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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歌曲과 時調는 같은 時調詩를 歌詞(노랫말)로 삼는 음악이다. 또한 그 발생과 발전 시기도


조선 후기 이후이다. 또한 이 두 장르의 음악은 12歌詞와 함께 소위 正歌라 불린다. 歌曲은
18~9세기에 크게 발전하였으며, 시조는 19~20세기에 크게 성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歌曲은 오늘날 극소수 專門家集團에 의하여 보존‧전승되고 있으며, 時調 또한 愛好家의
수효가 점차 감소되는 추세에 있다.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 한국 전통음악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였던 歌曲과 時調의 발생과
발전과정을 살펴보고, 이러한 사실들이 지니는 音樂史的 意義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 동안 歌曲에 관한 학술적 연구의 양은 많이 축적된 셈이나, 時調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
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선행연구의 업적을 대부분 수용하면서, 부분적으로 필자의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글의 성격상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나 논증보다는 歌曲
과 時調의 音樂史的 意義에 대한 토론의 論點을 제시하는데 목적을 두고자 한다.

歌曲의 발전과정은 두 時期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가곡의 모체가 된 慢大葉의
발생으로부터 數大葉이 3~4곡으로 분화되는 시기이며, 다른 하나는 數大葉에 弄‧樂‧編이 생
기고 여러 변주곡이 첨가되어 현행 歌曲의 틀을 갖추는 19세기 말기까지이다.

1) 이 글은 제1회 (사)한국국악학회‧한국시조학회 연합학술대회(2001. 5. 25~26. 전북대학교)에서 발표된 글이


다.
韓國音樂史學報 제 집

慢大葉이 가장 처음 보이는 악보는 琴合字譜 (1572년)이다. 이 악보에는 <平調慢大葉>이란


이름으로 琴(거문고)‧笛(대금)‧杖鼓‧鼓(북)의 악보가 일종의 總譜로 실렸는데, 악기에 따라 기
보방법은 다양하다. 이 악보에 의하면 <평조만대엽>은 “오리 오리나…”의 노랫말을 오
늘날의 歌曲과 같이 다섯 부분[五旨]으로 나누어 부르며, 악곡의 뒤에는 ‘餘音’이 있다. 그
러나 이 악보의 첫 곡으로 실린 <평조만대엽>과 악보의 끝에 실린 <琵琶慢大葉>의 악보는
<자료 1>과 같이 노랫말은 大同小異하나, 수록된 악곡의 선율은 다소의 차이가 있다.
이후 만대엽은 梁琴新譜 (1610년)‧ 玄琴東文類記 (1620년)‧ 大樂後譜 (1759년) 등의 악보
에 실렸는데, 이들 악보에서는 이미 노랫말이 탈락되어 기악곡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양금신보 에서는 “오리…”의 노랫말이 <中大葉(俗稱 心方曲>에 붙어 있어 그 사이
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1620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현금동문류기 에는 아래 <자료 2>와 같은 악곡이 수록되


었는데, 밑줄 친 악곡은 그 제목이 서로 다르게 표기되었으나, 만대엽의 다른 이름으로 추
측된다. 이 악보의 편자인 李得胤이 접해 본 古今의 악보에서 옮겨 온 이들 악곡 중 만대엽
에 해당하는 악곡의 수가 많은 것은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엽에 만대엽이 널리 연주되었음
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자료 2>에서 보는바와 같이 주로 平調[樂時調]2)로만 연주되던 만대엽은 이후 國立國樂


院所藏琴譜(일명 二水三山齋本琴譜) ‧ 白雲庵琴譜 ‧ 增補古琴譜 ‧ 延大所藏琴譜 ‧ 新證琴譜 ‧

2) 여기서의 樂時調는 樂調의 이름이다. 즉 林鍾을 宮으로 삼는 徵調를 가리키며, 後代의 平調와 같다.
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韓琴新譜 등에 수록되었으나, 中大葉이 유행하던 肅宗 때부터 차츰 자취를 감추었고, 數大


葉이 유행하던 英祖무렵에는 아주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3)

中大葉이 처음 보이는 악보는 양금신보 (1610년)이다. 이 악보에는 平調‧平調界面調‧羽調‧羽


調界面調의 네 가지 악조로 된 중대엽 악보가 수록되었는데, <평조중대엽>은 두 곡이 실려
있다. 노랫말은 <평조중대엽> 두 곡에만 붙어 있는데, 금합자보 의 <평조만대엽>에 붙었
던 “오리”와 鄭夢周의 <丹心歌>가 그것이다. 이와 같이 노랫말과 가락을 달리하는 두 가
지의 노래가 이미 양금신보 에 보이고 있음은 매우 주목된다. 즉 전자에 비하여 후자는 노
래의 앞부분을 높은 소리로 노래하는데, 이 점은 후대의 三數大葉이나 頭擧를 연상케 한다.

두 가지 노랫말은 위 <자료 3>과 같이 다섯 부분[五旨]으로 구분되고 있어 후대의 가곡과


같다.

3) 黃俊淵, ‘慢大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제7권, 6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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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엽은 이후의 여러 악보에서 각 악조별 악곡들이 2~3곡으로 늘어난다. 이들 악곡은 악


보에 따라 中大葉 第一, 第二 등으로 표기되거나 初中大葉‧二中大葉‧三中大葉 등의 명칭을
사용하는데, 양금신보 를 증보한 增補古琴譜 에 평조중대엽 두 곡, 우조중대엽 두 곡이
수록되었으나, 평조계면조와 우조계면조는 한 곡만 수록되었다. 네 가지 악조별로 3곡씩이
모두 갖추어진 것으로는 1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延大所藏琴譜 와 雲夢琴譜 (1707년),
韓琴新譜 (1724년)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동일 악조에 속하는 중대엽 一‧二‧三의 각 악곡이
지니는 음악적 특징으로는 一‧二‧三이 마치 현행의 平擧‧中擧‧頭擧처럼 노래의 시작부분을 들
어내는 정도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4)
18세기 후반기까지 다양한 악조와 다수의 악곡으로 분화‧발전하던 중대엽은 19세기 벽두인
遊藝志 에 네 가지 악조별로 한 곡씩 실렸으며, 三竹琴譜 (1841년)에 이르러 평조와 평조
계면조 중대엽이 없어지고 우조와 우조계면조의 중대엽만 각 세 곡씩 남게 되었다. 삼죽금
보 의 중대엽 각 악조별 세 곡의 특징은 初章 시작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데, 二中大葉이 初
中大葉보다 높게 시작하고, 三中大葉은 二中大葉보다 더 높게 시작되고 있다.
중대엽을 수록한 악보로 가장 늦은 시기의 것은 學圃琴譜 인데, 이 악보에는 羽初中大葉‧羽
三中大葉‧界三中葉의 세 곡이 水波形 旋律線譜(<그림 1> 참조)로 기보되었다. 그러나 이 수
파형 악보는 吳憙常琴譜 의 것을 베낀 것으로 보이며, 기보법의 특성상 구체적인 音高나
時價를 드러내지 않아서 당시 악곡을 고찰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1610년에 간행된 양금신보 에 數大葉의 악보는 실리지 않았으나, ‘數大葉與民樂步虛子靈山

4) 엄성은, “中大葉小考,” 한국음악산고 (서울: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연구실, 1989), 창간호, 73쪽.
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會上等曲用於舞蹈之節非學琴之先務姑(*故)闕之’이란 註에 의하여 당시에 삭대엽이 만대엽‧중


대엽과 함께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620년에 편찬되었다는 현금동문류기
에도 數大葉‧數大葉(滋滋大葉)‧數大葉一腔‧羽調數大葉‧斜調數大葉‧平調小葉 등의 악곡이 수
록되어 있다.
삭대엽은 增補古琴補 에 이르러 평조‧평조계면조‧우조‧우조계면조의 네 악조로 분화되었는
데, 平調와 羽調에 두 곡씩, 平調界面調와 羽調界面調에 한 곡씩이 실려 있다. 이 중 羽調數
大葉 한 곡과 平調數大葉 두 곡, 平調界面調數大葉 한 곡에는 노랫말이 붙어 있다.5) 이 악
보에 실린 平調數大葉과 平調數大葉又를 비교하면 又가 전자에 비하여 낮은 音域으로 연주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羽調數大葉과 羽調數大葉又에서도 발견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중
대엽에서는 대체로 中大葉一‧二‧三으로 진행하면서 음역이 높아지는 경향이었음에 비하여
증보고금보 의 삭대엽은 나중의 곡이 낮은 음역을 보이고 있다.
삭대엽은 신증금보 에 이르러 네 악조별로 각각 제일‧제이‧제삼의 세 곡씩 분화되었음을 확
인할 수 있으며, 한금신보 (1724년)에서는 평조와 평조계면조에 세 곡씩, 우조와 우조계면
조에 네 곡씩이 갖추어졌다. 한금신보 우조삭대엽에 한하여 살펴본다면 그 第一‧第二‧第三‧
第四는 현행 가곡에 비추어 각각 羽調初數大葉‧羽調頭擧‧羽調三數大葉‧羽調二數大葉에 해당함
이 밝혀졌다.6)
18세기 말기에 나타나는 삭대엽의 뚜렷한 변화는 음역의 고음화에서 찾을 수 있다. 拙庄慢
錄 (1786년)에는 평조와 평조계면조 악곡이 하나도 없고, 우조 3곡, 우조계면조 2곡이 수록
되어 있을 뿐이다. 졸장만록 의 이러한 변화는 유예지 이후 19세기 악보에서 평조 악곡
이 거의 사라지게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후기 음악사의 한 특징으로 지
적되는 음역의 고음화 현상이 가곡분야에 나타난 例가 될 것이다.
만대엽‧중대엽‧삭대엽 중 만대엽은 18세기 초반에 더 이상 연주되지 않게 되었고, 중대엽도
19세기 초반에 음악 장르로서의 수명을 다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삭대엽만이 남아 다양한
악곡으로 분화‧발전 과정을 거쳐 19세기 후반에 오늘날 가곡 한 바탕의 틀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삭대엽이 전성기를 맞은 19세기 이후 가곡의 변천은 다음 節에서 살펴보고자 한
다.

5) <삭대엽>에 붙어 있는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삭대엽) 우조>
千里外 病든 몸이/ 北녁○라 우니노라/
님 향 마음믈 뉘아니 두리마/
 고/ 밤 긴 나리어든 나닌가 노라/
<(삭대엽) 평조>
城市예 닐제/ 즐겁고 시이러니/
江湖에 나오니 여윈히 지매라/
○···이 이렁욤도 亦君恩이 셔터/
<又>
風霜이 섯거던 날애/ 슬픤 黃菊花/
銀盤의 것거다마 玉堂의 보내실샤/
桃李야/ 고온양 마라 님의  알아라 <정철>
<(삭대엽) 계면조평조>
가시리 가시링잇고/ 날 리고 가시리잇고/
고은님 보내··· 나 엇지 사링잇고/
잡와/ 두오련마 션가도 이다/
6) 이혜구, “한금신보의 우조삭대엽,” 한국음악논집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5), 35-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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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승되는 歌曲[萬年長歡之曲] 한 바탕은 연주방식에 세 가지가 있다. 즉 남창만 노


래부르거나 여창만 노래하는 경우가 있고, 남녀창이 교대로 노래하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
으로 가곡 한 바탕은 남녀가 교대로 노래하고, 太平歌의 男女竝唱으로 마치는 것이 올바른
연행방법으로 알려졌다.
가곡을 남녀창이 함께 노래 할 때는 <자료 4>와 같은 순서로 악곡을 엮어 부른다.

이와 같은 가곡 한 바탕의 규모는 18세기의 가곡에 비하여 매우 방대한 것인데, 대체로 유


예지 에서 비롯되어 三竹琴譜 (1841년)에 이르러 악곡의 수가 대폭 확대되었으며, 玄琴五
音統論 (1886년)에서 현행과 같은 체제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에 비하여 두드러지
게 달라진 점은 弄‧樂‧編 계통의 악곡과 中擧‧平擧‧頭擧 등 변주곡이 등장하였으며, 女唱이 생
겨나서 교대로 노래하는 ‘가곡 한 바탕’ 즉 소위 ‘篇歌’의 틀이 갖추어진 점이다.

19세기가 시작되는 무렵의 악보로 삭대엽의 분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가 遊藝志 이다. 정
확한 연대는 미상이나, 대체로 純祖(1800-1834)代에 편찬된 이 악보에는 거문고 악보로 羽
初葉‧羽二葉‧羽三葉‧界初葉‧界二葉‧界三葉 등의 악곡이 실려 있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
는 弄葉‧界樂‧羽樂‧編數大葉의 악곡이 들어 있어 주목된다.
張師勛에 의하면 弄調는 “흥청거리며, 폭 넓은 요성(搖聲)을 많이 쓰는”8)것이라 하며, 樂은
“화창한 봄 꽃동산과 같이 마냥 즐겁기만한 가락”9) 또는 “흥청거리는 농에 비하여 비교적
담담한 듯하면서도 유수(流水)와 같이 치렁치렁한 멋이 있다”10)고 하였다. 반면에 編은 ‘엮
음’ 또는 ‘사설’의 의미로, 가곡에서는 10점 16박 장단이 아닌 10점 10박 장단으로 구성된
악곡을 지칭한다. 당연히 編은 字數가 많은 사설시조를 얹어 부른다.

7) 남창 또는 여창만 따로 노래할 때는 아래와 같은 순서로 부른다고 한다.


<남창가곡> ① 우조초수대엽 ② 우조이수대엽 ③ 우조중거 ④ 우조평거 ⑤ 우조두거 ⑥ 우조삼수대엽 ⑦ 우조소
용 ⑧ 반엽 ⑨ 계면조초수대엽 ⑩ 계면조이수대엽 ⑪ 계면조중거 ⑫ 계면조평거 ⑬ 계면조두거 ⑭ 계면조삼
수대엽 ⑮ 계면조소용 ꊉ ꊘ 얼롱(乻弄·言弄) ꊉ
ꊙ 평롱(平弄) ꊉ
ꊚ 계락(界樂) ꊉ
ꊛ 우락(羽樂) ꊊ
ꊒ 얼락(乻樂·言樂) ꊊ

편락(編樂) ꊊ
ꊔ 편수대엽(編數大葉) ꊊ
ꊕ 얼편(乻編·言編) ꊊ
ꊖ 태평가. <여창가곡> ① 우조이수대엽 ② 우조중거
③ 우조평거 ④ 우조두거 ⑤ 반엽 ⑥ 계면조이수대엽 ⑦ 계면조중거 ⑧ 계면조평거 ⑨ 계면조두거 ⑩ 평롱
ꊓ 우락 ⑫ 환계락 ⑬ 계락 ⑭ 편수대엽 ⑮ 태평가

8) 張師勛, 國樂史論 (서울: 대광문화사, 1983), 256쪽.
9) 張師勛, 國樂史論 , 257쪽.
10) 張師勛, 最新國樂總論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5), 441쪽.
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弄歌란 이름으로 유예지 에 처음 실린 弄 계통의 악곡은 삼죽금보 (1841년)에 이르러 旕


弄이 처음 보이고, 현금오음통론 (1886년)에는 平弄이란 이름이 있으며, 방산한씨금보 에
는 羽弄이 처음 실렸다.
유예지 에 界樂과 羽樂이 처음 실린 이후에 樂 계통의 악곡은 江外琴譜 에 啓眠樂時調‧羽
調樂時調‧言樂時調 등이 실렸고, 삼죽금보 에 旕樂‧編樂이 처음 보인다. 樂 계통의 현행 악
곡이 다 갖추어진 것은 19세기 중엽으로 보이는데, 이는 농‧낙‧편 가운데 樂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현행과 같은 틀을 갖춘 셈이다.
사설시조가 실린 초기의 대표적인 것은 珍本 靑丘永言 (1728년)의 ‘蔓橫淸類’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악보인 浪翁新譜 (1728년)를 비롯하여 18세기의 악보에는 사설시조를 얹어서 불
렀을 것으로 보이는 악곡은 발견되지 않는다. 악곡으로서 編을 싣고 있는 것은 1800년경
이후에 속하는 유예지 編數大葉이 처음이다. 이후 言樂時調까지 소개되어 있는 江外琴譜
에도 보이지 않다가 三竹琴譜 (1841년)에 編數大葉‧編樂이 실렸고, 羲遺 (19세기 후기)
에 言編이, 방산한씨금보 (1916년)에 羽編이 처음 보인다. 따라서 辭說時調詩를 얹어 부르
면서 10점 10박 장단을 사용하는 編 계통의 악곡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20세
기 초기인 방산한씨금보 (1916년) 무렵이다.
弄‧樂‧編은 19세기 벽두의 악보인 유예지 에 처음 나타난 이후 樂은 19세기 중기에, 弄과
編은 20세기 초기에 현재와 같은 틀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아 가곡의 弄‧樂‧編은 19세기 풍
류방 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歌曲의 분화과정에서 초기 數大葉이 각각의 악조에서 第一‧第二‧第三 등으로 분화되었고, 이


들이 악보에 따라서는 初數大葉‧二數大葉‧三數大葉의 이름을 갖기도 하였으며, 韓琴新譜
(1724년)의 우조와 우조계면조, 浪翁新譜 (1728년)의 평조와 평조계면조에는 각각 第四가
실려 있기도 하다. 이 중 일부의 악곡은 현행 頭擧와 같이 악곡의 시작부분을 높게 들어서
노래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11) 이처럼 노래곡을 변주함에 있어 시작부분의 音域을 변화시
키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이는데, 민요에서 메기는 소리의 시작을 들거나 지르거나
숙이는 예가 그것이다. 시작부분의 다양한 변화 중에서도 본래의 선율에 비하여 높은 음역
으로 들어서 시작하는 예는 매우 이른 시기의 악보인 양금신보 의 平調中大葉又에도 보인
다.
이와 같이 노래의 앞을 들거나, 중간을 들어서 표현하는 변주곡들로 악곡의 이름에 ‘擧’字가
들어간 악곡이 玄琴五音統論 (1886년)에 처음 보인다. 즉 二數大葉의 가락을 토대로 ‘초장
12박 이하를 들어내는’ 中擧, ‘이삭대엽에 비하여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성(平聲)’으로 시작
되는 平擧, ‘머리를 드러내는 점이 특징’12)인 頭擧가 그것이다.
삼죽금보 에는 調臨이라는 악곡이 실려있는데, 羲遺 에서는 이 곡을 調臨大葉이라 하였
다. ‘조임(調臨)’은 ‘조이다, 죄다’에서와 같이 악곡의 한배를 빠르게 부른다는 의미13)를 지

11) 金英云, “浪翁新譜 所載 平調 數大葉 및 平調界面調 數大葉의 硏究”(서울: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5).
12) 張師勛, 國樂史論 , 248쪽.
13) “俗稱조온자즌한입 卽二葉之節奏漸促者也.” 三竹琴譜 羽調調臨調; 현악기의 줄을 조이듯이 음을 높인다는
의미를 漢字로 표기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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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 것인데, 학계에서는 調臨을 頭擧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으며, 小數大葉( 방산한씨금보 )


도 頭擧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14)
그 밖에도 一蓑琴譜 (1884년)와 嶧陽雅韻 에는 短數大葉이란 곡이 있으며, 愚軒琴譜 에
는 數數大葉이란 악곡도 실려 있다. 그러나 短數大葉은 圓客遺韻 이나 西琴歌曲 등에서
中擧‧平擧‧頭擧와 별도의 악곡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현행 가곡에서는 유사한 이름을 찾을
수 없다.
三竹琴譜 에는 調臨에 이어 三數大葉‧騷耳‧騷聳이 실렸는데, 동 악보의 註에 騷耳는 “초장
과 이장은 조림의 초장과 이장을 쓰기도 하고, 혹은 삼삭대엽을 쓰기도 하나, 삼장 16점으
로부터 騷耳가 시작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騷耳는 調臨(즉 頭擧)이나 三數大葉과는 구별되
는 별도의 악곡이며, 騷聳이란 곡명이 따로 있는 것으로 보아 騷聳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騷耳‧騷聳‧頭擧의 세 곡을 혼동하는 경우도 있었다.15) 騷耳와 관련된 문제는 차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三數大葉은 초장만 높은 음역으로 노래하지만, 騷聳은 끝까지 높은 음역으로 노래한다는 점
에서 구별된다. 頭擧도 곡의 머리를 든다는 점에서 三數大葉과 같으나, 그 드는 정도에 있
어서 차이가 있는데, 초장의 시작은 頭擧가 三數大葉보다 조금 높지만 이어지는 가락은 三
數大葉이 더 높아진다. 騷聳은 三數大葉의 변주곡이다.16)

19세기 초기의 악보로 보이는 江外琴譜 에 言樂時調가 출현한 이후 삼죽금보 에 旕弄‧旕


樂, 羲遺 에 言編이 실렸다. 旕은 악보에 따라 孼‧乻‧言 등으로 표기되기로 하는데 어느 것
이나 우리말 ‘엇’의 한자 표기이다.
가곡의 곡명에 엇이 붙은 악곡의 특징으로 張師勛은 “이삭대엽과 같이 장중한 창법에 농
(弄)이나 낙(樂)과 같은 흥청거리는 창법이 섞인 곡으로서,···(중략)···처음은 반드시 높은 소
리로, 즉 우조는 청황종(e♭’), 계면조는 청태주(f')로 질러 낸다”고 하였다.
비록 엇 계통의 노래가 弄‧樂‧編이 처음 등장하는 遊藝志 에는 실리지 않았으나, 1841년의
악보인 삼죽금보 에 旕弄‧旕樂‧言編의 세 곡이 모두 실려 있는 점으로 보아 가곡의 형성과
정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틀이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점과 관련하여 歌曲源流 에
서 엇롱의 다른 이름으로 쓰인 ‘蔓橫’이 주목된다. 이미 珍本 靑丘永言 에서 ‘蔓橫淸類’로
분류된 시조작품이 모두 평시조보다 字數가 확대된 중·장형의 시조임을 볼 때, 蔓橫은 ‘덩쿨
이 이리저리 얽힌’ 모습을 가리키는 ‘얽’의 뜻을 지녔고, 이를 한자로 표기할 때 乻‧孼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17) 이는 가곡의 編이나 乻이 모두 ‘엮음’의 뜻을 지니
고 있으나, 編은 10점 10박 장단으로 구성된 점에서 10점 16박 장단을 유지하는 乻과 구
별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만 ‘言編’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지가 문제로 남는데, 자
세한 논의는 추후로 미루더라도 가곡의 곡명에 旕이 붙는 악곡은 평시조보다는 많고 사설시

14) 黃俊淵, ‘두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제7권, 391쪽.


15) 張師勛, 國樂史論 , 254쪽; 張師勛, ‘지름시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제21권, 231쪽.
16) 趙雲朝, “三數大葉(騷耳)과 騷聳”(서울: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6).
17) 金英云, “「珍本 靑丘永言」의 編纂年代에 關한 一考察,” 시조학논총 (서울: 한국시조학회, 1999), 제14집, 97
쪽.
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조보다는 작은 글자수의 사설을 얹어 부른다는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


형의 노랫말은 18세기의 歌集에서 많이 발견되므로, 이를 노래하기 위한 엇 계통의 악곡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불려왔고, 악곡의 분화 과정도 19세기 전반기에 완결된 것으로 보인
다.

여창 가곡이 악보에 처음 실린 것은 三竹琴譜 (1841년)가 처음이고, 남녀병창으로 부르는


곡이 악보에 실린 것도 三竹琴譜 의 淸聲數大葉이 처음이다. 그리고 현행과 같이 가곡 한
바탕의 마지막에 남녀가 병창하는 악곡을 太平歌라 명기한 악보는 현금오음통론 (1886년)
이 처음이다. 그리고 오늘날 여창으로만 부르는 곡인 還界樂이 악보에 처음 수록된 것은
西琴歌曲 (1884년)이다. 19세기 중엽에 여창을 위한 악곡이 출현하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풍류공간에서 여창가곡을 필요로 할만큼 사회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행 가곡과 같이 한 바탕을 갖추어 남녀가 교대로 노래를 부르며, 그 마지막을 태평가로
여미는 연주형태 즉 篇歌의 모습은 남녀병창곡인 淸聲數大葉의 존재가 확인되는 삼죽금보
와 현학금보 (1852년)에서 초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삼죽금보 에는 羽調二數大葉‧羽
調調臨‧界面調臨이 여창곡이며, 淸聲數大葉이 남녀병창곡이다. 玄鶴琴譜 는 羽調의 二數大
葉 其二‧二數大葉 其四‧三數大葉(三雷), 界面調의 二數大葉 其二‧二數大葉 其四‧二數大葉 其五
가 여창이어서 남창과 교대로 수록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19세기 중기에는 남녀창이
교대로 노래 불렀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행과 같은 체계가 잡힌 것은 太平歌와 還界樂이 출
현하고, 악곡의 수효가 확대되어 현행 가곡의 체계가 잡힌 玄琴五音統論 (1886년)과 徽琴
歌曲譜 (1893년) 그리고 歌曲源流 (1876년) 등이 편찬된 19세기 후반으로 보인다.
篇歌의 형태가 갖추어지면서 羽調와 界面調의 악곡이 연결되고, 羽樂‧界樂 등 樂調를 달리하
는 노래가 연결되면서 조바꿈을 위한 악곡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半羽半界의 악
곡이 파생하였는데, 羽調騷聳에서 界面初數大葉으로 연결하기 위하여 半葉이 필요하였으며,
言樂과 編數大葉을 연결하기 위하여 編樂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羽樂에서 界樂으로 넘어가
기 위하여 還界樂이 필요하였다.
이와 같이 男女唱과 羽調‧界面調에 의한 篇歌의 형태가 확립되면서 가곡은 전성기를 맞은
것으로 보이는데, 歌唱 장르로서 全盛期는 곧 가곡발전의 完結期가 되었고, 더 이상 새로운
樂曲의 파생이나 새로운 노랫말의 收用이 없이 詩歌 장르로서의 성장을 마친 것으로 보인
다. 이후 소위 正歌 장르로서의 대중성을 時調唱에 물려주고, 지금은 중요무형문화재 제도
에 의하여 보호‧전승되는 斜陽 장르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時調의 발생을 高麗時代로 잡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어떻게 연행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時調唱의 발생을 좀 늦게 잡는 경우는 주로 申光洙의 石北集
의 “一般時調에 장단을 배열한 것은 長安에서 온 李世春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기록에 의하
여 朝鮮 英祖代로 잡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時調’라는 용어가 다양한 의미18)로 사

18) 그 한 例로 李衡祥의 甁窩歌曲集 에서는 梁德壽의 음악을 지칭하는 古調의 대칭으로 金成器의 음악을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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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되었기 때문에, 석북집 의 ‘時調’를 時調唱과 동의어로 단정하기도 어렵다. 또한 ‘時節短


歌’라는 명칭에 주목하여 白雲庵琴譜 에 실린 ‘平短(平調短歌)’을 時調와 관련지어 보려는
논의19)도 있었으나, 백운암금보 의 ‘平短’은 數大葉 즉 歌曲의 하나로 時調와는 구별되는
것임이 밝혀졌다.20)
따라서 이 章에서는 관련된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時調의 음악사적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時調라는 명칭의 樂曲이 수록된 악보자료로는 遊藝志 ‧ 歐邏鐵絲琴字譜 ‧ 三竹琴譜 가 있


고, 芳山韓氏琴譜 와 張琴新譜 에는 時節歌가 실렸다. 그 밖에도 峨洋琴譜 에는 시쥬갈
악‧질은는시쥬갈악‧시쥬역난갈악‧시쥬녀창 등이 실려있기도 하다.
이들 악보 중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것이 18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유예지 와 구라철
사금자보 이다. 이 두 악보에 실린 내용은 동일한데, 張師勛에 의하여 현재의 京制 平時調
의 원형으로 밝혀졌다.21) 한편 黃俊淵은 삼죽금보 에 5장 형식으로 실려있는 시조는 “음
악적 근거가 없는 것”이고, 오히려 시조는 “오음음계(五音音階)인 우조계면조(羽調界面調)
북전의 그것이 변질되어 새롭게 형성된 것”이라 하였다.22) 한편 李惠求는 삼죽금보 의 시
조 1‧2장은 현행 초장, 3장은 현행 중장, 4‧5장은 현행 종장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며, 이 악
보의 騷耳時調는 현행 지름시조라 하였다.
高宗 庚辰年(1880년)의 干支가 악보의 末尾에 보이는 아양금보 에는 시쥬갈악‧질은는시쥬
갈악‧사(*필자 註, 시)쥬역난갈악이 실렸는데, 이들 노래의 사설은 다음과 같다.

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19) 宋芳松, 韓國音樂通史 (서울: 일조각, 1984), 427쪽.
20) 홍은주, “백운암금보의 평단에 관하여”(서울: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3).
21) 張師勛, “歐邏鐵絲琴字譜의 解讀과 現行 平時調와의 關係,” 國樂論攷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1),
314~34쪽.
22) 黃俊淵, “北殿과 時調,” 세종학연구1 (서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6), 115~47쪽.
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洋琴 악보로 記譜된 峨洋琴譜 의 선율을 살펴보면, 질은는시쥬갈악은 시쥬갈악에 비하여


악곡의 初章 부분이 높은 선율로 구성되었고, 中章 이하는 동일하다. 따라서 질은는시쥬갈
악은 현행 지름시조에 해당한다. 또한 시쥬역난갈악은 질은는시쥬갈악에 비하여 初章‧終章부
분은 동일하고, 中章 부분에 음이 늘어났다. 특히 이 중장부분은 “당덩당동당 덩둥덩”을 6
회 반복하고 있다. 이를 미루어 본다면 시쥬역난갈악은 엮음지름시조와 비슷한 구조를 지니
고 있다. 따라서 아양금보 에 이미 평시조‧지름시조‧엮음지름시조가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아양금보 에는 시쥬여창이라 하여 앞에서 보았던 시쥬갈악의 時調詩가 “살랑니
들 님마다며······”의 표기로 실렸는데, 선율은 앞의 것과 다르다. 이 점은 아양금보 시
기에 이미 여창을 위한 별도의 곡조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편찬연대를 알 수 없는 양금 악보인 서금보 에는 詩調‧三章時立‧平調時調 女音也‧平調三章時
調 女音也의 네 곡이 있는데, 張師勛은 이를 각각 平時調‧지름‧女唱 平時調‧女唱 지름시조로
보았다.23)
이상을 종합하면 1800년경의 악보인 유예지 에 현행 평시조에 해당하는 악곡이 처음 소개
된 時調는 본래 北殿에서 비롯되어 새로운 음악으로 틀을 잡은 것이며, 삼죽금보 (1841년)
시기에 평시조와 지름시조가 이미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아양금보 가 편찬되
던 1880년 무렵에는 엮음지름시조와 여창 시조도 출현하였으며, 서금보 에는 여창 평시조
와 여창 지름시조도 실렸다.

20세기의 시조관련 자료는 張師勛에 의하여 소상하게 정리되었다. ‘時調의 分類’란 제목으
로 정리된 이 자료24)는 20세기 전반기 歌曲과 時調唱의 명인이었던 河圭一‧林基俊을 비롯
하여 두 名人을 초빙하여 雅樂生들에게 正歌를 교육하였던 李王職雅樂部와 그곳의 책임자이
기도 하였던 咸和鎭, 그리고 正歌 名人 洪元基의 스승이기도한 崔相旭 등이 時調의 악곡을
어떻게 분류‧이해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장사훈이 정리한 바를 표로 나타내면 <표 1>과 같
다.

<표 1>에 의하면 20세기 전반기에는 平時調(平擧時調)‧지름時調(三數時調)‧중허리時調(中擧


時調)‧辭說時調(弄時調)‧羽調時調‧平지름時調‧중허리지름時調‧辭說지름時調‧女唱지름時調‧羽調時
調‧羽調지름時調‧首雜歌 등이 갖추어져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악곡 모두
가 歌客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향유되지는 않은 듯 하다.

23) 張師勛, 時調音樂論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3), 21쪽.


24) 張師勛, 時調音樂論 ,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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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師勛에 의하면 京制 중에서도 格調를 내세우는 歌客들은 평시조‧중허리시조‧지름시조만 불


렀다고 하며, 林基俊과 崔相旭은 오히려 사설지름시조나 首雜歌 등을 더 애창하였다고 한
다.25) 또한 李珠煥에 의하면 羽調時調와 羽調지름時調는 妓樂版에서는 전혀 부르지 않았다
고 한다.26)
20세기 前半期 時調 음악에서 주목되는 점은 당시에 이미 지역적인 특색을 지닌 악곡들이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흔히 京制와 鄕制를 대립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으나, 內
浦制‧完制‧嶺制 등의 鄕制時調와 더불어 京制時調도 결국은 서울지방의 지역적 특색을 지닌
地方制의 하나일 뿐이라 생각한다. 경제와 향제 중 어느 것이 먼저 발생하였고, 다른 것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문헌자료는 아직 보지 못하였으므로, 이 두 가지 시
조의 선후 여부 또는 동시발생 여부는 확언키 어렵다.
다만 內浦制時調의 명인이었던 소동규의 스승인 윤종선을 비롯하여 김용래‧강진호 등이 충
남지역에서 활동한 것이 20세기 전반기이고, 嶺制時調의 경우 흔히 高宗代의 三大名唱으로
고영태‧이영서‧손덕겸 등을 꼽고 있는 점, 正歌 명인 정경태가 20세기 전반기에 박희성‧박남
규‧안치선‧유종구 등에게 여러 鄕制時調를 배웠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본다면 20세기 전반기
에는 전국적으로 지역적 특색을 지닌 鄕制時調27)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28)

20세기 중반기와 후반기에 활동한 시조의 名唱이나 큰 師範으로 李炳星‧李珠煥‧洪元基‧金月


荷‧鄭坰兌 등이 있다. 이들은 각종 강습회 등을 통하여 시조창을 널리 보급하였으며, 국악전
문 교육기관이나 대학 등에서 시조를 교육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20세기 후
반기에는 時調唱의 人口가 量的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중 金月荷‧鄭坰兌는 조직적인 시조 보급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故 金月荷가 주도한 全
國時友團體總聯合會, 鄭坰兌가 주도한 大韓時友會 등이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시조의 보급
과 唱曲운동을 펼친 결과, 1970년대에는 전국적인 시조 인구가 100만 명을 넘었었다고 한
다.29)

25) 張師勛, 時調音樂論 , 23쪽 참조. 한편 민속음악학자 李輔亨선생에 의하면, 林基俊과 崔相旭 등은 中人 歌客
層인 河圭一과는 구별되는 전문가집단이었을 것이라 한다. 中人 歌客집단이 歌曲과 八歌詞를 주로 부른데 비
하여, 平民 歌客인 이들은 四歌詞뿐만 아니라 辭說時調羽調時調
‧ 및 雜歌 등을 불렀던 집단이었을 것이라 한
다.
26) 본래 이 책은 1963년에 출간되었으나, 필자가 참고한 것은 李珠煥, 時調唱의 硏究 (서울: 은하출판사,
1987), 20쪽임.
27) 鄕制時調는 흔히 嶺制內浦制完制
‧ ‧ 로 구별하나, 鄭坰兌의 경우는 嶺制을 다시 嶺制와 半嶺制로, 完制를 完制
(全州)‧南制(光州羅州
‧ )‧靈制(靈光茂長
‧ )로 세분하기도 한다.
28) 대구문화재사랑 (대구: 대구광역시청, 1997) 및 문화재조사보고서 (광주: 광주광역시청, 1995) 참조.
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이들 時調團體의 활발한 활동의 결과, 時調가 전국적으로 널리 불리게 되고, 많은 競唱大會


를 통하여 時調名唱들이 배출되었으며, 이들 중에는 현재 각급 광역자치단체별 無形文化財
保有者로 지정된 이들도 있다.

29) 2001년 5월 16일, 정가 명인 金虎成과의 대담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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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의 時調 보급운동은 量的인 확대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이들 단체를 주도하는 명창의 時調制를 중심으로 전국의 時調唱이 통일되어 가는 역기능도
있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다수의 鄕制時調가 위축되고 흔히 ‘石菴制’30)로 불리는 가락이
時調唱의 주류를 형성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20세기 후반의 시조 보급에서 鄭坰兌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해박한 漢學 지식과
전통음악 다방면의 관심을 바탕으로 시조창의 곡조를 새롭게 다듬고,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
웠다. 특히 그가 고안한 ‘旋律線 時調譜’(<그림 2> 참조)는 대부분 비전문 음악가들인 時調
同好人들로 하여금 時調의 旋律을 視覺的으로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하는 탁월한 기능을 지
닌 악보로 활용되었다.
1970년에 刊行된 鄭坰兌의 增補‧註解 旋律線 時調譜 에는 앞 <표 3>31)에 보는바와 같이
모두 19종류의 時調曲이 수록되었다.32) 이 중에서 굿거리時調는 휘모리잡가를 가리킨 것이
고, 編時調‧編叱音男唱‧編叱音女唱은 정경태 자신의 編曲이라 하였다.
정경태의 악보에 실린 다양한 시조 악곡은 20세기 후반기 時調 향유층의 확대와 더불어 새
로운 樂曲에 대한 수요에 부응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1960년대의 자료에 보이는 악곡에
비하여 종류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1963년에 간행된 李珠煥의 時調唱의 硏究 에 소개된
시조의 ‘種類’는 아래 <표 4>와 같다.

李珠煥의 분류는 <표 1>에 정리된 20세기 전반기 시조창의 분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
1988년 國立國樂院이 LP음반으로 발행한 「韓國音樂選集 제17집 時調」에는 洪元基‧金月荷‧
李良敎‧金虎成‧李東圭 등의 노래가 실렸는데, 이 음반에 수록된 24곡의 시조창을 종류별로
정리하면 평시조 6수‧지름시조 4수‧사설시조 4수‧사설지름시조 2수‧반사설시조 2수‧엮음지름
시조 2수이며, 중허리시조‧우조시조‧우조지름시조‧각시조가 각각 1수씩이다. 當代의 時調名唱
들의 음악을 수록한 이 음반의 악곡 분포는 당시 時調人들이 선호하였던 악곡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당시 전문적인 시조인들의 시조 창곡에 대한 이해도 반영되
어 있을 것이라 추측되어, 이 음반에 실린 악곡이 당시 시조창의 주류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이들 악곡은 <표 4>에 소개된 李珠煥의 분류체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 비해 본다면 鄭坰兌의 악보에는 다른 시조명인들이 잘 부르지 않는 반
각시조‧반지름시조‧온지름시조‧우시조‧남창편지름시조‧여창편지름시조‧편시조‧편사설시조 등이
더 실려 있는 셈이다.

30) 石菴은 大韓時友會를 주도한 鄭坰兌의 雅號이다.


31) <표 3>의 ○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전수소가 발행한 「石菴 鄭坰兌唱 時調와 歌詞」 LP음반(음반번호
SEL‧R‧O 143)에 수록된 시조창의 종류를 표시한 것이다. <표 3>에 정리된 시조 악곡 중에서 ○표 된 것이
비교적 많이 불리는 노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2) 張師勛博士는 이러한 時調의 分化現狀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張師勛. 時調音樂論 , 26쪽.
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지금까지 살펴본 시조의 발생과 변천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時調는 北殿이 변하여 형성된 악곡으로, 최초의 악보가 1800년경의 악보인 遊藝志 ‧ 歐邏
鐵絲琴字譜 에 실렸다. 19세기 중엽에 지름시조가 발생하였으며, 19세기 후반에는 엮음지름
시조가 생겨났고, 女唱을 위한 악곡도 출현하였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악곡의 수가 확대되
었으며, 지역적인 특색을 지닌 地方制(鄕制‧京制)들이 각각의 지역에서 불렸다. 20세기 후반
에는 시조 인구의 양적 성장과 시조 악곡의 확대라는 점에서 분명 음악적인 면으로 時調의
全盛期를 맞이하였다가, 이제 서서히 時調 人口가 減少하는 등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다.

時調詩를 노래하는 성악곡으로 발생‧변천해 온 歌曲과 時調는 다른 장르의 음악과 상호 영


향을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음악으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민간의 歌客들이 즐겨 부르던 歌曲
이 宮中 呈才에 섞여 불리기도 하고, 器樂曲으로 변화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時調는 巫歌‧民
謠와 관련을 맺기도 하였다. 이 章에서는 歌曲과 時調의 이러한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呈才란 宮中 宴響에서 추어지는 舞踊이다. 그러나 정재는 단순히 춤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기악 반주와 노래를 함께 지니는 춤이다. 정재를 추는 중간에 妓女들에 의하여 불
리는 노래를 唱詞라 한다.
呈才의 唱詞는 조선전기만 하더라도 動動詞나 井邑詞를 각각 動動과 井邑의 곡조에 맞추어
노래하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 漢詩 또는 國漢文으로 쓴 詩를 歌曲의 곡조에 얹어
부르게 되었다. 그 한 예로 1894년(甲午年) 外進宴時舞童各呈才舞圖笏記 에 의하면, 響鈴
舞의 반주로 연주된 海屋添籌之曲이 사실은 歌曲의 界樂이며, 이 곡의 ‘가락을 따라[隨樂
節]’ 唱詞를 노래하였다.33) 또한 1901년(辛丑年) 女伶各呈才舞圖笏記 에 의하면, 鳳來儀에
서 醉豊亨之樂을 연주한다고 하였으나, 실은 歌曲 弄樂을 연주하면서 이 악곡에 맞추어 舞
妓 8人이 龍飛御天歌의 海東章을 노래하였다. 鳳來儀에서는 이어서 界樂에 맞추어 周國章
을, 歌曲 編調에 맞추어 商德章 이하를 노래하였다.34) 龍飛御天歌를 가곡 5장의 가락에 얹
어 부르는 방법은 김진향 편 善歌河圭一先生略傳 35)에 자세히 보인다. 이 밖에도 慶豊圖‧
萬壽舞‧四仙舞 등에서 歌曲 編에 맞추어 唱詞를 불렀다.36)
궁중 정재의 창사로 가곡의 곡조가 사용된 것은 19세기 말기의 자료에서 이미 확인되며, 현
재는 處容舞, 舞鼓 등의 창사에도 歌曲의 곡조가 활용된다.

본래 성악곡이던 가곡은 시조와 달리 관‧현악기로 이루어진 반주를 수반하는 음악이다. 오늘

33) 한국학자료총서1: 呈才舞圖笏記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44쪽.


34) 呈才舞圖笏記 , 302-304쪽.
35) 金眞香編, 善歌河圭一先生略傳 (서울: 도서출판 예음, 1993).
36) 張師勛, 韓國傳統舞踊硏究 (서울: 일지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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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가곡의 반주를 제대로 갖추자면 거문고‧가야금‧피리‧대금‧해금‧장구 등의 악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古樂譜 중에서는 洋琴譜에 가곡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20세기 전기에 녹음된 SP음
반에는 양금이 가곡반주에 사용되기도 한 것으로 보면, 양금도 가곡 반주에 중요한 악기로
보인다.
가곡의 반주 음악은 기악곡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음악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찍부터 가곡
의 반주 음악은 기악곡으로 독립되어 연주되기도 하였다. 1610년의 악보인 梁琴新譜 에
의하면 數大葉이 舞蹈之節에 사용된다고 하였는데, 後代의 呈才에서와 같이 伴奏曲인 동시
에 唱詞의 선율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韓成俊에 의하면, “기생들과 절에 야
유회를 갔다가 하룻밤을 자고는 그 다음날 아침에 악사들로 하여금 자진한잎을 연주하게 했
다”고 한다. 이는 아침 식사를 알리는 신호였다고 하는데, 이른 아침이라 기생들이 노래를
부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다.37) 이와 같이 가곡의 반주곡을 악기로만 연주하면서 가곡의
일부 악곡이 器樂化되었는데, 20세기 전반기 JODK 국악방송에 奚琴‧大笒‧細笛(피리)‧杖鼓 등
으로 자주 연주되었던 사관풍류(舍館風流, 仕館風流) 계통의 악곡은 오늘날 三絃六角 편성
또는 관악합주 편성으로 연주되는 慶豊年(一名 舍館風流, 자진한잎, 擧床樂)의 母體가 된 것
으로 보인다. 국립국악원에서 연주하는 현재의 자진한잎은 羽調頭擧‧變調頭擧‧界面頭擧‧平弄‧
界樂‧編數大葉을 연주하는데, 이는 芳山韓氏琴譜 에서 舍館紫芝羅葉이라 불렸던 羽調小數大
葉‧半葉‧界面小數大葉‧界弄‧界樂‧界編의 여섯 곡과 비슷하다.
합주곡으로 연주되는 자진한잎 중에서 일부의 악곡은 大笒이나 觱篥의 독주곡으로 자주 연
주되고 있으며, 笙簧과 短簫 또는 洋琴과 短簫의 竝奏曲으로도 자주 연주된다. 뿐만 아니라
대금이나 단소의 獨奏曲으로 유명한 ‘淸聲曲’은 본래의 이름이 淸聲자진한잎(淸聲數大葉)으
로 歌曲 二數大葉의 變奏曲이기도 하다.

時調 역시 時調詩를 노래하던 성악곡이다. 그러나 가곡과 같이 엄격한 반주를 수반하던 것


이 아니라 주로 隨聲가락으로 반주를 하던 음악이다. 따라서 가곡의 경우와 같이 기악화의
과정은 없다. 다만 시조가 널리 불리게 되면서 이의 음악적인 변형곡들이 파생하게 되는데,
巫女時調와 노랫가락, 首雜歌와 휘모리雜歌 등이 그것이다.
巫女時調는 三竹琴譜 에 보이며, 평시조에 해당하는 악곡과 지름시조에 해당하는 악곡이
실려 있다. 반면에 嶧陽雅韻 에는 神歌라는 이름의 악곡이 실렸으며, 노랫가락은 오늘날에
도 즐겨 부르는 京畿民謠의 대표적인 악곡이다. 이들 악곡은 모두 時調의 음악적인 특성을
이어 받아 형성되었다.38)
한편 시조의 악곡이 확대되면서 엮음지름시조가 생겼는데, 이를 수잡가라고도 한다. 20세기
전반기의 시조명창인 林基俊의 傳唱인 수잡가는 時調 半, 雜歌調 半이 뒤섞여 구성되었기
때문에 ‘잡가의 으뜸[首]이라는 뜻으로 首雜歌라 불리게 되었다.39) 首雜歌는 음악적으로 보
아 처음에는 시조창으로 부르다가 중간부분에서 시조의 장단을 벗어나 규칙적인 리듬으로
바뀌고, 서도소리처럼 중간 음을 떨어 표현한다. 그러다가 곡을 마칠 때는 다시 시조의 장

37) 晩堂 李惠求博士의 증언에 의함. 배인교, “관악 자진한잎의 역사적 변천과 변조두거의 형성”(성남: 한국학대
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 15쪽에서 인용.
38) 張師勛, “時調와 巫女時調와의 關係,” 國樂論攷 , 385~419쪽; 黃俊淵, “노랫가락의 음악적 고찰,” 藝術論
文集 (부산: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1989), 161-87쪽.
39) 張師勛, ‘수잡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제13권, 279쪽.
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단과 창법으로 돌아온다. 현재는 <푸른 산중하에>‧<窓 내고자>의 두 곡이 불리고 있다.


首雜歌보다 더욱 民俗音樂의 색채가 강한 것으로 휘모리雜歌가 있다. 서울지방 雜歌의 하나
인 휘모리잡가는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러운 곁말 투성이의 辭說을 빠르게 휘몰아쳐 부르기
때문에 이런 명칭을 갖게 되었다. 辭說이 대개 長型時調의 變形인데, 이를 자진타령장단에
얹어 촘촘히 엮어 부르기 때문에 辭說時調의 한 갈래로 보기도 한다.40) 특히 <바위타령>은
노랫가락으로 노래를 시작하고, 악곡을 마칠 때 역시 노랫가락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마치
기 때문에 時調와의 親緣性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현행 歌曲의 모체는 慢‧中‧數大葉이다. 이 중 慢大葉은 너무 느려서 영조 무렵에 없어졌고,


中大葉은 19세기 中葉의 樂譜에까지 남아 있고, 歌曲源流 와 동시대로 보이는 歌集 協律
大成 에 連音標가 붙은 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행 가곡은 삭대엽이 분화‧발전되어 이루
어졌는데, 19세기 전체를 통하여 가곡은 꾸준히 발전과정을 거쳤다. 19세기 초에는 旕‧弄‧樂‧
編이 정착되었으며, 이어 女唱歌曲이 고악보에 모습을 보인다. 또한 三數大葉과 騷聳 그리
고 中擧‧平擧‧頭擧가 생겼으며, 篇歌의 틀을 형성하고, 그 마지막을 男女竝唱인 太平歌로 여
미게 되었다.
가곡의 반주음악은 독립된 기악곡으로 연주되기도 하였는데, 三絃六角 또는 관악합주 편성
이나 두 세 가지 악기의 細樂 또는 독주로도 널리 연주되었다.
반면에 時調는 1800년경을 前後하여 北殿으로부터 파생되어 19세기를 통하여 다양한 변주
곡들이 첨가되었으며, 평시조와 지름시조‧사설시조의 기본적인 악곡이 형성되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平民 歌客層에 의하여 새로운 악곡이 첨가되었으며, 이 시기에 이미 여러 지방
에서 그 지역의 고유한 地方制가 불리고 있었다. 20세기 후반기에는 時調團體의 활발한 활
동에 힘입어 시조인구의 양적인 확대와 함께 일부 시조인들 사이에서 악곡이 더욱 확대되기
도 하였으나, 새로운 악곡의 첨가는 歌曲의 前例를 답습한 것으로 보이며, 전체 시조인에게
확산되지는 않은 것 같다.
한편 시조는 민요풍의 창법을 받아들여 노랫가락이란 민요곡을 형성하여 대중성을 극대화
하였으며, 일부 巫女들에 의하여 巫女時調로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平民 歌客들에 의하여
首雜歌가 불렸고, 휘모리잡가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鄕土民
謠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호남지방의 農謠로 불리는 <무상 삼장>이 그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韓國音樂史에서 歌曲과 時調는 朝鮮 後期의 중요한 聲樂 장르였다. 특히 판
소리가 소수의 전문가집단에 의하여 전승되면서 대중을 상대로 하는 공연물로 발전해 온데
비하여, 가곡과 시조는 애호가집단에 의하여 自樂의 음악으로 발전하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歌曲은 慢大葉에서 太平歌에 이르기까지 樂曲의 분화‧발전과정을 통하여
한국음악의 독특한 變奏技法을 낳았다. 이 시기 風流房 음악의 주된 곡목이었던 靈山會相과
步虛子 역시 變奏에 의하여 발전되었으나, 이들 기악곡들은 기존 악곡의 한배와 리듬‧調를
바꾸고, 가락을 덜어내면서 새로운 악곡을 만들어 기존 악곡에 부가시켜 큰 규모의 모음곡
을 만들었다. 반면에 歌曲은 단순히 장단을 바꾸거나 기존 악곡의 일부만 變奏하는데 그치
지 않고, 한 곡 안에서 轉調를 시도하고, 男女唱을 번갈아 노래하게 하였으며, 우리 전통음
악에서는 드물게 男女가 竝唱하는 太平歌까지 만들어 내었다.

40) 張師勛, ‘휘모리잡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제25권, 706쪽.


韓國音樂史學報 제 집

歌曲의 음악사적 의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기악곡으로 변주되어 합주곡‧중주곡‧독주곡으


로도 연주되고 있으며, 宮中 呈才의 唱詞를 통하여 15세기의 龍飛御天歌를 노래하기도 하였
다. 또한 가곡의 분화과정은 時調唱에도 영향을 미쳐서 다양한 시조 악곡을 낳았다.
돌이켜 볼 때, 18~9세기의 수많은 歌集에 수록된 時調詩들이 창작된 배경에는 그들 노랫
말을 자유롭게 얹어 부를 수 있는 악곡이 이미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다. 時調가 어차피 노래로 불리는 詩歌 장르이고, 동양사회의 전통에 의하면 새로운 악곡의
창작보다는 기존 악곡에 사설을 새롭게 올리는 協律의 방법이 보다 수월한 창작 동기를 부
여하였을 것이다. 이 점은 宋詞의 대부분이 塡詞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歌曲은 풍류 공간에서 風流人들의 品格과 雅趣를 드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 말기
가 되면서 歌詞나 雜歌 등이 風流空間에서 演行되었으나, 正統 歌曲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
신들의 음악에 대한 自矜心을 지니고 있었으며,41) 이러한 전통은 20세기 前期의 가객들 사
이에서 樂曲의 風格에 따라 好惡가 분명하였다는 사실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결국 歌曲은 公演物이기 보다는 自樂物이었고, 大衆性과 通俗性보다는 藝術性을 추구한 음
악이었다.
歌曲은 樂曲과 辭說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즉흥적인 協律이나 塡詞가 어려운데 비하여, 時調
는 비교적 선율이 단순하고 반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 힘입어 보다 대중성을 확보한 장르
였다. 특히 外來音樂이 대량으로 流入되던 20세기 전반기와 대중매체의 발달로 大衆音樂이
위세를 떨치던 20세기 후반기에, 전국적인 愛好家集團을 통하여 전통음악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시조창 발전의 배경에는 歌曲으로부터 이어지는 藝術性과 品格이 큰 힘으로 존재
하고 있었다. 실제로 時調唱을 배우고 즐겨 부르던 同好人들 중에는 신분제도가 없어진 근
대사회에서 이 時調를 통하여 社會的 交遊의 확대를 꾀한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韓國音樂의 美的 특징을 ‘멋과 흥’에 둔다고 할 때, 風物과 民謠가 흥에 치우친 장르라 한다
면, 歌曲과 時調는 바로 멋을 指向하는 音樂이라 하겠다.
(tedkim@aks.ac.kr)

※ 검색어 : 歌曲, 時調, 풍류, 남녀창

41) 이 점은 歌曲源流 編者들의 編纂動機에서 엿볼 수 있다. 국립국악원, 가곡원류 ,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


5집」(서울: 국립국악원, 1981), ‘가곡원류 해제’ 5쪽.
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Kim Yŏng-un

Kagok 歌曲, kasa 歌詞, and sijo 時調 are three principal classical vocal genres,
which have been developed in association with Korean classical poetry. Kagok is
the most formalized and elaborate of the three song genres. Because of its simpler
form and style sijo is widely sung by amateurs. This paper attempts to find out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kagok and sijo on the basis of literary source materials.
The contents of this paper comprises five topics: 1. Introduction, 2. Origin of
Kagok and its Historical Development, 3. Origin of Sijo and its Historical
Development, 3. Derivations of Kagok and Sijo, 5. Conclusion: Historical Meaning of
Kagok and Sijo.
From an extensive investigation of source materials concerned, the followings are
pointed out in conclusion. The prototype of kagok is generally believed to be the
songs called Mandaeyŏp 慢大葉 (lit. 'Slow Big Piece'), Chungdaeyŏp 中大葉
('Moderate Big Piece'), and Saktaeyŏp 數大葉 ('Fast Big Piece'). The slow
Mandaeyŏp disappeared around the early 18th century, but the moderate
Chungdaeyŏp can be found in the 19th century musical manuscripts.
While the slow Mandaeyŏp was gradually disappearing, more new pieces were
developed from the fast Saktaeyŏp by professional singers called kagaek 歌客.
Ch'ŏnggu yŏngŏn 靑丘永言 (Song from Korea) compiled by Kim Ch'ŏn-t'aek 金天澤
in 1728 includes such new derivations of Saktaeyŏp as Nong 弄, Nak 樂, and P'yŏn
編. The contemporary kagok was passed down by Ha Kyu-il 河圭一 (1867-1937) to
Yi Pyŏng-sŏng 李炳星 (1908-1960) and Yi Chu-hwan 李珠煥 (1909-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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