저히 정면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제 모습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였다.

“벌려요, 이브.”

다카르가 거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반젤린은 덜덜 떨면서도 천천히, 허벅지를 넓게 벌렸다.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쪽, 입을 맞췄다.

“잘했어요. 이제 그럼 스스로 보지를 벌려 봐요.”

스스로 벌리다니, 차마 그것만큼은 할 수 없어 망설이자 다카르가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속삭였다.

“어서.”

에반젤린은 결국 그의 말대로 아래를 벌렸다. 그의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착하네요.”

의자가 뒤로 밀리고, 벌어진 공간 사이로 그가 들어왔다. 감겨 있던 에반젤린의 눈이 뜨였다. 다카르가


그녀와 눈을 맞추면서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이브는 보지도 예뻐요.”

“아흐응!”

그의 입술이 아래에 닿았다. 에반젤린이 눈을 질끈 감자, 그가 혀로 음부를 핥으며 말했다.

“눈 떠요, 이브. 눈 뜨고 봐요.”

“흐읏, 응… 시, 싫어….”

“어서, 이브.”

그가 허벅지를 가볍게 찰싹, 내리쳤다. 아흑! 에반젤린이 신음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다카르가 제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개처럼 흘레붙은 모습이 거울 속에 보였다. 자신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더없이
음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흣, 하응, 아, 아!”

혀가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음부를 핥던 혀가 내벽으로 짓쳐들어오자 에반젤린이 비명 같은 높다란


신음을 내뱉었다. 의자에 기댄 그녀의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시, 싫어, 더는, 더는, 아, 아앙!”

혀를 뾰족하게 세워 내벽을 찌르는 힘에 에반젤린은 더는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다카르가


웃었다.

“이브, 말해 봐요. 제발 박아주세요.”

“흐읏, 흐…….”

“제발 박아주세요. 그렇게 빌어 봐요. 응?”

“흑, 흐윽….”

혀가 클리토리스를 꾹 누른 순간, 그녀는 결국 겨우 움켜쥐고 있던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제, 발… 흐읏, 박아…주세요.”

“아…… 사랑스러운 이브.”

다카르가 곧장 일어서더니 에반젤린의 입술에 쪽,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바지만 내려


흉흉한 성기를 꺼냈다. 에반젤린은 꼿꼿하게 서 있는 검붉은 성기를 바라보고는 얕은 숨을 내쉬었다.

처음 봤을 땐 그저 무섭기만 했지만, 이제는 곧 다가올 쾌감에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귀두가 입구를 문질러댔다. 은근한 감촉에 에반젤린이 보채듯 흐응, 신음하며 엉덩이를 위로 들었다.
어느새 거울 속에 비치는 제 음란한 모습에도 무뎌졌다.

다카르는 보채는 에반젤린을 그저 사랑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며, 천천히 성기를 질 안으로 삽입했다.


따스하고 질척거리는 내부가 들어오는 침입자를 꽉 조이며 환영했다. 다카르가 하아, 기분 좋은 숨을
내쉬었다.

“흑, 아! 아흣, 아! 앙!”

그가 허리를 흔들 때마다 그녀의 몸이 의자에 부딪혀 덜컹거렸다. 허나 그 반동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아래에 감각이 집중되었다. 안을 꽉 메웠다가 나가는 느낌, 깊은 곳을 찌르는 느낌, 뭉근하게 내벽 안을
휘젓고 쑤시는 느낌……. 온갖 쾌감이 휘몰아쳤다. 그저 좋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 계속, 계속해줘, 응! 다카르, 아아…!”

불과 1 년 전까지만 해도 아끼는 사촌동생에 불과했던 그와 이처럼 발정기의 개처럼 교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브, 언제 또 황궁에 와요? 보고 싶어요.’

칭얼거리던 어린 다카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 모습 위로 피로 물든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핏빛 적발, 피처럼 붉은 눈동자, 피에 젖은 정복…….

“다카르, 흐응! 하!”

“이브, 이브, 이브…….”

다카르가 계속해서 에반젤린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는 다정하기 짝이 없었으나, 움직이는 아래는
거칠고 빨랐다.
“이브가 딴 놈과 결혼할까봐, 헉… 얼마나, 걱정, 후우… 했는지… 몰라요.”

“아흑, 아!”

“드디어, 제 손에… 오롯이, 들어왔, 네요…. 기뻐요, 이브.”

다카르가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에반젤린은 그의 밑에 깔려 울면서 숨을 허덕거렸다.

왜일까. 이상하게도 쾌락의 덫에 빠진 이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느 날 딱 한 번,


어머니께서 이름을 불러주었던 적이 있었다.

‘에반젤린…….’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연약해서, 금방이라도 스러져 재가 되어 사라질 것 같았다. 그 슬픈 눈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눈은 무얼 말하고 있던 걸까.

“흐읏, 아, 아!”

에반젤린은 더 생각하기를 멈췄다. 손을 뻗어 다카르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저 이 감각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 이 정도면 나는…….

안개와 속박 3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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