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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 Fi001002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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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曲의 발전과정은 두 時期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가곡의 모체가 된 慢大葉의
발생으로부터 數大葉이 3~4곡으로 분화되는 시기이며, 다른 하나는 數大葉에 弄‧樂‧編이 생
기고 여러 변주곡이 첨가되어 현행 歌曲의 틀을 갖추는 19세기 말기까지이다.
2) 여기서의 樂時調는 樂調의 이름이다. 즉 林鍾을 宮으로 삼는 徵調를 가리키며, 後代의 平調와 같다.
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4) 엄성은, “中大葉小考,” 한국음악산고 (서울: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연구실, 1989), 창간호, 73쪽.
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19세기가 시작되는 무렵의 악보로 삭대엽의 분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가 遊藝志 이다. 정
확한 연대는 미상이나, 대체로 純祖(1800-1834)代에 편찬된 이 악보에는 거문고 악보로 羽
初葉‧羽二葉‧羽三葉‧界初葉‧界二葉‧界三葉 등의 악곡이 실려 있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
는 弄葉‧界樂‧羽樂‧編數大葉의 악곡이 들어 있어 주목된다.
張師勛에 의하면 弄調는 “흥청거리며, 폭 넓은 요성(搖聲)을 많이 쓰는”8)것이라 하며, 樂은
“화창한 봄 꽃동산과 같이 마냥 즐겁기만한 가락”9) 또는 “흥청거리는 농에 비하여 비교적
담담한 듯하면서도 유수(流水)와 같이 치렁치렁한 멋이 있다”10)고 하였다. 반면에 編은 ‘엮
음’ 또는 ‘사설’의 의미로, 가곡에서는 10점 16박 장단이 아닌 10점 10박 장단으로 구성된
악곡을 지칭한다. 당연히 編은 字數가 많은 사설시조를 얹어 부른다.
11) 金英云, “浪翁新譜 所載 平調 數大葉 및 平調界面調 數大葉의 硏究”(서울: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5).
12) 張師勛, 國樂史論 , 248쪽.
13) “俗稱조온자즌한입 卽二葉之節奏漸促者也.” 三竹琴譜 羽調調臨調; 현악기의 줄을 조이듯이 음을 높인다는
의미를 漢字로 표기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겠다.
韓國音樂史學報 제 집
18) 그 한 例로 李衡祥의 甁窩歌曲集 에서는 梁德壽의 음악을 지칭하는 古調의 대칭으로 金成器의 음악을 가리
韓國音樂史學報 제 집
20세기의 시조관련 자료는 張師勛에 의하여 소상하게 정리되었다. ‘時調의 分類’란 제목으
로 정리된 이 자료24)는 20세기 전반기 歌曲과 時調唱의 명인이었던 河圭一‧林基俊을 비롯
하여 두 名人을 초빙하여 雅樂生들에게 正歌를 교육하였던 李王職雅樂部와 그곳의 책임자이
기도 하였던 咸和鎭, 그리고 正歌 名人 洪元基의 스승이기도한 崔相旭 등이 時調의 악곡을
어떻게 분류‧이해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장사훈이 정리한 바를 표로 나타내면 <표 1>과 같
다.
25) 張師勛, 時調音樂論 , 23쪽 참조. 한편 민속음악학자 李輔亨선생에 의하면, 林基俊과 崔相旭 등은 中人 歌客
層인 河圭一과는 구별되는 전문가집단이었을 것이라 한다. 中人 歌客집단이 歌曲과 八歌詞를 주로 부른데 비
하여, 平民 歌客인 이들은 四歌詞뿐만 아니라 辭說時調羽調時調
‧ 및 雜歌 등을 불렀던 집단이었을 것이라 한
다.
26) 본래 이 책은 1963년에 출간되었으나, 필자가 참고한 것은 李珠煥, 時調唱의 硏究 (서울: 은하출판사,
1987), 20쪽임.
27) 鄕制時調는 흔히 嶺制內浦制完制
‧ ‧ 로 구별하나, 鄭坰兌의 경우는 嶺制을 다시 嶺制와 半嶺制로, 完制를 完制
(全州)‧南制(光州羅州
‧ )‧靈制(靈光茂長
‧ )로 세분하기도 한다.
28) 대구문화재사랑 (대구: 대구광역시청, 1997) 및 문화재조사보고서 (광주: 광주광역시청, 1995) 참조.
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李珠煥의 분류는 <표 1>에 정리된 20세기 전반기 시조창의 분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
1988년 國立國樂院이 LP음반으로 발행한 「韓國音樂選集 제17집 時調」에는 洪元基‧金月荷‧
李良敎‧金虎成‧李東圭 등의 노래가 실렸는데, 이 음반에 수록된 24곡의 시조창을 종류별로
정리하면 평시조 6수‧지름시조 4수‧사설시조 4수‧사설지름시조 2수‧반사설시조 2수‧엮음지름
시조 2수이며, 중허리시조‧우조시조‧우조지름시조‧각시조가 각각 1수씩이다. 當代의 時調名唱
들의 음악을 수록한 이 음반의 악곡 분포는 당시 時調人들이 선호하였던 악곡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당시 전문적인 시조인들의 시조 창곡에 대한 이해도 반영되
어 있을 것이라 추측되어, 이 음반에 실린 악곡이 당시 시조창의 주류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이들 악곡은 <표 4>에 소개된 李珠煥의 분류체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 비해 본다면 鄭坰兌의 악보에는 다른 시조명인들이 잘 부르지 않는 반
각시조‧반지름시조‧온지름시조‧우시조‧남창편지름시조‧여창편지름시조‧편시조‧편사설시조 등이
더 실려 있는 셈이다.
37) 晩堂 李惠求博士의 증언에 의함. 배인교, “관악 자진한잎의 역사적 변천과 변조두거의 형성”(성남: 한국학대
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 15쪽에서 인용.
38) 張師勛, “時調와 巫女時調와의 關係,” 國樂論攷 , 385~419쪽; 黃俊淵, “노랫가락의 음악적 고찰,” 藝術論
文集 (부산: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1989), 161-87쪽.
39) 張師勛, ‘수잡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제13권, 279쪽.
歌曲과 時調의 音樂史的 展開
Kim Yŏng-un
Kagok 歌曲, kasa 歌詞, and sijo 時調 are three principal classical vocal genres,
which have been developed in association with Korean classical poetry. Kagok is
the most formalized and elaborate of the three song genres. Because of its simpler
form and style sijo is widely sung by amateurs. This paper attempts to find out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kagok and sijo on the basis of literary source materials.
The contents of this paper comprises five topics: 1. Introduction, 2. Origin of
Kagok and its Historical Development, 3. Origin of Sijo and its Historical
Development, 3. Derivations of Kagok and Sijo, 5. Conclusion: Historical Meaning of
Kagok and Sijo.
From an extensive investigation of source materials concerned, the followings are
pointed out in conclusion. The prototype of kagok is generally believed to be the
songs called Mandaeyŏp 慢大葉 (lit. 'Slow Big Piece'), Chungdaeyŏp 中大葉
('Moderate Big Piece'), and Saktaeyŏp 數大葉 ('Fast Big Piece'). The slow
Mandaeyŏp disappeared around the early 18th century, but the moderate
Chungdaeyŏp can be found in the 19th century musical manuscripts.
While the slow Mandaeyŏp was gradually disappearing, more new pieces were
developed from the fast Saktaeyŏp by professional singers called kagaek 歌客.
Ch'ŏnggu yŏngŏn 靑丘永言 (Song from Korea) compiled by Kim Ch'ŏn-t'aek 金天澤
in 1728 includes such new derivations of Saktaeyŏp as Nong 弄, Nak 樂, and P'yŏn
編. The contemporary kagok was passed down by Ha Kyu-il 河圭一 (1867-1937) to
Yi Pyŏng-sŏng 李炳星 (1908-1960) and Yi Chu-hwan 李珠煥 (1909-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