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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the Musicological Society of Korea Vol. 23 No. 2 pp.

9-32 Print ISSN 1598-9224


http://dx.doi.org/10.16939/JMSK.2020.23.2.9

프로그램음악⋅중간음악⋅절대음악* 1)

김 용 환**

1. 들어가면서

음악 분야에서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으로 소급된다. 음


악작품이나 음악연주의 서술과 연계되어 사용되었는데, 기악작품과 연관해서는 래이몬디(I.
Raimondi)의 “교향곡 연주에 대한 보고서”(Les aventures de Telemaque dans L’lste de Calypso,
1777)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그리고 1800년경에는 프로그램 개념이 (프랑스에서) ‘프로그램에 의
한 교향곡’(symphonie à programme)라는 명칭과 연계되어 등장한다. 물론 이에 대한 적절한
용어는 아직 없었다. 그러다가 1855년에 암부로스(A. W. Ambros)와 리스트는 각각 “음악과 포
에지의 경계”(Die Grenzen der Musik und Poesie)와 “베를리오즈와 그의 해럴드 심포니”(Berlioz
und seine Harold Symphonie)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거의 동시에 ‘프로그램음악’이라는 개념
을 도입하였다. 여러 장르의 작품들, 즉 쿠나우의 ≪성경적 역사들≫(Biblische Historien), 바흐
의 ≪카프리치오 사랑하는 형의 여행에 붙여≫(Caproccio sopra la lontananza del suo fratello
dilettissimo BWV 992), 멘델스존의 ≪한 여름밤의 꿈 서곡≫,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의
상위개념으로 사용하면서이다. 특히 리스트는 ‘프로그램음악’이 베토벤의 ≪에로이카 교향곡≫과
≪전원 교향곡≫에서 실현되었다고 간주하면서 이 명칭을 후세대를 위하여 패러다임적으로, 그
리고 이정표를 제시하듯이 음악의 새로운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리스트에게 결정적이었던
사항은 주제를 다루는 테크닉과 음들 혹은 성격의 변화와 함께 시적 관념(Idee)으로서의 음악에
새로운 형식 사고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었다.1) 그리고 이에 상응하여 리스트는 “시대정신

* 이 논문은 2017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7S1A5A2A01026956).
** 김용환: 추계예술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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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상응하고 미래지향적인” 음악으로 여기는 일련의 ‘교향시’를 작곡하고, ‘프로그램음악’의 역사


적⋅미학적 당위성을 강조하는 다수의 글을 발표하였다.2)
이에 반해 빈(Wien)을 중심으로 활발한 비평 활동을 전개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한슬릭
(Eduard Hanslick, 1825-1904)은 1854년에 ‘절대음악’만을 극단적으로 추앙하고 ‘프로그램음악’을
비판적으로 다룬 내용의 저서 뺷음악적 아름다움에 관하여뺸(Vom Musikalisch-Schönen)를 발표
하여 “프로그램음악 vs. 절대음악” 논쟁의 새로운 국면을 야기시켰다.3) 즉 프로그램음악에 관한
논쟁은 처음부터 찬⋅반 양론으로 갈라졌고, 상당 부분은 파벌싸움에서 비롯되어 전개된 것이
다.4) 그리고 이 논쟁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견 “절대음악의 승리”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다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플로로스를 필두로 일군의 학자들이
“음악학이 저지른 한때의 오류, 즉 작품을 작곡가와 분리하여 마치 자체적인 ‘고유한 것’으로 관
찰한 치명적인 오류를 시정하고자 한 것이다.”5) 문제는 이 논쟁에 뛰어든 학자들이 프로그램음
악의 개념을 제각각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죽했으면 “바빌론적 언어혼란”6)이라는 비유가
등장했겠는가!
주목할 점은 이와 연관된 일련의 논의들 쫓아갈 때 우리의 눈길을 끄는 표현, 즉 다양한 제목
의 논의에서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에 속하지 않는 ‘회색지대’, 즉 “중간음악”이라고 칭할 수
있는 제3의 영역이 심심찮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에 대한 보편적 명칭의

1) Detlef Altenburg, “Programmusik,” in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hrsg. von Ludwig Finscher, zweite
Ausg. (1997), 7: 1824.
2) 이미 1830년대부터 ‘음악의 개혁’, ‘음악을 통한 사회의 개혁’을 꿈꾸었던 리스트는 1848년에 독일의 바이마르(Weimar)로
이주하여 이 도시를 ‘괴테-쉴러(Goethe-Schiller)’ 시기의 전통적 위상과 명예를 승계하는 “유럽의 새로운 문화국가의
중심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와 함께 바이마르에는 수많은 저명 예술가, 문인, 음악가들이 모여들었다
(혹은 리스트의 요청에 의해 바이마르로 왔다). 1850년대 초에 리스트의 주위에서 활동한 “대표적 제자들”로는 라프(Joachim
Raff, 1822-1882), 뷔로우(Hans von Bülow, 1830-1894), 코르넬리우스(Peter Cornellius, 1824-1874), 폴(Richard Pohl,
1826-1896)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열정적이고 재능있는 언론(음악비평) 활동을 전개하였고, “소수 정예”와 같은 이들의
글은 리스트의 이상을 반영하였다. 이 4명의 음악비평 활동은 1848년부터 1857년 사이에 전개되는데, 특히 1852년부터
1854년 사이에 집중되었다, 비평문의 주요 기고지는 (슈만에 의해 1834년부터 약 10년 동안 주도적으로 운영되었고,
1845년에 브렌델이 인수한) 뺷음악신보뺸(Neue Zeitschrift für Musik)였다. 또한 리스트가 프랑스어로 작성한 저술들도
이들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발표되었다. Klaus Ries, “Die Einheit der Kunst: Franz Liszt zwischen Universalismus
und Nationalismus,” in Liszt und Europa, hrsg. Detlef Altenburg und Harriet Oelers (Laaber: Laaber Verlag, 2008),
27.
3) Arnfried Edler, “Schumann und die Neudeutschen,” in Liszt und die Neudeutsche Schule, hrsg. Detlef Altenburg
(Laaber: Laaber Verlag, 2006), 173.
4) Albrecht Rietmüller, “Programmusik in der Ästhetik des 19. Jahrhunderts,” in Programmusik, hrsg. Albrecht Goebel
(Mainz: Schott Verlag, 1992), 9.
5) 이에 관해서는 김용환, “프로그램음악에 대한 논쟁의 재조명,” 뺷서양음악학뺸 20/1 (2018), 79-81 참조.
6) Detlef Altenburg, “Programmusik,” 1821.
프로그램음악⋅중간음악⋅절대음악 11

대안적 개념을 제시하지 못한 채 (혹은 “적절한 명칭이 없기 때문에”7)라고 얼버무리면서) 절대음


악과 프로그램음악의 사이의 “중간영역”으로만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독일의 음악학자 비오라(Walter Wiora)는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의 사이에
서”(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라는 제목의 논문8)에서 “절대음악이 아니면 프로그
램음악이고, 프로그램음악이 아니면 절대음악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극단적 절대음악 자
체가 실제에 있어서는 그 독트린만큼이나 절대적이지 않으며, 극단적 프로그램음악 자체도 그의
음악외적 프로그램에 전적으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9)라고 강조한 바 있다. 즉 “절대음악 및
프로그램음악이라는 카테고리는 유럽의 기악음악의 넓은 영역을 해석함에 있어서 충분치 못하
며, 오히려 무모하게 대립시킴으로써 역사적 현상의 다양함과 차이점을 도식적으로 단순화시키
고 실제와 다른, 그릇된 위치 선정을 하고 있다”10)는 것이다. 비오라의 이러한 관점은 본 주제와
관련된 일련의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인용⋅언급되고 있다. 후속 연구를 촉발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핀셔11)와 펠커12)는 아예 비오라의 논문과 ‘동일한 제목’으로 논문을 발
표하면서 비오라의 주장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본 논문은 바로 이점을 주목하면서 시도되었다.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이라는 극단적 이분
법적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중간영역”으로 거론되는 음악은 무엇이고, 학자들마다 그러한 주
장을 내세우는 배경과 근거는 무엇인가?

7) Ludwig Finscher, “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 Zur Interpretation der deutschen romantischen Symphonie,”
in Über Symphonien: Beiträge zu einer musikalischen Gattung, hrsg. von Christoph-Hellmut Mahling (Tutzing: Hans
Schneider Verlag, 1979), 103-115.
8) Walter Wiora, “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 in Festschrift Friedrich Blume zum 70. Geburtstag, hrsg.
von Anna Amalie Abert und Wilhelm Pfannkuch (Kassel: Bärenreiter Verlag, 1963), 381.
9) Walter Wiora, 위의 글, 381.
10) Ludwig Finscher, 위의 글, 103.
11) Ludwig Finscher, “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 Zur Interpretation der deutschen omantischen Symphonie,”
in Über Symphonien: Beiträge zu einer musikalischen Gattung, hrsg. von Christoph-Hellmut Mahling (Tutzing: Hans
Schneider Verlag, 1979), 103-115.
12) Bärbel Pelker, “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 in Studien zur Musikgeschichte. Eine Festschrift für Ludwig
Finscher, hrsg. von Annegrit Laubenthal (Kassel: Bärenreiter, 1995), 560-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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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간음악: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의 사이?

몇몇 학자들은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의 중간’에 해당되는 음악으로서 ‘성격음악’을 언급하


고 있다. 주로 옛날 문헌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어 보드키는 1933년에 발간된 뺷성격소품뺸
(Charakterstück)의 서문에서 “성격음악을 절대음악에서 프로그램음악으로의 과정에 위치하는 중
요한 과도 및 중간 단계로서 자리매김”13)한다. 이에 반해 최근에 발표된 논문들은 프로그램음악
과 성격음악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알텐부르크는 1924년에 비도르(Martha Vidor)의 논문이 발
표된 이후 ‘프로그램음악’과 ‘성격음악’이 구별되고 있음을 언급하고, 특히 주제의 관점에서 두
그룹의 음악이 차별적이라는 것이다.

[성격소품에서의] 음악외적 주제와 음악 사이의 관계는 프로그램음악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성격소품은] 대상의 표현이 아니라 대상이 작곡가에게 야기한 전체적 인상의 서정적 묘사이다. 성
격소품의 주요 속성은 프로그램적 의미에서의 각 발전이나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부동
성, 그림성, 분위기의 통일성이 특징이다.14)

달하우스 역시 위와 유사한 관점에서 두 장르를 구분 짓는다, 즉 일반적으로 사건이나 줄거리의


묘사는 프로그램음악이고, 정서상태의 묘사는 성격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프로그램으로서
유효하기 위해서는 주제가 개별화되어야한다15)고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은 아펠16)의 ‘성격소품’
을 논하는 지면에서도 확인된다. 아펠에 의하면 “프로그램음악은 음회화, 음악적 모방이나 유사
형상의 다른 수단, 경우에 따라서는 각 주제에 오리엔테이션된 형식 구성을 통해서 음악외적 현
상, 사건 혹은 줄거리의 진행을 청중들을 위해 재생산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것이며, 이에 반해
성격소품은 정신 상태, 기분 혹은 정서 상태의 영역에 머무른다”라고 하였다. 물론 “프로그램음악
과 성격적 음악 사이의 넘나듦은 유동적”이라는 단서를 덧붙이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 역시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필자의 선행연구17)에서 이미 지

13) Detlef Altenburg, “Programmusik,” 1828에서 재인용.


14) Detlef Altenburg, “Programmusik,” 1828에서 재인용.
15) Carl Dahlhaus, “VI. Aporien der Programmusk. Thesen über Programmusik,” in Klassische und romantische Musikästhetik
(Laaber: Laaber Verlag, 1988), 366.
16) Berhard R. Appel, “Charakterstück,” in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hrsg. von Ludwig Finscher, zweite
Ausg. (1995), 2: 636.
프로그램음악⋅중간음악⋅절대음악 13

적한 바와 같이 현행 음악학에서 ‘성격음악’이라는 개념도 여전히 일관된 정의를 보여주지 못하


고 있으며, 학자들에 따라 (프로그램음악 개념 못지않게)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그동안 논의되어 왔던 프로그램음악 규정에 적용할 수 있거나, 아예 단정적으로 프로그
램음악을 포함하는 설명, 예를 들어 “음악외적인 아이디어가 담긴 작품”, “하나의 아이디어 혹은
프로그램에 바탕을 둔”, “특정한 분위기 혹은 장면을 표현한”, “특정한 분위기와 순간을 환기하는”
등이 포함되어 있다.18) 심지어는 프로그램음악 개념과 거의 동일하게 서술되곤 한다.19)
비오라는 ‘성격소품’이라는 장르를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 사이의 중간적 가치로서 정리하
는 것은 단지 제한적으로만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즉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에 관한 이론적인
양극성의 조망에서 사용할 때라는 전제를 달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
의 ‘중간 유형’(Zwischentyp)으로서의 ‘성격소품’(즉 성격음악)은 “대상(Gegenstand)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태’(Zustand)를 표현하는데, 줄거리가 없고. 주제를 위한 발전적 과정도 없으며,
단지 그 정신적 영향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절대음악도 결코 아니다. 제목을 통해서
분위기와 성격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때 제목은 여러 가지를 나타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즉
흥곡’(Impromptus)은 내용의 공개성 때문에 불특정한 ‘그리움’의 낭만적 아이디어에 특히 근접하
고 있다. 때문에 절대음악이나 프로그램음악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설정할 수 없다. 또한 성격소
품으로 종종 분류되는 슈만의 ≪어린이 정경≫(Kinderszenen Op. 15)의 경우, 이 작품을 구성하
는 각 악장들은 “보채는 어린이”(Das bittende Kind), “시인은 말한다”(Der Dichter spricht)와 같
은 프로그램적 제목을 가지는데, 비오라는 슈만이 작곡을 한 후에 그와 같은 제목을 붙였음을
상기시킨다.

렐슈탑이 나의 ≪어린이 정경≫에 관하여 평을 했을 때, 불편하고 지루한 것들이 나에게 쉽지 않게


떠올려졌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소리 지르며 우는 아이를 떠올렸고, 그 이후에 분위기를(음들을)
찾았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이다. 물론 내가 작곡을 할 때 몇몇 어린아이들을 생각한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제목은 [작곡] 후에 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주와 [작품의]
파악을 위한 미세한 지침에 불과할 뿐이다.20)

17) 김용환, “프로그램음악에 대한 논쟁의 재조명,” 86-87.


18) 성격소품에 대한 다양한 정의는 이미배의 논문, “슈만 성격소품의 음악양식적 정의를 위한 시론,” 뺷음악학뺸23 (2012),
특히 7-12쪽을 통해 그 일단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9) 김용환, “프로그램음악에 대한 논쟁의 재조명,” 87.
20) 이 내용은 동시대 음악비평가였던 렐슈탑(Rellstab)이 슈만의 ≪어린이 정경≫을 프로그램음악이라고 간주한 것에 대한
14 서양음악학 제23-2호

즉 슈만은 연주자에게 음악적 분위기를 유사한 그림적 상상의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제목을 붙인
것이며, 연주자는 그에 따라 연주해야 하고, 청중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연주된 것을 듣는 것이다.
제목은 청중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음악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도움으로 여기면
된다.
슈만의 ≪교향곡 1번≫(일명 “봄 교향곡”) 역시 비오라에 의하면 프로그램음악도 아니고 절대
음악도 아닌 제3의 영역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봄”이라는 제목이 있고 각 악장에도
소제목21)이 있다. 그리고 악곡의 곳곳에는 봄을 깨우는 외침, 들판, 나비와 같은 어느 특정 대상
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봄을 상징하는 것과 같은 유사한 성격을 표현하는 음악적 형상이 나타난
다. 그리하여 이 곡의 [도입부의] 트럼펫 모티브는 “높은 곳에서 울리는, 마치 봄을 깨우는 외침”
과 같고, 이어서 “모든 곳이 녹색으로 물들고 나비가 날아든다”는 것 역시 “마치 잎사귀와 꽃봉오
리가 피어오르고 나비가 날아드는 것처럼”인 것이다. 물론 슈만은 그와 같은 “환타지들이 작업을
마친 후에 떠올려졌음”22)을 강조하고 있다. 비오라는 이 내용들이 단지 ‘유사함’을 의미하는 것이
고, 작품에 동반되고, 작품을 뒷받침하는 상상이라고 강조한다. 즉 음회화를 위한 토대 혹은 프로
그램이 아닌 것이다. 또한 이 ‘시적 제목’은 개인적으로 발설된 것이고 공개적으로는 (침묵한 혹
은 은폐된) ‘프로그램’이 아니다. 물론 작곡가가 연주자에게 편지로 준 작품에 동반된 아이디어는
대중들에게 제목을 통해서 공지할 수 있다. 작곡가는 이러한 ‘간접적 알림’을 통해서 음악에 의도
된 성격에 대한 정보를 주고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 비오라는 이러한 의미에서 종종 프로그램
음악으로 인식되는 많은 작품들이 사실은 유사한 동반적 내용(Begleitinhalt)의 음악이라고 강조
한다. 베토벤이 ≪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분노≫(Die Wut über den verlorenen Groschen, Op.
129)라는 작품에서 동전, 손실 및 분노를 그리지 않았고, 그것은 음악적으로 결코 그릴 수 없으
며, 단지 ‘동반적 상상’(Begleitvorstellung)을 첨부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피아노 작품의 성격 과
정을 구체화한 것이다.23) 즉 음악이 그 대상을 음회화적으로 묘사하지 않지만 그 분위기와 움직
임 등의 성격을 암시하고, 프로그램이 아닌 유사 내용을 통해서 유사한 상상을 하도록 한다는

슈만의 반박으로서, 슈만이 1839년 9월 5일자로 자신의 작곡 스승이었던 도른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되어 있다. Robert
Schumann, Gesammelte Schriften über Musik und Musiker, hrsg. von Martin Kreisig, Band 2 (Leipzig: Breitkopf &
Härtel, 1914), 74.
21) 이 소제목들은 작품의 출판 때 삭제되었다.
22) 이 내용은 슈만은 타우베르트(Wilhelm Taubert)에게 보낸 편지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Walter Wiora, “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 386에서 재인용.
23) Walter Wiora, 위의 글, 386.
프로그램음악⋅중간음악⋅절대음악 15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종류의 작품에서의 제목은 프로그램(Program)이 아니라”, 흥미롭게도


“메타그램(Metagramm)”24)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절대음악과 프로그램 사이의 위치하는 이
러한 특징을 지닌 음악을 ‘메타그램음악’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일찍이 리트뮐러25)는 ‘프로그
램’이라는 용어가 그리스어인 “prógramma”가 (글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사전 기록’(Vor-Schrift),
즉 프로-그람(Pro-Gramm)에서 파생된 것임을 상기시킨 바 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에서 ‘프로
그라마’라는 용어는 서면으로 게시문을 작성하여 공개한 ‘공고’을 의미했음을 언급하였다. 프로그
램음악에서의 프로그램은 ‘사전에 작성되어 공개되어져야 함’을 강조하는 대목에서이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본 연구자는 비오라가 음악외적 대상을 ‘유사한 상상을 통해 동반적으로 불러일으
키는 의미’에서 사용한 ‘언어의 언어’(Meta-Gramm), 즉 2차 언어의 음악으로서의 메타그램음악이
‘중간음악’의 대안적 명칭으로서 어떨까 싶다. 물론 이러한 ‘제안’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작품 내용의 유사성을 암시하는 의미에서 비오라가 제시한 메타그램은 또 다시 프로그램음악에
서의 범주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문제, 예를 들어 다수의 작곡가들이 제목을 붙인 작품들, 리스
트의 음악적 프로그램에 대한 사고와 중첩되고 충돌하기 때문이다.
한편, 핀셔는 비오라의 테제를 계속 이어가면서 독일 낭만주의 교향곡, 그중에서 특히 멘델스
존과 슈만의 교향곡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들의 작품이 교향곡이라는 장르의 고전적 전통
에 대한 낭만주의자들의 내재적-양식사적 및 사상사적 논쟁에 있어서 최초로 절정에 섰다는 이유
에서이다.26) 그리고 이 작품들은 (종교개혁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 작품으로 쓴 멘델스
존의 ≪교향곡 5번 Op. 107≫[일명 “개혁교향곡” Reformatiossymphonie]과 슈만의 ≪교향곡 4번
d단조 Op. 120≫을 제외하고) 고전주의의 교향곡 전통과 장르사적 연관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는 악장의 소제목이나 “봄”, “라인”, “스코틀랜드”, “이탈리아”와 같은 작품의 제목을 통해서 음악
초월적 ‘내용’이 음악적으로 구성되거나 암시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작곡적 구조 자체
에서 고전적 형식⋅장르사적 전통과의 명백한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그 뒤에 출현하는 리스트와
바그너의 교향악적 작품과도 구별된다고 선을 긋는다.27) 프로그램음악이 아니라는 말이다. 핀셔
는 특히 슈만의 ≪교향곡 1번≫은 고전적 교향곡 형식이 내용적 요인에 의해 변화되었다고 강조

24) Walter Wiora, 위의 글, 387.


25) Albrecht Rietmüller, “Programmusik in der Ästhetik des 19. Jahrhunderts,” in Programmusik, hsrg. von Albrecht Goebel
(Mainz: Schott Verlag, 1992), 9.
26) Ludwig Finscher, “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 Zur Interpretation der deutschen romantischen Symphonie,”
104.
27) Ludwig Finscher, 위의 글, 104.
16 서양음악학 제23-2호

한다. 즉 아돌프 뵈트거(Adolf Böttger)의 ‘봄의 시’(Frühlingsgedicht)의 특히 마지막 싯귀, “바꾸


어라, 당신의 주변을 바꾸어라, 골짜기에서 봄이 싹트고 있다”(O. wende, wende deinen Lauf, -
Im Tal blüth der Frühling auf!)에서 창작의 영감을 받았고, 이 내용을 처음에는 분명히 언급28)
했으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주변 지인들에게 점차 그러한 입장을 거두어들인 점을 지적한다. 즉
슈만은 1842년 11월 22일자로 루이 슈포어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묘사하고 그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29)라고 명시하였고, 1843년 1월 10일자 타우베르트(Wilhelm Taubert)에게 보낸 편지에서
는 작품의 해석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비유적으로 “마치 높은 곳에서... 마치 깨우는 외침처럼....
그러나 [이것은] 작품을 완성한 후에 나에게 떠오른 판타지들입니다”라고 서술했듯이 점차 모호
하게 표현하거나 그 내용을 아예 숨긴 것이다. 여기에서 핀셔가 강조하는 것은 작품의 탄생과
관련된 ‘내용’을 알아야만이 작품의 여러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30) 그 구체적 내용으
로는 음악적으로 느린 템포의 도입부의 주제, 즉 뵈트거의 ‘봄의 시’ 마지막 구절에서 영감을 얻
었다고 여겨지는 ‘봄의 시그널’이 완전한 형태로 발전되지 않고, 단지 ‘외침’처럼만 나타나고 이어
지는 1악장을 지배하는 것, 1악장의 나비의 형상(마디 19-20), 양식화된 새소리(마디 21-22,
23-24), 그리고 ‘봄의 시그널’ 모티브가 단순화된 형태로 2악장의 주제를 만들고, 3악장 스케르초
에서는 리듬적 기본형태(♩⎟뿀♩)로 축소되고, 4악장(봄의 이별)에서는 거의 알아볼 수 없고,
빈번하게 단조로 물들면서 트롬본으로 연주되는 것 등을 언급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적 단일
화’의 경향이 바로 이러한 관점하에서 음악을 초월하는 내용의 기능으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다.31) 뿐만 아니라 ≪교향곡 2번≫의 경우 슈만이 1849년 4월 2일자로 오텐(D. G. Otten)에게
보낸 편지에서 암시했듯이 당시에 처한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위협의 첫 번째 징후를 이 작품
의 작곡을 통해 극복했다는, 즉 자서전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주의를 환기한다. ≪교향곡 3번≫
(일명 “라인”) 역시 라인강변에서의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민속적 요소”가 주제

28) 클라라 슈만은 부부가 공동으로 작성하는 일기장(Tagebuch)의 1841년 1월 25일자에 “봄의 시가 이 창작의 첫 번째
자극이었다.”라고 적었으며, 슈만이 1841년 10월 19일자로 세라르(André Chélard) 보낸 편지에는 “나는 이 교향곡을
겨울 말까지 작곡할 것이다. 봄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라는 구절이 있다.
29) Ludwig Finscher, “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 Zur Interpretation der deutschen romantischen Symphonie,”
108-113.
30) 물론 슈만이 작품의 출판시에 삭제한 작품의 각 악장에 붙인 소제목들(1악장: 봄의 시작, 2악장: 저녁, 3악장: 즐거운
놀이, 4악장: 봄의 만개)은 뵈트혀의 시와의 연관성이 없다. 슈만이 이후에 진행된 봄의 경과에 따라 “프로그램적”으로
계속 시를 지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31) Ludwig Finscher, “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 Zur Interpretation der deutschen romantischen Symphonie,”
110.
프로그램음악⋅중간음악⋅절대음악 17

유형 및 악절 구조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쳤으며”, 이점은 슈만의 다른 교향곡들의 주제유형


및 악절 구조와는 다른, 내용적으로 아주 중요한 점을 강조한다.32) 또 다른 사례로 제시한 멘델
스존의 ≪교향곡 3번≫(일명 “스코틀랜드”)의 경우, 주제의 집중도는 슈만의 ≪교향곡 1번≫보다
더욱 강하며 거의 모든 주제들이 느린 서주부 모티브의 뉘앙스의 차이를 둔 변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4악장은 원래 “알레그로 궤리에로(Allegro guerriero, 즉 전투적인 알레그로)”라는 지시어
를 가졌는데, 후에 “알레그로 비바치씨모”(Allegro vivacissimo)로 변경되었으며, 4악장에서는 많
은 주제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 곡의 ‘원초 모티브’(Urmotiv)와 무관하며 오히려 프랑스의
‘영웅적⋅기사도적’ 비르투오소 양식에서 발전된 것을 강조한다. 즉 이 곡은 멘델스존이 1829년
에 행한, 그러니까 스코틀랜드로의 여행이 작품 창작의 계기가 된 것은 인정되지만, 내용적으로
는 월터 스코트경(Sir. Walter Schott)의 문학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이다.33)
그리고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절대음악이라고 분류하는 경향의 음악작품, 그리고
그들 작품들의 음악을 넘어선(transmusikalisch) 차원이 임의적인 해석이나 모호한 일반화로 몰
락해버린 음악 작품들을 그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내용적으로 해석해야 하고 [...] 이와 같은 길을
조심스럽게, 매우 정확하게, 그리고 보다 폭넓은 자료연구를 통해서 가야하면, 그 길이 절대음악
과 프로그램 음악이라는 끔찍한 단순화의 저편에 서는 것”34)이라고 강조한다.
펠커35) 역시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 사이”라는 제목을 붙인 논문에서 핀셔의 관점, 특히
“낭만적 교향곡의 음악을 초월하는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언어로 옮기는 것에 더 이상 난
처해하지 마라”는 주문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음악작품을 그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해석할
수 있다”36)는 핀셔 논문의 학문적 자극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멘델스존의 대표적
서곡인 ≪헤브리디스 서곡≫(Hebriden-Ouvertüre)37)을 그 구체적 예로 든다. 그러니까 핀셔가
자신의 논문의 서두에 언급하는 “음악을 넘어서는 내용”(transmusikalischer Inhalt)을 멘델스존의

32) Ludwig Finscher, 위의 글, 111-112.


33) Ludwig Finscher, 위의 글, 114.
34) Ludwig Finscher, 위의 글, 115.
35) Bärbel Pelker, “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 in Studien zur Musikgeschichte. Eine Festschrift für Ludwig
Finscher, hrsg. von Annegrit Laubenthal (Kassel: Bärenreiter, 1995), 560-571.
36) Ludwig Finscher, “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 Zur Interpretation der deutschen romantischen Symphonie,”
115.
37) 이 곡은 ≪핑갈의 동굴 서곡≫(Die Fingals Höhle Overtüre)이라고도 하는데, 핑갈의 동굴은 헤브리디스 군도의 섬 ‘스태
파’(Staffa)에 위치하고 있다. 펠커는 멘델스존이 이 영감을 떠올린 시점이 ‘핑갈의 동굴’에서의 경험과 무관한 점을 제시하고
있다. 즉 기존의 일부 문헌에서 언급되고 있는 “핑갈의 동굴의 형상으로부터 얻은 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멘델스존은
날씨 상황이 나아진 그 다음날에 두 개의 섬, 스태파와 이오나(Iona)를 방문하였다. Bärbel Pelker, 위의 글, 566.
18 서양음악학 제23-2호

작품을 통해서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멘델스존의 스코틀랜드 여행에 동행했
던 클링에만(Karl Kingemann), 옛 제자 쿠페라트(Hubert Ferdinand Kufferath), [1842년 당시 21
세였던] 젊은 작곡가 에케르트(Karl Eckert) 및 가족들과 나눈 편지, 그리고 슈브링(Julius
Schubling)이 훗날 발간한 뺷멘델스존 회고록뺸과 같은 1차 자료에서 언급된 ≪헤브리디스 서곡≫
관련 내용을 제시한다. 부언하자면, 펠커는 우선 멘델스존이 1829년 8월 7일자로 그의 가족들에
게 쓴 편지에서 중에서 “헤브리디스 군도에서 기이하게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 것을 명확하게
하도록 다음과 같은 것이 떠올랐다”38)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스케치를 제시한다.

<그림 1>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서곡≫ 스케치

즉 멘델스존은 1829년 8월 7일에 헤브리디스 군도에 위치한 섬 오반(Oban)과 토베모리


(Tobemory) 사이의 바다 혹은 물(Mull)이라는 섬에서 받은 정경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위와 같
은 21마디에 이르는 음악으로 (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스케치하였고,39) 이 형상은 훗날 완성된
작품(1버전)에서 마디 1-11에서 거의 그대로 나타난다. 물론 훗날의 개정판(2버전)에서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40) 즉 소나타 형식으로 구성된 이 곡의 서두(1주제: 마디 1-8)에서 이 작품의 핵심

38) Bärbel Pelker, “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 560에서 재인용.


39) Bärbel Pelker, 위의 글, 561, 565.
프로그램음악⋅중간음악⋅절대음악 19

적 모티브가 파곳, 비올라 및 첼로에 의해 제시되는데, 이 형상은 “해안에 가볍게 부딪히는 파도”
를 연상케 한다.

[악보 1] 멘델스존, ≪핑갈의 동굴 서곡≫, 마디 1-6

그리고 파곳과 첼로에 의해 제시되는 2주제(마디 47-57) 역시 “불어 제끼는 바람이나 거친 바


위의 모습”처럼 격렬하게 고조했다가 가라앉는다. 이 맥락에서 강조해야 할 사항은 멘델스존이
헤브리디스 군도에 위치한 섬 내지는 바다의 정경으로부터 떠오른 ‘영감’, 즉 음회화적인 음악외
적 내용을 소위 “절대적이고” “순수한” 기악음악에 수용했다는 점이다. 펠커는 이러한 논의의 결
론으로서 “음악을 넘어서는 내용에 관한 개인적인 음악적⋅시적 표현을 멘델스존의 작곡미학,
특히 자신이 원숙하게 섭렵한 [기악 음악의] 형식에 잘 들어맞도록 한 것은 [작품의] 해석적 판타
지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며, 바로 이점이 “이후 전개되는 ‘형식 vs. 내용의
논쟁’41)에서 벗어나는 허용가능한 해결책”42)이라는 것이다. 또한 펠커는 다른 지면에서 이러한
종류의 서곡, 즉 음악외적인 “주제(Sujet)가 있는 서곡”을 “독자적인 장르”43)로 간주하고 있다.

40) Bärbel Pelker, 위의 글, 566.


41) 19세기 중엽 무렵부터 전개되는 “절대음악 vs. 프로그램음악의 논쟁”을 의미.
42) Bärbel Pelker, “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 571.
20 서양음악학 제23-2호

일부 학자들이 “낭만적 연주회용 서곡을 교향시의 전단계로서의 선구적 작품”44)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른 관점인 것이다.
한편, 달하우스는 다른 지면45)을 통해 비오라의 주장에 공감하면서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
의 차이는 결코 배타적인 대립이 아니며, 단순화의 결과로 강요되는 엄격한 양자택일 때문에 음
악적 실제에서 양극단들 사이를 매개하는 수많은 ‘과도단계들’(Übergangsstufen)이 잊혀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제3의 영역인 “회색지대”로서의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음
악과 프로그램음악의 또 다른 “중간단계(Zwischenstufe)”46)로서 “작품의 개별 악장의 서두에 기
입된 글귀(또는 제목 Überschrift)는 “많은 경우에는 리스트 교향시에서처럼 작품 구상의 한 부분
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청중들의 판타지가 옆길로 샐까 두려워서 어떤 지침을 주려고
나중에 부가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니까 리스트가 ‘음들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청중들을 위하여 ‘단어들의 언어’, 즉 서문, 제목 혹은 프로그램과 같은 ‘글귀’를 명시함으로써 프
로그램음악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과 달리 달하우스는 그 글귀가 붙은 음악을 절대음악과 프로그
램음악의 “중간단계”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슈톡마이어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의 어느 곳에도 속
하지 않는 작품”이라고 언급하면서 “중간존재(Zwischendasein)”47)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
작품이 외견상 제목을 갖지 않고 “순수한” 기악 작품으로 작곡되었지만 내용적으로 “인격의 성장”
을 다루고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실제로 작곡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그러한 ‘내용’이 “작품의 주
제”라고 밝힌 바 있다.

이 교향곡의 주제는 인간성(인격)의 확립이다. 이 작품은 시종 서정적인 분위기로 일관되어 있으


며, 나는 그 중심에 서서 한 사람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체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피날레에
서는 이제까지 등장한 모든 악장의 비극적 긴박감을 해결하고, 밝은 인생관과 살아가는 기쁨을 맛
볼 수 있도록 유도했다.48)

43) Bärbel Pelker, Die deutsche Konzertouvertüre(1825-1865) (Frankfurt am Main: Peter Lang, 1993), 21.
44) 예를 들어 Walter Wiora, “Zwischen absoluter und Programmusik,” 381.
45) Carl Dahlhaus, Musikästhetik (Laaber: Laaber Verlag, 1986), 90.
46) Dahlhaus, 위의 글, 91.
47) Wolfgans Stockmeier, Die Programmusik (Köln: Arno Volk Verlag, 1970), 6.
48) 음악세계 편찬, 뺷작곡가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쇼스타코치뺸 (서울: 음악세계, 2001), 50쪽에서 재인용.
프로그램음악⋅중간음악⋅절대음악 21

알텐부르크 역시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의 중간단계’의 작품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별다른 명칭없이 “말러의 ≪교향곡 1번≫을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곡”49)
으로만 언급하고 있다. 어떠한 근거에서일까? 저자는 해당 지면에서 그 근거를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작품의 탄생사, 작곡가 자신의 진술 및 연주에 관련된 동시대로 기록을 토대로 저자의
관점을 가늠해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 작품(을 비롯하여 교향곡 2⋅3⋅4번)은 프로그램음
악(“교향시”)으로 작곡되었고, 말러는 작품을 초연할 때 (베를리오즈와 리스트가 그러했듯이) 상
세한 프로그램을 제시⋅배포하였다. 그러나 작곡가는 이 작품이 1900년에 뮌헨에서 연주될 때
“프로그램없이” 연주⋅수용되기를 희망하였다. 이즈음 말러는 일종의 “교통안내 표지판” 구실을
하는 프로그램이 청중들이 그 틀에 갇히는 것을 경험하였고, 청중들이 이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로지 귀로 들으며 상상할 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프로그램’에 적시된 ‘내용’에
함몰되지 않고 청중들이 음악을 그 자체로 듣기를 희망했던 것이다.50) 1896년 베를린 공연 후에
말러가 평론가 막스 마르샬크(Max Marschalk)에게 두 차례에 걸쳐 보낸 편지에는 프로그램 음악
에 관한 말러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함부르크 연주회 때의 프로그램은 친구의 성화에 못이겨 곡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덧붙인 것이었
는데, 유감스럽게도 프로그램이 이해를 돕는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고 오해를 낳는데만 많은
기여를 하게 된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 교향악에도 물론 프로그램이 있고, 베토벤의 교향곡들
도 그런 ‘내적 프로그램’(inneres Programm)를 지니고 있을 테지만, 그런 것은 오로지 청중들이 작
품과 점점 더 친해짐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니 프로그램 책자에 딸려있는 해설을 읽는다고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51)

며칠 후 마르샬크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는 더욱 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나의 체험을 말로 요약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런 것에 대해서 내가 틀림없이 아무 음악도


짓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음악적인 언어, 교향악적인 언어로 말을 하고자 하는 나
의 욕구는 어렴풋한 감정이 지배하는 곳에서,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작은 문 앞에서 시작됩니다.
사물들이 더 이상 시간과 장소에 의해 갈라지지 않는 그런 세계 말입니다.52)

49) Detlef Altenburg, “Programmusik,” 1828.


50) 김용환, “프로그램음악에 대한 논쟁의 재조명,” 뺷서양음악학뺸 20/1 (2018), 102-103 참조.
51) Jens Malte Fischer, Gustav Mahler. Der fremde Vertraute (Kassel: Bärenreiter Verlag, 2011). 이정하 번역 뺷구스타프
말러뺸(서울: 을유문화사, 2012), 1권 342.
22 서양음악학 제23-2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제가 반복적으로 화제로 거론되는 속수무책의 상황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말러는 1900년 10월에 ≪교향곡 2번≫의 뮌헨 공연이 끝나고 객석을
둘러보면서 힘주어 “프로그램 타도(Pereat den Programm)”53)를 외치게 된다. 알텐부르크의 주
장은 이와 같은 말러의 초기 교향곡의 연주⋅수용사를 고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관
점 역시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작곡가가 본래 프로그램음악으로 작곡했으나 훗날
그 프로그램을 거두어들였거나 은폐했을 때 이것을 어떻게 간주해야 하는지에 대해 학자들의 주
장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작품의 창작과정에서 음악외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개입되었다면, 훗
날 그 내용을 철회하거나 은폐하더라도 프로그램음악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드높이는
(예를 들어 플로로스 같은) 학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흥미로운 사례는 슈만의 ≪교향곡 4번 d단조 Op 120≫이다. 독일의 음악
학자 에곤 보스는 이 작품을 논하는 지면에서 이 곡이 “엄밀히 말해서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의
사이에 자리매김되어 있다”54)라고 언급하였다. 슈베르트의 ≪C장조 교향곡 D. 944≫(일명 “The
Great”)의 본질적 특성을 “소설적 특성”으로 본 슈만이 이 작품에서, 즉 “절대음악의 교향곡”이
뭔가를 “설명하는 것”, 말하자면 “마치 어떤 특정 이야기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뭔가를 설명하는
듯한 것”55)을 경험하였고, 이와 유사하게 자신의 ≪d단조 교향곡≫을 작곡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에는 프로그램이 없고, 주변 지인들과의 편지 등에서 엿볼 수 있는 그 어떤 암시조차 존
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우선적으로 2악장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즉 2악장은 “로만체”
(Romanze)라는 제목을 가지는데, 이 ‘로만체’는 18세기 및 19세기의 ‘프랑스 ‘로망스’(romance)가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된 옛 전통의 ‘스페인 로만차(romanza)’56)를 의미하며, 바로 1버전의 자필

52) Jens Malte Fischer, 위의 글, 195; 번역서, 343.


53) Jens Malte Fischer, 위의 글, 195; 번역서, 345.
54) Egon Boss, Robert Schumann Sinfonie NR. 4 d-Moll, op. 120 Einführung und Analyse (Mainz: B. Schott’s Söhne,
1980), 201.
55) 슈만에 의해 1839년 1월1일에 발견된 이 작품은 곧바로 라이프치히로 보내졌고, 1839년 3월 21일, 멘델스존의 지휘하에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되었고, 이후 몇 차례 더 공연이 이어졌다. 슈만이 1840년에 작성한 비평문에는 다음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이 작품의] 여기저기에 의미가 가득하고 표현도 예리하지만 그 전체는 우리가 슈베르트의 다른 작품들에서
이미 볼 수 있는 낭만주의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 교향곡의 장대한 길이(himmlische Länge)는 4권으로 된 장 파울의
두꺼운 소설을 읽는 것 같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 뿐 아니라, 다 읽은 후에도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에 골몰하게
하는 장 파울의 소설들 말이다. [....] 처음에는 새로운 악기 편성, 형식의 웅대함, 우리가 전혀 모르는 새로운 세계의
모습이 너무나 화려하게 교차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신기한 것을 볼 때와 같은 혼란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치 마술사의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을 뒤와도 같은 즐거움을 남겨주고 있다.” Robert Schumann,
“Die C-dur-Sinfonie von Schubert,” in Gesammelte Schriften über Musik und Musiker, hrsg. von Martin Kreisig, Band
1. 5. Auflage (Leipzig: Breitkopf & Härtel, 1914), 462-463.
56) Egon Boss, Robert Schumann Sinfonie NR. 4 d-Moll, op. 120 Einführung und Analyse, 187.
프로그램음악⋅중간음악⋅절대음악 23

원본의 악기편성에 등장하는 기타(Gitarre)57)가 그 증거라는 것이다.58)


[악보 2] 슈만, ≪교향곡 4번≫ 1버전 2악장(“Romanze”)

* 처음 부분의 자필악보59) 총보의 중간에 “Gitaree”라는 표기가 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2악장 중간부의 바이올린 솔로(마디 +27-34) 역시 세레나데처럼 어느 특정


생각을 상기시키는 점, 그리고 4악장의 발전부에서의 ‘푸가토’(마디 82 이하) 및 이 단락을 뒤덮
고 있는 ‘호른의 외침’(Hornruf)도 ‘소설적 특성’으로 해석하고 있다.60) 아울러서 보스는 이 곡의
도입부를 슈만의 피아노 작품 ≪환상소품 Op. 12≫의 1곡 ‘저녁에’(Des Abends), 그리고 스케르
초를 5곡인 ‘밤에’(In der Nacht)와 비유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61)
이상과 같은 사례를 정리하자면, 각 저자들마다 명칭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아무
튼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의 양극단의 개념에 속하지 않는 중간영역의 음악이 존재하고 있음
을 관찰할 수 있었다.
주목할 점은 “절대음악 vs. 프로그램음악”의 논쟁이 격렬하게 불붙기 전에 슈만이 이러한 대립

57) 1버전의 기타는 2버전에서 현악기 피치카토로 대체된다.


58) 김용환, “로베르트 슈만의 ≪4번 교향곡≫에 대한 재조명,” 뺷서양음악학뺸 15/3 (2011), 34.
59) 사진 출처: Egon Boss, Robert Schumann Sinfonie NR. 4 d-Moll, op. 120 Einführung und Analyse, 133.
60) Egon Boss, Robert Schumann Sinfonie NR. 4 d-Moll, op. 120 Einführung und Analyse, 201.
61) Egon Boss, 위의 글, 201.
24 서양음악학 제23-2호

적인 독트린을 이미 중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슈만은 1835년에 작성⋅발표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에 대한 비평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기악곡이 상념과 사건을 어느 정도까지 묘사할 수 있느냐하는 까다로운 질문이 제기되면 많은 이


들은 매우 심각하게 고민한다. 물론 작곡가 이런저런 것을 표현하고 묘사하고 그려내겠다는 생각
으로 펜과 종이를 준비한다고 믿는다면 그건 오산이다. 그렇지만 외부에서 주어지는 우연한 영향
과 인상도 너무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음악적 상상력 외에도 관념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할 때가
많고 귀 외에 눈도 함께 거든다. 끊임없이 작동하는 이 신체기관은 음향과 음 안에서 일정한 윤곽
을 포착한다. 그러면 그 윤곽은 음악이 진행함에 따라 더 확실한 모습으로 압축되어 완성될 수
있다. 음이 만든 상념이나 형상들이 음악과 유사한 요소들을 많이 담고 있을수록, 작품이 더 시적
으로 또는 조형적으로 표현될수록, 그리고 음악가가 더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음악을 날카롭게
파악할수록 그 작품은 마음을 더 고양시키고 사로잡는다.62)

[...]

베토벤이 상상력을 발휘할 때 불멸의 상념이 그를 덮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스러져간 위대한 영웅


에 대한 기억이 그에게 영감을 주어 작품을 쓰게 할 수는 없단 말인가? 베토벤이 아니라 다른 사람
이라도 행복했던 지난날에 대한 기억이 작곡의 원동력이 될 수는 없단 말인가? 젊은 음악가의 가슴
에서 자신의 작품[=멘델스존의 ≪한 여름밤의 꿈 서곡≫을 의미]에 걸맞는 것을 불러낸 세익스피어
에 우리는 감사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가 자연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빌려와 창작한
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그런 자연에 고마움을 느끼지 말아야 하는가? 이탈리아, 알프스, 바다의 모
습, 봄날 저녁-음악은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불려주지 않는가?63)

여기에서 ‘음악은 시적이어야 한다’라는 신념을 가진 슈만이 하나의 요구사항을 가지고 있는데,
그 요구에 음예술의 ‘순수함’은 지양되고 있다. 마치 ‘관념(Idee)’이 “구체적인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슈만은 그러한 ‘이정표’(Wegweiser), 즉 프로그램노트는 품위가 없고
사이비 같다”라고 언급하였다. 이 글귀는 마치 슈만이 프로그램음악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처럼 관련 문헌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지만, 슈만은 “5개의 악장 제목”을 전적으로 인정했으며,

62) Robert Schumann, “14. Sinfonie von H. Berlioz,” in Gesammelte Schriften über Musik und Musiker, hrsg. von Martin
Kreisig, 5. Auflage (Leipzig: Breitkopf & Härtel, 1914), 84; 슈만의 이 비평문은 다음과 같은 책에 번역되어 있다: 이기숙
번역 뺷음악과 음악가. 낭만시대의 한가운데서뺸(서울: 포노, 2016), 87.
63) Robert Schumann, 위의 글, 84.
프로그램음악⋅중간음악⋅절대음악 25

전체적으로는 이 작품을 독일의 젊은 작곡가들에게 권고하면서 비평문을 마무리하고 있음을 간과


해서는 안 된다. 다만, “남방 계열의 프랑스인과 달리... 북방계열의 섬세한 독일인들”은 “자신의
생각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조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64) 동시에 슈만은 ‘어느
정도까지 기악음악이 사고와 주어진 것을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편, 헤포콥스키는 ‘프로그램음악’을 논하는 지면에서 프로그램음악을 어떤 개별 작품의 안정
적인 존재론적 속성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해석학적 장르’로 여기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존 논쟁의 범주를 아예 벗어나서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이라는 양극단에 속하지
않는 제3의 영역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이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라는 생각은 19세기의 격앙된 논쟁에서 비롯된


잘못된 이분법이다. [...] 절대적 이해와 프로그램을 통한 이해라는 언뜻 상호배타적으로 보이는 양
극단 이외에도 선택지가 존재한다. 그 양극단 사이에 유연한 중간입장, 즉 원하는 관점에 따라 다
양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뉘앙스를 지닌 입장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음악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고의 틀은 아주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곡가
들은 대중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어느 한두 가지의 입장을 강조하고 다른 입장은 가볍게 여긴다.
어떤 작품보다 표상적 암시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불러일으킨다.65)

3. 나가면서

이상의 논의에서 19세기 중엽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절대음악 vs. 프로그램음악’의 대립


을 다루는 저술들, 그중에서 특히 ‘절대음악 혹은 프로그램음악’의 양 극단에 속하지 않는 ‘제3의
영역’ 즉 ‘중간음악’이라고 칭할 수 있는 작품을 거론하는 각 저자들의 주장을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중간음악으로 언급된 상당 작품이 프로그램음
악임을 주장하는 일부 강경한 입장과 충돌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플로로스66)와 같은 일군의

64) 김용환, “리스트의 눈으로 본 슈만의 음악적 포에지,” 236-238 참조.


65) James Hepokosky, “Program Music,” in Aesthetics of Music: Musicological Perspectives, ed. Stephen Downes (New
York: Routledge, 2014). 민은기, 조현리 공역, “프로그램음악,” 뺷음악 미학: 음악학적 접근뺸, (서울: 음악세계, 2017),
119.
66) 김용환, “프로그램음악에 대한 논쟁의 재조명,” 101-102 참조.
26 서양음악학 제23-2호

학자들은 ‘음악외적인 무엇’이 작품의 창작과정에 영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면 가차없이 프로그램음악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언급한 슈만의 ≪교향곡 1번≫,
≪교향곡 3번≫, 멘델스존의 ≪헤브리디스 서곡≫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작품의 창작과정에 영감을 불러일으킨 ‘음악외적 요소’의 개입이다. 물론 이 작품들은 모두 “순수
한” 기악 작품으로서의 형식적 면모를 갖추고 있으면서, 내용적으로 청중들로 하여금 (비오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사한 동반적 상상’을 떠오르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작품에 붙여진 제목에 대한 엇갈리는 입장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리스트와 같은 ‘프로그램
음악’의 지지자는 작품 제목을 “작품 구상의 일부”로 여긴 반면, 달하우스는 그러한 관점을 인정하
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일종의 “이정표”로서 간주하면서 ‘중간 음악의 단계’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이정표’에 관한 리스트와 말러의 상이한 태도도 생각의 주목의 대상이다.
이와 함께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종류의 음악이 슈베르트의 ≪C장조 교향곡≫(일명 “The
Great”)과 같은 작품이다. 순수한 기악음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지만 (슈만에 의하면) “무엇
인가를 설명하는..... 소설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 말이다. 슈만의 ≪교향곡 4번≫도 이와
유사한 성격의 작품이다.67) 이 곡은 물론 어떤 제목이나 프로그램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의 1버
전의 자필악보를 검토한 보스는 2악장 악기편성의 ‘기타’에 주목하였고, 결론적으로는 이 작품에
는 구체적 대상도 없고 언어로 서술되지 않고 있지만 음악을 초월하여 (마치 시의 행간을 읽는
것처럼 느껴지는)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듯한” 특징을 끄집어낸 것이다. 물론 이러한 특징은 기
존의 절대음악 혹은 프로그램음악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끝으로 필자가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인식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
는 학문적 자극은 음악 작품을 그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당위성이다. 즉 19세기에
작곡된 수많은 기악음악에 관한 ‘해석’에 있어서 ‘절대음악 vs. 프로그램음악’이라는 극단적 이분
법에 함몰되는 ‘오류’를 피하고, ‘음악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우리의 수용 인식
을 촉구하는 것이다. 필자는 달하우스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상기하면서 본 논의를 마치고자 한
다: “역사가들이 음악적 사실들을 받아들여 해석하는 정신이야말로 역사의 모습을 만들며, 굴러
가도록 자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68)

67) 이 점에서 보스는 핀셔와 다른 관점을 보인다. 핀셔가 이 곡을 “슈만의 교향곡 중에서 유일하게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
사이에 존재하는 분류에 해당되지 않는 예외적인 작품”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68) Carl Dahlhaus, “Neuromantik.” 노영해 번역, “서양음악사에서의 ‘신낭만주의’,” 뺷한국음악사학보뺸12 (1994), 222.
프로그램음악⋅중간음악⋅절대음악 27

검색어
프로그램음악(program music), 중간음악(medium music), 절대음악(absolute music), 성격음악(character
music), 메타그램음악(metagramm music)
28 서양음악학 제23-2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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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음악⋅중간음악⋅절대음악 31

Abstract

Program Music, Medium Music, Absolute Music

Kim Yong Hwan

Many writings discussing absolute music and program music often refer to a third
area that does not belong to the two groups. In other words, they are works that can
be called “medium music”. This paper has been attempted while paying attention to
this point. There has been in-depth discussion of what works are referred to by scholars
as “intermediate areas” that do not fall under the category of the extreme dichotomy
of absolute music and program music, and the reasons for and background to such
claims.
32 서양음악학 제23-2호

프로그램음악⋅중간음악⋅절대음악

김 용 환

절대음악 vs. 프로그램의 논쟁을 언급하는 상당수의 저술에서는 종종 두 그룹에 속하지 않는


제3의 영역, 즉 ‘중간음악’이라고 칭할 수 있는 작품이 언급된다. 본 논문은 바로 이점을 주목하면
서 시도되었다. 즉 학자들마다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이라는 극단적 이분법적 카테고리에 속
하지 않는 “중간영역”으로 거론하는 작품은 무엇이고, 그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근거와 배경을 심
층적으로 논의하였다.

논문투고일자: 2020년 8월 15일


심사일자: 2020년 10월 8일
게재확정일자: 2020년 10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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